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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글 만든 사람은? 17% “세종대왕” 24%는 “집현전”…정답은?

    한글 만든 사람은? 17% “세종대왕” 24%는 “집현전”…정답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다? 맞다. 이는 대부분 알고 있다. 그럼 세종 혼자 만들었을까? 아니면 집현전 학자들이 함께 했을까? 정답은 “세종이 홀로 직접 만들었다” 이다. 집현전 학자들은 세종의 지시로 한글 안내서인 훈민정음 해례본 집필에 참여했다. 오는 9일 제572돌 한글날을 앞둔 가운데 한글을 만든 주체가 세종대왕이라는 사실을 알고있는 우리나라 국민이 100명 중 17명에 불과하다는 조사가 나왔다. 초중고등학교에서 쓰는 교과서도 훈민정음 창제 내용을 잘못 쓰거나 불분명하게 다루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글문화연대가 여론조사 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성인 남녀 1002명을 상대로 한글 창제를 누가 한 것으로 알고 있는지 묻자, 세종이 직접 만들었다고 답한 사람은 17%에 그쳤다. 55.1%는 세종과 집현전 학자가 함께 만들었다고 답했고, 세종은 지시만 하고 집현전 학자들이 만든 것으로 아는 사람도 24.4%였다. 모든 연령에서 공동 창제로 알고 있는 비율이 가장 높았다. 한글문화연대는 훈민정음 창제 주체를 제대로 모르는 이유에 대해 “역사적인 사실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교과서 오류에 있다”고 지적했다. 단체에 따르면 초등학교 5학년 사회 국정교과서에는 “훈민정음(한글)은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직접 만들어 반포하였다”고 적혀 있다. 중학교 역사교과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도 창제 주체가 대부분 잘못되었거나 불분명했다. 심지어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을 독려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소개하는 교과서도 있었다. 중고교 검인정 교과서 중 “세종이 몸소 한글을 만들었다”고 소개한 것은 9종 중 2종,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7종 중 2종 뿐인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중고교 역사 교과서 25%에 해당한다. 반면 “세종과 집현전 학자의 공동 창제” 라고 소개한 교과서는 16종 중 10종이었다. 중학교 3학년 국어 교과서 14종의 한글 창제자 소개 내용 분류’ 자료에서는 모든 교과서가 세종을 한글 창제의 주체로 밝힌 것으로 조사됐다. 한글문화연대 측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놓고 학교 현장에서 세 가지로 혼란스럽게 가르치고 잘못된 역사를 소개한 교과서들도 교육부 검정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 정비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김지예 기자 jiye@seoul.co.kr
  • ‘손 the guest’ 허율, 영매로 등장...역대급 빙의에 ‘소름’ 엔딩

    ‘손 the guest’ 허율, 영매로 등장...역대급 빙의에 ‘소름’ 엔딩

    ‘손 the guest’가 마지막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소름’ 엔딩으로 안방을 사로잡았다. 4일 방송된 OCN 수목 오리지널 ‘손 the guest’ 8회에서는 다시 시작되는 ‘손’의 그림자를 막으려는 윤화평(김동욱 분), 최윤(김재욱 분), 강길영(정은채 분)의 고군분투가 펼쳐졌다. 박일도로 의심되는 박홍주(김혜은 분)를 공격하려다 경찰에 붙잡힌 윤화평은 최윤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박홍주의 벽에 가로막혀 추격전이 난항을 맞는 듯했지만, 윤화평에게 ‘손’의 기운이 다시 다가왔다. 고향의 이웃 할머니(이주실 분)가 손녀 정서윤(허율 분)이 박일도에 빙의됐을 때 윤화평과 증상과 비슷하다며 도움을 요청한 것. 정서윤을 찾아간 윤화평은 엄마 이혜경(심이영 분)에게 문전박대당하고 돌아가던 길에 한 남자가 위층에서 떨어진 돌을 맞고 사망하는 사고를 목격했다. 사망자는 정서윤의 아빠 정현수(김형민 분)였다. 우여곡절 끝에 만난 정서윤은 오래전부터 귀신이 보였고, 최근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자꾸 따라온다고 했다. 심지어 귀신들이 박일도가 지켜주니 괜찮다며 다 죽이자고 했다고 언급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정서윤을 살펴본 최윤은 빙의되어가는 과정인 것 같다며 영매인 것이 도움이 됐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윤화평과 최윤을 내쫓으려던 이혜경이 현관문을 여는 순간 정서윤이 악령에 사로잡혔다. 최윤은 급히 기도문을 외워 악령을 쫓았다.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정서윤에게 ‘손’이 찾아온 이유를 밝히려면 정현수의 차를 쫓아다녔다는 여자 귀신의 정체를 알아내야 했다. 강길영은 정현수 사망 사건 수사에 나섰다. 정현수의 휴대폰에는 이틀에 한 번꼴로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이 수십 장 담겨 있었다. 사진을 찍은 장소는 뺑소니 사건이 발생했던 곳. 현수막에 적힌 피해자의 인상착의는 정서윤이 봤다던 귀신의 모습과 일치했다. 무언가 직감한 윤화평, 최윤, 강길영은 아파트 CCTV에서 별거 후에는 집에 온 적이 없다던 정현수를 확인했다. 목격자는 정서윤이 아빠를 보고 귀신이라며 비명을 질렀다고 증언했다. 단서를 조합한 결과 정서윤을 쫓아다닌 건 빙의된 정현수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빙의체가 죽어 사라졌지만 정서윤은 여전히 귀신을 보고 있었다. 완벽한 빙의체인 영매 정서윤에게 깃들기 위해 악령이 주위를 맴돌고 있었던 것. 정서윤은 지난번처럼 귀신을 쫓겠다며 가방에서 돌을 꺼내려 했다. 이를 지켜본 이혜경은 “네가 지난번에 없앤 게 뭔지 알고 그래?”라며 정서윤을 막았다. 아빠의 죽음에 숨겨진 진실과 “이제 쟤가 무서워, 내 딸이지만 소름 끼친다고”라는 엄마와 할머니의 대화를 엿들은 정서윤은 스스로 악령에게 문을 열어주며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한층 더 강력해진 ‘손’의 무도함은 서늘한 공포의 폭발력을 더하는 동시에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사람의 약한 마음을 파고들어 범죄를 저지르는 ‘손’은 한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과 인간의 본질적인 악함에 질문을 던져왔다. 아빠의 범죄로 ‘손’이 찾아오고, 영매라는 운명의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정서윤의 아픔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처연한 공포를 수놓으며 ‘소름 엔딩’을 완성했다. 또 윤화평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섣불리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엮어내며 흡인력을 높였다. 영매의 운명을 타고난 윤화평과 정서윤의 같지만 다른 평행이론이 이어지며 윤화평, 최윤, 강길영의 공조도 전환점을 맞았다. 윤화평 역시 가족이 자신 때문에 죽음을 맞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윤화평의 과거사를 전해 들은 최윤은 정현수의 사망이 정서윤 때문일까 봐 마음 졸였고, 윤화평의 죄책감과 아픔을 이해했다. 박홍주에게 가로막혔지만, 또다시 ‘손’ 박일도 추격에 나서게 될 세 사람의 운명은 확고해진 공조 속에 어떤 극적인 상황을 맞게 될지 궁금증을 높였다. 한편 시청률 조사회사 닐슨코리아에 따르면 이날 ‘손 the guest’ 8회 시청률은 케이블, 위성, IPTV 통합된 유료플랫폼 가구 평균 3.2%, 최고 3.5%를 기록했다. ‘손 the guest’는 매주 수, 목요일 밤 11시 방송된다. 사진=OCN 연예팀 seoulen@seoul.co.kr
  • 설악산엔 산나물·내장산엔 한우…단풍 길 따라 별미 투어

    설악산엔 산나물·내장산엔 한우…단풍 길 따라 별미 투어

    끔찍하던 여름 폭염이 언제였냐는 듯 훌쩍 지나가면서 이젠 찬바람이 제법 매섭다. 벌써 가을을 알리는 단풍이 가슴속까지 울긋불긋 물을 들인다. 강원 설악산을 시작으로 차차 남향해 이달 말 한라산이 절정을 이룬다. 10월을 놓치면 1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큰소리를 치듯 반도 전체를 차례로 훑어 내려간다. 하지만 ‘단풍도 식후경’. 아름다운 자연도 즐기고 그 고장만의 맛깔을 함께 해야 단풍 나들이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색에 빠져들고, 맛에 취하는 단풍여행을 떠나 보자.설악산은 단풍의 원조 격이다. 울산바위, 비선대, 천불동계곡 등 기암절벽 사이로 물드는 단풍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정상 대청봉은 1708m 고지로 한라산(백록담 1950m), 지리산(천왕봉 1917m)에 이어 남한에서 세 번째로 높다. 봉우리만 700여개에 이른다. “과연 설악”이라는 감탄을 자아내는 단풍은 9월 하순 대청봉부터 시작한다. 설악동 일대에서는 토산품점과 함께 산나물 먹을거리 식당들도 발길을 유혹한다. ●울긋불긋 눈이 즐겁고, 얼큰 담백 입이 행복 전북 정읍시·순창군과 전남 장성군에 걸쳐 ‘호남의 금강’으로 불리는 내장산(신선봉 763m)은 핏빛 단풍을 자랑하는 천혜의 가을 산이다. 굴참나무, 느티나무 등이 기암괴석, 맑은 계류와 어우러져 빚어내는 가을 풍광이 온 산을 비단처럼 수놓는다. 축산업으로 유명한 지역이어서 한우 고기가 품질을 뽐낸다. ‘단풍미인’ 한우는 1+ 이상 등급만 출하해 이미 소비자들로부터 신뢰를 듬뿍 얻었다. 배합사료 대신 조사료를 많이 먹여 기르기 때문에 육질이 부드러우면서 고유의 풍미를 선사한다. 정읍시내 쌍화차 거리도 입소문을 타고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로 빼놓을 수 없다. 각종 한약재를 넣어 달인 한방 쌍화차는 피로 회복과 감기 예방 등에 효과를 나타내 단풍을 구경한 후 인기 만점 코스라는 소리를 듣는다.백제 무왕 33년(632년) 때 지은 전남 장성군 북하면 백양사(白羊寺)는 아이들을 동반한 역사 교육장으로 겸할 수 있어 괜찮다. 특히 입구 북두교에서 쌍계루를 잇는 길 3.4㎞는 작으면서도 고운 색깔을 띤 아기 단풍으로 잘 알려졌다. 정부가 선정하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들기도 했다. 주변 식당들은 맛으로 탐방객들을 사로잡는다. 단풍나무 수액으로 만든 전통 손두부는 유명세를 타고 있다. 버섯전골에 두부를 곁들인 특유의 시원한 국물이 일품이다. 단풍두부 보쌈정식도 인기 메뉴다. 백양사를 잘 아는 관광객들은 단풍 두부묵과 청국장도 즐겨 찾는다. 장성 특산물인 삼채도 놓치면 후회하기 십상이다. 인삼보다 60배나 많은 사포닌을 함유한 데다 ‘암 잡는 채소’로 알려져 있다. 냄새를 잡는다는 얘기다. 식이섬유가 풍부해 체내 유독가스를 해독하고 당뇨, 혈액순환 장애 등의 질환을 예방하는 데 그만이다. 삼채오리백숙부터 삼채닭백숙, 삼채닭볶음탕 등 취향에 맞게 삼채 요리를 즐길 수 있다. 삼채가 알싸한 맛을 풍기며 각종 비린내를 잡아줘 맛을 배가시킨다. 삼채를 넣은 묵은지 김치찜과 삼채매운갈비찜, 삼채비빕밤도 사랑을 듬뿍 받는다. 충북 영동군 황간면 월류봉(月留峯·401m)은 흐르는 석천에 발을 드리운 명산이다. 이름 그대로 ‘달이 머물다 가는 봉우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월류봉 광장에서 반야사까지 굽이쳐 흐르는 석천을 따라 이어지는 둘레길 8.3㎞ 구간은 3시간이면 만끽할 수 있다.눈이 즐거웠으니 이제는 입이 즐거울 차례. 충북 영동군은 금강에서 잡힌 민물고기 요리들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게 도리뱅뱅이와 어죽이다. 도리뱅뱅이는 손질한 피라미를 프라이팬에 뱅뱅 돌려가며 가지런히 놓고 튀긴 뒤 양념을 발라 조린 음식이다. 튀기듯 구워 내서 바삭하고 고소하다. 비린내는 전혀 없다. 과자를 먹는 것 같아 아이들도 잘 먹는다. 술안주로도 제격이다. 어죽은 개울이나 강물에 그물을 치고 잡은 잡어를 넣고 끓인 걸쭉한 국에 밥을 넣어 푹푹 끓여낸 음식이다. 비린내를 없애기 위해 야채와 파, 마늘, 생강 등 갖은 양념을 버무린다. 얼큰한 국물 맛을 앞세워 애주가들에게도 높은 점수를 얻는다.경북 청송군 주왕산(주봉 721m), 전남 영암군 월출산(천황봉 809m)과 함께 ‘대한민국 3대 기악(奇嶽)’으로 손꼽히는 경북 봉화군 청량산(의상봉 860m)은 ‘내륙의 소금강’으로 불릴 만큼 천혜의 단풍을 입는다. 단풍철 봉화에는 송이 향이 그윽하다.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주산지이다. 봉화 송이는 백두대간 해발 400m 이상의 마사토 토양에서 시원한 1급수 계곡물을 마시고 자라 단단하고 뛰어난 맛으로 승부한다. 가격 경쟁에서 단연 앞선다. 봉화읍을 비롯한 곳곳에는 한우 고기와 송이 음식 등을 먹을 수 있는 맛집이 성업 중이다. 물야면 오전 약수터 인근엔 닭백숙집이 몰렸다. 도로변 사과밭마다 붉게 익은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장관을 이룬다.국립공원 가야산은 매표소에서 법보사찰 해인사로 이어지는 6㎞ 구간 홍류계곡으로 단풍 명소임을 알린다. 가야산 주변 대표 먹을거리는 친환경 쌀로 지은 밥과 깨끗한 자연환경에서 자생하거나 재배한 갖가지 채소(나물)를 이용해 요리하는 산채정식이다. 20가지를 웃도는 반찬과 생선을 곁들인 푸짐한 상차림이 단풍 탐방객들의 기운을 돋우기에 충분하다. 경남 합천군 가야면과 야로면에서 생산되는 돼지고기로 요리하는 합천돼지국밥도 그만이다. 다른 지역보다 돼지고기가 풍성하다. 충남 공주시 계룡산(천황봉 845m) 자락에 자리한 고찰 갑사(甲寺) 단풍의 백미는 주차장에서 용문폭포까지 이어지는 오리숲길이다. 구간 길이가 오리(2㎞)쯤 된다고 해서 이름을 붙인 길 주변이 온통 단풍나무다. 군데군데 괴목이 뻗어 가을 분위기를 한껏 돋운다. 봄은 공주 마곡사나 동학사, 가을에는 갑사가 아름답다는 유명한 말에서 잘 드러난다. 갑사를 돌아 나오면 만나는 산채비빔밥, 더덕구이, 닭볶음탕 등 먹을거리에 달착지근한 공주 밤막걸리가 발길을 붙잡는다.●울산 ‘영남 알프스’ 한우 불고기 탄성 절로 해발 1000m를 웃도는 ‘영남 알프스’는 은빛 억새 물결과 붉고 노란 물감을 푼 듯이 산을 물들인 형형색색의 단풍이 눈을 즐겁게 만든다. 산행을 마친 등산객들은 울산시 언양 한우 불고기로 허기를 채운다. 언양 한우 불고기는 양념 불고기와 생고기 두 종류로 즐길 수 있다. 양념 불고기(일명 육수 불고기)와 달리 양념을 조금만 사용해 고기 고유의 맛을 최대한 살린 게 특징이다. 언양 특산물인 소고기를 얇게 썰어 양념하고 나서 석쇠에 구워 먹는다. 일반 양념 불고기와 달리 양념 맛이 적은 반면, 특유의 육질과 고소함을 느낄 수 있다. 생고기는 1등급 최상품만 사용한다. 소금을 뿌린 뒤 숯불에 바로 구워 먹는다. 육즙이 풍부하고 단맛을 낸다. 불고기에 쓰는 한우는 송아지 1~3마리를 낳은 3~4년생 암소 고기를 사용한다.제주 한라산에선 단풍이 절정인 11월 초 모슬포 항구 등에 들어선 횟집에서 겨울 진미로 알려진 마라도 방어회를 맛볼 수 있다. 뱃살에 기름이 잔뜩 오른 게 참치 뺨친다. 간장이나 초장, 쌈 된장과도 잘 어울린다. 제주 사람들은 기름진 방어와 찰떡 궁합인 신 김치를 곁들여 먹는다. 머리 구이와 방어 뼈를 넣고 푹 끓인 방어 김치찌개도 별미다. 무게 5㎏ 이상인 대방어일수록 맛이 뛰어나다. 소방어(2㎏ 안팎), 중방어(4㎏ 이하)도 괜찮다. 장성 최종필 기자 choijp@seoul.co.kr 울산 박정훈 기자 jhp@seoul.co.kr 영동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열린세상] 교도소는 어디로 가야 하나/양중진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장

