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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보 김기창화백 타계/ 천주교와의 관계

    운보 김기창화백의 말년은 천주교와의 관계로 특징지어진다.지난 85년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한 사실,이에 앞서 그가 매우 사랑한 막내딸이 수녀가 된 것,김수환추기경과의 인간적인 만남 등 천주교는그의 삶에서 마지막 정착지가 됐다. 개종하기 전 운보는 개신교 신자이면서도 사찰 법당 건립을 위한 전시회에 작품을 내는 등 특정종교에 얽매이지 않았다.작품세계에 자유분방함이 종교 쪽에서도 다름없은 것이다.개종에 관해 묻자 그는 “신교의 하느님이나 구교의 하느님이나 똑같지 않나.이사 한번 했다고생각하면 되지”라고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나 57년 수묵화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를 낸 것은 그의 작품경력에서 예사롭지 않은 일이었다.당시는 ‘군마도’니 ‘투우’같은기운찬 작품에 전념할 때여서 파격적으로 비쳐진 게 당연했다. 이 그림은 부인 박래현이 막내딸(김영)을 잉태한 뒤 그린 것이다.그 딸이수녀로 입교할 것을 간청했다. 평소 아버지의 장애인 사랑에 감화받은 딸은 “나도 장애인과 어려운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고 싶다”며 수녀가 되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운보에게 간절히 요청했다고 한다.딸이 입교한 2년 뒤 운보는 마침내 성라자로성당에서 김수환추기경으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았다.그는 “오늘의 영광은 모두 천주님의 것“이라며 하느님에게 가장 가까이 가고 싶다는 염원으로 세례명으로 베드로를 원했다. 이후 김추기경과는 신앙적·인간적인 관계가 지속됐고 이는 김추기경이 오는 27일 명동성당에서 열리는 영결미사를 친히 집전하겠다는 약속으로 남았다. 김성호기자 kimus@
  • 운보 김기창화백 타계/ 운보의 생애·작품세계

    끝없는 실험정신과 불굴의 의지로 예술혼을 불살라온 한국화단의 거목.운보 김기창 화백이 영원히 화필을 놓았다.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세상, 그 침묵의 언어를 화폭에 옮겨온 60여년의 세월을 뒤로 한 채운보는 우리 곁을 떠났다. 운보의 삶은 한 편의 휴먼 드라마다.1914년(호적상으론 1913년)서울종로구 운니동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운보는 승동보통학교에입학한 7세 때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후천성 청각장애가 됐다.어린시절 날마다 듣던 돈화문의 보초 교대 나팔소리도, 단성사 날라리 소리도 아득한 침묵의 심연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30년 신여성인 어머니 한윤명의 손에 이끌려 이당(以堂)김은호 문하에 들어가면서 그의 운명은 전기를 맞는다.입문 이튿날부터이당에게 수묵 농담법을 배운 운보는 그날 이후 47년동안 매일같이스승에게 큰절을 올렸다.운보는 입문 이듬해 18세에 ‘판상도무(板上跳舞)’란 널뛰기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약칭선전)에 입선, 일찍이 대가로서의 소질을 보였다.37년엔 선전에서 ‘고담(古談)’으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아 입지를 확고히 했다. 운보가 진정 거장인 것은 한곳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조형정신을 탐구해왔다는 데 있다.그는 전통주의와 현대적 조형실험을병행하며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었다.그의 예술은 크게 10년을 주기로변모를 거듭했다.첫 시기는 이당 문하에서 전통화법을 공부한 때부터50년대 초반까지.전통 한국화의 평면구성에서 벗어나 입체구성을 시도한 ‘노점’‘복덕방’같은 수묵담채화와 ‘성화’시리즈를 집중적으로 선보인 시기다.운보가 입체파의 선구적 작가로 나선 것이 바로이 때다. 60년대 들어선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작품세계를 추구했다.전통 가면극을 작품화한 과감한 동세(動勢)의 ‘탈춤’,흥겨운 악공들의 모습을 힘찬 필치로 그려낸 ‘아악의 리듬’등이 대표작이다.야생마의 움직임을 격정적인 구도로 담아낸 ‘군마도’(69년)는 운보 작품의 스케일을 유감없이 드러낸 작품.굵고 검은 윤곽선과 대담한 형태의 포착은 그의 자유분방한 예술가적 기백을 보여준다.이 시기는 또한 운보가 추상작품을집중적으로 그린 때이기도 하다.‘태고의 이미지’‘청자의 이미지’등이 그것.운보의 추상세계는 자연에의 통찰과 애정이 낳은 직관의 세계다. 운보 그림은 70년대 ‘청록산수’와 80년대 ‘바보산수’로 이어진다.‘청록산수’가 우리 산하에 깃든 충만한 생명력을 윤기흐르는 초록으로 표현했다면,‘바보산수’는 조선민화의 멋과 해학,여유 등이 녹아 있는 편안한 그림이다.특히 바보산수는 관념산수가 판친 18세기겸재 정선이 만들어낸 진경산수와 견줄만큼 창의력이 돋보이는 작업으로 평가된다.운보는 ‘엿장수’‘일장(日長)’‘오수(午睡)’‘비오는 날’‘행려(行旅)’‘호수’‘관폭(觀瀑)’‘십장생’‘장생도’‘바보화조’‘바보수렵’등 80여점의 바보화풍 그림을 불과 두달새에 그려내는 활화산같은 창작열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가 만년에 개척한 바보산수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바보’란 무엇인가.그것은 천진함과 무위에 기초한 원초적인 순수의 세계요 무심의 세계다.바보라기보다는 차라리 현실의 굴레를 벗어난 천재성이 빛나는 세계라할 수 있다.운보는 평소 “바보와 천재는 너무 통하는것이 많아.종이 한장 차이야”라고 말하곤 했다.바보화풍은 운보의부인이자 동지인 우향(雨鄕)박래현(76년 작고)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이기도 하다.90년대 들어 운보는 봉걸레를 이용한 ‘걸레그림’을 선보이는 등 또한차례 변신을 시도했다.그는 이 글씨추상을 ‘심상(心象)예술’이라 불렀다. 그러나 작품 경력에서 운보에게는 친일화가란 ‘업’이 따른다.‘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노인’‘총후(銃後)병사’등의 삽화가 친일작품으로 꼽힌다.운보는 이를 솔직히 인정,“역사와 민족 앞에 사죄한다”며 양해를 구했다. 운보의 삶을 더욱 가치 있게 한 것은 박애행(博愛行)이다.농아복지에남달리 관심이 많은 운보는 세계스케치 여행 때면 으레 선진국의 농아복지시설을 둘러봤다.낙후된 국내 농아복지시설을 개선하고자 회장으로 있는 한국농아복지회를 국제농아연맹에 가입시킨 공은 전적으로그의 몫이다. 운보는 80년대 중반 외가가 있던 충북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에 ‘운보의 집’을 세웠다.그리고 그옆에나란히 청각장애인을 위한 운보공방을 조성했다.도자기 기술을 가르쳐 자립기반을 닦도록 한 것이다. 예술과 장애인을 위한 거대한 삶은 그에게 ‘천연기념물’‘바보인간’이라는 호칭을 안겨줬다. 타계하기 전 운보는 다행히 작은 소원을 하나를 풀었다.북한에서 공훈화가로 활동중인 동생 기만(71)씨를 최근 병상에서 만난 것이다.패혈증과 고혈압으로 다리까지 부어오른 운보는 중풍으로 고생하는 동생을 바라보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50년전 이념의 벽을 넘지 못하고 헤어진 형제의 상봉은 가족사의 차원을 넘어 예술가의 비극을 말해주는 단면이기도 했다. 백의민족의 정신을 들날리기 위해서라며 병상에서도 흰 고무신에 빨간 양말만을 고집한 운보.그는 화선(畵仙)이 되어 하늘로 갔지만 예술은 남아 넓직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김종면기자 jmkim@
  • 해학·풍류 넘치는 상상의 세계

