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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영헌 감독 ‘레바논 감정’ 모스크바영화제 감독상

    정영헌 감독 ‘레바논 감정’ 모스크바영화제 감독상

    정영헌(36) 감독의 ‘레바논 감정’이 지난 28일(현지시간) 모스크바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도시와 시골을 배경으로 쫓고 쫓기는 남녀 인물들의 감정을 독특하게 담아 낸 ‘레바논 감정’은 지난 20~29일 개최된 제35회 모스크바 영화제 경쟁 부문에 다른 13개 작품과 함께 출품돼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정 감독에 따르면 ‘레바논 감정’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총체적 감정을 지칭한다. 작품은 지난 5월 3일 폐막한 제14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CGV무비꼴라주상을 수상한 바 있다. 지난 1959년부터 개최된 모스크바 국제영화제는 옛 소련권과 동유럽 지역 최대 영화제로 한때 주요 국제 영화제로 명성을 떨쳤으나 최근 들어 다른 국제영화제에 비해 쇠퇴하고 있다. 1995년까지는 격년으로 열리다 이후 매년 열리고 있다. 1989년 제16회 영화제에서 강수연이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여우 주연상을 수상하면서 국내에서도 관심을 끌었으며 1993년 제18회 영화제에서 ‘살어리랏다’로 이덕화가 남우 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다. 2003년 제25회 영화제에서는 장준환 감독이 ‘지구를 지켜라!’로 감독상을 받았다. 올해 영화제엔 ‘레바논 감정’ 외에 이지승 감독의 ‘공정사회’가 비경쟁 부문에 초청됐으며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명예집행위원장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한반도 지형변화(하)

    지난 60년간 전쟁 억제 역할을 해온 정전협정은 북한의 무효화 선언이 아니더라도 이미 한계점에 도달한 상태다. 북한이 정전협정을 지키지 않는 상황이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질 정도로 ‘적대 행위의 사실상 정지’라는 본래 의미를 잃고 사문화된 지 오래됐다. 정전협정이라는 안전장치가 전면전을 막고 있는 게 아니라 달라진 국제 역학관계 등 외교 환경과 ‘최악의 무장 충돌만은 피하자’는 남북의 암묵적 합의에 의해 안전이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다. 정전은 휴전보다 좁은 의미로 ‘서로의 합의에 의해 전쟁 당사국들이 일시적으로 전투를 중단한다’는 뜻이다. 휴전은 전쟁 중 얼마 동안 전투를 멈춘다는 의미로 정전보다는 더 나아간 준 평화상태로 볼 수 있다. 정전협정 한글판에는 ‘한반도 정전협정’으로, 영문판에는 ‘휴전협정’(Armistice Agreement)이란 표현을 혼용해 사용하고 있다. 어떤 것이든 전투를 일시 중단할 뿐 전쟁의 종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전협정상 비무장지대는 1000명 이내의 비무장 인원이 들어가 관리하도록 돼 있지만, 한반도 대치 상황이 이어지면서 실제로는 양측의 무장병력과 지뢰, 방벽 등 군사 시설물로 중무장됐다. 군사 인원 및 장비의 반입을 감시하는 중립국감독위 산하 중립국 시찰 소조의 활동은 북한의 소련 무기 반입 논란 끝에 1956년 5월 활동이 중지됐고, 시찰 소조의 활동을 규정한 정전협정 조항도 폐기됐다. 정전 감시의무를 수행하는 군사정전위와 중립국감독위의 기능도 1990년대 들어 공산 측 대표단이 철수하면서 완전히 마비된 상태다. 북한은 1993년 체코, 1995년 폴란드 대표단을 강제 철수시켰는데, 폴란드의 경우 철수를 거부하자 겨울철 막사의 전기와 수도까지 단절했다. 1994년 12월에는 군사정전위 중국 대표단을 철수시켰고, 1996년에는 군사정전위를 대신한다는 명분으로 인민군 판문점대표부를 일방적으로 설치했다. 북한이 군사정전위원회를 거부한 표면상의 이유는 한국군 장성을 군사정전위 수석대표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군은 휴전협정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수석대표가 될 수 없다는 논리다. 서명 당사자에 한국대표가 빠진 정전협정의 태생적 한계가 결국 협정문을 형식상의 문서로 만들어 버린 셈이다. 정전협정은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유엔군 사령관 클라크 대장 등 3명만이 서명했다. 중국군만 제어할 수 있다면 북진통일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정전협상에 반대하며 한국군 대표를 휴전회담에서 철수시켰다. 전문가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정전협정의 불안정성이 시작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국군은 6·25전쟁 당시 교전 당사자일 뿐만 아니라 정전협정의 구속을 받는 집행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유엔군 사령관에게 권한을 맡기고 있다. 이를 빌미로 북한은 정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 협상에서 한국을 제외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등 정치·외교적 공세를 펴왔다. 정전협정을 적용하면 한국은 북한이 도발을 해 와도 직접 책임을 따지지 못하고 유엔군 사령관에게 책임 추궁을 의뢰해야 한다. 군사정전위가 나선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군사정전위가 조사 활동을 마치고 유엔군 사령관에게 조사보고서를 제출하면 유엔군 사령관은 이를 유엔 안보리에 보고하는 절차를 밟는데, 이후의 대응 조치에 대해서는 특별한 규정이 없어 북측의 책임을 추궁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2010년 천안함 폭침 사건 당시에도 유엔사 특별조사팀이 조사에 들어갔지만 북한은 자신들의 어뢰공격으로 천안함이 침몰했다는 조사 결과를 부인했다. 꼭 평화체제로의 전환이 아니더라도 정전협정은 60년간 달라진 남북 간 상황에 맞는 새로운 체제로의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이와 관련해 북한도 1996년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정전협정을 대신하는 ‘잠정협정’을 제안한 바 있다. 평화협정 체결 시까지 정전 상태를 평화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잠정협정을 체결하자는 것이었지만, 주체를 북·미로 한정한 게 문제다. 정전협정이 그렇듯, 한국이 배제된 협정은 실효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평화체제로의 전환 과정에 제도상이 아닌, 실질적인 안전관리 방안 마련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커밍스 ‘자기 수정’ 엇갈린 반응

    [정전협정 60년] 커밍스 ‘자기 수정’ 엇갈린 반응

    1950년 6월 25일 발생한 한국전쟁은 남침이며, 미국이 의도적으로 전쟁을 유도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학 석좌교수(역사학)의 발언에 대해 학계의 입장이 엇갈리는 등 파장이 일고 있다. 김영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평소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논리는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 우리가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해 충분히 밝히지 못한 부분을 커밍스 교수가 (1981년과 1990년에 각각 펴낸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 1, 2권에서) 밝힌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주장에는 객관적 사실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1980년대 중반 커밍스의 주장이 각광을 받았지만 노태우 정부 시절 소련에서 남침에 대한 자료가 나오면서 커밍스의 논리가 제대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게 학계에서 밝혀졌다.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지원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제는 상상하고 추론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커밍스의 장점은 한글을 읽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국 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직접) 원문을 봤기 때문에 남들보다 많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반면 오역도 많았다는 것이 박명림 연세대학교 교수의 지적이었다. 커밍스의 주장을 금과옥조처럼 여겼던 학자들은 이번 발언에 대해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되물었다. 통일연구원의 김진하 박사는 커밍스 교수의 발언에 대해 “소련이 붕괴된 이후 캐스린 웨더스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교수 등 역사학자들에 의해 (기밀) 문서가 공개되면서 남침 유도설과 같은 가설적인 주장은 버티기 어려워졌다. 커밍스의 발언은 그에 대한 해명이 아닐까. 학자로서 객관적 사실과 충돌되는 부분에 대해 짚고 넘어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통일연구원의 조민 박사는 “커밍스의 ‘자기 수정’은 전혀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커밍스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까지 줄곧 본인의 한계에 대해 얘기해왔다. (자신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의 논지를 처음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조 박사는 “수정주의 학파는 1990년대 이후 냉전의 책임을 미국에 맞췄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지 못했다. 당시 커밍스도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의 책임에 포커스를 맞췄던 것에 대한 한계를 계속해서 인정해 왔다. 실제로 한국전쟁은 김일성과 스탈린이 기획한 것인데 그런 점에서 커밍스의 초기 접근법은 보다 다양한 견해를 검토했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덧붙였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反식민주의 근거한 내전 규정 잘못…공산주의 vs 反공산주의 이념전쟁”