    [열린세상] 교도소는 어디로 가야 하나/양중진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장

    지난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가장 더웠다던 1994년의 더위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에어컨을 틀지 않고는 밤잠을 이루기 어려울 정도였다. 폭염으로 인해 교도소 수용자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보도도 잇따랐다. 과밀 수용이 원인이라는 지적이었다. 독자들도 깊은 공감을 담은 댓글로 화답했다.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최소한의 인권은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과밀 수용을 해소하려는 당국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비판도 연이어 나왔다. 물론 그런 점도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수용시설을 제때에 짓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시 다른 원인은 없을까.30여년 전 교도소에 면회 갈 기회가 있었다. 지하철은 물론 노선 버스도 없었다. 주변에 변변한 식당조차 없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파트가 생기고, 생활 편의시설도 생겼다. 시설이 늘어남에 따라 교도소 이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새로운 건물을 지은 것도 아니었다. 아파트가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교도소는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혐오시설이라며 이전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마디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격’이었다. 지역의 한 중소도시는 축사가 밀집해 있었다. 날씨라도 흐린 날에는 냄새 때문에 주민들이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자치단체에서 묘안을 생각해 냈다. 자체 재정으로는 축사를 철거하기 어려우니 교도소를 유치하자는 것이었다. 국가에서 부지를 매입한 후 축사를 철거해 악취 문제를 해결하자는 생각이었다. 여러 번의 협의를 거쳐 계획이 실행됐다. 덕분에 주민들의 생활이 쾌적해졌다. 그러고 나자 생각이 달라졌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 생각과 나올 때 생각이 다르다더니 딱 그런 격이었다. 도시 주변에 수용시설을 짓는 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 헌법은 제10조에서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라고 규정하고 있다. 제1장 총강(總綱)을 제외하면 국민의 권리와 의무를 정한 제2장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조문이다. 그만큼 가장 중요한 조문이고, 가장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인간’이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직업의 좋고 나쁨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 재산의 많고 적음도 가리지 않는다. 범죄자도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다. 2016년 12월 헌법재판소도 과밀 수용은 헌법에 위반된다고 결정했다. 아무리 죗값을 치르는 것이라고 해도 수용 공간이 너무 좁아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지킬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당시 헌법소원을 제기했던 수용자는 실제 사용 가능한 1인당 면적이 1㎡를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1㎡는 어느 정도 크기일까? 가로 1m, 세로 1m 크기가 1㎡다. 사람의 체격으로 환산해 보면 키가 1m 75㎝인 사람에게 주어진 너비가 57㎝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옆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몸을 한 번 뒤척이기도 어려울 정도로 좁은 공간이다. 위헌 결정은 단순한 결정으로 그치지 않았다. 수용자들이 잇따라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과밀 수용으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당했으니 정신적 고통을 배상하라는 것이었다. 법원도 수용자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수용자들에게 돈을 주면서 징역살이를 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최근 들어 교도소 같은 수용시설을 짓는 게 예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다. 가장 큰 이유는 수용시설로 인해 범죄가 늘어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수용시설 주변의 범죄율이 높다는 통계는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경찰서나 검찰청 부근의 범죄율이 낮은 것처럼 수용시설 부근의 범죄율도 평균치 이하 수준을 유지한다. 그곳에서 잘못을 저질렀다가는 바로 검거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마음 깊은 곳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와 조금 떨어져 있는 일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해진다. 매우 이성적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막상 나와 조금이라도 관계된 일이 되고 나면 달라진다. 이성 대신 아무런 근거 없는 의심과 저항감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대신 내 안에 깊숙이 숨어 있던 이기주의가 격렬히 반응한다. 과밀 수용의 해소는 그것을 깨는 데서 시작된다.
  • 메뚜기 구울까, 꿀벌애벌레 부쳐 먹을까… 완주의 야생은 맛나다

    메뚜기 구울까, 꿀벌애벌레 부쳐 먹을까… 완주의 야생은 맛나다

    “로컬푸드 1번지 청정 완주의 산, 들, 하천에서 흥미진진한 야생 먹거리를 체험하세요.”개구리와 메뚜기를 잡아 즉석에서 튀겨 먹고 구워 먹는 ‘완주와일드푸드축제’가 오는 5일부터 7일까지 3일간 전북 완주군 고산자연휴양림 일원에서 개최된다. 올해로 벌써 8회째다. 1일 완주군에 따르면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유망축제인 완주와일드푸드축제는 먹거리, 놀거리, 볼거리를 재미로 버무려낸 또 가고 싶은 축제로 유명하다. ●개구리튀김·감자삼굿… 이색 먹거리 가득 와일드푸드축제에서는 타지역 축제에서는 볼 수 없는 향수음식과 야생음식, 이색음식을 ‘건강 음식’으로 풀어낸다. 여기에 로컬푸드 메카답게 주민들이 직접 생산한 신선한 농특산물로 만든 토속 음식들이 식욕을 자극한다. 어머니의 손맛이 느껴지는 정겨운 먹거리다. 축제는 주민들이 직접 기획하고 운영하는 체험프로그램이 인기다. ▲와일드나라와 ▲로컬푸드나라로 나뉜다. 와일드나라는 와일드마당, 향수마당, 놀이마당, 힐링마당, 캠프마당으로 구성됐다. 마당마다 특색이 가득한 프로그램을 체험할 수 있다. 와일드마당에서는 웬만해선 맛볼 수 없는 이색음식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메뚜기구이, 개구리튀김, 거저리(밀웜) 피자와 빼빼로, 돼지코구이, 꿀벌애벌레부침, 달팽이아이스크림 등이 호기심을 자극한다. 축제장 인근 논에서 메뚜기를 잡아 바로 구워먹기도 한다. 글로벌와일드푸드존은 다문화가정 여성들이 나라별 이색음식을 소개하는 코너다. 나라별 전통의상 입기, 전통놀이를 체험하고 닭머리찜, 소간꼬치, 마유주, 양머리꼬치도 즐길 수 있다. 관광객과 주민들과 함께 어우러져 감자삼굿, 계란껍질밥, 밀떡구이, 대파미꾸라지구이, 메추리숯불구이, 대나무통구이, 참나무훈연구이를 나눠 먹는 맛은 어느 축제에서도 체험하기 힘든 장면이다. 감자삼굿은 대형 구덩이를 파고 돌과 나무, 솔잎을 활용해 냇가에서 구워먹었던 감자와 고구마, 밤 간식 만들기 체험이다. 계란껍질밥은 내용물을 뺀 계란껍질에 불린 쌀과 육수를 넣어 숯불에 밥을 짓는 프로그램이다. 온 가족이 함께 맨손과 족대로 물고기, 미꾸라지, 가재, 우렁을 잡아 황토화덕에 구워먹는 천렵체험은 오랫동안 기억되는 추억거리다.●교복·고무신 빌려신고 DJ 다방서 추억 찰칵 힘든 보릿고개를 경험한 세대들에게는 향수마당이 발길을 붙잡는다. 양은도시락, 호박풀떼죽, 꽃전, 수수부꾸미, 밥풀과자, 백설기찜, 시루떡 등은 서양식 먹거리에 밀려 잊혀가는 추억의 음식이다. 묵국수에 보리단술, 시원한 막걸리 한잔을 기울이는 주막집도 관광객들의 발길을 유혹한다. 교복과 고무신을 빌려 입고 추억교실, 문방구, 사진관, 추억DJ다방을 돌아다니며 기념사진을 찍는 재미도 쏠쏠하다. 로컬푸드나라는 ▲로컬마당 ▲농부마당 ▲문화마당으로 구성됐다. 전국에 로컬푸드 바람을 일으킨 완주군 농민들이 직접 생산한 농산물로 건강한 우리 먹거리와 손맛을 선보인다. 로컬마당은 13개 읍·면 특산품과 부녀회의 솜씨가 만난 ‘완주대표밥상’이다. 각 읍·면에서 생산되는 특산물로 관광객을 위한 ‘한끼 식사’를 선보인다. 용진읍 닭발볶음과 보리비빔밥, 화산면 소머리국밥, 고산면 민들레비빔밥, 비봉면 표고탕수육, 상관면 다슬기칼국수, 구이면 순대국밥, 삼례읍 아욱국백반 등이 인기다. 소양면 청국장백반, 경천면 묵은지오징어전, 운주면 인삼튀김, 이서면 시래기밥, 비봉면 장날비빔밥도 로컬마당의 얼굴 메뉴다. 농부마당은 청정 완주의 건강한 농특산물 먹거리장터다. 생산자의 성명, 주소, 연락처 등이 명기된 얼굴 있는 먹거리를 시중보다 싼값에 살 수 있다. 엄격한 품질검사를 통과한 제품만 판매한다. 문화마당은 지역 공동체와 문화단체들이 꾸민 예술장터다. 지역 내 역량 있는 공동체들의 핸드메이드 제품을 판매하고 체험형 프로그램이 운영된다.●볏짚 놀이터에서 그네 타고 함박 웃음꽃 건강한 먹거리로 배를 채우고 나서 놀이마당을 돌며 추억 만들기를 이어 가면 기쁨이 배로 늘어난다. 어린이놀이터는 유기농 볏짚으로 공간을 구성해 다치지 않고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장소다. 미끄럼틀, 징검다리, 그네, 동굴 놀이를 하다가 허수아비만들기로 정점을 찍는다. ‘수상한 놀이터·는 청소년 이상 성인들을 위한 공간이다. 불질마당에서는 화덕에 계란 삶아 먹고 불편한 살롱에서는 맷돌에 간 커피를 핸드드립으로 내려 마신다. 새총사냥, 큰 장기놀이, 스툴의자 만들기도 있다. 인근 무궁화 식물원 잔디밭 힐링마당에 가면 자연을 해치지 않고 조성한 그늘막이 조성돼 있다. 마음에 안정을 주는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푹신한 의자에서 낮잠을 즐겨도 된다. 캠핑마당에서는 세계잼버리대회와 연계된 캠핑체험이 추진된다. 축제장 음식과 체험에 맞는 ‘와일드 법칙’을 적용한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주로 아이 홀로 돌보는 남편, 이혼 가능성 40% ↓”(연구)

    “주로 아이 홀로 돌보는 남편, 이혼 가능성 40% ↓”(연구)

    아기를 혼자 돌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남성은 배우자와 헤어질 가능성이 더 낮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영국 맨체스터대 연구진은 영국인 부부 1만30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와 연구를 통해 위와 같은 결론을 얻었다고 국제 학술지 ‘계간 사회과학’(Social Science Quarterly) 최신호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이들 참가자의 가정적 의무와 배우자와의 관계 사이 연관성을 조사해 남편의 육아 적극 참여와 부부의 장기적인 관계가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특히 이번 연구에서는 돌(만 1세)이 되기 전까지 아이를 혼자서 돌보는 시간이 많았던 남성들은 배우자들과 헤어질 가능성이 40%나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해 연구를 이끈 헬렌 노먼 박사는 가디언 옵서버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결과는 만일 남편이 아이가 태어난 첫해 동안 아이를 1주에 적어도 몇 차례 아내 없이 혼자 돌본다면 부부 사이의 관계가 오랜 기간에 걸쳐서도 무너질 가능성이 적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상관관계는 인종과 성 역할관, 가계 소득 등 다른 모든 변수와 무관하게 유지됐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현재 생후 6개월 된 아이가 있다는 노먼 박사는 이번 연구가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줄 수는 없지만 새롭게 어머니가 된 여성들에게 휴식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노먼 박사는 “만일 내게 약간의 시간이 있다면 육아에 복귀할 때 기분은 상쾌하고 더 행복할 것이다. 또한 이런 시간적 여유는 아내가 밖에서 일할 수 있게 해 배우자와 더 대등한 관계에서 경쟁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분석 자료에 따르면, 혼자 아이를 돌보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보내는 남성의 수는 여전히 적었다. 80%가 넘는 아이 아버지들은 여전히 전일제(풀타임) 근무를 하고 있었다. 또한 육아 휴직을 내는 비율 역시 아내보다 상대적으로 낮았다. 설문조사와 연구에 따르면, 많은 남성은 아이들의 삶 초기 동안 여전히 재정적으로, 직업적으로, 문화적으로 휴직을 내거나 단축 근무를 할 수 없다고 느낀다. 남성들은 육아 휴직을 내기 위해 회사를 설득하는 것이 힘들다고 말하며 유연한 근무 패턴을 요구하면 업무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다는 우려를 드러냈다. 사진=아이클릭아트 윤태희 기자 th20022@seoul.co.kr
  • 양키스 시즌 266호 홈런 스탠턴, 자신의 홈런 공에 맞은 사연

    양키스 시즌 266호 홈런 스탠턴, 자신의 홈런 공에 맞은 사연

    미국 프로야구 뉴욕 양키스의 장칼로 스탠턴이 홈런을 날린 뒤 2루 베이스를 돌다 자신의 홈런 공에 맞았다. 어떻게 된 일일까? 스탠턴은 29일(현지시간) 보스턴의 펜웨이 파크를 찾아 벌인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메이저리그 정규리그 대결 7회 왼쪽 담장의 저유명한 ‘그린 몬스터’를 넘기는 솔로 홈런을 날렸다. 앞서 그레이버 토레스가 4회 2점 홈런을 날려 팀의 시즌 265호 홈런으로 1997년 시애틀 매리너스의 메이저리그 한 시즌 팀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한 데 이어 266호 홈런을 추가했다. 그런데 스탠턴의 홈런 공을 주운 검정색 티셔츠 차림의 남성이 그라운드를 향해 공을 힘껏 던졌고 이 공이 때마침 2루 베이스를 돌던 스탠튼의 몸에 맞고 데굴데굴 굴러갔다. 흠칫 놀랐을 스탠턴은 고개를 돌려 관중석 쪽을 바라본 뒤 웃으며 모자를 벗어 그 팬에게 인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8-5 승리로 경기가 끝난 뒤 “보스턴 팬이 보복으로 던진 건가 싶었는데 그가 그런 의도로 그런 것 같지 않았다”며 “어느 쪽이건 내가 보고 있었더라면 쉽게 잡아낼 수 있는 공이었다”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심판들은 경기를 멈추고 3루 근처에 모여 숙의한 뒤 문제의 팬을 펜웨이 파크 경호 책임자에게 신고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그 팬은 관중석에서도 쫓겨났다. 스탠턴은 “우리네 경기장에서는 늘상 있는 일”이라며 “따라서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더불어 특별한 공이 될 수도 있는 공이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그 공이) 필요했다. 내 생각에 그는 아마 돈을 조금 잃은 것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한편 양키스는 좌익수 스탠턴이 38홈런으로 선두를 달리고 있고, 3루수 미겔 안두하르와 유격수 디디 흐레호리위스, 중견수 힉스, 우익수 저지가 나란히 27홈런을 기록 중이다. 2루수 토레스는 24홈런으로 그 뒤를 잇고 있다. 포수 산체스는 18홈런, 1루수 보이트는 12홈런을 날렸다. 에런 분 양키스 감독은 “공을 제대로 쳐서 담장 밖으로 넘기려면 많은 것을 해야 한다. 우리 선수들은 시즌 내내 그것을 보여줬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이어 포지션별로 골고루 힘 있는 타격을 하는 것도 고무적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승리로 양키스는 2009년 이후 9년 만이자 구단 통산 20번째 시즌 100승(61패)째를 채워 보스턴(107승54패), 휴스턴 애스트로스(102승58패)와 함께 메이저리그 최초로 동일 리그 세 팀이 나란히 시즌 100승을 넘어서는 진기록을 작성했다. 보스턴은 지난 12일 1946년(104승) 이후 72년 만에 100승을 달성했고, 휴스턴은 25일 2년 연속 100승을 돌파했다. MLB 닷컴에 따르면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세 팀이 100승 이상 거둔 시즌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104승·내셔널리그), 클리블랜드 인디언스(102승), 휴스턴(101승·이상 아메리칸리그)이 세자릿수 승수를 쌓은 지난해를 포함해 모두 여섯 차례 있었지만 동일 리그 세 팀은 이번이 처음이다. 양키스는 시즌 100승을 거두고도 보스턴에 이어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 2위로 밀려 와일드카드로 포스트시즌을 치른다. 임병선 선임기자 bsnim@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수목원은 현대인에 치유죠···시간이 갈수록 가치 빛나”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수목원은 현대인에 치유죠···시간이 갈수록 가치 빛나”

