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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절한 재미작가 차학경의 ‘딕테’

    연극집단 뮈토스가 10회 공연작으로 요절한 재미 교포작가 차학경의 ‘딕테’를 텍스트로 한 동명연극을 준비한다.19일∼30일 서울 문예회관 대극장. 딕테가 연극이 된다? 딕테는 그 작가만큼 문제적인 작품.버클리대학에 다닌 한국인 2세 차씨는 몇 개국어를 넘나들며 소수민족 여성의 시선으로 딕테를 썼고,피살됐다.파편화한 현대사회 주변부의 정황을 입체화한 딕테는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한 전범으로,미국 대학에서 텍스트로도 대접받았다. 뮈토스는 그리스 비극,셰익스피어 등 ‘고전의 현대화,재해석’에 주력해온 단체.이번엔 “‘딕테’ 총 10장의 전복적 이미지들과 언어적·영상적·음악적·연극적·무용적 기호들과의 충돌을 기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대 불문과,버클리대학원을 마친 김경년씨 번역,오경숙 구성·연출,김정옥·황연희·안태랑 등 출연.월∼목 하오 7시30분,금·토·일 하오 4시30분·7시30분.774­6543.
  • 몬테네그로共 대통령 듀카노비치(뉴스의 인물)

    ◎총선승리 이끈 36세 친서방 개혁기수/유고 연방대통령과 대립 ‘태풍의 눈’ 유고연방 몬테네그로공화국의 밀로 듀카노비치 대통령이 세계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총선 승리로 유고의 개혁 기수로 자리를 굳힌 까닭이다. 1일 개표가 끝난 몬테네그로 총선에서 “보다 좋은 삶을 위하여”라는 깃발을 내걸며 그가 이끈 개혁정파연합이 78석중 45석을 석권했다.듀카노비치가 ‘발칸의 화약고’로 불리는 유고의 새 조타수로 떠오를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 올해 36살의 듀카노비치는 여러모로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에 비견되는 인물.젊고 거침없는 개혁노선을 걷고 있다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 몬테네그로는 인구가 63만여명으로 세르비아(1000여만명)보다 훨씬 적다.하지만 유고연방 의회에는 똑같은 수의 의원을 보낸다.특히 연방의회는 연방대통령 선출권과 탄핵권을 갖고 있다.따라서 듀카노비치의 총선 승리는 밀로세비치 유고연방 대통령에겐 생각하기조차 싫었던 악몽의 시나리오였다. 듀카노비치는 친서방 경향에다 소수민족인 알바니아계를 공평하게대우하자는 입장을 취해왔다.세르비아 민족주의에 편승,11년째 장기집권중인 밀로세비치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왔다. 물론 듀카노비치가 밀로세비치의 대안이 되기엔 아직 역부족이라는 지적도 있다.그럼에도 그는 코소보주에서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의 충돌로 내란재연의 불씨를 안고 있는 유고 정국의 태풍의 눈이다.그가 세르비아 야당과 손잡는다면 밀로세비치의 권좌도 중대 기로에 설 전망이다.
  • 印尼 반정부 시위와 수하르토의 구태(해외사설)

    인도네시아를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는 최근의 소요사태는 바로 얼마전 밀림의 대화재를 연상케 한다. 수하르토 대통령는 그의 체제를 반대하며 인도네시아 열도를 달구고 있는 일련의 소요사태를 막을 수 없을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패와 족벌주의로 요약되는 수하르토 대통령의 7번째 연임을 비난하며 계속되고 있는 시위는 두가지 상황에서 ‘대폭발’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것같다. 32년만에 처음으로 항거하는 대학생 등의 외침은 아직도 캠퍼스안에서 머물고 있을 뿐이다.‘사태’를 촉발시킨 이슈들이 일반 국민들에게는 파고들지 못하고 있다는 관측이다. IMF가 인도네시아에 대해 요구하고 있는 내용은 국민들에게 고통스러운 것이다.석유값은 70%가 뛰었고 전기료도 60%가 올랐다.기본재의 폭등으로 쌀값과 밀가루값 그리고 기름값은 2배나 올랐다. 이러한 어려움에 대한 분노의 물코를 수하르토는 ‘서양의 강제조약’ 즉 IMF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또하나 경제위기에 대한 분노를 분출할 수있는 돌파구가 마련됐다.소수민족인 중국인들이다.중국인은 2억의 인도네시아 국민의 5%에 불과하지만 국부의 70%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백악관은 인권탄압을 비난하고 있지만 인도네시아가 통제불능의 상태가 되어 총체적 위기에 빠질 것을 우려,국가가 전복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체제의 상층부도 입장은 마찬가지이다.자신들의 부를 창출해준 현재의 구조를 바꿔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수하르토는 지난해 늦여름부터 경제위기가 불어 닥쳤고 루피화의 가치를 80%가량이나 잃게 했지만 추종자를 요직에 다시 임명했다.내무부장관직은 딸에게 주었고 골프 파트너를 산업장관에 기용했다. 취임연설에서도 경제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개혁조치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희망과 의지를 갖고 스스로 경제와 정치개혁의 최선봉에 서고 있는 한국이나 태국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 서울신문 연재‘흑룡강7천리’를 읽고/金周榮 작가

    ◎조선족‘질경이삶’에 가슴뭉클/물고기 껍질 옷·꿩고기 밥… 소수민족 삶의 지혜 寶庫/‘母國에 사기’ 조선족 사연엔 시대치부 드러난 서글픔마저/해당 지역 지도없어 옥에 티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 지혜롭게 살아가는 소수민족들의 극복의지와 지혜를 찾아내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던 柳燃山씨의 기행문은 곳곳에 깊은 감동이스며 있다. 柳燃山씨의 그런 열의에서 발굴되고 노출된 변방 소수민족들의 생활상에서 많은 지혜를 터득하게 된다.꿩이 많은 임강현에서는 그 꿩을 잡아 마을이생계를 유지하였고,가진구에서 살고 있는 허저족들은 강에서 지천으로 잡히는 물고기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그리고 중국대륙에서 최고의 북단 오지라할 수있는 흥안진 낙고하촌(洛古河村)에도 조선족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행문에서 읽고 가슴이 뭉클했다. 중국의 최북변인 막하(漠河)에는 조선족뿐만 아니라 몽골족,만주족,회족,다우르족,오로촌족,허저족,심지어 러시아인들까지 포함한 소수 민족들이 두루 섞여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그런데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이들이 그들의 삶의 형태가 갈등과 반목으로 경도되어 있기보다는 조화와 순응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해 준다.강이 있으므로해서 풍요보다는 오히려 열악한 생활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해도 그러한 자연환경에 어떻게 순응하며 이용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생활의 만족과 풍요가 판가름난다는 교훈을 이 기행문은 가르쳐 주고 있다. 흑룡강의 얼음 위에 통나무 초막을 짓고 고기를 낚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꿩고기로 밥을 지을 줄 알고,고기껍질로 여름옷과 겨울옷을 지어입을 줄 아는 사람들,한족의 가옥을 우리식 온돌로 바꾸어 길고 추운 겨울을 지낼 줄 알고 우라초를 뜯어 동상을 예방하지만 오히려 동상에 동상을 거듭하는 동안 살갗이 오히려 추위를 막아주는 방편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눈물겨운 대목이기도 했다. 특히 중국 전체 인구의 96%를 차지하고 있는 한족들 사이에서 그리고 변방에 떠밀려나서 질경이같이 밟히고 또 밟혀도 다시 일어나는 조선족들의 끈질긴 삶의 역정들은 읽을 때마다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특히 돋보이는 것은 柳燃山씨의 편견을 두지 않았던 역사적 해석과 조선족들의 생활상에 대한 꼼꼼한 기록들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얼음더미 위에서도 살아 남아 그 슬하에 올바른 자손을 남길 줄 알며 어느 민족보다도 교육열이 강한,그래서 끈질긴 생명력과 삶에 대한 속도감이 남다른 우리 민족의 열정적 근성은 이 기행문에서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확인은 그것에만 그치지 않는다.송화강에 인접한 부면(富綿)에 있다는 두흥농장의 황폐한 모습은 우리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제는 개발이 중단되어 버린 삼강평원의 스산한 모습은 면밀한 계획없이 개발에 뛰어든 인간들의 섣부른 의욕이 어떤 결과를 낳는가를 추한 모습으로 보여 주고 있어 민망하고 슬펐다.또다른 한 가지는 한국으로 오려고 자신의 전재산을 몽땅 털어넣고 사기만 당한 조선족 청년이 지금은 우수리 강가에서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마지막회의 기록은 다시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4천여명에 달하는 조선족들이 모국에 사기를 당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었다.많은 것을 깨닫게 한 이 기행문에서 한기지 옥의 티가 있었다면 매회 그 해당 지역의 지도를 곁들였으면 했던 아쉬움이었다.
  •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金奎煥 국제부 기자(오늘의 눈)

