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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 관타나모 중국인 수감자 수용 검토

    독일 정부가 관타나모 수용소 내 중국인 수감자 수용을 검토 중이다.그러나 중국 정부는 이들의 본국 송환을 강력히 요구해왔던 터라 지원이 결정될 경우 양국간 외교마찰이 불가피할 전망이다.독일 시사주간 슈피겔은 25일(현지시간) 프랑크 발터 슈타인마이어 외무장관이 관타나모 수감자들의 독일 정착을 위한 법률적,정치적 검토를 지시했다고 보도했다.현재 수용이 검토되고 있는 수감자 중에는 중국 신장(新疆) 위구르자치구의 무장 분리독립운동단체인 동투르키스탄이슬람운동(ETIM) 소속 17명이 포함돼 있다.귄터 노케 독일 인권위원회 위원장은 이들에 대한 수용 방안을 마련해 달라고 정부에 촉구했다. 노케 위원장은 중국 밖의 위구르인 단체 중 최대인 ‘세계 위구르 회의’가 독일 뮌헨에 있다는 점을 들며 독일이 이들의 재정착에 가장 적합한 국가라고 강조했다. 독일은 포르투갈에 이어 두번째로 관타나모 수감자 수용에 적극 나선 유럽국이다.앞서 친강(秦剛)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이들의 송환을 촉구하며 “제3국으로 보내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미국은 이들이 중국에서 고문을 받을 위험이 있다며 제3국행을 추진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국가가 중국과의 갈등을 우려해 거부하고 있다.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박대출 선임기자 정가 In&Out] 탄핵의 추억 혹은 악몽

    2004년 3월8일쯤이다.박관용 국회의장은 전직 총리 몇분을 초청했다.여의도 63빌딩 음식점에서 오찬을 함께 했다.남덕우 황인성 이홍구 박태준 전 총리 등이 참석했다.조언을 듣는 자리였다.3시간 동안 이뤄졌다.강한 역할 주문이 잇따랐다.박 전 총리의 목소리가 컸다.며칠 전에는 전직 국회의장들을 초대했다.10일엔 청와대 전화를 받았다.문재인 민정수석이 걸어왔다.“대통령이 피곤해 한다.”는 내용이었다.4자회동 제의를 거절하는 답신이었다.4자는 자신과 노무현 전 대통령,여야 대표를 말한다.다음날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이 투신 자살했다.노 전 대통령이 모욕을 준 직후다.박 의장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대통령 탄핵안을 두고 하는 얘기다.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그러나 이날 결심을 굳혔다.즉각 한나라당에 메시지를 보냈다.준비상황을 체크했다.의결 정족수 확보,강행 처리 의지 등이 전달됐다.연락책은 정병국 의원에게 맡겨졌다.그리곤 다음날 오전 탄핵안 방망이를 두드렸다.한달 뒤 4·15 총선 공천 때 일이다.열린우리당은 충북 증평·진천·괴산·음성에서 후보를 찾지 못했다.정우택 한나라당 후보가 너무 셌다.공천 포기까지도 한때 검토했다.그러다가 서울에서 탈락한 후보로 빈자리를 메웠다.김종률 의원이다.선거 결과는 더블스코어로 뒤집어졌다.탄핵의 후폭풍은 이처럼 컸다.정국은 한순간에 뒤집어졌다.정동영 당시 의장조차 ‘비정상’이라고 했다.지금 국회가 서 있다.야당은 해머로 공공 기물을 부순다.10년 전에도 그랬다.이젠 전기톱도 등장했다.물을 뿌려대고,소화기 분말로 맞선다.폭력의 진화다.민의의 전당은 거꾸로 간다.민주당의 점거로 상임위는 불통이다.여야 대화는 끊겼다.유정복 의원은 “정치만 있고,일은 없다.”고 개탄한다.1999년 1월5일에도 강행처리가 있었다.국민회의와 자민련 공동정권이 밀어붙였다.박준규 당시 국회의장은 직권상정했다.법안 140여건을 통과시켰다.한나라당은 ‘입’으로 반대했다.폭력은 없었다.지금 민주당은 ‘몸’으로 막을 태세다.정세균 대표는 의원직 총사퇴까지 내걸었다.‘집권 10년’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밟고 지나가라는 모습이다.탄핵의 추억 탓인지도 모르겠다.하지만 그때와 다르다.사안의 본질부터 차이난다.방송환경도 달라졌다.한나라당은 개혁입법 연내 처리를 선언했다.이명박 정부 2년의 토대 구축을 위한 승부수다.‘모 아니면 도’라는 식이다.하지만 신중론도 나온다.최악의 상황을 고려하자는 것이다.탄핵의 악몽을 걱정하는 의견이다.원희룡 의원의 주장이다.국민 공감대를 얼마나 얻느냐가 관건이다.해법은 모나,도가 아닐 수도 있다. 최근 박계동 국회 사무총장이 본회의장에 들렀다.출입문 잠금 상태를 점검했다.연말 본회의장 문이 걸어 잠가질지 주목된다.dcpark@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읽기] (103) 환향녀의 슬픔, 안추원과 안단의 비극

