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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학자가 본 한국전쟁]中 냉전체제 공산권 ‘양대 축’으로

    [中 학자가 본 한국전쟁]中 냉전체제 공산권 ‘양대 축’으로

    한국전쟁은 중국 공산당이 정권을 잡은 뒤 치른 첫번째 전쟁이다. 새로운 중국은 한국전쟁을 통해 국제무대에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전쟁은 국제관계의 관점에서뿐 아니라 중국에 있어서도 충분히 연구할 만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국제정치나 세계구조의 관점에서 중·소 동맹의 체결은 중국을 냉전의 한 방향으로 이끌었고, 한국전쟁은 중국을 그 최전방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 그 영향은 1960년대 말까지 지속됐다. 중국 입장에서 한국전쟁은 두 가지 측면의 영향을 끼쳤다.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서의 영향력 확대와 냉전의 선봉에 섰다는 점이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소련과 북한이 가장 위급했던 시기에 단독으로 병력을 파견해 참전했다. 당시의 결정은 사회주의 진영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스탈린 역시 감동했다. 소련은 중·소 동맹 협상 과정에서 중국에 최대한도로 양보했다. 모스크바는 태평양으로의 출구와 부동항을 잃을 수 있는 위험에 직면하기도 했다. 스탈린이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김일성의 주장에 갑자기 동의하고, 전쟁초기 중국의 군사행동을 막은 것은 이 같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중국의 참전은 소련이 어쩔 수 없이 양보해 맺을 수밖에 없었던 중·소동맹을 신뢰의 기초에서 새롭게 확립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중국은 소련과 사회주의 진영으로부터 대량 경제원조를 얻어낼 수 있었고, 아울러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서 명성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이 같은 결과는 마오쩌둥의 혁명 정서를 더욱 고무시켜 아시아 혁명을 이끌고, 더 나아가 세계 혁명의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욕망을 자극했다. 중국이 1950~60년대 반제국주의 투쟁의 선봉에 서서 그 당시 가장 혁명적인 국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이다. 한국전쟁은 또 중국과 미국 사이의 적대와 증오를 심화시켰고, 이데올로기적 투쟁 과정에서 이 같은 정서는 장장 20여년이나 지속됐다. 마오쩌둥이 친소련 일변도의 정책을 선택한 것에 대해 말한다면 국제관계와 국제왕래의 경험과 이해가 부족했던 데다 미국에 대한 불신과도 무관치 않다. 한국전쟁 기간중 마오쩌둥은 미국 정부의 모습을 주시했다. 미국은 타이완(臺灣)이 신중국에 속하지 않는다고 선포한 뒤 타이완 해협을 보호한다며 해군을 출동시켰다. 이로 인해 마오쩌둥은 결국 통일대업을 달성하지 못했다. 3년 동안의 막대한 희생을 핑계삼아 중·미 양국의 지도자들은 국민들을 상대로 상대방에 대한 적대감을 주입했다. 상대방을 추악한 모습으로 선전했다. 20여년 동안 중국인들은 모두 미국이 중국의 주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같은 국민들의 정서를 기초삼아 중국은 오랫동안 냉전의 최일선에서 전투적 입장을 견지할 수 있었다. 이런 것이 모두 한국전쟁 기간에 태동됐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국이 참전한 동기는 여러가지를 꼽을 수 있다. 동북 공업기지 보호와 반동세력의 위협을 해소하기 위해 국가 밖의 전쟁이 필요했던 마오쩌둥의 고민이 있다. 또 하나는 혁명 전파에 대한 마오쩌둥의 신념과 의지다. 마오쩌둥은 미 제국주의를 물리쳐야 한다는 열정에 넘쳤고, 혁명의 동력을 지속시키면서 중국의 국제지위를 높일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막 혁명을 완수한 중국이 처한 복잡한 환경과 조건도 빼놓을 수 없다. 타이완 문제가 대미 항전 욕구를 자극했고, 국제 분업구조하의 사회주의 진영에서는 중국의 책임과 의무를 요구했다. 중국의 참전은 이처럼 여러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결정됐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주관적 동기와 객관적 목적은 사실 합리적이고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세운 전략적 목표와 방침은 현실조건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중국은 유리한 조건에서 전쟁을 그만둘 수 있었던 역사적 기회를 놓치는 근본적인 오류를 범했다. 자신의 힘을 너무 과신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중국이 참전의 최초 목표를 억지로라도 달성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너무 많은 불필요한 대가를 치렀다. 게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세계는 평화와 안녕을 얻지 못했다. 한국전쟁은 미·소 대결과 자본주의·사회주의 양대 진영의 냉전상태를 더욱 심화시켰다. 한국전쟁은 강대국 간, 특히 핵무기를 보유한 강대국 간의 전쟁은 어느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 첫번째 전쟁이다.
  •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中 초기 피말린 권력투쟁… ‘對美전쟁’을 돌파구로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中 초기 피말린 권력투쟁… ‘對美전쟁’을 돌파구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절대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마오쩌둥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동이 틀 때까지 줄담배를 피웠다.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를 기다리듯 중국과 한국 지도를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하지만 갈수록 중국이 참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해졌다. 타이완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미군과 정면충돌을 피하고 싶었다. 그는 이번 전쟁의 승패가 가져올 정치적 여파를 꼼꼼히 계산했다. 미군이 참패를 맛볼 것이라고 확신했다. 국공내전을 치르느라 쇠약해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퓰리처상을 받은 언론인이자 역사가인 미국의 데이비드 핼버스탬이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를 속속들이 파헤친 ‘콜디스트 윈터’에서 묘사한 중국 참전결정의 전야(前夜)이다. 중국 주력부대의 압록강 도하 시간은 1950년 10월19일 오후 5시30분이었으니 18일 밤 상황인지도 모른다. 진위를 떠나 핼버스탬은 마오쩌둥의 번민을 마치 소설의 한 장면처럼 묘사했다. 중국군 개입은 한반도 내전을 순식간에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시킬 수 있는 도화선이었다. ●마오 결정은 중국을 위한 선택 한국전쟁에서 중국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마오쩌둥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 숱한 해석과 이론이 난무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중국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중국이 내세우는 한국전쟁 참전의 대의명분은 ‘미국에 대항해서 북한을 돕는’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제7함대를 파견해 타이완해협을 봉쇄하고, 프랑스의 베트남 지배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6월27일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성명에 정면대항하는 이른바 ‘미·중 전쟁’의 선전포고였다. 중국을 목표로 한반도, 타이완, 베트남 등 3개 루트를 통해 침투하려는 미국의 ‘삼로향심우회(三路向心迂回)’ 전략에 맞서려는 의도였다. 마오쩌둥은 미국이 이들 3개 지역을 차지하고 나서 궁극적으로는 중국본토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중국의 참전 배경과 결정과정은 그동안 일반에 알려지지 않았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설득에 따라 공산진영을 지키려는 마오쩌둥의 고독하고 영명한 결정이라는 정도밖에. 그러나 최근 공개된 러시아와 중국 측 비밀자료를 보면 마오쩌둥은 신생 중화인민공화국과 자신의 운명을 건 주사위를 한국전쟁을 향해 내던졌음을 알 수 있다. 전쟁은 마오쩌둥의 독단적 선택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중국은 이 같은 사실을 오랫동안 공개하지 않았다. 전쟁의 명분과 결과만 얘기했다.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의 실마리는 ‘조선인 사단’의 귀환 동의에서 찾을 수 있다. 개전 초 김일성이 파죽지세로 낙동강 전선까지 공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해방군에서 귀환한 3만 5000명 규모의 조선인 장병의 공이 컸다. 마오쩌둥은 1949년 중국 동북 3성 거주 조선족으로 구성된 2개 사단(2만명)을 통째로 북한에 넘겼다. 이들은 인민군 5, 6사단으로 편성됐다. 1950년에는 나머지 부대원 1만 5000명을 또 귀환시켰다. 이들은 국공내전에서 실전을 쌓은 백전노장들, 인민군의 3분의1에 해당하는 엄청난 전력이었다. ‘마오쩌둥, 스탈린과 한국전쟁’을 쓴 화동 사범대 선즈화 교수는 “북한에 대한 마오쩌둥의 동정과 지지를 보여준 조치”라고 분석했다. ●조선인 해방군 3만여명 北에 넘겨 본격적인 참전준비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7월부터 치밀하게 이뤄졌음이 중국 측 자료에 의해 새롭게 드러났다. 참전이 최종 결정된 10월19일까지 넉 달 가까이 피 말리는 내부투쟁이 중국 지도부 사이에서 벌어졌다. 7월7일 ‘미국의 조선 무장침략 후의 정세분석과 중국의 국방 증강대책’이라는 국방군사 회의가 열렸다. 13일에는 한국에 투입될 30만명 규모의 동북변방군 창설이 결정됐다. 가상 적국은 미국이었다. 8월4일 당 중앙 정치국회의에서 마오쩌둥은 “미국은 한반도와 타이완, 베트남에서 움직이고 있다. 우리는 한반도에서 미국과 교전할 작정이다. 미국이 계획하고 있는 전투규모가 크든 작든 혹은 원자폭탄을 사용하든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수밖에 없다.”라고 결사항전의 비장한 선언을 했다. 동북변방군은 출동할 때 ‘의용군’이란 명칭을 사용했다. 조선인민군 복장을 착용하며, 인민군의 깃발을 내걸고, 주요 간부의 이름도 조선인 이름으로 바꿨다. 해방군 정예부대인 제4야전군이 주축이 된 의용군은 ‘준비된 군대’였다. 참전 초기 연합군을 무서운 속도로 밀어내며 연전연승한 것은 연합군의 실책도, 운이 좋아서도 아니었다. 매복, 위장 등 한반도 북부 산악지형에 맞는 전술을 훈련을 통해 몸에 익혔기 때문이었다. 30만 의용군이 오로지 인해전술로 북진 중이던 13만 연합군을 물리쳤다는 건 냉전시대 교육의 산물이다. 9월 참전 구상이 세워졌지만 시기는 계속 연기됐다. 마오쩌둥도 저우언라이 총리와 린뱌오 등 지도부의 거센 반대를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중국의 문서보관소인 당안관(?案館)자료와 내부적으로 발간된 ‘건국 이후 마오쩌둥의 문고(文矯)’ 등에 따르면 중국 지도부는 혼란을 겪었다. 린뱌오는 “중국 자체의 존립이 위협받을지도 모르고, 승리 가능성이 작다.”라는 이유로 출병을 반대했다. 다들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일본 도요가쿠엔대학 지안롱 교수는 저서 ‘모택동의 한국전쟁’에서 10월4일과 5일 정치국 회의 참가자 중 찬성과 반대의 세력분포에 대해 재미있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찬성자는 마오쩌둥 혼자뿐이었고, 불명확한 사람은 저우언라이 총리와 펑더화이 사령관 두 명이었으며, 나머지 7명은 반대했다는 것이다. ●中 독자출병 소식에 스탈린 눈물 그러나 마오쩌둥은 10월5일 정치국 회의에서 “어떤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어떤 곤란이 있더라도, 미군이 평양을 점령하기 전에 출병해야 한다.”라고 밀어붙였다. 펑더화이를 의용군 총사령관에 추천한다고 발표해 버렸다. 세 번이나 번복된 참전이 최종 결정됐다. 이후 냉전체제가 해체돼 한국전쟁의 주역인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 사이에 오간 극비문서들이 공개되기 전까지 중공군 참전과정의 진실은 서고 속에 묻혀 있었다. 김일성에게 베이징의 개입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크렘린은 계속 베이징 지도자에게 미루고 있었다. 중국의 참전소식은 나흘 뒤인 10월8일에야 평양에 전해졌다. 초대 평양 대리대사를 지낸 차이청원은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그것 잘됐다, 잘됐어.”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마오 주석과 당 중앙에 나와 조선 당, 인민의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해 달라.”라고 기뻐했다고 적고 있다. ’ 앞서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으로 패주하면서 중국 망명정부 수립을 준비 중이던 김일성은 10월1일 ‘경애하는 마오쩌둥 동지’ 앞으로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 위험상태를 극복할 수 없다. 중국인민해방군이 직접 출동해 지원해 달라.”라고 애걸복걸하는 편지를 보낸 상태였다. 중공군의 참전결정이 차일피일 늦어진 것은 소련군의 공군지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였다. 보병은 중국, 공군은 소련이 맡는다는 것이 애초 양측의 합의사항이었다. 기다리다 못한 마오쩌둥은 저우언라이 총리를 모스크바에 보내 공군지원을 요청했으나 ‘준비 불충분’을 이유로 거절당했다. 중국 측 연구자들은 이를 ‘스탈린의 배신’이며 추후 중·소 갈등의 뿌리가 되었다고 본다. 또 소련공군의 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중국의 독자출병소식을 들은 스탈린은 눈물을 흘렸다고 중국의 역할을 강조했다. 몇 년 뒤 마오쩌둥은 “스탈린은 나를 (자국이익만 생각하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로 의심했지만 항미원조전쟁이 시작된 1950년 겨울부터 이 의심은 사라졌다.”라고 회고했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에 러시아어 통역장교로 자원입대한 장남 마오안잉(28)을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잃었다. 마오안잉의 묘는 평남 회령군 ‘지원군 열사능원’에 있다. 36만명에 이르는 중국군 전사자들과 함께 묻혀 있다. 마오쩌둥은 만류하는 측근들에게 “내 아들이 가지 않는다면 인민 누구도 가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또 전쟁이 끝나고 나서 “전쟁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중국과 북한 양국의 우의는 혁명열사들의 선혈로 맺어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中, 3년간 500만명 병력 투입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 의용군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79개 보병사단과 12개 공군사단, 16개 포병사단, 10개 공병사단, 10개 전차연대 등 모두 합치면 200만~300만명에 이른다. 최고조에 이른 1953년 4월부터 7월까지는 일시에 130만명의 병력이 투입됐다고 한다. 3년 동안 연인원 500만명이 동원됐다는 서방 측 자료도 있다. 중공군 희생자는 공식적으로 36만 6000명이지만 비전투 사상자를 더하면 사실상 60만~90만명으로 추정된다. 미군 전사자 3만 3000명과는 비교 불가한 엄청난 희생을 치렀다. 한국전쟁 참전은 중국 대외정책의 기본이 됐다. 우리는 천안함 사건에 대한 중국의 일방적인 북한 편들기를 비판하지만, 중국 지도부의 생각은 60년 전에 비해 크게 바뀌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미국- 일본-타이완-한국전선에 대항하고 완충지대를 갖기 위해서는 설령 사고뭉치라고 하더라도 북한을 붙들고 있을 수밖에 없는 사정이라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김일성의 우상은 스탈린에서 마오쩌둥으로 바뀌었다. 결정적인 순간 소련이 아니라 중국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전쟁 전 소련 위주의 북한정책이 전쟁 후 중국위주로 전환됐다. 지안롱은 “정전협정 뒤 중국과 북한 수뇌는 언제라도 서로 털어놓을 수 있는 특수한 관계가 계속됐다.”라고 설명했다. 집단지도체제를 유지하던 마오쩌둥에게 한국전쟁은 터닝 포인트였다. 한국전쟁에 개입함으로써 소련과의 동맹을 공고히 했고, 북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미국이 함부로 못하는 위협적 존재가 됐다. 인도차이나반도 문제 등에 대한 국제적 지위를 부여받았다. 1971년 타이완을 내쫓고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하는 발판이 됐다. 비록 ‘비기는 전쟁’으로 끝났지만 마오쩌둥의 도전과 모험은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마오쩌둥은 1953년 스탈린 사후 자신이 사망한 1976년까지 중국과 공산진영에서 ‘살아있는 신’으로 군림했다. 노주석 논설위원·윤샘이나 기자 joo@seoul.co.kr
  • [부고] 전설의 러 프리마돈나 세묘노바

