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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성의 아버지 데카르트의 유골을 찾아라

    이성의 아버지 데카르트의 유골을 찾아라

    [데카르트의 사라진 유골] 러셀 쇼토 지음/강경이 옮김/옥당/392쪽/2만 2000원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그 유명한 명제를 남긴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1596~1650). ‘유럽 철학이 플라톤에 대한 각주라면, 근대 유럽 철학은 데카르트에 대한 각주’라는 말 그대로 데카르트는 흔히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간주한다.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였고 17세기 근대과학의 등장이며 18세기 계몽주의, 19세기 산업혁명, 20세기 컴퓨터와 21세기 뇌과학에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연결된다는 그는 사후 관 뚜껑이 세 번이나 열리고 유골이 곳곳에 흩어지는 수난을 당했다. 왜 그런 고초를 겪어야 했을까. ‘데카르트의 사라진 유골’은 데카르트의 유골이 도난당하고 여러 차례 옮겨지는 과정을 추적한 탐정소설 분위기의 책이다. 저자는 ‘뉴욕타임스 매거진’ 칼럼니스트이자 암스테르담의 존 애덤스 연구원장. 탐정이 사건 현장을 조사하고 분석해 문제를 풀어내듯 1인칭 화법으로 사후 데카르트의 수난을 파헤쳐 그의 삶과 사상을 재구성해 내는 과정 자체가 흥미진진하다. 데카르트에 관해 가장 긍정적인 평가는 ‘개인의 이성을 깨우고 학문의 진리를 이성으로 탐구하기 위해 애썼던 위대한 철학자’이다. 미신과 신이 지배하던 세상에서 스스로 생각하는 인류로의 첫발을 내디딘 선각자였다고 할까.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의 힘을 주창하고 세웠던 만큼 왕과 교회의 절대적 힘에 편승한 당대 많은 세력들로부터 공격을 받거나 옹호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함께 받았을 것이다. 책의 큰 흐름은 역시 데카르트의 사후 수난의 재구성이다. 이국 땅 스웨덴에서 숨을 거둔 지 16년 후 스웨덴 주재 프랑스 대사가 유골을 몰래 파내 프랑스로 옮겼고 유골이 안치된 파리 생트 주네비에브 성당이 혁명정부에 몰수될 위기에 처하면서 프랑스유물박물관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그 뒤 프랑스 혁명에 공헌한 위인들을 팡테옹(국립묘지)에 모셔야 한다는 논리에 따라 생제르맹 데 프레성당으로 다시 옮겨지기에 이른다. 책의 특장은 단지 데카르트 유골의 수난 과정 찾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데카르트의 유골을 추적하는 저자를 따라가다 보면 서양 근대사를 장식한 굵직굵직한 명장면과 인물들을 자연스레 만나게 된다. 계몽주의자들의 비밀모임이며 프랑스혁명 절정기의 파리, 프랑스 아카데미데시앙스의 학회실, 초창기 인류학회의 현장들이 실감 나게 소개된다. 결국 사후 데카르트의 수난사는 유골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지성의 각축전이자 근대 철학·과학의 발전사였음을 보여주는 저자는 책에 이렇게 적고 있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공기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⑤광화문광장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⑤광화문광장

    >>광화문의 어제:육조거리의 부활을 기다리며 조선시대 국가의례·행사 열린 정치·행정·문화의 중심광장 세종로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심장에 해당하는 국가 중심도로다. 시대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조선시대 사료에는 육조대로, 주작대로라는 이름이 기록돼 있다. 주요 행정관청인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 6개 관청이 있는 거리라는 뜻에서 육조(六曹)거리라고 불린 듯하다. 흔히 어가(御街)라고 지칭됐으며 일반인들은 육조거리, 육조 앞, 해태 앞이라는 지명을 주로 썼다. 관청가인 육조대로가 세종로의 본디 이름인 셈이다.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을 중심으로 의정부와 삼군부, 육조, 한성부, 사헌부 등 주요 관청이 좌우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육조거리에는 광장의 개념까지 포함됐다. 국가의례나 문화행사가 열리는 정치·행정·문화의 중심 광장이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보기 어려운 폭 58m, 길이 200m의 큰길이었다. 노면이 고르고 배수가 잘 됐으며 바람이 불어도 먼지가 날리지 않는 멋진 길이었다. 중국, 일본의 사신이나 개항 이후 방문한 백인 외교관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조선팔도고금총람도, 수선전도, 조선경성도 등을 보면 육조거리의 관아는 위계에 따라 배치됐다. 의정부가 광화문 왼쪽 맨 앞자리인 현재의 광화문 열린 광장 자리에 있었고 이조, 한성부, 호조가 뒤를 이었다. 반대쪽 정부서울청사 쪽에는 삼군부, 예조,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가 차례로 터를 잡았다. 서울역사문화연구소 이상협 소장의 논문 ‘조선시대 육조거리에 대한 고찰’을 보면 의정부와 예조 등 모든 관아가 육조거리에 직각 방향으로 있으며 육조거리의 공간 구성과 관아 배치는 경복궁에서 임금과 신하가 한자리에 있는 공간 구성의 틀과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건물 조성 당시의 배치 구조와 규모를 확인할 수 있는 건물이 한 채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아쉽다. 다만 1900년대 전후에 촬영한 사진과 관아 그림 등으로 유추해 볼 때 양쪽의 긴 담장이 도로를 따라 이어져 있었다. 긴 행랑 때문에 육조를 흔히 육조장랑(六曹長廊)이라고도 지칭할 정도였다. 일제는 조선의 행정관청인 육조라는 명칭을 소멸시킬 목적으로 거리 이름을 광화문통으로 바꿨다. 육조장랑은 뜯겨 나갔고 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금기시됐다. 1926년 경복궁 근정전 앞에 총독부 신청사를 짓자마자 앞을 가리는 광화문을 해체해 건춘문 옆으로 옮겨 버리고 나서는 총독부 광장이라고 호칭했다. 어용 군중집회가 주로 이곳에서 열렸다. 미 군정기에는 군정청이 입주하면서 군정청 광장이라고 불렸다. 정부 수립 기념식이 개최됐다. 해방을 맞았지만, 육조거리로 복권되지 못하고 세종로라는 이름이 붙여져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는 이 거리를 광화문이나 광화문광장이라고 즐겨 부른다. 세종로라는 작위적 지명보다 현존 구조물인 광화문이 더 친숙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게다가 세 번이나 옮겨지고, 두 번이나 불탄 광화문 수난사가 마음속에 새겨진 탓인지도 모른다. 이름 하나가 역사적 사고를 지배하기도 한다. 1946년 해방 직후 구성된 지명위원회는 국가 중심가로의 역사성을 간과했다. 일제가 붙인 광화문통을 세종로로 바꾸는 데 급급했다. 육조대로라는 지명을 원상회복할 기회를 놓쳤다. 세종로가 100m의 도로폭을 갖게 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맥아더의 호언장담처럼 종전 후 서울도 이상적인 도시계획의 기회를 잡았다. 1945년부터 1956년까지 11년 동안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을 맡은 한국인 1호 도시계획가 장훈씨가 1952년 고시된 최초의 서울 도시계획에서 광화문사거리~중앙청까지 500m 길이 도로의 폭을 기존 53m에서 100m로 확장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폭 12m에 길이 2750m이던 청계천을 폭 50m의 도로 부지로 확장해 오늘의 청계천을 있게 했다. 광화문광장, 시청 앞 광장, 숭례문광장 등 주요 광장 부지도 확보했다. 대담한 도시계획에 맞춰 건물과 토지를 매수하고 수용해야 했지만 서울시의 재정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내버려둘 수도 없고 매수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민원이 빗발치자 가건축 허가를 내줘 가건물을 짓도록 했다. 도로 확장은 1966~1979년 계획대로 실행했지만, 광장 부지는 확보하지 못했다.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는 “세종로사거리를 기점으로 반지름 150m의 광장이 계획대로 실현됐다면 현재의 동아일보 사옥과 광화문 우체국, 교보빌딩과 KT빌딩은 들어서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62년 건설부고시에 따라 광화문광장계획선은 반으로 쪼그라들었다. 그러나 세종로와 태평로를 연결하는 광장계획선 안에 일부 건물이 건재하다. >>광화문의 오늘:주요 건물의 부침사 정부서울청사 옛 삼군부·예조 자리에… 개인건물은 4채뿐 광화문을 중심으로 왼쪽에 광화문시민열린마당·대한민국역사박물관·주한미국대사관·KT빌딩·교보빌딩·비각이 차례로 서 있다. 오른쪽으로는 정부서울청사와 별관·세종로공원·세종문화회관·삼보빌딩·현대해상화재·세광빌딩 등이 자리 잡았다. 폭 100m, 길이 500m의 광장구조 거리에 공공건물 5채와 대기업 건물 3채, 개인건물 4채, 문화재 1개, 공원 2곳뿐인 쾌적한 구조다. 해방 이후 육조거리를 복원하지 않은 탓에 건물들의 격렬한 부침(浮沈)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세종로를 폭 100m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건물이 헐렸다. 먼저 1967년 의정부 자리를 꿰차고 있던 경기도청과 국제전신전화국 일부가 철거됐다. ‘서울 한복판에 웬 경기도청’이냐고 하겠지만, 옛 경기도청은 행정구역 개편을 통해 경성부(서울)를 경기도의 일개 지방도시화한 일제가 의정부를 헐어 내고 지은 건물이었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기억에서 지우기 위한 식민통치의 음모였다. 한 때 치안본부 등으로 쓰였다. 정부는 이 자리에 정부 제2종합청사를 지으려고 계획을 세웠지만 1995년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에 고무된 이원종 당시 서울시장이 ‘국가 중심가로 구상안’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하면서 백지화됐다. 서울시는 이 부지를 정부로부터 매입해 광화문 시민열린 마당을 조성했다. 부지를 지킨 것은 잘한 일이지만 명칭을 의정부 광장이나 육조마당, 육조광장으로 붙이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질책받을 일이다. 서울의 면모를 일신한다는 방침에 따라 대대적인 도시 개조 사업이 벌어졌다. 이른바 ‘서울재건’이라는 이름 아래 정부가 외국 원조 자본을 끌어들이거나 민간 자본이 속속 건물을 지었다. 1961년 10월 완공된 현재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과 주한 미국대사관은 쌍둥이 건물이다. 역사박물관은 이조, 미국대사관은 한성부 터다. 이 건물은 미국대외경제원조처(USOM)가 500만 달러의 원조자금을 대고 필리핀에 건축을 의뢰해 지어졌다. 정부청사용 건물을 짓고도 280만 달러가 남자 건물을 한 채 더 지었는데 여기에 대사관이 입주한 것이다. 역사박물관 건물은 5·16 이후 국가재건최고위원회 건물로 사용됐다. 경제기획원과 재무부 청사로 쓰이다가 문화공보부, 문화체육부, 문화체육관광부를 거쳐 지난해 448억원의 예산을 들여 역사박물관으로 리모델링했다. 전시 내용과 건물의 구조 등이 박물관으로 맞지 않는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KT 광화문 빌딩은 1981년 국제전신전화국 자리에 세워졌고 체신부와 함께 입주했다. 이후 잦은 정부 조직 개편으로 소관 부처가 체신부, 정보통신부, 방송통신위원회로 바뀔 때마다 간판을 변경했다. 1998년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체신청으로부터 분리, 공사가 된 이후 2002년 민영화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개관 당시 체신부가 갖고 있던 이 건물의 12~14층까지 3개 층의 소유권도 방통위에서 기획재정부로 넘어갔다. 교보빌딩은 호불호가 엇갈리는 대표적인 건물이다. 건축가 등 전문가 그룹은 ‘짝퉁’ 건물이라고 깎아내리고, 일반인들은 건물 외관의 대형 걸개 글판과 시내 한복판 책방인 교보문고의 존재를 달가워한다. 왜 그렇까? 이 건물의 정체성 때문이다. 일본 도쿄 주일미국대사관 건물의 디자인을 빼닮았다는 이유다. 미국 건축가 시저 펠리에게 같은 건물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고 이 디자인을 교보의 전국 지사 건물로 복제했다. 최근 한 건축 잡지는 해방 이후 최악의 건물 리스트에 올렸다. 층수와 용도를 둘러싸고 뒤탈도 많았다. 설계 당시 40층을 계획했지만 23층에 그쳤다. 완공 단계에서 정부청사보다 낮은 17층 이하로 지으라고 행정 당국이 종용하자 당시 신용호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완공 단계의 건물을 자르라면…. 내가 광화문 복판에서 배를 자르겠다”는 격한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또 용도를 호텔로 변경하라고 권하자 “정부청사 앞에 술과 밥을 파는 숙박업소를 짓는다는 것은 나라 체면을 먹칠하는 것”이라고 거절한 사연도 자서전에 남아 있다. 교보빌딩은 2009년부터 2년 동안 건물의 뼈대만 남겨 두고 건물 옆면 일본식 다다미 모양을 유리로 교체하는 등 리모델링했다. 짝퉁 논란에서 벗어날지 두고 볼 일이다. 정부서울청사는 1970년 옛 삼군부와 예조 자리에 들어섰고, 별관인 외교부청사는 2002년 옛 교통방송국 터에 자리 잡았다. 1966년에 정부서울청사 자리에 있던 서울전신저금보험관리국, 경찰기동대 순찰반이 헐렸고,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인 시민회관 자리에 있던 종로보건소와 광화문전화국이 철거됐다. 시민회관은 이승만 대통령의 아호를 따 우남회관으로 지어졌지만 4·19혁명 이후 시민회관으로 이름을 바꿔 1961년 개관했다. 1972년 불타 버리는 바람에 1978년 현재의 모습으로 신축했다. 세종문화회관 옆 17층짜리 현대해상화재빌딩은 현대그룹의 성장사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1976년 현대건설 본사로 지어져 1983년 현대건설이 계동으로 옮겨 가기 전까지 현대그룹 본사 건물이었다. 고 정주영 회장은 중동특수를 누린 이 건물에 애착이 강했다. 1992년 대선에 출마하면서 국민당 당사로 썼다. 현대해상은 그룹 계열에서 분리되기 직전인 1999년 이 건물을 현대건설로부터 인수했고, 2004년 대대적으로 개보수했다. 대한민국 심장부에 빌딩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는 KT와 교보, 현대해상화재뿐이다. 그보다 엄청난 격랑을 헤치고 최고의 요지에 끝까지 살아남은 개인 빌딩 4채의 존재감이 더 빛난다. joo@seoul.co.kr
  • [‘2007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국정원, 민감 시기마다 정국 뒤흔들어