    金鍾泌 총리서리의 초청으로 지난달 26일 한국을 방문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부주석이 30일 이한(離韓)했다. ‘포스트 장쩌민 시대’의 선두주자인 후 부주석은 북한을 방문한 일이 있지만 우리나라는 처음이다.이번 방문기간중 金大中 대통령을 비롯,金守漢 국회의장·趙世衡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朴泰俊 자민련 총재·趙淳 한나라당 총재 등 정계인사를 연쇄예방을 하는 등 한단계 높은 한·중관계 발전을 위해 4박5일동안의 바쁜 일정을 보냈다. 두뇌·언변·대인관계 등 지도자로서 3박자를 갖춘 후 부주석은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21세기 중국의 지도자’로 불리고 있다.그가 ‘차세대 지도자’로 처음 떠오른 것은 92년 10월.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에 뽑혀 50살이라는 ‘어린’나이에 당서열 7위로 급부상한 것이다.특히 정치국 상무위원에 오른 이후 몇차례 평양을 방문,북한사정에도 밝은 편이어서 남북한 관계에 중요한 역할할 수 있는 인물이다.후야오방(胡耀邦) 당총서기의 눈에 띄어 중앙무대에 데뷔한 후 부주석은 88년 ‘소수민족 폭동 다발지역’인 티베트자치구서기 시절 탁월한 능력을 발휘,덩사오핑(鄧小平)에 의해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전격 발탁됐다.현재 장쩌민(江澤民)·리펑(李鵬)·주룽지(朱鎔基)·리루이환(李瑞環)에 이어 당서열 5위이다. 후 부주석은 그러나 대외적으로 별로 알려지지 않은 데다 외교적 감각을 익힐 기회가 없어 21세기 중국을 이끌어갈 인물로서는 약간 부담이 된다.따라서 한·일 방문을 통해 국제사회에 성공적으로 데뷔시켜,국제적인 지명도를높이고 외교적 감각도 익히도록 하는 게 중국의 복안인 셈이다.이 복안은 성공한 것같다.우리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난 22일 일본에서의 후 부주석 환영리셉션에는 현직 각료를 포함,100명 이상의 의원들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뤘다고 한다.하토야마 유키오 민주당간사로부터는 “이번은 부주석으로 왔지만 멀지않아 ‘부’를 뗄 때가 올 것”이라는 칭찬도 받았다. 미국·중국·일본·러시아 등 열강 틈바구니에 낀 우리나라가 소모적인 정쟁(政爭)으로 밤을 지샐 때 중국대륙은 21세기를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준비하고 있다.
  • 중국옷 입은 동양인 예수/중국 화단 새 유파 신선한 바람

    ◎농민화·티베트 벽화 기법 응용/전통문화­기독교 신앙 결합 시도 중국 전통 문화와 기독교 신앙을 결합시킨 새로운 화풍의 그림들이 중국 화단(畵壇)에서 새 유파를 형성하며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이들 유파의 화가들은 중국 미술의 전통 기법으로 기독교 신앙을 표현,중국화(中國畵)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들 화가들은 전통 중국화의 기법은 물론 농민화 및 티베트 벽화 등 티베트 미술의 전통 기법으로 과감하게 예수,성모 마리아,성경속의 사건과 사례 등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고 있다.이들은 성모마리아를 흡사 관음보살처럼 표현하는가 하면 예수를 동양인처럼 그리기도 한다. 이들 유파 그림의 등장 인물들은 예수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중국 고유의상을 입고 있고 주변 배경도 중국이어서 이채롭다.말구유에서 아기 예수를 낳아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는 화사한 중국 고유 의상을 입고 있는 농민화풍의 그림으로 그려졌는가 하면 성경속의 이야기를 운남성 소수민족의 의상을 입은 등장인물들로 처리한 것도 있다.예수의산상보훈이나 기적을 행하는 모습들도 마찬가지다. 등장인물의 색채와 구도역시 서양 화풍과는 다른 중국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 등 근착 외지 등은 이같은 중국 화단의 기독교 신앙을 선도하는 그룹은 남경의 기독교 예술 센터 등이라고 보도했다.이들 그룹은 서민들의 일상적인 생활속에서 발견되는 신앙심과 기독교 정신을 부각시키는데도 힘을 쏟고 있다. 이들 젊은 화가들은 “중국 문명과 기독교의 복음을 융합시키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작품의 의도를 설명한다.이들은 특히 인물화에 대한 특별한 애착을 보이고 있다.‘구체적인 사람들의 모습속에 녹아있는 예술의 보편성에 대한 표출’이 중요한 주제중 하나다. 지난 93년과 96년 두차례 홍콩서 회원 60명의 특별전시회를 열어 호평을 받은 이들은 오는 10월 세번째 홍콩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남경대 미술대학원을 졸업하고 중국인으론 비교종교 미술분야의 첫 박사가 된 흐어 치씨 등이 이 그룹의 핵심 회원들이라고 외신들은 전한다. 미술 비평가들은 중국 화단의 이같은 움직임에 대해 명나라때부터 시작된 서양 선교사들의 ‘전통 문화와 신앙의 조화 및 융합’ 작업이 종교 자유의 폭이 확대됨에 따라 그 싹을 틔우고 있다고 평가한다.외국의 선교단체나 교회와 연계 관계를 엄금하고 있는 중국적 상황에서 이같은 작품성향은 중국 정부의 ‘자립교회원칙’에 순응한 것이란 혹평도 있지만 중국의 미술 전통으로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고 있다.
  • 풍요로운 용강 조선족 마을(흑룡강 7천리:26)

