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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섬나라」 황금연휴… 일인이 몰려온다/관광 “호황”… 검색“비상”

    ◎「엔고」타고 평소의 3배이상 입국/옴교 원정 보복테러 대비 초긴장 이번 주말부터 5월 첫째주까지 일본인관광객이 줄을 이어 우리나라를 찾아오고 특히 5월3∼4일전후에는 평소의 3배에 이를 전망이다. 이에 따라 이 기간 서울과 제주도·경주등 주요지역의 호텔은 이미 예약이 끝난 상태며 한·일노선의 항공편도 벌써 동이 나는등 관광업계가 호황을 누리며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이는 일본에서는 오는 29일이 식목일이고 30일은 일요일로 연휴가 되며 5월3일은 헌법기념일,4일 국민체육일,5일 어린이날,6∼7일 주말로 황금연휴가 이어지는데다 최근의 「엔고」현상으로 일본인이 한국등지로 국외여행을 하는 것이 국내여행보다 오히려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본인들은 연휴와 연휴 사이에 낀 5월1∼2일을 「샌드위치 데이」로 대부분 휴가를 얻어 4월말부터 5월8∼9일까지 한국등 해외여행에 나서고 있는 추세다. 이처럼 일본인관광객 등의 대거입국이 예상되자 관계당국은 출입국관리비상령을 내리고 공항·항만 등 출입국장소는 물론호텔·지하철·백화점 등 공공장소에 대한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있다. 검찰과 경찰 등 보안당국과 호텔등 관광업계는 특히 23일 옴진리교 제2인자가 재일동포에게 살해된 데 따라 추종세력이 보복테러를 하기 위해 관광객 등으로 위장잠입할 가능성등에 대비,바짝 긴장하고 있다. 김포공항경찰대는 이에 따라 첫 비행기와 마지막 비행기의 이착륙 1시간을 전·후해 공항청사의 화장실과 사무실 쓰레기통 등을 샅샅이 검색,폭발물과 유해가스 등을 탐지하고 있으며 소속 경찰관 40명을 경찰특공대에 보내 대테러훈련을 시켰다. 경찰은 아울러 공단과 협조,고체·액체폭약 및 유해가스를 탐지할 수 있는 최신형 검색기 9대를 들여와 여객및 화물청사에 배치하기로 했다. 공항경찰대는 세관및 출입국관리소등과 협조,이날부터 일본·중국·미국등지에서 입국하는 외국인은 미성년자까지도 철저하게 검사하기로 하는 한편 여권 없이 신분증만으로 입·출국이 가능하던 미8군 소속 현역군인에 대한 심사도 강화했다. 이에 발맞춰 서울 중구 소공동 조선호텔은 11개이던CC­TV를 66개의 컬러TV로 대폭 늘리거나 교체했으며 3일이던 녹화테이프 보관일도 1주일로 늘렸다.
  • 미·소공동위 결렬 이후(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16)

    ◎미,한반도문제 유엔총회 상정/유엔 남북총선·한국임시위 설치 결의/소 「한국대표 불참」 이유 임시위 보이콧/남로당,북과 공조 유엔토의 반대 선동 미국은 제2차 미소공위가 정돈상태에 들어간 1947년 여름부터 회담자체에 기대를 걸지 않았다.그래서 팽창하는 공산주의 압력을 저지하기 위한 서구와의 협력문제,한국의 독립이 친미적 반공이념에 입각해 이루어져야 한다는 문제등을 고려하게 되었다.특히 양극화 현상을 치닫는 동·서냉전의 구도속에서 한반도 문제의 해결은 유엔에 맡기는 것이 최상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여기에는 당시 남한에 주둔한 2개사단을 철수시킬 수 있다는 군사전략도 맞물려 있었다. 1947년 9월 17일 미국대표는 한국독립문제를 제2차 유엔총회의 의사일정에 포함시킬 것을 전격적으로 요청했다.이날 미 국무장관 G C 마셜은 총회의 연설에서 미국정부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넘기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고 나섰다.마셜의 연설요지는 미 소협상에 의한 한반도 문제해결은 전혀 전망이 없기 때문에 유엔에 상정한것이며 비록 미국이 의안을 제출했을 지라도 회원들의 공정한 판단이 요구된다는 것이었다.그리고 미 소의 무능으로 한국인이 열망하는 한국의 독립을 더이상 연기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덧붙였다(미국무성보·1947년). 소련 외상 그로미코는 한반도 문제의 총회 상정은 위법이라고 주장했다.이 문제는 전쟁과 연결된 사안으로 강대국들이 특별한 방법,다시 말하면 모스크바협정(3상회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운영위원회는 미국의 의안을 12대 2로 가결한데 이어 총회도 이를 동의했다.총회의 제1위원회가 10월 28일 한반도문제 토의를 시작하기전 소련대표는 다른 안건을 내놓았다.그것은 한국민들에게 자신들의 정부를 선택할 기회를 주도록 1948년초까지 미·소의 군대를 한반도에서 철수하자는 내용이었다. 소련의 이같은 안건을 주의깊게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이무렵 한반도 북쪽에는 소련의 조종을 받는 자신들의 대리기구인 정부형태의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존재했기 때문이다.또 7월 제2차 미소공위에서 소련이 내놓았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한 정당 및 단체협의체 구성안과도 무관치 않은 것이다.소련은 제2차 미소공위에서 남한의 27개 정당을 우익계 및 중간계라는 이유로 배제시킨 극좌 우세의 지위를 차지하겠다는 의사를 보인 적이 있다(한국에서의 미군정 활동요약·1947년).소련의 이 제안은 제2차 미소공위가 결렬되는 요인의 하나로 작용했다. 어떻든 미국대표는 10월 17일 미국의 제안을 구체화한 결의안을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달했다.미국의 안은 되도록 빠른시기에 한국의 독립이 이루어져야 하고 점령군이 철수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다시 말하면 점령국은 1948년 3월 31일까지 남북한 전지역에서 유엔위원단의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국회나 중앙정부를 수립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그 정부는 군대를 창설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유엔위원단은 국회 및 정부조직,점령군 철수에 관한 협정체결에도 협의할 수 있다는 위원단의 역할도 제시했다. ○소 별도 결의안 제출 소련은 역시 미국안에 맞서는 2개의 결의안을 별도로 유엔에 내놓았다.그 하나는 남북한에서 선출된대표들을 초청,한국문제 토의에 참가시키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앞서 주장한 한국정부 수립은 한국민에게 맡기자는 요지였다.그러나 도대체 누구를 한국민의 대표로 하느냐는 벽에 부딪혔다.얼핏 매력적으로 보이는 한국대표 참가는 한국임시위원단을 설치하자는 미국의 수정안에 밀려나고 말았다.총회의 제1위원회는 11월 14일 35대 6으로 미국의 수정안을 최종 채택했다. 소련이 내놓은 안건은 미국에 의해 모두 봉쇄된 셈이었다.그로미코는 「총회가 한국민 대표를 참석시키지 않고 한국임시위원단을 설치한다면 소련은 불참하겠다」고 선언했다.이는 뒷날 소련과 소련이 전적으로 조정한 북한에 의해 실현되었다.유엔총회는 11월 14일 미국의 제안을 몇가지만 부분수정하고 최종적으로 채택했다.소련의 제안이 만약 수락되었을 경우 이미 기반을 닦은 북조선노동당과 인민위원회,남조선노동당을 주축으로 한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정부가 수립되었을지도 모른다.이는 미국이 우려한 부분이기도 하다. 유엔총회는 11월 14일 채택한 결의안에 따라 한국독립을 위한 계획안을 발의하였는데 대부분 미국이 주장한 원칙을 따르는 것이었다.총회의 결의에 따라 설치된 한국임시위원단은 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중국,엘살바도르,인도,필리핀,시리아,우크라이나로 구성되었다.우크라이나는 대표파견을 거부,7개국이 참여했다.한국임시위원단에게는 선거감시의 임무가 부여되었다.선거는 늦어도 1948년 3월 31일까지 성년자 투표 및 비밀투표를 실시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1947년 11월 14일 미국측 제안이 유엔총회에 최종 채택되는 것을 계기로 국내에서는 좌우파의 양극화가 심화되었다.이승만은 미국이 남한에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자신에게 눈을 돌릴 것이라고 예측했다.남로당도 이른바 야산대라는 게릴라를 조직하고 경찰관서를 포함한 관공서를 습격하는 등 과격성을 띠었다.그리고 유엔에서 한국문제 토의를 끝까지 반대해야 한다는 선전선동을 강화했는데 이는 12월 중순부터 본격화되었다(극동사령부 정보철·1948년 2월). 남로당은 북로당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광범위한 세력과 공동전선을 펴는 지령을 받는다.서울신문이 입수한 한 자료에 따르면 남로당 요원의 북한파견은 아주 일찍부터 고정루트를 통해 이루어졌다(별도기사).지금까지 알려진 자료들을 종합하면 1947년말 당시 남한에 있었던 중도좌파 인물 홍명희는 평양의 북로당위원장 김두봉과 수시 연락을 가진 것으로 되어있다.홍명희는 1948년 2월초까지 실제 비밀리에 평양에 몇차례 다녀왔다. 그리하여 19 48년 1월 8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서울에 첫발을 밟은데 이어 1월 12일 첫 회의를 열었다.하지만 앞으로 닥쳐올 한국에서 활동은 그리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남로당 북한과 수시접촉 했었다/당수 허헌,북에 밀령 전달/요원 4명 배로 평양 밀파/원산서장에 “동행을” 사신 해방정국에 엄청난 혼란을 불러일으킨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이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 가운데 수시로 접촉한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가 워싱턴에서 발굴됐다.1950년 미군이 평양에서 가져온 이른바 북한노획문서의 하나인 이 자료는 허헌이 함경남도 원산인민보안서장에게 보낸 소개장으로 4인의 공산당 요원을원산을 통해 평양에 밀파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개장은 1946년 당시 남로당위원장 직책을 맡고있던 허헌이 그해 12월 친필로 작성한 것이다.그는 소개장에 허인(당시 31세)등 4명의 이름을 적고 허인이 자신의 조카임을 밝혔다.소개한 4명의 인물은 모두가 희생적으로 투쟁하는 간부들이라고 전제하면서 이들이 평양까지 무사히 가도록 동행등 모든 편의를 보아주도록 당부한 내용을 담았다.그리고 동선했다는 대목이 보여 이들은 동해안에서 배를 타고 원산에 상륙한 것으로 보이는데 평양까지 가는 목적은 「모 용무」라고만 적어 상세히 밝혀지지 않았다.그러나 중요한 임무를 띠고 밀파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왜냐하면 경찰서장에 해당하는 인민보안서장의 동행을 요청했다는 점이 그것이다.특히 이무렵 남한의 공산당은 10월폭동과 같은 과격한 투쟁을 벌이다 지하로 숨어든 시기여서 다급한 밀령을 가지고 입북했을 가능성이 크다. 허헌은 1885년 함북 북청출신의 변호사로 일찍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다.1946년 11월 해방정국에서 개편한 공산당인 남조선노동당 위원장을 맡았다가 월북,최고인민회의 의장을 비롯,김일성대학 총장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장 등을 지냈다.1951년 8월 병사했는데 허정숙은 그의 딸이다. 이 자료를 검토한 북한문제연구소 김창순 소장은 『개성과 서해안,철원등을 통한 월북루트는 널리 알려졌지만 동해를 통한 해상루트가 밝혀진 것은 처음』이라면서 「허헌 친필의 소개장 자체도 공산주의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 〃 기자) ▲김성호 ( 〃 〃 ) ▲김경운 (조사부 〃 )
  • 시청앞 등 4곳에 광장 3만4천평/서울시 올 업무계획 주요내용

