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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봉산 ‘4일간의 향연’

    도봉산 ‘4일간의 향연’

    가을이 아름다운 도봉산에서 흥겨운 축제가 열린다. 도봉구는 26∼29일 서울의 명산인 도봉산에서 ‘제2회 도봉산 축제’를 연다고 24일 밝혔다. 구는 이번 축제를 역사적 전통에 뿌리를 둔 대동제 형식으로 꾸몄다. 최선길 구청장은 “도봉산 축제는 생태공원과 도봉산 입구 디자인 거리, 둘리테마존 등을 하나로 묶어내는 서울의 대표적 축제로 자리잡을 것”이라면서 “앞으로 도봉산을 1200만 관광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전략적 거점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사흘 동안 열리는 이번 축제는 등반대회뿐 아니라 도봉서원의 전통향사와 산사음악회, 인기 가수 공연, 각종 체험행사가 이어진다. 축제 첫날인 26일 도봉산 등산로 7㎞를 주민 1000여명이 왕복하는 ‘등산대회’가 열린다. 단순히 산 정상을 오르내리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팀별로 등산상식 필기시험, 포스트 테스트 등도 한다. 이어 산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는 오후 7시 도봉산입구 공영주차장 특설무대에서 ‘개막공연’이 펼쳐진다. 성악가 이지은, 김명환, 팝페라 가수 박완 등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감상할 수 있다. 27일 공영주차장 특설무대에서 방송인 허참이 진행하는 ‘주민노래자랑대회’가 열린다. 또 주변 체험행사장에선 연·도자기 만들기, 페이스페인팅 등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오후 7시부터는 국악한마당이 펼쳐진다.‘한소리’의 북공연과 서도민요의 대표 이춘희 명창의 구성진 목소리가 가을밤을 장식한다. 28일 특설무대에는 클래식과 비보이 공연이 이어진다. 비보이 플로어크루, 록그룹(LRD)힙합, 매직쇼가 선보인다. 이어 도봉산 제1휴식처에서 마당극 도봉산 별곡과 박정식, 장미화 등 가수들의 노래 공연이 펼쳐진다. 29일에는 무대를 도봉서원으로 옮긴다. 서울의 유일한 서원인 도봉서원에 모시고 있는 정암 조광조, 우암 송시열 등 조선시대 문인들의 학문적 사상과 덕행을 기리는 제사인 ‘정통향사’가 그대로 재현된다. 도봉서원은 지난 1573년 창건된 사액서원(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내린 서원)으로 매년 봄, 가을 전국의 유림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 이번 축제의 마지막은 ‘은행나무 음악회’가 장식한다. 영화 ‘왕의 남자’에 시대적 배경이 되는 연산군묘 앞 은행나무 앞에서 열린다. 수령 860년에 서울시 지정보호수 1호로 하지(下枝:가지가 밑으로 뻗은 것)가 있는 나무로 유명하다. 지역예술단체를 중심으로 열리는 작은 음악회로 클래식과 가요가 어우러져 노란 가을 옷을 입은 은행나무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다. 강신집 문화공보과장은 “연간 1000만 등산객이 찾는 도봉산에 펼쳐지는 이번 축제는 도봉구민뿐 아니라 서울시민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할 것”이라면서 “앞으로 관광 서울을 이끌어갈 대표적인 축제로 키워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35) 단옷날 씨름판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35) 단옷날 씨름판

    김홍도의 ‘씨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관중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있고, 그 가운데 두 사내가 맞붙어 한창 힘을 쓰고 있다. 그런데 요즘 씨름과 달리 두 사내는 모두 샅바를 매지 않고 있다. 자세히 보면 앞쪽의 사내는 오른 손 팔뚝에 바(삼베로 만든다)를 감고 상대의 왼쪽 허벅다리에 감고 있을 뿐, 허리에는 바를 매지 않고 있다. 이런 식으로 하는 씨름을 바씨름이라 한다. 이 그림에서 보듯 씨름도 여러 종류가 있다. 오른씨름, 왼씨름, 띠씨름, 바씨름이 그것이다. 요즘 하는 씨름이 왼씨름이다(대한씨름협회에서 모든 씨름을 왼씨름 하나로 통일했다). 오른씨름은 그 반대의 자세를 취하는 씨름이다. 바씨름은 이미 설명했고, 띠씨름은 허리에 띠를 두세 번 두른 뒤 그것을 잡고 하는 씨름이다.‘각희’는 김준근의 그림인데, 오른쪽 어깨를 서로 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왼씨름인데, 문제는 허리샅바가 없다(왼씨름이면 허리샅바가 있어야 한다). 혹 가려서 보이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19세기 문헌인 홍석모 ‘동국세시기’의 ‘단오’ 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젊은 장정들은 남산의 왜장(倭場)과 북산의 신무문 뒤에 모여 씨름을 하여 승부를 겨룬다. 그 법은 두 사람이 마주 꿇어앉아 각각 오른손으로 상대방의 허리를 잡고 또 각각 왼손으로 상대방의 오른쪽 다리를 잡고 동시에 일어서서 서로 들어서 팽개친다. 쓰러진 사람이 진다. 배지기·등지기·딴족거리 등의 여러 기술이 있다. 그 중 힘이 세고 손이 빨라 여러 차례 승부에서 이기는 사람을 ‘판막음’이라 부른다. 단옷날 이 놀이가 가장 성행하고 서울이나 지방이나 많이 한다. ●18세기 전설적인 씨름스타 김흑 씨름은 단옷날 가장 성행하고, 또 서울과 지방 구분 없이 널리 유행하던 구경거리였다. 단옷날 씨름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자료가 있다.18세기 말의 문인 이옥의 ‘호상관각력기(湖上觀角力記)’가 그것이다. 이 글에 따르면, 매년 오월 단오 때면 호상인(湖上人)과 반인(泮人)이 마포 북쪽 도화동 앞에서 씨름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호상인’은 호숫가의 사람이란 뜻이 아니다. 옛날 한강을 ‘호(湖)’라고 불렀다. 예컨대 마포 쪽 한강을 ‘서호’(또는 서강)라고 불렀다. 동호대교는 그 다리가 놓인 곳을 동호라고 불렀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이옥이 말한 ‘호상’은 아마도 마포 쪽 서호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포는 서울로 들어오는 물자를 부리는 것이었기에 수레를 끄는 차부(車夫), 짐을 나르는 짐꾼이 많이 살았다. 그러니 힘깨나 쓰지 않았겠는가? 반인은 성균관에서 일하는 노복들을 말한다. 성균관을 반궁(泮宮)이라 하고, 성균관 부근 동네를 반촌(泮村)이라 하고, 반촌에 대대로 사는 사람들은 반인이라 한다. 이들은 고려 말 안향이 성균관에 기증한 노비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쓰는 말도 서울말씨가 아니라 개성 말씨였다고 한다. 이들은 성균관에서 노복 일을 하고 살면서 동시에 서울 시내 쇠고기 판매업을 독점한다. 육류 판매란 백정이 하는 일이라, 이들은 사회적으로 천시되었고 그 때문에 내부적으로 굉장히 단결력이 강하였고 또 폭력적인 성향이 있었다. 호상인들의 스타는 김흑이란 사내다. 이 사내 때문에 반인은 호인을 이기지 못한다. 단오를 이틀 남겨 놓은 날 김흑이 새벽부터 묘시까지 백스물 네 마리의 말에 짐을 실었다는 말을 듣고, 반인들은 그가 지쳐 떨어졌을 것이라 짐작하고는 그날 당장 씨름 시합을 벌이자고 한다. 김흑은 “소 잡는 놈들이야 수백 명도 넘어뜨릴 수 있다.”고 호언한다. 반인이 시합할 선수 10명을 뽑으라 하자, 김흑은 자기 혼자 감당하겠단다. 결과는 김흑의 10전 10승이었다. 당시 힘이 세기로 유명한 종친 능창군 이난(李欄)이 그것을 보고는 “정말 장사로다.”라고 하며, 자신이 차고 있던 부채와 향주머니를 끌러 주었다 한다. 씨름판에는 스타가 있기 마련이다. 프로 씨름이 처음 생겼을 때 스타는 단연 이만기였다. 김흑도 그런 스타였던 것이다. 그런데 김흑은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우리가 익히 아는 사람도 있다. 김덕령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이몽학과 내통해서 역모를 꾸몄다는 무고를 받고 모진 고문 끝에 죽은 분이다. ●씨름 한판으로 벼슬길 오른 김덕령 송시열의 문집 ‘송자대전’을 보면, 김덕령의 용력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전하는 김덕령이 씨름으로 출세한 이야기는 이렇다. 이정귀의 아버지 이계는 장성현감으로 있을 때 단옷날 인근 수령들을 불러 예전부터 하던 대로 관아 마당에서 씨름판을 연다. 그날 어떤 장사가 판막음을 한 뒤 큰 소리를 쳤다.“나와 겨룰 사람이 없느냐?” 이때 김덕령은 관아로 막 들어오는 참이었다. 수령들이 술과 안주를 먹이고 싸우라 권했다.“자네가 저 사람을 이긴다면 정말 통쾌할 걸세.”“저는 본디 글 읽는 선비로 몸이 허약한데, 어떻게 저 장사를 이긴단 말입니까?” 사양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람이 강권하여 김덕령은 그 장사와 붙게 되었다. 그의 작은 체구를 그 장사가 놀리자, 김덕령은 “그대는 잔말을 말라. 힘만 겨루면 그만 아닌가.”라고 하였다. 장사가 김덕령을 잡아 돌리다 땅에 팽개쳤으나 김덕령은 쓰러지지 않았고, 다시 맞붙어 장사를 휘둘러 쓰러뜨렸다. 장사가 다시 겨루자 하니, 김덕령은 범처럼 눈에 불을 켜고 소리를 질러 장사를 죽이려 하였고, 좌우에서 겨우 말려 떼어놓았다. 김덕령의 이름은 이 일로 세상에 알려졌고, 이계의 추천으로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다. 씨름 한 판으로 출세를 했던 것이다. 씨름판은 늘 시끄러웠고 사건을 일으켰다.‘세종실록’ 12년(1430) 12월26일조를 보면 안음현(지금의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사람 박영봉은 김부개와 씨름을 하다가 김부개를 죽인다. 이처럼 씨름은 때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싸움도 흔하다. 명종 15년 5월 단오에 일어난 사건을 보자. 동궁전 별감 박천환은 세자빈객 원계검의 집에 동궁전의 하사품을 전하고 돌아오던 중 단옷날 씨름판이 벌어진 것을 보고 구경에 넋을 잃는다. 박천환은 돌아와 유생들이 자기에게 억지로 씨름을 시켰고, 거부하자 옷과 갓을 찢고 원계검이 쓴 감사문까지 찢었다고 시강원에 호소했고, 시강원에서는 유생들을 조사해 처벌하라고 명종에게 요청한다. 명종은 엄격한 조사와 이후 씨름, 도박, 답교를 금지하라고 명한다. 같은 달 28일 사간원에서는 박천환을 처벌하라고 요청한다. 박천환이 심부름을 갔다가 지체 없이 돌아오지 않고 길에서 씨름을 구경하다가 유생 윤명과 시비 끝에 그를 구타하고, 자기 옷과 사례문을 찢고는 윤명에게 뒤집어 씌웠다는 것이다. 사간원의 보고를 들은 명종은 둘 다 똑같이 처벌하라고 판결을 내린다. ●영조때 씨름하면 곤장 100대로 다스려 이처럼 씨름판은 종종 싸움판으로 바뀌고 때로는 사람이 죽기까지 했으므로 조정에서는 자주 씨름을 금했다.‘영조실록’ 47년(1771) 11월18일조를 보면, 영조는 경기관찰사가 보고한 살인사건을 계기로 다음과 같이 지시한다.“이후로 시장에서 씨름을 하거나 아니면 싸움을 하는 것은, 살인 여부에 관계없이 해당 관청에서 곤장 100대를 엄하게 치도록 하라. 서울에서 단오에 벌이는 씨름과 보름에 벌이는 석전을 포도청에서 금지시키도록 하고, 만약 하는 자가 있으면 엄중히 곤장을 치도록 하라.” 씨름을 하면 곤장 100대를 맞는다니 정말 가혹한 처벌이다. 하지만 이 금지 조치는 별 효과가 없었다. 지금도 씨름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예전 이만기 선수가 나올 때 씨름은 여간 재미있는 것이 아니었다. 체구가 작은 선수가 큰 선수를 기술로 제압하는 광경은 정말 볼 만하였다. 요즘은 금강급 태백급이 다 없어져 버리고 너무 큰 선수만 나온다. 이따금 티브이로 씨름을 보지만 기술 아닌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것 같아 서운할 때가 있다. 예전처럼 씨름에 관중이 많이 몰리지도 않는 것 같다. 일본의 스모는 제법 널리 알려져 있고, 관중들이 도시락도 싸 가지고 가서 하루 종일 구경을 하던데, 수천 년 역사의 한국인 유일의 전통 스포츠가 이렇게 밀려나다니 정말 섭섭한 일이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24) 담배 가게와 담배 피우기

