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세계대전
    2026-04-19
    검색기록 지우기
  • 미국방부
    2026-04-19
    검색기록 지우기
  • 한국 위성
    2026-04-19
    검색기록 지우기
  • 5000만원 지원
    2026-04-19
    검색기록 지우기
  • 병원 이송
    2026-04-1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7,507
  • 아! 발칸반도(외언내언)

    발칸반도를 「세계의 화약고」라고 한다.6백여년 간 민족·종교가 얽히고 설켜 피의 보복이 계속되는 땅이다.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암살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의 뇌관이 됐던 바로 그 반도다. 13세기 동진하던 게르만민족과 서·남진하던 남부슬라브족간에 민족적 충돌의 현장이 됐던 발칸은 14세기에 들어서 융성하던 오스만 터키제국의 힘이 북진하면서 천형의 땅으로 변했다.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 등 게르만계의 기독교와 세르비아 동방정교회,보스니아 중심 남부권의 회교 등 3개종교와 5개민족 4개언어,2개의 문자권이 뒤섞여 반목과 대립을 거듭하고 있다. 잠시나마 이들의 갈등을 묶어두었던 것은 티토의 카리스마적 지도력과 국제공산주의 이념.티토가 죽고 공산권이 붕괴되자 분열과 대립은 자연스럽게 재현됐다.구유고연방은 91년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마케도니아가 각각 독립하고 92년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신유고연방을 결성했으며 같은해 보스니아가 독립했다.3년을 끌며 20여만명이 희생되고 3백만명의 난민을 낸 「인종청소」가계속되고 있는 보스니아내전은 인구의 45%를 차지하는 다수 회교도와 세르비아계간의 핏줄전쟁.세르비아계는 인구의 32%밖에 안되나 경제권을 쥐고있으며 세르비아공화국의 지원을 받는다. 지난 4일 크로아티아 정부군이 크로아티아내 세르비아계 반군에 전면공격을 개시함으로써 민족전쟁은 발칸반도 전역으로 확산될 기세다.크로아티아 정부는 지난 91년 6개월간의 전투에서 국토의 5분의 1을 세르비아계에 빼앗긴 후 절치부심 해왔다. 크로아티아의 반세르비아계 공세가 「사라예보의 총성」으로 확대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그러나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세르비아계 뒤에는 러시아가 있고 세르비아계의 발칸석권을 막으려는 서부유럽은 그 반대편에 서있다.「신냉전」구도다.인간이 인간인 것을 부끄럽게 하는 핏줄전쟁이 지금 발칸반도에서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 피해자 외면한 「미·일논쟁」(오늘의 눈)

    6일은 히로시마 원폭투하 50주년이었다.지금 미국과 일본에서는 원폭투하에 대한 정당성 논쟁이 한창이다.두나라 언론까지 가세한 듯한 이 논쟁을 보고 있노라면 50년이란 시점을 활용,자국이기주의를 앞세운 「명분」 싸움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느낌이다.이 명분 싸움에 밀려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 원폭피해자들의 권리는 뒷전이라는 인상도 받게 된다. 일본은 원폭의 참혹상을 알려 2차세계대전의 가해자가 아닌 최대 피해자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급급하며,미국은 원폭 사용의 당위성을 역설하는데 온힘을 쏟고 있다. 특히 미국은 내부적으로 당시 정책결정론자들이 원폭 투하를 결정한 진짜 이유를 놓고 설왕설래하고 있다.지금까지의 정설은 해리 트루먼 당시 미대통령의 말처럼 『전쟁을 끝내고 수백만명의 인명을 구하기 위해서』이다.그러나 일부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은 꼭 트루먼의 주장같지는 않다는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이들의 주장 핵심은 당연히 원폭투하의 불필요성에 모아진다.당시 일본은 몰락 직전에 있었기 때문에 원폭투하까지 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원폭투하를 강행한 이유는 옛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은 참전용사단체 등의 주장에 힘입어 트루먼의 주장에 동조하는 전통적 견해가 우세하다.수정주의 역사학자인 카이 버드같은 사람은 『역사학자들보다 참전용사들의 수가 훨씬 많다는 것이 불행』이라고 꼬집고 있다.미국내 상반된 이 두 주장 모두 「역사」를 알리려는 긍정적 노력으로 볼 수 있겠지만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인도주의」 배려는 도외시하고 있다. 일본의 세계유일 피폭국 강조및 침략전쟁 외면 태도도 「인도주의」를 저버리고 있다.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 일본총리도 6일의 히로시마 평화기념식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비극과 비핵의 실현을 거듭 강조했으나 원폭투하를 몰고 온 태평양전쟁의 참상과 피해자들의 비극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원폭투하 50주년」은 전쟁의 양안에 있었던 「강국」 두나라에 새 쟁점을 제기했지만 정작 전쟁의 수렁 속에 갇혔 있던 「민족」들의 아픔에 대한 이해는 가져오지 못한 것 같아안타깝다.
  • 「6·25」는 잊혀진 전쟁 아니다(해외사설)

    워싱턴에서는 7월28일 한국전 참전기념물 제막행사가 치러진다.한국전쟁은 이제 역사가들이 일컫듯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 당당하고 장엄하게 기억될 것이다. 한국인 4백만명이 희생되고 미국인 3만2천여명이 전사한 3년동안의 전쟁이 끝난 지 42년만에야 이뤄진 일이다. 황량한 지형과 악천후 속에서 싸워야 했던 한국전쟁은 미국역사상 가장 인기 없는 전쟁 가운데 하나로 꼽혀왔다. 미국은 대한민국을 침공한 북한 공산주의세력을 물리치기 위해 유엔의 개입을 주도했었다.그러나 아시아의 요충지에서 벌어진 그 중대한 전쟁을 치러나갈 준비는 거의 돼 있지 않은 상태였다. 2차대전에서 승리한 직후에 일어난 급속한 군비해체에 따라 어리석게도 형편없이 낮은 수준으로 삭감된 방위예산으로 인해 미국은 한국전쟁의 초기단계에서 치명적일 만큼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사상자가 산더미처럼 쌓여가는데도 전략적인 여건에는 거의 아무 변화가 없었다.그 사이 전쟁을 끝내려는 정치협상이 2년씩이나 질질 끌며 애를 태우는 바람에 한국전쟁에 대한 국민의 불만만 고조됐던 것이다. 지금의 세대는 한국전쟁을 그보다 더 오래전에 일어난 제2차 세계대전이나 그토록 반대가 많던 베트남전쟁보다도 더 모르고 있다.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군의 수는 한국전에 나간 1백70만명보다 훨씬 적은데도 미국의 신문과 텔레비전은 늘 한국전쟁을 까마득한 기억처럼 다루었다. 논란의 여지는 많지만 어찌됐건 미국은 한국전쟁을 통해 기본적인 전략목표는 이뤄냈다.침공은 격퇴됐고 남한은 독자적인 상태로 남아 고도성장을 달성,민주사회로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같은 성과를 보기까지 미국인이 치른 대가는 너무나 컸다.전사자 외에도 10만3천4백명이 부상했고 7천명이 포로가 됐으며 5천8백명이 실종상태다. 그들의 희생과 용기를 기억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린 셈이다.
  • 딱정벌레차 「비틀」의 부활/나인용 자동차칼럼니스트(자동차 이야기)

    인류역사에 자동차가 등장한 이후 오늘날까지 대중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자동차중 하나가 바로 「비틀」이다. 비틀보다는 딱정벌레란 이름으로 무려 57년동안 장수하면서 단일차종으로 2천1백만대이상이나 팔렸다.한햇동안에만 1백70만대이상 생산되는 초유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또 비틀은 당시 자동차가 일부 부유층의 전유물로 인식된 것에서 탈피해 서민들에게 마이카의 꿈을 실현시켜 자동차대중화에 한몫 하기도 했다. 이러한 비틀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시 최고의 설계자인 페르디난드 포스쉐박사의 천재성과 독재자 히틀러의 만남에 의해 만들어졌다.히틀러는 지난 33년 등극과 함께 국민차개발을 발표했고 34년 포르쉐박사에 의해 설계가 시작됐다.설계후 4년만에 시작차로 첫 딱정벌레가 탄생한다. 39년9월1일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공장은 폐쇄되고 생산은 뒤로 미뤄졌다.그후 전쟁이 끝나고 45년5월부터 생산이 재개됐고 지속적인 기술개발과 보완으로 60년대에는 비틀의 전성기를 맞게 됐다. 그후 비틀은 VW1300,VW1300A,411 등 여러번의 모델변경속에 70년대 중반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최종모델인 412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마침내 지난 74년 서독(현 독일)에서의 생산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현재까지 멕시코공장에서 생산을 하게 돼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반세기동안 생산된 비틀의 명성은 아직도 세계 곳곳에 남아있고 폴크스바겐사도 비틀의 부활을 시도하는 차세대비틀을 계획하고 있다. 지난해 북미 오토쇼에서 발표된 컨셉트Ⅰ.비틀의 캐릭터인 딱정벌레스타일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했으며 아울러 미래첨단기술과 신소재를 적용한 미래형 전기자동차다.3도어 해치타입으로 제원은 비틀과 거의 비슷하다.디젤과 전기에너지를 혼용한 이른바 하이브리드엔진형식을 갖추고 있다. 물론 컨셉트Ⅰ이 비틀의 후속으로 곧바로 생산될지는 미지수이나 비틀을 기억하는 많은 대중들은 비틀의 부활을 기대하고 있다.
  • 한국전참전 미언론인 베이런 로버츠 회고

