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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의 눈] 독자적 위성발사체 개발 시급

    셋방살이 설움은 셋방을 살아 본 사람만이 안다고 했다.한국항공우주연구소(航宇硏) 사람들은 이번에 아리랑 1호를 발사하면서 발사체 기술과 발사장없는 설움을 톡톡히 겪어야 했다. 아리랑 1호의 발사를 위해 미 캘리포니아주 반덴버그 공군기지에서 3개월을 지낸 항우연 연구원들은 21일 발사가 성공한 뒤 “포로수용소에서 있었던기분”이라고 털어놨다.지난 9월27일 반덴버그 공군기지에 도착한 항우연 연구원 19명은 발사 당일까지 마치 죄수와 같은 생활을 했다.미국에서 남의 발사체를 빌려서 사용하는 입장이라 하루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출입 때마다 신원을 확인하는가 하면 점심식사 시간에도 항상 감시원이 연구원들 곁에서 대열을 이탈하지 않도록 감시했다.심지어 화장실까지도 따라다녔다.토러스 발사체를 개발·제작한 미 오비탈사의 경우 감시 정도는 공군보다 더 심했다고 한다.발사관련 기술은 국가기밀에 관한 사항이기 때문이었다. 위성개발그룹 관계자는 “우리들의 이름도 부르지 않고 출입카드 번호로 불렀다”며 “심지어 우리가 만든 위성을 로켓에 장착할 때도 제대로 일이 마무리 됐는지 확인할 수도 없었다”고 전했다. 이런 혹독한 조건 속에도 성공리에 발사를 마친 우리 연구진들의 노고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항우연은 이번 아리랑 1호 개발 경험을 바탕으로 오는 2003년 발사될 아리랑 2호부터는 모든 주요 부품이 순수 국내기술로 개발된 최상위급 실용위성 개발에 도전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발사체 개발과 발사장의 확보없는 우주개발은 한계를 보일 수 밖에없다.부탑재체인 미 항공우주국(NASA) 아크림 위성의 사소한 결함 때문에 예정됐던 아리랑 위성발사 시한을 무려 5개월이나 넘기지 않았던가. 발사체 개발 및 제작에 드는 비용은 약 980억원으로 추정된다.항우연이 이번에 아리랑 1호 발사를 위해 미 오비탈사에 지불한 비용은 약 250억원.네번 발사할 때 미국측에 지불하는 비용을 발사체개발에 투자하면 쉽게 본전을뽑을 수 있다는 계산이다. 정부는 오는 2005년까지 17기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예정이다.독자적인발사체 연구 및 발사장 건립은 국가의 자존심 뿐 아니라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시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미 캘리포니아주 반덴버그공군기지에서]lotus@함혜리 경제과학팀 차장
  • 문산 수해에 아직도 폐허…추석생각에 우울

    “아직 집도 제대로 못 고쳤는데 추석은 엄두도 못내요” 10일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문산초등학교 체육관.수마(水魔)가 할퀴고 간지 한달이 넘었지만 수재민 15가구 20여명은 체육관에 마련된 임시 거처에서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수해 당시 셋방살이를 하던 ‘영세민’들이다.돈이 모자란탓인지 집주인이 셋방까지 신경을 써주지 않아 돌아갈 곳이 없다. 한점상(韓占相·47)씨는 “수재 직후에는 위문품이라도 받았지만 끊긴 지오래됐다”면서 “쌀과 그릇,물 등 모든 생필품이 부족하다”고 하소연했다. 지대가 낮고 단독주택이 밀집해 있어 피해가 유난히 컸던 문산4리는 수해직후의 황폐한 모습 그대로였다.골목마다 기와 조각과 벽돌 등이 어지럽게널려 있었고,집을 미처 수리하지 못한 수재민들은 골목길 한구석에 텐트를치고 있었다. 상가도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는 추석의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제수용품 가게는 오히려 한산한 느낌마저 들었다.수리를 포기하고 가게를 버려둔 채 떠나버린 주민도 있었다.의류와 이불감을 파는 대광상회 주인 강태숙(姜泰淑·60·여)씨는 “추석 성수기가 시작될 때지만 96년 수해 때보다 복구가 늦어 손님이라곤 거의 없다”면서 “특별위로금 60만원이 나온다지만 그걸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지난 7일 현재 복구율은 84.5%.문산읍 관계자는 추석 전까지 대부분의 수리를 끝낼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인재 규명과 배상 촉구 투쟁위원회’ 송규범(宋奎範·60)위원장은 “96년 수해의 상처가 미처 아물기도 전에 외환위기까지 겹친 상태에서 다시 수해를 당해 올해 문산에는 추석이 없다고 보면틀림없다”고 주장했다. 장택동기자 taecks@
  • 전국역도선수권, 김학봉 세계新 사냥 나선다

    김학봉(27)이 한국 역도 사상 최초로 국내대회 세계신기록 사냥에 나선다. 지난해 방콕아시안게임 69㎏급 용상에서 세계신기록을 들어올리며 엮어낸 감동의 드라마를 국내무대서 재연해 보이겠다는 것. 한국역도의 세계신기록 1호인 김학봉이 세계기록에 재도전할 무대는 22일부터 올림픽역도경기장에서 시작된 제71회 전국역도선수권대회.25일 69㎏급 출전에 대비,방콕대회 때 자신이 세운 용상 세계신기록(195㎏)을 0.5㎏ 늘릴채비를 단단히 갖췄다.김학봉은 방콕대회 때 인상에서 145㎏을 든 뒤 용상에서 세계기록을 5㎏이나 늘렸다.그가 이번에 기대를 모으는 이유는 배짱 하나로 세계신기록에 도전했던 지난해와 달리 요즘 용상 195.5㎏을 거푸 들어올리고 있기 때문. 이처럼 기량이 급성장한 데는 안정된 주변환경의 영향이 컸다.그는 감독의질책을 우려,96년 장영희씨(27)와 몰래 혼인신고를 한 뒤 아들 유빈(2)이 태어난 사실조차 숨겨야 했던 아픔을 지난해 세계신기록 달성으로 치유했다.지난 2월엔 당당히 결혼식도 올렸다.또한 공석중이던 대한역도연맹회장에 여무남씨가 취임하면서 올림픽금메달 포상금 1억원을 건 것도 셋방살이 설움에젖은 김학봉의 도전의욕을 돋우었다. 박해옥기자 hop@
  • 프리뷰-내일 방영 K2TV TV문학관 ‘새’

    KBS2TV ‘TV문학관’이 1년남짓만에 부활해 30일 밤 10시10분 오정희의 원작소설 ‘새’(극본 박남준 연출 장형일)를 내보낸다. 꿈은 찬란하지만 현실은 처절한 남매의 이야기이다.아빠의 매질에 못이겨달아난 엄마,돌봐주던 외할머니마저 쓰러지자 친척집을 전전하던 남매는 다시 아버지를 만나 바다가 내려보이는 달동네의 단칸 셋방으로 이사온다.그곳에서는 천박한 새엄마 등 인간군상이 남매를 기다리고 있다.살인자인 포장마차 주인 정씨,동성연애중인 여성 부부,새를 키우는 트럭운전수 이씨,밤무대에서 트럼펫을 부는 김씨와 휠체어의 아내…. 새엄마가 집을 나간 이후 아버지도 떠나지만 동심을 잃어버린 소녀는 아버지를 붙잡지 않는다.이 소녀는 동생의 엄마이자 선생님.또 동생을 의지하지만 결국 남동생마저 죽고 만다.소녀는 동생이 죽자 “새가 되어 날아다니고 싶다”던 동생의 꿈을 이뤄주려 바닷가로 나가고,누나는 진짜 새가 된 동생의 환영을 만난다. 꿈이란 무엇인가.소중하고 아름다운 삶의 에너지이지만 실제로 꿈을 이루기에는 현실의 벽은너무 높고 가파르다.가난과 고독,소외… 이 드라마는 원작처럼 어둡고 절망적이다.어린 소녀의 무표정한 얼굴이 세상살이의 무게를 새삼 깨닫게 한다.장수혜와 유종원의 아역연기는 화면을 생동감있게 살려낸다.또 인간군상을 연기한 할머니 김지영과 정종준,정동환,방은희도 캐릭터를 잘 표현하고 있으며 TV드라마에서는 금기시된 남장여자로나와 동성부부의 남편역을 해낸 연운경의 몸을 던진 연기가 두드러진다. “새가 되고 싶다”는 구체화되지못한 꿈으로 버티지만 갈수록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어린 남매의 삶은 꿈을 잃어버린 오늘의 어른들을 울린다.부산에서 촬영한 어두운 도시와 바다의 영상,희끄무레하게 변해가는 하늘을 담은 화면은 남매의 불행한 삶을 그들의 것으로만 한정짓지 않는다.인생은 슬픔일까.주체할 수 없이 가벼운 여느 드라마와는 다르지만 너무 무겁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등신불’‘바닷가 소년’‘열녀문’‘불새’‘인간과 전장’ 등 옛 ‘TV문학관’을 연출한 장형일감독의 작품이다. 허남주기자
  • [인터뷰] 제31회 신사임당상 수상 힐튼호텔 정희자회장

