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셋째
    2026-03-07
    검색기록 지우기
  • 광복
    2026-03-07
    검색기록 지우기
  • 한탄
    2026-03-07
    검색기록 지우기
  • 100억
    2026-03-07
    검색기록 지우기
  • 특례
    2026-03-07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1,804
  • 12살 지우는 왜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했을까

    열두 살 새침데기 소녀 ‘지우’. 지우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얘기를 좀처럼 꺼내지 않는다. 입을 열면 거짓말부터 해야 하니까. 집에 친구를 데려오는 일도 없다. 가파른 계단과 침침한 가로등 골목을 지나 모습을 드러내는 허름한 집. 단칸방 구석에는 옷가지 외에 낡은 세탁기와 냉장고, 개수대까지 놓여 있다. 엄마는 생선가게와 반찬가게에서, 아빠는 공사장과 편의점에서 종일 일만 한다. 고단한 ‘워킹푸어’다. 남동생 ‘찬우’는 정신지체 판정을 받았다. 친구들에게 동생이 있다는 사실조차 감추고 산다. ‘폭풍소녀 가출기’(리젬 펴냄)는 초등학교 5학년인 어린 지우의 복잡다단한 삶을 담았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소재를 등장인물의 사투리에 실어 유쾌하고 잔잔하게 다뤘다. 개구쟁이 삼 형제의 엄마인 최미경 작가는 지우 또래로 시선을 낮췄다. 지우네는 늘어난 빚 때문에 부산에서 포항으로 건너온다. 학원 한 군데 다니지 못한 지우였지만 부산에선 공부면 공부, 미술이면 미술, 못하는 게 없었고 친구도 많았다. 그러나 포항의 학교에선 모든 게 낯설기만 하다. 다섯 살 지능을 가진 짝꿍 진우와 사사건건 시비만 거는 부잣집 딸 미경이, 그리고 지우가 짝사랑하는 ‘완소남’ 민수까지. 지우는 자기소개 시간에 아빠는 의사, 엄마는 교사라고 둘러댄다. 하지만 ‘가정실태조사서’에선 고등학교 졸업장조차 없는 변변찮은 사람들이다. 6개월치 공사판 임금을 떼여도 불평 없이 기다리는 아빠, 그런 아빠에게 잔소리 한 번 안 하는 엄마…. 우연히 엿들은 엄마의 전화통화. 엄마 뱃속에 셋째가 잉태됐다는 얘기를 듣고도 기쁘지 않았다. 형편없는 가정환경에서 동생도 자신과 같이 키워질 거라며 엄마에게 버럭 화부터 낸다. 만 하루 동안 이어진 가출은 이렇게 시작된다. “급식비 안 내도 되는 박지우! 우유 값 안 내도 되는 박지우! 와? 내가 불우이웃이니까!”(72쪽) 지우는 새벽녘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먹고,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며 상가 소파에서 밤잠을 청한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엄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집으로 돌아온 지우는 엄마를 꼭 안는다. 엄마 몸에 밴 생선 냄새도 더는 싫지 않다. 포항에 거주하는 작가는 비정규직 방과 후 교사와 도서관 시낭송 강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주인공 지우는 어릴 적 내 모습을 꼭 닮았다”면서 “동화 속 장애우인 찬우와 진우처럼 내가 만나는 아이들의 소소한 일상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낙태 원하는 여자는 없어”… 수술대 위 그녀들 ‘인권’은 없었다

    “낙태 원하는 여자는 없어”… 수술대 위 그녀들 ‘인권’은 없었다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슬픔이었던 것 같아요. 낙태(落胎)를 하고 싶은 여자는 아무도 없어요.” 25명의 여성이 지난달 20일 출간된 ‘있잖아…나, 낙태했어’(한국여성민우회 지음)에서 마음 한구석에 숨겨놨던 쓰라린 기억을 끄집어냈다. 어렵게 용기를 낸 이유는 낙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꾸밈없이 말하고 싶어서다. 한국에서 낙태는 객(客)들의 논란거리다. 사회가 강요한 ‘주홍글씨’ 탓에 낙태를 경험한 여성들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윤리나 생명과 결부된 주제이기에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태아도 생명이냐, 그럼 몇 주째부터 인간이냐, 그렇다면 낙태는 살인이냐로 이어지는…. 하지만 여성들은 ‘낙태 찬반론’에만 매몰되지는 말아 달라고 외친다. 이들은 “낙태에 대한 논의는 본질적으로 한 인간이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여성에게 있어 출산에 대한 결정은 곧 인생에 대한 결정과 동등한 무게라는 얘기다. 낙태를 하고 싶어서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육체적 고통에 정서적 악영향까지 있어 모두들 수술을 망설였다. 그리고 그 기억은 여전히 여자들을 옥죄고 있다. 미영(40대 초반·학원 강사)씨는 낙태의 기억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고 했다. “아기를 죽였다는 죄책감 있잖아요. 안 좋은 일이 생길 때마다 그게 떠올라요. ‘내가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구나’ 하는 느낌? 아마 죽을 때까지 안 잊히겠죠.” 대학교 1학년 때 아이를 지운 윤정(20대 후반·사무직)씨도 고통 속에 산다. “기억이 없어지지도, 지워지지도 않아요. 수치심, 분노, 죄책감 같은 오만 감정이 합쳐진 채 계속 가는 것 같아요. 몸이 기억을 하고요. 시간이 약이란 말이 여기엔 안 통해요.” 그러나 여자들은 수술대에 올랐고, 지금도 오르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전국 가임기(15~44세) 여성 4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2011년 발표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가임기 여성 1000명당 낙태 건수를 뜻하는 ‘임신중절률’은 2010년 15.8건이었다. 당시 가임기 여성 수(약 1071만명)를 고려하면 그해 약 17만명의 태아가 세상 빛을 못 보고 목숨을 잃은 셈이다. 낙태는 원칙적으로 불법이다. 모자보건법 제14조에 따라 ▲유전적 장애나 전염성 질환 ▲강간, 준강간에 의한 임신 ▲혈족, 인척 간 임신 ▲임신부의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는 때에 한해 임신 24주까지만 낙태가 허용된다. 낙태를 하면 여성과 의료진 모두 처벌받는다. 그러나 낙태를 경험한 여성들은 “낙태 수술을 안 한다는 병원은 한 곳도 없더라”고 말했다. 낙태를 범죄화한다고 해서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비싼 값에 은밀하고 위험하게 수술받는다고도 했다. 은미(30대 후반·회사원)씨에게 그날 산부인과에서의 기억은 끔찍할 만큼 또렷하다. 떠올리지 않으려 발버둥칠수록 악몽 같은 기억이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그녀에게 꽂히는 모든 시선이 불편했고 의사의 사소한 손짓에도 위축됐다. “전신 마취 주사를 맞고 다리를 벌린 채 누워 있는 상황이 끔찍했어요. 혹시 마취가 깰까 봐 그랬는지 팔다리를 묶었는데, 무슨 개구리 해부하듯이…. 되게 치욕스러웠어요.” 낙태하는 여자는 철저히 ‘을’(乙)이다. 수현(30대 후반·번역가)씨는 “병원은 돈벌이로 생각하는지 부르는 게 값이었어요. 그러면서도 귀찮은 일을 처리한다는 듯 티를 내는데 정말 그렇게 치욕적일 수가 없었어요”라고 회상했다. 혜진(40대 초반·운동선수)씨는 “의사가 ‘애가 잘 서는 몸이면 조심해야지’라는 거예요. 내가 무슨 섹스에 환장한 여자인 것처럼 야단을 쳤어요. 죄송하다고 하면서도 화가 나더라고요. 내가 공짜로 수술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라고 했다. 그렇다면 여성들은 왜 낙태를 결심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낙태를 ‘성적 방종’의 결과물로 치부하지만 전체 낙태의 57%는 기혼자 차지다. 많은 기혼자가 양육에 들어가는 돈을 감당하기 어려워 수술을 결심했다. 희영(40대 중반·사무직)씨는 연년생 두 자녀에 이어 생긴 셋째 아이를 지웠다. “보육료, 기저귀, 분유 등에 매월 250만원이 들었어요. 일 때문에 아이들을 다른 사람 손에 맡겼는데 그것도 마음 아팠고요. 경제적으로도 타격이 있어서 난감했죠.” 유진(30대 후반·주부)씨는 “중소기업에 다니는 남편이 한 달에 300만~400만원을 버는데 애들 두 명도 감당하기 버거웠다”면서 “세 명까지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킬 자신은 없었다”고 말했다. 미혼 여성들은 아기를 가진 ‘처녀’에게 쏟아질 수군거림이 두려웠다고 고백했다. 민정(30대 초반·학원 강사)씨는 어느 누구에게도 도저히 임신 사실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고 했다. “결혼 전에도 섹스를 해요. 임신한 사람이 특별히 헤프거나 문란하게 산 건 아닌데 미혼이 임신을 하면 죄의식을 갖게 한단 말이죠. 성에 대한 인식이 보수적이고 변태적이다 보니까 임신했다고 하면 ‘그동안 얼마나 섹스를 한 거야?’ 이렇게 보잖아요.” ‘아비 없는 자식’으로 손가락질받으며 자랄 아이 걱정도 있었다. 혜란(40대 중반·공무원)씨는 “아기는 누구라도 소중하다는 인식이 있으면 누가 수술을 하겠어요. 우리 사회는 아이 부모가 누군지, 어떻게 임신했는지, 혼인 여부, 성적 취향, 학력 등등에 따라 태어나면서부터 차별을 하잖아요”라고 꼬집었다. 정민(40대 중반·사무직)씨도 “인프라도 없고 미혼모에 대한 의식 변화도 없이 무조건 낳으라고만 하면 어떡해요”라면서 “그건 아기와 엄마 모두에게 무책임하고 잔인한 말”이라고 했다. 성에 대한 보수적인 사회 인식과 실체가 없는 성교육(피임법)이 낙태를 양산하기도 한다. 결혼 전 낙태를 했던 미영씨는 자연 피임을 했다가 임신했다. “콘돔을 끼라는 말을 하기가 민망했어요. 성관계를 염두에 두고 먼저 준비한 걸로 보일까 봐. 싸게 보인다거나 경험 많다고 생각할까 봐 남자한테 말을 못 했어요.” 현숙(40대 중반·공무원)씨도 비슷한 경우다. 학창 시절 1, 2차 성징과 남녀 생식기를 배우다 수정, 착상으로 건너뛰는 교과서적인 성교육만 받아 온 터라 성관계나 임신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단다. 그는 “남편이 알아서 하겠다고 했어요. 콘돔은 느낌이 싫다면서. 배란 주기를 따져서 몸 밖에 사정을 하는 거였는데 결국 임신했죠”라고 했다. 지난해 8월 헌법재판소는 낙태 시술자(의사)를 처벌하는 형법 제270조 1항에 대해 ‘합헌’ 판결을 내렸다. 사익(私益)인 임부의 자기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공익(公益)에 비해 결코 중하다고 볼 수 없고, 낙태를 처벌하지 않거나 가볍게 제재한다면 낙태가 만연하고 생명 경시 풍조가 확산될 것이란 이유에서였다. 관련 활동가들은 “제대로 된 양육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 미혼이라거나 장애아·여아를 낳아도 차별받지 않는 사회적 토대가 마련되기에 앞서 낙태를 법으로 처벌하겠다는 정부 시책은 폭력”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들은 낙태는 임신한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구조 문제라고 강조했다. 김두나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여자들이 아기를 낳아서 기르는 대신 울면서 수술대에 오르는 이유를 찬찬히 따져봐야 한다”면서 “경제적 여유가 없다거나 미혼모에 대한 편견이 두렵다거나 직장에서 해고된다는 등 낙태의 이유는 정말 다양하다”고 꼬집었다. 이화영 한국여성의전화 소장도 “우리나라는 ‘낙태가 살인이냐’라는 지엽적인 담론에만 갇혀 있다”면서 “자기 몸과 인생에 대해 결정하는 여성 인권의 문제로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태아가 생명이냐, 언제부터 인간이냐 하는 논쟁보다는 깊고 폭넓은 논의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이 점에서는 낙태를 반대하는 쪽도 비슷한 맥락이다. 최정윤 낙태반대운동연합 사무처장은 “생명 경시 풍조, 양육의 금전적 어려움, 미혼모·부에 대한 시선 등이 겹쳐 낙태를 결심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아이를 낳아서 건강하게 키울 수 있는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은지 기자 zone4@seoul.co.kr *기사 속 이름은 모두 가명이며, 사연은 책을 재구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 [서울 플러스]

