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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록도 간호사 마리안느·마가렛 노벨평화상 추천 서명 100만명 육박

    전남 고흥군 소록도 간호사 마리안느·마가렛의 노벨평화상 추천 서명이 6월 현재 91만5000여명으로 목표인 100만명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21일 고흥군에 따르면 소록도에서 한센인을 위해 40여년을 봉사한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사랑과 봉사, 나눔 정신을 세계의 표상으로 삼기 위해 노벨평화상 추천을 추진해 왔다. 정계,재계,학계 위원들로 구성된 범국민 추천위원회(위원장 김황식)는 지난 2017년 11월부터 전국적 서명운동을 했으며 6월 현재 91만5000명이 서명했다. 추천위원회는 6월 말 싱가포르에서 예정된 국제간호협의회 학술대회에 참석해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분의 숭고한 삶과 희생정신을 알리고 전 세계적으로 공감을 형성해 나갈 계획이다. 고흥군은 선양조례를 제정하고 한명 당 매월 ‘1004달러’를 지원하고 있으며, 마리안느와 마가렛 법인과 더불어 공익광고 방송, 영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이와 함께 사진전 개최와 중앙단위 기관 방문 등 노벨평화상 추천을 위한 서명운동을 지원해 왔다. 한편 노벨평화상 추천은 나이팅게일 탄생 200주년이 되는 2020년에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 추천서를 제출할 계획이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1962년과 1966년 소록도에 찾아왔다. 이후 한센병 환자와 그 자녀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삶을 실천했다. 그들은 나이가 드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줄 것을 우려해 지난 2005년 11월 22일 아무도 모르게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고흥군 ‘125억원 해수탕’ 민간 적자 보전 염두하면서까지 추진 논란

    전남 고흥군이 관광객 유치를 위해 120억원대의 해수탕을 짓기로 해 예산 낭비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23일 고흥군에 따르면 도양읍 녹동휴게소 야산 아래에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해수탕을 건립한다. 해수찜질방 70억원, 수영장 55억원 등 125억원이 투자된다. 군은 지난해말 나온 사업 타당성 용역보고서 결과를 근거로 설계공모를 거쳐 지난 19일 신청업체 4곳중 1곳을 선정했다. 하반기에 착공해 2021년부터 운영한다. 민간 위탁을 해 손실발생시 적자보존를 해줄것인지 염두하면서까지 추진하고 있다. 이같은 소식에 전형적인 혈세 퍼붓기 논란이 일고 있다. 군민들은 “찜질방을 통해 관광객들을 끌어모은다는 발상 자체가 우습기만 하다”며 “막대한 사업비만 날리고 애물단지로 전락할 것이다”는 반응들이다. 군민들은 “지난 2월 송귀근 군수가 읍민과 대화에서 해수탕만 들어선다고 해놓고 24시간 찜질방과 식당, 매점, 편의시설 등이 포함돼 지역 소상공인들의 생존권를 위협한다”고 반발하고 있다. 지난달 군민 600여명은 “해수탕 관광은 이미 전국적으로 사양사업이다”며 “환경이 오염된다”고 감사원에 공익 감사를 청구했다. 실제 전남 영광군이 군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010년 197억을 들여 만든 해수온천랜드는 운영 3년만에 관리비도 못내 3년전 문을 닫았다. 2014년 금산군이 200억원 이상을 들여 만든 한방스파도 4년만에 운영 중단됐다. 국내 온천 관광 명소인 경남 창녕 ‘부곡하와이’도 2017년 운영 38년만에 폐쇄됐다. 군민들은 안전성 문제도 지적하고 있다. 예정부지인 도양읍휴게소 인근과 가장 가까운 바다는 2㎞ 이상 떨어져 있다. 이들은 “해수탕 위치가 산간 지역이어서 바다에서 해수 공급 시 배관파손이나 누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며 “해수유입으로 인근 농지나 임야에 막대한 피해를 끼칠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사용 후 버려지는 고온의 해수는 염분을 함유하고 있어 하수종말처리장으로 방류되지 못하고 인근 바다로 방출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럴 경우 고온의 해수가 직접 바다로 유입될 수 있으나 고흥군은 이에 관한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군 관계자는 “소록도와 금산, 거금대교 등과 연계한 관광벨트를 만들어 체류형 관광지가 되도록 추진하고 있다”며 “아직 확정된 내용은 없지만 군민들의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민간위탁사가 적자 발생시 손실을 보전해줄것인지 여부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고흥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 기억하라 존중하라 그리고… 치유하라