    [정전협정 60년] “反식민주의 근거한 내전 규정 잘못…공산주의 vs 反공산주의 이념전쟁”

    캐스린 웨더스비(62)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한국전쟁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아 지난 21일(현지시간) 워싱턴의 존스홉킨스대에서 가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전쟁을 일제강점기와 해방 정국의 한반도 내부에서 발생한 사회적 모순으로 인해 일어난 내전으로 보는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의 시각을 반박했다. →정전 협상 과정은. -1951년 7월 처음 협상이 시작됐으나 미국과 중국, 소련의 소극적 자세로 협상이 지체됐다. 당시 북한 군사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일성은 미국의 엄청난 공습을 견딜 수 없어 조속한 정전을 원했다. 하지만 미국이 정전에 따른 경계선을 당시의 전선에서 훨씬 북쪽에 그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중국이 반대하면서 접점을 찾지 못했다. 이후 미국의 공습이 더욱 심해지자 1952년 초 북한 지도부는 다시 중국에 정전을 간청했다. 그러나 중국과 소련은 북한에 보낸 메시지에서 “전 세계적인 공산주의 투쟁을 위해서는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일축했다. 소련은 한국전쟁으로 미군을 극동에 묶어둠으로써 동유럽에서 군사적 우위를 구축하려 했다. 1952년 가을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공산당 총리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도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북한이 잃을 것이라고는 사람밖에 더 있느냐”면서 정전을 반대했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은 뒤에야 비로소 정전 협상이 진전됐다. →북한의 목소리가 그렇게 약했나. -협상 과정에서 김일성의 역할은 미미했다. 모든 결정은 중국과 소련 지도자에 의해 이뤄졌다. 중국 협상대표가 전보로 마오쩌둥(毛澤東) 중국 국가주석에게 보고하면 중국은 그것을 다시 스탈린에게 보냈다. 역으로 스탈린이 마오쩌둥에게 지시하면 중국은 다시 중국 협상대표에게 하달했다. 북한과는 일부만 상의했을 뿐이다. 앞서 중국은 1950년 가을 참전하자마자 북한군의 지휘권을 접수했다. 김일성은 원치 않은 일이었지만 중국은 중국군의 역할이 압도적이라는 이유로 지휘권을 고집했고 스탈린도 중국 편을 들었다. →미국이 정전에 동의한 이유는. -미군도 많은 인력과 물자를 잃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은 압도적인 무기를 갖고 있었지만 지상에서 중국군을 이길 수 없다는 자괴감과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여전히 한국전쟁은 남침이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남침이라는 것은 기록으로 입증된 명쾌한 진실이다. 김일성은 간절히 전쟁을 원했다. 그는 중국 권력 장악에 성공한 마오쩌둥처럼 한반도 전체로 공산혁명을 확산시키고 싶어 했다. 하지만 북한은 소련에 아주 의존적이었기 때문에 혼자서는 할 수 없었다. 스탈린은 가톨릭의 교황, 김일성은 신부와 같은 위상이었기에 김일성은 스탈린의 말을 따라야 했다. 1949년 9월 김일성이 남침 승인을 요청했지만 스탈린은 미군 개입 가능성을 우려하며 반대했다. 스탈린은 1950년 1월 말 김일성이 다시 요청했을 때에야 남침을 승인했다. 북한은 원래 옹진반도를 공격해 남한이 반격하면 남한이 먼저 공격했다고 핑계를 대며 전면적으로 남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6월 21일 남한군이 북한군의 공격 낌새를 알아채고 옹진반도에 병력을 증강시키자 초조해진 김일성은 38선 전역에서 남침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꿨다. →커밍스 교수는 1949년에 38선 부근에서 있었던 남북 간 무력 충돌의 대부분이 남한군의 공격이었다고 주장하는데. -남한이 많은 공격을 한 것은 사실이다. 당시 남한 지도부도 통일을 원했다. 하지만 38선 근처에서 벌어졌던 소규모 무력 충돌과 전면전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만약 북한이 침공하지 않았다면 남한이 침공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는데. -미국이 전쟁을 승인하고 지원했다면 이승만은 아주 좋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전쟁을 원치 않았고 무기가 없었던 한국군은 독자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능력이 없었다. →미국이 남한을 미군 방어선인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한 의도는.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군의 규모를 줄이라는 요구가 미국 내에서 많았기 때문에 제한된 자원으로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최우선 관심 지역은 일본이었고 그다음이 필리핀이었다. →커밍스 교수는 한국전쟁이 국제전이라기보다는 내전이라고 하는데. -남북한만의 싸움이 아니라 미국과 소련의 싸움이기도 했다. 만약 스탈린이 승인하지 않았다면 한국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북한에 대한 소련의 통제력은 남한에 대한 미국의 통제력보다 훨씬 강했다. 만약 한국전쟁이 내전이라면 동서독 간에는 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겠나. →커밍스 교수는 한국전쟁을 혁명세력 대 친일세력의 반(反)식민주의 전쟁으로 규정했는데. -공산주의 대 반(反)공산주의의 이념전쟁으로 봐야 한다. →한국전쟁의 교훈은. -근본주의적 이념의 파괴성을 경험한 것이다. 억지력의 중요성도 깨닫게 했다. 옛 소련 문서에는 “만약 1949년에 미국의 한국 방어 의지가 분명했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부분이 있다. 애치슨 라인을 의미하는 것이다. 글 사진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美 학자 ‘北의 북침 유도설’ 제기

    [정전협정 60년] 美 학자 ‘北의 북침 유도설’ 제기

    캐스린 웨더스비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가 1950년 6월 북한이 국지 도발로 남한의 반격을 유발한 뒤 그것을 빌미로 전면 남침에 나서기로 계획했다는 내용의 ‘북침 유도설’을 지난 21일(현지시간) 제기했다. 이는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가 24일 보도된 서울신문 인터뷰에서 남침 유도설을 공식 부인하면서 나온 주장이어서 주목된다. 웨더스비 교수는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맞아 이날 미국 워싱턴에서 가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은 원래 1950년 6월 옹진반도를 공격한 뒤 남한이 반격해 오면 ‘남한이 먼저 공격했다’며 전면적으로 남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면서 “하지만 6월 21일 남한군이 북한군의 낌새를 알아채고 옹진반도에 병력을 증강시키자 초조해진 김일성은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남침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꿔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승인을 받은 뒤 6월 25일 남한을 전면 침공했다”고 밝혔다. 웨더스비 교수는 1990년대 초 기밀 해제된 소련의 한국전 관련 문서들을 발굴, 분석함으로써 한국전이 북한과 소련, 중국이 정교하게 기획한 남침이었음을 규명한 학자로 알려져 있다. 웨더스비 교수는 인터뷰에서 “한국전쟁이 남침이라는 것은 기록으로 입증된 명쾌한 진실”이라면서 “간절하게 전쟁을 원한 김일성이 스탈린을 수차례 설득해 승인을 받고 전쟁을 일으킨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한반도 지형 변화(상)

    [정전협정 60년] 한반도 지형 변화(상)

