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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회수 러시아 차관 활용…연해주 개발펀드 만든다

    한국과 옛 소련의 국교수립 당시 제공했다가 받지 못한 14억7,000만달러(원금)의 차관을 러시아 연해주 지역개발에 활용하는 방안이 민간차원에서 추진된다. 러시아 국립협동조합대학의 분교를 국내에 설치하고 연해주지역 교포학생 20여명이 국내에서 영농기술을 배우게 된다. 재단법인 국제농업개발원은 지난 13일 서울 서초동 국제협력단 연수센터에서 ‘러시아 극동지역의 자원개발과 한러 협력방안’이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을 열고 러시아의 극동러시아 농공위원회측과 이같이 합의했다고 15일 밝혔다. 이병화(李秉華)원장은 “러시아에 제공했던 차관으로 극동지역에서 ‘시베리아개발은행’과 같은 일종의 펀드를 만들어 극동러시아 지역의 농업과 자원개발에 활용하는 방안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이원장은 이 돈을 그 지역에 진출한 한국기업에 대출 형식으로 빌려줘 연해주 개발에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재경부측은 이에 대해 “차관의 채권자는 국내 은행들이고 채무자는 러시아재무부이기 때문에 민간차원에서 차관을 그런 식으로쓸 수 없을 것”이라며 “올해중 양국 정부가 상환 방식에 관한 협정을 체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개발원과 러시아측은 내년 1년동안 러시아 프리모리스키 농업아카데미에 재학중인 고려인 2∼3학년 학생 20여명을 한국에 초청키로 합의했다.이들은 두달동안 컴퓨터와 우리말 교육을 받고 전국의 국내 농가에 분산돼 축산·화훼·채소 등의 영농기술을 배운다. 양측은 러시아 국립협동조합대학의 분교를 국내에 설치하는 것도 공동 추진키로 했다.오는 9월에는 러시아에서 자원이용에 관한 남북한의 공동협력 방안에 관한 세미나를 열고 북한측 인사 2∼3명을 초청,러시아의 자원개발에 남북이 협력하는 문제도 논의하기로 했다. 심포지엄에는 러시아측에서 국립 모스크바 협동조합대학 우바로프 부총장겸 극동러시아 농공위원회 부위원장과 연해주 농업아카데미 데민 총장 등 80여명이 참석했다. 손성진기자 sonsj@
  • 푸틴 지방통제 대폭 강화

    ‘강력한 러시아’건설을 위한 크렘린의 힘 모으기가 시작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13일 전국 89개 지역을 7개 연방지구안에두는 조치를 단행했다.푸틴 대통령은 이날 ▲전국을 7개 연방지구로 분리하고 ▲각 지구 대표를 대통령이 임명한다는 내용의 포고령에 서명,중앙권력통제력을 강화하는 조치를 취했다.이는 구 소련 체제가 붕괴되면서 당시 대통령이던 보리스 옐친의 권력 지방 분권화 조치와는 상반되는 것이다. 러시아는 그동안 알렉산드르 레베드 크라스노야르스크 주지사등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지역 정치가들이 포진,중앙정부를 불편하게 하고 있으며 이들에 대한 통제 여부가 푸틴의 국가체제 재확립의 전제조건으로 제시돼왔다. 포고령에 따르면 러시아의 연방지구는 몇개의 공화국,준 주(州),지방관구등으로 구성된다.크렘린궁 공보실은 이번 지방조직 개편은 헌법에 보장된 연방대통령의 권한 행사를 보장하고 각 지역에 있는 연방조직의 행정 효율을높여 연방 정책이 지방에서 효과적으로 시행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러시아 언론들은 지방을 ‘분할 통치’해 연방정부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한것이라고 분석했다.민간 방송인 NTV는 현 헌법상 대통령이 임명한 대표가민주적 선거절차에 의해 선출된 지방 지도자들을 통치할 수 없도록 돼있다며이번 조치의 위헌 소지를 제기했다. 이번 포고령은 지난 11일 푸틴 대통령이 푸틴정책에 대한 비판 기사를 게재했다는 이유로 언론사에 압수수색을 벌이고 연방법과 배치된다며 잉구세치아,바슈키르,아무르등 지방 정부의 일부 정책을 보류시킨 지 이틀만에 발표됐다. 김수정기자 crystal@
  • 오부치, 日불황 타개 ‘성공한 총리’

    ‘인품의 오부치’도 병마 앞에는 결국 무릎을 꿇었다.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 일본총리는 지난 4월 2일 하오 7시30분 혼수상태에 빠진지 43일만에 타계했다. 98년 7월30일 대망의 총리 자리에 올라 내각이 총사퇴한 4일까지의 총리 재임일수는 616일로 역대 총리중 ‘장수’부문 14위.부드러운 인상과 온유한인품,자리를 같이 하면 누구라도 빨아들이는 듯한 겸허한 성품 덕분에 ‘블랙홀’이란 별명을 지녔던 그는 비교적 빠른 시일 안에 침체된 경제를 회복궤도에 올려놓은 ‘성공한 총리’로 평가받았다. 1937년 군마(群馬)현에서 출생한 오부치는 아버지 오부치 고헤이(小淵光平)의원의 2남으로 2세 정치인이었다.와세다(早稻田) 대학원 재학중이던 63년 26세의 나이로 첫 출마해 당선된 옛 군마3구는 오부치의 정치색을 결정지은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후쿠다 다케오,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같은 거물 정객들의힘겨루기 씨름판이었다.이들과 함께 출마하면 오부치는 언제나 3,4위였다.그래서 어느 일본 정치인은 이런 오부치를 ‘미국과 소련 양대국 사이의 골짜기에 핀 한송이 백합’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의 정치적 스승인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전 총리와 비슷하게 ‘참을성 많고 적을 만들지 않는 인품’을 키워왔다고 할 수 있다.파벌내 분열로 군소파벌로 전락했던 옛 다케시타파를 물려받아 오부치파 회장이 되면서 그는특유의 ‘인품’으로 다른 파벌의원들을 끌어들여 최대 파벌로 키웠다. 사토(佐藤)파를 거쳐 다나카(田中)파 회원이었던 79년 그는 오히라(大平)내각때 총무장관겸 오키나와(沖繩) 개발청장관으로 첫 입각했다.87년 다케시타 내각에서 관방장관으로 기용됐다. 그는 다케시타 총리의 최측근이자 중간보스로서 다케시타와 ‘2인3각’의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91년에는 자민당 간사장에 취임하면서 ‘대망’을키웠다.‘관방장관과 간사장을 거친 사람의 절반은 총리가 된다’는 통념에따라 총리감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1년8개월의 총리 재임중 10년 불황과 낮은 지지율로 사면초가에 빠진자민당을 수렁에서 건져올렸다.뿐만 아니라 취임초기 ‘경제회생 내각’이라 이름을 붙이고 경제회복에 전력을 기울여 99회계년도의 경우 공약대로 플러스 성장으로 되돌려놓았다.연립정권을 통해 정권의 기반도 안정시키고 외교에도 적극적이었던 그에게 그러나 마냥 ‘행운’만 따라주지는 않았다.50%대가 넘던 지지율이 지난해 10월을 고비로 하락세로 돌아선데다 최근 비서관의 수뢰의혹,경찰비리,금융재생위원장의 망언 등 악재(惡材)가 겹치면서 정치적 수세에 몰렸었다.더욱이 쓰러지기 하루 전날 자유당의 연정 탈퇴는 극도로 쌓인 심신의 피로함에 결정타를 안겼다. 오부치는 일본 정계에서 널리 알려진 친한(親韓) 성향이었다.일한 의원연맹 창립 멤버이자 사망전까지 이 연맹 부회장이었다.총리취임후 98년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고 이듬해 그가 한국을 방문,한국과 우호를쌓았다.양국이 서로 인정하듯 한일관계는 오부치 총리 시대에 가장 탄탄대로를 걸었다.한국으로선 듬직한 ‘우군’을 하나 잃은 셈이다. ■1937년 군마현 출생. ■58년 와세다대 문학부 입학. ■63년 최연소 중의원 의원 당선. ■70년 우정성 정무차관. ■79년 총무장관 겸 오키나와 개발청장관. ■87년 다케시타 내각 관방장관. ■91년 자민당 간사장. ■92년 다케시타(이후 오부치파) 회장. ■97년 하시모토 내각 외상. ■98년 7월 총리 취임. ■99년 1월 자민·자유당 연정수립. ■〃 10월 자민·자유·공명 연정수립. ■2000년 4월2일 뇌경색 긴급입원. ■〃 5월 14일 사망. 황성기기자 marry01@. *오부치 총리 타계 이모저모. ●자택 안치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총리의 유해는 이날 병원에서 수습된 뒤 오후 7시쯤 병원을 나와 빈소가 마련된 도쿄 시내 자택에 안치됐다. 유해를 실은 차량은 경찰 호위를 받으며 그가 40년 가까이 지냈던 국회의사당과 쓰러지기 전까지 집무했던 총리 관저를 한바퀴 돌아 말없이 집으로 향했다. 오부치 전총리의 타계로 공석이 된 중의원 군마(群馬) 5구는 둘째딸인 유코(優子·26)씨가 물려받아 6월25일 실시될 총선에 출마할 것으로 알려졌다. ●장례 일본 정부·여당은 장례를 ‘내각·자민당 합동장’으로 치를 것을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역대 총리중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의 장례는 국장,7년여 총리를 지낸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는 국민장,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 등은 자민당장,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등은 내각·자민당 합동장으로 치렀다. ●조문 및 애도 오부치 전 총리의 타계소식이 알려진 직후 최측근인 노나카히로무(野中廣務) 자민당 간사장과 아오키 미키오(靑木幹雄) 관방장관 등이병원을 찾아 미망인 지즈코 여사 등 유족을 위로했다.오부치 전총리의 타계소식을 접한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는 “어려운 시대에 훌륭한 지도자를잃어 슬픔을 참기 어렵다”고 애도의 뜻을 표했다.오부치 전 총리의 정치적스승인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76) 전 총리는 “오부치군과는 40여년간 고락을 같이 해왔다”면서 “이제 편안히 쉬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클린턴 미국 대통령 부부와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 등 세계 각국의 정상들도 성명을 발표,오부치 전 총리의 타계를 애도하고 지도자로서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향후 정국 모리 총리가 이날 6월25일 중의원 선거 방침을 확인하면서 일본은 본격적인 총선 정국에 돌입.일본 여야는 오부치 전 총리의 타계가 총선에 미칠 영향을 계산하면서도 자민당쪽으로 ‘동정표’가 움직여 다소 여권이유리할 것으로 전망.특히 오부치 전 총리가 쓰러진 이후 다케시타 전총리 등 원로 정치인들이 대거 은퇴의사를 밝혀 이번 총선에는 세대교체가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황성기기자
  • [역사를 바꾼 정상회담] (6)라빈 아라파트 회담