    국가정보원이 민감한 시기 정치 한복판에 뛰어들어 정국을 뒤흔든 사례는 과거에도 적지 않았다. 2005년 ‘안기부 X파일’로 세상에 알려진 국가안전기획부(국정원 전신)의 불법도청 조직 ‘미림수사특별팀’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미림팀은 1991년 노태우 정부 말기 유력 인사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운영한 정보수집팀으로,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3년 폐지됐다가 이듬해 부활됐다. 미림팀은 1994년 6월부터 2007년 11월까지 정·관계, 재계, 시민사회 인사 등을 무차별 도청하고 1000개의 녹음 테이프를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국정원장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기 위해 직접 선거에 개입한 사례도 있었다. 권영해 전 안기부장은 대선을 앞둔 1997년 말 김대중 당시 대통령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 월북한 천도교 교령 오익제씨로 하여금 김 후보 앞으로 편지를 보내게 한 뒤 이를 공개해 ‘김대중 용공설’을 퍼뜨렸다. 권 전 부장은 이 사건으로 실형을 받았다. 정치공작이 횡행했던 1980년대에는 정보기관이 정치 개입을 위해 직접 조직폭력배를 사주한 사건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른바 ‘용팔이 사건’이다.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1987년 정치 조폭 ‘용팔이’(본명 김용남)를 사주해 통일민주당 창당대회를 방해했다. 김대중 정부 때도 국정원장을 지낸 임동원·신건 전 원장이 주요 인사들의 휴대전화 불법 감청에 관여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되는 등 국정원장들의 수난사는 끊이지 않았다. 2006년 노무현 정부에서는 국정원 5급 직원 고모씨가 유력 대권 후보였던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주변 인물 131명을 불법 사찰한 혐의로 구속됐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원세훈 前 국정원장 검찰 출두] 장세동·임동원·신건 구속 수모… 권영해 징역 5년

    [원세훈 前 국정원장 검찰 출두] 장세동·임동원·신건 구속 수모… 권영해 징역 5년

    1961년 중앙정보부로 출범 이후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까지 50여년간 국가 최고 정보기관 수장을 거친 사람은 원세훈 전 원장을 포함해 모두 30명이다. 이들의 대부분은 재임 시절 통치권자의 최측근이었다. 그렇다 보니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불법 행위를 하거나 정치에 개입한 경우가 많았다. 퇴임 후 상당수가 사법처리를 받은 것은 그로 인한 당연한 귀결이었다. 29일 원 전 원장이 국정원 댓글 사건과 관련해 강도 높은 검찰 조사를 받게 되면서 국정원은 오욕의 역사를 이어 가게 됐다. 김종필 전 총리는 중정을 창설하고 초대 부장까지 했으나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뒤 재산이 몰수되고 정치활동이 금지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검찰은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과 12·12사태, 5·18사건 등에 대해 칼날을 들이댔다. 전두환 정권 시절 최고 실세였던 장세동(13대 안기부장)씨가 세 차례나 구속됐고 이희성(9대), 유학성(11대), 안무혁(14대), 이현우(19대)씨는 군사반란과 비자금 조성 및 관리 등의 혐의로 줄줄이 사법처리됐다. 김영삼 정부 시절 안기부장을 지낸 권영해(21대)씨도 ‘북풍사건’ 등 각종 공안사건 조작 등의 혐의로 퇴임 후 네 차례나 기소됐다. 국정원으로 이름을 바꾼 뒤에도 수난사는 계속됐다. 초대 국정원장 이종찬(22대)씨는 퇴임 뒤 국민회의 부총재 재직 시절 언론장악 시나리오를 담은 ‘언론대책문건’ 유출 파문으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2005년 ‘안기부 X파일’로 세상에 알려진 국정원의 불법 도청조직 ‘미림팀’ 사건은 국정원 수난사의 정점을 찍었다. 검찰 수사로 미림팀이 1994년부터 3년간 군 수뇌부와 여야 정치인 등 연간 5400여명을 무차별 도청한 사실이 드러났다. 임동원(24대)·신건(25대)씨는 김대중 정부 당시 불법 감청을 지시 또는 묵인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 기소돼 1, 2심에서 각각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김덕(20대)·천용택(23대)씨도 각각 미림팀 운영 혐의, 불법 감청 테이프 및 녹취록 활용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노무현 정부 시절 국정원장을 지낸 김만복(28대)씨는 일본 월간지에 재임 시절 대북협상과 관련한 일화를 기고해 비밀누설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지난 1월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씨줄날줄] 대한문 수난사/함혜리 논설위원

    1897년 10월 12일 새로 지어진 환구단 안은 향 냄새로 가득찼다. 이날 고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환구단에서 대한제국의 출범을 하늘에 고하는 첫 제사를 지내고 황제에 즉위했다. 광무(光武)라는 연호도 쓰기 시작했다. 과거의 왕들은 천자의 나라 중국에서만 하늘에 직접 제를 올릴 수 있다며 제천의식을 삼갔지만 고종은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남별궁 터에 환구단을 지어 제를 지냄으로써 자주독립의 의지를 대외적으로 천명했다. 이후 민족자존의 상징인 환구단에서는 1년에 두 차례 제천의식이 거행됐다.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서 환구단으로 향할 때 고종은 정남쪽에 있는 정문 인화문이 아닌 동쪽의 대안문(大安門)을 주로 통했다. 민가가 밀집하고 외국공관이 많이 들어서 있던 인화문 쪽에 비해 대안문 쪽의 도로가 빨리 정비되면서 사람들도 대안문을 주 출입구로 사용하게 됐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된 전각들을 중건하면서 대안문을 수리한 뒤 고종은 1906년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고치고 정문으로 삼도록 했다. 대한문의 영광은 여기까지다. 원래 지금의 태평로 중앙선 부분에 위치했던 대한문은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야 했다.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이 강제체결되고 8월 29일 공포됨으로써 대한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뒤 일제는 조선의 근대화라는 미명하에 대한제국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병탄 이듬해 조선총독부는 환구단 건물을 철거하고 총독부 건물에서 소공로까지 대로를 건설하기 시작한다. 1914년 황토현(광화문 네거리)에서 남쪽으로 환구단을 관통하는 태평정통이 개설되면서 대한문은 원래 위치에서 서쪽으로 옮겨졌다. 1926년 조선총독부는 덕수궁 땅 일부를 매각하면서 덕수궁 해체와 함께 대한문을 그 위치에서 다시 30칸 뒤로 물러나도록 했다. 1961년 서울시는 태평로 도로폭을 6m 확장했는데 이때 대한문도 6m 뒤로 물러나야 했다. 철책이던 덕수궁 돌담길이 복원되고 차도가 생기면서 대한문이 도로 한가운데 덩그맣게 남아 차량 통행을 방해하는 신세가 되자 결국 서울시는 1970년 12월 대한문을 22m 뒤로 옳겼다. 현재 위치한 곳이다. 1년 넘게 천막농성이 벌어지던 대한문 옆에서 엊그제 쌍용자동차 범국민대책위원회와 민주노총 등이 참여한 ‘희망지킴이’가 캠핑시위를 벌였다. 서울 중구청이 농성천막을 철거하고 화단을 설치했지만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시위대의 확성기 소리에 고궁의 고즈넉함은 꿈도 꿀 수 없다. 끝나지 않는 대한문의 시련을 바라보는 마음이 참으로 착잡하고 울적하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실전 같은 훈련

    실전 같은 훈련

    27일 서울 한강시민공원 여의도 지구 일대에서 진행된 한강 수난사고 유관기관 합동 훈련에서 서울 소방재난본부 소속 119 특수구조단 대원들이 사고 환자를 헬기로 이송하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 이스라엘-신의 땅에서 울다가 웃다가 ①悲 로마의 구둣발에 짓밟히랴