    ◎한족보다 뛰어난 온돌구조 개발/“3개 마을 합쳐봐야 100가구 미만에 경운기 61·탈곡기 74·정미기도 49대 집집마다 TV·세탁기,전화있는 집도… 쌀밥에 고기반찬 안떨어져요” 차를 돌려서 부천촌으로 들어갔다.40여호의 마을이지만 널찍이 터를 잡고 있어 마을은 꽤나 컸다. 촌장 박용철(43세)씨 댁을 찾아갔다.집둘레를 나무 널판자를 세워서 울타리를 둘렀는데 파아란 색깔의 페인트칠을 해서 산뜻한 느낌이다.집은 한족식 구조지만 벽에 회칠을 해서 깨끗한 감을 주었다.흑룡강에서 한족집과 조선족집을 구별하자면 회칠을 했는가 안했는가를 보면 된다. 작달막한 키에 단단하게 생긴 박촌장이 반겨 맞았다.집안 역시 한족식이다.출입문으로 들어서면 부엌이고 좌우 양켠에 침실이 있다.그런데 여느 한족집과는 달리 부엌이 두 개가 아니라 네 개였다.그것은 침실이 한족들처럼 반온돌이 아니라 완전 온돌이기 때문이다.언뜻 보기엔 한족식과 다를 바가 없다.그런데 신을 벗고 온돌로 들어가면 발바닥이 따뜻한 감을 느끼면서 역시 온돌이라는 것을 알 수가있다.다시 말하면 낮은 온돌과 높은 온돌이 있는 셈이다.침실간 두 개에 모두 낮은 온돌과 높은 온돌이 있어서 부엌도 온돌마다 딸려서 네 개인 것이다. ○“이주 초기땐 배고팠죠” 온돌은 절반은 낮고 절반은 40㎝가량 높아서 걸터 앉기 편리했다.한족식 바닥과 조선식 온돌의 결합이다.한족들 속에서 살아오면서 걸터 앉는데 습관이 된 그들은 높은 온돌에 걸터 앉아서 좋고 또 신을 벗고 침실 출입을 하게 되어 있으므로 깨끗해서 좋았다.그리고 또 여름엔 낮은 온돌엔 불을 때지 않고 높은 온돌만 덮여서 조선식 완전온돌집처럼 집안이 그렇게 차지도,뜨겁지도 않고 또 겨울에는 낮은 온돌까지 덮여서 집안이 훈훈해서 좋았다. 허저족들은 거주문화가 낙후하므로 자기의 것을 버리고 한족의 집구조를 그대로 답습 하게 된 것이다.하지만 조선족들은 원래 한족보다 우수한 거주문화를 갖고 있었다.역사에 따르면 온돌은 2천여년전 부여국에서 처음 발명한 것이라고 하니 우리 민족은 온돌문화의 창시자라고 할 것이다. 박촌장의 아내가 나무뚜껑을 열더니 그속에서 무우,감자,배추를 꺼냈다.연변에서는 보통 김치독을 터밭에 묻는데 이곳은 추워서 집안에 묻어야 한다는 것이다.집안에 펌프를 박아서 물을 푸는데 수질이 좋지 않아서 모래와 자갈을 담고 또 그 위에 나무재를 얹어서 여과 시켰다.여과를 거친 물맛이 좋지 않다. “처음에는 배가 고팠습니다.지금은 천지개벽이 난겁니다.우리 마을은 나무를 때며 쌀밥에 고기반찬을 떨구지 않는 마을로 되었습니다.살기가 좋다마다요.한해 농사수입이 집집마다 2만∼3만원은 된다구요.쌀독에서 인심이 난다고 겨울이면 집집을 돌면서 먹고 마시고 노는 겁니다” 박촌장의 말이다. 100세대도 안되는 부천,부광,부화 세 조선족 마을에는 경운기가 61대,탈곡기가 74대,관개용 펌프 81대,정미기가 49대가 있다.그리고 집집마다 텔레비전,녹음기,세탁기가 갖추어져 있고 또 박촌장 등 적지 않은 집에서는 전화까지 놓았다. 마을에 소를 키우는 집이 몇호가 안된다.기계로 농사를 짓기에 소가 필요없다는 것이다.볏짚이든 콩짚은 물론 숲이나 강변에 소를 놓아 기르면 목축도 잘되련만 누구나 그런 고생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잘 먹고 잘 입고 따뜻한 집에서 살면 된다는 자족이었다.그들은 바깥 일에는 관심이 없다. 대자연은 용강 사람들한테 분에 넘치는 은총을 베풀어 주었다.“몽둥이로 노루와 물고기를 때려 잡고 꿩이 솥에 날아들고 땅이 비옥해서 한 사람이 일해서 열식구를 배불린다”는 여유로운 생활환경에서 살아온 용강 사람들은 게을러졌다. “먹을 가까이 하면 먹물이 든다고 했습니다.처음 이사 왔을 때는 우리는 고생을 달갑게 했습니다.그런데 이젠 고생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농사도 사람을 고용해서 한다구요.봄과 가을이면 도시의 실업자들이 삯일을 하러 온답니다.그래서 그늘속에 앉아서 농사는 짓지만 농사 수입은 해마다 줄어든답니다.얼마나 게을러졌는지 집집의 땔나무를 보면 알 수 있다구요.처음에 이사를 왔을 때는 땔나무가 지붕키를 넘었지요.그런데 한두해 살면서 주위에 땔나무 천지라 나무할 필요를 못느꼈습니다.땔나무의 높낮이로 주인의 성격을 점칠 수가 있답니다” 박촌장의 말은 깊은사색을 불러 일으켰다. ○5년전 93년에 전기 가설 마을을 세울 때 30만원의 대부금을 빌렸는데 지금도 물지 않아서 빚이 없는 집은 촌장네와 당서기네 뿐이란다.1993년에는 전기를 가설했고 또 1996년에는 벽돌로 170㎡의 학교를 지었고 나무 전선주를 콩크리트로 바꾸기도 했다.흑룡강성의 인구는 3천6백만.오로죤,어원커,허저족 등 수만명의 소수민족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산해관을 넘어왔거나 몽골초원이나 한반도 등 각지에서 모여온 사람들이다.이른바 용강인은 언어로부터 풍속 습관에 이르기까지 각이한 이민 혼잡이다.그러므로 각지에서 온 이민들은 자기지방의 방언을 포기하고 표준어를 매개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러시아인들이 흑룡강에서 물러간 지가 반세기도 넘지만 흑룡강 곳곳에서 러시아문화가 보존되어 있다.하얼빈 사람들은 광복전에 중국사람과 개는 출입금지했다는 러시아인 거주구역이던 지금의 중앙 큰길을 문화유물로 보존하기 위해서 차량의 통행을 금지시키고 건물을 보수하고 있다.시내 중심에 세워진 소피아 천주교당이 주위의 고층건물에 막혀서 형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지난해 주위의 건물을 폭파하고 광장을 만듦으로써 교회당이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중국 공산당 당조직의 서기 도성수씨는 집을 교회로 쓰게 했다.“하나님을 믿어 옳바른 마음을 가진다면 나쁠게 뭐겠습니까”라는 말로 교회에 다니는 것을 권장하는 심정임을 은근히 내비쳤다.
  • 중 첫 조선족 장관 탄생/이덕수씨 국가민위 주임에

    【베이징=정종석 특파원】 중국에서 처음으로 우리 동포(조선족)장관이 탄생했다.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는 18일 열린 제6차대회에서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장관급)에 조선족인 이덕수(55) 중국공산당 통일전선부 부부장을 선출했다.국가민족사무위는 중국내 55개 소수민족 관련사무를 관장하는 국무원산하 행정부처이다.
  • 조남기 중국 정협 신임 부주석(뉴스의 인물)

    ◎최고위 공직 역임한 군 출신 조선족/중국군 원로 홍학지 측근… 당중앙위원 활동 14일 폐막된 중국 제9기 전국 인민 정치협상회의(정협)에서 부주석으로 선출된 조남기(71)씨는 중국 조선족 가운데 가장 높은 공직을 역임한 군인 출신의 지도자다. 길림성 영길에서 태어난 조씨는 충북 청원이 원적지며 중국군의 최고 계급인 상장과 총후근부 부장,군사과학원장 등 중국 인민해방군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14차 중국공산당 대회때에는 중국 정치권력의 핵인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명실상부하게 중국내 조선족을 대표해 왔다. 조씨는 중국인민해방군의 최고 원로인 홍학지 장군의 측근으로 문화혁명때 홍장군의 목숨을 구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조씨는 길림성과 연변의 공산당 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해방군에 입대,군수분야에서 근무했다.문화혁명후 길림성과 연변 자치주의 각급 군부대의 정치위원회 고위간부를 두루 거쳤다. 그는 길림성 부성장과 당위원회 부서기에 이어 조선족으로서는 처음으로 길림성의 제1인자인 당위원회 서기를 지냈다.87년 인민해방군 총후근부장에 임명됐으며 88년엔 인민해방군의 최고 직급인 상장으로 승진했다.92년 이후 군사과학원장으로 재직하다 95년 일선에서 물러났다. 정협은 퇴임 원로 및 각계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통일전선기구다.공산당 및 정부의 자문과 여론 수집기능을 담당하며 주요 정책결정에도 영향력을 행사한다.이번 회의에서 조남기씨는 부주석 31명의 가운데 서열 24위로 3명의 소수민족 출신 부주석중 한명으로 뽑혔다.
  • 중 최고 지도부 인선 확정

    ◎부주석에 호금도 발탁… 후계 구도 가시화/당가선 외교부장 유력 【북경=정종석 특파원】 중국은 16∼18일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회의를 속개,국가주석 및 부주석과 전인대 상무위원장 등 국회직,국무원총리와 부총리,각부 부장(장관) 등 앞으로 5년동안 나라를 이끌어갈 국가 최고 지도부의 인선을 확정한다. 이번에 구성되는 지도부는 현 강택민 주석 체제를 중심으로 21세기 초강대국을 지향하는 중국의 차세대 실세들이 대거 요직에 발탁된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강주석이 당분간 국가주석과 군사위주석·당총서기를 겸하는 현 체제 아래서 가장 주목되는 자리는 국가부주석이다.그동안 명예직에 불과했던 이 자리는 현 영의인 부주석이 물러나고 당서열 5위의 호금도 정치국상무위원의 발탁이 예상된다.현재 72세인 강주석은 50대의 유일한 정치국상무위원인 호를 부주석에 기용,외교부분을 맡김으로서 대외적인 ‘경력관리’와 함께 그를 중심으로 후계구도를 가시화할 전망이다. 새 전인대 상무위원장과 총리에 이붕 총리,주용기 부총리가 각각 확정됨에 따라 새로이 구성되는 국무원부총리단의 좌장에는 이람청 현 부총리(경제총괄)가 승진 기용된다.전기침 부총리(외교 및 홍콩·마카오 담당)와 오방국 부총리(공업 담당)는 유임된다.원래 조자양의 측근이었다가 강주석의 측근이 된 온가보 정치국원(농업 및 경제)이 새로이 부총리에 발탁될 전망이다.부총리 숫자는 종전의 6명에서 4명으로 줄어든다. 부총리와 부장의 중간급인 국무위원에는 지호전 국방부장과 소수민족 출신의 스마이 아이스티(사마의 애매제)가 유임되고 왕충우 국가경제무역위원회주임과 대상용 중국인민은행장,유일한 여성 각료인 오의 대외무역경제합작부장이 새로 선임될 전망이다.국무위원의 숫자도 종전의 8명에서 5명이 된다. 기존 40개에서 29개로 대폭 줄어든 국무원 산하 부·위원회의 책임자 역시 강주석의 신임을 받는 사람들로 채워진다.사임 의사를 밝힌 전기침 외교부장의 후임에는 당가선 외교부 부부장이 유력하다.대외무역경제합작부장에는 석광생 부부장,안전부장에 허영약 하북성 정법위서기 등 신예를,공안부장에 고춘왕 안전부장 등이 거론된다.대거 부처로 탈바꿈하는 국가경제무역위원회 주임에는 성화인 중국석유화학총공사총경리의 전격 발탁이 예상된다.
  • 중 ‘전인대 한글보도자료’ 첫 배포/북경 정종석(특파원 수첩)

