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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일 TV 하이라이트]

    ●러브 인 아시아(KBS1 오후 7시30분) 중국어 강사와 수강생으로 만난 동갑내기 장리리, 구본식 부부. 어느덧 임신 10개월 한· 중 태교 총출동이다.남편 본식씨는 아내를 위한 발 마사지로 태교에 열심이고 장리리는 벽에 예쁜 아기 사진을 걸어두고 중국식 태교에 열심이다. 2009년 새해, 다문화 가정의 아기 탄생 순간을 함께한다. ●클래식 오디세이(KBS2 밤 12시50분) 작년 11월, 롱 티보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바이올리니스트 신현수. 최근 쇼팽 녹턴 전곡을 피아노 솔로, 오케스트라 협주 등 다양한 편성으로 녹음한 피아니스트 손열음.국내 최고의 트럼피터 안희찬과 그가 이끄는 금관 앙상블, 코리아 브라스 콰이어.그들이 들려주는 사랑과 희망의 연주를 감상한다. ●그분이 오신다(MBC 오후 7시45분) ‘고모부’하고 불러주는 재숙 때문에 기분이 좋은 전진. 그러나 고모부 소리 한 번에 따르는 엄청난 대가들. 재숙의 무리한 부탁이 시작되고, 전진은 마침내 노홍철까지 찾아가게 된다. 한편 경순은 소정 앞에서 좋은 시어머니의 표본을 보이기 위해 며느리 같은 민지에게 잘하려고 노력하는데….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SBS 오후 6시30분) 신년특집 그때 그 아이들 기억하십니까? 공포의 욕세례 주인공 5살 채희. 집과 밖에서의 행동이 다른 4살 우진. 외출 절대 불가 미스터리 방콕공주 3살 아현. 17살 누나가 돌보는 막무가내 동생 4살 준영. 울고불고 악쓰며 부모들을 당황하게 했던 악동들.1년이 지난 지금 과연 어떻게 변했을까? ●세계테마기행(EBS 오후 8시50분) 수도원의 동자승들은 하루에 두 번, 맨발로 공양 항아리를 들고 탁발을 나간다. 수백명의 동자승이 동시에 탁발을 받지만, 동자승들의 항아리는 비는 법이 없다.미얀마 사람들은 탁발 때가 되면 집집마다 밥을 해놓고 동자승이 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탁발하러 수도원을 나서는 꼬마 스님을 따라가본다. ●세계 세계인(YTN 오전 10시30분) 세계에서 가장 큰 강 위의 섬인 브라질 아마존강 초입의 마라호 섬에 많은 물소가 서식한다.섬 주민들에게 물소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다.차로 갈 수 없는 곳에 물소를 타고 갈 수 있으며,쓰레기를 수거하는 수레를 물소가 끌고 다니기도 한다.브라질 군도 물소를 저렴하고 편리한 교통수단으로 여긴다.
  • 천주교 성탄절 맞아 다양한 성찰과 나눔의 행사

    천주교 성탄절 맞아 다양한 성찰과 나눔의 행사

    성탄절을 맞아 천주교 수도회가 수도원 공간을 일반에 개방,색다른 체험을 선사한다.수도원 체험 행사들은 대부분 예수 탄생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나를 겸허하게 돌아보는 기도와 피정(避靜)이 주류를 이룬다. 소외된 이웃을 찾아가는 자선 행사들도 줄을 이을 전망이다. ●수도원서 새기는 성탄 의미 천주교는 아기 예수의 탄생일에 앞서 4주간의 대림(待臨) 시기를 보낸다.성탄을 기다리는 준비 시간이며,희망의 시기인 대림기에 신자와 성직자들은 죄를 회개하는 보속의 시간을 갖는다.올해 대림기에 수도회들이 마련한 대림·성탄 피정들도 대부분 수도원 전례 체험을 통한 성찰과 반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 청년 대림 피정 전교 가르멜 수녀회와 포교 성 베네딕도수녀회 대구 수녀원은 청년들만 대상으로 하는 피정을 마련해 눈길을 끈다.전교 가르멜 수녀회가 20일 오후 6시~21일 오후 3시 영성의 집(02-737-7765)에서 진행하는 ‘기다리는 마음’ 행사는 성모 마리아의 삶과 태도를 통해 성탄을 기다리는 자세를 생각해 보는 자리.침묵 기도와 개인 묵상을 통해 각자의 위치와 상황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 것인가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이 24~25일 피정의 집(053-313-3431)에서 여는 성탄 전례 피정도 젊은 남녀가 대상.피정 참가비는 북한 어린이 돕기 기금으로 전액 기부한다. # 수도자들과 함께하는 성탄 전례 피정 평소 쉽게 만날 수 없는 수사,수녀와 대림·성탄을 함께 보내는 것도 특별한 경험일 터.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경북 왜관 본원 피정의 집(054-971-0722)과 서울 분원(02-2273-6394) 두 곳에서 ‘수도자와 함께하는 성탄 전례 피정’을 마련한다.왜관 본원은 23~25일의 2박3일,서울 분원은 24~25일의 1박2일 일정.수도회 수사들과 함께하는 예수 성탄 대축일 미사와 기도,강의로 짜여진다. # 성탄 신비 묵상 기도와 묵상 시간을 별도로 갖지 못하는 신자들이 성탄 맞이 피정을 통해 신앙생활을 반성하고 마음가짐을 다잡기 위한 행사들.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이 23~25일 부산 분도 명상의 집(051-582-4573)에서 마련하는 신비 묵상은 개인 신앙생활 상담과 지도신부 강의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수도자들과 함께하는 기도 및 성탄 전례가 있다.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가 24일 오후 6시~25일 오후 3시 횡성 피정의 집(033-343-0201)에서 여는 ‘내 삶으로 오시는 임마누엘 주님’ 행사도 일반인이 수도원 전례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전례 위주의 성탄 행사에서 탈피,성경에 나타난 예수 탄생의 의미를 되새기는 점이 특이하다. ●이웃과 함께하는 따뜻한 성탄 축제 경제 불황 탓에 늘어나는 어려운 이웃을 위한 성탄,세밑 자선행사가 예년과 달리 매우 풍성하다(표 참조).천주교 관련 단체와 선교회들이 구치소며 외국인 공동체,소년의집,노인복지관들을 찾아가 마련하는 나눔의 자리.한마음한몸운동(02-727-2263)과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24일 오후 8시 명동 가톨릭회관 앞 주차장에서 ‘이웃과 함께하는 따뜻한 성탄축제’를 여는 것을 비롯해 바오로선교회의 ‘장애인을 위한 성탄 미사’,사회교정사목위원회의 성동구치소 성탄미사 등 다양한 나눔행사들이 연말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사운드 오브 뮤직’의 그 별장,호텔 변경 없던 일로

    ‘사운드 오브 뮤직’의 그 별장,호텔 변경 없던 일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시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인공 폰 트랍(크리스토퍼 플러머) 대령 일가가 머물던 별장을 호텔로 바꿔 문을 열려던 계획을 철회했다고 영국 BBC가 4일 전했다. 당초 빌라 트랍 호텔은 객실 14개로 올해 문을 열 예정이었고 이미 적지 않은 오스트리아인들이 이곳 기도소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웃 주민들의 반대 시위가 잇따르자 시 계획위원회가 한발 물러서게 된 것.개발업자들은 즉각 이의를 제기하겠다고 나섰지만 최종 결론이 내려지려면 3년 정도가 걸릴 것이라고 방송은 덧붙였다.  관광 당국에 따르면 모차르트의 출생지이기도 한 잘츠부르크를 찾는 관광객의 40% 이상이 ‘사운드 오브 뮤직’ 팬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호텔 개장을 반대해온 이들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줄어들 것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폰 트랍 대령 가족은 1923년부터 독일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침공한 1938년까지 이 별장에 거주했으며 가족이 떠난 뒤 나치 보안 책임자였던 하인리히 히믈러가 1945년까지 살았다.2차 세계대전 뒤 수도원이 이 별장을 구입했고 호텔로 영업하려는 이들에게 매각했다.  재미있는 것은 영화에서 7명의 자녀들이 말괄량이 수녀 마리아(줄리 앤드루스)와 웃고 뛰놀던 별장은 진짜 별장이 아니란 것이다.영화 에서 집으로 묘사된 장면들은 잘츠부르크 뿐만아니라 오스트리아 곳곳의 건물들에서 촬영됐다. 인터넷서울신문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수녀 출신 비구니가 본 ‘붓다 가르침’

    수녀 출신 비구니가 본 ‘붓다 가르침’

    어느 한 종교를 택해 독실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신앙인에게 종교를 바꾸는 ‘개종’은 삶을 한순간 송두리째 바꾸는 인생의 ‘대 역사’일 수 있다.하물며 독신 수도자의 삶을 결정해 수녀복을 입었던 여인이 머리를 박박 깎고 비구니가 된다면? 최근 방대한 초기 불교경전 빠알리경의 요체를 추려 번역,단 한 권의 책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민족사)을 펴낸 비구니 일아(62) 스님은 책도 책이려니와 그 신앙편력으로 해서 화제가 되고 있는 인물이다. “어릴 적부터 이성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수도자의 삶에만 마음을 둔 채” 천주교 ‘하느님의 종’이 되고자 수녀복을 입었다가 채울 수 없는 허전함에 종신서원 직전 옷을 벗어던진 뒤 과감하게 머리를 깎았고 혹독한 수행 끝에 귀결한 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담았다는 초기 불경 빠알리경전. 환갑을 넘긴 일아 스님은 무엇을 좇아 그토록 파란 많은 신앙의 길을 걸어왔을까.“자유와 관용.” 단호한 대답.“내 종교가 아니면 아니된다는 교리가 내 몸에 안맞아 길을 틀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엄숙하고 자아에 대한 절제가 강한 가톨릭은 수도자의 길을 걷자던 나에겐 매력적인 종교였지요.2000년간 이어져온 전통엔 힘이 들어있지요.하지만 내가 갈 길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법정 스님 만난 뒤 태국 등서 수행 서울여대 재학중엔 영화며 음악을 좋아했고 문학과 여행에도 빠져살았다는 일아 스님은 머리 깎은 스님보다는 수녀복에 몸을 감춘 수도자인 수녀가 그냥 좋았다고 한다.수녀가 되겠다는 말을 들은 부모님이 몸져 누울 만큼 반대가 심했지만 결국 서울 샤르트르성바오로수녀회에 입회,가톨릭 신학원을 졸업한 뒤 수녀가 됐다.그렇게 6~7년을 살았을까.불현듯 ‘내가 여기서 계속 살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었고 수녀복을 벗었다.그래서 무작정 찾아간 게 송광사 불일암.일면식도 없던 법정 스님을 만나 ‘올바른 수행을 할 수 있고 수행 잘하게 인도할 수 있는 스승이 있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해 몸담은 게 비구니 사찰 석남사다.행자생활이 힘들었지만 견딜 만했다. 하지만 운문사 승가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부처님의 말씀을 고스란히 담은 빠알리어 초기경전을 가르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다고 한다. 불교에 귀의해 끊임없이 의심이 들었던 것은 바로 ‘깨달은 자 붓다’.“과연 붓다는 어떤 사람이었고 그의 사상과 행동은 어땠는지 파고들고 싶어 몸이 달았다.”고 한다.“미얀마의 마하시명상센터와 태국 위백아솜 위파사나 명상수도원에선 정말 목숨걸고 수행을 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간화선에 매몰된 한국불교 비판 붓다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싶어 40대 중반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스토니브룩주립대 종교학과 학사과정과 웨스트대 비교종교학과 대학원서 석·박사를 마쳤다.영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 일일이 강의를 녹음한 뒤 노트에 옮겨적어 통째로 외울 만큼 ‘지독한 공부벌레’로 이름나 있다.LA로메리카 불교대학 교수도 했고,LA갈릴리 신학대학원에선 불교학 강의도 했다고 한다. “컴퓨터와 디지털의 홍수 속에서 아날로그와 잉크 묻힌 롤러 등사기를 고집하는 지진아.” 간화선에 매몰된 한국불교를 혹독하리만큼 비판하는 일아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말씀을 온전하게 담은 빠알리경을 배우지 않으면 한국 불교의 미래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래서 매달린 게 이번 나온 책이다.“부처님 직계 제자들의 부처님 말씀 암송을 집대성한 빠알리경은 삼법인,사성제,팔정도 등 불교의 기본 교리를 온전하게 담고 있지만 양이 너무 방대해 쉽게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반인이 쉽게 깨달을 수 있도록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한 채 2년여간 두문불출 작업 끝에 세상에 내놓게 됐고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한국불교의 닫힌 시각과 고정적인 인식의 벽이 깨지기를 바란다.”고 출간 배경을 밝혔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30) 목포 명도 복지관 관장 제라딘 라안 수녀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30) 목포 명도 복지관 관장 제라딘 라안 수녀

