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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의 소리] 사회환경 개선돼야 성범죄 준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최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교사 성추행뿐 아니라 겉으로는 평온한 도심에서 밤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필자는 부산서부경찰서 성매매단속반에 근무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매일 밤 불법 성매매를 단속하러 다니고 있다. 성매매특별법 제정 10주년이었던 지난해를 시작으로 대대적으로 단속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근절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진화해 도심 속 오피스텔뿐만 아니라 주택가까지 숨어들어 음지에서 더욱 은밀하게 불법행위들이 행해지고 있다. 쉽게 돈을 벌고자 불법 성매매 영업을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를 이용하는 손님이 대낮부터 이어지고 있는 것이 우리네 부끄러운 현실이다. 단속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겠지만 국민의식도 함께 바뀌어야 한다. 이런 불법 서비스를 찾는 국민들이 줄지 않는다면 성매매 업소는 계속 영업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어린 나이에 여러 이유로 성매매의 길로 빠져들어 성매매 처벌로 인한 전과가 주홍글씨로 평생 따라다닐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프다. 처음부터 성매매로 돈을 벌고자 생각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 친구, 주변 사람들도 이러한 환경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단시간에 완벽하게 근절되지는 않더라도 쉽게 성매매의 길로 빠져들 수 없도록 사회적 분위기와 환경을 기성세대들이 만들어 줘야 한다. 김성재 부산 사상구
  • 걸그룹 지망생들에게 대마초 거부 땐 ‘왕따’시킨 트레이너

    #홍모(23)씨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멕시코계 무기 밀매조직의 조직원으로 활동하다 2012년 한국으로 추방됐고, 지난해 5월부터 올 3월까지 필로폰을 유통시키다 구속됐다. 그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에 갱단 시절 찍은 총기, 문신 사진을 버젓이 올려놓았다. 2013년 9월부터 홍씨는 서울 이태원의 클럽 등에서 외국인들에게 필로폰을 공급받아 직접 투약하며 지인들에게 판매도 한 것으로 조사됐다. #작은 연예기획사에서 트레이너로 활동하던 정모(33)씨는 지난해 8월부터 11월까지 걸그룹 지망생 4명에게 강제로 대마초를 피우게 한 혐의로 구속됐다. “가수를 하려면 피워야 한다”면서 그가 8차례나 대마초를 피우게 한 피해자 중에는 10대도 2명이나 있었다. 정씨는 대마초 흡연을 거부하면 가수 지망생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하는 등 불이익을 줬다. 한 피해자의 부모가 딸의 대마초 흡연 사실을 알고 항의하자, 정씨는 경찰에 자수했다. 서울동부지검 형사4부(부장 이상억)는 지난 1월부터 7월까지 마약사범 집중단속을 벌여 홍씨와 정씨 등 16명을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하고 10명을 같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고 19일 밝혔다. 성관계를 목적으로 술잔에 몰래 필로폰을 섞어 배우자가 있는 여성들에게 마시게 한 혐의를 받고 있는 조모(58)씨 등 2명과 이들에게 필로폰을 공급한 다른 조모(61)씨도 집중단속 기간에 구속됐다. 이 외에도 김모(43)씨 등 8명이 모텔에서 혼숙을 하며 인터넷 등을 통해 구매한 필로폰 50g을 상습적으로 투약하다 단속에 걸렸다. 검찰은 이들 중 7명을 구속 기소했다.검찰은 “최근 마약류 거래가 공급자에게서 직접 건네받는 방식 외에 인터넷 등으로 마약을 주문해 국제우편, 택배로 받는 비노출·비대면 방식이 꾸준히 늘고 있다”면서 “이번 단속은 판매자, 알선책을 주로 겨냥했고 그 결과 지난해보다 2배 이상 많은 16명의 공급 사범을 단속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서울 도심 2곳에 ‘문화창조벨트’

    서울 도심 2곳에 ‘문화창조벨트’

    대한항공 소유인 서울 종로구 경복궁 옆 송현동 미국대사관 숙소 부지에 전통문화 체험이 가능한 복합문화공간이 들어선다. 대한항공이 2008년부터 추진해 온 7성급 호텔 건립 계획은 사실상 무산됐다.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18일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이 같은 내용이 포함된 ‘국정 2기, 문화융성의 방향과 추진 계획’ 발표를 통해 향후 문화융성의 청사진을 공개했다. 김 장관은 “문체부와 대한항공이 협력해 송현동 부지에 여가와 휴식은 물론, 복합문화·전통문화·현대문화를 모두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인 ‘케이익스피어리언스’를 건립하기로 했다”면서 “광화문, 경복궁, 인사동 등 주변 지역과 연계하고 문화창조융합벨트에서 창작된 전통문화 콘텐츠의 시연·판매와도 유기적으로 연계되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브리핑에 참석한 조성배 대한항공 상무는 “아직 구상 단계이긴 하나 숙박시설 없는 복합문화공간을 지하 3층, 지상 4~5층 규모로 개발해 2017년까지 1차 공정을 완료할 계획”이라며 “한국의 전통미를 살리되 젊은층도 호응할 수 있는 첨단기술을 가미해 짓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송현동 부지는 3만 7000㎡(약 1만 1192평) 규모로 대한항공이 2008년 매입해 7성급 호텔 건립을 추진해 왔으나 학교보건법 위반 등 서울시교육청의 불허로 2012년 대법원 소송까지 갔지만 모두 패소했다. 문체부는 이와 함께 1만 5000석 규모의 잠실 서울올림픽 체조경기장을 2017년까지 아레나형 케이팝 공연장으로 탈바꿈시킬 계획이다. 이를 위해 480억원의 체육기금을 투입한다. 이로써 문체부는 서울 도심 지역 두 곳에 문화창조융합벨트 거점을 새로 확보하게 될 전망이다. 이 밖에 정부는 외국 영화, 드라마 등 영상물을 국내에서 촬영하는 경우 제공하는 현금보조사업을 확대하고, 제작비 중 인건비에 대한 세액감면제도를 도입하기 위해 조세특례제한법을 개정하기로 했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100세 시대 新노년] “요즘 나이 65세면 청년… 노인 性 인식부터 바꾸자”

    대전에 사는 김모(54)씨는 한달에 한번 칠순을 훌쩍 넘긴 아버지가 직업여성과 만날 수 있게 해 준다. 아버지 친구의 힘을 빌리는 은밀한 작업(?)이다. 두 사람이 직업여성을 찾아가 성적 욕구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돈을 쥐여주는 것이다. 자식의 작전이란 것을 아버지가 눈치 못 채도록 아버지 친구에게 신신당부한다. 음성적이기는 하지만 어머니가 작고한 뒤 외로워하는 아버지를 위해서다. 벌써 수년째다. 김씨는 “내가 나이 들어 가니 아버지 마음을 알겠더라”면서 “이것도 나름의 효도라고 생각한다”고 털어놨다. 노인의 성(性)이 하루 이틀 문제는 아니지만 사회는 여전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성 기능이 쇠약해지지만 욕구는 그만큼 줄지 않아 성폭행 등 각종 노인 문제를 낳기도 한다. 18일 한국노인종합복지관협회에 따르면 전국 15개 시·도 성상담센터의 노인 성 상담 건수는 2012년 1477건에서 2013년 3815건, 지난해 4375건으로 크게 늘었다. 이 협회 김윤영 간사는 “이성과 단절돼 외로워하는 어르신들이 많다”며 “특히 남자 노인의 상담이 훨씬 더 많은데 단체 미팅을 주선하면 부인이 있어도 나오는 어르신이 적잖다”고 말했다. 상담 내용은 ‘성관계 문제로 생긴 부부 갈등 해법’이 29.2%, ‘이성교제 방법’이 25.2%로 주를 이뤘다. ‘노년기 성 관련 신체 및 심리 변화’(23.7%), ‘성 기능 장애 및 치료법’(15.4%)도 있지만 ‘성인용품 및 보조기구 사용법’(4.3%)이나 ‘성병 및 치료법’(0.6%)도 있어 노인의 성 문제가 가볍지 않음을 보여줬다. 인천에서 혼자 사는 A(73)씨는 4년 전 여자 친구를 만났다. 유명 관광지 등을 찾아 데이트를 즐겼지만 얼마 전부터 헤어질 때마다 여자 친구가 짜증을 냈다. 은밀히 알아보니 성관계를 하지 않는 게 화근이었다. A씨는 매달 3차례 비아그라를 먹고 관계를 맺었다. A씨는 “여자 친구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 자존심이 상하지만 사이는 한결 좋아졌다”며 웃었다. 전북 전주에 사는 B(77)씨는 몇년 전부터 장사하면서 홀로 사는 할머니와 연애 중이다. B씨는 “칠순을 갓 넘긴 처가 성관계를 거부해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지만 혹 들통이 나 처와 자식들에게 상처를 주고 가정이 깨지는 일이라도 벌어질까 봐 불안하다”고 말했다. 탈출구가 막히면서 성범죄로 이어지기도 한다. 어린이와 장애인 등 약자가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많아 사회문제가 된다. 경찰청이 집계한 65세 이상 노인 성범죄자는 2010년 571명이던 게 2011년 629명, 2012년 702명, 2013년 930명, 지난해 1076명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전체 성범죄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2010년 2.8%, 2011년 2.9%, 2012년 3.1%, 2013년 3.2%, 지난해 3.6%로 한번도 줄지 않았다. 배정원 행복한 성문화센터 대표는 “노인을 무성으로 보고 (성행위를) 망측하다거나 체면을 구기는 것으로 생각하는 게 문제다. 요즘 65세면 청년이다. 비아그라 등에도 관심이 많다”면서 “이런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배 대표는 “노인의 성 문제는 사회와도 연관이 깊은 만큼 남녀 노인들이 쉽게 만날 수 있도록 매칭 프로그램을 많이 제공하는 세심한 배려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대전 이천열 기자 sky@seoul.co.kr
  • 연예기획사 팀장, 걸그룹 지망생에게 강제로 대마 피우게 해..“가수 하려면 필수?”

    연예기획사 팀장, 걸그룹 지망생에게 강제로 대마 피우게 해..“가수 하려면 필수?”

    연예기획사 팀장, 걸그룹 지망생에게 강제로 대마 피우게 해..“가수 하려면 필수?” 충격 ‘연예기획사 팀장’ 한 연예기획사 팀장이 10대 걸그룹 지망생들에게 강제로 대마를 피우게 한 사실이 적발돼 충격을 주고 있다. 필로폰을 국내에 공급한 미국 갱단 출신 20대 남성과 10대 걸그룹 지망생들에게 강제로 대마를 피우게 한 연예기획사 팀장 등 마약 사범들이 대거 적발돼 재판에 넘겨졌다. 19일 서울동부지검 형사4부(부장검사 이상억)는 올해 1∼7월 마약사범 집중단속을 벌여 마약류를 공급·투약·밀수한 혐의(마약류관리에관한법률위반 등)로 연예기획사 팀장 등 16명을 구속 기소하고 10명을 불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에 따르면 소규모 연예기획사에서 가수 지망생들을 훈련하는 팀장급 트레이너로 일한 정모(33) 씨는 걸그룹 지망생 4명에게 “가수를 하려면 필요하다”면서 작년 8∼11월 8차례 강제로 대마초를 피우게 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연예기획사 팀장 피해자 중에는 16세와 18세 등 10대가 2명 포함돼 있다. 정씨는 피해자들이 흡연을 거부하면 소위 ‘왕따’를 시키는 등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대마초를 억지로 피우게 한 것으로 조사됐다. 피해자 부모가 딸의 대마 흡연 사실을 알고 항의하자 연예기획사 팀장 정씨는 경찰을 찾아가 자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홍모(23.구속기소)씨는 미국 영주권자인 아버지와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거주할 때 멕시코 출신 이민자들과 함께 무기밀매 갱단 활동을 하다 2012년 2월 추방돼 국내에 들어와서는 필로폰을 유통하다 단속에 걸렸다. 홍씨는 2013년 9월 이후 1주일에 1∼3번씩 이태원 클럽에서 만난 낯선 외국인들로부터 필로폰을 공급받아 투약했으며, 이를 지인들에게도 팔아넘기기도 한 것으로 조사됐다. 홍씨와 함께 마약을 투약한 지인 5명은 작년에 이미 구속됐다. 검찰은 홍씨의 범행과 관련해 해외 범죄조직이 마약 밀수에 개입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또한, 검찰은 성관계할 목적으로 술잔에 몰래 필로폰을 타 여성에게 마시게 하는 속칭 ‘몰래뽕’을 한 혐의로 조모(58)씨 등 2명과 이들에게 필로폰을 공급한 또 다른 조모(61)씨도 구속했다. 이밖에 모텔에서 집단 혼숙하며 상습적으로 필로폰을 투약한 김모(43)씨 등 8명도 단속에 걸려 이 가운데 7명이 구속기소됐다. 이들 일당에는 조직폭력배도 포함돼 있다고 검찰은 밝혔다. 검찰은 단속 결과 최근 마약류 거래가 공급자로부터 직접 건네받는 방식 이외에도 인터넷으로 마약을 주문해 국제우편이나 택배로 받아보는 비노출·비대면 방식도 꾸준히 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단속에서는 구매자나 투약자보다 판매자, 알선책을 집중 단속한 결과 공급사범을 작년 동기보다 2배 이상 증가한 16명을 붙잡았다. 투약사범은 12명, 밀수사범은 3명이었다. 마약류별로는 필로폰이나 프로포폴, 졸피뎀 등 향정신성의약품이 전체 적발 건(31명) 중 가장 많은 25건이었다. 양귀비나 아편, 코카인 등 전통적인 마약과 대마의 경우 각각 3건 단속됐다. 네티즌들은 “연예기획사 팀장 충격이다”, “연예기획사 팀장, 대체 왜 대마를 피우게 해?”, “연예기획사 팀장, 미쳤네” 등의 반응을 보였다. 사진=서울신문DB(연예기획사 팀장) 뉴스팀 seoulen@seoul.co.kr
  • 강영원 “3975억원 손해는 석유공사 규정 따른 것”

