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읽는 동화] 비밀/박신식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미희 쟨 어쩌면 큰일을 당했을지도 모른데.”
“큰일? 그게 뭔데?”
“바보. 성추행 같은 거…, 아니면 더 큰 일을 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야.”
아이들이 미희를 보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미희는 한 달 전, 한 아저씨에게 납치를 당했다. 그 아저씨는 미희의 부모에게 몸값을 요구했었다. 하지만 미희의 부모님은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의 추적 끝에 미희가 갇혀 있던 자동차를 찾았다.
자신을 납치한 아저씨를 동네에서 본 적 있다는 미희의 말에 경찰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저씨를 잡을 수 있었다.
미희는 한동안 집에서 쉰 뒤 학교에 돌아왔다. 하지만 예전처럼 웃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수연아, 너 미희랑 같은 반이지? 미희가 나쁜 어른 때문에 마음의 상처가 클 거야. 주위에서 따뜻하게 감싸줘야 할 텐데…….”
엄마가 안쓰러운 듯 말하며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너도 사람 조심해. 특히 아는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야. 알았지?”
순간 뜨끔해서 엄마의 눈길을 살짝 피했다. 하지만 곧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걱정 마세요. 웬만한 남자 아이들도 날 쉽게 못 건드리는 거 잘 아시잖아요.”
엄마는 나를 강하게 키운다며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 학원에 보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여러 대회에 나가 상도 받았고 또래 남자들과 겨루어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미희가 저만치 앞서 가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미희 옆에 낯선 아저씨가 다가가고 있었다. 잰걸음으로 미희 옆에 바짝 붙었다. 미희가 나를 힐끗 보았다.
아저씨는 커다란 종이상자를 들고 있었다. 무척 무거워 보였다. 아저씨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종이상자를 툭 내려놓고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얘들아, 이 동네에 제일문방구가 있다는데 어디 있는지 아니?”
아저씨는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펴보며 물었다. 머리끝이 쭈뼛 섰다.
“잘 모르겠는데요. 우리 어서 가자. 응.”
나는 톡 쏘아붙이듯 말하며 미희의 손을 잡아끌었다. 미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알면서 왜 가르쳐 주지 않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대답 대신 미희의 손을 붙잡고 그 자리에서 재빨리 벗어났다. 아저씨가 보이지 않았다.
“저런 아저씨들을 조심해야 해. 처음에는 길을 물어보다가 나중에는 앞장서서 길을 알려 달라고 하지. 그리고 으쓱한 곳에 이르면 나쁜 짓을 하려고 할지도 모르거든.”
“그렇게 보이지는 않던데….”
미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람은 얼굴만 봐서는 모르는 거야. 너도….”
손으로 재빨리 입을 막았지만 미희의 얼굴은 금세 어두워졌다.
“그래.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미희가 고개를 숙인 채 끄덕이며 대꾸했다.
며칠 뒤, 미희가 점심을 먹고 감기약을 먹었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미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말 많은 재희가 아이들 무리에서 빠져나와 미희에게 다가갔다.
“미희야, 너 그거 무슨 약이야?”
미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재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이들에게 돌아갔다.
“정말 정신병원에 다니는 게 맞나 봐. 그러니까 대답을 하지 않지.”
“전염되는 건 아니겠지?”
아이들은 미희를 쳐다보며 일부러 큰 소리로 수군거렸다. 악이 올랐다.
“야, 그게 무슨 소리야? 미희는 감기에 걸려서 약을 먹는 것뿐이야.”
내가 소리를 버럭 지르자 아이들이 쭈뼛쭈뼛 눈치를 보더니 흩어졌다.
미희는 아이들 말에 속상했는지 밖으로 나가 화장실로 향했다. 따라갔다. 미희는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 씻고 또 씻었다. 자세히 보니 손목만 몇 번을 씻는 것이었다.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아까는 고마웠어.”
집에 가는 길에 미희가 먼저 말을 꺼냈다.
“네가 그냥 감기약이라고 말했으면 됐을 텐데…….”
“그렇지? 나 바보 같지?”
미희가 엷은 미소를 흘렸다.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수연아, 우리 한강시민공원에 가서 자전거 탈까?”
자전거라는 말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왜? 자전거 못 타?”
“응? 아니.”
숨이 턱 막혔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미희야, 오늘 집에 일이 있어서 그러니까 다음에 놀자. 알았지?”
나는 계속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집을 향해 정신없이 뛰어갔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음 날, 선생님이 미희에게 수업 후에 남으라고 했다. 나는 미희에게 다가가 가지 말라고 속삭였다.
“왜?”
“선생님도 남자잖아. 그러니까 조심해야 해.”
“뭐?”
미희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늘 가까운 사람을 조심해야 해. 특히 둘만 있을 때는….”
“너 지금 무슨 상상을 하는 거니? 그런데 넌 남자라면 누구든 나쁘게 생각하는 것 같더라?”
바늘에 찔린 듯 뜨끔했다.
