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송광사
    2026-08-20
    검색기록 지우기
  • 증여 상속
    2026-08-20
    검색기록 지우기
  • 세대 역전
    2026-08-20
    검색기록 지우기
  • 민생 안정
    2026-08-20
    검색기록 지우기
  • 당선자
    2026-08-20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391
  • 이번주말 봄나들이 생각한다면…

    이번주말 봄나들이 생각한다면…

    ■ 꽃망울터진 전북 벚꽃 구경하고 전주~군산간 번영로·완주 송광사 등 절정 ‘살랑이는 봄바람 타고 전북으로 벚꽃 구경 오세요.’ 전북도내 벚꽃 명소들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예년보다 1주일 정도 빠를 것으로 예상됐던 벚꽃의 향연은 꽃샘추위로 다소 늦어져 이번주 말부터 절정을 이룰 것으로 예상된다. 전국에서 가장 긴 벚꽃길인 전주~군산간 번영로 43㎞는 오는 7일부터 12일 사이에 절정을 이룰 전망이다. 번영로 벚꽃은 고향을 그리는 재일교포들의 성금으로 40여년 전에 심은 왕벚꽃이다. 분홍빛 탐스러운 꽃가지가 장관을 이룬다. 수령이 오래 됐고 일부 구간은 교통사고로 훼손됐지만 아직도 옛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군산시는 4~12일 군산 월명경기장과 은파유원지, 월명공원 등 3곳에서 ‘벚꽃축제’를 연다. 각종 문화예술공연과 벚꽃가요제, 벚꽃아가씨 선발대회 등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진다.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송광사 입구 2㎞ 벚꽃길도 이번 주말이 가장 아름다울 것으로 전망된다. 전주 근교여서 평일에도 봄나들이 행락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정읍시 천변 벚꽃터널은 이미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봄맞이 명소다. 호남고속도로 정읍IC에서부터 내장사 입구까지 7㎞ 구간에 걸쳐 화려한 벚꽃터널이 이어진다. 시기동 천변도로가 특히 아름답다. 내장저수지를 둘러싸고 있는 벚꽃길도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하다. 1일부터 10일까지 정읍천 벚꽃축제가 열린다. 그러나 올 정읍천 벚꽃은 축제가 끝난 13일쯤 돼야 만개할 것으로 보인다. 진안 마이산 벚꽃은 전국에서 가장 늦게 핀다. 이달 20일 이후에야 마이산 입구에서부터 탑사까지 5㎞ 구간 벚꽃들이 장관을 이룰 것으로 예상된다. 수령 20~30년의 마이산 벚꽃은 재래종 산벚꽃으로 깨끗하면서 환상적인 꽃색깔로 유명하다. 이밖에 장수군 논개생가 가는 길, 완주 경천저수지와 구이 저수지, 모악산 입구, 김제 금산사 등 벚꽃이 아름다운 지역이 많아 4월 전북은 상춘인파로 넘쳐날 전망이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울산 ‘모세의 기적’ 체험하고 진하해수욕장~명선도 구간 바닷길 열려 울산 울주군 진하해수욕장~명선도 구간의 바닷길이 열려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1일 울주군과 진하리 주민들에 따르면 울산의 대표적 해수욕장인 울주군 서생면 진하리 진하해수욕장에서 맞은 편 무인도인 명선도 100여m 구간에 바닷물이 빠져 모랫바닥을 드러내면서 바닷길이 열리는 ‘모세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이 현상은 매년 음력 2월 말이나 3월 초에 시작해 음력 4월까지 한달가량 낮 12시~오후 4시 진행된다. 올해도 어김없이 바닷길이 열렸다. 조수 간만의 차에 따라 전남 진도군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리 사이 2.8㎞의 바다가 갈라져 만드는 바닷길과는 규모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바닷물이 가장 많이 빠지는 오후 2~3시에는 모랫바닥을 완전히 드러내 사람이 신발을 신고 다녀도 젖지 않을 정도가 된다. 평소 배를 타고 명선도에 들어가야 하지만 바닷길이 생기는 이 시기에는 누구나 걸어서 명선도에 들어가 무인도의 절경을 감상하고 주변 바위 사이에서 미역이나 소라를 따는 등 남다른 추억을 만들 수 있다. 이 바닷길은 음력 4월을 넘기면 평소처럼 다시 물이 차기 시작해 1.5∼2m의 수심을 유지하게 된다. 배근호(47) 진하리 이장은 ““최근 바닷길이 열린다는 소문이 나면서 주말에 관광객이 많이 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울산 박정훈기자 jhp@seoul.co.kr
  • [길섶에서] 향기와 냄새/함혜리 논설위원

    재작년 여름 송광사 불일암에서 법정 스님을 뵈었을 때의 일이다. 산목련을 바라보며 “냄새가 참 좋다.”고 했더니 스님께서는 “모름지기 꽃은 냄새라고 하지 않는다. 향기라는 단어를 써야 맞다.”고 하셨다. 스님은 “사람도 냄새가 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향기가 나는 사람이 있는데 향기 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지난 주말 남쪽으로 여행을 다녀오는 길에 구례의 한 마을에서 천리향 화분을 하나 샀다. 향기가 천리를 간다고 해서 천리향이라고 불리는데 원래 이름은 ‘서향(瑞香)’이다. 상서로운 향기라는 뜻이다. 향기만큼이나 예쁜 이름을 가졌다. 꺾꽂이해서 키운 작은 가지였지만 마침 꽃이 피어 꿈결처럼 은은한 향기를 뿜고 있었다. 차에 싣고 오는 내내 차 안에 향기가 가득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서울에 도착하는 것과 동시에 천리향의 향기는 사라져 버렸다. 코를 들이대 봤다. 향기가 꽃 속으로 숨어들어 가 버린 듯이 아련함만 느껴졌다. 천리향의 향기마저 삼켜 버린 도시의 냄새가 섬뜩했다.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산수유 활짝 핀 전남 구례 3색 매력

    산수유 활짝 핀 전남 구례 3색 매력

    소설가 정지아(44)는 전남 구례에서 나고 자랐다. 그는 1990년 부모의 뜨거웠던 청춘을 고스란히 옮겨 지리산을 배경으로 한 소설 ‘빨치산의 딸’을 쓴 뒤 공안당국에 오랫동안 수배됐고, 책은 판금되는 등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다.섬진강을 끼고 있는 지리산 자락의 전남 구례가 이렇듯 아픈 현대사의 한복판 무대에서 내려와 단지 뛰어난 자연의 아름다움만으로 칭송받기까지는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까마득해진 50여년 전, 골골마다 조심스럽게 서려있는 빨치산 혹은 토벌군을 애써 기억하기 위해 구례를 찾는 이는 이제 거의 없다. 그저 봄이면 온 산하에 만발하는 노란 산수유와 분홍빛 벚꽃의 향연을 만끽하기 위해, 가을이면 붉은 피아골의 단풍과 함께 루비처럼 점점이 맺힌 산수유 열매를 보기 위해 몰려드는 관광객이 있을 뿐이다. 이렇듯 잊혀짐으로써 구례와 지리산에 얽힌 역사의 화해가 이뤄지고 있다. 1. 산수유 - 현천·상위 마을 꽃천지…오늘부터 축제 지난 13일 지리산 자락 일대에는 비가 흩뿌렸다. 귀한 비다. 지리산은 더욱 푸르러졌고, 섬진강은 촉촉함을 더했다. 사람들에게는 더욱 반갑다. 서기동 군수는 “올 들어 20㎜, 10㎜, 3㎜ 온 것에 이어 고작 네 번째로, 지난해 강수량과 비교하면 3분의1도 안 된다.”면서 심각한 봄가뭄을 걱정했다. 그러면서도 “아주 조금이지만 비 맞은 뒤 더욱 풍성해진 산수유를 보니 훨씬 아름답지 않으냐.”고 반문했다. 산수유 마을로 더 잘 알려진 구례군 산동면 위안리 상위마을과 현천마을의 산수유는 수줍게 움을 틔웠다. 두 번 꽃을 피운다는 엄지손톱만 한 산수유는 이달 초순 수줍게 첫 노랑 방울을 내밀었다. 이달 하순, 4월 초순이면 꽃받침에서 왕관처럼 튀어나온 20여개의 꽃봉오리가 활짝 벌어지고 5~6개 수술까지 모두 아우성을 치며 피어날 것이다. 그리고 한 달 남짓, 시들지도 않고 지리산 자락에 노란색의 향연을 펼칠 것이다. 이 마을에는 중국 산둥지방에서 시집온 처녀가 산수유를 가져온 것으로 전해진다. 지리산 온천지구를 내려와 19번 국도를 타고 남원쪽으로 5분 남짓 가다 보면 산동면 위안리 계척마을에 산수유 시목지(始木地)가 있다. 약간 생뚱맞다는 생각도 없지 않지만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둥성 산해관의 모형까지 만들어 놓아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산수유는 익히 알려졌듯 신장기능을 좋게 한다. 남정네들이 의미심장한 웃음 지으며 내밀히 찾아올 수밖에 없는 곳이다. 물론 마음만은 여전히 10대인 여인네들 역시 노란색의 더미 앞에서 연방 감탄사를 쏟아낸다. 산수유 축제 기간은 19일부터 22일까지다. 2. 문학의 향기 - 소설가 황석영 등 문인들 즐겨 찾는 곳 광의면, 문척면, 마산면, 반내골, 질매재, 피아골 등 구례의 골골이 실명으로 등장하는 ‘빨치산의 딸’과 같은 아픈 한국 현대사의 흔적 외에도 지리산의 맑은 정기와 섬진강의 유려함은 많은 시와 소설을 쏟아냈다. 구한말의 애국지사 매천 황현(1855~1910년)은 굳은 의기와 대쪽같은 선비혼을 ‘매천야록’, ‘오하기문’ 등 작품집에 고스란히 남겼다. 친일파, 부패한 왕실과 고위관료, 백성을 수탈하는 지방 수령 등이 그의 준엄한 꾸짖음의 대상이었다. 황현은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기고 자결했다. 구례는 넉넉함과 불꽃같음을 함께 품고 있기에 문인들이 절로 찾아든다. 소설가 황석영은 ‘문인마을’을 만들겠다며 지난해 구례군 산동면 둔기마을에 4만 5000여평의 널찍한 땅을 샀다. 아직은 제대로 된 진입로도 없는 두메산골이지만 직접 찾아보면 옛시절 ‘산사람들’이 누비고 다녔을 반야봉과 노고단, 만복대까지 지리산 능선이 한눈에 쏙 들어오는 곳이다. 3. 화엄사 - 구층암 수백년된 나무 기둥 숨은 볼거리 구례를 찾는 이들이 빼놓지 않는 곳의 하나가 화엄사다. 불교에서는 ‘불(佛)·법(法)·승(僧)’을 삼보(三寶)라고 하여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를 각각 대표 사찰로 꼽고 있다. 구례군 문화관광해설가 박미연(36)씨는 “화엄사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갖고 있어 불보, 80권의 대방광불 화엄경을 갖고 있어 법보, 수행하는 스님이 100명을 넘어서니 승보 등 삼보를 모두 아우른 사찰로도 손색이 없다.”고 자랑했다. 이른 아침의 화엄사는 고즈넉하다. 댓잎들이 서로 비벼대며 사그락거리는 바람소리는 간간이 울리는 풍경 소리와 어우러져 산문에 들어선 객의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듯하다. 국보 67호인 각황전은 물론, 국내에서 가장 큰 각황전 앞 석등, 그리고 부처의 진신사리를 모셔 적멸보궁이 된 4사자삼층석탑 등 문화재를 찬찬히 둘러보려면 한두 시간은 벅차다. 대웅전 오른쪽으로 돌아가 100m 남짓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수백년 된 아름드리 모과나무 두 그루를 다듬거나 가공하지 않고 기둥으로 쓴 구층암을 만날 수 있다. 이 곳을 봐야 한다. 천불전을 왼쪽으로 둔 구층암의 기둥 2주는 훤칠하게 뻗어오르는가 싶더니 군살없는 근육처럼 굵직하게 뒤틀려서 버티고 있다. 찾는 이 누구나 남북으로 시원하게 뚫린 차방에 앉아 암주(庵主)인 덕제스님이 직접 가꾸고 만든 발효차를 맛보며 지리산의 주인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천불(千佛)’이 있으니 삼배(三拜)만 해도 삼천배의 효과가 있다는 너스레도 함께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내친걸음을 여기에서 멈출 수 없다. 50m쯤 더 올라가면 만나는 봉천암도 반갑다. 세월에 허물어진 석탑이 애써 손대지 않은 채 암자 앞에 그대로 놓여 있다.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며, 옛 그대로인 해우소, 장독 항아리 등을 엿볼 수 있어 수행하는 스님들의 질박한 삶을 엿보는 듯 하다. 글 사진 구례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가는 길 서울 남부고속버스터미널에서 2시간 간격으로 있는 구례행 버스를 타면 3시간40분 걸린다. 첫차 7시30분. 기차는 서울역에서 구례구역까지 새마을호(하루 2회)와 무궁화호(하루 12회)가 운행한다. 승용차로는 천안~논산고속도로를 이용하면 빠르다. 부산에서는 고속버스로 구례까지 2시간 정도 걸린다. 대구에서는 남원을 지나오면 2시간20분에 닿는다. 구례터미널에서 군내버스가 어지간한 구례군 여행 명소를 다 데려다준다. ▲맛집 구례는 웰빙 맛여행의 천국이다. 전라도 하고도 구례니 밑반찬만으로도 80점 이상 먹고 들어간다. 어느 식당문을 열고 들어서도 지리산에서 나는 더덕, 곤드레, 고사리, 두릅, 도라지 등이 풍성하다. 이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자연산 송이와 섬진강 참게, 그리고 흑염소다. 1만원에 향긋한 자연산 송이전골 정식을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강남가든(061-782-7644)은 정갈한 밑반찬이 특히 인상적이다. 산동면 좌사리 산골짜기에 있는 양미한옥가든(061-783-7079)은 산닭과 흑염소, 멧돼지 구이를 낸다. 놓아먹인 것들이라 무엇을 골라도 인공 아닌, 자연의 맛을 느끼게 한다. 참게와 보리새우, 지리산 바람에 말린 시래기가 어우러진 참게매운탕은 큰 것(5만원)을 시키면 4~5명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 천수식당(061-782-7738)은 섬진강 바로 곁에 붙어있어 눈의 호강은 덤이다. ▲묵을 곳 화엄사에서 1㎞도 떨어지지 않은 지리산 한화리조트(061-782-2171)가 있다. 1984년에 지어져서 시설은 조금 낡았다. 하지만 고즈넉하게 아침 구름 걸어놓고있는 지리산과 화엄사의 새소리, 바람소리, 계곡소리를 들으며 아이들 손잡고 아침 산책 하기에 딱 제격인 곳이다. 송원리조트(061-783-8200)는 산수유마을 바로 곁이면서도 지리산 온천지구에 있어 몸과 눈이 모두 호강할 수 있다. 봄이면 송원리조트나 한화리조트 모두 고로쇠 수액을 판매한다.
  • 남도 무지개 다리를 찾아서

