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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수환 추기경 추모] 끝없는 조문행렬… 9만여명 애도 발길

    [김수환 추기경 추모] 끝없는 조문행렬… 9만여명 애도 발길

    김수환 추기경 선종 이틀째인 17일 서울 명동성당은 본격적인 조문 행렬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김 추기경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기 위해 시민들은 명동성당을 넘어 계성여고 쪽으로 1㎞가량 길게 줄을 섰다. 볼이 에일 듯한 강추위에도 아랑곳없이 시민들은 한 시간 넘게 기다려 조문을 했다. 이명박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 등 각계 인사 50여명의 조문도 아침부터 계속됐다. 김 추기경의 시신이 놓인 명동성당 대성전에는 오전 6시부터 신도와 일반인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와는 별도로 명동성당 지하 성당에서는 추모미사가 오전 5시30분부터 1시간 간격으로 진행됐다. 대성전과 꼬스트홀 2층에서는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연도(煉禱·천주교식 위령기도)도 계속됐다. 이날 명동성당을 방문한 조문객은 9만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유명 인사들의 조문도 이어졌다. 천주교 신자로 김 추기경과 각별한 인연을 이어온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전 11시쯤 방문해 “김 추기경은 야당 시절부터 나의 정신적 지도자였다.”면서 “성직자로서뿐 아니라 독재 치하에서 신음하는 국민들을 위해 광야의 소리 같은 말씀을 하신 위대한 신앙가”라고 말했다. 오전 10시쯤 빈소를 방문한 불교방송 이사장 영담 스님은 “종교는 다르지만 국민의 성직자로서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돌아가신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명동성당은 일체의 조의금이나 조화를 사절했다. 전날 이명박 대통령이 보낸 조화도 되돌려보냈다. 허영엽 서울대교구 문화공보국장은 “장례식이 간소하게 진행됐으면 했던 김 추기경의 유지를 받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모여든 조문객들은 김 추기경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척추장애로 다리를 저는 김윤식(80·경기 산본)씨는 “개신교 신자지만 종교와 상관없이 40년 동안 존경해온 분의 마지막을 보고 싶어 불편한 몸을 이끌고 3시간이 걸려 이곳에 찾아왔다.”고 말했다. 40년간 천주교 신자로 지내온 김방지거(81·서울 청량리)씨는 개종의 이유가 김 추기경이라고 했다. 김씨는 “사진사로 1968년 피정(종교 수련회)에 참여했는데 그때 김 추기경이 피곤하겠다며 집까지 차를 태워주셨다. 그 은혜를 잊지 못해 결국 천주교로 개종하게 됐다.”면서 “천국에서도 다시 뵈었으면 좋겠다.”며 눈물을 훔쳤다. 한편 김 추기경이 입원했던 서울 강남성모병원은 이날 오후 2시 기자회견을 열어 “김 추기경은 마지막까지 의미없는 생명 연장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황태곤 병원장은 “마지막까지 진통제나 다른 처치를 하지 않고 영면하셨다.”고 말했다. 또 김 추기경에게서 적출된 각막은 이식이 가능하며 대상자가 이미 정해졌지만, 누가 추기경의 두 눈을 받을지는 공개할 수 없다고 병원측은 밝혔다. 김민희 이영준기자 haru@seoul.co.kr
  • [김수환 추기경 추모] 가족·측근이 본 ‘인간’ 추기경

    [김수환 추기경 추모] 가족·측근이 본 ‘인간’ 추기경

    성직자가 아닌 사인(私人)으로서 김수환 추기경은 어땠을까. 가족은 물론이고 김 추기경을 가까이서 지켜봐온 동료·후배들은 “청빈하고 자상한 추기경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입을 모았다. ●조카 아들 “유명하지만 가난하셨던 할아버지” 김 추기경 조카의 아들인 김형중(29·LG전자 근무)씨가 기억하는 추기경 할아버지는 엄격하지만 자상한 존재다. 김씨는 “지난해 5월 취업했을 때 할아버지가 혜화동 주교관으로 나를 불렀어요. 자주 뵙지 못했는데도 내가 무슨 공부를 했는지 하나하나 다 알고 계셨어요.”라며 그때를 회상했다. 김 추기경의 형 김동한 신부(1983년 작고)를 닮아 김 추기경이 가장 예뻐한 손자가 바로 김씨였다고 한다. 김 추기경은 가족들과 일년에 세 번 정도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자상하고 유머 넘치는 여느 할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가족들이 모이면 자신의 애창곡인 ‘만남’, ‘사랑으로’, ‘애모’ 등 대중가요도 즐겨 불렀다. 매년 설날에는 가족들에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세뱃돈으로 딱 1만원씩 줬는데 외환위기 때는 5000원만 줬다. 청빈한 성직자의 삶을 살아왔기에 김 추기경은 가족들에게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을 내내 안타까워했다. “할아버지는 유명하셨지만 가난한 분이셨어요. 대학 내내 장학금을 받고 다니는 나를 할아버지는 대견해하면서도 애틋하게 여기셨어요.”라고 김씨는 말했다. 지난해 10월 호흡곤란이 와 큰 위기가 닥쳤을 무렵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김 추기경이 가장 먼저 바라본 것도 김씨였다. 김 추기경은 “우리 손자 왔구나. 이 아이는 똑똑하고 공부도 잘한다. 이 불황에 취직도 했다.”며 김씨를 주위 사제들에게 소개시켜 줬다. “온 가족 소집명령이 떨어져 병실에 갔더니 할아버지가 누워 계셨어요. 할아버지 손을 잡고 ‘형중이 왔어요.’라고 말하니 눈을 뜨셨어요. 그때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김씨의 아버지 김병무(김 추기경 큰형의 3남)씨는 “삼촌은 평소 소신대로 엄격한 종교인의 가치관을 가족에게도 적용하셨고, 가족이라고 더 챙겨주시거나 특별한 도움을 주시진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중학 동창 “공부 열심히 했던 성실한 친구” 김 추기경과 중학교 때 같은 반에서 공부했던 최익철(86·1999년 은퇴) 신부는 “공부 열심히 하는 성실한 학생이었다.”고 말했다. 최 신부는 “한반에서 공부했지만 전쟁 때문에 태평양 쪽으로 나가 있었던 김 추기경은 늦게 돌아와 나보다 1년 늦게 서품을 받았다.”면서 “기숙사에서 성실히 공부하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담당 간호사 “주변사람을 늘 웃게 하신 환자” 강남성모병원에 입원해 있던 김 추기경을 간호한 홍현자(눈시아마리아) 간호수녀팀장은 “마음이 깊으시고 유머감각도 남다르셔서 주변 사람을 늘 웃게 하셨다. 이번 설날에 간호사들에게 세뱃돈도 줘 웃음을 자아냈다.”고 말했다. 김민희 최재헌기자 haru@seoul.co.kr
  • 따듯한 미소 남기고…김수환 추기경 선종

