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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라하에서 보낸 편지①/민병석(굄돌)

    대사관 운전기사 미식씨는 이곳 체코의 일류대학인 프라하 경제대학에서 학사학위와 석사학위를 마친 인테리이다.인물도 훤하고 영어와 러시아를 큰 불편없이 구사하는 32세의 기혼자이며 두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민주혁명 이후 인재부족난을 겪고 있는 이곳 사정으로 보면 그는 웬만한 주요직을 맡아 활동할만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볼수 있다.그러나 그는 한국대사관의 고용원직을 택했다.그 이유는 간단하다.해고의 위험이 별로 없고 괜찮은 액수의 월급을 미화로 받으며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장래설계에 도움이 되지않는 직업을 택했다는 나의 말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지금 체코 국민은 장래를 생각할 때가 아닙니다.우선 생존을 해야 장래도 있는 것이지요.1989년 혁명후 지금까지 우리가 생존하고 있다는것 자체가 기적입니다.정치가들은 서로 비난만 하고 있지 국민을 위한 기적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국민 스스로가 그 기적을 만들 수 밖에 없습니다.그래야만 다음 세대가 우리와 달리 떳떳한 생활을 할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말이 전혀 생소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바로 우리 부모들의 1950년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러했듯이 체코는 지금 희생적 세대를 거치면서 재기의 발판을 굳히고 있다.내 자식들에게 떳떳한 인생을 만들어주겠다는 부모의 결의로 2000년대에는 무서운 속도로 발전할 기반을 다지는 것이다.그때가 되면 미식씨는 외국대사관 운전기사가 아니라 사회의 중견으로 그리고 그의 아들들은 맹렬한 젊은 일꾼이 되어 체코를 또다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처럼 유럽의 6대 산업국으로 만들 것이다.용인줄 알았더니 지렁이더라는 우리에 대한 외국인들의 비아냥을 생각할때 혹시 일류대학을 나온 한국청년이 거꾸로 주한 체코대사관의 운전기사가 되어야하는 상황이 오는것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잠시 스친다.1백퍼센트 기우이겠지만….
  • 불 「고급 맞춤옷」 패션/사양길 걷는다

    ◎올 파리·로마 컬렉션 또 실패/70년대 이후 기성복에 밀려 프랑스 오트 쿠튀르(고급 맞춤옷)패션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는가. 지난 18일부터 21일까지 4일동안 올 가을 겨울 시즌의 상류사회 고급패션의 경향을 제안하기 위한 오트 쿠튀르 컬렉션이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됐다.위베르 드 지방시,에마뉴엘 웅가로등 18명의 세계적인 톱디자이너가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 이번 컬렉션은 예년보다 5일정도 기간이 짧아지고 호응도 역시 낮았다.1950년대 귀족이나 상류사회를 주고객층으로 누리던 번성기 이후의 오트 쿠튀르 패션의 내리막길을 되돌릴 수 없음을 보여준 발표회였다는 점에 세계 패션계는 주목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전부터 오랜 전통이 있는 파리 오트 쿠튀르 컬렉션은 파리의장협회에 등록된 디자이너에 한해 1년에 두번(1월과 7월)춘하·춘추복을 발표하는데 70년대 이후 기성복위주의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에 자리를 내주고 있는 형편이다. 이번 컬렉션이 끝난뒤 AFPAP등 외신들은 라피디·오스카드 라 렌타등 몇몇 디자이너들의 혁신적인 창작노력에도 불구,전반적인 불황과 패션의 대중화에 따라 오트 쿠튀르가 사양길의 끝점에 다다랐다고 경고했다. 파리컬렉션과 함께 세계 2대 오트 쿠튀르 패션컬렉션으로 이달초 열린 이탈리아 로마의 알타모다 발표회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영화와 패션이 손잡고 함께 전성기를 누렸던 지난 60년대의 전성기 분위기를 되살리는데 역부족이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디자이너 발렌티노가 금발의 세계적 톱 모델 클라우디아 쉬퍼를 2분 출연에 3만달러라는 거금을 주고 무대에 등장시켰음에도 이탈리아 하이패션계의 짙은 안개를 걷는데는 실패했다고 외신들은 전한다.
  • 반전 록 뮤지컬「헤어」/국내무대 첫선/31일까지 예술의전당서 공연

    ◎60년대 미 히피들의 삶과 저항의식 그려 60년대말 미국사회 히피들의 삶을 소재로한 반전 록뮤지컬 「헤어」가 국내무대에 첫선을 보이고 있다.31일까지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 하오 4시·7시30분 「자유와 평화,사랑」을 대주제로 내건 뮤지컬「헤어」는 65년 월남전 파병 반대세력으로 등장한 히피들의 자유로운 삶과 기존 규범에 대한 저항을 그린 작품.지난 80년 극단 자유가 국내 공연을 계획했으나 연습도중 계엄당국의 검열에 걸려 공연이 취소되기도 했던 「문제작」이다. 무대는 월남전이 한창이던 19 68년 미국 뉴욕시의 이스트 빌리지.2차세계대전이후의 암울했던 시대분위기는 65년 월남전 파병으로 이어지면서 기성체제에 대한 만만찮은 반발세력을 잉태케 한다.이른바 「히피」들이 바로 그들이다.이들이 등장함으로써 기존의 사회제도나 가치는 히피집단의 탈관념·탈기성의 철학과 마찰을 빚는다. 이 작품은 크라우드란 반항적 인물의 군입대 문제를 통해 신비주의적이고 즉물적인 히피의 내면세계를 비추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장발과 목걸이,굵은 벨트와 부츠로 단장한 히피족 주인공 크라우드가 결국 머리카락을 자르고 입영열차에 몸을 싣는 것으로 극은 끝나지만 자유와 평화를 절규하는 그의 목소리는 긴 여운을 남긴다. 사랑과 평화의 상징으로서의 꽃을 몸에 걸치고 스스로를 「꽃의 자녀들」(Flower Children) 혹은 「꽃의 세력」(Flower Power)이라 불렀던 히피집단의 「평화철학」과 마약의 힘에 의지해 진정한 자아를 찾으려 했던 히피족의 일탈적 삶 등 히피주의의 명과 암을 동시에 엿보게 한다. 극단 한량의 기획무대로 이정헌 김성훈 성기윤등 뮤지컬 전문배우 30여명이 출연한다.「I Got Life」(난 삶이 있어)·「아쿠아리스」등 모두 28편의 곡들이 2막에 걸쳐 흐른다.밴드를 맡은 이서종씨는 『뮤지컬의 핵심은 음악』이라고 전제,『「헤어」가 60년대말 록큰롤이 한창 유행일때 만들어진 작품인만큼 당시의 록사운드를 오늘의 감각에 맞게 옮기는데 역점을 뒀다』고 말했다.이 극에서 다만 아쉬운 대목은 원작이 갖고있는 충격적인 요소들이 대폭 제거돼 전체적으로 극의 성격과 색깔이흐려졌으며 메시지 전달의 힘도 떨어졌다는 점이다.
  • IMF·세은/창립 반세기… 두 국제기구의 발자취

    ◎세계경제 조정역 50년/각국 경제정책 조언·감시역 수행/IMF/3천억불 차관… 개도국 발전 기여/세은 1944년 브레튼 우즈협정으로 탄생된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은 과거 50년동안 세계경제의 추이에 따라 변화하면서 성장해왔다. 지난 71년 만들어진 환율제도의 붕괴등 역경을 이겨낸 IMF는 세계무대에서의 괄목할만한 비중을 가진 기구로서의 지위를 거듭 확인하며 22일 50주년을 맞았다.경제와 시장,통화의 국제화는 개발도상국이든 선진공업국이든 관계없이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 대해 조언자와 감시자로서 IMF의 역할을 크게 확대시켜 놓은 것이다. 그러나 선진공업국들은 IMF의 대주주이면서도 IMF의 충고에 가장 신경을 쓰지않는 그룹이다.개발도상국이나 변화를 겪고 있는 나라들과는 달리 선진공업국들은 IMF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업국들은 IMF에 세계의 경제및 통화정책은 물론이고 환율감시 임무까지 부여하고 있다.지난 87년이후 장 미셸 캉드쉬 IMF총재는 서방 선진공업 7개국(G­7) 재무장관 회담에 참석하고 있다. 달러화를 안정시키기 위한 지난 85년의 플라자 협정과 87년의 루브르협정이후에는 G­7국가들도 경제정책에서 최소한의 협력관계라도 유지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IMF의 장래에 대해 낙관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캉드쉬총재는 최근 세계경제성장에 상당부분 기여하고 있는 개발도상국들이 국제경제를 이끌어나가는데 있어 더 많은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고 피력했다. 캉드쉬총재는 『이제 고객이 아니라 협력자가 된 개발도상국들을 포함시켜 정책결정과정을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선진공업국과 개발도상국등 24개국으로 구성된 IMF의 잠정위원회는 재가동될 경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IMF 검사를 통과해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 일부 국가들의 특수한 상황에 맞는 보다 융통성 있는 재정적 수단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IMF는 사고를 발전시키고 있고 공산권국가들의 몰락으로 자유시장경제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이 없어짐으로써 얻는 유리한 점도 적지 않다. 2차세계대전으로 황폐화된 세계를 재건하는데 재정지원을 하기 위해 브레튼 우즈회의에서 설립된 세계은행도 세계정치의 엄청난 변화로 상당한 혜택을 입고 있다고 할 수 있다. 50년동안 3천억달러의 차관을 제공해온 세계은행은 가난을 몰아내고 유아사망률을 줄이는데 크게 기여함으로써 개발도상국들의 평균수명을 높여 놓았다.일본이나 스페인과 같이 오늘날 번영을 누리는 국가들도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세계은행의 단골손님들이었다. 그러나 세계은행은 1만명이 넘는 직원등 조직이 너무 비대해지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또 환경문제에 소홀히 하면서 수상한 프로젝트에 재정지원을 하고 있다는 비판도 듣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 91년이후 세계은행은 조직의 비대화를 방지하고 고객들의 변화하는 욕구에 부응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하고 있다고 루이스 프레스턴총재는 말했다. 세계은행은 또 건강과 교육분야의 인적자원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사회간접자본시설 개발은 민간부문으로 넘기는 방안도 마련하고 있다. IMF와 마찬가지로 세계은행은 국제경제에서 그동안 다져온 독보적인 지위를 더욱 공고히 다지기 위해서는 투명성과 효율성을 높이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것은 또 세계은행의 돈줄을 쥐고 있는 주주들의 주문이기도 하다.
  • 세계 에스페란토대회 23일 개막