    남도 무지개 다리를 찾아서

    봄이 가장 먼저 훈기를 풀어 놓는 곳, 남도. 산너머 조붓한 오솔길에도, 들너머 고향 논밭에도 봄기운이 찾아들고 있다. 유행가 노랫말처럼 말이다. 남도를 여행하다 보면 유난히 자주 홍예교(虹霓橋), 즉 무지개다리와 만난다. 우아하고 세련된 자태로, 또 때론 앙증맞은 모습으로 반기는데 금방이라도 봄의 전령이 교각을 타고 내려올 것만 같다. 남도를 대표하는 무지개다리는 전남 순천시 조계산의 양쪽 끝자락에 있다. 각각 조계종과 태고종의 대가람인 송광사와 선암사 들머리에서 오는 봄을 맞고 있다. 남도에 가거들랑 한번쯤 무지개다리를 찾아 자분자분 걸어 오는 봄을 맞아 보시라. 상사호 옥빛 물결을 훔쳐보며 선암사 입구로 들어서면 승선교(昇仙橋)가 가장 먼저 이방인을 반긴다. 우리나라의 무지개다리 중 가장 우아하고 아름답다는 평가를 받는 다리다. 건축에 대단한 조예가 없더라도 교각의 우아한 휨새며 하늘로 날아갈 듯한 자태에 금방 눈을 빼앗겨 버린다. 위쪽의 누각 강선루와 어우러지는 장면은 산수화에 다름아니다. 이처럼 돌다리 하나와 누각 하나만으로 절경을 펼쳐 놓은 선인들의 혜안이 놀랍다. 선암사 입구의 무지개다리는 두 개다. 그 중 보물 400호로 지정된 큰 다리가 승선교다. 안내판에 따르면 건립연대는 171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몇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길이 14m, 높이는 7m. 다리 가운데 용머리 조각이 이채롭다. 절집 관계자에 따르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이라는데, 사바세계에서 피안의 세계로 접어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봄 선암사 가을 송광사라 했던가. 선암사는 봄꽃이 필 때면 절집 전체가 하나의 꽃으로 보일 만큼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그 중심에 ‘선암매’라 불리는 600년 묵은 매화가 있다. 특별히 ‘볼 일’이 없더라도 해우소는 잊지 말고 들렀다 가자. 바닥이 무서울 정도로 크고 깊다. 긴 알 모양의 연못 삼인당과 편백나무 우거진 산책로는 시원한 풍경을 내준다. 선암사에서 500m쯤 올라가면 야생화 미로원 등 생태체험장이 조성돼 있다. 송광사까지는 산길로 6.5㎞ 정도 떨어져 있다. 두 절집을 잇는 종주산행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다. 선암사가 시골 처녀처럼 담담하고 순박한 자태를 하고 있다면 송광사는 도시 처녀의 화려하고 세련된 자태를 연상케 한다. 선암사와 더불어 조계산의 양대 가람을 이루는 송광사에도 능허교라는 빼어난 무지개다리가 있다. 선암사 승선교에 견줘 크기는 작지만 우화각과 육감정, 침계루 등 주변 전각들과 어우러진 화려한 자태가 일품이다. 능허교 아래에도 용머리가 조각돼 있는데 용이 물고 있는 여의주에 엽전 세 냥이 매달려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절집 관계자에게 설명을 구하니 조선시대 신도들의 시주를 받아 능허교 불사를 벌였는데 그때 쓰고 남은 돈이란다. 시줏돈을 허투루 쓰는 호용죄(互用罪)를 경계하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모든 것을 비운 채 허공으로 향하는 능허교(虛橋) 위에 서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우화각(羽化閣)을 날개 삼으니 가벼워진 몸이 봄기운에 실려 날아갈 듯하다. 원래 송광사로 길을 여는 것은 절집 초입의 청량각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보수 공사 중이어서 완전히 해체돼 있다. 청량각을 이고 서있었던 무지개다리도 역시 공사 중이다. 대리석을 사용하는 바람에 세월이 더께로 쌓여 있던 예전 자태와는 사뭇 다르다. 송광사는 800년을 함께 살아온 두 그루의 곱향나무 ‘쌍향수’와 쌀 7가마로 지은 4000명 분량의 밥을 한 번에 담을 수 있다는 ‘비사리구시’, 어느 순서로든 포개지는 신기한 그릇 ‘능견난사(能見難思)’ 등 세 가지 보물로 유명하다. 이 중 쌍향수를 보려면 천자암까지 올라야 한다. 잰걸음으로 1시간30분쯤 걸린다. 국보 4점, 보물 11점 등 송광사 경내 수많은 보물을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남도에는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들이 많다. 가장 높고 긴 것으로는 여수 흥국사 홍교가 꼽힌다. 길이 11.8m, 높이 5.5m. 조선 인조 17년(1639년)에 계륵대사가 축조한 것으로 전해진다. 잘 다듬은 자대석을 각지게 짜올려 우아한 반원을 이루고 있다. 보성군 벌교읍 홍교는 소설 태백산맥에 등장하면서 세인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원래는 뗏목다리가 있었던 곳. 벌교(筏橋)란 이름도 뗏목다리에서 비롯됐다. 썰물 때는 다리 밑바닥이 거의 드러나고, 밀물 때는 대부분이 물속에 잠긴다. 이 다리를 위해 주민들이 60년에 한 번씩 갑자년마다 회갑잔치를 해주고 있다고 한다. 절반 가까이 보수공사를 벌인 탓에 옛멋을 많이 잃었다. 보물 제304호. 진도군 임회면 남도석성 앞의 쌍홍교와 단홍교는 질박한 아름다움이 일품이다. 편마암 판석을 겹쳐 세운 것으로 전국 어디서도 보기 어려운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다. 구례군 천은사 홍교는 콘크리트로 지어져 자체로는 볼품이 없지만, 다리 위 누각 수홍루와 어우러진 풍경이 빼어나다. 앞에 큰 저수지가 있어 운치를 더한다. 유난히 심한 봄가뭄 탓에 바닥을 드러내곤 있지만 각종 드라마나 CF 등의 단골 촬영지로 이용된다. ●여행수첩(지역번호 061) ▲가는 길: 선암사(754-5247)는 호남고속도로 승주나들목에서 우회전해 857번 지방도를 따라간다. 송광사(755-0108)는 주암나들목에서 좌회전해 벌교 방면 27번 국도를 타고 간다. ▲맛집: 조계산 굴목재 아래 보리밥집은 순천 지역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올 만큼 유명한 맛집. 장작불로 지은 보리밥에 산나물 듬뿍 넣고 멸치젓갈과 함께 비벼먹는 맛이 일품이다. 5000원. 이순신 장군이 낙안읍성을 방문했을 때 백성들이 대접했다는 팔진미는 낙안의 별미다. 읍성 주변 음식점에서 맛볼 수 있다. 1인분 1만원선. ▲잘 곳: 송광사 아래 민박집이 1개, 승주읍내에 모텔이 2개 있다. 깔끔한 숙박업소가 많은 순천시에서 묵는 것도 좋겠다. ▲주변 명소: 선암사와 송광사는 각각 상사호와 주암호를 품고 있다. 봄기운을 느끼며 드라이브하기 좋다. 금전산 자락의 자그마한 절집 금둔사는 해마다 가장 먼저 매화꽃 소식을 전하는 곳이다. 납월매(月梅)라고도 불리는 홍매화가 지난주 꽃을 틔우기 시작했다. 낙안읍성에서 선암사 방향으로 가다 만날 수 있다. 글 사진 순천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목조문화재 화재 대책 ‘공염불’

    목조문화재 화재 대책 ‘공염불’

    국보·보물급 목조문화재에 대한 방재 대책이 여전히 허술하다. 지난해 2월10일 숭례문이 70대 노인의 방화로 전소된 뒤 불에 취약한 목조문화재에 대한 소방시설이 부분적으로 보강됐지만 방재 대책으로 미흡한 실정이다. 해당 문화재에 적합한 ‘맞춤식 소화도구’는 물론 소방인력 관리도 허점으로 지적된다. ●화재경보기 없는 곳 72% 서울신문이 최근 1주일 동안 쌍계사 대웅전, 마곡사, 안동 충효당, 해인사 장경판전, 송광사 국사전 등 전국의 주요 20개 국보·보물급 문화재에 대한 소방대책을 확인한 결과, 화재 때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상수도가 없는 곳이 14곳이나 됐다. 앞으로 설치할 계획도 없었다. 스프링클러 설치 계획이 없는 곳도 17곳이었다. 개인이 작동할 수 있는 방수총이 없는 곳은 5곳이었으며, 이곳에는 목조문화재를 방염처리할 계획조차 안 돼 있었다. 이번 확인 작업은 낙산사 화재 이듬해인 2006년 문화재청의 의뢰로 전국 124개 목조문화재에 대한 안전실태를 조사한 전문기관 ‘건국ENI’가 펴낸 당시 보고서를 토대로 이뤄졌다. ●경비·진화 매뉴얼 일선에선 몰라 특히 문화재청이 지난해 12월 전국의 목조문화재의 안전실태를 조사한 결과도 비슷하다. 화재경보기가 없는 곳은 88곳(71.5%), 폐쇄회로(CC)TV가 없는 곳은 72곳(58.5%)이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개정된 ‘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이 지난 6일에야 공포돼 이제부터 시설을 확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경내에 보물 1434호 계단(戒壇·계율을 받는 단상)을 소장하고 있는 전북 완주군 안심사 관계자는 “CC TV는 고장났고 소화전도 없다.”고 말했다. 숭례문 화재 직후 소방당국이 중요대책으로 제시한 ‘다굴절 파괴 방수차’ 는 서울과 제주에만 1대씩 도입된 게 고작이었다. 이 장비는 리모컨으로 지상 16m까지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파괴용 장비 및 호스를 탑재해 방재 대책에 효과적이다. 대당 16억원짜리인데 국가와 지자체가 비용을 절반씩 부담하도록 돼 있어 정작 중요 목조문화재가 많은 지역의 지자체들은 도입할 엄두를 못낸다. 소방당국은 목조문화재가 있는 지역의 모든 소방서에 문화재 맞춤 화재진압 매뉴얼을 지난해 5월 배포하고 훈련도 마쳤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등사(대웅전 보물 178호)를 관할하는 강화소방서 관계자는 “경비·진화 매뉴얼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소수서원(보물1402호) 관계자도 “경내에서 소방훈련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시설 확충보다 더 중요한 게 유사시 장비를 사용할 인력을 관리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지자체가 사찰에 파견한 경비인력은 대부분 60~70대 노인이었다. 경기 안성 청룡사(대웅전 보물 824호) 주지는 “소방관끼리만 훈련할 게 아니라 감시요원이나 스님에게도 사용법 등을 가르쳐 줘야 한다.”고 말했다. 화재 책임자도 불분명하다. 사찰측은 시·군청에서 알아서 할 일이라는 입장이지만, 시·군청은 관리책임자는 사찰 주지라고 답했다. 이경주 강병철 최재헌기자 kdlrudwn@seoul.co.kr
  • 조계종 첫 표준 금강경 2년 산고 끝 편찬

