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소련
    2026-08-06
    검색기록 지우기
  • 제나
    2026-08-06
    검색기록 지우기
  • 리아
    2026-08-06
    검색기록 지우기
  • 하천
    2026-08-06
    검색기록 지우기
  • 전사
    2026-08-06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6,224
  • ‘푸틴의 셰프’ 프리고진, 아프리카 ‘용병 사업‘으로 채굴권 따내

    ‘푸틴의 셰프’ 프리고진, 아프리카 ‘용병 사업‘으로 채굴권 따내

    러시아의 신흥 올리가르흐(재벌) 예브게니 프리고진(58)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권위를 등에 업고 축재해 ‘푸틴의 셰프’란 별명으로 통한다. 1990년대 케이터링 사업을 시작해 부를 쌓기 시작했고 2001년 푸틴의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뉴아일랜드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서빙하는 모습 때문에 앞의 별명이 붙여졌다. 그 뒤 푸틴과 각국 정상의 만찬 때 서빙하는 모습을 비치더니 이너 서클에 가세해 영향력을 등에 업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문어발식 확장에다 해외 페이퍼기업들, 호화판 제트여객기와 요트를 굴리는 등 전형적인 올리가르흐 행태를 보였다. 지난 9월 30일 미국 재무부는 2016년 대통령 선거와 지난해 중간선거 때 그와 그의 사업체가 영향력을 행사했거나 행사하려 했다며 제재 명단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더욱 문제는 많은 서구 언론과 싱크탱크들이 그가 바르네르(또는 바그너)라 불리는 용병 기업을 운영하며 우크라이나 동부, 시리아와 리비아, 아프리카 사하라 남부의 분쟁 지역에서 러시아의 이익을 앞장 서 관철시킨다는 점이다. 물론 그는 부인하지만 그의 사업 정체는 물론 개인의 족적 자체가 미심쩍기만 하다고 영국 BBC가 3일 전했다. 프리고진은 원래 오제로(Ozero)로 불리는 다차(시골 별장) 클럽이 주축을 이룬 푸틴의 이너 서클 멤버가 아니었다. 20대에는 핫도그를 팔았고 케이터링 업자로 성공했지만 강도와 사기 등의 혐의로 9년 동안 교도소를 들락거렸다. 1990년대 자본주의의 ‘충격요법’은 범죄자들에게 많은 사업 기회를 줬고, 라이벌들을 거꾸러뜨리기 위해 서로를 친구로 의지하게 만들었다. 프리고진은 2011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신문과 인터뷰를 통해 적들에 맞서 국왕을 지키는 기사의 동화를 들려주며 푸틴을 옹위해야 하는 사명을 띠고 있다는 식으로 묘사했다. 그는 ‘상트의 가짜 공장’이라고 불린 악명 높은 인터넷 연구 기관(IRA)을 세워 가짜 인터넷 계정을 만든 뒤 2016년 미국 대선과 관련한 가짜 뉴스를 만들어 사방에 뿌려댔다. 물론 운영 자금은 자신의 케이터링 사업체 콩코드 케이터링에서 조달한 것으로 미국 정부는 보고 있다. 석 대의 제트기, 한 척의 럭셔리 요트, 세이셸 제도와 케이만 제도의 조세 피난처를 이용한 페이퍼 컴퍼니 등이 제재 대상이 됐다. 이 제트기들이 빈번히 여행한 곳이 아프리카와 중동이었다. 콩코드 케이터링은 모스크바의 여러 학교에 급식을 공급하다 지난해 12월 130명의 유치원 아이들이 식중독에 걸려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스탠퍼드 대학의 페이스북 연구자 등은 아프리카 소셜미디어의 여론 조작에 프리고진이 깊이 연루된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달 30일 페북은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일들에 영향력을 행사한 러시아의 인터넷 계정 네트워크 세 군데를 정지시켰다. 첫 네트워크는 마다가스카르, 중앙아프리카공화국(CAR), 모잠비크, 콩고민주공화국, 코트디부아르와 카메룬이었고, 두 번째는 수단, 세 번째는 리비아를 겨냥한 것이었다. BBC 탐사보도팀은 지난해 마다가스카르 대선에 출마한 6명의 후보가 러시아의 뒷돈을 챙긴 것으로 파악했다. 1년 전 러시아는 CAR에 교관만 175명을 파견했는데 바르네르 그룹이 이 나라에서 암약하며 금과 다이아몬드 채굴권을 따냈다. 이들 광산과 용병 그룹의 관계를 취재하던 러시아 기자 셋이 총격 살해됐는데도 누구도 기소되지 않았다. 미국 CNN은 또 한 명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기업인이며 프리고진과도 막역한 예브게니 코도토프가 이끄는 로바예 인베스트가 맺은 채굴권 계약이 실은 프리고진이 주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달 푸틴 대통령이 흑해 연안 소치로 43명의 아프리카 정상들을 초대한 것도 옛 소련 시절을 재현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프리고진이 하는 사업이 푸틴의 야망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도 흥미롭다. 프리고진은 또 러시아 국방부와 군 부대 케이터링 납품 계약을 맺었고 가장 최근에는 크렘린의 미디어 그룹 패트리어트 프로젝트를 주관하고 있다. 이 그룹은 “이 나라에서 일어나는 좋은 일에는 도통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반러시아” 매체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상트의 RIA FAN 통신사, Narodnye Novosti, Ekonomika Segodnya, Politika Segodnya 등 네 군데 매체를 통합했다. 이들이 포괄하던 수용자들을 합치니 관영 타스 통신이나 친크렘린 성향의 RT 방송이 거느린 독자, 시청자를 간단히 앞질렀다고 방송은 전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어느덧 88 고르바초프 “지금 총체적 위기, 모든 나라가 핵 폐기 선언해야”

    어느덧 88 고르바초프 “지금 총체적 위기, 모든 나라가 핵 폐기 선언해야”

    미하일 고르바초프(88)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현재의 세계가 “총체적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말했다.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서기장으로 일하며 페레스트로이카 기치를 내걸어 독일 통일은 물론, 소련 해체를 불러오고 동서 간의 긴장을 녹이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고르바초프는 4일 공개된 영국 BBC 스티브 로젠버그 기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모든 나라들이 핵무기를 폐기하겠다고 선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순을 앞에 둔 그는 “그래야 우리 스스로는 물론 이 행성을 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건강이 썩 좋지 않은 듯 의자에 앉는 데도 한참이 걸렸고, 카메라를 향해 “벌써 찍고 있는 거냐”고 묻기도 했다. 로젠버그 기자는 영어로 물었고, 고르바초프는 러시아어로 답했지만 영어 자막이 달려 있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는 베를린 장벽 붕괴 당시를 돌아보며 “38만명의 소련 군인들이 동독에 주둔해 있었지만 군병력 이동 명령은 없었다. (통일이라는) 매우 복잡한 과정이 유혈사태 없이 지나갔고 이에 대해 내가 공헌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로젠버그가 브렉시티(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혼란을 막는 해법을 조언해달라고 주문하자 “똑똑한 영국인들이 알아서 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앞서 오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 30주년을 앞두고 지난달 31일 로이터 통신에 기고문을 보내 엄중한 동서 관계에 대해 우려하며 특히 핵무기와 관련해 미국과 러시아의 대화가 부족하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특히 지난 8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987년 체결된 ‘중거리핵전략(INF) 조약’에서 탈퇴한 것에 대해 “위대한 마음( great mind)에서 나온 결과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1987년 12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함께 INF조약을 체결해 냉전 종식을 이끌었다. INF 조약은 사거리 500~5500㎞의 지상 발사형 미사일의 생산·시험·배치를 전면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고르바초프는 현재 미국의 외교정책에 대해서도 동-서(East-West) 차이를 공식화한 베를린 장벽과 같은 냉전 스타일로 실재하는,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을 세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장벽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문제를 감추기 위한 시도이고 그래서 나는 장벽에 반대한다. 유럽에서 어떤 철의 장막도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금의 상황이 위험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냉전이 다시 발생했다고 보지 않는다”며 “현재 러시아와 서방 사이에 이데올로기 투쟁이 없고 경제적인 연결고리와 문화적 융합이 있다”고 평가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조종석에 女승객 태우고 여객기 조종간 맡긴 러 조종사

    조종석에 女승객 태우고 여객기 조종간 맡긴 러 조종사

    러시아의 한 여객기 조종사가 여성 승객을 조종석에 태운 것도 모자라, 조종간을 맡긴 사실이 드러나 파문이 일고 있다. 시베리안타임스는 2일(현지시간) 러시아 이르아에로 소속 조종사가 규정을 어기고 조종석에 승객을 출입시킨 것이 뒤늦게 알려져 조사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사건은 지난 8월 31일 러시아 사하공화국 수도 야쿠츠크에서 바타가이로 향하던 이르아에로 소속 여객기에서 벌어졌다.이날 비행을 맡은 조종사는 부조종석에 여성 승객 한 명을 앉혔다. 이 여성은 조종사의 지시대로 조종간을 조금씩 움직였으며, 조종사는 이 모습을 촬영해주었다. 해당 사실은 여성 승객이 최근 자신의 SNS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멋졌다. 고맙다”는 글과 함께 자랑하듯 영상을 공유하면서 알려졌다. 영상이 공개되자 곳곳에서는 승객의 목숨을 담보로 장난을 쳤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게다가 해당 여객기가 1960년 제작된 노후 기종인 것이 알려지면서 논란은 더욱 거세졌다. 사건이 발생한 여객기는 구소련의 안토노프사가 제작한 AN-24 기종으로 2000년대 초반 잇따라 발생한 추락 사고의 사고기다.2004년 1월 37명의 사망자를 낸 우즈베키스탄 추락사고와 2005년 7월 탑승자 60명이 전원 사망한 적도기니 바니 추락사고의 여객기가 모두 AN-24 기종이었다. 2007년 6월 발생한 캄보디아 추락 사고 여객기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16명의 승객 중 13명은 한국인이었으며, 탑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러시아 5TV채널은 20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안나라는 이름의 이 여성 승객이 조종사의 여자친구 혹은 친한 친구인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또 당시 여객기에 몇 명이 타고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탑승객이 최대 50명 정도였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파문이 일자 이르아에로 측은 문제를 일으킨 조종사 키릴 에스를 상대로 대대적인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여성 승객이 SNS에 올린 게시글은 삭제된 상태다. 권윤희 기자 heeya@seoul.co.kr
  • 1973년 중국외교 전담 조직 창설...독자 대중외교 본격화