    서울시가 17일 대통령에게 보고한 주요 업무계획은 세계 중심도시로 도약하는 서울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국가중심거리」 조성계획과 이를 위한 도심도로교통망 개편 등이 핵심이다. ◇국가중심거리 조성=광화문과 남대문 등이 지닌 역사성을 회복하고 중심거리의 경관을 살려 차량위주의 거리를 시민들의 거리로 바꾼다. ◎거리조성/사직터널∼율곡도 지하도로 건설/명동 등에 서울 상징가로 팔경 조성 경복궁∼시청∼서울역까지 2㎞구간에 광장을 설치하고 보도를 확충한다.주변교통망은 도심을 통과하지 않고 우회할 수 있도록 격자형 체계로 개편한다. 광장은 광화문·시청·남대문·서울역앞 등 4곳에 모두 3만4천여평을 조성한다. 1만5천평의 광화문광장은 현 중앙청광장과 정부종합청사앞 마당을 포함하게 된다.현재 이를 분할하는 도로는 없어진다. 광화문광장 조성으로 없어지는 도로를 새로 확보하기 위해 사직터널에서 삼청동입구 율곡로까지의 구간을 지하도로로 바꾼다. 시청앞광장 4천3백평은 보행자전용광장으로 조성,시민들이 을지로와 퇴계로 등에서 시청쪽으로 쉽게 접근하도록 꾸민다.태평로 양쪽에는 너비 10m,길이 3백60m의 가로공원을 조성한다.주변 북창동길과 무교동길은 확장·정비해 로터리식의 일방통행로로 바꾼다. 차도로 둘러싸인 남대문주변에 2천3백평의 광장을 조성해 시민들이 자유롭게 남대문을 찾도록 할 계획이다.남대문∼서울역간에는 너비 22m의 가로공원을 꾸며 보행자만 다니게 한다. 1만3천평의 서울역광장은 철로위를 복개해 승객과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복합시설광장으로 만든다.2005년까지 서울역앞 고가도로를 철거하고 퇴계로∼공덕동,후암동∼공덕동간 연결도로를 새로 개설한다. ◇서울 상징거리 조성=도심·용산·강남구간 등 3개 구간으로 꾸민다.팔경과 삼승이절의 전통경관 기법을 도입한다. 서울상징 거리의 주요부를 팔경으로 설정했다.1경은 경복궁과 세종로로 역사를 상징하며 2경은 덕수궁과 시청앞이다. 도심을 상징하는 명동과 야경광장이 3경으로,남산과 서울타워를 4경으로 조성한다.세계화의 상징인 용산공원과 이태원 풍경이 5경,한강과 반포대교는 6경이다. 7경은 서초공원과 공공건물단지이고 8경은 예술의 전당과 문화예술거리로 정했다. 팔경중에서 대표적인 경관을 특별히 조성,경복궁과 광화문광장 등 삼승이절로 가꾼다. 1승인 경복궁과 광화문광장은 6백년 역사의 서울을 다시 보는 경관으로 조성한다. 2승은 이태원과 세계민속 풍물단지로 정해 세계로 열려 있는 서울의 경관으로 꾸민다. 3승은 예술의 전당과 문화거리로 해 신명나는 화합의 장으로 가꿔나간다. ◎교통체계/내자동길 폭45m 10차선 확장/시청앞 광장 일방통행식 개선 ◇교통=국가중심 가로 조성에 따라 도심의 주요 교통체계가 2005년까지 대폭 바뀐다. 현재 일점 집중형으로 설계된 교통흐름을 격자형으로 바꿔 분산하고 좌회전신호를 최대한 없애 직진과 우회전으로 단순화한다.서울역 좌우에 50m의 복개도로를 만들고 여러 곳의 도로도 확장한다. ◇광화문광장 주변=광장조성으로 현재 광화문앞 도로가 폐쇄돼 내자동길이 기존도로의 역할을 맡는다.내자동길 7백m는 폭 20m에서 폭 45m 왕복10차선으로 확장된다.사직터널과 율곡로구간에 폭 16m,길이 4백m의 지하차도를 건설,사직터널에서 곧바로 율곡로로 진입하도록 한다. 종합청사 뒷길도 5차선으로 확대,구기터널방향에서 율곡로 또는 세종로 진입차량이 이용하도록 한다. 시간당 차량은 현재 2만7천4백대에서 2만8천9백대로 약5%가량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시청앞광장=일방통행식의 로터리방식으로 개선한다. 서울신문사 북측∼무교동길이 편도 7차선으로,무교동길은 편도 5차선으로 각각 확장되고 북창동길과 소공동길도 대폭 넓어져 기존도로와 연계된 하나의 로터리로 바뀐다.서소문로는 폭 30m에서 36m로 넓어진다. 서소문로에서 광화문방향으로 갈 경우 플라자호텔뒤 북창동길을 이용한뒤 무교동길로 직진해 서울신문사 북측에서 우회전하도록 한다. 태평로∼남대문구간은 양방향 통행이 계속 가능하다. 로터리에 접근하는 간선도로의 신호체계는 신호가 두번만 바뀌는 「2현시」로 단순화된다. 교통체계변화로 차량의 통행량이 1시간에 3만7천3백대에서 3만6천5백대로 약2%가량 줄어들고 차량의 평균 지체시간은 26.2초에서 29.8초로 약간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남대문광장 및 서울역광장=서울역 남북쪽을 50m 폭으로 복개,9차선도로를 만든다.서울역앞 고가도로를 철거해 도로구조를 남대문로 집중형에서 격자형 평면교차로로 단순화한다. 염천교에서 남대문간의 칠패길이 25m에서 40m로 대폭 확장돼 도심진입의 주요 도로로 이용되며 서울역∼남대문간 도로는 공원조성이 끝나면 광장 좌우로 왕복 2차선씩만 남는다. 고가차도가 철거되면 아현동 방면에서 퇴계로로 가는 차량은 남측 복개도로를 이용하고 만리동고개에서 남대문방향으로 진입하는 차량은 칠패길을 이용해야 한다. 시는 서울역주변의 교통처리대수는 시간당 3만8천4백대에서 4만2천9백대로 12%,남대문광장 교차로는 2만4천6백대에서 2만9천4백대로 20% 가량이 늘 것으로 보고 있다.
  • 좌우합작 실패의 두안(새로쓰는 한국현대사:15)

    ◎“미군정을 인민위 넘기라” 「민전」 일방발표/방헌영,우익 수용못할 「5원칙」 내세워 결렬/미군정고문 버치 개입… 친미세력구축 노력/중도우 김규식·여운형 「합작의 꿈」 무산 미·소공동위원회 1차회담이 1946년5월 무기휴회에 들어간 뒤 미국과 소련,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남북의 정치세력은 단독정부수립을 향해 나아갔다.비록 2차회담이 19 47년 열리긴 했지만 그 회의는 예정된 수순을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했다.이처럼 남북분단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민족의 대응은 어떠했나. 외세에 영합해 정파이익 찾기에 앞장선 무리가 있었는가 하면 민족통일과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도 등장했다.남쪽에서 가시화한 통일독립시도가 바로 좌우합작운동이다.좌우합작운동은 제1차 미·소공위가 결렬돼 남북분단이 민족 앞에 현실로 대두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1차공위 결렬후 손잡아 좌우합작운동을 이끈 양날개는 우파의 김규식,좌파의 여운형이다.김규식은 미·소공위 휴회 직후 열린 「독립쟁취국민대회」에서 『남의 손에 정부가 수립되기를 기다릴 것 없이 이제 우리가 자율적으로 정부를 세우자』고 역설한다(한성일보 1946년5월14일자).그리고 그 방안으로 ▲남쪽에서 먼저 좌우파간에 합작하고 ▲이를 바탕으로 남과 북의 정파가 통합해 통일정부를 이루자는 「좌우합작론」을 내세웠다.당시 김규식은 우익의 집결체이자 미군정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의 의장이었다. 김규식의 제안에 좌파모임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의장단의 한 사람 여운형(조선인민당위원장)이 대뜸 지지하고 나섰다.이들은 「좌우합작위원회」회의가 정식으로 열리기까지 때로는 단둘이서,때로는 좌우파 각 정당·사회단체대표와 함께 만나 좌우합작을 성사시키려고 애썼다. 김규식과 여운형이 합작운동에 쉽게 동의한 것은 무엇보다 민족통일이 최우선이라는 공감대를 가졌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한 「임시정부수립」계획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는 데도 뜻을 같이했다.민족이 우선 힘을 합쳐 「임시정부」를 구성하면 신탁통치문제,일제잔재청산등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고 보았다. 이들이 이데올로기상에서 색깔이 희미했던 사실도 도움이 됐다.당시 미군정의 정보보고서는 김규식을 중도우파,여운형을 중도좌파로 일단 구분한 뒤 『근본은 민족주의자들』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19 46년7월25일 덕수궁에서 열린 좌우합작위 1차회담에는 우파의 김규식·원세훈·안재홍·최동오·김붕준등 5명,좌파에서 여운형·성주식·정노식·이강국등 4명이 참석했고 김규식이 사회를 맡았다.또 미군정측 연락장교로 정치고문인 L 버취중위가 출석했다.1차회담에서 양측은 합작의 기본원칙으로 3개 항을 합의했다.곧 ▲진정한 대의에 의한 민주공화국수립 ▲진정한 애국자,혁명가,나라를 사랑하는 모든 세력이 단결하여 민족통일달성 ▲북한에서도 진정한 민주적인 언론출판의 자유,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기초 위에서 남북이 합작해야 한다는 것들이다. 그러나 좌우합작운동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친다.합작위의 좌파 파트너인 민전은 1차회의 다음날에 양쪽 합의사항을 무시한 새로운 「합작5원칙」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그 내용은 「미군정의 정권을 인민위원회에게 넘기라」는 등 미군정과 우파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었다.이 5원칙은 박헌영이 제안한 것으로,그 목적은 좌파내 지도권이 여운형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견제하는 데 있었다.좌파는 이어 7월29일 열린 2차회담에 불참했다. 그리고 나서 8월에 접어들어 정국이 일대격변에 휩싸이는 바람에 좌우합작은 뒷전으로 밀린다.조선공산당이 「신전술」을 채택해 「9월총파업」「10월폭동」이 잇따라 벌어졌으며 이에 따른 견해차이로 남쪽의 좌파세력이 4분5열돼 합작운동에 눈돌린 겨를이 없었다. ○기본원칙 3개항 합의 더욱이 미군정이 그해 9월 좌우합작위원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속셈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좌우합작운동은 위기를 맞는다.미군정은 김규식이 처음 좌우합작에 나설 때부터 적극적으로 지원한 것은 물론 어떤 때는 운동을 주도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열의를 쏟았다.정치고문 버취중위는 매번 회의에 참석해 회의진척상황을 평가하는 보고서를 군정측에 냈다.이같은 사실은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워싱턴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최근 입수한 문서로 확인됐다(별도기사 참고). 이 문서에서 드러나듯 미군정은 자체 필요에 의해 좌우합작을 지원했으며 합작방향을 원하는 쪽으로 이끌기 위해 배후조종을 시도했다.미군정의 목적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입법의원)」에 좌파를 참여시키는 데 있었다.미군정은 친미세력기반을 안정시킬 의도로 과도입법기구인 「입법의원」을 구성하려고 했다.선출방식은 지역유지들을 통한 간접선거였다.미군정은 이에 관한 법령을 46년8월 제정하지만 여건이 무르익을 때까지 숨겨왔다. 그러나 9월 언론에 관련보도가 나가자 미군사령관 하지중장은 버취중위를 통해 좌우합작위에 눈길을 보낸다.합작위에서 입법위원의 절반을 선출하도록 해주겠다는 것이다.이는 합작위의 위상을 높여주는 제의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합작위 자체를 입법의원으로 수렴하려는 시도였다.미군정의 제의는 거센 찬반논쟁 끝에 좌우합작위에 받아들여진다.하지만 이 과정에서 합작운동에 참여한 숱한 정파가 떨어져나갔다. ○「남 단독정부」로 기울어좌파대표 여운형은 9월23∼30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와 기자회견을 가졌다.그는 『좌우합작에 쌍방이 매우 접근하다가 여러 사정으로 중지된 것은 유감』이라면서 『민족공동의 이익을 위하여는 좌우협의가 절대필요하다』고 소신을 밝혔다. 여운형과 김규식은 계속 접촉을 가져 10월7일 「좌우합작의 7대원칙」을 공동명의로 발표했다.그 주요내용은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한 「선임시정부수립,후신탁통치해결」을 적극 지지하며 ▲친일파숙청은 임시정부의 입법에 따른다는 것이었다.이들은 입법의원에 대한 합작위원회의 입장을 정리,하지에게 통보했다. 두 사람이 발표한 합작원칙에 대해 김구 주도의 한독당 등 대부분의 정파는 크게 환영했지만 좌우의 대표정당격인 조선공산당과 한민당,그리고 이승만 진영은 분명하게 거부했다. 좌우합작위는 입법의원구성에 참여함으로써 결국 성격이 변질된다.간접선거를 통해 선출된 의원은 거의 우파들이었고,합작운동보다는 「남한 단독정부수립」에 기울어졌다.입법의원은 1947년1월 「신탁통치반대 긴급결의안」을 채택해 단정수립을 촉구하고 나섰다.입법의원을 좌우합작에 활용하려던 좌우합작파는 오히려 그 터전을 잃고 물러나야 했다. 미·소공위 2차회담이 6월25일 열리자 합작파는 「시국대책협의회」를 구성하는등 안간힘을 쓰지만 단정으로 흐르는 거센 물결을 막지는 못했다.그리고 7월19일 합작운동의 좌파지도자인 여운형이 서울 혜화동로터리에서 총격을 받아 숨졌다.좌우합작운동은 막을 내리는 듯하다가 1948년 봄 김구·김규식이 주도하는 「남북 정당·사회단체대표 연석회의」로 마지막 불꽃을 되사른다. 좌우합작운동은 실패한 운동이었다. 그 원인은 ▲미·소의 한반도 제패전략 ▲정파이익추구에 몰두한 극우·극좌파의 견제 등에 있었다. 그러나 실패한 운동이었다고 해서 이를 무시할 수는 없다. 좌우합작파가 외세의 개입을 차단하고 어떻게든 통일자주정부를 세우려 애쓴 점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더욱이 남북통일의 기운이 무르익는 현시점에서는 해방정국에서 벌어진 좌우합작운동의 실상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를 이 시대에 활용하려는 노력이 더욱 필요하다. ◎박헌영·여운형 갈등… 회담 깨졌다/버치보고서 내용/박헌영,“좌파대표에 회의참석 말라”/버치,좌우양쪽 움직임 낱낱이 파악 미군정 공보국 소속 레너드 버치중위는 하지사령관과 아놀드군정장관의 정치고문이었다.1946년 5월 전임자인 굿펠로의 귀국후 정치고문을 맡았지만 그해 1월5일 박헌영과 존 스톤(뉴욕타임스 서울특파원)의 기자회견에 간여해 그 내용을 왜곡시키는 등 일찌감치 정치공작에 뛰어들었다.그는 『스스로를 마키아벨리처럼 착각,남한 정계를 마음껏 주무를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정치적 책략에 부심한』(마크 게인 저 「해방과 미군정」속에서)인물이었다. 좌우합작에 대한 버치의 공작은 미군정측에 보낸 보고서에서 그대로 드러난다.다음은 좌우합작위원회 2차회담이 예정된 1946년 7월29일 작성된 「좌우합작회의에 관한 버치의 4번째 보고서」내용이다. 『일요일인 7월28일 저녁 박헌영이 합작위 좌파대표들에게 회의 불참을 지시했고 이 문제로 박과 여운형이 논쟁을 벌였다.다음날 상오 10시 김규식은 여운형으로부터 「몸이 아파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며 며칠동안 입원해야겠다」는 사신을 받았다』 버치는 이어 2차회담 연기가 박헌영과 여운형의 갈등 때문에 비롯되었다고 분석했다.또 김규식으로부터 좌파 대표인 김원봉·허헌등을 만나 설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이 보고서에서 보듯 버치는 좌우 양쪽의 움직임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으며,양쪽의 이견을 조정하거나 한쪽을 설득하는 일도 맡았음을 알 수 있다.미군정의 지원은 초기 좌우합작운동을 활성화하는데 도움이 되긴 했지만 이는 합작운동을 이끈 지도자들에게 끝내 족쇄로 작용하게 된다.
  • 2차 미·소공위 결렬(새로쓰는 한국현대사:14)

