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세종문화회관
    2026-05-02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6,051
  • “광복 70돌 숭고한 희생 기억” 전국 261개 기념 행사 풍성

    일제강점기 때 박상진(1884~1921) 선생은 양정의숙(1905년 설립된 사립 법학전문학교로 현 양정고 전신)을 거쳐 판사시험에 합격하고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1915년 대한광복회를 결성, 총사령에 올랐다. 만주에서 무장 독립운동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해외에서 무기를 사들여 일본인 고관과 한국 친일파들을 처단한다는 강령을 실천에 옮겼다. 1918년 체포돼 변호사 선임을 거부하고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됐다. 신현상(1905~1950) 의사는 1929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으로 임시정부 군자금 조달의 지령을 받고 국내로 잠입,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 미곡거래상을 포섭한 뒤 천안 호서은행 지점에서 5만 8000원을 강제 조달했다. 이후 중국으로 돌아가 베이징, 상하이 등 주요 지점을 순회하면서 독립운동가들에게 군사자금을 나눠 줬다. 1930년 3월 톈진 일본영사관을 습격하기 위해 무기를 구입하려다 미행하던 일본 경찰에 잡혀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공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광복 70돌을 기념하는 행사가 15일을 전후로 전국에서 261개나 마련된다. 참가 인원만 248만여명에 이른다. 울산시 문화예술회관에서는 14~15일 오후 7시 30분 박상진 의사의 일대기를 그린 창작 오페라가 무대 위에 오른다. 예산군 신례원초등학교에선 15일 오전 9시 신현상 선생 추모제가 열린다. 전북 고창군은 15일 오전 9시 아산면 공설묘지에서 김공삼(1865~1909) 의병장 추모 행사를 한다. 행정자치부는 15일 오전 10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우리 모두 대한민국’을 주제로 경축식을 개최한다. 독립유공자 및 유족, 주한외교단, 파독 근로자, 실향민 거주지인 강원 속초시 ‘아바이마을’ 주민 등 3000여명이 참석한다. 경축 공연 1막 ‘그날의 아침’은 1905년 을사늑약부터 광복 이전까지 우리 민족이 겪은 아픔을 그렸다. 2막 ‘위대한 여정’에서는 6·25전쟁에 따른 폐허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군 과정을 연출한다. 이어 3막 ‘새로운 도약’은 통일 대한민국을 실현하고 세계로 뻗어 나가는 모습을 담는다. 송한수 기자 onekor@seoul.co.kr
  • [문화마당] 어느 ‘트랜스포머 극장’의 앞날/정재왈 경희대 경영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문화마당] 어느 ‘트랜스포머 극장’의 앞날/정재왈 경희대 경영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

    우리나라 사람들은 언제부터 오늘날과 같은 실내극장에서 공연을 보기 시작했을까. 햇수로 치면 100년이 좀 넘었다. 1908년 이인직이 개설해 같은 해 11월 신극 ‘은세계’를 선보인 원각사(圓覺社)가 효시다. 지금의 서울 신문로 새문안교회와 금호아시아나빌딩 사이 골목 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연극학자들은 원각사를 ‘한국 최초의 근대식 극장’으로 본다. 외관이 선명한 사진 한 장과 극장 내부를 짐작할 수 있는 간략한 도면, 경험자들의 증언 등 객관적인 물증이 남아 있어 그런 평가가 가능했다. 극장은 글자 그대로 원통형의 몸통에 원뿔 지붕을 이고 있고 무대와 명확히 구분된 객석은 등급에 따라 입장료 차이를 두었다. 그런 객석이 500개 남짓이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나라의 극장 수는 얼마나 될까. 예술경영지원센터가 매년 실시하는 ‘공연예술실태조사’(2013년 기준)에 따르면 공연장 시설 수는 984개, 한 시설 내에 들어 있는 개별 극장들을 나눠서 합해 보니 극장 수는 1227개나 됐다. 1990년대 지방자치제 실시 이후 지역 극장 건립 붐이 일면서 공공극장 시대가 열리더니 근자에는 민간 극장이 늘어나는 추세다. 공공과 민간 극장 비율은 45대55로 민간이 약간 앞선다. 이와 같은 극장의 괄목할 만한 양적 성장 덕분에 한국의 공연예술은 그간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또한 전국 방방곡곡까지 이 ‘모세혈관’을 타고 공연예술이 확산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극장은 공연예술 유통의 중심이자 그것이 성립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한데 여기에도 맹점이 있다. 바로 1000여개의 극장 가운데 300석 이하 소극장은 논외로 하더라도 중·대형 극장의 거의 전부가 한 가지 형태의 극장이라는 점이다. 천편일률적이라는 말이 딱 맞다. 예술의전당이나 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 등과 같은 ‘사진틀 무대 극장’이다. 마치 사진틀처럼 생긴 ‘프로시니엄 아치’로 무대와 객석이 엄격히 분리돼 관객은 그 틀 속의 사진을 감상하듯 공연을 본다. 이 때문에 이런 무대 극장에서는 공연이 행해지는 무대와 객석의 깊은 교감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무대의 공연 양식도 사실주의 외에 획기적인 것을 포용하기 어렵다.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편식에 익숙해진 것이다. 극장이 애초에 그렇게 생긴 이상 그까짓 극장 하나를 맘대로 요리하지 못하냐고 연출가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오는 9월 4일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내 아시아예술극장이 문을 연다. 앞으로 전당 내 다섯 개 주요 공간 가운데 관객들과 수시로 만나야 하는 얼굴이다. 대극장에 해당하는 1120석의 ‘극장1’과 512석의 중극장 ‘극장2’로 구성됐다. 이 극장은 무대와 객석이 마치 트랜스포머처럼 자유자재로 변신이 가능한 ‘가변형 극장’이다. 예의 천편일률에 비춰 보면 신선한 파격이다. 미리 둘러본 사람들 사이에서 설계 부실 등을 지적하며 우려하는 목소리가 없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다소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관습적인 극장 디자인을 탈피한 것은 잘한 일이다. 특히 오늘날 화두인 융복합 예술의 생산과 확산을 지향하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의 임무를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극장은 마땅한 선택이다. 이 ‘트랜스포머 극장’을 좋은 연장으로 삼아 혁신적 예술을 만들어 내는 일은 이제 예술가와 관객의 몫이다.
  • 소프라노 ‘가수’ 조수미

