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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포토] ‘세종대왕님, 편안하신지요’

    [서울포토] ‘세종대왕님, 편안하신지요’

    시청직원들이 17일 광화문광장에 세워진 세종대왕 동상 안전점검을 하고 있다. 2016.3.17 김명국전문기자 daunso@seoul.co.kr
  • 광화문광장에 나타난 걸그룹 여자친구, 팬서비스도 끝판왕

    광화문광장에 나타난 걸그룹 여자친구, 팬서비스도 끝판왕

    최근 대세 걸그룹으로 급부상한 여자친구가 역대급 팬서비스로 SNS에서 화제몰이 중이다. 지난달 27일 컬쳐 컨텐츠 미디어 회사 화이트홀(White Hole)은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와 유튜브 채널 등을 통해 ‘광화문 광장에서 시간을 달려서 춤추다 우연히 만난 여자친구’라는 제목의 영상을 올렸다. 화이트홀에 따르면 공개된 영상은 지난 2월 25일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촬영된 것으로, 화이트홀 직원과 멘티 학생이었던 임소은 양이 댄스 프로젝트 촬영을 진행하던 중 어디선가 등장한 여자친구 멤버들의 모습에 깜짝 놀라 기뻐하는 모습이 담겼다. 교복 차림에 점퍼를 입고 나타난 여자친구 멤버들은 손뼉을 치며 여학생을 응원하는가하면 카메라 앞에서 ‘시간을 달려서’ 안무를 선보이는 등 여자친구 특유의 소녀다운 매력을 발산했다. 당시 걸그룹 여자친구와 조우한 임소은 양은 “광화문에서 댄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동 중이던 여자친구가 제 모습을 보고 뛰어와서 응원해줬다”면서 “마음도 착하고 얼굴도 진짜 예쁜 여자친구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한편 걸그룹 여자친구의 타이틀곡 ‘시간을 달려서’는 국내 최대 음원 사이트 멜론에서 2월 첫째 주부터 넷째 주까지 4주 연속 주간차트 1위에 오르며 인기몰이 중이다. 사진·영상=화이트홀/유튜브 김형우 기자 hwkim@seoul.co.kr ☞ 걸그룹 ‘여자친구’, 노래방에 가면 이렇게 논다!☞ [쇼케이스 영상] 마마무 ‘넌 is 뭔들’…눈과 귀 녹이는 첫 무대
  • 고향·해외로 떠난 서울은 ‘리틀 차이나’

    고향·해외로 떠난 서울은 ‘리틀 차이나’

    유커 춘제 맞아 15만여명 방한 재중동포 구로동 모여 명절 보내 설 연휴가 막바지로 접어들던 9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체감 온도가 1도까지 떨어진 쌀쌀한 날씨 속에서도 광장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 주위에는 외국 관광객으로 가득했다. 특히 중국어로 대화를 주고받는 관광객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아내와 7살 된 아들을 데리고 지난 7일 한국을 방문한 ‘유커’(遊客·중국인 관광객) 안롱위(41)씨는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5분 동안 가족 사진을 찍은 뒤 서둘러 경복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지금까지 제주, 부산을 다녀온 적은 있지만 서울 도심 지역을 관광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면서 “13일 중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최대한 많은 곳을 다닐 예정”이라고 말했다. 안씨는 여러 곳을 돌아보려면 “한시가 급하다”면서 총총히 자리를 떴다. 안씨 부인은 명동에서 구입한 화장품이 가득 들어 있는 쇼핑백을 꼭 쥐며 안씨를 따라갔다. 올해도 중국 최대의 명절 춘제(7~13일)을 맞아 많은 수의 유커가 한국을 찾았다. 한국관광공사는 이번 설 연휴기간에 한국을 찾는 유커의 숫자를 지난해 춘절(2월 18~24일) 대비 약 18% 증가한 15만 6000여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은 설 연휴로 지방이나 해외로 떠난 서울 시민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개별관광으로 서울을 둘러보고 있다고 밝힌 황리핑(24·여)씨는 “북촌 한옥마을과 서촌도 최근 뜨고 있다는 말을 들어서 연휴가 끝나기 전에 꼭 가볼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5~6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여파로 주춤했던 유커는 지난해 10월을 기점으로 증가세를 회복했다. 한국을 방문하는 유커 숫자는 해마다 늘고 있다. 신규민 한국관광공사 관광시장조사팀 차장은 “경제발전에 따른 중국인의 해외 관광 수요가 높아지는 것이 유커가 증가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라면서 “베이징, 상하이 등 대도시 지역만을 대상으로 관광 마케팅을 하는 외국과 달리 내륙 지역을 무대로 우리가 관광 마케팅을 ‘공격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점도 주효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유커가 관광과 쇼핑을 목적으로 서울 시내를 점령했다면 이곳에서 일하는 중국 출신 동포들은 망향(望鄕)의 심정으로 설 연휴를 보냈다. 구로구 구로동에 있는 한 중국음식점은 30여명의 중국 동포 손님으로 꽉 차 있었다. 구로구는 서울에서 두 번째로 중국 동포가 많은(2만 5679명) 곳이다. 명절을 맞아 모처럼 재중 동포들이 한자리에 모여 술과 음식을 먹으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2001년 한국에 들어온 조태화(40)씨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친척이 다 함께 모여 고향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서 “고향이 많이 그립지만 한국에 가족과 친구가 있어 이제는 여기가 고향 같다”고 전했다. 영등포구 대림동에서 3년째 중국 정통 꽈배기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김모(39)씨는 “명절에 고향에 못 가는 중국 동포에게는 이곳이 일종의 심정적 고향인 셈”이라고 말했다.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무거워 못 살겠소…갑옷 좀 벗겨 주시오

    무거워 못 살겠소…갑옷 좀 벗겨 주시오

    “오른쪽 어깨에 걸쳐 놓은 지휘봉을 두 손으로 배꼽 있는 데까지 내리세요. 다시 눈까지 들어 올리세요. 수문장의 인사는 첫째도 절도, 둘째도 절도, 절도가 생명입니다.” 지난 14일 낮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서울시청 서소문별관의 왕궁 수문장 대기실. 인근 덕수궁에서 열리는 수문장 교대식 체험을 위해 20분 넘게 반복 연습을 하던 차였다. 맡은 역할은 60여명의 수문군을 대표하는 최고 장수(수문장). 교관은 서울시에서 교대식 행사를 위탁받은 전문 업체 직원 김용택(29)씨가 맡았다. 지난 1년간 수문장 역을 맡았던 베테랑이다. 김씨는 “긴장하지 말고 편한 마음으로 하라”고 했지만 잘해 보려는 마음과 따로 노는 몸은 헛심까지 들어가 경직돼 있었다. “차마(사회자)가 초엄이라는 구호를 외치면 궁궐 열쇠가 든 함을 열어 확인하세요. 중엄이라고 외치면 순장패(수문장의 신분을 증명하는 동그란 금속 패)를 받으면 됩니다. 삼엄이라는 구호가 떨어지면 수문군이 교대할 겁니다. 이때는 근엄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세요. 순장패를 받을 때 지휘봉을 겨드랑이에 바짝 붙여 올리지 않으면 칼에 부딪혀 떨어질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지휘봉 떨어뜨리면 완전히 웃음바다 돼 버립니다.” 20여분의 기초 교육이 끝나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수염을 접착제로 붙이고 흰색 누빔 한복을 안에 입었다. 그 위에 황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그 다음에는 쇠비늘이 빈틈없이 박힌 갑옷을 입었다. 황금색 용이 갑옷의 양쪽 어깨 위에 달렸다. 마지막으로 금색 봉황을 새긴 투구를 썼다. 칼과 활을 왼쪽 허리에 차고 등에는 화살통을 멨다. 갑옷 무게만 15㎏에 투구 및 칼까지 합하면 몸에 걸친 게 20㎏은 족히 되는 듯했다. 마음의 무게에 갑옷의 무게가 더해지면서 멋진 수문장 역할을 하겠다던 초심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이렇게 화려한 갑옷을 갖춰 입는 것은 장군뿐이다. 수문군 병졸들은 전통 군복을 입는다. 칼과 활, 화살도 장군에게만 지급된다. 병졸들은 각자의 임무에 따라 깃발이나 월도를 든다. 복장을 갖춘 뒤 대기실을 나와 시청 서소문별관 앞에 60여명의 수문군과 함께 도열했다. 초짜 수문장의 긴장한 표정을 읽었는지 옆에 있던 수문군이 “갑옷이 무겁긴 해도 1시간이면 끝나니까 순서만 잘 기억하면 별 문제 없을 것”이라고 말해 줬다. 이들은 모두 서울시에서 위탁받은 수문장 교체 재현 행사 업체의 직원이다. 북소리가 울리자 수문장으로 분장한 기자와 수문군 60명은 덕수궁 돌담길, 평성문, 덕수궁 석조전 등을 지나 10여분 만에 수문장 교대식이 열리는 대한문에 도착했다. 취타대는 북, 운라 등 전통악기를 경쾌하게 연주했다. 50여명의 관광객 앞에서 “초엄”이라는 구령이 울렸다. 앞서 근무한 수문장에게 받은 열쇠함을 확인했다. 이어 “중엄”이라는 구호에 순장패를 받아 들어 올렸다.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김씨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덕수궁을 보고 있으면 안 돼요. 관람객 쪽으로 돌아요. 반대쪽으로 도세요.” 곧이어 마지막 “삼엄” 구호가 떨어졌다. 배운 대로 따라 했지만 잘되고 있는 건지, 잘못되고 있는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김씨가 옆에 다가와 “이제 포토타임이에요”라며 다독여 줬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셔터 소리가 들렸다. 베트남에서 왔다는 관광객 2명은 수문장 역할을 맡은 기자의 옆에 섰고 또 누군가는 팔짱을 꼈다. 아이들은 스스로 ‘장군’이 된 듯 칼을 휘두르는 척하며 뛰어다녔다. 근엄한 표정이 중요하다고 배운 터라 ‘이순신 동상’이 됐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늦게 도착하는 관광객을 위해 같은 교대식을 다시 한번 재현했다. 연신 스마트폰으로 교대식을 찍던 유연례(60·여)씨는 “의상과 무기가 화려하고 군인들의 움직임에 절도가 있어 상당히 재미있었다”며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문화를 알릴 수 있는 좋은 행사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오후 2시 40분 수문군은 대한문에서 시청 서소문별관의 왕궁 수문장 대기실로 돌아갔다. 워낙 이옷 저옷 많이 껴입어 영하의 날씨에도 몸에서 땀이 흐를 정도로 추운 줄은 몰랐지만 투구와 갑옷에 짓눌린 어깨와 등, 목이 뻐근해져 왔다. 이마에는 투구 자국이 가로로 선명하게 남았다. 수염을 붙인 입 주변이 접착제 때문에 끈적거려 알코올 솜으로 여러 차례 닦아 냈다. 수문군이 입는 옷은 겨울에는 1주일에 1번, 여름에는 1주일에 2번씩 특수세탁업체에 보낸다. 오후 3시 탈의를 마치고 힘없이 앉아 있는데 “고생했다”고 말하며 위탁업체의 김철형(46) 팀장이 다가왔다. “지난달에는 겨울이 춥지 않아 괜찮았는데 갑작스러운 한파 때문에 많이 힘들어졌어요. 다음주에는 더 춥다는데 걱정이에요. 반면에 여름에는 긴팔 옷을 여러 벌 겹쳐 입어야 하니까 아무리 옷을 얇게 만들어도 땀으로 범벅이 돼요.” 옆에 있던 한 수문군은 “팔을 주물럭대는 중년 여성이나 품에 안기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지난해 여름에는 중국인 관광객이 갑자기 볼에 뽀뽀를 해 놀라기도 했다”면서 “그래도 관광객들이 좋아해 주면 힘이 난다”고 말했다. 덕수궁에서는 휴일인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1시, 오후 2시, 오후 3시 30분에 수문장 교대식이 열린다. 오전 11시와 오후 3시 30분 교대식 후에는 수문군이 근처를 순찰하는 ‘순라 행사’를 한다. 지난해에는 덕수궁 대한문에서부터 서울광장까지 약 300m 구간을 돌았지만 19일부터 대한문에서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 동상까지(약 1㎞)로 늘어난다. 경복궁에서도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 수문장 교대식(경복궁 문 전체의 수문군 교대)이 열린다. 오전 11시와 오후 1시에는 광화문 앞 파수군만 교대하는 파수식도 연다. 교대식 체험은 덕수궁에서만 할 수 있다. 왕궁 수문장 교대 의식 홈페이지(www.royalguard.kr)에서 ‘나도 수문장이다’ 배너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 선착순으로 하루에 2명까지 지원받는다. 12세 이상이면 누구나 체험할 수 있다. 어린이용 갑옷도 있다. 서울시는 1996년부터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을 시작했고 2002년부터 문화재청이 경복궁 교대식을 열고 있다. 시는 숭례문 교대식 부활도 검토하고 있다. 오는 4월 재개될 가능성이 크다. 2007년에 시작한 숭례문 수문장 교대식은 2008년 2월 화재 이후 중단됐다. 시 관계자는 “문화재청과 협의 중인데 숭례문 교대식이 부활하면 덕수궁 대한문에서 숭례문까지 순라 행사도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서울광장] 광화문광장, 또 한 해를 보내며/박홍기 논설위원