    힐튼호텔 정희자회장(59·대우그룹 김우중회장 부인,선재미술관·아트선재센터 관장)을 외국인 직원들은 ‘타이거우먼’,‘터프우먼’이라고 부른다. 공격적인 경영스타일과 사소한 빈틈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 즉각적인 일처리방식 때문이다.하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더 할 수 없이 살가운 여성의 면모를 보여주는 이가 또한 정회장이다.정·재계 인사들과 골프라운딩 도중 마실 물을 떠다주고 공을 주워 주기도 하면서 분위기를 돋우면 이렇게 부드러운 사람인지 몰랐다면서 모두가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고 한다. 대한주부클럽연합회 선정 제31회 신사임당상(像) 수상을 계기로 이뤄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특유의 선굵으면서도 솔직 다감한 태도로 시원시원한 답변을 해 나갔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습니다.직접 예술을 해 온 사람도 아니고 500년전 여성상에 부합된다는 생각도 안 들었어요.하지만 알고보니 사임당은 아내와 어머니로서,그리고 예술가로서 내면의 열기에 꽉 차 있던 당찬 사람이었어요.한번은 실수로 남의 치마에 술을 쏟자 즉석에서 치마폭에 포도그림을 그려 주면서 이를 팔아 옷값을 하도록 했다는데 이를 보면 상업적 감각도 뛰어났던것 같습니다” 결국 21세기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고의 사임당상을 그려보면서 아내와 어머니,기업을 통한 예술활동의 지원자로서 이번 수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했다. “시상식때 나는 잘 못 들었는데 김회장이 ‘부군의 인사’를 하면서 울먹였다고 해요.셋방살이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30년동안 내조자로서 묵묵히일해온 데 대해 고맙다는 말 한마디 못해 온 가슴속의 빚을 이 상이 대신해줬다면서….내 생각 보다는 요즘의 여러가지 감회가 뒤얽혀 그랬겠지만 어쨌든 우리부부는 외조와 내조를 많이 나눴습니다” 정회장이 살림을 하다 호텔 경영에 뛰어든 건 1주일이면 4∼5회씩 집에서김회장 손님 치르는 솜씨를 보고 주위에서 권유를 했기 때문이다.미술관 운영은 김회장의 출장을 따라다니며 현대미술을 눈여겨 보고 컬렉션하면서 구상한 것이므로 김회장의 외조를 받은 셈이라고 했다. 정회장은 호텔 경영도 야무지게 했다.16년 사이 힐튼호텔을 대우의 노른자위 기업으로 키워놓았고 해외에도 진출,하노이와 옌벤에도 대우호텔을 세웠다.요즘도 하루 3∼4시간 밖에 자지않는 그는 새벽 3시30분이면 일어나 호텔 음식계획에서부터 실내 장식 변경까지 하루 할 일을 메모하는데 그 분량이A4용지 두 장 씩이다. 호텔 일은 그가 필생의 사업으로 여기는 문화사업의 재원이 되기에 더욱 열심히 한다.선재미술관및 아트선재센터관장,예술의전당 오페라단 후원회장,각종 무용제 영화제 극단 유시어터 후원 등 문화사업과 크고 작은 봉사활동을흔히 돈이 많아 하는 줄 알지만 그건 전혀 틀린 것이다.“육신이 부서져라일해 얻은 수익금으로 사회환원을 하는 것인데 막무가내로 요구해 올 땐 서운하다”고 그는 말한다. 호텔과 미술관 운영에서 그는 크게 두 가지 자부심을 갖고 있다.첫째는 지방문화 활성화에 기여했다는 점이다. “선재미술관은 지방 최초의 현대미술관입니다.반대도 많았지만 경주에 현대미술관을 지으면 전통과 현대가 조화되고 늘 새로운 멋을 풍기는 관광도시가 되겠다 생각해 밀어 붙였어요” 그 생각은 주효해 선재미술관은 그의 고향이기도 한 경주의 문화명소가 됐고 근래 4∼5년 사이 광주,부산등 지방 미술관 설립에 불을 당겼다. 둘째는 호텔건물에 미술 진품을 걸어 국제 호텔업계의 인테리어개념을 바꿔놓은 것이다.경주힐튼호텔 등엔 그가 좋아하는 콜롬비아의 페르난도 보텔로를 비롯해서 세계적인 현대작가들의 작품이 걸려있다.“값비싼 걸작들을 관리 시설도 제대로 안된 호텔건물에 거는 데 대해 이의를 다는 사람도 많습니다.하지만 호텔처럼 미술품 보여주기 좋은 장소가 어디 있습니까.요즘은 외국 호텔들도 우리를 따라오기 시작했어요” “손주들과 쉬고 싶어도 나이를 초월해 일하는 여성의 모델이 돼 달라는 주위의 기대 때문에 은퇴도 못했다”는 그는 호텔사업이 대우의 구조조정 대상으로 지정되면서 심각한 위기감에 빠져있다.“이 문제를 김회장에게 직접 물어 본 일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문화사업을 못하게 될까봐 그게 더 안타깝다”는 심정은 숨기지 않는다. 모계 3대를 잇는 명문호텔 경영과 문화 후원자에의 꿈을 접고 따뜻한남쪽지역에 로즈가든을 가꾸겠다는 노후 계획을 앞당겨 실천해야 할지도 모를 상황에 있는 정회장.그의 IMF위기는 허약한 토대의 국내 문화예술계에는 한층 어두운 그림자로 되돌아 올 공산이 크다.
  • 중앙공무원 교육원 개원 50돌