    [그림이 있는 조선풍속사] (24) 담배 가게와 담배 피우기

    김홍도의 ‘담배 써는 가게’다. 이 그림에는 남자 넷이 등장하는데, 각각 하는 일이 다르다. 먼저 아래쪽을 보자. 아래의 오른쪽에 있는 남자는 넓은 잎사귀를 펼쳐서 다루고 있다. 그 아래에 차곡차곡 쌓인 것은 담뱃잎이다. 필자는 담배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어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지만, 위 그림이 담뱃잎을 가공하고 있는 것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위쪽을 보자. 위쪽 왼편의 사내는 작두로 장방형으로 생긴 물건을 가늘게 썰고 있다. 오른편의 사내는 작두질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 이 사내가 오른팔을 기대고 있는 커다란 나무 상자는 돈궤로 보인다. 물론 돈 이외의 다른 것을 넣기도 할 것이다. 작두 앞에는 둥근 물건과 삼각형 물건이 있는데 무엇인지 모르겠다. 작두로 썰고 있는 물건도 무엇인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왼손으로 꽉 누르고 있는 것으로 보아 흔들리면 안 되는 물건이다. 추측건대 그림 아래쪽의 웃통을 벗은 사내가 차곡차곡 쌓은 담배를 작두로 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래쪽 왼편에 있는 탕건을 쓴 사내는 부채질을 하면서 책을 읽고 있다. 아마 소설 따위의 가벼운 책일 것이다. ●18세기 엽초전·절초전 상권 분쟁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은애전(恩愛傳)’에 참고할 만한 이야기가 있다. 강진현의 처녀 은애는 자신이 정조를 잃었다고 헛소문을 낸 노파를 죽인다. 이 사건을 보고 받은 정조는 은애를 정녀(貞女)라고 하면서 살려주고 이덕무에게 ‘은애전’을 짓게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은애가 아니고, 정조의 말이다. 옛날 어떤 사내가 종로 거리의 담배 가게에서 패사(稗史)를 읽는 것을 듣고 있다가 이야기가 영웅이 실의하는 곳에 이르자, 홀연 눈초리가 찢어지도록 눈을 크게 뜨고 입에서 거품을 내뿜다가 담배 써는 칼을 집어 들고 패사를 읽는 사람을 찔러 그 자리에서 죽이고 말았다. 패사는 곧 역사소설이다. 영웅인 주인공이 좌절하는 대목에 이르러 소설에 빠진 사내가 흥분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칼을 들어 소설을 읽어주는 사람을 찔러 죽이고 만 것이다. 정조는 아마도 이 사건을 심리했거나 아니면 관계되는 문서를 읽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담배 가게에서 소설을 읽었다는 것이다. 담배 가게는 약국과 함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조선후기 서울 시민의 카페와 같은 곳이었다. 여기서 고담(古談)을 하기도 하고 또 소설책을 읽기도 했다. 그림 위쪽의 돈궤에 기대어 있는 사내나 책을 읽고 있는 사내는 아마도 놀러 온 사람일 터이다. 담배를 썰어서 파는 곳을 절초전(切草廛)이라 한다. 조선 후기에 와서 담배가 널리 퍼지자, 조정에서는 담배 판매의 독점권을 갖는 엽초전의 개설을 허락하였다. 그 뒤 담뱃잎을 그냥 팔거나 큼직하게 잘라 파는 엽초전에서 담뱃잎을 사다가 피우기 좋도록 가늘게 썰어서 파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것은 엽초전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18세기 이래 엽초전과 절초전 사이에 상권을 둘러싼 분쟁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절초전도 국역(國役)을 담당하기로 하고 절초의 독점판매권을 얻었다. 하지만 뒤에 절초전의 절초 독점 판매권은 더 영세한 상인들이 절초를 파는 것을 막는다는 문제를 야기해 1742년 폐지된다. 그러다 1791년 육의전(六矣廛) 이외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禁亂廛權)을 없앤 신해통공으로 인하여 다시 담배를 썰어 파는 가게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위 그림은 아마도 신해통공 이후의 사정을 반영한 것일 터이다. ●송시열은 금연론자… 정조·정약용은 골초 담배는 17세기 초에 들어온 것이다.‘인조실록’ 16년(1638) 8월 4일조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이 몰래 담배를 심양에 보냈다가 청나라 장수에게 발각되어 크게 힐책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는 병자호란(1636)으로부터 불과 2년 뒤이고, 소현세자를 비롯한 많은 조선 사람들이 심양에 억류되어 있을 때였다. 이 당시 심양의 청나라 사람도 담배를 좋아해 뇌물로 가져갔던 것인데, 청 태종이 담배의 중독성에 주목해 금지하였으므로 담배를 가지고 간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날의 기사를 보자. 이 풀은 병진년(1616)·정사년(1617) 어림에 바다를 건너 들어왔다. 피우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리 성행한 것은 아니었는데, 신유년(1621)·임술년(1622) 이래로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다. 위의 기록에서 보듯 담배는 1616년에서 1617년 사이에 처음 전래되었고, 불과 5년 뒤인 1621·1622년간이면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퍼졌던 것이다.‘인조실록’ 6년(1628) 8월19일조에 광주(廣州)의 선비 이오(李晤)의 응지 상소를 보면 정묘호란 이후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공격에 대한 대비책은 세우지 않고 “여러 신하들이 비변사에 모여 농담이나 지껄이고 담배만 피울 뿐”이라고 비판하고 있는바,1628년이면 이미 담배가 조정의 관료들 사이에도 널리 유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담배에 관한 문헌은 무수하게 많다. 그 문헌들은 대개 두 가지로 갈린다. 담배 유해론과 담배 유익론이다. 담배가 유해하다는 것은 그것의 중독성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명인들 역시 담배에 관해 서로 의견이 갈린다. 대동법을 만들었던 명재상 김육, 고문의 명인이었던 이식, 그리고 설명이 필요 없는 인물인 송시열은 모두 담배를 싫어한 금연론자였고, 역시 고문의 대가였던 장유,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 군주인 정조, 그리고 정조를 능가하는 학문의 태두 정약용은 담배 유익론자이자 골초였다. 이들이 남긴 담배에 관한 글을 읽어보면 요즘과 다를 바 없다. 건강에 나쁘고 냄새가 심하게 난다는 것이 담배 유해론자의 견해이고, 그럴 수도 있지만 심화(心火), 곧 스트레스를 다스리기에 담배가 인간에게 이롭다는 것이 담배 유익론자의 견해다. ●흡연도구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까지 담배의 해로움이 널리 퍼지고, 또 조정에서 이따금 담배 금지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담배는 17세기 이래 일상에서 없앨 수 없는 필수적 기호품이 되었다. 서울 시전에는 절초전만 생긴 것이 아니라, 흡연도구를 전문적으로 파는 가게까지 등장했던 것이다.‘동국여지비고’란 책을 보면, 군기시와 약현의 연죽전(煙竹廛)에서는 여러 가지 색으로 물들인 담뱃대와 담배통을 팔았고, 종로의 도자전(刀子廛)에서는 장도, 은비녀, 부인네의 패물, 금은 가락지와 함께 담배통을 팔았다고 한다. 이교익(1807∼?)의 작품 ‘쉴 때 피우는 담배 한 모금’에서처럼 심심하면 손이 가는 것이 담배다. 담배 역시 일종의 ‘마약’이다. 담배의 중독을 이덕무는 ‘한죽당섭필’에서 아주 흥미롭게 그리고 있다. 우연히 여러 사람과 각각 좋아하는 것을 말하였다. 한 사람이 말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은 담배·술·고기 셋이지요.“ 내가 물었다. “만약 다 갖추지 못한다면 어떤 것을 빼겠는가?” “먼저 술을 빼고, 다음에 고기를 뺄 겁니다.” 내가 그 다음 뺄 것을 묻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담배를 뺀다면 산들 무슨 재미가 있겠소.” 담배가 없다면 살아 있어도 재미가 없다는 말은, 사실 흡연이 쾌락을 유발하는 수단이며, 동시에 담배의 중독 상태를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것을 말해 준다. 필자는 건강상 문제로 담배를 끊었지만, 몇 년 전까지는 골초 중의 골초였다. 아침 6시부터 10시까지 한 갑,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한 갑, 그리고 오후 6시부터 잠들 때까지 한 갑, 이렇게 하루에 세 갑을 피웠다. 집에도, 연구실에도, 들고 다니는 가방에도 여러 종류의 담배가 늘 구비(?)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문헌을 읽다가도 담배에 관한 기록이 나오면 모아 두었다. 만약 건강이 허락된다면 다시 그 향기를 맡아보고 싶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청장 차관급 11명 프로필

    ●남일호 감사원 사무총장 ‘안동 양반’으로 불릴 만큼 원만한 대인관계로 감사원 안팎에서 평이 좋다.‘대학수학능력시험 관리실태’, 황우석사건 관련 ‘국가연구개발 지원관리 실태’ 등 주요 감사를 총지휘, 일찌감치 사무총장감이라는 말을 들었다. ▲55세·경북 안동 ▲안동고, 고려대 법대 ▲행시 23회 ▲감사원 총무과장 ▲사회복지감사국장 ▲기획홍보관리실장 ▲감사교육원장 ●박종달 병무청장 친화력이 뛰어나다는 평이다. 육군 내 인사 전문가로 통한다. 인사사령관 시절인 2007년 사령부 내에 ‘유가족 찾기 특별팀’을 설치, 변사(變死) 등으로 처리됐다가 재심의를 통해 전사·순직으로 인정된 국군장병의 유가족 찾기 운동을 벌였다. ▲59세·경남 창녕 ▲육사 29기 ▲3군사령부 인사처장 ▲50사단장 ▲3군사령부 참모장 ▲3사관학교장 ▲수도군단장 ▲육군 인사사령관 ●양치규 방위사업청장 치밀하고 꼼꼼한 성격이다. 육군 중령 시절부터 무기체계 분야의 실무를 쌓았으며 장군 진급 뒤에는 국방부의 통신 감청용 정찰기 도입사업인 백두사업과 한국형 헬기(KHP)사업 등 사업을 도맡았다. ▲58세·제주 ▲제주일고, 육사 29기 ▲국방부 백두사업단장 ▲육본 무기체계사업단장 ▲32사단장 ▲육본 기획관리참모부장 ▲방사청 KHP사업단 체계관리부장 ●최성룡 소방방재청장 소방직 출신으로는 처음 청장에 임명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재직할 때 서울시 소방방재본부장을 맡아 안정된 업무 수행으로 신임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성격은 온화하면서도 꼼꼼하며,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58세·전남 영암 ▲나주종합고, 방송통신대학 행정학과 ▲전남 소방본부장 ▲행정자치부 방호과장 ▲중앙소방학교장 ▲서울시 소방방재본부장 ▲대불대 소방학과 교수 ●이건무 문화재청장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처럼 조용하고 꼼꼼한 성격의 선비풍 학자. 청동기시대를 전공한 고고학자로, 평생을 박물관에 봉직한 ‘박물관맨’이다. 국립중앙박물관장 시절 경복궁의 박물관을 용산으로 이전하는 데 힘썼다. ▲61세·서울 ▲삼선고,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국립광주박물관장 ▲국립중앙박물관장 ▲용인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 ▲문화재위원 ●이수화 농진청장 미국 미주리주립대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고 ‘금융정책의 효과측정연구’,‘피셔가설과 불확실성의 영향분석’ 등을 펴낸 농업경제전문가. 2004년 8월 산림청 차장에 취임, 3년6개월 이상 장수하면서 산림법 체계를 새로 정비했다. ▲53세·경북 청도 ▲경북고·성균관대 행정학과 ▲행정고시 19회 ▲농림수산부 식량정책과장, 농업정책과장 ▲주미대사관 농무관·참사관 ▲식량생산국장 ▲산림청 차장 ●윤여표 식약청장 국내 독성학 분야 권위자로 지난해 국립독성과학원장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기도 했다. 의약품·식품 분야 전문지식을 두루 갖췄으며, 약대 6년제 개편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52세·대전 ▲대전고, 서울대 약학박사 ▲충북대 약대 교수 ▲충북대 약품자원개발연구소 소장 ▲대한약학회 부회장 ▲한국식품위생안전성학회 부회장 ▲한국환경독성학회 이사 ▲식품의약품안전청 자문위원 ●정옥자 국사편찬위원장 정조, 성리학, 송시열, 진경산수화 등을 주된 연구분야로 삼아온 조선후기사 전문 역사학자.1980년대에는 독재 정권에 저항한 학생들을 보살펴 ‘운동권의 어머니’로 불렸다.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서울대 규장각 관장을 지냈다. ▲66세·강원 춘천 ▲동덕여고, 서울대 국사학과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규장각 관장,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문화분과위원 ●정장식 중앙공무원교육원장 관선·민선시장을 여러 차례 역임하는 등 행정 경험이 풍부한 정통 엘리트 내무관료 출신이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업무 처리가 돋보인다는 평가다. 성격은 유순하고 합리적인 편이다. ▲58세·경북 포항 ▲경북대사대부고, 서울대 경제학과 ▲행정고시 12회 ▲청와대 행정비서관 ▲내무부 지방자치기획단장 ▲경북 포항시장 ▲대구대 무역학과 객원교수 ●강병규 소청심사위원회 위원장 지방업무에 밝은 정통 내무관료 출신이다. 친화력이 뛰어나 폭넓은 인간관계가 가장 큰 장점으로 꼽힌다. 또 유연한 상황 대처로 주변 사람들에게 편안함과 신뢰감을 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54세·경북 의성 ▲경기고, 고려대 법학과 ▲행시 21회 ▲내무부 공기업과장 ▲소청심사위원회 위원 ▲대구시 행정부시장 ▲행정자치부 정책홍보관리실장·지방행정본부장 ●최광식 국립중앙박물관장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데 앞장선 역사학자.‘고대국가 제사’가 전공이지만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대책위원회’를 결성해 고구려사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55세·서울 ▲중앙고, 고려대 사학과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하와이대학 한국학센터 객원연구원 ▲고구려연구재단 상임이사 ▲한국고대사학회장 ▲고려대박물관장 ▲문화재위원
  • [내 책을 말한다] 정조가 묻는다 “지금 어디로 가냐”고