    1950년 6·25 전쟁 발발과 3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동족상잔 비극, 그리고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발효. 포성은 이미 60년 전 멎었지만 남북한 190여만명의 중무장 병력은 여전히 총부리를 겨누고 있다. 비무장지대(DMZ)의 ‘두 얼굴’, 평화와 대치는 오늘의 한반도 상황이다. 정전협정 발효 60주년을 앞두고 서울신문은 정전체제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고 한반도 평화체제 전환의 가능성을 짚어 보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전쟁도 평화도 아닌 모호한 상태가 21세기까지 이어지리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서문)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유엔군 수석대표인 윌리엄 해리슨 미 육군 중장과 북한·중국을 대표한 남일 북한군 대장은 12분 만에 전문 5조 63항의 협정문서 9통과 부본 9통에 서명을 마쳤고, 그날 밤 10시부터 정전협정이 발효됐다. 이때만 해도 정전협정은 임시적·군사적 수준의 합의에 불과했다. 전쟁 당사국 군사 책임자들이 ‘발포중지’에 합의했을 뿐 전쟁 책임 소재 규명과 피해 보상, 전범 처리, 재발방지 조치 등은 입장 차가 커 언급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전체제는 이후 60년 동안 한반도의 군사질서는 물론 외교·안보·정치적 프레임을 규정하고 있다. 양측은 정전협정 60항에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보장하고자 3개월 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쌍방의 한 급 높은 정치회의를 소집할 것을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이에 1954년 4~6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남·북한, 미국, 중국, 소련 등 19개국 외무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정치회담이 열렸다. 87일간 진행된 회담은 성과 없이 끝났다. 이후 폭 4㎞ 길이 240㎞의 비무장지대(DMZ)를 두고 남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고밀도의 군사적 대치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정전체제는 태생적으로 불안정성과 비정상성을 품었다. 남북 대치 상황에서 한국군은 실질적인 정전협정의 이행 당사자임에도 지금까지 소외돼 왔다. 정전협정 위반 사건이 발생하면 유엔군과 북한군이 협의하는 비정상적 상태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적대·대결과 화해·협력이 공존하는 모순된 상황도 여전하다. 정전협정이 유지되는 한 남북은 정치적으로는 전쟁이 종결되지 않은 적대관계에 놓인다. 남북 관계 또한 불명확하다.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서문에는 ‘(남북 관계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고 규정했다. 실제 남북 경계는 지도에 실선이 아닌 점선으로 표시된다. 정전협정 당시 국경선 개념을 배제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양측은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시작으로 1992년 남북기본합의서,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2007년 10·4 공동선언 등 끊임없이 화해와 협력, 교류 확대를 모색해 왔다.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할 필요성도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전쟁 상태를 법적으로 종결시켜야만 평화적인 관계로 재정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 모두 평화체제를 말하고 있지만, 시각차는 뚜렷하다. 우리 정부와 미국은 북한의 핵 프로그램 폐기가 완료되면 비로소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을 병행해 평화체제로 바뀔 수 있다는 입장이다. 반면 북한은 ‘선(先) 북·미 평화협정, 후(後) 한반도 비핵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1, 2차 연평해전과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사건 등에서 보듯 총탄이 오가지 않는 정전체제, 즉 전쟁 부재의 상황이 곧 평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정전협정 60년, 세계 최장의 ‘정전지대’인 한반도는 여전히 살풍경하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정전협정 60년] 브루스 커밍스 美 시카고대 석좌교수가 말하는 ‘한국전쟁’

    [정전협정 60년] 브루스 커밍스 美 시카고대 석좌교수가 말하는 ‘한국전쟁’

    “한국 사람들은 왜 어느 쪽이 전쟁을 일으켰는지에만 관심이 있습니까.” 브루스 커밍스(70) 시카고대학 석좌교수는 지난 20일(현지시간) 진행된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남북한이 한국전쟁의 책임을 놓고 서로를 손가락질하는 비난전을 그만둬야 한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그의 부인인 한국인 우정은 박사가 학장으로 있는 버지니아주립대 캠퍼스 내 자택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커밍스 교수는 한국 현대사와 관련된 구체적인 날짜와 한국인 이름을 자료도 없이 술술 말해 한국전쟁 연구의 최고 권위자임을 실감케 했다. →미국과 한국이 북한의 남침을 유도했다는 당신의 수정주의 이론에 반해 옛 소련의 기밀문서를 통해 북한의 남침이 확인됐는데. -나는 수정주의자가 아니라 개척자다. 내가 쓴 글은 미국 정부의 1급 비밀 문서에 기반을 두고 있다. 나는 미국과 한국이 북한을 침공했다고 말한 적이 없다. 1985년부터 전두환 정권이 그렇게 (조작)한 것이다. 내가 1990년에 쓴 책은 1950년 6월에 전쟁이 시작됐다는 기존의 관념을 허물려는 시도였다. 한국전쟁의 뿌리는 1945년 이후 발생한 일련의 일들에 있다. 미국은 일방적으로 한반도 분단을 결정했고 소련이 나중에 그것을 수용했다. 그것이 한국전쟁의 기반이 됐다.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의 남과 북에 진주했고 남한에서는 이승만이,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권력을 잡았다. 이 때문에 한국전쟁은 근본적으로 내전이다. 나는 북한이 남한을 6월 25일 침공한 것을 알고 있다. 문제는 그 침공이 남한의 자극에 의해 일어났는지 여부다. 1949년 8월 옹진, 개성, 철원 등지에서 남북 간 충돌이 격화됐다. 이승만이 공격을 원할 때 주한 미국대사가 반대했고, 김일성이 공격을 원할 때 주북 소련대사가 반대했다. 양측의 공격 욕구는 이렇게 억제됐다. 그리고 이듬해 봄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이 김일성에게 제한적인 대남 공격을 승인한 것이다. →소련 기밀문서 공개에도 불구하고 기존 이론을 수정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는 얘기인가. -기밀문서를 통해 소련의 연관성이 예상보다 깊숙했다는 점이 밝혀진 것을 빼면 나머지는 별로 수정할 필요를 못 느낀다. 나는 내가 했던 일에 대해 여전히 굳은 확신을 갖고 있다. 다만 책을 쓰는 시점에 아직 나오지 않은 문서에 대해서는 예상할 수 없었을 뿐이다. 나는 다른 학자들이 하지 못한 방대한 북한 문서를 연구했다. 나는 지난 20여년간 내가 하지도 않은 말 때문에 공격받았다. 사람들은 내 책을 읽지도 않고 말했다. →한국전쟁을 미국이 일부러 유도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나. -안 했다. 나는 단지 딘 애치슨 당시 국무장관이 탱크와 항공기를 한국에 두기를 거부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 무기로 이승만이 북한을 공격하는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그 결정으로 인해 남한은 북한이 6월 25일 침공했을 때 대처할 무기가 없었다. 애치슨은 한국에 대해 매우 모호한 전략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김일성은 어리석게도 전쟁을 일으키고 말았다. 애치슨이 전쟁을 유도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그는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고 그로 인해 미국은 많은 ‘옵션’을 확보할 수 있었다. 만약 이승만이 공격하면 미국은 지원하지 않는 반면 북한이 공격하면 이승만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애치슨이 남한을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한 이유는 이승만이 미국을 등에 업고 북한을 공격하는 상황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남한이 북한을 침공할 가능성도 있었다는 얘기인가. -1949년 5월부터 12월까지 38선 곳곳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싸움을 남한이 먼저 시작했다. 따라서 1950년 6월 25일의 침공은 북한이 ‘전면전’을 일으켰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1949년 8월 주한 미국대사는 워싱턴에 보낸 전문에서 “이승만이 북한군의 옹진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철원을 공격하려 한다”고 밝혔다. 한국전쟁의 본질은 당시 남북한의 지도부가 서로를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미국과 소련 모두 뜨거운 감자를 두 손에 쥐고 있는 꼴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이 그해 12월부터 한국군에 “38선에서 도발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후 38선 남쪽이 조용해졌다. 남한의 공격을 남침 명분으로 삼으려던 김일성이 1950년 2월 주북 소련대사에게 “왜 남한이 요즘 공격을 안 하느냐”고 물을 정도였다. →미국이 애치슨 라인에서 남한을 배제한 것은 북한의 침공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1949년 6월 30일 남한에 있던 마지막 미군이 오키나와로 나간 직후 애치슨 장관이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에게 ‘만약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면 유엔에 회부한다’는 메모를 건넸다. 한국전 발발 1년 전에 이미 전쟁 가능성을 예측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스탈린이 승인하지 않으면 북한은 남한을 침공할 수 없는데, 스탈린은 침공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은 소련이 2차 대전의 후유증 때문에 새로운 전쟁에 뛰어들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또 스탈린이 허락지 않으면 감히 중국도 전쟁에 개입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스탈린이 통제하는 획일적인 공산주의가 있다고 잘못 추정한 것이다. →한국전쟁의 특징은 무엇인가. -반(反)식민지 전쟁이라는 점에서 베트남전과 매우 비슷하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했던 빨치산 출신 김일성 등은 북한을 접수한 반면 남한에서 김구와 같은 민족주의자들은 밀려났다. 남한에서 미국은 일본 경찰과 장교 출신들을 기용했다. →한국에서는 내전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곳에서 8마일(약 12.8㎞)만 리치먼드 쪽으로 가면 남북전쟁박물관이 있다. 거기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남군을 침공할 명분을 얻기 위해 남군의 공격을 유도하는 속임수를 썼다’는 내용이 씌어 있다. 남부 사람들은 남북전쟁이 내전이 아니라 주(state)들끼리 벌인 전쟁이라고 한다. 한국인들이 6월 25일에만 초점을 맞추는 한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만 나쁘고 남한은 결백한 게 된다. →한국과 미국도 한국전쟁의 책임이 있다는 얘기인가. -미국의 책임이 크다. 미국은 38선을 그을 때 어떤 나라와도 상의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쁜 결정이었다. 70년 가까이 흐른 지금까지도 한반도 문제의 근원이 되고 있다. 이승만도 큰 책임이 있다. 그는 일본군에서 복무한 장교를 기용했다. →결국 한국전은 국제적 역학관계 속에서 발생했다고 봐야 하나. -아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한국 내 모순이다. 일제강점기부터 1945~1950년 사이 일련의 사태들이 영향을 줬다. →지난 60년간 정전체제는 잘 운영됐다고 보나. -아니다.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사건 등 매우 불행한 일들이 일어났다. 정전체제는 평화협정으로 대체돼야 한다. 중국과 소련은 1990년대 초 남한을 승인했지만 미국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한국전쟁의 교훈은. -미국인으로서 나는 한국전쟁 당시의 트루먼 대통령과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큰 존경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 열망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한반도에서 김일성의 반(反)식민지 운동에 봉착한 것이다. 1944년 국무부 문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인과 진정한 관계가 없는 반면 만주의 빨치산은 일본군에 잘 대적하고 있다”면서 “김일성을 접촉해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이 현실화했다면 한국전은 발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하고 싶다. 정전 60년이 흐른 지금도 한국인들은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는지에만 관심이 있다. 북한도 마찬가지다. 1997년 북한에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갔을 때 한 북한인이 “누가 한국전쟁을 시작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더라. “많은 원인이 복합작용한 내전”이라고 답했더니 그는 “한민족에 대한 미 제국주의자들의 전쟁”이라고 하더라. 한국전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런 ‘비난 게임’을 멈추고 화해해야 한다. 글 사진 샬러츠빌(버지니아주)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브루스 커밍스 교수는 미국 컬럼비아대 정치학(동아시아 전공) 박사 출신이다. 1960년대 후반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온 이래 한국 현대사 연구에 천착했다. 그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은 반공주의에 치우친 기존 연구의 평면성을 넘어 수정주의적 관점에서 식민지와 냉전, 계급 갈등이라는 전쟁의 구조적 기원을 파고들었다는 점에서 한국전 연구를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고, 1980년대 통일, 반미 운동과 맞물려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한국전쟁 연구는 커밍스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까지 생겼다.
  • [정전협정 60년] 커밍스, 남침유도설 30년만에 부인