    “인수는 협상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가격의 10%는 더 줄 수 있습니다. 석유공사의 배임죄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캐나다 자원개발업체 하비스트와 정유 부문 자회사 노스애틀랜틱리파이닝(NARL) 인수를 무리하게 추진해 국고에 최대 5000억원대 손실을 입힌 혐의로 기소된 강영원 전 석유공사 사장이 17일 첫 공판에서 혐의를 부인했다. 검찰이 연초부터 대대적으로 수사를 벌여 온 이명박 정권 당시 해외 자원외교 비리에 대한 재판이 시작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부장 김동아) 심리로 이날 열린 첫 공판에서 강 전 사장의 변호인은 “검찰이 손해로 판단하는 3억 5400만 달러(약 3975억원)는 석유공사 규정상 사장이 유동적으로 거래 가격을 결정할 수 있는 범위”라면서 배임 혐의를 부인했다. 강 전 사장 재임 시절 석유공사는 2009년 하비스트와 NARL을 인수하며 시장 가격인 주당 7.31캐나다달러보다 높은 가격인 주당 10캐나다달러를 지불했다. 총인수금액만 4조 5600억원에 달했다. 검찰은 무리한 인수 결정으로 석유공사가 입은 손실이 최대 4억 9100만 달러(약 5513억원)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석유공사는 당시 NARL 인수에 1조 3700억원을 쏟아부었으나 매년 적자가 누적되자 지난해 8월 인수 비용의 3%에도 못 미치는 329억원에 매각했다. 검찰에 따르면 하비스트는 과다 부채로 유동성에 문제가 있었고 NARL은 자본잠식 상태였다. 당시 석유공사 감사실이 하비스트 인수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내놨지만 무시됐다. 경남기업의 정부지원금 융자 사기로부터 시작된 자원외교 수사는 강 전 사장을 법정에 세웠고 김신종(65) 전 광물자원공사 사장의 기소를 앞두고 있다. 검찰은 마다가스카르 암바토비 니켈광산의 경남기업 지분을 고가에 매입해 200억원대 손해를 입힌 혐의를 받는 김 전 사장을 조만간 재판에 넘길 방침이다. 가스공사에 대한 비리 혐의는 아직 구체적인 정황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해외 자원개발 특혜 대출 의혹을 받던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지난 4월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수사는 난관에 부딪혔다. 성 전 회장이 박근혜 정부 실세들에게 돈을 건넸다는 메모와 인터뷰 내용을 남겨 수사의 방향이 어긋났기 때문이다. 한편 감사원은 역대 정부가 지난 30여년간 해외 자원개발 사업에 35조원을 투자했지만 자원 확보도 거의 하지 못했고 지난해 말 기준 12조 8000억여원의 적자가 발생했다는 중간 감사 결과를 지난달 내놨다.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노란 나비의 1191번째 절규입니다

    노란 나비의 1191번째 절규입니다

    “나비, 해방으로 날자! 마침내 해방!” 광복 70년이 지났지만 나비는 아직 날지 못하고 있다. 노란 나비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모든 차별과 억압, 폭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날 수 있기를 바라는 염원의 상징이다. 12일 낮 12시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을 노란 나비들이 가득 메웠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주최하는 제119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 참가자들이다. 한낮 뙤약볕에도 불구하고 평소보다 10배가 넘는 1000여명이 나비 모양을 한 노란 부채를 들고 집회 현장을 찾았다. 이날 집회는 하루 앞으로 다가온 ‘제3회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을 맞아 일본 도쿄, 미국 시카고 등 8개국 25개 도시가 함께하는 세계연대집회로 진행됐다. 위안부 기림일은 고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를 최초 증언한 1991년 8월 14일을 기념해 제정된 날이다. 집회 현장에는 방학을 맞은 색색 교복의 중고생들이 주를 이뤘다. 어린아이를 목말 태운 아버지, 점심시간에 짬을 낸 인근 회사들의 넥타이 차림 직장인들도 눈에 띄었다. 이들의 손에는 ‘70년이다. 사과 좀 하자’, ‘진실은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습니다’ 등의 내용이 적힌 팻말이 들려 있었다. 휴가를 맞아 세종시에서 가족과 왔다는 회사원 김모(41)씨는 “지방에 살아 수요집회 참석 기회가 없었는데, 아이들에게 보여 줄 겸 스스로 공부도 할 겸 해서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광복이 된 지 70년이 넘어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력이 많이 쇠한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고 밝혔다. 개회사에서 김선실 정대협 공동대표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1945년 8월 15일이 진짜 해방인 줄 알았지만 당연히 사죄할 줄 알았던 일본 정부가 아직까지도 제대로 사죄를 하지 않고 있다”며 일본 정부를 규탄했다. 이날 정대협은 14일로 예정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종전 70주년 담화와 관련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식민지 지배하에서 강제적으로 이뤄진 ‘성노예’ 범죄임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죄하고 법적 배상하라”는 성명을 냈다. 집회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길원옥(88), 김복동(90), 이용수(88) 할머니도 참석했다. 한편 집회가 한창이던 낮 12시 40분쯤 인근에서 최현열(80)씨가 자신의 몸에 인화물질을 뿌리고 불을 붙여 분신을 시도했다. 집회 참가자들이 달려들어 즉시 불을 껐지만 최씨는 전신 56%에 화상을 입었고 그중 40% 이상이 3도 화상이어서 위중한 상태다. 광주에 거주하는 최씨는 지난 6월 광주에서 열린 근로정신대 재판에도 참석하는 등 일제 강제 동원 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는 성명서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근령씨의 최근 친일 발언을 거론하며 “박근령 여사의 발표문을 접하고 더는 참을 수 없었다”고 분신한 이유를 밝혔다. 이어 1191차에 이르는 수요집회에도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 아베 정권에 대한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다. 광주전남 근로정신대시민모임 관계자는 “최씨가 분에 못 이겨 분신을 한 것 같다”고 전했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北도발 단호히 대응… 대화문은 열어둬 통일 대비해야”

    “北도발 단호히 대응… 대화문은 열어둬 통일 대비해야”