    따듯한 미소 남기고…김수환 추기경 선종

    김수환 추기경이 16일 선종(서거를 뜻하는 천주교 용어)했다.향년 87세.  천주교 서울대교구 고위 관계자는 서울 강남성모병원에 입원해 있던 김 추기경이 이날 6시12분 선종했다고 밝혔다.김 추기경의 안구 등 장기는 고인의 뜻에 따라 기증될 예정이다.  앞서 서울대교구 한 관계자는 이날 오후 4시반부터 관계자들이 김 추기경의 임종에 대비한 대책회의를 가졌다고 밝혔다.서울대교구는 명동성당에서 고인의 장례미사 준비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김 추기경은 지난해 8월29일부터 건강 악화로 서울 반포동 강남성모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그해 6월11일 조촐한 생일파티가 고인이 세상에 공개된 마지막 모습이다.이후 끊임없이 위독설이 나돌았고 수차례 고비를 넘겼지만 최근에는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쇠약해졌던 것으로 알려졌다.김 추기경은 입원 이후에도 생명연장 장치 사용을 거부해왔으며,의식불명 상태에서 의료진이 매일 응급 처치한 사실도 몰랐던 것으로 전해졌다. 고인은 마지막 순간 큰 고통 없이 영면한 것으로 전해졌다.주치의였던 강남성모병원 정인식 교수는 “추기경께서는 노환에 따른 폐렴 합병증으로 폐기능이 떨어져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스스로 호흡했다.”면서 “선종때까지 큰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또 “추기경께서는 평소 늘 하시던 말씀대로 임종을 지켜본 교구청 관계자들과 의료진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남기고 가셨다.”고 덧붙였다.  가톨릭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며 동시에 한국 사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고인은 1951년 사제서품을 받았고,초대 마산교구장(1966년)을 거쳐 1968년 대주교로 승품한 뒤 서울대교구장에 올랐다.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인 최초로 추기경에 서임된 김 추기경은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위원장 등을 역임한 뒤 정년(75세)을 넘긴 1998년 서울대교구장에서 은퇴했다.  고인은 자신의 신념을 교회와 현실 속에서 실천하기 위해 헌신했다.핍박받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곧 깊은 관심을 가졌던 김 추기경은 독재와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1970년에는 3선 개헌·유신 등 박정희 정권의 독재 행보에 강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정권의 거센 압력 속에서도 성직자로서의 양심과 소신을 지키고자한 고인의 신념에 힘입어 명동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성지로 자리잡았다.  김 추기경은 또 장애인과 사형수·빈민 등을 만나 소외받은 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고 농민과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서도 노력했다.1987년 ‘도시빈민 사목위원회’를 교구 자문기구로 설립,복지사업에도 힘을 기울였다.  고인은 1999년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난 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등 2권의 책을 발표했다.이 책에서 김 추기경은 “가톨릭 최고의 성직자로서 예수를 만나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다.”는 반성을 하기도 했다.또 “이웃사랑을 강조하면서도 스스로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지 못함으로써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일치시키지 못했다.”고 자책하기도 했다.  ”여러분과 또한 많은 이들을 위하여.” 지난 1966년 주교서품을 받으면서 사목표어로 정한 이 말 처럼 김 추기경은 자신의 신념을 평생에 걸쳐 실현하고 따뜻한 미소를 남긴 채 떠나갔다.  인터넷서울신문 맹수열기자 guns@seoul.co.kr  ●김수환 추기경 약력  ▲1922년 5월8일(음력) : 대구 출생  ▲1941년 : 서울 동성상업학교 졸업 후 일본 동경 상지대 입학  ▲1942년 : 상지대 문학부 철학과 진학  ▲1944년 : 2차 대전으로 학업 중단  ▲1947~51년 : 서울 가톨릭대 신학부 신학전공  ▲1951년 : 사제서품 및 대구 대교구 안동 천주교회 주임신부  ▲1953년 : 대구 대주교 비서 신부  ▲1955~56년 : 대구 대교구 김천시 황금동 천주교회 주임신부  ▲1956~63년 : 독일 뮌스터대 대학원 사회학전공  ▲1964년 : 주간 가톨릭 시보(현 가톨릭신문) 사장  ▲1966년 : 마산교구 주교 서품 및 마산 교구장 착좌  ▲1967년 이후 : 교황청 세계 주교 시노드(대의원회의)에 한국대표로 6차례 참석  ▲1968년 : 서울 대주교 승품 및 서울 대교구장 착좌  ▲1969년 :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 서임  ▲1970~75년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1차 역임)  ▲1970~73년 :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위원장  ▲1975~98년 : 평양교구장 서리  ▲1981~87년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2차 역임)  ▲1998년 : 서울대교구장 은퇴,아시아 주교회의 공동의장  ▲1998~99년 : 실업극복국민운동 공동위원장,자녀안심하고 학교보내기운동 국민재단 초대 이사장  ▲2001년 : 사이언스 북 스타트운동 상임대표  ▲2003년 : 생명21운동 홍보대사  ▲2009년 2월16일 : 선종    ●김수환 추기경의 명예학위  ▲1974년 : 서강대 명예문학박사  ▲1977년 : 미국 노틀담대 명예법학박사  ▲1988년 : 일본 상지대 명예신학박사  ▲1990년 : 고려대 명예철학박사,미국 시튼홀대 명예법학박사  ▲1994년 : 연세대 명예신학박사  ▲1995년 : 대만 푸젠 가톨릭대 명예철학박사  ▲1997년 : 필리핀 아테네오대 명예인문학박사  ▲1999년 : 서울대 명예철학박사 [서울신문 다른 기사 보러가기] 공교육 아름다움 일깨운 ‘임실 혁명’ 대학생 직장인 눈물겨운 부채탕감 비책 ”고용유지도 힘든데 나누긴 뭘” ’워낭소리’ 성공했지만 갈길 먼 독립영화
  • [김수환 추기경 선종] 5일장 장례 절차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진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수많은 조문객이 찾을 것으로 예상돼 장례 일정을 길게 잡았다. 서울대교구는 김 추기경의 선종 직후 정진석(서울대교구장) 추기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닷새 간의 장례 일정을 발표했다. 장례식은 20일 오전 10시 서울 명동성당에서 정 추기경의 주례로 진행된다. 장례식 뒤 시신은 경기 용인 천주교 성직자 묘지에 안장된다. 22일에는 명동성당과 경기 용인의 묘지에서 추모미사가 동시에 진행된다. 선종 당일인 16일 오후 10시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안구 적출을 마치고 명동성당으로 옮겨진 김 추기경의 시신은 대성전 제단 앞 유리관에 모셔졌다. 성당 입구에서 대성전까지는 후배 사제들이 시신을 운구했다. 시신은 교황이 사망했을 때처럼 유리관 속에 놓여 17일부터 19일까지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관 위쪽은 타원형 유리로 시신을 볼 수 있게 돼 있고, 나무로 만들어진 옆면에는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일반 신도들도 장례기간 동안 명동성당 꼬스트홀(문화관)에서 연도(사망한 사람을 위해 돌아가며 드리는 기도)를 올릴 수 있다. 추모미사는 17일부터 매 시간마다 진행되며 선종 나흘째인 19일에는 입관 예식이 진행될 예정이다. 한편 KBS 1TV는 20일 오전 10시부터 장례 미사를 생중계할 예정이다. MBC와 SBS도 중계를 적극 고려하고 있다. 방송사들은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에 따른 특집 프로그램을 긴급 편성했다.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사랑한다, 사랑해라, 용서해라”

    “사랑한다, 사랑해라, 용서해라”

    한국 천주교의 정신적 지주인 김수환 추기경이 16일 오후 6시12분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선종(善終)했다. 87세.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은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김추기경께서는 노환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미소와 인간미를 잃지 않으셨고,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평화와 화해 메시지를 전했다.”며 애도했다. 고인의 주치의인 강남성모병원 정인식 교수는 “추기경께서는 노환에 따른 폐렴 합병증으로 폐기능이 떨어져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스스로 호흡했다.”면서 “선종 때까지 큰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으며 임종을 지킨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남겼다.”고 마지막 순간을 전했다.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허영엽 신부는 “2~3일전부터 ‘사랑한다. 사랑해라. 용서해라.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아 감사하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고 전했다. 지난해 8월 노환으로 강남성모병원에 입원한 고인은 전날부터 갑자기 폐렴증세를 보이다 이날 오후 들어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것으로 전해졌다. 생전 장기 기증 약속에 따라 선종 후 병실에서 안구 적출 수술로 마지막 순간까지 나눔의 삶을 실천했다. 김 추기경의 안구 기증으로 2명이 새 빛을 얻을 수 있게 됐다. 김 추기경의 시신은 이날 밤 명동성당으로 옮겨져 안치됐다. 교황의 선종과 마찬가지로 추기경의 시신은 유리관에 안치돼 조문객을 맞는다. 서울대교구는 정진석 추기경을 위원장으로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20일 오전 10시 서울대교구장으로 장례미사를 치른다. 장지는 경기도 용인 천주교 성직자 묘역에 마련된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김수환 추기경 선종] 현대사 고비마다 버팀목으로… 한국 민주화 큰 횃불

    [김수환 추기경 선종] 현대사 고비마다 버팀목으로… 한국 민주화 큰 횃불

    김수환 추기경은 교회 안의 성직자에 머물지 않고 한국사회의 민주화를 앞당긴 ‘큰 횃불’로 인정받는다. 1970년대 유신체제에서 정치적 탄압을 받던 인사들의 인권과, 정의를 위해 힘겨운 투쟁을 벌였고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한복판에서 양심의 울림과 행동을 끈질기게 이어갔던 투사였다. ●박정희 독재정권 비판 시국 메시지 김수환 추기경이 인권과 민주화운동에 각별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68년 삼도직물 사건부터. 당시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불거진 이 사건을 놓고 추기경은 주교단 공동성명을 통해 교회가 노동자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게 정당함을 전격 발표했다. 이 성명서는 한국 천주교회가 사회정의 차원에서 낸 최초의 성명서로 기록된다. 한국 천주교회가 사회정의와 인권에 개입하기 시작한 첫 사례이기도 하다. 박정희 대통령의 3선개헌과 유신헌법 선포, 긴급조치 등 독재와 부정부패가 극성일 무렵 성탄절 미사를 통해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외치고 나선 것은 유명하다. 당시 KBS를 통해 방송된 미사 강론에서 “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인가.”라고 비판했으니 일반인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1971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시절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는 공동사목교서를 발표한 데에 이어 이듬해 ‘평화의 날’을 맞아선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선포, “불의와 부정부패, 부조리, 인권탄압, 독재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밝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일인독재체제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그 유명한 시국 메시지를 발표한 것은 그 이듬해인 1972년 8월이었다. “인권과 사회정의의 실현을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우선 정치적 민주화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면서 “국민을 위한, 인간의 모습을 갖춘 정치”를 거듭 촉구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현실 참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기이다.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 학생들을 도왔다는 이유로 1974년 구속된 사건은 유신체제하 독재정부와 천주교회의 대립 차원에서 가장 상징적인 사건.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할 때마다 추기경은 “우리 민족이 처한 아픔이자 교회의 아픔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80년대 군사정권에 맞서 직선제 주장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1979년 유신 체제가 붕괴될 때까지 국가권력과의 대립을 거듭해야만 했다. 1976년 명동 3·1절 기도회, 1978년의 전주교구 7·18기도회 등에서 사제들이 잇달아 구속되었다.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의 와중에서 모든 신자들에게 ‘광주를 위한 특별기도’를 요청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사건. 부산의 미 문화원 사건, KBS시청료 납부 거부운동, 언론통제 등 군부독재에서 빚어진 사회문제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다. 1980년대 들어서도 1986년 군사정권에 개헌실시를 촉구한 데 이어 1987년 6월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조치를 비판, 대통령 직선제 실시를 주장했다. 그 끝에 나온 6·29선언과 대통령 직선제 실시는 결국 문민정부를 등장시킨 큰 발판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김수환 추기경 선종… 안구기증 2명에 ‘새 빛’