    매월 2·3주 금요일 ‘교양강좌’ ■강남구(구청장 신연희) 6월까지 매월 둘째·셋째 금요일 삼성1문화센터 대강당에서 문학과 문화를 주제로 한 구민교양 강좌인 ‘강남강좌’를 무료로 연다. ‘문학에 묻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2’를 주제로 영화와 연극으로도 만들어진 고전 ‘닥터지바고’ ‘47인의 사무라이’ ‘광인일기’ 등 러시아·일본·중국의 문학과 문화인류학을 다룬다. 문화재단 생활문화팀 6712-0542. 셋째 입학시 10만원 도서상품권 ■서대문구(구청장 문석진) 셋째 이상 아동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10만원 상당의 도서문화상품권을 준다. 신청일과 입학일 현재 구에 주민등록을 둔 셋째아 이상 아동의 부모 또는 보호자는 오는 29일까지 동 주민센터를 방문해 신청서를 내면 된다. 출산다문화팀 330-1491. 다가구·상가주택도 상세주소 ■중구(구청장 최창식) 지역 내 다가구주택, 상가주택 등에도 아파트처럼 동·층·호 등 상세 주소를 부여한다. 이전엔 주민등록 전입신고 등 공적 장부에 상세 주소를 표기할 수 없어 우편물 분실, 수취인 불명으로 자주 반송되는 데다 우편물의 장기방치로 개인정보가 노출되는 문제를 낳았다. 건물 소유주나 임차인이 상세주소를 신청하면 현장조사 뒤 부여받을 수 있다. 토지관리과 3396-5945.
  • [시론] 국민연금 논란의 해법/김용하 순천향대 금융보험학과 교수

    [시론] 국민연금 논란의 해법/김용하 순천향대 금융보험학과 교수

    우리나라 국민연금 제도는 가입자 수가 2000만명을 넘어서고 적립기금도 400조원을 돌파하는 등 세계적으로 가장 모범적인 공적연금 시스템의 하나로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신정부의 인수위에서 제기된 기초연금 관련 논란의 불똥이 국민연금으로 옮겨붙는 과정에서 그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최근에 제기되고 있는 국민연금에 대한 불신은 첫째, 국민연금 기금이 고갈되면 현재의 젊은 가입자는 연금 수급이 불가능하지 않을까, 둘째, 이를 이유로 연금보험료를 인상하거나 연금 수급연령을 늦추지는 않을까, 셋째, 월 20만원 정도의 기초연금을 지급하면 연금보험료를 성실히 납입한 국민연금 가입자만 불리하지 않을까, 넷째, 40조원 상당의 기초연금 재원은 과연 조달이 가능할까 등으로 요약된다. 국민연금과 관련한 오해 중 하나는 적립기금이 없으면 국민연금을 못 받게 된다는 생각이다. 국민연금이 성숙된 대부분 유럽국가에서는 가계에서 자녀가 부모를 부양하듯, 적립기금 없이 매년 노년계층에 지급해야 할 필요 연금액을 그 당시의 근로계층이 보험료나 세금을 걷어서 조달한다. 선진국 방식으로 운영할 경우 인구구조가 고령화되면 미래 세대의 보험료 부담이 커지기 때문에, 국민연금은 충분하지는 않지만 보험료를 미리 적립하는 제도를 초기부터 도입하여 운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진적이다. 다만, 우리나라도 연금급여에 상응한 만큼 보험료를 부과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장기적으로는 기금 고갈 문제가 존재한다. 따라서 국민연금의 재정 안정을 위해서는 연금 급여수준을 낮추거나 보험료를 인상하거나 연금 수급 연령을 높이는 등의 조치가 필요하지만 우리나라는 1999년에 이어 2007년에 이러한 조정 작업을 국민 합의 하에 성공적으로 진행했다. 향후에도 조정요인은 있지만 국민의 노후 대비 정도와 가계의 부담능력 등에 대한 고려가 선행될 것이고, 적어도 사적연금에 비해 유리한 구조는 유지될 것이다. 민간 금융기관에서 운영되는 사적연금은 가입하면서 국가가 책임지는 국민연금을 못 믿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보험료 납입 없이 수급되는 기초연금과 국민연금과의 형평성 문제도 왜곡된 측면이 있다. 기초연금의 도입 취지는 국민연금을 받지 못하거나 받더라도 과소하게 받는 어르신에 대한 노후 소득보장 사각지대를 해결하는 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공무원연금 등 직역 연금을 받고 있거나 국민연금을 일정액 이상 받는 사람은 원칙적으로 대상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도 국민 누구나 노인이 되면 최소한 월 20만원 이상의 국가 보장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한편 보험료를 내지 않아도 기초연금을 받을 수 있는데 국민연금에 왜 가입하느냐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국민연금 수급자는 본인이 납입한 보험료에 상응한 소득비례 연금 외에 세대 간·세대 내 재분배적 성격을 가진 기초연금 상당액을 이미 받고 있음을 간과한 것에 기인한다. 국민연금이 늦게 도입되어 가입할 수 없었거나 혹은 소득이 없어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못했던 사람은 국민연금 가입자에 비해서 역차별을 받아온 측면이 있고, 기초연금 도입은 이를 시정하는 성격이 강하다. 더욱이 기초연금은 월 20만원 수준이기 때문에 보통사람이 노후에 필요한 생계비를 안정적으로 조달하기 위해서는 국민연금에 더 오래 가입해서 더 많은 연금을 받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노후소득 설계전략임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다. 40조원 내외가 필요한 기초연금 재원 조달이 걱정되지만, 박 대통령이 국민연금을 기초연금 재원으로 절대 사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만큼 일단 안심할 수 있고, 기존의 정부지출 중 낭비 요소를 절감하고 세금 누수가 의심되는 지하경제 양성화 등을 통하여 공약이행을 위한 135조원의 조달계획을 준비하고 있으므로 과도하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 [김문이 만난사람] 경복궁 야간 지킴이로 새 삶 사는 ‘시라소니 이후 최고 주먹’ 방동규 씨