    소프라노 ‘가수’ 조수미

    소프라노 조수미(53)는 성악뿐 아니라 팝 음악에도 일가견이 있다. 2000년 발매한 팝 앨범 ‘온리 러브’는 1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했고, 드라마 ‘명성황후’ 삽입곡 ‘나 가거든’은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명곡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무대에서 가요를 부른 적은 없었다. 조수미가 데뷔 후 처음으로 콘서트 무대에서 가요를 부른다. 이달 30일 경기 수원을 시작으로 의정부, 하남, 서울로 이어지는 ‘그리운 날의 기억’ 콘서트를 통해 조수미는 가요와 클래식을 넘나드는 특별한 무대를 선사한다. 내년 데뷔 30주년을 앞둔 그의 새로운 음악적 도전이다. 이번 공연에서는 ‘바람이 분다’(이소라), ‘옛사랑’(이문세), ‘인연’(이선희), ‘흩어진 나날들’(강수지) 등 가요 명곡들을 클래식 스타일로 편곡해 들려준다. 또 요한 스트라우스의 ‘봄의 소리 왈츠’와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아, 그대였던가’ 등 클래식 곡들도 함께 부른다. 특히 가요와 클래식을 1, 2부로 나누지 않고 교차하며 부른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조수미는 “인생의 흐름을 축약한 사계절의 흐름을 콘셉트로 잡고 이에 맞춰 선곡했다”면서 “가요 창법과 클래식 창법을 순식간에 넘나드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내 자신의 한계에 또 한번 도전해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수미는 이번 공연을 앞두고 데뷔 후 처음으로 머리를 짧게 자른 사진을 공개하며 변신을 예고했다. 뮤지컬배우 윤영석과 가수 소향,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과 박종성 등이 함께 무대에 오른다. 지휘자 최영선이 지휘봉을 잡고 과천시립교향악단이 풍성한 오케스트라 선율을 더한다. 30일 수원 SK아트리움 대공연장, 9월 4일 의정부예술의전당 대극장, 5일 하남문화예술회관 대극장, 11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5만∼15만원. 1544-1555.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국민대통합위원회(위원장 한광옥)는 12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통합 가치와 미래 비전’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13일까지 3부로 나눠 진행될 토론회 가운데 1부 토론회의 주제 발표를 맡은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와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의 주제문을 게재한다. 허동현 교수는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면서 “외교활동과 무장투쟁의 전략은 서로가 달랐지만 두 사람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면서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인가 대한민국 건국인가’를 주제로 발제한 이완범 교수는 “1945년 8월 15일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지 완전한 광복, 즉 주권 회복은 아니었다”면서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을 진정한 광복이자 건국의 날로 봐야 하며, 다만 남북이 갈라진 상태에서의 건국인 만큼 분단 정부의 수립-1948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병기하는 것이 분단 현실과 통일 지향의 의미를 함께 담는 균형적 역사 이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 수립’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Ⅰ. 21세기에 다시 보는 광복과 남북분단    1. 도둑처럼 찾아 온 광복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6시 하와이 진주만 북방 440㎞ 해상에 숨어든 아카기(赤城) 등 6척의 항공모함에서 183대의 함재기(艦載機)가 날아올랐다. “도-도-도.” 일본어 “도쓰케키(돌격)”의 첫음절을 딴 공격 신호와 함께 일본의 제로전투기와 폭격기 그리고 어뢰를 장전한 뇌격기들은 미태평양함대 주둔지인 하와이 진주만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기선 제압을 노린 일제의 진주만 기습은 잠자는 공룡의 꼬리를 밟아 깨운 자충수였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영광스러운 고립’을 내세우며 일본의 침략전쟁을 한 발 빼고 바라만 보는 중립국에 머물 수 없었다. “당신네들은 아직도 산불이 먼 곳의 일이라 생각하는가? 이래도 아직 한국인·만주인·중국인들에게 ‘일제와의 싸움은 우리 일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10달 전 이승만이 미국 뉴욕에서 간행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에서 미국의 참전을 촉구하며 올린 경종은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6개월 만에 판세가 뒤집혔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이후 남태평양의 섬들을 차례로 잃어가면서도 일제는 전쟁의 광기를 거두지 않았다. 1945년 3월 10일 새벽 B-29 슈퍼포트리스폭격기 344대가 도쿄의 하늘을 뒤덮었다. 글리세린과 기름을 섞어 만든 소이탄 2400톤이 마치 융단을 짜듯 퍼부어져 도시 전체가 거대한 화장로(火葬爐)였던 그날 10만이 넘는 생령(生靈)들이 잿더미로 사라졌다. 그러나 일제는 ‘본토결전’과 ‘1억 옥쇄(玉碎)’를 외치며 무모한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7월 17일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다음 날, 베를린 교외에 위치한 포츠담에 연합국의 세 거두인 트루먼, 처칠, 스탈린이 유럽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 했다. 나치 독일이 항복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회담이 열리지 않았던 이유는 미국이 핵무기라는 새로운 협상카드를 손에 쥘 때까지 시간을 버는 지연외교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핵무기를 확보해 태평양전쟁의 조기 종결에 자신감을 얻은 트루먼은 더 이상 소련의 참전에 목매지 않았다. 원폭에 의한 힘의 우위를 확보한 미국은 동북아 지역의 종전(終戰) 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우리는 오랜 실험 끝에 어떤 무기보다 파괴력이 큰 신무기를 만들었고, 일본이 즉시 항복하지 않으면 사용할 것이다.” 7월 24일 미·영·소 세 나라 수뇌의 공식회담 후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원폭 사용 계획을 통보했다. 26일 미·영·중 세 나라 수뇌들은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29일 일본이 최후통첩 격인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자 미국은 원폭 투하를 결정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리틀보이(Little Boy)와 팻맨(Fat Man) 두 발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을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 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민족시인 심훈이 1930년 3?1절을 맞아 몸부림치며 고대한 광복의 그 날은 15년 뒤 마치 도둑처럼 우리 곁에 다가왔다. 그러나 광복군이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직전 갑작스레 찾아 온 일제 패망이 김구는 안타까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다음 날인 10일 저녁 일제가 연합군에게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도 기뻐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본 천왕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의사를 밝히는 방송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이 땅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상처와 고통을 준 일제의 식민통치는 36년 만에 종언을 고했다.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 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그러나 희망 찬 기대와 달리 김구의 예상대로 일제 패망은 달콤하기보다 쓰디쓴 고통으로 다가왔다. 침략전쟁의 죗값으로 동서로 분단된 독일과 달리 일본이 아닌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마는 비극이 벌어졌다.    2. 38선은 누가 그었나?    1945년 8월 14일 미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빌미로 소련에 38도선 분할 점령을 제안했고, 다음날 스탈린은 이를 수락했다. 때문에 미국이 분단을 주도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과연 그럴까?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까닭은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참전 가능 시점으로 말한 8월 15일 전에 전쟁을 끝내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일제의 패망이 가시화되자 동북아지역에서 이권 확보가 무산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단 스탈린은 첫 번째 원폭이 투하된 지 하루 만인 7일 일본에 대한 공격명령에 황급히 서명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은 일본이 아닌 소련을 겨눈 것이었다”는 몰로토프 소련 외상의 말마따나, 원폭 투하는 유럽은 물론 동북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세 과시였다.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지기 하루 전인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소련군은 두만강을 건넌 반면 미군은 1천 Km 남쪽 오키나와에 있었다. 스탈린은 당시 마음만 먹으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궁여지책에 불과한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스탈린에게 38도선이남 한반도 반쪽보다 중요했던 것은 소련의 극동함대가 태평양으로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는 소야(宗谷, La Perouse)해협을 확보할 수 있는 홋카이도 북부에 대한 통치권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한 달도 못돼 9월 12일에 열린 전승국 외무상들이 ‘전리품’ 처리를 위해 모였던 런던 외상회의에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일본 항복에 공헌한 바 없는 소련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이에 분격한 스탈린은 9월 20일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으며, 이듬해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퇴한 중국 공산당군에게 북한을 반격을 위한 후방기지로 제공하였다. 북한이 중국내전의 연장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이 되자 남북분단은 마침표를 찍었다.  통념과 달리 분단의 주도자는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누가 분단을 주도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련이 남한과 홋카이도 반쪽을 교환하려 했던 사실과 미국이 중국이 공산화되자 극동방위선에서 남한을 제외했던 애치슨라인이 명증하듯,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이 벌인 바둑판에서 한반도는 대마를 잡기위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사석(捨石)이었다는 점이 38도선 분할의 아픈 역사를 우리가 곱씹어야 할 이유이다.    3. 남북협상은 이루어질 수 있었나?    이처럼 이승만(10월 16일)과 김구(11월 23일)가 귀국하기 전인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내림으로써 남북의 분단은 이미 결정되고 말았다. 그해 12월 한반도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전해지자 김구와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모태로 한 반탁운동의 선봉에 함께 나섰다. 반공?반소?반탁 노선을 함께 취한 두 사람은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정읍선언을 내면서 갈라섰다. 이후 김구는 단정 반대노선을 걸었으며, 5·10 총선거를 코앞에 둔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連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38도선을 넘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그가 김일성에게 보낸 2월 16일자 서한에서 제안했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정치지도자 간의 정치협상’, 즉 책임 있는 당국자끼리 머리를 맞대고 현안을 논의하는 구수(鳩首)회담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5년 말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우익탄압, 이듬해 6월 폴란드공산당의 국민투표 결과조작, 그리고 1947년 8월 20%밖에 득표하지 못한 공산당이 소련군의 비호 하에 정권을 강탈한 헝가리 사태를 고려해 볼 때, 당시 남북협상은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에 이용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조국은 지금 독립의 길이냐, 예속의 길이냐, 통일의 길이냐, 분열의 길이냐 하는 분수령의 절정에 서있다. 우리의 지표와 진로는 가능·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가위(可爲)·불가위의 당위론인 것이니 올바른 길일진대 사력을 다하여 진군할 뿐일 것이다.” 북행 하루 전날 나온 문화인 108인의 지지성명처럼, 김구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민족통일의 대의를 위해 북으로 갔을 수 있다. “공산주의나 여하한 주의를 가진 것을 불문하고 외각(外殼)을 벗기면 동일한 피와 언어와 조상과 풍속을 가진 조선민족이다.” 북행 4일 전 연설의 한 대목이 잘 말해주듯이, 그는 남북협상의 성공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민족은 주의를 초월한다”는 소박한 신념과 임정시절 중국에서 좌우연합전선을 결성한 경험이 그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결의문은 ‘채택’되어 있었다. 4월 23일에 나온 결의문은 “연석회의 개최와 관련해서 김일성에게 충고를 제공할 데 대하여”라는 4월 12일자 스탈린의 지령을 토씨까지 그대로 베꼈다. 4월 28일과 29일에 열린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김 회담’과 30일에 나온 ‘남북조선 제정당 및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도 구속력 없는 휴지조각과 다름없었다. 그의 구상이 성공하려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자주적 결정권이 있어야 했지만, 당시 북한은 사실상 소련 군정 치하였고 공산진영의 황제였던 스탈린의 지령은 불가침의 성헌(成憲)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노력은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지만, 김구의 북행으로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한 소련의 정치공작은 성공한 반면 대한민국 건국사는 큰 상처를 입었다.    Ⅱ. 대한민국 건국과 국제적 승인     1. 이승만이 주도한 UN을 통한 대한민국 건국 전략    새로운 사료의 발굴은 통념을 바꾼다. 종래 수정주의 사가(史家)들은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한국을 분단했고, 이승만은 정권욕에 눈이 멀어 미국의 반공보루 구축을 위한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선 주구(走狗)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즉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으며 분단 고착화의 책임은 미국과 이승만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의 장막에 갇혀 있던 소련의 문서고가 열리고 냉전시기 미국의 극비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기존 해석은 무너져 내렸다.  1946년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터지자 소련은 자국의 안보와 직결된 만주 장악을 위해 북한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소련과 달리 미국에게 있어 남한의 전략적 가치는 미지수였다. 한반도를 중국대륙에 부수된 지역으로 본 미국의 전략가들은 중국 패권의 향배가 가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반도만을 고려한 전략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내전의 승패가 안개 속에 쌓여 있던 1947년 초까지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현상유지에 초점을 맞춘 ‘관망(Wait-and-See)정책’이었다. 그해 3월에 나온 ‘트루먼 닥트린(Truman Doctrine)’은 유럽에서의 소련 팽창을 저지하는 ‘봉쇄(Containment)정책’이었지 한반도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온 4월, 패터슨(Robert P. Paterson) 육군장관은 미국이 “한반도에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아 미군 철수를 주장했으며, 합참본부의 전략조사위원회도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단정했다.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선포한 5월 이후 미국은 모든 재원을 유럽에 퍼부었으며,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 한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경비를 삭감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지 4개월 뒤인 1947년 9월, 미 국무부는 소련의 동시철병 제의를 받아들여 미군 철수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결정했는데, 이는 미국이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한국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는 신호였다. 당시 미국 수뇌부는 남한이 공산화되어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결론 때문이었다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 달 뒤인 1946년 6월 3일 정읍선언에서 미국보다 먼저 남한에 정부를 수립한 후 세계 공론에 호소해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제안했으며, 그해 12월 미국 방문 시에는 유엔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을 호소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전략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한다”는 공식입장을 미국이 폐기하고 유엔을 통한 한국문제 해결로 정책을 바꾼 1947년 9월 보다 앞선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화를 궁극적으로 이끌어 낸 주도자였다.  한국문제 해결이 유엔에 이관됨에 따라 1947년 11월 14일 유엔 소총회는 미국이 제출한 유엔 주관 하의 남북한 동시선거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에 따라 남북한에서 실시될 선거 감시를 목적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입국한 1948년 1월,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큰 시련에 봉착했다. “한국문제는 한국 사람들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며 5·10선거의 연기를 요구한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대표들에게 영향을 주어 유엔의 총선거 결정이 백지화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을 만나 남북 통일선거가 불가능할 경우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동의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의 결실로 한위 대표들은 마음을 바꿨으며, 유엔 소총회는 2월 26일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 결의안을 다시 채택했다. 마침내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5월 10일 총선에서 선출된 198명의 제헌의원이 만든 헌법이 7월 17일에 공포되었으며, 8월 15일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이 김구 등의 5·10선거 연기요구를 반대한 이유는 권력욕에 눈멀어서가 아니었다. 1946년 3월 북한은 한 달 전 소련의 지령으로 세워진 임시인민위원회 주도로 소위 “무상몰수·무상배분”의 토지개혁을 실시해 공산화의 물적 토대를 닥아 놓았으며, 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이 창군되고 이틀 뒤에는 ‘조선임시헌법 초안’이 발표된 상황이었다. 이처럼 북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준비가 끝나고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고해졌으며 미군철군은 이미 결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에도 미국의 정책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1948년 12월 국무부 극동국이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철병을 재고 의견을 내 놓았지만, 그 시기를 일시 연기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1948년 10월 21자 뉴욕 타임즈가 “서울의 미국 관리들은 대한민국이 이제 완전붕괴 직전에 도달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할 정도로 당시 남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이승만은 미군 철병 연기를 요청하는 한편,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2. 장면 수석대표가 이끈 건국외교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나    대한민국 건국이 공식 공표되기 나흘 전인 8월 11일 이승만 대통령이 제헌국회의 외교통 의원이었던 장면(張勉)을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임명할 만큼 국제적 승인은 시급한 문제였다. 당시 소련 중심의 공산국 블록과 영연방측은 대한민국의 승인을 반대하고 있었으며, 바티칸만이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했을 뿐 미국조차도 승인을 미루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장면이 이끈 대표단이 넘어야 할 장애는 산 넘어 산이었다. 