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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 낀 집
    2026-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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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가위 맞는 두가족의 명과 암

    전국이 한가위 명절분위기에 들뜨고 있다. 올해는 닷새동안의 황금연휴인데다 홍수가 들긴 했지만 풍년이 들어 추석기분이 한껏 높은 가운데 근반세기만에 고향에 돌아온 사할린 귀국교포들의 감회가 더 없이 깊은가 하면 65년만의 대홍수로 삶의 터전을 잃은 수재민들의 가슴은 아프기만 한다. 추석을 맞는 명과 암을 찾아봤다. ◎46년만에 가족과 명절잔치/사할린서 영주귀국한 밀양 정희찬옹/25살 일제때 징용… 7순 백발노인으로/조카ㆍ손자등 30명모여 웃음꽃 한마당 『사할린에 뜬 한가위달을 보면 어머니와 아내의 얼굴로만 보여 추석때마다 눈물이 났지』 2차대전 말기인 지난44년 일제의 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간뒤 46년만인 올해 영주 귀국한 정희찬할아버지(71ㆍ경남 밀양군 초동면 덕산리)는 추석을 사흘 앞둔 30일 반백년만에 다시 만난 아내 최분순할머니(70)에게 『고향의 추석이 진짜추석』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한집에 사는 동생 희판씨(62)도 덩달아 『아이들이 언제 도착한다고 했느냐』고 몇번씩 부인에게 되묻다 『멀리서 오는 아이들의 요기거리를 준비하라』고 다시 재촉하는 등 온집안이 명절분위기에 넘쳤다. 4살박이이던 큰딸 종수씨(50)가 한창 재롱을 부리고 작은딸 옥이씨(46)가 아직 아내의 뱃속에 있을때 정씨는 탄광부로 사할린에 끌려갔다. 혼인한지 7년만이었다. 그로부터 한 많은 세월이 흐른뒤 지난 3월13일 남편을 다시 만날때의 기억을 최할머니는 『쇠약해 보이는데다 보청기까지 낀 백발의 남편이었지만 다시보는 순간 지나간 세월의 고통이 모두 잊혀지더라』고 회상했다. 정할아버지는 사할린생활 1년만에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소련 당국에 의해 귀국이 금지돼 기다림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최할머니에게도 해방은 엄청난 기다림의 시작을 의미했다. 시아버지(지난80년 사망)와 시어머니(지난85년 사망)를 모시고 시동생과 시누이 세명의 뒷바라지를 해야하는 육체적 고통은 소식조차 알수 없는 남편을 끝없이 기다리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기다림에 지친 가족들은 지난83년 정할아버지의 사망신고까지 했다. 장손이면서도 아들이 없는 정할아버지의 대를 잇기위해 희판씨의 아들 종목씨(34)를 아들로 입적시키기도 했다. 어머니 조씨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이미죽은」 큰아들이 살아돌아오게 해달라며 매일밤 정화수를 떠놓고 큰며느리 최할머니와 함께 빌었다. 사할린에 발이 묶인 정할아버지는 55세에 정년퇴직을 하고 쓸쓸히 지내다 어느날 하루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어 고향집에 편지를 띄웠다. 그리고는 배달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부치고 또 부쳤다. 지난86년 마침내 소련땅에서 부친 편지 한통이 고향집에 날아들었고 최할머니는 평생 처음으로 펑펑 울고말았다. 그뒤로 어렵게 어렵게 서신연락이 이어졌고 지난 겨울 소련당국에서 초청장이 있는 한국인의 귀국을 허용하자 정할아버지는 가장 먼저 귀국신청을 낸끝에 이번 추석을 고향에서 맞게됐다. 소백산맥 줄기에 둘러싸여 요즘에도 하오5시도 못돼 해가 지는 장송마을 정할아버지 집은 추석날이 되면 두형제의 8자녀와 손자 등 30여명이 북적이는 한바탕 잔치가 벌어질 것이다. 이날하오 부산에서 올 아들과 창원에서 올 작은딸을 아침부터기다리던 정할아버지는 『좋은날일수록 더욱 죄스럽다』면서 낫을 들고 부모님의 산소가 있는 뒷동산으로 올라갔다. ◎“제사상도 못차리게 됐어요”/수해로 시름에 젖은 고양 최웅렬씨/물빠진 집 허물어져 학교강당서 생활/“노부모ㆍ자녀 추석선물은 꿈도 못꿔요” 경기도 고양군 지도읍 신평리 수재민 최웅렬씨(43)의 일곱가족에게는 올 추석처럼 괴로운 명절이 없다. 65년만의 대홍수로 한강둑이 무너지면서 보금자리인 집은 물론 삶의 터전인 논밭마저 모두 물에 잠긴 빈털털이가 돼 명절을 바로 쇨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모노릇은 커녕 자식구실도 제대로 하지 못해 가족들을 바라볼때마다 가슴이 미어져 온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맘때엔 풍성한 수확과 함께 노부모 최돌성(69)ㆍ박필순씨(65)에게는 속옷을 사드리고 어린아들 은철군(15ㆍ능곡중 2년)과 딸 은숙양(10ㆍ능곡국교 4년)에게도 예쁜 추석빔을 마련해주는 기쁨에 넘쳤었다. 