    우리나라 공무원 교육훈련의 중추인 중앙공무원교육원(원장 朴容丸)이 21일로 개원 50주년을 맞았다. 교육원은 지난 49년 국립공무원훈련원으로 출발했다.당시 청사는 서울 경운동 보통여학교 기숙사 건물.6·25전쟁 때는 부산으로 옮겨가 경남도청의 임시사무실,서울수복 이후에는 중앙청 부속건물 등에서 셋방살이를 했다.그러다 63년 서울 장충동에 청사를 지었고,대전청사를 거쳐 지난 81년 지금의 과천청사에 자리잡았다. 그동안 교육원을 거쳐간 공무원은 행정·기술고시 합격자 6,000여명을 포함해 모두 13만 6,000여명에 이른다.장·차관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은 대부분이 이곳을 거쳐갔다고 보면 된다.교육원은 올해도 6,255명을 교육시킬 계획이다. 교육원은 지난 84년부터 국력신장과 세계화 추세에 발맞춰 개발도상국 공무원에 대한 교육에도 중점을 두고 있다.지난해까지 동남아와 중국·중동·동구·아프리카·중남미 등 74개국 1,277명이 교육원을 거쳐갔다. 이들 ‘친한파’는 현재 각국 정부에 두루 포진하고 있다.특히 말레이시아에서는 이곳을거쳐간 공무원들이 장관급을 비롯한 고위직으로 성장,교육원의 머리글자를 딴 ‘코티(KOTI)마피아’로 불릴 정도로 영향력이 큰 것으로알려지고 있다.이달에는 스와질란드 총리의 부인인 산업고용부 제인 들라미니 차관보도 교육을 받았다. 한편 교육원은 22일 공무원 교육훈련 50년의 공과를 평가·반성하고 앞으로의 바람직한 발전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세미나를 갖는다.
  • 하키 전용구장‘눈물의 퇴출’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성남동 62번지에 위치한 ‘성남 하키전용구장.’국내 하키인들의 요람으로 그라운드에는 수많은 선수들의 땀과 애환이 담겨 있다.비인기 종목의 설움을 가슴에 안은 채 선수들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스틱을 휘두르며 내일을 기약했다.각종 국제대회를 통해 승전보를 알려 국민들에게 감격을 안겨준 것도 이 그라운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그러나 국내 5,000여 하키인들에게 마음의 고향인 ‘하키 메카’가 이제 추억으로 남겨지게 됐다.성남시의 축구전용구장 계획에 따라 16일 그라운드의 인조잔디가 걷혔다. 지난 84년 세워진 후 15년만에 국내에는 하키 전용구장이 하나도 없게 된 것. “비인기 종목은 이 땅에 발붙이지 말라는 얘기밖에 더 됩니까.”하키인들의 눈에는 눈물이 배어 나온다. 그동안 하키는 여자의 경우 88·96올림픽 은메달,86∼98아시안게임 4연패의 금자탑을 세웠다.남자는 86서울아시안게임과 90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서우승을 일궈냈다.국가대표팀 뿐 아니라 주니어 등 전국의 하키팀은 모두 시간을 쪼개 성남에서뛰는 보람을 지녀왔다.지난 12일만 해도 성일중 등 몇몇 팀이 봄철 중고대회(3.20∼4.1)에 대비해 비지땀을 쏟았다.지난해 12월 성남시의 축구경기장 전용계획이 발표된 뒤 협회는 이 구장을 살리려 성남시와절충을 벌였으나 허사가 되고 말았다. 많은 성남시민과 체육 균형발전을 바라는 이들은 ‘하키 메카’의 자부심이 무참하게 꺾인 데 깊은 실망감에 젖어있다.더욱이 올 한해를 ‘한국하키 전진의 해’로 삼고 새 국제대회 창설 등 청사진을 설계해 놓은 협회 집행부로서는 당혹스럽기 그지없다.무엇보다 사전협의는 커녕 대안을 모색할 틈마저주지 않고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이는 성남시의 행정에 아연실색해 한다. 양성진 협회 사무국장은 “그야말로 셋방 얻을 시간도 안준 채 전세집에서쫓아낸 꼴”이라며 한탄한다. 또 88서울올림픽 대표로 활약한 성일고 김재천 코치(31)는 ‘올림픽 하키대회가 벌어진 성남의 자랑’이라고 새겨진 경기장 입구의 동판을 가르키며 “이젠 제자들 볼낯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 [이사람] 경남 진주 秋慶和씨

    “일제탄압에 당당히 맞선 선조들의 발자취를 되새기는 것은 과거의 아픈치욕을 극복하고 우리의 미래를 발전적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입니다” 선조들의 항일투쟁 흔적을 찾아 12년째 전국을 누비고 있는 秋慶和씨(48·사진·경남 진주시 신안동 705의1).그는 흐르는 세월과 함께 우리의 기억속에서 잊어져 가는 독립유공자의 발굴에 미친(?) 요즘 보기드문 의인(義人)이다. 秋씨가 이 작업에 뛰어든 것은 광주대 3학년에 재학중이던 지난 87년.조상의 족보를 찾다가 증조부(秋鏞玖)가 일제때 의병활동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서 부터였다.곧바로 증조부의 행적을 찾아나섰고 이 과정에서 우연히 전라도 의병대장 秋璂燁과 黃俊聖의 항일행적을 발굴,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게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때부터 秋씨는 ‘돈 안되는’ 이 일에 매달렸다.운동화 차림으로 눈속을헤매는 것은 예사였고 수십년전 사망한 사람을 수소문하며,호적을 뒤지고 다니다 간첩으로 오인받은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의 이같은 열정은 결혼후에도 이어져 생계는 10년전 결혼한 부인張伊順씨(42)가 꾸려가고 있다.그가 전자회사에서 벌어오는 50여만원이 수입의 전부로 셋방살이를 하고 있다. 秋씨가 그동안 찾아낸 독립유공자만도 50여명에 이른다.모두가 독립유공자로 추서받은 것도 그의 발굴작업이 얼마나 알찬 것이었나를 말해준다.강원도 춘천의 장총단사건,경북 청도 군용열차사건,전남·북 의병활동상 등 묻혀져 있던 주요 사건들을 발굴했다.그러나 막상 자신의 증조부는 기록이 미비해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못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춘천 장총단사건.安二淳·三淳형제와 馬道賢 朴順九 등 일가 친척들이 춘천과 인제일대에서 10여년간 무장활동을 벌였던 활약상을 발굴,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한 것이다.그는 “겨울방학동안 눈덮인 강원일대를 샅샅이 뒤지며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했기 때문에 평생 잊을 수 없다”며 어색하게 웃었다. 秋씨는 요즘 신간회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일제때 문맹퇴치와 계몽운동에앞장선 청년정신을 되살리기 위한 작업이다.오는 9월쯤이면 신간회 지회의활동상을 담은 세번째 ‘항일투사열전’을발간할 예정이다.
  • 민가협 등 인권단체서 생활 후원/출소 장기수 쉼터 만남의 집

    “반갑습니다.잘 오셨습니다” 25일 오후 미전향 장기수들이 모여 사는 서울 관악구 봉천6동 ‘만남의 집’에서는 기쁨과 착잡함이 교차된 ‘만남’이 있었다.오전 10시 41년만에 대전교도소에서 풀려난 禹用珏씨(71)와 朴旺奎(70) 등 미전향 장기수 2명이 당분간 머무르기 위해 왔기 때문이다. 만남의 집에는 지난해 광복절 43년만에 풀려난 세계 최장기수 金善明씨(72)등 미전향 장기수 9명이 모여 산다. 만남의 집은 89년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등 인권단체들이 미전향 장기수 李鍾씨(87)를 위해 구로구 구로동에 1,500만원을 주고 얻은 단칸 셋방에서 출발했다. 생활비는 구에서 나오는 1인당 월 17만원의 거택보호자 생활보조금과 민가협과 성공회의 후원금,그리고 金善明씨가 중구 중림동의 치과 기공소에서 일해 받는 50만원으로 충당한다. 만남의 집이 봉천동에 자리잡은 것은 94년.대지 100평에 건물면적이 50평남짓한 2층의 붉은 벽돌 건물이다.1·2층에는 방이 3개씩 있고 상추,고추 등을 키우는 텃밭이 딸린 작은 마당도 있다. 그러나 만남의 집은 남쪽에도 북쪽에도 속하지 못한다.정부가 미전향 장기수들의 북송을 검토한다는 발표에 金錫亨씨(86)는 “조건없는 북송이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밝혔지만 이들은 이번에 북한에서 요구한 송환대상에서 빠져 있다.대부분 북한에 가족이나 연고자가 있지만 한국에서 남파 공작원이나 빨치산으로 체포돼 북한당국이 이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만남의 집 식구들은 통일이라는 진정한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全永祐 ywchun@
  • 10대소녀의 ‘살신성인’

    한 방에서 잠을 자던 10대 소녀가 집안에 불이 나자 친구 2명을 깨워 대피시킨 뒤 자신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숨졌다. 23일 새벽 0시55분쯤 서울 영등포구 신길2동 지하 셋방에서 趙仁來씨(21)가 가정문제를 비관,집에 불을 질렀다. 옆방에서 자던 朴지현양(19·강원도 동해시 천곡동)은 불을 처음 발견하고친구 李모양(19·회사원) 등 2명을 깨워 먼저 밖으로 대피시켰다.그러나 朴양은 빠져나오지 못해 연기에 질식해 숨졌다.朴양은 고향 친구인 李양을 찾아와 머물던 중이었다. 全永祐 ywchun@
  • KBS‘열린 음악회’14일 방송300회 특집