    ◎42년만에 되살린 참전용사의 프라이드/기념비 제막계기 평가 새로이/「잊혀진 전쟁」서 이젠 「기념할 전쟁」으로 워싱턴에서 한국전 참전기념비가 제막되는 것을 계기로 이 기념비의 주인공인 참전미군에 대한 평가가 새로워지고 있다.미 보병25사단 일반병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현직언론인 베이런 로버츠씨(워싱턴 타임스)의 한국전참전회고문을 소개한다. 한국전 참전 미군들에게 이번주는 아주 큼직막한 주간이었다. 「사격 끝」의 기념일이었고 워싱턴 중앙국립공원안 「기억의 연못」 옆에서 한국전 참전용사기념비가 제막되는 주였다. 그림자가 어리는 「기억의 연못」? 얼마나 어울리는 배치인가. 1950년대,아니 정확히 1950년6월로 거슬러올라가자.거기서 한국전은 시작한다.처음엔 전쟁도 아니었다.경찰적 용무라고 불렸다.1차세계대전·2차대전 또는 남북전쟁과 비교해보면 전쟁이 아니었던 것이다.그런 전쟁과 비할 때 첫눈에 이 전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전쟁은 3년이 걸렸고 5만4천명의 미국인 목숨을 앗아갔다.이 숫자를 바탕으로하면 베트남의 악전고투,소위 걸프전쟁,그라나다 모험,파나마 조련 등은 감히 상대가 되지 못한다.베트남전은 미군 목숨을 이보다 수천명 더 앗아가긴 했지만 그러기 위해서 9년이나 더 총격전을 벌여야 했었다. 페르시아만에서의 전쟁? 글쎄,잘해야 1백시간이나 걸렸을까.파나마는 거기에도 아주 못미친다.그라나다는? 아예 말도 꺼내지 말자. 그런 한국전을 미국에선 잊혀진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전쟁은 아마 미국이 참전하고도 가장 잊혀져버린 진짜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라는 세계대전의 발꿈치를 밟아 터졌고 그때 마침 거개의 미국인은 50년대와 60년대의 붐을 준비하기에 바빠 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공장들은 하이테크로의 경이로운 이행을 배태하기 시작했으며 텔레비전이 수백만 미국인의 넋을 홀릴 즈음이었다. 냉전은 유럽에서 열기가 오르고 있었다.미국 위에 아련히 드리우는 몹쓸 그림자는 소련 곰이었지 북한도 중공도 아니었다. 한국전 기사는 한 1년쯤 미국신문 1면에 올랐으나 곧 거침없는 후퇴를 기록,3면·7면·18면·20면으로 밀려났다.텔레비전은 초창기인 만큼 훗날의 베트남전같이 한국전을 커버하지 못했다.영화의 뉴스시간도 그저 다루는 시늉만 냈다.사람의 관심은 딴 데 있었다. 한국은 몸이 오그라드는 강추위와 숨이 턱 막히는 무더위 속에서 전쟁을 치렀다.쉬지 않고 쏟아지는 비와 세찬 눈보라,질식할 듯한 흙먼지와 무릎이 그냥 빠져드는 진창에서의 전쟁이었다. 또 교착상태의 기나긴 전선,축축한 벙커,가시철조망의 전진기지 등이 주요인상이었고 끊임없는 수색조 임무,적들의 미친 듯한 인해전술이 끔찍한 기억을 남겼다. 전쟁이 끝나자 싸웠던 미군은 다른 모든 전쟁의 참전용사가 그랬던 것처럼 행복감과 약간의 신경과민상태로 귀환했다.그러나 차이가 있었다. 1차대전의 귀환장병은 진정한 영웅으로 퍼레이드와 축하연에 파묻혔다.2차대전 참전용사도 마찬가지였다.베트남 참전용사는? 고향에 돌아올 때 퍼레이드는 없었지만 현충일·재향군인의 날·독립기념일 날 워싱턴의 베트남참전기념비 부근에 가보라. 걸프전의 「사막의 폭풍」에 참전한 미군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성대한 귀환 퍼레이드를 벌였다.단 1백시간만 싸우고도 슈발츠코프장군과 휘하 장병은 영웅대접을 톡톡히 받았다. 한국전 참전용사에겐 퍼레이드도 없었고 축하연은 더더욱이 없었다.옷가지를 쑤셔넣은 잡낭 하나만 달랑 들고 있었을 뿐이다.그리고 곧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몸소 참전한 전쟁에 대해서 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특히 외부인에게 그랬고,하더라도 같은 참전동료끼리 나지막한 소리도 주고받는 데 그쳤다. 베트남전이나 걸프전과는 달리 한국전 참전미군은 전쟁경험과 관련된 괴상하고 신비화된 후유증증상,혹은 그런 용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귀환해서 사회생활 속으로 융화되거나 표류해갔는데 기억과 참혹한 전쟁에 대한 상처는 혼자 말없이 간직했다.아마 그들은 중공군의 나팔소리와 뼛속을 파고드는 한기를 이따끔 머리에 떠올릴지 모른다.고지탈환을 위해 비명 같은 함성을 지르며 비탈을 지쳐오르는 장면을 기억할 수도 있겠다. 그렇더라도 그걸 장황히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국전 참전미군이 이번 참전기념비를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라고 기대해도 좋다.참전 퇴역군인은 말없이 참전비 옆에 서서 회상에 잠길 것이고 그새 눈물이 괴는 용사도 많을 것이다. 그들에겐 항상 이같은 조용한 위엄이 배어나온다.자신의 감정을 중인환시리에 떠벌리지를 않는다.말은 없지만 한국전 참전미군에겐 프라이드가 있다. 그렇다,42년이 지난 뒤이긴 하지만 이젠 기념할 때다.
  • 서울대생 5명중 1명 “성경험”/8백3명 의식조사

    ◎남학생이 갑절… 혼전성관계 77%가 “긍정적”/통일에 부정적 영향 끼치는 나라 미·일 꼽아 서울대생들의 성의식이 날로 자유분방해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또 이들은 대부분 낙관적인 통일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사실은 서울대 사회학과 「사회학연구실습팀」(지도교수 설동훈)이 지난 5월말부터 서울대생 8백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뒤 28일 발표한 「서울대생의 의식과 생활에 관한 연구보고서」에서 밝혀졌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성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응답한 학생이 조사대상자 전체의 18.9%(남학생 21.4%,여학생9.9%)를 차지,지난해 같은 조사때의 16.2%보다 2.7%포인트 늘어났다. 혼전성관계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13.3%),「사랑한다면 가능하다」(48%),「결혼을 약속했으면 가능하다」(15.9%)등 긍정적인 대답이 77.2%로 지난해의 75·7%를 다소 앞질렀다.또 31·6%의 응답자가 결혼과 연애상대자는 다를 수 있다고 대답했다. 남북통일의 시기에 대한 견해는 10년이내(35.7%),20년이내(27.3%),20년이상(17.5%),5년이내(13.2%),불가능(5.7%),1∼2년사이(0.6%) 등으로 절반에 가까운 학생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가능한 것으로 내다봤다. 학생들은 또 분단의 원인을 민족정치세력의 분열(22.1%)이나 민족의 역량부족(20.6%)보다는 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의 재편과정(52·2%)에 따른 것이라고 대답했다. 통일의 장애요인으로는 정부의 노력부족(32.7%)이나 체제및 이념의 차이(17%)보다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43.5%)를 많이 지적했으며 통일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나라로는 미국(52.5%),일본(28.3%),러시아및 중국(각각 4.4%)등을 들었다.
  • 외언내언

    현대적 개념의 비자(VISA·입국사증)제도가 시작된 것은 1차세계대전때부터.외국인 간첩의 입국을 막으려는 목적에서 출발했다.지금은 이민억제나 노동인력 유입등을 조절하기 위해 다목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특정인에게 비자를 내주거나 발급을 거부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지금 미국과 중국간 미묘한 갈등을 빚게 한 이등휘대만총통에 대한 미국의 비자발급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세계가 급속도로 좁아지고 국경개념이 흐려지면서 비자발급조건도 완화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우리나라와 비자면제협정을 맺고 있는 나라의 수도 7월 현재 65개국에 이르게 됐다. 문제는 미국비자.미국비자 받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까다롭다.『미국비자 한번 받고나면 확실한 반미주의자가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도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금년에만 미국비자발급 신청자가 5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미대사관의 영사업무담당자수는 신청자가 10만명내외에 머물던 70년대와 크게 달라진게 없다.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느는데 공급은 제자리걸음인데서 오는 당연한 현상이다. 금품이 오가는등 비자비리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미국측에서는 예산이 없어 인원을 늘리기 어렵다는 것이나 비자를 받으려는 쪽에서는 미국사람들이 한국인의 불편정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인상도 받고 있다. 이번에 대통령을 수행해 미국에 갔던 공로명외무장관과 크리스토퍼 미국무장관이 26일 워싱턴에서 이 문제의 심각성에 공감하고 조속한 해결에 나서기로 합의했다.이어 주한미대사관에서 비자발급업무를 부산 대구 광주등 4곳으로 확대하는등 몇가지 개선안을 내놓았다. 늦었지만 다행한 일이다.레이니 미대사의 말처럼 비자발급 지연으로 미국이 「자기발에 총을 쏘는 격」이 돼서는 곤란하다.비자업무가 전적으로 당사국이 알아서 할 고유 영사업무라지만 일이 이토록 꼬이도록 방치한 우리 외무부도 문제다.반성이 있어야 할 것이다.
  • 원폭 원료 산화 우라늄 일 45년 독서 도입 기도

