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소설
    2026-08-09
    검색기록 지우기
  • 성명
    2026-08-09
    검색기록 지우기
  • 서명
    2026-08-09
    검색기록 지우기
  • 연차
    2026-08-09
    검색기록 지우기
  • 동안
    2026-08-0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4,815
  • 공효진 “욕 실컷 했어요…순수하게, 앙칼지게”

    공효진 “욕 실컷 했어요…순수하게, 앙칼지게”

    드라마 ‘파스타’ ‘최고의 사랑’, 영화 ‘러브픽션’이 거푸 흥행 홈런을 날리면서 ‘공블리’(사랑스러운 공효진) ‘로코(로맨틱코미디)퀸’ 같은 수식어가 붙었다. 하지만 천명관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송해성 감독의 ‘고령화가족’(작은 9일 개봉)에서 공효진(33)은 두번 결혼에 실패한 욕쟁이 이혼녀로 나온다. 제목이 암시하듯 나잇값 못 하는 콩가루 가족 얘기다. 첫째 아들 한모(윤제문)는 교도소를 들락거리면서 엄마(윤여정)에게 기생한다. 집안의 유일한 대졸 학력자인 둘째 인모(박해일)는 영화를 말아먹고 빌붙으러 왔다. 두 번째 결혼마저 실패한 뒤 여중생 딸(진지희)을 데리고 엄마 집으로 온 셋째 미연이 공효진이다. 공동 주연이지만 비중만 보면 두 아들에게 무게중심이 쏠려 있다. 공효진의 위상을 생각하면 의외다.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공효진은 “비중이 적어 고민했다. 그런데 캐릭터에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순수하고 백치에 가까우면서도 어이없게 재미있는 역할이다. 앙칼지고 욕을 거침없이 내뱉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현실에선 그렇게 욕을 할 일이 있나”라며 웃었다. “윤여정 선생님이나 오빠들에게 묻어가는 느낌도 좋았다. 아이돌 그룹 같다고 해야 하나.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화기애애하게 찍었다”고 설명했다. 극 중 미연에게 ‘새끼’라는 말은 약과다. 큰오빠의 불룩 튀어나온 배를 발로 내리찍질 않나, 술집에서 ‘아줌마’ 소리를 듣고 욱해서 옆 테이블 남자의 뒤통수를 날린다. “어릴 때 한 살 터울 남동생과 치고받고 싸웠다. 힘은 달리지만 악착같이 달라붙어 때리면 동생이 질겁을 하곤 했다”고 털어놓았다. ‘고령화가족’에서 공효진의 연기는 캐릭터와 한 몸처럼 움직인다. 늘 그랬다. 모델 출신 배우에겐 숙명처럼 쫓아다니는 연기력 논란과는 무관했다. “제가 생각해도 데뷔 때부터 연기력 논란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워낙 잘하니까요. 하하하.” 능청스럽게 답했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호주로 조기 유학을 떠났던 공효진은 외환 위기로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진 탓에 1998년 유턴했다. 한국 학교에 편입하기 전 두세달 시간이 남아 모델을 시작했다가 ‘여고괴담2’로 덜컥 배우가 됐다. 그는 “그땐 영화 현장이 지긋지긋했다. 귀걸이도 못 하고 몇 달째 같은 옷만 입었다. 라면 먹고 쪽잠을 자다가 퉁퉁 부은 채 잔뜩 인상을 쓰고 찍었다. 그래서 자연스러웠나 보다. 너무 잘하려 해도 긴장하고 굳어지지 않나”라고 말했다. 평소 억양과 톤을 고스란히 유지하는 자연스러운 ‘딕션’(발성·발음)은 신인 연기자 공효진의 장점이었다.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으로 나온 박진영이 “노래하는 목소리와 평상시 목소리가 똑같아야 한다”고 말한 것과 비슷한 맥락인 셈. 공효진은 “딕션은 타고나는 것 같다. 말을 잘 옮기는 사람들이 있다. 귀에 쏙쏙 들어오게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나도 좀 그런 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잘하는 것처럼 비쳤을 수 있다. 물론 해일이 오빠처럼 말재주 없이도 연기를 잘하는 사람들도 있다. 호호호.” ‘여고괴담2’를 대형 스크린으로 보던 날 결심했다. 배우가 되기로. “진짜 못생겼더라. 가관이었다. 그땐 촬영하면서 모니터링 같은 것도 몰랐다. 그런데 의외였다. 시사가 끝나고 나서 사람들이 ‘진짜 학생을 캐스팅했나. 너무 잘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생전 처음 더 잘해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고 떠올렸다. 처음부터 주연이었다. 주위에선 늘 ‘잘한다’고 했다. 매너리즘에 빠졌다. “(배우로서) 알아야 할 건 다 알았다는 그런 생각을 했다. 자만했다. ‘가족의 탄생’(2006)을 찍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같은 역할을 같은 배우가 하더라도 조금만 비틀고 돌리고 꼬기만 해도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걸 비로소 알았다. 연기란 무궁무진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고 말했다. 또한 “원래는 한우물을 파고 끝장을 보는 성격이 아니다. 누굴 이겨보겠다거나 어느 위치까지 올라가겠다는 생각도 별로 안 한다. ‘적당히’를 좋아했다. 그런데 이젠 승부욕이 생겼다. 진짜 잘해 보고 싶다. 지난 10년보다 앞으로의 10년이 더 열정적일 것 같다”고 덧붙였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고개를 숙이고 앉았던 정한조의 입에서 한마디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시냇가에 허물어진 집은 사기 접시 같은데, 북풍에 이엉 날아가 서까래만 앙상하네. 묵은 재는 눈에 섞여 아궁이는 싸늘한데, 뚫린 벽 틈으로 별빛 새어드누나. 집안의 살림살이 너무나 빈약하여 모두 내어팔아야 7, 8푼도 못 되네. 세 가닥 조 이삭은 삽살개 꼬리 같고, 매운 고추 한 두름은 닭의 창자를 닮았네. 깨어진 항아리는 베로 발라 새는 구멍을 막았고, 찬장과 시렁은 새끼줄로 묶어 떨어지지 않게 하였네. 구리 수저는 오래전에 호장에게 빼앗겼고, 쇠 냄비는 이웃 토호에게 빼앗겼네. 다 해진 푸른 무명 이불 한 채뿐이니, 부부유별이란 말 이 집에선 말뿐이네. 젖먹이 적삼은 어깨와 팔꿈치가 드러나고, 태어난 이래로 바지도 버선도 알지 못하네. 다섯 살 난 맏이는 이미 기병으로 첨정되고, 세 살 난 작은 아이는 벌써 군관에 입적되었네. 두 아들 군포가 1년에 500푼이니, 하루빨리 죽기를 바라는데, 옷가지가 무슨 소용인가. 늑대와 호랑이가 밤마다 찾아와 울 밖에서 으르렁대네. 남편은 나무하러 산으로 가고, 아낙은 방앗간에 품팔이 가니, 대낮에 사립문 닫힌 모양 참담하기 그지없네. 아침 점심 두 끼는 굶고 밤에 돌아와 군불 지피며, 여름에는 다 해진 무명옷에 겨울에는 베옷을 입네. 들녘의 냉이는 이미 싹이 묻혔으니, 땅이 풀려 새싹 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고, 술지게미라도 얻어먹으려니 남의 집 술 익기를 기다릴 뿐이네. 지난봄 향미 닷 말을 꾸어 먹었는데, 그 일로 금년에는 살아남지 못하리. 나졸이 사립문에 들이닥치면 겁이 덜컥 나지만, 동헌에 끌려가 곤장 맞을 일을 걱정하지는 않네. “시생은 이런 옛날 언문 시구를 중얼거리곤 합니다. 세상이 도둑과 무뢰배와 들치기, 날치기 들로 어지럽게 된 것은 모두 벼슬아치와 글줄깨나 읽었다는 선비 들의 과욕 때문이지요.” “원래 벼슬아치들이란, 가난 속에 살면서도 의리를 지키고 도리를 어기지 않으며 나라의 어려운 일에 바른말하고 살아가면 되었는데, 언제부턴가 그 도리가 흐트러지고 말았소.” “우리들이 어찌 그런 사정을 모르겠소. 그런데 도둑들의 행동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들이 배울 점이 있소. 도둑들은 빈둥빈둥 게으름을 피우는 사람들과는 달리 밤 깊은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뜬눈으로 일한다는 것이오. 자신들이 겨냥하던 일을 하룻밤에 결단 내지 못하면, 다음날 밤에 다시 죽기 살기로 담판을 짓는다 하오. 뿐만 아닙니다. 도둑들은 같이 일하는 동배간의 행동거지를 자기 자신의 일처럼 엄중하게 생각하지요. 그리고 아주 적은 소득에도 목숨을 걸 뿐만 아니라, 아주 값진 물건에도 크게 집착하지 않고 반푼 어치도 안 되는 물건과 미련 없이 바꿀 줄 아는 너름새가 있습니다. 도둑은 자신에게 닥친 시련과 위기 따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이겨낼 줄 안다는 것이오.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 일이 무슨 짓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이지요.” 귀 기울여 듣던 조기출이 말했다. “우리 상단의 동무들과 도둑들이 마음가짐이나 처세함에 있어 근본이 다르지 않아 놀랐습니다.” “하긴….”
  •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정한조가 곰방대를 빼물며 등뒤에 멀리 두고 온 묏부리를 바라보다 말고 혼잣소리처럼 한마디 툭 던졌다. “저 멀리 넓재 묏부리가 까마득하게 보이네요. 7, 8년 전이었던가봅니다. 그날 우리 일곱 일행이 해거름에 저 넓재를 넘고 있었는데, 그때 대중없이 뛰어든 산적 두 놈과 딱 마주쳤네요. 그러나 우리가 누굽니까. 네놈들 잘 만났다 하고 다짜고짜 달려들어 싸다듬이로 난장 박살해서 묵사발이 된 놈들을 아갈잡이한 다음, 울진 관아까지 질질 끌고 가서 하옥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상했어요. 우리는 맨몸이었고 저들은 칼을 들기도 했는데, 우리가 덧들이는데도 전혀 대척할 방도를 못 찾았어요. 상투를 잡고 태질을 시키는데도 고스란히 당하고 있었지요.” “그랬소? 그런데 고개 넘을 때는 왜 입도 뻥긋하지 않았소?” “하긴 그때 입이 간질간질했었지요. 그러나 공원께서 얼살을 먹고 굽도 떼지 못하고 설설 길까봐. 가만있었지요.” “예끼, 시생이 무지렁이인 것은 틀림없으나, 그만한 일에 오줌까지 지리겠습니까. 이제는 천둥 번개 치는 밤길에 개호주가 뒤를 따라와도 아무렇지도 않을 만큼 간담이 커졌습니다.” 정한조가 그 소리 못 들은 척 딴청만 피웠다. “나중에사 깨달았습니다만, 명색 산적으로 나섰다는 위인들이 산적이 뭔지 모르고 있었어요. 폐농하고 행리 탈취를 업으로 삼기 시작하면, 엽전이 꿰미째 굴러오는 줄 알았던 것이지요. 길바닥으로 나서기만 하면 화수분이 저절로 굴러올 줄 알았겠지요. 그래서 후회가 되었습니다. 관아에 넘기지 말고 잘 달래서 돌려보낼 일이었는데. 경기의 안성이나 송파나 누원점 같은 대처에서 화적질하는 도둑들의 두령은 모두 군관들이란 말이 파다하게 퍼져 있습니다. 군관들은 길거리와 큰 저자에 도적들을 들여보내 빼앗고 훔치게 사주를 합니다. 도적들이 제 세력만 가지고는 대로에서 갈취와 약탈을 저지를 간담이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도 있는 집이나 부잣집의 기명이나 의복을 훔쳐낸다 하더라도 그것을 처분할 일이 막연하지 않겠소. 그것을 팔 수 있는 방도를 알고 있는 것은 군관들뿐입니다. 그래서 도둑질한 물건의 금어치가 열 냥이라면 넉 냥은 훔쳐낸 자가 먹고, 나머지 여섯 냥은 군관의 몫이 아니겠소. 또 도둑이 처음 소굴에 가담하게 되면 신참례를 하게 되어 있어 세 번이나 장물을 바치고 나서야 자기의 몫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한 번이라도 눈을 속이려 들었다간, 당장 관가로 잡혀간답니다. 친척이나 이웃이 그 사건에 연루되어 들어간 경우에는 군관의 안면에 구애를 받아 차마 바르게 토설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고 중언부언 횡설수설로 눙치게 되겠지요. 이것이 후하다고 하는 풍속이 되어버렸으니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도 그에 따라야 가상한 일로 여기게 되었소.” “그렇다 하더라도 화적질 방조하면 되려 큰코다칩니다. 그때, 구슬려서 돌려보냈다면, 적당 행세해도 이만저만하구나 해서 정신을 못 차리고 뒤돌아서서 다시 적당 행세했겠지요. 그러나 시생이 생각해보면, 애초에 도적이 생겨난 것은 그 화적질이 좋아서가 아니라, 회오리바람처럼 닥치는 기한과 뼛속까지 아리고 쓰린 신산을 견뎌내다 못해 단 하루라도 연명하려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미욱하고 온순한 무지렁이들을 도적으로 만든 자가 과연 누구겠습니까. 공명첩이니 원납전이니 하면서 공공연히 벼슬을 팔아 권세가의 문전이 장시처럼 소란하게 되었지 않습니까. 음직으로 권세를 잡은 그들 자제며 아전 들이 약탈을 일삼으니 적탈민들은 어디를 간들 도적이 되지 않겠습니까.”
  • [문학 새 책]