    서울신문은 12일 광복 70주년을 앞두고 서희외교포럼(대표 장철균 전 스위스 대사)과 공동으로 ‘분단을 넘어 통일로, 이제는 외교다’라는 주제로 좌담회를 마련했다. 장 대표의 사회로 조태용 외교부 1차관, 염돈재 성균관대 초빙교수, 김태현 중앙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국제정치학회장), 여인곤 통일연구원 명예연구위원 등이 참석한 좌담회에서 참석자들은 북한의 도발에 단호한 대응을 주문하면서도 대화의 문을 열어두고 남북 관계 개선을 모색해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 한반도 통일보다 어렵다던 독일 통일이 이뤄진 지 벌써 25년이 됐다. 아직도 우리의 통일에 대한 전망은 불투명하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북한의 정세와 향후 진로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염 교수:남북 관계 개선과 통일의 가장 큰 장애 요인은 북한의 3대 세습 체제다. 북한 정세는 장기적으로 볼 때 갈수록 불안정성이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소위 ‘급변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적다. 결국 북한의 개혁·개방과 한반도의 통일은 김정은 3대 세습 체제가 무너진 후에야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조 차관:경제적으로 평양은 종전에 비해 활발하고 휴대전화 확산과 먹거리의 증가가 목격되는 등 일부 나아진 점도 보이지만 물자나 재화가 상대적으로 풍부해진 것은 생산량이 증대됐기 때문이라기보다 수확량의 일부를 경작자가 가져가도록 하는 분조제나 장마당을 통해 유통, 분배 측면에서 나아졌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정치·경제 상황이 근본적으로 개선되기 위해서는 북한이 보다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핵·경제 병진 노선을 포기하고 개혁과 개방의 길로 나가야 한다. 북한의 전략적 도발은 외교적 고립과 경제적 고난을 더욱 가중시키게 될 것이라고 판단한다. -여 위원:북한의 목표는 김정은 정권의 공고화, 만성적인 경제난 극복, 외부 체제 위협 세력의 억제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동북 3성, 러시아는 자국 극동 지역의 경제 발전을 위해 한반도 통일보다는 분단을 선호하고 있어 단기간 내에 한반도가 통일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본다. →박근혜 정부의 통일 준비와 노력에 대한 평가는. -조 차관:정부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에 입각해 대화와 협력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신뢰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산가족 상봉 등 북한 주민과의 접촉면을 넓힐 수 있는 방안을 고심 중이다. 남북 관계에 있어 북한은 예외적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북한 예외주의’를 극복하고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기준을 도입하는 일관된 노력도 함께 기울이고 있다. -김 교수:통일대박론은 1990년대 소위 ‘통일비용론’으로, 식은 우리 사회의 통일 열기를 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통일은 쌍방적 과정이고 우리 사회에서 통일 열기가 살아났다는 것은 오히려 북한에 대한 위협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통일이 남북한 모두에게 대박이어서 결국 한민족 전체에 대박이라는 점이 충분히 납득됐는지는 의문이다. -염 교수:큰 틀에서 박 대통령의 정책이 옳은 길로 가고 있다. 문제는 이런 정책이 제대로 추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동북아평화협력구상은 미국, 중국, 북한이 외면하고 있어 실현 가능성이 적고 통일준비위가 구상한 통일헌장 제정도 성사될 가능성이 없는 제안이다. →한반도에서 실현 가능하고 바람직한 통일 한국의 비전은 무엇인지. -조 차관:박근혜 정부는 ‘작은 통일에서 큰 통일로’ 나아가는 점진적, 평화적 통일 방식을 지향한다. 정부는 이를 위한 일관된 노력을 기울여 나갈 것이며 북한의 부정적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에 입각해 북한의 도발에는 단호히 대응하되 대화의 문은 계속 열어 두고 남북 관계 개선을 모색하는 가운데 통일을 준비해 나갈 것이다. -김 교수:중국식 일국양제처럼 통일의 의미를 보다 확대하는 식의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현실적으로 두 개의 주권국가가 하나의 주권국가로 통합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이 통일에 관한 한 남북 관계를 제로섬으로 만들어 오히려 통일의 가능성을 저해한 것은 아닌지 반성하고 정치적 ‘통일’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통합’도 통일의 한 과정 또는 한 유형으로 생각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염 교수:한반도 통일은 불가피할 경우 민족공동체 통일 방안대로 단기간의 국가 연합 과정을 거칠 수도 있으나 가급적 독일처럼 평화통일, 흡수통일 및 단일체제하의 통일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의 민주화가 선행돼야 할 것이다. -여 위원:일부에서는 통일 한국의 중립국화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중립국이었던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독일군의 공세로 단기에 점령당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통일이 되더라도 중립국화된 통일 한국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남북 관계는 경색되고 중국의 부상으로 한국 외교가 시험대에 오르게 됐는데 바람직한 방향은. -염 교수:한반도 통일에 주변국의 동의가 필수 요소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주변국의 태도에 너무 민감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한반도 통일을 적극 지지할 것이고, 러시아는 통일을 적극 방해해야 할 이유가 없고, 일본은 대미 관계 및 한·일 관계에 비춰 함부로 어떤 시도를 할 수 없는 처지다. 중국에 대한 공공외교를 확대하면서 주한 핵무기의 한시적 재배치 등을 추진해 나간다면 중국이 북한을 포기할 가능성도 많다. -조 차관:현재 동북아시아는 각국의 안보정책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가운데 역사, 영토 등의 요인마저 겹치면서 갈등이 심화되는 등 정치적 협력이 경제 협력 증진에 역행하는 ‘아시아 패러독스’ 현상이 대두되고 있다. 미국과의 포괄적 전략 동맹과 한·중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조화롭게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우리 외교의 가장 중요한 과제다. -장 대표:동북아 정세가 급변하면서 한국이 ‘주변부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주변 이해당사국에 통일의 긍정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고 부정적인 효과를 최소화하는 방향의 ‘균형외교’가 요구된다. 균형외교를 위해서는 한·일 관계도 안정화시키고, 러시아와는 자원 중심의 경제 협력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 비무장지대에 유엔 제5사무국을 유치하는 외교적 노력을 추가할 필요가 있다. 유엔은 세계 평화 유지를 목표로 하고 있고 유엔 사무국은 현재 미국 뉴욕, 스위스 제네바, 오스트리아 빈, 케냐 나이로비 등 네 곳에 있다. 세계 인구 60%를 넘는 아시아에는 없다. 비무장지대의 유엔 사무국은 남북 평화뿐 아니라 세계 평화에도 기여한다는 당위성이 있다. →북한 핵 문제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외교 전략은. -조 차관:정부는 한·미 동맹에 기초한 맞춤형 억제 전략을 강화하고 도발 저지를 위한 예방외교를 강화해 나가고 있다. 아울러 한·미·일·중·러의 5자 공조 강화를 위해 적극적인 외교를 전개하고 있다. 굳건한 한·미 동맹을 바탕으로 미·일과의 긴밀한 공조를 강화하는 가운데 한·중 전략적 협력 관계 속에서 중국이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하게 함으로써 북한 비핵화 진전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도록 유도해 나가고 있다. -여 위원:북핵 문제는 김정은 정권이 병진 노선을 채택함으로써 해결 가능성이 적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차선책은 북한의 핵 개발을 동결시키는 것이고, 13년을 끌어 오던 최근의 이란 핵 합의가 해결 방안이 될 수 있다. -김 교수:미국과 우리나라를 포함한 관련국 사이에 ‘북핵 피로감’이 만연해 있다. 협상을 통한 북한 비핵화에 대한 기대를 접고 차라리 북한의 붕괴, 그 뒤를 이은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이 첩경이라는 인식이 성장하고 있다. 우리 전략과 외교는 보다 다차원적일 필요가 있다. 대화와 협상을 통한 북한 비핵화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돌발 상황 발생 시 우리나라의 주도권 확보가 필요하다. 남북 관계 개선, 북한 비핵화를 위한 꾸준한 대화 제의와 노력의 외교적 효용이 여기에 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의 자세는 무엇이고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김 교수:대한민국이 독립변수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의 파워로 인정받아야 한다. 이 파워를 영토, 인구, 경제, 군사 등의 하드파워라고만 이해하면 적어도 동북아 지역에서 한국이 설 땅은 없어진다. 법과 규범, 문화와 지식 등 소프트파워로서 파워를 규정할 때 우리나라의 입지가 커진다. MIKTA와 같은 중견국 외교가 대표적인 예다. -염 교수:통일을 위해 북한과의 화해, 협력만이 유일한 방법이라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 통일을 위해서는 우선 북한 3대 세습 체제의 붕괴에 노력을 집중해야 한다. 통일 문제와 관련해 국민적 합의를 이룰 수 있다는 환상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전망이 매우 불투명하고 접근 방법이 다양한 중요한 국가적 문제에 대해 국민적 합의를 이룬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 위원:해방 70년을 맞는 우리에게 가장 안타까운 일은 정권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속성을 가진 대북·통일정책이 없다는 것이다. 대북·통일정책은 분단 상황을 평화적으로 관리하면서 교류 협력을 확대하는 한편 통일에 대비하는 정책이어야 한다. -장 대표:통일 준비의 종착역은 통일 한국이다. 독일처럼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고 통일을 이뤄 낼 수 있는 내부적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북한이나 주변 환경을 우리의 희망대로 바꿀 수는 없지만 통일 역량을 강화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가능하다. 우리도 더 늦기 전에 정권 교체에 관계없이 일관성 있는 대북·통일정책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 정리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 “대북 확성기 모든 전선 확대”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12일 북한의 비무장지대(DMZ) 지뢰 도발과 관련, 대북 확성기 방송을 모든 전선으로 확대하고 각종 심리전 수단을 동원한 추가 보복 조치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한 장관은 이날 국회 국방위원회 긴급 현안보고에서 “우선 조치로 2곳에서 대북 확성기 방송을 시작했는데 전면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예비역 3성 장군 출신인 새누리당 한기호 의원이 대북물포작전(생필품을 기구에 담아 북한에 보내는 것)과 전단 살포, 전광판을 통한 심리전 등 강도 높은 대응을 요구하자 한 장관은 “말씀하신 여러 가지 사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또 군 당국은 대북전단 살포는 2000년 4월부터, 확성기 방송은 2004년 6월부터 중단한 바 있다.  같은 당 유승민 의원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했는데 확성기 방송 재개가 전부냐”면서 “233GP(지뢰 폭발 현장과 가장 가까운 북한군 초소) 폭파·사격을 고려했느냐”고 묻자 한 장관은 “(폭파)하고 안 하고는 결정된 바 없다”고 답했다.  한 장관은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지시 여부와 관련한 질문에 대해 “그런 형태의 지뢰 도발은 그러한 (김 제1위원장의) 지시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청와대는 정부의 늑장·부실 대응 논란에 대해 브리핑을 통해 발생 당일인 4일 오전 10시 대통령에게 첫 보고가 이뤄졌고 9일까지 4번의 상황보고가 있었다고 공개했다. 북한이 매설한 목함지뢰에 의한 사건이라는 보고는 8일 오후에 이뤄졌다고 청와대는 설명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노란 나비의 1191번째 절규입니다