    지난 9일 오후 7시30분 서울 여의도 KBS홀.‘열린 음악회’ 300회 특집방송 녹화가 진행된 이날 공개홀은 방청객의 열기로 뜨겁게 달궈졌다.1,800여석의 객석은 물론 계단까지 사람들로 꽉 찼다.첫순서로 테너 김진수 임정근,메조소프라노 강화자,소프라노 신애령이 ‘축배의 노래’를 흥겹게 부르며 등장하자 객석에서도 자연스레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이어 이광조 신효범 박정운의 무대.노래 잘하기로 소문난 가수들이어서 관객의 반응도 뜨거웠다.더욱이 이광조는 ‘열린 음악회’ 최다출연자(45회)이고,신효범과 박정운은 각각 두번째(44회),다섯번째(38회)여서 남다른 감회를 느끼게 했다. 양희은 노사연의 무대로 한껏 고조된 분위기는 현철 송대관 설운도 태진아김수희 주현미 등 내로라하는 트로트가수들의 메들리가 이어지면서 절정에달했다.‘열린 음악회’라는 타이틀답게 클래식과 대중가요,트로트의 공존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300회 특집답게 그동안 ‘열린 음악회’를 이끌어온 역대 MC들도 총출동했다.윤형주 이지연 유정아 유인촌 황현정 황수경이 그들.미국에 체류 중인 장은영과 녹화스케줄이 겹친 정은아는 참석하지 못했다.이들은 방송 첫해에 공개홀을 못빌려 고등학교 강당과 외부 행사장을 사글셋방 얻듯 찾아다닌 설움,야외 첫공연 때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에도 불구하고 구름같이 몰려든 인파에 눈시울을 붉혔던 기억 등을 회상했다. 클래식과 대중가요의 벽과 중장년층과 청소년층 간의 ‘세대차’를 허물자는 취지로 지난 93년 5월9일 막을 올린 ‘열린 음악회’는 지금까지 많은 기록과 뒷얘기를 남겼다.94년6월 민간인통제구역인 철원지역 옛 노동당사에서의 공연,95년8월 올림픽공원 민족화합공연,97년6월 문산 임진각 공연,98년제4땅굴 공연 등은 101번의 야외녹화 가운데서 단연 눈에 띄는 ‘백미’.그러나 무엇보다 10%에 못미치는 낮은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7년째 일요일 황금시간 대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 자체가 하나의 기록으로 꼽힌다. 김승우PD는 “라이브에 강한 가수층이 두텁지 않아 해가 갈수록 섭외에 어려움을 겪는다”며 “더욱이 IMF이후 야외녹화가 많이 줄면서 생동감을 못살리는 것이 아쉽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전출연자가 ‘열린 음악회’ 최다애창곡 ‘만남’을 합창하며 막을 내린 이날 300회특집은 14일 오후 6시40분부터 80분간 방송된다.
  • 윤관열의 휴먼스토리

    경희대 2년생 레프트 윤관열(21·198㎝)이 배구계의 기대 어린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다. 99배구슈퍼리그에서 기라성 같은 실업 선배들에 결코 뒤지 않는 기량으로 5일 현재 오픈공격 1위(성공수 187개),공격종합 2위(성공수 236개)에 올라 있는 윤관열은 선수로서의 자세에서도 귀감으로 꼽힌다.대학 진학 당시 거액의 유혹을 뿌리치고 경희대를 택해 ‘돈이면 다’라는 일부 스타급 선수의 파행적인 행태에 경종을 울렸기 때문. 윤관열은 전남사대부고를 졸업할때 모 대학으로부터 수억원대의 몸값을 제의 받았다.당시 김광수 전남사대부고 감독은 선수구성 등을 감안할 때 경희대를 선택하는 게 좋다고 권유했지만 윤관열은 가난한 살림에 어렵게 자신을 키우고 있는 부모님 생각으로 고민에 빠졌다.그러나 아버지 윤성근씨(57)와 어머니 문현순씨(53)는 고민하는 아들에게 “선수로서 대성하려면 선생님을 믿고 따라야 한다”며 설득했다.부모님의 말을 거역해 본적이 없는 윤관열은 ‘거액유혹’을 뿌리치고 마침내 경희대로 진로를 택했다.자신은 버스기사이고부인은 식당에서 잡일을 하면서 전남 순천에서 3형제와 고아가 된 조카 2명을 호적에 올려 양육하느라 셋방살이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윤씨는 돈의 유혹을 뿌리친 채 아들을 흔쾌히 경희대로 보냈다.윤씨 부부는 지금도 생활의 어려움을 아들에게 내색하지 않는다.다만 아들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직장에 양해를 구하고 어김 없이 경기장을 찾아 소리 없는 성원을 보낼 뿐이다. 윤관열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그리곤 “국가대표 최고 공격수가 돼 부모님의 선택이 옳았음을 보여주겠다”고 다부진 각오를 밝혔다.박해옥 hop@
  • 내집마련 소요기간 2년째 단축

    내집마련에 걸리는 기간이 2년 연속 줄어들었다.실업과 소득 감소 등으로수입은 줄었지만 부동산 경기침체로 집값 하락폭이 더 컸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살고 있는 집 평수도 4년 연속 늘어나는 등 주거상황이 개선됐다.주택은행이 전국 13개 도시 2,000가구를 대상으로 조사,6일 발표한 ‘98년 주택금융수요 실태조사’ 결과를 간추린다.●내집마련 쉬워졌다 결혼후 평균 7.7년만에 처음 집을 샀다.96년(8.1년) 97년(8년)보다 각각 4.8개월과 3.6개월 단축돼 셋방살이의 설움을 일찍 벗어났다.93년(9년)보다는 15.6개월이나 줄어들었다.주거면적도 97년(19.4평)보다0.8평 커진 20.2평으로 20평을 처음 넘어섰다.94년 16.9평,95년 18.4평,96년 18.5평 등 확대되는 추세다.내집마련까지 이사는 평균 4.4차례 다녔다.●집에 대한 욕구가 작아졌다 ‘집 마련’이 여전히 저축의 가장 큰 이유지만 비율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저축목적중에서 집마련이 차지하는 비율은 93년 41.3%에서 95년 32.6%,97년 29.5%,98년 26%로 조사돼 5년전보다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대신노후생활 대비 목적은 93년 7.5%에서 98년 17.5%로 대폭 늘었다.자녀교육과 재산증식은 각각 18.8%와 13.5%다.fi●눈높이를 낮췄다 향후 주택구입 시기를 늦춰잡고 있다.현재 주택을 소유한 가구는 평균 5.3년,무주택가구는 3.9년 이후로 97년보다 각각 1.2년과 0.5년을 더 미뤘다.소득 감소에 따른 빠듯한 살림살이가 주 원인이다.또 36.3평에 살기를 가장 원하고 있지만 정작 사려는 집은 32평으로 눈높이를 낮췄다.거실과 방 3개가 딸린 1억3,000만원짜리 집을 가장 선호하고 있다.朴恩鎬 unopark@
  • 부산 연제-남區 신청사 건립 추진

    지난 95년 분구 이후 셋방살이를 하고 있는 부산 연제구청과 남구청의 신청사 건립사업이 본격화된다. 연제구청은 6월 연제구 연산2동 4,500평의 시유지에 99억원을 들여 지하1층,지상3층,연건평 3,124평의 신청사 건립공사를 시작해 내년 6월쯤 완공할 계획이라고 6일 밝혔다. 옛 부산여대 건물을
  • 사랑 다듬는 가위손 26년/서울 길음동 이발사 閔基朋씨 선행인생

