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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향식 복지’ 핀란드… 고교 졸업 비율 낮은 지자체에 돈 더 푼다

    ‘하향식 복지’ 핀란드… 고교 졸업 비율 낮은 지자체에 돈 더 푼다

    지자체 업무, 법에 명시… 교육·복지 올인 사실상 모든 학교 공립으로 운영 무상교육 지자체·학교에 수업방식 등 과감히 맡겨 교육불평등 없게 재원 자율성은 부여 안해 국세 대비 지방세 32%… 행정효율성 중시“그럼 한국 지방자치단체는 돈을 어디에 쓰죠?” 우문현답이라고 할까. 제대로 한 방 먹은 기분이다. 한국 지방자치단체의 평균 사회복지지출이 올해 기준으로 28.6%라고 하자 대뜸 라리 소살루 박사가 되묻는다. 핀란드와 스웨덴에서 공통으로 직면하는 문제가 어김없이 등장했다. 핀란드 지자체연합 지방재정 담당 국장을 맡고 있는 그가 보기에 지자체의 존재 목적은 곧 사회서비스다. 지자체가 복지가 아닌 다른 사업을 대규모로 한다는 게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지난 6월 중순 방문한 핀란드 헬싱키는 자정 무렵에도 밝아서 가로등을 왜 세운 것인지 궁금해질 정도다. 지자체연합 본부에서 만난 소살루 박사는 마치 자학개그를 하는 듯한 표정으로 “하루 종일 햇빛이 비치는 게 이상하지 않아요?”라고 묻는다. “낯설긴 하지만 날씨가 너무 좋아서 정말 마음에 든다”고 대답하자 “겨울에 오지 않아서 그래요”라고 답했다. 사우나와 노키아, 앵그리버드와 슈퍼셀, 무민, 카모메 식당을 떠올리게 하는 핀란드는 에드 밀리밴드 전 영국 노동당 대표가 “아메리칸 드림을 원한다면 핀란드로 가십시오”라고 말했을 정도로 잘살면서 행복한 나라의 대명사다. 하지만 항상 그랬던 건 아니다. 한때 핀란드는 춥고 어두운 겨울 탓에 알코올중독과 높은 자살률로 고통받는 유럽의 변방이었다. 스웨덴과 러시아의 일부였다가 20세기 들어 독립정부를 갖게 된 핀란드는 이념 대립으로 인한 내전을 겪고 소련에 침공당해 영토를 빼앗기는 등 험난한 근현대사를 거쳤다. 1990년대에는 금융위기도 겪었다. 핀란드는 교육강국으로 유명하지만 이 역시 1960~70년대 이후 시행한 교육개혁의 결과다. 20세기 중반까지 핀란드에선 극심한 사회불평등 때문에 대학은 도시민이나 부유층만 갈 수 있었다. 지금 핀란드는 사실상 모든 학교를 공립으로 운영하며 헌법에 무상교육을 명시한다. 대학은 수업료 없이 매달 약 60만원을 학생수당으로 주는 등 교육을 기본권의 일환으로 본다. 물론 학생수당에도 소득세가 붙는다. 핀란드는 지자체가 지방교육청 구실도 겸한다. 핀란드 교육정책을 보면 핀란드에서 중앙·지방 재정관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핀란드 교육부는 목표를 세우고 기본적인 규칙만 정한 뒤 목표 달성 방법은 지자체와 지역공동체, 특히 교사에게 과감하게 맡긴다. 수업 방식도 지자체와 학교가 정한다. 경쟁이 아니라 평등을 추구하고, 그러면서도 행정효율성을 강조한다. 핀란드에서도 n분의1로 똑같이 지방에 재정지원을 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 방식은 한국과 반대다. 핀란드에선 가령 학생들의 고교 졸업 비율이 낮은 지자체에 더 많은 재정을 지원한다. 핀란드는 일선 교사에게 강한 자율성을 부여하지만 재원에서도 자율성을 주진 않는다. 이는 정확히 미국 방식과 정반대다. 미국은 교육예산이 전부 지방세인 재산세에서 나온다. 이는 자산불평등에 따른 교육불평등을 극대화시킨다. 미국 교육부가 2013년 발간한 보고서는 “도시 A는 학생당 과세 가능한 재산이 10만 달러고, 도시 B는 30만 달러다. 도시 A가 재산에 대해 4%의 세금을 물린다면 학생당 4000달러를 거둔다. 하지만 도시 B가 2%로 세금을 물려 학생당 6000달러를 거둘 수 있다”면서 학교 재정지원의 격차가 미국 교육 불평등의 가장 큰 요인이라고 비판했다. 핀란드에는 19개 광역 지자체와 311개 기초지자체가 있다. 소살루 박사는 “핀란드 지자체 업무는 법에 명시돼 있다. 가장 중요한 건 교육과 복지, 보건”이라고 말했다. 그는 “핀란드 역시 지역 간 격차 문제가 존재한다”면서 “일부 열악한 지자체는 중앙정부가 교부세를 준다. 교부세 사용처는 지자체 재량”이라고 설명했다. 핀란드 역시 인구 고령화와 대도시 집중화가 현안이다. 핀란드 지자체연합 연구위원으로 일하는 벤자민 스트란드베르그 박사는 “사회서비스 광역화와 행정구역통합 논의가 한창”이라고 밝혔다. 핀란드는 국세 대비 지방세가 32%가량으로 스웨덴보다는 10% 포인트 가까이 낮다. 스트란드베르그 박사는 “형평성과 자율성 못지않게 행정효율성도 중시한다. 스웨덴과 비교하면 우리는 더 적은 지방재정 규모로 비슷한 수준의 복지 업무를 처리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에게 “핀란드는 재정분권을 한 덕분에 복지가 발달한 것일까 아니면 복지국가가 발달한 덕분에 지자체 역시 복지가 발달했을까”라고 물었다. 소살루 박사와 스트란드베르그 박사는 “핀란드 국가가 복지국가 시스템을 갖췄기 때문에 그 속에서 지자체 복지 시스템이 작동한다”면서 둘의 관계를 “하향식”이라고 표현했다. 헬싱키 강국진 기자 betulo@seoul.co.kr
  • 키신저 미중 외교수장 잇따라 접견…미중 갈등 조율?

    키신저 미중 외교수장 잇따라 접견…미중 갈등 조율?