    ◎소,「임시인민위」 북 대표로 즉각 승인/3상회의 결정 휴지화… 남북분단으로 치달아/이승만 도미외교… 단정수립·유엔가입 등 추진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호 〃 〃 ▲김경운 조사부 〃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분할점령은 그 자체가 남북 두개의 한국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숙명 같은 것이었다.미·소공동위원회도 사실상 허상에 불과했다.1947년의 2차미·소공위는 한반도를 더욱 절망의 구렁으로 몰아넣었다.1946년의 1차공위가 좌우대립을 부추겨 분단의 자두를 제공했다면 2차미·소공위는 남북이 서로 갈라져 영원한 평행선을 달려야 할 지미를 의미했다. ○10월 62차 본회의 끝으로 제2차미·소공위는 1947년10월18일 제62차 본회의를 마지막으로 결렬되었다.자국의 이데올로기 옹호론에 빠져들기 시작한 2차미·소공위는 그해 여름부터 불투명한 조짐을 보였다.소련이 먼저 미군정의 공산당및 좌익계 검거를 비난하고 나서자 미국은 북한에 감금된 주요인사의 석방을 요구했다.그해 8월 평양에 간 미국 수석대표 WC 브라운소장은 고려호텔에 연금된 조만식을 면회한 바 있었다.그리고 10월 미군정 정치고문 랭던이 한차례 더 면회한 이후 조만식을 만났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미국과 소련은 미·소공위 결렬과 함께 한반도정책을 곧바로 바꾸었다.이는 한반도에 이념이 다른 두개의 정권탄생을 예고했다.미국의 정책전환에는 대전이후 소련군이 진주한 동유럽 여러 나라의 사회주의정권 출현이 자극제로 작용했다.더구나 소련의 절대적 영향력을 받고 있던 북한에서는 이미 1946년2월9일 임시인민위원회가 공식출범한 상태였다.그리고 광복1주년을 맞아 8월15일에는 대규모 행사를 열어 임시인민위의 존재를 대내외에 과시하고 소련을 찬양했다(별도기사 참고). 미군정은 북한의 재빠른 임시정권성립에 위협을 느꼈다.평양에서 북한 임시위원회가 성립된 1946년2월9일은 제1차 미·소공위 첫모임(1월16일∼2월5일)이 서울에서 막 끝나고 다음 예비회담(3월20일)을 기다리는 시기에 해당한다.마침 남한에서는 공산당을 중심으로 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결성되었다.당시 미군정의 위기상황은 하지의 2월말 보고서에 잘 나타난다.「소련은 앞으로 탄생할 조선임시정부의 지배권을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하도록 북한임시인민위원회를 북한의 대표로 받아들이고 남한공산주의자대표를 더 늘리라고 강요하고 있다」(미 대외문서철·1946년) 그렇다고 해서 미군정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른 통일임시정부수립노력을 일찍 포기한 것은 아니다.19 45년10월 환국한 이승만의 소련과 공산주의 매도발언(미 국무성이 일본 정치고문서리 애치슨에게 보낸 전문·1945년10월)에 제동을 걸면서 「말썽꾼」으로 몰아붙였다.한반도문제는 미·소공위를 통해 소련과의 협조하에 해결하는 것은 물론 그 가능성이 남아 있는 한 이승만을 경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특히 단정을 주장한 1946년6월 이승만의 정읍발언에 주목한 미군정은 그해 12월 미국을 방문한 그의 워싱턴행적에 대해서도 내내 신경을 곤두세웠다(주한미24군 G­2 주간정보·1946년12월).하지는 1947년7월까지도 이승만을 싫어했다. 이승만의 도미외교의 성과는 당시로서는 판단하기가 일렀다.미국내에서도 대전 직후부터 논의되던 대소외교정책이 뚜렷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화평파와 강경파로 나누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미국내 대소강경파에 가세,미국의 정책을 반소·반공으로 전환시켜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당시 이승만의 대미외교활동을 도운 사람은 임병직이었다.임병직은 뒷날 국무차관보 J R 힐드링이 이승만을 지지한 반면 동아시아국장 H 보튼과 극동국장 J K 빈센트는 반대입장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지,이승만을 따돌려 미군정은 임시정부수립노력의 하나로 좌우합작위원회에도 기대를 걸었다.1946년8월26일 하지장군은 우익대표 김규식,좌익대표 여운형에게 격려서한을 보낸 데서도 이런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이무렵 공산당의 활동도 만만치 않았다.테러리즘으로 전술을 바꾼 공산당의 활동은 미군정이 8월28일과 29일 청주와 부산지역 공산당비밀회합에서 압수한 1급비밀문서를 통해 드러났다.이들 문서는 공산당원들의 자기희생을 요구하면서 앞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한 정부에서로 다른 정치체제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역사에는 우연이 없다고 한다.그런데 공교롭게도 이승만이 미국에서 반소·반공노선을 주창하는 정치활동을 펼치던 1947년3월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되었다.이를 직접발표한 트루먼은 「소수파가 독재정치를 강요하는 공산주의와 대항,자유민주주의제도 보전을 위해 싸우는 세계 모든 국민을 원조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소련에 대한 미국의 강경정책은 이승만의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그러나 이승만 같은 대소강경파에게는 아주 유리했을 뿐 아니라 또 그런 반소·반공주의자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48년 분단고착 구체화 이승만은 귀국을 서두르면서 자신의 주장이 관철된 것처럼 보이는 발언을 했는데 그 내용은 국내에 곧바로 보도되었다.「미국은 30∼65일이내에 남한에 단독정부수립을 허용하고 UN가입을 지원하는 동시에 서울에 대사격의 고등판무관을 파견할 것이다.미군은 소련군이 북한에서 철수할 때까지 남한에 주둔할 것이다」(서울신문 1995년3월25일자).미국은 국무성 대변인을 통해 남한의 단정수립추진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부정했다.그러나 4월초 귀국한 이승만은 자신과 미국무성 차관보 힐드링장군과 협의한 사안임을 다시 환기시켰다. 이에 대해 하지장군은 미 국무성이 그런 양해를 한 사실이 없다고 부인했다.그리고 5월에 제2차 미·소공위가 열려 한반도의 통일임시정부가 수립될 것처럼 보였다.따라서 이승만의 도미외교는 실패한 인상이 짙었다.그러나 일련의 발언이 미·소공위가 결렬되었을 경우를 미리 생각한 대안이었음을 곧 알게 되었다.미국은 제2차 미·소공위가 공전하는 가운데 한반도문제 해결에 아무 도움을 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나서 미국은 한반도문제를 국제연합(UN)에 넘겼다.소련외상 N Y 비신스키의 반대발언에도 불구하고 미 국무장관 G C 마셜의 이 제안은 2차미·소공위가 결렬되기 약 한달 전인 9월21일 UN총회 운영위원회를 통과했다.이로 인해 최소한 5년의 신탁통치를 전제로 한반도에 임시정부를 세운다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뒷받침하는 미·소공위야말로 무의미한 만남에 불과했다.그래서 미국 수석대표 W C 브라운의 제의로 제2차 미·소공위는 막을 내렸고 1947년은 순탄치 않게 저물었다. 그러나 민족의 운명을 분수령에 세울 1948년은 복잡한 양상을 띠고 다가왔다.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가는 예정된 수순을 밟는다.남한에서는 유엔 한국위원회가 지켜보는 총선을 거쳐 대한민국시대를 맞는다.그것은 분단고착을 구체화한 두개의 국가였다. ◎「해방1돌 기념식 북조선계획안」 발굴/서울신문 특별취재반 미 국립문서국 통해/스탈린 예찬·기념비건립 추진… 소 예속 드러나 북한 공산주의사회가 오늘날까지도 체제유지를 목적으로 동원하는 대규모 선전선동수단은 이미 해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이는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미 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발굴한 1946년의 북한문서를 통해 밝혀졌다.이름은 「해방 제1주년 기념식준비에 관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계획안」.6쪽분량의 등사물로 이루어졌다. 이 문서는 남한에 앞서 19 46년2월9일 사실상의 북한정권으로 등장한 임시인민위원회 성립을 경축하기 위해 마련한 기획안이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끌고 있다. 특히 김일성이 발표한 20개 정치강령을 널리 선전,정치사업을 강화하라는 지시는 김일성 중심의 북한정권성격을 일찍부터 드러낸 대목이다.그리고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맞서는 반대파와의 투쟁을 부추긴 내용은 사뭇 선동적이다. 이와 더불어 소련 스탈린대원수에게 인민의 명의로 선물과 축하문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이를 소련군과 협의할 것을 지시했다. 또 스탈린을 조선의 친우·해방자·승리자로 예찬하면서 주요도시에 기념비 및 기념관건립을 계획하는 등 소련에 철저하게 예속되었다는 사실도 나타났다.여기에는 붉은 군대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도시의 가로명과 공원·광장이름을 모두 바꾸는 계획안도 포함되었다. 조직사업·선전 및 군중사업으로 나누어 30개항의 기념사업내용을 담은 이 문서는 8월15일에 각 도시와 농촌이 모두 나서 경축 군중집회를 열도록 다그치고 있다.임시위원회 위원장 김일성과 서기장 강양욱 명의로 작성했는데 내로라는 공산주의자 15명이 중앙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다.위원명단에는 월북문인 이기영과 한설야의 이름도 보인다.
  • 「조선공산당일지」영역본입수/서울신문/특별취재팀,미공문서 관리국통해

