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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기업에 강제징용 책임 묻기까지 13년…재판 지연된 배경

    일본 기업에 강제징용 책임 묻기까지 13년…재판 지연된 배경

    일본 기업에 강제징용 책임을 묻기까지 13년이 넘게 걸렸다. 그 사이에 강제징용 피해자 3명이 눈을 감았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4년 사망한 여운택씨 등 피해자 4명이 일본 신일본체절(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에서, 신일철주금이 피해자에게 1억원을 배상하라는 원심 판결을 30일 확정했다. 이날 승소가 확정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원고는 이춘식(94)씨 뿐이다. 이씨는 77년 전인 1941년 17세의 나이로 구일본제철의 가마이시 제철소에서 강제노역을 했다. 매일 12시간씩 고체 연료를 용광로에 넣고, 용광로에서 나온 철을 가마에 넣는 중노동이었다. 먼지가 심해 어지러움을 겪기 일쑤였고, 용광로 불순물에 걸려 넘어져 배에 상처를 입고 3개월 간 입원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일을 하고도 이씨가 손에 쥔 돈은 단 한 푼도 없었다. 제철소는 저축해준다며 임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1944년 일본군에 징집됐다가 해방을 맞은 이씨는 임금을 돌려받기 위해 제철소를 찾았지만, 공장은 이미 폐허로 변해 있었다. 이씨가 제철소의 후신인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소송을 시작한 건 60년이 더 지난 2005년 2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 문서가 그해 처음으로 공개돼 일본 정부의 불법 행위에 대한 개인의 배상 청구 권리가 살아있다는 법적 해석이 나왔던 시점이다. 앞서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는 1941∼1943년 구일본제철에서 강제노역한 여운택씨와 신천수씨가 낸 손해소송에서 “구일본제철의 채무를 신일본제철이 승계했다고 볼 수 없다”면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이 판결은 2003년 10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피해자 4명은 2005년 우리 법원에 다시 소송을 냈다. 그러나 1·2심 모두 “일본의 확정 판결은 우리나라에서도 인정된다”면서 원고 패소 판결했다. 하지만 2012년 5월 대법원은 “일본 법원의 판결 이유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라면서 원심을 파기했다. 사건을 다시 심리한 서울고법은 2013년 7월 “일본의 핵심 군수업체였던 구일본제철은 일본 정부와 함께 침략 전쟁을 위해 인력을 동원하는 등 반인도적인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면서 신일본제철이 원고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후 신일본제철이 불복해 재상고하면서 사건은 다시 대법원으로 넘어왔다. 그러나 대법원은 5년이 넘도록 시간을 끌었고, 그 사이에 이춘식씨를 제외한 피해자 3명(여운택·신천수·김규수씨)이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대법원 선고가 지연된 이유로, 양승태 대법원장 재임 시절 사법부가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한 박근혜 정부 청와대와 공모해 재판을 고의로 미뤘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대법원 산하 법원행정처의 고위법관들이 2013년∼2016년 김기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등 정부 인사를 수차례 만나 강제징용 소송의 재상고심 결과를 ‘피해자 패소’로 바꾸거나 소송을 지연하는 방안을 논의한 정황이 검찰 수사에서 발견된 것이다. 검찰은 법원행정처 측이 외교부가 전범 기업의 입장을 반영한 의견서를 제출해주면 이를 빌미로 사건을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넘기고,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준 2012년 대법원 판결을 뒤집는 방안을 박근혜 정부에 직접 제시한 것으로 파악했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일본과의 위안부 합의를 위해, 법원은 양승태 대법원장의 숙원 사업인 상고법원 도입은 물론 판사의 해외공관 파견을 늘리기 위해 이런 거래를 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검찰은 재판 거래 의혹의 전면에 나선 판사가 당시 법원행정처장이던 차한성·박병대 전 대법관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이라고 보고 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김 전 실장과 조윤선 청와대 정무수석, 윤병세 외교부 장관 등이 재판 지연 의혹에 연루됐다. 검찰은 최근 구속된 임 전 차장을 상대로 윗선 개입 여부 등을 집중 조사하고 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박근혜 정부 사법농단’에 미뤄진 강제징용 소송, 13년만에 오늘 결론

    ‘박근혜 정부 사법농단’에 미뤄진 강제징용 소송, 13년만에 오늘 결론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 대해 대법원이 13년 만에 최종 결론을 내린다. 일본 기업에 배상을 명령하는 판결이 내려진다면 일본 정부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는 등 강경 대응을 검토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오후 2시 대법정에서 2014년 사망한 여운택씨 등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일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배 소송 재상고심 판결을 선고한다. 이 사건은 여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일본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시작됐다.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는 1941∼1943년 구 일본제철에서 강제노역한 여씨와 신천수(사망) 씨가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구 일본제철의 채무를 신 일본제철이 승계했다고 볼 수 없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이 판결은 2003년 10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이에 여씨 등 4명이 우리 법원에 다시 소송을 냈지만 1심과 2심 모두 “일본 판결 내용이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과 기타 사회질서에 비춰 허용할 수 없다고 할 수 없다. 일본의 확정판결은 우리나라에서도 인정된다”며 원고 패소로 판결했다. 1·2심은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한 적이 없는 이춘식(94) 씨와 김규수(사망) 씨에 대해서도 “구 일본제철의 불법 행위를 인정하지만, 구 일본제철은 신일본제철과 법인격이 다르고 채무를 승계했다고도 볼 수 없다”며 같은 결론을 냈다. 하지만 대법원은 2012년 5월 “일본 법원의 판결 이유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라며 판결을 뒤집었다. 사건을 다시 심리한 서울고법은 이듬해 7월 “일본의 핵심 군수업체였던 구 일본제철은 일본 정부와 함께 침략 전쟁을 위해 인력을 동원하는 등 반인도적인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면서 원고들에게 각각 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가해자인 일본 기업이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첫 판결이었다. 피해자들이 2005년 우리 법원에 소송을 낸 후 8년 만에 거둔 성과이기도 했다. 이 같은 서울고법의 판결에 신일본제철 측이 불복해 재상고하면서 사건은 대법원으로 다시 넘어왔다. 하지만 대법원은 5년이 넘도록 시간을 끌었고, 이춘식 씨를 제외한 피해자 3명이 결론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이 과정에서 양승태 사법부가 박근혜 정부 청와대와 공모해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 소지가 있는 재판을 고의로 지연하고 소송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런 정황이 담긴 법원행정처 문건을 작성한 사실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이에 대법원은 지난 7월 27일에야 사건을 대법원장과 대법관 12명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고 심리에 속도를 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재판거래’ 日 강제징용 소송 내일 선고… 김명수 대법은 ‘13여년의 恨’ 풀어주나

    사법농단 수사·한일 관계 후폭풍 예고 피해자 손배청구권 인정 여부가 핵심 ‘양심적 병역 거부’ 판례 뒤집을지도 관심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재판거래’ 의혹의 중심에 있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소송이 대법원 판단을 앞두고 있어 13년 8개월 만에 끝맺음을 할지 주목된다. 판결에 따라 검찰의 사법농단 의혹 수사는 물론 한·일 관계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치는 등 후폭풍이 거셀 것으로 보인다. 28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오후 2시 이춘식(94)씨 등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철주금(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의 재상고심 선고 기일을 연다. 대법원에서만 두 번째 판단으로, 재상고심이 접수된 지 5년 2개월 만이다. 지난 2005년 2월 이씨 등은 1941~43년 신일본제철의 전신인 일본제철에 강제징용돼 고된 노역에 시달렸지만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며 1인당 1억원의 위자료를 달라고 소송을 냈다. 4명의 원고 중 여운택·신천수씨는 앞서 1997년 일본 법원에 같은 내용의 소송을 냈다가 패소해 2003년 10월 판결이 확정됐다. 이에 원고들은 우리 법원에 다시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1심과 2심은 모두 일본 확정 판결의 효력을 인정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반면 2012년 5월 대법원 1부(주심 김능환)는 “일본 법원의 판결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며 국내에서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며 판결을 뒤집었다. 또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 대해서도 “식민지배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었다”며 원고의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단하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어 파기환송심은 신일본제철이 원고들에게 각 1억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신일본제철이 재상고하면서 이 사건은 2013년부터 대법원에 계류됐다. 그 사이 원고 4명 중 3명이 세상을 떠나고 이씨만 남았다. 전원합의체가 기존 소부 판단을 유지하게 되면 일본과의 외교 갈등이 불가피해질 것으로 보인다. 반면 소부 판단을 뒤집으면 국내에서 비판 여론이 예상된다. 특히 최근 검찰 수사 과정에서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외교부, 청와대와 재판을 고의로 지연하거나 결론을 뒤집는 방안을 논의한 정황이 포착돼 논란을 빚었다. 한편 전원합의체는 같은 날 ‘여호와의 증인’ 신도로 병역을 거부한 오모(34)씨의 상고심 선고를 통해 개인의 신념 등 양심이나 종교적 이유가 병역법 88조 1항에 따른 병역을 거부할 수 있는 ‘정당한 사유’인지 판단한다. 지난 6월 헌법재판소가 대체복무제도를 규정하지 않은 병역법이 헌법에 어긋난다고 결정한 뒤여서 판례가 뒤집힐지 관심을 모은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 [어떻게 사법이 그래요] “친절 판사·덤덤 검사·호소 변호사…‘죄 없는 유죄’ 만들 수도”

    [어떻게 사법이 그래요] “친절 판사·덤덤 검사·호소 변호사…‘죄 없는 유죄’ 만들 수도”