    ●김사미와 효심:고려 최고의 민초의 난(김원 글, 아라 펴냄) 100여년간 존속한 고려시대 무신정권은 집권 초기 큰 혼란을 겪었다. 문신 중심의 귀족정치를 종식시켰지만 과중한 수탈과 고된 생활에 지친 농민과 천민을 자극해 전국적으로 큰 민란을 일으켰다. 그 규모와 양상이 가장 크고 격렬했던 것은 1193년 경상도에서 일어난 김사미와 효심의 민란이었다. 김사미는 운문(청도), 효심은 초전(울산)에 각각 근거지를 두고 신라 부흥을 표방해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울산지역 향토학자인 김원(60)은 이 같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소설을 집필했다. 13년간 한반도 동남부 전역을 답사하고 관련 서적 150여권을 탐독했다. 6년간 집필과정을 거쳐 고려 500년 역사상 가장 참혹하게 진압된 민란을 서술했다. 격동기 민초들의 애환과 삶도 질박하게 그려냈다. 작가는 현재 울산향토사 연구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김용택 글, 창비 펴냄)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는 시인이 사라지는 것들과 곁에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들을 애틋한 그리움으로 노래했다. 시인은 우수 어린 목소리로 물질적 욕망에 포섭돼 삶의 진정한 가치와 참된 행복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시대를 통렬하게 일갈한다. 섬진강을 소재로 한 연작시 4편도 추가됐다. 가난과 소외의 아픈 과거를 현재적 의미에서 반추하거나, 아름다운 섬진강을 앞에 두고 역설적으로 느끼는 생의 고독과 심적 갈등을 노래했다.
  • 끝없이 준 어머니, 더 원하는 며느리… 여자의 적은 정말 여자인가?

    끝없이 준 어머니, 더 원하는 며느리… 여자의 적은 정말 여자인가?

    ‘구강건조증’, 안구건조증과 비슷한 것이었다. 인공눈물이 있듯이 인공침도 있었다. ‘사회파 작가’ 김숨(39)의 장편소설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현대문학 펴냄)이 표현한 ‘여인’ 정순자씨가 앓는 고통스러운 병이다. 정순자는 1949년생 소띠로 충남 부여가 고향이다.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하고 17살에 서울에 올라와 동대문 직물가게를 하던 친척집 일을 돕다 남자를 만나 결혼해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낳았다. 36살에 과부가 돼 파출부, 요구르트 배달, 버스회사 청소부, 식당 주방일 등 안 해본 허드렛일이 없다. 맞벌이를 포기하지 않은 홈쇼핑 콜센터 상담원인 며느리의 요청으로 살림을 합쳐서 5년 동안 말없이 살림과 보육을 도맡았다.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두려워하기는커녕 대놓고 무시하고 핍박한다. 지방 3류 대학을 나와 중소건설사 직원으로 출장이 잦은 아들은 대한민국 귀한 아들답게 저밖에 모르고, 못났다. 정순자의 며느리 김미선은 누구인가. 구세대 어머니를 표상하는 ‘여인’들을 압박하는 ‘진화하는 적’이 아닐까 싶다. 그녀는 시어머니를 ‘여자’라고 부른다. 정규직 홈쇼핑 콜센터 상담원으로 15년 다녔던 회사에서 최근 해직됐다. 전문대 출판학과를 나온 그녀는 교사를 어머니로 둔 ‘노량진 고시촌의 번데기’ 같은 남자와 사귀다가 계층, 신분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껴 포기하고 32살에 36살의 중소건설사 직원과 결혼했다. 해직되자 구강건조증 환자 시어머니를 내쫓으려 한다. 김숨은 중세적 권력관계가 역전된 ‘며느리 시집살이’의 전형을 보여주는데, 자본주의적인 진화일지도 모르겠다. 시어머니 덕분에 신생아의 칭얼거림 없이 개운하게 잠을 자고, 시어머니가 6시 30분 남편의 아침밥을 대령하는 등으로 육아와 가사일에서 완전히 벗어났는데도 야박한 수고비를 책정한다. 그 쥐꼬리만 한 수고비마저도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자 절반으로 잘랐다. 필요가 사라지자 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김미선은 “부모가 뒷바라지를 얼마만큼 해 주느냐에 따라 자식 인생이 달라지는 것 아니냐”고 당당하게 정순자를 비난한다. 순박하고 희생적인 정순자는 “얼마나…인생이 얼마나 달라진다는 거냐?”고 되묻지만 “브랜드 아파트에 살고, 외제 차 끌고, 휴가 때마다 온 가족이 해외로 여행 다니면서 사는 게 성공한 인생이 아니겠느냐”는 김미선 앞에서는 말복을 채워 주기 위해 어머니 세대가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을 박탈하고 침해하는 것이 마땅할까. 이것이 오늘날의 진화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1일 TV 하이라이트]

    ■대한민국 행복발전소(KBS1 밤 7시 30분) ‘우승민의 깐깐한 시선’ 코너에서는 유명 브랜드의 가방, 지갑을 넘어서 선글라스, 시계 등 다양한 위조 상품이 판매되고 있는 실태가 낱낱이 공개된다. 단속 현장을 본 ‘바른 생활 가장’ 이윤석은 신혼 초 아내를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명품 지갑을 선물했지만, 그 지갑이 사실 모조품이었다고 밝히는데…. ■천명(KBS2 밤 10시) 원은 민도생 살인범으로 몰려 의금부도사 이정환에게 추포되고, 그의 일가는 풍비박산 난다. 급기야 노채를 앓고 있는 딸 랑(김유빈)의 상태도 심각해진다. 한편 다인은 최원이 그토록 간절히 찾던 생명의 은인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금서고에 떨어뜨린 노리개 때문에 원이 살인자로 몰렸다는 사실도 안다. ■자원봉사 희망프로젝트 나누면 행복(MBC 밤 1시 15분) 경기도에는 특별한 북 카페가 있다. 향긋한 커피를 끓이는 손길은 다름 아닌 연세 지긋한 노인들이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경기도 노인 일자리 창출 사업을 위해 지난해부터 노인들을 위해 바리스타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한 것이다. 노인들은 행사 준비에 분주한데…. ■TV소설 삼생이(KBS2 오전 9시) 사기진(유태웅)과 막례(이아현)의 대화를 듣게 된 봉출(이달형)은 경악을 금치 못하지만, 일단 입을 다문 채 삼생(홍아름)에게 가슴 절절한 미안함을 토로한다. 한편 막례는 봉출이 삼생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을 까맣게 모른 채 날뛰고, 봉출은 마침내 사실을 밝히기 위해 봉한의원으로 찾아간다. ■극한 직업(EBS 밤 10시 45분) 119 특수구조단 영등포 수난구조대원들은 반포대교에서 신행주대교까지 약 22.1㎞ 구간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 시민의 안전을 위해 24시간 출동대기 중인 구조대가 지난 한 해 동안 처리한 출동건수만 500건 이상이다. 그중 70% 이상이 투신 사고였다. 오늘도 대원들은 한 생명을 구하고자 강물 속으로 몸을 던진다. ■하늘에서 본 알프스(OBS 오후 5시 45분) 알프스 산맥의 중심에 있는 스위스로 여행을 떠난다. 그라우뷘덴주(州) 엥가딘에 있는 스위스 국립공원에서 야생 염소를 연구하는 생물학자를 만나고, 오스트리아 국경에 인접한 체르네츠에 있는 작은 학교를 둘러본다. 또한 플림스에서는 절벽에서 외줄을 타며 평화를 즐기는 청년의 이야기를 들어 본다.
  •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그건 그렇구… 그 논다니 창병 얻었단 얘기 밑절미 있는 말인가?” “밑절미가 있던 없던 말이 그렇다는 얘기지. 가랑비에 옷 젖더라고 계집질에 눈이 뒤집혀 허둥지둥 하다보면, 머지않은 장래에 창병 얻어 뼈까지 녹아나서 신세 망치는 날이 오지 않겠나. 창병도 창병 나름일세. 양매창(楊梅瘡)*을 얻으면 그게 바로 악창이어서 약도 없어 목숨 하나 일같잖게 거덜낸다네. 하나뿐인 초라한 육신, 낮에는 부담짐 지우고 밤에는 색탐에 부대끼다보면, 몸가축인들 온전할 리 없지. 초개 같은 목숨 진작 잡도리하지 못하면 지레 죽을 수도 있네. 우리네 행상인들 망하고 나면, 탱자처럼 쭈그러들어 대그락대그락하는 불알 두 쪽만 남을 뿐일세.” 길세만은 잡힌 말꼬리를 떼어버릴 궁리가 없었다. 머뭇머뭇하다가 대꾸할 말미를 놓치고 말았다. 속내가 뒤숭숭한 터에 배고령이 한마디 덧붙인다. “언젠가 행수님 말씀이 생각나네… 매화는 엄동설한을 뚫고 피어나기 때문에 그 진한 향기를 자랑할 수 있는 법이라고… 나 같은 무지렁이가 처음엔 무슨 흰소린가 해서 어리둥절했다네. 그런데 임자를 지켜보자니 그 말씀의 속 깊은 뜻을 얼추 깨닫게 되었다네… 얄팍한 길미나 챙기는 임자가 논다니 밑구멍에 찔러주어야 할 해우채는 오죽했겠나… 주책없다 생각 말고 내 말 새겨듣게. 우리 사이 흉허물 없이 지내니까 이런 말 하는 것일세.” 설피를 꺼내 신어야 할 만큼 한대중으로 내리던 눈은 언제부턴가 씻은 듯이 그쳤다. 산중 날씨란 그래서 짐작할 수 없었다. 말래에서 발행했더라면 너삼밭이 이른 중화 자리가 되었겠지만, 샛재에서 발행했으므로 중화 자리는 빛내골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새벽에 진눈깨비를 만나 지체되었으므로 너삼밭재 밥자리에서 중화를 짓기로 하였다. 그곳에는 안면이 낯설지 않은 어물 저자 차인꾼들 대여섯이 새옹을 걸어놓고 이제 막 한술 뜨고 있었다. 밥자리라고 하지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적막강산이긴 매한가지였다. 중화 먹는 말미에도 땀에 젖은 배자와 짚신 감발을 풀어 계곡 자갈 바닥이며 밭둑 위에 널어 말리고 있었다. 그들은 정한조와 조기출 일행 20여 명이 밥자리를 찾아 계곡으로 들이닥치자, 근래에 보기 드물었던 상단의 규모에 기가 질린 나머지 뱀 만난 여치처럼 잽싸게 두렁 위로 몸을 피했다. 그러자 일행들이 나서서 진정을 시켰다. “동고동락하는 터에 그 무슨 해괴한 짓들이오. 얼른 먹던 중화들 드시오.” 너삼밭재에서 들밥을 먹고 허기를 채웠다면, 빛내골과 넓재까지 계속 내달아 광희골 회룡천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당도해야 했다. 넓재에서 광희골까지는 내리막이어서 길 줄이기가 수월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코치비재와 성황당이 있는 밭재 지나서 숙소참인 맷재까지는 내리막보다는 꼬불꼬불한 자드락길에 오르막뿐이었다. 맷재는 십이령 중에서 마지막 고개로 꼽는 곳이기도 했다. 맷재에서 막지고개만 넘어가면, 현동저자와 내성저자의 차인꾼들과 만나 건어물 상대들이 등짐을 줄일 수 있었다. 행중이 맷재에 당도했을 때는 호랑이를 만나는 불상사가 있더라도 더이상은 발짝을 떼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근래에 보기 드물 정도로 먼길 행보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은 20여 명을 헤아리는 대상대가 함께 걸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나 늦깎이로 상단에 뛰어든 조기출과 같은 사람들은 고단하다 못해 몰골이 파리하고 눈자위가 허옇게 되어 숨을 가다듬기에도 힘겨워 보였다. 정한조가 측은하여 한마디 불쑥 질렀다. “생선 몇 뭇 팔아 하찮은 길미 챙기겠다고 이 고초를 겪는구려. 나물 먹고 물 마시더라도 차라리 옛날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소?” “도감께서는 정곡을 찌르시는군요. 때로는 그런 마음이 들 때도 없지 않지요. 그러나 행중 식구들에 견모*가 된다 하여도 두 번 다시 죽은 놈 발바닥같이 찬 냉골에 들어앉아 좀먹은 탕건은 쓰고 싶지 않소. 도감 입으로도 괭이 든 비렁뱅이는 없어도 책 든 비렁뱅이는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비 오는 날 똥장군을 등짐 대신 지고 길바닥에서 엎어지고 자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감나무 밑에서 홍시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어리석은 짓은 반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양매창(楊梅瘡): 매독 *견모: 놀림가마리
  • 올여름 에든버러는 한국 미디어아트의 놀이터

