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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사대부, 산수유람을 떠나다(정치영 지음, 한국학중앙연구원 펴냄)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 길을 여행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산수(山水) 유람을 중요한 공부로 생각했다. 사대부들은 다양한 이유로 여행길에 올랐고 유산기(遊山記)를 비롯한 각종 기행문학을 남겼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인 저자는 유산기를 비롯한 과거에 남긴 여행 기록을 통해 조선 사대부들이 유람하면서 견문한 과정과 당시 여행지의 상황을 살펴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600여편의 작품 중 북한산, 금강산, 속리산, 청량산, 가야산, 지리산, 백두산 등 7개의 산을 대상으로 개개인이 남긴 기행문 형식의 일기를 통해 여행자들의 특성과 그에 따른 여행 목적, 준비 과정, 여행 중 숙식장소, 교통수단, 여정과 방문지, 여행 중의 활동까지 다룬다. 376쪽. 2만 5000원. 인생의 맛(앙투안 콩파뇽 지음, 장소미 옮김, 책세상 펴냄) 몽테뉴 철학에 입문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맞춤한 책이다. 프랑스 라디오에서 몽테뉴의 사상을 소개하는 코너에서 출발한 책으로 저자는 프랑스의 저명 문학평론가. 몽테뉴 ‘수상록’의 특정 부분을 발췌해 해설을 붙이는 방식으로 지적 욕구와 흥미를 동시에 충족시켜 주목받았다. ‘수상록’에 나오는 명구절들을 소개한 뒤 거기에 투영된 몽테뉴의 사상을 설명하는 글을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몽테뉴라는 인물과 그의 철학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된다. “나는 춤출 때 춤추고, 잠잘 때 잠잔다.” “세상의 가장 높은 왕좌에서도 우리 자신의 엉덩이로 앉기는 매한가지다. 최고로 아름다운 인생은 내가 마음먹기에 달렸다.” 삶의 순간순간에 충실하자는 몽테뉴의 메시지는 5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진리다. 192쪽. 1만 3000원. 논쟁으로 본 조선(이한 지음, 청아출판사 펴냄) 조선시대를 다섯 가지 논쟁을 뼈대로 재구성해서 바라보게 하는 역사해설서다. 조선 600년을 돌아보는 키워드로 지은이가 꼽은 중대사안들은 태조와 태종 연간에 한성 천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 토지제도 개혁을 위해 17년간 이어진 세종시대 공법 실시 논쟁, 현종 시대에 왕의 정통성을 둘러싼 두 차례의 예송 논쟁, 서학과 소품체의 유행을 막기 위한 정조의 문체반정 논쟁 등을 꼽았다. 저자는 당대의 격렬한 토론을 실록과 문집에 의거해 재구성함으로써 역사적 지식과 읽는 재미를 균형미 있게 엮었다. 왕과 신하들이 벌인 논쟁의 결과물로 탄생한 정책들은 다양한 함의를 지녔던 것으로 파악한다. 역사적 사건의 진행 이면에 엄청난 진통과 기 싸움이 있었다는 사실은 시사점이 크다. 토론을 통한 정책합의 능력이 바닥인 오늘날 정치현실을 새삼 돌아보게 된다. 2008년 출간된 ‘조선 아고라’ 개정판. 440쪽. 1만 8000원. 이것이 깨달음이다(백창우 지음, 김영사 펴냄) 불교 수행의 가장 큰 목적인 깨달음을 쉽게 풀어쓴 수행지침서. 기존 수행법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바르고 건강한 깨달음을 위한 쉽고 빠른 공부법을 소개한다. 영원한 자유를 찾기 위한 수행의 시작부터 깨달음을 얻기 위한 구체적인 방편, 공부의 점검, 깨달음 이후의 세계까지 다룬다. 깨달음이 무엇인지, 지름길은 있는지, 깨달으면 어떻게 되는지 해답을 제시한다. 저자는 사십대 중반이 넘어 깨달음을 얻기 위해 직업 군인을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했다. 공부를 하면서 생겨나는 의문들을 해소하고 수행 중 옆길로 샐 가르침이 많다는 점을 염두에 둔 만큼 갓 입문한 사람들에게 훌륭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저자는 “굳이 힘들게 다리를 꼬고 용쓰지 않아도 되고, 생각만 할 줄 알면 얼마든지 가능한 수행”이라고 강조한다. 800쪽. 2만 8000원.
  • ‘고령읍 →대가야읍’ 개명 추진… 엇갈린 민심

    1500년 전 대가야의 도읍지였던 경북 고령군이 고령읍을 대가야읍으로 명칭 변경을 추진하자 주민 간에 찬반 논란이 일고 있다. 고령군은 연말까지 읍 명칭을 바꾸고, 내년 상반기부터 새 이름을 쓸 수 있도록 하겠다고 21일 밝혔다. 지역 특성을 살린 행정구역 명칭 변경으로 지역 명성이 높아지고 관광객이 증가하는 등 성과를 내는 곳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고령읍이 고구려, 백제, 신라와 4국 시대를 열었던 대가야(42~562년)의 수도 중심지였다는 점을 널리 홍보함은 물론 지역 정체성 확보와 군민에게 자부심을 심어주는 등 다각적인 차원이라고 군은 설명했다. 곽용환 군수는 6·4 지방선거에서 이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이에 따라 군은 오는 26일 명칭변경위원회 발족을 시작으로 고령 읍민 1만 1000여명의 과반수 참여와 참여자 3분의2 이상 찬성으로 명칭변경 동의를 얻어낼 예정이다. 연말까지 ‘읍면 명칭에 대한 조례’를 제정해 군의회에 의결을 요청할 방침이다. 이에 대해 일부 주민은 지역 홍보와 재도약의 기회라며 찬성하는 반면 다른 주민들은 읍 명칭의 역사성 훼손과 함께 혼란을 조장할 것을 우려하며 반대하고 있다. 찬성 주민들은 “고령이 일반 도시와 확연히 구별되는 역사·문화도시라는 차별성을 지녔음에도 군이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번 읍 명칭 변경을 통해 도시 정체성을 중점 부각시킬 경우 지역 홍보와 발전을 앞당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대 주민들은 “562년 대가야가 신라로 넘어가면서 생긴 오랜 역사성을 가진 ‘고령(읍)’이란 명칭을 지역 발전이란 미명을 앞세워 바꿀 경우 결국 득보다는 실이 훨씬 많을 것”이라며 재고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군 관계자는 “2018년 지산동 고분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함께 기존 대가야박물관, 대가야체험축제 등과 연계한 대가야 명칭 브랜드화를 위해 읍 명칭 변경을 추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앞서 강원 영월군은 2009년 지역 관광 활성화 등을 위해 한반도 지형을 닮은 서면을 한반도면으로 바꿨다. 이후 한반도면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지며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군은 또 같은 해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 김삿갓(본명 김병연)의 생가와 묘, 문학관 등이 있는 하동면을 김삿갓면으로 바꿔 브랜드화했다. 국립공원 속리산이 있는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은 속리산면으로, 수안보 온천이 위치한 충주시 상모면도 수안보면으로 명칭을 변경한 바 있다. 고령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김문이 만난사람] 제주의 흙으로 ‘오름’ 빚어내기 25년 도예가 송충효