    ‘월급쟁이 출신’ 성만기 원장이 말하는 수목원 40년“오늘 우리 한국 사람은 너무 바쁘게 급하게 삽니다. 오늘 일을 하면 내일 결과가 바로 나오기를 바랍니다. 3년이나 5년 계획을 ‘장기 계획’이라고 우깁니다. 조급증 환자같이 살다 보니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사는지도 모른 채 살다가 죽습니다. 하지만 나무를 키우니, 수목원을 하다 보니 시간의 의미를 체험합니다. 수목원은 최소 100년, 어쩌면 한 300년쯤 지나야 제대로 된 멋과 품격을 풍깁니다.” 수목원 가는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 재벌도 기업가도 아닌 평범한 월급쟁이 출신이 수목원을 멋있게 가꾸고 산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23일 경남 고성군 동해면에 있는 소담수목원으로 차를 몰았다. 국토교통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을 따라 향했지만 길가에 촘촘하게 선 전봇대와 얼기설기 걸린 전선이 눈에 거슬렸다. 수목원에 들어서 엔진을 끄자마자 성만기(73) 수목원장이 나왔다. 조성한 지 올해로 40년째인 이 수목원 앞에는 호수처럼 잔잔한 옥빛 바다가 내려다보인다. 이름 그대로 작고 아담했다. 그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숲을 걸었다. 가을이라고는 하지만 나뭇잎은 여름 그대로였다. “저기 저 나무가 스트로보 잣나무입니다. 미국 코네티컷에서 이 나무를 보고 반했지. 나무 대신 씨앗을 가져와 심었는데 저렇게 자랐습니다. 한 40년 자랐을까, 대한민국에서 아마 유일할 겁니다. ‘이스턴 화이트’라고도 해” 설명을 듣고보니 경기도나 강원도에서 보던 잣나무보다는 흰색이 강했고, 가지들이 피라미드처럼 층을 이루며 자라고 있었다. “스트로보 잣나무가 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만큼 우리 생물자원이 풍부하다는 겁니다. 저건, 로보참나무야. 독일에선 ‘할아버지가 로보참나무를 심으면 손자가 벤츠를 탄다’는 말이 있지. 그만큼 목재 가치가 높거든.”국내 유일한 잣나무, 국내 최대 참나무 보유 언뜻 보기엔 평범해 보이는 한 나무 앞에서 그가 걸음을 멈췄다. “이건 핀오크 참나무야. 국내에선 제일 클 겁니다. 손기정(1912~2002) 선생이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을 하면서 받은 월계관이 사실은 이 핀오크 참나무 가지로 만든 거야. 손기정 선생을 기념해 서울 양정고등학교에도 저런 핀오크 참나무가 자라고 있지.” 이 나무 높이가 25m쯤 돼 보였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나뭇잎이 다른 참나무와는 달리 단풍나무처럼 들쭉날쭉 길게 갈라져 있었다. 그는 핀오크를 대왕참나무로 부른다며 그 유래를 설명했다. “1990년 중반 핀오크 참나무를 조달청에 우리말로 등재하기 위해 고민하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국립수목원 조무연 박사와 의논했지요. 참나무 중에서 가장 으뜸이라는 생각에 대왕 참나무로 명명했습니다. 목재로 가치가 높을 뿐만 아니라 가을 단풍도 정말 아름답지요.” “대왕 참나무 이름도 지어···생물자원 풍요”그는 미국 노스웨스턴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1973년 대한항공에 공채로 입사했다. 승무직으로 4년가량 일하다 그만두고 나와 건축업과 자동차 딜러 등 개인 사업을 했다. 갑자기 불어닥친 불황으로 1년여 만에 모두 ‘까먹고’ 1979년 대한항공에 재입사했다. 대한항공 재입사 1호다. 수석 사무장 15년과 객실이사(현재의 상무)를 지낸 그의 비행시간은 약 3만 시간에 이른다. 지구를 300바퀴쯤 돌았다. 전 세계 곳곳의 좋다는 곳은 다 가봤다. 2000년 퇴직하고 수목원을 가꾸고 있다. 왜 수목원을 할까. “두 발을 땅에 딛지 않고 하늘에서 승무원 생활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그만큼 깎아먹는 시간입니다. 제때 자고, 제때 일어나 일하는 나의 시간, 나의 ‘우주’를 갖자는 열망이 강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하는 시간, 사색의 시간이 많아지면서 외국의 유명 식물원과 정원을 찾았습니다. 캐나다의 부차드가든, 영국의 큐식물원, 호주의 닐슨파크 등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지요. 그러다 독일 하이델베르크 ‘철학자의 거리(소피스트 로드)’에서 영감을 얻고 수목원을 하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철학자의 거리를 자양분 삼은 문인과 철학자가 많이 나면서 독일의 지적 수준을 높였지만, 하이델베르크보다 더 풍광이 좋은 제 고향 이곳은 궁색한 시골이었습니다. 이를 바꿔보고 싶었거든요.” “하이델베르크 ‘철학자의 거리’서 영감···고향 바꾸고 싶어서“수목원을 하는 데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님에게서 태어나 자란 그의 개인적 특성도 작용했다. “씨앗을 지배해야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에 마음이 흔들려 세계 곳곳에서 씨앗을 사 들였다. 소담수목원도 어린나무를 심는 게 아니라 씨앗을 발아시켜 성장시킨다. 수목원을 가꾸는데 시간도 훨씬 많이 걸린다. “요즘 길가 화단을 보면 꽃이 잘 핀 화초를 심는데 이건 1회용이예요. 1회용. 꽃이 시들면 파내 버리고 다른 화초로 갈아 끼우고···, 화초엔 인간의 이기심이랄까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도시의 욕망이 빚어낸 참사입니다.” 그의 비판이 신랄하다. “한번은 뉴욕 외곽의 종묘상에 갔는데 파산으로 ‘땡처리’를 하는 거예요. 평소 400달러 하던 씨앗을 40달러에 팔기에 무작정 종류대로 사들였지요. 한 1330여종이 됩니다. 국내엔 없는 희귀 종자들이 많이 있었지요. 종자를 사기는 했는데, 어떻게 발아시키는지 몰랐고, 당시엔 발아시킬 곳도 없어서 1976년 경기도 광릉임업시험장(현재 광릉수목원)에 그대로 기증했습니다. 당시 내가 가진 재산의 전부였죠.” 지금도 국립수목원 종자표본실에는 ‘기증자 성만기’의 이름이 내걸려 있다. 외국 수종실을 만든 이로 기록돼 있다. 희귀종자 등 외국 씨앗 1330여종 국가기증 성 원장은 오솔길의 호젓함을 달래주는 새소리를 따라 걸으며 계속 설명해줬다. “이건, 문재인 대통령이 이번에 평양 백화원초대소 앞에 심은 모감주나무”, “이건, 열매를 깨서 하천에 던지면 미꾸라지와 가재가 배를 뒤집고 뜬다는 때죽나무”, “이건, 밤에 잎이 오므라드는 자귀나무”, “이건, 6·25때 숲으로 피신한 사람들의 허기를 채워준 돌배나무” 등등 숲 해설사처럼 들려줬다. “저기 보이는 저 참나무, 줄기에 검은빛이 도는 나무가 루브라참나무고, 그 옆에 저 잣나무는 변종이야. 학계에서 아직 이름을 붙여주지 못하고 있어요.”그의 수목원 프로젝트는 아들이 태어나던 1978년 시작됐다. “처음엔 고향 아버지의 밭뙈기 한쪽에 나무 씨앗을 뿌렸지요. ‘쓰잘데 없는 일한다’고 핀잔도 많이 받았습니다.” 할아버지대부터 살던 이곳 3만 5000평을 샀다. 산도 있고 바다도 있어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외딴 오지여서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땅값이 말 그대로 ‘껌 값’이었다. “여기에 수목원 한다고 땅을 사니 가까운 사람들이 저보고 ‘돌았다’고 했습니다. 땅을 더 살 작정이었는데 그만 1995년쯤 마산 진전면에서 여기까지 다리를 놓는다는 계획이 덜컥 나오더라고요. 땅값이 너무 뛰어서 수목원을 더 확장할 수가 없어 안타깝습니다. 그때 다리(동진대교)만 놓지 않았더라도 이곳이 확 변했을 겁니다.” 고향 땅 사서 일궈···주말마다 나무 심어 주중에는 승무원으로 세계를 누비고 주말에는 스튜어디스였던 부인과 함께 내려와 종자를 뿌리고, 어린나무를 옮겨심고, 잡초도 맸다. 부부가 항공사 승무원이었으니 사천공항이나 김해공항을 통해 내려오기가 한결 수월했으리라 짐작된다. “가능하면 자연을 그대로 살리고자 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나무만 살리고 모두 베어낼 수는 없잖아요. 원래 이곳에 터를 잡았던 소나무, 밤나무, 물푸레나무, 칡덩굴 등등을 그대로 두었습니다. 4계절 다 아름다우면서도 주위 경관과도 조화를 이루는 그런 수목원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봄에 벚꽃 하나만 피면 좀 유치해 보이잖아요. 현재도 수목원을 한창 만들어가는 과정이니 한 50~60년쯤 뒤에는 수목원다운 풍모를 보일 겁니다.” 현재 이 수목원에서 자라는 나무만 300여종이란다. 식물은 1000종 이상 심었다. “여기 수목원의 고성의 기후와 토양에 따라 어떤 식물이 가장 계절을 잘 나타내주느냐 그렇게 만드는 것이 사명이고 정체성입니다.” 성 원장은 산책길을 따라 심은 어린 핀오크 참나무를 만지며 “아까 그 핀오크의 씨앗이 발아한 2세예요. 이네들은 고성이 ‘네이티브’인 핀오크입니다. 돈이 급할 때 내다 팔려고 길가에 심었습니다만···. 어릴 때는 볼품 없지만 크면 클수록 똑바로 서서 자랍니다. 나무에 기품이 있지요.” 이 수목원에 성 원장 부부의 전 재산이 다 들어갔다. 그러나 수목원이 미완성이니 아직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국내 유일이거나 국내 최고의 나무가 있는 수목원이 한편으론 경남의 얼굴이고 고성의 작품이지만 모두 고개를 돌렸다. 자연적 문화공간에 정부 돈은 1원도 들어가지 않았다. 부인 이상숙씨가 카페를 운영하며, 그는 앞치마를 두르고 거든다. 수목원을 산책하다 카폐에서 마시는 차 한 잔에도 여유가 묻어났다.고향의 얼굴인데도 지원 없어···카페도 운영 “캐나다 부차드가든은 한 개인이 만들었지만 정부의 지원으로 전세계에서 관람객들이 옵니다. 반면 우리나라 천리포수목원은 전세계 목련을 모았고 세계적인 작품이 돼 있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돈달라는 것도 아닌데 국가에서 이런 자원을 이용해 국익을 위해 활용하느냐는 것입니다. 여기도 내가 죽고 나서가 아니라 살아있을 때 관심을 두고, 관리에 참여하면 지역 전체가 발전할 수 있는 것 아니냐.” 그가 이 말을 하면서 목에 힘이 들어갔다. “형편상 사람을 데리고 쓸 수가 없어 제가 다 합니다. 요즘도 하루 평균 4~5시간 잡초를 속고, 씨앗을 거두고, 나무를 심고 합니다. 운동도 되고 좋습니다. 카페가 문 여는 오전 10시30분 이전에 다 마칩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그는 열정 이외는 식물과는 인연이 없다. “식물 공부, 책으로 혼자 했지요. 조경회사 만수원의 고 김명원씨, 천리포수목원을 세운 ‘미스터 밀러’(고 민병갈 원장), 충북 진천에 있는 영주농장 이영주 대표 등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카페 한쪽 구석에 자리한 창고에는 식물과 관련된 책으로 가득했다. 초창기엔 씨앗만 보고 어떤 특징을 지닌 나무인지 모르니 움이 트더라도 숱하게 죽었으리라. “멘토로 마틴 루서 킹 목사를 삼았습니다. 그 눈빛만 봐도 힘이 났습니다.” 그는 묻지도 않은 자신의 멘토를 이야기할 때 수목원을 조성하면서 느꼈을 벽, 고독과 고난 등이 묻어났다. 킹 목사가 멘토···“그 눈빛만 봐도 힘 솟아”성 원장은 산책 도중 중간에 칡덩굴 숲 옆에 서며 “아침이면 굴뚝새 수백 마리가 날아오릅니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정글을 이룬 칡덩굴이 나무를 휘휘 감고 넘실거리고 있다. “이 자체로 하나의 완벽한 생태계로 작은 우주입니다.” 몇 걸음 더 가다 “이게 백화등이라고, 담쟁이처럼 나무를 감고 올라가 5월이면 아주 향기로운 하얀 꽃을 피웁니다. 어떤 향수보다 더 달콤하고 향긋합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땀을 뻘뻘 흘리며 ‘선생님, 이게 나무를 휘감아 죽이는 것 같아 베어냈습니다’고 말해요. 몇 년 동안 정성 들여 팔뚝 굵기로 키웠는데, 너무나 안타깝지만, 기왕 베어낸 것, 제가 말을 못합니다. 들어와서 보는 것은 좋은데 제발 손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수목원의 가치요? ‘종자 전쟁’이나 ‘노아의 방주’ 프로젝트(지구에 재앙이 닥쳤을 때 씨앗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로 노르웨이의 스발바르 씨앗저장소가 대표적이다.)는 아니지만 수목원은 훼손된 자연의 복원과 치유입니다. 오늘 일하고 내일 결과가 나오기를 바라는 조급한 세상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수목원에서 조금이나마 치유가 될 것입니다. 수목원은 시간이 갈수록 진가가 발휘되죠. 그게 느리게 산다는 것, 여유롭다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그러면 만족합니다.” 산책하던 성 원장이 엎드려 작은 루브라참나무 옆에 우거진 잡초를 손으로 뽑아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는 현대이지만 한 자리에 우뚝 서서 수백년을 지키는 거목같은 수목원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고성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이광식의 문화유랑기]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기생 시인의 겨울사랑

