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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장난과 핵버섯(미래를 보는 세계의 눈)

    ◎불 조르주 샤르파크­미 라치드 가윈/원자력에너지 원리·역사 집대성/핵무기 개발 해악·원전 등 평화적 이용 역설 책을 펴내는 이는 보통 서문에서 가족이나 아내에게 책을 바친다고 밝힌다.하지만 「지구인에게 바치는 책」이 올해초 발간됐다. 프랑스에서 발간된 「불장난과 핵버섯(Feux follets et Champignons Nuclears)」.지난92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과학원 회원인 조르주 샤르파크(Georges Charpak)가 미국의 핵전문가 리차드 가윈(Richard Garwin)과 공동 집필한 서적에서 샤르파크는 지구인에게 바치는 책이라고 밝히고 있다. 「불장난과 핵버섯」은 원자력 에너지의 원리와 철학,역사,핵무기 등을 다룬다.X선을 발명한지 꼭 100년만에 나온 이책은 원자력에너지를 집대성한 역저로 평가받고 있다. 책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 E=MC2부터 시작한다.그리고 『나는 3차대전에 어떤 무기가 사용될지를 알지 못한다.그러나 4차대전은 막대기와 돌로 치러질것』이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을 인용한다. 저자들은 본문에서 군사및 민간용 원자력이 인간을 위협하고 있는가?,원자력 발전소는 과연 위험한가?,핵무기 테러는 가능한가?라는 등의 의문을 제기하면서 하나씩 해답을 찾아가는데 철저한 원자력과 「핵 옹호론」으로 전개된다. 불의 발견에서 시작된 에너지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 가운데 절정은 원자력 에너지의 발견이다.그리고 현재 세계에서 사용하는 전기의 18%는 원자력 에너지에서 나오고 있어 샤르파크는 「핵전력」이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때문에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유무해 논쟁은 원자력에너지 사용 전략의 문제이지 근원적으로 해악성을 띠고 있지는 않다고 주장한다.플루토늄 1t의 분량이 엄청난 전기를 발생시키는 인류의 유익성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같은 이에게는 핵폭탄 250개를 만들수 있는 물질로 비친다는 것이다. ○지구인에 바치는 책 인간의 소유욕은 핵무기를 지구상에서 완전히 없애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그리고 핵을 무기로한 테러는 엄청난 파괴력때문에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한다. 이를 피할수 있는 방법은 각국 정부의 정책에 달려있다.쓸모없는 핵무기 개발에 집착하면 옛소련의 예에서 봤듯이 국익에 해롭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경고한다.그리고 군사부문보다는 민간부문의 이용개발에 더 많은 투자를 해야한다고 충고한다. ○군사이용 개발 경고 원자력에너지가 환경보전과 주민 안전에 미칠수 있는 문제를 줄이려면 더욱 철저한 안전시설이 갖춰지는 것은 필수적이다.전세계에 퍼져있는 432개의 원자로는 지하에 건설되고,핵폐기물의 매립조치는 검증된 기술과 첨단 안전시설을 갖추야 하도록 국제적인 합의에 하루빨리 도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즉 북한이 대만으로부터 핵폐기물을 반입해 매립하려는 시도도 국제적인 제재의 틀속으로 넣어야 한다는 얘기다. 환경보호론자들의 원자력 에너지 백해무익론에 대한 반박에서 「불장난과 핵버섯」의 핵옹호는 극에 이른다.환경보호론자들의 반대운동에 대해 자본주의가 갖는 일부 문제에 대응해 사회주의가 나온 정도라고 폄하한다. 그래서 발간되자 마자 프랑스의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고 있다.프랑스의 유명한 오딜 자콥(Odil Jacob)출판사가 발행했고 383쪽 분량에 150프랑(2만4천원).
  • 「등」이후 중국­동북아­세계:Ⅱ(지구촌 칼럼)

    ◎본사 지구촌칼럼 필진 4명 국내전문가 1명 공동진단/국제정세 영향/리처드 하스 미 브루킹스연 외교정책실장/당분간 대외마찰 최소화/정치안정·경제번영땐 영향력 확대 등소평의 죽음은 우리에게 대답보다는 질문을 더 많이 남기고 있다.그의 죽음은 중국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그리고 세계에는. 분명 등소평이 중국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고 지금도 지대하다.현재의 중국은 모택동보다는 등소평의 국가라고 말해도 결코 과장은 아니다. 그러나 중국의 미래는 탄탄대로라든가 분명하다는 것관 거리가 멀다.중국은 시장경제 변화의 도입과 세계경제와의 연계증대를 굳게 약속한 것처럼 보인다.그렇지만 등 시대에 이런 일들이 아주 점진적으로 이뤄진 사실은 곧 커다란 의문들이 상존함을 뜻한다.강택민 등은 힘있지만 비능률적이고 돈이 많이 드는 국영기업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그들은 또 광범위한 부패,정부보조금의 축소,경제활동에 대한 국가통제의 완화지속 등을 헤쳐나가야 한다.이런 방향으로 움직여 나갈 때에만 중국은 세계무역기구에 합류할 수 있고세계에서 성공적으로 경쟁할 수 있다. 중국의 정치적 미래는 한층 불확실하다.공산당이 정부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합법적인 후계를 위한 공식절차도 없고 민중의 반정부 시위를 다룰 법조항도 별로 없다.시간이 지나면 무엇인가가 주어져야 한다.경제개혁에 고삐를 물리고 중국의 잠재적이며 정치적인 개혁을 제한할 어떤 것이 나오던가 아니면 중국 지도자들의 힘을 제한하는 어떤 것이 나오든가 해야 할 것이다. 이 질문이 답해지는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그러나 이것의 현실적인 파장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크다.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번영할 때만 중국은 국경선 너머로 심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대국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으로서는 등소평의 사망이 중국의 바깥 세계와의 관계에 미칠 충격은 작아 보인다.등소평이 몇년에 걸쳐 차근차근 퇴장한 결과로 그가 지목한 후계자들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세력 변수들로부터 지지를 얻을 시간을 가졌다는 사실은 의미깊다.후계는 그의 사망 이후부터가 아니라 이전부터 이뤄졌다. 그럼에도 등의죽음은 새로운 불확실한 상황들을 야기한다.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중국의 역사는 후계결정의 시기에 합법성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권위가 채 확고하지 못한 후계가능 인물들은 대담한 정책이나 폭넓은 타협책을 택하기를 꺼리게 된다고 일러준다. 이것은 결국 앞이 보이는 장래,최소한 올 가을의 당대회 이후 상당기간까지는 상황이 예전과 아주 비슷하게 돌아갈 것이란 점을 말한다.미국은 이 기간에 무엇을 해야 하는가.미국에는 예의 주시와 분명성과 일관성과 현실주의가 요구되는 때이다. 미국정부가 인권에 관해 장기적인 접근법을 택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중국지도자들이 갑자기 세계인권 규약준수를 다짐하고 반정부 인사를 석방하고 감옥에 대한 국제사찰을 허용할 리는 없다.변화는 오로지 시간이 지나야만,경제개혁과 중국지도자들의 자신감 확대의 결과로서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공개적인 압박보다는 은밀한 재촉이 진전을 이뤄낼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국 관리들은 홍콩에 대해서도 현실주의자가 될 필요가 있다.홍콩의 이양은 시간표대로행해질 것이 확실하다.더구나 중국지도자들이 홍콩의 민주적 관행들이 계속되고 발전되도록 허용하리라고 기대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중국은 그러나 그들의 홍콩에 대한 태도가 많은 미국인들의 중국관에 큰 영향을 줄 것이란 점을 알아야 한다. 또다른 민감 사안인 대만 문제에서 중국은 자기의 권리주장에 절대적인 자세를 견지할 것이며 국제사회가 대만 정부와 어떤 관계라도 맺는 것을 강력하게 반대할 것이다.대만에 전투기를 판매하려는 미국의 계획도 큰 저항을 받을 것이다.우리는 중국 군사력이 대만을 위협할 능력을 시범보인 지난해의 긴장사태가 어떤 식으로든 재연되는 것을 목격할 수도 있다.그럼에도 미국은 대만에 대한 의무를 완수하고 흔들림없는 자세를 지켜야 한다. 그밖의 지역에 대해 중국이 어떻게 나올까는 덜 분명해 보인다.그이유는 등 사망 이전에 관련 정책들이 정해지지 않은 것이 주요 원인이다.그래서 중국이 북한 식량난 문제에 개입해 대량의 식량지원에 나설지는 확실치가 않다.하지만 미국은 전쟁을 피하고 북한의 어떤 붕괴사태도 관리될 수 있도록 상호정책 협의를 할 만큼 중국을 개입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동아시아 경제/노조에 신이치 일 아세아대학 교수/중국도약은 아주발전 “핵”/개혁·개방의 흐름 단절 안될것 혁명가 등소평옹이 타계했다.그가 남긴 업적과 역할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할 생각은 없지만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등이 주도한 개혁·개방정책은 사람들의 욕망에 불을 붙여 중국경제를 「거대한 용」으로 소생시키며 21세기에는 미국과 유럽,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경제의 잠재적 「핵」으로서 세계경제 틀 안으로 진입시킬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그러한 것은 중국인들에게 강한 희망과 자신감을 가져다주었다.중국의 개혁·개방 흐름이 등소평의 죽음에 의해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경제가 시장경제로 이행함으로써 고도성장이 이룩됐다는 사실은 매우 시사적이다.인간의 욕망을 긍정하고 경쟁원리에 의해 움직이는 시스템의 도입으로 경재발전이 가능하게 된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자본주의를 초월하는 것으로 등장한 사회주의경제 시스템이 사실은 규제의 덩어리로 발전을 저해했다는 것은 옛 소련이나 중국의 경험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로 등소평 사망직전에 일어난 북한의 황장엽 서기 망명사건은 상징적이다.주체사상의 창시자라고 하는 황서기의 망명은 김일성체제의 종언을 의미한다고 할수 있다.더욱 주목해야할 것은 북한이 경제적으로는 이미 붕괴했다는 점이다.황서기도 「사람을 굶기는데 무슨 사회주의인가」라고 지적했다.북한은 80년대말 배급제도가 기능하지않아 계획경제체제는 붕괴되고 말았다.망명자의 속출은 인민이 자기체제를 포기했음을 의미한다.「인간이 주체」라고 계속 주장해도 인민을 철저히 지도자에 복종시키고 감시하지 않을수 없는 체제에서의 경제발전은 어렵다는 것이 분명하다.그러한 북한에 경제원조를 얼마나 하더라도 그것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에 지나지않는다.북한의 연착륙설은 환상이라고 말할수 밖에 없다. 그런데 위에서 지적한 중국경제의 세계경제로의 등장은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는 동아시아경제에 거대한 충격을 주고 있다.일본을 선두로 아시아의 신흥공업경제군(NIEs),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과 경제발전이 차례로 당구와 같이 연쇄반응해온 동아시아에 있어서 중국이라는 거대한 기관차의 등장은 동아시아경제의 발전가능성을 더한층 높이는 것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세계의 투자가의 눈이 아시아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중국경제의 거대한 가능성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론이 없을 것이다.그러나 중국경제가 앞으로 순조롭게 발전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있다.중국의 지금까지의 발전이 외자 유입에 주로 의존했다는 것은 명백하다.문제는 그 발전을 보다 내실있고 영속성 있는 것으로 할수 있는가하는 점이다.이를 위해서는 중국이 국제규범을 준수하고 경쟁원리에 의해 움직이며 투명성 있는 시장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불가피하다. 그런 의미로 ASEAN 국가가 중국에 투자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시장개방을 적극적으로 권장해온 것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그것이 ASEAN 국가의 계속적인 발전을 보증하고 있다.주목하고싶은 것은 그 문제가 ASEAN이나 중국에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미국경제의 재생,일본경제의 어려움이라는 대조적인 현상도 그점에 깊이 관련돼 있다고 말할수 있다.다시말해 규제완화 등 보다 매력적인 투자환경 정비를 추진한 미국 경제가 부활한 반면 그것이 불충분하고 대응이 늦은 일본경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김영삼 대통령 정권은 출범과 함께 종래의 권위주의적인 정책운영방식에서 탈피,「국민의 자발적 참여와 능동적 창의」를 원동력으로 하는 새로운 정책운영방식을 추구할 것을 분명히 했다.그러한 아이디어는 상술한 세계적인 움직임에 대응한 것으로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한국경제의 약진은 그러한 아이디어의 실천에 의한 것이라고도 말할수 있다.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도 그 결과이다.그러나 한보철강 부정융자사건의 발생은 권위주의적 정책운영방식이 여전히 청산돼지 않은채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OECD가입에 따라 한국은 앞으로 보다 개방적이고 투명성 높은 정책운영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그것은 한국경제에 큰 고통과 마찰을 가져다 주겠지만 그러한 진통을 극복하여 한국경제는 명실상부한 선진국으로 탈바꿈할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북아 정세/예브게니 바자노프 러 외교아카데미 부원장/일 대외영향력 확대 제동/한반도 균형유지정책 계속 추진 중국 고대의 진시황제가 죽었을때 각종 희귀보물에 덮인 지하궁전과 거대한 석조전사등이 만들어졌다.살아있는 짐승과 사람까지 제물로 바쳐지기도 했다.1976년 혁명지도자 모택동이 죽었을때는 수천만 중국인들이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중국에는 모의 초상화가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었다.그러나 중국개혁의 원로 등소평은 특별한 거만도 떨지않고 조용히 역사속으로 사라졌다.거의 모든 중국인들은 울지 않았다. 등소평의 그러한 죽음은 중국의 많은 진전을 나타내는 것이다.(서방처럼) 곧바로 죽음을 알리고 당국은 장례위원회를 구성,그에게 경건한 조의를 표시했다.수천년 중국역사를 더듬어 보면 개혁주의자들은 처참한 말로를 맞았다.독살을 당하거나 능지처참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개혁주의자들을 용인하지 않는 전통은 중국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려는 많은 선각자들은 당대 많은 학대를 받아왔다.고대 그리스·로마가 그랬고 독일·프랑스·러시아·이란등 현대국가에서도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났다. 세계의 관심은 등이 사라진후 그가 추진한 개혁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첫번째 시나리오는 개혁의 중단이다.등의 개혁으로 심천 일부 해안지방의 도시들은 서방국가 도시 이상으로 성장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반체제인사들은 탄압을 받고 소수민족문제가 악화되고 있다.이런 문제들이 중국개혁에 장애물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더욱이 후계자 문제가 통치위기로 까지 이어질지 모른다.지배엘리트가 분열되고 이것이 지방 작은 도시까지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소수민족의 항거가 일부 국경에서 일어나고 있다.이것이 다시 대도시의 사회혼란으로 이어질지 모른다.1920∼1940년대 상황이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일부는 러시아에서 동지를 구할 것이고 다른 일부는 미국과 미국의 협력자 대만에 손을 뻗칠지도 모를 일이다.이렇게 되면 중국은 더이상 한반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못할 것이다.힘도 없고 한반도문제에 간여할 욕심도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등소평식 개혁이 무너질거라는 시나리오는 가능성이 없다고 본다.많은 어려운 문제가 있었음에도 중국은 이미 경제발전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일궈냈다.가까운 장래에 「아시아의 큰 용」으로 변해있을지 모른다.홍콩이 반환되면서 용의 힘은 더 커질 것이다. 중국의 이러한 힘을 느끼는 쪽은 조만간 동남아시아가 될 것이다.이와함께 북경은 세계무대에서 정치적 군사적 입지를 확대하려는 일본의 영향력에 제동을 걸 것이다.중국과 일본은 동남아시아시장에서 주요 경쟁자가 될 것이다.이같은 두번째 시나리오 아래서 중국은 북쪽(러시아)에 대해 강경한 입장에 설 것이다.지금도 엄청난 수의 중국인 정착민들이 시베리아 지역과 극동지역으로 세력을 넓히고 있다.중국은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에 대해 러시아의 영향력을 대체하려 할 것이다.이렇게 되면 워싱턴과 모스크바,도쿄는 중국의헤게모니를 견제하기 위해 자연스레 뭉칠 것이다.그러나 동맹국가내 복잡한 사정때문에 실질적인 결속력은 강하지 못할 것이다.미국­일본의 무역분쟁,러시아­일본의 영토분쟁,미국­러시아의 유럽안보분쟁 등의 문제가 있다. 중국은 이러한 시나리오 아래서는 한국이 미국의 동맹국으로 남아있는한 북한쪽에 계속 남아있을 것이다.동시에 중국은 경제적 인센티브를 동원,한국을 가능한 한 미국과 떼어놓으려 할 것이다.두번째 시나리오에 상당수 전문가가 의견을 같이 한다. 그러나 이는 「제3의 시나리오」만 못하다.세번째 시나리오는 등소평식 개혁이 계속되며 중국은 안정과 경제성장을 지속한다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은 남을 것이며 북경정부는 계속 현대화의 필요에 외교정책의 초점을 맞출 것이다.그러한 외교정책은 현실적이고 온건한 외교노선이다.이는 갈등과 대결을 피하면서 동·서방 모두에게 이로운 측면이 있다.이러한 전략의 틀내에서 중국은 한반도에 균형유지정책을 계속할 것이다.적대적인 두개의 한국을 가급적 머리를 맞대게 할것이다.북한이 만일 붕괴된다면 중국은 슬쩍 발을 떼내 현상에 순응할 수 있다.결론적으로 등의 사후에는 「제3의 시나리오」가 가장 이상적일 것으로 본다.
  • 피격 KAL기 미 희생자 2명/유족 보상금 430만불 합의

