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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매일신보에서 서울신문까지(겨레의 맥박으로 본 89년:14)

    ◎「매신」의 8차례 부록 발간/충무공 등 소개… 암흑기 민족의식 고취/광개토대왕의 기개·정몽주충절 상세히/이퇴계·정약용·김정희 등 석학·명필 망라 한일합방 이후 일제가 총독부 기관지로 새로 창간한 경성일보(일문판)에 흡수되어 국문판 자매지 성격으로 명맥을 유지해오던 매일신보는 1938년 4월16일 경영체제의 독립이라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이는 1936년 중일전쟁을 시발로 내선일체를 더욱 강조해가던 일제가 한국인들의 민심계도를 위해 보다 강력한 한글신문의 필요를 느꼈기 때문 이었다. 이에따라 사장 최린,부사장 이상협등 새경영진이 선임되고 편집국장에 김형원 논설부장 유광렬등이 새로 임명되었다.이들은 제호부터 신자를 신으로 고쳐,매일신보로 바꾸고 경영독립을 기념으로 대대적인 지면혁신및 기념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당시 매일신보의 지면혁신 내용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부록판 발행.독립경영 2개월후인 6월30일자에 첫번째호를 발간했다.「역대명가유필진적」이라는 제목하에 한국의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필적을 소개한 이 부록판은 비록 이듬해 1월31일까지 매월 말일자로 여덟번 발간된후 중단됐으나 36년8월 동아의 일장기말소사건 이후 언론탄압이 극에 달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볼때 획기적인 것이었다. ○당시론 획기적 기획 그 내용을 면밀히 살펴보면 이 부록판은 표면적으로는 선현들의 「글씨」소개를 내세우고 있지만 이를 통해 한국 역사인물과 역대왕조의 소개등이 자연스레 이뤄졌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일제하에서 역사를 빼앗긴채 「일본신민」으로 살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높은 기상을 자랑하던 고구려와 광개토대왕을 알리고 고려말 충신들을 소개했다.또 이순신장군의 대첩,충절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았던 조선조 유명한 선비들에 대해 소개했다.이는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민족문화의 중요성과 그 보존을 강조한 것이 틀림없다. 이 부록판 발간에 대해 매일신보는 첫호가 나가기 전날인 1938년 6월29일자 1면에 사고를 내고 『본사경영독립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조선서도의 금자탑인 역대명가의 유필진적을 애독자 제위에게 무료증정하게 되었다』고 대대적으로 알렸다.또 소개되는 작품들에 대해서는 『본사가 그동안 막대한 노력과 시일을 들여 수집망라한 것으로 글씨 한개마다 전문 사학가의 해설을 곁들였음』을 밝혔다.인쇄및 장정에 대해서는 『본사 특선의 고급당지에 석판이도쇄로 미려정교하게 인쇄,병풍을 만들어 영구히 보존할수 있도록 고급전아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사고는 또 이 부록판 발간을 『조선신문 초유의 희생적 사업』이라고 정의하고 『반드시 독자제위의 열광적 환영이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고 자신했다. 38년 6월30일자로 발간된 첫번째 부록판은 황해도 해주군 광조사지의 진철대사보월승공탑비등 고려전기의 탑비 6편을 수록했다.해설의 예를 보면 진철대사비의 경우 고려 태조 20년에 세운 것으로 작자는 최언위 필자는 이환상으로 구양순체임을 밝히고 있다. 7월31자로 발간된 두번째 부록판은 고려때 최고의 왕사였던 석탄연의 문수원비를 비롯,오늘날 지극히 귀한 것으로 알려진 이규보의 유묵과 안향 정몽주 문공유등 고려시대 석학들의 필적을 실었다.특히 포은 정몽주는고려말 절개를 지킨 굴지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기술했다. 특히 세번째 부록판(8월31일자)은 광개토대왕비등 만주 안동성 집안현 일대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비문들로 꾸며졌다.특히 광개토대왕비에 관해서는 『동양인이 쓰고 세운 비석 가운데 최고 최대의 비석』이라는 설명과 함께 자세하게 대왕의 업적을 소개했다.『고구려의 19대왕으로 아버지는 고국원왕,아들은 장수왕이며 18세에 즉위했다.왕은 천자영매하고 용병의 귀신이었으며 공격하면 반드시 점령하고 싸우면 반드시 이겼다.64개의 성과 1천4백개소의 촌락을 공략하여 국경을 넓혔다.이르되 호태왕이라 한다.…』 ○신라때 비석도 게재 네번째 부록판(9월30일자)은 함경남도 함흥군 하기천면소재 황초령 진흥왕순수비와 낭공대사탑비,신행선사비등 주로 신라시대 인물들의 탑비를 싣고 있다.진흥왕순수비는 한반도내 광개토대왕비에 버금가는 최고,신라 제일의 비로 소개했다. 다섯번째 부록판(10월31일자)은 박연 성삼문 서거정 김시습 안평대군 정란종 최흥효등 조선 전기 각분야에서 특출난 인물들을 소개했다.박연은 세종때 처음으로 아악을 연구 시행한 음악가로 이조판서와 대제악을 역임했으며 성삼문은 조선의 세종과 문종 그리고 단종 세임금을 섬겼으나 세조를 거부한 사육신의 한사람으로 세종대왕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공이 크다고 설명했다.또 김시습은 단종폐위사건에 반발하여 일평생 방랑생활을 했던 신동으로 일시적으로 금오산에 우거,금오신화를 남겼고 이율곡이 그를 백세지사로 극찬하였음을 소개했다. 여섯번째 부록판(11월30일자)은 일제가 가장 주목하는 인물인 이순신을 비롯,이황 양사언 한석봉 김구 등 조선중기 대가들의 유필을 수록했다.특히 임진왜란때 일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던 이순신장군에 대해서는 그의 난중일기 일부를 소개하며 거북선 건조,옥포 당포 한산도 해전에서의 대첩등 큰 전공을 세운 내용들을 상세히 기록했다. 일곱번째 부록판(12월31일)은 허목 이광사 이숙 윤순거 송준길등 조선 중기 석학들에 대한 필적과 업적을 소개했다. 마지막회가된 39년 1월31일자 부록판은 김정희 조광진 정약용 이삼만 권돈인강세황등 조선말기의 명필 석학들의 글씨를 두루 실었다.특히 초서 해서 전서 예서에 통달,조선 최고의 명필인 추사 김정희를 자세히 소개했으며 남쪽의 김정희에 필적할만한 북쪽의 명필로 조광진을 내세웠다.또한 다산 정약용에 대해서는 뛰어난 학문과 저작을 칭송하고 그의 형 정약전 정약종과 함께 이들 형제의 천주교 귀의와 순교내용을 상세히 기술했다. ○「매신」 실체규명 계기 이같이 한국의 대표적 역사인물들을 두루 소개한 매일신보 부록판은 39년 1월 별다른 설명없이 중단되었다.그러나 이 부록판은 민족자각의 의도성 여부를 떠나 결과적으로 한국인들에게 잃어버렸던 역사를 되살리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따라서 이같은 매일신보의 새로운 측면은 그동안 친일 반민족 신문으로만 평가되어 한국언론사연구에서 제외되다시피 했던 매일신보의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역할을 규명할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 “민족혼 고취” 역사영화 상영/한국영상자료원,4월의 주제로

