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세계대전
    2026-04-19
    검색기록 지우기
  • 연합훈련
    2026-04-19
    검색기록 지우기
  • 2배 적립
    2026-04-19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7,507
  • 간도특설부대(압록강 2천리:25)

    ◎만주 군관출신 한인배치… 일제,대륙침략 악용/열하·하북 지역 팔로군 소탕이 주임무/해방후 귀국인사들 장군으로 출세가도/당시 소대장 마쓰모토소위는 박 전 대통령 설도 중국 동북지방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에 두었을 뿐 한반도와 연결되었다.그래서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정학적으로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특히 일제는 그 강점기에 중국 동북지방에 허수아비격의 만주국을 세워 통치수단으로 한국인까지 끌어들였다.그런 연유로 만주국 군부에도 한국인이 대거 참여했다. 그 만군군사조직에는 간도특설부대가 있었는데 목단강성 제6군관구의 지휘를 받았다.처음에는 동북항일연군을 토벌할 목적으로 1939년 조선인특설부대로 창설했다가 그 뒤에 간도특설부대로 명칭을 바꾸었다.이 부대는 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활동지역을 오늘의 길림성 일부지역인 간도 일대에서 열하와 하북지방으로 확대했다.전쟁말기의 주임무는 공산당의 팔로군 소탕이었다. 그러니까 만군에 들어간 한국인은 일본의 대륙침략을 위해 싸운 셈이다.요령성의 성도심양에서 만난 주재덕(76)선생은 간도특설부대에서 근무한 조선족이다.1943년말부터 특설부대에서 정보를 담당했던 그는 지금 중국해방군 동북관리국 요령성 경제개발합작총공사 부총리로 일하고 있다.일본의 침략을 위해 그것도 공산당의 팔로군 소탕 일선에 섰던 인물이 요직을 차지했다는 사실이 의아스러울 것이다. ○제6관구의 지휘 받아 그러나 이면에는 그럴만한 사연이 깔려있다.그가 털어놓는 인생역정은 파란만장했다.간도특설부대 정보요원에서 팔로군으로 투항,공산당 입당,전범으로 체포,석방이라는 명암의 세월을 살았다.이제야 양지로 돌아온 그는 간도특설부대 시절을 회상했다. 『특설부대는 대대병력을 가지고 있었디오.대대장은 중좌나 소좌였는데 보직은 일본인에게 돌아갔습네다.소대장은 준위에서부터 소위·중위들이 맡았댔디요.그 하위지휘관인 소대장만큼은 조선사람에게 줬지 뭡네까.모두가 창씨 개명을 해서 조선사람일지라도 일본식 성으로 불렀습네다.해방이 되고나서 한국에 돌아가 모두 장군이 됐다고 기래요.대통령이 된 사람도 있고…』 대통령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그게 누구냐고 물었더니 키가 작고 야무지게 생겼던 마츠모토 소위였다고 말했다.소대장으로 명성을 날렸던 박정희 대통령이 그 사람이라는 것이다.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한국에서 나온 박정희관계 책들을 보면 그가 간도특설부대 소대장으로 복무했다는 기록은 없었기 때문이다.그가 만주군관학교 시절 창씨개명을 했을 때도 마츠모토가 아니라 다카시라는 성씨에 마사오라는 이름을 써서 한문으로 고목정웅이었다.그래서 일단 아귀가 맞지 않는 다고 생각하면서 주선생의 말을 더 들어보기로 했다. 『내가 특설부대에 들어가서 반년쯤 훈련을 받자 부대가 열하성으로 들어갑데다.조선말은 물론이고 중국말에 일본말까지 잘 하는 날 더러 정보반에 근무하라고 기래요.거기 근무하면서 가는 곳마다 대동아공영권건설을 역설해댔디요.포로를 심문할 때면 매도 대고….내손으로 사람도 죽였수다.한번은 팔로군과 접전이 붙어 멀리서 총을 쏘았더니 하나가 고꾸라집데다.그리고 심문하던 포로가 도망을 치길래 권총으로명중을 시켰디요.팔로군 정찰원 사광화·장립귀·등우룡은 총살 직전 정보반에 쓰겠다고 살려주기도 했디요.나쁜 일만 한 것은 아닙네다』 ○43년 열하성으로 이동 간도특설부대가 활동무대를 간도에서 열하성으로 옮긴 것은 1943년말의 일이다.그 무렵에는 목단강성에서 이동해온 만주군 보병 제8단 본부가 역시 열하성에 주둔하고 있었다.한국에서 나온 여러 저술을 보면 당시 만군 소위였던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만군 보병 제8단에 배속 받은 것으로 되어있다.만군 제8단도 간도특설부대 처럼 모택동휘하의 팔로군 토벌이 주임무였다.그러나 간도특설부대와 임무가 같았을 뿐 박정희소위가 특설부대에 근무했다는 대목은 없다. 그러면 주재덕 선생의 증언에 착오가 있는 것일까,아니면 한국의 기록이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가려보아야 할 부분이 아닌가 한다.어떻든 주재덕 선생이 들려주는 만군시절 박정희소위 행적에는 흥미로운 부분이 많았다.심지어는 박정희소위가 한때는 팔로군으로 투항할 뜻까지 품었다는 것이다. 『팔로군 포로를 오래 심문하다 보니 내가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한다는 생각이 듭데다.그래서 포로로 잡힌 팔로군 정찰원을 통해 하북성 팔로군 이운창 사령한테 투항할 뜻을 전하는 편지를 몰래 보냈디요.그리고 나서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는 회신이 팔로군 정보망을 돌아서 왔디요.혼자 고민하다 조선사람인 가네카와 중대장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더니 동의하더란 말입네다.중대장 말이 내가 내부는 책임질테니 계속 팔로군과 접촉하라고 명령합데다.그러나 집단투항은 일본 헌병이 방해가 되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습네다.다만 나는 1944년 8월 하북성에서 혼자 투항할 수 있었디요.마츠모토 소위는 단기교육을 가서 부대에 없었던가 기래요』 ○팔로군으로 투항 속출 그래서 특설부대요원 주재덕은 1944년말에 팔로군이 되었다.팔로군에 겨누었던 총부리를 일제쪽으로 돌린 그는 해방을 맞고서 팔로군 이홍광지대 중대장으로 올랐다.그리고 공산당에 가입해 많은 공을 세웠다.1949년 모택동과 주재덕의 명령에 따라 이홍광지대가 북한으로 건너갈때 그는 심양에 그냥 남았다.심양에서 대퇴(제대)한 이후 요령성 본계로 들어가 화학공장을 맡아 경영했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하더니 그에게 곧 불행이 닥쳐왔다.연변 공안당국에서 경찰을 보내 그를 체포해버린 것이다.1958년 연변법정이 내린 판결서는 어마어마한 벌을 내렸다. 「죄범 주재덕은 1943년 4월10일 만주국 간도특설부대에 들어가 정보반에서 1년4개월 근무하는 동안 하북성 팔로군을 토벌하는 등 일제의 주구로 갖은 악한 죄를 범하여 법에 의해 총살한다」는 것이었다.그는 25년간 전범으로 감옥에 살다가 문화대혁명 이후 탄원서를 내어 1983년 무죄석방되었다. 『사형판결은 청천병력 같은 것이었디요.죄를 졌다해도 투항해서 혁명을 위해 숱한 공을 세웠으니끼리 지난 일은 묵과돼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네다.석방되어 나왔을 때 내 나이 예순세살이었수다.만약 내가 팔로군에 투항하지 않고 특설부대 요원들과 어울려 한국에 갔더라면 별 하나는 달았디 않겠습네까』 한국으로 간 특설부대 요원들은 출세가도를 달렸다.제1중대장 가네카와라는 김 아무개는 한국군 중장까지 올라갔고,경찰출신이었던 기포중대장 히로카와는 소장이 되었다는 것이다.특히 소대장으로 가장 유명했던 마츠모토 소위는 바로 박정희대통령이었다는 고집을 그는 끝내 버리지 않았다. 그러면서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 하나를 더 곁들였다.간도특설부대는 해방소식도 모르고 팔로군과 접전을 벌였다는 것이다.특설부대 요원들은 뒤늦게 무기를 버리고 동북으로 가는 길에 조선의용군부대를 만나 의용군에 가담하려다 심사가 두려워 개별적 고향에 돌아갔다고 했다.
  • 「대만선거」 양안위기 촉발(지구촌 칼럼)