    *93년 이스라엘 - PLO 오슬로협정 체결. “이미 너무 많은 피와 눈물을 흘렸다.전쟁터에서 죽어간 동료와 가족들을생각하면 만시지탄이다” 1993년 9월13일 미백악관.역사적 오슬로협정 테이블에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장과 마주앉은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는 축사라기엔 엄숙한 한마디를 던졌다.이날 양국 정상이 체결한 오슬로협정은 결코화해할수 없을듯 하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오랜 적대감을 끊고 이끌어낸 평화 총론이라는 점에서 세계의 갈채를 받았다.그러나 협정시효가 훨씬지난 지금까지도 그 각론이 합의되지 않은채 유혈충돌 역시 되풀이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중동평화의 가시밭길을 상징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평화의 청신호는 80년대 후반부터 찾아왔다.국제사회 압력과 극심한 경제난이 옥죄는 가운데 90년대초 소련의 붕괴는 그 지원에 의존하던 아랍 투쟁기구들로 하여금 노선 수정을 불가피하게 했다. 70년대 내내 반이스라엘 테러의 선봉에 섰던 PLO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는 88년 임시 유엔총회 연설을통해 이스라엘 생존권 인정과 테러 포기를 선언,국제사회의 요구에 발맞췄다.이스라엘에도 92년 선거에서 라빈이 이끄는 노동당이 강경 리쿠드당을 대체,화해분위기가 무르익었다.오슬로 협정은 양국정상의 평화의지 외에도 이같은 유화정세의 산물이기도 했다. 양국 대표단이 노르웨이 오슬로에 모여 오랜 물밑회담끝에 선보인 협정문은당시까지의 중동관계로 미뤄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협정원칙(Declaration of principles;DOP)이라는 이름으로 공표된 문서는 △99년 5월까지 가자지구 및 요르단강 서안으로부터의 이스라엘 철군△이 지역에서의 팔레스타인 자치△자치 3년내 독립국가로서의 팔레스타인 지위 논의 등을 규정하고있다.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점령지를 돌려줄 뿐만 아니라 향후 독립국 건설까지도 인정하겠다는 것.협정문이 제시한 ‘영토와 평화의 교환’ 정신은 향후중동협상의 대원칙이 됐다. 오슬로협정 규정에 따라 라빈과 아라파트는 94,95년 1,2차 자치협정에 나란히 서명했다.양국 정상간에 직통전화가 놓이고 총선거를 거쳐 아라파트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됐다.94년엔 요르단이 이스라엘과의 46년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평화협정에 조인,중동평화 도미노에 대한 예감으로 지구촌이들떴다. 그러나 94년 나란히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국제사회 갈채의 안쪽에서라빈과 아라파트는 국내 강경파의 거센 반발에 맞닥뜨려 진땀을 흘려야 했다.점령지에 정착중인 이스라엘인들의 반감이 극에 달했고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역시 잊을만하면 폭탄테러를 자행,평화일정을 지연시켰다.결국 95년 11월라빈 총리가 반대파에 암살당하면서 한축을 잃은 중동평화호는 일탈이 불가피해졌다. 곧이어 집권한 강경 네타냐후 정권 아래서 오슬로 플랜은 19개월가량 정지되기도 했다.98년10월 와이리버 협정이 가까스로 체결됐으나 오슬로 시계에의하면 이미 이뤄졌어야 할 요르단강 서안 완전철군,팔레스타인 최종지위협정 등이 아직도 미완으로 남아있는 실정이다.이 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또한번 정상간 회담에 의한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 다가올지도 모른다. 손정숙기자 jssohn@. *라빈당시 이스라엘 총리. 중동평화의 정착을 위해 힘쓴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는 그의 오랜 군경력 때문에 ‘철권을 쥔 평화의 병사’,‘미스터 안보’로 불렸다. 1922년 예루살렘의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카두리 농업고등학교를 마치고는 곧바로 하가나부대, 팔마치 부대를 돌며 군인으로서의 명성을 쌓아나갔다. 32세의 나이로 소장에 오르고 40세에 참모총장으로 진급, 67년의 6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68년에는 26년간의 군생활을 마치고 주미대사로 임명되어 미국과 전략적 관계를 이끌어 내 대규모의 군사적 지원을 확보하기도 했다. 73년 귀국,74년에는 골다메이어 총리정부에 노동장관으로 입각했으며 같은해 6월 메이어의 사임으로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나 자란 최초의 총리로 취임했다. 그러나 77년 부인의 미국내 은행 불법계좌가 드러나 총리직에서 불명예 퇴진했다. 이후 84년에는 국방장관으로 복귀하여 레바논 전쟁을 종식시켰다. 92년 다시 총리가 된 뒤 주변 아랍국들과 평화협상에 힘을 기울여 93년 워싱턴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원칙에 합의하고 오슬로평화협정에 조인했다. 이공로로 페레스,아라파트와 함께 94년 노벨평화상을 공동수상했으나 95년 11월 4일 평화집회를 마친 직후 극우파 유태인 청년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송하기자. *아라파트 당시 PLO의장.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야세르 아라파트는 1929년 부유한 무역상의 아들로 이집트 카이로에서 태어났다.4살 때 모친이 죽고 예루살렘의 삼촌 밑에서자랐다. 그러다 46년 이집트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들어가는 무기밀매를 하며민족주의자로 거듭난다.아랍과 이스라엘의 첫 전투 이후 UN은 팔레스타인에게 자치 정부를 약속하지만 이행되지 않고 갈 곳 없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의 박해를 받는다.이후 팔레스타인 동료들과 연계하여 64년 군소 저항단체들을 통합해 PLO(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를 창설한다. PLO는 게릴라전과 테러를 이스라엘에 행하여 많은 사상자와 피해를 입힌다. 그러나 대대적인 팔레스타인 길들이기에 나선 이스라엘 정부의 공격으로 요르단 본부를 빼앗기고 레바논으로 거점을 옮긴다.계속되는 테러와 마찰로 아라파트의 PLO는 세계의 불한당이 되었지만 72년 UN 옵저버 자격을 획득한다. 88년 모든 테러를 중지하고 평화를 지키겠다는 조건을 내세워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립을 요구, 그해 70개국의 승인을 얻었다. 90년 걸프 전쟁으로 신뢰도에 위기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93년 평화를 위한 기초 합의를 이스라엘 총리 라빈과 이루었다.96년 자치 수반으로 취임하여 98년 중동 평화의 결실이자 상징인 와이 리버 합의를 이끌어냈다. 황인철기자
  • [오늘의 눈] 한반도를 보는 美·中의 시각

    8일 광화문 중앙청사는 미국과 중국의 ‘외교 각축장’이 된 하루였다. 7일 방한한 웬디 셔먼 미 국무부 자문관 일행은 이날 오전 10시30분 청사 8층 회의실에서 장재룡(張在龍)차관보 등 외교부 관계자들과 머리를 맞댄 채한반도 현안을 숙의했다.공교롭게도 같은 시간 7층 공보관실에선 주방자오(朱邦造) 중국 외교부 대변인과 우리측 이남수(李南洙)대변인이 양국 현안 논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미국과 중국의 지도부들이 같은 시각,위 아래층에서 한반도 정세를 논의한것은 앞으로 몰아칠 ‘한반도 격류’를 예고라도 하는 듯 ‘의미심장’하게비쳤다. 미국과 중국은 6·25 이후 한반도에서 남북한을 상대로 가장 큰 영향력을행사해온 강대국들이다.연장선상에서 소련 붕괴 이후 ‘팍스 아메리카나’를이어가려는 미국과 새로운 세계강자를 꿈꾸는 중국이 동북아 패권을 놓고한판 대결이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주 대변인은 방한 직전 북한을 찾아 그곳 기류를 탐색했고 셔먼 자문관은조만간 중국과 일본을 연쇄 순방할 계획이다.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중이 주변 정세에 어느 정도 민감한지를 반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미국은 한반도를 교두보로 삼아 중국의 영향력을 최대한 억제한다는 세계전략에 기반을 두고 있는 반면 중국은 한반도 평화구축 과정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최대한 줄이겠다는 의지를 숨기지 않고 있다.최근 탕자쉬안(唐家璇)외교부장이 “한반도에서 미국은 조역의 역할에 그쳐야 한다”고 직격탄을 날린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은 것 같다. 이처럼 미·중 양국은 자신들의 국익이 투영된 세계전략에서 한반도를 바라보고 있다.당장 한반도 평화정착과 냉전해체라는 ‘총론’에 대해서 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이해관계가 틀어질 경우 언제 갈등과 반목의 사이로 돌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정부는 앞으로의 한반도 4강 외교에 대해 YS정권의 외교 실패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할 것 같다.허장성세와 무원칙한 외교정책으로 인해 한·미,한·일 관계를 어렵게 만들었던 과거를 잊지 말아야한다.실익과 명분의 균형 감각 속에서 미국과 중국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면서 최대의국익을 추구하는 ‘외교곡예’가 지금부터 본격화되는 느낌이다. [오 일 만 정치팀기자]oilman@
  • [시베리아 대탐방](20.끝)재벌 꿈꾸는 개인기업들