    [정전협정 60년] 커밍스, 남침유도설 30년만에 부인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학 석좌교수(역사학)는 1950년 6월 25일 일어난 한국전쟁은 남침이며 미국이 의도적으로 전쟁을 유도하지도 않았다고 지난 20일(현지시간) 밝혔다. 커밍스 교수는 한국전 정전 60주년을 맞아 미 버지니아주 샬러츠빌에서 이날 서울신문과 가진 단독 인터뷰를 통해 “나는 남침 유도설을 말한 적이 없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커밍스 교수는 1981년과 1990년에 각각 펴낸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 1, 2권을 통해 한국전쟁이 미국의 남침 유도에 의해 일어났다는 수정주의 사관을 펼친 것으로 알려졌고, 이에 따라 반공주의 시각에 치우쳐 있던 기존 한국전쟁 연구에 큰 충격파와 함께 일대 지각변동을 일으킨 바 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공개된 옛 소련의 기밀문서를 통해 북한에 의한 선제적 남침설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자리 잡으면서 남침 유도설도 크게 위축돼 왔다. 결국 커밍스 교수는 이날 인터뷰를 통해 그가 주장한 것으로 알려진 남침 유도설을 공식 부인한 셈이다. 커밍스 교수는 인터뷰에서 “나는 수정주의자도 아니고 미국과 남한이 북한을 침공했다고 말한 적도 없다”면서 “전두환 정권이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1985년부터 그렇게 (조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딘 애치슨 당시 미 국무장관이 ‘애치슨 라인’에서 남한을 배제하는 등 모호한 전략을 펴는 바람에 김일성이 어리석게도 전쟁을 일으키고 말았다”면서 “애치슨 장관이 전쟁을 유도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다만 “내가 1990년에 쓴 책은 1950년 6월에 전쟁이 시작됐다는 기존의 관념을 허물려는 시도였다”면서 “한국전쟁은 1945년 미국이 한반도 분단을 일방적으로 결정한 이후 일어난 일련의 사태와 일제강점기에 불거진 한반도 내부 모순에 뿌리를 둔 만큼 다각도로 원인을 진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커밍스 교수는 “1949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38선 부근에서 남한이 많은 도발을 했고 그해 8월 옹진, 개성, 철원 등지에서 남북 간 군사적 충돌이 격화됐다”며 남한의 군사적 자극이 한국전쟁을 촉발시킨 원인 중 하나라는 시각을 보이면서 “한국전쟁의 발발에는 미국과 남한도 큰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샬러츠빌(미 버지니아주)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北, 서울시민 50만명 북송 추진했다

    북한이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감행한 지 3주 만에 서울시민 50만명을 대상으로 부역자를 차출, 북송시킬 계획을 추진한 사실이 소련 정부 문건을 통해 확인됐다. 미국 시카고 교외에 거주하는 재야 사학자 유광언(71)씨는 최근 워싱턴DC 소재 우드로윌슨센터의 디지털 기록보관소에서 한국전쟁 시기에 북한 주재 소련 대사 테렌티 슈티코프가 소련 당국에 띄운 전보문을 찾아 22일(현지시간) 연합뉴스를 통해 공개했다. 1950년 7월 17일 타전된 전보문에는 북한 군사위원회가 서울의 식량난 극복을 명목으로 이날 공표한 포고령 제18호 내용이 들어 있다. 포고령에는 “서울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시 임시인민위원회 의장) 이승엽을 수장으로 하는 3인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한다. 서울·경기·강원 남부의 임시인민위원회 의장에게 해당 지역의 가용 식량자원 규모를 신속히 산출하고 인민군 내에 음식물과 교환할 수 있는 불필요한 재화가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는 임무를 맡긴다”는 등의 시행 세칙이 담겨 있다. 특히 서울시 임시인민위 의장에게 서울시민 50만명을 농촌 지역으로 분산시키거나 북한의 각 부처와 기관이 요청한 노동 인력을 충원하기 위해 북송시킬 계획을 수립하도록 명시돼 있다. 북한의 각 부처와 기관의 수장, 평양시 인민위원회 의장 등에게는 “서울시 임시인민위원회 의장과 합의하여 필요한 숫자의 인력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했다. 센터가 소장한 소련 정부 문서 가운데는 한국전쟁 발발 3개월 전인 1950년 3월 9일 북한 김일성 주석이 슈티코프 대사를 통해 안드레이 비신스키(1949~1953) 소련 외무장관에게 군사·기술 지원을 촉구한 내용의 편지도 포함돼 있다. 김일성은 편지에서 소련의 군사·기술 지원 대가로 1억 3500만 루블(약 47억원) 상당의 천연자원 제공을 제안했다. 김미경 기자 chaplin7@seoul.co.kr
  • 잔인한 전쟁 너머 ‘휴머니즘’의 속살