    조계종 첫 표준 금강경 2년 산고 끝 편찬

    ‘금강반야바라밀경’,즉 금강경은 한국불교 장자 종단인 조계종이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삼는 대표적 대승경전. 한국 최대 종단이 교리나 사상적 근거의 으뜸으로 삼는 경전인 만큼 신자들이 가장 즐겨 독송하는 경전으로 꼽히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불교계에서 독송하는 금강경은 대부분 개인적 차원에서 번역,보급돼온 탓에 신자와 스님들이 제각각 서로 다른 경전을 써 불경의 원뜻 이해와 신행 차원에서 개선 목소리가 높아왔다. 이같은 상황에서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소장 현종 스님)가 작심하고 2년간의 촘촘한 불사 끝에 조계종 종단본 금강경을 완찬,오는 20일 오후 3시 서울 조계사 대웅전에서 봉정법회를 가질 예정이어서 불교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금강석 같은 지혜로 깨달음(반야)의 세계에 이르는(바라밀) 길을 알려 주는 경전’이라는 금강경은 동진시대 서역 출신 승려인 구마라집(鳩摩羅什)에 의해 402년 처음 한문으로 번역 된 이후 6종이나 되는 한역본이 세상에 흘러다녔다. 한국에서는 주로 한문본이 유통되다가 훈민정음이 제정되면서 ‘언해본 금강경’이 간행되었고 일제강점기인 1924년 백용성 스님이 한글로 다시 번역한 ‘상역과해금강경’을 펴낸 이후 다양한 번역본이 간행돼, 현재 100여 종이 넘는 한글 금강경이 유통되는 실정이다. ●기준되는 경전 부재로 편찬 필요성 대두 조계종이 이번 표준 금강경 편찬 작업에 나선 것은 무엇보다 한국불교의 대주류를 이루는 선불교의 핵심이랄 수 있는 공(空) 사상을 천명하는 대표적인 대승경전 가운데 종단적 검증을 거친 소의불경이 없다는 점에 대한 위기의식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말이 통해야 뜻이 통하며, 뜻이 통해야 종지(宗旨)가 드러나는 만큼 종도들의 뜻이 하나로 모아질 수 있기 위해서는 종단본 소의경전이 편찬되어야 한다.”는 조계종 불학연구소측의 주장은 그 위기의식을 그대로 보여 준다. 불학연구소가 지난 2년간 진행해온 금강경 편찬작업은 간단치 않은 내공과 공력의 결집. 위원장인 연관(전 화엄학림 학장) 스님을 비롯해 각묵(화엄학림 강사)·무애(송광사 강사) 스님, 김호성 동국대 교수, 김호귀 동국대 연구교수 등 범어·교학·한학 등 각계의 금강경 전문가 6인을 편찬실무위원으로 위촉해 모두 21차례의 편찬 실무회의를 열어 왔다. ●전문가 6인 21차례 회의 통해 집대성 현재 가장 흔한 구마라집 역본 금강경으로 저본을 삼고 고려대장경 판본을 선택했지만 판본 대조 결과 고려장경 판본과 다른 대장경 판본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불학연구소측은 전하고 있다. 금강반야바라밀경(구마라집, 402년), 금강반야바라밀경(보리유지, 509년), 금강반야바라밀경(진제, 562년), 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현장, 660-663년) 을 비롯한 여섯 종의 이역본, 판본을 놓고 대교작업을 벌여 모두 여섯 곳의 자구를 수정한 끝에 조계종 표준 한문본을 완성했다. 기존 한역본 토대의 번역과는 다르게 번역된 부분에 주석을 달아 이해를 돕도록 한 것도 눈에 띈다. 그동안 불경 번역에서 한문 텍스트에만 의존해왔던 것과는 달리 범본과 한문 텍스트를 비교 연구했다는 사실을 불교계는 높이 사고 있다. 표준 금강경은 불자들의 신행용으로 만든 독송본과 주석이 포함된 주석본이 함께 출간될 예정이며 편찬과정서 있었던 학술회의와 공청회 논문을 묶은 논문자료집도 함께 나온다. 한편 오는 20일 조계사 대웅전서 있을 봉정법회에는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스님, 교육원장 청화스님, 포교원장 혜총스님, 종회의장 보선스님 등이 참석하며 종정 법전 스님의 출간 기념 법어도 내려질 예정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국내 유일 돌다리 연구가 손광섭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국내 유일 돌다리 연구가 손광섭

    개울가에 돌 하나만 툭 던져놓아도 징검다리가 된다.그리곤 개울을 건너,가지 않았던 인생길을 걷는다.태초의 어떤 만남도 그렇게 시작됐을 터.너와 나의 만남,남녀간의 사랑도 말이다.헤어짐도 당연지사였겠지.올해초 2008년이라는 개울 앞에 하나 둘 돌을 놓기 시작했다.벌써 해가 저문다.지금까지 어떻게 건너왔는지 잠시 되돌아본다.아마 세가지로 분류되지 않을까. 돌다리를 두들겨보지도 않고 천방지축 손오공처럼 건넜을 테다.삼장법사처럼 신중하게 두들겨보고 건너기도 한 것 같다.또 바둑의 이창호 9단처럼 두들겨보고도 건너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겠다. 중국의 덩샤오핑은 석두론(石頭論)을 좋아했다.개혁·개방을 설계하면서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摸着石頭過河)’고 주창했다.또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내세웠다.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논리를 폈다.덩샤오핑은 이 두 가지로 중국대륙을 호령했다. 이래저래 돌다리는 인생철학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고 동서고금을 통해 인류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그런데 오랜 세월,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돌다리들이 우리 주변에서 서서히 잊혀지고 사라져 가고 있다.여기서 잠깐! #문제1: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징검다리는? 전남 신안군 암태도에 있으며 수곡리와 추포리를 연결한다.길이 2.5㎞,돌덩이가 무려 3만 6000여개에 이른다.말 그대로 한폭의 그림을 연출한다. 300여년 전인 조선시대 추포도에 사는 문씨와 장씨 성을 가진 주민들이 하나 둘 돌을 던지며 연결했다.옛날에는 이 징검다리로 새색시들이 가마 타고 시집갔다.이때 가마꾼들 사이에 불려진 노래가 지금도 전해진다.‘띄었냐? 띄었다! 뒤쪽의 가마꾼이 띄었냐? 앞쪽의 가마꾼이 띄었다!’ #문제2:현존하는 돌다리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경주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이다.통일신라 때 화강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청운교는 높이 3.82m,너비 5.11m이다.백운교는 높이 3.15m,너비 5.09m,길이 6.3m이다.이름 그대로 푸른 구름과 흰구름 다리를 뜻한다. 다리 위는 천상의 세계요,다리 아래는 속세를 표현한다.하여,이 다리를 건너면 부처의 나라로 들어간다.하지만 기원전 37년에 만들어진 청주 남석교가 가장 오래됐다.애석하게도 이 다리는 일제 때 땅속에 묻혀 여전히 이름값을 못하고 있다.아울러 기록으로 남아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교량공사는 신라 실성왕 12년(413년)에 완성된 평양주대교(平壤州大橋)로 위치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발굴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문제3:현존하는 돌다리 중 가장 아름다운 다리는? 뭐니뭐니 해도 진천의 ‘농()다리’를 꼽는다.고려시대 몽골 침략 때 세워졌으며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돌다리 중 동양에서 가장 오래됐다. 길이 93.6m,폭 3.6m인 이 다리는 거대한 지네가 물을 슬쩍 퉁기며 물을 건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다리답게 사연도 많다.안질을 앓던 세종대왕이 초정리로 가다가 물을 마셨다는 소습천(어수천·御水川), 많은 장수들과 말발굽의 흔적 등이 남아 있다. 이렇게 돌다리만 고집스럽게 연구하는 사람이 있다.손광섭(66) 청주건설박물관장.15년째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숨어 있는 돌다리를 찾아내 거기에 담긴 천년의 세월을 끄집어내고 있다.다리품을 모아 7년 전 청주에 다리박물관인 ‘건설박물관’을 세웠다.또 2004년 단행본 ‘천년후,다시 다리를 건너다’를 발간했다.책에서 송광사 삼청교,강경 미내다리,함평 고막천 석교,광한루 오작교,논산 원목다리 등 전국 30여개의 돌다리를 소개했다.최근에는 돌다리 연구 완결편인 ‘천년후,다시 다리를 건너다Ⅱ’를 펴냈다.목릉 금천교를 시작으로 제주의 명월교에 이르기까지 전국 27개의 돌다리를 새로 추가했다.특히 보길도 굴뚝다리,봉화 돌다리 등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지거나 훼손돼 위험에 처한 다리까지 실었다.그가 국내 유일의 ‘돌다리 전문가’로 불리는 까닭이다. 청주건설박물관에서 손 관장을 만났다.박물관 안에 들어서자 눈이 휘둥그레진다.전국을 찾아다니며 직접 찍은 돌다리 사진이 사방 벽으로 쭉 전시돼 있었다.유리 전시관 안에는 조선시대에 사용됐다는 저승과 이승을 잇는 돌다리,당시 유배지로 떠나던 선비가 사용했던 화장실,조선시대 각종 건설장비 등을 비롯해 발해시대의 석등탑과 삼족우,송나라 때 사용됐던 소뿔먹통,타이타닉 배에서 뽑았다는 못 등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박물관 3개층에 걸쳐 시대별로 진열돼 있었다.예멘의 벽돌,페루 마추픽추의 관련 흔적 등 해외자료까지 합하면 무려 수십만 점은 족히 돼 보였다.이런 소문이 나 외국인들도 이곳을 찾는 경우가 더러 있다. →어떻게 해서 돌다리를 연구하게 됐습니까. “원래 아버지로부터 건설회사를 이어받았습니다.자연스럽게 전국을 다니게 됐죠.그때마다 지방 마을에 있는 돌다리를 접하면서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다리의 돌 하나하나에 예술이 있고,선조의 삶과 해학이 있다는 걸 알게 됐죠.1993년쯤부터는 아예 주말마다 거의 전국에 흩어진 돌다리를 만나러 도시락 싸들고 떠났지요.” →세월 속에 없어진 돌다리도 많을 텐데 자료찾기는 쉽던가요. “고서점은 물론 국회도서관에 가도 없더군요.결국 그동안 간간이 소개됐던 도지(道誌)와 군지(郡誌) 등을 뒤졌습니다.그걸 바탕으로 시골동네 어르신들에게 찾아가 밥과 술을 사드리면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소중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지요.암태도의 징검다리 돌덩이 숫자가 3만 6000여개인 이유도 일년 365일 평안을 기원하는 속뜻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우리나라 돌다리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조상들의 삶과 정신이 깃든 설화와 전설이 얽혀 있습니다.김만중의 소설 ‘구운몽’의 무대가 된 남해의 돌다리,형제가 쌀 천섬을 들여 만든 거창의 쌀다리,17세기 우리 교각의 형태를 볼 수 있는 벌교 도마교 등에도 흥미로운 사연이 많습니다.이런 돌다리에 서서 천년 전,누가 무슨 일로,무슨 생각을 하면서 건넜을까 생각하면 막 흥분이 되고 그럽니다.” 처음에는 옛다리들을 보면서 달리 표현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그놈,잠 잘생겼다.예술이다.”라고 중얼거리다 보니 박물관을 만들기로 결심하게 됐다고 술회한다.세계 어느 조각작품에도 뒤지지 않은 순수한 자연미를 혼자 보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에서였다.현실적으로 다리를 한 곳에 옮겨다 놓을 수 없기에 카메라를 메고 전국을 다녔다.또 고려말 충신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피살된 개성의 선죽교 등 북한에 있는 것은 방북했을 때 어렵게 그림을 얻어다가 전시해 놨다.그는 “수십번 찾아가도 항상 말없이 반겨주는 것이 돌다리였다.”면서 남은 생애에 여건이 된다면 북한의 돌다리 연구를 꼭 해보고 싶다며 웃는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그가 걸어온길 1943년 청주에서 태어났다.청주고와 청주대학을 나와 1968년 아버지로부터 건설회사를 이어받았다.그러던 어느 날부터 돌다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1993년부터 본업보다는 아예 돌다리 연구에 매진했다.고서점이나 국회도서관 등에도 돌다리에 관한 자료가 없어 어려움도 많았다.결국 수소문하면서 도지(道誌)나 군지(郡誌) 등을 뒤져 자료추적을 했고 산골마을에 직접 찾아가 동네 어른들을 만나 돌다리에 얽힌 얘기를 기록했다.2001년 1월 청주에 국내 최초의 돌다리박물관인 ‘청주건설박물관’을 설립했다.이어 2004년 산야에 묻혀 사라져 가거나 훼손된 돌다리들을 찾아내 ‘천년후 다시,다리를 건너다’라는 단행본을 펴냈고 최근 돌다리 연구의 완결편인 ‘천년후 다시,다리를 건너다Ⅱ’를 추가로 발간,언론과 학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 수녀 출신 비구니가 본 ‘붓다 가르침’