    요즘 북경의 인민대회당 주변은 연일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를 취재하는 각국 보도진들로 북적인다. 이번 대회를 취재하려고 몰려든 국내외 보도진은 줄잡아 1천명 가까이 되며,대회 프레스센터에 등록한 외신기자만 해도 380명에 이른다.중국 당국은 등소평 사후 처음 열린 지난해 제15차 공산당대회의 정신을 이번 전인대에서 관철한다는 정신 아래 종전보다 대외홍보에 적극적인 인상이다. 인민대회당 빈관(빈관·게스트 하우스)에 설치된 프레스센터에서는 중국헌법과 관련법률을 비롯해 전인대의 각종 법률문집을 비치,각국 보도진들에게 나눠준다.중국정치 기본정황을 소개한 자료와 티베트문제 등 민감한 사안을소개한 자료도 마련했다. 올해는 특히 처음으로 전인대 대표 2천980명의 명단과 이력사항을 담은 인사자료를 만들어 배포했다.또 국유기업 개혁,금융,대외무역 등 현안에 대한 일련의 브리핑과 기자회견을 마련하고 중요인물의 인터뷰를 주선하는 등 세심한 곳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중국당국이 전인대 개막일인 5,6일 잇달아 한글보도자료를 공식으로 배포한 것은 한국기자들에는 ‘큰 사건’이었다.인민대회당 2층 출입구 앞에서 이붕 총리의 정부업무 및 정부 예산안 보고 등 굵직한 뉴스의 보도자료를 한글판으로 배포했기 때문이다.과거에도 내부용 비공식 자료를 만든 적은 있으나 공식 보도자료로서 내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보도용 전인대 자료는 중국어와 영어,프랑스어,독어,러시아어,스페인어,한국어,일본어의 8개국어로 나와 있었다.이들 8개언어 사용국 가운데 중국내에 소수민족(55개)이 사는 나라는 한국 뿐이며,현재 18명의 조선족이 전인대대표로 참석중이다.하지만 조선족이 있다고 해서 전인대의 8개국 보도자료에 한글판이 생긴 것은 아닌 것 같다.오히려 나라별로 상주 외신기자들이 많고 중국과의 관계가 중요한 나라들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중국은 이미 지난 해부터 외교부의 공식브리핑(매주 화·목요일)때 영어답변을 폐지하고 중국어 만을 사용하는 등 ‘신중화사상’을 고취하고 있다.그런 가운데 전인대의 한글판 보도자료는 신중화사상의 기반 위에 중국의새로운 국제화와 대한반도 인식을 보는 것 같아 매우 반갑다.
  • 중 국무원 개혁태풍 예고/새달 전인대서 주용기 총리 체제 확정

    ◎이람청·오의 등 경제전문가 급부상 【베이징=정종석 특파원】 등소평 사후 중국에 새로운 ‘3두정치’ 시대가 열린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26일 교석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상무위원장과 이붕 국무원총리를 교체하는 인사안에 최종 합의,등사후 강택민 주석체제의 후속 인사구도를 사실상 마무리했다.새 전인대상무위원장에는 이붕 총리,새총리에는 주용기 상임부총리의 기용이 확실시된다.이같은 인사안은 3월5일부터 보름동안 열리는 제9기 전인대에서 확정된다.그렇게 되면 중국은 당분간국가주석과 당총서기를 겸하고 있는 강이 당,이가 국회,주가 정부를 각각 맡는 삼두정치체제로 운영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주총리체제의 출범은 국무원의 일대 개혁태풍을 예고하고 있다.탁월한 경제전문가인 그는 21세기 중국경제의 명운을 걸머지고 국유기업 및 금융제도 개혁을 선도하고 있기 때문이다.현재 중국이 안고 있는 산적한 경제현안을 타개하기 위해선 주만한 실력자가 없다는 것이 중론.그래서 강주석과 이총리를 비롯한 국가지도자들 가운데 주에게 경제총수의 권한을 맡기는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강주석의 라이벌이었던 교석은 은퇴 할 공산이 크다.그러나 그의 지지세력들은 교석이 국가부주석자리를 맡아야 한다고 강력히 요구,아직 미결의 과제로 남고 있다.지난해 15차 당전국대표대회(전대)때 중앙위원 명단에서 탈락,실각했던 교석은 전기운 전인대상무위 부위원장 등 측근들의 강력한 엄호를 받으면서 아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그래서 강주석은 새 국가부주석에 소수민족 출신인 포혁 전 내몽골지도자를 밀고 있으면서도 단안을 내리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이붕 총리의 거취문제에도 약간의 불안감은 없지 않다.89년 천안문사태의 피해자들이 학살의 원흉으로 이총리를 꼽으며 그의 전인대 상무위원장 진출에 반대,연판장을 돌리는 등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고 강주석과의 개인적인 관계도 다소 원만치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그러나 3월의 국무원개편을 통해 중국지도부는 대거 새로운 얼굴들로 채워질 전망이다.지난해 15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상무위원으로 진입한 이람청 부총리는 주용기 부총리가 맡아왔던 경제업무를 총괄하고,대외경제무역부 합작부주임 오의도 부총리 승진이 예상된다.
  • 소수민족 허저족(흑룡강 7천리:22)

    ◎중 정부 “희귀 종족 보호” 산아제한 없애/45년 300여명서 95년엔 4,275명으로/‘고향’ 동강시만 821명… 민속박물관도 여기는 삼강평원,흑룡강과 송화강이 만나는 동강이다.중국 역사는 동강을 이렇게 적고 있다.주나라 때는 동강이 숙진부,당나라 때는 하북도 흑수부,요나라에서는 동경도 오국부,명나라에 이르러 삼성부도관할구에 속했다는 것이다.1906년 이곳에 임강주가 서고 3년 후엔 임강부로 개칭,또 4년 후에는 임강현이 됐다.동강으로 이름이 고착되기는 그 다음해인 1914년이고 현에서 시로 승급한 때는 겨우 10년 전인 1987년이다. 오랜 옛적에는 성곽이었던 이 곳을 허저족들의 말로는 라하쑤쑤(나합소소),페허라는 뜻으로 불렀다. 1654년 조선 지원군이 러시아군을 일망타진한 곳이 바로 여기라는 생각이 떠올라 당장이라도 합수목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불붙듯 했다.하지만 아침 9시에 가목사를 떠나 270㎞ 겨울길을 달려서 동강에 도착한 때는 지난해 12월4일 하오 4시,벌써 겨울 짧은 해가 서산에 지고 어둠이 자리를 펴고 있었다. 가로등이 널따란 아스팔트 길을 밝히고 도로 양켠에 늘어선 고층 건물들에는 전기불이 밝혀졌다.옛날엔 페허였을지 몰라도 오늘의 동강시는 발전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우리는 동강호텔로 곧장 갔다. 동강시 민족사무위원회의 우립군(35) 주임과 오채운(42) 부주임이 호텔에서 우리를 맞았다.가목사시 민족사무위원회에서 이미 전화가 있었으므로 그들은 점심에 도착할 줄 알고 식사를 같이 하려고 그때까지 기다렸다는 것이다.식당에서 그들과 함께 식탁에 마주 앉았다. 우·오 두 사람은 모두 허저족(혁철족)이었다.중국 사책에서는 허저족을‘허진(혁진)’ ‘허지쓰리(혁길사륵)’ ‘허지리(혁길륵)’ 등으로 표기했는데 그 뜻은 동방,하류라는 것이다. ○선조는 북해지방서 어렵 바로 흑룡강 하류에 사는 동방 사람이라는 말이 된다.허저족으로 사책에 처음 기재된 것은 ‘청성조실록’인데 “강희 2년 3월 임진(1663년 5월1일)에 4성 쿠리하(고리합) 등에 명하여 수달피를 바치도록 했는데 허저 등국은 영고탑에서 수납했다”고 씌어 있다.허저족으로 고정되기시작한 것은 민국 23년(1934년) 능순성이라는 사람이 ‘송화강 하류의 허저족’이라는 책을 펴낸 때부터다. “우리 선조들은 원래 북해지방 바이칼호 부근에서 어렵으로 살았답니다.어렵장 쟁탈 전쟁에서 쫓겨 흑룡강,송화강,우수리강 유역으로 옮겨온 연대는 똑똑히 알 수 없습니다마는 서북방에서 온 통구스(통고사)인임엔 틀림이 없답니다” 1976년 중앙민족대학을 졸업하고 줄곧 허저족을 위한 일을 해온 오채운 여사의 말이었다. 현재 동강시 오기진의 만족들이 1990년 인구조사때 허저족으로 등기하고 허저족자치촌을 만든 사실이 이를 입증하기도 한다.‘효종실록’에 기재된 변급의 견문기에도 “흑룡강 하류에 또 어피달자가 있다.북경에 귀순했다”고 돼있다. 이튿날 동강시에 있는 허저족 민속박물관을 참관했다.흑룡강변 공원 옆에 세워진 박물관 건물은 영국인들의 세관이었다고 한다.청조 말년에 동강이 중국 북방의 중요한 무역항구로 되면서 1907년에 라하쑤쑤분관이 섰다.그러나 청조는 영국·미국·독일·러시아·일본·프랑스 등 11개 국가와체결한 불평등한 ‘신축조약’에 따라 해 관세 등을 배상금으로 외국인한테 주었다.1910년 영국인들은 바로 중국식과 서양식이 반반씩 섞인 벽돌건물을 지었던 것이다. ○항일전투서 40명 희생 인적이 끊긴 박물관은 썰렁했다.모두 네 개의 칸으로 된 박물관은 허저족들의 복장(짐승가죽과 물고기 가죽으로 만들었다),생산공구(활,작살,그물 등) 등을 전시하고 있었다. “우리는 중국에서 제일 인구가 적은 민족이랍니다.18세기 초 강희 말년에 1만2천여명(2천398호)이었는데 1856년에는 5천16명,1911년에는 3천400여명이었습니다.그런데 20년 후인 1930년에는 겨우 1천200명뿐이었고 광복이 되던 해에는 300명밖에 안 남았었지요.우리 민족은 멸망의 변두리에 이른 것이랍니다” 오채운 여사가 말했다. “동강,부금지구에서 우리 민족이 항일에 나선 용사들은 50여명입니다.칠성강 전투에서 40여명이 희생되고 나머지 분들은 러시아로 해서 신강으로 이전해서 항일을 계속했답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허저족은 소수민족 우대정책을 향수,인구가 급성장했는데 1995년 당시 4천275명이 되었다.한족은 무조건 아이 하나,만족을 제외한 모든 소수민족은 아이 둘까지 허용되어 있지만 허저족은 둘 이상도 허용된다. “정부에서는 허저족에 대한 특별한 우대정책을 주고 있습니다.동강시구역 내에 사는 허저족은 821명입니다.일년에 한 번씩 운동대회를 할 때면 국가에서 자금을 대지요.올해 여름 운동대회때 시 민족사무위원회,시 정부,향 정부에서 각각 10만원씩 30만원을 대주었습니다” ○조선족은 ‘대우’ 못받아 12만 인구를 가진 동강시 관할구역 내에 사는 조선족은 922명,허저족보다도 많지만 소수민족 대우를 그들처럼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동강진병원 원장 박광일(44)씨는 말한다. “동강은 허저족의 고향입니다.우리 조선족들이 연변자치주의 수도 연길을 수도처럼 생각하듯이 허저족들도 동강시의 동강진을 수도처럼 여긴답니다.민속박물관도 여기에 있습니다.용정에 조선족 민속박물관이 섰다더군요.허저족 민속박물관을 볼 때마다 용정에 가서 우리 민족의 박물관을 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이곳에 사는 우리들은 민족을 모르고 산답니다” 흑룡강성 내에 거주하는 조선족이 45만,그런데 조선족 민속박물관이 아직 없는 실정이다.내년에 가목사시에 박물관이 서는데 두칸을 내서 허저족과 조선족의 민속을 전시하기로 했다고 한다.
  • 까레스키 식품의 확산(중앙아시아를 가다:12)