     전남 목포시 산정2동 225-54 명도 복지관은 장애인 재활시설.정신지체아를 비롯한 장애아들의 방과후 학습을 돕는가 하면 이들의 언어,심리치료를 해주고 성인이 된 장애인들의 사회 적응을 위한 재활 학습과 직업교육을 시키는 사회복지기관이다. 이곳에서 자원봉사자며 상담자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장애인들을 보살피는 총책임자인 관장은 푸른 눈의 외국인.한국에서 33년째 장애인들의 곁에 있으면서 이들을 챙겨주며 세상의 떳떳한 존재로 살아가도록 자부심을 키워 주는 성골롬반 외방선교 수녀회 소속의 제라딘 라안(60·아일랜드) 수녀가 주인공이다.“사람은 누구나 예비 장애자.”수녀는 장애인들을 있는 그대로 보아 주고 사회 속에서 동반자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 준다면 세상은 한결 더 살기 좋은 곳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33년째 장애인들 재활 도와  장애인들의 종이 가방 만드는 작업을 돕다가 불쑥 찾아든 불청객에게 커다란 손을 내미는 제라딘 라안 수녀.첫 대면에도 막힌 구석이 없어 보이는 ‘활달자재’의 마음과 몸짓이 인상적이다.전라도에서 오래 산 때문인지 질펀한 호남 사투리로 건네는 인사말이 살갑다.“전라도가 내 고향인데 고향 말을 쓰는 게 당연하지요.” 자신의 방인 관장실 바로 옆에 딸린 접견실을 향해 나란히 걷는 길에서 마주친 장애아 학부모들이 연방 인사를 전한다.만나는 이마다 일일이 마음을 담아 정성스레 안부를 묻는 수녀.그에게 과연 장애인은 무엇일까.‘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함께 걸으며 들려주는 요한복음 10장10절 구절이 유난히 친근하게 다가온다.  아일랜드 더블린 남쪽의 작은 마을,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부모 밑에서 자랐으니 신앙심이야 말해 뭣할까.집에서 구독하는 선교지들을 보다가 우연히 칠레의 가난한 집 어린이들이 우유 대신 쌀 씻은 물을 먹고 연명해 간다는 소식에 어려운 이들을 돕는 봉사의 삶을 결정했다고 한다.고교졸업 후 곧바로 성골롬반 외방선교 수녀회에 입회했고 영국 런던 휩스 크로스병원에 부속된 간호대에서 간호학을 전공,졸업 이듬해인 1975년 전혀 알지 못하던 낯선 땅 한국에 몸을 맡겼다.  한국에 오는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그렇듯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에서 1년간 한국말을 배우고 제주도 성이시돌복지의원에서 곧바로 간호사 일을 했다니 그의 작심은 분명 한 곳을 향했던 것이 분명하다.한국말이 서툴다는 생각에 연세대 어학당에서 다시 1년간 공부하는 중에도 서울시립아동병원 일을 도왔다고 한다.장애인을 향한 이정표를 단단히 세운 것은 목포 성골롬반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던 무렵.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목포로 내려간 병원에서 뇌염 후유증으로 얻은 뇌성마비에 신음하는 어린이들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다는 현실에서 초라하기만 한 자신을 보았다고 한다.  “당시 뇌염이 아주 기승을 부렸는데 뇌염을 앓아 죽거나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이 부지기수였어요.그중 뇌염으로 뇌성마비를 당한 몇 명의 어린이들이 갈데 없이 막막한 상태로 입원해 있었는데 병원측이나 저나 어찌할 길이 없더군요.그때 나약한 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뇌성마비 어린이가 결국 허름한 수용시설로 보내지며 남긴 천연스러운 웃음에 아일랜드 성라파엘학교 유학을 결정했다.“저들을 돕기 위해 내가 노하우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특수교육을 배우기 위한 것이었다.2년간 공부하고 돌아와 광주 엠마우스 장애인복지관의 장애인 재활을 위한 작업장에서 낮밤을 가리지 않은 채 일하다 직접 목포 석현동에 장애인 재활 및 보호시설인 ‘생명의 공동체’를 꾸렸다.  말이 장애인 시설이지 23평 아파트 전셋방에서 장애인 20여명에게 심리치료와 알량한 재활 훈련을 시켜주는 게 고작.그나마 아파트 시공사가 부도 나는 바람에 두달 만에 쫓겨나 인근 산정동 전셋방으로 봇짐을 싸야 했다.“그때 인생공부 많이 했어요.” 한국의 법이며 상황도 모른 채 마음만 갖고 무작정 덤벼든 생활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고 한다.장애인을 돕는 데도 돈이 있어야 하지만 지원 한푼 없는 생활이 오죽했을까.장애인들과 함께 카네이션이며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어 내다 팔고 여기저기 아쉬운 손을 벌려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다가 적은 액수지만 정부 보조금을 받기 시작하면서 만든 게 지금의 명도 복지관이다.1992년이었다.물론 그동안 시설 규모도 커졌고 찾아드는 장애인도 늘어 이제 목포에선 웬만한 이라면 다 아는 공간이 되었다. ‘명도 복지관’ 길 잃은 장애인들이 잘살 수 있도록 밝은 길을 안내한다는 뜻을 담아 직접 지은 이름.“그동안 얼마나 많은 불쌍한 장애인들에게 도움을 주었는가.”라고 묻자 “장애인은 결코 불쌍하지 않다.”고 말을 고쳐준다.불쌍하다는 것은 그들이 나보다 못하다는 인식이 깔린 위험한 말이란다.“장애인은 그저 어려운 때를 겪고 있는 평범한 사람일 뿐입니다.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어려운 시기를 만나 장애를 겪게 마련이지요.그들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고 우리와 똑같은 존재로 여겨 가진 것을 함께 나눈다면 지금 장애인들이 버거워하는 사회의 시선과 잘못된 대우가 훨씬 좋아지지 않을까요?” “한국말을 똑바로 못해 장애인이고,한국문화에 익숙지 못해 장애인이고,장애인들의 마음을 잘 몰라 장애인”이라며 자신을 장애인으로 소개하는 라안 수녀.그 말대로라면 이 땅에서 살면서 겪은 장애가 얼마나 많았을까.그 장애를 만날 때마다 변함없이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은 글귀 하나.‘(네가)어디를 가든지 함께 있겠다.’ 아일랜드를 떠나오기 전 수도원에서 기도 끝에 마음으로 받은 말씀이란다.사회복지시설 운영 소관이 중앙 정부에서 지방자치단체로 이전되면서 오히려 시설들이 받는 지원은 더 열악해졌고 무엇보다 이런 시설에서 소신있게 일할 전문 인력이 턱없이 부족해 안타깝다는 라안 수녀.그나마 지금 명도 복지관의 ‘형제들’은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고마운 친구들이라고 치켜세운다. ●“남은 인생도 장애인들과 함께”  ‘하느님의 종이 되겠다.’며 종신서원을 한 천주교 수녀이지만 그 누구에게도 신앙을 강요하지 않는 선교사이자 수도자.목포 지역 개신교 목회자,신자들의 모임을 비롯해 다른 종교 모임에도 자연스럽게 찾아가 마음을 나눈다.‘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당신들과 함께 있겠습니다.’(마테오 복음 28장 19절)라는 말을 달고 사는 수녀.많은 정상인들은 욕심을 내고 끊임없이 가지려고 달려들지만 장애인들은 솔직하고 숨기지 않은 채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고 한다.  이 정도면 한국에서 많은 것(?)을 이루지 않았을까.2004년 적십자상 인도장을 받았고 2006년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 등 20여개 장애인 단체들이 수여하는 한국장애인인권상(생활실천부문)도 받았다.하지만 이룬 것이 없다고 한다.목포 지역 결손가정의 장애아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여전히 아프고 장애인들이 은퇴한 뒤 함께 머물면서 더불어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게 여생의 꿈이란다. “소녀 시절부터 비가 많은 고향 아일랜드에서 무지개를 즐겨 보며 자랐어요.비 온 뒤 세상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무지개가 얼마나 아름답고 예쁩니까.힘들고 눈물 흘리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마음과 도움을 줄 수 있는 인간 무지개가 됩시다.” 글ㆍ사진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제라딘 라안 수녀는 ▲ 1948년 아일랜드 출생 ▲ 1966년 성골롬반 외방선교 수녀회 입회 ▲ 1974년 런던 휩스 크로스병원 간호대 졸업 ▲ 1975년 한국 선교사로 파견 ▲ 1975~1981년 제주 성이시돌복지의원,서울시립아동병원,목포 성골롬반병원 근무 ▲ 1981~1983년 아일랜드 성라파엘학교서 특수교육 공부후 한국 재입국 ▲ 1985년 목포 석현동에 장애인 재활 교육시설 ‘생명의 공동체’개설 ▲ 1992년 목포 산정2동에 ‘명도 복지관’설립 ▲ 현재 명도 복지관 관장
  • 커피와 역사, 상관관계 조명

     7세기경 한 양치기 소년이 수도원에 전하면서 마시기 시작했다는 ‘검은 음료’ 커피는 지금 원유에 이어 전 세계 무역량 2위를 차지한다.  ‘커피가 돌고 세계史가 돌고’(우스이 류이치로 지음,북북서 펴냄)는 기원설부터 시작해 커피가 본격적으로 대중에 전파된 이후 400년에 ‘어떤 방식으로 역사에 관여했는지’를 차근차근 살펴나간다.  커피의 원산지는 동아프리카이지만 실제로 이를 끓여 마시기 시작한 것은 이슬람의 일파인 수피주의자들이었다.쉽게 잠들지 못하는 커피의 특성을 이용해 밤늦게까지 기도하고 신과 합일을 이루기 위한 종교적인 매개체로 사용됐다.이후 커피는 이슬람교도의 성지순례를 유통경로로 전파됐고,커피 운송과 교환에 이슬람의 거상과 유럽의 상인자본가가 관여하면서 전 세계적인 상품으로 등장한다.영국과 프랑스,독일 등지로 전파된 커피는 각 나라의 문화에 녹아들면서 독자적인 발전과정을 거친다.  1554년 터키 이스탄불에서 생겨나 커피의 대중적 확산에 기여했던 ‘커피의 집’(카페의 원형)은 100년 뒤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커피하우스’로 변신했다.경제활동은 등한시한 채 수시로 커피하우스에 출입한 남편과 출입을 제한하는 차별에 반발한 여성들은 홍차에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홍차가 영국을 대표하는 문화로 자리잡는 데는 이런 악사가 숨어 있다.프랑스 파리에서는 커피가 사람에게 해롭다는 소문이 돌면서 독성을 없애기 위해 우유를 섞어 마셨다.이것이 부드러운 카페오레의 시작이다.영국과 달리 카페 출입에 남녀 차별이 없었던 파리의 카페는 프랑스혁명과 문화의 본거지가 됐다.  중상주의 정책을 펴던 독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막대한 커피 수입 대금을 아끼려고 대용 커피 문화를 만들어냈다.커피는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착취와 인종차별에도 깊이 개입했고,독일에서는 시민사회의 돌연변이라고 할 파시즘을 생성하는 데 기반이 됐다.  지은이는 일본 도쿄대학 교양학부 교수.현대문명의 우화를 커피와 엮어 때로는 진지하게,때로는 재미있게 풀어낸다.무료하지 않게 역사와 커피에 대한 상식을 얻고자 한다면 필수.1만 2000원.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미네르바 정체 암시’ 글 전문