딸 은숙양도 이같은 어른들의 아픔을 벌써 알아챘는지 추석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않고 오히려 가족들의 시름을 달래주려는 듯 재롱을 떨다가는 혼자 풀이 죽곤한다. 남들은 닷새씩이나 되는 추석연휴로 고향을 찾거나 가족여행을 떠난다는 등 명절 분위기에 들떠 있지만 최씨의 가족들은 오히려 「이산가족」 신세이기까지 하다. 최씨와 동생 웅석씨(35)는 곧 닥쳐올 겨울동안 지낼 비닐하우스를 짓느라 마을앞 둑기슭에 2인용 텐트를 치고 지내고 있다. 나머지 가족들은 이곳에서 3㎞쯤 떨어진 능곡국민학교의 대피소에서 추위에 떨며 새우잠을 자며 밤을 보내고 있다. 물에 잠겼던 집은 기둥이 뽑혀져나가고 벽도 헐어버려 도저히 살수가 없게 돼버린 때문이다. 부인 김정희씨(41)만 낮이면 집에 돌아와 남편 최씨의 일을 돕고 밤에는 노부모와 어린 남매들을 돌보기 위해 대피소로 돌아가고 있을 뿐 일곱식구가 함께 모인지는 벌써 보름이 지났다. 어려울 때일수록 함께 지내고 싶지만 학교의 대피소가 좁은데다 텐트속에 놔둔 쌀 20㎏짜리 2부대,조그만 장롱 1개,밥솥 1개,그릇 3∼4개 등 남아있는 가재도구라도 지켜야 하기에 이같은 이산가족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최씨는 동생과 함께 자기 논 5마지기와 남의 논 18마지기를 빌려 농사를 지어왔다. 비록 지난해 보다는 못하지만 그런대로 풍년인 셈이어서 한마지기에 8∼9가마는 능히 수확해내 1천2백만원의 수입을 올릴수 있으리라고 자신했었다. 이 돈으로 농촌출신이라는 이유로 이태껏 결혼을 못한 노총각인 동생 웅석씨를 올해에는 무슨일이 있어도 결혼시키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이웃 벽제에서 5대째 농사만 지어오다 27년전 이곳으로 옮겨 정착한 최씨로서는 이같은 소박한 꿈들이 모두 깨어진 마당에 가슴이 저며오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이곳이 일산신도시에 편입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더더욱 불안하다. 좌절을 이기고 내년에 다시 농사를 지어야 하는 그는 농사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토박이 농부이다. 『해마다 명절이면 벽제에 있는 친척들을 만나뵙고 선산의 묘소에 벌초도 해왔으나 올해는 그마저 못하게 됐다』는 최씨는 『조상님들도 후손들의 아픔을 이해해 주실 것』이라며 한숨지었다.
  • 대낮 가정집 인질 떼강도/고교생낀 4인조/경찰,공포쏴 모두 검거

    ◎병원에도 3인조강도 대낮 가정집에 바캉스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침입했던 고교생 2명이 낀 10대강도 4명이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20분동안 인질극을 벌이며 대치하다 모두 붙잡혔다. 31일 낮12시30분쯤 서울 관악구 봉천9동 유문선씨(34)의 2층집에 이모군(17ㆍD고교 3년)과 최모군(18ㆍY공고 3년) 등 10대 4명이 열려있는 대문으로 들어가 유씨의 부인 조현숙씨(33)와 3살ㆍ1살된 두아들을 위협,안방 장롱을 뒤졌다. 이때 1층에 세들어 사는 주부(29)가 이웃 봉천9동사무소에 달려가 강도신고를 했다. 신고를 받은 파출소직원 3명이 C3순찰차를 타고 출동,유씨집을 포위하고 자수할 것을 권유했으나 유씨가족을 인질로 삼고 반항하는 강도들을 권총으로 공포 5발을 쏘고 사과탄 1발을 터뜨려 모두 붙잡았다. 이들은 경찰에서 『날씨가 무더워 바캉스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또한 31일 하오8시쯤 서울 동대문구 제기2동 1152의12 안암치과(원장 임동욱ㆍ41)에 20대청년 3명이 들어가 환자를 치료하고 있던 이혜숙씨(24) 등 간호사 3명을 흉기로 위협하고 이들이 갖고 있던 현금 1백17만원을 빼앗아 달아났다. 이씨는 『이날 하오7시쯤 원장 임씨가 퇴근한뒤 병원정리를 하기 위해 남아 있던중 청년 3명이 「치료를 받을 수 있느냐」며 들어와 갑자기 흉기를 들이대고 돈을 빼앗았다』고 말했다.
