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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균열 아카이브즈

    [2020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균열 아카이브즈

    목캔디가 담긴 플라스틱 상자 겉에는 다른 관객들을 위해 두 개 이상은 가지고 가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공연장 로비 내의 누구도 그 경고문을 신경 쓰지 않았다. 마른 남자가 플라스틱 상자에 팔을 욱여넣고 한줌 크게 쥐었다. 왁스를 먹인 캔디의 껍질에서는 부드러운 소리가 났다. 살라는 저것들을 협찬해준 사측의 직원을 만나본 적이 있다. 여자는 성마르게 생겼지만 웃을 때는 잇몸이 모두 보이도록 입을 벌렸다. 여자의 치아는 살라가 여자를 만날 때마다 점점 미묘하게 비뚤어졌기 때문에, 그녀는 여자가 치아교정을 했었고 지금은 유지 장치도 제대로 끼지 않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여자에게는 종종 불소 냄새가 났다. 여자의 가방은 치과에 다녀온 날이면 평소보다 무거워 보였다. 이른 아침의 기상일보는 오늘이 겨울 들어 가장 춥고 눈 내리는 날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살라는 문득 그녀가 집의 수도꼭지를 너무 꽉 조이고 나왔음을 깨달았다. 동파되고 말 거야. 살라가 당황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공연장 내부는 점차 소란스러워졌다. 로비 안에 들어온 관객의 수보다 그들의 발자국이 더 많았다. 입구부터 길게 깔아 놓은 붉은색의 카펫도 눈 젖은 발자국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공연 시간이 가까워 오자, 관객들이 어셔에게 그들의 겉옷과 소지품을 맡기기 시작했고 근처에 두꺼운 프로그램 북을 사기 위한 줄이 세워졌다. 아이들은 프로그램 북으로 서로의 머리를 가격하고 놀았다. 관객 몇몇은 공연장 입구 옆에 위치한 음반 가게에서 미리 음악을 들어 보기도 했다. 어떤 관객은 다른 독주회를 중계해주는 모니터 앞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러나 살라는 알고 있었다. 오늘 이 시간의 관객들은 저런 독주회에 일말의 관심도 없다. 저들은 카라얀을 보러 왔다. 카라얀이 마지막으로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였기 때문에 티켓 값은 끔찍할 정도로 비쌌다. 모든 좌석이 매진되었기 때문에 티켓을 사지 못한 사람들은 공연을 생중계해주는 모니터라도 차지하기 위해 집을 나섰을 것이다. 살라가 그녀의 발치를 맴도는 남아를 보호자에게 보내고 나니 독주회 홀에서 관객들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오케스트라 홀의 문이 열렸고 어셔들이 재빨리 줄을 정리했다. 홀의 내부는 조금 어두웠다. 남자들이 여자보다 앞서 걸음을 재촉했다. 홀에는 남자인 네가 먼저 들어가야 한다. 그곳은 어둡기 때문이야. 그들은 그렇게 배웠을 것이다. 살라가 아는 어셔와 눈인사를 했다. 그리고 뭔가 쏟아지고 엎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라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소음의 근원지를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목캔디를 담은 박스가 엎어져 모조리 쏟아져 있었다. 무리하게 까치발을 들어 팔을 집어넣었던 것이 분명한 아이가 빨개진 얼굴로 울기 시작했다. 아이는 두꺼운 바지를 입었다. 바닥에 엎어진 무릎이 아픈 게 아니었다. 바닥에 미끄러진 것을 부끄러워할 나이였다. 아이의 보호자가 아이를 안아 달랬다. 살라는 목캔디를 주워 담을 수 없었다. 그녀가 이런 상황을 정확히 교육받은 적은 없다. 하지만 살라의 상식으로도 잘 벗겨지는, 왁스를 먹인 공연장용 목캔디가 구정물이 묻은 바닥에 굴러다닌다면, 그것은 절대 주워 담아서는 안 되는 물건이 되어버린다. 사정이 어떻게 되었든 입장은 멈추지 않았다. 상황을 전해 들은 청소부가 바닥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공연이 시작하기 삼십분 전이었다. * 살라가 홀 뒤편인 음향조절시설로 들어갔을 때는 모든 것이 준비된 상태였다. 붉은 의자에 앉은 관객들은 헛기침을 하거나 돌아다니는 아이를 붙잡아 앉혔다. 헤드셋을 쓴 관리자들이 음향시설을 조절했고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저마다 악기를 만지작거렸다. 요란하게 울리는 금관악기 소리와 낮게 웅성이는 관객들의 목소리는 돌림노래처럼 이어졌다. 서로 알은체하며 악수하는 관객 두세 명이 크게 웃었다. 난 악기 조율소리가 제일 좋더라. 관객들은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었다. 살라는 잠시 관객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가장 익숙한 버튼을 눌렀다. 살라가 버튼을 누름으로써 그녀의 월급에 작은 수당이 더해질 수 있다. 그것은 휴대폰 벨소리를 재생하는 역할이었다. 관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바지춤을 뒤졌다. 휴대폰을 보관하고 온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휴대폰을 소지하고 온 관객들은 황급히 휴대폰을 끄거나, 정말로 꺼졌는지를 확인했다. 초대석에 앉은 어떤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살라는 그 남성관객의 옆모습을 얼핏 목격할 수 있었다. 찡그린 것 같았다. 그러나 잘 보이지 않았고, 남자가 다시 앉기도 전에 홀 내부의 조명들이 어두워졌다. 이윽고 카라얀이 입장했다.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은 박수소리를 들으며 살라는 파이프를 떠올렸다. 집의 수도관들은 지금쯤 단단히 얼었을까? 균열처럼 연속되는 성에들이 물을 막고 있을까? 카라얀은 박수를 갈무리하고 뒤돌았다. 그리고 지휘봉을 치켜들었다. 현악기와 목관악기가 가장 첫마디를 시작했고 이어 피아노가 보조선율로 들어왔다. 현악기의 소리는 점차 작아졌다. 오케스트라 가장 앞쪽에 앉은 현악기 연주자들이 정지했다. 악보를 넘기는 행동도 하지 않았고 목관악기 파트가 주선율을 장악할수록 카라얀의 팔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곧 피아노와 목관악기의 역할이 바뀌고 현악기가 자리를 차지했다. 겨울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은 겪은 적 없는 쓸쓸함을 선사한다고, 어떤 음악평론가가 주장한 적이 있었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단조에서 빛을 발하지 않겠습니까? 혹자는 차이콥스키를 러시아 최고의 음악가로 꼽지만 그건 라흐마니노프의 정서를 전혀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이나 하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차 광고가 반을 차지하는 프로그램 북을 살라는 끝까지 읽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이 끝난 후, 바로 차이콥스키의 심포니 5번을 지휘한 카라얀을 보면 그 음악평론가가 단숨에 새로운 평론을 써내려갈 것을 알았다. 예정에 없는 곡이었기 때문에 관객들은 지니고 있던 프로그램 북을 넘겨보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겨울의 공연장 홀 안에서는 아무도 소음을 내선 안 됐다. 그건 공연 시간에 늦은 사람이 마음대로 홀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이어 살라가 유일하게 제목과 음악가를 모두 알고 있는 라벨의 볼레로가, 그리고 익숙하지만 제목은 알 수 없는 곡들이 연주되었다. 살라는 인터미션이 다가오자 조용히 홀 밖으로 나갔다. 살라가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중계 모니터에 밀도 높게 붙어 있는 관객들이나, 새 독주회에 입장하는 관객들이 아닌, 캔디를 채우러 온 여자였다. 여자의 무채색 코트는 녹은 눈 탓에 비루할 정도로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은 넘기면 넘길수록 여자의 이마에 달라붙었고 여자는 외양을 정리할 새도 없이 빈 캔디 박스에 새 캔디들을 쏟아부었다. 플라스틱 통에서 작은 벼락소리가 났다. 그리고 여자가 살라를 바라보았다. 날씨가 좋지 않네요. 여자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여자가 발갛게 붓고 젖은 손가락을 코트 주머니에 밀어넣었다. 그리고 주먹 쥔 손을 내놓았다. 사탕 좀 드시겠어요? 여자의 손에는 갖가지의 사탕이 담겨 있었다. 기침을 예방하는 공연장용 캔디는 아니었다. 살라는 여자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아 사탕을 받았다. 여자의 치아는 저번보다 더 뒤틀려 있었다. 살라는 짙은 색의 껍질의 캔디를 까서 입에 넣었다. 예상대로 인공적인 맛이었기에 도저히 어떤 과일 맛인지 추리할 수 없었다. 그녀가 사탕을 입 안에서 굴리는 것과 동시에 오케스트라 홀 문이 열렸다. 살라가 여자에게 사탕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할 틈도 없이 그녀의 어깨가 빠르고 강하게 붙잡혔다. 여자의 얼굴이 빙글 돌았다. 당신이지요? 중년의 남성이었다. 살라가 대답하지 않자 남자는 살라의 어깨를 붙든 손에 힘을 더욱 강하게 실었다. 어셔들이 황급히 남자를 말렸지만 남자는 듣지 않았다. 당신이 벨을 울렸어. 겨우 살라에게서 남자를 떼어낸 어셔들이 숨을 골랐다. 매니저가 달려와 살라에게 눈빛을 보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따위의 물음이 확실했지만 그녀도 알지 못했다. 살라의 입 안에서 사탕이 굴러갔고 달콤한 즙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매니저는 남자를 사무실로 데려가기 위해 살라와 그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사무실에서 이야기 하실까요? 벨을 울렸다고, 당신이. 남자는 매니저 어깨 너머에 있는 살라에게 검지를 치켜들었다. 당신이 울린 거야. 남자는 매니저와 함께 사무실로 향하는 것을 선택했지만 그는 중간중간 살라를 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는 그때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당장에라도 그녀에게 달려들 것만 같은 제스처를 취했다. 살라가 침을 삼켰다. 작아진 사탕과 함께. * 세면대의 물은 나오지 않았다. 온수를 틀어보기도 하고, 언 수도관에 끓인 생수를 붓기도 해봤지만 헛수고였다. 살라는 생수와 그것으로 끓인 물을 섞어 세수했다. 윗물은 너무 뜨거웠고 아랫물은 너무 차가웠다. 물기를 채 닦지 않은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살라는 거울을 바라본 상태로 잠깐 생각해야 했다. 왜 내 얼굴이 빨갛지? 그리고 몇 초 후 깨달았다. 코피가 나고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세면대에 박은 상태로 숨을 내뿜었다. 고기의 핏물을 빼고 난 그릇이 이런 모습이었다. 살라는 뒤집힌 양말을 다시 뒤집어 원상태로 만들었다. 공연장에서 일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옷장이 단조로워진다는 뜻일지도 모른다고, 살라는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기꺼운 일에 가까웠다. 아무도 그녀의 옷차림을 지적하지 않는다. 모두가 유니폼을 입고, 비슷한 색의 양말을 신었다. 그녀는 세탁물을 정리한 후 고지서 봉투를 뜯기 시작했다. 거주자님께, 로 시작하는 봉투는 뜯지 않았다. 그것은 고지서를 빙자한 기부금 홍보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코피는 멎었지만 살라는 여전히 약간 어지러웠다. 그녀는 계산기를 두드렸다. 월세와 공과금을 지불하고 나면 그녀에게는 겨우 최소 생계비가 남아 있었다. 살라는 반사적으로 공연장 구석구석의 아름다움을 떠올렸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의 조각품이나 장식품들, 심지어 바닥에 깔린 마감재 한 조각의 가치를 알아채기 어려웠다. 글쎄, 아름답다는 건 비싸다는 뜻 아닐까. 그녀의 동료 중 하나는 쾌활하게 말했었다. 살라는 필사적으로 그 역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마침내, 그녀가 계산기에 마지막 숫자를 두들겼을 때 그녀는 떠올리고 말았다. 살라는 꼭 그런 움직임으로 공연장 내부에 벨소리를 울려왔었다. 벨을 재생하는 버튼은 부드러웠지만 동시에 묵직했다. 살라가 버튼을 누를 때면, 그녀는 그녀도 모르는 기쁨에 살짝 빠져들곤 했다. 누구보다 잘 교육받은 관객들이 살라의 손짓 한 번에 당황했다. 맡겼거나 챙겨오지도 않은 휴대폰을 찾느라 빈 허벅지를 찰싹 때리기도 했다. 안전한 유리창 너머로 살라는 그들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 관객이 살라의 어깨를 붙잡았을 때 그녀는 아무런 생각도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살라는 계산기를 제자리에 집어넣었다. 계산을 마저 하기가 꺼려졌다. 그녀는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월급은 일정했고 지불해야 할 돈도 일정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해야 할 일을 했다. 반듯하게. 매니저는 살라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살라는 휴대폰을 쥔 상태로 잠들었지만 아침까지 그녀에게 온 메시지나, 부재 중 전화는 없었다. 그렇다면 별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공연장으로 출근하자마자, 그녀는 느꼈다. 그녀의 추론은 어딘가 잘못되었다. 하지만 벨은, 벨을 울리는 건 규정에 있잖아요? 