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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시열 생가’ 법정다툼

    조선 중기의 대표적 유학자 우암 송시열 선생의 생가를 둘러싼 진위·철거 여부를 두고 후손들간에 법적 분쟁이 벌어져 법원의 최종 판단이 주목된다.13일 서울중앙지법에 따르면 송시열 선생의 후손인 은진 송씨 경헌공파 종중 구성원인 송모씨는 2003년 종중을 상대로 자신의 아들 명의로 등기된 충북 옥천군의 토지에 있는 종중의 건물을 철거하라며 토지 인도 청구소송을 냈다. 이 땅은 1993년 당시 7살이던 송씨의 아들에게 소유권이 이전됐다. 하지만 이곳에 세워진 건물은 2003년 종중이 소유하게 되면서 갈등이 빚어졌다. 원고측은 건물을 철거할 것으로 요구했고, 종중측은 “건물이 송시열 선생의 생가로 문화적 가치가 있다.”며 맞섰다.1심 재판부는 양측의 주장이 팽팽한 점을 고려, 문화재 지정 신청 결과를 기다리며 조정을 시도했지만 조정은 무산됐고 결국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재판부는 “만의 하나 건물이 철거된 후 송시열의 생가로 판명되는 경우 양측은 물론 국민도 가치있는 유산을 잃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참작해 가집행 선고는 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종중측은 1심에서 패소한 뒤 항소해 이 사건은 현재 서울중앙지법에 계류 중이다.박경호기자 kh4right@seoul.co.kr
  • [인사]

    ■ 교육인적자원부 ◇서기관 △서울교대 총무과장 鄭載鉉△중앙공무원교육원 교수요원 파견 朴株用■ 노동부 ◇서기관 승진△정책홍보관리본부 홍보기획팀 김은철△〃 재정기획팀 최현석△고용정책본부 고용서비스혁신단 김종윤△〃 사회서비스일자리정책팀 김유진△〃 고용정책팀 이성룡△〃 여성고용팀 김순림△노사정책국 노사정책팀 최종석△〃 노사관계조정팀 양승철△근로기준국 비정규직대책팀 양정열△산업안전보건국 안전보건정책팀 정진우△부산지방노동청 산업안전과장 이태우△대구〃 대구종합고용안정센터장 유한봉△부산지방노동위원회 사무국장 채경수△전남〃 〃 이우현◇기술서기관 승진△산업안전보건국 산업보건환경팀 권재록■ 법제처 ◇서기관 전보 △경제법제국 법제관 南昌局◇서기관 파견△중앙공무원교육원 金成浩■ 한국산업인력공단 ◇본부 △비서실장 추경현△경영평가팀장 정일성◇지역본부장△서울지역본부장 황상기△대구〃 구본재△인천〃 이원박△광주〃 고제룡△대전〃 김규하△부산〃 이원배◇본부 국·팀장 (평생능력개발본부)△기업학습지원국장 송시열△학습미디어센터장 이계정△평생능력개발전략팀장 이종태(자격관리본부)△검정국장 홍석운△출제실장 기경철△자격분석전략팀장 임경빈△일반기계〃 이항로△응용공학〃 황남근△정보통신〃 박호연△건설환경〃 유기성△생활과학〃 이지영(외국인고용지원본부)△외국인고용지원국장 구경회△외국인고용전략팀장 이승종(국제협력본부)△해외취업지원센터장 이정우△국제교류전략팀장 조영일(경영전략본부)△경영기획실장 노만진△총무국장 김시태△기능진흥〃 김흥재△홍보팀장 김록환◇지사장△서울동부지사장 장연수△서울남부〃 이항복△강원〃 박준기△강릉〃 박춘화△부산남부〃 이명희△경남〃 이무식△울산〃 김동진△경북〃 최승호△포항〃 이호진△경기〃 최철락△경기북부〃 이윤규△전북〃 이창구△전남〃 이석진△목포〃 문기표△제주〃 강현보△충북〃 이태현△충남〃 한상원△외국인취업교육센터장 박범수
  • 충남도청사 박물관으로? 공원으로?

    충남도청사 박물관으로? 공원으로?

    2013년 충남도청이 충남 홍성·예산으로 옮기면 대전시에 있는 현 도청사는 어떻게 활용되나. 현재 대전시는 박물관과 공원으로 활용하겠다고 구상하고 있으나 용역결과에 따라 다른 방안이 나올 수 있다. 7일 시에 따르면 중구 선화동에 있는 도청사 및 부지를 박물관과 공원으로 활용한다는 구상 속에 대전발전연구원에 이의 활용방안에 대한 용역을 의뢰, 현재 기초조사가 진행 중이다. 박물관 구상은 지하1층 지상3층의 본청(총건평 2376㎡)이 2002년 5월 대전시 등록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됐기 때문이다. 본관은 충남도청이 1932년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지어졌다. 당시 건물은 2층으로 현재의 3층은 1960년 증축됐다. 시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후손 등으로부터 소장품을 기증받아 향토문화재를 전시하는 박물관을 세운다는 것이다. 시는 또 지난해 9월 도청이전을 고려,2012년 공원관리기본계획에 도청부지를 포함시켰다. 공원이 되면 본관을 제외한 나머지 건물은 철거된다. 현재 도청부지는 모두 2만 5456㎡로 본관 외에 후생관(7층)과 신관(5층), 의회동(4층) 등이 있다. 대전발전연구원은 전남도청이 옮겨 간 광주 등에 대한 현장조사를 벌인 뒤 올 하반기 용역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시 관계자는 “구도심활성화 등이 화두가 되고 본관 가치도 기대이하로 판단되면 용역에서 달리 활용하는 것으로 나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儒林(521)-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1)

    儒林(521)-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1)

    제5부 格物致知 제2장 居敬窮理(11) 율곡의 호가 이처럼 원효대사가 태어난 율곡의 사라수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율곡은 태어났을 때부터 불교와 속세의 인연을 맺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율곡은 어렸을 때부터 불경을 읽기 좋아했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율곡이 가장 좋아했던 경전은 ‘능엄경(楞嚴經)’. 능엄경은 한국불교의 기본경전 중의 하나로서 ‘깨달음의 본성이 무엇인가 밝히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밝힌 소화엄경(小華嚴經)’이라고 불리면서 널리 독송되었던 경전 중의 하나였다. 훗날 율곡의 문인이었던 김장생(金長生)에게 글을 배웠던 우암 송시열은 율곡의 행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을 정도였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문성공 이이는 타고난 재질이 매우 높아 5,6세 때 이미 학문하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또한 10세도 못 미쳐서 각종 유교경전을 통달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인의 도가 다만 이것뿐인가.’라고 한탄하면서 불교와 도교서적도 널리 읽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하였던 것은 ‘능엄경’ 한 책이었습니다. 대개 그 내용은 안으로 마음과 본성을 말한 것이 매우 정미(精微)하고 밖으로는 하늘과 땅의 치수가 광활한 것을 말한 내용인데, 이이는 타고난 자질이 아니라면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 내용을 능히 알 수 있었으며, 또한 어떻게 능히 그 맛을 알았겠습니까.” 율곡의 부친이 평소 불경을 탐독하였다는 사실은 그대로 율곡에게 유전되어 율곡은 이처럼 어렸을 때부터 ‘능엄경’을 애독하였으며, 이를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묘심(妙心)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적 관심은 율곡의 성장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확산된다. 따라서 율곡은 어려서부터 산사를 자주 찾아다니면서 선(禪)을 통해 한순간에 진리를 깨우칠 수 있다는 돈오(頓悟)적 수행법에 점차 매력을 느끼기 시작하였던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율곡이 한때 봉은사(奉恩寺:지금 서울 강남에 있는 절)에 머물고 있으면서 불문에 귀의할 것을 결심하는 장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율곡의 제자였던 김장생은 행장기에서 이 무렵의 율곡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하루는 봉은사에 가서 불교서적을 보고 그 생사의 말씀에 깊이 감명을 받았으며, 또 그 학문이 간편하고 고묘(高妙)한 점이 좋아서 세상을 떠나 이를 구할 것을 시도하려고 하였다.” 율곡의 이러한 불교적 관심은 마침내 19세 되던 해에야 결실을 맺게 된다. 그 무렵 율곡은 사랑하는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3년 동안 심상하였으며, 마침내 관례를 올리고 성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은 율곡에게 견딜 수 없는 인생의 무게였으며 ‘왜 사는가. 나고 죽는 생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어릴 때 능엄경에서 읽었던 만법이 여래장묘진여성(如來藏妙眞如性)이라 하여 마음은 영원불멸이라는 진리는 과연 무엇인가.’하는 철학적 사색에 깊이 침잠하게 되었던 것이다.
  • 儒林(482)-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4)

    儒林(482)-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4)

    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4) 율곡이 성주에서 강릉의 외갓집을 향해 집을 떠났을 때에는 아직 임꺽정의 난이 태동단계에 있었지만 온나라는 폭풍전야의 불길한 조짐으로 위태위태하고 아슬아슬한 위기감이 감돌고 있었던 질풍노도의 계절이었던 것이다. 율곡도 이 무렵의 자신을 스스로 미친 물결, 즉 광란(狂瀾)의 시대로 표현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미 율곡은 두 번이나 국가에서 시행하는 과거에 급제하고 있었다. 특히 13살의 어린나이로 소과시(小科試)의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어린나이에 생진과 초시에 합격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으므로 당시 승정원의 관리들은 율곡을 위시한 합격생들을 불러 미래의 동량이 될 만한 인물인지 살펴보았으나 뽐내는 다른 선비들과는 달리 어린 율곡은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3살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였던 신동이었고,10살 이전에 논어 등 유교의 기본경전을 비롯하여 좌전, 사기 등의 역사서로부터 노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독서에 빠져있어 소년답지 않은 정신세계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종실록’은 율곡이 7세에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고 전하고 있고, 송시열은 율곡이 이미 10세 때 유교경전을 비롯하여 온갖 책을 독파하였다고 증언하고 있을 정도였던 것이다. 율곡이 본격적으로 글을 배웠던 것은 1541년 중종 36년 6살의 나이로 어머니를 따라서 강릉의 외가를 떠나 한양의 본가인 수진방으로 온 이후부터였다. 이때부터 율곡은 어머니 신사임당으로부터 틈틈이 글을 배워서 벌써 문리가 통하였고, 사서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미 율곡의 총명함은 4세 때에 이미 정평이 나 있어 고향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때 율곡은 스승으로부터 사략(史略)을 배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스승이 ‘제위왕초불치제후개래벌(齊威王初不治諸侯皆來伐)’이란 문장을 풀이하면서 실수로 ‘제후’의 ‘후’자 아래에다 구두점을 찍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문장의 뜻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제나라에 위왕이 처음에 제후들을 잘 다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제나라의 위왕이 여러 제후들을 직접 다스리는 결과가 되어 사실에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제후’ 다음에 나오는 ‘개(皆)’의 주체가 불분명하게 되어 그 문장의 뜻이 애매모호해지는 것이다. 이때 4살의 율곡은 말없이 한동안 그 문장에 눈길을 두고 있다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개(皆)자가 제후의 밑에 있으니 문세(文勢)로 보면 마땅히 ‘불치’ 아래에서 구두점을 떼어야 합니다.” 율곡의 말대로 이 문장의 뜻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제나라의 위왕이 처음에 정치를 잘못하여 다른 제후들이 함께 와서 정벌하였다.” 율곡의 주장대로라면 사실로 보나 문장의 의미로 보나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정답이 되어 버리는 것을 그제서야 확인한 스승은 자신의 무릎을 내리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다. “옳거니, 네 말이 맞다. 이제 보니 내가 너의 스승이 아니라 네가 나의 스승이로구나.”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4) 문인방의 ‘정감록’ 사건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4) 문인방의 ‘정감록’ 사건