    노란 나비의 1191번째 절규입니다

    “나비, 해방으로 날자! 마침내 해방!” 광복 70년이 지났지만 나비는 아직 날지 못하고 있다. 노란 나비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모든 차별과 억압, 폭력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날 수 있기를 바라는 염원의 상징이다. 12일 낮 12시 서울 종로구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을 노란 나비들이 가득 메웠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주최하는 제119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 참가자들이다. 한낮의 뙤약볕에도 불구하고 평소의 10배가 넘는 1000여명의 사람이 나비 모양의 노란 부채를 들고 집회 현장을 찾았다. 이날 집회는 하루 앞으로 다가온 ‘제3회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을 맞아 일본 도쿄, 미국 시카고 등 8개국 25개 도시가 함께하는 세계연대집회로 진행됐다. 위안부 기림일은 고 김학순 할머니가 위안부 피해를 최초 증언한 1991년 8월 14일을 기념해 제정된 날이다. 집회 현장에는 방학을 맞은 색색 교복의 중고생들이 주를 이뤘다. 어린아이를 목말 태운 아버지, 점심시간에 짬을 낸 인근 회사들의 넥타이 차림 직장인들도 눈에 띄었다. 이들의 손에는 ‘70년이다. 사과 좀 하자’, ‘진실은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습니다’ 등 내용이 적힌 팻말이 들려 있었다. 휴가를 맞아 세종시에서 가족과 왔다는 회사원 김모(41)씨는 “지방에 살아 수요집회 참석 기회가 없었는데, 아이들에게 보여 줄 겸 스스로 공부도 할 겸 해서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광복이 된 지 70년이 넘어 위안부 할머니들의 기력이 많이 쇠한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프다”고 밝혔다. 개회사에서 김선실 정대협 공동대표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은 1945년 8월 15일이 진짜 해방인 줄 알았지만 당연히 사죄할 줄 알았던 일본 정부가 아직까지도 제대로 사죄를 하지 않고 있다”며 일본 정부를 규탄했다. 이날 정대협은 14일로 예정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종전 70주년 담화와 관련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식민지 지배하에서 강제적으로 이뤄진 ‘성노예’ 범죄임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죄하고 법적 배상하라”는 성명을 냈다. 집회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길원옥(88), 김복동(90), 이용수(88) 할머니도 참석했다. 한편 집회가 한창이던 낮 12시 40분쯤 인근에서 최모(80)씨가 자신의 몸에 인화물질을 뿌리고 불을 붙여 분신을 시도했다. 집회 참가자들이 달려들어 즉시 불을 껐지만 최씨는 얼굴과 가슴, 팔과 다리 등에 3도 화상을 입어 위중한 상태다. 광주에 거주하는 최씨는 수요집회에 4차례 참가했으며 지난 6월 광주에서 열린 근로정신대 재판에도 참석하는 등 일제 강제 동원 문제에 큰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가 활동하던 광주전남 근로정신대시민모임 관계자는 “최씨의 부친이 독립운동을 하신 분이라고 들었는데, 최씨가 분에 못 이겨 그런 행동을 한 것 같다”며 “평소에는 마음이 비단결처럼 곱고 여린 분”이라고 전했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오세진 기자 5sjin@seoul.co.kr
  • “대북 확성기 모든 전선 확대”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12일 북한의 비무장지대(DMZ) 지뢰 도발과 관련, 대북 확성기 방송을 모든 전선으로 확대하고 각종 심리전 수단을 동원한 추가 보복 조치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한 장관은 이날 국회 국방위원회 긴급 현안보고에서 “우선 조치로 2곳에서 대북 확성기 방송을 시작했는데 전면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예비역 3성 장군 출신인 새누리당 한기호 의원이 대북물포작전(생필품을 기구에 담아 북한에 보내는 것)과 전단 살포, 전광판을 통한 심리전 등 강도 높은 대응을 요구하자 한 장관은 “말씀하신 여러 가지 사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또 군 당국은 대북전단 살포는 2000년 4월부터, 확성기 방송은 2004년 6월부터 중단한 바 있다. 같은 당 유승민 의원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했는데 확성기 방송 재개가 전부냐”면서 “233GP(지뢰 폭발 현장과 가장 가까운 북한군 초소) 폭파·사격을 고려했느냐”고 묻자 한 장관은 “(폭파)하고 안 하고는 결정된 바 없다”고 답했다. 한 장관은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지시 여부와 관련한 질문에 대해 “그런 형태의 지뢰 도발은 그러한 (김 제1위원장의) 지시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청와대는 정부의 늑장·부실 대응 논란에 대해 발생 당일인 4일 오전 10시 대통령에게 첫 보고가 이뤄졌고 9일까지 4번의 상황보고가 있었다고 공개했다. 북한이 매설한 목함지뢰에 의한 사건이라는 보고는 8일 오후에 이뤄졌다고 청와대는 설명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국민대통합위원회(위원장 한광옥)는 12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통합 가치와 미래 비전’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13일까지 3부로 나눠 진행될 토론회 가운데 1부 토론회의 주제 발표를 맡은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와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의 주제문을 게재한다. 허동현 교수는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면서 “외교활동과 무장투쟁의 전략은 서로가 달랐지만 두 사람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면서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인가 대한민국 건국인가’를 주제로 발제한 이완범 교수는 “1945년 8월 15일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지 완전한 광복, 즉 주권 회복은 아니었다”면서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을 진정한 광복이자 건국의 날로 봐야 하며, 다만 남북이 갈라진 상태에서의 건국인 만큼 분단 정부의 수립-1948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병기하는 것이 분단 현실과 통일 지향의 의미를 함께 담는 균형적 역사 이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 수립’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Ⅰ. 21세기에 다시 보는 광복과 남북분단    1. 도둑처럼 찾아 온 광복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6시 하와이 진주만 북방 440㎞ 해상에 숨어든 아카기(赤城) 등 6척의 항공모함에서 183대의 함재기(艦載機)가 날아올랐다. “도-도-도.” 일본어 “도쓰케키(돌격)”의 첫음절을 딴 공격 신호와 함께 일본의 제로전투기와 폭격기 그리고 어뢰를 장전한 뇌격기들은 미태평양함대 주둔지인 하와이 진주만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기선 제압을 노린 일제의 진주만 기습은 잠자는 공룡의 꼬리를 밟아 깨운 자충수였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영광스러운 고립’을 내세우며 일본의 침략전쟁을 한 발 빼고 바라만 보는 중립국에 머물 수 없었다. “당신네들은 아직도 산불이 먼 곳의 일이라 생각하는가? 이래도 아직 한국인·만주인·중국인들에게 ‘일제와의 싸움은 우리 일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10달 전 이승만이 미국 뉴욕에서 간행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에서 미국의 참전을 촉구하며 올린 경종은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6개월 만에 판세가 뒤집혔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이후 남태평양의 섬들을 차례로 잃어가면서도 일제는 전쟁의 광기를 거두지 않았다. 1945년 3월 10일 새벽 B-29 슈퍼포트리스폭격기 344대가 도쿄의 하늘을 뒤덮었다. 글리세린과 기름을 섞어 만든 소이탄 2400톤이 마치 융단을 짜듯 퍼부어져 도시 전체가 거대한 화장로(火葬爐)였던 그날 10만이 넘는 생령(生靈)들이 잿더미로 사라졌다. 그러나 일제는 ‘본토결전’과 ‘1억 옥쇄(玉碎)’를 외치며 무모한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7월 17일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다음 날, 베를린 교외에 위치한 포츠담에 연합국의 세 거두인 트루먼, 처칠, 스탈린이 유럽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 했다. 나치 독일이 항복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회담이 열리지 않았던 이유는 미국이 핵무기라는 새로운 협상카드를 손에 쥘 때까지 시간을 버는 지연외교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핵무기를 확보해 태평양전쟁의 조기 종결에 자신감을 얻은 트루먼은 더 이상 소련의 참전에 목매지 않았다. 원폭에 의한 힘의 우위를 확보한 미국은 동북아 지역의 종전(終戰) 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우리는 오랜 실험 끝에 어떤 무기보다 파괴력이 큰 신무기를 만들었고, 일본이 즉시 항복하지 않으면 사용할 것이다.” 7월 24일 미·영·소 세 나라 수뇌의 공식회담 후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원폭 사용 계획을 통보했다. 26일 미·영·중 세 나라 수뇌들은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29일 일본이 최후통첩 격인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자 미국은 원폭 투하를 결정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리틀보이(Little Boy)와 팻맨(Fat Man) 두 발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을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 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민족시인 심훈이 1930년 3?1절을 맞아 몸부림치며 고대한 광복의 그 날은 15년 뒤 마치 도둑처럼 우리 곁에 다가왔다. 그러나 광복군이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직전 갑작스레 찾아 온 일제 패망이 김구는 안타까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다음 날인 10일 저녁 일제가 연합군에게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도 기뻐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본 천왕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의사를 밝히는 방송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이 땅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상처와 고통을 준 일제의 식민통치는 36년 만에 종언을 고했다.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 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그러나 희망 찬 기대와 달리 김구의 예상대로 일제 패망은 달콤하기보다 쓰디쓴 고통으로 다가왔다. 침략전쟁의 죗값으로 동서로 분단된 독일과 달리 일본이 아닌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마는 비극이 벌어졌다.    2. 38선은 누가 그었나?    1945년 8월 14일 미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빌미로 소련에 38도선 분할 점령을 제안했고, 다음날 스탈린은 이를 수락했다. 때문에 미국이 분단을 주도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과연 그럴까?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까닭은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참전 가능 시점으로 말한 8월 15일 전에 전쟁을 끝내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일제의 패망이 가시화되자 동북아지역에서 이권 확보가 무산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단 스탈린은 첫 번째 원폭이 투하된 지 하루 만인 7일 일본에 대한 공격명령에 황급히 서명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은 일본이 아닌 소련을 겨눈 것이었다”는 몰로토프 소련 외상의 말마따나, 원폭 투하는 유럽은 물론 동북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세 과시였다.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지기 하루 전인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소련군은 두만강을 건넌 반면 미군은 1천 Km 남쪽 오키나와에 있었다. 스탈린은 당시 마음만 먹으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궁여지책에 불과한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스탈린에게 38도선이남 한반도 반쪽보다 중요했던 것은 소련의 극동함대가 태평양으로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는 소야(宗谷, La Perouse)해협을 확보할 수 있는 홋카이도 북부에 대한 통치권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한 달도 못돼 9월 12일에 열린 전승국 외무상들이 ‘전리품’ 처리를 위해 모였던 런던 외상회의에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일본 항복에 공헌한 바 없는 소련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이에 분격한 스탈린은 9월 20일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으며, 이듬해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퇴한 중국 공산당군에게 북한을 반격을 위한 후방기지로 제공하였다. 북한이 중국내전의 연장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이 되자 남북분단은 마침표를 찍었다.  통념과 달리 분단의 주도자는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누가 분단을 주도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련이 남한과 홋카이도 반쪽을 교환하려 했던 사실과 미국이 중국이 공산화되자 극동방위선에서 남한을 제외했던 애치슨라인이 명증하듯,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이 벌인 바둑판에서 한반도는 대마를 잡기위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사석(捨石)이었다는 점이 38도선 분할의 아픈 역사를 우리가 곱씹어야 할 이유이다.    3. 남북협상은 이루어질 수 있었나?    이처럼 이승만(10월 16일)과 김구(11월 23일)가 귀국하기 전인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내림으로써 남북의 분단은 이미 결정되고 말았다. 그해 12월 한반도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전해지자 김구와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모태로 한 반탁운동의 선봉에 함께 나섰다. 반공?반소?반탁 노선을 함께 취한 두 사람은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정읍선언을 내면서 갈라섰다. 이후 김구는 단정 반대노선을 걸었으며, 5·10 총선거를 코앞에 둔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連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38도선을 넘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그가 김일성에게 보낸 2월 16일자 서한에서 제안했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정치지도자 간의 정치협상’, 즉 책임 있는 당국자끼리 머리를 맞대고 현안을 논의하는 구수(鳩首)회담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5년 말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우익탄압, 이듬해 6월 폴란드공산당의 국민투표 결과조작, 그리고 1947년 8월 20%밖에 득표하지 못한 공산당이 소련군의 비호 하에 정권을 강탈한 헝가리 사태를 고려해 볼 때, 당시 남북협상은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에 이용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조국은 지금 독립의 길이냐, 예속의 길이냐, 통일의 길이냐, 분열의 길이냐 하는 분수령의 절정에 서있다. 우리의 지표와 진로는 가능·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가위(可爲)·불가위의 당위론인 것이니 올바른 길일진대 사력을 다하여 진군할 뿐일 것이다.” 북행 하루 전날 나온 문화인 108인의 지지성명처럼, 김구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민족통일의 대의를 위해 북으로 갔을 수 있다. “공산주의나 여하한 주의를 가진 것을 불문하고 외각(外殼)을 벗기면 동일한 피와 언어와 조상과 풍속을 가진 조선민족이다.” 북행 4일 전 연설의 한 대목이 잘 말해주듯이, 그는 남북협상의 성공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민족은 주의를 초월한다”는 소박한 신념과 임정시절 중국에서 좌우연합전선을 결성한 경험이 그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결의문은 ‘채택’되어 있었다. 4월 23일에 나온 결의문은 “연석회의 개최와 관련해서 김일성에게 충고를 제공할 데 대하여”라는 4월 12일자 스탈린의 지령을 토씨까지 그대로 베꼈다. 4월 28일과 29일에 열린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김 회담’과 30일에 나온 ‘남북조선 제정당 및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도 구속력 없는 휴지조각과 다름없었다. 그의 구상이 성공하려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자주적 결정권이 있어야 했지만, 당시 북한은 사실상 소련 군정 치하였고 공산진영의 황제였던 스탈린의 지령은 불가침의 성헌(成憲)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노력은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지만, 김구의 북행으로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한 소련의 정치공작은 성공한 반면 대한민국 건국사는 큰 상처를 입었다.    Ⅱ. 대한민국 건국과 국제적 승인     1. 이승만이 주도한 UN을 통한 대한민국 건국 전략    새로운 사료의 발굴은 통념을 바꾼다. 종래 수정주의 사가(史家)들은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한국을 분단했고, 이승만은 정권욕에 눈이 멀어 미국의 반공보루 구축을 위한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선 주구(走狗)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즉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으며 분단 고착화의 책임은 미국과 이승만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의 장막에 갇혀 있던 소련의 문서고가 열리고 냉전시기 미국의 극비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기존 해석은 무너져 내렸다.  1946년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터지자 소련은 자국의 안보와 직결된 만주 장악을 위해 북한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소련과 달리 미국에게 있어 남한의 전략적 가치는 미지수였다. 한반도를 중국대륙에 부수된 지역으로 본 미국의 전략가들은 중국 패권의 향배가 가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반도만을 고려한 전략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내전의 승패가 안개 속에 쌓여 있던 1947년 초까지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현상유지에 초점을 맞춘 ‘관망(Wait-and-See)정책’이었다. 그해 3월에 나온 ‘트루먼 닥트린(Truman Doctrine)’은 유럽에서의 소련 팽창을 저지하는 ‘봉쇄(Containment)정책’이었지 한반도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온 4월, 패터슨(Robert P. Paterson) 육군장관은 미국이 “한반도에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아 미군 철수를 주장했으며, 합참본부의 전략조사위원회도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단정했다.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선포한 5월 이후 미국은 모든 재원을 유럽에 퍼부었으며,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 한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경비를 삭감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지 4개월 뒤인 1947년 9월, 미 국무부는 소련의 동시철병 제의를 받아들여 미군 철수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결정했는데, 이는 미국이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한국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는 신호였다. 당시 미국 수뇌부는 남한이 공산화되어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결론 때문이었다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 달 뒤인 1946년 6월 3일 정읍선언에서 미국보다 먼저 남한에 정부를 수립한 후 세계 공론에 호소해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제안했으며, 그해 12월 미국 방문 시에는 유엔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을 호소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전략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한다”는 공식입장을 미국이 폐기하고 유엔을 통한 한국문제 해결로 정책을 바꾼 1947년 9월 보다 앞선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화를 궁극적으로 이끌어 낸 주도자였다.  한국문제 해결이 유엔에 이관됨에 따라 1947년 11월 14일 유엔 소총회는 미국이 제출한 유엔 주관 하의 남북한 동시선거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에 따라 남북한에서 실시될 선거 감시를 목적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입국한 1948년 1월,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큰 시련에 봉착했다. “한국문제는 한국 사람들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며 5·10선거의 연기를 요구한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대표들에게 영향을 주어 유엔의 총선거 결정이 백지화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을 만나 남북 통일선거가 불가능할 경우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동의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의 결실로 한위 대표들은 마음을 바꿨으며, 유엔 소총회는 2월 26일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 결의안을 다시 채택했다. 마침내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5월 10일 총선에서 선출된 198명의 제헌의원이 만든 헌법이 7월 17일에 공포되었으며, 8월 15일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이 김구 등의 5·10선거 연기요구를 반대한 이유는 권력욕에 눈멀어서가 아니었다. 1946년 3월 북한은 한 달 전 소련의 지령으로 세워진 임시인민위원회 주도로 소위 “무상몰수·무상배분”의 토지개혁을 실시해 공산화의 물적 토대를 닥아 놓았으며, 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이 창군되고 이틀 뒤에는 ‘조선임시헌법 초안’이 발표된 상황이었다. 