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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점순이가 ‘나’를 꼬시던 동백숲길…실레마을에선 사랑이 이뤄지리라

    점순이가 ‘나’를 꼬시던 동백숲길…실레마을에선 사랑이 이뤄지리라

    내게 강원 춘천은 ‘소설가의 분홍색 집’과 ‘소설가들’의 고장이었다. 처음 춘천 가는 기차를 탔을 적엔 이미 너무도 많은 사람과 사랑들이 다녀간 뒤였고, 102보충대에 입소하던 이를 배웅하러 오긴 왔지만 친오빠의 일이어서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울고 있는 엄마 뒤에서 오빠가 군대에 있을 동안에 그가 남기고 간 물건들을 쓸 생각에 약간 신이 났던 기억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춘천? 노래에나 나오는 거기 아냐?” 미안한 말이지만, 여튼 그랬다.대학원 재학 시절의 단체 MT에서야 ‘춘천’ 혹은 ‘봄내’에 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됐다. 그때만 해도 아주 작았던 김유정 생가터와 소양댐, 청평사를 거쳐 자연 휴양림의 방갈로 안에서 ‘술 마시러 갔던’ MT.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교수님들이 타고 있던 앞차가 갓길에 섰다. 그리고 물안개가 짙게 깔린 소양댐을 배경으로 두 작가의 옥신각신이 이어졌다. “춘천이 고향인 최수철 소설가 집에 들렀다 가자”는 임철우 소설가의 제안, 동료 교수의 다정하고도 장난기 어린 제안을 거절하는 ‘옛날의 집주인’. 숙취가 가시지 않은 판에 흥미진진한 주거니 받거니를 보면서 “그럼 수철 교수님 생가에 가는 거예요?”라고 묻자 눈앞에 뻔히 살아 있으니 ‘생가’가 아니라 ‘본가’라고 해야 한다고 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결국 그냥 떡전거리(병점역)로 돌아가자고 했는데 봉고차 두 대가 선 곳은 어느 우아한 핑크색 주택이었다. 모두가 웃고 있는 단체사진 속에서 최수철 소설가만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 “핑크라니….” 집주인이었던 이가 내뱉은 이 한마디가 춘천의 화룡점정으로 남았다. 대학원생에서 등단한 소설가가 되는 동안 춘천은 사랑과 낭만, MT와 봄 강의 고장에서 김유정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장소로 변모했다. 그사이에 자그마했던 김유정 생가는 김유정 문학촌으로 바뀌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소설가 김유정의 고향이자 그가 병을 얻어 내려와 요양을 하며 야학을 세우고 사랑하던 이에게 끊임없이 연서를 보내던 곳이라는 사실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셈이었다.왜 김유정 문학관이 아니라 김유정 문학촌일까. 올해 문학촌장으로 부임한 이순원 소설가에게 물었더니 마을 곳곳이 김유정 소설의 배경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돌아왔다. 동시에 문학촌으로 들어오면서 내내 ‘김유정로, 김유정 우체국, 김유정역, 김유정 농협지점’ 등등의 이름들을 스쳐온 것이 떠올랐다. 2004년 12월 1일부터 신남역(무궁화호, 경춘선)은 김유정역이 됐다. 2010년 경춘선이 복선 전철로 바뀌어 다시 김유정전철역이 된 사연이 길게 이어졌다. 한국 최초로 문인의 이름을 딴 길과 마을, 전철역과 우체국이라니! 이는 가히 마을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고서야 성립될 수 없는 크기이기도 했다.ㅁ자로 지어진 생가터에서부터 뻗어 나온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김유정 문학촌과 그 일대를 ‘소설 속 공간’으로 탈바꿈해 놓았다. 떡시루의 강원도 방언이라는 실레는 어쩌면 소설가 김유정으로부터 이야기를 빚어내기 위해 만들어진 동네가 아닐까. 김유정은 1908년생이다. 그리고 1937년 3월 29일에 이곳 실레(실제 지명은 신동면 증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2년 후에 경춘선이 처음 개통됐다. 그가 병사하지 않고 천수를 누렸더라면 실레에 기차가 들어온 것을 보고도 이야기를 지어냈을 법한 옴폭한 자리였다.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보를 거쳐 연희전문 문과에 진학한 수재였던 김유정은 어릴 적 양친을 잃고 나서 얻은 말더듬이병과 애정 결핍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던 중에 당대 명창인 박녹주를 만나 열렬한 구애를 펼쳤으나 실패했다. 박녹주의 가마를 지키고 서 있다가 마음을 전했으나 완강한 거절의 뜻을 전해 듣고 쓴 혈서는 그의 간곡한 마음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실연과 재적이라는 연이은 아픔에 고향으로 돌아온 김유정은 야학의 일종인 ‘금병의숙’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서울살이의 도회적 감수성과 연희전문까지 재학할 정도의 뛰어난 수재였던 김유정의 눈에 비친 고향 마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다. 고향에서 몸과 마음을 어느 정도 회복한 후에 다시 서울로 올라간 그는 글쓰기에 매진해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와 조선중앙일보에 입선했다.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펼쳤고, 구인회의 후기 동인으로도 활동한다. 이때 시인 이상과의 교류가 이어지는데, 이들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타지에서 글을 쓰는 같은 처지의 동료로서 우정이 깊어졌다.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폐병을 얻기까지 한다. “각혈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치질이 여전하십니까?” “네, 그저 그날이 그날 같습니다.” 이 대화 끝에 그들은 자살을 모의하기도 하지만 실패했다. 이상은 일본으로, 김유정은 다시 낙향해 투병과 작품 활동을 이어 간다. 이 대화를 나눈 이듬해에 그들은 다시 나란히 세상을 등졌다.김유정은 1937년 다섯째 누이 유흥의 과수원집 토방에서 투병 생활을 하며 휘문고보 동창인 안회남에게 생의 마지막 편지를 쓴다. 자신이 쓴 추리소설을 보낼 터이니 돈 백원을 융통해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닭 30마리와 살모사와 구렁이 10마리를 고아 먹고 너끈하게 일어나겠다고도 했다. 남은 생에 대한 의지가 매우 강인하게 나온 편지가 오히려 아리게 다가온다. 김유정은 그해 3월 29일 새벽에 생을 마감한다. 사인은 폐결핵과 치질. 김유정의 엽서와 유품들은 이 편지를 받은 안회남이 보관하고 있었으나, 안회남의 월북으로 인해 김유정의 흔적들은 모두 사라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유정 문학촌은 김유정의 유품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롯이 김유정의 소설로 다시 태어난 문학촌인 것이다.채 서른이 되기 전의 죽음이었지만 그가 남긴 30여 편의 단편소설은 아직도 빛나고 있다. 그 빛이 절정에 달하는 곳이 바로 이 김유정 문학촌이 존재하는 신동면 증리, 실레마을이다. 문학촌에서는 김유정의 소설과 생애만 담아둔 것이 아니라 기념전시관과 이야기집, 민속공예 체험방과 김유정 생가를 비롯해 그의 소설을 배경으로 한 ‘실레이야기마을’이 꾸려지고 있다. 금병산 밑의 옴폭한 시루 같은 마을 곳곳에 그의 소설의 배경과 인물들이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김유정 문학촌은 ‘이야기가 복작대는 마을’이 됐고 그 이야기들을 따라 한 해에 백만 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장소로 변모했다. 그 길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들병이들 넘어오던 눈웃음길, 금병산 아기장수 전설길, 산국농장 금병도원길, 점순이가 ‘나’를 꼬시던 동백숲길, 덕돌이가 장가가던 신바람길, 복만이가 계약서 쓰고 아내 팔아먹던 고갯길, 춘호 처가 맨발로 더덕 캐던 비탈길, 도련님이 이쁜이와 만나던 수작골길, 산식각 가는 산신령길, 응칠이가 송이 따먹던 송림길, 응오가 자기 논의 벼 훔치던 수아리길, 근식이가 자기 집 솥 훔치던 한숨길, 금병의숙 느티나무길, 장인 입에서 할아버지 소리 나오던 데릴사위길, 김유정이 코다리찌개 먹던 주막길, 맹꽁이 우는 덕만이길”이 바로 그것이다. 김유정 사후에 발간된 소설집의 표지는 빨간 동백꽃이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동백꽃은 노란 동백, 즉 강원도 사람들이 부르는 생강나무꽃을 일컫는다. 촌장님의 안내에 따라 문학촌 곳곳에 있는 생강나무들을 찾아봤다. 그 ‘알싸한 향기’ 역시도 이 노란 동백꽃에서 나온 것임을 거듭 강조하는 촌장님의 생강나무 사랑이라니. 문학촌은 여러모로 이야기와 사랑이 넘치는 곳이었다. 시루에 담긴 이야기들이 작가의 품을 떠나 그곳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새롭게 읽히고 쓰여지는 공간이자 후배 문인들을 독려하고 창작의 길을 열어 주는 마을이 봄내, 춘천에 있다. 김유정의 생애는 다소 불행하고 끝내 사랑도 이루지 못했지만 그가 펼친 문학의 자리, 이야기들은 아직도 살아 있음으로 그 스스로의 힘을 증명해 냈다. 오죽하면 여태 ‘나’의 장인이 점순이의 키를 재고 있을까. 김유정은 현실에서의 사랑은 실패했지만 끊임없이 인물들에게 사랑과 인간애를 부여하는 매파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랑들이 모두 이어졌는지는 소설을 읽어 보거나 김유정 문학촌에 와서 확인해 볼 일이다.이제 내게 춘천은 김유정 문학촌과 소설가들 그리고 (여러 의미의)사랑과 아직도 분홍색인 소설가의 집이 있는 곳이다. 오정희, 전상국, 최수철 소설가를 비롯해 현재 김유정 문학촌의 상주 작가로 근무하는 전석순 소설가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멋진 소설가들의 등 뒤에 병풍처럼 서 있는 김유정 문학촌의 위상이라니. 김유정의 춘천은 다소 무정했을지언정 그가 남긴 춘천에서의 이야기들은 하나의 문화가 되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내게도, 이곳을 찾는 백만 명의 발길에게도 그리고 그의 작품을 잇는 후대의 독자들에게도. 우리들의 사랑은 부디 유정하기를!
  • 숱한 비하와 혐오에도…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삶