    [부고] 전설의 러 프리마돈나 세묘노바

    ‘세계 무용계의 백과사전’이라는 칭송을 받아 온 전설의 발레리나 마리나 세묘노바가 9일(현지시간) 타계했다. 102세. 세묘노바는 1920년대에 데뷔한 옛 소련의 1세대 발레리나로 20여년간 모스크바 볼쇼이 발레단의 프리마(수석) 발레리나로 활약하며 러시아 발레의 중흥을 이끌었다. 지난 1908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세묘노바는 고향의 무용학원에서 발레를 배운 뒤 같은 도시의 마린스키 극장에 입단해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등의 주연을 맡았다. 1930년대에는 당시 옛 소련 최고 지도자 스탈린의 초청으로 볼쇼이로 옮겼다. 1952년 현역에서 은퇴한 세묘노바는 타고난 박력과 완벽한 기술로 무대를 지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성국기자 psk@seoul.co.kr
  • [한국 학자가 본 한국전쟁] 박종효 모스크바대 한국학센터 명예교수

    [한국 학자가 본 한국전쟁] 박종효 모스크바대 한국학센터 명예교수

    전 세계적으로 한국전쟁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6·25가 발생한 지도 어느덧 60년이 됐다. 그러나 지금도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 그 이유는 6·25와 직접 연관이 있는 옛 소련의 비밀문서가 완전히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천안함 침몰사건의 원인을 조사하면서 우방국 전문가는 물론 러시아와 중국 전문가도 초청했다. 공정하게 사고의 원인을 조사하려는 태도때문에 국제적인 공신력을 높이고 한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천안함 사건 조사처럼 6·25도 이제 스탈린과 김일성에 관한 자료가 완전 공개돼야 한다. 그래야 천안함 사고원인 조사에서 보인 국제공조와 권위 있는 결론을 내릴수 있다. 이제까지 6·25에 관한 연구는 국내자료나 서방측의 자료에 의존해 왔다. 공정성이 결여돼 있다. 6·25는 공산진영의 종주국 소련과 스탈린이 직접 관련돼 무기를 지원하고, 공군과 군사고문관을 파견하여 작전을 총괄했다. 게다가 마오쩌둥의 해방군까지 끌어들였던 것이다. 러시아연방 외무성 문서 보관소 자료와 크렘린 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는 이들 문서가 빠짐없이 공개돼야 지금까지 한국이 주장해 왔던 북한의 남침설이 확정될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이와 다른 주장을 펴왔다. 그 주장이 무엇이든 한국은 참이냐 거짓이냐를 가리려 하지도 않고 무조건 거부해 왔다. 6·25는 스탈린의 승인과 마오쩌둥의 지원약속이 없었다면 발발이 불가능했었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사실을 확인한다는 차원에서 러시아 측 자료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현재도 1994년 러시아 초대 대통령 옐친이 한국정부에 전달한 6·25 스탈린 관련문서가 일반에게는 공개되지 않고 있다. 많은 진실이 일반인에게 투명하게 공개되지 못한 채 의문으로 남아있다. 천안함 조사의 핵심이 공정성에 있다면 6·25는 역사적 진실에 있다. 진실이 올바로 밝혀지지 않거나 왜곡될 때 혼란이 야기되고 분열이 생기는 것이다. 이번에 6·25 60주년을 맞아 서울신문을 통해 러시아 측 자료가 일반독자에게 공개되는 것은 큰 의미 있는 일이다. 광복 이후 일부 역사학자들은 민족주의 사관을 내세우면서 과거 식민지 사관에서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작 자신들은 일본 측이나 미국 측 사료에 의존하는 한계를 보였다. 스스로의 연구역량을 저하시켜 민족사관을 정립하지 못한 모순을 반복했다. 그러므로 이제 6·25는 물론 해방 이후 미소 냉전시기 및 남북관계와 기타 국제관계를 밝히는데도 러시아 사료가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6·25 발생에 대한 책임이 북한 측에만 있다는 주장이 옳은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이 발생하게 되는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6·25가 단순히 김일성의 요구로 스탈린이 승인을 하고 모택동의 후원약속으로 발생하게 된 것은 아닌 것이다. 멀리는 일제가 1910년 한국을 합병하면서 항일독립운동을 시작하던 초기에 마침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면서 그 영향을 받았다. 특히 러시아 극동지방을 무대로 한 항일애국단체와 중국 상해 및 동북지방에서 활동하던 항일애국단체들이 서로 민족주의 진영과 공산주의진영으로 분열돼 투쟁하기 시작했다. 1945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고 남북을 미소가 분할해 군정을 실시하면서 자연스럽게 민족주의 진영은 서울로, 공산주의 진영은 평양으로 집결했다. 미소 냉전이 시작되면서 서울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신탁통치문제를 놓고 충돌하기 시작한 뿌리가 있다. 결국 광복이 되면서 남북으로 귀국한 양대 세력이 각각 미소 군정의 비호 하에 정부를 구성하고 김일성은 스탈린의 공산주의 확장정책에 힘을 얻고 마오쩌둥이 중국 본토장악에 고무돼 미군이 한국에서 철군을 시작하자 통일의 기회로 보고 남침을 감행한 것이다. 러시아 측의 자료없이는 한국의 근현대사 연구는 물론 6·25에 대한 진실을 가려내기 어려운 까닭이다.
  • [한국전쟁 60주년 기획]김일성 각본, 스탈린 연출, 마오쩌둥 주연