    [병자호란 다시읽기] (103) 환향녀의 슬픔, 안추원과 안단의 비극

    속환이나 도망을 통해 천신만고 끝에 조선으로 돌아온 여인들(還鄕女) 앞에는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사족(士族) 부녀자들은 ‘오랑캐에게 실절(失節)한 여자’라는 따가운 시선 때문에 고통받아야 했다.일부 신료들은 ‘속환되어온 며느리에게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할 수는 없다.’며 이혼을 허락하라고 요구했다.출가했던 딸이 환향녀가 되어 돌아온 친정 부모들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이혼을 섣불리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반대론도 있었지만,대부분의 사족 환향녀들은 본래의 남편으로부터 버림받고 말았다.피로(被擄)로 말미암은 슬픔과 비극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환향녀의 이혼 문제를 둘러싼 논란 1638년(인조 16) 3월 조정에는 상반된 내용을 담은 두 개의 호소문이 올라왔다.억울한 사연을 인조에게 호소했던 주인공은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와 전 승지 한이겸(韓履謙)이었다.그들의 호소는 모두 환향녀의 이혼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장유는 자신의 외아들 장선징(張善徵)과 속환되어 돌아온 며느리가 이혼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실절한 며느리에게 선조의 제사를 계속 맡길 수 없으니 아들이 새 장가를 들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 요지였다.한이겸의 사연은 장유의 호소 내용과는 정반대였다.그는 ‘자신의 딸이 속환되어 왔는데,사위가 딸을 버리고 새 장가를 들려고 하는 것이 원통하다.’며 인조에게 선처를 호소했다. 한 사람은 시아버지의 입장에서,다른 한 사람은 친정아버지의 입장에서 전혀 상반된 호소를 하고 있는 셈이다.입장이 난처해진 예조는 대신들에게 의견을 물은 뒤 결정해야 한다고 물러섰다. 좌의정 최명길이 나섰다.그는 먼저 임진왜란 이후의 고사를 떠올렸다.‘제가 고로(故老)들에게 들었는데,왜란 뒤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당시 어떤 종실(宗室)이,송환된 아내와의 이혼을 청하자 선조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또 어떤 벼슬아치가 새장가를 든 뒤,본래의 아내가 쇄환(刷還)되자 선조께서는 후취(後娶) 부인을 첩으로 삼으라고 명하시고 본처가 죽은 뒤에야 후취 여인을 비로소 정실부인으로 올렸다고 합니다.그밖에 재상이나 고관들 가운데 쇄환되어 온 처를 그대로 데리고 살면서 자손을 낳아 명문 거족이 된 사람도 왕왕 있습니다.예(禮)는 정(情)에서 나오는 것이니 때에 따라 다를 수 있으며,한 가지에 구애되어서는 안 됩니다.’ 최명길은 단호했다.이혼을 허락하면 안 된다고 했다.이혼을 허락할 경우,수많은 부녀자들이 속환을 포기하고 이역에서 원귀(寃鬼)가 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인조, 훈신(勳臣)의 독자 장선징에게만 특별히 이혼 허락 최명길은 또한 ‘속환을 통해 돌아온 부녀자들 모두가 실절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그는 끌려간 조선 여인들 가운데 청인의 회유와 협박에도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또 청인들 중에도 그런 조선 여인들의 절조에 감명 받아 함부로 행동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례를 들었다.최명길은 ‘급박한 전쟁 상황에서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쓰고서도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을 들어 환향녀들을 무조건 ‘실절한 여자’로 매도할 수는 없다고 했던 것이다. ‘인조실록’에는 장유와 한이겸의 상반된 호소 내용에 대해 최명길 이외의 다른 대신들이 어떤 의견을 제시했는지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하지만 최명길의 주장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그것은 ‘인조실록’의 사신(史臣)이 최명길의 주장을 맹렬히 비난하고 있었던 것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최명길을 비판했던 사평(史評)의 핵심은 이렇다.‘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포로가 된 부녀자들은,비록 본심은 아니었지만,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결국 절개를 잃은 것이다.그러니 억지로 다시 합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절대로 없는 것이다’.사평에 따르면 환향녀들이 포로가 되면서 죽지 않았던 것 자체가 이미 허물이 되고 죄가 되는 셈이다. 사평은 다시 최명길에게 화살을 돌린다.‘실절한 여자를 다시 취해 부모를 섬기고, 종사(宗祀)를 받들며,자손을 낳고 가세(家世)를 잇는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최명길은 백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삼한(三韓)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이니 통분함을 금할 수 있겠는가’.환향녀의 이혼 문제와 관련하여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하려 했던 최명길의 주장은 철저히 매도되었다. 장유 집안의 ‘이혼 문제’는 이후에도 다시 논란이 되었다.1640년(인조 18) 9월에는 장유의 아내가 예조에 다시 호소문을 올렸다.이번에는 호소문 속에 ‘며느리의 타고난 성질이 못되어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또 편치 않은 사정이 있으니 이혼시켜 주기를 청한다.’는 내용이 있었다.당시 장유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번에도 대신들의 의견은 일단 신중했다.‘섣불리 이혼을 허락하면,부부 사이에 뜻이 맞지 않는 일이 있을 경우에도 너도나도 이혼하겠다고 나설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다.인조는 고육책을 내놓았다.‘이혼을 인정할 수는 없지만,장선징이 훈신(勳臣)의 독자임을 고려하여 특별히 그에게만 허락한다.’는 내용이었다.하지만 그 파장은 컸다.대부분의 사대부 집안들은,청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며느리들을 내쳤고 새로운 며느리를 맞아들였다.사족 출신 환향녀들은 대부분 버림받고 말았다.사책(史冊)에도 이 여인들에 대한 언급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이 가엾은 희생자들의 비극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끌려가던 안단 “나를 죽을 곳에 빠트린다” 울부짖어 환향녀들의 운명은 가혹했지만,포로들 가운데는 끝내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많았다.속환해 줄 가족도 없고,가족은 있어도 경제적 능력이 없고,또 도망쳐 돌아올 여건도 되지 않았던 사람들은 청에 그대로 눌러앉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속환의 가능성이 점차 사라지고 있던 와중에도 귀향의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타났다.현종대에 도망쳐 온 안추원(安秋元)과 숙종대에 도망쳐 온 안단(安端)의 사연이 주목된다. 개성 부근에 살다가 1637년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포로가 되었던 안추원은 심양으로 끌려갔다.1644년 청이 입관(入關)에 성공하자 안추원은 주인을 따라 북경으로 흘러들어 갔다.그는 1662년(현종 3) 탈출을 시도했다가 한 번 실패한 뒤 1664년 다시 시도하여 조선으로 들어왔다.산해관을 통과하고 만주를 가로지르는 대모험이었다. 조선 조정은 28년 만에 탈출한 안추원을 고향인 개성으로 보냈다.하지만 개성에는 그를 품어줄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조정 또한 그에게 생계 대책을 마련해 주지 않았다.혈혈단신의 처지에 생계마저 막막해진 안추원은 결국 북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하지만 그는 압록강을 건너자마자 책문(柵門)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안단의 사연은 더 기막히다.병자호란 당시 포로가 되었던 그 또한 심양을 거쳐 북경으로 들어가 사역되었다.안단은 1674년(숙종 즉위년) 자신의 주인이 행방불명되자 조선으로 탈출을 시도했다.포로로 붙잡혀 끌려간 지 물경 37년 만이었다.안단은 산해관을 통과하여 봉황성(鳳凰城)을 거쳐 압록강의 중강(中江)까지 오는 데 성공했다.하지만 강을 건너게 해달라는 그의 간청에도 불구하고,의주부윤은 그를 결박하여 봉황성으로 압송했다.청의 힐문을 의식한 조처였다.입국을 거부당하고 봉황성으로 끌려가던 안단은 “고국 땅을 그리는 정이 늙을수록 더욱 간절한데 나를 죽을 곳으로 빠뜨린다.”며 울부짖었다. 안추원과 안단의 사연은 처절하다.각각 28년,37년 만에 탈출에 성공했다.둘 모두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었지만,한 사람은 고국에서 결국 적응하지 못했고 다른 한 사람은 끝내 압록강을 건너지도 못했다.이들의 비극은 과연 누가 책임져야 할까? 전란의 비극에 휘말렸던 수많은 생령들의 처참한 고통을 생각하면서 오늘 이 전쟁을 다시 성찰해야 할 필연성을 새삼 절감한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02) 포로들의 고통과 슬픔 ③