    숱한 비하와 혐오에도…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삶

    시절과 기분/김봉곤 지음/창비/364쪽/1만 4000원“덜 사랑하세요”가 대세인 시절이다. 너를 더 사랑하는 것은 나를 덜 사랑하는 일로 치환되는 시절. 이른바 ‘퍼주는 연애’가 낮은 자존감의 발로로 이해되는 시절. 201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두 차례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김봉곤(35) 작가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그런 시류와는 정확히 대척점에 있다.그의 두 번째 소설집 ‘시절과 기분’은 사랑한 시절과 기분에 관한 얘기다. 그러나 그 시절들은 어느 한 계절임과 동시에, 다른 시절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준다. 영어 시제로 말하면 ‘현재완료’쯤 된다고 해야 하나. 첫 소설집인 ‘여름, 스피드’(2018)가 열렬히 사랑한 특정 시점에 관한 얘기라면 ‘시절과 기분’은 그 시절이 아우르는 스펙트럼에 관한 스토리다. 사랑의 시작은 계절로 치면 항상 초여름이다. 열기에 달떠 그의 땀도, 나의 땀도 달콤하기만 하다. 그를 사랑하는 나의 모습까지도 사랑하며, 그를 기다리는 일은 절대 지루하지 않다. 전술 복습이랄 게 없는 ‘첫사랑’은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사랑부터는 앞뒤의 사랑이 겹치며 달겨든다. “정말로 딱 한발만 뒷걸음질해서 볼게요”(‘나의 여름 사람에게’ 125쪽)라며 사랑 앞에서 주춤거리는 창준 같은 이 앞에서 나에게 실패를 안겨줬던 첫 연인을 떠올리는 건 당연하다. 그럼에도 “무엇보다 당신을 실-감하고 싶다”(130쪽)며 다시 발걸음을 내딛는 게 김봉곤의 화자들이 가진 주체성이다. 10년 세월을 넘어, 다른 이의 연인이 돼서도 내 곁에 머물렀던 이에게 이별을 고하며 하는 말도 마찬가지다. “너가 나한테 조금이라도 더 연인일 때 꼭 말하고 싶어.”(‘마이 리틀 러버’, 261쪽) 김봉곤은 커밍아웃한 첫 게이 소설가다. 소설 속 주인공들도 다 게이 커플이다. 책의 앞과 뒤를 장식하는 표제작 ‘시절과 기분’과 ‘그런 생활’은 다른 종류의 사랑도 함께 다룬다는 점에서 독특한 지점에 있다. 뒤늦게 ‘나’가 쓴 책을 통해 게이였음을 알았을 전 여자친구와 살갑게 조우하긴 해도 극적인 고백은 일어나지 않는다.(‘시절과 기분’) “니 진짜로 그애랑 그런 생활을 했나?”(279쪽)라고 묻는 엄마하고도, 나 몰래 데이팅 앱으로 인스턴트 만남을 계속해 온 애인과도 극적인 화해는 불가하다.(‘그런 생활’) 그러나 그런 생활과 그런 사람, 그런 나를 껴안는 힘이 화자들에게는 있고, 그들 감정의 결을 작가는 세심하게 펼쳐 놓았다. 김봉곤 소설의 힘이다. 작가는 책 말미에 ‘나 그리고 우리의 목소리에 피로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잘 안다’로 시작하는 말을 남겨 놓았다. ‘나 그리고 우리’는 퀴어 또는 게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숱한 비하와 혐오와 부정과 번복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건 다름아닌,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삶이기 때문이다’(359쪽)라고 썼다. ‘피로’라는 말의 폭력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지점이다. 이윽고 ‘작가의 말’ 마지막은 이렇다. ‘나는 나의 삶을 쓴다. 그것이 내 모든 것이다.’(360쪽) 이른 더위가 밀려온 5월만큼 뜨거운 책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5·18문학상 본상에 공선옥의 ‘은주의 영화’ 선정

    5·18기념재단은 24일 5·18문학상 본상 수상작으로 공선옥 소설집 ‘은주의 영화’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5·18문학상 본상 심사위원들은 본상 후보에 오른 작품 14편을 심사, 수상작을 가렸다. 심사위원회는 ‘은주의 영화’가 작품성과 5·18문학상의 정체성을 두루 갖췄다고 평가했다. 심사위는 “광주의 이야기들 속에서 꺼져가는 불씨를 찾아내 시간과 공간을 함께 아우른 해원의 불길을 만들었다”며 “그 불길을 이루는 것들은 작고 보잘 것 없었으나 긴 시간 침묵하면서도 결국 자신들의 고통을 폭발시키고 넘어서는 존재들의 육성이다”고 평했다. 5·18문학상 신인상으로는 ▲시 부문 ‘고요한 세계-김경철을 기리며’ ▲소설 부문 ‘제주 푸른 밤바다’ ‘시크릿 박스’ ▲동화 부문 ‘오월의 내리는 눈’이 각각 선정됐다. 5·18문학상 신인상 공모에는 시 1024편, 소설 91편, 동화 46편이 접수됐다. 본상과 신인상 시상식은 5월23일 열린다. 한편 5·18문학상은 5·18민주화운동 정신을 기린 오월 문학의 저변 확대를 위해 제정됐다. 2006년부터 시상해오고 있으며, 2016년부터 본상과 신인상으로 나눠 진행하고 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뻔한 가난보다 상대적 박탈감, 그게 더 아프다

    뻔한 가난보다 상대적 박탈감, 그게 더 아프다

    한국 문학에서 서울로 상경한 여성 청년들의 서사는 유구한 전통을 가진다. 신경숙 작가의 소설 ‘외딴방’(1994)은 주경야독하는 구로공단의 여공 이야기였다. 최근 그레타 거위그 감독에 의해 영화로 재탄생한 고전 ‘작은 아씨들’도 따지고 보면 ‘조’라는 인물의 뉴욕 상경기다. 201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김유담(37) 작가의 첫 소설집 ‘탬버린’(창비)에도 그런 인물들이 한아름 등장한다. 이는 ‘부산 출생, 밀양 출신, 서울로 유학’이라는 작가의 인생과 닮아 있다. 최근 서울 서교동 까페창비에서 만난 작가는 “흔한 얘기라는 비판을 들을까 걱정했다”면서도 “제가 가장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얘기였기 때문에 썼다”고 밝혔다. “그레타 거위그 같은 감독을 보면서 힘을 내기도 했고요. 이게 시대를 뛰어넘어 전 세계적으로 많은 여성이 갈망하고 공감할 수 있는 얘기라는 생각을 했어요.” ‘흔한 얘기’라고 했지만, ‘탬버린’ 속 인물들은 다 같은 ‘지방러’가 아니다. 작가는 하나하나 미묘하게 다른 인물들의 결을 크레이프처럼 겹겹이 쌓아 올렸다. 인물들은 성별·경제적 수준 등에 따라 묘하게 다른 입장, 다른 처지를 지닌다. 가령 단편 ‘가져도 되는’에 나오는 인희와 승규 부부는 둘 다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을 온 캠퍼스 커플이다. 그러나 인희는 월 28만원짜리 여성 전용 고시원에 살고, 승규는 40만원짜리 하숙집에 산다. 취업 시장에서도 남자라는 스펙을 가진 승규에 비해 ‘B형 간염 보균자’라는 결격사유를 하나 더한 인희는 번번이 어려움을 겪는다. 인생에 있어 일견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하는 승규와 달리 천신만고 끝에 9급 공무원이 된 인희는 어렵게 쌓아 올린 자신의 현실을 더욱 그악스럽고, 야무지게 움켜쥔다. 같은 ‘상경 서사’라도 이전과 다른 이유는 시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절대적으로 밥을 굶는 수준의 가난한 인물은 제 소설에 안 나오죠. 지방에서 꽤 잘산다고 했는데 서울에 오니 가난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준은 아니지만 뭔가를 더 해보기에는 잘 안 되는 정도인 거죠. 그런 데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이 요즘 세대들한텐 더 큰 거 같아요.”이는 같은 자리에서도 차이와 차별을 미묘하게 감지하는 작가의 관찰력에서 비롯됐다.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도, 회식 자리 가면 사원 마음 다르고 팀장 마음 다르잖아요? 피라미드처럼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은 나한테 할 수 있지만, 나는 할 수 없는’ 그런 관계들을 예민하게 살펴보는 거 같아요.” ‘사원 마음 다르고, 팀장 마음이 다른’ 현실은 표제작 ‘탬버린’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회사 대표의 인솔하에 찾아간 노래방에서 쉴 새 없이 탬버린을 흔들 수밖에 없는 사원인 ‘나’와 그를 둘러싼 복잡한 셈법을 작가는 세밀하게 그려 냈다. 작가가 선망해 마지않는 김애란 작가는 “소설이 주는 위로란 따뜻함이 아니라 정확함에서 오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런데 김유담의 소설은 정확하다 못해 가차 없다는 느낌을 준다. 가령 이런 문장. ‘체력이 좋은 암 환자, 듬직한 신용불량자, 젖이 나오지 않는 수유부, 소설을 손에서 놓은 소설가가 커다란 불판 하나를 둘러싸고 장어를 굽고 있었다.’(272쪽) IMF 이후 실패만 거듭하다 암 환자가 돼 돌아온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린 ‘두고두고 후회’의 한 대목이다. “좀더 아름답게 그리고도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제 성격이 소설에 반영되나 봐요. 제가 항상 관계에 있어서도 머뭇거리는 편이고, 대책 없는 해피엔딩을 못 보거든요.” 그렇다고 무조건 해피엔딩이면, 독자는 행복할까. 더욱 부아만 돋우는 소설이 아닐는지. 김유담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 ‘정확한 가차 없음’으로 우리는 되레 위로를 받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인터뷰 도중 ‘서바이브’(Survive·생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서울로 유학한 ‘지방러’로서도, 신춘문예에 갓 등단한 신인으로서도 ‘서바이브’하기 위해 줄곧 노력했다는 뜻이다. ‘나’와 비슷한 생존기를 들으면,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지방러’도 경제 수준 따라 달라… 짠내나는 생존 노력 그려”

    “‘지방러’도 경제 수준 따라 달라… 짠내나는 생존 노력 그려”