이처럼 북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준비가 끝나고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고해졌으며 미군철군은 이미 결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에도 미국의 정책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1948년 12월 국무부 극동국이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철병을 재고 의견을 내 놓았지만, 그 시기를 일시 연기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1948년 10월 21자 뉴욕 타임즈가 “서울의 미국 관리들은 대한민국이 이제 완전붕괴 직전에 도달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할 정도로 당시 남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이승만은 미군 철병 연기를 요청하는 한편,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2. 장면 수석대표가 이끈 건국외교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나    대한민국 건국이 공식 공표되기 나흘 전인 8월 11일 이승만 대통령이 제헌국회의 외교통 의원이었던 장면(張勉)을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임명할 만큼 국제적 승인은 시급한 문제였다. 당시 소련 중심의 공산국 블록과 영연방측은 대한민국의 승인을 반대하고 있었으며, 바티칸만이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했을 뿐 미국조차도 승인을 미루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장면이 이끈 대표단이 넘어야 할 장애는 산 넘어 산이었다. 첫째, 대표단은 초청안이 가결된 12월 7일 이전에는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교섭 상대국 대표들을 공적으로 만나 외교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둘째,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와 그 진압을 위해 파견될 예정이었던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 등 남로당의 파괴공작으로 인한 불안정한 국내 정국과 국론 분열도 심각했다. 셋째, 대한민국 승인 결의안이 회기 최종기한인 12월 11일의 닷새 전인 12월 6일에야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에서 토의를 시작할 만큼 소련과 그 위성국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넷째, 당시 호주와 인도 등 영연방 국가들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한국문제는 미·소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아랍권 국가들도 이스라엘 독립문제로 인해 미국이 지원하는 대한민국 승인을 반기지 않았다.  우리 대표단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으므로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대표단은 첩첩산중의 장애를 뚫었고, 그 결과 12월 12일 총회 마지막 날 대한민국은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였다. 어떻게 승인을 얻어냈을까? 먼저 대표단의 적절한 구성을 꼽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는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며, 한국문제에 이견을 보였던 유엔한국위원단의 캐나다나 인도 대표도 반대하지 않을 장면을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전개된 막후 외교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국제 외교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던 교황 비오 12세는 유엔총회에 참석한 한국대표단에 대한 지원을 바티칸의 국무장관 몬트니(Giovanni Battista Montini)대주교와 재불 교황청 대표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대주교에게 명령하는 등 외교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장면은 혜화동 본당 신부로 당시 파리에 와 있던 생제(Singer) 신부와 함께 파리 근처 성지 참배여행 도중 우연히 만난 오브라이언(O‘brien) 부주교의 도움으로 호주대표단의 한국문제 담당자 플린스컷트(Jim Plinscott)를 만나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처럼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내려 한 이승만의 전략이 주효해 바티칸은 대한민국 승인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  또한 미국 특히 덜레스(John Foster Dulles)의 전폭적 지원활동도 중요했다. 장면은 후일 그를 “대한민국의 건국과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서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동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아 찬연한 공훈을 세움으로써 우리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거룩한 은인”으로 회고할 정도였다. 그는 유엔 총회 막전막후에서 유엔의 승인을 얻을 수 있도록 외교 전략을 조언하는 한편 거수로 찬반을 표시하게 할 만큼 12월 12일 총회에서 승인 과정을 진두지휘하였다.  한 마디로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에는 냉전체제 하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과 바티칸의 도움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이 두 지원세력의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견인차는 이승만이 구사한 외교 전략과 장면 등 유엔총회 파견 대표단의 헌신적 노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장면은 이 문서에 관한 일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덜레스씨는 조금도 피로해 하지 않고 솔선하여 각국대표를 깨우쳐 협조를 요청하기에 바빴으며 드디어 의장이 표결을 선언하자 몸소 일어나서 ‘한국문제는 중요한 것이므로 거수가결을 하지 말고 각국대표를 호명하여 가부를 하나씩 듣기로 하자’고 주장하여 그대로 되니까 종이를 앞에 펴놓고 각국 대표의 ‘예스’ ‘노’를 일일이 적었으며 48대 6의 다수로 가결이 선포되자 덜레스씨는 그 기록에 사인을 해가지고 와서 그것을 나에게 주며 ‘이것을 한국독립 승인의 기념품으로 드리며 축하합니다’고 하면서 자신도 무척 기뻐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기록을 지금도 꺼내보고 다시금 그 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3.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기억해야 할 이유    한 나라가 국민국가인지 여부는 자국민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19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 결과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그해 12월 12일 제 3차 유엔총회에서 회원국 58개국 중 48개국의 찬성으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우리는 한 세기 전 서구열강들이 국민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망국(亡國), 임시정부가 펼쳤던 승인외교의 실패, 그리고 광복 후 연합국의 신탁통치 계획에 비춰볼 때,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또한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더불어 유엔한국위원단을 재 파송해 통일국가 건설에 힘쓸 것을 약속한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 5?10총선 결과 폐기와 유엔한국위원단 해체를 주장한 소련측 결의안이 48개국의 반대로 부결되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시 총회에서 표결된 미국측 결의안과 소련측 결의안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측 결의안은 “1) 유엔은 대한민국의 위상과 권위를 국내외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 한국에서 유엔의 후원 하에 행해진 일에 합법성을 보장할 것, 2) 유엔은 가능한 한 조속히 철군을 감시함으로서 신정부로 하여금 전시 군사점령을 종결시킬 수 있도록 위원단을 존속시킬 것, 3) 유엔위원단은 한국민으로 하여금 재통일하고 경제적 혼란과 내란의 위협을 종식시킬 수 있도록 지원할 것” 등 이었으며, 소련측 결의안은 “유엔임시위원단의 폐지, 한국을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로 재건하는 새로운 수단 마련, 그리고 남한 선거결과의 폐기 등”이었다. 한국독립결의안이 통과된 뒤 표결에 부쳐진 소련측 결의안은 찬반 6대 48,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들어선 두 개의 국가가 유엔에서 벌인 인정(認定)투쟁에서 대한민국이 쟁취한 국제적 승인은 1950년 6·25전쟁 때 유엔군 파병의 근거가 되어 북한의 침략에서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Ⅲ. 건국의 아버지들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 광복 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서구가 300년 걸려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불과 60년 만에 따라잡은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긍하는 이들에게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이승만은 그 업적을 기려야 마땅한 ‘건국의 아버지’로 다가선다. 그러나 김구는 냉전체제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 소련의 기만전술에 말려들고만 ‘시대착오적 정치가’로 비칠 뿐이다. 반면 민족을 단위로 한 통일국가의 완성만이 살길이라 믿는 이들에게 김구는 그 당위성을 일깨우는 상징인물로 우뚝 선지만, 이승만은 ‘분단의 고착화’를 초래한 ‘역사의 죄인’이자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자로 비칠 뿐이다.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의 편차는 우리 시민사회의 정체성에 난 균열과 골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갈가리 찢긴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줄 묘안은 없을까? 우리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前文)의 정신을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가 채택한 민주공화국의 국가형태와 삼권분립 정신에 기초한 임시헌법이 오늘 우리가 지키고자하는 정치체제의 시원임을 말이다. 또한 1941년 6월 김구가 이승만을 임정을 대표하는 주미외교위원장 겸 주미 전권대표로 임명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외교활동과 무장투쟁 독립운동 전략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그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라는 자기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냐 ‘대한민국 건국이냐’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    I. 1945년 8월 15일: 해방인가 광복인가?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70년 전의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공식 호칭하며 북에서는 ‘조국해방기념일’이라 부른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 8·15를 북에서는 해방 남에서는 광복이라고 칭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남북 모두 두 용어를 쓰고 있다. 단 북한에서는 광복이라는 말 앞에 조국이라는 용어를 첨가하여 광복보다는 ‘조국광복’이라는 합성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1945년을 조국광복의 해로 공식 호칭하고 있으며 8월 15일을 ‘조국광복의 날’이라고도 규정한다. 또한 1945년 당시에는 남·북·좌·우 모두 해방이라고 불렀다. 1946년과 1947년 8-15는 좌우 모두 해방1주년, 해방2주년이라고 기념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은 1949년 10월 1일 법률 제53호 “국경일에관한법률” 2조에 ‘광복절 8월 15일’이라고 명기해 광복절을 국경일의 하나로 제정했다. 그런데 이 법안의 ‘신규제정 이유’에는 ‘獨立記念日’로 되어 있어 그 날이 1945년 8월 15일인지 아니면 1948년 8월 15일인지 명확하지 않다. 1949년 9월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초안에는 8·15가 ‘독립기념일’이라고 적혀있었는데 광복절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정부가 작성해 1949년 6월 2일 국회로 회부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안”에는 독립기념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9년 9월 제5회 임시국회의 법제사법위원회(위원장 백관수)에서 ‘광복절’로 수정된 안을 마련했다. 이 안은 9월 22일 본회의에 상정되어 재석 108명에 가 81표 부 4표로 확정되었다. 당시 법제사법위원회는 헌법기념일과 독립기념일을 제헌절과 광복절로 고치자고 주장해 관철시켰으며, 본회의에서 의원들은 독립이냐 광복이냐의 의미를 논하기보다는 日, 節, 날과 같은 어미·자구에 집착했으며 3·1절, 개천절과 같이 ‘절’자를 집어넣어 통일시키면서 제헌절, 광복절이라는 조금 더 간결한 명칭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당시 속기록을 검토했던 김효선 선생은 당시 제헌의원들이 1945년 해방이 아니라 1948년 8·15를 광복절로 간주했었다고 주장했다.  1945년 8·15가 아니라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의 견해는 다음 단락에서 상술하고자 한다.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운영하는 웹 사이트(www.korea.net)에서는 광복절을 Liberation Day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광복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번역은 직역인 restoration이 아니라 해방의 번역어인 liberation이다. 그런데 국가보훈처 산하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주최한 광복60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주제: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과 한국독립운동)에서는 광복60년을 the 60th Anniversary of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로 번역했다. 이렇듯 정부부처 사이에서도 혼선이 있다.  한편 2005년 네이버영어사전에서는 광복절(光復節)을 ‘Independence Day of Korea’라고 번역하다가, 2015년에는 ‘National Liberation Day’로 바뀌어 있다.  따라서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으며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기념일은 독립기념일이다(미국과는 달리 우리의 경우 식민지 이전에 독립국이 존재했으므로 독립이라는 표현 보다 광복이 더 타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진보적 학자들은 독립운동이라는 용어보다 ‘민족해방운동’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이렇듯 해방이 다소 진보적인 어감을 가진 것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광복은 국권상실 상태로부터의 회복을 의미하여 복고적이며 자강운동적-계몽운동적 지향이 보인다고 진보적 학자들은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진보진영의 한홍구 교수는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광복이 호소력이 있었지만 좀 복고적인 냄새가 난다는 의미에서 진보적인 사람들은 해방을 선호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두 용어 사용자에 이데올로기적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두 용어를 혼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해방은 “식민 상태 등 압제로부터 풀린다”는 뜻이다. “연합국이 한국을 일제로부터 해방했다”거나 “한국은 1945년 해방되었다”는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합국이 주체가 된 표현이다. 또한 “노예(상태)를 해방”한다는 기분 좋지 않은 어감을 연상시킨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다소 수동적·피동적인 표현이다.  이에 비해 광복은 주체적인 표현이다. 광복의 본 뜻은 빛나게 회복하다, 힘이 줄어들거나 기울어진 것을 이전상태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사전적으로 보면 “빼앗긴(잃었던) 주권(국권; 빛)을 도로 찾는 것”을 의미한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등 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광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역에서 ?은 ‘원래 자리로 오는 것’을 의미하는데 원상태로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광복은 ‘빛나는 되돌림’ 혹은 ‘빛을 되돌리는 상태(주권 회복)’를 뜻한다. 그런데 광복은 일제가 우리를 병탄하기 이전의 광명한[밝은] 역사를 회복한다는 과거 지향적이며 복고적[보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광복은 한마디로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장준하가 1956년 『사상계』에 문제제기한 바에 따르면 1945년은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의 계기였다는 것이다.  광복의 주체는 우리이며, 연합국이 우리를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시켰으므로 해방의 주체는 연합국이며 우리는 객체이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피동적인 용어이며 광복은 주체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이다. 또한 광복은 이전 시기 주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는데 비해 해방은 이전에 주권국가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는 용어이다. 복고적이라는 뉘앙스만 없다면 광복이 주체적이면서도 식민지 이전의 독립국가의 존재도 부각시킬 수 있는 말이므로 피동적인 해방보다도 좋은 어감의 용어이다. 그런데 ‘과연 1945년 8·15에 주권을 찾았을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이 날은 단순한 해방절이며, 광복은 1948년 8·15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주장이 가능한데 단락을 나누어 상술하고자 한다.    II.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설: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 1948년 광복    ‘광복’을 ‘주권(국권) 회복’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입각하면 해방보다는 ‘독립’이라는 용어와 그 의미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술한 ‘국경일에관한법률’ 제정이유에도 광복절이 독립기념일로 나오므로 광복을 독립과 등치시킬 근거가 있다. 이러한 등치론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에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독립을 성취한 것은 아니므로 얄타회담에 임했던 영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한반도를 해방은 시켜줄 수 있지만 독립은 시켜줄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러한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은 얄타회담 이틀째인 1945년 1월 31일자로 올라온 토인비(Arnold J. Toynbee)의 보고서였다. 훗날 위대한 역사학자로 평가받은 그는 당시 옥스퍼드대를 졸업하고 영국 외무부 조사국의 중진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얄타회담을 위해 준비한 정책보고서 “한국의 독립 능력: 그 역사적 배경(Korea’s Capacity for Independence: Historical Background)”에서 “한국은 독립할 수 없는 나라”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처칠은 회담장에서 그 보고서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1945년 광복을 해방으로 바꿔 써야 한다는 것이다. 주권을 찾는다는 견지에서 보면 1945년에는 국권(주권)이 미국과 소련에게 있었고, 힐드링 (Hilldring) 미국 국무부차관보는 1947년 3월 한국인들의 참담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제 일본인들은 떠났다. 그러나 한 통치자가 떠난 자리에 한국인들은 두 통치자들을 가지게 되었다. 설상가상 그들은 ‘두 개의 밀폐된 구획’(two hermetically sealed compartments)으로 국가를 분단시켰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제 치하에서보다 훨씬 못 살게 되었다고 느낀다. 식량 가격은 오르고 양은 줄어든다. 한국인들은 우리 미국인들이 떠나기를 요구하고 자신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정하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당시 한국인들 중 분단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미국의 정책 담당자조차 이런 고통을 인정했던 것이다. 한국인들 중 일부는 미군정에서의 생활이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의 삶만큼 비참하다고 느꼈으며 좌익들은 더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채만식은 1948년 소설 “낙조”를 통해 한반도는 외국 군대 아래서 허울뿐인 독립을 이루었다며 38선 이남을 미국의 보호령으로 간주했다. 박노갑은 1948년 소설 “사십년”에서 미군정은 일본 식민통치의 대체물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맥락에서 1945년 해방은 모두가 기뻐만할 일은 아니었으며 단지 지배자의 교체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1948년에야 찾았으므로 광복은 1948년 8월 15일이라는 주장이며 이는 현재까지는 소수설이다.  먼저 김효선 선생은 광복의 사전적 정의가 ‘주권회복’이므로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고 주장했다. 광복절의 정확한 의미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 아니라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 국권을 회복한 날’이라는 것이다. 1945년 8·15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일뿐 통치권이 미군정으로 넘어갔으므로 ‘광복의 날’이 아니며 ‘독립의 날’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반면 1948년 8·15는 ‘광복의 날’이자 ‘국권회복의 날,’ ‘독립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1945년 8·15에 우리 민족이 주권을 회복했다거나 독립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또한 2015년 1월 ‘KBS공영노동조합’(기존 노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임)도 김효선 선생의 주장에 의거해 1948년을 광복절의 기산으로 잡아야 한다고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광복절이 1948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이 아닌 1945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잘못 인식되게 된 것은 전쟁 와중인 1951년 8월 15일에 있었던 제3회 광복절 기념식부터였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기념사의 제목을 ‘기념사(제3회 광복절을 맞이하여)’로 명기하여, 『대통령이승만박사담화집』에 나와 있는 1950년 “기념사(제2회광복절을맞이하여)도 같은 맥락에서 부제를 달고 수록되었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부합하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기념하는 국경일로서 광복절을 기념했다. 