    기억하라 존중하라 그리고… 치유하라

    800여명 나환자 밤에만 걸어 140㎞ 이동… 눈물로 지은 공동체수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켜켜이 쌓은 가치… 그 가치 담은 공간●애양원에 대한 무섭고 슬프고 아름다운 단편들 #기억 1. 초등학교 때 아버님을 따라 시골의 할아버지 댁을 두어 번 갔었다. 그곳은 전기도 대중교통도 닿지 않는 ‘깡촌’으로 어린 내게도 낯설고 불편한 곳이었다. 그러나 마을 뒷산을 넘으면 바로 바닷가로 내 또래 아이들과 물놀이하는 큰 재미도 있었다. 바다 건너편에 교회가 보이는 녹음 우거진 섬이 있어 호기심이 일었다. 그러나 친척 아이들이 들려준 얘기는 정말 무서웠다. ‘문둥이’들이 사는 곳이며 그 섬에 헤엄쳐 갔다가 사라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기억 2. 배정받은 중학교는 성경과목을 가르치는 미션스쿨이었다. 어느 날 담당 목사 선생님이 한 권의 책을 가져와 한 인물을 소개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책으로 주인공은 손양원 목사였다.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를 거부해 6년간 옥살이를 하다 해방 후 지방 교회의 목회를 맡았다. 공산당의 반란이 일어나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들이 총살을 당했다. 그러나 손 목사는 아들을 살해한 주범을 용서하고 오히려 양자로 삼는 사랑을 실천했다. 6·25전쟁 때 그 역시 목사라는 이유로 처형을 당했다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기억 3. 10년 전, 여수공항 뒤에 있는 한 병원을 방문하게 됐다. 애양원이라는 이곳은 원래 미국 선교사들이 세워 나환자들을 수용해 치료하던 곳이었다. 서울의대를 졸업한 김인권 원장(현 명예원장)은 나환자 섬인 소록도에 공중보건의로 자원 복무했고 제대 후 바로 애양병원에 부임해 소외된 이들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는 우리 시대의 의인이었다. 동행했던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회장을 포함한 일행들은 김 원장의 고귀한 삶에 크게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40여년 전, 어릴 때 단편적 기억들의 무대는 모두 이곳 전남 여수 애양원이었다. 이제는 강같이 좁은 애양원 앞바다 건너편 공단 지역이 아버님 고향마을이 있던 곳이다. 육지에서 돌출한 반도의 끝을 본 것을 섬이라 착각했고 ‘문둥이’라 두려워한 가상의 대상은 한센병 환자들이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는 이곳 애양교회에 부임해 한센인들을 돌보다 여순반란사건(여수·순천사건)에 휘말려 두 아들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세 부자의 순교묘지와 손양원기념관이 있는 이곳은 개신교의 성지로 많은 신자들의 순례지가 됐다.●나환자들 사회서 격리돼 비참한 삶… 1909년 벽돌가마터에 환자 첫 수용 처음 방문한 애양원 일원은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애양원의 역사는 안타깝고 처절한 이야기다. 한국의 개신교는 조선말 개항기에 주로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됐다. 초기 선교사들은 의료 기술을 겸비한 이들이 많았는데, 미국 영사관 의사로 와서 제중원을 설립한 알렌이 대표적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1960년대까지 1000여명의 외국인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활동했는데 그들은 기독교 전파뿐만 아니라 현대적 의료시설을 설립하고 교육기관을 정착시켰다. 1909년 봄날, 미국 남장로회에서 파견한 목포선교부의 포사이트 선교사는 광주의 동료 선교사가 위중하다는 소식에 말을 타고 광주로 향했다. 도중 길가에서 여자 나환자를 발견해 광주로 호송했고 광주진료소 인근의 벽돌가마터에 수용해 치료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환자들은 치료는커녕 가족과 사회에서 버림받은 불가촉천민으로 저주의 대상이었다. 당시 벽돌가마터 여환자의 비참한 모습은 이랬다. “몇 달 몇 년 동안 빗질도 않고, 옷은 더러운 넝마이며, 손발은 짓물렀다. 온몸에서 참을 수 없는 냄새가 났다. 한 발은 짚신을, 다른 발은 두꺼운 판자조각을 묶어 걸을 때마다 심하게 절뚝거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광주선교부에 한센환자의 집이 설치됐고 2년 후에는 광주나병원이 출범했다. 애양원의 역사는 바로 1909년 4월 7일, 벽돌가마터에 여환자를 수용한 날부터 시작한다. 초대 원장인 윌슨(우일선) 선교사는 체계적인 치료는 물론 나환자들의 자립자생을 위해 목공, 석공, 직조, 의료기술까지 자체 기술자들을 양성했다. 또한 교회를 설립해 신앙을 통한 재활을 시도했다. 이 신앙적 한센공동체는 이후 애양원의 전통이 됐다.일제는 도시 공공위생을 문제 삼아 나병원 이전을 강권했고 1926년 여수 율촌면 신풍리 바닷가로 이전 명령을 내렸다. 800여 나환자와 가족들은 기차도 못 타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만 걸어서 무거운 침상과 짐을 들고 140㎞를 이동했다. 이른바 ‘눈물의 이주’ 끝에 애양반도에 한센인의 자치 공동체, 애양원을 건설하게 된다. 반도의 중앙에 병원과 교회를 세우고 그 남쪽에 여환자 숙소를, 북쪽에 남환자 숙소를 각 20여동 지었다. 이외에도 기술학교, 이발소, 창고, 오락실 등 총 110동의 건물을 세웠다. 현지에서 채취한 응회암과 사암들로 돌벽을 쌓고 목조 지붕틀을 올린 간략한 서양식 건물들이었다. 목수, 석공, 토공 등은 모두 훈련된 한센인들로, 자체 인력과 기술로 완성한 공동체 건축이었다. 해방 후에는 한성신학교를 세워 한센인 교역자를 양성했다. 첫 방문 당시, 남환자 숙소는 모두 철거돼 그 터에 한센인 정착지인 도성마을이 자리잡았다. 병은 완치됐지만 신체적 불구로 남은 음성한센인들의 자립갱생을 위한 마을이었다. 여환자 숙소는 폐가인 채로 14동이 남았고 한성신학교는 토플하우스라는 숙소로 개조했다. 원래 병원 건물을 애양병원역사관으로 개조했고 입구 쪽에 새 병원 건물을 크게 세운 상태였다. ●1967년 건축가 조자룡 설계·김종규 전시관 증축 계획… 장장 한 세기 걸친 건축 애양원 설립부터 1950년대까지 건설된 모든 건물들은 선교사들이 계획하고, 한센인들이 건설한 일종의 민간건축이었다. 굳건한 막쌓기 돌벽과 직선적인 서양식 지붕들은 마치 18세기 유럽의 마을에 온 듯 이국적인 경관을 이룬다. 경제적 부족과 기술적 제약으로 건물은 비록 낮고 허술하지만, 소외된 이들의 초보적인 안식처로서 충분한 근원적인 건축들이다.1967년 새로운 병원을 세우게 되는데 설계를 건축가 조자룡(1926~2000)이 맡았다. 해방 직후 하버드대학원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했고 스웨덴 설계회사에서 실무를 쌓은 후 귀국해 1950~60년대를 풍미한 풍운아였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그분을 뵙게 돼 1박2일로 말씀을 들었는데, 아마도 설계한 건물이 150개 이상은 되리라 회고했다. 그럼에도 조자룡은 늘 한국의 전통미에 관심을 두었다. 1970년 민학회를 조직했고, 최대의 민화 수집가로서 사설 민속박물관까지 경영했다. 새 애양병원에 도입된 휘어진 처마나 쌍사자석 등을 모티브로 한 현관 기둥도 그가 노력한 전통 계승의 표현이었다.2010년 애양원 방문 때 2년 후 열릴 여수해양엑스포에 대비해 여환자 숙소 잔해들을 철거하고 새롭게 펜션을 지을 계획이라고 들었다. 나는 남겨진 건축적 흔적을 살려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 그 설계를 자원해서 맡았다. 기존 건물의 돌벽을 최대한 보존하고, 그 뒤편에 단순하고 무성격한 새 숙소를 부가했다. 원 숙소부는 새 숙소의 안마당이 되고, 원 건물의 정면만이 돋보이도록 설계 전략을 세웠다. 애양원 개척 당시의 소중한 건축유산을 보존하고 새롭게 쾌적한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치유의 숲’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원 병원이었던 역사관은 외벽의 풍화가 심하고 비좁았다. 함께했던 서 회장이 비용을 쾌척해 기존 역사관을 수리하고 넓은 새 전시관을 증축하게 됐다. 이 설계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창조적 건축가 김종규가 맡았다. 그 역시 기존 건물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뒤편에 단순한 형태의 백색 전시관을 덧붙였다. 기존 건물에서는 느낄 수 없는 내부공간의 깊이와 빛의 변화를 담은, 외유내강형의 세련된 건축이다.거의 한 세기에 걸쳐 애양원은 수많은 이들의 건축적 노력을 결집해 왔다. 선교사들과 한센인들, 조자룡, 김봉렬, 김종규 등 전문, 비전문 건축가들은 이국적인 돌집부터 미니멀한 현대적 공간까지 다양한 형태와 공간을 차곡차곡 쌓아 왔다. 그럼에도 이들은 서로 중요한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 과거의 의미를 기억하고, 앞선 건축의 흔적들을 존중하며, 총체적인 환경의 상처와 기억의 아픔들을 치유하려는 소중한 가치들이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건축학자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슬픔이 기쁨에게 - 소록도 한센병 박물관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슬픔이 기쁨에게 - 소록도 한센병 박물관

