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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베, 위안부 책임 적극 부인” 알렉시스 더든 美교수 비판

    “아베, 위안부 책임 적극 부인” 알렉시스 더든 美교수 비판

    22일 서울 서대문구 통일로 동북아역사재단에서 ‘한일협정 50년의 성찰과 평화공동체의 모색’을 주제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서 독일, 미국, 중국, 일본, 한국 등 여러 나라의 정치학자, 사학자, 국제법학자들은 일제의 식민 지배에 대한 책임 문제를 제기하며 한일협정 체결은 마무리가 아니라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이었음을 지적했다. 특히 위안부 문제 및 재일한인(조선인) 문제가 갖고 있는 현재적 의미 등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역사 인식을 비판하는 세계 역사학자들의 공동성명을 주도한 알렉시스 더든 미국 코네티컷대 교수는 “아베 총리는 1기 집권 기간에 ‘좁은 의미’에서 강제 동원은 없었다는 악명 높은 주장을 했고, 2기인 현재에는 ‘인신매매’라는 주장을 했다”며 “누가 인신매매를 저질렀느냐는 질문에는 답변을 하지 않음으로써 일본의 국가책임을 적극적으로 부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라는 역사적 이슈는 지금까지 글로벌 차원에서 문제가 돼 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고 갈등을 빚는 역사 관계와 이것의 화해 문제 역시 한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히구치 나오토 일본 도쿠시마대 교수는 최근 일본 내에서 활발해지는 ‘배외주의’에 대해 “재일한인을 집중적으로 표적으로 삼는 이유는 일본의 식민지 역사를 부정하려는 욕망이 드러난 탓”이라고 쓴소리를 던졌다. 베르너 페니히 독일 베를린자유대 명예교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 일본의 전후 배상 및 책임에 대한 차이를 비교했다. 국가지도자가 자살한 독일과 지위를 유지한 일본의 비교에서 시작해 영토권 주장 여부, 물의를 일으키는 지도자의 행위 여부, 과거 기장 및 상징 사용 여부에서 엇갈림을 보여 줬다. 그는 “독일이 유럽에서 그러했듯 한·일의 갈등 역시 동북아시아 지역의 상호 긍정적 의존성을 확대하며 평화공동체를 지향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나 죽거든… 한국전쟁 영웅 남편처럼 부산에 묻어 주오”

    “나 죽거든… 한국전쟁 영웅 남편처럼 부산에 묻어 주오”

    한국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호주 여성이 전쟁 발발 65주년을 맞은 지금까지 한국과 깊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올윈 그린(92)은 지난 21일 호주 시드니에서 열린 한국전쟁 호주 참전용사를 기리기 위한 행사에 올해도 어김없이 참석했다. 그린의 남편은 1950년 9월 말 호주군 지휘관으로 참전했다가 그해 11월 31세의 나이로 숨진 찰리 그린 중령이다. 그린 중령은 연천·박천전투 등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앞서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해 북아프리카와 그리스 등에서 전과를 세워 호주에서는 영웅대접을 받고 있다. 결혼 7년 만인 27세 때 남편을 잃은 그린은 당시 세 살이던 외동딸을 홀로 키웠다. 남편을 잃은 뒤에 남편의 전기를 쓰거나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과 함께 전몰 호주 장병을 추모하는 대형 자수를 새기는 등 남편을 기리는 작업을 계속해 왔다. 그린의 한국에 대한 관심도 크다. 시드니의 한국 기관이나 민간단체들이 초청하면 만사를 제쳐 놓고 꼬박꼬박 참석한다. 이미 5차례 한국을 방문한 그린은 오는 11월 다시 한국을 찾는다. 남편 그린 중령이 ‘이달(11월)의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된 것을 계기로 남편이 묻힌 부산 유엔묘지 등을 둘러볼 예정이다. 그린은 자신이 숨지면 부산의 남편 묘지에 합장되길 원한다는 뜻을 이미 밝혔다고 한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英왕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여왕부터 전원 군복무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英왕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여왕부터 전원 군복무

    ▲ 여왕도 군용트럭 몬 수송장교 영국 왕실의 왕위 계승 서열 5위인 해리 왕자(Henry Charles Albert David Windsor)가 19일(현지시간) 10여 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고 전역했다고 영국 왕실이 밝혔다. 해리 왕자가 군 복무를 마치면서 영국 왕실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실천하는 가문이라는 칭송이 쏟아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왕은 물론 왕실 남성 모두가 군 복무를 했으며, 대부분 최전선에 자원해 전투에 참가했던 경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 여왕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수송보급장교로 근무하며 직접 군용트럭을 운전했고, 아들인 찰스 왕세자(Prince of Wales) 역시 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해 6년간 해군장교로 복무했다. 찰스 왕세자의 동생인 요크 공작 앤드루 왕자(Andrew Albert Christian Edward) 역시 1979년 소위로 임관해 2001년 해군중령으로 전역하였고, 복무기간 중 포클랜드 전쟁에 참전해 최전선에서 헬기 조종사로 활약했으며, 해리 왕자의 형인 케임브리지 공작 윌리엄(William Windsor) 역시 영국 공군에서 근무하고 전역했기 때문이었다. 왕실 인사 대부분이 국민들에게 모범이 되기 위해 군 복무를 했다면, 이번에 전역한 해리 왕자는 진심으로 군대가 좋아서 군복을 입었던 특이한 케이스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군복을 입고 장난감 총을 들고 뛰어노는 것을 좋아했으며, 유난히 군대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 “진짜 장군 계급장을 달겠다”...아프간 파병 자원 영국 최고의 사립 명문 이튼 칼리지(Eton College)를 졸업한 그는 곧바로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Royal Military College, Sandhurst)에 입학했다. 그는 사관학교 입학 전에는 누드파티 파문과 대마초 흡연 등으로 물의를 일으켰고, 샌드허스트 입학 이후에도 파키스탄에서 유학 온 교환생도에게 ‘파키'(Paki)라는 비하 표현을 사용해 징계를 받기도 하는 등 잦은 구설에 시달렸다. 그러나 사관학교 졸업 후 육군소위로 임관하면서부터는 철이 든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는 자대 배치를 영국 육군 내에서도 최정예 부대로 손꼽히는 근위대, 그 중에서도 400년 전통의 블루스 앤 로열스(Blues and Royals) 근위기병연대에 배치 받았는데, 부대에 짐을 풀자마자 지휘관을 찾아가 이라크 파병 부대에 차출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왕실이 극구 반대하면서 해리 왕자의 이라크 파병은 좌절되었지만, 그는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자원했고 할머니와 아버지를 설득해 아프가니스탄 남부 헬만드(Helmand) 지역으로 파병되었다. 탈레반 거점이었던 이 지역에서 해리 왕자는 적진 한복판에 침투해 전투기나 공격헬기의 공중 공격을 유도하는 합동최종공격통제관(JTAC : Joint Terminal Attack Controller)로 활약하며 실전을 겪었다. 해리 왕자가 이 부대에 배치되었다는 것은 비밀이었으나, 미국의 한 폭로 전문지가 해리 왕자의 임무수행 모습이 담긴 사진을 공개하면서 탈레반은 눈에 불을 켜고 해리 왕자를 찾아 나섰고, 결국 당시 왕위계승 서열 3위의 왕세손의 안전을 우려한 국방부는 해리 왕자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본토에 있는 부대로 전출 명령을 내렸다. 그는 본토 복귀 이후 지휘관과 국방부에 “전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끈질기게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전장에 파병될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와중에 헬기 조종사가 되면 파병이 가능할 것이라는 정보를 접하고 항공장교에 지원해 합격했다. 대위로 진급한 그는 2011년 공격용 헬기인 아파치 AH Mk.I(AH-64D)의 조종사(Pilot) 및 사수(Co-pilot gunner) 자격을 취득했는데, 그는 교육 수료식에서 최우수 특등 사수(Best co-pilot gunner) 상을 수상하고 곧바로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지원했다. 그는 2012년 아프가니스탄에 배치되어 실전에 투입됐는데, 실제 전투에 나가 적지 않은 탈레반 병사들을 사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3년에 아프가니스탄 파병 임무를 마치고 영국에 복귀했을 때 “사람을 사살한 일이 있느냐”는 언론의 질문에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빼앗았다”면서 아프가니스탄군과 NATO 치안유지군 부상자 구출 작전에 투입되어 상당한 수의 탈레반을 사살한 사실을 시인했다. 해리 왕자는 2013년 영국 본토로 돌아온 뒤 제3항공연대에서 지휘관 및 참모로 근무했으며, 2015년 1월 영관장교 자격시험에 통과, 소령 진급 대상자가 되었다. 그는 자격시험 통과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상징적인 계급이 아닌, 진짜 군 복무를 통해 장군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으나, 결국 5개월 만에 군복을 벗었다. 그가 전역을 결심한 배경에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생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와 더불어 위험한 전장을 선호하는 해리 왕자를 걱정한 찰스 왕세자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전해졌다. 해리 왕자는 전역 후 3개월 일정으로 아프리카를 찾아 환경보전 활동에 나설 예정이며, 추후 상이군경들을 대상으로 한 복지 사업에 뛰어들 것으로 알려졌다. ▲ 노블리스 오블리제 : 권리와 책무 영국 왕실 인사들은 모두 명예계급을 가지고 있다. 여왕의 남편이자 윌리엄·해리 왕자의 할아버지인 에든버러 공작 필립(The Duke of Edinburgh, Philip Mountbatten)은 영국 육·해·공군 명예원수 계급을, 대위로 전역한 윌리엄 왕세자 역시 육·해·공군 명예원수 계급을 가지고 있으며, 중령으로 전역한 앤드루 왕자 역시 명예 해군소장 계급을 가지고 있다. 비록 의전을 위한 상징적인 명예계급이지만, 이들은 모두 실제 군에서 복무했고, 실전에 참가하기도 했던 경험이 있다. 영국 왕실이 병역에 엄격한 것은 지도층으로서 국민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함이다. 해리 왕자의 가문인 윈저(Windsor) 왕가는 해리 왕자의 고조할아버지인 조지 5세(George V)부터 병역 명문가(?)였다. 조지 5세는 12세라는 어린 나이에 당시 영국 해군 최강의 전함이었던 1급 전열함(1st rate ship of the line) HMS 브리타니아(Britannia)에서 견습 생도로 해군 생활을 했으며, 그 아들인 조지 6세(George VI) 역시 해군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포술장교로 활약해 훈장을 받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런던 대공습 작전을 벌여 런던 곳곳에 초토화되었을 때 조지 6세는 아내인 메리 왕비와 함께 폐허가 된 런던 시내를 누비며 장병과 시민들을 격려하고 구조 및 복구 작업을 진두지휘했으며, 딸인 엘리자베스 2세를 군에 입대시키며 솔선수범을 마다하지 않았다. 입헌군주제인 영국에서 영국인들이 적지 않은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60~70% 이상의 지지율로 군주제 유지를 지지하는 것은 그동안 영국 왕실이 보여주었던 노블리스 오블리제였다. 다이애나비 사건부터 앤드루 왕자 불륜 사건, 윌리엄 왕자와 해리 왕자의 마약 및 퇴폐 파티 사건 등 온갖 추문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던 왕실이지만, 왕실 구성원들은 스스로 군복을 입고 자청해서 전장에 나가 일반 병사들과 똑같이 생활하며 전장을 누볐고, 이러한 모습 때문에 영국 국민들은 왕실 인사들의 사생활에 대해서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이다. 부와 권력, 명예를 가진 자에게는 사회적 책임이 뒤따른다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고대부터 현재까지 공동체 구성원들의 화합과 단결, 이를 통한 공동체 발전을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군복을 입고 전장에 나가는 자에게만 시민의 자격을 부여했고, 공화정 당시 로마에서는 의회를 구성하는 귀족들은 물론 귀족들 가운데 선거를 통해 선출된 최고 권력자인 집정관(Consul)들 사이에서 자신의 재산을 털어 공공시설이나 도로를 신축하거나 보수하는 일은 명예롭고 자랑스러운 일로 여겨졌으며, 전쟁이 벌어지면 이들은 앞다투어 로마군의 선봉에 서서 싸우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당시 16년간의 전쟁에서 사망한 집정관의 수는 무려 13명에 달했다. 사회 지도층이 공동체를 위해 자신의 목숨과 재산, 명예를 기꺼이 내놓는 전통이 있는 나라는 혼란이 있더라도 빠르게 사회통합을 이루어 위기를 극복했고, 대개의 경우 강대국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지만, 그렇지 않은 나라는 부정부패와 사회분열을 거듭하다가 식민지로 전락하거나 망한다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 역사가 보여주는 불문율이다. 이러한 불문율에 비추어 볼 때 대한민국의 앞날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사회 저명인사나 부유층은 병역을 기피하는 것은 물론 기부나 봉사활동에 대단히 인색하다. 여당과 야당을 막론하고 정치인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병역을 이행하지 않았고, 자녀의 병역비리에 관여하거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갑질’을 하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자녀에게는 수억대의 최고급 외제차를 선물하고 매달 여가생활에만 일반 봉급자의 몇 배에 달하는 돈을 쓰면서도 길거리의 자선냄비에 천 원짜리 지폐 한 장 넣는 데에는 대단히 인색하다. 부와 권력, 명예에는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 해리 왕자도 그랬고, 미국의 주요 대권주자나 유력 정치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군복을 입고 전장을 누볐거나 심지어 포로수용소 생활을 했던 인사도 적지 않다.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할 줄 아는 자가 사회지도층이 되어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 나가니 여기에 국민들도 호응하여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역시 OECD 가입,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 진입을 논하기에 앞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지도층의 인식부터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이일우 군사 통신원(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 ‘헌법 9조’ 무력화… 아베의 속셈 파헤치다