    ◎분열조정땐 중 인민들이 주권보전 나설것 대만과 중국간의 양안관계가 국제적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적잖은 사람들은 대만해협에 드리워진 검은 구름이 양안관계의 긴장은 물론 동북아지역의 안정,번영에 악영향을 끼치는 단계로 발전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지경이다. 이같은 긴장은 왜 발생한 것일까.이에 대해 중국정부 및 학계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대만해협의 양안관계는 지난 수년간 조금씩 발전해왔다.경제무역·문화교류·인적교류 등등 모두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전돼 왔다.특히 지난해 1월1일 강택민 중국국가주석의 「조국통일대업 완성및 계속적인 분투를 위한 연설」에서 밝힌 중국정부의 8가지 입장발표도 양안관계의 비약적 발전의 계기였다.이 발표는 중화민족의 이익,대만사회의 현상유지,대만동포들의 권리및 희망을 현실적으로 고려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대만당국은 호응은 커녕 조국을 분열하는 「대만독립」고취라는 행동으로 대응해 왔다.국제연합 재가입시도,「두개의 중국정책」등을 통해 양안관계를 흔들어놓았다.지난해 6월부터 양안사이에 치솟은 긴장의 파고는 대만의 이런 태도 때문이라고 중국쪽에선 생각하고 있다. 대만문제를 바라보는 중국정부 및 학자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대만은 나눌 수 없는 중국영토의 일부분이며 주권 및 영토는 양보할 수 없다.대만문제는 중국의 내정이란 것이 중국정부의 원칙이며 이 문제를 다루는 출발점이다. 대만은 중국영토다.역사는 이를 증명한다.1895년 한반도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은 시모노세키조약을 통해 대만을 떼어갔다.그러나 세계대전종전과 「카이로선언」,「포츠담협약」등을 통해 국제사회는 중국의 상실된 국토회복을 확인했다.49년 10월1일 대륙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고 71년 10월25일 국제연합 2758호 결의로 중국이 상임이사국 및 회원국지위를 회복하면서 대만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결의는 다시한번 집약됐다. 「대만은 중국영토이며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의 유일한 합법정부다」란 것이 그 결의의 핵심이다.현재 양안이 분열상태에 있지만 대만은 중국영토의 일부분이란 사실은 변할 수 없다는 원칙을 국제사회도 승인한 것이다.미국도 이 사실을 3개 중·미연합공보를 통해 약속했었다.이등휘의 미국방문허용으로 미·중관계가 갈등을 겪은 지난해 하반기에도 미국은 「1개 중국정책」을 재확인했으며 대만독립과 「두개 중국」 또는 「하나의 중국과 또 별개인 하나의 대만」에 반대함을 다시 한번 약속했다. 양안사이의 갈등을 푸는길,대만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이점에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그러나 대만당국은 도리어 중국을 분열하려는 심산에서 여러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대만당국은 「민주」라는 기치를 들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구호를 부르짖으며 오는 3월23일 대만의 첫 총통선거를 준비하고 있다.여론을 조작하고 조국을 분열하고 있는 행동을 합법화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그러나 주권은 분할될 수 없는 것이다.대만에 대한 주권은 중국에 속하며 12억 중화인민공화국 인민의 것이다.이는 앞서 언급한대로 국제사회에서도 공인한 것이다. 대만선거를 어떻게 볼 것인가.대만당국의 주관아래 치러지는 이 선거는 다만하나의 사기극이다.선거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진정한 민의를 대표할 수 없다.왜냐하면 주권은 훔치거나 빌려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대만당국이 잘못된 길로 멀리가면 갈수록 양안관계는 더욱 악화의 길로 치닫을 수 밖에 없다. 대만당국의 분열활동을 지지하고 중국의 내정을 간섭,긴장국면을 조성하는 외국세력은 그 결과에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대만문제는 중국 내정이다.이 문제에 관한한 어떤 외국세력의 간섭도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양안관계는 단지 해협을 마주보는 중국과 대만의 문제인가.양안관계가 긴장되면 무엇보다 동북아지역의 안정과 발전에 대한 악영향을 피할길이 없다.이 사실에 대해 다시한번 국제사회는 인식을 새롭게 해 주었으면 한다. 중국은 평화를 사랑하며 평화적인 조국통일을 주장한다.하나의 중국원칙에 의해 국가의 주권과 영토의 보전,평화통일의 기초를 마련하려고 애쓰고 있다.중국정부는 대만인민의 근본적인 이익과 현실을 감안해서 양안의 통일방안을 마련했다.또 대만인민들의 생활방식과 민주적바람에 대한 요구도 존중한다.이러한 기초위에 마련된 것이 바로 한나라의 두가지 제도인 「1국 2체제」를 통한 평화통일 방안이다. 지금 양안관계는 매우 중요한 계기를 맞고 있다.또 중화민족은 지금 새로운 세기를 맞는 도전의 시기에 서있다.대만당국이 만약 분열을 시도하고 외국세력과 결탁,분열활동을 계속한다면 중국인민과 정부는 국가 주권과 영토보전을 위해 그 모든 필요 수단을 동원할 수 밖에 없다.중국인민이 조국통일에 대한 결심 및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해서는 않될 것이다.
  • 독 실업률 10.8% “전후 최고”/1월 현재

    ◎4백여만명… 구동독지역 16% 【뉘른베르크 AP 로이터 연합】 독일의 실업자수가 지난 1월 4백만명을 넘어서 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독일관리들이 7일 밝혔다. 연방 노동부는 실업률이 지난해 12월 9.9%에서 1월 10.8%로 뛰어 올라 실업자수가 12월의 3백79만명에서 4백15만9천명으로 늘어났다고 밝혔다.이 수치는 전후 독일 역사상 최대치다. 귄터 렉스로트 경제장관은 『이러한 실업률이 사회보장과 고용주에 대한 세금격감을 포함하는 정부의 재정지출삭감을 통한 경제성장정책에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연방 노동부는 『전 동독지역의 실업률은 지난해 12월의 14.9%에서 16.8%로 뛰어 올라 1백16만명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고 있다』고 밝히고 『서독지역의 실업률도 작년 12월의 8.7%에서 9.4%로 상승,2백90만명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 야당작전의 실패와 성공(송정숙 칼럼)

    이른바 「면담파동」은 야당측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청와대 고위층」이 직접 나서서 야당의원 한사람을 빼내려했다는 『혐의를 잡고』 그것이 야당와해공작이라고 도덕적 시비를 걸고 나올 때만 해도 그 전의는 승산이 있어보였는데 당사자인 문제의 강원도출신 ㅊ의원의 해명이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자기를 유혹하려던 사람은 야당이 들고일어나 공격하는 「최고위층」은 아니라고 밝히는 바람에 등등한 한판승부를 벼르던 소속야당측을 난처하게 만들고 말았고 상대적으로 화가난 여권에서는 줄줄이 고소를 엄포하며 「버릇고치기」에 나섰다.그러니까 야권은 또 어차피 궁지에 몰릴 바에야 마지막 돌격으로 「전면전」을 선포하고 배수진을 쳤던 것이다. 기준도 특색도 없는째 정당들의 마구잡이 사람잡아당기기 게임이 진행중인 계절에,별것도 아닐 수 있었던 일이 비정상하게 발전하여 만들어진 이 사태.그 본질이라고 할수 있는 『ㅊ의원 유혹』사건이 벌어진 것은 지난해 말인 95년 12월이라고 한다.ㅊ의원은 그것을 96년인 새해 1월에 들어와서 대표에게 보고했다.왜 그토록 오래 뜸을 들였는지 모른다.그리고 그의 고백대로라면 그가 만난 것은 청와대 수석비서진의 ㅇ씨인데 어느 과정에선가 「대통령」으로 둔갑되었다.누구 잘못인지 지금으로서는 모호하다. 사라예보의 총성 한발이 세계대전의 발단이 되기도 하지만 이 「모호함」이 급기야 여야간에 전면전이라는 험악한 지경을 부른 것이다.야당대표측은 ㅊ의원이 만난것은 최고위층이고 여전히 확신한다는 주장을 마지막까지 고수했고 ㅊ의원이 그것을 부정한 것은 여권의 「탄압」을 겁낸 것이라고 말했다.그러나 ㅊ의원은 거듭 「고위층」을 직접 만난 적도 없고 처음부터 그렇게 말한 적도 없다고 밝혔다. 집안끼리 어긋난 이 논지는 ㅊ의원이거나 당 고위층중 어느 한쪽이 일을 좀 부풀린 것이라는 심증을 갖게 한다.ㅊ의원쪽을 의심한다면 우선 일이 있은지 한달이나 지나서야 당에 보고한 것부터 연결해서 생각해볼만하다.여권의 ㅇ씨수준에서 막연히 의중을 건들여 본것을 자가발전해서 무게있는 교섭을 받은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부풀렸을 가능성도있다.때마침 뭔가 여권을 향해 국지전정도의 자극을 하고싶던 야권대표측은 그것에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아니면 ㅊ의원의 말대로 처음부터 ㅇ씨수준의 접촉이었음을 밝혔는데 대표측에서 부풀렸을 가능성도 상정해볼 수 있다.ㅇ씨수준으로는 「공격 작전」의 수위가 낮아서 효율이 떨어지겠으므로 그렇게 부풀리고,문제가 되면 「야권탄압」이라는 고전적이고 전통적인 방패를 활용하자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그러나 세상은 이미 많이 변해서 「야권탄압」무기는 그것을 사용할 기능조차 퇴행해버린 시대가 되었다 어쨌든 전체적으로 볼때 어떤 형태로든 야당의원 유혹기도가 있었던 것만으로도 공격 빌미는 될수 있었는데 좀 과욕을 부려 「최고위층」을 들먹인 것이 화근이 된 셈인다.그러고보면 애당초 청와대의 「ㅇ씨」를 「대통령」으로 바꾸게한 것은 고의든 아니든 야당의 전의가 낳은 소산이기는 한데 좀 서툴러서 작전으로서는 성공하지 못한 것같다. 거기 비하면 가사두른 스님과 두손을 맞잡고 환하게 웃으며 『정치가 종교에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말로 종교에 개입하고 있는 또다른 야당총재의 작전은 매우 성공적으로 보인다.매체마다 화려하게 실려진 그 모습만으로,최근에 있었던 군인교회 과잉경호문제로 불교계의 노여움을 산 여권의 「실수」에 따른 반사이익을 충분히 거둔 셈이다.이렇게 잽싼 정치적 행보를 다른 야당쪽도 배울만하다. 특히 수도권 선거전략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이 야당 「최고위」의 행보는 작전이 노련하고 권위도 있어보인다.그「최고위」가 직접 내놓은 작전중에는 『규정하기』같은 것도 있는데 그들이 「선생님」으로 모시는 최고위의 이미지를 『양심적인 사람』 『서민적인 사람』으로 「규정」하는 따위다. 일단의 수하를 거느리고 『수도권은 한석도 내주지 말라』고 자신만만하게 지령하는 모습은 흡사 「수도권접수 연습작전」의 지휘관같은 고만함을 느끼게도 하고 그래서 불길성도 들게한다.그러나 이미 「예술 기관」에 가서 『우리가 정권을 넘겨받았을 때를 위해 잘해 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을만큼 승리의 환희에 대한 적응훈련을 하고 있는 것이그쪽야당의 정서인 것을 보면 「최고위급」의 작전이 다소 고만한 인상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할것같다.어쨌든 모든 판단은 국민의 몫이다.
  • 위안부문제 일의 이중성/강석진도쿄특파원(오늘의 눈)