    미국과 중국 간 무역전쟁이 길어지는 상황에서 미 외교 거장으로 불리는 헨리 키신저(96) 전 미 국무장관이 최근 왕이 중국 국무위원 겸 외교부장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을 잇따라 만나 관심을 모은다. 두 나라 외교의 책임자가 거의 동시에 그를 찾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례적이다. 곧 100세가 되는 그가 미중 간 갈등을 직접 조율한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온다. 3일 중국 외교부에 따르면 유엔총회에 참석한 왕 국무위원은 지난달 27일 뉴욕에서 키신저 전 장관을 만나 두 나라의 관계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왕 국무위원은 “중국은 미국과 분쟁이나 적대를 피하고 상호존중하며 협력을 추구한다”면서 “미국이 중국을 적대시하고 심지어 관계를 단절하려 하는 것은 미국에도 위험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키신저 전 장관에게 양국 관계를 푸는 데 다시 한번 협력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차이나데일리가 보도했다. 이에 키신저 전 장관은 “미중은 서로 단절될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관계”라며 “미중 관계 회복을 위해 개인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키신저 전 장관은 냉전시대 때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을 국제사회로 이끌어 낸 주인공이다.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 시절인 1971년 베이징을 극비리에 방문해 저우언라이 총리와 만나 ‘핑퐁외교’로 두 나라 간 수교를 이끌어 냈다. ‘하나의 중국’ 원칙도 수용해 중국이 1971년 대만을 몰아내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에 오를 수 있게 도왔다. 중국 입장에서는 나라의 운명을 바꿔 준 ‘은인’으로 볼 수 있다.폼페이오 장관도 지난달 29일 트위터를 통해 “전날 키신저 전 장관을 만났다”고 소개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논의가 오고 갔는지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스캔들’에 연루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을 둘러싼 문제와 함께 중국 관련 이슈도 공유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세계 외교지형이 크게 바뀌었지만 여전히 많은 정치인과 정부 관계자들은 키신저 전 장관의 조언에 귀를 기울이는 듯 하다. 다만 세계를 쥐락펴락하던 그의 영향력이 이미 소멸됐다는 주장도 심심치 않게 나온다. 키신저 전 장관은 지난해 9월에도 뉴욕에서 왕 국무위원을 만났고 두 달 뒤에는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 등 지도부에게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중국 굴기에 큰 역할을 한 원로에 대한 예우이자 미국 측에 무역전쟁 타결을 종용하기 위한 제스처였다. 하지만 “미중 무역갈등을 대화로 풀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공허한 외침에 머물고 있다. 그의 개입에도 양국 관계는 계속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내년 미 대선에 도전하는 버니 샌더스 민주당 경선후보는 폼페이오 장관과 키신저 전 장관과의 회동을 비난했다. 그가 미국의 베트남전 확전과 캄보디아 내전 개입, 칠레 정권 전복 등을 지휘한 ‘민주주의 파괴자’라는 것이다. 샌더스 의원은 “내가 대통령이 되면 키신저의 조언을 더 이상 듣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글로벌 In&Out] 시안사변과 중국의 운명/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글로벌 In&Out] 시안사변과 중국의 운명/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중국 근현대사 연구자들은 올해 70주년을 맞은 중국혁명 승리의 뿌리는 중국의 역사를 완전히 바꾼 1936년 12월에 발생한 ‘시안사변’에 있다고 간주한다. 이번에는 중공에 의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기념하면서 이 사건의 배경과 경과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중국공산당은 1921년 창설 이후 코민테른과 소련의 지시로 중국 국민당과 관계를 맺어 제1차 국공합작에 참여했다. 하지만 1927년 4월 상하이를 점령한 장제스가 예고도 없이 국민당군과 함께 싸웠던 노동자들로 구성된 소부대들을 무장해제시키고 잔인한 숙청을 단행했다. 국민당에 배신당한 중공은 난창폭동을 일으키고 홍군을 창설하였으며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설립했다. 1931년 만주사변을 통한 일본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안내양외(安內攘外)정책을 선포한 장제스는 대일저항을 사실상 포기하고 중공에 대한 토벌을 고수했다. 1933~34년 독일 군사고문의 지도를 받은 장제스의 군대가 대부분의 혁명근거지를 없애는 데에 성공했으며 중공은 장정(長征)을 실시하고 중국 북부에 있는 옌안이라는 지역으로 도피했다. 이때 국민당 내부에 일제의 위협을 무시하고 중공 소멸에만 집중하던 장제스의 정책을 반대하고 중공을 동정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었다. 결국 옌안 지역에서 중공 토벌을 맡았던 장쉐량과 양후청이 내전의 무의미함을 느끼고 공산당과 연락을 취하면서 정전했다. 중공과 손잡고 대일전쟁의 준비에 나선 장쉐량은 장제스를 설득해 봤으나 장제스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공격을 계속하라고 지시하였다. 1936년 말 장제스가 공격을 강행하기 위해 시안에 도착했을 때 장쉐량과 양후청은 더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되어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12월 12일 오전 5시 장쉐량 친위대가 장제스가 머물고 있던 별장을 급습해 그를 체포했다. 장쉐량은 8개의 조건을 내세워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에 나설 것을 요구했으나 장제스는 타협을 거부했다. 같은 날 저녁 장쉐량은 중공 중앙위원회에 전보를 보내 상황을 설명했다. 중공은 장제스 문제의 해결 방법을 논의했다. 이 회의의 기록이 공개되지 않았지만, 그 회의에 참석했던 장궈타오의 회의록에 따르면 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중공은 저우언라이를 시안에 파견하고 코민테른의 의견을 확인하고 결정하기로 했고 모스크바에 전보를 보냈다. 소련은 이 소식이 충격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잘 인식했던 소련의 지도부는 통일전선을 결성하지 못하면 아시아 전체가 일제의 지배에 들어가고 식민지 민족의 해방은커녕 소련도 독일과 일본의 양면침략을 당해 패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스탈린은 즉시 소련 정부기관지에 시안사변을 비난하는 기사를 발표할 것을 지시했고 12월 16일 코민테른이 중공에 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라는 전보를 보냈다. 이와 동시에 중국의 상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장제스 구금의 소식을 받은 국민혁명군 장군 허잉친은 12월 16일 자신을 토벌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시안 부근을 폭격했다. 이 폭격의 인명피해는 수백명에 달했다. 하지만 직접 시안에 간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은 토벌작전 중지 지시를 내리도록 장제스를 설득했다. 중공 중앙위원회는 12월 19일 확대회의에서 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로 하고 장제스와의 대화를 본격 지지했다. 흥미롭게도 장쉐량, 양후청과의 대화를 거부하던 장제스는 군관학교 총수 시절 부하이던 저우언라이와 대화를 시작했다. 결국 장제스는 중공이 그 정부와 홍군을 해산하고 국민혁명군에 들어가면 내전을 중지하고 통일전선을 결성하겠다고 약속했고 12월 26일에 석방됐다.
  • ‘흑묘백묘’ ‘대국굴기’… 中 지도자들의 사자성어 정치

    ‘흑묘백묘’ ‘대국굴기’… 中 지도자들의 사자성어 정치

    예부터 중국 지도자들은 아름다우면서도 상징적인 말 한마디로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곤 했다. 신중국 건국 70년을 맞아 중국을 바꿔 놓은 지도자의 주요 발언을 살펴봤다. 1일 신화통신 등에 따르면 초대 국가주석인 마오쩌둥은 1949년 10월 1일 신중국 건국에 앞서 열린 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중국 인민이 (마침내) 떨쳐 일어섰다”고 밝혔다. 국민당 정부에 쫓기며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중국 공산당이 대장정(1934~1935년)을 거쳐 산시성 옌안에 근거지를 마련한 지 14년 만에 이뤄 낸 역전의 선언이었다. 1840년대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100여년간 외세에 침략당한 굴욕의 역사, 부패 관료와 악덕 지주를 모두 몰아내고 인민이 주인인 ‘전혀 새로운 중국’(新中國)을 만들었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중국은 대약진운동(1958~1962)과 문화대혁명(1966~1976)의 후유증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1984년 덩샤오핑은 건국 35주년을 기념해 열병식에 나섰다. 당시 중국은 베트남과의 잦은 교전으로 어려움이 컸다. 소련과도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두고 갈등이 불거졌다. 그는 다분히 35년 전 마오의 연설을 염두에 두고 “중국인들이 더욱 부유해졌다”고 표현했다. 1978년 시작된 개혁·개방 정책 성과를 열병식을 통해 홍보하고 국민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였다. 그는 “능력 있는 사람부터 먼저 부자가 돼라. 그리고 낙오된 사람을 도와라”라는 선부론과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도 내놨다. 경제성장을 중시한 그의 발언은 중국이 ‘죽의 장막’에서 벗어나 ‘주요 2개국’(G2)으로 부상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2013년부터 ‘신형대국관계’를 강조한다. 달라진 중국의 위상에 걸맞은 새로운 국제질서를 구축하려는 의도다. 그는 “(미중) 두 나라가 협력을 강화하는 것은 세계를 이롭게 한다”면서 “양국 지도자가 불(不)충돌·불대항, 상호존중, 협력공영(상생)의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이 더이상 인권 문제 등을 이유로 자신들을 압박하지 말라는 속내가 담겨 있다. 다만 시 주석에 대한 서구세계의 평가는 긍정적이지 않다. 부정부패 척결 외에 가시적으로 드러난 성과와 업적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관광 상품된 체르노빌…발전소 제어실도 관광객에 공개한다

    관광 상품된 체르노빌…발전소 제어실도 관광객에 공개한다

    지난 1986년 4월 26일 구 소련(현재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시 남방 130㎞ 지점에서 인류 최악·최대의 원전사고가 터졌다. 이제는 33년 째로 접어든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방사능 누출 사고다. 이 사고로 인한 피폭(被曝)과 방사능 휴유증 등으로 수십 만 명의 사상자를 낳았으나 사실상 피해 집계가 불가능할 만큼 체르노빌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앙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들어 이 사고를 배경으로 한 미국 HBO 드라마 ‘체르노빌’이 인기를 끌면서 33년간 유령도시로 방치됐던 이곳이 대중적인 큰 관심을 받고있다.최근 영국 데일리메일 등 서구언론은 체르노빌 발전소의 중앙제어실(Unit 4 control room)이 사고 후 처음으로 일반인의 관광코스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드라마 ‘체르노빌’의 주무대가 될 만큼 발전소의 중앙제어실은 당시의 재앙을 지금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지난 주 일부 기자들에게 먼저 공개된 영상을 보면 제어실의 장비들은 녹슬고 부서져 켜켜이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다. 놀라운 사실은 여전히 방사능이 안전수치에 4만 배에 달한다는 점. 이 때문에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안면 마스크와 방사선 방호복등 안전장비를 반드시 착용해야 하며 5분 이상 머물 수도 없다.   정부 당국자는 "체르노빌 관광 코스 중 중앙제어실에 머무는 시간은 단 5분에 불과하지만 평생 기억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면서 "드라마 ‘체르노빌’이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면서 많은 관광객들의 관심이 늘어났다"고 밝혔다. 실제 우크라니아 현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올해에만 체르노빌을 방문하기 위해 전세계에서 온 관광객이 8만 5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우크라이나 관광업계가 때아닌 호황을 맞아 체르노빌 관광상품 예약 건수가 전년 대비 30% 증가했다고 보도했다.그러나 드라마를 보고 체르노빌을 찾아간 일부 관광객에게 참사 현장은 그저 인증샷을 위한 ‘핫플레이스’에 불과하다는 비난도 이어지고 있다. 특히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인플루언서의 부적절한 행태도 논란의 대상이다. 보도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체르노빌 투어 상품을 운영하고 있다. 경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체르노빌을 볼 수 있는 상품과 프라이빗 투어는 물론 드라마 ‘체르노빌’ 투어도 따로 마련돼 있다. 가격은 약 80달러에서 200달러까지 다양하며 우크라이나인 가이드가 체르노빌을 안내한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평화 위해 헌신했던 교황, 그의 사목이 싹튼 곳