    [병자호란 다시 읽기] (102) 포로들의 고통과 슬픔 ③

    당시 포로들을 속환해 오는 방식은 몸값을 누가 마련하느냐에 따라 크게 사속(私贖)과 공속(公贖)으로 나눠지고 있었다.사속이란 일반 사민(士民)들이 스스로 마련한 몸값을 갖고 심양에 들어가 혈육을 데려오는 방식이었다.공속은 국가가 몸값을 대고 포로들을 데려오는 것이었다.어느 경우든 포로를 팔아 한 밑천 챙기려는 청인들의 탐욕,조선의 고관들이나 재력을 갖춘 사람들의 무절제 때문에 속환가(贖還價)는 날이 갈수록 치솟았다.거기에 속환 과정에서 부정과 비리까지 더해지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속환은 그저 ‘남의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었다.또 속환을 통해 돌아오는 사람들은 또 다른 고통과 마주해야 했다.이래저래 포로들의 고통은 끝이 없었다. ●속환의 문제점과 허박(許博)의 절규 몸값을 마련할 수 없는 사민들의 입장에서는 공속이야말로 가장 바람직한 방식이었다.하지만 공속의 대상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전란 직후,국가의 재정 형편이 여의치 않았던 상황에서 조정은 공속의 대상자를 종실(宗室),인조를 호종(扈從)했거나 남한산성을 지키던 군사들,그리고 그들의 가족들로 제한했다.종실은 왕실의 피붙이이기에 가장 우선적인 속환 대상이 되었고,남한산성을 지키던 군사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국가 유공자’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국가가 몸값을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공속의 대상자도 아니고,비싼 속환가를 마련하기도 어려웠던 사람들은 결국 속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심양으로 달려갔지만 폭등해 버린 속환가 때문에 혈육을 눈앞에 두고 돌아서야 했던 사람들,아예 속환가를 마련할 방도가 없어 압록강 너머의 만주 땅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처참한 장면이었다. 속환 자체가 사실상 무역으로 변질되면서 갖은 부작용과 부정 행위도 같이 일어났다.상인들 가운데는 심양을 왕래하며 ‘사람 장사’를 하는 자들이 있었다.청인으로부터 포로를 싼값에 사서 조선에 돌아온 뒤,포로의 연고자에게 비싼 값으로 되파는 방식이었다. 실종된 혈육을 가진 사람들의 애끓는 심정을 악용하여 뇌물을 챙기는 관원들도 나타났다.당시 조정은 심양에 억류된 포로들의 명단을 청 측으로부터 넘겨받아 이른바 ‘피로인성책(被擄人成冊)’을 만들었다.실종된 가족들의 생사를 알지 못해 발을 구르던 사람들에게는 ‘성책’을 열람하는 것이야말로 속환을 위한 첫걸음인 셈이었다.하지만 당시 비변사에 보관되어 있던 ‘성책’을 열람하는 과정에서 관련 당상(堂上)이나 서리들이 뇌물을 받아 문제가 되었다.곤경에 처한 불행한 사람들을 등치는 파렴치한 행위였다. 이런저런 요인들 때문에 속환을 통해 포로들을 데려오는 것은 쉽지 않았다.누구보다 속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예조좌랑 허박(許博)은 1637년 9월,인조에게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글자 수가 1만자에 이르는 장문의 상소였다.그는 인조에게 속환을 전담하는 기구와 관원으로 속환도감(贖還都監)과 속환사(贖還使)를 설치하라고 촉구했다.그는 몸값 마련을 위한 방책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속환가로 충당되는 은을 마련하기 위해 은광(銀鑛)을 개발하고,벼슬아치들과 일반 백성들에게 속환의 절박성을 설명하여 성금을 거두라고 건의했다.허박은 또한 왕실과 조정이 절용(節用)에 솔선하고,속환 과정의 부정과 비리를 제거하고,속환가를 엄격히 제한하라고 촉구했다.그는 나라의 가용 재원을 총동원하여 속환에 나서라고 촉구하고,그렇지 않을 경우 백성들의 원망이 극에 이르고 그것이 궁극에는 조정을 향할 것이라고 경고했다.하지만 허박이 제시한 종합적이고 근본적인 대책은 수용되지 못했다. ●속환은 시들해지고,청의 압박은 강화되고 시간이 흐르면서 정부의 속환 대책은 점차 흐지부지되어 갔다.속환은 이제 ‘개인의 문제’가 되었다.조선 조정이 속환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오히려 청 측에서 먼저 속환을 종용하는 경우도 나타났다.1641년(인조 19) 6월,용골대(龍骨大)는 심관(瀋館)의 조선 관리들에게 자신의 곤궁한 경제적 사정을 이야기한 뒤,자신이 데리고 있던 열 살 아이를 속환하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속환 문제를 포함하여 포로들에 대한 조선 조정의 관심이 점차 시들해지고 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청은 도망해 온 포로(주회인)들을 송환하라는 압박을 멈추지 않았다.병자호란 당시 워낙 많은 수의 포로가 잡혀갔기 때문에 주회인의 수도 크게 증가해 있는 상태였다.청은 때로는 심양의 소현세자에게,때로는 직접 서울로 사신을 보내 주회인들을 잡아 보내라고 협박했다. 정묘호란 무렵,조선 조정은 ‘부모 된 자로서 고향을 찾아 도망쳐 온 자를 차마 잡아 보낼 수 없다.’는 인정론(人情論)을 들어 청측의 요구를 무마하고자 했다.하지만 병자호란 이후에는 이 같은 인정론이 통하지 않았다.청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인조를 입조(入朝)시킨다.’고 하거나 ‘애초 산성에서 나올 때 왕을 교체하려 했는데,그러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 는 등의 풍문을 흘려 인조를 직접 압박했다. 인조와 조정은 청의 압박에 바짝 엎드릴 수밖에 없었다.각 지방의 수령들에게 주회인들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부작용이 속출했다.수령들 가운데는 책임을 때우기 위해 주회인이 아닌 사람까지 마구잡이로 붙잡아들이는 자가 있었다.도망친 주회인 대신 가족을 잡아들이기도 했다.붙잡힌 주회인들 가운데는 청으로의 압송을 기다리며 몇 년씩 감옥에서 고통을 겪는 자들도 있었다. 당연히 민심이 흉흉해졌다.1641년(인조 19),유례 없는 대한재(大旱災)가 일어나자 백성들 사이에서는 ‘포로들을 도로 붙잡아 보내 하늘이 노했다.’는 수군거림이 나타나고 있었다. ●귀환 과정의 고통 청으로 끌려간 포로들 가운데 속환 또는 도망을 통해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사람들은 분명 행운아였다.하지만 그 ‘행운’도 잠시일 뿐 그들의 고통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우선 도망이나 속환을 통해 조선으로 귀환하는 과정 자체가 고통의 연속이었다.도망자들은 낮에는 산 속 등지에 숨어 있다가 주로 밤을 이용하여 이동했다.당장 이동하는 도중에 굶어 죽을 위험성이 대단히 높았다.또 산 속에서 맹수를 만나 희생되는 경우도 있었다. 어렵사리 심양부터 진강(鎭江-오늘날의 단둥·丹東)에 이르는 만주 지역을 통과하더라도,압록강변에 이르면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변방 관리들은 청의 힐책을 우려하여 주회인들의 도강을 허용하지 않았다. 입국이 막힌 주회인들이 강물에 뛰어들거나 목을 매어 죽는 경우가 속출했다.1642년 2월,정언(正言) 하진(河?)은 ‘창성(昌城)과 삭주(朔州)의 압록강 줄기 위아래에 백골이 널려 있고,그것을 보고 들은 사람들 가운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들이 없다.’며 참혹한 실상을 증언한 바 있다. ‘합법적인’ 속환인들의 사정도 주회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그들 또한 만주를 통과하고,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오는 도중 아사할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었다.이동하는 도중 식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도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1637년 윤4월,조정에서는 미곡을 통원보(通遠堡) 서편으로 운송하여 속환인들에게 공급하자는 대책이 제시된 바 있다.또 조선에서도 속환인들이 하루에 걸을 수 있는 거리를 따져 적당한 곳에 진제장(賑濟場)을 세워 구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여성 포로들 가운데는 귀환 도중 납치되는 경우도 있었다.그 때문에 조정은 1637년 2월,포로들이 지나는 연로와 나루터 등지에 병력을 배치하고,사족 부녀들을 잡아가는 자들을 붙잡아 효시(梟示)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하지만 아사와 납치의 위험성 등 갖은 난관을 무릅쓰고 귀향에 성공한 여성 포로들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 기다리고 있었다.그것은 다름 아닌 ‘실절(失節)한 여자’라는 비판과 매도였다.병자호란 당시 포로들의 삶은 시종일관 참혹한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KAL납북자가족 “40년만에 송환운동 시작”

    지난 1969년 북한에 의해 피랍된 납북자들의 생사확인과 송환운동이 사건발생 40년만에 본격적으로 이뤄질 전망이다. 피랍탈북인권연대(대표 도희윤)과 KAL기 납북자 가족들은 11일 프레스센터 서울외신기자클럽에서 KAL기 납치사건에 관한 다큐시사회를 가졌다. KAL기 납북사건은 1969년 12월 11일 대한항공 YS-11기가 강릉비행장을 떠나 서울로 향하던 중 대관령 상공에서 납치되어 함남 원산 근처 선덕비행장에 강제 착륙한 사건이다. 여객기를 납치한 범인은 승객으로 가장한 북한의 고정간첩 조창희로 밝혀졌으며, 국제사회의 여론이 거세지자 북한은 1970년 2월 14일 판문점을 통해 납북자 51명중 승무원 4명과 승객 7명을 제외한 39명만을 송환했다. 피랍된 황 원(전 MBC PD)씨의 아들 인철(40)씨는 “2001년 2월 제3차 남북이산가족 교환방문 때 당시 스튜어디스였던 성경희의 어머니가 평양에서 딸과 32년만에 재회했다.”며 하지만 “2006년 6월 통일부를 통해 북한에 생사확인을 요구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전원 생사확인불가능 이었다.”고 밝혔다. 납북자 가족측은 “다큐시사회를 시작으로 40주년이 되는 내년부터 피랍된 가족들의 생사확인과 송환운동을 대대적으로 계획하고 있다.”고 밝히고 “1969년 KAL기 납치사건에 대해서 국민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TV 손진호기자 nasturu@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뉴스플러스] 北에 국군포로 송환 ‘경제적 보상’ 검토