    【뉴어크(미 뉴저지주) AP 연합】 대한항공은 지난 83년 옛 소련 상공에서 격추돼 탑승객 전원이 사망한 KAL 007기 참사의 희생자인 미국인 두사람의 유족들에게 4백30만달러를 지급하기로 지난주 합의했다고 26일 유족측 변호사가 발표했다.
  • 「지식인의 망명과 체제의 행방」/기무라 히로시(해외논단)

    ◎황장엽 비서 탈출은 북한체제 격변의 예조 황장엽의 망명은 옛소련의 선례에 비추어 볼때 북한의 격변 조짐이 일 가능성이 있다고 기무라 히로시(목촌범)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교수가 24일 도쿄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주장했다.「지식인의 망명과 체제의 행방」이라는 제목의 그의 칼럼을 요약한다. 『우리는 반드시 귀국하고 말겁니다!』 1974년 말 솔제니친 부인이 모스크바공항에 마중나온 러시아 군중을 향해 외친 말이다.그녀는 이미 시민권을 박탈당해 스위스에 사실상 국외추방돼 있던 반체제작가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남편과 합류하기 위해 스스로 자녀를 데리고 조국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나는 우연히 당시 소지하고 있던 외교관여권 덕분에 그녀의 바로 옆에 서서 따라가면서 말을 걸기도 하면서 기내로 사라지는 그녀를 떠나보내는 서방측 최후의 사람이 됐었다. 당시의 소련 정세로 보아서 나는 그녀가 다시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있으리라고는 솔직히 말해 상상하지 못했었다.그러나 그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공산주의의 붕괴,냉전의 종료,소련 연방의 해체라는 생각할 수 없는 일련의 사건발생후 94년 여름 솔제니친 일가는 20년만에 러시아에 돌아왔던 것이다. 또 하나의 예.올해 1월말 나탄 샤란스키씨가 모스크바를 방문했다.샤란스키씨는 브레즈네프시대의 소련에 있어서 저명한 반체제 지식인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이스라엘의 통산장관이다.이스라엘로 돌아온 유태인중 최상급의 지위에 오른 옛소련인으로서 70명이나 되는 대규모 실업가 대표단을 이끌고 11년만에 조국에 「귀향」했다. 샤란스키 통산장관은 반체제운동의 별 사하로프 박사의 묘앞에 꽃을 바치면서 말했다.『박사는 수소폭탄의 발명자였다.그러나 그 폭탄이 결코 평화를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자유 인권옹호의 투사가 됐다.그러나 어떤 독재자라도 박사가 들이댄 「폭탄」으로부터 소비에트체제를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라고. 샤란스키씨는 모스크바 체재중 레폴도브감옥에도 들렀다.바로 20년전 이 감옥의 47호실에서 샤란스키씨는 구금돼 있었다.샤란스키씨는 시간의 경과가 불러 일으킨 변화의 격렬함을 믿을수 없는 듯 『내가 앞서 필사적으로 싸움을 해왔던 체제 그 자체가 붕괴돼 이미 존재하지 않는구나』라고 말했다. 북한의 황장엽 노동당비서는 왜 평양을 떠날 결심을 굳혔는가.자신이 지도하고 체계화에 노력한 주체사상이 당초의 생각과는 달리 독재자에 의해 인민억압의 도구로 왜곡돼 이용당하는 것에 대한 자책감,이에 따라 스스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동포에 미안하다고 하는 사명감등이 황비서의 망명동기로서 현재 가장 유력한 설인 듯하다.이같은 황비서의 의도 내지는 희망은 실현될 것인가. 황비서는 이미 74세.과연 황비서는 살아서 북한체제의 붕괴를 스스로의 눈으로 확인하는 귀향을 행할수 있을 것인가.그 보증은 어디에도 없다. 북한 체제의 존속은 대단히 많은 변수에 의해 규정되는 다원연립방정식이다.황비서가 망명한 결과로서 국내에서는 단속이 강화돼 결과적으로 북한 체제의 연명에 이바지할 가능성조차 배제할 수 없다.나라 사정이 다른 옛소련의 경우와 안이하게 비교하는 것은 금물일 것이다. 하지만 철벽의 관리를 과시하던 북한체제로부터도 황씨와 같은 고위간부의 망명이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사실 자체의 중요성은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옛소련 등의 선례에 비추어 생각하면 이는 가까운 장래에 있어 북한의 격변의 예조가 아닌가 생각된다.소련 및 동유럽제국의 최근 격변은 어떤 체제라도 미래영겁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특히 딱딱한 구조의 체제는 일단 무너지기 시작하면 중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인 붕괴에 이른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 중국식 사회주의경제 전망(등 이후 중국대륙:4)