     21일 인터넷 경제 대통령 ‘미네르바’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네티즌의 글이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날 새벽 2시쯤 포털사이트 다음의 논쟁 사이트인 아고라에 ‘read me’란 필명의 네티즌은 “‘미네르바’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기업인 K씨”라고 글을 올렸다.  ●다음은 read me가 다음 아고라에 남긴 글의 전문  오늘같은 밤,  겨울의 입구에서 불어오는 시린 바람은  런던의 워털루역 앞 길고 어둡고 지린내나는 지하보도의 벽에  낙서처럼 남겨진 이름 모를 시(詩)를 생각나게 한다.  I am not afraid as I descend,  step by step, leaving behind the salt wind  blowing up the corrugated river...  (우리는 저 암흑으로 내려간다 하더라도 두려워 않으리...) 사실 미네르바 개인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글을 안 쓰려 했다.  그런데...  어떤 누구에게서 한밤중 전화가 걸려왔다.  다짜고짜 K란 이름을 아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왜?  극비사항인데... K가 바로 아고라의 미네르바 라는군...    K... 01001011...    모교 동기 중에 그런 이름의 희미한 얼굴이 스쳐갔다.  삼십년도 훨씬 넘은 오래 전의 추억이다.  내 자신 이십여년 넘게 외국생활을 했고,  K 또한 오랫동안 해외에서 일했다는 말을 얼핏 들었다.  아마 런던 시티 어디에선가 마주칠 기회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점심 때면 외로운 이방인이 영란은행 앞 킹 윌리암 거리를 따라 내려와  캐논 거리 코너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다이어트 코크를 빨대로 마시며  진로 소주를 병 째 빨아대던 그 겁없던 시절을 그리워했는지도 모른다.  근처 다이와 보험회사에서 쏟아져 나오는 일본인 젊은 무리들을  동경 반 경멸 반 흘려보며 한국인으로서의 소외감을 잊으려고  로이터 터미널에 빠져들려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샌드위치 하나 싸들고 런던 브릿지 위에서  남쪽 강변의 미네르바 하우스를 바라보며 미래를 꿈꿨는지도...  내가 워털루 다리 밑 사우드 뱅크의 노점에서 헌 책을 뒤적이고 있을때  K는 사우드와크 다리 양쪽 LIFFE와 FT에서  텔렉스와 컴퓨터와 마이크로필름과 싸우고 있었을 것이다.  런던의 두 에트랑제가 아마 그 시간 테임즈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십 수년이 또 지나고...  나는 아직도 부(富)란 무엇이냐는 형이상학의 질문에서  수도원의 늙은 유폐자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K는 그동안 대한민국 재계의 유명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막대한 재력과 그에 걸맞는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를 수 있는  그런 자리에 그가 올라가 있다고 했다.  또 그는 훌륭한 사회활동도 많이 하여 존경받는 기업인이라고 했다.  나는 그를 만나지 못했고 그러지도 않았다.  구태여 그래야 할 이유나 핑계도 없었다.  동창이란 것 외에 우리의 관심이나 특히 처지는 너무나 달랐다.  나는 옛 친구들과 만날 기회를 일부러 피하며 살았지만,  그는 옛 친구들을 만날 시간도 없이 그렇게 쫒기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던 날들...  아고라에서 미네르바의 화신을 만난다.  십 수년 전...  테임즈 강변 사우드와크의 미네르바 하우스를 떠올린다.  아테나의 파르테논을 연상시키기에는  너무나 소비에트적인 현대식 건물과 우중충한 거리.  의미도 모른 채 예쁜 이름이 참 안 어울리는구나 생각했다.  마치 낡은 화력발전소 속에 숨어있는 테이트 모던 미술관처럼  무엇인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갈등과 타협이 이해할 수 없이 얽혀진  그런 모순의, 그런 도시의, 그런 건축의, 그런 이름 이구나...  라는 느낌을 흘려 버리고 지나갔다.  그런 불가사이의 미네르바를 여기 아고라에서 다시 만난다.  좌절과 희망과 평화와 복수와 수학과 역사가 동시에, 모두,  엄청난 파괴력으로 폭발하는 그의 글을.    K는 이제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지혜와 용기의 수호신이었다.    삼십여년전 그의 모습을 떠올리려 애써본다.  어린 시절 6년의 긴 시간을 같이 부대끼며 지냈겠지만,  말 한마디 나눠본 기억도 별로 없다.  이른바 명문학교의 얼마 안되는 수의 학생들 사이에서도  그는 너무나 얌전하고 조용한 아이였다.  아마 다른 아이들보다는 나이가 좀 더 많았던지,  좀 더 촌구석에 살았던지,  좀 더 생활이 어려웠던지 (당시는 모두 못살았지만), 아뭏든...  무척 어른스러운 아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아는 K를 미네르바의 암호에서 해독한다.  토끼처럼 유순했던 아이가 어느날 외로운 늑대가 되어 돌아왔다.  비밀의 가면 뒤에서 그러나 화려한 조명 아래서  현란한 검술을 뽐내는 몽테 크리스토 백작...  또는 고탐 시의 억만장자 흑기사 뱃트맨이 어울릴까.  무엇이 그를 정의의 분노에 불타게 했을까.  지금 그 나이와 그 명성에...  뭇 사람들이 선망과 질시를 함께 느껴야 할  지금 그처럼 높은 사회적 경제적 지위에서...  그가 속한 하이 소사이어티의 남들은  탐욕의 절정에서 더 많은 돈 더 많은 힘을 가지기 위해  금력과 권력을 휘둘러 힘없는 자를 탄압하며 갈취하고 있는데,  그는 그 모든 풍요와 안락의 유혹을 내던지고,  그가 말하는 저 아래 천민의 편에 서서 저 아래 천민을 위하여  자기가 그 정점에 앉아 있는 자기 발 아래의 피라미드를 부수고 있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정열과 노력으로...  왜?  모든 것을 가져본 자의 한낱 변덕일까?  청년 시절 하지 못한 초로의 때늦은 반항일까?  아니면...  - 슘페터가 말했듯이 -  자본주의 시장경제 진화의 극대점에서 드디어  마르크스적 사회주의의 이상치에 도달했기 때문일까?  체제 내적 모순의 변증법적 완성일까?  자기 자신을 불살라 없애는 생산적 에로스의 충동일까?  생명의 원죄를 드디어 깨달은 종교적 속죄 의식일까?  아니면... 저 멀리 아마존 숲 속 한 마리 나비의 날개 짓이 슈퍼 컴퓨터 미네르바의 프로그램에 삑. 삑.. 삑...치명적인 버그를 일으키기라도 했단 말일까?    왜 K는 자기가 있는 이너서클의 고리를 스스로 끊으려 할까?    70년대 폭압과 혼돈의 대학시절,  민주와 자유의 선구적 외침 속에서 나는 K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다.  아마 그의 이상주의는 철저한 현실주의 밑에 가려져 있었을 것이다.  아마 그는 나와 같이 영원히 무능한 회색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삼십여년의 세월이 지난 후 이제, 우리의 아이들이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이가 된 이제, K는 미네르바가 되어 돌아왔다.    우리는 중학입시를 경험한 세대이다.    나는 국민학생의 - 당시에는 국민학교라 불렀다 - 어린 나이에  밤 12시까지 중학교 입학시험 준비에 시달리는 내 또래 소녀의 어두운 포토 리포르타쥬를, 어른들이 보는 신동아에서 읽은 적이 있다...  때는 바야흐로 비틀즈와 월남전과 두브체크와 꽁방디를 거쳐 오일쇼크와 검은구월단과 아라파트와 바더 마인호프와 그리고 딥퍼플과 마리화나가 대변하는 해방의 시대였다.  그러나 대한민국이라는 식민주의 사회의 이른바 자유경쟁은 우리를 능력 껏 뛰게 해주는 자유가 아니라 발을 얽맨 노예의 사슬이었고 시험은 우리에게서 상상과 비판을 박탈하는 강제노동이었다.  차라리 군사교육 교련은 운동장에 나와 공기를 마시고 동무들과 장난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감옥은 오히려 자유에의 투지를 키우는 장소이며 전체주의는 내일에의 희망을 지울 수 없다.  우리들의 작은 꿈, 커서 어른이 되면 좋은 나라 만들거야...  우리의 아이들이 이런 지옥같은 세상에서 살게 하지 않을 거라고.  전쟁도 없고 독재도 없는 나라,  미군 트럭 뒤를 쫒아 뛰며 지아이에게 기브 미 껌,  쵸콜렛 냠냠 손 내밀지 않는 나라,  저 하늘에도 슬픔이 영화 속의 이윤복 같은 어린이가 없는 나라,  언젠가 우리는 그런 나라 만들어 행복하게 살거야 라고.    우리 세대가 지난 삼십여년간 이룬 것은 그러나 어린 시절의 꿈나라가 아니었다.  더 살벌한 경쟁과 더 잔인한 교육과, 더 오만하고 더 탐욕스런 부자들과,  더 가난하고 더 불쌍해진 아이들과 노인들이, 아파트라 불리우는 콩크리트와 플라스틱의 쓰레기 속에서 생존의 무자비한 쳇바퀴를 돌리고 있는 변태의 사회.  정치인들은 더 추해졌으며, 공직자들은 더 썩었으며,그 부정과 부패를 교활히 감추기 위해 온갖 위선적이고 기만적인 법과 규제와 관습과 편견이  도저히 풀 수 없는 고르디아스의 매듭처럼 인간적인 사회의 발전을 얽어맨 그런 세상.  어느날 삼십년간 잊어왔던 내 모습을 봤을 때 거울 앞에 서있는 것은 비겁하고 무식한 돼지였다.    누구를 위해서 우리는 살아왔나... 과연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좋은 세상을 남겨주겠다는 거짓 희망과 거짓 지식으로 우리 자신을 속여왔다.  현실주의의 미명 아래 힘을 휘두르는 자에게 아부하고 높은 자에게 가까이 붙기 위해 그들에게 조공을 바치며 그들의 권위와 폭정을 강화시키는 것이  우리 모두를 노예사회에 종속시킴을 뻔히 알면서도, 마치 그것이 나라 사랑이요 나라 발전에 이바지함이며 장차 우리 아이들에게 남겨줄 유산이라 믿으려 해왔다.  그러나 나의 애국은 나의 가장 탐욕스런 이기일 뿐이었다.  나라의 성장은 내 신분상승과 재산형성의 핑계였을 뿐이었다.  우리가 만들었노라고 자랑스러이 보이고 싶어한 이 사회는 결국 거대한 분뇨 덩어리였다.    불행하게도 개인의 부의 총합은 국가의 부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개인의 부란 더해질 수 있는 어떤 스칼라 량(量)이 아니며, 그것을 더하려는 행위 자체가 궤변이다.  - 플라톤, 데카르트, 로크, 케네 -    미네르바는 오늘 나를 거울 앞에 서게 한다.  거울 앞에 서있는 모습은 미네르바이다.  나는 삼십년전으로 돌아가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    K...  넌 2반이었지, 이과반.  담임이 오래 전 돌아가신 수학 선생님...  난 문과반이었지만 제일 좋아하던 분이었지.  제일 좋아하던 과목이었고...  넌 기억나니, 그 시절이?  * * *  이것이 내가 아는 미네르바이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가장 비밀한 곳에서 들려오는 소문이다.  미네르바가 노란 토끼의 미래를 이곳에 예언해야 했듯이  나는 미네르바의 과거를 이곳에 증언한다.  왜?  미네르바의 현재는 판도라의 상자임을 알려주기 위해서.    만일 미네르바의 신분이 이 정권에 의해 폭로된다면, 그것은 바로 이명박 강만수와 그 수하 한나라당이 내세워왔던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데올로기가 그 순간 몰락하며,이 정권 자체가 파멸의 헤어날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져버리게 된다는 사실을 말한다.  왜?  K는 이 정권의 존립이유와 권력유지의 동인으로 삼았던 1% 상위층 중의 상위에 속하는 0.1% 극상위층이기 때문이다.  극상위층의 대표적인 인물 K가 미네르바의 필명으로 일부 상위층에게 특혜를 줌으로써 경제를 살리겠다는 수탈주의 정책은 정책이 아니라 완전한 개.사기이며 날.강도질임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그런 이데올로기의 정강 위에 세워진 한나라당 세력의 정치적 존재 자체는 허구일 뿐 아니라 국민 전체와 국가에 대한 죄악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절대왕조와 중금주의의 야합에 불과한 소위 공급주의 친기업정책,  무한경쟁 약탈경제를 내세운 시대착오적 신자유주의,  교육의 상업화와 룸펜 부르조아지들의 천박한 귀족화,  복지와 후생과 군비의 감소,  그에 따른 국론의 분열과 국력과 국방의 쇠퇴,  실용주의를 빙자한 맹목적이고 고립적인 사대주의,  게다가 오만한 독재와 언론의 독점...  이 모든 것은 국가 파괴를 구성하는 죄목일 뿐이다.    소망교회 장로정권이 절대 충성과 복종을 맹세했던 돈의 신(神)들 중에서도  가장 풍요하고 가장 지혜로운 신 미네르바가 나를 향한 너희의 거짓 예배는 신성모독일 뿐이라며 분노한다.  너희의 주인인 0.1% 부자는 너희들 아랫 것 0.9% 졸부들의 패악한 정치를 부정한다.  너희가 경제를 빙자하여 국민에게서 강탈한 장물들을 나에게 뇌물로 바치려들지 말라. 그것은 나를 위함이 아니며, 기업가를 위함도 노동자를 위함도 국부를 위함도 국민을 위함도 아니며, 다만 국가를 욕되게 함이라.    기회주의 기득권자들이 국민을 경쟁의 구렁텅이로 몰아가서 그들이 영구독점하는 시장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 내세울 그 누구보다도 완벽하며 이상적인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얼굴 K,  일류학교 일류직장 일류기업의 일류코스를 모두 밟은 초글로벌 리더 최고선진 CEO의 얼굴인 K는 이제 기생충 계급의 일류선진국 데마고지가 숨기고 있는 음모를 폭로하기 위해 얼굴 없는 미네르바로 돌아왔다.  이 정권이 미네르바의 가면을 벗기려 함은 이 정권 스스로의 손으로 아포칼립스 제7의 봉인을 뜯어 한 때 마리 앙뜨와네트의 가증스런 무식을 단두했던 그 시퍼런 날이 정권의 목 위에 떨어지도록 자초하는 짓이다.    그러므로 이 정권이 택할 길은 오직 하나...  미네르바와 국민들 앞에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무조건 잘못했으니 살려만 달라고 무릎 꿇고 애원하는 것이다.  오만과 아집이 과연 목숨보다도 소중하지는 않겠지.  국민의 안녕과 따라서 정권의 생명이라도 부지하려면  이명박과 강만수는 국가의 부도를 맞기 전에 정권의 부도를 자백해야 한다.  숙주(宿主)가 죽는다면 기생충도 따라 죽어야 된다는 상식 쯤은 물론 알고 있겠지.  이 정권의 추종자들이 자기 생존의 본능까지 버릴 정도로 최소한의 이성 마저 잃고, 감히 미네르바와 국민들에게 대항하리라고 상상할 수 없지만...  그래도 소망교회 이명박 강만수 광신장로들이 성서의 억지해석을 바탕으로 패륜목사들의 꾐에 혹하여 운명을 그르칠까봐 조금 염려스럽기는 하다.    그러나 나는 이 사악하고 탐욕한 장로정권의 자멸에의 충동을 구태여 막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A Dieu!    출처 - 다음 아고라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396246&hisBbsId=best&pageIndex=7&sortKey=regDate&limitDate=-30&lastLimitDate= 인터넷서울신문 최영훈기자 taiji@seoul.co.kr
  • ‘만다라 전문사찰’ 국내 첫 건립