    이스라엘-신의 땅에서 울다가 웃다가 ①悲 로마의 구둣발에 짓밟히랴

    ISRAEL 신의 땅에서 울다가 웃다가 강해 보이기만 했던 이스라엘을 옆에서 바라보니 곳곳에 흉터가 선명했다. 이스라엘이 낸 ‘민족과 종교’라는 어려운 문제를 풀면, ‘사해·사막·지중해’가 들어있는 3종 선물 세트가 기다린다. 글·사진 구명주 기자 취재협조 이스라엘관광청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悲 로마의 구둣발에 짓밟히랴 Masada마사다 & Qumran쿰란 강자 앞에서 당당하고 약자 앞에선 따뜻하고 싶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지리멸렬한 싸움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팔레스타인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편향된 마음을 들킨 것인지, 이스라엘 여행은 처음부터 꼬였다. 출국을 코앞에 두고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인 하마스 간의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신문 국제면이 ‘이스라엘-하마스 교전 격화…전면전 가능’, ‘하마스 군 수장 사망’ 등 살벌한 이야기로 도배됐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안전한 나라가 그 어디 있는가. 내 나라만 하더라도 서로 남과 북으로 찢어져 으르렁거리고 있는데 말이다. 다행히 하늘이 도왔다. 출국일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을 때, 현지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휴전에 합의했으니 안심하고 와도 좋다.” 100여 명을 일주일 만에 죽이고 1,000명을 다치게 했다는 이번 전쟁은 시작도 끝도 문을 여닫는 것처럼 간단해 보였다. 짧은 말다툼으로도 마음이 들들들 끓는데, 총과 칼을 내젓는 싸움이 쉬울 리 없다. 이스라엘을 여행한다는 건 피고름이 철철철 흐르는 그들의 과거사를 훑는 과정이다. 이스라엘의 조상은 신에게 아들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했던 아브라함1). 아브라함이 신으로부터 받은 땅은 바로 ‘젖과 꿀이 흐른다’는 가나안이다. 신의 간택을 받았을지언정 아브라함의 자손은 끝없는 고통 속에서 광야를 헤맸다. 그들의 수난사를 읊자면 끝도 없다. 유대인에게 행복한 과거란 노역생활을 하던 이집트를 탈출해 가나안을 되찾았던 순간, 지혜로운 다윗과 솔로몬을 왕으로 삼았던 시절 정도였을 테다. 여기에 십자군전쟁의 박해,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의 삶까지 더하면 ‘신은 정말 있습니까’ 하고 저절로 묻게 된다. 특히 이스라엘에서 로마제국의 발길질은 악명 높았다. 이탈리아를 지도에서 찾아보면, 지중해에 발을 담근 구두 한 짝과 같은 모양새다. 신발의 높다란 굽으로 로마군은 유대인을 마구잡이로 밟아댔다. 척박한 사막을 비집고 자리한 기괴한 마사다Masada 는 로마군과 유대인의 처절한 싸움을 그 자리에서 똑똑히 지켜봤다. 450m의 높이에 들어선 이 요새는 길이 600m, 너비 320m로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AD70년, 로마에서 온 디도 장군의 박해를 피하고자 유대인 960여 명이 마사다로 몰려들었다. 도망자들을 가만히 손 놓고 봐 줄 로마군이 아니다. 1만5,000여 명의 로마군은 마사다를 정복하고자 수를 쓴다.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은 마사다에 오르지 못해 쩔쩔매던 로마군은 요새로 들어가기 위한 경사로를 3년에 걸쳐 만들었다. 경사로가 마사다에 닿았을 때, 그곳에서 로마군을 기다린 것은 유대인의 시체 960구. 유대인들은 로마군에게 능멸을 당하는 대신 죽음을 택하기로 했던 것이다. 죽음을 도울 사람을 제비뽑기로 뽑고 최후의 1인은 자살하는 식으로 그들은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마사다 정상에 오르면 900명이 넘는 유대인이 어떻게 3년간 마사다 꼭대기에서 생활할 수 있었는지 궁금증이 풀린다. 이곳엔 목욕탕, 창고, 채석장, 교회, 수영장 등이 아직도 남아 있다. 마사다의 본래 용도는 왕의 피난처였다. BC40년경 헤롯왕2)은 본인이 도망갈 곳으로 마사다를 지었고 온갖 시설을 갖추었다. 헤롯왕이 만든 시설을 이용하며 목숨을 부지하던 유대인은 빗방울을 모으려 도랑을 만들고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해 비둘기까지 길렀다고 한다. 마사다 정상까지는 케이블카로 금방이건만 많은 유대인은 가파른 마사다를 직접 두 발로 오르며 그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사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쿰란 동굴Cave of Qumran이 있다. 쿰란 동굴 역시 마사다와 마찬가지로 로마에 굴하지 않은 유대인의 삶을 증명한다. 유대교의 한 종파인 에세네파는 쿰란 동굴에 숨어 살던 은둔주의자들이었다. 에세네파는 성경사본을 항아리에 담아 숨겨놓았는데 2,000년이 지난 1947년, 목동이 염소를 찾던 중 항아리를 발견한다. 그 속에서 사해본Dead Sea Scroll으로 불리는 양피지 두루마리 7개가 나왔다. 1)아브라함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다. 그는 ‘아들인 이삭을 제물로 올리거라’는 신의 명령을 따르려 했을 정도로 신에게 충성했다. 현재 물과 기름 같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사실 알고 보면 아브라함을 한 조상으로 삼고 있다. 2)헤롯왕 이스라엘 일대를 다니다 보면 이스라엘을 통치했던 헤롯왕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헤롯왕은 아기 예수가 두려워 ‘어린아이를 모조리 죽이라’고 지시했던 왕으로 유명하다. 악덕한 왕이긴 했지만 그는 건축에 조예가 깊었다. 무너진 예루살렘의 성전을 대대적으로 재건축했으며 자신의 피난처로 철옹성 같은 마사다를 축조했다. 1 로마의 발길질을 피하고자 발버둥친 유대인의 흔적을 이스라엘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국기에 새겨진 별은 ‘다윗의 별’로 불린다 2 검은 양복을 고수하는 정통 유대교인 3 ‘머리 위에 신이 있다’는 의미의 작은 모자, 키파 4 유대인은 예수의 이야기를 닮은 신약성서를 부정하고 구약성서만을 읽는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그것은 누구의 사원인가 Temple Mount성전산 & Western Wall통곡의 벽 마사다와 쿰란을 돌아보던 중 고개를 들었다. 모래바람이 풀풀 날리는 사막 한가운데서 보이는 것이라곤 너른 하늘과 뜨거운 태양뿐. 왜 유대인이 ‘하나의 신’만을 숭배하는지 퍼뜩 이해가 됐다. 그들에겐 이리저리 떠돌며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잡아 줄 강력한 절대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반대로 불교는 ‘숲의 종교’라 불린다. 울창한 숲은 사막과 달리 풍요로워 수많은 식물과 동물이 살아간다. 유일신이 필요 없다. 인간이 곧 신이 될 수 있으며 그저 인간은 자연과 더불어 살면 된다. ‘하늘에 계신 신’을 아버지로 삼는 건 유대교뿐만이 아니다. 유대교에서 뻗어 나온 기독교, 이슬람교도 마찬가지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니 세 종교가 하나로 겹쳐져 보였다. 한 뿌리에서 뻗어 나왔을지언정 결코 세 종교를 같다고 말할 수도 없고, 말해서도 안 된다. 종교의 각축장인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세 종교의 정체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다. 예루살렘을 조망할 수 있는 감람산에 올랐다. 공동묘지 너머로 성전산Temple Mount이 보였다. 성전산은 유대인, 기독교인, 이슬람교인 모두 ‘성지’라 여기는 곳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산인 동시에 예수의 발길이 닿은 곳이며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가 말을 타고 승천한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곳에 서니 세 개의 종교가 동시에 “우리가 진짜”라 외치는 것만 같아 현기증이 났다. 지금 성전산에는 황금색 모자를 쓴 황금사원Dome of Rock이 서 있다. 이슬람교도가 예루살렘을 점령하며 지은 이 사원은 오마르 모스크Mosque of Omar로도 불리며 메카와 메디나만큼이나 중요한 곳으로 여겨진다. 당연히 유대인은 이슬람교도가 축조한 황금사원을 보며 칼을 간다. 그들은 성전을 두 번이나 지었으나 두 번 모두 잃었다. 솔로몬왕 시절 지어진 첫 번째 성전은 전란 중 부서지고 말았고 두 번째 성전은 로마 디도 장군에 의해 처참하게 파괴됐다. 디도 장군은 과시용으로 성전의 서쪽 부분 일부를 남겨 두었는데 그 흔적이 통곡의 벽Western Wall이다. 땅을 잃은 백성은 수천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이 벽 앞에 선다. 세우면 무너지고, 찾으면 또 뺏기고…. 약자의 역사를 이해한다. 우리의 조상도 그랬을 것이다. 전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유대인은 성전을 다시 세울 ‘그날’을 기다리며 통곡의 벽에 머리를 조아렸다. 키파1)를 쓰고 몸을 앞뒤로 흔들며 토라2)를 읽는 그들의 모습은 생경하다. 구레나룻을 돌돌 말고 검은 양복을 입은 정통 유대교도도 여기선 흔하게 보인다. 1) 키파 유대인이 쓰는 테두리 없는 모자. ‘하느님이 내 머리 위에 있다’는 뜻으로 크기는 손바닥 크기 정도. 이스라엘 어디서든 쉽게 살 수 있으니 기념품으로 사 와도 좋다. 2) 토라Torah 유대인은 예수의 행적을 담은 신약성서를 인정하지 않고 구약성서만을 읽는다. 토라는 구약성서의 처음 다섯 권을 일컫는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역사만 있고 역사책 없는 고려인 그들의 150년 通史이자 痛史죠”

    “역사만 있고 역사책 없는 고려인 그들의 150년 通史이자 痛史죠”

    “2013년은 고려인의 선조들이 두만강 너머 연해주 지신허에 최초의 고려인 마을이 들어서고 대륙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 지 150년이 되는 해다. 역사는 있지만 역사서는 없는 이들에게 제대로 된 역사서를 건네주고 싶었다. 다시 일어서려는 고려인들의 손을 잡아주는 계기가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서울신문 편집국장과 문화일보 편집인을 지낸 원로 언론인 김호준(70). 러시아, 아니 유라시아 대륙에 흩어져 사는 50만 고려인의 역사를 정리한 책 ‘유라시아 고려인 150년-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주류성 펴냄)를 냈다. 지난 17일 서울 중구 태평로의 서울신문사에서 만난 신문사 대선배인 저자는 “역사학자가 아닌 한 언론인의 이 무모함에 학계가 어떤 평가를 내릴지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궁금하다”고 했다. 평소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저자가 고려인에 ‘꽂힌’ 건 2002년 여름 키르기스스탄을 방문하면서부터였다. 한국에서 6000㎞나 떨어진 산악지대에 고려인 2만명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들이 어떻게 오지 중 오지인 이곳까지 흘려들어왔고, 무얼하며 먹고사는지 등이 궁금해졌다. 키르기스 고려인에 대한 궁금증이 10년이라는 세월을 거치면서 유라시아 전체의 고려인으로 확대됐다. “그동안 키르기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만 15~6차례 현지답사를 다녀왔다. 현지에서 인터뷰한 고려인만 100명가량은 된다”고 했다. 고려인 이주와 관련된 자료는 보이는 대로 모았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옛 소련 고문서의 비밀이 해제되면서 빛을 본 고려인 강제이주에 대한 기록들이 책 쓰는 데 도움이 됐다. “러시아에도 한국에도 고려인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책 한 권이 없더라. 기가 막혔다. 소련의 민족사 교과서는 수천 명밖에 남지 않는 소수민족까지 다루면서 40여만명에 이르는 고려인에 관해서는 한 줄도 적지 않았다. 해방 후 북한정권 창건에 참여해 건설상까지 지냈다가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간 역사학자 김승화가 1960년대에 출간한 ‘소련 한족사’도 강제이주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고 말할 때는 저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이 책은 고려인의 150년 역사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별로 개괄한 통사(通史)인 동시에 고려인의 한 서린 수난사인 통사(痛史)”라고 정리했다. 저자는 고려인의 역사를 크게 4차례의 대이주를 경계로 정리, 복원했다. 첫번째는 1860년대 조선 땅에서 살 수 없어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로 이주한 것이다. 두번째는 1937년 일본의 러시아 진출 교두보 역할을 할 것이 두려웠던 스탈린에 의해 18만여명이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내몰리며 삶이 뿌리째 뽑힌 시기다. 이어 1953년 스탈린이 죽은 뒤 자유여행이 허용되면서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지로 개별적인 재이주가 이뤄지며 고려인은 1차 전성기를 맞는다. 하지만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15개의 민족공화국으로 분리 독립하면서 경제난과 차별정책에 몰려 10만명의 고려인이 다시 유랑길에 올랐다. 저자는 연해주 고려인을 다룬 앞부분의 상당 부분을 항일 독립운동에 할애했다. 또 2차대전 당시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왔다 남은 사할린 고려인도 빠뜨리지 않고 다뤘다. 저자는 “‘한과 슬픔의 역사’인 고려인의 유라시아 이민사를 정리하면서 방점을 찍고 싶었던 것은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좌절하지 않고 시련을 기회로 만드는 강인함과 개척 정신이다”라면서 높이 평가했다. 150년 고려인의 발자취를 530쪽에 정리해놓았는데도 술술 읽힌다. 저자의 저널리스트로서의 30년 경험이 녹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10여차례의 현지방문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여섯째 딸 최 류드밀라를 비롯해 키르기스스탄 3선 의원 신 로만, 최장수 각료 김 니키포르, 탈영한 북한군 대위 출신 김수봉 부부, 연해주로 이주한 최 니키타, 고려인 출신으로 16년째 주한 우즈베키스탄 대사를 맡고 있는 편 위탈리 등과의 인터뷰와, 이들로부터 들은 일화 등은 기존의 역사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대목들이다. 고려인 작가들의 시와 화가의 작품, 수집한 다양한 사진 자료들도 또 다른 볼거리다. 현재 52만 3000여명의 고려인 가운데 러시아 고려인이 21만 3000명으로 가장 많다. 이 가운데 1만명의 고려인이 한국에 체류하고 있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개척자 정신이라는 DNA를 갖고 있는 고려인들이야 말로 우리(한국)에게 21세기를 함께 열어가야 할 대륙의 인도자가 되고 있다”며 고려인들에 대한 관심을 당부했다. 김균미 문화부장 kmkim@seoul.co.kr
  • 귀국선은 오지 않았다…조국은 사할린을 버렸다