    [서울광장] 광화문광장, 또 한 해를 보내며/박홍기 논설위원

    서울 한복판 광화문광장 앞에 섰다. 큰 칼 옆에 찬 늠름한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 있고, 성군 세종대왕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다. 그리고 아직도 끝나지 않은 세월호 희생자들의 분향소와 유족들의 천막이 있다. 나눔과 온정을 가리키는 사랑의 온도탑 눈금도 올라가고 있다. 세종대왕 동상 너머에는 조선왕조의 경복궁이 건재하다. 광장의 안팎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화려하게 빛나고 있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들이 나온 가족들은 성탄절과 함께 연말을 한껏 즐기고 있다. 눈에 비치는 풍경은 작년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때문인지 교보빌딩 벽에 걸린 ‘두 번은 없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므로 너는 아름답다’라는 시구가 왠지 어색하다. 을미년도 저물어 6일밖에 남지 않았다. 끝자락이다. 광화문광장은 올 한 해 역사를 품었다. 호오(好惡), 경중을 떠나 많은 일을 겪었다. 일어났던 일들, 계속되는 일들, 크고 작은 하나하나가 사건이고 역사다. 소설가 최인훈의 표현을 빌리자면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다. 개방과 소통, 화합의 공간인 것이다. 반대로 가치와 노선이 갈등을 겪고 충돌하는 장소다. 그래서 광장은 조용하기보다는 시끌벅적하다. 간결하기보다는 어수선하다. 때로는 분노의 절규가, 때로는 기쁨의 함성이 뒤덮는다. 광화문광장도 그랬다. 메르스가 전국을 휩쓸 때 광장은 텅 비었다. 간혹 나온 시민들은 정부의 초동 대응에 항의하려는 듯 ‘불신의 마스크’를 쓰기도 했다. 재앙이었다. 광화문광장에는 감격의 함성이 있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빛(光)이 된(化) 곳에 시민들이 나와 경축했다. 대형 태극기가 만들어지고 파도 타기 이벤트가 펼쳐졌다. 멋진 공연도 진행됐다. 모두 어울려 축제를 즐겼다. 광복 70년, 한·일 수교 50년, 한·일 관계는 아직도 과거사에 막혀 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찬반 논쟁도 치열했다. 촛불이 켜졌다. 집필 거부도 잇따랐다. 정부는 계획대로 교과서 집필에 착수했다. 그런데 국정·검인정을 떠나 정작 가르치는 주체인 교사가 공론장에서 제외됐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넘지 못한다고 했다. 광화문광장은 한때 아수라장이 됐다. 경찰은 차벽을 쳤고, 민중총궐기 참가자들은 경찰 버스를 밧줄로 끌어내려 했다. 복면이 등장했다. 물대포가 발사되고 참가자가 쓰러졌다. 싸움판으로 바뀌었다. 광장은 찢기고 부서졌다. 날 선 주장만 난무했다. 귀를 기울이는 쪽이 없었다. 볼테르의 “부싯돌은 부딪쳐야 빛이 난다. 서로 다른 견해가 부딪칠 때 진리가 스스로 드러난다”는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광화문광장은 병신년 새해를 맞는다. 풀리지 않은, 풀었어야 할 일도 또 한 해를 넘는다. 지난 일들을 돌아보는 이유다. 세월호가 침몰한 지도 햇수로 세야 할 지경이다. 미수습자 9명과 선체는 아직도 바닷속에 있다.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첫 청문회는 큰 성과 없이 끝났다. 기업의 탐욕이 부른 인재에서 비롯돼 행정의 무능이 부른 관재(官災)임에도 “잘못했다”는 공무원은 없었다. 이 때문에 진상 규명이 이뤄지거나 약속되지 않는 한 광장에서의 분향소 존치 논란은 계속될 것이다. 광화문광장에 45.815m 높이의 태극기 게양대 설치를 둘러싼 국가보훈처와 서울시의 다툼도 끝나지 않았다. 보훈처는 국무총리실에 행정협의조정을 요청했다. 태극기의 상징성, 정체성은 크기와 규모가 아닌 주변 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높이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광화문광장에는 정치가 있다. 제20대 4·13 총선이 치러진다. 국회의원 후보들은 광장에서 지지와 함께 선택을 호소할 것이다. 광장은 정치의 장이 된다. 청년실업률 9%, 가계빚 1200조원, 임금불평등, 양극화, 저출산·고령화 등 갖가지 민생 현안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세종대왕이 바른 정치로 여긴 백성을 편안케 하는 안민(安民)을 요구하는 것과 같다. 좋은 정치란 국민의 이해와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책임지는 정치라고 할 수 있다. 또 협상과 타협이 있는 감동의 정치다. 광장에는 벽이 없다. 누구든 접근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통로인 까닭이다. 을미년 세밑에 혼돈이 아닌 질서가, 절규 아닌 함성이 있고, 소시민적 권리가 보장되는 활기찬 광장을 그려 본다. 광화문광장의 삶은 찾는 시민의 몫이다. hkpark@seoul.co.kr
  • [씨줄날줄] 태극기 게양대 논란/박홍기 논설위원