    “그림은 내가 살아가는 의미요 술은 휴식이다” 숫돌에 몸을 가는고행을 하듯 술을 마신 화가 장욱진(1918∼1990).한국 현대미술계에남다른 자취를 남긴 그의 10주기 회고전이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02-734-6111∼3)에서 열리고 있다.2월 15일까지.그동안 먹그림전이나종이그림전 등은 있었지만 유화작품만을 모아 대규모 회고전을 열기는 95년 호암갤러리 전시 이후 처음이다. 장욱진은 해,달,가족,동물,까치 등 주변의 일상적인 이미지들을 어린아이처럼 단순하게 표현한 동심의 화가다.해학과 풍류가 넘치는 투명한 상상의 세계를 작가는 자그마한 화면에 담아냈다.장욱진의 그림은 대부분 3∼4호,기껏해야 10호 정도다.화폭이 커지면 그림이 싱거워지고 밀도가 떨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그의 그림은 서양화 재료를 썼지만 동양화의 정신이 배어 있는 것이 특징.오광수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장욱진의 그림은 수묵화로 번안된 유화”라며 “장욱진이통칭 서양화가로 불리지만 그의 그림이야말로 진정한 한국화” 라고지적한다. 장욱진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또 하나의 열쇠는 그가 유난히 집짓기를 좋아했다는 것이다.실제로 장욱진은 서울대 교수를 그만둔 1960년이후 서울 명륜동 집과 새로 지은 지방의 화실들을 옮겨 다녔다. 63년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면 삼패리에 작업실을 차려 12년간 홀로 살았던 그는 다시 충북 수안보(80∼85년)로,경기도 신갈(86∼90년)로떠돌았다.장욱진에게 술이 구원이었듯이 떠남 또한 구원이었던 셈이다. 작가의 현실의 집은 그림에선 하나의 정신적 이상향으로 나타난다. 그의 작품에 으레 등장하는 조그만 집 한 채는 곧 세속의 방황을 잠재워주는 고고한 영혼의 거처다.평전 ‘그 사람 장욱진’(김영사)을펴낸 김형국 서울대 교수는 “피카소 그림에서 여인이 차지하는 비중만큼 장욱진에겐 집이 그런 무게를 지닌다”고 말한다. 전시작품은 49년작 ‘독’에서 타계 직전 그린 마지막 유작 ‘밤과노인’(1990년)에 이르기까지 70여점.한국전쟁 와중에 고향인 충남연기에 머물며 작은 갱지에 보리밭 사잇길로 가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독실한 불교신자인 부인 이순경 여사(80·역사학자 두계 이병도의 맏딸)를 모델로 한 ‘진진묘(眞眞妙)’,무성한 나뭇가지위에 집이 올라앉아 있는 ‘가로수’ 등 1940년대에서 90년까지의 대표작들이 망라됐다.‘소’‘가족’‘아이들’‘수안보 집’‘나무와까치’‘두 나무’ 등 미공개작도 20여점이 전시돼 관심을 모은다.전시를 준비해온 장욱진의 큰딸 장경수씨(56)는 “아버지의 작품이 500여점 가량 될 줄 알았는데 이번에 모아보니 유화만 721점이나 됐다”며 기뻐했다. 이번 전시에 맞춰 장욱진 전작도록과 92년 미국에서 출간된 ‘황금방주:장욱진의 그림과 사상’의 한국어 보급판도 나왔다.국내 작가의전작도록이 출간되기는 운보 김기창에 이어 장화백이 두번째다. ‘해와 달·나무와 장욱진’이라 이름 붙여진 이번 전시의 관람료는 일반3,000원,학생 2,000원이다. 김종면기자 jmkim@
  • [외언내언] 안견과 안평대군

    안견(安堅)은 조선조 초기 산수화풍을 창출한 한국화의 대가로 신라의 솔거(率居),고려시대 이녕(李寧)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화가로 꼽힌다.호는 현동자(玄洞子).세종·문종 연간에 도화원(圖畵院)의 종6품 벼슬인 선화(善畵)에서 화원으로서는 마지막 품계인 종6품 제한을 깨고 정4품 호군(護軍)까지 승진했다.평소 안평대군과 가까이 하면서 중국 고화들을 섭렵,자신의 화풍을 이룩했다.성현(成俔)은 ‘용재총화’에서 “고래의 명적(名籍)을 많이 보고 연구해 그 요체를 터득하고 고금명가의 장점을 규합 절충해 자기 것으로 소화하였으며 산수화가 빼어나다”고 그를 평가했다.안견의 작품으로는 ‘몽유도원도’‘적벽도’‘사시팔경도’ 등이 전해지는데 확실한 것은,안평대군(安平大君)이 꿈 속에서 본 아름다운 도원(桃園)의 모습을 들려주며 그리게 했다는,‘몽유도원도’뿐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안평대군은 세종대왕의 셋째아들로 이름은 용(瑢),호는 매죽헌(梅竹軒) 비해당(匪懈堂)을 두루 썼다.세종 10년(1428년) 대군으로 봉해졌고 맏형인 문종이다스리는 동안 배후에서 실력자 구실을 하다가단종 1년(1453년) 둘째형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으로 김종서(金宗瑞)등을 죽일 때 강화로 귀양갔다가 사약을 받았다.시문서화(詩文書畵)에 능한 당대 최고의 명필로 꼽혀 중국 사신들이 올 때마다 글씨를얻어 갔다고 한다.대표작으로 현재 일본 텐리(天理)대학이 소장하고있는 안견의 ‘몽유도원도 발문(跋文)’과 국보 제238호 ‘소원화개첩(小苑花開帖)’이 전해진다. 최근 그림으로,글씨로 한 시대를 풍미하며 교유하던 안견과 안평대군의 작품이 공개돼 관심을 끈다.550여년 만에 공개된 안견의 ‘고잔도장축도(古棧道長軸圖)’와 오는 29일부터 예술의전당 서예관에서열리는 ‘한국서예 2000년전’에서 선보일 안평대군의 친필 ‘칠언절구’와 ‘춘야연 도리원 서(春夜宴 桃梨園 序)’ 등이다. ‘고잔도장축도’는 당 현종이 ‘안록산의 난’(755년)을 만나 험한산길로 피난가는 모습을 비단 바탕에 수묵과 채색으로 그린 작품이다.그림의 크기는 가로세로 219×25.5㎝,전체로는 585×31.5㎝ 두루마리 표구로 군청색비단 표지에 ‘안견고잔도장축도’라고 씌어 있다.안평대군의 ‘칠언절구’는 감지에 금니(金泥)로 외로움을 쓴 서정시이며 ‘춘야연 도리원 서’는 검은 종이에 역시 금니로 봄의 정원에서 형제들과 우애를 다지는 내용이다.전해지는 작품이 많지 않은조선 초기 대표적 화가와 명필의 작품이 한꺼번에 공개된 점은 기뻐할 일이지만 명확하게 진위를 밝히는 것도 소홀해서는 안되겠다. ■박찬 논설위원parkchan@
  • 2차 남북이산상봉/ 병상 金기창화백·北동생 ‘20분 대면’

    “형님,저 기만이에요.제가 왔어요.일어나서 저 좀 보세요.제 목소리 들리세요…” 산소호흡기를 단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88) 화백은 힘겹게 눈을 떴다.청력을 잃어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분명 동생의 얼굴이었다. 1일 오후 3시30분 서울 삼성의료원 19층.북의 화가 동생 기만(基萬·71)씨의 오열에 남의 형 김 화백은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로 맞았다.49년만이었다. 병실에 들어선 기만씨는 “못난 동생을 기다려 주셔서 고맙습니다”를 되뇌었다.김화백이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북에서 개선장군이 되어 왔습니다’라고 수첩에 써 보여줬다. 병상에 누운 김화백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동생을 바라봤다.몸이불편해 거동도 힘들고 말하기도 어려웠지만 서로 꽉 움겨잡은 손으로마음과 마음은 전해지고 있었다. 반세기 동안 쌓인 그리움과 한은 눈물이 되어 그치지 않고 흘렀다. 지난 4년간 패혈증과 고혈압에 시달리던 김화백은 동생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지난달 17일 병세가 갑자기 악화돼 삼성의료원 중환자실에입원했다.중환자실에서는 면회가 어려워 1일 오전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기만씨는 김화백의 셋째 동생.서울시립미술연구소 연구생으로 있다가 51년 월북했다.김화백은 85년 이산가족 상봉 당시까지 동생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하지 않았다.당시 북에 다녀온 사람이 소식을 전해준 뒤 동생들이 북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 밝혔다.기만씨는 북의 누이기옥씨(72)가 오빠에게 전해달라며 쓴 편지를 김화백의 손에 쥐어줬다.‘어렸을 때 영양실조로 눈이 멀었던 적이 있는데 큰오빠(김화백)가 업고 용하다는 의원을 찾아다녀 눈이 나았다.그래서 지금 의사가됐다’는 내용이었다. 김화백의 아들 완씨(51)는 족보와 사진 등을 작은아버지에게 보이며형제상봉을 안타깝게 지켜봤다. 김화백은 71년작 ‘승무’와 자신의작품 5,000점 모두가 담긴 전작도록(全作圖錄)을,기만씨는 ‘태양을따르는 마음’이라는 수묵화 4점을 선물로 주고받았다.남과 북을 달리하며 유명 화가가 된 형제의 상봉은 허무할 만큼 짧은 20분만에 끝났다. 이송하기자 songha@
  • 이응노미술관 14일 문연다