    일본정부는 6일 종군위안부문제에 대한 유엔인권위원회의 보고서를 수용하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일본의 정치인들은 지난 한햇동안 망언을 쏟아부어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막심한 고통을 겪었던 아시아국가들의 분노를 샀었다.이때 일본정부는 과거를 반성한다는 8월15일 총리담화가 정부의 입장이라면서 무마해 왔다.그러나 이날 유엔인권위원회의 보고서 수용을 거부했다.지금까지 쓰고 있던 양의 너울을 훌렁 벗어던지고 해 볼테면 해보라고 가슴을 쭉 내미는 듯하다. 인권위원회의 보고서는 일본정부에 국가가 피해자개인에게 사죄하고 국가배상을 하라는 것이다.또 가해자의 처벌도 권고했다.이같은 내용은 피해자 「할머니」들이 줄곧 요구해 온것과 선을 같이 한다.인류가 금세기 전대미문의 세계대전을 겪기까지 역사를 통해 확립해온 인권보호의 원칙에 비추어 지극히 당연하다.최근 보스니아내전 전후처리 과정을 보면 전쟁중이라고 하더라도 인권 침해행위의 책임은 지속적으로 추궁당하고 있다.또 독일의 전후 처리과정에서 그들은 스스로 유태인학살의 만행을 저지른 전범들을 처벌해 왔고 국가책임을 인정,배상에 인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뚜렷한 법적인,논리적인 근거도 없이 『법적으로 일본정부가 받아들일 여지가 없다』면서 『민간기금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협력해 나가겠다』고 말했다.국가책임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무수한 만행과 인권침해,인종차별,생체실험,경제적 착취,무모한 전쟁도발과 함께 뚜렷한 증거와 증인들로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국가책임이 드러난 종군위안부문제에 대해서 끝까지 책임을 외면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일본은 언제부턴가 경제거인이 되면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넘보아왔다.경제력에 걸맞게 국제평화와 안정에 기여하겠다는 것이다.그러나 일본이 과거침략사에 대한 반성을 거부하고 있는데 대해 아시아국가들은 줄곧 의심을 버리지 못했다.94년 유엔총회에서 일본의 상임이사국 진입을 지지한 아시아국가는 한 나라도 나오지 않았다. 유엔 기구가 요구하고 권고한,그리고 당연히 그리 했어야 할 일을 거부하면서 국제평화에 기여하는 상임이사국이 될 자격이 있는 것일까.우리는 일본이라는 국가의 지향목표와 미래에 대해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 핵실험(외언내언)

    1945년 7월16일.미국의 남서부 오지 뉴 멕시코 사막주변은 전에 없이 긴장감이 감돌았다.버려져 있던 이 불모의 땅이 이날처럼 중요했던 때는 일찍이 없었다. 거대한 코뿔소 크기의 검은 괴물체가 보자기에 가려져 사막 한 가운데로 운반됐고 과학자들의 점검이 끝난 잠시후 이 사막에는 상상을 초월한 굉음과 함께 장대한 버섯구름이 파란 하늘로 높게높게 피어올랐다.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이로부터 4년후인 49년에는 소련이 원폭실험을 시작했다.영국은 그보다도 3년이 늦었다.요즘 원폭실험을 계속해 세계여론의 비판을 받고있는 프랑스가 처음 핵실험을 한 때는 한참후인 63년.중국은 프랑스보다도 1년이 늦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핵실험이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얼마나 많이 실시됐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통계가 없다.미국의 브루킹스연구소가 95년 미국의 핵실험 총건수를 1천54회 라고 밝힌 일이 있고 같은 미국의 전문지 「원자과학자회보」는 95년 5∼6월호에서 1천30회 라고 보도했다.24회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회보」는또 45년이후 전세계적으로 실시된 핵실험 횟수가 모두 2천37회라며 국별로는 미국이 단연 많고 러시아 7백15회,프랑스 2백4회,영국 45회,중국 43회 등이라고 밝혔다. 이 통계에는 지난해말부터 지난 27일까지 계속된 프랑스의 6회 실험이 포함되지 않았다.74년에 실시한 것으로 알려진 인도의 실험도 안들어 있어 실제 핵실험 숫자는 「회보」통계보다 많을 것이다.핵보유국들이 밝히고 있는 수치도 정확하다는 보장이 없다. 미국의 원폭제조계획인 「맨해튼계획」이 성공을 거두어 최초의 원자탄이 폭발했을때 미국을 비롯한 자유세계는 모두가 환성을 올렸다.원폭은 세계대전을 앞당겨 종결시킨 인류의 구세주로 흠모를 받았다. 「원자탄의 아버지」라는 미국의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만든 원폭이 종국엔 인류를 파멸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그의 우려가 이제야 인류의 공감을 받고 있다.
  • 일본 사회당의 소멸(박화진 칼럼)

    소련과 동구공산권 붕괴에서 비롯된 탈냉전의 새로운 국제정치구도는 아시아 각국의 국내정치에도 큰 변화의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북한도 결국은 별수 없겠지만 중국,베트남,몽골 등 공산권은 말할 것도 없고 아시아 제일의 서구식 선진 민주국가라 할수 있는 일본의 정치에도 중대한 변화를 야기시키고 있다.2차세계대전 패전후의 동서냉전상황에서 정립되어 지난 50년간 일본을 지배해온 냉전시대의 옛정치구도에서 탈냉전시대의 새정치구도로의 변화가 그것이다. 이른바 「55년 체제」로 불리는 그동안의 일본 정치구도는 소련 동구 공산권과 서방세계의 이데올로기 대립이라는 국제정치적 냉전구도의 일본 국내정치적 반영이라 할수 있는 것이었다.전후의 혼돈속에서 1955년 사회당의 좌우파가 극적인 단합에 성공,『사회주의 혁명을 구현한다』고 선언한데 자극받아 자유와 민주 두당으로 대립되었던 보수세력도 자유민주당으로 힘을 합쳐 『자유사회를 수호한다』는 기치를 내걸어 보수·혁신대결의 전후 일본 정치구도를 만들어냈던 것이다.옛소련 공산권 붕괴로 인한 미·소 냉전구조의 종언이 그러한 보혁구도의 의미를 퇴색시켜버린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 해야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에서 소련 동구 공산권 붕괴와 탈냉전의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는 것은 지난 19일 전당대회를 열어 당명까지 사회민주당으로 바꿔야 했던 사회당이라 할수 있다.그것은 한마디로 사실상의 사회당 붕괴와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1945년 무산정당 각파가 결집,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출발한후 좌우파간의 격렬한 대립과 분열을 거듭한 끝에 55년 자민당 출범 한달 앞서 재출범한 사회당은 제1야당으로서 지난 50년동안 자민당정권의 독주를 견제하는 중요역할을 담당해왔다. 그러나 소련 동구 붕괴이후 불기 시작한 세계적 탈사회주의바람은 그렇지 않아도 미·일 안보조약 및 일본자위대와 국기·국가 그리고 한국존재의 부정등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정책에의 집착으로 지지기반이 약화되고 있던 사회당에 대한 일본국민의 지지를 더욱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이같은 분위기속의 93년 총선결과는 사회당몰락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의석수가 절반(자민 2백7석,신진 1백69석,사회 64석)으로 줄었으며 득표율도 15.4%로 폭락하는 참패를 당했다. 이를 계기로 사회당은 자민당과의 연립에 참여한후 그동안 비판 받아오던 비현실적 노선을 청산하는 변화를 시도했으며 마침내 당명까지 바꾸게된 것이다.사회당의 이같은 변신은 전반적인 보수화흐름을 타고있는 일본사회 현실을 반영한 위기타개의 몸부림이라 할수 있지만 사회당으로서의 고유 이념과 정책이라는 나름대로의 장점마저 청산해 버린 보수화변신이 과연 사회당의 진정한 구명책이 될수 있을지 의문이다.현 연립파트너인 사키가케와의 통합에 의한 신당창당으로 제3세력을 형성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으나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1선거구 1의원」의 새선거법으로 늦어도 내년 7월까지는 치러야 할 총선 또한 사회당에게는 불리한 조건이다. 이미 일본정치는 자민당과 자민당을 이탈한 신진당의 2대보수당이 양립하는 미국식 보·보대결구도로 나가고 있다.사회민주당으로의 개명과 정책노선의 현실화에도 불구하고 사회당이 한때 위력을 발휘했던 제1야당으로 재기하기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인다.사회당은 그동안 반한친북 정책으로 우리를 괴롭혀 왔다.그러나 이제 그 사회당의 몰락을 보면서 우리가 새로운 우려감을 갖게되는 것은 무슨 역사의 아이러니란 말인가. 일제의 잘못에 대한 망각·외면·왜곡 그리고 일본의 민족주의·대국주의·팽창주의지향의 오만무례한 보수우경화질주에 제동을 걸어줄 그나마의 견제력이 없어지는 이제부터의 일본의 향방과 그것이 몰고올수 있는 국제적 파란을 우리는 주목하고 경계해야할 것이다.
  • 「이」와 공존시대 연「팔」 자치선거(해외사설)

    중동 팔레스타인 문제의 근원에 제1차세계대전하 영국 「두개의 혀」외교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영국은 전쟁에 유리하게 하기 위해 아랍세력에는 맥마흔협정으로 독립국가를 약속하고 한편으로 유대인에게는 같은 지역에 이스라엘 건국을 인정하는 발포어선언을 발했다.오랜기간 동안 분쟁의 씨앗이 된 「2개의 국가」였다. 그러나 2개국가의 공존이 더이상 꿈이 아닌 때가 온 것일까.팔레스타인자치선거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아라파트의장을 자치정부의 의장으로 선출했다.자치평의회도 아라파트의장의 지지파가 다수를 점할 것이 확실하다.아라파트의장을 사실상의 대통령으로 하는 「정부」가 조직된 것이다. 여러 제약이 있지만 민의에 기초한 「팔레스타인국」 탄생의 전주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93년에 시작된 팔레스타인 화평프로세스 제2단계의 마감이다.지난해 11월 라빈 이스라엘총리의 암살 영향이 우려됐지만 선거는 예정대로 치러졌다.선거가 무사히 마쳐진데 대해 우선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새로운 자치정부의 민주적인 발전을 내다보면 낙관적인 것은 아니다.가장 큰 문제는 평의회의 의석을 아라파트지지세력이 거의 다 차지했다는 점이다.선거를 치른 의미도 색이 바랬다.물론 커다란 이유는 팔레스타인 과격파 하마스 등 자치반대세력의 선거보이콧 때문이다.이들 세력이 일상활동을 통해 팔레스타인 주민의 일부분의 의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자치정부는 평의회에 대표되지 않은 주민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제 화평과정은 3단계로 들어간다.점령지 가자,요르단강 서안의 최종적 지위외에도 예루살렘과 유대인정착지의 처리등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여기는 쌍방의 양보가 필요하다.
  • 구소 태평양함대 화학무기 2년간 1,790t 동해투기