    ◎7일∼23일 예술의 전당서 8편 영화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달마다 주제별로 영화감상회를 열고 있는 한국영상자료원(이사장 호현찬)이 4월을 맞아 민족의 역사적 삶과 혼이 투영되어 있는 역사물을 상영한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서 7일부터 23일까지 하오 4시에 열리는 이번 감상회는 그 제목만으로도 「영화로 보는 한국사」라고 할만하다. 40대가 넘은 올드팬들은 이번 기회를 통해 지금은 스크린에서 사라진 왕년의 유명배우들을 다시 한번 대할 수 있게 돼 옛기억과 향수를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정사에 전념할 것을 간하다 광해군의 박해를 받으며 살아가는 인목대비의 애처로운 인생기를 그린 「인목대비」에서는 신영균 주증녀 조미령 이민자 허장강등이,세조때 18세의 나이로 이시애의 난을 평정했으나 유자광의 모함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남이장군의 일대기를 그린 「남이장군」에서는 신영균 김지미 이예춘 허장강 황정순 최남현등이 열연한다. 상영작품은 「인목대비」(7일) 「사명당」(8일) 「강화도령」(9일) 「십년세도」(14일) 「남이장군」(15일)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16일) 「난중일기」(22일) 「일송정 푸른솔은」(23일)이다.문의전화는 521­2102∼2.
  • 올 임금 4.7∼8.9% 인상 합의/호봉승급분 제외/노총­경총

    ◎“인상률 한자리수로 국제경쟁력 강화” 노사 대표가 처음으로 올해 임금인상률 가이드라인에 합의,노사관계에 새로운 전환점을 기록했다.특히 정부의 개입 없이 자율적인 합의를 이뤘다는데 더욱 큰 의미가 있다. 노총과 경총의 대표들은 1일 서울 상의클럽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올 임금인상률을 4·7∼8·9%(호봉승급분 제외)로 권장키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독과점업체나 대기업등 고임금 업체들은 인상률을 자제하고 상대적으로 저임 업체 가운데 능력이 있는 기업은 높은 인상률을 택하도록 제시했다. 양측 대표들은 최근 국민경제가 어렵다는데 인식을 같이하고 문민정부 출범에 발맞춰 임금인상률을 한자리수로 낮춤으로써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는 한편 공정한 고통분담과 노사관계안정을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이들은 임금조정안 합의서를 통해 정부와 근로자,사용자등 모든 경제 주체가 고통을 분담할 것을 제시했다. 정부에 대해서는 물가안정 및 금융실명제의 빠른 시일 내 실시,근로자들의 성과급과 실적급등에 대한 면세조치등 세제의 합리적인 개선,각종 준조세의 철폐,고용보험제의 조기실시등을 건의했다. 합의서는 또 사용자의 경우 기업경영 실적에 대해 노조와 정보를 공유하며 임금인상분을 제품가격에 떠 넘기지 않는 한편 해고를 자제할 것을 촉구했다. 강석주통신노련위원장은 『앞으로 노사 공동으로 임금인상률을 결정하는 관행을 꼭 마련하자는데 의견이 일치했기 때문에 어려운 과정을 거치면서도 합의가 가능했다』고 밝혔다. 황정현경총부회장은 『노사의 이번 합의는 앞으로 양측의 신뢰관계가 이루어질 전환점』이라면서 『참된 의미의 안정적이고 협조적인 노사관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 조원기/부엌엔 늘 소금·나물밖에 없어(역사속의 청백리)

    조선 세조·중종때 대사간·판의금부사·형조판서등을 지낸 조원기(1457∼1533)는 충효절검을 생활신조로 일생을 보냈다. 그가 사는 세칸 초가는 겨우 비바람을 가릴 수 있을 정도로 초라했고 부엌에는 늘 소금과 나물밖에 없었으나 이를 오히려 떳떳하게 생각했다.그는 국가에서 받는 녹봉을 가까운 친척중에 고아가 됐거나 지아비를 여윈 사람들에게 먼저 나눠 주었다.주위사람들이 그의 빈한한 살림을 걱정하여 끼닛거리라도 보낼라치면 오히려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극구 사양했다. 이처럼 곧은 성품은 공직생활에까지 이어져 부당한 일에는 비록 임금의 하명이라도 맞서기를 주저하지 않았다.그가 수천으로 있을 때 연산군이 사초를 보려고 하자 홀로 부당함을 간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파면을 당하기도 했다.국왕이 역사편찬을 위한 사초를 미리 보고 잘잘못을 따지고 든다면 훗날 역사기술이 왜곡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일신상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조종조지법을 지키려고 안간힘을 쓴 것이다. 중종반정이후 귀양에서 풀려나 관직에 복귀한 그는 성종때 조정의 추천으로 기개가 곧은 관리로 뽑혀 판의금부사로 승진했다.또 당대의 청백리중에서도 가장 청렴한 관리로 인정받아 가선대부로 임명됨과 동시에 전라감사로 특별승진했다. 평소 선비의 참된 길은 벼슬길에 있지 않고 학문을 정진하는데 있다고 주장해온 조원기는 훗날 개혁론자로서 영욕을 함께 맛본 조카 조광조가 벼슬길에 오르려고 하자 「벼슬에 임하는 것은 칼날을 밟고 올라서는 것과 같다」며 그 어려움을 경계하곤 했다.또 맹자의 말을 인용,「벼슬이란 가난하기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수도 있으나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벼슬을 해선 안된다」고 조카에게 타이르곤 했다. 그는 특히 후학들을 위해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배우되 주의의 칭찬에 너무 연연하지 말 것을 간곡하게 당부하곤 했다.
  • 미,경기부양에 3백억불 투자/클린턴,의회연설

    ◎공무원봉급 1년간 동결/재정적자 4년간 5천억불 감소/국방예산 7백60억불 97년까지 삭감 【워싱턴=이경형특파원】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17일 갈수록 누증되는 정부재정적자 감축을 위한 총규모 5천억달러의 획기적인 종합경제개혁안을 발표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이날 연두교서 형식이 아닌 상하양원 합동회의 연설을 통해 이같은 경제개혁안을 발표,50만명의 고용창출을 위한 3백억달러 규모의 경기부양 투자와 함께 향후 4년간 총 5천억달러 규모의 재정지출 감축 및 세수증대 조치를 밝히고 이를 실행하기위한 증세조치 부담에 국민들이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다. 클린턴 대통령은 탈냉전시대를 맞아 미국경제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고질적인 재정적자 감축이 불가피하다고 선언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한 에너지세 신설과 전반적인 세금인상 조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날 발표된 증세계획은 ▲영세민을 제외한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부담될 에너지세를 신설하고 ▲연간소득 14만달러 이상의 고소득층에 대한 소득세 최고율을 31%에서 36%로 인상하며 ▲연간소득 25만달러 이상의 부유층에 10% 추가세율을 적용하며 ▲대기업에 대한 법인세 최고율을 34%에서 36%로 올리는 것 등을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다. 클린턴 대통령은 또 국방예산을 7백60억달러 삭감하는 등 향후 4년동안 1백50개 분야에서 모두 2천5백30억달러에 달하는 정부지출 삭감을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클린턴대통령은 이어 예산절감을 위해 전 연방정부 공무원의 봉급을 앞으로 1년간 동결시킬 것을 요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 기건/세조의 「오고초로」에도 벼슬 거절(역사속의 청백리)