    잔인한 전쟁 너머 ‘휴머니즘’의 속살

    정전 60년을 맞아 한국전쟁을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본 두 권의 책을 소개한다. 중국 최고의 전쟁 논픽션 작가로 불리는 왕수쩡의 ‘한국전쟁’과 권헌익 영국 캠브리지대 석좌교수의 ‘또 하나의 냉전’이다. 전자는 적국의 시선으로 본 한국전쟁이란 점에서, 후자는 인류학자의 시각에서 한국전쟁과 그 전후의 고통과 폭력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냉전이란 무엇인지를 되묻는다는 측면에서 주목된다. [한국전쟁] 왕수쩡 지음/나진희·황선영 옮김/글항아리/1000쪽/4만원 ‘한국전쟁에 대해 중국이 말하지 않았던 것들’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1999년 중국에서 초판이 출간됐고, 2009년 개정판이 나왔다. 국내에선 첫 번역 출간이다. 14년의 시차에 담긴 의미는 꽤 함축적일 터이다. 1970년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에서는 한국전쟁을 ‘항미원조전쟁’이라 불렀다. 적군인 미군을 향한 대항적 성격으로 한국전쟁을 규정하는 하나의 관점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저자는 ‘한국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국제정치적 맥락이나 이념적 시각으로 한국전쟁을 분석하는 태도에서 벗어난다. 이는 저자가 정치학자나 군사학자가 아니라 팩트를 추적하는 논픽션 작가라는 지점과 맞닿아있다. 치밀한 자료 수집과 수많은 관련자 인터뷰 등 방대한 취재량이 압도적이다. 저자는 한반도에 진입했던 중국국 소속 15개군이 전후에 정리한 전쟁사, 전쟁 종식 뒤 귀국한 참전 장병이 쓴 수많은 회고록, 전쟁 당시 한반도 전장에 있던 중국군 지휘부와 베이징의 지휘자들 간에 교환한 모든 문서와 전보를 열람했다. 또한 미국 역사학자 모리스 이서먼의 ‘한국전쟁’을 비롯한 서구의 다양한 관련서와 더글러스 맥아더의 회고록 등도 참조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저자는 한국전쟁의 발발부터 정전 협정까지의 긴박하고 참혹했던, 때로는 무기력했던 순간들을 하나하나 복원해낸다. 1950년 10월 8일 중국이 ‘중국인민지원군’을 출병하는 대목에서 출발한 책은 전장에 버려진 서적을 통해 적군의 작전 의도를 파악하려는 치열한 정보전과 피말리는 심리전, 각국이 구사하는 전술·전략의 유래와 전개 양상 등에 대한 꼼꼼한 기술을 거쳐 또 다른 전쟁의 양상을 보였던 정전 협상의 체결에서 끝을 맺는다. “병사란 전쟁 속에서 가장 평범하면서도 가장 중요하고 수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내가 ‘한국전쟁’을 집필하는 유일한 동력이 되었다.”는 저자의 말처럼 책을 관통하는 핵심은 휴머니즘이다. 하지만 대령 계급의 국가 1급 작가라는 저자의 또 다른 타이틀은 중국 중심의 서술이란 한계를 피할 수 없게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접하기 어려웠던 중국 내부의 자료들을 통해 한국전쟁의 한 축이었던 중국의 당시 상황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건 이 책만의 장점이다.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또 하나의 냉전] 권헌익 지음/이한중 옮김/민음사/256쪽/1만 8000 세계사에서 한국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 간 냉전의 역사선상에 놓인다. 1945년 조지 오웰이 처음 언급한 ‘냉전’은 실제적으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지만 정치·외교·이념상의 갈등이나 군사적 위협의 잠재적인 권력투쟁을 의미한다. 서구에서는 냉전이 “오랜 평화이자 상상의 전쟁”이었다. 하지만 해방공간이 분단으로 이어지고, 한국전쟁을 전후해 전쟁과 폭력의 시대를 살아낸 우리에게 이 시기는 과연 냉전일 수 있을까. 2010년 컬럼비아대에서 영어로 출간된 이 책은 이 같은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즉 한반도 해방공간의 역사가 세계 냉전사와 틀을 같이하는가 달리하는가, 한국전쟁의 역사는 냉전의 역사안에 있는가 아니면 밖에 있는가에 대한 분석이다. 정확히 얘기하면 이 책은 한국전쟁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제주 4·3사건과 베트남 전쟁을 통해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냉전이 폭력전 내전과 그와 관련된 반공주의 역사라는 형태로 전개되는 양상에 초점을 맞춘다. 인류학자인 저자는 냉전을 내전으로 경험한 사회에서 냉전이 얼마나 큰 고통을 주었는지를 인류학의 핵심 조사방법인 참여관찰법을 이용해 접근한다. 저자는 제주 4·3사건으로 분열된 하귀리 마을 사람들이 최근에서야 학살자들을 기리는 추모제를 자유롭게 열 수 있게 되면서 화해에 이르는 과정에 주목한다. 또한 베트남전쟁 당시 형은 혁명군에, 동생은 미국편에 가담해 총을 겨누고 싸워야 했던 가족이 어느 한 명을 추모할 권리를 박탈당하는 고통의 역사를 들여다본다. 저자는 말한다. “한반도의 해방공간이 그러했듯이 한국전쟁의 역사는 냉전의 역사 안에도 있고 또 밖에도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역사가 세계사의 영역에서는 생경해지는 상황은 불행한 일이며 이제는 이 잘못된 구도가 고쳐져야 한다. 그 첫 걸음은 냉전의 역사에 안과 밖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즉 또 하나의 냉전이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7쪽) 베트남전 양민학살을 종교인류학적으로 접근한 책 ‘학살, 그 이후’와 전쟁의 후유증을 기록한 ‘베트남전쟁의 영혼’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저자는 최근 한국전쟁의 새로운 연구 틀을 형성하고자 하는 ‘한국전쟁을 넘어서’국제연구사업단을 이끌고 있다.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 [여의도 블로그] ‘북침’ 정확한 뜻 몰랐다면 역사교육 잘못된 탓

    동풍(東風)은 동쪽으로 부는 바람인가?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인가? 답을 아는 일이 중요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시험에 나오면 맞히거나 틀리면 되니까 정도의 문제일 수 있다. 뒷날 동풍이 요즘 축약식 표현으로 ‘동·부·바’ 또는 ‘동·불·바’로 표현돼 출제되기를 기다리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6·25전쟁이 남침이냐 북침이냐’는 이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완전히! ‘위안부’(慰安婦) 얘기를 먼저 해 보자. 누군가 ‘위로하고 편안하게 해 주는 부인’ 아니냐고 한다면 피가 거꾸로 솟을 일 아닌가. 그 누군가가 한국의 학생들이라면 얼마나 자괴스러운 일인가. 분을 치밀게 하는 것은 ‘역사성의 결여’일 것이다. 위안부라는 단어와, 그 단어가 지닌 역사성은 한국인이라면 초등학생이라도 이해해야 한다. 반드시! 유대인이라면 ‘홀로코스트’를 알아야 하듯. 북침, 남침이 그렇게까지 정색할 일인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분명, 그럴 일이다. 우리는 특히나 1980년대 이 문제로 홍역을 치렀기에 더욱 그렇다. 어느 외국 학자가 북침설을 주장하고 몇몇 국내 학자들이 이에 동조하기 시작하면서 그 시기 청소년과 젊은이들은 큰 혼동에 빠졌다. 1990년대 초 옛 소련이 붕괴해 관련 문서가 공개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우리는 지금까지 남침, 북침으로 싸우고 있을지 모른다. 남침의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드러내는 문서가 나온 뒤에도 일부 학자들은 남침 유도설이니 어쩌니 하는 ‘변종 학설’로 진실을 호도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신뢰’의 벽에 틈이 생겼다. 남침은 어떤 역사성을 담고 있나? 북이 남을 기습 공격하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했음과 그러기 위해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을 오가고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승낙을 얻어내 각종 병참을 지원받은 사실 등이다. 기습의 결과, 개전하고 단 3일 안에 당시 남한 병력의 50%에 가까운 4만 3000명의 군인이 전사했다. 서울신문이 최근 고교생들을 대상으로 6·25전쟁이 남침이냐, 북침이냐는 설문조사를 해 보니 충격적인 결과가 나와 이를 보도했고, 박근혜 대통령도 이를 인용해 역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랬더니 “‘북한 침공’을 ‘북침’으로 답한 것뿐인데 웬 호들갑이냐”는 식의 비아냥이 나오고 있다. ‘북의 기습 남침’은 고정 용어, 그 자체로 알고 있어야 한다. ‘위안부’처럼. 이 표현들을 몰랐다면 이에 관한 전반적인 교육이 통째로 결여됐거나 부족했음을 의미한다. 끝으로 하나 더. 남침과 위안부, 어느 것이 더 어려운 단어인가? 이지운 기자 jj@seoul.co.kr
  • 이란 “시리아 정부 지원군 4000명 긴급 파병”