    [이르쿠츠크·앙가르스크 특별취재반] 시베리아의 동토(凍土)에서도 미래의‘재벌’을 꿈꾸는 개인기업들은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취재팀은 지난해 11월 30일 이르쿠츠크 주(州) 3,000여개 개인기업 가운데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에네르쁘레트’를 찾았다.이 회사는 지난91년 이르쿠츠크 인근 도시 우스트일림스크에서 일하던 젊은이 5명이 1만달러를 들여 창업한 기계 생산업체다.그들은 “전 러시아에 팔 수 있는 기계를 만들자”는 목표 아래 국영기업에 근무할 때보다 몇배는 더 열심히 노력했다. 그 결과,창업 9년째인 99년,에네르쁘레트는 이제 300만달러의 자산과 4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또 이 회사는 러시아 군수산업부품의 70%를 조달할 정도로 확고한 위치를 다졌다.그리고 경상이익이 매출액의 30∼40%에 달하는 등 재무구조도 견실하다. 에네르쁘레트는 이르쿠츠크 지역 대학졸업생들이 선호하는 기업중 하나다. 높은 임금과 성장성,개방성이 이 회사의 매력이다.이 회사는 2년전 입사한이르쿠츠크 공대 졸업생의 능력을 높이 평가,지난해 부사장으로 전격 발탁해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벤처기업 열풍이 러시아에도상륙했다는 느낌을 줬다. 에네르쁘레트는 그동안 시베리아 탐방 중 돌아본 다른 기업들과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통역을 맡은 고려인 정추광씨는 “이렇게 컴퓨터가 많은 사무실은 처음 본다”고 할 정도로 사무실 풍경은 거의 선진국의 기업과 닮았다.또공장의 분위기도 활기와 함께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러시아의 다른 기업에서 목격했던 느슨한 기업 분위기와는 달랐다.또 사장과 전 임원이 취재에 응할 정도로 홍보에도 적극적이었다. 트보로고프 수석부사장은 “우리의 성공은 개인기업이었기에 가능했다”며“무사안일의 타성에 젖은 국영기업이 이런 약진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그의 말은 취재팀이 12월 3일 방문한 앙가르스크 의류(주)에서 그대로 확인됐다. 공기업에서 민영기업으로 전환한 기업들은 대규모 자본을 갖고 있었지만,과거의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해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르쿠츠크에서 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앙가르스크에 있는 이 회사는 지난 56년 국영기업으로 출발,최근 민영화됐다.이르쿠츠크 주정부는 안내하기 앞서 취재팀에게 “미국회사의 외자유치를 받아 미국,독일에서 올해 1월 최신설비를 들여왔다”며 “러시아 최고수준의 공장”이라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앙가르스크 의류 공장은 역시 동부 시베리아 최대의 의복공장답게 대규모였고 시설도 훌륭했다.한국의 의류공장 못지 않게 깨끗했고 첨단 자동화 설비도 갖췄다.여성인 코롤료바 스베틀라나 사장은 “우리의 여성 및 아동외투가올해 러시아 최우수상품으로 선정됐다”며 “설비교체후 생산능력이 4배나늘어났다”고 말했다.그러나 막상 회사측의 안내에 따라 공장안으로 들어가자 이완된 분위기가 느껴졌다.절반 이상의 설비가 놀고 있었고 종업원들은‘잡담중’이었다.코롤료바 사장은 “주문이 없어 이렇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최근 한국업체와 운동복 외주계약 협상을 벌였는데 그쪽에서 너무싼 가격을 요구해 결렬됐다”고 말했다. 취재팀이 “수출 건을 따내러 직원들이 외국으로 직접 돌아다니지는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그런 적 없다”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또 첨단설비인만큼 옷의 바느질 상태는 빈틈 없었지만 디자인은 영 엉성해서 우리시장에서는 한 벌도 안팔릴 것 같은 수준이었다.또 민영화과정에서 종업원들이 모두 주식을 받았지만 사장을 포함해 그 어느 누구도 회사 주가에 관심이없었다.회사 주가를 올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도록 유도하는 종업원 지주제의 취지를 미처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이 회사는 하드웨어만 민영기업이지 소프트웨어는 아직도 국영기업의때를 벗지 못한 셈이다. oosing@. * 러시아 최대 의약콤비나트. [우솔레시비르스코예 특별취재반] 이르쿠츠크 시내에서 차로 약 1시간 떨어진 중소도시 우솔레시비르스코예에는 러시아 최대의 의약콤비나트가 있다.창립 30주년을 맞는 이 의약콤비나트의 16개 공장에서는 50여종의 각종 화학제품과 의약재료를 생산하고 있다. 이 의약콤비나트의 외자유치를 담당하는 투자회사 ‘메지우스’의 고려인사장 김신범씨는 “옛 소련 때는 유럽 각국에 수출할 정도로 훌륭한 콤비나트였다”고 설명했다.그러나 그와 함께 이 콤비나트에 들어선 취재팀은 그만실망하고 말았다.공장 부지와 건물은 대규모인데 설비는 마치 우리의 60년대를 연상케 했다.가동이 중단된 몇군데 공장은 아예 폐허와 같았다. 미로치니코프 페도로비치 의약콤비나트 사장은 “설비가 이미 낙후된데다재료를 구입할 만한 운영자금도 모자라 생산량이 급감했다”며 “자금부족으로 최근 5년간 유럽에 비해 뒤떨어졌지만 외자만 유치되면 몇년내 따라 잡을수 있을 정도로 기초기술은 충분하다”고 자신했다.그는 “투자자에게는 콤비나트의 주식도 주겠다”고 덧붙였다. 우솔레 의약단지가 세계 수준을 자랑하는 생산품으로는 ‘페놀 페르비탈’을 우선 꼽을 수 있다.이는 두통 또는 수면제로 쓰이는 의약재료다.메지우스김사장은 “한국도 수교관계가 없을 때 국제기구를 통해 간접적으로 수입해썼으나 지금은 생산량이 줄어들어 질 낮은 중국산을 사다 쓸 것”이라고 말했다.생선이나 고기를 통조림으로 만들 때 쓰이는 ‘벤조아트’도 질이 높은것으로 전세계에 잘 알려져 있다고 한다. 미로치니코프 사장은 “외자유치 금액의 상당부분은 주로 의약 완성품 공장에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그 이유는 의약재료보다는 완성품이 자본회임기간이 짧고 수익성도 높기 때문이다.현재 10%에 불과한 의약 완성품 비중을 절반까지 올릴 방침이다. 그는 “북한측과 인삼약 제조에 관해 협상을 했으나 이미 결렬된 상태”라며 “콤비나트 산하 4개 공장이 현재 한국과도 모종의 협상을 진행중이지만공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노브이 로시스키'…자본주의 바람 타고 급부상. [이르쿠츠크·크라스노야르스크 특별취재반] 러시아에서는 요즘 ‘노브이로시스키(새로운 러시아인)’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자본주의에 발빠르게 적응해 돈을 번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노브이 로시스키 가운데는 짧은 시간에 엄청난 부를 축적한 경우도 많다.그래서인지 노브이 로시스키란 말속에는 비아냥의 뉘앙스도 섞여 있다.우리의졸부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한다면 노브이 로시스키는 남들보다 앞서 용감하게 자본주의에 적응해 새 사업을 벌였고 이를 통해서 돈을 벌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졸부와는 다르다.러시아의 ‘신흥세력’내지는 ‘신흥상류층’으로 번역하는것이 적당할 것이다. 러시아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즉 고려인 사회에서도 노브이 로시스키를 응용한 ‘노브이 카레이스키(새 고려인)’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취재팀은 극동과 동부 시베리아를 취재하면서 두명의 노브이 카레이스키를 만났다.이 두사람은 학문의 길을 걷다가 생존을 위해 사업에 뛰어들었고 지금은 모두 많은 재산을 모았다.역경을 기회로 바꾼 것이다. 김 보리스 예브게니예비치,한국 이름으로는 김신범이다.그의 신분은 투자회사 ‘메지우스’의 사장.러시아에서는 매우 생소한 종류의 회사이다.취재팀은 그를 지난해 11월 30일 이르쿠츠크 주정부청사에서 만났다.김사장은 우리의 우솔레시비르스코예 의약단지 취재를 안내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이 의약단지에 대한 투자사업은 모두 그가 총괄하고 있었다. 김사장은 이르쿠츠크 의대 출신의 의사다.러시아 용어로는 의학중박사(의학석사).병원 외과의사와 의학연구소 연구원 등 정상적인 길을 가던 그는 91년구소련 붕괴로 연구소가 문을 닫으면서 졸지에 실업자 신세가 됐다.김사장은 이 때 일회용 주사기,수술장갑 등 수술에 필요한 의약품을 수입,판매하는개인회사를 차려 큰 돈을 벌었다.그리고 96년 투자회사를 차렸다.김사장은겉보기에도 재력이 있어 보였다.그는 질 좋은 무스탕에 진갈색 렌즈 안경을쓰고 있었다.그리고 5,6년 이상된 일본 중고차를 쓰는 러시아 사람들과는 달리,그는 국산 쏘나타를 탔다. 김 사장은 “생활수준이 이 지역에서 최상위급”이라면서도 의학도로서의생활에 미련이 남아있다고 말했다.김 사장은 “사업이 마음에 든다고는 못하지만 중요한 것은 의학,약품을 떠나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말했다.그는 사업차 서울에도 자주 들른다고 했다. 이에 앞서 26일 만났던 고가이 보리스는 벤처회사를 창업했다.아직 큰 돈은못벌었지만 석유시추공을 효과적으로 청소하는 기술을 자체 개발해 전도가유망하다.고가이에 붙은 ‘가이’자(字)는 중앙아시아 출신 고려인들이 흔히자신의 성 뒤에 붙여 러시아식으로 작명하는 접미사다. 카자흐스탄에서 출생한 고가이 사장도 66년 톰스크 공대를 졸업한 뒤 크라스노야르스크 석탄기술연구소에서 근무했으나 구소련 붕괴의 격동속에서 연구프로젝트가 취소되면서 연구소를 나왔다.그는 처음에는 이 연구소 출신 몇몇과 동업,목재 등을 수출하고 한국산 직물을 수입하는 무역업을 했으나 자금사정으로 그만뒀다.지금은 ‘시브레’란 엔지니어링 회사를 차려 자체 기술을 판매하는 한편 크라스노야르스크의 여러 연구소들이 창출해낸 성과들을실제 산업에 적용하도록 중개하는 일도 하고 있다.일종의 벤처캐피탈이다. 고가이 사장은 공익사업도 시작,‘국경없는 어린이(Boundless Children)’이란 인터넷 홈페이지를 제작했다.“크라스노야르스크주의 잠재력을 세계 어린이에게 알리고 싶었다”고 그는 말했다.고가이 사장은 인터넷 마인드와 영어실력으로 무장한 지식형 노브이 카레이스키인 셈이다.고가이 사장은 “할아버지가 연해주에 살면서 사업차 한국에 자주 왕래하다 6·25전쟁이 나면서소식이 끊겼다”며 “얼마전 할아버지의 성함을 잡지에서 봤는데 장남 이름을 아버지 이름과 똑같이 지어놨다”고 말했다.
  • [역사를 바꾼 정상회담] (5)브란트 슈토프 회담