    한국 천주교의 정신적 지주인 김수환 추기경이 16일 오후 6시12분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선종(善終)했다. 87세.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은 “우리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김추기경께서는 노환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미소와 인간미를 잃지 않으셨고,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리스도의 평화와 화해 메시지를 전했다.”며 애도했다. 고인의 주치의인 강남성모병원 정인식 교수는 “추기경께서는 노환에 따른 폐렴 합병증으로 폐기능이 떨어져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스스로 호흡했다.”면서 “선종 때까지 큰 고통을 느끼지는 않았으며 임종을 지킨 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남겼다.”고 마지막 순간을 전했다.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허영엽 신부는 “2~3일전부터 ‘사랑한다. 사랑해라. 용서해라. 그동안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아 감사하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고 전했다.  지난해 8월 노환으로 강남성모병원에 입원한 고인은 전날부터 갑자기 폐렴증세를 보이다 이날 오후 들어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것으로 전해졌다. 생전 장기 기증 약속에 따라 선종 후 병실에서 안구 적출 수술로 마지막 순간까지 나눔의 삶을 실천했다. 김 추기경의 안구 기증으로 2명이 새 빛을 얻을 수 있게 됐다. 김 추기경의 시신은 이날 밤 명동성당으로 옮겨져 안치됐다. 교황의 선종과 마찬가지로 추기경의 시신은 발인 때까지 유리관에 안치돼 조문객을 맞는다.  서울대교구는 정진석 추기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20일 오전 10시 서울대교구장으로 장례미사를 치르기로 했다. 장지는 경기도 용인 천주교 성직자 묘역에 마련된다. 글 /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영상 / 서울신문 나우뉴스TV 손진호기자 nasturu@seoul.co.kr @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김수환 추기경 선종] 낮은 자의 삶 실천한 시대의 성자

    [김수환 추기경 선종] 낮은 자의 삶 실천한 시대의 성자

    한국 천주교의 최고 성직자라는 명성을 넘어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 살며 우리의 곁을 지켰던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다. 용기있는 발언으로, 때로는 ‘무거운 침묵’을 지켜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잡아 온 시대의 양심이었다. 소외되고 억압받는 자를 품고 시대의 메신저로서 사회적 지침을 제시해온 그는 단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성직자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 정의와 진리에 바탕을 둔 인간성 회복에 앞장선 휴머니스트였다. 병인박해로 순교한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독실한 천주교 신앙을 이어온 아버지 김영석과 어머니 서중하 슬하의 5남3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옹기점과 농업으로 어렵게 생계를 꾸리는 부모 아래서 유아세례를 받아 자랐지만 원래 사제가 될 생각은 없었다. 남달리 자식에게 열정을 가진 모친은 그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사제가 되기를 권했지만 정작 소년 김수환은 썩 내켜 하지 않았다. 어머니를 모시고 남들처럼 처자를 거느리며 평범한 세상을 살아갈 요량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모친의 권유를 따라 결국 형(동한)과 함께 성직의 길을 택했다. 보통학교 5년 과정을 졸업하고 1933년 대구 성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한 게 성직자 인생의 첫걸음. 서울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입학했으며 1941년 동성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천주교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그해 4월 일본 유학을 떠났다. 조지(上智)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사제의 길을 놓고 망설임이 적지 않았다. 말할 것도 없이 나라 잃은 민족적 현실에의 고민이었다. 조지대학의 게페르트 신부가 “정치가가 될 것이냐, 신부가 될 것이냐.”고 물었을 때, “민족이 저를 부른다면 정치가라도 되겠다.”고 대답했던 것을 보면 당시 갈등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성직보다 항일 독립투쟁에 더 마음을 두던 중 졸업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1944년 학병에 징집되어 섬에 끌려갔다. 강제로 일본 국가를 부를 때마다 서러움이 사무쳐 미군에 투항할 생각으로 탈출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듬해 전쟁이 끝나 조지대에 복학, 1946년 12월 부산항에 도착했고 곧바로 서울의 성신대학에 편입해 4년 뒤인 1951년 9월15일, 대구 계산동 주교좌성당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남의 나라’를 위해 싸워야 했던 학병 시절 체험한 전쟁속 인간의 잔학상은 사제로서 “목숨 바쳐 지킬 가치가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했다. 경북 안동 본당에서 사목을 시작해 대구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비서, 해성병원 원장을 거쳐 1955년 6월 경북 김천본당 주임 겸 성의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전임됐고 독일 뮌스터 대학에서 신학·사회학을 전공한 뒤 귀국해 1년 8개월간 가톨릭 시보(현 가톨릭신문)사 사장을 지냈다. 1966년 44세의 김 신부가 마산교구 설정과 함께 초대 교구장에 임명돼 주교 성성식과 교구장 착좌식을 가졌을 때 택한 사목표어가 바로 그 유명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이다. 이 표어는 평생 소외받고 어두운 그늘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몸과 마음을 둔 채 어길 수 없었던 큰 나침반이었다. 1968년 서울대교구장에 착좌했을 때의 취임인사도 바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교회 쇄신과 현실 참여로 이어가겠다는 다짐이었다. 다짐대로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에 초점을 맞춰 살면서 민중들에 대한 관심과 부조리한 정치사회 현실을 향한 강경 발언을 서슴지 않아 교회 안팎에서 ‘인권 옹호자’의 명성(?)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상계동과 목동의 철거민 주거지를 직접 방문했고 성탄 전야 미사는 항상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집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1987년 ‘도시빈민 사목위원회’를 교구 자문 기구로 설립해 놓았다. 그 때문에 서울대교구의 복지 시설은 200여 개로 크게 늘었다.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가 사임한 다음해인 1968년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되면서 대주교로 승품, 이후 30년 재임기간 중 서울대교구에서 6명의 주교를 탄생케 했고 48개이던 본당이 200여개로 늘어나는 교세확장도 일궜다. 한국 천주교사상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된 것은 서울대교구장 착좌 이듬해. 나이 47세로, 전세계 추기경 136명 가운데 최연소 추기경이 됐던 그는 2차례에 걸쳐 총 12년동안 한국 주교회의 의장을 맡은 것을 비롯, 아시아주교회의 연합회(FABC)를 출범시킨 주인공이기도 하다. 현실에의 냉정한 처신을 비켜나지 않으면서도 늘상 이웃집 아저씨, 할아버지 같은 살가운 정과 웃음을 달고 살았던 김 추기경. 그는 떠날 때도 정확히 알고 지킨 인물이었다. 75세가 되던 1997년 교회법 제401조에 따라 로마 교황청에 서울대교구장 사임 의사를 단호히 밝혔다. 교황청이 자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자 거듭 사임의사를 밝힌 끝에 마침내 이듬해인 1998년 5월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에서 물러났다. 목자 생활 47년 만이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극우화 인사 파문 휩싸인 교황

    극우화 인사 파문 휩싸인 교황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사면초가에 놓여 있다. 홀로코스트(나치의 유대인 대학살)를 부인한 영국인 주교를 복권시킨 데 이어 2005년 미국을 강타했던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신의 처벌’이라고 주장한 오스트리아 성직자를 부주교로 승급시키자 비난의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논란은 지난달 24일 로마 교황청이 20년 전 교황의 승인 없이 주교에 올랐다는 이유로 파면됐던 4명을 복권시키면서 시작됐다. 복권된 주교 가운데 영국인 리처드 월리엄슨은 지난달 21일 스웨덴 TV와의 인터뷰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집단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은 유대인은 600만명이 아닌 20만~30만명에 불과하며 가스실에서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주장했었다. 논란이 지속되자 교황의 고국인 독일에서도 해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3일 기자회견에서 “윌리엄슨 주교의 복권에 따른 후폭풍이 강하게 불고 있는데도 교황청이 충분한 해명을 하지 않고 있다.”면서 “교황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부인을 반대한다는 점을 명쾌히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교황청은 이날 성명을 내고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는 완전히 복권되기 전에 자신의 발언을 철회해야 할 것”이라고 진화에 나섰다. 그러면서 교황청은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그의 복권을 승인하기 전 그가 그런 생각을 하는 인물인 줄 몰랐다.”고 해명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영국의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신의 처벌”이라고 주장한 오스트리아 성직자 게르하르트 마리아 바그너도 오스트리아 린츠의 부주교로 승급됐다. 바그너는 카트리나로 동성애자가 많은 미 뉴올리언스 주의 피해가 컸던 것을 염두에 두고 “동성애자에 대한 신의 처벌”이라고 발언해 구설수에 올랐고 “해리 포터가 악마주의를 전파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AFP통신은 오스트리아의 한 성직자의 말을 인용, “교황으로 인해 가톨릭 교회의 이미지가 실추되고 신자가 최근 몇 년 동안 급감했다.”고 비난했다. 교황은 지난 4년 재임기간 ‘극우 어록’으로 공식 사과를 반복해 왔다. 이슬람 교도와 인디언에 대한 비하와 동성애자 혐오 발언으로 진보·인권단체의 거센 반발을 샀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전철聯, 용산농성 초기부터 개입