    1973년 중국외교 전담 조직 창설...독자 대중외교 본격화

    올해는 중화인민공화국(신중국) 건국 70주년과 한중 수교 27주년이다. 두 나라는 한국전쟁(1950~1953) 때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등 수십년간 적대 관계를 유지하다가 1992년 수교한 뒤로 세계 외교가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비약적으로 교류 발전했다. 하지만 2016년 한반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로 갈등을 빚은 뒤로 ‘빙하기’를 맞고 있다. 반면 지속적으로 악화일로를 걷던 북중 관계는 지난해 북미 핵협상 재개를 계기로 서로의 전략적 가치를 인정하고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 중국을 둘러싼 한반도 주변 정세가 ‘역사적 변곡점‘을 지나고 있다. 이에 1970년대 미중 화해를 시작으로 20여년 뒤 한중수교가 이뤄지기까지 우리나라와 중국이 어떤 진통을 겪었는지 살펴보고 두 나라 관계의 미래도 함께 전망해보고자 한다. 전·현직 중국 주재 외교관·특파원 등이 만든 계간지 ‘한중저널’ 창간호(9월)의 내용을 중심으로 여러 문헌·자료를 요약 정리했다. ●1970년대 미중 화해로 데탕트 시대 돌입 1960년대 말 전 세계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의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가운데 공산권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프라하의 봄’(민주화 운동)과 이를 막으려는 소련의 ‘브레즈네프 독트린’(사회주의 수호를 위해 다른 나라 내정에 간섭하겠다는 주장), 1969년 중소 국경분쟁(아무르 강 유역 영유권을 두고 두 나라가 벌인 전쟁) 등으로 사분오열했다. 자유주의 국가들도 1969년 미국의 ‘닉슨 독트린’(각국의 안보는 미국 개입 없이 알아서 해결하라는 주장) 천명으로 위기감이 감돌았다. 진영에 관계없이 말 그대로 ‘각자도생’의 시대가 왔다.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중국 간 화해 분위기가 싹텄다. 소련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때부터 ‘제3세계론’(미국과 소련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세력을 키우자는 주장)을 역설한 마오쩌둥(1893~1976)은 중소 국경분쟁 당시 소련의 군사력을 실감하고 두려워했다. 리처드 닉슨(1913~1994) 미 대통령 역시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소련의 팽창을 봉쇄할 필요를 느꼈다. 미중 모두에게 ‘적의 적은 동지’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가 1800년 가까이 지나 다시 한 번 국제정치 무대에서 구현됐다. 1971년 중국이 미국 탁구 대표팀에게 초청장을 보내 ‘핑퐁 외교’의 물꼬를 텄다. 같은 해 7월 헨리 키신저 국가안보보좌관은 아시아 국가 순방 중 몸에 탈이 났다며 잠적한 뒤 극비리에 중국 베이징을 찾아가 저우언라이 총리와 비밀회담을 가졌다. 10월 중국은 미국의 도움으로 유엔에 공식 가입하고 대만의 상임이사국 자리도 이어받았다.이듬해 2월 닉슨은 미 대통령 최초로 중국을 방문했다. 국교도 맺지 않은 상태였지만 두 나라 정상은 환하게 웃으며 악수했다. 데탕트 시대의 막이 열렸다. 닉슨은 ‘골수 반공주의자’였지만 중국 문제만큼은 적극적으로 관계 개선을 추구했다. 과거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 미 외교전문 매체 ‘포린어페어’에 기고한 글에는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고 영토도 큰 나라(중국)를 마치 지구에 없는 듯 지내는 것은 바람직한 외교가 아니다”라고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북관계도 미중관계 반영…한국도 사회주의 국가와 교류 나서 미중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자 남북 관계도 변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은 1970년 전태일 분신 사건 등으로 제3공화국의 정치적 정당성이 도전받았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북한도 중소 국경분쟁 등 공산진영의 분열을 지켜보며 독자적인 생존 노선을 찾았다. 북한이 먼저 남북회담을 원했고 우리 정부도 이에 화답해 1971년 9월 비밀리에 남북 적십자 회담이 열렸다. 이후 양측이 합의한 내용을 정리해 통일 원칙 등을 담아 성명을 발표하는데, 이것이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이었다. 이때 만들어진 기본 정신은 2000년대에 들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남북 정상 회담에서도 부각됐다.그간 남북 사이에는 1968년 ‘1·21 사태’(북한군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려던 사건) 등 특수부대를 보내 상대를 타격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하지만 7·4 선언을 계기로 무장도발을 자제하기로 해 남북관계도 잠시나마 ‘봄날’을 맞았다. 박정희 대통령도 “사회주의 국가와 교류에 나서겠다”고 밝히며 외교적 외연 확장 의지를 드러냈다. 곧바로 이듬해인 1973년 우리나라 외교부에 중국을 전담할 ‘동북아2과’가 만들어졌다. 이곳은 훗날 한중수교의 산실이 된다. ●韓, 미국에 대한 서운함·중국에 대한 기대감 속 외교부 내 중국 전담 조직 마련 당시 박정희 정부는 미중 수교 당시 한국을 무시하는 듯한 미국의 태도에 반감이 컸다. 미 조지워싱턴대 자료에 따르면 1971년 10월 열린 키신저와 저우언라이 간 두 번째 비밀회담 때 저우 총리는 키신저에게 김일성 북한 주석이 작성한 8개항의 메모를 전달했다. ‘미중 수교 때 자신들의 입장을 반영해 달라’는 요구다. 중국은 비밀회담이었음에도 혈맹인 북한에 이를 통보하고 상의했다. 저우 총리는 회담 직후에도 평양을 찾아가 김 주석에게 회담 내용을 설명했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 정부에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다. 미중 관계 개선이라는 큰 그림만 살피다보니 남한이 느낄 소외감은 신경쓰지 않았다. 우리로서는 이런 미국의 태도가 섭섭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반영하듯 당시 조선일보에는 박 대통령이 초조하게 청와대 경내를 오가며 “미국과 중국 사이에 분명히 뭔가 진행되고 있는데…”라고 토로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나온다. 미국은 1972년 말에 가서야 국무부 아시아태평양 차관보를 서울로 보내 정보를 공유했다. 우리 정부의 서운함을 달래기에는 늦은 감이 있었다. 외교부가 동북아2과를 창설할 때에는 당시 미국에 대한 불만과 국제무대에 새로 등장한 중국에 대한 기대감 등이 복합적으로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4차 산업혁명시대 도서관, 정보생산 플랫폼으로 탈바꿈해야”

    “4차 산업혁명시대 도서관, 정보생산 플랫폼으로 탈바꿈해야”