    ◎양로원·고아원 찾아 일주일 5∼6일 ‘무료 출장’/87년 ‘무궁화봉사회’ 조직,전국 17곳 정기방문/“단칸 셋방 살지만 남 도울수 있어 너무 기뻐” “제가 가진 작은 기술로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기쁠 뿐입니다” 서울 성북구 길음2동 ‘칠칠 이발관’ 주인 閔基朋씨(55)는 1주일에 하루 이틀밖에 문을 열지 못한다.5∼6일을 장애인 시설이나 고아원,양로원 등을 찾아다니며 무료 이발 봉사를 하기 때문이다. 閔씨가 이발도구를 들고 정기적으로 찾는 곳은 17곳이나 된다.충북 음성과 경기도 가평의 꽃동네,서울 구산동 갱생원,한빛맹학교에 한달에 한번씩 들러 머리를 깎아준다.수도통합병원,은혜장애인요양원 등에도 정기적으로 가서 이발을 해준다. “아홉살 때 아버지를 잃은 뒤 배고파 눈물을 흘린 적도 많았습니다.그때 크면 어려운 사람들을 돕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천안이 고향인 閔씨는 17세 때 상경,이발 기술을 배웠다.29세 때인 72년 지금의 칠칠 이발관을 열고 어릴 때의 결심을 26년째 실천에 옮기고 있다.처음에는 ‘장애인 무료’라는 글을 써붙이고 동네 불우이웃들에게 무료로 이발을 해주기 시작했다. 그뒤 불우시설을 찾아가 이발을 해주며 뜻을 같이하는 이발사들을 하나 둘 만날 수 있었다.이들과 함께 87년 ‘무궁화봉사회’를 만들었다.대한적십자사에서 자원봉사시간 1만시간 돌파 인정서를 받기도 했다. 요즘 무료이발 봉사에는 20∼30여명의 이미용사들이 함께 나간다.95년 7월 이발사 10여명과 명일동 시립직업훈련원에 갔을 때는 하루 종일 700명이 넘는 훈련생들의 머리를 깎아주고 손발이 퉁퉁불어 움직이지 못할 정도가 된 적도 있었다. 음성꽃동네에 갈 때는 새벽 6시30분에 서울을 떠난다.한 이발사가 70여명씩 2,100여명의 머리를 깎아준다. 영업을 거의 하지 못하는 閔씨는 한달 수입을 밝히기도 꺼린다.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40만원인 이발관안의 단칸방에 부부가 산다.부인 李種源씨(55)도 척추를 다쳐 몸이 불편하다.두 아들을 두었고 장남(26)은 고려대 수학과를 졸업하고 육군 중위로 복무중이다.그는 “돈에 욕심이 있었다면 봉사활동을 할 수 없었겠지요”라고 말한다.처음에는 가족들과의 갈등도 많았지만 지금은 ‘존경한다’고 말한다고 했다.
  • 고독한 사령관 경찰서장:2(공직 탐험)

    ◎‘한달 평균 5일 귀가’ 격무의 연속/목욕탕·화장실에도 무전기 휴대/서장 되기까지 최소 10여회 이사/옷가지 직접 세탁할때 가장 불편 세탁기는 경찰서장의 필수품이라는 말이 있다. 경찰서장 부인은 과부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서장의 어려운 근무여건을 강조하는 경찰 내부의 자조섞인 표현이다. 경찰서장은 일반 공무원들처럼 정시에 일과를 끝내고 집에 들어가는 경우가 드물다. 치안수요가 상대적으로 많은 도시지역 경찰서장은 더욱 그렇다. 5∼6일에 1번 정도 집에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 집에 들어간다기보다 잠시 들르는 수준이다. 일반 직장인처럼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함께하고 다음날 아침 식사까지 하고 나오는 ‘여유’가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 자정넘어 들어갔다가 새벽녘엔 경찰서로 돌아온다. 아버지가 들어왔다 간줄 모르는 자녀들도 있다. 경찰관 직무집행법에 경찰관들이 집에 들어가서는 안된다는 대목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장들은 가족이 아프거나 제사 등 특별한 때가 아니고는 귀가하지 않는다. 이나마도 상황이 생기면 당연히 못들어간다. 지난 3월 중순 서울 외곽 경찰서 서장으로 전보발령을 받은 L모씨는 지난 21일까지 ‘정위치’한 날짜를 꼽아봤다. 정위치란 집에 들어가지 않고 경찰서에 있는 것을 말한다. 211일의 근무일수 가운데 집에 들어간 날짜는 53일. 나머지 158일은 경찰서에서 지냈다. 특히 탈주범 申昌源이 출현한 다음날인 지난 7월17일부터 집중호우로 침수피해가 우려됐던 8월22일까지 38일 동안은 하루도 못들어갔다. 대부분의 서장은 잠을 잘 때도 무전기를 켜놓는다. 목욕을 할 때도 마찬가지며 화장실에 갈 때도 무전기를 들고 간다. L모 서장은 “지휘관으로서 무전기 휴대는 필수적”이라며 “중요 사안이 발생하면 잠결에도 귀에 들어온다”고 말한다. 집에 못들어가다 보니 가장 불편한 것은 옷가지의 세탁. 속옷이나 양말을 직접 세탁하는가 하면 모아놓았다가 집에 가져 가기도 한다. C모 서장처럼 아예 소형 세탁기를 마련하기도 한다. 서장은 이사경험이 많다. 승진하면 대부분 인사이동을 하기 때문이다. 간부 후보생이나 순경에서 경찰서장의 자리까지 오르는 동안 최소한 10여차례 이상 이사를 하게 된다. 이사는 곧 가족과의 이별이다. 자녀들이 어릴 때는 함께 데려 가기도 하지만 학교갈 나이가 되면서부터는 ‘홀아비’생활을 하게된다. 경찰생활 36년째인 C모 서장은 지금까지 모두 36번의 이사를 했다. 관사가 없는 지방에 부임하면 여관이나 셋방을 전전한다. 그는 “워낙 옮겨다니다 보니 가장이 어디에 근무하는지 모르는 가족도 있다”고 소개했다. 경찰서장이 가장으로서 하는 가족에 대한 최대의 서비스는 안부전화. 그나마 자녀교육 상담이 대부분이다. 전화는 대부분 먼저 건다. 집에 경비전화가 있어 가족들이 걸 수도 있으나 개인적인 용무로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 기생 송설이와 이용교(秘錄 南柯夢:28)