    필수 증거도 없이 기소한 검찰에 증명할 시간을 주느라 6년 넘게 1심 형사재판을 지연시키는 법원, 검찰이 제시한 혐의를 부인하는 피고인을 괴롭히려는 듯한 ‘쪼개기 기소’,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를 재판에 내지 않고 이것이 문제가 되자 ‘고의가 아닌 과실’이라며 어물쩍 넘기는 검찰…. ‘어떻게 사법이 그래요’ 연재를 통해 드러난 검찰의 민낯이다. 피고인의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형사사법 체계가 가동되는 이유를 2회에 걸쳐 방담 형식으로 짚는다. 첫 번째로 진행된 대학생 법정모니터단 방담에선 공소 과정에 절차적 하자가 있어도 재판이 진행되는 관행이 핵심 문제로 지적됐다. 법조계에서 흔히 ‘뜨내기 손님인 의뢰인보다 단골손님인 검찰에 잘 보이려는 형사재판’이라고 회자되는 관행이다.‘친절하게 안내하는 판사, 무덤덤하게 구형하는 검사, 선처를 호소하는 변호사….’ 민사·형사·행정재판을 각각 3개 이상 방청한 대학생 눈으로 본 한국 법정의 요즘 풍경이다. 재판 ‘직관’ 전 영화·드라마를 보며 상상했던 풍경과 비슷할 때도 있었지만, 다른 점이 많았다고 이들은 회상했다. 대학생들보다 재판을 자주 방청하는 기자가 보기에도 영화 속 ‘진실을 탐구하는 검사, 검사와 다투는 변호사, 경우의 수 전부를 헤아리려 하는 판사’는 현실 재판과 괴리감을 보였다. 윤소라(48) 법률소비자연맹 대외협력부장과 지난해와 올해 대학생 법정모니터단 활동을 한 안태민(20·연세대)·지승윤(22·서울대) 대학생, 한세희(24·성균관대) 대학원생에게 그 괴리감의 이유를 물었다. ●진실 탐구·치밀한 사법부? 영화와 괴리 큰 법정 ‘2008년 법정 모니터 조사’에선 “재판 중 졸거나, 지각하거나, 반말하는 판사”가 지적 대상이 됐다. 10년이 지난 지금 모니터단은 “판사들이 정말 친절했다”고 극찬했다. 다만, 그 친절함의 이면에 ‘교묘한 불친절’이 감춰져 있을 가능성이 제기됐다. 안태민(이하 안) 법정에서 본 판사는 ‘친절한 공무원’ 같았다. “이 나라는 유전무죄”라며 10여분 동안 횡설수설하던 음주운전 전과 4범의 얘기를 다 들어 준 뒤 “서민이라서가 아니라 음주운전이란 혐의에 합당한 처벌을 정하기 위해 열린 재판”이라고 차분하게 피고인을 설득하던 판사가 기억에 남는다. 한세희(이하 한) 연로한 피고인이 나와 어려운 법률용어를 버거워하자 일일이 다 설명해 주던 판사도 있었다. 윤소라(이하 윤) 판사나 법원이 주는 중압감 때문에 판사가 조금만 친절해도 모니터단이 감동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행정적 의무’에 대해서만 교육받고 ‘재판받을 권리’에 대해선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과거에 비해 권위적 재판 운영이 줄었지만, 이면을 보면 좀더 교묘하게 판·검사의 재판 초기 선입견대로 재판을 진행하며 친절함을 무기로 법률에 무지한 피고인을 설득할 때가 있다고 느낀다. ●“일반인 재판, 검사 내용도 잘 모르고 형식적” 영화 속 법정과 현실 법정을 괴리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쪽으로 검사가 꼽혔다. 특히 수사 검사가 공판까지 맡는 유력인사 재판과 공판검사가 수사 과정의 세부 내용을 잘 모르는 일반 형사재판의 분위기가 다르다고 한다. 윤 사실 검사는 공소장으로 혐의를 전부 얘기해야 하기 때문에 재판 중 역할이 별로 없다. 오히려 검사는 피고인에게 유리한 정황도 제시할 객관의무를 진다. 그런데 피고인이 법정에서 혐의나 수사 중 진술을 부인하면 검사의 태도가 (피고인을 압박하는 쪽으로) 달라지고, 판사는 방관한다. 판·검사가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모르는 것 같다. 안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재판을 방청했다. 변호인이 정곡을 잘 찔렀고, 수사·재판을 계속한 검사들도 빠르게 반박하니 법정에서 치열한 다툼이 가능했다. 재판 시스템 지원이 이른바 주요 사건에 편중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 일반 형사재판 검사들은 써 온 공소 내용을 읽고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일 제가 피고인인데, 검사와 변호사가 모두 의욕 없이 재판을 한다면 너무 불안할 것 같았다. 물론, 휠체어를 끌고 나와 열정적으로 증인신문을 하던 검사도 있었다. ●“절차 어긴 공소… 판사 묵인·변호사는 설득” 모니터단은 민사 재판을 은행·관공서 업무에 비교했다. 변호사나 당사자들끼리 제출해야 할 서류 순서를 확인하고, 다음 기일을 협의할 뿐 대부분의 주장은 법정에서 말 대신 서류로 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구두 변론이 활발한 형사재판에서도 이들은 ‘혐의 인정 뒤 선처’를 설득하는 변호인의 모습을 포착했다. 검사가 절차를 어겨 공소를 해도 판사가 이를 묵인하는 재판에서 변호인이 무죄를 다툴 공간이 좁아진다고 윤 부장은 비판을 가했다. 지승윤 열심히 국선변호를 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하지만 빨리 일처리를 하고 싶어 한다는 느낌을 주는 변호인도 있었다. 윤 국민의 재판권을 보장하려면 법원이 ‘형식과 절차의 중요성’을 더 중시해야 한다고 본다. 검사의 객관의무 위반, 공소장 일본주의 위배, 검찰의 증인 회유 같은 일을 변호인이 주장하면 법원은 이를 따져 사실일 경우 더 볼 것 없이 공소기각을 해야 옳다. ‘미란다 원칙’ 계기를 만든 미란다는 흉악범이다. 하지만 체포 과정에서 위법성이 드러나자 미국 연방 대법원은 사실관계를 따지지 않고 공소기각 결정을 했다. 한국에선 검찰이 절차적 위법을 저지른 게 드러나도 일단 재판을 끝까지 한 뒤 피고인 혐의가 유죄라고 판단되면, 절차적 위법을 용서·방관하는 내용을 담아 유죄 판결문을 쓴다. 이런 시스템은 열 명의 범인을 잡겠으나, 죄 없이 처벌되는 여러 사람을 만들 수도 있다. 유영재 기자 young@seoul.co.kr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법원 국감, 사법농단은 뒷전…한국당 “강정마을 판사 불러내라” 요구로 파행

    법원 국감, 사법농단은 뒷전…한국당 “강정마을 판사 불러내라” 요구로 파행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18일 서울중앙지법 등 서울고법 소관 법원들에 대한 국정감사에서는 ‘사법농단’ 의혹 수사가 아닌 뜻밖의 이슈로 여야가 갈등을 빚으며 파행이 거듭됐다. 당초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농단 의혹에 대해 검찰 수사와 관련, 잇단 압수수색 영장 기각이나 행정처 출신 판사들의 재판업무 등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자유한국당 김도읍 의원이 강정마을 구상권 소송에서 조정 결정을 내린 서울중앙지법 이상윤 부장판사를 참고인으로 출석시킬 것을 요구하고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이에 반발하면서 여야 의원들은 내내 서로 이 부장판사의 출석 문제를 놓고 입씨름을 벌였다. 민사합의부 재판장인 이 부장판사는 지난해 12월 해군이 제주기지 공사지연 손해 등을 이유로 강정마을 주민 등 121명을 상대로 낸 34억 5000만원의 구상권 청구 소송에서 “상호 간 일체의 민·형사상 청구를 제기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강제조정 결정을 내렸다. 정부가 국무회의를 통해 소를 취하하면서 판결이 그대로 확정됐다. 김 의원은 “재판부가 유례없이 강제조정을 통해 국가가 청구한 34억 5000만원을 포기하라는 결정을 내린 것은 국고손실죄에 해당한다”면서 “판사가 임의로 혼자 결정했다고 보지 않고, 정부 측과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고 단언한다”고 주장하며 이 부장판사가 직접 과정을 설명하라고 재차 요구했다. 그러자 여당 의원들은 “현직 판사를 국감장에 부르는 것은 재판 독립을 침해하는 일”이라며 거세게 반발했고, 민중기 서울중앙지법원장에게 이 부장판사의 출석 의사를 물어보라고 한 여상규 법사위원장의 진행방식에 항의하며 집단 퇴장해 오후 5시가 다 되어서야 국감이 정상적으로 재개됐다. 종일 여야 의원들 간 싸움이 이어진 탓에 정작 사법농단 의혹에 대한 법원장들의 입장은 아주 짧게만 들을 수 있었다. 최완주 서울고등법원장은 일각에서 사법농단 의혹 관련 ‘특별재판부’ 설치를 주장하는 데 대해 “위헌 논란이 있어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 법원장은 검찰이 법원의 영장기각에 반발해 매번 기각 사유를 공개하는 것에 대해 “전체적으로 피의사실을 공표하는 부분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수사의 밀행성에 비춰봐도 적절하지 않다”고 우회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유영재 기자 young@seoul.co.kr
  • 제천스포츠센터 화재 소방지휘부 불기소 처분

    제천스포츠센터 화재 소방지휘부 불기소 처분

    검찰이 29명이 숨진 제천스포츠센터 화재와 관련해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수사를 받아온 현장지휘 소방관 2명에 대해 18일 불기소 처분키로 했다. 검찰 관계자는 “소방관들은 긴박한 상황과 화재 확산 위험 속에서 화재 진압에 집중했다“며 ”인명 구조 지연의 형사상 과실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검찰은 화재사건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사회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검찰수사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이같이 결정했다.이 관계자는 “2층 유리창을 파손하고 일찍 진입하지 않는 등 아쉬운 점은 분명히 있다”며 “그러나 불이 타오르는 기세, 소방인력, 건물 바로 옆에 LPG통이 있던 점 등을 고려할 때 결과가 좋지 않다고 이를 형사처벌하는 것은 법리적으로 무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상민(54) 전 제천소방서장과 김종희(54) 전 제천소방서 지휘조사팀장은 지난해 12월21일 발생한 충북 제천시 하소동 스포츠센터 화재 당시 인명구조 의무를 소홀히 한 혐의로 지난 2월 경찰에 불구속 입건됐다. 경찰은 5월10일 이들을 검찰에 송치했다. 경찰은 주출입구 외벽이 불에 그을리지 않은 점 등을 감안할 때 2층 유리창을 통해 내부 진입이 가능했던 것으로 판단했다. 이들이 건물 뒤편 비상구의 진입 가능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것도 과실로 봤다. 소방청 합동조사단도 2차례 조사를 벌여 이 전 서장 등 현장 지휘관들의 상황파악과 대응이 미흡했다고 평가했다. 유족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유족들은 이날 입장문을 통해 “불기소 처분은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결정”이라며 “10달 이상 소방합동조사단, 경찰 등이 수사를 했는데 하루만에 열린 대검수사심의위원회 권고에 따라 불기소처분 한 것은 유족을 두번 죽이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대책위원회는 오는 20일 회의를 열어 불기소 처분 등에 대응할 예정이다. 제천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 ‘마성의 기쁨’ 봉변 당하는 송하윤, 살인자 누명 벗을까?