    귀국선은 오지 않았다…조국은 사할린을 버렸다

    “귀국선은 오지 않았다. 1945년 전쟁이 끝난 뒤 사할린에는 ‘이제 곧 귀국한다’, ‘조선인이 먼저 떠난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다. 1949년 7월 23일 마지막 일본인들을 태우고 간 귀국선 ‘운센마루’는 돌아오지 않았다.” 파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귀국선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열여덟 살 청년. 그는 이제 팔순의 노인이 됐다. 경기 안산시 고향마을 영주귀국노인회의 고문 성점모(81)씨는 “일본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러시아 사할린(당시 일본령)으로 끌려간 강제동원 피해자 1세대의 후손이었다. 2010년 12월 가까스로 아버지의 나라에 돌아왔지만 망향의 설움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은 “1965년 한·일 협정에 따라 사할린 동원자의 재산권은 소멸했다.”며 보상을 거부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버티기에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참다 못한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 2295명은 지난 23일 “국가가 사할린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배상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성씨는 이 자리에서 사할린 동포들의 수난사를 기록한 수기 ‘망향의 반세기, 사할린 동포의 눈물 젖은 과거’를 서울신문에 제공했다. 성씨의 아버지는 하루 12시간 넘게 도로 건설에 노동력을 착취당했지만 우편저금 등의 명목으로 빼앗긴 임금을 돌려받지 못했다. 수기에는 한인들의 고통과 분노가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하루 한 줌도 안 되는 콩밥과 간한 청어 한 토막으로 2년을 버텼다. 분노를 참지 못해 반항하면 아이구… 때리고 또 때리고 죽도록 얻어맞았다.”(사할린 탄광에서 일했던 이기복) “어렸을 때 그물로 멸치를 잡던 일이 어제 같다. 그 멸치를 삶은 국물에 국수를 말아 먹으면 왜 그렇게 맛이 있던지.… 한 번이라도 가봤으면 한다.”(노동에 시달리다 현지에서 사망한 울산 출신 김길용) 광복 이후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황국신민화정책’을 통해 일왕에 충성을 강요했던 일제는 전쟁이 끝나자 사할린 동포들의 국적을 박탈한 뒤 모르쇠로 일관했다. 소련은 노동력 확보를 위해 이들을 억류했다. 그들의 모국은 힘이 없었다. 동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소련 국적을 취득하거나 무국적자로 남았다.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배상의 길이 열리는가 했지만 사할린 문제는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성씨는 “그때 ‘조선이라는 것은 잊어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제서야 모국에 대한 그리움을 잠시 접고 러시아어를 배워 모스크바 법과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모국 대신 생존을 택한 이들을 새롭게 가로막은 것은 이념 갈등이었다. 북한과 소련은 한국 정부와 교류가 없었다. 사할린 동포들은 일본과 소련에서 귀향 운동을 시작했다. 경기도 출신 도만삼씨는 1977년 소련 공산당위원회 앞에 가서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외쳤다. 소련은 어쩐 일인지 “귀국 준비를 하라.”고 답했다. 그러나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두만강 기슭이었다. 북한 장교가 ‘환영 인사’를 건넸을 때 도씨는 충격에 휩싸여 기절했다. 성씨는 “도씨 등 조선인 40명이 북한으로 추방된 뒤 한인사회는 공포에 휩싸여 귀향에 대한 말은 입 밖에도 낼 수 없었다.”고 적었다. 귀향의 꿈은 1980년대 고르바초프가 소련 사회를 개방한 뒤에야 찾아왔다. 1990년 6월 제주도에서 사상 처음으로 한국과 소련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있었다. 그해 한국 가수들이 찾아와 사할린에서 위문 공연을 가졌다. 성씨는 “너무 늦었지만 드디어 잃었던 모국을 찾았다.”면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눈시울을 적셨다.”고 회고했다. 1992년부터 영주귀국 사업이 시작돼 지난 3월까지 4000여명의 동포 및 배우자, 장애 자녀가 귀국했지만 망향의 한은 지워지지 않았다. “남한 노인들이 말하더군요. ‘사할린 동포들은 사할린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나랏돈을 받는다’고. 나라를 잃고 설움 속에 헤맨 우리들의 고통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배경헌기자 baenim@seoul.co.kr
  • 수난의 현대사, 축제 통해 되새겨요

    수난의 현대사, 축제 통해 되새겨요

    15~16일 국내 최대 독립·민주화 축제 ‘2012 서대문 독립 민주 페스티벌’이 열린다. 서대문구가 민족 수난사를 상징하는 지역에서 현 세대의 역사 의식을 재정립하고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마련한 행사다. 우선 15일 오후 1시 30분부터 메인무대인 독립문 앞에서 주민과 학생이 참여한 독립·민주 퀴즈 프로그램이 열려 흥을 돋운다. 오후 3시 30분에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통곡의 미루나무’ 아래에서 독립·민주·미래 세대를 하나로 묶는 ‘통곡을 희망으로’ 이야기 콘서트가 진행된다. 바이올리니스트 김종훈, 행복뮤지션 이수나·김수환·김성훈씨가 초청됐다. 오후 6시부터는 본행사로 박원순 서울시장과 문석진 서대문구청장, 독립·민주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풋프린팅 행사가 진행된다. 독립운동가는 1920~1925년 항일운동을 하다 투옥된 김영근·이봉양·임우철·이인술 선생의 발자취를 담는다. 민주인사는 1976년 유신철폐를 주장한 ‘3·1 민주구국선언’과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아름다운가게 이사장 등으로 활동한 이해동(78) 목사와 인권 변호사인 한승헌(78) 전 감사원장 등이 풋프린팅에 참여한다. 구한말 의병장으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서울진공작전을 지휘한 허위 선생과 군부정권에 항거한 고(故) 김근태 전 의원의 반부조상도 제작해 유족에게 전달한다. 오후 7시부터는 초청가수 울랄라세션을 비롯해 치바사운드·바닐라시티·더크랙 등 인디밴드, 국악공연단이 대거 출연하는 열정적인 무대가 펼쳐진다. 16일에는 오후 5시 30분부터 맛깔나는 광대무대인 ‘연희집단 더 광대’ 공연이 열리고 7시부터는 독도를 세계에 알린 가수 김장훈이 열창한 뒤 관객과 솔직담백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문 구청장은 “독립 민주 페스티벌은 세대와 시간을 뛰어넘어 현재 속에서 과거와 대화하고 성찰을 통해 미래로 향하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해학·풍자로 풀어낸 ‘가족의 의미’

    해학·풍자로 풀어낸 ‘가족의 의미’

    “가족은 뭐냐요, 아자씨?”라고 여산은 영필에게 물었다. “김양구, 너 식구가 뭔지 아나?” 하고 정묵은 양구에게 물었다. 여산과 정묵의 질문을 다시 독자에게 돌려본다. ‘가족, 식구라는 것은 대체 무엇이냐?” 성석제를 두고 흔히 ‘탁월한 이야기꾼’, ‘해학과 풍자의 장인’, ‘입담과 재담의 절대고수’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다만 성석제가 2000년대 후반에 펴낸 책을 두고 평론가들은 그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 해학과 익살의 즐거움을 잊어버렸다고 비판했다. 성석제가 최근 펴낸 장편소설 ‘위풍당당’(문학동네 펴냄)은 그에게 부활의 노래가 된 것 같다. 독자에게도 물어보자. 당신에게 가족과 식구는 무엇인가. ‘전국구 조폭’의 보스인 정묵에게 가족과 식구란 “같이 밥을 먹고 같이 방구를 뀌고 똥 싸는데 전혀, 전혀 켕길 것이 없는 사이”(77쪽)이다. 갑자기 이해가 팍 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한반도 국토지리부에서 콕 찍어서 여기구나 할 수는 없지만, 궁벽진 어느 강마을에서 어느 날부터인가 하나둘씩 모여들어 같이 밥을 먹고 함께 똥을 싸는 6명의 수상한 사람들은 과연 가족일까. 그 수상한 사람의 일원인 여산이나 영필에게 가족은 무엇인가. 성석제는 여산의 질문에 영필이 답변하는 대목을 써놓지 않았다. 그들에게 가족이 무엇인지를 서술하지 않은 셈이다. 다만 소설은 가족이거나 식구라고 하려면 의당 어때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감동적으로 잘 묘사해 나가고 있다. 소설의 제목은 ‘위풍당당’이지만 핏줄을 나눈 가족이나 남편, 새아빠 등 법적·제도적 가족으로부터 이지메를 당하고 도저히 세상에는 발붙일 곳이 없어 강마을로 흘러 들어온 6명의 주인공들은 애초부터 위풍당당 하고는 아주 거리가 멀다. 돈도 권력도 명예도 없고, 일부는 건강도 잃었다. 또 ‘전국구 조폭’ 20여명은 똥을 밟고 미끄러지고, 똥통에 빠지고, 똥물에 튀기고, 똥통에 갇히는 등, 조폭을 이렇게 다뤄도 되나 할 정도의 ‘조폭 수난사’를 겪고 있어 역시 위풍당당이라고 할 수는 없다. 대체 왜 위풍당당인거냐? 성석제는 6일 전화통화에서 “주인공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여산이 조폭 보스 정묵과 대표적으로 대결을 벌일 때 그 모습이 ‘시골의 용맹한 장닭’처럼 위풍당당해서 그것을 묘사한 것”이라고 말했다. 고양이나 개와 비교하면 사실 큰 힘도 없으면서 암탉들과 병아리들을 보호하기 위해 시뻘건 벼슬을 좌우로 털면서 거만스럽게 걸어다니는 시골의 장닭을 상상하면 되겠다. 몬도가네 스타일로 몸에 좋다면 벌의 애벌레나 구더기까지 먹어치우던 여산에 대한 묘사를 감안하면, 장닭하고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소설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가족, 식구가 혈연에 의존하거나 제도에 의지하지 않는 자발적인 가족이어도 통념적인 가족에 비해 훨씬 서로를 잘 돌봐 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조폭의 폭력에 노출됐을 때, 짧은 시간이지만 정을 나누고 살았던 사람을 위해 용감무쌍하게 대항하는 모습은 눈물겹다. 가족이라면 마땅히 지켜주고, 마땅히 보호해 줘야 했을 가치와 권리는 가족도 아닌 사람들에게 돌려받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 사이에서 가족애라는 것이 싹트게 된다. 이런 가족애는 ‘전국구 조폭’ 정묵의 식구론과 비교하면 확실하게 다가온다. 정묵의 식구론은 그의 자연주의적 발언과는 달리 절대적인 위계질서 안에서 절대적인 복종과 절대화된 폭력으로만 가치를 인정받는 식구이기 때문이다. 정묵은 신자유주의 시대의 효율성과 경쟁을 조직 안에서 내재화시키기도 했다. 정묵의 조폭 조직은 그래서 마치, 한국사회,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에 휘둘리는 지구촌의 모습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성석제 소설은 그의 해학의 코드를 읽을 수 있을 때만 해학과 풍자와 재담에 접근할 수 있다. 이번 소설의 키워드 중 하나는 ‘똥’이다. 갑자기 흥부가 한 대목이나, 안동 하회탈춤의 한 대목이 들리는 듯하다. 얼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이스라엘, 성지와 날선 긴장이 공존하는 곳