첫째, 대표단은 초청안이 가결된 12월 7일 이전에는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교섭 상대국 대표들을 공적으로 만나 외교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둘째,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와 그 진압을 위해 파견될 예정이었던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 등 남로당의 파괴공작으로 인한 불안정한 국내 정국과 국론 분열도 심각했다. 셋째, 대한민국 승인 결의안이 회기 최종기한인 12월 11일의 닷새 전인 12월 6일에야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에서 토의를 시작할 만큼 소련과 그 위성국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넷째, 당시 호주와 인도 등 영연방 국가들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한국문제는 미·소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아랍권 국가들도 이스라엘 독립문제로 인해 미국이 지원하는 대한민국 승인을 반기지 않았다.  우리 대표단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으므로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대표단은 첩첩산중의 장애를 뚫었고, 그 결과 12월 12일 총회 마지막 날 대한민국은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였다. 어떻게 승인을 얻어냈을까? 먼저 대표단의 적절한 구성을 꼽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는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며, 한국문제에 이견을 보였던 유엔한국위원단의 캐나다나 인도 대표도 반대하지 않을 장면을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전개된 막후 외교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국제 외교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던 교황 비오 12세는 유엔총회에 참석한 한국대표단에 대한 지원을 바티칸의 국무장관 몬트니(Giovanni Battista Montini)대주교와 재불 교황청 대표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대주교에게 명령하는 등 외교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장면은 혜화동 본당 신부로 당시 파리에 와 있던 생제(Singer) 신부와 함께 파리 근처 성지 참배여행 도중 우연히 만난 오브라이언(O‘brien) 부주교의 도움으로 호주대표단의 한국문제 담당자 플린스컷트(Jim Plinscott)를 만나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처럼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내려 한 이승만의 전략이 주효해 바티칸은 대한민국 승인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  또한 미국 특히 덜레스(John Foster Dulles)의 전폭적 지원활동도 중요했다. 장면은 후일 그를 “대한민국의 건국과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서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동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아 찬연한 공훈을 세움으로써 우리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거룩한 은인”으로 회고할 정도였다. 그는 유엔 총회 막전막후에서 유엔의 승인을 얻을 수 있도록 외교 전략을 조언하는 한편 거수로 찬반을 표시하게 할 만큼 12월 12일 총회에서 승인 과정을 진두지휘하였다.  한 마디로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에는 냉전체제 하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과 바티칸의 도움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이 두 지원세력의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견인차는 이승만이 구사한 외교 전략과 장면 등 유엔총회 파견 대표단의 헌신적 노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장면은 이 문서에 관한 일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덜레스씨는 조금도 피로해 하지 않고 솔선하여 각국대표를 깨우쳐 협조를 요청하기에 바빴으며 드디어 의장이 표결을 선언하자 몸소 일어나서 ‘한국문제는 중요한 것이므로 거수가결을 하지 말고 각국대표를 호명하여 가부를 하나씩 듣기로 하자’고 주장하여 그대로 되니까 종이를 앞에 펴놓고 각국 대표의 ‘예스’ ‘노’를 일일이 적었으며 48대 6의 다수로 가결이 선포되자 덜레스씨는 그 기록에 사인을 해가지고 와서 그것을 나에게 주며 ‘이것을 한국독립 승인의 기념품으로 드리며 축하합니다’고 하면서 자신도 무척 기뻐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기록을 지금도 꺼내보고 다시금 그 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3.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기억해야 할 이유    한 나라가 국민국가인지 여부는 자국민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19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 결과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그해 12월 12일 제 3차 유엔총회에서 회원국 58개국 중 48개국의 찬성으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우리는 한 세기 전 서구열강들이 국민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망국(亡國), 임시정부가 펼쳤던 승인외교의 실패, 그리고 광복 후 연합국의 신탁통치 계획에 비춰볼 때,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또한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더불어 유엔한국위원단을 재 파송해 통일국가 건설에 힘쓸 것을 약속한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 5?10총선 결과 폐기와 유엔한국위원단 해체를 주장한 소련측 결의안이 48개국의 반대로 부결되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시 총회에서 표결된 미국측 결의안과 소련측 결의안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측 결의안은 “1) 유엔은 대한민국의 위상과 권위를 국내외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 한국에서 유엔의 후원 하에 행해진 일에 합법성을 보장할 것, 2) 유엔은 가능한 한 조속히 철군을 감시함으로서 신정부로 하여금 전시 군사점령을 종결시킬 수 있도록 위원단을 존속시킬 것, 3) 유엔위원단은 한국민으로 하여금 재통일하고 경제적 혼란과 내란의 위협을 종식시킬 수 있도록 지원할 것” 등 이었으며, 소련측 결의안은 “유엔임시위원단의 폐지, 한국을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로 재건하는 새로운 수단 마련, 그리고 남한 선거결과의 폐기 등”이었다. 한국독립결의안이 통과된 뒤 표결에 부쳐진 소련측 결의안은 찬반 6대 48,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들어선 두 개의 국가가 유엔에서 벌인 인정(認定)투쟁에서 대한민국이 쟁취한 국제적 승인은 1950년 6·25전쟁 때 유엔군 파병의 근거가 되어 북한의 침략에서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Ⅲ. 건국의 아버지들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 광복 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서구가 300년 걸려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불과 60년 만에 따라잡은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긍하는 이들에게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이승만은 그 업적을 기려야 마땅한 ‘건국의 아버지’로 다가선다. 그러나 김구는 냉전체제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 소련의 기만전술에 말려들고만 ‘시대착오적 정치가’로 비칠 뿐이다. 반면 민족을 단위로 한 통일국가의 완성만이 살길이라 믿는 이들에게 김구는 그 당위성을 일깨우는 상징인물로 우뚝 선지만, 이승만은 ‘분단의 고착화’를 초래한 ‘역사의 죄인’이자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자로 비칠 뿐이다.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의 편차는 우리 시민사회의 정체성에 난 균열과 골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갈가리 찢긴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줄 묘안은 없을까? 우리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前文)의 정신을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가 채택한 민주공화국의 국가형태와 삼권분립 정신에 기초한 임시헌법이 오늘 우리가 지키고자하는 정치체제의 시원임을 말이다. 또한 1941년 6월 김구가 이승만을 임정을 대표하는 주미외교위원장 겸 주미 전권대표로 임명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외교활동과 무장투쟁 독립운동 전략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그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라는 자기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냐 ‘대한민국 건국이냐’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    I. 1945년 8월 15일: 해방인가 광복인가?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70년 전의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공식 호칭하며 북에서는 ‘조국해방기념일’이라 부른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 8·15를 북에서는 해방 남에서는 광복이라고 칭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남북 모두 두 용어를 쓰고 있다. 단 북한에서는 광복이라는 말 앞에 조국이라는 용어를 첨가하여 광복보다는 ‘조국광복’이라는 합성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1945년을 조국광복의 해로 공식 호칭하고 있으며 8월 15일을 ‘조국광복의 날’이라고도 규정한다. 또한 1945년 당시에는 남·북·좌·우 모두 해방이라고 불렀다. 1946년과 1947년 8-15는 좌우 모두 해방1주년, 해방2주년이라고 기념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은 1949년 10월 1일 법률 제53호 “국경일에관한법률” 2조에 ‘광복절 8월 15일’이라고 명기해 광복절을 국경일의 하나로 제정했다. 그런데 이 법안의 ‘신규제정 이유’에는 ‘獨立記念日’로 되어 있어 그 날이 1945년 8월 15일인지 아니면 1948년 8월 15일인지 명확하지 않다. 1949년 9월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초안에는 8·15가 ‘독립기념일’이라고 적혀있었는데 광복절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정부가 작성해 1949년 6월 2일 국회로 회부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안”에는 독립기념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9년 9월 제5회 임시국회의 법제사법위원회(위원장 백관수)에서 ‘광복절’로 수정된 안을 마련했다. 이 안은 9월 22일 본회의에 상정되어 재석 108명에 가 81표 부 4표로 확정되었다. 당시 법제사법위원회는 헌법기념일과 독립기념일을 제헌절과 광복절로 고치자고 주장해 관철시켰으며, 본회의에서 의원들은 독립이냐 광복이냐의 의미를 논하기보다는 日, 節, 날과 같은 어미·자구에 집착했으며 3·1절, 개천절과 같이 ‘절’자를 집어넣어 통일시키면서 제헌절, 광복절이라는 조금 더 간결한 명칭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당시 속기록을 검토했던 김효선 선생은 당시 제헌의원들이 1945년 해방이 아니라 1948년 8·15를 광복절로 간주했었다고 주장했다.  1945년 8·15가 아니라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의 견해는 다음 단락에서 상술하고자 한다.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운영하는 웹 사이트(www.korea.net)에서는 광복절을 Liberation Day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광복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번역은 직역인 restoration이 아니라 해방의 번역어인 liberation이다. 그런데 국가보훈처 산하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주최한 광복60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주제: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과 한국독립운동)에서는 광복60년을 the 60th Anniversary of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로 번역했다. 이렇듯 정부부처 사이에서도 혼선이 있다.  한편 2005년 네이버영어사전에서는 광복절(光復節)을 ‘Independence Day of Korea’라고 번역하다가, 2015년에는 ‘National Liberation Day’로 바뀌어 있다.  따라서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으며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기념일은 독립기념일이다(미국과는 달리 우리의 경우 식민지 이전에 독립국이 존재했으므로 독립이라는 표현 보다 광복이 더 타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진보적 학자들은 독립운동이라는 용어보다 ‘민족해방운동’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이렇듯 해방이 다소 진보적인 어감을 가진 것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광복은 국권상실 상태로부터의 회복을 의미하여 복고적이며 자강운동적-계몽운동적 지향이 보인다고 진보적 학자들은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진보진영의 한홍구 교수는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광복이 호소력이 있었지만 좀 복고적인 냄새가 난다는 의미에서 진보적인 사람들은 해방을 선호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두 용어 사용자에 이데올로기적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두 용어를 혼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해방은 “식민 상태 등 압제로부터 풀린다”는 뜻이다. “연합국이 한국을 일제로부터 해방했다”거나 “한국은 1945년 해방되었다”는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합국이 주체가 된 표현이다. 또한 “노예(상태)를 해방”한다는 기분 좋지 않은 어감을 연상시킨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다소 수동적·피동적인 표현이다.  이에 비해 광복은 주체적인 표현이다. 광복의 본 뜻은 빛나게 회복하다, 힘이 줄어들거나 기울어진 것을 이전상태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사전적으로 보면 “빼앗긴(잃었던) 주권(국권; 빛)을 도로 찾는 것”을 의미한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등 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광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역에서 ?은 ‘원래 자리로 오는 것’을 의미하는데 원상태로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광복은 ‘빛나는 되돌림’ 혹은 ‘빛을 되돌리는 상태(주권 회복)’를 뜻한다. 그런데 광복은 일제가 우리를 병탄하기 이전의 광명한[밝은] 역사를 회복한다는 과거 지향적이며 복고적[보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광복은 한마디로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장준하가 1956년 『사상계』에 문제제기한 바에 따르면 1945년은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의 계기였다는 것이다.  광복의 주체는 우리이며, 연합국이 우리를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시켰으므로 해방의 주체는 연합국이며 우리는 객체이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피동적인 용어이며 광복은 주체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이다. 또한 광복은 이전 시기 주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는데 비해 해방은 이전에 주권국가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는 용어이다. 복고적이라는 뉘앙스만 없다면 광복이 주체적이면서도 식민지 이전의 독립국가의 존재도 부각시킬 수 있는 말이므로 피동적인 해방보다도 좋은 어감의 용어이다. 그런데 ‘과연 1945년 8·15에 주권을 찾았을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이 날은 단순한 해방절이며, 광복은 1948년 8·15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주장이 가능한데 단락을 나누어 상술하고자 한다.    II.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설: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 1948년 광복    ‘광복’을 ‘주권(국권) 회복’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입각하면 해방보다는 ‘독립’이라는 용어와 그 의미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술한 ‘국경일에관한법률’ 제정이유에도 광복절이 독립기념일로 나오므로 광복을 독립과 등치시킬 근거가 있다. 이러한 등치론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에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독립을 성취한 것은 아니므로 얄타회담에 임했던 영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한반도를 해방은 시켜줄 수 있지만 독립은 시켜줄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러한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은 얄타회담 이틀째인 1945년 1월 31일자로 올라온 토인비(Arnold J. Toynbee)의 보고서였다. 훗날 위대한 역사학자로 평가받은 그는 당시 옥스퍼드대를 졸업하고 영국 외무부 조사국의 중진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얄타회담을 위해 준비한 정책보고서 “한국의 독립 능력: 그 역사적 배경(Korea’s Capacity for Independence: Historical Background)”에서 “한국은 독립할 수 없는 나라”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처칠은 회담장에서 그 보고서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1945년 광복을 해방으로 바꿔 써야 한다는 것이다. 주권을 찾는다는 견지에서 보면 1945년에는 국권(주권)이 미국과 소련에게 있었고, 힐드링 (Hilldring) 미국 국무부차관보는 1947년 3월 한국인들의 참담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제 일본인들은 떠났다. 그러나 한 통치자가 떠난 자리에 한국인들은 두 통치자들을 가지게 되었다. 설상가상 그들은 ‘두 개의 밀폐된 구획’(two hermetically sealed compartments)으로 국가를 분단시켰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제 치하에서보다 훨씬 못 살게 되었다고 느낀다. 식량 가격은 오르고 양은 줄어든다. 한국인들은 우리 미국인들이 떠나기를 요구하고 자신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정하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당시 한국인들 중 분단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미국의 정책 담당자조차 이런 고통을 인정했던 것이다. 한국인들 중 일부는 미군정에서의 생활이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의 삶만큼 비참하다고 느꼈으며 좌익들은 더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채만식은 1948년 소설 “낙조”를 통해 한반도는 외국 군대 아래서 허울뿐인 독립을 이루었다며 38선 이남을 미국의 보호령으로 간주했다. 박노갑은 1948년 소설 “사십년”에서 미군정은 일본 식민통치의 대체물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맥락에서 1945년 해방은 모두가 기뻐만할 일은 아니었으며 단지 지배자의 교체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1948년에야 찾았으므로 광복은 1948년 8월 15일이라는 주장이며 이는 현재까지는 소수설이다.  먼저 김효선 선생은 광복의 사전적 정의가 ‘주권회복’이므로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고 주장했다. 광복절의 정확한 의미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 아니라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 국권을 회복한 날’이라는 것이다. 1945년 8·15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일뿐 통치권이 미군정으로 넘어갔으므로 ‘광복의 날’이 아니며 ‘독립의 날’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반면 1948년 8·15는 ‘광복의 날’이자 ‘국권회복의 날,’ ‘독립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1945년 8·15에 우리 민족이 주권을 회복했다거나 독립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또한 2015년 1월 ‘KBS공영노동조합’(기존 노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임)도 김효선 선생의 주장에 의거해 1948년을 광복절의 기산으로 잡아야 한다고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광복절이 1948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이 아닌 1945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잘못 인식되게 된 것은 전쟁 와중인 1951년 8월 15일에 있었던 제3회 광복절 기념식부터였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기념사의 제목을 ‘기념사(제3회 광복절을 맞이하여)’로 명기하여, 『대통령이승만박사담화집』에 나와 있는 1950년 “기념사(제2회광복절을맞이하여)도 같은 맥락에서 부제를 달고 수록되었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부합하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기념하는 국경일로서 광복절을 기념했다. 