    *70년 동·서독 정상회담. “직접 회담을 통해 양쪽의 심각한 견해차를 확인했다.에르푸르트는 시작일뿐이며 2차회담을 갖는 것 이상의 목표는 세우지 않았다” 1970년 3월19일 동독의 접경도시 에르푸르트에서 역사적인 동서독 정상회담을 가진 뒤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이 서독으로 돌아와 가진 기자회견에서 던진 첫마디다.그는 이 자리에서 통일에 대한 환상없이 침착하게 긴장을 제거하고 협력의 가능성을 모색해 나가겠다며 ‘거짓된 희망’을 경고했다. 1945년 종전이후 25년만에 열린 정상회담은 긴장완화를 위한 대외적 여건변화를 동서독이 적극 활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1969년은 2차대전 종전후지속돼온 동서간 냉전구조에 처음으로 변화가 일어난 해였다.미국과 소련간전략무기감축조약(SALT I) 협상이 시작됐고 나토도 바르샤바조약기구에 상호균형감군협정을 제안했다.3월 동서화해를 추구해왔던 하이네만의 서독 대통령 취임,4월 서독의 ‘동독 국가승인’ 방침이 발표됐다.10월 ‘동방정책’을 제창한 빌리 브란트 총리의 사민당 연립정부가 출범했다.브란트 총리는취임연설에서 “서독 정부에 의한 동독의 국제법상 승인은 고려될 수 없지만독일에는 두개의 국가가 존재하며 둘은 외국이 아니라 특수한 관계에 있을뿐”이라고 밝혔다. ‘두개의 독일 인정 발언’은 동독을 소련의 위성국가로,‘비합법적’국가로 간주 동독을 승인하는 국가와는 외교관계 단절까지 불사하는 ‘할슈타인원칙’에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야당은 즉각 반(反)통일노선,분단고착화,심지어 ‘매국행위’라며 비난했다.반면 동독은 두달 뒤인 12월 서독에 무력사용·위협 포기,외교관계 수립 등을 요구,정상회담의 계기를 마련했다. 브란트는 동독이 국제법상 승인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어떤 대안을 제시하기보다 직접 동독총리를 만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 70년 1월 빌리 슈토프 동독총리 앞으로 정상회담을 제의하는 서한을 전달했다.슈토프도 이에 즉각 합의했다.양측은 곧바로 실무접촉에 들어갔고 4차례의 실무접촉과정에서의제가 아닌 회담장소가 최대의 난제로 떠올랐다.서독은 브란트 총리가 서베를린을 거쳐 동베를린으로 가길 원했고 동독은 서독 정상의 베를린 장벽통과라는 상징성 때문에 이를 거부했다.결국 제3의 장소인 동독의 에르푸르트로합의했다. 3월19일 브란트가 탄 기차가 에르푸르트 역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동독 국민들이 열광적으로 그를 환영했다.숙소인 ‘에르푸르트 호프 호텔’까지 몰려와 환호하는 군중앞에 나서 이들을 진정시키던 브란트의 모습을 지켜보는수행원들 눈엔 눈물이 고였다. 회담장 밖의 분위기와는 달리 회담장안은 냉랭했다.동독은 군비감축, 유엔동시가입,국제법상 동등한 관계수립 등 7개항을 요구했다.서독은 동·서독은서로 외국이 아니며 양측의 선린우호관계의 제도화를 위해 노력한다등 6개항을 제시했다.양쪽은 각자의 입장만 확인한 뒤 5월21일 서독의 카셀에서 2차회담을 재개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만 발표하고 헤어졌다.두달뒤 카셀 2차회담도 양쪽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1차때처럼공동성명도 발표하지 못했다. 가시적인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정상회담을 계기로 양쪽은 공존의 필요성을 공감했다.실무접촉은 계속 돼 기본조약이 체결된 72년 12월21일까지 70여차례나 열렸다.73년 9월 유엔동시가입,74년 3월 상호대표부개설로 이어졌다. 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90년 10월 통일때까지 양독은 9차례의 정상회담을 가졌다.‘조금씩 가까워짐으로써 변화를 촉발한다’는 브란트의 접근이 결실을 맺었다. 김균미기자 kmkim@. . *브란트 당시 서독총리. 인류평화·공존 철학속에 동방정책을 싹틔운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는옛 동서독인을 막론하고 ‘통일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1913년 12월18일 북부 독일의 소도시 뤼베크의 노동자 가정에서 소비조합여점원의 사생아로 태어났다.사회당원인 외할아버지를 ‘아빠’라 부르며 성장한 그는 17세때 독일사회민주당 당원이 돼 반나치 청년운동에 가담했다. 히틀러 집권후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노르웨이로 망명,종전때까지 그곳에서 활동했다. 49년 연방의회 베를린 시의원으로 독일 정계에 입문한 뒤 15년만인 64년 당수로 선출된다.69년 자민당과 제휴,전후 최초의 사민당 정권을 창출하고 총리에 올라 ‘동방정책’을 밀고 나갔다.동서독 정상회담 개최등 공로로 71년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보좌관이 동독 스파이로 밝혀지면서 74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87년 사민당 당수직 사임으로 정계에서 물러난 그는 사회주의인터내셔널(SI) 의장직을 6회 연임하면서 국제정의 실현과 인권신장에 앞장섰다.92년 10월8일 운명했다. *슈토프 당시 동독총리. 빌리 브란트의 상대였던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는 1989년 거세게 전개됐던반정부 시위에 밀려 사임할 때까지 에리히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 치하의 마지막 총리로 일했다. 1914년 7월9일 베를린 출생인 그는 벽돌공과 기술자,건축설계사 등으로 일했다.그는 동독의 내무·국방장관 등을 비롯해 공산당과 행정부에서 요직을두루 역임했다.70년 1차 정상회담직후 브란트 서독 총리로부터 ‘확고하고경직된 견해를 가진 정치가로 다루기 매우 어려운 회담 상대’로 불리웠다. 89년 10월18일 호네커 실각으로 함께 사임했다.사임하고 이틀 뒤 여행규제가 풀리면서 동독인들의 대탈출극이 벌어졌다.독일이 통일된지 1년만인 91년 60년대 베를린 장벽과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는 동독민들에 대한 사살명령을 내린 것과 관련된 혐의로 구속됐다.92년 이와 관련 재판을 받고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석방됐다. 독일 정부는 99년 4월19일 그의 사망소식을 발표했다.사망 원인은 공표되지 않았다. 김균미기자
  • 푸틴 러시아 2代대통령 취임

    [모스크바 연합] 블라디미르 푸틴(47) 러시아 대통령 당선자가 7일 크렘린궁 안드레이홀에서 러시아 제 2대 대통령으로 공식 취임했다. 푸틴 새 대통령은 이날 마라트 바그라이 헌법재판소장이 지켜보는 앞에서러시아 헌법 위에 오른손을 얹고 헌법 제82조에 규정된 대통령선서를 마침으로써 새 대통령이 됐다. ‘강력한 러시아 재건’을 내세운 푸틴 새 대통령은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과 다극화 세계 구축이라는 두가지 주요 목표 달성을 위한 자신의 정책을 펴나간다. 이날 취임식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소련 대통령과 보리스 옐친 전대통령이 참석,환영의 말을 건넸다. 푸틴 대통령은 취임식을 마친 뒤 크렘린 성벽에 마련된 무명용사의 묘에 헌화했다.
  • [각료 에세이] 열린 마음으로/ 국가안보와 ‘노블리스 오블리제’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되고 독일이 통일되었을 때 전 세계는 냉전종식과 함께 오직 평화만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그러나 그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갔다. 국지적 분쟁은 오히려 증가했고 지금 이 시각에도 체첸 등 무려 77개 지역이 불타고 있다.더욱이 한반도는 세계 유일의 냉전지대로서 남북대치상황이 언제 해소될지 예측하기 어려우며 냉전 종식으로 통일이 된다 해도 주변 4강의틈바구니 속에서 안보상황을 낙관하기 어렵다. 안보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우리에게 절대 중요한 것은 국가안보에 대한 확고한 보장이다.역사가들은 우리나라가 931회의 외침을 받았다고 말한다.따지고 보면 최근 100년 동안에만도 1894년 청일전쟁을 비롯해 러일,중일,태평양전쟁,6·25전쟁 등 다섯 차례의 참혹한 전쟁을 겪어야 했다.왜 우리 민족은이토록 엄청난 수난을 반복해서 겪어야만 했는가? 그것은 나라를 스스로의힘으로 지키겠다는 자위정신,상무정신(尙武精神)대신 주변 강대국에 의존하려는 사대정신(事大精神)에 젖어 스스로 지킬 힘을 키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강자도 없고 국가이익 앞에 영원한 적도,우방도 없다는 단순한 진리를 깨닫지 못한 결과이다.평화는 결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오로지 스스로 지킬 ‘힘’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여기서 간과해서 안될 것은 물리적 힘의 원천은 정신력,곧 ‘국민정신’이라는 것이다.영국의 기사도 정신,미국의 프론티어 정신,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이스라엘의시오니즘 등 강한 국민정신을 가진 나라는 영토의 크고 작음을 떠나 외침을막고 강한 나라로 발전하여 왔다.그리고 이들 국민정신의 바탕에는 예외 없이 지도층의 솔선수범,즉 ‘노블리스 오블리제’정신이 깔려있다.지도층의솔선수범 없는 국민정신의 결집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의 명망 있는 지도층 자제가 입학하는 이튼 칼리지 졸업생 중 무려 2,000여명이 1,2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고 엘리자베스 여왕의 차남 앤드루왕자는 포클랜드전쟁시 위험한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6·25전쟁 중 미국은 지도층 자제 140여명이 참전하여 30여명이 죽거나 부상당하였으며 특히 당시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밴플리트 장군은 두 아들을 그가 지휘하던 6·25전쟁터에서 잃었고,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도 낙동강전투에 참전하였다.또한중국의 모택동도 아들을 6·25전쟁터에서 잃었는데 ‘내 아들의 시신은 제일 마지막에 찾아 오라’고 지시,결국 포기케 했다고 한다.이렇듯 참전국 지도자들의 숙연한 일화는 있어도 정작 우리 나라 지도층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통계에 의하면 아직도 우리나라 지도층의 병역 이행률은 국민 평균율에 훨씬 못미친다고 한다.‘노블리스’(명예)만 있고 ‘오블리제’(의무)가 없는국가의 미래는 결코 밝다고 할 수 없다.격동의 21세기를 맞이하면서,우리 나라는 우리의 힘으로 지킨다는 국민정신과 지도층의 솔선수범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최근 병역을 면제받고도 재검을 신청하여 입대하는가 하면 병역을 필하고도 다시 입대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어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국민적 본보기가 될 값지고 소중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趙成台 국방장관
  • [대한광장] 김대중과 김정일