    ◎45년 12월∼46년 5월 주요사안 기록/남한의 기공­북 공조관계 보여줘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은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19 45년 12월26일부터 46년 5월14일까지 조선공산당(조공)의 주요사안을 기록한 일지내용을 입수했다.이 문건은 미군정이 19 46년 5월18일 조선공산당 중앙당사에서 압수한 원본을 영역한 것으로 주한 미24군 정보처(G­2) 주간정보문서철에 들어있다. 조공의 고위직 상임위원이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문건의 명칭은 「공산주의 일기」.남한의 조공과 소련,북한과의 밀접한 공조관계를 보여준다.46년1월6일 일지는 정재달이 무사히 귀환했다고 기록했는데,특별취재반이 NARA에서 입수한 다른 문건을 통해 그가 북한에서 1만원의 자금을 가져온 것도 확인했다.그리고 1월8일에는 이주상(조공 중앙집행위원)이 남한의 신문과 비밀문서를 가지고 입북한 사실을 적고 있다. 이 무렵에는 미군에도 공산주의자들이 존재했다는 사실도 이 일지가 입증했다.3월2일 공산당원 김이 제플린,노먼,크론스키를 만났다는 대목인데 이들은 모두사병으로 공산주의자로 알려진 인물들.또 조공 간부들은 서울의 소련영사관을 드나든 기록도 여러번 나온다.당시 남한에서 통용되던 조선은행권을 북한의 소련군이 몰수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서울의 소련영사관을 통해 이들 돈이 공산당 수중에 들어갔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조공 당원들의 입북과 동시에 평양의 조공 북조선 분국에서도 서울에 수시로 당원을 보냈고(3월11일),인민당의 이강국과 김원봉이 회동(3월25일)한 이야기도 나온다.5월2일 하오6시부터는 문제의 조선정 판사에 4백50명이 모여 「소비에트 쇼」등 소련영화 2편을 관람했다고 기록함으로써 위폐사건의 진원지 정 판사가 조선공산당의 아지트였음을 드러냈다. 5월14일에는 여씨(여운형),박동지(박헌영),허(허헌),김(김원봉),백(백남운),강(강진) 제씨가 모여 성명을 논의한 끝에 찬성했다고 썼다.성명은 아마도 5월8일에 발표한 미소공동위 연기에 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46년 남한의 공산당 활동(새로 쓰는 한국현대사:13)

    ◎미소공위 깨지자 9월 파업·10월 폭동 주도/「전평」앞세워 산업마비·사회혼란 획책/정 판사 사건 계기 미군정 좌익소탕 반격/“무모한 좌경 모험주의”북 질책에 박헌영 남노당 결성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호( 〃 〃) ▲김경운(조사부 〃) 1946년의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불확실한 한반도에 아무런 빛이 되어주지 못했다.특히 북위 38도선 이남에는 더욱 어두운 그림자를 깔아놓았다.그해 5월6일 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남한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렸다.북한이 소련의 의도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것과는 사뭇 대조를 이루었던 것이다. 찬·반탁의 좌우익 대결구도 속에서 맞은 미소공위의 결렬은 좌익쪽에 더 많은 좌절을 안겨주었다.찬탁을 주장했던 좌익은 미소공위를 통한 정권장악이 수포로 돌아가자 새로운 전술을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그래서 조선공산당은 정당방위를 위한 역공세라는 구호를 들고 이른바 신전술을 펴기 시작했다.폭력에 호소한 이 전술은 실제 9월총파업과 10월 폭동 등으로 나타났다. 조선공산당의 신전술을 소련의 지령에 의한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1946년 7월 박헌영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는 사실은 이를 어느정도 뒷받침한다.현재 모스크바에 살고있는 박헌영의 친딸 리비안나 박도 최근 한국 언론에 이를 시인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짙다.그해 7월 하순께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가 신전술을 발표한 것도 그의 모스크바 방문과 일치하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미군정의 공산당에 대한 표면적 탄압은 이보다 일찍 시작되었다.5월16일 공산당 본부 급습과 함께 이루어진 공산주의 비밀문서 압수가 그것이다.특히 19 46년 5월25일에 일어난 조선정 판사 위조지폐사건을 계기로 남한 전역의 좌익본부를 모조리 조사했다.하지장군은 공산당에 대한 모종의 조치를 취하기 위한 착수가 끝나자 「공산당과 그들의 활동을 제재할 때가 되었다」면서 「희생양이 필요하다면 본인이 기꺼이 수락하겠다」는 보고서를 맥아더에게 보냈다(주한미군사령관이 미 태평양사령부에 보낸 전문·1946). 하지의이같은 보고서는 공산주의 활동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주한미군인 24군단 정보처(G­2)와 방첩대(CIC),경찰조직을 통해 남한의 공산당과 소련의 연결고리를 확인한 미군정은 간첩활동 증거도 찾아냈다.여기에는 남한의 경찰과 경비대 침투,식량배급 방해,납세거부,군중선동,각종 사회단체 장악등의 지령이 포함되었다.조선공산당 본부와 원주지부,인민당 정치국장 김세용 집에서 찾아낸 문서들은 간첩활동을 입증한 대표적 케이스로 기록된다. 조선공산당이 7월6일 발표한 신전술의 슬로건을 보면 미군정에 대한 전면투쟁 양상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테러는 테러로,피는 피로 갚자」는 기치를 선명하게 든 공산당은 같은 계열의 연합체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전면에 나서는 대중적인 파업투쟁을 계획한다.전평을 조선공산당 세력구축의 발판으로 삼았던 박헌영은 당초 이 파업투쟁을 10월중에 강행한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그런데 공산당 지도부는 갑자기 총파업을 9월로 앞당기기로 수정하고 이를 긴급 지령했다. ○경찰발포로사태 악화 그 이유는 미군정 운수부가 적자타개와 노동자 관리의 합리화를 내세워 운수부 종업원의 25% 감원과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꾼다는 발표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또 9월6일 좌익계 신문인 「중앙신문」등 3개 신문이 미군정포고령 위반으로 정간되는 것과 함께 조선공산당 지도부원인 이주하가 체포되고 박헌영의 체포령이 내려진데도 그 원인이 있다.그해 10월 박헌영이 해주로 피신했는데도 남한 열성당원들은 그의 지령이 모두 서울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전국의 경찰이 비상경계에 들어간 상황에서 9월15일 철도 노동자들은 생활개선을 위한 6개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일주일간의 시한부 총파업을 미군정 철도당국에 통고한다.미군정의 성의있는 응답이 없자 23일 7천명의 부산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간 것을 시발로 24일에는 남한 각지에서 4만명의 철도노동자들이 연대투쟁을 벌였다.조선공산당의 전평을 주축으로 한 남조선총파업투쟁위 구성과 파업선동은 철도뿐 아니라 전기 체신 출판산업을 마비상태에 빠뜨렸다.이에대한 동정파업은 은행 회사 병원 미군정청까지 파급되었다.미군정은 이에맞서 9월30일 경무총감 장택상의 지휘로 파업 농성중인 경성공장 기관구 통신구에 진입,1천7백명의 철도종사원을 검거함으로써 일단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10월에 접어들면서 노동자들의 파업여파는 또다른 양상을 띠고 10월1일 대구폭동으로 이어졌다.부녀자들을 앞세워 쌀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된 이 사건은 경찰의 발포로 악화되어 경북 일원과 경남 전남등 전국 73개 지역으로 확대되었다.그러나 대중파업 지도의 경험이 없었던 전평은 간부들이 거의 검거되는 바람에 위기에 직면하고 만다.그렇다고 노동자 농민에게 어떤 정치·경제적 혜택을 안겨준 것도 아니었다. 미국 버클리대 교수를 역임한 RA 스칼라피노는 자신의 저서 「한국공산주의 운동사」에서 9월 총파업은 군정을 정치·경제적으로 악화시키려는 공산당의 음모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파업과 태업이 운수와 전기산업을 주 대상으로 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는 그는 9월 총파업은 결국 악화된 남한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것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그는 이 저서에서 파업과 폭동등의 일련의 사태는 소련의 새로운 정책이 박헌영을 거쳐 조선공산당에 의해 시행되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2개당 6개파벌로 분열 조선공산당은 9월 총파업을 전후로 여운형의 인민당,백남운의 신민당과 합당을 논의한다.좌익 3당의 합당은 9월파업과 무관치 않다는 설도 있다.다시 말하면 박헌영 자신이 헤게모니를 잡은 뒤에 합당추진의 반대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파업을 조기 결행했다는 것이다.3당 합당은 좌익세력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기 때문인데,동상이몽(의 합당은 내부분열을 일으켰다. 북한 지도부는 또 나름대로 남쪽의 공산당이 9월 총파업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와 인민 구국항쟁의 토대」로 삼아줄 것을 채근해왔다.그래서 박헌영은 10월6일 입북한다.당시 북로당은 박헌영을 호되게 비판하면서 「10월 인민항쟁이 무모한 좌경모험주의적 편향」이라고 몰아붙이고 북에서처럼 3당합동 추진을 강력히 요구했다.그러나 남한의 좌익은 조선공산당내 대회파와 인민당내 31인파,신민당내 반간부파 등 반박헌영세력과 조선공산당내 박헌영파,인민당내 47인파,신민당내 중앙파 등 어지럽게 갈려 있을 시기였다.박헌영은 북에 있었지만 결국 그 지지파를 중심으로 11월23·24일 서울 견지동 시천교당에서 북조선노동당을 표방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그로부터 6개월후 여운형과 백남운을 중심으로 근로인민당이 창당되었다.당초 좌익진영의 통합을 위해 추진되었던 3당합동은 2개당과 6개의 파벌로 분열된 셈이었다.좌익세력의 판도가 남조선노동당과 근로인민당의 창당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은 좌익역량 총결집이 실패로 끝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해방후 식량·농지문제(새로쓰는 한국현대사:11)