그래도 하필 그 벨이었어. 살라, 넌 그 벨을 울린 거야. 매니저는 살라를 맞은편에 앉힌 후 말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벨은 늘 같은 걸 써왔어요. 기억 안 나세요? 살라, 제발. 그냥 가서 죄송하다고 해. 내가 바라는 건 그게 전부야. 이해가 안 되는데요…. 네가 관객에게 피해를 입혔어. 그렇게만 알아둬. 나가도 좋아. 살라는 입을 잠깐 벙긋거렸지만 곧 일어나야 했다. 매니저는 서류를 들춰보고 있었다. 그녀가 사무실을 나왔을 때 그녀는 사기를 당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관객에게 사과를 할 때까지 살라는 공연장 일을 할 수 없었다. 아무도 그녀에게 맡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프로그램 북조차 만질 수 없었고 그녀와 면식이 있던 어셔들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조금 쉬어도 좋잖아. 모두가 비슷한 말을 했다. 살라는 가끔 길 잃은 관객들을 제자리로 돌려보내곤 했다. 그게 전부였다. 목캔디는 주기적으로 채워졌고 여자는 목캔디를 두고 와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헛발걸음을 몇 번 했다. 살라는 아주 멀리서 공연장 내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제 몇 개 남지 않은 사탕을 까서 입에 넣었다. 여전히 무슨 맛인지 알 수 없었으나 이제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살라는 그녀 곁을 지나가는 어셔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 어셔는 금방 그녀의 눈을 피했다. 그러고는 자신이 이끌고 온 신입 어셔들을 교육하는 것에 열중했다. 여러분 모두 공연장 지리를 외워야 합니다. 신입 어셔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그것이니까요. 신입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기억하려는 듯 두리번거리던 신입이 살라를 쳐다보았다. 말간 눈이었다. 살라는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살라는 길을 잃지 않는다. 그녀가 신입 티를 벗기 전부터 그녀는 길을 잃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살라는 지금 그녀가 어디를 향해 걷는지 알 수 없었다. 검정색의 굽 낮은 단화가 뒤꿈치를 사정없이 찔러올 때까지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살라는 많은 동료들을 지나쳤다. 가장 처음 얼굴이 뭉개지고 그다음은 목소리가 흐려졌다. 살라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살라를 부르거나 알은체하지 않았다. 겨우 걸음을 멈췄을 때, 그녀는 익숙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어디에서나 목캔디를 구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소리 나지 않는 목캔디는 공연장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살라가 빠르게 중얼거렸다. 기억하고 계시네요. 다정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다고, 살라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에서 굳이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여자가 잇몸을 내보이며 활짝 웃었다. 오늘은 누가 무슨 공연을 하지요? 여자가 주머니를 뒤적이며 물었다. 눈 탓에 흠뻑 젖었던 그 코트 같았다. 그러나 오늘의 코트는 아주 잘 말라 있었고 어쩐지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살라는 입을 벙긋거렸다. 오늘은, 어. 그러니까, 오늘은…. 아, 사탕을 모두 먹어버린 것 같아요. … 모르겠어요. 의사가 그렇게 먹지 말라고 했는데도요. 어쩌면 좋지? 모르겠어요…. 여자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옆구리에 끼고 온 공연장용 목캔디 박스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한 주먹만큼의 캔디를 꺼냈다. 살라는 손을 펼치지도, 여자에게 다가서지도 않았다. 여자는 넉살 좋게 살라의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안에 목캔디를 가득 담아주었다. 여자는 살라에게 인사했다. 다음에는 꼭 드릴게요. 새 사탕이요. 여자는 빠른 걸음으로 살라에게서 멀어졌다. 살라는 한참이나 목캔디를 받든 자세로 서 있었다.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처럼 낮은 자세였다. * 그다음날도 살라는 공연장 근처를 맴돌았다. 달라진 것이라고 더이상 그녀가 공연장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신입 어셔임이 분명한 이들이 홀 안을 배회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라고는 길 잃은 고객 관리였지만 신입들은 모두 특유의 빛나는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꾹 깨문 입술에서는 약간의 긴장감마저 느껴졌다. 살라가 신입과 눈이 마주치면 신입은 멋쩍게 웃었다. 마치 살라를 알고 있는 것처럼. 그녀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신입이 고객을 잘못된 방향으로 안내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살라는 나서야만 했다. 분명하게 느껴지는 콧잔등의 땀이나 빨개진 귀, 떨리는 목소리. 살라는 그것을 뒤로하고 고객을 올바른 장소로 안내하기 위해 발걸음을 뗐다. 그리고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순간 그녀는 내장이 아래로, 더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오싹해졌다. 저희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살라의 어깨를 두드린 것은 고객도, 매니저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 번 식은 피가 데워질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만 같았다. 다른 어셔가 고객을 데려갔고 살라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할 수 있었어, 따위의 말이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그것보다 더 단순했다. 살라, 쉬어야 하는 거 아냐? 어셔가 물었지만 살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여기에 있으면 안 돼. 그는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여기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이야. 그렇지? 살라는 그의 태도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그녀도 그런 말투나, 몸짓을 직접 실행해야 했다. 무릎을 굽히고 눈을 마주치고 주머니에서는 사탕이나 껌을 꺼냈다. 아니면 프로그램 북을 펼쳐 가장 사진이 많은 페이지로 상대방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살라는 말했었다. 울지 마. 엄마를 찾아줄게. 아빠를 찾아줄게. 그러나 살라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넌 내 매니저가 아니야. 모두가 네 매니저야. 살라, 정신 차려. 그녀의 말에 그가 대답했다. 그의 말에는 어떠한 대꾸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사과하면 끝날 일을. 그는 그대로 뒤돌아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무겁고 눅눅한 히터바람이 살라의 머리카락 몇 올을 흔들었다. 공연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살라는 알 수 있었다. 어떤 일은 관성처럼 작용했다. 관객들의 발소리나 웅성거림 외에도 그녀가 공연이 시작되었음을 알아차릴 방법은 많았다. 겉옷과 소지품을 맡긴 관객들이 오케스트라 홀로, 독주회 홀로 입장했고 잠시 후 단발성적인 소란이 홀을 뒤덮었다. 어셔 중 하나가 벨소리를 재생했으리라. 살라는 두꺼운 문 너머로 지휘자가 보인다고 생각했다. 어떤 공연인지, 누구의 지휘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가 카라얀만큼 유명하지 않다면 그는 꽤 예의 바르게 인사했을 것이다. 불쾌한 관객 탓에 연주를 멈추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는 가벼운 목례 후에 멋지게 뒤돌아 지휘봉을 치켜들 것이다. 그리고 연주가 시작되었고……. 공연을 생중계해주는 모니터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악장이 끝나기도 전에 모니터 앞을 떠나는 사람, 젖은 손을 바지춤에 비비는 사람. 어떤 아이는 보호자의 엉덩이에 끊임없이 자신의 머리를 박았다. 그러나 보호자는 아이에게 신경 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보호자는 성가신듯 아이의 머리를 밀어냈다. 하지 말라니까. 하지 말랬지. 하지… 그리고 살라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물었다. 저기요. 지금 연주하는 곡이 뭐예요? 살라는 입을 조금 벌렸다. 당장 발음이 샐 것처럼 흉부에 공기가 들어차기 시작했지만 도저히 내뱉을 수 없었다. 그러게요. 모르겠네요. 살라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뭔지 몰라요? 보호자는 살라의 차림새를 다시 한번 살폈다. 살라의 차림새는 어셔가 분명했다. 보호자는 그녀의 대답을 더 기다리기 싫다는 듯이 프로그램 북을 판매하는 곳으로 걸음을 돌렸다. 아이는 이제 보호자의 손가락을 잡아당겼다. 아파. 아프다고. 볼레로, 라벨의 볼레로요. 살라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보호자는 듣지 못했다. 볼레로로 말할 것 같으면, 글쎄요. 저는 라벨의 음악을 딱히 선호하는 편은 아닙니다만, 수학자들의 기호에는 딱 들어맞은 셈입니다. 우리는 수학의 기원으로 올라가는 무모한 행동은 하지 않겠습니다. 볼레로는 구조입니다, 이 음악에는 주선율이 흐릅니다. 이제부터 그것을 A라고 지칭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편곡하여 반복한 선율을 A’ 라고 부를 것이고요. 볼레로는 기본적으로 A와 A’ 선율의 반복입니다. 형태와 악기만 조금씩 바꿔서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그것이 볼레로의…. * 주말이 찾아오자 살라는 여분의 돈을 더 지불한 후 수도관 수리공을 불렀다. 수리공은 수도관이 아주 꽝꽝 얼었기 때문에 수도관을 모두 들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수리공에게 몇 개의 전화번호를 얻은 후, 그녀는 시장에서 채소 몇 종류와 붉은 고기를 사왔다. 그녀는 그것들을 모두 끓여 먹었다. 그다음주에 살라는 그 관객에게 사과하기로 결심했다. 매니저는 기꺼이 관객에게 연락을 넣겠다고 대답했다. 살라는 말끔한 카펫이 깔린 공연장을 배회했다. 캐나다의 거장 건축가가 설계하고 건축을 지도했다는 공연장은 신문기사를 인용하자면, 모던했다. 그 누구도 거스르지 않을 만한 곡선은 매끄러웠고 바닥은 차가웠다. 내부는 반짝이거나, 반짝이지 않았다. 그게 모던이었다. 살라는 현대적인 소파에서 시간을 죽였다. 마침내 그 관객이 사무실로 들어갔고 살라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따라 들어갔다. 관객은 매니저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매니저는 공식적인 서류 작업을 위해 함께 있겠다고 했지만 관객은 그것을 정중히 거절했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매니저는 사무실을 떠났다. 살라는 아침에 발톱을 깎고 오지 않은 것을 약간 후회했다. 단화 안의 발톱이 유독 무거웠고 거슬렸다. 발톱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 없었지만 살라는 사과를 잊지 않았다. 사과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벨을 울린 것 말입니까? 네. 벨을 울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제가 울렸습니다. 그게 고객님께 피해를 입혔다면…. 제가 무슨 피해를 입었는지 아십니까? 살라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햇빛을 직접적으로 받은 남자의 얼굴은 저번에 봤던 것보다 훨씬 늙어 있었다. 노골적인 자연광 탓일지도 몰랐다. 살라는 매니저에게 그가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에 대해 들은 바가 없으므로, 말을 얼버무려야 했다. 포괄적인 사과에 대해 배운 적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 어떤 사과로도 복구가 안 될 피해로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남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순간 살라는 그를 기억해냈다. 그는 그녀가 홀에 벨을 울리자마자 화가 나 일어났던 그 남자였다. 그 옆모습이 확실했다. 당신은 전혀 모르는군. 남자는 그대로 사무실을 나갔다. 그가 문을 세게 닫았기 때문에 문고리, 경첩, 책상 위의 액자, 모든 것이 흔들렸다. 살라가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리고 조용히 울었다.
  • 삶과 죽음의 틈에서 건진 시, 몸에 붙은 44편의 노래