    [한국전쟁 60주년 기획]김일성 각본, 스탈린 연출, 마오쩌둥 주연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학설은 대략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대표적인 학설이 ‘남침설’이다. 2차 세계대전 후 옛 소련이 자국의 팽창주의에 따라 북한을 부추겨 남한의 무력통일을 획책했다는 주장이다. 대척점에 서 있는 학설이 ‘북침설’이다. 미국이 한국을 조종해 북으로 쳐들어갔다는 주장이다. 중간적 입장에서 나온 것이 ‘남침유도설’이다. 대체로 북한의 북침설을 옹호하는 수정주의적 사관이다. 냉전해체 이후 공개된 러시아문서는 분분한 학설을 일거에 정리하는 ‘스모킹 건(결정적 증거)’의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이 주고받은 대화록과 편지가 담긴 극비문서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제 서방세계는 물론 러시아와 중국의 학자와 일반인들에게도 북한의 남침설은 다시 뒤집히기 어려운 정설로 자리 잡았다. 전쟁을 일으킨 발발자는 누구일까. 전쟁의 주체는 남침설과 북침설, 남침유도설 등 어느 학설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남침설은 스탈린의 김일성 사주설,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공모설, 마오쩌둥 주도설 등이 주류를 이룬다. 지금은 대체로 스탈린과 마오쩌둥 두 사람을 전쟁발발의 공동주체로 본다. 김일성은 괴뢰로 취급해 평가절하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발발 원인을 국내적 요인보다, 냉전체제라는 국제적 요인에서 찾은 결론이다. ●스탈린·마오쩌둥 한국전 공동주체 북침설의 입장에서는 이승만을 전쟁의 주동자로 본다. ‘김일성 저작집’ 제6권을 보면 김일성은 1950년 6월25일 새벽 3시 노동당 정치위원회와 내각 합동 비상회의를 소집해 “리승만 도당의 괴뢰군들이 오늘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공화국 북반부를 반대하는 불의의 무력침공을 개시하였습니다. 적들은 이미 38선 이북지역으로 1~2km 침공하였습니다.”라고 연설했다. 지금은 북한주민들만 그렇게 믿는다. 중국군이 펴낸 책자에는 ‘1950년 6월25일 새벽, 38도 선에서 오랫동안 계속되어 오던 소규모 무장충돌과 마찰이 마침내 질적인 변화를 일으켜 한반도에서의 대규모 내전으로 전면적으로 폭발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중국은 초기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보고 있으며, 미군 등 유엔군 참전과 중국의 개입 이후를 ‘국제전쟁’이라고 보는 시각을 갖고 있다. 한때 수정주의 이론이 득세했다. 스톤의 ‘한국전쟁 비사’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한국전쟁의 기원을 1945년 해방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좌우이데올로기로 나뉜 불완전한 해방의 연장 선상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심지어 스탈린의 옆에서 전쟁결정 과정을 지켜봤던 후루시초프가 ‘회고록’에서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라고 밝혔지만, CIA 공작설을 거론하면서 믿지 않았다. 그러나 수정주의 이론은 러시아문서가 비밀에서 해제돼 세상에 공개되자 설득력을 잃었다. 냉전이 해체되면서 이데올로기적 제약이 사라진 것이다. 커밍스는 자신의 이론을 부분적으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각본을 썼고, 스탈린이 연출했다. 스탈린은 처음에는 김일성의 저돌적인 전쟁공세에 머뭇거리기도 했지만 밑질 것이 없다고 여겼다. 전쟁을 승인하고 군사원조를 제공했으며 마오쩌둥을 설득해 동맹국으로 끌어들였다. 군사고문단을 보내 전쟁준비부터 휴전까지 직접 챙겼다. 1953년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휴전협정 조인은 더 미뤄졌을 것이고 꽃다운 생명의 희생은 더 늘어났을 것이다. ●“김일성은 꼭두각시”… 평가절하 러시아 극비문서가 공개되기 전까지 한국전쟁에서 마오쩌둥의 역할에 대한 평가는 절하된 감이 있다. 갑자기 압록강 국경을 넘어 나타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의해 연합군이 압록강에서 38선 이남까지 밀려난 정도로밖에 알려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 김일성이 전쟁발발을 선창했다면, 스탈린은 총연출을 맡았다. 주역은 사실상 마오쩌둥과 중국이었다. 마오쩌둥은 전쟁을 측면에서 조종했고, 참전을 선택했고, 치렀다. 1950년 9월15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나서 압록강 국경까지 진군했다. 이때부터 한국전쟁을 주도한 것은 중공군이었고, 휴전협정의 관장자도 중국이었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의 당당한 주연배우로 등장했다. 마오쩌둥은 소련과 미국이 38선 분할통치에 합의했기 때문에 소련 지상군이 동원되면 미군을 끌어들이는 구실이 된다고 봤다. 하지만 중국해방군은 예외라고 판단했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참전을 이끌어낸 김일성의 역할도 무시할 순 없다. 주지안룽 동양학원대학 교수는 저서 ‘모택동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에서 “김일성은 온 힘을 기울여 소국의 지혜로 대국의 지도자를 움직이게 하는 일류의 연기를 펼쳤다.”라고 평가했다. 러시아말과 중국말에 능했던 김일성은 양국 수뇌와 외교관 사이를 오가면서 스탈린에게는 ‘마오쩌둥 카드’를 내밀고, 마오쩌둥에게는 ‘스탈린 카드’로 말을 바꾸는 절묘한 ‘양다리 외교’를 펼쳤다. “마오쩌둥은 평화적 수단에 의한 남북통일은 불가능하며, 통일은 군사적 수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스탈린에게 전달했다. 김일성을 꼭두각시로 깎아내리는 시각도 있지만, 한국전쟁의 시나리오를 쓴 사람은 분명히 김일성이었다. 다만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은 1950년 10월 19일 이전까지 전쟁을 총지휘한 사람은 스탈린이었다. 그는 북한의 군비 요청 사항 중 90% 이상을 지원했다. 1950년 6월15일 평양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는 ‘6월25일 새벽에 진격한다. 조선인민군이 옹진반도를 공격하고 서쪽 연안으로 총공격을 가한다. 적 주력부대는 서울 근방에서 괴멸되고 서울과 춘천, 강릉이 동시 점령될 것이다. 최종적으로 남한은 해방될 것이다.’라고 크렘린에 보고했다. 비밀문서에 나타난 전쟁개시일과 전황이 정확하게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실제 사흘 만에 서울이 점령됐고, 8월20일쯤에는 낙동강 전선을 제외한 남한영토의 90% 이상이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는 한편 소련군 군사고문단장인 바실레프스키 원수에게 서울의 총사령부에 상주토록 조치했다. ●기고만장해진 北, 中 홀대 스탈린은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8월25일 김일성에게 다음과 같은 친서를 보냈다. ‘조선인민의 위대한 해방투쟁에 찬사를 바친다. 미군개입으로 부분적으로 실패하는 것에 당황할 필요가 없다. 북한은 고립되어 있지 않으며, 지원할 맹우들이 곁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조종사를 지원하는 방법을 검토하겠다.’ 김일성은 용기백배해 다음날 노동당 정치위원회를 소집했다. 북한지도부는 ‘친애하는 동지 스탈린의 아버지와 같은 심려와 지원이 조선인민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라는 내용의 공식 회답문을 채택했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바실레프스키 원수는 9월21일 ‘소련군 제147사단 84전투기연대 소속 전투기 야크-9형 40기의 파견을 모스크바에 요청했고 승인받았다. 소련 공군이 한국전에 참전했다. 바실레프스키 원수는 ‘소련 조종사가 전투에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군에게 숨길 수는 없다. 공중전에서 행해지는 교신이 러시아말로 이뤄지기 때문이다.’라고 보고했다. 성공확률 5000분의1에 불과한, 무모하기 짝이 없는 작전으로 보였던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인 성공은 전쟁의 흐름을 180도 바꿔 놓았다. 인민군과 소련군사고문단은 이 작전의 의미를 부정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중국은 서방 측 보도를 보고 이 사실을 알았다. 스탈린은 상륙작전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잘못을 문책해 스티코프 대사를 경질했다. 인민군은 패주에 패주를 거듭했다. 다급해진 김일성과 박헌영은 9월29일 ‘적이 38선을 넘을 때 대비해 소련 측의 직접적인 군사원조를 부탁한다.’라며 보병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스탈린은 응하지 않았다. 마지막 희망은 중국이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급기야 스탈린은 10월13일 ‘중국은 군사개입을 거부하고 있다. 귀하는 소련이나 중국으로 탈출을 준비하고 부대 및 병기를 대피할 필요가 있다.’라는 절망의 통첩을 김일성에게 보냈다. 한국전쟁에 개입한 소련, 중국 그리고 미국 지도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열도라는 사실이 러시아 비밀문서에 자주 등장한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콜디스트 윈터’에서 “미국이 한국을 위해 죽을 각오로 싸울 태세를 갖춘다는 게 아주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 미국이 정말 염려했던 것은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이었다.”라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김일성과의 회담에서 “일본이 분쟁에 개입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 “미군의 전투력이 일본군 이하이므로 우리가 이긴다.”라는 발언을 했다. 일본에 대한 생각이 은연중에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도 마찬가지였다. ●美·中·소련 관심대상은 日 스탈린은 패색이 짙어진 10월8일자 김일성에게 보낸 전문에서 일본을 막으려면 중국의 참전이 필요한 논리를 폈다. 스탈린은 ‘국제정세를 보면 군국주의 세력이 부활하지 못한 일본은 미국을 원조할 수 없다. 중국이 소극적인 자세를 유지한다면 일본 군국주의 부활을 막지 못한다.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미국의 동맹자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되살아나는 미래보다 지금이 우리에게 훨씬 유리하다. 이승만 치하의 남한이 미국과 일본의 대륙에 대한 전진기지가 될 수년 후보다 지금이 유리하다.’라고 썼다.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전까지 총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점령국 일본에서 황제처럼 군림했다. 전쟁을 지휘하는 동안 한국에서 하룻밤도 보내지 않았다. 그는 1952년 미국 대통령선거에 출마할 유력한 공화당 후보로 점쳐지고 있었다. 한국전쟁 최대의 판단오류 중 하나였던 ‘중국 불개입론’은 그의 신념이었다. 이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이 낳은 위대한 장군’ 맥아더는 불명예스럽게도 전쟁 기간에 파면당하는 신세가 됐다. 연합군의 ‘크리스마스 공세’는 중공군의 개입시기를 앞당겼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60년전 6·25때 삐라 한자리에

    60년전 6·25때 삐라 한자리에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추운 겨울,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적을 경계하며 눈밭에 엎드린 군인이 있다. 이 군인에게 애인의 편지가 사진과 함께 전달된다. “사랑하는 그대, 크리스마스에는 꼭 돌아올 거죠?” 편지를 읽는 순간 군인은 지독한 향수병이 도져 지긋지긋한 전쟁 따위는 당장 그만두고 싶어진다. 이런 반응이 바로 선전용 전단지 속칭 ‘삐라’가 노리는 효과다. 6·25전쟁 당시 유엔군과 북한군은 심리전의 일환으로 삐라를 대량 살포했다. 유엔군은 총 25억장을, 공산군은 3억장가량을 뿌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6·25전쟁 60주년을 맞아 당시 삐라를 직접 볼 수 있는 독특한 전시가 열린다. 서울역사박물관 분관인 서울 마장동 청계천문화관이 오는 15일부터 8월22일까지 개최하는 ‘보이지 않는 전쟁, 삐라’ 특별전에서다. 전쟁 3년 동안 뿌려진 삐라 445점을 만날 수 있다. 유엔군이 북한군을 대상으로 뿌린 한 삐라에는 고통스러운 모습의 군인 그림과 함께 “얼어 죽기 전에 다쳐 죽기 전에 굶어 죽기 전에 어서 도망하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북한군의 투항을 유도하려는 의도다. 삐라 제작에는 ‘코주부’ 김용환 화백, ‘고바우’ 김성환 화백 등 당대 유명 화가나 문인들도 동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소련, 중국 등이 가세한 국제전이었던 만큼 영어·중국어 삐라도 눈에 띈다. 김영관 청계천문화관장은 10일 “대부분 전쟁이 주는 고통과 평화에 대한 갈망 등 인간 본성의 밑바닥을 자극하는 내용들”이라며 “전쟁의 비극을 대변하는 상징물”이라고 말했다. 전쟁 당시 일상용품을 보여 주는 ‘전쟁과 일상’(인사동 갤러리 떼), 피란지 부산의 풍경을 담은 ‘굳세어라 금순아!’(국립민속박물관), 전쟁 기록물과 비무장지대 미공개 사진을 모은 ‘아! 6·25’(용산 전쟁기념관) 등 다른 특별전도 서울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문화마당] 한반도와 로마 제국/김기봉 경기대 역사학 교수