    평화 위해 헌신했던 교황, 그의 사목이 싹튼 곳

    종교는 유사 이래로 통치체제와 민중의 삶을 관통하며 변천해 왔고 여전히 변화한다. 그래서 종교 건축물은 당대 신앙과 삶을 압축한 상징으로 통한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지난 21~29일 폴란드, 오스트리아, 체코 등 동유럽 3개국의 천주교 문화유산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순례에 동참한 김성호 선임기자가 인상기를 싣는다.동유럽의 천주교는 사회주의의 격랑에 요동친 역사를 갖는다. 혼돈 속에서도 폴란드는 전 국민의 97%가 천주교 신자인 동유럽 최대의 천주교 국가다. 여기서 탄생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신앙, 삶에서 변함없이 추앙받는 최고 영적 지도자다. 순례도 요한 바오로 2세로부터 시작했다. 크라쿠프에 짐을 푼 순례단이 버스에 몸을 맡겨 1시간여 만에 다다른 곳은 교황이 태어나 18세까지 살았던 바도비체의 중앙광장. 초입에 나란히 성모마리아 성당(1470년 축성)과 요한 바오로 2세 생가 박물관이 놓였다. 성당 앞 무릎 꿇은 신자들의 얼굴에서 동유럽 최대의 천주교 나라를 실감한다. 사제의 묵직한 음성을 500여명 신자들은 고개 숙여 귀 기울였다. 중앙제대 왼쪽에 요한 바오로 2세가 유아세례를 받은 것을 기념한 경당이 눈에 든다. 9살 때 청년 성체를 받은 곳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옆 광장에서 뛰어놀던 요한 바오로 2세, 아니 카를 보이티와는 여기서 무슨 생각을 하며 하느님을 만났을까. 9살 때 어머니, 12살 때 형과 사별한 카를 보이티와는 군 출신 아버지와 고독한 유년기를 보낸 뒤 세계 최연소 주교(38세)와 최연소 추기경(47세) 서임을 받고 455년 만에 첫 비이탈리아 출신 교황에 등극했다. 다난한 삶에서 길어 올린 사랑과 배려의 사목은 이곳에서 싹텄을 것이다.교황이 즉위 후 첫 방문지, 선종 전 마지막 방문지로 택한 곳도 이곳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 민주화의 물꼬를 튼 인물이기도 하다. 폴란드가 구 소련 붕괴 후 가장 먼저 체제 전환을 한 이듬해(1990년) 요한 바오로 2세는 고국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신들은 이제 자유를 얻었습니다. 자유를 어떻게 쓸 것인지는 당신들의 선택입니다.” 지상 2층, 지하 1층의 생가 박물관엔 요한 바오로 2세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어린 시절 앉아서 줄곧 바로 앞 성당 벽면의 해시계 그림자를 바라보며 영성을 키웠다는 2층의 식탁 위 문구가 눈길을 모은다. “시간은 흐르나 영원함이 기다리고 있다.” 속 깊은 울림을 되뇌며 걷자니 교황이 방문지마다 챙겨 온 흙을 유리함에 모아 놓은 공간이 눈에 든다. 104개국 흙 가운데 한국의 흙 상자만 삐딱하다. 분단국의 올바른 정의와 평화를 기원하는 교황의 뜻을 담았다는 사제의 설명이 예사롭지 않다. 바도비체를 떠나 폴란드 호국의 상징이자 모후로 불리는 검은 성모마리아(블랙 마돈나)로 유명한 쳉스트호바 야스나고라 바오로수도원을 찾았다. 2㎞ 길이의 ‘성모의 길’을 걸어 정상에서 마주한 수도원 규모에 숨이 멎는다. 성모 마리아를 지키기 위해 폴란드로 들어온 은수자회가 세운 수도원. 순례객들의 눈길은 단연 수도원 앞쪽의 목조 성당에 봉헌된 블랙 마돈나에 집중된다. “성모님의 심장에 우리 민족의 심장이 같이 뛴다.” 요한 바오로 2세가 첫 고국 미사 중 남긴 문구엔 절절한 사연이 있다. 17세기 중반 스웨덴이 폴란드를 점령하기 위해 야스나고라를 침략했지만 무위로 끝났고 나라 보전의 힘이 바로 블랙 마돈나였다고 폴란드인들은 믿는다. 폴란드 마지막 순례처인 와기에브니키 ‘자비의 성모 수녀원’ 가는 길에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들렀다. 다른 수감자를 대신해 희생된 마리아 콜베 신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아내와 자식들이 있어 죽기 싫다”는 수감자를 대신해 독극물 주사를 맞고 시신이 소각된 콜베 신부는 1982년 성인 반열에 올랐다. 아우슈비츠에서 다른 수용자를 위해 죽겠다고 나선 이는 콜베 신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자비의 성모 수녀원은 환시로 나타난 예수의 계시를 실천한 마리아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성녀가 생활했고 선종한 신비의 터다. 1931년 한 손으로는 성심(심장) 근처를 움켜쥐고 다른 손은 강복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환시한 파우스티나 수녀는 성심에 대한 공경을 전하라는 예수의 임무를 받아 상본으로 남겼고 그 신심은 천주교계에서 ‘하느님의 자비’로 통한다. 천주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정한 이듬해부터 어김없이 이를 지키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기 상처받은 사람들의 구심점이기도 했던 이 수도원의 한 수녀는 파우스티나 수녀를 “가장 소박하면서도 은혜로운 절차를 받은 사도”라고 불렀다. 글 사진 크라쿠프·쳉스트호바·와기에브니키 kimus@seoul.co.kr
  • “모욕받지 않겠다”던 마오 말대로… GDP 450배 급증 ‘G2 우뚝’

    “모욕받지 않겠다”던 마오 말대로… GDP 450배 급증 ‘G2 우뚝’

    “인류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인들이 이제 일어섰다. 다시는 (외세에) 모욕받지 않을 것이다.” 중국 공산혁명에 성공한 마오쩌둥(1893~1976) 공산당 주석이 1949년 10월 1일 건국행사 직전 열린 정치협상회의 제1기 전체회의 개막사에서 이같이 선언한 지 70년이 됐다. 중국은 마오의 ‘자력갱생’을 거쳐 덩샤오핑(1904∼1997) 때부터 ‘도광양회’(힘을 감추고 때를 기다림)로 대표되는 개혁·개방에 나섰다. 이후 장쩌민의 ‘유소작위’(해야 할 일은 함)와 후진타오의 ‘돌돌핍인’(기세등등하게 힘으로 몰아침)을 지나 시진핑 주석에 이르러 ‘대국굴기’(큰 나라가 솟구쳐 일어남)로 나아갔다. 이제 중국은 세계 두 번째 경제대국이자 다른 어느 나라도 넘볼 수 없는 제조대국으로 성장했다. ●10%인 1억 5000만명은 선진국 수준 생활 30일 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건국 직후인 1952년만 해도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300억 달러(당시 가격 기준)에 불과했다. 소련의 원조 없이는 생존이 힘든 빈국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GDP는 13조 6082억 달러(약 1경 6330조원)로 450배 넘게 늘었다. 이 기간 연평균 성장률은 8.1%로 한국 정도를 제외하면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고속성장’을 일궜다. 개혁·개방이 시작된 1978년만 해도 중국의 경제 규모는 세계 11위 정도였지만 2007년 독일, 2010년 일본을 제치고 2위로 올라섰다. 지난해 중국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5.9%까지 높아졌다. 2018년 중국의 GDP는 13조 6082억 달러로 미국(20조 4941억 달러)의 70% 수준까지 쫓아갔다. 이 추세가 이어지면 2030년쯤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 경제대국으로 부상한다. 미국과의 경제적 공생 관계를 설명하는 ‘차이메리카’(차이나+아메리카)라는 단어도 이제 일상이 됐다. 미국이 설계하고 중국이 만드는 ‘아이폰’은 지구촌의 삶을 크게 바꿔놨다. 국민 생활 역시 ‘전면적 소강사회’(먹고사는 데 걱정이 없는 나라) 진입을 눈앞에 뒀다. 1인당 GDP는 1952년 119위안에서 지난해 6만 4644위안(약 1100만원)으로 70배가량 늘었다. 미 달러화로 환산하면 9000달러가 넘는다. 올해나 내년에는 충분히 ‘1만 달러 시대’를 열 것으로 보여 건국 70주년의 상징성을 더한다. 특히 지난해 각 도시가 발표한 자료를 종합하면 베이징과 상하이, 선전, 광저우 등 15개 도시는 1인당 GDP가 2만 달러를 넘었다. 이들 지역의 인구는 약 1억 5000만명이다. 한 국가나 지역의 1인당 GDP가 2만 달러에 도달하면 선진국 초입에 들어선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인 14억명 중 이미 10% 넘는 이들이 선진국 생활수준을 영위한다고 볼 수 있다.●글로벌 금융위기때 과감한 부양책이 기회로 세계는 1990년대 말 동아시아 외환위기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때 중국의 저력을 절감했다. 1997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들이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으며 국가부도 위기에 몰렸지만 중국은 되레 이 시기를 활용해 아시아 경제권에서 위상을 높였다.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미국과 일본, 유럽 등이 마이너스 성장 위기를 맞자 중국은 과감하게 4조 위안의 경기부양책을 발표해 세계 경제 회복을 이끌었다. 두 번의 글로벌 경제위기가 중국에는 기회가 됐다. 여기에 2008년 베이징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세계박람회(엑스포)를 통해 폐쇄적이던 국가 이미지를 크게 개선하며 ‘소프트파워’(연성권력) 확충에도 성공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중국어를 배우는 인구는 50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인민일보 등 중국 관영매체들은 이런 변화를 ‘상전벽해’(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함)로 표현하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1949년 건국 당시 마오의 바람대로 이제 중국은 ‘다시는 모욕받지 않을 나라’로 거듭났다. ●R&D 인력 세계 1위… “세계 놀라게 한 기적” 중국의 과학기술도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인공위성을 직접 만들고 중국판 위치확인시스템(GPS)인 ‘베이더우’도 도입했다. 올 1월에는 인류 최초로 달 뒷면에 탐사선 ‘창어4호’를 보내 미국의 자존심에 생채기를 냈다. 지난해 중국의 연구개발(R&D) 인력 규모는 418만명으로 단연 세계 1위다. 신화통신은 “인류의 역사에서 70년은 한순간처럼 짧다. 그럼에도 중국은 (70년 만에) 전방위 개방사회로 발전하며 역사적 전환을 실현했고 세계를 놀라게 한 기적도 창조했다”고 자평했다. 현재 중국은 3조 달러가 넘는 외환보유고를 바탕으로 ‘일대일로 블록’을 키워 가고 있다. 중국 정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올해 4월 기준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모두 126개국, 29개 국제기구가 참여하고 있다. 중국의 팽창을 우려하는 미국의 노골적 반대에도 서유럽 국가들이 꾸준히 동참 의사를 밝히고 있다. 독일에서 생산한 포르셰 승용차는 일대일로 사업으로 연결된 화물 열차로 단 3주 만에 중국 충칭까지 배송된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新중국 선언 70년…시진핑의 ‘G1 야심’

