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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역·종로 보행특구로 걷고 싶은 서울 ‘한 걸음’

    서울역·종로 보행특구로 걷고 싶은 서울 ‘한 걸음’

    걷기 좋은 환경을 만들기 위해 공들이는 서울시가 서울역 고가도로를 폐쇄하고 만드는 보행로 ‘서울로 7017’ 주변이 보행특구가 된다.서울시는 오는 4월 개통하는 서울로 7017을 전국 최초로 ‘보행자 전용길’로 지정하고 그 주변 지역 1.7㎢를 ‘보행환경 개선지구’로 만들어 보행 특구로 운영한다고 25일 밝혔다. 보행자 전용길로 차량이 지나가면 10만원의 과태료를 물릴 수 있어 차량 없는 안전한 보행 공간으로 꾸밀 수 있다. 시는 서울로 7017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남대문로와 소공로, 서쪽으로는 충정로와 손기정로 등을 경계로 하는 만리동과 회현동 일대 1.7㎢를 보행환경 개선지구로 지정한다. 개선지구가 되면 보행자 장애물과 옥외광고물 등을 우선 정비해야 한다. 고원식 횡단보도(보도와 횡단보도 사이의 턱을 없애 평평하게 만든 것)와 차량 속도 저감시설, 교통신호기 등도 먼저 설치해 걷기 편한 환경을 만들 수 있다. 또 보행특구 안에 도보여행 길 5개 루트를 조성해 역사문화 콘텐츠와 어우러지는 관광 코스로 만든다. 오는 하반기 중앙버스전용차로가 개통되는 종로 지역도 보행특구로 거듭난다. 세종대로사거리에서 동대문역까지 2.8㎞ 구간은 보도 폭을 최대 10m까지 넓히고 횡단보도를 만들어 걷기 좋은 길로 만든다. 이후 창덕궁∼세운상가∼남산 구간 남북 보행축을 내년까지 순차적으로 꾸민다. 서울 대표 명소인 인사동과 한옥 카페 등으로 최근 유명세를 탄 익선동 등이 있는 종로 북쪽은 보행 명소 거리로 조성한다. 인사동4길과 삼일대로30길 등 보행환경이 열악한 이면도로는 색상과 디자인을 바꾼다. 탑골공원 주변 낙후한 락희거리, 종로3가역 인근 돈화문로11길도 보도 폭을 넓히고 소규모 공연장을 만드는 등 새로 단장한다. 시는 앞으로 교통영향평가에서 차량 소통뿐 아니라 보행 분야 평가도 강화한다. 지금까지는 사업지에서 유효 보도폭 2m 확보를 요건으로 걸었지만 앞으로는 보행 수요에 맞춰 ‘2m 이상’을 요구할 방침이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서울시의회 김정태 의원, 교통방송 ‘유용화의 시시각각’ 토론자 출연

    서울시의회 김정태 의원, 교통방송 ‘유용화의 시시각각’ 토론자 출연

    서울특별시의회 도시계획관리위원회 김정태 위원장(더불어민주당, 영등포 제2선거구)은 지난 2017년 1월 3일(수) TBS교통방송 “유용화의 시시각각” 생방송 토론자로 출연하여, 올해 서울에서 개최될 예정인 UIA세계건축대회 등 건축문화행사에 대한 홍보 및 시민의 참여를 부탁했다. UIA 세계건축대회는 124개국에서 해외관계자 약 5,000명을 포함한 3만명 이상이 참가하는 대규모 국제행사로 서울이 보유한 우수한 건축문화 정책과 역사문화도시 서울을 국내외에 널리 알릴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행사다. 이 대회는 3년 단위로 세계 권역별 주요 도시에서 개최되는 행사로서, 서울시는 지난 2011년 UIA 도쿄 총회에서 싱가포르와 멕시코시티와 경쟁하여 금년행사를 유치했다. UIA는 “Union Internationale des Architectes”의 약자로 프랑스 파리에 본부를 둔 비영리기구이며, 세계유일의 UN이 인정한 건축관련 기구로 1948년 설립 이후 124개국을 회원국으로 보유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특히 2017년 한해 도시계획관리위원회 차원에서 도시를 구성하는 건축문화를 창달하는데 많은 노력을 들이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서울은 이미 세계적인 건축가와 건축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과 이 대회를 통해 단기간에 상당한 경제적 파급효과도 거둘 수 있다는 점을 전하며 이번 UIA세계건축대회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김정태 위원장은 “신은 사람을 만들었고, 사람은 도시를 만들었다.”는 말을 인용하며 주요 도시계획 및 공간기획 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2017년 위원회 소관 예산편성 내역 및 공공임대주택 공급과 도시재생사업 등 주요 현안사업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특히 공공임대주택의 공급으로도 부족한 저렴 임대주택 확보를 위해 민간임대주택으로 분류되는 ‘역세권 청년주택’ 공급 사업을 소개하였으며, 세운상가 및 서울역일대 도시재생사업 등 주요 서울시 도시계획 정책현안에 대해 일반 시민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밖에 UIA세계건축대회와 함께 개최 예정인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행사에 대해서도 소개하며, 세계도시간의 유대와 연계를 통해 도시문제의 해법을 모색하는 도시간‧시민간의 도시건축 문화 행사인 점을 강조했다. 이 행사는 비엔나‧베니스‧시카고 비엔날레 등과 같이 국제적인 행사로 발돋움 할 수 있는 행사로써, 서울의 도시건축과 역사문화에 대해 세계건축대회와 함께 국제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과 함께 시민여러분의 관심과 참여를 부탁했다. 마지막으로 지난해 12월 26일 실시한 제2롯데월드 및 잠실광역환승센터의 현장점검 결과를 설명하며, “서울의 건축을 대표할 수 있는 초고층 빌딩으로써 가치 있는 건축물이지만, 사용승인전 시민의 안전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의견을 밝혔고“악마는 디테일에 숨어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시민들의 안전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지속적인 감시를 펼칠 것”이라고 전하며 토론을 마쳤다. 뉴스팀 seoulen@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살이] 걷고 싶은 도시의 꿈

    [노주석의 서울살이] 걷고 싶은 도시의 꿈

    구한말 서울은 불결(不潔)의 도시였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절, 파란 눈의 선교사와 여행가들은 인구는 많고, 도로는 좁고, 오물로 뒤범벅된 도시에 대해 혐오감 어린 악담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실학자들이 도로 확장과 가로 정비를 촉구하고 나섰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사람들이 길을 차지해 말을 탄 사람이 서로 마주치면 지나칠 수 없다”고 했고,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수레를 이용할 수 없을 정도로 도로가 나쁜 것은 사대부 탓이며 책임을 져야 한다”고 질타했다. 보다 못한 고종이 도성(都城)의 정비를 이채윤 한성부윤(당시 서울시장)에게 맡겼다. 개화파 이채윤은 간선도로 확장에 착수했다. 운종가의 공식 상인조합 건물인 시전행랑(市廛行廊)에 틈입한 무허가 가게, 이른바 가가(假家)를 정리했다. 시전에 딸린 방이 전방(廛房)이 됐다가 나중에 점방(店房)이 되고, 가가가 가게로 명칭이 변이됐으니 이들 가가가 큰길을 암세포처럼 잠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대로 성공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종로가 왕복 8차선의 도로폭을 유지하고 있는 건 이 과감한 정비 덕분일지도 모른다. 18세기 후반 장흥 출신 실학자 위백규가 그린 ‘한양도’에서 볼 수 있듯 2000여칸에 이르는 시전행랑은 오늘의 세종대로 일대에 맞먹는 불야성이었다. 시전행랑은 경복궁, 한양도성과 함께 한양의 3대 랜드마크였다. 1960년대 말 지금의 세운상가 터에 자리 잡은 2200채의 무허가 판자촌과 세계 최대 규모의 사창가 ‘종삼’(鐘三)을 밀어버린 ‘불도저 시장’ 김현옥의 업적에 버금가는 ‘원조 도심재정비사업’이라 할 만하다. 요즘 ‘걷자, 서울’이라는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사람 인(人) 자 모양의 심벌을 길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서울시의 새로운 보행 정책이다. 박원순 시장은 “걷는다는 것은 건강·안전이고 행복·자유이며 연결”이라면서 “걸으면 시민 건강이 살고, 서울 경제가 살고, 지구 환경이 살아난다”고 보행천국론을 강조한다. 백번 천번 지당한 말씀이다. 캐나다와 이스라엘의 두 도시학자가 쓴 ‘도시의 정체성’(The Spirit of Cities)이라는 책을 읽어 보면 어떤 도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걷는 것이다. 천천히 걷다 보면 그 도시의 사람들, 역사와 문화, 사회적 특성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서울은 제대로 걸을 수 있는 도시인가. 심벌을 붙이고, 길에 스토리를 입힌다고 될 일이 아닐 성싶다. 최대의 방해물은 노상 적치물이라고 본다. 새삼 말하지만 서울은 걷는 자의 천국이 아니라 노상 적치물의 천국이다. 가끔 서울의 보행로가 공공보도인지, 가게의 점유지인지 헷갈릴 정도다. 너나없이 길에 상품 진열대나 물품을 내두고 공공연히 사용하고 있지만 제대로 단속이 이뤄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노상 적치물 실태조사 현황도 공개되지 않는다. 근본적인 보도환경 개선은 뒷전인 채 딴전이다. 언제까지 보행자가 노상 적치물을 피해 다녀야 하나. 이명박 시장의 청계천 복원은 상인들이 청계천을 떠나도록 설득했기에 가능했다. 정녕 ‘걷는 도시, 서울’을 만들려면 보행 흐름을 끊는 길거리의 무법자 적치물부터 상가와 점포 안으로 들여놓도록 ‘노상 적치물과의 전쟁’부터 선언하는 것이 순서다. 시류에 영합하는 인기 정책에 예산을 쓰기보다는 욕을 먹더라도 도시의 미래를 생각하기를 고언한다. 그래야 업적으로 남는다.
  • [현장 행정] 용산 전자상가 부활 키워드, IT 연구소·관광 그리고 쇼핑

    [현장 행정] 용산 전자상가 부활 키워드, IT 연구소·관광 그리고 쇼핑

    ‘서울의 전자상가=용산’이라고 떠올릴 때가 있었다. “세운상가에서는 탱크를 만들 수 있고 용산 전자상가에서는 인공위성을 조립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였다. 1990년대 PC·게임 주변기기를 사러 오는 ‘용산 키즈’를 낳았고 혼수품인 가전제품부터 전기·조명기구, 휴대전화 등 전자기기의 천국으로 통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인터넷 쇼핑에 밀리며 타격을 입은 용산 전자상가는 ‘용팔이’(가격을 높게 부르거나 강매하는 일부 용산 상인을 비하하는 표현)로 대표되는 이미지까지 덧씌워지면서 내리막길을 걷는다. 그 용산이 부활을 노린다. 서울 용산구는 도시재생사업(지역색을 그대로 살린 채 낙후 환경을 정비하는 사업)으로 낡은 용산 전자상가 일대를 정보기술(IT)과 관광, 쇼핑이 어우러진 명소로 만든다고 29일 밝혔다. 용산 전자상가는 지난 6월 서울시가 선정한 ‘2단계 서울형 도시재생활성화 지역’ 후보지 8곳 중 한 곳으로 뽑혔다. 전자상가에 연구시설을 설치해 IT 등을 발명하고 제품을 생산, 판매까지 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 시와 전문가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상권을 살리려면 기성제품만 팔 게 아니라 용산에서만 살 수 있는 첨단제품이 있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면서 “단순한 판매시설 리모델링이 아니라 용산 전자상가의 체질을 바꾸는 작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구는 전자상가 부활을 위해 연구·개발 시설을 짓기로 했다. 핵심은 ‘디지털랩’이다. 전자상가 인근에 국내 최대 규모 관광호텔(객실 1730개)을 짓는 부동산 업체 ‘서부T&D’가 원효전자상가 일부(6003㎡)를 공공기여했는데, 이를 연구시설로 꾸미겠다는 것이다. 대학생과 상인 등이 사용하는 세미나실과 작업실, 자료실, 방송국 등이 들어선다. 또 공과대학 학생들이 찾아와 연구하는 ‘멀티 공대 연합연구실’도 만든다. 성 구청장은 “용산역은 경부·경원선 등이 닿는 철도 교통의 중심지”라며 “전국 공대생이 용산으로 와 로봇과 드론, 정보통신기술(ICT) 등 4차산업 기술을 연구하고 이를 제품화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구는 연구·생산·유통이 모두 이뤄지는 전자상가를 만들고 용산역 HDC신라면세점, 2017년 완공될 관광호텔과 연계해 외국인 관광객을 끌어모을 예정이다. 성 구청장은 “용산 전자상가는 이태원관광특구와 함께 지역 경제의 양대 축인 공간”이라면서 “일본 도쿄의 전자상가 ‘아키하바라’를 넘어서는 아시아 최고의 전자상가로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유대근 기자 dynamic@seoul.co.kr
  •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지하철 노선 첫 키재기 기억… 영화골목 달군 추억을 찾아서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지하철 노선 첫 키재기 기억… 영화골목 달군 추억을 찾아서

    서울신문은 ‘서울미래유산’을 시민과 공유하기 위해 서울시·문화지평과 함께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을 매주 토요일 진행한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co.kr)에서 답사 코스 확인과 참가신청을 할 수 있다. 오는 18일 18회차 답사는 박광규 서울미래유산해설사의 안내로 종각에서 안국동 사거리로 이어지는 우정국로를 좌우로 훑어 보는 ‘종로 종축(남북) 탐방’이다. ‘서울미래유산’이란 서울 시민들이 근현대를 살아오면서 함께 만들어 온 공통의 기억과 감성이 들어 있는 유·무형의 문화유산을 말한다. 특히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가치를 미래세대가 수용할 수 있어야 미래유산으로 인정된다. 기존 문화재에는 지정문화재, 등록문화재, 예비문화재가 있다. 지정문화재는 문화재보호법과 시·도 조례에 의해 지정된 유물·유적이다. 지정문화재는 50년 이상 지난 문화재 중 역사·문화적으로 상징성이 있는 것들을 대상으로 정한다. 예비문화재는 50년이 지나지 않은 문화재 중 미래가치가 있는 것들이 지정 대상이다. 이들 문화재는 미래유산의 ‘선배’인 셈이다. 종로 보신각 앞 지하철 수준점 3·1운동 중심지에서 찾은 숨은 보물 ‘최순실 사태’로 온 나라가 어수선한 10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인 지난달 29일, 열다섯 번째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이 시작되는 보신각 앞에는 시국을 반영하듯 형광색 파카를 걸친 경찰들이 늘어서 있었다. 미래유산 플래카드를 펼쳐 달자 아니나 다를까, 잔뜩 긴장하고 다가온다. 한 경찰이 답사 취지를 묻는 새 다른 이는 사진을 찍고 무전으로 상부에 보고한다. 1주일 전 웃대 답사 때 검문검색보다 긴장감이 더 팽팽했다. 종로 보신각 앞에 물대포에 맞아 숨진 고 백남기 농민을 추모하는 가벽이 서 있었다. 고인을 추모하며 시민들이 쓴 수많은 메모지도 붙어 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국화꽃 20송이를 바칩니다’란 서촌 꽃집 ‘MOMO BLOOM’의 메모가 눈에 띈다. 마음으로, 꽃으로 고인을 떠나보내는 시민들의 마음이 진하게 느껴지는 추모벽 앞에서 답사가 시작됐다. 맑은 가을 날씨 덕에 최근 답사 참가인원이 30명을 훌쩍 넘기기가 예사다. 박광규 서울미래유산해설사는 미래유산인 지하철 수준점에 대한 설명으로 해설을 시작했다. 보신각 앞 잔디밭에 마치 야간조명쯤으로 여겨지는 작은 사각형 돌덩이가 있다. 카메라 망원렌즈로 당겨 보면 ‘수도권 고속전철 수준점’이라고 새겨져 있다. 커다란 카메라를 메고 답사에 참여한 시민 윤치영씨는 “그동안 서울 생활을 오래 했음에도 무심코 지나쳤는데, 오늘 탐방으로 지하철 수준점을 발견하니 마치 숨겨진 보물을 찾은 듯하다”며 “많은 사람의 만남의 장소인 이곳에 이런 유산이 있다니 그저 놀랍다”고 말했다. 윤씨는 이날의 답사 기록을 서울 미래유산블로그 포스팅 공모전에 출품해 우수상을 받았다. 지하철 수준점을 사진에 담기란 쉽지 않다. 보신각이 문화재인 탓에 출입이 엄격히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마침 문화재 관리인이 안에 있기에 사진을 대신 찍어 달라고 부탁했더니 흔쾌히 응해 주셨다. 그래서 귀한 사진을 두 장 얻었다. 또 보신각 앞에는 1919년 3·1운동 중심지였다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첫 종교방송 ‘옛 기독교 방송국’ 건물세계 명곡과 서양고전음악 보급에 기여 박 해설사가 설계한 코스는 ‘다이내믹’하기로 유명하다. 이날도 종각에서 출발해 을지로와 충무로를 종횡무진 걸어가며 길 위에 남은 기존 문화재와 미래유산을 콕콕 집어냈다. 보신각에서 큰길 동쪽으로 조금 걸으면 옛 기독교방송이 있던 누런색의 서양식 빌딩이 나온다. 지금은 기독교서회가 자리잡고 있는 이 건물은 1954년 기독교방송이 있던 자리다. 전파는 연희동 송신소에서 내보냈고, 이곳에는 연구소와 사무실이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 종교 방송국이 있던 장소이자 민간방송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됐다. 박 해설사는 “당시 기독교방송은 다른 방송에서는 듣기 어려운 서양고전음악, 세계명곡, 명가극, 성사극 등을 내보내 우리나라 서양고전음악의 보급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바로 옆에 있었던 종로서적도 지금 있었다면 미래유산 감인데, 시대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2002년 6월 최종 부도를 내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아쉬워했다. 종로 ‘젊음의 거리’를 따라 답사단은 뒷골목으로 스며들었다. 관철동은 종로 뒷골목의 대명사라고 할 만큼 종로를 대표하는 법정동이다. 관철동 골목길을 포함해 도시 조직 자체가 서울미래유산이다. 한국전쟁 직후 우리 자체의 기술력으로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실시한 곳이다. 내무부는 1952년 전쟁 복구를 위해 19개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를 고시하고, 이 중 시급히 시행할 5개 지구를 정했다. 그중 한 곳이 관철동 지구로 조선시대 구불구불한 실개천변을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됐던 도시조직이 격자형 모습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거쳤다. 관철동 삼일빌딩과 베를린 광장3.1운동 오마주와 통일 염원 담은 유산 요즘 관철동 골목은 또 다른 변화에 직면해 있다. 고공행진하는 임대료 탓에 기존 상인들이 떠나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막기 위해 건물주와 상인들의 공생 노력이 활발하다. 젊음의 거리 골목 사거리에는 ‘건물주와 세입자는 가족입니다. 임대료 인하하여 골목상권 활성화합시다. 갑이 도와야 을이 삽니다. 을이 죽으면 갑도 죽습니다’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관철동문화발전위원회 명의로 걸린 플래카드는 현명한 ‘갑’의 자세를 보여준다. 골목 몇 개를 좌우로 돌자 어느새 삼일빌딩 아래 서 있다. 연세가 높은 분들의 입에서 70·80년대 삼일빌딩의 위용에 대한 이야기가 봇물 터지듯 나왔다. 이 빌딩을 보려고 일부러 시골에서 올라온 관광객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삼일빌딩은 삼미그룹의 모태인 대일목재공업이 1968년 사옥으로 쓰려고 30억원을 들여 짓기 시작해 1971년 완공했다. 머릿돌은 1970년 3월 1일로 새겨져 있다. 삼일로에 31층 빌딩을 3월 1일 세운 것은 아마도 3·1운동 정신에 대한 ‘오마주’가 아닐는지. 그러나 정작 건축가 김중업은 설계비조차 받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은 1층에 KDB산업은행이 들어섰고, 건물 외벽에는 대우정보시스템이란 돌출글자로 된 간판이 붙어 있다. 삼일빌딩 건너편 한화빌딩에는 ‘베를린광장’이란 공간이 있다. 베를린시로부터 베를린 장벽 일부, 베를린 베어(Berlin Bear), 조명등과 의자를 기증받아 2005년 조성된 광장이다. 서울시와 베를린시 두 도시 간 우호의 상징이자, 대한민국 통일을 염원하는 장소로서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관수동 명패·영화관·노가리 골목영화보고 안동장 짜장면 먹고 노가리 안주까지 이제 관수동 명패골목으로 탐사팀이 이동했다. 빽빽한 골목길 안에 상패, 명패, 트로피, 기념물을 만드는 명패사가 즐비하다. 대로변부터 골목 안까지 명패 상권이 실핏줄처럼 발달해 있는 곳이다. 1980년대부터 생겨나기 시작해 90년대에 명패골목으로 완전히 형성됐다. 직업군인으로 정년퇴직을 한 이용성(78)씨는 “군 생활 할 때 이곳에 명패를 맞추러 자주 들렀던 기억이 있다”고 회상했다. 명패골목은 30~40년 된 굴보쌈 골목, 생선구이집 골목과 연결돼 있었다. 필자 역시 “50년 서울살이 동안 종로 대로변만 다녀봤지 남쪽 뒷골목에 이렇게 맛집이 모여 있을 줄 몰랐다”고 거들었다. 곧이어 이번 답사의 한 축인 영화관 골목이 시작됐다. 답사팀은 종로 3가역 서울극장을 거쳐 충무로길을 따라 명보아트홀까지 걸으면서 충무공 이순신의 32전 전승이라는 전대미문의 해전사를 들었다. 중구청은 충무로 보도 위에 충무공 해전사를 기록해 놓았다. 서울미래유산인 서울극장은 합동영화사가 세기극장(1958년 개관)을 인수해 1979년 ‘서울극장’으로 개관했다. 대기업의 멀티플렉스가 들어서기 전인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 시내 10대 개봉관이었다. 영화의 길을 가던 중간에 노가리 골목에 들렀다. 이 골목은 1980년대에 형성됐다. IMF 경제 위기가 닥치자 주머니가 가벼운 직장인들이 값싼 노가리 골목을 찾으면서 상권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2012년엔 을지로 노가리호프번영회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다. 상인 번영회 중심으로 매년 5월이면 을지로 노가리 축제를 연다. 이때만큼은 생맥주 한잔이 1000원이다. 노가리는 한 마리 1000원으로 오래전부터 가격이 요지부동이다. 노가리골목 터줏대감 격인 만선호프에서 22년째 일하는 조이로(82)씨는 이날도 노가리를 다듬고 있었다. 조씨는 “금요일같이 잘 팔리는 날은 하루에 노가리 1000마리, 평소 때는 500~600마리 정도 팔린다”고 말했다. 만선호프는 조씨 조카가 운영하고 있다. 호프집 골목을 나서자 길 건너 빨간색 간판이 트레이드마크인 서울미래유산 ‘안동장’이 보인다. 1948년 피카디리 극장 근처에서 화교인 왕충요씨가 개업한 중화요리집이다. 1950년 현 위치로 이전해 2대 왕용성씨, 지금은 3대 왕홍덕씨 등 3대에 걸쳐 가업을 잇고 있다. 영화와 인쇄의 대명사 충무로 을지로 개발로 1984년 대거 이전 종로와 을지로를 거쳐 드디어 충무로에 들어섰다. 충무로 인쇄골목 입구에는 이순신 생가터 표지석이 있다. 충무로는 ‘영화와 인쇄의 대명사’이다. 영화판 경력에 대한 질문은 으레 “충무로에서 몇 년 일했냐”로 치환된다. 연말이 가까워지면 인쇄골목 인쇄기는 쉼 없이 돌아간다. 내년도 달력, 다이어리, 수첩을 한창 찍어내기 때문이다. 충무로 인쇄골목은 1980년대 시작됐다. 원조 인쇄골목은 을지로다. 1910년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 영화관인 경성고등연예관을 시작으로, 경성극장, 낭화관, 중앙관 등이 을지로에 생기면서 영화 전단을 찍으려고 을지로에 인쇄소들이 생겼다. 그러다 1984년 을지로 개발로 을지로에 있던 인쇄업체 500여곳이 충무로로 이전하면서 충무로가 성황을 이뤘다. 충무로에서 영화와 인쇄산업을 서로 떼어내 생각할 수 없는 이유다. 중구청에 따르면 현재도 인가업체 1000여개, 미인가업체 3000여개에서 2만여명의 종사자가 일하고 있다. 시민에게 내어준 대한극장 옥상강북 전경 한눈에… 도시락 들고 소풍도 이번 답사는 대한극장에서 마무리했다. 대한극장 8층 옥상은 시민들에게 열려 있는 ‘공개공지’다. 대한극장이 서울시민을 위해 제공한 도심 쉼터로 화장실, 벤치가 갖춰져 있고 강북지역 서울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볕 좋은 날엔 도시락을 싸들고 올라가서 까먹어도 좋은 곳이다. 답사에 참석한 홍정자(76)씨는 세운상가에 대한 해설사의 짧은 설명을 듣자 “1966년(실제 준공은 1967년) 세운상가 아파트 7층에 입주해 살았다”며 “전자상가에 점포도 하나 운영했었다”고 회상했다. 남편 이용성씨는 “차를 타고 지나쳤던 서울의 구석구석을 걸어가면서 우리 문화유산을 만나니 삶의 질이 높아진 것 같다”고 했다. 대한극장 옥상에서 세운상가를 바라보며 이 부부는 5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난 듯 감회에 젖어 있었다. 글 사진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무지개떡 천국’ 싱가포르, 다민족의 얼굴 닮은 이곳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무지개떡 천국’ 싱가포르, 다민족의 얼굴 닮은 이곳