    올여름 에든버러는 한국 미디어아트의 놀이터

    오는 8월 9일부터 9월 1일까지 영국 에든버러에서 열리는 ‘2013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에든버러 축제)에 한국 현대예술을 대표하는 백남준아트센터, 와이맵(YMAP), 미디어아트 작가 김형수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가 초청됐다. 29일 서울 종로구 신문로 주한영국문화원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에든버러 축제 예술감독 조너선 밀스는 “올해 축제의 주제로 삼은 ‘예술과 기술’(Art and Technology)에 가장 부합하는 작품을 선정했다”면서 “40여개 국가에서 온 예술가 3000여명이 참여하는 국제 교류의 장에서 이들 세 작품은 한국 현대예술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대변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1947년 시작된 에든버러 축제는 연극, 오페라, 무용, 시각예술, 설치예술 등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는 세계 대표 예술축제로 꼽힌다. 밀스 예술감독은 “시각과 사고의 폭을 세계로 돌려 서로 이해하는 축제를 만들고자 한다”면서 “한국 단체가 서구 먼 곳에 있는 관객과 함께할 수 있는 장이 되는 동시에 베토벤, 레오나르도 다빈치, 리처드 버턴(미국 배우) 등 몇십년 전, 길게는 몇백년 전의 예술가와 현재 예술가들이 어떤 관계를 정립해 나가는지 볼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백남준아트센터는 8월 9일부터 10월 19일까지 에든버러대 탤벗라이스갤러리 등에서 ‘백남준의 주파수로:스코틀랜드 외전’을 연다. 이번 전시는 스코틀랜드에서 처음 열리는 백남준의 개인전이자 독일에서 가졌던 첫 개인전(1953, 독일 부퍼탈)의 50주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번 전시는 ‘글로벌 그루브’(1974), ‘비디오 코뮨’(1970) 등 백남준아트센터의 소장품 70여점으로 꾸민다. 8월 20~21일 킹스시어터에서는 와이맵의 ‘마담 프리덤’을 올린다. 와이맵은 ‘봄의 제전’(2009),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2011) 등 다양한 미디어 퍼포먼스를 보여준 공연단체. 김효진 안무가는 이번 작품에 한국춤과 정비석 작가의 소설 ‘자유부인’(1954)을 영화화한 한형모 감독의 동명영화(1957), 1960년대 TV 프로그램을 접목했다. 김 교수는 이번 축제 동안 에든버러 중심지 어셔홀 광장과 페스티벌 극장에 대규모 ‘미디어 스킨’을 설치해 새로운 공공예술로서 미디어아트도 구현한다. “예술이 어떻게 생활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 작업의 목적”이라는 김 교수는 “이번 작품을 에든버러에서 경험하는 한 여름밤의 꿈 같은 느낌으로 구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여경 기자 kid@seoul.co.kr
  •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소금과 미역은 궂은 날씨와는 상극이었다. 습기 먹은 짐들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워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해동머리라 질척질척해진 길턱 때문에 발길을 재촉하기 힘들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는 노릇, 누가 일러준 대로 들메끈을 단단히 고쳐 매고 샛재 숫막거리를 나섰다. 고개를 들면 안개 발 같은 진눈깨비가 얼굴에 척척 감기어 모두 목을 쇄골 속으로 감추었다. 그러나 발행한 지 반식경이 지나고부터 휘감기던 눈발이 성기기 시작하여 두런두런 수작들 나눌 만하였다. 뒤따라 걷던 배고령이 입에서 구린내가 났던지 자별하게 지내는 선머리의 길세만에게 바싹 따라붙으면서 불쑥 한마디 던졌다. “임자 보게.” 선머리에 선 길세만은 허리가 끊어질 듯 우려와서 줄곧 끙끙 앓는 소리를 하며 발부리만 내려다보고 걷다가 신둥머리지게 되받았다. “왜 또 그러나?” “말래 숫막거리에 그 암팡진 년 말일세.” “말래 도방 숫막거리에 암팡지다는 평판을 듣는 갈보들이 어디 한둘인가?” “아니… 그 연지골(燕脂溪)* 출신 새침데기 영월댁 말일세.” 시답잖은 농인 줄 알았더니 숫막거리 갈보 얘기가 나오자, 구미가 당겼던 길세만은 비로소 턱만 비틀어 뒤따라오는 배고령을 힐끗 일별했다. 길세만이 구미에 당겨하는 것을 눈치챈 배고령이 가래침을 긁어 계곡 아래 멀리로 내뱉고 나서, “도방이 있는 말래 숫막거리에는 오가는 원상이나 부구 염막 소금꾼 들의 염낭쌈지를 바라고 문을 연 숫막이 열 손가락을 헤아리고 들병이며 떠돌이 논다니 들도 섞여 있지만, 그중에서도 영월댁이 살신도 포르족족한 게 색깨나 쓰게 생겼지. 그 여자 거웃에 손이라도 한 번 넣어보려고 군침을 흘리는 축들이 한둘 아니라더군. 그런데 꼴에 밤똥 싸더라고 그 계집사람이 초면이고 구면이고 가릴 것 없이 사내를 할끔할끔 간색해서 골라가며 살보시를 하는데, 제 눈에 차지 않으면 아예 코대답도 않고 안면을 싹 바꾸고 만다는구먼…. 사내놈을 멧돌치기로 배 위에 올려놓고 한바탕 어진 혼이 나가도록 요분질로 조리를 쳐서 칵 뱉어놓으면, 어지간한 사내는 사흘 동안 자리보전으로 운신을 못 하고 누워 있어야 겨우 기동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도방 대처에 짜하게 퍼져 있다네.” “말 같잖은 소리, 밑절미 없는 소리 그만 하게.” “나도 귀동냥으로 들은 소리지만, 그 계집사람하고 한번 붙으면, 뻣뻣한 사내들도 뼛골이 녹아나서 잠시 동안 저승 구경까지 할 수 있다더군.” “양기가 입으로 오르자면 아직 한참 기다려야 할 나이인데… 음탕한 소리 그만하게.” “헌 갓 쓰고 똥 누기 예사지…. 일 년 열두 달 한둔으로 지내는 우리네가 그런 일도 없다면 명치끝까지 차오른 육허기는 어디다 풀고, 가슴에 쌓인 울화는 어디다 쏟아내겠나.“ “심통이 놀부군.” “왜? 들병이하고 놀아났다는 소문나면, 체면 깎일까 봐 그러나?” “어허, 봉패로세. 자다가 얻은 병이라더니 불각시에 왜 나를 물고 늘어지나.” “임자도 그중 하나가 아닌가?” “예끼 고얀 사람, 넘겨짚지 말게. 내가 매달고 다니는 고기 방망이는 구색으로만 달고 다니는 게야. 임자도 알다시피 물색에는 뜻이 없다네.” “잡아떼지 말고 내 말 귀여겨듣게. 그 여자 창병이라는 소문 있다네.” 굳이 보지 않아도 새파랗게 질린 길세만의 안색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점입가경이군. 창병이라는 말, 그게 정말인가?”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나는 것 보았나? 내가 괜한 말 지절거리는 게 아닐세. 내가 임자 앞에 있어서 보이지는 않지만, 보지 않아도 시방 임자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을 것이야.” “글쎄….” “임자 왜 대꾸가 없나?” “글쎄…. 내가 언제 그 염불 빠진 년과 상종한 일이 있었는지. 생각이 올지갈지해서 그러네.”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임자 알고 보니 말래 숫막거리에 있다는 논다니들 중에 가죽방아 찧어보지 않은 계집이 없구먼. 우리가 봉놋방에 둘러앉아 투전 놀음에 술추렴이나 하고 시시덕거리는 사이, 술 안 마시는 임자는 계집사람들 거처하는 퇴창 밑에 숨어 기회를 엿보아 계집들과 배꼽 맞출 궁리만 트고 있었군. 술추렴할 때마다, 임자는 딴청을 피운 까닭이 거기 있었군.” *연짓골:삼패 기생들이 모여 사는 마을.
  • 이외수 혼외아들 양육비 조정 합의

    이외수 혼외아들 양육비 조정 합의

    소설가 이외수(66)씨를 상대로 한 혼외 아들 친자 확인 및 양육비 청구 소송이 양측의 합의로 마무리됐다. 29일 오전 춘천지법 가사 단독 권순건 판사 주재로 열린 조정위원회에서 양측은 법률대리인을 통해 조정에 합의했다. 이로써 소송은 원고 오모(56)씨와 혼외 아들(26)이 지난 2월 1일 제기한 이후 3개월여 만에 끝났다. 이날 조정위원회에는 당사자인 오씨와 이외수씨 등은 참석하지 않았다. 비공개로 2시간 30분 동안 진행된 조정위원회가 끝난 뒤 양측 법률대리인들은 “원만하게 서로 만족할 수준의 합의가 이뤄졌다”고 밝혔다. 조정위원회 조정장인 권 판사는 “가사소송은 프라이버시와 관련된 민감한 사인이라 합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면서 “양측의 합의로 소송이 종결됐다는 사실 이외에는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원고인 오씨는 이날 “합의 내용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대외적으로 공인이라서 명분을 소중히 여기는 피고 측과 서로 감정이 상하지 않는 적정한 선에서 절충했다고 생각한다”면서 “아들은 앞으로 호적을 찾아 이외수씨를 더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상대방인 피고 이외수씨 측은 이날 기자들의 전화를 일절 받지 않았다. 오씨는 ‘1987년 이외수씨와 자신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으나 이씨가 양육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며 자신의 아들을 호적에 올려 주고 양육비 명목으로 2억원을 달라며 2월 1일 소송을 제기했다. 이후 지난 16일 권 판사는 첫 공판에서 조정위원회를 통한 조정을 권고했었다. 춘천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영화 프리뷰]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폭스파이어’