그런데 당시 신문 중 한 곳[『조선일보』; 인용자]이 이날의 기념식을 ‘광복 6주년 기념식’이라고 잘못 보도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1949년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간과한 다른 신문들이 이를 받아쓰고 1945년 8월 15일 즉,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국경일로 오인한 것이다.  전쟁의 혼란 속에 벌어진 신문사들의 광복절에 대한 착각은 이때부터 정부로 전파되었다. 제헌국회에서 결정한 1948년 8월 15일부터 시작되는 광복절 기념일의 횟수를 산정함에 있어서 <국경일에 관한 법률>과 ‘광복’의 사전적 의미인 ‘주권을 되찾은 날’을 외면하고 1945년을 기산년도로 삼았으며, 현 정부에서도 그런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  한편 진보진영의 학자 서중석 교수도 1948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호칭하는 소수설을 견지했다. 그는 1945년 8-15를 해방으로 규정했으며 “1945년 8‘15로 역사상 처음으로 언론‘출판‘집회‘결사 등 기본권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정치적 자유를 획득했기 때문에 대단히 뜻 깊지만 광복절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를 기념하는 명칭으로 아주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2008년에 뜨거웠던 건국절 제정 논쟁(후술함)을 의식해 1948년 8-15가 건국절이 아니라 광복절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의 일환이었다.  1945년 해방, 1948년 광복(건국)을 구분하여 기념하자는 김효선 선생·KBS공영노동조합의 주장과 서중석 교수의 주장은 그 접점이 모색될 수 있다. 다만 서중석 교수는 1948년 광복이 건국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1945년 8-15를 광복절로, 1948년 8-15를 정부수립기념일로 간주한다. 따라서 2005년에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에 반해 김효선 선생·KBS공영노조와 서중석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올해 2015년을 광복67주년으로 불러야 하는데 관행화된 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미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국가에서 공인했으며 일반인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마당에서 대중들의 고정관념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다소 문제가 있는 규정이라도 무리하게 바꾸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며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악법도 법’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잘못된 관행일지라도 일반 국민들이 그렇게 부른다면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통용되고 있는 이름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는 것이 역사가의 책무이기도 하다.  1945년 8·15 직후 미·소양군의 지배로 인해 우리민족이 독립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완전한 해방 송광성 교수는 1945년 8-15는 해방이 날이 아니라 분단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완전한 광복(주권회복)은 아니었다. 시인 권환은 1946년 “그대를 어떻게 맞을까”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과연 광복은 되었는가? / 오! 남녘땅 동포들아 / 다시 한 번 맞이하자 // 참다운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 새 8·15를 정말 8·15를 (...).”  그렇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으므로 불완전한 해방 1981년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한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 1권(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I,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의 결론인 12장의 제목은 ‘부정된 해방(liberation denied)’이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해방은 부정되었다고 평가했다. 필자는 해방이 완전히 부정되었다는 커밍스식의 급진적 평가에 대항하여 ‘불완전한 해방’ 정도는 된다는 중도적 해석을 견지하고자 한다. 불완전한 광복은 주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약간의 수식어를 첨가하는 것으로 광복절 지칭의 대립·논쟁을 지양하고자 한다.  즉 1945년 8·15를 ‘부분의 광복절[1기 광복절]’로, 미군정의 지배로부터 독립된 1948년 8·15를 ‘2기 광복절[미완의 광복절]’로 장차 도래할 통일의 날을 ‘완성된 광복절,’ ‘진정한 광복절’로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한다. 2015년 3월 5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조선일보』 창간 95주년 기념식의 주제는 ‘민족과 함께한 95주년, 광복에서 통일로’였다. 이 자리에서 “진정한 광복은 통일”이라는 기치가 내걸렸다. 배성규, “1920-민족과 함께한 조선일보 95년 진정한 광복은 통일,” 『조선일보』, 2015년 3월 6일 A1면. 또한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상임고문은 “한반도 통일만이 우리가 완전한 독립국가이자 선진국가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1948년 미국으로부터 독립되었지만 아직도 미군이 우리 국방의 중요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므로 완전한 자주독립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분단되었다고 광복이 되지 않았다는 ‘분단=부정된 광복’이라는 논리는 1945년 일제에서 해방되었던 사실과 1948년 독립된 사실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다. 일제에서 미국·소련으로 지배자가 교체된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잠정적으로 외세가 점령했던 미군정기와 소련지배기(소군정기)를 식민지 시대로 보지는 않으므로, 단순한 식민 지배 권력의 교체라고 보는 견해는 당시 주권 결여 상황을 너무 과장한 단순화 논리이다. 북한과 대한민국의 일부 민족해방(NL)파[친북 주체사상파]는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지에서 미제의 식민지로 지배자만 교체되어 지금까지 식민지 상태라고 평가하고, 일부 민중민주주의(PD)-제헌의회(CA)파는 일제 식민지에서 미국의 신식민지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도 역시 독립국가로서의 대한민국 출범을 폄하하는 급진적·극단적인 견해이다. 그렇지만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한 이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지원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었고 현재도 북한의 침략을 억제하기 위해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므로 자주독립국가라는 면에서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 1970년대 닉슨 행정부(1971년 3월 27일)와 카터 행정부(1977-1978년)가 단행한 미군감축의 와중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강조했다. 이 말은 당시 국방이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통일된 후 우리 손으로 우리를 지킬 수 있다면 완전한 자주의 실현에 한 걸음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광복은 그 시점에 달성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이 강대국에 의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 미군 철수를 요하고 관철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이다. 국제화시대에 과도한 민족주의적 감정은 민족의 장래에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자주라는 구호가 매력적이긴 해도 전세계적에서 자국만으로 안보를 책임지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영국, 독일 같은 선진국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EU의 국방도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독일 등이 자주국가가 아닌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러시아, 미국도 동맹국과 협조해 국방을 유지하고 있다. 한미동맹은 핵무기로 무장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데 뿐만 아니라 북한의 급변사태 혹은 중국의 급부상 등으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일시에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안전장치라는 측면도 있다.    III. 1948년 8월 15일을 보는 시각: 건국이냐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이냐?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8월 15일 ‘광복63주년 대한민국건국60년 중앙경축식’에서 “대한민국 건국 60년은 성공의 역사, 발전의 역사, 기적의 역사였다”고 평가했다. 이는 남한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남쪽만이라도 적화를 막은 성공적 조치로 ‘1948년 나라세우기’를 평가하면서 이를 선택한 이승만 노선에 호의적인 보수진영(그리고 당시 여권)의 평가와도 맞닿아 있다.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정부를 수립한 것이 오늘날의 분단으로 이어져 민족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고 평가했는데 분단시대의 개막은 성공시대의 개막이 아니라 실패한 부정적 역사의 시작이며 극복해야 할 것으로 간주했다.  1948년 8월 15일 우리는 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가를 우리나라 남쪽에 정식으로 만들었으며, 이 국가가 우리 민족의 구성원들을 직접 통치한지 벌써 70년 가까이 되었다.  이제 차분히 돌아보며 우리 현대사를 반성할 시점이 도래했던 것이다.  그런데 1948년 8월 15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논의가 분분했다. 1948년 8-15를 건국(국가 만들기, state-building)이냐 아니면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으로 보느냐에 따라 좌우가 갈리기도 했다. “대한민국 ‘건국’인가 ‘정부수립’인가: 동북아역사재단 ‘건국 60주년’ 학술대회”에서 김태식 기자는 “‘건국’은 대한민국 자체를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간주하는 것인 반면, ‘정부수립’은 대한민국 자체를 ‘남한’으로 축소해 불완전한 분단국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정부수립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모두 분단이나 단정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며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하는 입장에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다.   오늘날 현대사학계가 건국-대한민국 발전을 중시하는 ‘건국담론’과 해방-분단을 강조하는 비판적인 ‘분단담론’으로 대립적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2008년 8-15를 건국60년이라고 기념했는데 비해 다른 한편에서는 분단60년이라며 비판적으로 볼 것을 요구했다. 1948년 후 60년의 역사를 건국과 발전의 영광으로 보아 건국60주년을 기념하는 입장이 있고 이에 대해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좌절과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의 과정으로 보아 분단60년을 반성하는 입장이 대립했다. 이것이 2008년을 달구었던 ‘건국절 논쟁’ 등장의 한 부분을 제공했다.  1980년대 이후 한국현대사학계에서는 분단사관과 통일지상주의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건국의 관점에서 한국현대사를 바라보지 않았으나 2008년을 전후하여 건국사관을 담지한 그룹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기존의 연구경향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대립을 다양한 의견표출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대한민국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과거 독재치하처럼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역사인식 획일화를 지향한다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며 과거에는 그것이 무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능은 했으나 지금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립이 불필요한 오해와 소모적인 논쟁을 야기하거나 지나칠 정도여서 ‘국론분열’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양극화는 지양될 조짐을 보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소통을 통한 토론은 가능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는 건국과 정부수립을 그때그때 병행하여 사용해 왔고, 이를 구분하여 개념 짓는 게 큰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엄밀한 개념정의가 없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개념정의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 1945년 8월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가반이 되었던 건국동맹은 당초 그 이름으로 해방동맹, 해방연맹을 생각하다가 1943-1944년간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명백히 다가왔고 조선의 해방이 불을 보듯 명확해졌기 때문에 일제패망 시 즉각 건국에 착수해야 한다고 생각해 건국동맹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도 우파보다는 좌파가 주도했으며, 북에서도 ‘건국사상총동원운동’ 등의 예에서 보듯이 김일성의 건국에 대해 찬양하므로 양분법적인 구분에는 문제가 있다. 단지 국가를 부르주아계급이 인민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인식(국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 맑스주의에 대한 도구주의적 해석)이나 국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국가소멸론(19세기 중반 엥겔스의 인식) 때문에 좌파는 국가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편이다. 이런 맥락에 기반하기도 하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좌파는 대개 1948년 8·15를 건국보다는 정부수립이라고 부른다.  또한 일제에 의해 국권을 뺐기기 전에는 엄연히 나라가 있었으므로 2008년 건국60주년을 너무 강조하는 견해는 우리나라 역사가 60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따라서 건국이라는 용어를 쓸 때 대한민국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명기해 ‘대한민국건국’이라고 정확하게 적어서 다소 평가절하 시키기도 했다. 신국가 건설(새로운 건국)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고려건국, 조선건국도 있을 수 있으며 개천절에 최초 국가가 건국되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물론 1948년 수립된 것은 왕정이 아닌 공화제 국가이므로 이전 건국과는 다른 획기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을 선언했으며 그 이전은 신대륙 발견기와 식민지 시대였다. 조지 워싱턴은 국부,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로 추앙받으며 다른 독립 운동가들도 새로운 국가의 건국자(founders of new nation)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과연 국부라고 할 수 있을까? 중국의 손문에 비견되는 인물이 한국에 없는 것은 우리의 경우 국망으로 나라를 망쳤으므로 나라를 잃은 어른들 중 국부로 추앙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데에도 있다. 한편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는 2008년 8월 18일 참여사회연구소와 의제27, 코리아연구원이 주최한 ‘대한민국사의 재인식: 48년 체제와 민주공화국’ 공동 토론회에서 “‘국부’라는 말은 국가를 하나의 가족으로 보는 것인데, 이는 최고 통치자가 국민의 생존 여부까지 결단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이승만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며 “저항 가능성이 있는 대중 전체를 목표 삼아 반공을 신념화하지 않은 사람들을 국민의 범주에서 추방하고 죽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단군은 어떻게 되나? 고려 이후 단군을 국조로 인식했으며 1948년 9월 법제화했다. 대한민국을 일군 사람으로 이승만을 간주할 수는 있지만 미국의 조지 워싱턴에 비견되는 한국 국가의 최초 정초자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승만이 나라를 세우려 했을 때 미국은 최고 지도자로서 다른 대안(예를 들면 김규식, 여운형, 서재필)을 고려했었으며 국내에도 좌파는 물론 우파 중에도 김구-김규식을 비롯해 단정이라며 반대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로 대한민국 건립과정과 결과에 대해 누구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 권리를 부정한다면 그게 바로 위헌적 행태라는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의 지적이 있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내어놓은 것은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다. 그는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통진당) 해산 선고와 관련해 “애국가를 부정하거나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는 것 역시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고도 했다.  (물론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나라를 세운 이승만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조지 워싱턴과 이승만을 동격에 놓는 것은 우리의 ‘반만년’ 역사를 지나치게 협애화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건국은 대한민국 건국일뿐이며 전체 한국사의 건국일은 아니다. 게다가 대한민국 건국도 1919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대한제국과의 연결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반만년전의 (고)조선건국을 진정한 건국이자 우리 역사의 유일한 건국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이후 많은 국가의 수립은 우리나라의 다양한 왕조나 정부수립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진보진영의 김세균 교수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부수립으로 보는 한편,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와는 다른 형식면에서는 합법적인 건국절차를 밟았으므로 건국이라는 주장이다. 그 이전의 정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 국가유형의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진보와 보수가 각각 정부수립과 건국의 치밀한 논리로 양극화되어있는 것은 아니므로 토론의 여지는 있다고 할 것이다.    IV. 맺음말: 분단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    1948년 8·15를 광복으로 여기는 소수설을 견지하고 있는 서중석 교수는 2015년 7월 16일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제8회 몽양학술심포지엄의 종합토론 좌장을 보면서 광복절이라는 명칭은 ‘통일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인데 비해 건국절 제정론자들이 주장하는 건국절 명칭은 ‘분단국가주의적 역사인식’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1948년 8·15는 광복이 아니므로 건국도 안 된다면 모를까, 광복(주권회복)은 되는데 건국은 아니라는 인식은 모순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1948년 8·15가 광복이라면 건국은 충분히 된다고 생각한다. 주권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면 건국(독립)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한다. 분단되었으므로 완전한 건국에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건국(독립, 광복)이 완전히 부정될 수는 있는 것은 아니다. 남북한에 분단국가가 수립되었다고 해도 국가가 수립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국가 수립 즉 나라 세우기(건국)가 이루어진 것은 맞다. 다만 당시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선포하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고 한 것은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 남쪽의 우익도 모두 다 참여하지 않는 등 국민 총의에 의한 정부가 되지 못해 완전한 건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 정부가 곧 무너질 정도로 불안정하게 수립된 것은 아니었으며 이제 67년이나 경과했으므로 미흡하나마 건국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게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분단[단독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 받았으므로 단독정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길은 단독정부라고 쓰기보다 분단정부라고 쓰는 것이다]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병기하면 분단시대의 부족한 점도 인식하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역사인식도 포용하고 새 정부 출범의 긍정적인 면도 드러낼 수 있는 종합적[복합적]이고 균형적인 역사이해가 도모되지 않을까 한다. 양립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분단담론과 건국담론 양론을 지양해 수렴할 수 있을 것이다. 진경호 기자 jade@seoul.co.kr
  • 국민대통합위 광복 70주년 토론회