    본격적인 싱가포르의 역사는 19세기 초인 18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 동인도 회사의 토머스 스탬퍼드 래플스 경이 국제무역항을 개발한 것이 그 시초로, 아직도 그의 이름이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1867년에는 대영제국의 정식 식민지가 됐다가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다시 영국령이 됐다가 1963년 말레이시아의 일부로 독립했다. 그러나 인종과 사상 등의 차이로 인해 1965년 8월 9일 초대 총리 리콴유, 초대 대통령 유소프 빈 이스학 등이 주도해 말레이시아로부터 분리 독립, 현재에 이른다. 작년인 2015년, 독립 50주년을 성대히 기념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싱가포르는 도시국가다. 면적은 719.1㎢로 605.25㎢인 서울보다 넓고, 인구는 2015년 말 기준 567만 명으로 990여만 명인 서울의 절반이 넘는다. 단순히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인구밀도가 서울의 절반 정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서울 정도의 면적에 한 국가가 들어가다 보니 국가로서의 인구밀도는 엄청나게 높다. 국가로서의 싱가포르 인구밀도는 무려 6801.63명/㎢로 단연 아시아 최고다. 대한민국 전체의 인구밀도가 505명/㎢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나게 높은 수치다(물론 동등 비교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면적이 작은 국가의 인구밀도는 별도로 취급한다). 흔히 싱가포르 하면 고층 건물들이 숲을 이룬 모습만 상상하게 되지만 사실 나라 전체가 이런 것은 물론 아니다. 도심지나 교외의 신개발지를 벗어나면 의외로 저밀도 지역과 녹지가 많다. 싱가포르의 별명 중 하나가 ‘가든 시티’인 것도 우연은 아니다. 드물지만 리콴유 전 총리의 사저가 있는 옥슬리처럼 단독주택이나 저층 공동주택이 자리잡은 지역도 있다. 게다가 간척 사업을 활발히 해 건국 이후 지금까지 국토 면적을 무려 23%나 늘려왔다. 좁은 국토에 민간용, 군사용을 포함해 공항이 6개나 되는 것도 특이하다. ●중국식 상가 주택, 상업 밀도 높이는데 유리 국토가 극히 제한적인 나라이다 보니 싱가포르에서 공동주거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개국 이후 주택정책은 정부의 최우선 핵심 사업의 하나였다. 2015년 4월 2일자 연합인포맥스 기사에 의하면 싱가포르 정부는 한국으로 치면 토지주택공사(LH)에 해당하는 주택개발위원회(HDB)를 주축으로 해 전체 주택 시장에서 공공주택의 비율을 무려 85%까지 끌어올렸다. 게다가 그중에서 임대주택이 차지하는 비중은 겨우 3%에 불과하다. 리콴유 전 총리 이후 강력하게 실행해 온 자가소유확대 방침의 결과다. 사회적, 경제적 조건이 여러모로 다른 대한민국과의 단순 비교는 섣부르겠지만, 싱가포르 국민의 거의 대부분은 정부 주도로 지어진 자기 집에 살고 있는 셈이다. 상업 및 교역을 경제력의 근간으로 삼아 온 싱가포르에서는 이미 이전부터 다양한 유형의 주거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국과 비교했을 때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상가주택이다. 현지에서 ‘숍하우스’라고 부르는 이 유형은 기본적으로 3층이며 전체적으로 좁고 긴 대지에 자리 잡고있다. 짧은 변이 거리에 면하기 때문에 (이를 ‘frontage’라 한다) 상업의 밀도를 높이는 데 매우 유리하다. 중국에서 기원한 유형으로서, 건물에 대한 세금을 도로에 면한 폭으로 매겼기 때문에 이렇게 좁아진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결과적으로 상업 시설이 밀집한 거리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한다. 사실상 이런 유형은 싱가포르뿐 아니라 전 세계의 상업이 발달된 도시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동남아시아에 특히 많으며 일본의 ‘나가야’(長屋) 또한 이런 유형이다. 다만 한국에는 이런 유형을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대지의 긴 변이 거리에 면하는 경우가 더 흔하다. 이런 유형의 건물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 싱가포르의 어퍼 크로스 스트리트 일대다. 가로의 남쪽 면에 잘 보존된 상가주택이 줄 지어 서 있다. 넓게 보면 차이나타운에 속한다. 중국계가 대다수인 싱가포르지만 그래도 차이나타운은 엄연히 따로 존재한다. 이 중에서도 가장 붐비는 골목의 하나인 파고다 스트리트의 한복판에 있는 ‘차이나타운 역사박물관’은 3층 상가주택을 복원한 것이다. 내부의 가구, 집기까지 잘 갖춰 놓아 당시의 생활상을 쉽게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단면 모형을 보면 좁고 긴 평면 안에 중정이 두 개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중정을 중심으로 환기가 필요한 두 개의 시설, 즉 주방과 화장실이 바로 인접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아마 많은 고민 끝에 어쩔 수 없이 내린 결론이었을 것이다. ●1973년 완성된 두 건물… 관광 명소로 변화 이 상가주택들은 이제 일종의 역사 유물이 돼 관광객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을 통해 형성된 복합 건축의 전통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싱가포르를 위시한 동남아시아 일대는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합건축이 보편화돼 있다. 그야말로 ‘무지개떡 천국’인 셈이다. 그중에서도 싱가포르 거대 주상복합의 대명사는 바로 ‘골든 마일’(Golden Mile Complex)과 ‘국민 공원’(People´s Park Complex)이다. 두 건물 모두 1973년에 최종 완성됐을 뿐 아니라 건축가 또한 같았다. 싱가포르 근대건축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윌리엄 림과 그가 이끄는 설계회사인 DP 아키텍츠였이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싱가포르 주택개발위원회의 주도로 진행된 공공 프로젝트라는 공통점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이 연재에 등장했던 세운상가 등 한국의 상가아파트들에 비해서는 다소 연도가 늦은 편에 속한다. 그러나 윌리엄 림이 유럽과 미국에서 공부한 해외파인 데다가 싱가포르의 지정학적 성격이 겹쳐 국제적인 지명도는 비교하기 어렵다. 두 건물과 윌리엄 림에 대한 자세한 영문 정보는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특히 골든 마일은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일련의 건축적 사고들, 즉 메가스트럭처, 일본의 메타볼리즘, 브루탈리즘 등 중에서 실제로 지어진 거대 사례의 하나로 평가받으면서 국제 건축계에서 상당한 명성을 얻은 바 있다. 이는 동시에 당시의 한국 또한 일정한 동시대성을 확보하고 있었음을 역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것이다. ●사선 외관의 미학, 강남고속터미널과 비슷 골든 마일은 상업과 업무, 주거의 다양한 기능이 거대 구조물에 들어가 있는 건물이다. 아래서부터 순차적으로 500개의 주차공간, 411개의 상점, 226개의 사무실, 68개의 주거 가구가 있다. 멀리서 보면 반포의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을 연상케 하는 외관이다. 경사 구조물로 된 본관과 그 옆의 고층 타워 두 동으로 돼 있는데, 타워에는 북한 대사관이 입주해 있다고 들었다. 택시에서 내리자 태국어 간판이 여럿 눈에 보인다. 오가는 사람들 또한 싱가포르의 화교들이나 말레이족들과는 다소 다른 외모다. 싱가포르의 태국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어서 ‘미니 방콕’으로 불린다는 소문대로다. 건물 한쪽에 태국식 불교 제단이 있고 사람들이 향을 피우며 경배를 올리고 있다. 건물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상당히 경비에 신경을 쓰는 눈치다. ‘촬영금지’라는 푯말도 보였으나 마음속으로 사과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최고층인 16층에서부터 계단을 따라 걸어 내려간다. 오래된 건물이지만 의외로 건물의 상태가 나쁘지 않다. 1960~70년대 한국 상가아파트들이 예외 없이 벽에 금이 가 있고 페인트가 벗겨져 있는 것에 비하면 큰 차이다. 그나마 이 건물도 싱가포르에서는 일종의 슬럼으로 간주된다고 하니, 한국의 건물 관리 문화가 얼마나 낙후돼 있는지 알 수 있다. 주거 부분은 기본적으로 개방형 편복도 구조라 환기나 채광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게다가 정면은 계단식, 혹은 테라스 식으로, 그 앞에 펼쳐지는 마리나 베이 일대의 풍광을 즐기기에 손색이 없다. 주거 부분의 최하층에는 일종의 운동장이 있다. 기둥을 밝은 노란색으로 칠해 분위기가 경쾌하다. 원형의 창문이 건물 여기저기에 나 있는 것도 특이하다. 계단실 바닥이 작은 모자이크 타일로 돼 있는데 계단코 부분의 타일 높이를 달리해 발이 미끄러지지 않게 하는 논슬립을 만들고 있는 등, 디테일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테라스 증축 덕지덕지… 다소 음울한 내부 그러나 아래로 내려갈수록 분위기는 다소 음울해진다. 특히 사무실이 밀집된 중간 부분은 거대한 사선의 공간으로서, 건축의 기계미학을 경험하기는 좋으나 결코 쾌적하다고는 할 수 없는 곳이다. 저층부의 상가는 층고가 높아서 시원시원한 공간이기는 하나 이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다니기에는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다만 이것은 건물 자체의 본질적인 문제라기보다 현재 건물을 사용하고 있는 형태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다. 내부를 좀더 잘 정리하고 조명, 간판 등을 업그레이드하면 훨씬 더 좋은 분위기가 될 것이다. 다소 부정적인 의미를 담아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물론 세운상가 등에 비하면 관리 상태나 사용 형태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그러나 외부에서 바라보는 골든 마일은 왜 싱가포르에서 툭하면 이 건물을 헐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다. 테라스를 불법 개조, 증축하지 않은 가구가 거의 없다. 국민을 심지어 물리적으로 때려가면서 교육시킨 것으로 유명한 싱가포르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대부분의 건물들이 말쑥한 싱가포르에서 불법 증개축이 판을 치는 건물이 존재한다니? 그것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건물이. 오죽하면 의회에서 이 건물 주민들의 이기심과 무관심을 통렬하게 비판할 정도다. 다민족 국가로서 싱가포르는 특정 민족의 전통이나 문화를 우선하기 어렵다는 고민을 안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일찍부터 지역주의를 벗어나 국제적인 건축에서 해답을 찾으려는 경향을 보여 왔다. 현대건축의 대부 격인 렘 쿨하스는 싱가포르의 이러한 탈맥락적 특징을 ‘포괄적 도시’(The Generic City)라는 명칭으로 설명했다. 다만 싱가포르 사람들에게 이 건물은 본격적인 국제화가 이루어지기 전, 소위 ‘싱가포르적’ 문화를 담는 노력을 한 사례로 종종 인용된다. 이 건물의 미래에 대한 논의는 그간 다양하게 진행돼 왔으나 여전히 철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한국의 세운상가가 겪었던 것처럼 극적으로 재생의 길을 걷게 될지, 아닐지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져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아온 한국과 싱가포르의 두 건물이 맞게 될 운명은 어떤 것일까.
  • [영상] 제5회 서울신문 정책포럼 ‘서울 도시재생, 미래를 말하다’

    [영상] 제5회 서울신문 정책포럼 ‘서울 도시재생, 미래를 말하다’

    “모든 집을 한꺼번에 밀어버리고 고층 아파트로 짓는 방식의 재개발은 구시대적 발상”이라면서 “앞으로 지역 공동체를 복원시키고 원주민 정착률을 높이는 ‘도시재생’으로 낡은 서울을 고쳐나가겠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2012년 이렇게 주장하며 오도가도 못하는 ‘뉴타운’ 정책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뉴타운’으로 대표되던 과거 ‘대규모 철거 후 신축개발’에서 ‘서울형 도시재생’으로 과감히 방향을 튼 것이다. 창신·숭인 지역을 시작으로 가리봉 지구, 세운상가 등 본격적인 도시재생이 한창이다. 이는 도시 개발은 1973년 ‘주택개량 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제정된 이래 40년간 민간 주도의 전면 철거 재개발에서 전환을 의미한다. 서울시는 2014년 7월 뉴타운이 첫 해제된 창신·숭인 일대를 주민 주도의 재생에 나서고 있다. 또 창신·숭인 일대 재생에 이어 1970년대 수출산업단지 1호인 구로공단의 배후주거지인 가리봉 지구의 도시재생 계획도 발표했다. 또 1968년 세워질 당시엔 ‘미사일도 만든다’는 소문이 돌만큼 활성화됐다가 용산·강남 개발에 밀려 낙후된 세운상가의 재도약 계획도 실행 중이다. 하지만 문제점도 나타나고 있다. 주민참여도가 낮을뿐 아니라 의견수렴 과정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아파트’를 원하는 일부 주민과의 갈등 등이다. 서울신문은 지난 28일 한국프레스센터 19층에서 ‘서울 도시재생, 미래를 말하다’란 주제의 제5회 정책포럼을 열고 변창흠 SH공사 사장과 배웅규 중앙대 교수, 양재섭 서울연구원 도시공간실장, 김성훈 서울 강북마을 대표 등 전문가의 열띤 토론으로 서울시 도시재생의 현주소와 문제점, 해법 등을 알아봤다. 사회·진행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영상 김형우 기자 hwkim@seoul.co.kr
  • “도시재생 전국 확산… 주민 의사 반영·인센티브 지원 필요”

    “도시재생 전국 확산… 주민 의사 반영·인센티브 지원 필요”

    “모든 집을 한꺼번에 밀어버리고 고층 아파트로 짓는 방식의 재개발은 구시대적 발상이다. 앞으로 지역 공동체를 복원하고 원주민 정착률을 높이는 ‘도시재생’으로 낡은 서울을 고쳐 나가겠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2012년 이렇게 주장하며 오도 가도 못하는 ‘뉴타운’ 정책의 새로운 대안으로 ‘도시재생’을 제시했다. ‘뉴타운’으로 대표되던 과거 ‘대규모 철거 후 신축 개발’에서 ‘서울형 도시재생’으로 과감히 방향을 튼 것이다. 종로구 창신·숭인 지역을 시작으로 가리봉 지구, 세운상가 등 본격적인 도시재생이 한창이다. 이는 도시 개발이 1973년 ‘주택개량 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제정된 이래 43년간 민간 주도의 전면 철거 재개발에서 완전히 바뀐 것을 의미한다. 서울신문은 지난 28일 한국프레스센터 19층에서 ‘서울 도시재생, 미래를 말하다’란 주제의 제5회 정책포럼을 열고 변창흠 SH공사 사장과 배웅규 중앙대 교수, 양재섭 서울연구원 도시공간실장, 김성훈 서울 강북마을 대표 등 전문가의 열띤 토론으로 서울시 도시재생의 현주소와 문제점, 해법 등을 알아봤다. →사회 43년 동안 서울의 전면철거 위주의 재개발 사업은 부동산 광풍과 지역의 사회·문화적 공동체 파괴와 갈등, 원주민이 떠나야 하는 상황 등 많은 폐해를 불러왔다. 이를 보완하려는 게 도시재생의 목표다. 오늘 전문가 포럼에서는 서울시의 도시재생이 어디쯤 와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지금껏 드러난 사업의 문제점은 무엇이고 어떻게 보완해야 할지 알아봤으면 한다. 또 이 과정에서 서울시 등 자치단체의 역할은 뭔지 등도 함께 논의할 예정이다. 우선 도시재생 1호 사업 창신·숭인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다. →변 사장 창신·숭인 지역은 서울시의 도시재생 1호 사업지다. 재개발 혹은 뉴타운이라는 이름으로 전면 철거 뒤 아파트 만드는 사업이 4년여 진행된 곳이다. 반면 뉴타운지구 해제 요구가 가장 격렬했던 곳이기도 하다. 다른 도시재생사업이 주거지역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과 달리 창신·숭인과 왕십리지구는 중심 시가지를 낀 특수성이 있다. 또 동대문 시장에 납품하는 봉제공장이 몰려 있고 낙산공원을 중심으로 서울성곽이 지나가는 특수 지역이기도 하다. 지역 주민의 특수성과 입지 특수성 고려 없이 고급 아파트를 짓는다는 계획 자체가 실현성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울 내 뉴타운 중 가장 먼저 해제됐고 2014년 7월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 선도 구역으로 서울에서 유일하게 선정됐다. 이제 2년이 지났다. 지역을 대표하는 주민과 각종 시민사회단체 등이 역사와 문화, 생태, 환경 등 지역의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다양한 경관이나 자원을 만드는 과정이다. →양 실장 도시재생특별법은 (서울시가 뉴타운 출구전략을 준비하던) 2013년 6월 제정됐다. 하지만 도시재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서울시에 담당 조직인 ‘도시재생본부’가 만들어진 2015년 1월 이후의 일이다. 2년이 채 안 된 것이다. 아주 시작 단계다. 어떤 면에서는 ‘도시재생 한다고 하면서 지난 2년 동안 뭘 했나’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평가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다. 재생을 통해 지역 주민 의식도 변해 가고 공무원 의식도 변하고 있다. →사회 시장이 바뀌는 등 지방자치단체의 리더십이 바뀌면 도시재생사업 기조가 예전 철거 위주의 재개발사업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배 교수 재생사업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개념이 아니다. 흔히 도시재생 하면 기존 재개발, 재건축이 현시대적 관점에서 보면 잘못되고 부족한 게 많다. 하지만 빠르게 늘어가는 인구와 경제개발 속도에 맞춰 부족한 주택도 늘리고 도심 인프라도 공급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저성장 시대인 지금은 서울의 일부 지역은 전면 철거방식보다 재생사업이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구이다. 어떤 단체장이라도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김 대표 재개발 뉴타운 중심으로 갔다. 그것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긴 하다. 예를 들면 그 지역의 주민들이 다 쫓겨나야 하는 문제가 있다. 아파트의 융자금과 매달 관리비 등 갑자기 오른 주거비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볼 때 피해가 컸다. 도시재생이 대안인 건 맞다. 따라서 단체장이 쉽게 도시재생 패러다임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양 실장 철거 재개발이 여전히 필요한 지역이 부분적으로 있을 거다. ‘모 아니면 도’ 식으로 바뀌는 건 아니다. 경제 상황 자체가 이제 과거와 같은 재개발로 돌아가기는 어렵다. 2010년 이후에 한국이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게 공공연한 사실이다. 또 고령화 사회로 빠르게 접어들면서 아파트를 살 수 있는 ‘수요자’들도 급격히 줄고 있다. 재개발 방식이 더 많이 지어서 사업비를 만들어내는 방식이었는데 지금은 이 방식이 통할 수 있는 지역이 몇 곳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재개발하고 싶어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사회 결론은 서울의 많은 곳에서 전면 철거 방식 도입이 어려워서 어떤 지자체장이 와도 흐름을 뒤집을 수는 없다, 수요가 있는 강남 지역은 예외다. 도시 재생 흐름을 누구 와도 막을 수 없다. 도시재생 현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김 대표가 서울 강북구에서 활동 중인데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나. 기대와 우려는 무엇인가. →김 대표 최근에 ‘희망지’라고 해서 서울형 도시재생사업 20개가 진행되고 있다. 활성화 전에 6~10개월간 준비 예비기간을 주는 것이다. 주민들을 조직하고 주민들이 계획부터 실행까지 할 수 있도록 주체를 형성하는 과정으로 희망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강북구에도 2개 지역이 희망지로 선정돼서 진행되고 있다. 수유1동, 송중동에서 진행 중이다. 삼양동 지역 재생 기획단도 만들고 주거환경 정비사업에 사회적경제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고 주민들 의견만 듣는 게 아니라 주민이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조직화를 하고 있다. 또 물리적 환경의 변화, 주거 환경 개선 등 하드웨어적 사업도 하고 있다. 낡고 불안한 마을 환경의 개선작업도 전문가와 함께 진행하고 있다. →양 실장 전국적으로 도시재생사업이 진행 중인데 서울시가 가장 잘한 건 준비 단계를 뒀다는 점이다. 재생사업 지구 지정부터 먼저 할 게 아니라 후보 지역의 주민 역량을 키워주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해 재생 2단계에서는 준비 단계를 뒀다. 바로 진행해 봐야 분란만 있고 진전이 안 된다. 그래서 속도는 늦을 수밖에 없다. 이런 식의 일은 우리가 해본 적 없어서 숙성되는 데 시간이 더 필요하다. →김 대표 서울형 도시재생사업지 8곳을 모두 방문했다. 민관이 협력하고 비정부단체(NGO)도 들어와서 사업계획을 잘 세워 추진 중이었다. 다만, 문제는 사업 추진 때 주민들이 안 보였다는 점이다. 주민이 사는 지역에, 주민을 위한 도시 재생사업을 하는 데 주민에 의한, 주민의 사업은 아니었다. 전문가들이 와서 보고 어떻게 바꿔보자고 하는데 정작 주민들이 의사가 얼마나 반영됐는지는 의문이다. 도시재생의 지역을 선정하기 전에 반드시 주민들이 등장해야 한다. 주민들에게 공청회에 참여하라고 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계획과 실행, 관리까지 전 과정에 주민이 참여해야 한다. →배 교수 제가 가리봉 도시재생사업의 총괄계획가(MP)를 맡고 있는데 저희 지역도 초기 그런 맥락에서 지적받았다. 하지만 가리봉 지역은 중국동포가 많아 주민 참여가 낮을 수밖에 없다. 중국교포가 통계로는 40%가 잡히지만 80% 가깝다고 느낀다. 생계 활동에 불편하지 않은 범위에는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왜 도시재생은 모든 주민을 활동가로 만들려고 하나. 모든 사람에게 활동가 수준을 원하는 건 주민을 금방 지치게 한다. →김 대표 가리봉 상황은 저도 잘 이해한다. 그런데 재생지역에서 사업을 주도하는 사람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주민, 두 번째는 주민 중 좀 더 적극적인 리더, 세 번째는 재생 활동가다. 주민들이 주민협의회에 참여해서 계획 수립과 시행에 참여할 수 있는 의사결정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전문가들은 계획을 세우고 떠난다. 결국 이를 운영하는 건 지역 주민이다. 그래서 주민 참여가 중요하다. →변 사장 뉴타운 지정이 안 된 지역은 사업성이 없어서 못된 곳으로 봐야 한다. 어쨌든 (뉴타운 지정이 안 되면) 이곳 주민들은 아파트로 갈 꿈을 버리고 살아야 한다. 창신·숭인 지역에서 다른 지역에서 따라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적은 돈으로 할 수 있는 모델 말이다. 적은 돈 들이면서 공공성을 실현하고 주민들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사업 모델을 아주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 →배 교수 동의한다. 사업 방식이 정교해지고 작아져서 주민들이 쉽게 할 수 있는 구조의 사업을 만들어줘야 한다. 지금의 방식은 키 큰 친구 뽑아서 국가대표 훈련소에서 키우는 방식이다. 이제는 보편적인 몸무게, 키의 친구를 키워야 한다. →변 사장 제가 1~2년 동안 저층 주거지 모델을 만드는 작업을 해 거의 완성단계에 왔다. 8~10개 집의 소규모 사업단위 개발이다. 여기에는 공동시설로 주민 편의시설, 무인 택배센터 등을 넣을 수 있다. 인근 다른 10개 집이 모여서 개발하는 곳에는 어린이집 등 지역 편의시설을 확보하는 방식이다. 아파트 단지와 비슷한 생활 편의 효과를 낼 수 있다. 여기에 용적률을 올리고 자금지원을 하는 등 인센티브를 주면 공공사업자가 들어가고, 임대주택를 확보하는 등으로 사업 성공 가능성을 키울 수 있다. →사회 일반 주거지역에서는 낮에 주민들을 보기 어려워서 주민 의견 수렴은 물론 주민 참여를 이끌기 어려운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민들이 바라는 것은 뭐고, 현재 겪는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서울시에서 도왔으면 하는 일은 뭔가. →김 대표 지역에 필요한 주차장과 도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등 장기적 비전이 필요하다. 초기단계는 물론 5년 뒤, 10년 뒤에 어떻게 할지 등의 밑그림이 필요하다. 주민들은 지역 모임을 만들고, 여기에 서울시나 각 자치구 관계자뿐 아니라 전문가 집단이 참여해 도시재생의 문제를 같이 풀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변 사장 김 대표가 세 주체를 말했지만 나는 SH공사 같은 공공사업자도 중요 주체로 생각해야 한다. 주민 주도의 정비가 이뤄지려면 주민 중 누군가 앞장서서 해보자고 하고 설계도 하고 해야 한다. 주민이 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해결해줄 수 있는) SH 같은 공공사업자가 중요한 이해관계자가 될 수 있다. →김 대표 주민과 SH가 만나 얘기하면 주민들이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 같다. →변 사장 지금 저층 주거지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아파트다. 그런데 아파트를 못 지을 만큼 사업성 없는 동네에 우리 보고 사업하라고 하면, 우리도 기업인데 할 수 없다. 결국 정비를 위해서는 이 동네에 줄 수 있는 게 필요하다. 용적률 완화랄지, 높이 제한, 주차장 완화, 자금 지원 등이 필요하다. 바로 이런 지원을 서울시가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양 실장 도시재생은 쇠퇴지역의 환경 변화를 위한 실험이다. 도시 재생을 원하는 지역이 있다면 주민 역량을 우선 강화하고, 현실적으로 작은 단위 또는 중간 단위의 사업모델을 해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중요하다. →배 교수 도시재생이 앞으로 더 잘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도시 재생은 주민들이 일상 속에서 부담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하드웨어적인 정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 이후 환경 개선 사업이나 공동체 활성화가 이어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다문화, 국제화 사회에 대비한 도시재생사업을 해야 한다. →김 대표 행정과 주민, 전문가가 거버넌스를 통해 미래 도시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도시재생이라고 생각한다. 당장 효과가 아니라 10~20년 뒤 비전을 세우고 진행해야 한다. →변 사장 현재 도시재생사업이 상당히 지연, 정체되고 혼란스러운 것이 과거에 느꼈던 과도한 속도감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시재생이 제대로 안 되고 있는 부분을 두고 ‘원래 도시 재생은 이런 것이다’라는 식으로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이 너무 불편하고 환경 개선이 필요하다면 거기에 맞는 주거나 가로 환경 정비를 해야 한다. 지역 주민 역량만으로는 어렵다. 공공주체를 활용해야 하는데 SH도 중요 주체다. 따라서 중앙정부와 서울시가 SH에 적절한 인센티브와 자금 지원, 권한 등 법적으로 보장할 필요가 있다. 사회·진행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정리 유대근·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제5회 서울신문 정책포럼 전문]‘서울 도시재생, 미래를 말하다’