    때아닌 태극기 게양대 논란이 심상찮다. 휘날리는 태극기는 아름답다. 보는 것 자체로도 뿌듯하다. 국가에 대한 자긍심이 우러난다. 국기법 제1조는 ‘대한민국의 상징’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5조는 ‘모든 국민은 국기를 존중하고 애호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태극기는 곧 대한민국의 엠블럼이다. 다툼의 주체는 국가보훈처와 서울시다. 쟁점은 게양대의 위치다. 태극기를 어디에 다느냐다. 보훈처가 제시한 장소는 수도 서울 한복판인 광화문광장이다. 2009년 8월 1일 서울의 중심 세종로를 차량 중심에서 인간 중심 공간으로 바꾼 ‘한국의 대표 광장’, ‘도심 속의 광장’, ‘도시문화 광장’이다. 보훈처는 지난 6월 광복 70주년 기념사업을 위해 서울시와의 협약서(MOU)에 서명한 뒤 광화문광장에 게양대를 세우는 사업을 추진했다. 세종대왕 동상 뒤편이다. 광화문광장은 서울시가 관리하는 곳이다. 태극기를 광화문광장에 영구 게양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에서다. 애초 게양대의 높이도 광복 70주년에 걸맞게 70m를 계획했다가 서울시가 난색을 표명하자 광복절을 의미하는 45.815m로 줄였다. 서울시는 지난달 말 “광화문광장 대형 태극기 상시 설치를 거부한다”는 불가 입장을 보훈처 측에 전달했다. 영구 설치는 시민들 정서에 맞지 않고 주변 경관과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의 회의 결과를 근거로 댔다. 정부서울청사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 정부 시설 부지 내 설치를 대안으로 내놨다. 게다가 광화문광장이 필요하다면 내년 3월까지라는 한시적 조건을 달았다. 회의에서는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라는 목소리까지 나왔다고 한다.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다. 찬반 의견이 뜨겁다. 한쪽에서는 “서울시가 독립공화국이냐”, 다른 쪽에서는 “권위적 시대로의 회귀, 전근대적”이라며 맞서고 있다. 새누리당도 보훈처를 거들고 나섰다. 새누리당은 어제 “박원순 서울시장의 국가관에 대한 의심을 거둘 수 없다”며 서울시의 협조를 촉구했다. 광화문광장 주변에는 항상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다. 국기법 제8조에 의거해서다. 광화문광장을 둘러보다 보면 태극기 게양 논란의 인식 강도에 따라 “참 많구나”, “참 적구나”라고 느낄 것이다. 의식하면 할수록 더 눈에 잘 띈다. 컬러배스(color bath) 효과다. 미국 워싱턴 내셔널몰 앞에는 대형 성조기가 물결을 이루고 있다. 스페인 마드리드 시벨레스 광장 분수대 주변도 마찬가지다. 중국 톈안먼 광장에는 대형 오성기 게양대가 있다. 그러나 나라마다 게양대의 위치나 높이는 다르다. 국가 정체성이나 자존감과는 별개다. 때문에 서울시의 입장도 일리 있다. 보훈처도 다시 심사숙고해봄 직하다. 현명할 필요가 있다. 정치 쟁점화는 바람직하지 않다. 서울시와 보훈처가 만나 대화하기를 바란다. 박홍기 논설위원 hkpark@seoul.co.kr
  • 해사 광장에 세워진 ‘활 잡은’ 충무공

    해사 광장에 세워진 ‘활 잡은’ 충무공

    임진왜란 당시 실전에서 썼던 형태의 칼과 활로 무장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해군사관학교에 세워졌다. 그동안 칼을 찬 형태의 이순신 동상은 많았지만 조선군의 대표적 무기인 활까지 들고 있는 동상은 이번이 처음이다. 해군은 27일 충무공 탄신 470주년 및 해군 창설 70주년을 맞아 정호섭 해군참모총장 주관으로 경남 진해 해군사관학교 충무광장에서 ‘충무공 이순신 동상 제막식’을 거행했다. 이번 이순신 동상은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을 만든 김영원 한국조각가협회 명예회장이 제작했다. 4.97m 높이(좌대 포함 11.11m)의 이 동상은 이순신 장군이 오른손에 등채(조선시대 무관의 말 채찍)를 들고 삼도 수군을 지휘하는 모습이다. 허리에는 실전용 조선 환도(環刀)를 찬 상태에서 왼손에는 활을 들고, 등에 화살통을 멨다. 장군의 얼굴은 표준 영정과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에 묘사된 온화한 선비 얼굴에 가깝게 재현했다. 동상 제작 자문위원인 이민웅 해사 교수(국사학)는 “기존 이순신 동상이 칼을 들고 있는 것은 무인의 특징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라며 “난중일기를 보면 장군은 늘 활쏘기 연습에 매진했고 부하들에게도 활로 사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쳐 원거리 무기인 활을 든 모습이 더 적절하다”고 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569돌 한글날 축하해요”

    “569돌 한글날 축하해요”

    한글날을 하루 앞둔 8일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세종학당의 우수 한국어 학습자들이 전통 의상을 입고 한글날 축하 번개 모임을 하고 있다. 모임에는 문화체육관광부와 세종학당재단이 46개국에서 초청한 150명이 참석했다. 세종학당은 각 나라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보급한다. 손형준 기자 boltagoo@seoul.co.kr
  • 종로 “한가위엔 역시 한복이죠”

    종로 “한가위엔 역시 한복이죠”

    “우리 고유 명절, 우리 옷 전통 한복과 함께해요.” 24일 오전, 종로 광화문광장에 멋스러운 한복을 차려입은 100여명의 시민이 피켓을 들고 모였다. 색색의 고운 한복에 지나가는 이들마다 시선이 멈췄다. 종로구가 한복의 우수성과 전통문화를 알리고자 ‘한복 입기 퍼레이드 및 캠페인’을 실시한 것이다. 행사에는 구 관계자와 구의회 의원, 새마을지회 회원 등이 모였다. 지역 어린이집의 아동 30여명도 앙증맞은 한복 차림으로 전통문화 홍보에 나섰다. 구는 2012년부터 명절마다 한복 입기 캠페인을 해오고 있다. 한복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것으로 알려진 김영종 종로구청장도 이날 검정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나타났다. 김 구청장은 “우리가 먼저 우리 것을 지키자는 취지에서 한복을 입고 명절 맞이 캠페인을 하게 됐다”면서 “한복을 입으면 행동도 성숙해지기 때문에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도 좋다”고 권했다. 캠페인단은 ‘아름다운 우리 옷 한복 입고 풍요롭고 훈훈한 추석 보내세요’ 등의 글귀가 적힌 피켓을 들고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기념식을 가졌다. 이후 광화문 사거리를 지나 세종문화회관까지 행진하며 퍼레이드를 펼쳤다. 외국인들도 가던 발길을 멈추고 촬영을 하는 등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일주일간 서울 여행을 왔다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옥사나(37·여)는 “정말 아름다운 광경”이라며 “한복도 예쁘지만 자국의 전통을 지켜 나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라고 말했다. 김 구청장은 “양복에 익숙해져 처음에는 한복이 다소 불편하더라도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이어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지숙 기자 truth173@seoul.co.kr
  • ‘얼룩덜룩’ 방치된 남산공원 백범 동상

    ‘얼룩덜룩’ 방치된 남산공원 백범 동상

    광복 7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조명하고 기념하는 행사들이 잇따르고 있지만 정작 서울 시내에 세워진 독립운동가 동상은 새똥과 쓰레기 등의 각종 오물 속에서 악취를 풍기는 등 관리 사각지대에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21일 현재 서울시 각 공공부지에 설치된 동상은 모두 56개지만 관리 주체는 서울시와 자치구, 시설공단, 문화재청 등으로 쪼개져 있다. 이런 가운데 상당수 동상이 흉물처럼 방치돼 있다. 1969년 중구 회현동 남산공원에 세워진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도 곳곳이 부식돼 있다. 미술작품 보존가 권모씨는 “김구 동상의 경우 청동 안에 있는 여러 금속물이 부식되면서 얼룩덜룩 녹이 슨 상태”라고 진단했다. 김구 선생 동상의 관리 주체는 서울시이지만 예산 부족 등을 이유로 수년째 왁스 처리 등 보존 처리가 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시 동상 관리 기준 관련 조례에는 공공용지 내 동상의 경우 연 1회 상태 점검을 하고 시가 직접 관리하는 동상이 아니더라도 동상 관리를 지도하도록 규정돼 있지만 지켜지지 않고 있다. 옛 서울역사 앞에 세워진 강우규 의사 동상도 흉물처럼 방치돼 있다. 강우규 의사는 1919년 9월 2일 서울역 광장에서 일본인 총독을 향해 수류탄을 던진 독립투사로, 2011년 9월 2일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 측이 동상을 건립했다. 두루마기 차림에 오른손으로 수류탄을 투척하는 모습으로 만들어진 이 동상은 인근 노숙인들이 남긴 방뇨 자국과 새똥이 묻은 채 방치돼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관계자는 “서울시가 광화문처럼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장소에 있는 세종대왕상이나 이순신 장군상에 대해서는 매년 수천만원의 예산을 들여 관리하고 있지만 외진 공원에 있거나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의 동상 관리는 소홀히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동상의 인물 모두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분들인데 관리에는 차별을 두고 있는 셈”이라고 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각각의 관리 주체가 예산을 확보해 관리해야 하는데 동상 같은 경우 한번 만들어 두면 영구히 보존된다고 오인해 예산 우선순위 대상에서 밀리는 게 현실”이라고 털어놨다. 이 관계자는 “이번 기회에 서울 시내 전체 동상에 대해 전문가 점검을 실시해 상황이 심각한 동상부터 예산을 배정해 관리를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글 사진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막걸리 한잔 박정희·자전거 탄 노무현… ‘미니 청와대’서 다시 보는 역대 대통령

    막걸리 한잔 박정희·자전거 탄 노무현… ‘미니 청와대’서 다시 보는 역대 대통령

    충북도 청남대관리사업소가 4일 청남대 대통령기념관에서 대통령 기록 사업 준공식을 한다. 109억원이 투입된 이 사업은 대통령기념관, 대통령 역사 기록화, 대통령 동상 등 세 가지로 진행됐다. 실제 청와대의 60% 크기인 대통령 기념관은 7100㎡ 부지에 연면적 2837㎡(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졌다. 푸른색 기와 등 겉모습은 청와대와 같다. 지하 1층에는 정상회담 등 대통령의 일상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과 실제와 똑같이 꾸며 놓은 세종시 국무회의장 등이 마련됐다. 지상 1층에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이명박 대통령까지 역대 대통령 10명의 업적과 생애를 각각 담은 가로 3m, 세로 2m의 초대형 그림 20점이 진열됐다. 이 작업에는 20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대통령 전용 별장이던 청남대를 민간에 돌려준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세종시 건설과 남북 정상회담, 소박하게 자전거를 타는 모습 등이 그림에 담겼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농촌에서 막걸리를 마시는 장면 등이 그려졌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6·29선언과 국방외교, 올림픽 개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외환위기 청산과 6·15 남북 공동선언,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야당 총재 시절 민주산악회 활동 모습과 금융실명제 등이 그림으로 기록됐다. 20억원이 투입된 역대 대통령 10명의 동상은 청동으로 제작돼 대통령기념관 주변에 배치됐다. 230㎝ 높이로 만들어진 동상은 관람객들의 눈높이에 맞춰 국민과 소통하려는 온화한 대통령의 모습을 표현했다. 광화문 세종대왕 조각상으로 유명한 김영원 작가가 맡았다. 이시종 지사는 “청남대가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헌신한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하는 차별성 있는 문화 공간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청댐 인근인 청주시 문의면에 위치한 청남대는 1984년부터 2003년까지 대통령 전용 별장으로 사용됐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밀리터리 인사이드] 이순신만 아는 당신을 위한 전쟁영웅 이야기