    정보기술(IT) 업계의 대부 빌 게이츠는 “오늘의 나를 만든 건 마을 작은 도서관이었다”고 말했다. 지식의 보고인 도서관은 시대를 막론하고 소중한 인류의 자원이다. 하지만 한국인의 공공도서관 이용률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자료에 따르면 성인의 공공도서관 이용률은 2013년 30.3%, 2015년 28.2%, 2017년 22.2%로 하락 추세다. 도서관의 위기라 할 만하다. 국립중앙도서관은 국가대표 도서관이자 ‘도서관의 도서관’으로 불린다. 변화와 도전에 직면한 국립중앙도서관의 첫 개방형 수장으로 서혜란(64) 관장이 취임한 지 31일로 꼭 두 달이 됐다. 사서로 일했고, 34년간 대학 강단에 서는 등 현장과 정책에 두루 능한 대표적 전문가인 서 관장에게 도서관의 현재와 미래를 물었다.-첫 전문가 국립중앙도서관장이다. 밖에서 보던 것과 비교해 어떤가. “학자 입장에서 그간 굉장히 비판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 왔다. 막상 안에서 일해 보니 새로운 시각으로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가령 시대적 흐름에 맞춰 왜 빨리 변화하지 못할까 답답했는데, 효율적이지 못한 조직 관리와 인력 운용 등 구조적인 장애물이 적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됐다. 해결이 쉽지 않지만, 국립중앙도서관의 위상 제고를 위한 근본적 문제인 만큼 최선을 다해 바꿔 보려고 한다. 외부에서 바라보던 비판적 시각을 잃지 않으면서 내부의 시각을 조화시켜 발전 방향을 모색하겠다.” -임기(3년) 내 가장 주안점을 두는 것은 무엇인가. “국가대표 도서관으로서 가장 큰 임무는 국가 문헌의 수집과 보존이다. 1945년 28만권의 장서로 출발해 현재 1240만권의 오프라인 자료, 1600만건의 온라인 자료를 소장하고 있지만 갈 길이 멀다. 1965년부터 납본 제도를 통해 모든 출판물의 수집을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으나 아직 100% 이뤄지는 건 아니다. 2016년에 납본이 법제화된 전자책과 전자저널 등 온라인 자료 수집은 이제 걸음마 단계다. ●美 등 선진국보다 인력·예산 지원 부족 핵심은 1965년 이전 근현대 자료와 고문헌 수집이다. 1910년 이전 자료를 고문헌으로 규정하는데, 현재 보유한 고문헌 장서는 28만권이다. 한국국학진흥원 51만권, 서울대 규장각 25만권인 점을 감안하면 부족한 측면이 있다. 1911~1965년 출판된 근현대 자료들도 많이 빠져 있다. 해외에 흩어져 있는 한국 관련 자료들을 적극적으로 수집해야 한다. 한국 자료 소장 현황을 파악해 보니 14개국 130여개 기관으로 집계됐다. 우선 미국 국가기록원 소장본을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이어 중국과 일본·러시아 등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원본을 달라고 할 순 없고, 디지털로 복제해 누구든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 -4차 산업혁명시대에 디지털 자료의 체계적 구축이 매우 중요할 것 같다. “국립중앙도서관은 1995년부터 소장 자료의 디지털화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왔다. 디지털화 사업은 국가 문헌의 영구 보존과 정보의 적극적 활용을 통한 지식 창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 위한 핵심 전략이다. 단순히 스캐닝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자료 검색 기능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예산과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현재 원문 데이터베이스(DB) 구축 비율이 27%에 그치고 있다. 단행본뿐 아니라 악보, 도록, 비매품 자료 등을 망라해 디지털화 사업을 확대 추진할 계획이다. 기존 디지털 자료의 보존도 중요하다. 우리나라가 세계 첫 5G 서비스를 상용화하는 등 IT 강국이라지만 디지털 자료 구축과 보존 등 기초적인 연구와 투자가 많이 부족하다. -국가문헌보존관 건립은 어떻게 추진되고 있나. “서고의 수장 비율이 84%에 달해 2023년이면 포화 상태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별도의 국가문헌보존관 건립이 시급하다. 평창동계올림픽 때 국제방송센터로 쓰였던 유휴 건물을 리모델링해 최소한의 비용으로 국가문헌보존관을 짓기로 올 초에 결정하고, 기획재정부에 예비타당성 심사를 신청한 상태다. 최적의 시설과 환경을 갖춰 아날로그 자료와 디지털 자원의 보존에 힘쓰겠다. -공공도서관 이용률이 감소하고 있다. “도서관의 전통적인 역할은 정보 생산자와 이용자를 단순히 매개하는 통로였다. 이제는 정보기술 환경의 변화로 생산자와 이용자의 경계가 깨졌다. 이용자의 기호에 맞춰 도서관이 변하지 않는다면 찾는 발길은 당연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도서관이 스스로 정보생산 플랫폼으로 바뀌어야 한다. 생산자와 이용자, 이용자와 이용자들이 서로 소통하는 커뮤니티 공간으로서의 새로운 역할이 필요하다. -국립중앙도서관은 어떤 변화를 모색하고 있나. “우선은 디지털도서관을 중심으로 다양한 시도를 해 보려고 한다. 이용자들이 컴퓨터에서 콘텐츠를 열람하는 수준을 벗어나서 1인 미디어나 유튜버 등 예비 창업자를 위한 소규모 스튜디오를 10여개 만드는 리모델링 공사를 진행 중이다. 지난 9월 서울 서초구 역삼동에 있는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 1층에 창작공간을 시범적으로 열었다. 인공지능(AI), 증강현실(AR), 코딩 같은 정보기술을 체험하고,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가 개발한 프로그램을 전국 도서관에 보급해 정보생산 플랫폼으로 거듭날 수 있게 돕는 역할을 하겠다. 또한 빅데이터를 활용한 이용자 맞춤형 추천 정보 서비스 등도 고민하고 있다. 도서관이 정적인 공간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이용자를 찾아가는 동적인 기관으로 변모해야 한다. -국가대표 도서관으로서 사서 교육과 연구 기능도 중요한데. “전국의 사서 교육과 역량 강화를 담당하는 임무가 있지만, 현실적 여건이 쉽지 않다. 자체 교수 인력이 없어서 외부 강사를 초빙하는 형편이다. 전담 연구 인력도 없다. 앞으로 교육과 연구 기능을 확대해 온라인 교육 강화와 양질의 콘텐츠 제공 등을 통해 전국 도서관의 사서 역량을 키우는 데 매진하겠다. -해외 국립도서관은 어떤가. “미국은 의회도서관이 국립도서관 역할을 한다. 직원이 3000명으로 우리 도서관의 10배다. 인력도 풍부하고, 예산 규모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난다. 지식기반사회에서 도서관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고 해도 아직은 선진국에 비해 지원이 부족하다. ●“도서관 서비스 격차 줄이는 데 힘쓸 것” -국가의 도서관 정책이 왜 중요한가. “정책 결정자들이 4차 산업혁명시대에 창의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도 막상 기본에는 소홀한 것 같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는 크게 성장했지만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한다. 1957년 미국이 ‘스푸트니크 쇼크’를 겪고 나서 펼쳤던 정책 가운데 도서관진흥법이 있었다. 소련이 자국보다 먼저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한 뼈아픈 실패를 다시 경험하지 않기 위해 도서관 지원책을 생각한 발상이 놀라웠다. 독서와 도서관은 창의력을 키우는 기본 인프라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교수로 재직하면서 8년간 대학도서관장을 지냈다. 대학의 위기를 가장 체감하는 곳이 도서관이다. 예산과 인력이 제일 먼저 감축되기 때문이다. 대학의 가치는 교육과 연구에 있는데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이 국가대표 도서관으로서 대학도서관과 협력할 수있는 방안을 찾아보려고 한다. 모든 국민이 차별 없이 정보를 이용할 수 있도록 지역별, 소속 기관별 도서관 서비스의 격차를 줄이는 데도 힘쓰겠다. coral@seoul.co.kr ■서혜란 관장은 ▲연세대 문헌정보학 석·박사 ▲신라대 문헌정보학과 교수(1985~2019) ▲대통령 소속 정보공개위원회 위원(2004~2008) ▲한국기록관리학회 회장(2013~2014) ▲한국도서관협회 부회장(2015~2017) ▲대통령 소속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6기 위원(2018~2019)
  • [글로벌 In&Out] 74년 전 ‘조선노동당 창건대회’의 진상/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글로벌 In&Out] 74년 전 ‘조선노동당 창건대회’의 진상/바실리 V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지난 10일 북한은 조선노동당 창건 74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행사를 진행했다. 이 공휴일은 1945년 10월 10에 열린 조선공산당 북조선 5도당원 및 열성자대회를 기념하는 날이다. 이 대회에서 북한 조선노동당의 전신인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창설됐다. 김일성이 정식으로 북한 정계에 진출했다고 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다. 조선노동당의 창건일이 10월 10일이라는 것은 북한 역사가들이 오랫동안 주장해 온 것이다. 일찍이 1964년에 출판된 북한 당사 교재는 북한 노동당 창당 대회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1945년 10월 10일부터 10월 13일에 걸쳐 조선공산당 북조선 조직위원회 창설을 위한 북조선 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대회가 소집되었다. 대회는 당 조직 문제에 관한 김일성 동지의 보고를 청취하고 조선공산당 북조선 조직위원회 창설에 대한 방침을 지지찬동하였다.” 또 김일성도 박헌영 같은 ‘우경항복주의자’들을 비판했다고 한다. 이런 주장을 세계 북한 전문가들이 받아들인다. 위키백과나 심지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에도 조선노동당의 창건일이 10월 10일로 표기됐다. 하지만 1990년대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면서 조선노동당 창건일의 정확한 날짜와 그 진상이 밝혀졌다. 그 대회와 관련해 가장 기본적인 자료는 1945년 11월 5일 작성된 소련군 연해주군관구 정치부의 정보 요약이라는 문서다. 이 문서는 비교적 길지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945년 10월 13일 평양시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 5도당 대회가 열렸으며 69명의 대표가 참석했다. 대회에서는 네우메이코프 소련군 대위의 ‘국제정세’, 오기섭의 ‘당과 공산주의자들의 임무’, 김일성의 ‘조직문제’, 김용범의 ‘지방위원회와 당 사업의 강화’, ‘북조선공산당 조직국 선거’ 등이 보고됐다. 상임위원회에서는 김일성과 오기섭 등 9명이 선출됐으며,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명예위원으로 뽑혔다. 회의가 열리면서 먼저 조선공산당 서기장인 박헌영에게 인사를 보냈다. 오기섭은 조선 해방에서 소련군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조선이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 단계에 있으며, 당면 과제는 통일된 공화국을 창건하는 것이라고 했다. 오기섭은 조선이 사회주의 혁명의 단계로 넘어갔다는 좌경과 조선이 미국에 의해 해방됐다는 우경을 비판했고, 좌경이 가장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그다음으로 김일성이 보고했다. 김일성은 반일통일전선의 창설, 독립적인 조선의 창건, 혁명적 이론 공부 등을 노동자들에게 선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새로운 정부에는 노동자에서 자본가까지 각 계급의 대표자들이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또 김일성은 “현재 서울에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있다. 박헌영 동지는 당내의 분파주의를 극복하고 공산당을 바른길로 지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오기섭처럼 좌우경 분자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조선에서 계급투쟁을 진행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영 등 좌경 분자들’을 “일제의 앞잡이”라고 비난했다. 김일성은 북조선 모든 당조직 위원회의 선거 진행, 당규약 채택, 당증 제작, 북조선 전역 당대회 소집 등을 제안했다. 김일성의 제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마지막으로 보고한 김용범은 토지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소련군이 10월 11일 발표한 북한의 무장조직 해산 명령에 따라 공산당 적위대라는 무장조직이 해산됐음을 확인했다. 대회는 공산당 조직국 일원 17명을 선출한 뒤 폐막했다.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이 대회는 10월 13일 단 하루 동안 진행됐고, 김일성은 대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북한의 주장과 달리 박헌영을 비판한 것은 사실이 아니며 새로운 조선을 부르주아민주주의 단계에 있는 통일민주국가로 보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 “소련, 반체제인사에 약물 주입” 폭로 부콥스키 별세

    “소련, 반체제인사에 약물 주입” 폭로 부콥스키 별세

    구(舊)소련이 반체제 인사들을 정신병동에 가둬 약물을 투입해 무기력하게 만드는 만행을 처음으로 서방 세계에 폭로한 러시아 출신 작가 블라디미르 부콥스키가 별세했다. 76세. AFP통신 등에 따르면 부콥스키는 지난 27일 밤(현지시간) 영국 케임브리지의 한 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 그는 소련 당국이 의사들에게 허위로 정신병 진단서를 발급하게 해 반체제 인사들을 정신병동에 감금해 탄압한 것을 전 세계에 알린 인사 가운데 한 명이다. 1960년대에 잡지에 글을 쓰며 학생운동가로 이름을 알린 부콥스키는 1963년 금서를 소지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것을 시작으로 35세에 소련의 전체주의 체제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도합 12년을 감옥과 노동교화소, 정신병원을 전전했다. 부콥스키는 구소련이 정신병을 허위진단해 반체제인사들을 탄압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폭로한 인사로 서방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1971년 6명의 반체제 인사들의 정신병력이 기록된 의료 문서를 빼돌려 서방에 제공하면서 소련의 가혹한 체제 유지 방식에 대한 국제적 비판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소련에서 추방된 뒤 1978년 펴낸 회고록을 통해 강제노역과 정신병동에서 갇혀 지낸 경험을 구체적으로 알렸다. 블라디미르 푸틴이 이끄는 러시아가 구소련과 별로 다르지 않다면서 푸틴을 자주 비판했다. 2008년 러시아 대선 출마를 선언하기도 했지만 후보 자격을 얻지 못했다. 말년에는 아동 포르노 사건에 휘말려 2014년 영국 경찰에 기소되기도 했다.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프라하 성의 이 유해, 나치가 오면 “바이킹” 소련군 오면 “슬라브”