    ◎한국에스페란토협 주관… 「한국방문의 해」 기념/세계 71개국서 2천여명 참석/국내 첫 에스페란토연극 공연 에스페란티스트란 세계어인 에스페란토를 사용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한다. 에스페란티스트들의 국제대회인 제79차 세계에스페란토대회가 23일부터 30일까지 서울 쉐라톤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다. 에스페란토대회는 지난 1905년부터 두차례의 세계대전 동안을 제외하고 해마다 열려 온 행사.에스페란티스트 사이에 우의를 다지고 에스페란토의 발전을 점검하는 자리로 서울대회는 1965년 일본과 1986년 중국에 이어 아시아에서는 세번째다. 사단법인 한국에스페란토협회가 주관하는 이번 대회는 국내에서 3백여명을 포함해 전세계 70개 나라에서 모두 1천8백명의 에스페란티스트가 참여하는 대규모 행사로 치러질 예정.에스페란토 단일 언어로 통역없이 진행된다. 서울 대회는 「1994년 한국 방문의 해」행사의 하나이기도 하다.민족간의 이해를 증진시키고 국제민간교류를 확대한다는 에스페란토대회 이념을 구현하는 것은 물론 우리의 역사와 문화전통,경제발전을 세계인들에게 직접 체험시키는 좋은 기회다. 이번 대회에서는 특히 국내에서는 최초로 에스페란토 연극이 공연될 예정이어서 눈길을 끈다.에스페란토 연극은 1896년 처음으로 상연됐다고 한다.에스페란토대회에서는 1905년 프랑스에서 열린 제1회 때 몰리에르의 「마음에 없는 결혼」이 무대에 올려진 이래 대회 때 마다 공연되고 있다.서울대회에서는 유고의 자그레브 연극학교 출신인 여배우 비다 제르만이 호세 아우구스틴의 「꿈 속에서」라는 1인극을 29일 공연한다. 에스페란토는 폴란드의 안과의사 자멘호프박사(1859∼1917)가 1887년 창안해 반포한 인공어로 유럽에서 널리 쓰이는 말들을 바탕으로 했다. 현재 전세계에서 에스페란토를 쓰는 사람은 1백10개 나라에서 3천여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한편 이 대회에 이어 제50차 국제에스페란토청년대회가 31일부터 8월6일까지 단국대 천안캠퍼스에서 열리게 된다.자세한 문의는 779­7216 세계에스페란토대회 한국조직위원회.
  • “북한붕괴 사실상 시작됐다”/아르바토프(특별인터뷰)

    ◎김정일 권력 잡지만 결국 몰락할것/주민들 외부와 교감땐 변화 불가피 □아르바토프 약력 ­1923년 우크라이나 공화국서 출생. ­소련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 참전. ­모스크바국제관계연구소서 역사학 박사 학위 받음. ­고르바초프 외교참모 역임. ­소련과학원 정회원. 김일성 사후 북한의 장래는 어찌 될 것인가.독재자의 죽음 뒤에 그 체제의 몰락이 오게 돼있는 것은 스탈린 등의 예에서 보듯 필연적이나 김정일의 권력 승계까지는 일단 순조롭게 이루어지리라는 것이 러시아의 게오르기 아르바토프 미국·캐나다연구소장의 견해다.북한의 내부사정에 정통한 그를 이기동 모스크바 특파원이 인터뷰했다. ­김일성 사후 북한의 변화방향에 대해 여러가지 가설들이 제기되고 있다.변화가 일어난다면 그 폭과 속도는 과연 어느 정도일지.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동구의 변혁과정을 북한에 곧바로 대입할 수는 없다.극단적인 예로 루마니아의 경우를 비교해 보자.그곳에서는 독재자 차우셰스쿠에 반대하는 큰물결이 선행됐다.그것은 반혁명에 가까운 것이었다.그러나 김일성은 단순히 노령으로 죽었다.그리고 오랫동안 자신의 죽음을 준비해 왔다.오래 전부터 자신의 아들에게 권력이양 준비를 차근차근 해두었다.물론 정부내에서 몇가지 갈등이 있을 것이지만 적어도 최고권력은 순조롭게 김정일에게 넘어갈 것이다. ­김일성이 죽은지 수일간의 평양 분위기를 보면 주민들이 진정으로 이 지도자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이런 것을 보더라도 김정일이 자기 부친의 정책을 급격히 바꾸려들지는 못할 것같은데. ▲평양의 애도분위기는 솔직히 묘한 데가 있다.설사 김정일의 반대세력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같은 분위기에서는 다른 생각을 하기 힘들 것이다.확실히 북한은 독특한 나라이다.여기에는 아시아 국가들이 지닌 독특한 전통도 분명 작용한다고 생각한다.그러나 한가지 명심해야할 것이 있다.체제에는 문화적,전통적 관습을 뛰어넘는 그 자체의 보편적 논리가 있다는 것이다.예를 들어 모택동 사후 중국을 보자.당시 서방 전문가들 사이에선 유교적인 가부장 전통과 모택동이 생전에 누린 독특한 카리스마 때문에 그의 사후 중국에서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는 힘들 것이라는 분석이 우세했다.그러나 모의 유지를 이어받은 소위 4인방의 운명이 어떻게 됐나.그후 지금까지 계속돼온 등소평의 개혁정책을 보라. ­북한에서도 변화는 필연적으로 일어난다는 이야기인가. ▲이런 체제의 논리는 독재국가일수록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전체주의 체제의 국가경영방식은 역피라미드를 연상하면 된다.제일 아래쪽에 최고지도자 1인을 기반으로 하고 그가 내리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모든 국가조직이 그위에 존재한다.제일 아래쪽 최고지도자가 사라지면 그위의 모든 조직은 필연적으로 무너지게 돼있다.알렉산더 대왕 이후 마케도니아왕조의 몰락,가까이는 1956년 헝가리에서 최고지도자 사후 몰려온 변혁의 소용돌이,체코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에서도 스탈린이라는 독재자가 죽은 뒤부터 사실상 몰락의 과정이 시작됐다. ­스탈린체제의 소련과 김일성의 북한체제의 비교는 북한의 장래를 점쳐보는데 유용한 잣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스탈린 사후 모스크바의 애도분위기는 지금 평양보다 더 애절했다.정치범 수용소(굴락)의 수감자들이나 이 독재자의 죽음을 기뻐했지 일반국민들은 그에게 마지막 조의를 표하기 위해 시신이 안치된 곳으로 수백만명이 몰려들었다. 경찰과 군대가 동원돼 질서를 유지하려 했지만 결국 수백명의 압사자까지 생겼었다.그러나 그가 죽은 뒤 불과 2년이 지나면서부터 언론에 그에 대한 비판기사가 실리기 시작했다.그리고 3년뒤 제20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역사적인 스탈린 비판연설을 했다.이 당대회에서 스탈린은 거의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김일성은 거의 절대적인 전체주의 체제를 북한에 세웠다.그는 자기의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정적은 물론 조금이라도 이견을 말하는 사람은 가리지 않고 제거했다.이를 위해 심지어 동족전쟁까지 감행했다.국민들은 외부세계와 완전 격리됐다.북한의 변화는 그곳 주민들이 외부세계와의 교감을 시작하고 국민들이 보다 자유롭게 사고하기를 배우는 순간 체제발전의 논리가 작동을 시작할 것이다. ­북한은 김일성 장례후 미국과의 고위급회담을 재개하겠다고 했다.이를 김정일을 중심으로 한 새 지도부가 외부세계와의 관계발전에 주도적으로 임할 것이라는 징조로 풀이할 수 있는지. ▲만약 새 지도층 내부에 변화를 주장하는 세력이 있어 권력내부에 갈등을 유발시키고 이들의 목소리가 힘을 얻는다면 자연적인 체제발전 과정이 촉진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새지도부는 단기적인 과제로는 경제개선,고립탈피,핵문제의 종식,남한과 정상회담 개최등에 착수할 수 있을 것이다. ­김일성 사후 러시아는 북한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 ▲솔직히 말하면 러시아는 새북한의 변화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정책프로그램도 갖지 않고 있다. 경제난,군사개혁등 산적한 국내문제 때문에 한반도문제에 깊이 신경쓸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한반도 문제와 관련한 러시아 정부의 최근 입장은 한반도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기 위한 국제회의를 열자는 것이다.하지만 우리가 지금도 이 주장을 고집하는지 북한이 이를 받아들이는지는 확실치 않다. ­한때피살설,정변설등 김일성의 죽음과 관련,여러 소문들이 나돌았는데. ▲그의 죽음과 관련된 의혹들은 잘못된 정보라고 본다.그는 오랫동안 심장질환을 앓았고 누구든 그 정도의 고령이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 아닌가. ­남북정상회담등 남한과의 관계개선도 북·미회담과 같은 맥락에서 계속 추진될 것으로 보는지. ▲권력내부에 갈등만 없다면 남한과의 대화는 조만간 재개될 것이다.새 지도부는 전세계를 상대로 남한과 대화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과시할 필요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역사적으로 볼때 새지도자는 국민들에게도 새것,변화,과거와는 다른 희망을 심어주고 싶은 의욕을 갖는 게 순리이다.그것이 대외정책에도 나타날 수 있다. ­군부의 역할이 변수가 될 것으로는 보지 않는지. ▲스탈린 사후 군은 당·KGB·군지도부에 절대복종을 맹세했다.북한의 군도 지금 똑같은 상황이다.특히 김일성은 군대를 거의 완벽하게 통제했다.돌발사고가 없는한 군내부에서 반대세력이 표면화하기는 힘들 것이다. ­새 북한지도부가 핵게임을 계속할 것으로 보는지. ▲그러기는 힘들 것이다.다른 할일이 많기 때문이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이 죽고 권좌에 오른지 몇개월 뒤 곧바로 주민복지를 개선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사업을 펼쳤다.전국에 값싼 아파트를 건설했고 국민연금도 6배로 올려주었다.무언가 새것,좋은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물론 김정일이 자기 아버지가 고수해온 노선을 하루아침에 비난하거나 뜯어고치려고 나서기는 힘들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독제체제의 발전논리로 본다면 새정책은 불가피하다.더구나 북한은 경제난이 극도에 달했고 그로 인한 사회적 불만이 팽배해 있다.북한도 결국은 예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 “평양주민 광신적애도”시민들 충격/“통일돼도 동질성회복 애먹을것”