    “모든 집을 한꺼번에 밀어버리고 고층 아파트로 짓는 방식의 재개발은 구시대적 발상”이라면서 “앞으로 지역 공동체를 복원시키고 원주민 정착율을 높이는 ‘도시재생’으로 낡은 서울을 고쳐나가겠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2012년 이렇게 주장하며 오도가도 못하는 ‘뉴타운’ 정책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뉴타운’으로 대표되던 과거 ‘대규모 철거 후 신축개발’에서 ‘서울형 도시재생’으로 과감히 방향을 튼 것이다. 창신·숭인 지역을 시작으로 가리봉 지구, 세운상가 등 본격적인 도시재생이 한창이다. 이는 도시 개발은 1973년 ‘주택개량 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제정된 이래 40년간 민간 주도의 전면 철거 재개발에서 전환을 의미한다. 서울시는 2014년 7월 뉴타운이 첫 해제된 창신·숭인 일대를 주민 주도의 재생에 나서고 있다. 또 창신·숭인 일대 재생에 이어 1970년대 수출산업단지 1호인 구로공단의 배후주거지인 가리봉 지구의 도시재생 계획도 발표했다. 또 1968년 세워질 당시엔 ‘미사일도 만든다’는 소문이 돌만큼 활성화됐다가 용산·강남 개발에 밀려 낙후된 세운상가의 재도약 계획도 실행 중이다. 하지만 문제점도 나타나고 있다. 주민참여도가 낮을뿐 아니라 의견수렴 과정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아파트’를 원하는 일부 주민과의 갈등 등이다. 서울신문은 지난 28일 한국프레스센터 19층에서 ‘서울 도시재생, 미래를 말하다’란 주제의 제5회 정책포럼을 열고 변창흠 SH공사 사장과 배웅규 중앙대 교수, 양재섭 서울연구원 도시공간실장, 김성훈 서울 강북마을 대표 등 전문가의 열띤 토론으로 서울시 도시재생의 현주소와 문제점, 해법 등을 알아봤다. 지면 제약이 없는 인터넷에는 토론의 전체 내용을 올린다. 입말을 글로 바꾸는 과정에서 최소한만 수정했다. ●사회자 오늘 제5회 정책포럼에 오신 것은 감사드린다. 토론자들이 돌아가면서 오늘 포럼의 의미 등을 간단하게 설명해 달라. ●변창흠 SH 사장 =그동안 전면철거형 재개발 사업에 대해 여러 문제점이 유발돼 도시재생사업이 시작됐다. 4~5년이 지났다. 저층 주거지가 아파트가 되기 위한 대기 장소로 인식됐다가 더불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어떻게 태어날지 관심이 많다. 실행될 수 있는 사업 모델 찾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사업성 부족하기 때문에 제도적 인센티브 찾아내야만 사업이 시작될 수 있다. ●김성훈 강북구지역공동체네트워크 강북마을 대표 =철거 중심의 사업에서는 여러 가지 문제 많았다. 도시 재생으로 전환되는데 강조하고 싶은 것은 주민 주도다. ●배웅규 중앙대 도시공학과 교수 =도시재생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도깨비 방망이처럼 얘기하고 싶지 않다. 우리가 지금까지 서울의 성장은 과거의 경험이 축적된 것이다. 이제는 서울이 세계 도시로 영향력을 가지려면 기반이 중요하다. 종합적인 측면에서 재생이 필요하다. 물리적 정비 중심의 재생에서 이제는 보다 사회 문화를 경제를 포괄하는 새로운 도시 재생 시대를 열어야 한다. 세계 도시가 많은 사람이 함께 모여 사는 지혜를 갖추었듯이 그 이상향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실천하는 도시 재생을 기대한다. ●양재섭 서울 연구원 도시공간실장 =전면 철거 재개발에서 도시 변화 방식을 지역주민 참여를 통해서 환경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전환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문제들도 나타난다. 13개 지역 도시 재생 진행되는 것 모니터링 중이다. 오늘 세미나가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자리 됐으면 한다. ●사회 =도시재생 선도지역으로 뽑힌 창신·숭인지구와 가리봉 지구 등이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 전면철거 위주의 재개발 사업이 가져오는 폐해가 있었다. 예컨대 부동산 광풍과 지역의 사회·문화적 여건을 완전히 바꿔놓고 원주민이 떠나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이를 보완하려는 게 도시재생의 목표다. 서울시의 도시재생이 어디쯤 와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또 지금껏 드러난 사업의 문제점은 무엇인고 어떻게 보완해야할지 얘기해 보고자 한다. 또, 이 과정에서 서울시 등 자치단체의 역할을 뭔지 짚을 예정. 우선 도시재생 1호 사업 창신·숭인에 대해 얘기하고 해보고 싶다. ●변 사장 =창신·숭인 지역은 서울시로보면 도시재생1호사업지다. 그동안 도심 정비는 재개발 혹은 뉴타운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전면 철거 뒤 아파트 만드는 사업에 초점 맞춰져왔다. 창신·숭인지구는 서울에서 진행 중인 뉴타운 지구 중 가장 늦게 만들어진 곳이다. 뉴타운 지구 해제 요구가 가장 격렬했던 곳이기도 하다. 다른 도시재생 사업이 주거지역 중심으로 진행됐으나, 창신·숭인지구와 왕십리지구는 중심 시가지를 끼고있는 특수성이 있다. 또, 동대문 시장에 납품하는 봉제공장이 몰려 있다. 낙산공원을 중심으로 서울성곽이 지나가는 특수 지역이기도 하다. 이런 역사, 지역 주민의 특수성과 입지 특수성 고려없이 고급 아파트를 짓는다는 계획 자체가 실현성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울 내 뉴타운 중 가장 먼저 해제됐고 2014년 7월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 선도 구역으로 서울에서 유일하게 선정됐다. 이제 2년이 지났다. 도시재생사업은 전면 철거식 뉴타운 사업의 문제점 극복을 위해 만든 것이다. 과거에는 비용 최소화 등을 위해 짧은 시간 내 아파트를 다 지어 분양하면 사업이 끝나지만, 도시재생 사업은 여러 주체가 역사, 문화, 생태, 환경 등 지역의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다양한 경관이나 자원을 만드는 과정이다. 도시재생 사업은 과거 전면철거 뒤 아파트 짓는 방식의 정비와 비교하면 속도가 늦다. 지금 현재 있는 자원들을 찾아 발굴하고 어떤 방식으로 만들 것인지 합의하는 방식이 세계적으로도 벌어지고 있다. 재생사업지에 도시재생센터 만들어져 지역 자원을 여럿 발굴해서 국·시비 지원을 통해 만들고 있다. 백남준 기념관, 채석장 명소화, 봉제특화거리 조성 등의 계획이 확정했다. 현재 공동작업장이나 주민 이용시설을 만드는 일이 진행 중이다. 지역 공동 자산을 활성화하는데 초점 맞춰져 있다. 그게 되면 이후에는 자원 중심으로 지역 주민들이 지역을 어떻게 발전시킬지 고민해야 한다. 그때서야 주민들이 원하는 주거환경개선 등에 관심 집중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양 실장 =도시재생특별법은 (서울시가 뉴타운 출구전략을 준비하던) 2013년 6월 제정됐다. 하지만 도시재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서울시에 담당 조직인 ‘도시재생본부’가 만들어진 2015년 1월 이후의 일이다. 2년이 채 안됐다. 도시재생을 진행하려면 서울시 전체의 도시재생 전략계획 세워야 한다. 서울연구원이 시와 함께 2015년 3월에 계획 수립을 완료했다. 계획을 통해 어디를 재생지역으로 할지 정했다. 서울은 13곳이 재생지역으로 지정됐는데 경제기반형이 2곳, 중심지형이 3곳, 나머지는 주거지 근린형이다. 이 계획 수립을 하는데 1년여 정도 소요됐다. 13개 지역 중 계획 확정 지역은 2곳이다. 창신·숭인과 장안평이다. 2곳은 막 사업을 시작한 단계다. 나머지 11개 지역은 공청회를 하고 계획안을 다듬고 있다. 계획안조차 확정 안된 상황이다. 지난 2~3년간 서울시가 한 일은 시 전체 도시재생 추진 조직 만들고 큰 계획 세우고 재생추진기반을 만들었다. 이제 시작 단계다. ‘도시재생한다고 하면서 지난 2년동안 뭘 했나’ 할 수도 비판할 수도 있지만, 아직 평가하기에도 이른 감이 있다. 도시재생을 통해 지역 주민 의식도 변해가고 공무원 의식 변한다. 1970년 이후 지금까지는 쇠퇴 지역을 전면 철거로 하는 게 유일한 지역 환경 변화 방법이었다. 도시재생은 주민이 역량을 발휘해 이들의 주도 하에 변화시킬 수 있는 새 가능성이 열렸다는 게 큰 의미가 있다. ●사회 시장이 바뀌는 등 지방자치단체의 리더십이 바뀌면 도시재생사업 기조가 예전의 철거위주의 재개발사업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배 교수 재생사업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개념이 아니다. 흔히 도시재생하면 기존 재개발, 재건축이 현시대적 관점에서 보면 잘못되고 부족한 게 많아 그 대체 수단으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일부만 맞는 얘기다. 도시를 정비하는 방법이 1970년대 처음에는 ‘수복형’(소단위 맞춤 정비)으로 진행했다. 그러다가 빠르게 늘어가는 인구와 경제개발 속도에 맞춰 국민 삶의 질을 보장하기 어려워 철거 뒤 재개발 방식으로 바뀐 것이다. 빠르게 부족한 주택도 늘리고 도심 인프라도 공급할 수 있었다. 즉, 긍정적 효과도 컸다는 얘기다. 시장이 바뀌면 도시 정비 기조가 재생에서 재개발로 정책이 변화하지 않을까 우려할 수 있지만 시대 요구에 부응해서 시장이 진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수복형 방식이 다시 등장한 건 2009~2010년 사이의 일이다.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이 ‘휴먼타운’이라는 이름으로 수복형 정비 사업을 진행했다. 지금 사회에서는 철거 방식을 통한 정비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다. ‘아파트에서 누리는 삶의 질을 저층 주거지에서도 누릴 수 없을까’라는 고민 속에서 주민 재산권을 건드리지 않고 개발하는 방식을 찾은 것이다. 국토부에서 추진했던 내용은 서울시에서 단독주택지를 철거하지 않고 정비하는 방식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재개발 재건축 한계 인정하고 당시 3개의 법으로 진행했다. 도시재생기본법, 주거환경재생법, 주거환경재생법. 기존에 있던 법과 합쳐서 다시 3개의 법제로 재편하는 추진을 했다. 그러다가 국회 과정에서 성사가 안되고 도정법(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과 도촉법(도시재정비 촉진을 위한 특별법)을 개정하는 수준에서 정리가 됐다. 그 이후 주거재생법 등을 합쳐서 2013년에 만들었다. 2012년 개정된 도정법에 주목해야 한다. 과거에는 생활권 개념 없었는데 생활권 계획이 도입됐다. 도정법에서 가장 문제된 게 예정구역 제도다. 예정구역에 묶이면 주민 재산권이 제한된다. 신축, 증축, 개축이 안된다. 예정구역 지정 하지않고 정비할 수 있는 방법 고민하다가 생활권 계획이 도입됐다. 또하나는 미니 재개발이 있다. 대규모 재개발하니까 문제가 되니 도로로 둘러싼 지역, 소규모 정비 사업(가로주택정비사업)을 해서 보완하자는 것이다. 과거에는 물리적 정비만 했는데, 지역 문화를 고려하고 거주자들의 요구를 반영하자고 해서 만들어졌다. 이것이 주거환경관리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활성화되고 있다. 그런 흐름으로 도시재생사업의 범위가 아주 커졌다. 재개발이 보통 5만 제곱미터 미만이었다면, 도시재생사업은 기본이 10만 제곱미터, 크게는 30~40만 제곱미터 정도다. 규모가 커졌다. 물리적인 내용보다는 사회, 경제, 문화 등이 조금 더 강조돼서 진행되는 것 같다. 도시재생사업이 지속가능하려면 과거 물리적 정비와 실제 주민의 삶을 개선하는 방향이 병행할 수 있는 지혜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 대표 =과거 재개발 뉴타운 중심으로 갔다. 그것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예를 들면 그 지역의 주민들이 다 쫓겨야 하는 문제가 있다. 주거비를 감당해야 한다. 아파트가 들어서면 주민들이 와야 하는데 대부분이 융자를 받아서 사기 때문에 주거비 확 올라가고 생활에 문제가 있다. 실제로 분양이 안되고 빈집들이 많다. 이런 개발 방식에 문제가 있다. 서울시뿐만 아니라 국토부도 도시재생사업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개발 시대에서 재생시대로 왔다. 시장이 바뀌면 어떻게 되나. 재생시대가 왔는데 정치적인 거 생각하면 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든다. 물리적 환경 변화 탓에 생기는 문제로 도시 재생이 굉장히 중요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현장에서 볼 때 피해가 컸다. 도시재생이 대안이지만, 아직 주민들이 이해가 없다. 재개발 중요하다고 하는 주민들과 재개발 하면 안된다는 주민들이 여전히 갈등을 빚고도 있다. 창신·숭인과 관련해서도 여전히 개발 세력과, 개발로는 안된다는 비상대책위원회 세력 간의 갈등이 있다. 지역 주민들이 재개발과 같은 방식은 아는데 도시 재생은 이해가 부족하다. ●사회 =지금 말씀하신대로 이 법을 통해서 진행한 게 얼마 안됐기 때문에 잘 모르고 성과 확보는 어렵다. ●양 실장 =철거 재개발이 부분적으로 필요한 지역이 있을 거다. ‘모 아니면 도’ 식으로 바뀌는 건 아니니까. 경제 상황 자체가 이제 과거와 같은 재개발로 돌아가기는 힘들다. 2010년 이후에 한국이 저성장시대에 접어들었다. 성장률 1% 전망도 계속 나오기 때문에 과거의 고개발 시대와 달라졌다. 고령화 문제도 빠르게 진행이 되고 있는데 2017년이면 고령화 사회가 되고, 2026년에 초고령화 사회가 된다. 베이비붐 세대가 65세 이상이 됐을 때 한국이 빠르게 고령화 사회로 진입할 거다. 이는 개발 수요의 감소를 말한다. 성장률이 떨어지고 고령화가 되니 신규 개발수요가 당연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과거보다 빠른 속도로 떨어질 것이란 전망과 예측이다. 재개발 방식이 더 많이 지어서 사업비를 만들어내는 사업성에 근거하는 방식이었는데 지금은 통용될 수 있는 지역이 몇 곳에 불과하다. 재개발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사회 =김 대표의 말을 보면 재개발 방식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도시 재생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주민들은 시세차익을 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는 것인가. ●변 사장 =제가 설명을 드리겠다.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한다. 처음 배 교수 말한대로 처음에 재생법을 만들 때는 재개발을 규정하는 법률이 도정법, 뉴타운법이 따로 있어 이를 포괄하는 법을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새로 만들어진 특별법이 앞에 있는 뉴타운법 재개발법 등을 포괄하지 못했다. 얘는 얘대로 하고, 쟤는 쟤대로 하는 것이다. 서울시 기준으로 보면 뉴타운 출구 전략 전까지 뉴타운 지역이 1200개 구역이 있었고 430개는 뉴타운이 완료됐다. 뉴타운 사업을 못한 800개가 남았는데 여기가 이제 정비구역으로 지정될 예정이거나 일부는 조합설립 마치고 관리 처분 마친 데도 있다. 이를 해제하지 않으면 이전 법에 해당하는 것이다. 2012년부터 시행된 뉴타운법 재개발법 개정안 등에 예외 규정을 줬다. 그게 주거환경관리사업과 가로수 정비사업 등이다. 정비사업은 1만 제곱미터 이상이다. 작으면 잘될줄 알았는데 잘 안된다. 법체계가 아주 애매하게 돼 있다. 이제는 전면철거 뉴타운 개발 없다고 얘기할 수도 없다. 민간 기업이 시장 수요에 따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재개발로 가고 싶어도 갈수 없는 경우에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사회 =결론은 이 흐름을 되돌릴 수 있느냐. 결국에는 서울의 많은 곳에서 전면 철거 방식 도입이 어렵기 때문에 어떤 지자체장이 와도 흐름을 뒤집을 수는 없다. 그런데 수요가 있는 경우, 강남은 할수 있겠지만 여러 곳은 쉽지 않고, 도시 재생 흐름을 누구와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냐. ●배 교수 =도시재생 ‘사업’이라고 사람들이 이름을 붙인다. 우리가 일컫는 것은 앞으로 이 지역을 위해서 여러가지 사업을 진행할 것인데 패키지로 하나 덩어리로 ‘계획’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마치 뭔가 큰 사업이 일어나는 것처럼 오해하는 것이다. 하나하나 개별법에 따라 사업이 이뤄지는 것이라 오해를 하면 안된다. 그 간극을 메우려면 별도의 사업법 없이 조그마한 활동을 나중에 조금 규모가 있는 것들하고 연계해서 활성화 시킬 수 있는 연결고리 필요할 것 같다. ●사회 =김 대표가 강북에서 활동 중인데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기대와 우려는 무엇인가. ●김 대표 =최근 ‘희망지’라고 해서 서울형 도시재생 사업이 20개가 진행되고 있다. 활성화 전에 6~10개월간 준비예비기간을 주는 것이다. 주민들 도시재생 이해가 부족한 상황에서 주민들이 뭐냐고 할때 재생사업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다. 주민들을 조직해내고 주민들이 계획부터 실행까지 할 수 있도록 주체를 형성하게 하는 과정으로 희망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강북구에도 2개 지역이 희망지로 선정돼서 진행되고 있다. 수유1동, 송중동이다. 중심지 사업으로는 4·19 일대, 전체적으로 보면 희망지 2개, 중심지 1개 등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동안 물리적인 환경의 재개발로 피해가 컸다. 사람들이 쫓겨나고 주거비용은 상승됐다. 서울시의 도시재생 사업 환영했다. 주거와 관련된 단체들은 TF 구성해서 사업이 잘되도록 지원하자고 만든 것이 삼양동 지역 재생 기획단도 만들고 주거환경정비사업에 사회적 경제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고 주민들 의견만 듣는 게 아니라 주민 주체로 할 수 있는 조직화를 하고 있다. 희망지 2곳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지원해서 주민 조직화, 사업에 대한 주민들의 이해와 인식 넓히는 일 진행 중이다. 지역이 활성화되면 관도 관심을 보이고 전문가들도 들어올텐데 주민들을 잘 묶어 세우고 역량을 강화하는 일 중요하게 생각한다. 물리적 환경의 변화, 주거 환경 개선하는 것 등 하드웨어적인 것 정비해야하는 것 사실이다. 노후화 되고 길도 좁고 낙후됐으니까 이는 전문용역과 함께 개선 작업들도 해야한다. 주민들이 같이 관과 함께 만들어가고, 아이들 키우는 문제든, 어른들 쉼터 하는 것들 같이 해야 한다. ●양 실장 =전국적으로 도시재생사업이 진행 중인데 서울시가 가장 잘한 건 준비단계 뒀다는 점이다. 서울은 도시재생의 여러 후보지가 있는 상태에서 예산 등 제약으로 13곳을 선정했다. 계약을 맺는 과정에서 시는 ‘주민들의 공감대가 밑에서부터 생기지 않으면 위에서부터 진행하는 사업 방식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주민들의 역량 강화를 위해서는 지구 지정부터 먼저 할 게 아니라 후보 지역의 역량을 키워주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해 재생 2단계에서는 준비단계를 뒀다. 바로 진행해봐야 분란만 있고 진전이 안된다. 도시재생은 우리에게 익숙한 원포인트 사업 방식의 재개발을 벗어나 시와 지역주민, 센터 등이 여러 이해관계자가 들어가서 진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속도는 늦을 수 밖에 없다. 이런 식의 일은 우리가 해본 적 없어서 숙성되는데 시간이 더 필요하다. ●김 대표 =우연한 기회로 ‘서울형 3+5 도시재생 사업지’를 방문했다. 민·관이 협력하고 시민단체(NGO)도 들어와서 사업계획 잘 세워 추진 중이었다. 다만, 문제는 사업 추진 때 주민들이 안보였다는 점이다. 주민이 사는 지역에, 주민 위한 도시 재생사업을 하는데 주민에 의한, 주민의 사업은 아니었다. 전문가들이 와서 보고 어떻게 바꿔보자고 하는데 정작 주민들이 의사가 얼마나 반영됐는지는 의문이다. 도시재생의 지역을 선정하기 전 반드시 주민들이 등장 해야한다. 주민들에게 공청회에 참여하라고 하는데 그치지 않고 계획과 실행, 관리까지 전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 ●배 교수 =제가 가리봉 도시재생사업의 총괄계획가(MP)를 맡고 있는데 저희 지역도 초기 그런 맥락에서 지적당했다. 도시재생 선도사업지로 뽑혀 2014년에 진행했다. 국토부에서 10여 개를 지정하고 그 이후 확대하고 있다. 선발 기준이 있었다. 지역이 아주 쇠퇴한 경우 뽑았다. 즉, 뽑힌 곳을 보면 낙후한 곳이라는 특수성이 있었다. 1차 선도 지역에 포함된 곳이 서울은 창신·숭인지구였다. 2015년 두번째 선정·발표된 곳이 서울 가리봉동과 해방촌 지구였다. 가리봉이라는 곳은 여러 특징이 있는 곳이다. ‘1호 공단’이 만들어지고 공장다니는 젊은층이 많이 살던 곳이다. 지금은 중국 동포가 많이 산다. 공식 통계로는 거주자의 40%가 중국동포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80% 정도 된다고 평가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도시재생 과정에 참여하는 주민이 적다고 느낄 수 밖에 없다. (중국 동포가) 한국 처음 오면 무조건 가리봉으로 온다. 기착지다. 여기서 돈벌어서 대방동 등으로 나간다. 돈 벌려고 온 사람들이니 새벽5~6시 남구로역 인력시장에 가서 일자리 구해 돈 번다. 지역 일에 참여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는 범위에는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왜 도시재생은 모든 주민을 활동가로 만들려고 하나. 주민들이 활동가 수준의 역량을 발휘하고 역할을 해야할 이유는 없지 않나. 주민 중 자신의 여건에 맞을 때 도시재생활동에 참여한다. 주민의 참여를 2가지로 구분해서 해야 한다. 그래야 재생사업이 지속 가능하다. 모든 사람이 활동가 수준을 원하는건 금방 지치게 만든다. ●김 대표 =가리봉 상황은 저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재생지역에서 사업을 주도하는 사람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는 주민, 두번째는 주민 중 좀 더 적극적인 리더, 세번째는 재생 활동가이다. 여기서 주민들이 주민협의회에 참여해서 계획 수립과 시행에 있어서 참여할 수 있는 의사결정구조를 만들어져야 한다. 주민들도 다 자기 생활이 있기만 그 중 리더 그룹이 있다. 지역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많고 지역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주민들이 있다. 이 사람과 활동가가 결합해 활동해야 한다. 재생사업 초기에는 활동가가 지역 주민들에게 재생사업에 대해 충분히 이해시켜야 한다. 리더 그룹 만이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래서 리더그룹이 주민협의체를 조직하고 주민이 여러방식으로 결합해야 해야 한다. 도시재생은 일자리, 먹고 사는 문제까지 포함해서 진행되는 것이다 그런데 엔지니어는 계획 세우고 떠난다. 결국 이를 운영하는 건 지역 주민이다. 그래서 이런 주민들이 주체로 세워져야 한다. 원론적인 것 같아도 그렇다. ●변 사장 =뉴타운 지정이 안된 지역은 사업성이 없어서 못된 곳으로 봐야 한다. 어쨌든 (뉴타운 지정이 안되면) 이곳 주민들은 아파트로 갈 꿈을 버리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요즘 지은 아파트 보면 너무 잘 짓는다. SH공사에서 짓는 저소득층 임대주택도 너무 좋다. 지하주차장과 1층 공원, 어린이집, 작은 도서관, 커뮤니티 시설, 무인 택배센터 등이 다 들어간다. 그런데 단독주택 지구는 주차장 문제가 해결 안되고 공원이 없다. 낮에는 택배 받을 사람이 없는데 택배를 맡길 장치도 없다. 관리실도 없다. 이런 걸 개선하려면 누군가 지원을 해줘야 한다. 재생 선도지역으로 지정돼서 100억원씩 지원받는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주민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100억원이 생길 수가 없지 않나. 사업성이 없는 데는 아무리 고민해도 사업성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첫째 정부가 돈을 지원해주는 것이다. 둘째, 시가 돈을 지원해주는 것이다. 또다른 방법은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다. 용적률을 높이든, 시유지를 활용하든, 다른 자금을 빌려서 하든 하는 방식이다. 이런 인센티브가 없으면 매일 주민들이 회의해도 나올 게 없다. 도시재생 선도사업이라고 한다면 다른 지역에서 따라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적은 돈으로 삶을 개선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사업모델을 아주 정교하고 적은 돈 들이면서 공공성 실하고 주민들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한다. ●배 교수 =동의한다. 사업의 방식이 정교해지고 작아지면서 주민들이 쉽게 할 수 있는 구조의 사업을 만들어줘야 한다. 지금의 방식은 키 큰 친구 뽑아서 국가대표 훈련소에서 키우는 방식이다. 이제는 보편적인 몸무게, 키의 친구를 키워야 한다. 도시자생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데 자생 구조가 주민이 참여해 마을기업 운영하는 식으로만 이뤄지고 있다. 근데 주민이 여기에 다 참여할 수 없다. 주민들이 재생사업을 일상생활 영유하면서 부담없이 가져갈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 그 중 가장 필요한게 중요한 게 주거 정비라고 생각한다. 물리적 정비다. 주민 만나면 못살겠다고 한다. 예전에는 재개발, 재건축은 (큰 단위로) 몽땅 고쳐줬다. 지금은 한 집도 좋고, 두 집도 좋고 세 집도 좋다. 이렇게 해서 정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부담없이 가는 방법이다. ●변 사장 =제가 1~2년 동안 저층 주거지 모델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제 개략적 초안은 나왔다. 아파트가 아닌 동네는 아파트를 꿈꾸는 것 자체가, 그런데 너무 아파트가 갖고 있는 장점이 있어. 단점은 폐쇄 공간이라는 것이다. 소유하면 좋지만, 주변에는 장애물이다. 지향할 것은 아파트가 아닌 지역에서 열린 단지가 돼서 아파트 장점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저는 사업 단위와 계획의 단위, 편의시설 갖추는 단위를 다르게 봐야 한다는 것이다. 사업단위는 작게 하더라도 일정하게 편의시설 확보할 규모는 돼야 한다. 필지 별로 해보면 8~10집인 경우에 일반 주거지역에서 용적률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다. 주차장도 가장 많이 확보할 수 있다. 10집 정도 모이면 30~40세대가 된다. 이를 사업단위로 하자. 여기서는 공동시설 주민 편의시설 무인택배센터 1개정도 넣을 수 있다. 다른 집도 10개 집 모여서 그곳에는 어린이집 넣고 하는 거다. 이런 계획은 100필지 정도 300~400세대 정도이다. 이것보다 큰 것은 1000필지에서 3000세대 정도로 해서 큰 계획과 중간 계획이 결합되면 아파트 단지와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사업성이 없는 곳이라도 자금지원을 하고 인센티브까지 주면 공공이 들어가서 미분양을 임대주택으로 돌려준다든지 도움을 주면 위험이 없어진다. 공공이 들어가서 도시재상 사업 그림을 그려줘야 한다. 그래야 사업성이나 개발 가능성이 높아진다. 사업성이 없어서 잘 안되는 곳에서 20년 동안 주민들이 이야기한다고 개발이 되나. ●사회 =이사를 자주 다니는 데 무슨 의미가 있나. 지금 거주하는 분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나아가야지. 젠트리피케이션도 고민해야 한다. ●양 실장 =재개발에서 재생으로 가는 과도기다. 재개발은 누구나 상상이 되지만 재생은 미지의 세계다. 주민들 참여와 역량 위주로 한다고 하지만 먹고 살기 바쁜 주민들이 투표 정도의 참여만 했지, 지역 논의한 적도 없고 서울 주민들이 오랫동안 애착 갖고 사는 분들도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 주민 참여가 가능하냐는 반론도 많다. 재개발이라는 게 한번 들어와서 조합 참여한 분도 있고 한 상황에서 해제가 되면 재개발 찬성파와 잔존파들 사이에 갈등 양상이 지속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다. 도시사업의 변화라는 것이 시간을 갖고 기다려달라고만 말할 수 없다. 성과를 바라는 목소리도 있기 때문이다. 지역특성이나 여건에 따라서 소단위로 가는 부분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동의가 있는 것 같고 지역의 변화들을 급격하게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비교적 현재 사는 분들과 유사한 계층들이 지속적으로 살 수있는 물리적 환경을 만드는 모형도 있다. 일부 필요한 지역에 대해서는 부분적인 철거라든지 이런 상황이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복합적으로 돼 있어 어렵다.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종합적인 상황이다. 우리가 해봐야만 한다. 양극단에 정답 없다는 거 알고 있다. 공공이 해야 할 일 중 가장 큰 것은 변화의 속도를 조금 늦추는 것이다. 재개발이 그토록 활성화 됐던 것은 시장 상황이 받쳐줬다. 지금은 시장상황은 바뀌었는데 정교한 사업모델 갖고 있지 않다. 소단위로 개발하는 것이 당연하다. 지역 사회 여건에 맞는 아이템을 발굴하는 길 아닌가. ●배 교수 =젠트리피케이션은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는데 오해 진실을 알아야 해. 지역이 고급화되는데 얘기하는데 원래는 학술적인 이름으로 명명한 것이다. 나쁘냐. 저는 그렇게 보지는 않는다. 지역이 발전되고 고급화되는 현상을 나타내는 학술적 용어인데 이게 왜 나쁘냐. 젠트리피케이션 효과를 통해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누가 많이 일으키는지 살펴봐야 한다. 물론 자생적으로 나타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공공 프로젝트를 하게 되면 지역에 젠트리피케이션을 일으켜서 지역발전을 유도하려고 공공이 공공계획을 수립하고 사업을 하는 거다. 정책적인 부분이 필요하다면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젠트리피케이션인데, 부정적인 부분은 낮추고 긍정적인 부분은 유지하는 대책이 필요하다. 행복주택하면서 임대료 상승하는 것을 막기위해 주변의 80%로 한다든가 하는 등의 대책이 있는데, 자율적으로 해서 주민이 합의를 하고 전파를 통해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공 사업을 할 때 지구단위계획 같은 것 좀 수립해서 지정용도라든지 오래된 사업체들이 안쫓겨나도록 하는 방안도 필요하다. 경의선 주변에 연남동 지역이 많이 활성화하면서 주변 변화가 급격히 일어난다. 지금 국회 대로변 같은 데는 민자투자 사업 일어나기 전에 공공이 투자하는 그런 지혜도 필요할 것 같다. ●변 사장 =정비 사업이 전면 철거에서 아파트로 많이 올릴 때 속도감 때문에 천천히 하자는 얘기가 대세일 수 있다. 정비가 시급한 지역도 많다. 이런 사람들한테 고통 참고 견디라는 주장은 잔인하다. 10년을 기다려보자, 속도를 늦춰보자는 것은 잔인할 수 있다. 지역마다 다를 수 있지만 필요한 데는 빨리 속도를 높여야 한다. 집값이 오르는 걸 막기 위한 장치가 있었다. ‘리모델링 지원형’, ‘전세금 지원형’ 두 가지가 서울시에서 하는 것이다. 리모델링 지원형은 잘안된다. 리모델링비 1000만원 지원해주고 6년간 임대료를 못올리도록 했던 탓이다. 집주인 입장에서 전세금 천정부지로 올라가는데 혼자만 못올리니까 활성화가 안된다. 활성화 노력하는데 물가상승률 정도로 올리는 정도로 하는 방법이 하나 있고 또 하나는 저층 주거지 모델이 있다. 용도 변경 해주는 대가로 집주인은 임대수익이 높아진다. 과도한 이익 줬다고 하면 제한을 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걸 해주는 대가로 당신은 6년간 임대로 올리지 마라. 대신 이 사람은 다른 곳에 가 있어야 하잖는가. 이런 식으로 협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전세금 줄 여력도 안되고 내 돈으로 수리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잠깐만 집 비웠다가 돌아와도 새집이 되니 협상할 여력이 된다. ●배 교수 =주거권 유지나 이런 측면에서는 임대료 통제 방법인데, 지역의 환경을 유지하는 것은 용도의 문제다. 서촌에 프랜차이즈 들어가는 등 환경 차원에서는 지정 용도를 육성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초기에 인사동에 화랑 같은 것들이 임대료 등 때문에 밀려나는데. 당시에 문화지구 지정을 해서 특정한 용도가 들어와야 한다고 했어야 했다. 특정지구로 지정해서 활용하는 게 필요하다. 도시 재생이 사업단위고 단순한 사업을 하는 종류를 정하고 금액은 어느 정도 범위에서 한다는 것을 정하다 보니까 지역을 전체적으로 컨트롤할 부분은 담고 있지 않다. 만약에 연계해서 문화지구라든지 특정용도를 지속할 수 있는 내용이 담기면 젠트리피케이션 효과를 긍정적으로 유도할 수 있지 않겠나. ●사회 =일반 주거지역에서는 낮에 주민들을 보기 힘들기 때문에 주민 의견 수렴은 물론 주민 참여를 이끌기 어려운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주민들이 바라는 것은 뭐고, 현재 겪는 문제점을 극복하려면 서울시에서 도울 일이 뭔가. ●김 대표 =도시재생 때 주민들이 원하는 것은 따로 있다. 예컨대, 주차장이 필요하거나 소방도로를 내는 것이 절실하다. 하지만, 이일을 하기에는 턱없이 예산이 부족하다. 주민들에게는 정말 필요하지만 한계가 있는 것이다. ‘도시 재생 사업을 하면 동네가 진짜 좋아지느냐’는 의문이 많다. 사실 도시 재생을 해도 엄청나게 좋아지지는 않는다. 젠트리피케이션(임대료 상승으로 원주민 등이 쫓겨나는 현상)이 얼마나 일어나겠느냐. 예컨대 사업비 100억원이 있다고 해도 도로 하나만 지으면 10억원 들어간다. 도로 좀 색칠하고 폐쇄회로(CC)TV 달면 돈 다쓴다. 주민들은 ‘뭐가 얼마나 좋아졌느냐’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전면 철거를 하면 (비싸지기 때문에) 그들은 여기서 계속 살 수가 없다. 그들이 재개발을 기다리는 이유는 빨리 팔고 나가려는 것이다. 도시 재생사업을 통해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봐야 한다. 관이 좀 더 지원을 해야 한다. 예산을 일괄적으로 정해 ‘100억원 짜리로 하자’라는 식으로 하지 말고 예컨대 주차장과 도로는 어떻게 해야할 지 등 장기적 비전을 가지고 해야 한다. 초기단계는 물론 5년뒤, 10년 뒤에 어떻게 할지에 대한 장기적 비전을 세우고 추진해야 한다. 주민 주도와 관련해서 덧붙일 말이 있다. 도시재생에는 관과 주민모임, 전문가 등 세 집단이 관여한다. 관은 이 제도를 잘 만들고 예산을 잘 지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필요하다. 주민들은 전문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는 지역이 어떻게 됐으면 좋겠는지 정밀하게 계획 세울 수 없다. 이런 부분을 도시공학 등을 전공한 전문가가 적극적으로 제안해줘야 한다. 주민들은 지역 모임을 만들고, 협의해서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변 사장 =김대표가 세 주체를 말했지만 나는 SH공사같은 공공사업자도 중요 주체로 생각해야한다. 예를 들어보자. 각자 자기 집의 이익만 생각하면 지역에 도로를 낼 수 없다. 하지만 열 집이 모였다고 치자. 그러면 도로를 낼 수 있다. 예컨대 4억 자리 집을 전세 1억 5000, 월 100만원에 세준 집주인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에게 “마을을 정비해서 동일 평형으로 임대수입도 1.5배 정도 받을 수 있는 새집을 주겠다”고 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또, 세입자에게도 6개월만 다른 곳에 가서 살면 6년간 거주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하면 반대할 이유가 없다. 이런 주민 주도의 정비가 이뤄지려면 주민 중 누군가 앞장서서 해보자고 하고 설계도 하고 해야 한다. 주민이 하기에는 쉽지 않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해결해줄 수 있는) SH가 중요한 이해관계자가 될 수 있다. ●김 대표 =정비가 필요한 열악한 지역이 있다고 치자. 제일 먼저 빌라업자가 들어온다. 빌라업자가 들어와서 막 차지하고 길도 조금 넓힌다. 정비가 이런 식으로 진행되면 엉망이 된다. 그런데 주민들은 지역이 워낙 낡았으니 누구라도 나서 뭔가 빨리 변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본인이 직접 할 힘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주민과 SH가 만나 얘기하면 주민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변 사장 =지금 저층 주거지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아파트다. 그런데 아파트를 못지을 만큼 사업성 없는 동네에 우리보고 사업을 하라고 하면, 우리도 기업인데 할 수 없다. 결국 정비를 위해서는 이 동네에 줄 수 있는 게 필요하다. 용적률 완화랄지, 높이 제한, 주차장 완화, 자금 지원 등이 필요하다. 이런 지원 없이 도시재생을 하라고 하면 민간은 말할 것도 없고, SH도 할 수 없다. ●사회 =마무리 발언 부탁한다. ●양 실장 =도시재생은 쇠퇴지역의 환경 변화를 위한 실험이다 이렇게 비유하고 싶다. 자전거를 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처음에는 뒤에서 힘껏 잡아줬다가 패달 돌리는 속도에 맞춰 잡았다가 놨다가 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나도 모르게 자전거를 타게 된다. 도시재생도 마찬가지다. 자전거 타고 싶은 사람(도시 재생을 원하는 지역민)이 있다면 주민 역량을 우선 강화하고 현실적으로 작은 단위 또는 중간 단위의 사업모델을 해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중요하다. ●배 교수 =도시재생이 앞으로 더 잘되려면 세 가지가 필요하다. 도시 재생은 주민들이 일상 속에서 부담없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 주민들에게 모든 역할을 하도록 할 게 아니다. 또, 도시재생이 지속가능하려면 하드웨어적인 정비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 이후 환경 개선 사업나 공동체 활성화가 이어져야 한다. 세번째는 이미 다문화, 글로벌 사회에 대비한 도시재생사업을 해야 한다. ●김 대표 =행정과 주민, 전문가가 거버넌스 통해 미래 도시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도시재생이라고 생각한다. 당장 효과가 아니라 10~20년뒤 비전을 세우고 진행해야 한다. 단순히 도시를 바꾸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생활 양식을 바꿔가는 것이다. 물리적 환경 바꾸기 전에 사람의 가치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변 사장 =저는 현재 도시재생사업이 상당히 지연, 정체되고 혼란스러운 것이 과거에 느꼈던 과도한 속도감에 익숙한 탓이다. 그러나 제대로 안되고 있는 부분을 두고 ‘원래 도시 재생은 이런 것이다’라는 식으로 합리화 해서는 안된다.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이 너무 불편하고 환경 개선이 필요하다면 거기에 맞는 주거나 가로 환경 정비를 해야한다. 예전에는 다 그렇게 살아다는 식으로 해서는 안된다. 도시재생을 할 때 낭만적이거나 원칙적인 생각만 해서는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수익성 모델만 봐도 한발짝도 움직이기 어렵다. 주민이 모든 것을 하기는 어렵다. 큰 돈이 없고, 역량이 안된다. 공공주체를 활용해야 한다. SH도 중요 주체다. 적절한 인센티브, 자금 지원. 권한을 줘야 하고, 이를 법적으로 보장할 필요가 있다. 사회·진행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정리 유대근·이범수 기자 bulse46@seoul.co.kr
  •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혁신의 초고층 거물 열린 듯 막힌 폐쇄성 앞에 도시와 소통은 잊었다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혁신의 초고층 거물 열린 듯 막힌 폐쇄성 앞에 도시와 소통은 잊었다

