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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가 되어 더불어 살자(6회)-남북 화해의 물꼬 트자

    새로운 천년을 한해 앞둔 현재 범세계적 냉전구도는 거의 해체됐다.그러나한반도만은 여전히 탈냉전시대의 마지막 고도(孤島)로 남아 있다.이같은 문명사적 흐름 속에서 남북한은 공히 이중의 시련을 겪고 있다.분단으로 인한과중한 군사비 부담 뿐만이 아니다.북한은 극심한 식량난으로 상징되는 총체적 경제난으로 신음하고 있는지 오래다.남한마저 지난해부터 외환위기로 촉발된 경제적 어려움을 맞고 있다.이 모든 난관은 따지고 보면 장기 분단으로 인한 민족에너지의 낭비에 기인한다.남북이 냉전적 대결에서 벗어나 화해의 새시대를 열어야 하는 당위성도 여기에 있다.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韓光玉상임의장은 “남북간의 소모적 대결과 반목이 계속된다면 치열한 세계경제전쟁 속에서 우리의 장래는 기약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강조했다.한림대 全相仁교수는 “남북한이 현재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각자의 노력’을 서로간의 화해와 협력에 기초한 공동의 과제로 바꿔야 한다”고 대안을 제시했다. 남북의 화해 협력은 통일후 예상되는 엄청난 통일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도긴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은 통일후 북한주민의 소득을 남한의 60%선으로 끌어올리는데 10년이 걸린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다.2000년에 통일된다고 가정할때 무려 3,772억달러의 통일비용이 소요된다는 결론이었다. 화해와 협력은 그래도 여유있는 남쪽에서 이니셔티브를 쥘 수밖에 없다는게 중론이다.물론 이 점에서 ‘국민의 정부’도 역대 어느 정권보다 적극적이다.한때 ‘햇볕정책’이라는 대명사로 불린 대북 포용정책을 줄기차게 펴온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이 우리의 선의에 반드시 화답해 온다는 보장이 없다는데 있다.북한의 강경세력들은 남북화해의 폭이 넓고 깊어질수록 입지가 좁아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개방은 곧 북한주민들의 동요로 이어질 수 있다는북한 고위층의 두려움과 무관치 않다.북한체제가 안고 있는 원초적 딜레마인 셈이다. 때문에 정부는 가능한한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실현가능한 일부터하나씩 풀어나가자는 입장이다.남북화해의 가장 큰 상징적 현안인이산가족상봉문제에 대한 접근방식에서도 그 기류는 감지된다. 이를테면 생사확인-편지교환-상봉-재결합 등 단계적 해결방안을 모색하고있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다만 북측은 아직 생사확인이나 서신교환에도 소극적인 입장이다.그 과정에서 남한 등 외부사조의 틈입을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올해 이같은 벽을 넘기 위해서 다각적인 방안을 검토중이다.비료나종자 등 농업자재를 지원하는 대신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를 관철하려는 것도 그 하나다. 필요하다면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서 현금을 지원한 동서독 모델도 적극 검토할 것으로 알려졌다.구서독은 이산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경제난에빠진 동독측에 총 600억마르크를 지불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같은 대북 포용정책을 지속해 나가기 위해선 “우선 국민통합적 사회구조를 탄탄하게 구축해야 한다”(朴在圭경남대총장)는 지적도 있다.‘남남화해’가 없이 제대로 된 ‘남북화해’를 추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통일을 위해서라도 동서간 지역갈등이 한시바삐 치유돼야 한다는시각이다.이같은 맥락에서 우리 사회 내의 통일유관단체들의 활동에도 관심이 쏠리고있다.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등이 벌일 예정인 각종 지역갈등 해소캠페인의 성과가 기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를 통해 남북 화해협력 방안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들이 조화로운 화음을낼 수 있기 때문이다.바로 그 때 보다 전향적인 대북 정책도 설 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 경우 남북경협 방식도 남북 직거래 이외에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사례와 같이 한반도농업개발기구(KADO) 등 다자간 협력방식도 검토될 수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具本永 kby7@
  • “소,민항인줄 알면서 KAL기 격추”/전KGB 런던총책 폭로