    【도쿄=강석진특파원】 옛소련 태평양함대가 60년대 초에 동해에 구세대형의 화학무기 1천7백90t이상을 몰래 버려온 사실이 이 함대 사령부에서 입수한 자료를 통해 밝혀졌다고 일본의 도쿄신문이 21일 보도했다. 옛소련이 동해에 화학무기를 버려온 사실은 지난해 봄 러시아과학아카데미의 화학자 표도르프박사의 말을 인용,도쿄신문이 보도한 바 있으나 군의 내부자료를 통해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이 신문은 전했다. 이 신문은 군사전문가들이 동해의 해양오염실태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옛소련군 자료에 따르면 화학무기가 버려진 곳은 연해주 나호드카항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80㎞ 떨어진 해역으로 수심 2천∼3천2백m이며 기간은 60년 여름부터 61년에 걸쳐 모두 18회에 걸쳐 이뤄졌다. 당시 소련은 사린 소만등보다 살상력이 강한 신세대형 화학무기를 제조하고 있어 제2차세계대전때부터 제조해온 이페리트 루이사이트등 구세대형 화학무기를 투기하게 됐다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 외교전문가 자곱 헤일브런·마이클 린든 공동칼럼

    ◎보스니아서 「세번째 제국」 노리는 미국/카리브해 연안국 종속시켜 첫 제국… 두번째는 서유럽·아주지역서 패권/중동지역의 서부전선 간주… 영향력 강화 시도/중·일 등과 긴장 불원… 아시아선 점차 발빼기로 보스니아는 미국의 영향력이 날로 증대하고 있는 중동지역의 「서부전선」이기 때문에 미국은 보스니아에 대한 적극적 지원을 하고 동아시아와의 유대를 줄이는 방향으로 일본 및 한국과 유연성 있는 새안보조약을 협의할 필요가 있다고 미국의 외교전문가인 자곱 헤일브런과 마이클 린든이 최근 뉴욕 타임스에 공동 기고한 칼럼에서 주장했다.「세번째 미국 제국」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요약한다. 클린턴 대통령은 보스니아에의 2만명 파병결정을 미국과 유럽간 동맹의 자연적 부산물이라고 묘사하고 있다.그러나 우리는 보스니아를 나토의 동부전선으로 보는 대신에 발칸반도가 중동지역에 있어서 급진적으로 팽창하는 미국 영향권의 서부전선이라고 보아야 한다.2차세계대전까지 발칸반도는 유럽의 일부가 아니라 「근동」의 일부로 간주돼 왔음을상기해야 한다.미국이 보스니아 회교국 창설에 대해 유럽동맹국들보다 더 열성적이라는 사실은 미국이 페르시아만부터 발칸반도까지의 회교국가들로 구성된 비공식모임의 지도자라는 새로운 역할을 떠맡고 있음을 보여준다.한때 오스만 터키에 의해 지배된 이 지역은 이제 「세번째 미 제국」의 심장부가 되고 있다는 여러 징후들을 보여주고 있다. 19세기이래 미국은 3개의 제국(전통적 식민지뿐아니라 자발적 종속국가의 그룹을 말한다)을 가졌다.첫번째 미 제국은 미국이 쿠바,푸에르토리코,필리핀 그리고 카리브해 국가의 상당수를 삼켜버린 1898년 미­스페인전쟁으로 생겨나 2차세계대전 말까지 지속됐다.1945년부터 1989년까지의 두번째 제국은 서유럽과 아시아에 집중됐다. 냉전이후 미국은 다시 옛날 적국의 제국위에 종주권을 행사하고 있다.소련의 붕괴는 미국이 (나토를 통해)동유럽과 유고슬라비아에 군사적 헤게모니행사 지역을 확대하는 것을 촉진시켰다.가장 중요한 것은 냉전종말이 미국으로 하여금 중동지역에의 개입을 심화시키는 것을 허용했다는 것이다.대이라크전이 미국을 페르시아만의 지배국으로 만들기 전까지도 미국은 중동지역에서의 군사적 공약을 계속 강화함으로써 세번째 제국의 기초를 다지고 있었다.미국이 베트남을 포기한 직후 카터 대통령은 이스라엘­이집트의 평화를 장려하고 시나이사막에 미군을 주둔하게 한 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을 주도했다.이란혁명과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후인 80년 1월에는 페르시아만 지배에 대한 어떤 외부의 기도도 미국의 중요이익에 대한 공격으로 여긴다는 카터 독트린이 나왔다.이는 신속배치군으로 뒷받침됐다.카터 대통령이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신속배치군을 강화,미국의 대중동지역 공약을 유럽 및 동아시아에서와 같은 수준으로 놓게 했다. 걸프전이후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주변국에 항구적 군사주둔을 확대시켜 호전적인 회교국들의 분노를 샀다.페르시아만에 미 제5함대를 설치하기도 했다.미국이 이지역을 점점더 중요시함은 이스라엘과의 친밀관계를 전례없이 높이는 데서도 감지된다.중동은 미국이 군사배치를 강화하고 있는 세계 유일의 지역이다.세번째 제국의 중동 핵심부가 견고해지는 동안 두번째 제국의 주 요소였던 유럽과 동아시아의 종속국들은 약화되고 있다.서유럽에 대한 미국의 군사공약은 급격히 쇠퇴했다.클린턴 대통령은 독일에 중부 유럽을 잠재적 적국인 러시아로부터 보호하는 짐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나토국가의 주임무는 가까운 장래동안 발칸반도,지중해와 페르시아만에서의 미국의 전쟁을 위한 무대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세번째 미 제국내에서 아시아의 위상은 어떤 것일까.마땅한 위치가 아예 없을지도 모른다.중국과의 동맹은 단호히 배제될 수 있다.남지나해에서의 중국의 군사력 강화와 최근 반체제인사 위경생의 투옥에서처럼 북경정부는 워싱턴정부를 무시하거나 자극시키고 있다.중국을 압박하는 것 역시 현실적 대안이 못된다.중국정부를 전복시키려 한다면 분명 재앙을 초래할 것이다.그럴 경우 중국은 이란같은 반미정권들을 강력 지지하고 나설 것이다. 미국과 일본을 따로 움직이게 하는 긴장관계는 오해나 선동의 결과가 아니라 곧바로 이해관계 충돌의 결과이다.비록 일본이 장사꾼적인 무역,투자정책을 수정할지라도 이나라의 독특하고도 성공적인 정경카르텔은 계속해 자신의 무역 상대국과 긴장을 만들어 낼 것이다.미국 역시 영원히 일본의 파수꾼 역을 계속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중국과 일본과의 지역적 무기경쟁이 전개되더라도 미국은 외부 중재자라는 아쉬울 게 없는 입장에 있을 것이다.한반도 평화통일 뒤 미국과 한국과의 동맹관계는 계속될수 없다.왜냐하면 중국은 한반도 통일에 동의하는 대가로 통일한국의 중립성과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의 유대를 줄이고 일본 및 한국과 유연성있는 새 안보조약 체결을 협의해야 할 때가 왔다.기존의 안보조약은 모든 지역이해가 동등하다는 허구에 기초한 것이다.아시아에서의 미군감축은 중동과 발칸반도에서의 새 공약을 떠받치는 필요자원이 될 것이다.이 새 공약은 최소한 한세대는 지속될 공약이다. 처음 두번의 미 제국들과는 달리 세번째 제국은 민주주의와 자결권을 확대시키는 도구로 정당화될 수 없다.미국의 지도자들은 쿠웨이트를 사담 후세인으로부터 해방시켰을 때처럼 말로는 항상 이같은 가치들을 들먹일 것이다.그러나 중동의 미국 종속국 대부분은 사우디아라비아같은 권위주의 국가들이거나 민주국가라해도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좀처럼 인정치 않는 국가들이다. 지금까지 미국이 아시아로부터 빠지고 중동으로 향하는 변화는 19세기의 역사학자 J R 시일리의 영국제국이 「정신없이」 창조된 것이라는 유명한 표현과 흡사했다.클린턴 대통령의 발칸반도에서의 도박은 미국은 더이상 「팩스 아메리카나(미국의 지배에 의한 평화)」밖에는 주도할 여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아시아로부터의 철수와 동시에 유럽­중동 영향권의 구축에 대한 도전은 미국이 1990년이후 모은 다양한 종속국들을 다룰 새로운 나토유형의 기구나 동맹관계 발전을 필요로 한다.궁극적 윤곽이 어떻게 나오든 간에 세번째 제국은 적당한 힘으로 지원돼야만 한다.보스니아에서의 실패는 세번째 제국이 설립되기도 전에 그것을 무너뜨리는 것일 수 있다.
  • 이야기로 배우는 일본의 역사/가쿠 고조 감수(화제의 책)