    정조7년(1783) 1월15일, 인정전에 모인 신하들은 ‘정감록’을 되뇌이던 역적들을 일망타진하게 된 사실을 기뻐하며 국왕에게 축하인사를 올렸다. 난리가 토벌되면 되풀이되는 하나의 관습이었다. 이날 정조는 전국에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웬만한 죄인은 다 풀어주라는 것으로, 이 역시 뒤숭숭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한 상투적인 조치였다. 왕은 포고문에서 문제의 정감록 사건을 일으킨 문인방과 이경래 등 주범들의 죄상을 간단히 요약했다. 사면령을 내리는 동시에, 역모사건의 전모를 백성들에게 간단히 알려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실록, 정조 7년 1월15일 정미) 먼저 사건의 중심에 있던 문인방의 죄를 성토한다. 문인방은 삿된 술수를 써 백성들을 현혹하였다고 했다. 그가 역모를 꾸민 것은 고대 중국에서 일어난 황건적의 난과 비슷하다고 했다. 매우 심한 과장이었다. 그 옛날 장각이 이끈 황건적은 중국 한나라를 기우뚱거리게 만들었다. 문인방 사건이 미수에 그친 것과는 천양지차다. 정조는 문인방이 각지를 떠돌며 힘센 장사를 모으려 했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것이 명종 때 유명한 도적 임꺽정 사건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역시 과장된 표현이다. 문인방은 백천식, 김훈 등과 짜고 상주의 백학산 아래 만든 소굴에 머물렀다. 이 사건이 발각된 것은 그들과 한통속이던 박서집이 밀고했기 때문이었다. 전라도에서 체포된 문인방은 전주 감영에서 취조를 받았고, 곧이어 서울로 붙들려가 본격적인 신문을 받았다. 그는 역모 사실을 모두 실토했다. 군량을 담당할 사람, 난리를 일으킬 때 선봉장을 맡을 사람 등 가담자들의 역할은 이미 정확히 정해져 있었다고 했다. 그 가운데는 도원수도 있었고, 대선생(大先生)으로 불리는 선비까지 존재했다. 문인방 사건 때 도원수로 내정된 이는 이경래였다. 이 사건이 뒷날의 여러 정감록 사건과 뚜렷이 구별되는 점은 송덕상(宋德相)이란 유학자를 ‘대선생’이라 떠받들며,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했다는 점이다. 정조 즉위 초 산림(山林·재야에 묻혀 있던 큰선비)의 중심인물로 천거돼 조정에서 크게 활약한 송덕상이 정감록 사건에 연루됐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각별히 주목된다. ●산림 송덕상과 권신 홍국영 문인방 사건으로 조정이 한 차례 홍역을 겪기 5년 전이었다. 대대로 충청도 회덕에 살고 있던 성리학자 송덕상은 산림으로 천거되었다. 정조는 송덕상의 학덕(學德)에 크게 감복한 듯, 그의 건의라면 무엇이든 대체로 수용하는 편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이른바 산림이란 명목으로 향리에 묻혀 지내던 큰선비들이 일시에 높은 벼슬에 등용되곤 했다. 그런데 영조 이후로는 산림이란 카드가 집권세력인 노론에 의해 정국수습용 임시방편으로 활용되는 듯한 분위기도 있었다. 마치 1970∼80년대 한국의 국무총리 자리가 그러했듯, 산림은 일종의 얼굴마담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흔했다. 가끔 예외도 있었다. 효종 때 북벌론(北伐論)을 내세우며 정국을 홀로 이끌던 송시열(宋時烈)의 경우다. 그는 산림으로서 노론의 명실상부한 우두머리였다. 산림 송덕상은 바로 송시열의 자손이었으나 그 처지는 자기 조상과는 너무도 달랐다. 송덕상은 정조 즉위에 공을 세운 홍국영 일파의 추천으로 조정에 등용된 만큼 그들의 정치적 견해를 대변했다. 정조 3년(1779), 이조참판 송덕상은 홍국영 등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김구주의 처벌을 강력히 요구한 적이 있다.(실록, 정조 3년 6월18일 경오) 알 사람은 이미 다 알지만 홍국영은 정조의 외척이었다. 그는 영조 말기 세손(世孫·정조)의 집권을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 홍인한, 김구주 등을 물리치고 정조를 즉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 뒤 홍국영은 수년간 반대파를 모두 내쫓는 데 부심하였다. 그는 정조의 신변보호를 구실로 숙위소를 창설해 직접 그 책임을 도맡으면서 더욱더 세도를 부리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홍국영의 권력은 날로 비대해졌고, 과거에 그의 정적이었던 정후겸을 방불케 했다. 사람들은 홍국영을 ‘대후겸(大厚謙)’이라 부르며 비웃었다. 홍국영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자기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내 장차 외척으로 세력을 굳히려 했다. 하지만 일년 만에 누이 원빈이 병사하고 말았다. 홍국영은 꾀를 내어 왕제(王弟) 은언군 인의 아들 담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훗날 세자로 정할 생각을 가졌다. 이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담에게 역모죄를 씌워 죽였다. 정조4년(1780)에는 왕비 김씨를 살해하려고 음식에 독약을 넣었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그 일로 홍국영은 실각했고 그 여파는 송덕상에게도 미쳤다. 송덕상은 재빨리 상소를 올려 홍국영과 자기의 사이가 별것 아님을 애써 변명하려 했다. 그러나 홍문관 교리 서유성 등 홍국영의 반대파들은 송덕상이 겉으론 산림으로 행세하면서 실제는 홍국영에게 아부를 일삼아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왕세자 책봉 건에 관여하는 등 수많은 죄를 저질렀다고 맹렬히 규탄했다.(실록, 정조 5년 4월28일 신미) 결국 송덕상 역시 조정에서 물러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로선 억울한 점이 있었을 테지만, 이런 식의 정계 개편은 집권세력이 바뀔 때마다 늘 되풀이되어 온 일이다. ●송덕상의 제자 문인방 뜻하지 않은 스승의 정치적 몰락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타격으로 다가왔다. 스승이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는 한 그들의 미래 역시 어두웠다. 보통 스승이 중벌을 받으면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미래를 기약하게 된다. 일단 죽림으로 들어간 젊은 선비들은 시서(詩書)를 연마하며 세상이 바뀌기를 기다린다. 그러다 운이 좋아 언젠가 관리로 등용되기만 하면 왕에게 스승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보통이다. 중종 때 역적으로 몰려 죽은 개혁정치가 조광조의 복권과정이 바로 그랬다. 하지만 송덕상의 제자들 가운데는 극단적인 방식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문인방 등이 바로 그러하다. 그들은 ‘정감록’을 빙자해 난리를 꾸몄다. 과연 제자들이 스승 송덕상을 위해 역모를 꾀했는지, 아니면 우연히 송덕상과 역적들 사이에 사제관계가 형성돼 있었던 것인지, 쉽게 가늠하기는 어렵다. 여하튼 송덕상의 몇몇 제자들은 군사적 행동을 준비하다 발각돼 역적으로 처형되었고, 그 여파로 송덕상 역시 옥에 갇힌 것이 사실이다. 노론들 사이에서 박학다식한 큰선비로 통했던 송덕상은 여러 달 동안 영어(囹圄)의 몸으로 고통을 받다 드디어는 세상을 뜨고 말았다.(실록, 정조 7년 1월7일 기해) 다른 역모사건들도 그렇지만 이 사건 역시 피의자들이 자기들의 처지를 변호하며 남긴 기록은 찾아볼 길이 없다. 있다면 취조문서가 전부다. 사건을 수사한 국가의 입장에서 사건을 완전히 왜곡하였을 가능성마저 적지 않다. 그 점을 염두에 두면서 문인방 사건의 내막을 살펴보겠다. 송덕상의 제자 신형하는 황해도 평산 사람이다. 그는 송덕상의 억울함을 풀어야겠다며 스승을 변호하는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고 한다. 그것이 문제로 부각되어 신형하는 마침내 전라도의 한 섬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마찬가지로 송덕상을 추종하던 황해도 해주의 선비 박서집은 시를 지어 신형하의 절의를 기렸다. 그 시가 또 문제되어 박서집도 섬으로 귀양을 갔다. 박서집은 유배지에서 우연히 문인방이란 사람과 동거하게 되었다. 평안도 출신인 문인방은 놀랍게도 본심을 털어놓았다. 그는 송덕상의 억울한 처지를 생각해서 장차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갈 계획이라고 하였다. 물론 박서집은 그에 찬동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박서집은 겁이 났다. 그는 섬에 파견돼 유배자를 관리하는 사람에게 문인방의 역모사건을 밀고하였다. 그 섬은 전라도 관할이어서 깜짝 놀란 전라관찰사는 급히 영을 내려 관련자 전원을 체포하였다. 전주와 서울에서 혹독한 신문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문인방은 자기가 역모를 꾸민 사실을 시인하였다. 함께 붙들려온 백천식도 반란혐의를 인정하였다. 그들은 밀고자 박서집과 함께 일의 성사를 기원하며 하늘에 축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평민지식인으로 술사이기도 했던 문인방은 ‘정감록’의 한 구절을 이용하기도 했다. 이때 ‘여섯 글자’의 흉악한 예언이 문제로 부각되었으나 그 내용은 알 수 없다. 그 구절은 문인방이 소지했던 ‘경험록’이란 예언서에도 나와 있다고 하였다. 현재 ‘경험록’이란 책자는 남아 있지 않다. 이 사건 당시 문인방은 모두 4종류나 되는 예언서를 소지하고 있었다. 평소 그가 이른바 비결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던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같은 당류 이경래는 강원도 양양 임천리에 살며, 도창국은 평안도 영원 내락림에 있고, 김정언과 오성현은 함경도 안변에 거주하고, 곽종대는 평안도 순안에 살며, 이밖에 김훈과 백천식이 또 있습니다. 만일 난이 성공하게 되면 대선생으로 청계 선생을 모시려 하는데, 이는 송덕상이며 그 손자 송계유는 지금 나이 28세로 저와 마음을 합해 역모를 꾀했습니다.” 이 말에 따르면, 문인방처럼 고향이 평안도인 사람도 있지만 함경도 출신도 상당했던 모양이다. 이밖에 강원도 출신도 역모에 참여했다. 아울러 송덕상의 집안사람들도 일부 포섭돼 있던 것 같다. 그러나 과연 송덕상 일가가 역모사건에 참여하였을지는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회덕에 세거하던 송씨 집안은 조선사회에서 손꼽히는 명문 양반이었다. 설사 그들이 송덕상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해도 그것은 일시적인 일이었다. 조선사회에서 그들이 향유한 특권적인 지위는 이런 정도의 일로는 무너질 리가 없었다. 따라서 송덕상의 손자가 모의에 참여했다는 문인방의 진술은 신문과정에서 억지로 강요됐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송덕상의 제자는 주로 서울과 충청도에 거주했을 텐데, 하필 조선사회의 변경인 서북지방과 강원도 해안지방의 몇몇 제자들만 스승을 위해 난리를 꾸몄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양반과 평민지식인들의 역적모의 사건의 주모자로 분류된 문인방은 힘세고 날랜 평안도 출신의 장사 도창국과 함께 강원도 양양의 선비 이경래와 친했다. 이경래 역시 송덕상의 제자였는데 정조5년(1781) 9월 문인방 등이 이경래를 찾아갔을 때 이경래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 스승님 송덕상이 조정에 죄를 얻어 뜻밖에 멀리 귀양을 가 계시므로 지금 사태가 급해졌다. 빨리 일을 도모하는 게 좋겠다. 문인방 그대가 인재를 잘만 모집하면 일이 성사된 다음 장수든 정승이든 여하튼 높이 등용하겠다.” 문인방 등은 그 말에 기뻐하며 이경래를 도원수로 삼고, 도창국을 선봉장으로 정했다. 이경래는 양양에 일가친척이 많은 데다가 노복도 숫자가 많으므로, 일단 유사시에 난을 일으켜 양양군수를 잡아 죽이고 무기와 병사를 확보하는 것쯤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 이웃 고을인 간성을 공격하고 강릉으로 밀고 들어간다는 계획이 세워졌다. 그 뒤 반란군은 원주를 함락시키고 곧이어 서울로 진격해 동대문을 거쳐 대궐을 점령하기로 하였다. 거사가 성공한 다음 그들은 송덕상을 ‘대선생’으로 책봉하기로 뜻을 모았다. 반란을 일으킬 시기는 갑진년(1784) 7월과 9월 사이로 정해졌다. 이경래의 집안은 강원도 양양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명성이 자자한 명문가였다. 이경래의 친척 공조참의 이택징은 우선적인 포섭대상으로 떠올랐다. 이택징은 정조의 왕권강화정책에 반대해 규장각 운영을 강도 높게 비난한 적이 있다.“규장각은 전하의 사적인 관서에 지나지 않고, 규장각의 관리들은 전하의 사사로운 신하일 뿐입니다.” 이처럼 정조의 정책적 고려에 날카롭게 맞선 인물이었다. 문인방 등은 이런 이택징을 서둘러 합류시키고, 그들을 지렛대 삼아 서울의 여러 양반들을 역모에 끌어들이기로 했다. 당시 서울에는 몇 해 전에 거세된 홍국영 일파를 비롯해 정조의 왕권강화정책에 반대하며 울분을 삭이지 못해 어쩔 줄 몰라하던 양반들이 많았다. 조선은 양반의 국가라, 양반들이 국가에 반기를 들 거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영조 초년 삼남지방에서 일어난 무신란(1728)을 비롯해 몰락한 양반들이 반란을 꾀한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정적(政敵)들에 의해 완전히 조작된 역모사건도 없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17세기 초에 일어난 인조반정(1622)은 양반들이 반란을 통해 정권을 교체한 본보기였다. 그런 점에서 문인방과 이경래 등이 무력을 통해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소망을 품게 된 것도 전혀 터무니없는 일만은 아니었다. 문인방 사건의 경우 역모사건이 새롭게 달라진 측면도 있다. 권좌에서 밀려난 제일급의 양반들이 서북지방을 비롯해 전국 각지의 평민지식인들 또는 술객(術客)들과 합세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모의과정에서 평민지식인들의 역할이 점차 강화되었다는 점을 놓쳐서도 안 될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볼 때 이경래나 이택징과 같은 일급 양반들보다 평민지식인 문인방의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해 보인다. 또 한 가지 강조할 사항은 ‘정감록’을 포함한 각종 예언서에 의존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는 사실이다. 문인방은 양양과 서울은 일단 이경래에게 부탁해 놓고 자신은 삼남지방으로 내려갔다. 힘이 센 장사들을 다수 모집해 거사를 성공으로 이끌 생각이었다. 그가 관헌에 체포되기 직전 충청도 진천에 머물고 있던 것도 장사를 모으기 위해서였다.(실록, 정조 6년 11월20일 계축) ●평민지식인이 송덕상 같은 양반과 결탁하다니 억울하게 멸시받던 평민지식인들로서야 송덕상과 같은 명문가 출신의 양반과 사귀고 싶어도 도저히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짐작은 매우 합리적으로 들리지만,18세기 조선사회의 실상과는 더 이상 부합되지 않는다. 문인방 사건 때 연루됐을 가능성이 크지만 용케 법망을 빠져나간 평민지식인들 중에 이규운이란 사람이 있다. 전국 각지를 떠돌며 훈장노릇을 하던 평민지식인이었다. 그런 이규운이 산림 송덕상과 서로 가까워진 것은 실로 우연한 기회에 비롯되었다. 정조 초년 이규운은 강원도 통천에 있었다. 통천은 송시열이 함경도로 귀양갔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머물던 곳이라 송시열의 기념비가 있었다. 이 비석을 다시 세우는 일로 이규운은 송덕상을 몇 차례 만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강원도 김화 수령으로 재임하던 송덕상의 아들까지도 사귀게 된다. 어렵게 대갓집과 연줄을 대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규운에게 돌아올 몫은 아무 것도 없었다. 쥐꼬리만 한 벼슬 한 개도 차지할 운이 아니었다. 이규운은 본래 평안도 선천 사람이었고 진짜 이름은 오도하라고 했다. 이규운은 고향을 떠나 강원도를 떠돌았다. 그는 서울 양반 이찬이란 사람을 대신해 과거시험 답안지를 써주었는데 그 덕에 이찬은 진사가 되었다. 제 이름을 걸면 아예 과거시험장 출입이 불가능한 이규운이었으나 그가 대필해준 글로 다른 사람은 진사가 되었다.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은 허탈과 공황 속에서 이규운은 ‘정감록’을 읽었고, 반란을 꿈꾸었다. 이규운은 송덕상 같은 양반을 위해 피를 흘릴 사람은 아니었다. 그와 같은 술객에게 송덕상의 명예회복은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梧里 이원익 13대 종손 충현박물관 이승규·함금자 부부