    ◎실수뒤 당황한 군부서 “첩보비행 했다” 조작/크렘린,“CIAㆍKAL 연계활동 선전” 지시 소련 KGB(국가보안위원회)의 런던총책으로 있다가 지난 85년 서방으로 탈출한 올레그 고르디에프스키씨는 최근 펴낸 「KGB 인사이드스토리」(크리스토프 앤드루공저)라는 책에서 83년 KAL 007기 격추 당시 소련공군은 이 비행기가 민간여객기였음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이 사고는 소련공군과 사고기의 실수가 겹쳐 일어난 것이긴 하나 가장 큰 요인은 소련의 인명에 대한 경시풍조였다고 폭로하고 있다. 이 책의 KAL기 격추사건 관계부분을 발췌한다. 「KAL 007기의 비극은 소련공군과 대한항공기의 실수가 함께 야기한 것이며 특히 소련측의 인명에 대한 경시에서 비롯됐다. 이보다 5년전에 소련은 또다른 대한항공 902편이 소련 영공을 침입,무르만스크 근처로 날아왔을 때 요격해 강제착륙시켰으나 폭파시키지는 않았다. 83년 8월31일과 9월1일 사이의 밤 KAL기가 비행한 캄차카반도와 사할린섬에 있던 11개의 추적기지 중 8개소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지 않았다. 여기에다 변경된지 얼마되지 않은 소련방 공군사지역 관할체제가 혼돈을 가중시켰다. 사고기가 영공을 침범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하바로스크 방공군사령부는 모스크바로부터 훈령을 받으려 몇번 시도했다. 혼란스러운 메시지가 교환된 후에 하바로스크는 사할린섬에 있는 지휘부에 격추하기 전에 침입한 항공기를 식별하도록 되어있는 원칙을 상기시켰다. 사할린은 이를 무시했다. 이 사고기를 처리하던 과정에서 지휘계통에 있던 일부 사람들은 그들이 다루고있는 항공기가 민간여객기가 아니라 미국의 RC 135 정보수집기로 믿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KGB의 런던총책으로 모스크바에 휴가차 방문하고 있던 라르카디 쿠크는 사고기가 격추당할 시간에는 그것이 민간항공기라는 것을 하바로스크의 방공군 사령부는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 사건에 대한 소련의 첫 공식반응은 그같은 사고가 있었다는 것도 부인하는 것이었다. 이 비극을 처리한 모스크바의 혼란은 너무나 커 사흘동안 다른 곳에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런던주재 대사관이나 KGB지국에 어떻게 설명하라는 지침이 없었다. 9월4일 본부로부터 온 첫급전은 레이건 행정부가 전세계적인 반소캠페인을 벌이기 위해 KAL기 사고를 이용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지침은 너무나 악의에 찬 것이었다. KGB지국은 대사관 등과 협의해 소련국민ㆍ건물ㆍ선박ㆍ항공기 등을 공격해 대비해 보호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모스크바에서 두번째와 세번째 나온 전보는 미국과 한국에 사고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적극적인 내용이다. KGB본부는 미국과 대한항공 사이에는 긴밀한 군사ㆍ정보협력체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얘기는 나중에 사고기의 기장이 전에도 첩보활동을 한 적이 있다고 자랑한 적이 있으며 친구들에게 첩보장치를 보여주기까지 했다는 거짓 보고까지 첨가됐다. 더 의미심장한 것은 본부로부터 온 전보는 소련공군이 사고기가 민간항공기라는 것을 알았느냐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후 사고기의 기장이 『우리는 캄차카 상공을 운항하고 있다』고 무선보고를 했다는 거짓 주장까지 나왔다. CIA 음모설을 치장하기 위해 본부는 각 지국에 승객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도록 지시했다. 소련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승객과 서방정보원을 연계시키려고 시도했다. 소련외교관들과 KGB 관리들은 이 사고로 소련의 국제적 명성이 훼손된데 실망했다. 본부는 9월18일 프라우다지 편집국장인 아파나시예프가 런던을 방문하던중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격추사건에 대한 소련의 공식적인 주장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한데 대해 격분했다. KGB 런던지국은 본부로부터 아파나시예프의 인터뷰내용 전문을 보내라는 급전을 받았다. 83년말 KGB의 주요지국이 수행한 중대업무의 하나는 CIA 음모설을 널리 알리는 것이었다. 런던지국은 이 업무를 잘 수행했다고 본부로부터 격려를 받았다. 이 사건의 가장 위험한 결과는 KGB 본부와 크렘린당국이 레이건행정부가 반소음모를 벌이고 있다는 확신을 한 것이었다. 소련공군의 실수를 알고 있으면서도 안드로포프ㆍ오르가코프ㆍ크리우츠코프 등 지도부의 많은 사람들은 사고기가 첩보임무를 띠고 있었다는 것을 믿었다. 이 사건에 대한 미소 양국의 불화로 9월8일 마드리드에서예정됐던 양국 외무장관회담이 무산되었다. 이 사건이 있기 직전 와병중인 안드로포프는 공개석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병상에서 그는 레이건행정부에 대한 비난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세계적인 위기가 불길하게 다가오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암시했으며 사건후 죽기 5개월동안 핵전쟁이 도래할 가능성에 대해 숙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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