    정부는 6·25전쟁 이후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 송환을 위해 북한에 대한 경제적 보상을 해결 방안의 하나로 고려하기로 했다.정부의 한 관계자는 5일 “과거 정부에서도 북측에 국군포로 문제를 해결하면 획기적 지원을 고려하겠다는 제안을 한 적도 있다.”면서 “(송환 대가로)인센티브를 주고 해결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정부는 중국 등으로 탈북해 체류 중인 국군포로 송환과 관련,신변안전 보장을 최우선으로 추진하고 관련국에 대해 북송 방지 협조 노력을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주간HOT] 檢, ‘몸통’ 찾았을 뿐이고…靑, 500만원 파라솔 샀을 뿐이고…

    ●30억 진짜 주인은 누구? 세종증권 매각 비리를 둘러싸고 노 전 대통령 형인 노건평씨와 검찰의 공방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지난 4일 검찰이 1라운드 판정승을 거뒀다. 사건을 조사하고 있는 검찰은 건평씨가 직접 정대근 농협 회장을 만나 로비를 했고 그 대가로 30억원 가량을 받았다고 밝혔다. 또 건평씨는 정화삼 씨 형제를 통해 로비 착수금으로 1억원, 성공 사례금으로 각각 2억원과 1억원씩 총 4억원을 직접 받았다고 밝혔다. 건평씨는 지난 4일 구속영장이 발부된 직후 “(검찰이 제시한 혐의 중)일부는 인정한다.”며 일단 꼬리를 내렸다. 그러나 정씨 형제와 처음부터 로비를 공모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전면 부인하고 있다. 한나라당·자유선진당 등이 참여정부의 도덕성을 문제 삼아 강하게 비난하고 있는 가운데 민주당은 “진실이 밝혀지길 바란다.”며 한발 물러서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새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전 대통령 가족 비리’에 국민의 심정은 참담하기만 하다. ●보수·진보 단체 ‘삐라 몸싸움’ 지난 2일 자유북한운동연합과 납북자가족모임 등 보수단체 회원들이 경기 파주시 임진각 자유의 다리에서 진보단체 회원들과의 몸싸움 끝에 전단 1만장이 담긴 풍선 1개를 북으로 날려 보냈다. 몸싸움 도중 보수단체 회원 1명은 가스총을 발사했으며 이 광정에서 진보단체 회원 1명이 부상당해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등 마찰이 이어졌다. 보수단체가 납북자 송환을 촉구하는 내용 등이 담긴 전단을 매일 살포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밝힌 가운데 일부에서는 ‘남남(南南)갈등만 고조시키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져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한편 대북전단에는 남한체제의 우월성, 납북자 송환을 촉구하는 내용 뿐 아니라 “북한에서 노예처럼 살았지만 천신만고 끝에 대한민국의 품에 안겼다. 조선 인민들이 겪는 모든 고통과 가난, 굶주림은 김정일 한 사람 때문”이라는 탈북자의 인용문구 등이 세세하게 적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한민국영화대상의 꽃은 ‘미쓰 홍당무’ 공효진 지난 4일 영화인들의 축제 ‘대한민국영화대상’이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렸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영화인들이 참석해 자리를 빛낸 가운데 ‘영화제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여우주연상은 ‘미쓰 홍당무’에서 열연을 펼친 공효진에게 돌아갔다. 공효진은 “상을 받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에 이 영화를 하게 됐다.”며 솔직한 소감을 밝혔다. 올해 최고의 화제작 ‘추격자’는 최우수 작품상과 남우주연상 등 총 7개 부분의 트로피를 차지해 영향력을 입증했으며 신인상은 ‘영화는 영화다’의 강지환, ‘미쓰 홍당무’의 서우에게로 돌아갔다. 한편 영화제가 끝난 뒤 일부 언론과 시청자들은 “주인의식이 결여된 일부 스타들은 수상에 실패하자 곧바로 자리를 뜨는 실망스런 모습을 보였다.”며 “자기 영화 아니면 관심없다는 일부 배우들의 이기적인 자세가 문제”라는 지적을 내놓기도 했다. ●’럭셔리 청와대’ 파라솔 한대가 500만원? 최근 불거진 청와대의 ‘물품 구입비 과다 지출 논란’이 일파만파로 확산되고 있다. 청와대는 지난 3월부터 9월까지 물품 구입에 14억 4046만원을 지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발끈’한 한 네티즌은 “청와대 구입 물품을 인터넷 경매 쇼핑사이트에서 가격 비교해봤다.”며 조목조목 비교했다. ”판매가 많이 된 물건으로 골라봤다.”는 이 네티즌의 가격비교에 따르면 158만원짜리 커피메이커는 1만4000원짜리로, 26만원짜리 우산꽂이는 4만원짜리로 대체가 가능했다. 특히 청와대의 500만원짜리 파라솔은 7만 5000원이면 구입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비난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국민의 피땀으로 값비싼 가재(家財)사들이기에 여념이 없는 청와대가 언제쯤이면 철이 들런지, 국민들은 기다리고 또 기다려본다. 글 / 서울신문 나우뉴스 송혜민 기자 huimin0217@seoul.co.kr 영상 / 서울신문 나우뉴스TV 김상인VJ bowwow@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진보·보수단체, ‘삐라 몸싸움’

    정부의 자제 요청에도 불구, 보수단체 회원들이 2일 대북전단 살포를 강행했다. 자유북한운동연합과 납북자가족모임 등 보수단체 회원들은 이날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 자유의 다리에서 진보단체 회원들과의 몸싸움 끝에 전단 1만장이 담긴 풍선 1개를 날려 보냈다. 보수단체 회원들은 이날 납북자 송환을 촉구하는 내용 등이 담긴 전단 10만장을 10개의 풍선에 담아 날려 보낼 계획이었으나 진보단체와의 몸싸움으로 1개만 띄워 보냈다. 한국진보연대·전국여성연대·한국청년단체협의회 등 진보단체 회원 50여명은 이날 임진각에 먼저 도착해 전단 살포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10여분 후 보수단체 회원 6명도 화물차에 전단을 싣고 임진각에 도착해 진보단체 회원들에게 전단 살포를 막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결국 두 단체 회원끼리 몸싸움이 벌어져 보수단체 회원 1명이 가스총을 발사했으며 경찰은 더 이상의 충돌을 막기 위해 경찰 50여명을 배치했다. 이 과정에서 진보단체 회원 1명이 부상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며 보수단체 회원 1명은 경찰에 연행됐다. 보수단체 회원들을 진보단체 회원들의 저지에도 불구, 전단 1만장이 담긴 풍선 1개를 날려 보냈으며 진보단체 회원들은 화물차에 실린 나머지 전단을 빼앗았다. 황왕택 경기북부진보연대 집행위원장은 “국내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개성공단 등 남북 관계마저 경색돼 전단 살포를 자제해 줄 것을 권유하려고 이 자리에 나왔다.”며 “국민의 피해를 생각해 하고 싶은 일도 참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최성용 납북자가족모임 대표는 “전단 살포는 납북된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것이지 남북관계 단절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라며 “납북자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대북 전단 살포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연합뉴스@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보수·진보단체 ‘삐라 몸싸움’