    첫 소설집 ‘탬버린’ 펴낸 김유담 작가 자전적 경험 기반한 ‘청년 상경 서사’ 더욱 세밀한 상대적 박탈감 ‘직조’한국 문학에서 서울로 상경한 여성 청년들의 서사는 유구한 전통을 가진다. 신경숙 작가의 소설 ‘외딴방’(1994)은 주경야독하는 구로공단의 여공 이야기였다. 최근 그레타 거위그 감독에 의해 영화로 재탄생한 고전 ‘작은 아씨들’도 따지고 보면 ‘조’라는 인물의 뉴욕 상경기다. 201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김유담(37) 작가의 첫 소설집 ‘탬버린’(창비)에도 그런 인물들이 한아름 등장한다. 이는 ‘부산 출생, 밀양 출신, 서울로 유학’이라는 작가의 인생과 닮아 있다. 최근 서울 서교동 까페창비에서 만난 작가는 “흔한 얘기라는 비판을 들을까 걱정했다”면서도 “제가 가장 편하게 말할 수 있는 얘기였기 때문에 썼다”고 밝혔다. “그레타 거위그 같은 감독을 보면서 힘을 내기도 했고요. 이게 시대를 뛰어넘어 전 세계적으로 많은 여성이 갈망하고 공감할 수 있는 얘기라는 생각을 했어요.” ‘흔한 얘기’라고 했지만, ‘탬버린’ 속 인물들은 다 같은 ‘지방러’가 아니다. 작가는 하나하나 미묘하게 다른 인물들의 결을 크레이프처럼 겹겹이 쌓아 올렸다. 인물들은 성별·경제적 수준 등에 따라 묘하게 다른 입장, 다른 처지를 지닌다. 가령 단편 ‘가져도 되는’에 나오는 인희와 승규 부부는 둘 다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을 온 캠퍼스 커플이다. 그러나 인희는 월 28만원짜리 여성 전용 고시원에 살고, 승규는 40만원짜리 하숙집에 산다. 취업 시장에서도 남자라는 스펙을 가진 승규에 비해 ‘B형 간염 보균자’라는 결격사유를 하나 더한 인희는 번번이 어려움을 겪는다.인생에 있어 일견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하는 승규와 달리 천신만고 끝에 9급 공무원이 된 인희는 어렵게 쌓아 올린 자신의 현실을 더욱 그악스럽고, 야무지게 움켜쥔다. 같은 ‘상경 서사’라도 이전과 다른 이유는 시대가 다르기 때문이다. “절대적으로 밥을 굶는 수준의 가난한 인물은 제 소설에 안 나오죠. 지방에서 꽤 잘산다고 했는데 서울에 오니 가난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준은 아니지만 뭔가를 더 해보기에는 잘 안 되는 정도인 거죠. 그런 데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이 요즘 세대들한텐 더 큰 거 같아요.” 이는 같은 자리에서도 차이와 차별을 미묘하게 감지하는 작가의 관찰력에서 비롯됐다.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도, 회식 자리 가면 사원 마음 다르고 팀장 마음 다르잖아요? 피라미드처럼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은 나한테 할 수 있지만, 나는 할 수 없는’ 그런 관계들을 예민하게 살펴보는 거 같아요.” ‘사원 마음 다르고, 팀장 마음이 다른’ 현실은 표제작 ‘탬버린’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회사 대표의 인솔하에 찾아간 노래방에서 쉴 새 없이 탬버린을 흔들 수밖에 없는 사원인 ‘나’와 그를 둘러싼 복잡한 셈법을 작가는 세밀하게 그려 냈다. 작가가 선망해 마지않는 김애란 작가는 “소설이 주는 위로란 따뜻함이 아니라 정확함에서 오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런데 김유담의 소설은 정확하다 못해 가차 없다는 느낌을 준다. 가령 이런 문장. ‘체력이 좋은 암 환자, 듬직한 신용불량자, 젖이 나오지 않는 수유부, 소설을 손에서 놓은 소설가가 커다란 불판 하나를 둘러싸고 장어를 굽고 있었다.’(272쪽) IMF 이후 실패만 거듭하다 암 환자가 돼 돌아온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린 ‘두고두고 후회’의 한 대목이다. “좀더 아름답게 그리고도 싶었는데, 어쩔 수 없이 제 성격이 소설에 반영되나 봐요. 제가 항상 관계에 있어서도 머뭇거리는 편이고, 대책 없는 해피엔딩을 못 보거든요.” 그렇다고 무조건 해피엔딩이면, 독자는 행복할까. 더욱 부아만 돋우는 소설이 아닐는지. 김유담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 ‘정확한 가차 없음’으로 우리는 되레 위로를 받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인터뷰 도중 ‘서바이브’(Survive·생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서울로 유학한 ‘지방러’로서도, 신춘문예에 갓 등단한 신인으로서도 ‘서바이브’하기 위해 줄곧 노력했다는 뜻이다. ‘나’와 비슷한 생존기를 들으면,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문화마당] 2020 문학, 혁신을 요구받다/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문화마당] 2020 문학, 혁신을 요구받다/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계간 ‘자음과모음’ 봄호 특집 ‘작가-노동’이 화제다. “원고료로 생활이 가능한 ‘전업 평론가’는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문학평론가 장은정이 구체적 숫자로 답했기 때문이다. 2009~2019년 11년 동안 그가 발표한 글은 176편, 원고 매수로 5728매다. 대가는 총 3390만원, 한 달 평균 46만원이다. 이른바 ‘주니어 평론가 시스템’에 속해 상당히 많은 발표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이 정도다. ‘전업 평론가’는 불가능하다. ‘주니어 평론가 시스템’은 문학동네, 문학과지성사, 민음사, 창비 등 주요 문학 출판사의 내부 독회에 바탕을 둔 차세대 평론가 운영 체제를 말한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이들 출판사는 내부 편집위원, 편집자, 외부 평론가 등과 정기 독회를 갖췄다. 여기서 문예지 발표작, 단행본 시집과 소설집, 장편소설을 토론하고 작품성·대중성·가능성 등을 고려해 잡지에 청탁하거나 단행본 계약을 한다. 이때 참여하는 외부 평론가는 등단 5년 이내 ‘젊은 평론가’들이다. 이유는 두 가지. 우선, 한 사람이 모두 좇아서 읽지 못할 정도로 작품량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믿을 만한’ 이들이 분담해 읽고 일정한 논의 구조를 거쳐 좋은 작가를 가리는 것이 효율적이었다. 다음, 차세대 육성이다. 평론가는 20대 후반 등단한 후 학계에 자리잡을 때까지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대학에서 논문 중심 체제가 강화된 2000년대 들어 교수가 현장 평론을 하는 건 힘들어졌다. 자사 발행 작품을 잘 읽어 줄 평론가가 충분하지 않자 출판사 입장에선 ‘좋은 평론가’ 자체를 길러내는 게 나았다.(시인-서평가, 소설가-서평가가 늘어난 것도 같은 사정에서다.) 장은정에 따르면 ‘주니어 평론가 시스템’에는 근본적 결여가 있었다. 젊은 평론가한테 주어진 기회는 대부분 ‘리뷰’였다. “잡지를 운영하는 편집위원들이 정해 준 텍스트”에 대한 글이었다. 젊은 평론가에게는 선배 평론가들의 ‘좋음’에 복속해 그 과업을 잘 수행할 의무만 있었다. 평론가가 “어떤 텍스트가 다시 읽힐 만한 비평적 가치가 있는지를 선별할 수 있는 권한을 갖지 못한 존재”로 전락하고, 출판산업이 평론을 내부의 한 영역으로 포획해 버린 것이다. 출판산업과 직접 이해관계가 없는 독립비평가가 드물어지자 문학권력이 작품 생산에서 평가까지 모두 장악하면서 무분별한 작동을 시작한다. 장삿속이 노골화돼 작품에 대한 긍정 비평, 즉 ‘세밀한 읽기’만을 조장하고 작품의 질에 대한 근본 질문, 즉 ‘비판적 읽기’를 둔화시킨다. 우정의 리뷰만 가능하고 도발적 비판이 좀처럼 존재하지 못한다. 비판 없는 권력은 균형을 잃는다. 장은정이 보기에, 타락한 권력이 봉합된 진실을 견디지 못하고 찢어져 버린 것이 ‘2015년 신경숙 표절 사태’다. 신경숙을 옹호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언어가 동원됐는가. 이후, 올해 초 이상문학상 저작권 문제에 이르기까지 더이상 “세밀한 읽기로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났다. 문학제도 자체의 혁신을 위한 문제제기가 절실해졌다. ‘작가-노동’도 한 이슈다. 출판이 작품 노동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느냐는 오래된 질문이다. 예술성과 시장성이 어긋나는 경우가 많으니,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본래 좋은 답이 없다. 작가의 바람은 “안전하다는 느낌을 주는 집에 살며, 3800원짜리 마카롱을 사 먹고, 집 앞 근사한 카페에서 드립 커피 정도는 살 수 있는 삶”이다. 십여년 넘게 동결된 원고료 인상 등 실제 대책도 중요하다. 그러나 작가가 진짜 바라는 것은 문학제도가 자존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작동하는 것 같다. 작가와 출판사가 같은 길에 있다는 느낌이 무너졌다는 심각한 위기의 신호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2020년대 문학은 혁신의 과제를 무겁게 짊어진 채 출발하게 됐다.
  • 흙과 돌 틈, 자연 그대로의 삶이 오롯이… ‘토지’ 생명력처럼 강인하고 든든한 품