    이란이 시리아 바샤르 알아사드 정부군을 돕기 위해 병력 4000명을 긴급 투입할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날 사우디아라비아는 반정부군에 대공 미사일을 제공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시리아 내전이 무슬림 종파 간의 복잡한 갈등 양상으로 전개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16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는 이란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의 말을 인용, “이란이 지난 14일 치러진 대선 전에 이미 4000명 규모의 이란 혁명군을 시리아에 보내 수니파 반군과 싸우는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정부군을 지원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시리아 정부군은 최근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단체인 헤즈볼라와 합류해 북부 알레포 등 반군의 주요 거점을 공격하는 등 전방위 공세를 취하고 있다. 이에 맞서 같은 이슬람 수니파인 시리아 반군을 지지하는 사우디는 반군에 유럽산 휴대용 지대공 미사일(MANPADS)과 이동식 방공시스템을 보내는 방안을 찾고 있다고 AFP 통신이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을 인용해 보도했다. 이 지대공 미사일은 저공 비행기를 타격할 수 있으며 1980년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 ‘무자히딘’(이슬람 전사들)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구 소련군에 맞서 사용했던 무기다. 지난 2년간 계속된 시리아 내전에서는 아사드 대통령이 이끄는 시아파 정부군과 수니파 반군의 대결로 9만여명이 희생됐다. 인디펜던트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시리아 내전 불개입 원칙을 깨면서 미국은 이제 중동에서 가장 극단적인 수니파 이슬람주의들의 편에 서서 내전에 전면적으로 개입하게 됐다”고 전했다. 최재헌 기자 goseoul@seoul.co.kr
  • “초능력자 유리 겔라, 과거 CIA 스파이로 일했다”

    “초능력자 유리 겔라, 과거 CIA 스파이로 일했다”

    ’숟가락 구부리기’ 초능력(?)으로 유명한 유리 겔라(67)가 과거 미 중앙정보국 CIA의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주장이 나와 눈길을 끌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영화 제작자 비끄람 자얀티가 유리 겔라의 생애를 담은 다큐멘터리(The Secret Life of Uri Geller - Psychic Spy?)에서 주장했으며 올 가을 영국 BBC를 통해 방송될 예정이다. 지난 1980년 대 우리나라에도 찾아온 유리 겔라는 특유의 ‘숟가락 구부리기’ , ‘텔레파시’ 등을 선보여 세간에 큰 충격을 던진 바 있다. 그러나 이후 일명 ‘초능력 사냥꾼’ 제임스 랜디가 유리 겔라의 이 기술은 초능력이 아닌 눈속임에 불과하다고 주장해 법정 소송 끝에 이를 입증한 바 있다. 최근 영국 셰필드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상영된 이 다큐에는 과거 유리 겔라가 이스라엘 국방부에서 일했으며 이후 CIA의 관심을 끌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스파이로 활동 중 유리 겔라는 ‘초능력’으로 당시 소련 대사가 소지한 플로피 디스크의 내용을 지운 것이나 레이더를 무력화 시킨 내용들이 담겨있다. 이같은 내용은 1급 정보를 다룬 전직 CIA 관료와 육군 대령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드러나 있으며 유리 겔라도 이를 일부 시인했다. 유리 겔라는 인디펜던트 지와의 인터뷰에서 “CIA 측으로 부터 텔레파시로 돼지의 심장을 멈추게 하라는 요청을 받은 바 있는데 이를 거절했다” 면서 “이유는 향후 사람의 심장도 멈추게 하라는 명령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감독이 나의 비밀까지 모두 들춰내 다큐로 만들 줄은 몰랐으며 나의 모든 것이 담겨있어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사진=AP/IVARY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13일 TV 하이라이트]

    ■고향극장(KBS1 밤 10시 50분) 60살을 젊은이로 부를 만큼 고령화되고 있는 강원도 정선군 용꿈 마을에 최신 가요에 맞춰 모내기를 하고, 춤을 추는 청년들이 등장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사를 짓겠다며 고향에 내려온 서른 살 동갑내기 이호규, 윤중근씨가 바로 그 주인공. 농생농사(農生農死)를 외치며 의기투합한 두 청년의 일상을 따라가 본다. ■삼생이(KBS2 오전 9시) 봉무룡(독고영재)의 집으로 들어온 삼생(홍아름)은 옛일을 회상하며 감회에 젖지만, 집을 나가버린 금옥(손성윤)과 은둔하고 있는 지성(지일주)으로 인해 마음이 불편하다. 회사 돈을 빼돌리며 봉무룡에게 일격을 가하려던 사기진(유태웅)은 봉출(이달형)의 죽음에 대한 수사를 방해하려고 동우(차도진)를 납치한다. ■구암허준(MBC 밤 8시 55분) 도지는 예진이 여전히 마음에 허준(김주혁)을 담아 두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허준은 가난한 병자들을 갈취하는 혜민서의 관행들에 분노하며 이를 바로잡겠다고 결심한다. 한편 허준은 국법에 어긋남에도 집으로 찾아온 가난한 병자들을 치료해 준다. 이를 알게 된 양예수는 분노하며 허준에게 벌을 내린다. ■꾸러기 탐구생활(SBS 오후 4시 30분) 흥겨운 농악놀이는 원래 군대에서 시작된 거라고 한다. 과연 농악에서 군대의 흔적을 찾기 위해 출동한 꾸러기 탐구대원들이 알아낸 농악의 유래와 의미는 무엇일까. 한편 구부러진 포크를 뜨거운 물에 넣자 원래 모양대로 돌아온다는 신기한 제보, 어떻게 이런 마술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걸까. ■한국기행(EBS 밤 9시 30분)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이 그 경치에 반해 자신의 호를 삼봉이라 이름 짓게 한 도담삼봉은 충북 단양 8경 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남한강 상류에 세 개의 기암이 솟아있는 풍광은 조선 화백 김홍도와 이방운의 필치로 화폭에 담겼다. 프로그램은 도담삼봉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본다. ■더 워(OBS 밤 9시 50분) 스카이 훅, 고무 비행기 등 미 중앙정보국(CIA)은 냉전 시대에 막강한 소련의 군사력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러 가지 독특한 병기를 개발했다. 냉전 시대 치열한 군비 경쟁 속에서 탄생한 병기에 대해 알아본다. 또한 과거 기밀 자료였던 영상들을 통해 소련에 억류된 요원을 구출하려던 노력과 첩보전을 소개한다.
  • [위기의 한국사 교육] (2) 10년 이상 반복 교과서 논란