    조선 초기의 명신 기건은 세종때 평민에서 관직에 발탁되어 지평·연안부사·제주목사·관찰사등 지방관을 역임하고 대사헌과 판중추부사등 중앙요직을 거쳤다.그는 오랫동안 평민으로서 백성들과 더불어 살았기 때문에 백성들의 생활을 잘 헤아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백성의 어려운 형편을 덜어주려고 노력했다. 그가 연안부사로 부임했을 때 백성들이 남대지에서 붕어를 잡아다가 바쳤다.그는 농사에도 바쁜 백성들에게 폐가 된다고 하여 3년의 재임기간 동안 붕어를 입에 대지도 않았으며 술도 마시지 않았다.그러나 그가 이임할 때 그 지방의 촌로들이 마련한 이별연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가 백성들을 위해 재임중 금주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또 그가 제주목사로 갔을 때 해녀들이 차가운 바다에서 전복을 따는 것을 보고 백성들에게 누가 될까봐 역시 재임 3년간 전복을 입에 대지 않았다. 이처럼 그는 목민관으로서 항상 백성을 먼저 생각하고 관물을 사사로이 쓰지 않는 검소한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청백리에 천거될 수 있었으며중앙관계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건은 단종때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수양대군이 궁중을 마음대로 출입하며 정사에 간여하자 어린 단종을 보호하기 위해 이를 금하는 소를 올려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그후 기건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밀어내고 등극하자 벼슬길에서 물러났다.이에 수양대군은 그의 청렴한 정신과 능력을 흠모,다시 등용키 위해 다섯번이나 그의 집을 찾아갔으나 청맹(눈뜬 장님)이 되었다면서 벼슬길에 나서는 것을 완강히 거절했다.이를 미심쩍게 생각한 수양대군이 청맹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바늘로 눈을 찌르려고 해도 눈을 똑바로 뜬 채 피하지 않자 훌륭한 충신이라고 탄복을 하면서 그냥 돌려보냈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그를 아껴 등용하고자 각별한 노력을 기울인 이유는 그가 청렴하고 유능했을 뿐만 아니라 충의로운 그의 인품을 믿었기 때문이다.세조는 그를 벼슬길에 다시 불러내지는 못했으나 그가 죽자 가까이 두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정무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 화가와 화공/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굄돌)

    일찍이 사숙재 강희맹은 그림을 논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대체 사람의 기예는 비록 같지만 마음을 쓰는 것은 다르다.군자가 예술을 하는 것은 뜻을 가탁할 뿐이지만 소인이 예술을 하는 것은 뜻을 머물러 두려한다.예술에 뜻을 머물러 둔다는 것은 공사와 예장과 같이 기술을 팔아 그 힘으로 먹고사는 사람의 하는 짓이고,예술에 뜻을 가탁한다는 것은 고인 아사와 같이 마음으로 묘이를 탐구하는 사람의 하는 짓이다.어찌 저에 뜻을 머물러 두어 그 마음을 더럽힐 수 있으랴!」 곧 먹고살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화공이고 묘리를 탐구하는 것 즉 아름다움 그 자체를 창조해내는 것을 목표로 그리는 사람은 화가란 의미이다. 그래서 조선왕조에서는 화공은 천대했지만 화가는 몹시 우대하였다.이에 사대부들도 화업에 종사하는 것을 조금도 꺼려하지 않았으며 그로 말미암아 명성을 얻은 이도 적지 않았으니 인재 강희안,사숙재 강희맹 형제를 비롯하여 명종 선조 연간의 양송당 김제,탄은 이정및 인조,효종,현종 연간의 창강 조속,숙종 영조시대의 공재 윤두서,겸재 정선,관아재 조영석,현재 심사정,작암 강세황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그런데 이들이 평생 화업에 종사하면서 고심하였던 것은 어디까지가 화가의 길이고 어디로부터가 화공의 경계인지 구분하는 일이었다. 그림을 그려주고 응분의 윤필료를 폐백으로 받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인데 그 행위 자체만으로 화공의 경계를 넘어섰다 할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문제가 늘 당면문제로 다가왔기 때문이다.더구나 국왕의 어진을 그리는 일에 참여하는 문제가 대두되면 참여여부와 참여하면 어떤 자격으로 참여하고 그 논공행상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냐 하는 등의 문제에서 격심한 갈등과 고통을 겪기도 하였다. 각자가 그런 문제들을 나름대로 해결해 나가고 있지만 이들 사대부화가의 공통점은 결코 그림을 생계수단으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자신의 그림을 애호하는 이들이 어떤 종류의 폐백으로든 윤필료를 대신하면 그것으로 만족해 했고 공감과 공명의 화답으로 대작을 자청하여 기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떤 물리적인 힘으로 그림을 요구할 때는 비록 국왕의 어진을 그리라는 왕명일지라도 벼슬은 물론 목숨까지도 내걸고 정면으로 거부하였으니 숙종의 처남으로 인물화에 능하였던 죽천 김진규가 인현왕후 어진을 그리라는 숙종의 어명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나 관아제 조영석이 세조어진 모사에 참여하라는 영조의 어명을 정면 거절하며 벼슬을 버린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요즘이라고 화가와 화공이 구분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 화가의 기개/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굄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불의에 굴하지 않고 정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조차 초개같이 버리는 이들을 존경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예수가 그런 사람이었고 정몽주나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들이 그런이들이었다.이런 분들인들 어찌 목숨이 아깝지 않았겠는가.다만 정의를 수호해야만 세도를 바로잡을 수 있다는 투철한 이념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미련없이 포기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인류사회는 사회를 지켜나갈 기준을 다시 세우게 되고 그분들은 그 질서 속에서 영원히 기억되며 살아남게 되었다.예술이 투철한 이념의 포상이라면 예술가인들 어찌 이런 현인의 범주에서 소외되겠는가.초당삼대가의 하나인 저수양이 선왕의 후궁이던 칙천무후의 왕후책봉을 한사코 반대하다 애주지사로 좌천되어 죽은 것이나 성당서예의 대표자인 안진경이 이희렬의 반란을 회유하러 갔다가 그의 협박에 굴하지 않고 피살되는 것 들은 중국에 있었던 그런 실례 중의 한둘이다. 조선왕조에서는 시서화금기 오절로 꼬히던 풍류왕자 안평대군 이용이 세조의 왕취찬탈을 저지하려다 피살되고 낙성으로 추앙되던 난계 박연(1378∼1458)도 80고령으로 오히려 사육신들과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는 일에 동조하였다가 아들들을 모두 잃고 고향으로 쫓겨나 죽는 것을 그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을 듯 하다. 화가로 불의에 목숨을 내걸고 대항하여 절의를 지킨 이를 꼽는다면 벽은 진재해(1671∼1769)를 들 수 있다.그는 숙종 39년(1713)에 약관 23세로 숙종 어진을 도사한 화원화가였다.32세 때인 경종2년(1722)에 노론사대사을 비롯한 노론대가들이 역모를 도모하였다고 무고하여 신임사화를 일으킨 목호용이란 자가 그 공으로 공신이 되어 6월30일 녹훈하는 자리에서 충훈부공신화상첩에 그려 넣을 화상을 그려달라고 하자 화원의 신분으로 당연히 그 직무를 수행해야 함에도 결연히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한다. 『이 손은 이미 선대 왕의 어용을 그렸었는데 어찌 차마 다시 호룡을 그리겠는가』이는 죽음을 각오한 항변이었다.그랬었기에 차마 죽이지 못하였고 영조의 즉위로 정국이 일변되어 목호룡이 역적으로 능지처참되자,영조원년(1721) 4월21일에는 우의정 민진원이 경연에서 국왕께 그 입절하던 사실을 아뢰어 품계를 올리도록 하였다 하니 그 씩씩한 기개를 누군들 부러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개도국 외화 순유입액 전년비 17% 증가(해외정보)

