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談餘談] 386 의원에 보내는 한 선배의 고언/구혜영 정치부 기자
오랫동안 재야운동에 몸 담았던 한 50대 선배가 “요즘 가슴이 먹먹하다.”며 ‘서글픈’ 심경을 전했다. 저문 강이 내려다 보이는 9월 초가을, 서울 마포의 한 커피숍에서 선배는 간간이 눈물마저 보였다. 개혁 세력이 이처럼 통째로 거부당한 적이 없다는 것이 ‘슬픔’의 실체였다.
저 엄혹했던 80년대를 지나치면서 마른 빵으로 끼니를 때우던, 칠흑 같이 어두운 시절을 말할 때도 “이렇게 좋은 날이 빨리 올 줄은 몰랐다.”며 환하게 웃던 선배였다. 지금은 아침에 눈뜨면 “오늘 하루도 얼마나 슬프게 살아야 하나.”는 생각부터 든다고 한다. 연이은 선거 패배와 바닥까지 내던져진 지지율. 초로의 선배는 개혁세력의 현주소를 하나하나 짚어내려 갔다.
“그래, 집적된 실패도 있지. 앞선 정부가 주문만 해놓고 계산서는 모두 참여정부에 던져진 탓도 있을 거야. 옳은 길도 많아. 자기 팔 잘라가며 정경유착 고리끊고 폭압적인 권위도 무장해제시켰지.”
“근데 국민이 뭘 원하는지 알아야 할 거 아니야. 빵 달라는데 도덕 교과서 주고, 살기 힘든데 공자 같은 소리만 하고, 사려깊지 못한 말로 오장육부나 뒤틀어 놓는데 어떻게 마음이 가겠냐고. 쫓기는 수배자 손에 돈 쥐어주고, 안방 내주며 ‘386’이라는 이름을 쥐어준 그 국민들 생각하면 젊은 정치인들, 적어도 골프장 안 가면 안 되나.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땅에서 큰 차 굴리며, 하루종일 허비하고 골프 치는 거, 그거는 말이야,‘나는 민주화의 세례만 받았다.’는 항변이나 마찬가지야. 그 시간이면, 오징어가 흉작기라는데 동해안 가서 배도 타고, 허리 굽혀 벼베기도 하면서 막걸리 한잔 마실 수 있잖아. 이 정도라도 해야 구정치와 다르게 상큼한 정치한다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도리를 못하는 거야, 도리를….”
선배는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단다. 건강하라는 당부와 함께 “최악의 정치는 형벌로 백성 다스리는 거고 좀 덜 나쁜 정치는 물질적 이익으로 유인하는 거야. 마음으로 다스릴 줄 알아야지.”라는 말이 던져졌다.
사마천의 ‘사기’에만 나오는 경구가 아니길 바라는 선배의 심경이 가슴을 흔들었다.
구혜영 정치부 기자 koohy@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