    [영화 프리뷰]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폭스파이어’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인 로랑 캉테 감독의 신작 ‘폭스파이어’는 거장의 숨결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영미권의 대표적인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보수적인 남성 중심사회에 저항하는 소녀 갱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2008년 도시 빈민가의 한 중학교를 배경으로 교육과 사회의 문제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그려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감독은 이번에는 소녀들의 성장 드라마뿐 아니라 1950년대 미국 사회의 이면을 날카롭게 꼬집었다. 영화 제목인 ‘폭스파이어’는 부모와의 불화를 경험하고 성폭력을 당한 소녀들이 사회에 저항하기 위해 만든 자신들만의 공동체. 어리고 가난하다고 성적으로 추근대는 성인 남성에 대해 단체로 복수하는 모습은 그동안의 영화 속에서 늘 약자로 그려지는 10대 소녀들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 통쾌한 재미마저 준다. 이들은 ‘폭스파이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성장하고 갈등하면서 작은 사회를 경험한다. 어깨에 함께 문신을 함으로써 서로에 대한 신의를 맹세하고 상처를 감싸 안는 소녀들. 적어도 이 작은 공동체 안에서는 빈부나 계급의 차이는 없다. 하지만 단순히 복수를 하기 위해 뭉친 이들은 점차 사회의 불온 세력으로 낙인찍힌다. 소녀들은 ‘갱’으로 불리고 그들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점차 멀어져 간다. 단절된 공동체 속에서 갈등이 불거지기도 한다. 영화는 마치 한국 영화 ‘써니’처럼 ‘폭스파이어’ 활동을 했던 소녀 매디(케이티 코스니)가 자신들의 10대 시절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반세기 전의 이야기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소녀들의 감성이 현대 사회와 잘 맞아떨어지는 지점이 있다. ‘클래스’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 10대들의 이야기를 그린 캉테 감독은 “그들이 모순과 대립을 겪으며 성장하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감독은 10대들의 방황과 저항 심리를 섬세하게 담았다. 프랑스 출신이지만 영어로 영화를 만든 감독은 화려한 아메리칸 드림의 그늘 속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을 주목한다. 그는 “1950년대 미국을 희망차게 그리는 고착화된 이미지에 저항하고 싶었고 화려한 꿈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으려 노력했다”면서 “당시는 매카시즘이 유행했지만 소외된 계층을 상징하는 소녀들은 공동체 속에서 공산주의 이념을 실현하고 있다. 과거의 역사, 소녀의 감성이 지금도 똑같이 존재하고 전해 내려온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다소 긴 러닝타임과 철학적인 주제가 부담이 될 수도 있지만 연기 경험이 전무한 배우들을 잘 지휘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를 만든 감독의 연출력은 곱씹어 볼 만하다. 상반기에 국내에서도 개봉할 예정이다. 전주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5일장의 효시는 성종 초에 전라도 무안과 나주에서부터였다. 오랜 재해를 견디지 못했던 적탈민들이 집에 있던 곡식과 채소를 비석거리에 가지고 나와 필요한 물건과 바꾸어 연명하기 시작하면서 장시를 이루게 되었고, 여러 세궁민들이 그에 합세하면서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점차 폐농하고 장거리로 나선 도부꾼들의 수효도 늘어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저자가 번성하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저자가 번성하면 농투성이들이 문전옥답을 버리고 모두 장시로 몰릴 것이고, 더불어 시겟금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널뛰듯 해 무뢰배와 사기꾼 들이 횡행하여 풍속이 더럽혀질 것이었다. 농사라는 것은, 몸은 땀으로 절고, 손발은 흙과 똥으로 범벅이 되기 마련이었다. 비바람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벌레 잡기에 잠깐의 말미를 내어 쉴 수도 없어 고단하기 그지없다. 밭뙈기 크기에 따라 부역을 감당해야 하므로 그 괴로움 역시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장사치들은 농간을 부려 보잘것없는 것을 눈 깜짝할 사이에 존귀한 것으로 바꾸고는 그 이익을 챙겨 혼자서 방긋 웃고, 모리를 취하고도 시치미를 딱 잡아뗀다. 이를테면, 백동(白銅)을 가리켜 은(銀)이라 속이고, 염소 뿔을 내밀고 대모(玳瑁)라 하고 개가죽을 담비 가죽으로 꾸며 억매흥정으로 몰아붙인다. 어느 눈썰미 있는 자가 그 속임수를 적발하면 도리어 부아통을 터뜨리며 멱살을 뒤틀어잡고 협잡꾼이 나타났다 고함을 지른다. 그러면, 근처에서 장꾼 행세하며 배회하던 패거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애매한 사람을 개 잡듯 두드린다. 그런가 하면, 장시에는 들치기, 날치기, 소매치기는 물론이고 온갖 구메 도적이 난무한다. 어리석은 농투성이가 집에서 치던 닭 한 마리를 들고 나와 흥정을 할라치면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떠꺼머리총각이란 놈이 불쑥 나타나 닭을 가로챈다. 농투성이가 뒤따라가면 쫓기는 놈은 고샅길 속으로 몸을 숨기고 쏜살같이 달아난다. 요행으로 뒤따라잡아 뒷덜미를 낚아챌 만하면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또 다른 사내가 농투성이 앞을 엎어지듯 가로막으며 방구리 사려 채독 사려 하고 외치며 훼방을 놓아 종국에는 뒤쫓던 놈을 놓치게 만든다. 그들은 농투성이들처럼 배당된 부역도 없어 한껏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농사짓는 사람은 그 수효가 나날이 줄어들어, 한 사람이 경작하여 열 사람이 배를 채우니 나라의 창고는 늙은이 뱃가죽처럼 쭈그러들고 말았다. 농자천하지대본이란 말은 그래서 한낱 허언에 불과하게 되었다. 지방 군수들이 이를 좌시하지 않고 조정에 장계를 올려 저잣거리의 작폐를 저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조정에서 이를 엄중히 단속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수수방관하는 사이에 저자의 규모는 점점 커져 활기를 띠었고, 종사하는 행상인들의 수효 역시 불어나 세력화되었다. 조정에서는 할 수 없이 한 달에 두 번의 장문이 열리도록 허용하였다. 그러다 그 다음에는 열흘의 터울로, 나중에는 닷새마다 저자가 열리도록 묵인하게 되었다. 이튿날이었다. 신새벽에 일어나 발행을 서두르던 일행은 예상치 못했던 악천후와 마주쳤다.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난밤 잠들 때까지 날씨가 여전히 차갑긴 했어도 구름 낀 하늘은 아니었다. 비라도 내릴 양이면, 행중 식구들 중 대여섯쯤이 어깨나 허리가 결린다거나 굴뚝 연기가 낮게 깔리는 조짐을 보였다. 하지만 전혀 그런 징조가 없었는데, 느닷없이 앞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진눈깨비가 푹푹 내려붓기 시작한 것이었다. “어허, 좋기만 하던 날씨가 행장 꾸리자마자, 웬 심통이여.” “비알진 벼랑길에 나동그라져 다리나 작신 부러뜨리지 않으려면 감발치고 들메끈들 단단히 조여매시요들….”
  • 시골 목가적 풍경 그리는 안분지족적 문학 비판

    헝가리 출신의 정치경제학자 칼 폴라니(1886~1964)가 자본주의의 기원을 쓴 ‘거대한 전환’(1944년)을 읽다 보면 머리가 갸우뚱해질 때가 있다. 시장의 자기조절 기능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강렬한 비판이 담겨 있다. 폴라니는 인류가 잃어버린 공동체의 복원을 이야기하는데, 자본주의 이전의 평화로운 시골 풍경과 닮아 있다. 그런데 그 시골이 과연 낙원이 될 수 있을까? 영국의 소설가이자 문화비평가인 레이먼드 윌리엄스(1921~1988)의 대표작인 ‘시골과 도시’(1973년, 나남 펴냄, 이현석 옮김)는 이런 의문을 풀어주는 문화연구서다. 영국 웨일스 변경 철도노동자의 아들이었던 윌리엄스가 사용한, 시골을 뜻하는 컨트리(Country)는 라틴어 콘트라(contra: 대립하여, 반대하여)에서 나온 단어로 관찰자의 눈앞에 전개되는 토지를 의미했다. 그래서 시골은 지방이면서, 토지이자, 나라를 뜻하는 말과 같이 사용됐다. 이후에 널리 쓰이게 된 국토(land), 국가(nation), 지역(region)은 13세기에 생겨난 말이다. 16세기에 도시(city)와 대비되면서 시골로 고착됐다. 시골! 그 단어만으로도 한가롭고 초록 융단이 깔린 목초지나 하얀 스카프와 앞치마를 두르고 참을 내오는 아낙네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윌리엄스가 ‘자본주의가 가져온 재앙을 비판하면서 자본주의 도래 이전 시기를 신비화하고, 잉글랜드 옛 시골마을을 ‘유기적 공동체’로 이상화하는 풍조를 조목조목 통박’하는 것에 분노할지도 모르겠다. 윌리엄스는 옛날 시나 소설 등을 타고 과거의 시골로 돌아가 ‘대다수 민중이 지배계급의 폭력적 침탈에 신음하는 장면들만 확인’한다. 시골을 목가적 풍경으로 그리는 안분지족적 문학을 비판한다. 토머스 하디, 제인 오스틴, 조지 엘리엇의 소설과 시뿐만 아니라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의 작품과 영국 민중시 등 문학작품들이 대상이 됐다. 그는 도시와 대비해 시골을 이상화하는 것은 역사적 왜곡이며, 도시에서 진행 중인 많은 유의미한 변화를 놓치는 것은 정치적으로 위험한 행위라고 지적한다. 시골과 도시의 동시성을 통해 서구의 ‘근대적 자아’라는 것이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걸쳐 식민지 침탈을 하며 생겨난 ‘정복하는 자아’라는 것도 보여준다. 즉, 자본주의적 근대화로 모든 나라가 잘사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희망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번역자인 이현석 부산 경성대 영문학과 교수는 26일 “시골을 이상화하고, 환상적으로 색칠해선 안 된다”면서 “시골이 도시보다 더 폭력적일 수 있고, 도시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할 수도 있다는 것을 윌리엄스의 책을 통해 각인할 수 있다”고 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 [저자와의 차 한잔] 인물전기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 펴낸 前국가인권위원장 안경환

    [저자와의 차 한잔] 인물전기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 펴낸 前국가인권위원장 안경환