    수녀 출신 비구니가 본 ‘붓다 가르침’

    어느 한 종교를 택해 독실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신앙인에게 종교를 바꾸는 ‘개종’은 삶을 한순간 송두리째 바꾸는 인생의 ‘대 역사’일 수 있다.하물며 독신 수도자의 삶을 결정해 수녀복을 입었던 여인이 머리를 박박 깎고 비구니가 된다면? 최근 방대한 초기 불교경전 빠알리경의 요체를 추려 번역,단 한 권의 책 ‘한권으로 읽는 빠알리경전’(민족사)을 펴낸 비구니 일아(62) 스님은 책도 책이려니와 그 신앙편력으로 해서 화제가 되고 있는 인물이다. “어릴 적부터 이성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수도자의 삶에만 마음을 둔 채” 천주교 ‘하느님의 종’이 되고자 수녀복을 입었다가 채울 수 없는 허전함에 종신서원 직전 옷을 벗어던진 뒤 과감하게 머리를 깎았고 혹독한 수행 끝에 귀결한 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담았다는 초기 불경 빠알리경전. 환갑을 넘긴 일아 스님은 무엇을 좇아 그토록 파란 많은 신앙의 길을 걸어왔을까.“자유와 관용.” 단호한 대답.“내 종교가 아니면 아니된다는 교리가 내 몸에 안맞아 길을 틀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엄숙하고 자아에 대한 절제가 강한 가톨릭은 수도자의 길을 걷자던 나에겐 매력적인 종교였지요.2000년간 이어져온 전통엔 힘이 들어있지요.하지만 내가 갈 길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법정 스님 만난 뒤 태국 등서 수행 서울여대 재학중엔 영화며 음악을 좋아했고 문학과 여행에도 빠져살았다는 일아 스님은 머리 깎은 스님보다는 수녀복에 몸을 감춘 수도자인 수녀가 그냥 좋았다고 한다.수녀가 되겠다는 말을 들은 부모님이 몸져 누울 만큼 반대가 심했지만 결국 서울 샤르트르성바오로수녀회에 입회,가톨릭 신학원을 졸업한 뒤 수녀가 됐다.그렇게 6~7년을 살았을까.불현듯 ‘내가 여기서 계속 살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었고 수녀복을 벗었다.그래서 무작정 찾아간 게 송광사 불일암.일면식도 없던 법정 스님을 만나 ‘올바른 수행을 할 수 있고 수행 잘하게 인도할 수 있는 스승이 있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해 몸담은 게 비구니 사찰 석남사다.행자생활이 힘들었지만 견딜 만했다. 하지만 운문사 승가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부처님의 말씀을 고스란히 담은 빠알리어 초기경전을 가르치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이 커져갔다고 한다. 불교에 귀의해 끊임없이 의심이 들었던 것은 바로 ‘깨달은 자 붓다’.“과연 붓다는 어떤 사람이었고 그의 사상과 행동은 어땠는지 파고들고 싶어 몸이 달았다.”고 한다.“미얀마의 마하시명상센터와 태국 위백아솜 위파사나 명상수도원에선 정말 목숨걸고 수행을 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간화선에 매몰된 한국불교 비판 붓다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싶어 40대 중반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스토니브룩주립대 종교학과 학사과정과 웨스트대 비교종교학과 대학원서 석·박사를 마쳤다.영어를 알아들을 수 없어 일일이 강의를 녹음한 뒤 노트에 옮겨적어 통째로 외울 만큼 ‘지독한 공부벌레’로 이름나 있다.LA로메리카 불교대학 교수도 했고,LA갈릴리 신학대학원에선 불교학 강의도 했다고 한다. “컴퓨터와 디지털의 홍수 속에서 아날로그와 잉크 묻힌 롤러 등사기를 고집하는 지진아.” 간화선에 매몰된 한국불교를 혹독하리만큼 비판하는 일아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말씀을 온전하게 담은 빠알리경을 배우지 않으면 한국 불교의 미래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래서 매달린 게 이번 나온 책이다.“부처님 직계 제자들의 부처님 말씀 암송을 집대성한 빠알리경은 삼법인,사성제,팔정도 등 불교의 기본 교리를 온전하게 담고 있지만 양이 너무 방대해 쉽게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반인이 쉽게 깨달을 수 있도록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한 채 2년여간 두문불출 작업 끝에 세상에 내놓게 됐고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한국불교의 닫힌 시각과 고정적인 인식의 벽이 깨지기를 바란다.”고 출간 배경을 밝혔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Let´s Go] 술 익는 마을

    [Let´s Go] 술 익는 마을

    여행과 전통주.궁합이 잘 맞는 짝이다.특히나 요즘처럼 스산한 겨울 날씨엔 더더욱 그렇다.여행 도중 정감 넘치는 시골마을에 들어가 그 고장 전통주를 마시며 온몸에 훈훈한 온기를 채운다면 겨울 여행의 맛을 제대로 만끽하는 것일 터.술 익는 마을과 겨울 풍경이 잘 조화를 이룬 여행지들을 소개한다. # 청류 품은 ‘포천(抱川)’에서 술과 함께 노닐다  물맛 좋기로 소문난 경기도 포천에는 두 곳의 술 명가가 있다.화현면 화현리 운악산(해발936m) 아래 배상면주가와 이동면 도평리 백운산(해발904m) 아랫자락의 이동막걸리가 바로 그 곳.주종은 달라도 화강암을 뚫고 올라 온 물을 원료로 사용하는 것만은 똑같다.   배상면주가에서 운영하고 있는 전통술박물관 산사원은 주조도구 전시장과 시음장,가양주빚기체험장 등을 갖추고 있는 정갈한 술 문화 체험공간이다.2002년 문을 연 이래 해마다 2만명 안팎의 관람객이 방문할 만큼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특히 직접 술 빚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가양주프로그램은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 반드시 예약을 해야 한다.soolsool.co.kr,031)531-9300. # 달콤한 소곡주에 취하고 갈대밭에서 밀회도 즐기고  술 익는 마을이 있고,노을 물든 황금빛 갈대밭에 더해,떼 지어 날아오르는 철새들의 비상을 만날 수 있는 충남 서천은 명품 겨울여행지라 부를 만하다.서천의 대표 명주인 한산 소곡주는 1300년 전 백제왕실에서 즐겨 마시던 술로 알려져 있다.최고급 찹쌀로 빚어 100일 동안 숙성시켜 만든다.단맛과 함께 들국화 향기 비슷한 향을 갈무리하고 있다.한산면 지현리 한산모시전수관 맞은 편에 소곡주 제조과정 등을 엿볼 수 있는 전시장이 마련돼 있다.소곡주의 달큰함을 맛본 뒤엔 신성리 갈대밭을 방문해 보자.폭 200m,길이 1㎞에 달하는 광활한 갈대 군락지다.솜털처럼 부드러운 하얀 꽃이 선선한 바람 장단에 맞춰 춤사위를 펼치는 이맘때 가장 아름답다.겨울을 나기 위해 찾아든 수만 마리의 철새와 만나는 것도 이때쯤이다.한산소곡주 sogokju.co.kr,041)951-0290.  # 정성이 빚고 세월이 담근 맛, 완주 송화백일주    전북 완주의 송화백일주는 수도승들이 고산병 예방을 목적으로 즐겨 마셨다는 곡차(穀茶)에서 유례를 찾는다.송홧가루와 솔잎, 산수유,구기자 등 다양한 재료로 빚은 밑술을 증류해 얻는 증류식 소주. 송홧가루의 황금빛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간혹 알레르기 때문에 송홧가루를 기피하는 사람도 있지만,고추장 등 발효음식에서 송홧가루처럼 귀한 대접을 받는 것도 드물다.송홧가루가 방부제 역할을 해 우리 몸에 좋은 효모와 효소가 잘 살 수 있도록 도와 주기 때문이다.그래서 송화백일주는 오래 두고 먹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난다.  송화백일주와 더불어 완주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대둔산(877.7m)과 모악산(793.5m) 이다.이 두 명산은 겨울에 찾아야 제 맛이다.‘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대둔산 설경과 ‘모악춘경(母岳春景)’이란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아름다운 모악산 설경이 여행자를 경이로운 세계로 이끈다.송광사에서 동상호를 거쳐 대아호에 이르는 741번 호반도로는 드라이브 코스로 소문났다.송화양조 songkwangsa.org,063)221-7047. # 제주의 과거를 맛보다,오메기술  무속신앙이 성행하던 옛 제주도에서 당신(堂神)에게 제사지낼 때 쓰던 술이 오메기술과 이를 맑게 증류시킨 고소리술이었다.‘오메기’라 부르는 좁쌀로 만든 떡에 누룩과 물을 넣고 밀봉해 두면 술이 빚어진다.제조과정에서 ‘청주’,혹은 ‘세주’로 물리는 맑은 술은 위로 뜨고,밑으로는 탁한 막걸리가 가라앉는다.이 막걸리가 바로 오메기술이다.  흔히 좁쌀막걸리라 불리는 오메기술을 제대로 맛보려면 성읍민속마을로 가야 한다.제주시내에서 간다면 1131번 도로변 마방목지(마방터)의 드넓은 초지에서 제주말을 구경한 뒤,삼나무길(1112번 도로)을 거쳐 산굼부리에 들르는 코스가 좋겠다.폐교에서 예술공간으로 재탄생한 두모악 김영갑갤러리도 성읍민속마을에서 가깝다. 성읍민속마을보존회 seong eup.net,064)787-1179.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자료제공 한국관광공사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애덤스 신부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애덤스 신부