    6월의 남북 정상회담이 역사적인 기록이 될 것이냐,아니면 정치적인 이벤트로 끝날 것이냐? 한국은 물론 세계적인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이슈이다.그것은 21세기 벽두에 이 지구의 ‘마지막 이념의 철조망’이 제거되는 단초가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한국의 씨줄 38도선에 그어진 철조망이 치워졌을 때,진정한 지구의 평화가 시작되는 것이다.독일은 브란덴부르크의 시멘트 벽이붕괴되면서 동서독 이념의 대결이 끝났다.그 벽을 허무는 단초는 70년 3월동·서독의 수상,브란트와 슈토프의 악수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새천년 6월의 남북한 집권자 김대중과 김정일의 포옹이 과연 현실화될 것인가? 이제 남한의 ‘3김시대’는 가고 남북한 책임자 김대중과 김정일의 ‘2김시대’가 오는 것 같다.김대중 정부의 일관된 ‘햇볕정책’이 베를린선언으로 절정에 이른 느낌이다.그러나 국내외의 언론은 갑론을박을 하고 있다. 역시 긍정론과 부정론이다.긍정론 쪽에서는 이번 정상회담은 과거와는 달리경제가 초점이며,특히 경제협력 문제에서 남북한 당사자가 공감하고 있다는점이 특기할 만하다고 주장한다.부정론 쪽에선 역시 북한은 조금도 변하지않았으며,달러를 더 훑어내기 위한 눈가림이라고 손을 내젓고 있다. 어쨌든 6월까지는 ‘잠못 이루는 밤’이 되지 않을 수 없다.서울과 평양 뿐이랴.전세계 해외동포들도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특히 고령의 월남민과 이산가족들의 가슴은 숯검정으로 타들어갈 것이다.그러나 좀더 냉정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6월 회담에 대해 몇가지를 상정해볼 수가 있을 것이다. 첫째,외부적인 세계판도의 시각변화이다.한반도의 주변강국은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지 않았다.통일이 될 경우,남북한의 막강한 군사력은 오히려 주변강국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판단을 배제하지 않았다.남북한을 합쳐 약 140만명의 군대와 북한의 핵이 주변강국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계산이다.중국과 러시아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제는 시각이 바뀌어졌다.극한적 ‘전쟁포고’ 아니고는 미국 등누구도 북한을 억제하지 못했다.마지막 선택이 한국의 ‘햇볕정책’이라는귀결이다.외부의 어떠한 물리적인 제재방법보다는 남북한 당사자가 ‘민족적가슴’으로 해결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주변강국의 정책변화이다.그것은 오히려 한반도가 대화하고 통일함으로써 전쟁억지가 될 것이며 아시아에 평화정착이 이뤄질 것이라는 점이다.한반도의 화합으로 북한의 경제발전이 촉진되고 주변국들의 경제부담도 덜어질 것이다.핵개발도 자연히 중단될 것이란시각이다. 둘째,내부적으로 남북한 당국의 정치적 변화이다.김일성 사후,김정일 체제로 접어들면서 군사우위 정책보다는 경제적 개발정책으로 변화되기 시작한것이다.소련과 동구권 몰락,중국 등 사회주의 맹방들의 개방개혁 바람은 북한이라고 언제까지 손으로 가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김정일이 등극하면서 만경대학원 동창생을 중심으로 해외유학파 경제관료를 대거 기용해 부분적인대외개방정책으로 돌아서기 시작한 것이다.경제특구 지정,금강산유람선 개통,KEDO 허용 등이 이전 김일성시대의 경직성과는 분명히 달라진 유연성이다. 과거와 같은 핵 카드만으로는 한계라는 점을 인식하고,남한의 ‘햇볕정책’이 군사정권시절과 같은 정치용이 아니라는 점도 일부 공감한 것 같다.우선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국민들이 급증하고 있는 현실에서 언제까지 억압하고만 있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그렇다고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가는 동구권처럼 몰락한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때문에 차선책은 군비감축을위해서라도 평화공존이라는 협상테이블에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것이다.점진적으로 고려연방제도 생각해보자는 계산도 있을 것이다. 셋째,한반도의 이러한 내외부적인 변화기류를 놓고 볼 때,이번 6월은 과거와는 분명히 다른 정상회담이 될 것이다.몇차례 거듭되고 있는 차관급 만남에서도 이러한 변화의 조짐은 전달되고 있다.이번 회담에서는 ‘베를린선언’에서 강조한 사회간접자본 확충과 농업구조개선 등 경제협력 부문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논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7·4공동성명’에서부터 ‘남북한기본합의서’에 이르기까지 완패를 해온 민족문제가 민족전쟁 이전의 6월초에 성취돼 새천년 6월25일에는 ‘전쟁기념일’이 아닌 ‘평화기념일’로전환될 수 있을 것인가.김대중과 김정일의 뜨거운 가슴이 기대된다. [신상성 용인대교수·
  • 美언론보호위원회 선정…세계 ‘언론 10적’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미국의 비영리 언론공익단체인 ‘언론보호위원회’(CPJ)는 1일 세계언론자유에 커다란 제약을 가하고 있는 인물 10명을 선정,‘언론 10적’으로 발표했다. CPJ가 선정한 언론 10적에는 이웃나라에서는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이 포함돼 눈길을 끌었으며 최근 경제위기에서 탈출하는데 힘쓴 모하마드 마히티르말레이시아 총리도 선정돼 국가발전과 언론발전의 묘한 함수관계를 보여줬다. 또 나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지네 알압딘 벤 알리 튀니지대통령 등도 옛 소련을 연상시키는 수준의 언론탄압을 이유로 선정됐다. 특히 호세 에두아르도 산토스 앙골라 대통령,시에라리온 포대이 산코 혁명연합전선 지도자 역시 언론인의 학살과 불법체포에 앞장선 혐의로 악명을 얻었다. 기존부터 단골손님이던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아야툴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 지도자,유고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여전히 잔류됐으며,최근 헌법을 무시하고 3선을 노린 알베르토 후지모리 페루 대통령도 악명을 얻었다. hay@
  • [역사를 바꾼 정상회담](4)사다트 베긴 회담

    *77년 이집트·이스라엘 정상회담. “20세기 가장 위대한 외교적 승리의 하나이자 역사적 이벤트였다.우리는전혀 새로운 평화에의 여정을 창조했다” 1977년 11월19일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이스라엘 방문에 외무장관으로 동행한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전 UN사무총장은 당시를 이같이 회상했다. 사다트의 이스라엘 방문 및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의 만남으로 촉발된 화해 기류는 누구도 녹일 수 없을 듯하던 중동의 얼음장 하나를 쩍 갈랐다.양국 정상간 대면은 최초의 평화조약 체결로 이어져 중동평화 여정에 거대한 초석을 놓게 됐다. 애초에 사정은 결코 좋지 않았다.4차례 전쟁을 통해 국토를 강탈해간 이스라엘에 아랍권은 유혈투쟁을 불사해왔다.이집트 역시 67년 전투에서 이스라엘에 시나이반도를 뺏겼고 73년 이를 둘러싸고 또한차례 격전에 휘말리는 동안 감정이 상할대로 상해 있었다.설상가상으로 이스라엘에선 초강경 테러리스트 출신 베긴 정권의 탄생으로 세계가 경악했다. 그러나 한편 피비린내 가시지 않는 30년 무력충돌에 대한 넌더리가 중동 민중들 사이에 확산되고 있었다.국제사회의 압력도 날로 거세갔다.이스라엘은무력점령한 땅을 반환하라는 UN 결의안 242조를 마냥 무시할수 만은 없었으며 극도의 민생 피폐상에 시달려온 이집트에는 미국이 ‘평화분담금’ 명목으로 제시해온 경제원조가 절실했다.이 시점에서 사다트는 결단을 내렸다.77년 자국 의회에서 “중동평화를 위해서는 어디든 간다.이스라엘 의회까지라도”라고 연설,강한 평화의지를 피력한 것.여기에 이스라엘이 즉각 초청장을 보내 화답했다.그리고 사다트가 무조건 이를 수락함으로써 아랍지도자 최초의 역사적인 이스라엘 방문은 이뤄졌다. 이 자리에서 양국 정상은 3차례 회담에도 불구,평화조약이 아닌 “평화를원하며 대화를 계속하자” 정도의 원론적 합의성명서 한장을 달랑 내는데 그쳤다.30년간 반대편을 보고 달려온 양국간 입장 차는 클 수 밖에 없었다.베긴 총리는 평화보장을 전제로 한 시나이반도 반환은 받아들였으나 요르단강서안 등 팔레스타인 지위와 관련된 사항에는 한치도 양보할수 없다고 버텼다.양국은 향후 1년여를 무수한 중재회담으로 소모하고서도 접점을 찾지 못해미국의 개입을 불러들여야 했다.78년 9월 카터 미 대통령은 양국 정상을 캠프 데이비드로 불러 배수의 진을 친 상태에서 협상조율에 들어갔다.2주만인17일 천신만고 끝에 역사적인 합의문이 엮어져나왔다.골격은 ▲시나이 반도의 이집트 반환 및 이스라엘-이집트 수교 ▲5년내 요르단강 서안 및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자치 보장 원칙 등 크게 두가지였다.협정이 체결되기까지는 그후로도 반년이 흘러야 했다. 어렵사리 싹튼 중동평화였지만 부작용 역시 상상 이상이었다.양국 모두 국내의 거센 반발에 맞닥뜨렸으며 사다트는 동포를 버린 배신자로 아랍권에 낙인찍혀 리비아,시리아 등으로부터 단교당하기도 했다.미국을 불러들인 반쪽정상회담의 한계 등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의 실제 자치권 회복까지는 문서에약속된 몇배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그러나 이런 문제점들이 이스라엘-이집트 협정의 의미 자체를 희석할 수는없다.미국이 중도개입했으나 협상의 촉발점이 된 사다트의 예루살렘 방문이상당히 독자적 행보였다는 점에서 이는 중동문제를 자력으로 인식한 최초의사례가 아닐 수 없다.유대-아랍간 30년 적대관계를 청산한 이 회담이 없었다면 93년 오슬로협정,98년 와이리버협정 등 향후 중동평화의 모든 괄목할 만한 성과들도 나올 수 없었다.78년 사다트와 베긴은 그 공로로 나란히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그러나 81년 사다트는 과격파 총탄에 희생돼 중동평화의 첫 순교자가 됐다. 손정숙기자 jssohn@. *사다트 당시 이집트 대통령. 반식민,반봉건주의자에서 중동평화 개척자로.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의 일생은 드라마틱하기까지 하다. 1918년 영국 통치하 이집트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카이로 사관학교에 입교,정치 역정을 시작한다.영국 통치에 저항한 자란,터키 오토만 왕정을 무너뜨린 케멜 아타투르크,비폭력운동의 간디,그리고 히틀러로부터 영향을받았다. 38년 졸업과 함께 배치된 후방에서 후일 이집트 초대대통령이 된 아브델 나세르를 만나 정치적 동지가 된다.52년 나세르가 이끄는 비밀조직이 왕정을무너뜨리고 집권하자 그 밑에서 18년간 홍보장관,집권당 사무총장,국회의장,총리 등을 지내다 70년 나세르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물려받았다. 72년 소련군 추방,73년 대 이스라엘 반격 등으로 외교적 성과를 쌓아가던중 77년 이스라엘과의 평화계획을 제시,전세계의 관심권 안으로 부상했다.그러나 이에 대한 내부 반발을 철권통치로 억누르다 81년 자국군 내부 회교원리주의자 총탄에 숨졌다. * 베긴 당시 이스라엘 총리. 중동평화의 또다른 축 메나헴 베긴 전 이스라엘 총리는 한때 시오니스트 무장단체를 이끌며 테러를 자행,목에 현상금이 걸렸던 인물. 1913년 옛 소련(지금의 벨라루시) 브레스트-리토브스크에서 목재상의 아들로 태어나 바르샤바 법대를 졸업했다.2차대전 홀로코스트에 부모형제를 잃은 뒤 과격분자로 변신,예루살렘의 영국군 사령부 숙소였던 한 호텔을 폭격,100여명을 사망케 해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혔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 원내투쟁으로 선회,20여년간 극우 야당을 이끌다가 73년 리쿠드당을 창당했으며 77년 만인의 예상을 뒤엎고 총리로당선됐다. 그는 78년 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 체결로 중동에 평화를 부른 주역으로 각광을 받았지만 81년 이라크 핵수로 폭격,82년 레바논 침략 등으로 강경 이미지를 재확인시키며 국제사회에서 또다시 비난을 사기도 했다.그러나 83년 자진 은퇴한 뒤에는 92년 사망 때까지 정치를 등지고 칩거했다. 손정숙기자
  • 美 에이즈 ‘안보위협 질병’ 선포