    [김문이 만난사람] 경복궁 야간 지킴이로 새 삶 사는 ‘시라소니 이후 최고 주먹’ 방동규 씨

    “나를 주먹, 건달, 협객, 뭐라고 해도 상관없지만, 그냥 뜨거운 내 인생을 찾아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을 뿐이오.” 이 시대의 낭만 협객이라고나 할까.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시라소니 이후에 최고의 주먹, 한번에 17명과 맞서 싸운 전설, 백기완, 황석영과 함께 조선의 3대 구라”라고. 본명 방동규, 아니 ‘방 배추’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1935년 개성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각종 운동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중·고교 시절, 뜻하지 않게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1954년 체육특기생으로 홍익대 법학과에 입학했고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장), 구중서(문학평론가) 등과 함께 나무를 심고 계몽운동을 펼쳤다. 30살에 독일에서의 광부생활, 4년 동안 파리에서의 유랑생활, 양장학교 수업, 중동 파견, 긴급조치와 ‘말지’사건으로 구속수감 등 실로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겪었다. 2006년 경복궁 관람안내 지도위원으로 있다가 잠시 그만둔 뒤 2011년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와 야간지킴이 일을 하고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낭만 협객이 80살을 바라보는 나이에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인 경복궁의 파수꾼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지난달 22일 저녁 경복궁에서 방씨를 만나 사진 촬영을 한 다음 인근 막걸리 집으로 장소를 옮겼다. 등산복 점퍼에다 청바지 차림이었다. 백발이긴 한데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걸음걸이가 경쾌하다. 말할 때는 “이봐, 이 사람” 등을 섞어가면서 자신감을 나타냈다. 자리에 앉으면서 “내가 2003년 서울시장배 보디빌딩 대회(장년부)에서 6등을 했거든, 나이 80 되는 내년에는 꼭 우승하려고 그래. 그런 각오로 하루 1시간씩 꼭 운동을 하고 있지. 허허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단단한 팔뚝 근육을 잠깐 보여준다. 요즘 근무하고 있는 경복궁 야간지킴이 활동에 대해 먼저 물었다. “말 그대로 야간에 경복궁을 지키고 경비하는 일이여. 물어볼 것도 없어. 경복궁에는 오랫동안 내려오는 정기 같은 것이 있잖아. 그런 정기를 받고자 하는 사람도 있고 또 무작정 담을 넘어오는 사람도 더러 있어. 참 내원. 거 머시기야. 남대문에 불을 지른 사람도 창경궁에 불을 지르려다가 붙잡혔잖아. 당시 초범이고 노인이어서 풀어줬는데 결국 남대문에서 사고 쳤거든. 야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야 해.” 경복궁 주변에서 막무가내로 버티는 사람도 많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친절하게 대해 주다가 정 안 되면 강제로라도 끌고 나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런 힘은 어디서 나올까. 방씨는 아직은 괜찮다며 너털웃음을 짓는다. 방씨는 오후 5시 30분에 출근해서 그 다음 날 아침 8시 30분에 퇴근한다. 15시간을 근무하는 셈이다. 어떤 인연으로 경복궁에서 일하게 됐을까. “유홍준씨와 각별히 친하지. 긴급조치법 2호 때 독방에 있었어. 유홍준씨가 학생들과 데모하다가 감옥 옆방에 들어왔어. 통방이라고 하거든. 벽을 똑똑 두드리면 옆방에서 반응을 해. 귀에다 대고 말을 하면 서로 통화가 잘돼. 그때부터 형·동생으로 지내게 됐고 감옥에서 나와 같이 술 마시면서 아주 친해졌어. 또 이때 같이 수감된 이호철, 임헌영, 장준하, 백기완 등과 인연을 맺었어. 아주 각별하지.” 이후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고 유홍준씨가 문화재청장으로 재직 시 방씨에게 경북궁에서 일하도록 배려를 해 줬다. 이에 대해 방씨는 “아마 왕년의 주먹이자 몸짱 할아버지라는 이미지와 ‘경복궁 지킴이’의 역할이 썩 잘 어울렸는지 이곳저곳에서 인터뷰를 해 화제의 인물로 부각됐다”고 했다. 그는 지인들에게 사발통문을 날려 인사동에서 송년회를 겸해 ‘배추 취직 축하연’ 자리를 가졌다. 이때 임재경 전 한겨레신문 부사장, 시인 신경림, 정치인 김태홍과 이부영, 춤꾼 이애주, 불문학자 최권행 등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이 또한 언론에 보도돼 또 한번 화제가 됐다. 그렇다면,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과 인연이 된 긴급조치법 2호와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큰딸 이름은 방그레, 둘째는 방시레이다. 웃는 행렬로 지었단다. 방씨가 강원 철원 노느메기밭에서 일할 때였다. 둘째 딸 출산을 위해 서울 어머니네 집에 들러 병원을 가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점퍼 차림의 두 사람이 느닷없이 나타나 권총을 들이대면서 철원에서 대구 경찰서 대공분실로 연행했다. 이유는 서울에 아는 사람이 많고 정치와 문화계통에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취조를 해야 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심문 내용은 이런 것이었어. 뭐, 다짜고짜 김일성과 무전 친 암호를 대라고 했어. 나는 무전기도 만질 줄 모르고 집에 그런 것도 없다고 했지. 그때 산에서 농사를 지을 때 아는 사람이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하나 줬어. 그걸로 트집을 잡는데 참 황당하더라고. 그렇게 6개월 동안 고문받으며 지내다가 나왔어.” 1986년 ‘말지’ 사건 때도 수감됐다. 김태홍 전 국회의원과 형·동생하면서 지냈다. 제5공화국 시절 언론 보도지침이 나왔을 때 김 전 의원이 수배 대상이 돼 고향인 광주로 피신해야 했다. 방씨는 그런 사정을 알고 김 전 의원과 함께 광주로 동행했다. 이런 이유가 나중에 밝혀져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에 가서 고문을 받았던 것. “그때 고문기술자 이근안씨를 만났어. 고문실에 들어가면 옆방이나 옆옆방 정도에서 비명 같은 것이 들려. 진짜 고문해서 나는 비명인지 하여간 그런 소리 들리면 맥이 쫙 풀려. 그런데 이근안씨는 때리지는 않고 아주 상당한 기술이 있더구먼(웃음).” 화제를 돌렸다. 왜 ‘배추’라는 별명이 붙었을까. 6·25전쟁 혼란기 때였다. 방씨는 당시 경신·대광고와 정신여고 등 기독교 계열의 학교들이 합쳐진 전시 연합학교에 다녔다. 전쟁 혼란기라는 분위기도 있었지만, 평소 자유분방한 성격이라 군복 등 입을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거나 걸쳐 입고 다녔다. 특히 방씨는 6·25 때 부산과 호남에서 장사하던 옷차림 그대로였다. 여학생들은 이런 방씨의 모습을 보고 ‘쟤가 싸움 잘하는 배추장수’라고 했고, 결국 ‘배추’로 굳어졌다. ‘시라소니 이후의 최고의 주먹’이라는 별명은 어떻게 얻었을까. 방씨는 1950년대 학생 주먹으로 유명했다. 고등학생 때 대학가의 주먹들과 붙는 일이 자주 있었다. 1953년과 1954년에는 대학생 건달로 악명을 떨치던 ‘춘하’의 패거리들과 싸웠고 전국 씨름왕의 도전을 받아들여 이기기도 했다. 창경원에서 특수부대 군인 출신인 깡패들과 맞짱을 뜨면서 ‘양배추’의 이름이 장안에 알려졌다. 당시 신문기사 제목이 ‘군인 깡패, 학생에게 혼쭐나다’였다.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이라는 근원지는 소설가 황석영이었다. 그럴 것이 1960년대를 거쳐 1990년대까지 잊을 만하면 한두 번씩 ‘맞짱의 전설’을 만들어냈다. 국내뿐만 아니라 파리와 스페인 등 해외에서도 그랬다. 문단의 화제였고 술자리의 단골 주인공이었다. 특히 방씨는 재야 세력의 주먹으로 반독재 민주화를 기치로 내건 문화운동패의 문인, 화가, 그리고 지식인들과 두루 친했다. “내가 말야. 한창 주먹으로 이름을 날릴 무렵 이정재가 제3자를 보내 은근히 영입의사를 밝힌 적이 있어. 당시 이정재는 유지광을 전면에 내세워 동대문시장과 평화시장 일대를 주무대로 하는 ‘화랑동지회’라는 단체를 조직했거든. 이 조직의 후신인 반공청년단 등을 만들어 사회적 이권과 정치세계에까지 개입하고 있었지.” 그러나 방씨는 이정재의 제안을 단호하게 뿌리쳤다. 이유는 간단했다. ‘중국무협사’에 주가(朱家)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그는 첫째, 가난하고 빈천한 사람부터 도왔다. 둘째, 의협을 행하면서도 남이 알게 되는 것을 두려워해 굳이 대가를 바라지 않았다. 셋째, 가난하고 청빈하여 집에 재물이 없었다. 적어도 사나이라면 이러한 의기는 지녀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정치깡패들과 한통속이 된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방씨는 운동가 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육상 등 각종 운동을 했고 막내 삼촌은 승마, 고모는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였다. 방씨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육상과 높이뛰기, 넓이뛰기, 수영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선수로 발탁됐다. 고등학교 때에는 역도와 합기도를 했다. 그는 독일과 프랑스, 스페인, 중국, 중동 국가 등에서 생활했던 경험이 있어 지금도 6개 국어를 구사한다. ‘조선의 3대 구라’라는 말 또한 여기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지나온 세월을 반추한다. “돌이켜보면 가난하더라도 ‘마음 부자’에 ‘친구 부자’로 지냈어. 비록 별 볼 일 없이 살았지만, 친구들은 하나같이 모두 멋진 사람들이야. 정말 복 받은 사람이지. 그 복을 보디빌딩 장년부 우승으로 갚아 주려고 해. 세상이 뭐라 하든 나의 길을 가는 것이 원칙이야.” 너털웃음과 함께 ‘배추의 호방함’이 향기롭다. 헤어지면서 “앞으로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좋은 친구가 되면 어떠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세상은 좋은 친구들이 많아야 해”라며 다시 웃는다. 선임기자 km@seoul.co.kr ■방동규씨는 누구 1935년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1948년 월남 후 경신고와 대광고, 정신여고 등이 합쳐진 기독교 계통의 연합학교를 나왔다. 중학교 시절부터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으로 유명했다. 1954년 체육특기생으로 홍익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이때 백기완, 구중서, 김태선 등과 함께 나무를 심고 계몽운동을 펼쳤다. 30세에 독일에서 광부생활을 했고 4년여 동안 파리에서 유랑생활을 했다. 고국으로 돌아와서 양장점 ‘살롱드방’을 운영했고 1973년에는 강원도 철원의 ‘노느메기밭’에서 공동체 생활을 했다. 이때 간첩 혐의로 수감되기도 했다. 1979년부터 2년 동안 중동 아랍에미리트연합에서 건설노동자로 근무했고 1986년 ‘말지’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1991년 서해화성 경영자(CEO)로 취임했고 3년 뒤에는 중국 공장 대표이사를 지냈다. 2001년에는 헬스클럽 강사로 깜짝 변신했다. 2006년부터 경복궁 관람 안내 지도위원으로 활동하다 2008년 그만둔 뒤 2011년부터 경복궁 야간 지킴이로 근무하고 있다.
  • 안철수 ‘세싸움·수싸움’ 현실정치 벽 넘을까

    안철수 ‘세싸움·수싸움’ 현실정치 벽 넘을까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가 4·24 재·보궐 선거에서 서울 노원병에 출마하겠다고 밝혔지만 초반 분위기가 그에게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알 듯 말 듯한 메시지 정치도 이제 통하기 어렵다. 색다른 비전과 대안을 보여 줘야 한다. 오히려 책임이 동반되는 출마를 선언하면서 5대 난제 등 많은 과제가 그를 막아서고 있다. 과제는 갈수록 늘어날 전망이다. 첫째, 안 전 교수는 대선 때 정상적인 단일화 과정을 밟지 않고 문재인 전 민주당 후보에게 양보해 논란이 있었다. 대선 당일에는 당락도 확인하지 않고 미국으로 가 무책임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정치인으로 변신할 준비가 충분하냐는 논란이다. 둘째, 신당 딜레마도 크다. 정치권에서는 그가 출마하면 당선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긴 하다. 국회에 입성하면 민주통합당 이탈 세력을 중심으로 교섭단체 구성에 나설 것으로 전망한다. 정당이 아닌 정치결사체를 구성해 새 정치의 모습을 보여 주려 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지만 세 규합에는 어려움이 따를 것 같다. 어떤 경우에도 구태정치 논란에 휩싸일 수 있다. 셋째, 민주당과의 관계 설정은 난제 중의 난제다. 민주당은 그의 출마를 환영하고 있지만 속내는 불편하다. 대선에서 문 전 후보를 밀었던 그를 상대로 노원병에 후보를 내기가 쉽지 않다. 민주당이 후보를 내도 그와 소모적인 단일화 논란을 막판까지 펼 수 있다. 뒷거래 정치 논란이 예상된다. 넷째, 노원병에 출마하려는 것에 대해 “민심을 묻는 절차적 민주주의도 없이 오만하다”는 지적도 있다. 민주당이나 진보정당 측에 “대선 때 희생한 내가 출마하니 협조하라”는 모양새로 비칠 수도 있다. 부산 영도에서 새누리당 거물 김무성 전 의원과의 승부를 피한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다섯째는 여론 동향이다. 몇몇 여론조사에서는 그의 출마를 반대하는 의견이 높다. 전문가들도 신중해지고 있다. 박명호 동국대 정외과 교수는 “대선 때와 같은 애매한 입장으로는 정치판을 이끌 수 없다. 가치와 명분 제시가 쉽지 않을 것이다. 세싸움, 수싸움이 치열한 현실 정치의 벽을 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춘규 선임기자 taein@seoul.co.kr
  • [지방시대] 지역중추도시권 육성에 대한 제언/이성근 대구경북연구원장

    [지방시대] 지역중추도시권 육성에 대한 제언/이성근 대구경북연구원장

    박근혜 정부의 국정과제에는 지방거점도시의 지역중추도시권 육성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는 국민 대통합과 지역균형 발전정책의 일환이다. 지역중추도시권의 개념 정의를 통해 정책 방향과 내용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먼저 지방거점도시는 수도권이 아닌 지방의 거점도시를 의미하고, 지역중추도시권에서 지역은 광역경제권 차원의 광역지역을, 중추도시권은 정치·행정, 교육·문화, 산업·금융 등 중추관리기능을 담당하는 대도시 지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지방거점도시의 지역중추도시권은 지방의 중추관리기능을 담당하는 광역권 차원의 대도시로 정의할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국토 공간의 정책대상은 광역경제권에서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대도시와 그 주변지역을 포함한 지방대도시권이다. 해외에서도 지방거점도시를 중심으로 한 중추관리기능 강화 사례를 찾을 수 있다. 프랑스의 경우, 계획을 총괄하고 지원하는 중앙정부와 지역주민이 필요한 사업을 계획·추진·감독하는 코뮌(Commune) 연합 간의 협력을 통해 기능적 효율성을 제고하는 메트로폴(Metropole)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지방대도시권을 중심으로 한 육성정책을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글로벌 시대에는 대도시권의 형성과 육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무한경쟁시대에 국가책임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지방역량 강화가 중요하고, 따라서 지방대도시권을 중심으로 글로벌 지역거점 육성이 필요하다. 둘째, 지방과학기술과 정보기술(IT)에 기반한 특화된 융복합산업거점 육성을 통한 일자리 창출이 요구된다. 셋째, 창의인재 양성을 위해 교육국제화 특구제도를 활용한 지방교육의 경쟁력 강화가 필요하다. 넷째, 지역의 정체성 확립과 건전한 여가생활 등 지역문화와 복지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정책이 중요하다. 다섯째, 경제금융 등 중추서비스 거점 형성이 필요하다. 여섯째, 기후변화에 대응한 녹색성장과 도농 상생의 순환형 사회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 일곱째, 광역 교통·통신, 생활 인프라 구축을 위한 계획통합과 지방정부 간 네트워크의 거점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 박근혜 정부는 국가적 차원에서 교육, 산업, 문화, 복지, 지역창조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가 가능한 글로벌 거점도시를 지방대도시권을 중심으로 형성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한 기대효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글로벌 국가경쟁력 확보이다. 세계 도시들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역량 있는 지방을 육성할 수 있다. 둘째, 수도권에 대응한 지방거점 육성을 통해 국토균형발전과 국민대통합을 이룰 수 있다. 균형적 국토네트워크 형성을 위한 핵심적 지방거점 육성이 가능하다. 셋째, 행정구역의 한계 극복을 위한 지자체 간 연합과 연대를 통해 공공서비스의 효율적 공급과 기반시설의 효과적 투자가 가능하다. 넷째, 그간 실효성이 낮은 행정구역 통합에서 협력중심의 지자체 간 연합체 구성이 가능하다. 규모의 경제 실현을 위한 지자체 간 연합을 도모하고 성장 가능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 치솟는 휘발유값 2000원 육박