    新중국 선언 70년…시진핑의 ‘G1 야심’

    1949년 10월 1일 중국 공산당 리더 마오쩌둥(1893~1976)이 베이징 톈안먼 성루에 올라 ‘새로운 중국’(新中國)을 선언한 지 70년이 됐다. 19세기 아편전쟁으로 시작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병든 호랑이’로 전락했던 중국은 이제 14억명이 넘는 인구와 3조 달러(약 2400조원)에 이르는 외환보유고를 무기로 세계 최강 미국을 추격하는 ‘주요 2개국’(G2)으로 굴기(우뚝 섬)했다. 30일 세계은행 등에 따르면 중국은 건국 직후인 1952년부터 1978년까지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연평균 4.4%를 기록하다가 개혁·개방 정책을 본격화한 1979년부터 지난해까지 9.4%로 크게 상승했다. 중국은 전 세계 자원과 식량, 첨단기업을 끊임없이 사들이고 ‘일대일로(육상·해상 신실크로드) 프로젝트’에 앞장서는 세계 ‘경제허브’로 거듭났다. 지난해부터 본격화된 미국과의 무역전쟁에도 맞서며 ‘세계 최강국’(G1)의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이를 바라보는 전 세계의 속내는 복잡다단하다. 중국이 보여준 경이적인 성장에 박수를 보내면서도 이웃 국가들을 돈과 힘으로 굴복시키려는 듯한 태도에 불안감을 나타낸다. 공산당 독재와 불투명한 사회 시스템, 열악한 인권 상황 등을 보며 우려도 쏟아낸다. 한반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로 소원해진 한중 관계를 복원하고 새로운 외교관계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건국 70년을 맞은 중국 공산당은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 공산당(1922~1991 집권)보다 1년 더 집권하는 기록도 세우게 됐다. 클라우스 뮐한 독일 베를린자유대 교수는 29일(현지시간)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중국에서는 (소련이 경험한) 권력 붕괴의 두려움이 정책과 사고의 많은 부분을 형성한다. 새롭고 중요한 도전에 직면할수록 두려움이 더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대만 대학가서 중국·홍콩 유학생 정면 충돌

    대만 대학가서 중국·홍콩 유학생 정면 충돌

    홍콩 반정부 시위를 둘러싼 갈등이 대만 대학 캠퍼스로 확산됐다. 대만 대학의 곳곳에서 중국인 유학생들이 홍콩 반정부 시위 지지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홍콩 유학생들이나 대만 대학생들에게 공격적인 행동을 하는 사건이 잇따르고 있는 것이다. 대만 중국시보(中國時報),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등에 따르면 대만 교육부는 26일 대만 내 대학 4곳에서 중국 유학생들이 ‘존 레넌의 벽’에 홍콩 반정부 시위 지지 메시지를 붙이려는 홍콩 유학생과 대만 대학생들을 공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밝혔다. ‘존 레넌의 벽’(John Lennon Wall)은 홍콩과 대만 등에서 홍콩 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지지하는 의견을 포스트잇에 써 붙인 것을 일컫는다. 원래 영국 밴드 비틀스의 멤버 존 레넌이 1980년 12월 미국에서 암살된 후 체코슬로바키아 수도 프라하에서 그를 추모하면서 이 벽이 생겨났다. 당시 체코는 공산 정권의 ‘철의 장막’에 억압돼 있는 상태였다. 냉전 시대에 평화를 외치며 반전쟁 운동가로 활동한 레넌은 서구 음악이 금지됐던 체코에서 반전·반공산주의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레넌이 사망하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예술가가 프라하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 근처의 외딴 벽에 레넌의 얼굴을 그렸다. 이후 레넌을 기리는 글뿐 아니라 체코와 소련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글들이 끊임없이 벽에 새겨졌다. 1989년 ‘벨벳 혁명’으로 공산 정권이 무너지자 존 레넌 벽은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2014년 우산 혁명 당시 홍콩섬 애드미럴티역에서 홍콩 정부청사로 이어지는 외부 계단에 처음 포스트잇이 붙기 시작해 등장한 존 레넌 벽은 이제 홍콩 민주화 시위의 상징 중 하나다. 존 레넌의 벽을 둘러싼 대만 대학 캠퍼스 내 첫 충돌은 지난 20일 남부 가오슝(高雄)시 이서우(義守·I-SHOU)대학에서 발생했다. 기숙사 내에 설치된 존 레넌의 벽에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포스트잇을 붙이려던 한 홍콩 유학생을 중국 본토에서 온 유학생이 공격한 것이다. 중국 출신 유학생은 홍콩 출신 유학생에 물을 뿌리고 소리를 지르는 등 공격적 행동을 했다고 대만 교육부는 밝혔다. 이어 25일에는 타이베이(臺北)시에 있는 중국 문화대학을 비롯한 3곳의 대학에서도 중국에서 온 유학생들이 존 레넌의 벽에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포스트잇을 붙이려던 홍콩 출신 유학생이나 현지 대만 학생들을 공격하는 사태가 발생했다.이에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까지 나서 “대만은 전체주의 권력의 토대 위에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라면서 중국 유학생들의 폭력행위를 규탄했다. 차이 총통은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글을 통해 “폭력이 캠퍼스 안에서 일어났건 밖에서 일어났건, 폭력을 저지른 사람들이 누구건 간에 우리는 그런 행위를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며, 관용을 베풀지 않을 것”이라고 엄중 경고했다. 홍콩 반정부 시위를 지지해온 차이 총통은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표시할 권리가 있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지지할 권리가 있다면서 이번 사건에 대한 엄중한 조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판원충(潘文忠) 대만 교육부장은 자유 민주 사회는 법의 지배를 받는다면서 “우리는 전 세계 학생들이 대만에 유학 오는 것을 환영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곳의 법을 준수하고 따라야 한다”고 밝혔다. 이번 사건에 대해 공정하게 조사할 것이라고 판 부장은 덧붙였다. 이서우대는 이미 이번 사건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앞서 호주와 캐나다, 미국 등의 대학에서도 친중파 학생과 홍콩 반정부 시위를 지지하는 학생들 간 출동이 빚어진 바 있다. 지난 6월부터 4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홍콩의 ‘범죄인 인도법안’(송환법) 반대 시위는 홍콩 행정수반인 캐리 람 행정장관의 송환법 철회 선언에도 불구하고 다른 민주화 조치를 요구하며 장기화하고 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66년간 대통령 8명에 안보 전략 제공한 ‘펜타곤 추기경’

    66년간 대통령 8명에 안보 전략 제공한 ‘펜타곤 추기경’