  • 피켓도 함성도 없이 그러나 희망을 안고/민주자유당 창당대회를 보고

    나는 여의도를 「정치도」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그리고 「안개도」「연기도」라고 꼬집어 온 사람이다. 그곳 국회의사당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나로서는 툭하면 자욱한 안개가 끼는 그곳의 풍경처럼 잘 헤아려지지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정치감각이 둔하다는 얘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국회의사당만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여의도라는 곳이 자꾸만 정이 떨어지고 따라서 그곳을 가는 일이 거의 없다. 약속장소가 그곳이 되면 으레 비틀어 버린다. 병이라면 그것도 큰 병이다. 그러한 내가 2월9일 아침 그 안개지대엘 갔다. 그날 아침도 여의도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내가 그 내키지않는 곳엘 간 것은 그날 10시부터 중소기업회관에서 열리는 민주자유당 「합당수임기구 합동의회」라는 역사의 현장을 스케치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서울신문에서 내게 이 일을 맡기려할 때 나는 참으로 당황했었다. 정치감각이 둔한,아니 아예 그쪽을 감지할 수 있는 더듬이가 나에게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이 일을 떠맡게 되었다. 정치에 무식한 사람의눈으로 본 역사현장의 스케치도 어떤 면에서는 독자들에게 재미를 줄지도 모른다는 좀 뻔뻔스런 생각을 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현장을 찾게 되었다. 개회 20분전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과 귀를 「행사」쪽에 모았다. 과연 이곳에서 정치폭탄이 터질 것인가 싶도록 덤덤한 분위기였다. 회의에 참석하는 국회의원들도 서로 수인사를 나누는 정도였고 보도진들도 덤덤한 표정들이었다. 몇몇 기자들이 「내일부터 출입처가 어디냐?」는 농담을 주고 받을 뿐이었다. 10시 정각,대회장에 들어서니 사진기자들이 단상앞에 사다리를 늘어놓고 올라서서 플래시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룬 높은 벽 때문에 단상은 차단되었고 모습을 볼 수 없는 사회자가 성원보고를 했다. 1백11명중 1백6명이 참석했다며 개회를 선언했다. 이어 의장단이 선출되고 경과보고,합당결의,강령 및 기본정책의 채택,대국민 메시지 채택 등의 순으로 회의는 거침없이 진행되었고 최고위원들의 인사가 있은 뒤 만세 3창으로 회의는 끝났다.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회의가 끝났다기보다 「국민의 여망,시대의 요청에 의한 새로운 정당,민주자유당」이 출범한 것이다. 그제서야 사진기자들이 이루었던 담이 무너졌다. 회의는 그렇게 물흘러가듯 했으며 다른 정치집회에서처럼 그 흔한 피켓도 볼 수가 없었다. 야단스럽지 않은 분위기였으나 엄숙하기는 했다. 그 80여분 남짓한 동안 확성기를 통해 흘러나온 무수한 말들이 내게 묵자의 겸애편을 떠올려 주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국민을 안심시키고 국민에게 희망을 주며 나라를 밝은 내일로 이끈다」든지 「분열과 정치대결의 정치사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합당한 거대여당을 발족하게 됐다」는 등의 창당선언이나 경과보고때 나온 말들이 그것을 생각케 했다. 묵자는 일찍이 「천하의 이익을 일으키고 천하의 해를 제거하는 것이 인인의 임무」라고 말했다. 대국이 소국을 침공하고 큰 집이 작은 집을 어지럽히며 강자가 약자를 위협하고 다수가 소수에게 횡포하며 간사한 자가 어리석을 자를 속이고 귀한 자가 천민에게 오만한 것 따위가 천하의 해독인데 그런 여러가지 해독이 생기는 원인은남을 사랑하지 않고 남을 이롭게 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대회장의 마이크를 통해 내게 전달된 무수한 말들은 결국 그 밑 바탕에 이러한 묵자의 말들이 깔려 있었다고 느껴진 것이다. 분열과 대립의 정치사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노태우대통령과 김영삼 민주ㆍ김종필 공화당총재가 구상한 4당 구조의 과감한 타파도 결국은 『남을 그르다 하면서 별다른 대안이 없는 것은 불을 가지고 불을 끄자고 덤비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는 묵자의 얘기와 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어쨌든 대회가 끝났을 때의 여의도는 안개가 걷힌 상태였다. 