    한국의 무지개떡 건축을 추적하는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피해 갈 수 없는 몇 개의 사례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중 하나가 타워팰리스다. 이유는 간단하다. ‘초고층 주상복합’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건축을 사회에 각인시켰기 때문이다. 그 이전과 이후에도 주상복합이 있었지만 이 건물만큼 많은 관심을 끈 경우는 없다. 물론 지금은 이전에 비해 타워팰리스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타워팰리스로 대표되는 초고층 주상복합 건축의 바람은 아직도 대한민국 전역에 불고 있다. 도심형 주거라는 애초의 선언과는 달리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들어서는 경우도 있다. 어떤 식으로 평가하든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한 시대를 연 건물이라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다만 ‘대한민국 1%에 대해서 상위 0.1%의 존재를 보여 줬다’는 식의 평가보다는 도시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 복합 등의 이슈가 이 글의 관심사다. # 가장 낮은 동 42층 가장 높은 동 69층 세운상가와 마찬가지로 타워팰리스도 단일 건물이 아닌 건물의 집합이며 그 안에 상대적인 다양성이 존재한다. 1차(사용승인일 2002년 10월 30일)의 A, B, C, D동과 상가동, 2차(2003년 2월 28일)의 E. F동, 3차(2004년 4월 19일)의 G동과 S동(반트)까지 포함하면 총 9개의 거대 건물이 모여 있다. 상대적으로 저층인 체육시설 반트조차도 건축면적이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에 육박하는 4270.44㎡에 지상 7층 규모다. 가장 낮은 A동이 42층이고 가장 높은 G동은 69층으로, 주거용 건물로는 세계적으로도 상위에 랭크되어 있다. 타워팰리스는 실로 중후장대한 건물의 집합체다. 양재천에서 바라보면 자연 속에 우뚝 속은 건물의 숲이 가히 장관을 이룬다. 삼일 고가도로와 삼일 빌딩이 개발 시대의 아이콘이었다면, 이 장면은 오늘날 성공 신화의 상징으로 종종 이야기된다. 타워팰리스는 동으로는 선릉로, 서로는 언주로, 북으로는 남부순환로 그리고 남으로는 양재천에 접해 있다. 이 영역 안에는 대림 아크로빌을 위시한 다른 건물들도 있다. 이 중 남부순환로는 워낙 서울의 중요한 도로로서 2차의 E, F동이 여기에 인접해 있을 뿐 아니라 도곡역 4번 출구도 이 방향으로 나 있다. 따라서 타워팰리스로서는 매우 중요한 도로일 것 같지만 현장에서 보면 실상은 다르다. 타워팰리스의 대지는 남부순환로보다 사람 키 정도 높으며 게다가 길과 면한 부분에 조경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약 200m에 이르는 도로변에 조경의 장벽이 처져 있는 것이다. 인근의 또 다른 주상복합인 아카데미 스위트가 저층부를 길에 온전히 열고 있는 것과는 매우 대조되는 방식이다. 이 아카데미 스위트도 무려 51층으로 덩치가 만만치 않다. 다만 도시를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 # 느슨한 폐쇄성… 개방적 맨해튼과 대조 그렇다면 타워팰리스는 주변으로부터 폐쇄된 소위 빗장 공동체인가? 물론 주거 타워 부분은 그렇지만 나머지 저층부는 의외로 그렇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타워팰리스의 여러 건물 사이를 비스듬하게 동서로 관통하는 언주로 30길이다. 전체 길이 500m 남짓한 이 길에서 타워팰리스 영역이라고 할 만한 구간은 400m 정도다. 그리고 이 도로를 향해서 타워팰리스의 각 건물들은 의외로 상당히 개방적인 태도를 보인다. 1차의 상가동이 바로 이 길에 면해 있으며 여기서 야외 계단을 타고 오르면 네 동의 타워 사이에 조성된 데크는 물론이고 양재천 쪽에 면한 조경 공간으로의 진입도 가능하다. 다만 그 경로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알고 찾아가지 않으면 접근이 가능한지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2차의 E, F동의 하부도 필로티로 개방되어 ‘누구나’ 드나들 수 있다. 다만 이 건물에 살지 않는 한 특별히 찾아갈 이유가 있는 곳은 아니다. 지하철역으로의 접근이 조경으로 차단되어 있어 더욱더 그렇다. 한편 이 일대의 언주로 30길에는 신호등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작동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신호등이 있었으나 교통 혼잡을 이유로 철거되었다고 한다. 자동차와 사람이 서로 적당히 알아서 움직이는 그 모습은 나름 자연스러워 보이면서도 어쩐지 다른 세상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처럼 타워팰리스가 도시를 대하는 태도에는 ‘느슨한 폐쇄성’이 있다. 즉 물리적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었다고 할 수는 없으되, 그렇다고 주변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있는 것 또한 아니다. 나름 세련된 방식을 통해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가 고민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재를 진행하면서 그동안 다뤄 온 수많은 다른 사례들과 비교해 봤을 때 인근 지역에 대한 타워팰리스의 개방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는 분명히 사회 계층적 요인도 있을 것이나 타워팰리스라는 건물군이 갖는 매우 근본적인 성격 또한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이 지점에서 ‘타워팰리스는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처럼 과연 주상복합 건축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이 질문은 나아가 ‘한국의 수많은 소위 주상복합 건축은 과연 그 이름에 부합되는 성격을 갖고 있는가’라는 또 다른 질문으로 확대될 수 있다. 물론 이런 질문을 던지는 이면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주상복합이라는 유형이 처음 등장했을 때 그 목적은 기본적으로 도심의 복합 개발을 통해 직주근접을 도모하고 도심 공동화를 방지하는 것에 있었다. 즉 수평적 용도지역 개념에 반하거나 이를 보완하는 개념으로서 수직 도시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하나의 건물이 하나의 커뮤니티로서 어느 정도 기능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주거와 비주거 기능 간의 적절한 밸런스는 상당히 핵심적인 것이었다. 도심형 주상복합이 많은 뉴욕시의 경우, 한 건물 안에서 도로에 면한 부분은 상가, 그 위는 사무실 혹은 호텔 그리고 제일 윗부분에 주거가 자리잡는 경우가 있다. 이런 개념으로 만들어지는 건물들은 당연히 외부인의 출입이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도로에 대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뉴욕은 이런 성격의 복합 건물들이 많은 덕에 자동차 없이 도심에 거주하는 인구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전혀 미국스럽지 않은 도시가 될 수 있었다. 이들 대부분이 걷거나 대중교통 수단에 의존해서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에너지 소비를 줄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하버드대학의 도시경제학자인 에드워드 글레이저가 ‘도시의 승리’에서 세계에서 가장 친환경적인 인간 정주환경을 맨해튼이라고 했던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는 것이다. # 타워팰리스, 무지개떡 건축 향한 과도기 그런데 타워팰리스를 위시한 한국의 주상복합 건축은 대부분 이런 성격과는 거리가 멀다. 한마디로 비주거 부분의 비율이 너무 낮은 것이다. 그 비율은 법으로 정하는데 한때는 주거 비율을 90%까지 인정해 주기도 했다. 그러니 결국 한국의 주상복합이란 도시 전체에 대한 이론적 성찰의 결과라기보다는 상업지역의 높은 용적률을 이용해서 고급 아파트를 공급하기 위한 부동산 상품에 가깝다. 상업지역이므로 일조권의 영향도 받지 않고, 심지어 일반 아파트에 적용되는 인동간격 규정으로부터도 상당히 자유롭다. 거의 주거 전용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주변 지역에 대해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이것이 바로 타워팰리스가 ‘느슨한 폐쇄성’을 갖게 된 주된 이유다. 건축물 관리대장을 열람하면 이런 성격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전체 주거 타워 중에서 업무시설이나 오피스텔이 들어가 있는 것은 1차의 D동, 2차의 E동, 3차의 G동 등이다. 나머지는 전부 순수하게 ‘아파트’로 명기되어 있다. 그나마 이 오피스텔 또한 소위 주거형으로서, 이론적으로는 사업자등록이 가능하지만 제약이 있고 실제로 그런 사례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타워팰리스는 일부 상가를 제외하고는 전체 건물의 거의 대부분이 주거용으로 사용되는 건물인 것이다. 법적 용어와 일상 언어와의 간극을 무시하고 이야기하자면 주상복합이 아니고 그냥 아파트다. 게다가 이 도곡역 일대는 도심이나 부도심이 아니고 주거지역에 일부 상업지역이 침투해 있는 정도이므로, 주상복합 건축의 당초 취지와는 잘 부합되지 않는다. 상업지역에 고밀도로 지어진 단지형 고급 아파트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주상복합의 원래 의미에 훨씬 더 근접하는 사례는 피어선 아파트 이후 광화문 일대에 지어진 일부 건물들에서 찾는 게 더 적절할 것이다. 분명히 타워팰리스는 한국 주거사에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토지밀착형 삶을 이상으로 삼아 왔던 한국인들에게 이전 시대의 아파트가 주었던 충격을 훨씬 더 상회하는 것이었다. 이제 사람이 땅을 떠나 완전히 구름 위에 살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타워팰리스를 필두로 초고층 주상복합이 지어지기 시작한 시점은 서울의 북촌을 중심으로 전통 주거인 한옥이 다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시기와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두 유형은 어찌 보면 개념상 서로 완전한 극단인 것처럼 보이지만, 엄격히 이야기해서 본격적인 도심형 주거의 유형은 아니라는 점에서 서로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물론 주거 전체로 보면 이전에 비해서 선택권이 훨씬 다양해졌다는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로와의 관계, 인구의 구성, 복합적 성격 등의 면에서 보편적 도시 건축의 유형으로서 이 둘의 한계는 너무나 명확한 것이다. 이 연재에서 과도하게 느껴질 정도로 1960, 70년대의 가로형 상가아파트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들은 거리에 면해 있으면서 가로의 활력에 기여했다. 상가는 입주민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인근 지역 또한 대상으로 삼았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한때 본격적인 도심형 상가아파트가 대량으로 공급되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준전원형 방식인 단지 유형이 보편화되면서 그 시대가 저물었다. 앞으로 그 유형이 훨씬 진화된 형태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을 현실로 만들 필요가 있다는 의지를 담아 이 연재를 이어 가고 있는 중이다. 직주근접의 가능성을 높이면 개인의 삶과 지구 환경 모두에 기여할 수 있다. 그리고 주민뿐 아니라 인근 지역에도 개방된 건물은 도시의 활력을 높일 뿐 아니라 시민 사회의 정신을 고양시킨다. 그러한 유형이 바로 이 글에서 말하는 무지개떡 건축이다. 타워팰리스는 이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등장한, 일종의 과도기적 현상이다.
  • [서동철 칼럼] 우선 민속박물관부터 종로로 옮겨라

