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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편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펴낸 작가 공지영

    아프고 무서웠다. 신들린 듯 밤을 잊고 원고지를 메워 가다가도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날들이었다. 갑자기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싶은 생각에 이르면 한참 멍해 있기 일쑤였다. ●사형수, 여교수 알게된 뒤 내면 털어놔 새 장편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푸른숲 펴냄)을 내면서 공지영(42)은 끙끙 앓았다. 원고지 위로 간당간당 작두를 탔다는 표현은 어떨까. 딱 두달 만에 써버린 장편. 미쳐서 매달리지 않고서야 스스로 돌아봐도 “거짓말 같은 이야기”이다.“누가 옆에서 (글을) 불러준다는 느낌이 들었고, 막판에는 아예 밤잠을 못 잤다.”고 했다. 그랬을 것 같다. 작중 인물들의 캐릭터부터 예사롭지 않다. 극악해져 보고 싶었을까. 스스로와 독자들의 내성을 한번쯤 시험해 보고 싶었을까. 새 소설은 상처로 가득한 극단의 젊은 남녀를 주인공으로 세웠다. 내일이 없는 사형수와, 내일이 있으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냉소하는 여교수의 이야기다. ●8년동안 작품 구상… 단숨에 써 내려 겉보기엔 남부러울 것 없는 서른살의 대학교수 유정. 어린 시절의 잊지 못할 상처로 삶과 화해하지 못한 여자는 결국 여러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말할 수 없이 불우한 유년을 보낸 스물일곱살의 남자 윤수는 밑바닥만 떠돌다 살인을 했고 사형수가 됐다. 교도소를 내왕하는 모니카 수녀(유정의 고모)를 통해 둘은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되고, 빗장을 걸어놨던 내면을 풀어 보인다. 소설은 계간지 등에서 연재된 적 없이 공개되는 전작이다.“일단 구상이 끝나면 몰아쓰는 스타일이라 전작소설이 편하다.”고 작가는 말했다. 그러나 변명 같다. 알고 보면 머릿속에 얼개를 잡은 지 무려 8년을 곰삭힌 작품이다. 단숨에 써버리지 않았다면 가슴이 미어터져 버렸을 것이다. “소설집 ‘별들의 들판’ 원고를 넘긴 뒤, 그러니까 지난해 추석 즈음부터 취재를 시작했어요. 서울구치소를 다녔는데, 많은 사연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꼭꼭 그들(사형수들)을 만났으니까. 생의 벼랑 끝에 서있으면서도 얼마나 그 눈들이 맑은지….”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어 사는 인간 그려 “생에 아주 중요한 고비를 넘긴 것같다.”며 출간 소감을 밝힐 만큼 작가에게 이번 작품은 ‘숙제’였다. 소설이 속에서 발아한 시점까지도 정확히 기억한다.1997년 12월30일. 한밤에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라디오에서 흘러나온,23명의 사형수가 그날 처형됐다는 무심한 뉴스에 얼어붙었다.“내가 행복이라고 믿었던 것이 정말 행복일까 의심하게 됐다.”는 작가는 “당장 쓰고 싶었지만 아이(막내)를 낳을 때라 차마 살인 얘기를 쓸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어서 사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는 그의 말은 소설 뒤쪽으로 가면서 더욱 간절해진다. 작가가 속도를 내서 써내린 만큼 그 느낌은 곧이곧대로 독자에게로 전달된다. 두개의 이야기 얼개로 이어지는 형식 또한 독자들의 속도감을 뒷받침해 주기에 맞춤한 장치. 유정이 화자가 되어 상황을 전개하는 한편으로 윤수의 회고록(블루노트)이 장(章)마다 번갈아 끼어드는 식이다. 어린 동생 은수가 길거리에서 죽어간 기억 등 윤수의 풍파를 묘사한 블루노트 쪽은 ‘좀 심한 신파’다 싶게 눈물샘을 건드린다. 황석영은 “공지영의 글이 쉽게 읽히는 게 장점이자 불만인데, 이번 소설은 나도 읽기가 힘들고 몇번이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고 평했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책꽂이]

    ●온 생애의 한 순간(전상국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중진작가 전상국(강원대 국문학과 교수)이 ‘사이코’ 이후 9년 만에 낸 소설집.“놀이한다는 느낌으로 신명에 따라 글을 쓰다 보니 1년에 1편 정도밖에 쓰지 못했다.”고 그간의 과작에 대해 고백한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 중·단편 8편을 묶었다.‘실종’을 소재로 추리기법에 따른 작품이 많아 긴장감이 넘친다.9500원. ●투견(김숨 지음, 문학동네 펴냄) 1998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중세의 시간’이 당선돼 등단한 작가의 첫 소설집. 간질을 앓는 여자, 가장 역할을 하게 된 소녀 등 불우한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빌려 황폐한 현실과 내면풍경을 형상화했다. 작가 박범신은 “식물성을 가졌다는 원죄 때문에 마법에 걸린 불구의 인물들이 김숨의 서사를 결정짓는 키워드”라고 평했다. 표제작을 비롯해 ‘유리눈물을 흘리는 소녀’ 등 최근작까지 10편의 단편을 수록.8800원. ●길을 잃고 싶을 때가 많았다(정양 지음, 문학동네 펴냄) 작가는 1968년 등단 이래 시집 ‘까마귀떼’‘수수깡을 씹으며’‘눈 내리는 마을’, 판소리 평론집 ‘판소리 더늠의 시학’ 등을 상재한 시인 겸 평론가. 시인의 고향마을인 김제평야의 마현리 이야기에는 해학과 서정이 넘치고, 근간에 쓴 시편들에서는 세월에 휩쓸려 변질된 세상인심을 탄식한다.7500원. ●아름다운 아이(이시다 이라 지음, 양억관 옮김, 작가정신 펴냄) 일본식 성장소설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 식물 관찰이 취미인 열네 살의 주인공이, 남동생이 저지른 사건의 내막을 추적해 가면서 진실을 이해하고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담았다. 정교하고 매혹적인 문체가 ‘읽는 맛’을 돋운다. 작가는 나오키상을 수상한 신예.9500원.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 소녀(다이 시지에 지음, 이원희 옮김, 현대문학 펴냄) 중국 문화대혁명 기간 중 부르주아 지식인으로 분류돼 농촌으로 재교육을 받으러 간 두 소년이 그곳에서 만난 바느질하는 소녀와 나누는 사랑과 우정 이야기. 거의 모든 책이 금서로 묶여 있던 때에 이들은 발자크, 플로베르, 도스토예프스키, 스탕달 등을 읽으며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된다. 작가의 문화혁명 체험담이 생생히 녹아 있다. 작가는 중국 태생으로 프랑스에서 활약 중이며, 책은 2000년 ‘소설 속으로 사라진 여자’란 제목으로 국내에 출간된 적 있다.8800원.
  • [책꽂이]

    ●발끝으로 오래 설 수 없고 큰 걸음으로 오래 걷지 못하네(김홍신 지음, 해냄 펴냄) 15·16대 국회의원을 지낸 소설가 김홍신이 소설을 쓰지 못한 시간 동안 가슴에 품어온 이야기들을 수필집에 풀어놨다. 정치판에서 겪은 다양한 일화들, 문학수업을 받고 등단하기까지의 사연, 가족 이야기 등을 두루 엮었다.9000원. ●누드 크로키(태기수 지음, 이룸 펴냄) 1998년 현대문학 7월호에 ‘소와 양’이 추천돼 작품활동을 시작한 신인작가 태기수의 첫 창작집.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주제로 한 등단작 ‘소와 양’을 비롯해 표제작 ‘누드 크로키’‘롱아일랜드에 갇힌 사내’‘게임 월드’ 등 현대사회 인간의 실존을 생각해 보게 하는 중·단편 9편이 실렸다.9500원. ●맘모스 편의점(구광본 지음, 돋을새김 펴냄) 1986년 ‘소설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뒤 ‘나의 메피스토’‘미궁’ 등을 내놓은 작가 구광본이 소설집을 냈다.1988년 발표한 ‘섬’부터 최근작 ‘맘모스 편의점’까지 8편의 중·단편을 수록.24시간 편의점에 설치된 CCTV의 눈으로 그 안을 들락거리는 인간군상을 탐색하는 표제작 등은 “혼란과 미로의식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삶을 표현한 포스트모던 소설”(문학평론가 김성곤)이라는 평.8500원. ●텔크테에서의 만남(귄터 그라스 지음, 안삼환 옮김, 민음사 펴냄) ‘양철북’으로 199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78)의 장편소설. 신·구교의 갈등으로 촉발된 30년전쟁 끝 무렵, 독일의 시골마을 텔크테가 작품의 배경이다. 독일의 시인들이 전쟁으로 분열된 조국을 문학으로 치유해 보고자 모였지만,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리면서 위선과 탐욕의 본성을 드러내게 된다는 내용.2차대전 후 1947년 소설가 한스 베르너 리히터가 결성한 독일 ‘47그룹’의 이야기를 300년 전 시점에 대입시켜 소설로 재구성했다.8000원.
  • 분단의 비극과 고단한 현실 그속에 녹아든 ‘삶의 비애’

    이념의 가치가 표백돼 버린 상실의 시대. 아직도 그 이념의 문제를 화두로 붙들고 있는 작가가 우리 곁에 얼마나 남아 있을까. 소설집 ‘모란시장 여자’(창비 펴냄)를 내놓은 중견작가 정도상(45)은 그 몇 안 되는 글꾼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일상으로만 침잠해 들어가는 소설 쓰기의 유행에서 저만치 비켜선 작가는, 목을 길게 빼고 상처 입은 현실 구석구석에 연민의 눈길을 보낸다. ●‘개잡는 여자’의 눈에 비친 끔찍한 일상 원색적인 어감이 적나라한 현실 발언 같아서 애써 톤을 낮춘 것일까. 첫 작품이자 표제작인 단편 ‘개잡는 여자’는 한결 순화된 언어로 바뀌었다. 주인공은 성남 모란시장에서 개를 잡아 팔아 생계를 잇는 여인 미자. 날마다 수십 마리의 개를 죽이며 그악스럽게 사는 여자의 하루는 신산하기 짝이 없다. 어린 아들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고, 외도 끝에 딴 여자에게서 아이까지 얻은 남편은 이혼을 요구해 오고, 아버지는 허구한 날 누구인지도 모를 젊은 여자의 사진만 들여다본다. 비켜갈 수 없는 고단한 현실과 마무리되지 못한 분단비극을 균형감 있게 섞었다는 게 이번 소설집의 특징이다.‘개잡는 여자’에서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북에 두고 온 첫 부인을 못 잊어 기억을 묶어 놓고 산다면,‘그토록 긴 세월은’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어머니는 죽었다 깨어나기를 세 번이나 거듭하더니 아들에게 북에 살아 있는 아버지의 존재를 알리고서야 비로소 죽음을 맞는다. 이 두 작품에서는 분단과 이념의 잔영이 걸쭉한 필치, 때론 희극적 서사를 빌려 소설에 투사됐다. ●장기수 아들과 어머니의 사랑 이와는 달리 정색하고 읽게 되는 작품이 단편 ‘부용산’이다. 간첩 혐의로 감옥에 갇힌 장기수 아들에게 보내는 어머니의 편지가 기둥 서사. 그러나 모자의 극적인 상봉, 곧 이은 어머니의 죽음을 지켜보는 주인공 아들의 시선을 통해 이 작품의 주제의식은 어느 결에 ‘불멸의 사랑’ 쪽으로 부쩍 몸집을 불린다. ●수렁에 빠진 자본주의 사회 고발 수렁에 빠진 자본주의 사회를 액면 그대로 고발하는 작품도 있다. 아들의 병역비리를 무마시키려 검사에게 성상납을 하는 대기업 이사(‘오늘도 무사히’), 생활고에 시달리다 보험설계사로 나섰다가 카드빚에 몰려 죽음을 결심하는 여자(‘달빛의 끝’)는 낭떠러지로 떨어진 자본사회를 통찰케 한다. 작가는 지난해 연작소설 ‘실상사’를 펴내기 이전, 그러니까 1990년대 말부터 2000년 초에 발표했던 작품들을 이번 책에 묶었다. 스러진 이념의 가치를 “낡은 집”이라고 표현했듯이 작가는 새 소설을 통해 불멸은 곧 재앙이며, 시대 흐름이든 이념이든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함을 에둘러 주장한다. 소설가 방현석은 “불멸은 재앙임을, 거름이 썩어 가며 새로운 생명을 길러내듯 우리 삶도 부패하고 소멸하면서 비로소 새로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고 평했다. 작가는 1987년 광주항쟁소설집 ‘일어서는 땅’에 단편소설 ‘십오방 이야기’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오감도’ 불어로 번역한 쥘마社 사프랑 대표