    수많은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한국은 지구상 유례없는 ‘종교 천국’으로 회자된다. 그런데 요즘 이 말은 색이 바래고 있는 것 같다. 종교편향 시비로 불거진 불교계의 집단행동에 즈음해 종교간 갈등이 거론되고 자칫 분쟁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적지 않다. 때맞춰 많은 이들이 종교간 대화를 갈등 해소의 큰 방편으로 입에 올리지만 종교계 형편을 들여다보면 그리 녹록지 않다. 과연 한국의 종교들은 대화를 향한 진정한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일까. 한국의 종교, 특히 한국의 종교간 대화에 천착해 한국에 사는 푸른 눈의 사제가 있다.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사로 입국해 목포가톨릭대학에서 지난 9월부터 ‘인간과 윤리’강의를 맡고 있는 아일랜드 출신의 에몬 애덤스(41·한국명 임영준) 신부. 사제서품을 받은 천주교 성직자이지만 틈만 나면 절집들을 찾아 예불도 하고 주지 스님들과 차담을 나누며 불교 연구에 흠뻑 빠져 있는 별난 사제이다. ●전세방 책장엔 불교서적으로 빼곡 광주광역시 쌍촌동 고속버스 터미널 인근, 애덤스 신부가 사는 허름한 아파트 전세방엘 들어가니 책장에 빼곡하게 꽂힌 불교서적들이 시선을 잡는다. 인사를 나누면서도 연신 책장의 책들로 쏠리는 기자의 눈길을 알아챈 신부가 빙그레 웃는다.“두서 없이 덤벼들었더니 책도 뒤죽박죽입니다. 배우는 중이에요.” 겸손한 말과는 달리 깔끔히 정리된 손때 묻은 책들이 소문대로 예사롭지 않은 경지를 보여준다. 육조단경, 보조전서, 한국불교현대사, 한용운전집, 조선불교통사, 친일불교론, 민중불교탐구…. 성경과 천주교 교리서 대신 책장을 가득 차지한 불교 책들. 십자가나 성상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사제는 무슨 이력이 있길래 이토록 불교에 빠져 살까. 아일랜드 최북단, 인구 7000명 남짓한 소도시 출신.17살 나이에 성골롬반외방선교회에 입회, 더블린 서쪽의 메이누스 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사제서품을 받았다. 한국은 원래 원하던 땅이 아니었다고 한다. 신학대 재학 때부터 종교, 특히 불교에 관심이 많았고 일본불교를 알고 싶어 일본엘 가고 싶었다. 한국은 그저 ‘88올림픽 개최국’정도로만 머리에 있었다. 사제서품 후 선교회 총장 신부가 ‘한국과 파키스탄 중 택하라.’고 해 이왕이면 일본에 가까운 나라를 고른 것이 지금까지 한국에 살게 된 이유이다.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온 지 올해로 75년째.33명의 선교사가 한국에 살고 있지만 대부분 고령의 사제들이다.1994년 애덤스 신부가 입국한 뒤 한국을 택해 온 외국인 신부는 필리핀 출신 3명이 전부. 그나마도 모두 출국해 사실상 젊은 사제로는 애덤스 신부가 유일한 셈이다. ●반야경·금강경·화엄경 등 불경까지 통독 한국에 와 곧바로 연세대 서강대에서 한국말을 배운 뒤 광주대교구로 내려가 뉴질랜드 출신 선교사의 집에 얹혀살면서 한국불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도시빈민 사목을 했던 뉴질랜드 신부를 따라다니며 만난 불교 신자들에게서 한국불교를 보게 됐다고 한다. 그때부터 수소문해 대원사며 송광사를 찾아 몇 달씩 살았고 숭산 스님이 주석하던 서울 화계사에서 안거에도 들었다. 절집들을 찾아 만난 벽화며 주지 스님과의 차담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천주교 사제들이며 신자들의 눈총이 따가웠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나요. 빠져들수록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배워야 알지요. 종교간 대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 무렵입니다.” 결국 더 배우기 위해 영국 런던대로 유학을 떠났다. 아시아아프리카 학부에 들어 석사학위로 제출한 게 ‘부모은중경’이고 박사학위 논문은 ‘일제시대 한국불교의 혁신운동’이다. “막상 런던대엘 가니 한국불교란 눈을 씻고 봐도 눈에 띄지 않더군요. 일본, 티베트, 태국, 미얀마, 몽골의 불교가 다 있었지만 한국불교는 불모지였어요. 나 자신이 공부하려는 개인적인 욕심도 있었지만 한국불교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부모은중경과 한국불교 혁신운동을 택한 것이지요.” 불교 입문자의 필독서인 초발심자경문은 물론 반야경과 금강경, 화엄경을 통독한 실력이다. ●한국 종교 간의 대화 더이상 늦출 수 없어 2007년 2월 한국에 다시 들어와 광주대교구에 머물면서 본격적으로 사찰을 돌기 시작했다. 지금도 틈만 나면 대원사, 무등산 증심사를 찾아 사찰 구석구석을 들쑤시고 염불과 예불도 한다. 화·목·금요일 사흘은 목포가톨릭대 강의에 매달려야 하지만 나머지 시간은 모두 절집 순례며 종교간 대화 연구에 쏟는다. 주일 미사도 한 성당이 아닌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참석한다고 하니 분명 예사로운 사제는 아니다. 신·구교간 분쟁이 살벌한 아일랜드에서 피로 얼룩진 종교 테러와 살상을 보고 자란 사제에게 평화로운 한국 종교계는 당연히 큰 관심의 대상이었을 터. 그러면 과연 한국은 말대로 ‘종교 천국’일까. “유럽과는 달리 많은 종교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한국의 종교는 여전히 발전 가능성이 많은 게 사실입니다. 문제는 많은 신자들 사이의 갈등이 이미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지요.” 각각의 종교들이 다른 종교에 관여하지 않은 채 따로따로 잘살고 있지만 머지않아 상황은 크게 바뀔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종교간 대화를 더이상 늦출 수 없다고 힘주어 말한다. 영국으로부터의 분리, 독립과 맞물린 정치·역사적 상황에 개신교와 천주교가 편들어 가세하면서 복잡한 양상을 띤 아일랜드의 해묵은 종교분쟁. 종교간 대화라는 말을 꺼내기도 어색한 고향 아일랜드와 비교할 때 한국의 상황은 분명 천양지차일 것이다. 하지만 애덤스 신부는 요즘 흔한 한국종교계의 대화에 고개를 흔든다. ●선교는 강요가 아닌 행동으로 말해야 “그저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대화가 아닙니다. 진정한 대화는 상호이해와 관용에 바탕해 배우고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전제돼야 하지요. 지금 한국의 종교인들은 이런저런 합동행사를 갖고 왕래하지만 다분히 형식적이란 느낌을 갖습니다.” 대화를 하려면 남에게 가르치려는 대신 먼저 남을 배워야 한다는, 평범하지만 칼날 같은 한마디가 요즘 복잡한 우리 종교계의 혼돈에 얹혀 가슴에 콕 박힌다. 천주교 사제가 교육 과정에서 불교 원리와 사상을 배우고 불교 스님들이 기독교 교리와 성경을 배워야 한단다. 지난 8월 오대산 월정사에서 열린 교수불자대회에 불자 아닌 사제로 참석해 종교 본연의 기본으로 회귀해야 한다고 역설해 눈길을 끌었던 그다.“대부분의 종교가 원래 보수적인 속성을 갖지만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기독교가 불교 공부를 하면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신학 개념의 틀도 깰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종교의 역할은 개개인이 사는 보람을 찾고 넓은 마음을 갖도록 돕는 것”이라는 애덤스 신부. 선교사가 되고 싶어 신학대를 나와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사제의 길을 걷는 그가 생각하는 선교는 무엇일까. “다른 나라에 가서 우리 종교를 믿으라고 하는 게 선교사인가요? 모든 신자들이 다 선교사이지요. 적어도 나에게 선교사의 소임은 사회 속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믿는 것을 행동이나 말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제각각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자리를 인정하고 더 잘살 수 있게 한다는 믿음이 그 바탕이지요.” 다음 학기부터는 본격적인 종교 대화 관련 강의를 하게 될 것이라는 애덤스 신부, 아니 선교사가 품은 욕심은 강의 말고도 많다.‘해방후 한국불교의 혁신운동’ 논문도 써야 하고 한국 불교 27개 종단 소개책자도 영문으로 펴내려 한다. 요즘은 종교와 환경에 부쩍 관심이 많아졌다.2012년 여수엑스포를 계기로 종교와 해양을 연결한 국제학술회의 개최와 학회 조직도 벼르고 있다. “화엄경의 인드라망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세상은 모든 존재와 세계가 거미줄처럼 서로 얽혀 있다는 유기체 세계, 종교가 따라야 할 본연의 큰 가치는 바로 인드라망이 아닐까요.” 글ㆍ사진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애덤스 신부는 ▶1967년 아일랜드 출생 ▶1984년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입회 ▶1993년 메이누스 신학대 졸업, 사제수품 ▶1994년 선교사로 한국 입국 ▶1995∼1999년 광주대교구 도시빈민 사목, 한국불교 순례 공부 ▶1999∼2007년 영국 런던대 유학 ▶2007년 한국 귀환, 광주대교구 사목,‘한국 종교간 대화’ 연구 ▶2008년 9월∼ 목포가톨릭대학 출강
  • 靑 사회정책수석 사찰순방 왜?