    ◎유목민족의 식탁 점령한 김치/“입맛을 산뜻하게 하는 별미”/양고기·양젖 위주 식사에 적합/신강성­카즈흐­티베트까지 ‘침투’/우루무치 교포 절반이 김치장수 그 끝 없이 멀고 먼 서역에도,어디를 가나 우리 교포들이 살고 있다.그들은 한국의 음식을 먹고 전통식생활에서도 전통을 지킨다.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유학온 카자흐스탄 학생이 밥을 물말아 먹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던 기억이 생생하다.그 학생은 고려인인 자기 할머니도 늘 그렇게 잡수신다고 했다.그들의 식생활 가운데 빠지지 않는 것은 물론 김치다.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의 도시 큰 바자에 가면 의례히 고려인 까레스키 여인들이 김치와 고사리를 비롯한 각종 나물과 샐러드를 판다.이들은 본래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브스크 지역의 원동에 살던 사람들이다.그러다 1937년 스탈린이 강제로 이주시켜 중앙아시아 곳곳에 고루 퍼져 살게 되었다. 그래서 중앙아시아에서 김치는 까레스키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공산권에 여행이 가능해지던 80년대 말부터 이러한 소식을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터이다. ○88년 봉급자의 20배 수입 그런데 이번에 신강성의 수도인 우루무치에 가서 김치가 지닌 경제적 잠재력에 크게 놀랐다.1986년 중국에서 자영업을 허용하기 전까지 우루무치의 조선족은 불과 20호 정도밖에 없었다고 한다.우루무치의 조선족은 자영업을 허용한 이후 늘어났다.심양에서 처음으로 김치장사에 나섰던 한 아주머니가 하루아침에 큰 거부가 되었다는 소문이 나고 부터다.중국의 동북삼성에 사는 조선족들은 우리의 전통식생활을 잘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김치장사는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자영업이다.그런 점을 고려한 조선족들이 김치장수로 나서 옛날 서역이라 불렀던 신강성까지 왔다. 제일 먼저 우루무치에 온 사람들은 88년과 89년경에는 하루 중국돈으로 약 200원 이상을 벌었다.월수입도 6천원정도나 되었다. 월봉급이 많아야 500원이었던 시절 당시의 수익은 월급의 10내지 20배에 달하는 거금이었다.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90년에는 약 100세대의 김치장수가 우루무치로 몰려들어 조선족이 모두 120세대로 늘어났다.그러나 100여 세대 김치장수가 우루무치시에 있는 네개의 바자에 모여들었기 때문에 각 세대의 수입이 급속히 줄었다.그래서 그들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전업을 하든가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지금도 100세대 가운데 약 50여 세대가 김치장사를 하고 있다.월 1천여원 이상의 수익을 쉽게 올린다.이 정도면 중국에서 괜찮은 수입인데도 그들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이다.우루무치를 떠나 세계의 지붕 티베트 라사까지 진출했다.조선족 김치장수들의 생활태도는 참으로 놀랍도록 도전적이다.지금도 김치가 지닌 확실한 상품성을 딛고 일어서서 기적을 현실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신강성에 우리민족이 처음으로 들어간 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19세기 중엽 이전에 중국에 이주한 한국인들은 거의 중국에 동화되었기 때문이다.오늘의 조선족들은 그 이후에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거나 또는 일제의 수탈에 못 이겨 떠난 사람들의 후예다.그 가운데는 1959년 신강성 해방군 자격으로 현지에 주둔하다가 제대하고 주저앉은 사람도 있다.1960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파견되어 의사와 병원장으로 근무하다가 몇년 전에 정년퇴직한 원로 의사 한분도 신강성에 자리잡았다. 조선족 의사는 처음으로 우루무치에 올 때,난주에서 트럭을 타고 왔는데,17일이나 걸렸다고 한다.그 때 나이 21세의 총각이었다.우루무치 초행길에서 어떤 생각을 했는가 물었더니 “다시는 못 돌아갈 것같았다”는 이야기를 했다.그 길에는 김치장사를 하기 위하여 멀리 만주에서 온 조선족 네명이 동행했다는 것이다.어떤 이는 이런 말을 되뇌었다.“집 떠난 사람들이니까 선생님의 그 말을 알지,집 떠나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모를 거야”라고…,모두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입에 밴 음식 기름기 제거 신강성에는 위글족 이외에 몽골과 카자흐족 등 많은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다.모두 양고기를 주식으로 하고 낭이라 불리우는 빵을 먹는 민족이다.이러한 식생활은 신강성을 포함한 전 스텝 지역,다시 말해서 투르크와 몽골의 모든 지역이 같다.스텝의 유목민족들은 말이나 양젖으로 치즈와 요구르트는 물론이고,술까지 빚어서 먹는다.이런 점은 곤륜산맥과 에베레스트 산맥으로 연결되는 고원 티베트에서도 마찬가지다.한마디로,유목민들은 양고기와 우유만을 먹고 마시며 살아간다. 유목민족들이 왜 김치를 사먹느냐고 물어보았다.우루무치의 조선족들은 “김치가 산뜻하기 때문”이라고 하나같이 자랑스럽게 말한다.고기와 우유,그리고 치즈만을 먹고 사는 유목민들이 순식물성 발효식품이기도 한 산뜻하고 시원한 김치맛을 한번 보고나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치즈나 마유주도 발효식품이다.하지만 이들 낙농식품은 우유기름 맛을 그대로 담아 입에 밴 육식의 기름끼를 가셔주지는 못한다.그러나 무배추와 파마늘과 고추가루와 생강 등 온갖 양념을 고루 삭혀 발효한 김치는 입맛을 산뜻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시원한 맛은 정신까지 맑게 해준다.김치에는 고추 매운 맛의 톡 쏘는 자극과 파마늘의 짜릿하고 알딸한 뒷맛,무배추의 살에 양념들이 배여서 숙성될 때 나오는 산뜻한 신맛이 모두 어울렸다. ○개방정책 타고 번져 김치는 어느 육류와도 잘 들어맞는다.미국 카우보이들이 즐기던티본 스테이크와 가장 갈 어울리는 식품은 뭐니 뭐니 해도 김치다.한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미국인들의 주장이 그러하다.다만 김치는 가벼운 음식에는 그 양념 맛이 너무 강하다고 말할 수 있다.그러나 육식만 하는 유목민족에게는 안성마춤의 별미인 것이다. 세계의 오지 타클라마칸 사막과 티베트 고원지대에까지 밀어닥친 개방정책은 시장경제를 열었다.김치도 그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다.김치는 오래지 않아 유목민들 식생활의 총아가 될 수 있다.김치 없이는 못사는 한국교포들이 도전적으로 김치를 팔고 있는 한은 그럴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 치치하얼시 조선족중학교(흑룡강 7천리:17)