    용산 재개발지역 화재 참사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수사본부(본부장 정병두 1차장검사)가 전국철거민연합(전철련)이 남일당 철거농성 계획 초기부터 개입, 공모한 정황을 2일 확보했다. 검찰은 용산 4지구 철거민대책위원회 이모(37·구속) 위원장이 지난해부터 전철련이 주도하는 의식화 교육 및 다른 지역 농성에 지속적으로 참여한 사실을 파악했다. 또 이 위원장이 지난달 19일 남일당 건물을 점거하기 전 멀리 떨어진 인천 도화 지역에서 망루 설치를 연습하고, 회원들의 휴대전화를 빼앗는가 하면 화염병과 염산병 등의 제작 준비를 총괄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남경남 전철련 의장 등 전철련 중앙조직이 이번 농성을 주도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점거농성 현장에 함께 있지 않았더라도 인화성 물질을 병에 부어 넣었다면 남 의장은 화염병 사용 등의 처벌에 관한 법률에 의해 처벌받게 된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남일당 점거 직전 사당동 정금마을에서 열린 사전집회에 참여했을 뿐이라 남 의장을 구체적으로 어떤 혐의로 처벌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한편 이날 오후 7시부터 서울 청계광장에서는 신부 등 성직자 130명과 철거민·유족 등 2000여명(경찰추산 400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참사 희생자 추모미사가 충돌없이 끝났다. 앞서 한국기독교협의회(KNCC) 소속 목회자들로 구성된 ‘용산참사기독교대책회의’는 오전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용산참사에 대한 진상규명과 함께 공정하고 책임있는 수사를 할 것”을 검찰에 촉구했다. 기독교대책회의는 오는 5일에는 서울 연건동 기독교연합회관에서 ‘목요기도회’를 열 계획이며, 불교계도 추모법회를 열 예정이다. 유지혜 장형우기자 wisepen@seoul.co.kr
  • 북녘 선교 일꾼 양성 ‘첫 단추’

    통일 후 북한 선교를 본격적으로 담당할 천주교 평양교구 소속 신학생이 처음 탄생했다. 27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에 따르면 2009년 서울대교구 대신학교 합격자 31명 가운데 평양교구 소속 신입생 5명이 포함됐다. 김용찬·오명균·이상희·정길·최치영씨가 그 주인공. 이들은 서울대교구 성소국(국장 고찬근 신부)이 최근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마련한 ‘2009년 서울대교구 대신학교 합격자 감사미사’에 함께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평양교구 신입생 탄생은 1970년 3월 14일 당시 평양교구장 서리인 조지 캐롤 몬시뇰과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이 ‘평양교구 사제단 및 신학생의 서울대교구 입적 약정’을 체결한 이후 무려 39년 만에 처음 있는 일. 평양교구장 서리인 정진석 추기경이 줄곧 강조해온 ‘북녘 선교 일꾼 양성’ 사목방침에 따라 첫 결실을 본 것으로 풀이된다. 서울대교구는 지금까지 평양교구에 소속되어 사제품을 받은 성직자가 서울·부산·청주 교구에서 모두 20여 명 있었지만 대부분 고령으로 은퇴한 채 절반도 안되는 7명이 현직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신입생 탄생은 실질적인 북한 사목에 대비한 예비사제를 처음 낳았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들 신입생은 모두 조부모나 부모 등이 평양교구와 연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북한선교에 관심이 많아 원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가톨릭대 신학과의 입학 정원 증감이 어려운 사정상 일단 인천가톨릭대 신학과에 입학해 신학공부를 하게 된다. 졸업후 사제서품과 서품후 활동은 서울대교구에서 하게 되지만 평양교구가 수복되면 가장 먼저 북한에 파견된다. 평양교구 서리 대리인 황인국 몬시뇰은 “사실상 없어진 평양교구를 서울대교구로 편입해 별도의 평양교구 신학생을 선발하지 않았지만 통일후 북한에서 활동할 사제가 필요한 만큼 북한선교를 위한 사제 양성의 첫 단추를 뀄다.”며 “내년부터 지속적으로 평양교구 신학생을 뽑을 계획”임을 밝혔다.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김성호 선임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33) 중앙대병원 원목사제 소선도 멕시코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신부

    [김성호 선임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33) 중앙대병원 원목사제 소선도 멕시코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신부

    서울 동작구 흑석동 중앙대병원 지하 2층 종교실. 천주교, 개신교, 불교 등 3개 종교의 고만고만한 원목실이 옹기종기 이웃해 들어선 종교실은 비록 병원의 후미진 곳에 있어 일반인들의 관심이 미치지 못하지만 아픈 이들에겐 삶의 위안을 찾을 수 있는 절실한 믿음의 공간이다. 종교에 앞서 아픈 이들을 보듬고, 꺼져가는 생명의 끝자락을 붙잡아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을 이어가는 이들에게 실낱 같은 희망과 안정이라도 심어주기 위해 마음을 나누며 살고 있는 독특한 성직자들. 이 가운데 유일한 외국인인 천주교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소선도(73·본명 호세 산도발·멕시코) 신부는 ‘아픈 사람을 위해 온몸을 던지겠다.’는 서원을 세워 한국 땅을 고집해 살고 있는, 한국 천주교계의 대표적 이방인 ‘원목’ 사제로 꼽힌다. 새해 들어 1주일을 넘긴 날. 신년의 밝은 다짐이며 생기있는 덕담들이 여전히 이어지는 때이련만 아픈 이들과 그 주변 사람들 심정이야 그렇게 밝을 수 있을까. 흑석동 중앙대병원 정문을 들어서 지하 2층 원목실로 향하는 길에서 만난 이들의 얼굴 얼굴은 하나같이 무겁고 어두웠다. 20여년 전 5년여의 암 투병 끝에 요절한 선친의 병 수발을 하느라 병원을 집보다 더 많이 드나들던 절박한 시절의 일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지하 계단을 내리 걸어 다다른 종교실. 맨 앞을 차지하고 있는 천주교 원목실의 문이 살짝 열려 있다. 열린 문 틈새로 얼굴을 들이밀자 순박한 웃음과 함께 멕시코 사제의 커다란 손짓이 기자를 반긴다. 차를 권하며 자리에 앉는 소선도 신부의 뒷벽에 걸린 성경 글귀, ‘당신의 손, 내 위에 있사옵니다.’(시편 139장 5절) 지금은 피정에 드느라 잠시 자리를 비웠지만 늘 노 사제와 함께 아픈 이들의 정신적, 육체적 수발을 들며 살아가는 한국인 수녀가 유난히 좋아해 걸었단다. 순간순간 하느님을 믿고 의지해 따르는, 어쩔 수 없는 그리스도교의 사제인 그가 병원에서 아픈 이들을 만나 풀어가는 인생의 화두는 무엇일까. 선교사의 정해진 소임을 지켜갈 뿐일까, 아니면 나를 죽여 남을 살리는 활인의 휴머니스트인가. 멕시코 멕시코시티 서북쪽 할리스코주의 작은 도시 야와리카 출신. 멕시코 과달라하라의 현직 추기경인 맏형을 포함해 7남5녀 중 넷째로 태어난 소선도 신부, 아니 호세 산도발은 어릴 적부터 남다른 소신이 있었다고 한다.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철저히 나를 버리는 신부로 살아야 한다.’ 피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그냥 걸어 접어든 게 과달루페 외방선교회였고 그 소신의 대상이 바로 아픈 이들이다. 멕시코시티 대신학교에서 철학을 배우고 독일 밤베르크 신학대에서 신학공부를 마친 뒤 사제서품을 받아 곧바로 한국 땅을 밟은 게 1967년이었으니 고향을 떠난 지도 40여개의 성상이 지났다. 과달루페 외방선교회는 국내 일반인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1949년 멕시코시티에서 설립돼 한국에도 1962년 이후 50여명을 파견한 선교회. 주로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미국을 대상으로 활동해 왔으며 현재 한국엔 소선도 신부를 포함해 선교사 20명이 남아 있다. 사제서품 직전 ‘일본과 한국 중 한 곳을 택하라.’는 주문에 이왕이면 어릴 적부터의 소신을 살려 “조금 더 가난한 한국을 선뜻 골랐다.”는 소선도 신부. “이젠 한국도 처음 왔던 40년 전보다는 잘살게 됐으니 더 가난한 나라로 떠나고 싶지만 이곳의 인연들과 소임이 발을 묶는다.”며 웃는다. 과달루페 외방선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앞서 빛을 전한다.’는 선교회의 큰 정신에 맞춰 한국 진출 초창기부터 소록도 나환자촌 봉사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소 신부도 한국 땅에서 사제의 길을 걷기 시작할 무렵 소문만 듣던 소록도서 봉사할 기대에 한껏 부풀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정동 프란치스코회 명도원서 한국말을 1년반쯤 배우고 뜻에선 먼 전남 순천 저전동 본당 보좌신부 발령을 받았고 순천 조곡동 본당 주임을 거쳐 멕시코서 1년간의 수련원장 소임을 마친 뒤 한국에 돌아왔다. 서울 성수동 본당 주임 신부로 있으면서 지금의 자양동 본당을 세운 주인공이기도 하다. 성수동과 자양동 본당 주임시절 가난한 근로자들을 위해 대학생들을 불러 모아 야학을 운영했던 기억도 이젠 빛 바랜 사진처럼 가슴 한 편에 아련하다. “그 시절 가난한 젊은 근로자들과 부대끼며 많은 것을 배웠고 보람도 컸지만 정작 가야 할 길에선 비켜나고 있다는 생각에 안타까움을 떨치지 못했어요.” 신학대 재학시절 틈날 때마다 병원을 찾아 결핵환자며 나병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고통과 아픔을 나누었던 그였으니 원래 가고 싶은 길에서 점차 멀어지는 아쉬움이 오죽했을까. 자양동 본당 주임 시절을 마친 뒤 13년간 한국을 떠나 이런저런 일을 맡아 살면서도 마음은 줄곧 초심을 세운 한국을 향했다고 한다. 멕시코 수련원장 소임, 스위스에서의 선교사 발굴 육성 할동, 이탈리아와 페루에서의 선교, 멕시코 총장 신부의 보좌역인 대의원 활동…. 한국으로 향하는 마음이 워낙 굳었던 때문인지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더란다. 13년 만에 한국 귀환의 꿈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생활은 ‘아픈 이들을 위해 살겠다.’는 원 뜻과 길에선 멀었다. 서울 합정동의 선교회 분원생활을 거쳐 광주 쌍촌동 본당 주임 소임을 마친 뒤 마침내 기회가 왔다. 맡고 있던 쌍촌동 본당 주임을 한국인 신부에게 넘기게 되면서 그토록 원하던 병자, 특히 병원에서 아픈 이들을 돕는 원목신학을 공부하겠다는 뜻을 선교회측에 눈물로 전해 받아들여졌다. 로마 카밀리아눔 대학서 2년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선 뜻대로의 원목 일을 맘껏 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까지 거친 병원의 원목 활동만도 순천 성가롤로병원 원목실장, 국립의료원 원목실장, 건국대병원 원목실장 등 10여년. 이곳 생활은 지난해 3월부터 해왔으니 1년이 채 안 된 셈이다. 숙소인 합정동 선교회 분원에서 이곳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중교통으로 1시간 남짓. 전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걸어서 이른 아침 종교실에 도착하면 우선 전날 밤 새로 입원한 환자 리스트를 꼼꼼히 챙긴다. 병실 환자들에게 나누어줄 각종 기도문이며 환자 머리맡에 걸 예수 그리스도 상본을 복사하고 나면 환자들을 위해 정성어린 기도를 올리고 병실로 향한다. 병실을 돌며 이야기 벗도 해주고 상태가 나빠진 환자들과 가족을 위해 간절한 기도를 나누는가 하면 매일매일 원목실과 소성당에서 미사와 고백성사도 한다. 점심시간 1시간을 빼곤 저녁 5시 병원을 떠날 때까지 꼬박 병실을 돌며 환자들과 만나고 있다. “수많은 환자들을 만나고 헤어졌지만 죽음 앞에서 떳떳하지 못한 채 생의 마지막을 순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을 볼 때 가장 슬프다.”고 말하는 노 사제. “평안한 임종을 맞을 수 있는 마음의 평화와 정화야말로 자신이 세상에서 이끌 수 있는 가장 큰 소임일 수 있으며 임종까지 아픈 이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며 웃는다. 글 사진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소선도 신부는 ●1936년 멕시코 야와리카 출생 ●1967년 독일 밤베르크 신학대 졸업, 사제서품, 한국 선교사로 파견 ●1967~1969년 프란치스코회 명도원서 한국어 공부 ●1969~1978년 전남 순천 저전동 본당 보좌, 순천 조곡동·서울 성수동 자양동 본당 주임 ●1978~1991년 멕시코 수련원장, 스위스·이탈리아·페루 선교, 멕시코 과달루페 외방선교회 총장 신부 대의원 ●1991년 한국 귀환, 서울 합정동 선교회 분원서 생활 ●1992~1996년 광주 쌍촌동 본당 주임 ●1996~1998년 로마 카밀리아눔 대학서 원목신학 공부 ●1998~2006년 순천 성가롤로병원 원목실장, 국립의료원 원목실장, 건국대병원 원목실장●2007년 안식년 ●2008년 3월~ 중앙대병원 종교실서 원목활동
  • ‘명예로운 한국인’ 김수환 추기경