    ‘오감도’ 불어로 번역한 쥘마社 사프랑 대표

    |파리 함혜리특파원|“위대한 한국 작가들의 문학세계를 알게 되고, 지금까지 모르던 세계를 프랑스 독자들이 발견하도록 하는 작업은 그 자체가 큰 즐거움입니다.” 18일부터 23일까지 파리 포르트 드 베르사유 전시장에서 열리는 제 25회 국제도서전에서 프랑스어로 번역된 한국의 문학작품을 집중 소개하는 프랑스 쥘마(Zulma) 출판사의 세르주 사프랑(55) 대표의 얘기다. 사프랑은 “가치있는 작품이 외국 독자들로부터 진가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수준높은 번역이 필요하다.”며 “정서와 문화가 달라 문학작품의 번역은 힘든 작업이지만 조금만 정성을 기울이면 감동을 전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쥘마 출판사는 지난 1995년 황순원의 ‘목노미 마을의 개’를 처음 번역 출간한 이후 10년째 매년 2∼3권씩 한국문학 작품들을 선보여왔다. 이제는 프랑스 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한국문학 작품을 가장 활발하게 번역출간하는 출판사로 꼽힌다. 가장 최근 선보인 작품은 이상의 시를 묶은 시집 ‘오감도’. 재불 번역가 손미혜씨와 툴루즈대학 문학부 교수인 장피에르 쥐비아트가 공동 번역했다. 이에 앞서 쥘마출판사에서는 황석영의 소설 ‘손님’과 ‘한씨 연대기’‘삼포가는 길’, 이상의 소설집 ‘날개’ 등을 번역 출간했다. 김유정의 소설집 ‘소낙비’는 2개 판형으로 출간됐다. 사프랑은 앞으로 황석영의 작품들을 계속 번역 출간하고 이상 전집도 낼 계획이다. 그가 황석영, 이상 등 특정 작가의 작품을 연속 출간하는 이유는 두가지. 우선 “작품이 이국적이면서도 세계인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공통의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며 두번째는 개인적으로 이들 작가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시인이며 수필가, 비평가이기도 한 사프랑은 “한국문학이 프랑스에서 대중화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꾸준하게 작가들을 소개한 결과 독자들이 서서히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며 “‘기타 아시아국가 작품’으로 분류됐던 한국문학 작품들이 몇몇 대형 서점에서 독립된 코너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뿌듯하다.”고 말했다. 한국 작가를 알리는 데도 열심인 그는 도서전 기간 중인 20일 황석영씨를 초대, 프랑스 독자들과의 대화의 시간을 마련했다. lotus@seoul.co.kr
  • [책꽂이]

    ●내 아내의 모든 것(김연경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소설집 ‘고양이의, 고양이에 의한, 고양이를 위한 소설’‘미성년’ 등을 내놓았던 여성작가 김연경의 새 소설집. 올해로 등단 10년째인 작가는 러시아 유학 중에 써모은 새 작품집에서 진부함과 범속함을 가장해 우리 삶의 지리멸렬한 통속성을 에둘러 까발렸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남편을 잃은 여자의 고통이 환상문법으로 묘사된 표제작 등 9편의 단편이 묶였다.9000원.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신대철 지음, 창비 펴냄) 국민대 국문과 교수인 신대철 시인이 제4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 이후 5년 만에 시집을 냈다. 군 복무 시절 최전방에서 북파공작원을 북으로 보냈던 기억을 구체적으로 풀어놓는 등 아픈 체험을 술회하기도 했다. 문학평론가 염무웅(영남대 독문과) 교수는 “그의 시는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듯한 극한의 지점으로 우리를 끌고 간다.”고 평했다.6000원. ●왜 쓰는가?(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열린책들 펴냄) 어린 시절 열렬히 좋아하던 야구선수를 우연히 만났으나 연필이 없어 사인을 못 받은 게 한이 되어 늘 펜을 지니고 다녔고 그 습관 때문에 작가가 됐다는 폴 오스터. 도회적이고도 감성적인 언어로 미국 문학을 대표한다는 그가 글을 쓰게 된 동기와 작가로서의 삶을 진솔하게 털어 놓은 자전적 에세이집. 생활 속 경험담 위주여서 부담없이 그의 작품세계에 접근하는 길라잡이 역할을 할 듯하다.6500원. ●잔혹한 계절, 청춘(다자이 오자무·오에 겐자부로 외 지음, 이유영 옮김, 소담출판사 펴냄) 오에 겐자부로, 다자이 오사무, 이시하라 신타로, 마루야마 겐지 등 일본 대표작가 10인의 단편 묶음. 청춘을 주제로 한 10편의 단편소설들에 전후 일본 사회의 어두운 내면의식이 투사됐다. 무라카미 류, 사카구치 안고, 후루야마 고마오 등 11명의 성(性)을 주제로 한 단편집 ‘슬픈 집착, 성애’도 함께 나왔다. 각권 9500원.
  • 소설가 김별아 ‘화랑세기’속 요부 ‘미실’ 출간

    작가 김별아(36)가 1500년 전의 여인을 불러냈다. 새 작품 ‘미실’(문이당)은 신라시대의 요부(妖婦) 미실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얽은 장편소설이다. 지난해 말 국내 문학상 사상 최고상금인 1억원의 세계문학상을 따내 문단의 시샘이 쏠렸던 작품이다. 왜 ‘미실’이었을까. 소설집 ‘꿈의 부족’(2002년) 이후 3년 만에 내민 장편의 여주인공이 하필이면 왜 우리 역사 최고의 팜 파탈이었을까. 역사의 먼지를 헤집어 소환해낸 주인공에게 작가의 애정은 유별나다.“미실은 어머니로서, 한 여자로서도 어느 한쪽 꿇리지 않고 당당한 인물이었어요. 요녀와 성녀의 이미지를 한 몸에 끌어안고 살았던.‘모성’과 ‘욕망’이 충돌하지 않고 한 인물 속에서 용해된 여성 캐릭터를 구현해 보고 싶었죠.” “남성 작가들의 소설에서는 여주인공이 늘 모성과 욕망의 어느 한쪽 이미지로만 치우치는데, 그 극단적 묘사법은 옳지 않다.”는 게 그의 말이다. ●자기운명에 굴하지 않은 주체적 여성 미실(549∼606)은 김대문의 ‘화랑세기’에서 “백 가지 꽃의 영겁이 뭉쳐 있고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고 수식될 만큼 미색이 빼어났던 여인. 진흥·진지·진평 등 3대 신라왕을 섬긴 데다 사다함·세종·설화랑·미생랑 등 네 명의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 태자 동륜(진흥왕의 아들)과도 염문을 뿌리며 왕실을 주물렀던 역사 속 인물이다. 작가의 의도대로 “뛰어난 미모로 본능에 충실했으면서도 운명에 굴하지 않는 ‘현대적’ 여성상”은 소설에 제대로 녹아났다. 왕실에 색(色)을 바치는 전문여성집단 ‘대원신통’에서 태어난 미실은 어려서부터 온갖 기예와 미태술을 익힌다. 지소태후의 아들 세종의 눈에 들어 입궁한 뒤 곧 권력다툼에 휩쓸려 밖으로 내쳐진다. 화랑 사다함을 만나 진정한 사랑에 눈뜨게 되지만, 왕실의 부름으로 다시 입궁한다. 이후 미실은 스스로 권력을 움켜쥐려는 욕망을 실현해 간다. 작가의 설명처럼 “권력을 키워 가는 과정에서도 아이를 8명이나 낳으며 모도(母道)를 충실히 걸었던 독특한 여성상”을 묘파하는 데 소설은 전력투구한다. ●용어 하나하나 史實에 맞춰 사용 작가는 이 소설에 3년여를 공들였다.“중국 후한의 장수 삭매의 사랑과 운명을 무협소설풍으로 그린 단편 ‘삭매와 자미’(소설집 ‘꿈의 부족’)를 쓸 무렵 역사 소재 소설을 구상했다.”며 “그러나 역사를 최대한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쓰겠다는 원칙을 세웠었다.”고 말했다. 그 원칙은 철저히 지켜졌다. 소설에 등장하는 꽃 이름, 고사성어 하나까지 시대적으로 들어맞는 것인지 따졌을 정도다. 신라시대에 나올 수 없는 용어들은 추려냈다. 때로는 고어투의 문체가 적당히 끼어들어 소설에서는 고졸한 맛이 난다. 최근 여성 작가들이 황진이·나혜석 등 역사인물들을 작품에 끌어들이는 경향이 아이디어 빈곤 때문이 아닌지 짐짓 물었다. 대답은 솔직했다.“인정할 부분”이라더니 힘센 변명 한마디를 덧붙인다.“요즘처럼 빨리 돌아가는 현실에선 소설의 ‘영원성’을 포착해 내기가 힘드니까.” 받아 놓은 큰 상금은 대체 어디에 쓸 거냐는 질문에 “열살짜리 아들과 9월쯤 캐나다로 날아가 한 2년 지내다 오겠다.”며 엉뚱한 소리다.“죽을 때까지 쓰는 게 삶의 목표”라니 작가의 좌표에서 발을 빼려는 계산은 아닐 테고. “역사소설을 좀더 써보겠다.”고 한다. 청계천 복원 기념으로 서울시에서 주문한 조선시대 배경의 소설을 준비하느라 요즘은 조선왕조실록에 푹 빠져 지낸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이성아 첫 소설집 ‘절정’

    이혼율 55% 시대. 현실에 눈밝은 이 땅의 작가라면 결혼제도의 모순은 어떤 시각으로든 한번쯤 깊이 고민했을 법한 글감이다.1998년 ‘작가’지에 단편 ‘미오의 나라’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성아(45)는 그런 점에서 볼 때 누구보다 시대의 현실에 민감한 작가다. 첫 단편을 발표하고 6년의 침묵을 거친 그가 창작집 ‘절정’(이룸 펴냄)을 내놓았다. 사회적 존재로서 여성의 좌표와 결혼제도를 탐색하는 펜끝이 더없이 날렵하다. 모두 9편의 단편으로 엮인 책은 여자들의 이야기로 넘쳐난다. 그 이야기들은 언제나 사회적 문제로 치환돼 소설 이상의 의미를 남긴다. 결혼제도의 모순을 고민한 많은 소설들이 가정의 울타리 언저리에서 얘기를 접었다 폈다 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번번이 결혼을 사회적 문제와 병치시키기 때문이다. 80년대 운동권의 기억이 여전히 소설의 주요소재가 되는 대목은 특히 흥미롭다. 여자는 대학시절 운동권에서 만난 남자를 잊지 못하다 결국 남편의 외도를 계기로 이혼하고(‘삿포로 공산당’), 머리깎고 절로 들어간 여자에게도 운동권에 함께 몸담았던 남자에게 버림받은 상처가 있다(‘눈꽃’). 일상과 내면으로 침잠하는 여성적 글쓰기 경향과는 저만치 거리가 있다. 화석화된 결혼제도에 대한 의문을 푸는 사이사이로 한국(인)과 일본(인)의 관계가 의미심장한 소재로 끼어들기도 한다. 한국인 여자와 일본 남자 기자와의 모호한 만남을 그린 ‘가릉빈가 우는 저녁’, 정부나 법률의 개입이 싫어 남자와의 동거를 택한 일본인 여자가 나오는 ‘미오의 나라’ 등에서다. 다분히 직설화법의 페미니즘 소설로도 읽힐 만하다. 소설가 송기원은 “작가가 필생으로 추구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여성적 조건으로부터의 자유인지도 모른다.”고 이성아의 작품세계를 평했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책꽂이]

