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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침묵의 봄’ 가까워 오는가

    ‘침묵의 봄’ 가까워 오는가

    ‘어느 날 원인 모를 병이 마을을 덮쳤다. 새들의 지저귐이 사라졌고 꽃 사이로 붕붕거리던 꿀벌도 자취를 감췄다. 꽃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시들었다. 죽은 듯 고요한 봄이 찾아왔다.’ 미국의 해양생물학자이자 작가인 레이철 카슨이 저서 ‘침묵의 봄’에서 경고한 지구촌 재앙의 일단이 새해 벽두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아칸소주와 루이지애나주의 찌르레기떼 추락사뿐 아니라 스웨덴과 영국 등 유럽, 남미의 브라질, 오세아니아의 뉴질랜드, 아시아의 태국과 일본 등에서도 크고 작은 동물 의문사가 잇따르고 있다. 새해 들어 연일 동물 의문사가 보도되면서 인터넷에서는 갖가지 설들이 난무하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은 이 같은 동물의 집단 의문사가 결코 올해 처음 나타난 현상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다양한 형태와 이유로 나타나는 동물의 집단 죽음이 결국은 지구의 환경 파괴와 온난화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데 입을 모으고 있다는 점이다. ●동물들의 잇단 ‘다잉 메시지’ 동물의 떼죽음은 2000년대 후반부터 더욱 자주 눈에 띈다. 미 시사주간 타임 인터넷판은 7일 최근 발생한 동물의 주요 수난사를 추려 보도했다. 2009년 칠레의 여러 동물들이 연쇄적 의문사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3월 펭귄 1200마리가 칠레 남부의 해안에서 죽은 채 발견된 것을 시작으로 4월에는 정어리떼 수백만마리의 사체가 해안으로 쓸려 내려왔고, 같은 달에 희귀종인 홍학 수천 마리가 둥지를 버리고 떠나는 바람에 새끼 2000여 마리가 굶어 죽기도 했다. 2008년에는 호주 남부 태즈메이니아섬에서 고래들이 뭍으로 기어 올라와 집단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둥근머리돌고래 60마리가 해변에서 숨진 채 발견된 데 이어 1주일 뒤 참거두고래 150마리가 같은 방법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비극은 이듬해까지 이어져 2009년 향유고래 45마리가 숨진 채 태즈메이니아섬 모래톱에서 발견됐고 둥근머리돌고래와 돌고래 140여 마리가 해변으로 쓸려내려와 죽었다. 이 또한 명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미국의 박쥐 100만 마리도 2006년 괴질에 걸려 죽는 등 수난을 당하고 있다. 5년 전 뉴욕에서 시작해 미국 14개 주로 번진 이 곰팡이성 질병은 겨울잠을 자는 박쥐의 입과 코를 하얗게 만들어 죽도록 했다. 정확한 원인과 감염 경로는 밝혀지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박쥐가 괴질로 떼죽음을 당하면 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박쥐는 곡물이나 나무에 피해를 주는 해충 애벌레를 먹이로 삼는데 박쥐가 사라지면 생태계 균형이 깨지기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미국 사회를 고민스럽게 만든 꿀벌의 ‘집단 가출’(벌집에서 꿀벌이 사라지는 군집 붕괴 현상)도 환경적 변화와 관련이 깊다는 주장이 나왔다. 특정 살충제가 벌의 몸 속에 쌓여 있다가 후손 벌들에 치명적 결함을 안겨 벌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미 국립과학아카데미에 따르면 지난 3년간 미 전역에서 호박벌 4개 종의 개체 수가 10~15년새 96% 줄었다. ●다음 타깃은 인간… 모니터링 강화를 동물의 잇단 의문사를 지나치게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메시지를 읽고 대비해야 한다는 데는 전문가 대부분이 동의한다. 인간에 앞서 동물이 생태계의 미묘한 균형 파괴를 알아차려 죽음을 통해 이를 알리고 있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대표적인 생태계 교란 요인으로 꼽혀 온 독성 화학물질이 최근 지구 온난화 영향과 맞물리면서 위해성이 크게 높아졌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최경호 서울대 교수(보건학)는 “지구 온난화가 화학물질의 독성을 일률적으로 높인다고 볼 수는 없다.”면서도 “그러나 물고기 생태에 영향을 미치는 다환방향족탄화수소(PAH)의 경우 일정량 이상의 자외선에 노출되면 독성이 최대 200배까지 치솟는 등 기후변화로 화학물질의 불안정성이 더해진다.”고 설명했다. 박찬열 산림과학원 박사는 “미국 새떼의 죽음은 그나마 도시에서 일어나 경각심을 가질 수 있었다. 숲 등 서식지에서 떼죽음이 발생하면 모르고 넘어간다.”면서 “우리나라도 서해안 등 겨울 철새들이 자주 찾는 지역에서 모니터링을 강화해 동물들이 전달하는 위기의 신호에 좀 더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 “시크릿 가든 너마저…” 연예계 대본유출 수난사

    “시크릿 가든 너마저…” 연예계 대본유출 수난사

    종영을 단 4회를 남겨둔 SBS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결말이 유출돼 제작진이 홍역을 치르고 있다. 방영 전 대본 보안에 만전을 기했지만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주요 내용을 미리 알려주는) 글이 인터넷에 오르자 제작진은 물론 시청자들까지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최근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길라임이 교통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진다.”는 ‘시크릿 가든’의 결말로 보이는 글이 올랐다. 제작진은 “11월 일부 대본이 유출되자 인터넷 카페를 폐쇄했으나 촬영 현장에 몰려드는 팬들을 막을 수 없어 완벽한 보안을 불가능했다.”고 안타까워했다. 대본유출은 드라마 제작진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힌다. 특히 결말이 유출되면 긴장감을 떨어뜨려 몰입을 해칠 뿐 아니라 드라마 자체에 대한 흥미를 떨어뜨려 시청률 하락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제작진이 대본유출 방지를 위해 철통 보안을 외치는 것도 이러한 이유다. 하지만 지난 9월 종영한 SBS ‘내 여자 친구는 구미호’(이하 ‘여친구’)는 제작진의 이러한 노력에도 종영을 단 2회 남기고 대본을 올려둔 온라인 카페가 해킹당해 결말이 공개될 뻔 했다. 다행히 촬영 정보만 유출 됐을 뿐 마지막 대본은 공개되지 않아 ‘여친구’는 마지막회에서 자체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역대 연예계 최악의 대본유출 사고는 예능프로그램에서 벌어졌다. 2008년 첫방송한 SBS ‘패밀리가 떴다’(‘패떴’)는 18주 연속 예능 시청률 1위를 기록하는 등 승승장구 했으나 이효리, 유재석 등 출연진의 대사가 담긴 대본이 인터넷에 공개된 이른바 ‘대본 논란’이 이듬해 터지면서 난관에 봉착했다. “짜고 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에 휩싸인 ‘패떴’은 이후 출연진 교체와 일명 ‘참돔 논란’ 등을 겪으면서 침체기를 겪다가 결국 1년 8개월 만에 종영한 바 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 강경윤기자 newsluv@seoul.co.kr
  • 승자독식 대한민국 실업탈출 아직 멀었다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강준만 지음, 개마고원 펴냄)는 한동안 한국 사회문제 전반에 대한 비판적 글쓰기로 유명했던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의 ‘한국 생활사’ 작업이다. 강 교수의 ‘한국 생활사’는 전화, 커피, 축구, 입시, 어머니 등 일상을 주제별로 나눈 통시적 저술 작업으로 이번 주제는 제목 그대로 실업이다. ‘한국 생활사’는 전 18권인 강 교수의 ‘한국 현대사 산책’이나 전 17권인 ‘미국사 산책’보다 더 많은 40여권의 책을 예정하고 있다. ‘영혼이라도’는 해방정국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 실업의 역사와 슬픈 구직 수난사를 살펴 실업 문제 해결이 단순히 ‘방법’이 아니라 ‘철학’과 ‘자세’에 있음을 제시한다. 왜 구직에 철학이 등장할까. 우리나라는 ‘1등만 기억하는’, 한 번 나락으로 떨어지면 끝장이라는 식의 승자독식 문화가 강고하다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이런 문화에서 정규직-비정규직 문제나 기업형 슈퍼마켓, 이마트 피자, 롯데마트 치킨 논란에서 보듯 누군가 제아무리 ‘기막힌 방법’을 마련해도 이해당사자 모두를 만족하게 하는 해결책은 내놓기 어렵다. 따라서 저자는 실업 문제를 넓고 깊게 보기를 권한다. 실업 문제는 그 어떤 이념도 뛰어넘는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운영과 작동방식의 문제란 것이다. 기존의 좌우 이념의 틀을 벗어나 승자독식 문화의 의식과 관행을 바꾸고 공존공생의 자세를 찾지 않으면 영원히 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일본의 식민 지배에서 벗어난 1945년 8월 15일 이후 해방정국에서 우익 청년·학생 단체가 엄청나게 많이 생겨났다. 이는 당시의 대규모 실업과 심각한 경제난 때문이란 게 강 교수의 설명이다. 청년단의 폭력 행사는 배고픔을 해결하려는 방편이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 폭발적으로 늘어난 대학생과 30%가 넘는 실업률은 4·19 혁명을 촉발시킨 요인이었다. 5·16 쿠데타 역시 주동자들의 실업 문제가 큰 원인이었다. 강 교수는 정치란 ‘그 주체들이 고급 일자리를 얻기 위한 투쟁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아무리 정교한 법과 제도라도 공기업과 정부 산하단체의 보은성 ‘낙하산 인사’를 차단하기 어렵다는 게 그의 지적이다. 결국 실업을 경제적 문제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원수와도 같이 살자’는 자세를 갖춰야 “영혼이라도 팔아 취직하고 싶다!”는 절규를 해소하는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책의 결론이다. 1만 2000원.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씨줄날줄] 광화문 수난사/이춘규 논설위원