    ◎미 자료서 첫 확인 【도쿄 연합】 2차세계대전 말기인 45년 봄 독일의 키르군항을 출발해 일본으로 향하던 독일 잠수함(U보투)U-234호에 원자폭탄 원료인 산화 우라늄이 적재되어 있었던 사실이 미국 공식자료에서 확인됐다고 일본 지지통신이 27일 워싱턴발로 보도했다. 이 통신은 구일본제국군이 극비로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한 연구를 해온 사실은 알려져 있으나 실제원폭 원료까지 도입하려 했던 것으로 밝혀짐으로써 일제 대본영이 원폭제조에 매우 집착하고 있었음을 증명하게 됐다고 전했다.
  • 일본은 「일제 생체실험」 배상 나서라(해외사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50년이 지났는 데도 모든 사람들이 아직도 이를 사과하고 있다.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독일의 프랑스 점령 때 프랑스 사람들이 유태인 박해와 관련해 저지른 잘못을 사과했다.이어 일본도 과거 비슷한 시기에 군인들의 성적 위안을 위해 여자들에게 범한 잘못을 사과했다.그러나 일본의 경우 사과가 끝나기 전에 해야 될 일들이 아직 남아 있다. 대부분이 아시아인인 이 여자들은 정신대로 불리면서 일본군대가 정복한 지역에서 징용당해 와 일본군인들을 위한 창녀일을 하는 노예가 됐다.22만명이나 그같은 노예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이 범한 이런 잘못들은 지난 수십년동안 지적되어 왔다.지난주 일본의 무라야마 총리는 이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를 했고 생존자들의 보상을 위한 정부지원을 약속했다.그러나 일본은 전쟁중 살아있는 수형자들을 대상으로 행한 「과학적」 실험에 대해서는 보상이나 사과 등과 관련해 일언반구도 언급한 적이 없다.역시 아시아인이 대다수인 이들 실험대상 수인들 가운데는 마취없이생체해부를 당한 사람도 있다. 또 일본은 포로로 잡힌 미군이나 유럽군인에게 가한 고문과 학대에 관해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전쟁포로들을 대상으로 일본이 저지른 수많은 잔학행위가 거듭 증언되어 왔다. 포로들은 두들겨맞고 배를 곯았으며 총살당하거나 참수당했는데 때때로 일본장교는 재미삼아 이런 행위들을 태연히 저지르기도 했다.독일 수용소보다 일본 포로수용소의 사망률이 훨씬 높았다.살아남은 포로들은 플로리다에 소재한 강제구금자 권리센터 등을 통해 일본정부를 상대로 원상회복의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이 제소에 대한 재판은 일본법정에서 치러진다. 일본은 이들을 이런 재판의 수고로움과 경비부담및 고통 등으로부터 일거에 벗어나게 할 수 있다.일본정부의 자발적인 노력이 기대된다.
  • 스탈린·주은래 회담(모스크바 새 증언:26)

    ◎모,주은래 모스크바 파견… “휴전하자” 설득/“인명손실 막대… 김일성이 전쟁 원치 않는다”­주은래/“전쟁 끌면 끌수록 미에 불리” 강경입장 고수­스탈린 스탈린이 모택동,김일성 두사람의 거듭된 휴전 조기타결 요청을 묵살하자 모택동은 주은래를 모스크바로 보내 담판을 짓게했다.물론 이 노력도 스탈린의 마음을 돌려놓지는 못했다.다음은 A.비신스키와 N.페데렝코 두사람이 기록한 메모랜덤으로 52년 8월20일 스탈린·주은래 두사람의 회담내용이다.(러시아 국립문서소 관련 메모랜덤중 54∼72쪽) 스탈린의 입장을 잘 아는 주은래가 먼저 전쟁 옹호론부터 개진했다. 『주은래는 전쟁을 계속하는 게 유익하다는 모택동동지의 뜻을 전했음.왜냐하면 그럼으로써 미국이 새로운 세계대전을 준비하지 못하게 막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음.주는 그러나 김일성이 매일 당하는 인력손실이 우리가 미군으로부터 송환받으려는 포로숫자보다도 더 크기 때문에 전쟁계속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음. ○식량·무기 원조 약속 이 말을 들은 스탈린은 「모동지의 말이 옳다.이 전쟁은 미국에 큰 곤란을 안겨주고 있다.북한은 인명손실 외에는 잃는 것이 없다」고 답했음.특히 미국은 중국군이 조선에 참전한 뒤부터 이 전쟁을 서둘러 끝내고 싶어한다고 스탈린은 말했음.필요한 것은 인내라고 강조하며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계속했음.물론 많은 인명을 잃은 조선의 입장을 이해함.하지만 이 전쟁은 명분이 큰 전쟁임을 이해해야함.이번 전쟁으로 미군의 약점이 들어났음.24개국 군대가 전쟁을 오래 지탱할 수는 없음.조선동지들을 계속 도와주어야함. 주은래가 조선에 식량문제가 심각하다고 말하자 스탈린은 빵 원조를 늘릴 준비가 돼있다고 강조.주은래는 식량,의복등은 중국이 조선을 도와줄수 있지만 무기는 중국이 도와줄 수 없다고 말했음.그러자 스탈린은 추가무기원조를 해줄 수 있다고 확답했음.스탈린은 「조선에 대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끼지 않는다」고 말했음』 이 메모랜덤은 이어서 두 사람의 대화내용을 다음과 같이 요약 정리했다. 『주은래=우리는 협상에서 미국에 어떤 양보도 하지 않겠음. 스탈린=만약 미국이조금이라도 양보하면 받아들이고,그리고는 다른 문제를 계속 다룰 것. 주은래=적어도 1∼2년은 전쟁을 계속할 준비를 갖추어야함. 스탈린=동의함. 주은래=미국이 전쟁으로 곤란을 겪고 있다는 동지의 분석은 전적으로 옳음.이 전쟁에 전위역할을 함으로써 중국은 세계대전을 방지하고 있음.만약 우리가 조선에서 미국을 저지하면 최소한 15∼20년을 세계대전을 연기시키는 것임.그 다음 미국은 3차대전을 일으킬 힘을 영원히 잃게될 것임. 스탈린=옳은 말임.미국은 조선전쟁 이후 큰 전쟁을 일으킬 능력을 잃게 됨.그들의 힘은 공군력,원자탄에 있음.영국이 미국을 위해 싸우지는 않을 것임.미국이 만약 이번 전쟁에서 패하지 않으면 중국은 절대로 대만을 차지하지 못한다는 점을 명심할 것.미국인들은 모두 장사꾼이고 미군들은 모두 투기꾼들임.전쟁에서도 그들은 사고파는 일을 함.독일이 프랑스를 정복하는 데 30일이 걸렸음.미국은 벌써 2년이 지났는데도 작은 조선땅을 점령치 못하고 있음.미국의 무기는 스타킹,담배 따위의 물건임.미국은 세계를 점령하겠다고 하면서 작은 조선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음.원자탄,공습에 의존할 수 있겠으나 그런 방식으로 전쟁을 이길 수는 없음.지상군이 필요한데 미군은 지상군 숫자도 적고 허약함. 주은래=조선동지들은 남조선을 공습하는 방안을 생각중이나 옳은 일인지 확신치 못하고 있음. ○공군력 사용엔 반대 스탈린=공군은 국가의 것임.중국의용군이 국가 소유인 공군력을 사용해선 안됨』 주은래는 이어 북한의 입장이라며 새로운 공세작전을 시작하는 방안을 스탈린에게 타진했다.그러면서 중국은 김일성에게 새로운 공세작전 개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고 스탈린에게 밝혔다. 『스탈린=협상진행중 전략,전술을 막론하고 공격작전을 시작해서는 안됨. 주은래=중국정부는 판문점의 협상을 계속해야한다고 생각함.아울러 중국은 2∼3년 더 전쟁을 계속할 준비를 하고 있음.중국은 소련이 비행기,포,탄약을 추가지원해 주기를 바람. 스탈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겠음.조선내 사기는 저조한지. 주은래=매우 저조함.압록강의 발전소가 폭격당한 뒤 특히 나빠졌음.그래서 가능한 한 빨리 휴전을 하고 싶어함』 스탈린은 미국이 제일 즐겨하는 전략이 위협이라고 밝히고 그러나 미국은 중국에 위협을 주지 못했다고 말했다.그러면서 조선동지들은 겁을 먹었는지 물었다.주은래는 조선동지들이 조금 불안해하고 있다고 답했다.그는 『일부 조선지도자들이 겁에 질려 있다』고 말했다.스탈린은 자기도 김일성이 모택동 앞으로 보낸 전문을 읽어 그런 사실을 잘알고 있다고 했다.두 사람의 대화는 이렇게 스탈린의 주도로 끝났다. 사실 스탈린은 1년 전 전황이 기울어지기 시작하던 때부터 이같은 입장을 주장했다.51년 8월29일에도 그는 모택동앞으로 전문을 보내 휴전회담에 중립국 대표를 감독으로 참여시키자는 모의 제의를 일축한바 있다.(전문번호N49 54). 『협상성사를 더 원하는 쪽은 미국임.따라서 감독자격으로 중립국 대표들을 협상에 참여시키는 동지의 제의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함.그런 제의를 하면 자칫 우리가 협상타결을 더 원하는 것으로 미국에 비쳐져 협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가 있음』 당시 이 전문을받은 모택동은 바로 이튿날 답전을 보내 중립국 감독대표 참여방안을 철회한다고 밝혔다.이후에도 스탈린은 기회만 닿으면 전쟁을 끌수록 미국에 불리해진다는 논리를 수없이 되풀이했다. 다시 52년 상황으로 돌아가보자.9월14일에는 유엔기들의 평양시 공습이 있었고 협상교착으로 인한 무고한 인명피해는 날로 늘어만 갔다.그러나 스탈린의 입장은 요지부동이었다.52년 11월2일 소련은 당정치국 결의문을 채택,전쟁계속을 거듭 천명했다.(정치국결의안NBP2/19N2) ○전쟁계속 거듭 밝혀 『소련과 미국이 비밀협상을 진행중이라는 소문이 파다함.미국은 세계 여론에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이 소문을 굳이 부인하려하지 않음.우리는 공개적으로 이 소문을 부인해야함.왜냐하면 조선에서 적대행위를 계속하는 것은 실제로 우리의 반제국주의 투쟁에 유익하기 때문임』 반면 직접 의용군을 직접 참전시킨 모택동은 스탈린과 달리 1년전부터 휴전의 필요성을 완곡하게 내비쳤다.51년 11월11일 모택동은 스탈린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전문번호N25 902) 『지난 2개월간 전선에서 많은 인명피해가 있었고 미국내에서 군사행동을 중지해야한다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어 미국이 휴전조건을 채택할 가능성이 높아졌음.그럼에도 미국정부는 아직 국제상황을 긴장상태로 유지하려고 함.미국은 적극적인 정보활동과 유화 제스처를 병행하면서 실제로는 회담을 지연시키려하고 있음.…중략…적은 현전선을 휴전선으로 만들자고 요구하고 우리는 이에 반대하고 있음.다만 우리는 38도선 휴전문제를 정치협상 개시 때까지 유보할 의향은 있음.왜냐하면 현재 38도선 이남에 우리가 점령중인 서해안의 강 하구 구릉지대를 잃고 싶지 않기 때문임.이곳은 농업생산량이 풍부할뿐 아니라 서울로 진출하는 교두보가 되기 때문임.…중략… 우리는 금년중 군사행동 중단을 성사시키고자 함.또한 적이 휴전회담을 지연시키고 결렬시킬 경우에 대비하고 있음.또한 휴전회담이 반년 내지 1년 장기화될 것에 대비해 현위치를 고수하기 위한 인적,물적 자원을 비축하고 있음.협상을 통한 평화달성이 우리에게 유리한 것은 사실임.하지만 우리가 협상지연을 두려워하는 것은 아님』 모택동이 보낸 전문에서 알 수 있듯 휴전협상과 관련,모택동과 스탈린 두사람은 분명히 서로 다른 입장을 갖고있었다.모택동이 현상황에서 휴전이 유익하다고 솔직히 말한 반면 스탈린은 휴전을 더 바라는 쪽은 미국이니 협상에서 절대 양보하지 말고 밀어부치라는 강경입장을 고수했던 것이다. ◎새로 밝혀진 사실/스탈린,종전요청 끝까지 거절/한국전쟁 이용 미에 대응 속셈 이번 회에는 전쟁중인 52년 8월 주은래가 모스크바를 비밀리에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하였다는 사실이 나온다.물론 최초로 공개되는 사실이다. 주은래의 갑작스런 모스크바 방문은 중소간에 커다란 견해차가 있었음을 의미한다.그것은 전쟁의 계속 여부 문제였다.주은래는 중국의 의견은 일단 접어둔 채 김일성과 북한의 입장을 들어 완곡하게 전쟁의 종결을 건의하고 있다. 그러나 스탈린은 『북한은 잃는 것이 인명 뿐』이라며 이 전쟁이 미국에게 끼치는 큰 곤란을 들어 북한(과 중국)의 종전의사를 한마디로 거절하고 있다.스탈린의 의도와 차가운 성품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결국 주은래도 『이 전쟁에 전위역할을 함으로써 중국은 세계대전을 방지하고 있다』고 동의하고 있다.그러나 51년 11월11일 모택동의 전문은 『금년중 군사행동을 중단시키고자 한다』는 강한 종전의사가 분명하게 들어 있다.중국은 막대한 손실을 입으면서도 스탈린의 강한 전쟁지속 의도로 인해 어쩔 수없이 계속 끌려가고 있었던 것이다.스탈린은 교묘하게도 중국의 대만통일 의지를 이용하여 이번 한국전쟁에서 미국을 패배시켜야만 중국의 통일이 가능하다는 점을 상기시키기까지 하고 있음도 밝혀졌다. 스탈린의 모든 전략전술의 초점은 한반도 통일이나 동북아 정세가 아니라 오직 미국에 대한 대응과 세계적 규모의 대립의 방지를 위해 한국전쟁을 이용하는데 놓여 있었다.이 문제와 관련,52년 11월2일의 소련공산당 정치국 결의는 충격적이다.『조선에서 적대행위를 계속하는 것은 실제로 우리의 반제국주의 투쟁에 유익하기 때문이다』
  • 크림슨 타이드/탈냉전시대 액션스릴러 영화