    ◎남북 모두 흉년… 귀환동포 늘어 식량난 심각/소,살 북송 않으면 대남 전력중단 위협/미군정 쌀시장 자유화… 가격뛰자 폐지/미,일인소유토지 환수… 소작농 선발나서 인구는 때로 사람들 입에 회자되는 경우가 있다.다시 말하면 먹여 살려야 할 사람들을 의미한다.광복 이듬해 19 46년의 남한인구는 1천9백36만8천2백70명.이는 해방직전에 비해 자그마치 2백80만3천8백53명이 더 늘어난 것이다.북한으로부터 남하한 인구에 일본이나 북지에서 돌아온 귀환동포들이 합세했으니 그야말로 초만원이었다. 그래서 호구지책의 민생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해방원년 19 45년은 그런대로 풍년이 들어 쌀 1천2백83만5천섬을 수확했다.그 다음해인 46년에는 장마가 져서 흉년이 드는 통에 1천2백5만섬을 수확하는 것으로 그쳤다.오늘날 3천4백만섬을 해마다 웃도는 쌀 생산량에 비하면 분명히 격세지감이 있다.농촌의 쌀 과소비 탓도 있었지만 하여튼 해방이후 군정하에서 식량사정은 매우 심각했다.쌀 산지로 유명한 경기도에서도 45년 한해에 15만4천섬이 모자랄 정도였다. ○경기서만 15만섬 부족 우리 민족의 생활에서 쌀은 대단한 존재다.쌀농사 문화권(미작문화권)에서 쌀은 주식이려니와 재화의 척도가 되었다.그럼에도 1945년 미군정은 쌀의 중요성을 그리 깊이 인식하지 못한 것 같다.군정은 10월11일 쌀을 시장기능에 맡기는 쌀 시장 자유화 시책을 시행했던 것이다.여기에는 물론 미국적 사고의 자유시장 경제원칙이 적용되었다.또 일제의 수탈로 위축된 농촌경제에 활로를 열어준다는 의도도 가미되었을 것이다. 미군정이 쌀 자유시장 시책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데 2주일이 걸렸다.그래서 군정은 한국경제를 위해 언제라도 식량을 통제하겠다고 선포했다.자유시장이 개설되고 나서 쌀 값은 해방전 암시세인 1말 1백50원선을 웃돌았다.도시민들은 자유시장 기능 정지와 배급제 실시를 연일 외쳤다.미군정은 다음해 1946년 2월 자유시장 폐지와 아울러 긴급법령으로 전년도에 생산한 쌀 수집령을 공포하기에 이른다. 하지장군의 경제고문 A C 번스는 쌀 자유시장 채택이 잘못이었다고 시인했다.그는 기자회견에서 『내 생각으로는 작년에 도입한 쌀 자유시장을 큰 실수를 저지른 것으로 본다』고 시행착오를 인정하고 나섰다(서울신문 1946년9월4일자).그런 우여곡절을 겪고 수집령을 내린 1946년 2월은 수확기로부터 3∼4개월이 지난 뒤였다.마침 2월2일은 마음놓고 선호할 수 있는 해방후 첫 구정이어서 농촌 쌀 소비량은 절정을 이루었다. 군정이 전국에서 수집한 쌀은 68만3천섬에 불과했다.서울시민 1백20만명에게 하루 1홉꼴씩 일곱달 반을 배급할 양을 겨우 수집한 것이다.이에앞서 1월25일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에서 소련은 지체없이 북한에 쌀을 보내지 않으면 전력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해왔다.그러나 미국산 잡곡으로 간신히 배급제를 유지하는 남한 실정으로는 어려웠다.북한은 8만㎾가 넘게 송전하던 전력을 4월부터 최하 3만2천㎾로 실제 내려버렸다. 한반도의 민생경제가 몹시 궁핍했다는 사실은 미소공위 예비회담에서도 보여주었다.최종 확정한 15개 항목 의제가운데 민생 경제관련 분야가 6개항목을 차지했다.쌀과 전력을 포함한 원자재,연료,화공품 교역과 철도차량 운송문제 등이 그것이다. ○미,쌀 수집령 긴급공포 철도는 북한에 미군보다 먼저 진주한 소련군에 의해 1945년 8월27일 자정을 기점으로 이미 끊긴 것과 다름 없었기 때문에 물자교환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다.남한에서는 농사짓는데 쓸 비료가 당장 필요했다.그러나 비료와 같은 중화학공업은 당시 북한에 있었다. 1946년 2월5일 미소공동위원회 예비회담이 급히 막을 내린 이유의 하나도 쌀이다.쌀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다른 어떤 사안도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다.소련대표 스티코프 대장은 쌀 공급요청을 되풀이하면서 더이상 토론할 일이 없다는 식으로 일방적 폐회 결론을 내렸다(주한미군사령관이 연합군사령관에 보낸 전문·1946년2월5일).미소공위 예비회담에서 노린 소련쪽의 주목적은 쌀이었다.소련은 북한에 쌀만 준다면 남한에서 아주 필요한 전력,석탄,비료를 보내줄 수 있다고 매달렸다(주한미군사령관이 연합군사령관에 보낸 전문·1946년2월7일). 미군정은 일본인 소유재산,특히 농지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23만1천3백㏊에 달했는데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우선 법령을 만들어 1945년 9월25일부로 일본인 재산 모두를 확보했다.이어 미군정은 이상한 현상들을 발견한다.그 하나가 해군대위로 전남도 미군정에 참여한 바 있는 E G 미드(전 버지니아대 교수·90년 작고)의 저서 「주한미군정 연구」에 나온다.「내가 전남에 도착했을 때 마침 수확기였는데 아무도 일본인 논의 벼를 거두어들이지 않고 있었다」는 대목이다. 일본인 소유농지를 법적으로 귀속시킨 미군정은 1945년 11월 신한공사(신한공사·New Koean Co.)를 서둘러 만들었다.과거 일본의 농촌수탈 법인격인 동양척식회사 보유 농지는 물론 다른 개인소유 토지를 인계받은 신한공사는 농사를 지을 소작농을 선발했다.미군정의 농지정책은 소련과 소련의 조종을 받는 좌익세력의 비난이 늘상 따라다녔다.왜냐하면 북한은 명목상 임시인민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19 46년 초반기에 토지개혁을 끝내고 이를 선전자료로 삼았기 때문이다. ○여론도 토지개혁 반대 미군정도 토지개혁을 그냥덮어둔 것은 아니다.하지장군은 일본인의 재산,그중에서도 농지처리문제 결정을 워싱턴에 요청했다.국무부는 이를 지지하면서도 정작 행정지침은 내려보내지 않아 수포로 돌아갔다.결국 사문화한 1946년 2월 미군정의 농지령 역시 농지개혁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15년동안 농지를 점유한 농민에게 자작을 허용하고 대신 일정액의 현물지대를 내는 것을 골자로 한 이 법령은 군정기간 내내 빛을 못보았다. 미국의 입장은 새로 태어날 한국정부에게 농지개혁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었다.실제 군정이 1946년 3∼6월 사이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의 3분의2 이상이 장래의 한국정부가 담당하길 희망했다.이 조사에서 서울에서는 응답자의 89%,농촌에서는 68%가 북한의 토지개혁을 알고 있었다.그러나 이와 비슷한 입법여부를 물어본 결과 서울의 73%,농촌의 56%가 반대했다는 것이다(미외교문서시리즈·1946년). 북한에서는 토지개혁이 소련군 명령에 의해 거의 몰수성격을 띠고 19 46년 1월부터 강력히 진행되었다(별도기사 참조).김일성은 그해 4월10일 「토지사업을 결산하는 보고서」에서 『북조선 경제생활 향상을 위해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고 자찬했다.그러나 북한은 지금 혹독한 식량란을 겪고있다. 역사의 존재가치는 개인의 자유가 어떻게 존중되느냐에 있다고 한다.그럼에도 역사를 무시한 북한의 고립주의적 주체철학은 「다 함께 침몰하는 운동」을 가속화시켰는지도 모른다.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미( 〃 〃) ▲김경운(조사부 〃) ◎「꼭두각시」 북정관 연구에 큰가지/서울신문 입수 미 노획문서를 보고/토지·농업 등 정책 배경 드러나/당시 행정 소군 사령부서 명령 서울신문이 입수한 미국의 노획문서는 해방 이후 북한 실정을 연구하는데 있어 그 어떤 자료보다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특히 이 문서와 같이 북한의 각급 행정당국 간에 내부적으로 전달된 문건일 경우 북한 당국이 공식적으로 발간 혹은 발표한 자료에 포함되지 않는다.그래서 구체적인 정책 입안과정이나 배경등이 파악된다는 점에서 가치는 더욱 커지는 것이다. 이들문서 2건은 1945년 12월과 1946년 1월 초에 생산된 문서로서,모든 농업및 토지 문제에 관련된 자료이다.모두 『북조선 주둔 소련군 사령부의 명령』에 의해 작성되었음을 명기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1945년 12월 문서의 경우 『북조선 농림국은 소련군사령부의 명령에 의하여 임시조치 시정요강을 좌와 여히(왼쪽과 같이) 포고함』이라고 명기했다.이로 보아 이 당시 북한의 행정은 명백히 소련군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따라서 마치 자치정부인양 선전되었던 임시인민위원회가 실제로는 소련군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 하부기관에 불과했던 것이다. 1946년 1월의 문서는 제목 자체가 소련군사령관의 명령서이기 때문에 「북조선주둔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와 「참모부장 벤코프스키」의 이름으로 발령된 것이 당연하다.그러나 1945년 12월의 문서는 「북조선 농림국장 이순근」의 이름으로 포고되었는데 이는 외형적으로 당시 북한의 각종 정책이 한국인으로 구성된 정부기구에 의해 자율적으로 제정 집행된 것처럼 보이게 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해석된다. 농림국 문서 내용 중에 각별히 눈에 띄는 것은 1945년 12월 이전에 이미 전일본인 소유 재산과 「친일파 및 민족반역자」의 재산을 몰수하여 인민위원회 혹은 농민단체에서 관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이 문서에는 조선인 지주들이 「건국성납」이란 명목으로 토지등을 내놓았다는 증거가 들어 있다. 1945년 12월에 『전도농호등록을 행하고 매년도 말까지 그 이동을 보고』토록 한 뒤 46년 1월부터는 북조선주둔 소련군사령관이 전농호를 조사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여기에는 각종 토지사용자들(농민·소작농·지주·사원 소유지 기타)과 일체 국유지,이전 일본인 소유지들이 세밀하게 포함되었다.토지면적조사는 46년 2월15일 이전까지 끝내도록 지시하였다. 어떻든 이러한 조치들은 모두 토지개혁 준비에 필수적인 과정이다.그래서 북한의 토지개혁이 1946년 3월에 시작하여 한달만에 완료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 것도 이처럼 1945년 말부터 그 준비작업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 본사,「소대표지원… 공산당 지침」 발굴/랭던보고서