    이스라엘, 성지와 날선 긴장이 공존하는 곳

    이스라엘의 정신적 수도, 예루살렘의 구시가지(Old City)는 1㎢의 성벽으로 둘러쳐진 땅입니다. 이 좁은 땅 안에 유대교와 이슬람교, 기독교의 성지가 다 들어 있습니다. 아랍인과 유대인, 그리고 기독교를 믿는 여러 민족이 성벽 안에 나뉜 4개의 구역에 뒤섞여 삽니다. 예루살렘은 기원전 10세기 초 다윗 왕이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삼은 뒤, 약 3000년 동안 외침을 겪으며 부서지고 재건되기를 40여 차례나 반복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성지를 둘러싼 민족 간 갈등은 계속되고 있지요. 종교 성지와 날선 긴장이 늘 공존하는 곳, 이스라엘을 다녀왔습니다. ●무슬림과 유대인의 공통 성지 ‘바위의 돔’ 사원 벤구리온 국제공항에서 동쪽으로 약 50분간 차를 달린다. 무장한 군인의 검문을 통과해 예루살렘에 들어서면 곧 황금빛 돔 지붕이 모습을 드러낸다. 예루살렘 사진에 자주 등장하는 이 이슬람 사원의 이름은 ‘바위의 돔’이다. 사원 가운데 놓인 널찍한 바위 때문에 이름지어졌다. 바위는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가 말을 타고 승천한 자리인 동시에 아브라함이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제단이라고 알려졌다.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공통 성지다. 구약성서는 또 이 바위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 언약궤(모세의 십계명 석판을 보관했던 도금형 나무상자)를 안치한 장소라고 전한다. 이스라엘과 요르단은 1967년까지 이곳을 두고 싸웠다. 다른 아랍국가들도 탐을 내는 중요한 성지다. 이스라엘의 땅이 된 뒤인 지금도 입장할 때는 무장 군인의 소지품 검색을 받는다. 반바지나 어깨가 드러난 옷을 입어도 입장이 제한된다. 사원의 벽면은 푸른빛의 페르시안 타일과 코란의 문구로 장식돼 있다. 금요일이 되면 수천 명의 무슬림들이 사원을 찾아 기도한다. 다른 종교 시설 출입을 엄격히 금하는 유대인들도 아침 한 차례 이스라엘 군의 보호를 받으며 마당까지 입장한다. 적대적인 두 종교가 긴장 속에 공존하는 시간. 그 옛날 로마와 십자군, 무슬림이 공통으로 손에 넣고 싶어 하던 곳도 바로 이 바위를 중심으로 한 모리야 산과 예루살렘이었다. ●유대인의 자존심-통곡의 벽 ‘바위의 돔’ 사원 바로 아래엔 저 유명한 ‘통곡의 벽’이 있다. 솔로몬이 기원전 957년에 처음 세운 성전의 서쪽 벽이다. 유대인이 바빌로니아로 강제 이주 당할 무렵 처음 무너졌다. 페르시아에 의해 해방된 유대인이 재건한 성전과 벽을 로마 시대에 헤롯왕이 대대적으로 개축했다. 서쪽 벽은 폭 485m의 거대한 벽으로 거듭났지만 로마의 티투스 장군이 6년 만에 다시 무너뜨린다. 티투스 장군은 서쪽 벽의 일부를 남겨 놓았다. 유대인은 서기 135년 예루살렘에서 완전히 추방당하고 비잔틴 시대가 돼서야 1년에 한 번 들어올 수 있게 됐다. 유대인은 해마다 성전이 무너졌던 날 성안으로 들어와 서쪽 벽의 잔해를 두드리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통곡은 근현대까지 이어졌다. 유대인이 지금처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된 건 1967년 3차 중동전쟁이 끝난 뒤부터다.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남녀 유대교인이 따로 벽 앞에 선다. 기도하는 모습이 제각각이다. 벽에 머리를 대고 서서, 의자에 앉아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어떤 이는 허리를 연신 구부렸다 펴며 기도에 열중한다. 독실한 유대교인 중 살림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따로 직업이 없이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 벽의 높이는 18m 정도. 벽돌 크기는 위로 올라가면서 달라진다. 여러 번 다시 세운 흔적이다. 돌 틈엔 쪽지가 무수히 꽂혀 있다. 오스만제국 시대부터 전 세계에서 순례 온 유대교인들이 소원을 적어 끼워 넣고 기도했다. 교인이 아니더라도 소원을 적어 꽂아 보는 것도 좋겠다. 쪽지는 정기적으로 수거된다. 운이 좋다면 서쪽 벽 부근에서 군인의 선서식, 13세가 된 아이의 유대교 성인식 등을 구경할 수 있다. 해가 진 뒤 성곽 서쪽 다윗의 탑 박물관에서 운영하는 레이저 쇼 ‘예루살렘 라이트 더 나이트’(Jerusalem Light the Night)는 예루살렘의 4000년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성벽 안쪽 면을 스크린 삼아, 프로젝터로 영상물을 보여 준다. 외국인을 염두에 둔 듯 언어를 최대한 배제하고 시청각으로만 의미를 전달한다. 여러 대의 프로젝터가 나눠 비추는 하나의 영상은 형태와 내용이 성벽 모양에 맞춰 치밀하게 계산돼 있다. ●기독교의 수난사-비아 돌로로사와 성묘교회 오는 8일은 부활절.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가 죽은 뒤 부활했다는 500m의 길 역시 이 좁은 구시가지 안에 있다. 이 십자가의 길(비아 돌로로사, Via Dolorosa)은 전 세계의 순례자를 끌어들인다. 지난해 이스라엘을 방문한 한국인 약 3만 2000명 중 90%가 이 길을 찾았다. 길은 14개의 지점으로 나뉘어 있다. 예수가 재판을 받은 빌라도 법정 자리부터 로마군에 희롱당한 곳, 십자가를 지고 처음 쓰러진 곳 등을 지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어 묻힌 곳까지 지점마다 교회나 작은 예배당이 있다. 통곡의 벽이 유대교의 수난을 상징한다면 이 십자가의 길의 종착지인 성묘교회는 기독교의 고난을 대변한다. 지금의 교회는 십자군에 의해 세워진 이래 개보수를 계속해 온 것이다. 10지점부터 14지점까지가 교회 안에 들어있다. 입구로 들어서면 한 사람 누울 정도의 편평한 돌이 보인다. 예수의 시신을 놓았다는 13지점이다. 윗면은 닳아서 반들반들하다. 신자들이 무릎을 꿇고 돌 위에 물을 붓는다. 돌을 정성스럽게 닦다가 입을 맞추기도 하고, 눈물을 펑펑 쏟기도 한다. 예수가 묻히고 부활했다는 14지점은 작은 교회당처럼 생겼다. 밖에선 토굴 같은 내부를 들여다볼 수 없으므로 길게 줄을 서서라도 들어가 보기를 권한다. 교회 주변의 크리스천 구역 상점가는 특히 쇼핑하기 좋다. 간혹 남다른 솜씨로 만든 기념품들을 찾을 수 있다. ●예루살렘 밖 여행지들-텔아비브·마사다 요새 예루살렘 성지 순례가 아니라도 이스라엘엔 즐길 거리가 충분하다. 사막의 모래바람과 터번 쓴 아랍인을 상상했던 여행자는 텔아비브의 도시 풍경에 충격 받을 수도 있다. 짙은 청색 바다에 이는 파도는 아침부터 서퍼들을 불러들이고, 파라솔 밑에 누운 비키니 여성들은 남성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선착장에 늘어선 수많은 요트의 돛대들은 하늘을 찌를 듯 빽빽하게 솟아 있다. 육지 쪽으로는 고층빌딩들이 스카이라인을 만든다. 아침엔 해안가 산책로를 따라 남쪽으로 욥바까지 걸어가 그리스 산토리니 뺨치는 해안 도시 풍경을 감상하고 해가 떨어지면 텔아비브 도심으로 들어가 ‘잠들지 않는 도시’를 즐길 수 있다. 사해 인근의 마사다 요새도 빠트려선 안 된다. 유대인이 로마군을 상대로 2년간 최후의 항전을 벌인 곳. 434m 높이의 벼랑으로 둘러싸인 약 7만㎡의 편평한 땅에 지은 요새다. 로마군이 흙을 쌓아 경사로를 만들어 요새를 함락했을 때, 유대인은 굴복 대신 죽음을 택했다. 오늘날 이스라엘 장교 후보생들은 훈련 마지막에 이 언덕 꼭대기까지 행군한 뒤, 뜨는 해를 보며 임관 선서를 한다. 어떤 적에게도 항복하거나 민족을 내주지 않겠다는 의미다. 가파른 언덕을 걸어 오르려면 40분 이상 걸린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를 수도 있다. 창밖에 펼쳐지는 풍경도 그럴싸하지만 꼭대기에 오르면 사해가 한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최고의 파노라마를 볼 수 있다. 글 사진 예루살렘·텔아비브(이스라엘) 김민석기자 shiho@seoul.co.kr ●여행수첩 날씨 3~4월이 여행 적기다. 우기가 끝날 무렵이라 광야에 초원이 형성되고 꽃이 핀다. 햇살이 따갑고 일교차가 크므로 선글라스와 겹쳐입을 얇은 옷 여러 벌을 준비하는 게 좋겠다. 바람도 강하다. 예루살렘 국제마라톤 예루살렘 국제 마라톤의 풀, 하프, 10㎞ 코스는 구시가지를 통과하고 박물관이나 대통령 관저 등 시내 명소도 지나간다. 지난달 16일에 2회째를 맞은 대회는 세계 40여개 국가에서 1만 5000명의 마라토너가 참가했다. 지난해 첫 대회보다 50%정도 늘어난 수치다. 내년 대회는 3월 1일 열릴 예정인데, 시는 스폰서 기업의 기념품 외에도 참가자에게 시내 관광지와 음식점에서 할인혜택을 받을 수 있는 쿠폰 책자를 준다. 환전 우리나라에선 이스라엘 세켈(1세켈=약 303원)을 환전할 수 없다. 달러를 가져가 현지에서 환전하는 게 좋다. 달러도 통용은 되지만 거스름돈을 세켈로 받는 등 손해 보는 경우가 많다. 시내에 수수료를 받지 않는 환전소가 있다. 안식일 피할 수 없으니 즐겨야 한다.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까지는 유대인의 휴일인 안식일(샤바트)이다. 유대인은 이때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상점은 오후 2시를 전후로 문을 닫는다. 선물 구시가지의 크리스천 구역 상점을 이용하면 좋다. 안식일에도 문을 닫지 않고 신앙과 상관없이 살 물건이 많다. 가톨릭 신자의 선물을 사려면 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성물 판매점을 찾아가길 권한다. 은퇴한 수도사들이 직접 깎은 십자가나 성모상, 묵주 등이 예술작품에 가깝다. 값은 바깥보다 오히려 싸다.
  • [지방행정의 달인 수상자 릴레이 인터뷰] (5) 전기·기계-시설환경-소방 분야