    [김문이 만난사람] 제주의 흙으로 ‘오름’ 빚어내기 25년 도예가 송충효

    작은 산, ‘오름’이다. 대체로 둥그런 모습을 하고 있다. 태고적부터 켜켜이 쌓인 흙이 비바람에 묵묵히 견디었기에 그랬다. 제주에는 오름이 360여개나 있다. 이 오름들은 1만 8000여개의 신화를 만들어냈다. 사람들은 오름에서 태어나 오름에서 살다가 오름으로 돌아간다. 민초들의 얼과 혼이 서려 있으며 항쟁과 여러 사건을 고스란히 묻어둔 곳이기도 하다. 하여 둥그런 모습의 오름은 온갖 아픔을 품은 어머니의 따뜻한 가슴이기도 하며 잉태와 생명을 간직하고 있다. 도예가 고우(古牛) 송충효(70)씨는 25년 동안 이러한 오름을 오롯이 그릇에 담아내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이를 위해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오름을 오르고 또 올랐다. 아름답게 뻗어나간 곡선, 세월의 아픔을 쓸어안은 분화구 등은 예나 지금이나 늘 활화산처럼 생명력 있게 다가온다. 오름의 분화구에서 밤을 지새우는 일도 많았다. ‘낮의 오름’과 달리 ‘밤의 오름’만이 가지고 있는 느낌을 흙에 버무리고 또 버무려서 그릇을 만들어냈다. 주로 사발그릇이다. ‘도자기’ 하면 대부분 이천, 여주, 강진 등 소문난 육지의 흙으로 빚어내는 것으로 인식되지만, 그의 그릇은 제주의 흙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신선하게 다가온다. 한 가지 더 있다. 그는 22년 동안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어느 날 그만두고 도예의 길로 들어섰다는 것이 그렇다. 지난 8일 제주시 오남동 ‘속리산방’(俗離山房)에서 그를 만났다. 속리산방은 비록 세상 한가운데 있지만 세속과 멀리한다는 뜻으로 서예의 대가 현중화 선생이 생전에 지어준 이름이다.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얼핏 범상치 않은 스님처럼 느껴진다. 우선 머리를 빡빡 깎았으며 가끔 욕지거리를 섞어 내뱉는 말투가 그랬다. 하지만 웃을 때는 영락없는 어린 동승의 모습이다. 파안대소, 한바탕 크게 웃고 나서 그에게 왜 오름인지 먼저 물었다. “제주 오름을 사랑합니다. 평소부터 오름을 작품에 담고 싶었어요. 제주에 있는 대부분의 오름에서 텐트를 치고 잠을 자기도 했지요. 그림에는 재주가 없어서 흙으로 재현하려고 했습니다. 몇 년 하다 보면 오름 하나는 만들겠지 했는데 그게 쉽지 않더라고요. 그동안 흙덩이들을 어지간하게 고생시켰습니다. 오름의 선은 파도가 뒤집어지는 접시모양인데 그런 것이 잘 안 나와 초벌구이 전체를 모두 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도 흙장난이나 하고 있지요 뭐.” ‘흙장난’이라는 말은 아무렇게 만들어도 원하는 작품이 나온다는 뜻으로 들린다. 사실 오름의 분화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부분 사발모양을 하고 있다. 또 해안가에서 바라보는 오름은 아름다운 자연의 선(線)을 간직하고 있다. 분화구에서 들여다 보고 오름과 멀리 떨어진 해안가에서 오름을 바라다보면서 작품을 하다 보니 어느새 오름의 생명력과 신비함이 담겨진 선과 색이 살아났던 것이다. 이후 오름뿐만 아니라 범위를 넓혀 제주 자연이 주는 선물, 즉 지형과 바람, 바다 물결이 남긴 선 등도 사발그릇에 담았다. 그렇다면 제주의 흙으로 그릇을 빚는 일이 가능한 일일까. 이에 대해 그는 “제주의 흙은 철분이 많다.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만큼 좋은 흙을 고르는 일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가 주로 쓰는 흙은 오름 도처에서 캐오는 것들이다. 그가 이러한 작업을 할 때 2005년 작고한 사진작가 김영갑씨와 막역한 인연을 맺는다. 성산읍 신풍리에 있는 그의 작업실은 당시 김씨가 지내는 곳과 멀지 않는 위치에 있었다. 김씨 역시 오름 등 제주의 자연을 카메라에 열심히 담고 있던 터였다. 둘은 자연스럽게 만나 작품 얘기를 하고 또 작품 소재를 위해 여러 차례 함께 제주를 돌아다녔다. 송씨가 잠시 회고한다. “만난 지 20년은 더 됐지요. 김씨가 처음 제주에서 작업을 할 때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어요. 무엇보다 텃세가 힘들었는데, 저는 마을사람들에게 ‘제주에는 훌륭한 문화인들이 많이 와야 한다’며 그러지 못하도록 자주 설득했습니다. 그러면서 김씨와 친해졌지요. 한쪽 눈을 감고 사진을 찍지 말고 양쪽 눈으로 찍으면 전혀 다른 작품이 나온다는 등의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하루는 움직이는 오름을 찍어보라고 권유한 적이 있습니다. 민둥오름에 억새 흔들리는 모습, 그리고 쥐불놀이 때 용이 상처 나서 꿈틀거리는 모양의 오름 등을 얘기했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김씨는 생전에 “제주도만이 간직한 맛과 멋을 느끼고 표현하려고 애쓰는 나로서는 송충효님의 작품을 되돌아보며 나의 사진작업을 되돌아보곤 했다. 그의 작업은 억겁의 세월이 남긴 바람의 흔적으로 가득하다”는 글로 그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했다. 송씨는 2003년 9월 김영갑갤러리 개관 때 작품초대를 받았다. 하지만 전시는 무슨 전시냐며 야외 전시장 빈 공간에 작품 몇 점을 던지듯 뿌려놓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는 법정 스님과도 인연이 깊다. 그가 불혹의 나이에 교직을 그만두고 경기도 곤지암의 보원요(寶元窯)에서 3년 동안 청소, 농사, 장작패기 등 허드렛일을 하고 지낼 때였다. 하루는 법정 스님이 찾아왔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장마에 무너진 돌담을 열심히 옮겼다. 그러던 차에 도예 스승 김기철과 법정 스님의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됐다. 스승이 법정에게 “(그를 가리켜)새로 들어왔는데 저렇게 일을 잘하고 있다”고 했고 법정은 “고생을 더 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송씨는 안 그래도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던 터에 화가 나서 한마디 욕을 뱉었다. 나중에 둘은 깊은 인연으로 이어졌다. 법정은 제주에 올 때마다 송씨와 만나 도자기 형태, 도자기 디자인 등에 대해 자주 의견을 나눌 정도로 송씨의 그릇 마니아가 됐다. 제주살빛과도 닮은 은은한 찻잔인 이른바 ‘법정스님 찻잔’은 법정과의 인연에서 탄생된 것이다. 또 송씨는 작업에 몰두하는 동안 틈틈이 법정의 책을 읽으며 마음을 가다듬곤 했다. 속리산방에는 법정이 직접 사인하고 보내준 책만 10여권이 된다. 그가 도예의 길로 들어선 까닭은 어릴 때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제주 표선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생님으로부터 “너는 커서 뭐가 될래?”라는 질문을 받고 지체없이 도공이 되겠다고 대답했을 정도로 도공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하지만 제주에는 가마가 없을뿐더러 도예를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1969년 제주사범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교직 생활을 하게 된다. 그렇게 22년이 지난 어느 날 교직을 그만두고 도예공부를 하려고 서울로 왔다. 얼마 후 평소 알고 지내던 아동문학가 정채봉의 소개로 보원요에서 도예를 배우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김기철 선생은 “안정된 교직을 박차고 나와 도자기를 해보겠노라고 처음 나를 찾아왔을 때 솔직히 황당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꾸준히 뜻을 굽히지 않고 많은 역경을 이겨냈으며 타고난 예술성에 고맙고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회고한다. 이후 단국대 박종훈 교수한테 도예를 더 배운 뒤 제주 신풍리에 작업장을 만들면서 불가의 선수행처럼 도선일계(陶禪一界)의 길로 들어선다. 그는 작업을 하는 동안 여러 분야의 인사들과 만난다. 정종섭(현 안전행정부 장관) 서울대 교수, 동양화가 박대성·김행복· 최환채, 서양화가 김만수, 문인화가 구지회 등을 비롯해 수안 스님, 일장 스님, 대안 스님, 서예가 김종원, 유학자 오문복, 옻칠공예가 이가현 등도 함께 작업에 동참한다. 그릇의 형태가 어느 정도 만들어지면 함께 만나 그림을 그리고 글도 쓰며 작업을 완성해 나가는 일이다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미술평론가 김현돈 제주대 교수는 “그는 꾸밈을 극도로 자제한다. 그가 일관되게 추구하는 것은 비정제·무정형의 파격이다. 애써 예쁘게 꾸미지 않고 타고난 자연의 결을 살려나가는 도가(道家)의 예술성에 맞닿아 있다”면서 “그릇 전체에서 풍기는 미적 정조는 질박하고 영혼을 정화하는 청정무구의 아름다움”이라고 평가한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더니 그는 “어느 날 때가 되면 그동안 만들어온 그릇을 모두 오름에 내던질 것이다. 나를 좋아했던 사람은 알아서 가지고 가고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던 사람은 그 자리에서 깨버리게 하는 일을 할 것”이라고 대답한다. 선임기자 km@seoul.co.kr ■도예가 송충효는 1944년 제주 표선에서 태어났다. 1969년 제주사범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22년 동안 교직에 몸담았다. 불혹의 나이에 교직을 그만두고 경기도 곤지암 보원요에서 김기철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도예를 배웠다. 이후 단국대 박종훈 교수에게서 도예를 더 배운 뒤 제주 신풍리에 작업실을 만들고 본격적인 도예의 길을 걸었다. 제주 오름을 비롯해 해안, 바람, 바다물결 등 제주의 모습을 그릇에 담았다. 도예를 하면서 많은 인사들과 인연을 맺는다. 정종섭(현 안전행정부 장관) 서울대 교수, 동양화가 박대성·김행복·최환채, 서양화가 김만수, 문인화가 구지회 등을 비롯해 법정 스님, 수안 스님, 일장 스님 등과 교류하면서 작품을 함께 만들었다. 현재 제주시 오남동 ‘속리산방’ 방장이다.
  • [김문이 만난사람] 40년간 화폭에 노송 담아 온 이영복 화백