    ‘헌법 9조’ 무력화… 아베의 속셈 파헤치다

    일본은 전쟁을 원하는가 한다/시게루 지음/조홍민 옮김/글항아리/268쪽/1만 3000원 아베 신조가 처음 일본 총리에 오른 것은 2006년 9월이었다. 당시 주변에선 그를 ‘봉봉’이라며 비아냥댔다. 곱게 자란 도련님을 뜻하는 ‘봉봉’은 유약함의 다른 표현이기도 했다. 1년 만에 총리 자리에서 물러난 그가 정치 전면에 다시 등장한 것은 5년 뒤인 2012년이었다. 하지만 컴백한 아베는 완전히 딴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 나라’ 일본을 만들려는 행보가 두드러졌다. 아베 집권 이후 일본은 급격히 군국주의화하고 있다. 그의 최종 목표는 물론 군대 보유와 교전권을 금지한 헌법 9조, 이른바 평화헌법을 개정하는 것이다. 집권 후 그가 벌인 일들을 보면 그의 목표가 뭔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집단적 자위권을 용인하기 위한 해석 개헌, 무기 수출의 해금과 일본판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등장 등은 ‘보통 국가’ 일본을 향해 가는 정지 작업인 셈이다. 책은 아베 정권이 헌법 9조를 무력화해 ‘전쟁할 수 있는 나라 만들기’를 추진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아베의 노림수가 무엇이고, 지금 일본에서 어떤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지를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법률 초보자를 모아 간담회를 열고, 여기서 제출하는 보고서를 바탕으로 내각이 헌법 해석을 바꿔 버리는 ‘입헌주의 파괴’ 과정도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아베 정권이 지속될수록 실제 전쟁 가능성도 높아진다고 본다. ‘있지도 않은’ 위기를 부추겨 무장을 강화하고, 정식 군대를 만들고, 국민의 희생을 요구하려는 아베의 움직임이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일본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는 것이다. 아베의 소원대로 집단적 자위권이 용인되고, 헌법 9조가 무력화되면 어떻게 될까. 우선 미국이 일으키는 세계 각지의 전쟁에서 자위대 병력이 미군과 함께 싸우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미국 입장에선 손해 볼 것이 없다. 미국 젊은이 대신 자국 젊은이들의 희생을 일본 스스로가 원했으니 말이다. 지금까지 이 같은 미국의 요구에 대해 일본 측에서 거부할 명분으로 내세웠던 게 헌법 9조다. 한데 아베는 이런 강력한 방파제를 스스로 무너뜨리려 하고 있다. 도쿄신문 기자 출신의 저자는 “(일본에 대한) 선제공격 따위는 없다. 일본이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으면 안정은 계속된다”며 “헌법 9조를 무력화하려는 움직임을 당장 그만두라”고 일갈했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시한부 역사가가 돌아본 20세기 인류

    시한부 역사가가 돌아본 20세기 인류

    20세기를 생각한다/토니 주트·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조행복 옮김/열린책들/520쪽/2만 5000원 ‘20세기의 문제적 논객’이었던 말년의 역사학자는 스스로 ‘가석방 없이 진행되는 감금’, ‘한 주가 지날 때마다 6인치씩 면적이 줄어드는 감방’에서 살고 있다고 자신의 삶을 표현했다. 일종의 운동 신경세포 장애인 루게릭병을 앓고 있던 탓이었다. 근육들이 거의 마비 상태로 점점 쇠퇴했다. 겨우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따름이었다. 병의 와중에 그는 자신보다 21살 어린 젊은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 미 예일대 역사학과 교수를 만난다. 그리고 숨지기 얼마 전까지 20세기 인류 사회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구술하고 대화했다. 이미 ‘포스트워’, ‘기억의 집’, ‘재평가-잃어버린 20세기에 대한 성찰’ 등 역저들을 남겼던 토니 주트(1948~2010)의 마지막 유작 ‘20세기를 생각하다’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가 평생에 걸쳐 천착하다시피 한 20세기는 흘러가 버린 과거로만 치부되기 십상이다. 새로운 세기는 이미 15년 전에 시작됐다. 하지만 20세기가 남긴 유산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게 분명하다면 엄정한 평가와 성찰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소중한 과제가 돼야 한다. 역사가이자 철학자인 토니 주트는 이 지점에서 지성인으로서 치열함을 불태웠고, 기성의 가치와 싸움닭처럼 논쟁했다. 20세기는 인류의 새로운 사회체제에 대해 벌어진 거대한 실험의 처음과 마지막을 고스란히 목도한 세기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있었고, 1989년 공산주의 체제가 종언을 고했다. 이를 축으로 경제, 정치, 문화, 사회, 종교적 질서에 대한 새로운 입장이 정립되고 국가와 지역, 계급·계층 등에서 각자의 차이가 벌어졌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많은 비극을 낳았지만, 이 모든 지구 질서를 새롭게 재편하기 위해 중간에 벌어진 확인 과정이었다. 불안과 혼돈, 새로운 건설의 희망이 지역과 시기를 엇갈려 가며 계승하고 교차하고 공존했던 20세기였다. 그는 유대인, 영국인, 프랑스인, 미국인 사이의 경계인이었다. 반전체주의자였고 이성과 지성의 절대신봉자였으며 사회민주주의자였다. 그에 따르면 ‘악의 평범성’을 주창한 한나 아렌트는 동유럽 유대인의 고초 책임을 그들에게 돌리고 말았고, 사르트르는 공산주의 좌파에 대한 논의를 거부하고 말았다. 브레히트의 명시 ‘후손들에게’는 ‘악한 대의(공산주의)를 믿는 신자들을 격려한다는 이유로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치부됐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서구 시선 걷어낸 중동 사유의 역사

    서구 시선 걷어낸 중동 사유의 역사

    100년의 기록/버나드 루이스 지음/서정민 옮김’시공사/512쪽/2만 5000원 이슬람 과격단체 이슬람국가(IS)의 잔혹행위로 관심이 증폭되는 이슬람과 중동. 관련 서적이 범람하지만 대부분 편견과 표피적 해설에 치우친 경향이 짙다. ‘현존 최고의 중동학자’라는 99세의 역사학자가 개인의 삶과 평생 천착해 온 중동사를 버무린 역작 ‘100년의 기록’이 번역돼 출간됐다. 이 책은 서방 학자이면서도 서방세계의 시선에 고립되지 않는 입장을 견지해 돋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 당시의 에피소드를 비롯해 터키·이집트 대통령, 요르단 국왕 등 요인들을 만난 이야기를 통해 ‘진짜 중동’을 말한다. 얽히고설킨 중동 분란과 중동·서방세계의 갈등을 이슬람식 사유에 대한 이해로 풀자는 지론이 신선하다. ‘위험한 이슬람’의 시초로 자주 거론되는 중세 중동의 과격단체 아사신에 대한 서방의 오해는 그 단적인 예로 제시된다. 중세시대부터 전해 내려온 아사신에 대한 분노가 십자군으로 향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중세 아사신의 공격 대상은 이슬람권의 지배 엘리트와 지배이념이라는 것이다. 중동의 반미주의 확산과 관련해선 이렇게 푼다. “대다수 무슬림(이슬람 신자)들은 기독교 유럽의 정체성과 충성심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국가와 민족을 부차적이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에 따르면 무슬림들에게 정체성과 충성심의 기초는 바로 종교이다. 서양인들은 한 민족 안에 여러 종교가 존재한다고 여기지만 무슬림들은 한 종교 안에 여러 민족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저자의 속 깊은 중동 연구는 이 대목에서 정점을 이룬다. “서국의 민주주의 방식이 중동 사회에도 반드시 통할 것이라는 오만함은 수많은 계산착오를 발생시켰다. 서구의 힘을 중동에 적용시키는 것보다 중동인 자신들의 방법으로 자유를 쟁취하도록 돕는 편이 낫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인천상륙작전 성공 하고도…맥아더 해임된 결정적 이유는