    ◎미 「자동차 빅3」 내년 생산 20% 늘리기로/폴란드·헝가리·체코·내년 경제회복 전망 ○세계철강시장 공급 초과 ■내년에도 세계 철강시장은 수요에 비해 공급이 훨씬 많아 관련기업들의 어려움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게다가 미국과 EC(유럽공동체)의 보복관세조치가 침체를 더욱 부추길 전망이다. 세계은행의 경제전문가인 마이클 핑거씨는 『수요가 늘어나도라도 철강가격의 하락추세는 멈추지 않을것』이라고 예상했다. 철강공급이 넘치는 주요인은 경기침체 때문으로 공급초과와 가격하락에 따라 비효율적인 공장의 폐쇄가 잇따를 전망이다. ○선진국 금리하향에 영향 ■올들어 개발도상국에 대한 외화순유입액은 지난해보다 17% 늘어난 1천3백43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세계은행이 최근 발표한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으로의 외화유입이 증가한것은 주요 선진국의 금리가 낮은 수준을 유지한데다 민간부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및 태평양연안국에 대한 자본유입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올해 상환이 연기된 70억달러에 이르는 러시아의 외채도 개발도상국에 대한 외화유입액에 포함됐다. ○러시아경제 계속 침체 ■동구가운데 플란드,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의 경제는 회복세를 보이고 있으나 불가리아와 루마나아 러시아등은 침체를 보이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플란드,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는 외국인의 직접투자가 크게 늘어나 경상수지 흑자가 당초 예상보다 늘어난 것으로 분석됐다.특히 폴란드와 헝가리는 오는 94년 GDP(국내총생산)성장률이 3%대로 높아지는등 동구국가 가운데 경제전망이 가장 밝은 편이다. 한편 OECD는 『현재 동구경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수출이 점차 늘어나고 특히 원자재와 반가공품의 수출이 크게 늘어 경제가 회복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미,경기회복 전망 따라 ■미국의 자동차 빅3사인 GM,포드,크라이슬러사는 내년 1/4분기동안 올해 같은기간에 비해 승용차와 소형트럭을 평균 20% 늘리기로 했다. 빅3사가 생산을 늘리기로 한 것은 현재의 재고가 적은데다 클린턴정부의 출범에 따라 경기가 회복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빅3사는 내년 1/4분기동안 승용차는 올해 같은기간보다 14% 늘어난 1백15만대,소형트럭은 26% 늘어난 1백5만대를 생산키로 했다. ○일,수입확대 적극 추진 ■일본 통산성이 수입확대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통산성은 최근 3백55개 대기업과 90개 산업단체에 주요 교역상대국인 미국과 EC와의 무역마찰을 피하기 위해 수입을 적극 늘려달라고 촉구했다. 일본의 무역흑자는 올해에 1천3백20억달러,내년에는 1천4백억달러를 각각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중국 삼아시에 전자공단 ■중국의 경제특구인 해남성 삼아시에 대규모 전자전용 공업단지가 들어선다. 이 단지의 면적은 3㎦이며 조성비용은 30억원(약4천1백10억원)이다. 최근 단지조성에 착수한 중국전자공업총공사는 첨단산업에 대한 외자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했다.
  • 북방외교의 남방결실/한­베트남수교의 의미

    ◎교전상태 과거 씻고 미래로 동행/라오스·캄보디아와 수교 촉매로 한·베트남 수교는 한·소및 한·중수교에 이어 우리 북방정책이 수확한 또 하나의 결실인 동시에 냉전 종식이후 세계적 추세인 탈이데올로기화의 필연적 귀결이다. 또 한편으로는 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는 사회주의의 환각에서 깨어나 현실을 비로소 직시,인민들의 열악한 생활상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베트남이 한국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베트남이 한때 교전당사국이었던 상대방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고 오로지 「미래지향적」이라는 단어만을 강조하며 한국과의 수교에 열성을 보인데는 한국과의 관계개선에 부수되는 경제협력에서 얻을 실익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됐음이 물론이다. 베트남과의 수교는 우선 북방정책의 성과가 글자그대로 소련과 중국등 북쪽에서 이제는 동남아지역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베트남은 동남아지역 주요국가로 내년부터 동남아국가연합(ASEAN)외무장관회담에 업저버자격으로 참석하며 수년내에 정회원국으로 가입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따라서 베트남과의 관계증진은 한국이 아태지역에서 외교기반을 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 베트남이 라오스및 캄보디아를 영향권에 두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이들 국가와의 수교를 앞당기는 촉매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한·베트남 수교는 베트남이 북한과 함께 지구상에 남은 몇 안되는 사회주의국가중의 하나라는 점,그리고 오랫동안 북한과 돈독한 관계를 맺어온 나라라는 점에서 북한에 적지않은 심리적 압박감을 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베트남과의 수교의 가장 큰 의의는 앞으로의 경제협력에서 나타날 성과에서 찾을 수 있다. 베트남은 79년 캄보디아침공 이후 계속돼온 미국의 경제제재조치가 해제되면 막대한 해외투자재원및 원조자금을 끌어들여 본격적인 경제개발에 착수할 것으로 예상된다. 베트남의 경제개발은 석유·석탄·천연가스등 엄청난 부존자원과 7천1백만명에 이르는 인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잠재력을 갖고있다. 따라서 베트남과의 수교는 이미 진출한노동집약적 산업은 물론 자원개발,사회간접자본 건설 등 대규모의 프로젝트에 참여의 폭을 넓힐 수 있는 획기적 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실제로 한국은 이번 수교를 계기로 메콩강 개발사업등 대규모 프로젝트에 본격 참여할 예정이다. 양국간 교역은 89년 시작 당시 8천7백만달러에 머물던 것이 90년 1억5천만달러,91년 2억4천만달러로 급증했고 올해들어서는 1월부터 9월까지의 교역량이 3억3천3백만달러에 달했다. 한국의 베트남 진출은 일본이 아직 시장을 선점하지 못했고 베트남내 엘리트그룹이 한국의 강력한 중앙정부하의 경제개발을 자신들의 경우에 적용하려 하고 있어 유리한 측면이 많다. 한편 한·베트남 수교는 한국의 월남전 참전으로 야기된 불행했던 과거에 관한 양국간의 입장에 별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다행스런 느낌이다. 이상옥 외무부장관은 이날 구엔 만 캄 베트남 외무장관과의 회담에서 『냉전체제아래서 자유세력의 일원으로서 사회주의의 팽창을 저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참전 이유를 밝히고 식민지배를 목적으로 한 일본의 경우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에대해 캄장관은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미래지향적 관계 구축에 중점을 두었다. 일부에서는 베트남의 이같은 태도가 경제개발이라는 지상과제에 얽매인 데 기인한 것이며 베트남이 언젠가는 이 문제를 거론,한국에 사과및 보상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의 대일본·대중국 과거사 정리요구의 명분을 희석시킬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베트남에 있는 한국계 혼혈아문제,고엽제 피해자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면 한·베트남 관계는 발전적인 모습을 유지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한·베트남 관계 일지 △55·10 월남승인 △56·5 월남과 수교 △64·9∼73·3 월남전 참전 △75·4 주월대사관 철수 △76·7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 △80 베트남내 억류공관원 석방 △88·9 베트남 서울올림픽 참가 △90·4 베트남 대한 관계개선 제의 △90·10 베트남 대한 수교 제의 △91·4부코안 베트남 외무장관 방한,이상옥 외무장관 면담 △91·9 한국 정세조사단 베트남 방문 △91·12 1차 수교교섭단 베트남 방문 △92·4 연락대표부 설치에 관한 양해각서 체결 △92·8 베트남주재 연락대표부 업무개시 △92·11 주한 베트남 연락대표부 업무개시 △92·12·22 양국 수교에 관한 공동성명 서명(하노이)
  • 미군포로 문제로 9개월 지체/수교성사 뒷이야기