    ‘한국화단의 풍운아’ 고암 이응노 화백(1904∼1989)의 예술혼을가까이서 호흡할 수 있게 됐다.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자리잡은 이응노미술관(관장 박인경)이 14일 문을 연다.이에 맞춰 ‘42년만에 다시보는 이응노 도불전’이라는 제목의 개관기념전이 12월 29일까지 열린다. 지난해 고암 10주기를 맞아 출범한 이응노기념사업회(회장 윤범모)가 모태가 돼 건립된 이응노미술관은 건평 150평 3층 건물로 고암 작품의 연구와 전시,학술,출판사업 등을 통해 고암의 진면목을 알리는역할을 하게 된다.고암이 타계할 때까지 살았던 파리 근교 보 쉬르센에 있는 기념관 ‘고암서방’과 함께 고암의 생애와 예술을 조명하는 공간이 두 나라에 나란히 생긴 것이다.이응노미술관은 일련의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곤욕을 치뤘던 고암이 사후에나마 고국의 품에안길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됐다는 점에서 적잖은 의미를 지닌다. 미술관 개관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것은 ‘42년만에 다시 보는 이응노 도불전’이다.이번 전시에는 고암이 1958년 3월 도불을 앞두고 서울 소공동 중앙공보관에서 열었던 ‘도불기념전’때의 작품 61점중 30점이 나온다.자유분방한 선묘의 추상화 ‘해저(海底)’,잭슨 폴록의드리핑 작업을 연상케 하는 ‘생맥(生脈)’,수묵의 맛을 듬뿍 안겨주는 ‘자화상’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고암은 한국전쟁 중에도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피난민’같은 작품을 발표하는 등 쉼없이 화필을 잡아 생전에 수천점의 작품을 남겼다.이 작품들은 대부분 고암서방에 보관돼 있다.미술관측은 이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면 연중전시가 가능하다고 밝힌다. 충남 홍성 출신인 고암은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문인화를 배웠다.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청죽’으로 입선하며 화단에 나왔다.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남화(南畵) 2대가 중 한명인 마쓰바야시 게이게쓰에게 사사받았고 혼고(本鄕)연구소 등에서 서양화를 연구하는등 근대적인 미술교육을 받았다.1945년 해방을 맞은 고암은 김영기,장우성 등과 함께 ‘단구(檀丘)미술원’을 조직해 식민잔재에서 벗어나 새로운 한국회화를 개척하기 위해 노력했다. 고암은 1958년프랑스 평론가 자크 라센의 초청으로 파리로 건너갔다.이듬해 독일에서 순회전을 가진 뒤 1960년 파리에 정착했으며 앵포르멜 운동을 주도한 파케티화랑과 전속계약을 맺어 1961년 파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그러나 그후 ‘동백림사건’(1967년)으로 옥고를 치른 데 이어 백건우·윤정희 부부 납치미수사건(1977년)에 연루되는 등 시련을 겪었다.고암은 77년 서울 문헌화랑의 ‘무화(舞畵)전’을 끝으로 작고할 때까지 국내활동을 하지 못했다.정치적 탄압에직면한 그에게 80년광주민주화운동은 새로운 화제(畵題)를 안겨줬다.고암은 군중이 외치는 자유의 의미를 종이 위에 옮겼다.그리고 그작품에 ‘통일무(統一舞)’란 이름을 붙였다.그는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한편 미술관측은 ‘고암 이응노의 예술세계에 대한 재평가’란 주제로 학술대회를 마련,고암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12월 2일 이화여대 박물관에서 열리는 이 행사에는 홍선표(이화여대),정형민(서울대),최태만(서울산업대)교수 등이 발표자로 나선다.고암 연구자를 양성하고 한국근대미술연구를 활성화하기 위한 고암학술논문상도 제정해 현재 공모(15일 마감)중이다.(02)3217-5672김종면기자
  • 달마그림 들고 속세 나온 중광

    ‘세상의 외톨박이’‘광승(狂僧)’으로 통하는 중광(65)이 달마그림을 들고 속세에 다시 나왔다.지난 96년 개인전 이후 홀연히 자취를감췄던 그가 오랜만에 작품전을 열고 있는 것.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전관에 마련된 ‘중광 달마전’(11월 8일까지)에는 그가 그린달마도 45점과 유화 18점,도자기 작품 31점이 전시돼 있다.개인전에달마도를 이처럼 많이 내놓기는 처음이다. 중광 화업의 본령은 달마그림이다.중광이 달마에 ‘귀의’한 것은올해로 10년.근래들어 서울 구룡사와 설악산 백담사에 칩거하면서부터는 온종일 달마와 함께 살았다.심신이 쇠해 과거에 즐겨 그렸던 유화는 제쳐두고 수묵화로 방향을 틀었다. 이번에 소개된 달마도에 실린 달마의 모습은 모두 다르다.45점의 달마도에는 45명의 달마가 있다.짚신 한짝 달랑 달린 장죽을 메고 가는 ‘싱거운 달마’,웅크린 자세로 달을 등지고 앉아 있는 ‘옹심달마’,커다란 등에 작은 뒤통수만 보이는 ‘면벽 달마’,장전된 화살처럼 활모양의 머리를 한 ‘활달마’,꾸짖는 듯 동그랗게 치켜 뜬 눈이웃음을 자아내는 ‘돌 달마’ 등 각양각색이다.중광과 함께 ‘유치찬란’이란 제목의 시화집을 냈던 구상 시인의 ‘서시’를 보면 중광의 달마는 더욱 확연하게 다가온다.중광의 달마는 “휘갈겨 놓으니달마의 뒤통수요,느닷없이 만난 은총의 소낙비”인 것이다. 중광은 현재 조울증을 않고 있다.몸이 쇠약해져 그림은 잠시 접어두고 ‘바람’을 화두로 용맹정진중이다.중광은 “내가 ‘바람’이라고떠들긴 하지만 아직 ‘바람’을 구경도 못했다”며 묘한 웃음을 던진다.이번 전시의 부제 ‘괜히 왔다 간다’는 중광의 요즘 심상풍경을 여실히 전해준다.(02)720-1020. 김종면기자
  • 어린이 책꽂이

    ●풀과 벌레를 즐겨 그린 화가 신사임당(조용진 지음)마을 혼인 잔치에서 하인이 실수로 손님 치마에 음식을 엎어 얼룩진 치마를 보고 안절부절했다.보다 못한 신사임당은 그 치마에 포도덩굴과 포도송이를싱싱하고 탐스럽게 그렸다.분노로 가득했던 치마 주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율곡의 어머니로 널리 알려진 현모양처 겸 효녀의 대명사 신사임당(1505∼1551)은 뛰어난 화가이기도 하다.이 책은 작품과 일화를 중심으로 그의 진면목을 소개한 전기 형식의 화집.국립중앙박물관 등에소장된 그림 30여점과,검은 대나무가 무성한 강릉시내 생가 오죽헌등의 자료 사진 10여점도 실었다. 그는 꽃과 풀,벌레를 소재로 한 초충도(草蟲圖)를 많이 그렸다.수박과 들쥐,맨드라미와 개구리,오이와 메뚜기 등 옛날 우리 마당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작은 것들이 모두 훌륭한 작품 대상이었다.당시에는 중국의 그림을 흉내내 화선지에 먹물을 사용하는 수묵화가 유행이었다.그러나 신사임당은 비단 등 스며들지 않는 바탕에 색깔을 칠해 자연을 독창적으로 표현하는 채색화를 애용했다.어린이들에게 그림에대한 이해와 함께 올바른 생활태도를 배우게 한다.나무숲의 ‘어린이미술관 시리즈’ 제3권.9,000원김주혁기자
  • 김천 직지사 ‘한국고승眞影展’