    ◎가공할 핵전쟁 위험성 고발… “짙은 호소력”/군사 위기상황 생방송 화면처리 돋보여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어버린 오늘날 동서냉전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한 영화가 얼마만큼의 호소력을 지닐 수 있을까.오는 8월5일 개봉될 액션 스릴러영화 「크림슨 타이드」(원제 CRIMSON TIDE,감독 토니 스콧)는 우선 전형적인 냉전영화의 틀을 갖추고 있어 눈길을 끈다. 영화는 러시아의 정정불안을 틈탄 구소련 군부 강경파가 군통수권을 장악한뒤 미국 본토를 겨냥한 3차 세계대전 가상시나리오를 구체화하면서 시작된다.미국은 그들이 핵미사일 암호를 수중에 넣기전에 진압키로 결정하고 핵잠수함 앨라배마호를 파견한다.미 핵잠수함 앨라배마호는 러시아 핵미사일 기지 근해로 향하는 도중 러시아 잠수함의 어뢰공격을 받고 일대 혼란에 휩싸인다.이 지점에서 영화의 초점은 잠수함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75일간 벌어지는 군수뇌부간의 긴박감 넘치는 심리전으로 옮겨진다.그 두뇌게임의 주인공은 실전파 함장 프랭크 램지(진 해크먼)와 원칙파 부함장 론 헌터(덴젤 워싱턴).전혀 상이한 성격의 이들 두 지휘관이 위기상황에 처해 벌이는 대립과 갈등이 영화의 축을 이룬다. 경직된 냉전적 사고를 바닥에 깔고 핵전쟁의 위험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 다소 철지난 듯한 인상을 주지만 신뢰할만한 소재의 이야기를 깔끔한 액션에 담아낸 점이 돋보인다.특히 영화의 도입부와 마지막 러시아 내전과 군부의 권력암투,그에 따른 군사 위기상황을 미국 CNN방송의 생중계 장면으로 처리한 것은 영화의 생동감을 더해준다.행진곡풍이면서도 고전적인 장중함이 녹아있는 한스 짐머의 음악도 「군사영화」의 분위기와 어울린다. 한편 이 작품에서 영화의 흐름과 상관없는 경주마 이야기가 해군 수뇌부 사이의 화제로 올려지고 있는 것은 흑백 인종주의 갈등을 은근히 비꼬기 위한 감독의 고단위 연출로 보인다.『포르투갈산 리피자너는 모두 백마』라는 램지 함장의 말에 헌터 부함장이 짐짓 수긍하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것은 스페인산이며 태어날땐 블랙』이라고 응수하는 대목은 퍽 시사적이다. 「크림슨 타이드」는 전편을 통해 전문적인 해군용어가 범람할뿐 아니라 여성배역이 거의 없는 이른바 「가이즈 무비」(Guy‘s Movie)다.그런만큼 감각적인 오락영화에 길들여진 관객들에겐 1백28분의 상영시간이 좀 길게 느껴질 수도 있다.그러나 이 영화는 「진홍빛 조류」란 강한 제목이 암시하듯 가공할 핵전쟁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평가를 받을 만하다.
  • 일제 45년 동해서 원폭 실험/미 학자 주장

    ◎북한 흥남에 연구동 설치 【워싱턴 교도 연합】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중 현재 북한에 있는 흥남에서 원자탄개발 작업을 수행했다고 미국의 전 정보분석가가 21일 밝혔다. 미국 메릴랜드 대학의 디어도어 맥넬리 명예교수는 이날 워싱턴서 열린 태평양전쟁에 관한 포럼에서 관련문서 및 미정보소식통들과의 인터뷰를 근거로 이같은 분석결과를 내놓아 패널리스트들과 청중들의 주목을 끌었다. 2차대전중에는 미육군보안국(ASA) 분석가로,전후에는 도쿄에 있는 더글러스 맥아더장군 휘하의 민간정보부에서 일한 맥넬리 교수는 『지난 45년 도쿄에 위치한 니시나 요시오 박사의 핵연구시설을 파괴한 미군 폭격기의 공격권밖에 있던 흥남에 일본의 대규모 핵개발시설이 있다는 보고가 끊이지 않았었다』고 말했다. 맥넬리 교수는 『그같은 추정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일본은 45년 8월12일 동해에서 원자폭탄 실험을 했다』고 말하고 이같은 배경을 근거로,흥남에는 방사성 금속원소로 원자분열물질인 토륨개발을 위한 중요한 시설이 실제로 있었으나 개발수준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 중·일전쟁 기념일 대만서 반일시위

    【대북 AP 연합】 대만이 7일 중·일전쟁 발발 기념일을 맞아 일련의 행사를 시작한 가운데 대만 시위대 1백여명은 이날 대북시가지를 행진하면서 히로히토 전 일왕과 제2차 세계대전 전범인 도조 히데키 전 총리에 대한 화형식을 거행하는 한편 교류협회 대북사무소에 달걀을 던지면서 일본의 사과를 요구했다.
  • 제2부 시베리아 횡단철도/“출발” 모스크바(시베리아 대탐방:16)