    [지방행정의 달인 수상자 릴레이 인터뷰] (5) 전기·기계-시설환경-소방 분야

    달인 릴레이 인터뷰 5편에서는 겨울철 눈을 신속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는 제설특수차량을 만든 공무원을 만났다. 낙동강 하류 지역 원수요금 차등제를 적용해 34억원의 재정 수익을 올리고, 섬진강 댐 맑은 물을 골고루 이용활 수 있게 한 주인공도 소개한다. 신재생 에너지의 대부, 구조견과 함께 실종·재난 현장에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는 구조견 핸들러의 활약상도 들어봤다. 6편에서는 행정·정보통신 분야 달인을 소개한다. 김동찬 서울 성동구청 토목과 제설현장 관리팀장 친환경 다목적 제설차량 개발 ‘제설 박사’. 서울 성동구청 토목과 김동찬(58·기계6급) 제설현장 관리팀장의 별명이다. 겨울이면 몸값이 훌쩍 더 올라가고, 폭설이 쏟아지는 날이면 몸이 열이라도 모자라는 사람이 그다. 김 팀장은 레미콘 차량을 개선한 염화칼슘 자동 살포기를 개발, ‘제설의 달인’으로 선정됐다. “누구한테 인정 받자고 덤벼든 일은 애당초 아니었어요. 그래도 여기저기 알아주는 데가 많으니 새삼 큰 보람을 느끼게 되네요.” 김 팀장은 내부의 권유로 달인에 도전했다. 제설작업에 관한 한 그의 아이디어와 노력을 당할 사람이 없을 거라는 확신을 주변에서 먼저 했다. “천성적으로 기계를 다루는 일에는 재주가 좀 많았던 것 같다.”며 웃는 그가 공직에 발을 들인 건 1978년. 군 운전병으로 제대한 뒤 모셨던 장군의 ‘연줄’로 동대문구청에서 운전 일을 시작하게 됐다. 2년 뒤 지금의 성동구청으로 옮겼고 1990년 기계직으로 직역을 바꿨다. 성동구청에서 그가 계속 맡았던 업무가 제설이었다. 8t 덤프트럭 적재함에 올라타 모래와 염화칼슘을 일일이 섞어가며 도로에 뿌리는 고된 수작업을 도맡았다. 미끄러운 눈길에서 위험천만한 고비를 넘긴 것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워커힐 고개에서는 바퀴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타고 있던 제설 트럭이 인도를 덮쳐 인명사고를 낼 뻔하기도 했다. 제설작업 이후 염화칼슘이 닿은 쇠물질이 부식되고 나무가 말라죽는 등의 환경피해도 늘 고민거리였다. 그렇게 고민을 거듭하기를 10여년. 2006년 레미콘을 개량해 그 모든 숙제를 해결할 수 있는 친환경 다목적 제설차량(로드렉스)을 개발해 특허를 내는 데 성공했다. 로드렉스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기존의 제설장비가 한번에 고작 염화칼슘 4t과 소금 5t만 실을 수 있었던 것을 단박에 염화칼슘 10t에 소금 14t으로 적재량을 두세배나 끌어올렸다. 특히나 밀폐형인 로드렉스에는 제설제를 미리 실어둘 수가 있어 업무효율 만점이었다. “이전에는 눈예보를 듣고난 뒤에 제설제를 차에 싣고, 눈발이 쏟아질 때 부랴부랴 현장출동하면 도로사정은 이미 엉망이곤 했다.”면서 “로드렉스는 미리 제설제를 실어놓고 항시대기할 수 있어 기동성이 비교가 안 될 만큼 뛰어나다.”고 자평했다. 염화칼슘 살포량을 48단계 디지털 기능으로 조절할 수 있는데다 토양오염을 크게 줄이는 소금을 염화칼슘과 동시에 뿌릴 수 있어 친환경 기능도 주목받았다. 100년 만의 폭설이 서울을 덮친 2010년 1월에는 진가를 제대로 발휘했다. 그해 6월엔 서울창의상 우수상을 받았다. 구청 수입에도 적잖이 기여하고 있다. “용산구청, LH공사에 로드렉스를 임대해 주고 있고 얼마전엔 완주시청과 달성군에서도 장비 문의를 해왔다.”며 멋쩍은 듯 웃었다. “어느새 정년도 몇해 남지 않았네요. 앞으로는 이상기후로 폭설도 잦아질 거라는데, 제설 노하우가 부족한 지방에 열심히 기술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고말석 부산시 상수도사업본부 정수계장 낙동강 식수 ‘차등요금제’ 주도 시설환경분야 달인으로 선정된 부산시 상수도사업본부 고말석(54·6급) 정수계장은 부서를 옮길 때마다 반드시 한 가지 이상 업무 개선을 하는 아이디어맨이다. 2003년부터 시행한 낙동강 물 요금 차등요금제 등 수많은 그의 ‘작품’이 행정 곳곳에 있다. 차등요금제는 이전만 하더라도 낙동강 하류지역인 부산시민은 대구 등 상류지역 주민과 똑같이 물값을 내고도 갈수기 때 수질이 떨어지는 원수를 먹어야 했다. 낙동강 물을 독점 공급하는 한국수자원공사가 상·하류 구분없이 원수 동일요금제를 적용해서다. 갈수기가 되면 생화학적산소요구량(BOD) 기준 3급수 이하로 수질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되풀이됐다. 하류의 3급수를 먹는 부산과 경남 일부 지역 주민은 동일요금제에 불만이 커졌다. 고 계장은 이 문제가 부산뿐 아니라 낙동강 하류지역인 마산, 창원 등 전체의 문제로 접근하도록 방향을 바꾸어 낙동강 하류 9개 지자체가 공동대응에 나서는 한편, 공청회 개최 등을 통해 정부를 압박했다. 결국 무릎을 꿇은 정부는 2003년 BOD 기준 3급수 이하일 때 원수요금 차등요금제를 적용하도록 댐용수 공급규정을 고쳤다. 그는 “이 제도 시행으로 지난해까지 34억원의 재정수익을 올렸고, 수자원공사로 하여금 낙동강 상류댐 운영을 선진화해 하류지역에도 맑은 물을 공급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뿐 아니라 부산명지소각장에 근무할 때인 2006년에는 당시 전국에서 소각폐열 이용률 꼴찌인 이 소각장의 활성화 방안을 마련했다. 당시 소각장은 주변에 폐열사용 인프라가 없고 원거리 산업체 폐열판매는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방치하고 있었다. 이를 안 그는 폐열수송배관과 관련 시설을 설치하기로 하고 민자기업을 유치해 100억원의 예산을 절감했다. 2008년부터 본격 소각폐열 생산 판매에 들어간 명지소각장은 그의 아이디어 덕분에 연간 40억원의 재정수익을 올리고 있다. 또 20여명의 일자리창출과 연간 1300만t의 LNG 수입대체효과를 거뒀다. 이를 싼값에 공급받은 녹산공단의 제조업체들도 매년 20억원 상당의 연료비 절감혜택을 보고 있다. 앞서 2000년에는 민간부분의 환경경영체제(ISO)를 상수도행정에 접목시켜 정수장의 공정별 표준운영 매뉴얼을 만들었다. 그는 이런 업무개선 공로로 2007년 사무관(5급) 특별승진 우선권을 받은 것을 비롯해 환경부,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 등 장관급 표창 3회, 부산시장 표창 3회 등을 받았다. 또 쓰레기매립장 침출수 처리공정 개선으로 환경공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등 끊임없이 노력하는 학구파이기도 하다. 고 계장은 “공무원이 조금만 더 신경 써서 시민에게 다가가는 행정을 한다면 시민편익을 더욱 증진시킬 수 있다.”며 “앞으로 더 안전하고 맛있는 수돗물을 시민에게 공급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글 사진 부산 김정한기자 jhkim@seoul.co.kr 최덕용 순천소방서 산악구조대 전국 최고 ‘인명 구조견 핸들러’ 순천소방서 산악구조대 소속 최덕용(39) 소방교는 국내 최고의 구조견 핸들러다. 전남에서 유일한 인명 구조견 핸들러인 최 소방교는 다른 소방대원과 달리 열악하고 험난한 구조 현장에서만 모습을 보이는 억센 사나이다. ‘소방분야 행정의 달인’으로 선정된 최 소방교는 지난달 소방방재청 주관으로 열린 전국인명구조견 경진대회에서 최고의 인명구조견 핸들러에게 수여되는 ‘탑독’(Top Dog)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탑독은 인명구조견의 복종, 장애물, 산악수색 등을 평가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구조견과 핸들러에게 부여하는 명칭이다. 그는 경력 8년의 베테랑으로 인명구조견 ‘무한’이와 함께 각 분야에서 최고 득점을 얻어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핸들러에 선정됐다. 핸들러는 전문적으로 개를 다루는 사람을 통칭하는 말이다. 최 소방교는 2003년부터 험난한 산악 등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의 조난 사고 현장 등에서 인명 구조견을 활용한 구조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전국 구조견 경진대회에서 종합우승을 2회 차지하고, 2010년 중앙119구조단에서 실시한 산악구조 교육과정에서는 1등으로 수료했다. 수난사고 시에는 전문다이버로 활약하는 등 만능 구조 요원이다. 지금까지 2000여건 2300여명을 구조했다. 실종·재난 현장에 빠짐없이 출동해 20여만명에게 도움을 주는 탁월한 구조 능력을 발휘했다. 사고 예방 홍보 활동에도 열성이다. 인명구조견을 활용한 홍보 활동도 300여차례나 펼쳤다. 그의 활약은 해외로까지 발을 넓혔다. 국제구조대원 인명 구조견 핸들러 분야 구조대원으로 선발돼 중국, 아이티, 일본의 지진과 해일 등 11곳의 대형 참사 현장에서 인도주의 정신을 실천하는 등 해외 재난 시 민간외교관 역할도 성실하게 수행했다. 여름철에는 인명구조견을 활용한 ‘섬진강 안전지킴이’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구조견을 이용한 전국 최초 119수상 구조견 순찰대를 운영해 시각 효과를 이용한 효율적인 물놀이 안전 예방과 인명구조견과 함께하는 이색적인 안전홍보로 섬진강 주변의 사고 우려 지역의 순찰을 강화하는 등 피서객을 지키는 수상안전요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구조활동 이외에도 지역의 소외된 독거노인 가정을 찾아 가스·전열 기구에 대한 점검과 소화기 무상증정, 단독경보형 감지기 설치로 화재예방에 적극 나서고 있다. 최근 3년 6개월 동안 독거노인 봉사 활동을 300회 이상 펼치는 등 주변의 불우이웃돕기와 농번기 일손 돕기로 따뜻한 소방상 구현에도 앞장서고 있다. 최 소방교는 “사람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힘든 환경을 헤쳐 구조구급 활동을 했을 때 어려운 여건 이상의 큰 보람을 느낀다.”며 “핸들러로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 목숨을 던지고, 소방 조직 발전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글 사진 최종필기자 choijp@seoul.co.kr 이상록 원주시 청사관리계장 ‘지열 냉난방’ 국내 첫 도입 강원 원주시 청사관리계 이상록(52·지방공업6급) 담당은 지열과 생활폐기물을 활용한 국내 신·재생에너지의 대부로 통한다. 국내에서 저탄소 녹색성장이란 국가정책이 발표되기 훨씬 이전부터 공공건물에 지열과 생활폐기물을 이용한 냉난방시스템을 도입하고 전국에 전파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왔기 때문이다.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는 땅속의 지열을 활용한 냉난방시스템 도입은 2003년 원주 국민체육센터 신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전국에서 가장 비싼 도시가스요금으로 체육관 안에 마련할 수영장의 규모를 절반으로 줄여야 할 만큼 운영비 문제는 심각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설비를 담당하던 이씨가 나서 처음으로 지열 냉난방시스템을 도입, 에너지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여 나갔다. 지열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연간 에너지 비용의 52%(2억 5000만원)를 줄일 수 있었다. 국민체육센터는 일반 건물보다 2배 가까운 16시간을 운영하고 자연녹지지역으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이곳에서 지열이 실패하면 앞으로 지열은 발 붙일 곳이 없다.’는 신념으로 추진한 것도 성공요인이다. 그 뒤 지열 설비의 공공기관 워크숍과 에너지관리공단 주관의 지열 성공사례 발표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해 지열의 장점을 알리면서 지열 냉난방시스템이 국내에 정착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지열은 그 뒤에도 원주종합체육관 등 공공건물에 속속 적용되며 획기적인 성과를 얻고 있다. 2008년부터는 생활폐기물을 건조, 압축, 성형해 연료로 사용하는 생활폐기물(RDF) 전용보일러 냉난방시스템을 시청사에 도입해 에너지를 절감하고 있다. 시청에서 사용하는 냉난방 에너지원 가운데 가스가 여전히 60%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40%의 냉난방 에너지원으로 생활폐기물을 사용하며 에너지 절감 효과를 얻고 있다. 절감 효과는 2010년 21.1%, 지난해 22.2%에 이른다. 원주 RDF에너지센터는 이후 전국에서 모여드는 초등생, 대학생, 각종 연구소 연구원, 해외 바이어들의 견학과 학습장소가 되고 있다. 지금까지 이곳을 다녀간 외국인만 해도 미국 뉴욕주 상원의원을 비롯해 요르단, 브라질, 태국, 중국 등 다양하다. 이밖에 겨울철 미끄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파이프 매설공법을 개발, 시청사 진입광장에 온돌구조의 파이프를 깔았다. 이 같은 신재생에너지 성공사례로 이씨는 2007년 국무총리상, 2008년 에너지 대상, 지난해 원주시 베스트공무원, 청백봉사상 수상 후보자에 선정되기도 했다. 또 노하우 전파를 위해 전문강사와 연구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이씨는 “영구 배수시설을 이용한 냉난방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그동안 현장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을 활용해 새로운 에너지원 개발에도 온힘을 다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글 사진 원주 조한종기자 bell21@seoul.co.kr
  • “남은 동료도 구했어야…” 슬픈 소방 영웅