    청와대 불교신자 모임인 청불회의 회장을 맡고 있는 강윤구 사회정책수석이 지난 6일부터 나흘 일정으로 호남 지역 유명사찰 순방을 시작했다. 휴가를 얻어 부인과 길을 나선 강 수석은 6일 지리산 자락인 경남 하동의 쌍계사를 찾은 데 이어 전남 구례 화엄사에서 하룻밤을 머물며 주지 종삼 스님을 만났다.7일엔 순천 송광사와 선암사, 그리고 해남 대흥사를 찾았다.8일엔 장성의 백양사와 영암의 도갑사를 찾아가고, 서울로 돌아오는 9일엔 전북 고창의 선운사와 김제의 금산사를 방문한다. 이를 두고 청와대와 불교계에선 최근 이명박 정부의 ‘종교 편향성 논란’ 속에 등을 돌린 불심(佛心)을 달래려는 행보가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청와대 관계자는 그러나 “전적으로 강 수석 개인의 휴가여행일 뿐 청와대의 뜻과는 무관하다.”고 선을 그었다. 강 수석의 측근도 “불심이 깊은 강 수석이 오래전부터 고향(영암) 부근의 사찰들을 돌고 싶어 했고, 이에 따라 이번에 휴가를 얻어 부인과 함께 여행 차원에서 사찰을 다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지난달 조계종 총무원장에 대한 경찰의 검문검색으로 불교계와 청와대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은 마당에 청불회장이 아무런 ‘정무적 고려’도 없이 한가하게 사찰여행을 다닐 것으로 보는 시각은 많지 않다. 강 수석이 찾은 한 사찰의 관계자도 “사회복지 문제와 더불어 현 정부의 불교 정책과 관련된 얘기도 잠시 나눴다.”고 말해 이런 시각을 뒷받침했다. 최근 조계종 총무원장 비서실장과 종정특보를 지낸 불교계 인사를 시민사회비서관실 행정관으로 긴급 투입한 것도 불심 달래기 행보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에 “사찰 방문이나 불교계 행사 참석 같은 단편적이고 대외과시적인 자세보다는 불교계에 보다 귀를 기울이고 정부의 진심을 내보일 때 불심과의 관계 회복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해 보다 신중한 자세로 불교계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할 뜻임을 밝혔다. 진경호기자 jade@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선화의 대가’ 수안 스님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선화의 대가’ 수안 스님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했던가. 이제 ‘그분’과 만날 시간이 왔다. 아침 찬물로 세수하고 맞이하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고 한다. 천지사방이 푸르름으로 가득하고 퍼붓는 정열의 햇살로 온통 찬란해진다.98세에 작고한 피천득 시인은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라고 찬미했다. 어디 이뿐이랴. 어버이, 스승,‘나를 닮은’ 아이들이 새삼 생각나게 한다. 그럴 것이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날, 석가탄신일, 성년의 날 등 기념적인 날들이 이어진다. ‘마음을 모아 고요히 생각하는 일’(禪), 그리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축하(奉祝)하는 일이 더욱 많아진다. 5월과 무관치 않은 한 스님을 만나보자. 곧 칠순임에도 여전히 ‘개구쟁이 어린이’처럼 지낸다. 무장무애(無障無), 아무 거리낌 없이 ‘하하하’ 크게 웃어대는 모습은 영락없는 천진한 부처 같다. 그는 어머니와 어린이들을 ‘말할 수 없도록’ 그리워해 그림(禪畵·선화)을 그리고 시를 쓴다. 내공이 워낙 깊은지라, 주위에서는 ‘선화의 대가’라고 칭송한다. 10년 전쯤이다. 스님이 양저우(揚州)박물관장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했다. 하루는 양저우시장이 저녁자리를 마련했다. 때마침 선화의 대가가 양저우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글씨와 그림에 관한 한 ‘무림의 고수’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장쩌민(江澤民) 주석의 어릴 적 은사도 참석했다. 술잔이 몇순배 돌고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중국의 한 원로화가가 붓을 잡더니 즉석에서 물소그림을 그렸다. 이어 그 화가는 붓을 한국의 스님에게 건넸다.‘화답’을 청했던 것. 뒤질세라 스님은 주먹쥐듯 네 손가락으로 붓을 잡았다. 원래 악필(握筆)인 스님은 창호지에 원을 그리고 점을 몇군데 쓱쓱 찍었다. 불과 몇분 후 붓을 내려놓자 약속이나 한 듯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발그레한 볼에, 미소짓는 복덩이 동자상이었다. 양저우시장이 즉석에서 “공부 잘하도록 우리 아들 방에 걸어놓으면 너무 좋겠다.”고 하자 스님은 기꺼이 선물했다. 그러자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줄을 섰다. 스님은 이날 밤 새도록 붓을 잡았다. 스님과 관계된 일화는 많다. 프랑스 상원의장 초청으로 뤽상부르궁전 의장공관에서 전시회를 열어 프랑스와 우리나라 화가들을 놀라게 했다. 이밖에도 베를린, 카사블랑카, 남미 등 세계 각지의 유서 깊은 도시를 돌며 전람회를 열어 많은 화제를 뿌렸다. 얼마 전에는 유니세프(UNICEF)에서 발행하는 엽서에 그의 작품이 소개되기도 했다. 스님을 만나기 위해 한국을 찾는 해외팬들도 적지 않다. 법문 스타일도 독특하다. 야단법석(野壇法席)에서 마무리할 때 ‘우리의 소원은 성불’을 불러 신도들을 울리기도 한다. 국내 불교계에서는 중생을 연민하고 구제하는 일에 남달라 ‘관세음보살’이라고 표현한다. 스님이 머물고 있다는 통도사(通度寺)의 축서암(鷲棲庵)을 찾았다. 조선 숙종 때 창건된 암자로 영축산(靈鷲山·혹은 영취산)의 옛 이름 축서산에서 비롯된다. 400여년이라는 축서암의 세월 가운데 근래 30년을 문제(?)의 스님이 살아서인지 축서암은 거대한 화실처럼 느껴졌다. 마당 한가운데에는 붉게 핀 자목련이 원숙한 여인처럼 금방이라도 유혹할 듯 낯선 손님을 맞이한다. 암자 뒤로는 온갖 푸른나무들이 병풍처럼 쭉 늘어서 넋을 놓게 했다. 그렇게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기자양반인가? 읍내(서울)에 훌륭한 분들이 많은데 촌구석까지는 뭐할라고 왔노.”라는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가 들려온다. 선화의 대가 수안(殊眼) 스님이었다. “차나 마시고 가게.” 합장을 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쥐 두마리가 ‘입춘대길’이라는 글을 떠받치는 그림이 창문에 붙여져 있었다. “왜 ‘수안’이라고 했습니까?” “내 속가의 성이 ‘문(文)’이야. 그리고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수(殊)에다 ‘문수의 안목을 키워라’해서 안(眼)을 넣었지.” “만화방창, 이 봄에 유혹을 느끼지 않나요?” “허허허, 봄이 되면 관광버스 타고 놀러가는 사람들 많지.” 연근차 몇잔을 마셨다. 스님은 평소 길을 떠날 때 차보따리를 끼고 다닌다. 스님이 마실 차, 그리고 스님과 만날 사람을 위한 차를 준비한다. 그게 바로 풍류의 시작이다.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진수무향(眞水無香)의 ‘풍류차’를 권하면서 ‘어차피 인생살이가 다반사(茶飯事)이지요.’라고 한다. 차를 마시던 스님이 갑자기 기자의 얼굴을 보더니 “어라, 머리만 안깎았군.”이라고 했다. 전생이 스님인가? “호 하나 지어주랴? 고을 제(濟)에서 삼수는 빼버리자, 그리고 산에 기대 살아야 하니 산(山)을 넣어 제산(齊山)으로 해삐리라.‘재산’으로 들릴 수도 있으니 기분이 좋다. 하하하.” 얼핏 ‘개구쟁이 스님’의 장난기로 들려올 법도 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토굴생활 등 혹독한 수행으로 ‘대긍정(大肯定)’의 경지까지 오른 ‘큰스님’의 말씀 아닌가. “대긍정은 어떤 것인가요?” “별거 아니야, 긍정과 부정도 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야. 부정이 많다 보면 그림자가 많아져. 캄캄한 방에 전깃불 켜는 것도 수행이지. 스위치 하나로 어둠과 밝음, 즉 긍정과 부정이 생기거든. 흐르는 물이 굴곡을 탓하는 거 어디 봤는가?” “요즘 세상을 어떻게 보십니까?” “너무 바빠, 그렇게 살 필요 없어. 별로 들 것도 없으면서 왜 무겁게 짊어지고 쫓기면서 살아? 아나 다 놓아삐리라. 집착은 곧 노예인 것이야. 장독대에서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하는 어머니를 생각해봐. 요즘은 어머니도 고향도 다 잊고 살아가. 지혜는 없고 지식과 정보의 노예로 다들 전락했어. 그러니까 고급인력들이 빈둥빈둥 놀고 자빠졌지.” 스님의 시 중에 ‘사모곡’이 있다.‘누가 지었을까 어머니 이름 석자/기쁠 때 불러도 어머니 슬플 때 불러도 어머니/아무리 불러도 싫지 않은 그 이름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아기가 됩니다.’ 스님은 ‘진리는 곧 어머니’라고 강조했다. 스님은 ‘자비원’을 통해 무의탁 노인을 돕는다. 또 부산 지역 지체장애아동들에게 매년 휠체어 100대씩 사서 선물하는 등 수십년째 선행을 베풀고 있다. 길을 가다가 거지를 만나면 주머니를 뒤져 몇푼의 돈을 꺼내 건네주는 일도 다반사이다. 스스로 ‘수행화가’라고 표현하는 그는 17세 때 출가 직후부터 석정 스님을 스승으로 전각과 선화를 익혔다. 그의 그림은 어린이, 어머니, 초가집 등 토속적 냄새가 짙게 담겨 있다. “출가한 지 50년 됐습니다. 그동안 후회해 본 적이 한번도 없었나요?” “비바람이 부는데 파도가 안 일어날 물이 어디 있겠어. 성불하려면 비워야 해. 가득차 있으면 뭘 담겠나?” 인터뷰를 마치면서 석가탄신일을 맞아 법문 하나를 정중히 부탁했다.“춘래초자청(春來草自靑), 봄이 오면 풀이 절로 푸르기 마련인데 괜히 욕심 보탤 거 없어. 심청사달(心淸事達)이야. 마음이 맑으면 모든 일이 잘 풀려. 부정과 긍정도 다 흑백논리야. 최선을 다해도 나중에 부끄러운데 눈속임을 하면서 살면 얼마나 영혼이 부끄럽겠나. 내 자식이 귀하면 이웃 자식도 귀하고, 사회와 국가도 귀하지 않겠나?”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 수안 스님은 1940년 경남 통영에서 출생,57년 석정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64년 월하 스님에게 비구계 수지하고 이후 통도사 송광사 백련사 묘관음사 등에서 수선안거에 정진했다. 77년 이리역 폭발사고 때 이재민돕기 선화전을 열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후 85년 파리 초대전,86년 중앙승가대건립기금마련 전시회,89년 두달간 유럽순회전 등 유럽과 러시아, 남미 등에서 전시를 가져 독특한 수행력을 과시했다. 특히 불우어린이와 장애인, 무의탁노인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내놓는다. 그림전시도 ‘중생돕기’ 차원이다. 이달 초에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세상을 담는 그릇-발우전’에 공동전시를 가졌다.
  • “삶 통해 보면 과학·종교는 보완관계”

    “삶 통해 보면 과학·종교는 보완관계”

    과학자가 종교 경전을 강의한다. 우희종(50) 서울대 수의학과 교수가 주인공이다. 우 교수는 광우병 전문가다. 같은 대학 같은 학과의 황우석 교수와 이병천 교수가 각각 줄기세포 논문 조작사건(2005년)과 늑대복제 논문 오류사건(2007년)을 일으켰을 때 ‘생명과학의 비윤리적 질주’에 일침을 가했고, 한·미FTA 협상 전후로는 광우병 쇠고기 수입 가능성을 경고하며 문제를 제기했다. 일본 도쿄대 생명약학 박사 출신으로 과학자의 길을 걸어온 그가 8일부터 불경과 성경을 강의한다. 강의는 ‘경전과 선(禪)-일상의 아름다움을 찾아서’란 제목으로 서울 역삼동 정신과학문화원에서 매주 한 차례(토요일)씩 6개월간 진행된다. 단계별로 금강경(입문반), 육조단경·유마경(심화반), 신약성경·화엄경(활용반) 등을 공부하되, 강의 후엔 30분간 좌선 시간도 갖는다.“경전 강의는 단순한 글자 풀이로 그치지 않고 개인의 삶과 그가 직면한 현실과 철저히 연계해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다. 우 교수가 경전강의를 할 만큼 탄탄한 내공을 갖게 된 데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미국에서 귀국한 후 부인과의 이혼으로 극심한 심적 혼란을 겪었던 그는 송광사 현전 스님의 문하에 들어가 ‘무(無)’자 화두를 받아들고 참선에 몰두했고,‘여산’이란 법명까지 얻었다.2000년부터 5년 동안 서울 신림동 정혜사에서 매달 한 번씩 법회를 주관하며 고시생들에게 경전을 강의하는가 하면, 경기도 안양 정심여자정보산업학교의 불교반도 10여년째 지도해 오고 있다. 우 교수 강의의 초점은 ‘도그마 극복’이다. 그는 과학과 종교라는 이질적인 두 영역 사이에 ‘인간의 삶’이란 다리를 놓는다. 그는 “과학과 종교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만 삶을 통해 바라보면 둘의 관계는 극과 극이 아니라 보완적 관계임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과학과 종교간 대화를 통해 과학이든 종교든 어느 일방을 맹신하는 데서 오는 오류를 피할 수 있는 훈련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우 교수는 “우리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한다고 믿었던 과학적 사실이나 종교적 진리는 시간이 흐른 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거나 관점에 따라 다르게 이해될 수도 있다.”면서 “열린 마음과 다양성 인정만이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우 교수는 “과학도 종교도 부분에 집착할 땐 오류에 빠진다.”면서 “황우석·이병천 사태 또한 생명이란 전체가 아닌 학문적 업적이란 부분에 집착한 나머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든 사례”라고 지적한다.(02)538-7871.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길섶에서] 산불 친구/염주영 논설실장

    조계산 한자락을 깔고 앉은 송광사. 우린 매표소 뒤쪽 소나무 숲에서 야영을 했다. 이튿날 부랴부랴 짐을 꾸려 산행길에 올랐다. 점심 무렵 정상을 넘어 선암사 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오다 그만 등산로를 놓쳤다. 진작 선암사가 나타나야 할 시간인데 이름 모를 야산을 헤매고 있었다. 산중 겨울 해는 금방 넘어간다. 체력이 소진되고 주위가 어둑어둑할 무렵 저 아래 작은 마을이 보였다. 이리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긴장이 한순간에 풀렸다. 발 아래 토끼굴을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등산용 도끼를 꺼내들었다. 주위 덤불을 긁어모아 토끼굴 입구에 불을 놓았다. 얼핏 산불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욕심이 눈을 가렸다. 불은 바람처럼 번졌다. 온마을 사람들이 동원되고도 자정이 지나서야 불길을 잡았다. 소나무 수백그루가 탔다. 마을 지서에서 방화범으로 조사를 받았다. 다행히 대학생 신분이 감안돼 무죄로 방면되긴 했지만. 정월 보름마다 극성을 부리는 산불 기사를 읽다가 30년도 더 지난 옛일을 떠올려본다. 그 친구가 그립다. 염주영 논설실장
  • [사라진 숭례문] 방재시설 전무…화재 속수무책