    제국의 전략가/앤드루 크레피네비치·배리 와츠 지음/이동훈 옮김/452쪽/2만원무기 대신 냉철한 이성으로 싸운 마셜 中 ‘은둔 제갈량’ 日 ‘전설의 전략가’ 불려 현대 군사전략 탄생·굴곡진 역사 더듬어중국 고전을 읽다 보면 수많은 책사를 만난다. 삼국지 유비에겐 제갈량이, 손권에겐 주유가 있었고, 초한지의 유방에겐 장량, 항우에겐 범증이란 비범한 책사가 있었다. 한신처럼 탁월한 전략가이면서 직접 전장을 누볐던 장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무려 육십갑자(60년) 동안 한 나라의 최고 전략가 지위를 이어가지는 못했다. 그런데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에 그런 인물이 있다. 음지에서 미국의 실질적인 안보 전략을 설계했다는 ‘국방 설계자’ 앤드루 마셜(1921~2019)이 바로 그다. 책은 무기 대신 냉철한 이성으로 싸운 한 인물의 발자취를 통해 현대 군사전략의 탄생과 그 굴곡진 역사를 서술한다. 냉전 시대에서 출발해 이슬람 테러리즘의 발호를 거쳐 중국의 부상에 이르는 현대사의 중요한 국면에서 그가 어떤 역할을 수행했고, 그에 따라 세계의 군사지도는 어떻게 변화됐는지를 살피고 있다.마셜이 내놓은 핵심 개념은 ‘총괄평가’다. 미국의 무기체계와 전력, 군수 등 국방의 모든 영역을 경쟁국과 철저히 비교해 군비 경쟁에서 미국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파악하고, 미래의 문제와 전략적 이점을 예견하는 것이 평가의 목표였다. 이런 총괄평가의 개념 구조는 1970년대 초반 냉전체제 때 처음 등장했지만 정밀 유도무기와 중국의 급부상, 핵무장 국가의 증가 등 과거와 크게 변한 전쟁 상황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마셜은 1973년 국방장관 직속의 싱크탱크인 총괄평가국(ONA) 초대 국장에 취임한 후 2015년 93세 때 공직에서 은퇴할 때까지 42년간 이 조직의 리더 역할을 수행했다. 1949년에 들어간 국책기관 랜드연구소(RAND) 재직 기간을 포함하면 무려 66년에 달하는 시간이다. 그동안 그는 대통령 8명, 국방장관 13명에게 각종 안보 전략을 제공했다. 그의 경력을 두고 미국과 유럽에선 영화 ‘스타워즈’의 제다이 마스터 ‘요다’에 비유했고, 옛 소련에선 ‘펜타곤의 추기경’, 중국에선 ‘은둔의 제갈량’, 일본에선 ‘전설의 전략가’로 불렀다.마셜의 공적은 베일에 싸여 있다가 이제야 조금씩 드러난다. 대표적인 업적 하나는 냉전시대 소련을 대상으로 세운 ‘경쟁전략’이다. 1970~80년대 미국의 가장 큰 고민은 소련의 군사비 규모에 대한 정확한 정보였다. 당시 중앙정보국(CIA)은 소련이 GNP의 6~7%를 군비로 쓰고 있다고 주장했으나, 마셜은 30%를 초과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는 과도한 군비 지출이 소련의 발목을 잡을 것이라고 판단한 뒤, 계속해서 과잉 투자하도록 유도해 소련 붕괴를 재촉하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용 강요 전략’이라고도 불리는 이 경쟁전략은 결국 소련 해체의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소련 해체 후엔 미군의 군사혁신 논쟁을 주도했고, 향후 안보환경의 변화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예측했다. 중국의 패권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아시아 회귀 정책’을 제시했는데, 이 역시 중국으로 하여금 천문학적 비용이 소모되는 해군력 증강으로 출혈을 강요하려는 전략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재 양성도 주요 공적 중 하나다. 마셜은 ‘예정된 전쟁’의 저자 그레이엄 엘리슨, 새뮤얼 헌팅턴 등 얼추 120명에 이르는 기라성 같은 인재를 키워내 국방부 등에 포진시켰다. 마셜의 제자들로 이뤄진 이 집단 지성은 훗날 ‘성 앤드루 학당 동창회’라고 불리게 된다. 미국의 외교·정책의 발자취를 엿볼 수 있는 마셜의 삶은, 단순히 ‘미국 전략 노장’의 전기가 아니라 세계 강대국의 이익 셈법과 더욱 복잡해지는 국제관제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한국의 마셜’을 향한 갈증을 불러일으킨다는 게 단점이랄까. 손원천 선임기자 angler@seoul.co.kr
  • “외계인 보자”…해프닝으로 끝난 소리만 요란했던 ‘51 구역’ 습격

    “외계인 보자”…해프닝으로 끝난 소리만 요란했던 ‘51 구역’ 습격

    미국의 비밀 군사기지로 유명한 ‘51 구역’(Area 51)에 단체로 침입하자는 거창한 이벤트가 결국 극히 일부 사람들만 참여한 해프닝으로 끝났다. 지난 20일(현지시간) 미국 AP통신, USA투데이 등 현지언론은 채 100명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51 구역 습격 이벤트에 참여했다고 보도했다. 세계적인 화제를 모은 이 이벤트는 네바다주 남부 넬리스 공군기지를 일컫는 51구역에 20일 새벽 3시~6시 모두 함께 들어가자는 페이스북 이벤트가 발단이었다.그 목적은 황당하게도 ‘외계인을 보기 위해서’ 인데 주최 측은 “우리가 나루토처럼 달리면 그들의 탄환보다 더 빨리 움직일 수 있다”며 참가를 호소했다. 황당한 이 이벤트에 놀랍게도 무려 200만명 이상이 참가의사를 밝혔고 이에 미 당국도 긴장감을 감추지 못했다. 실제로 습격일인 20일을 앞두고 미 전역에서 약 1500여 명의 사람들이 기지 인근 마을에 짐을 풀며 전운이 감돌았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실제 51 구역을 향해 행진하는 습격이벤트에는 100명도 참가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USA투데이 보도에 따르면 이날 이벤트에 참여했다 체포된 사람은 단 한 명으로 흥미롭게도 공군 기지 문에 소변을 보다가 수갑을 찼다. 결과적으로 소리만 요란했던 이벤트였던 셈.화제를 모은 51구역은 미 정보기관들이 외계인 또는 외계 비행체를 비밀리에 연구하는 곳이라는 음모론의 진원지다. 이곳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계기는 로스웰사건 때문이다. 1947년 미국 뉴멕시코주의 한 시골마을인 로스웰에 UFO가 추락했지만 미국 정부가 이를 수습해 51구역에 옮기고 비밀에 부쳤다는 바로 그 소문이다. 그간 미 정부는 51구역의 존재에 대해 무응답으로 일관해오다 지난 2013년에서야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이 지역의 실체가 세상에 드러났다. 당시 비영리 조직인 내셔널 시큐리티 아카이브(NSA)의 정보공개 요청을 통해 공개된 중앙정보국(CIA)의 보고서를 보면 51구역은 냉전시대에 구 소련의 공중 감시를 담당했던 U-2 정찰기 시험 장소라고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보고서에는 외계인과 미확인 비행물체(UFO)를 은폐했을 것이라는 내용은 없어 UFO 신봉자들의 기대는 빗나갔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이승만 명예훼손 피소’ 도올 김용옥 무혐의 처분

    ‘이승만 명예훼손 피소’ 도올 김용옥 무혐의 처분

    이승만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혐의로 고소당한 도올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71)에 대해 경찰에 이어 검찰도 ‘혐의 없음’ 결론을 내렸다.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부장 성상헌)는 사자명예훼손 혐의를 받는 김 교수를 최근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했다. 앞서 검찰로부터 사건 수사를 지휘받은 서울 혜화경찰서도 지난 8월30일 김 교수를 무혐의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수사기관은 과거 판례 등에 비추어 김 교수에게 사자명예훼손 혐의를 적용하기에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취지로 무혐의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김 교수는 지난 3월 16일 KBS 1TV ‘도올아인 오방간다’에 출연해 “김일성과 이승만은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를 분할 통치하기 위해 데려온 자기들의 일종의 퍼핏(puppet),괴뢰”라며 “(이 전 대통령을) 당연히 국립묘지에서 파내야 한다”고 말했다. 또 3월 23일 같은 프로그램에서 “이승만이 제주도민들의 제헌국회 총선 보이콧에 격분해 제주도민을 학살했다”, “여수에 주둔한 14연대를 제주도에 투입해 보이는 대로 쏴 죽일 것을 명령했다”고 발언했다. 이 전 대통령 양자 이인수(88) 박사는 올해 5월 김 교수를 검찰에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이 박사는 김 교수가 책과 TV 프로그램에서 이 전 대통령에 대한 허위사실을 적시해 고인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사우디 vs 이란 지난 15년 동안 사이가 더 나빠진 이유는