    흙과 돌 틈, 자연 그대로의 삶이 오롯이… ‘토지’ 생명력처럼 강인하고 든든한 품

    ‘작가의 땅’(작.땅)은 온 생을 다해 글을 쓴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주소다. ‘작.땅’은 치열한 창작의 공간이자 문장으로 대들보를 세운 장소들을 따라간다. 작가들이 글을 쓰는 뒷모습과 곡진한 삶의 희비를 엿보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책 바깥의 여행이다. 그곳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강원 원주 매지리에 있는 토지문화관은 내게 멧돼지 떼가 창궐하던 한여름 밤의 옥수수밭으로 남아 있다. 재작년 여름, 두 번째 소설집의 교정지와 가을호 계간지 마감이 겹쳐서 얼마간은 저돌적인 상태로 토지문화관 문인 창작실에 입소했다. 만두 찜기의 뚜껑을 연 것 같던 하오가 지나도 청쾌한 바람은 쉽게 산골에 스미지 않았다. 창작실에서 식당으로 가는 길목에 나 있던 산짐승 발자국이 멧돼지의 것이라는 사실은 먼저 입소해 소설을 연재하고 있던 전성태 소설가가 알려주었다. 그날 밤부터 나는 창작실의 베란다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벌레 소리들을 배경음악 삼아 원고 작업에만 매달렸다. 일상에서 오는 잡념들을 접어둔 채 오로지 창작에만 매달릴 수 있는 환경이 더할 나위 없었지만 작업은 진척이 없었다. 자정을 넘기고서야 겨우 숨이 좀 가라앉을 만한 바람이 내려왔다. 그리고 바람을 따라 산골의 멧돼지도 왔다.창밖의 기척이 심상찮아서 밖을 내다보던 중이었다. 하늘보다 더 어두운 옥수수밭 한가운데에 분명 어떤 움직임이 있었다. 만일 나에게 귀신을 보는 눈이 트였다면, 헛것에게라도 어떻게든 빌어 보고 싶던 시기였기에 내 눈은 어둠 속의 움직임에 집중돼 있었다. 그 밤 내내 일사불란하게 옥수숫대 사이를 누비는 소리를 들으며 간신히 새벽을 맞았다. 다음날 남들이 점심 먹을 때쯤 일어나 식당으로 가다 보니 옥수수밭 한가운데가 우주선이 앉았다 간 모양으로 둥그렇게 파헤쳐져 있었다. 식당에서는 어젯밤에 내려온 멧돼지들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옥수수와 고구마밭이 점점 더 크게 헤쳐진다는 사실도 덧붙여 들려왔다.덕분에 아침마다 밭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도 내 또 다른 일과가 됐다. 엄밀히 따지자면 산짐승의 공간을 우리가 침범한 셈이기도 했으니 잘못은 이쪽에 있었지만 말이다. 그곳에서 나는 원고가 풀리지 않을 때마다 박경리 선생이 손수 일구시던 밭과 장독대에 다녀왔다. 선생의 거처를 지키고 있는 거위 떼들이 꽉꽉 우는 곳이었다. 그 소리를 따라 창작실과 선생의 울 안까지 오가는 길이 내가 부릴 수 있는 최대치의 여유였다. 정갈한 장독대와 두둑하게 북이 오른 밭이랑을 볼 때마다 직접 농사를 지어 수확한 작물들로 하루에 한 끼는 꼭 직접 반찬을 만들어 후배 작가들의 식사를 챙겼다는 선생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그곳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산짐승의 울음도, 더위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자연의 모든 것들은 우리가 후대에게 잠시 빌려 쓰는 것일 뿐”이라는 선생의 말씀에 따라 자연 친화적으로 지어진 문화관의 모습과 인위적인 것을 최대한 배제하며 살아가고자 했던 그분의 뜻이 곳곳에 배어 있는 자리였다. 생의 마지막까지 밭둑의 흙을 돋우며 생활하셨던 선생답게 남겨진 것들은 매우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선생이 손수 지은 옷들과 밀짚모자, 호미와 낫 같은 농기구들이 생전 그대로 놓여 있었다. 허울 좋은 건물의 이름 크게 쓴 문학관보다는 문인 창작실을 지어 후배 작가들의 작업을 응원했던 그 정신 그대로 오로지 작가들의 복지만을 추구하고 당신께서는 직접 흙과 돌 틈에서 최대한 자연 그대로의 삶을 사셨다. 그러는 동안에도 창작에 대한 열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는 이야기가 떠오를 때마다 이렇게 앉아 게으름을 피우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소리가 들리지는 않지만 게으른 후배에 대한 정갈한 꾸짖음, 그렇지만 응원과 격려를 한꺼번에 전해 받는 듯한 그 감각은 오로지 선생의 울타리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좋은 기회에 선생이 사용하던 모든 물건이 고스란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처에도 들어가 보았다. 방 한쪽에 은은한 분위기를 풍기던 장은 예전에 선생이 어느 글에서 썼던 그 나비장이었다. 6·25전쟁 당시에 피란을 가기 위해 이불에 싼 나비장을 마른 우물에 던져 넣고 떠났다가 천신만고 끝에 다시 돌아온 뒤에 건져냈다고 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애지중지하며 아꼈던 장과 필기구, 오래된 살림살이들, 태우시던 담배 보루까지도 여전한 그곳은 선생이 곧 문을 열고 들어올 것처럼 무척 현실적인 공간이기도 했다.작가 중에서 토지문화관을 모르거나 거쳐 가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로 이곳은 창작하는 사람들에게는 고요한 꿈의 공간, 선생의 창작열을 느낄 수 있는 산실이다. 누구도 선뜻 문인들의 복지를 이야기하지 않았던 시절에 사재를 기꺼이 헌사해 지은 이 공간을 선생은 무척 아끼고 사랑하셨다고 전해진다. 매지리 안쪽 산기슭에 자리했지만 제주도와 경상도, 전라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작가들이 몰려들었고 급기야 해외 작가들도 한 번쯤 다녀가고 싶은 공간으로 손꼽히는 장소가 됐다. 중견과 신진을 가리지 않고 고루 지원하는 문화관의 정책도 여전했다. 국내 지원을 넘어서 해외 레지던스까지도 교류를 넓힌 상태였다. 매년 봄이면 새로운 작가들이 입주해 60일 동안 혹은 길게는 90일 정도 이곳에 머물다 간다. 올해도 봄이 시작됐으니 창작실도 새 주인을 맞이했겠다.올해 토지문화관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박경리 선생의 딸 김영주 이사장이 숙환으로 별세한 후 그의 둘째 아들 김세희 관장이 취임했다. 선생의 유지를 이어 작가들의 창작을 지원하고 소설 ‘토지’의 삶과 생명 그리고 환경보호의 정신을 잇는 일이 손자 대로 넘어온 셈이었다. 토지의 생명력처럼이나 강인하고도 든든한 바통 터치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박경리 선생과 관련된 공간은 하동 악양면 평사리의 최 참판 댁 한옥문화관, 통영 박경리기념관 그리고 원주의 박경리 문학공원과 ‘토지’를 완성하고 선생이 말년을 보낸 공간인 이곳 흥업면 매지리 토지문화관까지 모두 네 군데다. 선생이 17년 동안 사신 원주시 단구동 자택이 택지지구가 되면서 그 자리가 없어질 위기에 처하자 많은 문인이 마음을 모았다. 여기에 택지지구 보상금과 토지개발공사 기부금을 합쳐 토지문화재단과 토지문화관이 들어섰다. 토지문화관 개관식에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참석해 선생의 소설과 후배들을 지원하고자 하는 마음을 기렸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흘렀지만 창작실에는 여전히 문인들의 입주 신청이 쇄도하고 매일 관람객들이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룬다. 김세희 관장은 위에 언급한 네 군데의 장소들을 보다 유기적이고도 조직적으로 연계해 ‘토지’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더불어 소설 ‘토지’의 콘텐츠들을 보다 현대적이고도 접근성이 쉽게 이용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제반 사업들을 검토 중이라는 사실도 덧붙였다. 선생의 유훈과 창작 업적을 기리기 위해 숙고 끝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세계문학상인 ‘박경리 문학상’을 국내외 독자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작업도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박경리 문학상 수상자들이 토지문화관에서 진행하는 강연 또한 국내에서 다시 듣기 어려운 기회로 명성을 얻기 시작한 터였다. 최인훈, 베른하르트 슐링크, 응구기 와 티옹오, 이스마일 카다레 등이 이 상의 역대 수상자였으며 이들의 강연은 창작실에 입주한 작가들을 비롯해 전국에서 찾아든 독자들로 인해 매년 성황리에 개최됐다. 아울러 여러 문화 행사들과 관련된 장소 대관과 숙박을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을 대여하는 일도 동시에 이루어지는 바쁜 문화관이라는 관장의 말을 듣고 있자니 소설 ‘토지’의 북적이는 평사리 장터의 여러 장면들이 떠올랐다. 선생이 일구었던 환경과 삶 그리고 창작의 힘을 후대에도 변함없이 이어 가겠다는 새 관장의 목소리에 자못 힘이 실려 있었다. 끊임없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중에도 문화관 한켠에 위치한 창작실에서 여러 명의 작가가 각자의 작업에 몰두하는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문화의 산실이 아닌가.코로나19 탓에 여러 나라의 국경이 닫혔다. 새싹과 꽃이 피는 길을 따라 걷던 발걸음도 사라졌다. 그러나 곧 감염병은 잠잠해질 것이며(그러리라 믿고!) 우리는 다시 길 위에 두 발을 얹어둘 것이다. 봄꽃은 남도에서부터 피어 온다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봄꽃을 따라 통영에서 하동을 거쳐 원주에서 그 여정의 정점을 찍는 일명 ‘박경리 토지 로드’를 돌아보시기를 추천해 드린다.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 시간에 문학과 대문호의 발걸음을 따라 걷는 시간이 길 위의 사람들에게 보다 의미 있는 여정이 돼 주리라 확신한다. 토지문화관을 돌아보고, 선생의 자취를 밟으며 하룻밤 토지문화관에서 묵어가는 일정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꿈꿨던 작가의 삶을 조금은 엿볼 기회가 되지 않을까. 올봄의 여정은 ‘토지’의 길을 따라 문학적인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보시기를, 그곳에 다녀가면 분명 이 ‘다음’을 살아갈 새로운 용기가 생겨 있을 것이니. 참, 나는 그해 여름에 멧돼지 옥수수 갉아먹는 소리를 들으며 작업했던 두 번째 소설집 ‘유빙의 숲’을 출간했고, 단편소설 마감 역시도 무사히 마쳤다. 선생의 응원이 분명 그곳에 실려 있다고 아직도 믿고 있다. 그 시간을 지켜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어디에 해야 할지 몰라 이곳에 적는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소설가 이은선
  • [책꽂이]

    [책꽂이]

    인류는 어떻게 역사가 되었나(헤르만 파르칭거 지음, 나유신 옮김, 글항아리 펴냄) 독일 최고 권위의 라이프니츠상을 수상한 고고학자가 쓴 문자 발명 이전 인류의 700만년 역사에 관한 서술. 식량과 거처만 확보되면 더 나은 것을 향한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던 인간이 효율성과 최적화를 추구하기 시작한 석기 시대, 문자가 아닌 다른 의사소통 방식으로 자연이 만든 한계를 넘어서려고 했던 인간의 행보를 담았다. 1128쪽. 5만 4000원.좋은 느낌이 특별한 인생을 만든다(이장민 지음, 이담북스 펴냄) 문화기획자로 활동하는 저자의 ‘치유’ 에세이. ‘느낌’이란 무엇이며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좋은 느낌이 왜 필요한지 심리학과 양자역학 관점에서 풀어놓는다. 특히 좋은 느낌을 깨우는 활동 중 음악을 듣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이유와 음악을 통해 인생을 변화시키는 방법을 제시한다. 281쪽. 1만 5000원.조선인민군(김선호 지음, 한양대학교출판부 펴냄) 역사학자가 쓴 북한군 전문 연구서. 새로 발굴한 자료를 바탕으로 인민군이 창설되고 북한 체제가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했다. 인민군이 소련군을 모델로 창설됐다는 통설을 넘어 소련군·중국군·일본군으로부터 다양하게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보여 준다. 720쪽. 3만 5000원.일주일 만에 사랑할 순 없다(김동식 지음, 요다 펴냄) 2018년 ‘회색 인간’으로 데뷔한 김동식의 신작 소설집. 카카오 페이지 연재 당시 반응이 좋았던 작품과 신작 등 단편 23편을 실었다. 표제작은 SF와 판타지, 스릴러 등을 쓴 작가의 첫 로맨스 소설로 지구 멸망을 일주일 앞두고 사랑에 빠진 남녀의 생존기를 그렸다. 392쪽. 1만 3000원.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브래디 미카코 지음,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펴냄) 영국에서 20년 이상 거주한 일본인 보육사가 영국 사회의 밑바닥에서 아이를 키우며 겪은 현실을 기록했다. 중학교에 갓 입학한 아들이 인종, 국적, 계층이 다른 친구를 만나며 겪는 복잡미묘한 사건을 관찰하며 계층 격차와 다문화 문제라는 민감한 이슈를 풀어낸다. 292쪽. 1만 4000원.기울어진 교육(마티아스 도프케·파브리지오 질리보티 지음, 김승진 옮김, 메디치미디어 펴냄) 한국뿐 아니라 미국, 유럽 등에서도 확산되는 ‘헬리콥터 부모’의 기원을 톺아본 저작. 자녀에 대한 개별적인 욕망과 애정의 영역으로 치부되던 양육의 문제를 경제적 변화에 대한 부모의 합리적 반응으로 설명한다. 512쪽. 2만 3000원.
  • 아동문학가 신지식 작가 별세

    아동문학가 신지식 작가 별세

    고전 ‘빨강머리 앤’을 국내에 처음 소개했으며 소설집 ‘하얀 길’로 유명한 신지식 작가가 지난 12일 별세했다. 90세. 17일 문학계에 따르면 소설가 겸 아동문학가인 고인은 지난 12일 밤 숙환으로 소천, 14일 오후 경기 용인시 용인공원에 안장됐다. 유족들은 코로나19 확산 우려로 가족장으로 조용히 장례를 치른 뒤 뒤늦게 부고를 알렸다. 가족장은 고인 유지인 것으로 전해졌다. 1930년 서울에서 태어난 고인은 1948년 이화여고 재학 시절 ‘전국여학생 문예콩쿠르’에서 단편 ‘하얀 길’이 당선돼 등단했다. 1956년에 나온 첫 소설집 ‘하얀 길’은 고인의 대표작이다. 꿈 많은 소녀 감성을 아름답고 섬세하게 표현해 당대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소녀들이 사랑하는 고전 ‘빨강머리 앤’(루시 몽고메리)을 1963년 처음으로 번역해 국내에 소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유네스코문학상, 소천문학상, 대한민국아동문학상 대통령상, 화관문화훈장, 한국어린이도서상 등을 받았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제주 4·3사건 상처 재규명한 ‘원로 소설가’ 현길언 별세