    [이광식의 문화유랑기]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기생 시인의 겨울사랑

    - 기생 시인 매창(梅窓)의 '겨울 사랑' 우리 옛시조 중 가장 동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시조 중 하나가 매창의 다음 작품이 아닐까 싶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 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이화는 배꽃이다. 배꽃은 갈래꽃이다. 변덕스런 봄바람이 한바탕 불어제끼면 낱낱이 떨어진 흰 꽃잎들이 마치 빗낟처럼 난분분 허공을 비산한다. 그래서 이화우라 한다. 이처럼 이화우, 추풍낙엽 같은 동적인 소재, 그리고 봄에서 가을로 건너뛰는 장면 바뀜 등으로 위의 시조는 마치 한 편의 동영상을 우리 앞에 펼쳐 보여주는 듯한 절창이다. 그래서 예전엔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매창은 조선 중기의 시인이다. 직업은 기생이었다. 그 아비가 부안현의 아전이었는데, 매창은 그마나도 첩에게서 태어났다고 한다. 갈데없는 천출이다. 하지만 자질이 영특했다. 어릴 때부터 한문을 배웠고, 거문고 타기를 즐겨 상당한 기량의 연주 솜씨를 지니기에 이르렀다. 시재(詩才)는 일찍 드러났다.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떴다. 시 잘 짓고 거문고 잘 타는 천출 처녀가 아버지마저 일찍 여의었으니 갈 길은 대강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기적에 이름을 올리고 기생이 되었다. 나이 16살 때였다. 거문고 연주가 빼어날뿐더러 시재까지 출중한 이런 조합이 그리 흔치는 않다. 명기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이런 소문을 듣고 멀리서 시인묵객, 한량들이 찾아왔다. 때로는 손님 중 술이 거나해지면 집적대는 이들이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매창은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는 여인은 아니었다. 다음 '증취객(贈醉客)' 제목의 오언절구를 보면 그녀의 시재와 마음자리까지 오롯이 드러난다. 醉客執羅衫 취하신 님 사정없이 날 끌어단 羅衫隨手裂 끝내는 비단적삼 찢어놓았지 不惜一羅衫 적삼 하날 아껴서 그러는 게 아니야 但恐恩情絶 맺힌 정 끊어질까 두려워 그러지 (신석정 역) 하지만, 험한 세파에 일찍 몸을 실었으니, 인생의 쓴 맛도 일찍 찾아왔다. 현감에게 수청을 들었으나 버림받고 말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렇게 빼어난 미색은 아니었다 한다. 이런 매창에게도 첫사랑이 찾아왔다. 임진란이 일어나기 1년 전 선조 24년(1591) 18살 때였다. 그런데 그 상대는 28살이나 연상인 유부남으로, 한양에서 이미 문명을 날리는 시인인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이었다. 부안에 놀러왔다가 매창을 찾아온 것이다. 매창과 마찬가지로 유희경 역시 천민 출신으로, 같은 천출 시인인 백대붕과 함께 유 · 백으로 일컬어지며 문단을 주름잡고 있었다. 매창이 유희경을 처음 만났을 때 한양에서 온 시객(詩客)이란 말을 듣자, '유희경과 백대붕 가운데 뉘신지요?' 물었다고 한다. 그만큼 촌은의 문명이 멀리 부안에까지 알려져 있었던 터이다. 두 사람은 28년의 나이 차를 뛰어넘어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깊은 사랑을 나누게 된다. 같은 천민이라 더욱 동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유희경은 묘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다. 상례에 아주 밝아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喪)에 집례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또한 화담 서경덕계의 문인으로 기녀를 멀리하고 반듯한 선비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지만, 이때 매창을 만나 지족선사가 되고 말았다. 평생 처음으로 ‘파계’를 했던 것이다. 얼마 후 유희경이 한양으로 돌아가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통에 이들의 재회는 기약 없게 되었다. 유희경은 의병을 일으켜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화우' 시조는 이 무렵 첫사랑 유희경을 떠나보내고 난 후에 지은 것이다. 봄바람에 날리는 하얀 꽃잎처럼 그들의 사랑도 덧없고 아름다웠으리라. 이 무렵 그들이 사랑을 주고받은 많은 시들이 전한다. 이 고장 출신의 '촛불' 시인 신석정은 이매창, 유희경, 직소폭포를 가리켜 부안삼절(扶安三絶)이라 하였다.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를 일컫는 송도삼절을 본딴 모양이다. 어쨌든 유희경과의 첫사랑은 매창의 영혼에 깊은 각인을 남겼다. 그녀는 천리 밖 정인을 모질도록 그리워했고, 그것은 나중에 서러움과 한으로 응어리지기까지 했다. 한양의 유희경 역시 매창을 그리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은 좀 다르지만, 다음의 시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娘家在浪州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我家住京口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相思不相見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腸斷梧桐雨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젠 애가 끊겨라 (懷癸娘, 허경진 역) 이처럼 독한 사랑이었지만, 시절은 그네들의 편이 아니었다. 7년 전쟁의 불길이 조선땅을 온통 휩쓸고 갔으며, 전후에도 세상이 어수선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구러 10년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줄곧 유희경만을 그리며 살던 매창에게 두 번째 남자가 나타났다. 이웃 고을 김제에 군수로 내려온 이귀(李貴)였다. 그는 율곡의 문인으로 문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절의가 곧아 나중에 인조반정에 앞장서 공신이 된 인물이다. 이런 인물에게 매창이 마음이 끌려 그의 정인이 되었던 것이다. 10년 동안 첫사랑 유희경으로 가슴앓이를 하던 매창에게 두 번째 정인으로 이귀를 만났으나, 그 만남 역시 오래 가지는 못했다. 환해(宦海)를 떠도는 이귀의 입장에서 매창을 수습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 남자마저 떠나보낸 매창은 사랑의 덧없음, 인생사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깊이 받아들였던 듯하다. 그 뒤 매창의 행로를 더터보면 그런 짐작을 아니 할 수가 없다. 매창에게 깊은 흔적을 남긴 유희경과의 두 번째 만남은 15년 만에 이루어졌다. 매창을 잊지 못한 유희경이 다시 부안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재회는 잠깐의 만남으로 끝났다고 한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 뒤로 영원히 만나지 못했다. 짐작컨대, 15년의 세월이 이미 두 사람의 얼굴을 크게 바꿔놓았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오랜 옛사랑은 다시 찾을 것이 못된다. 그냥 마음속 깊이 간직함만 못하다는 걸 여기서도 확인하게 된다. 이 재회 후 매창은 3년을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 37살의 한창 나이였다. 이승의 삶에서 더 이상 붙잡을 것이 없음에 깊이 절망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매창은 죽어서 부안읍 남쪽에 있는 봉덕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유언에 따라, 평생을 끌어안고 살며 고락을 같이했던 자기 거문고를 안은 채 묻혔다고 한다. 누구도 오래 머물지 않았던 매창의 옆에 거문고가 끝까지 함께했던 것이다. 그것만이 자신의 소유였던 모양이다. 그 뒤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뜸이라고 부른다. 매창이 죽은 지 45년 만에 매창을 잊지 못하는 부안 사람들이 그녀의 무덤 앞에 빗돌 하나를 세웠다. 그로부터 다시 13년 뒤에 부안의 아전들이 중심이 되어 그녀가 남긴 시 중에서 구전되는 58편의 작품을 목판에 새겨 인근 사찰 개암사에서 <매창집>을 펴냈다. 시집이 나오자 하도 많은 사람들이 시집을 찍어달라 하여 개암사의 절 살림이 어려울 지경이었다는 말도 전한다. 허균의 누이인 허난설헌과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여류 시인으로 꼽히는 매창의 시는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여성적인 정서로 섬세하게 읊으며, 자유자재로 시어를 구사하는 데에 있다"는 평을 받는다. 세월이 한참 지나 매창 빗돌의 글씨들이 이지러진 1917년, 부안 시인들의 모임인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높이 4척의 비석을 다시 세우고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라고 새겼다. 그전까지는 마을 나뭇꾼들이 벌초하며 무덤을 돌보았다고 한다. 가극단이나 유랑극단이 부안 읍내에 들어와 공연할 때도 먼저 매창 무덤을 찾아 한바탕 굿을 벌이며 시인을 기렸다. 바로 곁에는 명창 이중선의 묘가 있다. 지금도 음력 4월이면 부안 사람들은 매창의 제사를 모신다. 매창이 간 지 360여 년이 지난 1974년 어느 날, 매창뜸을 찾아온 시조 시인 가람 이병기가 그녀를 추모하며 다음과 같은 시조를 올렸다.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가고 하지마는 한 줌의 향기로운 이 흙 헐리지를 않는다 이화우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두고 등 아래 홀로 앉아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하구나 나빈상(羅衫裳)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었으리 그리던 운우(雲雨)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 남았다 ('매창뜸' 전문) 한편, 매창의 첫사랑 유희경은 대시인으로 문명을 날리며 91살까지 천수를 누렸다. 그의 집은 경복궁 뒷담 너머 개울 가에 있었다. 가끔 궁궐 사람들이 담 너머로 그의 모습을 보기도 했는데, 하얗게 늙은 모습이 마치 신선 같았다고 한다. 이광식 칼럼니스트 joand999@naver.com
  • 中 문화혁명 때 파괴된 삼학사비, 복제비마저 잡목에 묻힌다

    中 문화혁명 때 파괴된 삼학사비, 복제비마저 잡목에 묻힌다

    우리 민족 최대 치욕 중 하나를 꼽는다면 ‘삼배구고두’(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 의식)로 불리는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의 남한산성 항복이다. 이때 침략국 청나라에 항복하거나 청과 화의를 맺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다 중국 선양(瀋陽)으로 끌려가 처형된 세 신하 오달제·홍익한·윤집이 있었다. 이들의 충절 및 절개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삼학사비’가 선양 외곽 한 창고와 풀숲에 방치돼 잊혀 가고 있다. 역사를 망각하면 미래가 없다고 한다. 선양에 방치된 삼학사비를 지난 22일 찾아봤다.●요녕발해대학 설립자 천문갑 학장 숨져 폐교 아스팔트 도로를 벗어난 택시는 덜컹거리며 10분여 인적이 끊긴 선양시 허핑구 경진로 재개발지역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막다른 길에 다다르자 왼쪽으로 폭 6m 철문이 나타났다. 그 너머로 예쁘장한 5층짜리 건물이 보였으나, 가까이 다가설수록 손질이 많이 필요해 보였다. 조선족이 설립하고 운영하는 중국 내 유일한 ‘요녕발해대학’ 본관이다. 설립자인 천문갑(조선족 과학자) 학장이 2009년 지병으로 숨지면서 문을 닫았다. 철문 안으로 들어서자 50대 후반 남성이 본관 안으로 안내했다. 쇠사슬로 잠금장치를 한 낡은 여닫이 쌍문을 열고 들어서자 작은 복도가 나왔다. 복도 양쪽 가득 종이 상자가 쌓여 있다. 왼쪽은 매점이다. 상자를 치워 가며 복도 끝 오른쪽 방문 앞에 이르자, 비로소 ‘전시실’이란 푯말이 보였다. ●발견된 비신은 요녕발해대학 전시실에 보관 잠기지 않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벽면 가득 사진과 설명문이 붙어 있다. 그 한가운데 비스듬히 깨져 나간 육중한 비석이 붉은 테이블보 위 유리관 안에 누워 있다. 삼학사비다. ‘비두’라 불리는 머리 부분은 중국 문화대혁명기(1966~1976년) 때 훈허강변에 버려진 뒤 발견되지 않고 있고, 몸체 격인 ‘비신’만 발견돼 보관 중이다. 13년 전 사비를 털어 이 전시실을 꾸민 김용규(60) 전 요녕발해대학후원회 비서실장이 전등을 켜고 삼학사비 앞에 서서 한참을 묵념했다. 착잡한 그의 표정에서 삼학사가 느꼈을 망국의 설움이 보이는 듯했다.건물 밖으로 나와 왼쪽 풀숲을 더듬거리며 들어가 보니 거대한 비석이 나타났다. 높이 390㎝, 가로 83㎝, 두께 26㎝의 삼학사비 복제비이다. 2005년 허창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와 계룡건설 도움으로 2개의 복제비를 만들었다. 1기는 그해 6월 국내로 옮겨져 8월 31일 천안 독립기념관 ‘겨레의 큰마당’에 세웠으며 다른 1기는 지금의 위치에 자리잡았다. 농가의 주춧돌로 사용될 뻔했던 원비(비신)는 앞서 봤던 요녕발해대학 내 전시실 유리관 안에 보관하고 있다. 복제비가 세워진 곳은 13년 전 깔끔했던 공원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아카시아 등 잡목과 사람 키보다 높게 자란 잡초로 뒤덮여 있다. 정문 경비원이나 학교 관리원이 한 시간이면 정리정돈할 수 있을텐데 안타깝다. 대학 설립자 유가족들이 삼학사와 삼학사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청태종은 1636년 조선을 침략해 2개월 만에 남한산성 삼전도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아냈다. 철군할 때 약 60만명의 우리 백성을 포로 또는 노예로 끌고 갔다. 당시 조선 인구는 200만명 내외로 추정된다. 소현세자 부부와 봉림대군 부부, 항복하거나 화친을 반대한 오달제·홍익한·윤집 등 신하 셋(삼학사)도 선양으로 끌려갔다. 신하가 되라며 고문하고 회유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자 처형했다. 청태종은 그러나 삼학사의 굳은 충절과 절개에 감동해 ‘삼한산두’(三韓山斗)라는 휘호를 내리고 비와 사당을 세워 매년 제를 지내 삼학사의 넋을 위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삼한’은 조선을 의미하고 ‘산두’는 삼학사의 정신이 태산처럼 크고 북두칠성처럼 변함없이 빛난다는 뜻이다. 청태종이 세운 비는 세월이 흘러 청이 멸망하면서 사라졌다가 일제강점기인 1933년 오달제 선생 후손 등에 의해 머리 부분이 발견돼 1935년 10월 항일운동의 한 방법으로 다시 중건됐다. 이후 모택동 집권 후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다시 파괴돼 선양을 가로지르는 훈허강에 버려진 것으로 전해진다.●3년치 급여 털어 비신 구입… 재중건 뜻 못이뤄 한동안 잊혔던 비는 1990년 비신 부분이 중국 농민에 의해 발견됐다. 중국인이 밭갈이하다 발견한 바위를 주춧돌로 사용하려다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알고 문밖에 내놨다. 중국 에서는 글이 새겨진 돌은 집 안에 두지 않는다. 길을 지나던 조선족 교원이 비문을 보고 중국 당국에 보관해 달라고 신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삼학사가 중국의 역사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거절됐다. 다행히 당시 랴오닝대학 교수이자, 중국 조선족과학자협회 천문갑 부이사장이 3년치 급여를 들여 구입해 보관해 오다 1992년 요녕발해대학을 설립하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천 학장은 선양 일대 동포 유지들을 모아 삼학사비 재중건 등을 위해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주변 도움으로 복제비 2개만 만드는 데 그쳤다. 김 전 비서실장은 “순국열사들의 행적을 찾고 기억하는 것은 후손들의 마땅한 책무”라며 안타까워했다. 글 사진 선양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베트남 권력서열 2위 쩐 다이 꽝 국가주석 별세

    베트남 권력서열 2위 쩐 다이 꽝 국가주석 별세

    베트남 권력서열 2위인 쩐 다이 꽝 국가주석이 21일(현지시간) 병환으로 별세했다. 61세. 국영 베트남뉴스통신(VNA) 등 현지 언론은 “쩐 다이 꽝 주석이 21일 오전 10시 5분 하노이에 있는 군중앙병원에서 병환으로 별세했다”고 보도했다. 그동안 꽝 주석을 둘러싼 건강 이상설이 현지 정가를 중심으로 돌았다. 특히 지난해 8월에는 1개월가량 공식 석상에 나타나지 않아 이 같은 소문이 퍼졌었다. 꽝 주석은 쯔엉 떤 상 국가주석의 후임으로 2016년 4월 국가주석으로 공식 선임됐다. 공산당 일당 체제인 베트남은 권력서열 1위인 당 서기장을 정점으로 국가주석(외교,국방), 총리(행정), 국회의장(입법)이 권력을 나눠갖는 집단지도체제를 택하고 있다. 꽝 주석은 취임 후 반체제 인사들에게 무관용 원칙으로 대응해 국제 인권단체들로부터 베트남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베트남 북부 닌빈 성 출신인 꽝 주석은 1975년 공안부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해 국가안전자문과장, 국가안전총국 부국장, 공안부 차관, 공산당 중앙집행위원, 정치국원을 거쳐 2011년 공안부 장관에 임명됐다. 그는 공안부 말단에서 시작해 장관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 41년 만에 국가주석 자리에 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 중도 성향으로 업무 추진력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한국에 대해서도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와 지난 3월 베트남을 국빈방문했을 때 꽝 주석을 만난 바 있다. 이석우 선임기자 jun88@seoul.co.kr
  • “마지막주 토요일, 세종대왕과 만나세요”…여주박물관 체험프로그램