    ◎워싱턴,해결때까지 유보 요청 한·베트남간의 수교교섭은 베트남측의 제의로 시작됐다. 베트남은 한국의 사이공(현 호치민)주재 대사관 철수 만 15년이 되는 90년4월 태국주재 대사를 통해 대규모 건설및 투자 진출을 포함한 양국 관계 발전방안을 제의해왔다. 89년 이미 무역을 개시했고 그해 2월 투안 경공업장관,지앙 투자협력위원회 부위원장이 한국을 다녀간 뒤였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한국은 79년 1월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으로 촉발된 인도차이나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대베트남 관계개선을 보류한다는 입장을 견지,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베트남은 이에 그치지 않고 90년 10월 다시 태국주재 베트남대사를 통해 우리측에 수교를 정식 제의해왔다. 이어 91년 4월 제46차 아시아태평양경제사회이사회(ESCAP)총회참석차 방한한 부 코안 외무차관편에 수교에 앞서 우선 무역대표부를 교환·설치하자고 요청했다. 한국은 베트남측의 거듭된 제의와 함께 인도차이나사태가 해결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음을 감안,91년 9월 외무부 아주국장을 단장으로 한 베트남 정세조사단을 베트남에 보냈다. 조사단은 베트남과의 수교교섭을 본격 추진할 것을 정부 고위층에 건의했고 이에따라 한국은 91년 12월 정주년 당시 태국대사를 단장으로 한 제1차 수교교섭단을 하노이에 파견,양국간 연락대표부 설치에 관한 양해각서의 문안을 확정했다. 이어 92년 4월2일 제2차 수교교섭단이 하노이에서 양해각서에 정식 서명함으로써 한·베트남 수교는 초읽기에 들어갔다. 그러나 양국 수교는 월남전 실종미군(MIA)및 생존포로(POW)문제의 해결때까지 베트남과의 관계정상화를 유보해 달라는 미국의 요청때문에 이날까지 9개월여동안 지체되어야 했다. 이 때문에 양국은 8월 하노이,11월 서울에 각각 설치된 연락대표부를 통해 비자발급등 영사업무를 취급해 왔다. 한편 50년초 수립된 북한·베트남 외교관계는 북한이 베트남 주재 대사를 소환할 만큼 유대를 상실해가고 있다. 베트남이 86년 12월 제6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베트남식 페레스트로이카인 「도이모이」(쇄신)정책을 채택한 이래 실질협력이 축소돼 왔다. 북한과 베트남이 3백만달러씩 투자해 만든 새우양식장업이 실패로 돌아갔고 양잠합영회사인 동흥무역과 대성상사등 베트남내 북한기업들의 활동도 뜸한 편이다. 주요인사 교류 역시 2년전인 90년 10월 베트남 공산당대표단의 북한건국기념일 참석이후 끊어졌다. 이날 공동성명 서명식이 거행된 하노이 영빈관은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이 독립전쟁후 첫 전과를 올린 곳이다. 45년 9월2일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 민주공화국군은 46년 12월 항불전쟁을 시작한 뒤 당시 프랑스총독부로 쓰이던 이 건물을 공격,점령한 바 있다고.
  • 승복의 미학(외언내언)

    승복과 굴복은 똑같이 패배를 전제로 하고 있는 말이다.그렇지만 그 패배의 모습이나 내용은 사뭇 다르다. 승복이 당당하고도 동격인 신사의 풍모를 풍긴다면 굴복은 정복당해서 접복하는 종인의 몰골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승복은 의연하지만 굴복은 참담하다.승복은 자의에 의한 양식의 소산이지만 굴복은 타의에 의한 강압의 소산이다.그뿐 아니다.승복의 웃음에는 그늘이 없지만 굴복의 웃음에는 비굴이 깃들인다.그래서 『고개를 움츠리고 억지웃음으로 남의 비위를 맞추는 일은 염천아래 밭매기보다 고단하다』(맹자:등문공하)고 했다. 이성이 허락해 주는 것이 승복이다.승복은 그러므로 승복할만 해서 하는 것이다.성삼문·박팽년 등은 세조의 거조에 승복할 수가 없었다.이성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화가 난 세조는 매질·담금질로 굴복시키려 한다.그들은 굴복도 승복도 안했지만 굴복한다 해서 그것이 승복을 뜻하는 것은 또 아니다.승복은 「억지웃음」아닌 「참마음」을 곁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나간 선거에서 패자가 승복을 잘 하지 않았던 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결코 승복할 수 없는 여건을 권력의 힘으로 만들어 놓고 유리·불리가 명백한 상황 속에서 싸우게 했던 것이 아닌가.갖은 부정·불법이 권력의 비호아래 자행된 결과로서의 패배인데 그것을 아는 패자가 패배를 인정함은 그 자체가 굴복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어떻게 승복할 수 있었겠는가. 이번 14대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한 김대중후보와 정주영후보는 선거결과에 승복한다고 하면서 김영삼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고 있다.특히 김대중후보의 경우 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에서 은퇴할 뜻을 밝힘으로써 이른바 양금시대의 종언을 알린다.본인뿐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착잡한 심경을 안기는 선언이다. 정부의 공명의지 관철과 선거결과에의 깨끗한 승복.사실,승복할 만한 선거전이었다.이것만으로도 우리 선거문화의 진일보를 양언할 수 있는 터.가슴 뿌듯해진다.
  • 농민피해 줄이고 유통질서 개선/농림수산부 대책의 배경

    ◎갑싼 원료의 안정적 공급원 확보/관련산업 진출·시장개척도 겨눠 농림수산부가 16일 내놓은 농림수산분야 한·중협력대책안은 두가지 측면을 담고 있다. 하나는 지난 89년 이후 수입개방의 확대와 한·중수교로 밀려드는 값싼 중국산 농산물의 무분별한 수입을 억제,우리 농어민의 피해를 줄이고 국내 유통거래질서를 바로잡자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농림수산 관련산업의 중국진출과 상품시장개척을 꾀하는 한편 값싼 농산물원료의 안정적 공급원을 확보하는데 있다. 물론 이 가운데 무게는 중국산 농산물의 수입을 줄여보자는데 실려있다. 농산물 수입이 개방되고 지난 90년 4억2천만달러이던 중국산 농산물수입은 불과 2년만인 올해 갑절이 넘는 1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는데다 지난해 11.8%이던 시장점유율도 올해 15%까지 급상승하고 있다. 정부는 중국산 농산물의 범람에 대해 그동안 원산지표시제나 할당·조정관세부과등의 수입관리책을 써 수입증가세가 다소 둔화되기는 했으나 국내 농가의 피해를 줄이는데에는 미흡했던게 사실이었다. 이에따라 농림수산부는 보다 포괄적인 수입억제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한·중수교 직후인 지난 9월 농림수산분야 대책위원회및 실무작업반을 구성하고 전문가 간담회,몇차례의 중국 현지조사를 통해 이날 대책안을 내놓기에 이른 것이다. 내년에 추진할 단기대책은 관세무역일반협정(GATT)이 규정하고 있는 범위안에서 쓸 수 있는 관세·비관세조치를 모두 동원,중국산의 수입및 유통을 최대한 억제하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로 풀이된다. 품질이 뛰어난 국내산과의 차별을 강화하기 위해 토끼고기 감자 땅콩등 1백5개품목을 원산지표시제 품목에 추가하고 원산지를 표시하지 않은 행위에 대해서는 관련법의 개·제정을 통해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또 검역및 위생검사를 강화하고 값싼 농산물의 수입억제를 위한 종량세및 국내 생산시기등을 감안한 계절관세의 도입을 추진하는 한편 소나기식 수출을 자율규제해줄 것을 정부차원에서 중국에 요청할 계획도 포함돼 있다. 중장기 대책은 단기대책이 갖는 대립적인 요소에서 벗어나 농림수산분야에서 한국과 중국을 구조적 보완관계로 발전시킨다는데 특징이 있다. 여기에는 「녹색카드제」등의 도입으로 검역제도나 위생검사등을 강화해 나가는등의 수입억제책이 들어 있다.
  • 2회 분쉬의학상 수상 김재협교수 전남대 의대(인터뷰)