    ◎집단통곡·실신에 “저럴수가”/“유일체제가 남긴 집단 히스테리현상”/전문가 『저럴수가….아무리 오랫동안 세뇌되고 신격화되었다지만….』 북한 김일성 사망후 평양 만수대언덕의 김일성동상앞에 모여든 평양시민들이 무릎을 꿇고 통곡하고 심지어 졸도까지 하는 모습이 방송과 신문을 통해 보도되자 국민들은 놀라움에 말문을 제대로 열지 못했다. 특히 시민들은 5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이와 노인들까지 북한의 곳곳에 세워진 동상을 찾아 울부짖는 광경에 소름이 끼칠정도로 섬뜩함을 느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시민들은 『북한동포가 다른 민족같다』『통일이 이룩돼도 같이 살수 있겠느냐』『사이비 종파의 광신도같은 착각마저 든다』라며 남북 동질성 회복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겠느냐며 입을 모았다. 이와함께 심리학자나 정신과의사등 전문가들은 이같은 북한 주민들의 현상을 정신적 지주로 삼고 49년 동안 숭배해 왔던 김일성의 급사로 일어나는 허탈과 절망,충격등 정신적 공동화에서 나오는 이른바 「집단히스테리현상」이라고 밝혔다. 서울영등포 중앙시장에 장을 보러 나온 김연희주부(36·영등포구 당산동7)는 『아직까지도 북한 주민들이 속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모른채 오히려 김일성이 혁명을 하느라 고생만 하다 죽었다고 믿으며 죽음을 애통해하는 것을 보니 마치 다른 민족같은 생각이 든다』며 상인들과 TV에 비친 북한 주민들에 관해 얘기 꽃을 피웠다. 이화여대 조경혜양(서양화과 4년·23)은 『폐쇄된 사회에서 어렸을때부터 김일성을 숭배해 온 북한주민들의 광신적인 오열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소름이 끼친다』면서 『문제는 앞으로 남북통일에 대비해 우리가 어떻게 이들을 감싸안고 이해할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갖춰나가느냐 하는것』이라고 말했다. 이주혜양(17·서울 Y여고 3년)은 『어린이들까지 거리에 나와 울부짖는 모습을 보니 불쌍하고 측은한 생각마저 든다』며 『통일후 어떻게 저런 동포들과 함께 살수 있을까 걱정스럽다』고 우려했다. 직장에서 점심시간을 이용,북한의 추모행렬에 관해 이야기를 하던 삼성건설 영업기획팀 양세균대리(34)는 『그들의 행동이 폐쇄된 북한의 현실을 리얼하게 나타내 주고있다』며 『오열하며 기절하는 그들의 모습은 바로 통일의 문제가 간단치 않음을 역설하고 있다』고 혀를 찼다. 90년 구소련에서 유학중 귀순한 남명철씨(30)는 『북한 주민들이 거리로 나와 통곡하고 울부짖는 것은 전혀 이상할게 없다』면서 『그들은 우상화와 신격화 정책에 따라 치밀한 세뇌교육을 반복적으로 받아와 김일성의 사망은 곧 「신의 죽음」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심리학과 차재호교수(60)는 『전체주의체제에 길들여진 북한주민들은 김일성은 죽었어도 체제가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에 개인숭배의 연장선상에서 나오는 행동』이라면서 『그 동안 체제속에서 세뇌당해온 것을 고려하면 무의식적인 행동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분석했다. 서울대 의대 조두영교수(정신의학과)는 『「위대한 수령」「친애하는 아버지」등 신처럼 군림한 김일성의 불멸에 대한 믿음이 깨져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일본의 2차세계대전 패망 당시 일본에서도 이같은 현상이 나타났으며 작게는 사이비종교의 광신도들 사이에 일어나는 집단 자살도 같은 경우』라고 말했다.
  • 장기 집권(외언내언)

    금세기들어 가장 오랜 통치권력을 행사하던 김일성주석이 사망했다.지난 6월 평양주석궁에서 카터 전미국대통령에게 앞으로 10년은 더 통치할 것이라했다는 김일성주석의 갑작스런 죽음은 권력의 무상함을 새삼 실감케 한다. 37세의 나이로 1945년 10월 평양의 군중대회에 첫 모습을 드러낸 그는 48년 9월 제1기내각수상에 오른뒤 무려 46년동안 절대적인 통치권을 행사해왔다.2차세계대전이후 등장한 세계의 지도자중 가장 오랜 집권기간이다.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이승만초대대통령을 시작으로 7명의 대통령이 나왔고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에 따르면 강산도 네다섯번 변한 셈이다.오늘의 시사적 의미로는 단연 기내스 북에서 쉽게 지울 수 없는 진기록이다. 지난 78년 미벤텀사가 최초로 펴낸 세계의 인명연감에서 김일성주석은 이미 장기집권독재자 10인의 리스트중 4위를 차지했으니 16년이 지난 94년까지의 통치기간이면 가히 독보적 기록임에 틀림이 없다.옛 알바니아의 엔베르 호사 공산당제1서기의 41년 통치가 두번째고,41년부터 79년까지 38년간 이란을 지배해온 팔레비국왕이 3위,그리고 39년부터 75년까지 36년간 스페인을 통치한 프랑코총통이 4위였다.현대사에 손 꼽히던 독재자들은 80년대 초반을 고비로 축출되거나 병사해 종국을 맞았다.현재 살아있는 최장기 집권자는 지난 59년부터 35년간 군림해 오고 있는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옛 소련의 스탈린은 31년간,중국의 모택동은 41년에 주석에 올라 76년9월 사망하기 까지 26년간 대륙을 지배했다. 장기집권 독재자의 말로가 대부분 비참했다는게 역사상 기록의 공통점이다.루마니아의 챠우세스쿠대통령이 대표적 사례이고 크렘린의 독재자 스탈린은 사후 동족으로부터 혹독한 평가절하와 비판을 받았다.
  • 포용하되 말려들지 말아야/정희경(남북정상회담에 바란단)