    [내 책을 말한다] 정조가 묻는다 “지금 어디로 가냐”고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히던 날 열한 살의 어린 세손(世孫)은 할아버지에게,“아비를 살려 주옵소서.”라고 빌었다. 이때만 해도 세손은 자신이 가해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 자신이 없었다면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이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전율한다. 세손이 없었다면 영조는 ‘삼종(三宗:효종·현종·숙종)의 혈맥(血脈)’인 사도세자를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모친이 그 사건에 가담한 이유도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사도세자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한중록’은 사도세자가 “(영조가) 세손은 귀하게 여기니 세손이 있는데 내가 없어도 관계할까?”라고 말하고, 혜경궁 홍씨에게 “자네는 세손 데리고 오래 살려 하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사도세자가 부친에게 죽임을 당하는 아들의 운명을 받아들여 좁은 뒤주 속에서 여드레 동안이나 신음하다 숨을 거둔 순간 비극은 정조의 운명이 되었다. 그러나 영조가 사도세자를 애도하며 쓴 “피 묻은 적삼이여 피 묻은 적삼이여”라는 ‘금등지사(金之詞)’를 보고 할아버지 영조도 저주받은 신탁의 주인공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래서 수많은 방해를 무릅쓰고 즉위한 정조는 과거로 돌아가는 대신 미래를 선택했다. 모친 윤씨와 장씨를 비명에 잃었던 연산군과 경종이 보여 주었던 것처럼 과거로 돌아가는 길은 실패한 국왕의 길이기 때문이다. 즉위 일성으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선포한 정조는 그릇된 과거와 단절하고 미래로 나아갔다. 대리청정하는 저군(儲君)을 뒤주에 넣어 죽인 증오의 정치,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擇君)의 정치, 노론(老論) 일당의 전제(專制) 정치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갔던 것이다. 그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는 그 도상에서 정조가 만났던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의 이야기다. ‘정조 시대를 읽는 18가지 시선’이란 부제는 열여덟 가지의 다양한 시선으로 그 시대를 조망했다는 뜻이다. 정조의 즉위를 방해하는 노론, 정조를 암살하려고 존현각 지붕 위로 침입한 자객들, 정조의 이복동생을 죽이라고 끈질기게 요구하는 정순왕후, 송시열의 후손 송덕상을 추대하려는 무리들, 그리고 미래를 가장해 과거로 돌아가려는 흑두봉조하 홍국영 같은 사람들과 실랑이하며 정조는 미래로 나아갔다. 이가환·이승훈, 정약용 형제처럼 열린 지식인들, 최고의 학자였으나 서얼이란 이유로 소외 당하던 이덕무·박제가·유득공 같은 서얼들, 그리고 신분제에 신음하던 백성들과 함께 새로운 길을 걸었다. 그 길 끝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정조가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래서 정조와 그 시대는 지금 우리에게 어떤 길로 가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 연구소장
  • 우암 송시열의 글씨 ‘刻苦’ 첫 선

    지금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는 ‘직필(直筆)’이라는 범상치 않은 제목을 가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정치가인 동춘당 송준길(1606∼1672)과 우암 송시열(1607∼1689)을 통하여 도학자(道學者)들에게 글씨란 무엇인가를 살펴보자는 취지이다. 두 사람은 같은 은진 송씨로 동춘당이 세상을 떠나자 우암이 ‘공과 나는 성도 같으니 다만 부모만 다를 뿐’이라고 추모했을 만큼 가까웠다. 노론을 이끌었던 두 사람을 두고 정치적으로는 공과를 따질 수도 있겠지만, 양송체(兩宋體)라고 일컬어졌던 이들의 글씨는 조선후기 진경문화의 토대를 구축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는 동춘당 고택에 있는 대전선비박물관이 소장한 동춘당의 ‘양기발처(陽氣發處)’ 8곡병풍과 ‘진로(振鷺)’ 8곡병풍, 우암의 안식처였던 화양을 이형부(1791∼?)가 그리고 발문을 쓴 ‘화양구곡도첩(華陽九曲圖帖)’ 등 처음 공개되는 희귀작품이 적지 않게 출품되어 있다. 하지만 전시장에서 관람객의 발걸음을 가장 오래 머물게 하는 작품은 역시 우암의 ‘刻苦(각고)’이다. 세로 164㎝에 가로 82㎝의 대작으로, 마른 붓의 거친 필획 속에서 도학자의 꼿꼿한 기개가 그대로 전해져 온다. ‘각고’는 우암의 제자인 유명뢰가 스승에게 청하여 받은 글이다. 유명뢰가 비단글씨폭의 오른쪽, 우암의 또 다른 제자인 권상하와 정호가 각각 오른쪽과 아래쪽에 발문을 남겼다. 특히 “학문을 다잡아 하지 않고 어정쩡하게 아까운 세월을 허송하는 것이 학자의 가장 큰 병통이니…‘각고’ 두 글자가 어찌 병통에 알맞은 좋은 처방이 아니겠는가.”라는 권상하의 발문은 그의 문집에 실려있어 일찍부터 후학들에게 가르침이 되어 왔다. 우암은 ‘주희가 아들을 공부시켜 타관으로 보낼 때는 근근(勤謹·부지런하고 삼감) 두 글자로 경계하였고, 임종시에는 주위사람들에게 견고각고(堅固刻苦·뜻을 굳게 갖고 열심히 노력함) 네 글자를 당부하였다. 이 여섯 글자야말로 후학들이 죽을 때까지 가슴에 새겨둘 일이 아니겠는가.’라는 글을 ‘송자대전(宋子大全)’에 남겼다. 우암은 주자가 당부한 여섯 글자를 가슴에 담고 있다가 다른 네 글자까지 모두 포괄하는 의미를 가진 ‘각고’ 두 글자를 제자에게 써주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암이 쓴 ‘각고’의 존재는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일반에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이 글씨는 우암을 추종한 대표적 노론의 한 사람인 민유중(1630∼1687)의 집안에 전해져 내려온 것으로 알려진다. 권상하는 발문을 ‘지금 붓을 잡고 제(題)하려고 하니 나도 모르게 부끄러워 흐르는 땀이 옷을 적신다. 그러나 지금부터라도 맹렬히 다스려서 힘껏 고쳐나간다면 또한 끝내 미혹하여 바른 길로 돌아오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러니 삼가 서로 이를 힘써야 할 것이다.’라고 마무리했다. 권상하는 발문을 쓰면서 ‘백발이 성성한 때에 이르렀다.’고 밝히고 있다.‘각고’하기에 그래도 늦지 않았다는 뜻이다. 전시장에서는 ‘각고’를 탁본으로 찍어보는 체험행사도 열린다.‘직필’전시회는 내년 2월24일까지. 월요일은 휴관. 일반 5000원, 학생 4000원.(02)580-1284.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가을 소풍가자 - 소풍 가기 좋은 곳

    가을 소풍가자 - 소풍 가기 좋은 곳

    제천시 청풍문화재단지 - 무량한 가을바람을 가슴에 안는다 가을바람이 소슬하다. 충북 제천의 청풍문화재단지에서 맞는 그 바람은 말 그대로 맑고 푸른 기운이 가득하다. 옛 청풍부의 관문인 팔영루에 들어서면 한량없는 그 바람과 가을볕을 만난다. 청풍은 남한강 상류에 위치하여 수운이 크게 발달한 곳으로 문물이 번성했고, 역사 문화의 뿌리가 깊은 고장이었다. 하지만 충주댐 건설로 화려했던 옛 명성만 전설처럼 남긴 채 물에 잠기게 되자 1983년부터 3년여에 걸쳐 현재의 위치에 청풍의 오랜 문화유적들을 이전하여 복원했다. 충주호를 굽어보는 산마루에 자리 잡은 청풍문화재단지는 이름만큼이나 시정(詩情) 넘치는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이제는 물 속에 잠겨버린 지난날의 영화를 그리워하듯 충주호를 보고 선 한벽루(보물 528호)의 고고함, 단아하고 귀족적인 금병헌의 멋스런 분위기며 무리지어 선 고가들의 정겨운 풍경은 수백 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한벽루는 고려 충숙왕 4년(1317)에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해 관아에서 세운 독특한 양식의 부속 목조 건물로 연회 장소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루에 올라갈 때 계단 역할을 하는 ‘익랑’은 현존하는 건축물 중에서는 전무한 양식으로 보고 있다.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의 친필이며, 조선조 영의정을 지낸 하륜의 기문도 유명하나 1972년 수해 때 유실된 것을 2001년 복원했다. 누각에 오르면 넓은 청풍호반이 한 눈에 들어오며 시원한 바람이 대책 없이 가슴으로 달려든다. 이곳 문화재단지에는 보물로 지정된 한벽루와 석조여래입상 외에도 금남루, 팔영루, 응청각, 청풍향교, 고가, 생활유물들을 비롯해 유물전시관에는 30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어 옛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역사 문화의 산 교육장으로도 훌륭하지만 또한 단지 내에는 자연학습장을 조성하여 여러 종류의 야생화들도 볼 수 있다. 관광지 둘러보듯 후딱 둘러보고 가기에는 아까울 만큼 이곳저곳 오래도록 발길을 잡는 곳이 많다. 드라마 촬영장도 문화재단지와 바로 이웃하고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다. SBS 기획 드라마 <대망> <장길산> 등을 찍은 촬영장의 세트가 더없이 실감난다. 선착장으로 내려가면 청풍호 유람선을 타고 내륙의 바다로 불리는 충주호를 누벼보는 색다른 즐거움이 기다린다. 설치당시 동양 최고(현재 2위), 세계 2위 높이(162m)로 그 웅장함을 과시했던 수경분수는 제천을 대표하는 관광시설이다. * 가는 요령 중부내륙고속도로 감곡 IC에서 빠져 제천에서 82번 지방도로를 타고 달리면 청풍문화재단지에 이른다. 또는 영동고속도로 - 중앙고속도로 남제천 IC에서 빠져 금성면을 지나 지방도를 타고 달리면 청풍문화재단지이다. * 맛집 <태조 왕건> 촬영장에서 597번 도로를 따라 가면 금수산 무암사 계곡이 나온다. 무암사 계곡 입구에 남근석 표지판을 따라 계곡을 올라가면 금수산송어장횟집(043-652-8833)이 있다. 제천의 향토음식으로 이름날 만큼 소문난 송어회를 맛볼 수 있다. 특히 여러 종류의 야채를 썰어 만든 비빔회가 인기 메뉴. 간단하게 먹고 싶다면 청풍 시내로 가면 붕어찜, 닭도리탕, 민물매운탕, 산채비빔밥 등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들이 있다. 파주시 벽초지수목원 - 아해야 배 띄워라, 저곳에 소풍 가자 연인들의 근사한 데이트 장소로, 가족들의 멋진 소풍 장소로 더없이 잘 어울리는 곳이 있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창만리에 있는 벽초지문화수목원. 물(호수)과 숲과 꽃들이 어우러진 드넓은 수목원은 마치 영화 속처럼 아름답고 이국적이다. 지난 2005년 9월 문을 연 벽초지문화수목원은 3만여 평의 부지에 100여종의 교목과 200여종의 관목 700여종의 각종 식물이 아름다운 연못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벽초지라는 이름 또한 ‘푸른(碧) 풀(草)과 연못(池)이 있는 곳’이라는 뜻. 벼루용 돌인 흑오석으로 지어진 입구를 들어서면 크고 잘생긴 소나무가 멋진 조경을 이루며 입장객을 반긴다. 전국 각지에서 수집한 150여 그루의 소나무와 화사한 꽃들이 장관인 테마정원을 시작으로, 양쪽으로 연결된 길을 따라가면 본격적인 모습이 펼쳐진다. 수십 년 된 아름드리나무가 하늘을 가린 주목터널길, 단풍터널길, 버들나무길이 은밀하게 둘러싸고 있는 한가운데 호수 벽초지가 자리하고 있다. 호수에는 수양버들 고목들 사이에 날아갈 듯 자리 잡은 정자 ‘파련정’과 파련정으로 이어지는 통나무 다리 무심교가 가로질러 놓였다. 호수 한가운데까지 연결된 나무 데크는 연꽃 군락지 연화원으로 가는 수련길이다. 여름 한철 연꽃을 피웠던 수련은 이제 그 아름다움을 접으며 연밥을 매달고 있다. 물에서 자라는 부채붓꽃·미나리아재비·동의나물 등이 어우러진 습지원에는 나룻배 한 척이 기우뚱 묶여 있다.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빚어내는 이국적이면서도 동양적인 모습은 벽초지 수목원의 하이라이트다. 숲속 별장을 지나 잘 다듬어진 돌길을 따라가면 키 작은 음지식물과 소나무·느티나무 등이 싱그럽게 펼쳐진다. 수천 평은 됨직한 잔디광장은 야생화로 둘러싸였고, 연인들에게 사랑받는 주목터널길은 사시사철 그늘을 드리고 있다. 제2주차장 쪽에 자리한 실내온실인 그린하우스에는 80여 종의 허브가 자란다. 한가운데 분수를 중심으로 허브와 관상식물. 석류·밀감 등 유실수들이 에워싸고 있다. 입구 쪽에서는 이곳에서 재배한 허브 화분을 시중보다 싸게 팔고 있다. 수목원 안 유일한 건물인 2층짜리 건물은 지하에 갤러리, 층에는 카페와 기프트 숍, 2층에는 허브를 이용해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 등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는 천연 비누 만들기, 허브 토분 만들기, 허브 화장품 만들기 등 체험학습 프로그램도 다양해 아이들과 함께 즐기기에 좋다. * 입장료 대인 6000원, 소인 4000원. (오전9시∼해질녘). * www.bcj.co.kr / 031-957-2004 * 맛집 수목원 내 레스토랑 ‘나무’에서는 각종 허브 요리를 맛볼 수 있다. 특수야채·새싹·식용꽃 등 7∼8 종의 꽃을 밥 위에 얹고 로즈마리·타임·바질 등 허브와 10여 가지 재료로 만든 비빔장을 곁들여낸다. 새송이버섯과 마늘이 주를 이룬 허브스파게티, 칠리소스가 들어간 이탈리안풍의 허브누룽지탕, 허브돈가스 등도 맛볼 수 있다. * 가는 요령 ‘벽초지수목원’을 표시한 도로 이정표가 없어 자칫 길을 헤맬 수도 있다. 자유로를 이용하거나 구파발삼거리에서 통일로를 탄다. 또 의정부쪽에서도 쉽게 갈 수 있다. 자유로를 이용할 경우 문발 인터체인지에서 빠져 파주-광탄 삼거리에서 좌회전한 다음 방축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도마산초등학교를 찾으면 바로 앞이 수목원이다. 또 통일로를 이용해 벽제교차로에서 우회전한 뒤 다시 고양동 삼거리에서 좌회전해서 보광사 방향으로 가면 된다. 고양동 삼거리에서 약 12㎞. 글·사진/ 김혜숙 <여행 칼럼니스트>     월간 <삶과꿈> 2007.09 구독문의:02-319-3791
  •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9) 논산 연무~상월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9) 논산 연무~상월