    지난 1일부터 경북 김천 직지사 설법전에선 이색적인 전시가 열리고있다. 평소 볼 수 없었던 한국 고승 65명의 진영(眞影) 91점이 빼곡하게 내 걸린 ‘고승진영전’. 진영은 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져 보통땐 공개하지 않는게 원칙.스님들의 기일이나 다례 등 1년에 한두번 쯤을 빼놓곤 일반인은 물론 스님들도 쉽게 보지 못한다. 전시에 나와있는 진영들은 대부분 전국의 유명 사찰과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9세기 작품들.소장자들이 워낙 조심스럽게 다루어온 것들이라 전시 성사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고 전시 관계자들이귀띔한다. 직지사 대웅전을 지나 왼쪽으로 방향을 잡아 조금 걷다보면 성보박물관이 나온다.성보박물관 왼쪽에 자리잡은 100평 남짓한 설법전이전시장.평소 법회가 이루어지던 곳이라 분위기도 엄숙하다. 전시장을 들어서자마자 고승들이 위엄을 과시한다.입구에서 맨 처음관람객들을 맞는 원효 ·의상의 진영 각 1점씩은 일본 고신지(高山寺)에서 빌어온 것들.국내엔 한 번도 소개되지 않았다고 한다.원효의모습이 조금은 세속적인모습이라면 의상은 해맑은 선승의 얼굴을 하고 있어 각자 삶대로 퍽이나 대조적이다. 원효 의상을 보고나면 불교 신도들에겐 숭배의 대상인 고승들이 각양 각색의 얼굴로 위엄스레 둘러서 있다. 송광사 보조국사 지눌 진영의 원본이라는 동화사 보조국사 진영과신륵사 무학대사,청허(서산대사)사명대사들이 나란히 서있다. 갑사가내놓은 청허 사명 기허대사의 진영은 금방이라도 뛰어나올 것 같은생생한 표정이다. 이밖에 절에서 만난 스님처럼 살아있는 얼굴을 한 김룡사 용암당 찬련스님과 눈을 지그시 감은 인자한 표정의 김룡사 완파당 취관 스님의 진영도 독특하다.또 설법을 할 때면 비둘기도 날아와 듣고 3년간수도를 할 때는 호랑이가 스님을 수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선암사 눌암당 식활 스님의 진영과 김룡사 성월당 스님의 진영은 다분히민화풍을 띠고 있다. 조선시대 이름을 날렸던 스님들의 진영은 전국 사찰에 산재해 있다. 청허 사명만 하더라도 전국에 각각 10여점씩 전해져 전시된 것들은각기 다른 모습이다.표충사 화담당 경화 스님의 진영엔 추사 김정희가 ”봉우리의 등불은 꽃華(화)를 토하고 산에 걸린 달은 못潭(담)에잠기는구나”란 글귀의 제찬(題讚)이 눈길을 끈다. 진영은 주로 화승(畵僧)이 그렸다고 전해지는데 전시엔 이런 화승들의 진영도 나와있다.19세기 지금의 경북 지역에서 활동했던 김룡사퇴운당 신겸과 대승사 의운당 자우 진영이 그것들이다. 한편 근 현대기의 진영들은 사진을 찍은뒤 그 사진을 보고 그린 것들이 독특하다.선암사 화산당 오선스님과 그의 권유로 출가한 동생경붕당 진영은 같은 1917년 작품이지만 경붕당의 진영이 빛에 반사되는 눈동자까지 표현할 정도로 사실적인데 비해 화산당은 만화같은 느낌의 수묵기법을 써 퍽 다르다. 이밖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이 그리고 민족대표 33인중한 사람인 오세창이 글을 쓴 송광사 인봉당 진영과 왕가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한 선암사 대각국사 진영과 금란가사도 관람객들의 발길이끊이지 않는 볼거리다. 직지사 성보박물관장 흥선 스님은 “고승들의 진영은 엄연한 문화유산인데도 관련 논문이 석사학위 논문 3편에 불과할 정도로 연구층이엷고 깊이도 얕다”며 “종교적인 차원을 떠나 일반인들도 쉽게 접할수 있도록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천 김성호기자 kimus@
  • 한국화가 김보희 ‘명상의 풍경’展

    한국화가 김보희(48·이화여대)가 자연의 고요함과 명상의 세계를보여주는 ‘명상의 풍경’전을 서울 소격동 아트스페이스 서울에서열고 있다.양수리,충주호반,제주도 등지의 풍경을 담은 잔잔한 분위기의 작품들을 냈다. 생활 주변의 모습이나 자연의 풍광을 채색 위주로 그려온 작가는 이번에 작품경향을 바꿨다.화면 전체를 가라앉게 하는 먹의 효과에 주목,채색을 배제한 수묵화를 처음 시도했다.인위적인 장치들도 될 수있는대로 자제했다.그래서인지 작품에 사람이 등장하지 않는다.단순히 ‘거기 있는 풍경’이 아니라 ‘생각하게 하는 풍경’이며 ‘명상으로 이끄는 풍경’이다.안으로 스며드는 듯 중첩된 먹색이 화면에은은하게 퍼지는 가운데 자연의 푸근함을 느낄 수 있다. 1995년 월전미술상을 받은 작가의 8번째 개인전이다.10월 12일까지.(02)720-1524[김종면기자]
  • 2000년 서울국제문학포럼