    애당초 한반도의 분단이 제2차세계대전의 끝무렵에 맞물렸던 국제정치의 힘겨루기의 소산이었고,뒤이은 한민족의 분열과 적개심,그로해서 연유한 무서운 불신등은 두루 정치세계가 빚어낸 것이었다.따라서 한반도의 국토통일과 한민족의 화해및 융합은 결자해지의 원칙에 따라 결국 정치적 영도자의 대좌를 통한 화해없이는 불가능하다.그런 점에서 오는 25일로 예정된 남북정상회담은 지난 45년이후에 있었던 모든 남북회담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중대한 사건이 아닐수 없다.이번 정상회담을 위해 지난날의 모든 남북 대화들이 있었다고 보아도 좋으리라.「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하여… 먹구름은 그렇게 울었나 보다」란 미당의 시구가 어울릴 만한 느낌을 지금 강하게 느끼고 있다. 71년8월12일 최두선총재가 남북적십자회담의 개최를 제의했을 때의 그 신선한 감동이 일렁이던 우리의 거기에선 남북간의 적대감을 인도주의로 풀어나가고자 하는 희구로 분출되었다.그러나 그 기대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그 무위함을 드러내기 시작했었다.나는 남북적십자본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판문점에서 열렸던 25차에 걸친 예비회담에 참여하면서 정치적문제의 해결이 선행되지 않는 회담이 얼마나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기조차 어렵다는 것을 절감할 수 있었다.그리고 어렵사리 시작된 본회담으로 평양과 서울을 오가며 열렸던 남북적십자대표의 대좌도 문제의 변죽만 울렸을 뿐 결국 문제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음은 정치적 접근이 두절됐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남북대화에 대한 나의 경험으로 보아 이번 남북정상회담은 그 실현의 경위를 따질것 없이 남북 문제해결에의 첩경일 뿐만 아니라 남북간에 그동안 꼬이고 꼬인 모든 문제의 실타래를 푸는 첫단계로 받아들여진다. 북한의 정권은 두말할 나위없이 지난 45년이후 김일성일인독재에다 이제 김정일로 이어지는 세습정권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자유민주주의의 원칙에서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정치적 취약성을 가지고 있지만,그것은 또한 무서운 정치력으로 응집력높은 정권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그들이 남북대화에 내세우는 인물만해도 지난 25년간변함이 없다.한마디로 대부분이 구면이고 인도주의적 문제를 다루는 적십자회담이나 고위급정치회담에서나 필요에 따라 역할분배만 달라질뿐 한결같이 그 얼굴이 그 얼굴들이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측은 변화무쌍하다.정권이 그러했고 남북대화참여인사 또한 그러해왔다.거기에도 정권의 정통성시비가 끊이지 않아온 우리나라 정치사속에선 과거의 역사란 흔히 「정권유지적 차원에서」라는 라벨이 붙으면서 거부되고 단절되고 「차별화」되어온 것이 현실이다.따라서 남북의 통일방안도 정권따라 확연히 다르게 변화해왔으며 남북대화에 참여하는 인물도 부지기수로 「물갈이」되어온게 사실이다.이같은 남북의 차이가 과연 남북정상회담에서 어떤 동인으로 작용할 것인가 걱정되지 않을수 없다. 꼭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역사의 단절이나 거부는 결코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괴롭고 부끄럽고 힘겨웠던 역사도 역사임에는 틀림이 없다.그런 역사의 험산준령을 넘으며 와신상담의 인고를 견디며 조금씩 보다 나은 방향으로 나가는데에 자유민주주의적 역사의식의매력이 있는 것이다.더구나 남북대화라는 엄청난 중임을 맡아 보았던 사람으로서 그 진지했던 민족에의 책임감,하늘의 도우심을 간구했던 그많은 헌신의 시간들이 정권유지차원의 도구등으로 표현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역사해석의 결과라고 보며 그런 해석은 엄존하고 있다. 결자해지의 마당에 대좌하는 우리대통령은 45년 이후 우리역사의 모든 것을 껴안는 큰틀의 정치지도자로서의 풍모를 유감없이 보여줄 것을 희구한다.우리사회에 엄존하고 있는 보수와 진보의 연장선상에 북한일인독재정권에의 위험한 동조세력의 끈질긴 준동도 대통령께서는 간과하지 않는 다원화사회의 국가원수로서의 순발력있는 회담의 이니시에이터가 될것을 믿고 그렇게 염원해 본다.
  • 이스탄불/보스포루스 해협(아랍서 지중해까지:7)

    ◎동·서양 분기점… 이질문화 한품속에/이스탄불시를 양분… 기독·이슬람교 격전의 역사 간직 보스포루스. 탁한 암록색 물빛의 길이 30㎞,폭 0.6∼3㎞의 좁은 해협,그것은 바다라기보다 강에 가깝다.어원을 보더라도 Bous(ox:황소) Poros(ford:여울),황소여울이다. 제우스와 여사제 이오(IO)는 연인사이다.아내 헤라의 집요한 추적을 비켜나보려고 제우스는 이오를 황소로 변하게 한다.헤라는 그 사실까지도 눈치채고 등에를 이용하여 황소로 변한 이오를 괴롭힌다.황소는 괴로움에 못이겨 근처의 여울 속으로 뛰어드는데…이오가 몸을 던진 물이 바로 보스포루스다. 이 해협은 터키 최대의 도시인 이스탄불을 동양과 서양으로 갈라놓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유럽을 분할하는 분기점이기도 하다. 한 도시가 동양과 서양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동양과 서양이라는 대칭적 이질문화를 하나의 품속에 끌어안고 있는 이스탄불은 어떤 도시일까? 이스탄불에 도착하자마자 떠오르는 궁금증이 그것이었다.「내가 지금 아시아에 있는가,유럽에 있는가?」 지도를 입수함으로써 그 궁금증은 싱겁게 풀리는가 했는데…사실은 그게아니었다. ○부를 나르는 물길 보스포루스 서안 돌출부에 그리스의 메가리아인들이 비잔티움 도시를 세운 것은 BC660년이었다.그들은 집터를 정하기 전에 점술가에게 물어보았다.「눈먼 사람들이 사는 땅의 반대편에」라는 대답을 듣고,그들은 보스포루스 서안 일대를 탐사하던중,경관이 빼어난데도 불구하고 거주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아름다운 터를 발견했다.그때 해협 건너편 땅엔 마케도니아인들이 이미 부락을 이루어 살고 있었으므로,메가리아인들은 이렇게 풍광이 수려한 땅을 몰라본 저들이 바로 「눈먼 사람들」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따라서 자신들이 발견한 곳이 바로 점술가가 점지한 땅이라고 확신하며,그들은 도시를 세웠다. 그것이 바로 해협을 사이에 두고 동양과 서양이 나누어지게 된 시초였다. 그후 비잔티움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에게 점령되었다가 알렉산더대왕이 페르시아를 패퇴시켜(BC334)아나톨리아를 장악함으로써 다시 그리스의 영토로 귀속되었다.대왕의 사후,맹주들에 의해 통치되던 비잔티움은 BC278년 갈라티아인들의 공격에 무릎을 꿇었고,그뒤 마케도니아인들을 쳐부순 로마제국의 출현으로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황제 셉티무스는 비잔틴문화를 재건한다는 기치를 내세우고 도시를 둘러싼 성벽을 확장하고,소피아성당 주변과 도로를 정비했다.뒤이어 왕위를 계승한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고 새 수도의 이름을 콘스탄티노플ㅈ라 했다.황제는 트로이의 영화를 재현한다는 포부를 세우고 성벽을 서쪽으로 2.8㎞나 확장하고,자신이 그리스도교인임에도 이교도들의 사원을 보수하는 한편 소피아 성당을 대대적으로 넓혔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동양과 서양이 격돌한 것은 14세기 중엽이었다.발칸에까지 진출하여 위세를 떨치던 오스만튀르크제국은 메흐메트 2세가 즉위한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이곳에 「이슬람교도가 많은 도시」라는 뜻의 이스탄불이란 새 이름을 붙였다. 그후 이스탄불은 오스만제국의 수도가 되어 이슬람문화권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19세기에 들어서 오스만제국이 쇠퇴함에 따라 이스탄불은 또다시 발칸을 둘러싼 열강들의 분쟁지가 되었다.1차 세계대전때 독일편이었던 터키는 패전후 1918년까지 연합군의 통제를 받던중,케말 아타튀르크의 혁명으로 새 공화국이 탄생되기에 이르렀다. 중앙아시아의 회교국가로서 자주권을 선언한 뒤에도 터키는 유럽공동체의 항구적인 회원이 되기 위해 노력해왔다.한국전쟁중에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고,1952년에는 그들의 막강한 군사력 때문에 NATO의 회원국으로 영입되었다.냉전이 종식되자 터키는 걸프전때 연합전선을 펼쳤던 NATO로부터 차갑게 되면당했다. 보스포루스는 과거에도,오늘날에도 이스탄불과 터키에게 막대한 부를 실어다주는 푸른 물길이면서,동시에 그들의 역사앞에 항시 하나의 질문으로 존재해왔다. 「우리는 아시아에 속하는가,유럽에 속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보스포루스를 통과하는 여행자인 나에게까지도 역사와 무관한,정신의 뿌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자 확인으로,이스탄불을 떠날 때까지 마음속에서 맴돌았다.엘레신 호텔. 4월20일 이스탄불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열흘 남짓 뜨거운 사막에서 지내는 동안 증발되었던 마음의 물기가 일시에 되살아났다.여로의 쓸쓸함,애달픔.몸이 으스스 떨리면서도 비릿한 비냄새,축축한 바람이 싫지 않았다. 차가 마르마라 해안에 있는 예쉴쿄이 국제공항을 벗어나 유럽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동안,나는 마음속으로 주머니를 불룩하게 만든 터키의 리라화를 가늠해보고 있었다.1달러에 2만9천리라,1백50달러에 4백35만리라.방금 떠나온 요르단 디나르화에 비해 끗수가 네자리나 더 많아진 것이다. ­이걸로 혹시 보스포루스 해협이 굽어보이는 언덕 어디쯤 오스만 시대에 지은 작은 집 한채 정도 살수 있지 않을까. ○구로동 골목 연상 그러나 차창 밖으로 휙휙 스쳐가는 노변풍경은 나를 황당한 공상에서 깨어나게 했다.겉만 말끔했지 상자곽처럼 보이는 저층의 아파트들,그 사이사이에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석탄더미,고철더미,그리고 산비탈에 빽빽이 들어찬 우중충한 가건물들.그것은 비잔티움이나 오스만이 연상시키는 고풍스런 우아함과는 거리가 아주 먼,어딘지…. 『여기는 서울의 구로동하고 흡사하군요』. 익살이었지만 S씨의 그 말은 활기찬 고도 이스탄불의 속얼굴,오늘의 터키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함축하고 있었다. 회교국들 중에서 최초의 여자 수상이 된 탄슈 칠레르는 취임과 동시에 터키국민들에게 호소했다. 『우리는 더이상 걷지 않을 것입니다.우리는 이제부터 뛰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이끄는 정부는 국내외로부터 밀려오는 거센 도전에 시달리고 있었다.인플레,일자리를 찾아 이스탄불·앙카라·이즈미르등 대도시로 밀려드는 유민들,구소련의 붕괴이후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이웃 회교국들의 무력증강,10년이 넘도록 계속되어온 쿠르드족 분리주의자들과 게릴라전 등등. 아마도 우리는 3박4일의 짧은 일정에 쫓기는 여행자들로서는 이스탄불의 「구로동」을 이런 식으로 스쳐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터키인들이 게체콘두(밤에 지어졌다는 뜻.오스만법에는 밤에 짓기 시작해서 동틀때 완성된 집은 아무도 부술수 없다고도 함)라고 하는 그 집들은 이스탄불 중심가에서 불과 45분거리밖에 안되지만 관광객들이 흔히 지나다니는 길목으로부터 그 얼마나 먼 동네인가. 어느새 창변 풍경이 바뀌고 있었다.안개 자욱한 보스포루스 바다,갈매기떼의 환영을 받으며 항구로 입항하는 크고 작은 선박들,그 너머로 붉은 지붕에 흰 벽의 그리스풍 건물들,백양나무숲,돔과 미나레트들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스카이라인이 펼쳐졌다.가슴이 뛰기 시작했다.사해의 짜디짠 물맛이 이제는 꿈이 된 반면,꿈이었던 이스탄불이 현실이 된 것이다. 호텔 엘레신은 신시가 베이올루의 중심지인 탁심 뒷거리에 있었다.이웃에 있는 마르마라나 셰라톤 호텔에 비하면 작고 보잘것없는 시설을 갖춘 곳이었다. 숙박계를 쓰고 604호의 키를 받아든 순간이었다.이스탄불이라는 미지를 해독할 수 있는 최초의 사인.저울의 추처럼 생긴 키를 받아듦으로써 나는 마음을 스쳐간 환영의 무게를 손에 느꼈다.머나먼 장안에서 비단을 싣고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타슈켄트,카라쿰,자그로스산맥을 넘어서 바그다드,그리고 마침내 이스탄불에 당도한 옛대상.동양과 서양,기독교문명권과 이슬람문명권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격돌의 현장.이곳의 이니셜은 저울과 추 일법했다. ○이니셜 “저울과 추” 짐을 방으로 옮겨주려고 로비에 나타난 포터.옛 술탄의 왕자같이 수려한 용모.아마도 그는 전생에서 너무나 놀고 지냈기 때문에 차생에서 남의 무거운 짐을 옮겨주는 일을 하게 되지나 않았는지? 원도어식의 자그마한 승강기가 음악을 싣고 내려왔다.허밍으로 멜로디를 쫓고 있는 사이에 승강기가 멈추었다.문을 열고 복도로 나오자,우리는 복도끝의 전면 거울속에 그림자처럼 담겨 있었다.갑자기 시간이 겹으로 느껴졌다.그리고 내 앞에 나타난 미지의 문.열려라,참깨! 짙은 청색 시트로 덮여있는 가지런한 트윈 침대,하얀 반투명 커튼,머리맡에 놓인 하얀 갓전등…창가로 가서 커튼을 열어본다.오래된 건물의 옥상에서 하얀 비둘기 한마리가 빗속을 가로질러 어디론지 날아간다.맞은편 건물의 지붕밑 방에는 오래전에 사람의 인적이 끊긴듯 책상과 의자 하나가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채 놓여있다.아니다.다시 보니 머리 까만 계집아이가 혼자서 마룻바닥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공깃돌 놀이를 하고있다.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다. 꿈을 꾸는 것일까.분명히 몸은 여기 있는데,의식은 전생을 살고 있는 것 같다. 『너 화장실에 좀 들어가봐.비눗곽이 참 예쁘다』 등 뒤에서 날아온 K의 목소리에,맞은편 건물의 빈 방에서 계집아이가 얼굴을 돌리고 이쪽을 바라본다.
  • 스탈린,인구발표 조작/조사문서 발견… 3백여만명 누락