    여기 문제적 인간이 있다. 족적만 살펴보자. 대구사범학교를 다니다 사회주의 서적을 읽고 독서회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 재학 중 학병으로 중국에 끌려간다. 광복군의 일원으로 해방 조국에 돌아와 교육에 매진하다 부산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 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을 용기있게 보도해 4·19 혁명에 불을 당긴다.   대구사범 동기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다시 만나 조국의 암울한 현실에 공분, 5·16 쿠데타와 이후 조국 근대화의 밑그림을 그린다. 미국의 반대 따위는 없을 것이라며 박정희를 부추긴다. 정수장학회를 만들고 방송사 사장에까지 오른다. 곧바로 주체세력의 암투에 휘말려 나락을 경험한다. 1964년에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남북한 상호 체제 인정” 등을 월간 ‘세대’에 실었다가 구속된다. 이후 40여년의 삶은 ‘함께 혁명했던’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추모에 오롯이 바쳐진다.  황용주(1918-2001년) 전 문화방송 사장. 그가 평생 남긴 40여권의 일기를 유족에게서 건네받은 안경환(65) 서울대 법대 교수가 여러 인사의 증언과 자료를 수집해 쓴 인물전기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까치 펴냄)를 냈다. 진보진영에 속하며 국가인권위원장을 지낸 안 교수이기에 의외로 비칠 여지도 있다.  지난 25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만난 안 교수와의 일문일답.    →책을 내겠다는 결심은 어떻게, 10년도 전에 일기를 입수했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산 지식인이 그렇게 무덤도 없이 간 것에 대해 아련한 마음이 있었죠. 우리 문화나 정체성이 4·19 이후에야 시작됐다고 보며 일제시대는 우리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게 대세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윗세대에 대해 우리가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고, 특히나 일제 말기 최고의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학병 세대들을 전체적으로 엮어서 시대사를 써볼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려니까 벅차기도 하고 시간도 많이 걸렸어요. 그런데 (황용주씨) 부인(이창희 여사·프랑스 거주) 나이가 90이 넘었으니 기왕 하는 거 10주기에 맞춰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제 평가를 배제하고 그 사람 목소리를, 그 분 입장에서 재현해봐야겠다 그렇게 된 거고요. 그래서 ‘인물전기’라고, ‘평(評)’ 자를 넣지 않은 것입니다. 개인의 기록들을 보니까 다행히 그 시대 분위기를 공부해야 하고, 특히 일본 관련 책들을 많이 봤죠.   일제 말기 사람들의 지적 역량이나 스케일, 능력이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세대보다 훨씬 높더라. 일본 제국의 지적 수준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정하기 싫어하거든요. 그러니 잘못됐다고 생각해버립니다. 후세대들은 내가 모르는 옛날 건 중요하지 않은 거고, 나쁜 거다, 은연 중에 생각하게 됐어요. 후속 세대는 더하더라고요. 심정적으로 동조하면서도 그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많았습니다. 운동가나 정치가는 그럴 수 있겠지만 지식인들이 정보나 지식을 선택적으로 취해 경박하게 판단하는 것을 보고 전 많이 불편했습니다. 요새 말로 좌든 우든 마찬가지입니다. 요새 사람들이 공부를 덜하는구나, 균형 감각이 덜하구나, 우리는 완전히 체화되기 전에 들어오면 말로 다 풀어버리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 쓰는 사람들이 그렇듯 이 작업에만 매달린 건 아니고 다른 책도 준비하면서 조금씩 하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난해쯤 낼 수 있었는데 박정희 문제가 걸려 있기에 선거전에 이슈가 되는 건 원치 않아 이번에 내게 된 것입니다.  →황용주와의 첫 만남은?  -1987년에 처음 교수가 된 뒤 찾아 뵜습니다. 외국 생활을 하느라 비었던 공백을 채우고 싶은 욕망 같은 게 있을 것 아닙니까. 학생들이 왜 저런 구호를 내걸까 궁금증이 있었고 한국 사회에 대한 총체적 이해랄까, 그런 차원에서 이문열도 그때쯤 다시 만났고요.  당시 이미 황 선생은 형편이 어려워 제가 ‘문예춘추’ 몇개월치 모아서 드리기도 하고 프랑스 문학 얘기도 나누며 일년에 서너 번, 명절 뒤 인사도 드리고 바둑도 두고 했습니다.  →두 분이 (경남 밀양 출신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 같은데.  -정치 얘기는 많이 나누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분이 학생 때도 문학을 공부했고, 부산일보 시절 영화제도 만들고 칼럼니스트로 일하면서 제가 공유한 취향을 한 세대 앞서 가지신 분입니다. 난 내 얘기하고, 응 그러냐 그런 거죠. 황용주 하면 떠오르는 게 박정희니까, 저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지식인으로나 교양인으로서의 제 이미지와 제가 만나본 많은 원로 가운데 가장 잘 맞는 분이었어요.   →역시 자료 수집하고 증언 채취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을 것 같다. 10년 동안 꾸준히 조금씩 하신 것이네요.  -사람들 만날 때마다 묻기도 하고 지나가는 말처럼 던지기도 했습니다. ‘세대’지 관련해서는 많이 증언을 들었습니다. 가능하면 증언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찾으려 노력했고 정 안될 때는 그냥 증언만 실었지만.  인권위원장 그만 둔 뒤인 2010년, 사모님(이창희 여사) 증언 받으러 프랑스를 며칠씩 두 차례 다녀왔죠. 딸(황용주는 프랑스를 동경해 이름을 ‘란서’라 지었다)에게는 단편적으로 한 게 아니라 너 써라, 무조건 써달라고 해서 대학노트 한 권을 받았습니다.  그 양반에게는 단순한 딸이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이상의 표현이자 상징이었잖아요. 그런 딸이 문학을 공부하고 싶어하는데도 프랑스에서 이공계를 전공하도록 한 것도 조국 근대화에 기여하라는 뜻이었을 정도였다. 마지막 운명의 순간에 ‘정희야, 란서야’라고 외친 것도 상징성이 크다.  →10년을 매달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 시대 사람들의 고민과 열정을 젊은 세대에게 전달하고 싶었다는 거겠지요.  -네, 크게 보면 김윤식 교수가 해온 일과 비슷합니다. 제가 진보진영에 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데, 황용주는 나쁜 인간으로 평가돼 있습니다. 정수장학회를 만들고. 그렇지만 그 사람의 입장을 들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만약 법률가로서 누구의 변호를 맡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의 다른 얘기를, 판사의 판단을 받기 위해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책을 쓰면서 100% 공감이 안 가서 힘든 구석은 없었는지.  -예를 들어 5.16은 어쨌든 헌법학자 입장에서는 쿠데타입니다. 헌법이 그렇게 정리가 되고. 그걸 혁명이란 이름으로 내세워서, 군인이 권력을 잡아 출세를 하겠다, 사심을 채우겠다고 달려든 사람도 있었겠지만, 황용주는 적어도 지식인으로서 가지고 있던, 한 국가를 전체적으로 개발하는 로드맵으로서 높게 생각하고 정당화시키는데 헌법학자로선, 쿠데타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쿠데타의 결과로서 산업화에 기여한 역사는 현 시점에서 인정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또 10월 유신(등에 눈 감거나 박정희가 죽은 뒤에) 추모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전두환을 찬양하고 나아가 노태우까지 그러는 건 동의할 수 없었죠.  →다투거나 한 건 아니시죠.  -그러진 않았고요. (웃음) 일제시대의 훌륭한 군인들 얘기 많이 하잖습니까? 그 때 장군들의 스케일과 지적 역량, 신화같은 얘기들. 일정 부분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박정희의 유업을 이어가려면 군인이 더 집권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전혀 용납할 수 없죠. 서로 시대가 다른 사람 얘기하는 거니깐.  그 때마다 바둑이나 두고, 뭐 이렇게 하면서 넘어갔습니다. (웃음) 저도 대학생 때 1급이었는데 나이 차도 있으니까 제가 나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안 그렇더라고요.  →프랑스를 동경해 딸 이름을 지을 정도로 일반적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던 분이 한국적 민주주의를 얘기한 것은 극히 모순되는데.  -그건 이해가 가는 것이 한국이란 사회가 식민 지배 이후 아무것도 없었지 않습니까.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누가 먼저 썼는지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군대가 집권해서 공업화를 서두르고 남북한이 유엔 동시가입한 뒤 통일로 간다, 이런 로드맵을 만든 것은 완전히 황용주의 머릿속에서 나온 겁니다. 사회 변혁을 이끌 지식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룹은 군대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실 신생국가의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하고, 그렇게 그 사람은 본 거지요. 4·19 다음에 대한 기대가 많았겠죠. 당당히 4·19의 연장이란 주장을 하게 되고 당시 그런 생각에 호응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지요.    황용주는 평생 ‘국민’이나 ‘시민’이라 하지 않고 ‘한반도 주민’이라 불리길 열망했다. 그렇게 평소에 증오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던 즈음에 그가 흥분했던 모습을 안 교수는 어제 일처럼 떠올렸다.    →책을 읽으면서 1947년 마크 게인(281쪽)과 1979년 황용주(459쪽)의 경고는 지금 정확히 들어맞는데요. 우리 사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면.  -전 역사를 길게 보고 낙관하는 쪽이에요. 연초에 이문열씨와 한 케이블 채널에 출연해 대담하면서 느낀 건데 결국은 진보와 보수 모두 역사의 완결성을 믿지 않잖습니까. 우리 역사가 이만큼 성공했다고 보는 사람이에요. 지금까지 성공한 양상과 속도는 아닐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더 괜찮은 나라가 된다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게 무엇이냐?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옆으로 챙기고 같이 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전 박근혜 시대에 반감 같은 건 없어요. 개인적으로 박정희 체제에 당했느냐와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박정희 시대에 연좌제 피해를 받은 사람이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이니까 안된다’라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건 정치적 연좌제인 거죠. 반대로 박근혜씨는 아버지의 영광만 누리려 하지 말고 ‘그늘’도 같이 받아라고 칼럼에 적었던 것이지요.  →이병주(1921~92년) 평전을 내겠다고 했는데 마음의 빚이라도 있나.  -앞에 학병시대를 얘기한 것처럼 그를 작가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평론을 해보고 싶은 것이다.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읽고 며칠 잠을 못 잘 정도로 큰 감명을 받았는데 지금 보면 문단에 그의 자리는 없다. 중학교 다닐 때 주필실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는데 당시 국제신문 주필이 이병주였다. 부산일보 사설과 비교하며 읽고 친구들에게 떠들곤 한 기억이 있다.  대학 때 건방지게 문단에서 대들고 한적도 있는데 다 받아주고 했다. 그런데 5·16 이후 문단이 완전 진보 쪽으로 정리돼 경상도 출신 작가는 모두 전두환과 도매금이 됐다. 또 이병주씨는 문단이나 대학에서 패거리를 이루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우뚝 서 있던 거인이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다. 그를 정리하는 건 좌와 우가 함께 한다는 의미도 있다. 내가 가장 맞춤하다는 데 공감대가 맞춰져 있고 은근히 압력도 가해지곤 한다.    오는 8월 정년퇴임하는 그는 “아무 것도 안하는” 자유로운 삶을 꿈꾸느라 무척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걱정거리라면 그동안 읽은 책들을 처분하는 문제, 저자 서명이 담긴 수천 권의 책을 어떻게 처분하느냐 고민하고 있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주말 인사이드] 종이책은 죽지 않는다, 다만 숨 고를 뿐이다