    ◎모든 지표 낙관적 “장미빛 미래”/거시정책 자리잡아 인플레 한자리수 안정/기업개혁·지방발전 차이·인프라부족 “복병” 중국경제와 관련한 등소평의 업적은 개혁·개방정책으로 국가현대화를 달성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을뿐아니라 소련·동구 몰락후 90년대초에는 사회주의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함으로써 중국이 공산국 붕괴 도미노를 피할수 있게 했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어쨌든 등의 개혁·개방정책은 세계 최빈국중 하나이던 중국을 세계11위의 무역대국으로,세계 두번째의 외환보유국(1천억달러)이자 미국에 이은 세계 두번째의 투자대상국으로 변모시켰다.78년 개방이래 연평균 9.3%의 고속성장을 거듭하면서 국민소득(GNP)은 12배,외국자본의 직접투자는 38배나 증가하는 급성장을 이뤄냈다. 20년전 국민 절대다수를 먹이고 입히는 「온포의 실현」이 불가능했던 중국정부는 이제 물질적 풍요를 초보적으로 구가하는 소강상태에 도달했다고 자부하고 있다.2억5천만명이던 절대빈곤인구도 6천5백만명으로 줄었으며 물가수준을 고려한 실제구매력에선 GNP보다 4∼5배가량 더 높은 경제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80년대말부터 고질화됐던 인플레이션도 한자리수로 안정되는등 정부의 거시조절정책이 효과를 보고 있다. 이같은 발전추세속에서 중국공산당과 정부는 2000년의 국민소득(GNP)을 80년 수준의 4배로 삼았다.2010년에는 2000년기준의 두배의 GNP수준의 달성을 목표로 삼고 있고 96년부터 9차5개년 경제개발계획 및 2010년까지의 사회·경제발전계획을 실천해 가고 있다.현재 속도라면 목표달성은 가능할 것이란게 중국 관계자들의 낙관이다.2000년엔 1인당 GNP 1천2백달러로 1천달러대 돌파와 무역액 4천억달러 달성도 낙관되고 있다.2010년에는 3조2천억달러의 GNP규모로 미국,일본에 이어 세계 3대 경제대국으로의 부상이 중국정부의 단순한 바람만은 아니다. 연초 대외경제무역부의 오의부장은 97년도의 무역규모는 3천억달러선을 넘어설 것이라고 장담했다.사회과학원 투자연구센터도 경제전망보고서를 통해 금년도 중국의 GDP성장을 9.5%로 전망하는 등 중국경제의 계속적인 안정성장을 자신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이 등의 지시에 따라 지난 92년 공식채택한 중국특색의 사회주의시장경제가 더욱 심화되고 세계경제로의 편입이 가속화되는 중이다.또 시장경제로의 구조변화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다.경제성장방식을 효율화,집약화로 변화시키고 경제체제의 근본적인 변혁시도를 통한 산업구조고도화를 시도가 중국정부의 확고한 목표다.성장중의 중국경제에도 걸림돌은 있다.국유기업의 개혁,잘 사는 연해지역과 중서부지역의 경제차이,8억 농촌인구의 소득하락과 식량자급문제,에너지 및 사회간접자본의 부족 등이 중국경제의 발목을 잡는 복병이다. 그러나 강력한 중앙집권을 통한 균형있는 경제정책과 풍부한 노동력및 자원,축척된 기초과학기술들은 중국 경제의 미래를 낙관케 한다.2000년까지 복선철도 1천200㎞,전기화철도 4천300㎞등 6천100㎞의 철도를 신설하고 상해 포동지구개발,삼협댐 등 일련의 건설과 홍콩 귀속으로 인한 경제활성화 기대 및 개방화,세계경제로의 편입가속화 등은 중국이 21세기 아시아태평양시대의 주역이 될수 있는 가능성마저 보여주고 있다.
  • 위험스런 인­파키스탄 핵경쟁/리처드 하스(지구촌 칼럼)

    ◎분쟁땐 파멸… 관계개선 국제적 관심 절실 흔히 「다른쪽」 아시아로 불리는 서남아시아가 뉴스를 타고있다.이 지역의 주축국가이자 세계에서 인구가 두번째로 많은 인도는 러시아로부터 핵원자로 2기를 구입할 계획인데 이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공식적인 항의를 받았다.한편 파키스탄은 대통령이 총리를 해임함에 따라 새 총리가 막 선출됐다.총리 파면은 벌써 최근에만 세번째 있는 일이다.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인접한 이웃 국가이자 모두 핵무기로 무장하고 싸울수 있는 능력을 갖춘 라이벌인 인도와 파키스탄은 각각 국내적으로나 서로간에나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가장 극적이면서 또 가장 위험한 것이 이 서남아시아의 핵 상황이다.인도와 파키스탄은 그동안 세차례 서로 싸웠고 몇번이나 교전직전까지 갔으며 지금도 캐시미르 지역주변에서 심하진 않지만 분쟁을 계속하고 있다.이처럼 불안하고 확실하지 못한 평화가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재래전이 곧장 핵전으로 치달을 수도 있는 곳이다.그런 상황전개는 서남아시아 국가와 주민들에게 대파멸을 뜻하며 세계의 핵확산금지 노력을 크게 약화시킬 것이다. ○과거 미­소보다 적대적 그러한 불행한 상황을 막기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무엇보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정례적인 고위급 대화와 이웃 나라끼리라면 정상적으로 하는 교역,교육에서부터 문화,체육,여행자의 교류,그리고 합작투자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각각 독립한지 반세기가 지났으면서도 인도와 파키스탄이 예전 냉전 절정기때의 미국과 소련 사이보다도 더 못한 양자관계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진짜 걱정스럽지 않을수 없다. 좀더 체계적인 외교적 교류 또한 요망된다.두 나라가 신뢰를 구축하고 교전돌입의 위험을 감소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자 할때 이 외교적 소통은 안정을 촉진시켜준다.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으로 핫라인의 설치와 민감지역에서의 군사훈련 중지협약 등을 들수 있다. ○핫라인 설치 고려돼야 양국은 또 각국의 경제를 부강시키는 정책을 계속 도입하고 이를 실천할 필요가 있다.이들 나라가 광범위한 빈곤,높은 문맹률과 영아사망률,대규모이면서 증가일로인 인구문제에 적절히 대처하려면 경제성장이 필수적이다.그러나 이같은 경제성장은 오로지 지속적인 시장경제 개혁에서만 이뤄지며 이 개혁은 부패와의 전쟁을 의미하기도 한다. 경제개혁은 또다른 좋은 혜택을 가져다 준다.이는 양국 모두에서 민주주의를 고양시키려는 노력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파키스탄은 군부의 빈번한 국내정치 간섭,만연된 부패,종교및 부족에 따른 강한 파당심리 등으로 거의 실패한 국가의 수준에 와 있다.이곳 정치지도자들이 필요한 국내개혁을 도입할 시간과 공간의 여유를 갖고자 할 때 이 경제성장은 긴요한 것이다. 다른 바깥나라와 국제사회도 인도와 파키스탄을 도울수 있다.경제부문에서 인도는 가능한한 빨리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 합류되어져야 한다. ○핵문제 현실적 접근을 국제사회,특히 미국은 양국의 핵에 관해 보다 현실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도움을 줄수 있다.핵능력과 계획을 깨끗이 철폐하라고 이들 나라를 설득하거나 강요하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인도는 파키스탄에 대한 보장을 원하고있고 파키스탄은 인도에 대한 보장을 요구한다.이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인도는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 서명을 거부하고 있고 파키스탄은 계속적으로 중국과 핵 및 미사일 협력체제를 구축한다.미국이나 국제사회는 가능하지도 않은 철폐를 시도하는 것보단 가능한 일인 이들간 핵경쟁의 안정에 주력하는 편이 더 현명하다. 이같은 전후 사정과 함께 최근의 상황을 살펴봐야 한다.파키스탄의 새 총리 선출은 두 정부간에 대화를 시도할 기회를 주고 있다.인도의 현 정부도 선출된지 얼마되지 않은 셈이다.과거 양국 지도자의 개인적인 적대감은 양국 화해의 큰 장애물이었다.이 장애물이 없기 때문에 두 지도자가 만날 기회는 그만큼 높아졌다. 미국 또한 러시아가 인도에 2기의 원자로를 팔려는데 대한 반대를 재고해볼수 있다.이같은 판매의 수입은 러시아와 러시아 원자에너지 부서에 긴요한 자금을 제공해준다.인도는 원자로구입에서 나온 추가 전력을 늘어나는 인구의 수요에 충당할 수 있다.원자로판매와 관련된 기술은 인도의 핵개발 능력에 근본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인도는 그 정도의 기술은 이미 갖고 있다.사용후 핵연료가 인도의 핵무기 재고증가로 전용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려운 일이 아니며 이 보장과 함께 원자로 거래는 진행되어야 한다.인도와 파키스탄의 관계는 세계평화에 매우 중요하다.
  • 로미오와 줄리엣·석화·이반황제/볼쇼이 발레 대표작 안방서 본다

    ◎EBS,오늘·새달1∼2일 잇따라 선봬 EBS­TV가 옛 소련의 볼쇼이발레단 공연의 진수를 영상으로 전한다.「로미오와 줄리엣」(22일 밤12시10분),「석화」(3월1일 밤12시10분),「이반 황제」(3월2일 하오7시20분)등 볼쇼이가 자랑하는 인기 레퍼토리 세편을 잇따라 방송하는 것. 이 필름들은 러시아 발레곡의 대표 작곡가중 한사람으로 꼽히는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탄생 1백주년을 기념해 지난 91년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선보였던 공연작. 세익스피어 원작인 「로미오와 줄리엣」은 프르코피에프의 음악에 레오니드 라브로프스키가 안무를 맡아 1940년 레닌그라드 키로프극장에서 초연된 이래 전세계 발레팬의 사랑을 받아왔다.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이 몸담은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의 내한공연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졌다. 프로코피에프가 작곡하고 대본을 완성한 「석화」는 우랄산맥 지방에서 전해오는 공작석을 둘러싼 석공과 약혼녀의 사랑이야기를 그린 작품.그의 마지막 작품이기도 한 「석화」는 발레 특유의 환상적 세계를 고전적발레기법으로 최대한 살렸으며,우랄지방의 민속음악이 덧붙여져 웅장한 스케일로 펼쳐진다. 「이반 황제」는 등장인물들의 개인적 면보다는 정치적인 소재를 다룬 작품으로,유리 그리고로비치 안무로 1975년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초연한 2막짜리. 16세기 러시아 모습을 18개 장면으로 형상화했으며,볼쇼이발레 특유의 역동적인 파워를 실감할 수 있다.
  • 「등」이후 중국… 나카지마 미네오 기고(해외논단)

    ◎중 사회주의 모순 분출… 체제유지 회의적/강택민 군사력 증강·민족주의 강화 가능성 등소평이후의 중국에는 사회적 모순이 분출될 가능성이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현재의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일본의 중국전문가 나카지마 미네오 도쿄외국어대학 학장이 21일 요미우리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주장했다.그의 칼럼을 요약한다. 중국의 최고 실력자였던 등소평의 죽음은 중국의 현대사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고 있다.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해온 등은 모택동 모델의 중국사회를 변혁시킨 지도자다. 등은 3번씩이나 실각하면서도 그때마다 다시 일어났으며 모택동이 죽은후 78년에는 마침내 화국봉을 밀어내고 중국공산당내 주도권을 확보했다.등은 그후 최고 실력자로 황제와 같이 군림해왔다.하지만 그러한 등의 인치를 비판하는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으며 민주화 움직임은 1989년 6월4일 천안문사태로 발전했다.등은 천안문사건을 철저히 진압하지않은 조자양 당시 총서기를 실각시키고 강택민을 총서기에 임명했다. 등은 중국의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이때문에 중국은 등의 사망이후 정치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사회적 혼란을 피할수 있을 것인가 하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그러한 문제들은 장기적으로 큰 불안을 안고 있다.무엇보다도 지금의 개혁·개방정책이 중국민중들에게도 혜택을 주며 등사망이후에도 중국의 경제·사회가 순조롭게 발전해 나가면 그러한 불안은 크게 완화되겠지만 그렇게 된다는 보장은 없다. 중국은 현재 놀라운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있지만 많은 사회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는 「압력솥」과 같은 상황이다.천안문사건후에도 개혁·개방정책을 둘러싸고 당내 논쟁이 끊이질 않았으며 민주화운동의 불씨도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이때문에 포스트 등시대에 거대한 역사적 변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한 변동은 민주화운동을 다시 고양시키고 농민반란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폭발을 촉발시킬 가능성도 있으며 옛소련과 같이 등이후에 정치적 실권을 쥔 지도자에 의한 위로부터의 「반혁명」이 될 가능성도 있다.그러한 두가지현상이 연계되어 일어나며 큰 혼란없이 공산당독재체제가 조용히 붕괴될지도 모른다.그럴 경우 대만과 홍콩으로부터 불어온 「남풍」의 사회적 침투력도 무시할수 없을 것이다. 최근의 중국 권력중심부에서는 등이후의 혼란에 대비,견고한 위기관리체제를 구축하기위해 등과 거리를 두는 일종의 「비등소평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94년의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강택민 총서기의 측근인 황국 당시 상해시장 등 이른바 상해인맥이 당중앙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도 그러한 흐름의 반영이었다. 강택민 주석은 지금 당(총서기),정(국가주석),군(국가군사위원회주석)의 3권을 장악하고 있지만 등에 의해 현재의 지위에 올랐음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그렇기 때문에 강택민은 등의 영향력이 쇠퇴하는 것에 비해 등의 그늘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지만 그러한 강의 기반강화 움직임에 보수파 원로들과 군지도자들이 어떻게 대응할지도 주목거리다.앞으로 수주에서 수개월사이에 교석 등 최고 지도자들의 권력투쟁이 격화되면 군의 움직임도 주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는 역사적 흐름인 탈사회주의 조류에 의해 등이 주도한 개혁·개방정책이 가속화되고 있다.그렇기 때문에 등사망후의 중국은 장기적으로 사회주의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이며 21세기에는 「일국다정부」 형태의 중국으로 재편될지도 모른다.오는 7월에 반환되는 홍콩의 운명,대만인들의 정체성 성숙,소수민족의 반란움직임 등이 그러한 전망의 가부를 결정할 중대한 문제다. 중국이 그러한 불확실성의 과정에 들어서면 중국은 군사력을 증강하며 대외적으로 대중화 민족주의를 강화할 것으로 보인다.그렇게 될경우 미국과 중국,일본과 중국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일 도쿄외국어대 학장/정리=강석진 도쿄특파원〉
  • 대우↔GM/해외격돌 2라운드