    [문화마당] 한반도와 로마 제국/김기봉 경기대 역사학 교수

    천안함 사태로 우리가 새삼 깨닫는 것이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는 대륙 세력인 중국과 해양 세력인 일본 사이에 끼여 있는 샌드위치 신세고, 정치적으로는 G2로 불리는 미국과 중국이 신냉전적 대결을 벌이는 전장이다. 한반도의 운명이 주변 세력의 판도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공식화하는 이론이 반도 사관이다. 반도 사관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역사학적으로 옹호하는 식민 사관의 일종이다. 식민 사관은 전근대에서는 중국에 사대하여 왕조 국가의 정통성을 유지했던 조선이, 중국 대신에 일본이 동아시아의 맹주로 등장한 근대에서는 일제 식민지가 되는 것을 합리화하는 역사 이데올로기다. 해방 후 한국의 역사가들은 식민 사관에서 탈피하여 한국사의 독자성과 자주성을 재인식하는 과학적 한국사학을 정립하는 것을 제일과제로 삼았다. 하지만 1945년 이후 한국사는 과연 독자적이며 자주적으로 전개됐는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 독립투쟁의 성과가 아니라 연합군이 승리한 결과로 주어진 것이었기에, 이후 한반도의 운명은 주변 열강의 세력관계 속에서 결정됐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시작된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해방을 기점으로 출발한 한국 현대사를 분단시대로 만들었다. 천안함 사태는 우리가 여전히 분단시대에 살고 있음을 확인시켜준 사건이다. 북한 어뢰를 맞고 천안함이 침몰했다면, 북한은 가해자고 우리는 피해자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미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의 동의와 협조 없이는 북한에 대해 어떤 효과적인 제재도 할 수 없는 현실이다. 북한과 남한은 같은 민족이다. 하지만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공동 운명체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한국사의 비극이다. 이 같은 한국사의 비극은 삼국 시대부터 있었다. 삼국 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사이에 ‘동족상잔’이 벌어졌다. 신라의 삼국 통일이 중국 당나라와의 연합을 통해 이룩됐듯이, 오늘의 한반도 통일도 미국과 중국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세계를 주도하는 선진국 모임인 주요 20개국(G20)의 주최국이 되는 위대한 국가를 이룩했다고 아무리 자랑해도, 강대국을 향해 사대외교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역사적 운명인가? 우리가 반도 사관을 반증하는 역사적 사례로 드는 것이 로마 제국이다. 이탈리아 반도의 작은 도시 국가로 출발한 로마는 시작은 미미했지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이 같은 로마의 힘은 어디서 비롯했는가? 인종과 종교가 다른 민족에게 시민권을 부여한 관용이 로마를 보편 제국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일반적 설명이다. 에이미 추아는 ‘제국의 미래’(이순희 옮김, 비아북 펴냄, 2008)에서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초강대국들은 관용을 토대로 하여 위대한 국가를 이룩했음을 밝혀냈다. 그녀는 어떤 시대와 세계에서도 가장 독창적이고 진취적이며 숙련된 사람이 한 지역과 민족에서만 나올 수는 없으므로, 어느 특정 국가가 세계를 제패하려면 자본과 인적 자원을 ‘세계’로부터 충원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분단시대 대한민국이 강대국이 되기엔 너무나 작은 나라다. 북한은 당위적으로는 같은 민족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가장 위험한 적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힘은 로마처럼 우리 공화국 안에 들어온 타자들을 대한민국 시민으로 포섭하는 것으로부터 나올 수 있다. 대한민국이 점점 다문화 사회로 변하는 것은 민족 정체성의 위기이자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다. 이제 지방선거도 끝났다. 국민은 선거를 통해 여러 지역에서 기존의 정치가를 해고하고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했다. 이번 선거에서 국민의 선택을 받은 정치가 가운데 로마 제국처럼 반도 국가를 선진 조국으로 디자인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있기를 기원한다.
  • 가스카로프 무용단과 함께 민속춤을

    가스카로프 무용단과 함께 민속춤을

    바시코르토스탄. 우리에겐 생소한 이름이다. 우랄산맥 남부 서쪽 기슭에 위치한 나라다. 1992년 구 소련 새연방 조약에 따라 공화국이 됐다. 지금은 러시아 연방에 소속돼 있다. 넓은 대지와 맑은 호수 등 자연 경관이 백미인 곳이다. 천혜의 자연 환경과 어우러진 전통 무용단이 우리나라를 찾을 예정이어서 눈길을 끈다. 바로 ‘가스카로프 민속무용단’이다. 이 나라 출신의 천재 무용가로 꼽히는 가스카로프가 만든 무용단이다.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전통춤으로 승부수를 띄우겠다는 게 설립 취지다. 일단 시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무용단은 전 세계 60개국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며 러시아 대표 무용단으로 입지를 굳혔다. 세계 유수 페스티벌에서 상도 휩쓸었다. 한국 공연은 새달 1일 오후 8시 서울 염리동 마포아트센터 아트홀맥에서 펼쳐진다. 한·러 수교 20주년을 기념해 두 나라 정부가 공동 주최했다. 단원은 80명. 러시아 국민배우로 명성이 높은 아브스타로바와 아브둘마노프가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음악감독은 러시아의 명예 예술가이자 바시코르토스탄 공화국 명예 예술가인 무라트신이다. 6000~1만원. (02)3274-8600.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우주도전사 다룬 신간 봇물

    1957년 10월4일. 옛 소련은 바이코누르 우주기지에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하늘로 쏘아올렸다.11월3일에는 강아지 한 마리를 태운 스푸트니크 2호까지 발사시켰다. 그런데 스푸트니크 2호 발사에는 우여곡절이 숨어 있었다. 궤도 비행 때 일정한 간격으로 기내 장치를 중단시켜주는 타이머가 꺼져 있는 바람에 발사가 한 차례 지연된 것이다. 최근 나온 ‘세계우주클럽’(바다출판사 펴냄)에 소개된 내용이다. 나로호 재발사가 카운트다운에 들어감에 따라 ‘세계우주클럽’을 비롯해 ‘로켓, 꿈을 쏘다’(갤리온 펴냄), ‘반가워요 우주씨!’(주니어김영사 펴냄) 등 흥미진진한 우주과학 도전역사와 기술 이론 등을 다룬 책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우리나라 나로호 부품이 대부분 외국제라는 점을 들어 ‘한국 첫 우주발사체’로서의 나로호 의미를 평가절하하는 시각도 있지만 ‘우주강국’ 미국의 도전역사도 출발은 ‘나치 과학자’의 손에서 이뤄졌다. 히틀러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1943년 A-4 로켓을 발사시킨 베르너 폰 브라운(1912~1977)은 독일 패전 뒤 미국에 스카우트됐다. 소련의 스푸트니크 2호 발사에 충격받은 미국이 석 달도 되지 않아 익스플로러호(1958년 1월)를 쏘아올릴 수 있었던 데는 이 ‘나치 과학자’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애초 우주과학은 1865년 프랑스 소설가 쥘 베른이 쓴 ‘지구에서 달까지’라는 공상과학(SF) 소설과 밀접하게 맥이 닿아있다. 이 ‘황당무계한’ 소설은 브라운을 비롯해 ‘우주 엘리베이터’라는 정교한 우주여행 이론을 내놓은 소련의 치올콥스키(1857~1935)와 액체 로켓 발사를 성공시킨 미국의 로버트 고다드(1882~1945) 등 ‘쥘 베른 키드’들의 꿈과 호기심을 자극했고 결국 우주 개척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통일은 결코 무력으로 안 된다”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통일은 결코 무력으로 안 된다”

    한국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을 일으켜 한민족의 분단에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역사 너머로 사라졌다. 그러나 민족의 통일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출판물과 영화로 신세대에 전해지고 있다. 전쟁이 발생한 지 60년이 지났는데도 한반도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폭발 가능성이 큰 곳이다. 불안정한 휴전하에서 남북한은 준전시 상태로 유지됐다. 금방이라도 군사적 충돌이 재현될 것 같았지만 위기를 극복했다. 그동안 남한에서는 경제발전이 우선, 군사문제는 이차적인 순위로 밀려났고, 북한은 선군 정치로 일관해 왔다. 지난 세기 러시아도 소비에트시대의 군사적 분쟁에 휩싸여 있었다. 러시아사람들 사이에서도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이 잊혀져 가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 파견됐던 옛 소련 공군 출신과 한반도의 현황을 좀 더 깊이 연구해 보려고 하는 학자들만이 잊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서방세계의 정보를 자유롭게 얻는 러시아 신세대는 한국전쟁을 북한의 돌발적인 남침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한국전쟁을 그 전쟁에서 승리해 공산주의 체제를 한반도의 남쪽까지 확산시키고 미국을 중국과의 군사대결에 끌어넣는다는 것에 목적을 두고 스탈린이 직접 주도해 행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대부분의 러시아 전문가들은 한반도에서 발생한 한국전쟁은 외부적인 영향보다도 내부적인 요소가 더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필자는 더 나아가서 제1차 대전의 마지막 단계에 일어난 제정 러시아 붕괴의 결말이었던 적군(赤軍)과 백군(白軍) 간에 벌어진 내전과 제3차 전쟁의 서곡이 충분히 될 수 있었던 남북한 간 동족상잔의 유혈전쟁, 그 두 전쟁 사이에 일종의 유사성이 있다고 본다. 결국은 러시아에서 적색테러와 백색테러, 한국의 공산테러와 반공테러 등은 우리 양국에서 시민적 자유와 민주사회의 형성과정을 수십 년 거꾸로 돌려놓았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유사성이 또 하나 있다. 러시아는 제정 러시아가 남긴 폐허 위에서 일어나 20년 만에 세계 역사상 가장 유혈적인 제2차 대전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반세기에 걸쳐 미국과의 군사 정치적 세력균형을 유지해온 강대국으로 변했다. 전후 한국에서도 같은 능력을 볼 수 있다. 3년 동안의 한국전쟁으로 수백만 명의 희생자를 내고 전 국토가 폐허가 되었다. 예를 들어 민간인의 피해는 여러 통계에 의하면 150만명 내지 400만명에 달해 제일 컸다. 제2차 대전 당시 소련의 인구손실과 대비할 수 있다. 남북한은 경제적으로도 큰 피해를 보았다. 남한의 경제적 피해 규모는 30억달러로 평가되었으며 북한은 4200억원이었다. 북한의 피해는 남한보다 훨씬 더 컸다. 왜냐하면 2년 동안 미 공군의 공습으로 북한의 경제기반이 깡그리 파괴됐기 때문이다. 남한은 전쟁의 피해에도 단 한 세대 만에 아시아 국가 중에 일본에 버금가는 산업대국이라는 지위와 세계 12대 경제 강대국 대열에 드는 국가로 성장했다. 북한의 발전은 그다지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자기보존과 생존에 있어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고, 핵클럽에 사실상 가입을 선언한 상태다. 올해는 한국전쟁 발발 60주년과 동시에 한국전쟁에 개입했던 러시아와 수교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다. 한반도에는 1950년 전쟁 직전의 긴장이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통일은 무력으로 할 수 없다는 교훈을 한국사람 자신들이 잘 알고 있다. 물론 그동안 힘의 배분이 변화되어 북한과 남한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예전과 비교해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60년 전에 무력통일을 실패한 대가로 수많은 희생과 고통을 치러야 했다면 오늘날은 휴전선 쌍방에서 대량 살상무기를 포함한 군비의 축적규모를 살필 때 어떤 전쟁 시나리오도 전쟁이 발생하게 된다면 아예 한민족의 존재 여부 자체가 의심스럽게 될 확률이 높다고 볼 수밖에 없다. 러시아로서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극동에 평화가 유지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러 문서보관소 ‘한국전쟁사 寶庫’ 자료공개로 ‘북침설’ 사장시켜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러 문서보관소 ‘한국전쟁사 寶庫’ 자료공개로 ‘북침설’ 사장시켜