    ‘마성의 기쁨’ 봉변 당하는 송하윤, 살인자 누명 벗을까?

    결국 송하윤이 검찰의 재수사를 받게 됐다. 배우 최진혁, 송하윤이 주연을 맡고 있는 MBN, 드라맥스 수목드라마 ‘마성의 기쁨’ (극본 최지연 / 연출 김가람 /제작 IHQ, 골든썸) 13회에서는 ‘민형준 살인사건’의 용의자로서 다시 검찰 조사를 받게 되는 주기쁨(송하윤 분)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가 민형준(이정혁 분)을 죽였다는 누명을 벗을 기회이기도 하지만, 전 소속사 대표인 김범수(정수교 분)가 또 다른 계략을 꾸미고 있는 터라 과연 주기쁨이 억울함을 벗을 수 있을 지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검찰에 출두한 주기쁨은 민형준의 팬들로부터 봉변을 당한다. 주기쁨이 민형준을 죽였다고 굳게 믿고 있는 팬들은 주기쁨을 향해 쓰레기를 던지며 악담을 퍼붓는다. 홀로 검찰에 나온 주기쁨은 과연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지도 13회의 관전 포인트다. 주기쁨의 재조사를 마친 후 드디어 검찰은 재수사 결과를 발표한다. 과연 주기쁨은 민형준의 죽음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또 김범수 대표가 꾸며놓은 덫을 어떻게 피해갈 수 있을까? 제작사 측은 “13회에 깜짝 놀랄 재수사 결과가 발표되는 등 빠른 전개가 이어질 것”이라며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있는 ‘마성의 기쁨’의 변곡점이 되는 사건이 벌어진다”고 예고했다. 한편 마지막을 향해 가는 ‘마성의 기쁨’은 네 남녀 주인공의 본격적인 러브라인과 함께 주기쁨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사건의 실마리가 풀려가며 자체 최고 시청률 2%가 넘는 등 탄탄한 시청층을 확보하고 있다. ‘마성의 기쁨’ 13회는 오는 17일 오후 11시, MBN과 드라맥스에서 동시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마성의 기쁨’ 송하윤, 또 위기 ‘민형준 살인사건’ 재수사로 검찰 소환

    ‘마성의 기쁨’ 송하윤, 또 위기 ‘민형준 살인사건’ 재수사로 검찰 소환

    송하윤이 또 다시 위기에 놓였다. 오늘(11일) 방송되는 드라맥스, MBN 수목드라마 ‘마성의 기쁨’ (극본 최지연 / 연출 김가람 / 제작 IHQ, 골든썸) 12회에서는 신데렐라 기억장애를 앓는 사실을 공개한 공마성(최진혁 분)의 주변 상황 변화와 김범수(정수교 분)의 계략으로 다시 ‘민형준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주기쁨(송하윤 분)의 모습이 그려진다. 지난 방송(11회)에서 공마성은 힐링마을 기부 행사장에서 자신이 신데렐라 기억장애를 앓고 있단 사실을 발표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성기준(이호원 분)은 형이 아프다는 걸 자신 빼고 다 알고 있었다는 것에 화가 나 공마성에게 “내 이름 부르지 마. 죽을 때까지”라며 절교 선언을 한다. 항상 장난스럽기만 하던 성기준의 진지한 모습이 처음으로 시청자들에게 공개된다. 또 아픈 형에게 자신이 했던 철없는 행동들이 후회가 돼 울고 있는 성기준을 위로하고자 이하임(이주연 분)은 “부기 빼러 가자”며 한강으로 데려간다. 성기준을 위로하며 자신의 외로운 연예계 생활을 늘어놓고 둘은 또 다시 투닥투닥되며 시청자들에 웃음을 안긴다. 한편 김범수가 주기쁨을 ‘민형준 사건’ 범인으로 몰기 위해 몰래 마약을 구매한 뒤 검찰을 찾아가 증거자료라며 주기쁨이 3년 전 들고 다닌 가방과 마약을 전달한다. 재수사 확정 기사가 나면서 주기쁨은 실시간 검색에 오르기 시작한다. 과연 주기쁨은 이 위기에서 잘 벗어날 수 있을지 다음 전개를 궁금케 한다. ‘마성의 기쁨’은 신데렐라 기억장애를 앓는 남자 남자와 누명을 쓰고 나락으로 떨어진 톱스타의 황당하지만 설레고, 낯설지만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로 매주 수,목요일 저녁 11시, 드라맥스와 MBN에서 동시 방송된다. 이보희 기자 boh2@seoul.co.kr
  • [여기는 중국] 무고 남성, 12년 복역 후 출소…국가에 20억 청구 사연

    [여기는 중국] 무고 남성, 12년 복역 후 출소…국가에 20억 청구 사연

    2006년 6월 6일 중국 녹읍현(鹿邑)에 거주하는 두 농민의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12년 전 평범한 농민이었던 진덕기, 정광기 씨는 각각 강도죄, 절도죄라는 무고한 혐의를 받았다. 사건의 발달은 이에 앞서 같은 해 3월 마을에 살던 피해자 류 씨가 복면을 쓴 남성으로부터 휴대전화 1대, 컬러 TV 1대, 비디오 1대 등을 도난당한 사건이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공안에게 피해자 류 씨는 같은 마을에 사는 진 씨가 복면을 두른 가해자의 체격과 가장 비슷하다고 진술, 이후 추가 진술 시에는 같은 마을 농민이었던 정 씨의 걸음걸이가 사건 발생 시 도망가던 가해자의 뒷 모습과 유사하다고 진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피해자 진술을 토대로 수사하던 해당 지역 공안은 진 씨와 정 씨에 대해 녹읍현 인민법원 제소, 두 사람은 곧장 각각 13년, 10년이라는 중형을 확정 받았다. 그로부터 12년이 흐른 지난해 7월 만기 복역 후 출소되기까지 가해자로 지목된 진 씨는 무려 12년에 달하는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셈이다. 그 사이 정 씨는 징역 3개월 만에 이름 모를 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와 관련, 최근 주구시 녹읍현 중급인민법원은 이들 두 사람에 대한 강도죄, 절도죄 등을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2006년 형이 확정된 이후 12년 만에 판결 내용이 정면에서 번복된 것이다. 법원의 무죄 판결문에 따르면 ‘이 사건의 증거와 피해자의 진술 등을 종합해 분석한 결과 두 사람에 대한 가해 사실을 증명할 증거가 부족하다’고 적었다. 또한 ‘기존의 형 확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피해자의 진술에는 모순된 점이 상당하고 일부 증거 역시 죄를 확정할 만한 사유가 없다’는 점을 들어 무죄 판결을 내렸다고 적었다. 이 같은 판결이 나온 직후 진 씨는 곧장 1천 만 위안에 달하는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 현재 법원은 진 씨의 피해 보상에 대해 심리 중으로 알려졌다. 진 씨는 자신이 억울하게 복역해야 했던 지난 12년 세월에 대해 “내 아이들은 내가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가정을 돌보지 못하는 동안 20대가 됐고, 첫 아이는 무려 서른 살이 다 되어 간다”면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자녀들은 아직 결혼 조차 하지 못했다. 그 세월을 어떻게 차마 돈으로 환산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이어 “오직 만기 복역 후 출소하는 날만 기다렸다”면서 “하지만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는 병상에 누워 얼굴이 누렇게 변해 있었고, 아이들은 벽 조차 제대로 없는 헐벗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로 진 씨는 만기 복역까지 총 3차례에 걸쳐서 모범수로 감형 받았다. 현재 출소 후 국가배상을 위해 현지 언론에 사건을 제보한 진 씨는 “내가 가정을 돌보지 못하는 동안 자녀들이 살았던 집은 잡초가 무성한 빈 집처럼 변해 있었다.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이 아니다”면서 “나를 대신해서 아이들을 책임졌던 아내와 처남은 잦은 빈혈로 사회 생활이 어려운 지경”이라고 했다. 징역 3개월 만에 명확한 병명을 모른 채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정 씨의 가정도 파탄 지경에 이른 것으로 확인됐다. 진 씨는 “정 씨의 가족을 수소문해서 찾은 결과 마을로부터 무려 3km 이상 떨어진 숲 속에서 숨어 살고 있었다”면서 “무고한 정 씨가 감옥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받은 그의 아버지 역시 그로부터 1년 후 사망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진 씨는 “현재 강도죄, 절도죄 등 무고한 죄를 확정한 국가에 대해서 약 1232만 위안(한화 20억 2700만원)의 배상금을 신청했다”면서 “이미 사망한 정 씨를 대신해 그의 가족들 역시 348만 위안(한화 5억 7000만원)에 달하는 국가 배상 소송을 진행 중이다”고 했다. 한편, 이번 국가 배상 소송은 지난 8월 녹읍현 인민법원에 접수된 이후 추가 진전에 대해서는 공고된 바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임지연 베이징(중국) 통신원 cci2006@naver.com 
  • 서울대 로스쿨생들 “사법농단 사태 참담···선배에 대한 믿음 흔들려”

    서울대 로스쿨생들 “사법농단 사태 참담···선배에 대한 믿음 흔들려”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재학생들이 사법농단 사태에 대한 규탄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들은 재판 거래 등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짓밟았다는 의혹에 직면한 사법부에게 책임을 묻고 사법농단 사태에 관여된 법관들의 적극적인 수사 협조를 요구했다.10일 서울대 로스쿨 재학생들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사법부가 사법농단 진상규명을 지연하며 스스로 정당성을 져버리고 있다”며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에서 재학생들은 사법농단 수사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와 진상 규명, 재발 방지 등을 촉구하고 재판 거래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의 권리를 구제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선배 법조인들이 걸어가며 남긴 판결문은 우리의 길”이라며 “적어도 그 모든 문장은 헌법과 법률에 의한 법관의 양심에 따라 쓰였으리라 믿었지만 사법농단 사태로 믿음이 흔들렸다”고 밝혔다. 또 “법을 공부하고 법과 함께 살아갈 미래의 법률가로서 헌정사의 굴곡에서 사법의 길을 고민한다”면서 “이러한 고민 속에 사법농단을 지켜보니 참담한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특히 재학생들은 “사법농단 수사 과정에서 청구된 영장들이 유례없는 상세한 기각 이유들로 연이어 기각되고 있다”면서 관여 법관들에 대한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이어 “현 사법부가 법 앞의 평등이라는 원칙을 망각하고 사법농단을 바로잡을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또 재판 거래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의 권리 구제도 촉구했다. 재학생들은 “사법부가 재판을 거래했다는 의혹을 자초해 재판의 공정성을 위협했다”며 “의혹 앞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누구에게나 보장된다고 감히 말하기 어렵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근아 기자 leegeunah@seoul.co.kr
  • 이명박·김기춘도 피한 ‘직권남용’… 사법농단엔 통할까