    梧里 이원익 13대 종손 충현박물관 이승규·함금자 부부

    “저희 부부가 사재를 헌납하고, 땀을 쏟아 부은 이 박물관이 청백리로 한 시대를 살았던 오리(梧里)라는 역사적 인물을 바로 알고 기리는 소중한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최근 경기도 광명시에 있는 충현박물관(관장 함금자·65)이 ‘영정 보물지정 기념 이원익전’(11월14일까지)을 열어 눈길을 모았다. 우리에게 청백리 ‘오리 대감’으로 더 잘 알려진 문충공 이원익(李元翼·1547∼1634)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격동기에 선조 등 3명의 임금을 섬긴 명신(名臣)으로 청렴함과 바른 처신으로 당대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던 인물. 이번 전시회는 문화재청이 최근 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4점의 오리 영정 중 ‘호성공신도상(扈聖功臣圖像)’을 보물1435호로 지정한 것을 기념해 열렸다. 연세대 간호학과를 졸업한 뒤 현재 간호대 동창회장도 맡고 있는 함금자 관장과, 오리의 13대 종손으로 이 박물관 관리법인인 충현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남편 이승규(65·전 연세대의대 세브란스병원 소아과 교수)씨는 사실 박물관과는 거리가 먼 의료인 부부. 이들은 역사적 인물을 주제로 해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박물관을 연 것을 두고 “선조의 뜻을 너무 늦게 받들게 됐다.”며 그간의 경위를 설명했다.“실은 종중 내에서 재산 분쟁이 있었습니다. 대법원 확정판결까지 6년을 끌었는데, 그 과정에서 그분의 유서 등 자료를 통해 정말 자랑스러운 조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때부터 아내와 함께 집안에서 전해지는 영정과 종가 유물 등 자료를 다시 추려 정리한 게 계기가 됐습니다.”이 과정에서 이들 부부는 50억원에 이르는 사재를 박물관 건립에 쏟아부었다. 광명시 소하동 1085-16 박물관 부지는 오리가 노후에 관직을 떠나 타계할 때까지 기거했던 곳으로, 이곳의 관감당(觀感堂)은 그의 공덕을 기려 인조가 하사한 당옥이다. 박물관의 이름 ‘충현´은 숙종 2년 오리의 학덕을 기려 건립된 사액서원인 충현서원에서 따왔다. 모두 90여평의 전시관에는 보물로 지정된 오리 영정 외에 3점의 영정이 더 있으며, 이밖에 오리 묘와 신도비, 종택과 충현서원지, 영정을 봉안한 영우와 관감당 등이 지방문화재로 등록돼 있다. 이곳에 전시된 600여점의 종가 유물도 조선조 반가의 생활상을 전해 주는 매우 소중한 자료들. 함 관장은 “지금 생각해도 가계에 대한 자부심이 없었더라면 결코 해내지 못할 일”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들 부부는 이 자료들을 모아 지난 95년에 119쪽 분량의 컬러판 ‘오리 이원익 유적유물집’을 펴냈으며, 이황, 이덕형, 송시열은 물론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나섰다가 순절한 윤탁, 허적 등과 나눈 서간문을 따로 모아 엮은 ‘간찰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이 이사장은 이들 유물 중에서도 유독 오리가 남긴 유언서에 큰 애착을 느낀다.“재산 분쟁 과정에서 유언서에 기록된 그분의 유지가 없었다면 이 박물관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이사장은 “현행 세금 관련 법규정이 재단에 출연조차도 어렵게 한다.”며 “목적사업을 위한 재산 출연에 대해서는 법인세 등을 감면해주는 전향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
  • [25일 TV 하이라이트]