    “안 맞으면 못 살아.” 혹자는 “김민정이니까 할 수 있다”고 했던 시집 제목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거기는 커서 우리는 헤어지는 중입니다’(문학과지성사)에 대한 해명(?)이 그랬다. 거침없고 도발적인 시 세계로 알려진 김민정(44) 시인의 말이다 1999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시인은 시력 20년의 끝자락에 네 번째 시집을 냈다. 최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만난 시인은 덧붙였다. “내 문학에 대한 본령인 ‘거기’는 내가 모르는 곳이니까 작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어요. 거기는 아무나 못 들어가는 세계인데 내 열망은 너무 큰 거죠. 그래서 나는 늘 시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남의 책 내느라 자기 책 쓸 겨를이 없던 성공한 편집자인 시인의 책은 어느 날 느닷없이 나왔다. 지난해 11월 16일부터 사흘 밤낮을 앉아서 쏟아낸 덕이다.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중편소설 써내려 가듯 쭉 쓴 다음에 시 44편으로 분절했다. 시는 지난해 10월 ‘문학동네’ 100호에 냈던 산문을 보고 김혜순(65) 시인이 보내온 문자메시지에서 기원한다. “민쟁(민정)은 이미 몸에 말이 붙어서 쓰기만 하면 다 시여.” 결국엔 스스로가 말한 시집 제목에 대한 설명처럼 ‘못 살아서’ 썼다. “문학성을 계산하기 전에, 사람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니까 산란스러워서 썼어요.” 그도 그럴 것이, 시인은 2019년을 꼬박 먼저 간 이들을 기리는 데 썼다. 1년 내내 황현산 문학평론가, 박서영·배영옥·허수경 시인의 유고집을 묶었다. 허 시인의 49재와 황 평론가의 1주기 자리를 마련하는 일도 모두 그의 몫이었다. 정작 본인은 슬픔을 몸으로 체화할 여유도, 겨를도 없었다. “황현산 선생님 돌아가신 날도 안 울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 슬펐다”는 그는 “길 가다가도 울고, 책 보다가도 울고. 그들의 아른아른거리는 것들을 일단락 짓지 않으면, 산 사람으로서의 내 생활이 안 되겠더라”고 고백하듯 말했다. 슬프거나 못 만나는 아쉬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을 잘 기억하게 하는 다음의 도모를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따라붙었다. 그렇게 나온 시집은 이전과는 좀 다르다. 시집으로서는 드문 페이지터너로서의 매력은 여전하지만, 특유의 가혹하고 그로테스크했던 정서는 사라졌다. 시인은 이제 ‘나’에게 천착하기보다 죽은 이들을 비롯한 주변 이들의 이름을 부르고 그들의 말을 주워 담는다. 가령 1만원도 하지 않는 양파를 가지고 퀵 서비스 기사와 벌이는 실랑이가 담긴 ‘준이의 양파’ 같은 시는 정말, 그야말로 ‘골 때린다’. ‘누나 이 중에 한 개의 무름이 있어요’(62쪽)라는 박준 시인의 말에서부터 시작된 소동. ‘한 개의 무름은 모두를 무르게 하는 무름’이라 화자의 마음은 초조해진다. ‘반드시 오늘일 필요가 있겠냐’는 기사의 반문에 끝끝내 ‘내일은 내일이고 오늘만 오늘이라고 끝내 한 번 더 대답하는 지경’(64쪽)이 된다. 양파를 둘러싼 소동만큼이나 시인이 불러 모으는 이의 스펙트럼은 더욱 넒어졌다. 중국의 여성 노동자 시인 정샤오충, 파주의 ‘교하 중국정통마사지집’에서 마사지하던 내몽골 여인 등 국경도 없고, 노소(老少)도 없다. 시인에게 지난해는 ‘죽은 사람의 스케줄 따라 다니느라 안 죽어서 다행인 해’였다. 새해는 ‘선택과 집중의 해’다. “내가 있어야 남이 있다는 걸 알았잖아요. 나부터 직립할 거예요.” 그러나 산 사람들의 책 스케줄이 꼬박 밀려 있어 시인이 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나는 나의 부록. 가장 사랑하는 것은 없다. 많은 사랑이 있을 것이다.’ 책 첫머리에 나온 ‘시인의 말’처럼 새해에도 그의 ‘많은 사랑’은 쉼이 없을 예정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내 문학에 대한 본령인 ‘거기’는 내가 모르는 곳이니까 작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어요. 거기는 아무나 못 들어가는 세계인데 내 열망은 너무 큰 거죠. 그래서 나는 늘 시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 삶과 죽음의 틈에서 건진 시, 몸에 붙은 44편의 노래

    삶과 죽음의 틈에서 건진 시, 몸에 붙은 44편의 노래

    “안 맞으면 못 살아.” 혹자는 “김민정이니까 할 수 있다”고 했던 시집 제목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거기는 커서 우리는 헤어지는 중입니다’(문학과지성사)에 대한 해명(?)이 그랬다. 거침없고 도발적인 시 세계로 알려진 김민정(44) 시인의 말이다 1999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한 시인은 시력 20년의 끝자락에 네 번째 시집을 냈다. 최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만난 시인은 덧붙였다. “내 문학에 대한 본령인 ‘거기’는 내가 모르는 곳이니까 작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어요. 거기는 아무나 못 들어가는 세계인데 내 열망은 너무 큰 거죠. 그래서 나는 늘 시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남의 책 내느라 자기 책 쓸 겨를이 없던 성공한 편집자인 시인의 책은 어느 날 느닷없이 나왔다. 지난해 11월 16일부터 사흘 밤낮을 앉아서 쏟아낸 덕이다.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중편소설 써내려 가듯 쭉 쓴 다음에 시 44편으로 분절했다. 시는 지난해 10월 ‘문학동네’ 100호에 냈던 산문을 보고 김혜순(65) 시인이 보내온 문자메시지에서 기원한다. “민쟁(민정)은 이미 몸에 말이 붙어서 쓰기만 하면 다 시여.” 결국엔 스스로가 말한 시집 제목에 대한 설명처럼 ‘못 살아서’ 썼다. “문학성을 계산하기 전에, 사람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니까 산란스러워서 썼어요.” 그도 그럴 것이, 시인은 2019년을 꼬박 먼저 간 이들을 기리는 데 썼다. 1년 내내 황현산 문학평론가, 박서영·배영옥·허수경 시인의 유고집을 묶었다. 허 시인의 49재와 황 평론가의 1주기 자리를 마련하는 일도 모두 그의 몫이었다. 정작 본인은 슬픔을 몸으로 체화할 여유도, 겨를도 없었다. “황현산 선생님 돌아가신 날도 안 울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 슬펐다”는 그는 “길 가다가도 울고, 책 보다가도 울고. 그들의 아른아른거리는 것들을 일단락 짓지 않으면, 산 사람으로서의 내 생활이 안 되겠더라”고 고백하듯 말했다. 슬프거나 못 만나는 아쉬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을 잘 기억하게 하는 다음의 도모를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따라붙었다. 그렇게 나온 시집은 이전과는 좀 다르다. 시집으로서는 드문 페이지터너로서의 매력은 여전하지만, 특유의 가혹하고 그로테스크했던 정서는 사라졌다. 시인은 이제 ‘나’에게 천착하기보다 죽은 이들을 비롯한 주변 이들의 이름을 부르고 그들의 말을 주워 담는다. 가령 1만원도 하지 않는 양파를 가지고 퀵 서비스 기사와 벌이는 실랑이가 담긴 ‘준이의 양파’ 같은 시는 정말, 그야말로 ‘골 때린다’. ‘누나 이 중에 한 개의 무름이 있어요’(62쪽)라는 박준 시인의 말에서부터 시작된 소동. ‘한 개의 무름은 모두를 무르게 하는 무름’이라 화자의 마음은 초조해진다. ‘반드시 오늘일 필요가 있겠냐’는 기사의 반문에 끝끝내 ‘내일은 내일이고 오늘만 오늘이라고 끝내 한 번 더 대답하는 지경’(64쪽)이 된다. 양파를 둘러싼 소동만큼이나 시인이 불러 모으는 이의 스펙트럼은 더욱 넒어졌다. 중국의 여성 노동자 시인 정샤오충, 파주의 ‘교하 중국정통마사지집’에서 마사지하던 내몽골 여인 등 국경도 없고, 노소(老少)도 없다. 시인에게 지난해는 ‘죽은 사람의 스케줄 따라 다니느라 안 죽어서 다행인 해’였다. 새해는 ‘선택과 집중의 해’다. “내가 있어야 남이 있다는 걸 알았잖아요. 나부터 직립할 거예요.” 그러나 산 사람들의 책 스케줄이 꼬박 밀려 있어 시인이 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나는 나의 부록. 가장 사랑하는 것은 없다. 많은 사랑이 있을 것이다.’ 책 첫머리에 나온 ‘시인의 말’처럼 새해에도 그의 ‘많은 사랑’은 쉼이 없을 예정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하동 최참판댁 한옥문화관 목조건축 우수 선정