    # 세 번 죽어야만 되는 한센병 환자의 삶. 소록도에는 단종(斷種)과 불임 시술의 현장이 그대로 “그건 이곳 규칙입니다. 환자가 건강인을 대할 때는 반드시 다섯 걸음 이상 거리를 유지해라. 말을 할 땐 45도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손으로 입을 가려야 한다.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p32, 1976, 문학과 지성사> 우리나라에서는 한센병을 나병(癩病), 업병(業病) 혹은 문둥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나(癩)’는 ‘두꺼비’의 의미도 담고 있는 데, 한센병 환자의 피부가 흡사 두꺼비 모양과 비슷하다는 데서 유래한다. 예전에는 동서양을 구분할 것 없이 한센병에 걸리게 되면 사회는 물론 가족으로부터도 철저히 격리, 배척되었다. 소록도에 들어온 한센인들도 '당연히' 이름이나 고향은 숨겼다. 육지의 가족들을 위한 마지막 배려였다. 천형(天刑)이었다.그러나 현대 의학에서 한센병은 중병이라고 이름 짓기 미안할 정도로 정복된 지 오래다. 단적인 예로 한센병에 걸려도 항생제의 일종인 ‘리팜핀’ 600mg을 단 한 번만 복용하면 체내 나균의 99.99%가 전염력을 상실한다. 또한 성적인 접촉이나 임신을 통해서도 감염되지 않으며 유전도 되지 않는다. 한센병 환자와 24시간 같이 생활하는 경우에도 전염 위험은 240만 명 중의 1명 꼴이니 통계자체가 신뢰도를 확보하지 못할 수준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한 해 20여 명 정도의 환자가 발견되는 정도이며, 의무접종 중의 하나인 결핵 예방 BCG 접종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라면 이런 발병 확률조차도 의미가 없어진다고 본다. 설사 발병되더라도 복용약만으로 대개는 6개월, 최장 2년 이내 완치가 되며 흔적 조차 남지 않는다. 또한 한센병 완치환자의 경우 감염위험은 완전 소멸된 상태로 일상생활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한센인들의 시간이 가득 담긴 소록도 한센병 박물관으로 가 보자.소록도는 전라남도 고흥군에 위치한 자그마한 섬이다. 2009년 3월 3일에는 소록대교가 개통되어 지금은 육로로도 자유롭게 연결된다. 바로 이 곳에 소록도 자혜의원(조선총독부령 제7호)이 1916년에 문을 열고 전국의 한센병 환자들을 강제 분리,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센병 환자들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감내하기 힘든 모멸과 강제 노동, 단종 수술 및 불임 시술을 받는 등 극심한 인권 침해에 시달려야만 했다.과거에는 한센병에 걸리면 세 번 죽는다고 하였다. 처음은 가족, 친지, 사회로부터의 단절을 뜻하는 사회적 죽음을, 두 번째는 피부가 산 채로 썩어 들어가면서 죽는 육체적 죽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죽음은 한센병 환자들은 죽어서도 묻히지 못하고 해부되는 치욕의 죽음을 뜻한다. 그러니 한센병 환자들의 소원은 토요일에 죽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2일장인 장례 절차에서 일요일은 해부를 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무지(無知)와 편견, 그리고 비과학적인 상식이 만들어 낸 인간 비극의 종착지가 소록도였다.# 40 여 년을 무보수 자원봉사로, 소록도 할매 '마리안느'와 '마가렛' 바로 이런 소록도에 거주하는 한센병 환자들의 인권 탄압은 해방 후에도 ‘갱생원’이라는 명칭 아래 지속되다 1960년 7월에 이르러서야 국립소록도병원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개선된다. 또한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하여 해외 선교 단체에서 파견된 자원봉사자들이 소록도로 들어온다. 이 중에서 ‘소록도 할매’라고 불렸던 오스트리아 출신 간호사인 마리안느 스퇴거(1934년생)와 마가렛 피사렛(1935년생)의 봉사 활동은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의 삶을 개선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들은 수녀가 아닌 무보수 일반 자원봉사자 신분으로 40여 년을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들과 어울렸다. 특히 맨손과 맨입으로 환자들의 피고름을 짜내고 한센병 환자들과 같은 공간에서 생활을 하며 존대말을 쓰는 등 당시 격리된 채 생활하던 한센병 환자들의 인권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더구나 오스트리아에서도 부유한 의사 아버지를 둔 마가렛의 헌신으로 풍부한 약품 지원을 받았으며 마리안느를 후원하던 오스트리아 부인회의 경제적인 지원까지 더하여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의 생활 환경은 극적으로 변화하여 지금에 이르렀다.이에 국립 소록도 병원은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의 삶과 역사, 그리고 고통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하여 2016년 개원 100주년을 맞아 한센병 박물관을 소록도내에 개관하였다. 지상 2층 연면적 2006㎡ 규모로 지어진 박물관은 1층에는 수장고와 아트숍, 2층엔 5개 주제(한센병·인권·삶·국립소록도병원·친구들)로 꾸며진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이 있어 소록도를 찾는 일반인들에게 한센인들이 겪어 왔던 힘든 세월을 알려 주고 있다. <소록도 한센병 박물관에 대한 여행 10문답> 1. 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 아름다운 섬이다. 한센인들의 삶과 그들이 거쳐 온 고통이 온전히 느껴지는 공간. 의미있는 방문지로 적극 추천. 2. 누구와 함께? - 누구라도. 가족 단위도 좋지만 단체 모임 단위의 견학지로 훌륭하다. 3. 가는 방법은? -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해안길 65 / 광주, 순천, 여수, 벌교 터미널에서 녹동행 시외버스 이용. 4. 감탄하는 점은? - 생각보다 훨씬 잘 정비된 공간. 섬 전체 기후가 온화하고 전체적으로 외부인들의 흔적이 많지 않아 섬 자체의 자연 경관을 잘 보존한 공간. 국내에서는 보기 드물게 아름다운 섬이다. 5. 명성과 내실 관계는? - 명성에 비해 방문객들이 많지 않다. 소록대교가 연결되어 교통편은 수월하다. 6. 꼭 봐야할 장소는? - 한센병 박물관, 중앙공원, 감금실, 검시실 7. 토박이들이 추천하는 먹거리는? - 가까운 녹동항에 맛집이 많다. ‘우정식당’, ‘풍년식당’, ‘소담식당’, ‘금일식당’, ‘정다운식당’ 8. 홈페이지 주소는? - http://www.sorokdo.go.kr/sorokdo/board/sorokdoHtmlView.jsp?menu_cd=030101 - 마리안느 마가렛 노벨평화상 추천 서명 사이트 -> http://recommend.lovemama.kr/ko/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 외나로도 우주 과학관, 고흥분청문화박물관, 고흥우주천문과학관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소록도는 국내 여행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섬 자체도 풍광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조잡스런 외부 시설이 없기에 깨끗한 섬 자체의 환경을 지니고 있다. 또한 소록도에서는 인간이 지닌 삶의 환경과 인권에 대해서도 다시금 깨닫을 수 있다. 여행지로 특별 추천!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소록도 찾은 김정숙 여사 “우리 안의 경계 사라져야”

    소록도 찾은 김정숙 여사 “우리 안의 경계 사라져야”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23일 전남 고흥군 국립소록도병원을 찾았다. 이 병원은 1916년 개원한 이래 102년간 한센인을 진료해 온 곳으로, 현재 한센인 500여명이 입원 진료를 받고 있다. 현직 대통령 부인의 소록도 방문은 2000년 이희호 여사 이후 18년 만이다.김 여사는 병동을 둘러보고 환자들과 손을 맞잡으며 “늘 오고 싶은 마음이 컸다. 늦은 감은 있지만 이제라도 여러분들을 만나게 돼 무척 기쁘다”고 말했다. 김 여사는 지난 4월 장애인의 날에 청와대를 찾았던 환자를 이곳에서 다시 만나기도 했다. 박형철 국립소록도병원장이 “소록도에 더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오면 좋겠다. 그래야 한센병에 대한 편견이 사라진다”고 하자 김 여사는 “우리 안의 경계들이 서로를 멀리 밀어 놓고 서로를 섬으로 만들고 있다”며 “그 경계가 사라져야 할 것”이라고 화답했다. 김 여사는 한센인과 그 가족이 한 달에 한 번 재회하고 이별하는 장소였던 ‘수탄장’을 지나며 “편견과 차별이 얼마나 많았을까. 곳곳이 아픔과 고통의 기억이다”라며 “소록도가 더이상 고통의 섬이 아니라 치유와 희망을 상징하는 땅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도 2016년에 소록도병원 100주년 기념식을 계기로 소록도를 방문했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포토] ‘여사를 안은 할머니’를 따뜻한 눈빛으로

    [포토] ‘여사를 안은 할머니’를 따뜻한 눈빛으로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23일 오후 전남 고흥 국립소록도병원을 방문, 환우들에게 격려와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있다. 청와대제공
  • [데스크 시각] 소록도를 등록문화재로/손원천 문화부장

    [데스크 시각] 소록도를 등록문화재로/손원천 문화부장

    얼마 전 문화재청이 전남 목포와 전북 군산, 경북 영주 등의 근대역사문화공간에 대해 문화재 등록을 예고했다. 철저하게 점(點) 단위로 이뤄졌던 종전의 문화재 등록 범위를 선(線)이나 면(面) 단위로 확대하겠다는 정책이 적용된 첫 사례다. 앞으로도 급속한 도시화로 고유의 모습을 잃어 가는 마을이나 거리, 염전 등을 맥락에 따라 입체적으로 보존하고 활용하는 등 긍정적인 효과가 기대된다.문화재청의 이번 조치를 보면서 가장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던 곳은 전남 고흥의 소록도였다. 나라 안 어느 곳보다 보전 조치가 시급한 곳이기 때문이다. 몇 달 전 문화체육관광부의 공무원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 소록도 상황 등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했으나 그는 많은 건물들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어 그리 걱정할 게 없다는 입장이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상당수 건축물들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보호받고 있으니 말이다. 한데 정작 중요한 게 빠졌다. 한센인들이 실제 거주하던 집, 병사(病舍)다. 서울신문 보도(9월 6일자 9면)에 따르면 소록도의 병사 112개 동 가운데 64개 동이 방치돼 있다. 병사의 건물로서 ‘법적 지위’는 등록 말소된 폐가다. 이는 감금실, 식량창고 등의 등록문화재들과 달리 보호받을 법적 근거가 없다는 뜻이다. 지금도 보건복지부 산하 소록도병원의 많지 않은 관리 예산으로 겨우겨우 허물어지는 것만 면하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라진 것들도 적지 않다. 한센인들이 ‘저주받은 땅’이라 불렀다는 벽돌공장 터, 간장공장 등은 이미 종교시설, 기념물 등으로 대체돼 사라졌다. 위로로 포장된 값싼 자본의 그림자도 쉴 새 없이 기웃거린다. 가장 극적인 곳은 한센인 치료를 위해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자혜의원이다. ‘복원’했다는 자혜의원 안쪽을 들여다보면 기가 막혀 탄식만 나온다. 소록도의 역사나 다름없는 곳을 시골의 버스대합실보다도 못하게 ‘복원’해 놓는 만용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이는 역사에 대한 경시이고 만행이다. 건물 몇몇을 활용하자거나 리모델링하자는 요구도 끊이지 않는다. 대표적인 곳이 오스트리아 출신의 간호사 마리아네 스퇴거와 마르가레트 피사레크가 1962년부터 머물던 집이다. 평생을 검박하게 살았던 두 ‘소록도 할매’들의 멀쩡한 거처를 왜, 어떻게 리모델링하자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만약 독일이 아우슈비츠를, 일본이 군함도의 건물들을 흉물이라며 헐고 기념관 등을 지어 올리려 했다면 두 나라 국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다소 과장된 비교이기는 하나 처절한 삶의 기억이 쌓인 곳이란 점에서 보면 소록도 한센인 마을과 이 유적들은 별반 다를 게 없다. 소록도를 단순히 ‘보건 복지’의 시선으로 들여다볼 때는 지났다. 역사와 문화유산의 시각까지 덧붙여 봐야 한다. 소록도 전체를, 혹은 일부 지역만이라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자는 건 이 때문이다. 그래야 ‘고유의 모습을 잃어 가는 한센인 마을들을 맥락에 따라 입체적으로 보존’해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 듯해서다. 영국의 사상가 존 러스킨은 ‘집은 기억’이라고 했다. 집이 사라지면 기억도 사라진다. 소록도가 소록도일 수 있는 건 100년에 걸친 한센인들의 삶의 기억이 남아 있어서다. 그 기억은 여태 이어지고 있다. 세상에 이런 곳이 얼마나 더 남아 있을까. 지금, 허물어져 내리는 기억의 집들을 온전히 지켜 내야 하는 건 역사가 우리에게 지워 준 책무다. angler@seoul.co.kr
  • 슬픈 역사…폐허가 돼가는 소록도병원