    제주 4·3사건 상처 재규명한 ‘원로 소설가’ 현길언 별세

    “반란군·국군 모두 제주민에 희생 강요” 4·3사건 직접 조사·연구 저서에서 지적제주도 역사와 주민의 삶을 작품세계의 바탕으로 삼고 제주 4·3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문학으로 재규명한 원로 소설가 현길언씨가 별세했다. 80세. 1980년 ‘현대문학’에 소설 ‘성 무너지는 소리’를 발표하며 등단한 고인은 ‘순이삼촌’을 쓴 현기영(79) 작가와 함께 제주도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활동해왔다.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에서 태어난 고인은 제주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와 한양대에서 각각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제주대 국문과 교수와 한양대 국제문화대학 한국언어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퇴임 후에는 울란바토르 대학 석좌교수이자 한국학연구소 소장으로 지내며, 학술계간지 ‘본질과 현상’을 기획해 펴내기도 했다. 고인은 제주의 지역적 특성에 기반한 비극적 삶, 이념적 싸움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노력들을 소설에 담았다. 4·3사건을 꾸준히 조명하고, 이를 둘러싼 진영 논리를 비판하는 데도 목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귀향’, ‘우리들의 조부님’, ‘먼훗날’ 등으로 4·3사건 소설화했고, 2014년엔 4·3사건을 직접 조사·연구한 저작 ‘섬의 반란, 1948년 4월 3일’을 출간했다. 이 책을 통해 사건의 본질은 반란군과 국군 양쪽에서 제주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노무현 정부 때 채택된 진상 보고서에 대해서는 “4·3 당시 정부의 잘못을 찾아내 양민들의 희생에 대한 책임을 떠넘기는 것에만 목적이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성경과 제주 설화의 토양 위에서 신앙·문학·생활이 만나는 자리를 추구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그렇게 ‘용마의 꿈’, ‘벌거벗은 순례자’, ‘나의 집을 떠나며’ 등 소설집과 ‘회색도시’, ‘한라산’(전 3권) 등 장편소설을 냈다. ‘전쟁놀이’, ‘그때는 한 살이었다’ 등의 어린이소설도 그의 작품이다. 후학들을 가르치면서는 소설 연구서로 ‘소설쓰기의 이론과 실제’, ‘한국 현대소설론’ 등을 내놨다. 지난해 10월 출간된 소설집 ‘언어 왜곡설’은 인간의 사적 관계에서 벌어지는 소통 문제에 천착한 작품으로 그의 유작으로 남았다. 고인은 녹원문학상,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기독교문학상, 백남학술상, 김준성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상(문학부문) 등을 수상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한국기독교문인협회장도 지냈다. 고인은 수개월 전부터 암 투병으로 항암치료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발인은 13일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제주 4·3사건 재조명했던 원로 소설가 현길언 별세

    제주 4·3사건 재조명했던 원로 소설가 현길언 별세

    제주도 역사와 주민의 삶을 작품세계의 바탕으로 삼고 제주 4·3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문학으로 재규명한 원로 소설가 현길언씨가 별세했다. 80세. 1940년 제주도 서귀포시 남원읍에서 태어난 고인은 제주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와 한양대에서 각각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제주대 국문과 교수와 한양대 국제문화대학 한국언어문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퇴임 후에는 울란바토르 대학 석좌교수이자 한국학연구소 소장으로 지내며, 학술계간지 ‘본질과 현상’을 기획해 펴내기도 했다. 1980년 ‘현대문학’에 소설 ‘성 무너지는 소리’를 발표하며 등단한 고인은 ‘순이삼촌’을 쓴 현기영(79) 작가와 함께 제주도를 대표하는 문인으로 활동해왔다. 고인은 제주의 지역적 특성에 기반한 비극적 삶, 이념적 싸움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노력들을 소설에 담았다. ‘귀향’, ‘우리들의 조부님’, ‘먼훗날’ 등은 4·3사건의 상처를 소설화하고 해당 사건의 역사적 재규명을 시도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여기에 성경과 제주 설화의 토양 위에서 끊임없이 신앙·문학·생활이 만나는 자리를 추구해왔다. ‘용마의 꿈’, ‘벌거벗은 순례자’, ‘나의 집을 떠나며’ 등 소설집과 ‘회색도시’, ‘한라산’(전 3권) 등 장편소설을 냈다. ‘전쟁놀이’, ‘그때는 한 살이었다’ 등 어린이소설도 썼다. 후학들을 가르치며 소설 연구서로 ‘소설쓰기의 이론과 실제’, ‘한국 현대소설론’ 등을 출간했다. 녹원문학상, 현대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기독교문학상, 백남학술상, 김준성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문학부문 등을 수상했다. 고인은 수개월 전부터 암 투병으로 항암치료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빈소는 서울성모병원, 발인은 13일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광화문 상공에 UFO 띄울까…우리네 일상이 담긴 생활SF

    광화문 상공에 UFO 띄울까…우리네 일상이 담긴 생활SF

    ‘한국 SF계의 핵심 부품’(정세랑 작가), ‘2000년대 한국의 SF에서 가장 주목받을 만한 젊은 작가’(복도훈 문학평론가). 동료 작가와 평단의 찬사를 한몸에 받았던 배명훈(42) 작가가 데뷔 15년, 출간 11년 만에 첫 소설집 ‘타워’(왼쪽·문학과지성사)를 복간했다. 첫 에세이집 ‘SF 작가입니다’(오른쪽·문학과지성사)의 출간과 함께다. 최근 서울 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작가는 대뜸 “표지가 예쁘게 나와서 좋다”며 싱글벙글했다. “표지가 예쁘려면 편집자가 중간에서 조율을 잘해야 하고 제가 생각했던 메시지가 디자인으로도 잘 소화가 돼야 하죠.” ‘표지가 예쁘다’는 것은 그의 말처럼 편집자와 디자이너 모두와 ‘통했다’는 방증이지만, 2005년 데뷔한 이래 배명훈의 행보는 한국 SF를 독자들에게 각인시키는 수순이었다. 그래서 그의 에세이집 ‘SF 작가입니다’의 주된 주제는 ‘한국에서 SF소설을 쓴다는 것’이다. 일단 ‘과학 소설’ 앞에 ‘공상’이라는 단어를 무심코 붙이는 데서 알 수 있듯 SF에 대한 편견은 여전하다. 그의 책에 따르면 SF는 ‘과학 소설’(Science Fiction) 또는 반드시 과학에만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의 ‘사변 소설’(Speculative Fiction)에서 온 말이다. ‘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을 막연히 그려 봄’을 뜻하는 공상(空想)을 과학 소설과 함께 쓰는 건, 판타지와 SF를 함께 다룬 미국 잡지를 번역하며 쓴 일본식 조어다. 습관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이들에게 작가는 말한다. ‘당신 직업이나 단체 이름 앞에 공상을 붙여 보시라. 공상서점, 공상출판사, 공상신문사, 공상기획팀.’(87쪽) SF를 쓰는 소설가로서 더욱 현실적인 문제는 과연 ‘광화문 상공에 UFO를 띄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거대 우주선이 난무하는 SF는 제국의 장르이고 그래서 한국인의 공간에는 우주가 없다. 우주적 스케일의 일에 한국인이 능동적 주체가 되리라는 기대감이 한국 독자들에겐 많지 않다. “아직도 한국 작가의 SF에 미국 국적의 주인공들이 등장하고요. 거대 우주선이나 로봇이 나와야 ‘진정한 SF’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제가 쓰는 글은 ‘소소한 일상이 담긴 생활 SF’라고 하면서 ‘우리랑은 다르다’고 하는 거죠. 근데 저는 그게 중요했어요. SF로 우리 삶을 다루는 거요.” 그렇게 2009년, 당시 한국 현실에 대한 은유가 담긴 인구 50만명을 수용하는 초고층 초대형 빌딩 ‘빈스토크’의 서사, ‘타워’가 탄생했다.으레 SF 작가들은 과학 전공이겠거니 싶지만 배 작가는 서울대에서 외교학을 전공했다. 그때 배운 국제정치학 개념들은 뜻밖에도 SF를 쓰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가령 ‘현실주의’는 국제 정세가 철저히 파워 게임이라는 주장이며, 대안으로 등장한 ‘구성주의’는 ‘그 같은 현실은 당신이 구성한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작가가 보기에 리얼리즘을 중요한 평가 지표로 삼는 순문학에는 실제 정보기술(IT)의 발전 양상 같은 것들이 더디게 반영된다. “지금보다 앞선 시대 삶의 모습을 재현하면서 ‘이게 리얼한 거야’라고 구성주의식으로 말하는 거죠. 그래서 저는 리얼리즘에 대한 열등감이 없고요. 상상의 지위가 절대 낮지 않다고 생각해요.” 지금에서야 한국 SF는 해외에 판권이 팔리고, 전문 무크지가 생겨나는 등 집중 조명받고 있다. 일찍이 SF계에 투신(?)한 작가는 이런 현상을 어떻게 볼까. “2년 전쯤부터 이른바 순문학을 하는 출판사에도 SF 투고가 많이 들어온다는 얘길 들었어요. 저변 확대가 돼 있었던 거죠. 기성 작가도 SF를 많이 쓰고, 지망생도 많아지고요. 자화자찬을 하자면 제가 한 15년 동안 보여 줬기 때문이 아닌가. 하하.” 그간 ‘순문학과 장르문학을 넘나든다’는 소리를 들어 온 작가에게 그러한 수식어는 오히려 즐거운 작가 생활을 뒷받침한단다. “양쪽에 시민권이 있다, 그런 느낌이에요. 그래서 좀더 자유롭게 쓸 수 있죠.” 말마다 쾌활한 느낌이 묻어나는 게 ‘SF 작가입니다’의 노란색 표지가 그냥 나온 건 아니지 싶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모르겠다” “멀었다” 집요한 시선의 흔적

    “모르겠다” “멀었다” 집요한 시선의 흔적

    아직 멀었다는 말/권여선 지음/문학동네/284쪽/1만 3500원 1996년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로 제2회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이래 한국문학의 깊이를 더해 온 권여선 작가의 소설집이다. ‘안녕 주정뱅이’ 이후 4년 만에 선보이는 소설집에는 제19회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한 ‘모르는 영역’을 포함해 8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안녕 주정뱅이’로 주류 문학의 한 획을 그은 그이지만, 새 소설집에서 작가의 촉수는 술 너머로 뻗어 간다. 스물한 살의 스포츠용품 판매원 소희(‘손톱’)에서부터 정교한 배제에 노출된 기간제교사 N(‘너머’)까지 다양한 인물들을 향한다. 가장 눈이 가는 소설은 레즈비언 할머니 이야기 ‘희박한 마음’이다. 데런은 연인 디엔이 떠난 뒤 혼자 살며 디엔과의 일을 꼼꼼히 짚어 나간다. 디엔과 같이 살던 몇 년 전 한밤중에 어디선가 소름 끼치는 의문의 소리가 들려왔는데 실은 옆집 수도 계량기에서 나는 소리였다. 디엔이 떠나고 없는 지금도 반복되는 그 소리는 대학 시절 데런과 디엔이 함께 담배를 피울 때 갑자기 나타나 담배를 끄라며 소리 지르던 한 복학생 남자의 위협과도 닮아 있다. 복학생 남자가 디엔을 후려쳤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지켜보기만 했던 순간으로 데런은 끊임없이 돌아간다. 소설은 성소수자를 향한 외부의 폭력에 더해 그들 사이에 해소되지 않고 남아 있는 감정에 이르기까지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소설집 제목인 ‘아직 멀었다는 말’은 단편 ‘손톱’에서 따왔다. 갚아야 할 빚과 모아야 할 돈을 100원 단위까지 끊임없이 계산하고, 단돈 500원 때문에 ‘매운’ 짬뽕을 포기하는 소희는 손톱에 난 상처마저 돈 때문에 오래 방치한다. 유일하게 자신에게 위안이 되는 존재인 할머니의 하품을 소희는 “그건 아직 멀었다” 하는 소리로 알아듣는다. 작가는 책의 끝에 “모르겠다”고 썼는데, 소설 속 “아직 멀었다”와 맥락이 닿아 있는 듯하다. ‘모르겠다’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더 열심히 정확하게 볼 것이다. “소설이 주는 위로란 따뜻함이 아니라 정확함에서 오는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김애란 작가의 추천사가 마음에 와닿는 이유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또 다른 나…내 안에 괴물이 산다