    ●사막에서 사는 법(이선 지음, 민음사 펴냄) 1990년 제14회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작가의 소설집.9편의 단편에 다양한 성격과 배경을 가진 인물들을 내세워 잔잔한 감동과 일상의 냉혹함을 균형있게 부각시켰다. 소시민 주인공들을 통해 삶의 아이러니를 묘파하는 작법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병을 거꾸로 세워 흔들면서 물을 쏟아내는 듯한 망설임없는 글쓰기”라고 평가했다.9000원. ●사로잡힌 영혼 맘루카(로베르 솔레 지음, 윤은오 옮김, 아테네 펴냄) 지은이는 국내에 출간해 주목받은 나폴레옹 이집트 원정기 ‘나폴레옹의 학자들’의 저자.19세기 후반 유럽 열강에 둘러싸인 이집트 격동기를 배경으로, 시대를 앞서간 한 여성 사진가의 이야기를 통해 19세기 이집트 사회를 되짚어보는 역사소설.1만 5000원. ●하늘렌즈(가타야마 교이치 지음, 권남희 옮김, 북폴리오 지음) 지은이는 최근 흥행한 영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원작으로 국내에 두꺼운 팬층을 확보한 46세의 일본 작가. 지금까지 선보였던 연애소설과는 다른 독특한 구성의 SF. 중학생 넷이 사이버 공간에서 만나 불가사의한 일들을 겪는데…. 속도감있는 전개에 위트가 넘친다.9500원.
  • 성석제씨 새 소설집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성석제씨 새 소설집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

    장단에 겨워 흥겨운 입심을 뿜어내는 듯한 글쟁이. 성석제(45)는 ‘입담’‘해학’‘농담’ 등 문학의 듬직한 밑천이 되는 수사들을 한몸에 받아온 작가다. 가뜩이나 얇아진 남성 작가층을 대변하는 그의 소임은 그래서 더욱 막중하다. 익살과 재담으로 상징되는 ‘성석제표’ 소설 쓰기의 틀거리 안에서도 그는 꾸준히 의외성과 자기증식을 모색해 왔다. ●주변에 널려 있음직한 인물 등장 새로 묶어낸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창비 펴냄)는 그를 에워싼 수사들이 효력발생 중임을 보여주는 소설집이다.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이후 근 3년 동안 띄엄띄엄 발표해온 중·단편 9편을 묶었다. 작가는 “2,3년의 세월 동안 잘 논 시간의 소산”이라고 했다. 하지만 곧이 듣고 말기엔 작품에 내장된 서사전략은 넘치도록 다양한 차원에서 빛을 발한다. 주변에 널렸음직한 각양각색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앉힌 화술은 낯익다. 첫 단편인 ‘잃어버린 인간’에서는 작가 자신의 에피소드에서 발아한 듯한 고백적 어투가 먼저 엿보인다. 작중 화자는 잘 나가는 소설가. 재당숙모의 부음을 듣고 찾아간 고향에서 유년시절을 반추한다. 자신이 못 살게 굴었던 재당숙의 아들 쌍둥이가 진작에 굶어 죽었다는 사실에 혼란스럽다. 재당숙모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얼떨결에 초상집을 찾아가는 주인공의 행세에서는 작가의 해학적 기질이 묻어난다. 그러나 사이사이 능청스럽게 풍자정신을 발휘한다.‘잃어버린 인간’에서 액자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한 재당숙의 삶은 그런 의도다. 이렇다 할 이념도 없이 시류에 떠밀려 사회주의자, 독립운동가로 평생을 외진 곳에서 살다간 재당숙은 현대사가 빚어낸 기형적 산물이었다. 인물의 본질을 까탈스럽게 파고드는 글쓰기 자세는 대부분의 작품에서 엿보인다. 부(富)에 대한 허망한 집착과 욕망을 보여주는 ‘인지상정’, 사이비 예술가와 시골에서 요양중인 화자의 이야기를 얽은 ‘본래면목’, 속물지식인의 태생적 배경을 되짚은 ‘소풍’ 등이 그 계열에 세울 작품들이다. ●작가가 부리는 언어에 윤기가 돌아 작가가 부리는 언어들에는 윤기가 돈다. 예의 사투리 대사체의 운율감, 적당히 희극적인 인물들이 질감을 돋우는 것도 ‘성석제 스타일’이다. 뒤집어, 매번 같은 처방에 내성이 생긴 독자들은 시큰둥할 수도 있을 터. 그러나 표제작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를 대하면 작가의 범상찮은 자기갱신력에 또 한번 기가 꺾이고 말지 않을까 싶다. 리얼리즘을 벗어났나 싶다가도 어느새 시속(時俗)에 푸욱 발을 담그는 듯 다른 결의 이야기들을 교직해내는 솜씨에 감성과 이성이 함께 긴장하게 된다. 데뷔 20여년을 바라보며 “작품에 촉촉한 물기 같은 게 생긴 것 같다.”고 자평하는 작가는 표제작에 새삼 모성의 기억을 쓸어담았다.1920년대 시골마을의 한밤. 길쌈하는 어미와 고전소설 ‘추풍감별곡’을 읽어주는 맏딸이 등장하는 ‘어머님이 들려주시던 노래’는 실눈을 떴다 감았다 혼몽한 감상마저 떠안긴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책꽂이]

    ●유클리드의 막대(장 피에르 뤼미네 지음, 김윤진 옮김, 문학동네 펴냄) 7세기 지중해 연안에 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역사를 통해 서양학문의 세계를 돌아봤다. 인류의 발전에 위대한 자취를 남긴 학자들의 업적과 일화를 흥미롭고 박진감 넘치게 묘사한 역사소설이자 과학·철학소설. 지은이는 프랑스의 천체물리학자.8800원. ●소설가의 죽음(전2권)(패트리샤 콘웰 지음, 홍성영 옮김, 노블하우스 펴냄) 시체안치소를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 법의학 스릴러. 유명 여류소설가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 원고를 둘러싸고 잔혹한 살인게임이 벌어진다. 어려운 전문용어가 등장하는 법의학 소설의 편견을 버려도 좋을 듯. 사건과 드라마 위주의 전개 덕분에 수월하게 책장이 넘어간다. 각권 8000원. ●나비(안도현 지음, 리즈앤북 펴냄) 안도현 시인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1960년대 말 인구 2000명 규모의 시골마을 이야기. 말똥구리 한마리로 즐거웠던 시간들, 술지게미로 배를 채우는 아이들, 반공 웅변대회 등 가난했지만 훈훈했던 그때 그 시절을 추억했다.8000원. ●그 남자에게 보내는 일기(유미리 지음, 송현아 옮김, 동아일보사 펴냄) 재일교포 작가 유미리가 2001년 11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내밀한 사적 영역을 송두리째 드러낸 일기책. 훗날 연인이 된 스승이자 연극연출가인 히가시 유타카와의 만남과 자신을 절망으로 몰아간 그의 죽음, 의도하지 않았던 임신과 출산 등 삶의 우여곡절을 일기형식으로 담담히 털어놨다.1만 1500원. ●남향(南向)(권명옥 지음, 열화당 펴냄) 1970년대 초 ‘심상’지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시인(세명대 국문학과 교수)이 뒤늦게 첫 시집을 냈다. 성서 속에서 퍼온 듯한 이미지와 상상력이 결합한 40편의 시들이 묵상하는 듯한 고요함을 안긴다.7000원. ●이상한 나라의 프로포즈(김하인 지음, 북웨이브 펴냄) ‘국화꽃 향기’의 베스트셀러 작가 김하인이 ‘사랑’을 주제로 단편 13편을 묶은 소설집.‘바다 속으로 내리는 눈’‘과일깎는 남자’ 등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듯 상상을 부추기는 감성소설들이 묶였다.8800원.
  • ‘늙음’ 바라보는 8개의 시선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2002년 한국인 평균수명은 남자 73.4세, 여자 80.4세. 며칠전엔 세계적 비누회사의 새 모델로 96세 할머니가 발탁됐다는 뉴스가 외신란을 장식했다. 바야흐로 본격 노년사회를 살고 있음이다. ● ‘장수시대’ 발빠른 기획 눈길 황금가지에서 펴낸 소설집 ‘소설, 노년을 말하다’(김윤식·김미현 엮음)는 그런 맥락에서 발빠른 기획이 눈길을 붙들어매는 책이다.3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국내 현역작가 8명이 노년 소재의 단편을 각각 한편씩 써 묶었다.8편의 신작 단편들은 그러니까 ‘소설’이라는 외피를 둘러쓴, 노년사회를 향한 작가 저마다의 ‘발언’인 셈이다. 소설집에 참여한 이는 한승원(66) 홍상화(65) 이청해(57) 한정희(55) 이순원(48) 하성란(38) 한수영(38) 이명랑(32).‘늙음’이라는 텅빈 거푸집 같은 기호 쪽으로 여덟 개의 시선들이 일제히 쏠려 있다. 늙음의 현현(顯現)이 에누리없이 까발려진 작품은 하성란의 ‘712호 환자’다.30대 후반에 맹장염 수술 도중의 마취사고로 21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지내온 남자가 주인공. 어느날 깨어보니 백발의 노인으로 변해버린 남자는 ‘현재의 몸’으로 ‘과거의 시간’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늙음이 싸목싸목 기척을 내며 오는 게 아니라 삽시간에 다가오는 것이란 은유가 직설적인 설정이다. 주인공 남자가 자신의 신체적 변화를 발견하고 당혹해하는 대목들은 적나라하기 그지없다. 거울에 비친 남자는 “오촌 당숙뻘쯤 되는 노인의 얼굴”이었다가 “얇고 흰 머리카락이 실오라기처럼 환풍기 바람에도 날린다.”거나 “수분을 잃은 살갗에는 하얗게 살비듬이 일어 옷을 갈아입을 때면 먼지처럼 날린다.”고 묘사되기도 한다. ● 노인문제를 독자들 사유공간으로 하성란의 주인공이 노년의 좌표를 인정하지 못해 과거에 머물러 있다면, 현재를 치열하게 긍정하는 캐릭터도 있다. 한수영의 ‘벽’에 등장하는 칠순의 아버지에겐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말 그대로 죽을 힘을 다해 빚을 갚고 집을 고치는 이상한 벽(癖)이 있다. 노인은 빚을 갚거나 집을 다 고치기 전에는 죽을 수 없다는 명분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한승원의 ‘태양의 집’에 나오는 노인은 손자를 통해 생을 확장시키려는 순수한 열망을 가졌다. 빚에 몰린 사위 때문에 외손자를 떠맡게 된 71세의 노인은 허름한 시골집에 어울리지 않게 ‘태양의 집’이란 현판을 단다. 어린 손자의 기사회생을 바라며 마치 제의처럼 현판을 단 노인, 거기에다 작가는 유년시절 아버지보다 더 짙은 그늘이 돼주었던 할아버지의 정을 오버랩시킨다. 작가 개개인의 색채를 음미하게 하는 소설은 아니다. 더는 부정할 수 없는 노인문제를 소설독자들의 사유공간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인, 선의(善意)가 돋보이는 공모(共謀)의 소설집이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김지우 첫 소설집 ‘나는 날개를‘