    인천상륙작전 성공 하고도…맥아더 해임된 결정적 이유는

    6·25전쟁은 ‘잊혀진 전쟁’이라 한다. 16개국에서 전투부대를 파견한 국제전이었던 이 전쟁은 결코 잊지 못할 전쟁임에도 정치, 이념적 시선에 따라 판이하게 평가된다. 우리 민족에겐 여전히 상흔이 씻기지 않는 최대의 비극이다. 6·25전쟁 발발일을 즈음해 관련 서적들이 봇물을 이룬다. 논란이 분분하거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담아 주목된다. 이 가운데 ‘맥아더’(플래닛 미디어), ‘6·25전쟁과 미국’(청미디어)은 한국전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와 미국 수뇌부 동향을 집중 분석했다. 미국의 전쟁전문가 리처드 B 프랭크가 쓴 맥아더 평전 ‘맥아더’는 당시 유엔군사령관 맥아더의 진짜 얼굴이 도드라진다. 책 속의 맥아더는 ‘최고의 업적과 최악의 실패가 공존하는, 매우 복잡한 인물’이다. 한국전쟁은 특히 그에겐 ‘최고 영광과 최악 수모를 함께 안겨 준 사건’이다. ‘5000대1 확률’의 도박 같은 인천상륙을 감행, 전세를 역전시키고도 중공군 개입을 불렀다. 합동참모본부 명령과 반대로 국경 근처까지 돌진해 중국을 자극한 것이다. 맥아더는 제3차 세계대전 확산을 우려한 트루먼 대통령을 공개 비난하고 맞서 해임됐다. 책에서 그 해임 사건은 “너무나 분명하게 그리고 공개적으로 국가 정책에서 벗어나 해임당한 것이며 적절한 조치였다”고 평가된다. 생체실험을 자행한 일본군 731부대장이 전후 전범재판서 무죄받는 조건으로 미국에 실험자료를 건넨 거래에 맥아더가 개입됐다는 내용도 흥미롭다. 언론인 출신 남시욱 세종대 석좌교수의 ‘6·25전쟁과 미국’도 맥아더 행적을 촘촘하게 추적하고 있다. 트루먼 대통령, 애치슨 국무장관과 비교한 맥아더의 전쟁 수행 과정이 도드라진다. 트루먼 행정부가 전략적 가치가 없다는 이유로 군사력으로 방어할 대상 국가에서 제외한 한국에 지상군까지 파병하기로 결정한 과정이 명쾌하다. 당초 38선 이북으로의 북한군 격퇴를 목적으로 했던 유엔군 작전 목표를 북진통일로 바꾼 과정, 북한 완전 점령을 눈앞에 둔 크리스마스 공세가 중공군 개입으로 참패한 원인도 흥미롭다. 맥아더 해임을 놓고는 “맥아더의 아시아 중시주의에 대한 트루먼과 애치슨의 유럽 중시주의의 승리”라고 잘라 말한다. 트루먼, 애치슨이 전략적으로 유럽을 중시하고 한반도에 깊게 발을 들여놓지 않으려고 한 반면 맥아더는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한반도를 굳게 지켜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 차이가 6·25전쟁 당시 한반도에 대한 미국 정책에 혼선을 불렀다고 본다. 전쟁 전 태평양 방어선에서 한국을 빼는 애치슨 발언이나 트루먼이 1951년 4월 맥아더를 해임하고 휴전으로 나아간 것도 유럽 중심주의 때문이다. 반면 맥아더는 공산주의 척결을 위해 북진 당시 평양∼원산 라인에서 방어선을 치고 중국 참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의견을 무시한 채 압록강까지 진격해 패했다는 주장이다. 트루먼, 애치슨, 맥아더의 긴밀한 협력이 있었다면 맥아더 해임 사태가 없었을 것이며 6·25전쟁도 다르게 전개됐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6·25전쟁 당시 외국 군대의 개입 배경과 전쟁 실상을 추적한 책들도 눈길을 끈다. ‘그을린 대지와 검은 눈’(책미래 펴냄)은 영국군과 오스트레일리아 지상군을 조명하고 있다. 영국인 저널리스트 앤드루 새먼이 50여명의 생존자 인터뷰를 바탕으로 쓴 책에서 저자는 놀랍게도 이렇게 말한다. “한국전쟁은 영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치른 전쟁 중 가장 인명 피해가 크고 잔인했다. 그럼에도 당시는 물론 지금도 영국인들은 그 전쟁을 모르고 있다.” 전쟁에서 영국군은 포클랜드 전쟁,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전사자를 모두 합친 수(783명)보다도 더 많은 1087명이 전사했다. 영국 제27여단과 41코만도 부대, 그리고 왕립오스트레일리아연대의 참전기를 통해 전황이 가장 격렬했던 1950년 마지막 몇 개월의 최전선 상황이 생생하다. 특히 불과 1주일 전에 출발 명령을 받아 무기나 보급품도 제대로 없는 상태로 파병된 영국군의 부산 방어선 전투와 인천상륙작전, 장진호 전투, 흥남철수 작전 수행 등 극적인 순간들이 소개된다. 박실 전 의원이 쓴 ‘6·25전쟁과 중공군’(청미디어 펴냄)은 1990년대 이후 풀리기 시작한 공산권 공문서·자료를 통해 전쟁 시기 중공군의 움직임을 집중 추적했다. 북한 인민군의 주력이 된 팔로군의 조선인들, 전쟁을 앞두고 김일성이 40여 차례나 스탈린을 조른 이야기, 마오쩌둥의 아들까지 참전한 배경, 마오쩌둥의 지구전 방침, 38선 경계를 둘러싼 줄다리기 과정이 실감난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유네스코 위원님, 日세계유산 후보 군함도는 지옥섬입니다”

    “유네스코 위원님, 日세계유산 후보 군함도는 지옥섬입니다”

    일본 정부가 하시마(일명 군함도) 탄광을 비롯해 규슈 일대 23곳에 대해 유네스코에 신청한 세계문화유산 등재 여부가 이달 말 결정될 예정인 가운데 한국 홍보 전문가인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동영상 ‘하시마의 진실’(The truth of hashima)을 제작해 18일 유튜브에 올렸다. 서 교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의장국인 독일을 포함한 21개국 위원에게도 이메일로 동영상을 발송했다. 서 교수는 지난달 하시마 탄광을 방문하고 돌아와 그 실상을 영상에 담았다. 3분 분량의 영상은 군함도가 한국과 중국 등지에서 수많은 사람을 강제로 끌고 와 노동력을 착취한, 한번 들어가면 살아서는 나오지 못한다는 의미의 ‘지옥섬’이라고 알려 주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끝 부분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전쟁 수행을 위해 유대인과 전쟁 포로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했던 역사를 지닌 독일의 촐페라인 석탄광업단지를 보여 주면서 이곳이 왜 반대 없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는지를 설명한다. 서 교수는 “강제징용 사실을 감추는 일본과 강제징용을 인정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독일의 촐페라인 탄광을 비교함으로써 세계인 누구나 이해하기 쉽도록 영상을 제작했으며, 특히 최종 투표권을 가진 유네스코 위원들에게 올바른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 영상을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워싱턴포스트, CNN·BBC방송, AP통신, 로이터통신 등 전 세계 194개국 주요 언론 605개 매체의 트위터 계정에도 링크했다. 또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활용한 홍보도 시작했다. 특히 아시아, 유럽, 미주 등 대륙별 주요 30개국을 선정해 대표 포털 사이트와 동영상 사이트에서 동시에 게시했다. 연합뉴스
  • 아베정권, 침략전쟁 인정 ‘도쿄재판’ 재검증 추진 논란

    아베정권, 침략전쟁 인정 ‘도쿄재판’ 재검증 추진 논란

    일본 집권당이 자국의 A급 전범을 심판하고 태평양전쟁을 침략 전쟁으로 공식화한 극동군사재판(도쿄재판)에 대한 검증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자민당이 도쿄재판과 함께 2차세계대전 직후 일본을 점령 통치한 연합국군총사령부(GHQ)에 의한 정책, 현행 헌법을 만든 과정 등을 검증하는 새로운 조직의 설치를 계획하고 있다. 자민당이 이 같은 조직을 이나다 도모미 당 정조회장 산하에 설치하고 이르면 이번 정기국회에 논의를 시작할 계획이라고 산케이신문이 16일 보도했다. 이나다 정조회장은 지난 2월 “판결 주문은 받아들이지만 (판결의) 이유에 대한 판단에까지 구속될 필요는 전혀 없다”며 도쿄재판에 간접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자민당은 GHQ가 점령 통치 중 전승국의 역사관을 침투시키기 위해 ‘전쟁 유죄 정보 프로그램’(WGIP)을 통해 조직적으로 선전했다는 주장 등에 대한 검증도 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도쿄재판이나 헌법 제정 과정에 대한 검증은 일본의 전쟁 책임을 인정한 것이 맞는 것인지 혹은 무력행사와 군대 보유를 금지한 헌법 9조를 유지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논쟁을 촉발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전범 국가로서의 반성 및 교전권 박탈 등을 규정한 전후 일본의 질서를 부정하기 위한 분위기 조성 작업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는 앞서 헌법 제정 과정에 대해 “헌법 원안을 GHQ의 문외한들이 8일 만에 만들었다”고 혹평하는 등 개헌을 일생일대의 과업이라고 공언해 왔다. 한편 새 조직은 자민당 ‘일본의 명예와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특명위원회’의 역할도 흡수할 계획이다. 특명위원회는 ‘전쟁 때 제주도에서 여성을 강제로 연행했다’는 일본인 요시다 세이지(사망)의 발언에 관한 보도를 아사히신문이 취소한 것 등과 관련해 영향 등을 검증하는 집권당 내 조직이었다. 도쿄재판은 2차대전 뒤 일본의 전쟁 범죄자를 심판하기 위해 열렸으며 재판부는 1948년 11월 12일 도조 히데키 전 총리 등 7명에게 교수형, 16명에게 종신형 등 모두 25명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그 유명한 M16의 美 ‘총기 명가’는 왜 몰락했나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그 유명한 M16의 美 ‘총기 명가’는 왜 몰락했나