    사우디 vs 이란 지난 15년 동안 사이가 더 나빠진 이유는

    사우디아라비아 유전 시설 두 곳을 예멘 반군이 드론으로 공격해 국제유가가 출렁이고 있는데 예멘 반군의 배후 조종자로 이란이 지목되고 있다. 이란은 심지어 순항미사일도 사우디 쪽으로 발사했다고 미국은 의심하고 있다. 두 나라는 이라크를 중간에 두고 있어 국경을 마주하지 않지만 매우 가까운 이웃이다. 하지만 수천년을 이어 철천지 원수처럼 지내고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수니파, 이란은 시아파의 맹주로 믿음의 대립을 근본적으로 갖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두 나라는 더욱더 첨예한 갈등과 충돌에로 이끌리고 있다고 영국 BBC는 16일(현지시간) 지적하며 그 배경을 분석해 눈길을 끈다.역사적으로 사우디는 왕조이며 이슬람의 성지로 자신을 무슬림 세계의 지도자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이에 반기를 든 것이 1979년 혁명으로 샤 왕조를 무너뜨린 이란이다. 혁명 신학을 앞세워 이전에 중동 지역에 없던 새로운 정치체제를 실험하는 이란은 혁명을 국경 너머로 확산시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출한다. 그런데 최근 15년 동안 이런 갈등을 더 첨예하게 부채질하는 사건들이 있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소수 수니파를 대표하는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붕괴되면서 다수 시아파 정부가 들어섰다. 이란의 입김이 강해질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2011년 아랍의 봄이 지역 내 정세의 불안정성을 높였다. 두 나라 모두 영향력 확대에 골몰할 수 밖에 없었으며 특히 시리아, 바레인, 예멘을 둘러싸고 서로 의심하는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이란이 지중해로 뻗어나갈 회랑을 건설하려 한다는 의심까지 나온다. 이란은 지역 정치에서 최근 여러 차례 승리를 맛봤다. 시리아에서 이란은 (러시아와 힘을 합쳐)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을 지원해 사우디가 뒷배를 봐주는 반군을 거의 격퇴해냈다. 사우디는 비교적 젊은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가 통치자 지위를 굳히자 군사적 모험주의를 내세워 이란의 영향력을 제한하고자 해 지역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이에 따라 후티 반군을 제압하려는 예멘 정부군을 지원하고 있는데 4년 뒤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도박이었다는 점을 깨닫고 있다. 유엔 보고서는 이란이 무기를 후티에 대주고 있으며 기술과 군사적 측면 모두에서 테헤란 정부가 뒷배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레바논에서는 이란의 동맹인 시아파 무장집단 헤즈볼라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사우디는 사드 하리리 총리를 물러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그 뒤 하리리는 돌아와 사임을 없던 일로 했다. 해서 사우디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정부를 끌어들였고, 이스라엘은 친이란 무장집단이 시리아에서 발호해 국경 근처까지 이르자 이란을 견제하려는 사우디를 지원하는 야릇한 상황이 벌어졌다. 물론 2015년 이란 핵합의 때 사우디와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탑재 능력을 둘러싸고 심각한 의견 대립을 겪긴 했다.중동 지역의 패권 구도는 기본적으로 수니냐 시아냐에 따라 구분된다. 걸프 지역의 아랍에미리트(UAE)와 바레인, 이집트와 요르단까지가 친사우디 진영으로 분류된다. 친이란 캠프에는 알아사드 시리아 정부, 레바논 거점의 헤즈볼라, 이라크의 시아파 정부가 있다. 물론 역설적이게도 이슬람 국가(IS) 격퇴가 다급한 미국 정부는 이라크 의 시아파 정부의 협조가 절실해 좋은 관계를 만들려 애쓰고 있다. 냉전시대에는 미국과 소련이 군사적으로 이 지역에서도 대치해 힘의 균형을 취했지만 이제 이란과 사우디는 다양한 형태의 대리전으로 영향력 확대에 부심하고 있다. 시리아가 대표적인 예이고, 예멘 역시 그렇다. 이란은 또 걸프 해역 운송로를 장악하는 방식으로 근육질을 키우고 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곳은 사우디 원유가 수출되는 길목이다. 미국은 최근 들어 이란이 다른 나라 유조선들을 억류하는 일의 배후로 이란을 지목하고 있다.그렇다면 두 나라가 전면전으로 맞붙을 것인가? 아직까지는 대리전에 그치고 있다. 양쪽 모두 전면전을 공언하지 않지만 후티 반군이 사우디 수도나 경제적 타깃을 겨냥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고 방송은 전망했다. 후티 반군이 사우디의 인프라를 계속해서 파괴한다면 두 나라의 반목은 첨예해질 수 밖에 없다. 걸프에서의 해상 충돌뿐만 아니라 더 넓은 국경들에서의 긴장도 높아질 수 있다. 아울러 미국과 서구 열강들은 국제 교역과 원유 수송을 위해서도 걸프의 안정 확보가 긴요해 물길을 막는 이들이 생긴다면 미국 해군과 공군이 개입할 여지가 커질 수 있다고 방송은 결론 내렸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열 일’ 다한 CIA, 비둘기 까마귀 개와 고양이 돌고래까지 스파이로

    ‘열 일’ 다한 CIA, 비둘기 까마귀 개와 고양이 돌고래까지 스파이로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냉전 시대 별 일을 다 벌였다. 물론 1차 세계대전 때의 영국 첩보부, 옛 소련이나 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던 나라들, 지금의 러시아도 정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다. CIA가 최근 기밀 해제한 문서에 따르면 비둘기 몸에 작은 카메라를 달아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부두에 정박한 소련 잠수함을 자동으로 촬영하게 만든 타카나 작전이 대표적이다. 영국 BBC의 고든 코레라 안보 전문기자는 CIA가 비둘기들을 대상으로 정교한 훈련 과정을 운영했으며 비둘기 뿐만아니라 까마귀를 이용해 도청 장치를 낙하하게 하거나 돌고래를 수중 염탐에 활용하곤 했다고 소개했다. 동물들 각자가 신성한 작전을 위해 독특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는 것이다. 버지니아주 랭글리의 CIA 박물관에는 카메라를 장착한 비둘기 인형이 있다. 영국이 2차 세계대전 중 비둘기를 스파이로 활용했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책을 펴낸 코레라 기자는 비둘기를 서신 교환에 쓴 것은 훨씬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만 첩보전에 처음 활용한 것은 1차 세계대전 때부터라고 했다. 비둘기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에 물건을 떨어뜨릴 수 있고 나중에 그곳을 찾아 가서 되찾아올 수 있는 초능력 같은 것을 지녔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영국 첩보기관 MI14는 독일 등 주축국에 점령당한 유럽 지역에 낙하산을 매단 컨테이너 안에 비둘기 1000마리를 넣어 지상에 떨어뜨렸다. 비둘기 몸에는 편지가 붙어 있었는데 독일군의 V1 로켓 발사 장소와 레이더 기지에 관한 정보를 적어달라는 내용이었다. ‘레오폴드의 앙심(Leopold Vindictive)’이란 레지스탕스 조직이 작성한 12쪽의 보고서는 직접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에까지 전달됐다. 전후 영국 합동정보본부는 냉전시대에 어울리는 비둘기 활용법을 찾는 비둘기 소(小)위원회를 구성했지만 흐지부지됐지만, 대신 CIA가 1960년대 바통을 넘겨 받으면서 다른 동물에게로 시야를 넓혔다고 코레라 기자는 소개했다. 까마귀들에게 유리 창틀에 40g 밖에 안 되는 작은 물건을 내려놓고 나중에 찾아오게 하는 훈련을 시켰다. 실제로 유럽의 어느 특정 장소에 도청 장치를 떨어뜨리는 작전에 성공했지만 어떤 내용도 녹음으로 담기지 못했다. CIA는 또 소련이 화학무기를 실험했는지 감지할 수 있는 센서를 철새들이 갖다 놓을 수 있는지 알아봤다. 나아가 개들의 뇌를 전기로 자극해 원하는 곳에 가게 할 수 있는지 알아봤다. 고양이 귀에 녹음 장치를 심는 ‘어쿠스틱 키티’ 작전이 있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또 돌고래를 사람과 함께나 아니면 돌고래 혼자만 적진에 침투시킬 수 있는지 살펴봤다. 돌고래를 현장 요원으로 일하게끔 훈련시키는 조련사를 어떻게 통제할지가 관건이었다. 지난 2001년 태평양 병코돌고래가 수륙양용 구축함 USS 덜루스 호에 승선해 물 속 기뢰를 탐지하는 임무를 수행했다.플로리다주 키웨스트에서는 아예 병코돌고래에게 적군의 선적 작업에 타격을 주기 위해 수중 공격을 시도하게 하는 훈련도 실행했다. 또 소련 핵잠수함의 기계음을 탐지하는 센서를 운반할 수 있는지, 방사능이나 생물학 무기의 흔적을 찾는 임무를 맡기려 했다. 1967년에 CIA는 돌고래 담당 옥시개스(Oxygas), 조류 담당 액시오라이트(Axiolite), 견공과 고양이 담당 케첼(Kechel) 등 세 파트에 60만 달러를 지출한 것으로 나온다. 1970년대 중반 CIA는 한 교도소와 워싱턴 DC의 해군기지 마당에서 여러 차례 실험을 실시했다. 카메라는 2000 달러 짜리였으며 무게는 35g 밖에 안 됐다. 140장 정도의 사진을 찍었는데 절반 가량은 화질이 괜찮았지만 산책하는 사람들이나 주차된 차량 등 의미없는 정보를 담은 사진만 그런대로 볼 만했다. 전문가들은 위성 사진이 훨씬 쓸 만하다고 판단했다. CIA 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비둘기 스파이 요원에 대해 알면 오히려 자신들을 염탐하는 데 활용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해서 입을 꼭 다물었다. 모스크바로 비둘기 상자를 비밀리에 운송해 레닌그란드 항구를 염탐하기 위해 비둘기를 어떤 방법으로 풀어놓을 것인지까지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예를 들어 시속 80㎞로 달리는 차의 창문을 열어 비둘기를 날리는 방안까지 거론됐다. 하지만 최근 기밀 해제된 문서는 딱 여기에서 멈춘다고 코레라 기자는 아쉬워했다. 얼마나 많은 비둘기가 실제로 염탐 임무를 띠고 하늘을 날았는지, 그들이 수집한 정보는 얼마나 되고 어떤 수준인지는 여전히 기밀에 가려져 있다는 것이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네타냐후 최대 정적으로 부상한 전직 비서실장