    [김문이 만난사람] 40년간 화폭에 노송 담아 온 이영복 화백

    기품이 당당하다. 스스로 길지(吉地)에서 생기와 절개를 묵묵히 뿌리내린다. 천년 세월, 어떤 모진 비바람도 견딘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 그랬다. 거친 우리 민족사를 도도히 지켜왔다. 조선시대에는 소나무를 ‘생명의 나무’로 여겼다. 퇴계 이황은 34세 나이에 이렇게 읊었다. ‘바위 위에 자란 천년 묵은 저 불로송/ 검푸른 비늘같이 쭈글쭈글한 껍질 마치 날아 뛰는 용의 기세로다/ 밑이 안 보이는 끝없는 절벽 위에 우뚝 자라난 소나무/ 높은 하늘 쓸어내고 험준한 산봉을 찍어 누를 듯~/ 한겨울 눈서리에도 까닭 없이 지내노라’ 소나무가 가진 장쾌한 기운이 그대로 살아있는 느낌이다. ‘추위가 온 뒤에 그 푸르름을 더한다’는 소나무는 예로부터 나무 중에 으뜸으로 여겼다. 소나무는 한자로 송(松)이다.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져 온다.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직후 군대를 이끌고 산길을 가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다. 진시황은 엉겁결에 주변에 있는 큰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 비가 그친 후 나무를 자세히 쳐다보니 마치 용틀임하는 자세였다. 진시황은 소낙비를 가려준 고마움으로 공(公)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그래서 나무 목(木)에 공(公)이 더해져 송(松)이 됐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벼슬을 받은 소나무는 ‘정이품송’으로 속리산에 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소나무를 좋아한다. 산야 어디를 가든 만날 수 있는 것이 소나무이기도 하고 풍광이 뛰어난 곳에는 항상 소나무가 보란 듯이 의연하게 고고한 자태로 뽐을 내고 있다. 소나무를 예로부터 정절과 기개의 표상으로 삼아왔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주고받는 ‘시놀음’에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디 시뿐일까. 추사 김정희 ‘세한도’에 있는 소나무는 말 그대로 지조와 의리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창원(蒼園) 이영복(76) 화백은 40년 동안 전국의 고송과 노송을 찾아다니며 현장 스케치를 하고 그 기상과 기품을 오롯이 화폭에 담아와 우리나라의 대표적 ‘소나무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호 ‘창원’은 1970년대 초 이당 김은호 화백이 부채에 잉어 그림을 그려주면서 지어준 것이다. 그는 단순히 노송을 찾는 기행이 아니라 오랜 벗이나 스승을 찾아 떠나는 순례와 같은 여정을 통해 소나무와 교감을 이루어낸다는 점에서 쉽게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의 화풍을 일구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소나무를 즐겨 그리는 화가들이 적지 않은 현실에서 철저히 사생에 의한 ‘이 화백의 소나무’라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그는 작화(作畵)에 있어서 사실적 묘사보다는 그때그때 의취(意趣)와 의경(意境)에 따라 심상의 표현에 중점을 두는 것이 그만의 독특한 화풍이다.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그의 그림에서 리얼리티가 높은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단순히 그렸다기보다 화면에서 살아 걸어나오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렇듯 뻗고 휘어지는 필법의 묘를 스스로 취하고,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소나무를 되살리는 구체적 실천을 일관되게 추구해왔다. 지금까지 13회 개인전, 그리고 수많은 단체전과 특별전을 통해 이를 입증했다. 특히 그는 1955년 중학교 3학년 때 제4회 국전에서 ‘홍성교외’라는 작품으로 입선, 당시 ‘천재 화가’라는 말을 들으며 화단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때 세운 국전 최연소 입선의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지난달 25일 오전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 있는 작업실을 찾았다. 입구에는 부인 염지윤씨가 운영하는 작은 공방이 자리하고 있었다. 작업실로 들어서자 ‘쌍룡송’ 그림이 맨 먼저 눈에 들어온다. 크기가 500호(400×190㎝)나 됐으며 한 소나무에서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엉켜 포효하는 위용에 저절로 압도된다. 20년 전 경북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소수서원 주변 노송군락지에 갔다가 쌍룡송을 발견하고 감동을 받아 그림을 그리게 됐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우둔하고 바보스러우나/ 격조 높은 운필(運筆)을/ 담대하게’라는 글귀였다. 구부러지고 휘어짐이 자유로워 마치 운필의 묘미를 창출해내는 이 화백의 ‘붓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소나무와 관련된 한시 100여편을 따로 정리를 해놓았으며 틈이 날 때마다 한 편씩 꺼내 다시 읽어 보며 되새기곤 한다. 그중 ‘오직 법도를 엄격히 지킨 뒤에라야만 초신진변(超神盡變)하는 것이니 유법(有法)의 극이 무법(無法)으로 돌아가는 것이다’라는 추사의 글을 좋아한다. 무법으로 돌아간다는 뜻은 이미 있어온 많은 법들을 부단히 연마하면 새로운 법이 생긴다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가끔 여러 단체에서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할 때 이 같은 내용도 함께 설파한다. “저에게 소나무는 어떤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자 오랜 벗이기도 합니다. 충주 단호사에 있는 적룡송을 스승으로 여깁니다. 500여년이 된 소나무인데 노송이 갖고 있는 직선과 곡선이 잘 어우러지는 아주 훌륭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작년 개인전 때 ‘단호사 적룡송 서설’이라는 이름으로 첫선을 보였습니다. 1년에 한 번 꼭 스승을 만나러 단호사에 가지요.” 단호사 적룡송 같은 웅험한 노송은 그림이 커야 제대로 살아나기 때문에 작심하고 600호(420×200㎝) 크기의 대작을 그리게 됐다고 설명한다. 이는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어떻게 해서 소나무와 인연을 맺었을까. 그는 충남 홍성군 홍북면 중계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아버지는 같은 마을 사는 고암 이응로 화백과 절친한 친구사이로 지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그는 마을이 월산과 용봉산 사이에 있어 자연스럽게 산을 배경으로 그림을 자주 그리게 됐다. 그러던 중학교 1학년 때 학원사가 주최하는 전국 중고미술대회에서 장려상을 받았다. 중3 때에는 학교 교사와 주위의 권유로 국전에 입선했고 화가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홍익대 미술대학에 진학하게 됐다. 대학 1학년 때 그는 잠시 이응로 선생의 원효로 집에서 유숙을 하게 된다. “그때가 1958년인가 그래요. 고암 선생이 후암동에 살다가 원효로 집으로 이사했지요. 고암 선생은 새벽에 일어나 대청에 앉아 늘 그림을 그렸습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그림을 다 찢어버리곤 했는데 그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안타깝게도 고암 선생이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더 이상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대학 재학 때 우리나라 화단의 큰 인물들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고암에 이어 대학 3학년 때에는 이당 김은호와 함께 한국 동양화의 토대를 이룬 청전 이상범을 학부 담임교수로, 4학년 때에는 운보 김기창 화백을 지도교수로 모시게 된다. 졸업 후에는 이당을 좋아하는 모임인 ‘후소회’의 총무를 맡아 이당과도 자연스럽게 친분을 맺는다. 당시 ‘후소회’ 회장은 운보였다. 2001년 운보가 세상을 떠나자 운보를 사랑하는 모임인 ‘운사회’를 결성하는 일에 앞장서게 된다. 지금은 ‘운사회’의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운보 선생은 현장 수업을 많이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전통에만 얽매이지 말고 전통과 현대를 잘 조화있게 하라’고 말씀하셨지요. 제 그림에 큰 영향을 주신 분이 바로 운보 선생입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홍성 주변의 풍경, 억새 등 산수화를 주로 그렸다. 또 산수화 속에는 소나무가 들어가야 제맛이 난다는 것을 알고 산수에 소나무 그림을 그려넣었다. 어릴 적 왕솔밭에 황새가 날아오는 모습도 그렸다. 그러다가 소나무가 가지고 있는 의연함에 새삼 느낌이 꽂혀 본격적으로 소나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전국의 고송과 노송이 있다는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럴듯한 노송을 찾게 되면 2~3일 민박하면서 스케치를 하곤 했다. 아침과 낮, 그리고 저녁 때 바라보는 노송의 느낌을 담아내기 위해서였다. 요즘 같으면 사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 화백은 철저히 현장 위주로 노송과 교감을 했다. 이 같은 사생첩은 스케치북으로 수십권이나 된다. “소나무의 기상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칫 현대적으로 치우치다 보면 고절함과 기상을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소나무는 우연히 가늠하는 신묘한 몸체의 변화에 있습니다. 저는 사생을 통한 노송과 고송의 재구성에 역점을 두고 있지요. 복잡한 것보다 사유하는 철학적 소나무, 간결함과 고고함이 있는 소나무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늙어가면서 추하게 보이지만 소나무는 그 격조가 더욱 깊어집니다.” 이 화백은 사생을 전제로 하면서 온유하고 담백함을 일관되게 표출해왔다. 결국 자기만의 소나무를 창출해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대표적 소나무 작가로 꼽힌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화 일기에 나오는 대목이다. ‘나는 오늘도 선현들께서 소나무를 의인화한 까닭을 생각하며 붓을 든다.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빗줄기에도 노송은 오늘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있다.’ 앞으로 변함없는 붓의 여정을 말해주는 듯하다. 선임기자 km@seoul.co.kr ■이영복 화백은 1938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홍성고를 나와 홍익대 미술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1955년 16살 때 국전에 최연소로 입선했다. 대학 때는 고암 이응로, 청전 이상범, 운보 김기창, 이당 김은호 등 당대를 풍미했던 화가들과 인연을 맺는다. 졸업 후에는 산수화를 그리다가 1974년부터 소나무 그림에만 몰두했다. 동아미술제 심사위원(1992·1998년), 서울 미술대전 추진위원(1998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한국화 분과위원장(2001년),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2001·2008년), 남농미술대전 심사위원(2011년) 등을 역임했다. 주요 초대전으로는 서울신문사 기획 동서양화(1986년), 한국현대미술전 국립현대미술관(1987~1992년), 한국방송공사 특별기획 KBS-TV미술관 방영작가전(1989년), 예술의전당 전관개관기념(1993년), 서울정도600주년기념 서울국제현대미술제(1994년) 등이 있으며 13회 개인전과 수십 차례 단체전에 참여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자운/음양), 영남대학교 박물관(반구대), 타이베이 화강박물관(부귀도), 서울시립박물관(알터), 크리스찬 아카데미하우스(도봉영산) LG인력개발원(환희) 등에 소장돼 있다. 현재 한국미술협회고문, 운사회 고문,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 쉿, 여긴 너만 알고 있어…

    쉿, 여긴 너만 알고 있어…

    휴가 시즌 ‘7말 8초’가 코앞이다. 누구나 차량 적고 인적 드문 휴가처를 찾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절정의 피서철만은 피하려 해도 그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달콤한 휴가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여름휴가 때 가 볼 만한 10곳을 소개한다. 여기에 누락시키기 아쉬운 곳 하나를 더했다. 여기라고 붐비지 않을까만, 그나마 한적하다고 귀띔할 만한 곳들이다. 글 사진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대한민국 특급 피서지-제주 우도 하고수동 제주 우도를 대표하는 명소는 서빈백사(西濱白沙)다. 바다풀의 일종인 홍조류가 돌처럼 굳어져 형성된 홍조단괴(천연기념물 제438호)와 함께 새하얀 모래 해변으로 유명하다. 한데 서빈백사 맞은편의 하고수동 해변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단언컨대 대한민국에서 이만한 해수욕장 찾기 쉽지 않다. 모래 곱고, 비췻빛 물빛도 곱다. 더 좋은 건 수심이 얕다는 것. 썰물 때는 100m 넘게 상앗빛 백사장이 드러난다. 누구와 가도 좋지만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이라면 만족도는 훨씬 더 높아진다. 검멀레 해변, 우도 등대 등 인근에 볼거리도 풍성한 편. 다만 햇빛을 피할 그늘이 부족한 게 다소 흠이다. ●여우를 닮은 섬-충남 보령 호도 충남 보령엔 외연도 등 명자깨나 날리는 섬이 수두룩하다. 그 틈바구니에서 힘겹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섬이 호도(狐島)다. 여우를 닮았다는 작은 섬. 호도의 자랑은 규사로 이뤄진 해수욕장이다. 유리의 원료가 되는 모래로, 바람이 불면 날릴 만큼 곱고 부드럽다. 섬은 여우처럼 작고 앙증맞지만 해변은 1㎞를 훌쩍 넘길 만큼 넓고 길다. 해수욕장 오른쪽은 갯바위 지역이다. 바위에 붙은 굴 등 해산물이 풍성하다. 물고기 개체 수도 많은 편. 초보자라도 매운탕을 끓일 우럭 서너 마리쯤은 잡아 올릴 수 있다. 갯바위 너머 몽돌해안에선 스노클링을 즐기기 좋다. 대천항에서 배로 50분 정도 걸린다. ●궁극의 적요함-경북 울진 왕피천 ‘등허리 긁어 손 안 닿는 곳’이 경북 울진이랬다. 그만큼 두메산골이란 뜻이다. 그 울진에서도 오지로 꼽히는 곳이 왕피천 계곡이다. 왕피천은 고려 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피신했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이곳은 국내 최대 규모의 생태경관보전지역이다. 면적이 북한산 국립공원의 1.3배에 이른다고 한다. 왕피천에 들면 참 웅숭깊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굴구지마을에서 속사마을까지 다녀오는 동안 내 발자국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만큼 적요하다. 모래톱이 하얗게 빛나는 수곡(水曲)과 뱀처럼 굽이치는 용소 등 볼거리도 많다. ●탐험형 동굴의 시초-강원 평창 백룡동굴 관광보다는 교육과 탐사에 주안점을 둔 탐험형 동굴이다. 여느 동굴과 다르게 내부에 조명시설이 없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사람으로 인한 오염을 최소화하겠다는 뜻도 담겼다. 백룡동굴은 영월과 평창을 가르는 동강의 가파른 절벽에 자리 잡고 있다. 전체적으로 수평굴이라 하나 다소 품은 든다. 하지만 장식되지 않은 동굴의 원형을 엿보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백룡동굴 안내소에서 전용 탐사 복장을 빌려 준다. 장화와 장갑도 필수. 지급된 헤드랜턴은 필요한 경우에만 켤 수 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50분까지 총 9회 입장. 1회 관람 인원도 20명 정도로 제한된다. (033)334-7200. ●숨어 있던 1인치-충북 제천 억수계곡 괴산과 단양, 제천 등 충북 북쪽엔 계곡이 많다. 월악산과 속리산에서 뻗어 내린 1000m급 준봉들이 만든 터라 어느 하나 서열을 매기기 어려울 만큼 깊고 아름답다. 그 가운데 하나가 제천시 덕산면 억수리의 억수(億水)계곡이다. 흔히 용하(用夏)계곡, 또는 아홉 개의 풍경을 지니고 있다는 뜻에서 ‘용하구곡’이라고도 불린다. 사실 이름만큼 수량이 ‘억수로’ 많지는 않다. 다만 물은 정말 ‘억수로’ 맑다. 계곡 위쪽은 출입통제구역이다. 계곡미가 빼어나고 곳곳에 텐트 칠 자리가 넉넉해 진작부터 캠핑족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월악산 송계계곡에서 제천 방향으로 가다 보면 나온다. 계곡 지류에선 천렵도 즐길 수 있다. ●수도권 주민들의 휴식처-경기 파주 임진각 평화누리 경기 파주는 흥미로운 도시다. 최전방 도시로 인식되지만 늘 전쟁의 기억만 맴도는 건 아니다. 임진각 평화누리가 대표적이다. 사방을 짓누르던 무거운 분위기는 사라지고 지금은 밝고 평화롭다. 여름이면 분수가 가동되는데 제법 규모가 넓어 수영장에 견줄 만하다. 아이들이 뛰어놀기 딱 좋다. 공원은 야외공연장 ‘음악의 언덕’과 수상카페 ‘카페안녕’, 3000여개의 바람개비가 있는 ‘바람의 언덕’ 등으로 구성돼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바람개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대나무 조형물 ‘통일부르기’도 이채롭다. 자유의 다리 초입엔 경의선 증기기관차가 전시돼 있다. (031)953-4854. ●토종 ‘천연 워터 테라피’-전남 구례 수락폭포 국내 대표적인 물맞이 폭포다. 현지 안내판에는 “수락폭포(15m)가 ‘천연 워터 테라피’ 효과를 갖고 있다”고 적혀 있다. 기암괴석 사이로 은가루가 쏟아지는 듯 풍경이 빼어나고 물맞이가 근육통 등에 효험이 있다고 소문나면서 여름철 수많은 사람이 몰린다고도 했다. ‘공기 속 비타민’이라 불리는 산소음이온의 발생량도 많다고 한다. 전남 보건환경연구원이 2012년 도내 유명 계곡의 산소음이온 분포도를 조사했는데 수락계곡의 산소음이온 발생량이 월등히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는 것이다. 폭포 오른쪽의 할미암은 부녀자가 치마에 돌을 담아 올려놓으면 아이를 갖는다는 이야기가 구전돼 온다. ●에메랄드빛 호랑이 꼬리-경북 포항 구룡포 해수욕장 우리나라 지도에서 호랑이 꼬리처럼 삐죽 솟아오른 곳이 경북 포항의 호미곶이다. 호미처럼 돌출된 곶부리 옆에 구룡포 해수욕장이 있다. 아름다운 물 빛깔에도 불구하고 세간엔 덜 알려진 곳이다. 해변으로 내려가는 언덕길에 서면 에메랄드빛 바다가 눈을 의심케 한다. 파도가 일 때면 꼭 연둣빛 커튼이 출렁이는 듯하다. 해수욕장 주변에 볼거리도 많다. 구룡포 읍내 우체국 골목에 ‘일본인 가옥거리’가 남아 있다. 호미곶 등대 옆 ‘까꾸리개’는 풍랑이 심한 날 밀려와 갇힌 청어 떼를 ‘까꾸리’(갈고리)로 쓸어 담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모리국수’는 꼭 맛보고 오자. 잡어 넣고 끓인 칼국수로 비릿하고 걸쭉한 국물이 일품이다. ●물과 안개의 나라-강원 화천 파로호 강원 화천은 흔히 겨울 도시로 인식된다. 산천어축제 때문이다. 하지만 화천의 아름다움을 꼽자면 절반은 물의 몫이다. 북한강과 화천천이 들녘을 적시고,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계곡물은 파로호에서 ‘내륙의 바다’를 이룬다. 피서 시즌엔 파로호 일대에서 물축제도 열린다. 수상자전거 등 온갖 수상 레포츠를 한곳에서 즐길 수 있다. 굽이도는 북한강변을 따라 42㎞짜리 ‘산소길’도 조성됐다. 호수와 주변 산자락이 뿜어내는 맑은 공기를 흠뻑 마시며 걸을 수 있다. 자전거를 타고 돌 수도 있다. 물축제가 열리는 붕어섬에서 자전거와 헬멧을 대여해 준다. 오지 중의 오지로 꼽히는 비수구미 마을도 둘러볼 만하다. ●모래와 공룡의 섬-전남 여수 사도 사도(沙島)는 ‘바다 한가운데 모래로 쌓은 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여수에서 약 25㎞, 배로는 1시간 30분쯤 걸린다. 본섬인 사도를 중심으로 추도와 중도, 증도(시루섬) 등 7개의 섬이 빙 둘러 마주하고 있다. 추도를 제외하면 사실상 6개 섬이 하나로 연결돼 있다. 사도 안에는 다양한 지질 현상이 남아 있다. 공룡 화석은 사도와 중도 사이를 잇는 다리 아래에 무수하다. 해안가엔 공룡의 알을 닮은 바위들이 놓여 있다. 중도 너머는 양면 해수욕장이다. 맑은 바닷물이 해변 양쪽에서 들이친다. ●그리고 빠지기 아쉬운 이곳-강원 동해 어달리 강원 동해시 묵호항에서 북쪽으로 내달리다 보면 모퉁이 너머에서 느닷없이 예쁜 마을이 튀어나온다. 어달리다. 비단처럼 미끈한 바다, 손대면 묻어날 것 같은 잉크빛이 일품이다. 어달리는 모래 해변의 길이가 300m, 폭이 20~30m에 불과한 조그만 바닷가 마을이다. 이 작은 마을에 60여개에 달하는 횟집 등 식당이 몰려 있다. 여느 동해안 해수욕장과 달리 경사가 완만한 데다 모래가 곱고 수심 1m를 넘지 않는 해변이 바닷가 쪽으로 이어져 있어 가족 단위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다. 특히 낚시 포인트로 명성이 자자하다. 어달리 초입의 까막바위는 서울 숭례문에서 정확히 동쪽 방향에 있다는 바위다.
  • 물놀이 안전해 보이는 곳 더 위험… 가평·남양주 일대 하천이 ‘최다’