    ◎총길이 9,288㎞… 러시아의 대동맥/시경계 벗어나면 별장 「다차촌」이 눈앞에/출발 1시간만에 차창밖은 침엽수림으로/철길따라 늘어선 「베료자」 숲은 “러시아인의 정서” 서울신문 창간50주년기념 특별기획연재물 「시베리아 대탐방」은 지난 주 15회로 1부를 끝내고 이번 주 16회부터 제2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시작한다. 본사 이기동 모스크바특파원과 사진부 송기석 특파원이 20여일동안 이 열차를 탑승,철도주변의 모습과 자원,자연환경 등을 컬러사진과 함께 재미있고 생생하게 전할 예정이다. 시베리아 대탐방 제2부는 주2회 수요일과 목요일에 연재한다. 하오 2시 정각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기점인 모스크바의 야로슬라블역을 출발했다.출발한지 불과 35분만에 북부시경계를 벗어나 모스크바주(오블라스치)로 들어서자 곧바로 확트인 대지가 차창밖으로 모습을 드러낸다.그리고 대지와 숲 사이로 러시아인들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재산목록 1호 「다차」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다차는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별장」이지만 호사스런 별장이 아니라 그곳에서 남새도 키우고 신선한 공기속에 이웃들과 보드카도 실컷 마시는 주말농장같은 곳이다. 다차의 어원은 러시아어 「다바치(받다)」에서 유래된 것.제정 러시아시절 황제 차르가 총애하는 귀족들에게 땅떼기를 선사한데서 나온 말이지만 소비에트시절 일반노동자들에게 골고루 보급돼 지금은 모스크바시민 70∼80%가 다차의 주인이다.5월부터 겨울이 시작되는 9월까지 매주 금요일 하오만 되면 다차로 향하는 시민들로 모스크바시의 외곽도로는 지독한 교통체증을 빚을 정도다.물론 주말이면 모스크바 시내는 완전히 빈도시가 되다시피 한다. 다차 마당에 나와 감자를 심는 사람들의 모습이 간간이 보인다.러시아인들은 봄 5월15일을 기준으로 감자씨를 뿌리기 시작한다.특별한 이름이 붙은 절기는 아니지만 이날이 지나면 혹독한 추위는 더 이상 오지 않는다는 속설 때문이다. 다차촌이 시작되며 러시아인들의 정서적인 심벌,「베료자」나무들이 나타난다.목재로 쓸 수 있는 나무는 아니지만 시베리아끝까지 줄곧 길동무가 될 나무들이다.우리의 백양목과 비슷한데 우랄에서 동시베리아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돼 있고 겨울이 물러가면서 연푸른 잎을 달기 시작하기 때문에 우리의 시베리아 횡단길에 계절의 경계를 알려주는 「잎의 화신」역할을 하게된다.우리에게는 베료스카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이는 베료자에 예쁘고 귀여움을 나타내는 접미사 「카」가 덧붙은 말이다. 다차촌은 모스크바 시경계를 중심으로 반경 2백50㎞까지 계속된다.그리고는 황량한 대지와 베료자숲이 계속되다가 다음 도시의 다차촌이 또 나타난다.대도시 주위에는 반드시 다차촌이 형성돼있다. 출발 한시간이 지나자 푸슈킨의 이름을 딴 푸슈키노역이 지나고 역한편에 증기기관차 시절의 유물인 사일로같이 생긴 물탱크가 지나간다.높이 20여m에 붉은벽돌과 나무로 만들어 지나는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던 시설이다. 시베리아철도는 현재 공사가 진행중인 하바로프스크∼블라디보스토크간을 제외 하고는 전구간이 전철화됐다.따라서 물태크는 이제 역할이 없어진 철도의 장식품에불과하다. 우리가 탄 차는 종착역이 블라디보스토크인 「러시아2호」특급열차.방 하나에 침대 2개가 마련돼 있어 객차 한칸에 승객수는 20명안팎에 불과한 최고급 이다.격일로 홀수날만 모스크바를 출발하는데 종착역까지 계속 갈 경우 6박7일이 걸리기 때문에 좋은 이웃을 만나는게 보통 복이 아니다. 모스크바에서 야로슬라블까지를 시베리아철도의 제1구간으로 부르는데 이는 건설기간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이 구간은 두단계로 나누어지는데 첫째 구간은 모스크바에서 세르기예프 파사드까지로 1862년에 건설됐다.모스크바에서 시베리아로 뻗는 최초의 철도인 것이다.이 선은 1870년에 2단계로 야로슬라블까지 연장됐다.세르기예프 파사드는 당시 러시아제국의 종교적인 수도였다.지난 91년 이름이 바뀌기 전까지 볼셰비키의 이름을 딴 자고르스크로 불렸으며 모스크바에 들르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르는 명승지다.그 다음 야로슬라블은 종교적인 의미 외에도 모스크바에 있는 공장들을 볼가강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산업적인 고려 때문에 건설됐다.이구간이 개통됨으로써 모스크바에서 생산된 각종 공산품들은 당시 가장 가까운 볼가강 항구인 이 야로슬라블을 통해 카스트로마·니즈니노보고르드·체복사리·카잔등 볼가강변의 크고 작은 도시들로 공급될 수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시베리아행 열차의 종착역은 야로슬라블이었는데 이 때문에 모스크바의 시베리아철도 출발역 이름은 야로슬라블역이다.모스크바의 역 이름은 모두 행선지 이름을 따서 만든게 재미있다.예를들어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열차가 출발하는 역은 레닌그라드역이다.키예프로 가는 열차는 키예프역,백러시아로 가는 열차는 백러시아역…하는 식이다. 출발 1시간이 지나면서 차창의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한다.침엽수림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침엽수·활엽수의 혼재상태가 이어진다.벌써 타이가(삼림지대)의 분위기가 나타나는 것이다.모스크바에서 멀어질수록,그리고 타이가에 가까워질 수록 침엽수의 몫이 더 많아진다. 계속되던 다차촌은 세르기예프 파사드를 기점으로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20년대 최대 출판단지(콤비나트)였던 프라우다신문이 종업원들을 위해 만든 다차촌 「프라브딘스키」역을 지나면서 다시 막막한 베료자숲이 대지를 수놓기 시작했다. ◎횡단철도란/수도 모스크바서 극동 블라디보스토크 연결/1891년 첫삽,25년만에 완공… 6박7일 걸려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모스크바에서 시작해 시베리아대지를 가로질러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총길이 9천2백88㎞에 달하는 세계 최장의 철로이다.특급열차로 달릴 경우 꼬박 6박7일이 걸리는 거리다.지구둘레의 3분의 1에 가까운 거리며 시간이 바뀌는 시간대만도 7개나 지난다.일명 「대시베리아철도」로도 불리는 이 철도는 제정러시아 때인 1891년5월19일 착공돼 25년만인 1916년 쿠즈네츠∼하바로프스크 구간을 끝으로 완공됐다.물론 많은 구간은 기존 노선을 보완해 연결했다.이 철도의 등장과 함께 지구의 최대 자원보고인 시베리아도 본격개발의 계기를 맞았다.인구유입이 촉진돼 철로변을 중심으로 잇따라 대도시가 등장했고 대학·도서관·극장등이 들어서 문화적 대변혁을 가져왔다. 특히 2차세계대전중 모스크바·레닌그라드등 유럽쪽에 있던 많은 공장·문화기관들이 이 철도를 따라 대거 시베리아로 옮겨져 이 지역의 현대화에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지금은 최대 공업지대인 우랄지구·쿠즈네츠탄전·북부의 석유·가스산지를 유럽쪽으로 연결해 주는 러시아의 산업 대동맥 구실을 하고있다. 2차대전 종전 직후부터 전노선의 전철화가 시작돼 75년 거의 마무리됐으며 현재 공사가 진행중인 하바로프스크∼블라디보스토크구간을 제외한 전구간이 전철화됐다.현재 대시베리아철도는 연방철도부 산하에 반독립기구로 우랄철도부·옴스크철도부·사할린철도부 등 약 20개의 지방 철도부가 나누어 운영하고 있다.앞으로 전구간 복선화·전철화,그리고 바이칼∼아무르구간(BAM철도)완공과 함께 만성 적자를 탈피하기 위한 서비스 개선,경영합리화 등이 과제로 남아 있다. 현재 유럽으로 가는 우리나라 화물의 일부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 철도를 이용해 육로로 값싸고 빠르게 운송되고 있다.앞으로 남북관계가 원만히 풀리면 직접 육로로 유럽까지 연결해줄 철도가 바로 시베리아 철도라 이 철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더 하다.
  • 영 마거릿공주 애인/피터 타운센드 사망

    【파리 AP AFP 연합】 2차세계대전의 영국군 전쟁영웅이자 엘리자베스2세 영국 여왕의 여동생 마거릿공주의 애인이었던 피터 타운센드가 암으로 19일밤 파리에서 사망했다고 파리주재 영국대사관이 20일 발표했다.향년 80세.
  • 「북 지원」 기우는 북경(6·25내막 모스크바 새 증언:14)