    신성한 단(壇)에 부처와 보살을 배치해 우주와 깨달음의 진리를 표현한 만다라. 말 그대로 깨달음의 경지를 도형화한 불화(佛畵)이며 ‘모든 법을 원만히 갖추어 모자람이 없다.’는 뜻의 윤원구족(輪圓具足)이라 불리기도 한다. 세계 각국의 이 ‘윤원구족’ 만다라를 모은 만다라 전문사찰이 국내에선 처음으로 들어선다. 만다라 전문가인 동휘(48) 스님이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원소리에 일군 ‘만다라 성지’. 오는 15일 성지에서 법당 상량식겸 ‘해피 만다라’ 운동 선포식이 열릴 예정이다. 동휘 스님은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미술학도였으나 1998년 수덕사 견성암에서 38세의 나이로 뒤늦게 출가한 비구니. 미술공부를 하던 시절 관심을 가졌던 만다라의 세계에 출가후 깊숙이 빠져들어 만다라를 직접 그리면서 세계 각국의 만다라를 수집해왔다. ‘만다라 성지’는 3년 전 가톨릭 수도원이 내놓은 땅 1만여평을 매입해 어렵게 작업해온 끝에 성사된 불사. 황량한 땅에 만다라 성지를 조성해 국제적 명소로 키워낸 네팔의 스완부와 버드낫에서 착안해 문화콘텐츠로서의 만다라를 본 것이다. 성지에는 스님이 직접 그린 것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수집하고 기증받은 만다라 2000여점을 상설 전시하게 된다. “만다라는 세상을 창조하는 중심 에너지이자 ‘우주의 눈’으로 깨달음을 통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 여기서 비롯된다.”고 강조하는 동휘 스님. 스님은 15일 ‘해피 만다라’ 운동 선포식을 시작으로 이 만다라 성지에서 누구나 자기 자신이 ‘행복한 부처’임을 깨닫는 ‘행복한 깨달음! 해피 붓다, 해피 만다라’ 운동을 펼쳐 나갈 계획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한국식 성당에 깃든 독일 신부의 혼

    한국식 성당에 깃든 독일 신부의 혼

    ‘건축가 신부 알빈을 아시나요.’ 이 땅에는 다양한 양식과 형태의 성당들이 즐비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편적으로 통하는 흐름이 있다.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담아 ‘하느님의 집’을 구현하려는 토착화의 노력들이다. 지금도 각지에 또렷하게 살아있는 토착화된 양식의 한국 성당들은 어떻게 비롯됐고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알빈 슈미트(1904~78) 신부는 그 의문에 가장 만족할만한 답을 줄 수 있는 인물이다. 베네딕도수도회 소속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돼 활동하면서 122개의 성당과 공소를 포함해 무려 185개의 천주교 건축물을 설계해 지금도 보란 듯이 서있게 한 신부.‘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살려야 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은 채 선교사로, 건축가로 살다가 이 땅에서 생을 마감한 독특한 신학자요 성직자로 남아 있다. ●성당·공소 등 185개 건축물 설계 독일 남부 슈바벤 지방 슈파이힝엔 출신으로 뮌헨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베를린 프리드 빌헬름 대학과 빈 대학에서 조형미술을 공부한 알빈 신부는 베네딕도수도회에 입회해 수도원에서 살던 시절 니체의 니힐리즘에 빠져 수도원을 떠나는 등 가톨릭에 대한 회의로 한 때 방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사제 서품을 받아 한국에 온 것은 1937년. 만주 북간도 연길 교구에서 활동하면서 연길상시 성당의 내부 장식을 직접 했는데 조선식으로 그린 그림들이 신자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자들을 위해 조선 기와집 모양으로 만든 상여마차도 신자들의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1937년부터 9년간 간도에서 사목활동을 하면서 이처럼 한국문화와 전통을 살린 성당 7개를 설계했는데 그 가운데 돈화성당(1942년)은 제대를 벽에서 옮겨 분리시키고 감실은 제대 뒤쪽의 반원형 벽감에 붙박아놓아 사제가 신자들을 향해 미사를 드리도록 한 전대미문의 전례공간으로 유명하다. 이같은 미사 형식은 전세계적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년)이후부터 공식화된 것을 보면 알빈 신부의 선구적 감각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다. ●한국의 문화·전통 담은 ‘하느님의 집´ 용정 상시본당 주임으로 사목 중 공산군에 체포, 하얼빈 감옥에 투옥됐고 결국 독일로 추방됐지만 1961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와 왜관 수도원에 머물며 본격적인 한국식 성당들을 설계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그가 남긴 성당들은 지금도 뭇 성당들이 본을 뜨는 것들이다. 박해시대 한국 교회에 흔했던 남녀석 분리 형식을 띤 김천 지례성당과 고창성당을 비롯해 김천 평화동성당, 구포동성당, 상주 남성동성당, 왜관성당이 모두 그의 손끝과 머리에서 나온 걸작들이다. 말할 나위 없이 모두 한국과 한국의 전통이 들어있는 것들. 75세를 일기로 1978년 왜관 수도원에서 심장마비로 선종했는데 세상을 떠난 그 한 해동안만도 7개의 성당을 설계했다고 한다. 알빈 신부의 이같은 신앙, 건축 궤적을 추적해온 한국 천주교계가 뒤늦게 재조명 작업에 나서 주목된다.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과 천주교주교회의가 16~23일 강남구 역삼동 대우 푸르지오밸리에서 ‘알빈 신부의 생애와 건축’ 전시회를 여는 데 이어 17일 같은 장소에서는 알빈 신부를 재조명하는 세미나를 개최한다. 전시회에는 알빈 신부가 한국에서 남긴 건축물 뿐만 아니라 독일서 그린 삽화며 성당벽화 작품이 나오고 특히 간도와 한국 사목활동중 겪은 애환을 가족에게 전한 편지도 들어있어 흥미롭다. ●특정 선교사 생애 이례적 재조명 17일 세미나는 한국의 특정 선교사를 대상으로 마련하는 천주교계 모임으론 사실상 첫 행사란 점에서 눈길을 끄는 자리. 왜관 수도원 아파스인 이형우 신부와 주교회의 문화위원장 이기헌 주교가 참석하며 가톨릭미술가회 회원과 한국건축역사학회 회원들이 자유토론도 벌일 예정이다. 세미나에서 ‘알빈 신부의 생애와 건축’을 발제하는 단국대 김정신(건축학)교수는 “알빈 신부는 한국과 한국인의 입장에서 신앙을 보고 실천한 대표적인 선교사로 교회를 신자들만의 닫힌 공간이 아닌 모든 이들의 열린 장소로 제공한 탁월한 인물인데도 한국 천주교사에선 드러나지 않은 채 묻혀 있었다.”며 “늦게나마 한국 천주교가 재조명 작업에 나서 반갑다.”고 말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김성호 선임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28) 예수고난회 노인조 수사

    [김성호 선임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28) 예수고난회 노인조 수사

    한국을 택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외국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나름대로의 소명과 사명을 위해 하루하루 자신을 바친다. 그들이 가슴에 새기고 사는 그 소명과 사명이 중생 구제이건 선교이건 지향점은 한결같다.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위한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 길을 찾는 숱한 이방인들이 그런 것처럼 노인조(60·본명 로렌스 핀·캐나다) 수사(修士) 역시 남을 위해 철저하게 나를 버리는 인물이다.“아픈 사람을 만날 때 내가 살 길과 살아 있음을 더욱 절실하게 새기고 느낀다.”는 노 수사. 그는 이역 만리의 생경한 한국 땅을 밟은 이래 줄곧 에이즈(후천성면역결핍증) 환자의 아픈 몸과 마음을 보듬어 살겠다며 ‘나’를 거듭 거듭 확인해가는 생활 속의 수도자이다. ●아픈 사람들과 만날 때 가장 편해 서울 강북구 우이동 245-4 천주교 예수고난회 명상의 집. 우이령으로 향하는 산행 길에 들어 1.8㎞를 오르다보면 만나게 되는 아담한 집이다. 천주교 신자와 성직자들의 피정과 기도가 끊이지 않는 공간. 예수고난회 한국관구 소속 신부, 수사 38명중 7명이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노인조 수사는 그 가운데 유일한 외국 출신이다. 오후 늦게 명상의 집 접견실에서 기자를 맞은 노 수사는 첫 대면부터 큰 웃음을 보여주었다. 오랜 세월 아픈 이들과 함께 해온 종교인의 의례적인 배려일까? ‘조금은 부담스러울’만큼의 잦은 ‘웃음 병’(?)에 어느 순간 전염된 ‘나’를 문득 본다. 서울 돈암동의 예수고난회 신학원 원장에서 물러나 1년간의 안식을 마치고 이곳에 온 게 지난 3월. 평일, 주일 줄곧 이어지는 피정은 물론 예수고난회 아시아태평양 지역 장상들의 모임에서 총무격인 행정 비서를 맡아 이런저런 국제 행사며 모임을 총괄하느라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공동체에 속한 수사이니 맡겨진 소임에 충실해야지요. 흔히 수사는 닫힌 곳에서 혼자만의 수행과 기도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으로 인식됩니다. 하지만 수사들은 나름대로 엄연한 공동체의 일원으로 각자의 중요한 일을 합니다.” 공동체에 매인 몸인 만큼 조직의 일원으로서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귀띔이다. 그러면서도 못내 안타까움을 털어놓는다. “아픈 사람들과 만날 때가 가장 편안합니다. 줄곧 함께 해온 아픈 사람들과 떨어져 있을 때 뭔지 모를 불안감이 밀려들곤 해요.” 수사의 말은 괜한 말이 아니다. 지금도 오랜 세월 만나고 인연을 맺어온 에이즈 환자들과의 만남이 생활의 큰 부분.“살기가 힘들다.”며 수시로 걸어오는 에이즈 환자들의 전화 상담이며 “만나 달라.”는 요청에 서슴지 않고 달려 나간다. 노출을 꺼려한 탓에 대부분 으슥한 곳에서 마주한 환자와의 만남을 마치고 돌아설 때마다 안쓰러움을 떨칠 수 없다고 한다. ●간호·교육·신학 공부한 뒤 33년째 한국생활 그가 이토록 애달파하고 챙기는 에이즈 환자들은 어떻게 그의 인생행로에 들었고 또 무엇일까.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아일랜드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노 수사는 중학교 시절 만난 봉사에 몸을 바친 한 수녀의 모습을 보며 ‘하느님의 부름’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한다. 예수고난회가 운영하는 학교를 다니며 자신도 모르게 종교적 분위기에 빠져들던중 수녀의 헌신적인 이타행에 소신을 다졌고 고등학교 졸업후 1년간 은행에 몸담았다가 고향을 떠나 미국 세인트루이스 수도원을 통해 예수고난회에 입회했다. “노인들의 요양시설에서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에 들어간게 켄터키주립대학 간호학과.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루이빌시내 병원에서 간호사 일을 하며 중학교 시절 큰 좌표로 있었던 그 수녀의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 것이었다. 루이빌 천주교구 대학인 벨라민대학에서 교육학과 신학을 공부하고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한국으로 들어와 올해로 한국생활 33년째. 처음 한국에 와 정동 명도원에서 한국말을 배우면서도 강릉 갈보리병원과 광주 성요한병원을 찾아다니며 간호사 일을 했다고 하니 이 땅에서의 그의 소임은 애초부터 정해져 있었던 셈이다. “예수고난회에 입회한 지 얼마 안돼 회원들을 대상으로 해외 선교사 희망자를 골랐는데 이상하게도 당시 내가 속한 시카고 관구의 회원 320명 중 나를 빼놓곤 아무도 나서지 않았어요.” 초창기 한국에 들어와 활동하고 귀국한 선교사를 통해 한국 이야기를 자주 들었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국에 가야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한국행을 자원했다. “계획을 세울 때마다 번번이 예상치 못한 일이 맡겨져 언제부터인가 계획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대로 한국생활도 처음엔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 세검정에서 다른 미국인 신부들에게 얹혀 살다가 지금 이곳의 명상의 집이 생기면서 옮겨와 5년여를 살고 광주 명상의 집 원장을 맡아 피정·신학생 지도며 광주가톨릭대 영어 강사로 활동하던중 예수고난회 로마 본원 총장신부의 개인 비서 소임이 떨어져 한국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아픈 이들과 함께 한다.”는 애초의 계획에선 아주 먼 나날들이었다. 하지만 길은 정해져 있었던 것일까. 로마에 살면서도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런던 에이즈 환자 쉼터에서 만난 에이즈 환자의 고통을 바라보며 초심을 굳게 다졌다. ●에이즈 환자 쉼터 전국 6곳 만들어 운영 “에이즈 환자들이 힘을 모아 세운 대규모 쉼터였어요. 병원과 호스피스 병동, 장례장까지 갖춘 큰 쉼터였는데 그곳의 고통받는 환자들을 보면서 종교인이 이런 쉼터를 운영한다면 환자들에게 훨씬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이후 쉼터의 의사며 환자들을 쉼없이 만났고 아일랜드 쉼터와 파리 에이즈병원을 찾아 환자들과 어울려 살았다고 한다. 물론 한국에 돌아와 무엇을 할지를 마음에 점찍어둔 채였다. 이렇게 ‘에이즈 공부’에 매달려 살다가 한국에 돌아와 청주의 외딴 수도원에 살던 중 에이즈 환자를 돕는 고미리암 수녀를 만나면서부터 본격적인 에이즈 환자와의 삶이 시작되었다. 고 수녀와 서울에서 첫 에이즈 환자 쉼터를 만들었고 그 이후 천주교계가 운영하는 비슷한 쉼터가 서울 두 곳과 원주, 광주, 대구 등지에 모두 6개가 생겨났다. 2002년부터 3년간 가톨릭에이즈협의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전국의 쉼터에 살고있는 70여 명의 환자들을 모두 만났다고 한다. 환자의 임종은 물론, 시신의 마지막을 돌보는 염이며 장례까지 가리지 않았다. “처음 한국에 올 무렵을 돌이켜보면 에이즈 환자를 보는 시선이 많이 달라졌어요. 그래도 에이즈 환자들이 겪는 고통과 불편한 대우는 여전합니다. 병으로 인해 겪는 육체의 고통은 정신적인 아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요.” 수용시설에 들어 사는 에이즈 환자가 점점 줄고 대신 아프면서도 사회 속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추세. 그래서 그들을 돕는 방식도 달라져야 한단다. 종전의 쉼터들을 묶어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돌보기 위한 협의체를 천주교주교회의 산하에 두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2003년 본의와는 달리 신학원 원장을 맡으면서 에이즈 환자들과 조금씩 멀어진 것 같아 미안합니다. 마음은 여전히 그들과 있지만 항상 몸이 함께 할 수 없는게….” 말 끝을 흐리는 노 수사가 말 대신 시편을 펼쳐 보인다.‘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살펴보시어 아십니다.’(시편 139) 비록 내 맘과 같지않게 몸이 멀어도 나를 보고 알아주는 하느님의 뜻으로 위안을 삼는단다. “나의 노출로 에이즈 환자들의 신변이 노출될까 걱정한다.”는 말대로 사진 찍기를 완강히 거부하다 마지못해 고개를 숙인채 성모자상 앞에 선 수사가 겸연쩍은 얼굴로 말을 맺는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사람과 인연은 모두가 서로에게 큰 선물입니다. 그것이 작건 크건. 수도자인 내가 택한 길은 그중에서 아픈 사람들을 통해 하느님과 만나는 것뿐이겠지요.” kimus@seoul.co.kr ■ 노인조 수사는 ●1948년 캐나다 온타리오 출생 ●1968년 예수고난회 입회 ●1971년 종신서원 ●1973년 켄터키주립대학 간호학과 졸업 ●1975년 루이빌 ‘벨라민대학’졸업, 한국 입국 ●1977∼1982년 우이동 명상의 집에서 사목 ●1982∼1988년 광주 명상의 집 원장 ●1988∼1995년 로마 본원 총장신부 개인 비서 ●1995년 한국 귀환 ●1998년 서울서 에이즈환자 쉼터 시작 ●2002∼2005년 가톨릭에이즈협의회 회장 ●2003∼2006년 예수고난회 신학원장 ●현재 우이동 명상의 집에서 사목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25) 파리외방전교회 허보록 신부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25) 파리외방전교회 허보록 신부