    ◎FSO 이어 우크라 국영 차회사 인수 대결/세계경영 경쟁… 「20년 동지」서 라이벌로 20년동안 동반자관계였던 대우자동차와 세계 최대의 자동차회사인 미국 제너럴모터스(GM)가 92년 결별한 뒤 세계 곳곳에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해외생산 1백50만대에 세계 10대자동차회사를 향해 글로벌 경영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대우자동차에게 한때 동지였던 GM은 이젠 최대의 적이다. GM과 대우는 다같이 세계경영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세계 자동차판매 1위사로 최근 몇년 사이에 미국 내수판매가 크게 늘어난 GM은 여세를 몰아 세계 각국에 현지 생산과 판매체제 구축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세계경영을 그룹 이념으로 걸고 5대양 6대주로 나가고 있는 대우와 맞부딪칠수 밖에 없다. 최근 대우와 GM이 부딪치고 있는 곳은 우크라이나.연산 10만대 능력의 우크라이나 국영자동차회사인 오토자즈의 인수협상에 GM이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대우의 인수가 불투명해지고 있다.우크라이나는 대우가 우즈베키스탄에 이어 구 소련권 진출의 교두보로 삼고 있는 지역.이 공장인수건이 성사되느냐가 러시아 진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폴란드의 국영자동차공장인 FSO를 인수할 때도 대우와 GM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인수 경쟁에 나섰다.대우자동차가 승리했지만 GM은 폴란드 남부 글리비체시에 대규모 공장을 짓는 등 중유럽 최대의 시장인 폴란드에서 대우와 한판 승부를 준비하고 있다.인도 브라질 영국 등 세계 각국에서도 대우와 GM은 판매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양보없는 경쟁을 벌이고 있다. 대우자동차는 신진자동차 시절인 72년부터 GM과 협력체제를 유지해 왔다.대우는 새한자동차때인 78년 경영에 참여,83년부터 대우자동차로 이름을 바꾸고 GM과 기술제휴로 르망을 비롯한 많은 차종을 합작 생산했었다.외형에서 GM에 크게 못미치는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92년 10월 GM과 결별한 뒤 2백50만대 생산체제를 목표로 놀라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대우자동차는 세계시장에서 GM과 당당히 어깨를 겨루고 있다.
  • 등소평이후 중국의 진로/이민형 산업연구원 책임연구원(전문가기고)

    ◎선택의 기로에 선 강택민 모택동의 사망이 문화대혁명의 종식과 더불어 개혁개방이라는 대격변을 가져다 주었듯 등소평의 사망 역시 중국에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예고할 것인가? 세계의 이목이 온통 중국에 집중되고 있다.등소평의 사망은 결코 갑작스러운 것이 아닌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수년전부터 그가 언제 사망할 것인가는 세계 최대 관심사중의 하나였으며 그의 사후 중국 진로에 관한 연구보고서도 국내를 포함하여 세계 도처에서 이미 상당수 작성·발표되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망에 여전히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직설적으로 이야기 하면 세계,특히 서방국가들의 중국 경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사실 지난 20여년간 중국이 달성하였던 연평균 10%라는 경제발전 속도는 세계를 놀라게 하였으며 중국의 이러한 폭발적 잠재력에 서방 국가들은 이미 충분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 ○사회주의 모순극복 과제 지금까지 발표된 등 사후 시나리오들은 대체로 두가지의 상반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상당수는 중국 경제가 지금과 같이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21세기 중반에는 최대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것을 전망하고 있다.비록 소수지만 또 다른 시나리오는 중국이 소련과 동구처럼 결국 사회주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한 채 그의 사망을 계기로 핵분열될 것을 예측하고 있다. 중국 현대사에서 등소평이 남긴 업적에 대해서는 더이상 재론의 여지가 없다.그러나 등소평시대에 추진되었던 개혁개방은 그 성과가 화려한 만큼 그 이면의 골도 깊게 나타나고 있다.대부문의 모순과 갈등은 아이로니컬하게도 등소평 유산의 최대 걸작품이라고 하는 「사회주의 시장경제」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경제는 시장경제를 지향하되 정치는 공산닥 일당독재를 고수한다는 원칙은 의사 결정의 분권화를 전제로 하는 시장경제의 발전에 한계로 작용하고 있다.또한 순차적,선별적으로 진행되었던 개혁개방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간의 알력은 물론 지역간 경제격차를 갈수록 확대시켜 급기야는 지역 이기주의와 연계된 상해방,북경방,광동방,산동방 등과 같은 패거리 정치를 형성시켰다.사회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이원적 경제구조는 개혁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농민과 국유기업 종사자,공무원,군인들의 생활여건을 갈수록 악화시키고 있다.인치제도하에서 불명확한 권력의 한계는 당·정·관료들을 부패로 유혹하고 있으며 이데올로기를 상실한 엘리트들의 배김주의 사상 팽배는 부정부패를 더욱 확산시키고 있다.지역적,자연적 조건이 개혁개방에 불리하였던 소수 민족들의 상대적 빈곤과 소외는 종교적 요인과 맞물려 서장,내몽고,신강 지역에서의 분리 움직임을 가속화시키고 있다.그리고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하는 것은 이러한 모순과 갈등들이 문화대혁명때 절대 빈곤이 모택동의 카리스마에 의해 은폐되었듯 등소평 생전에 제대로 현실 정치에 반영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강 주석 해법에 세계관심 강택민이 직면하고 있는 이러한 모순과 갈등들은 화국봉이 물려받은 것들과 비교하여 결코 가볍지 않다.이제 등소평 시대에 축적되었던 모순을 타파하고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서 중국과 강택민은 또 한번 선택을 하여야 한다.과거 화국봉처럼모택동 사상 일변도의 유훈 통치를 고집하다가 절대 빈곤 타파라는 시대적 사명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권좌에서 물러나고 말것인가 아니면 이등휘나 등소평처럼 중국의 현실적 바탕위에서 새로운 방향과 대안을 제시하여 제2의 도약을 맞이할 것인가.마침 강택민과 중국은 운이 좋게도 고성장,저물가라는 안정된 경제 환경하에서 등소평 사망을 맞이함으로써 상당한 여유를 확보하였다.시장경제에 걸맞게 정치체제를 개혁하여 권력 창출의 메카니즘을 확립하여야 함은 물론 지역간,계층간 내부 갈등을 해소할 대안을 새롭게 제시해야만 하는 선택의 순간이 왔다.강택민은 제2이 화국봉이 될 것인가? 제2의 이등휘가 될 것인가? 세계는 기대반 우려반의 모순된 심리를 갖고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 등소평 사망­중 정부의 치적 평가

    ◎대륙 통일·중국적 사회주의 이론 확립/「모 절대무오류」 비판… 실사구시사상 체계화/일국양제 제시… 홍콩주권반환 결정적 기여 【북경 연합】 중국당국은 당·전국인민대표대회(전대회)·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등이 공동으로 발표한 등소평 사망발표에 관한 서한에서 등소평의 일대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등소평 동지는 초기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1차 국·공내전기간중 처음으로 북서 중국에서 혁명군의 정치공작임무를 맡았다. 등은 이어 국민당과의 무장투쟁을 결정한 1927년8월9일의 무한긴급회의에 참석한 후 홍군의 제7군과 제8군을 조직,무장봉기에 본격돌입했다. ○모택동과 대장정 참가 그는 이후 중앙혁명기지에서 당시의 좌파로부터 모택동노선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직위해제됐으나 홍군 총정치부에 복직한 후 장정에 참가했다.등은 장정기간중 중국공산당사에 중대한 전환점을 맞은 존의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항일투쟁에서 주로 북중국에서 홍군의 여러 요직을 거친후 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7전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됐다.중·일전쟁기간중 그는 야전군의 정치위원 등을 맡으면서 전투를 내부지역에서 외부로 전환하는 모택동의 전략적 결정을 혁명적으로 수행했다. 그는 이어 총전선위원회의 서기겸 당 동부지부 제1서기로 양자강 도강작전 등에서 승리,남경·상해 등 남중국의 여러 지역을 해방시켜 국민당정권을 붕괴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이어 남서중국으로 진출,티베트 등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방,중국대륙통일과 새 중국건설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등소평은 대륙통일이후 공산당 중앙위 남서지부 제1서기를 맡아 이 지역의 정치권력·사회개혁과 경제회복을 주도했다. ○56년 당총서기에 선출 곧 이어 북경의 중앙지도부에 진출한 그는 1954년 당 중앙위 제1서기를 거쳐 1년후인 1955년 중앙위 정치국원으로 승진했다. 그는 1956년 8전대회에서 당헌 개정보고를 하고 공산당의 통치능력을 강화하는 작업을 선도했다. 8중전회 1차회의에서 당 정치국 상임위원 겸 중앙위 총서기에 선출된 등소평은 모택동과 함께 중국 집단지도체제의 핵심멤버대열에 합류했다. 등소평은 10여년동안 당 총서기로 재직하면서 서기처를 관장,▲사회주의체제 확립과 사회주의건설 ▲중국실정에 맞는 사회주의자의 길을 증명하고 ▲경험을 종합,정책을 조정하고 난관을 극복하는데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이어 소련 공산당과의 협상을 위해 수차례 대표단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방문,중국 공산당의 자주원칙을 확고히 지키면서 당과 당관계에서 일체의 불공평에 반대했다. ○문혁중 실각·73년 복권 문화혁명기간중 그는 부당하게 비판을 받아 모든 공직에서 축출되는 박해를 받았다. 지난 73년 복권된 등은 2년후인 75년 당 중앙위 부주석,국무원 부총리,중앙군사위 부주석,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을 겸직,당·정·군의 일상업무를 관장했다. 등소평은 당시 중국이 처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정력적인 조정노력을 기울이면서 4인방과 투쟁을 벌였다. 등의 이같은 조정노력과 투쟁은 당간부와 일반인민의 열망을 반영하는 것으로 당의 올바른 지도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등의 노력은 전국적으로 지지를 받아 단기간에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다.그는 다시 부당하게 모든 공직을 박탈당하는 수난을 당했으나 당내에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굳혀 4인방을 타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등소평은 4인방을 타도하고 문화혁명이 끝난 후 당원과 인민의 긴박한 요구에 따라 모든 공직을 다시 맡았다.당시 중국은 문화혁명의 후유증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졌고 이같은 대재앙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요구됐고 역사적인 경험과 교훈의 집대성이 필요했다.중국은 국제정세의 진전에 따라 사회주의 발전전략을 재검토하고 미래발전전략의 새로운 청사진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등소평은 당과 인민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그는 무엇보다도 당 사상과 노선을 바른 궤도위에 올려놓음으로써 키를 제대로 잡았다. ○4인방 타도계기 마련 그는 실사구시가 모택동사상의 핵심이라고 강조하면서 『모택동이 내린 결정은 무엇이든지 옳고 모가 시달한 지침은 반드시 고수한다』는 이른바 2개의 절대무오류이론에 반대했다.등은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에 대한 토론을 지지하고 마음을 해방시키고 실사구시의 사상과 정치노선을 재확인했다.잘못된 사상과 정치노선의 수정은 11기 3중전회의 지도적인 지침이 됐다. 이 회의는 새로운 중국건국이후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을 이루면서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현대화건설의 새시대 도래를 가져왔다. 등소평이 제2기 중앙집단지도체제의 핵심이 된 것은 바로 이 회의이후였다. 이 새로운 시대에 등소평동지는 다른 집단지도부 멤버와 함께 당과 국가의 장래와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두가지 역사적인 기여를 했다. 그 하나는 중국건국이후 모든 역사적 경험을 종합,당을 이끌면서 문화혁명의 과오를 시정하고 모택동사상을 과학적으로 이해,체계화시킨 점이다. 둘째는 중국적 특색을 가진 사회주의건설이론을 제시,발전시킨 점이다.사회주의 초기단계에 「1개 중심,2개 기본축」이란 노선을 당의 방침으로 공식화하고 경제·정치·외교·교육·고학기술·문화·군사·통일문제·당건설 등 전반적인 분야에 대한 당의 원칙과 정책을 확정,개혁과 개방을 통해 사회주의 현대화발전의 성공을 위한 새로운 방안을 발전시켰다. 등소평은 통일을 위해 일국양제 이론을 제시,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오는 7월 홍콩주권을 반환받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대만과의 통일문제도 이 원칙에 따라 결국 해결돼 완전한 조국통일이 완성될 것이다. 중국적 특색을 가진 사회주의이론은 국제정세변화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한데서 비롯됐고 이는 미국과 일본·옛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인접국 및 제3세계와의 우호관계를 발전시켜 중국이 현대화에 주력할 수 있는 국제적인 여건을 조성했다. ○종신제 반대·공직 은퇴 등소평은 또 13전대회에서 은퇴를 선언하고 종신제폐지를 주창함으로써 중국의 집단지도체제를 제2세대에서 3세대로 세대교체의 길을 열었다. 등은 생애 마지막 공식활동으로 지난 92년 심천을 포함한 남부지방을 방문,남순강화를 통해 당의 새로운 기본노선을 총정리했다.
  • 윌리엄 오버홀트 미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이즈 기고­요약(해외논단)