    ◎중 수뇌 “혁명 완성위해 참전” 당위성 역설/러국위문서보관소 미공개자료 9백50건으로 엮는 시리즈/유소기 “이제 중국이 북조선 도울 차례” 개입 지지/중·소 인천상륙작전 이후 긴밀하게 작전 협의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 사흘뒤인 50년 9월 18일 주은래는 북경주재 로신소련대사와 소련군사고문단의 코토프,코노프 장군을 불러 한국전 상황에 관해 의견을 나누었다.크게 당황한 모습의 주는 이들에게 중국은 인천상륙작전을 신문보도와 평양라디오방송의 보도를 통해서야 알았다고 불평했다. ○주,인천상륙에 당황 로신대사가 같은날 스탈린에게 보고한 이 면담내용에 따르면 주는 북조선동지들과 중국군의 연락이 매우 어렵다고 밝혔다.그는 북조선군의 작전계획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고 말하고 북조선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군사관구에서 중국군 대표를 북한에 파견해 현지상황을 파악토록 하겠다는 요청을 보냈는데도 북조선에서 아무 회신이 없다고 불평했다. ○“모충고 무시” 큰 불만 이와 함께 주은래는 지금까지 모택동이 수차례 해준충고와 예견을 북조선 지도부가 모두 무시했다며 큰 불만을 표시했다.심지어 평양주재 중국대사가 작전관련 정보를 받지 못해 제때에 본국에 보고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따라서 중국정부는 인천의 진짜 상황을 모르며 그 때문에 일관성 있는 입장을 취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그는 이와 함께 공식적인 보고에 의거해 다음과 같은 작전관련 주문을 내놓았다.(로신 대사가 스탈린앞으로 보낸 보고전문) 『1.만약 지금 북조선이 서울과 평양지역에 병력 10만명을 보유하고 있다면 충분히 상륙작전으로 들어온 적을 궤멸시킬 수 있다.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주전력을 전선으로부터 북으로 후퇴시킬 필요가 있다.전선에는 적의 진격을 저지할 일부의 병력만 남긴다.미군을 방어지역에서 밀어내 전전선으로 분산시킨 다음 치밀한 작전을 통해 이들을 하나하나 분쇄할 필요가 있다. 2.주공격부대를 창설해 이를 결정적인 전투에 대비,비밀리 유지할 것』 이같은 주문을 한 다음 주은래는 소련정부가 한국전상황에 대해 갖고 있는 정보를 공유해줄 것을 모택동을 대신해로신대사에게 부탁했다.그는 최근 한국전상황이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갑자기 중국의 유엔가입문제를 끄집어냈다.미국이 대통령선거를 치르기까지는 중국의 유엔가입을 계속 반대할 것으로 본다며 미국이 입장을 바꾸는 즉시 중국은 유엔에 가입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이었다. 주는 또한 미·영·불이 소련·중국의 한국전 무력개입 가능성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왜냐하면 이들 나라들은 한국에서 장기적인 대규모 전쟁을 벌일 준비가 안돼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주는 이같은 두려움을 더욱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며 중국이 중국남부 주둔 병력 일부를 만주로 이동시키자 미·영정부가 크게 겁을 먹었다고 말했다. 로신 대사는 주가 소련측에 요청한 사항은 즉각 본국에 보고하겠다고 말하고 중·북조선간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중국대표단이 북조선을 방문하는게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한편 9월 20일 스탈린은 로신대사의 이 보고내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북조선지도부가 중국동지들에게 조선전쟁 상황에 대해 제대로 알리지 않은 것은 물론 잘못이다.하지만 우리는 김일성이 고의로 그랬을 것으로 생각지 않음.아마도 전선과의 통신불량으로 인한 문제로 생각됨.모스크바도 평양주재 대사로부터 이따금씩 그것도 낡은 정보를 보고받고 있음.모두가 북조선인민군이 창설된지 얼마되지 않고 경험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들임.인민군 사령부와 전선병력사이의 통신이 아주 불량한 수준임.전선의 보고수준이 불량해 제때 분석이 안됨. 거듭 말하거니와 북조선 당·군 모두 미숙함.불과 3개월의 전쟁경험밖에 없는 북조선군이 완벽한 장비를 갖춘 외국군대를 맞아 그정도 인상적인 전과를 올렸다는게 오히려 놀라운 일임.제물포(인천)의 패배는 인민군이 이승만뿐 아니라 영·미군을 함께 상대해야 하기 때문에 당한 것임.만약 이승만정권만 상대했다면 조선반도의 반동세력을 오래 전에 일소했을 것임』 ○스탈린,중·소 공조 다짐 스탈린은 이와 함께 다음의 4가지 사항을 모택동에게 전달했다.『1.대대·연대가 개별적으로 적과 싸우는 전략은 잘못됐음.이는 전략손실만 자초할뿐임.2.주전선에서 병력을 대부분 철수시켜 서울 동북부에 강력한 방어선을 새로 만들어야 함.3.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더 힘들어졌음.소련대표단이 유엔에서 중·소의 평화해결방안을 계속 역설하겠음.4.미국은 중국의 유엔가입 거부입장을 계속 유지할 것으로 보임.소련대표단은 국민당대표의 유엔축출을 계속 요구하겠음』인천상륙작전으로 인해 어려워진 전황을 반전시키기 위한 작전변경과 함께 중·소의 국제적 공조체제를 재다짐하는 내용이었다. 이 무렵 중국측에서는 장기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과 함께 국면타개를 위해 어차피 중국측이 어느 정도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개진되기 시작했다.로신대사는 스탈린의 지시를 전하기 위해 주은래를 다시 만난뒤 이같은 중국측의 분위기를 9월 21일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중국쪽의 참전지지 분위기를 보다 분명히 표시한 사람은 유소기였다.이날 유는 소련아카데미 회원 유딘을 위해 자신이 주최한 만찬에서 한국전 상황을 상세히 분석한 뒤 중국사회 각층의 이같은 참전지지 분위기를 이야기했다.9월 22일 로신대사가 본국에 보고한 전문중에서 유소기의 발언중 참전관련 부분만 소개한다. ○일부선 개입에 반대 『노동자,농민,혁명적 지식인들 다수는 중국혁명이 진행되는 오랜기간 동안 북조선이 중국을 도왔다고 믿고 있다.이제 중국이 북조선을 도울 차례라고 말한다.이들 다수는 미제국주의를 증오한다.민주정당 지도자들도 정부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물론 일각에서는 3차세계대전이 일어나 중국이 다시 고통을 당할까 두려워한다.활발한 정치선전 덕분에 중국군내 장교·사병 다수는 사기가 충천하다.필요하다면 미제국주의와 맞서 싸우겠다는 기세이다.미군의 사기는 크게 높지 않다는 판단이다. 물론 조선전쟁에 개입하지 말자는 의견도 있다.오랜 전투를 치르다보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도 많다.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극소수일뿐이다.중국공산당 지도부에서는 미제국주의를 분쇄하기 전에 중국혁명은 완성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미국이 북조선을 위협하는한 중국은 북조선 동지들을 도와야 한다고 지도부동지들은 믿고 있다』 중국혁명의 완성을 위해서라도 한국전에 참전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역설한 것이다. 이 전문보고와 같은 날인 9월 22일 모택동이 유딘을 불러 역시 중국의 참전 필요성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로신대사가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9월22일). ○“미,장기전 준비 미비” 『트루먼이 6월말 남조선과 대만에 미군을 보내기로 한 결정은 큰 실책이었다.그 때문에 영국의 입장이 난처해졌다.영국은 한편으로는 남조선에서 미국의 입장을 지지해야 하고 한편으로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했기 때문에 미군의 대만파병을 지지할 수 없는 입장이다.현재 남조선에서 미군의 군사활동을 보면 그곳에서 장기적인 대규모 전쟁을 치를 준비가 안돼 있다.그들이 하는 것은 소련·중국의 반응을 떠보고 군사력을 시험하는게 목적인 것 같다.모택동은 미군이 큰 분쟁을 일으키지 않고 다시 타협할 명분을 찾을지 모른다고 했음.이와 관련,미국이 중국의 유엔가입 가능성을 모색할 수도 있다고 모는 보았음.미국이 중국의 유엔가입을 반대하고 대만에 병력을 파병한데 대해 인도·필리핀같은 나라가 반대한 것이 이런 가정을 뒷받침한다고 모는 주장했음』 모는 이와 함께 『적어도 미국과 외교관계가 수립되고 유엔가입이 허용될때까지 중국은 아시아에서 미제국주의에 맞서 공개적으로 투쟁할 명분을 갖고 있다』며 한국전 참전을 시사한것이다.
  • 중국의 개입(6·25내막/모스크바 새 증언:13)