    “마지막주 토요일, 세종대왕과 만나세요”…여주박물관 체험프로그램

    경기 여주박물관에서는 ‘문화가 있는 날’을 맞이해 11월까지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후 2시에 여주박물관 특별기획전시와 연계한 체험 프로그램 ‘세종대왕을 만나다’를 운영한다. ‘세종대왕을 만나다’는 무채색의 도자기 인형에 왕을 상징하는 곤룡포를 그리고 익선관을 클레이로 만들어 붙여 직접 세종대왕 미니어처를 만들어 보는 체험 활동이다. 또한 체험과 함께 세종대왕 즉위 600돌을 기념한 특별기획전시 ‘세종, 왕이 되신 날’을 관람하며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손꼽히는 세종대왕의 즉위 과정과 애민정신, 업적을 알아보는 시간도 갖는다. 신청인원은 매회 초등학생 자녀가 있는 가족 10가족이며, 신청방법은 매월 셋째 주 금요일인 10월 19일, 11월 16일 오전 10시부터 여주박물관 홈페이지(www.yeoju.go.kr/museum)를 통해 접수하면 된다. 신동원 기자 asadal@seoul.co.kr
  • “붓 들 수 있을 때까지 그려야죠…수묵담채화 기법 후세 남기고파”

    “붓 들 수 있을 때까지 그려야죠…수묵담채화 기법 후세 남기고파”

    “한국화, 특히 수묵화가 오랫동안 침체했습니다. 저를 비롯한 수묵을 연구하는 화가들이 공부를 게을리해서 노력하지 않은 탓이 크다고 봅니다. 대학에서는 동양화나 한국화 전공 학과가 없어지는 추세입니다. 그래도 나는 우리 고유의 수묵담채화 전통과 기법을 후세에 남기고 싶습니다. 붓을 들 수 있을 때까지 그릴 겁니다.” 길이 57m의 초대작을 그렸다는 오산 홍성모(58) 화백의 화실을 지난 12일 찾았다. 흰머리를 길게 길러 뒤로 묶었고, 빨간색 셔츠와 검정 개량 한복 바지를 입고 나왔다. 악수하며 맞잡은 손에서 작은 굳은살들이 느껴졌다.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아파트 상가에 위치한 그의 화실로 들어서자 안쪽 벽에 걸린 가로 2.75m, 세로 1.7m 크기의 흑백 그림이 반겼다. 무슨 그림인지 묻자 “사자 바위”라고 짧게 답한다. 설명을 듣고 그림을 보니 동그란 눈과 오뚝한 콧날, 수북한 갈기가 엿보이는 게 앞을 내려보는 사자처럼 보였다. 홍 화백은 “적벽강 사자 바위는 채석강과 함께 부안의 명물”이라고 설명해 줬다. 그는 전북 부안 출신이다. 그가 작품 구상을 설명했다. “사자니깐 전반적으로 좀더 거칠게 사납게 표현하려고 합니다. (그림 오른쪽 상단을 가리키며) 빛을 이쪽으로 넣고···.” 이 그림은 부안군의회 포토존에 걸릴 예정이다. 화실의 다른 벽에는 용 비늘 같은 껍질의 소나무와 노란 개나리가 피어난 마을, 살구꽃이 흐드러진 동네 어귀의 그림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길이 57.4m짜리 초대형 그림을 그렸다던데. -계화도에서 줄포만생태공원까지 변산반도 83㎞의 해안 사계절을 담았습니다. 한지에 그린 수묵화로, 길이가 57.4m, 높이가 1.2m입니다. 가로 2.05m짜리 작품 28개를 그려 이었지요. 시작한 지 20개월 만인 지난 6월에 완성했습니다. 그사이 쓰러져 병원에 두 번 실려 갔죠. 지난 7월 부안군에 이 그림 ‘해원부안사계전도’를 기증했습니다. 군청 민원실 1층과 2층 사이 난간 벽에 길게 걸려 있습니다.→이런 초대형 작품을 그리게 된 계기는. -2013년 여름에 위도로 하얀 상사화 스케치를 하러 갔었거든요. 돌아오는 길에 선상에서 변산반도를 바라봤는데 너무 아름다워 이곳을 연작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바다에서 육지 쪽인 채석강을 보면 그야말로 신이 혼자 즐기려고 만든 정원같이 빼어난 절경입니다. 말 그대로 ‘해원’(海苑·바다의 정원)이지요. 이를 그려 기증하겠다고 제안하니 부안군에서 흔쾌히 받아 주었습니다. →부안군이 많이 지원해 줬겠다. -부안군이 곰소항 쪽에 작업실을 마련해 줬습니다. 저는 월~목요일 서울에서 활동하다 금요일 부안에 내려가 일요일까지 작업했습니다. 주말마다 266㎞를 달려 내려갔지요. 해안을 스케치하러 낚싯배를 15번 빌려 타고 나갔지요. 낚싯배 한 번 빌리는 데 30만원, 그건 제 지갑에서 나갔습니다. 겨울엔 줄포만 쪽엔 수심이 얇아 배가 못 들어가니 조개 캐는 아주머니들 태우는 경운기와 트랙터를 얻어 타고 갔지요. 잠은 처음엔 여관방에서 자다가 비용 문제로 찜질방에서 자고···. →작업할 때 가장 큰 애로는. -먹는 것이었습니다. 작업에 열중하다 깜빡 저녁 시간을 놓쳐 밤 8~9시쯤 나가면 식당들이 문을 닫아 먹을 데가 없어요. 또 간장게장이니, 무슨 찌개를 한 그릇 먹으려 해도 1인분은 팔지 않고 2인분 이상만 팔더라고요. 그래서 2인분을 시켜 1인분만 먹고 1인분은 포장해 와서 다음날 먹기도 했습니다. 나중엔 서울에서 출발할 때 도시락을 두 끼 정도 싸 다니기도 했고···. 표구 값만 1000만원 넘게 들었는데, 모두 제 사비로 충당했습니다. →남다르게 깊은 고향 사랑 아닌가. -고교 졸업 후 가출하다시피 고향을 떠났습니다. 선천성 심장병을 갖고 태어나 고향에 대한 추억은 아팠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고향이지요. 아름다운 풍광의 고향을 그림으로 남기는 것은 고향에 대한 보은의 마음입니다. 나이가 더 들어 눈이 침침해지고 손이 떨려 작업이 힘들어지기 전에 그림을 남겨 두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에게 사진 촬영을 위해 작품을 그리는 포즈를 취해 달라고 하자 직접 붓으로 그림을 그렸다. 붓질 한 번에 산이 솟고, 나무에서 잎이 돋고, 길이 만들어지고, 강이 흘렀다. 그는 작품을 할 때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한다. “스케치를 보고 바로 붓질을 하죠. 그러다가 잘못되면 작품을 고칠 수도 없으니 그대로 종이를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버린 화선지 값만 해도 강남 아파트를 사고도 남을 겁니다.” →심장병 어린이를 많이 도왔다던데. -제가 심장병으로 대학 4학년 때 수업 중에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갔습니다. 그때 의사가 ‘수술해도 죽고, 안 해도 죽는다’고 했어요. 동료 학생들이 1000원씩 걷어 모금한 도움으로 심장병 수술을 했고, 그 덕분에 살아났습니다. 그 후 돈이 생기면 단 한 명에게 심장병 수술을 시켜 주자고 결심한 것이 심장병 환자를 돕는 계기가 됐습니다. 1985년부터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까지 13년 동안 어린이 50명에게 심장병뿐만 아니라 언청이 등의 수술을 해 줬습니다. 환자가 있다는 소식만 들리면 바로 찾아 입원시켰습니다. →심장병 어린이를 돕자면 돈이 많이 들었을 텐데. -자랑 같지만 제가 졸업과 동시에 미술대전에서 특선으로 입상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잘나갔죠. 병원비는 그때 작품을 그려 팔고, 크리스마스 카드도 그려서 팔고, 후원금 계좌도 만들고, 그렇게 해서 해마다 병원에 2500만원가량을 한꺼번에 냈습니다. 그런데 IMF가 터지니 그림이 팔리지 않았고, 후원금도 끊겼습니다. 병원에서는 외상 수술비 갚으라고 독촉도 오고···. 그때 병원 외상이 2억원 남짓 했습니다. 금모으기 운동할 때 와이프 몰래 결혼 반지, 아이들 돌 반지까지 모조리 팔아 병원비를 갚는 데 보탰습니다. 그래도 남은 빚은 병원에서 탕감해 줬습니다. 지금은 심장병 수술을 돕는 단체도 많고, 보험도 적용되고 해서 더는 안 합니다. →그림 실력을 타고났나 봐요. -요즘도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하루 최소 2시간씩은 붓을 잡습니다. 대학 다닐 때 서양화를 전공하다가 동양화로 바꿨습니다. 동양화 특히 한국화의 맛과 멋, 선의 묘미를 깨닫는 데 10년이 걸렸습니다. 요즘엔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오른쪽 팔이 아파 들지를 못합니다. 한참 풀어 줘야 움직일 수 있지요. 이것도, 직업병 아닌가요. 하하하. 그의 오른손을 다시 만져 봤다. 가운뎃손가락의 마지막 끝 부분이 한쪽으로 뭉턱 들어갔다. “오랜 시간 붓을 잡고 씨름한 훈장이지요.” 그리고 그 손가락 끝과 손톱은 다른 손가락과는 달리 먹물로 검게 변해 있었다. →강원도 그림을 많이 그렸던데. -IMF 이후 병원 빚을 겨우 갚고 나서, 또 건강이 악화되어 숨어 살려고 강원 영월에 들어갔습니다. 그전에 80년대부터 영월군 청령포를 처음 접했을 때에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기암절벽의 산과 계곡이 전부 한 폭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런 풍경에 반해 영월의 폐교에 화실을 마련해 거기서 살았습니다. 할 일이 없으니 정말 그림을 많이 그렸지요. →다음 전시회는 언제 여나. -내년에 열한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림에 스토리텔링을 하는, 약간 색다른 전시를 할까 합니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정자나 경치, 나무 등에 얽힌 역사와 야사 등도 함께 적어서 그림 아래에 붙여 전시할 계획입니다. 요새 시간이 날 때마다 부안에 내려가 이야기를 채록하고 있습니다. 한 100점 정도 전시할 생각인데, 지금 70점 정도 완성했습니다. 글 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홍성모는 누구 - 1961년 전북 부안 출생, 원광대 사범대 미술교육학과 졸업, 동국대 예술대학원 미술학과 졸업(석사), 개인전 10차례,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성균관대 겸임교수 역임, 동국대·원광대 강사 역임 ●작품의 대표적 소장처 - 한국은행 청주지점, 외교부, 국립현대미술관, 가천대 길병원, 싱가포르 대사관, 부안군청
  •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베델 생가 英서 첫 확인 성과… 반세기 지나 ‘영원한 한국인’ 부활

    [조선을 사랑한 英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베델 생가 英서 첫 확인 성과… 반세기 지나 ‘영원한 한국인’ 부활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데일리뉴스(KDN)를 창간해 우리 민족의 항일의식을 고취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1872~1909·한국명 배설)은 1909년 세상을 떠난 뒤 일제의 왜곡과 날조 등으로 한국인의 기억에서 빠르게 잊혀졌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반세기가 지나자 우리에게 남은 것은 베델이라는 이름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부 수립 뒤 국가 재정비에 정신을 쏟느라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를 챙기지 못한 우리 자신의 책임이 컸다. 대한민국이 베델을 다시 찾은 건 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독립된 정부가 세워진 지 20년이 지난 뒤였다.●베델 며느리가 손주 데리고 한국대사관 찾아 프랑스에서 일어난 ‘68혁명’(학생과 근로자가 중심이 된 사회변혁운동)이 들불처럼 유럽 전역에 번지던 1968년 7월 15일. 영국의 ‘더타임스’ 16면에 조그마한 안내 광고 하나가 실렸다. 확대경을 대지 않으면 글자를 읽을 수 없을 정도의 크기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1905년 서울에서 신문을 창간한 어니스트 토머스 베델이라는 분께 훈장을 드리려고 합니다. 연고자는 런던의 한국대사관으로 연락 바랍니다.” 한국과 영국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진 ‘대영(大英) 남자’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베델이 세상을 떠난 지 60년이 다 돼서였다. 하루 종일 신문만 읽는 사람이 아니라면 광고의 존재조차 파악하기 힘들 만큼 작게 게재돼 아무 반향도 없었다. 사실 우리 정부는 정말로 그의 후손을 찾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영국 최고 권위지 가운데 한 곳에 광고를 내 독립운동가를 찾으려 나름 노력했다는 흔적을 남기려는 의도가 더 컸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반응이 나왔다. 신문 광고의 크기가 당시 한국이라는 나라의 국력을 반영하는 것 같아 측은해 보였던 것일까. 더타임스가 이 광고를 근거로 이튿날 ‘한국이 한 영국인에게 감사를 표하려 한다’는 제목의 기사를 쓴 것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의 대통령 훈장과 트랜지스터 라디오가 과거 한국의 국민 영웅이던 영국인 후손을 기다린다. 1905년 신문을 창간해 일본의 한국 지배에 저항하다가 1907~1909년 사이에 추방당했다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것이 없다.”더타임스 기사는 오류가 많았다. 그때까지 우리가 아는 베델에 대한 정보가 이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신문에 그의 이야기가 실리자 후손에게서 연락이 왔다. 베델의 며느리인 도러시 메리 베델(당시 52세·2002년 작고) 여사가 딸 수전 제인(당시 12세)과 아들 토머스 오언(당시 9세)을 데리고 한국대사관을 찾은 것이다. 베델 사후 반세기가 넘어 그의 가족과 한국이 다시 만난 순간이었다.●베델, 전 재산 한국에 쏟아 가족들 곤궁한 삶 도러시의 입을 통해 들은 베델 가족의 이야기는 한 편의 가슴 아픈 소설 같았다. 베델의 부인 메리 모드 게일(1873~1965)은 남편 사망 뒤 아들 허버트 오언 친키 베델(1901~1964)을 데리고 결혼 전 살았던 영국 런던으로 돌아갔다. 베델이 일본에서 사업을 하며 모은 재산 대부분을 대한매일신보 발간에 쏟아부어 영국에서의 삶은 힘들고 곤궁했다. 도러시가 한국대사관을 찾아왔을 때도 이들은 정부 보조금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었다. 영국의 이웃들은 자신과 가족을 희생해 가며 아무 이해관계도 없던 한국을 도운 베델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메리 여사는 그런 남편을 자랑스러워하며 홀로 아이를 키웠다.한국 정부가 베델의 연고자를 찾았을 때는 그와 조선에 함께 살던 이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다. 1964년 아들 허버트가 63세에 사망했고 이듬해에는 베델의 부인 메리 여사도 92세로 숨을 거뒀다. 베델의 손녀 수전 제인 블랙(62)은 “할아버지(베델)는 아버지(허버트)가 9살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 역시 내가 10살도 되기 전에 떠났다. 할머니(메리 여사) 역시 말년에 치매 증세를 보여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했다. 현재 베델의 후손들은 우리 정부의 초청으로 꾸준히 한국을 방문해 그를 기린다. 베델이 “영원히 살아남게 해 한국 동포를 구해 달라”고 당부한 신보는 어떻게 됐을까. 베델의 비서였던 영국인 알프레드 매넘이 신보사의 2대 사장이 됐지만 1910년 영국 정부의 권유를 받아들여 일본에 신보사를 팔고 떠났다. 이후 신보는 ‘매일신보’로 이름을 바꾸고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전락했다. 조선인들의 신뢰도 사라졌다. 매일신보는 해방 뒤 ‘서울신문’으로 이름을 바꿨다. 1950년대에는 이승만 정권을 지지하다가 1960년 4·19 혁명 당시 시위대가 사옥과 시설을 파괴해 희귀 자료 대부분을 잃어버리기도 했다.●베델 다시 살려내는 데 정진석 교수 역할 커 대한민국 역사에서 사라질 뻔한 베델의 발자취를 찾아내 ‘영원한 한국인’으로 부활시킨 이는 정진석(79) 한국외국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명예교수였다. 1976년 대한매일신보 국한문판 영인 작업에 참여하면서 그의 삶에 매료된 정 교수는 영국 런던정경대(LSE)에 수학하며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베델 관련 자료를 하나하나 찾아냈다. 베델이 태어난 영국 브리스톨과 1888~1904년 무역업을 했던 일본 고베 등을 돌며 베델 기록 대부분을 바로잡았다. 지금 우리가 교과서 등을 통해 배우는 베델의 생애는 그가 일생을 바쳐 찾아낸 것들이다. 서울신문 역시 ‘조선을 사랑한 英 언론인 베델의 히스토리’ 기획을 통해 몇 가지 의미 있는 성과를 냈다. 우선 언론학계의 주요 과제였던 베델의 영국 브리스톨 생가를 확인했다. 그간 베델 생가를 찾으려는 노력은 관훈클럽 창립자인 최병우(1924~1958) 코리아타임스 편집국장 등에 의해 1950년대부터 수차례 시도됐지만 모두 실패했다. 정 교수는 베델의 출생지 주소(Egerton villa, Egerton Road, Horfield)를 구했지만 지금의 영국 주소체계와 달라 생가를 특정하지 못했다. 국가보훈처는 서울신문이 찾아낸 베델 생가(현주소 54 Egerton Road, Bishopston, Bristol)를 검증한 뒤 현충시설로 지정해 역사적 장소로 활용할 계획이다. 베델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던 베델 관련 자료도 독립기념관으로 옮겨 전시하기로 했다. 여기에 서울신문은 베델의 가족관계 일부를 새로 발굴해 그가 왜 일본을 통해 조선에 오게 됐는지를 좀더 명확히 밝혀냈다. 해외 기사 데이터베이스(DB)를 통해 베델이 통신원으로 조선에 와서 쓴 첫 번째 기사(전통놀이 석전)도 소개했다. 이밖에도 베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1910년대 미국 작가의 역사소설 두 편(황제 납치 프로젝트·황제의 옥새)을 찾아냈다. 베델의 열정에 반해 러시아 기밀문서 등을 찾아내 독학으로 연구하는 외국인을 만났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베델의 생애를 소개하며 그의 이름을 알리는 해외 네티즌도 확인했다. 베델의 발자취 찾기는 지금도 전 세계에서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런던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붓 들 수 있을 때까지 그려야죠…수묵담채화 기법 후세 남기고파”