    보수·진보단체 ‘삐라 몸싸움’

    정부의 자제 요청에도 불구,보수단체 회원들이 2일 대북 전단(삐라)을 살포했다. 자유북한운동연합과 납북자가족모임 등 보수단체 회원들은 이날 경기 파주시 임진각 자유의 다리에서 진보단체 회원들과의 몸싸움 끝에 전단 1만장이 담긴 풍선 1개를 날려보냈다. 보수단체 회원들은 이날 납북자 송환을 촉구하는 내용 등이 담긴 전단 10만장을 10개의 풍선에 담아 날려 보낼 계획이었으나 진보단체와의 몸싸움으로 1개만 띄워 보냈다.진보단체 회원들은 화물차에 실린 나머지 전단을 빼앗았다.한국진보연대,전국여성연대,한국청년단체협의회 등 진보단체 회원 50여명은 임진각에 먼저 도착해 전단 살포에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10여분 뒤 보수단체 회원 6명도 화물차에 전단을 싣고 임진각에 도착해 진보단체 회원들에게 전단 살포를 막지 말라고 요구했다.두 단체 회원끼리 몸싸움이 벌어져 보수단체 회원 1명이 가스총을 발사했으며 경찰은 더 이상의 충돌을 막기 위해 경찰관 50여명을 배치했다.이 과정에서 진보단체 회원 1명이 부상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보수단체 회원 1명은 경찰에 연행됐다. 황왕택 경기북부진보연대 집행위원장은 “국내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개성공단 등 남북 관계마저 경색돼 전단 살포를 자제해 줄 것을 권유하려고 이 자리에 나왔다.”며 “국민의 피해를 생각해 하고 싶은 일도 참을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국민행동본부 서정갑 대표는 “국민행동본부,라이트코리아 등 30여개 보수단체가 전단 살포에 동참했다”고 밝혔다.또 오늘 오전 11시 라이트코리아 회원을 비롯한 50여명이 임진각 자유의 다리에서 전단지 10만장을 북한으로 보낼 예정이라고 밝혀 이를 둘러싼 논란이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윤상돈기자 yoonsang@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100) 포로들의 고통과 슬픔 ①

    [병자호란 다시 읽기] (100) 포로들의 고통과 슬픔 ①

    ‘우리가 끌고 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탈출에 성공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하지만 일단 강을 건너 한 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다음에 도망치는 자는 조선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청 태종 홍타이지가 1637년 1월,항복을 받을 당시 조선 조정에 제시했던 포로 관련 조건이었다.참으로 무서운 조건이었다.당시 서슬 퍼렇던 청의 위협 앞에서 조선 조정은 약조를 어기기 어려웠다.실제 조선으로 도망쳐 온 포로들 가운데 도로 붙잡혀 청 측에 넘겨진 사람들의 운명은 가혹했다.그들은 ‘도망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酷刑)을 받았다.끔찍한 일이었다.참혹하기 그지없는 ‘포로 문제’야말로 병자호란이 남긴 가장 큰 비극이자 인조정권을 계속 고민하게 했던 문제이기도 했다. ●청의 포로에 대한 집착 병자호란 당시 청군에 붙잡혀 청나라로 끌려간 사람(被擄人)은 얼마나 될까.전쟁이 끝난 뒤,최명길은 가도(椵島)의 명군 지휘부에 보낸 자문(咨文)에서 피로인의 수를 50만명으로 추정했다.쉽사리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수이다.조선이 청의 침략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명 측에 강조하기 위해 포로의 수를 부풀렸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나만갑(羅萬甲)이 ‘병자록’에서 ‘청군이 철수하는 동안 매번 수백 명의 조선인들을 열을 지어 세운 뒤 감시인을 붙여 끌고 가는 것이 하루 종일 지속되었다.’거나 ‘뒤 시기 심양(瀋陽) 인구 60만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 사람’이라고 서술했던 사실을 염두에 두면 최명길의 추정이 과장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50만명은 안 될지 몰라도 적어도 수십만 명에 이르렀을 가능성은 꽤 높아 보인다.  청은 어떤 배경에서 이렇게 많은 수의 포로들을 끌고 갔을까.청은 일찍이 후금(後金)시절 이전부터 부족한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포로들을 획득하는 데 골몰했다.후금은 전투,납치 등을 통해 한인(漢人)과 몽골인들은 물론 조선인들을 잡아가곤 했다.그들은 후금으로 끌려가 농장 등지에서 노비로 사역되었다.신체가 건장한 자들은 군대에 편제되어 또 다른 전쟁에 동원되기도 하고,여자들은 궁중에 들어가 시비(侍婢)가 되기도 했다.특히 철장(鐵匠),야장(冶匠) 등 특별한 기능을 가진 포로들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우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실제 1627년 후금이 정묘호란을 도발했을 때,조선에 들어온 병사들 가운데는 일찍이 1619년 심하(深河) 전역에서 포로가 되었던 조선 출신 병사들도 끼어 있었다.  영역은 날로 늘어나는데 인구가 부족했던 후금은 이후에도 ‘포로 사냥’에 몰두했다.특히 1629년 이후 명을 수시로 공략하면서 매번 수만에서 수십 만의 한인들을 납치했다.그들은 후금의 새로운 인구가 되고,노동력이 되었다.따라서 병자호란 무렵에 오면,청은 이미 상당한 수의 한인 노동력을 확보한 상태가 되었다.이제 조선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은 단순히 노동력이라기보다는 돈을 받고 판매할 ‘무역 상품’으로서의 의미를 더 크게 지니게 되었다.   ●포로를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    이미 정묘호란 직후부터 조선은 청(후금)과 ‘포로 문제’를 놓고 심각한 갈등을 벌였다.특히 심각했던 것은 후금에 정착했다가 조선으로 도망쳐온 포로(走回人)들을 처리하는 문제였다.후금은 조선에 대해 주회인들을 조건 없이 돌려보내거나,아니면 그들의 몸값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조선이 자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또 다른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고 협박하기도 했다.하지만 조선은 후금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이었다.  청과 조선은 포로를 바라보는 개념과 인식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청은 포로를 ‘혈전(血戰)을 벌여 얻어낸 정당한 성과’로 인식했다.말하자면 피를 흘려 얻은 일종의 ‘소유물’이자 ‘재화’였던 것이다.따라서 포로들이 달아나는 것이나,달아난 포로들을 숨겨주고 송환하지 않는 조선의 행위에 대해 극도의 불만과 분노를 표시했다.  조선은 달랐다.정묘호란 직후의 기록을 보면,조선 신료들은 포로들이 도망쳐 오는 것을 ‘혈육과 고향을 간절히 그리는 마음 때문에 이루어진 부득이한 행동’으로 여겼다.따라서 주화인들을 붙잡아 후금으로 도로 넘겨주는 행위는 ‘사람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不忍之事)’이었다.나아가 도망 포로들을 붙잡아 보내라고 독촉하는 청의 요구를 ‘짐승 같은 오랑캐들의 탐욕에서 나온 행위’로 매도했다.  조선은 일찍이 임진왜란 이후에도 일본으로부터 포로를 송환해 왔던 경험이 있었다.1607년 이른바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를 일본에 보내 처음으로 데려온 이후 통신사가 갈 때마다 포로들의 송환 문제를 교섭했다.당시 대마도와 막부(幕府)가 포로들을 일부 돌려준 것은,조선의 원한을 다독여 국교를 재개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어쨌든 일본과의 그 같은 경험을 통해 ‘포로 문제’에 대한 조선의 생각은 나름대로 굳어졌다.‘똑같은 오랑캐임에도 일본인들은 포로 송환에 성의를 보였는데,만주족 오랑캐들은 어찌 이렇게도 잔인하단 말인가’.  자연히 조선 조정은 주회인 송환에 극히 소극적이었고,청의 압박이 몹시 강해진 상황에 이르러서야 마지못해 몇몇 주회인들을 잡아 보내 입막음을 시도하곤 했다.실제 정묘호란 무렵까지만 해도 후금 또한 ‘포로 문제’ 때문에 조선을 끝까지 몰아붙이지는 않았다.아직 명과의 대결을 위한 준비를 완전히 갖추지 못한 데다,그런 상황에서 조선을 다시 공략하는 것이 몹시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에는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사실상 ‘무조건 항복’을 통해 청의 처분을 기다려야 했던 조선은,과거처럼 ‘혈육을 찾아 도망쳐온 포로들을 차마 잡아보낼 수는 없다.’는 식의 ‘호소’를 되풀이할 수 없었다.홍타이지가 제시한 조건에서도 드러나듯이 ‘포로 문제’를 둘러싼 청의 압박이 정묘 당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커졌기 때문이다.   ●조선,속환(贖還)을 시작하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의 압박 때문에 주회인들을 숨겨줄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이 같은 상황에서 청에 끌려간 혈육들을 데려올 수 있는 길은 속환(贖還)이 거의 유일했다.속환이란 포로의 몸값을 청 측 주인에게 치르고 데려오는 것을 말한다.포로를 사고 파는 과정에서 ‘인간 시장’이 서게 되었고,몸값을 흥정하는 과정에서 조선인 포로들은 일종의 ‘상품’이 되었다.  청의 용골대는 1637년 4월,심양에 도착한 소현세자(昭顯世子) 일행에게 속환에 대한 청 측의 방침을 통보했다.그들은 속환과 관련하여 ‘청군이 조선으로부터 완전히 철수한 뒤부터 심양에서 시작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즉 중간에서의 속환은 불가능하고,속환을 원하는 포로의 보호자가 직접 심양으로 올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소현세자는 이 내용을 4월13일 본국에 보고했고,조선 조정은 비로소 속환 준비에 나서게 되었다.  다시 언급하겠지만 속환은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었다.하지만 그것은,전란 시기 행방불명된 혈육을 갖고 있었던 많은 조선 사람들에게는 유일한 ‘희망의 끈’이었다.그 단적인 사례로 대사간 전식(全湜·1563~1642)의 경우를 들 수 있다.병자호란 중에 행방불명된 아들의 생사를 알지 못해 애를 태웠던 그는,아들이 죽은 것으로 치부하여 가짜 묘까지 만들어 장례를 치를 생각을 했다.하지만 속환이 곧 시작된다는 소식에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었다.그것은 다름 아닌 아들이 심양에 포로로 끌려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전식은 1637년 4월,심양에 사은사(謝恩使)로 가게 되어 있던 좌의정 이성구(李聖求)에게 아들을 찾아봐 줄 것을 부탁하기에 이른다.살아 있기만 하면 속환해 오는 데 드는 몸값 등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자식을 비롯하여 헤어진 혈육들이 생존해 있기를 바라고,그들을 속환해 올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조선 사람들의 비원(悲願)이었다.하지만 그 비원은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높은 관직에 있거나,많은 재물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어려웠다.바로 거기에 ‘포로 문제’를 둘러싼 또 다른 비극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민간단체 “대북 전단지 계속 살포할 것”