    [밀리터리 인사이드] 이순신만 아는 당신을 위한 전쟁영웅 이야기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죠. 그렇다면 여러분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전쟁영웅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나요. 이런 질문을 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부터 거론할 겁니다. 풍전등화의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지금도 성웅(聖雄)으로 불리는 존경받는 위인이죠. 하지만 교과서에 단 한 줄만 언급된, 아니 우리가 따분하다고 덮어버린 역사책 속에 숨겨진 전쟁영웅은 수없이 많습니다. 저는 이번에 우리가 몰랐거나 지나쳤던 6·25 전쟁의 영웅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독일의 영웅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처럼 웅장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치고 각박한 삶이지만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해 준 그분들을 한번 쯤은 되새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국민 성금으로 산 중고 초계정, 첫 승전보를 올리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19만명(한국군 10만명)의 병력과 소련이 제공한 T-34 전차 240여대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불과 사흘만인 28일 수도 서울을 빼앗게 됩니다. 전차는 커녕 변변한 대전차 무기조차 갖추지 못한 우리 군은 눈물을 머금고 후퇴를 거듭할 수 밖에 없었는데요. 전쟁발발 다음날 깜짝 놀랄 만한 승전보가 전해졌습니다. 전쟁 직전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과 해군 지휘부는 장병들의 월급과 국민 성금 1만 5000달러와 정부지원금 4만 5000달러를 합한 6만 달러를 들여 미 해군의 450t급 중고 초계정을 구입했는데요. 초계정은 연안을 감시하는 작은 전투함입니다. 참고로 우리 최신 이지스함 세종대왕함 배수량이 7500t(만재 배수량 1만t)이니 정말 작은 함정이죠. 선박이 진해 해군기지에 들어온 시기가 전쟁 발발 불과 두 달 전인 4월 10일입니다. 무장조차 없었던 선박에 3인치 함포 1문과 포탄 100발을 어렵게 갖췄습니다. 드디어 27일에는 ‘PC-701’이라는 함명을 받고 ‘백두산함’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전쟁 당일 진해 해군본부는 백두산함에 동해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백두산함은 초계임무 중 울산 앞바다에서 덩치가 두 배인 1000t급 괴선박을 발견합니다. 깃발이나 표식이 없었지만 함정을 북한군 상륙함으로 판단한 백두산함 지휘부는 해군본부로 “600명의 북한군이 승선한 채 전속력으로 남하하고 있다”고 긴급보고했습니다. 부산항을 노려 남하한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위협사격을 가하자 적선이 중기관총과 주포로 대응했고, 곧 백두산함의 3인치 주포가 불을 뿜었습니다. 4시간의 교전 끝에 26일 오전 1시 30분쯤 적선은 포탄에 명중돼 물 속으로 가라앉았고, ‘대한해협 해전’이라는 이름으로 6·25 전쟁 첫 승전으로 기록됐습니다. 치열한 교전 끝에 장전수 전병익 중사, 조타수 김창학 하사가 전사했습니다. 김창학 하사는 침몰 위기에 놓인 적함이 집중적으로 조타실을 공격해 중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조타실 키를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백두산함 함장이었던 최용남 중령은 태극무공훈장을 받았고, 소장으로 진급해 해병대 1사단장에 오른 뒤 1998년 타계했습니다. ●수류탄과 화염병 뿐…적의 자주포를 육탄공격하다 6·25 전쟁 영웅으로 또 심일 소령이 있습니다. 심 소령은 함경남도 단천군 출신으로, 서울대 사범대 재학 중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한 당시로서는 엘리트 군인이었는데요. 전쟁 발발 당일 6사단 7연대 대전차포대 2소대장(소위)으로, 춘천·홍천지구 전투에서 남하하는 10여대의 SU-76 자주포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적이 가까이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2문의 57mm 대전차포 발사를 명령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죠. SU-76은 이름만 자주포이지 전면에 35mm 장갑을 갖춰 당시 우리 군 입장엔 전차나 다름없었습니다. 초라한 무기에 좌절감을 느낀 것도 잠시, 그는 포탑을 돌리지 못하는 자주포의 특성상 좌우 측면이 취약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5명의 특공대를 편성합니다. 이어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적의 포탑 위로 돌진하는 육탄 공격을 감행해 자주포 3대를 격파하는 성과를 거뒀죠. 이런 방식은 전차에 대한 공포심을 사라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전선 곳곳에서 적 전차를 효과적으로 저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이후 충북 음성군, 경북 영천군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에 잇따라 참전했고 1951년 1월 26일 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강원 영월군에서 정찰 활동을 하던 중 북한군의 총에 맞아 안타깝게 전사했습니다. 심 소령에게는 사후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됐습니다. 심 소령의 동생으로 셋째 동생 심익은 1952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실종됐고, 경찰관이었던 둘째 동생 심민은 1960년 32세의 나이로 과로사하는 아픈 가족사를 남겼습니다. 보훈처는 올해 6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세 형제의 어머니인 고(故) 조보배 여사를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훈장 하나 못 받았지만…북한군 간담을 서늘하게 한 ’구월산 여장군’ 여성 전쟁영웅으로는 ‘구월산 여장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이정숙 여성유격대원이 있습니다. 그의 활약상은 1965년 최무룡 감독의 영화 ‘피어린 구월산’과 고우영 화백의 만화 ‘구월산 유격대’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는데요. 6·25 전쟁 직전 북한군에 의해 부모와 남편을 잃은 그는 1950년 10월 황해도 안악군에서 처음 ‘서하무장대’를 결성, 적의 후방에서 게릴라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후 그는 중공군에게 많은 부하를 잃고 고향 황해도로 돌아온 육군본부 김종벽 대위의 ‘구월산 유격대’에 합류했고, 김 대위의 보좌관으로 많은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1951년 1·4 후퇴 당시에도 후퇴하지 않고 구월산에 남았는데요. 제대로 된 보급을 받지도 못한 채 적의 후방을 기습공격해 탈취한 물자로 생존해야 했지만 늘 그들의 가슴은 뜨거웠습니다. 같은 달 18일 고립된 재령유격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촌부로 가장한 채 밤새 100여 리를 걸어 적 포위망을 뚫고 89명을 구출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올해 여군으로는 처음으로 보훈처가 선정한 2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됐습니다. 지금도 일부 대원이 생존해 있지만 유격대를 이끌던 이정숙씨조차 훈장하나 받지 못했고 올해 뒤늦게 아들이자 구월산유격대 청장년회장인 김광인(60)씨가 참전 유공자 증서를 받았습니다. 6·25 전쟁 훈·포장은 1953년 12월 31일부로 종결한다는 이승만 정부 당시 법 조항이 걸림돌이 됐다고 합니다. 북한이 2013년 42일간 억류했다가 추방한 미국인 메릴 뉴먼(당시 85세)씨는 6·25 전쟁 당시 이 구월산 유격대와 함께 활동했다고 밝히면서 유격대의 활약상에 관심이 집중됐는데요. 그는 추방 뒤 공식 성명을 통해 북한 가이드에게 구월산 유격대원 생존 여부를 묻고 “구월산도 가고 싶다”고 말했다가 오해를 받고 억류됐다고 밝혔습니다. 6·25 전쟁에서는 유엔군, 특히 압도적 다수였던 미군의 희생도 많았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흥남철수’도 사실 미군이 목숨을 걸고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해 이뤄졌습니다. 역사상 미군이 가장 고전한 전투 중 하나인 ‘장진호 전투’입니다. 당시엔 미국 언론의 조롱까지 받았지만 종전 후에는 전략적으로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군과 미군은 압록강을 목표로 북진을 거듭했죠. 동부전선을 맡았던 미 10군단은 1950년 11월 해병대 1사단을 주력으로 한국군과 함께 함경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이미 중공군이 장진호 북쪽까지 진출한 상태였고, 병력은 1만 5000명인 한미 연합군의 8배에 가까운 12만명에 달했습니다. 7개 사단으로 구성된 중공군 제9병단은 미군이 주력인 연합군을 장진호 계곡으로 몰아넣고 섬멸작전에 돌입했습니다. ●중공군에 패해 후퇴하면서도 피난민을 구한 그들 11~12월 이 지역에는 영하 20~32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해발 1000m 산악지대여서 살을 에는 추위가 전투만큼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전체 미 해병대 1사단 사상자 7200명의 절반인 3600명이 동상으로 쓰러졌을 정도였습니다. 부상자에게 사용할 약품이 얼어터지고 총은 사용하지 않으면 얼어붙어 작동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니 당시 추위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수준이었을 겁니다.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청하고 싶었겠지만 중공군의 기습을 대비해야 해 강제로 지퍼를 올리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군을 에워싸고 단숨에 전멸시킬 기세였던 중공군은 미 해병대의 악착같은 반격에 사망자만 2만 5000명, 부상자 1만 2500명의 극심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결국 중공군 제9병단은 이곳 동부전선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어 서부전선의 제13병단과 합류하지 못하고 부대 재편을 위해 휴식기를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공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성공적으로 후퇴해 흥남에 도착한 미군은 전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결정을 했습니다. 김백일 1군단장과 의사 출신 민간인 고문관 현봉학씨의 설득으로 에드워드 알몬드 미 10군단장이 민간인 피난민까지 모두 철수시키기로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공로로 현씨는 ‘한국의 쉰들러’라는 별명을 얻었죠. 그는 종전 뒤 미국 버지니아대, 콜롬비아대, 펜실베니아대에서 의대 교수로 활약, 의학 발전에 공헌했고 2007년 미국 뉴저지주 뮐렌버그병원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부두를 떠날 때 미군이 시설과 군수 물자를 폭파하면서 일부 민간인이 희생돼 논쟁이 있긴 합니다만, 흥남 철수 작전은 2차 세계대전의 ‘됭케르크 철수 작전’과 더불어 가장 성공한 철수 작전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흥남 철수 당시 피난민들을 도왔던 또 한 명의 영웅이 있는데요. 라루 선장은 배에 실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1만 4000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인원의 피난민을 태우라고 지시합니다. 가장 많은 사람을 구한 배로 기네스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죠. 배 안에서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날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후 아픔을 겪은 한국인들을 떠올리며 ‘마리너스’라는 이름을 얻어 가톨릭 수도회인 베네딕토회 수사가 됐습니다. 그는 당시 항해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그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 위에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가 내게 와 있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밀리터리 인사이드] 이순신 장군만 아는 당신을 위한 전쟁영웅 이야기