    - 관급과 내수 독점이 '독'으로 어릴 적 일명 ‘BB탄 총’ 꽤나 가지고 놀았다는 사람들이라면 일명 ‘에무십육(M-16)'이나 ‘콜트 45’라는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미국의 콜트(Colt)라는 회사가 내놓은 소총과 45구경(11.43mm) 권총을 뜻하는 이들 이름은 총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몇 번쯤은 들어보았을 만큼 유명한 총이다. 이 같은 걸작들을 만들어내며 세계 총기 역사에 한 획을 그었으며, 약 200여 년간 미국 총기의 상징처럼 군림해 왔던 총기 명가(名家)인 콜트(Colt)가 과도한 채무와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지난 14일(현지시간) 파산 보호 신청을 냈다. 전 세계적으로 1,000만 정 이상이 생산된 M-16과 추정 불가능한 수량이 생산된 콜트45라는 히트작을 내놓았으며, 총기 소유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가장 미국스러운 총’의 상징처럼 사랑 받았던 이 회사는 갑자기 왜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일까? -서부를 제패한 권총 '전설의 시작' 1836년 사무엘 콜트(Samuel Colt)가 설립한 콜트는 설립 초기부터 리볼버(Revolver) 권총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업체였다. 서부영화를 보면 보안관이나 카우보이들이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바로 리볼버 권총은 19세기 후반 금속 탄피의 등장과 함께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콜트 역시 초창기에는 리볼버 권총 시장 확대에 따라 시장에 뛰어든 수많은 총기 회사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시기에 콜트가 내놓은 콜트 SAA(Single Action Army) 권총은 우수한 성능을 인정받아 미 육군에 제식 채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안관과 카우보이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앞 다퉈 구매하면서 ‘서부를 제패한 권총’이라는 별칭까지 얻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SAA는 높은 신뢰성과 명중률을 가진 우수한 권총이었지만, 19세기 후반은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총기와 탄약이 개발될 정도로 빠른 기술 변혁기였기 때문에 새로운 권총 개발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에 콜트는 총기 설계에 있어 천재로 불리던 존 브라우닝(John M. Browning)을 영입해 새로운 총기 개발에 나서는데, 이때 존 브라우닝은 “총알이 발사될 때 생기는 반동과 가스를 이용해서 다음 탄이 자동으로 장전되는 총을 만들 수 없을까?”라는 고민을 하게 됐고, 결국 그러한 총기를 설계해 냈다. 1896년 미국 특허청에 등록된 특허번호 580924가 바로 브라우닝이 만들어낸 최초의 자동권총이었다. 콜트에서 브라우닝 주도로 자동권총 개발이 한창 진행되던 1899년, 미국은 필리핀을 침공해 각지에서 필리핀 원주민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미국은 이 전투에서 기존에 사용하던 권총의 위력이 너무 약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대상으로는 효과적이었던 기존의 리볼버식 권총이 필리핀 원주민들에게는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 미군은 모로족(Moros)이라는 부족에게 경악했다. 한 전투에서 미군 장교가 돌진해오는 모로족 전사의 가슴에 6발의 권총탄을 명중시켰는데, 그 전사가 그대로 달려들어 자신을 쏜 미군 장교를 칼로 난자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미군은 ‘최후 방어 무기’인 권총의 위력 강화를 요구했고, 여러 메이커가 차세대 권총 사업에 참가했는데, 여기서 승리한 것이 콜트의 M1911 모델이었다. 이 권총은 자동으로 재장전되는 자동권총이었으며, 대단히 강력한 45ACP 권총탄을 사용해 이전에 사용하던 리볼버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력을 자랑했다. 이 권총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또 한 번 대박을 쳤고, 콜트를 굴지의 거대 총기회사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이 권총은 개량을 거쳐 M1911A1이라는 명칭으로 우리 군도 사용 중에 있는데, 한때 9mm 권총탄을 사용하는 베레타 M92 시리즈 등에 밀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미군 장병들이 앞 다퉈 구매하고 있을 정도로 우수한 성능과 신뢰성을 가진 ‘명품 중의 명품’으로 대접받고 있다. -위기 후에 찾아온 꿈같던 시절 콜트의 전성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마지막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더 이상 대규모 군대를 유지할 여력이 없었고, 많은 부대를 해체하면서 이들이 쓰던 총기들을 우방국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기 시작했다. 남는 총기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민간 시장에서의 총기 가격도 폭락했고, 구태여 비싼 신품 총기를 구입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러던 시기에 콜트는 과감한 투자를 했다. 아말라이트(Armalite)라는 업체가 시험적으로 개발했던 AR-10/15 계열의 판권을 사들였다. 목재로 된 총몸을 사용했던 기존의 소총들과 달리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총열덮개와 손잡이, 개머리판은 당시 병사들에게 적지 않은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었다. 콜트는 5.56mm 소총이었던 AR-15에 약간의 개량을 거쳐 XM16E1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판매를 시작했는데, 미 공군이 기지 방어용으로 소량을 구매했고, 이 가운데 일부 물량이 월남전 초기에 베트남군에 지급되어 실전에 데뷔했다. 우려와 달리 생각보다 준수한 성능을 발휘한 덕에 육군은 “이것이 우리가 찾던 미래형 소총”이라며 제식 채용을 결정했고, M16이라는 이름으로 미 육군 전투부대에 실전 배치되기 시작했다. 제식 채용에 들뜬 콜트는 홍보용 팸플릿에 ‘휴대성과 신뢰성, 명중률이 우수한 미래형 소총‘이라며 과대 광고를 시작했고, 이 광고를 본 병사들은 “신형 소총은 청소할 필요가 없다”면서 총기 관리를 게을리 했다. 그 결과 작동 불량이 속출했고, 당시 납품되었던 불량 탄약 문제까지 겹치면서 어느 한 전투에서는 총기 고장으로 인해 부대원의 60%가 죽거나 다치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미군은 즉각 M16 성능 개량과 탄약 개선 작업에 착수했고, 1967년부터 M16A1을 실전에 배치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우리 파월 국군이 사용했던 주력 소총이자, 우리나라도 면허생산해서 대량으로 보유했던 바로 그 소총이다. M16A1 소총은 1980년대에는 M16A2 소총을 거쳐 2000년대에는 M16A4 등 다양한 개량형과 파생형을 선보이며 끊임없이 진화했고, 1,000만 정 이상 생산되며 콜트 최대의 효자 상품으로 자리 잡았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그 단축형인 M4 시리즈가 히트를 치며 콜트로 하여금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으나, 이러한 꿈같던 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끝없는 내리막길 콜트의 위기는 최대의 호황을 누리던 1986년에 처음으로 찾아왔다. 당시 콜트는 M16A1에 이어 M16A2를 미 육군에 납품하기 시작하면서 매출이 급성장하기 시작했지만, 회사의 이익률 증가에 비해 급여 인상이 충분치 않다는 노조가 무려 4년간 대규모 파업을 하면서 위기가 시작됐다. 강경 노조의 파업에 사측은 긴급히 모집한 대체 인력을 투입해 생산 라인을 돌렸지만, 미숙한 대체 인력들의 숙련도는 크게 떨어졌고, 납기일을 맞추지 못한 것은 물론 납품한 소총의 품질이 형편없어 미 육군으로부터 잦은 컴플레인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미 육군은 콜트를 버리고 벨기에 총기회사 FN의 미국 현지법인에 M16A2 생산을 주문했다. 파업으로 가장 큰 고객을 빼앗기고 매출에 치명타를 입은 콜트는 결국 1992년 파산 신청을 하고 법정 관리에 들어갔다. 이후 새로운 경영진이 긴급 자금 수혈과 대규모 구조 조정을 통해 1994년부터 다시 영업을 시작할 수 있었지만, 콜트가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에는 시장 상황이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콜트는 M16의 단축형인 M4 카빈을 내놓아 좋은 평가를 얻었지만, 이것이 콜트를 살릴 수는 없었다. M16 계열의 특허 독점기간이 끝나 이제는 그 어떤 총기회사도 마음만 먹으면 M16이나 M4의 ‘짝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상황이었고, 세계 유수의 총기 메이커들이 너나 할 것 없이 M4를 만들어내면서 콜트는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명품 총기 메이커 시그 사우어(SIG-SAUER)가 신뢰성과 명중률을 획기적으로 높인 SIG516을, 독일의 총기명가 H&K가 우수한 신뢰성과 확장성을 가진 HK-416을 시장에 내놓아 고급형 M4 시장을 장악했고, 미국 내에서는 LWRC에서 M6를 내놓는가 하면, 심지어 중국의 NORINCO(北方工业)에서 CQ-A 소총을, AK소총으로 유명한 러시아 칼라시니코프(Kalashinikov)에서 VEPR-15를 발매하면서 저가형 M4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은 세계적인 총기 메이커들이 미국 시장에 현지 법인을 내고 몰려드는 춘추전국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콜트는 신형 총기 개발을 게을리 했고, 20여 년 전의 교훈을 잊은 노조는 다시금 투쟁과 태업을 일삼았다. 결국 미 육군은 지난 2013년 2월, 12만 정 규모의 M4 소총 신규생산 납품 계약 공개 입찰에서 콜트를 탈락시키고 또 다시 FN의 손을 들어주었다. 미군이 사용하는 모든 총기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미국 내에서 생산된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에 의존해 내수 군납 시장만 바라보고 살던 콜트는 기술 개발을 등한시하고 해외 시장 개척에 소극적이었으며, 내부적으로는 노조 활동 확대에 따른 생산성 악화라는 악재까지 겹치면서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결국 콜트는 지난 14일(현지시간) 델라웨어주 윌밍턴 법원에 파산보호신청(Chapter 11)을 제출했다. 법원이 이를 수용하면 콜트는 법정관리에 들어가며, 현재 쌓여 있는 부채 상환 시기 연장 등의 조치를 받은 뒤 새로운 경영진을 찾게 될 것이다. 현재 콜트가 가진 채무는 3억 5,500만 달러(약 3,900억 원). 콜트는 일부 사업 부문을 매각하고 대규모 구조 조정을 통해 사업 지속을 위한 자금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으나, 콜트의 앞날은 불투명하다. 시장에 경쟁자는 너무도 많고, 콜트는 기술이나 생산성 등 모든 면에서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콜트 몰락의 사례는 비단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수 시장 독점과 그로 인한 호황에 도취해 새로운 기술 개발을 소홀히 하고, 노사분규만 일삼는 기업은 제아무리 초일류 제품을 개발했던 경험이 있더라도 시장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는 교훈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콜트 몰락 사례는 관급과 내수시장 독점으로 먹고사는 국내 일부 기업들도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야하지 않을까? 이일우 군사통신원(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M16·콜트...200년 역사 ‘총기 명가’의 몰락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M16·콜트...200년 역사 ‘총기 명가’의 몰락