    슬픈 역사…폐허가 돼가는 소록도병원

    한센인 첫 1만명 미만… 환자 평균 75세의사 필요인력 44%·간호사 22%에 그쳐균열·지붕 파손 등 병사 절반 이상 폐가“기념사업 추진보다 의료기능 강화 필요” 전남 고흥군 국립소록도병원의 한센인 병사(病舍) 절반 이상이 폐가로 방치되는 등 섬 공동화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이미 1980년대에 한센병 퇴치가 선언됐지만 급속한 한센인 고령화에 대한 대처는 미흡한 실정이어서 종합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다. 5일 보건복지부가 올해 실시한 ‘국립소록도병원 감사 결과’에 따르면 2002년 759명이었던 한센병 환자는 지난해 511명, 가장 최근 조사인 지난 2월 503명으로 급감했다. 환자의 평균 연령은 75.6세에 이르렀다. 이들은 고혈압(62.1%), 골다공증(38.7%), 당뇨병(25.3%) 등 각종 만성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의 건강을 관리할 의료진은 더 빨리 줄어 의료법 기준에 크게 미달하는 상황이다. 의사 필요 인원은 25명이지만 정원 11명, 간호사는 필요 인원 201명의 4분의1에 불과한 45명이다. 환자들이 거주하던 병사 112개 동 중 64개 동은 방치돼 폐가가 됐다. 대부분 1930년대에 만들어진 건물로 벽체 균열과 지붕 파손 수준이 심각하다. 관사도 79개 동 중 37개 동이 폐가로 남았다. 복지부는 2016년부터 소록도병원에 폐건물 철거용 예산을 지원하고 노인병원 전환을 지시했지만 병원 측은 종합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고흥군과 순례길 조성을 요구하는 천주교 단체, 추가 지원을 요구하는 한센단체 등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정착촌을 떠나 소록도병원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한센인도 있어 관리 대책이 시급하다. 지난해 기준으로 전국의 한센인 정착촌은 87곳, 거주민은 3129명이나 된다. 2011년 한빛복지협회 조사에서 정착촌 폐쇄 후 돌봄을 받기 위해 소록도로 이주할 의사가 있는 한센인은 34.5%였다. 복지부는 “의료 기능의 강화보다는 문화재 보존, 기념사업 측면으로 편향되게 연구가 추진되고 있다”며 “의료인력 확충 등 중장기 발전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병원에 요구했다. 한편 국내 한센인 수는 2002년 1만 8014명에서 2010년 1만 3316명, 지난해 1만 33명으로 해마다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올해 이미 1만명 미만으로 줄었고, 2025년이면 7262명으로 급감할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미 1980년대 중반에 우리나라 한센병 퇴치를 선언했다. 항생제인 ‘리팜피신’을 한번만 복용하면 균 감염력이 99%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균 활동성이 있는 한센병 양성환자는 현재 소록도병원에 단 한 명만 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한센인 고령화 못 따라가는 소록도병원

    한센인 고령화 못 따라가는 소록도병원

    한센인 첫 1만명 미만… 환자 평균 75세 의사 필요인력 44%·간호사 22%에 그쳐 균열·지붕 파손 등 병사 절반 이상 폐가 “기념사업 추진보다 의료기능 강화 필요” 전남 고흥군 국립소록도병원의 한센인 병사(病舍) 절반 이상이 폐가로 방치되는 등 섬 공동화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선 이미 1980년대에 한센병 퇴치가 선언됐지만 급속한 한센인 고령화에 대한 대처는 미흡한 실정이어서 종합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다.5일 보건복지부가 올해 실시한 ‘국립소록도병원 감사 결과’에 따르면 2002년 759명이었던 한센병 환자는 지난해 511명, 가장 최근 조사인 지난 2월 503명으로 급감했다. 환자의 평균 연령은 75.6세에 이르렀다. 이들은 고혈압(62.1%), 골다공증(38.7%), 당뇨병(25.3%) 등 각종 만성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데도 이들의 건강을 관리할 의료진은 더 빨리 줄어 의료법 기준에 크게 미달하는 상황이다. 의사 필요 인원은 25명이지만 정원 11명, 간호사는 필요 인원 201명의 4분의1에 불과한 45명이다. 환자들이 거주하던 병사 112개 동 중 64개 동은 방치돼 폐가가 됐다. 대부분 1930년대에 만들어진 건물로 벽체 균열과 지붕 파손 수준이 심각하다. 관사도 79개 동 중 37개 동이 폐가로 남았다. 복지부는 2016년부터 소록도병원에 폐건물 철거용 예산을 지원하고 노인병원 전환을 지시했지만 병원 측은 종합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고흥군과 순례길 조성을 요구하는 천주교 단체, 추가 지원을 요구하는 한센단체 등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착촌을 떠나 소록도병원으로 이주하고자 하는 한센인도 있어 관리 대책이 시급하다. 지난해 기준으로 전국의 한센인 정착촌은 87곳, 거주민은 3129명이나 된다. 2011년 한빛복지협회 조사에서 정착촌 폐쇄 후 돌봄을 받기 위해 소록도로 이주할 의사가 있는 한센인은 34.5%였다. 복지부는 “의료 기능의 강화보다는 문화재 보존, 기념사업 측면으로 편향되게 연구가 추진되고 있다”며 “의료인력 확충 등 중장기 발전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병원에 요구했다. 한편 국내 한센인 수는 2002년 1만 8014명에서 2010년 1만 3316명, 지난해 1만 33명으로 해마다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올해 이미 1만명 미만으로 줄었고, 2025년이면 7262명으로 급감할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미 1980년대 중반에 우리나라 한센병 퇴치를 선언했다. 항생제인 ‘리팜피신’을 한번만 복용하면 균 감염력이 99%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균 활동성이 있는 한센병 양성환자는 현재 소록도병원에 단 한 명만 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길섶에서] 개우밥/임창용 논설위원