    [밀리터리 인사이드] 이순신 장군만 아는 당신을 위한 전쟁영웅 이야기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의미를 담고 있죠. 그렇다면 여러분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전쟁영웅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나요. 이런 질문을 하면 대다수 사람들은 ‘이순신 장군’부터 거론할 겁니다. 풍전등화의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지금도 성웅(聖雄)으로 불리는 존경받는 위인이죠. 하지만 교과서에 단 한 줄만 언급된, 아니 우리가 따분하다고 덮어버린 역사책 속에 숨겨진 전쟁영웅은 수없이 많습니다. 저는 이번에 우리가 몰랐거나 지나쳤던 6·25 전쟁의 영웅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독일의 영웅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처럼 웅장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치고 각박한 삶이지만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해 준 그분들을 한번 쯤은 되새길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국민 성금으로 산 중고 초계정, 첫 승전보를 올리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19만명(한국군 10만명)의 병력과 소련이 제공한 T-34 전차 240여대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불과 사흘만인 28일 수도 서울을 빼앗게 됩니다. 전차는 커녕 변변한 대전차 무기조차 갖추지 못한 우리 군은 눈물을 머금고 후퇴를 거듭할 수 밖에 없었는데요. 전쟁발발 다음날 깜짝 놀랄 만한 승전보가 전해졌습니다. 전쟁 직전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과 해군 지휘부는 장병들의 월급과 국민 성금 1만 5000달러와 정부지원금 4만 5000달러를 합한 6만 달러를 들여 미 해군의 450t급 중고 초계정을 구입했는데요. 초계정은 연안을 감시하는 작은 전투함입니다. 참고로 우리 최신 이지스함 세종대왕함 배수량이 7500t(만재 배수량 1만t)이니 정말 작은 함정이죠. 선박이 진해 해군기지에 들어온 시기가 전쟁 발발 불과 두 달 전인 4월 10일입니다. 무장조차 없었던 선박에 3인치 함포 1문과 포탄 100발을 어렵게 갖췄습니다. 드디어 27일에는 ‘PC-701’이라는 함명을 받고 ‘백두산함’으로 불리게 됐습니다. 전쟁 당일 진해 해군본부는 백두산함에 동해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백두산함은 초계임무 중 울산 앞바다에서 덩치가 두 배인 1000t급 괴선박을 발견합니다. 깃발이나 표식이 없었지만 함정을 북한군 상륙함으로 판단한 백두산함 지휘부는 해군본부로 “600명의 북한군이 승선한 채 전속력으로 남하하고 있다”고 긴급보고했습니다. 부산항을 노려 남하한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위협사격을 가하자 적선이 중기관총과 주포로 대응했고, 곧 백두산함의 3인치 주포가 불을 뿜었습니다. 4시간의 교전 끝에 26일 오전 1시 30분쯤 적선은 포탄에 명중돼 물 속으로 가라앉았고, ‘대한해협 해전’이라는 이름으로 6·25 전쟁 첫 승전으로 기록됐습니다. 치열한 교전 끝에 장전수 전병익 중사, 조타수 김창학 하사가 전사했습니다. 김창학 하사는 침몰 위기에 놓인 적함이 집중적으로 조타실을 공격해 중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조타실 키를 놓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백두산함 함장이었던 최용남 중령은 태극무공훈장을 받았고, 소장으로 진급해 해병대 1사단장에 오른 뒤 1998년 타계했습니다. ●수류탄과 화염병 뿐…적의 자주포를 육탄공격하다 6·25 전쟁 영웅으로 또 심일 소령이 있습니다. 심 소령은 함경남도 단천군 출신으로, 서울대 사범대 재학 중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한 당시로서는 엘리트 군인이었는데요. 전쟁 발발 당일 6사단 7연대 대전차포대 2소대장(소위)으로, 춘천·홍천지구 전투에서 남하하는 10여대의 SU-76 자주포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적이 가까이 다가오길 기다렸다가 2문의 57mm 대전차포 발사를 명령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런 피해도 입히지 못했죠. SU-76은 이름만 자주포이지 전면에 35mm 장갑을 갖춰 당시 우리 군 입장엔 전차나 다름없었습니다. 초라한 무기에 좌절감을 느낀 것도 잠시, 그는 포탑을 돌리지 못하는 자주포의 특성상 좌우 측면이 취약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5명의 특공대를 편성합니다. 이어 수류탄과 화염병을 들고 적의 포탑 위로 돌진하는 육탄 공격을 감행해 자주포 3대를 격파하는 성과를 거뒀죠. 이런 방식은 전차에 대한 공포심을 사라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전선 곳곳에서 적 전차를 효과적으로 저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이후 충북 음성군, 경북 영천군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에 잇따라 참전했고 1951년 1월 26일 7사단 수색중대장으로 강원 영월군에서 정찰 활동을 하던 중 북한군의 총에 맞아 안타깝게 전사했습니다. 심 소령에게는 사후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됐습니다. 심 소령의 동생으로 셋째 동생 심익은 1952년 17세의 어린 나이로 학도병으로 참전했다가 실종됐고, 경찰관이었던 둘째 동생 심민은 1960년 32세의 나이로 과로사하는 아픈 가족사를 남겼습니다. 보훈처는 올해 6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세 형제의 어머니인 고(故) 조보배 여사를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훈장 하나 못 받았지만…북한군 간담을 서늘하게 한 ’구월산 여장군’ 여성 전쟁영웅으로는 ‘구월산 여장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이정숙 여성유격대원이 있습니다. 그의 활약상은 1965년 최무룡 감독의 영화 ‘피어린 구월산’과 고우영 화백의 만화 ‘구월산 유격대’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는데요. 6·25 전쟁 직전 북한군에 의해 부모와 남편을 잃은 그는 1950년 10월 황해도 안악군에서 처음 ‘서하무장대’를 결성, 적의 후방에서 게릴라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후 그는 중공군에게 많은 부하를 잃고 고향 황해도로 돌아온 육군본부 김종벽 대위의 ‘구월산 유격대’에 합류했고, 김 대위의 보좌관으로 많은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1951년 1·4 후퇴 당시에도 후퇴하지 않고 구월산에 남았는데요. 제대로 된 보급을 받지도 못한 채 적의 후방을 기습공격해 탈취한 물자로 생존해야 했지만 늘 그들의 가슴은 뜨거웠습니다. 같은 달 18일 고립된 재령유격부대를 구출하기 위해 촌부로 가장한 채 밤새 100여 리를 걸어 적 포위망을 뚫고 89명을 구출하는 전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올해 여군으로는 처음으로 보훈처가 선정한 2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됐습니다. 지금도 일부 대원이 생존해 있지만 유격대를 이끌던 이정숙씨조차 훈장하나 받지 못했고 올해 뒤늦게 아들이자 구월산유격대 청장년회장인 김광인(60)씨가 참전 유공자 증서를 받았습니다. 6·25 전쟁 훈·포장은 1953년 12월 31일부로 종결한다는 이승만 정부 당시 법 조항이 걸림돌이 됐다고 합니다. 북한이 2013년 42일간 억류했다가 추방한 미국인 메릴 뉴먼(당시 85세)씨는 6·25 전쟁 당시 이 구월산 유격대와 함께 활동했다고 밝히면서 유격대의 활약상에 관심이 집중됐는데요. 그는 추방 뒤 공식 성명을 통해 북한 가이드에게 구월산 유격대원 생존 여부를 묻고 “구월산도 가고 싶다”고 말했다가 오해를 받고 억류됐다고 밝혔습니다. 6·25 전쟁에서는 유엔군, 특히 압도적 다수였던 미군의 희생도 많았습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흥남철수’도 사실 미군이 목숨을 걸고 중공군의 진격을 저지해 이뤄졌습니다. 역사상 미군이 가장 고전한 전투 중 하나인 ‘장진호 전투’입니다. 당시엔 미국 언론의 조롱까지 받았지만 종전 후에는 전략적으로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한국군과 미군은 압록강을 목표로 북진을 거듭했죠. 동부전선을 맡았던 미 10군단은 1950년 11월 해병대 1사단을 주력으로 한국군과 함께 함경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이 때 이미 중공군이 장진호 북쪽까지 진출한 상태였고, 병력은 1만 5000명인 한미 연합군의 8배에 가까운 12만명에 달했습니다. 7개 사단으로 구성된 중공군 제9병단은 미군이 주력인 연합군을 장진호 계곡으로 몰아넣고 섬멸작전에 돌입했습니다. ●중공군에 패해 후퇴하면서도 피난민을 구한 그들 11~12월 이 지역에는 영하 20~32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해발 1000m 산악지대여서 살을 에는 추위가 전투만큼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전체 미 해병대 1사단 사상자 7200명의 절반인 3600명이 동상으로 쓰러졌을 정도였습니다. 부상자에게 사용할 약품이 얼어터지고 총은 사용하지 않으면 얼어붙어 작동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니 당시 추위는 우리의 상상을 넘어서는 수준이었을 겁니다.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청하고 싶었겠지만 중공군의 기습을 대비해야 해 강제로 지퍼를 올리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미군을 에워싸고 단숨에 전멸시킬 기세였던 중공군은 미 해병대의 악착같은 반격에 사망자만 2만 5000명, 부상자 1만 2500명의 극심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결국 중공군 제9병단은 이곳 동부전선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어 서부전선의 제13병단과 합류하지 못하고 부대 재편을 위해 휴식기를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공군의 추격을 뿌리치고 성공적으로 후퇴해 흥남에 도착한 미군은 전세계가 깜짝 놀랄만한 결정을 했습니다. 김백일 1군단장과 의사 출신 민간인 고문관 현봉학씨의 설득으로 에드워드 알몬드 미 10군단장이 민간인 피난민까지 모두 철수시키기로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공로로 현씨는 ‘한국의 쉰들러’라는 별명을 얻었죠. 그는 종전 뒤 미국 버지니아대, 콜롬비아대, 펜실베니아대에서 의대 교수로 활약, 의학 발전에 공헌했고 2007년 미국 뉴저지주 뮐렌버그병원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부두를 떠날 때 미군이 시설과 군수 물자를 폭파하면서 일부 민간인이 희생돼 논쟁이 있긴 합니다만, 흥남 철수 작전은 2차 세계대전의 ‘됭케르크 철수 작전’과 더불어 가장 성공한 철수 작전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흥남 철수 당시 피난민들을 도왔던 또 한 명의 영웅이 있는데요. 라루 선장은 배에 실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1만 4000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인원의 피난민을 태우라고 지시합니다. 가장 많은 사람을 구한 배로 기네스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죠. 배 안에서 5명의 새 생명이 태어날 정도였습니다. 그는 이후 아픔을 겪은 한국인들을 떠올리며 ‘마리너스’라는 이름을 얻어 가톨릭 수도회인 베네딕토회 수사가 됐습니다. 그는 당시 항해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작은 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태울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한사람도 잃지 않고 그 끝없는 위험들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그해 크리스마스에 황량하고 차가운 한국의 바다 위에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 배의 키를 잡고 계셨다는 명확하고 틀림없는 메시지가 내게 와 있었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중국 관광객 “내가 왕이로소이다”