    치솟는 휘발유값 2000원 육박

    휘발유값이 무서운 기세로 상승하며 5개월 만에 2000원선 돌파를 코앞에 두고 있다. 올 초부터 라면 등 식료품 가격과 전기·가스 등 공공요금 인상으로 가뜩이나 어려워진 서민 경제의 그늘이 더욱 깊어질 전망이다. 27일 한국석유공사가 운영하는 오피넷에 따르면 국내 주유소 휘발유 평균 판매 가격(지난 26일 기준)은 ℓ당 1988.8원을 기록했다. 이는 지난주(1967.6원)보다 21.2원(1.0%) 오른 가격으로 2월 한 달 동안 70원 정도가 올랐다. 서울 지역에서는 연일 전국 최고가를 경신하고 있다. 서울 지역 평균 가격은 지난 1월 27일 1999.5원을 저점으로 오름세를 타더니 지난 26일 2084.7원을 기록해 한 달 사이에 무려 4.2%(85.2원)가 뛰었다. 내릴 땐 ‘찔끔’이더니 오를 땐 ‘왕창’이어서 수직에 가까운 상승곡선을 그렸다. ‘기름값이 묘하다’는 의심이 가시지 않는 이유다. 지난해 9월 셋째 주(2026.5원)부터 내리막길을 걸은 휘발유 가격은 올해 1월 넷째 주(1920.2원)까지 20주간 106.3원 하락했다. 일주일 평균 5원씩 내렸다. 하지만 1월 넷째 주부터 4주 동안 무려 68.7원 오르면서 평균 17.5원씩 상승했다. 문제는 최근 국제 유가 급등 탓에 오름세가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다. 한동안 배럴당 107~108달러로 안정됐던 두바이유 가격이 지난달부터 상승, 이달 중순에는 113달러를 돌파했다. 미국의 경기지표 호조로 세계 석유 수요가 늘어나고 미국의 이란 제재 추가발표 등으로 중동 지역의 불안 고조가 원인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원·달러 환율이 재상승해 유가 상승을 부추기고 있다. 원유 도입 가격이 보통 2~3주 시차를 두고 국내 휘발유값에 반영되는 점을 고려하면 당분간 기름값은 고공행진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따라서 이르면 3월 첫째 주 휘발유값이 2000원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지난해 10월 말 2000원대 이하로 떨어진 이후 20주 만에 2000원대로 복귀하는 것이다. 석유공사 관계자는 “최근 미국과 유럽의 경제지표 호조에 따른 석유 수요 증가와 원·달러 환율의 영향에 아시아 국가의 정제시설 유지 보수가 더해지면서 국제 석유제품 가격이 초강세를 유지하고 있다”면서 “이에 따라 국내 유가도 당분간 가파른 상승세가 이어질 전망”이라고 말했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이영탁 미래와 세상] 재미없는 리더십

    [이영탁 미래와 세상] 재미없는 리더십

    사람 사는 게 무언가, 왜 그토록 치열하게 사는가? 결국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다른 말로 하면 재미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다. 일찍이 공자도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결국 재미있고 즐겁게 살아야 하는데 지금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다. 사실 먹고살기가 어려울 때는 삶의 만족도를 높이기가 비교적 쉬웠다. 경제적 여유만 나아져도 상당부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우리가 별나서 그런 게 아니라 세계적인 공통 현상이다. 일반적으로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으면 국민들의 행복지수를 더 높이는 것은 어렵다고 한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니까 이것저것 고려할 게 많아지기 때문이리라. 이런 판에 요즘은 정치까지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 같다. 원래 정치는 국민을 편안하게 해주는 데 목적이 있다.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선 기간 중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는 등 재미있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다. 다른 후보와의 차별을 위해 ‘준비된 대통령’임을 강조했다. 국민의 뜻을 하늘처럼 받들면서 통합·상생의 정치를 하겠다고 했다. 한번 약속하면 반드시 지키겠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대통령이 되고 나서 보여주는 모습은 기대에 못 미치는 것 같다. 일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방식에 문제가 있어서다. 국민에게 공감과 감동을 주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결과적으로 재미가 없고 미덥지 못하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얼마 안 있어 많은 사람들이 짜증스러워할지 모른다. 새 정부의 출범을 자세히 보면 우선 타이밍을 못 맞추고 있다. 무슨 일이든 늦지 않게 선제적으로 해야 한다. 상황을 리드해 나가야지 끌려 다녀서는 하수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남의 탓을 한다면 무책임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둘째, 일의 내용도 별로다. 부분과 전체의 조화가 부족하다. 따라서 배려와 균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개별 사안도 준비 부족이 많다. 셋째, 일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 지금은 소수가 밀실에 앉아 일하는 시대가 아니다. 리더가 혼자서 결정하고 일방적으로 지시하는 시대는 더욱 아니다. 여러 사람의 중지를 모아 분야별로 다양한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 넷째, 더 큰 문제는 소통의 부족이다. 양방향 무제한 소통시대에 일방 소통으로는 안 된다. 답은 밖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한 많이 열어야 한다. 여건 변화에 따라 기왕의 주장을 바꾸는 유연성도 필요하다. 70 인생에 생각도 70번이나 바뀐다고 하지 않았던가. 지금처럼 일하다 보면 힘은 힘대로 들고 평가는 별로일 수밖에 없다. 밀실에서 소수가 모여 머리를 짜내서는 좋은 답을 구하기 어렵다. 일의 진도도 잘 나가지 않는다. 더구나 장고 끝에 악수가 나올 수도 있다. 더 나쁜 것은 아랫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하긴 하겠지만 책임지고 일하지 않는다. 지시 받아 하는 일은 열정을 쏟지 않고 건성으로 하기 마련이다. 같은 일을 해도 왜 이렇게 재미없게 하는지 모르겠다. 실망스러워하는 사람이 많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다가도 부동의 고집을 보면 짜증이 난다. 나아질 기미도 없다. 대통령 본인도 벌써 표정이 굳어지고 여유가 없어 보인다. 더 푸근한 세상, 더 재미있는 세상을 기대했는데 일찌감치 기대를 접어야 하나. 세상을 움직이는 파워가 소수의 권력 엘리트에서 다수의 개개인으로 옮겨간다는 말이 귀를 울린다. 그렇겠구나! 지도자가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이 모두 우수한 지도자라는 것을 모르는 한 그렇게 되겠구나. 머지않아 직접민주주의가 온다는 말도 머리를 스친다. 그렇겠구나! 200년 대의민주주의가 이제 곧 종말을 고하게 된다는 말이 이래서 나오는구나. 많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정작 당사자는 낌새도 못 차리고 있는 것 같아 답답하고 안타깝다. 그리고 재미가 없다.
  • 다둥이가구에 출산·육아 상품 파격할인

    롯데마트가 자녀가 둘 이상인 가구를 대상으로 파격 할인 등 다양한 혜택을 주는 ‘다둥이 클럽’ 서비스를 선보인다고 27일 밝혔다. 가계의 육아 부담을 줄여 정부의 출산 장려정책에 참여하겠다는 취지다. 다둥이 클럽 회원은 분유, 완구, 물티슈 등 28개 브랜드 1000여개의 출산·육아 상품을 5~15%가량 싸게 살 수 있다. 다른 유통업체의 키즈 멤버십과 달리 연중 내내 할인을 받을 수 있다. 구매 금액에 따라 상품권도 증정하며, 셋째 아이를 출산하면 20만원 상당의 출산용품 할인 혜택도 있다. 롯데월드 자유이용권 50% 할인권, TGIF 키즈 콤비네이션 스테이크 무료시식권 등도 제공한다. 롯데마트는 ‘다둥이 클럽’ 할인 상품을 연말까지 현재의 2배 수준인 2000여개로 늘리고, 제휴사와 연계한 할인 혜택도 개발할 방침이다. 남창희 롯데마트 마케팅부문장은 “다둥이 가구의 육아 부담을 덜기 위해 일시적 상품 할인이 아닌 다양한 헤택을 연중 상시 제공할 것”이라며 “저출산 대책 마련에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회원 가입은 롯데마트 카드센터에서 받는다. 첫째가 13세 이하인 2자녀 이상의 부모가 주민등록등본 또는 건강보험증을 지참하거나, 둘째를 임신한 1자녀 가구에서는 임신부의 산모 수첩을 추가로 지참하면 된다. 회비는 없다. 박상숙 기자 alex@seoul.co.kr
  • 늙어가는 산모