    물놀이 안전해 보이는 곳 더 위험… 가평·남양주 일대 하천이 ‘최다’

    ‘안전해 보이는 곳이 가장 위험하다.’ 여름 휴가철을 앞두고 최근 5년간 하천과 계곡, 해수욕장 등에서 발생한 물놀이 사망사고를 분석했더니 ‘물이 깊거나 물살이 사나울수록 사망 사고가 빈번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오히려 수심이 얕고 유속이 느린 곳에서 사고가 집중된 경향을 보였다. 또한 물놀이 사망자 가운데 92%가 남성인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신문이 11일 소방방재청으로부터 최근 5년간 물놀이 사망사고 현황 자료를 받아 지리정보 분석 프로그램인 ‘엑스레이맵’으로 매핑(지도에 데이터를 표시해 사고 경향 등을 파악하는 기법)을 해 보니 물놀이 사망자(240명)는 ▲경기 가평군과 남양주시 일대의 하천(17명) ▲충남 태안군~보령시로 이어지는 서해안의 해수욕장(15명) ▲강원 홍천군 일대 하천(14명) ▲충북 괴산군 속리산국립공원 주변의 계곡과 하천(13명) 등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가평·남양주 일대에는 수심이 깊지 않아 물놀이하기 좋은 하천이 많지만 사고가 자주 발생했다. 예컨대 가평과 남양주 사이를 흐르는 구운천은 수심이 깊지 않지만 지난해 7~8월 두 차례 사망사고가 일어났다. 가평군 관계자는 “구운천 하류의 수심이 어른 허리 높이 정도라 쉽게 보고 준비운동을 하지 않은 채 입수해 심장마비가 오는 일이 있다”고 말했다. 강원도의 홍천강도 온화한 듯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매년 여러 명의 피서객을 집어삼킨 ‘위험한 강’이다. 홍천강은 수심이 대체로 얕고 수온이 따뜻하다. 홍천군 관계자는 “해병대 등을 제대한 젊은 남성들이 과시욕이 앞선 나머지 친구들과 수영 내기 등을 하다 사고를 당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물놀이 중 숨진 희생자 가운데 남성 비율이 91.3%(219명)에 달하는 점도 ‘과신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부른다’는 사실을 뒷받침했다. 또 사고 원인별로 보면 준비운동 부족 등 안전 부주의로 인한 사망자가 126명(52.5%)이나 됐고 음주 수영으로 숨진 사람은 32명(13.3%)이었다. 해변에서의 물놀이 사망 사고는 태안군에서 보령시까지 이어지는 서해안 지역 해수욕장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했다. 5년 새 15명이나 숨졌다. 피서 인파가 가장 많이 몰리는 해운대 해수욕장이 있는 부산에서는 같은 기간 6명이 사망했다. 소방방재청 관계자는 “부산의 해수욕장에는 피서객이 많아 파도 등에 휩쓸려 갈 공간이 적고 안전 관리 요원도 여럿 투입되는 반면 서해안에는 마을마다 규모가 작은 해수욕장이 많아 사고 위험이 높다”고 말했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정이품송 위기… 솔잎 70% 솔잎혹파리 감염

    정이품송 위기… 솔잎 70% 솔잎혹파리 감염

    충북대 수목진단센터 연구원들이 지난 9일 크레인을 이용해 보은군 속리산 입구 정이품송(천연기념물 103호)의 병해충 실태를 조사하고 있다. 센터는 정이품송 솔잎의 60∼70%가 성장을 멈추게 하거나 광합성을 막아 생육에 치명적인 솔잎혹파리에 감염됐다고 11일 밝혔다. 600여년 전 조선 세조의 행차 때 어가행렬이 걸리지 않도록 스스로 가지를 들어올려 ‘정이품’ 벼슬을 받은 소나무는 1979년에도 솔잎혹파리에 감염돼 3년 넘게 방충망을 씌우고 수간주사를 놓는 치료 끝에 겨우 살아났다. 충북대 수목진단센터 제공
  • 보은에선 월요일마다 여자축구를 본다는데… 동네 잔치하듯 놀다보니 90억이 덤이라네