    전북 여산에서 1번 국도와 갈라진 옛길은 충남 논산 연무대와 닿아 있다. 이 길로 접어 들면 연무읍 고내리에 봉곡서원이 나온다. 서원 앞에 사는 80대 할머니는 “여자들이 꿈을 꾸면 옛날에 욕을 본 사람들이 나타난다며 (서원을) 옮기라고 해유.”라고 말했다. 이곳에는 최근까지 사람이 살다가 떠난 흔적이 있다. 특별하게 보이는 서원은 아니지만 이계맹 등 조선시대 때 귀향을 갔던 선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기에 그리 생각하는 듯했다. ●논산훈련소 주변 경기도 옛말 서원 앞에는 ‘황화정(皇華亭)’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다. 황화정은 서원에서 400m쯤 북쪽에 있던 정자다. 옛날 현감(군수)이 관찰사(도지사)를 맞고 배웅을 하던 곳이다. 황화정이 훼손된 뒤 비석만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황화정이 있던 마을은 지금 한적하고 쇠락한 농촌일 뿐이다. 예전에 전라도 지역에 속했던 마을이다. 이 마을 끝에서 옛길은 다시 1번 국도와 만난다. 곧 이어 육군훈련소(옛 논산훈련소·연무대)와 입소 대대가 나온다. 훈련소 앞에서 식당 호객을 하던 김영심(74)씨는 “훈련소도 옛날 훈련소지, 지금은 아녀. 자꾸 오그라져.”라며 최근의 경기를 전했다. 흔한 술집도, 다방도 없다. 입소병의 ‘총각딱지’를 떼주던 아가씨촌도 사라졌다. 교통이 좋아져 입소날에 부모의 차를 타고 오고 면회 때도 멀리 나가 먹는다고 말했다. 김씨와 함께 호객을 하던 70대 할머니는 “재수 있으면 하나 걸리고 공 치는 날이 많아.”라고 한탄을 했다.“밥 먹고 가슈.” 두 할머니는 끝내 객(客)의 소매를 잡아끈다. 훈련소 입소 대대 앞도 마찬가지다. 식당이 줄지어선 거리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논산은 역사상 최고 전쟁터 훈련소에서 옛길을 따라 좀더 올라가다 옆길로 2㎞쯤 빠지면 견훤 왕릉이 나온다. 이 왕릉은 기념물 26호로 연무읍 금곡리에 있다. 견훤은 완산(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세력을 키웠으나 아들 신검과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분을 빚으면서 고려 왕건에게 멸망했다. 죽으면서 “완산이 그립다.”고 해 이곳에 묻어주었다고 한다. 날씨가 좋으면 이곳에서 전주 모악산이 보이는 것도 이런 연유다. 논산은 후백제가 왕건과 전투를 벌였고 백제가 멸망할 때 계백장군이 신라와 싸운 황산벌이 있는 곳이다. 육군훈련소도 이곳에 있고 계룡대도 있다. 삼군본부가 있는 계룡대는 현재 계룡시에 속하지만 이전에는 논산 땅이었다. 논산지역 향토 사학자 류제협(61)씨는 “논산은 넓은 곡창지대여서 전투식량 조달이 손쉬워 역사상 수많은 전쟁이 치러졌다.”며 “삼국시대 때는 접경 지역이라 전쟁이 많았고 계룡대는 높은 계룡산이 둘러싼 천혜의 요새여서 들어온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논산은 최대 전쟁터일 뿐만 아니라 삼국 통일을 이끌어 통일을 상징하는 고장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견훤 왕릉에서 다시 탄 옛길은 연무터미널과 개태골을 거쳐 1번 국도와 갈라져 은진향교로 향한다. 은진면 교촌리에 있는 이 향교는 조선시대 교육기관으로 봄과 가을에 제향을 지낸다. 공자 등 성현 22명의 위패를 모신 향교는 평상시에 문이 닫혀 있다. 향교 안에 3000년 된 은행나무가 있어 떨어진 은행 열매가 옛 정취를 이어준다. 향교에서 1㎞쯤 올라가면 망보기마을이 나온다. 고개에서 적들이 오는지 망을 보았다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한양이나 전라도로 갈 때 선비들이 이곳에서 쉬었다고 한다. 큰 정자나무 밑에 계단식 서낭당이 있다. “20년 전만 해도 소몰이꾼들이 정자나무 밑에서 쉬다 갔어.” 나무 밑에서 붉은 고추를 널어 말리던 70대 할머니가 넋두리처럼 내뱉었다. 이 마을을 지나면 옛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관촉사가 있다. 보물 232호 석등도 있지만 높이 18m의 국내 최대 석불인 은진미륵(보물 218호)이 서 있어 유명하다. 고려 목종 9년(1006년)에 완공된 이 석불은 보수공사가 진행 중이다. 구절초가 절 안에 가득 꽃망울을 터뜨려 가을 분위기를 한껏 뽐냈다. 사찰로 들어가는 계단 옆에 세워진 이승만 박사 추모비는 이 곳의 옛 정취와 달라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이 추모비는 방공청년회 논산지부가 1965년 건립한 것이다. ●‘춘향전´에 7군데나 지명 나와 옛길은 다시 논산시 부적면으로 이어진다. 향토 사학자 류씨는 “전북 여산에서 충남 공주 경천까지 가는 길의 지명이 춘향전에 7군데나 나와 이 구간이 ‘춘향전 옛길’이라고 불린다.”고 말했다. 새다리도 이 가운데 하나다. 부적면 신교리 논산천에 있는 이 다리는 새로운 교량이 건설되면서 다리를 놓았던 돌이 냇가에 묻혔다고 한다. 부적면사무소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진 옛길은 지금도 넓은 논 사이를 달린다. 호남선 건널목을 건너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2리의 자연부락인 지밭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 무당이 후백제를 멸망시키려 왔던 왕건의 꿈을 해몽해줘 왕건이 이를 믿고 공격, 끝내 멸망시켰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마을 입구에서 만난 서용호(81)씨는 “한양으로 가던 길은 농로가 됐거나 경지 정리로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푸념했다. 4∼5㎞쯤 되는 비포장 농로를 달리다 보면 노성천이 나오고 이 하천을 건너자마자 초포마을이 나온다. 이 일대 주민들은 이 마을을 ‘풀개’라 불렀다. 주소는 광석면 항월리다. 이곳은 한양을 오갈 때 반드시 거치는 마을이었다. 자연히 주막촌이 형성됐고 왈패들이 많았다.‘최장사’니 ‘팔장사’니 하는 힘센 전설적인 장사 이름이 전설로 내려온다. 주민들은 이들이 들었던 거대한 돌이 있다고 전했으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새로운 교량이 들어섰지만 예전 다리를 쓰던 돌들이 냇가에 흩어져 있다.20∼30년 전까지만 해도 논산장을 가려면 지나던 길이다. 주막집들은 지금 슬래브 주택으로 바뀌었다. 허름한 기와집 한 곳에서만 막걸리를 팔았다. 주민 이유영(67)씨는 “주먹 깨나 쓰던 장사들이 많아선지 ‘아사리 풀개’라고 불렀다.”면서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이곳에 5일장이 서면 노성, 상월 등 인근 동네 아이들이 무서워 오는 걸 꺼렸다.”고 회고했다. 풀개를 떠난 옛길은 노성천 옆을 따라 올라간다. 노성면으로 들어서자 교촌리 ‘윤증고택’이 맞는다. 윤증(1629∼1714) 선생은 조선시대 숙종 때 한학자로 스승 송시열 선생의 논리를 비판하는 등 성품이 대쪽 같았다. 대사헌, 우의정 등에 임명됐으나 모두 사양했다. 고택은 윤증의 성품대로 간결하고 품위가 있다. 중부지역 양식에 남도풍이 가미돼 있다. 중요민속자료 190호다. 길은 이어 상월면을 거쳐 공주시 계룡면으로 들어간다. 논산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부인2리 지밭마을 유래 “옛날 선비들이 한양에 말 타고 갈 때 서낭당 앞에서 내려서 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말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대유.” 논산시 부적면 부인2리 지밭마을 주민 오영근(65)씨는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을 전하면서 대뜸 이렇게 말했다. 마을안 논 옆에 세워져 있는 서낭당은 무당을 모신 곳이다. 이 무당은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의 아들 신검의 후백제를 멸망시키는 사건과 관련이 있다. 왕건이 후백제를 치려고 개태사 근처에 진을 치고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다. 자신이 무쇠솥을 쓰고 물속에 빠지는 꿈이었다. 왕건이 “불길하다.”고 고민하자 부하들이 “이 마을에 해몽을 잘하는 무당이 있으니 한번 물어보자.”고 했다. 무당의 딸로부터 ‘흉몽’이라는 얘기를 듣고 낙심해 되돌아가던 왕건을 때마침 집에 돌아온 무당이 붙잡았다. 무당은 “길몽이다. 솥은 왕관을, 물은 등극을 뜻한다.”고 풀이했다. 왕건은 무당의 말에 곧바로 후백제를 쳐 멸망시켰다.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뒤 무당의 은혜를 갚고자 ‘부인’이라는 작위를 내리고 땅을 하사했다. 지금의 마을 이름도 이 작위명에서 유래하고 있다. 지밭이란 자연부락명도 ‘제사를 지내는 데 쓰는 밭’이란 뜻에서 변형됐다. 오씨는 “쳐다봐서 보이는 땅은 전부가 무당 땅이었다고 해요.”라고 전했다. 재미있는 것은 왕건이 하사한 엄청나게 넓은 토지의 일부가 지금도 전해진다는 것이다. 이 땅은 두 마지기(400평 정도)로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경작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온 쌀로 매년 대보름 전날 마을 서낭당에서 무당의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 요즘 서낭당 앞에는 건축폐기물이 어지럽게 쌓여 있지만 제사 때는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고 지낸다고 한다. 제삿날이면 일부 주민이 풍물을 치면서 서낭당으로 올라간다. 제사가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이다. 이 풍물소리를 들은 이웃들이 준비해놓은 음식을 하나씩 가지고 뒤따른다. 제사는 성대하다. 오씨와 함께 도랑에서 우렁이와 참게를 잡고 있던 서일웅(67)씨는 “(제사를 지내는) 그날은 주민 모두가 멸치도 안먹는다.”고 웃었다. 비린 것을 피할 정도로 무당의 제사를 신성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20여년 전만 해도 제사 때면 외지인이 마을에 들어오지 못했다.”면서 “지금도 제삿날 직전에 초상집에 갔던 주민은 서낭당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논산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계룡산 모든것’ 공주 박물관서 보세요

    국립공주박물관과 국립청주박물관이 각각 계룡산과 우암 송시열과 계룡산을 주제로 하는 특별전을 연다.국립광주박물관이 호남선비 하서 김인후를 기리는 기획전을 갖고 있는데 이어 지역이 갖고 있는 문화 자원을 집중 조명하는 지방 국립박물관들의 노력이다. 공주박물관(041-850-6360)이 23일부터 12월30일까지 여는 ‘계룡산’특별전은 특정한 산을 주제로 잡았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이미 신라시대에 국가적으로 중요한 오악(五岳) 가운데 서악(西岳)으로 등장한 계룡산의 역사적 유래와 풍수지리적 특징, 그리고 이를 토대로 인간이 이룩한 종교와 문화를 살펴본다. 계룡산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문헌이나 문학작품을 모았고, 산악신앙과 풍수도참설, 불교문화가 함께 공존하는 이 산만의 독특한 종교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유물도 곁들인다. 백제시대에 축조된 표정리 고분군의 출토 유물과 계룡산 학봉리 가마터에서 구워낸 분청사기도 나온다. 청주박물관(043-252-0710)의 ‘우암 송시열 탄신 400주년 특별전’은 박물관 개관 20주년을 겸하는 행사.23일 개막해 내년 1월30일까지 계속된다. 우암의 학문세계와 삶을 조명하고자 우암 종가에서 기탁한 유물 90점을 내놓는다. 성리학 완성자인 주희의 글과 말을 모은 ‘주자대전’을 염두에 두고 만든 우암 전집인 ‘송자대전’(宋子大典)도 만날 수 있다. 24일에는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와 이용삼 충북대 천문학과 교수가 각각 ‘우암 다시보기’와 ‘전시대의 혼천의 복원-우암의 혼천의를 중심으로’를 주제로 특별강연도 갖는다.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1) 마마 전문치료 두의(痘醫) 유상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41) 마마 전문치료 두의(痘醫) 유상