    주요재판 무죄 선고 잇따르자 기소 부담 판사사찰· 재판지연, 범죄 성립 여부 관건 “양승태 등 결정권자들, 폭넓게 인정해야” 이명박 전 대통령,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최경환 자유한국당 의원 등이 모두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를 받으면서 사법농단 사건의 피의자들 역시 검찰이 직권남용으로 기소하더라도 무죄 판결이 내려질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9일 법조계에 따르면 판사 사찰과 재판 거래 의혹의 핵심 혐의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다. 검찰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고영한·박병대·차한성 전 법원행정처장,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이 행정처 심의관이나 대법원 재판연구관에게 사법행정에 비판적인 판사의 뒷조사를 시키거나 정치·사회적으로 주목받는 재판을 지연하는 등 의무가 없는 일을 하게 했다고 보고 있다. 형법상 직권남용은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에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 행사를 방해했을 때 적용된다. 법무법인 이경의 최진녕 변호사는 “직권남용이 성립하려면 해당 업무가 권한 범위에 포함돼야 하고, 부하 직원에게 의무가 아닌 일을 시키거나 타인의 권리 행사를 방해해야만 한다”면서 “사법농단 수사에서 압수수색 영장이 계속 기각되는 이유 중 하나도 범죄 성립이 까다롭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법원은 직권남용을 엄격하게 판단하고 있다. ‘직권’의 범위가 아니면 의무에 없는 일을 시켰어도 무죄를 선고한다. 대통령 재직 시절 다스의 미국 내 소송을 지원하고 차명재산의 상속세 절감 방안을 검토하는 데 공무원을 동원한 이 전 대통령의 혐의는 무죄가 나왔다. 소송 지원이나 상속세 절감 방안 검토가 대통령 권한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보수단체를 지원하도록 요구한 김 전 실장, 중소기업진흥공단에 인턴 직원 채용을 압박한 최 의원도 같은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런 식이라면 판사 사찰이나 재판 거래 또한 애초에 대법원장 등의 권한이 아니기 때문에 직권남용은 무죄라는 법원 판단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법조계에서는 양 전 대법원장과 임 전 차장 등 사법농단의 주요 피의자들이 사법행정을 결정하는 자리에 있었던 만큼 ‘직권’의 범위를 폭넓게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재경지검의 한 부장검사는 “재판이나 판사 인사 모두 사법행정권에 포함되는 중요 업무”라며 “판사 사찰이나 재판 거래에서 불이익이 없었거나 실현되지 않았더라도 의무에 없는 일을 시킨 만큼 직권남용이 성립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이근아 기자 leegeunah@seoul.co.kr
  • 미투도 못 막았다…캐버노 ‘50대48’ 박빙 인준

    미투도 못 막았다…캐버노 ‘50대48’ 박빙 인준

    진보 4명·보수 5명… 대법원 ‘우클릭’ 강화 공화당선 리사 머카우스키 의원만 기권표 트럼프 “역사적 승리이자 미국민의 승리”고교 시절 성폭행 의혹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킨 브렛 캐버노(53) 미국 연방대법관 후보자의 미 의회 인준안이 6일(현지시간) 가까스로 상원의 문턱을 넘었다. 이로써 캐버노 후보자는 미 역사상 114번째 연방대법관에 취임하게 됐다. ‘젊은 보수’ 캐버노 후보자의 취임으로 보수·진보 대법관이 4대4의 팽팽한 균형을 이뤄온 미 연방대법원이 보수 쪽으로 ‘우클릭’할 전망이다.이날 오후 열린 상원에서 캐버노 후보자의 인준안은 찬성 50 대 반대 48로 최종 통과됐다. 이는 상원 공화당과 민주당의 의원 수인 51명, 49명(무소속 포함)과 거의 비슷하다. 이번 표결은 24대23으로 통과된 1881년 스탠리 매튜스 연방대법관 인준 표결 이후 가장 박빙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표결은 의원 이름이 불리면 일어나 찬반을 말하는 호명 투표 방식으로 진행됐다. 캐버노 후보자에 관해 입장을 유보했던 공화당 의원 중 수전 콜린스 메인주 의원이 찬성을 표명했고, 민주당에서도 조 맨친 웨스트버지니아주 의원이 혼자 찬성표를 던지면서 가결에 힘을 보탰다. 공화당에서 유일하게 인준 반대 의사를 밝혔던 리사 머카우스키 알래스카주 의원은 막판에 기권표를 던졌다. 인준안이 통과되고 몇 시간 뒤 워싱턴DC 연방대법원에서 캐버노 후보자는 존 로버츠 대법원장과 지난 7월 은퇴한 앤서니 케네디 전 대법관 앞에서 선서식을 했다. 그는 케네디 전 대법관 뒤를 잇게 된다. 그가 취임하면 연방대법원은 보수 성향 대법관 5명, 진보 성향 대법관 4명으로 보수로 무게 중심을 옮기게 될 것으로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닐 고서치(50) 대법관에 이어 50대의 젊은 보수 대법관을 잇달아 임명함으로써 연방대법원의 보수 우위 구도를 장기간 유지하는 토대를 마련하게 됐다. 미 연방대법관은 스스로 퇴임하지 않은 한 종신직이다. CNN은 “이날 표결로 연방대법원의 보수 우위가 한 세기 동안 지속하게 됐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오후 11·6 중간선거 지지연설에서 “캐버노의 대법관 임명장에 서명했다. 역사적 승리이자 미국과 미국민의 승리”라고 밝혔다. 캐버노 후보자의 취임식은 8일 오후 백악관에서 열릴 예정이다. 캐버노 후보자를 둘러싼 의혹은 고교 시절 술에 취한 그가 성폭행하려 했다고 주장한 여성의 워싱턴포스트 인터뷰를 계기로 불거진 뒤 이후 추가 폭로가 잇따르면서 확산했고, 진실 공방이 벌어지다가 미 연방수사국(FBI)이 재조사를 결정하는 등 진통을 겪었다. 이 때문에 그의 인준에 반대하는 시민들은 이날 의사당 일부를 점거하면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표결이 진행된 의회 내부 방청석에서도 고성이 터져 나와 몇 차례 표결이 중단되기도 했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열린세상] 임금체불 노동자의 고통과 대한민국의 민낯/박영기 한국공인노무사회 회장

    [열린세상] 임금체불 노동자의 고통과 대한민국의 민낯/박영기 한국공인노무사회 회장

    올해 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을 앞두고 충북 청주의 신축 상가 건물 옥상에 12명의 건설 노동자들이 올라 농성을 벌였다. A건설사 하청업체 소속인 이들은 명절에도 올해 4월부터 밀린 3개월치 임금 2억 3000만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원청업체가 밀린 임금을 지급하기로 하면서 농성은 한 시간 만에 일단락됐다.또 다른 건설 노동자 4명도 앞서 6월 서울 강남구 분당선 대모산입구역에서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한국철도시설공단에서 발주한 분당선 대모산입구역과 개포동역 에스컬레이터 설치 공사 현장에서 일했으나 3~6월치 임금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집단행동으로 이들에게 돌아온 건 밀린 임금이 아니라 전과자 신분이었다. 승강장의 스크린도어(안전문)를 강제로 열고 약 10분간 선로를 점거해 지하철 운행을 지연시킨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임금을 지급하지 않은 사업주와 이에 항의해 농성을 벌인 노동자 둘 중 누가 더 처벌받아야 할까? 피땀 흘려 일하고도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해 생계의 벼랑 끝에서 선택한 노동자의 불법행위와 당연히 지급해야 할 임금을 지급하지 않음으로써 한 인간을 무너뜨리고 한 가정을 파탄 내는 사회적 범죄 중 어느 것이 더 중한 범죄일까? 임금체불은 형법상 절도보다 더 죄질이 안 좋은 사회적 범죄다. 절도는 단지 돈과 물건을 훔칠 뿐이지만 임금체불은 돈과 노동자의 피땀을 훔치는 것도 모자라 가정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의 처벌은 그 반대다. 노동자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자칫 징역형을 선고받을 수 있지만, 대다수의 임금체불 사업주는 임금체불액에도 못 미치는 적은 액수의 벌금만 낼 뿐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올 들어 8월까지 임금체불 노동자는 23만 5700명으로 지난해 21만 8538명보다 7.9% 증가했다. 체불임금 규모는 1조 1274억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 8910억원 대비 26.5% 증가한 수치다. 임금체불 노동자와 체불금액은 8월까지 기준으로 역대 최대치다. 이 추세대로라면 체불임금 규모가 연간 기준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한 2016년의 1조 4286억원을 넘어설 게 확실시된다. 이웃인 일본의 2014년 임금체불액은 우리 돈으로 1440억원 정도다. 우리나라 1년 임금체불액의 10분의1 수준이다.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이 우리나라의 세 배이므로 GDP 기준으로 따지면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30배나 심각한 임금체불 국가다. 정부와 전문가들은 외국과 비교해서도 매우 높은 우리나라 임금체불의 원인을 ‘체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문화에 따라 경기가 나빠지거나 일시적 경영 악화가 발생하면 직원 월급은 주지 않아도 된다’는 잘못된 사업주들의 인식 때문이라고 말한다. 일면 타당한 분석이기도 하지만 인식이나 문화의 개선 수준으로 임금체불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강력한 제도 개선이 뒤따르지 않는 한 고질적인 임금체불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현행법상 임금체불 사업주에게 가해지는 제재인 ‘고의적 또는 상습적인 체불 사업주에 대한 구속 수사 및 명단 공개’나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 등은 임금체불 방지를 위해서는 터무니없이 약한 수준이다. 실제 구속 사례도 드물뿐더러 벌금도 턱없이 적게 부여되는 만큼 더 강력한 징벌적 제재가 필요하다. 임금체불로 인해 노동자와 가족들이 겪게 되는 고통에 대한 책임이나 배상이 전무하다는 점도 큰 문제다. KTX에 부정 승차하면 최고 30배의 부과금을 내고, 고속도로 톨게이트 요금을 내지 않으면 10배의 가산금을 무는 상황이다. 최소한 임금체불에 대해서도 두세 배 정도의 부가금 등 불이익이 가해져야 고질적인 문제가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현재 국회에서는 체불임금 외에 부가금까지 지급하도록 하는 제도를 신설해 체불임금의 두 배까지 보상하게 하고, 퇴직 노동자에게만 지급되던 지연이자를 재직 노동자까지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법 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상임위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정부와 여야 정치권 모두의 분발을 촉구한다.
  • ‘美선거 최대변수’ 캐버노 낙마, 졸업앨범 메모에 달렸다