    ◎공포정치로 인한 희생자로 추정 구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지난 39년 실시한 인구조사 자료가 최근 단행본으로 출판됐다고 러시아 일간지인 로시스키예 베스티가 25일 보도했다. 이 자료는 엄청난 인명피해 등을 감춘 소련 초기역사의 공백을 밝혀주고 스탈린이 행한 숱한 거짓말을 폭로해줄 것으로 보여 관심을 모으고 있다. 소련은 지난 26년 총인구가 1천4백70만명이라는 통계를 발표한 것을 마지막으로 59년까지 완전한 인구통계를 발표치 않아 학자들은 스탈린의 공포정치와 제2차 세계대전이 인구에 끼친 영향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겪어왔다. 20여권에 이르는 39년도의 인구 조사 통계 보고서는 정부 문서 보관소에 있었으며 겉표지에는 「극비,공개불허」라는 스탬프가 찍혀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로시스키에 베스티는 러시아의 나우카 프레스가 문제의 보고서에서 통계수치를 발췌,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산하 역사연구소 전문가들의 주석을 붙여 책으로 펴냈다고 밝혔다. 26년도 인구조사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39년 사이에 많은주민들이 피의 숙청과 폭압적인 집단화·산업화 정책으로 희생됐다.희생자 추정치는 최저 6백만명에서 최대는 6천만명으로 들쭉날쭉하다. 스탈린의 공포정치가 극에 달했던 37년에 인구조사가 있었지만 발표를 금지시키다 39년도에 2차 인구조사를 실시했다.그러나 그는 이것도 마음에 안들었는지 극히 단편적인 자료만을 발표토록 했다. 스탈린은 39년 총인구가 1억7천50만명이라고 공언했으나 이번 자료에는 당시의 실제 총인구가 1억6천7백60만명인 것으로 돼 있다. 기사를 쓴 알렉산드르 구바노프는 『3백만명 가까운 사망자가 살아있는 것으로 발표된 셈』이라고 말했다. 또한가지 밝혀진 사실은 스탈린이 30년대 소련국민들의 문자해독률을 과장했다는 것.당시 관리들마저 교육수준이 형편없었음이 드러났다.판검사들 41%가 중학교 수준의 학력에도 마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 전쟁 삽화/박영(굄돌)

    북한의 IAEA탈퇴소식이 전해지자 생필품 사재기로 백화점은 잠시 호황을 누렸다고 한다.시청에서도 시민들에게 생활용품의 목록을 발표했다. 한 친구가 말한다.『이제 전쟁이라면 3차 세계대전밖에 더 남았어? 그리되면 너죽고 나 죽고 다 죽는데 무슨 미련이있어?』라고.그러자 그 옆의 한 친구가 받아친다.『그렇다고는 해도 핵전쟁에 대한 행동 요령을 알아는 둬야지』 어떨까? 6·25를 겪지 않은 세대들은 남대문시장에서 군복을 사다 물들여 입는것은 한때 유행시킬만큼 전쟁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향수에 가까운 감정을 갖고 있는듯 한데 위기감을 정말 느끼고 있는 것일까? 그들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마치 만화영화의 스토리를 늘어놓고 있는 것처럼 태평해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면서 한국전쟁과 일본·미국·러시아·중국 등의 입장을 정치 전문가인 양 떠들어 댄다. 개혁정부의 회오리 속에서 다소 벗어나 긴장이 풀어진 우리 국민들이 북핵 위기감으로 생활의 탄력성을 갖는듯도 하다.「이러다 정말…」하는 심정으로 슈퍼마켓으로 뛰어가는 그긴장이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어쨌든 핵전쟁이 화제에 오르고 이러 저러한 분석을 소주 집에서,밥집에서 열정적으로 토로 하다가 여름밤이 깊어질 즈음에 7월 공연을 앞두고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연극 단원들이 『우리 공연이나 무사히 끝낸후에…』하면서 유유히 대본을 챙겨들고 연습실을 나서는 모습은 보기에 좋다. 신문이나 TV에서 핵전쟁에 대한 뉴스를 접할때 이런 생각을 해 봤다.우주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중의 하나가 지구라는데,하물며 너와 나의 존재는 뭐관데….어느날 그 별 하나가 핵폰탄으로 깜쪽같이 사라진다한들 어느별에서 안타까워 할 것인가.에라 미운 그사람 용서해주자 하고 가슴속에 응어리져있던 미움 하나를 지워 버렸다. 그런거 아닐까? 역시 전쟁에대한 두려움은 그리 많은 사람들의 뭣은 아니지 않을까….
  • 「6·25」 3년1개월간 인명·재산피해

