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지」 이야기/송정숙 논설위원(서울칼럼)
30년쯤 신문기자 노릇을 했다. 그리고서 느끼는 신문은,꼭 손오공에게 있어서의 부처님 같다. 죽어라고 용을 써보지만 그 손바닥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한량한 존재. 신문도 꼭 그런 모양으로 존재한다. 무한히 자비로우면서도 섬광처럼 예리하게 가혹하고,절대로 속아주지도 않으며 결코 잊는 일도 없는 그는 반드시 보상하고 어김없이 보복도 한다.
그 신문이라는 정령이 오늘 와서 무엇인가를 짚고 다스리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잇따라 우리를 부끄럽고 무안하고 창피하게 만들고 있다. 자기 허물은 선반에 올려놓고 부처님의 권능을 제마음대로 농한 손오공처럼 가당찮았던 우리는 「자정의 소리」를 신음소리처럼 내고 있지만 이것으로 신문정령의 진노를 풀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자정대상의 핵심적인 정례는 지금으로서는 「촌지」인 것 같다. 누군가 중독성 높은 마약으로까지도 비유했지만,그러나 그것이 아편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다. 그렇게까지 금단증세가 강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수습기간이 갓 끝난 젊은 기자가 취재에서 돌아와 멈칫거리며데스크 앞에 다가올 때가 있다. 처음으로 「촌지」와 만난 난감함을 고백하러 온 것이다. 70년대의 대부분을 「데스크 노릇」으로 보내던 때 이런 젊은 기자는 꽤 여러 번 볼 수 있었다. 그럴 때 해줄 수 있는 말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
『이 시대에 이 땅에서 신문기자 노릇을 하자면 「촌지 관리능력」도 길러야 한다,그것은 「정의」는 아니므로 받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그러나 그걸 「끊는 일」이 기자 노릇의 유능성을 방해하는 경우도 상당히 있을 것이다,관리능력에는 그런 것이 포함된다,데스크는 기사만 가지고 기자와 대화한다. 촌지를 의심하여 「되는 기사」가 안 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지도 않고 깨끗한 기사라도 함량이 미달하면 신문의 몸을 만들지 못한다,촌지문제는 자율적으로 처리하고 기사만을 제출하라…』
이런 정도의 지침이 어느 정도 실천기준이 되어주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지금 돌아보아도 다른 말은 생각나지 않는다.
촌지의 도덕률은 『그것으로 기사를 흥정하지 않는 것을 품위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이 그 무렵의 묵시적인기준이었던 것 같다. 그걸 못 지키면 「신문의 혼」에게서 꾸짖음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지니고 있었다.
5공 청문회가 서슬이 등등하고 그 서슬 푸른 칼 밑에서 비명이 울릴 때,유난히 부릅뜬 눈이 무섭고 사나워 보이던 선량이 있었다. 그로써 청문회 스타가 된 그가 최근에 어떤 독직혐의에 연루되었다. 그런 그를 보며 누군가가 풀이해준 해설의 일단이 인상적이다.
언론에 비친 그 무섭게 생긴 서슬에 기가 질린 나머지 웬만한 기업에서는 그가 나타나기만 하면 특별히 요구하지 않아도 앞날의 화를 모면하려는 기분으로 촌지성 봉투를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그런 기회가 많다보니까 독직에도 쉽게 연루된 것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극명한 인과응보의 질서는 어디에나 있다. 신문의 혼은 유난히 그런 변별을 탁월하게 해낸다.
시중에는 퇴직금 사기 대상자를 찾아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인적 정보」를 사고 파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어디에 아무개라는 퇴직자가 얼마의 퇴직금을 손에 쥐고 있다는 정보만을 제공해주면 꽤 높은 값을 쳐 받는다는 것이다. 그 정보를 가지고 접근하여 유령회사 사장 자리 같은 것을 낚시밥으로 하여 사기해내는 것이다. 그 대상으로 비싸게 치이는 사람이 퇴역한 「교장선생님」 「고급 군인」이라고 한다. 「경력 많은 신문기자」도 세 번째쯤에는 들 것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신문동료들의 생각이다. 물정에는 어둡고 희떱기까지 하므로 의외로 잘 속고 사기도 잘 당하는 것이 「신문인」들이다.
그런 품성의 사람들이므로 촌지 같은 것을 영악하게 챙겨 살림에 보탰다는 예는 신문계에 별로 없다. 신문을 만드는 데 종사하는 사람 중에는 「촌지」와는 전혀 무관한 곳에서 일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지극히 일부의 사람이,또한 어떤 시기에만 「촌지대」를 거쳐갈 뿐이다. 그 지대를 지나고 난 뒤에는 그것의 무상함과 무의미함,단지 좋지 못한 버릇과 공연히 비만해진 간의 크기에 회한만 남길 뿐이어서 그 지대를 벗어난 것에 개운하고 후련함을 맛본다. 그러므로 이른바 「촌지」라는 것이 그렇게 끊지 못할 마약처럼 힘들고 어려운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 하찮은 것에 발목이 묶여 수모를 당하고 우세를 당한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부당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촌지로 오염된 우리의 부패되고 일부 파괴되기도 한 생체조직을 우리가 가볍게 여기고 죄 없다고 강변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시절이 끼친 피치 못할 사연 때문에 생겼던 병폐였다고 딴청을 부리려는 것도 아니다.
더러는 가책받고 더러는 갈등하고 더러는 중독되어 일그러진 형상으로 비쳤던 스스로의 맨얼굴이 얼마나 부끄럽고 속상한지를 성찰하려는 것이다.
신문의 정령이 성이 나서 벌을 주려고 벼르는 시기까지 와버린 우리의 어리석음을 자책하려는 것이다.
올해의 신문주간 표어가 자정으로 신뢰를,자율로 책임완수를 외치고 있다.
「촌지」 정도와 바꾸기에는,너무 값지고 뜻깊고 매력까지 있는 것이 신문이다. 정령들이 곳곳에서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숨쉬는 신문에게 나는 여전히 외경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