    ◎미군정청 입수… 좌익 투쟁정책 수록 )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19 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릴 때 조선공산당이 소련대표단과 동일노선을 걸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를 긴급입수 했다.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이 소장한 이 문서는 미국대외정책(FRUS·1946년)에 들어있는 미군정 정치고문 랭던이 마셜 국무위원에게 보낸 보고서의 첨부물인 노획문서.당시 좌익의 선전및 시위는 소련대표를 지원하기 위해 중앙집중화한 형태로 조직된 공산당에 의해 통제되었다는 사실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첨부물들은 미 군정청 대공정보부대 장교들이 46년 5월께 입수한 것이다.조선공산당 부산시와 인천시인민위원회가 같은 해 3월말부터 4월3일까지 미소공동위와 관련,각 지역 지부 당원들에게 지시한 선전및 투쟁정책을 고스란히 담고있다.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지지한 조선공산당은 이 문건을 통해 반민주적 정당과 조직및 개인이 포함된 친일파 반역자는 철저히 배제돼야 한다는 당 기본노선을 밝혔다.그리고 임시정부 구성 협의대상이 선정되면 미국측이 최우선 해결과제로 내세우는 38선 철폐를 비롯,경제·행정적 문제등은 자연히 해결될 것이라는 소련대표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인물속성도 소련측과 대동소이하게 박헌영 여운형 허헌 김두봉 김일성 이주하 최무정 김원봉등은 임시정부 협의대상으로 최적격자로 분류해 놓았다.이어 이승만 김구 안재홍 김성수 조완구 조만식 장덕수 조소앙은 배제돼야 할 반동인사,김규식 김병로 홍명희 등은 찬·반탁이 명확지 않은 중도파로 못박았다. 이와 더불어 팸플릿과 영상물 뿐만 아니라 신문·잡지등 간행물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것과 모든 조직과 인민을 총동원,미소공위에 결의문과 청원서·서신등을 보내는 운동전개등 투쟁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서울신문 발굴 「공산당 지령문」을 보고/“추측 입증한 가치있는 사료”/당시의 정황과 일치… 신뢰도 높아/김창순 북한문제연구소 이사장 해방직후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협상에서 조선공산당이 소련의 입장을 옹호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이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문서가 발견되기는 처음이다.이러한 상황에서 서울신문사가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입수한 조선공산당 지령문은 상당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1945년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서도 이 문서는 상당한 신뢰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남한 공산당이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선 것이 46년 1월2일이고 당시 남한 공산당 책임자였던 박헌영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기 전인 46년 1월과 4∼5월쯤에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했다.미소공동위원회에 대비한 북한 공산당 그리고 남한 공산당의 역할에 대해 논의한 바가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소련군 사령부가 조선공산당에 대해 사실상 모든 지휘 감독 권한을 행사한 시점이기도 하다.소련이나 북한의 직접적인 문서가 아니라는 점에서 한계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조선공산당이 소련과 일사분란하게 보조를 맞추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특히 해방 당시 수집한 정보보고와 각종 문건들을 정리 분석한 첫 문서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끈다.이 문서에서 보여주는 투쟁방법등은 오늘날 북한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선전선동과 맥락을 같이한다.그래서 변화하지 않는 북한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 1946년 「미·소공위」(새로 쓰는 한국현대사:10)

    ◎「임정수립」 합의… 참여 정당·인물싸고 암투/소,반탁 사회단체 배제… 1차공위 무기휴회/자국세력 구축속셈에 남북은 단정 줄달음/「하나의 정부」 무산… 38선 제거못해 분단 고착화 우리 민족이 맞는 새해는 늘 각별한 것이었다.1946년 새해도 어떤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감 속에 다가왔다.지난해 해방원년의 세밑을 찬·반탁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야 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그래서 새해에 열리기로 되어있는 미소공동위원회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미소공동위원회에 앞서 예비회담이 그해 1월16일 서울 덕수궁에서 열렸다.미국 쪽에서는 AV 아놀드 소장이,소련 쪽에서는 T E 스티코프 대장이 대표로 참석했다.미소의 첨예한 대립은 예비회담에서부터 노골적으로 표출됐다.거기에는 장차 한반도에 태어날 정부에 자국이 서로 얼마나 세력을 확보하느냐는 속셈이 깔려 있었다. ○소대표단 120명 파견 미국은 먼저 한반도 통일에 방해가 되고 있는 38선 철폐방법을 포함한 경제문제 등 비정치적 분야부터 해결할 것을 제의했다.이에 반해 소련은이보다 정당세력 통합과 같은 정치적인 문제해결이 급선무라는 입장을 들고 나왔다.결국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한채 38선 설정으로 생긴 남북간의 비현실적인 장애요인 제거는 뒷전으로 밀려났다.예비회담은 조선임시정부 수립이라는 과대포장의 정치문제를 토의할 분과위원회 설치를 골자로한 공동성명 채택을 끝으로 2월5일 폐회한다. 예비회담이 열리고 있는 와중에도 반탁데모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미군정은 반탁세력의 협조를 얻지 못한채 3월20일 덕수궁에서 개막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 참석한다.그러나 1백20명의 대표단을 이끌고 나온 소련으로 부터 예비회담 때보다 더 도전적인 공세를 받아야 했다.당시의 기록인 「미소공위의 전말」은 회담장 분위기를 아주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스티코프는 번번이 연필을 책상에 집어던졌다.미국이 아무 것도 모르니 한수를 가르쳐 주겠다는 식으로 모욕적인 말들을 했다.아놀드장군은 안경을 벗고 일어나 스티코프에게 발언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중략)아놀드는 가끔 스티코프를 꼼짝하지 못하게 만들었다.스티코프는 39세였다.아놀드가 겸손하게 「나의 33년 군경력에서…」라고 말하면 스티코프는 기가 죽었다』(주한미군사 문서철·19 46년) 소련측은 미소공동위원회의 임무가 조선임시정부수립을 밀어주는데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그래서 회의초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따른 협의대상으로 삼을 정당과 사회단체 선정기준을 제시하고 나섰던 것이다.그 기준은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할 것 ▲진실로 민주주의적이어야 할 것 ▲장차 한반도를 대소련침략의 요새지로 만들려는 반소련적 성격을 가진 집단이나 인물이 아닐 것 등이다.모스크바 결정에 반대하는 정당이나 개인과는 협의하지 않을 것이란 원칙도 분명하게 덧붙였다. 미국은 여기서 소련이 미소공위의 가장 어려운 부분인 협의대상자 선정문제에 주목했다.이는 결국 소련이 지배하는 한국임시정부 수립을 획책하고 있다고 판단,강경한 자세로 맞섰다.신탁반대 의견을 내세웠다고 해서 전부 협의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많은 한국민의 지지를 받고있는 정당및 사회단체의 배제는 곧 숙청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소련은 「처음에 반대했어도 지금 와서라도 신탁에 동의하고 공위가 결정할 결론에 협력만 한다면 협의대상 자격을 부여할 수 있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이를 계기로 미소공위는 4월16일 한국의 개인이나 정당이 공위와 협의하기 전 반드시 서명할 것을 명시한 선언서를 채택한다.4월16일 발표한 「코뮤니케 제5호」가 그것이다. ○협의단체 기준 장애로 선언서 내용이 알려지자 좌우익은 심한 견해차를 보였다.조선공산당등 좌익계 정당·사회단체·북조선인민위원회는 즉각 지지 표명의사를 밝혔다.반면 우익및 민족진영은 이 선언서에 대한 서명은 곧 신탁통치에 동의하는 의미 밖에 없다는 이유를 들어 절대로 서명하지 않겠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미국측은 선언서 서명이 신탁에 찬동하거나 지지할 의무를 부과하는게 아니라는 식으로 설득했다.우익과 민족진영도 마지못해 5월1일 일제히 선언서를 공위에 제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소련은 이 선언서에 대한 미국의 해석에 제동을 걸었다.「선언에 서명하고도 모스크바 결정에 반대할 권리를 보유한다고 선언함은 기만이며 반동분자는 제외돼야 한다」는 완강한 태도를 보였다.미국은 이에 대해 의사표시는 언론자유 보장의 원칙이라는 점을 내세워 옹호하고 나섰다.처음부터 동상이몽격으로 대좌한 1차 미소공위는 5월6일 무기휴회에 들어감으로써 사실상 결렬되고 말았다. 제1차 공위결렬은 남한에서 좌우익간 대립을 더욱 부채질 했고 단독정부 수립론이 서서히 머리를 들었다.또 북한에서는 나름대로 「혁명적 민주기지론」에 입각한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차근차근 진행시켰다.미국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모색하면서 남한에서의 좌우합작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다. 미국의 남한 단정수립 계획은 이승만의 단정수립과 관련한 순회연설에서 드러났다.그는 6월3일 이른바 전북 정읍발언을 시발로 이리·서울·개성에서 연속적으롤 단정수립을 주창했던 것이다.미국의 단정수립 의도는 미 육군전략사무소(OSS)요원으로 당시 이승만과 빈번하게 만났던 굿펠로우의 5월24일 도미 발언이 뒷받침 한다.서울신문이 입수한 그의 발언은 『만일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대표단이 조속히 돌아오지 않을 경우 미국은 남한 단독정부의 구성을 추진해야 할 것』(미 대외정책문서·19 46)이라는 내용을 담고있다. 그러나 중도적 온건파였던 김규식과 여운형은 모두 민족단합을 통한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을 원했다.7월22일과 25일에는 좌우 양쪽이 예비회담을 갖고 29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정식회담을 갖기로 합의하는 데까지 의견을 도출해냈다.그러나 좌우합작 원칙을 둘러싼 박헌영의 극좌적인 조선공산당과 여운형의 인민당 사이의 갈등으로 좌익진영을 2차회담에 끌어들이지 못했다. ○「입법의원」 극우파 장악 미국은 또 다른 한편에서 임시정부 수립시 당면문제를 자치적으로 처리할 입법의원 설립을 추진했다.이를 위해 민주의원 의장 김규식과 조선인민당 위원장 여운형을 적격인물로 찍었다.좌우합작을 시도한 미국의 대한정책은 46년이 저물어가는 12월12일 김규식을 의장으로 하는 입법의원 개원을 성사시킨다.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후 자국에동조할 수 있는 세력확보에 고심한 미국은 입법의원 개원으로 얼핏 새로운 전기를 맞는듯 했다.하지만 입법의원도 극우파에게 넘어가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한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는 해를 넘겨 19 47년 5월21일 서울 덕수궁에서 열렸다.제1차 공위가 결렬되고 나서 다시 모이는데 어언 1년이 걸렸다.두차례에 걸친 공동위원회는 한반도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상은 자국 세력구축 무대에 불과한 것이었다.그리고 미·소의 각축 속셈을 읽어내지 못했던 좌우익 양측은 임정수립을 위한 연합체 결성에 실패했다.미소공위는 결국 남북한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에 이은 분단 고착화 이외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호( 〃 〃 ) ▲김경운(조사부 〃 )
  • 좌우익 대립 극심(새로쓰는 한국현대사:9)