    북한의 개성관광 중단과 육로‧열차 통행 차단조치 등으로 남북관계가 급격히 냉각되는 가운데, 25일 외교통상부 1층 로비에서는 대북 전단지 살포 단체인 자유북한운동연합과 납북자가족모임의 긴급 기자회견이 열렸다. 자유북한운동연합 박상학 대표는 이날 ‘국민에게 드리는 호소문’을 낭독하며 “국민들이 북한 정권의 진실을 분별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위해 전단지 살포를 중단하기로 했으나 북한의 12・1 조치를 보고 계속 보내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북한이 개성관광 중단, 경의선 중단, 경협사무소 폐지, 개성공단 절단을 위한 공갈과 협박으로 우리국민과 정부를 유린했다.”면서 “고 박왕자씨에 대한 북측의 사과와 대남비방, 납북자 및 국군포로 생사 확인과 송환, 이산가족 상봉 등이 이뤄지지 않으면 마지막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풍선엽서를 계속 보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납북자가족모임의 최성용 대표는 북한에 보내는 전단지를 취재진들에게 공개하면서 “전단지는 납북자가족들의 호소문과 납북자들의 명단으로 구성되어 있다.”며 “국민들이 더 이상 우리 납북자가족들을 비방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또 그는 “북한이 우리 정부의 대화 제의에 호응하고 남북 대화가 이뤄지는 동안에는 전단 살포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서울신문 나우뉴스TV 손진호기자 nasturu@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난감한 대북전단 살포

    정부가 민간 단체의 대북 전단(삐라) 살포와 관련해 유관부처 합동으로 적극 대처하겠다고 밝혔지만 납북자가족모임·자유북한운동연합 등 대북 단체들이 20일 전단 10만장을 살포, 논란이 예상된다. 이들 단체 회원 10여명은 이날 오전 김포시 월곶면 일대에서 국군포로의 생사 확인과 송환 촉구, 북한에 보내는 메시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가계도와 건강이상설 등의 내용을 담은 전단 10만장을 대형 풍선 10개에 나눠 담아 황해도쪽으로 날려 보냈다. 박상학 자유북한운동연합 대표는 “북한 정권의 실상을 알리려고 (노무현 전대통령 시절부터)지난 5년간 전단을 보냈는데 이제 와서 당국이 문제 삼는 것은 최근 경색된 남북 관계의 책임을 전단 보내는 것에 떠넘기려는 처사”라며 “바람이 북쪽으로 불고 있어 북에 (잘)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는 전날 민간 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와 관련 첫 유관부처 공동 대책회의를 열어 전단 살포에 대해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통일부·경찰청 등 유관부처 합동으로 적극 대처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박 대표는 “통일부에서 엄청나게 (전단 살포에 대한)자제 요청을 했다.”며 “임원 회의를 통해 앞으로 전단을 계속 날려 보낼지를 결정해 내일 중으로 입장을 밝힐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전단 날리기가 중단되려면)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에 대한 북한의 공식 사과와 신문·방송을 통한 대남 비방을 중단하라는 (북에 대한)정부의 요청, 국군포로 및 납북자 문제 해결 등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의 행위가 법을 어긴 것은 없어 경찰이 배치되지는 않았다. 정부는 민간 단체에 계속 자제 요청을 하고 부처별로 직무 범위 내에서 대처하겠다고 대외적으로는 밝히면서도 법적으로 제재할 수단이 없어 난감해 하는 분위기다. 통일부 당국자는 “관련 단체들과 수차례 만나 상호비방 금지 합의 등 남북 관계에 미치는 영향과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의 상황 등을 설명하며 설득했다.”며 공은 민간 단체로 넘어갔다고 말했다. 한 대북 소식통은 “정부가 뒤늦게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나섰으나 뾰족한 방안은 없다.”면서 “단체들도 남북 관계 개선을 고려한다면 자제할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한편 개성공단의 80여 입주기업 대표들은 25일 개성을 방문, 남측 개성공단관리위원회와 북측 중앙특구개발지도총국 책임자를 만날 계획이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 딜레마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관타나모 해군 기지에 있는 포로 수용소를 폐쇄해 미국의 도덕성을 회복하겠다.”고 말했다. 오바마 당선인은 16일(현지시간) 미국 CBS의 시사프로그램 ‘60분’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은 고문을 하지 않는 국가이고 앞으로도 이점을 확실히 할 것”이라며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쿠바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가 당선 이후 첫 인터뷰인 이날 방송에서 이 문제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낸 것은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는 곧 ‘부시 행정부와의 결별’로 상징되기 때문이다. 관타나모 수용소는 9·11 테러의 주범인 알 카에다 요원과 테러 용의자들이 수용돼 있는 곳으로 수감자들에 대한 고문 행위로 악명이 높아지면서 인권 침해의 상징이 된 곳이다. 이에 미국 진보진영은 부시 정부를 강도높게 비판해 왔고 오바마 역시 대선 기간 수용소 폐쇄를 여러차례 언급했다. 하지만 그는 이날 인터뷰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수용자들의 석방 문제 등 구체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수용소 폐쇄는 정치적·법적으로 문제가 복잡해 해결하기 쉽지 않다. 이 때문에 관타나모 폐쇄 문제는 오바마 안보 정책 개혁의 심판대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수용소가 폐쇄될 경우 수용자들을 어디로 보낼지가 첫번째 당면 과제다. 전부 본국으로 송환할 경우 테러 용의자를 무조건 풀어주는 것은 국가 안보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비판에 직면할 수 있다. 이같은 지적을 차치하더라도 해당 국가에서 이들을 받아줄지, 받아준 이후에 그곳에서 이들의 인권이 보장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미국 본토에 데려온다고 해도 수용 시설 찾기가 마땅치 않다. 후보로 떠오르는 곳의 정치인들은 지역주민을 의식해 이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될 경우 당장 반대하고 나설 태세다. 오바마 정부는 관타나모 수용소 폐쇄와 함께 앞으로 테러 용의자를 어떻게 다룰지도 고민해야 한다. 테러 용의자를 법정에 세울 경우 이들이 국가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정황이 있더라도 법정에서 이를 증명하기 쉽지 않는다는 것이 법률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 때문에 기소는 할 수 없지만 풀어주기에는 위험한 테러 용의자를 안보 차원에서 수용코자 할 때 국회 동의를 얻는 것을 법제화하는 방안이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국가 안보와 인권을 축으로 찬반이 엇갈리고 있어 관타나모 폐쇄 못지않게 뜨거운 논쟁거리를 낳을 전망이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씨줄날줄] 중국인 난민/노주석 논설위원