    [서동철 칼럼] 우선 민속박물관부터 종로로 옮겨라

    요즘 서울특별시의 지하 발굴 유적 보존 정책은 이름처럼 특별한 데가 있다. 대부분의 다른 지방자치단체가 역사성과 학술적 가치를 도외시하면서 매장 문화재를 보존하기보다 개발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는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서울시는 사대문 내부의 조선시대 유적을 현지 보존으로 유도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특히 서울시가 종로구 장사동 종묘 앞 세운상가 초입에서 발굴된 조선시대 지하 유구를 그대로 보존하겠다고 밝힌 것은 돋보인다. 종로와 맞붙은 이곳에는 세운상가라는 큰 건물군(群)의 일부였던 현대상가가 있었다. 현대상가를 철거한 뒤에는 도심 속 보리밭으로 활용됐다. 그런데 발굴 조사에서 조선 전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4개의 문화층이 드러났다. 특히 제3문화층에서는 청동화로, 청동희준, 청동거울과 하늘 천(天) 자가 새겨진 전돌, 봉화무늬 수막새 기와가 줄지어 나왔다. 희준(犧尊)은 제사에 쓰는 술항아리로 일반적으로 소 모양이지만 소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한다. 서울시는 이곳을 한성부 중부 관아터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출토 유물로 볼 때 종묘의 제사와 관련된 시설이었거나 제사용품을 제작하는 장소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은 듯하다. 서울시는 도시재생 사업의 하나로 문화공간화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지하 유구를 그대로 보존하려면 종묘가 눈앞에 펼쳐지는 경사광장 아래 공연, 프리마켓, 전시 공간을 만든다는 애초 구상은 일부 수정이 불가피할 것이다. 그럴수록 도성(都城) 초축 시기 유구부터 20세기 세운상가의 콘크리트 기둥까지 켜켜이 쌓인 600년 서울의 역사를 그대로 볼 수 있는 이곳은 서울의 명물이 될 것이다. 서울시가 도성의 역사를 복원하고 시민들이 그 흔적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결정을 내린 것은 박수를 받을 만하다. 해당 부지를 활용할 수 있는 권리를 서울시가 갖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사대문 내부는 어디를 파도 유적이 나오지 않는 곳이 없다. 실제로 세운상가 유적보다 훨씬 중요한 유적이 지금도 끊임없이 발굴되고 있다. 그렇지만 그 땅이 민간 소유라면 백이면 백 상징적 수준의 보존만 이루어지고 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종로만 해도 조선시대에는 광화문사거리부터 동대문까지 양쪽에 상점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상점 거리 유구는 지금도 땅밑에 그대로 남아 있다. 하지만 벌써 육의전거리의 종로2가 상당 부분까지 고층 건물이 잠식했다. 보존이라는 이름으로 남겨 놓은 손바닥만 한 유리창 너머 집터를 내려다보면서 옛날 상점거리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러다간 조선시대 상점거리 흔적은 머지않은 미래에 사라질 것이다. 결국 민간이 땅을 소유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사대문 내부 유적 보존을 아무리 외쳐 봐도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될 수밖에 없다. 세운상가 유적을 보존하듯 사대문 내부 유적을 보존하려면 결국 정부나 지자체를 비롯해 공공성 있는 주체가 해당 부지를 소유하는 방법밖에는 없다. 마침 국립민속박물관의 이전이 늦춰질 것이라는 소식이 들린다.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옆을 부지로 점찍었지만 결정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이참에 접근성이 좋지 않은 용산 대신 종로를 대체지로 권해 본다. 사통팔달의 교통요지인 종로에 도심 박물관을 만들자는 것이다. 민속박물관이 삶의 양상을 담는 공간이라면 상점과 시장이 어울린 종로보다 적합한 곳은 없다. 더구나 옛 상점거리를 부지에 포함시킨다면 지하 육의전 유구는 그대로 조선상업사관(館)으로 활용할 수 있다. 한마디로 사대문 내부 유적 보존의 패러다임을 바꾸자는 것이다. 그동안 정부나 지자체는 청사가 필요할 때 한적한 곳에 넓은 부지를 확보해 새로 짓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땅값도 많이 올랐을 넓은 청사를 팔고 도심 유적지에 청사를 마련하는 게 어떠냐는 것이다. 국가 기관인 민속박물관을 앞세웠지만 서울시 소속 서울연구원도 꼭 서초구에 있을 이유는 없다. 사대문 내부로 옮긴다고 연구 활동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대신 서울 역사의 영구 보존이라는 값진 대가를 얻는다. 민속박물관이나 서울연구원뿐이겠는가.
  •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주택과 아파트 사이, 모여 사는 즐거움 마당에 널렸네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주택과 아파트 사이, 모여 사는 즐거움 마당에 널렸네

    근대건축의 거장들은 공동주거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미스 반데어로에는 이미 1922년 슈투트가르트의 바이센호프 전시에서 철골 아파트를 선보였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1951년에 860-880 레이크 쇼어 드라이브 아파트먼트를 시카고에 완성했다. 또 다른 거장 르코르뷔지에의 위니테 다비타시옹이 1959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그 뒤를 이었다. 이보다 훨씬 앞선 안토니오 가우디의 카사 밀라(1912)는 파격적인 조형으로 유명하지만 알고 보면 무려 40여 가구가 거주하는 유럽형 상가 아파트다. 시기와 지역,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지만 네 건물 모두 세계 건축계의 명작이다. 한국 공동주거의 연보에는 건축가의 이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름난 건축가의 작업 중에 공동주거, 특히 아파트가 별로 없다. 안병의의 힐탑 아파트(1968), 조성룡의 아시아 선수촌 아파트(1986), 우규승·황일인의 올림픽 선수기자촌 아파트(1988) 등 손꼽을 정도다. 물론 그 리스트의 제일 앞에는 다수의 건축가가 참여했던 마포 아파트(1964), 그리고 이 연재에서 다뤘던 김수근과 그 후예들의 세운상가(1967)가 있다. 공동주거는 건축계에서 그리 인기 있는 분야가 아니다. 작업 조건이 좋지 않고 무엇보다 건축가의 의지를 구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강한 소위 작가형 건축가들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주제다. 그러나 공동주거는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건축 유형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한 나라의 대표적인 건축가들이 관심을 갖고 노력할 필요와 명분이 충분히 있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상황은 이례적이다. #단지형 아파트·주상복합 열풍 전 건축 이례적인 상황에는 꼭 예외적인 인물이 있다. 아파트, 특히 그중에서도 상가 아파트를 설계한 건축가로서 그 존재가 알려진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런데 그 희귀한 사례의 하나가 2016년에 작고한 김석철이다. 예술의전당,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을 설계한 바로 그 건축가다. 국가적 프로젝트를 많이 했고 거대담론을 담은 각종 저서를 다수 출판했다. 그런 김석철의 작품 연보에 상가 아파트가 두 개나 들어가 있다. 그 하나가 대구 명륜로의 한양 가든 테라스고 또 다른 하나는 서울 강동구 성내동의 올림픽 파크타워(현 삼성 파크타워 아파트)다. 각각 사용승인일이 1982년 12월 30일과 1995년 8월 28일이다. 상가 아파트의 연보에서 이 시기는 독특한 의미를 갖는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에 불었던 상가 아파트 열풍과,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에 들어 시작된 주상복합 열풍 사이에 절묘하게 끼어 있기 때문이다. 즉 김석철은 상가 아파트가 한물가고 단지형 아파트가 이미 대세를 이루던, 그리고 본격적인 주상복합의 열풍은 불어오기 전에 이 두 개의 건물을 설계한 것이다. 이것은 우연일까? 이 두 건물에 대한 그의 글이 마침 남아 있다. 좀 길지만 음미해볼 면이 있다고 생각해 인용한다. ‘이제 단독주택에 살기는 어렵게 되었다. 땅도 부족하고, 유지관리도 힘들고, 좋은 주변여건을 갖기도 어렵다. 집이라면 단독주택만 한 것이 없지만 집합주택은 단독주택이 못 가진 많은 장점도 있다. 집합주택의 긍정적인 면과 단독주택의 좋은 점을 합한 새로운 주거의 모델을 추구해야 한다. 이웃이 있고, 마을이 있으면서 집집마다의 독자성과 가변성이 확보되는 그런 공동주택을 모색할 때가 되었다. 모여 사는 즐거움과 편안함과 안전을 가지면서 단독주택이 지닌 특유의 세계를 하나의 주거 속에 시도해 본 것이 성내동의 올림픽 파크타워다. (중략) 올림픽 파크타워는 열아홉 세대의 조그만 세계를 최초의 철골구조 속에 하늘 위의 대지라는 이름으로 이루어 본 것이다. 예술의 전당 국제현상 직전 대구 시내 한가운데에 시도하였던 각 집이 자신의 마당을 갖는 열아홉 세대의 마을인 가든 테라스 이후 십이 년 만에 다시 시도해 본 이웃과 마을이 있는 단독주택 같은 집합주택이다.’ (출처 : 건축도시정책정보센터 아우름) #시대착오인가, 작가정신인가 그런데 김석철이 당시 기준으로는 유행이 한참 지난 상가 아파트를 설계한 상황은 여전히 궁금증의 대상이다. 건축가 본인이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그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직접 가서 보는 것이다. 답은 항상 현장에 있다. 그래서 오직 이 건물 하나를 보겠다는 목적으로 대구에 내려갔다. 무더위가 유난했던 2016년 여름에서도 가장 더웠다고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동대구역에서 택시를 타고 가면서 내 눈을 의심했다. 사방에 오래된 상가 아파트들이 보였다. 특히 동대구역 바로 옆에는 ‘동대구 맨션’이 있었다. 아주 반듯한 중정형 상가 아파트였다. 나중에 알아보니 1979년 5월에 사용 승인을 받았다. 연대가 비교적 늦은 셈이다. 이것 말고도 눈에 띄는 건물들이 많았다. 대구는 상가 아파트 연구에 중요한 도시라는 것을 알게 됐다. 김석철의 가든 테라스는 대구 중구 명륜로에 있다. 동대구역에서 3.6㎞ 정도 떨어져 있다. 가로명이 명륜로인 것을 보면 근처에 향교가 있을 것이고 (실제로 있다) 그렇다면 아주 오래된 동네다. 상가 아파트가 도심 유형이라는 것은 서울이나 대구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실물로 접한 건물은 사진에서 보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관리 상태도 비교적 양호해 보였다. 다만 지하와 지상 1층에 자리잡은 상가는 별로 활기가 없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엄청나게 넓은 에스컬레이터는 운행하지 않은 지 오래된 듯 했다. 그리고 그 가라앉은 분위기는 명륜로의 인접 구간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일대에 곧 재건축이 진행될 것이라고 했다. 안타깝지만 김석철의 가든 테라스도 그 대상이었다. (이 글이 그 마지막 기록이 아니기를 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륜로는 인상적이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바로 이거다’ 하고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약 280m에 달하는 한 블록의 거리 양쪽이 일부만 제외하고 모두 상가 아파트였던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길 북쪽의 가든 테라스를 위시해 송정맨숀, 대봉맨션 A, B동(1973)이, 길 남쪽에는 대구맨션 A, B, C동(1972)이 포진해 이 일대를 무지개떡 가로로 만들고 있었다. 분당 정자동이나 판교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한국 어디서도 이런 가로를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이 건물들은 모두 연대가 상당히 높다. 서울하고 비교해도 결코 늦지 않다. 즉 가든 테라스가 들어서기 이전에도 이곳은 상가 아파트 지역이었다. 그러니 김석철과 그의 의뢰인은 지역의 특성을 그대로 인정한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30대 후반이었다. #19가구로 건축해 작가성 여지 남겨 가든 테라스는 지하 1층, 지상 8층의 건물이다. 지하 1층에서 지상 2층까지의 저층부는 상가와 사무실이고 그 위는 주거다. 일부 주거에 상당히 널찍한 옥상 마당이 있어서 가든 테라스라는 이름이 붙은 듯하다. 실체와 이름이 썩 잘 어울린다. 주차장은 건물 뒤쪽 옥외에 있다. 전체 19가구가 있으니 공동주거로서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개별 가구의 면적이 200㎡를 훌쩍 넘을 정도로 넓고 상가의 비중이 높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상당한 존재감이 있다. 이 ‘19가구’라는 것은 공동주거에서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숫자다. 20세대가 넘어가면 당시 주택건설촉진법상 사업계획 승인대상으로 각종 규제가 심해지기 때문에 바로 그 아래 숫자를 택한 것이다. 이미 1977년에 주택건설촉진법, 1979년에 주차장법이 제정되면서 그 이전의 상가 아파트와는 완연히 다른 방식의 설계가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내부를 안 들어가 볼 수 없다. 제일 좋은 방법은 주민을 만나 말을 붙여 보는 것이지만 유난히 더운 날이라 그런지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다. 결국 안면에 철판을 깔고 경비실 문을 열었다. 두 분이 계셨다. 이럴 때는 그냥 솔직한 것이 최고다. 학창 시절에 이 건물에 대해 알게 되었고, 실물을 보려고 서울에서 왔으며, 설계하신 분이 안타깝게도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니 두 분 모두 표정이 풀렸다. 게다가 그중 한 분이 마침 주민이었다. 결과적으로 건물 안팎을 잘 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2018년으로 임박한 재건축 이야기, 엘리베이터가 2층에서부터 시작해서 불편하다는 이야기, 살아보니 고층 주상복합보다는 이런 식의 상가 아파트가 최고라는 이야기 등등이 나왔다. 마침 3층에 비어있는 집이 있다고 해서 올라가 보니 꽤 여유 있는 마당이 있었다. 비어 있는 탓에 가꾸지 않아서 그렇지 입지와 환경 면에서 매우 양호한 상황이었다. 단 내부 평면은 그다지 특이한 점이 없었다. 외부 복도가 유난히 넓고 쾌적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전용면적 비율에 집착하는 요즘 같으면 생각도 하지 못할 일이다. 이 건물 이후에 김석철은 예술의전당으로 일약 세간에 이름을 얻게 되고 그만의 독특한 행보를 이어나가게 된다. 그러다 무려 12년이나 지난 후에 올림픽 파크타워를 설계했다. 가든 테라스가 비교적 옆으로 긴 유형이라면 올림픽 파크 타워는 13층으로 엄연한 수직 유형이었다. 역시 주택건설촉진법의 규제를 피하기 위해 불과 19가구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유형은 점차 ‘나 홀로 아파트’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결국 공동주거 시장은 대규모 단지형 아파트가 아니면 상업지역에 고밀도로 지어지는 고층 주상복합으로 양분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1960년대 후반, 70년 초중반을 관통했던 거리형 상가 아파트의 유형은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김수근 이후 또 다른 시대의 풍운아라 할 만한 김석철이 자신만의 해법으로 두 개의 공동주거 프로젝트를 세상에 선보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시대착오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독창성에 기반한 작가정신이라고 할 것인가? 50년대 후반의 상가 주택에서 60~70년대의 상가 아파트, 현재의 주상복합에 이르는 한국의 도시복합건축의 계보에서 이것은 여전히 심각한 질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요즘의 한국 건축가들은 공동주거를 매우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으며 그 결과물들이 하나씩 등장하고 있다. 일부에 불과하지만 상가 아파트도 서서히 복권의 길을 가고 있는 듯 보인다. 강남보금자리 주택 4단지(2015)를 설계한 이민아(협동원)가 전자의 경우라면 2016년에 영등포 양남시장을 시장과 아파트가 결합한 형태로 재건축하는 현상공모에서 당선된 코어 건축은 후자에 속한다. 어느 방향이건 공동 주거가 좀더 다양하고 깊이 있게 발전되는 것은 사회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김석철의 독자적 행보가 헛되지 않은 셈이다.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낙원상가…쇠락과 번성 사이를 흐르는 선율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낙원상가…쇠락과 번성 사이를 흐르는 선율

    “그렇게 하고 싶어하던 음악하고 사니까 행복하냐구… 진짜루 궁금해서 그래… 행복하냐…?”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나오는 대사다. 밤무대와 카바레를 전전하는 4인조 밴드의 삶을 보여주는 감독의 메시지는 역설적으로 우울하다. 한때 그들도 '음악'을 통해 세상을 품을 수 있는 '낙원(樂園)'을 꿈꾸었을 것이다. 종로구 낙원동에서. 정확한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284-6번지 낙원악기상가이지만 그냥 ‘탑골공원’ 옆쯤으로 퉁쳐도 얼추 누구든 찾아가기 쉬운 자리에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월남참전전우회’ 새겨진 붉은 색 등산조끼차림의 군복입은 늙은 섹스폰 연주자가 힘겹게 내뱉는 ‘사랑밖에 난 몰라’를 들을 수도 있다. 혹은 폭염 속에서도 검은 가죽 재킷으로 온 몸을 감싼, 열정의 홍대 인디 록 밴드들의 달뜬 미소도 만날 수 있다. 세대(世代)는 음악을 통해, 악기를 통해 낙원동에서 이어진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악기상점, 낙원악기상가이다. ●조선후기 여흥문화가 있던 자리 그대로 애당초 이곳에는 '악사'(樂士)들이 모여들 수 밖에 없었다. 지리적으로 낙원동, 인사동, 익선동은 조선시대부터 온갖 기방(妓房)들이 들어서 있던 곳이니 거문고나 가야금 둘러멘 가객(歌客)들이 늘상 북적대던 곳이었다. 더구나 조선의 법궁(法宮·임금이 거주하는 곳)이었던 창덕궁, 운현궁 주변에 머물던 한량이나 다름없던 고관대작(高官大爵)들과 그들의 망나니같은 막내 아들 한 명 쯤이, 분명 피맛골 배나무집 뒷방 사는 기생 치맛폭에서 아비 얼굴에 똥칠했다는 일화쯤이야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닌 동네였다. 또한 조선 팔도 온갖 뇌물과 진상품을 들고 궁궐 앞 서성이던, 현감(縣監)자리 하나 추렴하려는, 마음 삐뚜름한 지방 부호(富戶)들의 대기 장소이기도 하였다. 조선의 밤은 이곳에서 열리고 닫혔다. 사실 낙원상가가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건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실제 낙원상가는 1968년에 올려졌고, 이보다 앞서 바로 옆동네 세운전자상가가 1967년에 만들어진 최초의 주상복합아파트였다. 이 세운상가에는 당시의 부자들이나 고위공무원들이 거주하였고, 낙원상가는 기존의 낙원동에 있던 낙원시장의 대체부지로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세운상가와는 달리 낙원상가는 실용적 목적에 기반을 둔 건축물이어서 격벽(隔璧)이 많지 않아 쇼핑객들의 동선이 사통팔달(四通八達) 다 뚫려 편한 느낌이다. 처음부터 이곳에 악기점들이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원래 낙원상가는 양품점, 즉 의류상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원래 1960년대부터 피맛골, 종로2가 주변에 당시 음악다방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미8군에서 활동하던 밴드들의 영향으로 젊은 층의 악기 수요가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에 종묘 주변과 종로2가, 3가에 풍금이나 피아노, 기타 등을 판매하는 점포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한국대중음악의 1세대이자, 기타문화를 불러일으킨 ‘트윈폴리오’가 데뷔한 ‘세시봉’도 원래 이곳 종로2가에도 있다가 인근 서린동으로 옮겨 간 당대 최고의 음악다방이었다. 그러다 1979년 서울시의 탑골공원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종로 2가와 종묘주변에 몰려있던 악기점들이 대거 낙원상가 안으로 이주하게 된다. 진정한 낙원악기상가의 시작이다. ●낙원악기상가의 전성기와 암흑기를 거쳐 문화거리로 1982년 1월 6일 자정,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면서 낙원악기상가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다. 아시안게임, 올림픽과 더불어 밤문화시설(?)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남으로써 전국 각지에 라이브 밴드 수요가 빗발치게 된다. 바로 이 인력 및 악기 수요를 다 맞추어내는 공간이 낙원악기상가였다. 낙원상가 관계자의 말을 빌리면, 1980년대 후반에는 건반 연주자가, 드럼 연주법을 점포 주인에게 반나절 배워 봉고 타고 동두천으로 성남으로 다녔다고 한다. 한 달 후 뭉칫돈 들고 헐레벌레 뛰어와 맘에 넣어둔 야마하(YAMAHA) 건반을 사들고 가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한다. 낙원상가는 악기판매점이었고, 단기속성 음악학원이었고, 유흥업소와 연주자들을 이어주는 직업소개소였으며, 급전 돌리는 전당포였다. 꿈만 같던 시절이었다. 1997년 IMF의 직격탄은 낙원상가가 다 맞았다. 말 그대로 신기하게도 한 사람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 육이오 피난 시절에도 사람은 보였다는데 갑자기 모든 시간이 끊긴 듯 하였다. 수천 만원짜리 그랜드 피아노가 고작 수 백만원에 몸을 낮추어 팔아도 이를 싣고 갈 트럭을 못 구할 정도였으니 눈물 한 번 단단히 흘린 시절이었다. 다행히도 2000년대 들어서 교회 CCM 찬양 밴드의 지속적인 등장, 각종 대학교의 실용음악학과의 개설, 그리고 클럽문화로 인한 인디밴드의 결성 등으로 낙원악기상가는 비록 예전만 못할지라도 다시금 부활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다. 현재 서울시는 창덕궁 앞 재생계획을 발표하여 2018년까지 200억원 사업비를 들여 낙원상가주변을 궁중문화와 대중음악 중심인 근현대 문화지대로 재편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또한 상가 옥상에 공원과 상설무대를 만들어 명실상부한 한국 음악의 중심지로 낙원악기상가의 모습을 바꿀 예정이다. <낙원악기상가에 대한 여행 10문답> -아래 질문은 실제 독자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을 바탕으로 만든 10문답입니다. 1.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일반인에게는 ‘꼭’이라는 부사는 빼도 된다. 하지만, 음악에 관심이 있거나, 관련 업종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나라 최고의 방문지가 될 것은 분명하다. 2. 교통편은 어때? -탑골공원 뒤에 있다. 5호선 종로3가역 5번 출구가 가장 가깝다. 3. 인근 편의시설, 주차장 등의 시설환경은 괜찮은가? -왠만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할 것을 추천한다. 자동차로 이동할 경우 없던 종교라도 하나 믿고 들어가는 것이 낫다. 출, 퇴근 시간이나 주말의 경우 무조건 대중교통을 이용하길 바란다. 4. 주변에 맛집은 있나? -낙원상가 주변는 예로부터 낙원떡집 거리를 비롯한 진정한 먹거리의 천국이다. 특히 종로 5가쪽으로 펼쳐지는 포장마차촌은 종로 뒷골목의 운치를 제대로 느끼게 해준다. 5. 직원이나 주변 상인들은 친절한가? - 친절하다. 다른 곳보다는 악기나 음악을 다루는 분들이어서 기본적으로 상냥한 편이다. 참고로, 이곳 매장 직원들 앞에서 연주 실력 뽐내지는 말기를. 유명 그룹 프로 연주자들도 한 수 가르침을 받고 가는 고수(高手)들이 모여 있다고 보면 된다. 6. 운영시간은? - 평일, 토요일 9시~20시/ 토요일 일부매장 오픈/ 일요일이나 공휴일은 쉬는 가게가 많음. 7. 이 곳에서 가장 감탄하는 점은 어떤 것? -악기의 가격과 종류들. 전 세계 희귀한 악기들도 많이 볼 수 있다. 8. 홈페이지 주소와 도움되는 정보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전화 (02)743-6131/ 팩스(02)743-7070/ 홈페이지 www.enakwon.com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낙원떡집 거리. 운현궁, 종묘, 인사동 거리 외 종로 구석구석.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원악기상가는 관광지가 아닌 건강한 생계의 공간이다. 단지, 이곳을 여행지로만 방문한다면 약간은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악기산업의 메카라는 사실 하나는 기억하고 방문하자.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실패한 도시 유토피아… 재생의 길로 ‘다시 세운’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실패한 도시 유토피아… 재생의 길로 ‘다시 세운’