    ◎전정계이론 오류 지적… 세계가 “깜짝”/“기초의학연구 후학에 자극제 됐으면” 『남이 알아주지 않는 기초의학분야에 묵묵히 매달려온 「30년연구인생」에 대한 평가라고 생각합니다.특히 저처럼 지방대학에 몸담고 있는 사람에게 이런 큰 상이 주어지리라고 생각지도 못했지만,아무쪼록 오늘도 어려운 여건속에서 연구에 정진하는 지방후학들에게 좋은 자극제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15일 제2회 「분쉬의학상」을 수상한 전남대의대 김재협교수(61·생리학)는 지금까지 어려움을 함께 해온 후배들과,자신에게 이 길을 인도해 준 「한국생리학의 아버지」고 이종윤박사(전전남대교수)·김명선박사(전연세대교수)에게 모든 공을 돌렸다. 「분쉬의학상」은 1901년 고종황제 전의로 내한해 당시 세계의술의 선도적 위치에 있던 독일의학을 한국에 전수,국내 서양의학발전의 디딤돌을 마련한 독일인 리하르트 분쉬(18 69∼19 11년)를 기리기 위해 지난해 제정됐다.한국의학협회와 한국베링거인겔하임사가 공동제정한 이 상은 대한의학회 정회원으로서 20년이상을 의료·의학연구에 종사하고 연구업적이 국내 의학발전에 끼친 공로가 인정되는 학자에게 주어지는데,저명한 심사진에 의한 정밀한 사정으로 매우 권위있는 의학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김교수의 수상논문은 「전정계의 자세및 운동조절」. 『사람의 귀는 청각과 신체 균형유지에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이중 신체 균형유지에 관여하는 구조물을 전정계라고 하며 전정계는 이석기와 반규관으로 구성돼 있지요』 김교수에 따르면 이석기는 사람이 승강기를 타고 오르내릴때 느끼는 직선가속을 받아들이는 수용기로 작용하며,반규관은 회전대위에서 회전할때 느끼는 회전가속을 받아들이는 수용기로서 기능을 갖는다.이때 이석기나 반규관에 전해진 가속신호는 중추신경계를 거쳐 눈의 외안근이나 목의 근육 또는 사지골격근에 전해져 신체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전정성 자세조절반사」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 이 분야에 대한 연구에는 전세계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왔지만 아직까지 연구자간의 실험결과에 차이가 심해 확실한 이론이 없는 실정.60년대 초반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이 분야의 연구를 개척한 김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 제1의 전정계박사」. 특히 김교수가 이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미국의 코헨교수(마운틴 사이나이대학)와 윌슨교수(록펠러대학)의 연구결과에 오류가 있음을 실험적으로 입증,세계의학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일화는 유명하다. 지난77년 프랑스 국제생리학회에 참석한 김교수는 교과서에 부동의 이론으로 게재되고 있는 코헨의 「반규관과 외안근의 반응작용」의 허구성을,그리고 83년에는 록펠러대학에 찾아가 윌슨의 「반규관과 목근육의 기능반사」의 오류를 지적한뒤 대체이론을 제시,한국생리학의 자존심과 우수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김교수는 『이들이 오류를 시인했음에도 아직까지 교과서 등에 나오는 이론이 시정되지 않고 있다』며 『지난해 한국생리학회 회장을 맡으면서부터 세계각국에 영문저널을 보내 올바른 이론세우기 노력을 벌여오고 있다』고 소개했다. 「좌뇌와 우뇌 한국의학 종설」을 비롯해 40여편의 논문을 발표한 김교수는 53년 전남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테네시대학원을 수료한 뒤 63년부터 전남대의대교수로 재직해 오고 있다.
  • 종반 기선잡기… “금권”“편파수사” 공방(대선 유세현장 6일)

    ◎“서민위해 관공서·병원 등 문턱 낮출터”/김영삼/“민자의 금권선거도 똑같이 수사” 촉구/김대중/“모든 관사 동원해 「탄압」 자행” YS 맹공/정주영/“지방자치 조속실현”/이종찬/“기성정치에 환멸”/박찬종 ○“정의로운 사회건설” ▷김영삼후보◁ 중부권 표밭갈이에 나서 현대그룹의 물량을 등에 업은 국민당측의 김력공세의 폐해에 대해 연설기간의 상당부분을 할애. 김후보는 비가 내리는 가운데 안성여중에서 열린 상오 유세에서 『돈없고 빽없는 우리 서민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이 김영삼이의 오늘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전제,『내가 말하는 신한국건설이란 바로 돈없는 서민들이 땀흘린 만큼 대가를 받는 정의로운 사회건설이 그 핵심』이라며 지지를 호소. 김후보는 이어 이 지역의 품질좋은 안성유기에서 유래된 「안성맞춤」이란 용어를 인용,『여러분의 대통령으로서 이 김영삼이가 안성맞춤이 아니냐』고 물어 호응을 유도한 뒤 『집권하게 되면 서민들을 위해 관공서·은행·병원 등 다섯곳의 문턱을 낮추겠다』고 약속. 김후보는하오 수원 장안공원에서 열린 유세에서는 『집권여당이 앞장서 중립내각을 제의함으로써 이제 관권선거의 우려는 사라졌다』고 강조.유세를 마친 김후보는 이날 대전 유성에 머물면서 이지역 직능단체대표들과 간담회등을 갖고 자신에 대한 지지를 당부. ○김씨 시조왕릉 참배 ▷김대중후보◁ 비행기편으로 김해공항에 도착,김해금씨의 시조인 김수로왕릉을 참배하고 김해·양산·울산지역을 돌며 유세를 벌인뒤 부산에서의 대규모집회를 끝으로 영남지역에서의 유세를 마감. 김후보는 이날 유세에서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정부의 현대그룹에 대한 선거개입및 탈세조사와 관련,『국민당이 현대직원을 동원해 돈 뿌리며 정치를 망치는 것도 문제지만 정부가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편파적인 수사를 벌이는 것은 더욱 용납할 수 없다』면서 『정부는 민자당의 김권선거에 대해서도 똑같이 수사하고 처벌하라』고 촉구. 울산 태화강의 고수부지에서 열린 유세에서는 이 지역에 국민당 정주영후보가 강세를 보이는 점을 의식 『정후보가 관훈회견에서 1원도 부정축재한적이 없고 1전도 탈세한 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면서 『정후보만큼 철저하게 거짓말하는 사람은 처음보았다』고 공격. ○경제공약들 제시 ▷정주영후보◁ 선산 영천 경산 경주 포항 등 경북지역에 이어 하오 늦게 상경,경기도 구리에서 야간 유세. 정후보는 경북지역 유세에서는 김영삼후보를 집중공격하는 한편 박철언 유수호 윤영탁의원등 「TK」인사들을 내세워 무주공산으로 표현되는 경북지역에서 우위를 정하기 위해 안간힘. 정후보는 『YS는 내가 재산이 많은 점을 악용,김권이 관권보다 더 무섭다며 모든 관리를 동원해 탄압을 자행하고 있다』고 주장. ○“지역감정을 청산” ▷이종찬후보◁ 광주공원에서 열린 유세에 1만8천여 청중이 운집하자 『호남에서 세가 살아나고 있다』고 고무된 표정. 이후보는 이날 유세에서 『우리나라 정치에 있어서 고질병인 지역감정을 청산해 새한국을 만들겠다』고 다짐하고 쌀개방문제와 관련,『고율 관세등 합리적 처방으로 우루과이라운드에 현명하게 대처해야지 대통령직까지 걸며 막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라고 타후보들을 겨냥. 이후보는 이어 『지방자치제를 조속히 실현하고 중앙정부의 권한및 기능을 지방자치단체로 대폭 이양해 지방중심시대를 열겠다』며 『정부에서 관리하는 각종 기금을 중소기업시설자금대출에 우선 활용하도록 하겠다』고 공약. ○거리유세 지지호소 ▷박찬종후보◁ 휴일인 이날 유동인구가 많은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과 명동 롯데백화점앞 광장에서 거리유세를 갖고 수도권지역 표몰이에 박차. 박후보는 『낡고 병든 기성정치에 환멸을 느껴 정치불신,정치무관심으로 침묵하던 민심이 새로운 선택을 찾아 용틀임하고 있다』고 지적,『20,30대뿐만 아니라 40대이상의 유권자들도 이 박찬종을 조국의 앞날을 이끌어갈 「대안세력」으로 확실히 선택할 것』이라고 지지를 호소. ○운동권가요 불러 ▷백기완후보◁ 비가 간간이 내리는 가운데 열린 서울 대학로 유세에는 학생·노동자·일반시민등이 참석,「님을 위한 행진곡」등 운동권가요를 부르며 진행.백후보는 이날 연설에서 『지금 우리 경제가 파탄지경에 빠진가장 큰 이유는 재벌경제때문』이라면서 『집권하면 무주택자에게는 전원 영구임대주택을 분양하고 특히 영구임대주택을 건설할 재원은 재벌의 비업무용토지를 몰수해 충당하겠다』는 공약을 제시.
  • 천기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을(박갑천칼럼)