“내가? 아니야.”
손사래를 치며 시치미를 뗐다. 미희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너무 간섭하지 마.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으니까.”
“간섭하려는 게 아냐. 널 도와주고 싶을 뿐이지.”
“날 돕겠다고? 풋. 넌 날 도와줄 수 없어.”
미희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학교 현관에서 서성서리며 미희를 기다렸다. 미희는 한참 후에 나왔다. 미희의 얼굴이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미희는 내가 기다렸다는 사실에 놀란 듯 했다.
미희가 운동장 스탠드에 앉았다. 나도 따라 앉았다.
“무슨 이야기 한 거야?”
머뭇거리다 물었다. 미희도 머뭇거리다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님께서는 지난번 일로 내가 왕따를 당하고 있는 것 같다고 걱정하셨어.”
미희는 길게 한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난번 일을 다시 한번 어른들 앞에서 이야기해야 하는데 괜찮겠냐고 물으셨어. 내가 집에서 짜증만 부리고 대답하지 않아서 엄마가 선생님께 부탁하셨나봐.”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
“응. 한다고 했어. 힘들다고 조용히 덮고 넘어가면 그런 일은 계속 일어나게 될 테니까.”
미희가 어른스러워 보였다.
“어차피 할 거면 부모님께 먼저 말하지 그랬어.”
내 말에 미희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아빠와 엄마에게 화가 많이 나 있었나 봐. 나는 그때 아무 일이 없었는데도 아빠와 엄마 때문에 산부인과에 가서 진찰을 받았거든.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몰라.”
미희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우리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넌 다시 그 이야기를 말할 수 있다니 정말 용감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모르게 용감하다는 말이 나오며 몸이 움츠러들었다.
“아냐. 처음에는 얼마나 무섭고 떨렸는지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어. 아직도 그 아저씨가 내 손목을 억세게 잡고 있는 것 같아.”
그제야 미희가 손목을 자주 씻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미희가 길게 한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보다 더 무서운 게 있어.”
“그게 뭔데?”
“아이들이 날 힐끔힐끔 보면서 주고받는 눈짓과 웃음소리, 속삭이는 말들이야. 처음에는 전학을 가려고 했어. 하지만 너무 비겁한 것 같았지. 내가 당당하면 되는 거잖아. 그리고 내가 원해서 납치된 것도 아니고.”
미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그 맘 알 것 같아.”
“아냐, 넌 이해할 수 없어.”
“알아. 사실은 나도 그런 비슷한 일을 당한 적 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덜컥 내뱉고 말았다. 금세 가슴이 콩닥콩닥 뛰며 얼굴이 달아올랐다. 미희가 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5학년 되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야.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놀다가 이웃집 중학생 오빠를 만났어.”
떠올리기 싫은 순간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쏟아버려야 했다. 혼자 숨기고 있었던 비밀을….
“그 오빠가 음료수를 뽑아주겠다며 공원관리소 옆으로 날 데리고 갔어. 주위에는 사람들도 돌아다니고 있어서 아무 의심도 하지 않았는데….”
심장이 쿵쿵 뛰고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그 오빠가 내 바지를 벗기는 거야. 난 온 몸이 굳은 듯 소리도 지를 수 없었고 반항도 할 수 없었지. 태권도를 오랫동안 배웠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어.”
몸이 저절로 오그라들었다.
“다행히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우리를 보고 소리치자 그 오빠가 도망쳤지. 나도 그제야 정신이 들어 재빨리 도망쳤어.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몰라.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어. 부모님에게도.”
미희가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 따뜻했다. 내 눈에서는 이미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때부터 모든 남자들이 다 나쁜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어. 그리고 그 오빠가 어디선가 날 보고 있는 것 같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게 되었지. 시원하게 털어놓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어. 다른 사람들의 놀림거리가 될 것만 같았거든.”
정신없이 모든 것을 내뿜었다. 꼭꼭 숨겨 두었던 비밀이 빠져나가자 머리가 맑아졌다. 미희가 손등으로 내 눈물을 쓰윽 닦아주었다. 내 아픔까지도….
●작가의 말
언론에 어린이 납치, 어린이 성추행, 어린이 성폭행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어른의 한 사람으로서 얼굴이 붉어진다. 어린이들에게 “싫어요.”, “안 돼요.” 하며 큰 소리로 자신의 뜻을 표현하라고 가르치기 전에, 부끄러움으로 고민하지 말고 어른들에게 도움을 청하라고 가르치기 전에, 어른들을 가르쳐야 한다. ‘유엔 어린이 권리 조약’을 빌리지 않더라도 어린이는 유괴나 성적인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른들은 어린이가 유괴당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며 성적인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작가 약력
1993년 MBC 창작동화대상, 1994년 계몽아동문학상을 수상했다. ‘아버지의 눈물’, ‘등대지기 우리 아빠’, ‘공짜밥’, ‘찢어버린 상장’ 등의 작품집이 있으며 현재 서울천일초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