    광화문(光化門)은 궁궐마다 있는 평범한 문이 아니다. 빛나는 국보 숭례문이 불탄 지금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문화를 상징하는 존재다. 대한민국의 얼굴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국민의 자존심이기도 하다. 그래서 광화문 원형 복원에 관심이 뜨거웠다. 빛의 문 광화문은 우리 민족이 어려울 때면 빛을 잃곤 했다. 600년 광화문의 수난사는 민족 수난사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다. 광화문은 조선 개국 직후인 1395년에 건립됐다. 정도전은 경복궁의 정문인 이 문을 사방에서 어진 사람이 오가는 문이라 해서 사정문(四正門)이라고 했다. 1425년 세종대왕은 경복궁을 중수하면서 광화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를 담았다. ‘광피사표 화급만방’(光被四表 化及萬方·빛이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이라는 서경(書經) 글귀에서 따왔다. 하지만 광화문의 운명은 이름을 지은이의 비원과는 달리 모질었다. 광화문은 오랜 세월 수난을 겪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1592년 임진왜란 때 광화문은 처음 불탔다. 건립된 지 200년을 목전에 둔 시점이었다. 긴 수난의 시작이었다. 1865년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때 이르러서야 270여년 만에 재건됐다. 그때 광화문 현판은 한자로 쓰여졌다. 그 뒤 일제에 국권을 내준 뒤 조선총독부 건물에 밀려 1926년 해체돼 경복궁 내 지금의 민속박물관 근처로 이전됐다. 민족정기 말살책이었다. 한국전쟁은 더 큰 시련을 안겼다. 폭격으로 현판을 포함한 목조로 된 다락 부분이 불에 타 축대만 남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8년 변형된 모습으로 제 위치 부근에 복원하면서 자필 한글 현판을 내걸게 했다. 도로 때문에 10m 이상 뒤로 밀려났다. 1995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실시한 경복궁 복원 계획의 하나로 목조구조로 외형은 되살아났다. 그리고 2006년 12월 광화문 제 모습 찾기 사업이 시작됐다. 4년간의 복원 공사를 통해 올 여름 84년 만에야 원래 자리를 되찾았다. 광화문 현판이 복원된 지 석달도 안 돼 10여곳에 균열이 생겼다. 시련이다. 건조한 날씨 때문이라는 문화재청의 해명은 옹색하다. 전문가들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등에 맞춰 공기를 앞당긴 속도전이 부실을 초래했다고 주장한다. 틈새 메우기로 복구하려 했던 것도 너무 경솔했다는 지적이 많다. 축대나 기둥 등 복원을 거친 다른 시설을 포함, 차분하게 보완해야 한다는 주문도 있다. 광화문의 수난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신음하는 중소기업] 中企 ‘환차손 쇼크’… 직원 80% 줄이고 공장은 해외매각

    [신음하는 중소기업] 中企 ‘환차손 쇼크’… 직원 80% 줄이고 공장은 해외매각

    전체 고용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중소기업계에 ‘저환율 쓰나미’가 밀려오고 있다. 특히 2008년 키코(KIKO) 사태에 따라 ‘흑자 도산’의 악몽에 시달린 중소기업계는 이후 환헤지(환위험 회피) 상품 가입을 꺼린 터라 원화 강세에 따른 ‘제2의 키코 사태’가 재현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정부가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협력을 강조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소기업계가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이다. “환율 하락으로 매출이 예년의 30%는 날아갔죠. 직원들 임금만은 ‘달러빚’을 내서라도 제때 주려 하고 있지만 키코(KIKO) 사태로 쌓였던 부채 잔치에 이마저도 쉽지 않습니다. 솔직히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환란극복 잠시 환율암초에 좌초 직전” 서울 이화동에서 의류 수출업체 S사를 운영하는 김영환(가명·47) 사장은 1일 담담한 목소리로 최근의 회사 사정을 설명했지만 허공을 향한 눈동자는 한없이 흔들리고 있다. 20년 넘게 피땀으로 일군, 심지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도 극복했던 회사가 최근 환율이라는 암초에 걸려 넘어지기 일보직전이라는 현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기 때문이다. 김 사장은 키코 때문에 2008년 이후 120억여원의 피해를 봤다. 그 이후 환헤지라는 말만 들어도 진저리를 친다. 앞으로도 은행들의 환헤지상품은 쳐다보지도 않을 작정이다. 그는 “환헤지 상품 하나 때문에 중소기업이 여기저기서 망하는데 누가 금융기관을 통해 환헤지를 하려고 하겠느냐.”며 되물었다. 물론 김 사장이 수출기업에 환헤지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러나 환헤지 상품에 가입하지 않다 보니 경영난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요즘 중소기업들은 달러당 1000원 정도로 환율 하락 예상치를 미리 반영해 주문 계약을 합니다. 하지만 미리 가격경쟁력을 낮춰서 계약을 하는 바람에 채산성은 더욱 떨어지죠. 또 유동성 압박 때문에 원자재 투입 여력이 없어 한달에 200만 달러가 넘는 수주가 들어와도 생산이 원활하지 못합니다. 납기일을 제때 못 맞추다 보니 주문이 감소하는 악순환만 계속되는 셈이죠.” ●“은행·中企 상생 거론안돼 정부 불신” 이런 상황이니 회사가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하다. 사무실 임대료도 6개월째 밀려 있는 상태다. 김 사장은 “직원들 사기가 떨어진 것도 문제지만 신제품 개발은 엄두도 못 내고 있어 내년 상황은 더 어렵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정부의 중소기업 상생정책과 은행에 대해서도 깊은 불신감을 드러냈다. 그는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정작 필요한 은행과 중소기업의 상생은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면서 “환율 문제로 중소기업들이 망하면 은행 역시 신뢰와 고객을 잃으면서 위기에 빠질 것”이라고 꼬집었다. 신진호기자 sayho@seoul.co.kr ■어느 中企사장의 하소연 “매출 30% 뚝… 얼마나 버틸지” “환율이 10원 떨어지면 월 매출 10억원 정도인 회사는 매월 1000만원씩, 200만원짜리 월급 일자리 5개가 사라지게 됩니다.” 1일 경기 안산시 반월공단은 키코(KIKO) 사태 이후 텅 빈 공장들이 아직도 곳곳에 눈에 띄었다. ‘식당 급처분’이라고 쓰인 전단이 발 아래에서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한때 유압파쇄기로 세계 시장을 주름잡았던 코막중공업은 키코의 직격탄을 맞고 현재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 중이다. 100여명이던 직원을 20명으로 줄이고, 국내 공장과 함께 유럽·미국 공장 등을 팔았지만 환율의 망령은 여전히 주위를 맴돌고 있다. 조봉구 사장은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키코에 가입했지만 환율이 오를 땐 엄청난 리스크를 지우고, 정작 헤지가 필요한 환율 급락기에는 헤지가 안 된다.”고 말했다. 중소기업들의 환율 수난사가 계속되고 있다. 2008년 키코 사태로 뿌리째 흔들렸던 중소기업계가 환차손 상품을 외면하면서 최근 급격한 환율 하락에 따른 손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 제2의 키코 사태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1일 원·달러 환율은 1116.6원. 지난 5월 25일 1272.0원보다 155원 이상이나 떨어졌다. 지난달 14일에는 1110.9원까지 하락했다. 문제는 환율 하락이 대세라는 점. 최근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들은 자국 경기부양 등을 위해 확장적인 재정정책 등을 펴면서 자국 통화의 가치 하락을 유도하고 있다. 지난달 23일 경주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의 ‘환율 분쟁’이 어느 정도 봉합됐지만 여진은 남아 있는 상태. G20 정상회의 개최를 전후해 국내 통화당국의 외환시장 개입도 더욱 껄끄러워졌다. 향후 원·달러 환율이 크게 떨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뜻이다. 국내 주요 경제연구소들은 내년 원·달러 평균 환율이 1050원까지 떨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중소기업들은 키코 사태를 계기로 환헤지 상품을 외면하고 있다. 한국무역보험공사에 따르면 대표적인 환헤지 상품인 환변동 보험에 가입한 기업은 올 들어 지난 9월까지 597곳에 불과하다. 2007년 1579곳, 2008년 1248곳보다 크게 줄었다. 중소기업중앙회 조사에 따르면 ‘최근 환율 불안정으로 수출 채산성이 악화됐다.’는 기업은 전체의 81.2%에 달했다. 심지어 77.4%는 ‘이미 이익이 감소했지만 그대로 수출을 진행하고 있다.’고 답했다. 중소기업계 관계자는 “키코 피해를 본 기업들을 위해 정부가 유동성 지원 프로그램(패스트 트랙)을 운영하고 있지만 은행들이 대출을 꺼리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향후 고환율 국면에서 중소기업들의 연쇄 도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두걸·신진호기자 douzirl@seoul.co.kr
  • ‘영화의 바다’ 빠져봅시다