    ◎텅빈 국고 채우려 황실선 매관매작/탐관오리 들끓어/당시 전국 군수·도지사 3분의 2가 돈으로 벼슬/‘개혁’ 빌미 과거제 폐지 실업자도 날로 늘기만/이름난 한 ‘백수’ 이용교 돈 많은 과부기생에 접근/돈 꾸러미 슬쩍 던져준뒤 일부러 애간장 태우는데…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꾼 해가 1897년이니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의 일이었다.왕국이 제국이 됐으니 이름으로 본다면,발전이다.마치 국민소득 1만달러의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것같은 기분이었으나 속된 말로 속빈 강정이나 다름없었다.국고는 텅 비어 마치 IMF사태와 같았다. 도무지 세원(稅源)이 없어 황실에서는 벼슬을 팔아 국고를 충당할 수 밖에 없었다.이른바 매관매작(賣官賣爵)이란 악습이 생겨난 것이다.어떤 뜻에서 이 악습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다고 하겠다. 무술년(戊戌年 1898년)과 기해년(己亥年 1899년) 사이에 국가재정이 아주 어려워 매관매작으로 날을 지샜다.그때 전국의 수령(守令=군수) 방백(方伯=도지사)중 3분의 2가 벼슬을 돈으로 산 관리들이었다.그래서 경향(京鄕)의 돈있는 재산가들은 거의 벼슬자리를 사려고 혈안이 되었는데 무턱대고 돈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요령이 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헛돈만 쓰고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매관매작이 대한제국 초년에 심했던 것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갑자기 과거제도를 폐지해버린 때문이기도 했다.아무 후속조처도 없이 과거제도를 폐지해버리자 요즘처럼 실직자가 늘어나고 사정으로 자리가 많이 비었으나 탐관오리만 자리를 메우게 되었다.이런 때는 머리는 좋을 지 모르지만 자질은 형편없는 사람이 요직을 차지하게 마련이다.여기 기생 송설(松雪)이와 기둥서방 이용교(李容敎)의 이야기를 들어보면,구한말 탐관오리의 실상을 역력히 들여다볼 수 있다. 하루는 박상우(朴相雨)가 와서 기생 송설(松雪)이는 “영감님의 고향사람이 아닙니까”하고 물었다.“그렇습니다.그러나 본시 송설이는 전북 고부(古阜) 여자였는데,아홉 살때 그 어미를 따라 우리 고향(김천)으로 온 여자입니다.너무 가난해 남의집 셋방살이를 하며 품팔이와 절구질로 어렵게 살았고 심지어 어미가 딸 송설이를 관기(官妓)로 팔았습니다.그때 송설의 나이 열여덟이었으니 뭇 사내가 탐을 냈을 것이 아닙니까.아전 백가(白家)놈도 그 중의 하나였는데,송설이를 하루밤을 데리고 자보더니 그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는지 공금을 유용하면서까지 송설이를 속량(粟良=관기에서 해방해줌)해주었습니다” 송설이 이렇게 해서 관기 신세를 면하게 되었고,그 뒤 김천시장에서 술집을 차려 이름을 고부댁이라 했다고 하며 배문옥(裵文玉)이라는 그곳 재산가의 첩이 돼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송설이는 김천시장에서 술파는 영업을 하다가 백모라는 아전 놈과 헤어지고 배문옥이라는 자의 첩이 되어 수천금의 돈을 벌었는데,배문옥과도 재산문제로 다투다가 헤어지고 말았지요.그러나 불과 10년 사이 부동산이 1만여금에 이르러 김천에서는 그녀를 탐내는 사내가 많았다고 합니다.그런데 엉뚱하게 이용교(李容敎)라는 상주(尙州)사람이 나타나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이용교는 일찍이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한때 오위장(五衛將)으로 날렸으나 개혁바람에 직을 잃고 실업자가 되었다.이곳저곳 배회하다 김천에 당도했는데,돈많은 과부 송설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작전을 개시했다.돈 좋아하는 여자는 돈으로 유혹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형님에게서 300냥을 꾸었다.그리고 그 돈을 송설이에게 맡겼다. 정랑(正郞=六曹의 正五品) 이홍교(李弘敎)는 이용교의 친형이었다. 이홍교 역시 개혁에 밀려난 빈털털이라 서울에서 놀고 먹는 무업자(無業者=실업자) 신세였다.그러나 다행히 전판서 김선근(金善根)과 친하게 지냈다.김선근은 구정권때 송경유수(松京留守,개성시장)로 부임해 떼돈을 벌었다.그가 이홍교에게 묻기를 “자네 고향 경북 상주에는 땅값이 싸지 않겠나”고 했다. 이홍교는 “경기지방보다야 싸지요.매두락(斗落)에 상답(上畓)이 1백여금이고,중답(中畓)이 80금,하답(下畓)이 50금 정도밖에 안됩니다”고 하였다. 김선근이 다시 묻기를 “가령 1두락에 1백금을 주고 상답을 사면 도지(賭地=소작료)는 얼마나 받는가”하기에 대답하기를 “대두(大斗)로 열한말(斗) 가량 됩니다”고 하였다.김선근이 또 묻기를 “장마와 가뭄이 든 해에도 도지를 받을 수가 있을까” 하면서 “내가 상주에 몇천마지기 사 우리집 식량으로 삼을 터이니 자네가 거간꾼이 되어 좋은 땅을 물색해주게” 이렇게 해서 이홍교는 김선근의 부탁을 받고 김천·개녕(開寧) 등지에 땅을 사서 매년 도지를 받아 서울로 보내고 있었다.이 사실을 알고 동생 이용교가 형을 찾아갔다. “형님,급히 쓸일이 생겨 돈이 필요하니 3백금만 꾸어주시오.곧 갚으리다” 하였다. 형은 동생의 청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3백금을 꾸어주었다. 이용교는 이 돈을 송설이에게 보냈다.불시에 3백금을 횡재한 송설이는 이용교가 자기집을 찾아와 주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석달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이용교는 그때 금산군수(金山=김천)인 민영집(閔泳集)과 사귀면서 군청에만 자주 드나들뿐 송설이의 집을 일부러 외면하였다. 그러기를 3개월,어느날 길에서 두사람이 만났다.송설이는 반색하며 “영감님 왜 우리집에 오시지 않습니까.오늘은 저와 함께 우리집으로 가십시다”하면서손을 잡아 끌었다.그러나 이용교는 시치미를 떼고 말하기를 “요즘 관청일이 바빠 몸을 뺄수가 없네그려.당장 지금이라도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오늘은 못가겠네” 몸이 단 송설이는 이용교의 손을 잡은 채 “그렇지만 잠깐이면 됩니다.가십시다”하고 억지로 잡아 끌었다.이용교가 마지 못한척 끌리어 송설이 집에 갔는데, 송설이는 돈 한푼 없는 이용교를 상좌에 모시고 주안상을 내놓았다. 원래 김천 과하주(過夏酒)라면 전국에서도 이름이 나있는 향주(香酒)였다.거기다 해산물에 산나물이 나와 진수성찬이었다.한잔 한잔 들다 5,6배에 이르러 이용교는 크게 취했다. 그러나 이용교는 고맙다고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쯤에서 취하면 연극이 들통날까 두려워 벌떡 일어난 것이다.송설이는 그것도 모르고 한사코 붙잡고 놓아주지를 않았다.걸려든 것이었다. 송설이는 아래 위 의복과 갓을 벗겨 옷장 속에 넣고 자물쇠를 채운 다음 저녁상을 내왔다.이용교가 눈을 들고 보니,식전방장(食前方丈=고배로 고여 놓은 음식)이었다.그러나 벌써 술에 취해 다 먹지 못하고 상을 물리치면서 이용교는 또다시 집에 간다고 일어섰다.그러나 송설이는 이용교의 의관을 내주지 않고 한사코 만류했다.이용교는 세부득해 유숙하는 척 했다. 이용교앞에 다시 과하주가 나오고 그는 어느 덧 취하여 골아 떨어졌다. 이것이 무슨 세상인가.드디어 안아다가 요 위에 누인 뒤 솜이불을 덮더니 송설이 알몸이 돼 이불속으로 들어왔다.누가 남자만 여자를 좋아한다 했던가.여자도 남자를 좋아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이용교는 술에 취하여 몽롱한 가운데 정신이 없다가 점점 깨어보니 곱고 따스한 여자의 살이 닿지 않는가. 이용교는 송설인줄 알면서도 시침을 떼고 “이 집이 뉘 집이며 오늘밤이 무슨 밤인가” 하면서 일어나 앉으려 하였다. 송설이가 말하기를 “영감님께서는 무산양대(巫山陽坮=운우의 정)를 모르십니까.아침에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돼 조석으로 양대로 내려간다는 구절을 모르십니까.비록 연꽃과 같은 젊은 기생 보다야 못합니다마는…” 하면서 다음 말을 잊지 못하였다.
  • 地上 최고의 계급 대령:3(공직 탐험)