    “남은 동료도 구했어야…” 슬픈 소방 영웅

    전날 밤 번진 가야산의 불길은 동이 트도록 잡히지 않았다. 충남 서산소방서 신동철(33) 소방교는 마침 쉬는 날이었지만 한걸음에 달려갔다. 3월 19일 충남 서산시에 있는 가야산 신선대에서 벌어진 산불 사고였다. 새벽에는 충남소방본부 소속 헬기 등 5대의 헬기까지 투입돼 근처 대곡저수지에서 물을 퍼와 산불 진화에 속도를 붙였다. 그러다가 오전 6시 30분 저수지에서 물을 푸던 헬기 중 한 대가 추락했다. 밤새 불을 끄던 신 소방교는 200m 남짓 떨어진 대곡저수지로 출동했다. 헬기는 이미 물에 가라앉아 있고, 두 사람이 허우적대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였다. ‘동료가 위험하다.’ 곧바로 물에 뛰어들었다.가까스로 헬기 조종사 등 2명의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그는 한동안 우울함과 자괴감 속에 머물러야 했다. 또 다른 동료인 헬기 정비사는 이미 숨이 멎은 채로 구해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좀 더 빨리 도착했다면, 좀 더 물속을 과감히 뒤져봤다면 하는 미련은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신 소방교는 7일 소방방재청이 마련한 ‘올해의 최고 영웅 소방관’으로 뽑혀 행정안전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소방관으로서 최고의 영예다. 하지만 그는 이날 역시 새삼스러운 자괴감을 느꼈다. “며칠 전 동료를 떠나 보낸 사람이 어울리지 않게 상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상을 받아야 할 진짜 영웅은 따로 있는데….” 시상식장에서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려 해도 어색하기만 했다. 목숨을 구해도, 상을 받아도 가까운 이의 죽음을 늘 등에 업고 사는 것이 소방관의 숙명임을 신 소방교는 이날 다시 한 번 절감해야 했다. 이 밖에 올여름 강원도 춘천과 서울 우면산에서 발생한 산사태 현장에서 많은 인명을 구조한 강원소방서 송병익(50) 소방경과 서울 서초소방서 김봉선(43) 소방장도 영웅 소방관으로 선정됐다. 또 서울외곽순환도로 사패산터널 화재 사고 때 인명 피해를 막은 인천 부평소방서 박창석(48) 소방장, 여름 수난사고와 산악사고에 출동해 인명을 구한 충북 증평소방서 김갑수(45) 소방장도 영웅 소방관으로 뽑혔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사설] 불에 탄 국보1호, 폭우에 훼손된 보물1호

    우리 문화재가 악마의 발톱에 노출된 채 몸살을 앓고 있다. 불과 3년 전 국보 1호 숭례문(남대문)이 방화로 잿더미가 되는 참사를 겪고도 문화재 관리는 여전히 부실한 상태다. 이번엔 보물 1호인 서울 흥인지문(동대문) 문루의 지붕 일부가 폭우로 떨어져 나가는 일이 벌어졌다. 104년 만의 기록적인 폭우라고 그렇게 아우성을 쳤으면 당연히 그에 대비하는 ‘보물지키기’ 작전이라도 펼쳤어야 했다. 그러나 최소한의 문화재 보호의식도 찾아보기 힘들다. 관할 종로구청은 사고가 언제 일어났는지조차 몰랐다. 심지어 시민의 신고를 접수하고도 나흘이나 지나서야 보수작업에 들어갔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아무리 문외한이라도 한번 망가진 문화재는 원형 회복이 쉽지 않다는 것쯤은 알 것이다. 선제적인 보호대책은 고사하고 ‘응급환자’처럼 다뤄야 할 문화재 훼손 사건을 며칠씩이나 방치하다니 나사가 빠져도 한참 빠졌다. 엄중히 문책해 다시는 이 같은 문화재 수난사태가 없도록 해야 한다. 이번에 훼손된 것은 용마루와 연결되는 내림마루 부분으로, 용마루의 삼화토가 제대로 배합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부실공사라는 것이다. 또 폭우가 내리면 붕괴될 위험이 있다는 경고음도 들린다. 보수작업에 앞서 정밀진단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문화재 보호·관리에 대한 인식을 가다듬는 일이 중요하다. 전국적으로 수난을 겪고 있는 문화재는 한둘이 아니다. 선사시대 유적인 반구대 암각화(국보 285호)는 46년째 침수로 날로 훼손돼 가고 있다. 2015년까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본목록에 등재하겠다고 큰소리 칠 때가 아니다. 보다 내실 있는 문화재 대책이 아쉽다. 문화재는 문화재청 전문가나 담당 구청 공무원이 대신 지켜주는 게 아니다. 이번 흥인지문 훼손 사실이 시민의 제보로 드러났듯 진정한 문화재지킴이는 바로 깨어 있는 국민 각자임을 명심해야 한다.
  • “경찰 수사개시 안 돼”… 평검사 집단 반발

    검·경 수사권 조정을 둘러싸고 경찰이 검사의 수사지휘권을 전면 배제하자고 주장한 것에 대해, 전국의 평검사들이 전체회의를 여는 등 집단으로 반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검사의 수사지휘권은 형사소송법 196조 1항 “수사관, 경무관, 총경, 경감, 경위는 사법경찰관으로서 검사의 지휘를 받아 수사를 하여야 한다.”에 근거한다. 서울중앙지검은 16일 평검사 회의를 열자는 제안이 있어 수석검사 회의를 여는 등 광범위한 의견 수렴에 들어갔다. 중앙지검 관계자는 “20여명이 참석한 수석검사회의에서 평검사회의 개최 여부에 대해 논의한 결과 ‘정부 조정안을 좀 더 지켜보자’고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중앙지검이 갖는 위상과 상징성 때문에 자제 움직임이 있었다.”며 “상황이 급박하면 언제든지 평검사회의가 열릴 것”이라고 전했다. 앞서 서울남부지검 평검사 48명은 지난 15일 점심시간에 전체회의를 열고 수사권 조정에 대한 대책을 논의한 뒤 김준규 검찰총장에게 서면건의를 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검사 지휘 규정 삭제나 경찰 수사 개시권이 사실상 인권 보호를 후퇴시키는 것이라 반대하며 검찰, 경찰 조직의 이해를 떠나서 국민 인권 보호에 대해 심도 있는 검토가 필요하고 남부지검 평검사는 인권 보호와 사법 실현을 실천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건의서를 김 총장 앞으로 전달했다. 청주지검도 16일 비슷한 내용의 건의서를 김 총장에게 전달했다. 서울 동부지검도 이날 긴급 간부회의를 가졌다. 동부지검 관계자는 “경찰이 검찰과 대등한 관계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는 결국 수사지휘권을 달라는 소리와 같다.”며 “많이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북부지검 관계자는 “평검사들 분위기가 매우 심상찮다.”며 “검찰 수뇌부의 미온적인 대처에 대한 성토가 많다. 초기에 대응을 잘못했다.”고 전했다. 부산지검에서는 부장검사와 평검사 등 6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서 경찰의 잘못된 수사 관행을 지적하는 평검사들의 성토가 이어졌다. 광주지검도 긴급회의를 열어 대검에 건의문을 전달하기로 했고, 창원지검과 수원지검 평검사 회의에서도 격앙된 반응이 나왔다. 순천지청의 한 수석검사는 검찰 내부통신망(e-pros)에 “이제 더는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 같다. 공소장, 불기소장은 내일도 쓸 수 있지만 이번 논의는 늦으면 역사에 길이 남을 검찰 수난사를 쓰게 될지도 모른다.”며 전국 검찰청의 평검사 대표들이 모이는 수석검사회의를 제안하기도 했다. 검찰 관계자는 “1970~80년대 독일에서도 우리와 유사한 수사권 논쟁이 벌어졌지만 독일 국민은 경찰권이 ‘초권력’으로 등장하는 것을 우려해 경찰 수사의 사법적 통제가 필요한 것으로 귀결됐다.”고 말했다. 법무부는 프랑스, 일본 등도 검사가 수사지휘권을 갖는다고 밝혔다. 대검 관계자는 “평검사 대부분이 경찰과 잦은 대면을 하는 형사부 소속이어서 수사권 조정 논의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검찰은 지난 9일 대검찰청과 경찰청 관계자 등이 가진 ‘수사권 법안에 대한 총리실 실무자회의’ 내용을 요약 정리해 공개했다. 검찰은 경찰 입장대로 수사권이 조정되면 ▲선거·공안사범 등 중요 사건 입건 지휘 불가 ▲부당 내사 종결에 대한 통제 불가 ▲중복 수사·수사기관 간 통제불가 ▲인권을 침해하는 경찰 수사 상황 구제 불가 등의 부작용이 예상된다고 밝혔다. 임주형·김진아기자 hermes@seoul.co.kr
  • [저축은행 비리수사] 나라종금·대북송금… 네번째 ‘출두’