    ‘영화의 바다’ 빠져봅시다

    ‘영화의 바다, 부산에 빠지다.’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가 7일부터 9일 동안 부산 해운대와 남포동 일대를 뜨겁게 달군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 허브 축제로 거듭난 부산국제영화제의 관전 포인트를 짚어 본다. 김지수·조영정·이수원·이상용·홍효숙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의 추천을 토대로 놓쳐서는 안될 작품도 함께 소개한다. ●세계 최초로 만나는 기쁨 영화제 기간 동안 상영되는 전 세계 67개국 307편 가운데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작품(월드 프리미어)이 무려 103편이다. 살 집이 없어 어린 딸과 트럭 밑에서 살아가는 여인의 이야기를 그린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트럭 밑의 삶’(감독 아돌포 알릭스 주니어·필리핀), 베트남 최고 소설 ‘광활한 논’을 스크린에 옮긴 ‘떠도는 삶’(응우옌 판쿠앙빈·베트남 등), 아들의 동성애 연인을 이해하게 되는 어머니를 그린 ‘아들의 연인’(산조이 낙·인도), 단절된 가족의 모습을 심도 있게 보여주는 ‘섬들’(조아나 호그·영국), 탈북 남성의 비극적인 남한 사회 순응기인 ‘무산일기’(박정범·한국), 남편과 헤어진 탈북 여성이 겪게 되는 잔혹사 ‘댄스 타운’(전규환·한국),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 네 명의 삶을 따라가는 다큐멘터리 ‘종로의 기적’(이혁상·한국) 등이 돋보인다. 오랫동안 가족을 버렸던 어머니가 동생을 데려가려고 하자, 이에 분노해 소년원을 탈출하는 비행 소년의 이야기 ‘휘파람을 불고 싶다’(플로린 세르반·루마니아), 생존을 위해 모정과 사랑 사이에서 힘겨운 선택을 해야 하는 여인을 그린 ‘모정과 사랑 사이’(아그니에슈카 우카시아크·스웨덴 등),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자신들의 뿌리를 찾아 중동으로 떠나는 쌍둥이 남매의 이야기를 담은 ‘그을린’(드니 빌뇌브·캐나다)은 월드 프리미어는 아니지만 프로그래머들의 강력 추천작이다. 앞서 세계 영화제에서 화제를 모았던 작품들도 만날 수 있다. 오랫동안 가족을 떠나 있던 할아버지와 여섯살배기 손자의 만남을 그린 ‘비, 두려워 마’(판당디 감독·베트남), 입대를 앞둔 청년의 인상적인 성장 영화 ‘모래성’(부준펑·싱가포르), 돈을 벌어 일본으로 떠나려는 19세 소녀와 그의 이모가 벌이는 기괴한 사업을 다룬 ‘타이거 팩토리’(우밍진·말레이시아), 현대판 프로메테우스 이야기 ‘전기도둑’(악탄 아림 쿠바트·키르기스스탄)은 프랑스 칸 영화제 화제작. 영감이 떨어져 5년째 일거리가 없는 영화 감독의 수난사를 그린 ‘어느 감독의 수난’(카를로 마자쿠라티·이탈리아), 파업 노동자들에게 인질로 잡힌 폭군 같은 남편을 구하러 나선 가정 주부의 이야기 ‘현모양처’(프랑수아 오종·프랑스)는 지난달 초 이탈리아 베니스 영화제에 다녀왔다. 탈북 소년과 조선족 소년의 우정을 그린 ‘두만강’(장률·한국 등)도 베를린영화제에서 주목받았다. ●한국 영화의 여신, 김지미 회고전도 눈길 여고 시절이던 1957년 김기영 감독에게 발탁돼 ‘황혼 열차’를 통해 은막에 데뷔했다. 그리고 1992년 ‘명자, 아끼꼬, 소냐’까지 무려 700여편에 출연했다. 데뷔 당시 동양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로 갈채 받으며 단숨에 톱스타가 됐다. 1960년대 초반까지는 청순한 매력을, 이후 성적인 매력을 뽐내던 스타에서 1970년대 들어 대종상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2년 연속 거머쥐는 등 연기력을 겸비한 스타로 거듭났다. 1980년대 들어서는 영화 제작자로, 1990년대에는 두 차례에 걸쳐 영화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하는 등 영원한 영화인, 영화계의 여장부로 살아왔다. 김지미(70) 얘기다. 그의 회고전도 영화제의 백미 중 하나. 부산국제영화제 한국 영화 회고전에서 배우가 주인공이 된 것은 2007년 김승호에 이어 두 번째다.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1959), ‘불나비’(1965), ‘댁의 부인은 어떠십니까’(1966), ‘길소뜸’(1985), ‘티켓’(1986) 등 시대별 대표작 8편을 만날 수 있다. 최무룡, 신영균, 신성일, 김진규 등 당대 최고 남자 배우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덤. 지난 5월 자살한 곽지균 감독의 회고전도 눈길을 끈다. ●해운대로 별들의 대이동 해운대에 마련된 레드 카펫을 밟을 국내외 최고 스타들의 면면도 관심거리. 올해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프랑스 배우 쥘리에트 비노슈와 장 자크 아노 감독의 ‘연인’ 등으로 국내에서도 널리 알려진 영국 여배우 제인 마치도 온다. ‘색, 계’에서의 파격적인 연기로 단숨에 세계적인 배우로 발돋움한 중국의 탕웨이도 현빈과 호흡을 맞춘 ‘만추’로 찾아온다. ‘플래툰’으로 유명한 윌렘 대포와 인도 ‘발리우드’의 최고 여배우인 아이슈와리아 라이도 ‘라아반’을 들고 부산을 찾는다. 마야자키 아오이와 아오이 유우, 요시타카 유리코, 오카다 마사키 등 일본의 젊은 피도 눈에 띈다. 이란의 거장 아바스 키아로스타미를 비롯해 미국 할리우드의 올리버 스톤 감독, 올해 개막작인 ‘산사나무 아래’를 연출한 중국의 장이머우, 스페인 3대 명감독 가운데 한 명인 카를로스 사우라, 일본의 유키사다 아사오, 홍콩 뉴웨이브의 주역인 허안화 등 세계적인 감독들도 줄을 잇는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서울광장] 자유의 여신상과 광화문 해태/김성호 논설위원