    국민대통합위원회(위원장 한광옥)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12일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통합 가치와 미래비전’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한다. 3부로 나눠 진행될 토론회는 광복 이후 70년간 펼쳐진 건국과 산업화, 민주화 과정을 돌아보고 남북통일 시대를 맞이할 통합 가치를 모색할 예정이다. 허동현 경희대 교양학부 교수와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 김세중 연세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윤평중 한신대 철학과 교수, 김태우 동국대 석좌교수, 이숙종 성균관대 행정학과 교수가 발제자로 나선다.
  • [길섶에서] 태극기의 의미/이동구 논설위원

    청계천 배오개다리에 내걸릴 초대형 시민태극기에 관심이 쏠린다. 서울시민 100여명이 광복 70년을 기념해 이틀 동안 손바느질로 완성한 가로 21m, 세로 14m의 태극기다. 찜통이 돼 버린 8월의 서울광장에서 수백 조각의 흰 천을 한 땀 한 땀 이어 붙인 정성이 예사롭지 않다. 민족대표 33인이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던 그날, 전국의 거리에서 202만개의 태극기를 흔들었던 민초들의 절박함에 비유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김구 선생은 1941년 벨기에 출신의 오그 신부에게 건넨 태극기에다 미국의 동포들에게 전하는 친필 묵서를 아로새겼다. ‘망국의 설움을 면하려거든,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거든, ~조국의 광복을 완성하자!’라는 글귀가 새겨진 태극기를 본 동포들의 각오는 어떠했을까.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식민통치가 막을 내린 날 조선총독부 청사의 일장기는 내려졌으나 태극기 대신 올라간 미국의 성조기를 보고 있어야 했던 국민들의 심경은 또 어떠했을까. 정부서울청사와 세종문화회관 등 서울의 주요 건물에 내걸린 대형 태극기들이 새삼 광복 70년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이동구 논설위원 yidonggu@seoul.co.kr
  • 정부, 서울시에 세종문화회관 부지 주고, 대통령 경호동 받아