    ◎중국 등 사후도 안정견지/강택민 등 3세대 지도자들 합의통치 예상 등소평 사망후 중국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등 사망전에 발표되었지만 권위있는 「포린어페어즈」에 게재된 윌리엄 오버홀트의 「등 이후의 중국」을 소개한다.「중국의 부상:경제개혁이 어떻게 새 슈퍼파워를 창조했는가」란 책을 쓴 저자는 아주 낙관적인 전망을 흥미있게 전개하고 있다. 중국 권력의 후계는 4가지 측면을 갖는다.누가 최고지도자가 될 것인가,어떤 세대가 주요 권력을 좌지우지할 것인가,정부는 어떤 모습으로 짜여지고 정책은 어디를 지향하는가.특히 누가 최고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는 예측하기 어려운 문제이나 누가 되든 모택동이나 등소평 같은 위치에 오르기는 좀체 어려울 것이다.후계 예상 지도자들의 자질이 뒤져서가 아니라 중국의 구조가 변하기 때문에 그렇다.2차대전은 루스벨트,트루먼,아이젠하워,처칠,드골 등을 차례로 배출했다.마찬가지로 혁명의 모진 시련 속에서만 모나 등과 비슷한 그릇의 지도자가 나온다고 할 수 있다. 등사후 중국은 다수 지도자들에 의해 다스려질 것이며 정책도 한 개인의 취향보다는 권력엘리트들의 광범위한 지지와 합의에 달려있게 될 것이다.새 지도자 세대는 「불멸의」 선배지도자들보다 이념적으로 아주 모호하다.강택민,이붕,주용기 등 이른바 3세대 지도자들은 대개 소련 스타일의 전기엔지니어들로 이뤄졌다.그러나 많은 기관에서 좀더 전문관료적이고 시장체제 지향적이며 정치적으로 더 관대하며 서구지향적인 40대들이 세력을 떨치고 있다.더 빠른 경제발달이나 더 무난한 대외관계를 원하되 이념적,민족적 슬로건의 강도는 수그러들기를 바랄때는 이 전통적인 3세대를 지지할 것이며 동시에 한층 빠르게 무게중심이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4세대로 옮겨질 것이다. 20년전 미국은 박정희 대통령이 죽자 한국이 어떻게 될까 막막하게 생각했다.박대통령 등장 이전에 한국을 휩쓸었던 혼란과 이념적 양극화가 재발할지 모른다고 거의 모든 관심있는 미국인들은 걱정했다.그러나 최고 자리를 차지하려는 무서운 투쟁에도 불구하고 박대통령의 경제적,외교적방향은 결코 도전받지 않았다.장개석 사후의 대만,이광요 총리 퇴진후의 싱가포르,프렘 틴술라논다 후의 태국도 마찬가지였다.박대통령 아래서 한국인들은 경제발전 일념의 권위적 정치와 수출주도 시장경제의 마술적 결합을 발견하였고 점차 기아에 대한 공포,전쟁의 불길한 조짐,외국에 대한 수치감이 씻은듯 사라져갔다. 영국지배의 홍콩을 예외로 하고 아시아의 대도약들은 초기엔 위대한 지도자에게 매여진채 진행되지만 그후엔 합의에 의해 계속된다.그리고 모든 경우 이 합의는 독재적 통치의 완화를 가져왔다.이는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와 상이한 패턴이다.아시아에서도 인도와 필리핀처럼 성공의 정도가 근본적 합의를 이끌어낼 만큼 충분하지 못한 예도 있지만 중국에서는 경제발전의 중요성에 대한 전체적 합의는 결국 정치면의 진보를 유도할 것이다. 어떤 정책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냐에 관해 중국은 광범위한 합의가 이뤄져 있다.경제발전에 압도적인 우선순위가 주어져 있고 이와 연관된 시장체제로의 점진적 이동도 핵심적으로 중요시된다.최고위층 50명 가운데 국가가 농장을 다시 소유해야 한다든가 폐쇄경제로 되돌아가자든가 옛 소련처럼 국영기업 전체를 정부가 보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냉전종식후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마치 한국과 대만 국민들이 지난 80년대 중반까지 그랬듯이 경제 우선정책은 올바른 것이며 정치적 자유화는 느려도 괜찮다는 견해를 받아들이고 있다.지도층이 경제를 망치면 모르지만 이같은 컨센서스는 국민 대다수가 식량,주거 및 자녀의 건강 등을 당연한 권리로 여기게 되기까지의 장래 1,2세대동안 유효할 것으로 보인다.그런뒤 한국과 대만처럼 정치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질 것이다. 중국이 지금처럼 급속하게 발전하다 보면 어느날엔가 용기있는 반정부 인사들이 미래를 안내할 수도 있다.그러나 이는 등 사망 직후에 올 물결은 아니다.중국인들의 불만은 그간 점점 더 가시화되어 왔지만 등 사후의 중국은 지난 200년간 그 어느때보다 통일되고,안정되며,안전한 모습을 견지할 것이다.〈정리=김재영 워싱턴 특파원〉
  • 「실리적 유대」 지속할 듯/북­중 관계

    ◎중­영향력 유지… 대서방 카드 활용/북­체제 안정 등 위해 의존 불가피 등소평의 사망은 북한으로 볼때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국가의 변화이다.그동안 북한에 있어서 중국은 최대교역국이자 사회주의 형제국으로서 혈맹관계를 유지해 왔다.그러나 중국은 지난 92년 한국과 수교이후 북한에 대해 정치·안보차원의 영향력은 계속 유지해 왔으나 경제적으로는 남북 등거리 외교를 펼치는 등 이중성을 보여왔다. 김일성 사망에 이어 등의 사망으로 이제 북·중 관계는 혈맹관계의 혁명1세대가 퇴조하고 실리적인 국가간의 새로운 유대관계가 시작되리라는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그러나 그간의 북·중 관계가 급격히 소원해지는 방향으로 변화하리라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북·중 관계를 결정할 요소는 북한에 달려있다기 보다는 중국당국이 북한의 필요성과 김정일체제의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지금까지 중국은 북한이 붕괴되거나 체제 위기에 빠지기를 원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식량과 생필품 등을 북한에 지원하고 있다.중국은 지난해 북한에 대해 향후 5년간 매년 곡물 50만t과 석유 130만t,석탄 250만t을 제공하기로 비밀리에 약속했다.조건도 이 가운데 절반은 무상지원이고 나머지 3분의 1은 국제가격으로 지불하는 등 북한에 아주 유리하게 돼있다. 중국이 북한에 대해 계속해서 지원을 하는 이유는 북한의 안정은 바로 중국의 대서방카드에 있어서의 영향력과 직결된다는 판단 때문이다.중국은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확보함으로써 한국과 미국,일본 등에 대한 카드로 활용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 역시 소련 등 동구권 공산국가들의 몰락 이후 체제유지,안보 및 경제난국 타개를 위해 중국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다.현재로서 북한은 등 이후,중국과의 정치·외교·군사·경제적 관계에 미칠 파장을 최소화하려 할 것으로 여겨진다.동시에 중·장기적으로는 중국에 대한 의존관계에서 벗어날 것에 대비,미국과 일본에 대한 과감한 접근을 시도할 가능성도 크다.
  • 등소평 사망­중 이끌 5인의 실력자