    1994년 6월2일. 당시 러시아를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마친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검은 서류상자 하나를 건넸다. 흔히 ‘옐친 문서’라고 불리는 이 서류는 1949년 1월부터 1953년 8월까지 옛 소련과 중국, 북한 간에 오고 간 극비자료였다. 모두 230여건, A4용지 800쪽 분량의 자료 속에는 김일성의 선제타격작전계획과 스탈린의 3단계 작전지침 그리고 마오쩌둥의 전쟁개입 과정 등이 소상하게 담겨 있었다. 이 자료가 공개되면서 김일성과 좌익진영에서 주장해 오던 ‘북침설’은 소설이 됐다.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는 옐친 문서 공개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이전까지는 미국, 일본 등 서방 측 자료에 일방적으로 의지한 탓에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전쟁발발자인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이 주고받은 극비문서에 대한 분석 없이는 한국전쟁의 기원과 발발에 대한 연구의 가치는 떨어진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와 조선이 첫 수교를 맺은 1884년부터 일제에 의해 외교권이 강탈당한 1905년까지 두 나라는 긴밀한 우호 관계를 맺었다. 고종의 아관파천(1896년)에서 알 수 있듯이 러시아는 우리 근세사에서 10년 넘게 한국전쟁 이후 미국과 같은 역할을 누렸다. 제국주의 열강 앞에 촛불처럼 흔들렸던 한반도의 정세와 이권약탈사가 러시아 비밀문서 속에 고스란히 들어 있다. 한국전쟁 발발과 휴전 이전까지, 휴전 이후 1980년까지 남북한과 러시아 두 나라 사이에 일어난 모든 공개, 비공개 외교문서가 포함돼 있다. 러시아라는 거울을 통해 조선후기와 대한제국, 남북 분단 시기의 내밀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러시아에는 20여개의 국립 문서보관소가 있다. 러시아 외무성 산하 제정러시아 대외정책 문서보관소와 혁명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문서를 보존하고 있는 러시아연방 대외정책 문서보관소가 한국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와 국방성중앙문서보관소에는 부지기수의 한반도관련 문서가 소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모스크바 크렘린 러시아연방 대통령 문서보관소는 한국전쟁관련 문서의 보물창고이다. 전쟁준비 단계에서 휴전협정이 이뤄진 1949년부터 1953년까지의 극비문서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서가에 꽂혀 있다. 일반적으로 문서보관소의 출입증을 받으려면 소속 학교나 연구소에서 작성한 출입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 연구할 제목을 비롯해 인적사항을 적은 신청서를 내고 나서 출입허가가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연락이 오면 가서 문서목록 속에서 필요한 문서를 찾은 뒤 신청하게 된다. 외무성 연방문서보관소는 허가절차가 까다롭다. 3개월 만에 허가가 나오기도 해서 연구자들로부터 원성이 높다. 특히 한국전쟁 사료가 있는 연방대통령 문서보관소는 일반 연구자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특별허가를 받은 문서보관소 관계자의 협조를 얻어야 자료접촉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서보관소의 여러 부서에서 문서를 각각 접수하고 있고, 또 문서의 성격에 따라 담당자와 정리자가 달라 문서의 날짜가 다르거나 잘못된 사례도 허다하다. 옛 소련 국가안보위원회(KGB) 문서 보관소는 여전히 금역이다. 박종효 모스크바대 한국학 센터 명예교수가 최근 펴낸 ‘러시아연방 외무성 대한정책 자료1,2’(도서출판 선인)도 이 같은 발품의 산물이다. 러시아 내 한국사료 발굴의 권위자인 박 교수는 지난 16년 동안 문서보관소를 찾아다니면서 관계 문서를 찾아 번역하고 자료집으로 정리했다. 박 교수는 “한·러 관계사의 1차 사료인 러시아 대한정책 자료가 한국전쟁 등 한·러 관계사 연구에 길잡이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1) 한국전쟁 발발 막전막후

    [한국전쟁 60주년 기획] (1) 한국전쟁 발발 막전막후

    다시 유월이다. 60년 전 한반도를 선혈로 물들였던 한국전쟁 발발의 막전막후에서 남북한, 미국과 옛 소련 그리고 공산화된 중국 간의 이합집산과 동상이몽이 클라이맥스에 올랐던 바로 그 여름이다. 일갑자의 세월이 흐른 지금, 천안함 사태를 둘러싸고 전쟁의 두 당사국과 주변 4강이 편을 갈라 맞서고 있는 풍경의 흑백판이다. 한국전쟁을 어떻게 봐야 하나. 전쟁을 일으킨 발발자와 원인 그리고 전쟁의 성격에 대한 의견이 여전히 분분하다. 한국전쟁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주변 4강의 지정학적 관계와 국제정세 속에서 발발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한다면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 서울신문은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러시아연방 대통령문서보관소에 깊숙이 감춰져 있던 한국전쟁 관련 문서발굴을 통해 전쟁의 실체에 한걸음 다가서려고 시도했다. 문서 속에는 한국전쟁의 총연출자인 스탈린과 동조자이자 막후 조종자였던 마오쩌둥, 각본을 썼지만 꼭두각시에 불과했던 김일성이 노렸던 적화통일의 염원이 빛바랜 엽서처럼 남아 있다. 1949년 3월5일은 김일성에게 역사적인 날이었다. 김일성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정부대표단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마주 앉았기 때문이다. 소련군 장교출신의 풋내기 김일성이 절대적 독재자에게 첫선을 보인 날이다. 김일성으로서는 우상 스탈린으로부터 전쟁 승인과 지원을 이끌어낼 절호의 기회였다. 이 시기 평양과 모스크바 사이를 부지런히 오간 비밀문서는 겉으로는 경제협력, 문화교류 확대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전쟁준비를 위한 소련의 군사 및 군비지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2월4일 평양에서 외무성에 보낸 전문 중에는 ‘2월3일 남조선 경비대가 38선을 넘어와 북한 경비대와 교전 끝에 격퇴됐다. ’는 내용의 문서가 있다. 4월20일 소련 국방상이 스탈린에게 보낸 38선 상황에 대한 극비보고서에서도 ‘남한의 38선 침범행위는 도발적이며 체계적이다. 올 들어 지난 15일까지 모두 37건의 침범사례가 있었다. 발포는 남한이 시작했다. 남한군의 38선 집결이 계속되고 있다.’라고 보고했다. 회담을 전후해 한반도의 전쟁위기가 고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 1946년 대구폭동과 1948년 제주 무장봉기, 여수·순천반란사건 등으로부터 한숨을 돌린 이승만 대통령은 38선 부근에 국군을 집중적으로 배치했으며 시중에는 ‘8월 북벌론’이 팽배해 있었다. 첫 회담에서 스탈린은 남한에 미군이 얼마나 있으며, 남한군의 규모와 남한군을 두려워하는지 여부, 희망하는 차관액수 등등에 대해 김일성에게 질문을 던졌다. 김일성은 2만명의 미군이 있으며, 남한 군대는 6만명이고, 남한군보다 북한군이 강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스탈린은 빨치산의 남한 군부 침투를 주문했으며 동석한 박헌영은 ‘침투를 시켰지만 드러내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스탈린은 38선 충돌상황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스탈린은 또 ‘김일성, 박헌영 둘 다 전보다 살이 많이 쪄 알아보기가 어렵다.’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두 사람이 1946년 여름 모스크바를 방문한 사실을 염두에 둔 얘기다. 이후 스탈린은 ‘ 첫째, 북한군은 남한군대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지 못하며 수적으로도 뒤진다. 둘째, 남한에 있는 미군이 개입할 우려가 있다. 셋째, 38선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협정이 유효하다.’는 이른바 ‘3대 남침 불가론’을 내세워 김일성의 전쟁의지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김일성의 데뷔는 성공작으로 평가된다. 스탈린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김일성은 항일 유격전에서 일본군이 가장 체포하고 싶어 하는 게릴라 지휘관 출신이었다. 1942년 소련군에 입대해 1945년 평양에 지도자로 나타났을 때 적군 군복에 소령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그는 중국보다 소련을 후원자로 선택한 스탈린 추종자였다. 그는 ‘나는 스탈린 동지에게 충실한 공산주의자이며, 나에게 스탈린은 바로 법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퓰리처상 수상작가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를 파헤친 최신작 ‘콜디스트 윈터’에서 스탈린이 김일성을 좋아한 이유를 ‘김일성의 지도력이 소련군보다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적인 역량과 지도력이 뛰어났다면 마음대로 다루기 어려웠을 테니 당연했다. 다소 경력이 부족하더라도 미화시킨 다음 권좌에 앉히면 그만.’이라고 분석했다. 김일성은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마오쩌둥에게 빌붙기 전까지 스탈린의 입맛에 맞게 움직였다. 김일성은 평양주재 스티코프 소련대사를 구워삶는 데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스티코프는 남한의 북침 가능성이 크며, 북의 준비는 부족하다는 점을 강조한 전문을 스탈린에게 계속해서 보냈다. 스탈린은 이 같은 스티코프의 언동에 대해 경고장을 보냈을 정도다. 스탈린은 북한의 선제공격이 미국과의 전면전을 유발할지 모른다면서 몸을 사렸다. 스탈린은 스티코프에게 ‘전쟁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남한이 먼저 북한을 공격하는 경우밖에는 없다.’라며 남한이 공격해 올 때까지 자제토록 지시했다. 김일성의 다음 행로는 마오쩌둥 설득에 맞춰졌다. 마오쩌둥은 1949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주석에 취임한 다음 날 소련과, 나흘 뒤 북한과 각각 국교를 맺었다. 김일성은 1949년 4월 북한 인민군 총정치국장 김일을 보내 원조의사를 떠봤다. 베이징 지도자의 답은 ’선제공격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다만 ‘필요하면 중국군 조선인 사단 2개를 지원해 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검은 머리이니까 중국 해방군인지 북한 인민군인지 분간을 못 할 것’이라는 희망어린 메시지를 전했다. 이때만 해도 김일성은 신생 중국을 얕봤다. 소련에 매달렸고, 중국의 도움은 불필요하다고 여겼다. 전쟁을 통해 입지를 다지려던 김일성은 끈질겼다. 1950년 4월 한 달 동안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스탈린과 세 차례 만났다. 마오쩌둥의 개입 의사를 전해 들은 스탈린의 마음도 움직였다. 김일성은 ‘전쟁이 나도 미국은 절대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20만명의 공산당원들이 들고 일어나 북한을 지지할 것’이라고 허풍을 쳤다. 스탈린은 마침내 ‘북한군을 38선에 집결시키고서 남한에 대해 평화통일을 제의할 것, 남한이 거부하면 옹진반도를 점령하되 남한이 반격하면 전선의 폭을 넓혀 나간다.’는 이른바 ‘3단계 작전지침’을 제시했다. 러시아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AV토르쿠노프 총장은 저서 ‘한국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에서 “전면전 허용은 아니었다.”라고 분석했지만 김일성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뜸을 들일 의사가 없었다. 마오쩌둥도 합류했다. ‘미국이 개입한다면 중국도 북한에 군대를 보낸다.’는 것이 마오쩌둥의 기본 생각이었다. 마오쩌둥은 1949년 12월16일 모스크바를 방문해 석 달 가까이 체류하면서 스탈린과 만났다. 그 때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혁명에 성공한 영웅으로 초대받지 못했다. 숱한 공산주의 국가 대표 중의 한 사람으로 스탈린의 고희연에 참석, 장기집권을 축하하도록 초대받았을 뿐이었다. 두 공산주의 국가 거목 사이에는 불화가 싹트고 있었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에 따르면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전혀 믿지 않았다. 스탈린은 한반도가 남북으로 나뉘기보다 자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고마워하는 단일 공산국가로 통일되기를 바랐다. 또한 일본에 맞설 정도로 강해지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일본 동양학원대학 주지안롱 교수는 저서 ‘모택동은 왜 한국전쟁에 개입했을까’에서 중국의 참전이유를 ‘첫째, 미국 7함대의 타이완해협 파견을 대중국 선전포고로 간주했다. 둘째, 한반도 개입이 국내 정치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다. 셋째, 미군이 한반도 북부에 진군하면 중국 동북지역이 위협에 노출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국의 한국전쟁 전문가인 선즈화 화동사범대 교수는 ‘미국의 침공을 저지하고자 미·중대결의 전장으로 한반도를 선택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본토 원자폭탄투하설을 입에 올린 맥아더 장군의 쇼맨십도 마오쩌둥의 참전의지에 불을 붙였다.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저지른 가장 큰 실책은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큰소리치면서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간 일이었다. 마오쩌둥은 미국의 원자폭탄을 종이호랑이로 깎아내렸다. 인도의 네루 수상과 만난 자리에서 ‘우리는 1000만~2000만명의 인명피해는 눈도 깜짝하지 않는다.’라고 호언장담했다. 공개된 러시아 비밀문서를 유심히 살펴보면 공산진영 세 나라 지도자의 성격과 품계가 잘 나타난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직접 지시하기보다는 평양주재 대사 등을 통해 우회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썼다. ‘김일성에게 문서를 읽어주고 나서 베껴가는 것은 허용하지만 문서를 가져가지 못하도록 하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마오쩌둥 역시 스탈린 앞에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갔다. 문서의 서두는 스탈린의 암호명인 ‘필리포프 동지’로 시작했고, ‘귀하의 검토와 의견을 바란다.’라고 마무리했다. 또 ‘볼셰비키적 경의를 표하며 모택동’이라고 썼다. 전쟁이 장기화하고 중국의 역할이 강화되면서 마오쩌둥은 스탈린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휴전교섭 지침을 스탈린에게 의뢰한 1951년 6월30일자 전보에서 마오쩌둥은 ‘ 귀하에게 나의 의견을 전한다. 검토 후 김일성에게도 직접 지시하시기 바란다. 귀하가 김일성과 접촉하고 나서 나에게도 알려주기 바란다.’라고 썼다. 의례적인 칭송은 사용하지 않았고, 자신의 존재감을 내세우고 있다.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스탈린은 물론 김일성과 공산진영에서 ‘무시 못할 둘째 형’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김일성이 줄기차게 주장한 ‘남침공격’을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결국 허락했지만 상호 담보를 원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베이징 지도자의 지원을 구하라고 지시했다. 1950년 5월13일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베이징 장도에 올랐다.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 등 공산진영 3자의 전쟁 합의는 이날 성사됐고, 한국전쟁은 그렇게 막이 올랐다. 노주석 논설위원·윤샘이나 기자 sam@seoul.co.kr
  • 북한연구자 서동만을 추모하다