    [워싱턴 연합] 인류의 천형 에이즈가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협할 수 있는 질병으로 선포됐다. 빌 클린턴 행정부는 에이즈를 외국 정부를 전복시키고 인종전쟁을 촉발하며세계의 자유시장 체제와 민주주의 구축에 쏟아부은 지난 수십년의 노력을수포로 돌릴 수 있는 미국 국가안보의 위협으로 공식 지정했다고 워싱턴 포스트가 30일 보도했다. 질병이 미국 국가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선포된 것은 처음으로 이는 에이즈의 국제적 확산이 재앙의 지경에 이르렀다는 클린턴 행정부의 판단에 따른것이다. 이에 따라 전염병과의 전쟁에는 한번도 관여한 바 없는 국가안전보장위원회가 선봉에 나서 정부의 기존 에이즈대책에 대한 긴급 재점검에 들어갔다. 클린턴 행정부는 특히 해외 에이즈 퇴치 지원 예산을 두 배로 늘려 2억5,400만달러를 요구하고 지난 2월8일 16개 정부기관이 참여하는 범정부 실무작업반을 백악관에 설치,에이즈 퇴치를 위한 ‘국제적 노력을 확산시킬 광범위한방안들을 개발하도록’ 지시했으며 작업반은 5월중으로 종합대책안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미국의 새로운 에이즈 대책은 지난해 에이즈가 아프리카를 비롯한 외국 정부와 사회에 미칠 폭넓은 영향들을 고찰한 미국 정보기관 보고서들로 촉발됐지만 정작 이 정책의 입안자들은 대책이 더디며 위기의 규모에 걸맞지 않다고 비판하고 있다. 지난 1월 작성된 국가정보평가서는 아프리카 남반부 인구의 4분의1이 에이즈로 사망할 것으로 전망했다. 보고서는 현 추세라면 인도를 비롯한 남아시아와 옛 소련도 이와 유사하거나 오히려 더 큰 재앙이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고 2010년에는 아시아의 에이즈 바이러스(HIV) 감염자 수가 아프리카를 앞지를 것으로 내다봤다.
  • 교황, 20세기 순교자 선정

    [바티칸시티 AFP AP 연합]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마틴 루터 킹 목사, 알도모로 전 이탈리아 총리, 오스카르 로메로 엘살바도르 대주교 등을 20세기의계파를 초월한 기독교 순교자로 선정하고 이들의 업적을 치하한다. 로마 교황청은 오는 7일 로마시대 원형극장으로 살상의 상징이기도 한 콜로세움에서 특별 의식을 거행하고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기독교 순교자 일부를선정해 발표할 예정이다. 이날 발표될 순교자 중에는 비폭력 흑인 민권운동가로 64년 노벨평화상을수상하고 68년 암살당한 킹 목사,78년 테러단체인 ‘붉은여단’에 의해 납치됐다가 살해된 이탈리아 기독민주당 출신 모로 총리,인권운동가 겸 해방신학자로 우파에 의해 암살된 로메로 대주교 등이 포함됐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구교,신교,그리스정교,영국국교회 등 종파를 초월해 20세기 기독교 순교자로 총 1만2,000명을 선정할 예정이며 전체 순교자 명단은올해말께 확정될 예정이다. 명단에는 구소련 전체주의, 나치즘,파시즘, 유럽공산주의 압제, 테러,세계각국 독재정권 등에 의한 희생자가 대거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가톨릭교는 선정작업의 책임을 가톨릭 역사가 안드레아 리카르디씨에게 맡겨 지난 5년 동안 자료 검토를 해왔다.
  • 베트남 통일 25주년/ (하)미국의 상처

    [워싱턴 최철호특파원] 어느 전쟁이나 그렇겠지만 미국에게 특히 베트남 전쟁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정신적·육체적 상처를 남긴 뼈아픈 전쟁이었다. 호치민의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린든 B.존슨이 군사개입을 시작한 베트남 전쟁은 엄청난 인적,물적 자원 동원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에게 잊지못할 상흔만 남겼다. 1955년 미군 고문단이 베트남 땅을 밟은 이래 65년 첫 전투병력이 들어가개전,75년 4월29일 미대사관철수 때까지 1,500억달러를 쏟아부었고 5만8,000명이 희생됐건만 결국 패전의 쓴맛을 봐야 했다. 남북전쟁이 미국의 완전한 통일체 국가형성에 기여하고 세계 1·2차 대전이미국에 부를 가져다 주었다면 베트남전은 정치권력의 부정적 속성과 지방정부의 중앙통제 반발,군산복합체의 상업주의,이에 따른 국내여론 분열과 충돌등 미국의 환부를 여지없이 드러낸 전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미국이 받은 상처 가운데 가장 큰 것은 1,2차대전 승전국으로 미국 제일주의를 과시하던 미국인들의 자존심이 이후 걸프전 승전때까지 고개를 숙여야만 했던 것이라고 역사가 피터 쿠즈니크는 지적했다. 54년 베트남군은 디엔비엔푸 지역 침공으로 프랑스군 3,000명,베트남군 8,000명의 전사자를 내고 제네바조약을 끝으로 식민지배를 종식시켰다.하지만이때 맺은 조약은 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또 하나의 현실,즉 냉전 대결장으로인도하고 있었다. 미국을 필두로 한 자유세계와 소련·중국이 중심이 된 공산주의와의 갈등은한반도의 38선 같은 ‘이념의 국경’ 북위 17도선을 그었고, 한국전에서 끝장을 보지 못한 냉전 강대국들은 베트남에서 재대결을 준비해야 했다. 혁명의 대상인 남쪽으로의 진출을 위해 캄보디아를 통한 루트를 만든 뒤 미군을 공격한 북베트남의 호치민을 단죄한다는 명분에 4명의 미국 대통령은울창한 열대우림 땅속으로 숨은 ‘보이지 않는 적’ 베트콩과 숨바꼭질하며베트남 전쟁이라는 끝없는 수렁으로 빠져들었던 것이다.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를 주창했던 드와이트 아이젠아워,프론티어 주창으로 미국의 힘을 적극적으로 내세웠던 존 F.케네디,그의피살로 대권을 인수받은 뒤 차기를 노린 린든 B.존슨,종전이란 국민들과의 약속을 어겨가며 확전에 열을 올렸던 리처드 닉슨 대통령등 역대 4명의 대통령은 그들의 미국내 업적에도 불구하고 모두 베트남전으로 비난받아야 했다. 미 대통령들은 이전과는 다른 형태의 베트남전쟁에 M16 자동소총,신형제트전투기,각종 장갑차량,‘에이전트 오렌지’ 고엽제 등 물량공세로 대응했지만 결과는 전례없는 미군의 인명피해에 불과했다.미국은 베트남전장과 국내반전여론이라는 2중 전선에 시달리면서 전략부재를 드러내야 했다. 존슨은 매일 아침 신문과 TV화면을 통해 죽어나가는 미군 모습이 생생하게전달되는데도 불구하고 승전 홍보를 강조하다 여론에 부딪혀 “차기 대권도전을 포기한다”고 선언해야 했다.닉슨은 비등한 반전 여론 와중에 폭로된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했다. 반전 여론은 70년 오하이오주 켄트대학의 반전론자 학생 4명이 경찰총에 숨진 사건으로 정점에 달했고 미국은 결국 75년 4월 베트남 철수와 함께 씁쓸하게 고향으로 돌아왔다. hay@. *한국에 남긴 교훈. 한국과 베트남은 서로 다른 정치적 이념으로 나라가 두 동강 나 전쟁을 치렀다는 점에서 닮은 꼴이다.베트남은 전쟁을 통해 통일을 이뤘지만 한국은여전히 북한과 대치중이다.통일된 지 25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이겪고 있는 각종 후유증은 한국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베트남은 인구 7,800만명중 전후 세대가 50%를 넘는다.이들은 돈에 대한 생각이나 의식구조가 전쟁을 겪은 기성세대와는 판이하게 달라 세대간 갈등이현안으로 떠오를 정도다.한국의 경우 전후세대가 인구의 80% 가량을 차지한다.올해로 종전 50년을 맞는 한국은 분단의 역사가 긴 만큼 세대간 인식의골도 깊다. 남북간 개발의 불균형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베트남은 뒤늦게 북부개발에 나섰지만 베트남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서 외국자본 유치도 난관에 부딪쳤다.남에서는 북부를 살리기 위해 남의 희생을 강요하고있다는 불만과 함께 남의 제한된 ‘번영’마저 잃을까 불안해한다. 호치민시(옛 사이공)를 중심으로 남부는 86년 경제개혁 정책을 표방하면서농촌에서 일자리를 찾아 몰려드는 사람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특히 97년아시아 경제위기 이후 경기가 악화되면서 이들은 순식간에 극빈층으로 추락했다.범죄와 마약,매춘 등 사회문제가 심각하다.교통망과 상하수도 시설등사회간접자본시설은 거의 갖춰져 있지 않다.남북간 경제격차는 날로 심화돼지난해 상반기 남부의 수출은 22% 증가한 반면,북부는 15% 감소했다. 상호불신과 감정의 앙금도 여전하다.북부인들은 전쟁통에 가족과 재산을 잃은 책임을 남부인에 돌리며 원망섞인 눈초리를 거둬들이지 않고 있다. 최근 중앙정부내 고위직에 남부인의 진출이 늘고 있지만 여전히 남부 출신이라는 꼬리표는 공직과 공기업에서 득이 되질 못한다. 한국의 경우 통일에 따른 경제적 손실에 대한 우려는 더욱 크다.베트남의교훈을 거울 삼아 남북의 균형개발과 이질감 해소 등 장기적인 민족화합 방안을 마련해야 할 때다. 김균미기자 kmkim@. *베트남 근대사 주요 일지. ◆1859 프랑스군 사이공 점령◆1930 베트남 공산당 결성◆459.2 베트남 민주공화국 독립선언◆45 9. 미·프랑스 연합군 베트남 진주◆54 제네바협정서 17도선 남북 분단◆55 남부에 미국지원 응오 딘디엠 정부 출범◆60 베트콩 월남민족해방전선 수립◆65 2 미국의 북폭개시,베트남전 시작. ◆68 9 호치민 사망◆73 1 파리 휴전협정 조인.3월 미군 마지막 철수◆75 4. 29 미대사관 철수◆75 4.30 월남 패망.통일◆76 7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건설◆86 6차전당대회서 도이머이 경제정책 도입◆92 12.22 한국과 수교◆95 7.12 미국과 수교
  • “中영토확장 혈안 아시아에 위협”