    하동 최참판댁 한옥문화관 목조건축 우수 선정

    경남 하동군은 최근 개관한 최참판댁 한옥문화관이 산림청에서 주관한 2019년 공공목조건축 우수사례 공모에 우수사례로 선정됐다고 31일 밝혔다.공공목조건축 우수사례 공모사업은 공공분야 목구조 건축물을 확대하기 위해 공공목조건축의 우수사례를 발굴해서 전파·공유하고 벤치마킹을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올해 처음 시행됐다. 공모사업 심사는 목조건축 계획·설계의 적정성, 목구조 반영 비율, 목조건축의 독창성, 파급 효과성, 노력도 및 홍보 등의 심사기준에 따라 심사를 해 선정됐다. 군에 따르면 최참판댁 한옥문화관은 심사기준 가운데 특히 설계·독창성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응모한 10개 기관 중 우수기관으로 선정돼 산림청장 상장과 포상금 150만원을 받았다. 군은 이번 목조건물 우수기관 선정으로 받은 포상금은 지역 청소년들 학업에 도움이 되도록 장학기금으로 전액 기탁했다고 밝혔다. 최참판댁 한옥문화관은 고 박경리 작가의 대하소설 ‘토지’ 무대인 악양면 평사리를 찾는 관광객에게 전통문화체험형 숙박시설을 제공하기 위해 한옥으로 지은 숙박시설이다. 기와지붕에 전통한옥구조의 팔작목구조 1동(안채), 맞배목구조 1동(사랑채), 우진각목구조 2동(동·서별채) 등 4동 5실로 18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17억원을 들여 건립해 지난 11월 정식 개관했다. 최관용 하동군 산림녹지과장은 “최참판댁 한옥문화관이 목조건축 우수사례로 선정돼 대한민국 전통 가옥구조 계승과 목조건축물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창원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 군포시, 중앙도서관 문예창작실 입실 작가 2년간 도서 6권 출간

    군포시, 중앙도서관 문예창작실 입실 작가 2년간 도서 6권 출간

    경기도 군포시 도서관이 창작의 산실로서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어 화제다. 시는 문예창작실에 입실한 작가 5명이 다양한 도서를 출간했다고 31일 밝혔다. 시는 창작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군포시 중앙도서관에 문예창작실을 조성해 작가들에게 무료 제공하고 있다. 지난해 3월부터 최근까지 입실 작가 중 5명은 소설과 시, 동화, 그림책 등 총 6권의 도서를 출간했다. 특히 박소명 작가가 출간한 동시집 ‘뽀뽀보다 센 것’은 한국아동문학인협회가 주관한 제29회 한국아동문학상 동시 부분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박 작가는 “책이 가득한 도서관 공간은 나만의 시와 책을 집필하는 창작활동에 큰 도움이 됐다” 말했다. 시는 2013년부터 중앙도서관 1층 78㎡ 공간에 8개 문예창작실을 조성해 운영하고 있다. 평균 5개월 단위로 입실 작가를 공모한다. 현재 17번째 입실한 작가들은 냉난방, 인터넷 시설 등 편의시설을 갖춘 공간에서 창작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이남구 중앙도서관장은 “좋은 문예 작품이 군포에서 더 많이 창작돼 군포시민은 물론이고 전국에 감동을 선사하길 희망한다”며 “시 정책이 문화예술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남상인 기자 sanginn@seoul.co.kr
  • 오바마도 올해의 영화에 ‘기생충’ 선택

    오바마도 올해의 영화에 ‘기생충’ 선택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자체 선정한 ‘올해의 영화’ 리스트에 봉준호 감독 영화 ‘기생충’이 포함됐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29일(현지시간) 트위터에 ‘2019년의 매우 좋은 영화’ 18편과 TV 프로그램 3편 목록을 올렸다. 그는 목록 위에 “물론, 최근 오스카상 후보에 오른 우리들의 제작사 ‘하이어그라운드’의 영화 ‘아메리칸 팩토리’도 있다”고 말했다. ‘아메리칸 팩토리’는 콘텐츠 제작자로 변신한 오바마 전 대통령 부부가 처음 만든 작품으로, 자동차 공장을 둘러싼 미중 충돌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기생충’은 ‘포드 vs 페라리’, ‘아이리시맨’, ‘결혼이야기’ 등 화제작들과 함께 목록에 포함됐다. 목록은 알파벳 순으로 정리됐으며, 따로 순위가 매겨지지 않았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전날엔 별도 트위터로 ‘2019의 매우 좋은 책’ 30여편 목록을 올렸다. 리스트엔 한국계 작가인 민진 리의 소설 ‘파친코’와 수전 최의 ‘트러스트 엑서사이즈’,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도 이름을 올렸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김기현 “방송 통해 나를 공격하라는 이메일도 오갔다”

    김기현 “방송 통해 나를 공격하라는 이메일도 오갔다”

    ‘울산시장 선거 개입 의혹’과 관련해 30일 3번째 검찰 조사를 마친 김기현 전 울산시장이 지난 지방선거 당시 자신을 향한 치밀한 네거티브 전략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송병기 울산시 경제부시장이 이를 위해 시 내부 정보를 빼돌려 이용했고 ‘방송을 통해 공격하라’는 이메일도 오갔다고 밝혔다. 서울중앙지검 공공수사2부(김태은 부장검사)는 김 전 시장을 이날 오후 2시 30분에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했다. 임동호 전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도 오후 2시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김 전 시장은 약 8시간 30분 동안 조사를 받은 뒤 오후 11시쯤 검찰청사를 나섰다. 조사를 마치고 나온 김 전 시장은 기자들과 만나 “‘송병기 업무수첩’에 관한 방대한 내용의 조사가 진행됐다”며 “송 부시장이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울산시의 내부 정보를 입수해 선거 전략에 사용한 정황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방송을 통해 (김기현을) 공격하라는 내용의 이메일이 오간 것도 확인했다”며 “나를 상대로 한 치밀한 네거티브 전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임동호 전 위원의 ‘공천 배제’와 관련해서는 “당시 지역에서 돌던 소문이나 주변 상황들을 물어 아는 대로 답했다”며 “임 전 위원이 기존에 알려진 것 외에 다른 자리를 제안받은 내용도 (노트에) 나와 있었다”고 말했다. 앞서 김 전 시장은 지난 15~16일 두 차례 검찰에 참고인 신분으로 나와 지난해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울산 경찰이 벌인 측근 비리 의혹 수사 전반에 대해 진술했다. 검찰은 최초 비리 제보 문건이 청와대에서 가공돼 경찰로 이첩된 정황을 포착하고 정보를 추가·삭제한 주체와 가공에 활용된 정보의 출처를 추적하고 있다. 또 청와대와 일부 울산시 공무원들이 김 전 시장을 누르고 당선된 송철호(70) 현 시장을 불법적으로 지원했는지도 살피고 있다. 김 전 시장은 이날 검찰청사로 들어가기 전 기자들과 만나 “(이번 선거 개입 의혹은) 개인 차원이나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헌정 질서를 무너뜨리고 선거제도를 짓밟은 폭거이고 선거 테러이기 때문에 책임을 엄중히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김 전 시장과 함께 소환된 임 전 위원은 오후 10시쯤 조사를 마쳤다. 그는 “송 부시장 업무수첩에 기재된 내용과 관련한 조사가 주로 진행됐다”고 밝혔다. 임 전 위원은 “수첩 내용이 소설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그건 아닌 것 같고, 공무원의 특성대로 꼼꼼하게 내용을 기록한 듯 싶다”며 “내가 당사자가 아니다 보니 메모가 사실인지, 단순한 생각인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열쇠는 수첩을 기록한 송 부시장이 쥐고 있는 것”이라며 “검찰에서도 송 부시장에게 확인할 부분이 많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송 부시장은 2017년 10월 김 전 시장 측근 관련 비리 의혹을 당시 청와대 민정비서관실 문모(52) 행정관에게 제보하고, 이후 송철호 현 울산시장 선거준비 과정에서 청와대 인사들과 선거 전략·공약을 논의한 혐의를 받고 있다. 송 부시장의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은 31일 열린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엘턴 존, 英왕실 최고 ‘명예 훈작’ 수상

    엘턴 존, 英왕실 최고 ‘명예 훈작’ 수상

    세계적 팝아티스트 엘턴 존(72)이 신년을 맞아 영국 왕실의 서훈 체계 가운데 가장 영예로운 ‘명예 훈작’을 받았다.28일(현지시간) BBC 방송 등에 따르면 엘턴 존은 3억장 이상의 음반을 판매하는 등 50년간 음악에 매진한 데다 에이즈 파운데이션 등 23개 자선단체에서 활발히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명예 훈작을 받았다. 명예 훈작은 예술과 과학, 의학, 정부 분야에서 공로가 큰 인사에게 서훈되는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제외하고 64명으로 제한된다. 명예 훈작 수여자는 소설 해리 포터의 작가 J K 롤링과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2018년 사망) 등이 대표적이다. 영국에서는 신년과 여왕의 생일(6월 둘째 토요일) 등 1년에 두 차례 서훈자 명단이 발표된다. 엘턴 존은 트위터에 “명예 훈작을 받아 매우 존경받는 이들에 합류하게 돼 영광이다”라며 “2019년은 나에게 매우 멋진 한 해로 축복받았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밝혔다. 엘턴 존은 1998년 기사 작위도 받은 바 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출판도 脫플랫폼 바람… ‘큰손’으로 뜨는 북튜버·웹소설 시장

    출판도 脫플랫폼 바람… ‘큰손’으로 뜨는 북튜버·웹소설 시장

    가속화되는 종이책 출판 시장 불황에 영향력 커진 유튜브, 서점가 좌지우지 올해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린 책 가운데 ‘90년생이 온다’(웨일북)와 ‘반일종족주의’(미래사)가 눈길을 끌었다. 영향력이 커지는 유튜브는 서점가를 흔들었다. 불황을 겪는 종이책 출판과 달리 웹소설, 오디오북 시장은 점차 커지는 추세다. ●의외의 베스트셀러들… 이유 있었네 지난해 11월 출간한 ‘90년생이 온다’가 올여름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역주행’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8월 청와대 직원들에게 선물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이후다. ‘대통령 효과’를 보긴 했지만, 앞선 세대와 ‘뭔가 다른’ 밀레니얼 세대만의 특징을 잘 잡아내 인기를 끌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책은 고학력에 높은 스펙을 갖추고도 9급 공무원 시험에 몰리거나 ‘워라밸’(일과 생활의 균형)을 외치며 자기 할 일만 하는 새로운 세대를 조명했다. ‘밀레니얼 이코노미’(인플루엔셜), ‘포노 사피엔스’(쌤앤파커스) 등 비슷한 주제의 책들도 잇따라 나왔다. “강제 징용은 없었다”, “일본군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었다”는 내용으로 논란을 빚은 ‘반일종족주의’도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 등 진보·보수 인사들이 책을 비판하자 오히려 관심이 쏠렸다. ‘노이즈 마케팅’의 영향을 본 셈이다. 지난달에는 일본에서도 출간돼 온라인 서점인 아마존재팬 베스트셀러가 됐다. 출판계에서는 ‘20만부 이상 팔렸다’는 이야기가 나돈다. 두 사례는 이미 출간된 책이라도, 혹은 양서가 아니라도 베스트셀러에 오를 수 있음을 보여 줬다. ●서점가 흔든 유튜브, 셀러 홍보 논란도 대도서관, 흔한남매, 박막례 할머니와 같은 유명 유튜버가 낸 책이 인기를 끌었다. 책을 주로 소개하는 ‘겨울서점’이나 ‘책읽찌라’ 같은 ‘북튜버’(북+유튜버)도 유명세를 떨쳤다. ‘김미경TV’, ‘라이프해커자청’, ‘신박사TV’ 등 소위 ‘유튜브 셀러’가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경우도 등장했다. 온라인서점 예스24에 따르면 오프라 윈프리의 ‘내가 확실히 아는 것들’(북하우스)은 ‘김미경TV’ 방송 후 일주일 전과 비교했을 때 책 판매량이 무려 54배나 뛰었다.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유튜버들이 인기를 업고 책을 내놓지만, 함량 미달의 책도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돈’ 문제가 얽히면서 유튜버 셀러에 관한 잡음도 컸다. 업계에서는 ‘한 권 소개에 얼마’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돈다. 급기야 이들을 공격하는 유튜버가 등장하기도 했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소장은 “출판사들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뿐 아니라 유튜브 셀러까지 신경써야 할 처지가 됐다”면서 “유튜버 셀러들이 소개하는 책이 홍보비를 받고 소개하는 것인지, 아니면 좋아서 추천하는 것인지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내년에는 시장이 더 혼탁해질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웹소설·오디오북·무제한 대여 성장세 종이책은 불황이었지만, 웹소설을 비롯한 관련 산업은 활력이 넘쳤다. 웹소설의 경우 ‘문피아’가 공모전 전체 상금 7억원, 포털사이트 ‘네이버’가 무려 8억원을 내걸었다. ‘카카오페이지’가 진행한 공모전 총상금도 6억 2000만원이다. 억대의 대형 공모전에 시장이 후끈 달아올랐다. 업계 측은 웹소설 전체 시장이 올해 4000억원 규모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스마트 기기가 확산하면서 전자책 무제한 대여 서비스도 활성화하고 있다. 한 달에 5500~9900원만 내면 무제한으로 전자책을 빌려 볼 수 있는 ‘무제한 대여 서비스’ 시장이 본격 경쟁 체제에 돌입했다. 밀리의 서재가 운영하는 ‘밀리의 서재’와 리디북스의 ‘리디셀렉트’, 예스24의 ‘북클럽’이 각축을 벌이는 가운데 국내 최대 서점인 교보문고가 지난 3월 ‘sam무제한’으로 시장에 뛰어들었다. 오디오북 시장도 약진했다. 네이버를 비롯해 구글, 교보문고, 팟빵 등이 경쟁적으로 오디오북을 내놓고 있다. 오디오북 플랫폼 ‘윌라’를 비롯해 ‘밀리의 서재’는 회원제 오디오북 서비스를 시작했다. ‘오디오북의 넷플릭스’라 불리는 스웨덴 ‘스토리텔’도 11월 한국 서비스를 정식으로 론칭했다. 내년 오디오북 시장 경쟁 역시 더 치열해질 전망이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길 잃은 베테랑 편집자, 길 위에서 소설 만나다