    보은에선 월요일마다 여자축구를 본다는데… 동네 잔치하듯 놀다보니 90억이 덤이라네

    축구는 야구와 함께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스포츠다. 월드컵 때는 거리가 붉은 물결로 넘쳐나고 국민들은 태극전사들을 목 터져라 외친다. 새벽잠을 설쳐가며 유럽 챔피언스리그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보는 이들도 숱하다. 그러나 국내 축구로 눈을 돌리면 사정은 다르다. K리그만 해도 ‘슈퍼매치’로 불리는 수원과 서울의 맞짱 경기 정도만 운동장을 꽉 채울 뿐 다른 경기엔 관중석이 텅 빈다. 여자축구는 더욱 심각하다. 프로팀이 몇 개인지, 경기는 어디에서 하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충북 보은군 상황은 아주 딴판이다. 침체됐던 동네가 여자프로축구(WK리그) 덕분에 활기를 되찾았다. 보은은 전체 인구 3만 4000여명 가운데 35%가 농업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다. 65세 이상이 28%나 돼 충북도내 12개 시·군 가운데 고령화가 가장 심각한 곳이다. 이런 동네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여자축구에 열광할까. 이를 눈으로 확인하려고 인천 현대제철과 부산 상무의 경기가 열린 지난달 28일 보은군을 찾았다. 읍내 군청 바로 앞에 자리한 보은공설운동장 인근에 도착하자 ‘월요일은 여자축구 보는 날’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먼저 손님을 맞았다. 축구에 미친 남미나 유럽도 아닌 곳이라 마냥 신기했다. 여자축구연맹이 관중 유치를 위해 프로야구와 남자 프로축구 경기가 없는 월요일에 경기를 치르면서 ‘축구 보는 날’이란 아이디어를 짜냈고, 보은군이 여자축구 발전을 위해 군 지정일로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군은 홈페이지나 각종 전광판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축구 보는 날을 홍보하고 있다. 이날 날씨는 간간이 비도 뿌리고 바람까지 불어 관람하기에 최악이었다. 바람이 워낙 세차 경기장에 광고 보드판도 세우지 않았다. 이런 날 여자축구를 보러 오는 사람이 있을까 고개를 갸웃했지만 킥오프 시간이 다가오자 하나둘 관중석에 나타나 30여분 만에 400명을 웃돌았다. 날씨가 심술을 부렸지만 주민들은 오리털 점퍼와 담요 등으로 무장하고 축구장을 찾았다. 날씨 탓에 이날 관중수는 평소 보은공설운동장의 30% 수준. 여자축구연맹 관계자는 “날씨와 세월호 참사 등을 고려할 때 적은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아버지를 따라온 초등학생부터 할머니의 손을 잡고 온 70대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한자리에 모였다. 요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가는 지방선거 출마자들도 눈에 띄었다. 경기장에서 만난 신흥수(69)씨는 “여자라 그런지 공을 차면 멀리 나가지는 않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면서 “우리 동네와 자매결연을 맺은 현대제철 팀을 응원하러 왔다”며 웃었다. 관중석은 잔치 분위기다. 저마다 한보따리씩 싸온 먹을거리를 풀어놓으며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김밥, 어묵, 호떡, 뻥튀기, 막걸리까지 먹을 게 넘쳐난다. 쌀쌀한 날에는 따뜻한 어묵이 최고라며 큰 통에 끓여온 어묵을 이웃들에게 나눠 주는 아주머니의 모습에서 농촌의 푸근한 인심이 묻어난다. 경기에 앞서 선수들이 사인볼을 던져 주기 위해 관중석 쪽으로 다가오자 자기에게 던져 달라며 한바탕 전쟁(?)을 벌인다. 한 할아버지는 운동장으로 내려가 선수에게 사인볼을 뺏어 오다시피 한다. 보은 지역에서 사인볼 인기는 대단하다. 한 초등학생은 “여자축구 7개 팀 가운데 6개 팀의 사인볼을 받았다”며 “친구들 사이에서 사인볼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부러움의 대상”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묵념에 이어 경기가 시작되자 관중들의 눈은 그라운드로 다시 쏠렸다. 선수들과 팀의 이름을 부르며 아쉬움과 탄성이 이어졌다. 2시간 동안 축구를 보며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린 듯 경기장을 나서는 주민들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보은 지역이 여자축구의 고장이 된 것은 2011년부터다. 군은 극장 하나 없는 지역 주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면서 지역경제도 살리기 위해 여자축구 리그를 유치했다. 군은 독하게 마음을 먹고 여자축구에 많은 정성을 쏟아부었다. 군청 등 행정기관의 전화 컬러링과 마을 방송을 통해 축구경기를 알렸고, 길거리 홍보전도 펼쳤다. 정상혁 군수는 주민들을 만날 때마다 여자축구 얘기를 꺼냈다. 또한 군은 주민들을 경기장으로 유인하기 위해 11개 읍·면과 군청 각 부서를 7개 여자축구 팀과 자매결연을 맺어줬다. 부산 상무는 보은읍, 경제정책실, 재무과와 인연을 맺었다. 수원시설관리공단은 속리산면, 농축산과, 상하수도사업소와 손잡았다. 군은 관내 기업 등의 협찬을 받아 경기 때마다 쌀 등 다양한 경품도 마련했다. 군의 노력과 주민들의 협조로 여자축구는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보은에서 열리는 경기의 관중은 대부분 1000명을 넘어선다. 2011년 열린 올스타전은 4000여명이 찾아들었다. 올해 개막전 관중은 2200여명을 기록했다. 같은 날 개막경기가 열린 경기 고양의 관중은 762명, 강원 화천은 550명뿐이었다. 지난해 보은에서 열린 31경기의 총관중은 4만 1388명이나 된다. 군민 모두가 한 번 이상은 축구장에 온 셈이다. 선수들도 보은에 오면 신이 난다. 손종석 스포츠토토 감독은 “다른 구장에 견줘 관중이 많은 데다 호응도까지 높다”면서 “보은군의 열의도 남달라 선수들이 이곳에서 경기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귀띔했다. 최인철 현대제철 감독은 “천연잔디가 깔려 있는 데다 시설도 좋아 다들 편하게 운동을 한다”고 덧붙였다. 여자축구는 보은 지역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축구단과 축구협회 관계자, 응원을 위해 축구팀을 따라다니는 선수들의 부모까지 보은을 찾으면서 침체됐던 경기가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 이들이 경기 전날 보은을 찾아 하룻밤을 묵으면 읍내가 시끌벅적하다. 한 주에 월요일과 목요일 두 차례 경기가 있으면 보은에 계속 머물러 식당과 숙박업소들의 매출이 부쩍 늘어난다. 업주들은 여자축구 덕에 먹고사는 것 같다고 입을 모은다. 모텔을 운영하는 이영희(54)씨는 “경기가 어려워 기업들이 워크숍도 줄이면서 장사에 어려움을 겪는 터에 여자축구 선수들이 영업에 큰 도움을 준다”면서 “여자축구를 통해 보은이 알려지니까 이제는 어린이축구팀도 전지훈련을 하러 온다”고 말했다. 여자축구가 기대 이상의 즐거움을 주면서 어두웠던 주민들의 얼굴도 밝아지고 있다. 산외면 백석리 김학제(45) 이장은 “농촌에서 밤에 환하게 불을 켜놓고 경기를 보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라며 “축구장에서 이웃들과 응원을 하며 온갖 고민을 훌훌 털어낸다”고 말했다. 그는 “남자선수보다 여자선수가 더 잘 뛰는 것 같다. 백석리에서만 100여명이 구경을 온다”며 웃었다. 여자축구가 지역경제에 보탬이 되자 군은 스포츠마케팅에 주력하고 있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전지훈련 유치 전담부서를 만들었다. 지난해 230개팀 5500명의 전지훈련 선수를 유치해 90억원에 이르는 지역경제 파급 효과를 얻었다. 전지훈련 선수단이 몰리는 여름에는 숙박시설이 동나고 음식점 매출도 두 배로 껑충 뛴다. 여름에도 서늘하고 접근성이 좋은 곳이라 최적의 전지훈련지로 평가받는다. 올 400개팀 6000명의 전지훈련 선수단을 유치할 계획이다. 또한 올해 양궁, 축구, 검도, 세팍타크로, 육상 등 총 29개의 스포츠대회를 유치했다. 안진수 군 체육계장은 “축구장 2면과 야구장 1면 등으로 구성된 스포츠파크가 2016년 들어서면 한층 많은 체육인이 보은을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 사진 보은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허우적 대책본부 뭉그적 행정부처] 해상 전문가 한 명 없이 중대본 꾸려… “인력·장비 총동원” 하나마나한 지시

    [허우적 대책본부 뭉그적 행정부처] 해상 전문가 한 명 없이 중대본 꾸려… “인력·장비 총동원” 하나마나한 지시

    안전행정부는 대규모 재난의 예방, 대비, 대응, 복구 등에 관한 사항을 총괄 조정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국가재난 컨트롤타워 역할도 한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로 직격탄을 맞았다. 안행부는 중앙부처 한 곳의 능력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재난이 발생한 경우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를 가동한다. 이번 참사에서 해양수산부가 구성한 중앙사고수습본부만으로는 사고 대처가 여의치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중대본을 가동했다. 지난 16일 오전 8시 58분 해양경찰청 상황실에 침몰 사고 신고가 접수된 이후로 중대본이 사고 발생 사실을 인지한 시간은 오전 9시 19분. 21분이나 늦었다. 그것도 해경의 보고가 아닌 언론 보도를 통해서였다. 당시 중대본 상황실 상황판에는 방재 기상정보 지원시스템(MISS-DP)과 지진재해 대응시스템 실시간 영상 및 소백산(경북 영주시), 속리산(충북 보은군), 부모산(충북 청주시) 폐쇄회로(CC)TV 영상 등이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전남 진도군 해역의 침몰 현장 영상은 전혀 볼 수 없었다. 중대본은 해경에 “가용 가능한 인력과 장비를 모두 동원해 달라”고 전했다. 명령 권한이 없어 해경에 적극 지원을 요청한 것인데, 내용이 너무 포괄적이고 일반적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구조 인력과 장비가 필요한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중대본 본부장에서부터 차장, 총괄조정관, 통제관, 담당관 모두 안행부 공무원들로 구성돼 해양 선박 사고에 대한 전문성이 없다. 중대본은 “우리의 역할은 재난대응 과정에서 관계 부처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원을 이끌어내는 일”이라고 말하지만, 국가재난 컨트롤타워를 자처하면서 그에 어울리지 않게 제한적인 기능만 수행할 뿐이다. 해경은 “고생은 우리가 다 하는데 중대본은 멀리서 상황 보고만 받는다”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불만은 16~17일 이틀 동안 중대본과 해경 발표 내용이 서로 다르고, 한쪽 발표를 다른 한쪽이 곧장 부인하는 볼썽사나운 일로 나타났다. 안행부 중심의 현 중대본 체제가 한계를 드러낸 셈이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태안 5.1 지진, 서울·인천 흔들려 “건물에 심각한 영향…”

    태안 5.1 지진, 서울·인천 흔들려 “건물에 심각한 영향…”

    태안 5.1 지진, 서울·인천 흔들려 “건물에 심각한 영향…” 충남 태안지역에서 국내 기상관측사상 역대 세 번째 규모의 지진이 발생해 대전과 충청지역은 물론 서울과 인천, 경기 등 수도권 지역에까지 진동이 전해졌다. 1일 대전지방기상청에 따르면 이날 오전 4시 48분쯤 태안군 서격렬비도 서북서쪽 100㎞ 해역에서 규모 5.1의 지진이 발생했다. 진앙은 북위 36.95도, 동경 124.50도 지점이다. 이번 지진은 1978년 기상대 관측 이후 역대 3번째로 큰 규모다. 실제 사람이 느끼는 지진의 규모를 나타내는 진도는 태안 4, 인천 3, 서울 2 정도라고 기상청은 전했다. 진도 규모가 5를 넘으면 부실하게 지어진 건물의 경우 심한 손상을 줄 수 있는 정도이다. 육지에서라면 실내에 있어도 감지할 수 있다. 실제 이번 지진으로 태안과 서산 지역은 물론 서울과 인천 등 수도권 지역에서도 건물이 흔들리는 것이 감지됐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 상에는 자다가 흔들림을 느꼈다는 글이 속속 올라오고 있으며, 기상청에도 수백 건의 지진을 감지했다는 시민의 신고가 접수됐다. 인천 작전동에 거주하는 A씨는 “자다가 침대가 심하게 흔들려 무서워서 잠이 깼다”고 말했다. 기상청 이지민 연구관은 “지진이 먼바다 쪽에서 발생해 큰 피해는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현재까지 접수된 신고는 건물이 흔들렸다는 것 정도”라고 말했다. 지진의 원인에 대해서는 “국내에는 지질 구조를 연구할 수 있는 장비나 자료가 부족해 구체적인 원인을 분석하기는 어렵다”며 “앞으로 해저지질 조사 등 정밀 연구를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상청 관측 사상 남한에서는 1978년 9월 16일 오전 2시 7분쯤 충북 속리산 부근과 2004년 5월 29일 오후 7시 14분쯤 경북 울진 동쪽 약 80㎞ 해역에서 발생했던 규모 5.2의 지진이 가장 큰 지진이었다. 울진 지진으로 당시 경상도 일원에서 건물이 흔들렸고 전국에서 진동이 감지됐다. 비공식 기록을 포함하면 1980년 북한 평안북도 의주 일대에서 리히터 규모 5.3의 지진이 발생한 적이 있다. 네티즌들은 “태안 5.1 지진, 건물에 심각한 영향이라면 어느 정도 수준?”, “태안 5.1 지진, 나는 전혀 못 느꼈는데”, “태안 5.1 지진, 왜 유독 서쪽에서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 걸까”, “태안 5.1지진, 일본처럼 대지진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태안 지진, 국내 역대 세 번째 규모…서울·대전서도 지진 느껴져