    ◎반탁대회 성공하자 김구 “과도정부 추진”/좌익 찬탁 급선회후 전국 암살·테러 잇따라/반탁운동 격렬… 서울 철시·군정종사원 파업/좌우 4개정당 “임정 세워 국난 수습… 대단결” 추구 모스크바삼상회의가 결정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과 「5년이내 신탁통치」는 이 땅에 남긴 것이 없다.그런 뜻에서 회의 자체가 우리에게 대단한 역사적 의미를 던져주지 못했다.다만 이를 기화로 남북의 각 정치세력은 주도권잡기에 혈안이 돼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만다.일제 유산 처리는 뒷전으로 밀린채 좌우익 대결구도만이 전면에 떠올랐던 것이다. ○군정청 “가두시위 훌륭” 1945년 12월27일 「모스크바 결정」이 전해지자 38선 이남지역의 세밑 정국은 하루가 다르게 바뀌었다.가장 강력하게 반발한 쪽은 김구를 중심으로 한 중칭(중경)임시정부 세력이었다.중칭임정측은 28일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를 결성,4대국 결정에 대항해 시위와 파업을 벌이라고 백성에게 직접 촉구했다.이날 밤부터 서울시내에는 「반탁」벽보가 곳곳에 나붙고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다.가두연설을 한 몇몇 인사는 미 헌병에 의해 연행되기 시작했다. 김구는 「신탁통치에 대한 비협조」를 선언하고 나섰다.그는 선언문에서 『한반도는 유엔이 규정한 신탁통치 대상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4대국 신탁통치는 ▲민족자결을 바라는 민족 염원에 어긋나며 ▲제2차세계대전 중 영국이 되풀이 약속한 내용과 다른데다 ▲끝내는 극동 평화를 깨뜨릴 것이라는 주장이었다.김구는 이 내용을 4개국 원수들에게 전달하라고 미군정청에 요구했다. 29일에는 각 정당·사회단체 대표자회의가 열려 중칭임시정부와 청년단체들이 긴밀하게 협조,조직적인 반탁국민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한다.좌파인 조선인민공화국(인공)중앙인민위원회와 조선인민당도 이날 「신탁통치 배격」담화를 발표해 반탁 입장을 표명했다. 이날부터 서울거리는 철시했고 미 군정청에 근무하는 한국인들도 총파업을 선언,집단결근하고 따로 반탁 가두시위를 벌였다.이같은 분위기에 놀란 미군정청은 이날 하오8시부터 헌병을 제외한 미군 병사와 민간인의 외출을제한하는 일종의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30일에는 국민총동원위가 「국민행동강령」발표를 통해 「중칭임시정부 절대 수호」와 「외국군정의 철폐」를 호소한다.이날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송진우가 암살된 것도 그가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국민총동원위는 곧이어 31일 하오2시 서울시민반탁대회를 열었다.당시 중앙신문(좌익지로 뒤에 찬탁으로 선회,46년 9월 미군정에 의해 폐간됨)은 대회상황을 「수만명의 남녀노소가 구름같이 모여들어 탁치반대 깃발을 들고 만세를 부르며 질서정연하게 걸어갔다」고 보도하고 『기미만세(3·1운동)때를 연상케 하는 우리 민족의 항쟁표시』라고 평했다.하오4시30분쯤 끝난 이 대회는 질서정연했고 비폭력적이었다. 미군정청 보고서도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격렬한 모습이었다.그러나 호스로 물을 뿌리는 미군장교나 미국인들에게 이상하리 만큼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폭력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 시위는 훌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군정청이 추산한 시위 참가자는 5만∼7만5천명이었다. 대회 성공에 고무돼서인지 김구는 46년 1월4일 중칭임시정부를 강화해 과도정권을 수립한다고까지 선언한다.국민총동원위가 주최한 대규모 반탁집회가 1월12일 한차례 더 열린데 이어 학생들의 반탁시위가 줄을 지었다.반탁운동은 전국적 범위의 저항운동으로 전개돼 가고 있었다. ○북은 소 지령따라 찬탁 우익세력이 반탁운동의 주도권을 잡고 민심을 이끌자 남쪽의 조선공산당도 1월3일 서울운동장에서 「탁치반대민족통일촉성시민대회」를 연다.그러나 이 대회는 도중에 찬탁으로 성격이 변질됐다.조선공산당의 태도 급변은 물론 소련의 지령에 의한 것이었다.소련군 민정사령관 로마넨코는 45년 12월28일 박헌영을 평양으로 불러 모스크바 결정을 따르라고 직접 지시한다.5일만에 서울로 돌아온 박헌영은 이 대회를 「모스크바 결정 지지대회」로 둔갑시킨다.이어 인공 중앙인민위원회도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고 나섰다. 엄밀한 의미에서 당시의 대립은 「반탁」대 「찬탁」이 아니라 「반탁」대 「모스크바 결정 지지」였다.즉 「찬탁」으로 분류된 세력은 「신탁통치를 기꺼이 받아들인다」기 보다 모스크바 결정에 포함된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에 더 비중을 뒀다.어쨌든 조선공산당이 「찬탁(모스크바 결정 지지)」으로 급선회하면서 남쪽의 정국은 아수라장이 됐다.「찬탁은 좌익,반탁은 우익」이란 등식은 모든 가치 평가기준을 압도했다. 좌익이 찬탁으로 돌자 전국에서 테러행위가 잇따랐다.1월12일 서울에서 찬탁 유인물을 돌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회원 3명이 납치됐다.또 전북 전주에서는 2월8일 아침 인민위원회 회원이 죽음을 당했는데 곁에는 「신탁통치를 찬성하거나 우리 한국의 독립을 방해하는 반역자는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죽음을 당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경고문이 놓여 있었다. ○좌우 중간파 태동 계기 이 와중에서 정국을 주도하는 좌우익 4개 정당이 뜻을 합쳐 민족단합을 추구하는 움직임을 보여 그나마 한가닥 희망을 던져줬다.한민당·국민당·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의 대표들이 1월7일 회담을 열어 공동성명을 낸 것이다.이 자리에는 중칭임정과 인공측에서도 옵서버로 나왔다.4당은 『자주독립과 민주발전을 원조한다는 모스크바삼상회의의 정신을 전적으로 지지하며 신탁통치 문제는 장차 수립될 임시정부에서 해결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이어 『암살과 테러활동은 민족단결을 파괴하며 국가독립을 방해하는 자멸행동』이라고 비난하고 이를 중지할 것을 호소했다.중칭임시정부가 다음날 「4당 합의」를 공식지지하자 민족의 기대는 더욱 커졌다. 그러나 희망은 곧 무산됐다.이승만이 7일 전에 없이 강경한 반탁성명을 발표한 데 이어 한민당과 국민당이 8일 당대표들이 서명한 4당합의를 전면 부정하고 나섰다.비록 4당합의는 우익정당들의 번복으로 깨졌지만 이 때 합의한 「선 임시정부 수립,후 신탁통치 해결」원칙은 좌우합작과 통일정부수립을 목표로 한 제3세력,곧 「중간파」를 태동시켰다. 그나마 좌우연합의 기대를 걸게 한 4당합의가 깨진 뒤 좌우익은 각각 자체 기반 확보에 열을 올렸다.이는 2월1일 중칭임정의 「비상정치회의주비회」와 이승만 계열인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합쳐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비상국민회의는 뒤에 미군정청의 행정자문기관 성격을 띤 「남조선국민대표민주위원」으로 변모한다.이어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좌파 29개 정당·사회단체들이 이달 15∼16일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를 열어 우파와 맞섰다. ○“반탁” 조만식 연금당해 한편 북쪽에서는 김일성주도 아래 일사불란하게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46년 1월3일 평양에서 대규모 지지결의대회를 여는 등 주민여론을 유도하는 동시에 한쪽에선 반대파들을 어김없이 숙청했다.평남인민정치위원회 조만식의장이 1월5일 열린 긴급회의에서 「신탁통치 반대」발언을 하자 그를 고려호텔에 연금시켰다.반탁을 외치는 시민·학생들에 대한 시베리아 유형이 시작됐다. 모스크바 결정을 실행하기 위한 실무회담인 미소공동위원회 1차회담은 46년 3월20일 덕수궁에서 열렸다.모스크바 결정이 내려지고 미소공동위 개최까지의 석달동안 이땅의 정치세력들은 뭉치지 못했다.민족의 통일·독립을 4대국에 강력히 요구하기는 커녕 사분오열돼 정파 이익찾기에 급급했던 것이다.결국 미소공동위는 결렬되고 남북에 주둔한 미·소군은 단독정부 수립 계획을 구체화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 모스크바 3상회의(새로쓰는 한국현대사:8)