    늙어가는 산모

    20대 산모를 보기가 힘들어졌다. 통계청이 26일 발표한 ‘2012 출생·사망통계’(잠정)에 따르면 20대 산모는 15만 1800명으로 전체 산모의 31.3%에 그쳤다. 10년 전만 해도 20대 산모는 27만 8390명으로 전체의 절반 이상(56.6%)을 차지했다. 이재원 통계청 인구동향과장은 “초혼 연령이 계속 올라가고 있는 데다 결혼 후에도 맞벌이 등으로 인해 출산 시기를 조절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여성의 평균 초혼 연령은 1990년 24.8세에서 2011년 29.1세로 4.3세 높아졌다. 상대적으로 35세 이상 고령 산모는 꾸준히 늘고 있다. 5명에 한 명꼴이다. 2002년 3만 9454명(8.0%)에 불과했던 고령 산모는 지난해 9만 300명(18.6%)으로 늘었다. 10년 사이 2.3배 급증했다. 이런 추세를 감안해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고령 임신부에 대한 비자극 검사(산전검사)의 건강보험 혜택을 1회에서 2회로 늘렸다. 셋째 아이의 출생 성비(여아 100명당 남아 수)는 2002년 141.1에서 지난해 109.2로 떨어졌다. 뿌리 깊은 남아 선호 사상이 약해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이 과장은 “103~107을 정상 성비로 보는 만큼 셋째 아이의 경우 거의 성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지난해 출생아 수는 48만 4000명으로 전년보다 1만 3000명(2.8%) 늘었다. 2007년(47만 3200명) 이후 최고치다.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인 합계출산율도 지난해 1.30명으로 3년 연속 오름세다. 초(超)저출산국 탈출이 임박한 것으로 통계청은 내다봤다. 사망자 수도 26만 7300명으로 전년보다 9900명(3.8%) 늘었다. 고령화에 따라 70세 이상 사망자가 8.1% 늘어난 데 따른 것이다. 2월 사망자가 유난히 많았다. 기록적인 한파 때문으로 보인다. ‘객사’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도 흥미롭다. 2002년까지만 해도 집(45.4%)에서의 사망이 의료기관(43.4%)보다 많았지만 2003년 역전되기 시작해 지난해는 의료기관(70.1%)이 집(18.8%)을 월등히 앞질렀다. 세종 김양진 기자 ky0295@seoul.co.kr
  • [열린세상] 북한 ‘핵 그늘’에서 벗어날 결의와 전략/조성환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열린세상] 북한 ‘핵 그늘’에서 벗어날 결의와 전략/조성환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북한은 지난 12일 제3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우라늄탄에 의한 핵무기의 대량화, 소형·경량화에 의한 핵폭탄의 미사일 탑재력이 시험됨으로써 북한은 사실상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1993년 3월 18일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로 시작된 한반도의 핵 위기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수많은 노력, 그리고 남북한 및 국제적 합의들은 이로 인해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북한의 2·12 핵실험은 대한민국을 핵이라는 절대 무기의 그늘에 가두었고, 동북아 국제정치를 핵 도미노와 신냉전적 대치로 몰아갈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핵 그늘’의 엄중한 현실에 직면할 것이다. 따라서 이를 벗어날 비상한 결의를 다지고 전략적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난 20년 동안 북한 핵 문제 대처의 실패 요인을 엄정하게 따지는 게 선행돼야 한다. 실패 자체는 용납될 수 있지만 실패의 반복은 결코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핵 문제 20년이 북한의 핵무기(탄두) 보유라는 최악의 결과로 나타난 것은 집요한 북한 권력의 핵무장 의지에 의한 것이지만, 우리와 국제사회가 이 문제를 제대로 못 다룬 탓도 있다. 먼저, 우리는 지금까지 북핵을 ‘발등의 불’이라기보다는 ‘강 건너 불’로 보려는 안이함에 젖어 있었다. 북한 핵 문제를 우리의 사활적 안보 사안이 아니라 미국의 문제로 전가(轉嫁)함으로써 이를 풀어 나가는 주체적 전략을 수립하지 못했다. 소위 종북세력은 물론이거니와, 일부 정권 당국이나 전문가들조차도 북한 핵 문제를 북·미관계의 역학게임으로 보려고 했다. 둘째, 북한 핵 문제를 북한 전제 권력의 유지라는 정치성, 남한에 대한 비대칭적 절대무기를 통한 제압이라는 전략성을 간과한 채 전술적 차원의 ‘핵카드’로 치부하려고 했다. 북핵 20년 동안 우리는 핵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한 정치적·전략적 결단을 고민하지 않았다. 단지, ‘대화와 협상’을 통한 ‘전술적 흥정과 거래’만 반복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공갈과 기만 전술을 기묘하게 구사하여 결국 핵무기와 이를 운반할 미사일 체계까지 갖추었다. 셋째, 우리와 국제사회는 북한과의 시간 경쟁에서 판정패했다. 1, 2차 핵 위기의 야기,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이라는 핵 국가 이행과정에 우리와 국제사회는 북한 정권의 자멸을 기대했다. 북한은 핵 문제를 일으킨 ‘불량국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북한은 유례 없는 전제와 강압정치로 권력을 유지·세습했고, 공갈·협박 그리고 기만전술로 밖으로부터의 다양한 비핵화 압력을 견뎌냈다. 우리와 국제사회가 희망한 체제 붕괴는 도래하지 않았다. 북한은 핵 무장을 위한 기만과 지연전술을 체계적으로 전개시켜 핵 무장에 이르렀다. 이제 우리는 북한 핵 그늘의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극복하는 데 국력을 결집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나간 실패의 교훈을 엄정하게 인식하고 새로운 대응전략을 구축·실행해야 한다. 먼저, 북한 핵 문제의 당사자 및 주체적 대응 원칙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북한 핵을 북·미 간의 문제로 전가한 지금까지의 안이한 현실인식, ‘민족의 핵’은 선(善)이라는 환상 등을 일소시켜야 하는 것이다. 아울러 대한민국은 핵이라는 불덩이를 이고 있다는 절체절명의 위험성에 대한 공감대도 결집해야 한다. 더 이상 ‘핵카드’는 존재하지 않고, 가공할 북한의 핵 위협이 현실화되었다는 점을 국민 모두가 직시해야 한다. 따라서 북한 핵 문제를 더 이상 정파적 차원의 흥정과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 북한 핵에 대한 실효적인 억제력 구축이 북한과의 어설픈 협상에 선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북한의 실질적인 체제변화를 위해 시간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북한 핵은 분명 전제정권의 유지를 위한 수단이지만 체제의 지속가능성을 닫아 버리는 ‘외통수’이다. 우리는 북한 정권이 ‘핵 무장이 권력 유지의 보약이 아니라 체제붕괴의 독약’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야 한다. 이와 함께 내부와 외부의 역량을 결집하여 북한의 체제변화를 유도해야 한다. 이것이 북한 정권의 핵 무장 전략을 넘어선 민족 통일을 위한 시간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길이다.
  • 장려금보다 보육시설 확충이 출산 높였다

    서울 강남구는 출산장려금 지급 제도보다 구립보육시설 확충이 출산율 향상에 더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26일 밝혔다. 구에 따르면 전국 최하위 수준인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그동안 출산장려금 지급, 전국 최초 365일 24시간 전일제 보육시설 운영, 구립보육시설 확충 등 다양한 출산장려정책을 폈는데 출산장려금 지급보다 구립보육시설 확충이 실제 출산율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됐다. 구는 2009년 출산장려금을 둘째 100만원에서 여섯째 이상 3000만원까지 전국에서 가장 많이 지급했지만 2009년 출산율은 0.79명으로 2008년(0.82명)보다 떨어졌다. 오히려 재정여건이 어려워 2010년과 2011년 두 차례에 걸쳐 출산장려금을 둘째 50만원, 셋째 100만원, 넷째 이상 300만원으로 대폭 줄였지만 출산율은 2010년 0.86명, 2011년 0.85명으로 높아졌다. 출산율 증가는 2010년 민선5기 출범 이후 구립보육시설을 크게 늘렸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됐다. 구는 당시부터 지금까지 동 문화센터와 구민회관 유휴 공간 등을 활용해 458명 정원의 8개 구립보육시설을 만들었고, 올해는 465명 정원의 구립어린이집 8개소를 확충한다. 신연희 구청장은 “2011년 주민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최우선 추진해야 할 출산율장려정책은 ‘보육시설 확대’인 것으로 나타났다”면서 “올해는 구립보육시설 확충 외에도 종교시설이나 일정 규모 이상 직장의 민간어린이집 확충에 나서 임기 내에 61개소 2863명 정원의 보육시설을 확충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현석 기자 hyun68@seoul.co.kr
  • [열린세상] 박근혜 정부의 외교, 위기에서 기회로/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

    [열린세상] 박근혜 정부의 외교, 위기에서 기회로/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

    국민들의 기대 속에서 행복시대를 선언한 박근혜 정부가 어제 출범했다. 박근혜 정부가 직면한 현실은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상황이다. 우리에게 닥친 위기와 도전을 슬기롭게 대처해야 한다는 것은 박근혜 정부의 사명이자 모든 국민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박근혜 정부는 남북한 관계에는 신뢰 프로세스 구축을, 동북아에서는 화해와 협력 관계를, 그리고 국제사회에서는 기여하는 외교를 대외 정책기조로 설정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박근혜 정부가 ‘당당하며 국익을 증진하는 외교’를 펼치기 위한 정책적인 제언을 하고자 한다. 우선, 무엇보다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북핵 불용’을 실현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북한과의 관계를 보면 양자가 정면으로 달려드는 ‘치킨 게임’의 양상이었는데, 항상 충돌을 회피하는 것은 한국이었다. 그 결과, 북한이 의도하는 대로 상황이 전개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는 북한이 잘못된 선택을 하였을 경우 감옥에 갈 수 있다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으로 바꾸어야 한다. 박근혜 정부는 북한이 핵 개발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북한이 최악의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시켜야 한다. 이것이 박근혜 대통령의 신뢰 프로세스를 실현하는 길이다. 자칫 신뢰 프로세스를 북한에 대한 ‘지원 정책’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신뢰 프로세스는 굳건한 안보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한 남북한의 신뢰를 형성할 수 없다는 철학에 근거하고 있다. 이 점에서 단기적으로 박근혜 정부는 군사력에 대한 투자와 선택을 대폭 늘려야 하며, 이를 기반으로 주변국에는 한국의 ‘북핵 불용’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한국의 강력한 의지 표명과 이행은 주변국을 설득할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이다. ‘북핵 불용’ 원칙에 대한 주변국과의 공감대를 확보하고 북한을 실질적으로 압박하는 노력이 절실한 때이다. 둘째, 미·중 갈등을 완화하도록 하는 주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아시아 안보 불안정의 중심에는 미·중 갈등이 있다. 북한의 도발에는 중국의 ‘북한 껴안기’가 있으며, 센카쿠열도를 둘러싼 중·일 갈등에는 일본에 대한 미국의 지원이 있다. 결국 미·중관계가 나빠지면, 북한 비핵화와 동북아의 협력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가장 우려되는 점은 미국과 중국이 담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한반도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미·중이 ‘북핵 불용’이 아니라 북핵을 인정하는 ‘핵 비확산’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도 박근혜 정부는 북한 핵문제 등 당면 외교 현안에 대한 해결 의지와 대안을 신속하고 명확하게 국제사회에 표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한·미 정상회담과 한·중 정상회담을 성급하게 추진하기보다는 박근혜 대통령이 제시한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에 대한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현안 해결을 위한 다양한 형태의 다자협력 강화와 확대에 한국이 주도적인 외교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이미 제도화되고 정례화된 ‘한·중·일 정상회담’을 안보 협력의 장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으며, 한·미·중 전략포럼도 적극적으로 실현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셋째, 한·일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전략적인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다케시마의 날’로 시작되는 한·일관계의 경색은 박근혜 정부 출범 초기부터 풀어야 할 외교적인 난제임에 틀림없다. 대일 정책은 향후 5년 한국의 대외전략 속에서 일본의 전략적 가치 평가와 함께 동북아 질서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박근혜 정부의 대일정책은 양국 간 현안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안정적인 지역·세계 질서의 구축·유지라는 다자적 관점에서 한·일 양국의 상호 전략적 가치를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대일 정책의 방향은 일본과 전략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하여 중견국 외교를 추진하는 동반자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제도적인 틀 속에서 지속적인 교섭을 해야 하며, 일본과의 인식 공유를 위한 정책 네트워크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 [글로벌 시대] 이제 출발이다! 한국의 공적개발원조/이명신 월드비전 동해종합사회복지관장