    길 잃은 베테랑 편집자, 길 위에서 소설 만나다

    온전한 고독/강형 지음/난다/296쪽/1만 4000원 ‘책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살았다. 수년 전 여행을 시작한 이래 길을 떠돌며 이야기를 찾고 있다. 이 책은 그 길에서 만난 이야기이고, 첫 책이다.’ 소설 ‘온전한 고독’의 작가 소개에 적힌 글이다. 그의 이름은 ‘강형’. 생소하다. 그는 지난 8월 말, 출판사에 투고한 이래 근 일주일간 매일 컬러를 달리해 수정 부분을 표시한 새 원고를 보냈다. 이 신인 작가는 책 제목이 ‘어제를 사는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편집자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자신이 말하던 제목을 지켜냈다. 남자의 본명은 강병선(62). 1993년 서울 명륜동 작은 건물에서 출판사 문학동네를 시작해 오늘날 문학 출판계의 ‘빅3’로 키워 낸 인물이다. 또 다른 필명은 강태형. 1982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겨울새’로 등단한 시인이기도 하다. ‘온전한 고독’은 수백 수천권을 만들어 낸 베테랑 편집자이자 시인이 자신의 이름으로 내는 첫 책이다. ‘전직 시인’이라는 자조를 즐겨했다는 작가는 뜻밖에 길 위에서 소설을 만났다. ‘작가의 말’에 그는 ‘길을 잃고 여행이 시작되었다’(292쪽)고 적으며 4년 전의 일이라고 부연했다. 2015년 신경숙 표절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문학동네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난 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해 겨울부터 그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단칸방에서 시작해 발칸반도 9개국을 떠돌다 남미에도 갔다. 거기서 갈라파고스를 만났다. ‘이편 수평선에서 일어나 하늘을 가르며 저편 수평선 끝까지 선명하게 흐르는 기나긴 은하의 강을 보았다. 불가능한 꿈을 꾸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내게 깃든 건 그때였다. 오래 품고 있었으나 방기했던 내 어린 날의 꿈, 글 쓰는 자의 생을 다시 꿈꾸어도 괜찮겠다고.’(293쪽) 소설은 용모는 멀쩡하지만 바보 소리를 듣는 묘지기 피터의 이야기다. 글을 쓰고 버릴 때마다 묘지를 찾았다는 작가가 묘지에서 만난 인물인 듯하다. 부모 없이 할아버지와 묘지에서 산다는 이유로 어려서부터 친구들에게 “시체 냄새가 난다”는 괴롭힘과 놀림을 받고 자란 그에게 묘지는 집이자 놀이터이고 세상의 전부다. 그에게 찾아오는 갖가지 사연의 여인들은 서로가 가진 결핍으로 말미암아 상대에게 쉬이 자리를 내줄 수 있는 이들이다. 인물들의 말로 전하는 인생의 잠언들과 예상 밖 허를 찌르는 반전이 키포인트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책꽂이]

    [책꽂이]

    레드 닥(앤 카슨 지음, 민승남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 캐나다의 시인이자 고전학자,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 중 한 명인 앤 카슨의 운문소설. 헤라클레스가 나오는 고전 ‘게리오네이스’에서 모티브를 얻은 대표작 ‘빨강의 자서전’에 녹인 세계관을 이어 간다. 어깨에 빨강 날개를 달고 태어난 괴물 게리온과 아름다운 소년 헤라클레스가 중년이 된 뒤 삶의 퍼즐을 완성해 간다. 208쪽. 1만 4000원.백년의 변혁(백낙청 외 5인 지음, 창비 펴냄) 역사학을 비롯해 한문학, 정치학, 사회학, 인류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3·1운동에서 촛불혁명으로 이어지는 100년 역사를 조망했다. 총론을 쓴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3·1운동은 한반도에서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 수행에 본격적인 시동을 건 혁명적 대사건이었다”면서도 “당시의 최대 과제인 독립국가 건설을 이루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380쪽. 1만 8000원.사랑하는 사람과 저녁 식탁에서 죽음을 이야기합시다(마이클 헵 지음, 박정은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편안하게 나눌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가이드 북. 저녁식사를 하며 죽음을 이야기하는 단체 ‘데스 오버 디너’의 설립자인 저자는 수천 번의 만찬을 통해 만난 사람들의 다양한 일화를 함께 들려준다. 355쪽. 1만 5000원.기독교는 어떻게 역사의 승자가 되었나(바트 어만 지음, 허형은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20명의 신도로 시작한 작은 유대 종파였던 기독교는 어떻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가 됐을까.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 종교학과 교수인 저자가 기독교의 포교 방식, 높은 윤리 기준, 로마 황제의 개종과 기독교 특유의 배타적인 성격 등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488쪽. 2만 1000원.소를 생각한다(존 코널 지음, 노승영 옮김, 쌤앤파커스 펴냄) 귀농한 아일랜드 소설가가 들려주는 생명과 자연의 목가. 그는 소의 분만을 돕고, 더러워진 우사를 청소하는 등 육체노동의 나날들을 보내면서 1만 년간 인간과 함께해 온 소의 역사를 되짚고 인간과 자연의 연결, 나아가 살아간다는 일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332쪽. 1만 4000원.쉬코노미가 온다(타파크로스 지음, 한스미디어 펴냄) 소셜 빅데이터 분석기업이 진단한 ‘쉬코노미’(SHEconomy·여성+경제) 현상. 강력한 소비층으로 떠오른 ‘2030’ 여성 소비자들의 소비 패턴과 트렌드를 분석했다. 책에 따르면 이들은 누구보다 나 자신을 위한 소비를 아끼지 않으며, ‘가치 소비’와 비거니즘 등에 앞장선다. 260쪽. 1만 5800원.
  • 만화 속 주인공 되어볼까, 구석기시대로 떠나볼까