    태안 지진, 국내 역대 세 번째 규모…서울·대전서도 지진 느껴져

    ‘태안 지진’ ‘서울 지진’ ‘대전 지진’ 충남 태안지역에서 국내 기상관측사상 역대 세 번째 규모의 지진이 발생해 대전과 충청지역은 물론 서울과 인천, 경기 등 수도권 지역에까지 진동이 전해졌다. 1일 대전지방기상청에 따르면 이날 오전 4시 48분쯤 태안군 서격렬비도 서북서쪽 100㎞ 해역에서 규모 5.1의 지진이 발생했다. 진앙은 북위 36.95도, 동경 124.50도 지점이다. 이번 지진은 1978년 기상대 관측 이후 역대 3번째로 큰 규모다. 실제 사람이 느끼는 지진의 규모를 나타내는 진도는 태안 4, 인천 3, 서울 2 정도라고 기상청은 전했다. 진도 규모가 5를 넘으면 부실하게 지어진 건물의 경우 심한 손상을 줄 수 있는 정도이다. 육지에서라면 실내에 있어도 감지할 수 있다. 실제 이번 지진으로 태안과 서산 지역은 물론 서울과 인천 등 수도권 지역에서도 건물이 흔들리는 것이 감지됐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 상에는 자다가 흔들림을 느꼈다는 글이 속속 올라오고 있으며, 기상청에도 수백 건의 지진을 감지했다는 시민의 신고가 접수됐다. 인천 작전동에 거주하는 A씨는 “자다가 침대가 심하게 흔들려 무서워서 잠이 깼다”고 말했다. 기상청 이지민 연구관은 “지진이 먼바다 쪽에서 발생해 큰 피해는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현재까지 접수된 신고는 건물이 흔들렸다는 것 정도”라고 말했다. 지진의 원인에 대해서는 “국내에는 지질 구조를 연구할 수 있는 장비나 자료가 부족해 구체적인 원인을 분석하기는 어렵다”며 “앞으로 해저지질 조사 등 정밀 연구를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상청 관측 사상 남한에서는 1978년 9월 16일 오전 2시 7분쯤 충북 속리산 부근과 2004년 5월 29일 오후 7시 14분쯤 경북 울진 동쪽 약 80㎞ 해역에서 발생했던 규모 5.2의 지진이 가장 큰 지진이었다. 울진 지진으로 당시 경상도 일원에서 건물이 흔들렸고 전국에서 진동이 감지됐다. 비공식 기록을 포함하면 1980년 북한 평안북도 의주 일대에서 리히터 규모 5.3의 지진이 발생한 적이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태안 5.1 지진, 서울·인천에서 느낄 정도 “건물에 어떤 영향?”

    태안 5.1 지진, 서울·인천에서 느낄 정도 “건물에 어떤 영향?”

    태안 5.1 지진, 서울·인천에서 느낄 정도 “건물에 어떤 영향?” 충남 태안지역에서 국내 기상관측사상 역대 세 번째 규모의 지진이 발생해 대전과 충청지역은 물론 서울과 인천, 경기 등 수도권 지역에까지 진동이 전해졌다. 1일 대전지방기상청에 따르면 이날 오전 4시 48분쯤 태안군 서격렬비도 서북서쪽 100㎞ 해역에서 규모 5.1의 지진이 발생했다. 진앙은 북위 36.95도, 동경 124.50도 지점이다. 이번 지진은 1978년 기상대 관측 이후 역대 3번째로 큰 규모다. 실제 사람이 느끼는 지진의 규모를 나타내는 진도는 태안 4, 인천 3, 서울 2 정도라고 기상청은 전했다. 진도 규모가 5를 넘으면 부실하게 지어진 건물의 경우 심한 손상을 줄 수 있는 정도이다. 육지에서라면 실내에 있어도 감지할 수 있다. 실제 이번 지진으로 태안과 서산 지역은 물론 서울과 인천 등 수도권 지역에서도 건물이 흔들리는 것이 감지됐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 상에는 자다가 흔들림을 느꼈다는 글이 속속 올라오고 있으며, 기상청에도 수백 건의 지진을 감지했다는 시민의 신고가 접수됐다. 인천 작전동에 거주하는 A씨는 “자다가 침대가 심하게 흔들려 무서워서 잠이 깼다”고 말했다. 기상청 이지민 연구관은 “지진이 먼바다 쪽에서 발생해 큰 피해는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현재까지 접수된 신고는 건물이 흔들렸다는 것 정도”라고 말했다. 지진의 원인에 대해서는 “국내에는 지질 구조를 연구할 수 있는 장비나 자료가 부족해 구체적인 원인을 분석하기는 어렵다”며 “앞으로 해저지질 조사 등 정밀 연구를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상청 관측 사상 남한에서는 1978년 9월 16일 오전 2시 7분쯤 충북 속리산 부근과 2004년 5월 29일 오후 7시 14분쯤 경북 울진 동쪽 약 80㎞ 해역에서 발생했던 규모 5.2의 지진이 가장 큰 지진이었다. 울진 지진으로 당시 경상도 일원에서 건물이 흔들렸고 전국에서 진동이 감지됐다. 비공식 기록을 포함하면 1980년 북한 평안북도 의주 일대에서 리히터 규모 5.3의 지진이 발생한 적이 있다. 네티즌들은 “태안 5.1 지진, 건물 손상되면 무너지는 것 아냐?”, “태안 5.1 지진, 얼마나 강하길래”, “태안 5.1 지진, 왜 유독 서쪽에서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 걸까”, “태안 5.1지진, 일본처럼 지진 일어나면 안되는데”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태안 5.1 지진, 서울·인천에서도 느꼈다 “건물에 심한 손상 줄 정도…”

    태안 5.1 지진, 서울·인천에서도 느꼈다 “건물에 심한 손상 줄 정도…”

    태안 5.1 지진, 서울·인천에서도 느꼈다 “건물에 심한 손상 줄 정도…” 충남 태안지역에서 국내 기상관측사상 역대 세 번째 규모의 지진이 발생해 대전과 충청지역은 물론 서울과 인천, 경기 등 수도권 지역에까지 진동이 전해졌다. 1일 대전지방기상청에 따르면 이날 오전 4시 48분쯤 태안군 서격렬비도 서북서쪽 100㎞ 해역에서 규모 5.1의 지진이 발생했다. 진앙은 북위 36.95도, 동경 124.50도 지점이다. 이번 지진은 1978년 기상대 관측 이후 역대 3번째로 큰 규모다. 실제 사람이 느끼는 지진의 규모를 나타내는 진도는 태안 4, 인천 3, 서울 2 정도라고 기상청은 전했다. 진도 규모가 5를 넘으면 부실하게 지어진 건물의 경우 심한 손상을 줄 수 있는 정도이다. 육지에서라면 실내에 있어도 감지할 수 있다. 실제 이번 지진으로 태안과 서산 지역은 물론 서울과 인천 등 수도권 지역에서도 건물이 흔들리는 것이 감지됐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 상에는 자다가 흔들림을 느꼈다는 글이 속속 올라오고 있으며, 기상청에도 수백 건의 지진을 감지했다는 시민의 신고가 접수됐다. 인천 작전동에 거주하는 A씨는 “자다가 침대가 심하게 흔들려 무서워서 잠이 깼다”고 말했다. 기상청 이지민 연구관은 “지진이 먼바다 쪽에서 발생해 큰 피해는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현재까지 접수된 신고는 건물이 흔들렸다는 것 정도”라고 말했다. 지진의 원인에 대해서는 “국내에는 지질 구조를 연구할 수 있는 장비나 자료가 부족해 구체적인 원인을 분석하기는 어렵다”며 “앞으로 해저지질 조사 등 정밀 연구를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상청 관측 사상 남한에서는 1978년 9월 16일 오전 2시 7분쯤 충북 속리산 부근과 2004년 5월 29일 오후 7시 14분쯤 경북 울진 동쪽 약 80㎞ 해역에서 발생했던 규모 5.2의 지진이 가장 큰 지진이었다. 울진 지진으로 당시 경상도 일원에서 건물이 흔들렸고 전국에서 진동이 감지됐다. 비공식 기록을 포함하면 1980년 북한 평안북도 의주 일대에서 리히터 규모 5.3의 지진이 발생한 적이 있다. 네티즌들은 “태안 5.1 지진, 서울 인천에서 느꼈다는데 나는 왜 못 느꼈지”, “태안 5.1 지진, 건물에 손상을 줄 정도면 대단하네”, “태안 5.1 지진, 서쪽에서 지진이 많이 일어나는 듯”, “태안 5.1지진, 일본처럼 지진 일어나면 안되는데”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태안 지진, 관측 사상 4번째 규모…여진 계속 된다는데

    태안 지진, 관측 사상 4번째 규모…여진 계속 된다는데

    태안 지진 충남 태안에서 1일 규모 5.1의 지진이 발생했다. 이번 지진은 한반도 기상관측사상 역대 네 번째 규모의 지진으로 대전과 충청지역은 물론 서울과 인천, 경기 등 수도권 지역에까지 진동이 전해졌다. 대전지방기상청에 따르면 이날 오전 4시48분께 태안군 서격렬비도 서북서쪽 100㎞ 해역에서 규모 5.1의 지진이 발생했다. 진앙은 북위 36.95도, 동경 124.50도 지점이다. 오전 9시25분쯤도 서북서쪽 100㎞ 해역에서 규모 2.3의 지진이 잇따라 발생했다. 기상청 관계자는 “앞서 지진 규모가 컸기 때문에 추가로 여진이 발생할 수 있다”면서 “본 지진보다 큰 규모는 아닌 만큼 염려할 필요는 없다”고 설명했다. 실제 사람이 느끼는 지진의 규모를 나타내는 진도는 태안 4, 인천 3, 서울 2 정도라고 기상청은 전했다. 진도 규모가 5를 넘으면 부실하게 지어진 건물의 경우 심한 손상을 줄 수 있다. 육지에서라면 실내에 있어도 감지할 수 있다. 실제 이번 지진으로 태안과 서산 지역은 물론 서울과 인천 등 수도권 지역에서도 건물이 흔들리는 것이 감지됐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는 진동을 감지했다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고 기상청에도 각종 신고가 접수되고 있다. 기상청 이지민 연구관은 “지진이 먼바다 쪽에서 발생해 큰 피해는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현재까지 접수된 신고는 건물이 흔들렸다는 것 정도”라고 말했다. 이 연구관은 “국내에는 지질 구조를 연구할 수 있는 장비나 자료가 부족해 구체적인 원인을 분석하기는 어렵다”면서 “앞으로 해저지질 조사 등 정밀 연구를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지진은 1978년 기상대 관측 이후 역대 4번째로 큰 규모다. 기상청 관측 사상 한국에서는 1978년 9월 16일 오전 2시7분쯤 충북 속리산 부근과 2004년 5월 29일 오후 7시 14분께 경북 울진 동쪽 약 80㎞ 해역에서 발생했던 규모 5.2의 지진이 가장 큰 지진이었다. 울진 지진으로 당시 경상도 일원에서 건물이 흔들렸고 전국에서 진동이 감지됐다. 북한에서도 1980년 평안북도 의주 일대에서 리히터 규모 5.3의 지진이 발생한 적이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태안 5.1 지진, 서울·인천에서도 느꼈다…깜짝