    [글로벌 시대] 이제 출발이다! 한국의 공적개발원조/이명신 월드비전 동해종합사회복지관장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관문 중 하나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에 가입하는 것이었고, 그 꿈은 2010년 달성됐다. 2011년 부산 세계개발원조총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며 우리의 위상은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DAC의 주관으로 5년마다 받아야 되는 피어 리뷰(Peer Review, DAC 회원국 간 상호 평가)를 한국은 지난해부터 받기 시작해 그 결과를 지난달 30일 발표했다. 그동안 한국은 공적개발원조(ODA) 규모(2013년 2조 411억원 예상)를 꾸준히 증액시켜 왔다. 2015년까지 국내총생산(GDP)/국민소득(GNI) 비율 0.25%까지 확대(2013년 0.16%), 국제개발협력기본법 제정, 국제개발협력 선진화 방안 수립, 총리실 산하 국제개발협력위원회 설치 등 ODA의 양적·질적 성장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반면 국제개발협력 분야에서 일해온 국제개발 NGO 단체들과 시민단체, 학회 등에서 꾸준히 제기한 문제들이 이번 DAC 피어 리뷰에서도 권고사항으로 지적됐다. 이 가운데 중요한 과제 몇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정부의 ODA 실행에 대한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 국제사회에 약속한 2015년 GDP/GNI 비율 0.25%를 준수하려면 연간 1조원 이상의 예산을 증액해야 한다. 새 정부의 각종 공약 실천 등으로 ODA 예산 확보에 어려움이 예상되지만 이를 위해서 정부의 국제적 약속에 대한 강력한 실행 의지가 있어야 한다. 둘째, 독립적이고 통합된 원조기구의 신설이 필요하다. 양자와 다자 간 원조, 유상(기획재정부 주관)과 무상원조(외교부)의 분절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30개 이상의 정부 부처와 산하기관들이 ODA를 시행 중인데, 통합된 전략과 시스템의 부재로 효과를 경감시키고 있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기구가 필요하다. 셋째, ODA 정책에 대한 소통과 투명성, 책무성을 강화해야 한다. 그동안 ODA와 관련된 정책을 입안하거나 결정된 사항들에 대한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심지어 정부의 국제개발협력 중점 국가조차 비밀이라고 공개하지 않았다. 국내·외 파트너에 대한 투명성과 책무성을 강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국민 홍보를 통해 ODA에 대한 이해와 협력을 강화하길 바란다. 넷째, ODA 관련 국제규범을 지켜야 한다. 원조 효과성에 대한 국제적 규범과 원칙 준수, 비구속화 확대 약속 준수, 최빈국에 대한 유상원조 규모 축소, 무상원조 확대 등에서 한국적 특성을 고려해 나갈 필요가 있다. 다섯째, 민간단체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파트너로 협업을 확대하는 것이다. 유상 원조는 정부 차원에서 진행하되 무상 원조 확대 및 이에 대한 시행 파트너로 시민단체들을 참여시켜 시민사회의 기능과 역할을 활성화해야 한다. 불과 반세기 만에 최빈국에서 DAC의 일원이 된 한국을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를 방문하면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따뜻하게 환영해준다. 어느새 한국은 그들에게 희망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본다. 아직 한국의 ODA는 갈 길이 멀다. 그렇다고 주눅들 필요는 없다. 이제 출발이다. DAC의 일원이 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부단히 부족함을 채워 세계를 바라볼 때 설 자리가 보이고 어떤 모습으로 나가야 할지 알게 될 것이다. 한국의 ODA를 기대해 본다. 우리는 대한민국이니까.
  • [명사가 걸어온 길] 4.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

    [명사가 걸어온 길] 4.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

    1960∼70년대 기타 하나 들고 혜성같이 나타나 한국 가요계를 풍미했던 신중현(75). 그에겐 ‘록의 대부’며 ‘록의 비조’ ‘6현의 연금술사’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한 세대가 지난 지금 많은 가수와 음악인들은 역사의 기억 너머로 묻혀졌던 그의 묵은 음악을 다시 꺼내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중현을 ‘살아있는 전설’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다. 당대의 숱한 히트곡과 스타들을 만들고 배출한 불세출의 명인이지만 정작 그의 삶은 굴곡으로 점철돼 있다. 그 질곡의 길을 걷게 한 단초는 배고픔과 외로움이라고 신중현은 말한다. 하지만 그의 삶과 분신인 음악에 담긴 메시지는 한 가지, ‘새로운 것들을 향한 멈추지 않는 열정’. 그래서일까, 한국 가요계의 이단아이자 진보주의자였던 그는 2006년 은퇴를 앞두고 내놓은 자서전 제목도 이렇게 썼다.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2006년 7월 신중현이 전격 은퇴 선언을 한 뒤 마지막 전국 순회공연을 준비할 무렵,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 록의 대부’라는 제목으로 신중현의 살아온 이야기를 실었다. 최근 경기 용인시 양지면의 거처에서 만나 ‘월스트리트저널 기사를 기억하느냐’는 첫 질문에 신중현은 “나도 의외였다”고 했다. 유난히 작은 키에 ‘작은 거인’이란 별명이 겹쳤다. 신장이 얼마나 되느냐는 미련한 질문에 “한 번도 재 본 적이 없어 모른다”며 무심코 던진 한마디. “돌이켜 보면 내가 살아온 인생은 꼭 곡예 같다.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줄 위에서 움직이는 꼴이라고 할까.” 용인 거처는 은퇴와 함께 1986년부터 20여년간 음악 활동의 아지트로 썼던 서울 송파구 문정동 ‘우드스탁’ 생활을 마감하고 2007년 새로 튼 보금자리. 거처 겸 연습실, 작은 공연장을 갖춘 공간이다. 지금도 대패며 망치를 들고 구석구석을 다듬고 만들고 있다. 혼자 작업실을 꾸미느라 힘들지 않았느냐고 묻자 “어린 시절 그 험한 고생을 했는데 이까짓 거야”라며 초년 시절로 이야기를 돌렸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만주에서 이용업을 하며 큰돈을 벌었다고 한다. 6·25전쟁 통에 한 푼도 건지지 못한 채 충북 진천으로 옮겨 어렵게 살아야 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1년 새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두 사별한 고아. 동생을 친척 집에 맡기고 상경해 제약회사를 하는 친척 집에 얹혀살았다. “공장 일이 너무 힘들고 서러웠어요. 판자 쪼가리에 군용 전화선을 매어 만든 기타를 치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습니다.” 중학교 때 공장 일을 해 모은 돈으로 기타를 사서 혼자 연습하다가 고교 2학년 때 집을 뛰쳐나와 서울 종로 바닥을 전전했다. 당시 종로엔 ‘기타 잘 치는 신중현’이란 명망이 파다했고 미8군 무용수 눈에 띄어 오디션을 거쳐 미8군 플로어쇼에 데뷔한 게 음악 인생의 시작이다.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어요. 보수도 당시로선 큰돈이었고 미군부대 공연 때마다 최상급 대우를 받았으니까요.” 언제부터인가 ‘재키’ ‘히키’ ‘스코시’라는 별명이 미군들 사이에 퍼졌고 공연이 끝나면 악수를 청하는 미군들이 줄을 섰다. 미군 정보부 요원들이 출입하는 용산역 건너편 ‘시빌리언 클럽’에서 1960년 가졌던 첫 기타 독주 공연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연주가 끝난 뒤 떨려서 인사도 못 하다가 얼떨결에 고개를 들어 보니 미군 전원이 기립박수를 치고 있는 게 아닙니까.” 미8군 스타 생활을 5년 정도 했을까. 베트남전이 터지고 주한 미군이 베트남으로 빠져나가면서 미군부대 쇼도 시들해졌다. 미8군 생활을 접은 건 단순히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연을 하면서 늘 외국곡을 그대로 따라 연주하고 부르는 데 회의가 들곤 했지요. 한국적인 음악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커져 가던 때였습니다.” 당시 한국 가요계는 남진, 나훈아로 대변되는 트로트의 세상. ‘한국 가요계를 바꿔보자’며 국내 가요시장에 뛰어들었지만 대중들은 그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가 천착했던 로큰롤이며 사이키델릭 록은 낯설기만 한 것이었다. “우리 가요계의 수준이 서방세계의 음악과 너무 차이 났어요. 당시 미군부대 공연 때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든다는 미군들의 말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왜 우리는 그토록 훌륭한 콘텐츠를 갖고 있으면서도 문화적 자부심을 갖지 못하는 걸까.’ 그 창피함과 문제의식은 이후 한국적 특성을 살린 록으로 뻗친다. 한국 최초의 록 밴드 ‘애드4’(Add4)를 시작으로 그룹 ‘조커스’ ‘던키스’ ‘퀘스천스’ ‘더 맨’ ‘신중현과 엽전들’을 결성해 실험적인 음악을 구가했지만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룹 활동을 하면서 발굴해 낸 스타들은 숱했고 음반사와 가수들은 그의 곡을 받기 위해 줄을 섰다고 한다. ‘빗속의 여인’이며 ‘커피 한잔’ ‘님아’ ‘떠나야 할 그 사람’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미인’…. 그리고 그 노래들을 부른 펄시스터즈, 김추자, 장미화, 장현, 박인수…. 인생의 굴곡은 사이클을 이룬다고 했던가. 전국에 ‘신중현표’ 음악이 깔리고 입을 통해 번져 갈 무렵, 그는 군사정권의 칼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괘씸죄’로 인한 세상으로부터의 격리다. “대통령 찬가를 만들어달라는 전화를 받았어요. 한마디로 잘라 거절했던 게 미운털이 됐던 것 같아요.” 죄목은 ‘대마초 공급책’이다. “미군부대 공연장엔 당시 월남전에 반대하는 히피들이 많이 모였어요. 대마초며 마리화나를 상습적으로 즐겼던 그들은 우리 집에도 드나들었고 집에 그런 환각제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모진 고문과 심문 끝에 정신병원과 교도소 신세를 졌고 그가 만든 100여곡이 금지곡으로 묶였다. 그에겐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1987년에야 그의 곡들이 해금됐지만 ‘대마초 사건’은 지금 생각해도 억울하기만 한 생트집이다. “따져 보면 저를 지옥으로 몰아간 이벤트지요. 어떻게 그 일을 잊을 수 있겠어요.” 이후 소공연을 하면서 기타 산조 ‘무위자연’이며 ‘김삿갓’ 같은 한국적인 곡들을 발표했지만 회생 기미가 없었다. 마침내 2006년 은퇴선언을 하고 용인에서 사실상 칩거에 들어갔다. 그런 그를 다시 세상 밖으로 불러낸 건 2009년 미국 기타 전문 회사 펜더로부터 헌정 기타를 수여받은 일이다. 에릭 클랩턴, 제프 벡, 에디 반 헤일런 등 기라성 같은 음악인들만 받았다는 그 기타다. 세계에선 여섯 번째, 아시아에선 처음이라는 펜더 기타 헌정. “마치 신의 선물 같았어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는 계시라고나 할까.” 그는 ‘신의 부름’이라는 그 사건 이후 또 다른 삶을 시작했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무엇보다 록 음악이 태동된 본향으로부터 이어진 그에 대한 관심이 놀랍기만 하다. 미국 음반사 ‘라이트 인 디 애틱’은 2011년 사이키델릭 록 모음집과 그가 제작한 김정미의 ‘나우’를 발매한 데 이어 ‘신중현과 엽전들’ 1집을 CD로 제작해 현지 시장에 내놓았다. 지난해 9월엔 미국 음반사의 초청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무대에도 섰다. 오는 10월 그 음반사의 초청으로 같은 장소에서 재공연도 예정돼 있다. 칩거에 들었던 황혼의 음악인을 다시 일으켜 세운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좀처럼 뒤돌아볼 줄 모르는 천성 때문인 것 같아요. 음악 하는 사람은 먼저 치열한 수양을 통해 실력을 쌓아야 하고 무엇보다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요즘 팬들을 몰고 다니는 젊은 아이돌 가수들을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인기가 하늘을 찌를 것 같지만 실력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사상누각이지요.” 실제로 신중현이 ‘6현의 연금술사’라는 별명을 얻게 된 바탕엔 뼈를 깎는 수행과 노력이 있다. 미8군 데뷔 전 기타 교습서며 주한 미군방송 AFKN을 통해 접한 곡들을 손이 갈라지도록 연습했다. 1960년대 초반엔 해군 군악대장을 지낸 이교숙 선생을 사사하며 화성법을 배웠고 그 덕에 작곡에 천착했던 것도 사실이다. 약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 중 세 손가락으로만 연주하는 ‘3·3주법’이며 5음계를 적용한 화성법이나 곡 편성도 전 세계에서 그만이 할 수 있는 독창적인 기법으로 소문나 있다. 그러면 그가 말하는 철학은 또 무엇일까. 놀랍게도 노자와 장자 이야기를 불쑥 꺼낸다. ‘대마초 사건’으로 교도소에 수감됐을 때 두 살 연하인 부인 명정강씨가 가져다준 노자와 장자 책은 그의 음악과 인생의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낮은 자세로 살다 보면 다칠 게 없어요. 책을 보면서 마음을 비울 때 많은 것을 얻게 됐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세상에 많은 도움을 주면서도 낮은 데로 묵묵히 흐르는 물을 이길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에게 낮음의 철학을 깨우치게 한 책들을 소개한 부인은 미8군 시절 만난 여성 그룹 드러머 출신. 록밴드 시나위의 리더인 큰아들 대철, 기타와 키보드에 모두 능한 둘째 아들 윤철, 드럼 스틱을 잡은 셋째 석철은 모두 아버지 신중현의 길을 따르고 있는 내로라하는 음악인들이다. 4부자는 지난해 12월 함께 공연 무대에 서기도 했다. “대견합니다. 돈벌이에 매달리지 않는 음악을 하고 있다는 게 걱정스러우면서도 흐뭇하지요.” 모두가 부러워하는 한국 대중음악계의 실력자라는 세 아들을 포함해 가족들에겐 못난 가장이자 아버지였다고 말하는 신중현. “지금은 떨어져 사는 부인과의 사실상 별리도 음악에 대한 고집 때문이었다”는 말을 전하는 그의 얼굴 표정이 어두웠다. 그 숱한 히트곡과 스타들을 만들었으면서도 드러난 스캔들 한 번 없었다는 그의 꼿꼿하고 고집스러운 음악 인생이 고스란히 읽히는 대목이다. 그가 남은 생애에 꼭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평생을 받쳐 천착했던 한국적인 음악이다. 그래서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미인’과 ‘아름다운 강산’을 입에 올린다. 각설이 타령조를 록에 얹은 ‘미인’과 국악풍의 전설 같은 노래. 그토록 열정을 쏟아 만들고 세상을 향해 외쳤지만 번번이 외면받았던 노래들을 요즘 젊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하고 다시 찾아 불러 신이 난단다. 요즘은 자신의 음악을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려 정리하는 작업에 매달려 있다. 작은 공연을 생중계할 수 있는 공연장 만들기도 한창이다. 6가닥의 기타 줄에 인생의 희로애락을 담아 살았고, 또 그렇게 살아갈 노장의 버팀목은 철석같은 의지일 것이다.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책꽂이]