    ◎일본 역사 쉽고 재미있게 풀어 쓴 교양서 일본 역사의 흐름을 쉽고 재미있게 서술한 역사교양서.일본인이 쓴 일본사에는 흔히 「황국사관」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어 과장되기 일쑤이지만 이 책은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된데다 최신 연구성과를 적극 반영한 것이 특징이다.따라서 일본사를 처음 대하는 사람들에게 길잡이 구실을 톡톡히 할 만하다. 1만2천년전 일본열도에서 조몬문화가 열리면서 부터 일본이 GNP 세계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기 까지를 6장으로 시대구분해 설명했다.첫째 「유사이전」에서는 일본 문화와 국가의 성립을 다루되 「일본서기」등 옛사서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 보다는 이웃국가들과의 문화발전 비교를 통해 신중하게 서술했다.이어 ▲쇼토쿠태자 시대 율령국가 형성 ▲무사(사무라이)계층의 대두 ▲도쿠가와막부 시대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 ▲제2차세계대전이후의 현대사로 구분했다. 종전 후 일본의 경제성장을 다루면서 결코 일본인의 노력 때문만은 아니며 『불행한 일이지만 한국전쟁 특수도 큰 영향을 미쳤고』『대만 장개석정권과 미국이 전쟁배상금을 포기한 것이 매우 도움이 됐다』고 밝힌 데서 이 책이 유지하는 관점을 엿볼 수 있다. 양억관 옮김,고려원 6천5백원.
  • “사시과목에 국제경제법 포함돼야”/박노형(발언대)

    대법원과 세계화추진위원회가 합의한 사법시험과목 개선안이 8일까지 입법예고중이다. 사법시험과목 개선안은 우리 사법제도와 법률문화의 근본적 개혁의 근간이된다. 사법시험은 판사·검사·변호사·의 법조인이 되기 위한 관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법원과 세계화추진위원회가 온갖 지혜를 다하여 합의하였을 사법시험과목 개선안은 법학교육과 법률서비스 측면에서 합리성과 균형을 상실하고 있음이 크게 우려된다. 특히 국제법이 헌법 등의 다른 기본과목과는 달리 사법시험의 2차 필수과목으로 채택되지 않고 있으며, 국제경제법은 전혀 사법시험의 독립된 과목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세계회추진위원회는 1995년 12월 발간된 「사법개혁­그 시작과 끝」이라는 해설자료에서 「통상…등 새로운 전문분야의 법학과목을 시험과목으로 편입」하였다고 설명하고 있다(36쪽). 세계화추진위원회의 설명을 존중한다면,새로이 1차 제2선택과목으로 추가된「국제거래법(국제사법 포함)」이 통상분야의 법학과목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기업의 국제간 거래에 관한 법규범인 국제거래법은 통상에 관한 법이 결코아니다. 국제경제관계에서의 국가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법규범인 국제경제법이 통상에 관한 법이다.따라서 통상분야의 법학과목을 사법시험과목으로 편입하였다는 세계화추진위원회의 설명은 사실과 다른 것임을 알수 있다. 국제거래법은 상법의 인접법으로서 신용장의 개설 등 기업의 국제적 거래에 관한 법규범을 의미하며, 국제사법은 우리 국민과 외국인과의 결혼이나 이혼 등 민·상법상 법률관계에 외국요소가 개입된 경우의 법적 문제해결을 위한 법규범을 의미한다. 국제사법이 국제거래법에 포함되어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렇게 다른 법체계가 하나의 시험과목이 됨으로써 이들 분야의 교육과 연구가 효율적으로 수행될지도 의심스럽다. 국제경제법은 위의 국제거래법이나 국제사법과 크게 다른 학문영역이다.국제경제법은 국제경제관계에서 국가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법규범을 의미한다.예컨대 제2차세계대전후 출범한 IMF를 중심으로 한 국제통화제도,IBRD를 중심으로 한국제개발제도 및 GATT와 WTO를 중심으로 한 통상제도가 국제경제법의 주요내용이 된다. 또한 미국과 EC의 통상법도 국제경제법의 주요내용이 된다. 국민들에게 더 이상 생소하지 않은 반덤핑관세,상계관세,긴급수입제 한조치는 물론 미국의 무역법 301조 등이 국제경제법의 한부분이 된다. 더욱이 WTO체제에서 국제투자와 경쟁정책에 관한 국제규범이 형성되면서 역시 국제경제법의 한부분이 된다. 이러한 국제경제법이 사법시험에 독립된 과목으로 채택되지 않음은 우리의 국제경쟁력 제고에 있어서 법학교육의 책임을 포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더욱이 사법시험과목은 법학교육과 법조인의 기능수행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됨을 주목해야 한다. 전문법과대학원의 설립이 무산된 현시점에서 국제경제법이 사법시험과목이 되는 여부는 더욱 중요하다. 학생들은 사법시험과목으로 채택된 과목만을 열심히 공부하며 학교당국도 이들 과목에 대해서만 전임교수를 두려 하기 때문이다. 국제경제법이 사법시험과목으로 전혀 채택되지 않음으로써 오늘 이후의 국제경제법의 연구와 교육은 물론 우리의 국제경쟁경에 큰 문제가 생길 것이 자명하다. 또한 대학교에서 국제경제법과 국제법을 올바로 교육받지 못한 법조인들이 정부·기업 등에 오늘날 일상적인 국제경제법문제에 대하여 효과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게 될 것도 자명하다. 세계화추진위원회가 주장하듯이 사법시험과목 개선안에 통상분야의 법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면 국제경제법이 독립된 과목으로서 새로이 추가되어야 할것이다. 국제경제법이 독립된 과목으로 채택될 수 없다면 세계화추진위원회는 이번의 사법시험과목 개선안에 통상분야의 법이 편입되었다는 주장을 철회하여야 한다. 그러나 사법시험령의 개정취지인 대학교육의 내실화와 전문법조인의 육성을 실현하기 위하여 국제경제법은 반드시 사법시험의 독립과목으로 채택되어야 하며, 국제법은 2차 필수과목이 되어야 한다. 위와 같은 사법시험과목의 문제가 올바로 해결되어 우리 법조·법학계가 다른 분야와 함께 국제경쟁력 제고에 제몫을 다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아테너서 애틀랜타까지/올림픽 100돌 성화 타오른다

    ◎1896년 첫 대회… 13개국 311명 참가/31년 LA­상업주의 적중 “대성공”… 선수촌 처음 등장/72년 뮌헨­아랍테러단 「이」 숙소 기습… 선수 9명 사망/88년 서울­개도국서 첫 개최… 159국 참가 “화합구현” 아테네에서 애틀랜타까지 1백년.오는 7월19일 미국 남부도시 애틀랜타에서 개막되는 제26회 올림픽을 계기로 근대올림픽이 1백주년을 맞는다.「근대 올림픽의 아버지」 쿠베르탱남작의 올림픽부활운동이 열매를 맺으면서 1896년 고대올림픽의 발상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13개국 3백11명의 선수들이 제1회 대회를 연지 한 세기가 흐른 것이다.그동안 올림픽은 질적·양적으로 수많은 변천을 거쳤다.그 과정을 간추려보고 올림픽의 의의 및 앞으로의 과제 등을 살펴본다. ▷약사◁ 기원 3천여년전 그리스 제우스신전 근처 계곡에 있는 올림피아에서는 4년마다 한차례씩 헤라클레스 축제를 기념하는 경기가 열렸다.달리기 멀리뛰기 창던지기 원반던지기 그리고 레슬링이었다.이 행사는 아테네 스파르타 마케도니아의 끊임없는 전쟁속에서도 10세기 이상지속되었다. 기록된 최초의 올림픽경기는 기원전 776년으로 서기 394년에 이르기까지 1천2백년 이상 이어졌다.그러나 그리스를 정복하고 있던 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가 기독교정신에 어긋나는 이교도 의식이라며 올림픽을 폐지시켜 이후 근대올림픽이 부활되기까지 15세기 동안 자취를 감춘다. 1880년대 들어 쿠베르탱남작이 부활운동을 펼치면서 드디어 1896년 첫 대회를 열기에 이르렀다.모두 10개 종목에 44개 금메달이 걸린 이 대회에서는 미국이 1위를 차지했고 그리스와 영국이 그 뒤를 이었다. ○16·40·44년대회 취소 이후 미국 세인트루이스,런던,스웨덴 스톡홀름 대회를 거친 올림픽은 1916년 베를린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개최국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취소되고 만다.이때부터 올림픽의 정치오염이 본격화된다. 제7회 대회는 1920년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열렸는데 1차대전동안 벨기에 사람들이 겪었던 슬픔을 달래주는 대회였다.반면 패전국인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터키는 참가가 허용되지 않았다. 다시 파리와 암스테르담을 거친 올림픽은 32년 유럽대륙을 떠나 미국 LA로 옮겨간다.이 대회는 미국의 상업주의가 적중해 대성공을 거뒀다.처음으로 선수촌이 등장했고 거의 매일 6만명 이상의 관중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4년 뒤 히틀러의 나치에 의해 올림픽은 나치의 들러리 역할로 전락했다.독일 베를린대회 주변에는 나치의 숨막히는 분위기가 감돌았고 결국은 40년 대회와 44년 대회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취소되고 만다. 52년 헬싱키대회에는 볼셰비키혁명 이래 수십년동안 올림픽을 인정치 않던 소련이 마침내 대선수단을 이끌고 등장,동·서냉전시대에서의 미국·소련 초강대국 대결을 시작한다. 이후 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때까지 11차례의 올림픽에서 미국은 4차례,소련은 7차례 1위를 차지했다. 올림픽은 56년 호주 멜버른에서 개최돼 다시 한번 대륙간 이동을 했고 64년 일본 도쿄로 넘어갔다.도쿄대회는 패전국 일본의 부흥을 꾀하는 기폭제가 됐다. 68년 멕시코대회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아프리카국가들의 보이콧위협,학생시위,시상식에서의 흑인시위 등 정치오염이 심각했다.시위폭동으로 2백60여명이 사망했다. ○올림픽정신 상처입어 72년 뮌헨대회에서는 9월5일 아침,세계평화를 추구하는 올림픽정신이 영원한 상처를 입었다.아랍테러리스트들이 이스라엘숙소를 기습,선수 9명과 테러리스트 2명,경찰 1명이 사망했고 올림픽은 34시간 중단됐으며 메인스타디움에서는 추모식이 열렸다.이때부터 올림픽의 슬픈 역사가 거듭된다. 76년 몬트리올대회는 뉴질랜드럭비팀의 남아공 여행을 꼬투리잡은 아프리카국가들의 보이콧으로 얼룩졌고 80년 모스크바 대회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하는 64개 서방국가들의 불참으로 반쪽대회로 전락했다. 84년 LA대회 역시 소련등 동구권의 보복불참으로 반쪽대회였다.한국은 이 대회에서 종합10위를 차지한 뒤 88년 서울대회 4위,92년 바르셀로나대회 7위 등으로 기염을 토해 올림픽강국으로 떠오른다. 서울올림픽은 「한강의 기적」을 온세상에 자랑하면서 상처투성이의 올림픽을 되살려 놓았다.동·서 양진영 1백59개국이 참가해 「화합올림픽」을 구현했고 그동안 선진국이 독점했던 올림픽개최를 처음으로 개발도상국에서 대성공으로 마무리했다.단일민족 북한의 불참이 「옥의 티」였다. 서울대회는 초강대국 소련과 스포츠강국 동독의 올림픽 고별무대였다.이후 지구상에는 지각변동이 일어나 독일통일이 이뤄지고 소련이 붕괴됐으며 동구권 전체가 몰락했다. ○소련·동독의 고별무대 바르셀로나 대회에서 옛 소련 국가들은 EUN이라는 어정쩡한 단일팀으로 참가했다.동독은 참가대상에 존재하지 않았다.EUN은 미국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해 소련붕괴의 긴 여운을 남겼다. 애틀랜타 올림픽은 경쟁상대를 잃은,유일한 초강대국 미국의 안마당이 될 것이다. 근대 올림픽이 19세기에서 21세기로 3세기를 옮겨가는 길목인 2000년 대회를 놓고는 중국 북경과 호주 시드니가 치열한 각축전을 벌여 시드니로 돌아갔다.12억의 중국인들은 그들이 「천하의 중심」,즉 「중화민족」임을 과시할 절호의 기회를 놓쳐 땅을 쳤으며 2백5년전 유럽인들이 처음으로 호주땅을 밟은 곳이기도 한 시드니는 흥분의 도가니를 이뤘다. ◎의의·과제/세계평화·국제친선 구현 “이바지”/인간능력 한계 넓히는데도 도움/정치오염·상업주의 극복이 과제 올림픽헌장은 첫 머리에 올림픽의 본질과 목적을 내세우고 있다.즉 ▲육체적·도덕적 자질의 향상 ▲세계평화의 추구 ▲국제친선 등이 골자이다.올림픽은 1백년의 역사를 누리면서 이같은 올림픽정신을 구현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인종과 언어와 풍습·국적·민족·문화를 뛰어넘는 인류의 대제전으로 발전했다.인간 능력의 한계를 넓히는데에도 공헌을 해 인류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올림픽정신이 퇴색하고 있다.정치오염과 상업주의가 스포츠정신을 퇴색시키고 있다.금메달은 「돈방석」과 직결되고 있으며 대회 행사 자체도 자본주의 논리에 입각해 치러진다. TV독점중계는 올림픽을 TV의 「시녀」로 전락시켰으며 공식후원업체의 횡포 역시 심각하다. 아마추어리즘도 프로페셔널리즘 앞에서 맥을 못추고 있다.테니스 축구 농구를 시발로 프로선수들의 출전은 현대올림픽이 종착을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뿐만아니라 옛 소련·동독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과 중국,그리고 일부 권위주의국가에서 보여준 국가관리체육정책은 자본주의의 프로페셔널리즘 못지 않게 올림픽을 오염시켰다. 약물복용의 폐해 또한 심각하다.근육강화제 흥분제 진정제 호르몬제 등의 복용은 육체와 정신의 건강을 추구하는 올림픽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과 각국 스포츠지도자들의 「스포츠귀족화」 역시 올림픽의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일반대중의 평등을 추구하는 올림픽에서 이들은 이미 스포츠 특권층으로서 상당한 부와 권력을 향유해 올림픽의 이질감을 부추기고 있다. 과대망상에 가까운 민족주의·국가주의 역시 장애요인이다. 전문가들은 21세기에는 다시 한번 「올림픽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 이달의 독립운동가 송종익선생/재미 흥사단 이끌며 임정 적극 후원