    한 달여 전 전남 고흥의 소록도를 방문했다. 한센병 환자들이 겪은 아픔의 흔적이 구석구석 배어 있는 섬이다. 한센병박물관에서 본 ‘개우밥’을 잊지 못한다. 소록도에선 식기(食器)를 개우라고 불렀다고 한다. 개우밥은 미혼 환자들이 사는 독신사에서 공동취사를 할 때의 조리법이었다. 개인별로 배급받은 쌀이나 고구마 등 식재료를 모아 조리해 먹을 때 벌어지는 불공평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식재료를 담은 개인 식기를 커다란 솥에 한꺼번에 넣어 취사를 한 것이다. 취사 후 자기 식기를 꺼내 먹으면 되니 아예 분쟁의 소지를 없앤 셈이다. 배급량이 부족해 배가 고팠을 테고, 그러면서 생긴 음식 분배에 대한 불만이 이런 조리법을 탄생시켰을 것이다. 재현된 개우밥엔 배를 곯던 환자들의 고한(苦恨)이 고스란히 담긴 듯했다. 소록도를 다녀온 뒤 식사하다가 가끔 개우밥을 떠올린다. 입맛에 맞지 않아 음식을 많이 남길 때 특히 그렇다. 집에서 아이들이 밥을 절반도 먹지 않고 남기면 안 하던 잔소리까지 한다. 하루 만에 꽉꽉 차는 음식물 쓰레기통. 개우밥은 요즘 더 필요한 듯싶다.
  • 한센인 애환 담은 마지막 ‘사슴섬 간호일기’

    한센인과 함께 살아가는 소록도 간호조무사들의 경험담을 담은 ‘사슴섬 간호일기’가 지난달 출간된 13번째 책으로 마무리됐다. 국립소록도병원 간호조무사회는 1993년 섬이라는 고립된 환경 속에서 한센인들을 위해 일한다는 사명감과 보람, 애환을 담아 책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난 25년간 펴낸 13권의 책에는 편견과 차별의 그늘 속에서 침묵하며 살아온 한센인들의 고달픈 삶과 그들의 곁을 묵묵히 지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일기 형식으로 담겼다. 13번째 사슴섬 간호일기에는 창간호부터 12번째 호에 수록된 글 중 인상 깊었던 63편과 2016년 병원 개원 100주년을 맞아 소록도를 다시 찾은 간호조무사 동문들의 글 8편, 자원봉사자들의 이야기를 포함해 총 93편을 수록했다. 첫 호에 실렸던 서판임씨의 ‘죽는 일은 내 소관이 아니여’는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도 “살고 죽는 일은 하느님 소관”이라며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지내던 최씨 할아버지의 이야기다. 김영진씨의 ‘일방통행 사랑’은 2004년 당시 구복리에서 알게 된 할아버지의 이야기로 병에 걸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내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 준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한센인 돌보는 간호조무사 애환 담긴 마지막 ‘사슴섬 간호일기’

    한센인 돌보는 간호조무사 애환 담긴 마지막 ‘사슴섬 간호일기’

    한센인과 한센인 돌보는 간모조무사 이야기 담겨1993년 첫 출간 이후 13번째 출간‥올해로 마지막 지난 5월 한센인과 함께 살아가는 소록도 간호조무사들의 경험담을 담은 ‘사슴섬 간호일기’ 마지막 호가 출간됐다. 국립소록도병원 간호조무사회는 1993년 첫 호 발간을 시작으로 25년간 13권의 책을 펴냈다.첫 출간 당시 이들은 섬이라는 고립된 환경 속에서 한센인들을 위해 일한다는 사명감과 보람, 애환을 담아 책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지금까지 펴 낸 13권의 책에는 편견과 차별의 그늘 속에서 침묵하며 살아온 한센인들의 고달픈 삶과 그들의 곁을 묵묵히 지키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일기 형식으로 담겼다. 13번째 ‘사슴섬 간호일기’에는 창간호부터 12번째 책에 수록된 글 가운데 63편과 2016년 병원 개원 100주년을 맞아 소록도를 다시 찾은 간호조무사 동문들의 글 8편, 자원봉사자들의 이야기 등 모두 93편을 수록했다. 첫 호에 실렸던 서판임씨의 ‘죽는 일은 내 소관이 아니여’는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도 “살고 죽는 일은 하느님 소관”이라며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지내던 최 씨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았다. 김영진씨의 ‘일방통행 사랑’은 2004년 당시 구복리에서 알게 된 할아버지의 이야기로 병에 걸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내에 대해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준다. 소록도 간호조무사회 고은아 전 회장은 “23년간의 책 작업은 소록도에서 간호조무사의 지난한 수고를 기록하기에 충분했다”면서 “책을 통해 한센 어르신들의 삶의 마지막까지 기쁘게 돌볼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소록도병원 간호조무사 양성소는 1977년 개설됐으며 이듬해 1기를 시작으로 2003년 폐쇄되기까지 614명의 간호조무사를 배출했다.<‘일방통행 사랑’ 전문(김영진·2008년)> “할아버지, 오늘도 오셨네요. 집에서 좀 쉬지 않구요?”“힘들더라도 와 봐야지.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해.” 특별한 일 없는 한, 하루에 세 번 병상의 할머니를 찾아오는 할아버지가 계시다. 할아버지를 알게 된 건 4년 전 구북리에서 근무할 때다. 당시 할머니는 걷지 못해도 말씀을 잘하셨고 엉덩이로 방을 밀고 다닐 정도는 되었다. 할아버지는 집안 살림에 구북리 사무실 일이며 밭일까지 쉴 틈 없는 바쁜 일상에도 불구하고 항상 웃음과 농담을 잃지 않았다. 그렇게 일 년을 구북리에서 근무하고 세월이 흘러 5병동에서 할아버지를 만난 반가움도 잠시, 눈만 깜빡거릴 뿐 아무 말씀도 못하고 누워만 계신 할머니를 본 순간 마음이 무거웠다. 불러도 대답 없이 눈 한 번 맞추지 않는 할머니지만 그래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할아버지는 오실 때마다, 할머니 등 뒤에서 꼭 안으며 따뜻한 체온과 사랑을 전한다. 그런 할아버지의 마음을 할머니가 느끼기는 하는 걸까? 한참을 안아주고 식사수발을 마친 후 자리에 눕힌다. 그리고 날마다 묻고 또 묻던 질문을 오늘도 반복하신다. “내가 누구여?” 하지만 할머니는 그저 음냐, 음냐 하는 소리만 낼 뿐 다른 대답은 없다.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아도, ‘영감’하고 불러주지 않아도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보기 위해 어제도 그제도 그랬듯이 오늘도 여전히 병동을 찾는다. 할아버지의 일방통행 사랑은 참으로 감동이고 지극하다. 할머니가 살아계시는 동안 그 일방통행 사랑은 계속될 것이다. 민나리 기자 mnin1082@seoul.co.kr
  • ‘돼지 신부’ 맥그린치 신부에 명예국민증 헌정

    ‘돼지 신부’ 맥그린치 신부에 명예국민증 헌정

    6·25전쟁 직후 제주도민의 자립을 위해 성이시돌 목장을 설립하는 등 64년간 제주도를 위해 헌신하다가 지난 4월 선종한 ‘돼지 신부’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한국명 임피제) 신부에게 5일 명예국민증이 헌정됐다. 법무부는 5일 맥그린치 신부의 봉사정신을 기리기 위한 명예국민증 헌정 행사를 열었다. 외국인에게 명예국민증이 주어진 것은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거스 히딩크 감독, 43년간 소록도 한센인을 위해 봉사한 마리안느와 마가렛 간호사에 이어 네 번째다. 사후 헌정은 처음이다. 1928년 남아일랜드 레터캔에서 출생한 맥그린치 신부는 1954년 스물여섯의 나이에 성골롬반 선교회 사제로 제주도에 부임한 이후 직물회사 및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어 제주도민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맥그린치 신부는 또 제주도민들과 함께 황무지를 개간하고 선진 축산기술을 도입하며 성이시돌 목장을 아시아 최대의 양돈단지로 키웠다. 이와 함께 우유 및 치즈, 사료공장에서 얻은 수익금으로는 양로원, 요양원, 호스피스병원을 세워 제주도민들의 삶의 질을 끌어올리기도 했다. 이날 행사에는 맥그린치 신부의 조카 레이먼드 맥그린치와 제주교구 천주교회 유지재단 마이클 리어던 신부가 참석해 명예국민증과 기념동판을 받았다. 또 줄리언 클레어 주한 아일랜드 대사가 함께해 자리를 빛냈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신부님의 숭고한 인류애와 희생 정신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서울포토] 김정숙 여사, 청와대 방문한 장애인들과 만남

    [서울포토] 김정숙 여사, 청와대 방문한 장애인들과 만남

    김정숙 여사는 19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청와대를 찾은 소록도 한센환우와 봉사단, 신망애복지재단, 호세아동산 등 장애인 복지시설 장애인들과 봉사자를 만나 인사하고 격려했다. 청와대 제공
  • [서울포토] 장애인 손 꼭 잡은 김정숙 여사