    내 인생의 작전타임(정은일 지음, 함께북스 펴냄) 살다 보면 한 번쯤 리더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그때 좋은 리더가 되기 위한 아이디어들을 담았다. 일단 전문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 등산모임 리더라면 길이라도 하나 더 알아야 한다. 둘째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잘 설득해서 이끌고 나가야 한다. 셋째 부하의 능력을 보고 권한을 위임해줄 수 있어야 한다. 온갖 잘난 척으로 다 끼어드는 건 리더의 요건이 아니다. 저자는 지위만 차지한다고 리더가 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1만 4000원. 북경일기(송훈천 지음, 서교출판사 펴냄) 저자는 1992년 한·중수교 이전 적성국으로 분류됐던 중국에 들어가 현대자동차 중국 초대 지사장을 지냈고, 외환위기 직후 현대차를 떠나 개인 사업을 벌이면서 20여년 동안 중국에 살았다. 이 20여년의 경험을 소소한 것까지 빠뜨리지 않고 한데 묶어냈다. 1만 5000원. 카북(자일스 채프먼 책임편집, 신동헌 등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재규어, 르노, 포르셰, 시트로엥, 푸조, 스즈키, 도요타, 벤츠 등 세계 유명 자동차 제조사들의 역사와 차종 등을 화려한 컬러도판과 함께 실었다. 시대순으로 배열됐는데 간간이 당대의 시대상황을 적어넣어 뒀다. 책임편집자가 자동차전문지 편집자였고, 번역자들 역시 국내 자동차 전문지 기자들로 구성됐다. 으르릉대는 엔진과 유선형으로 부드럽게 빠진 몸매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환호성을 지를 만한 책이다. 5만원.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김지은 등 지음, 시공주니어 펴냄) 2009년 볼로냐 국제어린이도서전에 참가한 29명의 작가를 소개하는 책이다. 우리나라 그림책이 일정 정도의 수준에 올랐다는 평은 많음에도 그림책 자체는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어떤 풍의 그림책들이 있고, 그들이 그림책을 대하는 자세는 어떤 것인지 등 상세한 설명이 담겨 있다. 2만 3000원.
  • 朴당선인 지지율 44%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지지율이 44%로 떨어졌다. 최근 내각 및 청와대 인선에 대한 부정적 평가 등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22일 발표된 한국갤럽의 2월 셋째 주 정기 여론조사(18~21일)에서 ‘박 당선인이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잘하고 있다’는 응답은 44%에 불과했다. 지난주(2월 둘째 주) 조사 때 49%에 견줘 5%포인트 하락했다. ‘잘못하고 있다’는 32%로 지난주 29%보다 올랐다. 지지율이 가장 높았던 1월 넷째 주 56%와 비교, 3주 만에 12%포인트 급락한 것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취임 직후 첫 분기 직무수행 평가에서 김영삼 71%, 김대중 71%, 노무현 60%, 이명박 52%였다. 부정적으로 평가한 응답자의 52%는 ‘인사 잘못 및 검증되지 않은 인사 등용’을, 12%는 ‘국민 소통 미흡’을, 10%는 ‘공약 실천 미흡’을 이유로 꼽았다. 조사는 휴대전화 임의전화걸기(RDD) 방식으로 이뤄졌으며,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2.8%포인트다. 황비웅 기자 stylist@seoul.co.kr
  • Clubmed Kabira Beach 三無 리조트 이야기