    김지우 첫 소설집 ‘나는 날개를‘

    지난 2000년 제3회 창비신인소설상을 받으며 등단한 여성작가 김지우(41)의 첫 소설집이 나왔다.‘나는 날개를 달아줄 수 없다’(창비 펴냄)에는 등단작 ‘눈길’을 비롯해 지난 5년 동안 발표해온 단편 7편이 묶였다. 많은 여성작가들이 그렇듯 이 작가도 일상에 주목했다. 하지만 개인적 경험에 기대 지나치게 사유화한 글쓰기 흔적을 보이진 않는다. 화자의 의식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선 굵은 구어체 문장, 풍성한 대화들로써 이음새 없이 상황을 연결해가는 요령 등 필치에서는 오히려 남성적인 호흡이 감지된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강퍅한 세상살이에 치일 대로 치인 캐릭터다.‘디데이 전날’‘눈길’‘그 사흘의 남자’ 등은 경제적 결핍을 온몸으로 견뎌내는 이들이 꾸려가는 이야기. 사변적인 글감에 의존하는 안이한 글쓰기가 아닌, 부지런히 삶의 현장으로 다리품을 판 공력이 두드러진 작품들이다. 첫번째 단편 ‘디데이 전날’은 IMF사태 때문에 거리로 내몰려 보험사기단으로 전락한 밑바닥 인생들을 그렸다. 그러나 섣부른 동정을 보내거나 그들의 삶을 쉽게 부정하지 않는다. 닳고 닳은 일상의 풍속도에서도 눈밝은 작가는 희망의 모티프를 낚아올린다. 빚더미에 허덕이는 여자가 주인공인 단편 ‘그 사흘의 남자’에서는 벼랑에 내몰린 위기상황에서도 인간(남녀)관계에 새로운 움이 틀 수 있음을 웅변한다. 낚시꾼들을 뒷바라지하며 가까스로 생계를 잇는 한 가정을 들여다본 ‘물고기들의 집’도 마찬가지. 한 집에서 겉돌며 살던 비(非)혈연 관계의 세사람이 용케 융화의 씨앗을 찾아간다. 뭉근히 끓여낸 누룽지탕처럼 걸쭉한 입담의 주인공이 신인 여성작가란 사실이 놀랍다. 문득 책날개의 약력을 들추게 된다. 우리말을 부리는 요령에도 감칠맛이 넘친다.“칠석날에나 비가 한 줄금 했던가. 유월 중순부터 입초시에 오르내리던 장마는 꾀꾀로 장대비나 두들겨놓고 갈 뿐, 금평저수지 황토바닥이 피죽만 남은 채 쩍쩍 갈라지고 수초만 우무룩하도록 바람 한점 없이 해만 말끔했다….”(‘물고기들의 집’ 도입부)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지괴소설 ‘부여 현감 귀신 체포기’ 펴낸 김탁환 씨

    지괴소설 ‘부여 현감 귀신 체포기’ 펴낸 김탁환 씨

    ‘불멸의 이순신’의 저자 김탁환(37)씨가 본격 지괴(志怪)소설을 냈다. 새 소설의 제목은 ‘부여 현감 귀신 체포기’(이가서 펴냄). 지괴소설이란 말 그대로 괴이한 일들을 기록하는 형태의 소설. 국내에서는 익숙하지 않지만 중국 육조시대(3∼6세기)에 크게 유행한 소설의 한 갈래다. 황당하고 괴이한 이야기 소재로 서사의 즐거움을 안기는 청나라 초기 포송령의 소설집 ‘요재지이(聊齋志異)’를 떠올리면 이해가 빠를 듯하다. 김씨는 “장르를 확실히 규정해주는 것이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란 판단에서 ‘지괴소설’이란 낯선 장르를 책 표지에 명기했다.”고 말했다. 정확한 장르구분 자체가 훌륭한 독서 가이드라인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부여 현감 귀신 체포기’는 모두 10편의 이야기로 묶인 연작소설이다. 주인공은 부여 현감 ‘아신’.800여년 동안 낙화암에서 자살한 사람이 없던 부여에서 갑자기 하루에 한 명씩 투신 자살자가 생기고,2월 보름이 돌아올 때마다 열살 남짓한 사내아이가 백마강에 빠져 죽지만 시신을 찾을 길이 없다는 풍문이 돌고, 열흘 만에 소 서른마리와 말 열세마리가 감쪽같이 사라지거나…. 이런 괴이한 일들이 일어나고 부여 현감이 사건해결에 나선다는 줄거리 형식을 띤다. 조선 중종때의 실존인물 전우치도 등장한다. 그가 현감을 돕는 사건해결의 주체로 등장하는가 하면, 현감이 연모하는 여스님 ‘미미’가 위기상황에서 또 그를 구해주기도 한다. 지괴소설 장르를 빌린, 김탁환식 ‘팩션’인 셈이다. “역사추리와 팬터지 소설, 두가지 장르를 개척하는 것을 평생의 글쓰기 숙제로 정했습니다. 이번 소설은 쓰고 싶었지만 능력이 모자라 오랫동안 주저했던 건데…. 하지만 이젠 ‘지괴’란 장르에서는 어느 정도 자신이 붙었다고 할까요.” 새 소설을 완성하기까지 그는 우리 구비설화나 민담들을 모조리 섭렵하다시피 했다. 예컨대 2권에 실린 9번째 단편 ‘내 고운 인형에게’는 구미호 이야기에서 소재를 빌렸다. 아이디어 많기로 소문난 작가답게 재기발랄한 장치들이 책속에는 많다.“글자를 꼭 가로로만 배치할 필요가 없다.”는 그의 주장대로, 간간이 그림처럼 무정형으로 흘려진 글자배열도 재미있다. “작중 배경이 모두 부여에 실재하는 장소들이어서 책을 들고 역사여행을 떠나도 좋을 것”이라는 그는 “심각할 것 없이 낄낄거리며 읽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장편 ‘열두마리 고래의 사랑이야기’(1996년) 이후 ‘나, 황진이’(2002년) ‘방각본 살인사건’ 등 역사소재 소설을 꾸준히 써온 그에게 새 소설은 10번째 전작장편. 한남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그로테스크 멜랑콜리, 상실에 대응하는 한 가지 방식(천운영의 소설세계)/차미령