    ◎1만6천여 민족교육의 산실/48년 개교… 학생 600명·교사 71명/“조선어문시간 단어해석은 한어로…/92년 한·중수교이후 부터 조선어 경시사상 무너졌지요” ‘명문대학에 시골의 한 가난한 선비의 딸이 입학했다. 묵직하던 가슴이 열리면서 무언가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식 가진 모든 부모들의 소망이 그러하듯 자식들을 어떻게든 공부시키려는 것이 나의 의지이며 신념이며 숙망이었다’ 이는 흑룡강성 상지시 하동향 문화참 강효삼 시인(53)이 올해 딸을 북경대학에 보내고 쓴 수필 ‘염원’의 한 대목이다. 그는 딸을 공부시키려고 시골의 집을 팔아 현 소재지에 와 셋집에 살면서 아내는 타 고장에 가서 식모살이를 하도록 했다. 자식을 위해 인생 후반에 별거해야 했었지만 아쉽지 않았다는 강시인의 마음은 바로 자식을 가진 조선족 부모의 마음이다. 1920년대 김규식박사 같은 독립운동가들은 흑룡강땅에 구국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학교를 설립했다. 만주국이 서면서 조선족 학교는 폐교됐다. 1945년 9월 하얼빈에 조선인 북만교육위원회가 세워지면서 민족교육은 다시 살아났다.현재 흑룡강성 조선족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64개소. 그중에서 중학교는 25개소이며 서부지구인 치치하얼시에 치치하얼조선족중학교가 하나 있다. 1948년 세워진 치치하얼조선족 중학교는 시구역 안에 있는 조선족 1만6천546명의 염원이 꽃피는 장소이다. ○학교 담장안은 조선어왕국 조선족 촌을 제외하고는 흑룡강성 도시에서 유일하게 조선말이 통할 수 있는 곳이 이 학교이다. 학교담장밖이 한어세계라면 담 안은 조선어왕국인 셈이다. 미래 조선사회가 약속되는 요람이다. 소수민족 동화정책을 실시했던 문화대혁명 시절 조선족학교는 철저히 파괴됐다. 탕원현조선중학교 등 7개 중학교는 농촌으로 밀려갔고 치치하얼조선족중학교는 해산됐다. 당시 중학교를 다니던 사람들은 한족과 조선족 연합학교에서 한어교육을 받았다. 1981년 흑룡강성 민족교육공작회의에서 ‘민족학교에서는 민족의 언어로 강의해야 한다’는 규정이 마련된뒤 점차 조선어는 살아나기 시작했다. 지난 83년 연변대학 조선어과를 졸업하고 모교인치치하얼조선족중학교에서 조선어문을 가르쳤던 노만룡씨(43·교도처주임)는 이렇게 말했다. ○95년 오산중학교와 결연 “아이들의 조선말 수준이 연변에 비하면 소학교 수준입니다. 조선어문시간에 단어해석은 한어로 해야 합니다. 연변의 학교에서 한어를 가르치듯이 여기서는 조선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게라도 조선어를 가르치지 않으면 저아이들이 장차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말에 수긍이 갔다. 학교 정원에 들어서서 유심히 살피던 나는 학생들이 하는 말이 한어였고 체육선생님의 말도 한어였음을 알았다. “선생님들도 조선어교육에 관한 관심이 줄어들었습니다. 조선어 선생님만 빼고는 다른 선생님들은 학과시간에 한어를 사용합니다. 조선말보다 쉽고 학생들의 이해가 빠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들의 회의 용어도 한어입니다. 한중수교이후 조선어 경시 사상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지난 95년 4월 한국군 예비역장군인 이정순씨가 치치하얼조선족중학교를 방문했다. 치치하얼시에서 공부를 했던 이장군은 서울 오산중학교와 자매결연을 추진했다. 한국측에서 매년 1천500달러를 모아 피아노,비디오,음향설비를 갖추게 됐다. 이장군이 오산의 영어선생과 국어선생이 함께 방문했고 이듬해에는 학생대표 13명이 왔다. 올해에는 20명의 학생들이 우호 방문했다. 이들은 조선족 농촌에서 민박을 하면서 우의를 다졌다. 중국측에서도 부시장,교육위원회 주임과 부주임이 인솔하는 대표단이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에서 환대를 받은 시 교육관계자들이 조선족 학교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됐다. 김영석 교장(42)은 이렇게 말했다. “청사 뒤에 교원주택을 짓고 있습니다. 교원 아파트가 완성되면 집이 없는 교사는 없게 됩니다. 다른 학교보다 사정이 좋은 편이지요. 교원들 자질도 높습니다. 연변대학 아니면 오상조선족사범학교 졸업생들입니다” 오상사범학교는 흑룡강성 내의 28개 사범학교중 유일한 조선족 사범학교로 졸업생들의 98%가 조선족 학교의 교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600명의 학생에 71명의 교사를 갖고 있는 치치하얼조선족중학교는 동삼성에서 널리 알려져 길림성에서도 학생들이 찾아 온다고한다. 그것은 한국의강원도 동해시 동해전문대학이 투자한 학교내 홍해직업전문학교가 취업에 유리하기 때문이다.장학금제도가 잘 되어 있는 가목사시 조선족중학교도 조선족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다. ○소·시서도 조선족학교 중시 해마다 흑룡강 조선족 중학생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유명대학에 입학한다. 올해 상지시 하동조선족향에서도 15명의 학생이 대학에 입학했다. 5명은 북경대학과 청화대학 등 명문대학에 들어갔다. 강시인의 딸 강선영도 그중한 사람이다. 대학으로 가는 것은 장원급제를 하는 것처럼 조선족촌의 경사이다. 하동향대성촌에서는 청화대학에 간 박춘걸에게 1천원,그외의 대학 입학생들에게는 300원씩을 장학금으로 주었다. 밀산시 조선족고등중학 졸업생중 김춘범이 청화대학에 입학하자 채득식 향 당서기는 향에서 4천원을 지원하고 학교에서는 1천500원,또 흑룡강조선말방송국의 방송이 나가자 한국의 기업인들도 장학금을 내놓았다. 한국과의 교류가 빈번해지자 성과 시에서도 조선족 중학교를 중시하기 시작해 교직원 아파트와 기숙사 식당등의 학교시설을 건설해주고 있다. 또 한국의 기업들도 조선족 학교의 후원사업에 눈을 뜨고 장학금을 주고 학생들의 모국유학을 주선하는 등 2세교육에 헌신하고 있다.
  • 5천년 중국문화의 흔적들/‘중국문화대전’ 예술의 전당 미술관

    5천년 중국문화의 흐름을 보여주는 대규모 전시인 ‘중국문화대전’이 지난 7일부터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미술관(580­1234)에서 열리고 있다. 한·중수교 5주년과 예술의전당 개관 10주년을 맞아 예술의전당과 중국대외문화교류협회가 공동주최한 이번 전시는 예술의전당 전관을 사용하는 첫기획.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중국 명품과 중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유물 등3천여점을 선보이는데 문명사에서 손꼽히는 수작에서부터 민속공예품과 소수민족 의상,티벳인 문물 등 중국의 풍속과 문화·생활사의 면모를 한꺼번에 들여다볼 수 있는 흔치않은 자리이다. 1층에는 중국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청동기 유물과 역대 황제의 유물들이 선보인다. 무릎을 꿇고 등을 들고 있는 궁녀의 모습을 형상화한 기름램프 장신궁등과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진시황 동마차 1호도 있다. 또 화려한 세공법과 황제의 권위를 들여다볼 수 있는 황실가구도 전시돼 있다. 2층에는 당나라 시대의 대표적인 도자기로 세계의 주목을 받아온 당삼채를 비롯해 쌀알과 머리카락 위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새긴 절묘한 세공술의 명품들과 55개 소수민족의 의상을 모아 보여주고 있다. 또 3층에는 불교와 유목문화가 접목된 티벳의 만다라가 들어 있고 서화에서 농민화까지 중국의 다양한 회화가전시돼 있다. 3월29일까지.
  • 평통 전문가회의 김학준 인천대총장 주제발표