    [주말 인사이드] 종이책은 죽지 않는다, 다만 숨 고를 뿐이다

    전자책이 정말 종이책을 없앨까.1998년 미국의 누보미디어가 처음으로 ‘로켓 e북’을 내놓자 출판계에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 이래 15년째 반복되고 있는, 그래서 비명이라기엔 앙칼진 목소리가 무던해져버린 비명이다. 공상과학(SF)소설이나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 처음 전자책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 머릿 속에 그려진 그림은 이렇다. 모든 사람이 책을 쓴다. 전문가? 교수? 작가? 기자? 그런 계급장 따윈 필요없다. 분량에 상관없이 모든 주제, 모든 형식의 글을 쓸 수 있다. 그렇게 써서 올리면 소비자의 선택이, 그러니까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걸 알아서 정리해준다. 전자책 사업자는 일종의 유통 플랫폼 사업자로 중개수수료만 챙긴다. 오랫동안 출판사에서 경력을 쌓으면서 책을 매만져왔던 노련한 편집자? 책의 전반적인 가치와 위치를 설정해주는 평론가? 그런 혹 따윈 떼버려도 된다. 좀 지나친 거 같다고? 그럴리 없다. 전자책으로 마침내 ‘글쓰기의 민주화’가 완벽하게 달성되는거니까. 민주화, 그 얼마나 신성한 단어이던가. 이런 시나리오는 현실화되지 못했다. 아니,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에 그쳤다. 그러나 한번씩 고개를 쳐든다. 처음 고개를 든 것은 2007년 아마존이 전자책 단말기인 ‘킨들’을 내놨을 때다. 뒤질세라 한국에서도 이런저런 단말기가 나왔다. 전자책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호들갑이 들끓었다. 결과는 실패. 단말기 생산이 은근슬쩍 중단되더니 차츰차츰 시장에서 사라졌다. 단말기를 산 사람들도 대개 20~30대 남성이었다. 20~30대 여성, 40~50대 남성처럼 책시장의 주력부대군이 아니었다. 책읽기 도구로 단말기를 샀다기보다, 단말기 그 자체의 성능을 시험해보려는 얼리 어답터, 그러니까 ‘IT 덕후’들의 놀잇감에 더 가까웠다는 뜻이다. 그뒤 사그라졌던 전자책 얘기가 다시 불거져나온 것은 순전히 스마트기기 덕이다. 휴대전화, 패드, 태블릿PC 등 값비싼 전자기기가 광범위하게 보급되자, 그 훌륭한 기계로 고작 웹서핑이나 해야 하느냐는 말이 나오고 결국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의 한 요소로 전자책이 다시 불려나온 것이다. 아니, 화려한 동영상 콘텐츠에 밀려 자꾸만 변방으로 내밀리니 뭐라도 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일어섰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한동안 사라졌던 전용단말기도 슬금슬금 다시 등장했다. 이전 실패를 만회하려는 듯 파격적 행보도 곁들였다. 교보문고는 전용단말기와 함께 회원제 전자책 대여 서비스인 ‘샘’을 내놨다. 한 달 만에 1만 3000대를 팔았고 회원도 1만명 이상 확보했다. 인터넷서점 예스24도 지난해 ‘크레마터치’를 내놓으면서 살림지식총서 100권을 붙인 버전, 박경리·조정래의 소설을 붙인 버전, 셜록 홈스 등 추리소설을 붙인 버전 등을 다양하게 내놓고 있다. 개별 출판사로는 대형출판사 ‘열린책들’이 지난 2월에 ‘세계문학’ 앱을 내놓고 애플 앱스토어 매출 1위를 기록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출판계로부터 욕은 진탕 들어먹었지만 일단 이런 움직임들이 전자책에 대한 호감도를 높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단 이용자들은 만족감을 드러낸다. 전자책에 특화된 ‘e-잉크’ 기능을 사용하는 전용단말기의 경우 요즘의 현란한 디지털기기에 비하자면 다소 답답한 부분이 있다. 화면전환도 느린 편이고 잔상도 남는다. 그럼에도 10만원 정도의 비교적 싼 단말기 가격에다 읽는 데만 특화돼 쓸 만하다는 평이다. 한국 소설을 즐겨 읽고 학생시절 때부터 모아온 책들이 상당한 회사원 강소연(여·37)씨는 “책을 쭉 꽂아놓고 소장하는 재미는 줄었지만, 그 대신 정말 소장하고픈 책을 빼고는 나머지는 전자책으로 바꿔나갈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고전을 즐기는 회사원 강신(남·30)씨는 순전히 열린책들의 세계문학 앱 때문에 아이패드까지 사들인 경우다. 강씨는 “실물 책이 가득찬 책장이 주는 뿌듯함이 없고 오래 읽으면 눈이 좀 아프다는 단점이 있지만 대만족”이라면서 “처음에는 종이가 주는 질감이나 맛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책갈피, 밑줄, 메모, 독서노트처럼 종이책과 다를 바 없는 여러 기능들을 쓰면서 아쉬움을 달랬다”고 말했다. 실제 판매 추이에서도 약간의 변화 조짐이 보인다. 그동안 전자책이라면, 가벼운 자기계발서나 확실한 마니아계층이 형성되어 있는 장르소설이 대부분이었다. 쉽게 말해 가벼운 내용의 책을 싸게 사들이는 곳이 전자책 시장이라는 얘기다. 인터넷서점 예스24에 의뢰해서 최근 3년간 베스트 50에 든 전자책들의 종류를 확인해보니 2011년 18권에 이르던 장르문학의 비중이 최근 6개월간에는 5권으로 줄었고, 문학 비중이 12권에서 18권으로 늘었다. 인문·사회분야가 5권에서 10권으로 늘었다. 예스24 측은 “장르문학의 비중이 차츰 낮아지고 있는 데다, 책 가격이 점점 다양화되고 있는 점을 확인해볼 수 있다”면서 “이는 고만고만한 책을 싸게 사는 곳이라는 이미지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증거”라고 강조했다. 써본 사람들 반응도 그리 나쁘지 않고, 고전급 문학서적을 발판 삼아 전자책이 마침내 IT덕후들의 놀잇감에서 벗어나는 징후를 보이고 있으니, 이제 전자책의 공포가 마침내 현실화될 차례인가. 무슨무슨 연구소니 무슨무슨 증권사들이니 하는 곳에서 잠잠할 만하면 전자책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내면서 한껏 분위기도 띄우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출판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지금 느껴지는 전자책 붐은 고전을 덤핑으로 팔아치운 데 따른 거품이라는 진단이다. 이런저런 시장 조사 결과를 보면, 같은 콘텐츠라면 전자책이 아니라 종이책으로 보겠다는 응답이 압도적으로 많이 나온다. 그나마 자본력을 갖춘 곳에서 저작권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고전을 이렇게 싼값에 폭탄세일하듯 팔아치워버리면, 나중에 새 콘텐츠를 제값 받고 팔 수 있겠느냐는 반문도 나온다. 최근 전자책 행보에 출판계가 끙끙 앓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국 전자책으로 제작되는 것은 저작권 시효가 끝난 고전, 그냥 쓱 읽고 마는 가벼운 에세이나 장르소설들, 토익이나 운전면허시험 같은 시험에 대비할 수 있는 가벼운 수험서, 대학 등에서 쓰이는 각종 두꺼운 교재 정도가 아니겠느냐는 전망이 나온다. 실은 이마저도 잘 안되고 있다. 복제의 위험 때문이다. 대학교재를 많이 내는 A출판사 관계자는 “종이책을 변환한 것은 물론, 전자책 버전으로 다듬은 시험제작판도 나름대로 만들고는 있지만 회사에 차곡차곡 쌓아만 두고 있다”면서 “가장 큰 걱정은 시장에 내놓는 순간 저작권 침해행위가 만만치 않을 상황을 어떻게 감당하느냐다”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을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콘텐츠를 내놓을 출판사들이 모두 몸을 사리고 있으니 시장선점 욕심 때문에 몸이 바짝 달아오른 플랫폼 사업자가 그간 문화사업자로서 쌓아왔던 좋은 이미지가 무너지는 것을 감수해가며 가격을 후려치는 방식으로 일단 판을 벌린 경우”라고 정리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연구결과를 보면 전자책이 종이책을 대체하는 게 아니라 종이책을 즐겨보는 독자가 전자책도 사보고, 전자책을 보는 독자가 종이책도 사보는 일종의 하이브리드 독자라는 사실”이라면서 “저가전략, 할인공세는 결국 자충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전자책 시장이 안 뜬다고 초조해하는 이들은 독자들이나 출판사들이 아니라 오직 전자책 시장 관련 사업자들뿐”이라 꼬집었다. 그래서 여전히 전자책은 시험 중이다. 가령 민음사는 기존 콘텐츠를 디지털화해서 공개하는 대신 ‘디지털 싱글’이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했다. 잡지 기사보다는 길고 단행본보다 짧은 분량의 글을 선보이는 것이다. 출퇴근시간, 찻집에 앉아 보내는 시간 등에 스마트기기를 통해 간단하게 읽을 수 있는 콘텐츠를 집중 개발, 보급한다는 전략이다. 이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실험이 많다. 장르, 분량, 형식면에서 기존 단행본의 전철을 밟지 않는 책이 나오면 알게 모르게 진행되는 실험일 가능성이 높다. B출판사 관계자는 “대기업 혹은 언론사를 끼고 최근래 몇년간 새롭게 생긴 각종 문학상, 혹은 보통 300쪽 안팎으로 구성되는 단행본 분량에 비해 더 짧거나, 아니면 아예 다 파괴하고 더 길게 쓰면서도 파격적으로 편집된 책 같은 경우 전자책 제작을 염두에 둔 일종의 실험이라고 보면 된다”고 귀띔했다. 15년 동안 전자책 혁명을 떠들었으나, 전자책 혁명은 여전히 더 두들겨봐야 할 돌다리다. 조태성 기자 cho1904@seoul.co.kr
  • “황용주의 진지한 믿음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