    ◎40여년간 항일운동·광복군 지원 활동/통합 독립단체 「한족연합위」 결성 앞장 국가보훈처는 7일 흥사단 창립 발기위원을 역임하고 북미 「대한인 국민회」의 부의장을 지낸 우강 송종우선생을 서거 40주기를 맞아 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선생은 1887년 2월 대구에서 태어났다.1904년 4월 미국으로 유학간 뒤 재미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40여년간의 항일운동에 첫발을 내디뎠다. 1908년 3월 전명운의사 등이 스티븐스를 처단하자 이들의 석방을 위한 재판후원회의 재무로서 재판경비 조달에 힘썼다.1912년 도산 안창호선생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흥사단 약법」의 초안을 보여줬다.이같은 만남이 인연이 돼 선생은 흥사단의 첫 동지가 되어 일생을 흥사단 운동에 바치게 된다. 이듬해인 1913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 창립총회가 열렸다.흥사단의 사자는 문사와 무사를 모두 일컫는 말로 진정한 애국자를 일으킨다는 뜻을 담고 있다. 흥사단은 창단 이후 8년동안 창단위원회에서 운영했으며 3부 역원제가 실시된 1921년부터 선생은 5년간 이사부장을 맡았다. 1926년부터 36년까지는 이사부 재무원으로 도산이 없을 때에는 실질적으로 흥사단을 이끌었다. 1919년 상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흥사단의 창립자인 도산이 노동협판 등 정부요인으로 활동하게 되자 흥사단 미주본부의 사무는 선생이 도맡게 됐다.선생은 흥사단 활동은 물론 개인적으로는 도산의 가족까지도 보살피며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선생은 중국지역 독립운동 세력의 지원을 위해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세웠으나 벼농사의 실패로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선생은 미주 「대한인 국민회」의 재무로서 임시정부 건설의 경비조달에도 참여했다.대한인 국민회 북미지방총회는 1922년 1월 대의회의 결의로 지방총회를 폐지한 뒤 미주·멕시코·쿠바에 있던 지방회들만으로 국민회를 재편성하고 북미 대한인 국민회로 이름을 바꿨다. 그 뒤 일제가 만주사변을 도발하는 등 최후의 발악을 시도하자 1936년 5월 국민회는 미주 각 지역의 대표자들을 소집,항일역량의 결집을 시도했다.선생도 여기에 참여해 항일독립운동의후원에 힘을 쏟았다.선생은 총회관 건축위원에 선임되어 국민회의 중흥에 노력하는 한편 임시정부를 비롯한 중국지역 항일세력의 지원을 계속했다. 국민회는 특히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광복 때까지 외교사업과 국방후원 및 동포들의 전시안녕 보장을 주도하는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 편성도 도왔다. 1941년 4월 하와이 국민회 및 동지회와 북미 국민회 등은 하와이 국민총회관에서 「대한민족이 대동단결해 독립전선에 역량을 집중하고 광복대업을 촉성할 것」을 목적으로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했다.이 회의는 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등 세계정세의 변화에 호응하고 종래 분산적으로 전개되던 독립운동 및 지원활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미주지역 운동단체들의 통합을 논의하기 위한 목적을 띠고 있었다. 이 모임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조직됐고 이 위원회는 로스앤젤레스에 집행부,호놀룰루에는 의사부를 두어 1943년 봄까지 독립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와 구미위원부에 보내 광복사업비에 충당케 했다. 선생은 미주대표로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집행부 재무에 선임돼 이같은 활동에 앞장섰다. 1943년 이승만이 이끄는 동지회가 연합위에서 탈퇴하자 연합위는 워싱턴에 별도로 외교사무소를 설치했다.이 때문에 동지회의 외교사무소와 나란히 활동함으로써 외교활동에 지장이 생겼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는 외교기관을 단일화하기 위해 1944년 8월 주미외교위원부를 폐지하는 대신 주미외무위원회를 설치키로 결정,위원회 인선을 재미한인사회에 일임했다.동지회를 제외한 13개 단체 대표들은 로스앤젤레스에 모여 15명의 위원을 선출했는데 선생도 위원에 선임됐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이 회의에 동지회가 불참했다는 이유로 이 인선을 인준하지 않았다. 선생은 광복후인 1945년 11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의 일원으로 귀국,조국재건과 흥사단 부흥에 힘쓰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지원과 흥사단 정신의 발양에 헌신하다 1956년 1월7일 별세했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지난해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종말론(외언내언)

    한글사전은 「사이비」를 『겉은 제법 비슷하나 속은 다름』이라고 풀이하고 있다.따라서 사이비종교는 종교가 아니라 종교의 탈을 쓴 혹세무민 집단이다.이 집단들은 허무맹랑한 교리를 내세워 신도들을 현혹한다.그 대표적인 교리가 종말론이다. 사이비교주들은 종말론으로 위기의식을 강조하면서 「영생」과 「영원불멸」을 미끼로 활용한다.종말론의 뿌리는 깊다.초대교회때의 기독교박해,십자군원정,1·2차세계대전등 그때그때의 긴박하고 어려웠던 시대상황을 대변해왔다. 종말론을 신봉하던 프랑스 「태양사원」신도 16명이 23일 알프스산악지대에서 불탄 시체로 발견돼 성탄절을 앞둔 프랑스국민들을 경악케 했다.이들은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단지 환상일뿐이다」라는 유서를 남겼다고 하지만 프랑스경찰은 타살의 혐의가 짙은것으로 보고 있다. 종말론에 의한 참사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공통적인 현상이다.종말론 때문에 가장 많은 사람이 희생된것은 78년 미국 「인민사원」사건.이 교단의 교주 짐 존스는 남미 가이아나밀림에 건설한 종교촌락에서 어린이 3백명을 포함한 신도 9백14명을 음독자살하게 하는 희대의 참극을 연출했다.일본 도쿄의 지하철에 독가스를 살포한 「옴진리교」도 종말론으로 신도들을 현혹했다.사회주의 붕괴후 동구권에도 종말론 바람이 일고 있다.93년 11월 우크라이나에서는 신을 자칭하며 종말론을 강조한 사이비 교주 2명이 체포되기도 했다. 우리사회도 사이비종교의 종말론 때문에 여러차례 소동을 겪었다.87년 구원파의 오대양사건으로 32명이 떼죽음을 당했는가 하면 92년에는 다미선교회가 그해 10월28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속여 신도들에게 학업과 생업을 버리도록 강요해 가정을 파괴하는등 반사회적 행위를 저질렀다. 독버섯처럼 번지고 있는 사이비종교는 이땅에서 추방되어야 한다.히로뽕이나 코카인이 인간의 육체를 좀먹는 마약이라면 사이비종교는 사회의 질서와 안녕을 해치는 정신적 마약이기 때문이다.
  • 「국교정상화 30년」고노 일 외무 본지 특별회견