    ◎군인·민간인 258명 사망·실종/장애자·미망인·고아 등 전재민 5백망/항만1백곳·교량 3백12㎞ 완전 파괴/주택·학교·병원·공장 등 63곳 초토화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53년 7월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기까지 3년1개월동안 계속돼 막대한 인명·재산피해를 냈다. 남북한군은 물론 연합군등 수백만명과 민간인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거나 한 부상을 입어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또 산업·생산시설이 모두 파괴돼 휴전뒤 남북 주민들이 헐벗고 굶주리며 전쟁복구에 땀흘려야만 했다. 우선 군인의 피해를 보면 한국군은 전쟁중 14만9천5명이 전사하고 71만7천8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3만2천2백56명이 실종됐다. 또 포로로 붙잡힌 사람은 9천6백34명으로 한국군 전체의 인명피해는 1백만여명에 이른다. 또 한국군을 돕기 위해 참전한 유엔군은 5만7천6백15명이 전사하고 11만5천3백12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실종과 포로는 8천8백97명으로 집계돼 유엔군의 피해는 18만여명에 달했다.이중 대부분은 미군으로 전사 5만4천2백46명을 비롯,부상 10만3천2백84명과 실종·포로 5천5백29명등 16만여명이다. 공산측의 피해는 더욱 커 북한군은 29만4천명이 전사하고 부상 22만6천명,포로 11만2천명등 모두 63만2천여명이나 되고 중공군은 전사 18만4천명,부상 71만6천명,포로 3만1천명등 93만1천여명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산가족 1천만 이같은 군인피해에서 사상자수만 따로 떼어내 보면 유엔·한국·북한·중국군을 통틀어 사망 41만4천여명,부상 1백77만4천여명등 모두 2백18만8천여명이다. 6년동안 계속된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사상자가 일본 6백46만명,미국 1백7만명이었고 14년간 계속된 월남전에서 1백90만명의 사상자가 생긴 것과 비교했을 때 3년여의 비교적 짧은 기간에 치러진 한국전쟁이 다른 전쟁과 상대적으로 비교해 얼마나 치열했었나를 입증하고 있다. 민간인들의 희생과 피해는 더욱 엄청나다. 남한의 경우 민간인 사망 24만4천여명,학살 12만8천여명등 37만2천여명이 귀중한 목숨을 잃었고 부상 22만9천명,납치 8만4천명,행방불명 30만명등 모두 99만1천여명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집계됐다. 또 전재민 3백62만명과 미망인 50만명,불구자 33만명,결핵환자 1백만명,전쟁고아 10만명등 무려 5백55만여명이 전쟁후유증으로 고통을 겪었다. 당시 2천50만명 정도였던 남한인구의 4분의 1정도가 직접적인 전쟁피해를 입은 것이다. 특히 6·25전쟁은 「게르만민족의 대이동」보다 더많은 민족의 이동을 불러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란한 남북이산가족이 1천만명에 이르는 등 지금까지도 전쟁의 깊은 상처가 가시지 않고 민족적인 비극으로 남아있다. 서울의 경우 49년 6월 1백43만명이던 인구가 52년 3월 67만명으로 추계돼 전쟁으로 76만명이 피란살이를 떠나 돌아오지 않았거나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남한의 총인구는 55년 1천8백92만여명으로 전쟁전보다 1백만명 이상 감소됐다. ○재산피해 40조원 6·25전쟁으로 인한 재산피해는 50년도 불변가격으로 약 4천억원이었으며 이를 93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무려 4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계산됐다. 당시 재산피해 내용을보면 민간가옥 61만호,각급학교 4천23개교 15만4천여동,경찰관서 1천9백여곳,행정관서 2천7백여곳,의료기관 1천5백여곳,금융기관 1천1백여곳,종교단체 8백여곳,생산업체 1만3천여곳이 파괴됐다. 또 기간시설을 보면 항만은 1백개소가 파괴됐고 철도 3백29㎞,교량 3백12㎞,전선 61㎞등이 끊겨 전국토의 도로망과 통신이 완전 초토화 되었다. 이같은 사회간접시설등의 파괴로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전쟁발발 당시 56달러에서 전쟁이 끝난 53년에는 67달러로 겨우 11달러가 증가하는데 세계최빈국 가운데 하나로 전락했다. 또한 전쟁통에 물가는 천정부지로 솟구쳐 예를들면 전쟁직전 5백30원하던 어떤 물건의 경우 51년 그 값이 2천1백28원으로 4배나 껑충 뛰어올랐고 52년에는 다시 2.5배 오른 5천2백43원으로,53년에는 7천6백18원으로 급상승했다. 전쟁전과 종전직후를 비교하면 물가는 3년만에 무려 14배가 오른 셈이다. 그러나 이같은 물가상승은 휴전협정이 체결된뒤에도 계속돼 54년에는 73%,55년에는 57%등의 놀랄만한 인플레율을 보인 바람에 민생고가극에 달했다. 당시 주요 공업생산규모를 보면 면직물은 50년 1백34만필생산에서 전쟁이 끝난 53년 생산량이 27만필로 4.9배가 줄었고 시멘트는 1만t에서 2천여t으로 4.3배,전깃줄은 1백78t에서 50t으로 3.6배나 줄어들었다. ○담배소비만 급증 그러나 담배만은 유일하게 생산량이 늘어 연간 4백11만개비보다 무려 1백76배 급증한 7억9백53만개비를 생산,생활고와 전화에 시달린 나머지 국민들이 엄청나게 담배를 피워댄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만일 제2차 한국전쟁이 발발할 경우 최신무기의 엄청난 파괴력으로 미루어 인명과 재산피해는 이루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다시는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은 한민족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절대명제이다.
  • 채명신장군이 말하는 「우리를 지키는 길」

    ◎“국민 깨어있어야 불행 막는다”/“유사시 나부터 희생” 각오로 뭉쳐야/군에 따뜻한 애정과 격려 절실한 때/탄광속 학살 등 공산군의 잔학행위 지금도 생생… 북 평화손짓 늘 경계를 최근 북한핵문제로 한반도 정세가 극히 미묘해 지면서 올해 6·25는 예년과 달리 새로운 의미로 다가서고 있다.6·25와 월남전에 참전한 「국군의 산 역사」 채명신 전주월한국군사령관(69·예비역중장)역시 이번 6·25를 맞아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나 않을까 며칠째 밤잠을 설치고 있다.채장군은 황해 곡산 출신으로 46년「같이 일하자」는 김일성의 권유를 뿌리치고 공산치하에서 1년반만에 남하,47년 소위로 임관(육사5기)한뒤 야전을 누빈 맹장.6·25 44돌을 앞두고 자그마한 정원이 깔끔하게 가꿔져 있는 용산구 후암동55 자택에서 채장군을 만났다. ­6·25 개전 당시 상황을 말씀해주십시오. ▲당시 북한병력은 20만여명으로 한국의 2배에 이르렀습니다.공산군은 일요일 새벽 4시 주공격 방면을 의정부·개성일대로 삼고 최신형 T34전차 1백50여대를 집중시켜 남침에 나섰습니다.한국은 이 지역을 7사단이 맡고 있었으나 예하 1개연대는 온양에 위치해 2개연대만이 방어를 하고 있었습니다.더욱이 5월이후 비상경계상태에 있던 군은 전쟁발발 며칠전 경계령을 해제,농촌병사들은 농번기일손돕기를 위한 휴가중이어서 전후방 병력은 평소 절반수준이었습니다.또 연대장 이상급 장교들은 24일 저녁 서울 육군본부 장교클럽 낙성식 축하 댄스파티에 참석,새벽녘까지 술을 마시고 취해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댄스파티에 만취 특히 전방에서 새벽 6시쯤 국방장관에게 전화로 비상을 알리려 했으나 보좌관이 『장관님은 일요일에 전화를 받지 않는다』며 전화를 연결시켜 주지 않았으며 육군총장집에서도 『주무시고 있어 깨울 수 없다』고 전화를 끊는 일도 있었습니다. ­당시 병사들의 사기등 의식은 어땠는지요. ▲전쟁초기 북한군의 사기가 남한에 비해 훨씬 높았습니다.그러나 대한민국의 운이 좋아 미국이 전쟁발발 한달여만에 조속히 참전하게 됐으며 북한이 3일만인 28일 서울을 점령한뒤 이상하게 7월3일까지 더이상 남하하지않고 시간을 허송세월해 아직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 남아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미군의 참전이후 국군도 사기가 충천해 북한을 다시 밀어붙일 수 있었습니다. ­6·25당시 소대장과 중대장·대대장으로 직접 전투를 벌였는데 공산군에 대해 기억에 남는 점이 있다면. ▲공산군은 참으로 잔혹했습니다.국군이나 민간인은 물론 동료전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북한군에 밀리다 반격에 나설 당시 대대장으로 죽령점령을 위해 전투를 벌인 적이 있었습니다.치열한 격전끝에 죽령을 확보했는데 죽령터널안에서 시꺼먼 연기가 치솟으며 악귀형상을 한 사람들이 엉금엉금 기어나오고 있었어요.처참한 전쟁에 단련된 부대원들도 이들을 진짜 귀신으로 생각하고 깜짝 놀랐습니다.가까이 다가가 확인해보니 이들은 북한군 부상병들이었습니다.터널을 야전병원 겸 유류저장창고로 사용하던 북한군이 후퇴하기 직전 부상병이 잔뜩 있는 그 곳에 불을 지른 것입니다.터널 입구에 있던 부상병들이 살겠다는 의지로 화상을 입고 피범벅이 된채 간신히 기어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전장병들은 통곡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때 북진이 늦어지면 그만큼 동포들이 흘리는 피가 많아진다고 말하던 일이 생각납니다.탄광등에 갇혀 떼죽음을 당한 동포들도 엄청났습니다. ○역사교훈 배워야 ­최근 전쟁에 대한 위기의식이 높아지고 있는데 전쟁을 막기 위해 국민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될까요. ▲역사의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히틀러는 영세중립국 스위스를 침공하려 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스위스 국민들은 일치단결해 전쟁이 나면 최후의 한사람까지 싸울 것임을 행동으로 히틀러에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한마디로 스위스 국민들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평화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경험으로 보아 장병정신무장의 지름길이 무엇입니까. ▲장병들이 의식은 몇시간의 정훈교육이나 높은 계급자의 훈시로 절대 전환되지 않습니다.경험을 얘기하면 4·3폭동때 처음 일선 소대장으로 제주에 부임하자 모든 소대원의 눈빛이 적대감으로 가득 차있었고 중대장은 이미 나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였습니다.그래서 어떻게 해야하나 하고 밤새 기도하다 새벽녘에 『좋다.그들사이로 뛰어들자』고 결심하고 숙소를 소대막사로 옮겼습니다.아픈 병사를 보면 죽을 끓여다 주며 간호하고 잠자다 모포를 걷어차는 사람은 모포를 덮어주고 해서 친동생처럼 병사들을 대했습니다. ○「골육지정」 필요 그 결과 일주일만에 병사들의 눈빛이 달라졌습니다.당시 중대장이 저격병을 보냈으나 몰래 신변보호를 해주던 소대원들이 그들을 먼저 쏴 목숨을 건진 일도 있었습니다.그때 부대통솔은 골육지정임을 깨달았습니다.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전쟁은 병사들이 하는 것이고 병사들은 소대장·중대장을 위해 싸웁니다.그 것이 전력입니다.여순사건을 일으킨 반란군 3천명도 모두 빨갱이는 아니었습니다.주동자들이 그렇게 이끌었습니다.그러나 전제조건이 하나 있습니다.전쟁에서 다친 사람들을 돌봐줘야 합니다.월남전 고엽제후유증환자들이 보상을 받으려면 얼마나 힘이 듭니까.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을 냉대하면 누가 전쟁에서 목숨을 내놓고 싸우겠습니까.다치면 나만손해라는 생각이 들게 마련입니다.북한의 핵이 걱정이 아니라 위기때 전방 소·중대장과 병사들이 얼마나 싸워줄 것인가를 염려해야 전쟁을 막을 수 있는 것입니다. ­김영삼대통령과 김일성주석간의 정상회담에 대한 견해를 말씀해주십시오. ▲며칠전만해도 김영삼대통령에게 험담을 퍼붓던 김일성이 태도를 하루아침에 바꾼 것은 놀랄만한 일입니다.만나는 것 자체는 좋은 일입니다.그러나 지금까지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해온 김일성이 회담을 갑자기 제의해온 것은 유엔 제재를 회피하기 위한 평화제스처로서 미국으로부터 호의적 반응을 얻어내자는 속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앞으로 진전될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경계를 흩뜨리지 않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채장군은 『전쟁이 다시 일어나면 우리 민족은 모두 망하게 된다』며 국민이 단결해야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거듭 말했다.또한 요즘 군을 나쁜 존재로 보는 시각에 대해 0.01%만이 잘못된 사람이라면서 언론의 바른 역사인식이 전쟁을 막는데 중요하다고 몇차례씩 강조했다.노장군이 제시한 전쟁방지의길은 로마의 격언이었다.『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 해양고고학의 미래/김용한(굄돌)