    ★ 산중에 숨은 신들:도겐(道元). 나는 미국 워싱턴주의 태평양 연안 농촌에서 자랐다.아이 시절에 우리집의 젖소를 돌보고 숲 속에 드나들며 일했다.나는 삼림의 남벌을목도했으며 아직 고등학교 학생이면서 환경 정치운동을 벌였다.1930년대의 내 고향 퓨젯 사운드는 많은 부분이 야생지대로 남겨 있었으나 오늘날 그곳은 90%나 채벌되었다.나는 동서양의 역사와 문학을 공부하면서 힌두 사상이 불교와 불해(不害)라는 윤리적 교훈을 공유한다는 것,그리고 이 교훈이 사람만 아니라 모든 중생을 포함한다는 것을 배웠다.이것이 나를 결정적으로 아시아로 쏠리게 했다.그리고 공부 끝에 선 사상에 도달했을 때 드디어 나는 대승 경전과 도교 사상과 수묵화와,시와 인도 요가와 좌선 등이 서로 연결됨을 깨달았다. 몇 해가 지나 나는 도겐을 발견했다.내가 이 13세기 일본 선승의 ‘산수경’을 읽고 실천과 자연 현상계에 대한 그의 접근법을 약간 깨달았을 때 나는 단순한 동아시아의 자연에 대한 감성보다 훨씬 값진어떤 것,단순한 ‘자연사랑’의 한정되고 선택적인 주제들을 훨신 뛰어넘어 모든 영역을 두루 섭렵하는 어떤 위대한 정신과 만나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다. 폭넓고 자비로운 관점을 가진 오늘의 환경주의자들은 도겐을 일종의 생태학자로 생각할 수 있다.오늘의 생태 과학자들은 생명체 작용에서 관찰되는 복잡성의 수준을 토대로 하여 ‘혼돈과 복잡성’의 이론화를 이룩하는 데 이르렀다.이런 모든 유기적,무기적 영역들의 상호작용을 일러 ‘생명환경띠’라고 하며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이라 한다.그것은 광대한 연결이며 우리는 모두 그 지체들이다. 생태학의 연구는 진정 ‘청소’와 ‘윤회’ 즉 욕망의 세계에서의삶과 죽음의 바퀴,다른 말로 하자면 ‘신진대사’의 존재들에 대한연구이다.삶과 죽음의 공동체에 실존하는 각양각색의 역할을 현상 그대로 파악하는 눈이다.그런데 지구환경 보존은 과학자의 일거리가 아니다.이는 헌신적으로 도를 따르는 자들,곧 실천과 통찰로써 지혜와자비의 균형을 맞출 수 있어 남들의 눈을 열어줄 수 있는 사람들의몫이다. 원형적 생태론자인 도겐 선사는 산수경에서‘잠자리와 물고기가 물을 궁전으로 본다면 사람이 궁전을 보는 것과 꼭 같다.그들은 그 궁전이 흘러간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한다.모든 영역들이 나름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는 진리를 능숙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해주며 개인 각자의 에고는 물론 인간이란 종족의 에고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개리 스나이더 美 시인. ☆ 대중문화 사회 속의 시인. 우리는 인터넷사이트에서 미국제 특정 멀티미디어 프로그램을 다운받는다.그러면서 많은 광고를 보게되고 결국은 크레딧 카드로 돈을지불하게 된다. 조금은 복잡한 이 과정에서 ‘파울 첼란’의 육성이 컴퓨터 사운드시스템에서 울려나온다.첼란은 아우슈비츠 이후시대의 핵심적인 시로꼽히는 자작시 ‘죽음의 푸가’를 읊조린다. 그런데 어째서 시인가? 왜 오락사회는 사사로운 잡담,즉 그런 사회에 걸맞는 채팅에 만족하지 않는 걸까? 어째서 하필 입으로 말하는의식(儀式)적인 전통중 가장 오래된 표현형식을 위해 애를 쓰는 걸까? 이를테면 운맞추기라는 전통이 힙합 구절 속에,청소년 대중문화의문맥속에서 다시금 되살아나고 있는 까닭은 뭔가. 내 생각으로,대중문화와 시는 그렇게 대립적인 것 같지는 않다.반대로 가장 널리 유포된 문화의 형식들이,바로 죽었다고들 하던 시를 거듭 불러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블루스,유행가,록 발라드에 가사와시적 운율이라는 그 태고의 구성성분이 없다면 그것이 무엇이겠는가. 고급문학에서 나온 서툰 모조품 아니겠는가? 판타지 영화세계의 주인공과 마술사들은 그들이 입을 열 때마다,옛세계문학시편이라는 소도구들 없이는 계속 진행해 나가지 못할 것이다.위협받고 있거나 파괴된 아름다움의 이미지들을 눈앞에 보며 무언가 말을 한다면,그 말이야말로 시어일 것이다.더 없이 평면적인 문맥에서도,가장 단순화된 상투어에서도 시적인 발언은 그 힘을 증명한다. 여기 고향도,사회적 출신도,직업도,빈부도 다른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시작한다고 치자.이들은 어릴때 본 TV영화,비틀즈의노래 등 유년의 기억을 서로 짜맞추어 가며 이야기 매개로 풀어 나간다. 즉 소통,상이한 사람들이 서로 가까워지고 관계를 깊어지게 하는 바탕은 대중문화에 함께 참여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서로 교환하는 기호의 대다수는 대중문화에서 비롯되었거나그에 상응한 함의를 가지고 있다.할리우드는 거대한 조작이며 우리가 보낸 어린시절의 한 장소에 대한 동의어다. 나는 상상한다.온 세상 수많은 남녀 동료시인들과 함께 시를 쓰고있다고.물론 그 시는 대중문화보다 더 오래된 것이며 그보다 더 위대하다.그 시의 뿌리는 인간이라는 종과 언어의 뿌리 만큼이나 깊게 뻗어있다. 그러나 또 나는 안다.시인은 그의 동시대인과 그리고,그 시대를 관통하는 대중문화와 조심스럽고도 본질적인 대화를 나누며 살고 있다는 것을. 우베 콜베 獨 시인·튀빙겐대 교수. ■ 위기속의 문화. 오늘날 예술생산계가 전반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현상은 아주 새로운 것이다.오랜 시간에 걸쳐 어렵게 얻어낸 예술생산 및 유통의 자치성이 경제적인 당위성이라는 이름으로 위협받고 있다.신자유주의자들은 문화에도 다른 분야처럼 시장논리가 혜택을 줄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들은 문화의 특성을 묵시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인정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서적에 대해서도 보호조치를 취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새로운 미디어기업들이 유통시키는 서적과 영화·TV용 오락 프로그램 등 ‘정보’라는 이름 아래 유통되는 모든 생산품들은,다른 상품과 다를 바가 없이 이윤생산의 법칙에 따라 생산되어야 한다는 발상에서 온 것이다.수많은 채널을 가진 디지털 TV가 ‘미디어 선택 가능성의 폭발적 증가’라고 불릴 만큼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게 되어,시청자의 어떤 요구든 경향이든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또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경쟁이 있게 됨에 따라 당연히 창조적인 방송이만들어질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것을 공급의 획일성이라는 말로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이 획일성은 국가적 차원에서는 물론이고,세계적으로도 그렇다.경쟁상태에서는 다양성을 추구하기보다는 동질성을 추구하기 마련이다.최대다수가선호하는 것을 생산해야 하므로,생산자는 특히 어느 국가에서든지 통용될만한 상품들,다시 말하면 차별화를추구하지 않는 TV드라마와 연속극·추리극·상업용 음악·통속연극 등 ‘맥도날드 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작한다. 경쟁상태에서 그나마 소규모의 다양성을 지향한다해도 생산기구,특히 유통기구들이 통합됨에 따라 최소한의 가능성도 막히게 된다.기업들의 수직적인 통합으로 생산업체가 유통업체에 통합되어버렸기 때문이다.그 예가 바로 여러 개의 상영실을 갖춘 대형영화상영관으로 이들은 영화배급업자의 요구에 철저히 따를 수 밖에 없다.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정권이 검열을 했다면,이제는 금권이 검열기구로 등장한 셈이다. 상업논리라고 하는 것은 외형상으로는 진보적인 근대성의 양상을 띠지만,사실은 가장 대표적인 경향을 선택해서 최소의 노력의 대가만을 치르려하는 사회논리의 발현으로,방임의 극단적인 표현형태일 뿐이다. 여기에 대항하고자 했던 사람들도 가장 자율적인 문화생산자에서 점점 생산과 생산품 보급의 수단으로 전락해가고 있다.문화생산자는 어느 때보다 위협받고 있는 약화된 위치에 있으며,그래서 드물고 필요하며소중한 존재가 된 것이다. 피에르 부르디외 佛 사회학자. □ 문학과 삶의 관계. 삶이 문학의 원천이라고들 말합니다.사실이죠.그러나 동시에 삶과문학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삶은 문학의 원천이 될 수도있지만 문학의 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삶이 문학에 노골적인 방식으로 남용하여 들어가면,문학이 파괴되곤 합니다.실제로 문학은 삶,시민,관중,독자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제가 여기서 말하는 이것들은 당연히 문학의 질을 떨어지게 하는 부정적인 요소들만을 말합니다.가령 작품에 도움이 되는 독자들의 날카롭고 좋은 비평 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지요.삶도 마찬가지입니다.오늘날 만연하고 있는 저속한 취미로부터 문학은 스스로를 방어할 줄 알아야 합니다.다시 말해휼륭한 문학작품은 시장의 법칙에 복종하기를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공산정권은 이런 울타리를 부셔 버리려고 했습니다.공산주의자들은전 인민이 문학에 참여해야 하고 모두가 소설이나 극작품을 쓸 수 있다고 외쳤습니다.이것은 문학을 없애고 파괴하는 한 수단입니다.모든사람이 문학을 한다는 것이야말로 문학의 사양길을 재촉하는 것입니다.문학작품의 질이 떨어질 것은 당연합니다. 문학의 캘린더는 삶의 캘린더와 다릅니다.문학은 삶을 상대적으로알뿐입니다.인류에 이롭고 위대한 사건일지라도 문학에는 별 흥미로운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반대로 문학작품들의 대부분이 살인,부정적인 사건에서 영감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과학의 진보에 관하여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과학이 문학의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합니다.그러나 나는 이 의견에 반대합니다.문학은 과학의 발전에 상관없었습니다.문학에 중요한 것은외적 세계의 발견이 아니라 인간 내면세계의 발견을 이루는 것이기때문입니다. 오늘날 인터넷의 발견으로 문학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나는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인터넷은 위대한 문학,다시 말해 질이높은 작품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작가인 나에게 있어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지옥의 발견입니다. 지옥,이 무시무시한 기구는 인류문명의 기초를 이루었습니다.문학에있어 지옥의 발견은 다른 어떤 과학의 발명보다도 중요합니다.왜냐하면 지옥은 인간의 의식,죄의식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문학이 삶의 투영이라고 생각합니다.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문학은 특별하고 좀더 내밀한 삶입니다.문학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삶이나 세계와 다릅니다. 시대의 단순한 삶의 투영에 머무르는 문학은 저속한 사실주의와 열악성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스마일 카다레 알바니아 출신 소설가.
  • 26일부터 ‘이대원 2000’展

    한국현대미술 1세대인 이대원 화백이 팔순을 기념해 5년만에 개인전을 연다.26일부터 10월 10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02-734-6111)에서 개최되는 ‘이대원 2000’이 화제의 전시다.출품작은‘인왕산’등 1,000호짜리 대작 3점을 포함해 50여점.모두 최근 5년 새그린 것이니,회고전이 아니라 신작발표 무대인 셈이다. 1921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난 이 화백은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나와 화가의 길로 들어 홍익대 초대 미대학장,총장,예술원 회장을 지낸 문화계 원로.화단에서는 이런 이력의 그를 ‘가장 행복한 화가’라부른다. 이 화백이 화필을 잡은 것은 올해로 70년에 이른다.서울 청운초등학교 5학년 때.‘백일홍’이란 유화를 그려 눈길을 모은 그는 제2고보(경복고 전신)에서 국내 첫 프랑스유학파 화가인 이종우에게 그림을배웠다.38,39년에는 고등학생 신분으로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에 낸 ‘언덕위의 파밭’‘뜰’이란 작품이 잇따라 입선돼 재능을 인정받았다.심형구 유영국 장욱진 임완규 김창억 권옥연 이우경 화백 등은 제2고보 동문들.이화백은 당시 경신학교 미술교사이던 도상봉에게 데생지도까지 받으며 미술학교에 들어가려 했지만 집안의 반대로진학을 포기했다.그러나 그는 화가의 길을 스스로 개척,‘농원’등자연을 모티브로 한 독특한 작품세계를 일궜다. 이 화백은 이번 전시를 앞두고 자신의 예술관을 한 자락 밝혔다.“나무는 삶의 방향으로 가지를 뻗는다.다시 말해 나뭇가지는 생명의선이다” 그가 나무를 즐겨 그리는 데는 선친이 가꿔놓은 파주의 과수원에서 뛰놀던 유년의 기억이 큰 몫을 했다.물오른 나뭇가지,하얀배꽃,소담스런 열매와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의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고 예술적 감성을 키웠다.색점과 색선으로 이뤄진 화사한 그의 그림은 이런 성장배경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의 독특한 개성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시기는 50년대와 60년대. 동료들은 구상화를 버리고 모노크롬이나 미니멀리즘 경향의 추상회화로 전환했지만 그는 이런 시대 흐름에 아랑곳하지않고 산과 들,연못등 자연풍경만을 고집스레 그렸다.이에 대해 프랑스 미술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는 이렇게 평가한다.“이대원은 동시대 한국화가 중 서양미술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이다.그러나 그의 나무 그림은 한국 수묵화 전통도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이 화백에게 또 하나의 색다른 경험은 1959년 국내 첫 상설화랑인반도화랑의 운영을 10여년동안 맡은 것.그림값이 터무니없이 비싸서는 안된다는 그의 ‘소신’은 그 때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당시 이 화백 밑에서 그림을 배우며 화상으로서의 기본을 익힌 갤러리현대 박명자 대표는 “이 화백의 그림은 값이 없다”고 말한다.호당가격제의 모순에서 벗어나 합리적으로 그림값을 정한다는 얘기다. 이 화백은 팔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루 대여섯 시간씩 화폭과 씨름하는 영원한 ‘현역’이다.그 육체적·정신적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그것은 바로 엄격한 자기관리다.그는 지금도 매일 아침1시간씩 수영을 하고,영어·독어 등 이미 능통한 4개국어 외에 중국어를 새로 배우고 있다. 김종면기자 jmkim@
  • 박노수화백, 화업 50년 회고전