    중국 관광객 “내가 왕이로소이다”

    28일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관광객들이 무료 체험 궁중 복식을 입고 기념촬영을 하며 즐거워하고 있다. 강성남 선임기자 snk@seoul.co.kr
  • [시론] 광화문 -세월호 참사 1주년을 보내며/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시론] 광화문 -세월호 참사 1주년을 보내며/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필자가 사는 곳은 서울 하고도 신촌, 그곳에서 인사동 나가려면 반드시 광화문을 통과하게 된다. 글 쓰는 사람들 자주 모이는 곳이 바로 인사동이다. 그래서 광화문을 자주 보게 된다. 광화문, 밤의 광화문은 신비스럽다. 푸르스름해 보인다. 깊은 사연을 간직한 것 같다. 아마도 그곳에서 수많은 일들이 일어 났음을 필자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지난 한 해 동안 필자는 다른 때보다도 더 많이 광화문 앞에 갔던 것 같다. 이상하게도 인사동에 일이 많았고 뿐만 아니라 한밤에도, 새벽에도 잠 못 들거나 잠이 깨면 문득 광화문 생각이 났다. 그곳에 쳐져 있는 세월호 유족들 흰 천막이며 노란 리본이며 희생자들의 사진이 떠오르곤 했다. 한겨울 찬바람 부는 광화문은 그곳에 서 있는 이를 더 외롭게, 더 춥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슬픔은 필자 자신이 자식을 잃은 이들의 슬픔을 온전하게 나누어 질 수 없음을 알고 있는 데서 오는 피할 수 없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필자는 천막과 영정들이 있는 곳에 섰다 이순신 장군 동상을 우러러보고 또 세종대왕이 인자한 표정을 짓고 계신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 보기도 했다. 광화문 앞 광장은 춥디춥다. 텅 비어 있어 춥고, 찬바람이 대로 양쪽에 늘어선 빌딩 사이 광장으로 계곡바람처럼 세차게 흐르기 때문에 더 춥다. 4월 내내 그곳은 추웠다. 지금 책상 앞에 앉아서도 그곳을 생각하면 차갑고 슬픈 기운이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고 해결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아 더 막막하게 춥다. 며칠 전에는 그곳 광장에 버스 차벽이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길게 이어진 것을 보았고, 실시간으로 상황을 전달하는 인터넷 티브이를 통해 그곳에 무슨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았다. 그것은 참으로 이상한,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유족들과 시위하는 시민들과 공권력이 힘과 힘으로 맞서고 밀고 잡고 쏘고 함성을 지르는 광경은 얼마나 그로테스크한가. 긴 유족 행렬이 희생된 아이들의 영정을 들고 저 안산에서 여의도를 거쳐 서울까지 빗속을 걸어가는 광경은 얼마나 기이한가. 1년 365일 내내 광화문 광장에 흰 천막이 쳐지고 노란 리본이 사태처럼 피어 있고 만장을 닮은 플래카드가 바람에 퍼덕이는 모습은 얼마나 이상한가. 이 모든 풍경이 매일같이 컴퓨터 모니터와 텔레비전 브라운관으로 국내외 사람들에게 ‘생중계’되고 있다. 필자는 우리가 지금과 같은 역사적 경험을 적어도 한 번은 일찍이 경험했었다고 생각한다. 그때 비극의 진실에 접근하려는 사람들을 공권력은 결국 막아 내지 못했다. 더구나 지금은 희생된 아이들의 부모들이 전혀 의지를 거둘 생각이 없다. 한국 사회가 민주국가인 한 이 의지를 무력하게 만들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상하게도 필자는 벌써부터 용서니 화해니 하는 단어들을 떠올릴 때가 많다. 그러나 진실이 가려져 있는 한 그 어느 것도 가능하지 않다. 필자는 생각한다. 우리는 함께 이 세계를 살아내야 한다. 우리는 저 막막한 공간 어딘가로부터 이 세상으로 왔고 하필이면 이 한반도로 왔고 ‘곧’ 우리가 왔던 곳으로 다들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것을 삶과 죽음이라 하고, 우리는 이 한시적 세계에서 함께 호흡을 맞추며 살아 가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껏 가려져 있는 참사의 진실이 무엇이라 해도, 그것이 밝혀진 후에도 함께 문제를 풀어 갈 수 있는 지혜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필자는 벌써 그런 문제부터 생각하게 된다. 지난 한 해 동안 광화문에서 펼쳐진 일들은 얼마나 끔찍하고 부끄러운가. 이것을 누가 끝낼 수 있는가. 함께 참사의 진실을 찾고 그 진실에 성실하게 응답하려는 노력이 없는 한 광화문의 풍경은 계속될 것이다. 이 상황을 직시해야 한다. 지난 1년여의 긴 시간 동안 정부는 사태의 본질을 바로 보지 않고 어떻게든 회피하려 한 인상이 짙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는 돈의 문제로도, 이념 문제로도 풀 수 없다. 그런 방법들은 우리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 뿐 미봉책조차 되기 힘들 것이다. 진심과 성의만이 해결의 길임을 정부는 다시 헤아려 주기 바란다.
  • “주동자 처벌” vs “무차별 진압”… 상처뿐인 추모 집회

    “주동자 처벌” vs “무차별 진압”… 상처뿐인 추모 집회

    세월호 참사 1주년 후 열린 범국민대회 참가자 100명을 연행하며 강경 대응에 나선 경찰이 주동자 사법 처리와 민사상 손해배상 청구 의사를 분명히 했다. 경찰은 시위대가 과격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시위대 측은 경찰의 과잉진압을 문제 삼았다. 19일 경찰청은 브리핑을 통해 18일 열린 세월호 참사 범국민대회를 ‘불법 폭력 집회’로 규정, 주동자를 사법처리하고 집회를 주관한 세월호 국민대책회의 측에 경찰의 물적 피해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고 밝혔다. 서울지방경찰청에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나머지 15개 지방경찰청에도 수사전담반을 편성, 시위 주동자와 극렬 행위자를 끝까지 추적해 사법처리하겠다고 강조했다. 경찰은 유가족 21명을 포함한 100명을 연행했고, 19일 오전까지 유가족과 고등학생·환자 등 29명을 우선 석방한 뒤 71명에 대해 조사를 벌였다. 지난 18일 경찰은 경력 1만 3700여명과 트럭 18대를 비롯한 차량 470여대, 안전펜스 등을 동원해 경복궁 앞, 광화문 북측 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 세종로 사거리, 파이낸셜빌딩 등에 6겹으로 ‘차벽’을 설치해 범국민대회 참가자들의 이동을 차단했다. 서울광장에서 유가족들이 있는 광화문 누각으로 향하던 범국민대회 참가자 1만여명(경찰 추산)은 길을 가로막은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했고, 경찰은 캡사이신 최루액과 물대포를 분사하며 막았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시민 양측 모두 부상자가 속출했다. 경찰은 경찰관·의경 74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차량 71대, 캠코더 등 경찰장비 368점이 집회 참가자에게 빼앗기거나 파손됐다고 주장했다. 경찰이 뿌린 물대포에 넘어진 40대 남성은 무릎 뼈가 완전히 부서지는 부상을 입고 서울대 병원에서 수술을 받는 등 범국민대회 참석자 100여명도 크고 작은 부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의 변혜진 기획실장은 “경찰이 무차별적으로 캡사이신을 뿌리는 과정에서 눈과 피부가 약한 어린 아이들과 노인들이 부상을 입었다”고 설명했다. 민주노총은 성명을 내고 “4월 16일 이후 대한민국엔 진압과 검거밖에 모르는 경찰의 폭력만 있다”며 “유가족을 시민과 떼어 놓고 고립시켜 세월호 1주년으로 인한 정권의 부담을 덜고 진실마저 수장시키기 위한 의도로 판단된다”고 비난했다. 경찰은 “차벽을 허무는 등 참가자들이 예전 집회보다 격렬하고 과격한 모습을 보였다”면서 “차벽이 무너지면 바로 청와대에 접근하고 경찰과 몸싸움이 일어날 상황이었다”고 물대포 등을 사용한 배경을 설명했다. 한편 경찰의 차벽이 일반 시민들의 교통불편을 가중시켰다는 지적이 빗발쳤다. 서울 중구에 직장을 둔 김모(30·여)씨는 “종로구 청운동에서 을지로로 이동하는 데만 2시간이 걸렸다”면서 “길목마다 경찰이 길을 막고 있었고 우회하라고 지시한 도로마다 주차장처럼 차량들이 멈춰 있었다”고 말했다.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도 경찰이 집회의 자유를 침해한 것인지 정당한 진압을 위한 조치였는지에 관한 논란이 계속됐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400만원짜리 선크림’…이순신 장군 몸단장