    또 다른 나…내 안에 괴물이 산다

    몬스터/손원평 외 9인 지음/한겨레출판/각 200쪽/각 1만 3000원세계 영화사를 다시 쓴 영화 ‘기생충’은 ‘계급 전쟁 속 괴물이 된 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개봉 전부터 로테르담영화제 등 유수의 영화제에서 러브콜이 쏟아지는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돈 가방을 좇아 괴물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두 영화의 사례를 빌려 요즘 영화의 성공 공식을 거칠게 요약하면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이 괴물이 되는 과정을 핍진하게 그리는 데 있는 것 같다. 각박한 현실 속 조커 같은 ‘빌런’(악당)이 대세인 것처럼 ‘괴물이라도 괜찮아’ 정도의 정서가 우리 기저에 깔려 있는 것 아닐까.‘몬스터’는 각각 ‘한낮의 그림자’, ‘한밤의 목소리’라는 부제가 붙은 소설집이다. 평범한 일상 속 어딘가 낯익은 주인공을 통해 나도 몰랐던 내 안의 괴물을 발견하는 작품들로 채워진 ‘한낮의 그림자’와 자신의 괴물 같은 욕망을 꺼내는 인물들을 통해 인간과 사회의 본질적 탐구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한밤의 목소리’로 나뉜다. 지난해 하반기 ‘밀리의서재’에서 오리지널 시리즈로 연재됐던 작가 10인의 작품을 테마 소설집 두 권으로 묶었다. ‘한낮의 그림자’에 실린 최근 절필을 선언한 윤이형 작가의 소설 ‘드릴, 폭포, 열병’을 보자. 모임에서 횡령을 했다고 지목받은 혜서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윤경은 혜서의 절친한 친구이면서도 혜서의 잘잘못을 정확히 따져 보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은 인물이다. ‘드릴, 폭포, 열병’은 혜서의 사망 이후 또 한번 입을 열려는 윤경에 대한 ‘나’의 입막음이다. 한 생명의 죽음으로 인해 어차피 또 다른 희생양을 찾기에 급급한 게 여론이라면 ‘침묵으로서 책임질 용기’(84쪽)를 내야 하며, 다시 나서려는 윤경의 행동은 ‘가해망상’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 한마디를 하기 위해 이구아수폭포에서 피부가 코끼리 살갗처럼 변한다는 열병에 걸렸다는 불안이 퍼지면서 사소한 증상도 ‘코끼리열병’으로 인식했던 지난날, 누수의 원인을 알 수 없는데도 계속되는 이웃들의 민원에 집 안 여기저기 드릴을 들이대야 했던 시절들을 열거하는 ‘나’. 결국은 ‘두려움 앞에선 모두가 평등’(53쪽)하다며 윤경에게 침묵할 것을 종용한다.‘한밤의 목소리’에서 마주하는 몬스터의 모습은 좀더 가시적이다. 손아람 작가의 ‘킹 메이커’는 상대 후보의 룸살롱 출입 동영상을 손에 넣고 단박에 승리를 거머쥔 선거 컨설턴트 ‘영경’의 이야기다. 영경의 고객이었던 문지학 후보와 상대 후보였던 유재성의 차이는 룸살롱 출입 유무가 아니라 상대의 네거티브 이슈를 손에 쥐었을 때 터뜨리는 사람이냐, 아니냐의 문제였다. 선거 승리로 도취돼야 마땅했던 그날 영경은 뜻밖의 인물에게서 만나자는 전갈을 받는다. 괴물에 패배한 자 스스로 괴물이 되리니. 김동식, 듀나, 곽재식 등 이른바 장르문학 작가들이 대거 참여한 ‘한밤의 목소리’는 영화 시나리오를 읽는 듯한 생생함이 특징이다. ‘몬스터’에서 각 소설의 뒤에는 작가들이 생각한 몬스터가 정의돼 있다. ‘영화 속 괴물도 괴물은 아닌 것 같다. 사람을 괴물이라고 표현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최진영), ‘인간에게 망각이란 것이 어쩔 수 없다지만, 가끔은 망각이 모든 괴물들의 변호사처럼 느껴집니다’(김동식)라는 말처럼 결국은 자신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어떤 것으로 수렴된다.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수련해야 하는 것이 사람이라고 하면, ‘나는 괴물이오, 어쩌다 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보다 맞는 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안의 몬스터를 더 예민하게 인식하는 데 이 책 두 권이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책꽂이]

    [책꽂이]

    고난과 웃음의 나라(정병호 지음, 창비 펴냄) 20년 동안 10여 차례 방북해 기근 구호 활동을 벌인 정병호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북한 주민의 삶과 북한 체제에 대한 이론적 분석을 균형 있게 서술했다. 당장 구호물품이 아쉬우면서도, 트집을 잡으며 도덕적 우위에 서려는 북한 주민들의 심리를 언급하며 핵폭탄이라는 극단적 카드를 놓지 않는 북한 체제를 고발한다. 376쪽. 1만 8000원.우리 안의 악마(줄리아 쇼 지음, 김성훈 옮김, 현암사 펴냄)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면을 과학적으로 파헤치고 악의 사회·문화적 작동 원리를 살핀다. 사디즘, 마조히즘 등을 이상 성욕으로 치부하기엔 상당히 흔하다거나 소아성애자와 아동 대상 성범죄의 연관성에 대한 도발적인 논의도 과감히 던진다. 352쪽. 1만 7000원.당신의 외진 곳(장은진 지음, 민음사 펴냄) 2019년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 소설 속 인물들은 중심에서 얼마간 소외됐으면서도, 남들에게 자신이 사는 방식을 좀더 세련되게 보여 주려고 애쓰거나 짐짓 밝아 보이려 하지 않는다. 각자가 겪는 고통과 불안을 딱 그만큼의 크기로 들여다보고, 왜 이런 곤란에 머무르게 됐는지 오래 생각할 뿐이다. 324쪽. 1만 3000원.착취도시, 서울(이혜미 지음, 글항아리 펴냄) 한국일보 기자로 일하는 저자가 지방에서 올라온 자취생, 부동산 투기꾼으로 가장해 취재한 빈곤 르포르타주. 고시원 사람들과 ‘가족 비즈니스’ 형태로 월세 장사가 이어지는 쪽방촌, 스스로는 가난하지 않다고 여기는 대학가의 청년 주거빈곤층을 심층 분석했다. 208쪽. 1만 3000원.바닷마을 인문학(김준 지음, 따비 펴냄) 오랫동안 갯벌과 바다, 섬과 어촌의 가치를 기록해 온 광주전남연구원 김준 박사의 신작. 물때와 바람, 물길과 갯벌 등을 바다를 배경으로 사는 삶을 이해하는 키워드로 제시하고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 전통적인 어업활동 등을 도모한다. 320쪽. 1만 7000원.그림 그리는 사람(다니구치 지로, 브누아 페터스 지음, 김희경 옮김, 이숲 펴냄) 2017년 TV 시리즈 ‘고독한 미식가’의 원작 만화 작가 지로 다니구치가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기 전 인문학자 브누아 페터스와 오랜 기간 대담한 내용을 작고 3주기에 맞춰 책으로 출간했다. 200쪽. 2만원.
  • ‘대장암 투병’ 원로 소설가 최창학 별세

    ‘대장암 투병’ 원로 소설가 최창학 별세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를 지내며 문인들을 키워 낸 소설가 최창학이 지난 27일 별세했다. 79세. 도서출판 상상은 28일 2017년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하던 고인이 전날 밤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고인은 1941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1968년 ‘창작과비평’에 포스트모더니즘 계열 중편 ‘창’(槍)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후 100여편의 작품을 남겼다. 대표작으로는 소설집 ‘물을 수 없었던 물음들’과 ‘바다 위를 나는 목’, 장편소설 ‘긴 꿈속의 불’, ‘아우슈비츠’, 선집 ‘최후의 만찬’ 등이 있다. 1997년 이후 소설을 쓰지 않았지만 2017년 대장암 수술을 받은 후 항암 주사를 맞으면서 지난해 말 자전적 장편소설 ‘케모포트’를 펴내기도 했다. 제자들과의 에피소드, 후배 시인과의 불륜, 조울증을 앓던 여제자와의 스캔들로 교직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일까지 고백한 유언장 같은 작품이다. 1978년부터 30여년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임하는 동안 소설가 신경숙, 하성란, 강영숙, 김기우, 이나미, 신승철, 조경란, 천운영, 윤성희, 편혜영 등 수많은 제자를 소설가로 양성했다. 빈소는 강남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이며 발인은 30일 오전이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손 안의 쉼, 나는 이 한 권만 있으면 충전된다