    중국을 현대화한 카리스마적 지도자 등소평이 사망함에 따라 등없는 중국의 미래에 세계적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강택민 국가주석을 비롯한 중국지도자들은 등과 같은 지도력과 카리스마적 권위가 없기 때문에 잠정적으로 강을 중심으로한 집단지도체제가 유지되며 권력투쟁의 양상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등이후의 정치역학 구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실력자들을 알아본다. ◎강택민/개방정책 지휘한 등의 적자/상해·기술관료 출신… 추진·포용력 돋보여/대중적 카리스마 부족… 군부기반도 취약 「강철 미소」.북경외교가에서 강택민을 평하는 말이다.부드럽고 여유있게 보이는 이면에 치밀하고 끈질긴 추진력을 평하는 말이다.각 부문을 통괄하고 무리없이 이끄는 포용력은 등소평도 크게 평가했다고 한다.문제를 파악하고 역할을 분담하는 지도력도 그의 장점으로 꼽힌다.현재와 같은 중국의 집단지도체제에선 강과 같은 적격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다른 지도자들의 입지를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 점진적으로 지도력을 강화해 나가고있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다. 강은 명문대(상해 교동대)를 졸업한 전형적인 기술관료(테크노크래트)다.지난 95년 한국방문때 삼성전자 등을 둘러볼때 전문지식과 식견으로 주위를 놀라게 할 정도다.그러나 특유의 인화력과 포용력으로 조정과 막후 교섭등 정치력이 돋보인다는 평이다.지난 89년 천안문사건으로 전국이 혼란에 빠졌을때 상해서기로서 유혈사태를 피하면서도 시위대를 적절히 제압하는 「성과」를 거두어 등소평의 점수를 얻었다.그는 강소성의 비교적 넉넉한 학자집안의 자제다.그가 영어·러시아어 등 외국어에 능통하고 서예와 그림,중국전통악기 및 피아노 다루기 등에도 조예가 깊은 것은 그같은 집안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이붕에 비길수 없지만 그의 양아버지인 숙부가 공산당원간부로서 이선념·장애평·진의 등 신4군 수뇌들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이같은 출신배경도 그의 능력과 함께 출세의 밑천이 됐다.인민해방군의 거목인 이선념은 생전 그를 적극 지원했었다.강택민은 상해시 당위원회 부서기·서기·시장 등을 거치면서 중앙의 인정을 받았다.상해가 권력의 기반일뿐 아니라 출세의 발판이고 그의 고향도 넓게 범상해권에 속하는 강소성이다.상해의 식품공장과 비누공장에서 기술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뒤 기계공업부와 전자공업부 부장 등으로 기술관료로서도 엘리트코스를 거쳤다. 그의 뒤에는 상해파벌의 대부격인 왕도극이 후견인 역할을 해왔다.오방국·황국·서광적 등이 다 그와 정치적 운명을 같이하는 소위 「상해방」이다.그는 증경홍 당중앙판공실 주임을 정치국으로 끌어올리려는 등 계속 상해출신의 진용을 강화하고 있다.94년 14기4중던회 때 상해시장 황국과 당시 당서기 오방국을 정치국원으로 진입시키는 등 주위를 두텁게 하고 있다.등소평에 의해 뽑혀 올려왔지만 지난 8년동안의 최고지도자로서의 입지 강화해 모택동에 의해 선택된 화국봉처럼 쉽사리 뽑혀나갈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다. 그러나 국가지도자로서 카리스마나 구체적인 치적이 없고 취약한 군부의 지지기반 등이 그의 아픈 곳이다. ◎이붕/보수파 대변 태자당의 리더/거미줄처럼 깔려있는 관료인맥이 강점/천안문사태 강경진압 지휘… 대중반감 커 이붕 국무원총리는 지난 8년여동안 강택민 총서기 겸 국가주석과 쌍벽을 이루며 중국을 이끌어 오고 있다.이미 79년 국무원 전력공업부 부부장으로 중앙에 진출한뒤 국무원 부총리(83년),중앙위원 겸 정치국위원 등을 거친 기술관료로서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중앙위원이나 정치국원도 강택민보다 먼저 올랐다.제3세대 기술관료들의 본산인 소련유학파의 수장격으로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관료인맥의 대부격이다. 87년이후 10년 가까운 총리직을 통해 각 지방에 자신의 인맥을 상당히 확보해왔다.정부를 통괄하는 국무원 판공실주임 라간 등도 그의 수하다.최근 그는 지난 95년 북경시의 진희동·왕보삼사건 등으로 곤경에 몰리는 등 강택민의 상해파에게 밀리는 듯 위축된 모습이다.그러나 그의 경력과 배경은 앞으로 전개될 권력투쟁에서 강점으로 꼽힌다. 그는 중국 공산혁명 제1세대의 적자로 비유되는 소위 로열패밀리의 성원이다.아버니 이석훈은 장개석 국민당군에게 처형된 「혁명열사」고 어머니 조군도도 열렬한 핵심당원이었다.그의 외가는 혁명1세대의 핵심성원이다.고아가 된 그는 혁명1세대들에게 「우리들의 아이」로 키워졌고 특히 주은래와 등영초의 양자로 성장했다.진운은 사망했지만 당원로 팽진·등력군 등은 그의 배경이 되고 있다.또 중국 정·관·군의 주류로 건재한 로열패밀리출신의 「태자당」들의 구심점이란게 무엇보다 그의 강점이다.이같은 배경은 그의 생각과 행동을 보수적인 성향을 갖게 한다. 이붕은 그러나 지난 89년 천안문사건때의 강경진압 주도자라는 부담을 지게하고 있다.진압의 총지휘자인 등소평이 사라진 마당에 천안문의 부담은 더할 것만은 분명하다.이붕은 연임제한규정에 묶여 오는 98년초 총리직에서 내려와야 한다.아직 그에게 마땅한 자리는 없는 듯하다.강택민·오방국·황국 등을 주축으로한 상해파가 계속 북진을 거듭하고 있지만 그의 입지가 비관적인 것은 아니다.시장개방정책과 국유기업개혁 등 경제체제개혁이 심화돼 부작용이 높아질수록 그의 발언권도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중국의 방대한 관료체계와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상층부 인사들과의 인적관계,총리 등 당·정 지도자로서의 엘리트코스 등은 그가 1인자는 될 수 없어도 영원한 2인자,견제세력으로의 위치를 지키게 할 것으로 보인다. ◎교석/온건·합리… 서열3위 중도파/개혁·보수파 조정역… 전면 나서진 않을듯 올해 74세의 교석은 당 공식서열 3위로 국회의장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맡고 있다.절강성 출신으로 대학시절(상해 동제대) 상해학생운동의 총지도자였다.당조직부와 정법부문에서 오래 근무해왔다.공안부 및 검찰·감찰업무를 총괄하는 정법위원회 서기 임건신,부정부패처벌 등을 총괄하는 기술검사위원회 서기 위건항 등이 모두 그의 직계로 꼽힌다. 천안문사건 당시 강경진압에 기권의사를 표시하는 등 온건하고 합리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전인대 상무위원장직을 맡은 이후 전기운부위원장의 지지 아래 전인대의 정부에 대한 감독·비판역할을 강화하고 있다.또 법률정비 및 법치제도 완비추세 속에 각종 법률제정 등을 주도하며 보이지 않게 중국사회변화를 주도하고 있다.강택민 서기의 선배격이며 당조직 부부장 때는 현재 중국지도부의 거의 대부분을 발탁,관장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발이 넓다.빠른 판단력에 기분과 의사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 성격은 그의 입지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결정적인 순간 그의 동의는 더욱 무게를 갖는다.그러나 개인적으로 최고지도자의 자리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 그의 주위사람의 이야기다.사실상 실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란 것이다.한때 「강락석출(강택민은 떨어지고 교석이 등장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일반의 인정을 받고 있다.「불편불기,심장불로」로 요약되는 그의 조심성과 균형 있는 처신은 전환기를 맞아 정치적 힘을 배가시킬 것으로 보인다.중앙대의연락부 부장,중앙당교 교장 등 당·정 핵심요직을 두루 거쳐 넓은 인맥도 강점이다.또 최근 해외나들이 등 국회외교를 보여 주목받기도 했다.실질적이고 유연한 사고가 경제개혁·개방에 이어 정치적 개혁의 바람을 주도할지 그의 역할이 주목되고 있다. ◎조자양/개방의 전도사… 대중적 인기/천안문사태로 실각… 세력잃어 재기 의문 소년 홍군병사 출신으로 총서기에 올랐다가 「급진」자유주의적 견해 때문에 권좌에서 추락한 올 79세의 조자양은 개인적인 권력기반보다는 중국 자유주의사조의 부침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그의 입지변화의 귀추가 주목된다.89년 천안문사건 당시 천안문광장에서 학생과 얼굴을 맞대며 설득을 시도하던 그의 실각도 8년여가 되지만 개혁·개방정책의 주도자로서의 그의 명성과 성취는 기존지도자들을 위축되게 한다.경제성장,개혁·개방의 전도사란 말은 늘 그의 성공을 수식하며 따라다니는 말이다. 그만큼 그는 지금도 요주의인물의 하나로 감시받고 있다는 것이 북경외교가의 이야기다.이미 정치의 꿈은 버렸다고 공언하고 있지만 그의 복귀가 현정권 자체에 위협시되고 있는 것이다.그는 성장시절 빈곤에 찌든 사천성에 빈곤추방을 시작해 대성공을 거두었다.「곡식 먹고 싶거든 조자양에게로 가라」는 이야기가 회자될 정도로 그의 경제개혁은 성공을 거두었다.그는 중앙무대에서도 혁명세대와 혁명후 전문기술관료 사이의 가교역할을 하며 입지를 다져왔었다.그는 1932년 13살의 나이에 중국혁명에 참가한 소년병 출신이다.양상곤의 다음세대인 2.5세대로 평가된다.80년대 개혁·보수의 힘겨루기 속에 급진적 정치·경제개혁을 추진하다가 천안문사태로 「동란을 지지하고 당을 분열시켰다」며 정치적 매장을 당해야 했다. 그는 지방의 자율성과 중앙권력의 지방이양을 강조,지금까지도 지방세력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다.특히 80년대 호요방에 의해 형성된 기술관료층이 현집권세력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복귀를 두려워하는 현정권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그러나 세력기반이 뿔뿔이 흩어져 재기는 의문시된다. ◎양상곤/군부 영향력… 킹 메이커 노려/「천안문」 강경진압 주역… 나이도 너무 많아 양상곤이야 말로 등소평없는 중국에서 당·정·군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원로다.그는 인민해방군의 창설자의 한명이자 중국공산당의 원로며 전임 국가주석겸 권력의 핵인 당 중앙판공실 주임을 20년가까이나 맡았다.실권은 없지만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즉 중국국내의권력투쟁이나 분쟁이 가열되고 문제해결이 어려워질 경우 그의 발언권과 선택이 상당한 무게를 갖는다는 점에서 그의 향배는 앞으로의 주요 변수로 꼽히고 있다. 올해로 91살이지만 쉬지않는 지방시찰 등으로 정력적인 활동으로 건강을 과시하고 있다.그는 95년 광동성,96년 동북3성을 순회한데 이어 올해초에도 주해와 심천 등을 시찰하고 개혁개방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중국건립 당시 팽덕회가 지휘하던 제3군의 정치위원이었다.양상곤은 지난 93년10월 정치 연소화란 구실로 권좌에서 밀려났다.실은 그와 그의 이복동생 양백빙의 군에 대한 장악력등은 강택민정권의 가장 큰 위협세력이 된다고 판단한 등소평의 기습으로 군의 실세였던 양백빙과 함께 실권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다. 그 역시 이붕처럼 89년 천안문사건때 「손에 피를 묻힌」강경진압자중 대표인물이다.부담을 벗어버리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천안문사건의 강경진압주장과는 달리 그는 비교적 유연한 사고와 실용주의적 노선이 지지자로 평가된다.나이 때문에 권력의 전면에 나설 가능성은 없지만 유사시 「킹메이커」는 될 수 있다는 해석이다.문화혁명때 주자파로 몰려 66년부터 13년동안 소련간첩 혐의를 뒤집어쓴채 감옥생활을 한 쓰라린 과거도 있다.등소평과는 고향도 갖고 깊은 친분을 갖고 있다.〈북경=이석우 특파원〉
  • 150㎝ 단구로 버틴 「개혁세월」 73년/등소평이 걸어온 길