    ◎잦은 전속·이사… 태반이 주말 부부/부대 보조비 턱없이 부족/주머니돈 들여 품위유지/집없는 대령 50% 넘어 K대령은 출근을 위해 정모를 눌러 쓴 뒤 거울 앞에서 “오늘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충성을 다하자”고 다짐하고는 힘차게 방문을 나선다.그러나 그것도 잠시,이마가 반지하 셋집의 출입문에 부딪히면서 정모와 함께 ‘국가와 민족에의 충성’도 날아간다.전방에 근무하다 집 값이 비싼 수도권으로 옮긴 대령들의 비애를 다룬 일화다. 육본 과장인 L대령은 육사 32기.금년으로 임관 22년째를 맞았다. 아직 자기 앞으로 집 한칸 없다.“군에 있는 동안은 집 걱정 안해도 돼 굳이 내 집을 가질 필요성을 못느꼈다”고 말했다.동료들도 집 없는 이가 태반이라고 소개했다. 아내와 고2,중3짜리 자녀 등 그의 가족은 지금 육본 계룡대 20평 아파트에 산다.물론 육본을 떠나면 비워줘야하는 집이다.육본 서울 사무소에 근무하는 자신은 국방회관의 3평 남짓한 숙소에 살며 주말이면 가족한테 내려간다.15평에 살 때는 아이들 침대를 놓을 수 없었는데 2년 전 20평짜리로 옮기면서 몇 ㎝ 차이로 침대가 방에 들어가 아이들이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아이들 교육문제.잦은 이사 때문이다.두 아이 모두 국민학교만 7번 옮겼다.지금까지 총 이사횟수는 18번.81년 결혼 후 서울 성수동을 시작으로 용주동,수색,진해 육군대학,경기도 금와,외국유학,다시 서울로,대전으로.그의 가족은 이사를 ‘밥먹듯’했다. 중소도시 이상 부대에 근무할 때는 가족들이 군인아파트에 입주해 살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어김없이 셋방살이였다. 수당까지 합하면 L대령의 연봉은 4,500여만원.적지 않은 액수다.게다가 제대하면 연금을 받으니 “굳이 재산 모을 욕심 안낸다”는 게 그의 말이다. 사실 대령만 돼도 경제적으로 크게 어렵지는 않다.전방부대로 가면 부대내 관사를 받는다.또 부대 지프 외에 쏘나타 승용차,운전병,사무실 당번,관사 당번,주임 상사 등의 ‘수발’을 받는다.하지만 전방부대에 근무하는 대령들 중 가족과 함께 지내는 이는 거의 없다.아이들 때문이다.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대령의평균 연령은 43.5세.자녀들이 중학교 이상 다닐 나이이다.부대 따라 이리저리 함께 다닐 형편이 못되는 것이다.그래서 가족은 서울 등 대도시에 남고 본인만 부대 관사에 살며 주말에 서로 오가야 한다.그래서 “두 살림을 벌여 돈 모은다는 건 거짓말이다”고 말한다.이같은 이중생활로 추가되는 생활비 부담은 월평균 50만원이 넘는다. 부대 지휘관으로 나가면 휘하 장병을 거느리고 ‘폼’을 잡는다.하지만 폼에는 돈이 따라야 한다.병사수에 따라 지급되는 부대 보조비는 지휘관 품위를 유지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수도권 후방 연대장인 Y대령은 “축구공 한개값이 2만∼3만원이다.연대 축구시합 한번 하려면 축구공 20개는 사야 한다.한달에 나오는 연대보조비가 50만원이니 내 호주머니 돈 안쓰고는 부하를 통솔하지 못한다”고 하소연한다.부대를 지휘하면서 많든 적든 빚지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병참,병기 등 업자를 상대하는 경우에는 뒷돈 챙길 기회도 없지 않겠지만 옷벗을 각오를 먼저하지 않는다면 곤란하다.Y대령은 “지역 유지들이 모이는 방위협의회에 나가면 간혹 밥이야 그냥 먹지만 그외에 뒷돈 생길 건더기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 물에 빠진 여중생 3명 수색중/소방관 3명 급류 휩쓸려 순직

    ◎대구 금호강서 이국희·김기범·김현철씨/“잘다녀온다더니 웬 날벼락” 가족들 오열 ‘하늘도 무심하시지…’ 남부지방을 휩쓴 태풍으로 많은 인명·재산피해가 난 가운데 실종자 수색작업을 벌이던 119 구조대원 3명이 급류에 휘말려 숨지는 사건이 발생,주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 1일 오후 4시30분쯤 어둠이 서서히 깔려 가던 대구시 북구 검단동 제3아양교 근처 금호강.지난달 30일 실종된 대구 동부여중 2학년 金정희양(15)등 여중생 3명에 대한 수색작업을 벌이던 대구 동부소방서 소속 李國熙 소방장(44) 등 구조대원 4명을 태운 보트가 갑자기 급류에 휘말려 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미처 구조 손길이 미치지도 못 할 만큼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사고 직후 긴급 출동한 헬기에 의해 구조된 李소방장과 金起範(26)·金晛哲 소방사(28)는 병원으로 옮기던 중 그만 모두 숨을 거두고 말았다.함께 보트에 타고 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裵孝奉 소방교(28)는 “하류로 이동하면서 수색작업을 벌이던 중 갑자기 보트가 물막이 보에서 2m 아래로 떨어지면서 급류에 휩쓸렸다”고 사고 순간을 전했다. 사고를 당한 대원들은 하나같이 어려운 사정을 지닌 것으로 알려졌다. 20년 경력의 베테랑인 李소방장은 어머니가 7년 지성끝에 얻은 외아들.평소와 마찬가지로 이날도 주위의 만류를 뿌리친 채 젊은 부하직원들을 이끌고 직접 수색작업에 나섰다가 참변을 당했다.“李소방장은 박봉에도 불구하고 조부모와 어머님을 극진히 모신 효자였는데…”라고 말하는 동료대원들은 눈시울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 96년 12월 육군대위로 제대한 뒤 지난해 구조대원으로 합류한 金晛哲 소방사는 부인과 6살박이 아들과 함께 100만원짜리 전셋방에 살면서 내년 봄 결혼식을 올린다는 희망을 간직한 채 살아왔다.지난 96년 10월 공수부대 중사로 제대하고 소방대원으로 투신한 金起範 소방사 역시 내년 봄 5년간 사귀어 온 학교동창 애인과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다. 시신이 안치된 대구 파티마병원 영안실에는 차마 믿고 싶지 않은 현실 앞에서 망연자실한 가족들이 넋을 잃고 있었다.金起範 소방사의 어머니 李희순씨(52)는 “아침에 잘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섰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냐’며 “태풍이 귀한 아들을 빼앗아 갔다”며 울부짖었다.
  • 민주열사 열전:9/金宜基 前 서강대생(정직한 역사 되찾기)