    태안 5.1 지진, 서울·인천에서도 느꼈다…깜짝

    태안 5.1 지진, 서울·인천에서도 느꼈다…깜짝 충남 태안지역에서 국내 기상관측사상 역대 세 번째 규모의 지진이 발생해 대전과 충청지역은 물론 서울과 인천, 경기 등 수도권 지역에까지 진동이 전해졌다. 1일 대전지방기상청에 따르면 이날 오전 4시 48분쯤 태안군 서격렬비도 서북서쪽 100㎞ 해역에서 규모 5.1의 지진이 발생했다. 진앙은 북위 36.95도, 동경 124.50도 지점이다. 이번 지진은 1978년 기상대 관측 이후 역대 3번째로 큰 규모다. 실제 사람이 느끼는 지진의 규모를 나타내는 진도는 태안 4, 인천 3, 서울 2 정도라고 기상청은 전했다. 진도 규모가 5를 넘으면 부실하게 지어진 건물의 경우 심한 손상을 줄 수 있는 정도이다. 육지에서라면 실내에 있어도 감지할 수 있다. 실제 이번 지진으로 태안과 서산 지역은 물론 서울과 인천 등 수도권 지역에서도 건물이 흔들리는 것이 감지됐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 상에는 자다가 흔들림을 느꼈다는 글이 속속 올라오고 있으며, 기상청에도 수백 건의 지진을 감지했다는 시민의 신고가 접수됐다. 인천 작전동에 거주하는 A씨는 “자다가 침대가 심하게 흔들려 무서워서 잠이 깼다”고 말했다. 기상청 이지민 연구관은 “지진이 먼바다 쪽에서 발생해 큰 피해는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현재까지 접수된 신고는 건물이 흔들렸다는 것 정도”라고 말했다. 지진의 원인에 대해서는 “국내에는 지질 구조를 연구할 수 있는 장비나 자료가 부족해 구체적인 원인을 분석하기는 어렵다”며 “앞으로 해저지질 조사 등 정밀 연구를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상청 관측 사상 남한에서는 1978년 9월 16일 오전 2시 7분쯤 충북 속리산 부근과 2004년 5월 29일 오후 7시 14분쯤 경북 울진 동쪽 약 80㎞ 해역에서 발생했던 규모 5.2의 지진이 가장 큰 지진이었다. 울진 지진으로 당시 경상도 일원에서 건물이 흔들렸고 전국에서 진동이 감지됐다. 비공식 기록을 포함하면 1980년 북한 평안북도 의주 일대에서 리히터 규모 5.3의 지진이 발생한 적이 있다. 네티즌들은 “태안 5.1 지진, 서울에서도 느끼다니 대단하네”, “태안 5.1 지진, 무슨 일이 있었길래”, “태안 5.1 지진, 서울에 있었는데 아무렇지 않던데?”, “태안 5.1지진, 앞으로 지진이 더 자주 일어나는 것 아냐?”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태안 5.1 지진, 서울·인천 흔들려 “건물에 심각한 영향 줄 정도” 강도 수준이

    태안 5.1 지진, 서울·인천 흔들려 “건물에 심각한 영향 줄 정도” 강도 수준이

    태안 5.1 지진, 서울·인천 흔들려 “건물에 심각한 영향 줄 정도” 강도 수준이 충남 태안지역에서 국내 기상관측사상 역대 세 번째 규모의 지진이 발생해 대전과 충청지역은 물론 서울과 인천, 경기 등 수도권 지역에까지 진동이 전해졌다. 1일 대전지방기상청에 따르면 이날 오전 4시 48분쯤 태안군 서격렬비도 서북서쪽 100㎞ 해역에서 규모 5.1의 지진이 발생했다. 진앙은 북위 36.95도, 동경 124.50도 지점이다. 이번 지진은 1978년 기상대 관측 이후 역대 3번째로 큰 규모다. 실제 사람이 느끼는 지진의 규모를 나타내는 진도는 태안 4, 인천 3, 서울 2 정도라고 기상청은 전했다. 진도 규모가 5를 넘으면 부실하게 지어진 건물의 경우 심한 손상을 줄 수 있는 정도이다. 육지에서라면 실내에 있어도 감지할 수 있다. 실제 이번 지진으로 태안과 서산 지역은 물론 서울과 인천 등 수도권 지역에서도 건물이 흔들리는 것이 감지됐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 상에는 자다가 흔들림을 느꼈다는 글이 속속 올라오고 있으며, 기상청에도 수백 건의 지진을 감지했다는 시민의 신고가 접수됐다. 인천 작전동에 거주하는 A씨는 “자다가 침대가 심하게 흔들려 무서워서 잠이 깼다”고 말했다. 기상청 이지민 연구관은 “지진이 먼바다 쪽에서 발생해 큰 피해는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현재까지 접수된 신고는 건물이 흔들렸다는 것 정도”라고 말했다. 지진의 원인에 대해서는 “국내에는 지질 구조를 연구할 수 있는 장비나 자료가 부족해 구체적인 원인을 분석하기는 어렵다”며 “앞으로 해저지질 조사 등 정밀 연구를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상청 관측 사상 남한에서는 1978년 9월 16일 오전 2시 7분쯤 충북 속리산 부근과 2004년 5월 29일 오후 7시 14분쯤 경북 울진 동쪽 약 80㎞ 해역에서 발생했던 규모 5.2의 지진이 가장 큰 지진이었다. 울진 지진으로 당시 경상도 일원에서 건물이 흔들렸고 전국에서 진동이 감지됐다. 비공식 기록을 포함하면 1980년 북한 평안북도 의주 일대에서 리히터 규모 5.3의 지진이 발생한 적이 있다. 네티즌들은 “태안 5.1 지진, 진도 5 이상이면 심각하다는데, “태안 5.1 지진, 큰 피해는 없었으면 하네요”, “태안 5.1 지진, 지진 문제 심각하네”, “태안 5.1지진, 일본처럼 대지진 일어나는 건 아니겠지?”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태안 5.1 지진, 역대 3번째…울림 어느 정도인 지 측정해보니

    태안 5.1 지진, 역대 3번째…울림 어느 정도인 지 측정해보니

    태안 5.1 지진, 역대 3번째…울림 어느 정도인 지 측정해보니 충남 태안지역에서 국내 기상관측사상 역대 세 번째 규모의 지진이 발생해 대전과 충청지역은 물론 서울과 인천, 경기 등 수도권 지역에까지 진동이 전해졌다. 1일 대전지방기상청에 따르면 이날 오전 4시 48분쯤 태안군 서격렬비도 서북서쪽 100㎞ 해역에서 규모 5.1의 지진이 발생했다. 진앙은 북위 36.95도, 동경 124.50도 지점이다. 이번 지진은 1978년 기상대 관측 이후 역대 3번째로 큰 규모다. 실제 사람이 느끼는 지진의 규모를 나타내는 진도는 태안 4, 인천 3, 서울 2 정도라고 기상청은 전했다. 진도 규모가 5를 넘으면 부실하게 지어진 건물의 경우 심한 손상을 줄 수 있는 정도이다. 육지에서라면 실내에 있어도 감지할 수 있다. 실제 이번 지진으로 태안과 서산 지역은 물론 서울과 인천 등 수도권 지역에서도 건물이 흔들리는 것이 감지됐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 상에는 자다가 흔들림을 느꼈다는 글이 속속 올라오고 있으며, 기상청에도 수백 건의 지진을 감지했다는 시민의 신고가 접수됐다. 인천 작전동에 거주하는 A씨는 “자다가 침대가 심하게 흔들려 무서워서 잠이 깼다”고 말했다. 기상청 이지민 연구관은 “지진이 먼바다 쪽에서 발생해 큰 피해는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현재까지 접수된 신고는 건물이 흔들렸다는 것 정도”라고 말했다. 지진의 원인에 대해서는 “국내에는 지질 구조를 연구할 수 있는 장비나 자료가 부족해 구체적인 원인을 분석하기는 어렵다”며 “앞으로 해저지질 조사 등 정밀 연구를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상청 관측 사상 남한에서는 1978년 9월 16일 오전 2시 7분쯤 충북 속리산 부근과 2004년 5월 29일 오후 7시 14분쯤 경북 울진 동쪽 약 80㎞ 해역에서 발생했던 규모 5.2의 지진이 가장 큰 지진이었다. 울진 지진으로 당시 경상도 일원에서 건물이 흔들렸고 전국에서 진동이 감지됐다. 비공식 기록을 포함하면 1980년 북한 평안북도 의주 일대에서 리히터 규모 5.3의 지진이 발생한 적이 있다. 네티즌들은 “태안 5.1 지진, 큰 지진 나는 것 아냐?”, “태안 5.1 지진, 무섭다”, “태안 5.1 지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태안 5.1지진, 앞으로 지진이 더 일어나는 것 아닌 지 모르겠네”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태안 5.1 지진, 서울·인천에서도 느꼈다 “도대체 누구?”

    태안 5.1 지진, 서울·인천에서도 느꼈다 “도대체 누구?”

    태안 5.1 지진, 서울·인천에서도 느꼈다 “도대체 누구?” 충남 태안지역에서 국내 기상관측사상 역대 세 번째 규모의 지진이 발생해 대전과 충청지역은 물론 서울과 인천, 경기 등 수도권 지역에까지 진동이 전해졌다. 1일 대전지방기상청에 따르면 이날 오전 4시 48분쯤 태안군 서격렬비도 서북서쪽 100㎞ 해역에서 규모 5.1의 지진이 발생했다. 진앙은 북위 36.95도, 동경 124.50도 지점이다. 이번 지진은 1978년 기상대 관측 이후 역대 3번째로 큰 규모다. 실제 사람이 느끼는 지진의 규모를 나타내는 진도는 태안 4, 인천 3, 서울 2 정도라고 기상청은 전했다. 진도 규모가 5를 넘으면 부실하게 지어진 건물의 경우 심한 손상을 줄 수 있는 정도이다. 육지에서라면 실내에 있어도 감지할 수 있다. 실제 이번 지진으로 태안과 서산 지역은 물론 서울과 인천 등 수도권 지역에서도 건물이 흔들리는 것이 감지됐다. SNS(사회관계망서비스) 상에는 자다가 흔들림을 느꼈다는 글이 속속 올라오고 있으며, 기상청에도 수백 건의 지진을 감지했다는 시민의 신고가 접수됐다. 인천 작전동에 거주하는 A씨는 “자다가 침대가 심하게 흔들려 무서워서 잠이 깼다”고 말했다. 기상청 이지민 연구관은 “지진이 먼바다 쪽에서 발생해 큰 피해는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현재까지 접수된 신고는 건물이 흔들렸다는 것 정도”라고 말했다. 지진의 원인에 대해서는 “국내에는 지질 구조를 연구할 수 있는 장비나 자료가 부족해 구체적인 원인을 분석하기는 어렵다”며 “앞으로 해저지질 조사 등 정밀 연구를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상청 관측 사상 남한에서는 1978년 9월 16일 오전 2시 7분쯤 충북 속리산 부근과 2004년 5월 29일 오후 7시 14분쯤 경북 울진 동쪽 약 80㎞ 해역에서 발생했던 규모 5.2의 지진이 가장 큰 지진이었다. 울진 지진으로 당시 경상도 일원에서 건물이 흔들렸고 전국에서 진동이 감지됐다. 비공식 기록을 포함하면 1980년 북한 평안북도 의주 일대에서 리히터 규모 5.3의 지진이 발생한 적이 있다. 네티즌들은 “태안 5.1 지진, 서울 인천에서 느꼈다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지”, “태안 5.1 지진, 이러다 지진 많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태안 5.1 지진, 지진 제발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데”, “태안 5.1지진, 그래도 일본보다 상황은 좀 낫지 않나”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英 팬들 “즐라탄 ‘EPL파괴 발언’ 맞다” 63%