    만화 속 주인공 되어볼까, 구석기시대로 떠나볼까

    겨울방학 시즌이다. 아이와 함께 추위 걱정 없는 실내에서 재미와 학습,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여행지는 없을까. 한국관광공사가 1월에 가볼 만한 곳을 추천했다. 볼거리와 체험거리가 가득한 ‘어린이를 위한 박물관’이 테마다.1. 어린이의 보물섬 - 강원 춘천 애니메이션박물관 상상력을 키우고 애니메이션에 대한 흥미도 불러일으키는 곳으로, 다양한 체험 시설이 있다. 초창기 애니메이션 작품과 영사기 등 애니메이션 관련 자료를 관람하고, 특별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사운드를 만들어 보는 폴리 아티스트 체험, 애니메이션 기법을 몸으로 경험하는 핀 스크린 체험, 애니메이션에 내 목소리를 입히는 더빙 체험이 인기다. 바로 옆의 토이로봇관에선 다양한 로봇을 조작해 볼 수 있다. 하루 7회 공연하는 로봇 댄스도 놓치면 안 된다. 관람료는 애니메이션박물관과 토이로봇관 각 6000원, 통합권 1만원이다. 인근의 효자마을 낭만골목엔 아기자기한 벽화가 가득하다. 춘천낭만시장에서 시장표 주전부리를 맛보고, 이상원미술관에서 고즈넉한 춘천의 멋을 느끼는 것도 좋겠다.2. 우주선 타고 시간여행 - 경기 연천 전곡선사박물관 전곡선사박물관은 동북아시아 최초로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발견된 경기 연천 전곡리 유적에 있다. 국제 설계 공모를 거쳐 완공된 건물은 원시 생명체와 우주선을 결합한 모양새다. 박물관은 상설전시실, 고고학체험실(인터스코프), 3D영상실 등을 갖췄고, 아이부터 어른까지 즐길 만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전곡 구석기나라 여권’을 이용해 본인의 얼굴과 선사시대 인류의 얼굴을 합성해 보는 체험이 인기다. 고고학체험실에서 고인류 가상현실(VR), 아이스맨 외찌 체험도 즐겨 보자. 관람료는 없다. 아울러 다양한 휴양 시설을 갖춘 한탄강관광지, 하수종말처리장을 공원으로 꾸민 임진물새롬랜드, 고구려의 독특한 축성 방식을 보여 주는 연천 당포성, 고려조 네 왕의 제사를 지내던 연천 숭의전지 등 주변 볼거리도 풍성하다.3. 풍성한 의학 체험 기회 - 충북 음성 한독의약박물관 동서양 의약 관련 유물을 관람하고 소화제를 직접 만들어 보며 의약 관련 지식을 넓힐 수 있는 곳이다. 국내 최초 전문 박물관이자 기업 박물관으로 1964년 개관했다. 무료로 개방하고, 연령대별 맞춤 프로그램이 충실해 가족 여행 코스로 제격이다. 19세기 독일의 약국을 재현한 특별전시실과 페니실린을 처음 발견한 플레밍 박사 연구실은 아이들의 인기 코스다. 독일 약국 안에 있는 약장과 약병은 모두 독일에서 가져온 진품이다. 가족 단위 체험 프로그램은 매달 홈페이지에 공지하며, 네이버에서 예약한 뒤 이용할 수 있다.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코리아크래프트브류어리는 토요일 오후 1시와 3시에 맥주 시음 투어를 진행한다. 화덕 피자, 소시지도 함께 즐길 수 있다. 역사가 100년이 넘은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 운곡서원, 반기문기념관도 함께 돌아볼 만하다. 4. 꼭 기억해야할 역사 - 전북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일제강점기 참혹한 수탈이 할퀴고 간 전북 군산은 상처투성이다. 무수한 약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거리는 생생한 고통의 기록이자, 잊지 말아야 할 역사가 됐다.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은 일제 수탈의 근거지로 왜곡된 성장을 겪은 도시의 상처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군산 최고 번화가였다는 영동상가 맞은편에는 도시 빈민이 거주하던 토막집이 있어 대비된다.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 ‘미두장’으로 등장한 군산미곡취인소도 눈에 띈다. 박물관 오른쪽으로 구 군산세관 본관이, 왼쪽으로 구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등록문화재 372호)과 구 조선은행 군산지점(등록문화재 374호)이 이어진다. 진포해양테마공원에는 군산내항 뜬다리부두(등록문화재 719-1호)가 자리를 지킨다. 테디베어뮤지엄군산, 경암동철길마을도 가깝다.5. 가야로 가는 시간의 문- 경남 김해 국립김해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은 사라진 왕국, 가야를 만나는 공간이다. 부산·경남 지역의 선사시대, 변한의 문화와 유물까지 아우른다. 무료로 진행되는 해설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가야 왕국의 건국부터 소멸에 이르는 변천사를 자세히 알 수 있다. 본관과 이웃한 어린이박물관 ‘가야누리’는 놀이와 배움을 결합한 공간이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춘 체험 코너가 많아 가족 여행객에게 적합하다. 관람료는 없다. 이웃한 수로왕릉은 가야 왕국의 시조 수로왕 무덤이다. 수로왕 위패를 모신 숭선전과 신어 문양이 새겨진 납릉정문 등 여러 전각이 있다. 김해가야테마파크는 김해의 랜드마크다. 전시와 공연, 체험 시설을 통해 누구나 쉽고 재밌게 가야의 역사를 배울 수 있도록 꾸몄다. 김해분청도자박물관도 가볼 만하다. 분청사기 변천사와 제작 과정, 여러 가지 기법을 알차게 소개한다. 6. 고려청자의 고향 - 전남 강진 고려청자박물관 고려청자박물관은 고려청자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낸 공간이다. 2층 상설전시실에는 9세기 청자완, 12세기 청자상감여지문대접, 13세기 청자퇴화연국문과형주자 등이 시대별로 전시돼 있다. 청자범종과 청자인장 등 강진 고려청자 요지에서 출토된 유물 800여 점을 전시한 공간도 볼만하다. 연꽃 등 청자가 품은 아름다운 꽃문양과 명문(銘文) 등을 소개한 1층 특별전시실과 기획전시실도 흥미롭다. 나만의 고려청자를 만들어 보는 도자 체험은 아이들이 좋아한다. 관람료는 어른 20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이다. 조선 민화 200여점을 전시한 한국민화뮤지엄과 정약용 유적(사적 107호)도 놓칠 수 없다. 정약용 유적에서 2㎞ 남짓 떨어진 다산박물관은 2012년 유네스코가 세계기념인물로 꼽은 다산 정약용의 강진 유배 생활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했다. 손원천 선임기자 angler@seoul.co.kr
  •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잘 아는 낯선 사람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잘 아는 낯선 사람들”

    1980년 미국 콜로라도주 북동부 도시 볼더. 10살 꼬마 어거스트의 낙은 방과 후 집에서 소설책에 파묻혀 지내는 것이었다. 아이는 책 속에서 거대 초콜릿 공장에서 꿈같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흥분을 떨쳐낼 수 없었던 아이는 작가에게 소감을 담은 손편지를 보냈고, 얼마 후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쓴 로알드 달에게서 답장을 받은 아이는 25년 후 감독 팀 버튼과 함께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2005)을 리메이크해 세계적인 흥행을 올린다. 자신만의 색채와 독특한 감각으로 국내는 물론 세계에 두터운 팬층을 둔 영화감독 팀 버튼의 곁에는 늘 작가 존 어거스트(49)가 있었다. ‘빅 피쉬’, ‘찰리와 초콜릿 공장’, ‘유령신부’, ‘다크 섀도우’, ‘프랑켄위니’ 등 팀 버튼의 선택은 언제나 어거스트였다. 올해 영화 ‘알라딘’ 각본에도 참여하며 할리우드 최고의 작가로 자리매김한 그가 영화가 아닌 뮤지컬을 들고 한국을 찾았다. 지난 23일 서울 예술의전당 CJ라운지에서 만난 어거스트는 자신의 첫 뮤지컬 참여 작 ‘빅 피쉬’를 “서로를 사랑했지만 잘 이해하지는 못했던, 어린 시절 나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착안한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그는 “20년 전 소설 ‘빅 피쉬’ 속 아들 윌과 아버지 에드워드를 보면서 현실의 아버지와 저의 관계를 떠올리곤 했다”면서 “뮤지컬 가사 중에 ‘서로를 참 잘 아는 낯선 사람들’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그게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설명했다. 다니엘 월러스가 쓴 원작 소설은 허풍쟁이 아버지 에드워드와 아버지의 과거를 따라가며 아버지의 진심을 깨닫게 되는 아들 윌의 이야기를 담았다. 2003년 어거스트가 영화로 각색해 팀 버튼에게 먼저 제안하면서 영화로도 탄생했다. 뮤지컬로는 2013년 미국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랐고, 한국에서는 지난 4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한국 제작진·배우 버전으로 처음 공개됐다. 어거스트는 자신의 첫 뮤지컬 작품에 대해 “매우 미국적인 민화와 설화들이 등장하고, 큰 이야기의 흐름 속에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게 이 작품의 매력”이라고 했다. ‘미국적’이라고 했지만 한국 관객에게도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한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는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어디든지 비슷하다는 걸 느끼게 될 겁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아버지를 이해 못한 소년, 시대와 문화를 넘어 존재하지 않나요”

    “아버지를 이해 못한 소년, 시대와 문화를 넘어 존재하지 않나요”

    팀 버튼의 ‘이야기꾼’, 뮤지컬 ‘빅 피쉬’ 작가 존 어거스트“서로 사랑했지만 이해하지는 못했던, 아버지와 내 이야기”1980년 미국 콜로라도주 북동부 도시 볼더. 10살 꼬마 어거스트의 낙은 방과 후 집에서 소설책에 파묻혀 지내는 것이었다. 책을 펼쳐들면 소년만의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아이는 책 속에서 거대 초콜릿 공장에서 꿈같은 시간을 보내곤 했다. 흥분을 떨쳐낼 수 없었던 아이는 작가에게 소감을 담은 손편지를 보냈고, 얼마 후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보낸 이는 아동 소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쓴 로알드 달. 그리고 25년이 지난 2005년 미국에서 리메이크된 영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은 세계적인 흥행으로 흥행했다. 영화에는 감독 팀 버튼과 함께, 시나리오 작가로 ‘존 어거스트’가 이름을 올렸다. 25년 전 원작 소설 작가에게 편지를 썼던 그 꼬마는 영화 작가로 성장해 더 많은 세계의 아이들에게 꿈과 환상을 심어줬다. 자신만의 색채와 독특한 감각으로 국내는 물론 세계에 두터운 팬층을 둔 영화감독 팀 버튼의 곁에는 늘 작가 존 어거스트(49)가 있었다. ‘빅 피쉬’, ‘찰리와 초콜릿 공장’, ‘유령신부’, ‘다크 섀도우’, ‘프랑켄위니’ 등 팀 버튼의 선택은 언제나 어거스트였다. 올해 영화 ‘알라딘’ 각본에도 참여하며 할리우드 최고의 작가로 자리매김한 그가 영화가 아닌 뮤지컬을 들고 한국을 찾았다. 지난 23일 서울 예술의전당 CJ라운지에서 만난 어거스트는 자신의 첫 뮤지컬 참여 작 ‘빅 피쉬’를 “서로를 사랑했지만 잘 이해하지는 못했던, 어린 시절 나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착안한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그는 “20년 전 소설 ‘빅 피쉬’ 속 아들 윌과 아버지 에드워드의 관계를 보면서 현실의 아버지와 저의 관계를 떠올리곤 했다”면서 “뮤지컬 가사 중에 ‘서로를 참 잘 아는 낯선 사람들’이라는 내용이 있는데 아버지와 아들이 이런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뮤지컬 제작 배경을 설명했다.다니엘 월러스가 쓴 원작 소설은 허풍쟁이 아버지 에드워드와 아버지의 과거를 따라가며 아버지의 진심을 깨닫게 되는 아들 윌의 이야기를 담았다. 2003년 어거스트가 영화로 각색해 팀 버튼에게 먼저 제안하면서 영화로도 탄생했다. 뮤지컬로는 2013년 미국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랐고, 한국에서는 지난 4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한국 제작진·배우 버전으로 처음 공개됐다. 어거스트는 자신의 첫 뮤지컬 작품에 대해 “매우 미국적인 민화와 설화들이 등장하고, 큰 이야기의 흐름 속에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게 이 작품의 매력”이라고 했다. ‘미국적’이라고 했지만 한국 관객에게도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한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는 시대와 문화를 초월해 어디든지 비슷하다는 걸 느끼게 될 겁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한동근, 복귀 직접 예고 ‘음주운전 자숙 16개월만’ [전문]

    한동근, 복귀 직접 예고 ‘음주운전 자숙 16개월만’ [전문]

    가수 한동근이 복귀를 직접 예고했다. 한동근은 25일 자신의 SNS에 버스킹 현장 사진과 함께 “그동안 저는 ‘길 위의 한동근’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주요 도시로 버스킹을 하러 다녔습니다. 한 때는 음악을 포기할까도 생각했었지만, 제 노래를 듣고 힘을 얻었다는 분들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라고 전했다. 이어 한동근은 “관객 분들 덕분에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최선을 다해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라며 “좋은 음악으로 다시 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라고 차기 활동을 예고했다. 한동근은 지난해 8월 음주운전으로 경찰에 적발됐고, 이를 반성하기 위해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자숙의 시간을 가져왔다. 이후 공식적으로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은 한동근은 이달 20일 플레디스엔터테인먼트와의 전속계약 종료 소식을 전했다. 한편, 한동근은 2012년 MBC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 3’의 우승자로 관심을 받았고, 2014년 정식 데뷔해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써보려 해’ 등의 곡으로 사랑받았다. 1년 4개월 만의 활동 재개 소식을 알린 한동근이 어떤 음악을 준비하고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이하 한동근의 SNS 글 전문 안녕하세요, 한동근입니다. 오랜만에 글을 남기게 됐습니다. 그 동안 저는 ‘길 위의 한동근’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주요 도시로 버스킹을 하러 다녔습니다. 한 때는 음악을 포기할까도 생각했었지만, 제 노래를 듣고 힘을 얻었다는 분들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관객 분들과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떨렸지만, 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제 노래를 들어 주신 관객 분들 덕분에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최선을 다해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좋은 음악으로 다시 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감사합니다. 사진 = 서울신문DB 김채현 기자 chkim@seoul.co.kr
  • 노르웨이 공주의 전 남편 아리 벤 극단 선택, 케빈 스페이시가 왜 나와?

