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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독 한국을 아낀 교황… 세월호 유가족 손잡고 “가슴 아프다”

    유독 한국을 아낀 교황… 세월호 유가족 손잡고 “가슴 아프다”

    즉위 이듬해 첫 亞 방문지로 선택분단·위안부·산불 등 자상한 관심한국인 추기경 2명 인선 등 배려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유독 한국을 아낀 교황으로 꼽힌다. 한반도 평화 문제부터 최근 경북 일대 산불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세심하고 자상한 관심을 보였다. 즉위 후 첫 아시아 방문지로 한국을 선택했고, 2027년 세계청년대회(WYD) 개최지로 서울을 결정하면서 두 번째 방한을 약속하기도 했으나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처음 방한한 건 즉위 이듬해인 2014년 8월이다. 전임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이후 약 25년 만에 한국을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은 평화와 위로, 화해의 메시지로 깊은 울림을 안겼다. 교황은 한국에 머무는 4박 5일간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장애인 등 고통받는 이들을 보듬는 행보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무엇보다 검소하고 소탈한 모습이 우리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의전 차량으로 초대형 방탄차가 아닌 기아차의 1600㏄급 소형차 ‘쏘울’을 이용한 것도 깊은 인상을 안겼다. 방한 내내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의 상징인 금목걸이 대신 20년간 착용한 철제 십자가 목걸이를 했다. 낡은 구두를 신고 오래된 가죽 가방을 직접 들었다. 당시 교황청에서 사전 공문을 통해 환영 행사를 간소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박근혜 정부가 화동에 예포까지 쏘면서 성대한 환영식을 준비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남 서울공항 도착 직후 마중 나온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족 4명의 손을 잡고 “가슴이 아프다.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있다”며 위로했다. 광복절에 대전에서 열린 성모승천대축일 미사 때는 세월호 유가족에게 받은 노란 리본 배지를 왼쪽 가슴에 달았다. 방한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전세기 안에서도 교황은 선물 받은 배지를 그대로 착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교황은 당시 전세기 안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 “이분들은 이용당했고 노예가 됐고 그것은 잔혹한 일이었다”면서 “그들은 고통을 겪었음에도 인간적인 품위를 지니고 있었다”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충북 음성의 꽃동네를 찾아갔을 때는 의자에 앉으라는 거듭된 권유에도 장애인들과 함께하는 50여분 내내 서 있었다. 당시 78세였던 교황은 체력적인 부담에도 장애인 한 명 한 명에게 따스한 눈길을 보내며 소통했다. 성직자 인선에서도 교황은 한국을 배려했다. 한국인 추기경은 그간 4명 배출됐는데 그중 2014년 염수정(82) 추기경, 2022년 유흥식(74) 추기경 2명을 프란치스코 교황이 임명했다. 특히 유 추기경은 2021년 6월에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으로 전격 발탁되기도 했다. 교황은 분단된 한반도의 평화도 염원했다.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해 직접 북한을 방문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피력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 가난한 자의 성자, 교황 프란치스코 1936.12.17~2025.4.21