    ●미디어 바로보기(EBS 오후 9시50분) 지난 9일, 한국의 농촌 현실을 취재하기 위해 홍콩의 TVB팀이 우리나라를 찾았다. 그들이 한국 농촌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한국 농민이 올 12월 홍콩에서 열릴 WTO각료회의를 저지하겠다고 해 홍콩 당국에 비상이 걸렸기 때문이다. 농산물 개방으로 위기에 처한 한국 농촌의 실상과 언론의 역할을 짚어 본다. ●인사이드 월드(YTN 오전 10시25분) 스페인의 유기농 과수원.3대에 걸쳐 농사를 지었고 조상으로부터 자연농법을 이어받았다. 아열대 기후로 오렌지 망고 토마토 등을 수확한다. 목양업자는 농장의 휴경지를 자유롭게 쓰고 대신 거름을 제공하는 것이 자연농법의 비결이다. 살충제 대신 꿀벌 페로몬이 가득한 병을 덫으로 이용해 해충을 잡는다. ●빙글빙글 랭크쇼(MBC 오전 9시55분) 처음이기에 더 짜릿하고, 처음이기에 더 흥분되던 내 인생의 첫 경험들. 비밀스럽게 간직했던 소중한 첫 경험의 기억들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얼짱 기상 캐스터 안혜경, 그녀의 기상천외한 과거가 전격 공개된다. 또 구수한 사투리로 인기를 얻은 김종석의 해외에서의 경험 등 스타들의 고백이 이어진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SBS 밤 12시5분) 아토피 피부염 때문에 전쟁 같이 보내고 있는 혁이의 사연 속으로 들어가 본다. 식이요법을 하는 혁이는 달콤한 초콜릿도, 혀끝에서 살살 녹는 아이스크림도, 바삭거리는 치킨도 먹을 수가 없다. 그렇게 참아야하는 것들이 늘어나면서, 혁이는 자주 화를 내는 등 짜증스럽게 변해 갔다. ●TV쇼 진품명품(KBS1 오전 11시)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자 조선시대 여류 예술가인 신사임당의 ‘미발견 그림’이 입수되었다. 그동안 우암 송시열의 문집 ‘송자대전’에 수록된 발문을 통해서 이 작품의 존재 여부를 알 수 있었던 것이 전부다. 신사임당 연구에 몰두했던 노산 이은상 선생조차 만날 수 없었던 이 그림을 최초 공개한다. ●도전 지구탐험대(KBS2 오전 8시50분) 빅토리아 호수의 넉넉함을 닮은 케냐의 루어족. 생동감 넘치는 삶의 현장을 탤런트 양동재가 찾아간다. 쓰나미 피해 이후 아직도 고통 받고 있는 스리랑카 사람들. 의료 혜택의 사각 지대인 스리랑카 밀림 속으로 탤런트 이솔, 피부과 의사 한기덕, 치과의사 황성식, 한의사 이문원씨 등이 봉사에 나섰다.
  • 우암 송시열 주인공 역사소설 펴내

    ‘제로섬 게임’과 ‘파라도’로 잘 알려진 중견 소설가 김선주씨가 최근 우암 송시열을 다룬 역사인물소설 ‘송자소전(宋子素傳)’을 펴냈다. 김씨는 “우암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차례 이상 언급된 조선 최고의 사학자이자 사상가, 또 정치가이자 민족주의자였지만 그에 대한 연구가 여전히 부진하며 이번에 그의 인간적인 내면을 파고들고 싶었다.”고 집필 이유를 밝혔다.경기여고와 이화여대 불문학과를 졸업한 김씨는 1985년 등단한 뒤 95년 창작집 ‘길 위에 서면 나그네가 된다’(제1회 민족문학상을 수상) 등 십수편의 중·장편집을 내놓았다.
  • 문헌에만 전해온 신사임당 그림 ‘초충도’ 찾았다

    지금껏 공개되지 않은 신사임당의 진품 초충도(草蟲圖)가 발견됐다. 그 동안 이 그림은 송시열의 글을 모은 문집인 ‘송자대전’ 146권에 발문만 남아 문헌상으로만 존재가 알려져왔다. 가로 60㎝, 세로 120㎝ 크기의 이 그림은 중앙에 원추리가 그려져 있고, 나비ㆍ벌ㆍ방아깨비 등 곤충들이 꽃 주위에 자리잡고 있다. KBS1TV ‘TV쇼 진품명품’ 제작진은 15일 “지난 2일 진행한 프로그램 녹화에서 서울에 사는 서모(35·여)씨가 의뢰한 이 그림이 우암 송시열의 발문이 씌어 있는 신사임당의 진본 초충도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그림은 1억 3500만원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방송은 25일 오전 11시.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조용섭의 산으路] 충북 괴산 도명산

    [조용섭의 산으路] 충북 괴산 도명산

    속리산 문장대에서 동북진하며 눌재∼청화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마루금 북쪽 저 멀리, 흰 빛으로 빛나는 수많은 바위봉우리와 아름다운 계곡을 품고 있는 또 하나의 산줄기가 있다. 그 봉우리 중의 하나가 충북 괴산의 도명산(643m)이고, 이 산자락들이 품고있는 계곡이 바로 화양계곡이다. 양계곡은 우암 송시열 선생(조선 인조∼숙종)이 말년에 은거하며 지낸 곳으로, 화양구곡이란 선생이 중국의 무이구곡을 본때 이 계곡의 아름다운 곳곳에 이름을 짓고 그리 불렀다고 전해진다. 당쟁의 중심에서 생의 부침을 거듭하던 선생이 자연세계와 가까이하며 만난 또 다른 세상의 느낌은 어떠했을까. 선생에게는 잘 알려진 우암(尤庵)이라는 호(號)외에 화양동주(華陽洞主)라는 이름도 사용하였으니 이 곳에 대한 선생의 애정을 짐작할 수 있겠다. 산길은 화양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절경지대를 편안하게 감상하고, 화양구곡의 제8곡인 학소대 앞 다리를 건너 정상에 오른 뒤, 첨성대 아래 화양3교로 하산하는 코스로 잡았다. 주차장에서 깔끔하게 조성된 공원을 지나 수중보 옆의 다리를 지나면 구름의 그림자가 비친다는 운영담, 구곡 중 가장 아름답다는 금사담과 암서재를 차례로 지난다. 금사담은 맑고 깨끗한 물에 모래 또한 금싸라기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 바위 위에 지어진 암서재는 우암 선생의 서재였다고 한다. 상가지구를 벗어나 만나는 화양3교 앞 이정표 있는 곳이 나중에 하산할 지점이다. 뒤쪽 산자락 높은 곳에 첨성대가 보인다. 계속 계곡 옆의 너른 길을 따라 능운대, 와룡암을 지나고, 계곡을 가로지르는 학소대 앞 다리를 건너면 산길이 시작된다. 계곡에 서있는 학소대의 모습이 아름답다. 주차장에서 40분 소요. 산길은 아주 잘 나있고 이정표도 잘 들어서 있다. 한동안 편안하게 이어지던 산길은 학소대 다리를 지나 약 1시간쯤 진행하면 바위지대가 나타나고 경사도 비교적 급하게 이어진다. 거대한 바위 옆을 올라 철다리를 만나면 비로소 동남방향으로 시계가 트인다. 철다리에서 15분 남짓 계단길이 있는 오르막길을 진행하면 낙양사 절터와 마애불상을 만난다. 절터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비교적 너른 굴이 있다. 이 곳은 예로부터 기도하는 이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한다. 마애불 바위지대를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이내 5개의 큰 바위가 어우러진 도명산 정상이다. 사방으로 펼쳐지는 조망이 시원하고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진 풍광이 무척 아름답다. 하산길은 진행방향 오른쪽 철계단으로 이어진다. 바위지대로 길이 나있지만 철계단과 난간이 잘 설치되어 있어 진행에 어려움은 없다. 정상을 내려서면 이내 바위사이의 구멍을 지나 고정로프가 설치되어 짧은 사면을 내려서고, 오른쪽으로 길이 이어진다. 하산하는 도중 오른쪽 군데군데 조망하기 좋은 곳이 나온다. 산자락 사이 길게 드리워진 화양동계곡이 한눈에 들어오고, 이 계곡 상류 뒤쪽(東), 아스라이 보이는 산이 대야산이다. 목재 난간이 나타나는 지점의 오른쪽 아래로 내려서는 길은 능운대 쪽으로 하산하는 길이다. 그대로 직진해서 숲길을 진행하면 화양3교 앞 너른 길에 이르고 산행을 마친다. 정상에서 1시간30분 소요. 중부고속도로 증평IC∼증평∼청천 방향 592번지방도 백봉 37번 국도 합류∼청천∼화양동 매표소 청주에서 이용하는 것이 편리. 서울터미널(반포)∼청주(1일 35회). 청주∼청천 직행버스(1일 13회), 청주∼화양동 직행버스(1일 26회), 청천∼화양동 시내버스(1일 7회) 화양계곡 주변으로 상가시설이 잘 형성되어 있다.(참고 http:///goesan.chungbuk.kr) 속리산국립공원 화양분소(043-832-4347)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7)무학대사와 ‘정감록’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27)무학대사와 ‘정감록’