    국민명예협회(대표 김규봉)는 2008년의 ‘명예로운 한국인’에 김수환 추기경을 선정했다고 5일 밝혔다. 협회는 “김 추기경은 가톨릭 성직자로서 시대의 양심과 공동선을 추구하면서 인간 존엄성의 고귀한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가난하거나 병든 사람과 함께 해 국민의 존경과 신망을 받아 왔다.”고 이유를 밝혔다.
  • [열린세상]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최창일 시인·현대시인협회 이사

    [열린세상]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최창일 시인·현대시인협회 이사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박완서 소설가는 어릴 적 맛있게 먹었던 싱아를 그리워한다. 그립다못해서 한 권의 소설이 된다.사람들은 좋았던 시절을 생각하고 그리워한다. 우린 밝고,기쁨과 소망을 주는 사람에게 호감을 표시한다.40대의 젊은 오바마에게 기대하고 많은 표를 안겨준 미국인도 그가 주는 매력이 음울한 시대에 희망과 소망을 가져다줄 야심만만한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교회나 사찰에 들르면 목사님이나 스님은 늘 희망의 메시지를 준다.그래서 사람들은 성직자를 좋아한다.요즘 뜨고 있는 법정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글은 우리들 가슴을 파고든다.최후의 시간에도 아름다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희망하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를 겨냥해서 만들어졌던 ‘달콤한 거짓말’이라는 영화가 있다.거짓말은 나쁜 것이다. 기분 나쁜 말 중의 하나다.그러나 거짓말 앞에 ‘달콤한´ 이라는 수식어에 사람들은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하나같이 밝고 건강한 연기,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비쳐지는 내용의 줄거리기 때문이다.백화점에 가면 물건을 사지 않아도 종업원들은 너무나 친절하다.통로에서 마주치든 주차장에서 마주치든 너무나 공손히 인사한다.그래서 백화점에 있는 시간은 무조건 기분이 좋아진다.주일날 교회에 가도 이런 친절함을 목격한다.교회 입구에서부터 그렇게 공손하게 안내할 수가 없다.단정한 정장에 함박 가득한 웃음으로 맞이한다.마치 무슨 실수를 하여도 괜찮을 것 같은 안심이 든다.이런 분위기가 좋아서 예배시간 30분 전에 가서 마음껏 분위기를 만끽한다는 사람도 있다. 요즘 한창 인기 있는 류장하 감독이 만든 ‘순정만화’가 있다.서른 살 남자와 18세 여고생의 사랑이야기다.순수 시대에 대한 향수를 마음껏 끌어낸 영화다.누구나 순수를 꿈꾸던 시절은 있다.그 순수함은 회복하고 싶은 소망 중의 하나다.시절이 어려울수록 그 순수는 위대한 기억으로 자리한다.요즘처럼 절박한 시대에 순수를 끌어낼 수만 있다면 있는 대로 끌어내도 영화로서도 흥행이 된다는 모범 답안이다. 나이 들어 동창회 나가도 순수한 마음의 친구 옆에 앉고 싶어진다.순수의 친구가 왠지 기분 좋기 때문이다.노래방의 노래 인기순위도 희망과 순수,사랑이 담긴 내용이다.요즘 방송의 인기는 예능프로의 입담이 대세다.하나같이 즐겁고 몸 안 사린 슬립스틱 웃음을 만발하게 한다.연말 크리스마스를 같이 지내고 싶은 남자의 1위는 유재석이다.잘생긴 장동건도 아니다.마음 편하게 유머를 한 움큼씩 던져주는 예능프로의 고수를 사람들은 선택한다.유재석이 선택받는 이유는 출연진을 돋보이게 감싸는가 하면 동반진행자의 부자연스러운 진행까지 껴안고 간다는 것 때문이다.터무니없는 호통개그로 알려진 박명수도 유재석의 띄워주기 진행의 덕을 톡톡히 본다는 평도 있다.여자 예능인으로는 신봉선이 1위를 차지했다.그녀는 미모의 배우도 아니다.우리에게 편하고 친근함으로 골목 어귀에서라도 마주칠 것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선호의 이유다.거기에다 앙큼,엉뚱한 재치까지 넘나듦이 매력이란다. 살아가며 가끔 당신에게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요?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다시 만나고 싶은 주변의 사람들이라고 대답하곤 한다.그렇다. 혈관 속으로 흐르는 온기가 느껴지는 사람,가슴과 가슴이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진 사람,삶의 어려운 조건하에서도 아무런 조건 없이 우리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기에 웃을 수 있는 이유가 되는 사람들,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바로 그런 것이다. 사람들은 경험한 것에 대한 추억을 끌어당기는 본능을 가졌다.아름다운 사람을 만날 때,나는 너를 경험하는 것이다.희망과 설렘의 새해,우린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된다. 최창일 시인·현대시인협회 이사
  • [환경&에너지] ‘미래형 생태 도시’ 핀란드 에코 비키