그런데 당시 신문 중 한 곳[『조선일보』; 인용자]이 이날의 기념식을 ‘광복 6주년 기념식’이라고 잘못 보도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1949년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간과한 다른 신문들이 이를 받아쓰고 1945년 8월 15일 즉,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국경일로 오인한 것이다.  전쟁의 혼란 속에 벌어진 신문사들의 광복절에 대한 착각은 이때부터 정부로 전파되었다. 제헌국회에서 결정한 1948년 8월 15일부터 시작되는 광복절 기념일의 횟수를 산정함에 있어서 <국경일에 관한 법률>과 ‘광복’의 사전적 의미인 ‘주권을 되찾은 날’을 외면하고 1945년을 기산년도로 삼았으며, 현 정부에서도 그런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  한편 진보진영의 학자 서중석 교수도 1948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호칭하는 소수설을 견지했다. 그는 1945년 8-15를 해방으로 규정했으며 “1945년 8‘15로 역사상 처음으로 언론‘출판‘집회‘결사 등 기본권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정치적 자유를 획득했기 때문에 대단히 뜻 깊지만 광복절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를 기념하는 명칭으로 아주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2008년에 뜨거웠던 건국절 제정 논쟁(후술함)을 의식해 1948년 8-15가 건국절이 아니라 광복절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의 일환이었다.  1945년 해방, 1948년 광복(건국)을 구분하여 기념하자는 김효선 선생·KBS공영노동조합의 주장과 서중석 교수의 주장은 그 접점이 모색될 수 있다. 다만 서중석 교수는 1948년 광복이 건국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1945년 8-15를 광복절로, 1948년 8-15를 정부수립기념일로 간주한다. 따라서 2005년에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에 반해 김효선 선생·KBS공영노조와 서중석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올해 2015년을 광복67주년으로 불러야 하는데 관행화된 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미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국가에서 공인했으며 일반인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마당에서 대중들의 고정관념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다소 문제가 있는 규정이라도 무리하게 바꾸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며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악법도 법’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잘못된 관행일지라도 일반 국민들이 그렇게 부른다면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통용되고 있는 이름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는 것이 역사가의 책무이기도 하다.  1945년 8·15 직후 미·소양군의 지배로 인해 우리민족이 독립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완전한 해방 송광성 교수는 1945년 8-15는 해방이 날이 아니라 분단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완전한 광복(주권회복)은 아니었다. 시인 권환은 1946년 “그대를 어떻게 맞을까”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과연 광복은 되었는가? / 오! 남녘땅 동포들아 / 다시 한 번 맞이하자 // 참다운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 새 8·15를 정말 8·15를 (...).”  그렇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으므로 불완전한 해방 1981년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한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 1권(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I,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의 결론인 12장의 제목은 ‘부정된 해방(liberation denied)’이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해방은 부정되었다고 평가했다. 필자는 해방이 완전히 부정되었다는 커밍스식의 급진적 평가에 대항하여 ‘불완전한 해방’ 정도는 된다는 중도적 해석을 견지하고자 한다. 불완전한 광복은 주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약간의 수식어를 첨가하는 것으로 광복절 지칭의 대립·논쟁을 지양하고자 한다.  즉 1945년 8·15를 ‘부분의 광복절[1기 광복절]’로, 미군정의 지배로부터 독립된 1948년 8·15를 ‘2기 광복절[미완의 광복절]’로 장차 도래할 통일의 날을 ‘완성된 광복절,’ ‘진정한 광복절’로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한다. 2015년 3월 5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조선일보』 창간 95주년 기념식의 주제는 ‘민족과 함께한 95주년, 광복에서 통일로’였다. 이 자리에서 “진정한 광복은 통일”이라는 기치가 내걸렸다. 배성규, “1920-민족과 함께한 조선일보 95년 진정한 광복은 통일,” 『조선일보』, 2015년 3월 6일 A1면. 또한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상임고문은 “한반도 통일만이 우리가 완전한 독립국가이자 선진국가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1948년 미국으로부터 독립되었지만 아직도 미군이 우리 국방의 중요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므로 완전한 자주독립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분단되었다고 광복이 되지 않았다는 ‘분단=부정된 광복’이라는 논리는 1945년 일제에서 해방되었던 사실과 1948년 독립된 사실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다. 일제에서 미국·소련으로 지배자가 교체된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잠정적으로 외세가 점령했던 미군정기와 소련지배기(소군정기)를 식민지 시대로 보지는 않으므로, 단순한 식민 지배 권력의 교체라고 보는 견해는 당시 주권 결여 상황을 너무 과장한 단순화 논리이다. 북한과 대한민국의 일부 민족해방(NL)파[친북 주체사상파]는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지에서 미제의 식민지로 지배자만 교체되어 지금까지 식민지 상태라고 평가하고, 일부 민중민주주의(PD)-제헌의회(CA)파는 일제 식민지에서 미국의 신식민지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도 역시 독립국가로서의 대한민국 출범을 폄하하는 급진적·극단적인 견해이다. 그렇지만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한 이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지원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었고 현재도 북한의 침략을 억제하기 위해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므로 자주독립국가라는 면에서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 1970년대 닉슨 행정부(1971년 3월 27일)와 카터 행정부(1977-1978년)가 단행한 미군감축의 와중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강조했다. 이 말은 당시 국방이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통일된 후 우리 손으로 우리를 지킬 수 있다면 완전한 자주의 실현에 한 걸음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광복은 그 시점에 달성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이 강대국에 의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 미군 철수를 요하고 관철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이다. 국제화시대에 과도한 민족주의적 감정은 민족의 장래에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자주라는 구호가 매력적이긴 해도 전세계적에서 자국만으로 안보를 책임지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영국, 독일 같은 선진국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EU의 국방도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독일 등이 자주국가가 아닌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러시아, 미국도 동맹국과 협조해 국방을 유지하고 있다. 한미동맹은 핵무기로 무장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데 뿐만 아니라 북한의 급변사태 혹은 중국의 급부상 등으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일시에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안전장치라는 측면도 있다.    III. 1948년 8월 15일을 보는 시각: 건국이냐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이냐?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8월 15일 ‘광복63주년 대한민국건국60년 중앙경축식’에서 “대한민국 건국 60년은 성공의 역사, 발전의 역사, 기적의 역사였다”고 평가했다. 이는 남한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남쪽만이라도 적화를 막은 성공적 조치로 ‘1948년 나라세우기’를 평가하면서 이를 선택한 이승만 노선에 호의적인 보수진영(그리고 당시 여권)의 평가와도 맞닿아 있다.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정부를 수립한 것이 오늘날의 분단으로 이어져 민족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고 평가했는데 분단시대의 개막은 성공시대의 개막이 아니라 실패한 부정적 역사의 시작이며 극복해야 할 것으로 간주했다.  1948년 8월 15일 우리는 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가를 우리나라 남쪽에 정식으로 만들었으며, 이 국가가 우리 민족의 구성원들을 직접 통치한지 벌써 70년 가까이 되었다.  이제 차분히 돌아보며 우리 현대사를 반성할 시점이 도래했던 것이다.  그런데 1948년 8월 15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논의가 분분했다. 1948년 8-15를 건국(국가 만들기, state-building)이냐 아니면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으로 보느냐에 따라 좌우가 갈리기도 했다. “대한민국 ‘건국’인가 ‘정부수립’인가: 동북아역사재단 ‘건국 60주년’ 학술대회”에서 김태식 기자는 “‘건국’은 대한민국 자체를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간주하는 것인 반면, ‘정부수립’은 대한민국 자체를 ‘남한’으로 축소해 불완전한 분단국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정부수립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모두 분단이나 단정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며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하는 입장에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다.   오늘날 현대사학계가 건국-대한민국 발전을 중시하는 ‘건국담론’과 해방-분단을 강조하는 비판적인 ‘분단담론’으로 대립적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2008년 8-15를 건국60년이라고 기념했는데 비해 다른 한편에서는 분단60년이라며 비판적으로 볼 것을 요구했다. 1948년 후 60년의 역사를 건국과 발전의 영광으로 보아 건국60주년을 기념하는 입장이 있고 이에 대해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좌절과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의 과정으로 보아 분단60년을 반성하는 입장이 대립했다. 이것이 2008년을 달구었던 ‘건국절 논쟁’ 등장의 한 부분을 제공했다.  1980년대 이후 한국현대사학계에서는 분단사관과 통일지상주의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건국의 관점에서 한국현대사를 바라보지 않았으나 2008년을 전후하여 건국사관을 담지한 그룹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기존의 연구경향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대립을 다양한 의견표출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대한민국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과거 독재치하처럼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역사인식 획일화를 지향한다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며 과거에는 그것이 무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능은 했으나 지금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립이 불필요한 오해와 소모적인 논쟁을 야기하거나 지나칠 정도여서 ‘국론분열’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양극화는 지양될 조짐을 보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소통을 통한 토론은 가능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는 건국과 정부수립을 그때그때 병행하여 사용해 왔고, 이를 구분하여 개념 짓는 게 큰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엄밀한 개념정의가 없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개념정의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 1945년 8월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가반이 되었던 건국동맹은 당초 그 이름으로 해방동맹, 해방연맹을 생각하다가 1943-1944년간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명백히 다가왔고 조선의 해방이 불을 보듯 명확해졌기 때문에 일제패망 시 즉각 건국에 착수해야 한다고 생각해 건국동맹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도 우파보다는 좌파가 주도했으며, 북에서도 ‘건국사상총동원운동’ 등의 예에서 보듯이 김일성의 건국에 대해 찬양하므로 양분법적인 구분에는 문제가 있다. 단지 국가를 부르주아계급이 인민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인식(국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 맑스주의에 대한 도구주의적 해석)이나 국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국가소멸론(19세기 중반 엥겔스의 인식) 때문에 좌파는 국가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편이다. 이런 맥락에 기반하기도 하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좌파는 대개 1948년 8·15를 건국보다는 정부수립이라고 부른다.  또한 일제에 의해 국권을 뺐기기 전에는 엄연히 나라가 있었으므로 2008년 건국60주년을 너무 강조하는 견해는 우리나라 역사가 60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따라서 건국이라는 용어를 쓸 때 대한민국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명기해 ‘대한민국건국’이라고 정확하게 적어서 다소 평가절하 시키기도 했다. 신국가 건설(새로운 건국)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고려건국, 조선건국도 있을 수 있으며 개천절에 최초 국가가 건국되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물론 1948년 수립된 것은 왕정이 아닌 공화제 국가이므로 이전 건국과는 다른 획기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을 선언했으며 그 이전은 신대륙 발견기와 식민지 시대였다. 조지 워싱턴은 국부,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로 추앙받으며 다른 독립 운동가들도 새로운 국가의 건국자(founders of new nation)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과연 국부라고 할 수 있을까? 중국의 손문에 비견되는 인물이 한국에 없는 것은 우리의 경우 국망으로 나라를 망쳤으므로 나라를 잃은 어른들 중 국부로 추앙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데에도 있다. 한편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는 2008년 8월 18일 참여사회연구소와 의제27, 코리아연구원이 주최한 ‘대한민국사의 재인식: 48년 체제와 민주공화국’ 공동 토론회에서 “‘국부’라는 말은 국가를 하나의 가족으로 보는 것인데, 이는 최고 통치자가 국민의 생존 여부까지 결단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이승만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며 “저항 가능성이 있는 대중 전체를 목표 삼아 반공을 신념화하지 않은 사람들을 국민의 범주에서 추방하고 죽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단군은 어떻게 되나? 고려 이후 단군을 국조로 인식했으며 1948년 9월 법제화했다. 대한민국을 일군 사람으로 이승만을 간주할 수는 있지만 미국의 조지 워싱턴에 비견되는 한국 국가의 최초 정초자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승만이 나라를 세우려 했을 때 미국은 최고 지도자로서 다른 대안(예를 들면 김규식, 여운형, 서재필)을 고려했었으며 국내에도 좌파는 물론 우파 중에도 김구-김규식을 비롯해 단정이라며 반대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로 대한민국 건립과정과 결과에 대해 누구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 권리를 부정한다면 그게 바로 위헌적 행태라는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의 지적이 있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내어놓은 것은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다. 그는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통진당) 해산 선고와 관련해 “애국가를 부정하거나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는 것 역시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고도 했다.  (물론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나라를 세운 이승만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조지 워싱턴과 이승만을 동격에 놓는 것은 우리의 ‘반만년’ 역사를 지나치게 협애화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건국은 대한민국 건국일뿐이며 전체 한국사의 건국일은 아니다. 게다가 대한민국 건국도 1919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대한제국과의 연결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반만년전의 (고)조선건국을 진정한 건국이자 우리 역사의 유일한 건국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이후 많은 국가의 수립은 우리나라의 다양한 왕조나 정부수립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진보진영의 김세균 교수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부수립으로 보는 한편,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와는 다른 형식면에서는 합법적인 건국절차를 밟았으므로 건국이라는 주장이다. 그 이전의 정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 국가유형의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진보와 보수가 각각 정부수립과 건국의 치밀한 논리로 양극화되어있는 것은 아니므로 토론의 여지는 있다고 할 것이다.    IV. 맺음말: 분단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    1948년 8·15를 광복으로 여기는 소수설을 견지하고 있는 서중석 교수는 2015년 7월 16일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제8회 몽양학술심포지엄의 종합토론 좌장을 보면서 광복절이라는 명칭은 ‘통일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인데 비해 건국절 제정론자들이 주장하는 건국절 명칭은 ‘분단국가주의적 역사인식’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1948년 8·15는 광복이 아니므로 건국도 안 된다면 모를까, 광복(주권회복)은 되는데 건국은 아니라는 인식은 모순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1948년 8·15가 광복이라면 건국은 충분히 된다고 생각한다. 주권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면 건국(독립)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한다. 분단되었으므로 완전한 건국에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건국(독립, 광복)이 완전히 부정될 수는 있는 것은 아니다. 남북한에 분단국가가 수립되었다고 해도 국가가 수립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국가 수립 즉 나라 세우기(건국)가 이루어진 것은 맞다. 다만 당시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선포하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고 한 것은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 남쪽의 우익도 모두 다 참여하지 않는 등 국민 총의에 의한 정부가 되지 못해 완전한 건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 정부가 곧 무너질 정도로 불안정하게 수립된 것은 아니었으며 이제 67년이나 경과했으므로 미흡하나마 건국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게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분단[단독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 받았으므로 단독정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길은 단독정부라고 쓰기보다 분단정부라고 쓰는 것이다]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병기하면 분단시대의 부족한 점도 인식하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역사인식도 포용하고 새 정부 출범의 긍정적인 면도 드러낼 수 있는 종합적[복합적]이고 균형적인 역사이해가 도모되지 않을까 한다. 양립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분단담론과 건국담론 양론을 지양해 수렴할 수 있을 것이다. 진경호 기자 jade@seoul.co.kr
  • [현장 행정] 성장현 용산구청장의 끝없는 ‘실버홈’ 선물