    다가오는 세기는 「해양 혁명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한다.바다의 중요성이 강조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데 따른 식량의 부족과 주요 에너지원인 화석연료의 고갈 등 인류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은 바다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그런만큼 이 「미래 자원의 보고」를 선점하기 위한 선진 각국의 물밑 경쟁이 치열하다. 바다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은 세계대전 이후부터 라고 할 수 있다.전쟁을 치르며 급속히 발달한 과학기술은 경외와 신비의 대상으로 만 여겨졌던 바닷 속 깊은 곳까지 인간의 손길을 미치게 했다.해양기술의 발달은 비단 자원탐사 뿐만 아니라 고고학 분야에도 새로운 장을 열게 했다. 해양고고학 혹은 수중고고학이 추구하는 것은 물 속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인류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일이다.바다 속에는 해수면의 상승이나 지각변동으로 잠긴 유적이 있는가 하면,폭풍우에 휘말리거나 해전중 불행을 당한 수많은 침몰선등이 고스란히 남아있다.육지라면 이처럼 당시 생활상이 그대로 얼어붙은 듯한 유적과 유물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해양고고학이 태동한뒤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확인된 침몰선은 1천여척에 이른다.또 지금도 연간 1백여척에 이르는 침몰선이 발굴 또는 확인되고 있다.해양고고학이 가히 들불처럼 번지고있다는 어느 학자의 표현을 실감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신안 침몰선 발굴을 계기로 이같은 흐름에 화려하게 합류했다.신안 발굴은 국민들의 해양유물에 대한 관심을 크게 높이는 역할을 했다.신안보물선 발굴 이래 해양 유물에 대한 신고가 전국적으로 2백건을 넘어서고 있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모든 일은 관심에서 부터 출발한다.정부와 학계 그리고 국민 모두가 수중고고학에 관심을 가질 때 우리 역사의 빈 공간이 훌륭히 메워지는 것은 물론 바다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극우 게르만」 폭력에 독 이미지 상처(박강문 귀국리포트:6)

    ◎파리에 들른 여행객 “안가는 게 좋겠죠” 『독일 가 보는 거 괜찮아요?외국인을 막 두들겨팬다는데…』 유럽 여행중 파리에 들른 친지들이 묻는다.『운 나쁘면 당할 수도 있지요』 이 말 들으면 대개 독일행은 포기다. 베를린 파견근무중인 한 한국인은 아주 고약한 경험을 했다.그가 엘리베이터에 여러 독일인과 함께 타고 있는데 한 사람이 『이 안에 동물이 하나 있군』하고 내뱉었다. 독일 유학중인 한국 여학생이 공원에서 살해된 직후에는 독일 땅을 밟는 것이 대단한 모험으로 여겨졌다.이 사건은 뒤에 인종적 박해는 아니었던 것으로 판명되기는 했다. 독일 극우파 청년들의 외국인 학대는 동·서독 통일 후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이다.그전에도 더러 외국인 구타 사고가 있었다.기자가 88년 여름 독일에 갔을 때 뮌헨 근교에 살고 있는 화가 김영희씨에게서 그곳 젊은 한국인 개업의가 당한 이야기를 들었다.이 의사가 밤길을 걷다가 독일 청년들에게 이유없이 뭇매를 맞고 식물인간 상태로 귀국했다고 한다. 그뒤 91년 5월이후 3년간 파리 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기자는 독일에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그쪽에 따로 특파원이 나가 있었기 때문에 업무로 가 볼 기회가 없었고 휴가 때도 인접국이건만 별로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후 독일은 많은 노력으로 좋은 이미지를 쌓아왔지만 공든 탑을 일부 철부지 젊은이들이 무너뜨렸다. 아마 몇년전부터 동양인들의 독일 방문은 줄었을 것이고 독일의 관광 수입도 그만큼 적어졌을 것이다. 요즘은 동양인 뿐만 아니라 서양인들도 독일 방문을 꺼린다.외신보도로는 최근 미국과 이스라엘 청소년 단체들의 독일 방문 취소 통보가 잇따르고 있다.유럽인들도 자주 관광 여정에서 독일을 빼 버리고 있다는 것이고 독일 대학들의 외국 유학생도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달초 독일 원정중인 스웨덴 축구팀이 탄 버스를 독일 청소년들이 야구방망이를 들고 공격했다.터키인 등 아시아인만이 아니라 유럽인들도 당할 수 있다는 것이 실증되었다. 잔뜩 구겨지고 있는 대외 이미지에 독일정부는 꽤 신경을 쓰고 있는 듯하다.지난해 가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홍보 관계 국제회의에서 연방 정부 대변인 디터 포겔씨는 연방언론국의 조사 결과를 근거로 하여 독일의 이미지가 많이 훼손되어 있다고 말했다. 이 집계에서는 미국 언론의 독일에 대한 보도중 극우파의 난동에 대한 보도 빈도가 매우 높다는 것이 확인되었다.미국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의 독일에 관한 보도중 가장 많은 것이 극우파를 주제로 한 것이며 전체의 30%를 차지했다.경제 기사는 20%로서 두번째로 많다. 포겔 대변인은 독일에 대한 대외적인 평가가 주로 정치적 범주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면서 독일인들이 이것을 부당하기는 하지만 어쩔수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내 극우파의 움직임이 사소한 것일지라도 독일이 과거에 저지른 과오와 함께 묶여 증폭돼 전달되는 경향이 있고 그것을 기분은 좋지않지만 감수한다는 말이다. 전해지는 말을 듣는 사람이 때로는 실상보다 더 위기감있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이런저런 걱정스런 소식이 들려오는 가운데서도 독일의 많은 교포들은 별 탈 없이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에 가겠다는 이에게는 그래도 한가지 전해들은 충고를 옮기고 싶다.독일인 앞에서는 극우파든 아니든 히틀러나 나치,또는 유태인 학살 등을 입에 올리지 말라는 것이다.그 유명한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이 독일에서는 상영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한 독일인에게서 들었다. 폴란드를 방문한 독일 총리는 유태인 묘역을 찾아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우리의 뻔뻔스런 이웃과 대조된다.그런데 이런 국가적 이성도 국민 개개인의 감정과 완전히 합치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서는 나치를 꼭 나쁘게만 볼 수 없다는 사람이 상당히 나왔다.근년 극우파의 발호가 싹틀 만한 토양이 바로 이것인지도 모른다.
  • D데이와 독일인들(임춘웅칼럼)