    프라하 성의 이 유해, 나치가 오면 “바이킹” 소련군 오면 “슬라브”

    1928년 체코 프라하 성에서 유해 하나가 발굴됐다. 10세기 것으로 추정됐다. 그런데 나치 독일과 옛 소련이 이념 선전에 써먹으려고 서로 이 유해가 자기네 조상이라고 우겨댔다고 영국 BBC가 28일 전했다. 유해 자체가 희한하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린 채 누워 있다. 오른손 아래 길다란 철제 검이 놓여 있다. 마치 짚고 서 있는 모양새를 꾸미려 한 것 같다. 왼손 아래에는 단검 둘이 놓여 있었는데 손가락들이 거의 닿을락 말락 뻗쳐 있다. 팔꿈치 옆에는 면도칼과 내화강(耐火鋼) 불쏘시개가 놓여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중세 때는 이게 지위를 상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발 밑에는 작은 나무바구니가 있었다. 바이킹족들이 축배를 드는 잔과 비슷해 보였다. 또 철제 도끼날이 부장(副葬)됐다. 무엇보다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1m가 조금 안 되는 길이의 장검이었다. 마치 권력은 영원하다고 웅변하는 것 같았다. 체코과학원의 중세 고고학 교수인 얀 프로릭은 “이 칼의 품질은 대단히 좋다. 아마도 서유럽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런 장검을 사용한 지역은 북유럽 바이킹족과 현대의 독일과 잉글랜드, 중부유럽 등이었다. 프로릭은 “바이킹스러운 것은 맞다. 하지만 국적은 의문”이라고 말했다.90년도 훨씬 전에 유해를 발견한 이는 우크라이나 고고학자 이반 보르코프스키였다. 볼세비키 내전 때 제정 러시아를 탈출해 프라하국립박물관 관장을 보좌했다. 유해를 발견했지만 자신의 견해를 정립해 발표할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11년 뒤 나치가 프라하를 점령한 뒤 유해가 바이킹이 틀림없다고 포장하기 시작했다. 바이킹은 곧 노르딕, 다시 말해 독일 혈통이며 아리아인의 순수성이 1000년 된 유해에도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라고 선전에 써먹었다. 나아가 고대의 영토를 되찾아야 한다는 아돌프 히틀러의 이상에도 맞아떨어졌다. 보르코프스키는 나치 대학에서 자신들의 이념 선전에 맞는 연구를 하도록 떠밀렸다. 말을 안 들으면 수용소로 보내버리겠다고 위협했다. 해서 그는 검열을 받아가며 이 유해는 독일의 혈통이 틀림없다고 기록을 남겼다. 전쟁이 끝나고 소비에트 적군이 프라하에 진주하자 보르코프스키에게 이제는 슬라브 혈통이 맞다고 결론을 내리라는 압력이 쏟아졌다. 이번에도 굴락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버리겠다고 겁을 줬다. 해서 그는 이 유해가 895년부터 1306년까지 400년 넘게 보헤미아를 통치한 프레미슬리드 왕실의 중요 성원으로서 초기 슬라브인이었다고 기록했다.이제 70년이 흘러 프로릭과 같은 고고학자들은 이데올로기에 기대지 않고 자유롭게 연구 결과를 발표할 수 있게 됐다. 프로릭은 유해 치아의 방사성 동위원소를 조사한 결과 발트해 남쪽 해안이나 어쩌면 덴마크 같은 북유럽 출신인 것을 알아냈다며 “그가 보헤미아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물론 발트해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만으로 모두 바이킹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당시 발트해 남쪽 해안도 슬라브인, 발트해 부족 등등에게 고향과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이 쉰 무렵에 여러 질병에 걸려 사망한 이 북쪽 전사가 성인이 될 무렵 프라하에 들어왔으며 보헤미아의 1대 공작이며 프레미슬리드 왕조의 시조인 보리보이 1세나 그의 맏아들이며 계승자인 스피티네프 1세의 수행단원으로 봉직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프레미슬리드 왕조가 프라하 성을 보헤미아 국가의 상징으로 여겼고, 이 전사가 묻힌 장소가 성 안의 중심인 것도 상당한 지위를 누린 인물이었음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프로릭 교수와 함께 논문을 집필한 니콜라스 사운더스 영국 브리스톨 대학 교수는 “이 친구의 독특한 점은 다중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바이킹이기도 하면서 슬라브인이기도 했다고 말하는 게 나을지 모르겠다. 사람들은 각자의 시공간에 맞춰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 친구는 몇 천년 동안 분명히 단 하나의 메이저 플레이어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메이저 플레이어였던 것은 맞다”고 말했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우크라 증언 막아라”… 美공화 ‘탄핵조사 청문회’ 육탄 저지

    “우크라 증언 막아라”… 美공화 ‘탄핵조사 청문회’ 육탄 저지

    4시간 30분 중단·재개 반복… 결국 연기 탄핵 찬성 여론 커지자 위기감 느낀 듯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대한 탄핵정국에 빠져든 미 의회에서 의사일정을 방해하기 위해 의원들이 실력 저지에 나서는 이례적인 일이 일어났다. 23일(현지시간) CNN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한 ‘우크라이나 의혹’ 탄핵조사 비공개 증언에서 불리한 증언이 계속 나오자 공화당 의원들이 회의를 방해하기 위해 집단 행동에 나섰다. 이 때문에 회의는 4시간 30분 이상 중단됐다 재개되는 파행이 벌어졌다. 25명가량의 공화당 하원의원들은 이날 오전 하원의 3개 관련 상임위가 국방부 부차관보에 대한 비공개 증언을 진행하던 회의실을 급습했다. 이들은 회의장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의회 경호 인력들의 신분증 확인 과정을 무시하기도 했다. 이어 여야 의원들 간 고성과 반말이나 다름없는 비아냥이 오가며 회의장 안팎은 ‘여의도 정치’를 연상하게 하는 아수라장이 됐다. 공화당 의원들은 비공개회의에 참석할 수 있게 해 달라며 탄핵조사를 주도하는 민주당 애덤 시프 하원 정보위원장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공화당 하원 원내 2인자 스티브 스칼리스 의원은 “(민주당이) 옛 소련 스타일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이들의 실력 저지에 결국 시프 위원장은 얼마 후 “증언을 무기한 연기한다”고 말한 뒤 회의실을 떠났다. 이날 회의실 급습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1일 각료회의에서 공화당 의원들에게 좀더 적극적으로 대응해 달라고 ‘야성’을 요구한 뒤 이틀 만에 나왔다. 블룸버그통신은 트럼프 대통령과 하원의원들이 22일 2시간 30분 정도 회의를 했고, 이 자리에서 실력 저지 계획을 공유했다고 전했다. 공화당 짐 조던 의원은 “무엇이 진행되는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 마침내 비등점에 도달한 것”이라고 말했다. 표면적으로 민주당 주도의 비공개 조사에 대한 공화당의 불만이 팽배한 데 따른 것이지만 탄핵 찬성 여론이 높아지는 등 사태가 악화되고 있다는 위기감이 여당을 중심으로 커지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이날 공개된 퀴니피액대의 여론조사 결과 절반을 넘는 55%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조사를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공개로 일정을 진행한 이유에 대해 민주당은 탄핵조사 초기이기 때문에 증인들이 말을 맞추는 것을 피하기 위한 조치라고 해명했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남아공에 전략폭격기 보낸 ‘푸틴의 야심’

    남아공에 전략폭격기 보낸 ‘푸틴의 야심’

    무기 수출로 아프리카까지 세력 확장 국가 부채 200억 달러 탕감에도 서명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아프리카에서의 영향력 강화를 노리고 있다. 사상 처음으로 아프리카 국가 지도자들을 초청한 ‘러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가 23일(현지시간)부터 이틀간 휴양도시 소치에서 열린다고 AP통신이 전했다. 이 자리에는 압둘팟타흐 시시 이집트·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등 아프리카 정부 수반과 지도자 등 45명이 참석했다고 러시아 측이 밝혔다. 이에 맞춰 러시아의 대표적 전략폭격기 투폴례프(Tu)160 두 대가 이날 1만 1000㎞ 거리를 비행해 남아공 워터루프 공항에 도착했다고 타스통신이 전했다. 러시아 전략폭격기가 아프리카를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폭격기들은 러시아를 출발해 남아공까지 13시간 동안 공중 급유를 받으면서 쉬지 않고 비행했다. 러시아 국방부는 “(남아공과의) 양자 군사협력 발전과 양국 공군 간 협력 강화를 위한 방문”이라고 밝혔다. 러시아는 이미 아프리카 최대 무기 공급 국가의 위치를 굳혀 가고 있다. 지난 5년 동안 최소 28개국과 군사협조 합의에 서명했다. 러시아 전투기와 군함이 아프리카 국가들의 기지와 항만 사용 가능성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특히 러시아는 냉전시대 소련이 정치 이념과 무기를 수출하고 지원했던 국가들과의 관계 복원을 시도하고 있다고 AP가 분석했다. 소련이 영향력을 행사했던 국가들에 러시아가 주춤한 사이 중국이 사회간접시설에 수천억 달러를 투자하면서 영향 확대를 꾀해 왔다. 포스탱 아르샹제 투아데레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에게 무기 제공에 감사하면서 다이아몬드와 황금, 우라늄을 무장세력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하게 게인고브 나미비아 대통령은 러시아 군사 자문단 파견을 환영한다고 밝혔고, 요웨리 무세베니 우간다 대통령은 “러시아가 전투기와 탱크 등 다른 무기를 공급한 것에 감사하다”면서 “러시아가 대출을 제공하면 더 많이 사고 싶다”고 말했다. 러시아 지질조사 기관은 남수단·르완다·적도기니와는 탄소자원 탐색에 합의했다. 러시아 최대 석유기업 로즈네프는 모잠비크 연안에서 석유 탐사를 준비한다고 발표했다. 앙골라는 러시아 다이아몬드 기업 알로사와의 협력 확대를 논의했다. 러시아가 이처럼 아프리카에 공을 들이는 것은 2014년 크림반도 합병 이후 서방의 제재를 돌파할 활로로 보기 때문이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아프리카 국가들을 지원하고자 부채 200억 달러 탕감에 서명했다. 크렘린 외교담당 보좌관 유리 유샤코프는 “러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는 3년마다, 외교장관 회의는 해마다 개최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美 트럼프, 여성 우주인에게 ‘손가락 욕설’? 구설 올라