    ◎강요된 침묵속 ‘광주 항쟁’ 왜곡 항거/당시 기독교회관서 ‘서울 봉기’ 외치다 추락사/어둠의 시대 역방향 역사에 맞선 ‘진실의 불꽃’ ‘80년 5월의 학살’은 국민들을 극도의 공포로 몰아넣고 침묵을 강요했다. 항쟁 직후 정부와 제도언론에서 연일 뱉어내는 ‘광주폭동’이란 단어에 대해 누구도 ‘아니오’라고 나서지 못했다. 그러나 분노를 흠뻑 머금은 침묵은 오래갈 수 없었다. 그 강요된 침묵을 깨뜨리고 거짓과 왜곡으로 가득찬 어둠의 시기에 진실을 향한 한줄기 빛을 비춘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의 한 사람이 金宜基라는 젊은이였다. 광주항쟁이 무력으로 진압된 후 사흘째인 80년 5월30일. 서강대 4학년생 金宜基는 그날 오후 5시쯤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떨어졌다. 밑에는 계엄군 장갑차와 군인들이 있었으나 그를 병원으로 이송하는 대신,주위에 흩어진 유인물을 수거하기에 바빴다. ○가마니에 덮인채 방치 그는 가마니에 덮여 30여분 동안이나 그대로 방치된 채 죽어갔다. 그가 뿌린 유인물 ‘동포에게 드리는 글’은 이렇게 호소하고 있었다.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오월의 하늘 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동포여 일어나자. 우리의 힘모은 싸움은 역사의 정(正)방향에 서 있다…내일 정오 서울역광장에 모여 오늘의 성전에 몸바쳐 싸우자. 동포여!” 金宜基는 서울에서의 봉기야말로 짓밟힌 광주를 살리는 길이라고 굳게 믿고 이를 처음으로 실천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하지 못한 채 젊은 생을 마감했다. 당시 경찰은 그가 유인물을 뿌리려다 발을 헛디뎌 떨어져 즉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그가 떨어지는 모습을 확실히 목격한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주위에 있었던 몇몇 사람들은 그가 계엄군에게 발각돼 쫓겨다니며 유인물을 뿌리다 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가 숨막히는 시대와 씨름했던 불꽃같은 투혼은 그의 삶 구석구석 스며있다. 막일로 생활을 꾸리던 부모님과 광부·공장노동자로 일하던 형들을 가슴속에 빚으로묻어둔 채 대학에 다녔던 金宜基. 그러나 그런 부채의식은 집안에서 유일한 대학생으로 장차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야심보다는 도리어 사회모순에 대한 천착으로 이어졌다. “나를 빼고 모두가 돈을 버는데 우리 가족은 왜 셋방을 전전해야 하나”“농사를 짓는 형님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데 왜 빚만을 불려가야 하는가”그런 의문은 그를 자연스럽게 책으로 안내했고,그는 우리 역사가 바로 서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감상적 농활에 실망 그는 농촌문제 연구에 빠져들었다. 2학년 여름 학교 동아리 ‘한국유네스코 학생회(KUSA)’의 하계농촌봉사활동에 참여했으나 깊은 실망감을 맛보았다. 대개 근로·의료봉사,아동지도 등으로 구성된 당시 농촌봉사활동이 저변에 감상적 인도주의를 깔고 있어 농민과 일체감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막연한 봉사보다는 농민들과 함께 농촌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짚어가고자 했다. 발이 닳도록 농촌현장을 누볐고 농민들과 대화를 나눴다. 보고서를 작성해 발표했고 토론을 통해 분석된 결과를 다시 농민들에게 전했다. 그가 얻고자 한 것은 농촌의 실물경제 파악과 그에 대한 농민들과의 공감대였다. 10차례에 걸친 농활과 연구에서 그가 보여준 집중력은 놀라웠다고 한다. 전국농민회총연합 조성우 상임부의장(42)은 “그에게는 대학 출신 농민운동가들이 갖기 쉬운 현장 농민들과의 위화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농민운동은 농민대중에 기반을 둔 자주적인 조직이어야 한다고 믿었고,후일 그와 가깝게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자주적 농민관을 갖게 됐다”고 회고했다. 그는 대학 2학년때부터 서울 신당동 형제교회의 농촌문제연구모임을 이끌면서 농촌문제에 대한 전문성을 키웠고,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EYC) 농촌분과위원회 간사로 활동하는 등 자신의 진로를 농민운동쪽으로 굳혀갔다. 80년 5월18일 광주시내에서 공수부대의 만행이 본격화할 무렵 그는 광주시내로 들어갔다. 항쟁 실상 파악과 19일 시내 한 성당에서 열릴 예정이던 함평고구마사건 승리대회에 참가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는 시민들이 고립무원 상태에서 무참히 살육되는 참상을 목도하고 이를전국에 알리기 위한 방법에 부심했다. 그리고 매주 금요일 기독교회관에서 열리는 ‘금요기도회’를 디데이로 잡았다. 기독교회관에는 그가 활동하던 EYC사무실이 있었다. “30일 낮 12시 EYC사무실에 나타난 그가 광주에 다녀왔다며 잠시 좀 쓸게 있으니 사무실을 비워달라고 부탁했어요. 오후 4시쯤 사무실로 돌아오니 그가 작성한 ‘동포에게 드리는 글’ 원본을 건네주더군요. 근처 상동교회에서 청년회장과 그것을 보고 이상한 예감이 들어 기독교회관에 오니 이미 상황이 끝나 있었어요” EYC에서 함께 활동했던 변광순씨의 회고다. 떨어진 쌀 수매가에 가슴치던 분노의 주먹. 농활을 준비하던 신명나던 손길. 광주를 향했던 발길. 5월의 학살을 남들처럼 가슴에 묻지 못하고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하고 터뜨린 피맺힌 절규. 이들은 모두 역(逆)방향의 역사에 맞섰던 金宜基 열사의 민중을 향한 뜨거운 사랑의 실천 방식이었다. □金宜基 열사 연보 ▲1959년 경북 영주군에서 출생 ▲70년 영주 중부초등교 졸업 ▲76년 배명고 졸업.서강대 무역학과 입학. KUSA 가입. ▲78년 형제교회 농촌문제연구모임 참여. 감리교청년회전국연합회 참여 ▲79년 서강대 근대사연구모임 주도. ▲80년 EYC 농촌분과위원장으로 활동. ▲80년 5월 광주항쟁 목격. 30일 종로 기독교회관 6층에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남기고 떨어져 숨짐 ▲90년 서강대에서 명예졸업장 받음 ◎어머니 권채봉 여사/“5·18 사망자 공식 인정” 소식 듣고 담담/“아들이 이루려 했던 세상보는게 소원” 광주광역시청 5·18 보상지원과에 전화를 했다. 담당 직원은 金宜基 열사가 ‘5·18 사망자’로 공식 인정됐다며 10월쯤 유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할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 권채봉 여사(74)는 그 소식에 의외로 담담했다. 아마도 아들의 큰 뜻과 죽음,‘빨갱이 가족’이라는 누명을 강요받아온 기나긴 고통의 세월이 금전으로 바꿔지는 듯한 허탈감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그저 “글쎄 다행인것 같기도 하고. 반갑다고 해야 하나”라고만 말했다. 어머니가 진정 바라는 것은 아들이 이루고자 했던 세상을 보는 것이다. “그날(80년 5월30일) 저녁 8시30분쯤 동대문서 형사라는 사람이 와서 宜基가 서울대병원 응급실에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하는거야. 그런데 그애는 영안실에 있었고,상부 명령이 없다고 다음날 낮 12시까지 시신도 안보여줬어. 사람을 오지 못하게 하고 화장을 하라고 갖은 협박을 했지” 그러나 김동완 목사의 주도로 장례식은 치러졌다. 수백명의 민주인사와 학생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참석,광주항쟁 후 첫 대규모 집회가 됐다. 어머니는 그때 자신의 울음을 신호로 학생들이 일어서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어 그들이 다칠까봐 자식의 관에 꽃을 던지면서도 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권여사는 송파구 잠실의 한 아파트에서 노환으로 거동을 못하는 구순의 시어머니와 중풍을 앓고 있는 남편 김억씨(73)의 시중을 혼자 들며 살고 있다. ◎장석재 형제교회 목사가 전하는 농민사랑/농민과 일체감 위해 극도의 허름한 생활/농촌연구 삶의 일부 농민 향한 애정 각별 金宜基 열사의 농촌문제에 대한 관심과 농민을 향한 애정은 각별했다. 그가 교회에 다니게 된 것도 형제교회의농촌문제연구모임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는 김동완 목사가 담임으로 있으면서 빈민·농민 선교를 통해 사회참여에 앞장서고 있었다. 金宜基는 특유의 적극성으로 이 모임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는 농촌문제 연구의 핵심은 현장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형제교회 장석재 담임목사(42)는 “그는 당시 가장 어려운 곳이 농촌이라고 보고 농촌현실에 몰두했던 것 같다”고 했다. “미울정도로 허름한 생활을 했어요. 군복바지에 검정고무신 청자담배 등 가장 싼 것만을 입고 먹었지요. 친구들로터 티내지 말라는 구박도 많이 받았어요”그러나 그것들은 농민과 일체감을 느끼려는 그의 사랑의 표현법이었다고 했다. 교회사적으로 볼때도 金宜基 열사는 ‘사회선교의 순교자’로 기록될 것이라고 했다. 장례식때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뿌리다 체포돼 4개월간 감옥신세를 지기도 했던 장목사는 “사회운동가들이 정치인 등으로 기성화하면서 과거의 순수함과 진지함이 굴절돼 보일 때마다 宜基가 생각난다”고 했다. 당시 EYC 농촌분과위원장이었던 전국농민회총연합 조성우 상근부의장도 “金宜基는 현장에서 필요로 하면 두말 않고 달려갔다. 농촌은 그에게 있어 몸에 밴 생활의 일부였으며 농민에 대한 애정과 이해는 혈육에 대한 것 이상의 깊이를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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