    [환경&에너지] ‘미래형 생태 도시’ 핀란드 에코 비키

    |헬싱키(핀란드) 이도운기자|2008년 12월 1일 오전 10시.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헬싱키 시청 앞에서 버스를 타고 동북쪽으로 35분쯤 달리니 대학과 연구소가 밀집한 과학공원(Science Park)이 나타났다.이 과학공원의 바로 옆에 핀란드가 자랑하는 미래형 생태도시 에코 비키(Eco-Viikki)가 자리잡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 가물가물하게 바다 냄새가 느껴졌다.헬싱키와 마찬가지로 비키도 발트해와 마주한 도시다.역시 바다의 영향 때문인지 한겨울이었지만 큰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물 풍부한 나라 불구 곳곳에 빗물 저장  에코 비키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공동주차장이 자리잡고 있었다.헬싱키 시청 경제기획센터에서 비키 주택개발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헤이키 린느는 “에코 비키 안으로는 자동차가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했다.  마을 안쪽으로 들어설 때 린느와 함께 일하는 프로젝트 엔지니어 이나 리예스트롬이 살짝 우산을 씌워줬다.리예스트롬은 “미래의 도시는 자연과 함께 하는 도시”라고 말했다.  에코 비키는 자연을 최대한 살리면서 조성한 마을이다. 마을 안에 자연 그대로의 실개천이 흐르고 주변의 슾지도 원래대로 보존돼 있다.곳곳에 설치된 수동 펌프로 물을 길어올려 정원과 텃밭을 가꾸는데 사용한다.핀란드는 나무와 돌,물이 풍부한 나라다.그런데도 빗물을 저장해 쓸 정도로 물을 아낀다.아끼기 때문에 풍부한 셈이다.  마을 안의 집과 놀이터,공동시설들을 이어주는 길은 포장이 된 곳도 포장이 되지 않은 곳도 있었다.  에코 비키의 주택에는 태양광 패널이 설치돼 있고 집안에 나무 조각을 때는 작은 난로도 있다.또 열 손실을 최소화하는 공기정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에코 비키의 집들은 크고 화려하지 않았지만,작고 누추하지도 않았다.개인주택이나 공동주택이나 모두 주변 지역에서 채취한 돌과 나무로 담담하게 지어졌다. ●주변서 채취한 돌·나무가 주택 재료  미래의 도시는 영화 스타워즈나 제5원소에 나오는 것처럼 4킬로미터짜리 고층 빌딩 사이를 소형 자가용 비행기들이 컴퓨터 음을 내며 날아다니는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코 비키의 전기 및 난방의 주요공급원은 지역열병합 발전이라고 한다.독일의 생태마을이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핀란드의 생태마을은 환경쪽에 좀더 중점을 두는 편이었다.  에코 비키는 초원과 숲,호수,목장으로 둘러싸여 있다.전체 면적 1132헥타아르 가운데 주택과 도로가 292헥타아르를 차지하고,나머지 840헥타아르는 스포츠 및 레크레이션 공원 및 자연보전지역이다.  린느와 리예스트롬은 에코 비키의 건축물을 대표하는 비키 교회로 기자를 안내했다.에코 비키 북쪽에 자리잡은 비키 교회는 마틴루터교를 믿는 대다수 주민들의 종교활동 공간이기도 했지만 부모가 영아나 어린이들에게 환경을 가르치는 교육 공간이기도 했다.비키 교회는 나무로만 지어진 건물이다.내부에는 전나무,외부에는 아스펜 나무가 사용됐다.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상큼한 나무 냄새가 났다.놀랍게도 교회 내부는 물론이고 외부에도 어떤 화학물질이나 첨가제를 바르지 않았는데도 광택이 나고 벌레도 꼬이지 않는다고 한다.청소를 쉽게 하기 위해 바닥에 왁스를 바르는 것이 전부라고 한다.  비키는 새로 조성된 도시가 아니다.비키는 1550년에 성직자의 마을로 탄생했고,한때 헬싱키의 중심지역이었다.그러나 스웨덴과 러시아가 핀란드를 점령한 시절 현재의 헬싱키 도심이 중점적으로 개발됐다.이에 따라 비키는 오랜동안 국유지 농장으로 현재의 생태환경을 유지해올 수 있었다. dawn@seoul.co.kr 후원: 한국언론재단, 환경재단 기후변화센터
  • 천주교 성탄절 맞아 다양한 성찰과 나눔의 행사

    천주교 성탄절 맞아 다양한 성찰과 나눔의 행사

    성탄절을 맞아 천주교 수도회가 수도원 공간을 일반에 개방,색다른 체험을 선사한다.수도원 체험 행사들은 대부분 예수 탄생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나를 겸허하게 돌아보는 기도와 피정(避靜)이 주류를 이룬다. 소외된 이웃을 찾아가는 자선 행사들도 줄을 이을 전망이다. ●수도원서 새기는 성탄 의미 천주교는 아기 예수의 탄생일에 앞서 4주간의 대림(待臨) 시기를 보낸다.성탄을 기다리는 준비 시간이며,희망의 시기인 대림기에 신자와 성직자들은 죄를 회개하는 보속의 시간을 갖는다.올해 대림기에 수도회들이 마련한 대림·성탄 피정들도 대부분 수도원 전례 체험을 통한 성찰과 반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 청년 대림 피정 전교 가르멜 수녀회와 포교 성 베네딕도수녀회 대구 수녀원은 청년들만 대상으로 하는 피정을 마련해 눈길을 끈다.전교 가르멜 수녀회가 20일 오후 6시~21일 오후 3시 영성의 집(02-737-7765)에서 진행하는 ‘기다리는 마음’ 행사는 성모 마리아의 삶과 태도를 통해 성탄을 기다리는 자세를 생각해 보는 자리.침묵 기도와 개인 묵상을 통해 각자의 위치와 상황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 것인가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 수녀원이 24~25일 피정의 집(053-313-3431)에서 여는 성탄 전례 피정도 젊은 남녀가 대상.피정 참가비는 북한 어린이 돕기 기금으로 전액 기부한다. # 수도자들과 함께하는 성탄 전례 피정 평소 쉽게 만날 수 없는 수사,수녀와 대림·성탄을 함께 보내는 것도 특별한 경험일 터.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은 경북 왜관 본원 피정의 집(054-971-0722)과 서울 분원(02-2273-6394) 두 곳에서 ‘수도자와 함께하는 성탄 전례 피정’을 마련한다.왜관 본원은 23~25일의 2박3일,서울 분원은 24~25일의 1박2일 일정.수도회 수사들과 함께하는 예수 성탄 대축일 미사와 기도,강의로 짜여진다. # 성탄 신비 묵상 기도와 묵상 시간을 별도로 갖지 못하는 신자들이 성탄 맞이 피정을 통해 신앙생활을 반성하고 마음가짐을 다잡기 위한 행사들.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이 23~25일 부산 분도 명상의 집(051-582-4573)에서 마련하는 신비 묵상은 개인 신앙생활 상담과 지도신부 강의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수도자들과 함께하는 기도 및 성탄 전례가 있다.성 도미니코 선교 수녀회가 24일 오후 6시~25일 오후 3시 횡성 피정의 집(033-343-0201)에서 여는 ‘내 삶으로 오시는 임마누엘 주님’ 행사도 일반인이 수도원 전례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전례 위주의 성탄 행사에서 탈피,성경에 나타난 예수 탄생의 의미를 되새기는 점이 특이하다. ●이웃과 함께하는 따뜻한 성탄 축제 경제 불황 탓에 늘어나는 어려운 이웃을 위한 성탄,세밑 자선행사가 예년과 달리 매우 풍성하다(표 참조).천주교 관련 단체와 선교회들이 구치소며 외국인 공동체,소년의집,노인복지관들을 찾아가 마련하는 나눔의 자리.한마음한몸운동(02-727-2263)과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24일 오후 8시 명동 가톨릭회관 앞 주차장에서 ‘이웃과 함께하는 따뜻한 성탄축제’를 여는 것을 비롯해 바오로선교회의 ‘장애인을 위한 성탄 미사’,사회교정사목위원회의 성동구치소 성탄미사 등 다양한 나눔행사들이 연말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김성호 선임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31) 원불교 영산선학大 미하일 아브데예프 예비교무

    [김성호 선임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31) 원불교 영산선학大 미하일 아브데예프 예비교무