    美 트럼프, 여성 우주인에게 ‘손가락 욕설’? 구설 올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역사상 최초로 여성 우주인들만의 우주 유영을 축하하는 화상 통화 중 여성 우주인들에게 가운데 손가락 욕을 했다는 구설에 올랐다고 데일리 메일등 외신이 보도했다. 지난 18일 (현지시간) 트럼프 대통령은 역사상 최초로 여성 우주인들만의 우주 유영을 성공한 크리스티나 코크와 제시카 메이어를 축하하기 위해 백악관에서 화상 통화를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이분들은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우주 정거장 외부 부품을 교체하기 위해 우주 유영에 성공한 최초의 여성 우주인”이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문제는 크리스티나 코크와 제시카 메이어가 우주 유영을 한 최초의 여성 우주인이 아니라는 것. 역사상 최초의 여성 우주 유영의 주인공은 1984년 구소련 우주인 스베틀라나 사비츠카야이고, 그 이후로도 이미 14번에 걸쳐 여성 우주인들이 우주 유영에 성공 했다. 이번 기록은 남성 우주인의 협력 없이 오롯이 여성 우주인들만의 최초 유영이었는데,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이 최초의 여성 우주 유영이라고 극찬을 한 것. 이에 제시카 메이어는 “무엇 보다 저희가 너무 과분한 칭찬을 받을 수 없는게 (저희는 최초 여성 유영 우주인이 아니고) 저희 이전에 이미 많은 다른 여성 우주인들이 우주 유영을 했습니다. 이번에 저희는 최초로 여성만의 우주 유영을 성공시킨 것입니다” 라고 겸손하게 대답했다. 그 순간, 트럼프 대통령이 당황한 듯이 중지로이마를 위아래로 긁적이며 흘러 내리지도 않는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특히 중지의 모양과 위 아래로 이마를 긁적이는 움직임이 마치 손가락 욕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자신이 극찬한 여성 우주인들이 자신의 실수를 지적하는 것이 몹시 불쾌한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적인 제스처라고 생각했다. 트위터 이용자인 새턴 와츠는 “여성 우주인이 그의 실수를 정중하게 고쳐주는 순간 그는 ‘가운데 손가락’을 이용해 머리카락를 고친다? 너무 의도적이지 않나”라고 적었고 이글은 7만7천번의 ‘좋아요’와 2만5천번의 리트윗이 이루어졌다. 바디 랭귀지 전문가 패티 우드는 데일리 메일에 “그의 행동이 의도성을 가지고 한 행동임을 즉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며 “ 타이밍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여성 우주인이 그의 실수를 지적하는 순간 그의 손이 올라 가며, 그의 얼굴 표정과 손동작을 유심히 살펴보면 명백하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손가락 욕설 구설수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7년 2월 ‘흑인 역사의 날’ 행사에서 옆에 앉아 있던 흑인 백악관 참모인 오마로사 매니골트에게 손가락 욕을 하는 듯한 모습이 포착되어 구설수에 올랐는데, 후에 오마로사는 트럼프 대통령의 인종차별에 대한 책을 출판했다. 2017년 5월에는 이탈리아에서 열린 G7회담에서 이탈리아 대통령의 연설 중에 손가락 욕을 하는 듯한 장면이 포착되었고, 같은해 9월에는 NFL의 일부 흑인 선수들이 미국 국기와 애국가가 나오는데 흑인 인권을 주장하면서 무릎을 꿇는 동작을 취하는 거에 대한 브리핑을 하면서 손가락 욕설을 하는 듯한 모습이 포착되어 구설에 올랐다. 김경태 해외통신원 tvbodaga@gmail.com
  • 사상 최초 여성들 만의 우주유영서 ‘셀카’…지구가 배경이네

    사상 최초 여성들 만의 우주유영서 ‘셀카’…지구가 배경이네

    사상 처음으로 여성 만으로 이루어진 우주유영 임무가 성공적으로 끝난 가운데 이들만 촬영할 수 있는 흥미로운 셀카 사진이 공개됐다. 푸른색 지구를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있는 이 셀카 사진의 주인공은 미 항공우주국(NASA)의 여성 우주인 크리스티나 코크와 제시카 메이어다. 이들은 지난 18일(현지시간) 고장난 국제우주정거장(ISS) 배터리 부품을 교체하기 위해 우주유영에 나서 총 7시 33분 간의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복귀했다.이번 우주유영 성공이 특별한 것은 사상 처음으로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임무였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상 첫 우주유영은 1965년으로 모두 남성들로만 구성됐다. 역사상 첫 여성 우주유영의 주인공은 1984년 구소련 우주인 스베틀라나 사비츠카야지만 남성의 지휘 하에 이루어졌다. 전기공학자인 코크는 이번이 4번째, 해양생물학 박사인 메이어는 첫번째 우주유영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남녀를 통틀어 우주유영에 성공한 우주인은 모두 227명이며 코크는 우주유양을 한 14번째, 메이어는 15번째 여성 우주인으로 기록됐다.한편 인류 최초로 우주 셀카를 남긴 주인공은 ‘비운의 우주인’이라는 수식어가 평생 따라다녔던 버즈 올드린(89)이다. 그는 1966년 11월 12일 제미니 12호 미션을 수행하는 동안 인류 최초의 우주 셀카를 남겼다. 1969년 7월 21일 닐 암스트롱(1930 ~2012) 바로 다음으로 달에 발자국을 남겨 항상 조연에 머무른 올드린이지만 우주 셀카만큼은 ‘인류 최초’라는 타이틀을 가진 셈. 이에 대해 올드린은 “그냥 찍었을 뿐 왜 찍었는지는 모르겠다”면서 “어떻게 사진이 나올지 궁금했다”고 밝힌 바 있다. 박종익 기자 pji@seoul.co.kr
  • ‘제5공화국 외교수장’ 노신영 전 국무총리 별세

    ‘제5공화국 외교수장’ 노신영 전 국무총리 별세

    5공 정권 외무장관·안기부장 등 역임반기문 전 유엔총장 발탁·중용한 ‘멘토’이 총리 “능력과 경륜의 공직자” 추모신군부의 쿠데타로 들어선 제5공화국 요직을 두루 역임한 노신영 전 국무총리가 지난 21일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노 전 총리는 서울대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고 병원 측은 밝혔다. 평안남도 강서 태생으로 실향민인 노 전 총리는 서울대 법대 졸업 1년 전인 1953년 고시행정과에 합격, 1955년 외무부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980년 5공 정권이 들어서자 외무부 장관에 이어 국가안전기획부장(안기부장), 국무총리 등을 거쳤다. 1980년 8월 고시 출신 외교관으로는 처음으로 외무장관에 올랐으며 장관 시절 1965년 한일협정 이후 최대 규모의 양국 간 경협협상을 맡기도 했다. 안기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중국과 첫 공식 대화의 물꼬를 트게 한 중국 여객기 불시착 사건, 사할린 상공에서 발생한 소련기에 의한 대한항공기 격추사건, 아웅산 테러암살사건 등 굵직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1987년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불거지자 정권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용퇴, 32년간의 공직생활을 마감했다.이후 당시 여당이었던 민정당 고문을 지냈으며 1994년부터 2012년까지 롯데복지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노 전 총리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을 발탁한 인물이기도 하다. 고인은 1973년대 초대 주인도대사로 부임하며 반 총장을 서기관으로 데려갔고 1985년 총리 취임 때는 미국 연수 중이던 그를 초고속 승진 시켜 총리실 의전비서관에 임명했다. 반 전 총장 역시 고인을 평생 ‘멘토’로 삼았다. 그는 총 2년 3개월간 총리직을 수행, 이명박 정부의 김황식 국무총리(2010년 10월 1일∼2013년 2월 26일·2년 4개월) 이전까지 최장수 총리 기록을 보유하기도 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22일 소셜미디어(SNS)에 “고인이 외무장관과 국무총리로 일하셨던 기간에 저는 담당 기자였다”며 “능력과 경륜의 공직자이셨다”고 추모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동영상] 일곱 시간이나, 인류 최초 여성으로만 구성된 우주유영

    [동영상] 일곱 시간이나, 인류 최초 여성으로만 구성된 우주유영

    우주 개발에 나선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우주인들로만 구성된 팀의 첫 우주유영이 일곱 시간 동안 진행됐다. 국제우주정거장(ISS)에 머물고 있는 미국 우주인 크리스티나 코크와 제시카 메이어가 18일 오후 8시 38분(이하 한국시간) 우주정거장 밖으로 나와 일곱 시간 진행됐다고 영국 BBC가 19일 전했다. 두 우주인은 팀을 이뤄 ISS 외부에 설치된 고장 난 전력 장치를 교체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이달 초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옛 소련 우주인 알렉세이 레오노프가 지난 1965년 인류의 첫 우주유영에 성공한 이후 여성 우주인들만으로 이뤄진 팀이 우주유영에 나선 것은 처음이다. 전기공학자 코크는 이미 지난 6일과 11일 미국 남성 우주인 앤드루 모건과 팀을 이뤄 ISS 외부의 축전지형 배터리 교체 작업을 한 바 있어, 이번 우주유영이 최근 2주 사이에 벌써 세 번째이고, 개인 통산 다섯 번째였다. 반면 해양생물학 박사인 메이어는 첫 경험이었다. 1984년 7월 25일 옛소련 여성 우주인 스베틀라나 사비츠카야가 여성으론 처음 3시간 35분의 우주유영에 성공한 이후, 코크가 우주유영을 한 14번째 여성 우주인, 메이어는 15번째 여성 우주인으로 기록된다. 남녀를 통틀어 우주유영에 성공한 우주인은 모두 227명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두 사람이 우주유영을 수행 중일 때 이뤄진 화상 통화를 통해 “당신들은 아주 용감하고 똑똑한 여성들”이라고 격려했다. 민주당 대선 후보 가운데 한 명인 카말라 해리스는 트위터에 “역사 이상의 일”이라고 적었다. ISS 체류 우주인들은 지난 6일부터 우주유영을 통해 정거장 외부에 설치돼 있는 니켈-수소 배터리를 개량형인 리튬-이온 배터리로 교체하는 작업을 해왔다. 모두 6개의 리튬-이온 배터리를 교체·설치할 예정인데 현재까지 3개만 설치했다. 하지만 지난 주말 태양열 집열판으로부터 축전지용 배터리로 들어가는 전력의 충전과 방전을 조절하는 에너지 블록(BCDU)이 고장 나면서 이 장치 교체 작업부터 먼저 하기로 했다. BCDU 고장으로 새로 설치한 리튬이온 배터리 3개 중 1개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력을 태양열에 의존하고 있는 ISS는 지구 300~400㎞ 상공의 궤도 상당 구간에서 햇빛을 직접 받지 못해 축전지용 배터리를 활용하는데, BCDU는 각 배터리의 충전량과 전력 공급량 등을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ISS는 BCDU 고장으로 현재 약간의 전력 손실이 발생했으나 과학실험이나 주거공간 등은 영향을 받지 않고 안전한 상태라고 미국 항공우주국(NASA)는 밝혔다. 한편 지난 3월 NASA가 발표한 여성들만의 우주유영 작업에는 원래 앤 매클레인이 참여할 예정이었으나 그녀 체격에 맞는 우주복이 없다는 이유로 취소됐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日 원전 사고로 국토 절반 오염… 절박함에 진실 감추고 축소 급급”