    # 세운상가의 ‘복권’ 세운상가에 2016년은 어떤 해였을까. 아마 프랭크 시내트라의 노래처럼 ‘참 좋은 해’(It was a very good year)였을 것이다. 일단 오세훈 시장 당시 등장했던 ‘전면 철거 후 재건축 및 녹지축 조성’이라는 이야기는 이제 완전히 들어갔다. 내부적인 우여곡절도 있었고 세계 경제의 영향도 받았지만, 이 지역이 고층화되면 종묘의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해제해 버리겠다는 유네스코의 엄포 또한 강력한 지원사격이었다. 그 와중에 세운상가의 가장 북쪽 끝인 현대상가가 철거되기는 했다. 지금의 세운상가는 서울시가 추진하는 도시 재생 사업의 중요한 한 축이다. ‘다시 세운’라는 프로젝트 이름은 적어도 당분간은 이 건물의 미래가 상당히 밝을 것임을 보여 준다. ‘입체적 복합문화 산업공간으로 재생’한다는 취지로 다양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철거될 뻔했던 세운상가는 졸지에 도시의 문화적 아이콘이 됐다. 2016년은 세운상가의 보행자 데크, 즉 공중가로를 다시 살리는 대대적인 공사가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세운상가 건립 당시의 취지, 즉 종로에서 퇴계로까지 공중 보행자 가로로 연결하는 개념을 다시 되살린다는 것이다. 국제 현상설계 공모를 통해 이스케이프(김택빈, 장용순, 이상구) 건축사사무소의 ‘현대적 토속’(Modern Vernacular)이 최종 선정됐고 3월 4일 공사가 시작됐다. 한국은 건축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이 지극히 부족한 사회다. 지어진 지 수십 년이 지난, 게다가 문화재도 아닌, 민간 건물의 당초 설계 의도를 이렇게 정성스럽게 다시 살리려는 노력은 사실상 전례가 없다. 건물이 워낙 크고, 주변 지역이 워낙 넓으며,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도 하겠지만, 뭐니 뭐니 해도 설계자가 한국 근현대 건축 대표주자의 하나인 김수근과 그의 후예들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 연재를 통틀어 이렇게 설계자의 아우라가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는 건물의 사례는 단연코 없다. 세운상가가 각종 전시나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흔해졌고, 세운상가에서 다양한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7~8월에는 ‘도시는 선이다’라는 제목으로 세운상가의 산파역이었던 ‘불도저’ 김현옥 시장에 대한 전시회가 시립역사박물관에서 열렸고 세운상가는 그 핵심적 전시물의 하나였다. 2016년은 세운상가의 ‘복권’이 시민사회에서 공식화된 해로 봐도 좋을 것이다. 세운상가에 대한 글은 넘치도록 많다. 다만 그 물리적 실체에 대한 기초 정보는 그리 넉넉하지 않다. 자료의 축적과 차분한 관찰보다는 해석과 의미 부여에 더 많은 관심이 기울어진 듯하다. 현재까지는 2010년 서울 시립역사박물관에서 펴낸 ‘세운상가와 그 이웃들’이라는 책이 가장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비매품으로 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다. 세운상가 도시재생을 추진 중인 서울시는 이제 자료집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흔히 ‘세운상가는 1967년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이라고 하지만 이 숫자가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전체 건물 중에서 극히 일부분이다. 게다가 공식 기록이란 측면에서 세운상가가 과연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도 지난번 좌원 아파트 편에서 제시한 바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세운상가가 들어선 자리는 일제강점기 후반 태평양전쟁이 격렬해지면서 공습에 대비해 만들어진 소개공지대다. 그 자리가 슬럼화되자 당시 서울시장 김현옥은 대형 주상복합 건물을 짓는다는 아이디어를 대통령 박정희에게 제출했다. 내친김에 ‘세(世)계의 운(運)이 모인다’는 지극히 자기현시적이고 개발시대다운 이름까지 지어 올렸다. 설계를 의뢰받은 건축가는 김수근이었다. 당시 상당한 규모의 조직을 운영하고 있던 김수근은 휘하의 젊은 건축가들에게 실무를 맡겼다고 전한다. 그러나 실행 단계에 들어갔을 때 건설사들이 제각각으로 시공하는 바람에 보행자 통로 등 핵심 설계 의도가 잘 구현되지 않았다. 결국 아무도 설계자를 자처하지 않는 기묘한 상황이 오랫동안 계속됐다. 완공 당시에는 상가와 아파트 모두 상당한 인기를 끌었으나 반짝 인기가 식고 건물이 낡아 가면서 도시의 흉물로서 받을 만한 비난은 모조리 받는 처지가 됐다.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는 것부터 시작해 ‘서울의 도시구조를 망친 주범’이라는 것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하고 날 선 비난들이었다. ‘한국의 아파트 연구’의 저자인 프랑스 출신 발레리 줄레조는 세운상가를 한마디로 ‘완전한 실패작’으로 규정했다. # 실패한 유토피아? 세간의 논의는 일단 그렇다 치고 세운상가의 면모를 간단히 파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가장 북쪽부터 시작해 각각 현대상가(2008년 철거), 세운상가 가동(혹은 아세아상가. 현 세운전자상가), 청계상가, 대림상가, 삼풍상가(현 삼풍 넥서스), 풍전호텔(현 PJ호텔), 신성상가(현 인현상가), 진양상가까지 총 8개의 건물이 있다. 전체 길이는 945m로 종로와 청계천로, 을지로, 마른내길, 그리고 퇴계로에 걸쳐져 있다. 이 중 가장 먼저 완공된 것은 세운상가 가동으로 1967년 11월 17일 사용 승인을 받았으며, 가장 나중에 완공된 것은 풍전호텔로 사용 승인일은 1982년 12월 31일이다. 그 격차가 무려 15년에 가깝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풍전호텔은 나머지 건물들과 사뭇 다른 점이 있다. 지하에 널찍한 주차장이 있는 것이다. 주차장법이 제정된 해가 1979년이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처음으로 신문 지면에 ‘세운상가의 개관’을 알리는 기사가 실린 것은 1967년 7월 26일이었다. 하오 2시라고 시간까지 밝히고 있다. 당시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와 김현옥 시장이 참석했다. 이때 개관한 건물은 세운상가 가동으로 당시 광고가 아직 남아 있다. 사용 승인일은 그보다 몇 개월 후인 11월 17일이었으나 1, 2층 상가만 먼저 개관하는 바람에 개관일이 한참 앞당겨진 것이다. 이때 상부의 아파트는 아직 건설 중이었다. 이름이 말해 주듯이 건물마다 건설사가 제각각이었다. 이들 중 현대나 대림, 삼풍은 잘 알려진 이름들이다. 그중 비교적 덜 알려진 신성건설은 거대 주상복합 건설의 경험을 되살려 1971년 7월 6일 홍은동에 유진상가를 완성한 바로 그 회사다. 그러나 이처럼 건설사가 서로 다르다 보니 공통의 개념을 구현하는 것이 어렵게 됐다. 건물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요소의 하나였던 보행자 데크의 경우 아예 처음부터 마른내길 위, 즉 풍전호텔과 신성상가 사이는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이후 청계천로의 데크가 2004년, 이어 삼풍상가와 풍전호텔의 데크가 2006년 리모델링 당시 철거됐다. 결국 보행자 데크의 전체적인 연속성은 처음부터도 완전치 않았고 그나마 만들어진 것도 상당 부분 사라진 지 오래됐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보면 이 장대하고 사연 많은 복합 건물군을 ‘세운상가’라는 이름으로 단일화해 이해하고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문제를 낳는지 알 수 있다. 차라리 서로 다른 건물로 파악하고 역으로 공통분모를 만들어 가는 것이 더 유익한 태도일지 모른다. 세운상가에서 예나 지금이나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역시 보행자 데크, 즉 공중가로 부분이다. 지상은 자동차가 다니고 보행자는 그 위를 걷는다는 공중가로의 개념은 물론 세운상가만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당시는 세계적으로 거대 건물을 통해 구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고 전쟁의 상처를 복구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야망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일본은 메타볼리즘 건축을 통해 생명체의 신진대사 시스템을 도시와 건축에 적용하려고 했다. 공중가로라는 개념도 이미 1960년대에 영국의 신브루탈리즘 계열 건축가인 앨리슨과 피터 스미슨 부부에 의해 ‘스트리트 인 더 스카이’(street in the sky)라는 이름으로 소개된 바 있었다. 이것은 사실상 런던의 교통사고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었는데, 당시 한국이 같은 문제를 제기할 상황이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김수근은 누구보다도 세계 건축계의 동향에 민감했고, 또한 그것을 자신의 경력에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았던 인물이었다. 수많은 사람을 한 층 위로 올라가게 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유인 동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제공되지 않은 공중가로는 그야말로 무용지물이다. 1960년대에 시도된 런던의 공중가로 네트워크인 페드웨이(Pedway)도 결국 실패했다. 세운상가도 이와 다르지 않아서 불법 음란물 말고는 사람들을 데크로 올라오게 하는 별다른 ‘유인 동기’가 없다는 불명예를 얻고 말았다. 세운상가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사실상 이렇게 버려진 공중가로의 탓이 크다. 종종 ‘건물 전체가 슬럼화됐다’고 하지만 정작 건물의 내부, 특히 아파트의 중정 부분은 지금도 상대적으로 환경이 더 양호하다. 답사 과정에서 만난 몇몇 세입자들은 임대료가 오르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즉 수요가 있는 것이다.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한 삼풍상가나 풍전호텔은 불명예스러운 루머가 무색하리만큼 아주 멀쩡한 모습을 하고 있기도 하다. 아예 처음부터 공중가로를 건물 양옆이 아니라 중앙에 설치해서 여러 개의 중정을 거치도록 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다. 즉 중정을 지금처럼 입주민들만이 전용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공공장소로서 보행자에게 개방했더라면? 즉 다른 상가아파트들이 길과 맺고 있던 밀접한 관계를 공중가로에서 만들었더라면 어땠을까. # 세운상가가 던져준 건축의 역할 영욕의 세월을 뒤로하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세운상가가 이제 새로운 도시재생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삶을 기약하고 있는 지금 건축과 건축가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세운상가를 가리켜 실패한 유토피아라고 비난하는 것은 결과론적인 시각에서는 근거 있는 행위일지 모른다. 동시에 아주 쉬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자칫하면 미래에 대해 꿈을 꾸고 상상하는 것은 부질없다는 패배주의를 낳는다.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가 그렇듯이 건축 또한 해 오던 방식을 더 세련되게 반복하는 것만으로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도전해야 하고 남들이 하지 않았던 것을 시도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 어디 다른 나라에서 선례를 수입해 우리의 미래를 해결하려는 습관 또한 그 효용성의 한계에 다다랐다. 우리는 우리의 현실을 집요하게 관찰하고 분석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따라서 그만큼 외로운 결정을 내릴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실패한 유토피아의 상징, 그러나 어떻게든 세월의 무게를 이겨 온 세운상가가 우리에게 주는 역설의 교훈이다.
  •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도심형 최고급 주상복합 원조…美 종교재단 파워 담긴 당당함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도심형 최고급 주상복합 원조…美 종교재단 파워 담긴 당당함

    # 사무실 같은 아파트 구도심의 유서 깊은 중심 상업가로인 종로는 세종대로 사거리를 건너면서 새문안로로 이름이 바뀐다. 이전에는 신문로(新門路)라고 불렸는데 아직 이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쓰인다. 조선 초기에 서대문, 즉 돈의문이 폐쇄되었다가 다시 대대적인 수리 끝에 재사용되는 과정에서 ‘새문’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 그 유래다. 한양 도성의 동서 방향 중심은 지금의 탑골공원 부근이지만, 지형적인 이유 때문에 실제 중심인 세종대로는 이보다 훨씬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 결과 새문안로의 도성 내 구간은 770m 정도로 그리 길지 않다. 그러나 이 구간에는 흥국생명, 포시즌즈 호텔, 대우건설, 금호아시아나 그룹 등 한국의 중요한 대기업과 국제적 호텔 등이 밀집해 있다. 게다가 길의 북쪽에 경희궁과 서울시립역사박물관 등이 자리잡고 있으니 공공적인 성격 또한 매우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매우 인지도가 높은 길이라고 할 것이다. 지금은 없어진 새문, 즉 돈의문 조금 못 미친 곳의 새문안로 남쪽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콘크리트 건물이 하나 보인다. 콘크리트에 시멘트 미장을 하고 거기에 페인트를 바른, 사실상 이보다 더 저렴할 수 없는 외부 마감 덕분에 존재감이 더욱 없어 보인다. 하지만 ‘피어선 아파트’라는 건물의 이름을 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피어선은 도대체 어떤 의미이며, 사무실처럼 생긴 건물이 아파트라니? 아서 태펀 피어선은 근대 복음주의 선교운동의 이론가로서 미국 장로교의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연희전문학교와 새문안교회를 세운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박사와의 인연으로 병약한 중에도 1910년 12월 조선에 입국,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그러나 불과 6주 만인 1911년 1월 다시 조선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고, 같은 해 6월 3일에 세상을 떠났다. 조선에 성경학교를 세우라는 유언을 남겨 그 이듬해인 1912년에 현재 평택대학교의 전신인 피어선기념성경학원이 설립되었다. 이후 1968년 피어선기념성서신학교로 개명한 후 재단의 자금 마련을 위해 진행한 사업이 바로 피어선 아파트다. 중림동 천주교 약현성당이 성요셉 아파트를 지은 것과 사업의 목적이나 시기 면에서 매우 유사한 점이 있다. 건축물 관리대장에 의하면 피어선 아파트는 1971년 11월 10일에 사용승인을 받았다. 경희궁 터에 있던 서울고등학교가 아직 서초동으로 이전하기 전이었다. 그 당시 교정을 드나들던 학생들에게 길 건너편의 최신식 도심 맨션은 매우 색다른 풍경이었을 것이다. 애초에 위치부터가 독보적이었다. 일단 사대문 안, 그것도 궁궐과 명문 고등학교 바로 맞은편이라는 입지는 이 연재에 자주 등장하는 서대문 바로 너머의 충정로나 홍제동 등 신개발지들이 견주기 어려운 것이었다. 같은 사대문 안이지만 도로를 신설하는 과정에서 세워진 낙원상가나, 태평양 전쟁 후반기에 폭격을 대비한 소개공지대에 들어선 세운상가 등과도 확연히 다르다. 그야말로 구도심의 가장 핵심적이고 상징적인 위치의 하나에 자리잡은 것이다. 미국계 종교 재단의 파워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 시기의 다른 여러 아파트들이 다 그러했듯이 피어선 아파트도 건립 당시 장안의 화제였다. 심지어 ‘서울에도 선진국 도시처럼 도심에 주상복합건축이 들어섰으니 한번 살아 봐야겠다’는 이유로 입주한 경우도 있었다고 들었다. 1974년 7월 9일자 매일경제신문의 기사를 보면, 도심의 업무지구가 확대되고 한강변에 맨션아파트가 계속 들어서는 와중에 도심의 업무지구를 중심으로 ‘비원 근처의 가든 타워 아파트, 신문로의 피어선 아파트, 삼익건설(?)이 지은 사직 아파트, 남산에 솟은 외국인 전용 아파트 등 초고급 아파트’ 등이 들어섰음을 알리고 있다. 한마디로 피어선 아파트는 그 당시 가장 앞선 아파트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었다. 지금의 피어선 아파트는 과거의 그런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심지어 더 이상 아파트도 아니다. 건축물 관리대장을 보면 분명히 대부분의 층에 아직 아파트라는 용도가 적혀 있고, 심지어 건물 1층에 아직도 ‘피어선 아파트’라는 명패가 남아 있지만 주거로서의 기능은 완전히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건물 성격의 변화를 잘 알려주는 자료가 하나 있다. 1990년 9월 14일자 대법원 판결문이다. 다름 아닌 상수도 사용료 부과처분에 대한 내용이다. ‘…지하 1층에서 지상 3층까지는 점포 및 사무실로, 4층부터 11층까지는 79세대의 아파트로 건축되어 개인에게 분양된 복합건물인데, 그 후 세대별 아파트의 소유자 및 그로부터 임차한 사람들이 개인사무실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최근에 이르러서는 79세대 중 75세대가 주거용 아파트가 아닌 회사사무실, 건축사 또는 법률사무소, 치과병원 등 개인사무실 및 영업장소로 사용되고 있는 사실….’ 이후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게 건물의 용도가 당초와 완전히 달라졌으므로 상수도 요금 산정을 위한 요율 또한 다르게 적용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건물을 ‘피어선 아파트’가 아닌 ‘피어선 빌딩’이라고 부르고 심지어 건물 내에서도 두 가지 이름이 혼재되어 있는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오히려 이 건물은 위치적 장점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임대료 덕분에 각종 시민단체들이 대거 둥지를 틀고 있는, 이른바 ‘비정부기구(NGO)의 메카’로 더 잘 알려졌다. 1층 입구에 붙어 있는 안내판을 보면 원조 시민단체의 하나인 소비자시민의모임을 비롯해서 한국투명성기구, 에너지시민연대 등의 이름이 보인다. # 도심 공동 주거의 선구자적 역할 새문안로 맞은편에서 바라본 피어선 아파트는 좌우 대칭의 반듯한 건물이다. 정면 네 칸에 양쪽에 좁은 칸이 하나씩 더 붙어 있다. 대충 나누어 그린 입면 같지만 자세히 보면 흥미로운 것들이 있다. 일단 정면 네 칸의 간격이 다르다. 가운데 두 칸이 넓고 양쪽 두 칸이 다소 좁다. 그래서 건물 가운데가 조금 앞으로 튀어나온 것 같은 착시 현상이 생긴다. 어떤 이유에서 이렇게 한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보는 이를 생각에 잠기게 한다. 분명히 정면에서 보면 11층 건물인데 건축물 관리대장에는 지하 1층 지상 10층으로 되어 있다. 즉 육안상 1층으로 보이는, 가로에 면한 부분이 알고 보면 법적으로 지하 1층이다. 그 이유는 건물 뒤로 돌아가 보면 알 수 있다. 뒷부분이 땅에 묻혀 있는 것이다. 건축법상 지하층 산정 기준에 따른 결과다. 위에서 언급한 대법원 판결문 또한 법적인 층수가 아닌 육안상의 층수를 사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이 글에서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 육안상 층수를 기준으로 한다). 양쪽 측면의 좁은 칸에는 역시 콘크리트로 만든 차양 같은 것이 붙어 있는데 3층 이하는 없고 그 위부터 꼭대기 층까지는 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법원 판결문에 나오는 것처럼 저층부 3개 층의 사무실과 그 위의 아파트가 나뉘는 부분을 정확하게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세히 보면 두 부분은 층고도 서로 다르다. 이렇게 건물을 ‘읽으면’ 그 연혁과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건축 답사가 주는 즐거움의 하나다. 지하 1층, 즉 가로에 면한 층에는 좌측부터 볼링장, 맥도날드, 하나은행 현금 코너 등이 입주해 있고 차량 통로를 지나 작은 꽃집이 하나 있다. 볼링장은 한 층 아래로 내려가는데 그렇다면 법적 지하 2층이 되는 셈이지만 건축물 관리대장에 언급이 없는 것이 특이하다. 그 좌측에는 마치 달아낸 것처럼 아주 작은 김밥집이 있다. 김밥도 맛있고 주인이 재미있는 분이어서 꽤 알려진 집인데 평일에는 오전 11시쯤부터 길게 줄을 선다. 건물 정면에 로비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 것도 또 다른 특징이다. 하나은행 현금 코너를 통해 내부로 들어갈 수는 있으나 정작 주출입구는 차량 통로의 중간에 측면으로 나 있다. 가로변 상가와 건물의 출입 동선을 분리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평소에는 이상할지 모르지만 비가 올 때 차에서 내리거나 차를 탈 때 편리할 것이다. 이 역시 자동차를 중시하는 미국식 사고의 영향으로 생각한다. 뒤로 돌아가면 꽤 널찍한 주차장이 있는 등 당시 건물치고는 자동차에 대한 신경을 많이 쓴 것을 알 수 있다. 건축물 관리대장에는 주차대수가 0으로 나와 있는데 주차장법 제정 이전에 지어진 건물이라서 그렇거나, 아니면 주차장이 나중에 추가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한다. 한편 피어선 아파트에 대한 자료를 찾다 보면 엘리베이터가 2층부터 있다는 등의 기록이 나온다. 이전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1층까지 연결되어 있다. 기록이 맞는다면 역시 당초 1층 상가에 출입하는 동선과 그 위 입주자들의 동선을 분리하려는 의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새문안로가 북쪽에 있으므로 피어선 아파트는 북향 건물이다. 그런데 주차장 쪽으로 가서 남쪽을 보면 드디어 이 건물의 원래 정체가 잘 드러난다. 주거 기능은 상실했지만 아직도 발코니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주거 세대의 용도가 다른 것으로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구조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보면, 하드웨어로서 건축이 갖는 끈질김이 느껴진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상상을 해 본다. 피어선 아파트가 공동 주거로서의 본래의 기능을 되찾으면 어떨까?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아직도 건축물 관리대장에 ‘아파트’가 명기되어 있고 저렇게 발코니까지 남아 있다. 필요하다면, 그리고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그렇게 되는 것에 별 무리는 없어 보인다. 서울 구도심의 주거 기능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요즘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다만 건물 남쪽의 지형이 높고 (정동은 의외로 지형의 고저차가 심한 곳이다. 그런 이유로 1927년 2월 16일 경성방송국이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인 정동 1번지에서 첫 방송을 시작했다) 높은 건물이 많아 남쪽으로의 채광과 경관은 사실 별로 기대할 것이 없다. 피어선 아파트 바로 남쪽의 경향신문사 사옥은 구 문화방송 사옥인데 김수근이 설계하여 1967년에 완공되었다. 전면부와 후면부 모두 상당히 고층인 데다가 피어선 아파트 건립 당시에 이미 그 자리에 있었으므로 피어선 아파트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남쪽이 매우 답답했을 것이다. 당시 도심형 최고급 주상복합건축으로서의 피어선 아파트의 선구적인 역할은 주목할 만하다. 정작 그 자신은 공동 주거 기능을 상실했지만 길 건너 광화문 일대, 특히 세종문화회관 주변 지역이 그 역할을 이어받았다. 대단지형 주상복합인 경희궁의 아침, 스페이스본 등은 물론이고 거리에 면한 단독 건물 중에서도 주상복합이 많다. 세종 아파트, 신문로 주상복합, 세종로 대우 아파트 등이 그것이다. 이 건물들은 모두 겉에서 보면 일반 사무용 건물인지 아파트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모습을 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세종로 대우 아파트는 특이하게도 중정형인데, 개인적으로 청년 시절 첫 직장에서 참여했던 프로젝트라서 필자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렇게 일반 건물과 주거가 별다른 구별 없이 섞여 있는 것이 주거가 도심에 존재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피어선 아파트가 남긴 도시적 유전자다.
  •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인연; 한 지붕 아래 작은 골목길…우연; 모래내 납작 건물의 손짓…필연; 어쩌면 50년 된 ‘첫’ 주상복합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인연; 한 지붕 아래 작은 골목길…우연; 모래내 납작 건물의 손짓…필연; 어쩌면 50년 된 ‘첫’ 주상복합