    [서울신문 신춘문예] 평론 당선작-그로테스크 멜랑콜리, 상실에 대응하는 한 가지 방식(천운영의 소설세계)/차미령

    진실이 나를 절망으로 밀어 넣으려 한다면 나는 단호히 거부할 것이다. ―천운영,‘포옹’ 천운영 소설에 대한 보다 정확히 말해,‘바늘’이 출간되고 난 후 이 작가의 첫 소설집을 중심으로 한 지금까지의 논의는 ‘엽기성’,‘동물성’,‘야생성’,‘야수성’,‘육식성’,‘파괴성’,‘공격성’,‘관능성’ 등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 천운영 소설에 이르러 우리 문학은 “가부장적 질서를 난도질하는 육체적 질감을 지닌 현장(김양선,‘기이하고 낯선 가족과 여성이야기’)”을 갖게 되었다는 식의, 지난 연대의 여성 소설과 천운영 소설을 구획짓고자 하는 시도가 여러 평문에서 발견되는 것은 그러므로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불감증, 거식증, 불임, 도벽 등과 같은 히스테리적 징후로서만 즉, 부정으로서만 여성 소설의 위반성을 거론할 수 있었던 지난 연대와는 달리,“맹수의 이미지를 띤 여성인물들(황종연,‘탈승화의 리얼리즘’)”은 유례없이 “전복적이고 파괴적인(황도경,‘환상 속으로 탈주하라’)”힘을 독자들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 작가의 차기작에 대한 관심이 “신선한 살과 피를 원하는 이 짐승의 다음 먹잇감은 무엇이 될 것인가(남진우,‘늑대의 후예’)”쯤으로 표현되는 것이 지금은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이다. “육체적 질감”,“신선한 살과 피” 등의 앞서 인용한 비평적 수사에서 은연 중 드러나듯, 천운영 소설이 보여 주는 이러한 특징은 무엇보다 그 생생한 현장감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러나 이제는 잘 알려진 ‘발로 쓰는’ 이 작가의 스타일이나 그로 인한 생동감 넘치는 디테일의 창출에도 불구하고, 천운영이 정작 공들여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그가 취재한 세계, 바로 그 곳으로부터 도출되지는 않는다. 아무리 직접 회를 뜨고, 야나기상의 문신을 보고, 소머리 가르는 접칼을 쥐어도, 작가의 시선은, 장어를 다루는 횟집 주방장의 손놀림에서 텅 빈 수족관 앞에 망연히 앉아 있는 그의 ‘아내’에게로, 남자의 육체에 수놓아진 화려한 거미 문신에서 문신사의 자살한 ‘어머니’에게로, 뼈와 살이 갈려진 소머리에서 우시장 노동자의 ‘할머니’와 ‘연인’에게로 이동한다. 한 세밀한 묘사가 담고 있는 내용이 작품의 전체적인 의미를 좌우하는 데까지 미치지는 못한다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 앞에서, 우리의 포커스 또한 이동할 때가 된 듯하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질문들;천운영 소설의 세밀한 묘사와 이에 기반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에 가려 미처 드러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저토록 야수적이고 공격적이며 파괴적인 인물들 내면에는 과연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가? 작가의 두 번째 창작집 ‘명랑’이 출간된 지금, 우리가 시도해야 할 작업은 엽기성과 파괴성의 이면 혹은, 공격성과 야수성의 연원을 추적해 들어가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그 그로테스크함으로 인해 앞서 언급한 비평적 키워드들의 시발점의 하나가 되었던 천운영 소설 인물들의 ‘몸’으로부터 출발해 보자.“감각적이고 물질적인 신체를 보여(심진경,‘아름다움과 추함을 가로지르는 섹슈얼리티의 모험과 위반’)”주면서 “몸의 해부학적 묘사라 할 만큼 유난히 신체에 대한 묘사에 집착(황도경, 앞의글)”한다고 평가받는 이 작가의 소설에서, 몸, 그것으로부터 다시 시작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주목하는 몸의 일부는 얼굴이 아니다. 바로 ‘등’이다. 우리 중 누군가 자신의 ‘등’의 진짜 모습을 본 사람이 있을까. 등은 인간의 육체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사람들은 대개 죽을 때까지 자신의 등의 실제 모습을 모르고 산다. 심지어 거울 앞에서도. 그 실재를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은 무의식의 세계를 은유하고 있으며, 나조차 알지 못하는 이면을 타자는 볼 수 있다는 인식은 불안과 공포의 근원으로 자리한다. 만약 자신의 등이 “굽은 등”이고, 자신이 “곱사등이”이라면, 그 불안과 공포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된다.‘포옹’의 ‘나(인경)’는 “평면만을 보여주는 거울의 기만성(1:213, 이하 괄호안의 표기는 수록소설집:페이지수)”을 충분히 알고 있다.“그렇게 화장을 하고 차려 입으니 너무 예쁘구나(1:213)”라는 거울 속 어머니의 말은 그러므로 거짓이라는 것도. 일찍이 멜라니 클라인이 말한 대로 거울의 드라마가 막을 내릴 때 더 이상 엄마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아이의 고통은 원초적인 것에 육박하지만, 거울이 제공하는 이 기만적인 나르시시즘은 자기정체성을 구성해 내고, 거울을 통과한 후에야 아이는 자신을 3인칭으로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굽은 등을 보기를 두려워하는 인경은 여전히 엄마의 일부일 때에만 완전하다고 느낀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진실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니, 그것이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엄마 품에 안겨 거울 속 나를 바라보(1:213)”며, 자신의 뒷모습이 “백지”로 남기를 바란다. 진실이 절망을 가져다준다면 그 진실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 그것은 자신이 불완전하다고 믿는 그녀가 불우한 삶을 견뎌 내는 일종의 방법론이다. ‘포옹’에서 인경의 등은, 어머니를 제외한 그 누구도 손대기를 꺼려한다는 점에서는 나조차 어찌할 수조차 없는 내 안의 괴물―‘바늘’에서 곱추를 연상시키는 ‘나’의 등이나,‘숨’에서 육식동물을 연상시키는 할머니의 단단한 등뼈를 보라―이지만, 거꾸로 누군가의 손길을 간절히 요구한다는 점에서 소통을 불러오는 몸의 유일한 창구가 된다.“어느 누구도 자신의 등을 쓰다듬을 수는 없는 법이며, 타인만이 그 등을 쓰다듬고 보듬어 줄 수 있”(‘등뼈’)다는 소설 속의 한 전언은 천운영 소설에서 타인과의 소통이란 것은 곧 위무의 다른 말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자신은 볼 수조차 없지만 타자는 볼 수 있으며, 자신은 안아주고 보듬어 줄 수 없지만 타자는 안아주고 보듬어 줄 수 있기 때문에,“아내의 굽은 등”“할멈의 굽은 등”(‘행복 고물상’)에서 번져 나오는 고독감은 남편과 이웃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키고, 지친 이를 위로하는 가장 좋은 방편은 “등을 쓰다듬어 주는” 것(‘멍게 뒷맛’)이며, 위로받는 가장 좋은 방법 또한 “등을 내맡기는”(‘아버지의 엉덩이’) 것이다. 천운영 소설에서는 환상 속에 잠깐 이루어진 만남 또한 “등을 만졌던 것 만 같다”(‘월경’)라고 표현된다. 이런 식이라면 타인에 대한 분노나 타인으로부터의 외면은 등을 돌리거나, 등을 치는 것으로 그려질 성싶다. 마치 아버지를 경멸하는 아들이 제 아버지의 “등을 쏘아 보”고, 그 아버지의 “등짝을 후려”치고 싶어 하는 것(‘아버지의 엉덩이’)처럼, 친구들이 대항할 힘도 없는 ‘나’를 “등을 밀쳐 땅바닥에 넘어뜨리”던 것(‘세번째 유방’)처럼, 살인 장면의 마지막 기억이 “남자가 정말 당신 등을 밀었다”(‘멍게 뒷맛’)로 남게 되는 것처럼. 그러나 무엇보다 천운영 소설에서 등은 대부분 대상­타자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작중인물의 불안을 담고 있다. 등을 돌린 사람 혹은, 돌아선 사람의 등에 대한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사례들;“등을 돌리고 누워”있는 남편 뒤에서 그의 아내는 “침묵하는 당신(남편)의 등”을 바라보며 그 “등이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고,“왜소한 그 등을 보이고 당신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다”(‘당신의 바다’)며 견딜 수 없어 한다. 연인들의 연애의 끝은 또 어떠한가. 꿈 속에서 골목을 헤매던 여자는 길 모퉁이에서 “남자가 등을 보이고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가가지만 모퉁이를 돌면 새로운 모퉁이만 계속해서 나타날 뿐이고(‘모퉁이’), 연인에게 입 맞추던 여인은 “등을 보이고 돌아”선 후 그로부터 “점점 멀어진”다(‘세번째 유방’). 이렇듯 도저한 상실감이 등의 이미지를 빌려 가장 성공적으로 형상화된 소설은 그 표제가 아예 ‘등뼈’이다. “여자가 떠났다”라는 간결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등뼈’는 자신에게 맹목적으로 집착하던 여성이 떠난 이후 전개되는 남성의 황폐한 내면풍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아무런 징후나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1:138)”라는 구절에서 강조되고 있듯이, 여자의 실종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것이어서 남자에게 그것은 “떠난 것이 아니라 증발한 것(1:143)”에 가까우며, 남자는 당연히 여자의 그러한 증발에 대비할 수 있는 아무런 준비도 해 놓지 못한 채이다. 그러나 “그때 왜 여자의 등을 쓰다듬어주지 못했을까(1:148)”라는 소설 속의 한 구절을 제외한다면 남자가 여자의 사라짐을 안타까워하는 모습은 쉽사리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 남자는 특이하게도 “여자가 떠난 뒤 살 속에 숨은 뼈에 집착하기 시작(1:150)”한다. 주위 사물들에서 뼈를 연상해 내고(1), 원인을 알 수 없는 요추디스크로 고통받다가(2), 급기야 뼈를 찍은 엑스레이 필름을 닥치는 대로 모으며(3), 결국 아무런 식욕조차 느끼지 못하게 되어 그의 몸엔 뼈만 두드러지게 된다(4). 여자가 떠난 후 이 남자가 보여주는 모든 증상((1)∼(4))은 그러니까 ‘뼈’에 대한 집착으로 수렴된다. 그런데 왜 하필 ‘뼈’일까? 등에 통증이 느껴졌다. 손을 돌려 등을 만졌다. 손끝에 등뼈 마디마디가 분명히 잡혔다. 남자는 욕조에서 기어 나와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 서린 김을 걷어내자 남자의 퀭한 얼굴이 보였다. 광대뼈가 툭 튀어 나오고 눈이 쑥 들어간 낯선 사람이 거울 속에 들어 있었다. 남자는 가까스로 몸을 움직여 거울에 등을 비추어보았다. 등골이 패고 뼈가 튀어나온 등이 어렴풋이 보였다. 여자가 그 등뼈에 숨어 남자의 등을 하염없이 쓰다듬고 있었다.(1:158) ‘뼈’에 대한 남자의 집착은 그의 일상을 와해시키고 결국 그 자신을 말 그대로 뼈만 남게 만들어 버리는데, 사라진 여자가 등뼈는 말할 것도 없고 광대뼈, 턱뼈, 어깨뼈, 복사뼈까지 유난히 뼈가 도드라졌으며 식성도 특이해서 생선뼈, 닭갈비뼈, 조개껍데기와 같이 뼈에 붙은 살들만을 골라 먹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러한 남자의 집착은 그녀에 대한 남자의 무의식적 동일시 즉, 사라진 대상을 불완전하게나마 보유하고자 하는 멜랑콜리적 동일시가 빚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대상이 사라지면 누구나 그 대상에 대한 집착을 어느 정도 유지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현실적인 요구와 함께 대상에 투자되었던 리비도는 다시 회수된다(프로이트,‘애도와 우울’). 이것이 상실된 대상에 대한 상식적인 ‘애도’의 과정이다. 그러나 상실된 대상에 대한 리비도가 너무나 강해서 현실에서 상실된 대상을 대체할 만한 다른 대상을 찾지 못할 때, 주체는 상실된 대상을 내면화(internalization) 혹은 합체(내적 동일화,incorporation)함으로써 계속 보유하고자 한다(J 버틀러,‘멜랑콜리적 젠더/거부된 동일시’). 결코 재현될 수 없는 상실된 대상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살아 있는 현재로 끊임없이 소환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남자가 가까스로 거울에 비춰본 자신의 등에서 “여자가 그 등뼈에 숨어 남자의 등을 하염없이 쓰다듬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는 환상으로 처리되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이러한 맥락에서 음미해 볼 만하다.“뼈가 튀어나온 등”은 현재의 환상 속에서 과거의 상실된 대상과 남자가 조우하는 장소로 공간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천운영 소설의 인물들은 이처럼 상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그리고 그 저항이 지극히 위장된 형태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멜랑콜리적 주체의 성격을 상당 부분 공유하고 있다. 상실로 인한 슬픔이 애도로 승화되지 못한 원인은 무엇보다 이들이 도저한 상실감의 원인이 된 대상에 대해 ‘의식적으로는’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환상 속에서조차 대상과의 만남이 허락되지 않을 때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난폭한 짐승(2:119)”이 출몰하게 된다. 이 “난폭한 짐승” 혹은,“광포한 짐승” 혹은,“제 속에 든 짐승”은 인물들 특히, 여성인물들을 숨이 차도록 달리게 만들기도 하고, 그녀들에게 무서운 식욕을 부추기기도 한다. 다음을 보라:애도할 만한 죽음이 나타나면 여자 속에 숨은 짐승도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언가 슬픈 일이 일어나기를, 짐승을 다스릴 만한 제물이 나타나기를 여자는 빌었다(‘모퉁이’, 강조 인용자).“애도할 만한 죽음”이 여자 속 숨은 짐승을 사라지게 하고,“무언가 슬픈 일”이 그 짐승을 다스릴 것이라는 저 여자의 내면이 가리키는 것은, 자신의 상실감의 원인이 되는 대상이 앞에 있다면 그 상실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막한 기대이다. 통제 불가능한 내면은 분명 무언가의 상실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실된 대상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상실된 대상이 눈 앞에 있어 이를 애도할 수 있다면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내면을 잠재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기억-내용은 이미 소실되었으되 기억-감정이 남아 있어 유사한 심리적 기제가 주어지면 어김없이 리비도가 투자된다. 그러나 그 대상이 상실된 바로 그 대상은 아니기에 상실의 흔적은 그녀들에게 애도해야 할 무언가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애초에 존재하지조차 않았던 남자의 유골을 뿌리러 제주도로 향하는 여자(‘포옹’)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또한 바로 그것이다. 천운영의 소설들에서 누군가의 죽음 혹은 (갑작스러운) 사라짐은 서사를 이끌어 가는 가장 기본적인 모티프이다. 이 작가의 어느 작품을 들춰 보아도 이 점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명랑’‘아버지의 엉덩이’‘세번째 유방’에서는 할머니가,‘바늘’‘명랑’‘월경’‘당신의 바다’에서는 아버지가,‘바늘’‘멍게 뒷맛’‘월경’‘아버지의 엉덩이’에서는 어머니가,‘숨’‘그림자 상자’에서는 양친부모 모두가,‘등뼈’‘멍게 뒷맛’에서는 여자가,‘모퉁이’에서는 연인이,‘당신의 바다’에서는 남편이 죽거나, 실종되거나, 아무런 예고 없이 주인공 곁을 떠난다. 