    조선시대에 가장 무서운 병 가운데 하나가 마마였다. 마마는 누구나 평생 한번은 걸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병인데, 심하면 죽었고, 가볍게 나아도 얼굴에 흉터가 생겼다. 심하게 얽으면 곰보라고 했는데, 조선시대 초상화를 살펴 보면 얼굴에 얽은 자국이 심한 분들이 많다.‘역사인물초상화대사전’에 200여명의 초상화가 실렸는데,17세기 후반에 태어난 인물들의 얼굴이 특히 많이 얽었다. 예를 들어 16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20년 동안 태어난 분들 가운데 정수기, 박필건, 오명항, 이덕수, 어유룡, 윤봉근, 정현복 등의 얼굴에 마마자국이 심한데, 이들은 숙종과 비슷한 연배이다. 이 시기 인물들의 절반 정도는 마마를 심하게 앓았던 후유증을 평생 지니고 살았던 셈이다. ●왕실이 가장 두려워했던 전염병 마마 마마를 전문으로 치료한 의원이 두의(痘醫)인데, 가장 빠르게 승진했다. 임금들이 두의를 특히 고맙게 여긴 이유는 얼굴에 흉터가 생기면 왕노릇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평생 수많은 신하와 외국 사신들을 만나야 하는데, 성형수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당시로서는 얼굴이 심하게 얽은 임금을 만나야 하는 신하도 마음이 괴롭고, 임금도 편치 못했다. 왕과 세자의 마마를 모두 치료해 지중추부사까지 오른 유상(柳 )은 대표적인 두의이다. 왕실에서 마마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현종 즉위년(1659) 9월5일 기사에 실린 이야기를 살펴 보자. 인조가 청나라 태조에게 항복한 뒤에 심양에 인질로 끌려 갔던 봉림대군이 돌아와 즉위하자 청나라에 복수할 준비를 했다. 효종은 송시열과 함께 북벌책(北伐策)을 추진했는데, 세상을 떠나던 해인 1659년 3월11일 희정당에서 송시열을 만나 북벌에 관해 의논했다. 몸이 차츰 약해지는 것을 걱정한 효종이 10년을 기한으로 청나라 칠 준비를 하자고 했다.10년이 지나면 효종 자신이 나이 쉰이 되어 기력이 약해지고 송시열도 늙을 테니, 북벌을 실현하기 불가능하다고 했다. 효종은 그러면서 아들의 마마 이야기를 했다. “세자가 매우 현명한데, 비록 부자지간이라 하더라도 어찌 그 장단점을 모르겠는가? 세자는 성품이 온순하고 효성스러운데다 견고한 의지가 있으니, 문치(文治)로 국가를 보존할 임금이 될 것이다. 깊은 궁중에서 자라 병가(兵家)의 일을 알지 못하니, 억지로 어려운 일을 책임지울 수 없다. 아직 마마를 치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어린아이처럼 보호하고 있다.” 효종은 세자의 마마를 걱정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두 달 뒤에 종기를 고치지 못해 세상을 떠났다. 쉰이 될까봐 걱정했는데, 겨우 마흔이었다. 효종의 아들인 현종도 마마를 걱정했다. 현종 8년(1667) 2월에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는 책례(冊禮)를 치르기로 했는데, 나중에 숙종이 된 원자는 그때 일곱 살이었다. 그러나 한달쯤 전에 마마가 유행하자 현종은 행사보다 아들의 건강이 더 걱정되었다. 몸이 약해 자주 온천에 다니던 현종은 1월18일에도 침을 맞다가, 영의정 정태화를 불러 명했다. “세자가 책례를 마친 뒤에 사례의 전문(箋文)을 올리는 것은 중요한 의례이다. 그러나 지금 마마가 치성하고 있는데 세자가 연일 외정에서 예를 행하고 있으니 염려스럽다.” 그러나 정태화가 ‘내정에서 하는 것은 너무 구차하니, 동궁 소속 관원들만 외정에서 참여하여 간략하게 치르자.’고 아뢰어 그대로 하였다. 그만큼 마마는 왕에게도 무서운 병이었다. 이듬해 5월17일에 궁인이 마마를 앓자, 현종이 창경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마마는 환자와의 접촉은 물론, 공기로도 전염되었다. 그래서 지엄하신 임금도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현종 12년(1671) 2월29일 실록에는 “팔도에 기아, 여역, 마마로 죽은 백성을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마마를 앓지 않고 왕위에 오른 숙종과 마마 전문의원 유상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숙종 완쾌되자 유상의 품계를 두 계급 이상 올려 명성대비는 숙종이 마마를 겪지 않은 것을 늘 걱정했다. 숙종이 왕위에 오른 지 8년째 되던 1683년 10월에 몸에 두창(痘瘡)이 나자 깜짝 놀라 목욕재계하고 자신이 대신 죽기를 청했는데,11월에 마마가 깨끗이 나았다. 허준이 ‘두창집요(痘瘡集要)’를 편찬한 뒤부터 두창이라는 말이 널리 쓰였는데, 일생에 한번은 걸린다고 해서 백세창이라고도 불렸다. 그랬기에 숙종은 늘 마마를 걱정했으며, 내의원에 두의를 두었다. 한의학에서는 두창이 걸리는 이유를 태독설과 운기설로 설명했는데, 태(胎) 안에 있을 때에 어머니의 나쁜 기운을 물려 받았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두창에 걸린다는 것이 태독설이다. 그랬기에 명성대비도 숙종이 어렸을 때에 마마를 앓지 않자 평생 조바심하며 걱정했던 것이다. 명성대비가 기도하여 숙종의 마마가 나았다고 기록되었지만, 실제로 치료한 의원은 유상이다. 10월18일에 숙종의 마마 증상이 시작되었는데, 이틀 뒤에 유상을 불러 진료케 했으며, 의원 일곱 명이 번갈아 숙직했다. 현종이 왕궁을 비워두고 온천에 행차했을 때같이 십며칠 치의 군호(軍號)를 미리 정해 올렸으며, 숙직하는 군사도 새로 뽑지 않고 활쏘기 시범도 중지시켰다. 왕이 마마를 앓기 시작하자 비상사태에 들어간 것이다. 숙종의 증세는 나날이 심해져, 열흘째 날에는 청성부원군 김석주가 안부를 물어도 혼미한 상태로 턱만 끄덕일 뿐이었다.28일에야 비로소 곪은 데가 아물며 딱지가 생기기 시작했다.29일에는 가벼운 죄수들을 석방하라고 사면령을 내렸다. 11월1일에 딱지가 떨어져 완쾌되자, 대비의 수라상에도 고기와 생선이 오르게 되었다.5일에 시약청(侍藥廳)을 해체하고, 군사들의 비상체제도 원상으로 복구했다.10일에 유상을 종2품 동중추부사로 초자(超資)하고, 금관자를 내려 주었다. 상을 줄 때에는 품계를 하나씩 올리는 것이 관례인데, 유상의 경우에는 두 계급 이상 올렸다는 뜻이다.14일부터 의원들에게 지나친 상을 주었다는 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지만, 언관들도 유상의 공로는 인정했다.17일에 종묘 사직에 경사를 아뢰었으며, 전 승지 이현석이 ‘성두가(聖痘歌)’를 지어 기쁨을 표현하자, 많은 사람들이 외워 전하였다. 그 정도로 왕의 마마는 큰 사건이었다. 12월4일에 유상을 종4품 서산군수로 임명했다. 그러나 이튿날 “임금의 환후가 평상시 같이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멀리 내보낼 수 없다.”고 하여 한양 옆의 고양군수로 옮겨 주었다. 언제라도 불러 들일 수 있는 곳에 둔 것이다. ●감꼭지를 달여 마마를 치료했다는 전설까지 유상이 숙종의 마마를 치료한 비법이 ‘청구야담’에 실려 있다. 유상이 영남관찰사를 따라 책실(冊室)로 내려갔는데, 몇 달 동안 할 일이 없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관찰사에게 말했다. 금호를 건너 우암창에 이르기 전에, 종이 변을 보겠다고 고삐를 맡겼다. 유상이 채찍을 들어서 한번 치자, 나귀가 깜짝 놀라 달아났다. 하루가 다하도록 멈추지 않다가, 날 저물 무렵에야 어떤 집 마루 앞에 멈춰섰다. 마루에 있던 노인이 아들을 부르더니 “손님이 나귀를 타고 오셨으니, 나귀도 잘 먹이고 손님도 잘 모시라.”고 했다. 인사를 나눈 뒤에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자 주인이 긴 칼을 차고 나가면서 “내 책은 보지 마시오.”라고 했다. 유상이 휘장 속을 보니 의서(醫書)가 가득해 아무 책이나 들춰 보았다. 주인이 돌아와 함께 잠자리에 누웠는데, 첫닭이 울자 주인이 “빨리 떠나라.”고 했다. 한낮이 되어 판교에 다다르자, 액정서 아전들이 열댓 명이나 길가에 줄지어 서서 유상에게 빨리 서울로 들어가자고 재촉했다.“지금 성상께서 마마를 앓으시는데, 꿈속에 신령이 나타나서 의원 유상을 부르라고 했다오.” 구리개를 넘어서는데 어떤 할미가 마마에 걸렸던 아이를 등에 업고 있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묻자 할미가 설명했다.“이 아이는 곪긴 속에 출혈이 심해 숨까지 막혔었다오. 다들 팔짱을 낀 채 죽기만 기다렸는데, 지나가던 스님이 시체탕(湯)을 달여 먹게 해서 효험을 보았지요.” 말린 시체탕은 감꼭지를 달인 약인데, 딸꾹질에 복용했다. 듣고 보니 어젯밤 보았던 의서에도 시체탕이란 말이 있었다. 왕을 진찰했더니, 할미가 업고 있던 아이와 같은 증세였다. 그래서 시체탕을 올렸더니 곧바로 효험이 있어, 신의라고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고 한다. 병균이라는 개념이 없던 조선시대에 두창은 귀신에 의해 생겨났다고 믿었다. 민간에서는 두창신을 중히 여겨 왔으며, 여러 가지 금기(禁忌)가 생겨났다. 그래서 그 귀신을 마마, 손님이라고 높이 받들었던 것이다. 고을마다 여단( 壇)을 쌓아 놓고 전염병이 돌 때마다 여제( 祭)를 지냈는데, 억울한 원혼(魂)을 달래 전염병이 돌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마마가 유행하면 마마배송굿이나 하던 시대에 유상은 숙종뿐이 아니라 1699년에는 세자,1711년에는 왕자와 왕비의 마마까지 모두 치료했다. 더 이상 승진할 수 없을 정도로 분에 넘치는 상을 받았으니, 왕실의 마마를 치료하던 의원은 조선 최고의 전문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상의 아들이 대를 잇지 않았기 때문에, 전설까지 생겨난 그의 의술은 전수되지 못했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마지막 영남 巨儒의 ‘유월장’

    마지막 영남 巨儒의 ‘유월장’

    어쩌면 ‘이 시대 마지막 유월장(踰月葬)’이 될지도 모를 한 장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화제의 장례는 ‘영남 기호학파의 마지막 유학자’로 불리다가 지난달 20일 경남 김해에서 77세를 일기로 별세한 화재(華齋) 이우섭(李雨燮) 선생의 전국 유림장(유월장). 16일간에 걸쳐 조선시대 사대부의 전통 장례 형식과 절차 그대로 재현하는 독특한 장례행사로 눈길을 끈다. 장례에서는 두건, 굴건제복 등 성복과 거친 옷을 입고 짚멍석에서 지내는 상주, 그리고 장례 1년 뒤의 소상과 2년 뒤의 대상 등 3년상 등이 모두 철저한 고증을 통해 재현된다. 이번에 치러질 유월장은 1997년 경북 청도의 한학자 박효수 선생의 유월장 이후 처음이다. 전통식 유림회의인 ‘개좌’에서 이우섭 선생의 장례를 유월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한 것은 지난달 29일. 개좌에서는 조선 중종의 15대손인 이우섭 선생이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간재 전우, 석농 오진영으로 이어진 전통 기호학맥의 후예로,200여명의 문하생을 배출한 영남의 거유(巨儒)라는 점을 높이 사 유월장을 결정했다. 부친이 별세했을 때 3년의 상제를 지킨 데 이어 어머니 별세 후에도 3년상을 꼬박 지킨 고인의 덕을 추모하자는 뜻을 모았다고 한다. 개좌에서 장례위원장에 최근덕 성균관장과 충북 천안의 유학자 임용순 선생이 선정됐으며 세부적인 장례절차는 장례 하루 전날 최근덕 성균관장이 주재하는 유림회의에서 공식 결정된다. 개좌의 결정에 따라 전주이씨 종친회(서계령파)에서도 비상종중회의를 열어 장례에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접수된 장례 참여인원만도 4000여명. 장례위원회에 따르면 장례 당일인 4일에는 2만 3000여명이 모여 2㎞에 달하는 장사진을 이룰 전망이다. 상여소리꾼(명인 1명), 상두꾼(32명), 상주 및 복인(200여명), 조객, 만장 행렬이 선산까지 운구한다. 이준규(한문학) 부산대 교수는 “근대 이후 전국 유림장인 유월장이 전국에서 1∼2차례 있었지만 그것도 간소화한 작은 행사로 치러졌다.”며 “이번 유월장은 유림의 종장들이 거의 세상을 떠난 시점에서 ‘효(孝)’라는 우리의 정신문화를 전국의 유림들이 결집해 되살려낸다는 행사의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유월장(踰月葬)이란 조선시대 학문과 덕망이 높은 유학자가 별세했을 때 행하는 전통 장례 형식. 주로 유림의 종장이 세상을 떠났을 때 전국에 퍼져 있는 유림들의 뜻을 모아 지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일제의 압박과, 이후 제정된 가정의례준칙으로 인해 유월장은 자취를 감췄다. 유월장(踰月葬)은 초상난 달을 넘겨 치르는 장례라는 의미를 지닌다.
  •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1) 땅끝~ 강진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다시 걷는 옛길] (1) 땅끝~ 강진