    4층짜리 넓고 깊은 독특한 평면 비례…1층 내부 복도는 가로·세로 3중으로 교차 세운·현대상가보다 건축 시기 앞서 주상복합 정의·추가 실증 연구 필요 # 하마터면 놓쳤을 ‘운명’의 좌원 아파트 답사를 다니다 보면 갈등이 생긴다. 원래 알고 있었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제보를 받았거나 하면 일단 대상 건물에 대해 자료를 모으기 시작한다. 그러고 네이버나 다음의 스트리트 뷰로 외관을 확인한다. 이 과정에서 이야기할 만한 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여길 꼭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굳이 이 건물을 언급하지 않아도 될 이유들이 생각나기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꾀가 나는 것이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제한된 지면에 가급적 다양한 사례를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도 깔려 있다. 하지만 결론은 항상 똑같다. 일단 가 보고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막상 실물을 대하면 어떤 충실한 자료로도 대체할 수 없는 구체성과 현실성이 밀려온다. ‘건물이 말을 거는 것 같다’는 표현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사람을 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모래내에 있는 좌원 아파트는 하마터면 만나지 않을 뻔했다. 그러나 생각을 고쳐 먹고 찾아간 것은 매우 잘한 일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홍제천이 모래내(沙川)라는 이야기는 이미 한 적이 있다. 유난히 모래가 많아서 그렇다는 것인데 실제로 홍제천을 따라 걸어 보니 옛말이 틀린 것이 없다. 서울 서북부 지역의 물이 모여 흘러서 만들어진 하천으로, 사실 그 모래 또한 북한산과 인왕산, 안산 등이 제 몸의 일부를 흘러내려 보낸 것이다. 한국 산들은 화강암 위주이기 때문에 하천도 그 화강암이 풍화, 마모된 모래와 자갈을 많이 품을 수밖에 없다. 서울뿐 아니라 인천에도 모래내가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홍제천 전체가 이런 모래 하천, 즉 모래내인데, 유독 그중 한 지역을 특정해서 또 모래내라고 부르는 것이 재미있다. 모래내의 서쪽 일대는 인근 가좌역이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좌(加佐)라고도 불린다. 가좌는 순 한국어로는 가재울이다. 모래내의 물이 맑아 가재가 많이 살아서 그렇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지금도 인근 주민들이 홍제천 여기저기에서 물놀이를 할 정도다. 사람뿐 아니라 오리, 백로, 잉어 등등이 흔해서 특별히 눈길이 가지도 않는다. 그 물길에 기둥을 박아서 내부순환로를 만들었기 때문에 자연과 인공이 매우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 하천이기도 하다. 가좌역은 용산역에서 시작된 경의~중앙선(혹은 용산선)과 서울역에서 시작된 같은 이름의 경의~중앙선이 합쳐지는 곳이다. 이 가좌역에서 수색로를 건너면 길가에 낮고 넓적한 오래된 건물 하나가 웅크리고 있다. 심지어 건물 입구가 길보다도 낮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인다. 이것이 바로 좌원 아파트다. 서울 서대문구 수색로 42번지가 그 주소다. # 폭 41m 전면부·후면부는 사다리꼴로 증축 좌원 아파트는 몇 가지 면에서 특별하다. 우선 첫 번째로, 평면의 비례가 예사롭지 않다. 하늘에서 본 좌원 아파트는 크게 두 부분으로 돼 있다. 수색로에 면한 전면부는 폭 41m, 깊이 46m로 정방형에 가깝다. 지상 4층 건물이지만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 것은 단순히 건물이 길보다 낮기 때문만은 아니다. 워낙 전면이 넓어 더욱 그렇게 보인다. 나중에 증축한 후면부는 사다리꼴 모양으로 지하 1층, 지상 2층이다. 건물의 평면이 이렇게 넓으면 특별한 설계상의 조치 없이 주거를 집어넣는 것은 불가능하다. 충정로 미동 아파트처럼 과감하게 양쪽에 복도가 있는, 외기에 면하지 않는 가구를 넣거나 (‘유람선형 평면’) 개방형, 혹은 천창형 중정이 있어야 한다. 좌원 아파트는 폭 대 깊이의 비가 각각 32m와 47m인 삼각지의 삼각 아파트보다도 더 넓은 평면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삼각 아파트가 개방형 중정을 갖고 있는 것과 달리 좌원 아파트는 두 개의 천창을 넣어 환기와 채광을 해결했다. 주거로 사용 중인 3, 4층을 관통하는 2개 층 높이의 중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옥상에 올라가서 보면 두 개의 천창은 현재 막혀 있는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건물 내부의 환기와 채광은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또 다른 점은 내부의 복도 및 통로 구성에 대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건물 내부의 복도 구성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는 것과 아주 다르다. 1층의 경우 편복도나 중복도, 이런 차원이 아니라 무려 3중 복도가 나 있다. 그것도 한 방향으로가 아니라 두 방향으로 직교하고 있다. 따라서 그 안에서는 수많은 공간의 분화가 일어난다. 4x4의 마방진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나머지 층들은 이보다는 복도 구성이 간단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넓은 평면에서 오는 고뇌와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1층은 실제로 가서 보면 상당히 놀랍다. 우선 복도와 도로 사이에 문이 없이 그냥 외기에 열려 있다. 게다가 그 바닥재도 일반적으로 건물 실내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인도에 사용하는 것과 같은 보도블록이다. 즉 복도라기보다는 도로가 건물 안에 들어가 있는 셈이다. 마치 이 자리에 원래 작은 건물과 골목길이 서로 얽혀 있었는데 그 위에 넓적한 건물을 올려놓은 것과 같다고나 할까. 게다가 그 안이 워낙 복잡하고 황량하다. 건물 외곽에 있는 상가만 영업을 하고 있을 뿐 내부에서는 이렇다 할 상업 활동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그 이유는 나중에 알게 됐다. 2008년 11월 28일 밤에 1층 상가에서 합선, 혹은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있었던 것이다. 좌원 아파트의 연혁 또한 주목할 만하다. 건축물 관리대장에 따르면 이 아파트는 1966년 12월 23일 사용 승인을 받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런 숫자는 별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아파트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올해로 50년이 됐으니 상당히 오래된 건물이다. 이 연재에 등장했던, 그리고 앞으로 등장할 건물 중에 이보다 더 오래된 건물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있다면 1940년대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옥인동의 2층 한옥 상가나 1950년대 말에 지어진 서울역 앞 상가 주택 정도가 있을 뿐이다. 이런 기록에 근거해 말하자면 좌원 아파트는 한국 주상복합 건축의 시초라고 일컬어지는 세운상가보다도 오래됐다. 세운상가는 흔히 한 건물처럼 이야기하지만 엄연히 공사 주체와 건립 연도가 제각각인 무려 8개 건물의 집합체다. 그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것은 이미 철거된 종로변 현대상가와 그 바로 뒤의 세운상가 가동이다. 현대상가는 이미 철거됐으나 현재 남아 있는 세운상가 가동의 경우 1967년 11월 17일 사용 승인을 받았다. 좌원 아파트보다 약 1년이 늦은 것이다. 1967년 7월 27일 매일경제신문에 따르면 바로 그 전날인 1967년 7월 26일 육영수 여사와 김현옥 시장이 참석해 1, 2층 상가를 개장했고 그 위는 아직 공사 중이라는 구절이 있다. 5층부터 13층까지 아파트가 들어간다고 쓴 것으로 보아 현대상가를 의미하는 것 같다. 기사의 내용으로 보면 현대상가와 세운상가 가동(당시 아시아상가)은 비슷하게 공사가 진행된 것으로 추측된다. 즉 좌원 아파트가 세워지고 반년이 더 지난 후에도 세운상가를 구성하는 최초의 2개 동은 아직 공사 중이었던 것이다. 건축물 관리대장상 엄연히 건립 시기가 더 이른 좌원 아파트가 지금까지 거론되지 않았던 것은 건물의 지명도가 낮았거나, 혹은 주상복합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하는 문제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좌원 아파트도 연면적이 8677.24㎡의 대형 건물인 데다 총 4개 층 중에 절반인 1, 2층은 상가로, 3, 4층은 공동주거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간단히 무시할 대상이 아니다. 만약 주상복합의 정의에 상가주택도 들어간다면 그 연대는 1950년대 후반으로 훌쩍 올라간다. ‘최초’라는 타이틀의 무게를 감안할 때, 이 부분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가 좀더 진행될 필요가 있다. # 사용승인 4년 뒤 나온 ‘분양 광고 미스터리’ 좌원 아파트와 관련된 또 다른 흥미로운 정보는 분양 광고다. 그 당시 아파트의 분양 광고가 아직까지 전해지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1971년 7월 21일, 그러니까 건축물 관리대장상의 사용 승인일로부터 무려 4년이 훌쩍 넘은 시점에 나온 신문 광고가 아직 전해진다. 여러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건축물 관리대장의 사용 승인일이 잘못됐거나, 아니면 그 시점까지도 분양이 채 끝나지 않았거나 등의 다양한 시나리오를 생각해 볼 수 있다. 7월 21일자 광고인데 ‘7월말 입주보장’이라고 쓴 것을 보면 어떤 다급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좌원산업 주식회사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사업 주체의 이름을 딴 아파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쪽방 현실 속 ‘생활의 근대화’의 모순 시점의 문제와는 별도로 분양 광고의 내용 자체가 눈길을 끈다. 일단 ‘독신 아파트 분양 및 임대’라는 구절과 ‘고급 맨숀 아파트’라는 구절이 위아래로 놓여 있다. 같은 건물 안에 서로 다른 성격의 공동주거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급형은 25평 이하고 독신 아파트는 8평이다. ‘동’이라는 글자의 의미가 의문인데 개별 건물이 아니라 가구 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결코 잘 그렸다고 볼 수 없는 투시도는 허탈하리만큼 간단하다. 그러나 1층을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복도와 출입구의 존재를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좌원 아파트는 ‘생활의 근대화’를 주장하며 ‘독신 아파트’로 브랜딩을 했지만 실상은 어땠을까. 모래내 지역은 서울의 근대화 과정에서 도시 빈민들이 모여들던 곳이었다. 좌원 아파트가 들어서는 시점을 전후해 인구가 늘어나고 모래내 시장이 생겼지만 여전히 먹고사는 일이 어려운 곳이었다. 저 ‘독신 아파트’에 과연 독신자가 들어가서 ‘생활의 근대화’를 만끽하며 살았을까. 아직도 좌원 아파트와 관련된 자료에서 여전히 ‘쪽방’과 같은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걸 보면 현실은 그와 사뭇 달랐던 것 같다. 1979년 6월 29일자 동아일보에 당시 소방법 위반으로 입건된 시장 및 상가 아파트에 대한 기사가 실렸는데, 그 명단을 보면 유감스럽게도 세운상가, 낙원상가, 반포 1단지 등 이 연재에서 다루고 있는 건물들이 줄줄이 나온다. 좌원 아파트도 여기에 포함돼 있는데 마치 약 30년 후인 2008년 11월 28일의 화재를 예견하고 있는 것 같다. 상가 아파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나빠진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화재에 대한 불안이었다. 좌원 아파트는 이처럼 풍상도 많이 겪고 낡을 대로 낡은 건물이기는 하다. 그러나 여전히 본래 용도로 사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어쩌면 한국 주상복합 건축의 계보에서 가장 앞에 세워야 할 건물일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다. ※ 좌원 아파트의 공간 구성과 관련해 마침 이 건물에 대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경희대 대학원 김일현 교수 연구실 이우석씨의 도움을 받았다.
  •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근현대 유통 핵심지 종로5가…111년 패션 1번지 광장시장…상인정신 숨쉬는 방산·중부시장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근현대 유통 핵심지 종로5가…111년 패션 1번지 광장시장…상인정신 숨쉬는 방산·중부시장

    서울미래유산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 미래유산의 유형은 문화적 인공물, 문화적 행위·이야기, 배경으로 구분된다. 문화적 인공물에는 토목구조물, 건축물과 같은 건조물, 그림, 조각, 공예품, 공산품 등이 포함된다. 문화적 행위·이야기는 의식이나 기술, 전통과 명성, 이야깃거리 같은 무형 유산을 의미한다. 배경은 문화적 인공물이나 문화적 행위, 이야기 등이 만들어지는 배경을 의미한다. 서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특색 있는 장소나 경관이 포함된다. 미래유산 선정에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는 것은 ‘보존이 필요한 공통의 기억과 감성’이다. 서울시는 서울신문, 문화지평과 함께 미래유산에 대한 보존과 홍보를 위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을 진행하고 있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홈페이지(http://futureheritage.seoul.co.kr)에서 앞으로 남은 답사 코스를 확인할 수 있고 참가 신청도 가능하다. “전국에 전통시장이 몇 곳인지 아시는 분?” 이희준(29) 전통시장해설사이자 서울미래유산해설사가 질문을 던졌다. 답사에 나온 시민들은 어림짐작으로 답해 보지만 정답 근처도 못 갔다. “서울부터 제주까지 1398개의 전통시장이 있고 그중 330여개의 시장이 서울에 집중돼 있습니다. 시장의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선사시대 제전시가 열렸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만큼 시장은 인류 역사와 함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난 7월 23일 서울미래유산 탐방답사 네 번째 시간은 서울의 전통시장인 광장, 방산, 중부시장이 주인공이었다. 20대인 이 해설사는 전국 전통시장 798곳의 방문기록을 가진 ‘시장덕후’이다. 이 해설사는 MBC 생활정보프로그램 ‘생방송 오늘 저녁’에서 전국 전통시장을 소개하는 시장 전문가다. 얼마 전에는 구로시장 영프라자에서 참기름, 들기름을 파는 방앗간 ‘청춘주유소’를 개업한 청년창업가이기도 하다. 설명은 50대 아저씨처럼 구수하게 술술 풀어간다. 광장시장은 서울 전통시장 1호…동문 옆 신발점은 미래유산 지정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전통시장은 어디일까요?” 이 해설사는 질문하기를 좋아한다. 이날도 답사 내내 다양한 질문으로 시민들을 긴장(?)시키면서 전통시장 매력에 푹 빠져들게 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소지왕 12년(490년) 오늘날 경주 지역에 국가에서 직접 설치한 시장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백제 가요 ‘정읍사’에도 시장의 존재를 짐작게 하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 지하철 1호선 종로5가역 7번 출구에 모인 서울미래유산 탐방답사단은 이곳에서 시장의 역사에 대해 선행학습을 하고 시장답사에 나섰다. 시장답사라서 그런지 앞선 답사 때보다 중년 여성분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이 해설사의 설명이 거침없이 이어진다. “조선 초 1414년 경복궁 앞 시전에 무려 2827개 가게가 있었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지리지 한성부조’에 남아 있는데 이를 운종가라 불렀습니다. 조선 후기 무렵에 지금 남대문시장 자리에는 ‘칠패시장’이, 동대문시장 자리에는 ‘이현시장’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운종가는 지금의 광화문과 종로1가 인근을 말하는데 조선 왕조가 허용한 유일한 공식 시장 ‘육의전’이 있던 곳이고 칠패시장이나 이현시장은 이른바 ‘난장’이다. 답사팀은 광장시장 동문을 통해 시장으로 들어갔다. 동문 입구 옆에는 상호명이 서울고무상사(프로월드컵)인 신발가게가 있다. 1955년 개업해 주인은 몇 번 바뀌었지만, 60년 동안 신발가게로 한자리를 지켜온 이유로 서울미래유산에 선정됐다. 광장시장은 이현시장 후신으로 1905년 한성부에 등록된 서울 공식 전통시장 제1호이면서 최초의 사설시장이다. 청계천 광교와 장교 사이에 있어서 광장(廣長)시장으로 불렸다. 1905년 7월에는 동대문시장으로 이름을 확정했다가 나중에는 ‘넓게 저장한다’는 의미의 광장(廣藏)으로 정해졌다. 서울미래유산은 아니지만 문화재적 가치는 그 이상이다. 답사팀은 광장시장의 광장(廣場)에 모였다. 이곳은 먹거리 구간을 지나 견과물 구간에서 좌회전해서 포목부로 들어서면 만날 수 있는 시장의 중심이다. 포목을 사러오지 않는 이상 이 공간을 접해 보기 힘들다. 답사단은 광장에 다다르자 놀랍다는 반응이다. 이경윤(55·나눔마켓 대표)씨는 “지금껏 광장시장 하면 빈대떡이나 육회 같은 먹거리만 떠올렸지 이런 곳이 있는 줄 미처 몰랐다”며 놀라워했다. 포목부를 지나면서 이 해설사가 “뭔가 이상한 간판이 있을 것”이라며 궁금증을 유발했다. 주변을 살피자 포목점 간판들 사이에 ‘장안백화점’이란 간판이 낯설다. 이 해설사는 “과거 백화점들이 별도 건물을 짓는 대신 상권이 발달돼 있는 시장에 ‘숍인숍’(가게 안에 또 다른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것) 형태로 들어온 흔적”이라며 “지금도 수원 남문시장(글로벌명품시장, 팔달문시장 주변 9개시장 연합) 중 하나인 영동시장에는 영동백화점이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이창섭(47·중소기업진흥공단 홍보실장)씨는 “전통시장 안에 백화점이 있었다는 것도, 그 백화점이 지금은 초라하게 변한 것도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며 “예전의 화려함이나 생기는 잦아들었지만, 그럼에도 전통시장은 그 나름대로 멋이 있다”고 말했다. 성은도서 서울미래유산 후보감…예지동 시계골목 보존가치 높아 광장에서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면 2층에도 포목상점과 한복점들이 즐비하다. 구석진 상가 몇 곳은 셔터가 내려져 있다. 이에 대해 이 해설사는 “주인들이 고령화되면서 가업 승계가 이뤄지지 않은 점포”라며 “저곳에 청년들이 들어와 시장에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책이 마련되면 좋겠다”고 아쉬워했다. 중앙직물부 2층에 가면 ‘성은도서’라는 세 평 남짓한 허름한 책방이 있다. 이곳은 40년 넘게 패션 디자이너와 관련 학과 학생들에게 수입 패션도서를 공급하고 있는 곳이다. 사장님은 “작고한 앙드레 김도 단골이었다”며 “유명 패션디자이너 중 이곳을 거쳐 가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2층 한쪽에는 저렴함을 자랑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수입 구제상가도 있다. 이현주 국립중앙박물관 홍보전문관은 “시장 답사를 통해 아주 오래간만에 전통시장의 정을 느끼고 왔다”며 “광장시장의 떡볶이 먹으러 꼭 다시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다음 답사지인 방산시장을 가기 위해 예지동 시계골목을 지났다. 이곳은 시간이 멈춘 듯 옛 풍경을 간직한 골목이다. 고급 손목시계를 고치기 위해 일부러 외국서 찾아오는 곳이다. 시계태엽을 직접 깎아 만드는 장인들이 아직도 활동 중이다. 이 해설사는 “대부분 시계공들과 장인들이 예지동을 벗어나 인근 세운상가와 전국 각 지역으로 흩어지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며 “세계 어느 장인보다도 월등히 우수한 이들의 숙련된 기술과 시계 골목의 역사는 보존해야 할 가치가 크다”고 강조했다. 방산시장은 1976년 9월 폐교된 방산국민학교가 있던 자리에 세워졌다. 방산이라는 이름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청계천에서 떠내려온 부산물과 흙이 쌓여 있던 걸 퍼 올려 산처럼 쌓아 놓았다고 해서 가산 또는 방산이라 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분뇨가 많이 쌓이자 향기로 덮기 위해 꽃을 심은 데서 유래한다. 방산시장의 주력 상품은 얼마 전까지 초콜릿과 제과제빵 재료였다가 지금은 공교롭게도 향수와 디퓨저다. 방산시장 이름과 어울리는 품목이 자리잡은 셈이다. 방산시장을 둘러보다가 비교적 보존이 잘 된 적산가옥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또 하나의 재미다. 시장 인접에는 김치찌개가 유명한 은주정이란 밥집이 있다. 답사단은 이날 은주정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은주정은 문턱이 없어 이동장애를 가진 이경윤씨의 휠체어가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광장시장·방산시장·중부시장…모두 후대를 위해 보존할 곳 답사단은 서울미래유산인 중부시장을 가기 위해 길을 건넜다. 이 시장은 1950년대 후반 남대문과 동대문 인근에서 건어물을 팔던 상인들이 모여 만든 시장이다. 개설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이 개소식에 참석할 정도로 시장 규모와 거래액이 상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해설사가 답사단을 이끈 곳은 50년간 황태 등 건어물을 판매하는 서울상회다. 정문교 사장은 개성 있는 필체로 갖가지 교훈이 되는 글을 써서 점포 밖에 걸어 뒀다. ‘정직·정확·정성’이란 상훈(商訓)도 써붙여 놨다. 정 사장은 이날도 성경을 붓글씨로 필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정 사장은 “장사는 모름지기 신용이고 사람은 됨됨이가 중요하다”며 답사단에 교훈이 되는 이야기를 몇 마디 건넸다. 답사단이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중부시장의 초기 모습을 볼 수 있는 서쪽 끝이다. ‘오신 손님 친절하게 소비자를 보호합시다’라는 오래된 간판이 보이고 회랑이 있는 오래된 건물이 서 있다. 이 해설사는 “시장은 아침, 점심, 저녁이 다르고 어제와 오늘, 내일이 다른 것처럼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전통시장의 역사와 상인들의 이야기, 특화된 상품에 대해 듣는 것만으로도 시장이 달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마무리했다. 글 사진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 [In&Out] 도시와 문화 정책의 실패 확률 줄이려면/최도인 메타기획컨설팅 본부장