    정부가 서울 종로구 광화문 앞 세종문화회관 일부 부지 등을 서울시에 주고 서대문구 연희동에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 경호동 등을 받는다. 기획재정부는 4일 서울시와 총 2785억원 규모의 국공유재산 교환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기재부가 서울시에 넘기는 국유재산은 세종문화회관 부지 중 35%(2630억원)를 비롯해 뚝섬 정수장, 중랑하수처리장, 반포 배수지, 공원, 도로 등으로 총 10만 8400㎡다. 서울시가 기재부에 주는 재산은 전 전 대통령 경호동, 구로경찰서, 서울법원종합청사, 북한산 국립공원 일부 부지, 4·19 국립묘지 일부 부지 및 건물 등으로 총 355만 9400㎡다. 돈으로 계산하면 기재부가 넘기는 국유재산은 2785억원, 서울시의 공유재산은 2783억원이다. 서울시는 나머지 2억원을 기재부에 돈으로 줄 예정이다. 기재부는 국유지와 지방자치단체가 갖고 있는 공유지의 소유자와 점유자를 일치시키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2013년 대전시와 최초로 국공유재산 교환 계약을 맺었고 지금까지 39개 지자체와 총 1199필지를 바꿨다. 최호천 기재부 국유재산정책과장은 “이번 교환으로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자기 책임 아래 효율적으로 재산을 관리, 활용할 수 있게 됐다”면서 “변상금, 대부료 부과에 따른 행정력 낭비가 없어지는 효과도 있다”고 설명했다. 세종 장은석 기자 esjang@seoul.co.kr
  • 光化門 앞 水化門

    光化門 앞 水化門

    휴일인 2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세종문화회관 앞 보행 전용 거리에서 시민들이 도심 속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서울시는 먼 곳으로 휴가를 떠나지 못한 시민들을 위해 이곳에 대형 물놀이장과 워터슬라이드, 워터볼 등 놀이시설을 설치했다. 김명국 전문기자 daunso@seoul.co.kr
  • “10대 여학생 또래 관계 중시… 쉽게 자살 충동”

    “10대 여학생 또래 관계 중시… 쉽게 자살 충동”

    지난해 11월 17일 울산 북구 신천동의 한 아파트에서 대입 수험생 A(19)양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자기 방에서 목을 맸다. 가족들은 A양이 며칠 전 치른 수능시험을 망쳤다며 괴로워했다고 전했다. 경찰은 “유서도 없고 휴대전화에도 특별히 자살을 암시하는 내용은 없었지만 가족들 진술을 종합한 결과 성적을 비관해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국 여성 청소년(만 10~19세)의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두 번째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교육부와 한림대 자살과학생정신건강연구소 주최로 3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2015 학생 자살 예방 정책 세미나’에 따르면 한국 여성 청소년들의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4.36명으로 OECD 회원국 중 두 번째로 높았다. 여성 청소년 자살률 1위 국가는 뉴질랜드로 5.65명이었다. 한국에 이어 아일랜드(3.88명), 핀란드(3.50명), 노르웨이(3.42명) 등도 여성 청소년의 자살 빈도가 높았다. 미국과 일본은 각각 1.77명과 2.82명이었으며 이탈리아가 0.60명으로 가장 낮았다. 특히 이는 우리나라 남성 청소년의 자살률이 5.15명으로 OECD 내 18위인 것과도 크게 대조된다. 김동일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여학생들은 상대적으로 관계 지향적이기 때문에 주변 환경에 따라 정서적으로 취약해지기 쉽다”며 “내적 우울감이 있어도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주위에서 이를 포착하고 대처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청소년 자살률은 학기 중일수록, 성적이 나쁠수록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부터 올 7월까지 총 150명의 월별 학생 자살 실태에 따르면 학기 중반인 3~4월과 9~10월 전후에는 자살률이 증가했다가 방학 기간에는 다소 하락하는 양상을 보였다. 자살 학생의 75.4%는 성적이 중하위권이었다. 이미정 한림대 연구원은 “자살 학생들이 평소 고민했던 내용도 성적과 관련된 것이 26.0%로 가장 많았다”고 밝혔다. 특정 시기와 특정 지역에 자살률이 일시적으로 급격히 증가하는 ‘아웃라이어’(outlier) 현상도 나타났다. 2014년 학생 자살률의 지역별·월별 패턴을 조사한 결과 울산에서는 5월, 충북에서는 6월 등 특정 지역과 시기에 자살률이 눈에 띄게 높아지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는 또래의 자살이나 기타 주변 상황의 영향을 많이 받는 청소년의 강한 전파력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해석이다. 노법래 한림대 연구원은 “외국에서는 자살자가 1명 발생했을 때 70명이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연구가 있는데 우리나라는 인구밀도가 높아 더 많은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을 가능성이 크다”며 “자살자가 누구와 가까웠는지 사회 연결망을 파악해 적극적으로 확산을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서울대 김 교수는 “청소년이 자살까지 가려면 몇 가지 위기 전조 증상이 있다”며 “학습 부진이나 또래 관계처럼 청소년들이 가장 취약한 단계별 위기 요소를 학교에서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홍진표 중앙자살예방센터장은 “주위에서 자살을 예측해 도움을 주는 모델보다는 위험 학생이 스스로 어려움 호소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 공연 바캉스

    공연 바캉스

    연극을 보며 웃고 클래식 선율에 젖어들다 보면, 또 박물관을 거닐며 옛 선조들의 정취를 느끼고 다양한 체험을 하다 보면 어느새 무더위는 저 멀리 달아난다. 올여름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공연과 전시가 풍성하다. 밤하늘 아래 선선한 바람과 함께하는 야외 공연, 저렴한 티켓 가격으로 다양한 공연을 볼 수 있는 축제, 어린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오페라와 합창, 역사와 문화를 배울 수 있는 전시까지 가족 단위로 ‘공연·전시 바캉스’를 즐기기에 손색이 없다. 29일부터 다음달 9일까지 경남 밀양 일대에서는 제15회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가 열린다. ‘연극,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슬로건을 건 올해 축제는 남천강이 내려다보이는 영남루에 특설무대가 마련된다. 이곳에서 개막 축하공연을 비롯해 재담극 ‘탈선 춘향전’, 손숙의 ‘어머니’, 창작뮤지컬 ‘궁리’, 강부자의 ‘오구’ 등 연희단거리패의 대표작들이 공연된다. ‘코마치후덴’(이윤택 연출), ‘왜 두 번 심청이는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가’(오태석 연출) 등 거장들의 명작들을 비롯해 ‘만주전선’(박근형 연출) ‘정글북’(이대웅 연출) ‘갈매기’(김소희 연출) 등 연극계 화제작들, 가족극과 대학 극단의 작품들, 해외 초청공연까지 총 40편의 작품이 관객들을 만난다. 경남의 대표적인 피서지인 거창 수승대 계곡은 오는 9일까지 한바탕 연극으로 들썩인다. 제27회 거창국제연극제는 울창한 숲과 계곡의 물줄기 등 수려한 자연을 배경으로 세계 11개국 54개 극단의 연극을 선보인다. 극단 백수광부의 ‘까베세오’, 극단 청우의 ‘내 이름은 강’ 등 연극계 화제작과 일본,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체코, 스페인 등 해외의 초청공연, 댄스, 팝페라, 민요 등 다양한 볼거리가 가득하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마에스트로’의 지휘를 볼 수 있는 특별한 무대도 열린다. 서울시립교향악단은 다음달 1일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 멀티플라자에서 ‘시민과 함께하는 서울시향 강변음악회’를 개최한다.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이 지휘봉을 잡아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모음곡’,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등 익숙한 클래식 명곡들을 들려준다. 총 1만석 규모의 객석이 전석 무료이며 관객들은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소풍을 온 듯 공연을 즐길 수 있다. 방학을 맞아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공연도 풍성하다. 세종문화회관의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청소년음악회’(다음달 6~19일)는 오케스트라와 합창, 오페라, 국악 등 다양한 장르에서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예술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합창음악회 ‘신나는 콘서트’는 클래식과 민요뿐 아니라 뮤지컬, 재즈, 이탈리아 칸초네 등 다채로운 장르로 꾸며진다. 서울시유스오케스트라의 ‘썸머클래식’은 규모 있는 관현악곡을 재미있는 해설과 함께 즐길 수 있다. 모차르트의 코믹 오페라 ‘코지 판 투테’, 세종대왕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미스터리 국악극 ‘꿈꾸는 세종’ 등 알찬 프로그램이 가족단위 관객들을 기다린다. 박물관도 각양각색의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어린이박물관은 역사에 대한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충족해줄 ‘선조들의 풍류 있는 여름나기’를 준비했다. 상반기 어린이박물관에서 이뤄진 교육들 중 가장 선호도가 높았던 프로그램들만 선별했다. ‘아름다운 빛깔, 고려청자’라는 교구를 활용하는 ‘신비한 고려청자의 세계’, 해시계 ‘앙부일구’를 통해 시간의 개념을 이해하는 ‘해 그림자 속 암호를 풀어라’, 고구려·백제·신라가 한강을 둘러싸고 벌인 영토전쟁에 대해 알아보는 ‘삼국이여, 한강을 사수하라’ 등 여섯 종류의 교육프로그램을 다음달 4일부터 14일까지 16회에 걸쳐 운영한다. 국립한글박물관은 한글을 주제로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놀이를 통해 한글의 제자 원리를 익히고 한글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키울 수 있는 ‘한글아, 안녕?’, 오감 체험을 통해 부모와 자녀 간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한글 마음 여행’ 등을 진행한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여름방학 경주박물관 탐험대’를 31일부터 다음달 30일까지 매주 금·토·일 오후 2시부터 3시 30분까지 14회에 걸쳐 진행한다. ‘신라의 황금문화와 불교미술’ 특별전 내용을 토대로 ‘영원을 꿈꾸는 황금장신구’ ‘비단길에서 온 보물’ ‘또 하나의 부처님, 탑’ 등 세 가지 프로그램으로 꾸몄다. 신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는 강의를 비롯해 금제허리띠 꾸미기, 유리잔 꾸미기, 탑 만들기 등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국립극장 공연예술박물관에서는 6~9세 어린이를 대상으로 공연 무대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전 과정을 체험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오늘은 나의 무대2 : 보물상자 대탐험’ 전시가 내년 2월까지 열린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가자! 독도로