    서울신문의 기획 시리즈인 ‘다시 걷는 옛길-호남대로’가 영남대로에 이어 시작됐다. 전남의 해남 땅끝마을에서 한양까지 1000리 길을 답사하는 긴 여정이다. 길섶 곳곳에 스며 있는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쉬어도 가고, 뜀박질도 하면서 그들의 삶을 엿본다. 지금, 대부분의 옛길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도로 개발 등에 편입된 곳이 많다. 길이란 교통로 역할뿐아니라 고장의 문물, 풍속을 전파하는 정보의 소통로이다. 호남의 옛길도 ‘남도 해양문화’를 한양에 실어나르는 역할을 했다. 때로는 왜구의 침략로로, 어떤 때에는 귀양길로 이용됐다. 호남길을 따라 걸으며 길의 역사와 선인들의 삶의 자취를 천착(穿鑿)해 본다. 호남의 땅끝에서 한양에 이르는 1000리 길의 호남 시발지는 전남 해남땅 관두포항과 강진 마량항으로 보면 크게 무리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말이다. 이들 일대의 길이 군사적 목적으로 개설된 흔적이 곳곳에서 보인다. 신라시대∼고려∼조선시대를 잇는 세월 동안 왜구 등의 침탈(侵奪)을 막기 위해 해안선에 진(鎭)과 영(營)을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해남과 마량항은 제주로 가는 뭍의 마지막 지점으로,‘제주로’라고도 불렸다. 조정은 이 길을 통해 관리들을 귀양보내거나, 임지에 파견하고 군사를 이동시켰다. 제주 사람들이 범선으로 육지에 도착해 과거를 보거나 장사를 하기 위해 한양길에 오르는 길이었다. 땅끝 해안가에 살던 선인들도 마찬가지로 이 길을 이용했다. 머나먼 여정 속에 머무는 길목에는 자연스레 역(驛)과 원(院)이 생겨났다. ●관두포는 관로(官路) 전남 해남군 화산면 관동리(관두포)와 북평면 이진마을은 한양에서 내려오는 마지막 지점이자 한양에 오르는 첫 길이었다. 이진과 관두포에서 각각 북쪽(한양)으로 출발한 길은 강진군 성전에서 다시 만난다. 관두포는 조선시대 제주로 향하는 관청 ‘물목’이었다.1653년 제주에 표류한 네덜란드 하멜 일행 36명이 이듬해 관두포를 거쳐 한양으로 압송됐다. 이 마을 오른쪽에 솟아 있는 관두산은 해발 178m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여수 돌산에서 한양에 이르는 봉수터로 쓰였다. 마을 노인정에서 만난 채남두(76)씨는 “마을 안쪽에 ‘관터’와 ‘영터’가 있었다.”며 “지금은 그 자리에 김 가공공장과 집들이 들어섰다.”고 말했다. 그는 “관두산 아래 평지를 ‘몰돌지’라고 부른다.”며 “이는 제주 방언인 말(몰)을 돌리는 공간으로 사용된 흔적”이라고 추정했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해남읍에서 관두포를 향해 ‘관머리’(관두)를 세번 외치면 무서운 학질도 떨어진다.”는 말이 전해온다고 했다. 관청과 군영의 ‘위세’가 선인들의 삶을 얼마나 고달프게 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한때 관리와 군졸, 짐꾼·상인들로 북적였던 관동마을은 지금 한적한 농어촌으로 변했다. ●한양 향한 옛길 따라 호남길 시발지인 관두포를 뒤로 하고 국도 13호선을 따라 완도 쪽으로 8㎞쯤 가다 보면 현산면 하구시 마을이 나온다.‘구시 저수지’ 뒤쪽으론 고산 윤선도가 54세(1640년)부터 9년간 머물렸던 금쇄동(金鎖洞) 산장이 자리하고 있다. 고산은 이곳에 터를 잡아 ‘회심당’이란 집을 짓고,‘산중신곡’이란 시조를 읊었다. 지금은 고산의 묘소와 윤씨 제각(祭閣)만 방치돼 있다. 호남길은 13호선을 따라 하구시 바로 아래쪽 고현마을로 이어진다. 고려시대 때 해남현 관아였던 현산면 고현에서 서울을 가려면 ‘오도재’란 대둔사 골짜기를 넘어야 했다. 지금은 지방도가 뚫려 있다. 그러나 길은 오도재 8부 능선인 덕흥리에서 끊기고, 이 재(고개)를 넘어 대둔사 계곡에 도착하려면 도보로 이동해야 한다. 이 고개를 넘던 관리들은 삼산면 평활리에 있던 녹산역에서 말을 공급받았다. 이곳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지금의 해남읍을 거치지 않고 바로 옥천면 백호리∼송산리를 거쳐 계곡면 별진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강진군 성전으로 빠져나간다. 옛 지리지에는 해남에서 북행하는 첫 역참(驛站)은 별진역이고 북으로 30리 거리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때 ‘별진’이 ‘성진’으로 이름이 바뀌어 계곡면 소재지가 되면서 별진역 터를 확인할 길이 없다. 주민들은 “이 역을 지나간 관리들이나 찰방(조선 때 역참 일을 맡던 외직 문관 벼슬) 송덕비 10여개가 마을앞 거리에 서 있었으나 1970년대 새마을운동 사업 때 모두 없어졌다.”고 증언했다. ●또다른 출발지 이진항 관두포항이 관리들이 주로 이용한 ‘관로’ 였다면 이진항은 민·관이 두루 활용했다. 이진마을은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바로 건너편이다. 이곳은 강진 마량항에서 고마도를 지나 완도와 해협을 이루는 길목으로 통한다. 이진 역시 수군만호가 주둔했던 주요 군사 거점의 하나이다. 이곳은 성을 쌓는 데 제주사람이 동원될 만큼 한양∼제주를 오가는 주요 길목이었다. 이곳에서 시작하는 호남길은 강진군 신전·도암면과 강진읍을 거쳐 성전·영암 등 북쪽으로 이어진다. 성전은 해남읍과 강진 방면에서 각각 올라오는 길이 만나는 지점으로, 석제원(石梯院)이란 나그네 쉼터가 있었다. 이진∼강진읍에 이르는 옛길은 지방도 813호선으로 포장된 신작로로 변했다. 지금은 옛길임을 짐작할 만한 표지나 건물터를 찾기 어렵다. 도암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2㎞쯤 가다 보면 바위를 깎아지른 듯한 석문산이 앞을 가로막는다. 석문교 오른쪽으로 다산초당과 백련사로 이어지는 길이 나 있다. 석문협곡에 들어서면 절리를 이룬 바위덩이가 무너져내릴 듯 자리한다. 이 길은 옛 강진 읍성을 지나 최근 확·포장된 2번 국도와 나란히 성전으로 이어진다. 이 도로는 구한말 일본 경찰에 붙잡힌 항일 의병들이 강제 동원돼 건설된 구간으로 알려져 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다산 18년간 머물며 불후의 저작 남겨땅끝마을∼한양간의 옛길 시발지는 ‘귀양길의 끝자락’이다. 전라도의 해안가 고을은 귀양지였거나 섬 귀양지인 제주로 향하던 길목이었다. 각종 문헌에서는 강진과 제주, 해남, 진도 등이 귀양지로 자주 등장한다. 강진군 도암면에는 다산초당이 있다.1801년(순조 1년) 정치적 사건에 휘말린 다산 정약용은 형인 정약전과 호남 옛길을 따라 나주까지 귀양길을 동행한다. 형과 헤어진 다산은 영암∼풀치재∼성전(석제원)을 거쳐 강진으로 들어오고 정약전은 나주에서 흑산도로 유배된다. 다산은 강진에서 18년간 머물면서 목민심서 등 불후의 저작을 남겼다. 강진읍의 남강서원은 송시열(1607∼1689년)을 모시고 있다. 송시열이 1689년 강진항을 통해 제주로 귀양가던 길에 바람이 불어 백련사에 잠시 머물 때 강론한 것을 기념해 세운 서원이다. 해남읍 연동리의 녹우당은 고산 윤선도(1587∼1674년)가 1640년 영덕 유배 생활을 마치고 은둔 생활을 했던 곳이다. 그는 완도, 보길도와 해남을 오가며 시조문학의 백미로 치는 어부사시사·오우가 등을 저술했다. 이들 조선시대의 관리는 한양땅에서 출발, 호남 옛길을 따라 전라도 벽지와 제주로 향했다. 이 때문에 문학과 그림 등 선현들의 수많은 저서가 호남대로의 끝자락에서 탄생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아하!이그림] 겸재의 ‘어초문답’

    [아하!이그림] 겸재의 ‘어초문답’

    서울 성북구 성북초등학교 바로 옆에 있는 간송미술관(02-762-0442)은 일년에 딱 두번 전시회를 엽니다. 매년 5,10월에 2주씩 소장문화재를 전시하고, 나머지 날에는 한국미술을 연구하는 곳입니다. 지난해 이맘때 열린 봄 특별전에는 10만여명에 이르는 구름떼 관람객이 몰렸다고 하는데, 고운 여름한복을 입은 최완수 연구실장은 “세어보지 않아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13~27일 열리는 72회 이번 봄 정기전은 ‘우암 송시열 탄신 400주년 기념 서화전’입니다. 하지만 100점의 전시작품 중 우암의 것은 글씨 단 한 점입니다. 전시회 하이라이트는 겸재 정선의 그림 31점입니다.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겸재의 정신적 뿌리에는 우암 송시열의 조선성리학 이념이 있었다는 것이 간송미술관측의 설명입니다. 그럼 진경산수화가 과연 이전의 조선 그림과 어떻게 다른지 한번 볼까요. 나라에서 설치해 화가를 양성하고 회화를 관장했던 화원에서 활동한 이명욱의 ‘어초문답(사진 왼쪽)’은 중국 그림을 그대로 베낀 것입니다. 같은 중국 그림을 베껴서 비슷한 조선의 그림이 여럿 있지요. 어부와 나무꾼이 묻고 대답한다는 뜻의 ‘어초문답’에서 성리학의 뜻이 허다하게 밝혀져 동양화의 낭만적 소재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겸재의 ‘어초문답(오른쪽)’은 중국 그림을 베낀 것이 아니라 주변의 조선 사람 얼굴을 그리고 있습니다. 중국 나무꾼과 달리 조선의 나무꾼은 나뭇짐을 한짐 다 해놓고 한가로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중국 어부는 고기를 꿰서 주렁주렁 들고 가는데, 조선의 어부는 망태까지 갖추었습니다. 나무와 시냇가도 눈에 익은 풍경이라 겸재가 흔하게 보던 조선 산수를 그림 속에 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최완수 실장은 “역관이 겸재의 집 앞에 줄을 설 정도로 그의 그림은 중국에서 고가에 팔렸다.”고 말했습니다. 중국 동양화의 정수를 뽑아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겸재의 그림에 명나라 사람이 환장했을 정도로 그는 ‘국제적 화가’란 것이 최완수 실장의 평가입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17)송시열 기리는 경기도 여주 대로사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17)송시열 기리는 경기도 여주 대로사

    경기도 여주에는 세종대왕의 무덤인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세종릉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이웃한 효종릉은 차분하기만 하지요. 세종릉과 남한강 건너 신륵사는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세종의 영릉이 예종 원년(1469년) 지금의 서울 대모산 기슭에서 여주로 옮겨진 뒤 신륵사는 세종의 극락왕생을 비는 원찰이 되었으니까요. 효종의 영릉 또한 여주군청에서 가까운 시내에 있는 대로사(위 사진·大老祠)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효종릉이 현종 14년(1673년) 여주로 천장(遷葬)되지 않았다면 대로사도 없었을 것입니다. 대로사는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아래·1607∼1689)의 사당입니다. 정조 9년(1785년) 왕명으로 지어졌지요. 우암은 성인의 반열에 오른 대학자로 추앙받기도 하지만, 당쟁의 참화를 이끈 편벽한 소인이라는 극단적인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입니다. 우암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을 바라보는 시점에 정조가 그의 사당을, 그것도 효종의 영릉을 바라보도록 서향으로 지은 데에는 ‘효종의 죄인’이라는 ‘혐의’를 풀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정치적 판단이 담겨 있습니다. 효종이 종종 ‘대왕’으로 받들어지는 것은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의 치욕을 씻고자 북벌의 기치를 높이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봉림대군 시절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 8년 동안이나 고초를 겪은 효종의 신임을 받아 북벌론의 기수로 지목된 이가 우암입니다. 우암의 북벌론은 그러나 양병보다는 민생의 안정, 무력보다는 군왕으로 덕을 쌓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는 점에서 효종의 실천적인 북벌론과 달랐습니다. 그의 존명배청 감정은 한족의 나라는 높이고 오랑캐는 물리친다는 유교경전 ‘춘추(春秋)’의 원리에 따라 관념적으로 형성됐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우암은 1659년의 유명한 기해독대에서 효종이 구체적인 북벌계획을 제시했을 때도 “제왕은 먼저 자신을 닦고 가정을 다스린 뒤에야 법도와 기강을 세웠는데 이것이 북벌의 선결조건”이라는 말뿐이었다고 합니다. 효종은 우암과 독대한 지 불과 두달 만에 급서하는데, 우암은 국상의 예법을 조언합니다. 이때 관이 시신보다 작은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지요. 장지 역시 수원부가 길지라는 지관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경기도 구리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곁으로 정했지만, 불과 15년 만에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여주의 세종릉 곁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반대파인 남인들이 이 모두를 우암의 탓으로 돌린 것은 물론입니다. 우암은 사약을 받아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효종의 죄인으로 지탄받은 것을 뼈아프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정조는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로 양성된 친위세력을 바탕으로 산림의 정치참여를 억제하는 강경책을 폈지만, 초반기에는 지지세력으로 포섭하고자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을 닦은 노론 중심의 산림(山林)을 중용했습니다. 정조가 대로사를 세운 데 이어 우암의 세 번째 회갑년인 1787년에는 북벌대의론을 칭송하는 비문을 직접 지어 대로사비를 세운 것도 노론을 향한 정치적 제스처라는 뜻입니다. 건축사적으로 대로사는 18세기 익공집의 기준이 될 만큼 부재를 짜올린 수법이 완벽하다고 합니다. 나아가 대로사는 조선 후기 권력투쟁의 큰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에 더욱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dcsuh@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6) 역관 명문 인동 장씨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6) 역관 명문 인동 장씨