    [서울포토] 장애인 손 꼭 잡은 김정숙 여사

    김정숙 여사는 19일 장애인의 날을 맞아 청와대를 찾은 소록도 한센환우와 봉사단, 신망애복지재단, 호세아동산 등 장애인 복지시설 장애인들과 봉사자를 만나 인사하고 격려했다. 청와대 제공
  • 화장기 없는, 花園

    화장기 없는, 花園

    전남 고흥 하면 우주발사기지가 있는 나로도, ‘박치기왕’ 김일의 고향인 거금도가 퍼뜩 떠오를 겁니다. 한센인들이 거주하는 소록도 역시 엇비슷한 무게감을 갖지요. 한데 쑥섬은 당최 생소합니다. 걸출한 섬들 틈바구니에 숨겨진 작고 예쁜 섬입니다. 쑥섬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쑥섬지기’를 자처한 한 부부와 마을 공동체의 10년 노고가 있었다고 하지요. 공들여 꽃씨를 뿌리고 산책로를 다듬었습니다. 그런데도 섬은 여느 유명 섬들과 달리 ‘화장기’가 옅습니다. 소박하고 수수합니다. 가꿔졌으되 섬으로서의 제 모습을 잃지는 않은 것이지요. 그게 쑥섬의 가장 큰 매력인 듯합니다.#스무명 남짓 사는 곳… 난대림 울창한 당숲·등대 등 볼거리 쏠쏠 쑥섬은 ‘애도’라 불린다. 쑥 애(艾) 자를 쓴다. 쑥이 많이 자란다 해서 이 같은 이름을 얻었다. 전남도 제1호 민간 정원이기도 하다. 덜 알려진 민간의 정원을 발굴해 지역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려는 전남도 프로그램의 첫 대상 지역이다. 쑥섬은 나로도항 바로 맞은편에 있다. 딱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다. 크기도 작다. 해안선 길이가 3.2㎞ 정도에 불과하다. 이 작은 섬 안에 스무명 남짓한 주민이 깃들여 산다. 이웃한 나로도항이 삼치 파시로 이름을 날리던 1980년대 초엔 무려 400여명의 주민이 살았다고 한다. ‘손바닥 만 한’ 섬의 규모로 미뤄 볼 때 거의 ‘전설’이나 다름없는 이야기지 싶다. 섬의 크기는 작아도 볼거리는 제법 풍성하다. 동백, 후박나무 등 난대림이 울창한 당숲, 사연 많은 바위들, 등대 등이 섬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널리 알려진 볼거리는 ‘쑥섬정원’이다. 중학교 교사인 김상현(50), 약사인 고채훈(47)씨 부부와 마을 공동체가 10년 가까이 애면글면 가꾼 비밀의 정원이다. 거제 외도나 장사도처럼 화려하지는 않아도 계절에 따라 피고 지는 수수한 들꽃들과 만날 수 있다.선착장에 내리면 ‘양심 돈통’이 먼저 객을 맞는다. 외지인이라면 누구나 자발적으로 섬 탐방비를 넣어야 한다. 선착장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곧 갈매기 카페와 만난다. 마을회관 겸 여행자 쉼터다. 섬 내 유일하게 공용화장실이 갖춰진 곳이기도 하다. 카페 역시 자율적으로 운영된다. 카페를 지나면 탐방로가 시작된다. 언덕길은 조붓하다. 다소 가팔라도 숨이 목에 찰 정도는 아니다. 이어 만나는 당숲은 울창하다. 푸조나무, 후박나무 등이 난대림을 이루고 있다. 섬사람들에게 당숲은 신성한 곳이다. 쑥섬을 세상에 알린 김씨 부부도 2001년 섬을 매입하기 시작한 뒤 8년 만에야 당숲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고 한다.#전남도 제1호 민간 정원… 수수한 들꽃들과 마주하는 ‘비밀의 화원’ 섬 정상 부근은 야생화 정원이다.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비밀의 정원이다. 계절을 달리하며 다양한 들꽃들이 피고 진다. 초봄 무렵이라 꽃의 종류는 아직 많지 않다. 파랗거나 보랏빛인 현호색, 보라유채꽃이라 불리는 소래풀, 앙증맞은 은방울 수선화와 샛노란 유채꽃 등이 눈에 띌 정도다. 그래도 새봄을 맞은 들꽃의 화사한 빛깔은 여행자의 마음을 공연히 달뜨게 만든다. 산상 정원 너머로는 파란 다도해다. 사방으로 거칠 것 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한 주민의 표현처럼 너른 바다 위로 크고 작은 섬들이 ‘쪼빗쪼빗’ 솟았다. 작은 섬에서 맞는 참으로 큰 풍경이다. 섬 정상은 해발 83m다. 표지석 대신 손으로 쓴 표지판을 세워 놨다. 표지판엔 에베레스트와 백두산 등의 높이도 함께 적었다. 그러면서 “(쑥섬 정상과) 별 차이 없다”고 우겨 댄다. 에베레스트의 높이와 무려 100배 이상 차이가 나는데도 말이다. 섬사람들의 애교에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정상에서 발걸음을 줄이면 곧 성화등대다. 해넘이 명소다. 일몰에 펼쳐지는 장관을 보기 위해 하룻밤을 묵는 이도 있다고 한다. 이어 수백년을 살아 낸 동백나무길, 주민들의 추억이 쌓인 쌍우물 등을 지나면 다시 마을 안쪽에 닿는다. 섬 끝에서 만나는 돌담길도 인상적이다. 돌담은 집과 집을 잇는다. S 자로 휘휘 돌아가며 골목을 만들었다. 골목 초입에 강제윤 시인의 글이 적혀 있다. 강 시인은 골목길을 “바람의 통로”라고 했다. 바람을 막는 게 아니라 잘 지나가도록 하기 위해 돌담을 세웠다는 것이다. 돌담 안 집들은 대부분 비었다. 사람이 깃들이지 않은 집은 황량하다. 그래도 이 낡은 공간에 외지 자본이 들어올 가능성은 많지 않다. 이 섬을 일군 김씨 부부가 섣부른 변화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몇몇 이름 난 섬과 달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화장기 짙은 섬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뜻이다. 두 부부가 애초 세웠던 뜻이 오래 지속됐으면 싶다.#고흥 우주발사전망대~영남 용바위 4㎞ ‘미르마루길’ 걷노라면… 고흥에 걷기 길이 새로 생겼다. 미르마루길이다. 고흥 우주발사전망대에서 영남 용바위까지 4㎞ 거리를 걷는다. 미르는 ‘용’, 마루는 ‘하늘’(우주)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미르마루길의 가장 큰 장점은 여태 볼 수 없었던 웅장한 해안 절벽을 줄곧 눈에 담으며 걸을 수 있다는 것이다. 들머리는 우주발사전망대다. 고흥의 랜드마크 중 하나다. 나로우주센터와 직선거리로 17㎞ 떨어졌다. 전망대에 서면 올망졸망한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대에서 시작된 미르마루길은 사자바위와 다랑논, 몽돌해변 등 여러 볼거리를 품었다. 용굴 등 기암절벽도 지난다. 곳곳에 스카이워크 전망대와 용 조형물 등도 세워 뒀다. 특히 용암마을 언덕에서 보는 해안 풍경이 빼어나다. 날머리인 용암마을은 고흥 8경 중 6경인 영남 용바위가 있는 곳이다. 둥근 갓처럼 생긴 용바위의 자태가 압도적이다. 새달 12일엔 미르마루길 일대에서 걷기 축제가 열린다. 요즘 고흥 어디나 봄 풍경이 완연하다. 특히 산벚꽃이 절정이다. 고흥 대부분의 산에서 볼 수 있지만 팔영산국립공원과 마복산 등의 산벚꽃 핀 풍경이 장관이다. 봄의 산은 멀리서 봐도 빼어나다. 산행을 하지 않아도 좋은 만큼 꼭 찾아보길 권한다. 이맘때 고흥 여정에서 꼭 찾아야 할 여행지 두 곳만 덧붙이자. 금탑사는 비자나무숲(천연기념물 239호)으로 이름 난 절집이다. 가지를 늘어뜨린 늙은 비자나무들이 절집을 에워싸고 있다. 비자나무숲과 이웃한 동백숲도 깊다. 해마다 이맘때면 떨어진 동백꽃으로 일대가 붉은 양탄자를 깐 듯하다. 이 모습이 초록빛 비자나무숲과 절묘한 앙상블을 이룬다. 형제섬은 진달래가 곱다. 십수 그루의 진달래가 작은 섬을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해마다 이맘때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나로도 초입에 있다. 글 사진 고흥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여행 가방 (지역번호 061) →가는길:쑥섬 가는 배(4월 기준)는 나로도항에서 매일 오전 7시 40분, 10시 50분, 낮 12시 50분, 오후 1시, 4시, 6시에 출항한다. 쑥섬에서는 오전 7시 35분, 8시 55분, 11시 15분, 낮 12시 55분, 오후 3시 5분, 5시 35분 출항한다. 요금은 1인 3000원(왕복)이다. 쑥섬 탐방비는 1인 5000원이다. 관련 정보는 ‘힐링파크 쑥섬쑥섬’ 홈페이지에서 얻을 수 있다. 형제섬은 같은 이름의 농원펜션(832-2004)을 통해 들어가야 한다. 남의 집 안마당을 지나는 느낌이어서 머쓱하긴 해도 진달래 곱게 핀 섬을 보려면 어쩔 수 없다. 형제섬도 이 펜션 주인의 소유라고 한다. 옆마을에서도 형제섬까지 들어갈 수 있지만 다소 좁고 복잡하다.→맛집:분청마루(834-7242)는 한정식을 맛깔스럽게 내는 집이다. 과역면의 맛집 해주식당이 옮겨 와 새로 문을 열었다. 전화번호가 옛 해주식당과 같은 건 그 때문이다. 찬 국물의 피굴, 팥과 낙지를 넣은 낙지팥죽, 소 육회 등을 제철 해산물과 함께 내놓는다. 두원면 운대리의 분청박물관 안에 있다. 정다운식당(843-0217)은 생선구이백반이 맛있는 집이다. 녹동항에 있다. 이웃한 수정식당(842-2791)도 현지인의 발걸음이 잦다. 생선회 등을 판다. 과역면 일대에 커피 농장들이 많다. 산티아고 등 농장마다 로스팅 체험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의 고흥 커피에 대한 자부심은 높다. 일반 아메리카노는 3000원이지만 고흥 커피는 세 배 가까운 8000원을 받는다. →잘 곳:최근 문을 연 명품무인호텔(832-6300)이 깨끗하다. 고흥읍 외곽에 있다. 마복산 아래 목재문화체험장(830-5123)의 전통한옥체험도 권할 만하다.
  • [단독] ‘천형 낙인’ 한센병 환자 5년 뒤 사라진다