    신약 요한복음을 관통하는 복음의 큰 가치는 사랑이다. 이 요한복음을 쓴 것으로 알려진 사도 요한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뒤 성모 마리아를 정성껏 모신 ‘사랑의 사도’로 불린다. 경기도 군포시 당동, 군포역 근처의 성요한의 집은 이 ‘사랑의 사도’ 이름을 딴 무의탁 아동·청소년 사회복지시설. 이곳을 맡아 운영하고 있는 프랑스 출신 허보록(본명 블루 필립보·49) 신부는 ‘마더 테레사의 사랑’을 따르겠다는 사제서품 때의 약조를 지켜 한국에 사는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이다. 마더 테레사의 사랑을 가슴에 새긴 채 ‘사랑의 사도’, 성 요한을 따라 18년간 한국에서 불우 아동·청소년들의 곁을 한결같이 지켜오고 있다. ●군포 성요한의 집서 14명이 함께 살아 ‘성 요한의 집’은 4층 건물에 운동시설과 작은 성당, 청소년들을 위한 생활공간인 야고보의 집, 초등학생들의 보금자리인 요한의 집을 갖춰 14명의 아동·청소년을 수용하고 있다. 4층 성요한의 집은 초등학생 7명,3층 야고보의 집은 중·고등학생 7명이 형제처럼 살아가는 공간. 성 요한과, 요한의 형이자 역시 12사도 중 한 사람으로 가장 먼저 순교한 야고보의 이름을 각각 땄다.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을 보살피고 있는 봉사자는 모두 6명. 삼촌, 이모, 형처럼 살가운 정을 베풀고 나누며 공동체를 꾸려가는 이들의 중심에 허보록 신부가 있다. 등하교는 물론 식사, 잠자리 같은 일상생활 챙기기는 물론 이들의 진학과 취업, 진로까지 모두 신경을 써야 하는, 그야말로 집안의 가장 웃어른이다. 1999년 천주교 수원교구가 허름한 양로원을 개조해 지금의 시설로 바꾼 뒤 처음 운영 책임을 맡았으니 허보록 신부는 9년째 이곳에서 아버지 역할을 해온 셈. 이곳 생활에 불만을 갖거나 학교생활에 적응 못해 탈선하는 가족이 생길 때마다 가슴을 졸인단다. 청소년 사회복지시설 규정상 만 20세를 넘긴 가족들은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어 이들을 위해 인근에 따로 마련한 자립관 수용자 세 명의 살림 운영도 허 신부의 몫이다. 가족들의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간절한 기도를 통해 스스로를 추슬러 왔지만 지금도 막상 문제가 생기면 여간 마음이 아픈 게 아니다. 기자를 만나 명함을 전하면서도 명함 뒤에 새긴 글귀를 먼저 보여준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또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곧 나를 보내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코 9,37) ●프랑스 고향에 ‘삼형제 신부´ 집안으로 유명 프랑스 노르망디의 독실한 천주교 집안 태생의 3남2녀 중 둘째. 형과 동생이 모두 사제의 길을 걸어 프랑스 고향에선 지금도 ‘삼형제 신부’로 이름이 자자하다. 어릴 적부터 봉사에 헌신하는 테레사 수녀를 누구보다 동경해 사제의 길을 일찍부터 마음에 두었다고 한다. 고향 마을엔 유난히 보트피플이 많이 모여살았다.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에서 넘어온 난민들과 먹을 것을 나누고 이들의 빨래를 해주고 정을 쏟는 아버지 어머니를 보면서 자랐으니 마더 테레사를 향한 동경이 더욱 컸을 것이다. 노르망디 캉대학교에서 국제경제학을 전공한 경제학도. 대학 2학년 때 한 기도모임에서 ‘마더 테레사’의 영성을 거듭 확인하고 사제의 길을 결심했다고 하니 테레사 수녀는 허보록 인생의 꼭짓점임에 틀림없다. 알프스의 스키부대에서 1년을 복무한 뒤 곧바로 로마의 예수회신학대학인 그레고리아나에 들어가 6년간 선교와 영성공부를 했다. “선교사를 할 바에야 테레사 수녀처럼 살겠다.”는 신념으로 신학대 재학 중 테레사 수녀를 따르는 사랑의 선교수도회에 입회하려 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그 무렵 미국 LA의 한 수도원에서 동성애 사건이 터져 방향을 틀어 입회한 게 파리외방전교회. 어릴 적 아시아 보트피플과의 어울림과 테레사 수녀의 삶을 연결해 당시 아시아 지역 선교에 치중한 파리외방전교회를 택한 것이다. 신학대 졸업 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례한 로마의 사제 서품식에서 다짐한 것도 역시 “평생 마더 테레사처럼 버림받고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는 서원이었다. 간절한 서원과 다짐이 통했을까. 한국에 입국해 강화도의 한 공소에 몸담다가 안동교구 영주 하망동 보좌신부로 옮기면서 만난 어린이들이 인생의 표지판이 됐다. “성당에서 노인들을 위한 무료급식소를 운영했는데 밥 때마다 노인들 틈에 섞여 아이들이 밥을 얻어먹는 것이었어요. 알고 보니 의지할 곳 없는 결손 가정 아이들이었어요.” 갈 곳도, 의지할 곳도 없지만 누구 하나 챙기지 않는 걸식 아동 5명을 위해 영주의 허름한 집에 ‘다섯 어린이집’을 어렵게 꾸린 게 ‘아동·청소년들의 대부’로 살아온 계기가 된 것이다. 당시 안동교구장 박석희(1941∼2000) 주교의 부름을 받아 옥산 성당 주임신부로 옮겨 2년간을 살면서도 줄곧 다섯 어린이집 아이들이 눈에 밟혀 불안했다고 한다. ●잃어버린 가정을 위해 매주 가족 모임도 “본당 신부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교구장의 명령이었으니 마다할 수 없이 본당 주임을 맡긴 했지만 결국 주임 신부 2년을 마치고 안동의 낙동강 옆 농민회관 건물에 결손 가정 어린이들을 위한 ‘프란치스코의 집’과 ‘글라라의 집’을 마련했다. 안성에 양로원 ‘성모마리아 집’을 세운 것도 그 무렵이다. 9년간 이곳 ‘성 요한의 집’을 거쳐간 아동·청소년은 50여명.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번듯한 직장도 잡고 결혼해 가정을 일군 이곳 출신 가족들이 찾아올 때마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고 한다. “결손 아동·청소년들이 받는 마음의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아요. 이곳의 아이들만 보아도 가출하거나 술을 마시고 도둑질을 하는 가족이 생기면 덩달아 상심해 풀이 죽어요. 같은 처지의 가슴앓이라고나 할까요.” 평소 사제인 자신을 사제보다는 아버지요 형으로 여겨 살아가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이 ‘아버지’라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고 한다. 마음 깊숙한 곳에 각각 간직하고 있는 절실함 때문이다. “사제인 내가 잘 살 때 아이들도 잘 살아갈 수 있어요. 언제나 몸조심, 마음조심이지요. 특히 아이들에게 잃어버린 가정을 채워줄 수 있도록 가족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데 신경을 가장 많이 써야 합니다.” 그래서 일요일이면 모두가 함께 어울리는 가족모임과 게임을 어김없이 열어오고 있다. “줄곧 아이들과 노인들을 위해 살아왔지만 언제든지 어려운 일이 있는 곳에서 나를 필요로 한다면 서슴없이 달려가겠다.”는 허보록 신부.‘미소한 이웃들에게 해주는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는 것’이란 말씀은 사제요, 봉사자가 변함없이 지켜야 할 공통의 좌우명이자 신조라고 거듭 말한다. “이 땅에서 언제 어느 소임이 맡겨질지 자신도 알 수 없다.”는 허 신부. 그러나 인터뷰를 하면서도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이 “신부님”을 부르면서 안길 때마다 일일이 이름을 부르며 웃음으로 품에 안는 그가 이곳을 떠나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글·사진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허보록 신부는 ▲1959년 프랑스 노르망디 출생 ▲1983년 노르망디 캉대학교 국제경제학과 졸업 ▲1984년 로마 그레고리아나 신학대 입학 ▲1986년 파리외방전교회 입회 ▲1990년 그레고리아나 신학대 졸업, 사제서품. 한국 입국 ▲1992년 강화도 내가 공소 신부 ▲1993∼1994년 영주 하망동성당 보좌신부,‘다섯어린이집 운영’ ▲1994∼1996년 안동교구 옥산성당 주임신부 ▲1996∼1998년 안동 낙동강변에 고아원 ‘프란치스코집’‘글라라의 집’ 설립 ▲1999년 안성에 양로원 ‘성모마리아집’ 설립, 운영 ▲1999년∼ 군포 ‘성 요한의 집’ 운영 책임
  • [문화마당] 러시아 종교갈등의 교훈/석영중 고려대 노문과 교수