    [서울광장] 자유의 여신상과 광화문 해태/김성호 논설위원

    뉴욕 자유의 여신상이 건립 125주년을 맞는 내년 10월부터 1년간 폐쇄된다고 한다. 화재에 대비한 별도의 비상계단을 설치하려 관광객들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막는단다. 보통 하루 최대 3000여명꼴로 관광객이 찾아들고, 정상부분인 왕관까지 오르겠다는 예약자가 11월까지 밀려 있다는데. 뉴욕의 상징이자 미국 대표 아이콘을 보려는 탐방객들에겐 서운한 소식이겠다. 2001년 9·11테러 때 한 차례 폐쇄된 뒤 2004년 재개방했지만, 건립 125주년에 맞춘 폐쇄 조치는 특별한 것으로 보인다. 자유의 여신상이 세계적 명성과 인기를 끄는 건 의미와 역사성 때문이다. 프랑스 국민들이 미국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기증한 선물이 아닌가. 프랑스에서 장장 9년여의 제작기간을 거쳐 1886년 지금의 자리인 리버티 아일랜드에 세워진 ‘세계를 밝히는’ 자유의 여신상. 건립 후 16년간 뉴욕항의 등대로 쓰인 이후 1세기에 걸쳐 ‘아메리칸 드림’의 선봉 역을 했으니 이름 값은 톡톡히 한 셈이다. 미국 최대도시 뉴욕의 상징이 자유의 여신상이라면 한국 수도 서울의 상징은 광화문 해태상이다. 많은 이들에겐 존재감도 없지만 서울시가 2008년 공식 선정한 대표상징이다. 광화문 전면 양쪽에 얼굴을 약간 돌린 채 마주 선, 사자를 닮은 형상. 일반적으로 독특한 동물상쯤으로 인식되지만 조선 정궁 경복궁 창건 때부터 궁내 곳곳에 세웠던 수호상이다. 화기(火氣)를 제압한다 해서 불기운이 강한 관악산을 노려본다는 풍수지리설이 회자된다. 고래로 부정한 사람을 보면 뿔로 들이받는 신수(神獸)로 여겼다니, 서울시가 상징으로 꼽은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이 해태상이 서울의 상징이란 사실 말고도 그것에 담긴 의미를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경복궁 정문 광화문 앞에 세운 수호의 신수를 말이다. 일제에 의해 격하, 훼손된 조선 정궁 수난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표 증거인데도 관심에선 철저히 비켜난 소외의 상징이다. 이 땅이 일제 식민지로 전락한 뒤 경복궁 구석으로 이리저리 옮겨지면서 거듭 손상된 천덕꾸러기. 박정희 정권 시절 광화문 앞에 다시 세웠다지만 원 자리에선 멀었고 경복궁 복원공사로 또 옮겨졌다가 지난 15일 복원된 광화문 공개와 맞물려 비로소 제자리를 찾았다. 광복절 65주년 기념식 식전행사로 성대히 열린 광화문 현판 제막식에서도 그 수호상인 해태상은 관심 밖이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서울의 상징이라는 위상이 무색하다. 125년 만에 방재설비 설치를 이유로 폐쇄되는 뉴욕 상징 자유의 여신상과 145년 만에 제자리에 복원된 서울 상징 광화문 해태상.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만큼의 근황을 알리는 자유의 여신상과 복원사실조차도 감감한 해태상의 대비가 씁쓸하다. 따져보면 독립기념 선물에 불과한 자유의 여신상과 우리 자신의 정신이며 삶의 양식이 밴 문화재 해태상 중 어느 것이 더 값질까. 19세기말 20세기초반 외국인이 촬영해 남긴 서울의 풍경사진에선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는 광화문 해태상이다. 한 세기 전 이미 서울의 상징이었던 우리만의 문화재가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세태가 서럽지 않은가. 문화재의 복원은 외양 복구에 그치지 않는 정신의 부활이다. 화려한 모습의 환원을 만족해하고 반길 게 아니라 어두운 역사의 그늘을 챙기자는 말이다. 서울의 상징 해태상을 들여다보자. 아니, 수도 복판에 어렵사리 다시 선 수난과 오욕의 상징, 해태상만이라도 찬찬히 뜯어보자. 광화문 현판 제막식에서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복원된 한국역사의 아이콘(광화문)이 우리 국민의 자긍심과 역사의식을 고취할 것”이라고 했다. 번듯한 외양에 가려진 소외의 천덕꾸러기가 더 없는지 찾아볼 일이다. 시비 선악을 판단한다는 상상의 동물 해태는 왕의 재판이 공정하게 행해지는 시대에 나타난다고 한다. 인사청문회가 한창이다. 자고나면 불거지는 비리와 불·탈법의 혼탁함 속에서라도 해태상을 한번 쳐다봄이 어떨지…. kimus@seoul.co.kr
  • [8·15 65주년] 광화문 600년 수난사

    광화문은 조선 건국 직후인 1395년(태조 4년)에 건립됐다. 당시 이름은 정도전이 붙인 사정문(四正門)이었다. “사방에서 어진 이가 오가는 정문”이라는 의미의 보통명사였다. 세종대왕이 1425년 경복궁을 중수(重修)하면서 광화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서경(書經)에 나오는 ‘광피사표 화급만방(光被四表 化及萬方·빛이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이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이후 광화문은 이름에 걸맞지 않게 두 번의 전쟁을 겪으며 숱한 수난에 시달렸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처음 광화문이 불탔다. 1865년(고종 4년)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로 인해 땅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경복궁 중건에 나섰고 이때 광화문도 재건됐다. 영광도 잠시. 일제는 조선총독부 청사 신축을 위해 광화문 철거를 결정했다. 조선 문화재를 사랑한 일본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의 노력으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결국 1926년 해체, 이전되는 수모를 당했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엔 폭격으로 목조로 된 다락 부분이 소실돼 축대만 남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8년 아랫부분인 석축은 그대로 두고 윗부분만 철근콘크리트로 복원하는 ‘반쪽 복원’으로 비난을 샀다. 광화문은 1995년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실시한 경복궁 복원계획의 하나로 목조 구조로 되살아났다. 일제와 1968년 복원을 거치면서 틀어지고 옮겨진 부분도 이때 바로잡혔다. 드디어 2006년 12월4일 ‘광화문 제모습 찾기사업’이 시작됐다. 용마루 취두 철거로 시작된 4년간의 복원 공사를 통해 84년 만에 제자리로 돌아가는 감격을 누리게 됐다. 박상숙기자 alex@seoul.co.kr
  • [8·15 65주년] 5대 궁궐 日帝 수난사

    일제는 조선 왕실의 권위를 말살하고자 대대적인 궁궐 파괴를 자행했다. 박람회장으로, 동물원으로, 유원지로 전락시켜 조선 백성을 조롱했다. 그 상흔은 광복 65주년이 되는 지금도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1915년 경복궁 전각 대부분 철거 법궁인 경복궁은 박람회장이 돼 버렸다. 일제는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열면서 정전과 편전, 침전 일곽을 제외한 거의 모든 전각을 철거했다. 1920년대 중반에는 남산에 위치했던 총독부 건물이 협소하다는 이유로 광화문을 이동시키고 지금의 흥례문 영역에 조선총독부를 건설했다. 경희궁은 가장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1907년 일제는 경희궁 안에 통감부 중학교를 세우면서 기존 건물들을 대부분 철거했다. 지형도 높은 곳을 깎아 낮은 곳을 메우는 등 크게 변형시켰다. 이후 숭정전, 회상전, 흥정당, 흥화문, 황학정 등 얼마 되지 않은 건물들마저 다른 곳으로 팔려가거나 이전되면서 궁궐의 면모를 상실했다. 정문인 흥화문은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된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 정문으로 팔렸다가 이후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는 수난을 당했다. 1920년대가 지나면서 7만여평의 넓이에 120채가 넘는 전각이 있던 조선 왕조의 서궐 경희궁은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파괴됐다. 1930년대에는 전시 대비용 시설인 벙커가 건립되는 수모까지 당했다. 일제는 덕수궁도 공원으로 만들어 버렸다. 덕수궁은 아관파천 후 고종이 환궁해 대한제국을 선포할 당시 경운궁이라는 이름의 정궁이었다. 덕수궁은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도 궁역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나 이후 곳곳이 잘려 나가고 건물이 철거돼 궁궐로서의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일제는 1931년 덕수궁 부지 2만여평 가운데 1만평을 경성의 중앙공원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듬해부터 많은 전각이 철거됐고, 석조전은 1933년부터 미술관으로 바뀌어 1943년까지 일본 미술품만 전시했다. ●경희궁 전시 벙커 활용 창덕궁은 조선 왕조 500년 역사가 막을 내린 장소다. 1919년 8월29일 창덕궁 인정전에서 한·일강제병합 조약이 이뤄졌다. 1926년 4월25일에는 순종이 대조전에서 승하했다. 1917년 내전 일대에 대화재가 발생하자 일제는 이를 복구한다는 핑계로 경복궁 내전 건물들을 모두 헐어다 이곳으로 옮겨 지었다. 일제는 주인을 잃은 창덕궁의 전각을 헐고 전시장과 각종 편의시설을 지어 일반인에게 개방했다. 창경궁은 동물원으로 전락하는 모욕을 당했다. 1907년 즉위한 순종은 창덕궁을 새로운 거처로 삼았다. 1908년 일제는 창덕궁과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창경궁의 선인문 안에 동물원을 설치했다. 순종 황제에게 위안거리를 제공한다는 구실이었다. 뒤이어 식물원이 설치됐고, 이름조차 창경원으로 격하됐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서울광장] 광화문 복원과 日帝의 조선왕궁 말살기/노주석 논설위원