    [단독] ‘천형 낙인’ 한센병 환자 5년 뒤 사라진다

    고령화·적극적 감염예방 일환 활동성 환자 작년 125명으로 ‘나균’ 신규 환자 3명으로 감소5년 뒤 한센병 환자가 국내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출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환자 고령화와 적극적인 감염 예방 정책의 영향이다. 고려시대부터 현대까지 800년이 넘도록 주변의 따돌림과 비난, 공권력의 폭압을 피해 숨어 살다시피한 환자들의 고통스러운 역사가 저무는 것이다. 6일 서울대 평화통일연구원이 최근 질병관리본부에 제출한 ‘한센병 관리 개선방안 마련’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한센병 환자로 부르는 ‘활동성 환자’는 2001년 581명에서 지난해 125명으로 줄었다. 활동성 환자는 한센사업대상자(한센인)의 1%에 불과하다. 나균에 감염된 신규 활동성 환자는 2005년 15명에서 지난해 3명으로 감소했다. 정근식 평화통일연구원장은 “현재 추세가 이어질 경우 2022년에는 활동성 환자가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센병 감염 경험이 있는 전체 한센인도 2001년 1만 7712명에서 지난해 1만 33명으로 급감했다. 지난해 기준 한센인 평균 연령은 76세다. 70세 이상의 비율이 71%로 20년 뒤면 현재 한센인의 대부분이 사망할 것으로 예측됐다. 한센인은 대부분 소록도에 거주하는 것으로 잘못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지난해 말 기준 60.3%가 자신의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정착마을은 31.2%, 소록도 등 한센생활시설에 거주하는 비율은 8.5%다. 소록도병원에 거주하는 한센인은 511명이다. 해마다 사망하는 한센인은 평균 500명에 이르러 한센생활시설 입소자도 계속 감소하는 추세다.눈썹이 빠지고 피부와 근육이 문드러지는 증상 때문에 한센병 환자들은 늘 사회의 차별과 폭력에 시달렸다. 특히 일제는 소록도에 환자들을 몰아넣고 평생 격리, 강제 단종수술, 감금실 운영 등 ‘증오의 역사’를 이어 갔다. 소록도에 환자가 많을 때는 6000명이 넘을 정도였다. 해방 이후인 1954년과 1963년 전염병 예방법 개정을 통해 강제 격리가 폐지되고 정착마을이 활성화됐지만 사회적 편견으로 인한 아픔은 지금도 완전히 아물지 않았다. 현재는 70대 이상 고령자가 대부분이어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많다. 2016년 조사에서 한센인 정착마을 거주자의 70.9%가 기초생활수급자이고 9.9%만 경제적으로 독립한 것으로 분석됐다. 정착마을 한센인 3명 중 1명꼴로 가장 큰 어려움은 ‘빈곤’이라고 답했다. 인권침해 요소가 있는 정책의 개선도 필요하다. 정 원장에 따르면 과거 한센병 유병률이 높았던 시기에 만들어진 ‘부랑 한센인 수용’ 정책도 여전히 남아 있다. 정 원장은 “‘2017 한센사업지침’에는 과거 한센인 강제 송환의 근거가 됐던 ‘부랑 한센사업대상자 선도 및 이송’ 항목이 여전히 포함돼 있다”며 “고령화라는 한센인의 특성에 맞게 일상생활을 위한 생활복지적 모델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공직체험] 간호인 한 명이 40~50명씩 매일 ‘섬 라운딩’…한센인 몸과 마음 둥글게 치유하는 천사들