    -관급·내수 독점이 '독'으로...파산보호신청 어릴 적 일명 ‘BB탄 총’ 꽤나 가지고 놀았다는 사람들이라면 일명 ‘에무십육(M-16)'이나 ‘콜트 45’라는 이름을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미국의 콜트(Colt)라는 회사가 내놓은 소총과 45구경(11.43mm) 권총을 뜻하는 이들 이름은 총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몇 번쯤은 들어보았을 만큼 유명한 총이다. 이 같은 걸작들을 만들어내며 세계 총기 역사에 한 획을 그었으며, 약 200여 년간 미국 총기의 상징처럼 군림해 왔던 총기 명가(名家)인 콜트(Colt)가 과도한 채무와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지난 14일(현지시간) 파산 보호 신청을 냈다. 전 세계적으로 1,000만 정 이상이 생산된 M-16과 추정 불가능한 수량이 생산된 콜트45라는 히트작을 내놓았으며, 총기 소유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가장 미국스러운 총’의 상징처럼 사랑 받았던 이 회사는 갑자기 왜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일까? -서부를 제패한 권총 '전설의 시작' 1836년 사무엘 콜트(Samuel Colt)가 설립한 콜트는 설립 초기부터 리볼버(Revolver) 권총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업체였다. 서부영화를 보면 보안관이나 카우보이들이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바로 리볼버 권총은 19세기 후반 금속 탄피의 등장과 함께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콜트 역시 초창기에는 리볼버 권총 시장 확대에 따라 시장에 뛰어든 수많은 총기 회사 가운데 하나였다. 이러한 시기에 콜트가 내놓은 콜트 SAA(Single Action Army) 권총은 우수한 성능을 인정받아 미 육군에 제식 채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안관과 카우보이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앞 다퉈 구매하면서 ‘서부를 제패한 권총’이라는 별칭까지 얻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SAA는 높은 신뢰성과 명중률을 가진 우수한 권총이었지만, 19세기 후반은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총기와 탄약이 개발될 정도로 빠른 기술 변혁기였기 때문에 새로운 권총 개발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에 콜트는 총기 설계에 있어 천재로 불리던 존 브라우닝(John M. Browning)을 영입해 새로운 총기 개발에 나서는데, 이때 존 브라우닝은 “총알이 발사될 때 생기는 반동과 가스를 이용해서 다음 탄이 자동으로 장전되는 총을 만들 수 없을까?”라는 고민을 하게 됐고, 결국 그러한 총기를 설계해 냈다. 1896년 미국 특허청에 등록된 특허번호 580924가 바로 브라우닝이 만들어낸 최초의 자동권총이었다. 콜트에서 브라우닝 주도로 자동권총 개발이 한창 진행되던 1899년, 미국은 필리핀을 침공해 각지에서 필리핀 원주민들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미국은 이 전투에서 기존에 사용하던 권총의 위력이 너무 약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대상으로는 효과적이었던 기존의 리볼버식 권총이 필리핀 원주민들에게는 별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 미군은 모로족(Moros)이라는 부족에게 경악했다. 한 전투에서 미군 장교가 돌진해오는 모로족 전사의 가슴에 6발의 권총탄을 명중시켰는데, 그 전사가 그대로 달려들어 자신을 쏜 미군 장교를 칼로 난자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미군은 ‘최후 방어 무기’인 권총의 위력 강화를 요구했고, 여러 메이커가 차세대 권총 사업에 참가했는데, 여기서 승리한 것이 콜트의 M1911 모델이었다. 이 권총은 자동으로 재장전되는 자동권총이었으며, 대단히 강력한 45ACP 권총탄을 사용해 이전에 사용하던 리볼버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력을 자랑했다. 이 권총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또 한 번 대박을 쳤고, 콜트를 굴지의 거대 총기회사의 지위에 올려놓았다. 이 권총은 개량을 거쳐 M1911A1이라는 명칭으로 우리 군도 사용 중에 있는데, 한때 9mm 권총탄을 사용하는 베레타 M92 시리즈 등에 밀리기도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미군 장병들이 앞 다퉈 구매하고 있을 정도로 우수한 성능과 신뢰성을 가진 ‘명품 중의 명품’으로 대접받고 있다. -위기 후에 찾아온 꿈같던 시절 콜트의 전성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마지막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더 이상 대규모 군대를 유지할 여력이 없었고, 많은 부대를 해체하면서 이들이 쓰던 총기들을 우방국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기 시작했다. 남는 총기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민간 시장에서의 총기 가격도 폭락했고, 구태여 비싼 신품 총기를 구입하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러던 시기에 콜트는 과감한 투자를 했다. 아말라이트(Armalite)라는 업체가 시험적으로 개발했던 AR-10/15 계열의 판권을 사들였다. 목재로 된 총몸을 사용했던 기존의 소총들과 달리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총열덮개와 손잡이, 개머리판은 당시 병사들에게 적지 않은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었다. 콜트는 5.56mm 소총이었던 AR-15에 약간의 개량을 거쳐 XM16E1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판매를 시작했는데, 미 공군이 기지 방어용으로 소량을 구매했고, 이 가운데 일부 물량이 월남전 초기에 베트남군에 지급되어 실전에 데뷔했다. 우려와 달리 생각보다 준수한 성능을 발휘한 덕에 육군은 “이것이 우리가 찾던 미래형 소총”이라며 제식 채용을 결정했고, M16이라는 이름으로 미 육군 전투부대에 실전 배치되기 시작했다. 제식 채용에 들뜬 콜트는 홍보용 팸플릿에 ‘휴대성과 신뢰성, 명중률이 우수한 미래형 소총‘이라며 과대 광고를 시작했고, 이 광고를 본 병사들은 “신형 소총은 청소할 필요가 없다”면서 총기 관리를 게을리 했다. 그 결과 작동 불량이 속출했고, 당시 납품되었던 불량 탄약 문제까지 겹치면서 어느 한 전투에서는 총기 고장으로 인해 부대원의 60%가 죽거나 다치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미군은 즉각 M16 성능 개량과 탄약 개선 작업에 착수했고, 1967년부터 M16A1을 실전에 배치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우리 파월 국군이 사용했던 주력 소총이자, 우리나라도 면허생산해서 대량으로 보유했던 바로 그 소총이다. M16A1 소총은 1980년대에는 M16A2 소총을 거쳐 2000년대에는 M16A4 등 다양한 개량형과 파생형을 선보이며 끊임없이 진화했고, 1,000만 정 이상 생산되며 콜트 최대의 효자 상품으로 자리 잡았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그 단축형인 M4 시리즈가 히트를 치며 콜트로 하여금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만들었으나, 이러한 꿈같던 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다. -끝없는 내리막길 콜트의 위기는 최대의 호황을 누리던 1986년에 처음으로 찾아왔다. 당시 콜트는 M16A1에 이어 M16A2를 미 육군에 납품하기 시작하면서 매출이 급성장하기 시작했지만, 회사의 이익률 증가에 비해 급여 인상이 충분치 않다는 노조가 무려 4년간 대규모 파업을 하면서 위기가 시작됐다. 강경 노조의 파업에 사측은 긴급히 모집한 대체 인력을 투입해 생산 라인을 돌렸지만, 미숙한 대체 인력들의 숙련도는 크게 떨어졌고, 납기일을 맞추지 못한 것은 물론 납품한 소총의 품질이 형편없어 미 육군으로부터 잦은 컴플레인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미 육군은 콜트를 버리고 벨기에 총기회사 FN의 미국 현지법인에 M16A2 생산을 주문했다. 파업으로 가장 큰 고객을 빼앗기고 매출에 치명타를 입은 콜트는 결국 1992년 파산 신청을 하고 법정 관리에 들어갔다. 이후 새로운 경영진이 긴급 자금 수혈과 대규모 구조 조정을 통해 1994년부터 다시 영업을 시작할 수 있었지만, 콜트가 정신을 차리고 난 뒤에는 시장 상황이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콜트는 M16의 단축형인 M4 카빈을 내놓아 좋은 평가를 얻었지만, 이것이 콜트를 살릴 수는 없었다. M16 계열의 특허 독점기간이 끝나 이제는 그 어떤 총기회사도 마음만 먹으면 M16이나 M4의 ‘짝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상황이었고, 세계 유수의 총기 메이커들이 너나 할 것 없이 M4를 만들어내면서 콜트는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명품 총기 메이커 시그 사우어(SIG-SAUER)가 신뢰성과 명중률을 획기적으로 높인 SIG516을, 독일의 총기명가 H&K가 우수한 신뢰성과 확장성을 가진 HK-416을 시장에 내놓아 고급형 M4 시장을 장악했고, 미국 내에서는 LWRC에서 M6를 내놓는가 하면, 심지어 중국의 NORINCO(北方工业)에서 CQ-A 소총을, AK소총으로 유명한 러시아 칼라시니코프(Kalashinikov)에서 VEPR-15를 발매하면서 저가형 M4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은 세계적인 총기 메이커들이 미국 시장에 현지 법인을 내고 몰려드는 춘추전국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콜트는 신형 총기 개발을 게을리 했고, 20여 년 전의 교훈을 잊은 노조는 다시금 투쟁과 태업을 일삼았다. 결국 미 육군은 지난 2013년 2월, 12만 정 규모의 M4 소총 신규생산 납품 계약 공개 입찰에서 콜트를 탈락시키고 또 다시 FN의 손을 들어주었다. 미군이 사용하는 모든 총기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미국 내에서 생산된 것이어야 한다는 원칙에 의존해 내수 군납 시장만 바라보고 살던 콜트는 기술 개발을 등한시하고 해외 시장 개척에 소극적이었으며, 내부적으로는 노조 활동 확대에 따른 생산성 악화라는 악재까지 겹치면서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결국 콜트는 지난 14일(현지시간) 델라웨어주 윌밍턴 법원에 파산보호신청(Chapter 11)을 제출했다. 법원이 이를 수용하면 콜트는 법정관리에 들어가며, 현재 쌓여 있는 부채 상환 시기 연장 등의 조치를 받은 뒤 새로운 경영진을 찾게 될 것이다. 현재 콜트가 가진 채무는 3억 5,500만 달러(약 3,900억 원). 콜트는 일부 사업 부문을 매각하고 대규모 구조 조정을 통해 사업 지속을 위한 자금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밝혔으나, 콜트의 앞날은 불투명하다. 시장에 경쟁자는 너무도 많고, 콜트는 기술이나 생산성 등 모든 면에서 경쟁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콜트 몰락의 사례는 비단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수 시장 독점과 그로 인한 호황에 도취해 새로운 기술 개발을 소홀히 하고, 노사분규만 일삼는 기업은 제아무리 초일류 제품을 개발했던 경험이 있더라도 시장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는 교훈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콜트 몰락 사례는 관급과 내수시장 독점으로 먹고사는 국내 일부 기업들도 반면교사(反面敎師) 삼아야하지 않을까? 이일우 군사통신원(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 ‘3각 튼튼’ 실버세대 미국 경제 떠받친다

    ‘3각 튼튼’ 실버세대 미국 경제 떠받친다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 웍서해치의 모넷 베리힐(72·여)의 은퇴 생활은 은행원으로 일하던 현직 시절보다 화려하다. 오전에 운동하고 외식을 즐긴 뒤 가끔 저녁 콘서트에 가는 게 베리힐의 일과다. 올해 휴가철에는 손자들이 있는 샌디에이고에 가는 대신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을 떠날 계획이다. ‘그레이 중산층.’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14일(현지시간) 미국 경제를 떠받치는 중산층 기둥으로 1941~1950년생, 2차 세계대전 전후에 태어난 2500만명을 주목했다. 현재 65~74세 노인층이 튼튼한 자산, 안정적인 연금, 일할 수 있는 체력을 기반 삼아 ‘경제적 약자’로 자리매김했던 노인에 대한 인식을 깨뜨렸다고 이 신문은 진단했다. NYT에 따르면 이 세대의 풍요는 ‘시대적 운’을 타고난 측면이 크다. 이들은 전후 지속된 호황기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손쉽게 견실한 직장을 구했고 퇴직 후 두둑한 연금을 보장받는 세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이들의 은퇴 이후 터졌다. 빚 없이 보유했던 자산의 가치가 높아진 덕에 이들 노인층은 반사 이익을 봤다. 65~74세 가구의 연간 중위소득은 1989년 3만 달러 초반에서 2013년 4만 달러 중반으로 1만 달러(약 1100만원) 가까이 상승했다. 같은 기간 미국 전체 가구의 중위소득이 5만 달러(약 5500만원) 초반 대에서 정체됐을 때 벌어진 일이다. 이전 노인들보다 체력이 좋아 더 오래 일할 수 있다는 점도 이 세대의 저력이다. 1990년대 후반까지 5명 중 1명꼴이던 60세 이상 근로자의 비중은 최근 3명 중 1명꼴로 늘어났다. NYT는 은퇴 이후 최저임금을 받으며 댈러스 시립 도서관에서 일하는 팻 체리(72·여)가 계속 고용을 걱정하는 사연을 전했지만, 정년을 넘겨 오래 일할수록 체리가 받을 연금액수도 늘어난다는 점을 덧붙였다. 일할 수 있다면 노년기에도 연금액을 늘릴 수 있는 셈이다. 구매력 측면에서도 65~74세 노인들은 미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다. 2013년 이 세대 노인 가구의 연평균 소비·지출액은 4만 6757달러(약 5200만원)로 1989년보다 18% 늘었다. 이 세대에게 걱정이 있다면, 자녀 세대다. 베리힐은 “61세에 은퇴했던 부모님은 휴가 여행은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각종 고지서 때문에 부담을 느꼈다”면서 “확실히 우리 세대는 거부(슈퍼리치)는 못 됐어도 배는 곯지 않은 세대”라고 규정했다. 이어 “지금 세대는 우리보다 더 많은 복지비용을 내고 그 혜택은 받지 못하는 문제를 겪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서울광장] 메르스 너머의 사회적 면역결핍증후군/진경호 편집국 부국장