    국보 1호 숭례문의 붕괴는 화재위험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국내 목조 문화재의 방재관리 허점을 그대로 드러냈다. 소방설비 설치 등을 강제하는 세부규정이 없는 현행 문화재보호법으로는 목조문화재들이 사실상 화재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돼 있었던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소방설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화재에 대처하지 못하는 문화재가 부지기수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숭례문 참사 이전에도 화재로 심각하게 훼손된 문화재들은 이미 많았다. 쌍봉사 대웅전, 낙산사, 수원화성 서장대, 창경궁 문정전 등은 대부분 목재 건축물인 데다 숭례문의 경우처럼 문화재 훼손을 우려해 적극적 진화장치를 해놓지 못했다. 문화재 원형을 보존해야 한다는 원칙에 화재예방 장치 설비가 어려웠고, 그로 인해 방재관리는 오히려 일반건물보다 더 취약했던 셈이다. 그나마 목조문화재 방재 대책 마련 움직임이 일어났던 것은 지난 2005년 4월 낙산사 동종이 화재에 소실된 이후. 문화재청은 지난해 직원 10명으로 문화재 안전과를 신설해 문화재 재난 방지 등을 전담케 하고 있다.2006년 실시한 중요목조문화재 방재시스템 구축 연구용역 결과를 토대로 중요 목조문화재 방재시스템 구축사업을 연차적으로 추진 중이다. 문화재청이 예산을 배정하면 시·도 지방자치단체에서 사업을 시행하는 구조로, 지난해 총 15억원의 예산을 들여 해인사, 봉정사, 무위사, 낙산사 등 4곳에 수막설비와 경보시설 등을 설치했다. 그러나 목조문화재 방재의 제도적 수준은 여전히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올해 관련 예산은 18억원. 숭례문도 우선 방재시설 구축대상인 중요 목조문화재 124개에 포함됐으나, 산불 위험이 높고 소장 문화재가 많은 사찰 문화재 등에 밀려 순위가 48번째로 밀려 있었다. 문화재 관계자들은 “전국의 주요 목조문화재들은 관리주체마저 불명확해 유사시 대처능력이 형편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숭례문과 비슷한 구조의 수원 팔달문과 장안문에도 소화전이 도로에 설치돼 있어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수원시 화성사업소 관계자는 “목조에 불이 붙으면 건물내부에서 진화해야 하나, 소화전이나 스프링클러를 규정상 설치할 수 없어 진압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1호인 남한산성내 수어장대의 방재시설은 소화기 몇대가 고작. 최근 도립공원 관리주체가 광주시에서 경기도로 이관되면서 책임소재조차 모호해졌다. 지방의 형편은 더 심각하다. 전남도의 경우 목조문화재는 무려 303개동. 여수 진남관, 송광사 국사전, 화엄사 각황전 등 5점이 국보이나, 이들 건물안에는 화재진압 장치가 전무하다. 전등사, 보문사 등 문화재급 지방사찰들의 방재시설도 모두 사찰이 자체 관리하는 데다 간이 소화기만 배치된 수준이다. 서동철 김병철 기자 dcsuh@seoul.co.kr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43)김시습과 만복사 석불입상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 (43)김시습과 만복사 석불입상

    매월당 김시습(1435∼1493)처럼 전국 곳곳에 흔적을 남겨 놓은 옛사람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매월당이 최후를 마친 충남 부여 무량사에는 그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는 부도가 있습니다. 무량사에는 그의 초상화도 영정각에 모셔져 있는데, 유·불·선(儒·佛·仙)을 넘나든 이 사상가가 이곳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선사(禪師)로 대접받았음을 뜻합니다. 최근 매월당의 관향(貫鄕)이자 어머니의 시묘살이를 했던 강릉의 경포대에는 김시습기념관이 문을 열었습니다. 율곡 이이가 신사임당을 어머니로 태어난 오죽헌이 지척이지요. 율곡은 선조의 명으로 매월당의 전기를 짓기도 했으니 이래저래 인연이 깊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은 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키고,1455년(단종 3년) 마침내 보위에 오르자 책을 불사르고 방랑을 시작합니다. 그는 모두 2200편에 이르는 시를 남겼습니다.‘유관서록(遊關西錄)’과 ‘유관동록(遊關東錄)’,‘유호남록(遊湖南錄)’,‘유금오록(遊金鰲錄)’은 일종의 기행연작시이지요. 시의 제목을 훑어가다 보면, 전국적으로 그의 발걸음이 닿은 곳보다 닿지 않은 곳을 찾는 편이 오히려 빠를 지경입니다. ‘유금오록’은 김시습이 30대 시절, 오늘날에는 남산이라는 이름으로 친숙한 경주 금오산에서 지은 것입니다. 짐작처럼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 소설인 ‘금오신화’도 그가 금오산 남쪽 용장사에 머물고 있을 때 썼습니다. ‘금오신화’는 5편의 단편 소설을 모은 것으로,‘만복사 저포놀이(萬福寺樗蒲記)’도 그 하나이지요. 저포란 나무로 만든 일종의 주사위를 던져서 승부를 겨루는 중국 놀이라고 하는데, 우리식의 윷놀이도 한자로는 저포라고 적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만복사는 전북 남원의 기린산에 있었던 절입니다. 지금도 남원시내에서 순창으로 가는 길가에서 절터를 찾을 수 있습니다.‘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문종(1019∼1083) 때 창건된 것으로 전하지요. 탁발을 마치고 만복사로 돌아가는 스님의 행렬(萬福寺歸僧)이 ‘남원 8경’의 하나로 꼽혔다는 얘기가 전설처럼 전하고 있습니다. ‘만복사 저포놀이’는 양생(梁生)이란 노총각이 만복사를 찾아가 부처님과 저포놀이를 하여 이기고는, 소원대로 불공을 드리러 온 처녀를 만나 이승의 3년에 해당하는 꿈 속 같은 3일을 지내고는 헤어진다는 내용입니다.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던 처녀는 왜구의 난리를 만나 죽임을 당한 혼령으로, 이후 양생도 다시 장가들지 않고 지리산에서 약초를 캐며 살았다고 했습니다. 만복사는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모두 불탔다는 기록이 전합니다. 하지만 이보다 100년도 훨씬 전에 씌어진 ‘만복사 저포놀이’에 벌써 ‘이미 퇴락하여 스님들은 한쪽 구석진 방에 머물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퇴락의 원인도 왜구의 침입이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만복사에는 창건 당시 조성된 석불입상이 하나 전하고 있습니다. 원만하고 양감있는 얼굴과 유려하고 굴곡있는 신체 곡선이 자연스럽습니다. 전체 높이가 2m라지만 대좌와 광배를 제외하면 부처님은 사람키와 비슷하지요. 저포놀이를 하자는 양생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 같은 친근한 모습입니다. 매월당은 세조 8년(1462) 여름을 순천 송광사에서 보내다 남원으로 발걸음을 옮겨 ‘광한루에 오르니 피리소리 들리다’는 시를 남겼습니다. 아마도 그는 이 때 만복사에 머물며 지금은 보물 43호로 지정된 이 석불입상을 만났을 것입니다. 춘향과 판소리의 고장에서 뜻밖에 ‘금오신화’의 주인공과 마주치고, 매월당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즐거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dcsuh@seoul.co.kr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4)강화 연등국제선원 지도법사 일조 스님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4)강화 연등국제선원 지도법사 일조 스님

    강화의 연등국제선원(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길직리 85-1)은 한국불교에 귀의한 외국인 스님들이 모여 사는 특이한 곳이다. 지금은 대부분 다른 선방과 고향을 찾아 잠시 떠나 두 명만이 선원을 지키고 있지만 평소엔 10여명의 외국인 스님이 각자 소임을 맡아 절집 살림을 꾸리고 수행에 매진하는 이색공간. 이곳에 가면 외국인 템플스테이며 일반인 참선을 지도하느라 늘상 분주하게 움직이는 눈 푸른 스님이 단연 눈에 띈다. 한국 불교계의 웬만한 스님들이 다 이름을 알 정도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 러시아 출신 지도법사 일조(日照·34·본명 표트르 가브릴렌코) 스님. 한국에 출가한 외국인 스님 가운데 ‘어렵다 못해 혹독하다.’는 서슬 퍼런 강원과 율원 과정을 가장 먼저 마치고 비구계를 받은 푸른 눈의 납자(衲子)이다. “한국불교를 제대로 배우자.”며 한국으로 출가해 이젠 여느 한국인 스님과 다를 바 없이 ‘한국 스님’이 다 된 일조 스님. 그에게 한국은 배움의 땅이자 소신의 실천처이다. 일조 스님은 시베리아 철도의 지선이 통과하는 러시아 중남부 도시 케메로보에서 태어난 옛소련 출신. 직장을 옮기게 된 아버지를 따라 중앙아시아 북부 키르기스스탄으로 4살 때 이주해 살아 러시아와 키르기스스탄의 이중국적자 신원이다. 비록 국적은 한국이 아니지만 1998년 한국불교에 귀의한 뒤 9년간 줄곧 한국에 몸과 마음을 바쳐 살아온 자칭 타칭 ‘한국인’이다. 한국에 사는 뭇 외국인들처럼 일조 스님, 아니 표트르도 한국과는 참 인연이 깊은 사람이다. 어쩔 수 없이 한국에서 불제자의 길을 걷도록 예정되어 있었던 것일까.16살 때 우연히 읽은 한 권의 종교서적이 한국과 맺은 인연의 시작이다. 러시아인이 쓴 ‘무신론자’란 제목의 일종의 종교 사전이자 종교 비방서. 옛소련 종교를 탄압하던 시절 발간되어 기독교를 비롯해 불교, 도교, 유교 등 모든 종교를 짤막짤막하게 개괄한 책이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스님은 책의 의도와는 달리 불교 부분을 읽고 ‘큰 발견’을 한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모두 독실한 정교회 신자이며 자신 역시 정교회의 의식을 따라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침수세례를 받았다는 일조 스님. 그는 모두 다르게 태어나는 중생의 성격과 신분 차를 짓는 근본 원인이 몹시 궁금했다. 그런데 책 ‘무신론자’중 ‘과거 지은 업에 따라 태어난다.’는 구절에 마치 큰 숙제를 푼 것만 같아 말할 수 없이 기뻤단다. 세상의 어느 가르침과 교훈에서도 찾을 수 없었던, 나름의 답을 찾았다고나 할까. 일반인이라면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이른바 윤회의 ‘업(業)’에 신경을 이었으니 분명 예사 사람은 아니다. 그 이후로 늘상 불교와 ‘업’을 머릿속에 넣고 살다가 일종의 예비대학을 졸업하고 키르기스스탄의 수도 비슈케크 지역 군(軍)에 입대해 소위로 군 생활을 하던 중 결정적인 계기를 맞았다. 지역 신문에서 비슈케크에 한국 사찰 ‘보리사’가 들어선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마치 오래 기다렸던 그 누군가를 만난 듯 설다고 한다.1992년의 일이다. 당시 보리사 개원식에 참석한 은사 원명(2003년 입적) 스님을 만난 것도 그때였다. 대학에서 지리학을 전공한 학력을 인정받아 장교로 근무한 때문에 병영생활은 비교적 자유로웠다.6년간 보리사를 다니며 일요일 법회에 꼬박꼬박 참석한 것은 물론 평일에도 가끔씩 찾아 법문을 듣고 절집 일도 돕고 참선을 이어갔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보리사는 고려인과 현지인 30명 정도가 법회에 참석할 만큼 보잘것없는 포교원. 불교를 제대로 알고 싶었지만 영 맘에 차지 않았다. 언어 소통도 그렇고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았다. 조금이나마 한국불교에 더 다가가기 위해 비슈케크 인문대학에 입학해 아시아역사와 한국어, 한문을 파고들었다. “대학 3학년 1학기를 마쳤는데 한국의 원명 스님에게 연락이 왔어요. 머물 곳이 있으니 강화 연등선원으로 오라는 전갈이었지요.” 모든 것을 버린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연등선원으로 들어왔다.1998년 연등국제선원이 막 개원했을 때의 일이다. 연등국제선원은 성철 스님의 상좌(제자)인 원명 스님이 서울 안국동에서 외국인 대상의 포교원격으로 운영하던 국제불교회관 개원 10주년을 기념해 세운 선원. 현 선원장 겸 주지 원유 스님은 원명 스님의 맏상좌이자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한 한국인 스님이다. “처음 연등선원에 왔을 때 체코 스님과 한국인 스님 한분을 빼곤 도무지 사람 구경을 할 수 없었어요. 정말 아무 것도 모른 채 무서울 만큼 갇힌 상태에서 행자생활을 했지요. 그러던 중 선원을 찾은 한 스님의 ‘공부 제대로 하려면 송광사로 가라.’는 말에 솔깃한 것이지요.” 행자생활 1년을 마치고 절집 살림을 꾸리는 원주 소임 1년째였다.“한국 스님들과 몸을 부대끼며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란 생각에 송광사 강원으로 가기 위해 봇짐을 쌌다. 함께 수행하던 스님들이 “틀림없이 중도에 포기할 것”이라며 “못 견디면 언제든지 연등선원으로 돌아오라.”는 말과 함께 봇짐을 챙겨주었다고 한다. 강원 공부는 한국인 스님들도 절반가량이 도중에 포기할 만큼 어려운 과정. 일조 스님과 함께 공부를 시작한 한국인 동기 스님 37명 가운데 16명만 졸업을 했다고 한다. 이를 악물고 치문, 사집, 사교, 대교의 4년과정을 견뎌냈다. 한국어가 서툰 데다 생활방식도 다르고 선배들이 너무 무서워 눈칫밥을 먹고 잠 자는 것은 물론 숨쉬는 것도 수행의 연속이었다. 하루 다섯 시간 잠을 자지만 선배들에게 불려가 밤새도록 엄한 참회(일종의 단체기합)를 받거나 절을 하느라 꼬박 밤을 새운 날도 부지기수. 가장 낮은 과정인 치문 때는 화장실 청소며 밥짓기 같은 힘든 소임도 도맡아야 했다. 강원을 졸업한 2004년 마침내 원명 스님을 은사로 비구계를 받아 정식 스님이 됐지만 내쳐 송광사 율원에 들어 2년간의 힘든 과정을 마치고 ‘제2의 고향’인 이곳 연등선원에서 뜻을 펴고 있다. “나는 대수롭게 인터뷰할 사람이 못된다.”며 묵묵히 차를 따르던 스님이 은사 스님의 유언을 불쑥 꺼낸다.“세상 만사 모두 헛되니 오직 수행에만 정진하라.” 한참 공부에 빠져 있던 송광사 강원 학승시절, 병중의 원명 스님이 마지막 대면에서 남긴 한마디는 거역할 수 없는 생활의 처음이자 끝이 되어 있는 듯했다.“인생에서 마음공부를 할 수 있는 친구를 만나는 것만 해도 큰 행운인데 나는 큰 스승을 만났으니 선택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많은 불교 가운데 한국불교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중국불교는 원 속성을 잃은 채 명맥만 유지하고 있고 일본불교는 정통의 수행방식에서 비켜났지요. 티베트 불교가 밀교성격의 복잡한 의식에 치우쳤다면 남방의 소승불교는 보살사상이 빠졌습니다.” 오랜 공부 때문일까 스님의 입에선 온갖 불교의 속성들이 술술 풀어진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를 존중하는 ‘중생’개념과 내가 아닌 모든 중생을 돕기 위해 산다는 ‘보살사상’이야말로 대승 한국불교의 핵을 이루는 백미가 아니냐고 묻는다. 무릇 불가에 귀의한 모든 중생들의 귀착점은 ‘아누다라 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일 터.‘더 이상 갈 곳 없는 최고의 완벽한 깨달음의 경지’를 향한 수행이야말로 일조 스님에게도 예외없이 가장 큰 목표일 것이다. 그런 스님에게 지금 할 일이 너무 많다. “‘보살행’의 큰 가르침을 오롯이 담은 한국불교의 제 가치를 만방에 알리는 것이야말로 나에게 주어진 큰 업(業)입니다.” 그래서 안거(案居)가 아닌 산철엔 틈날 때마다 러시아며 우크라이나 등지의 한국 사찰을 돌며 참선지도와 법회를 이끈다. 외국인들에게 한국불교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 틈틈이 전통의 한국불교 수업기관인 강원·율원 등의 교육시스템 안내 책자 짓기와 번역작업에도 매달린다. “죽을 날을 생각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중생일수록 속된 것들과의 반연(攀緣·집착)을 버리지 못한다.”는 일조 스님.“부처님이 되는 성불(成佛)은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모두 버려가는 과정인데 아직도 이렇게 버릴 것이 많으니 부처님 되기엔 아직 멀었다.”며 선원 문을 나서는 기자에게 두 손을 모았다. 강화 글 사진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일조 스님은 ●1973년 옛소련 케메로보 출생. ●1977년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로 이주. ●1992∼1997년 비슈케크 한국사찰 보리사 신도로 활동. ●1998년 한국행, 강화 연등국제선원서 출가. ●2000년부터 4년간 송광사 강원생활. ●2004년 원명 스님을 은사로 비구계 수지. ●2004년부터 2년간 송광사 율원생활. ●2006년 송광사 율원 졸업 및 러시아 등지 만행. ●현재 강화 연등국제선원서 선원장 원유 스님을 도와 내외국인 상대로 참선지도 중.
  • [종교플러스] 조계총림 방장후보 선출 총회 31일 개최