    “日 원전 사고로 국토 절반 오염… 절박함에 진실 감추고 축소 급급”

    ‘원자력안전과미래’ 이정윤 대표 … 후쿠시마 현황과 대안을 말하다“체르노빌 원전 폭발이 소련을 망하게 한 계기가 됐듯 후쿠시마 원전사고 후유증으로 일본 또한 서서히 앓고 있으며 잘못하면 망할 수도 있습니다. 아베 신조 총리로서는 사활을 걸고 유치한 도쿄올림픽에 매달릴 수밖에 없으며, 후쿠시마 원전이 ‘적절히 통제되고 있다’(under control)는 식의 거짓말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지난 10일 대전에서 만난 ‘원자력안전과미래’ 이정윤(59) 대표의 말은 단호했다. 이 대표는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공기에 의해 일본 국토의 절반이 오염됐고, 해양 방출을 통한 오염은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이라면서 “현재 117만t이 넘는 방사능 오염수를 일본 정부가 바다에 버리려고 하는 이유는 딱 하나, 바로 돈이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일본의 냉엄한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가 내놓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방출된 방사성물질 아이오다인(I-131), 세슘137 등 대표 방사성 핵종의 방출량에 대한 조사 결과 통계표를 보면 진실을 감추려는 일본의 절박함을 엿볼 수 있다. 사고 직후 원자력규제청(NISA), 일본원자력연구개발기구(JAEA) 등 일본의 조사 결과는 프랑스 방사능보호핵안전연구소(IRSN)와 비교하면 축소 발표의 흔적이 역력하다. 특히 해양 방출량만 놓고 보면 일본 JAEA는 155PBq(페타베크렐/1PBq=1000조 베크렐)로 프랑스 IRSN의 조사 결과인 1080PBq의 7분의1 수준으로 축소됐다. 베크렐은 국제적인 방사능 측정 표준 단위다. 흔히 쓰이곤 하는 밀리시버트(m㏜)는 방사능 인체 피폭량을 나타내는 단위다. 허용되는 m㏜ 허용 기준 역시 아베 정부는 사고 이후 20배 이상으로 상향했다. 일반인의 1년 허용 국제기준은 1m㏜다. 이를 훌쩍 올려놓은 것이다. 정부지원금을 끊은 뒤 후쿠시마 이재민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게 하기 위한 강제적 조치였다. 이 대표는 “30㎞ 이내 주거 제한을 엄격히 하면서 해체 작업 및 오염 제거 작업을 철저히 해야 함에도 아베 정부 때문에 생활고에 몰린 주민들이 어쩔 수 없이 후쿠시마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고기를 잡게 만들었다”면서 “이는 명백한 범죄 행위이며, 후쿠시마로 인한 오염 그리고 사후 대책의 안전성을 포기하고 방사능 오염을 확산시킨 주범은 아베”라고 단언했다. 내년 도쿄올림픽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냈다. 이 대표는 “올림픽을 보이코트하거나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면서도 “바람이 불면 나무 등에 붙어 있는 방사능이 공기 중으로 날아다니게 되며, 소량이지만 이로 인한 피폭 또한 긍정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 12일 태풍 하기비스에 후쿠시마에서 임시 보관 중인 방사성 폐기물 자루가 무더기로 유실됐지만 소재 파악도, 수거도 안 된 상황에서조차 일본 정부는 “위험하지 않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이런 부실하고 후진적인 관리에도 불구하고 후쿠시마산 농수산물을 올림픽 선수촌에 공급한다는 계획이니 선수단 및 응원단, 취재진 등은 여기에도 고스란히 노출된다. 그렇다고 그가 ‘방사능 괴담론자’는 결코 아니다. 극단적 반일주의 혹은 극단적 반원전론자 또한 아니다. 이 대표는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원자력연구원의 선임연구원으로 캐나다원자력공사에서 중수로설계 국제공동연구를 맡았고, 한전기술 원자로설계개발단에서 원자로 설계개발을 수행하는 등 30여년 동안 원자로 설계엔지니어링, 연구개발, 현장정비, 안전성 평가 등 여러 분야를 거친 원전 전문가다. 그의 대안 또한 감정적인 민족주의로 바라보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원전 해체 작업에도, 오염수 정화 기술에도 일본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주요 피해자 중 하나인 우리가 일본을 도와줄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가 제시한 방법은 일본이 방사능 오염수를 해양에 방출한다면 가장 먼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한국과 중국, 대만, 호주 등 태평양 연안 국가들 중심으로 비용을 투입해 일본에 ‘평화의 정화수 탱크’를 지어 주는 것이다. 이 대표는 “일본이 돈 문제 때문에 바다에 방류한다는데 주변 국가에서 저장 탱크를 지어 준다면 반대하지는 못할 것”이라면서 “후진국을 지원하는 공적개발원조(ODA) 자금을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현재 경제 보복 조치 등으로 대립과 갈등의 골이 깊어진 상황에서 쉽게 동의를 얻기 어려울 수도 있는 아이디어다. 그 또한 현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 논란이 있을 수 있음을 예상한다. 이 대표는 “국민 감정상 반감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인류애적 측면에서 필요함은 물론 우리 국민의 직접적 건강과 생명 피해를 막는 차원에서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 ‘탈원전 정책’을 채택한 우리 정부 입장에서도 향후 원전 해체 작업을 대비해 기술을 축적해야 할 필요성 또한 명백하다. 이 대표는 “비록 지금 국제 연구 공조에서 일본이 우리를 배제시키지만, 우리나라의 원전 건설 기술은 물론 해체 기술 또한 높은 수준인 만큼 연구인력을 투입해 공동 기술 개발 등 경험을 쌓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원자로 설계 등을 전문적으로 해 온 연구자였던 그가 원전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제기하는 입장으로 돌아선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2013년 한빛 원전 3, 4호기 발전소가 정지했을 때만 해도 이 대표는 ‘우발적 사건일 뿐 특별한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는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는 물론 1986년 체르노빌 사건 때도 원전 기계설비 전문가로서 우리나라는 안전하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빛 3, 4호기 사고 이후 정부의 대책을 보며 처음으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 대표는 “정부가 원전 품질 관련 해외 전문기업의 안전 검증을 받겠다면서 한국수력원자력에 150억원의 예산을 들여 검증기업 입찰을 받았는데, 엉뚱하게도 150년 된 원전검증회사가 아닌 선박전문검증회사가 낙찰을 받게 됐다”면서 “원자력안전미래를 만들게 된 직접적 계기였다”고 말했다. 당시 짝퉁 부품 공급 등 원전비리로 100여명이 기소됐고 60여명이 구속됐다. 당시 정부는 재발방지 대책의 일환으로 지역주민들의 한빛 1~6호기 현장 검증 시찰 요구를 ‘덜컥’ 약속했다. 이 대표는 “당시 정부로서는 원전 설비 등이 너무도 전문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주민들이 둘러본다고 해도 제대로 알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원전 현장 검증에 이 대표를 참여시켰고, 이는 ‘신의 한 수’가 됐다. 이 대표는 “2013년 7월부터 2015년 9월까지 직접 시찰에 참여해 문제점만 700건 이상 파악해서 시정을 요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근본적인 시정은 없었다. 이 대표는 “예컨대 비상 디젤 발전기의 경우 프랑스 제조품인데 본사가 아예 없어져 부품 문제가 있어도 교체가 불가능하며, 발전기를 통째로 교체하려면 70억~80억원이 들어 어렵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었고 “중저준위 폐기물 저장소 및 사용후핵연료저장소도 드론 등에 의한 테러 위험에 취약했으며 화재 위험에도 대비가 쉽지 않은 조건이었다”고 말했다. 결국 원자력안전위원회의 대응 능력이 심각한 상황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는 게 이 대표의 설명이다.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탈원전 정책을 둘러싼 찬반에 대해서도 이 대표는 국제적 추세 등을 감안하면 방향 자체는 맞다고 보면서도 찬반 양측에 쓴소리를 빠뜨리지 않았다. 그는 “탈원전은 일종의 선언적 의미이며 점진적 축소 정책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라면서 “출구 전략을 좀더 구체적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으며, 기계, 전기, 핵물리 등 여러 분야의 기술과 연구 성과가 결집된 원전 관련 업계도 집단으로 탈원전 정책을 반대하는 식으로 산업혁신을 거부하는 모양새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글 사진 youngtan@seoul.co.kr
  • 달에 착륙한 최초의 비글 ‘스누피’, 한국 현대미술 작가들과 터치다운