마치 불투명한 정국을 해소하기 위한 합당을 상징하기라도 하는 듯이. 그러나 그 합당대회를 장식한 말들만으로는 내 머리속에 낀 「안개는 아직도」 였다. 그것은 여태까지 많은 정치인들의 입에서 나온 숱한 「좋은 말」들이 말의 성찬이었을 뿐 실행되어 온 사례를 별로 보지 못했기 때문일 터였다. 그러한 불신의 안개는 내게서만 걷히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상당수 국민들의 머리 속에서 안개는 아직도 걷히지 않았을 것으로 믿어졌다. 사실이 그렇다면 그 안개는 정치인들의 언행일치를 바라는 국민들의 소박하고도 간절한 소망에 다름 아닐 것이다. 창당대회가 끝난 뒤 나는 여러사람들과 「합당」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들 역시 나와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이날 저녁 6시,나는 삼성동 한국종합무역전시관 올림피아홀에서 열린 민주자유당 창당 축하연에 참석하게 되었다. 축하연에 초청받은 형식이었지만 실은 순전한 구경꾼이었다. 2천5백여명이 초청되었다는 그 자리에서도 나는 또 노태우대통령과 김영삼ㆍ김종필 두 최고위원의 얘기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창당대회장에서 들은 얘기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내용들이었지만 그 말들은 훨씬 부드럽고 훨씬 더 마음에 와 닿았다. 김지애 유열 최진희 등의 가수들이 들려준 감미로운 노래나 텔레비전 화면 혹은 신문ㆍ잡지 등으로 눈에 익은 얼굴들,군데군데서 만나게된 지기들 때문에 풀어진 마음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탤런트 이순재,성악가 박인수씨 등의 축시 「목련꽃」 낭독과 축가 「뱃노래」를 들은 뒤에 행해진 연설에서 거대여당 지도자들은 「10∼20년 뒤에 나라와 겨레를 살린 위대한 정치혁명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도록 굳게 단결하겠다」(김영삼)든지 「우리 당이 너무 커졌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결코 교만하지 않을 것」(김종필)이라든지,「흑백논리가 통하던 시대가 끝났으므로 이제 불안은 떨쳐버리자」(노태우)는 등의 얘기를 설득력있게 강조했다. 또 그것은 새로운 정치질서를 열기 위한 대연합의 주역다운 얘기들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 머리속의 안개는 아직도 말끔히 가셔지지 않았다. 나는 그 원인을 일단 내 협소한 시각 탓으로 돌리기로 했다. 편협한 시각,편협한 사고를 스스로 꾸짖으며 오래전 중공 당총서기 호요방이 일본의 야마자키 도요코와의 간담회에서 했다는 말을 생각했다. 『나라를 생각한다고 해도 그중에는 애국주의도 있으며 그 반대로 매국주의도 있고 또 오국주의도 있다. 40여년전 전쟁을 일으킨 일본인들은 비록 그것이 나라를 위해 한 일일지라도 그들을 애국자라고 할 수는없다. 그렇다고 매국주의자라고 할 수도 없지만 오국주의자임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사물을 협소하게 본 결과 저지를 수 있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애국 아니면 매국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국도 있으며 이 말은 지금 우리의 정치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소야대의 4당 체제로는 더 이상 과감한 개혁조치와 국운을 상승시켜 세계의 중심국가로 부상시킬 수 없어 정치적 안정을 도모키 위해 3당 통합으로 중심세력을 구축했다」는 것이 합당의 명분이다. 나 뿐만 아니라 많은 국민들이 그 말을 믿고 싶어 한다. 민정ㆍ민주ㆍ공화 3당의 통합이 삼발이와 같은 안정감을 우리들에게 안겨줄 것을 많은 국민들이 일단은 믿기로 할 것이다. 또 그 삼발이의 세 다리가 길고 짧음이 없이 튼튼하게 버텨 그 위에 얹은 「민주ㆍ번영ㆍ통일」을 굴러 떨어지지 않게 하기를 바랄 것이다. 그것이 말대로만 된다면 3당의 합당은 오늘의 우리 현실에 참으로 합당한 「정치혁명」이 아닐 수 없다. 두시간 남짓한 합당축하연이 끝나 귀가길에 오르며 나는 빌고 또 빌었다. 『여당이여,오국주의자가 되지 말라. 여당이여,오국주의자가 되지 말라. 그리고 우리 겨레여,오국주의자가 되지 말자! 하늘이시여,여당ㆍ야당 그리고 우리 한 겨레가 튼튼한 다리로 세계에서 가장 좋은 삼발이를 만들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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