    [문화마당] 러시아 종교갈등의 교훈/석영중 고려대 노문과 교수

    종교는 사람들을 뭉치게도 하고 갈라서게도 한다. 종교로 하나가 된 사람들이 느끼는 결속감은 그 자체로 나쁠 게 없지만 자칫 잘못하면 나머지 사람들을 ‘남의 편’으로 몰아붙여 무시무시한 반목을 조장할 수 있다. 어느 종교가 사랑을 설파하지 않겠느냐만, 종교가 가르치는 사랑이 ‘우리 편’의 경계를 넘어 ‘남의 편’으로까지 흘러가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워 보인다. 최근에 우리 사회에서 불거진 종교편향 문제를 바라보고 있자니 러시아의 종교 대분열이 생각난다. 서기 988년에 러시아에 전해진 동방 정교는 오랫동안 러시아의 유일한 종교로서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다. 러시아 역사를 통틀어 정교와 다른 종교 간의 심각한 갈등은 거의 없을 정도로 정교 신앙은 견고했다. 그런데 17세기에 종교개혁 바람이 불면서 교회가 분열되고 말았다. 러시아 종교 대분열은 그리스도교도들과 그리스도교도들 간의 싸움이므로 엄밀히 말해서 종교 간의 갈등이라 보기 어렵지만 그래도 그것은 세 가지 점에서 오늘의 우리에게 전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첫째, 문제는 늘 그렇듯이 열성 신도들에게서 시작되었다. 당시 교회의 수장이었던 니콘은 열렬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교회가 곧 국가가 되는 세상을 꿈꾸었고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전례 개편을 시도했다. 니콘의 개혁은 믿을 수 없이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무수한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개혁에 반대하며 들고일어났다. 예배의식과 신앙을 동일한 것으로 여겼던 러시아인들에게 전례의 개편은 배교행위나 마찬가지였다. 이들 개혁 반대파는 옛 의식을 고수한다는 의미에서 구교도라 불리게 되는데 그 선봉에 선 사제 아바쿰은 니콘 못지않은 광신도였다. 그는 주위에 몰려드는 열혈 신도들을 이끌고 니콘과 피 터지게 싸웠다. 둘째, 분쟁의 불씨가 된 것은 늘 그렇듯이 아주 작은 일이었다. 니콘의 개혁안 중에서도 반대파를 심히 자극했던 것은 성호를 그을 때 두 손가락 대신 세 손가락을 사용할 것, 예배 의식 때 알렐루야를 두 번 부르던 것을 세 번 불러야 한다는 것 같은 지극히 사소한 조항이었다. 그러나 구교도들은 사소한 일에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걸었다. 니콘은 저항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화형이라는 극단의 조처를 취했다. 그러나 구교도들은 세 손가락으로 성호를 긋고 알렐루야를 세 번 불러야 한다면 차라리 불에 타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아바쿰은 웃으면서 불가마에 들어갔고 17세기 말까지 노약자를 포함한 약 2만명의 구교도들이 자진해서 화형의 길을 택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순교자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셋째, 종교 분쟁은 늘 그렇듯이 승자 없는 싸움이다. 러시아 종교 대분열에서 이익을 본 사람이 있다면 그건 니콘도 아니고 아바쿰도 아닌 황제였다. 개혁파와 구교도가 정신없이 싸우는 동안 황제는 그동안 교회와 나누어 가졌던 권력을 독점했다. 니콘은 외딴 수도원으로 추방당해 비참하게 일생을 마쳤고 아바쿰의 죽음 이후 갈팡질팡하던 구교도들은 탄압을 피해 볼가 강 너머로 도주했다. 두 열성 신도들의 신앙 경쟁은 결국 교회의 붕괴를 가져왔고 그 후유증은 이후 몇 세기 동안 지속되면서 수시로 러시아 사회의 토대를 흔들었다. 러시아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아주 작은 종교적인 불화도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종교적인 갈등 상황에서 시비를 따지는 것은 당사자들을 포함하여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이해와 관용만이 유일한 해법이다. 갈등의 해소는 ‘나’의 종교가 중요한 만큼 ‘너’의 종교도 중요하다는 마음가짐에서 출발해야 한다. 종교 문제는 법의 논리가 아닌 사랑의 논리로 풀어야 한다. 사랑과 자비와 용서야말로 진정한 종교의 힘이 아니겠는가. 석영중 고려대 노문과 교수
  • [부고] 달라이 라마 큰형 린포체 별세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맏형이자 독립운동가인 탁체르 린포체가 4일 미국 인디애나주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AFP통신이 7일 보도했다.86세. 인도 북부 다람살라에 있는 티베트 망명정부 관계자는 “린포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화로 알았다.”면서 “우리 모두 고인의 죽음을 슬퍼한다.”고 애도를 표시했다. 린포체는 달라이 라마(73)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티베트 종교계에서 유명 인사였다. 그는 세살 때 티베트에서 가장 중요한 사원의 하나인 쿰붐 사원 수도원장의 현신(現身)으로 여겨졌다. 여기 수도원장도 지냈다. 린포체는 달라이 라마에게 망명 정부 수립을 설득했던 조언자였다. 망명 정부 관계자는 “달라이 라마의 안위뿐만 아니라 티베트의 통합성을 위해 망명 정부를 세우도록 설득했다.”고 전했다. 달라이 라마는 1959년 중국의 지배에 항의하는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해 인도로 망명했다. 티베트 미래에 대한 두 형제의 견해는 다르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중도 노선을 견지, 자치를 추구한다. 반면 린포체는 완전 독립을 주장했다. 린포체는 1979년 인디애나주에 티베트 문화원을 설립했다. 자서전을 비롯해 티베트 문제를 다룬 책과 논문을 여러 편 발표했다. 유족으로 부인과 세 아들이 있다. 아들 모두 달라이 라마의 망명정부에서 일하고 있다.이기철기자 chuli@seoul.co.kr
  • [열린세상] 지상의 평화/이성형 중남미 전문가 정치학

    [열린세상] 지상의 평화/이성형 중남미 전문가 정치학

    한사도가 목이 잘린 한 이교도를 밟고 서 있는 조각상이 눈에 들어온다. 스페인의 톨레도에 있는 대성당의 본당에서의 일이다. 아마도 산티아고, 곧 야고보 성인이리라. 산티아고는 스페인이 무어인들을 밀어내고 이베리아 반도를 재정복하는 과정에서 전사들이 수호성인으로 모셨다.‘산티아고 마타모로’, 즉 ‘무어인을 죽이는 성 야고보’는 스페인 가톨릭의 전투적 모습을 잘 보여준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대단히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종교개혁과 싸우는 가톨릭 세력의 최대 실력자였다. 기도의 응답이 이뤄져 산 로렌소 축일에 프랑스군을 대파하자, 마드리드 근교에 ‘엘 에스코리알’이란 궁전을 성인에게 봉헌했다. 장방형의 엘 에스코리알은 스페인 합스부르크 제국의 최전성기 건물이지만 곧 정교일치의 이상을 음울한 모습으로 증언한다. 궁정은 온통 종교화로 뒤덮인 수도원 건물처럼 치장했고, 지하에는 가문의 시체안치소까지 마련했다. 펠리페 2세는 늘 기도를 하면서 죽음을 묵상했고, 골방에 앉아서 제국의 곳곳에서 날아든 서류를 꼼꼼하게 읽었다. 엘 에스코리알은 곧 제국 쇠락의 징후를 표현한다. 무엇이든 뜨겁게 사랑하면 피를 흘리게 된다. 종교전쟁은 숭고한 이상이 빚은 참혹한 결과이다. 영국에서도 가톨릭과 신교도, 국교도와 비국교도가 처절하게 싸웠다. 프랑스에서는 성 바르톨로뮤 대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신앙의 차이를 견디지 못했고, 마니교적 이분법으로 상대를 악마와 동일시했다. 처음에는 유대인이나 무어인들이 악마와 동일시되다가, 급기야 신교와 구교, 교파 간 싸움으로 변질되었다. 이단심문소는 이교도를 태워 죽였다. 홉스는 종교전쟁으로 얼룩진 17세기 영국에서의 삶을 ‘외롭고, 가난하고, 더럽고, 거칠며, 단명적’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종교적 광기에서 영국 사회를 구하기 위해 인간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와 분리시키는 획기적인 제안을 한다. 신적 계시에서 벗어난 인간 사회 그 자체가 분석의 대상이 된다. 그는 정치를 종교와 분리시키는 서구 민주주의의 ‘거대한 분리’를 ‘리바이어던(1651년)’에 기록하였다. 루소는 신앙을 ‘내면의 빛’으로 재정의하면서 합리적 신앙의 가능성을 열어 보였다.‘에밀’의 ‘사부아 보좌신부의 신앙고백’은 이렇게 기록한다.“어떤 특정한 종교라도 하느님을 유용하게 모시면 좋다고 믿는다.” 그 역시 종교적 광기, 신정정치, 성직자 제도에는 반대했지만, 홉스와 달리 종교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홉스와 루소 이래로 서구 사회는 이 ‘거대한 분리’를 점진적으로 내면화했다.‘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로 나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때때로 분리의 경계는 무너지고 상호 침범하는 경우도 많았다. 신정정치의 기억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역사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독일의 개신교도들은 가톨릭교도들보다 훨씬 강력하게 나치당을 지지했다. 당대의 저명한 신학자 프리드리히 고가르텐은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에 이렇게 선언했다.“우리가 오늘 다시 한 번 국가를 완전히 주장할 수 있게 되었기에, 인간적으로 말해서 성서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지배를 선포할 수 있게 되었다.” 제국교회는 히틀러를 하느님의 도구로 이해했다. 교회가 광신적 인종주의와 민족주의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어떻게 유대인 학살극에 개신교도들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메시아적 신앙은 메시아적 정치를 호명한다. 하지만 메시아적 정치는 독일인들에게 ‘하느님의 평화’가 아닌 재난을, 유대인에게는 홀로코스트를 선사했다. 정교분리는 지난 500년간 역사를 통해 서구사회에 평화를 가져온 값진 성과물이다. 그래서 대부분 근대국가의 헌정질서 속에 포함됐다. 정교분리, 종교간, 교파간 관용과 대화의 문화가 없이는 세상의 평화란 쉬 오지 않는다. 이성형 중남미 전문가 정치학
  • “자꾸자꾸 그리워해도 그리움이 남아 있는 엄마”