    ◎“미래지향 한일관계 구축 전력”/한국상품 수입 늘어나 역조시정 낙관/대중문화 개방 이해증진에 도움될 것 한국과 일본은 금세기들어 수천년 역사에 있어 가장 최악의 상태를 맞았었다.해방 뒤에도 20년동안 양국은 정상적 관계를 맺지 못했다.1965년에야 양국은 기본조약을 맺고 국교를 정상화했다.18일은 기본조약이 발효된지 정확하게 30년이 되는 날,즉 국교정상화 30주년이다.그러나 양국은 올해에도 망언파동 등을 둘러싸고 여러차례 마찰음을 냈다.국교정상화 30주년을 맞아 고노 요헤이(하야양평) 일본외상과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인터뷰가 시작되자마자 『양국 국교정상화 30주년은 기념할 만한 뜻깊은 일』이라면서 『본래대로라면 서울에 가서 함께 이 기념할 만한 날을 맞고 싶었는데…』라고 말문을 연 고노 외상은 18일은 일본으로서는 56년 유엔에 가입한 날일 뿐 아니라 종전 50주년을 맞는 정부의 기념식도 있어 여러가지로 뜻깊은 날이라고 설명했다. ­탈냉전시대를 맞고 있는 때 양국관계의 미래를 전망한다면. ○기본적 가치공유 ▲한·일양국은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라고 하는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또 안전보장상의 이해를 함께 하고 있다.양국의 우호협력관계는 양국만이 아니라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중요하다.더 나아가 유엔과 아시아 태평양경제협력체(APEC)와 같은 국제사회의 무대에서 한·일양국의 협력이 날로 중요성을 더해 가고 있다.이같은 상황에서 양국간의 긴밀한 관계 구축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고 이를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 나가고 싶다. ­국교정상화 30주년을 평가하면. ▲65년 국교가 정상화한 이후 30년동안 한·일관계는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발전해 왔다.지금까지의 한·일관계 발전에 힘을 기울여온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고 싶다.전후 50주년이자 한·일국교정상화 30주년인 올해 지난 30년동안의 한·일관계를 되돌아보면서 과거를 직시한 위에 미래지향의 관계를 구축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싶다는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다. ­전후처리의 마지막 과제로 북한과의 국교정상화 문제가 활발하게 거론되기도했는데. ▲11월14일 무라야마 도미이치(촌산부시)총리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도 분명하게 밝힌 것처럼 일본의 한반도 정책 기조는 한국과의 우호협력관계의 증진에 있다.이런 기본정책 아래 일·북한 국교정상화교섭에 대해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일·북한간의 비정상적 관계를 바로잡으면서 동시에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이바지한다고 하는 두가지 관점에 입각,계속해서 한국과 긴밀하게 제휴해가면서 대응해 나간다는 생각이다.지난 3월 여3당대표단의 북한방문시 북한의 노동당과 연립여당 대표단이 국교정상화 교섭의 무조건 재개에 합의하기도 했지만 현재로서는 재개 시기 등에 대해 결정돼 있지 않다.상대가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전망 등을 명확하게 말하는 것은 곤란하지만 일본으로서는 앞서 말한 방침에 기초해 대응해 나갈 것이다. ○직접 투자 늘릴터 ­한국은 지난 30년동안 한번도 대일무역흑자를 기록하지 못했다.한국의 책임도 적지 않지만 일본으로서도 개선책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가. ▲양국간 무역불균형은 한국의 산업구조 및 한국의 고도성장등 요인에 의한 점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최근에는 반도체등을 중심으로 한국으로부터의 수입도 급증하고 있어 밝은 변화의 조짐도 나오고 있다.일본으로서도 계속해서 내수주도형의 경제운영에 힘써 규제완화 및 시장접근을 개선시키려 하고 있다.또 동시에 한국에 대한 직접투자의 촉진과 산업기술협력을 추진해 앞으로도 한·일양국의 무역이 순조롭게 확대 발전되도록 노력해 나가고 싶다.김 등 농수산물의 수입규제완화등에 대해서는 종래부터 양국간에 협의가 행해지고 있다.특히 올해는 김에 대해서는 양국 민간간의 조정의 결과 수입이 실현됐다.앞으로도 이같은 협의의 장에서 충분히 대화가 이뤄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한국은 대중가요,연극,영화등 일본의 일부 대중문화 공연을 제한하고 있는데. ▲현재 한국에서는 일본의 이른바 대중문화를 해금하는 데 대해서 여러가지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일본으로서는 이같은 논의를 거쳐 한·일간의 문화교류가 보다 자연스럽게 자유로운 형태로 발전해 나가 양국 국민간의 상호이해가 깊어지기를 기대한다.일본정부로서는 일본문화의 여러가지 측면을 한국민 여러분에게 소개해 폭넓게 이해가 깊어지도록 다양한 문화교류사업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이런 의미에서 지난해 가을 서울에서 열렸던 「일본문화통신사」사업에서 일본어 뮤지컬이 상연되는 등 새로운 시도가 받아들여져 호평을 받은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이런 자연스런 문화교류의 흐름이 한층 더 촉진되도록 한국측의 협력을 기대한다. 올해 한·일양국간 어려운 장면도 여러차례 만났던 고노 장관은 언제 가장 힘들어 했을까.직접 물어 보았다. 『일본국,일본정부의 생각은 지난 8월15일 총리담화에 담긴대로다.무라야마 총리의 담화는 각의에서 논의돼 이해를 얻어 각의의 결정 위에 담화로서 발표된 것이다.무라야마내각의 생각이자 곧 일본의 생각이다.그러나 한 나라에는 여러가지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모두 하나로 생각할 수는 없으나 대다수 사람은 총리의 생각과 같다.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은 사람의 발언도 있었고 양국 사이에 첨예한 감정적 마찰이 일어나 나로서는 대단히 괴로웠다.일본정부의 생각이 정확히 이해됐으면 좋았을텐데라고 생각했었다』라고 말해 에토 다카미(강등륭미) 전총무청장관의 망언파동을 직접 지적하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상당히 고통스러웠음을 시사했다. ○대한우호가 우선 30년을 넘어가는 때 한국민에게 하고 싶은 말을 부탁했다. 『지난 14일 TV로 클린턴 미대통령이 보스니아 평화협정 조인식에서 연설하는 것을 들었다.클린턴 대통령은 「우리는 과거는 바꿀 수 없다.그러나 미래는 변화시킬 수 있고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나 역시 전적으로 동감이며 우리에게도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했다.역사를 직시하고 역사에서 배우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하다.최근 공로명 외무장관과 오사카에서 만나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외무장관으로서 협력해 양국관계가 더욱 발전되도록 전력을 기울이고 싶다』고 미래지향적 양국관계를 강조하면서 총총히 자리를 떴다.
  • 특급정보 유출(외언내언)

    스파이가 언제적부터 있었는 지는 확실치 않다.어디까지를 스파이 활동으로 보아야 하는가도 분명치 않다.아마도 인간이 집단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원시적 스파이활동은 시작됐을 것이란 추정은 가능하다. 부족사회에서도,고대국가에서도 스파이활동은 있었을 것이다.적이나 경쟁자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 경쟁이나 전쟁에 결정적으로 유리해지는데 정보수집활동을 안했을리 없다. 1차 세계대전 때의 마타 하리,미국의 로젠버그는 전설적인 스파이들이다.소련은 로젠버그를 매수해 미국이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한지 불과 4년만에 원자탄을 갖는데 성공했다. 국가정책 기밀을 캐내는 정치스파이,적군기밀을 탐지하는 군사스파이,사기업간에 경쟁사의 기밀을 파내는 산업스파이등 종류도 다양하다.냉전시대,미·소간의 스파이전은 아마도 인류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정보전으로 기록될 것이다. 노태우정부 때 차세대전투기의 기종변경과정에서 청와대의 기종평가지침,청와대동향등 세칭 「청와대 정보」가 F16제작업체인 미국의 제너럴 다이내믹스(GD)사에 속속들이 넘겨진 사실이 밝혀져 국민들의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니다.국가 최고통치기구인 청와대의 정보가 유출됐다는 충격도 충격이지만 ▲흘러나간 경로와 관련자 범위 ▲관련정보의 유출이 기종을 F18에서 F16으로 변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지여부 ▲93년 감사원감사에서 지적됐던 사실이 그동안 은폐됐던 경위 ▲사후 청와대의 보안대책등 궁금증이 하나 둘이 아니다. 이런 일이 우리나라에서만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미국의 카터정부 때 백악관에서 일했던 고위관리가 백악관을 나온뒤 KGB에 포섭돼 소련스파이활동을 한 예,서독의 브란트총리시절 여비서가 동독공산간첩이었던 사실이 밝혀진 일들이 그런 것들이다. 이번 사건은 국가최고급 정보가 일개민간기업에 넘어간 부끄러운 사건이다.국민이 납득할만한 규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 체코,오늘 OECD 가입/서방측 유럽 안정화전략 작용