이러한 상실이 대개 가장 기본적인 삶의 단위인 가족 관계에서부터 발생한다는 것은 이렇게 열거한 목록에서도 금방 포착되는데,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할머니)의 빈자리이다. 천운영 소설이 가족관계 안에서의 갈등을 그 기본 축으로 하면서도 ‘모퉁이’‘그림자 상자’‘세번째 유방’을 제외하면 형제나 자매를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소설들에서마저도 언니, 오빠, 동생은 화자를, 부모 특히 어머니 곁에 가까이 할 수 없게 만드는 경쟁자로서만 그 의미를 지닌다. 천운영 소설 속 주인공들의 어머니에 대한 집착 혹은 애증은 그 유례를 찾아 보기 힘들 정도로 강렬하다. 최근 한 평론에서는 천운영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로 ‘부재하는 아버지’가 거론되었거니와(남진우, 앞의 글), 이 논자의 지적대로 무능하고 비루한 아버지의 초상은 이 시대 거세된 남성성의 표상이라 할 만하다. 물론 아버지가 부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로는 그리 특별할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부재하는 아버지’는 실로 오랫동안 우리 소설의 한 테마였고,‘아비-부재’,‘아비-찾기’,‘아비-되기’,‘아비-부정’의 기나긴 순환 속에서 우리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 정체성의 근거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존재론적 불안과 함께 지금껏 성장해 왔다고 해도 그리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천운영 소설에서 아버지의 죽음, 그 부재의 효과는 말 그대로 그저 ‘없음’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특징적이다. 아버지의 위치가 지극히 주변화되어 있음에도, 이 작가의 소설에 등장하는 아들들에게서는 그에 대한 어떠한 연민도, 이를 복권하려는 의지도, 스스로 가부장으로 전신하고자 하는 충동도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천운영 소설에서 강력한 입법자로서의 아버지란 ‘세번째 유방’의 아버지를 빼고는 찾아보기 힘들며, 심지어 ‘아버지―법’은 “어머니를 닮은 부라보콘”에게까지 자리를 내준다(‘눈보라콘’);“오직 부라보콘만이 내 운명에 관여할 수 있는 존재(1:90)”다.‘∼하지 말라’가 사라진 자리에서, 가위를 든 “이발사” 아버지가 사라진 바로 그 자리에서,‘나’는 어머니를 마음껏 향유하고자 한다.‘눈보라콘’에서 부재하는 아버지는 그러므로 이후 도래할 어머니의 빈자리를 보다 선명하게 부각시키기 위한 하나의 장치에 그치게 된다. 또 다른 남성 주인공이 등장하는 ‘아버지의 엉덩이’에서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아버지는 느낄 수 없을 만큼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텔레비전을 본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상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등을 쏘아 본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쇼핑호스트가 플라스틱 밀폐용기를 소개하고 있다. 앞치마를 두른 쇼핑 호스트는 크기가 각기 다른 밀폐용기를 쌓아놓고 얼마나 저렴한지에 대해 과장되게 말하며 전화주문을 유도한다.(……) 아버지는 냉장고에 뭐가 들었는지 관심도 없으면서 조금씩 내려가는 숫자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2:172) 위 장면의 등장인물의 성(性)을 여성으로 치환시켜 놓으면 즉, 아버지와 아들의 식사장면이 아니라 어머니와 딸의 그것으로 바꾸어 놓으면, 우리 눈 앞에 매우 익숙한 광경이 펼쳐진다. 늙은 어머니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딸이 “상”을 차려 들어간다, 어머니의 모습에 “신경질”이 난 딸은 그녀를 “쏘아 본다”, 텔레비전에서는 “플라스틱 밀폐용기”를 선전하는 “홈쇼핑” 프로그램이 한창이다, 어머니는 숫자판에 넋을 놓고 있다. 그러나 이 장면의 주인공은 분명 아버지와 아들이다. 홈쇼핑 중독자인 아버지의 “게걸스런 주문과 반품”이 “외출”로 이어지는 이 소설은 우리가 익히 보아왔던 히스테리 여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 혹은 홈드라마의 역전된 판본이라 할 만한다. 그러나 이 장면을 언급한 것은 이 시대의 ‘아버지 부재’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존재한다. 아버지의 ‘엉덩이’라는 발칙한 상상력이 말해 주듯이 다만,‘어머니 부재’로 세계의 중심을 잃어버린 한 “엄마”의 아들로서만, 아버지는 그렇게 존재할 뿐이다. 이 소설의 아버지와 아들, 두 남성 주인공을 움직이는 숨은 작인은 아버지가 아니라 부재하는 어머니이다. 자신의 어머니 묘소 앞에서 “이제 막 탯줄을 끊고 세상에 나온 갓난아이처럼 우는(2:166)” 아버지는 물론이고, 태어나자마자 잃어버린 “따뜻한 자궁(2:167)”을 그리워하는 아들 역시 포도나무 가지에서조차 “침묵하며 나를 바라보는 할머니(2:182)”를 발견한다. 이들 부자(父子)에게 ‘부재하는 어머니(할머니)’는 모성적 초자아(maternal superego)의 형상으로 그녀의 아들들을 조종한다. 남성인물을 움직이는 모성적 초자아의 형상은 ‘숨’에서는 ‘차가운 자궁’의 이미지를 빌려 섬뜩하게 변주된다. 할머니를 설득하는 마지막 방편인 송치를 구하기 위해 주인공 ‘나’가 불법적인 물먹이기를 감행하다가 경찰에 발각되어 도망치는 대목에서, 단속반의 추격을 피해 숨어든 장소가 높이 2미터, 영하 20도의 “거대한 냉장창고”라는 점을 쉽게 지나쳐서는 안 된다. 그 추격의 장면이 마치 사냥의 한 대목처럼 그려지고 있다는 점―할머니가 “육식동물”이라는 점을 상기하자―, 이 발각으로 인해 할머니의 의사를 거스른 미연과의 결혼이 틀어질 위기에 처한다는 점, 그 안에서 ‘나’는 입을 틀어막은 채 “숨을 죽여(1:55)”야 한다는 점 등은 이 냉동고가 ‘나’에게는 공포 그 자체일 수밖에 없는 ‘얼어붙은 자궁’이 물질화된 것임을 암시한다.‘숨’에서 아들을 숨죽이게 만드는 냉동고가 이처럼 은유적 차원에서 자궁의 부정적 이면을 함축하고 있다면,‘행복고물상’에서 그것은 “유산된지도 모르고 보름 동안이나 자궁 속에 죽은 아이를 넣고 다녔던(1:162)” 아내를 빌려 실체화되고 있기도 하다. 자궁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나 자궁을 연상케 하는 이미지는 천운영의 소설들에서는 빈번하게 출물하면서 작품의 기저음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당신을 둘러싼 바다 밑바닥 같은 어둠”(‘당신의 바다’)과 같은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천운영 소설에서 어둠, 바다는 의미론적인 층위에서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 놓이는 경우가 흔하며,“깊은 어둠(1:195)”,“어두운 바닷 속으로 깊숙이(1:139)”,“바다 깊숙한 곳(1:156)”,“물 속 깊숙이(1:158)”,“깊은 바다로 침잠(1:136)” 에서와 같이 곧잘 하강 혹은 침잠의 이미지와 함께 나타나는데,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최종지점에 어머니―모체―자궁이 자리한다.“탄생 이전의 따뜻한 양수 속으로 돌아가고 있는” 할머니(‘명랑’)나,“태아처럼 몸을 구부리”고 “어머니의 자궁처럼 포근해진 어둠”을 즐기는 아이(‘유령의 집’)는 천운영 소설의 주인공들에서 발견되는 모체―자궁으로의 회귀욕을 보다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천운영 소설에 등장하는 위와 같은 사례들에서 다음과 같은 해석들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무력한 아버지를 대체하는 어머니에게서 아버지-법에 내포된 헤게모니의 일시적인 전복을 읽어낼 수도 있고, 성적 관계의 절대적 방해자로 나타나는 할머니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는 손자의 서사를 아버지―질서의 외부를 꿈꾸는 딸의 서사의 역전된 판본으로 체감할 수도 있으며, 빈번히 등장하는 자궁 회귀욕으로부터 주체―대상의 이분법에 이전하는 원초적 충동으로서의 모체 회귀욕을 지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위 소설들에서는 그것이 의존성이건, 억압이건, 회귀이건 간에 어머니의 부재가 스토리―시간 내에서 발생하는 경우는 드물며,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죽음(‘아버지의 엉덩이’)이나 재혼(‘눈보라콘’)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자체로 버려짐이나 내쳐짐의 쓰라린 감각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대상―타자의 상실을 ‘버려짐’으로써 격렬하게 경험하는 인물들은 무엇보다 ‘바늘’‘멍게 뒷맛’‘월경’‘모퉁이’에 등장하는 여성인물들이다. 울음보가 터졌다. 엄마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다락 계단을 기어오르면서부터 나는 이미 울고 있었다. 코피가 나올 것처럼 콧잔등이 매큼해지고 입술은 움찔움찔 울음을 품었다. 엄마는 내 울음소리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엄마는 뒤도 안 돌아보고 걸었다. 내 울음이 엄마를 돌려세울 수 없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울음을 그칠 수는 없었다.(2:100) ‘모퉁이’는 주인공 ‘나’가 ‘엄마’와 헤어지는 인상적인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장면에서 엄마를 잃어 비통한 한 소녀의 심사는,14줄에 걸쳐 집요하게 서술된다. 마치 그것을 영원한 이별이라 예감하는 듯이 소녀는 줄기차게 울어댄다. 그러나 소녀가 그토록 떠날까봐 전전긍긍하는 엄마는 단지 아빠의 공장에 밥을 가져다주러 나선 길일 뿐이다. 매일 반복되었을 이 일상적인 엄마의 떠남 앞에서 소녀는 한참동안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심지어 엄마를 자신으로부터 떼어놓는다고 생각되는 존재는 “뱃속의 아이”라도 저주하는 소녀,“엄마가 없으면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악을 쓰고 울었(2:112)”던 그 소녀,“우는 것만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2:105)”이었던 바로 그 소녀는, 성인이 되어서도 “남자”에게는 여전히 “울음소리”로 존재한다.‘멍게 뒷맛’,‘바늘’에서 역시, 어머니와의 이별은 언제나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것이며, 성장한 그녀들이 겪는 모든 상실의 밑그림이 된다. 엄마들은 결국 떠난다. 엄마가 떠난 길목을 바라보며 꼼짝도 못하고 있던 그날을 기억하는 ‘나’(‘바늘’)나, 좋은 옷을 차려 입고 기차에 올랐을 때부터 이미 엄마에게 “버려질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당신’(‘멍게 뒷맛’)은, 그런 점에서는 모두 닮은 존재들이다. 이 세 작품에 비해 어머니의 비중이 미미하게 그려진 ‘월경’에서조차, 주인공 ‘나’는 어머니의 화사한 보석함에, 손톱 자른 것, 빠진 머리카락, 상처에서 떼어낸 딱정이와 같이 제 몸에서 떨어져 나온 것들을 모아둠으로써, 뿌리깊은 분리 불안을 드러낸다. 이 소설들에 등장하는 여성 주인공들은 어린시절, 주로 어머니로 대표되는 대상-타자에게 강렬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으되, 필연적으로 그 애착이 거부(혹은 금지)됨을 경험한다. 가령,‘모퉁이’에서 그것은 금지의 양상(“엄마의 가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엄마는 젖무덤을 헤치는 내 손을 단호하게 뿌리쳤다. 나는 엄마의 매정한 손이 야속했다. 엄마는 내게 동생이 생길 거라고 했다. 동생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되우 맞은 사람처럼 휘청거렸다(2:109)”)으로,‘바늘’에서 그것은 거부의 양상(“엄마가 내민 보자기에는 꽤 많은 돈뭉치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스님의 옷을 들고 집을 나섰다.‘나는 그곳으로 가야겠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내게 남긴 말이었다.(1:24)”)으로 전면화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금지/거부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의 욕망은 부인된 형태로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할머니를 갑작스러운 사고로 잃은 뒤 그녀의 뼛가루를 생전의 할머니가 명랑가루 먹듯 맛보는 손녀가 “내 내부에는 언제나 나를 바라보며 침묵하는 그녀가 있다(2:37)”고 고백하는 것(‘명랑’)처럼, 상실이 일어났을 때 상실을 부인하고 상실된 대상의 속성을 취하여 이를 내면화하는 것이 천운영 소설에 등장하는 멜랑콜리적 주체의 생존전략이라고 한다면,‘바늘’과 ‘월경’의 ‘나’는 바로 그 길을 간다. ‘바늘’과 ‘월경’은 각각 그로테스크한 인물 묘사와 도착적인 섹슈얼리티로 인해 발표된 직후부터 유독 많은 평자들의 주목을 받아 온 작품들이다. 이 글의 관점에서 역시, 두 작품은 매우 흥미롭게 읽힌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지점에서 두 소설을 집중적으로 되짚어 보고자 하는 이유는 다음의 몇 가지 단서들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먼저 두 소설 모두 여성 화자들이 이미 유년기를 통과한 이후임에도 여전히 아동인 것처럼 그려지고 있으며 또한 공히 인물이 비성적인 단계―통상적인 의미로―에서 성적인 단계로 이행하는 순간을 문제 삼고 있다는 점, 인물들은 각각 어머니(‘바늘’) 혹은 아버지(‘월경’)와의 이별을 하나의 트라우마로 간직하고 있으며 이와는 대조적으로 반대성(性)의 부모는 거의 무시되고 있다는 점 등이 그 단서들로, 이로부터 우리는 천운영 소설에 나타나는 도저한 공격성(/도착성)의, 이면(/연원)을 다시금 집약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을 듯하다. 왜냐하면 ‘바늘’과 ‘월경’에서는 여성 주인공들이 어린 시절 겪어야 했던 한 쪽 부모의 상실이 그녀들의 자아정체성의 형성에 결정적인 기제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데뷔작이자 출세작인 ‘바늘’에서는 그로테스크한 삽화가 여러 번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다음의 세 장면은 특히 문제적이다;(1)먼저, 죽어가는 새끼고양이. 간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절에서 살던 시절 ‘나’는 “어미고양이의 날카로운 울부짖음(1:20)”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새끼고양이를 변기통에 버리고는 그 변기통 속으로 고양이가 자취를 감추는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2)다음으로, 전쟁기념관에서의 상상. 전쟁기념관에서 ‘나’는 전시된 무기들을 하나씩 꺼내 스님을 공격하는 불온한 상상을 해보지만 스님의 심장이 관통당하고 내장이 갈가리 찢기고 발에서 피가 솟구쳐도, 그녀는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좀더 강인하면서 잔인한”“엄마가 할 수 있는 그런 방법(1:21)”이 아니었기 때문에.(3)마지막으로, 어머니의 자살 소식 직후 행해지는 육식. 형사로부터 어머니의 자살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의연히 수화기를 내려놓고 고기 한 점을 집어 먹으며, 바위에 찢긴 엄마의 모습을 떠올려 보지만 ‘나’의 머릿속엔 “여자의 하얀 알몸만 떠오를(1:31)” 뿐이다;상식적인 수준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행위들이 무대화되고 있는 이 세 장면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러니까 ‘나’의 공격적인 행위의 메커니즘을 해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보자. 