    [서울광장] 메르스 너머의 사회적 면역결핍증후군/진경호 편집국 부국장

    스페인독감이 20세기 인류 최대의 재앙으로 자리한 데는 정부의 정보 통제가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 휩싸인 영국과 미국 등 서방국들은 전황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해 스페인독감 관련 정보를 엄격하게 통제했다. 미국 시카고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전염병이 엉뚱하게도 스페인독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이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비(非)참전국이던 스페인의 언론이 이를 처음 보도한 데서 비롯됐다. 정부의 정보 통제 속에서 여느 독감과 다를 바 없는 줄 알고 활보하던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졌고, 결국 스페인독감은 1918년부터 이듬해까지 미 대륙과 유럽 전역에 걸쳐 5000만명을 죽음으로 몰아간 대재앙이 되고 말았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군 세력은 1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을지는 몰라도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선 결국 대패를 면치 못했다. 정보의 독점과 통제가 키운 참극이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가 엄습한 2015년 한국의 초상은 적어도 정부의 대응 차원에서 볼 때 100년 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니 당시의 열악한 보건환경이나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 그리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무장한 지금의 첨단 소통 구조를 생각한다면 호미로 막을 수 있었을 메르스를 가래로도 막지 못하는 지금 우리 정부가 100년 전 미 정부보다 낫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방역 당국의 안이한 인식과 초동대응 실패, 컨트롤타워 부재에 따른 혼선 등 정부의 무능을 증명하는 정책적 오류는 더이상 열거할 지면이 없을 정도가 됐다. 한데 이 가운데서도 무엇보다 치명적인 오류는 정부의 초기 정보 통제였다. ‘메르스 병원’, 즉 메르스 환자가 입원해 있거나 거쳐간 병원을 정부는 무려 18일간 숨겼다. 지난달 중순 첫 메르스 환자가 발견된 평택성모병원과 서울삼성병원을 신속하게 공개하고 통제했다면, 그래서 온 나라가 보다 조직적으로 메르스에 대응했다면 지금 나라를 뒤덮은 열병은 피해 갈 수 있었을 공산이 크다. 정부부터가 국민을 믿지 못했다. ‘메르스 병원’을 공개하면 더 큰 혼란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단했다. 해당 병원이 입을 피해를 먼저 생각했다. 그런 정부를 국민도 믿지 않았다. SNS를 통해 확인되지 않은 ‘메르스 병원’ 명단을 퍼 나르기 바빴고, 그 과정에서 진위를 따지는 일은 나중 일이 됐다. 메르스의 위험성이 어느 정도인지, 그에 맞춰 개개인과 지역사회, 각 기관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와 같은 과학적 판단은 그 어디에도 설 땅이 없었다. 정부에선 학교 휴업을 밀어붙인 교육부와 그럴 필요 없다는 복지부가 충돌했고, 서울시와 성남시 등 몇몇 지방자치단체들은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며 독자 행동에 나섰다. 한쪽에선 단체여행을 취소하는 행렬이 줄을 잇는가 하면, 다른 쪽에선 메르스에 감염됐을지 모를 사람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다. 중동 방문자를 겨냥한 정부의 ‘낙타 주의보’를 왜곡해 조롱하고 메르스 환자가 타고 다녔다는 버스 노선도를 퍼뜨리며 불신과 불안을 부추기는 괴담도 때를 놓칠세라 퍼뜨리기 바빴다. 초기 대응에 실패한 정부의 무능 너머로 사회적 면역 결핍이라는 보다 심각한 징후가 어른댄다. 코로나바이러스 변종에 대해 인간 개개인이 항체를 지니지 못해 메르스 환자가 발생했다면, 메르스 확산과 그 과정에서 빚어진 우리 사회의 혼란상은 소통 부재와 고도로 구조화된 불신 풍조에서 비롯됐다. 메르스가 지금 시장경제 전반에 찬물을 끼얹고 한·미 정상회담 연기와 같은 외교적 손실까지 낳으며 나라 전체에 주름을 안기고 있다지만 기실 메르스는 죄가 없다. 사회 면역력을 상실한 우리의 책임만 있을 뿐이다. 메르스가 던져 준 과제는 명확하다. 방역체계 정비와 같은 즉자적 대응을 뛰어넘어야 한다. 방역 실패의 책임을 묻고, 방역기구를 개편하는 식의 대응은 메르스 환자에게 감기약 하나 처방해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필요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제2, 제3의 메르스가 닥치더라도 흔들리지 않도록 사회적 건강성을 회복하는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무엇보다 정부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만능정부’의 착각에서 벗어나 자신들보다 훨씬 똑똑한 시민 대중과의 협치(協治) 체제를 적극 구축해야 한다. 대중과의 철저한 정보 공유와 소통이 그 첫걸음이다. jade@seoul.co.kr
  • [열린세상] 중국·러시아 농업투자기금 설치를 보며/김한호 서울대 농경제학과 교수

    [열린세상] 중국·러시아 농업투자기금 설치를 보며/김한호 서울대 농경제학과 교수

    5월 9일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는 2차 세계대전 전승 7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미국과 유럽 주요국 정상 대부분은 행사에 초대받고도 우크라이나 사태를 이유로 불참했다. 그래서 세계 언론은 겉으로 성대해 보인 이 행사를 반쪽 잔치라고 평했다. 이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크게 띄우며 나머지 반쪽을 메우려는 듯했다. 글로벌 전략에서 서방 견제라는 공통 이해관계를 가진 두 지도자는 어느 때보다도 긴밀한 관계임을 연출했다. 기념식 전날 크렘린 정상회담에서는 통 큰 주고받기를 했다. 중국은 고속도로 건설자금 차관 제공, 러시아는 대규모 가스 공급 등 총 32건의 주고받기 계약에 두 정상은 서명했다. 그런데 정상회담 직전에 이루어져 크게 드러나지 않은 두 나라의 농업협력 하나가 눈길을 끈다. 시 주석의 모스크바 도착 직전 중국은 특수 목적 기금 하나를 러시아에 선물했다. 중국 헤이룽장성(省) 정부, 러시아직접투자기금(RDIF), 러시아·중국투자기금(RCIF) 3자는 농업 부문 투자를 목적으로 하는 20억 달러 규모의 농업투자기금을 만든 것이다. RDIF는 러시아 국부펀드이고 RCIF는 2012년 RDIF와 중국투자공사가 합작해 만든 러시아와 중국의 협력기금이다. 이번에 새로 설치한 기금재원 대부분은 중국이 제공하며, 기금의 주목적 사업은 러시아 극동 지역 농업개발로 알려졌다. 극동 지역에서 중국 헤이룽장성과 러시아 아무르주는 국경을 접하는데 두 나라의 대표적 농업지대다. 이 지역에서 농업 개발과 함께 농업자유무역지대 설치까지 검토한다고 한다. 따라서 수출입 물류 기반 구축과 통관절차 개선은 당연한 부속 사업이다. 기금 설치가 마치 중국의 선심 쓰기처럼 보이지만 곡물 수요 증가에 대비한 해외 식량공급 기반 확보라는 중국의 해외 농업 진출 전략이다. 아울러 중국의 이번 기금 설치와 지난해 대규모 국제 곡물 기업 인수를 연결해 생각해 보면 러시아 내의 곡물확보 종합 체제 구축으로 보인다. 중국 국영 농식품 기업 중량그룹은 지난해에 러시아 곡창지대에 이미 확고한 영업 기반을 거느린 두 개의 거대 국제 곡물기업 니데라와 노블을 인수했다. 곡물기업 인수와 투자기금 설치라는 두 해에 걸친 연이은 조치는 해외 농업 개발의 교과서적 접근인 유통형과 농장형 기반의 동반 구축이다. 게다가 아무르주·헤이룽장성 농업자유무역지대 검토는 더욱 주목을 끈다. 해외 농업 개발 진출국에 필요 시 최종 생산물의 안전한 국내 반입 여건 확보는 중요하다. 그런데 유통형과 농장형 어느 것에나 최종 생산물의 진출국 국내 반입에 불확실성이 따른다. 투자 유치국의 예상치 못한 수출 장벽 도입이 대표적 불확실성이다. 물론 자유무역지대 설치가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정도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러시아는 극동 지역 농업기반 투자와 개발, 중국은 식량기지 확보라는 실리를 챙기게 됐는데, 모범적 상생 농업협력 모델로 보인다. 식량 취약국 한국도 2012년 해외 농업개발 종합계획을 발표하면서 2021년까지 국내 곡물 소비량의 35%를 해외 농업 개발로 확보한다고 했다. 정부는 융자와 정보 제공 사업으로 해외 농업 개발을 장려하며 ‘농어업·농어촌 및 식품산업기본법’과 ‘해외농업개발협력법’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성공사례 하나 만들지 못한 지금까지 상황을 볼 때 목표 달성은 요원하다. 특히 러시아 극동 지역은 그동안 한국 기업이 상대적으로 활발하게 진출한 지역이다. 노력 끝에 몇몇 기업이 곡물 생산까지 했고 일부 곡물은 국내 반입도 됐다. 그러나 수익성과 불확실성 측면에서 겪는 어려움은 변함없다. 기업의 모험과 정부의 단순 장려가 결합해 외국에서 농장을 개발하고 생산만 하면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고도의 경제·외교적 협력관계 구축이 필요한 국가 전략 의존 사업임을 중국과 러시아가 보여 주었다. 국가의 전략적 접근으로 단숨에 방향을 휘어잡는 중국을 한국 기업은 한숨 쉬며 볼 것 같다. 성공적 해외 농업 개발을 위해서는 구호만 요란할 것이 아니라 유망한 대상 국가 선정, 경제·외교적 협력관계 구축과 같은 국가 차원의 전략적 접근, 거기에 기업의 모험이 따라야 한다는 기본 원칙을 되새겨야 할 것 같다.
  • 낯선 日 연극… 익숙한 울림

    낯선 日 연극… 익숙한 울림

    20년 동안 방구석에서 살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쓰레기를 뒤집어쓴 히키코모리는 “세상과 어우러지는 연습”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히키코모리 밖으로 나왔어’) 임종을 앞둔 82세 아버지와 60대, 50대, 40대, 30대, 20대의 아버지가 거실에 모여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으려는 아들을 나무란다.(‘허물’) 코믹한 캐릭터 혹은 재기발랄한 발상으로 일본 사회를 들여다보는 연극 두 편이 한국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일본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가볍고 유쾌한 터치로 어루만지면서, 한국 관객들도 공감할 만한 메시지와 울림을 준다. ●‘히키코모리 밖으로 나왔어’ 두산인문극장 ‘예외’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인 ‘히키코모리 밖으로 나왔어’(20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는 세상 밖으로 나가려는 은둔형 외톨이, 히키코모리들의 고군분투기다. 일본의 극단 ‘하이 바이’의 대표이자 배우, 소설가, 연출가로도 활동하는 작가 이와이 히데토는 16세부터 20세까지 히키코모리로 살았던 경험이 있다. 연극은 히키코모리를 향한 편견을 거두고 있는 그대로의 히키코모리를 사실적으로 무대 위에 세운다. 히키코모리였던 ‘토미오’는 히키코모리 출장 상담원이 돼 의뢰인들을 만난다. 긴 머리로 얼굴을 가린 채 사는 20대 ‘타로’는 부모에게 발길질을 하고, 쓰레기 더미에 파묻혀 사는 40대 ‘카즈오’는 무엇이 정상이고 비정상인지 강박에 가까운 고민에 빠져 있다. 연극은 ‘히키코모리’라는 단어로 이들을 묶어 규정하려는 무성의한 태도를 거부하고, 이들 개개인의 내면에 귀를 기울인다. “레스토랑에서 ‘개구리 왕눈이 파스타’를 주문하고 싶지만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볼까 두렵다”는 카즈오의 말처럼, 이들은 남들과 ‘조금’ 다르고 여리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쉽게 배제된 존재들이라고 항변한다. 타로와 카즈오는 집에서 나와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일자리도 구한다. 그러나 타로의 아버지가 실직을 당한 것을 시작으로 예상 밖의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는다. 연극은 히키코모리의 아픔에서 이들을 매몰차게 내치는 사회로 관객들의 시선을 돌린다. 버블경제가 무너지고 삶이 전쟁이 돼 버린 일본의 모습은 한국 관객에게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허물’ ‘허물’(14일까지 서울 용산구 국립극단 소극장 판)은 일본의 전후 세대인 아버지의 삶과 ‘잃어버린 세대’라 할 수 있는 아들의 삶을 서로 마주 보게 한다. 그런데 그 아버지의 삶을 펼쳐 내는 방식이 기발하다 못해 황당하다. 치매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82세 아버지가 매일 허물을 벗으며 젊어진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허물을 벗을 때마다 육신은 껍데기가 돼 방 한구석에 널브러져 있다. 아버지는 다정다감한 60대, 성실히 일하던 50대, 우쿨렐레를 치며 여유를 누리던 40대, 젊음의 혈기가 넘치던 30대, 패전의 기억에 갇힌 20대의 모습으로 아들 앞에 선다.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해 최악의 위기에 빠졌던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를 시작으로 고도의 경제성장을 누렸다. 그러나 ‘잃어버린 10년’을 지나 동일본대지진까지 경험한다. 이 모든 풍파를 거쳐 온 아버지는 직장에서 해고되고 이혼을 앞둔 아들에게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어깨를 두드린다. 허물을 벗는 아버지를 마주하면서 자신의 내면 속 허물마저 벗어던지는 아들을 통해 어떻게든 삶은 이어진다는 관조와 깨달음을 전달한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G8 정상회담이 열리는 엘마우 성과 번개치는 하늘