    [현장 행정] 성장현 용산구청장의 끝없는 ‘실버홈’ 선물

    “우리 같은 사람에게 이렇게 깨끗한 집이 생기다니 천국에 온 것 같아요.”(용산구 실버홈 입주자 최모 할머니) “세금으로 만든 집이니 의미를 살리려면 세 할머니들이 건강하고 사이좋게 사시면 됩니다.”(성장현 용산구청장) 11일 오전, 성 구청장이 오갈 데 없던 세 할머니의 입주를 기념해 찾은 용산구 서계동 실버홈(노인여가복합센터 1층·46.8㎡)에는 방 3개와 거실 겸 부엌, 화장실이 있었다. 냉장고, 세탁기는 물론 방마다 TV, 옷장, 서랍장 등도 두었다. 기초수급자인 세 할머니는 이곳에서 최대 8년간 무료로 살게 된다. 구는 이미 보광동 노인의 집과 용산2가동 노인의 집 등에 시설을 만들어 10명의 독거노인을 무료로 거주하도록 한 바 있다. 성모(90·여)씨는 이날 늦게 입주할 계획이어서 최모(85·여)씨와 김모(65·여)씨를 만날 수 있었다. 최씨는 효창동 5구역에서 화장실도 없는 월 20만원의 사글세를 살았다.하지만 재개발로 지난 6월 초에 집을 떠났다. 기한 내에 신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대했던 이주비를 못 받게 되면서 그간 다른 이의 자동차나 지인의 집에서 신세를 졌다. 가족을 꾸린 아들이 있지만 신용불량자에다 같은 곳에서 사글세를 살고 있어 9월이면 집을 비워야 한다. 최씨는 “지난 3개월간 63㎏의 몸무게가 48㎏까지 빠졌다”면서 “첫날 내 방에서 다리 뻗고 잘 수 있다는 것 만으로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김씨는 지난 4월 남편의 폭행을 피해 맨몸으로 집을 나와 교회 지하방에서 생활했다. 가정폭력으로 오른쪽 팔·다리를 제대로 쓸 수 없어 일도 못 한다. 그는 “술에 취한 남편과 싸우기 싫어 교회로 도망치려면 남편이 완력으로 팔을 잡고 비틀기 일쑤였다”면서 “식당 설거지나 아이돌보미라도 하려고 했는데 커피잔도 3분을 들고 있지 못하는 팔 때문에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두 할머니는 지난 7일 입주해 3일을 같이 보냈다. 시설도 좋지만 무엇보다 대화상대가 생겨 행복하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방마다 TV가 있지만 거실에 둘이 누워 도란도란 얘기하다 함께 잠이 든다”면서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짜장면이 그렇게 맛있을 수 없었다”고 전했다. 둘은 벌써 서로를 이모, 조카로 부른다. 최씨는 “나도 다른 이들을 위해 조금이나마 봉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우선 90세 입주자가 들어오면 큰 언니처럼 지내고 싶다”고 말했다. 성 구청장은 “노인의 집에 실버홈을 지속적으로 늘려 오갈 데 없는 노인들에게 작지만 지속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건넬 것”이라고 말했다.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 3000억대 역대 최대 규모 불법 도박사이트 적발

     미국에 서버를 두고 중국과 한국에서 3000억원대 불법 인터넷 도박사이트를 운영해 온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 인터넷 카드 도박(일명 바둑이, 포커) 사이트 운영조직 가운데 회원 수와 매출액 규모에서 최대 조직이다.  경기 일산경찰서는 12일 성모(50)씨 등 6명을 도박공간 개설 등 혐의로 구속하고 김모(47)씨 등 12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경찰에 따르면 국내 총책 성씨 등은 지난해 3월부터 지난달 말까지 도박사이트 2개를 운영하면서 게임머니 환전수수료 명목으로 200억원 상당의 부당이득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지난해 3월 미국에 서버를 두고, 관리는 중국에서 하며, 국내 회원을 모집했다. 이용자들이 현금을 입금하면 게임머니를 주고 도박하도록 한 뒤 게임이 끝나면 환전수수료 10%를 떼고 게임머니를 현금으로 바꿔주는 방식이다. 2만∼3만명의 회원을 모집해 도박사이트를 운영했으며 같은 시간 접속자 수가 900여명에 달하기도 했다.  이들은 벌어들인 돈의 80%를 중국으로 빼돌려 고급 외제차를 몰고 최고급 아파트를 구입하는 등 호화생활을 해왔다. 경찰은 아직 검거하지 못한 중국 총책 정모(56)씨 등을 체포영장을 발부받아 추적하고 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 독해진 몰카 범죄… 처벌은 더 약해지나

    독해진 몰카 범죄… 처벌은 더 약해지나

    여성의 주요 신체 부위를 몰래 촬영하는 ‘몰래카메라 범죄’가 해마다 늘고 있는 가운데 몰카 범죄자 처벌을 완화하는 취지의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왔다. 몰카 범죄자를 일반 성범죄자와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게 헌법재판관들의 판단이지만 헌재가 몰카 범죄를 단순 경범죄 수준으로 보고 있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헌재는 성범죄 혐의가 확정된 사람의 신상정보를 국가가 20년간 보존, 관리하도록 한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45조 1항’에 대해 재판관 7(헌법 불합치) 대 2(위헌) 의견으로 헌법 불합치 결정을 했다고 11일 밝혔다. 헌법 불합치는 해당 조항이 헌법에 위반되지만 사회적 혼란을 막기 위해 법 개정 때까지 그 효력을 인정하는 결정을 말한다. 법무부는 2016년 12월 31일까지 해당 조항을 개정해야 한다. 성폭력 특례법에는 성범죄에 따른 신상정보 등록 대상자를 정한 ‘등록규정’(제42조 1항)이 있고 해당 정보를 20년간 보존, 관리토록 한 ‘관리규정’(제45조 1항)이 있다. 두 법 조항은 여성의 신체 부위를 몰래 찍거나 찍으려다 기소된 이모씨 등 5명이 “죄질을 가리지 않고 모든 성범죄자에게 동일한 규정을 적용하는 것은 평등권과 개인정보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내면서 헌재의 판단을 받게 됐다. 청구인인 이씨는 서울의 한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에서 앞서 올라가는 여성의 치마 속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하는 등 97회에 걸쳐 같은 범죄 행위를 반복했고 PC방 화장실에 스마트폰을 설치한 혐의가 확정됐다. 전체 성범죄에서 차지하는 몰카 범죄 비중은 2012년 10.5%에서 지난해 22.4%로 두배 넘게 불었다. 헌재는 성범죄의 재범 위험성이 범죄 종류나 등록 대상자의 특성에 따라 다른 만큼 등록 기간을 차등화해 개인정보 자기결정권 제한을 최소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특히 교화 가능성이 있는 소년범에게도 같은 규정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다만 몰카 범죄자도 신상정보 등록 대상에 포함한 이 법 등록규정에 대해서는 재판관 5(합헌) 대 2(위헌) 대 2(헌법 불합치) 의견으로 합헌 결정했다. 이번 헌재의 결정에 대해 여성·청소년 인권단체 등을 중심으로 ‘성범죄를 가볍게 취급한 보수적 결정’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청소년 성폭력 상담소를 운영 중인 시민단체 ‘탁틴내일’의 이현숙 대표는 “몰카 범죄는 피해자에게 신체 위해를 직접 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범죄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면서 “피해자가 범죄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어나고, 몰카 사진이나 동영상이 인터넷 등에 공개되면 그 피해가 눈덩이처럼 커진다”고 지적했다. 김보람 여성변호사회 변호사는 “인터넷에는 몰카 사진을 공유하는 사이트들도 있고 그에 따른 범죄 피해가 심각한데 이를 타 성범죄보다 경미하다고 보는 시각에 대해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전북 노크한 文 “인위적 물갈이 반대 공감”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10일 전북지역 의원들과 만찬회동을 하고 내년 총선 및 공천제도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특히 문 대표는 호남지역 의원들에 대한 인위적 물갈이는 안 된다는 참석자들의 의견에 공감을 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규성·김영록·유성엽·이춘석·김관영·김성주·박민수·전정희 의원 등 8명이 문 대표와 자리를 함께했다. 서울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2시간가량 진행된 회동이 끝난 뒤 김영록 수석대변인은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인위적 물갈이는 안 된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다. 전북이 전체 11명 중 초선이 7명이라 오히려 전북을 발전시키는 데 장애가 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며 “문 대표도 공감을 표했다”고 전했다. 회동에서는 강세지역의 전략공천은 안 된다는 데 많은 공감대가 형성됐으며 문 대표 역시 “전략·비례공천을 투명·공정하게 하고 지도부가 작위적, 인위적으로 개입할 여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겠다”고 말했다고 김 수석대변인이 밝혔다. 오픈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에 대해서는 참석자 다수가 찬성했고 문 대표도 조건부 찬성 입장을 확인했다. 문 대표는 “제도의 장점을 살리되 신인이 어려운 점에 대해서는 새누리당 방식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보완하겠다는 전제하에 공감을 표명한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편 새정치연합은 이날 의원총회를 열고 국회의원 정수를 늘리지 않는 선에서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사실상 당론으로 확정했다. 오픈프라이머리의 경우 유연성 있게 받아들인 뒤 세부적인 방식은 추후 논의하기로 했다. 앞서 문 대표가 제안한 대로 권역별 비례대표제와 오픈프라이머리를 ‘일괄 타결’하는 방향으로 새누리당과 협상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장진복 기자 viviana49@seoul.co.kr
  • 성추행·비리 폭로전… 꼴사나운 성추문高 감사관들