    최근 암수술을 받고 투병 중인 시인 이해인(63) 수녀가 세상을 떠난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담은 시집 ‘엄마’(샘터)를 펴냈다. 지난해 어머니 김순옥씨가 별세한 뒤 써내려간 사모곡 60여편과 이에 앞서 어머니를 소재로 썼던 20여편의 동시, 유품 사진 등을 함께 묶었다. ●“아플 때 제일 먼저 불러보는 엄마” 올해로 수도생활 40년, 시인생활 30년을 맞은 그는 지금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회에서 외부와 연락을 끊은 채 항암치료에 몰두하고 있다. 시인은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절제된 시어로 드러낸다.“몸이 아프고/마음이 아플 때/제일 먼저 불러 보는 엄마/엄마를 부르면/일단 살 것 같다/엄마는/병을 고치는 의사/어디서나/미움도 사랑으로/바꾸어 놓는 요술천사/자꾸자꾸 그리워해도/그리움이 남아 있는/나의/우리의 영원한 애인/엄마.”(‘엄마’ 중에서) 시인 자신의 간절한 사모곡이지만, 세상 모든 자식들의 마음 또한 이와 같지 않을까. 그만큼 그의 시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한껏 멋을 낸 어머니에게 수수하게 차려 입으라며 잔소리를 해대는 둘째딸, 어머니가 만들어 주던 카레라이스를 너무 좋아한 딸…. 시인은 ‘귀염둥이 딸’로 생전의 어머니 모습을 떠올리며 ‘언니 같고 친구 같던’ 자애로운 어머니를 추억한다. “엄마를 부르는 동안은/나이 든 어른도/모두 어린이가 됩니다/밝게 웃다가도/섧게 울고/좋다고 했다가도/싫다고 투정이고/변덕을 부려도 용서가 되니/반갑고 고맙고/기쁘대요.”(‘엄마를 부르는 동안’ 중에서) 세상을 등진 수도자이지만 어머니 앞에서만큼은 여전히 천진난만한 딸일 뿐이다. 시인은 어머니의 삶의 지혜를 새삼 되새기기도 한다.“엄마가 모아 두신/수백 개의 단추들을/제가 수도원으로 가져간다니/매우 기뻐하셨지요/“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단추는 얼마나 쓸모가 많은지 몰라”/하시던 엄마가/블라우스에 장식도 만들고/치마의 앞뒤를 분별하는/표지판도 된다며/단추 자랑을 하시던 엄마.”(‘단추 예술’ 중에서) 시인은 ‘엄마’의 주인공처럼 지혜로운 ‘원더우먼’이 되고 싶은 소망을 내비치기도 한다. ●어머니가 만들어 준 도장집·꽃골무 등 사진 실어 시집에는 시인과 어머니가 주고 받은 편지와 생전 모습을 담은 사진,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 준 도장집과 꽃골무, 괴불 주머니 등의 사진도 실려 있다. 시인은 출판사 관계자를 통해 암 선고를 받았을 때의 심경을 들려 줬다.“지금 아픈 것이 어쩌면 다행인지 몰라요. 투병의 고통을 통해 더 넓고 깊게, 모든 이들을 끌어안고 보듬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됐으니까요.”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23)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임인덕 신부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23)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임인덕 신부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 ‘서방 수도(修道) 제도의 입법자’,‘수도생활의 사부(師父)’로 불리는 이탈리아 성 베네딕트(480∼547)가 쓴 수도 규칙서의 대표적 문구이다. 경북 왜관의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엘 가면 곳곳에서 이 문구를 볼 수 있다. 이곳의 모든 사제와 수사들은 실제로 한순간도 잊지 않고 이 문구를 새기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독일 출신의 임인덕(73·본명 하인리히 세바스티안 로틀러) 신부는 영화와 비디오로 ‘복음’을 전하는 ‘미디어신부’. 성경 대신 영화를 복음의 방편으로 삼아 기도하고 일하며 42년째 한국에 살고 있는 독특한 사제이다. ●한국생활 42년은 한 편의 ‘로드무비´ ‘아시아 최대의 수도원’이라는 왜관수도원은 일반인에겐 좀처럼 속살을 드러내지 않는 은밀한 곳. 그중에서도 임인덕 신부가 매일매일 ‘기도하고 일하는’ 시청각실은 웬만한 수도원 식구들조차 발길을 쉽게 들여놓을 수 없는 이색지대로 통한다. 내년 초 사제서품을 받는다는 젊은 한국인 신학생의 안내로 찾아간 수도원 한쪽, 분도출판사와 닿아 있는 시청각실은 소문대로 임 신부의 궤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영화는 딱딱한 성경보다 복음의 가치들을 훨씬 더 잘 전할 수 있는 길”이라는 임 신부. 왜관수도원에서 22년간 가톨릭 분도출판사를 이끈 데 이어 베네딕도미디어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국내 영화계에서도 유명 인사가 되어 버린 그의 한국 삶은 한 편의 로드무비나 다름없다. 20여년 전 당한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쥐어진 지팡이에 의지한 채 시청각실에서 기자를 맞은 임 신부는 실타래 같은 고난의 나날들을 덤덤한 웃음으로 하나하나 풀어냈다. “1980년 광주민주화항쟁을 기억하시나요.” 예정됐던 손님들의 방문 약속을 인터뷰 뒤로 물린 노 사제가 불쑥 던진 물음이 묵직하게 가슴을 죈다. 사제의 뜻을 이리저리 더듬어 보아도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한 뼘 손으로 진실을 가리려는 무지막지한 폭력을 도저히 참을 수 없더군요.” 국내 언론들이 ‘시민 폭동으로 네 명의 군인과 한 명의 시민이 희생됐다.’는 왜곡으로 일관했지만 현장을 목격하고 빠져나온 광주의 한 신학생이 전하는 진실은 신문과 방송을 통해 듣던 것과는 사뭇 다르고 놀라운 것이었다. “200명 이상의 무고한 시민이 희생됐다는 광주 현장의 증언을 밤새도록 녹음한 테이프를 서울의 성당들로 올려보내 미사 직후에 나눠 줬지요. 덕분에(?) 신부들이 모두 잡혀 들어갔고 혹독한 매질을 견디지 못한 한 신부가 내 이름을 댔지요. 출국당할 뻔했지만 아직 이곳에 살고 있네요.” ●출판사 이끌며 400여권 신학서적내 분도출판사 책임을 맡고 있던 1977년 ‘해방신학’을 번역출간했을 때의 일화도 내쳐 들려준다. “용공성이 있다며 책을 모두 불태우라는 문화공보부의 위협이 있었어요.3000권을 찍었는데 도저히 책을 버릴 수가 없었지요. 수도원 옥상에 숨겼다가 서울의 책방으로 보냈는데 1년 만에 다 팔리고 12쇄를 찍었습니다.” 1971년부터 1993년까지 분도출판사를 이끌면서 낸 책만도 400여편.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을 비롯해 교부학 시리즈 등 신학서적을 출간했으며 ‘아낌없이 주는 나무’‘꽃들에게 희망을’같은 스테디 셀러도 그의 손끝에서 번역되어 세상에 나왔다. 책 선정부터 번역, 편집, 교열, 제작, 표지 디자인까지 모두 혼자 해냈다. 군사정권 시절 사회정의와 관련된 책을 내려니 여간 견제와 통제가 심한게 아니었다. 천주교 교회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 브라질의 마틴 루터 킹이라는 돔 헬더 카마라 주교의 ‘정의에 목마른 소리’를 내면서부터 교회의 외면을 받았고 어쩔 수 없이 가방에 책을 싸들고 책방들을 전전해야 했다. 뉘른베르크 전기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이 땅에서 그토록 험한 길을 걷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버지는 정말 용감한 사람입니다. 나치에 반대하다가 살던 고향에서 쫓겨났지만 단 한번도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아버지의 영향이 컸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시절 교실에서 히틀러의 사진을 가리키며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 선생님의 물음에 “전쟁을 일으킨 범죄자’라고 말했다는 그다. 밤늦게 집으로 찾아온 교사가 “위험한 아이이니 주의를 시키라.”며 아버지, 어머니에게 신신당부를 했다고 한다. 출판사 일을 하면서도 영화 일을 놓지 않았다. 국내 영화계에서도 그를 예술영화 보급의 산파로 인정한다. 크시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십계’연작이며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같은 예술영화를 국내에선 처음 비디오로 출시했다. 대학가며 공장에 영사기를 들고 찾아가 사회정의와 자유의 메시지를 담은 영화들을 보여 주기도 했다. 1981년부터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칠 때까지 6년간 안동 가톨릭센터에서 영화포럼을 연 것도 이 지역에선 유명한 일. ●종교 초월한 영화포럼 서울로 이어져 “입소문이 번지면서 포럼엔 천주교 신자뿐만 아니라 불교 신자, 대학생, 개신교 신자들까지 모여들었지요. 막걸리와 김치를 놓고 영화 이야기를 하느라 밤을 꼬박 지새기도 했는데….” 이 영화포럼은 나중에 서울로 이어져 한 지인이 자신의 방을 포럼 장소로 내놓아 문인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박완서씨도 단골손님이었다고 한다. 그가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뮌헨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던 시절. 하나님의 부재와 하나님의 침묵을 담은 영화 잉마르 베리만의 ‘침묵’을 보고였다.“신학이 가르칠 수 없는 메시지를 영화로 전할 수 있다.”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생각이 불현듯 일었고 한국에서의 삶도 그 연장선이다. 당시는 제3세계에 대한 관심이 컸던 때. 아시아, 아프리카의 선교사로 가기를 원하고 있던 중 같은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던 부산 출신의 한국 대학생들과 교유하면서 한국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결정적으로 한국에 오게 된 것은 1954년까지 북한 강제수용소에 수용됐다가 독일로 돌아온 한 신부를 만난 뒤였다. 그 신부로부터 전해들은 한국 문화와 풍속에 끌렸고 사제서품을 받은 이듬해 한국행을 택했다고 한다. 먼 길 떠나는 자식을 뒷발치서 하염없이 쳐다보던 아버지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무렵 동생도 아프리카 잠비아 선교사로 떠났다고 한다. 한국에 42년간 살면서 성주 본당 보좌신부 6개월과 점촌 본당 주임신부 4개월을 합친 10개월이 본당 신부 소임의 전부. 나머지는 모두 출판과 영화에 매달려 산 셈이다. 지금도 주일 인근 안동 공소와 필리핀공동체에서 미사를 주례하고 강론도 하지만 큰 일은 역시 영화.5년 전부터는 DVD에 주력해 어린이·청소년들에게 나눔과 배려의 가치를 심어주는 작품들에 치중하고 있다. “라디오캐나다가 제작한 환경 애니메이션 ‘프레데릭 백의 선물’도 꽤 많이 팔았고 독일 아동문학가 에리히 케스트너 원작의 ‘하늘을 나는 교실’, 이탈리아 작가 레오 리오니의 동물 우화 애니메이션 ‘핑크트헨과 안톤’도 반응이 괜찮은 편”이라며 웃는다. “예수는 복잡한 이론을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즐겨 썼던 쉽고 편안한 비유들을 영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젠 한국 교회에서도 영화에 대한 인식이 많이 열려 기쁘다는 임 신부. 영화와 영성에 대한 집착에서 시작된 그의 외길 걷기는 지금도 진행 중이다.“예수가 지금 시대에 있다면 분명 영화감독이 되어서 메시지를 전할 것입니다.” 글 사진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임인덕 신부는 ▲1935년 독일 뉘른베르크 출생 ▲ 베네딕도회 입회 ▲1960년 뷔르츠부르크대 신학과 졸업 ▲1965년 뮌헨대 종교심리학과 졸업, 사제서품 ▲1966년 한국 입국 ▲1969년 왜관수도원 기숙사 사감 ▲1971년 분도출판사 책임 ▲1987년 교통사고 ▲1993년∼ 베네딕도미디어 책임
  • “부시 방한 반대” 5일 대규모 촛불집회

    주말 촛불집회가 별 충돌없이 끝났지만 5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방한에 맞춰 또다시 대규모 촛불집회가 예정돼 있어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는 5일 오후 7시 청계광장에서 대규모 ‘부시 방한 반대’ 촛불집회를 열 예정이라고 3일 밝혔다. 경찰은 촛불집회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원천봉쇄할 방침이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뉴라이트전국연합 등 보수단체들도 ‘한·미우호기념 문화축제’를 열기로 해 단체간 충돌도 우려된다. 앞서 지난 2일 촛불집회는 경찰이 직업경찰관으로 구성된 기동대와 최루액 물대포를 준비했지만 큰 충돌없이 끝났다. 집회는 오후 7시 청계광장에서 시민 1000여명(경찰추산, 주최측 추산 3000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앞서 오후 4시에는 서울 정동 프란체스카회관 수도원 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이 주최한 시국미사가 열렸다. 경찰은 전의경 74개 중대 7000여명과 경찰 기동대 9개 중대 600여명을 배치했다. 전경차량으로 청계광장을 봉쇄한 경찰은 이례적으로 집회시작 8분 만에 해산명령을 내렸다. 최루액을 섞은 물대포를 쏘겠다던 경찰은 실제 사용하지는 않았다. 시위대는 종로와 을지로를 거쳐 명동으로 행진한 뒤 오후 10시쯤 해산했다. 경찰은 이 과정에서 13명을 연행했다.한겨레신문 허모(28) 기자도 연행됐으나 10분 만에 풀려났다. 허씨는 “수차례 신분을 밝혔고, 취재완장을 보여 줬으나 막무가내로 미란다 원칙만 반복하며 목을 조르며 끌고 갔다.”고 말했다.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 2일부터 부시 방한반대 촛불집회… 경찰 “최루액 물대포 쏠 것”

    촛불시위 참가자들에 대한 강도 높은 검거작전을 펴고 있는 경찰이 2일 열리는 ‘부시 방한 반대 촛불집회’부터 최루액 물대포와 색소 분사기를 적극 사용키로 해 시위대와 경찰간 충돌이 우려된다. 최근 창설된 시위진압 전문 경찰관 기동대도 이날 집회에 투입된다. 김석기 서울경찰청장은 1일 “극렬 폭력행위자는 현장에서 반드시 검거해 처벌하겠다.”면서 “필요하면 반드시 최루액을 섞은 물대포를 쏠 것”이라고 밝혔다. 최루장비는 1998년 9월3일 만도기계 공권력 투입 당시 마지막으로 사용됐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는 2일 오후 7시부터 서울 청계광장에서 집중 촛불문화제를 연다. 장대현 홍보팀장은 “부시 미 대통령이 방한하는 5일까지 방한 반대 집회를 계속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또 이날 오후 4시부터는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회관 수도원 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등이 주최하는 시국미사가 다시 열린다. 한편 대한민국재향군인회와 뉴라이트전국연합 등 보수단체로 이루어진 ‘부시방한환영 애국시민연대’는 오는 5일 오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부시 대통령 환영문화제를 열 계획이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19) 정교회 한국대교구 제2대 교구장 암브로시오스 대주교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19) 정교회 한국대교구 제2대 교구장 암브로시오스 대주교