    [서울광장] 광화문 복원과 日帝의 조선왕궁 말살기/노주석 논설위원

    돌아오는 광복절날 제대로 된 광화문을 보게 될 모양이다. 조선의 법궁(法宮)인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이 본래 모습 그대로 태어난다니 말이다. 광화문은 조선왕궁 수난사와 궤를 같이한다.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흥선대원군이 다시 지었지만,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이리저리 옮겨지는 과정에서 훼손되고 뒤틀렸다. 일제는 민족정기와 조선왕실의 권위를 훼절시키고자 궁궐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일제의 조선왕궁 말살정책은 용의주도했고 결과는 참담했다. 5궁 가운데 경복궁은 해체되다시피 했고, 창덕궁은 피폐해졌으며, 창경궁은 동물원으로 둔갑했다. 경희궁은 학교가 됐고,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어 퇴위한 고종과 순종의 거처로 쓰였다. 훼손되기 전 경복궁 전경 사진이 공개된 적이 있다. 1915년쯤 촬영된 경복궁은 높은 담 뒤로 전각이 빽빽하게 들어선 웅장한 궁궐이었다. 우리가 아는 쪼그라든 경복궁이 아니었다. 1867년 중건 당시 경복궁 전각은 모두 7226칸이었고, 궁성 밖 후원에 489칸의 전각이 따로 있었다. 모두 7715칸으로 규모 면에서 9999칸을 자랑하는 중국 자금성에 못지않았다. 창덕궁의 4500칸을 합치면 오히려 더 컸다. 일본 교토의 천황궁은 넓이에서 경복궁의 4분의1에 불과한 작은 궁에 불과했다.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 1910년 5월1일 자에 ‘경복궁 없어지네’라는 제목의 가슴 아픈 기사가 실려 있다. ‘경복궁이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을씨년스러운 곳으로 변한 것은 모두 알지만 얼마 전 왕실사무를 관장하는 궁내부에서 경복궁 안에 공원을 짓고자 전각 4000여 칸을 경매에 부쳤다. 10여명이 한 칸당 15~27환씩에 샀다. 이 중 3분의1을 사간 일본인은 척식회사 총재의 첩자로 알려졌다.’는 내용이다. 경복궁 안에서 박람회를 열고, 총독부를 근정전 앞에 짓기 이전부터 왕궁의 전각들이 일본인의 손에 헐값에 부지기수로 넘겨졌음을 알 수 있다. 바다 건너 일본에 팔려간 전각은 개인 미술관이나 정자, 정원의 일부가 됐다. 심지어 상점이나 기생집 문으로 사용됐다. 경복궁의 파괴는 식민통치의 업적을 자랑하는 박람회 개최 과정에서 가속화됐다.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1923년 조선부업품공진회, 1925년 조선가금공진회, 1926년과 1929년 조선박람회, 1935년 조선산업박람회 등 모두 6차례의 박람회를 통해 자행됐다. 경복궁의 유서 깊은 전각들은 유흥장소와 오락장으로 변했다. 행사 때마다 일본 총독이 근정전 임금의 용상에 앉아 상장을 주고, 훈시를 했다.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이제야 자리를 찾은 광화문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광화문 제자리 찾기는 일제가 허문 조선 척추의 복구이다. 20년 걸려 광화문-흥례문-금천교-근정문-근정전-사정문-사정전-강녕전-교태전으로 이어지는 경복궁의 등뼈를 겨우 맞췄다. 1990년에 시작된 복원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착수 당시 남아 있는 전각은 36개 동에 불과했지만 지난 20년 동안 89개 동을 지어 125개 동을 갖췄다. 중건 당시 500여개 동의 25% 수준이다. 조선법궁의 격을 떨어뜨리는 흉물스러운 민속박물관과 고궁박물관, 주차장의 철거는 별개의 문제이다. 경복궁과 나머지 궁궐을 완전 복원하려면 앞으로 얼마나 시간이 더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일본의 간 나오토 총리가 광복절 즈음 사과 담화문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당시 사토, 종전 50주년의 무라야마, 종전 60주년의 고이즈미 총리에 이은 네 번째 공식 사과가 될 전망이다. 내용을 놓고 일본열도가 떠들썩하다. 1995년 무라야마는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한다.”고 해 놓고 2개월도 못 가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는 정당했다.”라고 말을 바꿨다. 일본정부는 지난해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껌 한 통 살 수 없는 돈 99엔을 보상했다. 외교적 레토릭은 신물이 난다. 조선왕궁 말살 같은 정신적·문화적 피해는 어떻게 보상할 셈인가. joo@seoul.co.kr
  • [씨줄날줄] 새만금 삼국지/이춘규 논설위원

    현지 어른들은 징게맹갱(김제·만경)이라고 부른다. 전라북도 김제(시) 만경(면)의 드넓은 평야 지역을 말한다. 새만금은 김제만경의 앞글자에서 따왔다. 새롭다는 ‘새’자를 붙여 새만금으로 했다. 지난 4월 완공된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생긴 땅은 4억 100만㎡에 이른다. 여의도 면적의 140배, 서울시의 3분의2에 해당하는 넓은 땅과 33㎞인 방조제의 행정구역이 올 연말께 결정된다. 행정구역은 행정안전부가 해당 시·군의 의견을 수렴한 뒤 중앙분쟁조정위의 심의를 거쳐 확정한다. 징게맹갱은 한(恨)의 땅이었다. 동학혁명 때는 수많은 농민군이 김제 땅이 코앞인 부안 백산에서 봉기해 김제만경을 지나 북으로 북으로 진격해갔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보이는 곳이다. 워낙 광활해 백산(47m)에 오르면 고창, 부안, 김제, 군산, 익산, 완주, 전주 등 전북 대부분 지역이 한눈에 들어왔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 벽골제가 김제 남단 부량면에 있다. 조정래 대하소설 아리랑에는 1905~45년의 만금지역 민중들의 애환이 녹아 있다. 김제 죽산면 들판에 살던 민초들이 일제에 수탈당하면서도 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처절히 투쟁하는 장면들이 장대하게 묘사돼 있다. 일제가 조선인들의 종교적 대상도 됐던 당산나무를 베어버렸다는 내용은 아픈 민족사를 상징한다. 군산, 만주, 북간도, 하와이로 유랑하던 만금지역 주민들. 민족의 수난사다. 당시 일제는 김제만경 앞바다에 해상경계선을 그었다. 넓은 김제만경 들판의 식량 수탈을 위한 군산항만 확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다. 일제는 새만금지구에서 원래 부안·김제 소속 지역 일부를 군산시로 편입해 버렸다. 주민들의 편의는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통일신라시대 이래 새만금 지구는 김제를 관할하던 만경현 소속이었다고 한다. 광복 65년이 흐른 오늘 그 해상경계선이 분쟁의 원인이 됐다. 군산, 김제, 부안의 ‘새만금 삼국지’가 불을 뿜는다. 군산시는 해상경계선을 기준으로 새만금지구 행정구역을 정하자고 한다. 그러면 전체 면적 중 71.1%는 군산시로 넘어간다. 부안군 15.7%, 김제시 13.2%다. 반면 김제의 경우 김제시와 군산시는 만경강, 김제시와 부안군은 동진강을 기준으로 행정구역을 결정하길 원한다. 그 경우 군산시 38.8%, 김제시 36.8%, 부안군 24.4%를 점유한다. 새만금특별시 얘기도 나오지만 새만금지구 행정구역이 모두를 만족시키게 결정되고, 일제의 잔재도 조금 털어낼 수는 없을까.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경기 하천변 자동경보 준비 끝