    ‘정감록’엔 이른바 삼절운(三絶運)이 예언돼 있다. 조선왕조의 운수가 세 번 끊길 위험에 처한다는 것인데,“이씨의 운에 세 개의 비밀스러운 글자가 있으니 소나무, 집, 그리고 밭이라(李氏之運 有三秘字 松家田三字也)”고 한 구절이 그것을 집약하고 있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소나무, 집, 그리고 밭이 최적의 피란처란 뜻이다. 소나무(松, 명나라 장수 李如松) 덕택에 임진왜란을 넘길 수 있었으며, 병자호란은 겨울철에 일어난 전쟁인 데다 단기간의 전쟁이라 집에 조용히 머문 사람은 무사했고 멀리 피란간 사람들은 도리어 혹한을 만나 얼어 죽었다는 이야기다. 밭이 피란처가 되는 것은 세 번째 위기가 닥쳐올 때라고 했다. 위기가 닥쳐올 시기에 대해 “해를 헤아려보면 세 번의 전쟁은 원숭이, 쥐 또는 용해에 일어난다.(考基年數 則兵在申子辰)”고 했다. 임진(辰)·병자(子)는 이미 역사적 사실로 입증됐기 때문에 원숭이해가 언제인가로 초점이 모아졌다. 조선 후기 기득권층은 그 해가 언제냐며 전전긍긍해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왕조의 종말을 바라던 사람들은 이 예언에 큰 희망을 걸었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도 이 예언을 남긴 사람은 무학대사(無學大師)라고 했다. 무학이라면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로 한양 천도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조선왕조의 멸망 시기를 예언했다니 갑자기 어리둥절해진다. 무학은 정말 조선 왕조의 멸망을 예언했을까. 만일 그런 일이 없었다면, 언제 누가 왜 무학의 이름을 판 것일까.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 사실 태조 이성계는 무학에게 정신적으로 적잖이 의지했다. 이 점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확인된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지만 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실세로 등장하자 이성계는 왕위를 버리고 고향땅 함흥으로 낙향했다. 이것은 태종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의 표현이었고, 따라서 태종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정치적 부담이었다. 태종은 부왕을 다시 서울로 모셔오지 않으면 안 됐고, 그래서 여러 차례 함흥으로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항간에는 태조가 함흥으로 내려온 사신을 모조리 잡아 죽였다고도 한다. 어딜 가서 아무 소식도 전하지 못하는 경우 ‘함흥차사’(咸興差使)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유래는 태종 때의 복잡한 사정을 반영한다. 태조의 저항을 무마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태종은 마침내 무학대사를 함흥으로 보냈다. 평소 태조는 무학을 한없이 공경하고 믿었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라면 태조의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태종2년 11월9일 무자). 과연 무학의 설득은 효과가 있어 얼마 후 태조는 다시 서울로 말머리를 돌렸다. 그 만큼이나 태조는 무학을 존경했고 인간적으로 신뢰했다. 몇 년 뒤 무학이 타계하자 태조는 아들 태종에게 부탁해 무학에게 묘엄존자(妙嚴尊者)라는 시호를 내리게 하였다(태종 10년 7월12일 정축). 마지못해 태조의 뜻을 따르기는 했지만 태종은 실상 무학을 우습게 여겼다. 태종의 눈에 비친 무학은 한낱 평범한 승려에 불과했다. 조선 초기의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무학은 설법(說法)에 뛰어나지 못했다 한다. 한 번은 궁중에서 선(禪)에 관해 가르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무학은 불교의 종지(宗旨)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그 자리에 있던 여러 스님들의 애를 태웠다는 것이다(실록, 태조 1년 10월11일 기미). 그 자신 선승(禪僧)이었지만 참선에 관해 별로 많이 알지 못했다는 악평인데, 물론 이것은 태종을 비롯한 일부 인사들에 의해 왜곡된 평가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태조는 무학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태조는 무학이 머무는 회암사(檜巖寺)를 찾아가 숙식을 함께 하기도 했고, 그를 스승으로 받들어 계(戒)를 받고 심지어 대사의 생활방식을 본 떠 일체 육식을 끊어버리기도 했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질문을 제기된다. 무학의 어떤 점이 태조를 그렇게까지 매료시켰을까. 역사적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두 사람이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큰 구실을 담당한 것은 풍수지리에 관한 무학의 전문적 지식이었다. 태조는 즉위 초 계룡산 천도를 검토했다. 당시 무학은 태조의 측근에서 계룡산의 풍수지리를 검토했다. 결국 그는 천도를 반대하게 되었고(실록, 태조 2년.2월11일 병술), 계룡산 천도도 무위에 그쳤다. 그 뒤 한양이 새 수도의 후보지로 떠올랐고 그 때도 태조는 무학의 의견을 물었다.“이 곳은 사면이 높고 수려(秀麗)하며 중앙이 평평하므로,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실록, 태조 3년.8월13일 경진) 이러한 무학의 찬동에 태조는 무척 만족했다. 왕은 정도전·하륜·이양달 등에게도 명령해 천도문제를 함께 결정짓게 했다. 무학은 북한산에 올라 한양의 풍수를 살폈다. 그 때 무학이 미래의 도성 풍경을 조망한 곳은 삼각산의 하나인 만경대(萬景臺)였다. 거기서 한양 쪽을 내려다보면 만 가지 모습이 한 눈에 보인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무학이 나라의 도읍터를 살폈기 때문에 국망봉(國望峰)이라고도 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 때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을 좌청룡(左靑龍), 목멱산(남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정도전(鄭道傳) 등이 강력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북악이 주산이 되었다 한다. 무학은 정도전 등과 더불어 한양 천도의 일등 공신이었다. 도읍을 옮기는 문제는 가벼운 일이 아니었지만 태조는 이를 서둘렀다. 그는 고려 말 갑자기 중앙정계에 등장한 신흥세력이었기 때문에, 고려의 수도 개성에 포진한 해묵은 귀족 세력들이 눈엣가시처럼 느껴졌다. 무학은 왕의 그런 심중을 정확히 헤아려 한양천도를 적극 도왔다. 이로써 무학은 태조와 하나가 되었다. ●무학대사는 갈수록 높이 평가돼 무학은 실제로 풍수지리에 능통했다. 그런데 후대로 갈수록 풍수 및 예언에 관한 그의 능력은 더욱 미화되었다.17세기 중반 대신(大臣) 송시열(宋時烈)은 효종 임금 앞에서 조선시대의 3대 풍수지사를 거론하는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첫 손가락에 꼽힌 사람은 무학(無學)이었다. 나머지 둘은 이의신(李懿信)과 박상의(朴尙毅)라고 했다.(‘실록’, 현종 개수 즉위년 7월3일 임술). 이것은 아마도 당대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평가로 봐도 좋을 것이다. 후대 사람들이 무학을 높이 평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조선왕조의 기틀이 확고해지면서 건국의 주역들이 신성화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태조 이성계는 신성한 왕으로 자리매김되었다. 그런 가운데 태조를 가까이서 보좌한 무학은 신인(神人)으로 기려졌다. 태조와 무학의 특별한 관계를 상징하는 설화도 많이 생겨났다. 예컨대, 무학이 스승 나옹화상과 함께 왕후(王侯)가 배출될 명당과 장상(將相)이 나올 명당을 봐두었는데 무학이 이성계에게 이를 알려주었다는 이야기다. 이성계는 무학의 말을 듣고 아버지 이자춘의 묘를 잘 써서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왕건 가문과 도선의 관계를 꾸민 설화를 연상케 한다. 설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나이를 고려할 때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둘째, 수도 한양이 명실공히 모든 분야에서 조선왕조의 중심이 됨에 따라, 도읍을 정하는 데 기여한 무학의 능력이 과장되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해 왕십리에 관한 설화도 탄생했다. 한양에 도읍하려고 했을 때 무학은 왕십리 자리에 궁궐을 지으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사실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았으므로, 이런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설화에 따르면, 무학은 왕십리에서 검은 소를 타고 지나가던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소를 때리면서 무학만큼이나 미련하다고 꾸짖었다. 이에 무학이 노인에게 가르침을 청했고 십 리를 더 가라는 깨침을 얻어 왕(往)십리라는 지명이 생겼다 한다. 어떤 설화에서는 그 노인이 신라의 고승 도선 국사였다고 한다. 물론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그렇긴 해도 이 설화에는 한두 가지 숨은 뜻을 담고 있다고 본다. 한양의 궁궐터를 정하기가 쉽지 않았던 사실이 암시되어 있고, 풍수지리의 대가였던 도선과 무학은 죽음의 세계를 뛰어넘어 서로 통한다는 믿음이 보인다. 그런가 하면, 이런 신이한 우여곡절을 통해 얻은 도읍인 만큼 한양은 최고의 수도라는 뜻도 있는 것같다. 이런 주장과 믿음은 조선시대 일반 민중의 의식세계를 반영한다. 그것이 정말 옳으냐 그르냐하는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셋째, 풍수지리에 관한 무학의 능력이 점차 과장되면서 그가 생전에 발휘하지 못한 다른 능력까지도 재평가되었다. 해몽을 잘해 이성계의 즉위를 미리 알아 맞혔다는 전설은 그 가운데 하나다.(‘대동기문’) 인왕산 선바위에 얽힌 전설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무학은 애초 조선왕조가 5백년 뒤 망할 줄 알았기 때문에 나라의 수명을 늘리려고 선바위에 와서 천일기도를 하였다는 것이다. 만일 선바위가 한양도성 안에 포함되면 그것이 가능하다는 신령의 계시를 받았으나, 정도전의 주장에 밀려 무학의 주장은 관철되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그러자 무학은 장차 불교가 유교에 억눌려 지내게 되고, 나라의 수명도 500년에 불과하게 되었다며 통탄했다. 선바위에 관한 전설 역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무학의 예언 능력이 조선후기 민중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은 유교사회가 된다는 예언은 실제의 역사적 상황을 반영해 꾸민 이야기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국운이 500년에 그친다는 예언은 많은 민중의 희망이기도 했다. 그들은 한 편으로 조선왕조와 수도 한양의 번영을 바라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조선사회의 각종 모순이 해소된 새 나라를 꿈꾸었다. 이런 소망은 왕조의 종말에 관한 예언 설화를 낳았고, 그 중심에 무학이 자리잡게 되었다. 무학의 신이한 예언 능력을 소재로 한 설화는 전국 여러 곳에 있다. 부평의 원통골이나 부산의 강선대(降仙臺)의 지명 설화는 해당 지역의 지리적 특성을 설명하면서 무학의 예지능력을 강조한 경우다. 그밖에 서산의 나무 설화는 특정한 나무를 대상으로 해 세상의 운명을 예언한 것이다. ●무학은 예언과는 거의 무관한 고승 역사적 기록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무학은 예언가가 아니었다. 경남 합천 삼가 출신인 그는 젊은 시절 원나라의 수도에서 인도승려 지공(志空)을 만나 불법을 배웠고, 뒤에 고승 나옹(懶翁)의 지도를 받았다. 그는 태조의 두터운 신임으로 왕사(王師)가 되어 한양천도를 도왔다. 그러나 세상사에 깊이 관여한 흔적은 없다. 무학은 주로 회암사에 조용히 머물다가 태종 5년(1405) 금강산 금강암에서 세수 78세, 법랍 62세로 입적하였다. 비록 풍수에 능통하긴 했지만, 사사건건 세상일에 관심을 두었다고 볼 근거는 조금도 발견되지 않는다. ●무학을 둔갑시킨 술사들 하지만 후대에 이르러 무학은 풍수지리와 예언의 대가로 부풀려졌다.16세기 후반, 무학이 타계한 지 약 180년쯤 지났을 때, 불현듯 그가 저술했다는 ‘도참기’(圖讖記)가 한양에 등장했다. 그 때는 고질적인 당쟁이 시작된 데다 일본과의 관계가 경색되기 시작해 안팎으로 무척 어수선하였다. 이런 판국에 누군가 무학의 명성을 빌려 국가의 장래를 논하였다고 하겠다. 무명의 술사가 실은 ‘도참기’의 저자였을 것이다. ‘도참기’는 임진왜란을 전후해 상당히 널리 퍼졌다. 그런데 처음에는 누구도 그 내용을 명확히 해석하지 못했다. 그만큼 난삽했다. 예컨대, 임진년에 대해 “악용운근(岳聳雲根) 담공월영(潭空月影) 유무하처거(有無何處去) 무유하처래(無有何處來)”란 구절이 적혀 있었다. 이 구절은 한바탕 왜란을 겪은 뒤에야 명료해졌다. 결론적으로 말해, 신립(申砬) 장군이 충주에서 패전해 그 군사들이 월낙탄(月落灘)에서 몰사한다는 내용으로 풀이되었다. 왜 그런가. 첫 구절의 ‘악’(岳)은 곧 ‘유악강신’(維岳降申)이므로 신(申)이다.‘용’(聳)은 ‘입’(立)과 같은 뜻이라 입(立)이다. 그리고 ‘운근’(雲根)은 돌(石)이다. 따라서 ‘악용운근’(岳聳雲根) ‘신립’의 이름이다. 다음 구절인 ‘담공월영’(潭空月影)은 ‘달이 여울에 떨어지다.’(月落灘)는 뜻이다. 달리 말해,‘물에 빠져 죽는다.’는 말이다. 마지막 두 구절은 ‘도성의 백성들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모두 피란 간다.’,‘왜구가 입성(入城)한다.’는 말로 해석된다(실록, 선조 25년 4월30일 기미) 물론 이런 해석은 사후 약방문이었다. 억지스러운 면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무학의 예언가적 능력에 새삼 주목했다. 실제로는 어느 술사가 무학의 이름을 빌려 저술한 ‘도참기’였을 텐데 그 위력에 힘입어 예언가 무학의 명성은 더욱 빛났다. 역사에는 이런 아이러니가 있다. 서양 중세의 도서관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저자로 내세운 위서(僞書)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하지 않은가. 한 때 장안의 화제가 됐던 ‘도참기’는 남아 있지 않다. 워낙 알쏭달쏭한 내용이라 해석이 어려워 임란과 함께 수명을 다한 것 같다. 그 대신 오늘날에는 ‘정감록’의 일부로 돼 있는 ‘무학비결’이 전한다. 눈을 부릅뜨고 ‘무학비결’에서 ‘도참기’의 흔적을 살폈으나 허망한 노릇이었다. ‘무학비결’은 조선왕조의 멸망에 초점을 맞춰 말세의 징후를 논의한 예언서다. 주요한 내용은 ‘정감록’에 실린 다른 예언서들과 대체로 일치한다. 조선왕조의 국운을 약 400년으로 봐 “앞의 360년” 즉 18세기 말까지는 국정이 비교적 순탄할 것으로 예상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그 뒤 56년은 물과 불이 서로 살아주기 때문에 백성들이 난리를 깨닫지 못하고 재상은 쓸모없는 글만 숭상하니 가히 풍요롭고 태평하나 방백(方伯)과 수령(守令)은 위에서 도둑질하고 아전과 군교(軍校)는 아래에서 약탈을 일삼으니 백성들이 불안하여 들에 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18∼19세기의 실제 상황과 대체로 일치한다. 그 사실로 미루어 보면 ‘무학비결’이 저술된 시기는 그 때가 아니었을까 한다. 조선의 운명이 다할 무렵에 대해선 “신인(神人)이 두류산(頭流山)에서 도읍을 옮기는 계책을 세우고 200년이나 국운을 연장시킬 것”이라고 했다. 두류산 즉, 지리산에서 혁명의 기운이 무르익지만 그것은 매우 서서히 진행된다고 보았다.“때에 무(武)는 강하고 문(文)은 약하여 가히 임금이 임금이 아니요 신하 또한 신하가 아니라 슬프도다.” 조선의 마지막은 무인정권이 장식할 것이라는 예언이다. 역사적 사실과 동떨어진 내용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무학비결’이 저술된 시기를 좀더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다. 새로 오군영이 설치되어 수도 방어가 강화되던 18세기 말 이후, 외세의 침입이 노골화되기 직전인 1860년대까지 저술되었다고 추측된다. 누누이 말했듯 18∼19세기엔 술사와 그들에게 협력한 승려들이 다양한 예언서를 생산 유포했다. 그들은 새로운 예언서들에 근거해 때로 반란을 획책했다.‘무학비결’은 바로 그런 예언서의 일종이었다. 고승 무학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지만, 풍수와 예언으로 이미 명성이 높아진 무학의 이름을 빌려 술사들은 민중을 포섭하려 했다. 그러잖아도 민중들은 설화 속의 무학같은 신승(神僧)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무학비결’의 창작은 사회적 여망에 부응하는 행위였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빈 방에 달빛 들면/송시열·이인상 등 지음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동안 가장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 사건은 ‘배우자의 죽음’이라고 한다. 평생의 동반자가 되어 동고동락하다 죽음으로 헤어지는 일은 견디기 힘든 일임에 틀림 없다. 그렇다면 엄격한 유교문화 한가운데 있었던 조선시대 선비들은 배우자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축첩이 공공연하게 인정되던 사회였던 만큼 혹시나 배우자 죽음을 담담하게, 무심한 척 받아들이지는 않았을까? ‘빈 방에 달빛 들면’(송시열·이인상 등 지음, 유미림 등 옮김, 학고재 펴냄)은 이처럼 조선 선비들이 아내의 영전에 바친 제문을 번역해 묶은 책이다. 조선 중기 대학자인 송시열, 서출로 태어나 현감벼슬을 지낸 이인상 등 49인의 제문을 담았다. ‘아, 나와 당신이 부부가 된 지 올해로 53년이 흘렀소. 못난 사람과 짝이 되어‘(송시열),‘굶주리는 가운데서도 책은 팔지 않아 내 우직함을 지켜주었고, 추울 때도 꽃나무는 때지 않아 내가 측은지심을 지닌 채 살아가게 해 주었소’(이인상). 지엄한 선비에게 어떻게 이런 곡진한 정이 숨어 있었을까. 수백년 전의 글임에도 애도의 염이 간절해 가슴을 저미게 한다.1만 2000원.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 서울 도봉서원 18일 전통향사