    조계종 제21교구본사 조계총림 송광사는 ‘조계총림 방장후보 선출’을 위한 산중총회를 오는 31일 오후 2시 송광사 사자루에서 개최한다.총회 소집대상은 ▲비구계 수지 후 5년이 넘은 21교구 재적스님 ▲임명 후 1년 이상 된 본사 국장급 이상 종무원 비구스님 ▲21교구 관할 말사 주지인 비구ㆍ비구니스님 등이다.
  • “재물은 이 生에서 잠시 맡은 것일 뿐 가진 것 없다고 불행해하지 마세요”

    “저것은 저 사람 몫이고, 내 몫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하라. 남과 비교하지 말라.” 침체된 경기, 불안한 금융시장 탓에 고민이 쌓여가는 요즘 ‘소유하는 만큼 얽힌다.’라며 ‘무소유’의 삶을 강조해 온 법정 스님의 말씀은 더욱 가치있게 느껴진다. 전남 순천 조계산에 있는 송광사 불일암(佛日庵)에서 지난 16일 법정 스님을 만났다.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국내 증시가 사상 최대의 낙폭을 기록한 날이었다. 스님은 “재물은 이 생(生)에서 잠시 지니는 것일 뿐 내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증시 폭락으로 가슴이 무너져 내렸을 많은 개인투자자들을 염두에 둔 말씀은 아니다. 하지만 재물 손실로 가슴앓이를 하는 이들에게 큰 의미가 있는 가르침이었다. 이날 스님을 찾아간 것은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하안거 기간 중 잠시 불일암을 찾은 스님을 방문하기로 한 친구가 있어 따라 나선 것이다. 간편한 모시 승복 차림의 스님과 2시간 가까이 나눈 대화에는 소중한 가르침이 그득했다. 이날 스님의 말씀을 간추린다. ●저 사람 몫은 저만큼… 내 몫은 이것뿐 ▶사람의 소유욕은 끝이 없습니다.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살려는데 쉽지 않습니다. -소유의 단계를 거쳐 봐야 무소유의 의미를 진정 깨닫게 되는 법입니다. 하지만 소유를 하더라도 마음이 재물에 얽매이면 안 돼요. 재물이란 잠시 이 생에서 내가 맡은 것일 뿐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 재물이 많다고 부러워할 것 없고, 내가 가진 것이 부족하다고 불행해 해서도 안 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마세요. 비교하면 불행해져요. 이만큼이 내 몫이고, 저 사람 몫은 저만큼이라고 생각하세요. ▶실천이 어렵습니다. 거스를 수 없는 팔자와 운명을 탓하게도 되고…. -팔자니, 운명이니, 살(煞)이니 하는 따위는 믿지 마세요. 점쟁이한테 찾아가서 돈 주고 팔자가 안 좋다는 말 듣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을까요. 그런 것 모두 털어 버리세요. 지금 현재에 충실하면 되는 것입니다.‘지금 불행한가?’ 하고 자신에게 물어보고 그렇지 않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겁니다. 화나고 속상한 일들을 끌고 다니면서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소중한 자신의 삶을 위해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세요. 스님의 조촐한 살림살이가 있는 불일암은 송광사 뒷산의 대나무밭 오솔길을 따라 20여분 오르면 나온다.20년 전부터 이곳을 거처로 삼아 칩거하던 스님은 몇해 전부터는 강원도 오대산의 오두막에서 혼자 생활한다.3개월에 한번 정도 불일암에 내려와 며칠 머물다 간다. 스님이 안 계신 동안에는 건법 스님과 상좌 스님 한 분이 알뜰하고 깔끔하게 불일암을 가꾼다. 후박나무와 태산목 등 키 큰 나무들이 믿음직스럽게 스님의 거처에 그늘을 드리우고 양지바른 텃밭에는 가지·고추·토마토가 햇볕을 받아 영글어 가고 있었다. ▶텃밭이 예전에도 있었나요? -전에는 제대로 가꾸질 않았지요.‘태평농법’이라면서 방치했지. 말이 좋지, 그건 게으른 사람들이 지어낸 말이에요. 소중한 흙에게 미안한 일이지. 사람은 자나 깨나 부지런해야 해요. 그렇지만 너무 바지런해도 폐가 됩니다. ●향기 나는 사람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을 법정 스님은 은은한 향이 좋다며 건법 스님이 곁에서 정성껏 준비한 황차를 권한다. “차(茶)나 꽃은 냄새라고 하지 않고 향기라고 하지요. 사람도 냄새가 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향기 나는 사람이 있어요. 사악한 사람한테서는 끈적하고 지독한 냄새가 나요. 씻지 않은 사람한테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처럼 말예요. 나쁜 냄새와 기운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겁니다. 언제나 정갈하고, 향기 나는 사람이 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서는 아름다운 향기가 나지요.” 출가 51년째. 올해 75세인 스님은 강원도에서 송광사까지 7시간을 손수 운전한다.“어제 저녁 후박나무 아래 있어 보니 가을이 코 끝으로 느껴지더라.”던 스님은 불일암을 등지고 또다시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떠났다. 순천 함혜리 논설위원 lotus@seoul.co.kr
  • 山寺체험

    山寺체험

    ‘휴가철 산사 체험도 맞춤시대’ 여름 휴가철을 맞아 전국의 산사들이 다채로운 수련과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 손님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산사들은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통적인 수련회 형식으로 신행 차원에서 신도들을 맞았으나 일반인들의 발길이 늘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앞다투어 개발해 내놓고 있다. 기존의 수련회를 바탕으로 템플스테이, 단기 출가, 참선 명상, 다도에 이어 한문 학당, 심지어는 영어 캠프까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올 여름 휴가기간에도 1박2일, 혹은 2박3일 일정의 가족용 주말 프로그램부터 7박8일간의 단기 출가가 전국 사찰에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우선 구례 화엄사, 순천 송광사, 장성 백양사,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 부산 범어사 등 대규모 사찰들에선 전통적인 수행 중심의 템플스테이가 어김없이 진행된다. 가장 흔한 프로그램은 전통사찰에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느끼고 체험하는 템플스테이. 그 내용도 종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부안 내소사는 매주 주말 트레킹을 겸한 생태체험 행사를 진행하며, 보성 대원사와 서산 부석사는 매주 주말 휴식형 템플스테이를 이어간다. 경주 골굴사의 ‘선무도 주말 템플스테이’를 비롯해 김천 직지사, 경주 기림사, 동해 삼화사 프로그램도 언제나 참여할 수 있는 휴식형 템플스테이다. 도심과 도시 인근 사찰들이 마련하는 선(禪) 수련회나 템플스테이 프로그램도 늘고 있다. 서울 길상사가 매월 넷째 주말에 운영하는 ‘선수련회’, 고양 흥국사가 매월 첫째·셋째 토요일에 진행하는 주말 템플스테이가 대표적인 예. 서울 조계사가 매월 마지막주 토요일 운영하는 ‘템플라이프’와 서울 묘각사의 ‘내마음 내려놓기 템플스테이’처럼 외국인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적잖이 눈에 띈다. 연령층과 대상을 살피거나 사찰의 특성을 살린 프로그램도 인기를 더하고 있다. 인천 강화국제연등선원의 ‘청소년 영어 캠프’와 강화도 전등사의 ‘전통문화체험 템플스테이’, 선기공과 선무도를 체험할 수 있는 경주 골굴사의 ‘청소년 화랑 수련회’가 그 대표적인 예. 여기에 공주 마곡사의 ‘소년소녀가장을 위한 템플스테이’나 공주 영평사의 ‘해외 입양인 100명 초청 템플스테이’처럼 소외계층을 배려한 특별 행사도 생겨나고 있다. 지리산 산행프로그램과 함께 진행되는 실상사의 ‘지리산의 아침’이나 실상사 화림원에서 진행되는 ‘단식 좌선’, 해남 대흥사의 ‘초의선사 다도 아카데미’, 평창 월정사의 ‘박물관 어린이 수련법회’ 등도 눈길을 끄는 것들이다. 단기 추가 수행 프로그램으로는 해남 미황사의 ‘참사람의 향기’를 비롯해 평창 월정사의 ‘단기 출가학교’가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다. 주요 사찰 템플스테이 일정은 한국불교문화사업단 홈페이지(www.templestay.com) 참조.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