    동양적 여백의 미를 절도있게 표현해온 남정(藍丁) 박노수(73) 화백이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고 있다.19일까지.13년만에 열린 개인전이자 화업 50년을 결산하는 자리다. 남정의 작품은 동양화의 구태의연한 엄숙주의와 전근대적인 취향을넘어선 새로운 경지의 한국화를 보여준다.동양적 정서를 듬뿍 담는그의 필법은 매우 집약적이고 탄력적이다.그렇기에 그에게는 ‘북화적인 준열함과 남화적인 색채감이 절충돼 있다’는 평가가 따른다.이번 전시에는 1950년대부터 최근까지 그린 수묵채색화 60여점이 나와있다.높은 산과 기마소년의 설화적 연출이 돋보이는 ‘산정’,소복입은 두 여인의 사색이 담긴 ‘한일(閑日)’,서양화의 점묘법을 끌어쓴 듯한 ‘수렵’, 기암과 파초의 선묘가 일품인 ‘뜰’,고결한 선비의 기풍이 느껴지는 ‘고사(高士)’ 등은 특히 시서화 일체의 문인화적 감수성이 엿보이는 작품들이다. 남정의 예술관은 간결하고 담백하다.“아름다움은 지극히 단순하고간결한 것이다.점 하나로 1만가지의 의미를 담을 수 있을 만큼 함축적이어야 한다”게 그의 말.그런 극도의 자기절제 때문인지 그는 작품활동을 하면 할수록 더욱 어려움을 느낀다고 고백한다.이화여대와서울대 교수를 지낸 그는 현재 예술원 회원으로 있다.(02)3217-0233. 김종면기자
  • 詩로 달래고 그림되어 가슴적신 美學

    옛 문인 묵객들은 만남의 의의와 기쁨을 그림으로 남겼고,헤어짐의아쉬움을 시와 글씨로 달랬다.계회도(契會圖)니 전별시(餞別詩)니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선인들의 만남과 헤어짐의 미학,그 아취 넘치는 정신은 현대인의 메마른 마음밭을 적셔주기에 충분하다.고서화를찾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잃어버린 삶의 여유를 되찾게 하는 고서화 특별전이 서울 관훈동 학고재화랑에서 열리고 있다.30일까지.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계회도다.계회도는 문인풍속화의 한 유형으로,고려와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문인계회의 광경을 묘사한 그림을말한다.16세기 계회도는 대부분 관료들의 모임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됐다.그 모임은 입직(入直)과 송별,사가독서(賜暇讀書),전·현직 관료의 만남 등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시음회(詩飮會) 형태로 진행됐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시음계회는 중국 진나라 왕희지의 난정수계,당나라 백낙천의 낙중구로회,송나라 문언박의 진솔회 같은 풍류모임에뿌리를 두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계회도는 고려 때 시작돼 조선조 성리학이 완성되는 16세기,붕당정치가 정착되면서 전형화됐다.조선시대 문인들은 관아의 동료나 과거의 동년(同年) 또는 70세 이상 원로 사대부들이 참여하는 기로회(耆老會) 등의 그림을 그려 후손들이 선조의 삶을 배우도록 했다. 지금까지 밝혀진 16세기 계회도는 모두 26점.특히 이번 전시에는 예안김씨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추관(형조)계회도’와 ‘기성(병조)입직사주도’,‘금오(의금부)계회도’ 등 3점의 국보급 계회도가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돼 관심을 모은다.‘추관계회도’는 을사사화 이듬해인 1546년 명종 1년에 정5품 정랑 4명과 정6품 좌랑 4명 등 형조소속 낭관 8명의 모임을 그린 수묵화.‘기성입직사주도’는 정3품직참의와 참지,정6품 좌랑 2명 등 4명의 계회를 담은 산수도다.또 1606년에 제작된 ‘금오계회도’는 의금부 소속 종4품 경력 2명 등 10명의 모임을 기념해 그린 작품이다.이 3점의 계회도는 16세기 중엽에서 17세기 초에 이르는 명종과 선조시대 계회산수의 양식적 변화를 살피는 데 귀한 자료로 꼽힌다.이와 관련,이태호 전남대박물관장은 “이3점의 계회도는 사림의 성장기인 16세기 조선사회를 가장 정확히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라며 “한국회화사에서 16세기는 한 마디로‘계회도의 시대’”라고 밝힌다.이번 전시에서는 이밖에 능호관 이인상의 심오한 문기가 서린 ‘수하한담도(樹下閑談圖)’,윤제홍의 최만년 작품인 ‘학산구구옹(鶴山九九翁)’,윤덕희의 흥미로운 말그림‘상견상애도(相見相愛圖)’,김홍도·홍의영·유한지가 합작한 ‘병암진장(屛巖珍藏)’시화첩,근대문인·화가들의 풍류를 보여주는 아회도 등 고서화의 세계를 두루 감상할 수 있다. 글씨로는 퇴계 이황이 후학인 남언경과 헤어지면서 쓴 송별시를 비롯,자하 신위가 용강현령으로 떠나게 되자 유득공,천수경 등 20여명의 벗들이 지은 전별시를 묶은 ‘암연첩’ 등이 전시돼 있다.또 추사 김정희의 ‘운외몽중(雲外夢中)’첩과 ‘해붕대사 화상찬’도 빼놓을 수 없는 명품.특히 서간이 아니라 본격적인 서예작품인 ‘운외몽중’첩은 추사가 40대에 쓴 글씨로 추사의 서체가 골격을 잡아가는무렵의 작품이어서 주목된다.이번 전시를기획한 유홍준 교수(영남대·미술사)는 “추사가 35세때 쓴 ‘직성유궐하(直聲留闕下)’만 해도 글씨에 기름기가 흐르고 쓸데없이 살이 쪘다는 흠을 면키 어려웠다. 하지만 ‘운외몽중’에 이르러서는 추사의 글씨가 골기(骨氣)를 살리면서 굳세졌음을 대번에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02) 7394937. 김종면기자 jmkim@
  • 남북이산상봉/ 귀환 방문단 밤새 얘기꽃