    ◎북 붕괴 대비 대중정책 비중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사무총장 정호근)는 7일 사무처 회의실에서 통일문제 전문가회의를 개최했다.회의에서는 ‘98년도 한반도 정세전망과 대북정책추진방향’에 대해 △정치외교 김학준 인천대총장·안병준 연세대 교수 △경제 박승 중앙대 교수 △군사 차영구 국방부정책기획차장 △언론 김영희 중앙일보상무 △통일분야 양영식 통일교육원장·최주활 북한문제조사연구소 연구위원의 분야별 주제발표가 있었다.다음은 김학준 인천대총장의 주제발표 요지이다. ○‘붕괴’ ‘와해’ 미의 두 시각 미국의 국방부를 포함한 미 군부는 김정일 정권이 이미 ‘붕괴’의 과정에 들어섰으며 아무리 길게 잡는다고 해도 2002년께에는 군부 쿠데타에 의해 퇴진을 강요당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미 군부는 또 새로 집권하게 될 군부 쿠데타 세력은 서방에 대한 ‘화해’정책을 채택하고 결국 시장경제체제로서의 전환을 시도함으로써 ‘개방독재’노선을 걷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미 군부는 이 정권의 생명도 결코 길지 못할 것이며 결국 그 때로부터 길게 잡는다고 해도 서너해안에 무너지게 된다고 예견하고 있다. 반면에 미국의 국무부를 포함한 외교분야의 기관들은 앞으로 5년안에 김정일 정권을 존속시키면서 북한을 시장경제체제로 전환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게 되면 북한사회가 밑바탕에서부터 흔들리게 되며 그때로부터 5년안에 북한이라는 국가의 ‘와해’가 현실화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중·일 난민유입 방지 부심 중국은 표면적으로는 김정일 정권이나 북한이라는 국가가 쉽게 ‘붕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그러나 내심으로는 북한 상황전반을 비관적으로 평가하고 있다.일본 역시 내부적으로는 북한에서 몇해안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 대규모의 난민이 발생할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다면 ‘내전’이 전개될 수 있으며 북한인구의 약 1할에 해당하는 약 2백50만명의 난민이 발생할 것이다.중국은 약 1백만 규모의 난민이 유입될 것으로 예견하고 치안과 소수민족 문제에서 골치 아픈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위해 자신도 수입해다 쓰는 식량과 원유 가운데 일부를 북한에 원조하고 있는 것이다.일본은 약 30만명 정도의 난민이 일본으로 유입되리라고 예상하고 이것을 막는 방법을 공안당국은 심각히 연구하고 있다. 북한이 ‘붕괴’하는 경우 한국에 의한 북한의 즉각적 접수나 흡수통일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미국은 북한을 일정한 기간 ‘국제관리’아래 두려고 할 것이며 중국은 북한에 ‘친중 괴뢰정권’을 세우는 방안을 고려하게 될 것이다.미국과 중국은 경우에 따라서는 북한을 ‘공동관리’하는 방안을 유엔의 이름아래 실시하려고 할 것이다. ○평화통일 설득외교 긴요 한국으로서는 그러한 상황이 닥쳐왔을 때 북한의 접수를 통한 한반도의 평화통일이라는 목표를 관철해야 할 것이다.만일 그 목표가 실현된다면 북한을 ‘특수관리지역’또는 ‘특별행정구’로 설정해야 할 것인지 또는 한국의 행정지역으로 곧바로 통합시켜야 할 것인지 결정해야 할 것이다. 김정일 정권은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하는 경우,무력도발을 시도할 개연성이 있다.앞으로 몇해가 한국의 안보와 한반도의 안정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주변 열강을 상대로 한국에 의한 한반도 평화통일이 주변 열강과 동북아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점을 꾸준히 이해시켜야 한다.특히 중국을 이해시키고 중국으로 하여금 한국을 지원하도록 움직이게 만드는 외교가 필요하다.
  • 파키스탄 새 대통령 라피크 타라르(뉴스인물)

    ◎판사출신의 독실한 회교도/“여성에 편견” 일부서 비난 【이슬라마바드 AFP DPA 연합】 1일 취임한 무하마드 라피크 타라르 파키스탄 새 대통령(68)은 파키스탄 역사상 사법부 출신 첫 대통령으로 회교 교리에 정통한 회교 신자.29년 펀자브주 구지란왈라의 중류 가정에서 출생한 타라르 대통령은 펀자브대학 법과를 졸업한 뒤 51년 변호사로 개업,15년간 의변호사 생활을 마치고 사법부로 들어가 66년 형사기록법원 판사로 임명됐다. 74년 라호르고등법원 판사,89년 펀자브주 대법원장으로 임명된데 이어 91년 파키스탄 대법원판사로 영전,정년퇴직했다. 93년 당시 샤리프 총리가 이끌던 정부의 해산을 불법이라고 판결한 판사들중 한명으로 베나지르 부토 전총리 재임시에는 연금도 받지 못하다가 97년2월 샤리프 총리가 재집권한 후에 연금을 받게 됐다. 그러나 일부 인권운동가들과 진보 그룹들은 타라르 당선자가 여성 및 비회교 소수민족들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 지구상의 유민들/미 로빈 코언 교수(미래를 보는 세계의 눈)

    ◎다민족 국가 유민 발생 역사적 고찰/희생자·문화·제국주의 ‘디아스포라’ 설명/국제평화 위협 요인·민족갈등 원인 분석 【워싱턴〓나윤도 특파원】 오늘날 지구상에는 200여개의 국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서로 언어와 관습,종교,가치 등이 다른 ‘민족’(nation­peoples)의 수는 2천이 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이들 민족들은 한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사는 경우보다는 여러 민족이 모여 하나의 국가를 이루고 사는 경우가 많다. 이같은 다민족 국가들 가운데는 미국과 같이 구성 민족들끼리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공존공영하는 국가도 있지만 상당수는 민족간의 반목과 질시로 갈등,심지어는 내란(civil war)의 고통을 겪고 있다.특히 이같은 민족간의 갈등은 냉전시대 이데올로기 대립을 대체하는 새로운 국제평화의 위협요인으로 대두되고 있다. 로드 아일랜드 워윅(Warwick)대학의 사회학 교수인 로빈 코언 박사는 ‘지구상의 유민들’(Global Diasporas)이라는 최근 저서에서 다민족 국가의 기원이 된 유민 발생의 역사적 고찰과그로 인해 오늘날 야기되는 많은 문제 등에 관한 명철한 분석을 시도했다.그리고 세계 대표적 유민들의 생성원인을 ▲희생자 ▲노동력 ▲제국주의 ▲무역 ▲홈랜드 ▲문화 디아스포라 등으로 나눠 설명했다. 그는 먼저 유민을 가리키는 ‘디아스포라’라는 말의 의미를 분석했다.‘디아스포라’는 그리스어로 씨뿌리다,혹은 분산이라는 뜻의 ‘speiro’와 위(over)라는 뜻의 전치사인 ‘dia’의 합성어.인간에게 적용시켰을 때 고대그리스인들의 사고로는 이주(migration),식민화(colonization)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유민의 설움을 뼈아프게 겪은 유태인이나 아프리카인,팔레스타인인,아르메니아인 등에게는 강압에 의한 것,비참하고 잔혹한 것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다고 설명했다. 원래 디아스포라는 팔레스타인 외곽에 살던 유대적 종교관과 생활습관을 유지하던 유대인 혹은 그 거주지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였으나 요즘은 유민을 가리키는 보통명사화 됐다는 것이다.결국 디아스포라의 의미는 자의든 타의든 여러가지 이유에 의하여 자신들의 고향땅을 떠나 낯선땅에서 자신들의 언어,관습,종교,가치관 등을 펴지 못하고 마음속으로는 고향에 대한 충성심과 감정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그래서 디아스포라 집단의 구성원은 과거 이주 역사와의 피할 수 없는 연계를 인정하고 비슷한 배경을가진 다른 민족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들 디아스포라 집단은 오늘날 불완전하고 폭력적 성향이 강해 국가 분리운동을 일으킨다거나 내란 등을 야기시켜 국가의 안보는 물론 세계평화까지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되고 있다는 것이다.그 이유로 저자는 심지어 자유민주주의가 정착된 국가에서도 이민자들이 그들을 받아준 국가에 대한 정치적 충성이나,문화,언어에 있어 동질화되어야 한다는 과거의 가정들이 더이상 통용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오늘날은 더욱이 옛 이주민에 난민,망명자 등이 가세돼 새로운 국가의 환경을 따르기 보다는 주로 홈 국가의 환경에 지배되어 활동함으로써 문제를 야기시킨다는 것이다. 코언 박사는 먼저 제1장에서 디아스포라의 고전적 개념을 유대인의 유민사적 전통을 통해 설명했다.기원전 8세기 앗시리아의 침공으로 인한 이스라엘왕국의 멸망,바빌로니아에 의한 유대왕국의 멸망 등에서 비롯됐으며 어느 지역에서든 강인한 유대인의 자생력은 반유대의 풍조를 생성케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2장은 ‘희생자’디아스포라로 노예무역으로 엄청난 희생을 입은 서부 및 동부 아프리카인과 19세기말과 20세기초 터키인에 의해 대학살당한 아르메니아인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3장에서는 ‘노동력’과 ‘제국주의’ 디아스포라를 설명한다.19세기말 세계적으로 1백40만에 달하던 계약노동자는 대부분 인도인으로 이들은 인도양과 카리브해로 이주해 정착하게 됐으며 오늘날 각 국가마다 상당히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또 제국주의 디아스포라는 영국 등의 식민정책과 중상주의에 따라 자국민의 이동이 발생한 것을 말한다. 4장에서는 ‘무역’디아스포라로 무역을 위해 각국으로 퍼져나간 것을 말하며 주로 중국인 상인들의 동남아 진출과 레바논인들의 아랍,남미 등의 진출을 예로 들었다.5장은‘홈랜드’디아스포라로 홈랜드의 상실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인도 시크인과 유대인의 해외 확산을 설명했다.또 6장에서는 ‘문화’이디아스포라로 영국,프랑스,네델란드 등 식민종주국들의 문화적 동경에서 떠난 카리브해 도서국가 사람들을 지적했다. 7장에서는 세계화와 디아스포라의 관계를 설명하고 국제경제의 발달로 세계의 국경이 허물어지면서 디아스포라 현상은 더욱 증가할 것으로 예측했다.그러나 8장 결론부분에서는 이같은 디아스포라 현상의 증가가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을 더욱 부추길 것이라는 부정적 견해와 평등한 세계사회의 건설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견해 두가지를 새로운 문제제기로 제시했다. 원제 Global Diasporas.워싱턴대 출판부.240쪽.19·95달러.
  • 중국 티벳 라싸 포탈라궁:하(세계 문화유산 순례:53)