    ◎모택동,전쟁초기부터 중국군 파병 준비/미군 38선돌파 대비 목단지역에 병력 12만 집결/소에 “공중호위” 지원요청… 스탈린 “즉각제공” 통보 모택동은 전쟁준비단계에서부터 김일성의 남침계획을 적극 지지했고 나아가 필요시 중국군을 직접 파병하겠다는 약속을 수차에 걸쳐 한바 있다.그러나 모택동은 김일성이 전쟁계획을 구체화시키면서 스탈린을 주의논 상대로 삼은데 대해 매우 섭섭한 감정을 가졌음을 알수 있다.이런 양상은 결국 모택동으로 하여금 중국군 파병을 여러 차례 거부하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했다. 전쟁초기부터 중국이 한 역할을 살펴보자.전쟁발발 직후인 50년 7월 1일 북경주재 로신 소련대사는 스탈린 앞으로 다음과 같이 중국정부의 분위기를 보고했다.(로신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중략…미국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남조선 괴뢰들은 완전한 패배를 겪고 있음.남조선당국은 미국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렸음.트루먼이 조선에 대한 군사개입을 명령한 것은 심사숙고해 내린 결정이라기 보다는 좌절감의 표시임.극동에서 패배를 경험한미국은 유럽뿐 아니라 중근동에서 마저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는 데 우려를 표하기 시작했음.이런 점으로 미루어 미국은 소련이 이끄는 평화·민주진영과의 대규모 군사대결을 벌일 태세가 안돼있음을 알 수 있음』 ○김·스탈린 밀착에 불만 이튿날인 7월 2일 주은래는 로신 대사를 불러 한국전에 대한 중국정부의 입장을 전달했다.로신대사는 면담직후 곧바로 이를 전문으로 보고했다.(로신의 본부보고.전문번호N1112­1126)『중국정부는 미국이 막강한 일본점령군 12만중 6만명을 한국에 투입할 수 있다고 보고 있음.이들은 부산,마산,목포에 상륙한 다음 철도를 이용,북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있음.따라서 인민군은 남진을 서둘러 이들 항구를 점령해야함. 모택동은 서울을 사수하기 위해 인천(제물포)지역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믿음.본대사는 주은래에게 일본군이 개입을 준비중이라는 게 사실이냐고 물었음.중국은 그런 정보를 갖고있지 않다고 답했음.주은래는 또한 만약 미군이 38도선을 넘을 경우 중국인민해방군이 조선군인으로 변장해의용군으로 전쟁에 참전할 것이라고 말했음.이를 위해 중국지도부는 이미 목단 지역에 3개군,총12만 병력을 집결시켰다고 밝혔음.주은래는 소련공군이 이 병력을 위해 공중호위를 제공할수 있는지 물었음. 주은래는 한국전 상황에 언급하며 북조선이 미국의 군사개입 가능성을 과소평가했다고 강조했음.모택동이 49년 5월부터 개전당시까지 줄곧 이 점을 지적했는데 북조선이 이를 무시했다고 함』 한편 이 전문을 본 스탈린은 7월 5일 중국이 한국전에 병력을 파병할 경우 이들을 위해 공중지원을 제공하겠다는 답신을 보냈다.(스탈린이 주은래앞으로 보낸 전문.N3172)스탈린은 주은래에게 『귀측이 적군이 38도선을 넘을 경우 의용군으로 북조선에 투입시키기 위해 9개 중국군 사단을 중·조 국경에 즉각 집결시킨 것은 올바른 판단으로 생각됨.우리는 이 병력들에 공중지원을 제공키 위해 노력하겠음』이라고 밝혔다. 7월8일 스탈린은 모택동 앞으로 전문을 보내 평양에 중국대표부를 설치해달라는 김일성의 뜻을 대신 전달했다.(전문번호N3231).스탈린은 『조선동지들이 조선에 아직 중국대표부가 없다고 불평함.제반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고 통신을 원할히 하기 위해 중국대표부를 조속히 파견해줄 것을 희망함』이라고 밝혔다. 7월13일 스탈린은 로신대사에게 전문을 보내 중국군 9개 사단의 국경집결문제에 대해 재차 문의하고 소련공군 지원의사를 거듭 밝혔다.(전문번호N3805).『소련대사앞.다음의 전문을 주은래와 모택동에게 전달할 것. …중략…우리는 귀하가 9개 중국군사단을 조선과의 국경에 배치키로 결정했는지 모르고 있음.배치키로 했다면 우리는 제트전투기 1개사단,1백24대를 이 병력의 공중지원을 위해 보낼 준비가 돼있음.우리는 2∼3개월간 소련조종사들로 하여금 중국군 조종사들을 훈련시킬 계획임.그 다음 모든 장비를 귀측 조종사들에게 넘기겠음.상해주둔 항공사단에 대해서도 같은 조치를 취하겠음』 ○부산 등 항구점령 촉구 중국군 참전시 소련기의 공중지원뿐 아니라 중국군 조종사들의 훈련 및 공군장비 일체를 공급키로 약속한 것이다. 한편 로신 대사는 7월 13일 본국으로 보낸 정보보고를통해 당시 영국대사관의 브라이언 참사관이 한국전쟁에 대해 말한 견해를 보고했다.브라이언 참사관은 한국전쟁이 미국과 소련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합작으로 일으켰다는 황당무계한 분석을 한 것으로 이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브라이언 참사관이 『중국이 대만을 점령해 강대국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소련과 미국이 연합해 한국전을 일으켰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이 보고서는 적고 있다. 이런 가운데 모택동은 전쟁초기부터 미군의 본격개입과 그에 대비한 중공군의 참전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후일 형식적으로는 스탈린이 김일성의 요청을 받고 모택동을 설득,중국군의 한국전 참전이 이루어졌지만 실제로 모택동은 전쟁초기부터 스스로 중국군 파병에 대한 결심을 하고 그에 따른 준비를 진행시켰던 것이다. 8월19일 모택동은 소련과학아카데미 회원인 유딘과 장시간에 걸친 면담을 가졌다.유딘은 공식적인 방문목적이 모택동의 이론서를 집필하기 위한 준비라고 밝혔지만 사실은 스탈린의 지시를 받고 모택동의 의중을 탐지키 위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유딘은 후일 중국대사를 지냈다.로신대사는 두사람의 대화내용을 이튿날인 8월 20일 스탈린 앞으로 보고했다. 『한국전상황에 대해 모택동은 2가지 시나리오를 상정했음.(1)미군이 지금같은 전력으로 계속 전쟁에 임할 경우 그들은 조만간 남조선에서 밀려나 다시는 남조선문제에 개입하지 못할 것이다.물론 모택동은 이를 가장 바람직한 시나리오라고 강조했음. (2)미국이 한국전에서 승리하려면 최소한 30∼40개 사단이 필요함.그럴 경우 북조선군은 자기들 힘만으로는 현재의 전황을 지속시킬 수 없고 중국의 지원이 필요함.중국이 지원하면 미군 30∼40개 사단은 「분쇄할 수 있다」고 모택동은 말했음.그러면 3차세계대전은 뒤로 미루어지고 소련,중국 모두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는 것이라고 모는 강조했음. 모택동은 이와함께 미국이 한국전에 개입한 것에 대해 국제적으로 비난선전을 강화할 것을 주장했음』 ○미 참전 비난선전 강화 8월 29일 모택동은 유딘을 위해 만찬을 베풀었다.이 만찬석상에서 모는 한국전에 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소련대사관이 스탈린앞으로 보낸 전문.8월 28일) 『모택동은 최근 상황에 비추어 미국이 남조선파병 병력을 크게 증가시키기로 결정한 것같다고 말했음.모는 따라서 8월 19일 유딘과 면담시 언급한 시나리오중 두번째 시나리오의 실현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했음.미국은 이미 중·조국경지역을 공습,중국에 도발하고 있다고 모는 강조했음』 모택동은 8월과 9월 두차례에 걸쳐 북한대표단을 접견하고 그들과 한국전 상황에 대해 협의했다.여기서도 모는 한국전이 기본적으로 두가지 방향으로 전개될 것임을 전제,이에 대비할 것을 강조했다.9월 2일 주은래는 로신대사를 불러 모택동과 북조선대표단과의 회담내용을 설명했다.다음은 9월 3일 로신대사가 스탈린 앞으로 보고한 전문. 『모택동은 두가지 시나리오를 이야기했음.최상의 시나리오인 첫번째는 인민군이 미군을 패배시켜 몽땅 바다로 쓸어내는 것임.두번째는 장기전으로 가는 것임.이 경우 미국은 대구∼부산을 사수하기위해 총력전을 펼 것임.이렇게 되면 그들은 인민군 주력을 이곳에 묶고 상륙작전을 비롯해 다른 여러 지역에서 자유롭게 작전을 벌일수 있게 됨. ○김일성에 장기전 권유 모택동은 북조선대표단에게 이 두번째 유형에 대비,전력을 모으고 제물포∼서울,진남포∼평양지역의 경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라고 주문했음.모는 이와함께 적군과 중국인민군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북조선군은 전략상 실책을 범했다고 지적했음.즉 작전의 목적을 적의 전력을 궤멸하는 데 두는 대신 전력을 전전선에 공평하게 배치,적을 밀어내고 영토를 점령하는 데 두었다는 것임.그리하여 적이 쉽게 이를 간파,반격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임. 덕분에 미군은 쉽게 후퇴,대구∼부산지역에 확고한 방어선을 구축했음.모택동은 인민군을 전전선에 배치하지 말고 필요하다면 신속한 후퇴도 생각해야한다고 강조했음.아울러 새전선으로 전력을 이동시키는 문제도 고려하자고 주문했음.결론적으로 장기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음』 모택동은 미군의 대응이 심상치 않음을 간파,북한측에게 장기전에 대비할 것을 권유한 것이다.그러나 김일성은 이를 심각히 받아들이지않고 기존의 전면공세를 계속했다.그러던 차에 9월 15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돼 전황을 결정적으로 뒤바꾸어놓은 것이다. ◎새로 밝혀진 사실/“중국군 조종사 훈련·장비양도 약속”/스탈린,중국참전 유도 끈질긴 노력 우리는 이번 회를 통해 전쟁이 모스크바­북경­평양의 긴밀한 협의하에 치러졌으며 그 협의의 중심축은 모스크바­평양,모스크바­북경의두 채널이었지 북경과 평양간에는 이에 준하는 협의가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북한에 중국대표부를 설치해달라는 북한측의 의사도 스탈린을 통해서 중국에 전달될 정도였다. 중국측은 이에대해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었음이 이번 자료에 밝혀져 있다. 다음 회에 보듯이 인천상륙작전조차 중국은 보도를 통해서 알 정도였다. 또한 중국의 참전의사가,50년 10월 참전 직전의 혼선과는 달리 전쟁 초기에는 의외로 확고하였으며,그것은 소련측의 확실한 공군지원의사로 인해 가능하였음이 밝혀져 있다. 스탈린은 처음부터 중국군참전시 공중 지원에 대해 분명하게 지원할 것임을 수차례 걸쳐 확인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스탈린은 소련공군의 지원확인에 앞서 중국군의 조·중국경 집결문제에 대해 거듭 확인하고 있었다. 이것은 중국의 참전의사가 어느 정도인자,실제로 병력을 국경지역에 이동시켜 놓았는지 확인하기 위한 스탈린식 조심성의 표현이었다. 스탈린이 『2∼3개월간 소련조종사들로 하여금 중국군 조종사들을 훈련시킬 것』이라든가 『그 다음에는 모든 장비를 중국에 넘겨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내용은 이번 자료에는 처음으로 밝혀진 사실들인데 이는 자신들은 참전치 않으면서 중국측으로 하여금 참전케하려는 그의 끈질긴 노력이었다. 또한 최초의 전쟁결정에서 처럼 그는 가장 깊숙이 개입하였으면서도 끝까지 소련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으려했음을 알 수 있다.
  • 미 하버드대 루덴스타인총장 졸업식사