    ◎20세 파리유학때 중 공산당 유럽지부 창설 “혁명 1세대”/33년 첫 좌절후 3전4기… 78년 개방기치로 전권장악/사회주의 몰락 국제풍파속 말년엔 체제독려 지방순회 신장 150㎝정도의 땅딸막한 등소평은 외무부터가 오뚝이 같았다.부도옹이라는 그이 별명은 세력다툼의 와중에서 쓰러졌다가도 매번 다시 오뚝 일어섰울 뿐 아니라 마침내는 모택동 사후의 중국을 한손에 틀어쥔 탁월한 정치력에 대한 경탄을 담고 있다. 실용주의노선으로 12억 중국인민을 배고픔에서 해방시키고 최고 지도자이면서도 최고직책을 가져보지 않은채 중국을 15년 넘게 통치해온 등소평.하지만 그 역시 같은 세대의 거의모든 중국지도층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서사시적 삶을 살아왔다. ○맏아들로 본명 등희현 1904년8월22일 사천성 광안현에서 비교적 부유한 불교도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본명은 등희현.광안중학시절 그의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고 성격은 온순 참착했다.겉으로는 매우 산박했으나 「마음은 겨자처럼 맵다」는 평을 들을 만큼 결단력에 냉혹성까지 갖추며 자라났다.16세 되던 20년 10월 은등 고학생으로 프랑스에 유학간후 24년에는 주은래·이입삼·조세염 등과 파리에서 주국공산단 유럽지부를 창설함으로써 일찍부터 혁명에 가담했다.이 시절 르노자동차회사의 조립공으로부터 기차화부,식당보이 등 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스런 시절을 보냈다.뒷날 어떠한 환경속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이때 길러졌다고 한다.그는 당면에 따라 26년초 파리를 떠나 모스크바로 향했다.여기서 중국인만을 대상으로 공산주의학습을 시키던 중산대학에 들어가 체계적으로 공산주의이론을 학습하고 군사훈련까지 받은뒤 그해 연말 귀국했다. 귀국후 그는 곧바로 서안의 중산군사학교에 배치돼 이 곳에서 정치처장을 맡으면서부터 본격적인 중국혁명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이듬해인 27년 국공합작이 실패로 돌아간뒤 그는 중국공상당본부에서 일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이름을 등소평으로 개명했다.그해 겨울 중공중앙이 상해로 옮겨가자 함게 따라가 당비서장과 비슷한 역할을 맡으면서 최초의 부인 장서원과 결혼한다.하지만이장씨부인은 멀지않아 난산으로 사망하게 된다.등은 28년 당대회에서 당중앙부비서장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부턴 광서지역에 들어가 본격적인 게릴라활동을 벌였다. 31년에 들어서자 주덕이 이끄는 홍군제1군단에서 정치부주임을 맡게 되고 동시에 홍군총정치부부주임을 맡아 활동하던중 두번째 부인 김유영과 결혼한다. 그의 인생에서 최초의 큰 좌절은 33년에 찾아온다.강서성 위원회 서기로 취임하지만 그가 모택동파라는 이유만으로 곧 해임되고 「엄중경고」처분을 받는다.당시까지만해도 모가 전권을 잡지 못하던 시절이다.이것이 그이 첫번째 실각으로 기록되고 있다.설상가상으로 그의 처 김유영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그녀는 당시 중공중앙조직부장이던 이유한과 재혼해서 현재의 경제체제개혁위주임인 이철영을 낳았다. 34년10월 중국공산당은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의 끈질긴 소탕전에 견디다 못해 대장정에 나섰다.물론 등은 참여했다.이 장정도중 모는 준의회의에서 중공당 최고지도자로 부상하게 되고 당시 홍군기관지 「홍성보」 편집장 자격으로이 회의에 참석했던 은등 당중앙비서장(당사무총장격)이라는 중책을 맡게 돼 모파의 유력한 간부지위에 올랐다. 약 1년간의 대장정이후 계속된 붉은 공산혁명과 항일운동을 거치면서 등은 계속 모의 신임을 쌓아 가다가 38년8월에는 팔로군의 제129사단 정치위원으로 임명돼 사단장인 류백승과 함께 유등대군(제2야전군)의 기반을 닦아간다.그후 45년에는 군부내에서 주덕·팽덕회 다음으로 3번째의 지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군부내 기반과 인맥을 형성해나갔다. 그는 이에 앞서 39년9월 세번째이자 마지막 부인인 탁림과 결혼,지금까지 2남3녀를 둔채 반백년도 넘게 해로해왔다. 50년대말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극심한 가뭄등으로 수백만명이 굻어죽는 사태가 발생하자 그는 그 유명한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론」(흑묘백묘론)을 내놓았다.『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사상이야 어떻든)쥐만 잘 잡으면(생산만 많이 하면)좋은 고양이(인민)다』는 의미의 이 주장으로 그는 자본주의 추종자라는 이른바 주자파로 주목받게 된다. 60년대 중반부터문화대혁명 바람이 일기 시작하면서 또다시 그의 주변에도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한다.홍위병들로부터 주자파라는 비판을 받아온 그는 류소기 국가주석과 함께 67년8월 모든 공직에서 해임,강서성 신건현에 유배돼 강제노동에 동원되어야 했다.2차 실각이었다. 그로부터 7년뒤인 73년3월 그는 국무원 부총리로 임명됨으로써 화려하게 복권,오뚝이의 면모를 과시했다.그러나 그는 이번에는 『남쪽 언덕이든 북쪽 언덕이든 꼭대기에만 오르면 된다』는 의미의 「남파북파논」을 내놓아 골수 공산주의자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결국 76년4월 주은래 추모집회로 시작된 천안문난동사건(일명 4·5사건)때 사인방(모택동을 등에 업은 강청 장춘교 왕홍문 요문원등 강경파)으로부터 「난동의 배후조종자」로 몰려 또다시 실각했다.3차 실각이었다.주추모집회에서 은등 추도사를 읽었었다. 이윽고 모사망과 사인방 실각 이듬해인 77년 그는 다시 부활,실각 당시의 모든 직책을 회복했다.이때 그의 재기용여부를 놓고 중앙공작회의는 격렬한 찬반논쟁을 벌였다.그런데등이 스스로의 과오를 시인,이미 당주석과 중앙군사위주석이었던 화국봉의 지위를 인정하는 편지를 씀으로써 부활하게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이때 화는 의등 부활에 반대했었다. ○강경책 내며 위기극복 이렇게 되살아난 등은 78년12월 당11기3차중앙위전체회의에서 향후 20년간에 걸친 「4개(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현대화계획」선포를 주도함으로써 당의 최고 실권자임을 과시했다.이때부터 중국이 야심찬 개혁개방시대로 들어선 것이다.이는 곧 실사구시를 중심으로한 실용주의 「등시대」가 시작된 시점이기도 했다. 그는 이때부터 자신이 최고실권자였음에도 당주석이나 국가주석과 같은 최고 자리에 오르지 않는채 호요방(당)과 조자양(정부)을 앞세워 화에 대한 문책과 강등에 착수,마침내 82년9월 화를 당중앙 위원이외의 일체의 요직에서 제외시킴으로써 권력투쟁에서의 기나긴 「장정」을 매듭지었다. 89년4월 전총서기 호요방 추모집회로 시작된 천안문 민주화시위는 그에게 닥친 마지막 시험이었다.그러나 그는 이 시험문제를 시위대군중에 대한무자비한 발포와 함께 시위대의 추앙을 받던 총서기 조자양을 「폭란의 배후책임자」로 몰아 제거하는 방법으로 풀었다.13년전의 천안문폭동때 자신이 당했던 방법을 이번에는 자신의 심복이었던 조에게 그대로 되풀이한 셈이다.어쨌든 이로써 사회주의체제를 전복시켰을지도 모를 자유화물결을 일단 잠재울 수 있었다. 등은 그동안 자신의 후계자로 호요방과 조자양을 잇따라 내세워 봤지만 「홀로세우기」에 실패했다.그 뒤 가장 적절한 후계자라고 꼽은 인물이 강택민.강은 천안문사태 이후 상해시에서 혼란을 신속히 수습했고 그동안 의등 개혁개방노선을 가장 능숙하게 실천해온 것으로 평가되었다. ○강택민 지목한 뒤 은퇴 강을 후계자로 내세운 그는 89년 11월9일 당중앙위의 허락을 받아 당중앙군사위주석직에서 퇴임함에 따라 공직에서 은퇴,평민으로 돌아왔다.그러나 그가 은퇴한 뒤에도 배후에서 한동안 강체제를 지원하고 후견인역할을 해와서 최근까지도 「최고지도자」또는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라는 칭호를 들어왔다. 특히 그는 동구공산체제가붕괴된데 이어 소련마저 무너져 중국이 망당망국의 위기의식에 휩싸이자 심천 주해 등 남부 개혁개방지역을 돌며 이른바 남순강화를 통해 개혁개방을 보다 적극화할 것으로 주창함으로써 사회주이체제붕괴의 도미노현상이 중국대륙에 밀어닥치지 못하게 했을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모방한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당노선으로 채택케함으로써 중국이 21세기 아시아 태평양시대를 이끌어갈수 있도록 새로운 용기와 힘을 불어넣기까지 했다. 중국경제가 이같은 시장경제체제 도입에 힘입어 연10%가 넘는 경이적인 고도성장을 지속하며 전진을 계속하자 그는 『기회를 잃지 말고 성장을 계속하라』는 말을 남기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등소평 연보 ▲1904.8.22=사천성 광안현에서 3남매중 맏아들로 출생 ▲1918=중경에서 프랑스유학을 위한 예비학교 입교 ▲1920=프랑스 유학 떠남 ▲1924=파리에서 주은래와 중국공산당 유럽지부 창설 ▲1926=모스크바의 중산대학으로 옮겨 수학한뒤 연말에 귀국 ▲1927=광서성에서 공산당 게릴라 조직.첫부인 장서원과 결혼 ▲1931=홍군제1군단 정치부주임.두번째부인 김유영과 결혼 ▲1933=강서성위서기로 취임직후 모택동파라는 이유로 해임.1차실각 ▲1934∼35=대장정 참가,준의회의에서 당중앙 비서장으로 선임 ▲1938=국공합작으로 홍군이 팔노군으로 개편될때 129사정치위원이 됨 ▲1939=세번째부인 탁림과 결혼 ▲1945=제7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으로 선출 ▲1952.8=국무원 부총리에 임명 ▲1954=당중앙위원회 비서장,국무원 부총리,국방위원회 부주석에 선출 ▲1956=정치국상무위원겸 당총서기 선임 ▲1966=문화대혁염 시기 홍위병으로 부르주아 반동파로 비판받음 ▲1967.7=모든 당·정 직무에서 해임.2차 실각.남창으로 하양 막노동 ▲1973.3=주은래 천거로 국무원 부총리에 복직 ▲1974=당정치국원 승진.유엔총회 특별회의에 중국대표 단장으로 참석 ▲1975.1=당중앙 부주석,정치국 상무위원,국무원 제1부총리,중공군 총참모장 등에 선임 ▲1976.4=천안문사건이 발생하자 4인방에 의해 배후조종자로 지목,모택동의 제의로 모든 직무에서 물러남.3차실각 ▲1977.7=중공당 10기3중전회에서 당중앙정치국상무위원,당중앙부주석,군총참모자 등으로 복직 ▲1978.12=당11기3중전회에서 당최고영도자 지위 획득,향후 20년간 4개 현대화 추진계획 선포 ▲1979=핑퐁외교로 미국과 국교수립후 공식 방미,개혁·개방정책을 당지도노선으로 정식 출범시킴 ▲1980=경제특구제 시행 결정,호요방·조자양체제 출범토록 지원 ▲1981.6=당중앙군사위우너회 주석으로 권권장악 ▲1987.10=당정치국원,정치국상무위원직 사임 ▲1989.6=천안문사태 유혈진압 지시 ▲1989.11=당중앙군사위 주석자리를 내놓고 정치일선에서 은퇴 ▲1992.1=남부개방지역 순시중 담화(남순강화)로 개혁·개방 가속화와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도입 역설 ▲1992.10=제1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당원로들을 은퇴시키고 강택민체제 구축토록 지원 ▲1993.8=막내딸 용등,「나의 아버지 등소평」전기 출간 ▲1993.11=「등소평문선 제3집」 발간 ▲1993.12=북경시 순시중 「기회를 잃지말고 계속 성장추진」역설 ▲1997=92세를 일기로 영면
  • 피아니스트 우고르스키 내한공연을 보고(객석에서)