    英 팬들 “즐라탄 ‘EPL파괴 발언’ 맞다” 63%

    “즐라탄의 말이 맞다 63% VS 아니다 37%” 만 32세, 한국 나이로는 34세의 나이에도 여전한 실력을 과시하며 소속리그(프랑스 리그1), 챔피언스리그에서 모두 득점선두를 달리고 있는 ‘상남자’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그런 그가 英 매체 데일리미러에 게재된 인터뷰를 통해서 “내가 EPL에서 뛰었다면, EPL 수비수들을 파괴해버렸을 것”이라는 본인다운 코멘트를 해 화제다. 즐라탄은 해당 인터뷰에서 “잉글랜드는 유럽 최고수준의 클럽 3, 4개팀이 있는 아주 강한 리그다”라며 “그러나 다른 리그에서 모두 그랬듯, 내가 만약 그곳에서 뛰었다면 나는 EPL을 파괴해버렸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16세 때 아스널 대신 아약스 행을 선택했던 즐라탄은 이어서 “모두가 알다시피 나는 아스널로 갈 수도 있었지만 트라이얼을 거부했다. 나와 벵거 중 누가 더 후회하고 있을까?”라고 말했다. 2012년 잉글랜드와의 친선전에서 혼자 4골을 넣었던 즐라탄은 “지난 번 내가 EPL 최고 선수들로 구성된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을 상대했을 때 무슨 일이 생겼던가?”라고 물은 뒤 “많은 팬들은 그 경기를 ‘즐라탄 쇼’로 기억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해당 인터뷰는 현지 팬들 사이에서도 널리 회자되고 있으며, 인터뷰가 게재된 데일리미러 홈페이지에서는 축구팬들이 즐라탄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투표까지 진행중이다. 현재까지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잉글랜드의 축구 팬들마저 63%가 ‘즐라탄의 말이 맞다’고 대답하고 있다. 본인의 말대로 정말 그가 EPL에서 뛰었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됐을지 축구 팬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목이다. 사진=‘상남자’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의 인터뷰를 게재한 데일리미러(데일리미러) 이성모 스포츠 통신원 London_2015@naver.com
  • [김문이 만난사람] 국내 유일 낙화장 김영조씨

    [김문이 만난사람] 국내 유일 낙화장 김영조씨

    우리 전통 화법 중에 ‘낙화’(畵)라는 것이 있다. 화선지, 나무, 천, 가죽 등의 재료 표면을 인두로 지져서 글씨와 문양을 그려 넣는다. 붓이 아닌 인두를 사용하기 때문에 회화와 공예의 기술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점에서 조선시대에는 상당히 수준 높은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다가 근대에 이르러 그 맥을 잇는 사람이 점점 사라지면서 일반인들과도 거리가 멀어졌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낙화를 그리려면 고도의 수련과 많은 시간이 요구되고, 따라서 끊임없는 장인정신으로 달궈진 예술 혼이 아니면 견뎌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전통을 잇는다는 것은 무한한 인내와 끊임없는 정진이 요구된다. 지난 13일 충북 보은군 보은읍 대야리, 25번 국도를 따라 속리산 방향으로 가다가 누청삼거리 부근에 버섯 모양의 집 두 동이 마당을 사이에 두고 서로 사이좋게 마주보고 있었다. 한 집은 ‘청목화랑’이고 다른 한 집은 ‘낙화 체험장’이다. 먼저 ‘청목화랑’으로 들어갔다. 입구에는 8m 길이의 12폭 병풍 ‘낙화강산무진도’(畵江山無盡圖)가 떡하니 진열돼 있었다. 이 작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이인문(李寅文)의 ‘강산무진도’를 전통 낙화 기법으로 재현해 놓은 것이다. 이인문은 단원 김홍도와 함께 정조, 순조 때를 대표하는 화가로, 그의 작품인 ‘강산무진도’는 조선 회화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최대 걸작 중의 하나다. ‘어떻게 이런 대작을 인두로 다 그렸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몇 발자국 옮기자 종이가 아닌 나무에 직접 그린 ‘신선암 마애보살상’이 눈에 들어왔다. 좌우로 낙화산수도, 사군자, 연과 버들 등 여러 그림들이 앙증맞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래저래 합해서 모두 100여점이다. 김영조(64)씨는 국내 유일의 전통 낙화장인(충북 무형문화재 제22호)이다. 22세 때 낙화에 입문해 끊어질 위기에 처한 전통 낙화의 맥을 계속 이어간다는 사명감으로 42년째 낙화 인생의 길을 오롯이 걸어오고 있다. 이런 노력의 결실일까. 그가 오는 5월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아솔로 비엔날레에 참가해 한국 낙화의 전통미를 한껏 알릴 예정이다. 그토록 소망했던 우리의 전통 낙화가 처음으로 외국 나들이를 하게 된 것이다. 하여 김씨는 어느 때보다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다. 화랑 옆에 있는 작업실에서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눴다. “비엔날레는 이탈리아 예술도시 아솔로에서 5월 한 달간 열립니다. 베니스 비엔날레처럼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조직위원회에서 초청하는 전문작가들만 참가한다는 점에서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 낙화가 그들과 함께 세계에 알려진다고 생각하니 감개가 무량합니다.” 그는 아솔로 비엔날레에 애지중지 여기는 작품 7점을 엄선해 전시할 예정이다. 단순히 전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 낙화 기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과정까지 시연할 예정이다. 그가 아솔로 비엔날레에 참가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지난해 9월 청주 국제공예비엔날레에 참가한 이탈리아 작가와 에이전시들이 전시된 낙화와 대작을 시연하는 김씨의 모습을 보고 감동받아 그를 초청했다. 불에 달군 인두로 그려도 타지 않고, 특유의 원근법으로 살아 있는 산수화를 잘 표현해내는 것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낙화는 중국과 한국에만 있는데 특히 한국의 낙화를 더 알아줍니다. 예술성이 높아 회화의 한 장르로 인식되고 있지요. 이번 아솔로 비엔날레를 통해 세계적인 낙화 예술이라는 것을 확실히 각인시키겠습니다.” 낙화 전수자인 그의 딸 유진씨도 동행해 비엔날레 현장에서 함께 시연할 예정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낙화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그는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조선 초기에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면서 “오세창의 ‘근역서화징’ 등에 낙화와 관련해 1598년에 태어난 정부인 장씨를 언급하고 있어 문헌상으로는 400년 역사로 해석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1822년쯤 밀양 박씨 박창규가 임금님 앞에 가서 시연할 정도로 이름을 날렸으며 당시 장안 양반집에 낙화 그림이 한 점씩은 대부분 있었을 정도로 크게 유행했습니다.” 김씨의 스승은 일제강점기 때 활발히 활동했던 운포 백학기와 설봉 최성수의 계보를 잇는 전원 전창진이다. 전원은 1972년 서울 종로에서 한국낙화연구소를 차려 낙화를 가르치며 작품활동을 하다가 나중에 출판업으로 전향했다. 당시 전원의 제자가 여러 명 있었으나 김씨가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맥을 잇고 있다. 김씨는 1950년 충남 부여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충북의 천도교 책임자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정치에 관심이 많아 27세 때 부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가족의 생계는 어머니가 책임을 졌다. 이후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김씨 가족은 서울 뚝섬 쪽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아버지가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가정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게다가 당시 서울시가 무허가촌에 살고 있는 시민을 강제로 경기도 성남으로 이주시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가족 모두 성남으로 이사를 했다. 장남인 김씨가 미술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생활 전선으로 뛰어들게 된 계기였다. 원래 김씨는 미술대학에 들어가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좋아해 어쩌다 용돈이 생기면 곧바로 종이를 사다가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다. 어머니를 도와 바느질도 곧잘 했다. 지금의 예능적 끼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중학교 때에는 동양화를 좋아해 각종 미술대회에서 입상했다. 이런 김씨를 보고 미술 선생도 미술분야로 진로를 정해 보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모든 꿈을 접고 취직하기로 마음을 돌렸다. 취업을 위해 여기저기 다니며 알아보던 중 어느 날 우연히 ‘낙화연구생 모집’이라는 신문광고를 보게 됐다. 이게 뭘까. 그때만 해도 낙화라는 말이 생소했다. 그러나 그림도 배울 수 있고 취업도 보장된다는 내용에 곧바로 모집광고를 낸 종로에 있는 한국낙화연구소로 달려갔다. “그때 장교빌딩 5층에 학원(낙화연구소)이 있었지요. 30여명의 수강생들에게 낙화를 가르치는 전창진 선생님의 모습이 아주 특이했습니다. 마음이 금방 끌리더군요. 처음에는 아주 재미있었지만 나중에는 무척 어렵더라고요.” 그는 집이 성남이라 낙화연구소에서 기숙하며 열심히 배웠다. 스승이 그려준 낙화를 익숙해질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그렸다. 낙화의 소재는 주로 동양화에 등장하는 것들이었다. 처음에는 사군자로 시작해 나중에는 꽃과 새, 산수, 인물 등을 배워 나갔다. 잠 잘 시간을 줄여가며 낙화에 몰두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날 무렵이었다. 낙화연구소의 운영이 점차 어려워졌다. 30명이 넘던 수강생들이 날이 갈수록 점점 줄어들었다. 결국 연구소는 문을 닫았다. 하지만 김씨는 남아 있는 낙화연구소 수강생 5명과 함께 종로2가 건물에 사무실을 얻어 합숙을 하며 낙화를 연습했다. 나중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제작과 판매를 하며 사무실을 운영했다. 그러나 1년쯤 지나자 같이 활동했던 멤버들이 모두 떠나버렸다. 혼자 남게 된 그는 기념품을 제작해 전국 유명 관광지를 다니며 판매했다. 다행히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그러던 1977년 대구 동아백화점에서 전시를 하게 됐다. 100여점을 풀어놨는데 10여점이 팔렸다. 이어 속리산 입구에 기념품 상점을 열었다. 그곳에서 10여년 동안 기념품을 팔면서 어느 정도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그동안 소망했던 일, 즉 자신의 공방을 열어 본격적으로 전통 낙화를 다시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박물관이나 전시관 등에 가서 전통회화를 감상하고 연구를 했다. 회화와 도록에 나와 있는 유명 화가의 그림을 모사하기도 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무에 낙()을 하는 기술과 종이에 낙을 하는 기술이 다르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인두의 온도가 적당하고 손놀림이 빨라야 종이가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인두의 열로 그림과 선의 음양을 표현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이후 무수히 많은 실패를 거듭하며 반복된 노력 끝에 마음대로 종이에 낙을 할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게 됐다. 그는 2007년부터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을 시작으로 여러 공모전에 10여 차례 수상을 하게 됐다. 그러자 주위에서는 김씨의 낙화기술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후대에 전승해야 한다며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을 것을 권했다. 결국 심사과정을 거쳐 2010년 10월에 지정됐다. 그동안 그린 낙화는 수천점에 이른다. 외국인들에게는 그의 산수화와 마애불이 특히 인기가 높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는 “좋은 작품을 국내외에 꾸준히 선보이고 후진 양성에 진력해 예술적 생명력을 이어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선임기자 km@seoul.co.kr ■김영조씨는… 1950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 배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2년 낙화에 입문했다. 1977년 대구 동아백화점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1979년 청목화랑을 개원했다. 2010년에 충북무형문화재 제22호 낙화장으로 지정됐으며 현재 한국 낙화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국내외 활동 이력으로는 일본 궁기현(宮岐縣) 낙화전(2003년), 인도 세계공예심포지엄 워크숍 참가(2012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통공예작가 워크숍 참가(2013년) 등이 있다. 주요 수상으로는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특선(2007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입선(2008년),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장려상(2009년)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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