    ◎외국투자 연30% 증가/1인 GDP 3천달러/동구의 시장경제 전환 모델 평가 체코가 28일 구사회주의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선진경제국들의 모임인 세계경제협력기구(OECD)에 26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한다. 89년 민주화 성공 이후 순조롭게 시장경제로 전환 중인 체코가 이번 OECD 가입을 계기로 자본주의 체제로 본격적인 편입을 시작했다는 평이다.한국보다 경제력이 뒤진 체코가 OECD에 먼저 가입할 수 있는 것은 서방선진국들이 동유럽국가들을 서구경제권에 조기흡수,유럽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헝가리와 폴란드도 서방의 지원을 업고 내년 목표로 가입을 서두르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체코의 경우 동유럽 가운데 정치적 민주화는 물론 시장경제 전환에 가장 성공적인 국가로 꼽힌다.지난달 자국화폐를 외화와 교환할 수 있는 태환법을 의회에서 통과시킴으로써 OECD 가입에 가장 큰 걸림돌을 제거했다.올 1월에는 수출은행 설립 및 외국인 기업에 대한 획기적인 관세면제 조치를 취해 외국 투자자들을 손짓하고 있다.최근 6년간 매년 30% 이상씩 늘면서 모두 31억달러의 외국자본이 들어왔다는 점만 보더라도 체코경제의 역동성이 짐작된다. 체코의 경제성장은 과거의 명성을 되찾자는 국민들의 열망에 힘입은 바 크다.2차세계대전 직전까지만 해도 세계 7대 공업국에 속했던 부국이었으나 공산주의라는 장애에 걸려 경제성장이 정체됐던 나라.이같은 국가적 잠재력이 뒷받침이 되어 공산정권 시절에도 동유럽 국가 가운데 동독에 이어 두번째의 부국이었다. 체코는 인구 1천33만명에 면적은 7만8천㎦(남한의 80%)에 불과하지만 유럽의 중심부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인 만큼 주변 시장이 넓다.1인당 GDP는 3천67달러지만 구매력으로 환산할 경우 7천달러가 넘는다.농림수산업이 전체생산에서 5.9%(93년 기준)에 불과하고 제조업이 32.3%를 차지한다.이외에 금융·보험이 15.1%,전기와 가스 등 공공서비스가 21.2%에 달한다.광학과 정밀화학,핵공업 기술 등은 이미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다는 평이며 지난 해 26억달러의 관광수입이 체코경제 활성화에 큰 힘이 됐다. 민주화 이후 첫 시련은슬로바키아의 분리독립.지난 93년 1월1일부터 74년간이나 한나라를 이뤘던 슬로바키아가 독립하면서 그해 0.9%의 마이너스 성장을 보였으나 94년 2.6%,올 2·4분기엔 4%의 경제성장을 기록,분리후유증을 완전히 벗어났다. 한국과는 지난 90년 3월 수교이후 올 6월말까지 교역규모가 2억달러에 불과하다.그러나 올 3월 양국정상회담을 통해 한국이 체코의 민영화 사업에 본격적인 참여를 결정함으로써 앞으로 급속한 경협이 기대된다.
  • 서울신문 창간 반세기를 맞으며(사설)

    ◎「변화의 에너지」를 국가발전의 동력으로 서울신문이 오늘로 창간 50주년을 맞았다.조국광복이후 곧바로 창간되어 나라와 함께 발전하고 겨레와 함께 성숙해온 반세기였다.벅찬 감회와 긍지속에 우리는 지금까지 축적되어온 역량을 바탕으로 이제 민주·통일·번영의 더욱 믿음직한 길잡이가 될 것을 다짐한다. 우리 대한민국호는 21세기를 목전에 둔 지금 국내외적으로 몰아치는 격랑속에서도 세계초일류 국가를 이룩한다는 전략목표를 향해 변화와 개혁의 물길을 따라 힘차게 항진하고 있다. ○부패·정경유착 혁파시급 오늘의 세계는 냉전체제가 붕괴되면서 민족간 마찰과 종교적 갈등으로 크고작은 분쟁이 곳곳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세계무역기구(WTO)발족으로 상징되는 국제경제질서의 재편 소용돌이속에서 국익의 극대화를 위한 총성없는 전쟁이 더욱 치열한 상황이다.특히 한반도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민족간의 대립과 갈등이 첨예하게 부각되고 있는 세계유일의 분단현장으로 남은채 평화와 통일이라는 숙제를 안고있다.국내상황 역시 폭발력을 지닌 변화의 소용돌이속에 휩싸여 있다.정치·경제·사회등 모든 부문에서 구습과 정체,그리고 퇴영의 낡은 모습들이 표출되고 있는 가운데 이를 혁파하려는 에너지가 응집력을 더해가고 있다. 최근 노태우 전직대통령의 부정 축재사건과 관련하여 노출된 정치권의 부패상과 정경유착의 극심한 폐해는 국민적 분노를 불러 일으켜 이제 이런 것들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국민적 합의가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활력소 필요한 민주 한국 무엇보다 먼저 부정부패의 척결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활력을 얻도록 파사현정의 노력을 경주할 때다.우리는 변화와 개혁을 향한 국민적 소망과 응집된 에너지가 불만속에 내연하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폭발하는 것을 막고 국가발전을 이끄는 동력이 되도록 하는데 일역을 맡을 것이다. 우리는반세기 현대사를 정리하면서 단순한 구시대의 청산과 개혁을 넘어 창조와 발전의 새로운 세기를 위한 국민적 결집이 있어야함을 강조한다.그러기 위해서는 지식인과 지도층의 자각과 의지가 긴요하고 국민의식의 혁명적 변화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우선 과학·기술·정보·문화등 삶의 질이나 선진의 척도가 되는 분야에서의 후진적 사고나 행태를 선진적인 것으로 바꿔야 한다.오늘같은 무한경쟁시대에서는 변화의지만이 생존을 보장한다. ○민주·자율·책임지배해야 한세대동안 군사문화와 권위주의가 지배해온 우리사회에는 민주·자율·책임이라는 생활양식의 정착이 더욱 필요하다.경제를 위시하여 양적팽창만을 자랑해온 부문은 이제 질적발전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정치·경제 위주의 사고가 이제는 인간과 자연,그리고 문화중심으로 한단계 성숙해질 때가 되었다.새로운 도덕기반과 가치관의 정립으로 부정부패구조를 청렴과 투명한 민주체제로 바꾸고 분열을 통합으로 가꾸어 정의롭고 번영된 통일조국을 세우는 진정한 변혁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 창간 50돌을 맞은 서울신문은 바로 이런 막중한 과업들을 선도할 것이다.이같은 총론적 다짐아래 우리는 몇가지 목표를 정해놓고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려 한다.서울신문은 첫째,국민과 정부를 잇는 가교역할을 충실히수행하고자 한다.과거 권위주의 정부때와는 달리 도덕성과 정통성이 갖춰진 문민정부의 시책을 국민이 바로 알고,국민다수의 소리가 정책에 반영되도록 돕는 것은 공공적 가치를 높이는 일로서 책임있는 언론이 마땅히 해야할 일이다. ○21세기 초일류 고급지지향 둘째,통일을 이끌 민족정론지로서의 역할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오늘의 세계정세나 시대정신은 한반도의 통일을 역사적 필연으로 몰아 가고 있다.우리는 단순한 국토분단의 해소라는 물리적 통일에 더하여 진정한 민족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남북한 모든 국민의 숙원을 성취시키는데 앞장설 것이다. 셋째,세계화라는 국가목표를 달성하는 일에 함께 나섬으로써 고급지로서의 성가를 올리도록 노력할 것이다.이를 위해 전문성과 합리성,그리고 책임성을 갖춘 보도와 논평으로 신문제작의 기본을 삼을 것이다.세계를 상대로 배울 것은 배우고 알릴 것은 알리는 역할에 충실하려고 한다. 이제 서울신문은 21세기에 세계유수의 신문과 질적경쟁을 하는 초일류 고급지로 탈바꿈해 나가려 한다.독자여러분의 변함없는 관심과 성원을 기대한다.
  • 고전의 부활 「벤츠 E클래스 W210」(자동차 이야기)

    유행에 가장 민감한 패션의 경우 항상 새로운 디자인이 유행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과거에 유행했던 스타일이 현대적 감각에 맞게 재구성 돼 돌아오는 것이다.이처럼 스타일 트렌드는 일정한 주기를 갖고 시대적 사건이나 환경적 변화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자동차 업체들은 당시 승전의 분위기에 편승하여 드림카 제작에 몰두하기도 했다.60년대 후반 아폴로 우주선의 달 착륙때에는 자동차의 형태는 비행기나 우주선의 형태를 닮은 스타일이 유행하기도 했다. 오일 쇼크 때에는 연비 향상을 위해 공기저항을 최소화 한 유선형의 에어로 다이내믹 스타일이 유행하기도 했다. 11년만에 모델을 바꾼 벤츠의 E클래스인 W210도 종전의 벤츠 트레이드 마크인 사각형 헤드램프에서 탈피해 50∼60년대의 복고풍 스타일의 원형 헤드램프와 슬림하게 처리한 앞모습 등으로 파격적인 변신을 했다. 앞 모습의 변신과 함께 차량 전체가 종전 모델에 비해 라운드감을 더하면서 고전적 실루엣을 풍기고 있다.전문가들의 반응은 『벤츠 답지 않다』『장난스럽다』 『진보적이다』는 등으로 엇갈리지만 벤츠사로서는 21세기를 내다본 의욕적인 변신을 시도한 것이다. 외장 디자인과 더불어 내장 디자인에서의 가장 큰 특징은 쾌적한 거주성 실현에 있다.일반적인 자동차가 실내 거주성 검토를 위해서 사용하는 마네킹에 70년대의 기준치를 적용한 반면,W210은 21세기의 성인 남성의 평균체격을 기준치로 사용해 경쟁차에 비해 상당히 넓은 거주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단순히 수치적 우세뿐 아니라 인체에 적합한 조작성이나 감성적 측면까지 고려됐다고 벤츠사는 밝히고 있다.벤츠사는 W210의 스타일을 기본형으로 앞으로 전 차종에 반영할 계획을 갖고 있다.보수적 취향의 벤츠 소비자들이 앞으로 개발될 새로운 벤츠 모델들을 어떻게 평가할 지 주목거리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