    [위기의 한국사 교육] (2) 10년 이상 반복 교과서 논란

    보수·진보 진영 간 중·고교 역사 교과서의 편향성 논란은 10년 넘게 반복된 해묵은 논쟁이지만 현 사회상에 대한 비판의식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진행형 이슈’이기도 하다. 10여년 전 편향성 논란을 최초로 제기한 측이 역사 전공자가 아닌 국회와 언론 등이었다면 최근에는 역사학계가 총동원돼 역사 전쟁을 벌이고 있다. 보수 진영은 북한 역사학계의 관점과 닮은 1980년대 운동권의 민중사관이 최근 역사 교과서에 반영됐다는 주장을, 진보 진영은 뉴라이트 등의 의견이 일본 극우파 의견과 닮은 꼴이란 주장을 이어 가고 있다. 최근 보수 진영 학자들이 모인 한국현대사학회의 ‘중·고등 한국사교과서 분석과 제언’ 학술대회에서 나타난 현행 교과서에 대한 비판은 2008년 뉴라이트 사관(史觀)을 담은 대안교과서에서 보인 인식과 비슷한 수준으로 평가됐다. 학술대회에서 오영섭 연세대 이승만연구소 연구교수는 “동학농민운동을 조선 사회를 변혁하고 외세 침략에 맞서려 한 투쟁으로 본 관점은 북한 학계와 닮은 점”이라고 비판했다. 현대사학회 회장인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현행 교과서들은 해방 후 좌익이 신탁통치를 받아들인 것이 소련의 지시 때문이란 점을 감추고 있다”며 현행 교과서의 편파성을 주장했다. 한국현대사학회 소속 학자들은 기존 교과서에 대한 비판에서 그치지 않고 새로운 고교 교과서 집필 참여를 선언했다. 이들이 주도한 역사 교과서는 국사편찬위원회 검정 본심사를 통과해 8월에 마무리되는 최종 합격 심사 중에 있다. 보수 진영의 역사 교과서가 검정 본심사를 통과한 것은 처음으로, 이들이 주도한 교과서가 최종 합격될 경우 역사 교과서 논쟁이 고교 현장에서 본격화될 전망이다. 이미 장휘국 광주시교육감은 역사 교과서 왜곡 대응팀을 꾸려 한국현대사학회가 주도한 교과서 배급에 대비하고 있다. “뉴라이트와 관련 없다”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한 한국현대사학회 측은 광주시교육청 등이 과잉 대응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교과서 집필을 책임 진 이명희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11일 “최종 합격 전이라 교과서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이승만 대통령 시절 자유민주주의가 훼손됐던 사실을 분명히 명기했고, 5·16쿠데타에 대해서는 쿠데타가 외래어이기 때문에 군사정변으로 서술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과거 역사 교과서 논쟁에서 심판 격인 교육부가 보수 측 주장을 수용한 사례가 많다는 점에서 광주시교육청의 대응이 적절하다는 평가도 나왔다. 2002년 당시 근현대사 교과서가 김대중 정부를 미화했다는 비판에 근현대사 교과서 검정위원이 일괄 사퇴하는 내홍을 겪은 뒤 교육부는 교과서 4종을 수정, 배포했다. 2004년 금성출판사가 내놓은 근현대사 교과서가 좌편향됐다는 국회 국정감사 지적 이후에도 교육부는 교과서 206곳에 대해 수정을 지시했다. 2011년 한국현대사학회가 중·고교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에 ‘민주주의’란 표현 대신 ‘자유민주주의’란 내용을 담아야 한다고 했을 때도 교육부는 이 주장을 수용했다. 2008년 뉴라이트 시각을 담은 대안교과서 출판 당시 학교 채택이 이뤄지지 않은 탓에 대응하지 않은 것을 빼고는 교육부가 늘 보수 측 주장을 받아들인 셈이다. 동학농민운동, 각종 단체의 독립운동 활동에 대한 평가, 해방 후 찬탁·반탁 논쟁에 대한 평가 등 근현대사 사건 대부분에 대해 보수·진보 진영 간 이견은 좁히기 어려운 상태다. 보수 측인 권 교수는 “현행 교과서 대부분이 대한민국 건국 이후 지속된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폄하하거나 북한의 전체주의와 균형을 맞춰 서술하고 있다”면서 “현행 교과서가 대한민국 헌법정신에 맞지 않는 왜곡된 역사 교육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진보 측이면서 중학교 역사 교과서 집필자인 주진오 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는 “검정 기준을 통과해 현행 교과서에 나타난, 대다수 역사학자가 공유하는 역사인식을 좌편향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면서 “뉴라이트야말로 일본의 식민 지배와 친일을 정당화하고 독재를 불가피한 선택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는 양 진영의 충돌이 역사 논쟁에 대한 거부감과 피로감을 키우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유대인 대학살 기획자’ 일기 70년만에 발견

    나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의 최측근이자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토대가 된 인종차별 이론 주창자인 알프레트 로젠베르크의 일기가 사라진 지 70여년 만에 미국에서 발견됐다고 로이터가 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로젠베르크가 1936년 봄부터 1944년 겨울까지 기록한 이 일기에는 그가 히틀러와 히틀러 친위대장인 하인리히 힘러, 나치 정권 2인자인 헤르만 괴링과 나눴던 회의 내용이 기록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기에는 또 독일의 소련 침공과 유럽에서 이뤄진 문화재 약탈, 유대인과 동유럽인을 학살한 구체적 계획 등도 담겨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나치 시절 외교정책국장을 역임하며 2차 대전 중 일어난 홀로코스트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던 로젠베르크는 1946년 독일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돼 교수형을 당했다. 그러나 재판 당시 유대인 학살을 증명하는 검찰 측 증거자료로 쓰였던 그의 일기는 판결 이후 사라져 그동안 미 정보당국이 소재를 수소문해왔다. 이후 미 연방수사국(FBI)은 당시 재판 검사였던 로베르트 켐프너가 로젠베르크의 일기를 미국으로 빼돌린 것을 확인하고 1999년 그의 가족들을 통해 일기를 전달받았으나 문제의 기록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올 초 미 국토안보부가 미국에 있는 켐프너의 전 비서로부터 관련 서류들을 건네받았고, 미 워싱턴 홀로코스트기념박물관 측에 조사를 맡긴 것으로 전해졌다. 박물관 측은 이번 주 일기 세부 내용을 설명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할 예정이다. 로이터는 “나치 만행에 관한 기록이 바뀔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재헌 기자 goseoul@seoul.co.kr
  • 두정상 ‘적과의 동침’ 커플 될까

    7~8일(현지시간) 열리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 간 정상회담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백악관이 아닌 휴양지에서 열린다는 점이다. 그동안 미 대통령들은 인간적 친밀도를 과시하는 휴양지 회동을 주로 동맹국 정상에 대한 ‘선물’ 격으로 활용해 왔다. 그런 점에서 이번 미·중 정상회담은 과거와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이를 두고 워싱턴포스트는 6일 과거 라이벌 국가의 정상들이 인간적 유대관계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던 몇몇 사례에 빗댔다. 1985년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처음 만났을 때 강하게 끌렸고, 당초 15분으로 예정된 환담이 1시간 넘게 이어졌다. 레이건은 나중에 “고르바초프에게는 그전 소련 지도자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따뜻함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갈수록 두터워졌고 고르바초프는 획기적인 개혁·개방에 나서게 된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은 베이징으로 날아가 1주일 동안 마오쩌둥(毛澤東) 주석과 마오타이를 건배하며 신뢰를 쌓았고, 중국은 국제사회에 문을 열기 시작했다. 2001년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처음 만난 뒤 “그(푸틴)의 눈에서 영혼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믿을 만한 인물”이라고 말했고, 미국은 동유럽에서 미사일방어(MD)망 구축을 포기했다. 백악관 관계자들은 시 주석이 종전 중국 지도자와 달리 인간적 관계를 맺는 데 적극적이며 미국민들과의 대화를 주저하지 않는다고 평하고 있다. 랜초미라지 김상연 특파원 carlos@seoul.co.kr
  • 결혼 30주년 앞둔 푸틴, 이혼 공식 발표