    ‘美선거 최대변수’ 캐버노 낙마, 졸업앨범 메모에 달렸다

    FBI, 약물·성행위 의미 단어 집중 조사 대학 동창 “그는 만취하면 공격적” 진술 공화당 내부서도 “거짓말 땐 인준 무산” 트럼프 “플랜B는 원치않아” 강행 의지성폭행 의혹에 휩싸인 브렛 캐버노 연방대법관 지명자의 인준 문제가 내달 중간선거의 최대 변수로 부상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공화당은 오는 5일 유력한 캐버노 지명자의 본회의 표결을 밀어붙일 기세이지만, 공화당 내부의 반발과 이탈, 캐버노의 청문회 거짓 증언 의혹과 더불어 연방수사국(FBI) 수사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불거지면서 ‘낙마’ 가능성도 점점 커지는 기류다.트럼프 대통령은 1일(현지시간)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캐버노 낙마를 상정한) 플랜 B에 대해선 말하고 싶지 않다”며 인준 강행 의지를 드러냈다. 공화당 상원 원내사령탑인 미치 매코널 원내대표도 이날 “끝없는 지연과 방해의 시간은 끝났다”면서 이번 주중 본회의 표결 강행을 시사했다. 캐버노에 대한 FBI 조사는 5일 종료될 예정이다. 워싱턴의 한 소식통은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은 캐버노 지명자가 낙마하게 되면 오는 11월 중간선거 판세가 더욱 불리해지는 등 정치적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전망했다. 사태가 수습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다. 캐버노에 대한 불리한 증언 등이 계속 터져 나오고 있다. 제프 플레이크 공화당 상원의원은 지난달 30일 CBS방송에 ‘캐버노가 법사위 청문회에서 거짓말을 한 것으로 드러나면 후보 인준이 무산되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예스”라고 답했다. 현재 상원 100석 중 공화당이 51석이다. 캐버노의 거짓 증언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는 플레이크 의원의 동조자가 단 1명만 나와도 인준을 물 건너가게 된다. FBI 조사도 가속도가 붙고 있다. 특히 FBI는 캐버노 지명자가 고교 졸업앨범에 쓴 아리송한 문구를 집중적으로 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캐버노는 자신의 졸업앨범에 ‘부핑’(boofing)과 ‘데블스 트라이앵글’(Devil’s Triangle)이라는 단어를 썼다. 앞서 열린 상원 청문회에서 캐버노는 두 단어에 대해 “속에 가스가 차서 부글거리는 것”, “술 마시는 게임”이라고 답변했다. 일상적으로 이 단어들은 약물 사용과 성행위를 의미하는 은어여서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 논란마저 제기됐다. 의회전문 매체인 더힐은 ‘FBI가 이런 얼렁뚱땅식 캐버노 지명자의 답변을 더 깊이 파고들며 조사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캐버노 지명자의 예일대 동창이자 ‘농구 대표팀’ 활동을 같이했던 채드 루딩턴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교수는 지난달 30일 성명을 내고 “그가 만취해 몸을 비틀거리거나 발음을 똑바로 하지 못하는 것을 여러 번 봤다”면서 “캐버노 지명자는 취했을 때 호전적이고 공격적”이라고 말했다. 워싱턴 한준규 특파원 hihi@seoul.co.kr
  • 檢, 양승태 영장에 재판거래 혐의도 포함… 사법농단 수사 급물살

    차량 압수수색 때 서재서 USB도 확보 검찰이 집행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의 피의 사실에 재판거래 혐의가 적시된 것으로 확인됐다. 사법농단의 핵심 중 핵심으로 꼽히는 재판거래에 대해 법원이 혐의가 일부 소명됐다고 판단하면서 수사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1일 검찰 등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사법농단 수사팀(팀장 한동훈)이 전날 집행한 양 전 대법원장과 고영한·박병대·차한성 전 대법관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에는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의 혐의, 구체적으로 재판거래 혐의가 적시됐다. 해당 혐의에는 일제 강제 징용 재판과 헌법재판소 관련 내용이 포함됐다. 과거 법원행정처가 강제 징용 소송 지연에 개입하고 과거사 재판 관련 헌재에 압력을 행사하거나 관련 평의 내용을 빼낸 행위 등의 최종 책임자가 양 전 대법원장이라고 검찰이 판단한 것이다. 지난 7월 검찰이 양 전 대법원장 자택에 대해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할 때만 해도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에는 일명 ‘판사 블랙리스트’로 불리는 불법 사찰 부분만 포함됐다. 영장 기각 이후 검찰은 두 달 넘게 판사 블랙리스트뿐만 아니라 재판 거래 혐의에 대한 대법원장이나 법원행정처장 연루 여부를 규명하는 데 집중했다. 검찰은 전직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 등 대법관에 대해 강제수사를 법원이 허가한 것은 재판거래 혐의가 어느 정도 소명됐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그간 사법농단 수사와 관련한 영장에 대해서는 (일반 사건과 비교해) 훨씬 엄격한 기준으로 유무죄까지 미리 판단해 왔던 법원이 이번에 영장을 내줬다는 것은 혐의가 인정됐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검찰은 전날 양 전 대법원장의 자택 서재에서 USB(이동식 저장장치) 2개를 확보해 분석 중이다. 당초 법원은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기각하고 차량에 대한 영장만 발부했었다. 다만 영장에는 ‘참여인 등의 진술 등에 의해 압수할 물건이 다른 장소에 보관된 경우 보관 장소를 압수수색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이 있었고, 압수수색을 지켜본 양 전 대법원장과 변호인이 지난해 퇴직 당시 가지고 나온 USB가 자택 서재에 보관돼 있다고 진술함에 따라 검찰은 이를 근거로 서재에 있던 USB를 압수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양승태 압색 영장에 ‘재판 거래’ 피의사실 적시

    양승태 압색 영장에 ‘재판 거래’ 피의사실 적시

    지난 7월 영장 기각 당시엔 판사 불법 사찰 개재두 달여 보강 수사 끝에 사법농단 핵심 의혹 추가檢 “법원 영장 발부는 혐의 일부 소명됐다는 뜻”검찰이 집행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의 피의 사실에 재판거래 혐의가 적시된 것으로 확인됐다. 사법농단의 핵심 중의 핵심으로 꼽히는 재판거래에 대해 법원이 혐의가 일부 소명됐다고 판단하면서 수사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1일 검찰 등에 따르면 서울중앙지검 사법농단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이 전날 집행한 양 전 대법원장과 고영한·박병대·차한성 전 대법관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에는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혐의, 구체적으로 재판거래 혐의가 적시됐다. 해당 혐의에는 일제 강제징용 재판과 헌법재판소 관련 내용이 포함됐다. 과거 법원행정처가 강제징용 소송 지연에 개입하고 과거사 재판 관련 헌재에 압력을 행사한 것 등의 최종 책임자가 양 전 대법원장이라고 검찰이 판단한 것이다. 지난 7월 검찰이 양 전 대법원장 자택에 대해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할 때만 해도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에는 일명 ‘판사 블랙리스트‘로 불리는 불법 사찰 부분만 포함됐다. 결국 법원에서 영장이 기각됐고, 이후 검찰은 두 달 넘게 수사하면서 판사 블랙리스트뿐만 아니라 재판 거래 의혹에 대한 대법원장이나 법원행정처장 연루 여부를 규명하는데 집중했다. 검찰은 전직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 등 대법관에 대해 강제수사를 법원이 허가한 것은 재판거래 혐의가 어느 정도 소명됐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이전에 영장이 기각됐을 때와는 달리 판사 불법 사찰 혐의를 보강했고, 재판거래 혐의도 새로 추가했다”면서 “그간 사법농단 수사와 관련한 영장에 대해서는 (일반 사건과 비교해) 훨씬 엄격한 기준으로 유무죄까지 판단해왔던 법원이 이번에 영장을 내줬다는 것은 혐의가 인정됐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검찰은 압수물을 분석하고 보강 조사를 마치는 대로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해 추가 압수수색 영장 청구 여부를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검찰 관계자는 “양 전 대법원장은 수사 초기부터 입건된 상태였고, 지난 영장 기각때도 피의자 신분이었다”고 밝혔다. 한편 검찰은 전날 압수수색 과정에서 양 전 대법원장의 USB(이동식 저장장치)를 확보했다. 검찰이 발부받은 압수수색 영장에는 ‘참여인 등의 진술 등에 의해 압수할 물건이 다른 장소에 보관된 경우 보관 장소를 압수수색할 수 있다’고 단서 조항이 있었고, 압수수색에 참여한 양 전 대법원장과 변호인은 지난해 퇴직 당시 가지고 나온 USB가 서재에 보관돼 있다고 진술함에 따라 검찰은 단서조항을 근거로 양 전 대법원장의 자택 서재에 있던 USB를 압수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사법농단 몸통 첫 압수수색… 양승태 자택은 빠져 ‘형식적 발부’

    사법농단 몸통 첫 압수수색… 양승태 자택은 빠져 ‘형식적 발부’