    ◎고난도 테크닉… 독특한 곡해석 구소련 출신 피아니스트 아나톨 우고르스키가 18일 하오7시30분 서울 예술의 전당 음악당에서 첫 내한연주회를 가졌다. 우고르스키는 지난 92년 50살의 나이에 서방으로 불쑥 망명,뒤늦게 이름이 알려진 연주자.연주시간이 2시간30분을 넘긴 이날 독주회에서 그는 고난도의 테크닉과 고난을 겪은 자만이 드러낼 수 있는 여유,풍부한 표현력으로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연주자의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감흥과 음악적 논리가 하나가 될때 템포는 의미가 없다』는 그의 음악관처럼 첫곡 바흐의 「왼손을 위한 샤콘느」에서부터 독특한 곡해석을 선보였다.이어 연주한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에서 그는 이 작품이 갖는 회화적인 표현에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감정이 담뿍 배인 연주를 보여줬다. 조성진 예술의 전당 음악감독은 『테크닉이 기가 막힐 뿐 아니라 이 작품에 대해 많은 연주자들이 가져왔던 강박관념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해석을 해낸다』고 평했다. 「스크리아빈 전문가」로 불리는 그답게 경쾌하고 명징한터치로 모차르트 「판타지 d단조」와 「론도 D장조」를 연주한데 이어 스크리아빈 「소나타 제2번」과 「소나타 제4번」 그리고 앵콜곡에 이르기까지 「신이 숨겨놓은 진리」를 조심스레 찾아내려는 신지학자의 자세로 스크리아빈에 몰입했다. 이날 연주곡은 독주회 연주분량으로는 만만치 않은 7곡.그는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대기실에 들어갔다 나오는 시늉만 하고 곧바로 건반에 몸을 내맡기는 힘을 과시했다.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에너지는 더욱 청중들을 끌어당겼다. 특히 앵콜 끝곡인 스크리아빈의 「왼손을 위한 녹턴」을 연주할 때는 믿지기 않을 정도의 테크닉과 무채색의 연주로 청중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 말과 글 가진 위구르족 독립외침에(박갑천 칼럼)

    중국서북쪽 신장(신강)성 위구르자치구 이닝(이령)시에서의 유혈사태가 알려진다.독립을 외치는 위구르족이 한족을 공격,양쪽에서 3백여명이 죽고 위구르족 1천여명이 잡혀갔다니 규모가 꽤큰 폭동이었던 듯하다. 위구르는 한자로 「회홀·회흘·외올아」라 적는다.6∼7세기께까지 동돌궐제국 지배아래 있었는데 8세기들어 위구르제국을 세우면서 한때는 남쪽 토번과 함께 당나라 2대 대항세력으로 뻗는다.하나,괘그르는 역사의 흐름 따르는 영고성쇠.현재 신장성에는 13개 소수민족이 쓰적쓰적 엉켜사는데 위구르족이 70%를 넘는다. 그들에게는 위구르어가 있고 위구르문자가 있다.말과 글자를 가질수 있었던 뒷심이 「독립만세」를 외치게한 바탕으로 되지 않았겠나 생각케도 한다.고대위구르어는 고대튀르크어의 하나로 동투르키스탄에 살았던 위구르족 말이다.현대위구르어는 투르키스탄에서 쓰는 현대튀르크어.이는 1921년부터 「위구르어」라 부르도록 공식화했다. 마니교 문헌 등에서 볼 수 있는 소그드문자에서부터 제나라글자를 만들어낸 겨레가 위구르족이다.초기에는 소그드문자같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로쓰기하다가 나중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로쓰기한다.그게 몽골문자로 이어진다는 점이 흥미롭다.13세기초 위구르족은 칭기스칸의 지배를 받는다.그러나 그들은 조정의 문서기록을 맡으면서 위구르문자를 쓴다.나중에 몽골어 성격에 맞추어 수정보완한게 몽골문자.힘에는 눌렸지만 문화는 물려준 셈이었다. 신장성지역 위구르족에게는 「에팽티」란 이름의 설화주인공이 있다(강명상 「재미있는 중국의 이색풍속」).그가 엮어내는 얘기의 하나인「금씨앗 뿌리기」는 백성들 잡죄는 통치자의 독단과 부정부패를 웃음거리로 만들면서 꼬집는다.­에팽티가 금붙이들을 빌어다가 모래밭에 뿌린다.이곳을 지나던 임금이 까닭을 묻자 며칠만 지나면 몇곱절을 수확하게 된다고 대답한다.임금은 그말을 믿고 궁중의 금붙이를 모두 가져나와 뿌리고 그걸 가난한 백성들과 유목민들이 줍는다.비가 안와 금나무가 시들어서 거둘게 없다는데 임금인들 어쩌랴. 냉전시대가 가면서 옛소련등 사회주의 나라쪽에서 「독립」소리가 높아져 온다.위구르족의 동투르키스탄공화국 건설외침도 그점에서 쉬이 간정될 것 같진 않다.과연 소망은 이뤄질건지.〈칼럼니스트〉
  • 북,대중교섭에 한계 느낀듯/「황 망명」 수용시사 배경

    ◎미 식량지원도 겨냥 “현실적 선택”/체제수호 위해 「변절자」로 몰아 북한 황장엽 노동당비서 망명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북한의 외교부대변인은 17일 조선중앙통신과의 회견에서 『황비서가 망명을 추구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변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변절자는 어디든 가라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라고 밝혔다.황비서의 망명요청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이를 수용할 수도 있음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이같은 북한의 반응은 이번 사건을 「한국측의 납치」로 규정,「응당한 조치」를 호언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던 것과 달리 이번 사건의 성격을 새로이 규정하려는 시도로 풀이된다.즉,이번 사건을 자신들의 체제위기와 관련된 사건이 아닌 개인적인 「변절」에서 비롯된 일로 몰고가겠다는 의도를 나타낸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는 곧 이번 사건이 장기화될수록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북한이 인식한데 따른 변화로 보인다.통일원의 한 당국자는 『북한이 중국정부와 벌여온 외교교섭에서 뭔가 한계를 느낀 것 같다』고 말했다.이 당국자는『북한이 계속 지금과 같은 강수를 둔다면 미국 일본및 중국에 더이상 접근하기가 어려운 위기상황으로 빠져들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미국의 식량지원 등을 노린 현실적인 판단을 한 게 아닌가 분석된다』고 평가했다. 외무부측은 북한의 태도변화가 지난 67년 3월에 발생했던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의 미국망명 사건과 유사하다는 점을 중시하고 있다.비동맹권인 인도를 극비리에 여행하던 스베틀라나가 모스크바로 돌아오기 직전 뉴델리주재 미국 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하자 소련은 즉각 CIA납치설을 주장하며 반발했다.그러나 곧이어 스베틀라나가 자의에 의한 망명임을 명백히 밝히고 나서자 소련은 그녀를 CIA에게 돈을 받고 조국을 배신한 여자로 매도해 버렸고 이로 인해 사태수습의 단초가 마련될 수 있었다.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몰고가기 보다는 「변절자」의 「한심한 행위」로 치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소련의 판단덕분에 조기수습이 가능했던 것이다. 과연 북한이 이같은 소련의 사건처리 수순을 밟고있는 것인지는 속단하기 이르다.북한의 명확한 진의는 앞으로 북경에서 전개될 한·중,북·중 외교교섭을 통해 드러날 전망이다.다만 북한이 처음으로 「망명요청」을 전제로 한 입장을 피력하고 나섰다는 점에서 향후 황비서 사건을 푸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은 분명하다.북한의 이같은 변화가 향후 남북한과 중국의 삼각외교교섭에서 어떤 결과를 이끌어 낼지 주목된다.
  • 남북한 아닌 중국이 풀어야(사설)

    북한 황장엽 비서 망명사건으로 중국이 매우 난처한 입장에 놓여 있다는 것을 우리는 십분 이해하고 있다.북한은 중국이 반세기에 걸쳐 일관되게 후원해온 나라이고 한국은 이해관계가 막중한 경제파트너인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이러한 처지와 이번 사건의 처리와는 별개라는 점을 강조해두고 싶다.따라서 중국의 관계당국자가 이 문제를 『남북한이 해결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피력했다는 보도는 유감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 보도가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만에 일이라도 그렇다면 생각해볼 문제다.우선 이는 사리에 맞지 않다.망명사건은 어디까지나 소재국의 관할하에 있는 사안이다.외국공관에 대한 치외법권 인정은 국제법상 상호주의에 입각한 외교활동의 보호가 목적일 뿐이다. 이 문제의 직접 당사자가 남북한인 것은 사실이다.그렇다고 제3국에서 일어난 제로섬게임과 같은 미묘한 사건을 당사자가 알아서 하라는 것은 양측의 대결만을 격화시킬 것이다.앞서도 우리는 이번 문제는 국제관례와 국제규범에 따라 해결할 문제이지 정치적 차원에서 처리될 성질이 아님을 지적했다. 이 문제의 정치화는 인도적 차원에서도 적절치 않다.대화가 중단된 채 적대적 관계가 계속되고 있는 남북한간에 발생한 문제를 당사국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것은 비인도적일 뿐 아니라 일의 해결을 염두에 둔 처사라고 보기 어렵다. 이번 사건과 관련,지난해 1월 잠비아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잠비아주재 북한공관원 3명이 한국공관에 망명을 요청했을때 잠비아는 문제를 잠비아 차원에서 해결했지 남북한의 문제로 다루지 않았다.냉전시대 구소련의 적지 않은 인사가 제3국에서 미국으로의 망명을 요청했지만 어느 케이스도 그것이 미·소간의 문제로 다뤄진 일이 없다.
  • WP·르몽드·도쿄신문/황 망명 외국언론 보도

    ◎WP­“북한내 강·온파 분열 심화”/르몽드­중에 국제관례 준수 강조/도쿄신문­“한·미·중 긴밀연대 필요” 세계각국 언론들은 황장엽 비서의 망명과 관련,비상한 관심을 표시했다.각 신문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북한의 내부권력 투쟁이 가열되고 있다거나 남북한과 이해관계에 처해 있는 중국이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고 보도하는 등 나름대로의 분석을 곁들여 주요 뉴스로 취급했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북경발로 「황의 망명,중국에 뜨거운 감자」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황장엽 비서의 망명요청은 북한의 오랜 혈맹인 중국에 심각한 딜레마를 안겨주고 있다고 14일 보도했다.이 신문은 중국은 그의 망명처리문제와 관련,지난 40여년 동안 유지해온 북한 공산주의자들과의 끈끈한 유대와 최근 수년간 괄목하게 발전해온 한국과의 경제적인 관계 사이에서 외교적인 악몽에 직면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 권력층에 심각한 타격이 되고 있는 황의 망명은 국제사회에 적극 참여할 것을 바라는 북한내 온건파와 강한 군사력 및 자립을 고집하는 강경파간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킬 가능성이 크다고 위싱턴 포스트가 보도했다.CNN은 중국은 지난 78년 북한과 체결한 조약에 따라 비자나 유효한 여행서류를 소지하지 않은 북한인은 누구라도 북한에 돌려보내도록 돼있으나 이 조항이 황장엽 비서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르 몽드는 중국은 황비서의 망명건 처리에 있어 정치적 망명에 대한 국제법상의 규정을 준수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이 신문은 미국의 매들린 올브라이트 신임 국무장관이나 에르베 샤레트 프랑스 외무장관 등 주요 서방국 지도자들이 이미 중국에 대해 국제사회에서 『강대국으로서 모든 책임을 이행할 것』을 명백히 요청한 만큼 중국이 더욱 벽에 부딪혀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도쿄신문은 『북한체제의 심각성이 보인다』면서 『한·미·일·중국은 예측 불가능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긴밀한 연대를 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러시아의 이즈베스티야는 「주체사상 전파에 지친 수령의 심복」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황의 망명 원인이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지만 사상적 의견 차이가 주요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세보드냐는 『황의 망명은 옛소련 시대의 수슬로프에 비견되는 것으로 한반도 정세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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