    서울 도봉구(구청장 최선길)는 오는 18일 도봉동 도봉서원에서 정암 조광조, 우암 송시열의 학문적 사상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도봉서원 전통향사(춘향제)를 개최한다. 도봉서원은 1573년 창건된 사액서원으로 매년 봄(음력3월)·가을(음력9월) 전국의 유림들이 모여 향제를 지내오고 있다. 이번 향제에서는 향을 피우는 분향례, 폐백을 바치는 전폐례, 술잔을 올리는 헌례, 술잔을 마시는 음복례, 폐백과 축문을 불사르는 천변두 등 좀처럼 보기힘든 전통향사를 그대로 재현한다. 누구나 참관할 수 있다.(02)2289-1153. 고금석기자 kskoh@seoul.co.kr
  • 儒林(299)-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儒林(299)-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제3부 君子有終 제1장 名妓杜香 그러나 이러한 일화로 인하여 이산해의 가문에서는 아버지 이지번과 작은아버지 이지함이 은둔하였던 단양의 구담을 대대로 기리고 곁들여 두향에게 제사를 지내주었던 것이다. 스승 이퇴계를 존경하여 애인이었던 두향의 제사까지 함께 지내준 이산해의 사제지도(師弟之道). 그러한 사제지도가 없었더라면 오래 전에 두향의 무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표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새겨져 있다. 나는 그 내용을 읽어보았다. “…조선 숙종 때 우암 송시열(宋時烈)과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호조정랑, 의금부부사, 단양군수였던 수촌(水村) 임방(任傍:1640~1724)은 ‘두향묘시(杜香墓詩)’를 남긴다.…” 묘석에 나오는 임방은 송시열의 제자로 의금부도사를 거쳐 대사성·호조판서에 이르렀던 명신인데, 일찍이 단양의 군수로 재직하다가 두향의 무덤 앞에서 추모시를 한수 읊는다. 그 추모시가 임방의 문집 수촌집(水村集)에 실려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외로운 무덤 하나 두향이라네. 강 언덕 강선대 그 아래 있네. 어여쁜 이 멋있게 놀던 값으로 경치도 좋은 곳에 묻어 주었네.(一點孤墳是杜秋 降仙臺下楚江頭 芳魂償得風流價 絶勝眞娘葬虎丘)” 두향에 대해서 노래한 시 중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이 시에서는 두향을 ‘두추(杜秋)’라고 부르고 있다. 두추는 당나라에서 전해 내려오는 최고의 명기. 따라서 임방은 두향을 감히 두추에 비유하여 시를 읊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임방은 두향이 묻힌 이곳을 ‘호구(虎丘)’라고 명명하고 있다. 호구는 오늘날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에 있는 경승지를 말함이다. 하이융산(海湧山)이라고도 하는데,‘오월춘추(吳越春秋)’에 의하면 오나라의 왕 부차가 아버지 합려를 장사지낸 지 3일 후에 백호(白虎)가 나타나 그 무덤을 지켰다는 고사에서 연유하여 호구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언덕 위에는 높이 47.5m의 8각 7층 벽돌건물인 운암사탑(雲岩寺塔)이 있고, 수목이 무성하며 기암괴석이 풍부한 절경이다. 서남쪽 교외 19㎞ 지점에 있는 영암산(靈岩山)에는 월왕 구천이 감금되었다는 굴이 있고, 구천이 복수하기 위해서 부차에게 진상하였던 서시(西施)를 위해 지었다는 별궁터가 남아 있다. 서시는 중국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절세미인. 눈길 한번 돌아보면 성이 기울고, 두 번 돌아보면 나라가 기울 만큼의 경국지색(傾國之色)이었는데, 서시가 몸이 아파 낯을 찌푸리면 나라의 모든 여인들이 이를 흉내내어 낯을 찌푸렸다는 이 전설의 여인은 바로 이 궁터의 금대에서 거문고를 켰던 것이다. 그러나 호구가 유명한 것은 바로 이런 연유 때문에 육조시대(六朝時代) 때에 이르러 나라의 많은 명기들은 자신이 죽으면 동양의 클레오파트라인 서시처럼 자신을 바로 이 호구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호구는 유명한 미인들이나 기생들이 사후에 묻히는 북망산(北邙山)으로 유명했던 곳. 북망산이 낙양(洛陽) 북쪽에 있는 작은 산으로 제왕, 귀인, 명사들의 무덤이 많은 곳이라면 호구는 이처럼 명기들의 공동묘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임방은 이곳을 빗대어 두향이 묻힌 강선대의 무덤가를 호구라고 명명하고 있음인 것이다.
  • [인사]