    ‘방탄법원’서 윗선 수사 협조로 돌아선 듯 임종헌 조사 뒤 前대법관들 줄소환 유력사법농단 수사가 시작된 지 100여일 만에 양승태 사법부 수뇌부에 대해 이뤄진 첫 압수수색이 진상 규명을 위한 분수령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법원 스스로 옛 최고위층에 대한 강제수사를 허용한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의견과 ‘보여주기식 영장 발부’라는 비판이 동시에 나오고 있다. 서울중앙지검 사법농단 수사팀(팀장 한동훈)은 30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양 전 대법원장 밑에서 법원행정처장을 차례로 지냈던 차한성·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에 대한 압수수색을 실시하며 이들이 사법농단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물증 확보에 나섰다. 양 전 대법원장은 사법농단의 최종 책임자로 지목받아 왔다. 차·박 전 대법관은 각각 2013년과 2014년 청와대와 일제 강제징용 소송 지연을 논의한 의혹을 받고 있다. 고 전 대법관은 전교조 법외노조 판결, 부산법조비리 사건 등에 개입한 의혹이 있다. 검찰은 지난 7월부터 이들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수차례 청구했으나 법원이 이를 번번이 기각하면서 수사 속도가 늦어졌다. 특히 법원은 양 전 대법원장과 관련해선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과 공모했다는 점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고 기각 사유를 밝히기도 했다. 이에 검찰은 추석 연휴 직전까지 50여명의 전·현직 법관들을 직접 불러 조사하는 등 저인망식 수사를 벌였고, 연휴가 끝나자마자 그간 확보한 진술 내용을 토대로 다시 한번 최고위층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다. 검사 출신인 서울중앙지법 명재권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혐의가 일부 소명됐다고 보고 영장을 발부했다. 법조계 안팎에선 이날 압수수색을 기점으로 ‘윗선’ 수사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간 법원은 사법농단 사건 관련 압수수색 영장을 대부분 기각하며 ‘방탄 법원’, ‘제 식구 감싸기’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러나 처음으로 전직 대법관에 대한 영장이 발부됨에 따라 법원이 검찰 수사에 어느 정도 협조적으로 돌아섰다는 평가다. 검찰은 조만간 윗선과의 연결고리인 임 전 차장을 불러 조사한 뒤 전직 대법관들도 소환할 전망이다. 양 전 대법원장도 예외는 아닐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각에선 양 전 대법원장의 주거지 등 영장 일부가 기각된 점을 놓고 “형식적인 영장 발부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법원은 양 전 대법원장을 비롯해 차·박 전 대법관의 주거지에 대한 영장을 기각하는 한편, 정작 사무실이 없는 고 전 대법관에 대해선 주거지 압수수색을 허용했다. 영장 발부 기준이 일관되지 않다는 지적이 뒤따르는 이유다. 따로 사무실이 없는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해선 차량만 압수수색해야 했기 때문에 사실상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이와 관련, 검찰 관계자는 “압수수색 영장은 기본적으로 사무실, 주거지, 차량을 한 묶음으로 청구한다”며 “일부는 내주고 일부는 기각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어떤 대법관은 주거지, 어떤 대법관은 사무실만 내주는 것은 형식적이고 기교적”이라며 “특히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해선 본류인 주거지를 기각하면서 차량만 영장을 발부한 것은 예우 차원으로 보인다”고 꼬집었다. 나상현 기자 greentea@seoul.co.kr
  • 삼성전자 미전실 기획·작전명 ‘그린화’… 신속대응팀 꾸려 노조원 수백건 사찰

    檢 “경찰 등 외부 세력 동원된 조직 범죄” 개인정보 수집… 동료 이용 ‘1대1’ 회유도 ´무노조 경영´ 원칙을 지키기 위해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와해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한 삼성전자 전·현직 임직원 32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은 삼성그룹의 컨트롤타워로 불린 미래전략실이 노조 와해 공작을 총괄 기획했고, 삼성전자와 삼성전자서비스는 구체적인 계획을 마련하는 등 전사적으로 조직이 동원된 범죄라고 밝혔다. 서울중앙지검 공공형사수사부(부장 김수현)는 27일 이상훈(63)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 박상범(61) 전 삼성전자서비스 대표이사 등을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위반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 앞서 목모(54) 전 삼성전자 노무담당 전무 등 4명이 구속 기소, 28명은 불구속 기소됐다. 검찰에 따르면 삼성은 2013년 그룹 차원에서 노조 설립을 ‘악성 바이러스의 침투’로 규정하고 이를 저지하거나 탈퇴를 유도하는 일명 ‘그린화’(Green化) 전략을 세우고 삼성전자에는 신속대응팀, 삼성전자서비스에는 종합상황실을 설치·운영했다. 이들은 고용노동부 장관 정책보좌관 출신의 노조전문가에게 4년간 13억원을 주고 노조 와해 전략을 자문받거나 경찰청 정보국 소속 경정 등 외부 세력을 끌어들여 노조 내 정보를 제공받았다. 협력업체로부터 노조원들 모르게 결혼·이혼 여부, 채무 등 재산 상태, 임신 등 건강 상태, 성향, 노조 가입 동기 등 수백건의 개인정보를 수집해 관리한 정황도 밝혀졌다. 위험 인력 문건을 만든 뒤 이들과 친분이 있는 직원을 1대1로 배치해 노조 탈퇴를 종용하거나 회유하는 데 사용했다. 이 문건에는 ‘매사에 업무 불만이 많고 문제점을 많이 제기함’, ‘이혼을 함(전처에게 문제가 있었음)’ 등 개인적 사항도 포함돼 있었다. 이 밖에도 ▲노조가 활동할 수 없도록 협력업체를 폐업한 뒤 조합원의 재취업을 방해하고 ▲개별 면담을 빙자해 노조 탈퇴를 종용하며 ▲조합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임금을 삭감하거나 ▲한국경영자총연합회와 공동으로 단체교섭을 지연하거나 응하지 않고 ▲불법 파견을 적법한 도급으로 위장하는 등 다양한 수법이 동원됐다. 삼성 측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조합원 염호석씨의 장례가 노동조합장으로 치러지지 않도록 아버지에게 6억 8000만원을 건네기도 했다. 검찰 관계자는 “삼성이 노조를 발붙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 백화점식으로 모든 수법을 사용했다”며 “내부 전문가와 외부 세력이 합세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노조는 불공정한 게임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또 “미래전략실이 전략을 수립해 삼성전자서비스에 전달한 사실은 확인했지만 이 과정에 오너 일가가 개입했다는 증거는 발견된 게 없다”고 말했다. 검찰은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와해 의혹 수사를 마무리짓고 최근 압수수색을 실시한 에버랜드 등 다른 삼성 계열사로 수사를 확대할 계획이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이근아 기자 leegeunah@seoul.co.kr
  • [어떻게 사법이 그래요] 5년 넘도록 끝나지 않는 1심… “피고인 탓”이라는 사법부

    [어떻게 사법이 그래요] 5년 넘도록 끝나지 않는 1심… “피고인 탓”이라는 사법부

    “신속하게 재판이 이뤄질 수 있도록 검찰을 지도·감독 하겠습니다”(2015년 법무부장관), “검찰에서 낸 (증거) 부분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2016년 법원행정처장), “(검사의 사법공조 은폐 의혹은) 파악 못하고 있어서 죄송합니다”(2017년 서울중앙지검장)….저작권 침해 혐의로 기소했지만, 범행을 입증할 ‘기본 증거’인 원저작물을 확보하지 못한 검찰 때문에 2013년 12월부터 2016년 5월까지 2년 6개월 동안 공판 대신 공판준비기일만 열리고 기소 뒤 5년이 지난 지금도 1심 형사재판이 진행 중인 ‘미국 대입시험(SAT) 기출문제 유출 사건’은 지난해까지 3년 연속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감에서 여러 법사위원들의 지적 대상이 됐다. 서울신문이 26일 국회 회의록 시스템을 검색해 보니 19, 20대를 거쳐 모두 9차례 국감 회의장에서 이 사건이 거론됐다. 검찰과 법원 고위 관료들은 국감장에서 “검토 뒤 조치”를 약속했지만, 실제 파행적인 재판에 시정은 없었다. 결국 다음달 국감에서도 관련 지적이 이어질 전망이다. 법사위원들은 ▲3개월 안에 끝내도록 법으로 정해진 공판준비기일을 검찰이 제대로 된 증거를 제출할 때까지 법원이 무작정 연장해 주는 이유 ▲원저작물을 갖고 있는 미국 칼리지보드 측이 SAT 시험지를 제공하지 않아 검찰이 끝내 제대로 된 증거를 못 냈음에도 재판을 이어 간 배경 ▲원저작권자인 칼리지보드가 피고인들을 고발한 사건도 아닌데, 대한민국 검찰이 미국 회사인 칼리지보드 측 피해 구제를 추구하는 근거 ▲형사재판이 길어져 유학생 신분인 피고인들의 진학·해외 취업에 차질이 빚어진 실태 등을 지적해 왔다. 사법당국 고위 관료들은 “(사건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답하기 일쑤였고, 시간이 지날수록 “(재판 지연에) 죄송하다”던 답변은 “(혐의를 수용하지 않는) 피고인이 문제”란 식으로 변해 갔다. 질의 3년째인 지난해 김소영 당시 법원행정처장은 “재판 절차상 하자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답했다가 반박당하기도 했다. 김 전 처장은 “사건 당사자가 많았는데 대부분은 다 (벌금형) 확정이 됐고 한 명인가 두 명인가밖에 안 남았는데 그분은 불출석에다 재판에 별로 협조를 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같은 해 대검도 서면 답변을 통해 “피고인 24명 중 1명운 군사법원 이송, 22명 선고, 1명은 1심 재판 시작 이후 계속 불출석 상태”라고 밝혔다. 재판이 5년 넘게 지연된 책임을 피고인에게 떠넘긴 셈이다. 하지만 이 재판을 모니터링해 온 사법감시배심원단은 “남은 피고인 1명은 2013년 12월 1회 공판준비기일에 참여했고 지난해 3월 현 재판장이 심리한 첫 공판기일에도 참석해 진술하는 등 한 번도 이유 없이 불출석한 사실이 없다”면서 “2016년 5월까지 진행된 공판준비기일엔 피고인 참여가 필요 없을뿐더러 그 기간에도 변호인을 통해 방어권 보장을 촉구했다”고 반박했다. 검사와 변호사, 재판부가 모여 심리 절차를 논의하는 공판준비기일엔 피고인의 출석 의무가 없다. 그런데 막상 국감장에선 유례없이 긴 공판준비기일 기간을 초래한 검찰과 법원이 피고인이 그 준비기일에 오지 않았다고 질책했다. 국회 소관 상임위가 3년째 국감에서 같은 내용을 지적했음에도 재판 진행이 고쳐지지 않은 배경으로 사법 당국의 ‘무오류 주의’가 꼽힌다. 일단 검찰이 발표, 기소한 사건이라면 유죄 증거가 부족하더라도 수사·기소 당시 오류를 인정하기보단 새롭게 적용할 다른 형벌 조항을 찾거나 별건 혐의를 들춰내 추가 기소하는 행태가 문제란 얘기다. 법원은 ‘사법부 독립’이란 허울 아래 ‘재판·판결 비판’을 금기시하고 있는데 SAT 기출문제 유출 사건을 다룬 국감에서도 사법부 고위직들이 “개별 재판 내용을 말하기 부적절하다”고 회피한 경우가 많았다. 이제까지는 오직 검찰만이 무죄 선고에 대해 강력 반발하는 등 ‘판결 무비판 성역’의 예외가 돼 왔다. 수사 당국이 범죄자로 낙인찍은 뒤 범행 입증 증거를 찾지 못할 때 조작된 증거나 회유·협박에 따른 자백 증거를 활용한 일은 서울시공무원 간첩조작 사건 등 역대 간첩조작 사건에서 심심치 않게 알려져 왔다. 대공 사건뿐 아니라 일반 형사 사건에서도 비슷한 수사 기법이 활용되는 현상에 대해 검찰 출신 한 변호사는 “검찰과 법원은 자신들이 염두에 둔 범죄자를 잡기 위해서라면 수사 당국은 불법을 저질러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꼬집었다. 이근아 기자 leegeunah@seoul.co.kr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안도현 시인 특별기고]평양은 멀지 않다