    노르웨이 공주의 전 남편 아리 벤 극단 선택, 케빈 스페이시가 왜 나와?

    노르웨이 마사 루이즈 공주와 2002년 결혼했지만 2년 전에 이혼한 작가 아리 벤이 스스로 극단을 선택해 마흔일곱 삶을 접었다. 여러 편의 소설과 희곡을 집필한 고인의 대변인은 성탄절에 노르웨이 NTB 통신에 그의 죽음을 알렸다고 영국 BBC가 전했다. 노르웨이의 하랄트 국왕과 소냐 왕비도 성명을 발표해 고인이 “오랜 세월 우리 가족의 중요한 일부가 됐고 따듯하고 좋은 기억을 우리에게 남겼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이어 “그를 알게 돼 기뻤다. 또 우리 손주들이 이제 사랑하는 아빠를 잃은 것에 큰 슬픔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사실 결혼 때부터 벤은 마사 공주의 짝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로 비쳐졌다. 덴마크에서 태어나기도 했고 단편 ‘지옥만큼 슬퍼’ 등 몇몇 작품만을 발표한 상태였고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약물에 취해 성매매를 한 동영상이 공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국왕 부부의 외동딸이자 맏이인 마사의 고집을 누구도 꺾지 못했다. 공주의 심리 치료를 맡은 그의 어머니가 뒤에서 조종한 것 아니냐는 입길도 뒤따랐다. 공주는 자신이 죽은 이와 대화할 수 있는 영매 능력이 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마우드(16), 레아(14), 엠마(11) 세 딸이 있지만 2016년 별거한 뒤 이듬해 이혼했다. 당시 마사 공주는 성명을 내 “우리 아이들이 누려야 마땅한 안식처를 더 이상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같은 해 12월 벤은 성추행과 동성애 편력 등 온갖 기행으로 명예가 실추된 할리우드 배우 케빈 스페이시가 노벨 평화상 축하 공연 도중 자신을 추행했다고 고발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스페이시가 탁자 밑으로 손을 뻗어 은밀한 부위를 만졌다고 주장했고, 스페이시는 이렇다 할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문화마당] 크리스마스 다음날/김이설 소설가

    [문화마당] 크리스마스 다음날/김이설 소설가

    ‘마감이 눈앞에 닥쳐 있을 때 내 아파트는 언제나 최고로 깨끗하고, 내 파일은 가장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고, 냉장고는 썩어가는 음식 없이 말끔히 치워져 있다. 반드시 해야 할 무언가가 있을 때, 나는 바로 그 일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용감무쌍하게 해내겠다고 결심한다.’ 마치 내 일처럼 묘사하고 있는 이 문장은 앤드루 산텔라의 ‘미루기의 천재들’에 수록된 부분이다. 책은 ‘지금 해야 하는 일보다 더 나은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편다. 연말이 되면 올 한 해를 어떻게 보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연초에 세웠던 올해 계획을 적은 페이지를 들춰 보며 한숨을 쉬는 때도 이맘때이지 싶다.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의 한두 가지는 이뤘을 수 있다. 소액적금 만기, 치과 진료 받기나 밀가루 음식 줄이기 같은 것들. 그러나 올해도 못 해낸 일들이 더 많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면 운동하기, 금주·금연, 책 100권 읽기라든지 부모님에게 연락 자주 하기, 야식 먹지 않기 같은 항목들. 그리고 매년 그랬듯이 새해 계획에 올해 못 지킨 항목이 다시 포함될 것이다. 올해 계획 중에는 경장편 두 편 쓰기와 건강검진이 있었다. 경장편, 단편, 중편을 한 편씩 썼으니 그리 나쁜 결과는 아니다. 건강검진도 마쳤고, 그동안 건강을 위협하던 고혈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체중 감소도 이뤘다. 그러나 매일 단편 소설 한 편씩 읽기라든지, 매일 물건 하나씩 버리기라든지, 제대로 된 식단으로 상 차리기 같은 결심은 거의 빵점에 가깝다. 물론 못 해낸 것들은 새해 계획에 포함될 터다. 그나저나 우리는 왜 새해 계획을 세우는 걸까. 리스트를 만들어도 이룰 확률이 낮은데도 마치 어떤 의식을 치르듯이. 그런가 하면 연말이면 꼭 북적이는 송년회를 하는 분위기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겹쳐진 한 해의 마지막은 그래서 더욱 쓸쓸한 기분에 빠지기 일쑤다. 어릴 때부터 의아했던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텔레비전과 거리는 크리스마스라고 시끌벅적한데 정작 내 일상은 달라진 게 하나 없다. 한 해의 마지막, 새해 첫날이라며 난리인데 내 하루는 어제와 다르지 않았고, 내일이라고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에게만 아무 일이 벌어지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러니까 나만 쓸쓸한 줄 알았다. 나이가 들면서 원래 기념일이란, 우리가 정한 어떤 날이란 사실 어제와 다를 바 없고, 내일과도 다를 리 없는 하루일 뿐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럴수록 특별한 날이라고 유난을 떨지 않는 것으로 그날을 가장 값지게 기렸다. 고요하고 차분하게 평범한 하루에 충실했다. 그러니 쓸쓸할 이유가 없었다. 올해 계획 중에서 이루지 못한 것들을 헤아리며 스트레스받을 이유도 없다. 올해 못 했으면 내년에 하고, 내년에도 못 한다면 그 다음해에 해내면 될 테니까. 크리스마스 전에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꾸미고 선물을 준비하고 새해를 축원하는 카드를 보냈다면 이제 조용히 크리스마스 장식을 정리하고, 새 다이어리를 준비하면 된다. 우리가 ‘미루기 천재’들일지언정 그게 큰 문제는 아니라는 걸 우린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미룬 일들은 어디 가지 않고 고스란히 쌓여 있다. 그것이 지긋지긋한 일상이 아니라, 너무 평범한 일상의 흔적이라고 생각하면 게으른 자신에 대한 한탄은 불필요하다는 걸 잘 알게 될 것이다. 나의 내년도 올해처럼 마감 날짜가 다가오는데도 뜨개질을 시작하고, 대청소를 결심한 순간부터 시집을 들추거나, 저녁밥을 안치기 전에 영화를 보기 시작해 결국 라면이나 끓이는 날이 반복될 것이다. ‘더 빨리! 더 많이!를 요구하는 세상의 압박 앞에 초연하고 싶’어서라고 변명한다면 위악적일까. 여하튼 반도 지켜지지 않을 새해 계획을 적어나가며 어제와 같은 내일을, 오늘과 같은 새해를 기다리기로 한다.
  • 여성·퀴어·SF… 펜에 스민 다양성

    여성·퀴어·SF… 펜에 스민 다양성

    대부분 문학상 수상자 여성 돌풍 여전 장르 문학도 약진… ‘K문학 위상 높여’올 한 해 문학계는 ‘다사다난’보다는 ‘다이내믹’에 가까웠다. 한림원에 번진 ‘미투’(#Me too·나도 피해자다)로 한 해를 거른 노벨문학상은 두 명의 수상자(올가 토카르추크·페터 한트케)를 배출했다. 한국에서는 김혜순 시인이 그리핀 시문학상을 수상, 차기 노벨문학상 수상 전망을 높였다. 변방의 서자 취급을 받던 SF 등의 장르 문학은 대세로 떠올랐고, 여성 작가를 필두로 한 페미니즘과 퀴어 서사는 여전한 힘을 발휘했다. ●후보도 수상자도 여성… 여성 작가 초강세 올해 트위터에서 돌았던 ‘짤’ 중 하나. ‘김승옥문학상 수상자’라는 코멘트 아래 쭉 이어지는 7명의 사진은 모두 여성이었다. 대상을 받은 윤성희 작가를 비롯해 우수상 수상자인 권여선, 편혜영, 조해진, 황정은, 최은미, 김금희 모두 여성인 까닭이다. 올해 13회째를 맞은 김유정문학상도 사정은 비슷했다. 수상자 편혜영 작가를 비롯해 후보 작가들(김금희, 김사과, 김혜진, 이주란, 조남주, 최은미) 모두 여성이었다. 동인문학상(최수철)을 제외하고 이상문학상(윤이형), 현대문학상(박민정) 등 주요 문학상도 여성들에게 돌아갔다. 박혜진 문학평론가는 “최근 사회에 던지는 윤리적인 질문 자체가 문학 미학을 구성하는 중요 요소가 됐다”며 “젠더나 퀴어, 장애인 같은 소수자 서사를 다루는 데 여성 작가들이 사회에 더욱 직접적으로 질문하는 ‘첨단의 윤리’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페미니즘·퀴어 서사의 진화 여성 작가들의 활약으로 ‘82년생 김지영’(민음사)이 쏘아 올린 페미니즘 소설 붐은 올해도 계속됐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리타 메이 브라운 등 외국 유명 페미니스트 소설가들의 작품이 번역 출간되는가 하면 국내 여러 작가가 참여한 앤솔로지 발간이 이어졌다. 퀴어 문학에서는 박상영이라는 걸출한 신예의 탄생이 주목받았다. 지난해 출간한 첫 소설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문학동네)로 주목받았던 박상영은 두 번째 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창비)으로는 6개월간 4만 5000부를 찍었다. 성에 대한 자유분방한 묘사가 돋보이는 그의 작품은 퀴어 서사를 넘어 청년 세대의 사랑과 상실,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있게 성찰한다는 평을 받는다. ●신성의 등장, 무크지 창간… SF 문학의 약진 웹소설 플랫폼의 성장과 함께 SF, 판타지, 무협, 로맨스, 추리 등을 포괄하는 장르 문학이 크게 각광받았다. 그중에서도 SF의 활약은 눈부셨다. 포스텍에서 생화학 석사 학위를 받은 김초엽 작가의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은 출간 6개월 만에 3만 3000부를 찍어 신예 작가로는 이례적인 관심을 받았다. 김보영 작가는 미국 최대 출판그룹 ‘하퍼콜린스’에 중·단편 소설 3편의 번역 출간권을 판매, 한국 SF 최초로 영미권 주요 출판시장에 진출했다. 한편 지난달에는 SF 전문 무크지 ‘오늘의 SF’(아르테)가 창간돼 SF 문학을 비평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고호관, 듀나, 정세랑, 정소연 등 SF 문학의 최전선에 있는 작가들이 편집위원을 맡았다. 복도훈(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문학평론가는 “AI나 인류세, 환경 문제에 이르기까지 SF적인 상상이 우리 삶의 중요 기제가 됐다”며 “최근의 SF 붐은 밑바닥부터 실력을 다져 온 작가들과 팬덤, 출판사들까지 오래된 노력이 ‘빅뱅’처럼 폭발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로 뻗어가는 K문학의 힘 한국에서 130만부를 찍은 ‘82년생 김지영’은 올해까지 19개국에 수출, ‘K문학’의 위상을 드높였다. 중국에서만 18만부, 일본에선 15만부가 인쇄되는 등 비슷한 사회 환경의 동아시아에서 특히 인기를 끌었다. 아시아를 넘어 북미, 유럽에서도 한국 문학에 대한 열띤 관심이 이어졌다. 지난 6월 김혜순 시인은 캐나다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그리핀 시문학상을 한국 작가로는 처음 수상했다. 9월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열린 국제도서전은 맨부커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낭독회를 들으려는 사람들로 붐볐고, 그즈음 스웨덴 문예지 ‘10TAL’은 한국문학 특집호를 발간했다. 외국으로 번역 출간되는 한국문학을 지원하는 한국문학번역원의 올 한 해 출판 지원 종수는 26개 언어권 151종이었다. 2010년 15개 언어권, 53종의 책을 번역 출간한 것과 비교하면 3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젊은 평론가의 시선, 문학을 둘러싼 시간을 보다