    손 안의 쉼, 나는 이 한 권만 있으면 충전된다

    설 연휴에 누군가는 고향에 가고, 누군가는 그간 떨어져 지낸 가족과 친지를 맞을 채비를 할 겁니다. 또 누군가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 혹시 계획 안에 ‘책 한 권쯤’ 들어 있다면 여기를 보세요. 국립도서관장들이 읽어 볼만한 책을 추천해 줬습니다. 지난해 발행한 책 중에 놓쳤을지도 모를 책, 다시 읽어 봄직한 책을 다양하게 준비했습니다. 친지나 친구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한다면 이 책들을 참고하세요. 정리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가족에게… 명절 갈등 대신 일상 속 차별·역사 돌아보기 ●서혜란 국립중앙도서관장책과 도서관에 대한 아름다운 헌사인 ‘도서관의 삶, 책들의 운명’(수전 올리언 지음, 박우정 옮김, 글항아리)으로 설 연휴를 열어도 좋겠다. 1986년 4월 29일 로스앤젤레스 공공도서관이 불탔다. 이 화재로 책 40만권이 잿더미가 됐고, 70만권이 훼손됐다. 저자는 화재 당시 근무 중이던 사서들과 경비원, 화재 진압에 나섰던 소방관들, 그리고 수많은 자원봉사자와 방화 용의자의 숨은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500쪽에 가까운 분량이지만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32개 장으로 잘게 나눠 교차편집해 연휴 동안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명절이면 으레 가족 간 갈등이나 스트레스가 사회문제로 등장한다. 우리 사회엔 얼마나 많은 차별이 존재하는지, 다른 사회는 어떤 차별이 있는지 진단한 책이 ‘선량한 차별주의자’(김지혜 지음, 창비)다. 생각보다 흔하고 일상적이고 구조적이며 은폐된, 그래서 우리가 무심히 동참하는 차별을 이야기한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차별을 누군가가 지적했을 때 변명하기보다 겸허한 마음으로 수용할 수 있을까, 자신을 들여다볼 수도 있겠다.소설 ‘해녀들의 섬’(리사 시 지음, 이미선 옮김, 북레시피)은 일제강점기부터 2008년까지 제주해녀 영숙과 미자, 그리고 주변인의 삶을 그렸다. 해방과 전쟁, 4·3사건, 군사독재의 시대를 관통하면서 개인의 삶은 굴절되고 우정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된다. 참담한 비극과 슬픈 사연이 끝없이 펼쳐지지만, 근현대사의 거친 파도를 온몸으로 헤쳐 나가는 해녀들의 강인한 생명력이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저자는 중국계 미국인이지만 숨비소리, 불탁 등 우리에게도 낯선 제주 고유 언어와 해녀들이 부르는 노동요 등 풍속에 대해 세밀히 묘사함으로써 치밀한 사전조사를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혼설족에게… 초연결 사회 속 인간관계·희망 메시지 ●이신호 국립세종도서관장우리는 다양한 사회적 채널을 통해 수많은 타인과 연결되는 이른바 ‘초연결’ 사회에서 살고 있다. ‘사회성이 고민입니다’(장대익 지음, 휴머니스트)는 인간 본성이 지닌 사회성을 과학자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실험하며 풀어간다. 자신을 ‘외로운 과학자’라고 한 저자는 강연에서 서로 고민을 나눈 결과를 6개의 장으로 구성해 인간관계에 대해 상담하듯 풀어낸다. 설 연휴는 올바른 인간관계에 대해 고민해 보는 때이기도 하다. 혼자만의 시간은 필요하지만, 혼자이기 싫은 이들, 소중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자 노력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설 연휴에 가볍게 읽을 과학책으로 ‘과학의 품격’(강양구 지음, 사이언스북스)을 권한다. 책은 다양한 과학기술 이야기를 실었는데, 과학 이론과 원리를 설명하는 전문서는 아니다. 과학기술 시대에 어떻게 사회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에 관한 ‘사회 속 과학’ 이야기다. 과학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과학 지식만으로는 어렵다. 예컨대 천체물리학을 소재로 한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려면 물리학보다 철학이 더 필요하다. 인문학적으로 과학기술에 접근한다면 우리 삶은 다채롭고 풍요로울 것으로 기대한다.‘무엇이든 가능하다’(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문학동네)는 미국 작은 마을 앰개시에 사는 인물들을 단편소설로 그려낸 소설집이다. 가난, 불안정한 결혼 생활, 타인과의 관계 등 우리 삶 어딘가에 있는 아홉 가지 이야기를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있다’, ‘우리는 그 속에서 배운 교훈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무엇이든 가능하다’라는 제목이 희망적으로 다가온다. 절망적인 일을 겪은 이들이라면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하리라 믿는다.친척들에게… 뉴스 근원의 오류·AI 시대 화두를 ●정기애 국립장애인도서관장디지털 세상은 생활양식과 사고의 패턴을 변화시키고 옳고 그름의 판단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최근 등장한 가짜뉴스와 인공지능이라는 화두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만들어진 진실’(헥터 맥도널드 지음, 이지연 옮김, 흐름출판)은 모든 사안이 여러 측면의 진실을 품고 있고 그중 어느 부분을 골라 이야기할지는 발언자의 마음에 달렸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단어의 정의나 잘못 이해한 통계 숫자들이 제대로 된 맥락 없이 서로 꿰이다 보면 편집된 역사와 전혀 다른 허구의 세상이 만들어질 수 있으며,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디스토피아 같은 세상도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설날에도 가짜뉴스를 주장하는 친척이 있다면 팩트로 따지지 말고 침착하게 뉴스 근원의 오류를 설명하면서 화제를 돌려 보길 권한다.‘에이트’(이지성 지음, 차이정원)는 인공지능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인공지능 사회를 위한 선진국의 기업과 학교의 혁신 사례를 소개하면서 아직 우리 사회가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준비가 미흡하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컴퓨터가 아무리 똑똑해지더라도 그들이 학습할 충분한 데이터를 준비하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빈 깡통일 뿐이다.넘쳐나는 디지털 정보의 홍수는 비장애인과 장애인 간 정보 격차를 더욱 벌려 놓는다. 청각장애가 시각장애보다 정보 습득에서 유리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현실은 오히려 반대다. ‘우리는 코다입니다’(이길보라·이현화·황지성 지음, 교양인)는 농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청인을 가리키는 ‘코다’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 모두 함께 살아가는 것에 동의한다면 디지털 이면에 가려져 있는 그들의 아픔에 좀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가족들과 함께 설 연휴에 읽어봄 직하다.10대 조카에게… 음식·경제·환경 지식 선물을 ●조영주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장먹고 돌아서면 배고픈 십대들에게 먹는 일은 참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맛있게 먹는 것이 아닌 ‘잘’ 먹는 게 어떤 건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책은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몸, 사회 그리고 지구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려 준다. ‘십대들을 위한 맛있는 인문학’(정정희 지음, 맘에드림)은 패스트푸드의 등장으로 멀어진 밥과 국, 우리 음식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음식 문화사를 청소년의 시선에서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편안한 문장으로 이끌어 준다. 십대 조카에게 설 연휴 선물해 주기 딱 좋은 책이지 싶다.십대 조카에게 자신의 미술 지식을 자랑하고픈 이들이라면 ‘그림이 보이고 경제가 읽히는 순간’(태지원 지음, 자음과모음)을 권한다. 청소년들이 경제에 쉽고 재미있게 다가갈 수 있도록 그림에 얽힌 경제적 의미를 설명한다. 예컨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 희소성을, 결혼식 장면이 담긴 그림으로 기회비용을, ‘독일 어린이들이 굶고 있다’라는 그림으로는 인플레이션을 알려 준다. 널리 알려진 미술작품을 청소년들의 눈높이에서 설명하면서 중요한 경제 개념을 쉽고 흥미롭게 풀어간다.소비는 환경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고 이 문제가 온전히 소비자만의 잘못일까. 당장 소비를 멈춘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인간의 욕망과 약한 노동자를 이용하는 기업, 기업을 규제하고 환경을 지켜야 하는 국가, 그리고 소비자로서의 ‘나’가 서로 책임을 다해야만 해결할 수 있다. ‘환경과 생태 쫌 아는 10대’(최원형 지음, 방상호 그림, 풀빛)는 환경과 생태의 관점에서 컵라면, 바나나, 아보카도, 생수병, 휴대전화 등 여덟 가지 소비 행동을 살펴본다. ‘환경과 생태 쫌 아는 어른’으로 보이고 싶다면 일독하길 권한다.
  • 설날에는 이 책 어떠세요…국립도서관장들이 추천한 12권

    설날에는 이 책 어떠세요…국립도서관장들이 추천한 12권

    설 연휴에 누군가는 고향에 가고, 누군가는 그간 떨어져 지낸 가족과 친지를 맞을 채비를 할 겁니다. 또 누군가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 혹시 계획 안에 ‘책 한 권쯤’ 들어 있다면 여기를 보세요. 국립도서관장들이 읽어 볼만한 책을 추천해 줬습니다. 지난해 발행한 책 중에 놓쳤을지도 모를 책, 다시 읽어 봄직한 책을 다양하게 준비했습니다. 친지나 친구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한다면 이 책들을 참고하세요. ●서혜란 국립중앙도서관장책과 도서관에 대한 아름다운 헌사인 ‘도서관의 삶, 책들의 운명’(수전 올리언 지음, 박우정 옮김, 글항아리)으로 설 연휴를 열어도 좋겠다. 1986년 4월 29일 로스앤젤레스 공공도서관이 불탔다. 이 화재로 책 40만권이 잿더미가 됐고, 70만권이 훼손됐다. 저자는 화재 당시 근무 중이던 사서들과 경비원, 화재 진압에 나섰던 소방관들, 그리고 수많은 자원봉사자와 방화 용의자의 숨은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500쪽에 가까운 분량이지만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32개 장으로 잘게 나눠 교차편집해 연휴 동안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명절이면 으레 가족 간 갈등이나 스트레스가 사회문제로 등장한다. 우리 사회엔 얼마나 많은 차별이 존재하는지, 다른 사회는 어떤 차별이 있는지 진단한 책이 ‘선량한 차별주의자’(김지혜 지음, 창비)다. 생각보다 흔하고 일상적이고 구조적이며 은폐된, 그래서 우리가 무심히 동참하는 차별을 이야기한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차별을 누군가가 지적했을 때 변명하기보다 겸허한 마음으로 수용할 수 있을까, 자신을 들여다볼 수도 있겠다. 소설 ‘해녀들의 섬’(리사 시 지음, 이미선 옮김, 북레시피)은 일제강점기부터 2008년까지 제주해녀 영숙과 미자, 그리고 주변인의 삶을 그렸다. 해방과 전쟁, 4·3사건, 군사독재의 시대를 관통하면서 개인의 삶은 굴절되고 우정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된다. 참담한 비극과 슬픈 사연이 끝없이 펼쳐지지만, 근현대사의 거친 파도를 온몸으로 헤쳐 나가는 해녀들의 강인한 생명력이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저자는 중국계 미국인이지만 숨비소리, 불탁 등 우리에게도 낯선 제주 고유 언어와 해녀들이 부르는 노동요 등 풍속에 대해 세밀히 묘사함으로써 치밀한 사전조사를 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신호 국립세종도서관장우리는 다양한 사회적 채널을 통해 수많은 타인과 연결되는 이른바 ‘초연결’ 사회에서 살고 있다. ‘사회성이 고민입니다’(장대익 지음, 휴머니스트)는 인간 본성이 지닌 사회성을 과학자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실험하며 풀어간다. 자신을 ‘외로운 과학자’라고 한 저자는 강연에서 서로 고민을 나눈 결과를 6개의 장으로 구성해 인간관계에 대해 상담하듯 풀어낸다. 설 연휴는 올바른 인간관계에 대해 고민해 보는 때이기도 하다. 혼자만의 시간은 필요하지만, 혼자이기 싫은 이들, 소중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자 노력하는 이들에게 추천한다. 설 연휴에 가볍게 읽을 과학책으로 ‘과학의 품격’(강양구 지음, 사이언스북스)을 권한다. 책은 다양한 과학기술 이야기를 실었는데, 과학 이론과 원리를 설명하는 전문서는 아니다. 과학기술 시대에 어떻게 사회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에 관한 ‘사회 속 과학’ 이야기다. 과학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과학 지식만으로는 어렵다. 예컨대 천체물리학을 소재로 한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려면 물리학보다 철학이 더 필요하다. 인문학적으로 과학기술에 접근한다면 우리 삶은 다채롭고 풍요로울 것으로 기대한다. ‘무엇이든 가능하다’(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문학동네)는 미국 작은 마을 앰개시에 사는 인물들을 단편소설로 그려낸 소설집이다. 가난, 불안정한 결혼생활, 타인과의 관계 등 우리 삶 어딘가에 있는 아홉가지 이야기를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있다’, ‘우리는 그 속에서 배운 교훈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무엇이든 가능하다’라는 제목이 희망적으로 다가온다. 낙담한 일을 겪은 이들이라면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하리라 믿는다. ●정기애 국립장애인도서관장디지털 세상은 생활양식과 사고의 패턴을 변화시키고 옳고 그름의 판단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최근 등장한 가짜뉴스와 인공지능이라는 화두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만들어진 진실’(헥터 맥도널드 지음, 이지연 옮김, 흐름출판)은 모든 사안이 여러 측면의 진실을 품고 있고 그중 어느 부분을 골라 이야기할지는 발언자의 마음에 달렸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단어의 정의나 잘못 이해한 통계 숫자들이 제대로 된 맥락 없이 서로 꿰이다 보면 편집된 역사와 전혀 다른 허구의 세상이 만들어질 수 있으며,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디스토피아 같은 세상도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설날에도 가짜뉴스를 주장하는 친척이 있다면, 팩트로 따지지 말고 침착하게 뉴스 근원의 오류를 설명하면서 화제를 돌려보길 권한다. ‘에이트’(이지성 지음, 차이정원)는 인공지능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 인공지능 사회를 위한 선진국의 기업과 학교의 혁신 사례를 소개하면서 아직 우리 사회가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준비가 미흡하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컴퓨터가 아무리 똑똑해지더라도 그들이 학습할 충분한 데이터를 준비하지 못하면 어쩔 수 없이 빈 깡통일 뿐이다. 넘쳐나는 디지털 정보의 홍수는 비장애인과 장애인 간 정보격차를 더욱 벌려놓는다. 청각장애가 시각장애보다 정보습득에서 유리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현실은 오히려 반대다. ‘우리는 코다입니다’(이길보라·이현화·황지성 지음, 교양인)는 농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청인을 가리키는 ‘코다’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 모두 함께 살아가는 것에 동의한다면 디지털 이면에 가려져 있는 그들의 아픔에 좀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가족들과 함께 설 연휴에 읽어봄직하다. ●조영주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장먹고 돌아서면 배고픈 십대들에게 먹는 일은 참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맛있게 먹는 것이 아닌 ‘잘’ 먹는 게 어떤 건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책은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몸, 사회 그리고 지구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려준다. ‘십대들을 위한 맛있는 인문학’(정정희 지음, 맘에드림)은 패스트푸드의 등장으로 멀어진 밥과 국, 우리 음식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음식 문화사를 청소년의 시선에서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편안한 문장으로 이끌어준다. 십대 조카에게 설 연휴 선물해주기 딱 좋은 책이지 싶다. 십대 조카에게 자신의 미술 지식을 자랑하고픈 이들이라면 ‘그림이 보이고 경제가 읽히는 순간’(태지원 지음, 자음과모음)을 권한다. 청소년들이 경제에 쉽고 재미있게 다가갈 수 있도록 그림에 얽힌 경제적 의미를 설명한다. 예컨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 희소성을, 결혼식 장면이 담긴 그림으로 기회비용을, ‘독일 어린이들이 굶고 있다’라는 그림으로는 인플레이션을 알려 준다. 널리 알려진 미술작품을 청소년들의 눈높이에서 설명하면서 중요한 경제 개념을 쉽고 흥미롭게 풀어간다. 소비는 환경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고 이 문제가 온전히 소비자만의 잘못일까. 당장 소비를 멈춘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인간의 욕망과 약한 노동자를 이용한 기업, 기업을 규제하고 환경을 지켜야 하는 국가, 그리고 소비자로서의 ‘나’가 서로 책임을 다해야만 해결할 수 있다. ‘환경과 생태 쫌 아는 10대’(최원형 지음, 방상호 그림, 풀빛)는 환경과 생태의 관점에서 컵라면, 바나나, 아보카도, 생수병, 휴대전화 등 여덟 가지 소비 행동을 살펴본다. ‘환경과 생태 쫌 아는 어른’으로 보이고 싶다면 일독하길 권한다. 정리=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박완서 타계 9주기… 다시 읽는 ‘작가의 말’