    가자! 독도로

    아웃도어 브랜드인 엠리밋 모델들이 20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광복 70주년 기념 독도 방문 행사를 알리고 있다. 엠리밋은 ‘엠포인트 카드’로 20만원 이상을 구매하는 고객을 대상으로 추첨을 통해 20명을 선정해 동반 1인 포함, 모두 40명에게 독도 방문의 기회를 제공한다. 정연호 기자 tpgod@seoul.co.kr
  • 광복 70년, 국민 대화합의 빛을 밝혀라

    광복 70년, 국민 대화합의 빛을 밝혀라

    올해 광복 70주년 경축행사가 다음달 15일 광복절에 서울 세종로 광화문광장에서 ‘국민 화합’을 주제로 화려하게 펼쳐진다. 15일 광복7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 따르면 윤호진 총감독의 연출로 진행되는 경축행사는 14일 전야제와 15일 오전 중앙 경축식, 저녁의 국민화합 대축제 등 순으로 진행된다. ‘대한민국의 영광’을 주제로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전야제는 태양의 빛을 형상화한 무대에서 화려한 조명과 영상을 활용해 지난 70년 우리 역사와 민족의 미래를 구현하는 ‘빛의 축제’로 막을 올린다. 또 오케스트라의 코리아 판타지 연주와 한류 콘서트가 펼쳐지고, 남산의 N타워에서는 불꽃 축제가 예정돼 있다. 진행진이 관객들과 직접 소통하는 시간도 갖는다. 주말인 광복절 당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중앙 경축식에서는 2002 월드컵 4강 신화를 일궈낸 축구 대표팀, 파독 광부, 수학·과학 올림피아드 입상자 등 다양한 계층의 국민 3000여명이 참석한다. 세종문화회관 옆 광화문광장에서는 각종 퍼레이드와 공연, 전시, 체험 행사 등이 진행된다. 이날 저녁에는 국민화합 대축제가 광화문 주변에서 열린다. 구체적인 장소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교통을 통제한 뒤 광화문 정문 앞에서 행사가 진행되면 행사장으로 처음 공개되는 의미를 갖는다. 국민화합 대축제에는 청소년 1000여명이 참여해 공연을 하고,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에 대한 내용을 담은 뮤지컬 ‘영웅’의 갈라 공연도 펼쳐진다. 미국 워싱턴과 로스앤젤레스, 중국 상하이와 충칭, 일본 도쿄 등 13개국 주요 도시에서도 경축식과 기념공연, 전시회 등이 동시에 열린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이날 열린 4차 추진위원회 회의에서 “광복 70년 경축행사가 이념·지역·세대 간 갈등을 넘어 국민화합의 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경운 전문기자 kkwoon@seoul.co.kr
  • 에너지 충전으로 건강한 여름

    에너지 충전으로 건강한 여름

    한국인삼공사 홍보 모델들이 12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에서 베리 농축액으로 맛을 더한 홍삼 농축액 ‘정관장 아이패스 파워’를 선보이고 있다. 홍삼과 베리 외에 녹용, 황기, 타우린 등을 넣어 피로 회복에 도움이 된다는 게 한국인삼공사의 설명이다. 가격은 14병(50㎖) 한 세트에 9만 5000원.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 최초의 오페라는 어떤 모습일까

    최초의 오페라는 어떤 모습일까

    세계 음악사(史)상 첫 오페라는 무엇일까. 1597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베르디 백작 궁정에서 지역 예술가와 귀족들로 구성된 ‘카메라타’ 모임에서 그리스 비극을 재현하기 위해 쓴 ‘다프네’가 꼽힌다. 안타깝게도 악보가 남아 있지 않으며, 악보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작품은 ‘에우리디체’(1600)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오페라의 기원으로 인정받는 건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1607)다. 다양한 악기를 동원하고 음악과 극이 어우러진 ‘종합예술’로서의 오페라를 제시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본격적 오페라인 ‘오르페오’가 처음으로 국내 관객들을 만난다. 서울시오페라단은 오는 23~26일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오르페오’를 초연한다. 이건용 서울시오페라단 단장이 “70년 가까운 우리나라 오페라 역사에 ‘오르페오’가 빠져 있다는 것은 악단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며 지난해부터 공연을 기획해 왔다. 최근 국립오페라단장에 임명된 김학민 경희대 교수가 연출을 맡았다. ‘오르페오’는 국내에도 잘 알려진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체’를 바탕으로 한다. 악사인 오르페우스가 죽은 아내 에우리디체를 찾아 저승으로 향하는 이야기다. 김학민 연출은 공연의 콘셉트를 ‘길’에서 찾았다. 시간과 공간, 현세와 저승을 잇는 길들에서 모티프를 얻어 무대 세트를 구상했다. 또 바로크 원전 악기들로 편성된 작품을 현대에 맞게 재연하기 위해 고음악의 대표적 학자인 정경영 교수가 바로크 음악감독을 맡았다. 양진모 지휘자와 함께 ‘오르페오’에서 연주되는 악기 구성을 연구해 바로크 음악 연주법은 유지하되 대부분의 악기는 현대 악기로 편성했다. 양진모 지휘자는 지휘뿐만 아니라 쳄발리스트 김희정과 함께 쳄발로를 연주한다. 주인공 ‘오르페오’는 바리톤 한규원과 테너 김세일이 맡는다. 산천초목까지 감동시키는 노래 실력을 갖춘 오르페우스를 서로 다른 음역대의 성악가가 어떻게 표현할지 시선을 모은다. 아내 ‘에우리디체’ 역에는 소프라노 정혜욱과 허진아가 낙점됐다. 3만~8만원. (02)399-1783.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자외선 막고 화사하게

    자외선 막고 화사하게

    8일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세종문화회관에서 화장품 브랜드 이지듀 모델들이 자외선을 차단해 광노화를 방지하고 피부 톤을 화사하게 보정해 주는 ‘이지듀 플러스 브라이트닝 선’ 라인을 선보이고 있다. 이언탁 기자 utl@seoul.co.kr
  • 평창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 송승환씨

    평창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 송승환씨

    “한국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겠다.” 2018평창동계올림픽·장애인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가 2일 송승환(58) PMC프로덕션 회장 겸 예술총감독을 3년 앞으로 다가온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으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조직위는 “개·폐회식 총감독으로는 연출력뿐 아니라 관객과 방송에 대한 이해, 인적 네트워크, 조직 관리 능력 등 다양한 방면의 균형적 조율 능력을 갖춘 인사가 적합하다는 ‘총감독 선정자문위원회’ 의견을 반영해 송승환 감독을 적임자로 선임했다”고 밝혔다. 조직위는 “5월 공모를 통해 총감독 선정을 추진했으나 적격자가 없어 공모에 참여하지 않은 후보들까지 재검증해 뽑았다”고 덧붙였다. 송 감독은 TV와 연극 등 오랜 연기 생활로 대중과 친숙한 인물이다. 특히 ‘난타’를 기획해 18년간 1000만 관객을 동원하는 등 대표적인 한류 문화 상품을 제작한 것이 선정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는 “너무 큰 일을 맡아 부담스럽다”면서 “아시아 위주였던 한류 문화가 북유럽이나 북아메리카 등에도 많이 전파될 수 있는 계기가 되도록 만들겠다”고 말했다. 이어 “한류 문화가 대중문화 중심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우리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도록 힘쓰겠다”고 강조했다. 2002년부터 문화산업포럼 공동대표를 맡은 그는 성신여대 융합문화예술대학장과 세종문화회관 이사회 선임이사,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지난 5월 장애인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으로 이문태(67)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이사장을 선임한 조직위는 “국내외 전문가로 부문별 감독단을 구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민수 선임기자 kimms@seoul.co.kr
  • “영화 관객 2억명 시대, 수용자 중심 지원 사업 필요”

    한 해 영화 관객 2억명 시대, 영화산업의 한 축인 관객 지원 정책에 대한 지원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정재형)는 2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한국영화·영상문화 환경 개선을 위한 정책포럼’을 열고 한국 상황에 적합한 관객 지원 모델에 대해 논의했다. 영화평론가협회 측은 “정부의 지원 사업이 지나치게 공급자 중심으로 쏠리면서 관객 및 수용자에 대한 지원책은 미미한 수준”이라며 “영화·영상문화가 도약하고 성숙해지려면 양질의 콘텐츠를 구분하고 지지할 수 있는 수용자의 존재가 더욱 중요해진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이아람찬 목원대 조교수는 “국내 초·중·고교에서의 영화 교육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하고 있는데 전문적이고 대중적인 부분을 추구하는 영화진흥위원회와 다양한 영화 교육에 대한 자료를 확보하고 있는 서울영상미디어센터가 함께 영화 교육을 지원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면 영화 교육의 질적 제고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학 박사 김준덕씨는 “프랑스의 영화산업조직위원회(CNC)는 14세 이하 청소년에 대한 영화 관람료를 대폭 할인해 주는 특별 할인제도를 시행하고 있다”면서 “CNC처럼 강력한 지원을 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처럼 부가세율을 낮추고 영화발전기금의 현행 세율을 상향 조정하는 방안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영화 평론가 윤성은씨는 “현재 대학 영화 교육 역시 이론보다는 제작에 치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영화 문화에 대한 인식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관객 교육이 절실하다”면서 “외부적인 자원의 추가 확보보다는 현재 책정된 사업금이 효율적으로 사용되는지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며 영화인 문학 강의 등 일반 관객에 대한 서비스 확충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 쏟아지는 여름 뮤지컬, 신작 3편 감상해 보니