    지난해 폐암으로 사망한 서동만(1956~2009) 상지대 교수를 기념하는 책이 나왔다. 서동만 저작집 간행위원회가 고인의 주요 논문과 잡지 기고 글 등을 모은 ‘북조선 연구-서동만 저작집’(창비 펴냄)과 유족 중심의 서동만 추모집 발간위원회가 지인 52명의 추모글을 모아 낸 ‘서동만, 죽은 건 네가 아니다’(삶과 꿈 펴냄)이다. 일급 북한 연구자로 꼽히는 고인은 ‘내재적 접근론자’다. 송두율과 동의어처럼 돼 버린 내재적 접근법은 색깔 공세의 좋은 먹잇감이다. 그런데 원래 내재적 접근법은 그런 이론이 아니다. 어떤 사회를 평가하려면 그 사회의 논리와 잣대를 들이대자는 것인데, 색깔론자들은 ‘평가하려면’을 ‘찬양하려면’으로 바꾼 뒤 ‘칼질’했다. 실제 내재적 접근법을 제일 처음 적용한 저작은 E H 카의 1950년작 ‘소비에트 러시아사’였다. 저 유명한 ‘역사란 무엇인가’는 러시아 연구자인 카가 역사철학 문제를 언급한, 일종의 ‘외도 저서’다. 공산주의 사회를 자본주의 논리로 평가할 수는 없으니, 소련이 얼마나 공산주의 원칙에 충실한지 자체 논리로 어디 한번 따져 보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송두율의 문제점은 내재적 접근법이 아니라 그에 걸맞은 실증적 연구를 생산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고인의 학문적 업적은 이 지점이다. 일본에서 발굴한 각종 북한 관련 1차 사료를 정밀하게 분석, 가공해 냈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지도 아래 쓴 박사논문을 손봐 2005년 출간한 ‘북조선 사회주의체제 성립사 1945~1961’은 학계에서 최고의 북한 연구서라 평가받았다. 한국전쟁 뒤 북한이 지금의 북한과는 다른 사회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었으나 이런 움직임이 패배했다는 게 책의 논지다. 현재의 기괴한 북한 사회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규명한 것이다. 북한으로서는 북한의 논리로 북한을 비판하는 것이니 가장 뼈아픈 비판인 셈이다. 2003년 당시 서 교수를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임명하는 문제를 두고 색깔론이 횡행할 때 보수 일간지 논객(권영빈 중앙일보 당시 편집인)마저 “저작을 검토해 보니 친북좌파라는 비난은 얼토당토않다.”며 “‘서동만은 빨갱이’라고 누군가 잘못 짖으니 너도나도 짖다가 여기까지 온 것 아닌가. 우리 사회의 무분별이 이렇게 개판인가.”라고 탄식했다. ‘서동만을 아는가’라는 제목의 이 칼럼은 추모집에도 실렸다. 고인은 다만 북한에 대한 비판과 북한에 대한 공격을 엄격히 구분했을 뿐이다. ‘북조선 연구’ 2만 9000원, ‘서동만’ 2만원.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시론] 적벽대전과 천안함사태/이준태 경희대 교수·중국학연구소 소장

    [시론] 적벽대전과 천안함사태/이준태 경희대 교수·중국학연구소 소장

    천안함 사태로 인한 이른바 북풍이 거세게 불었던 6·2 지방선거도 끝나고 곧 군의 대응 태세에 대한 감사원의 감사결과 발표와 함께 책임의 과중에 따라 군 내부에 삼엄한 문책의 회오리가 몰아칠 것으로 예상된다. 46명의 소중한 젊은 해군장병의 희생에는 철저한 진상조사와 그에 따른 문책과 군의 개혁이 필연적이겠지만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보여주기 식의 문책만이 천안함 사태를 풀어나갈 최선의 방도인지 곰곰이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현 시점에서 필자는 역사소설 삼국지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적벽대전의 교훈을 조조의 처지에서 주목해 보고자 한다. 잘 알다시피 손권의 오나라와 유비의 촉 나라 연합군을 치려고 조조는 백만 대군을 양쯔강에 결집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오나라 최고 지휘관 주유의 반간계(反間計)에 속아 조조 스스로 자신의 참모이자 수군 최고 지휘관인 채모와 장윤을 참수케 하였고 이 일은 결국 조조에게 적벽에서의 엄청난 패배를 안겨다 주었다. 평생을 육지에서 전투를 해왔던 백전노장 조조는 수군 장수 채모와 장윤을 참수한 직후 “수군을 어찌하려는가.”라는 주위의 말을 듣고서야 적의 간계에 속았음을 깨닫고 크게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그 순간 적벽대전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적에게 속고 돌아온 장수일지라도 그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우선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천안함 사건이 발생한 지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 생방송을 통해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국방부장관을 상대로 모 국회의원이 보여주었던 문제 접근 방식은 시청하는 국민으로 하여금 또 다른 걱정거리를 느끼게 해주었다. 불 끄는 소방관에게 “건물 안에 몇 명이 있느냐?”, “빨리 구해내지 않고 뭐하냐?”, “불났을 때 너는 뭐 했느냐?”와 같은 인기몰이 식의 질문보다는 “불이 더 번질 가능성은 없느냐?” 또는 “번질 경우의 대비책은 세워져 있느냐?”와 같은 질문이 오히려 위기에 직면한 국민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하고, 넓은 의미의 국정을 맡은 정치인들에 대해 믿음이 가게 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GNP와 군사력의 함수관계를 따지지 않는다고 해도 대한민국 군대는 결코 약한 군대가 아니지만, 군사전략적으로 의도된 적의 기습을 막아내기는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 본다. 수중의 적 잠수함을 탐지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 군사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과거 한·미 연합훈련 도중 미 항공모함과 주변 함정들이 소련의 핵잠수함을 탐지하지 못 하고 급기야 항모와 잠수함이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한 바 있는데, 이는 수중작전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완벽한 국가안보는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안보의 전문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군사전문가를 육성하는 것에도 많은 시일과 노력이 소요된다. 동시에 베트남전 이후 실전을 경험한 지휘관이 거의 없다는 현실 등을 고려할 때 천안함 사태는 향후를 대비한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본다. 이번 사태에 책임져야 할 지휘관이 있겠지만 될 수 있으면 지휘관 스스로 뼈를 깎는 자세로 각성하여 다시는 제2의 천안함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히 준비하고 대비할 기회를 줄 필요도 분명히 있다. 전군 지휘관회의에서 김태영 국방부장관은 지난 3월26일을 국군으로서 치욕의 날이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절대 그 의기가 일회성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많은 국민은 이번 사태를 매우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대한민국군을 믿고 신뢰하고 있다. 천안함 사태를 통해 군이 더욱 강해지는 발전적인 계기가 되기를 희망하고 또한 이것이 먼저 간 46명 장병들의 희생을 값지게 하는 것이라 믿는다. 적의 간계로 아까운 장수의 목숨을 빼앗아 버린 조조처럼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우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태극전사와 30일 맞붙은 벨라루스는 어떤 팀?