    [이기철의 노답 인터뷰]“붓 들 수 있을 때까지 그려야죠…수묵담채화 기법 후세 남기고파”

    길이 57.4m 초대작 남긴 홍성모 화백이 말하는 수묵화“한국화 특히 수묵화가 오랫동안 침체해 있습니다. 그 이유를 따져보면 저를 비롯한 수묵을 연구하는 화가들이 공부를 게을리해서 노력하지 않은 탓이 크다고 봅니다. 그림에 발전이 없었던 것입니다. 대학에서는 동양화나 한국화 전공 학과가 없어지는 추세지요. 그래도 나는 우리 고유의 수묵담채화 전통을 후세에 남기고 싶어요. 붓을 들 수 있을 때까지 그릴 겁니다.” 길이 57m의 초대작을 그렸다는 소식에 동양화가 오산(悟山) 홍성모(58) 화백을 지난 12일 찾아갔다. 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한 아파트 상가에 위치한 그의 화실이 찾아가는 길에서 그를 만났다. 화실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짐작한 듯 홍 화백이 마중 나온 것이다. 흰 머리를 길게 길러 뒤로 묵었고, 빨간색 셔츠와 검정 개량 한복 바지를 입고 나왔다. 길거리에서 악수를 했다. 그의 손바닥은 작은 굳은 살이 박혀 거칠거칠했다. 그를 따라 화실에 들어서자 안쪽 벽에 걸린 가로 2m75cm, 세로 170cm 크기의 흑백 그림이 반겼다. ‘무슨 그림이냐.’고 물어보자 그는 처음 만난 기자가 다소 서먹한지 “사자 바위”라고 짧게 답한다. 완성되지 않은 작품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 다소 어색한 듯도 했다. 설명을 듣고 그림을 보니 동그란 눈과 오뚝한 콧날, 수북한 갈기··· 앞을 내려보는 사자처럼 보였다. 홍 화백은 “적벽강 사자 바위는 채석강과 함께 부안의 명물”이라고 설명해줬다. 그는 전북 부안 출신이다. 어색함이 다소 풀린 듯 작품 구상을 설명했다. “사자니깐 전반적으로 좀 더 거칠게 사납게 표현하려고 합니다. (그림 오른쪽 상단을 가르키며) 빛을 이쪽으로 넣고···.” 이렇게 큰 그림을 어디에 전시할 것이냐고 묻자 “부안군의회 포토존에 설치할 계획”이라고 했다. 화실의 다른 벽에는 용 비늘 같은 껍질의 소나무와 노란 개나리가 피어난 마을, 살구 꽃이 흐드러진 동네 어귀의 그림들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눈이 호사를 누렸다.- 길이 57.4m짜리 초대형 그림을 그렸다던데.☞ 변산반도의 4계절을 그렸습니다. 계화도에서 줄포만생태공원까지 83km의 해안 4계절을 20개월 만에 완성했지요. 지난 7월에 부안군에 이 그림 ‘해원부안사계전도’를 기증했습니다. 군청 민원실 1층과 2층 사이 난간 벽에 길게 전시돼 있습니다. 한지에 그린 수묵화로, 길이가 57.4m, 높이가 120cm입니다. 가로 2m5cm짜리 작품 28개를 그려 이었지요. 이 작품을 하다가 과로로 화실에서 쓰러져 병원에 두 번이나 실려갔습니다. - 이런 초대형 작품을 그리게 된 계기는.☞ 2013년 여름에 위도로 하얀 상사화 스케치를 하러 갔었거든요. 그때 돌아오면서 선상에서 본 변산반도가 너무 아름다워 이곳을 연작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바다에서 육지 쪽인 채석강을 바라보면 그야말로 신이 혼자 즐기려고 만든 정원같이 아름다운 절경입니다. 말 그대로 ‘해원(海苑·바다의 정원)’이랍니다. 이를 그려 기증하겠다고 제안하니 부안군에서 흔쾌히 받아주었습니다. - 부안군이 많이 지원해 줬겠다.☞ 부안군이 곰소항 쪽에 작업실을 마련해줬습니다. 저는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금요일 부안에 내려가 일요일까지 작업했습니다. 주말마다 266km를 달려 내려갔지요. 해안을 스케치하러 낚싯배를 15번 빌려 타고 나갔지요. 낚싯배 한번 빌리는데 30만원, 제 지갑에서 나갔습니다. 겨울엔 줄포만 쪽엔 수심이 얇아 배가 못 들어가니 조개 캐는 아주머니들 태우는 경운기와 트랙터를 얻어 타고 갔지요. 개펄이어서 발이 빠지니 걸어다니진 못하거든요. 잠은 처음엔 여관방에서 자다가 비용 문제로 찜질방에서 자고···. - 해원부안사계도 작업할 때 가장 큰 애로는.☞ 먹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작업에 열중하다 깜빡 저녁 시간을 놓쳐 밤 8~9시쯤 나가면 식당들이 문을 닫아 먹을 데가 없어요. 또 간장게장이니, 무슨 찌개를 한 그릇 먹으려 해도 1인분은 팔지 않고 2인분 이상만 팔더라고요. 그래서 2인분을 시켜 1인분만 먹고 1인분은 포장해와서 다음날 먹기도 했습니다. 나중엔 서울에서 출발할 때 도시락을 두 끼 정도 싸다니기도 했고···. 표구 값만 1천만원 넘게 들었습니다. 모두 제 사비로 충당했습니다. - 정말 고향 사랑이 남다르게 깊다.☞= 고교 졸업 후 가출하다시피 고향을 떠났습니다. 선천성 심장병을 갖고 태어나 고향에 대한 추억은 아팠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부모님 모두 돌아가시고 친척들밖에 없지만, 그래도 고향이지요. 그래서 아름다운 풍광의 고향을 그림으로 남기는 것은 고향에 대한 보은의 마음입니다. 나이가 더 들어 눈이 침침해지고 손이 떨려 작업이 힘들어지기 전에 그림을 남겨두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변산반도를 쳐다보고 화폭에 담으면서 고향에 대한 애착이 새록새록 깊어졌습니다. 그에게 사진 촬영을 위해 작품을 그리는 포즈를 취해달라고 하자 직접 붓으로 그림을 그렸다. 붓질 한 번에 산이 솟고, 나무에서 입이 돋고, 길이 만들어지고 강이 흘렀다. 그는 작품을 할 때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다고 한다. “스케치를 보고 바로 붓질을 하죠. 그러다가 잘못되면 작품을 고칠 수도 없으니 그대로 종이를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버린 화선지 값이 강남 아파트 한 채를 사고도 남을 겁니다.” - 심장병 어린이를 많이 도왔던데, 계기는.☞ 제가 심장에 구멍이 생기는 질병으로 대학 4학년 때 수업 중에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그때 의사가 ‘수술해도 죽고, 안 해도 죽는다.’고 했어요. 동료 학생들이 1000원씩 걷어 모금한 도움으로 심장병 수술을 했고, 그 덕분에 살아났습니다. 그 후 돈이 생기면 단 한 명에게 심장병 수술을 시켜주자고 결심한 것이 심장병 환자를 돕는 계기가 됐습니다. 1985년부터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까지 13년 동안 어린이 50명에게 심장병뿐만 아니라 언청이 등의 수술을 해 줬습니다. 환자가 있다는 소식만 들리면 바로 찾아 입원시켰습니다. 가천 길병원 이길녀 이사장님이 의료팀을 만들어주었지요. 참, 고마운 분입니다. - 심장병 어린이를 돕자면 돈이 많이 들었을 텐데.☞ 자랑 같지만 제가 졸업과 동시에 미술대전에서 특선으로 입상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잘 나갔죠. 입원비는 그때 작품을 그려 팔고, 크리스마스 카드도 그려서 팔고, 후원금 계좌도 만들고, 그렇게 해서 해마다 병원에 2500만원가량을 한꺼번에 수술비로 냈습니다. 그런데 IMF가 터지니 그림이 팔리지 않았고, 후원금도 끊겼습니다. 병원에서는 외상 수술비 갚으로고 독촉도 오고···. 그때 병원 외상이 2억원 남짓 했습니다. 금모으기 운동할 때 와이프 몰래 결혼 반지, 아이들 돌 반지까지 모조리 팔아 병원비를 갚는데 보탰습니다. 그래도 남은 빚은 병원에서 탕감해 줬습니다. 이젠 심장병 어린이를 돕는 기관도 많고, 의료보험도 되니 더 이상 하지 않습니다. - 젊은 시절 이름을 날렸군요.☞ 특선하고 나서 대학 졸업 직후 전북 익산에서 활동했는데 건달들 등쌀에 힘들었습니다. 건달들이 저를 납치해 여관방에 감금시켜두고 그림을 그리게 했거든요. 건달들은 제 그림을 강매해서 돈을 챙겼던 거죠. 그때 경찰서장이 건달들에게 저를 건들지 말라고 경고도 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던 1988년 서울로 도망쳐 왔습니다. 서울에서 한번은 검은 양복 차림의 20대의 깍두기가 제 화실로 찾아와 ‘오산 선생, 어디 있느냐’고 묻기에 ‘내가 오산인데···.’라고 했더니 ‘너 말고, 너희 선생 어딨느냐’고 하더라고요. 서울은 사람도 많고 작가도 많으니 제게 관심이 없어진 거죠. - 그림 실력을 타고났나 봐요.☞= 요즘도 아무리 바쁘고 힘들어도 하루 최소 2시간씩은 붓을 잡습니다. 대학 다닐 때 서양화를 전공하다가 동양화로 바꿨지요. 유화 페인트 냄새에 머리가 아파서 작업을 할 수가 없었거든요. 1985년부터 수묵담채화로 전향했습니다. 동양화로 바꾼 지 5개월 만에 한국미술대전에 입선하고 그다음 해에 특선하니깐 신동났다고 했지요. 화선지를 끼고 스케치를 나갔지요. 하지만 동양화 특히 한국화 맛과 멋, 선의 묘미를 깨닫는 데는 10년이 걸렸습니다. 요즘엔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오른쪽 팔이 아파 들지를 못합니다. 한참 풀어줘야 움직일 수 있지요. 이것도, 직업병 아닌가요. 하하하. 그의 오른손을 다시 만져봤다. 가운뎃손가락의 마지막 끝 부분이 한쪽으로 뭉턱 들어갔다. “오랜 시간 붓을 잡고 씨름한 훈장이지요.” 그리고 그 손가락 끝과 손톱은 다른 손가락과는 달리 먹물로 검게 변해 있었다. - 강원도 그림을 많이 그렸다.☞= IMF 이후 병원 빚을 다 갚고 나서, 또 건강이 악화되어 숨어 살려고 강원도 영월에 들어갔습니다. 그 전에 80년대부터 영월군 청령포를 처음 접했을 때에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기암절벽의 산과 계곡이 전부 한 폭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런 풍경에 반해 영월의 폐교에 화실을 마련해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영월에서 딱히 할 일이 없으니 정말 그림을 많이 그렸지요. 지금도 영월에 아는 사람이 고향 부안보다 더 많아요. - 전시회 계획은.☞ 내년에 열한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단순히 그림만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 스토리텔링을 하는, 약간 색다른 전시를 할까 합니다. 그림의 배경이 되는 정자나 경치, 나무 등에 얽힌 역사와 야사 등도 함께 적어서 그림 아래에 붙여 전시할 계획입니다. 요새 시간이 날 때마다 부안에 내려가 어른들한테 이야기를 채록하고 있습니다. 한 100점 정도 전시할 생각인데, 지금 70점 정도 완성했습니다. - 꿈이 무엇인가.☞ 부안의 절경을 그림으로 많이 남기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지내면서 좋은 작품을 많이 남기고, 그 작품들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일걸요. 또 와이프랑 전시회를 같이 여는 것입니다(그의 부인 강지우씨는 학교 과후배로, 수채화를 그린다). 그는 서울신문 기자인 점을 의식한 듯 “옛날에 서울신문 1층 갤러리에 자주 갔다”고 말했다. “그곳에서 개인전도 하고 단체전은 여러 번 했던 인연이 있다”며 “서울신문에 있던 미술관이 없어져 아쉽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홍성모는 누구 - 1961년 전북 부안 출생- 원광대 사범대 미술교육학과 졸업- 동국대 예술대학원 미술학과 졸업(석사)- 개인전 10차례-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역임- 성균관대 겸임교수 역임- 동국대·원광대 강가 역임 ●작품 대표적 소장처 - 한국은행 청주지점- 외교통상부- 국립현대미술관- 가천 길병원- 싱가포르 대사관- 부안군청 글·사진 이기철 선임기자 chuli@seoul.co.kr
  • [세종로의 아침] 팔불출/임병선 체육부 선임기자