첫 번째 장면에 대한 질문 하나. 어미고양이에게서 떨어져 나와 변기통 속으로 빠져 들어간 새끼고양이는 마찬가지로 버려진 ‘새끼’인 ‘나’의 분신과 다름 없을 터. 그렇다면 이 장면은 ‘나’에게 지극한 고통을 유발했을 것임에도 왜 ‘나’는 이를 스스로 자행하며 게다가 “오랫동안” 지켜 볼 수 있었던 것일까? 마조히스틱한 쾌감 때문에?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상실이 곧 결핍을 부른다는 오래된 통념은, 천운영 소설의 인물들 앞에서 수정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자아가 포기된 대상의 심리적 저장고이며 상실된 대상은 구성적 동일시의 하나로 자아 안에 거주하면서 자아와 함께 출몰한다는 사실은 일찍이 프로이트가 ‘자아와 이드’에서 기술한 바 있으며, 버틀러는 그러하기에 사랑하는 대상을 떠나보낸다는 것은 대상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위상을 외부적인 것에서 내부적인 것으로 전이하는 것이라 지적한 바 있다(J 버틀러, 앞의 글). 즉, 상실에 대처하는 멜랑콜리적 전략은 역설적이게도 상실 자체를 무화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나’가 새끼고양이를 변기통 속에 버릴 수 있었던 까닭으로 이미 그녀의 자아 안에, 거부된 애정의 대상으로서의 어머니가, 멜랑콜리적 동일시를 통해 그 자아의 일부로서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시할 수 있을 듯하다. 어머니는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숨쉰다! ‘나’의 행위에서 ‘나’의 위치와 어머니의 위치가 이중적으로 얽혀있는 것은 이러한 내면화의 결정적인 증거다. 버려짐과 버림을 동시에 구현하는 새끼고양이의 에피소드는 물론이고, 스님을 잔인하게 공격하는 상상이나, 자살 소식 직후의 육식 또한 마찬가지의 메커니즘 아래에서 작동한다. 스님을 공격하는 것은 자신으로부터 어머니를 빼앗아간 존재에 대한 응징이라는 점에서 그 일차적 의미가 있지만, 그 방식은 어머니가 자신을 버렸던 방법 혹은 어머니가 스님을 살해했던 바로 그 방법에는 미치지 못하기에 ‘나’는 그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만족할 수가 없다.‘나’가 공격으로부터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그녀의 내부에서 그녀와 함께 공존하는 어머니의 시선 바로 그것을 체현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고기 한 점을 씹어 삼키면서 찢겨진 엄마의 모습을 상상하는 그녀로부터 우리는, 어머니가 여전히 ‘나’에게는 알몸의 여자로 현현하는 에로틱한 대상이라는 사실을 유추함과 동시에,“상실하기보다는 차라리 조각내고 분해하고 자르고 삼키고 소화하고”자 하는 곧, 대상을 먹음으로써 그 대상을 제 안에서 부활시키고자 하는 멜랑콜리적 식인 행위의 환상(J 크리스테바,‘검은 태양’)의 한 풍경과 마주하기에 이른다. 정신이 아득해져온다. 가슴 한쪽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솟구쳐 올라온다. 나는 방으로 뛰어들어간다. 그리고 그가 했던 것처럼 팔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한다. 누구를 향해 팔을 휘둘렀는지 모른다. 푸른 모자가 튀어오른 것 같기도 하고 계집의 찢어지는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1:83) ‘바늘’에서와 같이 유년기를 통과한 이후에도 여전히 아동으로 남겨진 듯한 여성 주인공은 ‘월경’의 ‘나’로 재등장한다.‘월경’의 ‘나’는 스무살을 코앞에 두고 있지만 어른과 아이의 경계를 월경(越境)하지 못한 채 바로 그 경계 위에 서 있다.‘나’의 말을 빌리자면 ‘나’의 “몸은 작정이라도 한 듯 자라기를 멈추었다(1:62).” 이 소설의 주된 관심사가 바로 그 경계를 넘어서는 한 순간에 있다는 것은 제목에서부터 암시되는 바다. 그런데 ‘바늘’과 마찬가지로 한쪽 부모의 상실을 초점화하고 있는 이 소설을 전작 옆에 나란히 놓고 따져볼 때 새롭게 부각되는 측면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그 상실이 ‘나’의 젠더 정체성 형성에 개입됨으로써 ‘나’의 젠더 정체성을 매우 불안정하게 구조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월경’에서는, 천운영 소설에서는 이례적으로, 어머니의 떠남이 아니라 아버지의 떠남이 ‘나’에게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나’가 떠나버린 아버지를 하나의 이성으로 욕망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목 또한 수차례 등장한다. 그녀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칭하지 않고 ‘그’라고 지칭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인상을 강화하는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소설은 일렉트라 콤플렉스의 천운영식 판본으로 받아들여지기 쉬울 듯하다. 그러나 프로이트에게 이성부모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망과 그 욕망의 금지가 여아에게 여성성을 최종적으로 선사하는 것과는 달리 이 소설에서 ‘나’의 젠더 정체성은 오히려 남성의 그것에 가깝게 드러나고 있어 차별적이다. 즉,“가슴도 가슴이지만 계집의 엉덩이는 정말 탐스럽다. 표주박 두 개를 나란히 놓은 듯 완만한 곡선을 이루다가 툭 불거지는 모습이 여간 아니다(1:70)”라는 구절을 비롯한 소설의 여러 대목에서 나타나듯이 ‘나’는 “은하수 계집”을 성인 남성의 시선으로 욕망하고 있으며, 바로 이 점이 여러 평자들로 하여금 ‘월경’을 도착적 섹슈얼리티가 전경화된 소설로 주목하게 한 주요한 요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함께 트럭 짐칸에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면 온 우주가 우리를 중심으로 돌았고, 별들은 작은 이슬방울이 되어 우리의 배 위에 사뿐히 내려 앉았다(1:63)”에서와 같이 지극히 감상적으로 또 지극히 여성적인 시선으로, 떠나버린 아버지를 기억하고 또 애타게 그리는 ‘나’가 어떻게 동시에 “은하수 계집”을, 그것도 저러한 시선으로 욕망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이러한 불균형은 작가가 도발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내는데 몰두한 나머지 그 일관성은 신중히 검토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결함에 불과한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상실한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내면화하고자 했던, 그럼으로써 상실로 인한 상처를 무의식적으로 무화하고자 했던 ‘바늘’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월경’의 ‘나’ 역시 상실한 아버지를 그러한 방식으로 제 속에 부활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을 수 있다. 즉, 그녀의 자아 안에, 상실된 애정의 대상으로서의 아버지가, 그 자아의 일부로서 공존하고 있다고 말이다.“은하수 계집”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이에 대한 한 근거가 됨은 물론이거니와,‘나‘가 “은하수 계집”을 여러모로 ‘그녀(어머니)’와 견주어 보면서 ‘그녀(어머니)’의 분신처럼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가정을 뒷받침해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설의 클라이맥스에 위치하는 사건 곧,“은하수 계집”과 “푸른 모자를 쓴 사내”의 정사장면을 ‘나’가 목격하고 그들을 공격하는 그 사건에서,‘나’가 ‘그(아버지)’의 위치를 그대로 반복함으로써, 과거의 ‘그(아버지)’―‘그녀(어머니)’―“낯선 남자”의 구도를, 현재의 ‘나’―“은하수 계집”―“푸른 모자를 쓴 사내”의 구도로 전이시키고 있다는 점은 그 결정적인 증거로 제출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요컨대 ‘월경’에서 ‘나’는 아버지를 욕망하는 데서, 아버지의 욕망을 그리고 아버지가 욕망할 것이라 추정되는 대상을 욕망하게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바로 이 점이 ‘나’의 젠더 정체성의 혼란을 초래한 근본적인 요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메커니즘의 시발점에 현실에서의 상실을 절대로 수락할 수 없는 멜랑콜리적 주체의 내면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읽는 이를 순식간에 포박하는 천운영 특유의 자질 뒤편에 도사리고 있는 상실과 박탈의 어두운 그림자……, 누군가는 사라지고 그 사라짐이 가족 내의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저토록 결정적인 흔적을 남긴다. 그리하여 이 작가에게 가족은 천운영식으로 표현하자면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 같은 유령의 집(‘유령의 집’)” 즉,‘아가리(구강기)’적 욕구에 충실한 “괴물”스러운 인물들이 집 안을 떠도는 “유령”의 “어두운” 그림자와 씨름하는 전쟁터나 다름없다.“핏줄”과 얽혀진 인간 욕망의 가장 원초적인 그래서, 들여다보고 싶으면서도 그러기에는 두려운 “하수도” 속 같은 “어둠”이야말로 이 작가의 해부 대상인 것이다. 이어지는 ‘유령의 집’의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라;“보이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들리는 것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그 이면에 삶은 존재하니까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으려고 해보세요. 그건 때때로 흥미진진한 일이 될 겁니다.” 천운영이 꾸며놓은 유령의 집을 방문한 독자에게 이 보다 더 친절한 안내가 또 있을까. 천운영은 이렇게 근본적인 상실을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그것도 가족 내부에서 끈질기게 문제화한다는 점에서 현재 우리 문단에서는 매우 독특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다. 배수아, 백민석 같은 바로 앞선 연배의 작가는 물론이고, 비슷한 연배이며 비슷한 시기에 등단한 정이현이나 김윤영에 견주어 보아도 이는 이 작가 특유의 자질이다. 앞서 살펴본 작품들에서처럼 특히나 천운영은 가족 안에서의 상실을 한 인간을 배태해내는 결정적인 그 무엇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이제 전환을 맞을 때가 온 것은 아닐까.‘늑대가 왔다’나 ‘그림자 상자’와 같은 비교적 근작들에서는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파괴적 욕구가 분출되고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 물론 가족이 부여한 운명으로부터의 탈출은 아직 환상 속에서만 가능하고 결국에는 처참한 결말을 맞지만 말이다. 앞으로 이 작가에게 “배꼽을 버리고자 하는(‘그림자 상자’)” 욕구가 앞설 것인지, 아니면 그럼에도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운명론에 더 깊숙이 천착할 것인지, 우리는 이 작가를 계속 눈여겨 지켜볼 필요가 있다. ■ 당선 소감 하루 평균 서른 통 정도의 전화를 받고 또 그만큼의 전화를 하며 두 해를 보냈다. 맞춤법을 묻는 전화부터 부고를 알리는 전화까지. 아무리 사소하게 보이는 일도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소중하며 또 누군가의 수고가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체감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문학을 한다는 것 역시 그리 다르지 않은 일인 것 같다. 누군가의 호소에 응답하는, 그러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마음껏 공부할 수 없어 애태우던 나날들이었지만 헛되지 않았다고 믿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부족함을 스스로 잘 알기에 당선은 여전히 실감나지 않는다. 응모한 글에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공이 아니라 주위 여러분들의 은덕이다. 국문과 은사님들과 조남현 지도 교수님,202호와 326호에서 동고동락했던 선후배 동료들, 이 분들께 더 좋은 글로 보답하고 싶다. 결점이 많은 글을 너그러이 감싸주신 김윤식 선생님과 정과리 선생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한결같이 믿어 주시는 부모님과 언니, 동생, 오랜 벗들에게는 쑥스럽지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고백하건대, 좋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어린 시절의 꿈을 나는 아직도 버리지 못했다. 이제는 다른 길을, 그것도 멀리 와버렸다는 생각이 들어 한편으론 쓸쓸하다. 그러나 약속한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세상을 향한 내 새로운 수화기를 함부로 놓지 않겠노라고. 그것이 지금 주어진 이 지면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길인 것 같다. 이제 겨우 시작이다. ●약력 ▲1976년 대구 출생 ▲서울대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 심사평 이번에도 평론의 기초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 이론에 대한 지식을 과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설익은 개념들이 횡행하면서 작품을 파괴하거나, 작품과 겉도는 독무를 추는 글이 적지 않았다. 이론이 문학의 이해에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니 배울수록 좋다. 그러나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하니 작품 분석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경합한 작품은 네 편이다. 김수영의 시를 다룬 정경은의 ‘생활의 뒤란, 시’는 엉뚱한 상상력으로 김수영의 시를 장식해가면서 시의 변주를 다룬 재미있는 글이다. 그러나 그 상상력이 김수영 시의 이해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장욱과 김행숙의 시를 다룬 송승환의 ‘청동 방패를 바라보는 두 가지 방식’은 동일성의 부정이라는 기본적인 전제 하에 새로운 시의 존재 가능성을 탐색한 글이다. 꼼꼼한 분석이 돋보이고 설득력도 있었다. 오랫동안 시를 써본 사람이라는 짐작이 간다. 다만 구도가 지나치게 단순한 게 흠이었다. 최윤의 세 장편을 분석한 허병식의 ‘진정성의 서사와 주체의 귀환’은 ‘기원의 부재’라는 현대 이론의 신화에 깊이 침윤된 글이다. 그래서 마치 소설이 그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씌어진 것처럼 읽었다. 그것이 약점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주체의 귀환이라는 명제를 끌어낸 것은 글쓴이만의 독창적 사유의 결과이다. 전체적으로는 대상 작품에 들어맞았지만 세목들에서는 무리한 적용이 많았다. 천운영의 소설 세계를 해부한 차미령의 ‘그로테스크 멜랑콜리, 상실에 대응하는 한 가지 방식’은 ‘등뼈’ 이미지를 천운영 소설의 핵심 징조로 보고 그것으로부터 소설의 무의식의 ‘작업’과 변주를 정신분석학적으로 파고든 글이다. 분석과 해석이 요령을 얻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기존의 상식적인 해석을 뛰어넘으려는 패기가 돋보였다. 마무리를 서둘러 처리했다는 약점이 있었지만 글 전체가 보여준 가능성은 그런 약점을 무시해도 좋게 하였다. 당선을 축하한다. 김윤식·정과리
  • ‘한국문학상’ 정공채 시인등 3명