    ‘400만원짜리 선크림’…이순신 장군 몸단장

    “쉽게 말해 자외선, 매연을 막으려 광화문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동상에 선크림을 바르는 셈이죠.” 13일 서울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의 세척을 지시하던 업체대표 박상규(50)씨는 “사실 1968년 세워진 이순신 장군 동상은 방치되다시피 했는데 2010년 서울시가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이후 매년 목욕을 하게 됐다”면서 “보수 이후 올해 처음으로 부식을 막기 위한 코팅을 한다”고 밝혔다. 시는 14일까지 이틀간 이순신 장군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을 세척한다. 자외선, 매연, 염화칼슘 등으로 인해 동이 부식되면서 물 세척만으로는 보존이 힘들다고 판단해 올해는 차단제를 바르게 됐다. 물 세척만 하던 예년에 600만원이 들던 비용은 1000만원으로 늘었다. 두 동상에 총 400만원어치 선크림을 바르는 셈이다. 박씨는 “매연이 많아지고 온도가 높아지는 환경오염 및 기후변화로 인해 이순신 장군 동상도 숨을 쉬기 힘든 셈”이라면서 “탈색된 부분의 색을 맞추는 작업이 가장 민감하고 힘들다”고 말했다. 이날 오전 8시에 시작된 세척 작업은 강한 압력의 물로 세척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후 중성세제를 섞은 물을 분사해 닦았고 걸레로 동상의 틈 사이를 닦아 냈다. 또 동상 전체를 알코올로 닦은 후 탈색이나 변색된 부분에 색을 분사해 덧입혔다. 색의 탈색 정도가 달라 곳곳에 알맞은 색을 내기 위해 물감을 10여번 섞는 것을 반복했다. 이후 선크림과 같은 역할을 하는 화학약품으로 만든 자외선 차단제를 바르고 광택을 냈다. 원래 자외선 차단제 처리는 14일 하려 했지만 비가 올 것으로 예보되면서 계획을 앞당겨 이날 마쳤다. 작업자는 10여명이 투입됐으며 10년 정도 된 직원부터 45년 경력자까지 다양했다. 한 직원은 “2010년 보수 당시 동상은 단지 시멘트 위에 올려놓은 상태로 강풍에 넘어질 수 있는 위험한 상태였다”면서 “현재는 철심을 지지대에 박아 강도 7의 지진에도 견디도록 했다”고 말했다. 높이 6.5m, 무게 8t에 이르는 동상은 당시 훼손 부위만 21곳에 달했다. 직원들은 우리나라 위인을 돌본다는 자부심이 강했다. 시 관계자는 “영화 ‘명량’ 개봉 이후 주말이면 동상과 함께 광화문 지하에 마련된 이순신기념관 ‘충무공이야기’를 찾는 이들이 크게 늘었다”면서 “15일부터 말끔해진 두 위인의 동상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이주일의 어린이 책] “우리 엄마가 변했어!” 쌍둥이 남매의 가출 소동

    [이주일의 어린이 책] “우리 엄마가 변했어!” 쌍둥이 남매의 가출 소동

    쌍둥이의 가출/정현정 지음/최덕규 그림/크레용하우스 출판/96쪽/9000원 ‘은별’이와 ‘은빛’이는 쌍둥이다. 5분 먼저 태어난 은빛이 오빠다. 최근 들어 엄마가 변했다. 날마다 야단을 친다. 글씨를 예쁘게 쓰지 못한다고, 책상을 어지럽게 어질러 놓는다고…. 사소한 일에도 일일이 화를 낸다. 자주 해 주던 고구마 맛탕이나 매콤달콤한 떡볶이 같은 간식도 해 주지 않는다. 아침마다 단정한 옷을 입고 정답게 말하던 엄마였는데 이제는 다 구겨진 헐렁한 원피스를 입고 짜장면 등 배달 음식만 시켜 주거나 식빵 사이에 치즈 한 장 달랑 넣어 준다. 급기야 엄마는 둘 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나가라고 소리친다. 둘은 가출을 결심한다. 장바구니에 옷이랑 돼지저금통을 넣고 집을 나간다. 저녁마다 엄마 아빠랑 산책하던 물빛내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다 자신들이 다니는 학교로 간다. 그네도 타고 목마도 탔지만 재미가 없다. 밤이 되자 학교는 춥고 무섭기만 하다. 세종대왕 동상이 살아 움직일 것 같고 누가 뒤따라오는 것만 같다. 쌍둥이는 너무 무서워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러다 은별이가 발이 꼬여 넘어지고 만다. 은별이는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그 순간 뒤에서 은별이를 부르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빠다. 쌍둥이는 아빠랑 함께 집에 돌아온다. 엄마를 보자마자 달려가 품에 안긴다. 쌍둥이는 엄마가 동생을 임신해 매일 잠만 자고 속이 메스꺼워 간식도 만들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자신만을 바라보며 지속적인 사랑과 관심을 쏟기를 바란다. 엄마나 아빠가 자신을 평소와 다르게 대하거나 애정을 쏟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면 자신을 싫어한다고 여긴다. 그러면서 ‘내가 만약 집을 나간다면 엄마와 아빠는 나를 걱정할까’라는 아이다운 생각을 한다. 은별이와 은빛이의 가출 얘기는 아이들에게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더 애틋하게 해 준다. 엄마가 바뀌게 된 비밀은 뭘까. 궁금증을 자아내는 구성이 읽는 재미를 더한다. 초등 저학년.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길섶에서] 동상(銅像) 유감/서동철 논설위원

    아침 신문에 서울 종로 사직단에 있는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의 동상이 갈 곳을 잃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사직단은 조선왕조의 제사 시설이지만, 제 모습을 잃은 지 오래다. 다행히 사직단 복원을 위한 발굴 작업이 내년 3~4월 시작된다고 한다. 집물고(什物庫) 같은 옛 건물터를 차지하고 있는 두 기의 동상은 옮길 수밖에 없다. 문제는 율곡과 그 어머니인 사임당과 인연이 깊은 장소는 동상을 받아들일 형편이 아니라는 데 있다. 사임당의 친정으로 율곡이 태어난 강원 강릉 오죽헌과 율곡 일가의 무덤이 있는 경기도 파주 자운서원에는 이미 세워졌거나 세워질 예정이다. 정 갈 곳이 없다면 파주의 또 다른 율곡 유적인 화석정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 집중적으로 세워진 역사 인물의 동상은 애물단지가 되고 있다. 하지만 갖가지 비판에도 하나쯤은 더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종대로에 세계 중심 문화국가로 일으켜 세운 세종대왕과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이순신 장군이 계시다면 세계로 영토의 지평을 넓힌 인물의 동상도 세우는 것이 진취적인 나라의 자세다. 주인공은 당연히 광대토대왕이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15) 서울시장(상)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15) 서울시장(상)