    1951년 제네바에서 체결된 ‘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난민협약) 제1조에 따르면 난민이란 ‘인종, 종교, 국적 또는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 신분 또는 정치적 의견을 이유로 박해를 받을 우려가 있다는 충분한 이유가 있는 공포로 인하여 국적국 밖에 있는 자로서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공포로 인하여 그 국적국의 보호를 받을 것을 원하지 아니한 자’라고 정의하고 있다. 한국은 1993년 3월부터 이 협약을 시행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난민’이라고 하면 전쟁이나 천재지변으로 인해 곤궁에 빠진 이재민을 일컬어 왔다. 그러나 난민협약 체결 이후 인종적, 종교적 이유에 의한 정치적 국외 망명자를 지칭하는 법적 신분용어로 자리잡았다.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UNHCR)이 난민의 지위결정, 국제적 보호 등의 임무를 맡고 있다.UNHCR 인정 난민은 6700만명으로 집계됐다. 수단 다르푸르에서 25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고 아프리카 콩고에서는 장차 몇명의 난민이 발생할지 알 수 없는 피비린내나는 분쟁이 진행중이다. 정치적 망명이 아닌 ‘국가내 난민’에 대해서는 보호 및 지원 규정이 따로 마련돼 있지 않다. 쓰촨 대지진으로 1500만명의 중국인이 집을 잃었다.200만명 이상의 이라크인들이 종파분쟁으로 고향에서 쫓겨났다. 유혈분쟁을 피해 수백만명의 수단, 소말리아인들이 난민촌을 전전하고 있다. 내전과 폭력, 도시화와 개발, 지진·쓰나미 같은 자연재해로 집을 잃고 자국내를 떠도는 사람들의 숫자가 770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대법원이 중국 국적의 반체제 인사 5명을 난민으로 첫 인정했다. 재판부는 “이들이 중국으로 강제 송환되면 박해를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했다.”고 판시했다. 법무부는 그동안 난민 신청자 1951명 중 76명만 인정했다. 중국인은 모조리 거부했다. 중국정부의 눈치를 보면서 부담스러워했다. 북한 탈북자 3만명이 중국내에서 숨어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법부가 이를 전향적으로 뒤집은 것이다. 중국도 탈북자 중 명백하게 난민 범주에 드는 국군 포로와 납북자 등에 대해서는 난민 지위 부여를 검토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민주화운동 중국인 첫 난민 인정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중국 민주화 운동을 하던 중국인에게 난민 지위를 인정하는 대법원 확정판결이 잇따라 나왔다. 그동안 300명이 넘는 중국인이 난민인정 신청을 했으나 ‘위장 난민’ 논란 등과 맞물려 법무부가 받아들인 경우는 없었다. 이제야 법원을 통해서 중국인 난민이 처음 나오게 됐다. 대법원 3부(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Y(54)씨 등 가족 3명이 법무부장관을 상대로 낸 난민인정불허처분 취소소송 상고심에서 원고승소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4일 밝혔다. 지난 1998년 중국 민주당 설립에 참여했던 Y씨는 2003년 9월 단체관광 일행에 섞여 한국으로 온 뒤 난민 신청을 했다. 이후 한국에 머물며 중국 관리에 대한 규탄서 등 인권침해 사실을 국제기관 등에 알렸고, 중국대사관 앞에서 열린 톈안먼 사태 규탄집회 등에서 자국 민주화를 촉구했다. 힘겨운 타향살이를 하던 그는 골수암까지 앓게 됐다. 법무부는 2년이 넘는 심사 끝에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중국을 떠났다고 보기 어렵다며 Y씨의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신 인도적 체류허가를 내줬다.Y씨는 지난해 난민 지위를 인정해 달라는 소송을 냈다. 1·2심 재판부는 “원고가 중국에 있을 당시에는 반정부 활동으로 인해 중국 정부로부터 별다른 불이익을 받은 적이 없다 해도 한국에 온 뒤 중국 정부의 인권침해 사례가 세계에 폭로되게 기여했고, 병으로 활발하지는 못했으나 중국 민주당원으로 활동하는 사실이 자국 인터넷 홈페이지에 게시된 점을 고려할 때 강제송환될 경우 박해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또 가족의 보호라는 인도주의적 요청에서 그 가족도 난민 지위가 인정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법원도 “원고가 적어도 거주국에서 정치적 의견을 표명하는 등의 결과로 대한민국 현지에서 체재 중에 난민이 됐다고 판단한 원심은 정당하다.”고 못박았다. 3부(주심 김영란 대법관)는 또 중국민주운동해외연석회의 한국 지부장인 W(59)씨 등 2명이 제기한 같은 취지의 소송에 대한 상고심에서도 원고승소를 확정했다. 법무법인 공감의 황필규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난민제도의 인도적인 취지를 살리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전직교수 잔혹사