    “평생의 소원을 풀었습니다.이제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핏줄을 만났다는 기쁨과 흥분을 뒤로 한채 집으로 돌아온 이산가족들은 헤어지는 순간까지 눈에 담으려던 혈육의 모습을 떠올리며 하얗게 밤을 지샜다.상봉 당시를 되새기며 밤늦도록 이야기꽃을 피우는가 하면,어떤 가족들은 허탈함과 사무쳐오는 그리움을 추스르지 못해 식욕부진,불안,우울증 등 상봉 후유증을 겪고 있다.장엄한한편의 드라마가 막을 내린 18일 밤은 이산가족들에게 또다른 만남을기약하는 시간이었다. *부모·자식. ■15일 서울에서 형님 이종필씨(69)를 만난 동생 종덕씨(63·충남 아산시 탕정면 명암1구)는 “치매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가형님을 알아보셨다”며 기적같은 상봉 순간을 상기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99세로 이산가족 상봉자중 최고령인 조원호 할머니는 20여년간 치매를 앓아 사람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으나 상봉 첫날 아들 종필씨를 알아보는 기적과도 같은 상봉을 연출했다. 헤어지면서 “통일의 그날까지 몸 건강히 잘 있으라”는 형님이 말에 눈물만 나오더라는 종덕씨는 “어머니가 헤어지는 순간에도 형님을 알아보시며 손을 놓지 않으셨다”고 회고했다. ■북쪽의 아들 강영원씨(66)를 만나고 온 박보배 할머니(90·전주시인후동)는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이 대학교수로 잘 살고 있어 한시름 덜었다”며 “아들이 며느리가 직접 지은 한복 두벌과 며느리와손주 모습이 담긴 가족사진을 주었는데 평생 제일 맘에 드는 선물이었다”고 말했다. 강씨의 남쪽 조카인 강석기씨(39)는 “큰아버지가남쪽 가족들의 사진이 든 앨범을 소중히 가지고 가면서 ‘우리가 죽더라도 너희들은 꼭 통일을 이룩해 서로 왕래하며 지내라’고 당부했다”고 전했다. ■이산가족 방문단 의료진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한 고 장기려 박사의 아들 장가용(張家鏞·65) 서울대 의대 교수는 “현대적 도시로 변해버린 평양에서 만난 북한사람들로부터 ‘물자는 풍족하지 못해도열심히 사는구나’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장교수는 “회색빛고층아파트가 즐비하고 대규모 지하철이 다니는가 하면 대동강 폭도3배로 넓어지는 등 완전히 현대적인 도시가 돼 옛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고 평양의 오늘을 전했다. *부부. □50년전 소식이 끊긴 남편 이복연씨(73)를 기다리면서 평생 수절하며 살아온 이춘자씨(72·안동시 동부동)는 “떠나는 남편에게 ‘건강하십시오’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이제는 50이 넘은 아이들에게도아버지가 살아계신 모습을 보여줘 여한이 없고 막상 다시 헤어지자니너무 섭섭했다”고 울먹였다. 심장병과 고혈압으로 고생하고 있는 이씨는 남편과 헤어진 뒤 곧바로 아들 이지걸씨(53)의 경기도 일산집으로 가 안정을 취했다. □상봉을 거부하던 아내와의 극적인 해후로 화제가 됐던 북한의 영화촬영감독 하경씨(74)의 남쪽가족들은 짧은 만남 뒤의 긴 이별을 괴로워했다. 17일 남편 하씨와 만난 아내 김옥진씨(78·경기도 성남시 분당구)는그날 밤 곧바로 성남으로 내려왔으나 18일에는 애끊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듯 하루종일 집을 비웠다. 장남 문기씨(54)는 “통일되면 다시 만나자고 약속은 했지만 그 약속을지킬 수 있을지 착잡한 마음 뿐”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형제·자매. ■서울을 찾은 언니 김옥배씨(62·평양음대 무용과 교수)를 어머니홍길순씨(88)와 함께 상봉했던 숙배씨는 “살아 있는줄 몰랐을땐 가끔 그립기만 했는데 이제 헤어지고 나서 보고 싶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라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김씨는 “어머니는 가슴이 아프다며 식사도 안하시고 어제는 혼절까지 하셨다”며 “헤어지는건 정말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것 같다”고말했다. 김씨는 이어 “언니는 해방 직후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서를 53년째간직하며 힘들 때마다 ‘훌륭한 사람이 돼라’는 내용의 아버지 유서를 보고 또 봤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북한 최고의 인민화가 정창모씨(68)의 여동생 춘희씨(61·경기도군포시 수리동)는 “오빠는 매우 당당하고 소신이 뚜렷한 사람이었다”며 “가족을 버리고 월북한 이유와 북한에서의 생활,앞으로의 계획등에 대해 거침없이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춘희씨는 북한에서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고 있는 오빠로부터 귀중한그림을 선물받았다. 4점은 북한에서 직접 가져왔고,4점은 약 40분간에 걸쳐 그린 수묵화였으며,통일을 염원하는 ‘통일조국 만세’라는글도 선물받았다.“오빠에게 한복 두벌과 양복을 선물했다”고 밝힌춘희씨는 “그러나 시간이 없어 충분히 선물을 마련하지 못한 것이못내 아쉽다”고 말했다. *기타. □남측 이산가족들의 3박4일간 평양방문에 남북적십자 교류전문위원자격으로 동행했다 돌아온 소설가 이호철(李浩哲·68)씨는 50년만의혈육의 상봉을 직접 체험하고 목격한 감동이 가시지 않은 듯 흥분을감추지 못했다. 이씨는 “북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을 연작이든 단편이든 반드시소설로 작품화하겠다”고 밝혔다. □평양에서 가족을 만나지 못한채 돌아온 이종백씨(69·서울 양천구신정동)는 큰 소리로 엉엉 울면서 김포공항 입국장을 빠져 나와 보는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이씨는 “바로 아래 동생 종윤(60)이가 아파서 만나지 못하고 생전 얼굴도 모르던 동생 종덕(53)이만 보고 왔는데 주위 친지들의 소식을 잘 알지 못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며 통곡했다.그는 또 “종윤이를 못 만나게해 북에 눌러앉으려다 주위의 설득으로 참고 왔다”며 불만을 털어놨다. 김재순기자 fi
  • 남북이산상봉/ 속속 드러나는 애타는 사연들

    남북 이산가족들의 서울 상봉 이틀째를 맞은 16일 남과 북으로 헤어진 가족들의 숨겨졌던 사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북한의 인민예술가 정창모(鄭昶謨·68)씨의 남과 북 가족에는 화가가 둘이나 더 있었다. 이날 정씨를 처음 만난 조카 진규(鎭圭·32·전북 전주시 효자동)씨는 전라북도 미술전에서 입선하는 등 현재 전주에서 활발히 작품활동을 펴고 있다.진규씨는 50년만에 만난 삼촌으로부터 북에 있는 삼촌의 큰아들 성혁씨(34) 역시 화가라는 소식을 들었다.정창모씨는 전통산수화를 주로 그리며 진규씨 역시 현대 수묵화를 그려 화풍도 비슷한 편이다. 또 외증조할아버지인 고(故) 이광렬 화백이 고암 이응로 선생을 가르쳤다는 것도 북에서 온 삼촌으로부터 처음 듣는 집안 내력이었다. ■아직도 까만 머리에 비녀로 쪽을 진 고승남씨(78·강원도 강릉시)는 50년만에 내려온 조카 민병승씨(69)로부터 북에 남편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50년을 수절하고 살아온 고씨는 “남편이 재혼했다는 소식에 앞서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쁘다”면서 “영감이 북에서 재혼해 아들 3형제를 둬 며느리도 둘을 보았다는 말에 그저 고마울 뿐”이라고 말했다. ■의학박사가 돼 돌아온 형 신승선씨(69)를 만난 창선씨(62)는 형의막내아들 귀남씨(24)가 평양교예단원으로 두 번이나 서울을 방문했던사실을 처음 들었다. 형으로부터 널뛰기 묘기를 보인 사람중 하나가 바로 귀남씨였다는사실을 전해들은 창선씨는 “미리 알았으면 조카가 서울에 왔을 때만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하면서도 “형이 평양의 대형병원외과팀 총책임과장이고 조카는 교예단원인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지난 15일 뒤늦게 상봉장을 찾은 황모씨(75)는 북에서 온 동생(68)의 두 손을 꽉 잡은 채 말없이 눈물만 주룩주룩 흘렸다. 지난 50년 동안 자식들에게조차 존재를 알리지 않던 동생이었다.황씨는 6·25 당시 북으로 간 동생 때문에 자식들이 냉전시대의 산물인연좌제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고 판단, 동생과의 만남을 포기했었다. 3년 전부터 북에 있는 동생에 대한 그리움으로 치매에 걸렸지만 정작동생을 만날 자신은 없었다. 수없이 망설이던 황씨는 결국 뒤늦게 상봉장을 찾았다. 이창구 김재천기자 window2@
  • 한국화가 사석원 개인전 16일까지

    동물의 형상을 해학적 미술언어로 표현해온 작가 사석원(40).그는 “동물을 꼭 그리고자 해서가 아니라 그리다 보니 동물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붓 가는 대로,마음 가는 대로’ 그려서일까,그의 동물그림은 퍽 친근하게 다가온다.동물 연작으로 널리 알려진 한국화가 사석원이 ‘애정과 유머그리고 생명력’이란 제목으로 개인전을 열고 있다.16일까지 서울 인사아트센터(02-736-1020). 부엉이,수탉,당나귀,호랑이,까치,독수리,소,돼지,양,개구리….작가의 화폭에는 온갖 동물이 오른다.우리에 갇혀 사육되는 것이 아니라 야생상태 그대로의 모습이다.자연 그대로의 거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동물들의 표상은 정겹기만 하다. 작가는 한지에 수묵채색으로 조선시대 민화에서나 느낄 법한 넉넉함과 친근함을 담아낸다.그의 그림에서 ‘카메라의 눈’으로 사물을 그려낸 흔적은 찾아내기 힘들다.기교가 없고 서툴러 보이지만 예스럽고 담박하다.‘고졸함의미학’이다.그것은 우현 고유섭이 한국미술의 특질로 표현한 ‘무기교의 미’‘적조(寂照)의 미’와도통한다. 동물을 소재로 한 때문인지 그의 그림은 한 편의 동화 같다.특유의 익살로웃음을 자아내는 재치가 만만찮다.웃음이 말라버린,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병이 들어도 아픈 줄 모르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의 그림은 여유와 운치를 안겨준다.예컨대 한 마리의 호랑이를 그리더라도 그의 손에 들어가면 민화의 그것처럼 풍자와 해학의 대상이 된다.닭을 머리에 이고 있는가하면,모란꽃에 파묻혀 있기도 하다. 전시에는 ‘당나귀’‘호랑이’시리즈 등 평면작품 40여점과 오브제 3점이나와 있다.이번 작품들은 예전처럼 두텁고 풍부한 마티에르를 보여주지 않는다.그 대신 색채의 향연을 펼친다.수묵의 유연함과 원색의 강렬함,그리고 간간이 섞인 파스텔톤의 은근함은 색에 예민한 작가의 미적 감수성을 엿보게한다. 그에게 가장 큰 예술적 영감을 주었던 것은 오지 여행.특히 실크로드 답사여행중 중앙아시아와 소아시아 지방에서 만난 동물들의 잔상은 아직도 생생하다.“몇년전 이란의 한 사막에서 껌정 당나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서서히 사라져가는 그 껌정이의 뒷모습을 보며 블루스의 음울한 곡조를 읊조렸지요.다시 그 당나귀를 만나 우수와 사랑,구름과 무지개,운명 등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작가는 말없는 동물과의 교감,그것을 ‘당나귀블루스’라고 이름 붙였다.이번 전시에는 ‘닭과 당나귀’‘꽃과 당나귀’‘소나기를 맞는당나귀’ 등 당나귀 그림이 유난히 많이 나와 있다. 김종면기자
  • 운보 김기창 화백 米壽전