    당나라 시인 이하는 『하늘이 만약 사람과 같이 유정한 것이라면 역시 노쇠할 것이다』(천약유정천역로)고 노래한 적이 있다.도가의 하느님이라고 할 옥황상제도 유정했기에 늙었고 늙었기에 이젠 말이 없는 것인가.많이 들먹여졌을 때의 유정한 옥황상제가 가장 싫어하여 진노가 탱천하는 것이 있었다.바로 천기의 누설.우주의 모든 영위를 관장하여 하다못해 ×파리의 생사까지 쥐고 있는 그의 권능의 비밀이 새나가는 일이었다.천기 누설의 죄를 물어 사랑하는 딸도 인간계로 귀양보내 버리던 것 아닌가. 맞다.천기는 알 수가 없다.알수 없는 것이라야 한다.예로부터 『하늘의 도리는 헤아리기가 어렵다』(천도란지)고 해왔지만 헤아릴 수 있는 것이어서도 안된다.천기가 누설된 경우를 생각해 보면 금방 알수 있는 일.지금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의 운세가 갈수록 더 곤궁해지게 되어 있다고 치자.그는 사는 의미를 잃고 말 것이다.그렇게 사람마다 알게된다고 할때 마침내 이승의 영위는 중지돼 버릴 것인지 모른다. 섭리의 뜻은 아무도 헤아리지 못해야 한다는까닭이 여기에 있다.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기에 희극과 비극을 교직시키면서 살아간다.내일 죽게 되어 있는 사람이 떵떵거리면서 큰소리를 친다.저녁때면 복권 당첨의 행운을 맛볼 사람이 저자세로 이리저리 돈을 꾸러다닌다.한치 앞을 내다볼 수만 있다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이게 사람이 이승을 사는 모습이다.유정한 옥황상제이기에 어쩌면 이같은 인생살이 기미의 조종을 스스로 즐기고 있는 것이나 아닐지. 어느날 세조가 사가 서거정(사개 서거정)에게 녹명서(녹명서:사주책)에 대해 물은 일이 있다.서거정의 「필원잡기」(필원잡기:1권)에 대답하는 내용이 적혀 내려온다.­『갑기년 정월은 병인이요 갑기일 생시는 갑자이니 60위(육갑)로 추산하면 그 수가 7백20이 되며 7백20의 해수(연수)로써 7백20의 날수(일수)를 곱하면 명의 사주가 51만8천4백에서 다하고 다시 더할 수 없는데 억조중생이 어찌 51만8천4백에만 그치리이까….』 사주는 똑같아도 화복은 전혀 같지 않은 경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것이냐면서 그는 녹명의 글을 믿을 수 없다고 상주한다.그에 대해 세조도 『그대 말이 옳도다』며 맞장구를 친다.천기는 인지로써 헤아릴 수 없는 것임을 우리의 옛 석학도 그와 같이 지적한 것이다. 대통령 선거에 대학입시까지 앞두고 있는 요즘 각지의 점술촌이 평소의 2∼3배 가량 성업중이라고 한다.어떤 정당에선 역술인을 포섭하여 점괘 로비까지 벌인다는 것이고.어허.옥황상제 말고는 모르게 돼있대도 그래.
  • 구치관/인사청탁땐 예정됐던 자리도 안줘(역사속의 청백리)

    조선초기 세조때 영의정을 지내고 사후에 좌이공일등에 서품된 구치관(1406∼1470)은 곧고 청렴한 성품때문에 처음에는 벼슬길이 더디었다. 그는 24세에 생원이 되었으며 세종 16년에 한림에 뽑혔으나 성품이 지나치게 강직하여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그러나 그의 성품과 재능을 아끼는 주위사람의 적극적인 권유로 뒷날 좌익공신 능성부원군에 책봉됐을 뿐만 아니라 세조 9년에는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그는 벼슬길에 들어섰어도 처음에는 밀어주는 사람이 없어 하급관리로만 10여년을 보냈다.그럼에도 그는 남에게 아첨하거나 비굴해지지 않고 선비로서의 기개를 지키려고 애썼다. 그는 천성이 방정하고 모든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고자 노력했다.그가 이조판서로 있을 때였다.사람들은 그에게 벼슬을 하기 위해 갖가지 청탁을 들고 찾아 왔으나 이를 하나도 들어주지 않았다.그가 이조판서가 되기전 전임자는 사사로운 정리나 청탁에 따라 관리를 임명하곤 했으나 그는 참판이하 모든 사람의 의견을 수렴,인재를 등용하곤 했다.따라서 그는 청탁이 들어오면 당연히 임명하거나 자리를 옮겨줄 자리라 하더라도 오히려 임명도 않고 옮겨주지도 않았다.또한 그는 사람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할줄 알았다.한번은 10년간이나 한가하게 지내던 문사 한 사람을 현감으로 추천하자 다른 사람들은 「그는 현실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적절하지 못하다」고 반대했다.그러나 그는 「실도도 10년이면 회복이 되는데 어찌 사람을 이렇게 묻어둘 수 있겠느냐」며 그를 천거,임명한 결과 훌륭한 업적을 남길 수 있도록 길을 터주었다. 그는 문관으로서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나 군사에도 밝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가 영의정때 건주야인들이 변경에서 준동하자 그는 진서대장군에 임명되어 야인을 토벌하고 개선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세조는 좌우에 있는 신하들에게 「구릉성(구치관의 호)이야말로 나의 만리장성」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 “1935년 서울인구 44만4천명”/일제때 「조선통계시보」 발견