    아내와 아들을 살해하고 일본으로 도피했다 9년 만에 국내로 송환된 전직 대학 교수는 이혼문제로 아내와 말다툼을 벌이다 자식까지 참혹하게 살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서울 노원경찰서는 26일 서울 모 대학 전직 교수 배모(45)씨에 대해 살인과 사체손괴 등의 혐의로, 배씨의 애인 박모(38·여)씨에 대해서는 일본에서 배씨의 도피를 도운 혐의(범인도피)로 각각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에 따르면 배씨는 1999년 12월31일 오전 7∼8시쯤 서울 노원구 중계동 자신의 아파트에서 아내 박모씨(당시 32세)와 이혼문제로 심하게 다투다 목을 졸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배씨는 이어 옆방에 있던 아들(당시 6세)을 집 밖으로 데려고 나와 놀이터 등을 돌아다니다 오후 3∼5시쯤 귀가해 아내 옆에 눕힌 뒤 머리에 비닐봉지를 둘러씌워 숨지게 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는 범행 사실을 숨기려 시체 위에 이불을 덮고 식용유 등을 뿌려 불을 지르는 잔혹함을 보였다고 경찰은 설명했다. 배씨는 범행 다음날 일본으로 건너가 연구원 생활을 하고 있던 애인에게 처자식 살해 사실을 털어놓은 뒤 3∼4일 후 국내에 함께 들어와 대출 등으로 1억 3000만원가량의 도피자금을 마련해 일본에서 도피 행각을 벌인 것으로 조사됐다.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 부인·아들 살해혐의 前대학교수 8년만에 일본서 잡혀 국내 송환

    서울 노원경찰서는 24일 지난 1999년 자신의 부인과 아들을 독극물로 살해하고 집에 불을 지른 혐의를 받고 일본으로 도피했다 붙잡힌 전직 대학교수 배모(44)씨와 그의 대학 후배인 박모(38·여)씨의 신병을 넘겨받아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서울시립대 교수였던 배씨는 1999년 12월 말 서울 중계동 자택에서 부인 박모(당시 32세)씨와 아들(당시 6세)을 독극물로 살해하고, 범행을 숨기기 위해 이들을 안방에 눕혀둔 뒤 불을 지른 혐의를 받고 있다.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 佛 브뤼니 국정 간섭 ‘도마 위’

    |파리 이종수특파원|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이탈리아 붉은여단 소속 여성 테러리스트의 본국 강제 송환을 취소한 이면에는 부인 카를라 브뤼니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돼 논란이 커지고 있다. 일간 리베라시옹 등 프랑스 언론은 13일(현지시간) “테러리스트 마리나 페트렐라가 지난해 12월 프랑스 법원의 결정에 따라 본국 송환을 앞두고 단식 투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이탈리아 출신인 브뤼니 여사와 언니인 배우 발레리아 브루니 테데스키가 사르코지 대통령에게 송환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따라 페트렐라는 강제 송환은 피하게 됐으나 피해자 가족의 반발 등으로 후유증이 예상된다. 페트렐라(54)는 1992년 살인, 납치 등의 혐의로 기소된 뒤 이탈리아 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1986년 이탈리아에서 보석으로 석방된 뒤 프랑스로 건너와 20년 남짓 살았다. 그러나 지난해 이탈리아 당국의 요청에 따라 경찰에 체포됐다. 페트렐라는 프랑스 법원의 본국 송환 결정에 반발해 교도소 병원에서 단식 투쟁을 해왔는데 의료진은 생명이 위독하다고 발표했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제궁은 지난 주말 성명을 내고 “사르코지 대통령이 송환 중단을 결정했다.”면서 “점차 악화하고 있는 페트렐라의 건강 상태를 고려한 것”이라고 밝혔다. 리베라시옹은 사르코지 대통령의 결정에 매우 만족한 브뤼니 여사가 12일 교도소 병원을 방문해 페트렐라에게 “남편이 보내는 메시지를 갖고 왔다.”면서 “당신은 이탈리아로 송환되지 않을 것”이라고 알렸다고 전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테러 피해자 단체 등이 반발했다. 이들은 이번 주말 엘리제궁 앞에서 사르코지 대통령의 결정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일 것으로 알려졌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지난해 취임한 뒤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과 달리 이탈리아의 붉은여단 조직원들의 프랑스 망명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밝힌 바 있다. vielee@seoul.co.kr
  • 불법체류자 단속 中企에 불똥

    # 경기도 안산의 자동차 부품 제조 회사 박모(46) 대표는 최근 생산라인의 빈자리를 채우지 못해 애를 먹고 있다. 6년 전부터 함께 일해 왔던 네팔 출신 근로자 7명이 지난달 불법체류자 단속에 걸려 강제송환됐기 때문이다. 한 달간 채용공고도 내고 노동부 고용센터에 신청도 했지만 일손 구하기는 쉽지 않다. 불법 체류자를 고용하더라도 언제 단속을 당해 쫓겨날지 모르는 판이다. # 경기도 마석의 가구공장에서 일했던 불법체류자 A(32·방글라데시)씨는 최근 2개월간 임금을 받지 못해 노동부에 신고했다. 하지만 “불법체류자이기 때문에 출입국관리사무소에 통보해야 한다.”는 출석 요구를 노동부로부터 받았다. A씨는 강제출국이 두려워 구제신청서를 내지 못하고 있다. 법무부가 현재 22만여명인 불법체류자를 올해 말까지 20만명까지 줄이겠다며 강력한 단속에 나서자 경기 안산과 마석 등의 중소제조업체들에서는 일손 품귀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불법체류자들도 언제 단속을 당해 강제송환될지 모르는 상황이라 선뜻 일자리 찾기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노동부는 불법체류자라 하더라도 임금체불 등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체불임금을 완전히 청산해 권리구제가 이뤄진 후 출입국사무소에 통보하도록 한 ‘외국인 근로자 민원처리 지침’을 지난 6월 폐지했다. 이와 동시에 불법체류자 단속이 강화되자 중소기업들은 저렴한 임금의 이주노동자 구인난을 겪고 있다. 법무부는 올들어 지난 7월까지 부처 합동단속을 벌여 불법체류 외국인 1만 8412명을 적발해 이중 체류허가를 다시 받지 못한 1만 4368명을 강제출국했다. 지난해 1년간 단속된 외국인은 2만 2546명이었다. 최근의 단속 추세가 계속된다면 연말까지 최소 3만 2000명에서 최대 4만명의 불법체류 외국인이 단속될 것으로 예상되고, 체불임금을 받지 못하고 추방되는 현상도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 유일한 합법적 외국인 근로자 채용 창구인 노동부 고용센터를 통해 고용된 인력은 지난 3월 3335명에서 8월 6575명으로 급증했다. 하지만 중소기업의 구인난에 비하면 공급은 역부족이다. 안산에서 5년 넘게 플라스틱 사출제품 생산업체를 운영했던 이모(52) 대표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단속의 칼바람에 떨고 있는 모습을 보다 못해 비교적 단속이 뜸하다는 강원도 원주에 기숙사를 마련하고 공장까지 옮겼다. 경기 마석가구공단의 L가구 김우성(40) 대표는 “이 지역 노동력의 60~70%가 외국인 근로자”라면서 “환율 때문에 원목가격이 올라가고 경기침체에 물건은 안 팔리는데, 노동력마저 제대로 수급이 안 되면 결국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장형우기자 zangzak@seoul.co.kr
  • ‘대북지원 113만명 서명’ 통일부에 전달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모임’(이하 종교인모임)은 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대북 지원을 위한 ‘100만인 국민 서명 결과보고 및 전달식’을 열고, 대북 식량·개발 지원을 위한 국민 서명운동을 벌인 결과 113만여명이 서명했다며, 정부가 조속히 대북 지원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종교인모임은 이날 행사 후 서울 도렴동 통일부 청사에서 김하중 통일장관을 만나 서명운동 결과를 전하고 대북 지원을 촉구하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번 서명에는 113만 5000여명이 참여했고 24억여원이 모금됐다고 모임측은 밝혔다. 서명운동을 주도한 정토회 법륜 스님은 “정부는 하루빨리 대북 인도적 지원에 나서야 하며 이산가족 상봉, 국군포로 송환 등 여러 문제들도 해결하려면 북한과 대화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행사에 참가한 정의화 한나라당 의원은 “국회에서 대북 인도적 지원을 입법으로 뒷받침할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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