    ◎“교육예산 삭감땐 미국장래 어둡다”/눈앞의 이익 얻으려 「국가기반」 허물어선 곤란 8일 거행된 미국 하버드대졸업식에서 네일 L 루덴스타인총장은 치사를 통해 현재를 대학재정의 위기상황이라고 규정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국가의 기반을 이룩하는 과학연구와 고등교육에 대한 투자는 지속돼야 한다고 강조했다.르네상스 문학의 대가인 그의 졸업식사를 간추려 소개한다. 우리는 지금 국가가 새로운 지식과 이해를 창조시키는데 앞장서야 하는 중요한 전환점에 도달해 있습니다.워싱턴의 결정은 이 나라의 미래연구와 미래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하버드는 지난 53년 DNA구조 발견 뿐아니라 컴퓨터,마이크로웨이브,플래스틱,광섬유,레이저디스크,초전도체,기상통신위성등의 발전에 있어 혁혁한 공헌을 했으며 암,심장질환,정신병치료에도 발전의 원동력이 됐습니다. 이러한 계속적인 발전의 추진력은 대학과 연방정부간 반세기 이상 지속돼온 협력이었습니다.이런 상호협력은 우리 대학을 과학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의 분위기는 지난 날과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오늘날 우리는 대학이 과연 무엇을 할수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 시각을 갖게 됐습니다.우리는 장기적 투자와 해결 방식에 인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더욱이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재정자원은 과거보다 더 억제돼 있으며,또 어떻게 이 부족한 자원을 사용해야 될지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습니다.그런 환경 속에서 특히 기초연구는 심각한 처지입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이룩한 업적은 발견과 이해가 우리 모두에게 실제적 이익을 항구적으로 가져다 줄 것이라는 국가적 확신의 결과입니다.지금은 경제,국제,건강,인종관계,기술 분야에서 우리 능력으로는 풀기 힘든 복잡한 문제가 날로 늘어나는 시대입니다.따라서 우리는 우리와 국가경제의 힘의 원천이 된 국가의 기본적 투자와 공약을 포기할 여유가 없습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연구와 교육에 있어서 그런 투자를 할 여유가 우리에게 있는지 묻고 있다는 것입니다.우리 앞에 항상 놓여진 기본적 질문입니다.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물어야 할 것은 우리에게는 과연 그런 투자를 할 여유가 정말로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당장의 예산 삭감은 그렇게 큰 영향을 주지 않을 것으로 자위할 수 있지만 10년 혹은 20년 후에는 전반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가져다 주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지금 조금만 개선하면 되는 것을 나중에 가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의회와 행정부에서도 이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그러나 페니실린을 발견한 알렉산더 프레밍이 50년전 이 자리에서 하버드 졸업생들에게 『준비하지 않는 마음은 뻗쳐오는 기회의 손을 보지 못한다』고 한 말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중요하고 새로운 지식은 활력적인 작업과 준비된 마음의 상상력에서 나옵니다.그것은 모든 개인이 융통성을 가지며 자연과 세계에 대해 새로운 것을 발견한 자신들의 직관과 통찰력이 지지받는 자유스러운 연구 분위기에 좌우됩니다. 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의 고등교육은 전보다 더 접근이 쉬어졌습니다.교육기회의 중요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확신은 재능과 활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문호를 개방했습니다.재정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에게도 문호는 열렸습니다.재정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약속은 지난 50년동안 미국사회가 달성한 특별한 업적중의 하나입니다. 과학 연구의 사례처럼 발전에의 열쇠는 학생,그 가족 그리고 재정헌납자 뿐아니라 교육기관과 정부간의 강력한 동반자적 관계입니다. 우리는 지금 중요한 교차로 선상에 다달았습니다.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 있는 제안들이 지금 워싱턴의 테이블에 놓여 있습니다.재정도움에 있어서의 매우 생산적인 투자와 교육에의 투자는 아주 고민스럽다는 신호가 나오고 있는 중입니다.대학생이 되는 순간부터 이자를 부과하기 시작하겠다는 생각은 학생들의 부채를 더해 줄 뿐입니다.산학협동같은 프로그램처럼 대학이 중심이 되는 프로그램의 원조를 삭감하거나 동결하겠다는 제안과 펠 그랜트 프로그램을 동결시키겠다는 제안은 혼란만 가져다 줄 뿐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거나 유사한 현상들이 결코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50년전 당시 코난트 총장이 『광범위한 교육에의 접근은 이 자유국가의 근간을 보장한,미국 민주주의가 창조한 위대한 도구』라고 졸업식장에서 말했습니다.그는 자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하버드 졸업생들의 희생을 존중할 것을 약속했습니다.우리는 이 중요한 순간에 그 약속을 저버려서는 안될 것입니다.우리는 앞으로의 50년동안 우리가 교육에서 분담해야 하는 몫을 이행해야 합니다.
  • 일제침략사 미화/정치인 망언 비판/중 광영일보

    【북경 연합】 제2차 세계대전 종전 50주년을 앞두고 일부 일본의 정치인들이 일제 침략행위를 미화하고 있는 망언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겨냥,중국관영 광명일보는 6일 『어떤 호도와 개변으로도 일본 군국주의의 죄행부가 공로부로 탈바꿈할 수는 없다』고 비난했다. 광명일보는 이날 「죄행부가 어떻게 공로부로 바뀔 수 있는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일본의 유명정치인인 오쿠노(오야성량)와 나가노(영야무문)가 지난달 29일 도쿄 무도관에서 열렸던 이른바 「아주공생제전」에서 또다시 일제침략전쟁을 미화하는 망언을 늘어놓은 것을 비판했다. ◎와타나베 전외상/역사·수치도 몰라/일지 사설 【도쿄 연합】 일본 아사히(조일)신문은 6일자 사설을 통해 한일합방조약이 원만하게 체결됐다고 밝힌 와타나베 미치오(도변미지웅)전외상의 망언을 역사도 부끄러움도 모르는 정치가의 발언이라고 비난했다. 아사히는 이 사설에서 와타나베의 발언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면서 자민당 실력자의 인식수준이 그 정도라면 과거를 반성하는 국회결의를 할 계제가 못된다고 지적했다.
  • 미 프리니스턴대 샤피로총장 졸업식사(연설)

    ◎“교육과 지식이 미국미래 이끄는 힘/근시안적인 예산삭감 막아야 한다” 교육과 기술,과학에의 최우선적 투자가 시급한 시점이라고 미국의 명문 프린스턴대의 해럴드 T 샤피로총장이 지난달 30일 있은 졸업식 치사에서 역설했다.그는 저명한 경제학자답게 이들 분야의 투자가치 효율성을 지적,「아는 것이 힘」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줬다.다음은 그의 졸업식사 요지다. 대학졸업식은 지난 세월 이룩한 과업을 축하하고 새로운 경험을 기대하는 주요한 자리의 하나입니다.오늘 나는 이 뜻깊은 졸업식장을 1930년대 대공황기에 태어나 길고 긴 어둠속의 2차세계대전과 이후의 여파 속에 자라온 우리 세대가 겪은 몇몇 경험의 단면을 반추해보기 위해 과거와 미래의 연결고리로 삼고자 합니다.특별히 나는 우리 사회를 강건하게 해주는 교육과 사회·경제·문화적 염원을 이뤄내는 과학과 기술에의 새로운 믿음의 방법을 고려해보겠습니다.이것들은 우리 세대에게 30∼40년대초의 상흔을 말끔히 벗게 해준 것입니다. 올해는 종전 50주년의 해입니다.전후세대에게 대공황과 이후의 2차세계대전이 얼마나 쓰라린 경험이었는가를 설명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나는 며칠 전 45년도 졸업생들을 전쟁중 숨진 프린스턴대인들을 기리는 자리에서 만났을 때 30∼40년대의 어려움을 뚫고 「낙관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미군 병사들이 전장에서 돌아왔을 때 우리의 사회는 고등교육을 향한 참으로 혁신적인 조치를 취했습니다.이른바 「병사의 법안」이 통과되면서 우리 사회는 처음으로 참전병사에 대한 보상은 교육기회의 제공이라는 형태를 띠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전후 초기에는 과학과 기술에 대해서도 매우 낙관적 태도를 견지했습니다.한동안 우리는 지식과 기술이 더 발전하면 풀지 못할 문제는 거의 없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같은 믿음과 낙관은,그러나 연속적으로 야기되는 난제들을 막지 못했습니다.우리는 과학과 기술만으로는 응집력 있고 정당한 사회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기술분야에서의 괄목할 업적은 사회적으로나,기술적으로나 새로운 우려를 파생시켰습니다.예를 들면 신기술은 사회적 관계의 재정립을 촉진시킬 때도 있었지만 그로 인해 가치 있는 인간관계의 상실이라는 측면도 가져왔습니다.신형자동차와 초고속도로·쇼핑센터들은 소도시들을 텅 비게 했으며 개인적·사회적 관계를 좋든 나쁘든 바꾸어 놓았습니다.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기술적이며 비기술적인 해결방법을 요구하는 사회적·정치적·문화적 현안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 것이었습니다. 기술적·과학적 낙관의 시대는 새 지식과 기술의 무궁한 장점에 대해 의심과 불확실성을 갖는 시대에 자리를 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과학과 기술에 대한 양가치적 감정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의 발전은 자연세계에 대해 우리가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돌파구를 계속 마련해주고 있습니다. 때때로 나는 역사를 자신감과 열정,그러나 활발한 이상론과 밀접한 낙관의 시대에서부터 불신과 의혹,그리고 의심으로 대변되는 회의의 시대까지 돌고도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다행히도 비관적 시대는 조정이 되거나 통합이 되는 시대로 이어지며,새 통합체제는 새 수준의 희망을 창조하면서 다시 한번 낙관과 자신감의 시대를 구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의론적 감정은 이해할 수 있지만 교육,과학과 기술의 미래역할까지 비관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고 역사를 모르는 처사입니다.교육분야를 볼 때 수입에 관한 최근의 여론조사결과는 두 가지의 피할 수 없는 사실을 보여줍니다.첫째,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의 수입규모는 계속 늘고 있다는 것이고 둘째,부자와 가난한 자의 수입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이 결과는 사회가 교육투자증대의 길과 함께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투자방법을 찾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같은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압력을 받고 있을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교육과 연구에의 투자를 삭감할 때 우리는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습니다.우리 앞에 놓여 있는 어려운 선택을 하는 데 있어 우리의 대표자들이 재정문제만 보는 단견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납세자이며 유권자인 우리는 이 목표를 이뤄내는 데 희생을 할 각오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한 순간에는 제아무리 매력적이라 할지라도 단기적 해결방식은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무엇보다 우리는 교육과 새 지식에 대해 가끔씩 실망했다고 해서 교육과 지식이 지닌 잠재력에 눈을 감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지난 몇십년을 돌이켜볼 때 우리의 이같은 믿음은 몇배로 보상받았습니다.교육과 기술에 대한 회의는 언제가는 신중한 사고과정을 거쳐 우리의 새롭고 폭넓은 목표에 양보할 것으로 믿습니다.다시한번 교육과 새 지식 창조를 위한 지속적 공약이 뒷받침돼야 할 것입니다. 사회가 믿음과 노력을 정확히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게끔 유도하는 것은 바로 여러 졸업생입니다.현재의 환경과 여러분이 건설하고자 하는 세계를 심사숙고하는 것이야말로 여러분의 책임입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