    서울 서대문의 한 공립고에서 벌어진 최악의 성추문 사건을 조사 중인 서울시교육청 감사실의 내부 갈등이 진흙탕 싸움으로 번지고 있다. 감사 총괄책임자인 감사관의 ‘음주 감사’ 논란에 이어 부하 여직원에 대한 성추행 의혹까지 제기됐다. 감사관은 즉각 반박 기자회견을 열고 성추행 의혹을 제기한 여직원에 대해 무고죄로 형사 고발 하겠다고 밝혔다. 김형남 서울시교육청 감사관은 9일 기자회견을 통해 “개방형 감사관 길들이기에 실패하고 자신들의 비위 사실까지 적발된 공무원들이 음해에 나섰다”고 주장했다. 올 6월 개방형 공무원으로 채용된 김 감사관은 지난달 26일 서울 서대문구 A공립고 성추행 피해 여교사 면담에 감사팀장인 B 사무관과 감사반장인 C 장학사를 배석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이들은 감사관의 음주를 이유로 이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논란이 일자 김 감사관은 A고교 감사업무에서 배제된 상태다. 여기에다 최근 C 장학사가 “김 감사관이 나를 성추행했다”며 지난 2일 시교육청에 조사를 요구하면서 논란이 일파만파로 퍼지고 있다. 김 감사관이 지난달 26일 A고교 감사 때 시교육청 복도에서 자신의 손을 더듬고 피해 여교사들과의 면담 도중 자신에게 불쑥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 김 감사관은 이날 “2명의 공무원이 본질을 흐리고 있다”며 B 사무관과 C 장학사의 비위 사실을 공개했다. 지난달 실시했던 12개 사립유치원에 대한 특별감사에서 감사 대상이었던 한 유치원이 지난해 교육감 선거에 나섰던 모 후보에게 100만원을 송금했는데, 감사를 맡은 B 사무관과 C 장학사가 이런 사실을 적발하고도 고의적으로 은폐했다는 것이다. 김 감사관은 “다른 직원들을 입막음한 것도 모자라 보고까지 누락했다”고 말했다. 김 감사관은 자신에 대한 성추행 의혹도 같은 연장선에서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김 감사관이 A고교 가해자인 모 부장교사와 C 장학사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감사에서 배제하자 C 장학사가 있지도 않은 성추행을 꾸며 냈다는 것이다. 김 감사관은 “A고교 피해 여교사들이 이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 정상적인 감사가 불가능해 모두 교체했고, 이 과정에서 앙심을 품은 이들이 언론에 나를 음해하는 거짓 제보를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교육청은 부교육감을 중심으로 팀을 꾸려 감사실을 조사할 예정이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주장이 엇갈려 양측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하다”면서 “A고교 사건은 독립된 조사팀이 철저히 조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 김대환 4개월 만에 귀환… 노사정 대화 속도 낼까

    김대환 4개월 만에 귀환… 노사정 대화 속도 낼까

    노동계는 6일 박근혜 대통령의 노동 개혁 관련 대국민 담화에 대해 “개혁이 아닌 개악”이라며 일제히 비판 성명을 냈다. 정부가 저성과자 일반해고 지침, 임금피크제 도입과 이를 위한 취업규칙 변경 지침 제정 등 고용유연성에 방점을 둔 방안을 일방적으로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다시 밝히면서 노사정위 재개는 더욱 난항을 겪을 전망이다. 한국노총은 성명을 통해 “대통령 담화는 경기침체, 청년실업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전가해 온 정부의 기존 방향을 재확인하는 데 그쳤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이 언급한 노동시장 경직성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나라는 노동자 대다수가 비정규직이고 평균 근속연수가 5.6년이며, 실제 정년 연령은 49세”라고 반박했다. 민주노총도 “미래세대 운운하면서 세대 갈등을 조장할 뿐 구체적인 개선책이나 대화를 어떻게 풀어갈지 등을 제시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한편 노사정위는 지난 4월 노사정 대타협 결렬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표를 낸 김대환 노사정위원장이 7일 복귀한다고 밝혀 어떤 돌파구를 마련할지 주목된다. 노사정위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담화 발표 뒤 김 위원장에게 복귀를 요청했다. 김 위원장은 이날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기자간담회를 여는 것을 시작으로 노사정 대타협을 위한 물밑 협상에 나선다. 정부도 비정규직 사용 규제 완화 등의 내용을 담은 기간제법 및 파견법 개정 전문가 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노동개혁 과제에 대한 공론화 작업에 나섰다. 노사정은 기간제 사용기간 및 갱신 횟수, 파견근로 대상 업무, 생명·안전 분야 핵심 업무 비정규직 사용제한, 노동조합의 차별시정 신청 대리권 등 비정규직 관련 의제 대부분에 이견을 보이고 있다. 정부는 기간제근로자의 사용 기간인 2년에서 예외를 인정해 추가로 2년간 고용이 가능하도록 하는 방안, 고령자·고소득자를 관리·전문직으로 파견하는 것을 허용하는 방안 등을 추진 중이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미혼여성 69% “동성결혼 인정”…남성은 50%가 “반대”

    미혼여성 69% “동성결혼 인정”…남성은 50%가 “반대”

    미혼여성 10명 중 7명이 ‘동성결혼을 인정할 수 있다’는 의견을 보였다. 남성은 10명 중 5명이 동성결혼에 반대하는 입장을 나타냈다. 6일 결혼정보회사 듀오는 최근 전국 20~30대 미혼남녀 616명을 대상으로 ‘동성결혼 합법화’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51.5%가 ‘동성결혼을 인정할 수 있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여성의 경우 찬성이 69.3%로 압도적이었다. 반면 남성은 반대가 50.2%로 가장 많았으며, 찬성 의견은 32.3%로 나타났다. 동성혼을 찬성하는 이유로는 자유와 평등 등 인간의 기본권에 관한 내용이 많았다. ‘누구를 사랑하든 개인 자유라서’(67.5%), ‘성적 취향은 선천적인 것이므로’(13.6%), ‘소수의 사회적 차별을 없애야 하므로’(12%) 등이 주된 이유로 꼽혔다. 반대 이유로는 ‘개인의 성 정체성 혼돈 가중’(21.9%), ‘사회적 혼란 야기’(21%), ‘성적 취향의 후천적 학습’(15.2%), ‘동성애의 표면화 및 증가’(14.7%) 등의 우려가 많았다. ‘특정 이유 없이 동성혼이 싫다’는 답변은 전체의 12.5%를 차지했다. 가족 및 가까운 사람이 동성애자임을 알게 됐을 때는 어떨까. 여성은 ‘상대를 이해하며 지지한다’(36.4%)는 응답이, 남성은 ‘진지하게 알아보고 생각하겠다’(35.7%)는 의견이 가장 많았다. 이외에 ‘평상시처럼 행동한다’는 답변도 전체의 27.9%로 많이 나타났다. 실제 주변에 커밍아웃을 한 지인이 있는 경우는 남성이 12.8%, 여성이 48.3%였다. 여성이 남성보다 3.5배 이상 높은 수치로 동성애 공개 사실을 접한 사례가 많았다. 김승호 듀오 홍보 팀장은 “미국의 동성혼 합헌 판결 두고 현지는 물론 세계적으로 열띤 논쟁이 일고 있다”면서 “이번 조사를 통해 국민 여론 중 현대 미혼남녀의 생각은 어떤지 동성결혼 합법화 인식에 대한 변화와 추세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김유민 기자 planet@seoul.co.kr
  • [열린세상] 김정은 제1위원장, 이희호 여사 만나야/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열린세상] 김정은 제1위원장, 이희호 여사 만나야/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5일 이희호 여사가 평양행 비행기를 탔다. 광복 70돌을 딱 열흘 앞둔 날이다. 방북 시점이 그래서 더 의미 있다. 이 여사의 방북에 대한 기대도 크다. 남북 관계가 오랫동안 대결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그렇다.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만날 수 있는가에 대한 관심도 있다. 방북이 꽉 막힌 남북 관계의 물꼬를 틀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기대치가 높은 것이 사실이다. 이 여사는 세 번째 방북 길에 올랐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0년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 낼 때가 첫 번째 북한 방문이었다. 두 번째는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때 조문을 위한 평양 방문이었다. 이 여사는 당시 상주이자 후계자인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직접 만나 위로했다. 남측에서 김 제1위원장을 최초로 만난 인물이 이 여사였다. 이 여사가 이번에 김 제1위원장을 만나면 재회다. 남쪽 인사 어느 누구도 김 제1위원장을 두 번 만난 사람은 없다. 재회한다면 김 제1위원장에 대한 온갖 억측이 난무한 남한 사회에서 그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여사의 방북 자체가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여사의 방북 걸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남북 관계가 오랫동안 강대강(强對强)의 대결 구도를 풀지 못하고 있어서 그렇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여사 방북길이 대결 구도를 푸는 밀알이 될 수 있기에 기대치가 있다 이 여사 방북의 포인트는 김 제1위원장과의 만남 여부다. 개인적인 일정보다 김 제1위원장과의 만남이 가장 중요하다. 본인이 직접 초청했기에 이 여사 방북은 김 제1위원장과의 만남을 전제로 한다. 아버지 김정일 위원장 때의 인연이기에 이 여사 일행을 예우해야 할 것이다. 북한 주민들을 향해서도 아버지 때의 남측 인사를 잘 대접하는 모양새가 보기에 좋다. 대외적으로 이 여사와의 만남이 자신의 안정적인 지도자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기회도 될 것이다. 최고지도자의 동선을 미리 공개하지 않는 북측의 특성상 깜짝 만남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김 제1위원장이 특정 시간에 이 여사가 머무르는 백화원초대소를 예방할 가능성이 높다. 두 사람의 만남에서 이 여사가 박근혜 대통령의 남북 관계 개선 의지를 전달하길 바란다. 마침 홍용표 통일부 장관이 사흘 전 동교동을 비공식 방문한 것을 주목한다. 김 제1위원장의 남북 관계 전환을 위한 메시지도 받아 오길 기대한다. 이 여사를 통해 당장 시급한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에 대한 남북 최고지도자의 의중이 교환될 필요가 있다. 비공식 대북 접촉은 하지 않겠다는 박근혜 정부에서 이 여사의 메신저 역할은 대단히 중요하다. 박 대통령이 임기 동안 남북 관계의 실질적 성과를 거둬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이번 광복절 경축사에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대북 제안을 담아야 할 것이다. 이 여사 방북을 징검다리로 해 박 대통령과 김 제1위원장의 광복절 경축사에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와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고위급 회담 제안 등이 담기길 기대한다. 내년부터 총선과 대선이 줄줄이 있는 정치 일정상 남북 관계 개선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시간, 이른바 ‘골든타임’이 올 하반기밖에 없다는 것을 누누이 말해 왔다. 김 제1위원장 입장에서도 대내외적으로 안정감 있는 지도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남북 관계를 더이상 방치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여사의 방북을 계기로 남북 관계의 일대 전환이 이뤄지길 바란다. 94세 이 여사가 고령의 몸을 이끌고 평양을 다녀온다. 현실적으로 다음을 기약하기 어려울 수 있는 방북이다. 그렇기에 이번 방북이 의미 있는 성과 속에 이뤄지길 기대하는 마음이 크다. 박 대통령과 김 제1위원장은 고령의 이 여사가 평양 어린이들에게 목도리만 걸어 주고 오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비행기로 오가는 아쉬움, 육로를 통해 휴전선을 넘는 기회가 무산된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선물 보따리를 들고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는 이 여사의 발걸음이 가볍길 바란다. 건강히 잘 다녀오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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