    네타냐후 최대 정적으로 부상한 전직 비서실장

    리에베르만, 네타냐후 통해 정계 입문국방장관 사임하며 “총리, 테러에 굴복”4월 연정 깬 장본인, 17일 재선거 불러이번 총선서도 연정 구성 키 갖고 있어 이스라엘 총리로 장기집권한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오는 17일(현지시간) 총선에서 5선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더구나 총선에서 승리해 다시 권력을 잡지 못하면 철창 신세를 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뉴욕타임스(NYT)는 9일 그가 세 건의 부패 사건의 혐의를 받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약 일주일 남은 선거는 ‘재선거’다. 이스라엘은 지난 4월 총선을 실시했고, 네타냐후가 이끄는 리쿠르당이 승리했지만 연정 구성에 실패했다. 이스라엘 의회는 당시 의회를 해산하고 오는 17일 재선거를 하기로 결정했다.선거에서 네타냐후의 최대 경쟁상대는 제1야당인 중도연합 청백당의 베니 간츠다. 하지만 그의 최대 정적으로 떠오른 인사는 따로 있다. 지난 4월 단 5석을 갖고 연정을 무너뜨린 베이테누당의 아비그도르 리에베르만 전 국방장관이다. 9일 AP통신이 조명한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네타냐후를 통해 정계에 입문했으며, 한 때 비서실장을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는 정치적 ‘멘토’를 최대 위기로 몰아넣은 경쟁자, 비판자, 그리고 ‘가시’가 됐다. 리에베르만은 구소련 출신 유태인으로 강경 우파다. 그는 국가 안보를 최우선으로 여기기 때문에 오히려 유대교 쪽에선 세속적인 인사로 평가받는다. 지난해 그가 국방장관에서 물러난 이유도 네타냐후가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에 대해 더 강경하게 대응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국방장관에서 물러나며 “네타냐후의 정책은 단순히 테러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연정이 틀어진 원인도 그의 정치적 성향 때문이다. 여성까지 의무복무를 하는 이스라엘에서도 초정통파 유대교 신자들은 병역을 거부하고 있는데 리에베르만은 이들을 강제징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네타냐후 입장에선 이런 베이테누당을 끌어안을 경우 반대쪽 초정통파 유대정당과 연정이 틀어지게 된다. 결국 연정은 깨졌고 네타냐후는 당시 “리에베르만은 자신의 정치적 자존심 때문에 이스라엘을 불필요한 선거로 끌어들였다”고 비난했다. 이번 선거에서도 네타냐후의 리쿠르당과 베니 간츠의 청백당이 박빙의 대결을 벌일 전망이다. 하지만 선거 승리와 별개로 연정의 키는 리에베르만이 쥐고 있다. 그는 네타냐후와 베니간츠 사이에서 세속적인 통합정부를 주장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네타냐후는 “그의 목적은 나를 공직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AP통신은 네타냐후 발언 이후 실제로 그렇게 되길 바라는 유권자들이 리에베르만에게 몰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이해영의 쿠이 보노] 에하라와 에키타이

    [이해영의 쿠이 보노] 에하라와 에키타이

    도쿄생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ㆍ1896~1969)와 평양생 에키타이 안(한국명 안익태ㆍ1906~1965). 두 사람의 관계는 어쩌면 근대 이후 한일 관계사의 가장 괴이하고, 희비극적인 한 대목일지 모른다. 꽤 오랫동안 에키타이의 행적을 추적해 온 나는 최근 3건의 원본 문서들과 한 건의 매우 흥미로운 주장을 접할 수 있었다. 이 문서는 미 CIA 문서고에서 기밀 해제된 것들이다. 문서 중 하나는 전쟁 중인 1944년 4월 18일자 ‘터키에서의 일본 첩보·선전활동’에 관한 보고서이고, 다른 하나는 1945년 1월 30일자 ‘스칸디나비아에서의 일본 첩보활동’에 대한 보고서다. 전자는 미 전략첩보국(OSS) 이스탄불지부가, 후자는 영국 정보원이 생산한 것이다. 세 번째 문서는 종전 이후인 1949년 11월 18일자 미 육군 유럽사령부 정보국이 미 합참 정보국장에게 보낸 ‘전시 독일의 외교·군사 정보활동’이라는 보고서다. 그리 보면 마지막 보고서가 가장 정확하고 포괄적인 셈이다. 전시 일본의 재유럽 첩보활동의 본부는 베를린에 있었다. 2차 대전 직후 일본은 처음에는 ‘간첩활동의 수도’라 불리던 포르투갈 리스본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태평양전쟁이 확전되면서 포르투갈의 식민지를 위협하게 되자 마찬가지 중립국인 터키 이스탄불로 이동한다. 하지만 터키마저 연합국으로 기울자 스웨덴의 스톡홀름을 미·영 첩보전의 기지로 활용했다. 일본 첩보활동의 동선을 미국은 매우 촘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 나라의 첩보 라인이 이렇게 ‘탈탈 털리는’ 경우는 드물다. 오직 패전이라는 상황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에하라의 회고에 따르면 에키타이안은 1941년 말부터 1944년 4월까지 자신의 베를린 사저에 기거했다고 했다. 안익태가 나치 독일의 제국음악원 회원증에 기재한 주소지가 바로 이 사저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에하라 고이치는 누구인가? 나와는 다른 시기에 또 다른 이유로 에하라 고이치를 추적한 학자가 있다. 북텍사스대학의 세계적으로 저명한 음악학 교수 팀 잭슨이다. 잭슨 교수는 에하라가 하얼빈 소재 731부대의 20세기 최악의 전쟁범죄와 연루돼 있다고 보고 있다. 나아가 1938년 에하라가 독일로 건너간 뒤 731부대의 생체실험 정보를 독일과 공유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아우슈비츠 등에서의 생체실험과 731부대의 그것은 에하라를 고리로 해서 서로 연결돼 있다는 말이다. 잭슨 교수와 서로 자료를 공유해 온 내 쪽에서도 확인해 본 결과 에하라는 1935~1937년 하얼빈의 총무처장으로 있다가 1937년 7월 1일자로 하얼빈 부시장으로 승진한 뒤 1년 뒤 베를린 주재 만주국공사관 참사관으로 파견됐다. 731부대가 일왕 히로히토의 칙령에 의해 본격적으로 하얼빈으로 확장 이전된 때가 1936년이다. 만주국의 직제는 이른바 일만정위(日滿定位) 원칙 곧 일계(日係)와 만계의 직위가 정해져 있었다. 일본의 괴뢰국이라는 국제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성장, 시장이나 공사 등은 만계에 할당하고 그 아래에 일계를 배치했는데 실세는 당연히 일계였다.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총무청(처) 중심주의를 기본으로 해서 인사ㆍ재정, 특히 모든 기밀업무를 총무(청)처장이 관장했고, 그 배후에는 관동군이 있었다. 그렇게 보면 에하라가 하얼빈 시절 직간접적으로 731부대와 연관됐을 가능성은 아주 농후하다. 위에서 말한 1949년 보고서에 따르면 에하라는 “재독 일본 첩보망의 총책”이었다. 이 진술은 페터 바이라우흐 나치 독일의 SS 해외첩보부(SD) 소련·일본국장에게서 나온 것이다. 독일과 소련은 군사동맹이었지만, 1943년 8월 이후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상호 첩보활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에하라는 1945년 1월의 영국 첩보부 보고서에도 등장한다. 당시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였던 핀란드의 만주국공사관 참사관으로 등록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1949년 보고서만큼 정확한 정보는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영국 첩보원은 그가 일본과 러시아 간 협상을 담당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리고 OSS 이스탄불지부에 따르면 당시 일본은 베를린에서 다양한 직업군에 속한 약 300명의 정보망을 운용하고 있었다. 에하라 고이치는 외교관이라는 합법적 신분으로 위장한 ‘화이트’였다. 그의 집에 주소지를 둔 에키타이 안은 추축국과 나치 점령국을 돌면서 나치와 일제의 전쟁 수행을 음악으로 응원했다. 에키타이 안이 안익태다.
  • 인도 4번째 달착륙국 실패했지만 “90∼95% 임무 목표 달성”

    인도 4번째 달착륙국 실패했지만 “90∼95% 임무 목표 달성”

    인도가 4번째 달착륙국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데 실패했다. 뉴욕타임스 등에 따르면 인도의 무인 달탐사선 찬드라얀 2호는 7일 오전 1시 55분(현지시간) 궤도선에서 분리된 비크람이 프라그얀을 싣고 달 남극 부근에 착륙을 시도하던 중 교신이 두절됐다. 인도우주연구기구(ISRO)는 이날 성명을 통해 “비크람이 지상 2.1㎞ 고도까지는 정상적으로 작동했으나 이후 교신이 끊겼다”고 밝혔다. 찬드라얀 2호는 궤도선과 착륙선인 비크람, 탐사 장비 프라그얀으로 구성됐다. 프라그얀은 달에서 얼음 형태의 물과 미래 에너지원으로 주목받는 헬륨3 등의 자원을 탐사할 예정이었다. 찬드라얀 2호의 비크람이 정상적으로 착륙했더라면 인도는 미국과 옛소련, 중국에 이어 4번째로 달 착륙에 성공한 국가로 기록됐을 것이다. 지난 4월에는 이스라엘이 인도에 앞서 세계 4번째 달착륙국에 도전했지만, 착륙 과정에서 탐사선이 부서지는 바람에 실패했다. 인도는 그러나 찬드라얀 2호가 4번째 달착륙국이 오르겠다는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임무 목표의 90∼95%를 달성됐다고 밝혔다. ISRO 측은 “성공 기준은 단계별로 설정돼 있다. 현재까지 임무 목표의 90∼95%가 달성됐다”며 “착륙선과의 교신이 끊겼음에도 불구하고 (찬드라얀 2호는) 계속해서 달 과학에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찬드라얀 2호의 궤도선이 정상 위치를 돌고 있고, 이 궤도선에는 역대 달 탐사선 중 최고 해상도의 카메라(0.3m)가 장착돼 있어 세계 과학계에 매우 유용한 고해상도 이미지를 제공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궤도선은 1년간 달 궤도를 돌면서 표면 촬영, 대기 연구 등 임무를 수행한다. K 시반 ISRO 소장은 “비크람과 접촉하려는 노력은 앞으로 14일 동안 계속될 것”이라고 말혔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도 이날 과학자들을 위로하는 한편 TV 연설을 통해 “(달착륙에) 가까이 왔다. 흔들리지 말고 앞을 내다보자”고 말했다. 찬드라얀 2호에 투입된 비용은 97억 8000만 루피(약 1670억원)로 알려져 있다. 할리우드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제작비인 3억 5000만 달러(약 4181억원)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인도 달 착륙 실패한 듯, 영화 ‘어벤저스’ 절반도 안되는 제작비 탓?