    한국문인협회(이사장 신세훈)가 주관하는 제41회 한국문학상 수상자로 시인 정공채, 소설가 손영목, 아동문학가 이재철 씨가 22일 선정됐다. 수상작은 정씨의 시집 ‘새로운 우수’, 손씨의 소설집 ‘유년의 환상’, 이씨의 평론집 ‘방정환론’. 시상식은 28일 오후 4시 서울 대학로 흥사단 강당에서 있다.
  • [되돌아본 2004 문화] ④문학계

    “김훈, 김영하 두 작가로 기억될 한해였다.” 한 출판사 편집장은 2004년 문학계를 이렇게 한 문장으로 압축했다. 재기발랄한 젊은 작가 김영하와 3년전 출간한 장편소설 ‘칼의 노래’로 최고 베스트셀러 작가로 입지를 굳힌 김훈이 침체에 빠진 문학시장의 자존심을 추슬러 주었다는 얘기다. 이에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오빠가 돌아왔다’‘보물선’ 등으로 김영하는 동인문학상 황순원문학상 이산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석권하는 기록을 세웠다. 김훈의 ‘칼의 노래’는 올해도 국내 소설 가운데 최다 판매부수(45부)를 기록했다. 올해 초 장편 ‘현의 노래’를 새로 발표하며 왕성한 창작의욕을 불태우고 있는 김훈은 단편 ‘화장’으로 이상문학상까지 차지해 50대 늦깎이 작가의 저력을 과시했다. 그는 한 설문조사에서 한국문단의 ‘브랜드 작가’ 1순위로 꼽히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출판시장이 위축된 가운데 두 작가의 ‘스타 스토리’말고는 할 말이 그리 많지 않은 한해였다.1981년 문을 연 교보문고 광화문점조차 사상 첫 매출액 감소를 기록한 해였으니 ‘실족’했다는 소설시장 형편이야 말할 것도 없다. 한 국내소설 전문출판사의 대표는 “유명작가에게서 원고를 받아놓고도 시장이 워낙 얼어붙어 있어 출판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곳이 한 둘이 아니다.”고 푸념한다. 오랫동안 침묵하던 중진 작가들이 우연히도 모두 4년여의 공백을 깨고 새 소설을 발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완서의 장편 ‘그 남자네 집’, 서정인의 연작단편집 ‘모구실’, 최일남의 창작집 ‘석류’ 등이 그것. 특히 박완서는 지난 10월 출간한 새 장편을 지금까지 11만부 넘게 팔아 ‘장편 승부사’로서의 내공을 입증했다. 김원일(‘물방울 하나 떨어지면’)도 12년 만에, 이청준(‘꽃 지고 강물 흘러’)도 3년 만에 소설집을 발표했다. 30대 작가 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린 것도 올해 문학계의 큰 변화.2000년대를 이끌어갈 신인작가들이 다양한 개성의 화법으로 줄이어 등장했다. 김영하를 비롯해 소설집 ‘최순덕 성령 충만기’ 출간 뒤 평단의 주목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이기호, 왕성한 필력으로 여성소설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천운영, 윤성희 등이 그들이다. 10만부를 넘기면 대단한 베스트셀러로 분류되는 한국문학의 현실과는 대조적으로 댄 브라운의 ‘다 빈치 코드’는 100만부가 팔려 나가며 국내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역사적 상황에 상상력이 결합된 쉽고도 ‘실용적’인 서사로 소설읽기에 거부반응을 보이던 독자들을 달랬다는 분석이다. 올해는 또한 남북간 문학교류와 관련한 논의가 어느 해보다 활발했다. 정치 상황이 경색되면서 막판에 무산되긴 했으나, 지난 8월말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작가대회가 추진되기도 했다. 또 창비가 제19회 만해문학상 수상작으로 북한작가 홍석중의 장편 ‘황진이’를 선정, 금강산에서 작가에게 직접 상을 전달한 것도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함정임 장편소설 ‘춘하추동’

    함정임 장편소설 ‘춘하추동’

    작가 함정임(40)의 ‘춘하추동’(민음사 펴냄)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작가인 나혜석의 삶을 모티프로 이야기를 일군 장편소설이다. 하지만 극적인 삶을 살다간 인물에 기대 어물쩍 전기소설이나 평전쯤에서 멈춘 작품은 아니다.“형벌처럼 소설이 써졌다.”고 고백할 만큼 작가는 나혜석을 빌려 치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세 여자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오버랩된다. 작중 주인공인 서른두살의 여자 가은, 나혜석, 그리고 작가 자신. 어떤 대목이 누구의 이야기인지 구짓지 못할 정도로 세 여자의 이야기는 점성질로 단단히 뭉쳐져 굴러간다. 유부남 M을 애인으로 둔 ‘나’ 가은이 중학교 때 읽었던 소설들의 첫 문장을 기억하고 있다는 등 도입부분 묘사들에서부터 소설은 작가의 개인사와 밀착해 있다는 암시를 던진다. 서양 최초의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평전소설을 번역(실제 작가의 이력이기도 하다)한 가은은 나혜석의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위해 그녀의 생애를 추적한다. 1990년 등단한 이후 작가는 5권의 단편소설집을 냈다. 부지런한 글쓰기였지만 정작 장편소설을 내기는 ‘행복’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 여행, 일상, 예술 등 다양한 소재를 여러 각도에서 접근한 산문집도 자주 내온 작가였다. 그런데 긴 호흡의 소설을 새삼 내놓기까지 작가의 번민은 컸다. 자신의 이야기를 조미하지 않은 ‘날 것’ 그대로 작품 속에 풀어넣었으니 더욱이나 그랬을 수밖에. 다큐멘터리 인물 소재로만 냉정히 R(나혜석에게 붙여진 작중 이름)를 분석하려고 하지만,‘나’는 관찰자의 관점을 벗어나 속수무책으로 R의 삶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러는 사이 스페인으로 떠났던 M의 아내가 돌아오고,‘나’는 M을 잊지도 간직하지도 못한 채 도쿄 파리 수덕사로 나혜석의 흔적을 더듬어 미친 듯 돌아다닌다.R는 ‘나’의 또 다른 얼굴이었으며, 그 얼굴은 다시 작가의 무의식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독자들은 무리없이 눈치채게 된다. 이미지와 서사가 균형있게 손잡은 극의 구도, 파격적 소재와 형식을 빌리지 않고도 응집력을 구사하는 필법이 소설을 단숨에 읽어내리게 만든다. 나혜석의 이야기를 액자소설 스타일에 빚어넣은 글쓰기에도 운동감이 느껴진다. 문학평론가 신수정은 “몇 겹의 삶이 뒤엉킨 독특한 메타픽션의 형식으로 나혜석의 삶을 재구성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초상화를 완성했다.”고 작품을 압축했다.9000원.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책꽂이]

    ●계용묵 전집(계용묵 지음, 민음사 펴냄) ‘백치 아다다’의 작가 계용묵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그의 소설과 산문을 나눠 묶은 전집. 단·장편으로 일관해 문단의 조명을 받지 못했던 작가의 미발표 작품까지 수록됐다. 소설집 2만 5000원, 산문집 2만원. ●백년여관(임철우 지음, 한겨레신문사 펴냄) 한겨레신문에 연재된 소설가 임철우의 새 장편. ‘봄날’ 이후 5년 만에 쓴 작품으로 일제시대,6·25 보도연맹 사건, 광주항쟁 등 한국사 100년을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재구성했다.9000원. ●그해 여름(전4권)(이영숙 지음, 한글 펴냄) 천재작가 이준수 등 직업이 다른 세 사람의 욕망과 사랑, 인간의 이중성을 그린 장편소설. 미술출판 기자 출신인 작가는 1992년 단편 ‘환상의 나라’ 이후 ‘함박눈이 내린 새벽’‘대바람 소리’ 등 중단편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각권 8000원.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고은 등 71명 지음, 열화당 펴냄) 고은 이윤기 최인호 김지하 한수산 강석경 신경숙 등 한국의 대표 문인 71명이 문학을 향한 순수열정과 글쓰기의 아픈 여정을 고백했다. 붓을 꺾을 수 없는 작가들의 육성이 ‘문학론’으로도 손색없다.1만 2000원. ●책 읽어주는 남자(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이레 펴냄) 15세 소년과 36세 여인의 사랑을 빌려 독일 현대사의 아픈 기억을 반추한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재출간됐다. 작가의 단편집 ‘사랑의 도피’(1995년)도 나란히 선보였다.9500원. ●핑거포스트,1663(전2권)(이언 피어스 지음, 김석희 옮김, 서해문집 펴냄) 내란과 혁명으로 점철된 17세기 영국을 무대로, 과학 의학 신학 인식론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아우르는 미스터리 역사추리소설.1권 1만 3800원,2권 1만 2800원.
  • [책꽂이]

    ●연인들(엘프리데 옐리네크 지음, 류소연 옮김, 다른우리 펴냄) 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스트리아 여성작가의 대표소설.1975년 작품으로, 여성의 자기모순과 분열의식을 파헤쳤다.1만 1000원.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제이 파리니 지음, 김소영 옮김, 궁리 펴냄) 러시아의 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말년이 가상소설 형식으로 재구성됐다. 톨스토이 마니아인 지은이가 톨스토이의 아내, 제자, 비서, 주치의 등 지인 6명이 남긴 실제기록을 꼼꼼하게 고증했다.1만 3000원. ●검은 사각형(이덕형 지음, 생각의나무 펴냄) 예술기행서 ‘빛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저자인 이덕형(성균관대 러시아어문학) 교수가 러시아 비잔틴 이콘의 흔적을 찾아나선 구도적 여정을 소설에 담았다. 러시아 기행에 나선 작중 주인공을 따라가며 ‘예술과 존재’의 의미를 미학적으로 고찰해볼 수 있을 듯.1만 8000원. ●안녕, 레나(한지혜 지음, 새움 펴냄) 199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외출’이 당선돼 작품활동을 시작한 한지혜의 첫번째 소설집. 음지에 선 주인공들의 캐릭터를 통해 20대 전후 젊은이들의 예민한 감각을 경쾌하게 그렸다.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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