    운보 김기창 화백(88)이 은거 4년만에 작품으로 모습을 드러낸다.갤러리 현대는 ‘바보예술 88년-운보 김기창 미수기념 특별전’을 7월 5일부터 8월 15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와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분산 개최한다.한국현대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운보의 극적인 삶과 자유분방한 예술세계를 총정리하는 자리다. 1913년 서울 운니동에서 태어난 운보는 1920년 장티푸스로 청력을 잃었고 1976년에는 아내인 우향 박래현과 사별했다.그러나 운보는 그런 절망을 오히려 희망의 언덕으로 삼으며 빛나는 작품을 토해냈다.그러나 이제 그림을 그릴 수 없다.96년 스승인 이당 김은호 화백의 후학모임인 후소회 창립 60주년기념전에 참석했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이다.그는 현재 충북 청원 ‘운보의 집’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다.100㎏이 넘던 당당하던 체구가 60㎏대로 줄었다.생사의 고비를 수차례 넘긴 그는 요즘 깊은 상념에 빠져 있다.그중하나가 월북한 막내동생 기만과 여동생 기옥을 생전에 과연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한국전쟁 당시 월북한 기만은현재 공훈화가로 활동중이며,기옥은 의사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피카소’라 불리는 운보.그가 남긴 작품은 1만점이 훨씬 넘는다. 표현의 진폭 또한 어느 작가도 따를 수 없다.인물과 화조에 대한 사실적인묘사에서부터 조선시대 민화의 정취와 익살을 대담하고 해학적으로 표현한‘바보산수’,한국 산하의 정기를 수묵의 농담과 단순한 색상으로 힘차게 그려낸 ‘청록산수’,그리고 인생의 비의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추상작품에 이르기까지 광대무변하다. 이번 미수전은 운보 생전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뜻깊은 전시다.그런 만큼 작품 선정에 각별한 정성을 기울였다.운보 전작도록에 실린 4,000여점의작품중 초기에서 현대까지 장르별로 88점을 가려 뽑았다.특히 일본에 있는제13회 선전 입선작 ‘정청(靜聽)’(1934년)과 개인소장의 ‘군마도’(1969년,1986년)는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어서 주목된다.한편 이번 전시엔 가로 1m,세로 75㎝ 크기로 확대된 1만원권 한화 지폐 한 장이 작품으로 내걸린다.그 이유는 뭘까.1만원권 지폐에등장하는 세종대왕을 그린 영정작가가 바로 운보란 점에 착안한 아이디어다.운보는 세종대왕 외에 을지문덕·김정호·무열왕 등의 표준영정을 남겼다. 운보의 개인전이 열리는 것은 8년만이다.지난 93년 1,200여 작품이 선보인예술의전당 ‘팔순기념 대회고전’이 양적으로 압도한 전시였다면,이번 미수전은 운보의 걸작만을 엄선한 알짜배기전시란 점에서 관심을 끌 만하다.입장료는 일반 5,000원,초·중·고생 3,000원,학생단체할인 2,000원.(02)734-6111. 김종면기자 jmkim@
  • 언론인 출신 이영조화백 작품전

    “사물을 설명함에는 언어보다 나은 것이 없고,형상을 보존함에는 그림보다 나은 것이 없다” 중국 서진의 문인 육기가 말했듯이 그림의 본령은 대상을 정확하게 옮겨 그리는 데 있다.그러나 단순히 외형을 똑같이 그리는 데 머물지 않고 그 내면의 정신까지 담아낼 수 있다면 더 큰 울림을 주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형상에 근거해 정신까지 나타낸다’는 이형사신론(以形寫神論)의 요체다.언론인 출신 한국화가 고정(古亭) 이영조(60)의 작품을 보면 그가 이런 동양미학의 정신을 고스란히 체득하고 있음을 대번에 알 수 있다. 30여년 동안 언론현장을 지켜며 틈틈이 화업을 쌓아온 그가 27일부터 7월2일까지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트갤러리(02-3449-5507)에서 첫 개인전을 연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 금강산 설악산 북한산 한라산 등의 풍광을 그린 수묵담채 40점을 내놓는다.그는 산수풍경을 그리기 위해 일일이 현장을 찾았다.스스로 자연의 일부가 돼 자연을 호흡하고 그 숨결과 생명력을 화폭에 담았다. 그가 그리는 수묵산수는 특정한 화풍에 얽매이지 않는다.그런 만큼 개성적이다.필치는 질풍노도처럼 세차고 때론 투박한 질그릇처럼 거칠다.그런가하면 어느새 봄날 아지랑이처럼 고요하고 섬세한 필세로 돌아온다. 그는 미술전문교육을 받지 않았다.죽농 서동균 선생으로부터 사군자 치는법을 배운 것이 고작이다.하지만 그의 화격은 무사자통(無師自通)의 경지를보여준다.특히 구사하는 준법이 창의적이다.“동양화의 기본이 되는 준법은거의 다 원용 혹은 응용하고 있다”는 게 작가의 말.심오한 먹빛과 은은한묵향의 세계를 보여주는 이번 전시는 그에겐 화가로서 공인을 받는 의미있는자리다.서울전에 이어 7월10∼16일 대구 봉성갤러리 전시도 예정돼 있다. 김종면기자
  • 평양 지하철역은 ‘벽화 미술관’

    “북한의 모든 미술은 조선화로 통한다.평양은 공공미술의 천국이자 기념비적 조소예술의 나라다.”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 미술을 밀착소개한 책이 나와 관심을 끈다. 윤범모 교수(경원대 미대)가 쓴 ‘평양미술기행’(옛오늘).98년11월 국내 최초로 북한 미술계를 시찰하고 돌아와 썼다. 윤교수는 동양화를 주체미술화한 조선화가 북한미술의 본령이라고 전한다.수묵화는 조선왕조 양반들의 향락주의의 이용물로서 비현실적이며 봉건시대의잔재라는 이유로 배제했다. 그래서 먹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화려한 색채를 통해 선명성과 간결성을 강조하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택했다는 것.윤곽선을 무시하고 면으로 화면을 처리하는 몰골법을 쓴다.동양화나 벽화나 똑같다. 조각과 벽화 등 공공미술품들이 시내 곳곳을 장식하고,만수대창작사 소속 작가들의 공동작품이라서 작가 이름이 없는 것도 특징. 평양시내 지하 100m는 온통 벽화미술관이다.영광역의 대형벽화 ‘백두산 천지’를 비롯해 지하철역마다 자리잡은 벽화들은 캔버스 그림처럼 보이지만실상은 타일 모자이크인 ‘우리식 쪽무이 벽화’다. 천리마동상,주체사상탑,개선문,대성산 혁명열사릉,만수대 대기념비 등 5개조각품이 가장 인상적이라고 윤교수는 평한다.미술품이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며 극진히 보호받는 것도 감명적이었다고. 1959년 창립된 만수대창작사에는 창작가 1,000명을 비롯해 기술·행정 지원요원 등 모두 3,700명이 소속돼 있다.조선화 유화 조각 출판화 벽화 도자기공예 수예 보석화 도안 등 10여개 창작단으로 구분된다. 조선미술박물관은 고분벽화나 김홍도 등의 그림을 모두 모사화로 전시한다. 진품은 창고에 보관한다.근대미술실에 진열된 30여점중 김은호 김용진 이상범 허건 등 남한 출신 화가의 작품이 대다수를 차지한다.김기창과 장우성의작품까지 걸려 있다.서울의 국립현대미술관에 북한 현역작가의 작품이 단 한점도 없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평양에는 화랑이 없다.대신 미술품을 전시하지는 않고 전문적으로 판매만 하는 회사는 있다.옥류민예사.자체 화가 120명을 거느리고 있다. 김주혁기자 jh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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