    [안도현 시인 특별기고]평양은 멀지 않다

    지난 18일부터 20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당시 수행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했던 안도현 시인이 서울신문에 당시 감동을 담은 기행문을 보내오셨습니다. 안 시인이 보고 느꼈던, 그리고 언론 매체에선 볼 수 없었던 정상회담 이면의 이야기들을 원문 그대로 전합니다.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바로 눈 앞에서 펼쳐지듯 생생한 북한의 풍경들을 함께 즐겨 보시기 바랍니다.평양은 역시 멀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 부부와 수행원, 그리고 기자단을 태운 공군 1호기는 ‘ㄷ’자의 서해 직항로의 경로를 좌석 앞 모니터에 정확하게 펼쳐보였다. 이른 새벽 해 뜨기 전에 잠을 자지 못하고 나선 길이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비행기의 머리가 항로를 따라 시시각각 순조롭게 순항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서울공항에서 평양국제비행장에 도착하는 데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2008년 봄에 평양 근교 역포구역에 어린이사과농장을 만들기 위해 다녀온 뒤로 10년 만의 방북이었다. 순안비행장이라 불리던 평양국제비행장 청사는 현대식 건물로 면모를 완전히 바꿨고, 의장대와 환영 나온 평양 시민들의 함성이 귓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차범근도, 유홍준도…벅찬 감동에 “왜 이렇게 눈물이” 평양 시내로 들어가는 길가에 환영 나온 평양 시민들이 어마어마한 사람의 파도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가도 가도 끝없이 늘어서서 손을 흔들고 깃발을 흔들고 발을 구르고 있었다. 10만 명이 넘을 거라고 했다. 남녀가 따로 없었고 노소가 따로 없었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천천히 움직였고 우리는 시민들의 진심 어린 표정 하나하나를 가까이에서 읽을 수 있었다. 버스 바깥도 버스 안도 만남의 감격의 출렁거렸다. 선두에서 남북 정상은 정상끼리, 행렬 뒤쪽에서 같은 동포인 우리는 우리끼리 만나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 차범근 감독이 유홍준 교수를 보며 말했다. “이상하네요. 왜 이렇게 눈물이 나려고 하죠?” 차 감독의 눈자위는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눈물이 나야 정상이지. 울고 싶을 때는 실컷 울어버려요. 아무 걱정 말고 울어버려요.” 이렇게 말하면서 유 교수도 눈가를 훔쳤다. 서로 대화 한번 나눈 적 없는 남과 북의 시민들이 썬팅 처리된 버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함께 우는 것으로 만남은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는 울어볼 일이 없는 세상에서 너무 오래 살았다. 밥을 버느라, 통장의 잔고를 늘리느라, 오로지 내 자식 뒷바라지 하느라, 비즈니스를 위한 일에 매달리느라 울어볼 날이 없었다. 누군가가 눈물 타령한다고, 감상적이라고 또 이죽거린다고 해도 평양에서는 울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공식수행원들의 숙소는 백화원초대소, 특별수행원들의 숙소는 고려호텔이었다. 오랜만에 들어선 고려호텔은 별다른 장식 없이 조용히 낡아가고 있었다. 1인 1실로 배정된 방에는 사과, 배, 귤, 바나나로 구성된 과일 한 접시와 과자, 사탕, 껌이 담긴 접시 하나가 ‘당신을 열렬히 환영합니다’라는 팻말과 함께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아직 담배를 끊지 못한 내게 재떨이는 또 반가운 선물이었고. 호텔 창밖으로 평양화력발전소 굴뚝에서 희뿌연 연기가 솟아올라 평양 시내 상공을 뒤덮고 있었다. 호텔에서 가까운 평양역 구내로 화물차와 전철이 쉼 없이 오가는 게 보였다. 평양을 방문했을 때 음식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호텔 2층 뷔페식당의 메뉴 중 하나로 나온 돌목어식해는 처음 먹어보는 북쪽 음식이었다. 널리 알려진 가자미식해와 모양과 빛깔은 비슷했는데 식감이 완전히 달랐다. 돌목어는 도루묵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봤다. 북쪽 접대원에게 물어도 그는 도루룩을 모르고 나는 돌목어를 모르니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걸 입에 넣고 씹으면 비리지 않은 쫄깃한 생선회를 씹는 느낌이 났다. 발효 과정에서 생기는 퀴퀴하고 들척지근한 맛도 없었다. 부드럽고 몰캉한 생선 식해에다 흰 밥을 먹으면서 나는 1930년대 후반 시인 백석을 떠올렸다. ●김정숙 여사 ‘영부인 외교’ 동행한 리설주 여사 ‘깍듯한 환대’ 인상적 우리의 첫 번째 임무는 옥류아동병원을 방문하는 김정숙 여사를 수행하는 일이었다. 유홍준 교수, 김형석 작곡가와 같은 문화예술계 인사, 차범근·현정화 감독, 이기흥 대한체육회 회장, 박종아 평창아이스하키남북단일팀 주장 등 체육계 인사, 에일리·알리·지코 같은 가수들, 마술사 최현우는 소형버스 14호차를 함께 타고 다녔다. 14호차 일행이 옥류아동병원에 도착한 직후 북쪽의 리설주 여사가 승용차에서 내렸다. 리설주 여사는 병원 관계자들과 30분 가까이 병원 입구에서 김정숙 여사를 기다렸다. 그녀는 한 번도 의자에 앉지 않았다. 정장 차림에다 하이힐을 신고 부동자세에 가까운 모습으로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북 정상회담 일정 내내 김정은 국무위원장 부부는 문재인 대통령 부부를 깍듯하게 모시듯 환대하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한 국가의 지도자이기 전에 젊은 부부가 웃어른을 모시는 우리의 전통 예절을 잊지 않으려는 자세가 분명했다. 아동병원에 도착한 김정숙 여사는 리설주 여사에게 특별수행원들을 일일이 소개했다. 가까이에서 악수하면서 잡은 리설주 여사의 손은 연약하고 따뜻했다. 이어서 김원균 음악종합대학을 방문했다. 김원균은 북한의 국가와 ‘김일성장군의 노래’ 등을 작곡한 사람으로 북한 정권 초기 앞장서서 음악으로 ‘혁명과업’을 수행했다. 저녁에 평양대극장에서 ‘2018 평양 수뇌회담 환영공연’이 열렸다. 평양 시민들은 김정은 위원장이 입장할 때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와 함께 ‘만세’ ‘만세’를 입 모아 외쳤다. 김 위원장이 손짓으로 제재를 해도 그 웅장한 소리는 끝이 없었다. 최고 지도자를 향한 그 존경심의 표현은 머리끝이 곤두설 정도로 극적이었다. 공연은 우리도 잘 아는 ‘반갑습니다’를 시작으로 북쪽 노래와 남쪽의 노래를 섞어 진행되었다. 남쪽 가요 중에는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아침이슬’ ‘흑산도 아가씨’ ‘그대 없이는 못 살아’와 같은 노래들이 들어 있었다. 모두 북한식 편곡과 연주로 우리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던져주었다. 남쪽의 대중가요를 선곡한 것도 모두 남쪽 손님들에게 예를 갖추기 위한 거라고 안내원은 설명했다. 그렇지만 나는 귀에 익숙한 노래를 들으면서도 왠지 불편했다. 낯간지러운 가사와 트로트풍의 가요를 내가 모두 좋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외국에 나가 북한 식당을 들렀을 때 점점 남쪽 사람들의 입맛대로 음식들이 변화하는 것을 볼 때 느끼는 불편함과 유사한 것이다. ●‘홀로아리랑’에 눈물…“어떤 난관도 아리랑 고개 넘듯 헤쳐 가야” 환영공연에 등장한 인민배우들의 한복 디자인도 현재 남쪽의 한복 디자인과 거의 비슷하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북한이 원래의 것을 놓치고 남쪽을 흉내 내는 일로 남쪽을 배려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진행될 모든 남북 관계에서 북한은 원래의 북한을 유지해야만 화해와 협력도 대등한 관계 속에서 진전될 것이 아닌가. 공연의 절정 부분에 한돌이 작사하고 작곡한 ‘홀로아리랑’이 배치되었다. 가사 뒷부분은 이렇다. “백두산 두만강에서 배타고 떠나라/ 한라산 제주에서 배타고 간다/ 가다가 홀로섬에 닻을 내리고/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맞이해보자/ 아리랑 아리랑 홀로 아리랑/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 보자/ 가다가 힘들면 쉬어 가더라도/ 손잡고 가보자 같이 가보자” 나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평화와 번영을 향해 가는 길이 순조롭고 반듯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남북을 가로막기도 하고 우리의 운행을 방해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듯이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한다. 1980년대 후반에 남쪽에서 만들어진 이 노래가 2018년 평양에서 울려 퍼진다는 것은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뜻이다.평양은 확실히 변화하고 있었다. 시내를 걸어가는 시민들의 발걸음은 밝고 자신감이 넘쳤고, 여성들의 옷차림도 전보다 훨씬 다양한 디자인을 보여주었다. 어떤 젊은 여성은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휴대폰(손전화)을 계속 들여다보며 걸어가기도 하였다. “문재인 대한민국 대통령 내외분의 평양 방문을 환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이신 김정은 동지와 부인 리설주 녀사께서 주최하는 연회”가 목란관에서 열렸다. 