    박완서 타계 9주기… 다시 읽는 ‘작가의 말’

    박완서(1931~2011) 작가의 타계 9주기를 추모하며 그가 생전에 쓴 ‘작가의 말’을 모은 책이 나왔다. 최근 출간된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작가정신)은 말 그대로 박완서의 모든 책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다. 소설, 산문 , 동화의 서문과 발문에 실린 ‘작가의 말’ 67편을 연대순으로 정리했다.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작가의 소회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 그에 대한 고찰을 솔직한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그가 남긴 ‘작가의 말’에서 두드러지는 한 가지는 시대의 변화를 목격한 자로서의 책임감이다. 평소 입버릇처럼 “전쟁의 상처로 작가가 됐다”고 고백해온 작가는 전력을 다해 시대를 증언하고자 하는 냉철한 목격자였다. 동시에 온정적인 시선을 잃지 않았던 따듯한 서술자이기도 했다. “6·25의 기억만은 좀처럼 원거리로 물러나주지 않는다. 아직도 부스럼 딱지처럼 붙이고 산다”라고 얘기하면서도 “나의 부스럼 딱지가 개인적인 질병이 아닌, 한 시대의 상흔”(‘목마른 계절’(1978) 후기)이라며 시대의 아픔을 함께 경유하는 식이다. 소설집 ‘꽃을 찾아서’(1996)에서는 1985년에 계간 ‘창작과비평’이 폐간되면서 ‘창작사’란 출판사 이름으로 나왔다가 1996년에 다시 ‘창작과비평사’로 펴내게 된 사연을 적었다. 그는 “야만적인 시절”에 대한 곡절을 풀어내며 창작의 자유가 그토록 ‘대견’한 것인 줄 몰랐던 자신의 안이함을 반성한다. 그 밖에 새마을운동, 급격한 근대화와 자본주의의 이식, 전체주의, 자연 파괴에 이르기까지 여러 갈래로 뻗어가는 세상에의 관심이 그대로 담겨 있다.대문호에게도 예외없었던, 창작에의 고통을 다룬 구절도 눈에 띈다. “써지진 않는데 원고 독촉은 빗발칠 때는 아유, 지긋지긋해, 소리가 입에 붙어 있기도 했습니다. 언제나 이 노릇을 안 하나, 쓰는 노릇에서 놓여날 것을 상상만 해도 황홀한 해방감을 맛볼 수가 있었으니까요.”(‘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1989) 책 뒤에) 마감에의 압박은 그에게도 여지없이 몰아쳤다. 그러나 마흔 살 당시로는 늦은 나이에 데뷔, 세상을 뜨기 전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작가를 구원하는 것도 역시 문학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입니다. 뜻하지 않게 닥쳐온 무서운 고통과 절망 속에서 겨우 발견한 출구도 쓰는 일이었으니까요.” 이어지는 작가의 고백이다. “작가로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만나야 하고, 자기가 지닌 것 중 가장 괴로운 것을 마주하며 살아야 하고, 자신을 극복하고 갱신해야 하는 일”이며, “그 길을 피하지 않고 온전히 지나가신 선생님의 모습을 돌아보게 됐다”는 최은영 작가의 말처럼, 문학으로 한 시절을 살다간 이의 생생한 육성이 오롯이 담겼다. 208쪽. 1만 4000원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전자책 보면 종이책 드려요”… 독자 마음 움직일까

    “전자책 보면 종이책 드려요”… 독자 마음 움직일까

    ‘밀리의 서재’ 격월로 종이책 제공…유명작가의 한정판 우선 만날 수 있어 교보문고 ‘sam’ 매월 종이책 한 권 배송…전자책으로 볼 수 없는 베스트셀러 위주 “전자책 독자 상당수 종이책 보는데 착안” “한정적인 독자 두고 출혈경쟁 될 수도”전자책 제공 업체들이 종이책을 결합한 상품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매월 일정한 돈을 내면 무제한으로 전자책을 볼 수 있는 월정액 구독자들이 돈을 조금 더 내면 종이책을 보내주는 형태다. 업계 1위인 ‘밀리의 서재’가 서비스를 시작한 지 두 달 만인 이달 교보문고도 새롭게 뛰어들면서 시장이 뜨거워지고 있다. 밀리의 서재는 다음달 김영하 작가의 신작 소설을 종이책으로 출간한다. ‘밀리 오리지널 종이책 정기구독’의 세 번째 책이다. 밀리의 서재는 지난해 10월 전자책과 종이책을 결합한 서비스를 시작했다. 9900원을 내고 월정액으로 책을 보는 독자가 매월 6000원을 더 내면 격월로 종이책을 보내준다. 첫 번째 책은 정용준, 김초엽 등 작가 7명이 참여한 테마소설집 ‘시티픽션’이었다. 지난달에는 김중혁 작가가 3년 만에 발표하는 신작 장편소설 ‘내일은 초인간’을 냈다. 이 책들은 밀리의 서재에서 우선 나온 뒤 2개월 이상 지나야 일반 서점에서 만날 수 있다. 예컨대 다음달 출간하는 김 작가 신간 소설은 일반서점에는 4월이 넘어야 나오고 표지도 바뀐다. 밀리의 서재 독자들은 한정판을 소장한다는 의미가 생긴다. 밀리의 서재 관계자는 “출판사와 협의해 출간 예정 유명 작가의 작품을 우선 밀리의 서재에서 만날 수 있도록 했다. 표지도 다르게 꾸민 한정판 서적들”이라면서 “김영하 작가 소설 이후로 이 서비스가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보문고는 이번 달부터 ‘sam(샘) 그리고 책’ 서비스를 시작했다. 전자책을 한 달에 9900원에 보는 sam 무제한 서비스에서 돈을 더 내면 교보문고가 고른 종이책 가운데 원하는 한 권을 매월 정기적으로 받을 수 있다. 전자책 5만권에 종이책을 주는 ‘sam 무제한’이 월 1만 6500원(연간 19만 8000원), 전자책 13만종에 종이책을 배송하는 ‘sam 패밀리’가 월 2만 2500원(연간 27만원)이다. 종이책은 전자책으로 볼 수 없는 신간들로, 주로 베스트셀러 위주로 구성했다. 이번 달에는 ‘트렌드 코리아 2020’(미래의챙), ‘오늘도 펭수, 내일도 펭수’(놀), ‘90년대생이 온다’(웨일북) 등 9권이다. 원하는 책이 없다면 포인트 1만원을 준다. 무제한으로 전자책을 빌려볼 수 있는 월정액 구독 모델은 2017년 밀리의 서재가 시작한 이후 점차 커지는 추세다. 리디북스, 예스24에 이어 교보문고가 지난해 3월 뛰어들면서 경쟁이 치열해졌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2018 출판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자책 유통사의 판매 형태는 전자책 단권으로 파는 ‘일반 판매’가 93.3%로 가장 많았고, 최대 90일 이내 등으로 제한하는 ‘기간제 대여’가 46.7%였다. ‘정액제 구독 모델’은 33.3%였다. 향후 고려 중인 전자책 판매 방식을 묻는 질문에는 ‘일반 판매’가 66.7%로 26.6% 포인트 낮아지고, ‘정액제 구독’은 13.4% 포인트 높았다. 종이책 결합 상품 확대 현상에 대해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은 “지난 10년이 아이패드와 같은 태블릿PC와 같은 하드웨어의 변화였다면, 최근 들어 소프트웨어의 변화가 활발하다”면서 “새로운 서비스를 계속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될 전자책 제공 업체들이 전자책 독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종이책도 읽는 점에 착안해 새로운 형태의 서비스를 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전자책·종이책 결합 상품이 과도한 할인 공세로 도서정가제 변질, 시장 교란 등을 야기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예컨대 교보문고의 ‘sam 그리고 책’의 ‘sam 무제한’은 연 구독비가 원래 22만 8900원이지만 19만 8000원, ‘sam 패밀리’는 50만 4000원이지만 27만원으로 대폭 할인했다. 고를 수 있는 종이책 9권 가운데 정가가 2만원인 ‘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를 택하면 ‘sam 무제한’은 사실상 공짜인 셈이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장은 “전자책 월정액 구독자 대부분이 책을 많이 읽는 ‘헤비유저’이고, 종이책을 실제로도 많이 구입하고 있다. 결국 한정적인 독자를 두고 출혈 경쟁을 펼치며 나눠먹기 하는 식이 될 수 있다”면서 “전자책 시장 자체가 확장하지 않는 이상 종이책 연계 서비스도 한계를 맞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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