    쏟아지는 여름 뮤지컬, 신작 3편 감상해 보니

    뮤지컬 시장이 6월 중순부터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대극장 뮤지컬만 10편 가까이 같은 기간에 맞붙으며 뮤지컬 전용 극장은 빈 곳을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흥행이 검증된 작품의 재공연뿐 아니라 신작들이 쏟아진다는 점에서 여름 뮤지컬 시장의 성장세를 엿볼 수 있다. 대형 공연기획사들의 진검승부에서 ‘데스노트’와 ‘체스’, ‘시카고’ 오리지널 내한공연이 먼저 뚜껑을 열었다. ‘데스노트’ - 괴물 보컬 웨스트엔드 무대를 밟은 홍광호와 그룹 JYJ의 김준수는 ‘데스노트’(씨제스컬쳐)에서 다시 한 번 이름값을 증명해 냈다. 앞서 도쿄 초연에서 다소 밋밋하다는 평가를 받은 프랭크 와일드혼의 넘버는 홍광호의 ‘꿀성대’와 김준수의 금속성 보컬 덕에 한층 드라마틱하게 살아났다. 연극성이 강한 연출에서 두 배우의 연기력도 빛을 발했다. 홍광호는 똑똑한 고교생 라이토가 데스노트를 손에 넣고 폭주하다 자멸하는 과정을 섬뜩하게 묘사했다. ‘죽음’(엘리자벳) ‘드라큘라’ 등 비현실적인 캐릭터에 잘 어울리는 김준수는 기괴한 이미지의 천재 탐정 엘(L)이 맞춤옷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본 만화 ‘데스노트’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건 현대사회에 팽배한 허무주의, 정의와 선악에 대한 철학적 논쟁, 반전을 거듭하는 두뇌 대결 등의 요소 덕이다. 이 모두를 3시간 이내의 뮤지컬에 담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엘의 추리에는 중간중간 비약이 보였고, 라이토와 엘의 대결도 원작만큼 치열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판타지와 로맨스가 넘쳐나는 대형 뮤지컬 시장에 음울함과 냉소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의 등장은 반가운 일이다. 강홍석은 라이토를 이용해 인간 세계를 희롱하는 사신 류크의 캐릭터에 대한 이해력이 높았다. 라이토를 사랑하는 아이돌 가수 미사 역의 정선아와 미사를 지켜주는 사신 렘 역의 박혜나도 비교적 짧은 분량에서 주연 못지않은 존재감을 발휘했다. 그러나 뮤지컬계 최고 디바인 두 배우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문 점은 아쉽다. 일본 공연을 수정 없이 가져온 탓에 일본 만화를 보는 듯 유치한 장면도 몇몇 보인다. 8월 15일까지 경기도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체스’ - 낯선 끌림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에비타’ 등의 작사가 팀 라이스가 만든 ‘체스’(엠뮤지컬아트)는 브로드웨이에서 두 달 만에 막을 내린, 크게 성공한 작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체스 챔피언 프레디와 러시아의 체스 챔피언 아나톨리의 맞대결을 냉전이라는 맥락 속에서 그려낸 ‘체스’는 국내 뮤지컬 팬들에게는 낯설고 독특한 소재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았다. 그런 ‘체스’에 도전한 건 ‘삼총사’ ‘잭 더 리퍼’ 등 외국 뮤지컬에 대중성을 더해 성공시켜 온 왕용범 연출이었다. 뚜껑을 연 ‘체스’는 시각적인 면에서는 합격점을 줄 만했다. 서숙진 디자이너는 체스의 고향인 이탈리아 마로스티카 마을을 옮겨 놓은 무대세트 위에 영상을 투사해 매끄러운 공간 이동을 구현해 냈다. 중세 이탈리아의 성벽은 눈 깜짝할 사이에 체스 세계챔피언십이 열리는 태국 방콕과 헝가리 부다페스트, 미국 등 세계 각국으로 변신했다. 3m가 넘는 체스의 말을 들고 펼치는 앙상블의 군무도 신선한 광경이다.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인물들을 사각의 핀 조명 아래 가둬 놓는 연출도 체스라는 소재와 절묘하게 맞물린다. 그러나 첩보물을 방불케 하는 스토리의 긴장감을 반감시키는 건 단조로운 구성이다. 극과 넘버는 다채로운 방식으로 맞물리지 못하고, 한 장면이 끝나면 넘버가 2절까지 이어지는 뻔한 패턴이 반복된다. 흐름이 예측 가능한 탓에 극이 축축 처진다. 아나톨리가 프레디의 조수 플로렌스와 사랑에 빠지고, 아내와 조국마저 버린 채 미국으로 망명하는 과정도 급작스럽게 전개돼 설득력이 떨어진다. 7월 19일까지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시카고’ - 원조 파워 ‘시카고’(신시컴퍼니)는 국내 공연계의 베스트셀러다. 그만큼 익숙한 작품이지만, 12년 만에 한국을 찾은 오리지널 팀에게는 ‘오리지널’만의 매력이 충분했다. 1920년대 미국의 사회상을 재즈 선율에 담은 ‘가장 미국적인’ 뮤지컬에서 미국 배우들은 관객들을 브로드웨이를 여행하는 것 같은 환상으로 끌어들인다. 놀라운 유연성을 갖춘 배우들은 다리를 일(一)자로 찢으며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길쭉한 팔다리와 탄탄한 근육에서 뿜어져 나오는 관능적인 몸짓은 시선을 단번에 붙잡았다. ‘올 댓 재즈’ 같은 명곡을 원어로 듣는 즐거움에 미국식 유머를 다양한 글씨체로 표현한 재기발랄한 자막이 재미를 더한다. 남편을 총으로 쏴 죽이고도 ‘무죄’를 외치는 여죄수들의 뻔뻔함도 배우들의 매력 때문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테라 매클라우드(벨마 켈리 역)와 딜리스 크로만(록시 하트 역)의 기량은 물론 출중했다. 그러나 섹시함과 뻔뻔함, 처연함을 오가는 입체적인 캐릭터의 매력을 100% 표현하지는 못한 듯한 느낌이었다. 한국의 벨마와 록시인 최정원과 아이비의 기량이 결코 떨어지지 않음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8월 8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친구데이 김장훈, “청소년에게 연예인들 역할 중요해” 이유 들어보니…

    친구데이 김장훈, “청소년에게 연예인들 역할 중요해” 이유 들어보니…

    친구데이 김장훈, “청소년에게 연예인들 역할 중요해” 이유 들어보니… 친구데이 김장훈 ’친구데이’를 앞두고 ‘친구데이-청소년의 날’ 선포식이 개최됐다. ‘친구데이(청소년의 날)’와 청소년 주간은 대한민국 미래 세대의 주역인 청소년을 위한 날이 없다는 데서 출발했다. 대한민국 980만 청소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제고하고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달하기 위해 NGO프렌딩(대표 백두원)이 기획하고 행복문화인과 백암재단이 공동으로 주최한 캠페인이다. 1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친구데이’ 선포식에는 정운찬 전 총리, 대한민국국가대표선수회 상임이사 임오경 감독, 가수 김장훈 등이 참석했다. 사회는 개그맨 윤형빈이 맡았다. 이날 정운찬 조직위원장은 “친한친구 캠페인을 통해 청소년들이 공부가 전부가 아닌 꿈과 희망을 실현하는 의미 있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며 “어른들도 청소년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꿈을 응원해주는 아름다운 문화가 정착되길 바란다”고 인사말을 전했다. 이어 대한민국국가대표선수회 상임이사 임오경 감독은 “최근 자녀가 일명 ‘중2병’에 걸려서 어려움을 겪었다. 코트에서는 감독이지만 집에 돌아가면 한 가정의 어머니”라며 “‘친구데이’를 통해 청소년들이 미래의 주역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희망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가수 김장훈 역시 ‘친구데이’의 긍정적인 면에 동의했다. 그는 “‘친구데이’라는 의미도 좋지만 내용이 좋아야한다”며 “무엇보다 청소년에게 연예인들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솔선수범하겠다”고 이야기했다. 한편 NGO프렌딩은 7월 1일부터 7월 9일까지를 친한친구 주간으로 정하고 다양한 펑소년 문화 활동을 계획 중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친구데이 김장훈, “청소년에게 연예인들 역할 중요해” 이유 들어보니…

    친구데이 김장훈, “청소년에게 연예인들 역할 중요해” 이유 들어보니…

    친구데이 김장훈, “청소년에게 연예인들 역할 중요해” 이유 들어보니… 친구데이 김장훈 ’친구데이’를 앞두고 ‘친구데이-청소년의 날’ 선포식이 개최됐다. ‘친구데이(청소년의 날)’와 청소년 주간은 대한민국 미래 세대의 주역인 청소년을 위한 날이 없다는 데서 출발했다. 대한민국 980만 청소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제고하고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달하기 위해 NGO프렌딩(대표 백두원)이 기획하고 행복문화인과 백암재단이 공동으로 주최한 캠페인이다. 1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친구데이’ 선포식에는 정운찬 전 총리, 대한민국국가대표선수회 상임이사 임오경 감독, 가수 김장훈 등이 참석했다. 사회는 개그맨 윤형빈이 맡았다. 이날 정운찬 조직위원장은 “친한친구 캠페인을 통해 청소년들이 공부가 전부가 아닌 꿈과 희망을 실현하는 의미 있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며 “어른들도 청소년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꿈을 응원해주는 아름다운 문화가 정착되길 바란다”고 인사말을 전했다. 이어 대한민국국가대표선수회 상임이사 임오경 감독은 “최근 자녀가 일명 ‘중2병’에 걸려서 어려움을 겪었다. 코트에서는 감독이지만 집에 돌아가면 한 가정의 어머니”라며 “‘친구데이’를 통해 청소년들이 미래의 주역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희망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가수 김장훈 역시 ‘친구데이’의 긍정적인 면에 동의했다. 그는 “‘친구데이’라는 의미도 좋지만 내용이 좋아야한다”며 “무엇보다 청소년에게 연예인들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솔선수범하겠다”고 이야기했다. 한편 NGO프렌딩은 7월 1일부터 7월 9일까지를 친한친구 주간으로 정하고 다양한 펑소년 문화 활동을 계획 중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