    ●관직명 판사-판부사-판윤-부윤-서울시장 등 13번 바뀌어 서울시장이란 어떤 자리인가. 서울의 역사는 기원전 18년 한성백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달빛 아래서 흐릿하게 나타나는 야사(野史)가 대부분이다. 대낮에 떳떳하게 펼칠 수 있는 정사(正史)는 조선 개국 이후로 봐야 한다. 당시 서울은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사실상 국가 그 자체였다. 서울이 조선이고, 조선이 곧 서울이었다. 서울은 한성 또는 한양이라고 불렸는데 한성부(漢城府)가 오늘의 서울시청이며, 한성판윤(漢城判尹)이 서울특별시장이다. 일제 식민 시기 서울은 경기도에 속한 일개 지방도시였고, 경성(京城)이라는 생소한 지명을 부여받았다. 제국의 유일한 수도는 도쿄(東京)였기에 조선 사람의 뇌리에서 수도의 위상을 지우려는 얄팍한 수작이었다. 서울시장의 지위 또한 경성부윤으로 깎아내렸다. 판윤(判尹)이라는 벼슬의 주인은 한성판윤 단 한 사람이었지만 부윤(府尹)은 여러 지방도시의 장(長) 중 한 명이었다. 나라를 되찾은 이후에야 서울과 서울시장은 어느 정도 권위를 회복했다. 한성판윤과 관선 시장이 왕조와 권위주의 시대 최고 권력자의 하수인 역을 주로 수행했다면 민선 자치 20주년을 앞둔 지금 서울시장의 주가는 상한가를 치고 있다. 누가 서울시장을 지냈으며 어떠한 족적을 남겼을까. 서울역사박물관이 1997년 발간한 ‘한성판윤전’에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추출해 정리한 ‘한성판윤 선생안’(先生案)이 수록돼 있다. 초대 성석린 판한성부사부터 민선 6기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에 이르기까지 620년 동안 거쳐간 1446명의 이름이 명멸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관직 이름도 판사-판부사-판윤-부윤-서울시장 등으로 13차례나 변경됐다. 실록에 한성판윤의 이·취임 내용이 누락돼 한성판윤을 역임하고도 수록되지 않은 인물이 적지 않았고, 너무 자주 바뀌었고 중임자가 많았던 점 등을 고려하면 숫자와 명단이 정확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또 일제강점기에 재임한 일본인 경성부윤 18명과 광복 이후 서울특별시의 관선 시장 29명과 민선 시장 5명도 포함된 숫자다. 이와 관련해 향토사학자 박희씨는 2005년 발표한 ‘역대 서울시장 연구’에서 “한성판윤을 포함한 서울시장은 모두 1427명이었으며 이명박 시장이 제2005대 서울시장”이라고 주장했다. 조선 중기 이언강이 무려 11차례나 중임한 것을 비롯해 한 사람이 여러 차례 시장에 재임한 사례가 의외로 많았다는 것이다. 박씨의 주장에 따르면 박원순 시장은 제2008대 서울시장이며 역대 서울시장을 지낸 사람은 모두 1429명이다. 최고 권력자로 따지면 역대 조선왕 27명과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 11명에 대통령직무대행 6명을 합쳐도 40여명에 불과하고,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는 영의정 165명과 조선 말 총리대신 및 의정대신은 물론 정부 수립 후 역대 국무총리 42명을 다 합쳐도 220명 남짓인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숫자다. ●한성판윤은 민선 서울시장보다 파워 막강했던 자리 조선의 중앙행정체제는 1부 6조 체제였다.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전원 일치 합의제 기구인 의정부(議政府) 아래 오늘의 정부 부처인 6조(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를 두었다. 현재의 부(部)를 조선시대에는 조(曹)라고 했다. 한때 지금의 광화문광장 KT 사옥 앞 옛 한성부터에 ‘경조(京兆) 아문터’라는 표석이 서 있었는데 이 때문에 6조와 경조를 유사 부서의 이름으로 잘못 알게 됐다. 2009년 광화문광장을 조성하면서 세종대왕 동상 옆에 한성 부터 표석이 새로 설치됐다. 한성부는 의정부와 맞먹는 파워 집단이었다. 한성부의 권한과 업무는 오늘의 서울시청보다 더 광범위했다. 정2품 한성판윤은 비록 임명직이지만 왕에게 신임을 얻었을 때는 지금의 민선 서울시장보다 힘이 더 셌다. 한성부는 지방행정조직이 아니라 중앙행정조직이었고, 한성판윤도 관찰사나 부윤과는 달리 중앙 관직이었다. 사법 기능과 수도 치안 유지 기능까지 한손에 쥐었다. 한성부는 행정기관이면서 형조, 사헌부와 함께 삼법사(三法司)의 하나였고, 포도청과 더불어 궁궐과 도성을 지키고 순찰하는 치안업무도 맡았다. 20만명이 거주하는 동시대 세계 최대 규모 도시의 하나인 한성의 도시 시설을 관리하는 관청인 동시에 한성 부민에 대한 목민관청의 역할을 했다. 지방의 선위사(宣慰使)로 파견되거나 왕의 행차 때 어가를 안내하기도 했다.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영접사를 맡거나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니 외교업무마저 한성판윤의 몫이었다. 한성부는 전국의 호적 관리와 호패 발행을 통해 도성 안팎의 인구를 통제하고 군역과 부역을 관리했으며 궁궐과 한양 도성, 시장, 도로, 하천을 관리했다. 일반 행정 기능과 함께 사법 기능까지 수행한 까닭은 전국에서 발생하는 토지나 가옥, 채무 관련 소송을 한성부가 도맡아 처리했기 때문이다. 한성부 아래에 오늘의 구청인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부 등 5부를 두고 각 부 아래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 등 6방을 둔 것이 기본 편제였다. 한성부가 사실상 정부 역할을 한 이유는 다분히 복합적이다. 판서가 다스리는 중앙부처는 6조였으나 한성부를 의정부와 함께 부(府)라고 칭한 것은 오늘의 정부(政府) 반열로 봤기 때문이다. 지금도 서울시는 국방을 제외한 모든 종합 행정이 이뤄지는 기관이다. “한성판윤 되기가 영의정 되기보다 어렵다”는 말이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비록 정승이 영예로운 자리이지만 한성판윤의 집행 권한이 그만큼 많고 이해관계가 얽히고설켰다는 뜻이었다. ●낙점하기 전 친·외가의 3대까지 집안의 지체 살펴 한성판윤만 제대로 두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체제였다. 조선의 왕들은 한성판윤을 낙점하기 전에 친가와 외가의 3대까지 집안의 지체를 살폈고, 어느 당파에도 치우치거나 성품이 편협되지 않은 인물을 고르고자 외가 쪽 3대까지 살폈다고 한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육조거리 왼쪽에 의정부-이조-한성부가 나란히 위치한 것만 봐도 한성부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한성판윤을 지낸 다음 이조판서로 옮겨 가는 사례가 많았고 한성판윤 역임자 중에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 유독 많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판윤은 좌윤(左尹)과 우윤(右尹)이 보좌했는데 오늘의 서울특별시 행정 1부시장과 2부시장 격이다. 오늘의 장관에 해당하는 6조 판서는 참판이라는 1명의 차관을 두었지만 한성부는 예외적으로 차관이 2명이었다. 업무의 과중함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한성판윤은 중앙 관직이어서 3정승, 6판서와 함께 왕이 집전하는 어전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지방자치단체장인 서울특별시장이 국무회의에 참석하는 세계 유일의 전통이 여기서 비롯됐다. 지금의 도지사나 광역시장에 해당하는 관찰사와 부윤이 종2품의 외관직이었지만 한성판윤은 수도의 시장 이상의 의미를 뒀다. 한성판윤은 판서를 지내거나 참찬, 대제학, 강화유수를 지낸 정2품이 가는 자리로 여겨졌고 종2품 참판이나 관찰사, 승지에서 발탁된 사례도 가끔 있었다. 한성판윤을 지낸 다음 승진보다 수평 이동을 할 경우 대개 이조판서로 옮겼다. 의정부 좌우참찬이나 관찰사, 대사헌으로 많이 옮겼으며 정1품 우의정으로 승진한 사례도 있었다. ●유명 인물로는 황희·맹사성·서거정·민영환 한성판윤을 지낸 유명 인물로는 황희, 맹사성, 서거정, 권율, 이덕형, 박문수, 박규수, 박영효, 지석영, 민영환 등을 꼽을 수 있다. 4차례 이상 지낸 사람은 53명이었다. 무려 10번을 중임한 이가우는 헌종부터 철종까지 13년 동안 취임과 퇴임을 거듭해 별칭이 ‘판윤대감’이었으나 재임 기간은 통틀어 1년 3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북벌을 추진했던 이완은 7번, 독립협회에 가담했던 이채연은 6번이나 한성판윤을 지냈다. 철종 때 김좌근, 고종 때 이기세, 한성근, 임응준은 1일 초단임 시장으로 끝났다. 한성판윤은 왜 그렇게 자주 바뀌었을까. 한성부를 다스리기보다 중앙정치에 지나치게 간여하여 적을 많이 만든 게 탈이었다. 송사를 다루는 사법업무도 수명을 재촉했다. 무엇보다 구경(九卿)이라고 하여 의정부 좌우참찬, 6조 판서, 한성판윤을 아홉 개의 명예로운 벼슬로 꼽았는데 9경 벼슬을 여러 번 거치는 게 가문의 영광이었다. 그런데 골치 아픈 한성판윤직에 오래 머무르기보다는 이름만 올리고자 한 욕심이 자리 이동이 가장 심한 관직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만들었다. 조선 513년(1392~1905) 동안 한성판윤은 평균 재임 기간 3.6개월의 ‘파리목숨’이었다. 광해군 때 오억령은 무려 13년 4개월이나 집권했으며 단 하루 만에 바뀐 사람도 5명에 이른다. 조선 말 순조대에 접어들면 1년 이상 자리를 지킨 인물이 1명도 없었다. 잦은 교체로 말미암은 공백을 채우려고 종5품 판관 중 1명은 장기 복무케 했다. 한성판윤을 10명 이상 배출한 가문은 전주 이씨, 여흥 민씨, 달성 서씨, 파평 윤씨 등 모두 35개 가문이었다. 왕족인 전주 이씨가 43명으로 가장 많았고 여흥 민씨가 35명이었는데 8명이 고종대 20년 동안 발령났다. 고종 27년인 1890년에는 한 해 동안 25명이 바뀌었고, 고종 재위 43년 7개월 동안 모두 378명의 한성판윤이 옷을 입었다가 벗었다. 영조 때 병조판서를 지낸 홍상한과 아들 낙성, 손자 의모가 3대에 걸쳐 한성판윤을 지냈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서종태와 두 아들 명균, 명빈 3부자가 한성판윤에 오르기도 했다. 오늘날 국무총리를 지내고 나서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는 게 흠결이 되지 않는다. 서울시장을 지낸 인사가 대통령에 당선된 사례가 있고, 서울시장에 오르면 차기 혹은 차차기 유력 대권 주자로 꼽히는 것도 500년 이상 내려온 한성판윤의 오랜 전통과 내력의 힘이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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