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광장] 문인 재능은 공동체의 것
사람들은 왜 문학을 존경하는가.그것은 문학이,언어의 구축하는 힘을 통하여 시간이라는 허무로부터 인류의 존재를미적으로 구원해주는 불멸의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문인들은,그들의 재능을 언어가 문학에 부여해준 이 소명에 부응하여 공동체를 위해 사용함으로써 문인이 된다.따라서 그들의 재능은 개인의 재능을 넘어선 공동체의 것이다.
그러므로,만일 어떤 문인이 사적 복수심의 충족을 위하여문학을 이용한다면 그래도 그것을 문학이라 불러주어야 할까.슬프게도,한국문학 안에서 그런 일들이 자꾸 일어나고있다.최근 이문열이 ‘술단지와 잔을 끌어당기며’를 발표한 것을 보며 시인 박남철에 의한 ‘욕시’ 사건을 떠올린것이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전자는 차마 마주볼 수 없는저열한 성폭행의 외양을 가지고 있고, 후자는 몇 대목의 저열한 인신공격을 제외한다면 그럴듯한 외양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두 사건 모두,사적인 복수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문학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문학을 빙자한 테러 사건이기 때문이다.
박남철 시인은 신인 여성시인을 상대로 성추행을 저질렀다는 혐의로 고소당하게 되자,그 사건과 아무 상관도 없는 엉뚱한 중견 여성시인이 그 사건의 원고를 부추겼다는 오판에의해 그 여성시인을 상대로 언어 성폭행을 가하는 글을 ‘시’의 이름으로 발표했다.알만한 사람은 다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쓰여진 그 성폭행 글을 그는 ‘시’라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작가 이문열은 추미애 의원과의 ‘곡학아세’공방으로 비판의 도마에 오르자,이미 충분한 지면을 통해서추미애 의원을 원색적으로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형식 안에서 추미애 의원을 “개”라고 지칭하면서 누가보기에도 분명한 사적 복수심을 풀어낸다. 그 일이 물의를빚자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로 보아달라고 변명한다.
이들에게 문학은 사유재산인가? 문인이라는 이름은 그들이공동체의 언어를 위한 고뇌와 노력으로 낳은 글들이 아닌오로지 자기에게만 중요한 복수와 모욕의 글조차도 문학으로 불러주어야만 할 어떤 무소불위의 면허증 같은 것인가?이러한 일들을 접하면서, 나는 내가 이 땅에서문학을 하고있다는 일이 너무나 끔찍하게 느껴졌다. 이 두 사건은 한국문학의 타락이 어디까지 왔나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아픈 사건들이다.이문열의 글은 현대문학지에 당당히 소설이란 이름을 달고 발표되었고,박남철은 문제의 ‘욕시’란 것을 월간문학과 ‘애지’에 시의 이름으로 발표한 것은 물론이고,거기에 따른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은 채,최근 ‘현대시’에커버스토리로 등장해서 시인으로서 집중 조명의 혜택까지누리고 있다.
이것은 이들의 행동이 단지 다른 한 개인의 인권을 침해한데 그치지 않고 시와 소설이라는 문학장르에 대한 테러라는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문학 편집자들의 지독한 무지가 낳은 파행이다.두 문인들은 물론 문학하는 사람 이전에 양식있는 근대적 시민으로서 지녀야 할 최소한의 기본자세를 지니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면할 수 없다.그러나 동료 문 인들이나 문학권력을 지닌 편집자들 또한 이들의 행패에 지면을 제공하고 어떤 비판도 하지 않음으로써 이들이 문학을사유화하고 타락시키는 것을 용인하거나 방조하고 있다. 바로 이런 무지와 무책임이 한국문학의 총체적 위기를 구성하고, 한국문학의 장래를 환멸로 이끈다.
박남철과 이문열은 근대 백년의 문학사가 애써 갈무리해온문학성의 이름에 똥칠을 했다. 공동체가 위임한 언어를 손끝 재주로 더럽혀 놓았다.이러한 문인들을 우리 문단이 용납하는 한 한국 문학의 장래는,단언컨대 없다.
문인들은 문학이라는 불멸의 예술에 종사하기를 자임했다는 이유만으로 자동으로 영광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문학이지닌 ‘아우라’가 문인들의 불철저함과 안이함과 유치함과자폐증을 저절로 문학적인 것으로 교환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문학하는 사람들이 한국의 언어를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는, 문학의 이름을 팔아 개인적 부와 명성과 심지어 모욕과보복까지도 감행하는 자들에 대한 단호한 거부로부터 다시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노혜경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