    전남 영광군 백수읍 길용리의 영산성지는 원불교 으뜸 성지.창교자인 소태산 박중빈(1891~1943)의 탄생가며 구도처,대각지,그리고 초기 9인 제자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원불교 교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이 영산성지 오른 편에 우뚝 선 영산선학대학교는 원불교 성직자인 교무가 될 꿈을 키우는 예비 교무들이 밤낮 몸과 마음 다스리기에 열중한 채 교리와 마음 공부를 익히는 원불교 교육기관.전북 익산의 원광대 원불교학과와 함께 교무 육성기관으로선 쌍벽을 이루는 4년제 원불교 전문대학으로 현재 27명이 수업을 받고 있다. 이 가운데 유일한 외국인 학생인 미하일 아브데예프(34·한국명 원신영·러시아)는 모스크바 대학서 화학을 전공한 박사 출신.모스크바의 원불교 교당을 찾았다가 출가,“제대로 된 원불교 교전을 번역해놓겠다.”는 야무진 꿈을 키우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고 있다.손이 시릴 만큼 쌀쌀한 날 해거름,총총걸음을 옮겨 찾아간 영광 영산선학대 교정에서 원불교 정복 차림으로 합장한 채 기자를 맞은 미하일 아브데예프.아직은 교리를 공부하는 학생 신분이어서일까,긴장한 낯빛이 역력하다.꼿꼿한 자세로 자신을 소개하는 예비 교무의 양 손목을 감고있는 시계가 퍽 인상적이다.시계를 흘깃흘깃 쳐다보는 기자의 눈길을 알아챈 이방인이 “매일 매일 마음 공부와 수행의 잘잘못을 재는 유무념 시계”라며 웃는다. 선(禪)을 공부하는 데 시간과 장소가 따로 없다는 ‘무시선 무차선’ “어느 때 어느 장소에 있건 끊임없이 ‘나’를 챙겨 찰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푸른 눈의 원불교 예비 교무와의 만남은 그렇게 무시선 무차선으로부터 시작됐다. “일어나는 모든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선(禪)의 기본은 모든 생각을 통제하는 것입니다.업장을 소멸시키고 고치는 수행이라면 굳이 앉아서만 할 필요가 있을까요.수행이 잡념을 버리고 일심을 키우는 목적이라면 일상 생활을 버려 산중을 택할 까닭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지난 1월 한국에 와 3월부터 선학대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으니 본격적인 원불교 교리 공부를 한 지는 9개월째.짧은 공부 이력이지만 기자에게 들려주는 원불교 교리며 수행론이 녹록지 않다.인터뷰 내내 “할 일이 따로 있다.”며 거듭 입에 올리는 목표는 바로 원불교 경전인 교전을 러시아어로 완벽하게 번역해놓겠다는,단순 명료한 작업이다. 원불교 교전 번역이 꿈일 바에야 굳이 출가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종교는 과학적인 이론을 갖추지 못한 허황된 믿음일 뿐´이라는 관념에 충실했던 과학도가 한국의 군소 민족종교에 빠져살게 된 속내가 몹시 궁금해진다.옆에 앉아 인터뷰를 묵묵히 지켜보던 한 교무가 나지막한 소리로 귀띔한다.“어릴 적부터 가부좌 틀기를 좋아했다고 해요.원불교에서 말하는 이른바,전생인연이지요.” ‘전생 인연’ 교무의 말마따나 아브데예프가 원불교와 맺은 인연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옛 소련 남우랄 지역인 첼랴빈스크에서 태어난 아브데예프는 철도회사 기술자인 부모의 영향을 받은 때문인지 화학에 천재적인 소질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고등학교 시절 이런저런 화학 올림피아드의 모든 상을 휩쓸었다.모스크바 국립대 화학과와 러시아과학원 석유화학합성연구소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쳐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모스크바 근교 트로이스크의 레이저정보연구소에 스카우트돼 5년여간 일등 연구원 생활을 했다.피할 수 없는 운명일까.언어에도 관심이 많았던 대학 졸업반 시절 20개 언어에 능통한 친구로부터 ‘한국어를 배울 수 있다.’는 꼬임에 빠져 찾은 게 원불교 모스크바 교당 한국어학교.당시 모스크바에는 한국 교회가 20여개 있었지만 종교에 거부감이 컸던 만큼 믿음을 권유하는 종교시설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싶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모스크바에선 유일한 원불교 교당을 처음 찾았을 때만 해도 ‘종교색’에의 의심이 적지 않았지만 한국인 교무의 말,행동이 남달라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수행하던 중 결국 부처님오신날 교인들 앞에서 출가의 뜻을 밝혀 귀의했다. “처음 접한 원불교 모스크바 교당의 분위기는 분명 종교와는 멀었어요.철저하게 실천을 고집한 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는 성직자의 사는 방식과 말들은 제가 알고 있던 종교인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지요.” 교무의 말에서 모순을 찾기 위해 직접 실행해보고 잘못을 찾아내려 했지만 날이 갈수록 스스로 빠져들기 시작했다고 한다.신앙보다는 한 성직자의 실천행과 ‘나’와 ‘남’을 가리지 않는 인간적인 모습에서 감화를 받은 셈이다. 그때부터 불교 서적을 찾아 혼자 공부를 시작했고 특히 헤르만 헤세의 ‘고타마 싯다르타’를 비롯해 ‘선불교의 공안 모음집’‘티베트 불교’같은 책에서 내생,후생의 사상을 알고 윤회에 눈뜨기 시작했다고 하니 원불교 교무가 그의 모습에서 ‘전생인연’을 떠올릴 만도 하다. 대학 졸업반 때 우연히 맺은 원불교와의 인연은 대학원,연구소 시절을 거쳐 한국에 들어오기까지 14년.원불교 교당을 드나들며 모스크바에서 이룬 업적도 적지않다.한국인 교무의 법문을 러시아어로 통역하면서 한국인 교무와 함께 러시아인을 위한 한국어 교재 3권을 4년여에 걸쳐 펴냈고 소태산 대종사가 직접 쓴 교전인 정전도 4년간에 걸친 작업 끝에 번역해놓았다.한국어 교재는 주러 한국대사관서 요청한 프로젝트.지금은 러시아 중·고교는 물론 대학들이 채택해 쓰고 있고 얼마 전부터 국내 대형 서적에서도 팔고 있다고 한다. “한국어 교재와 정전을 만들고 번역하면서 출가의 뜻을 굳혔던 것 같아요.” 2005년 많은 러시아 현지인들과 한국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결국 출가 서원을 했고 2년간 현지에서 행자 기간을 거쳐 “한국에서 교무로 살겠다.”며 지난 1월 한국행을 결정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한국어를 배우려 교당을 찾았지만 결국 부족한 나 자신을 메워줄 수 있는 길을 찾아나섰던 것 같아요.” 모자란 ‘나’를 채우기 위한 수행의 방편으로 신앙을 시작했지만 갈수록 남을 위한 제중(중생제도)에의 뜻이 커진다는 푸른 눈의 예비 교무.“한국 말은 알아듣지만 말 마디 마디에 담긴 깊은 뜻인 말귀까지는 아직 서툴다.”며 나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한 원불교 경전 번역에의 의지를 다진다. “한국인,한국문화와 어울리면 어울릴수록 그냥 한국인이 좋고 한국 문화가 편해져 전생에 한국 사람이었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는 그는 어차피 출가한 만큼 원불교 최고의 성직자인 ‘갑종 전무 출신’이 될 수 있도록 거듭 거듭 기도한다고 한다.나의 모든 몸과 마음을 철저하게 바쳐 수행과 대중 교화에 매진한다는 원불교의 모범적인 출가자 ‘갑종 전무 출신’. “파란 고해의 일체 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려 함이 그 동기니라” 불쑥 찾아왔다 불쑥 떠나는 객에게 정색하고 들려주는 원불교 정전 제1 총서 ‘개교의 동기’편.“아마추어가 아닌 전문가의 식견으로 제대로 된 원불교 교전을 꼭 번역해내겠다.”는 소신이 언제쯤 이루어질 수 있을까. 영광 글 사진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미하일 아브데예프는 ●1974년 옛 소련 첼랴빈스크 출생 ●1995년 원불교 모스크바 교당 한국어학교서 원불교와 첫 인연 ●1996년 모스크바 국립대 화학과 졸업 ●1998년 원불교 귀의 ●2001년 러시아과학원 석유화학합성연구소 박사학위 ●2001~2005년 트로이스크 레이저정보연구소 연구원,러시아인을 위한 한국어 교재 3권 발간 ●2004~07년 원불교 정전 번역 ●2005년 원불교 모스크바 교당서 출가 서원 ●2008년 1월 한국 입국 ●현재 전남 영광 영산 선학대학교 3학년 재학
  • [25일 TV 하이라이트]

    ●러브 인 아시아(KBS1 오후 7시30분) 직접 농사지은 무공해 재료만 고집하는 카르멘 가족의 식당.이곳 별미는 도미니카 전통 음식인 통돼지 바비큐인데,영동대표로 요리대회에 나갈 만큼 최고의 손맛을 자랑하는 카르멘.한국에서 6년,도미니카에서 6년을 보내고 한국에 다시 돌아왔다는 이들.20년을 동고동락한 카르멘 가족을 만나본다. ●아침드라마 아내와 여자(KBS2 오전 9시) 희수와 종미는 연하와 가까워질 수 없다는 사실에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태환은 종미와 가까워하지 말라며 희수에게 충고하지만, 오히려 희수는 더 이상 걱정해주지 말라며 차갑게 응대한다.한편,여진으로 인해 병원을 들락거리는 자경.아름이를 창하에게 맡겨야 하는 것이 만중은 불만이다. ●그 분이 오신다(MBC 오후 7시45분) 자신의 취미가 뭔지 몰라 매일 저녁 술이나 마시던 문식은 ‘돌아이바’ 광고 속 영희를 이용해 만든 우스꽝스러운 합성물들을 보게 된다.한편,재용은 민지가 자리를 비우고 커피 프린세스에서 혼자 일하는 사이 매상이 떨어지자,만수와 진상의 4차원적인 도움을 받아가며 커피를 팔기 위해 애쓰는데….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SBS 오후 6시30분) 태어나서 하루도 울지 않은 적이 없다는 새봄이.생글생글 ‘미소걸’이다가도 순식간 돌변,울음떼를 쏟아내는 못 말리는 새봄이.특기는 마트에서 오줌싸기,얼굴 쥐어뜯기는 취미.쑥스럼쟁이를 가장한 3살 꼬마의 두 얼굴.제멋대로 천하무적 떼쟁이 새봄이는 전문가의 도움으로 달라질 수 있을까? ●다큐 인(EBS 오후 10시40분)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도 잠시.김순경은 또 다시 출동이다.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는 바다.묵묵히 우직하게 기꺼이 바다의 파수꾼을 맡아준 사나이 김순경.가족들이 살고 있는 제주.제주 앞바다를 지키는 것이,그에게는 가족을 지키는 것도 같다.그는 오늘도 가족을 위해,바다를 지키기 위해 출동한다. ●세계 세계인(YTN 오전 10시30분) 천주교도가 전체 인구의 99%를 차지하고 있는 스페인.스페인의 바달로나에는 아직도 많은 이슬람 교도가 살고 있는데,이슬람 교도의 수가 증가하면서 더 큰 규모의 모스크를 지으려 노력하고 있다.한 이슬람 성직자는 유럽국가들처럼,스페인에서도 이슬람교도에게 모스크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마이클 잭슨, 이슬람교로 개종

    팝스타 마이클 잭슨(50)이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이름도 미카엘로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여호와의 증인’ 신도로 성장한 잭슨은 최근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친구 집에서 무슬림으로 개종하는 의식을 가졌다고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 ‘더 선’이 21일 보도했다. 잭슨은 이슬람 성직자 이맘이 의식을 집전하는 동안 이슬람 의상을 입고 코란에 맹세를 했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잭슨은 ‘드릴러’ 앨범 작업에 참여했던 키보드 주자 스티브 포카로의 집에서 새 앨범을 녹음하다 개종의식을 치렀으며, 이슬람교로 개종한 작사가 데이비드 완스비와 프로듀서 필립 부발로부터 조언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연합뉴스
  • [김성호 선임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29)꼰솔라따 선교수도회 강 디에고 신부