    하천이나 계곡 등 경기도 내 81곳에 수위 상승 등 재난 발생 위험이 있을 경우 자동으로 즉시 대피방송을 하는 시설이 설치됐다. 도는 지난해 임진강 수난사고 이후 인명피해가 우려되는 도내 하천변 81곳에 재난경보 방송시설 설치 작업을 완료했다고 12일 밝혔다. 이 가운데 30곳은 올해 새로 설치했다. 이 시설들은 실시간으로 수위를 측정, 위험 수위에 다다를 경우 즉시 인근 지역 피서객 등에게 대피하도록 방송하는 시설이다. 기존 도내 51개 방송시설은 그동안 수위를 측정한 뒤 위험이 감지될 경우 담당 공무원 등이 수동으로 대피방송을 하도록 돼 있었다. 그러나 도는 올해 30곳에 방송시설을 추가 설치하면서 기존 방송 시스템도 자동 방식으로 업그레이드 했다. 자동 대피방송 시설이 설치된 곳은 호우시 수위가 갑자기 높아지는 곳이나 범람위험이 있는 하천변 등으로 ▲임진강 유역 16곳 ▲한탄강 유역 16곳 ▲북한강 유역 28곳 ▲안성천 유역 3곳 ▲남한강 유역 10곳 ▲한강 유역 4곳 ▲황구지천 1곳 ▲경안천 3곳 등이다. 도는 이와 함께 현재 210곳에 설치된 강우량계, 160곳에 설치된 자동기상관측장비, 171곳에 설치된 수위관측시설에서 수집되는 정보를 실시간으로 비상상황 근무자에게 전달하도록 하는 시스템도 개발해 가동에 들어갔다. 이 시스템은 위험 상황이 발생할 경우 상황근무자 컴퓨터에 자동으로 위험 경고창과 함께 경광등이 작동하도록 돼 있으며, 다른 근무자 및 관계자들에게도 문자 서비스를 제공하게 된다. 도는 이 밖에 그동안 각 지역별 재난안전대책본부 상황실에서만 시청할 수 있었던 654개 지점의 재난영상감시시스템(CCTV)을 올해부터는 신속한 협력 대응을 위해 해당 지역 소방서에서도 볼 수 있도록 했다. 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천안함 침몰 이후] 민·관 구조대 수색작업 가세

    천안함 수색 작업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민간 구조대들도 활기를 띠고 있다. 29일 오전 한국구조연합회 회원 30여명은 백령도 용기포 선착장에서 옹진군이 제공한 어업지도선을 타고 사고 해역에 나가 구조작업을 펼쳤다. 민간 구조대를 투입해 달라는 실종자 가족들의 요청을 받아들인 해군은 한국구조연합회 측의 지원을 요청했으며, 해난구조대(SSU) 요원 4명과 구명보트 2대를 지원했다. 이에 구조연합회는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1시30분까지 함미가 발견된 사고 해역에서 수색활동을 벌였다. 황민선 한국구조연합회 인천지역 대장은 “대원 30명 모두가 잠수 채비를 갖춰 현장으로 나갔지만 조류가 너무 세 함미에 접근하기 어려웠다.”면서 “조류가 느려지는 오후에 다시 현장으로 나가 구조활동을 재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소방방재청도 ‘119심해특수구조대’를 실종자 구조 현장에 급파했다. 63명의 ‘119심해특수구조대’는 대부분 전직 특수부대 출신으로, 각종 수난사고 현장에서 다년간 인명탐색과 구조활동 경험을 풍부하게 쌓은 베테랑 구조전문 요원들이다.특히 이들은 수중 음파탐지기, 수중 영상탐지기, 수중 다방향카메라 등 첨단 수중 구호장비 9종 166점을 헬기 2대에 나눠 싣고 현장으로 출동, 군 구조작전에 큰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소방방재청은 전국 소방관서를 대상으로 심해 잠수가 가능한 인력을 파악, 대기를 지시하는 한편 중앙 119구조대를 인천지역으로 전진배치해 현장 추가투입에 대비하고 있다. 앞서 오전 9시35분쯤에는 해군과 실종자 가족의 요청으로 천안함 실종자 수색에 나섰던 민간인 잠수부 홍웅(27)씨가 장촌 포구 인근으로 복귀했다. 홍씨는 전날 오후 7시20분쯤부터 SSU 요원 4명과 함께 함미 침몰 해역에서 수색작업을 벌였으나 수심 9m 지점에서 저체온증을 호소해 광양함에서 응급치료를 받아왔다. 이동구 윤샘이나기자 ccto@seoul.co.kr ☞ [사진] 실낱같은 희망이라도…천안함 침몰 그후
  • 경기 북부등산로 ‘전화 불통’

    북한산과 소요산 등 경기 북부지역에 있는 유명산의 등산로 열 곳 중 두 곳에서 휴대전화 통화가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21일 경기도 제2소방재난본부에 따르면 경기북부 50개 산의 등산로 755개 지점 가운데 169곳(22.3%)에서 통화가 불가능한 것으로 조사됐다.조사는 지난 1월부터 11월 말까지 경기 북부지역의 각 소방서가 산악구조 등을 목적으로 출동했을 때 등산로 각 지점에서 휴대전화 통화를 시도한 결과를 집계한 것이다.조사 결과 북한산(해발 836m)은 평균 통화율이 80% 정도로 비교적 양호한 편이지만 송추폭포∼오봉능선(4-3)의 통화율은 30%, 행궁지 표지판 앞(55-01)은 18%에 그쳤다. 대남문∼보국문 방향 500m 지점과 태고사∼행궁지 방향 300m 지점 역시 통화율이 40%에 그쳤다.동두천 소요산(536m)의 경우 나한대∼의상대는 통화율이 100%, 의상대∼상백운대∼선녀탕 및 금룡사∼정상은 80%, 선녀탕 갈림길∼나한대 20%, 구절터∼공주봉 50% 등으로 지점별 편차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경기소방2본부는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산악, 수난사고 발생 때 신고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휴대전화 불통지역에 이동통신 중계기를 설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경기소방2본부 관계자는 “휴대전화 불통지역이 여러 군데 있는 만큼 겨울철 산행에서는 각종 안전 장비와 여유 물품을 잘 갖춰 사고에 유의하고, 반드시 어두워지기 전에 하산해야 한다.”고 당부했다.김병철기자 kbchul@seoul.co.kr
  • [이용철의 영화 만화경] ‘브로큰 임브레이스’

    레나는 대재벌 어니스토의 비서로 일하다 그와 금전적으로 얽혀 정부로 살아간다. 어릴 때부터 배우가 되기를 꿈꾸다 가난 때문에 희망을 접었던 그녀는 다시 그 꿈에 도전하기로 결심한다. 마침내 감독 마테오를 만나 오디션을 본 뒤 역할을 얻지만, 어니스토는 그녀의 외출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궁여지책으로 어니스토가 영화의 제작자가 되어 두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가운데, 레나와 마테오는 영화현장에서 열정적인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어니스토가 끝내 간섭을 멈추지 않자 두 사람은 도피의 길을 택한다.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세계적인 거장이 되는데 ‘귀향’, ‘그녀에게’,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 큰 역할을 한 게 사실이나, 모성과 여성의 신체와 멜로드라마를 연결한 작품들만 주목받은 감이 없지 않다. 감독 특유의 감각적인 스릴러를 더 좋아하는 팬이라면 신작을 주목할 만하다. 2004년 작품 ‘나쁜 교육’의 연장선상에 놓인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스릴러와 멜로드라마의 근사한 조합을 꾀했다. 어떤 면에서 알모도바르의 스타일, 주제, 이야기의 안일한 반복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평범한 ‘미친 사랑’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감독의 위기’에 관한 자기반영적 독백으로 완성됐다. 알모도바르 영화를 특징짓는 ‘강렬한 색상과 그래픽으로 꾸민 오프닝타이틀’을 배제한 채 ‘리허설 혹은 오디션 장면’으로 시작하면서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영화에 관한 영화가 될 것임을 밝힌다. 새 영화를 찍다 험난한 지경에 처하는 마테오는 평범한 감독의 초상이다. 돈줄을 쥔 자는 사심을 드러내고, 그의 아들은 현장을 기록한답시고 온통 들쑤시고 다니며, (도피한 연인이 되돌아오도록 급조된) 조악한 편집본은 감독의 이름을 땅에 떨어뜨린다. 하지만 알모도바르판 ‘예술가의 수난사’인 ‘브로큰 임브레이스’가 단순히 감독의 고통과 불평을 담는 그릇에 그칠 리 없다. 화산섬에 도피 중인 레나와 마테오가 TV로 보는 ‘이탈리아 여행’의 한 장면은 거장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알모도바르의 마음이 만나는 지점이다. 극중 결혼의 위기에 봉착한 부인은 폼페이 유적지에서 화산재를 뒤집어쓴 채 부둥켜안고 죽은 남녀의 모습을 보게 된다(영화 밖으로는, 부인 역의 잉그리드 버그먼과 감독인 로셀리니가 불륜관계라는 이유로 스캔들의 중심에 있을 때였다). 위기의 관계라는 점에서 그 장면을 보고 있는 레나와 마테오 또한 마찬가지의 입장인데, 두 사람은 곧 죽은 남녀와 비슷한 자세를 취한다. ‘이탈리아 여행’의 결말에서 부인이 ‘기적’을 외쳤음을 기억하는 알모도바르는 자기 인물들을 통해 어떤 영화적 기적을 만들지 고민했음이 분명하다. ‘브로큰 임브레이스’의 엔딩은 그 고민이 낳은 답변이다. 맹인이 된 마테오는 한때 사용했던 해리 케인이란 이름을 버리고 다시 마테오(즉, 감독)로 돌아와 만신창이가 된 작품을 재편집하는데, 그 결과물은 놀랍게도 (알모도바르 영화의 전환점인)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를 재현한다. 가장 즐겁고 재기발랄했던 순간을 불러낸 알모도바르는 마테오의 입을 빌려 불멸의 이야기를 필름에 아로새길 것임을 선언한다. ‘브로큰 임브레이스’는 올해 환갑을 맞아 30년 영화인생을 되돌아본 감독이 관객에게 들려주는 ‘진심어린 고백’이다. 원제 ‘Los abrazos rotos’,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19일 개봉. <영화평론가>
  • 일제강점기 宮의 굴욕