    지금까지 확인된 조선시대 잡과(雜科) 합격자는 모두 6122명이다. 이 가운데 역과가 2976명, 의과가 1548명, 음양과가 865명, 율과가 733명 순이었다. 산학(算學)은 정조 즉위년(1756)부터 주학(籌學)이라고 했는데, 잡과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취재(取才)를 통해 1627명 이상 선발했다. 역과가 가장 많은 합격자를 냈는데, 인조가 병자호란 때에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 역관(譯官)의 업무가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는 사신들의 여비를 공식적으로 지급하지 않고,1인당 인삼 여덟자루(80근)를 중국에 가져다 팔아 쓰게 했다. 돌아올 때에 골동품이나 사치품을 사다가 팔면 몇배의 장사가 되었다. 인삼이 차츰 귀해지자, 인조 때에는 인삼 1근에 은 25냥으로 쳐서 2000냥을 가져다 무역하게 하였다. 사신들은 중국 장사꾼과 만날 수 없어 사신들의 몫까지 역관들이 대신 무역했다. 역관들이 무역을 통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고, 서울의 돈줄은 역관의 손에 달려 있었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서 허생이 돈을 빌린 갑부 변씨도 역관이다. 변씨는 허생을 어영대장 이완에게 추천하여 벼슬을 주려 했다. 역관들은 막대한 재산과 해박한 국제정세를 통해 정권의 핵심에 가까이 다가갔다. 역관의 딸로 왕비에까지 오른 장희빈이 대표적인 예이다. 인동 장씨는 역과 합격자가 22명뿐이라 전체의 1%도 채 안되지만,1등 합격자가 많고 정치적·경제적 수완이 뛰어난 인물들이 나와 역관 명문을 이루었다. ●역관들 중국과의 인삼무역으로 막대한 돈 벌어 원래 양반인 인동 장씨 집안에서는 20대 경인과 응인 대에 이르러 처음 역관이 되었다. 장경인은 1628년 명나라에 진향사(進香使) 역관으로 갔다가 사신이 재촉해 시세에 맞게 팔 수 없게 되자 중국인 앞에서 서장관을 욕해 나중에 심문을 당했다. 경험이 없어 첫 장사에 실패한 것이다. 그의 맏아들 장현(張炫)이 1639년 역과에 1등으로 합격해 사역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고,40년 동안 북경에 30여차례나 다녀왔다.‘인동장씨세보’에는 장경인 이하 역관 집안이 빠져 있어, 김양수 교수는 역과방목과 ‘역과팔세보(譯科八世譜)’ 등을 통해 이 집안이 어떻게 역관 집안으로 정착되었는지 조사했다. 다른 역관들도 인삼 무역을 통해 부자가 되었지만, 장현은 색다른 방법을 썼다. 자신의 딸을 효종의 궁녀로 넣어, 왕을 후견인으로 삼은 것이다. ●왕명으로 화포까지 밀수입 효종 4년(1653) 7월에 대사간 홍명하가 자신의 벼슬을 바꿔달라고 아뢰었다. 사신들이 압록강을 건널 때에 화물 50여 바리에 내패(內牌)가 꽂혀 있어 물의를 일으킨데다, 불법무역을 심문당하던 역관 김귀인이 동료들의 이름을 끌어대자 형관이 손을 저어 말렸기 때문. 제대로 조사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뜻이었다. 내패(內牌)는 내수사(內需司)의 짐이라는 꼬리표였으니, 역관 장현의 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도 손댈 수 없었다. 효종은 “풍문이 사실과 다르다.”면서 장현을 감싼 뒤에, 도강 초기에 50바리라는 것을 알았으면 왜 그때 조사하지 않고 지금 와서 시끄럽게 구느냐고 오히려 나무랐다. 이날의 실록 기사에는 장현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사관은 이 기사 끝에 “성명을 끌어댄 자는 역관 장현인데, 궁인(宮人)의 아버지이다.”라고 붙였다. 대사간이나 효종의 입에서는 장현의 이름이 끝내 나오지 않았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한번의 무역만으로도 엄청난 이익을 남겼는데, 무역량과 그 이익은 해가 가고 직급이 높아질수록 눈덩이처럼 커졌다. 심지어는 화포(火砲)까지 밀수입하다 청나라 관원에게 적발되기까지 했다. 염초(焰硝)나 유황(硫黃), 화포 등의 무기류는 금수품(禁輸品)이다. 선양에서 모욕적인 인질생활을 겪었던 효종은 복수를 다짐하며 북벌책(北伐策)을 강구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기를 사들였다. 현종 7년에도 최선일이 염초와 유황을 밀수하다 적발돼 청나라 사신에게 문책당하고 몇천금의 뇌물을 썼다. 숙종 17년(1691) 6월에는 장현의 밀수건이 문서로 넘어왔다. 몇년 전에 청나라에서 화포 25대를 구해오다가 봉황성장(鳳凰城將)에게 적발된 사실이 자문(咨文)으로 이첩돼와, 조정에서도 할 수 없이 “장현을 2급 강등시키겠다.”고 청나라에 알렸다. 그가 역모를 꾸미지 않았다면, 화포는 당연히 나라에서 쓸 물건이다. 적어도 화포 밀수건은 왕의 묵인하에 저지른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장현의 신임이 그만큼 두터웠고, 그에 따른 경제적 이익도 막대했으리라고 짐작된다. 응인은 경인과 사촌 간으로 선조 16년(1583) 의주에 역학훈도(譯學訓導)로 있었다. 목사와 통군정에 올라 시를 짓는데, 술을 따르고 운을 부르자 술잔이 식기 전에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 그의 아들 장형(張炯)도 취재를 거쳐 사역원 봉사를 지냈다. 그의 장인 윤성립은 밀양 변씨 역관 집안의 사위였다. 장형의 맏아들 장희식은 효종 8년(1657) 역과에 장원으로 합격해 한학직장(漢學直長)이 되었으며, 작은아들 장희재는 총융사까지 올랐다. 딸이 장희빈이니, 장희빈의 외할머니는 조선 최고의 갑부 역관 변승업의 큰할아버지 딸이었다. 안팎으로 역관 집안들과 혼맥을 이루면서, 인동 장씨도 역관 집안의 핵심이 되었다. 장희빈이 처음 종4품 후궁인 숙원(淑媛)에 봉해지던 숙종 12년(1686) 12월10일 사관은 이렇게 기록했다. ●정치력 발휘, 장희빈을 왕비로 장씨를 책봉하여 숙원으로 삼았다. 전에 역관 장현은 온나라의 큰 부자로 복창군 이정과 복선군 이남의 심복이 되었다가 경신년(1680) 옥사에 형을 받고 멀리 유배되었는데, 장씨는 바로 장현의 종질녀(從姪女)이다. 나인(內人)으로 뽑혀 궁중에 들어왔는데, 얼굴이 아주 아름다웠다. 경신년(1680)에 인경왕후가 승하한 후 비로소 은총을 받았다. 왕실과 가까이 했던 장현은 경신대출척으로 한때 밀려났지만, 바로 그해에 오촌 조카딸 장희빈이 숙종의 눈에 들면서 기사회생하였다. 장현이 딸을 궁녀로 들였던 것처럼, 장형도 역시 딸을 궁녀로 들였다. 인경왕후는 노론 김만기의 딸이니,‘구운몽’의 작가 김만중의 조카딸이기도 하다. 숙종 14년(1688) 10월에 장씨가 아들을 낳자 숙종은 노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자로 정해 종묘사직에 고했으며, 소의(昭儀·정2품) 장씨를 희빈(정1품)에 봉했다. 노론을 견제하려던 종친과 남인들이 장희재 주변에 모여들자,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원자로 정하는 것이 너무 이르다.”고 상소했다가 남인의 공격을 받고 삭탈관직당했다. 노론의 등쌀을 지겨워했던 숙종이 장희빈에게 마음이 기울면서 남인을 편들어준 것이다. 다음날로 목내선을 좌의정에, 김덕원을 우의정에, 심재를 우의정에 임명하면서 정국을 뒤바꿨다. 이것이 바로 기사환국이다. 장희빈의 아버지 장형은 영의정, 장수는 좌의정, 할아버지 장경인은 우의정에 추증하여, 역관 집안이 정국의 핵심에 들게 되었다. 목내선은 “역관 장현이 청나라 내각의 기밀문서를 얻어온 공로를 표창해 주십사.”고 아뢰었다. 이미 품계가 숭록대부(종1품)까지 올라 더 이상 오를 수 없지만 “600금이나 비용을 쓴 점을 감안하여 그 자손에게라도 수여하자.”고 하자, 왕이 “그 자손에게라도 한 급을 올리라.”고 했다. 장희빈이 왕비로 책봉되자, 오빠 장희재도 포도대장을 거쳐 총융사에 올랐다. 숙종실록 18년 10월24일 기사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렸다. ●서울의 돈줄 좌지우지 왕이 주강(晝講)에 나오자, 무신 장희재가 아뢰었다.“신이 주관하고 있는 총융청은 군수(軍需)가 피폐하므로, 병조판서 민종도와 상의하였습니다. 병조의 은 1만냥을 꿔다가 장차 교련관에게 주고, 사신이 북경에 갈 적에 같이 가서 잘 처리하여 그 이득을 가지고 동(銅)을 무역해다가 주전(鑄錢)하는 재료로 삼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때 민종도와 장희재가 서로 안팎이 되어 마구 뇌물 주기를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했었다. 숙종이 기사환국을 통해 당쟁으로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려고 하자, 남인들은 그 기회를 이용해 집권하고 서인에게 복수하려 했다. 장희재는 국고를 이용해 역관의 무역방식으로 재산을 불렸다. 후대의 사관은 군수(軍需)를 빙자한 무역의 이익이 결국은 두 사람의 뇌물로 쓰였을 것이라 판단했다. 수출과 수입을 통해서 몇배를 벌어들인 뒤에 그 구리로 동전까지 찍어 풀었으니, 얼마가 남는 장사였는지 계산하기 힘들다. 서울의 돈줄이 역관 집안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허생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우리 조상묘 못 옮깁니다”

    “조상묘는 옮길 수 없다.” 행정도시인 세종시 건설에 따른 분묘 이장을 앞두고 지역 명문가들이 조상묘 이전 반대 운동을 하고 있다. ‘유물과 유적이 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조상인 만큼 묘도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며 정부기관에 민원을 제기하는 등 거세게 반대하고 있다. 9일 행정도시건설청에 따르면 세종시 건설공사를 앞두고 행정중심타운 등이 들어설 곳은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으면 묘가 지장물로 분류돼 오는 6월부터 1년 이내에 이장해야 한다. 행정중심타운이 들어설 충남 연기군 남면 종촌리에 있는 조선시대 거유(巨儒) 초려 이유태(1607∼1684) 선생 문중도 예외가 아니다. 이유태는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과 더불어 당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경주 이씨 문중은 최근 청와대와 행정도시건설청 등에 탄원서를 냈다. 전국의 유림 1만 5000명이 서명해 문중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이들은 “‘초려선생필첩(충남도유형문화재 104호)’ 등 각종 유물이 문화재로 지정돼 그의 묘도 역사적 가치가 충분하다.”며 “일제도 옮기지 못한 묘의 이장을 정부가 강행하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성토했다. 이유태 문중은 호남선 철도 및 일제의 방목장 개설에 이어 1966년 조치원 판교선 철도계획 때에도 충청지역 유림까지 가세해 이장을 막았다. 2005년 말엔 그의 묘를 문화재로 지정해줄 것을 충남도에 요청했다. 연기군이 집성촌인 부안 임씨도 같은 해 중시조인 동면 합강리 임난수(1342∼1407) 장군 묘에 대한 문화재 지정을 요청했다. 임난수 장군은 고려 말 최영 장군과 함께 탐라(제주도)를 정복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임 장군의 신도비가 있는 남면 나성리 독락정은 충남도 문화재자료 264호, 임 장군이 심은 남면 양화리 승모각 옆 650년 된 은행나무 두그루는 도 지정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사육신 박팽년(1417∼1456)의 할아버지 묘(전동면 송정리),‘택리지’의 저자 이중환(1690∼1752)의 할아버지 묘(남면 고정리)도 해당 문중에 의해 도 문화재 지정이 신청됐다. 행정도시건설청 문화복지팀 김교년 학예연구관은 “유물과 묘의 문화재 지정은 별개의 문제”라며 “오는 7월 실시설계 전에 보전상태, 당대의 묘제 반영 정도 등 학술적인 가치를 심사하겠다.”고 말했다.연기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19)‘딱 하나뿐인 한옥 성당’ 익산 나바위성당