    “황용주의 진지한 믿음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

     여기 문제적 인간이 있다. 족적만 살펴보자. 대구사범학교를 다니다 사회주의 서적을 읽고 독서회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퇴학당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 재학 중 학병으로 중국에 끌려간다. 광복군의 일원으로 해방 조국에 돌아와 교육에 매진하다 부산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이 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을 용기있게 보도해 4·19 혁명에 불을 당긴다.   대구사범 동기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을 다시 만나 조국의 암울한 현실에 공분, 5·16 쿠데타와 이후 조국 근대화의 밑그림을 그린다. 미국의 반대 따위는 없을 것이라며 박정희를 부추긴다. 정수장학회를 만들고 방송사 사장에까지 오른다. 곧바로 주체세력의 암투에 휘말려 나락을 경험한다. 1964년에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남북한 상호 체제 인정” 등을 월간 ‘세대’에 실었다가 구속된다. 이후 40여년의 삶은 ‘함께 혁명했던’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추모에 오롯이 바쳐진다.  황용주(1918-2001년) 전 문화방송 사장. 그가 평생 남긴 40여권의 일기를 유족에게서 건네받은 안경환(65) 서울대 법대 교수가 여러 인사의 증언과 자료를 수집해 쓴 인물전기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까치 펴냄)를 냈다. 진보진영에 속하며 국가인권위원장을 지낸 안 교수이기에 의외로 비칠 여지도 있다.  지난 25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만난 안 교수와의 일문일답.    →책을 내겠다는 결심은 어떻게, 10년도 전에 일기를 입수했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지.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산 지식인이 그렇게 무덤도 없이 간 것에 대해 아련한 마음이 있었죠. 우리 문화나 정체성이 4·19 이후에야 시작됐다고 보며 일제시대는 우리 것이 아니라고 보는 게 대세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윗세대에 대해 우리가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고, 특히나 일제 말기 최고의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학병 세대들을 전체적으로 엮어서 시대사를 써볼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려니까 벅차기도 하고 시간도 많이 걸렸어요. 그런데 (황용주씨) 부인(이창희 여사·프랑스 거주) 나이가 90이 넘었으니 기왕 하는 거 10주기에 맞춰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제 평가를 배제하고 그 사람 목소리를, 그 분 입장에서 재현해봐야겠다 그렇게 된 거고요. 그래서 ‘인물전기’라고, ‘평(評)’ 자를 넣지 않은 것입니다. 개인의 기록들을 보니까 다행히 그 시대 분위기를 공부해야 하고, 특히 일본 관련 책들을 많이 봤죠.   일제 말기 사람들의 지적 역량이나 스케일, 능력이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 세대보다 훨씬 높더라. 일본 제국의 지적 수준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정하기 싫어하거든요. 그러니 잘못됐다고 생각해버립니다. 후세대들은 내가 모르는 옛날 건 중요하지 않은 거고, 나쁜 거다, 은연 중에 생각하게 됐어요. 후속 세대는 더하더라고요. 심정적으로 동조하면서도 그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많았습니다. 운동가나 정치가는 그럴 수 있겠지만 지식인들이 정보나 지식을 선택적으로 취해 경박하게 판단하는 것을 보고 전 많이 불편했습니다. 요새 말로 좌든 우든 마찬가지입니다. 요새 사람들이 공부를 덜하는구나, 균형 감각이 덜하구나, 우리는 완전히 체화되기 전에 들어오면 말로 다 풀어버리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 쓰는 사람들이 그렇듯 이 작업에만 매달린 건 아니고 다른 책도 준비하면서 조금씩 하느라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난해쯤 낼 수 있었는데 박정희 문제가 걸려 있기에 선거전에 이슈가 되는 건 원치 않아 이번에 내게 된 것입니다.  →황용주와의 첫 만남은?  -1987년에 처음 교수가 된 뒤 찾아 뵜습니다. 외국 생활을 하느라 비었던 공백을 채우고 싶은 욕망 같은 게 있을 것 아닙니까. 학생들이 왜 저런 구호를 내걸까 궁금증이 있었고 한국 사회에 대한 총체적 이해랄까, 그런 차원에서 이문열도 그때쯤 다시 만났고요.  당시 이미 황 선생은 형편이 어려워 제가 ‘문예춘추’ 몇개월치 모아서 드리기도 하고 프랑스 문학 얘기도 나누며 일년에 서너 번, 명절 뒤 인사도 드리고 바둑도 두고 했습니다.  →두 분이 (경남 밀양 출신이란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 같은데.  -정치 얘기는 많이 나누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분이 학생 때도 문학을 공부했고, 부산일보 시절 영화제도 만들고 칼럼니스트로 일하면서 제가 공유한 취향을 한 세대 앞서 가지신 분입니다. 난 내 얘기하고, 응 그러냐 그런 거죠. 황용주 하면 떠오르는 게 박정희니까, 저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지식인으로나 교양인으로서의 제 이미지와 제가 만나본 많은 원로 가운데 가장 잘 맞는 분이었어요.   →역시 자료 수집하고 증언 채취하는 일이 가장 힘들었을 것 같다. 10년 동안 꾸준히 조금씩 하신 것이네요.  -사람들 만날 때마다 묻기도 하고 지나가는 말처럼 던지기도 했습니다. ‘세대’지 관련해서는 많이 증언을 들었습니다. 가능하면 증언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찾으려 노력했고 정 안될 때는 그냥 증언만 실었지만.  인권위원장 그만 둔 뒤인 2010년, 사모님(이창희 여사) 증언 받으러 프랑스를 며칠씩 두 차례 다녀왔죠. 딸(황용주는 프랑스를 동경해 이름을 ‘란서’라 지었다)에게는 단편적으로 한 게 아니라 너 써라, 무조건 써달라고 해서 대학노트 한 권을 받았습니다.  그 양반에게는 단순한 딸이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는 이상의 표현이자 상징이었잖아요. 그런 딸이 문학을 공부하고 싶어하는데도 프랑스에서 이공계를 전공하도록 한 것도 조국 근대화에 기여하라는 뜻이었을 정도였다. 마지막 운명의 순간에 ‘정희야, 란서야’라고 외친 것도 상징성이 크다.  →10년을 매달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 시대 사람들의 고민과 열정을 젊은 세대에게 전달하고 싶었다는 거겠지요.  -네, 크게 보면 김윤식 교수가 해온 일과 비슷합니다. 제가 진보진영에 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데, 황용주는 나쁜 인간으로 평가돼 있습니다. 정수장학회를 만들고. 그렇지만 그 사람의 입장을 들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지 않습니까. 만약 법률가로서 누구의 변호를 맡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의 다른 얘기를, 판사의 판단을 받기 위해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책을 쓰면서 100% 공감이 안 가서 힘든 구석은 없었는지.  -예를 들어 5.16은 어쨌든 헌법학자 입장에서는 쿠데타입니다. 헌법이 그렇게 정리가 되고. 그걸 혁명이란 이름으로 내세워서, 군인이 권력을 잡아 출세를 하겠다, 사심을 채우겠다고 달려든 사람도 있었겠지만, 황용주는 적어도 지식인으로서 가지고 있던, 한 국가를 전체적으로 개발하는 로드맵으로서 높게 생각하고 정당화시키는데 헌법학자로선, 쿠데타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쿠데타의 결과로서 산업화에 기여한 역사는 현 시점에서 인정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또 10월 유신(등에 눈 감거나 박정희가 죽은 뒤에) 추모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전두환을 찬양하고 나아가 노태우까지 그러는 건 동의할 수 없었죠.  →다투거나 한 건 아니시죠.  -그러진 않았고요. (웃음) 일제시대의 훌륭한 군인들 얘기 많이 하잖습니까? 그 때 장군들의 스케일과 지적 역량, 신화같은 얘기들. 일정 부분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박정희의 유업을 이어가려면 군인이 더 집권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전혀 용납할 수 없죠. 서로 시대가 다른 사람 얘기하는 거니깐.  그 때마다 바둑이나 두고, 뭐 이렇게 하면서 넘어갔습니다. (웃음) 저도 대학생 때 1급이었는데 나이 차도 있으니까 제가 나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안 그렇더라고요.  →프랑스를 동경해 딸 이름을 지을 정도로 일반적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던 분이 한국적 민주주의를 얘기한 것은 극히 모순되는데.  -그건 이해가 가는 것이 한국이란 사회가 식민 지배 이후 아무것도 없었지 않습니까.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누가 먼저 썼는지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군대가 집권해서 공업화를 서두르고 남북한이 유엔 동시가입한 뒤 통일로 간다, 이런 로드맵을 만든 것은 완전히 황용주의 머릿속에서 나온 겁니다. 사회 변혁을 이끌 지식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그룹은 군대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실 신생국가의 보편적인 현상이기도 하고, 그렇게 그 사람은 본 거지요. 4·19 다음에 대한 기대가 많았겠죠. 당당히 4·19의 연장이란 주장을 하게 되고 당시 그런 생각에 호응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지요.    황용주는 평생 ‘국민’이나 ‘시민’이라 하지 않고 ‘한반도 주민’이라 불리길 열망했다. 그렇게 평소에 증오하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던 즈음에 그가 흥분했던 모습을 안 교수는 어제 일처럼 떠올렸다.    →책을 읽으면서 1947년 마크 게인(281쪽)과 1979년 황용주(459쪽)의 경고는 지금 정확히 들어맞는데요. 우리 사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면.  -전 역사를 길게 보고 낙관하는 쪽이에요. 연초에 이문열씨와 한 케이블 채널에 출연해 대담하면서 느낀 건데 결국은 진보와 보수 모두 역사의 완결성을 믿지 않잖습니까. 우리 역사가 이만큼 성공했다고 보는 사람이에요. 지금까지 성공한 양상과 속도는 아닐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더 괜찮은 나라가 된다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게 무엇이냐? 앞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옆으로 챙기고 같이 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전 박근혜 시대에 반감 같은 건 없어요. 개인적으로 박정희 체제에 당했느냐와 역사적으로 평가하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박정희 시대에 연좌제 피해를 받은 사람이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이니까 안된다’라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건 정치적 연좌제인 거죠. 반대로 박근혜씨는 아버지의 영광만 누리려 하지 말고 ‘그늘’도 같이 받아라고 칼럼에 적었던 것이지요.  →이병주(1921~92년) 평전을 내겠다고 했는데 마음의 빚이라도 있나.  -앞에 학병시대를 얘기한 것처럼 그를 작가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정리하는 평론을 해보고 싶은 것이다.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읽고 며칠 잠을 못 잘 정도로 큰 감명을 받았는데 지금 보면 문단에 그의 자리는 없다. 중학교 다닐 때 주필실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는데 당시 국제신문 주필이 이병주였다. 부산일보 사설과 비교하며 읽고 친구들에게 떠들곤 한 기억이 있다.  대학 때 건방지게 문단에서 대들고 한적도 있는데 다 받아주고 했다. 그런데 5·16 이후 문단이 완전 진보 쪽으로 정리돼 경상도 출신 작가는 모두 전두환과 도매금이 됐다. 또 이병주씨는 문단이나 대학에서 패거리를 이루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우뚝 서 있던 거인이 사라진 거나 마찬가지다. 그를 정리하는 건 좌와 우가 함께 한다는 의미도 있다. 내가 가장 맞춤하다는 데 공감대가 맞춰져 있고 은근히 압력도 가해지곤 한다.    오는 8월 정년퇴임하는 그는 “아무 것도 안하는” 자유로운 삶을 꿈꾸느라 무척 행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걱정거리라면 그동안 읽은 책들을 처분하는 문제, 저자 서명이 담긴 수천 권의 책을 어떻게 처분하느냐 고민하고 있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행중에는 객지를 말똥같이 굴러다녀도 떠나온 고향을 꿈에도 잊지 않으려고 배고령(裵高靈), 최상주(崔尙州), 장안동(張安東), 박원산(朴元山), 권영동(權永同)같이 자신의 태생지를 이름으로 부르는 행중도 없지 않았으나, 곽개천만은 소년 시절에 만났던 포수가 지어준 이름으로 행세하였다. 행수와 곽개천이 겨끔내기로 주고받는 말을 행중은 그다지 귀여겨듣지 않고 술추렴에만 이마를 곤두박고 있었다. 귀틀집 풀막 지붕을 핧고 지나는 해질녘의 바람 소리가 울적할수록 뱃속은 더욱 허전하여 숨바꿈으로 술 사발을 돌리고 있었다. 만기가 지어준 새웅밥으로 얼추 끼니를 때운 정한조는 이웃 숫막에 사처 잡은 조기출을 찾아갔다. 그는 아직 선비 시절 때를 벗지 못해서 자리를 잡고 좌정하였다하면 행탁에 넣고 다니는 필사본을 꺼내 읽곤 하였다. 정한조가 쪽문 바라지를 열고 봉노로 들어서자, 그는 끝동이 너덜너덜하게 해진 저고리를 얼른 수습하면서 정한조에게 아랫목을 내주고 한쪽으로 썩 비켜 앉았다. 손위 손아래의 경계를 구분하는 처신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저녁 요기는 하였소?”  “조밥에 소금국으로 얼추 허기증은 모면했습니다. 마땅한 찬반이 없어 쩔쩔매는 늙은 주모를 보다 못한 행중 식구들이 산에 올라가 눈 속을 헤치고 이제 막 움이 돋는 수리취나 참취 같은 나물을 뜯어 삶아 소금물에 찍어먹은 게 고작이었습니다.”  “이번 행로에는 안동, 상주 거쳐서 상무사 임소가 있는 고령까지 갔다가 회정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자면 얼추 달포는 걸리겠습니다. 행중이 모두 동행입니까?”  건어물 행상들은 보통 흥부장에서 발행하여 말래를 거쳐 샛재를 지나고 곧은재 아래에 있는 검은돌 마을이나 현동 저자, 그리고 내성장에서 물화를 처분하고 회정하는데 보통 팔구 일이 걸렸다. 그들 행중에는 울진 포구 근처에 가솔을 거느린 행상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대여섯은 현동저자나 내성에서 회정할 것입니다.”  “고령까지 다녀오자면 이래저래 달포가 지나야 할 텐데, 그때쯤이면 십이령에도 봄빛이 완연하겠지요. 그때가 되면 드릅이나 고비나물 삽주나물이 비석거리에 지천이겠지요. 이번 행보에는 우리 행중과 내성까지 동행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왜? 무슨 일이 있습니까?”  “별일은 없습니다만, 나귀들도 있고 해동머리라서 비알진 길을 건너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우린 먼동 트기 전에 발행하려 하였습니다.”  “동행으로 고개를 넘읍시다.”  그런 제안을 받기는 오랜만이었으나 그럴만한 내막이 없지 않겠기로 그리하자고 승낙을 하였다. 그렇다면 당장 내일 샛재에서 발행하는 상단의 수효가 20여 명을 헤아릴 것이었다.  “초행일 텐데, 내륙의 저잣거리를 섭렵하다보면, 무뢰배들이나 협잡꾼들과 여러 번 마주칠 것입니다. 그들은 여간한 행내기들이 아닙니다. 삭은 바자에 노란 개 주둥이라고 말참견 잘하는 놈에 농간만을 일삼는 놈들을 만나 맹랑한 지경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피가 뜨겁고 세력이 다부지다 한들 그 패거리들을 따돌리기 쉽지 않을 것이니, 눈을 똑바로 뜨고 다녀야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장시의 폐단이 나날이 흉흉해지고 있습니다. 멀리까지 가서 기러기가 되어* 돌아오지 않도록 일행을 닦달하시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기러기가 되어: 손해보지 말라는 뜻
  • 고전, 무대 위를 거닐다