    G8 정상회담이 열리는 엘마우 성과 번개치는 하늘

    8일(현지시간) 제41회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가 열리는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에 있는 엘마우 성(Schloss Elmau)의 밤 풍경이다. 화려한 조명으로 밤을 밝히는 엘마우 성과 함게 오른 쪽 하늘에서는 번개가 치고 있다. 엘마우 성은 지난 1916년 건축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선에서 물러난 나치 군인들의 휴양지로 쓰이던 곳이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독일 나치 정권의 과오를 반성하는 의미로 당시 독일군의 휴양지로 이용되던 고성을 택했다. 전후에는 미군 병원으로 바뀌었다가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난민 거처로 이용되기도 했다. ⓒ AFPBBNews=News1/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세계 2위 아시아 군수시장… 美 메이저 업체들엔 ‘그림의 떡’

    세계 2위 아시아 군수시장… 美 메이저 업체들엔 ‘그림의 떡’

    ‘잔치는 소문났는데, 먹을 건 없었다?’ 미국 메이저 군수업체들이 아시아 시장에서 고전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지난 10년 동안 아시아 지역 국방 예산이 급증하며 북미 지역에 이어 세계 2위 수준으로 치솟았지만, 미 군수업체들엔 ‘그림의 떡’이었다는 얘기다. 역설적으로 기술적으로 너무 훌륭하기 때문에 미 군수업체들이 이 시장에서 고전한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분석했다. 너무 복잡하고 비싼 국방 장비는 아시아 지역에 맞지 않고, 한국과 같은 시장 후발 주자들이 아시아 국가에 공을 들이며 경쟁이 심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지난해 글로벌 국방지출 총액을 1조 7190억 달러로 집계했다. 이 가운데 25%인 4230억 달러를 아시아·오세아니아에서 썼다. 5960억 달러를 지출한 북미에 이어 2위다. 아시아 지역 국방 지출은 지난 10년 동안 62% 급증했다. 아시아가 ‘뜨는 시장’인 셈이다. 더욱이 아시아에서 역내 군사적·정치적 갈등은 고조되는 분위기다. 중국과 남중국해 주변국 간 영유권 분쟁 양상을 보면 베트남과 필리핀이 이미 분쟁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를 제외한 나머지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ASEAN) 국가 전체가 갈등을 겪을 잠재군으로 분류된다. 중국이 미 군수업체 무기를 쓸 것으로 기대하긴 어렵지만, 미국의 우방인 필리핀뿐 아니라 한때 적대 관계였던 베트남마저 미국산 무기에 관심을 기울일 처지가 된 셈이다. 그럼에도 현재 아세안 10개국 가운데 미국산 최신 전투기를 보유한 곳은 싱가포르가 유일하고, 미국 초현대식 군함을 보유한 나라는 없다. 1970년대엔 한국을 비롯해 대만·인도네시아·싱가포르·태국 등이 미국의 노스롭 F5를 구비했던 것과 대비된다. 가뜩이나 올해 미국 정부의 국방 예산이 5600억 달러로 4년 전 7210억 달러의 77.7%로 급감한 가운데 떠오르는 아시아 시장에서 고전하며 미 군수업체들의 매출도 감소했다. 레이테온의 지난해 매출은 228억 달러로 2010년 252억 달러보다 줄었다. 록히드마틴의 지난해 순매출액은 4년 전과 차이 없는 456억 달러였다. 미 군수업체들은 이렇게 된 이유가 미군을 위한 비싼 최첨단 제품 개발에 치중해 온 탓이라고 자평했다.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FA18 슈퍼호넷 다목적 전투·공격 항공기의 글로벌 세일즈를 총괄하는 하워드 베리 보잉 부사장은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우리 제품은 자동차로 따지면 캐딜락”이라고 말했다. 록히드마틴의 F35 통합 전투기도 아시아 고객에겐 지나치게 정교하며 비싼 제품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40대에 70억 달러를 지불하고 F35를 구매할 만한 나라는 일본과 한국뿐이라고 지적했다. 정작 아시아 국가들은 훈련부터 실제 전투까지 가능한 다기능, 유지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효율적 무기를 선호한다. 이들이 선호하는 전투기 가격대는 대당 1억 2500만 달러 선으로 F35의 가격과 격차가 크다. 미국 KAT컨설팅의 조 카츠만 컨설턴트는 “미국이 ‘금띠 두른’ 무기체계로 소수의 고가 시장 고객만 만족시키려고 한다”면서 “저가 시장을 외면하면 신규 구매자를 잃게 된다”고 평가했다. 비용뿐 아니라 무기 카테고리 측면에서도 미 군사업체들은 경쟁력을 잃고 있다. 최근 아시아 국가들은 디젤 잠수함을 선호하지만 미 군수업체들은 핵잠수함만 만든다. 결국 최근 몇 년 동안 말레이시아·베트남·싱가포르·인도·인도네시아 등이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신형 잠수함을 발주했을 때 한국, 유럽, 러시아 제조사들이 수주권을 따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 업체들 중 선박을 만드는 대우조선해양, 전투기를 생산하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등을 주목했다. 대우조선해양은 인도네시아 잠수함, 영국·노르웨이·태국의 군함을 수주했다. KAI는 인도네시아·터키·페루·이라크·필리핀 등지에 수출 거점을 확보했다. 삼성테크윈은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회원국인 터키와 폴란드에 최신 자주포를 판매했다. 7일 한국국방연구원에 따르면 한국의 방산 수출액은 2006년 2억 5000만 달러에서 2011년 23억 8000만 달러로, 같은 기간 수출 대상국은 47개국에서 85개국으로 늘었다. KAT컨설팅의 카츠만 컨설턴트는 한국 방산업체의 성공을 현대차의 성장과 결부해 분석한 글을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했다. 그는 “현대차는 신속한 기술 확산, 초기의 값싼 노동력, 충분한 경쟁력을 갖춘 제품을 지렛대 삼아 글로벌 자동차 산업의 경쟁자로 부상했다”면서 “글로벌 방위산업에서도 현대차화가 이뤄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카츠만 컨설턴트에 따르면 한국·파키스탄·인도의 전투기들은 미국 F16보다 33~50% 싸다. 한국처럼 무기 시장의 틈새를 파고들며 신흥국을 공략하는 나라가 늘어나면, 미 군수업체들이 저가 시장을 파고드는 쪽으로 전략을 바꿀까. 월스트리트저널은 그럴 가능성을 낮게 보며 한국이 전투기 등을 판매할 때 미 군수업체들도 반사적으로 이익을 얻는 구조를 설명했다. 예컨대 KAI의 수출 품목인 한국형 복합 훈련기 T50은 록히드마틴과 공동 개발한 기종으로 허니웰인터내셔널, 록웰콜린스, 레이테온 등의 장비를 쓴다. 한국의 T50이 판매되면 미국 업체들에게도 일정한 수익이 발생하는 구조인 셈이다. 허니웰의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방·우주 체계 수석책임자인 마크 버지스는 “우리에게 아시아 항공기 제조사들의 부상은 위협이 아닌 기회”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가 경쟁사로 보는 그룹은 유럽 업체”라고 덧붙였다. 유럽 업체들의 자세는 미국 업체들과 다소 다르다. 특히 방산 분야에서도 ‘히든 챔피언’을 키운 독일은 고가 시장과 저가 시장을 넘나들 수 있는 국가로 분류된다. 독일 역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국방 예산이 삭감되자 수출에서 활로를 찾고 있다. 독일 슈피겔은 “독일 군수업체들은 주로 독일 연방군인 분데스베르에 무기를 납품했지만, 10년 전부터 수출 비중을 늘려 최근에는 제품의 70%를 해외에 판매한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독일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무기 수출을 규제하는 결정을 내렸고 미국과 러시아에 이어 무기 수출국 3위의 자리를 중국에 넘겨주고 프랑스에 이어 5위로 내려앉은 처지이지만, 독일은 여전히 각종 무기 시장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심지어 최근 2차 세계대전 사과 문제를 놓고 이견을 빚었던 일본 시장에도 적극 구애를 펴고 있다. 독일 국영 독일의 소리(DW)는 “지난달 일본이 전후 처음으로 자국에서 개최한 방산 전시회에 독일 군수업체들이 적극 참여했다”고 전했다. 해군 장비 부품 제작업체, 무인 전차 개발업체 등에 소속된 직원들은 “당장 계약을 따내지 않더라도 관련 시장 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참석”이라고 전했다. 일본과 동맹 관계인 미국 군수업체들의 경쟁 우위를 인정하면서도 틈새 시장을 노리겠다는 독일의 포석이다. 지난달 13일 요코하마에서 열린 일본의 방산 전시회에는 미국과 독일의 군수업체뿐 아니라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업체들도 참가했다. 프랑스의 무기 수출액도 지난해 82억 유로로 1년 동안 18% 증가, 15년 만에 최고 실적을 기록했다고 최근 AFP가 전했다. 이집트와 카타르에 라팔 공급 계약을 체결하는 등 중동 지역에 공을 들인 게 주효했다는 평가다. 2010~14년 프랑스는 중동(38%)과 아시아(30%)에 대한 무기 수출에 집중했다. 이어 유럽(13%), 북미(11%), 아프리카(4%) 순으로 무기를 수출했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軍人’ 1%의 영웅과 99%의 희생자들