    인도 달 착륙 실패한 듯, 영화 ‘어벤저스’ 절반도 안되는 제작비 탓?

    인도의 두 번째 무인 달 탐사선 찬드라얀 2호의 달 착륙 시도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NDTV 등 현지 매체는 7일 오전 1시 55분(현지시간) 찬드라얀 2호 본체 궤도선에서 분리된 착륙선 비크람이 달 남극 부근에 착륙할 예정이었으나 2.1㎞ 상공에서 교신이 두절됐다고 전했다. 인도우주연구기구(ISRO)의 K 시반 소장은 “비크람의 하강은 예정대로 진행됐으나 착륙 직전 교신이 끊어졌다”며 “관련 데이터를 분석 중”이라고 밝혔다. 남부 도시 방갈로르의 ISRO 통제센터에서 지휘하던 시반 소장은 착륙 예정 시간 이후에도 비크람과 교신이 이뤄지지 않자 근처에 있던 나렌드라 모디 총리에게 다가가 상황을 설명했다. 모디 총리는 굳은 표정으로 시바 소장의 설명을 들었고 잠시 후 통제센터를 떠났다. 다만 곧이어 트위터를 통해 “인도는 우리 과학자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며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고 격려했다. 이어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갖고 있고 우리의 우주 프로그램을 위해 계속 열심히 노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로써 미국, 옛 소련, 중국에 이어 네 번째로 달 착륙 국가가 되면서 세계 최초로 달 남극에 탐사선을 착륙시키려던 인도의 시도는 물거품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찬드라얀 2호는 지난 7월 22일 인도 동부 안드라 프라데시주의 사티시 다완 우주센터에서 로켓 GSLV Mk-3에 실려 발사됐다. 찬드라얀 2호는 발사 후 15분 정도 지나 지구 궤도에 진입했다. 이어 모두 열다섯 차례 고도를 높이면서 속도를 올렸고 지난달 20일 달 궤도에 들어섰다. 찬드라얀 2호는 특히 저렴한 개발비용으로 주목받았다. 97억 8000만루피(약 1670억원)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할리우드 영화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제작비 3억 5000만달러(약 4190억원)의 절반도 안 되는 돈으로 달 착륙 미션에 도전했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인도는 2008년에도 달 탐사선 찬드라얀 1호를 띄워 착륙 시도를 하지 않고 ‘달 충돌 탐사기(MIP)’만으로 달 표면 정보를 수집해 달에 물과 얼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내 우주항공 기술을 과시했다. 2014년에는 자체 제작한 화성 탐사선 망갈리안을 화성 궤도에 진입시키기도 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소련 비밀 품은 2000㎞ 러시아판 ‘카타콤’

    소련 비밀 품은 2000㎞ 러시아판 ‘카타콤’

    이탈리아 로마와 프랑스 파리에 있는 지하 무덤 ‘카타콤베’의 구간 길이는 각각 300㎞, 500㎞에 달한다. 서울과 부산 시청 사이의 직선거리가 약 325㎞라는 걸 생각하면 엄청난 규모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오데사엔 러시아의 비밀스러운 과거를 품은 2000㎞ 규모의 지하도시가 있다. 5일(현지시간) CNN은 세계에서 가장 큰 오데사의 지하 미로를 조명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 지하도시는 출입구만 1000개에 달할 정도로 넓고 복잡하다. 관광지이면서도 ‘자격이 있는 가이드의 동행 없이는 입장하지 말라’는 경고 문구가 있다. 이 러시아판 카타콤이 로마와 파리의 카타콤베와 가장 다른 점은 죽은 사람을 묻는 데에 사용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 지하도시는 18세기말 오데사가 생길 당시부터 형성되기 시작했고, 세 개 층에 걸쳐 확산됐다. 시작은 채석장이었다. 오데사가 1819년~1859년 거대한 성장을 경험하며 지상엔 높고 훌륭한 저택이나 궁전의 수요가 늘어났다. 훌륭한 건물을 짓기 위해선 훌륭한 석재가 필요했고, 오데사는 땅을 파 나가기 시작했다. 궁전의 수만큼 많은 채석장이 지하에 생겨났다. 석재 때문에 파기 시작한 땅굴은 이후 러시아의 역사적 흐름에 따라 도시가 되고 방공호가 되기도 했다. 지하 도시를 체험한 CNN 취재진은 내부 온도가 13도에 불과해 추웠으며 냉전시대 핵 벙커, 대피소 등이 처음 눈에 들어왔다고 썼다. 벙커 안 공기는 퀴퀴했으며, 녹슨 소련 시대의 장비과 전선 조각, 엔진실 등이 있었다고 밝혔다. 채석장 지역엔 벽면에 석탄 그림이 새겨져 있고 비문이나 상징, 그림 등이 있었다고 전했다. 벽엔 그림을 설명하는 날짜, 방향, 욕설 등이 있었다. 오데사 카타콤에선 2차 세계대전 당시 사상자로 추정되는 부패한 시신이 발견된 적도 있다. 당시 동료와 함께 시신을 발견한 뎀비츠키는 유골을 가방에 넣어 경찰에 가져갔다. 하지만 경찰은 발견 지역이 2차 세계대전 박물관의 관할구역이라는 이유로 시신 인수를 거부했다. 뎀비츠키에 따르면, 박물관 역시 시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그는 “카프카적인 방식으로 가이드가 시신을 자동차 트렁크에 싣고 시내를 돌아다닌 끝에 검찰이 인수했다”고 말했다. 또다른 이야기는 소련 비밀 경찰 기관인 NKVD에 관한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소비에트 연방(소련)에 속했던 2차 세계대전 당시, NKVD 요원 32명은 1941년 오데사를 점령하고 있던 나치의 루마니아 동맹을 무너뜨리라는 지령을 받고 이 카타콤에 투입됐다. 수년 동안 국가기록 보관소에 잠자고 있다가 최근 대중에게 공개된 바에 따르면 이들 중 바깥에 나와 햇빛을 본 요원은 단 한 명 뿐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각각 오데사와 모스크바 출신의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경쟁적인 이들 그룹 사이의 긴장감은 끝내 연쇄적인 배신과 총격으로 이어졌다. 많은 구성원들이 처형됐으며, 나머지는 병으로 죽었다. 결국 1943년엔 각 그룹 지도자들만 남았는데, 오데사 그룹의 지도자가 모스크바 지도자에게 치명적인 총격을 가한 뒤 9개월 동안 혼자 땅굴에서 살았다. 하지만 그는 땅 위로 올라왔다 1944년 다시 땅굴로 보내졌고 수류탄 폭발로 숨졌다. CNN에 따르면 아직도 지하 도시의 많은 구간들이 미개척 상태로 남아있다. 공개 일정이 끝날 때쯤 뎀비츠키는 투어가 전체 구간의 1%도 안 되는 약 3㎞만을 지난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공개된 지역에선 채석장 시절부터 러시아제국, 소련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전시돼 있다고 보도는 전했다. 이 카타콤에서 가이드 역할을 하며 50년 이상 연구한 리오니드 애슐렌코는 책 출판을 준비하고 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모스크바 국제도서전에 한국관 설치

    모스크바 국제도서전에 한국관 설치

    2019 모스크바 국제도서전에 한국관이 설치됐다. 대한출판문화협회는 지난 4일(현지시간) 개막해 오는 8일까지 러시아 모스크바 VDNH 전시장에서 열리는 ‘2019 모스크바 국제도서전’에 한국관을 운영 중이라고 6일 밝혔다. 모스크바 국제도서전은 러시아 및 구소련 독립국가연합(CIS) 지역 최대 규모 도서전이다. 35개국 600여개 회사가 참가하며 10만여명의 관람객이 찾는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출판문화협회가 운영하는 올해 한국관에는 교문사, 김영사, 문학동네, 사계절출판사, 시공사, 은행나무 등 17개사의 출판사가 위탁한 77종의 도서가 전시된다. 이와 함께 ‘일상의 아름다움’이란 제목의 특별전을 통해 27종 그림책을 선보인다. 한국문학번역원 지원으로 러시아에서 번역 출간된 한국도서 70종도 소개된다. 한국-러시아 수교 30주년인 내년에 한국이 모스크바 국제도서전 주빈국이 되고, 러시아는 서울 국제도서전 주빈국이 된다. 출판문화협회는 모스크바 국제도서전 이후 오는 26일 개막하는 예테보리 도서전에서 주빈국관을, 새달 16일 개막하는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한국관을 운영한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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