    ◎당시면적 36.2㎢… 55년간 17배 커져 1930년대의 사회상을 짚어볼수 있는 귀중한 통계자료가 통계청에 의해 발굴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일제하 조선총독부 산하에 설치됐던 조선통계협회가 발간한 조선통계시보에 실린 1935년의 국세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서울인구는 현재의 4%인 44만4천명에 불과했으며 이는 당시 남한 전체인구의 2.9% 수준에 머물렀다.서울인구는 90년 1천62만8천명으로 지난 55년 사이에 24배로 불었으며,서울인구집중도는 2.9%에서 25%로 높아진 것이다.서울의 면적은 당시 36.2㎦에서 90년에 6백5.3㎦로 17배로 커졌다. 19세이하에 결혼하는 여자가 전체의 81%에 달했고 15세 미만에 결혼하는 여자도 8.8%나 됐다. 남자의 혼인연령은 17세 미만이 11.6%,17∼19세가 32.4%,20∼24세가 35.9%로 79.9%가 24세 이하에 결혼했다. 인구 1천명당 사망자수(조사망률)는 당시 19.7명으로 지금(90년)의 5.8명에 비해 3.4배,전체 사망자중 5세미만의 영유아 사망자 비율은 40.9%로 지금(90년 1.9%)의 22배에 달했다. 당시에는 전체가구의 75%가농가였으며 이가운데 순수자작농은 18%에 지나지 않았다.농림어업생산액은 12억3천2백만원(1934년)으로 공산품생산액(5억6천8백만원)의 2.5배였으며 전체 공업생산의 35.3%가 가내공업 형태로 이뤄졌다. 교욱기관의 형태는 1912년 서당 학생수가 14만1천명으로 보통학교 학생수의 3.17배에 달했고,그 수는 계속 증가해 1922년에는 29만8천명에 이른후 1923년을 고비로 점차 감소해 1935년에는 서당학생수가 15만3천명으로 1912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한 반면 보통학교 학생수는 72만여명으로 늘었다.
  • 박수양/한성판윤하다 별세… 장례비 없어(역사속의 청백리)

    조선조 중종·인종·명종등 세조정을 거쳐 38년동안 호조·형조·한성판윤·지중추부사등을 역임한 명신 박수양(1491∼1554)은 5백년 사직에서 유일하게 사후 「백비」를 하사받았다. 명종은 생전 그의 청빈했던 관직생활과 강직한 성품을 기리기위해 서해바다 암석에서 흰돌을 골라 하사하면서 「박수양의 청렴결백함을 알면서 비에다가 새삼스럽게 결백했던 생전의 생활에 대해 쓴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청렴함을 욕보이는 결과를 빚을 지도 모른다」며 비문없이 그대로 세우라고 어명을 내렸다. 그는 오늘날 서울시장격인 한성판윤으로 재직하다가 세상을 떠났으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향으로 운상할 비용조차 마련할 수 없을 정도로 궁핍했다. 박수양이 관직생활을 하던 기간은 사색당파간의 정쟁이 치열했던 시기였다.서로 헐뜯는 와중에서 그를 모함하는 투서가 여러번 날아들었으나 그때마다 암행어사를 시켜 조사한 결과 「박수양은 벼슬길에 오른지 30여년간이나 되며 경상에까지 이르렀으면서도 서까레 두엇정도되는 집마저 없다」는 보고만 올라와 그의청빈한 생활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결과만 낳을 뿐이었다. 그는 매사를 원칙대로 처리했으며 임금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여자를 임금님께 보이는 것은 국정을 어지럽히는 원인이 되고 뇌물을 밖에서 들어오게 하는 것은 정치를 문란시킨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비록 동료라 하더라도 부정은 눈감아 주지 않았다.그가 형조판서로 재직할 때 같은 판서직에 있는 동료의 친동생인 광주목사의 부정이 적발되자 동료나 주변의 청탁을 뿌리치고 끝내 그를 퇴임케 했다.그러나 그는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서는 적서를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상소를 올릴 정도로 당시 시대상황으로는 감히 꿈꾸기 어려운 개혁적인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 그에게는 정혜공이라는 시호가 주어졌다.이는 결백수절하였다는 뜻의 정과 애민호여하였다는 뜻의 혜자를 합친 것으로 생전 그의 행동과 태도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 기업자금 선거유입 차단/공선장관회의/유출업체 세무조사·사법처리

    ◎금융기관여신 추적… 불법집회 엄단 정부는 14일 기업자금이 특정정당및 선거에 변칙유입되는 것을 철저히 차단키 위해 기업자금의 변칙유출에 대해 법인세조사등 각종 세무조사를 통해 세금을 엄정히 추징하고 위법사실에 대해서는 사법처리하기로 했다. 정부는 이날 현승종국무총리주재로 제3차 공명선거관리관계장관회의를 열어 이같이 결정하고 각종 세무조사때 기업자금이 정당이나 선거에 변칙적으로 유출돼 세금을 탈루했는지를 중점조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현총리는 이날 회의에서 『선거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있는 금권·타락선거를 뿌리뽑기 위해 검경·국세청이 긴밀히 협조,금품을 변칙제공한 기업과 개인에 대해서 철저히 추적해 엄단하라』고 지시했다. 현총리는 이어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금융자금이 소비성자금이나 선거자금화 되지않도록 금융기관의 여신관리에도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총리는 『선거일이 확정된 만큼 앞으로 각급단체의 집회가 특정정당·후보자에 대한 지지·반대를 주장,선거법에 명백히 위반될 경우 집회를 원천봉쇄하는 방안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추경석국세청장은 기업자금의 선거유입차단책과 관련한 보고에서 『법인세조사등 각종 세무조사때 기업자금의 변칙적인 선거유입을 중점조사하겠다』면서 『특히 변칙유출가능성이 높은 가지급금이나 선급금의 사용용도와 기부·접대비등 소비성 경비지출및 각종 비용명목으로 위장한 기업자금유출여부를 정밀확인하겠다』고 말했다. 추청장은 또 『기업자금의 변칙유출사실이 드러나는 경우 세무조사를 통해 각종 세금을 추징하는 한편 금융자금의 목적외사용,정치자금에 관한 위법사항에 대해서는 관계기관에 즉각 고발해 의법조치토록 하겠다』고 밝혔다. 백광현내무부장관도 이날하오 서울을 비롯,전국15개 대도시에서 열린 「민주대개혁과 민주정부수립을 위한 국민회의」주최의 국민대회개최와 관련,『대선법·집시법등 관계법을 준수하겠다는 조건으로 집회를 허용했지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경찰력을 동원해 가두행진·서명운동·선전등의 불법사례가 발생하면 단호히 의법조치하겠다』고 보고했다. 백장관은 이와함께 『11일 현재까지 선거운동원이 되려고 하는 통·이·반장 3백90명을 해임·해촉했다』고 밝혔다. 이정우법무부장관은 『검찰이 그동안 신고·고발에만 의존하지않는 적극적인 수사를 전개,지금까지 위반사실이 밝혀진 44명을 형사입건하고 그중 죄질이 무거운 15명을 구속했으며 나머지 29명은 불구속입건했다』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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