    ‘軍人’ 1%의 영웅과 99%의 희생자들

    볼프 슈나이더 지음/박종대 옮김/열린책들/584쪽/2만 5000원 ‘국가의 안전 보장과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일정한 조직 체계에 소속되어 전투를 수행할 수 있도록 교육·훈련을 받고, 전시에는 직접 전투에 종사하는 사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 소개한 ‘군인’의 정의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군인은 사전적 의미를 뛰어넘는 다양한 개념과 이미지를 포함한다. 전쟁의 최일선 수행자 말고도 통치의 강력한 주체, 나라를 없애고 만들거나 인간을 잔인하게 죽이는 괴물, 비참한 죽음, 영웅…. 신간 ‘군인’은 군인을 매개 삼아 ‘인간 종’의 면모를 파헤친 색다른 전쟁문화사다. 저자는 국내에도 번역 소개된 ‘위대한 패배자’를 쓴 독일 언론인이다. 고교 졸업 직후 징집돼 나치 정권을 위해 싸웠던 당사자가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50년 천착 끝에 내놓은 ‘군인의 역사’로 읽힌다. 전쟁, 그리고 전쟁의 직접 수행자인 군인의 기원은 언제이고 무엇이었을까. 그 시발을 명쾌히 밝힌 자료나 문건은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인류 역사가 싸움과 전쟁의 점철’이라는 평범한 관측에 얹어 책에서 찾아낸 그 시초는 상상보다 훨씬 앞선다. 그 이유는 남에 대한 멸시와 배척, 그리고 점령으로 모아진다. 이를테면 뉴기니 섬의 왈라루아 족은 인간과 동물의 구분이 아닌, 왈라루아 족과 비(非)왈라루아 족으로 구분하면서 비왈라루아 족을 동물에 더 가깝게 대우했다. 뉴기니와 아마존 밀림 속 마지막 원시부족들은 다른 종족·부족을 여전히 그렇게 분류한다. 타 민족에 대한 경멸을 토대로 번창한 그리스 문화에서도 실상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스 세계를 외부 세계와 엄격히 구분한 개념인 ‘야만족’(babarian)은 그리스어를 잘 못하고, 교양 없고 거칠고 잔인한 모든 족속, 이방인, 적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것 말고도 차별과 무시에 기반한 점령·전쟁의 사례는 숱하다. 콜럼버스가 아이티섬에 도착한 지 40년 만에 이 섬 인디언 원주민들은 상당수가 천연두로 죽거나 학살당했다. 테네리페섬과 나머지 카나리아 제도의 원주민인 구안체 족은 일부만 남고 몰살됐다. 역사상 가장 큰 ‘인간사냥’이라는 아메리카 노예시장을 위한 흑인 생포는 어떤가. 16∼19세기 아프리카에서 배로 수송된 흑인 수는 1000만∼1500만명에 이른다. 1800년 제1통령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앞둔 밀라노에서 병사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위대한 민족의 땅을 모욕하려는 미친 자들(오스트리아)에게 반드시 저주가 내린다는 사실을 보여 줘라.” ‘군인은 다른 어떤 인간 집단보다 타인에게 더 많은 고통을 가할 뿐 아니라 자신이 크나큰 고통을 겪는 사람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전쟁에 휘말린 군인의 희생은 상상을 초월한다. 책에 명시된 통계만 보더라도 희생의 두께는 어렵지 않게 감지된다. 나폴레옹전쟁(1803~1815) 150만명, 미국 남북전쟁(1861~1865) 62만명, 보불전쟁(1870~1871) 18만 8000명, 제1차 세계대전 1000만명, 제2차 세계대전 1700만명, 한국전쟁 100만명, 이란·이라크전쟁 90만명…. 엄청난 희생을 부른 전쟁에 군인이 끌려 들어간 원인은 무엇일까. 핑계, 착각, 거짓말, 영토와 전리품, 조국, 명성과 복수, 종교, 모험 등 다양할 것이다. 저자는 ‘무엇을 위해 군인은 죽었는가’를 설명하며 ‘전쟁영웅’을 놓고도 회의적인 말을 던진다. “한 군대가 어떻게 수많은 영웅, 전대미문의 용맹성을 지닌 모범적 남자들로 이뤄질 수 있겠는가. 굳이 영웅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면 누구나 인정하는 훌륭한 일을 위해 죽을 때까지 초지일관 싸운 군인들에나 붙일 수 있다.” 대부분의 군인은 영웅이 아닌 희생자인 것이다. 이제 전쟁은 더이상 군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싸움으로 변했다. 무인 전투기 드론처럼 전자기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기술자로도 충분한 ‘군인 없는 전쟁’의 시대다. 민간 군사기업을 이용해 바로 공격에 나서고 무기 수준에 구애받지 않는 사이버전을 벌이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전쟁을 해 보려는 유혹도 과거보다 더 커졌다. 그래서 저자는 서문에 추도사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평화를 외치면 평화가 올 것’이라는 주장은 순진한 것이라며 다소 슬픈 말을 전한다. “수백만 명의 인간이 더는 군인이 될 필요가 없는 건 좋은 일이지만, 군인이 사라진다고 해서 미래의 전쟁이 없어지거나 덜 끔찍해지지 않는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美·中 찍고 러시아로… 아베의 광폭 외교

    ‘아베의 다음 외교 목표는 러시아?’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5일 우크라이나를 방문한다. 오는 7일부터 독일에서 열리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가는 길에 우크라이나를 들른다. 일본 총리로서는 첫 우크라이나 방문이지만 아베 총리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지난 4월 미·일 정상회담을 통한 관계 강화, 중·일 정상회담 재개를 통한 관계 정상화 등으로 외교적 입지를 굳힌 아베 총리가 전방위 외교에 시동을 걸었다. 아베 총리는 4일 베니그노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최근 남중국해에서 보인 중국 행보에 심각한 우려를 표하고, 중국 견제를 위한 안보 협력을 결의했다. 러·일 정상회담 개최에 대해 미국 측은 그동안 부정적인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합병한 러시아에 대해 미국과 서방은 경제적 제재를 가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아베 총리는 우크라이나를 찾아 친서방적인 페트로 포로셴코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 주면서 러시아와의 정상회담을 위한 균형외교라는 명분을 축적하는 행보를 시작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아베 총리는 지난 5월 러시아의 2차 세계대전 전승 70주년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일본과 러시아는 쿠릴 4개 섬(일본명 북방영토) 문제가 얽혀 있다. 일본은 미국의 우크라이나 정책을 따르면서도 “러시아와의 관계는 지역 차원에서 별개로 이뤄지는 문제”라면서 대(對)러 공조 약화를 우려하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미 행정부를 설득해 왔다. 요미우리신문은 아베 총리가 오바마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일본에는 이웃인 러시아, 중국과의 관계도 중요하다. 중·러 양국이 협력해서 미·일 등과 대립하는 자세가 불필요하게 강해지면 동아시아는 불안정해진다”며 “푸틴 대통령과의 대화는 반드시 할 것”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분석했다. NHK는 4일 “아베 총리가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반도 병합 등에 대해서는 ‘무력을 사용한 현상 변경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천명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18억 달러 규모의 경제협력 및 인도적 지원 의지를 밝힐 것”이라고 보도했다. 아베 총리가 우크라이나를 적극 지원하는 자세를 보임으로써 푸틴 대통령의 올해 일본 방문에 대한 미국의 양해를 구하려 하고 있다고 NHK는 분석했다. 일본은 푸틴 대통령의 방일 초청에 앞서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의 러시아 방문을 추진하고 있다. 아베 총리와 푸틴 대통령은 개인적으로도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연락을 주고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아베 총리는 G7 정상회의에서 중국의 남중국해 암초 매립 문제를 제기할 방침이라고 교도통신이 전했다. 도쿄 이석우 특파원 jun88@seoul.co.kr
  • [열린세상] 한국 외교 위기 아니다/김경민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열린세상] 한국 외교 위기 아니다/김경민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일본의 지식인들과 만나면 종종 이런 말을 듣곤 한다. “한국이 중국과 가까워지니 이 다음에 중국과 힘을 합쳐 일본에 적대적인 나라가 되지 않을지 걱정됩니다”라고. 한국과 중국의 지나간 역사에 대해 전혀 관심도 없고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에 어안이 벙벙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멀리 조선시대로 되돌아가 한국이 중국에 조공 바치던 역사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중국은 한국전쟁 때 대규모의 군대를 출병해 남북이 분단되도록 한 나라라는 역사적 판단도 못 하는 것이다. 중국과 국교를 열고 지금은 명동에 중국인이 넘쳐 나지만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중국과의 역사 관계에서 배태된 ‘중국 공포’라는 염색체가 단단히 박혀 있다는 사실은 웬만한 한국 사람들은 다 안다. 단지 중국과의 관계가 경제적인 측면에서 대단히 중요하다는 사실은 명철하게 알고 있고 이 다음에 혹여 경제적 힘에 휘둘리지 않을까 걱정스런 속내들이 있다. 그래서 안보는 미국과 함께하면서 중국과는 경제적으로 친밀한 관계가 돼야 한다는 것이 대중적 상념일 것이다. 그러면 일본과는 어떤가. 일본 사람들은 한국에 대한 침략 사과에 대해 “너무 자주 많이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인들의 속내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반성과 사과에 전혀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 감상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 총리가 사과를 하면 며칠도 안 가 각료 중 한 사람이 과거사 망언을 되풀이해 왔으니 말이다. 위안부 문제와 식민 지배에 대한 억울함을 딛고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로 가자고 약속한 경우가 어디 한두 번인가. 한국이 이런 대승적 견지에서 일본을 용서하고 파트너로 생각하게 된 배경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나서부터 나름대로 민주주의 가치를 지닌 국가 경영을 해 왔기 때문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 신뢰의 바탕 위에서 한국은 일본과의 좋은 관계를 심화해 나갈 것이고 이 관계는 한국의 미래에 좋은 토양이 될 것으로 믿고 있다. 한·일 관계가 경색돼 있지만 조만간 풀릴 것이라는 낙관적 평가를 하는 이유도 한반도 주변 국가 중 일본이 그래도 민주주의의 가치가 훈련된 나라라고 한국이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일본이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중국은 어떤가. 중국과의 지나간 역사를 회고해 볼 때 중국이 과거처럼 동북아를 바라본다면 결코 주변국의 속마음을 얻지 못할 것이다. 일본이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강화하며 군사력 증강에 천문학적인 돈을 투입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중국이 기존 질서를 흩트리고 이미 일본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센카쿠를 넘보면서 심지어는 난사제도를 군사요쇄화하며 필리핀·베트남을 불안하게 하니 미래가 불 보듯 뻔히 보이는 것이 아닌가. 중국의 국력이 강대해지면 강대해질수록 주변국들이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민주주의의 경험이 부족한 중국이기에 더욱 그러하고 미국을 맞상대하는 힘이 길러지면 힘의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예측하는 것이다. 중진국의 반열에 올라 있는 한국이 선진국을 향해 달려가려면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와 같이 전쟁이 없고 평화가 유지돼야 한다. 중국의 대두, 미·일의 신방위협력지침으로 한국 주변의 안보 상황에 큰 역사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외교가 위기가 아닌가”라는 물음이 쏟아지고 있다. 필자는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기회라고 답하고 싶다. 우리 국민들이 한국 주변의 변화에 촉각을 세워 민감하게 감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해답을 찾으면 될 일이다. 한국 주변의 가장 큰 변화인 일본의 우익화, 중국 대두의 바닥에서 군사력 증강에 많은 돈을 쓰는 중국과 일본을 보게 된다. 그래서 한국이 능동적으로 나서서 국가 예산을 허비하는 군비경쟁을 해소하고 중국·일본 국민들의 복지증진과 경제적 번영을 이야기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을 한국이 주도해 만들어 나가는 외교의 길을 택하면 설득력이 있다. 처음에는 어려움도 있겠지만 침략의 역사가 없는 한국이 동북아 평화의 꿈을 그리는 대화 체제를 제안하며 꾸준한 설득해 나가면 번영의 동북아가 될 수 있다. 위기의 한국 외교가 아니라 기회의 한국 외교가 되도록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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