    [도쿄 교도 연합]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일본 도쿄도지사는 중국 지도자들이 영토확장에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에 중국은 아시아에 군사적 위협이라고 주장했다. 이시하라 도지사는 28일자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지적하고 “일본은 중국에 대해 위기를 느끼고 있으며 현재의 냉전은 과거의 냉전보다 더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구 소련이 없어진 후 중국은 영토 팽창주의를 믿고 있는 유일한 제국이다.일본이 이같은 영토팽창주의의 제물이 되면 이같은 추세는 아시아 전역에 퍼져 나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시하라는 이어 미국과 유럽은 물론 일본이 중국
  • [역사를 바꾼 정상회담](3)닉슨 마오쩌둥 회담

    *72년 美·中정상회담. 1972년 2월21일 아침 중국 베이징(北京) 수두(首都)공항.20여년동안 쌓인적대감을 버리고 2만5,000㎞를 날아 중국 대륙의 땅을 처음 밟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조금 어리둥절했다.황금시간대 생중계되는 미 TV를 통해‘세계 평화의 전도사’로 비쳐지던 자신의 이미지를 높여줄 베이징의 환영인파는 고사하고 환영 플래카드 하나 내걸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항에는 저우언라이(周恩來)총리의 환영인사와 의장대의 간단한 의전행사만 있었다.베이징 디아오위타이(釣魚臺) 영빈관을 향해 차량행렬이 지나갈때도 톈안먼(天安門) 광장과 베이징거리는 텅비어 있었다. 이날 오후 닉슨은 중난하이(中南海)로 마오쩌둥(毛澤東)을 만나러 갔다.약간 초췌한 모습의마오는 닉슨을 반갑게 맞았다.“반동집단이 미국과의 공식 접촉을 강력히 반대했다”며 환영에 신중했던 점을 설명한 마오는 “미 대선기간 내내 당신이 투표에서 이기리라고 확신하고 있었다”고 덕담을 건넸다.닉슨은 삭막한 첫 소감을 뒤로 한 채 “한 국가를 움직였고 세계를 변화시켰다”고 마오를 추켜세웠다. 미·중 정상 첫 회담은 이처럼 의례적인 만남에 불과했지만,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이후 처음으로 ‘죽의 장막’을 걷어젖히고 국제무대 복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닉슨이 만리장성 등을 둘러보는 동안 미·중 협상자들은 긴 시간의 비밀회의를 통해 타이완의 지위 등 중요한 외교적 사안을다듬었다.그 결과 2월 28일 미·중은 ‘상하이(上海)공동선언’을 통해 ▲영토와 주권의 상호존중 ▲상호불가침 ▲내정불간섭 ▲평등호혜 ▲평화공존 등 평화 5원칙을 천명한 뒤,관계 정상화 합의의 상징으로 팬더 한쌍과 사향소를 교환했다. 40년대 후반부터 국공내전 및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적대국이 된 미·중관계가 해빙되기 시작한 것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날로 커가는 소련의 영향력을 견제해야 한다는 공통의 이익분모를 갖고 있었기 때문.특히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베트남전쟁의 수렁에서 빠져 나오는 돌파구를 찾으려했다.중국은 50년대말 이념갈등과 69년 헤이룽장(黑龍江)성 전바오다오(珍寶島)의 중·소 무력충돌 사건 등으로 대(對)소련관계가 악화되면서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소련견제 카드로 활용하고자 했다. 두나라는 이전부터 관계정상화로 가는 수순을 차근차근 밟았다.71년 4월10일 베이징 공항에 도쿄발 루프트한자 비행기에서 낯선 미국인 15명이 내린게 첫 사례로 꼽히고 있다.이들은 중국을 공식 방문한 최초의 미국인들로 미·중관계를 복원 물꼬를 튼 ‘핑퐁외교’의 주역들이다.3월말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 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중이던 중국 대표팀이 미국 대표팀에 초청할 뜻을 전달하자,두차례 비밀 접촉끝에 전격 이뤄졌다.이후 미국은 20년넘게 지속돼온 대중국 무역금지 조치를 해제,유화적인 제스처를 보내면서 본격 대화에 나섰다.헨리 키신저 미 대통령 안보담당 보좌관이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저우 총리와 만났고 그해 7월 15일 닉슨이 72년 5월 이전에 중국을방문한다고 발표했다.이어 10월 중국은 유엔총회에서 회원국들의 압도적인지지를 받아 유엔 가입을 실현,타이완(臺灣)은 국제정치 무대에서 축출됐다. 김규환기자 khkim@. *막후협상 두 주역/ 키신저 당시 美안보담당 보좌관. 헨리 키신저 당시 미 대통령 안보담당 보좌관(77)은 데탕트(긴장완화)의 흐름을 주도하며 당대를 풍미한 국제외교가의 스타중 스타.안보담당 보좌관·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국장·국무장관 등 미 행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1923년 독일 퓌르트에서 태어난 그는 38년 미국으로 이주,뉴욕 시립대학 회계학과를 졸업했다.54년 하버드대학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교수로 활약하며 미국 방위연구계획을 입안한 주역이다. 아이젠하워·케네디·존슨 행정부를 거치며 안보문제 고문으로 활약한 키신저는 57년 ‘핵무기와 외교정책’을 출판,미국 전략정책의 최고 권위자로 떠올랐다. 68년 닉슨 대통령에 의해 안보담당 보좌관에 임명된 그는 중국·소련·베트남·중동 등지에서 데탕트 흐름을 추진,외교적 성공을 거두고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성사시켜 닉슨 행정부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부상했다.71년4월 핑퐁외교 이후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미·중관계 정상화를 이끌어내는막후 주역으로 활약했다.77년 국무장관직에서 물러난 뒤 국제고문·작가·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周恩來 당시 中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 당시 중국 총리는 외교부장을 겸임하며 20세기 중국의 가장 위대한 협상가로 꼽힌다.세부사항을 파악하는 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그는 실용적이고 친화력과 설득력이 있는 화술로 협상 당사자를 사로잡았다. 장쑤(江蘇)성 화이안(淮安)에서 출생한 저우는 근로 장학생으로 프랑스에유학하는 동안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평생을 공산주의자로 보내겠다고 결심했다. 27년4월 중국 공산당 정치국위원으로 선출된 그는 장정(34년10월∼35년10월)기간동안 당기구 통제권을 장악한 마오쩌둥(毛澤東)의 지도력을 보좌했다. 장정으로 공산당 근거지를 확보한 이후 국공내전 등의 협상테이블에서 우아하고 섬세한 화술로 협상에 임함으로써 탁월한 외교 협상가로서의 입지를 굳혔다.저우는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이후
  • 레닌탄생 130주년… 수백명 묘소 헌화

    수백명의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은 22일 블라디미르 레닌탄생 130주년을 맞아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있는 레닌 묘소에 헌화하고 그의 업적을 기렸다. 겐나디 주가노프 당수를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은 레닌의 일부 경제이론이 현재의 경제난국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주가노프 당수는 레닌이 재산을 집단농장과 개인 및 국가형태로 조화시킨신 경제정책을 수립,수개월만에 러시아경제를 복원시키는 등 그의 능력은 어느 때보다도 더욱 빛난다고 운집한 청중들에게 연설했다. 레닌이 20년대에 발표한 신경제정책(NEP)은 일부 사기업을 허용,1917년 볼셰비키 혁명과 이어 일어난 내란 이후 탄생한 구 소련 경제에 어느 정도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 1870년에 태어난 레닌은 1924년 53세로 사망,페테르부르크의 어머니 묘 옆에 묻히기를 바라는 본인의 뜻과는 달리 방부처리된 후 붉은 광장에 보관돼많은 사람들의 순례장소가 되어 왔다. 모스크바 AP 연합
  • [역사를 바꾼 정상회담](2)레이건‘고르비 정사회담