    [세종로의 아침] 팔불출/임병선 체육부 선임기자

    기자도 늘 그러지 말아야지, 되뇌면서도 팔불출(八不出) 짓을 한다. 본디 출산 예정일을 다 채우지 못하고 세상에 나온 이를 가리키는 말에서 유래했는데 뒤에 ‘생각이 조금 모자라고 덜 찬 행동을 하는 이’를 지칭하는 말로 넓어졌다.예로부터 자신을 비롯해 아내, 자녀, 조상, 형제, 선배, 고향 자랑을 하는 일곱 유형을 팔불출로 꼽고 경계했다. 모자란 점을 도드라지게 하려고 일곱만 꼽았다는 믿기지 않는 얘기도 전해진다. 내세울 것 없는 기자는 술기운에 취해 세 번째 자랑을 곧잘 하는 바람에 다음날 일어나 아찔하고 낯이 화끈거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돌아보면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만큼 누구의 아들, 누구의 아비 얘기가 넘쳐난 국제종합대회가 또 없었다 싶다. 어느 감독은 두 아들을 국가대표로 뽑았다가 스스로 책임을 떠안았고, 지상파 방송조차 버젓이 자녀의 경기에 아빠가 마이크를 잡고 해설하게 했다. 대놓고 방송사가 그 점을 홍보 포인트로 내세우는 것을 보면서 세상 참 많이 달라졌구나, 느낀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기자처럼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를 모두 경험해 이쪽 저쪽 눈칫밥만 늘어난 이들은 한편으로는 그런 용기와 배짱이 부럽기도 하고, 속으로는 ‘저러면 안 되는데’ 싶지만 고루한 사람이란 핀잔도 듣기 싫어 국으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번 대회처럼 성적이나 결과가 좋으면 그저 웃고 넘어가고, 잘못되면 그것 보라고 사팔뜨기눈을 뜨고, 꼭 그렇지 않은 덤터기까지 씌우는 게 세상살이 이치다. 정말 가리고 삼가야 한다. 서울 강남의 어느 여고 교사처럼 쌍둥이 사랑이 지나치면 온 가족을 구렁텅이로 밀어넣는다. 그런데 세상에는 팔불출만 있는 게 아니다. 베트남의 축구 영웅으로 떠오른 박항서 감독은 세계사격선수권대회가 한창이던 창원국제사격장에 나타나 박충건 베트남 대표팀 감독을 비롯해 선수들에게 점심을 사 주고, 대회장 바깥에서 기념 촬영만 한 뒤 돌아갔다. 국내 언론에 과도하게 노출되는 것은 베트남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일주일 정도 매달린 대회 조직위원회를 뿌리치고 인터뷰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대회장 근처에 나타났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어 보시라. 손흥민을 세계적인 축구 스타로 길러 낸 손웅정씨가 언론에 나와 자식 자랑하는 장면이 뇌리에 있는지를. 그는 자랑할 것이 넘쳐나는 사람이다. 일찍이 팀과 전술을 우선시하는 학원체육 시스템의 문제점을 간파하고, 손흥민을 기본기와 공 다루기만 철저히 익히게 하고 큰물에 나가 놀게 만든 혜안과 결단력, 용기를 갖췄다. 오죽하면 미국의 어느 축구팬이 잉글랜드 프로축구 토트넘에 그를 코치로 영입하라고 촉구하는 글을 썼을까. 하지만 손씨가 앞에 나와 그렇게 자랑할 것이 많은 부자를 드러내는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손주 사진을 카톡 메시지로 보내오는 선배들이 있다. 다른 선배의 그런 행동을 힐난하던 선배가 정녕 자신의 손주는 귀여웠는지 구경 좀 하라고 사진을 보내온 일도 있었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함함하다고 한다는 속담이 있다. 팔불출인 기자도 이런 경구를 매일 아침 되새기며 경계하려 한다. 조심하고 또 조심할 일이다. bsnim@seoul.co.kr
  • 대중식당 찾은 文 “우리도 맛보러 왔어요”…평양 시민들도 식사 중 “와~” “만세” 화답

    대중식당 찾은 文 “우리도 맛보러 왔어요”…평양 시민들도 식사 중 “와~” “만세” 화답

    北주민과 직접 대화는 사상 처음 예정 없던 金위원장 부부도 참석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9일 평양 대동강수산물시장에서 시민들과 어울려 평양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함께했다. 남한 대통령이 북한 주민이 이용하는 일반 식당에 가서 직접 대화를 나눈 건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청와대는 정상회담에 앞서 평양에서의 한끼는 평양 시민들이 이용하는 식당에서 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북측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평양에서의 특별한 하룻밤이 마련됐다. 애초 만찬에는 문 대통령과 경제인 특별수행원만 함께할 예정이었으나 김 위원장이 뒤늦게 참석 의사를 밝혔다. 평양 시민들은 자신들의 생활 공간에 불쑥 찾아온 남북 정상을 신기한 듯 바라봤다. 문 대통령은 평양 시민들이 식사하는 자리를 돌며 인사를 나눴다. 문 대통령이 식사 중인 테이블을 찾아가 “어떻게 왔습니까”라고 묻자 40대로 보이는 평양 시민은 “3대가 함께 왔습니다”라고 답했고, 이에 문 대통령은 “좋은 시간 보내세요”라며 미소를 지었다. 식사 자리마다 찾아가 “음식 맛있습니까? 우리도 맛보러 왔습니다”라고 묻는 통에 김정숙 여사가 “이제 그만 가십시다”라며 문 대통령의 옷깃을 잡아 끌기도 했다. ‘서양료리식사실’에서 식사하던 북한 주민들은 문 대통령에게 기립 박수를 보냈다. 김 위원장은 문 대통령보다 조금 늦게 식당에 도착했다. 문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게 웃으며 “오늘 내가 너무 시간을 많이 뺏는 것 아닙니까”라고 고마운 마음을 표시했다. 평양 시민들은 식당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만세를 외치며 두 정상을 반겼다. 대동강구역 능라동에 위치한 대동강수산물시장은 지난 7월 30일 문을 연 북한을 대표하는 수산물 시장이다. 우리로 치면 노량진수산시장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크고 작은 연회룸을 갖춰 평양 시민이 가족 또는 직장 동료와의 회식 때 즐겨 찾는 곳으로 알려졌다. 앞서 점심 때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 내외는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에서 냉면, 자라탕, 잉어달래초장무침 등 12가지 음식으로 식사를 했다. 리설주 여사는 옆에 앉은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에게 “여기가 그 계기(판문점 회담)로 평양에서도 더 유명해졌다. 외부 손님들이 와서 계속 랭면 랭면 한다”며 “상품을 광고한들 이보다 더하겠냐”고 말했다. 유 교수는 “서울에서도 유명한 평양냉면집은 1시간 이상 기다려야 먹는다. 아주 붐이 일었다”고 화답했다. 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게 판문점 회담 기념 메달과 북·미 정상회담 주화 등 기념품도 전달했다. 평양공동취재단·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 제주도 올레! 가을에 올래?

    제주도 올레! 가을에 올래?

    걷기 좋은 계절, 제주 올레길은 가을에 흠뻑 젖는다. 도로 확장을 위해서라며 싹둑 잘라버린 비자림로 삼나무 숲길로 온 국민에게 분노를 샀다. 거센 개발 바람에 실려 제주의 자연은 신음한다. 아름다운 섬 제주의 속살을 보여 주는 올레야말로 제주가 지켜 나가야 할 게 무엇인지를 오롯이 보여 준다. 제주 올레의 가치와 소중함이 더 크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가을날, 터벅터벅 자연 속으로 빠져드는 2018 제주올레걷기축제가 11월 1~3일 제주올레 5코스, 6코스, 7코스에서 열린다. 2010년부터 매년 가을에 펼쳐져 하루 한 코스씩 걸으며 즐기는 이동형 축제다. 가을을 맞아 더욱 반짝이는 제주 자연과 어우러지는 공연, 제주의 독특한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 마을 주민들이 제주 식재료를 이용해 마음을 담아 마련한 제주 먹거리 등을 통해 제주 올레길을 한층 특별하게 경험할 수 있다. 국내외 도보여행자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시간이기도 하다.올레걷기축제는 1만여명의 도보여행자와 지역주민, 자원봉사자를 아우르는 길 위의 열린 잔치다. 이번엔 11월 1일 올레 5코스, 2일 6코스를 정방향으로, 3일 7코스를 역방향으로 걷는다. 개막식은 11월 1일 오전 9시 서귀포 남원포구에서 열린다. 1일차엔 남원포구를 출발해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산책로로 손꼽히는 큰엉 해안경승지를 지나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 펼쳐내는 에메랄드빛을 뽐내는 쇠소깍까지 걷는다. 제주 남쪽 바다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바당올레와 아늑한 마을올레를 지나는 총 13.4㎞로, 5~6시간이 소요된다. 2일차 6코스는 쇠소깍에서 출발해 섶섬과 보목포구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제지기오름, 전국에서 유일하게 바다 풍광을 즐길 수 있는 국궁장, 물맞이 명소로 알려진 소정방폭포 등 다채로운 자연 풍광과 더불어 이중섭 문화거리, 서귀포 매일올레시장 등 서귀포 시내 명소까지 포함된 볼거리, 즐길거리로 꽉 찼다. 총길이 12.2㎞로 4~5시간이 걸린다. 마지막 날엔 기존 7코스 종점인 월평 아왜낭목쉼터에서 시작해 7코스를 역방향으로 걷는다. 고즈넉한 골목길을 걷다가 만나는 서건도·두머니물 해안 구간은 제주올레 탐사팀이 일일이 손으로 돌을 고르는 작업 끝에 새로운 바닷길로 바꾸었다. 돌들이 검은 융단처럼 깔려 있다. 걷기 쉽지 않은 터벅함도 있지만 바당올레의 진면목을 품었다. 길은 법환포구를 지나 속골, 외돌개 전망대 등으로 이어지며 도착점인 칠십리시공원까지 걷는 내내 서귀포 바다 경치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총 17km로 6~7시간이 소요된다.올해 축제엔 ‘잘못된 길은 없다’를 대주제로 지치고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용기를,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는 이들에게는 응원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짰다. 또한 서귀포 시내를 관통해 지나는 만큼, 마을 주민뿐 아니라 제주지역 문화예술, 홍보 마케팅, 콘텐츠, 사회적 경제 등과 관련된 단체 및 기관과 협업해 다양하고 ‘함께 만들어가는 축제’로 꾸린다. 10월 10일까지 제주올레 홈페이지(www.jejuolle.org)를 통해 참가신청을 받는다. 사전 예약자에 한해 공식 기념품과 프로그램북, 기업 협찬품을 묶은 선물 꾸러미 등을 선물한다. 사전 참가 신청 참가비는 1인 2만원인데 20인 이상 단체, 어린이 및 청소년, 장애인은 1만 5000원이다. 자원봉사자도 10월 1일까지 모집한다. 이들에겐 숙식 및 자원봉사 확인증 등이 제공된다.제주 올레는 규슈올레(2012년 2월 개장), 몽골올레(2017년 6월 개장)에 이어 세 번째 해외 자매의 길인 ‘미야기올레’를 10월 7일 공식 개장한다. 글로벌 프로젝트 ‘자매의 길’은 해외에 올레 브랜드를 확장해 만드는 도보여행 코스다. 첫 자매의 길은 현재 일본 ‘규슈 올레’ 19개 코스로, 2012년 2월 개장 이후 33만명의 여행자를 맞았다. 올해 6월 문을 연 ‘몽골 올레’는 2개 코스다. 세 번째 자매의 길의 씨앗을 심는 곳은 일본 미야기현이다. 도쿄에서 약 300여㎞ 떨어진 곳으로 인천~센다이 노선 항공편이 매일 운항되는 일본 동북부 관문이다. 일본의 3대 절경인 마쓰시마(松島)와 알칼리 온천수로 미인 온천이라 불리는 나루코 온천, 천연 식물과 리아스식 해안으로 유명한 산리쿠국립공원 등이 있어 일본 내에서도 큰 인기를 끈다. 미야기 올레는 2011년 3월 동일본 대지진 이후 줄어든 외국인 여행객과 생채기를 입은 지역 공동체 회복을 위해 올레길을 내고 싶다는 미야기현의 제안으로 시작됐다. 미야기 올레는 10월 7일 게센누마 가라쿠와 코스(10㎞·3~4시간 소요), 8일에는 오쿠마쓰시마 코스(10㎞·3~4시간)가 개장된다. 이유미 제주올레 일본지사장은 “미야기현은 동일본 대지진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한국을 비롯한 국내외 여러 곳에서 많은 도움을 받아 회복 중이다. 미야기 올레는 제주올레의 정신 및 노하우를 건네받아, 지역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 알려 뜻깊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계기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했다. 제주올레는 미야기 올레길에 이어 인도네시아의 요청으로 롬복 지역에도 올레길을 만들기로 하고 인도네시아 관광개발공사와의 협의에 한창이다. 북한에도 제안해 개설을 꾀하고 있다. 이뤄지면 한라에서 백두를 잇는 한반도 장거리 도보여행길이 탄생, 세계적인 트레일로 발전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또 한반도 도보여행길엔 평화올레(Peace Olle)란 이름을 붙였다. 대규모 사회간접자본(SOC)을 포함한 인프라 구축 위주의 남북 협력사업이 아닌 한반도 생태여행 플랫폼을 구축하는 일로 남북한 주민이 올레길을 통해 소통하는 신개념 남북 협력사업으로 기대를 받는다. 올레 측은 이를 위해 평화올레 남북한 민간협력추진기구 구성을 추진할 생각이다. 남쪽 제주올레와 북쪽 마을협의체 등 남북한 민간단체가 손을 잡고 평화 올레길을 개설하겠다는 이야기다. 북한지역 올레길 우선 후보지로 비무장지대(DMZ)와 금강산, 개마고원, 백두산 일대를 손꼽고 있다. DMZ 올레길은 훼손되지 않은 천혜의 생태환경에다 한반도 평화를 상징할 수 있는 올레길이다. 금강산지역은 기존의 관광코스를 활용하면 금강 올레길 조성이 수월할 것으로 전망했다. 개마고원과 백두산 올레는 전 세계 도보여행객의 관심을 모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안은주 제주 올레 상임이사는 “평화올레 조성 사업은 뜻만 같이하면 이번 남북 정상회담 성과에 따라 당장 시작할 수 있고, 제주올레에서 보듯 올레길 골목 경제 활성화와 국제관광 유치에도 한몫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인터뷰 플러스] “의식주 해결만으로는 부족… 일자리·지역공동체 관심 가져야”

    [인터뷰 플러스] “의식주 해결만으로는 부족… 일자리·지역공동체 관심 가져야”