    [저축은행 비리수사] 나라종금·대북송금… 네번째 ‘출두’

    김종창(63) 전 금융감독원장이 9일 검찰에 출두함에 따라 한동안 뜸했던 금융감독 수장들의 수난사가 다시 조명받고 있다. 1998년 금감원이 설립된 뒤 참고인 신분이든 피의자 신분이든 검찰 조사를 받은 금감원장 출신 인사는 김 전 원장까지 모두 5명이다. 권혁세 현 원장을 제외하고는 역대 7명의 수장 가운데 절반이 넘는 숫자다. ●역대 수장 7명中 과반 ‘불명예’ 검찰에 직접 출두한 경우는 이번이 네 번째다. 현직에 있을 때 조사가 이뤄진 경우는 없다. 대부분 퇴임 뒤 수 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조사가 이뤄졌다. 하지만 김 전 원장은 퇴임 직후 재임 시절에 일어났던 일과 관련해 검찰에 나왔다는 점에서 충격이 크다. 금감원에 대한 신뢰와 권위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금감원장 출신으로 처음 검찰 조사를 받은 인사는 이용근(2000. 1~2000. 8) 2대 원장이다. 금융감독위원회 상임위원과 부위원장으로 재직하던 시기에 나라종금 쪽으로부터 청탁과 함께 금품을 받은 혐의로 2003년 구속기소됐다. 항소심에서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 추징금 4700만원을 선고받았다. 이용근 원장은 구속 기간 동안 대북송금 의혹 사건과 관련해 특검 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근영(2000. 8~2003. 3) 3대 원장은 2003년 대북송금 의혹 사건과 관련해 특검 조사를 받았다. 금감원장에 앞서 산업은행 총재로 재직하던 시절에 있었던 대출이 문제가 돼 구속기소됐고,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이 확정됐다. 그런데 그는 2007년에는 김흥주 삼주산업 회장 로비 사건에 휘말려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헌재(1998. 3~2000. 1) 초대 원장은 김앤장 고문으로 있을 당시에 이뤄졌던 외환은행 매각과 관련해 헐값 매각 의혹이 제기되며 2006년 검찰 조사를 받았다. 이정재(2003. 3~2004. 8) 4대 원장도 같은 사건으로 간접(방문·서면) 조사를 받았다. 모두 참고인 신분이었고 무혐의 처분됐다. ●“김종창씨 무혐의일 것” 관측도 금융감독 수장 8명 가운데 검찰과 악연을 맺지 않은 경우는 4대 윤증현(2004. 8~2007. 8) 원장, 5대 김용덕(2007. 8~2008. 3) 원장, 8대 원장으로 재직 중인 권혁세(2011. 3~) 원장 등 3명에 불과하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감원장은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는 만큼 로비 대상이 되기 쉽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 문제로 홍역을 치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금감원 안팎에서는 김종창 전 원장의 꼼꼼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상 부산저축은행 관련 청탁이 통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은진수 전 감사위원으로부터 부산저축은행에 대한 검사 무마청탁을 받고 부당하게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부산저축은행에 투자한 아시아신탁 주식을 명의신탁해서 보유하고 있는지 등이 풀어야할 의혹들이다. 김 전 원장이 침묵을 지키는 사이 오히려 커져버린 의혹이 해소될지 관심이 주목된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부평 미군기지터 수난

    인천 부평 미군기지 터는 ‘흉지(凶地)’인가. 10년 가까이 끌어온 친일파 후손 부지 반환소송이 겨우 마무리되는가 했더니 독성물질이 폐기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수난사가 이어지고 있다. 부평 미군기지 ‘캠프마켓’이 들어선 인천 부평구 산곡동 일대 50만㎡. 1900년대 초반까지 근대농업회사인 ‘목양사’의 땅이었다. 그러다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총독부가 친일의 대가로 송병준에게 이 일대를 불하했다. 해방 이후에는 미군 군수지원기지로 바뀌었다. 2002년 친일파 송병준(1858∼1925)의 증손자 송모(66)씨 등이 미군기지 일대를 되돌려 달라며 국가를 상대로 토지소유권확인 및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공시지가로 2600억원. 송모씨는 1심과 2심에서 잇따라 패소했고, 대법원은 지난 13일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번엔 환경오염을 일으키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또 논란의 중심에 섰다. 주한미군이 1989년 부평 미군기지에서 독성물질인 폴리염화비페닐 448드럼을 처리했다고 재미 언론인 안치용씨가 폭로한 것. 이후 조사를 촉구하는 인천 지역 시민단체와 주민들의 시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부평 미군기지는 2008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친 환경조사에서도 토양·수질의 오염 수준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고, 지하수에선 맹독성 발암물질이 검출됐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데스크 시각] 의학은 어떻게 진보하는가/심재억 의학 전문기자

    [데스크 시각] 의학은 어떻게 진보하는가/심재억 의학 전문기자

    아스클레피오스는 의사였습니다. 그리스 신화 속의 ‘반신반인’인 그는 의술로 수많은 사람을 구했습니다. 얼마나 대단했느냐 하면, 그가 병자를 치료하자 저승의 신 하데스가 할 일이 없을 정도였는데, 이를 안 제우스가 격노해 그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때 아스클레피오스가 사용한 뱀 지팡이는 지금도 세계보건기구(WHO)는 물론 미국·영국·한국 등 각국 의사단체들이 상징 문장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생명의 가치를 옹위하는 의술의 신성성이 함축돼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신성성의 이면에는 숱한 의료 선각자들의 탐구와 고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오만하지도, 안주하지도 않았습니다. 병자의 피를 바꿔 질병을 치료하고자 했던 무모한 시도는 수혈의 시작이 되었고, 두개골을 쪼개거나 심장을 바꿔 죽은 사람을 살려내려 했던 시도는 외과학의 출발이었습니다. 이런 시도가 더할 수 없이 신성했던 것은 당시의 질병관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질병의 실체를 몰랐던 암흑의 시대에 모든 병은 천형이었습니다. 이런 미혹 속에서 누군가 나서 “아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목숨을 건 이단적 도발이었지만 의학자들에게 그것은 지적 확신이었기에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 외침은 다름이 아니라 “그래도 의학은 진보해야 한다.”는 신념이었습니다. 요즘의 의료를 이런 시시콜콜한 역사적 기억으로 환치하기는 어렵습니다. 거대한 의술의 진보가 있었고, 과학기술의 역할이 극한으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의료가 천박한 상업주의에 결박되면서 신성성의 자리에는 보란 듯 ‘돈’과 ‘퇴행적 권위의식’ 그리고 ‘조작된 허명(虛名)’이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의사들은 자신들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환자들과 멀어졌고, 의학의 진보는 그 지점에서 발목이 묶이고 말았습니다. 이런 ‘불편한 진실’은 의료계 전반에 촘촘하게 그물을 드리우고 있는 거대한 상업주의의 획책이 낳은 결과이며, 어떤 진보도 이런 상업주의와 야합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는 예단은 우리를 우울하게 합니다. 적지 않은 의료인들이 이런 상업주의와 결탁하려고 기를 쓰는 판국에 함부로 의학의 진보를 말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누구도 진보의 가치를 본질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랬기에 가능해 보이지 않던 시도들이 의학의 전범(典範)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고, 치료 영역은 확대됐으며, 의사들의 권위는 강화됐습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건국대병원 송명근 교수의 대동맥 판막질환 근치술인 ‘카바 수술’ 논란이 그것입니다. 다양성의 사회에서 논란은 피할 수 없으며, 논의는 중요한 검증의 절차입니다. 그러나 논란과 논의가 공정한 논리 대결이 아니라 증오와 배제의 배설구여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신성성의 후예인 의학자들이 나서 ‘카바’를 죽이려 하고, 복지부는 뒷짐을 진 채 눈만 찡긋거립니다. 의학사를 바꿀 씨앗 하나 싹 틔우기가 참 어려운 나라, 한국의 의료계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진보의 수난사가 새로 쓰여지고 있고, 국민들은 이런 상황을 밥그릇 때문에 중요한 의학적 성과를 짓밟으려 한다고 읽고 있습니다. 의학 진보의 주체는 의사입니다. 오늘날의 눈부신 의학적 성과가 온전히 의학자들 공로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의학적 퇴보 역시 의료인들의 선택입니다. 의학자들이 냉철하고, 지혜로워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유럽연합(EU)이 기술력을 인증했고, 의료 기준이 세계에서 가장 까다롭다는 일본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의사들이 배우겠다고 줄을 서는 ‘카바’가 유독 국내에서만 이런저런 시비에 내몰리는 상황이 난감해 보입니다. 물론 모든 의사들이 아니라 소수의 획책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물어야 합니다. 그것이 정말 선각자들이 그랬듯 지적 확신에 따른 도발인지, 아니면 시비의 배후에 국민의 생명과 국가경쟁력까지도 방기해야 할 만큼 중요한 그 무엇(?)이 따로 있는지를 말입니다. jeshim@seoul.co.kr
  • [사설] 장애인 문전박대 식당이 아직 있다니…

    1982년 사법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법관을 지망한 장애인 4명이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다. 단지 신체장애라는 이유로 임용에서 탈락한 것이다. 국민의 인권과 기본권을 보호하는 최후 보루인 사법부조차 장애인을 차별한다는 비난이 빗발치자 법원행정처는 마지못해 그들을 판사로 임용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이처럼 공공연히 이뤄졌다. 장애인 수난사를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다. 인권이 인류 보편의 가치임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장애인 차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최근 시각장애 음악인 송율궁씨가 “손님들이 불쾌해한다.”는 이유로 식당에서 문전박대를 당하자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한 사건이 단적인 예다. 장애인차별금지법(장차법)이 시행된 지 올해로 3년이 됐다. 고용이나 교육 등 각 부문에서 장애인에 대한 부당한 차별을 없앤다는 것이 입법 목적이다. 장애인을 차별하면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간단없는 차별 사례에서 보듯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법 절차가 너무 까다로워 몸이 불편한 사람이 과정을 다 밟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말한다. 타당한 지적이다. 우리는 장애인 권리 구제라는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법적 절차부터 간소화해야 한다고 본다. 아울러 인권위 또한 장애인 인권을 보다 알뜰하게 챙기는 기구로 거듭나기 바란다. 인권위에 따르면 2010년 장애차별 진정 접수는 1200여건(미집계 부분 포함)이나 되지만 이 가운데 장차법으로 시정명령을 받은 사례는 단 1건에 불과하다. 우리는 너나없이 ‘잠재적 장애인’이다. 그 평범한 사실에 착목한다면 차별의 벽은 한층 낮아질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공감능력의 확산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장애인 주권’에 눈을 크게, 제대로 떠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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