    *86년 美 - 蘇정상회담. 합의사항 하나없이 끝난 정상회담.그러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회담으로높이 평가받는 정상간 대좌가 있다.바로 1986년 10월 북구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열린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공산당 서기장 사이에 열린 정상회담이다. 레이건대통령은 당시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부르며 지구상에서 사라져야할 존재라고 규정한 ‘신냉전주의자’였다.레이건은 막강한 미국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5년간 1조 5,000억 달러의 방위예산을 투입,경제난으로 비틀거리는‘병든 북극곰’을 ‘무장해제’시키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레이캬비크회담에서 고르바초프는 재래무기와 단거리·중거리 핵무기의 감축을 제의하면서 그 대가로 레이건대통령이 추진하는 SDI(전략방위구상)의개발,배치를 중단해줄 것을 간청했다.SDI는 일명 ‘별들의 전쟁’으로 불리는 방위구상으로 소련으로부터 미국영토를 향해 발사되는 모든 전략핵무기를대기권 밖에서 포착해 모두 요격한다는 꿈같은 계획.파탄직전에놓인 소련의 경제력으로는 이 어마어마한 계획에 맞서 미국과 군비경쟁을 벌일수없다는 것을 고르비는 잘알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건은 완강했다.레이건은 SDI를 이용해 소련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내고 궁극적으로 핵무기를 포기케 만드는 카드로 활용한다는 구상을 갖고있었다.레이캬비크 정상회담은 레이건대통령이 SDI방위구상을 동원해 고르비에게 ‘미국과 더이상의 군비경쟁은 그만 두라’는 메시지를 분명히 깨우쳐준 결정적 계기가 됐다.결과적으로 양국은 본격적인 군축의 길로 들어서게됐다.바로 여기에 이 정상회담의 역사적 의미가 있다. 10월 10일 오후 1시30분.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부인 라이사 여사와 레이캬비크에 도착,아에로플로트 항공기 트랩을 내려왔다.고르비에 앞서 도착한 레이건은 낸시 여사를 대동하지 않았다.두 정상의 대변인들은 회담 내용 중간 발표를 하지 않는다는 사전 합의를 깨고 수시로 회담이 낙관적이라는 메시지를던졌다.그러나 11일부터 이어진 이틀간의 회담에서 두 정상은 어떠한 합의도 이루어내지 못했다. 앞서 1985년11월 미소는 제네바 정상회담에서 군축에 합의하지 못했다.따라서 이 회담에 거는 국제사회의 기대는 매우 컸다.고르바초프서기장이 SS-20등 서유럽을 겨냥한 중거리 미사일 배치를 일방적으로 중지하겠다는 등의전격적인 군축선언을 했기 때문에 회담 전 분위기는 낙관적이었다.고르바초프는 유럽에서 모든 중거리 미사일을 제거하자는 미국의 제의에 동의했고 향후 5년간 전략핵무기를 약 50%감축할 것을 제의했다.레이건도 호응했다. 문제는 SDI.고르비는 SDI를 최소한 10년간 실험실단계에서만 고정시키라고요구했지만 레이건 대통령은 SDI가 방어적 목적에서 개발되는 것이라며 이를끝내 거부했다.SDI구상의 목적은 소련내에 배치돼있는 모든 대륙간탄두미사일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라고 할수있다.결과적으로 고르비는 SDI의 위력앞에무력감을 느껴야했고 이는 이후 양국이 STARTⅡ(전략핵무기감축협정), INF(중거리 핵전력)감축협정 등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됐다. 김수정기자 crystal@
  • [역사를 바꾼 정상회담](1)부시‘고르비 정상회담

    세계 현대사의 굵은 매듭에는 어김없이 그 시대,세계를 이끌어온 지도자들의 역사적인 대좌가 있었다.살벌한 군비경쟁속에 인류를 이념의 틀에 얽어맸던 냉전체제도 강대국 정상들의 결단에 의한 회담으로 무너졌다.관계가 소원하기만 했던 나라들의 해빙(解氷)무드 역시 지도자들의 ‘만남’을 필요로했다.정상간의 대화는 묵었던 현안을 해소할 수 있는 장(場)이 될 수 있음을역사는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6월12일의 한반도 분단 이후 첫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새 천년의 기억 한편에 물러서 있는 세기의 정상회담을 돌아보고그 의미를 되짚어본다. *89년 美·蘇정상회담.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4주 뒤인 1989년 12월2일,지중해의 휴양지 몰타해변.정박중인 소련 순양함 ‘막심 고리키’호의 카드놀이방을 개조해 임시로 만든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조지 부시 미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고르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마주앉았다.주위에는 소련의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과 미국의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백악관 안보보좌관 등이 배석했다. “얘기가 잘 안되면 책상을 발길로 걷어 찰 수 있을 정도로 너무 좁군요.”수많은 취재진 앞에서 고르비는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를 이끌어 갔다. “정상회담 얘기가 나가자 동유럽 등 지구촌 곳곳에서 커다란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자주 만나야 할 것 같습니다.” “맞아요.오늘 만남도 오래전부터 이어진 대화의 연장선 같습니다.” 헝가리의 국경 개방,베를린 장벽 붕괴 등 냉전의 벽들이 무너지는 소용돌이속에서 구질서의 양대 축인 미·소의 정상은 이렇게 만났다. 부시 대통령이취임한 이후 10월 말까지 철저히 비밀에 부치며 추진해 온 정상회담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성공한다면 세계는 더욱 좋아질 것입니다.” 부시는 참모진과의 협의를 거쳐 준비한 양국 무역협상 개시,소련의 최혜국 대우를 금지시킨 잭슨-바닉 수정안 해제 등 고르비 최대의 관심사항인 경제 제안들을한꺼번에 제시했다. 부시는 무기감축에 관해서도 진일보한 입장을 보였다. “세계는 변화하고 있으며 양극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우리는과거 냉전에서 얻은 교훈들을 토의할 필요가 있으며,대립의 정치학인 냉전적방법론은 전략적 패배를 맞고 있습니다.” 고르비는 다소 철학적인 답변으로대신하며 대화분위기에 신경을 썼다. 정상회담이 열리는 동안 몰타의 기상은 최악이었다.미국의 순양함 벨크냅호와 소련 함정 슬라바호를 오가며 갖기로 한 정상회담은 폭풍우를 꺼린 고르비의 제안으로 장소가 고리키호로 변경됐다. 이튿날 회의에서 고르비는 미·소관계의 이정표를 긋는 중대한 발언을 한다.“우리는 미국이 유럽에 남아있는 것을 원하며 이것은 유럽의 장래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우리는 이제 여러분들을 적으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물론 언쟁도 있었다.아프카니스탄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소련의 지원을 두고 설전이 오갔으며,동독의 변화를 서방의 가치에 기초를 둔 변화라는 부시의 언급에 고르비가 “우리도 민주적 가치관을 갖고 있다”고 되받는 등 한때 공기가 냉랭해지기도 했다. 부시는 고리키호를 떠나지 않으려는 고르비를 위해 이틀 동안 거센 파도속에 함재정을 타고 밸크냅호와 고리키호를 오가,이를 TV로 지켜보던 미 국민들은 가슴을 졸여야 했다. 몰타회담의 하이라이트는 12월3일 열린 사상 최초의 미·소 정상 공동 기자회견.고르비의 전격 제안이었다. 부시가 기자들에게 “미·소 관계개선으로 고쳐 나갈 수 없는 문제가 세계,특히 유럽에는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말을 꺼내자 고르비는 “우리 두 사람은 세계가 냉전의 시대를 지나 다른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는 의견을 나누었습니다.영구적 평화로 가는 긴 여정의 시작입니다”라고 화답했다. 기자회견을 끝낸 두 사람이 전용기를 타고 몰타를 떠날 때 회담 내내 멈추지 않던 폭풍우는 빛나는 태양에 그 자리를 내줬다. 45년간 지구촌을 갈라놓은 냉전시대 구질서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서는 순간이었다. 김수정기자 crystal@. *조지 부시,냉전해체과정 충격없이 연착륙시킨 주역. 미국 41대(1989∼1992) 대통령.89년 1월23일 취임,동구 민주화 도미노,베를린 장벽 붕괴 등 급속한 속도로 진행된 냉전 해체 과정을 충격 없이 연착륙시킨 당사자다. 76세.매사추세츠주 밀튼 출생으로 예일대 경제학과 출신.텍사스에서 정유사업으로 부를 축적,64년 상원의원 출마로 정치에 입문했다.닉슨 대통령 시절주 유엔 대사를 거치고 75년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을 지냈다. 최근 CNN과의 인터뷰에서 헝가리 국경 개방 이후 선물받은 ‘헝가리 철조망조각’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소개해 당시 외교 결실에 따른 보람을 은근히 내비쳤다. 98년 보좌관이었던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와 함께 당시를 기록한 회고록 ‘세계의 대전환(A World Transformed)’을 펴냈다. 동구 해체시의 위기관리 능력과 91년의 걸프전 승리에도 불구,미 경제의 침체로 클린턴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줄 무렵 인기가 급추락했다.아들인 조지 W부시가 공화당 후보로 올 대선에 출마한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냉전해체 1등공신…90년 노벨평화상 수상.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1985∼1991년),옛 소련 대통령(1990∼1991년).명실상부한 냉전해체의 일등 공신으로 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69세.스타프로폴의 농가 출신.모스크바대에서 법학을 전공했으며 52년 공산당에 입당했다. 82년 후견인인 안드로포프가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의 뒤를 이어 공산당 서기장이 되면서 정치적 위치가 급상승했다.이때부터 부패와 비효율에 대한 개혁을 시도,명성을 얻었다. 85년 서기장으로 선출된 뒤 추진한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는 80년대 국제사회 최대의 화두였다.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기득권을 지키려는 보수강경파와 개혁파들 사이에서 입지가 흔들렸고 91년 8월강경파들의 쿠데타로 실각했다. 개방정책은 발트해 공화국들의 분리독립,소련연방의 해체로 이어졌고 경제는 피폐해졌다.서방에서는 ‘칙사’ 대접을,러시아내에서는 러시아 추락의주범이라는 원성을 듣고 있다.지난해 9월 부인 라이사가 암으로 사망,쓸쓸한말년을 보내고 있다. 김수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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