    ■ 재정경제부 ◇국장급 전보 △중앙공무원교육원 파견 周亨煥△대통령 비서실 金光洙 ■ 농림부 ◇과장급 승진 △총무과장 金政姬△농업협상〃(직무대리) 鄭日正△시설관리〃 金周豪△농림부(농특위 파견예정) 鄭然虎△농업연수원 농업인력교육과장(직무대리) 宋德鉉△국립종자관리소 동부지소장 金珍鎭◇과장급 전보△감사담당관 梁泰善△농촌정책과장 朴哲秀△국립식물검역소 李基植△행정법무담당관 金先泳△농지과장 金鍾熏△경영인력〃 閔연태△국제협력〃 吳京泰△소비안전〃 沈相寅△축산정책〃 金瓊圭△농산경영〃 朴鍾緖△채소특작〃 呂寅弘△과수화훼〃 裵元吉△품종보호심판위원회 상임위원 許泰雄△국립종자관리소 아산지소장 申鉉寬△농림부 安虎根 ■ 해양수산부 ◇국장 전보 △국립수산물품질검사원장 李龍洙◇국장 승진△국립수산과학원 연수부장 黃秀鐵△마산지방해양수산청장 金英煥△중앙해양안전심판원 수석조사관 李長薰◇국장 파견△중앙공무원교육원 林光秀◇과장 전보△감사담당관 夫元贊△안전정책〃 鄭亨擇△해양방재〃 劉載晩△항로표지〃 李章雨△통상협력팀장 方泰振△혁신기획관 崔埈彧△정보화담당관 韓寬熙△해양정책과장 鄭 弘△해양개발〃 延泳鎭△해양환경〃 孫健洙△연안계획〃 徐柄奎△해양환경발전팀장 崔完鉉△선원노정과장 韓洪敎△항만운영〃 全宰佑△수산정책〃 宣元杓△유통가공〃 朴鍾國△품질위생팀장 徐在然△어촌어항과장 崔益榮△어업정책〃 孫在學△어업교섭〃 朴奎昊△어업지도과 鄭永勳△동북아물류중심국가추진기획단 魚在爀△동북아물류중심국가추진기획단 申連澈△2012년여수세계박람회유치기획단 李相文△국립수산과학원 총무과장 張炳熙△국립수산과학원 수산자원관리조성센터소장 徐壯雨△국립수산물품질검사원 관리과장 李京一△동해어업지도사무소장 金千洙△서해어업지도〃 魯炳煥△부산지방해양수산청 총무과장 金禹哲△〃 환경안전〃 趙承煥△인천지방해양수산청 〃 金圭鎭△〃 항만개발과장 李哲朝△군산지방해양수산청장 朴夏靈△포항〃 金鍾淑△제주〃 高仁哲△평택〃 柳英夏△부산지방해양수산청 수산관리과장 李錦烈△마산〃 〃 李滿寧◇과장 파견△세종연구소 金勝鎬 ■ 건설교통부 ◇국장급 파견 △중앙공무원교육원 柳潤浩 崔在吉◇과장급 파견△세종연구소 田成文 ■ 청소년보호위원회 ◇서기관 전보 △세종연구소 파견 徐學奉 ■ 산재의료관리원 ◇임용 △대전중앙병원장 琴東仁 ■ 한국주택금융공사 ◇이사 승진△유동화사업본부장 白英夫△주택보증〃 林秉蔓△인사·IT담당 李種晩◇부장 승진△리스크관리부 洪年植△경영관리부 權慶源△조사부 金甲邰△인사부 鄭氣春△유동화사업본부 유동화개발부 李重熙△ 〃 유동화영업부 金永萬△〃 유동화관리부 朴秉燮△주택보증사업본부 신용보증부 鄭然晩△ 〃 보증관리부 權炳雲◇실장 승진△비서실 李玹滿△혁신기획실 柳尙奎△홍보실 李敬雨◇지사장 승진△서울 金康龍△부산 安萬基△대전 辛賢植△전주 柳春承△청주 金善光△춘천 羅相植△제주 李尙涉◇팀장 승진△리스크관리부 리스크기획팀 趙玄坤△ 〃 리스크전산TF팀 柳守馥△경영관리부 경영관리팀 蔡載鉉△ 〃 대외협력팀 鄭泰吉△ 〃 법무팀 李茂弘△ 〃 예산운용개선TF팀 鄭 進△재무관리부 자금관리팀 李庸濟△ 〃 회계경리팀 車渡源△조사부 조사연구1팀 劉錫熙△ 〃 조사연구2팀 李潤宰△인사부 인사팀 文槿錫△ 〃 인력개발팀 金明鉉△유동화개발부 유동화기획팀 鄭在善△ 〃 상품개발팀 許謹源△ 〃 모기지론마케팅팀 安洪燦△유동화영업부 증권마케팅팀 洪承道△ 〃 증권발행팀 崔赫洵△유동화관리부 등기실사팀 朴承昌△ 〃 자산관리팀 金益洙△ 〃 신탁관리팀 魚翼善△신용보증부 보증기획팀 徐永大△ 〃 개인보증팀 李元百△ 〃 사업자보증팀 車炅萬△보증관리부 보증관리1팀 文正烽△ 〃 보증관리2팀 徐聖基 ■ 한국철도공사 ◇차장급 전보 △서울열차승무사무소장 李起宋△세종연구소 파견 金榮煥 ■ 한국산업인력공단 ◇국장급 승진 △출제실장 이정재◇제주직업전문학교원장 박철성◇국장급 전보△경영기획실장 이명희△기능진흥국장 김흥재△능력개발국장 이계정△인력개발지원국장 송시열△중앙고용정보원 고용정보실장 이상환△서울지역본부 능력개발지원국장 이윤규△부산〃 〃 최승호△대전〃 검정관리국장 이원박△춘천지방사무소장 박준기△전북〃 이창구△순천〃 김재복△경기북부〃 기경철△출제실 출제1팀장 박춘화△〃 출제2〃 전효중△〃 출제3〃 임경빈△〃 출제4〃 박범수△〃 출제5〃 박호연 ■ 한국철도시설공단 ◇1급 전보 △ERP추진단장 李元淳 ◇2급 전보 △ERP추진단 경영관리팀장 申東植△〃 정보화팀장 李準泂△〃 건설사업팀장 李東春△경영혁신단 윤리경영팀장 金在奎△〃 혁신기술팀장 金榮澈△기획조정실 경영관리부장 崔鍾鉉△사업관리실 PM총괄부장 崔文圭△〃 PM2부장 廉敬燮△재무본부 자금총괄부장 李粲鏞△강원지역본부 재산관리부장 曺德煥 ■ 공정거래위원회 ◇과장급 전보△하도급기획과장 金泰亨△총괄정책과장 金學炫△독점정책과장 金治杰△공동행위과장 鄭仲源△조사기획과장 金淳鐘
  • 선현들 편지에 담긴 묵향

    “당계서색구홍약(當階瑞色句紅葯) 임수문광정록천(臨水文光淨綠天)” 추사 김정희가 당대의 서예가였던 유상에게 써준 ‘대련 서색문광(對聯 瑞色文光)’의 한 대목이다. 뜨락의 상서로운 빛은 붉은 작약과 같고, 물에 임한 아름다운 빛은 하늘처럼 푸르다는 내용이다. 또한 다산 정약용은 지인이 보내온 전복과 해초를 받고 그 고마운 마음을 간찰(간지에 적은 편지)로 적어 보냈는데, 이는 다산의 고결한 인품과 심성은 물론 당대의 풍속과 사회상까지 고스란히 전해준다. 13일부터 27일까지 서울 관훈동 우림화랑에서 열리는 ‘선현들이 남기신 묵향’전에는 이처럼 선현들의 숨결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1500년대부터 구한말까지의 서예가 156명의 서간 200여점이 선보인다. 성리학자인 우암 송시열과 퇴계 이황, 개화파 김옥균, 독립운동가 오세창까지 다양하다. 이번 전시와 관련, 초정 권창륜 한국서예학술원장은 “선현들이 남긴 묵적(墨蹟)은 대부분 간찰 글씨다. 한편 한편의 편지에도 모두 쓴사람의 개성과 심경이 확연히 드러나며 완상의 흥취를 북돋워준다.”고 말했다. 우림화랑측은 전시에 맞춰 156점의 작품과 해설이 실린 도록을 발간, 간찰 연구를 위한 자료로 활용하도록 했다.(02)733-3738.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 선비의 배반/박성순 지음