    ◎미,「신탁통치」 제의… 좌·우 극렬대립 초래/처음엔 온국민 “반탁”… 며칠새 좌익은 “보탁” 돌변/해방정국 혼란의 늪에… 「남북분단 고착」 빌미로/“한국문화·생활수준 높다” 미 군정서도 신탁 반대 광복의 기쁨이 채 가라앉기도 전인 19 45년 겨울 모스크바에서 불어온 한줄기 삭풍은 민족의 가슴을 꽁꽁 얼어붙게 했다.「미국 소련 영국 중국 등 4개국이 한반도를 최장 5년 동안 신탁통치한다」는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은 비보 그것이었다. ○미 43년초 탁치 첫언급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은 분노로 들끓었다.새 국가의 체제를 놓고 경쟁하던 우익·좌익 양대 세력은 반탁,찬탁으로 갈라서 서로가 적대관계 노선을 치달았다.또 한민족의 신탁통치 반대투쟁 과정을 지켜본 미·소 양국은 「한반도 독차지」의 야욕을 포기하고 자국 세력권에 각각 단독정부를 세우는 쪽으로 선회해버린다.결국 모스크바 삼상회의가 몰고온 「신탁통치 바람」은 남북분단을 고착하는 빌미로 작용했을 뿐이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은 이처럼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정확한 내용은 물론 어느 나라가 신탁통치 계획을 주도했는지는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다.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 한반도를 신탁통치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이를 실현시키려고 애쓴 국가는 미국이다. 미국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인 1943년 초 이같은 구상을 처음 드러냈다.그해 3월27일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은 영국 외상 이든과 만난 자리에서 전후 한국과 인도차이나에 신탁통치를 실시할 뜻을 비쳤다.이어 11월 열린 테헤란회담에서 루즈벨트는 소련의 스탈린에게도 같은 생각을 슬쩍 흘렸다. ○루스벨트 구상 흘려 이후 미국의 계획은 갈수록 구체화됐다.43년 12월 카이로회담에서는 한국을 「적당한 시기에」독립시킨다는 표현으로 나타났다.그리고 얄타·포츠담회담에서는 더욱 은밀하게 추진된다.루즈벨트가 얄타회담에서 필리핀을 예로 들며 한국에서도 20∼30년간의 훈련기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이에 스탈린은 『기간은 짧을수록 좋다』고 대답하기에 이른다. 전쟁이 끝나 38선을 경계로 남북에 미·소 양군이 진주하고 군정이시작되면서 「신탁통치」건은 얼핏 사라지는 듯 했다.그러나 10월1일 미국 삼성조정위원회는 맥아더 장군에게 「미군정에 이어 효과적인 4국 신탁통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교섭을 시작하라」는 통고를 보낸다.이어 미국이 신탁통치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한 고위관리의 발언으로 명확하게 표출됐다.국무성 극동국장 J C 빈센트는 그달 중순 외교정책협의회 포럼에서 『한국에는 당장 자치를 할 준비가 돼 있지 않기 때문에 미국은 우선 신탁관리제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 내용은 즉시 한국 언론에 보도돼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매일신문(10월20일자)은 논평에서 신탁통치 기도를 『그것은 식민지화이며,다름아닌 쇠사슬』이라고 비난했다.좌우익 모두 같은 반응이었다.우익인 한민당은 미군정과의 협력을 중지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좌익인 인민공화국도 『신탁통치를 강제 결의한다면 한국인은 목숨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를 거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식민지의 연장” 비난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워싱턴국립문서보관소(WNRC)에서 최근 찾아낸 미 외교문서와 「신탁통치에 관한 보고서」 등에 따르면 주한 미군정도 사실상 신탁통치안을 반대했다.하지의 정치고문 랭던은 11월20일 맥아더 연합군사령관에게 보낸 전문에서 『해방된 한국을 한달 동안 관찰한 경험에 미루어 신탁통치는 불가능하므로 철회해야 한다』고 충고했다.그 까닭을 『한국은 일제치하를 제외하면 남다른 역사를 산 민족이고,문자해득률이 높을 뿐만 아니라 문화와 생활수준이 높기 때문』이라고 밝혔다.하지도 이 무렵 합동참모본부에 보낸 보고서 「한국의 상황」에서 『신탁통치가 지금 또는 장차 적용된다면 한국인들은 폭동을 일으킬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우익지 “소련서 제안” 이런 상황속에서 12월16일 소련 수도 모스크바에는 미국의 번스 국무장관,소련의 몰로토프 외상,영국의 베빈 외상 등 3명이 회동했다.얄타회담의 후속으로 마련된 이 모임에서는 한국 말고도 유럽·아시아지역의 여러국가들에 대한 처리방안이 논의됐다. 삼상회의 마지막날인 27일 「한국에 관한 결정」이국내에 보도됐다.우익지의 대표격인 D신문은 27일자에서 「워싱턴 25일발 합동 지급보」란 설명을 붙여 그 내용을 전했다.『소련은 신탁통치 주장,소련의 구실은 분할 점령,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란 제목의 기사는 벌집을 쑤셔놓은듯 파급이 컸다.미국의 「성조지」와 KPP통신도 이날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결국 이같은 첫보도는 한국민에게 ▲「모스크바 결정」의 주내용은 신탁통치 실시이고 ▲이를 주장,관철시킨 쪽은 소련이라는 인상을 깊이 각인했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다르다.이 회담에서 미국은 4대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5년 동안 실시하되 10년까지 연장하는 방안을 제의했다.반면 소련은 한국의 정당·사회단체와 협의해 임시정부를 수립한 다음 4개국이 원조하자는 안을 내세웠던 것이다. 「한국에 관한 결정」은 미·소 양국안을 절충한 형태로 내려졌다.4개항의 요지는 ①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②준비모임으로 미소공동위원회 구성 ③5년 이내의 신탁통치 실시 ④2주 내 남북 주둔군사령부 대표자회의 개최 등으로 돼 있다.따라서 절차상 예비기구 설치를 규정한 조항을 빼놓고 본 주요내용은 「임시정부 수립」과 「5년 이내 신탁통치 실시」이다.특히 「임시정부 수립」에 우선 목표가 주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공산주의 음모」 오해 당시 일반적인 국민감정은 「어떤 형태로든 외국 지배가 연장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백성의 분노는 당연히 왼쪽을 겨냥했다.더욱이 처음 반탁에 동참했던 좌익세력이 며칠새 찬탁으로 입장이 돌변하면서 「신탁통치 기도는 공산주의의 음모」라는 시각이 자리를 굳혔다.그러나 사실은 곧바로 드러났다.46년 1월25일 소련 타스통신은 『신탁통치를 제안한 쪽은 미국』이라며 미국안을 공개했다. 미국이 신탁통치를 먼저 제의했다는 증거는,서울신문사 특별취재반이 역시 WNRC에서 입수한 「번스 국무장관이 주한미군 정치고문 베닝호프에게 보낸 전문(46년 1월26일)」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이 전문은 「타스통신 보도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를 묻는 베닝호프에게 보낸 답신으로,번즈 장관은 『그 내용이 맞다』고 시인한 뒤 『하지 장군이 적절하게 판단해 처리하도록』지시했다. 하지만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의 핵심내용이 무엇인지,누가 신탁통치를 획책했는지가 새로 밝혀졌다고 해서 대세가 달라지지는 않았다.반탁·찬탁 투쟁을 통해 이미 전면전에 들어간 좌우익 세력은 상대에 대한 공세를 더욱 강화했다.이에 따른 좌우익 충돌은 해방정국을 더욱 깊은 늪으로 빠뜨렸다. ◎한·소 신탁통치 결정 속셈/자기세력권 확보에 유리 판단/한국독립과는 무관… 냉전체제 대비 노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에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합의한 미국·소련 양국의 속셈은 무엇일까.신탁통치 구상이 처음 나와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결정되기까지 양국의 입장은 사뭇 달랐다. 미국은 전후 세계 질서 재편의 한 방안으로 한반도를 비롯한 여러 식민지 국가들을 신탁통치령으로 전환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미국의 의도는 명확하다.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측을 주도한 미국은 전후세계가 자국 중심으로 개편되기를 원했다.다른 나라보다 보유 식민지가 적었던 미국은 독일·이탈리아·일본 등 패전국은 물론 전쟁에서 큰 피해를 입은 영국·프랑스의 식민지들을 「민족 독립」의 명분으로 풀어주고자 했다.이는 실질적으로는 해당국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독립한 국가들을 자연스럽게 자국 세력권으로 유도하는 방안이었다.또 당시 이미 싹트고 있던 냉전체제에 대한 대비이기도 했다. 한국에 「4국 신탁통치」가 실시되면 미국은 영국·중국과 손잡고 소련을 견제함으로써 한국을 미국 세력권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같은 이유로 소련은 처음 신탁통치안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그러나 「8·15」 후 북쪽에 진주한 소련은 신탁통치를 하더라도 한반도를 공산주의화할 수 있다는 확신을 나름대로 갖게 됐다.북쪽은 물론이고 남쪽에도 좌익세력이 만만치 않아 결국 대세를 장악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소 양국의 신탁통치 결정은 애당초 한국에 자주독립국가를 세운다는 것과는 상관 없었다.한반도에 들어선 정부를 자국 세력권으로 확보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고 그 전략으로서 신탁통치가 양국의 입맛에 들어맞았을 뿐이었다.
  • 중 예내위 1승1패/결승3번기 2국서/보해컵 세계여자바둑

    중국의 예내위(33) 9단이 1패 뒤 1승을 올려 보해컵의 향방은 최종 대국에서 판가름나게 됐다. 예내위 9단은 23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벌어진 제1회 보해컵 세계여자 바둑선수권대회(우승상금 3만달러) 결승 3번기 제2국에서 같은 중국의 풍운(28) 7단에게 2백97수만에 백 7집반승을 거두고 1승1패를 기록했다.최종국은 24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다.
  • 중 풍운먼저 1승/보해컵 여자바둑 결승

    중국의 풍운7단이 보해컵 결승에서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다. 22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벌어진 제1회 보해컵세계여자바둑선수권대회(우승상금 2천4백여만원)결승3번기 제1국에서 풍운 7단이 중국의 예내위9단에게 3백7수만에 백 16집반승을 거둬 대회 첫 우승의 유리한 고지에 올라섰다.
  • 한일은행장 후보 이관우대행 선출

    한일은행은 22일 은행장 후보 추천위원회를 열어 이관우 행장 직무대행(58)을 행장 후보로 선출,은행감독원에 승인을 요청했다.은감원의 승인이 나는대로 이 달 말 쯤 확대 이사회를 열어 행장으로 선임할 계획이다. 이 행장 후보는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지난 62년 한일은행에 입행,서울역전 지점장,소공동 지점장과 영업 1부장 등을 거쳐 88년 이사로,작년 2월 전무로 승진했다.지난 4일 전임 윤순정 행장이 사표를 낸 뒤 행장대행을 맡아 왔다.
  • 빌딩유리청소부 추락/행인 덮쳐 사망­중태(조약돌)

    ○…26일 하오1시20분쯤 서울 중구 소공동 센터빌딩 17층에서 밧줄을 타고 바깥 유리창을 청소하던 김성근씨(61·서울 성북구 길음동)가 50m 아래로 떨어지면서 마침 이 곳을 지나던 김성웅씨(51·관광버스기사·서울 관악구 신림동)를 덮쳐 청소원 김씨는 그자리에서 숨지고 버스기사 김씨는 중태에 빠졌다. 경찰은 숨진 김씨의 몸을 묶고 있던 밧줄이 모두 함께 떨어진 점으로 미뤄 김씨가 밧줄을 옥상의 고정장치에 제대로 묶지 않고 작업하다가 추락한 것으로 보고 청소용역업체 관계자들을 상대로 정확한 사고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 조훈현·유창혁 8강/이창호 등 5명탈락/동양증권배 바둑

    한국이 동양증권배 16강전에서 조훈현9단·유창혁6단만이 8강에 진출한 반면 나머지 5명의 기사가 대거 탈락,부진한 출발을 보였다. 18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벌어진 제6기 동양증권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 16강전에서 지난 대회우승자 조9단은 일본의 오다케9단을 2백45수만에 흑불계승,유6단은 대만의 진영안5단을 98수만에 백불계승으로 각각 물리치고 8강에 올랐다.
  • 백화점 주변 종일 혼잡/세일 마지막날… 도심·강남도로 북새통

    휴일이자 백화점 정기 바겐세일의 마지막날인 16일 대형백화점이 밀집된 서울도심과 강남 일부지역에 쇼핑객들의 차량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백화점 주변도로가 큰 혼잡을 빚었다. 롯데·신세계백화점 본점이 있는 서울을지로 입구와 퇴계로·소공동 일대에는 쇼핑을 나온 시민들의 자가용 행렬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한때 2백m 이상 늘어서는등 이날 하오 늦게까지 심한 교통체증 현상이 빚어졌다. 또 롯데백화점 잠실점이 있는 송파구 잠실역 주변에도 하오들어 차량이 몰리면서 폐점시간까지 이 일대 도로가 체증으로 몸살을 앓았다.
  • 환경부담금 2백억 부과/서울시/차 43만대,건물 4만곳 대상

    ◎가락동농수산물시장 1억8천만원 1위/소공동 롯데호텔 등 롯데사 10위내 포함 서울시는 7일 자동차 43만3천8백60대와 건물 4만8천7백76곳에 대해 올해 하반기 환경개선부담금 2백1억3백만원을 부과했다.납부기간은 오는 16일부터 30일까지며 부과착오등에 대한 이의신청은 납부고지서를 받은 날로부터 30일이내에 관할구청장에 조정신청을 하면 된다. 환경개선부담금은 바닥면적이 3백3평이상인 건물,목욕탕 등 오염물질배출이 많은 업소,개인소유의 경유자동차에 부과되는 것으로 지난해 하반기분에 비해 건수로는 15.1%,금액으로는 5.4%가 각각 늘었다.
  • 한국 첫 우승/한·중 바둑대항전

    한·중 양국간 바둑대항전에서 한국이 종합전적 8승6패로 중국을 격파하고 대회 첫 우승을 차지,「세계최강」임을 입증했다. 2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벌어진 제1회 롯데배 한·중바둑대항전 2회전에서 조훈현9단·이창호7단·유창혁6단·임선근8단·최규병6단은 섭위평9단·왕견강8단·유소광9단·상호6단·조대원9단을 꺾었으나 서봉수9단·장수영9단은 마료춘9단·유청5단에게 패해 5승2패를 기록,1회전 3승4패의 부진을 씻고 종합전적에서 8승6패로 앞서 우승(우승상금 7만달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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