    태극전사와 30일 맞붙은 벨라루스는 어떤 팀?

    한국 축구대표팀과 30일 오후 10시(한국시간) 오스트리아 쿠프슈타인 슈타디온에서 평가전을 갖는 벨라루스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1990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독립한 벨라루스는 월드컵과 유럽축구선수권 등 메이저대회 출전 경험이 거의 없다. 또 벨라루스는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82위로 저조한 순위에 그쳐있다.특히 2010 남아공월드컵 유럽예선에서는 잉글랜드와 우크라이나, 크로아티아에 패해 4위에 올랐으며 카자흐스탄과 안도라 등 다소 실력이 출중하지 못하다고 평가받는 국가 외에는 승리를 거둔 적이 없다.벨라루스의 가장 대표적인 선수는 미드필더 알렉산드르 흘렙(29. 슈투트가르트)지만 이번 대표팀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 비탈리 쿠투조프(30. 바리), 티모페이 칼라체프(29. 로스토프) 등 유럽예선을 경험해 본 일부 선수들도 제외돼 유럽 예선 때보다는 활약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사진 = 서울신문NTN DB서울신문NTN 뉴스팀 ntn@seoulntn.com@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新 차이나 리포트] G2 중국, 세계를 호령하다 ⑤ 야심찬 우주개발 계획

    [新 차이나 리포트] G2 중국, 세계를 호령하다 ⑤ 야심찬 우주개발 계획

    │베이징 박홍환특파원│“미국과 소련이 하면 우리도 한다.” 1958년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의 선언은 ‘흰소리’가 아니었다. 중국의 우주개발 계획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중국의 원대한 우주개발 계획은 달을 넘어 화성을 향하고 있다. 한번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자 미국과 러시아가 양분했던 ‘우주자산’을 무서운 속도로 잠식하면서 미국에 맞서는 ‘우주대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중국은 올 10월 두 번째 달 탐사위성인 ‘창어(嫦娥) 2호’를 발사하고, 2013년에는 달 연착륙 임무를 맡은 ‘창어 3호’를 쏘아올릴 계획이다. 여기에는 독자 개발한 달 탐사차량도 실린다. 내년 상반기에는 소형 우주정거장이자 우주실험실 역할을 맡을 ‘톈궁(天宮) 1호’를 발사하고, 하반기에 ‘선저우(神舟) 8호’를 쏘아올려 첫 우주 도킹 실험도 할 예정이다. 무인 화성탐사선 ‘잉훠(螢火) 1호’도 내년에 발사한다. 2017년 우주인을 달에 보내고, 2020년에는 독자적인 우주정거장을 건설한다는 목표도 세워놓고 있다. 2030~40년에는 화성유인탐사도 시작할 계획이다. 앞서 중국은 2003년 양리웨이(楊利偉)가 선저우 5호를 타고 우주비행에 성공함으로써 미국, 러시아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 유인 우주선 발사국이 됐다. 2007년 달 탐사위성 창어 1호 발사, 2008년 자이즈강(翟志剛)의 우주유영 등 거의 매년 ‘우주 이벤트’를 벌이고 있다. 중국의 유인 우주선 발사는 구 소련 및 미국에 비해서는 40년 이상 뒤졌다. 하지만 중국의 우주개발이 미국과 러시아를 따라잡는 데 앞으로도 40년 이상 걸릴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중국의 경제성장 및 과학기술 발전 속도,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 등을 감안하면 머지 않은 시기에 미국과 러시아 수준에 근접할 것으로 예측된다.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미·중 2대 우주강국 체제로의 전환이 예고되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경기 침체로 미국과 러시아가 우주개발 분야 예산을 대폭 감축한 반면 중국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우주개발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어 격차가 크게 좁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왕원바오(王文寶) 중국 유인우주개발판공실 주임은 WSJ와의 첫 인터뷰에서 “중국이 이르면 10년 내에 독자적으로 우주공간 탐색에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중국의 우주개발은 ‘중국 항공우주공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첸쉐선(錢學森·2009년 사망) 박사가 미 항공우주국(NASA)에서 활동하다 전격 귀국한 1955년부터 비롯됐다. 중국 정부는 첸 박사에 대한 아낌없는 지원을 통해 우주과학 기술을 기초부터 탄탄하게 쌓아올렸다. 문화대혁명 기간에도 중단되지 않았다. 1970년 유인우주선 개발계획, 이른바 ‘714공정’이 마오의 지시와 심의로 시작됐으며 개혁·개방 이후 더욱 본격화됐다. 1986년 3월 첨단기술연구계획인 ‘863계획’을 수립해 항공우주 관련 기술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장쩌민(江澤民) 주석 체제가 등장한 1992년 ‘921공정’을 통해 3단계의 우주개발 계획이 확정됐다. 중국이 우주개발에 집중하는 데에는 정치, 경제, 군사 등 다목적 포석이 깔려 있다. 국민들의 결속을 이끌어 내면서 대외적으로 강대국의 위상을 과시하는 동시에 상업적 이익의 확보, 첨단 군사기술의 제고 등에서 우주개발만큼 뛰어난 재료는 없다는 것이 미국 및 러시아의 사례에서 이미 검증됐다. 군사적 측면의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쉬지량(許其亮) 공군사령관은 지난해 공군 창설 60주년 기자회견에서 “우주공간에는 국경선이 없다. 오직 힘만이 평화를 지킬 수 있다.”며 우주무기 개발을 공언했다. 중국은 경제대국, 군사대국에 이어 우주대국의 길에 들어섬으로써 명실상부한 세계 초강대국의 지위에 올라설 수 있게 됐다. 물론 그 기초에는 과학기술에 대한 적극적인 재정, 정책적 뒷받침이 있었다. stinger@seoul.co.kr
  • [《복에 관한 담론》(돌베개) 중에서 | 무덤을 찾아다니며] 무덤에도 시대가 보인다

    [《복에 관한 담론》(돌베개) 중에서 | 무덤을 찾아다니며] 무덤에도 시대가 보인다

    언제부터 생긴 기묘한 버릇인지, 나는 젊은 시절 외국에 나가 살 때 어느 새로운 도시를 방문하면 곧잘 그 고장의 묘지부터 찾아보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독일 하이델베르크 유학 시절에 그곳 공동묘지에 묻힌 막스 베버와 마리안네 베버 부부,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철학자 쿠노 피셔 등의 무덤을 찾은 것이 시작이 아니었나 회상됩니다. 유럽의 묘원(墓園)은 우리나라의 공동묘지와는 달리 그 꾸밈새가 아름답고 잘 정리돼 있기도 해서 꽤 볼 만하고 관광객에게도 충분히 눈요깃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자동차로 드라이브하면서 둘러봐야 되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의 광대한 중앙묘지(zentralfriedhof)는 그 좋은 보기입니다. 그곳의 가령 음악가 묘역 단지에는 베토벤, 브람스, 글루크, 슈베르트, 후고 볼프,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 등 세계 음악의 기라성 같은 작곡가들이 한데 모여 묻혀 있습니다. 더욱이 그 무덤들은 천편일률적인 우리나라의 무성격한 봉분과는 달리 무덤마다 각 시대 양식의 조각 작품을 장식하고 있기도 해서 다양하고 개성적인 형상을 보여줍니다. 장엄하기도 하고 우아하기도 한 유럽의 그러한 묘지들을 우리나라의 초라한 분묘와 비교하고 나면, 과연 한국이 세계에 자랑할 조상 숭배의 나라라 할 수 있는지 자신이 없어집니다(물론 선조들의 무덤 자리로 명당을 찾으려는 한국인의 성심과 열성만은 단연 세계 제일이란 믿음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가령 프랑스의 여행 가이드북 《기드 뒤 미슐랭》에는 작곡가 베를리오즈, 시인 보들레르, 독일의 망명 문인 하이네, 또는 실존주의 작가 사르트르와 보봐르 등 명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묘역 지도까지 자세히 기재된 파리의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의 공동묘지에 관한 안내가 있습니다. 그곳은 가보신 분들도 많으시리라 믿기 때문에 그곳에 관한 긴 얘기는 생략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비교적 근래에 가본 묘지 몇 군데에 관한 얘기만 해볼까 합니다. 나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20여 년 전 처음 방문했습니다만 그때는 다른 곳은 둘러보지도 않고, 그럴 시간 여유도 없고 해서 오직 한군데만 구경하고 돌아왔습니다. 베네치아 시내에서 택시(모터보트)로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산 미켈레 섬(Isola S. Michele)만을 둘러보고 온 것입니다. 그 섬의 공동묘지에 묻힌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1882~1971)의 무덤을 찾아보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 프랑스, 미국의 국적을 차례로 가진 세상이 다 아는 코스모폴리탄이었기 때문에 그가 어디에 묻히건 놀랄 일은 아니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뉴욕에서 숨을 거둔 그가 영면의 장소로 마지막 국적을 얻은 그 광활한 미 대륙의 땅이 아니라 굳이 대서양을 횡단해서까지 유럽으로 건너와, 하필이면 그것도 예전에 한동안 국적을 취득하고 살았던 프랑스가 아닌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로 건너와서 거기서도 다시 한참 떨어진 한적한 외딴섬에 묻혔다는 것이 내게는 도무지 궁금하기만 한 수수께끼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산 미켈레 묘지를 찾아가 봤고, 거기서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이고르와 베라 스트라빈스키 부부의 묘가 있었고, 거기에서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세르게이 디아길레프(1872~1929)의 무덤이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걸 확인하고 그때 그곳에서 잔잔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발레 뤼스(Ballet Russe)’를 창단해 20세기 발레의 부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디아길레프는 스트라빈스키에게 발레 음악의 명작 <불새> <페트루슈카> <봄의 제전> 등의 작곡을 위촉해 그를 세계적인 음악가로 키워 준 사람입니다. 산 미켈레에 못지않게 나를 감동시킨 것은 서베를린의 첼렌도르프 공원묘지에 묻힌 전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의 무덤이었습니다. 사생아로 태어나서 서베를린 시장을 거쳐 유럽대륙 최고(最古)의 정당 당수가 돼 제2차 세계대전 후 첫 사회민주당 출신의 총리로 취임한 빌리 브란트(1913~1992), 그는 냉전시대에 동·서유럽의 화해에 기여한 업적으로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무덤에는 아무런 장식이나 가공도 하지 않은 자연석이 하나 덩그렇게 세워져 있고, 거기에는 일체의 경력이나 관직에 관한 표시 없이 - 심지어 드골 프랑스 전 대통령(1890~1970) 묘비에도 그것만은 새겨 두었다는 생년과 몰년(沒年) 표시도 없이 - 다만 WILLY BRANDT라는 이름만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나를 감동시킨 것은 브란트의 묘역 바로 뒤가 에른스트 로이터(1889~1953)의 묘역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로이터와 브란트는 둘 다 베를린 시장을 역임하면서 저마다 스탈린의 베를린 봉쇄와 흐루시초프의 베를린 장벽에 맞서 분단 도시의 자유를 지켜낸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노르웨이 군복을 입고 망명지에서 귀국한 젊은 브란트를 정치가로 키워 준 사람이 역시 터키의 망명지에서 귀국한 베를린의 선배 시장 에른스트 로이터였습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로 가히 압권이라 할 만한 사례를 나는 최근 모스크바의 한 공동묘지에서 구경했습니다. 그곳은 가령 정치가로는 흐루시초프와 옐친, 문인으론 고골과 체호프, 무대인으론 샬라핀과 울라노바 등이 묻혀 있는 명소 노보데비치 수도원의 묘원이었습니다. 나는 거기에 전년에 타계한 러시아의 세기적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1927~2007)가 묻혀 있다 해서 2008년 6월 초 짬을 내어 찾아가 봤습니다. 로스트로포비치의 무덤은 묘비가 완성되지 않아 가묘 상태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치 제2차 세계대전 전의 세계에서 드림 트리오라 일컫던 파블로 카살스(첼로), 자크 티보(바이올린), 알프레드 코르토(피아노)의 3인조와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대전 후엔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 소련의 ‘드림 트리오’를 이루었던 에밀 길렐스(1916~1985, 피아노)와 레오니드 코간(1924~1982, 바이올린)의 묘소가 오래전부터 거기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이들이 형제도 부부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길렐스와 코간은 같은 자리에 묻혀 있고, 묘비도 둘이 붙어 있었던 것입니다. 사후의 영원한 안식처로 생전에 특별히 가까웠던 은인이나 선배, 친구나 동료들 곁을 찾아간다는 것이 동북아에는 없는 서양의 기독교 문화권에만 있는 풍습인가 생각해 봤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의 거리인 고도(古都) 가마쿠라(鎌倉)에는 도케이지(東慶寺) 묘원이 있습니다. 원래 비구니 사원이라고 하는 이 절의 후원에 마련된 공동 묘역에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근대 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한 출판사 이와나미서점의 창업자 이와나미 시게오를 비롯해서 일본 근대철학을 대표하는 니시다 기타로와 아베 요시시게, 와쯔지 데쓰로, 다니카와 데쓰조, 문학자 고바야시 히데오와 아베 도모지, 기시다 구니오 등의 무덤이 모여 있습니다. 지난 100년 동안 일본 문화계의 주요 인물 가운데 그곳에 묻히지 않은 사람이 드물 정도로 도케이지 묘원은 근대 일본의 지식인과 예술인의 네크로폴리스(necropolis)라 할 만한 곳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다른 나라와 같이 순국한 군인들을 위한 국립묘지는 있습니다. 가족 묘지를 마련할 땅을 매입하기가 일반 서민들에겐 갈수록 어려워진 근래에 와서는 망우리를 위시해서 여러 군데에 공원 묘지, 교회 묘지 등이 개발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음악가, 학자, 작가들을 위한 공동묘지는 없는 것 같고, 앞으로도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이 도대체 가능한지, 아니 그러한 발상부터 가능한 것인지…, 나는 회의적입니다. 살아서는 넓은 세상에 나와 이름도 군청이나 시청의 열린 호적부에 오르지만, 죽어서는 좁은 선영(先塋)의 가족묘에 돌아가 묻히고 이름도 닫힌 족보에 기록되는 것이 괜찮게 사는 한국 사람들의 생사입니다. 왜 그럴까? 그러한 궁금증을 풀어보기 위해 나는 우리나라 기복사상을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글·사진_ 최정호 울산대학교 석좌교수
  • [씨줄날줄] 정찰총국/노주석 논설위원