    고전, 무대 위를 거닐다

    “난데없기는. 당신 양친께서 당신처럼 재고만 앉아 있었으면 당신이야말로 난데도 없었겠지”라는 말장난이 있고, “그대가 지나온 밤바다의 별빛은 여전히 그대 머리 위에 빛나는구나”라는 닭살 돋는 대사도 있다. “왜 늘 우리만 당해야 하는데요? 왜 우리만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데? 왜 우리 애들만 죽어야 해?”라는 가슴이 먹먹한 통탄이 있다. 인생과 생존, 존재와 자유를 관조하면서 시대의 고민과 오늘의 삶을 이야기한다. 연극 ‘라오지앙후 최막심’이다. ‘라오지앙후 최막심’은 명동예술극장이 ‘명작의 희곡화’ 첫 프로젝트로 선정한 작품.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장편소설 ‘그리스인 조르바’(1946)를 한국 역사의 한 장면으로 변형했다. 배삼식 작가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30년대 크레타섬을 1941년 연해주 얀코프스크 반도에 있는 바닷가 촌락 앵화촌으로 치환했다. 크레타는 그리스에 속해 있지만, 터키, 불가리아 등 주변국 사이에서 참혹한 분쟁을 겪던 지역이다. 배 작가는 그런 역사성을 떠올리면서 “일제강점기에 러시아나 일본의 국가 권력이 완전히 장악하거나 지배하지 못했던 지역, 경계와 변경의 공간을 찾다가 반도 언저리 촌락에 대한 기사를 봤고 번안 작품의 공간으로 선택했다”고 소개했다. 소설 속 화자인 ‘나’는 ‘김이문’이, 조르바는 ‘최막심’이 됐다. ‘막심’이라니 막심 고리키 같은 러시아인인가 하고 갸우뚱할 테지만 중요하지 않다. 출생의 단서는 “일생에 한 일 중에는 최고로 후회막심한 일”이라 어머니가 이름을 그리 지었다는 것 정도인데, 어차피 ‘라오지앙후’(떠돌아다녀 세상 물정에 밝은 사람) 아닌가. 일제강점기에 러시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이 사는 곳이 배경이니 당연한 이름일 수도 있다. 500쪽 가까이 되는 소설은 그야말로 철학의 성찬이요, 명문의 행렬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추천 목록에 넣지만 읽기가 수월하지 않다. ‘라오지앙후 최막심’을 무대화한 양정웅 연출가는 그 점을 명쾌하게 정리했다. 양 연출가는 “원작은 현란하고 아름다운 언어가 많지만 그것을 말로 하게 되면 그 의미를 명확하게 전달하기가 어렵다. 관념과 철학을 덜어내고 인물 각자의 삶에 더 집중했다”고 설명했다. 베트남인과 조선인 사이에서 태어난 귀여운 여각 주인 ‘오르땅스’, 일본인과 결혼했던 과부 ‘로사’, 로사를 사랑하는 ‘이차만’, 늙은 무당 ‘진펄댁’, 지능이 떨어지는 ‘춘보’ 등 주변인물의 비중이 원작보다 커졌다. 조르바가 ‘독점’하던 잠언들을 골고루 나누어 부여했다. 시대상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장치도 많다. 박향림이 노래한 ‘코스모스 향기’와 ‘오빠는 풍각쟁이야’, 최성희의 ‘이태리의 정원’ 등 옛노래가 흘러나오고, 우쿨렐레와 아코디언의 생생한 음악이 퍼진다. 의상 고증도 충실하다. 한복 바지에 양복 정장, 중국인 모자를 쓴 인물들의 행색이 이상해 보이지만, 없는 일도 아니었다. 반가운 얼굴도 보인다. 최막심은 뮤지컬 배우 남경읍(55)이 맡았다. ‘자유롭지만 상처가 있는 영혼’ 최막심을 표현하기 위해 남경읍은 턱수염을 기르고 아코디언을 배우고 있다. 오르땅스는 방송 데뷔 40년을 맞은 오미연(60)이 열연한다. “영화를 보면서 저 오르땅스보다 더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돼야지 노력한다”는 오미연은 연습실에서도 살랑살랑 치마를 흔들고 우아한 스텝을 밟고 있다. 1960~1970년대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섰던 배우 유순철(76·조선달 역), 이용이(55·진펄댁 역)도 만날 수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고민한” 최막심의 이야기는 새달 8일부터 6월 2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른다. 2만~5만원. 1644-2003. 최여경 기자 kid@seoul.co.kr
  •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그 땡추가 주모가 수절 과부라는 것을 진작 눈치채고 언젠가 소리개 뱁새 덮치듯 날탕으로 삼키려고 주막거리 어름을 정탐하려 들렀는지도 모르지 않겠소.” 월천댁이 입귀를 치켜들고 흔들비쭉하더니, 정한조의 농을 되받아쳤다. “쥐똥 같은 소리 그만하시지요. 개짐 벗어던진 게 까마득한 옛날이네요. 군동내 나는 육고기 탐하는 스님이 있단 소리는 못 들어봤습니다.” “혹간 있을지도 모르지 않소…괴나리봇짐조차 가진 게 없었다면 그게 사칭하는 무뢰배나 난봉꾼 아니겠소.” 정한조는 농으로 얼버무리고 봉노로 들고 말았다. 행중이 한결같이 땀에 절은 짚신과 행전을 풀어 횟대와 시렁에 걸어 말리고 있었다. 몽근 짐들을 지고 벼랑 중턱을 까낸 고개치 길만 걸었으니 두께살이 앉은 어깨는 좀 쑤실까만, 먼길 행보 만리 행역도 대수롭지 않은 듯 술방구리 하나와 두루거리 밥상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곤댓질들 해가며 시답잖은 농들을 건네고 있었다. 원상들이건 차인꾼들이건 미장가가 대부분이었으므로 여럿이 모여 앉아도 상투 튼 위인들은 한두 사람 정도이고 대부분이 머리를 땋아내린 엄지머리들이거나 외자상투였다. 정한조만 하더라도 상투를 틀고 있었으나 나이든 거간들을 상종해야 할 처지여서 외자로 튼 상투였다. 행중이 방안에서 시구문 차례로 술사발을 돌리고 있거나 목침 차지하기 투전 놀음을 하고 있는 사이 만기는 양식 전대를 풀어 울바자 밑에 새옹을 걸어놓고 쭈그리고 앉아 밥을 짓고 있었다. 숫막에서 내놓는 요깃거리란 끽해야 장떡이나 도토리묵이어서 그것으로는 간에 기별도 안 됐기 때문에 뱃구레가 큰 축들은 새옹으로 지은 밥을 안다미로 퍼서 배를 채워야 든든했다. 봉노에 있는 동무들 가운데 행수 정한조가 소금섬을 물로 끌라면 군소리 한마디 없이 끌고 갈 만치 매사에 행수를 따르는 곽개천(郭介天)이 방 귀퉁이에 끼어 앉아 부들자리 위에 산가지를 널어놓고 무슨 셈을 하다 말고 행수를 힐끗 쳐다보며 풀쑥 질렀다. “성님 왜 그러십니까.” “혼자 사는 까막과부 하소연이나 들었네.” “얼른 보아도 하소연이 아니던데요?” “눈치 하구선… 우리 행중 등 뒤를 개호주 한 마리가 줄곧 미행하고 있으니 호식을 당하기 전에 방비하란 말이더군.” “개호주도 영물이라 적선한 사람에겐 얼씬도 않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러게 말일세. 여기서 내성장까지 갔다가 회정하자면 140리 내왕길을 일순*이 넘도록 눈보라에 시달림을 받아야 할 텐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개치 길마다 개호주와 숨바꼭질을 해야 한다면, 그 또한 곡경이 아니겠나.” “만기가 밥을 짓고 있으니 요기는 나중에 하시고 우선 목이나 축이시지요.” 곽개천의 태생은 빛내골 산골이라 하였으나 소년 시절부터 말래 숫막거리에 진출하여 퇴개꾼*이건 중노미 노릇이건 닥치는 대로 연명하며 잔뼈가 굵었다. 일찍이 조실부모해서 서발막대 휘둘러보았자 거칠 것이 없는 사고무친이었기 때문이었다. 중노미 노릇으로 남의 대궁으로 주린 배를 채우며 소년 시절을 보내는 중에, 백두대간을 발서슴하며 풍상을 겪는 늙은 포수의 곁꾼이 되었다. 그 포수가 어느 해 한겨울 노루목을 지키고 앉았다가 난데없이 나타난 멧돼지에게 뱃구레가 찢겨 죽고 난 뒤, 그 화승총을 차지하고 명색 소년 포수로 연명하다가 말래 접소에서 정한조를 만나 상단의 차인꾼으로 입문하여 원상이 된 사람이었다. 역시 미장가였으나 장시에 가면 눈치가 멀쩡한 거간들과의 흥정에 밀리지 않으려고 외자 상투로 행세하였다. 늙은 포수를 따라 백두대간의 비알지고 험악한 기슭을 풀방구리에 생쥐 드나들듯 했으므로 십이령 내왕길쯤은 눈감고도 넘을 만큼 이력이 나 있었다. 십이령길 말고도 그만 알고 있는 지름길이 여럿이어서 부상들 가운데서는 그가 축지를 한다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였다. *일순: 열흘 *퇴개꾼: 구운 숯을 운반하는 짐꾼
  • [문화마당] “꽃 구경 하셨나요?”/백가흠 소설가

    [문화마당] “꽃 구경 하셨나요?”/백가흠 소설가

    드디어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 온 느낌인데, 사람들은 이미 지쳐버린 마음 둘 곳 없어 서둘러 봄을 잊은 듯, 마음이 부산하다. 지난주의 화두는 당연히 “꽃 봤어?”였으나, 대부분 사람들은 꽃이 피었는지 졌는지 계절을 느끼기 힘들 만큼 생의 전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리라. 마음이 바쁘니, 눈이 바쁘고, 머리도 바빠지는 것, 꽃 피어도 아무것도 볼 수 없음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잠시 숨을 돌려 ‘사랑의 발전소’를 품고자 시간을 내어 꽃 본 자들 일 년 내내 화사하여라. 우리가 왜 서로서로에게 “꽃 봤어?”를 물을 수밖에 없었을까. 그 연유는 아마도, 걱정 많은 정세 때문 아닐까. 연일 어이없이 터지는 북의 미사일 발사 엄포와 미숙한 정부의 대응에 국민의 불안감만 흐드러진 벚꽃처럼 화사했다. 보스턴 마라톤에서 발생한 폭탄테러를 지켜보며 잠시, 인류애라는 것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무엇부터 바로잡아야 하는지 참혹한 마음을 불러오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경상남도의회의 ‘진주의료원 폐업’ 날치기 사건이 보여주는, 기본권과 복지의 몰이해는 보스턴 테러 사건만큼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었다. 그분, 어디서 무얼 하시나 했더니 거기 가서 한 건 하고 계신 것을 보고, 사람은 점점 환경과 세월에 망가져 악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아니라, 나이를 먹을수록 원래 악한 본성을 숨길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었다. 순자(荀子)는 그것이 욕망에서 비롯된다 하지 않았던가. 여전히 젊은이들의 취업 문턱은 높고, 가계의 부채는 최고조에 이르러 있다. 대기업은 사상 최고의 실적을 낸다는데, 일반 서민들은 생존의 절명 앞에 내던져진 듯 위태로운 형세이다. 절망이라는 것은 좋았던 상황에서 좋지 않은 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느낄 때 오는 것이 아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상황이나 능력이 나아지지 않은 답보의 상태에서 더 좋지 않아졌을 때 절망은 온다. 우리의 상황은 이제 절망의 내리막 길뿐인가.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다. 새벽에 뜬눈으로 밤을 밝히고 류현진의 호투나 기다리며 힐링을 기대하던 차, 정말이지 똥 같은 뉴스 하나가 안 그래도 복잡한 심정을 더욱 어지럽혔다. 무슨 대기업 간부가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에게 라면을 덜 익혀 왔다며 폭행을 했더란 얘기였다. 흘러나온 내막을 훑어보니 참으로 북한 미사일보다 기막힌 것들이 군데군데 놓여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영 찜찜했다. 우리나라 뉴스는 무슨 똥밭인가 싶었다. 하루하루 피해가기 어려운, 발끝을 아무리 세워도 밟고야 마는. 그 특권의식이라는 것을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은 가히 짐작조차 하기 힘들지만, 공무원·국회의원·대기업 간부 등 툭하면 터져 나오는 이러한 뉴스는 안 그래도 힘든 서민들 마음에 허탈한 웃음을 짓게 만든다. 그 자리까지 올라가는 어려운 시간 동안 힘겹게 자신을 희생했을 것을 생각하니 한쪽 마음도 짠하지만, 화 한번 참지 못해 일어난 일이라고 치부하기엔 이 사회에 이러한 특권의식은 너무 만연한 것이 아닌가. 나는 회사 같은 데 다녀본 적이 없어 직함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분들은 자기 스스로 자리를 대단하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절망으로 가는 내리막 길이란 걸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