    Clubmed Kabira Beach 三無 리조트 이야기

    클럽메드에는 3가지가 없다. 그 三無는 완벽한 휴가를 즐기기 위한 조건이기도 하다. 일본 열도 가장 끝에 있는 오키나와 이시가키 카비라 비치에서 직접 경험해 봤다. 클럽메드 해변에 파랑색 깃발이 걸렸다. 파랑색 깃발은 지금 비치에서 해양스포츠를 즐기기 안성맞춤이란 사인이다 클럽메드는 ‘리조트’가 아니다? 휴양을 목적으로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클럽메드는 꽤 우선순위가 높은 리조트다. 입소문만으로 클럽메드를 선택하는 이가 적지 않은데, 소문이 전부인 줄 알고 무턱대고 선택했다가는 진정한 재미를 놓칠 수도 있다. 클럽메드는 ‘리조트’라고 부르기에는 그 뒤에 붙여야 할 수식어들이 너무 많은, 독특한 콘셉트를 지녔다. 다른 리조트에는 있지만, 클럽메드에는 없는 3가지 때문에 클럽메드에서의 휴가는 더욱 즐겁다. 첫째, 넓은 객실, 개인 수영장, 커다란 욕조 등 동남아의 고급 리조트가 자랑하는 특급시설이 클럽메드에는 없다. 물론 2012년에 개보수를 마친 스위트룸과 디럭스 가든 테라스 룸 같은 객실은 수준급이지만 일반 수준의 객실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그럼에도 휴양 목적의 리조트로 클럽메드가 사랑받는 이유는 진정한 클럽메드의 진가는 객실 안이 아닌 객실 밖에 있기 때문이다. 객실이 너무 좋아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행자에게도, 다양한 공연과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한 클럽메드 모두에게도 손해다. 둘째, 클럽메드에는 허례허식이 없다. 리조트의 총책임자인 ‘촌장Chef de Village’의 하루 일과를 보면 알 수 있다. 클럽메드 카비라 비치의 촌장은 50세를 훌쩍 넘긴 나이지만 매일 밤 공연장에서 열리는 각종 쇼를 직접 진행하고, 최신 유행가에 맞춰 춤을 추고 방문객의 호응을 이끈다. 식사 시간에는 리조트 방문객들과 격 없이 식사도 한다. 근엄하고 격식을 차리는 고급 리조트의 총지배인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다. 클럽메드의 최고 책임자가 가식을 털어내고 방문객에게 다가가니 투숙객들도 처음 해보는 각종 프로그램을 즐기는 데 거리낌이 없다. 셋째, 클럽메드에는 추가 비용이 없다. 어렵게 짬을 내 떠난 여행에서, 각종 추가 비용 때문에 쉽사리 도전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면 클럽메드에서는 안심해도 된다. 클럽메드는 특별한 요리, 스파 등 일부 품목, 서비스를 제외하고는 식사, 음료, 객실 이용료, 팁은 물론 항공료, 유류할증료, 세금까지 모조리 상품요금에 포함돼 있다. ‘무엇이든 할 자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며칠간 얻는 비용에 더해, 뭔가 추가로 지불해야 하는 ‘숨은 비용’은 애초부터 없다. 다시 아이가 되다 클럽메드 카비라 비치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이시가키 공항으로 향할 때 온몸이 뻐근했다. 군 훈련소에 입소한 다음날, 힘든 산행을 마친 다음날 느끼는 바로 그것. 오랜만에 만나는 ‘알’이었다. 허리를 굽혀 옷을 입을 때, 여행가방을 들 때 온몸을 엄습하는 찌릿함. 간만에 땀에 흠뻑 젖을 만큼 즐겁게 뛰어 놀았던 후유증이다. 그만큼 체력을 불사를 활동이 많았기 때문이다. 클럽메드 카비라 비치에서의 지난 며칠은 어렸을 적 흙을 먹으며 친구들과 공을 차던 그때와 흡사했다. 클럽메드를 찾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아이를 동반하는 가족이다. 클럽메드에는 만 2세에서 3세의 유아를 동반하는 가족여행자를 위해 쁘띠클럽을 운영한다. 자녀를 맡기고 나면 부모는 비로소 자유를 만끽한다. 어린이를 돌보는 데 특성화 된 G.O가 어린이들을 밀착 보호하기 때문에 부모들은 몸은 물론 마음까지 자유로울 수 있다. 이제부터 격렬한 스쿼시로 ‘알’을 영접할지, 누구의 방해 없이 산책에 나설지, 잔잔한 파도에 몸을 맡길지! 클럽메드 카비라 비치가 제공하는 프로그램 중 기호에 맞는 것을 골라 체험하면 된다. 단 스케줄표와 유의사항을 충분히 숙지하고 참여하자. ▶travie info 클럽메드 쁘띠클럽 쁘띠클럽은 사전 예약이 필요하며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쁘띠클럽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이의 건강진단서를 준비해야 하며, 기저귀, 물티슈, 갈아입을 옷, 모자, 선글라스, 운동화, 수영복 등도 미리 챙겨야 한다. 클럽메드 카비라 비치에는 만 4세에서 10세까지의 아동들이 이용할 수 있는 미니클럽도 설치돼 있다. ‘퍼펙트골드’를 쏴라 한국에서 서양식 양궁을 체험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클럽메드 카비라 비치에서는 담당 G.O와 함께 안전하게 양궁을 즐길 수 있다. 손끝에서 활이 떠날 때 전해지는 묘한 떨림은 나름 중독성이 있어 방문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활 쏘기는 의외로 어렵지 않다. 양궁장에 활시위의 탄도와 강도가 각각 다른 활이 준비돼 있어, 자신에 맞는 것을 선택하면 된다. 양궁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할 때 가장 즐겁다. 그룹을 나눠 활을 쏜 뒤 그 점수를 합해 승부를 겨루기 좋다. 10점 중의 10점인 ‘퍼펙트골드’도 노려볼 만하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치유의 30분 클럽메드 카비라 비치의 산책로는 낙원으로 가는 길이다. 리조트 정문에서 시내 반대 쪽으로 걷다 보면 잘 가꿔진 산책로가 나온다. 산책 시간은 넉넉히 잡아도 1시간을 넘지 않는다. 리조트가 카비라만 한 켠에 덩그러니 자리잡았기 때문에 사람의 이동도 많지 않다. 그러나 산책로는 잘 정돈돼 있어 대저택의 정원 같은 느낌이다. 산책로 자체도 부침이 거의 없고,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잘 닦여 있어 남녀노소 산책하기 딱 좋다. 동반할 아이가 없는 사람은 산악자전거를 빌려 주변 산책로를 일주해도 된다. 단 12세 이상이나, 자전거에 앉은 상태에서 발이 땅에 닿는 사람만 산악자전거를 이용할 수 있다. 반갑다 ‘알’ 오랜만에 ‘알’을 만나게 해준 것은 다름 아닌 스쿼시였다. 클럽메드 카비라 비치에는 3개의 스쿼시 코트가 있다. 클럽메드에서 스쿼시를 치려면 운동화와 객실 카드키를 꼭 챙겨야 한다. 스쿼시는 가로 6.4m, 세로 9.75m 넓이의 작은 공간에서 격렬하게 이뤄지는 스포츠다. 때문에 방향을 바꾸다 자칫 발목이 삐는 부상을 당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파도에 몸을 맡겨라! 리조트에서 바다를 조망하면 수평선 끝까지 넓게 펼쳐진 산호초 지역이 눈에 들어온다. 잘 보존된 산호초 지역은 파도를 잔잔하게 하는 방파제 역할도 하기 때문에 태풍 불 때를 빼고 리조트 앞 바다는 언제나 잔잔하다. 클럽메드 카비라 비치에서 즐길 수 있는 해양스포츠는 투명 카야킹과 윈드서핑, 스노클링 등이다. 투명 카야킹은 바닥이 투명한 바나나 모양의 카약을 타고 리조트 인근 바다를 유영하는 것으로 만 8세 이상(어린이는 부모동반)이라면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다. 윈드서핑은 사전에 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체험할 수 있다. 윈드서핑 교육은 리조트에서 윈드서핑 담당 G.O가 진행한다. 스노클링도 할 수 있는데 만 8세 이상 어린이 대상의 강습도 있다. 팔짱은 금물 매일 밤, 수영장 옆 공연장에서는 흥겨운 공연이 펼쳐진다. 공연장에 들어서면 단 두 가지만 지키면 된다. 첫 번째는 ‘팔짱끼지 않기’와 ‘주머니에 손 넣지 않기’다. 이 두 가지는, 행동의 문제이기보다는 즐기겠다는 마음의 준비와 관련이 있다. 팔짱 끼고 공연의 품질을 평가하는 것은 클럽메드 공연장에서는 금물이다. 클럽메드의 G.O들은 매일 공연을 준비하지만 전문 배우들이 만드는 공연이 아닌 탓에 완성도는 높지 않다. 그러나 G.O들이 공연 내내 내뿜는 ‘행복 에너지’는 무대를 가득 채우고도 남는다. 공연이 종료될 때 즈음이면 관객들도 거리낌 없이 무대 앞으로 나와 G.O와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춘다. G.O들이 준비한 공연은 공연장 앞에 있는 바까지 이어진다. 요일에 따라 다채로운 이벤트가 끊임없이 펼쳐진다. 바에서는 오키나와 지역 맥주인 ‘오리온’도 무제한으로 공급된다. 1 이시가키 야아마무라 민속촌에 살고 있는 원숭이 무리 2 맹그로브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지역에 서식하는 관목이다 3 커다란 물소가 끄는 대형 달구지. 이리오모테섬과 유부섬 사이를 매일 왕복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일본과 타이완이 편애하는 섬 클럽메드는 스스로 도시와 격리된 삶을 선택한다. 이번에 다녀온 클럽메드 카비라 비치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도쿄에서 오키나와 본섬 나하那覇국제공항까지 비행시간은 2시간 정도. 클럽메드 카비라 비치는 오키나와 본섬에서 1시간은 더 날아가야 하는 이시가키섬 안에서도, 공항에서 차량으로 50분은 더 들어가야 하는 카비라만灣에 자리하고 있다.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카비라 비치는 주변에 인공 불빛이 없어 밤에는 별이 더욱 눈부시고, 도시의 소음이 없으니 바다의 파도 소리는 청연하다. 때묻지 않은 자연을 품은 이시가키를 포함한 오키나와 지역은 최근 일본 본토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 휴가는 물론이고 이주도 부쩍 늘었다고 한다. 이유는 일본 동북부 지진으로 정신적 충격을 입은 사람들이 청정한 자연 속에서 치유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다. 게다가 비교적 지진으로부터 자유롭고, 원전에서도 까마득히 멀다. 실제로 오키나와 본섬에서 이시가키까지 거리는 400km 정도이지만, 타이베이에서 이시가키까지는 300km에도 못 미칠 정도로 일본 본토보다 타이완에 더 가깝다. 그래서 이시가키는 타이완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기다. 매해 여름이면 타이베이와 이시가키 사이를 운항하는 전세기가 있을 정도로 타이완 사람들은 이시가키를 사랑한다. 타이완 사람들과 일본 본토에서 오는 사람들은 이시가키섬을 기점으로 이리오모테섬, 타케도미섬 등 점점이 박힌 보석 같은 섬들을 관광한다. 이리오모테섬은 이시가키섬에서 뱃길(타이완 방향)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다. 이리오모테섬은 광활한 맹그로브 숲과 커다란 물소가 있는 유부섬 등이 주요 관광지다. 특히 이리오모테섬의 맹그로브는 지구상 가장 서쪽에 있는 맹그로브숲 중 하나여서 생물학, 지리학적으로도 가치가 있다. 유부섬은 이리오모테섬에 달린 작은 육계도로 섬 사이는 1km도 안 되는 거리인데, 그 사이를 연결해 주는 커다란 달구지가 특히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달구지를 끄는 검은 물소는 발걸음이 느려 둔해 보이지만, 힘이 좋고 성실해 이 지역 사람들에게 귀한 대접을 받는다. 이시가키섬에서 배로 20분 거리에 있는 다케도미섬에서는 낮에도 별을 볼 수 있다. 별모래 해변이라고 불리는 섬 북쪽의 백사장에는 별 모양의 산호가 산재해 있다. 얼핏 보면 좁쌀 크기의 모래 같지만 자세히 보면 반짝이는 별 모양을 하고 있다. 이시가키 주변 섬 관광은 클럽메드에서 운영하는 외부 관광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가능하다. 단 각 프로그램에 따라 가능한 시간과 날짜가 있으며,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글·사진 박우철 기자 취재협조 클럽메드 www.clubmed.co.kr, 오키나와 관광·컨벤션뷰로 www.visitokinawa.jp/kr, 아시아나항공 www.flyasiana.com 타케도미섬에서는 자전거를 타고 섬을 일주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travie info 클럽메드 카비라 비치와 다양한 매력을 지닌 이시가키가 오는 3월, 조금 더 가까워진다. 아시아나항공은 이시가키 신공항 개항에 맞춰 인천국제공항과 이시가키를 연결하는 직항 전세기를 3월7일과 3월10일 단 2회 운항한다. 2월 현재까지 이시가키공항은 대형 비행기가 이착륙하기에는 너무 짧은 활주로를 갖고 있지만 3월이면 보잉사의 747 점보 기종도 이착륙할 수 있게 된다. 아시아나항공의 직항 전세기를 이용하면, 대기 시간을 포함해 4시간 이상 걸리는 기존 여정이 2시간 정도 단축된다.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위 기사는 기사콘텐츠 교류 제휴매체인 여행신문의 기사입니다. 이 기사에 관한 모든 법적인 권한과 책임은 여행신문에 있습니다.
  • “My soul is dark” 김수영 시인 고백에 반해서 그 지독한 주사 다 견뎠지

    “My soul is dark” 김수영 시인 고백에 반해서 그 지독한 주사 다 견뎠지

    “동공은 빛을 잃었고 귀에선 피가 흘렀습니다. 그렁그렁 가래 끓는 소리만이 숨이 붙어 있음을 알려줬습니다.” 1968년 6월 16일, 새벽 5시쯤. 47년의 짧은 생애를 마친 김수영(왼쪽) 시인은 조각처럼 희고 단정한 얼굴로 ‘무’(無)의 세계에 들었다. 선불로 받은 번역료로 친구들과 술판을 벌이고 귀가하던 시인은 서울 마포구 구수동의 인적이 드문 길에서 인도로 뛰어든 버스에 받혀 풀잎처럼 쓰러졌다. 20년 가까이 동고동락했던 김현경(오른쪽·86) 여사는 김수영 시인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떠올렸다. 그는 지난 두 달간 구술로 김수영의 삶을 풀어놨다. 원고는 조만간 자전적 에세이 ‘김수영의 연인’(실천문학사 펴냄)으로 빛을 보게 된다. 에세이에는 생전 김수영이 탈고했던 시구 속에 숨은 창작 배경과 일화가 오롯이 담겨 있다. 김수영은 평소 집에서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고, 말수도 별로 없었다. 그런 그가 술만 취하면 무궁무진한 애교로 웃음을 자아냈다. 장기는 무성영화의 변사 역할, 레퍼토리는 ‘수일과 순애’였다. 하지만 비위가 거슬려 술을 마신 날이면 주사가 심했다. 이혼 얘기가 입에 오르내리고 열흘간 별거까지 했다. ‘당신이 내린 결단이 이렇게 좋군’으로 시작하는 김수영의 시 ‘이혼 취소’는 이런 부부의 삶을 말해 준다. 몸도 돌보지 않고 폭주를 하는 날이면 시인은 자유당과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욕을 퍼붓곤 했다. 4·19 직후 부정 선거에 대한 칼럼 청탁을 받고 동아일보에 원고를 보냈는데, 지면에는 김수영 이름 석자만 있고 휑하니 비어 있었다. 김수영은 “멋있잖아, 이런 게 저항이지”라며 오히려 신이 나 했다고 한다. 김현경은 진명여고 2학년이던 1942년 5월 김수영을 만났다. 만남을 주선한 이는 이종구(1990년 사망)로, 광산을 경영하던 김 여사 부친의 첩의 남동생이었다. 이종구와 김수영은 선린상고 2년 선후배로 일본 도쿄에서 함께 유학한 사이였다. 김 여사는 6살 차이인 김 시인을 ‘아저씨’라 부르며 따랐고, 이후 일본에 유학 중이던 시인과 편지로 사랑을 나눴다. 일제 패망 직전인 1944년 귀국한 김수영은 ‘마이 솔 이즈 다크’란 한마디 영어로 사랑을 고백한다. 1949년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신접살림을 차렸지만 이번엔 6·25전쟁이 둘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김 여사는 부산 피란살이 기간 동안 이종구와 동거한 뒤 김수영과 재결합했다. 이렇게 정착한 곳이 서울 성북동집. 김 여사는 “원래 거부 백낙승의 별장이었는데 내가 그곳에 세를 얻었다”면서 “정원 한쪽에 비가 오면 폭포가 되는 절벽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시 ‘폭포’를 썼다”고 회고했다. 1968년 발표한 절명시 ‘풀’은 그해 5월 29일 바람이 몹시 불던 날 무성한 풀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는 모습을 보고 지었다. 김수영의 삶 속엔 현대사의 비극이 담겨 있다. 1950년 8월 인민군에 끌려가 의용군으로 징집된 김수영은 총살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거제 포로수용소에 수용된다. 8남매 중 가장 총명했던 넷째 수경은 의용군에 자원 입대했고, 셋째 수강은 우익단체인 대한청년단 단장을 하다 납북됐다. 여동생 김수연씨 내외도 1969년 KAL기 납북 때 북쪽으로 끌려갔다. 김 여사는 현재 경기 용인시의 한 아파트에 살며 김수영의 육필 시를 정리하고 있다. 그는 “살아생전 ‘김수영문학관’을 짓는 게 꿈”이라고 전했다. 문소영 기자 symun@seoul.co.kr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