    35년 전 그곳에 노인과 장애인, 고아들이 모여들었다. 누구든 받아주는 스님에 대한 소문이 돌면서 100명 넘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경북 예천군 법흥사는 부처님과 사람들을 함께 모시는 절이었다. ‘사람다운 삶’을 지향하는 복지법인 예천연꽃마을은 그렇게 시작됐다. 예천연꽃마을은 지역민들을 비롯한 외부인들에게 개방적인 시설이다. ‘울타리를 만들지 말자’고 강조한 설립자 정안스님의 뜻을 이어 누구나 다가가고 함께할 수 있는 곳, 지역 공동체에 속한 시설을 만들어 왔다. 예천연꽃마을에 헌신하고 있는 서경석 이사장은 “시설 이용자들이 특별한 존재들이 아니라 지역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 이사장은 30년 교직 생활을 접고 1996년에 서울에서 예천에 내려가 이제까지 예천연꽃마을을 지켜왔다. 예천연꽃마을이 추구하는 가치와 복지시설의 현재를 그에게 직접 들었다. 편집자 주→예천연꽃마을을 이끌게 된 계기가 특별히 있으셨습니까. -저는 여기에 오기 전에 서울에서 고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어요. 교직에 있었는데 이 연꽃마을을 시작하신 스님이 정안스님이신데 사실 제가 그분 동생입니다. 복지법인을 만들려고 행정을 볼 사람을 찾아다녔는데 쉽지 않다면서 저를 3년 동안 설득하더라고요. 서울에서 학교 그만두고 내려와야 하니까 처음엔 전혀 엄두가 안 났습니다. 가족들 반대도 심했고, 그런데 와서 보니까… 정말 기가 막히더라고요.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았어요. 고민을 하다가 1996년 6월에 내려왔습니다. 결정하고 나서는 가족들 난리가 났죠. 애들 문제도 있었고. 결국 저 혼자만 내려왔어요. →당시 모습이 ‘기가 막혔다’고 하셨는데, 어떤 상황이었나요. -예천연꽃마을은 처음에 시설로 시작한 곳이 아니에요. 1984년에 달랑 법당(법흥사)밖에 없을 때 정안스님께서 할머니 두 분을 모시고 생활을 했던 거죠. 그러다가 고아 둘이 와서 식구가 늘었고요. 그렇게 생활을 하다 보니 소문이 난 겁니다. ‘법흥사 가면 스님이 다 받아준다더라’라고요. 여기저기서 오셔서 10여 명이 모여 살게 됐습니다. 법당을 반으로 나눠서 한쪽에 부처님 모시고, 한쪽은 생활공간으로 해서 쓰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시작하다 보니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겁니다. 전국에서 와서 어린아이를 문 앞에 버리고 가기도 하고, 장애인들도 모여들었어요. 복지시설이 잘 갖춰지지 않았던 시절이었잖아요. 건물도 없이 천막을 치면서 버티다가, 건물을 지어야겠다고 스님이 결심하고 전국을 다니면서 도움을 구했어요. 그렇게 1990년에 건물을 짓기 시작해서 1993년에 세워졌는데, 건물만 있다고 다 되는 게 아니잖아요. 인력 문제도 심각했고, 그로 인해서 생기는 문제들이 많이 있었죠. 그걸 보니까 법인 설립을 해서 국가 보조를 받는 것이 좋겠다고 저도 받아들이게 됐어요. 그래서 내려왔습니다. →처음에 그렇게 시작을 했다면 힘든 일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그때 아동이 30~40명 되고, 장애인이 약 40명 있었어요. 그 외에 분들이 어르신들이었죠. 다 같이 생활했습니다. 한 방에 10명씩 들어가고…. 건축할 때 쓰던 컨테이너 박스를 설치해서 방처럼 썼어요. 제가 내려오니까 스님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여기서는 네가 모든 걸 봉사한다고 생각해라.’ 그러면서 월급을 30만원 받았습니다. 재원이 많이 부족한 상황이었어요. 스님이 전국을 찾아다니시면서 재정을 충당하셨습니다. 저는 법인 설립 작업을 하면서 정부를 열심히 쫓아다녔고요. 그러다가 노인시설로 보조금을 받기 시작하고 지금까지 이렇게 왔습니다. →복지시설을 혐오시설로 보고 갈등이 생기는 문제들이 종종 있는데, 예천연꽃마을은 어떻습니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연꽃마을은 출발이 조금 달랐잖아요. 스님과 함께 사는 고아들, 장애인들, 어르신들이었던 거예요. 그냥 ‘절 식구’였던 거죠. 그러니까 지역에서도 시설 개념으로 보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스님께서 강조하시는 게 있어요. ‘울타리를 없애라’라는 겁니다. 시설처럼 가둬놓고 외부인과 접촉을 차단하는 방식의 복지는 시대에 맞지 않아요. 그렇게 개방하고 만나게 되니까 주민들이 불편하게 여기던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지역 공동체의 한 사람들로 서서히 받아들여지는 과정이었어요. 다른 시설에 비해서는 마찰이 적었습니다. →외부인들에게 개방적이라는 점이 인상 깊습니다. 꾸준히 그런 활동을 하고 계신 건가요. -가급적이면 저희 프로그램도 주민과 함께하는 방향으로 시행하고 있습니다. 외부에서 봉사도 많이 오시고요. 오시는 분들에게 연꽃마을에서 생활하는 어르신들, 장애인들과 공동체로 살아간다는 인식을 가지실 수 있도록 하고 있어요. 사람은 행위를 제한하려고 하면 나가서 사고치고 싶은 마음이 커지잖아요. 누구나 그럴 텐데, 저희는 처음부터 잡아두질 않으니까 그런 사고가 오히려 적은 것 같아요. 또 저희는 안에 있는 분들의 가족들이 오시면 시설 거실 안에서 쉬어갈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어요. 오히려 ‘보시고 우리가 부족한 점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라고 요청합니다. 우리끼리 잘한다고 해봐야 뭐가 나아지겠어요. 가족들이 보시고 지적해주셔야 개선이 되죠. 그리고 주민 사회에 자연스럽게 어울리기 위해서 5일장으로 열리는 장날엔 우리 시설 입주자들이 장터거리휴지 줍기 등 청소를 한 번도 빠짐 없이 15년 동안 시행해 왔어요.→지금도 많은 분이 연꽃마을에 들어오려고 하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현재 시설 상황은 어떤가요. -요청이 많은데 현재로는 제도적으로 막혀서 못 받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정부 정책상 장애인 시설은 소규모 시설을 지향하고 있어요. 그래서 30인 이상 시설은 설치 허가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결원이 생겨도 새로 받지 못하고 줄여나가야 하는 상황이라서, 63명 정원인 저희 장애인 시설에 54명만 있습니다. 노인 시설 같은 경우도 제도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장기요양보험제도가 생기기 전에는 지역에서 소외되고 가족 갈등으로 돌봄을 받을 수 없는 분들을 저희가 받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장기요양등급이라는 게 있어서 3등급 이상이 아니면 받을 수가 없습니다. 어르신들이 정말 사각지대에 놓여있어요. 저도 정부에 자주 얘기하는 부분인데 제도적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우리나라 복지 수준은 어느 정도 된다고 보시나요. -예전에 비해서는 정말 많이 좋아졌습니다. 제가 1996년에 왔을 때에 비하면 정말 긍정적인 방향으로 달라졌죠. 하지만 아직도 복지선진국으로 불리는 나라들에 비하면, 이제야 과도기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는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제도와 시설이 되려면 정부나 지자체, 국민들이 관심을 더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계신 복지 이슈는 무엇인가요. -장애인들의 일자리 창출이 정말 필요합니다. 시설에도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친구들이 더러 있어요. 특수학교 전공반까지 다 마치고, 직업교육도 받은 인력들입니다. 그런데 일자리가 없어요. 사람이 일하는 보람을 느끼는 것이 삶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 친구들이 내부 프로그램만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게 현실이에요. 저도 일자리를 창출하고자 여러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지역 농특산물과 연계해서 가공유통 산업을 지자체에 얘기하고 있는데 허가가 안 나요. 허가만 나면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는 건실한 회사도 있는데 우선 지역에서 허가가 안 나니까 움직일 수가 없죠. 이게 장애인들 일자리뿐 아니고 지역 주민들 일자리도 같이 창출이 되는 건데…. 우려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관리·감독을 그만큼 철저히 받을 수 있습니다. 이번에 군수님도 새로 오셨으니까 다시 추진해 볼 생각입니다. →복지시설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우리 사회에 제안하실 말씀이 있다면. -시대가 달라진 만큼 생각도 달라져야 합니다. 노인, 장애인, 아동 등 대상과 관계없이 시설의 역할을 다르게 생각해야 해요. 과거에는 시설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면 끝이라는 생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시대가 지났습니다. 정말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시설에서 역할을 해야 하는 시대입니다. 특히 인권에 더 민감해져야 할 필요가 있어요. 어떤 경우가 됐든 인권이 침해당하는 시설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일부에서 그런 문제가 있어서 자꾸 부정적인 측면이 보도가 되는데, 너무나 안타까워요. 시설 운영자들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지만, 시설에서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개방이 되어야 하고, 지역과 함께하는 시설로 발전해 가면 인권문제도 자연스럽게 없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태기 객원기자 jtk3355@seoul.co.kr
  • [인터뷰 플러스] “암흑 터널 같았던 인생길… 이제 LED로 밝히렵니다”

    [인터뷰 플러스] “암흑 터널 같았던 인생길… 이제 LED로 밝히렵니다”

    LED 터널 시선 유도등의 명가 ㈜진태명의 김명순 CEO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친환경 에너지의 중심인 LED 전문업체를 10년 넘게 이끌어오고 있는 여성 기업인이다. 그는 10년 전 가까운 인척이 투자하면 밥 먹고 살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해 100% 투자자로, 도와주겠다는 말 한마디에 참여하게 된 것이 지금은 경영자 겸 마케터(영업인)가 됐다. “아는 사람도 없는데 처음 영업을 하러 나서야 할 때는 마치 도살장에 죽으러 가는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당당하게 직접 영업 일선을 누비는 김명순 대표이다. 그렇다 보니 뭍은 세월의 날 수 만큼 생면부지의 시장에서 홀로 구르고 부딪치며 한걸음을 내딛고, 돌아서 속울음을 울고 또 한걸음을 떼고 하며 그가 오늘에 왔다. “부산에서 전남 광주로 또 강원도 양양을 거쳐 서울로… 전국 방방곡곡을 하루에 1000㎞ 넘게 뛰어다니기 일쑤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앉은뱅이가 되는 줄 알았다”며 “강원도 꼬부랑길을 넘어올 때 하늘에서 내리는 눈비가 마치 내 눈물 같기도 했다”고 회고할 즈음 김 대표의 눈가는 맺히는 이슬들로 반짝거렸다. 이에 본지는 지난 11일 경기도 성남에 자리한 ㈜진태명의 김 대표를 만나 그가 걸어온 인생 스토리를 인터뷰했다. 김 대표가 꿈과 희망을 안고 달려간 도로마다 사람 사랑의 LED 불빛이 반짝거리며 대한민국을 빛내고, 세계를 밝히길 기대해 본다. 편집자 주다음은 일문일답이다. →LED 업계의 여성 기업인이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아주 가까운 인척이 도와줄 테니 투자하면 밥 먹고 살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해서 100% 투자를 했습니다. 당시 캐츠아이안전㈜라고 우리나라에서 한참 잘 나가던 회사였습니다. 제가 여자로서 당시는 생면부지의 사업이었고, 저는 기술도 없고 물론 아무런 노하우도 없는 상태였죠. ‘도와주겠다’는 그 말에 의지했고, 또 ‘밥 먹고 살게 해 주겠다’는 그 말을 믿고 시작을 했는데요. 그게 제 발목을 잡아 버렸습니다. 분명 첫발은 100% 투자자였는데요. 막상 투자하고 보니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제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법인을 설립하게 됐는데, ㈜진태명입니다. →우여곡절이 많았다는 말씀이군요. -10년을 지내 오는 동안 사업공부, 인생 공부를 많이 한 거죠. 처음에는 의존할 수밖에 없어 그분들이 하는 말을 믿고 돈을 주고, 인맥까지 전부 다 주다시피 했습니다.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랐던 거죠. 믿음의 상처로 고통을 받은 다음에서야 ‘내가 직접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날고뛰는 사람들이 사장으로 앉아 있는 업계의 틈바구니에서 그 틈을 비집고, 벽을 넘자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내가 직접 나서야만 했습니다. 지금은 웬만한 사람이 뭐라 말해도 노하우가 쌓여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큰 고비들은 넘겼다고 해야 하나요. →그렇더라도 마케팅·영업에 직접 뛰어들기는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기술이 최고인 줄 알았습니다. 기술이 있으면 사업은 승승장구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팔아야 산다’로 바뀌었습니다. 내가 시장에 나가 영업할 수 있으면, 밥은 먹고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걸 안 다음부터 아침에 일어나면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며 1000㎞ 넘게 뛰어다니기 일쑤더라고요. 또 어느 날은 고속도로에서 운전대를 잡고 자고 있더라고요. 깜짝 놀랐죠. 밤낮이 없는 겁니다. 나는 왜 힘들게 살아야 하나 하고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나중에는 앉은뱅이가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때는 병원에 가서 누워 있을 시간마저 없었습니다. 그러면 내 목표를 이루고 죽어도 죽어야 하는데 하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소리 없는 속울음으로 가슴은 멍이 들어 찢어지는데도 저는 1000㎞를 놀러 다니는 듯이 다닌 겁니다. 지금은 부모님께 건강한 유전자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눈물이 감사로 바뀌셨군요. -네, 지금은 감사합니다. 전국을 운전하며 돌아다니다 보니 산봉우리들을 많이 봅니다. 그때 문득 ‘저 산봉우리에 오르려면 땀 흘려 올라가야 오를 수 있다, 저절로 올라가지는 게 아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른 한편으로 전국의 산천초목이 내 눈에 다 들어오는 풍경을 만나는데 그것을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마음도 들더라고요. 그때 내가 나를 원망했던 게 미안하게 되더라고요.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일석이조로다가 돈도 벌고 계절 따라 온갖 경치를 다 감상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그때 대표님을 지켜낸 원동력이라고 할까요. 힘은 무엇이었나요. -누군가 보이지는 않지만 나를 도와준다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루는 영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TV를 켰는데요. 경주 남산이란 곳이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너무 지쳤고 힘들 때였습니다. 그런데 몸 안에서 이상한 반응이 일어나는 겁니다. 경주 남산에 안 가면 마치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막 드는 겁니다. 그 당시 제가 스트레스를 너무 받다 보니까 발은 쩍쩍 갈라지고, 혈액순환은 안 되고. 억울한 일로 검찰과 경찰에 불려 다니던 그러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경주 남산에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다녀온 지 하루 만에 몸이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더라고요. 얼굴에 웃음이 감돌며 남에게 웃음을 주게 되더라고요. 몸과 마음이 모두 함께 바뀌었습니다. 경주 남산이 제게 웃음꽃을 주어 희망 꽃을 피우게 한 거죠. 제 눈에는 보이지 않는 분들이 나를 이끌며 돕고 있다는 새로운 믿음이 생겼습니다.→그렇다면, 앞으로의 꿈과 희망은 무엇인가요. -삶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봉사와 나눔의 삶을 사는 겁니다. 어떤 때 TV를 시청하다 보면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나오잖아요. 그러면 나도 모르게 전화기를 들어요. 그러면 ‘아~ 내가 후원하고 있지’하는 게 생각나 수화기를 놓습니다. 평소에도 길을 가다가 배고픈 사람들을 만나면 내어주는데, 그런 습관은 몸에 배었나 봐요. 한동안 독거노인을 찾아가서 계좌에 돈을 넣어주기도 했는데요. 앞으로는 체계 있는 복지로 돕고 싶어요. 제가 잘 아는 산악회가 있습니다. 그 산악회가 네팔의 히말라야 오지에 학교를 세워주는데 약간의 기금을 기부했습니다. 지진이 나서 학교가 무너졌다고 하더라고요. 내년 1월에 학교가 준공되는 때를 맞춰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참, 진태명의 제품은 어떻습니까. -회사의 대표적인 제품은 ‘LED 터널 시선 유도등’(특허 제10-1042187호)입니다. 운전자들이 터널 내 어두운 조도에서도 차로 폭의 시인성을 확보해 안전운전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먼저’인 제품으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이 제품은 각종 사고에서 안전한 대피를 유도함으로써 사고확대도 방지할 수 있습니다. 터널은 물론 지하차도, 지하주차장, 중앙분리대, 도로 경계석, 연석 등에도 다양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납품은 주로 한국도로공사와 지자체 등 관급입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국내 LED 시장규모는 지난해 7조4400억원을 기록한 데 이어 내년에는 1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업계는 전망하고 있습니다. 정부도 ‘스마트 LED 도로조명 제어시스템’을 2020년까지 구축할 계획이죠. 단순 조명의 기술개발 수준을 넘어 ‘사람이 먼저’인 기술을 적용하는 응용 분야로 산업 저변이 확대되는 추세입니다. 이에 발맞춰 ㈜진태명도 ‘국민 생활과 안전에 직결된 제품인 만큼 최고로 만들자’고 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자제이지만 가격경쟁력을 갖춘 최고의 제품 말이죠. 그렇다 보니 최근 들어서는 “견적서 보내 주세요” 하며 저희 진태명을 찾아주고 불러 주는 곳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서원호 객원기자 guil@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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