    ◎불상·경전 가득… 세계적 ‘불교 박물관’/백궁과 홍궁엔 방 모두 1천여개/산자와 죽은자 함께 거처하는 궁전/네팔 등 라마불교 신도들 줄이어 참배 포탈라는 산자와 죽은자가 함께하는 궁전이다.그래서 달라이 라마는 죽어서도 생전에 살던 포탈라를 떠나지 않았다.이들 산자와 죽은자를 같이 경배하기 위한 순례객의 발길이 늘 포탈라로 이어졌다.티벳은 물론 사천성과 네팔,스리랑카 등에서 온 라마불교 신도들로 붐비는포탈라.달라이 라마가 앉았던 의자에 입맞추는 순례객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달라이 라마가 살아서 쓰는 궁전은 백궁이다.백궁은 ‘최상의 행복궁’이나 ‘영원한 생명의 궁’ 따위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달라이 라마는 백궁 가장 높은 층인 ‘영원한 생명의 궁’에서만 잠을 잤다.백궁의 금정에 올라 바라보는 히말라야는 신비로웠다.투명한 코발트 색깔과 어울린 만년설 산자락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종교적 심성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포탈라에는 다른 불교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영탑전이 있다.영탑은 달라이 라마의 시신을 모신 탑인데,전각안에 봉안되었다.화장한 뒤 뼈만 모아 넣어두거나 약품처리한 시신을 그대로 넣어두는 경우도 있다.홍궁맨 뒤쪽 아래층의 영탑전에는 5세와 7∼9세,13세 등 다섯 달라이 라마의 영탑이 자리했다.그중에 5세와 13세의 영탑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달라이 라마 시신 모여 그 화려한 5세 달라이 라마의 영탑은 죽은지 5년뒤인 1690년에 조성되었다. 영탑은 기단에 호리병을 올려놓은 것 같은 모양이다.14.85m에 이르는 탑신은 동과 은으로 만들고 황금칠을 올렸다.주옥과 산호 따위의 보석을 군데군데 박아놓아 야크기름이 타는 불빛을 찬란하게 반사했다.은이 1만량,황금이11만9천량이 들어갔다는 기록이 있다.13세의 영탑은 1934년에 완성되었으나 역시 찬란했다. 영탑전은 홍궁 다른 공간에도 하나가 더 있다.그 자라는 홍궁 후문께 서편강당 뒤쪽이다.달라이 라마 5세와 10세,11세와 12세의 영탑이 두 방에 봉안되었다.그런데 영탑전과 이웃한 서편강당에서는 1959년까지만해도 달라이 라마의 음성이 들렸다.그 음성은 바로 포탈라에 사는 수백명 승려들에게 들려준 달라이 라마 14세의 설법이었던 것이다. ○황금 11만9천량 사용 포탈라에서 만난 젊은 라마승은 영어로 이런 말을 했다.“이 강당에서는 59년 이후 어떤 행사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정지돼 있는 장소다”라고….그래도 포탈라에는 방마다 촛불이 꺼지지 않았다.달라이 라마는 없지만 라마승과 순례자들이 켜놓은 촛불은 그냥 타고 있었다.그렇듯 몸을 불 사르는 촛불에서 오늘의 라마불교를 다시 보았다. 달라이 라마 14세가 망명한 1959년 이후 변화한 공간은 또 있다.백궁의 동쪽 정원이다.운동장처럼 넓은 이 정원에는 절기가 바뀔 때마다 승려와 티벳사람들이 천여명씩이나 몰려들었다.그러면 달라이 라마가 의례히 백궁 발코니로 모습을 드러냈다.종교의식을 베풀고나서 민속놀이를 즐기는 군중들을 격려하기 위해서였다.그 정원이 지금은 빈뜰로 남아있다. 백궁과 홍궁을 합뜨려 포탈라는 1천개가 넘는 방을 갖추었다.이 가운데 일반에게 공개하는 방은 30여개 뿐이었다.동쪽 정원에서 3층 정도의 계단을 올라가서 만난 달라이 라마 집무실도 그런 비공개 공간의 하나다.달라이 라마가 정무와 종무를 본 집무실은 명상의 공간이기도 했다. 백궁의 여러방은 ‘영원한 덕의 장소’니 하는 따위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그 여러방을 잇는 복도와 회랑에는 티벳사와 티벳불교사,역대 달라이 라마의 일생을 담은 벽화들이 가득했다.그리고 방마다에는 달라이 라마들이 앉았던 자리를 보존한 가운데 달라이 라마들의 소상을 세워두었다.한쪽 벽에는 닫집을 만들어 불상을 모셨다.또 다른 벽에는 경전함을 덧대어 천정 꼭대기 까지를 불경으로 채웠다.이들 경전은 티벳어,몽골어,만주어 등 소수민족 언어로 되어있다. ○30여개 방만 일반 공개 그 어마어마한 장서들은 라마불교권 학승들을 포탈라로 불러들였다.포탈라로 와서 먼지를 털어가며 경전을 넘기는 학승 모두가 불심에 흠뻑 젖은채 삼매경에 빠져있다.포탈라를 가리켜 흔히 세계적 불상박물관,또는 세계적 불교박물관이라 하는 까닭을 알만 했다.그것은 티벳불교가 정치를 손에쥔 종교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어떻든 포탈라 홍궁에는여러 부처 이름을 딴 방도 곳곳에 널려있다.미륵보살전이나 천수관음보살전,관음보살전과 만다라전이 그것이다.이들 불전에서는 야크기름을 태우는 불빛속에 순례자들의 참배가 계속되었다.그 많은 부처의 상중에서도 티벳불교의 핵심은 관세음보살상이다. 그러나 관음보살전 규모는 의외로 적었다.3구의 관음보살상 가운데 한구는 키가 1m 남짓했는데 7세기쯤에 만들었다고 한다.금물을 입힌 단향목불상이다.티벳인들은 이 보살상은 누가 만든 것이 아니라 저절로 관세음보살 모양을 하게 된 것으로 믿고 있다. ◎여행가이드/해발 3,700m… 두터운 옷 준비를 티벳은 3천∼7천m에 이르는 고산지대다.포탈라궁이 있는 라싸도 해발 3천700m나 된다.건강한 사람도 도착 첫날은 아무일도 하지 말고 호텔방에서 누워쉬어야 할 정도다. 티벳 여행의 적기는 7·8월 두 달이다.9월부터는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산소의 양도 10%가량 줄어들기 때문에 여행길이 더욱 고통스럽다.고산지대임을 고려,두터운 옷 등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외국인의 티벳행은 현지 정부의 허가증이 있어야 비행기표를 살 수 있다.사천성의 성도에서만 라싸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다.반면 일주일에 하루(보통 일요일) 2∼3편씩 라싸에서 북경을 가는 비행기가 운행되지만 북경에서 라싸행은 없다.북경-성도 비행기는 왕복기준 2천3백위안이고 성도에서 라싸까지는 2천4백위안이다.북경서 라싸가는 비행기만도 4천7백위안(49만원상당)이 든다. 공까공항에서 라싸와 제2도시인 르카차 등으로 다니는 버스가 있다.포탈라궁은 티벳의 주요 여행코스다.매일 오전만 개방한다는 사실에 맞추어 여행계획을 짤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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