    정보기관을 운영하지 않는 나라는 없지만 정보기관 사이에도 우열은 존재한다.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이스라엘의 모사드를 세계최고의 정보기관으로 꼽았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2006년도 영화 ‘뮌헨’은 모사드가 벌인 피의 보복극을 극화했다. 1972년 뮌헨올림픽에 참가한 이스라엘 체조선수 11명이 팔레스타인의 검은 구월단에 인질로 잡혀 처형당하자 민간인으로 신분을 세탁한 전직 모사드 요원들이 범인들을 끝까지 찾아내 처단한다는 내용이다. 모사드에 1위 자리를 내준 미국의 CIA를 비롯해 M16으로 유명한 영국의 SIS, 프랑스의 DGSE, 옛 소련시절 악명 높았던 KGB의 후신 FSB도 그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정보기관이다. 일본의 내각 정보조사실이나 중국의 국가안전부도 위세가 만만치 않다. 정찰총국은 북한의 정보 및 공작기관이다. 지난해 2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산하 대외정보조사부(35호실)와 작전부, 그리고 총참모부 산하 정찰국을 합쳐 만들었다. 1968년 청와대 습격사건과 1983년 아웅산 테러사건을 일으킨 무장 테러 집단이다. 명목상 인민무력부 산하일 뿐 지휘체계를 보면 총정치국, 보위사령부와 함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지휘하는 3대 권력 중추이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정찰총국을 세계 5위권의 정보기관으로 꼽기도 한다. 실제 미국 정보당국은 정찰총국으로 통폐합하기 이전의 정찰국을 세계 최대규모의 정예 공작부대로 보았다. 정찰총국의 인원은 모두 1만명으로 추정된다. 작전부는 한국에 침투하는 전투원을 호송하거나 요인 납치, 암살에 주력한다. 정찰국은 무장공비로 남파되는 게릴라부대라고 보면 된다. 옛 대외정보조사부인 35호실은 해외 정보수집 임무를 맡는다. 1987년 KAL기 폭파사건이 이들의 작품이다. 110호 연구소는 해킹 등 사이버테러를 담당한다. 머뭇거리던 정부와 군이 천안함 침몰사건을 총괄한 공작주체로 정찰총국을 사실상 지목했다. 천안함에 어뢰를 쏜 연어급(130t) 잠수정을 보유한 부대가 북한 해군이 아니라 정찰총국인 것으로 미뤄 발뺌이 어려울 것이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암살을 위해 침투했다가 붙잡힌 공작원 2명도 정찰총국 소속이었다. 국가안보론에서 위해세력을 물리치는 3가지 옵션이 있다. 첫째는 외교이고, 둘째는 군사적 대응이다. 둘 다 여의치 않을 때는 세 번째 옵션으로 ‘비밀공작(Covert Action)’을 쓴다. 우리만 당하라는 법이 어디 있나.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 베르베르의 ‘우주돛단배’ 현실로

    베르베르의 ‘우주돛단배’ 현실로

    │도쿄 이종락특파원│일본이 21일 첫 금성탐사위성과 우주범선 발사에 성공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파피용’에 나오는, 거대한 돛을 달고 1000년을 날아가는 우주범선이 현실로 한 발짝 더 다가선 것이다.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는 오전 6시58분쯤 가고시마현 다네가시마 우주센터에서 금성탐사위성 ‘아카쓰키’(새벽)와 우주 범선(요트) ‘이카로스’ 등을 실은 H-2A 로켓 17호기를 발사했다. 아카쓰키는 오전 7시25분쯤 고도 360㎞ 지점에서 로켓으로부터 분리돼 예정된 궤도에 올라갔다. 이어 오전 7시40분쯤 이카로스가 분리됐고, 이후 10분간 나머지 소형 위성 4개가 모두 예정된 궤도에 안착했다. ●예정궤도 안착… 12월7일 금성도착 이카로스는 빛을 반사하는 초박막 필름으로 제작한 돛을 편 뒤 태양광에서 나오는 광자(포톤)를 에너지로 삼아 움직인다. 태양빛이 돛에 부딪힐 때 생기는 힘, 즉 태양풍을 받아 날아가는 셈이다. JAXA에 따르면 이카로스의 본체는 직경 1.6m, 높이 0.8m의 원통 모양이다. 여기에 한 변이 20m가량인 정사각형 모양의 돛을 달게 된다. 돛은 대기권을 벗어난 뒤 회전하는 본체의 원심력에 의해 펼쳐진다. 돛의 두께는 100분의1㎜도 되지 않는다. 머리카락보다 얇다. 개발비는 15억엔(약 220억원)이 들어갔다. 개발진은 이카로스에 적용한 기술을 이용하면 별도 연료 없이 태양광만으로도 우주 공간을 운항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돛 두께 100분의1㎜도 안돼 100년 전부터 우주범선의 아이디어가 제기됐지만 큰 돛을 우주에서 펼쳐야 하는 기술적 문제 때문에 지금껏 실현되지 못했다. 이번 비행의 과제는 돛이 안정적으로 작동하는지, 태양 에너지만으로 항해가 가능한지를 입증하는 것이다. JAXA는 비행이 성공할 경우 10년 안에 직경 50m짜리 초대형 돛을 단 목성탐사선을 발사할 계획이다. 일본 첫 금성 기후 탐사위성인 아카쓰키는 약 5억 2000만㎞를 날아가 12월7일쯤 금성 궤도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후 2년 이상 금성 주변을 돌면서 카메라 5대로 금성 대기권을 관측할 예정이다. 금성 표면 약 300~8만㎞ 상공을 돌면서 금성에 왜 거센 바람이 부는지 관측할 예정이다. 옛 소련과 미국, 유럽 등이 금성탐사위성을 쏘아 올린 적은 있으나 지구 밖 혹성의 기상을 관측할 목적으로 위성을 발사하기는 일본이 처음이다. 아카쓰키 개발에는 발사비용까지 포함해서 252억엔(약 3270억원)이 들어갔다. 수명은 4.5년이다. 나머지 소형 위성 4개는 가고시마대 등 일본 대학의 학생들이 제작했다. jrlee@seoul.co.kr
  • 푸틴 “1980년대 KGB 산업스파이로 활동”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1980년대 동독에서 산업스파이로 활동하면서 서방의 민감한 기술과 산업기밀을 수집하는 임무를 수행했다고 밝혔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푸틴총리가 최근 러시아 과학원 회의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고 1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1985~1990년 동독 드레스덴에서 옛 소련의 국가안보위원회(KGB) 스파이로 활약했던 푸틴 총리는 당시 서방과 기술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자신이 본국에 전달한 정보를 상부가 무시한 것에 좌절감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드레스덴은 당시 동독 최대의 컴퓨터 제조업체 로보트론이 본사를 두고 서방 제품을 기초로 제품을 만들었던 곳이었다. 그는 “내가 다른 부서(KGB)에 근무할 당시 우리와 외국인 동료가 특별한 수단을 통해 얻은 성과가 소련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았던 1980년대 말의 상황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당시 지도부에 대한 강한 유감을 나타냈다. 푸틴 총리가 KGB 소속 정보요원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하지만 그가 서방의 컴퓨터 관련기술을 소련에 넘기는 임무를 수행했다는 증언이 일부 있었을 뿐이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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