    일제강점기 宮의 굴욕

    #1. 일제 강점기 일본인 거주지역이었던 남산과 그 주변에는 많은 일본계 사찰이 모여 있었다. 이중 박문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로 일본인 및 친일파 위령제, 태평양전쟁 필승대회 등이 행해진 곳이다. 1932년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이 이곳으로 옮겨져 정문으로 사용됐다. 박문사는 경복궁의 선원전과 그 부속건물까지 옮겨와 사찰 건물로 삼았고, 원구단 자리에 있던 석고전까지 해체해 종각으로 사용했다. 흥화문은 1973년 신라호텔에 인수돼 정문으로 활용되다 1988년 경희궁 복원 계획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2. 풍경궁은 1902년 고종이 평양에 건설한 대한제국의 이궁(離宮)이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식민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으로 변모하면서 훼손되거나 철거됐다. 풍경궁의 정문인 황건문은 건축적 아름다움과 우수성으로 이름 높았는데 1925년 경성 조계사의 요청으로 수레 열한 대에 실려 230㎞를 이동해 산문으로 사용됐다. 황건문은 이후 동국대 정문으로 쓰이다 1971년 철거됐다. 남한에 남아 있던 평양 풍경궁의 유일한 건축 유산이 속절없이 사라진 것이다. #3. 경복궁의 도면인 ‘북궐도형’(1907년 제작 추정)에 나타난 경복궁 내 건물 수는 509동이다. 하지만 광복 후 남은 건물 수는 40동에 불과했다. 일제는 조선물산공진회를 준비하던 1914년 근정전 전면에 있는 흥례문과 회랑 등을 제거했다. 이때 방매된 궁궐 전각 중 상다수가 남산동, 필동, 용산에 있는 일본계 사찰과 요정, 일본인 부호의 저택으로 팔려 나갔다. 경성부 서사헌정의 남산장은 건춘문 내의 비현각을, 남산정 화월별장은 수정전 남쪽의 한 전각을 이건한 것이었다. 조선 왕조와 대한 제국기의 주요 궁궐은 지난 100년간 역사의 격랑 속에서 처참히 붕괴되거나 훼손됐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그리 크지 않았다. ‘궁궐의 눈물, 백 년의 침묵’(효형출판)은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등 서울의 주요 궁궐과 평양 풍경궁이 일제 강점기에 어떻게 훼철(毁撤)되었는지를 실증적으로 연구·분석한 결과물이다. 우동선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등 8명의 전문가가 공동 집필했다. 1부 ‘황권 강화를 위한 근대 조선(대한제국)의 움직임’에선 대한제국과 고종황제가 추진한 조선 변혁의 움직임을 궁궐 건축의 변화상을 중심으로 펼쳐 보인다. 일본, 러시아 등 외세의 영향력 속에서 고종황제는 중국에 대한 사대의 예를 폐기하고, 근대국가로의 진입을 꾀했는데 이러한 시대적 움직임은 경복궁 중건 및 경운궁(덕수궁), 원구단 건설, 궁궐 의례의 변화로 이어졌다. 2부 ‘일제에 의한 조선 궁궐 수난사’에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조선의 궁궐이 어떻게 훼손되어갔는지를 본격적으로 살핀다. 경복궁, 경희궁, 풍경궁의 굴욕과 더불어 창경궁이 벚나무가 심어진 종합 위락시설 ‘창경원’으로 전락한 과정을 추적한다. 3부 ‘조선의 궁에 들어선 근대건축물’은 경운궁, 창경궁, 경복궁 등지에 지어진 근대건축물의 건설 배경과 건축양식, 쓰임에 대해 파악한다. 특히 경복궁이 일제 식민지 경영의 선전장인 박람회장으로 쓰이면서 맞이한 변화상을 건축양식 측면에서 분석하면서 일제의 국력 과시 욕망과 조선인에 대한 상징 조작 행태를 들여다본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실종자 6명 시신 모두 발견

    임진강 수난사고로 실종된 야영객 3명의 시신이 9일 추가로 발견되면서 사고발생 4일 만에 실종자 6명이 모두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임진강 사고현장지휘본부는 이날 오전 11시48분 경기 연천군 동이리 합수머리 부근에서 마지막 실종자 이두현(40)씨의 시신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유족대책위원회는 임시로 연천의료원에 안치된 시신을 경기 고양지역 병원 장례식장으로 옮겨 합동분향소를 마련하기로 하고 구체적인 장소를 논의 중이다. 정부는 이날 권태신 국무총리실장 주재로 차관회의를 열어 임진강 인명사고와 관련해 책임이 있는 것으로 드러난 연천군과 한국수자원공사 관계자 등을 엄중 문책하기로 했다. 경기 연천경찰서는 이날 수자원공사 직원과 연천군 담당자 등 5∼6명을 소환해 직무태만 여부를 조사했다.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임진강~서해 수십㎞ 실종자 입체수색

    경기 연천 임진강 수난사고 현장지휘본부는 야영객 실종 3일째인 8일 소방서와 경찰, 군부대 등 수색인력 4500여명을 투입해 오전부터 대대적인 수색 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수색지역이 워낙 광범위한 데다 수초가 무성해 생사여부를 확인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연천군 사고수습대책본부가 차려진 왕징면사무소 광장은 이날 대책본부로부터 배낭과 운동화 등 유품을 돌려받은 유가족들의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이날 수색은 인력과 장비가 옆으로 길게 늘어서 5명의 실종자를 낸 임진교 남쪽 3㎞ 지점부터 하류 방향으로 23㎞를 훑어 내려가는 방식으로 진행됐다.임진강에는 헬기 16대, 고무보트 36대가 배치돼 공중과 수상에서 입체적 수색이 이뤄졌고, 서해에서도 함정을 이용한 수색이 진행됐다. 현장지휘본부 관계자는 “마지막 수색이라는 심정으로 인력을 대폭 증원해 저인망식으로 훑어 나머지 실종자도 반드시 찾겠다.”고 밝혔다.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오후 임진강 무인자동경보시스템 미작동과 관련해 현장 감정을 실시했다. 연천경찰서는 국과수 감정결과를 토대로 기계적 오작동 원인을 밝혀 책임 소재를 가려낼 방침이다. 경찰은 또 수자원공사와 연천군 등 관련 기관 직원들의 직무태만 여부도 확인하고 있다.한편 임진강 사망자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 대표들은 고양에 합동분향소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고양시는 사망자들의 거주지역이다.그러나 유가족 대표 이용주(48·고 이경주씨 사촌형)씨는 가족들과 협의한 결과 실종자가 모두 발견될 때까지 분향소를 설치하지 않고 발견된 시신을 연천의료원에 임시 안치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씨는 “11일 이전에 실종자를 모두 찾을 경우 함께 합동분향소를 차린 뒤 장례식을 치르기로 했으나,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이후에 장례절차 등을 논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또 보상문제는 선임된 변호사에게 일임하기로 했다.고 이경주씨 일행이 아닌 김대근(39)씨 유가족도 전날 시신을 발견했지만 바로 장례식을 치르지 않고 다른 가족과 행동을 같이 하기로 했다. 김씨의 분향소를 별도로 마련할지에 대해서는 추후 논의하기로 했다.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北 댐 방류] 유족들 “제발 시신 만이라도…”