    달에 착륙한 최초의 비글 ‘스누피’, 한국 현대미술 작가들과 터치다운

    냉전체제 당시 미국과 소련이 군사적으로 양립한 동시에 우주개발 전쟁도 벌였다. 1969년 5월 미국항공우주국(NASA)이 기술력을 과시하며 달 탐사선 아폴로 10호를 쏘아 올린 장면을 전 세계에 생중계했을 때, 세계인들은 친숙한 이름을 들었다. ‘찰리 브라운’과 ‘스누피’. 우리에겐 ‘스누피와 친구들’로 널리 알려진 미국 인기 만화 ‘피너츠’(Peanuts)의 주요 캐릭터다. NASA는 경쟁 국가들도 지켜보는 중요한 우주 비행을 하면서 달 착륙선 이름은 스누피, 사령선은 찰리 브라운으로 지었다. 달 착륙선에는 우주 비행사와 함께 스누피 인형도 함께 탑승했다. 그렇게 스누피는 최초로 달을 탐사한 비글이 됐다.50년 전 달 탐사를 마친 스누피가 이번에는 친구들과 함께 서울을 찾았다. 롯데뮤지엄이 인류의 달 탐사 50주년과 스누피 탄생 70주년을 맞아 기획한 특별전 ‘투 더 문 위드 스누피’를 통해서다. 17일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롯데뮤지엄에서 개막한 특별전은 ‘피너츠’의 ‘아버지’ 찰스 먼로 슐츠(1922~2000) 뮤지엄 특별전을 비롯해 미국 팝아티스트 케니 샤프와 프랑스 그래픽아티스트 앙드레 사라이바가 제작한 ‘피너츠’ 관련 작품도 포함됐다. 만화가 슐츠가 1950년 미국 7개 지역신문에 4컷 만화를 연재하면서 시작된 ‘피너츠’는 곧 미국 전역을 넘어 세계 각국으로 뻗어나갔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신문 매체에 연재된 만화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NASA와의 인연은 1968년 NASA 측이 아폴로 프로젝트의 안전성을 홍보하는 동시에 국민 관심을 이끌기 위해 ‘피너츠’ 제작사 측에 먼저 요청하면서 시작됐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찰리 브라운의 애완견이자 친구인 스누피가 우주비행사와 NASA의 ‘안전 마스코트’가 되기까지 과정을 다양한 그림과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권오상, 김정기, 노상호, 박승모, 신모래 등 한국 현대미술 작가 19명이 참여한 작품도 보는 재미를 더한다. 이들은 각각 회화와 조각, 설치, 미디어아트, 스트리트아트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스누피와 그의 친구들을 표현했다. 또 윤춘호(YCH), 젠틀몬스터, 한현민 등 13명의 패션디자이너가 ‘피너츠’ 캐릭터에서 받은 영감을 살려 제작한 인형 의상을 선보이는 ‘스누피 런웨이’와 아트피규어 경매를 통한 판매수익금 전액을 월드비전에 기부하는 자선 이벤트 등도 열린다. 롯데뮤지엄 측은 “반세기 전 달 착륙의 순간을 함께한 스누피를 매개로, 인류의 원대한 꿈이 펼쳐지는 우주에 대한 특별 전시를 기획했다”면서 “스누피를 재해석한 예술가들의 시선을 통해 우주를 향한 인류의 꿈을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2020년 3월 1일까지 계속된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중국의 미래를 결정한 시안사변(西安事變)

    중국의 미래를 결정한 시안사변(西安事變)

    70년 전인 1949년 10월 1일, 중국공산당 (이하 중공) 중앙위원회 위원장인 모택동(毛澤東)이 북경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의 성립을 선포함으로써 중국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 후 중국은 복잡한 역사를 거쳤으며 중국공산당의 지도 밑에 경제적으로 미국과 경쟁할 수 있는 초강대국이 되어가고 있다. 중공의 당사(黨史) 연구자들도, 중국근현대사 연구자들도 중국혁명 승리의 뿌리는 중국의 역사를 완전히 바꾼 1936년 12월에 발생한 ‘시안사변’에 있다고 간주한다. 이번에는 중공에 의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기념하면서 이 사건의 배경과 경과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중국공산당은 당시 공산주의운동을 지도했던 국제조직인 코민테른의 대표 2명이 참여한 1921년 7월 1일 제1차전국대표대회에서 창건되었다. 유럽혁명의 실패 후 소련과 코민테른은 민족 및 식민지문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면서 중국, 조선 등 제국주의 열강의 압박에 대항하는 동양민족 공산당들에게 사회주의혁명 대신 민족해방운동에 전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내전을 겪어 큰 피해를 입은 소비에트 러시아는 열강에 의한 국제적 봉쇄를 돌파하기 위해 중국의 국민혁명을 통해서 통일을 목적으로 했던 국민당의 당총리인 손문(孫文)과 관계를 맺었다. 만일 공산당원들의 국민당 가입을 허가하면 군사·정치적 지원을 제공할 것을 제안하였으며, 손문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것은 바로 제1차 국공합작이다.소련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은 국민혁명군을 창설하고 중국의 무장통일을 위해 북벌(北伐)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손문은 1925년에 죽었다. 그 후계자인 장개석(蔣介石)은 극우파로 공산당원들을 숙청해야 할 내부의 적으로 보았다. 때문에 1927년 4월 상해를 점령한 장개석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국민혁명군과 함께 중국통일을 위해 싸웠던 노동자들로 구성된 소부대들을 무장해제시키고 잔인한 숙청을 단행했다.결국 국민당의 배신을 당한 중공은 국민당에 대해 혁명적 공세를 결정하고 남창폭동(南昌暴動) 등을 일으키면서 공산당 무력조직인 홍군(紅軍)을 창설하였다. 그 후 중공은 혁명근거지를 중심으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설립하고 국민당과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을 통한 일본의 중국침략에도 불구하고 안내양외(安內攘外)정책을 선포한 장개석은 대일저항을 사실상 포기하고 중공에 대한 토벌을 고수했다. 1933~34년 독일 군사고문의 지도를 받은 장개석의 군대는 코민테른 군사고문의 잘못된 전략을 이용하여 대부분의 혁명근거지를 없애는 데에 성공했으며, 중공은 모택동을 따라 장정(長征)을 실시하고 심각한 병력피해를 입으면서 중국 북부에 있는 연안(延安)이라는 지역으로 도피했다. 연안에 도달한 중공은 항일전쟁을 계속 호소하면서 1936년에 그 정권의 명칭을 중화소비에트인민공화국으로 변경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이란 국명의 기원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이때 국민당 내부에 일제의 위협을 무시하고 중공 소멸에만 집중하던 장개석의 정책을 반대하고 중공을 동정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었다. 결국 연안 지역에서 중공 토벌이 맡긴 장학량(張學良)과 양호성(楊虎城)이 일제 침략이라는 상황에서 내전의 무의미함을 깨달아 공산당과 연락을 취하면서 정전했으며 장개석의 정책을 바꾸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중공과 손잡고 대일전쟁의 준비에 나선 장학량은 대화를 통해서 내전보다 항일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장개석에게 몇 개월 동안 설명하고자 했으나 장개석은 귀를 기울이지 않고 공격을 계속하라고 지시하였다. 1936년말, 장개석은 공격을 강행하기 위해 시안에 도착했다. 장학량과 양호성이 장개석을 다시한번 설득해봤으나 장개석은 즉시 공격하지 않으면 그들의 군대를 남부로 보내고 대신 중앙군대를 파견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장과 양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되어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12월 12일 오전 5시, 장학량 친위대가 장개석을 체포하려고 그가 머물렀던 별장을 급습했다. 장개석은 잠옷을 입고 맨발인 채 별장에서 나가 도망치려고 했으나 오전 9시에 잡혔다. 반란군 사령부에 호송 후 장학량은 8개의 조건을 내세우고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에 나설 것을 요구했으나 장개석은 압박 하에서 아무 타협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것은 힘으로라도 장개석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장학량과 양호성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같은 날 저녁, 장학량은 중공 중앙위원회에게 전보를 보내 상황을 설명했다. 중공은 긴급회의를 열어 장개석 문제의 해결 방법을 논의했다. 이 회의의 기록이 공개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그 회의에 참석했던 장국도(張國燾) 중공중앙위원의 회의록에 따르면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 중공중앙 책임자들 중에 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우리는 장개석을 살려주면 향후 큰 화를 초래할 수 있다(養癰遺患)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은 공개 재판을 통해 그 반공분자를 죽일 것을 주장했고, 어떤 사람은 그를 비밀리에 구금하고 인질로 삼아 남경으로 하여금 항일을 강요할 것을 주장했다.”하지만 중공 중앙위원회는 행동하기 전에 우선 교섭을 위해 주은래(周恩來)를 시안에 파견하고 코민테른의 의견을 확인하고 결정하기로 했고 모스크바에 전보를 보냈다. 소련과 코민테른에게 이 소식은 몹시 충격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잘 인식했던 소련의 지도부는 장개석을 죽이고 통일전선을 결성하지 못하면 아시아 전체가 일제의 지배에 들어가고 식민지 민족 해방은커녕 소련 자체가 독일과 일본의 양면침략을 당해 패망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장개석이 죽으면 국민당이 분열되고 대도시에서의 지지기반이 비교적으로 약한 중국공산당이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스탈린은 그 소식을 받은 후 즉시 소련 정부 기관지인 ‘이즈베스티야’에 시안사변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장학량의 봉기’라는 기사를 발표할 것을 지시했고 12월 16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위원장 디미트로프가 중공에 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라는 전보를 보냈다. 재미있게도, 중공 당사(黨史) 교재에는 12월16일자 디미트로프의 전보는 암호에 문제가 있어 해독하지 못해서 재전송을 요구했다고 실려있다. 하지만 그 후 모스크바로부터 연락이 없어서 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운명적인 19일자의 결정을 모스크바의 지시에 의거해서 내려진 것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이 독립적으로 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양규송(楊奎松) 등 중국 연구자들에 의해 중국문서보관소에서 시안사변을 비난하는 소련 신문기사의 내용이 17일에 중공에 알려졌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문서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19일자의 결정은 소련의 영향을 받고 내려진 것으로 확인된다.이와 동시에, 중국에서의 상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장개석 구금의 소식을 받은 국민혁명군 장군 하응흠(何應欽)은 12월 16일 자신을 토벌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시안 부근에 대해 폭격을 실시했다. 이 폭격의 인명피해는 수백명에 달했다. 하지만 직접 시안에 가서 장학량과 만난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宋美齡)은 토벌 작전을 중지하도록 장개석을 설득했다. 긴장이 고조되어가는 상황에서 양측은 회담을 계속해 나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공 중앙위원회는 12월 19일 확대회의에서 시안사변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결정했고 장개석과의 대화를 본격적으로 지지했다. 흥미롭게도, 장학량과 양호성과의 대화를 거부하던 장개석은 소련이 창설한 황포(??)군관학교 총수 시절에 그 부하이었던 주은래와 대화를 시작했다. 결국 장개석은 중공이 그 정부와 홍군을 해산하고 국민혁명군에 들어가면 내전을 중지하고 통일전선을 결성하겠다고 약속했고 12월 26일에 석방된 후 비행기를 타고 남경(南京)으로 향했다. 약 반년 후인 1937년 7월 7일, 일본이 루거우차오 사건을 통해 중국에 대한 침략을 전면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하지만 이때 내전이 이미 중지되었고 제2차 국공합작이 형성되어 가는 중이었기 때문에 유격대 전술에 능숙한 중공과 정규군을 가진 국민당은 통일전선을 결성하고 일본 침략에 맞설 수 있었다. 중국은 1945년 9월 2일에 승전국이 되었다. 하지만 전쟁과정에서 국민당과 중공 간의 모순이 완전히 해결되지 못해 내전이 재발하였고, 그 결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었다.글 사진: 바실리 블라디미로비치 레베데프 고려대 사학과 석사
  • 바일스 세계선수권 통산 25개 메달(19개 金), 셰르보 넘어서다