    결혼 30주년 앞둔 푸틴, 이혼 공식 발표

    블라디미르 푸틴(왼쪽·60) 러시아 대통령이 결혼 30주년을 앞두고 이혼을 공식 발표했다. 6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이날 부인 류드밀라 푸티나(오른쪽·55)와 함께 크렘린에서 열린 발레 공연 ‘에스메랄다’를 관람한 뒤 국영 러시아 24TV와의 인터뷰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별거 중이라는 소문이 사실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사실이다. 결혼 생활은 이제 끝났다”면서 “부부가 함께 내린 결정”이라고 밝혔다. 부인 류드밀라 역시 “(푸틴은) 완전히 자신의 일에 빠져 있다. 우리는 서로 거의 만날 시간이 없었다”면서 이혼 배경을 설명했다. 류드밀라는 또 “대중 앞에 서는 게 정말 싫었다. 비행기를 타는 일도 힘들었다”고 말해 지난 9년간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를 드러냈다. 푸틴 대통령은 옛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 시절이던 1983년 7월 러시아 국영 항공사인 아에로플로트 승무원 출신의 류드밀라와 결혼해 20대의 두 딸 마리아와 예카테리나를 두고 있다. 푸틴 부부는 두 딸에 대해 “아이들은 이미 성장했고, 각자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고 전했다. 푸틴 부부는 2012년 5월 푸틴 대통령의 집권 3기 취임식 이후 공식행사에 함께 참석하지 않아 별거설, 불화설 등에 시달려 왔다. 앞서 2008년 모스크바의 한 신문이 푸틴 대통령이 부인과 비밀리에 이혼하고 31년 연하인 올릭픽 리듬체조 선수 출신 의원인 알리나 카바예바와 약혼했으며 심지어 둘 사이에 아기도 있다고 보도하면서 푸틴 대통령과 부인을 둘러싼 루머는 수년간 계속돼 왔다.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 도발·충격적인 러시아 현대사진

    도발·충격적인 러시아 현대사진

    지난달 24일부터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러시아 현대 사진전’은 러시아 현대 예술과 조우할 수 있는 드문 기회다. 러시아 작가들의 현대 사진전이 국내에서 열리기는 처음이다. 러시아 미술평론가인 이리나 츠미레바는 영향력 있는 대표작가 10명의 작품 100점을 엄선했다. 1990년대 초반 이후 러시아 사진계를 이끌어온 50대 원로 작가부터 1990년대부터 2000년대 들어 작업을 시작한 20~40대 중견·신진 작가까지 다양하다. 50대인 안드레이 체쥔, 니콜라이 쿨레비야킨, 바딤 구쉰의 작품은 다분히 도발적이다. ‘개념 예술가’인 체쥔은 ‘자화상’ 시리즈를 통해 과거 스탈린 시대를 비판한다. 사람의 얼굴을 배지, 핀, 못, 숫자 등을 통해 표현해 충격을 안긴다. “개인은 국가라는 기계의 톱니바퀴일 뿐”이라던 스탈린의 연설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작품이다. 체쥔은 “예술의 주된 구성 요소는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구쉰의 작품은 인간의 공감각을 조롱한다. 형형색색 봉투와 책을 통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비현실적인 공간의 이미지를 연출한다. 30, 40대인 그레고리 마이오피스, 이고르 쿨티쉬킨과 20대 유망주 알리사 니쿨리나, 키르 예사도프, 마리아 코자노바, 페트르 라흐노프 등의 작품도 주목받는다. 흑백의 틀에 갇혀 차갑고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크멜리 수넬리 아트그룹의 ‘전쟁 이후의 풍경’시리즈는 구소련 해체 후 러시아의 혼란기를 연출한다. 땅 위에 어지럽게 널린 동물의 뼈가 아날로그 카메라에 담겼다. 신예 코자노바의 ‘거리두기를 선언하다’는 고도로 조직화된 러시아 사회의 붕괴를 일본식 코스프레를 한 젊은이들의 모습으로 나타냈다. 반면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마이오피스는 침대 위에 앉아 있는 곰(‘정치는 뜻밖의 동료를 만든다’)을 통해 해학을 드러냈다. 관람료는 무료. 10일까지 서울본점, 8월 13일까지 경기 안양점과 전남 광주점의 갤러리에서 전시된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김일수 樂山樂水] 위험형법론 다시 보기

    [김일수 樂山樂水] 위험형법론 다시 보기

    안전 불감증에 길든 타성을 벗어버리도록 상시적인 감시체계를 가동시켜야 한다. 사고가 발생한 뒤에야 쫓아가는 진압 조치로는 앞서 본 새로운 위험원의 속성상 1, 2세대 안에 원상을 회복시킬 수 없다. 요즘 들어 위험형법론의 등장 배경이 새삼스럽게 실감 난다. 후기 현대의 탈산업화·정보화사회는 독일 사회학자 베크가 정의한 대로 위험사회로 변모하였다. 근대화·산업화가 스스로의 기반을 뒤흔들 위험까지 양산하였고 원자력 위험, 화학물질 위험, 유전공학 위험, 기후 변화와 생태계 위험과 같은 ‘새로운 위험’이 인류의 생존 자체를 크게 위협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들 새로운 위험의 특성은 하나의 작은 실수가 우리의 생존기반 전체를 초토화시킬 만큼 거대한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구소련의 체르노빌 원전사고, 인도 보팔의 화학공장 참사 같은 예가 그것을 말해 준다. 이를 예방하려면 작은 부정, 작은 실수부터 통제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위험사회에서 위험 예방은 작은 악의 싹부터 잘라내는 철저한 사전 예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발맞추어 형법의 기본 관점도 종래의 사후 진압적 통제 모델로부터 예방적 조절 모델로 서서히 변해가고 있다. 후기 현대의 위험사회는 새로운 위험에 대처하고자 형법적 보호 장치를 강화하고 그 보호 영역을 넓히는 경향이 있으며, 이 같은 예방 사고는 전통적인 법치국가 형법을 사회국가의 신축성 있는 조정기구로 재해석하도록 유도한다. 심지어 형법의 임무는 이제 더 이상 범죄 투쟁에만 머물지 말고 투자·환경·건강·외교정책에 대한 원활한 지원이어야 하며, 단편적인 범죄 억지에서 벗어나 거시적으로 문제 상황에 대처하고자 선제적으로 위험 행위 자체를 규율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통적 법치국가 형법관을 고집하는 입장에서는 위험사회의 새로운 위험에 대응하는 형법적 수단도 사회문제 해결의 최후 수단이어야 하고, 자유우선 원칙의 한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에 반해 새로운 위험에 대처하고자 위험 형법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입장은 21세기 문제를 18세기의 정신적 도구로써 해결할 수 없으므로, 형법의 최우선 수단화나 국민 계몽의 도구화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일상적인 위험원에 대처하려면 법치국가 형법의 최후수단성 원칙을 포기할 수 없다고 보는 반면, 새로운 거대위험으로부터의 안전을 확보하려면 형법을 전진 배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결국, 자유와 안전 사이의 비중을 어떻게 잡느냐가 후기 현대사회 형법 정책의 난제 중 하나이다. 최근 들어 원전과 그 안전관리에 총체적 부실이 드러나 일반 국민의 불안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거기다가 자주 일어나는 화학물질 사고도 예사롭지 않다. 대형 원전 사고나 화학물질 사고가 우리의 생활터전을 어떻게 황폐화시킬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이 땅에서 그런 불길한 재앙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 최근 원전사태에 대해 국무총리뿐만 아니라 대통령까지도 초강경 비판을 내놓았다. 대형 원전 사고는 자신과 가족, 미래 세대까지 포함한 전 국민의 생존 기반을 뒤엎을 파괴력을 갖고 있다. 자신들만의 이익을 위해 이 같은 불법을 저질렀다면, 탐욕 죄 외에 멍청한 바보짓이라는 비난까지 받아 마땅하다. 이번 사태를 안전사회 기반 구축의 전환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먼저 감시·감독기구를 새로운 위험원에 맞게 격상시켜야 한다. 검사 인력과 안전관리 인력을 확충하고 기술 고도화도 추구해야 한다. 안전 불감증에 길든 타성을 벗어버리도록 상시적인 감시체계를 가동시켜야 한다. 김대중 정부 이래 규제 개혁·규제 철폐가 국정의 한 흐름이 된 후, 부지불식간에 늘 경계 태세에 있어야 할 안전 부문조차 의식과 기강이 해이해진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사고가 발생한 뒤에야 쫓아가는 진압 조치로는 앞서 본 새로운 위험원의 속성상 1, 2세대 안에 원상을 회복시킬 수 없다. 이번 기회에 안전사회, 안전국가, 안전형법을 말하는 담론들의 고뇌를 다시 새겨듣게 된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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