    [김성호 선임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29)꼰솔라따 선교수도회 강 디에고 신부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옥길동 644-2,‘위로의 샘터’는 독특한 공간이다. 천주교 꼰솔라따 선교수도회 공동체겸 종교간 대화의 장. 꼰솔라따 선교회 수도회 소속 외국인 신부 2명이 머물며 종교와 사상을 가리지 않는 대화와 사랑의 나눔을 실천해 뭇 종교인과 세상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강 디에고(52·본명 디에고 카촐라토) 신부는 이곳 공동체를 천주교에 국한하지 않는 열린 공간으로 이끌고 있는 주인이자 꼰솔라따 선교수도회 한국지부장을 맡고 있는 선교사. 한국에 나와 있는 꼰솔라따 선교사 10명의 대표이면서 요란하게 드러나지 않는 나눔과 배려의 선교를 몸으로 보여주는 맘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이다. 산 밑 단층 건물 두 채가 고즈넉이 앉은 ‘위로의 샘터’의 문을 열자니 산 아래 병풍처럼 둘러선 울창한 나무들이 객을 맞는 인사라도 하듯 낙엽을 우수수 쏟아낸다. 한꺼번에 떨어지는 낙엽 소리가 영락없는 빗소리이다. 얼핏 보기에도 사람 좋은 이웃집 아저씨인 신부가 웃는 얼굴로 반색을 한다. 헐렁한 옷차림과 꾸밈 없는 얼굴빛이 흔히 마주치는 선교사의 행색과는 멀어 그냥 편하다. 에스프레소 커피 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인사를 나누자니 오랜만에 만나 묵은 얘기들을 털어놓는 친구처럼 다가온다. ●伊 본토인 꼰솔라따 선교수도회의 한국 개척자 처음 본 손님을 앞에 두고도 이어지는 격의 없는 몸 놀림과 말투. 무슨 말을 꺼내도 막힘 없이 척척 받아낸다. 몸에 밴 열린 신앙의 발로이려니 생각하니 선교사로 한국에 온 까닭이 궁금해진다.“아픈 사람은 누가 곁에 있어 말을 들어주기만 해도 위안이 되지요.” ‘하느님의 종’이 되기를 서원하고 한국을 택해 아픈 사람들과 살아가기를 올해로 20년째.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아픈 사람들에게 다가가 나누고 베푸는 이 푸른 눈의 사제가 한국에서 찾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 뜬금없는 물음에 빙그레 웃더니 곁에 있던 성경을 집어 든다.‘온갖 무거운 짐과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히브리서 12장) 성경 구절을 한자 한자 손으로 짚어내던 끝에 “지난 2004년 사제서품 25년인 은경식 때 택한 것”이라며 자신의 삶이라고 귀띔한다. 그가 꾸준히 달리고 달릴 길의 끝은 어디일까.“사람이 사는 이유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지요. 지금 제가 살아가는 길도 어찌 보면 사제서품을 받을 때의 다짐에서 많이 벗어나 있지요. 하지만 이 길도 하느님이 가리킨 손 끝에 있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위로자이신 성모 마리아’라는 뜻을 품은 꼰솔라따 선교수도회는 1901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창설돼 주로 유럽과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에서 활동했던 외방선교회. 한국에는 1988년 이탈리아, 스페인, 브라질, 콜롬비아 출신 선교사 4명이 들어온 게 시작으로 그때 한국 땅을 밟은 초대 선교사 가운데 지금은 강 디에고 신부만 남아 있다. 베니스 북쪽, 인구 5000명의 작은 마을 출신인 디에고 카촐라토는 어릴 적부터 소신학교를 다니며 사제를 꿈꾸었다고 한다. 사제가 되고 싶어 런던 선교대학(MIL)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서품을 받아 콜롬비아와 스페인에서 성소자 교육 사목을 하다 한국에 꼰솔라따 선교수도회가 생기면서 곧바로 파견됐으니 꼰솔라따 수도회에선 한국 개척자인 셈이다. 인천 교구 소속으로 한국에 온 까닭에 처음 한국 생활은 인천 근처 역곡에서 시작했다. 전셋집에 다른 사제들과 함께 살면서 만석동 달동네 주민들을 찾아 만나기 시작했다. 철로 옆에 있다고 해서 ‘기찻길옆 공부방’이라 이름 지은 공부방에서 어린이들 공부를 가르치고 의지할 이 없는 노인들에겐 자식처럼 이야기를 들어주고 아픈 이들은 병원엘 데려가고…. 그렇게 2년여를 살다가 달동네가 재개발되는 바람에 떠날 때 아쉬워하는 주민들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위로의 샘터´는 주민·종교인들 간 소통의 장 만석동 달동네를 떠나 역곡 꼰솔라따 수도회 본부 생활을 하면서도 서울 양재동 비닐하우스촌에서 공부방을 운영하며 주민들과 부대끼며 살았다. 그러던 중 로마 본부의 부름을 받아 3년간 신학생 교육 일을 맡았지만 내내 한국의 일이 머릿속에 맴돌아 아주 불편했다. 당초 6년 동안 로마에 머물기로 예정됐지만 “한국에 돌아가겠다.”는 다짐이 강했던 때문인지 한국 지부로부터 ‘돌아오라’는 연락이 별안간 와 뛸 듯이 기뻤다고 한다. 2002년 한국에 다시 온 뒤 줄곧 이곳 ‘위로의 샘터’에 머물며 주민들끼리 어울리고 이웃 종교인들이 만나도록 주선하는 소통의 주인으로 살고 있다.‘위로자이신 성모마리아’. 꼰솔라따 수도회의 이름에서 ‘위로’를 따고 원래 집터에 샘이 있었다고 해서 붙인 게 ‘위로의 샘터’.“내가 있어 주민들이 위로를 받고 모든 종교인들이 함께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는 공간이란 소망을 담았어요.” 그 소망대로 인근 보광사며 온수역 근처 원각사, 개신교 교회들을 찾아 어울리다 보니 불교 신자와 개신교 신도들이 하나둘씩 ‘위로의 샘터’를 찾아들었고 지금은 교회, 성당, 사찰, 원불교 교당에서 이런저런 신행 모임을 갖는 명소가 되었다. 모임이 열릴 때마다 강 디에고 신부는 인기 있는 초대손님으로 동참한다. 지금은 뜸하지만 2년 전까지 불교, 개신교, 천주교, 원불교, 천도교, 유교의 예비 성직자 모임인 ‘평화고리’가 단골로 모였던 곳으로도 이름 높다. 한국 종교계에선 드문 종교간 대화에 앞장서다 보니 이름이 알려져 지금은 천주교 주교회의 종교간 대화위원회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 개신교, 천주교 신학자들의 소통을 주도하고 있으며 내년 1월 ‘그리스도인 일치 기도주간’의 주제문와 활동내용도 직접 정한 주인공이다. 강 디에고 신부가 택한 주제문은 기도주간 중 교황청을 통해 전 세계에서 공통으로 쓰게 된다. 지난 2월부터는 스님과 원불교 교무를 비롯, 수도생활을 하는 각 종교인들이 영적인 체험을 나눌 수 있는 모임을 이곳에서 주선하고 있다. ●“상대방 영적체험까지 나눌 때 종교간 대화 성숙” “한국에서도 종교간 대화에 관심이 늘고 있지만 대부분 형식적인 만남에 머물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진정한 대화는 종교계 대표들끼리 만나 그저 미소 짓고 헤어지는 게 아니라 밑바닥 신도들끼리 허물없이 어울리고 나누는 만남에서 시작돼야 합니다.” ‘위로의 샘터’에서 흔히 이루어지는 이웃 종교의 만남에서도 신자들 간의 두터운 벽을 여지없이 실감한다는 강 디에고 신부.“내가 체험하는 영적인 체험까지 다른 종교의 신앙인들과 나누고 소통할 때 종교간 대화는 성숙해진다.”고 거듭 말한다. “선교사로 가는 곳마다 가장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내 일”이라는 사제. 지난해 10월 동두천에도 작은 공동체를 마련, 외국인 근로자들이며 새터민들의 정착과 안정을 돕고 있다고 한다. “차오.” ‘위로의 샘터’를 나란히 나서던 신부가 외마디 인사말을 건넨다.‘잘 가라. 다시 만나자.’는 이탈리아 인사말. 덩달아 “차오.”로 인사를 돌려주자 빙그레 웃더니 한마디를 보탠다.‘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차오의 큰 뜻이지요. 진정으로 나를 낮출 때 모든 이들이 위로받고 더욱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요.”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 강 디에고 신부는 ▲1956년 이탈리아 비아데네 출생 ▲1972년 꼰솔라따 선교수도회 입회 ▲1977년 런던선교대학(MIL) 졸업 ▲1979년 사제서품 ▲1979~1987년 콜롬비아, 스페인 사목 ▲1988년 한국 파견 ▲1992~1993년 인천 만석동 사목 ▲1993~1999년 역곡 꼰솔라따 선교수도회 본부 사목 ▲1999~2002년 로마 꼰솔라따 본부 근무 ▲2002년~‘위로의 쉼터’에서 종교간 대화 주도 ▲2007년 동두천 공동체 건립, 외국인 새터민 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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