    ‘높은 학식과 대쪽 같은 기개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청렴결백의 상징’.일반적으로 조선 선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보통 사람들은 감히 올려다 보기 힘든 고고한 인품을 갖춘 성인군자로 묘사되는 것에 대해 누구도 섣불리 이의를 달지 않았다.소장 역사학자인 박성순 단국대 겸임교수가 쓴 ‘선비의 배반’은 그런 점에서 대단히 전복적이고,모험적이다. ●성리학은 사대부 위한 정치적 무기 저자의 문제의식은 의외로 단순한 지점에서 출발한다.‘조선이란 나라는 그토록 자기 수양의 정도가 높은 사람들이 사회지도층을 형성하고 있었는데,궁극적으로 나라의 운명은 왜 그리됐을까.’저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실마리로 조선 선비들이 절대적으로 신봉했던 ‘성리학’에 주목한다. 성리학이 순정 성리학자를 자임했던 사림파들에 의해 ‘선비들의 심신을 수양하는 학문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고,왕권을 억압하는 한편 아래로는 민에 대해 일방적으로 군림하는 사대부 독존의 사회체제를 만들기 위한 정치적 무기’였다고 규정한 것. 저자는 이같은 주장의 근거로 사림파 성리학자들이 ‘심경’을 경연 과목으로 정착시키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였던 사례를 내세운다.성리학의 발원지인 중국에선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던 성리학 경전 ‘심경’이 조선 중기 이후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 배경에는 민생과 관계없이 임금을 훈도하고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던 사림파들의 정치적 야욕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마침내 효종대에 ‘심경’이 정식 경연과목으로 채택된 이후 왕권과 사림파 성리학자들의 충돌은 격화된다. 저자는 이같은 갈등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효종과 송시열간의 북벌논쟁을 든다.송시열은 당시 새롭게 정계에 진출한 산당세력의 입지확보를 위해 효종의 북벌대의에 동조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을 뿐 현실적인 사업전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고 주장한다.즉 도덕적,내적 수양을 강조한 ‘심경’의 추종자들인 사림파 선비들은 고매한 학문적 이상과는 별개로 현실에선 백성이나 국가보다 가문과 당파의 안녕을 더 염려했고,이같은 사족 지배체제의 강화가 궁극적으로 조선의 멸망을 불러들인 근원이라고 지적한다. ●정치인의 이중적인 태도 오늘날도 비슷 조선 선비를 박제된 성인군자에서 기득권 수호를 위해 표리부동했던 인간의 모습으로 재조명한 저자의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요즘 정치 현실에 대한 우려와 맞닿아 있다.저자는 후기에서 개혁을 화두로 내세운 현 참여정부의 인물들이 대의명분과 달리 속으로 정치적 이해득실을 고려함으로써 국민들의 지지를 배반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충고한다.1만 1000원.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儒林(102)-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102)-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강당 천장 벽에는 송시열의 ‘강당기’를 비롯하여 ‘학규(學規)’,‘중건기(重建記)’등 많은 현판들이 걸려있었으나 대부분 일정한 규격 속에 많은 내용을 빼곡히 담고 있어 판독하기가 불가능하였지만 유독 숙종대왕의 어제만은 굵은 필체로 양각되어 있었고,마모상태도 양호하여 한자 한자 정확히 읽어 내릴 수 있었다.민진원이 추신하여 쓴 문장 제일 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崇禎後再庚戌首春 未死臣 閔鎭遠 敬識” 재경술이라면 1730년.수춘은 1월이니,민진원이 숙종대왕의 뜻을 받들어 어제를 삼가 적은 것은 조광조의 사후 200년 후의 일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나는 팔짱을 낀 채 다시 생각하였다.조광조의 사후 200년이 흐른 뒤에 숙종은 ‘늘 돌아가시기 전에 한 말씀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솟아나온다’고 노래하였다.숙종이 돌아갔음에도 신하인 자신은 황공하게도 살아 있다 하여서 죽지 못한 신하,즉 미사신(未死臣)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민진원 역시 ‘한번 읊어보고 세 번 탄식하여 감동하여 눈물이 절로 솟아나왔다’고 칭송하고 있다. 또한 효종의 어명으로 이시해는 치제문을 통해 조광조를 ‘위대하다.공의 경로는 오랠수록 빛이 나서 영원히 백세토록 종주(宗主)로 떠받드니’하고 축원하고 있다. 그 뿐인가.송시열은 ‘강당기’에서 조광조를 다음과 같이 영탄(詠歎)하고 있다. “선생은 뛰어난 자질로 문장의 기운을 지니시어 스승의 전수를 받지 않고 홀로 도의 묘리를 터득하시었다.이는 순수한 성현의 도요,순전한 제왕의 법이었다.비록 일시에 행하지는 못하였으나 후세에 전하는 것은 더욱 오랠수록 없어지지 않으리라.아,이것이 어찌 인력이 관여할 일인 것인가.하늘이 실로 그렇게 한 것이다.” 송시열로부터 ‘성현의 도’와 ‘제왕의 법’을 갖추었던 하늘이 내린 인물로 찬양 받았던 조광조. 그러나 조광조는 이처럼 후세의 사람들로부터 칭송만 받았던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조광조의 사후 그에 대한 복권운동이 시작되자 홍문관 직제학이었던 허흡(許洽) 등은 조광조를 ‘나라를 어지럽히는 괴수’라고 단정하고 맹렬하게 비난하였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심지어 조광조와 같은 신진사림파로 함께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기묘사화 때는 조광조 일파로 몰려 삭직당하고 유배를 떠났던 김정국(金正國)은 ‘사재척언’에서 조광조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대사헌 조광조는 항상 총애를 받아 매양 소대(召對)할 때에는 반드시 의리를 끌어와 비유하였다.종으로 횡으로 경서의 말을 인용하여 말을 정지하는 때가 없으니 다른 사람은 그 동안에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비록 한겨울과 한창 더위라도 한낮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았고,소대를 마치고 나면 윤허되지 않은 일이 없었다.같이 있던 자는 매우 괴롭게 여겼고,모두 싫어하는 기색이 있었다.일찍이 대사헌으로서 아문에 출사하다가 길에서 고형산을 만났으나 경례하지 않고 지나갔는데,대사헌을 미워하는 자는 모두 이를 갈았다.‘한서’를 상고하여 보니 소망지(蕭望之)가 어사가 된 후에는 정승을 가볍게 여겨 만나고도 예를 표하는 일이 없는 것과도 같았다.또한 장탕(張湯)도 어사가 되어 매양 밤이 늦어야 일을 파하였다.두 사람이 어질고 어질지 않음은 비록 같지 않으나 거만하고 제 마음대로 하다가 죄를 당한 것은 같다.예나 지금이나 군자의 몸가짐에는 공경하고 겸손한 것이 복을 누리는 터전이 된다.어찌 경계하지 않으리오.”
  • 儒林(102)-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강당 천장 벽에는 송시열의 ‘강당기’를 비롯하여 ‘학규(學規)’,‘중건기(重建記)’등 많은 현판들이 걸려있었으나 대부분 일정한 규격 속에 많은 내용을 빼곡히 담고 있어 판독하기가 불가능하였지만 유독 숙종대왕의 어제만은 굵은 필체로 양각되어 있었고,마모상태도 양호하여 한자 한자 정확히 읽어 내릴 수 있었다.민진원이 추신하여 쓴 문장 제일 뒤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崇禎後再庚戌首春 未死臣 閔鎭遠 敬識” 재경술이라면 1730년.수춘은 1월이니,민진원이 숙종대왕의 뜻을 받들어 어제를 삼가 적은 것은 조광조의 사후 200년 후의 일인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나는 팔짱을 낀 채 다시 생각하였다.조광조의 사후 200년이 흐른 뒤에 숙종은 ‘늘 돌아가시기 전에 한 말씀 생각하면 눈물이 절로 솟아나온다’고 노래하였다.숙종이 돌아갔음에도 신하인 자신은 황공하게도 살아 있다 하여서 죽지 못한 신하,즉 미사신(未死臣)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민진원 역시 ‘한번 읊어보고 세 번 탄식하여 감동하여 눈물이 절로 솟아나왔다’고 칭송하고 있다. 또한 효종의 어명으로 이시해는 치제문을 통해 조광조를 ‘위대하다.공의 경로는 오랠수록 빛이 나서 영원히 백세토록 종주(宗主)로 떠받드니’하고 축원하고 있다. 그 뿐인가.송시열은 ‘강당기’에서 조광조를 다음과 같이 영탄(詠歎)하고 있다. “선생은 뛰어난 자질로 문장의 기운을 지니시어 스승의 전수를 받지 않고 홀로 도의 묘리를 터득하시었다.이는 순수한 성현의 도요,순전한 제왕의 법이었다.비록 일시에 행하지는 못하였으나 후세에 전하는 것은 더욱 오랠수록 없어지지 않으리라.아,이것이 어찌 인력이 관여할 일인 것인가.하늘이 실로 그렇게 한 것이다.” 송시열로부터 ‘성현의 도’와 ‘제왕의 법’을 갖추었던 하늘이 내린 인물로 찬양 받았던 조광조. 그러나 조광조는 이처럼 후세의 사람들로부터 칭송만 받았던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다.조광조의 사후 그에 대한 복권운동이 시작되자 홍문관 직제학이었던 허흡(許洽) 등은 조광조를 ‘나라를 어지럽히는 괴수’라고 단정하고 맹렬하게 비난하였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심지어 조광조와 같은 신진사림파로 함께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기묘사화 때는 조광조 일파로 몰려 삭직당하고 유배를 떠났던 김정국(金正國)은 ‘사재척언’에서 조광조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대사헌 조광조는 항상 총애를 받아 매양 소대(召對)할 때에는 반드시 의리를 끌어와 비유하였다.종으로 횡으로 경서의 말을 인용하여 말을 정지하는 때가 없으니 다른 사람은 그 동안에 한마디 말도 하지 못했다.비록 한겨울과 한창 더위라도 한낮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았고,소대를 마치고 나면 윤허되지 않은 일이 없었다.같이 있던 자는 매우 괴롭게 여겼고,모두 싫어하는 기색이 있었다.일찍이 대사헌으로서 아문에 출사하다가 길에서 고형산을 만났으나 경례하지 않고 지나갔는데,대사헌을 미워하는 자는 모두 이를 갈았다.‘한서’를 상고하여 보니 소망지(蕭望之)가 어사가 된 후에는 정승을 가볍게 여겨 만나고도 예를 표하는 일이 없는 것과도 같았다.또한 장탕(張湯)도 어사가 되어 매양 밤이 늦어야 일을 파하였다.두 사람이 어질고 어질지 않음은 비록 같지 않으나 거만하고 제 마음대로 하다가 죄를 당한 것은 같다.예나 지금이나 군자의 몸가짐에는 공경하고 겸손한 것이 복을 누리는 터전이 된다.어찌 경계하지 않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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