    [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19)‘딱 하나뿐인 한옥 성당’ 익산 나바위성당

    젓갈 마을로 유명한 강경 읍내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익산 방향으로 2㎞쯤 차를 달리다 보면 ‘나바위성지’라 쓴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표지판을 끼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이내 야트막한 화산(華山) 중턱에 앉은 성당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한옥에 뾰족탑을 올려 세운 외양이 언뜻 보기에도 여느 성당과는 사뭇 다른 성당. 개화기에 세워져 10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옛 모습 그대로인 천주교의 유일한 한옥성당 나바위성당(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1158·사적 제318호)이다. 외래종교의 토착화를 보여주는 희귀한 교회란 점에 더해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한국 땅에 첫 발을 내디딘 유서깊은 곳. 한국 천주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성지로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우암 송시열이 산세에 반해 ‘아름다운 산’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화산(華山). 나바위성당은 이 화산에 있는 광장처럼 너른 바위(나바위)에서 이름을 땄다고 한다. 본당 설립 때는 ‘화산본당’이라 불렸지만 성당이 건립되고 성지로 조성되면서 지금의 나바위로 바뀌었다. 멀찌감치서 보면 마치 화산을 우산처럼 받치고 선 모습. 거대한 팽나무 옆, 팔작 기와 지붕을 인 목조 한옥에 치켜세운 고딕 종탑의 본당과 바로 이웃한 사제관이 연출하는 조경이 잘 꾸며진 정원 못지않게 빼어나다. 성당 양쪽 벽 바깥에 회랑을 두른 것도 이 성당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양식이다. 중국 상하이 김가항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돛배 라파엘호에 몸을 싣고 서울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 용수리 포구까지 밀려갔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로 올라오던 중 배에 물이 차오르는 위험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배를 댄 곳이 바로 강경 황산포구에서 조금 떨어진 화산이다. 당시 라파엘호에는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다블뤼 신부, 그리고 김 신부 사제서품식에 참석했던 조선 신자 11명이 함께 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제물포, 부산과 함께 3대 어시장으로 꼽혔던 황산포구는 매일 100여척의 배가 드나들 만큼 번창했던 곳이라 포졸들이 항상 진을 치고 있었다. 포졸들의 눈을 피해 인근 화산에 상륙한 김 신부와 신자들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에게 상복을 입혀 상주로 변장시킨 후 신자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상경했다.(김대건 신부는 상경 11개월 후인 1846년 9월 새남터에서 참수되어 순교했다.) 김대건 신부가 한국 땅을 밟은 것을 기념해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1897년 이곳에 설립한 것이 바로 ‘화산본당’. 호남권 본당으로선 전동·수류·고산성당에 이어 네번째로 설립됐지만 옛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성당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초대 주임으로 파견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베르모렐 신부가 당시 돈 4000원을 주고 화산과 농경지를 사들여 1906년에 성당 건물을 세웠다. 설계는 서울의 약현성당(현 중림동성당)을 설계했던 프와넬 신부가 맡았고 벽돌공과 목공일은 모두 중국인들이 했다. 화산에서 30리 떨어진 임천군 지저동 뒷산에서 베어낸 소나무들을 뗏목으로 날라 건축 목재로 썼는데, 터 다지기며 목재 운반 같은 힘겨운 일은 모두 조선 신자들의 몫이었다고 한다. 처음 지어졌을 때의 성당은 흙벽, 기와지붕에 나무로 만든 종탑과 마루바닥의 순 한옥 목조건물. 종탑에는 프랑스에서 제작해 들여온 종이 설치됐는데 이 종은 나중에 성당 입구쪽 강당에 종탑을 새로 들여 옮겼다. 종 소리의 울림에 건물 균형이 틀어지는데다 종탑에 벼락을 맞아 어쩔 수 없이 종을 옮겼다고 한다. 이후 1916년에 목조벽을 벽돌조로 교체하고 고딕식 벽돌 종각을 올려 지금의 한국식과 서양식 건축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성당 앞면의 수직종탑과 아치형 출입구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전통 목조 한옥 형태의 지붕과 벽면은 성당의 것으론 아주 생소하다. 기와 지붕 아래에는 중국 인부들의 손길을 탄 팔각 채광창 68개가 사방으로 나 있고, 모든 처마 위엔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성당 뒤편 야외 제대와 성모동산을 지나 ‘십자가의 길’을 따라 화산 정상에 서면 ‘김대건 신부 순교기념비’와 ‘망금정(望金亭)’이 눈에 들어온다. 순교기념비는 김 신부가 타고 왔던 라파엘호의 규모와 같은, 높이 4m50㎝의 크기로 지어졌다. 순교 기념비 왼쪽으로 금강 황산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망금정’은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와 교구 사제 피정소로 사용되던 곳. 망금정 바로 아래까지 금강 강물이 넘실거렸지만 일본인들이 둑을 쌓아 농토로 만들었고 지금은 주민들이 수박, 토마토를 키우는 비닐하우스 단지로 변했다.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서북지방의 공소 24개를 관할하며 1929년 무렵엔 신자수 3200명에 전국 최대의 본당으로 우뚝 섰던 나바위성당. 전국에서 최초로 신사참배 거부 사태를 일으킨 ‘계명학교’를 운영한 바로 그 성당이며 일제기와 6·25전쟁 중에도 미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던 유일한 성당이기도 하다. 지금은 신자 800명이 교적에 올라있고 망성면 지역 주민 180명 정도가 미사에 참여하는 작은 교회. 그러나 성당 입구에 그대로 남아 있는 이름 ‘화산성당’이 한때 ‘전국 최대의 본당’이었던 옛 위상을 웅변하고 있다. kimus@seoul.co.kr ■ 성당 안에 들어가면 유일한 ‘한옥 천주교성당’에 걸맞게 내부 구조와 제대 등 성물들은 모두 현대 건축양식의 성당에선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들이다. 우선 성당의 가장 성스럽고 중요한 공간인 제단과 제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개혁 이전의 모든 성당이 그랬듯이 사제가 신자석에 등을 돌린 채 벽을 보고 미사를 봉헌하던 옛 제대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초대 주임이었던 베르모렐 신부가 프랑스와 중국에서 부품을 몰래 들여와 직접 조립했다고 한다. 제대 위 예수 성심상과 촛대, 감실 등도 성당을 처음 지었을 때 들여왔던 그대로다. 중앙 제대 양 옆에는 소제대가 옛 모습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오른쪽 소제대 감실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목뼈)가 봉안되어 있어 신자들의 예배가 집중된다. 옛 제대 앞 신자석 쪽을 향해 새로 제대를 놓아 모두 4대의 제대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기록으로 보면 제단과 신자석 사이를 구분하는 성체간이 있었지만 언제 철거되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중앙 통로 한가운데에는 8개의 목조 기둥이 일정 간격으로 서 있는데 이 기둥들은 남녀 신자석을 구분하는 경계였다고 한다. 많은 초창기 교회와 성당에서 천 등으로 칸막이를 쳤지만 아예 기둥을 세워 남녀석을 구분한 것은 이례적이다. 출입문을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초창기 그대로의 낡은 목조 성수대도 독특하다. 바닥은 맨 마루바닥. 처음 지어졌을 당시에 깔았던 나무 그대로의 것인데 오랜 세월 신자들이 드나들어 반질반질하다.
  • [열린세상] 이율곡과 김대중/김민환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1610년에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 다섯 분이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런 분들은 국가가 충신 도학자로 공인한 셈이어서 후손들은 더없는 영광으로 알았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서인은 추가로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모시자고 주장했다. 남인이 가만 있을 리가 없었다. 이이는 한때 출가하여 중이 된 적이 있으려니와 주자의 학문을 충실히 계승한 이황의 학설에 어긋나는 주장을 폈으며, 성혼은 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북쪽으로 파천하면서 그의 집 앞을 지나가는데도 마중을 나오지 않았고 의병을 일으키지도 않았다고 헐뜯었다. 한동안 잠잠하다가 숙종 때 서인이 득세하자 서인은 이 문제를 다시 들고 나왔다. 영의정과 좌의정이 동조하고 노론인 송시열까지 지지하자 숙종은 배향 논의가 제기된 지 50여년이 지난 1681년에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배향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숙종이 1689년에 송시열 등을 귀양 보내고 남인을 중용하자 일은 다시 꼬였다. 정권을 잡은 남인은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서 빼라고 아우성쳤다. 숙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두 분의 출향(黜享)을 단행했다. 그 일은 그것으로 종지부를 찍었는가? 아니다.5년 뒤인 1694년에 숙종은 다시 남인을 내쫓고 노론을 불러들였다. 노론 세상이 되자 이이와 성혼을 다시 배향해야 한다는 복향론(復享論)이 제기되었다. 숙종은 다른 당파의 눈치를 살피느라 질질 끌다가 마침내 이를 허락했다. 조선조 최고의 학자였던 율곡 이이 선생마저 당파싸움 때문에 사후에 갖은 풍파를 겪은 셈이다. 율곡만 그런 훼예(毁譽)를 당한 것이 아니다. 현종 때 정태화나 조경 등도 문묘에 배향되었다가 출향당했다. 명예를 내렸다가 거두고 벼슬을 주었다가 빼앗는 건 왕조시대에는 다반사였다. 특히 논리의 힘이 아니라 힘의 논리가 지배할 때면 별의별 일이 다 벌어졌다. 요즘 후광 김대중 전 대통령이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언젠가 한나라당의 박근혜 전 대표가 후광을 찾아가 만나자 그 당 사람들은 동서화합의 새 기운이 조성되었다고들 자찬했다. 그러나 그 뒤 그 당의 대변인은 후광과 햇볕정책을 호되게 몰아세웠다. 한 인터넷신문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그 대변인은 후광이 5000억원을 김정일 개인 계좌에 넣어주고 김정일이 공항에서 껴안아 주니까 치매든 노인처럼 얼어 서 있다가 6·15선언에 합의해줬다고 막말을 했다. 그러나 후광을 둘러싼 반전은 되풀이되고 있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자 보수정객들은 한결같이 햇볕정책 때문에 대북정책이 꼬이게 되었다고 입을 모았다. 그런 상황에서 한나라당에서 햇볕정책과 포용정책을 차별화해야 한다는 내부 보고서가 나왔다. 햇볕정책이 옳고 그르고의 문제를 떠나, 호남을 끌어안기 위해서는 전술적 대응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북한의 핵실험으로 요즘은 비둘기파가 사람 많은 곳에서 입조차 열기 어려운 형편인데, 한나라당이 햇볕정책과 포용정책을 차별화해 햇볕정책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겠다니 이건 후광에 대한 놀라운 배려가 아닐 수 없다. 율곡의 시대와 후광의 시대는 거의 4세기에 가까운 시차가 난다. 그런데도 자기 당색의 인물이 아니면 헐뜯고, 당색이 다르더라도 치켜세우는 것이 이로울 것 같으면 눈 딱 감고 경배하는 풍조는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다. 특정 인물이나 사상·정책 등을 평가할 때 정파적 이해관계나 전술적 판단은 배제해야 한다. 김민환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오일만 기자의 여의도 프리즘] DJ의 목포방문은 ‘한국판 남순강화’?

    [오일만 기자의 여의도 프리즘] DJ의 목포방문은 ‘한국판 남순강화’?

    역사에서는 극단의 평가를 받는 인물들이 더러 있다. 조선 후기의 집권세력인 노론으로부터 ‘주자의 화신’으로 추앙받았던 유학자 우암 송시열(1607∼1689)도 이런 경우다. 반면 노론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했던 남인들은 집안의 개 이름을 ‘시열이’라고 부르며 뼈에 사무친 증오감을 표출했다. 조선조 사색당파의 정치구도가 빚어낸 비극이었다. 우리의 동서분열의 지역구도 속에서 이처럼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 바로 김대중 전 대통령(DJ)이 아닌가 한다. 한반도 냉전구도를 허문 ‘햇볕정책’의 창시자라는 극찬과 함께 북한 핵실험의 ‘군자금 제공자’라는 비난이 공존한다. 유엔 안보리의 강경한 대북제재 결의에 이어 야당에서는 ‘금강산-개성 관광’ 거부운동의 조짐도 거세다. 이참에 김정일 정권의 ‘생명선’을 완전히 차단하자는 논리다. 한마디로 햇볕정책이 사면초가에 몰린 상황이다. DJ에게 햇볕정책의 용도폐기는 60년 민의원으로 시작한 46년간의 정치인생 자체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셈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DJ는 정치 인생을 건 마지막 승부를 준비하고 있다. 바로 ‘햇볕정책 지키기’다.DJ의 28일 고향 목포 방문은 이런 맥락에서 비장한 각오가 엿보인다. 정치적 근원지인 목포에서 평생을 걸쳐 갈고 닦은 햇볕정책과 통일의 ‘초심(初心)’을 확인하고 2차 북핵위기의 해법을 설파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목포 방문의 의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바로 햇볕정책이란 이념적 구심점 아래 범여권 통합을 하나로 묶는 정계개편의 포석이다.“분당에 여권의 비극이 있다.”는 그의 최근 발언은 곱씹을 대목이다. 국내외적으로 조여드는 햇볕정책 궤도 수정의 압박을 돌파하고 범여권의 통합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 ‘목포의 해법’인 것이다. 이 때문에 그의 측근들은 이번 목포 방문을 중국 개혁·개방의 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이 92년에 단행한 ‘남순강화(南巡講話)’에 비유한다. 당시 중국의 개혁·개방 노선은 천안문 사태(89년) 이후 보수파들의 전면공세로 용도폐기의 궁지에 몰렸다.‘부도옹(不倒翁·오뚝이)’ 덩샤오핑은 그의 별명답게 88세의 노구를 이끌고 시장주의 경제체제의 전면 도입을 촉구한다. 중국 인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보수파를 외각에서 압박하는 ‘정치적 도박’을 감행한 것이다. 하지만 DJ의 마지막 ‘도박’이 성공을 거둘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만큼 대내외적으로 대북 강경노선이 힘을 얻고 있다. 여당 일각에선 전쟁 불사론마저 나온다. 핵실험 자체가 적지 않은 국민들을 ‘안보 보수화’로 돌아서게 할 정도로 충격과 ‘배반감’이 컸다. 그럼에도 당장의 감정적 판단보다는 역사의 긴 호흡에서 한반도의 장래를 냉정하게 바라볼 시간이 필요하다. 한반도의 미래를 책임질 주체는 미국이나 일본 등 우방이 아니다.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oilman@seoul.co.kr
  • [베리타스·한국법학교육원과 함께하는 PSAT 실전강좌] 언어논리영역(독해)

    (문제)다음 글로부터 알 수 있는 진술을 모두 고르면? 조선의 소중화사상도 그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성장한 것이다. 소중화사상은 원래 두 가지 모순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니, 하나는 중화에 대한 사대적·모화적 발상이고, 다른 하나는 유교문화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중화와 질적으로 동등하다는 긍지에서이다. 화이사상은 원래 한족 중심의 세계관이었으며, 명·청 시대에는 동아시아의 폐쇄적 국제관계가 전개됨에 따라,‘외이(外夷)’는 각기 독자적으로 화(華)를 추구하고 다른 국가에는 이(夷)로 멸시하였다. 조선의 소중화의식도 그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성장한 국가의식 내지 민족의식의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화인 명과 이인 청의 교체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과 함께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왔다. 조선은 두 차례의 호란과 명·청 교체를 경험하면서, 그 소중화 의식에도 반청존명의 모화감정이 치열해졌다. 송시열(宋時烈)을 위시한 북벌론자들의 경우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으며, 그러한 북벌론적 소화의식이 당시 사상계의 저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러한 치열한 반청감정은 일시적 현상이었으며, 뒤이어 나온 실학자들에 이르러서는 화이일야적(華夷一也的) 소중화 의식으로 바뀌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조선의 소중화의식이 원래 갖고 있던 두 가지 모순되는 성질, 즉 사대적 모화와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심 가운데서 후자에 속하는 우월의식이 새로운 국제질서의 변화에 대응하여 실학자들에 이르러 합리적으로 해석된 것이다. 일본은 명·청 교체를 화이변태(華夷變態)로서 환영하는 뜻을 표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과 명의 경우와는 판이한 태도다. 임진왜란으로 무력을 한껏 과시한 그들은 덕천막부 체제에서 쇄국정책으로 일관하였으나, 지방의 영주(領主)들로 하여금 서양과의 일정한 교섭관계를 맺게 하면서 그들 나름의 세계관을 형성하였다. 그들의 무력을 바탕으로 하는 우월의식에서 천황을 중국의 황제와 동일시하고, 그 밖의 외국은 한 단계 낮춰 보는 이른바 일본형 화이관을 형성하였다. ㄱ. 조선의 소중화 의식을 실학자들은 전면부인하고 조선의 문화에 대한 우월성을 합리적으로 주장하였다. ㄴ. 국가별 세계관은 상대주의적 성향을 띤다. ㄷ. 중화가 여러 나라의 민족주의를 불러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ㄹ. 국가들의 세계관 변화는 국제질서의 재편을 초래한다. ㅁ. 통상적으로 과거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는 페쇄성으로 일관하였다. (1)ㄱ,ㄴ,ㅁ (2)ㄱ,ㄷ (3)ㄴ,ㄷ (4)ㄴ,ㄹ (5)ㄹ,ㅁ (해설) ㄱ. 사대적 모화와 문화민족으로서의 자긍심 가운데서 후자에 속하는 우월의식이 새로운 국제질서의 변화에 대응하여 실학자들에 이르러 합리적으로 해석된 것이다. ㄴ.‘外夷는 각기 독자적으로 華를 추구하고 다른 국가에는 夷로서 멸시하였다’,‘일본은 명·청 교체를 華夷變態로서 환영하는 뜻을 표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과 명의 경우와는 판이한 태도다’ ㄷ.‘外夷’는 각기 독자적으로 華를 추구하고 다른 국가에는 夷로서 멸시하였고 조선의 소중화의식도 그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성장한 국가의식 내지 민족의식의 표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ㄹ.‘화인 명과 이인 청의 교체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과 함께 세계관의 변화를 가져왔다’라는 진술로부터 국제질서의 재편과 세계관 변화 간의 인과관계는 확실하게 도출할 수 없다. ㅁ.‘명·청 시대에는 동아시아의 폐쇄적 국제관계가 전개’,‘덕천막부 체제에서 쇄국정책으로 일관’으로부터 전체적 차원에서 폐쇄적 국제관계의 일관성은 잘못되었거나 알 수 없다. 정답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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