    [공직체험] 간호인 한 명이 40~50명씩 매일 ‘섬 라운딩’…한센인 몸과 마음 둥글게 치유하는 천사들

    매년 1월 마지막 주 일요일(지난달 28일)은 ‘세계 한센병의 날’이다. 프랑스의 자선사업가인 라올 홀레로가 한센인들을 돕고자 1954년 프랑스 의회에서 이날을 세계 한센병의 날로 제정하는 의결을 이끌어낸 것이 그 유래다. ‘한센인’ 하면 떠오르는 곳이 있다. 바로 소록도다. 소설가 이청준은 이곳을 배경으로 한 작품 제목을 ‘당신들의 천국’이라 지었다. 지난 100년 한센인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간직된 이 천국에서 이들을 묵묵히 돌보는 ‘천사’들이 있다. 국립 소록도병원 간호사·간호조무사들이다.# 7개 마을 환자 380명 최대 하루 4~5번 방문 이들의 업무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병동간호, 마을방문간호, 외래간호다. 병동이나 외래는 다른 병원에서도 흔히 볼 수 있지만, 마을방문간호는 섬 전체가 병원인 소록도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지난달 19일 국립 소록도병원 남미화 간호사의 마을방문간호를 따라갔다. 너무 바쁜 발걸음에 당황한 기자가 “조금 천천히 가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부탁했다. 남 간호사는 “그러면 시간 내에 다 못 돌아요”라고 잘라 말했다. 소록도에는 중앙리·동생리 등 7개 마을이 있다. 전체 간호인력 정원은 111명(간호사 45명, 간호조무사 66명)이지만, 현원은 96명(간호사 36명, 간호조무사 60명)이다. 특별한 사명감이 요구되는 자리라 정원을 채우기가 녹록지 않다. 이들 중 마을방문간호에 배치된 인력은 20명이다. 소록도 병원 전체 환자 511명 중 병동에 있는 환자를 제외한 약 380명 정도가 마을방문간호 대상이다. 간호인력 한 사람당 40~50명 정도의 한센인을 하루에 방문해야 한다. 공식적으로는 오전·오후 하루 두 번 방문간호를 하지만 환자 상태에 따라서 4~5번 방문하는 일도 많다. 즉 한센인들은 하루 최소 두 번 이상 담당 간호사 얼굴을 본다.# 바쁜 발걸음 속 한 분 한 분 건강체크 꼼꼼히 쉴 새 없이 빠르던 남 간호사의 발걸음이 중앙리의 한 방문 앞에 멈춰 섰다. 남 간호사는 조용히 방문을 두들기며 “어르신 저 왔어요. 들어갈게요”라고 말했다. 병동을 다 돌지 못할까 급했던 마음은 방 안으로 들어서자 사그라졌다. “지금 어디 아픈 데 있으세요? 얼굴이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아요.” 남 간호사는 몇 분 동안 방 안의 노인과 도란도란 얘기를 나눴다. “또 올게요”라는 말과 함께 방문을 나선 남 간호사의 발걸음이 다시 빨라졌다. 소록도병원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이곳에 활동성 한센병을 앓는 환자는 없다. 과거 병력으로 인한 신체 변형으로 거동이 불편하거나, 고령으로 인한 질환을 앓는 환자가 대다수다. 병원에 등록된 한센인은 511명이다. 평균 나이는 75.5세다. 50대 미만도 있지만, 대다수가 60세 이상 노인이다.# 보호자 없는 어르신에게는 말벗이자 자식처럼 이 병원 환자들에겐 보호자가 없다. 그래서 간호사·간호조무사들 업무는 단순히 간호에서 그치지 않는다. 환자들 손발톱관리·목욕 등 일상적 위생관리부터 대소변 수발과 세탁물 정리까지. 그리고 적적한 분들에게 다정한 말벗이 돼 주는 것도 중요하다. 남 간호사는 한 환자 방 안에 어지러이 놓인 지폐 다발을 보고는 “돈을 이렇게 놓으면 어째요, 어르신”이라고 장난스레 타박하며 한쪽에 잘 정리해 뒀다. # 그냥 공무원 아닌 남다른 사명감으로 근무 이들에겐 공무원이란 직업 자체가 주는 것 이상의 특별한 사명감이 있다. 20여년간 이곳에서 일한 허옥희 국립소록도병원 간호조무사는 “그냥 공무원이 되고 싶어서 이 일을 택한 건 아니었어요”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라운딩하면서 어르신에게 ‘아리랑’을 가르쳐 드렸어요. 제가 방에 들어가면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하면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시는 모습이 기억에 떠올라요.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지요.” 글 사진 소록도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한센인 문제, 한·일 과거사 중 유일한 해결 의의”

    “한센인 문제, 한·일 과거사 중 유일한 해결 의의”

    “10년 넘게 함께 고생한 동료 변호사들에게 미안했는데 작은 보답이 된 것 같아 다행입니다. 좀더 많은 변호사가 공익 활동에 관심을 두고 참여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30일 사단법인 법조언론인클럽 ‘올해의 법조인상’을 수상한 한센인권변호인단 단장 박영립(65) 변호사는 “모두 안 되는 일이라고 했고, 나도 승소하리란 기대는 없었지만 한센인들을 직접 만나고 나니 돕지 않을 수 없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한센인과의 인연은 2004년 5월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장을 맡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센인 인권 침해 소송에서 승소판결을 받아낸 일본 변호사들이 한국의 한센인도 돕겠다며 대한변협을 찾아온 것이다. 박 변호사는 “일본 변호사들도 관심을 갖는데 한센인에 대해 무지한 것이 부끄러웠다”고 돌이켰다. 그러면서 “처음 한센병에 대해 공부를 시작할 때만 해도 판결을 받기까지 2~3년이면 끝날 줄 알았다”면서 “한센인 단체에서도 회의적이었지만 우리가 열의를 보이자 도와줬다”고 덧붙였다. 소송을 시작할 때만 해도 60명에 달하던 변호사들은 12명으로 줄었다. 박 단장과 김성기, 김준우, 박종강, 서중희, 양정숙, 이영기, 이정일, 장철우, 조영선, 최용근, 한석종 변호사로 구성된 변호인단은 일제 정책으로 고통당한 한센인에 대한 일본 정부의 보상을 이끌어냈고, 한국 정부로부터도 배상받았다. 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에서 보상과 배상을 받기까지의 과정은 지난했다. 처음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은 관련 법이 없다는 이유로 패소했다. 이후 일본 변호사, 시민단체, 언론 등의 도움으로 한국인도 보상받을 수 있도록 일본 법이 개정됐지만, 공식 문서가 없어 증명할 길이 없었다. 결국 변호사들이 팀을 꾸려 주말마다 소록도 등 전국에 흩어져 있는 한센인 정착촌을 돌며 설명회를 열고, 한 달에 5~10명씩 직접 만나 진술서를 작성했다. 일제 당시 한센인 정착촌에 강제억류됐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 교회 교적부, 학교 학적부 등 관련 자료를 모두 뒤졌다. 결국 피해자 590명이 일본 정부에서 1인당 1억원을 받을 수 있었다. 박 변호사는 “변호사들뿐만 아니라 시민단체가 합심해 소송을 제기하는 한편 입법청원을 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일본 정부를 압박했다”며 “한국, 일본, 대만 3국 국민 50만명이 서명운동하는 등 3국의 힘을 합친 결과”라고 설명했다. 해방 이후 한국 정부는 한센인들에게 단종과 낙태수술 등을 강요했다. 정부는 2007년 보상법을 제정해 의료비만 지원하겠다는 방침을 세웠지만 박 변호사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법원은 538명에 대해 1인당 3000만~4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박 단장은 한센인 문제가 한국과 일본 양국의 과거사 문제 중 유일하게 해결된 점에 의의가 있다고 강조했다. 박 변호사는 “위안부나 강제징용 문제도 변호사, 시민단체, 언론 등이 다양하게 합심해 한국 정부와 힘을 합쳐 일본 정부를 설득해야 한다”며 “한센인 문제도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결국 해냈다”고 말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커버스토리] “100년사 발간은 기적”… 소록도의 기록은 끝나지 않는다

    [커버스토리] “100년사 발간은 기적”… 소록도의 기록은 끝나지 않는다

    “언제나 역사엔 밟은 자의 근거만 있지. 밟힌 자의 근거는 지워지기 마련이야.”소록도 주민 강선봉(79)씨는 이런 상황 속에서 100년사가 발간됐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처음에는 갈등이 무척 심했다”면서 “완벽하게 만족할 순 없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1946년 이곳에 들어온 강씨는 이청준이 소설 제목에 쓴 ‘천국’(天國) 표현에 반박하는 수필 ‘천국(賤國)으로의 여행’을 펴낸 인물로도 이곳에서 유명하다.역사편 227페이지엔 반가운 이름이 등장한다. ‘소록도 할매천사’ 마리안느 스퇴거(84)와 마가렛 피사렉(83)이다. 한센병 의료봉사단체인 다미안재단에서 간호원으로 활동한 두 사람은 각각 소록도에 온 시기가 다르다. 마리안느는 1962년 이곳에서 영아원을 운영했고 그리스도왕 시녀회 소속 마가렛은 1959년 전북 정읍에서 한센병 환자를 돌보다 1966년부터 다미안재단에 합류했다. 다미안재단이 소록도를 떠날 때도 이들은 계속 남아 봉사활동을 이어 갔다. 이곳에서 각각 ‘큰할매’와 ‘작은할매’로 통한다. 40여년 이곳에서 지내다 2005년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돌연 귀국한다. 주민들에게 서툰 한국어로 쓴 편지 한 통만 남겼다. 작은할매를 친어머니처럼 따랐다는 허옥희 소록도병원 간호조무사는 그들이 떠나던 마지막 날을 기억했다. “녹동항에서 두 할매를 봤어요. 할매들이 잠시 피정(종교인들이 수련을 떠나는 일) 가시는 줄 알았죠. 잘 다녀오시라고 인사했습니다. 할매들은 알겠다며 웃었지만 왜인지 한 번 돌아보시더라고요. 그때 왜 그랬는지, 나중에서야 알았죠.” 소록도의 200년은 어떻게 기록될까. 강의원 주무관은 “그때쯤엔 이곳에 삶의 이야기가 더이상 없기 때문에 질문이 성립하지 않습니다”며 선을 그었다. 그러나 소록도에 사람이 있는 한, 그의 기록도 끝나지 않는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전했다. “앞으로는 국가가 무엇을 했다는 얘기가 남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공무원들은 할 일을 했을 뿐인 걸요. 그보다도 한센인들이 주어진 여건 속에서 어떻게 살아‘냈’는지. 그런 흔적들을 찾아나가야 할 것입니다.” 소록도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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