    바일스 세계선수권 통산 25개 메달(19개 金), 셰르보 넘어서다

    체조 일인자 시몬 바일스(22·미국)가 13일(현지시간)에만 금메달 둘을 더해 세계선수권 사상 가장 많은 메달을 목에 건 선수가 됐다. 바일스는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이어진 국제체조연맹 세계선수권 대회 여자 평균대 결선에서 15.066이란 압도적인 점수를 얻어내 이번 대회 네 번째 금메달을 목에 걸어 개인 통산 대회 24번째 메달이자 18번째 금메달을 땄다. 이로써 옛 소련과 1990년대 독립국가연합(CIS)과 벨라루스 남자 대표로 활약했던 비탈리 셰르보를 제치고 역대 대회 최다 메달 기록을 경신했다. 리우팅팅과 리시지아(이상 중국)가 각각 은메달과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번 대회에서 단체전, 개인종합, 도마 우승을 휩쓴 바일스는 이어 마루 결선에서는 역시 15.133이란 놀랄 만한 점수를 따내 14.133에 그친 미국의 떠오르는 샛별 수니사 리(16)를 은메달로, 안젤리나 멜니코바(러시아)를 동메달로 밀어내고 결국 대회 5관왕 위업을 달성했다. 이번 대회 이단평행봉 한 종목에서만 데르와엘 니나(벨기에)에게 금메달을 내주고 5위에 그쳤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서 금메달 넷과 동메달 하나를 땄던 바일스는 이로써 올림픽과 세계선수권 메달을 합쳐 30개를 채웠다. 이제 이 기록에서는 스체르보에 3개만 모자란다고 영국 BBC는 전했다. 바일스는 주 종목인 평균대와 마루운동 신기술로 이번 대회 예선의 막을 화려하게 올렸다. 그가 마치 농구 용어 같은 더블-더블(평균대), 트리플-더블(마루운동) 기술을 새로 선보이자 체조 팬들은 경탄했다. 더블-더블은 높이 125㎝, 길이 5m, 폭 10㎝의 평균대 위에서 여러 기술 과제를 수행한 뒤 마지막 바닥에 착지할 때 두 번 뒤로 돌아 두 번 몸을 비튼 뒤 내리는 동작이다. 웬만한 탄력과 근력이 없으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바일스만의 기술이다. 자신의 이름을 따 ‘바일스’로 명명된 이 기술의 난도는 ‘H’로 바일스의 기대에 못 미쳤다. A부터 시작하는 난도는 알파벳 순서에 따라 0.1점씩 높아진다. 현존 최고 난도는 I로 바일스와 미국체조협회는 이를 넘어서는 J난도 공인을 바랐지만, FIG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FIG는 바일스만이 할 수 있는 위험한 기술에서 다른 선수들을 보호하고자 난도를 일부러 낮췄다. 트리플-더블은 마루운동에서 뒤로 땅 짚고 두 번 돈 뒤 세 번 몸을 비틀어 내리는 동작이다. 북한의 체조 영웅 리정성이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시연했으며 남자 선수들도 이 기술을 할 줄 아는 선수가 거의 없다. 키 142㎝, 몸무게 47㎏의 바일스는 로랑 랜디 코치의 지도로 이 기술을 부단히 연습해 처음으로 국제무대에서 성공한 여자 선수가 됐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여자 마루운동에서 뒤로 땅 짚고 두 번 도는 기술은 1970년대 초에 등장했고, 1978년 구소련의 엘레나 무키나가 두 번 돈 뒤 한 번 몸을 비트는 기술을 추가했다. 공중에서 두 번 몸을 비트는 기술은 1988년 루마니아의 다니엘라 실리바스가 완성했다. 이 기술은 여전히 여자 선수들에게 가장 고난도 동작이다. 바일스는 이마저 넘었다. 두 신기술을 결선 마지막 동작으로 끝내고 바일스는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는 마루운동 2개, 도마와 평균대 1개씩 등 모두 4개의 독자 기술을 보유한 ‘기술자’이면서 예술가다. 임병선 기자 bsnim@seoul.co.kr
  • 非유럽·非미국 선호...노벨평화상 수상에도 ‘패턴’이 있다

    非유럽·非미국 선호...노벨평화상 수상에도 ‘패턴’이 있다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아비 아흐메드 알리 에티오피아 총리가 선정된 것에 대해 워싱턴포스트(WP)는 12일(현지시간) “다양성에 대한 노벨위원회의 의지가 다시 확인됐다”고 전했다. 비(非)유럽, 비미국 국가 출신으로 수상자를 결정해온 최근 노벨평화상 수상 패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분석이다. 1970년대까지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대부분 유럽과 미국 출신이었다. 올해 수상자까지 출신 국가별로 보면 가장 많이 평화상 수상자를 배출한 상위 국가는 미국(19회), 영국(11회), 프랑스(10회) 등의 순이었다. 하지만 지난 수십년간 수상자의 출신 국적은 훨씬 다양해졌다. 2010년 이후 수상자를 보면 2012년 유럽연합(EU)이 수상한 경우를 제외하면 2010년 중국(류샤오보), 2015년 튀니지(국민4자대화기구), 2016년 콜롬비아(후안 마누엘 산토스) 등 올해까지 모두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 등에서 배출됐다. WP는 “지난 수십년 동안 노벨평화상은 국제적인 상이 됐다”면서 “지금은 아프리카, 아시아, 구소련 등에서 수상자가 배출되고 있고, 여성들도 많이 포함됐다”고 분석했다. 노벨상 연구가인 역사학자 오이빈드 스텐네센은 “아프리카의 탈식민화 영향과 베트남전쟁 등으로 노벨위원회는 유럽 밖의 분쟁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고 이같이 출신 국적이 다양화된 이유를 설명했다. 수상자 국적을 다양화해온 노벨위원회의 의중에 고려하면 ‘환경소녀’ 그레타 툰베리가 왜 노벨평화상을 받지 못했는지에 대한 분석도 가능하다. 툰베리는 유럽국인 스웨덴 출신이기 때문이다. 스웨덴은 독일과 함께 노벨평화상을 5회 수상해 미국·영국·프랑스에 이어 가장 많이 노벨평화상을 받은 국가로 꼽힌다. 물론 올해 수상이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WP는 지적했다. 2009년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을 때처럼 아흐메드 총리 역시 그의 개혁 조치 중 일부는 아직 이행하지 않고 있는 등 다소 이른 수상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번 선정이 정치지도자나 남성 위주로 선정됐던 1970년대 이전 수상 패턴을 떠올리게 한다는 반응도 있다.앞서 노벨위원회는 11일 에티오피아 북부 에리트레아의 분리독립 세력과 평화협정을 체결해 역내 평화를 증진한 업적으로 아흐메드 총리를 사상 100번째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아흐메드 총리는 지난 8월 내한해 문재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안석 기자 sartori@seoul.co.kr
  • 사할린 강제동원 희생자 14명 유해 국내 봉환

    일제 강점기에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된 한국인 희생자 14명의 유해가 70여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행정안전부는 사할린 강제동원 한인 유해 14위를 국내로 이송해 오는 7일 충남 천안에 있는 국립망향의동산에 안치한다고 6일 밝혔다. 사할린 강제동원 한인 유해 봉환은 이번이 일곱번째다. 앞서 정부는 러시아 정부와 사할린 한인묘지 발굴·유해 봉환에 합의한 뒤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모두 여섯차례에 걸쳐 유해 71위를 봉환했다. 이번 봉환에 앞서 전날 유즈노사할린스크 한인문화센터에서 러시아 정부와 한국 영사관,사할린한인협회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환송식이 열렸다. 공식 추도·봉환식은 7일 오후 2시부터 거행된다. 이 행사에는 유족과 유족단체, 정부 관계자, 주한일본대사관 참사관 등이 참석할 예정이다. 일제 강점기 수만 명의 조선인이 사할린에 강제로 끌려가 탄광·토목공사장·공장 등에서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다. 학계에서는 2차대전 종전 당시 4만명 이상의 한인이 사할린에 남아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해방 이후에도 일본 정부의 방치와 미수교국이었던 옛 소련과의 관계 탓에 1990년 한·러 수교 전까지 귀국길이 막혔고, 상당수는 고국 땅을 밟지 못한 채 이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할아버지 정용만(1911∼1986년)씨의 유해를 봉환하는 손자 정용달(51)씨는 “할아버지는 1943년 초여름에 논에 물을 대러 나갔다가 끌려가셨다.남편과 생이별한 할머니는 여섯살 아들과 뱃속 딸을 홀로 키우다 94세에 한 많은 세상을 떠나셨다”고 전했다. 정씨는 “비록 남편이 한 줌 유골로 돌아왔지만 할머니는 기뻐하실 것”이라며 “이미 선산에 할아버지를 모실 산소를 조성했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사할린 강제징용 한인 유해 봉환 작업을 계속하는 한편 봉환과 강제징용 한인 관련 기록물 수집이 안정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러시아 정부와의 협정을 추진 중이다. 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