    1944년 6월6일은 2차세계대전중에 서방연합군이 나치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유럽대륙을 되찾기 위해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상륙작전을 개시한 날이다. 이날은 우리의 해방과도 적지않은 관련이 있어서 우리들도 기억해 둘 만한 날이기도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영국·캐나다·프랑스 등 서유럽국가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역사적인 날이다.우선 나치독일로부터 유럽을 해방시켰다는 의미가 있다.프랑스를 비롯한 대륙국가들은 나라를 되찾았으며 영국은 나치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난 날이다. 무엇보다 미국에게는 유럽을 해방시킨「십자군」으로서 세계 위에 군림하는 초강국의 위치를 확고히 한 역사적인 시점이다.영광스럽고 자랑스런 역사인 것이다.그래서 지난 6일과 7일 이틀동안 미국의 뉴욕 타임스 같은 신문은 50년전의 같은 날짜 1면기사 전면을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실어 감격을 되새기고 있다. 6일 노르망디에서 벌어진 50주년 기념행사도 그들의 영광된 역사만큼이나장중했다.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엘리자베스 2세 영국여왕,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대통령 등 19개국 수뇌가 참가했고 생존해있는 4만1천여명의 참전용사가 초대됐다.미국은 항공모함과 최신예 전함들을 오마하 해변에 배치해 미국의 위용을 과시했다. 관심이 가는것은 이처럼 요란한 행사를 지켜보는 독일인들의 감회다.이번 행사에 독일사람이 초대되지 않은 것은 당연한데 헬무트 콜 독일총리의 코멘트가 흥미롭다.콜총리는 이 행사에 초대되길 기대하지도 않았고 결코 요청한 일도 없다고 밝히면서 미국·캐나다·영국인들이 유럽을 해방시키기 위해 프랑스 해변에서 죽어간 그들 병사들을 추모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논평했다.그런데 그 논평 중에『나치 전체주의로부터 독일인의 해방을 포함해 모든 유럽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라는 대목이 있다. 최근 독일에서 실시된 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2차대전이후 태어난 독일인의 64%가 독일의 「항복」을 「해방」으로 보고 있다.이조사를 실시했던 여론조사 전문가는 「64%」가 예상보다 너무 낮았다고 분석하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독일인들이 나치즘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패망」이외의 다른대안이 없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독일인들이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끌어서 얻은 것보다 패배해서 얻은것이 더 많았다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패배」를 자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그러나 독일인들은 비록 실패하긴 했지만 일단의 군장교들이 히틀러를 암살하려했던 그해 7월20일을 「독일해방의 날」로 기념하려 계획하고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한시대의 종언이었고 또한 한시대의 시작이었다.나치독일은 서방민주주의 국가로 재탄생했고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일원이 돼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같은 회원국가들 모두가 「노르망디 상륙」50주년을 자축하고 있던 날 뒷전에서 독일의 오늘과 역사를 되씹는 혼란속에 묻혀 지냈다.역사의 유산은 하루아침에 소멸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그러나 그들은 잘못된 역사를 스스로 반성하고 새출발 하려는 각고의 아픔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역사적 사실을 끈임없이 부정하고 은폐하려는 일본과의 차이점이다.
  • “불황” 일에 전직안내회사 등장

    ◎경기 장기침체… 외국회사로 전직 늘어 「인재는 직장을 옮기지 않는다(인재불동)」는 일본의 종신고용 체제가 무너지며 새로운 전직시장이 형성되고 있다.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불황이라 불리는 「헤이세이(평성) 불황」이 낳은 결과이다. 신일본제철 7만명,일본전신전화(NTT) 3만명,닛산자동차 6천명….일본 대기업의 인재들이 구름처럼 직장을 옮기고 있다.주로 외국인 회사와 멀티미디어 산업으로 몰려간다. 90년대 초 일본시장이 대폭 개방되자 늘어나는 외국인 회사들은 일본 대기업 출신 화이트 컬러의 흡수처가 됐다.미국 애플컴퓨터 일본지사의 경우 2백50명의 사원 중 95%를 대기업에서 스카우트했다.폭스바겐 일본지사도 3백30명 가운데 3백명이 대기업 출신이다.2배에 달하는 연봉과 많은 여가 시간 때문이다. 21세기를 이끌어 나갈 멀티미디어 산업은 밝은 비전으로 인재를 빨아들인다.이 산업은 2010년에 1백23조엔의 시장으로 성장,2백40만명의 신규 고용을 창출할 것으로 예상된다.게임기 업체인 세가엔터프라이즈사는 임원 31명 중 16명,관리직 4백명 가운데 절반이 외부 영입 인사이다. 프로그램 전문업체 오러클사는 최근 1년간 직원이 3배로 늘어 3백50명이 됐다.거의 대부분이 일본IBM에서 왔다.컴퓨터 업계의 소형화 물결에 휩쓸려 승진을 못하던 IBM 인재들이 멀티미디어 분야의 신흥 기업으로 옮긴 것이다. 전직 안내 세미나는 어딜 가나 성황이다.아예 업종을 인재 알선 회사로 바꾸는 종합광고 회사들까지 생겼다. 직원들의 전직을 돕는 회사도 나타났다.광학유리 대기업인 호야사는 올해부터 조기퇴직을 종용하며 45세가 넘는 관리직에게 전직할 수 있는 회사를 알려주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무공은 『종신고용 체제에 가까운 우리에게도 멀지 않아 닥쳐올 상황』이라며 월급쟁이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 노르망디상륙 50돌 기념식/15국정상·노병·관광객 수십만 참석

    【파리 연합】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 전개한 사상 최대 규모의 노르망디상륙작전 50주년을 맞아 기념식이 미국·영국·프랑스및 캐나다등 15개국의 국가원수등 대표와 참전용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6일 프랑스 북서부 생 로랑 쉬르 메르의 해안에서 거행된다. 나치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와 유럽을 해방하기 위한 노르망디 상륙작전 개시일을 맞이해 열리는 공식 기념식에는 프랑수와 미테랑 프랑스대통령,빌 클린턴 미대통령,엘리자베스 영국여왕,존 메이저 영국총리,장 크레티앙 캐나다총리,폴 키팅 호주총리등 15개국 국가원수및 정부수반과 프랑스정부의 초청을 받은 참전용사 3만여명이 참석한다. 프랑스정부는 약1만3천명의 군병력과 경찰및 소방구조대원을 동원,각국 정부요인들에 대한 보안을 철저히 하는 한편 대부분 60대 후반 또는 70대가 된 참전용사에 대한 의료지원을 준비하는 등 만전을 기하고 있다. 프랑스정부는 또 노르망디 지역당국과 함께 이번 50주년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약6만명이 참가하는 2백여가지의 옥내외 행사를 마련했는데기념일을 전후해 수십만명의 관광객이 몰려들 것으로 보인다.
  • 연합국측 6일 기념행사/노르망디 상륙50주년 “축제분위기”

    ◎미·영·불·가정상 4만5천여노병 참가/3백50개 프로그램 마련… 언론 대서특필 제2차 세계대전당시 독일군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한 노르망디상륙작전이 오는 6일로 50주년을 맞는다. 노르망디상륙 기념일 행사는 그동안 매년 열려왔지만 이번에는 꼭 반세기가 흘렀다는 상징성에다 생존해있는 참전용사들이 참석할수 있는 거의 마지막 대규모 행사라는 점때문에 세계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대통령을 비롯해 영국의 엘리자베스여왕,미국의 클린턴대통령이 참석할 예정이고 캐나다·벨기에·네덜란드등의 국가원수들이 초청돼 있다.당시 참전용사 가운데 생존해 있는 은발의 「노병」 4만5천여명도 행사에 참석키 위해 「왕년의」 낡은 군복들을 찾아입고 속속 프랑스로 몰려들고 있다.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지역에선 크고 작은 3백50여가지 다양한 행사가 준비되고 있다.부산한 거리 곳곳엔 미·영·불·캐나다등 연합군측 국기들이 나부끼고 있다.또 상륙작전 화보가 쏟아져나오는가 하면 참전용사들의 증언들이 연일신문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이런 축제분위기는 마치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 직후인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참석하는 노병들은 가장 젊은 사람이 60대후반이고 당시의 장교나 장군은 대부분 작고해 거의 찾아볼 수 없다.최전선에서 독일군과 싸웠던 당시의 젊은 사병들이 대부분이다.이들은 컴퓨터를 통해 자신이 상륙했던 지점,그리고 4만명의 연합군이 안장된 묘지를 찾아 50년전 「D­데이」를 회상하기도 한다. 1944년6월6일 1천1백36대의 폭격기가 95㎞의 노르망디 지역(암호명 피카딜리 서커스)에 폭탄을 쏟아부으며 시작된 노르망디상륙작전에는 15만5천명의 군인과 2만대의 트럭이 투입됐다.그뒤 프랑스지역을 차례로 해방시킨 연합군은 2개월후인 8월26일 파리를 되찾기까지 20만명의 희생자를 냈고 독일군 피해는 그 두배였다. 50주년 기념행사로 관광업계는 때아닌 재미를 보고 있다.그동안의 기념행사는 3천여명 정도의 용사들이 모이는 3일정도 축제에 그쳤으나 올해는 부근의 칼레에 역이 개설된 영­불간 유러터널의 개통과 맞물려 엄청난 방문객이 밀려올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패전국인 독일은 노르망디 지역에 6만명의 독일군 묘지가 있는데도 이번 행사에 초청되지 못했다.프랑스의 여론조사에서 헬무트 콜 독일총리 초청에 찬성이 35%인 반면 반대가 54%로 나타난데다 재향군인회가 강력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대신에 독일은 오는7월14일 프랑스혁명 기념일 행진(파리)에 자국의 군대를 파견할수 있게돼 체면을 살리게 됐다.미테랑대통령이 혁명기념일 퍼레이드에 유럽군단의 일원으로 독일군이 참가해주도록 콜총리에게 요청했던 것이다.대대적인 연합군의 승전 기념행사에 이어 독일군이 패전이후 처음으로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를 행진하는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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