    젊은 평론가의 시선, 문학을 둘러싼 시간을 보다

    작품 안팎 시간의 상호작용 주목 ‘맘충’의 페미니즘적 재현 비교도지금 이 시대를 문학 안팎으로 새롭게 조명하는 비평집이 출간됐다. 2012년 ‘세계의 문학’ 평론 부문으로 등단한 허희(35)의 ‘시차의 영도’(민음사)다.처음으로 펴내는 비평집에서 젊은 평론가가 주목한 것은 ‘시간’이다. 작품이 탄생한 당대의 시간, 당대에서 문학이 포착해 낸 시간, 작품을 읽은 뒤 독자가 생성해 낸 시간 등 텍스트 안팎에 놓인 시간들과의 상호작용에 주목했다. 가령 소설 ‘82년생 김지영’과 느닷없이 자식을 잃은 엄마의 이야기인 영화 ‘비밀은 없다’(2015)를 중첩시켜 ‘맘충’이라는 소재의 페미니즘적 재현을 살펴보는 식이다. ‘조남주 작가가 ‘82년생 김지영’을 통해 “엄마는 맘충이 아니다!”라고 항변한다면, 이경미 감독은 영화에서 “엄마가 맘충이면 어때?”라고 반문한다’(39쪽)는 게 평론가의 분석이다. 그 이유는 영화 속 캐릭터 연홍이 행한 복수극은 ‘그녀가 뒤늦게 끌어낸 모성의 위력이 아니었다면 해낼 수 없는 것’(43쪽)이기 때문이다. 이 외에 시대를 그대로 보여 주거나 과거에 대한 향수를 통해 현재를 비춘 김사과·윤이형·박민규·김중혁의 소설, ‘전통’과 ‘현대’라는 키워드로 김언, 박소란,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아이들을 화자로 한 ‘엄마, 나야’와 같은 시를 돌아본다. ‘문학은 그 자체로 가치 있지 않다. 이것이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인간과 다른 점이다.’(5쪽) 문학 비평서치고는 도발적인 책머리다. 평론가는 최근 몇 년 새 문단을 휩쓴 ‘미투’와 표절 논란을 언급하며 이같이 말한다. ‘문학을 한다는 것은 문학작품을 읽고 쓴다는 것뿐 아니라, 자기가 지향하는 문학적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다.(중략) 만약 그런 것이 문학(적 삶)이라고 한다면, 문학 따위 할 필요 없다.’(25쪽)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별이 된 박완서 길이 되다

    별이 된 박완서 길이 되다

    서울신문이 서울시, 사단법인 서울도시문화연구원과 함께하는 2019서울미래유산-그랜드투어 ‘제35차 서울의 문학5-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편이 지난 21일 서대문구 현저동과 종로구 무악동·사직동·필운동 일대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서울미래유산을 사랑하는 참석자 40여명은 이날 오전 10시 독립문역 4번 출구를 출발, 현저동 가파른 언덕배기에 올랐다. 박완서 작가가 어린 시절 놀던 길과 매동보통학교(매동초등학교) 등굣길을 연상하는 코스였다. 독립문~옥살이 골목~무악현대아파트~인왕산 순성길~종로도서관~매동초등학교로 이어진 코스는 단출했지만 명작의 힘은 위대했다. 꼬불꼬불한 골목 귀퉁이마다 작가의 숨결이 느껴졌다. 한 참가자는 “작품 속 등굣길이 궁금했고, 그대로 따라 걸어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꿈이 이뤄졌다”는 감동적인 소감을 남겼다. 올해 최종회인 이날 코스에서 서울미래유산은 영천시장이 유일했다. 해설을 맡은 심흥식 서울도시문화지도사는 서울문학의 현장을 차분하고 깊이 있게 전달했다.박완서(1931~2011)는 서울과 서울사람을 탐구한 대표적 작가이지만 서울 토박이와는 거리가 멀다. 경기 개풍군 박적골에서 태어나 조부모 슬하에서 자라다 8살 때 극성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온 이주민이다. 사대문 밖 대표적 빈촌지대 현저동 46-418번지는 ‘제2의 고향’이었다. 숙명여고를 다니다 개성 호수돈여고로 전학 갈 때까지 6년간의 성장기를 이곳에서 보냈다. 광복 후 몇 차례 행정동 개편을 통해 의주로 남서쪽은 서대문구 현저동으로 남고, 북동쪽은 종로구 무악동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지금의 무악동 아이파크아파트가 있는 산 중턱이 옛 집터쯤으로 추정된다. 현저동을 벗어나서는 잠시 신혼살림을 차린 종로구 충신동과 성북구 돈암동 신흥주택 개발지구에서 살았다. 강남개발 이후 주저하지 않고 잠실 장미아파트로 이주, 강남문학을 선보인 이유도 서울의 사대문 안과 사대문 밖을 구분 짓는 앙상레짐이 싫었기 때문이다. 40세 늦깎이 데뷔작 ‘나목’((1970년)에서 거주지를 북촌 계동으로 설정한 것도 현저동 달동네를 벗어나고픈 의도였다.현저동은 박완서의 문학세계에서 가장 특별한 장소다. 현저동이라는 사대문 밖에 둥지를 틀었지만 언젠가는 사대문 안에 입성하기를 갈망했다. 사대문 안과 밖이라는 분리주의는 남북 분단과정에서 빚어진 오빠의 죽음이라는 가족의 비극과 닮았다. 50~51세에 발표한 ‘엄마의 말뚝1~2’는 분리와 분단의 세계에 세운 작가의 깃발이다. ‘박완서 산문집6: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애수(문학동네 2015)’에서 “그러나 막상 내가 도달한 어머니의 서울 살림은 형편없이 궁색한 것이었다. 평지의 반듯반듯한 기와집 동네를 다 그냥 지나쳐 꼬불꼬불한 돌사닥다리 길을 한없이 기어올라가 깎아지른 듯한 축대 끝에 제비집처럼 매달린 초가집의 우중충한 문간방이 어머니 서울 살림집이었다. …서울에서의 첫날밤…나는 이불 속에서 소리를 죽여가며 울었다”는 구절은 8살 박완서가 서울살이를 시작한 현저동 달동네 어느 문간방의 1938년 풍경이다.세월이 흘러 현저동 산기슭엔 아파트단지가 빼곡하다. 소설에서 “골목은 깎아지른 듯한 층층다리로 변했다, 집들도 층층다리처럼 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곧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이상한 동네였다”고 묘사된 곳이라곤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미끈하게 변했다. 현저동은 물이 좋아서 악박골(약박골)이라고 불렸다. 이광수의 ‘흙’에 “…소화불량이 심하기나 해야 악박골 약물에나, 그것도 다른 사람들 오기 전에 이른 새벽에 다녀올까…”라는 대목이 나오고, 심훈의 ‘상록수’에서 주인공 영신과 동혁이가 나누는 대화에서도 “그럼 목두 마른데 악박골루 가서 약물이나 마실까요?”하고 독립문 편짝을 향해서 앞장을 선다. “참, 악박골이 영천이라구도 하는 덴가요?”라고 나온다. 약수로 유명한 이 동네의 진면목과 다양함은 박완서의 작품에 의해 사실화되고 구체화된다. 박완서의 연작 자전소설은 장장 15년 만에 마무리된다. 50세에 쓴 ‘엄마의 말뚝’에 나타난 자전적인 서사를 62세 때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다듬었다. 이 작품에는 ‘소설로 그린 자화상’이라는 부제까지 붙어 있다. 65세 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로 드디어 3부작을 완성했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저서 ‘서울문학기행’에서 “이들 자전적 연작소설을 보면 박완서 가족에게 서울은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부역과 전향에 얽힌 가족사 때문에 전쟁 속의 서울이 작품의 주무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풀이했다.작가가 경험한 서울은 전쟁의 도시인 동시에 사랑의 도시였다. 해방과 전쟁, 피란살이가 중첩된 격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살았다. 현저동 ‘괴불마당집’은 서울에 입성한 작가에게 ‘지상의 방 한칸’이었다. 서울사람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이자 작가의 길을 마련해준 이야기보따리였다. “우리 세 식구가 처음으로 서울에 장만한 내 집인 현저동 꼭대기 괴불마당집에서의 첫 겨울은 가혹했다. 추위도 예년에 없이 혹독했지만 여름철 장마처럼 눈이 한번 내리기 시작하면 몇 날 며칠 계속됐다. …물보다는 불 걱정이 훨씬 더 심각했다”고 ‘엄마의 말뚝’에서 현저동 시절을 추억했다. ‘엄마의 말뚝’이란 소설 제목은 현저동에 입성했을 때 “드디어 서울에 말뚝을 박았구나”고 안도하는 어머니의 말에서 따왔다. 엄마의 말뚝은 서울의 말뚝이었다. ‘서울탄생기’의 저자 송은영은 “이 말뚝은 드디어 서울에 정착했음을 알게 해주는 장소이다. 말뚝은 지식과 주체성을 갖춘 새로운 여성상에 대한 지향과 그것을 딸에게 투사한 어머니의 욕망을 담고 있다”고 해석했다. 어린 박완서는 등굣길 인왕산 산록에서 싱아를 애타게 찾아다녔다. “나는 불현듯 싱아 생각이 났다. 우리 시골에선 싱아도 달개비만큼 흔한 풀이었다. 산기슭이나 길가 아무 데나 있었다. 그 줄기에는 마디가 있고, 찔레꽃 필 무렵 줄기가 가장 살이 오르고 연했다. 발그스름한 줄기를 꺾어서 겉껍질을 길이로 벗겨 내고 속살을 먹으면 새콤달콤했다. 입안에 군침이 돌게 신맛이, 아카시아 꽃으로 상한 비위를 가라앉히는 데는 그만일 것 같았다. …간절하게 산속을 찾아 헤맸지만, 싱아는 한 포기도 없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나는 하늘이 노래질 때까지 헛구역질을 하느라 그곳과 우리 고향 뒷동산을 헷갈리고 있었다.”박완서의 작품에서 현저동은 ‘바닥 상것들’이 사는 ‘쌈박질이 그치지 않는 동네’로 묘사되고 있다. 현저동의 삶은 ‘서울살이의 법도라기보다는 셋방살이의 법도’부터 익혀야 하는 궁핍한 삶이었다. “오줌과 밥풀과 우거지가 한데 썩은 시궁창 물”이 흐르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박완서는 현저동에서 작가의 길을 찾았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나만 보았다는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 있다. 그건 앞으로 언젠가 글을 쓸 것 같은 예감이었다”고 썼다. 현저동은 박완서 문학을 잉태한 산실이다. 글 노주석 서울도시문화연구원 원장 사진 김학영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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