이 연회의 차림표를 여기 북한 표기대로 적는 것으로 나는 평양 방문을 한 것에 대해 우쭐거려 보려고 한다. 백설기, 약밥, 칠면조말이랭찜, 해산물 물회, 과일남새생채, 상어날개야자탕, 백화대구찜, 자신소심옥구이, 송이버섯 편구이와 볶음, 흰 쌀밥, 송어국, 도라지 장아찌, 오이숙장과, 수정과, 유자고, 강령록차 이에 화답하듯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는 첫날 환영만찬에서 ‘동무생각’을 불러 왕년의 솜씨를 뽐냈다. 내 옆자리에 앉은 당중앙위 조용원 부부장은 낮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금지의 언어가 아니라 소통의 언어로 말하고자 하였다. 우리 14호차의 안내를 맡은 여성 두 사람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에서 일하는 젊은 엄마들이었다. 탁아소에 아기들을 맡기고 나온 이들은 찡그린 얼굴을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한 한 사람은 소월과 육사의 시를 이야기했다. 나는 이들이 사용하는 핸드폰을 한번 들여다봤다. 뒷면에 ‘평양’이라고 적혀 있는 이 핸드폰의 앱에는 체계관리(설정), 조선대백과사전을 비롯해 류경바둑, 별찌까기와 같은 게임이 들어 있었다. 십여 년 전부터 북한에서 휴대폰이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지금은 사용자가 500만 명을 넘어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평양에서 가장 현대화한 지역은 미래과학거리 구역이었다. 여기에는 전에 없던 현대식 고층빌딩과 아파트들이 도열해 있었다. 이곳에는 과학자, 연구자, 교육자들이 주로 거주한다고 했다. 이 거리의 가로수들은 대부분 메타세쿼이아였다. 북에서는 이걸 수삼나무라고 부른다. 이밖에 평양의 가로수로 많이 심어진 나무들은 살구나무와 버드나무가 있다. 봄이 되어도 평양 거리에 벚나무들이 벚꽃을 휘날리는 일은 없다.9월 19일 이튿날 일정은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점심 때 옥류관에서 열린 오찬장에 도착하자 남북공동선언 합의문이 만들어졌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큰 숙제를 끝낸 듯 표정이 밝아 보였다. 이번 평양 회담의 가장 중요한 성과로 기록될 공동선언은 남쪽에 생중계 되었다. 평양을 방문한 수행단보다 남쪽의 국민들이 더 빨리, 더 생생하게 뉴스를 접했을 것이다. ●웅장한 집단체조…남북 정상을 향한 15만 환호는 ‘지축 진동’ 평양 방문은 휴대폰으로부터 해방된 여행이었다. 혹시나 진동이 울리나 싶어 무의식적으로 양복 안주머니 쪽으로 손이 간다는 분도 있었다. 옥류관 오찬으로 나온 음식은 평양냉면뿐만이 아니었다. 잉어달래초장무침, 자라탕, 송이버섯볶음 등이 맛있었고, 나는 냉면을 한 그릇 먹고 나서 반 그릇을 더 먹었다. 모두 300g이었다. 평양교원대학은 우리의 교육대학과 사범대학을 합친 교육기관이다. “어린이들에게 한 컵의 물을 주기 위해 한 동이의 물을 들이키는 심정으로 가르칠 준비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었다. 평양 방문 때 각 장르의 미술가들이 창작하고 그 창작물을 전시, 판매하는 만수대창작사를 들르는 일은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다. 나는 ‘감자꽃 필 때’라는 제목의 유색판화 한 점을 구입했다. 큰 가격은 아니었지만 그림 값을 깎는 ‘가격투쟁’에는 실패했다. 집에 그 판화를 가져와 펼쳐 놓고 다시 보아도 내 선택이 현명했던 건 분명하다.대동강의 능라도에 있는 5·1경기장은 15만명의 평양 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처음 보는 집단체조와 예술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가슴이 자꾸 두근거렸다. 카드섹션에 참여하는 경기장 반대편 ‘배경대’는 1만 7490명의 중학생들로 구성되었다고 했다. 남과 북의 양 정상들이 경기장에 막 도착했을 때 15만명이 하나의 목소리로 환호하는 소리를 상상해 보라. 지축을 울린다는 그 상투적인 표현이 여기에 딱 들어맞는 수사일 것이다.대규모 평양 시민들 앞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연설에 나섰다. 거의 한 문장이 끝날 때마다 열광적인 박수와 환호가 이어졌다. 집단체조 ‘아리랑’의 일부와 남북 정상회담을 축하하는 특별공연이 수만 명의 청년학생과 예술가들에 의해 펼쳐졌다. 공연은 북한식 집단주의가 역사적 경험과 만나면서 어떠한 예술적 영향력을 생산하는지 웅장하게 보여주었다. 다들 하나같이 말했다. “남쪽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공연이지. 아이들을 저렇게 동원해서 연습 시키면 가만히 있을 엄마가 한 사람도 없을 걸.” 씁쓸했지만 그게 또 우리의 현실이었다. 1970년대 중반 전국체육대회를 앞두고 중학생이었던 나도 마스게임에 참여해본 적이 있다. 어린 우리는 뙤약볕 속에서 살을 태워가며 연습을 해야 했다. 개인은 없고 집단만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북쪽 안내원이 말했다. “여기 참여하는 어린이들의 엄마는 아주 영광스럽게 생각한답니다.”평양 방문단이 백두산을 간다는 소식이 들린 것은 19일 저녁 9시경이었다. 20일 새벽 4시에 출발한다는 갑작스런 통보가 전해졌다. 평양 방문 내내 우리는 그 다음 일정을 알지 못해 궁금해 하였다. 일정이 정해진다고 해도 남과 북의 안내원 말이 다를 때가 있었다. 대규모 행사를 진행하면서 실무적으로 삐걱거리는 일도 있었던 것 같다. 백두산을 간다는 말에 특별수행원들은 들뜨기 시작했다. 방한복을 싣고 공군2호기가 평양국제비행장에 온다는 말도 들렸다. 공군1호기 조종사는 삼지연비행장의 활주로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미리 떠났다고도 했다. 백두산은 밤에 영하의 기온으로 내려간다는 말도 들렸다. 어쨌든 젊은 가수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대박!” 9월 20일 새벽 1시까지 큰 짐들을 호텔 로비에 내려놓으라는 전갈이 왔다. 1시쯤 잠이 든 나는 4시에 모닝콜을 받았다. 평양 거리는 불을 켠 곳이 별로 없었다. 5시 30분 비행장으로 가는 길은 어두웠다. 비도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그때 버스 창문으로 우리를 환송하러 나온 평양 시민들이 보였다. 불빛 하나 없는 거리에서 그들은 손을 흔들면서 연도에 줄지어 서 있었다. 평양에 도착했을 때보다 숫자는 적었지만 환송 열기는 그에 못지않아 보였다. ‘뭉클하다’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든 말일 것이다. 비행장에서는 남쪽에서 급히 공수해온 방한복이 두 벌씩 지급되었다. 기자도, 그룹 총수도, 노동자도, 학생도, 성직자도, 교수도, 공무원도, 국회의원도 모두 하나같이 점퍼로 중무장을 마쳤다. 백두산으로 가는 비행기까지 따로 수속 과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좌석표도 없었다. 우리에게 배정된 고려항공에 탑승해서 빈 자리에 앉으면 그만이었다. 마치 수학여행을 가듯이 말이다.●남북을 위한 백두산의 환대, 이젠 평양도 백두산도 멀지 않더라 7시 40분, 평양에서 한 시간을 날아가 삼지연비행장에 도착했다. 2005년 남북작가대회 때 삼지연에 가본 이후 13년 만이었다. 해발 1300m의 고원지대에 위치한 삼지연의 공기는 서늘한 가을의 공기였다. 우리는 한두 달 앞당겨 가을 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나는 마음껏 맑고 시원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어디 보자기에도 싸갈 수 없는 바람이 얼굴을 어루만졌다. 만약에 할 수만 있다면 삼지연의 공기를 팔아 돈을 벌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지연비행장과 그 주변은 말끔하게 단장이 되어 있었다. 새로운 터미널이 신축되었고, 활주로는 깨끗하였다. 백두산으로 가는 포장도로도 손색이 없었다. 이깔나무(냑엽송), 가문비나무, 자작나무들이 도열해 있는 길을 운전하는 운전기사가 말했다. “남쪽에서 오신 나이 드신 손님들을 위해 속도를 80㎞ 이하로 줄이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삼지연에서 백두산까지의 길은 32㎞다. 모든 길의 양쪽 갓길에 이끼를 깔아 남과 북의 양 정상을 맞이하려는 노력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갔다. 백두산 천지가 내려다보이는 난간의 테두리도 대리석으로 새로 단장했고 천지로 내려가는 삭도(케이블카)도 운행을 멈추지 않았다. 장군봉 정상까지 SUV 차량으로 올라간 수행원들도 있었고, 두 정상과 함께 천지로 내려가는 삭도를 타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삭도를 타고 생전 처음 천지 물을 손에 적시는 행운을 누렸다. 백두산과 천지는 구름 한 점 없는 날씨로 우리를 환대해 주었다. 1920년대에 육당 최남선이 쓴 ‘백두산근참기’를 나도 쓰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우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꽃은 졌지만 잎은 푸르게 남아 있는 만병초 잎사귀 하나를 따서 수첩에 끼워 넣는 일이었다. 두메양귀비는 보이지 않았지만 구절초로 짐작되는 식물의 씨앗을 봉투에 넣는 일도 빼놓을 수 없는 나만의 즐거움이었다. 백두산과 천지 주변을 마음껏 걸으며 둘러보고 노랗게 물든 자작나무 잎사귀 하나를 오래 들여다보는 것, 그것으로 나의 ‘백두산근참기’는 완결편을 갖게 되었다. 평양도 백두산도 이제 먼 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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