    [In&Out] 도시와 문화 정책의 실패 확률 줄이려면/최도인 메타기획컨설팅 본부장

    새로운 정책이 입안되고, 사회 현장에서 실현되는 과정에는 다층적 기획과 협력이 필요하다. 물리적 도시공간이 결합된 문화적 계획을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도시에 대한 이해, 운영 주체 형성, 건축가의 제안, 정책 지원 등 여러 이해관계들이 결합하고 때로는 갈등하고 협력한다. 좋은 정책은 다양한 선과 면들이 교차하는 섬세한 ‘과정의 기획’을 통해 실현된다. 최근 서울시에서 추진하고 있는 두 가지 프로젝트, ‘서울아레나와 플랫폼창동61’과 ‘세운상가 도시재생과 거점공간 조성’ 사업은 과정(process)의 혁신 차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두 프로젝트 모두 과거 공공정책과는 다른 기획 및 실행 프로세스를 도입하고 있다. 구상과 계획 그리고 실현 사이에 ‘현장 실험 프로젝트’를 배치하여 계획의 적정성에 대한 검증을 통해 수정과 보완의 과정을 거치도록 기획하였다. 이 과정에서 운영진과 정책담당자들은 정책의 집행이 미칠 문화 생태계의 반응을 모니터링할 수 있게 되었다. 올해 봄 개관한 플랫폼창동61은 문화적 불모지로 여겨졌던 서울 동북부 지역에 문화예술과 음악산업 생태계의 형성이 가능한가에 대해 실험 중이고 지금까지는 성공적이다. 최근 협력뮤지션 공모에 80여개 팀이 지원하는 등 대중음악 신에서 활동하는 뮤지션들이 호의적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플랫폼창동61은 2020년을 목표로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서울아레나와 창동 일대의 문화예술 생태계 조성을 위한 파일럿 프로젝트이다. 과거의 방식대로 하자면 아티스트와 시민들은 ‘반짝이는’ 서울아레나 조감도를 보며 공사 가림막이 없어질 때까지 긴 시간 기다리기만을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세운상가 도시재생과 거점공간 조성 프로세스는 조금 더 드라마틱하다. 이 프로젝트는 1970·80년대 도심산업을 이끌었던 세운상가군을 잇는 보행데크 조성이라는 도시건축 구상에서 시작되었다. 이를 이어받아 세운상가의 기술장인들을 발굴하고 현장과 소통하는 거버넌스 활동, 창의제조산업을 비전으로 산업재생의 토대를 만드는 현장실험실 등을 기획하고 있다. 물리적 연결에만 그칠 수 있었던 건축 프로젝트에 산업, 공동체 재생의 과정이 결합되면서 세운상가는 창의제조산업의 문화 플랫폼으로 진화할 기초를 다지기 시작하였다. 우리 사회의 많은 영역은 이미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성의 시대에 직면하고 있다. ‘책상 위 좋은 정책’이 현장에서는 ‘효과가 없거나 나쁜 정책’이 될 확률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도시와 문화를 다루는 정책은 더욱 예측이 어려운 영역이다. 해당 분야의 전문가라 할지라도 정답을 찾기 쉽지 않다. 이럴 때일수록 지혜를 모으는 ‘과정의 기획’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실패의 확률을 줄이는 필수 비용이라는 공감대가 필요하다. 내년 말이면 대통령선거가 있고 지금부터 여러 지역에서 ‘대선급’ 공약 프로젝트를 준비할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선거 국면을 통해 급조된 아이디어가 대형 문화프로젝트로 급부상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선거가 부실한 기획을 용인하는 절차가 되지 않기 위해, 어떠한 문화정책이 미래를 위해 중요하고 필요한지 각 정당과 전문가, 시민사회에서 그 과정을 체계적으로 그려 갈 수 있으면 좋겠다. 문화와 도시 정책이 꿈꾸는 조감도 너머에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복합적인 현실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조선의 중심 ‘종로 뒷골목’… 계단 없어 휠체어 답사도 OK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조선의 중심 ‘종로 뒷골목’… 계단 없어 휠체어 답사도 OK

    서울시는 2014년 근현대 서울의 추억과 발자취가 담긴 유·무형 자산을 발굴·관리하는 ‘미래유산 보전 종합계획’을 수립했다. 이에 따라 지난해 이맘때 ‘미래유산 보존·관리 및 활용에 관한 조례’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시민들과 미래유산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시는 미래유산 발굴보존 사업이 가능한 한 민간 주도로 진행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이번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역시 서울신문, 문화지평과 함께 시민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홈페이지(http://futureheritage.seoul.co.kr)에서 오는 9월 3일 장충단비, 국립극장, 장충체육관, 한양성곽, 족발 골목 등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가는 ‘장충단 성곽길’ 프로그램을 예약할 수 있다. 지난 7월 9일 오전 10시 보신각 앞에 한 무리 시민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빨간색 손수건을 하나씩 목에 두르거나 손목에 묶고 2회차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출발을 기다리는 이들이었다. 이번 역사탐방로는 보신각부터 동대문까지다. 일직선으로 뻗은 대로가 아니라 잘 다녀 보지 않은 뒤안길이다. 보신각 길 건너 서울아트센터 공평갤러리에서 인사동을 거쳐 종로 뒷골목을 헤집는 코스다. 답사로는 발밑으로는 광화문역에서 동대문역으로 달리는 지하철 5호선과 거의 겹친다. 단 한 번도 대로로 나가지 않고 동대문까지 뒤안길만 누비는 오리지널 골목 답사다. 서울 종로 뒤안길 답사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뒷골목에 숨어 있는 수많은 근현대 역사 이야기와 미래유산을 만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답사로 전체가 평지로 이뤄져서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들도 무리 없이 동행할 수 있는 ‘무장애 답사로’란 점이다. 이 답사로는 이날 해설을 맡은 박광규(55) 서울미래유산해설사가 개척한 코스다. 박 해설사는 “큰길에는 큰 역사가 존재하고 뒷골목에는 소소한 것만 있을 것이란 선입견을 날려 버리는 대단히 의미 있는 뒤안길”이라며 “특히 계단이 단 한 층도 없는 완벽한 무장애 코스로 장애인과 함께 역사와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답사길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날 답사팀 안전은 손안나 해설사가 맡았다. 이날 답사에도 어김없이 이경윤 나눔마켓 대표가 가장 먼저 나왔다. 장애인 콜택시를 타려고 일찍 서둘러야 해서 두 시간 전에 도착했다. 어릴 적 소달구지에 깔린 사고 때문에 전신마비로 이동장애를 가진 이 대표는 노원구 하계동 미성아파트 지하상가에서 책방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수많은 답사 활동을 했을 것이다. 이날은 무장애 코스라서 그런지 그의 표정이 유난히 밝다. 이 대표는 “이 코스를 두 번째 가 볼 기회를 얻어서 행복하다”며 “길 끝 창신동 골목길 ‘장가네 보리밥집’에서 쓱쓱 비벼 먹는 비빔밥이 일품이었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눔마켓은 책을 기증받아 온·오프라인을 통해 염가로 파는 책방”이라며 “기증은 책 종류와 수량에 관계없이 어떤 책이든 가능하다”고 깨알 같은 광고를 빼놓지 않았다. 박 해설사의 해설이 시작되자 모두 시선을 모으고 귀를 쫑긋 세웠다. “보신각 안 잔디밭에는 서울미래유산인 ‘지하철 수준점’이 있습니다. 지하철 1호선을 건설하려고 기준을 잡은 것인데요. 앞으로 놓일 모든 지하철의 높이를 정하는 기준이 됩니다.” 박 해설사가 손으로 지하철 수준점을 가리켰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사방 25㎝ 정사각형 표지석 한가운데 직경 7㎝, 길이 12㎝ 놋쇠 못이 박힌 수준점은 높이가 20㎝밖에 되지 않아 한여름에는 잔디에 묻혀 버리기 때문이다. 보신각이 보물 제2호로 지정된 문화재인 이유로 무작정 들어가 가까이 들여다보기가 어렵다. 박 해설사가 이해를 돕고자 아이패드를 꺼내 근접해서 찍은 사진을 보여 주자 그때야 시민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답사에 나온 배현철(40·두루EDS 대표)씨는 “보신각 앞에서 숱하게 약속도 하고 그 앞을 지나쳤지만, 이 안에 지하철 수준점이란 게 설치돼 있다는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다”고 했다. 지하철 수준점은 1970년 5월 도심 교통난을 해소할 대책을 마련하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당시 양택식 서울시장이 지하철을 도입하면서 같은 해 10월 설정한 일종의 기준이다. 우리나라 해발 기준점(수준원점)은 어디일까. 인천 앞바다를 기준으로, 수준원점 시설물은 인하대 교정 안에 있다. 박 해설사의 해설을 토씨 하나 놓칠세라 꼼꼼하게 받아 적는 답사객이 있다. 1회차 때 대한문 앞에서 출발하는 답사단 무리를 보고 2회차 때 무작정(?) 참가한 김청길(74)씨다. 김씨는 파워블로거다. 2013년부터 현재까지 문화와 답사 관련 포스트를 2200여개나 올렸단다. 김씨는 “일전에 대한문 앞에 갔다가 역사 탐방단이 출발하는 걸 보고 다음번 참석을 다짐했다”면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앞으로 계속 나올 예정”이라고 예고했다. ‘무임 승차’를 공언한 것이다. 보신각에서 길을 건너 서울아트센터 공평갤러리 쪽으로 인사동 랜드마크 중 하나인 ‘동헌필방’이 보인다. 창업자 이동하씨가 1966년부터 반세기 동안 한자리에서 운영하고 있다. 원래 남계양행이라는 양판점이었다. 건물 자체가 1930년대 지어진 등록문화재감이다. 그런데 동헌필방만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동헌필방 앞에는 1926년 지어진 건물이 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일제강점기 민간 3대 신문 중 하나였던 조선중앙일보의 사옥이었다. 박 해설사는 “동아일보와 함께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 보도한 신문”으로 “여운형이 사장이었는데 정간을 당한 후 그 다음해 폐간됐다”고 설명했다. 1960년대는 자유당 중앙당사, 1970년부터는 농협중앙회 사옥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NH농협 종로지점이다. 건립 당시 모습이 비교적 양호하게 보존돼 건축사적 측면에서 보존 가치가 있다. 서울 근대건축물과 미래유산이다. 이들 건물은 자칫 옛 도시계획에 의해 멸실될 위기에 있었으나 상위법을 바꿔 운 좋게 살아남았다. 그래서 종묘에서부터 직선이던 골목이 이들 건물을 피해 종로 쪽으로 살짝 굽었다. 여기서 시민 한 분이 추가로 무임 승차성 답사에 나섰다. 종로 뒷골목은 서울미래유산이 유난히 많은 곳이다. 이미 지나온 열차집, 동헌필방, NH농협 종로지점 이외도 이문설농탕, 구하산방, 서울중심점, 허리우드극장, 낙원악기상가, 낙원떡집, 유진식당, 피맛골 등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건물과 랜드마크가 즐비하다. 마치 ‘미래유산 종합선물세트’ 같다. 부모와 참가한 백은솔(9)·은채(7) 자매는 이문설농탕 벽면에 붙어 있는 서울미래유산 동판 앞에서 현수막을 들고 인증 사진을 찍었다. 자매는 “답사가 약간 힘들지만 견딜 만해요”라며 의젓한 모습을 보였다. 섭씨 30도를 웃도는 더운 날이라 어린이들에게는 다소 버거울 수 있었는데, 이들 자매는 양볼이 발갛게 달아 올랐지만, 군소리 한마디 없이 동대문까지 완주했다. 이인선(52)씨는 “과거의 길을 오늘 걸으며 미래를 생각해 본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체험”이라고 말했다. 앞서 가던 박 해설사가 태화빌딩 앞에 멈춰 섰다. ‘서울 3대 요정’ 중 하나인 명월관 별관 태화관 자리다. 태화관 전엔 매국노 이완용이 살았고, 매국 친일파들이 을사늑약, 경술국치 등을 모의했던 장소다. 1919년에는 민족 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자리다. 그 직후 총감부에 직접 전화를 걸어 자수를 한 탓에 3·1 운동은 구심점을 잃고 실패했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태화관 건물은 매국과 독립, 진정성과 모호성이 뒤섞인 역사의 아이러니를 품은 장소다. 태화빌딩 옆 건물인 하나로빌딩에도 깜짝 놀랄 만한 미래유산이 숨어 있었다. ‘서울 중심점 표지석’이다. 1층 로비 한쪽에 사방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채 보존돼 있는 표지석에는 ‘1층 로비에 있는 네모꼴 화강석은 서울의 한복판 중심지점을 표시한 지표석으로 대한제국 건양원년(1896)에 세워진 것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윤정배(48)씨는 “지금껏 서울 중심점이 남산에만 있는 줄만 알았는데 종로에, 그것도 빌딩 1층 로비라니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답사자 중에 누군가 “지난 1회차 답사 때 들렀던 도로원표가 서울 중심인 줄 알았다”며 거들었다. 박 해설사는 “이 중심석은 조선시대 서울이 확장되기 전 당시 기준점이고, 지금 사용하는 중심점은 2008년 최첨단 GPS 측량을 해 지정한 곳으로 남산정상 N타워 인근에 있다”고 설명했다. 답사단은 어느덧 익선동 한옥마을로 접어들었다. 100년 전인 1920년 당시만 해도 생소했을 법한, 도시형 한옥집단지구로 형성된 한옥촌이다. 지금은 카페와 술집, 레스토랑 등이 들어선 서울의 명소다. 익선동 골목 끝은 밤이면 불야성을 이루고, 고기 누린내로 진동하는 갈매기살 구이집이 즐비하다. 고깃집 담벼락에는 ‘조루증을 치료하고 회춘시켜 준다’는 한약방 광고지가 세월의 때를 묻힌 채 붙어 있다. 익선동 골목에는 과거가 현재와 공존하고 있다. 종묘 앞을 지나면서 남산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멀리 세운상가가 보인다. 1960년대 획기적 도시개발의 표본이자 근대 건축 1세대 김수근의 작품이다.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가서 실패한 도시계획의 표본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답사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섭씨 33도 한증막 같은 날씨 속에 강행군한 답사팀은 어느덧 서울미래유산인 한국기독교회관을 지나 동대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한국기독교회관은 1969년 준공돼 1974년 민청학련사건 인사 석방 운동 전개, 1978년 동일방직 노조원 생존권 보장 농성, 1980년 5월 서강대생 김의기 투신 자살 등 민주화 운동 성지로 손꼽히고 있다. 종로꽃시장에서 길이 좁고 복잡해 답사팀은 두 패로 갈렸지만 다시 만났다. 박 해설사는 한양도성박물관 앞에서 동대문을 바라보면서 폭염 속 2시간 30분 동안의 답사를 폭염만큼 뜨거운 박수로 마무리했다. “점심은 장가네 보리밥집 가요.” 글 사진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인왕시장 품고 중정으로 감싸 더불어 숨쉬다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인왕시장 품고 중정으로 감싸 더불어 숨쉬다

    # 네덜란드 ‘마켓 홀’ 원형이 70년대 한국에? 최근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한 건물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이름하여 마켓 홀(Market Hall·Markthal 혹은 Koopboog). 서울역 고가공원의 설계자로 이제 우리에게도 꽤 친숙한 네덜란드의 건축가 그룹인 MVRDV가 설계했다. 간단히 말해서 시장과 아파트를 결합한 건물이다. 가구 수가 228개에 이르니 상당히 대형 건물이다. 지하에는 1200대의 차량을 수용할 수 있는 4개 층의 주차장도 있다. 시장과 주차장과 공동주거가 결합한, 가히 초복합 건물이라고 할 것이다. 2014년 개장 이후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고 이 설계 사무소는 이 건물로 인해 가히 폭발적인 성장을 하고 있다는 업계의 후문이다. 디자인 못지않은 개념의 힘이다. 건물의 사진을 보면서 마음 한구석이 찡했다. ‘아, 또 좋은 개념 하나를 누군가가 선점했구나…’ 하는. 시장과 결합한 아파트, 흥미로운가? 이런 개념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런데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에게도 유사한 개념의 건물이 있었다. 그것도 이미 1970년대에. 홍제동 일대는 충정로에 이어 한국 아파트의 실험장이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이 연재의 주제인 주상복합 건물, 즉 무지개떡 건축의 사례가 유난히 풍부한 지역이다. 홍제동과 충정로 둘 다 서대문구인데 앞으로 이 연재가 계속되면서 등장할 여러 사례가 서대문구에 있다. 관심 있는 독자들은 권역별로 답사를 다녀도 좋을 듯하다. 지난번의 유진 상가에 이어 이번에는 그 바로 옆의 또 다른 상가아파트를 소개한다. 통일로 맞은편에서 비스듬히 찍으면 두 건물이 한 번에 카메라 앵글에 잡힐 정도로 가깝다. 바로 원일 아파트다. 서울 서북부 지역의 거점 시장인 인왕 시장과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본격적인 주상복합 건물이다. 효자 아파트를 이야기하면서 통인 시장을 빼 놓을 수 없듯이, 원일 아파트를 이야기하자면 인왕 시장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 두 아파트는 시장과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다. 인왕산은 서울 구도심을 호위하고 있는 네 개의 산 중 하나지만 정작 구도심의 일부인 인왕산의 동쪽 사면, 즉 서촌 일대에서는 인왕산과 관련된 이름이 그다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반대쪽 즉 인왕산의 서쪽 사면인 행촌동, 무악동, 홍제동 일대는 이야기가 완전히 다르다. 인왕 목욕탕, 인왕산 아이파크, 인왕 어르신 복지센터, 인왕산 어울림 아파트, 인왕궁 아파트, 인왕 아파트, 인왕산 현대 아파트, 인왕 빌라, 인왕산 벽산 아파트, 인왕 초등학교, 인왕 중학교…. 남쪽의 독립문 인근부터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인왕’이라는 이름의 행렬 최북단에 있는 것이 바로 인왕 시장이다. 인왕 시장에 대한 소개글에 의하면 1960년에 자연발생적인 시장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시장 개설 허가를 받은 것은 1971년 11월이다. 100년 전통을 자랑하는 광장 시장이나 일제강점기에 개설된 통인 시장만은 못하지만 나름 50년에 가까운 연륜을 자랑하는 시장이다. 서울 서북부 지역의 거점 시장으로서 상당한 규모다. 당연히 다양한 품목을 다루지만 농수산물과 잡화가 주 종목이다. 점포 수만 150개, 좌판은 200개에 달한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가로를 따라 길게 형성된 것이 아니라 광장 형이라는 것이다. 원래 노천 시장이었으나 2003년 시장 전체에 약 3400㎡의 지붕을 덮고 바닥을 정비해서 새롭게 태어났다. 워낙 존재감이 있는 시장이라 인근 유진 상가 사이의 넓은 길의 이름도 ‘유진상가길’이 아닌 ‘인왕시장길’이다. # 돌출된 수평선으로 조형미와 실용성 잡아 인왕 시장 내에 여러 갈래로 나 있는 통로 중의 하나는 서쪽의 통일로 쪽으로 입구가 나 있다. 그런데 그 사이에 건물이 하나 있어서 시장은 건물 하부를 그대로 관통한다. 이렇게 시장을 제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특이한 건물이 바로 원일 아파트다. 여기서 건물의 규모를 키우고 시장과 결합된 정도를 극단적으로 높이면 적어도 개념적으로는 위에서 이야기한 로테르담의 마켓 홀이 된다. 건축물 관리대장에 의하면 원일 아파트는 지하 1층에 지상 6층 건물로서 총 67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건물의 주 용도는 예상대로 공동주택, 사무실, 점포다. 주소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 294-36 외 3필지로 되어 있다. 사용 승인일은 1970년 5월 20일이다. 인근 유진 상가가 1970년 7월 11일인 것을 보면 거의 동시에 공사를 진행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완공된 셈이다. 앞에서 적은 것처럼 이 두 건물이 완공된 이듬해 연말인 1971년 11월에 인왕 시장이 시장 개설 허가를 받았으니 1970년대 초에 이 지역에 불어닥친 변화의 열풍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한편 인터넷에서 원일 아파트를 검색하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 완공 및 입주 연도가 1979년도로 나온다. 1970년이라는 건축물 관리대장상의 준공 연도를 정확히 밝히고 있는 경우가 오히려 예외적이다. 누군가에 의해서 시작된 오류가 반복해서 인용되어 퍼져 나간 경우인 것으로 짐작된다. 1979년이면 이미 한국에서 상가아파트가 거의 지어지지 않던 시기이기 때문에 더더구나 신빙성이 떨어진다. 통일로 변에서 본 원일 아파트는 전형적인 근대주의 디자인이다. 가지런한 수평띠 사이에 창문이 끼워져 있고 그 모듈 또한 일정하다. 북쪽, 즉 유진상가 쪽에 비상계단을 두기 위해서 한 번 모듈에 변화를 줬을 뿐이다. 언뜻 보면 완전히 수직선과 수평선으로만 이루어진 건물 같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않다. 매 층을 구분 짓는 수평 띠의 상단이 약간 위로 벌어져 있다. 마치 서구 고전 건축의 코니스(cornice), 즉 돌출된 띠를 연상케 한다. 시공사가 신라 건설이라는 것만 알려져 있지 설계자의 존재는 알 길이 없으나, 나름 고전 건축에 대한 감각과 조예가 있는 건축가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 시대의 여러 건물들을 보러 다니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현재의 쇠락한 모습을 근거로 건축의 질을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벗겨진 페인트와 엉클어진 전선, 덕지덕지 붙은 간판과 에어컨 실외기 등은 관리의 부실,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징후일 뿐이다. 원설계자의 의도와 생각은 비례와 공간 구성, 주변 맥락에 대한 태도 등 그 너머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원일 아파트의 조형적 섬세함은 북쪽 측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정면의 수평 띠를 약간 돌출시켜 측면 벽에 요철을 만든 후 그 두께 안에서 비상계단을 솜씨 있게 집어넣었다. 움푹 파인 콘크리트 벽의 육중한 질감과 금속의 세장한 비례가 대비되는 수준 높은 조형 감각이다. 게다가 그 위 옥상에는 매우 흥미로운 단면 형상의 구조물이 보인다. 나중에 실내와 옥상을 답사해 보면 이 구조물이야말로 원일 아파트를 특별한 존재로 만드는 또 다른 요소임을 알게 된다. 지하 1층과 지상 1, 2층은 상가고 지상 3층부터 6층은 공동주거다. 그러니 전체 7개 층 중에서 상가가 3개 층이나 차지하니 복합의 비율이 매우 높다. 게다가 상가에는 점포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의원, 소규모 사무실 등이 들어가 있다. 이상적인 무지개떡 건축의 복합 기능을 골고루 담고 있는 사례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5개의 모듈로 구성된 정면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역시 남쪽 두 번째 모듈의 1층 부분이다. 이 부분에는 점포가 없다. 그 대신 인왕 시장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 있다. 통로 안쪽으로는 지붕 덮인 인왕 시장의 거대 공간이 보인다. 통일로 변 점포의 행렬이 통로 안으로 꺾여 들어가면서 시장으로 연결되는 광경은 일종의 도시적 드라마다. 어쩌면 불과 8개월 남짓 후 같은 통일로 변에 완공된 서소문 아파트(1971)가 원일 아파트에서 이런 태도를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서소문 아파트 역시 주변 상권을 이어주는 도시적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 환기 잘되는 중정… 옥상 오르니 인왕산·안산 아파트 내부로 들어가 본다. 원일 아파트 역시 평면의 깊이가 26m에 달하기 때문에 중정의 존재가 예상되고 있었고 답사 전 항공사진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장 한쪽의 입구를 통해 상가 2층을 거쳐 3층으로 올라가니 역시 중정이 있었고 그 양쪽은 계단이었다. 폭이 다소 좁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천창을 통해 들어온 빛은 건물 내부를 부드럽게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아래 시장의 소음은 여기서는 전혀 들을 수 없었다. 아주 포근하고 조용한 중정이었다. 난간에는 화분들이 가득 올려져 있었고 사람과 물건의 추락을 방지하기 위한 망이 4층과 5층에 쳐져 있었다. 의외로 환기가 잘된다는 느낌이었다. 일반적으로 지붕이 있는 중정 아파트의 경우 환기가 잘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원일 아파트는 그런 느낌이 없었다. 어떻게 해결을 한 것일까? 그 의문은 옥상에 올라가 보고서야 풀렸다. 밖에서 본 조형적인 구조물은 바로 천창이었다. 그것도 콘크리트로 아주 육중하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이 천장은 중정을 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중정의 뚫린 부분 위를 덮고 있을 뿐이었다. 옆으로는 완전히 트여 있어서 공기가 자유롭게 흐를 수 있었다. 즉 원일 아파트의 중정은 세운상가(1968)나 낙원 빌딩(1969)처럼 닫힌 중정도, 동대문 아파트(1965)처럼 열린 중정도 아닌 반개방형 중정이었다. 환기와 채광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 위한 고민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옥상 위는 비교적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고 바람 쐬러 올라온 거주민들이 한두 명 보일 뿐이었다. 맞은편이 안산, 그 반대편은 인왕산이니 경치 또한 훌륭했다. 1970년 또한 한국 아파트 역사에서 중요한 해였다. 서로 이웃인 원일 아파트와 유진 상가를 비롯해, 남아현 아파트, 원효 아파트, 삼각아파트 등 대표적인 상가아파트가 이해에 지어졌다. 일반 아파트로는 비운의 와우 시민아파트, 그리고 시민 아파트의 부실을 만회하기 위해 지어진 시범 아파트의 선두주자 격인 회현 제2 시범아파트 등이 역시 1970년에 지어졌다. 이처럼 원일 아파트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탄생했다. 그것도 시장과의 결합이라는 주제를 충실하게 구현한, 대표적 주상복합 아파트의 하나였다. 하지만 그동안 상대적으로 덜 소개되었을 뿐 아니라 그 의미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적도 없었다. 아쉽게도 이런 실험적인 시도들은 이후 단지형 아파트가 대세를 이루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아파트는 ‘주거의 성’이 되었고 다른 기능들과의 유의미한 결합은 더이상 시도되지 않았다. 이렇게 우리는 기껏 만들어 놓았던 훌륭한 도시 주거의 유형 하나를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그런 유형의 한끝에 마켓 홀 같은 가능성이 있었다. ※귀중한 사진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신 MVRDV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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