    [北 댐 방류] 유족들 “제발 시신 만이라도…”

    북측의 댐 방류로 경기 연천군 임진강에서 실종된 6명 가운데 시신 3구가 7일 잇따라 발견됐다. 임진강 수난사고 현장지휘본부는 이날 오전 10시22분쯤 사고지점에서 5㎞ 떨어진 삼화교 하류에서 서강일(41)씨의 시신을, 15분 뒤인 10시37분쯤 삼화교에서 11.5㎞ 거리에 있는 비룡대교 하류에서 김대근(41)씨의 시신을 인양했다. 오전 11시54분쯤에는 장남교 하류 200m지점에서 이경주(38)씨의 시신이 발견됐다. 구조대원들은 이날 오전 헬기를 타고 삼화교 하류 부근을 샅샅이 뒤진 끝에 서씨의 시신을 먼저 인양했다. 서씨는 아들 우태(12)군을 아이스박스에 태워 살려낸 뒤 자신은 급류에 떠내려갔었다. 서씨의 아내 한지연씨는 고인이 안치된 연천의료원에 들어서자마자 병원 주차장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 어떡해 어떡해”라며 벌벌 떨면서 목놓아 울기만 했다. 비룡대교 부근에서 혼자 낚시를 하다가 실종된 고 김대근씨와 이경주씨 가족들도 실낱같은 희망을 끝내 외면한 채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온 가족을 보고 넋을 잃었다. 이씨의 아내 김선미씨는 남편의 사망 소식에 곧바로 탈진했다. 유가족 대표 중 가장 의연한 모습을 보였던 이씨의 사촌동생 동주(36)씨는 “형이 떠내려가면서 바위에 부딪혔는지 여기저기 멍이 들어있는 등 너무 처참한 몰골이었다. 얼마나 아팠을까….”라고 절규했다. 실종자 이두현(40)씨의 아버지는 “우리 장남은 낚시가 취미도 아니었고 친구따라 바람쐬러 간다며 나갔다가 이렇게 됐다. 생존은 이미 포기했으니 제발 시신만이라도 찾아 달라.”며 하소연했다. 박성국기자 psk@seoul.co.kr
  • 클래식과 권력, 오랜 애증 엿보기

    클래식과 권력, 오랜 애증 엿보기

    대부분 태교음악은 클래식이다. 아름다운 선율은 순수하기 그지없고, 마음을 안정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클래식의 역사는 마냥 우아하거나 순결하지 않았다. 클래식은 어떻게 정치와 권력으로부터 자유와 고고함을 지켜냈을까. ●권력자에게 매력적이던 음악 위대한 작곡가 베토벤의 교향곡 3번은 많이 알려져 있듯 나폴레옹을 위한 것이었다. 민중의 권리와 자유 정신을 옹호하며 프랑스 혁명에 관심을 가진 베토벤은 이 작품에 ‘보나파르트’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그러나 그가 황제가 됐다는 소식에 “그도 속된 사람이었어. 그 역시 자기의 야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민중을 짓밟고 누구보다도 심한 폭군이 될 거야.”라고 한탄하며 이름을 지워버렸다. 교향곡 3번에 ‘영웅’이라는 제목이 붙은 배경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음악은 본질적으로 대중적 효과가 있으며…사람들을 고무시키고 격앙시키며 최면을 걸 수 있다.”는 사상을 펼쳤다. 괴벨스와 함께 음악을 선전술로 철저히 이용하고, 순수 아리아인들로 제국음악회의소를 세워 국민을 선동할 음악을 만들었다. 그의 말대로, 음악은 원하는 것을 이끌어내기 위한, 또는 마음을 전달하기 위한 최적의 수단이다. 과격한 선동 없이도 사람들의 마음을 무장해제시키고 움직일 수 있어 권력자들에게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음악은 권력에 아부하고, 권력은 음악을 이용했다.”는 말은 어찌보면 식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전제로 한 ‘음악과 권력’(베로니카 베치 지음, 노승림 옮김, 컬처북스 펴냄)이 끌리는 것은 음악가들의 치열하고 처절하며, 한편으로는 권력에 저항한 삶을 저자의 풍부한 지식으로 제대로 버무렸기 때문이다. 독일의 음악학자인 베치는 이 책에서 기원전 3000년 수메르 시대부터 21세기에 이르는 시기를 거슬러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만, 멘델스존, 글루크, 그레트리, 로르칭, 알레비 등 유명작곡가에서부터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이들까지 방대하게 아우르며 음악가와 권력의 관계를 조망한다. 음악과 정치의 관계는 태초부터 함께였다. 수메르 시대에는 국왕보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성직자가 연주가요 작곡가였다. 페르시아와 이집트를 평정한 알렉산더 대왕은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음악을 배웠다. 중세에는 귀족계급이 성장하면서 음악가와 교류를 확대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처럼 권력자는 궁정에 당대 영향력있는 작가와 작곡가들이 음악으로 자신을 찬양하길 바랐다. 궁정의 녹을 먹으면서 안정과 권세를 누리고자 했던 음악가들과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국왕(영주)과 음악가(궁정악장)의 관계는 점차 끈끈해졌다. 강력한 국가와 현명한 국왕을 찬미하는 모테트(르네상스 시대의 성악곡), 오페라, 발레 등이 권력자의 지지 아래 번성하게 된다. ●저항정신이 창작의 기반 되기도 음악가가 권력에 순응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저항정신을 창작의 기반으로 삼기도 한다. 아름다움과 선량함, 목가적 정서를 작품에 녹인 슈베르트가 대표적이다. 그는 진보주의자 빌헬름 뮐러를 비롯해 괴테, 클로프슈토크, 하이네 등 시대 고발에 적극적인 작가의 글을 가사로 썼다. “힘과 행동의 시대가 묘사된 작품 속에서 커다란 고통은 미약하나마 위안을 얻는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유대인 음악가들은 반유대주의의 편견이 자신의 작품을 평가절하시킬 것을 우려하며 이름을 바꾸거나 개종했다. 부르노 발터는 흔한 유대계 이름인 슐레징어란 이름을 포기했고, 야콥 오펜바흐는 파리로 피신하면서 프랑스식 이름인 자크로 불렸다. 멘델스존은 기독교로, 말러는 가톨릭으로 각각 개종해 활동을 이어나갔다. 자크 프로망탈 알레비는 엘리아스 레비라는 이름을 버렸지만, 종교적 신념을 지키느라 고통받는 여주인공 라헬을 찬양한 ‘유대인 여자’를 만들어 정체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여성음악가들의 수난사도 인상적이다. 요제프 요아힘의 아내 아말리에 요아힘의 말대로 “훌륭한 여성 예술가이자 완벽한 가정의 안주인이 되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슈만의 아내 클라라는 “내 피아노 연주는 뒷전으로 밀려났고…이대로 퇴물만 되지 않으면 좋으련만.”이라고 한탄했다. 말러는 아내 알마 말러가 다시 작곡을 시작하자 “나를 남편으로 둔 대가로 당신이 음악을 포기한다면 당신은 나와 똑같은 명예를 누릴 수 있다.”며 만류했다고 전한다. ●거장 40여명의 유착과 긴장 생생히 전달 많은 이야기 가운데 한국의 작곡가 윤이상을 다룬 대목이 특히 흥미롭다. 저자는 윤이상을 일제시대에는 한국어 노래를 부르고 싶어했고, 1945년 이후에는 끊임없이 인권을 무시하는 정권에 대항한 ‘위대한 거장’으로 소개하고 있다. 18가지 주제에, 얼핏 세어봐도 40여명에 이르는 작곡가의 삶과 대작의 탄생 이야기, 당대 정권과 유착관계, 정권에 저항한 활동 등을 생생하게 전달해 600쪽에 육박하는 분량에도 지루함이 덜하다. 작품의 초연 당시 악기 편성이나 청중의 반응도 전하는 대목은 마치 한편의 공연 리뷰를 읽는 듯한 재미도 있다. 2만 8000원.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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