    정교회 한국대교구는 다음달 20일 큰 전환점을 맞는다. 은퇴하는 초대 대교구장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대주교의 뒤를 이어 두번째 대교구장에 임명된 암브로시오스 아리스토텔레스 조그라포스(48·그리스) 대주교가 착좌(취임)하는 날이다. 일찌감치 한국 땅에 묻힐 것을 선언한 채 30여년을 정교회 사제로 한국에 살아온 그리스 출신 한국인, 소티리오스 대주교. 그의 뒤를 잇는 한국 정교회의 새 수장 암브로시오스 대주교는 다름아닌 소티리오스 대주교의 간곡한 부름으로 한국에 살게 됐다.‘한국 정교회에 힘이 되어 달라.’는 소티리오스 대주교의 간청에 한국행을 결심해 한국에 사는, 정교회의 실력자이다. ●소티리오스 대주교 뒤이어 새달 착좌 지난 13일 오후 서울 마포구 아현동의 정교회 한국대교구 성니콜라스 대성당. 최고 수장의 착좌식을 앞두었으니 사제며 신자들이 바쁠 성 싶은데, 성당은 ‘뭔 일 있느냐.’고 되묻기라도 하듯 차분하기만 하다. 찌는 한여름 날씨에 약속 시간을 맞추려 마포경찰서 맞은편 언덕 길을 바삐 올랐더니 온몸이 땀 범벅이다. 땀이 말라갈 무렵 “용인에서 강의를 마치고 막 도착했다.”며 긴 수염의 암브로시오스 대주교가 웃음 띤 얼굴로 기자 앞에 선다. 목부터 발등까지 내려입은 검은 사제복을 보고 있으려니 식었던 땀이 다시 솟을 것만 같다. 길다란 사제복에, 지금은 가평 수도원으로 옮겨 살고 있는 소티리오스 전 대교구장의 모습을 겹쳐 본다. 두 사람이 많이 닮아 있다. 마치 기자의 속내를 훔쳐본 것처럼 암브로시오스 대주교가 전임 대교구장 이야기를 불쑥 꺼낸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이토록 많은 것을 이룸은 기적이지요. 소티리오스 대주교가 한국 신자들로부터 ‘영적 아버지’로 통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자신을 버린 고생 끝에 얻은 영예이지요. 같은 사제의 입장에서 존경스러울밖에요.” 한국의 소수종교 사제 대신 좀더 나은 형편의 나라에서 살 수 있었지만 끝까지 어려운 한국 땅을 고집한 선배 대교구장에 대한 공경이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 한국의 정교회를 새로 이끌 이 중년의 대주교는 13년 전 소티리오스 대주교의 청을 지나칠 수 없었다고 한다. “1995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석사학위 준비를 하던 때였는데 소티리오스 대주교가 한국에서 전화를 하셨어요. 아무 인연이 없던 한국 정교회에 도움이 되어 달라는 청이었으니 당황할밖에요.” 그때만 해도 아시아 땅은 밟아본 적이 없는 그였다.2년여, 크리스마스 철마다 짬을 내 보름 정도씩 한국을 오가면서 한국, 한국인에게 정이 깊어감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한국을 알고 가까이해야만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게 커갔다고 한다. 그의 한국행 역시 정해진 소명이었던 것일까. 사도 바울의 역사와 흔적이 절절하게 담긴 아테네 남쪽의 유명한 지중해 휴양지 에기나 섬 출신. 에기나 섬의 웬만한 이라면 다 아는 대가족의 농민 아들로 태어났다.10남6녀중 여덟째.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과 같은 시기에 세워진 그 유명한 아페아 신전을 비롯해 사도 바울부터 이어진 그리스도교 교회의 유적들이 널린 곳에서 나고 자랐으니 신앙심이 오죽할까. 어릴 적부터 정교회 사제가 될 생각에 신앙활동을 줄곧 했고 아테네대학교 신학과를 졸업, 사제서품을 받았다. 아테네 서쪽의 항구도시인 니케아-피레아 대교구청서 3년을 산 뒤 이집트 시나이산의 성카테리나 수도원에서 2년간 도서관과 성화갤러리의 관리를 맡았다고 한다. 성카테리나 수도원 도서관은 그리스도교 관련 도서관으로는 로마 바티칸 다음으로 오래되고 각종 성서의 사본이 가장 많이 보관되어 있는 곳. 성화갤러리도 초대교회 때부터 전해온 수천 점의 성화가 들어 있어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성지이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의 귀중한 성서와 성화들이 가득 들어 있다는 도서관과 갤러리의 모든 관리며 순례객 안내를 맡았으니 정교회의 그를 향한 신뢰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시절 열쇠 50∼60여개를 항상 몸에 지닌 채 살았다고 한다. “성카테리나 수도원 시절, 오랜 세월 숱한 희생을 딛고 살아 남은 성화며 성서들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때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어요. 마치 극한 산고를 넘긴 어머니의 품에 안긴 갓난아기가 말을 걸어오는 듯한…. 어려운 고비마다 초심을 잃지 않으려 그 순간을 떠올립니다.” ●한국행은 정해진 소명 이곳에 묻히겠다 소티리오스 대주교의 느닷없는 전화 통화에 고민이 적지 않았지만 결국 아테네신학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바로 다음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1998년, 거리마다 성탄의 흥청거림이 절정으로 치닫던 크리스마스 이틀 전. 영국 옥스퍼드대학측의 신학과 학과장 제의와 캐나다 대교구의 대주교 추천을 미련없이 물리친 채였다. “영국, 그리스 같은 곳에선 나 아니어도 일할 사람이 많아요. 하지만 사제와 봉사자가 턱없이 부족한 한국에서 길을 찾은 것이지요. 물론 소티리오스 대주교의 영향이 컸고…. 돌이켜 보면 마음은 오래 전에 한국에 쏠렸던 것 같아요.” 소티리오스 대주교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도 한국 땅에 묻히겠다는 대주교. 그리스도교의 일치와 화해를 위해선 동·서 교회로 갈린 10세기 이전의 그리스도인이 살았던 모습 그대로를 회복하는 게 관건이라고 말한다. 물론 한국에서 그가 살아가는 가장 큰 이유도 교부들의 가르침이며 그리스도교 초기 교회의 말씀들을 온전히 전하기 위함이다. ●“강요 않는 믿음” 제대로 인식됐으면 “정교회는 남의 집 문을 두드려 믿음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주교는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는 정교회를 한국인들에게 잘 알리기 위해 한국인 주교와 대주교 탄생이 필요하다고 한다. 현재 미국과 그리스 등지서 신학교육을 마친 한국인 사제가 7명 있지만 주교 자리엔 단 한명도 오르지 못했다. 그래서 청평 수도원 인근에 설립할 정교회 신학교에 쏟는 정성이 각별하다. 용인 한국외국어대 그리스어·발칸어과 교수의 신분도 겸한 사제. 지난 2004년 이 학과가 처음 개설된 이후 줄곧 교수로 재직해 왔다. 신분이 알려지면서 언제부터인가 교수, 학생들 사이에선 ‘교수님’보다 ‘신부님’ 호칭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용인에서 강의에 열중하지만 금요일 오후면 어김없이 정교회 서울교구청의 사제로 돌아온다. 최근 대교구장에 임명되면서 ‘신부님’이 학교를 떠날까 걱정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고 귀띔한다. “그리스 피를 받고 태어나 미국 시민권도 갖고 있지만 태어날 때부터 한국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는 대주교. 서로 다른 종교를 가진 가족들이 아무 분란없이 한 지붕 아래 잘 살아가는 한국의 종교세계를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단다. “해가 갈수록 한국의 종교에 깊숙이 빠져들게 됩니다. 샤머니즘이며 소수의 민족종교가 거대 종교와 허물없이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요인이 무엇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허튼 말이 아니다. 학생들과 함께 떠나는 답사며 여행 때 사찰이나 문화공간을 빼놓지 않고 일정에 꼭 넣는다.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 들여다 보기 위해서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날 최후의 만찬에 앞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며 섬김의 모습을 직접 보여 주었다는 세족(洗足). 대주교는 성경의 세족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진리가 농축된 핵심임을 늘 새기며 산다고 한다. “민족이나 지위, 언어에 차별과 구별을 두지 않는 똑같은 사랑으로 변함없이 봉사, 봉직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글 사진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암브로시오스 대주교는 ●1960년 그리스 에기나섬 출생 ●1983년 아테네대학교 신학과 졸업, 사제서품 ●1985년 니케아-피레아 대교구청 봉직 ●1988∼1989년 이집트 시나이산의 성카테리나 수도원 도서관, 성화갤러리 관리, 순례객 안내 담당 ●1991∼1993년 미국 보스턴 홀리크로스 정교회신학교서 학업 계속, 뉴잉글랜드·뉴저지 사목 ●1993∼1996년 프린스턴 신학교서 교회역사 전공, 프린스턴 대학교서 ‘예술의 역사’ 관련 석사학위 ●1998년 아테네신학대서 박사학위,12월23일 한국정교회서 사목 시작 ●2004년∼ 한국외대 그리스·발칸어학과 교수 ●2008년 5월27일 정교회 세계총대주교청 시노드서 대주교 임명 ●2008년 7월20일 정교회 한국대교구장 착좌 예정
  • 5000년 탐험역사 유쾌하게 뒤엎기

    5000년 탐험역사 유쾌하게 뒤엎기

    ‘역사는 승리자를 위해 잘 차려진 말의 성찬’이라고 했던가. 엄밀히 말해 해적의 무리인 바이킹의 후예 영국은 ‘신사의 나라’로 미화되는가 하면, 목숨을 살려준 인디언들의 은혜에 대한 잔혹한 ‘학살의 축제’는 아메리카 대륙 정착에 성공한 것을 감사하는 ‘추수감사절’로 둔갑했다.‘세계 지리 오디세이’(일빛 펴냄)는 인류의 5000년에 걸친 탐험의 역사를 유쾌하게 뒤엎는 데 초점을 맞춘 책이다. 저자는 세계사를 전공한 장서우밍 중국 난징대 역사학과 교수와 가오팡잉 쑤저우대 역사학과 교수. 옮긴이는 중국어 전문번역가인 김태성 한성문화연구소 대표. ●탐험가들, 끝없는 자신의 탐욕 채우려 도전 디아스의 희망봉 발견,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마젤란의 세계일주, 피사로의 잉카제국 정복, 미국 지리 탐험의 선구자 그레이, 아문센의 극지 탐험…. 책은 기원전 7세기 3척의 배에 나눠 타고 2년여간 아프리카 대륙 연해를 일주했던 최초의 항해민족 페니키아인들의 이야기부터 400년 동안 계속된 북극탐험 도전기에 이르기까지 5000여년에 걸친 방대한 인류 탐험의 역사를 파고든다. 이집트의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 등 참고 자료를 토대로 정치한 고증을 거쳤다. 저자들이 추적하는 탐험의 역사는 현재 학계에서 정설로 통하는 그런 역사가 아니다. 사뭇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본다. 탐험가들이 자신의 끝없는 탐욕을 채우기 위해 탐험에 나섰다는 주장이 그 한 예다. 책은 먼저 ‘신사의 나라’의 대명사를 불리는 영국에 대해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793년 6월8일 새벽, 잉글랜드의 린디스판 주민들은 평온하게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는 유명한 수도원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그때 갑자기 해적선이 나타나 신을 경배하기는커녕 여성들을 겁탈하고 금은보화를 닥치는 대로 약탈했다.” 이들 약탈자가 훗날 오늘의 영국을 건설하는 선조가 됐다는 게 저자들의 주장이다. 미국인의 선조가 된 영국의 ‘메이플라워호’ 청교도들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을 아메리카에 정착하도록 도와준 인디언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기보다 오히려 잔인한 ‘학살’로 보답했다.“1620년 8월 청교도들이 북아메리카 탐험에 나섰다. 수많은 위기와 희생을 딛고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이들이 절망에 빠졌을 때 인디언들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정착에 성공한 이들은 인디언들과 신에게 감사하는 ‘추수감사절’을 제정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자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학살하기 시작했다.” 추수감사절은 이교도인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학살한 데 대한 ‘승리의 자축연’이었던 셈이다. ●추수감사절은 인디언 몰아낸 승리의 자축연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아메리카와 마젤란 해협, 빅토리아 호수, 허드슨강 등의 탐험사도 살핀다. 책은 이들 지역을 발견하고 탐험한 이들을 기념하지만, 이들에게 무고하게 생명과 삶의 터전을 빼앗긴 원주민들을 추모하거나 억울한 영혼을 위로하는 기념물은 거의 없다고 비판한다. 요컨대 서구인들의 강자논리에 따라 역사적 진실이 왜곡됐다는 시각이다.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이들 강대국은 이제라도 자신들이 서술한 역사가 진실이 아니라고 말하는 용기를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2만 3000원.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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