    가난한 자의 성자, 교황 프란치스코 1936.12.17~2025.4.21

    2013년부터 12년간 14억 가톨릭 신자를 이끈 프란치스코 교황이 21일(현지시간) 88세로 선종했다. 2000년 넘는 가톨릭 역사에서 가장 개혁적인 교황이라는 평가를 받은 그는 동성애 커플에 대한 가톨릭 사제 축복을 승인하는 등 소수자를 끌어안고자 노력했다. 이날 교황청 궁무처장인 케빈 패럴 추기경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늘 아침 7시 35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셨다”고 발표했다. 패럴 추기경은 “그는 삶의 전체를 주님과 교회를 섬기는 데 헌신했다”며 “우리에게 신앙과 용기, 보편적 사랑으로 복음의 가치를 실천하며 살아가라고 가르쳤다. 특히 가장 가난한 이들과 가장 소외된 이들을 지지했다”고 밝혔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도 “평생 복음과 사랑을 실천하신 교황님께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기도한다”며 “우리는 그분을 떠나보내지만 복음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이어가야 한다”고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때 아버지가 일하던 양말공장에서 청소와 사무보조를 맡았다. 공업학교에 진학해 오전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오후엔 학교에서 식품화학을 공부했다. 교황의 소박한 삶과 검소한 정신은 이때부터 몸에 밴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성요셉 신학교에서 공부해 사제 서품을 받고 2001년 추기경에 서임됐다. 2005~2011년 아르헨티나 주교회의 의장을 지냈다. 프란치스코는 사제가 되기 전부터 아르헨티나 빈민촌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마약을 유통하는 마피아가 있어 치안이 미치지 않았다. 총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봉사활동을 이어 갔다. 추기경이 된 뒤에도 빈민촌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교황에 선출되자 아르헨티나에서는 ‘빈민가의 교황’이 나왔다고 기뻐했다. 사제 되기 전부터 빈민촌 봉사활동여성 세족식·동성애 포용 등 진보적올해 초 건강 악화로 입원했다 퇴원2013년 베네딕토 16세가 건강상 이유로 교황직에서 스스로 물러나자 266대 교황에 선출됐다. 당시 언론들은 그가 기록한 여러 ‘최초’ 타이틀에 주목했다. 첫 아메리카대륙 출신 교황이자 첫 예수회 출신 교황,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을 사용한 첫 교황이었다. 시리아 출신 그레고리오 3세 이후 1282년 만에 탄생한 비(非)유럽권 출신 교황이기도 했다. 취임 뒤 그의 행보는 ‘파격’의 연속이었다. 2013년 로마 인근 소년원에서 소년원생 12명의 발을 씻겨 주는 세족식을 진행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두 명은 여성, 두 명은 무슬림이었다. 가톨릭 남성만을 대상으로 했던 세족식 관습을 과감히 깼다. 美·쿠바 국교 정상화에 결정적 기여러·우크라, 이·팔 전쟁 중단 목소리트럼프 반이민 정책에도 반대 표명같은 해 방송 기자회견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포용적 시각도 드러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동성애자가 선한 의지로 신을 찾는다면 누가 그를 심판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가톨릭 내 보수세력은 동성애를 금지하는 교리와 배치된다며 프란치스코를 비판했다. 하지만 그는 가톨릭 사제가 동성애 커플을 축복할 수 있게 허용하는 등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여성을 처음으로 교황청 장관에 임명했고 낙태·재혼자에 대한 성체성사 허용, 성직자의 독신 의무 등에 대해서도 진보적 입장을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분쟁으로 얼룩진 세계 곳곳에 평화와 공존의 메시지를 보낸 종교 지도자로도 평가받는다. ‘어부의 반지’ 파기 결정이 장례 시작통상 장례식 4~6일… 애도 기간 9일23일 운구… 일반 신도 경의 표할 듯적대적 관계에 있던 미국과 쿠바의 2015년 국교 정상화에 결정적 기여를 했고 2017년에는 로힝야족 추방으로 ‘인종청소’ 논란이 불거진 미얀마를 찾아 평화의 메시지를 전했다. 2000년 가톨릭 역사상 처음으로 2021년 이라크 땅을 밟아 무장테러 희생자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전쟁이 발발하자 교황은 끊임없이 평화의 목소리를 냈다. 2023년 10월 시작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 간의 전쟁을 두고도 민간인 희생을 막고 분쟁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최근까지도 약자의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목소리를 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진행 중인 불법 이민자 추방 정책에 대해서도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일갈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2년 동안 건강 문제에 시달리다가 지난 2월 14일부터 로마 제멜리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폐렴 진단을 받은 그는 입원 후에도 호흡 곤란 증세로 고용량 산소 치료를 받았고 혈소판 감소증과 빈혈로 수혈받기도 했다. 입원 중 상태가 악화하기도 했지만 지난 3월 23일 38일간의 입원 생활을 마치고 퇴원했다. 교황은 선종 전날 남긴 마지막 강론에서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폭력과 분쟁에도 불구하고 평화가 가능하다는 희망을 가지라고 거듭 강조했다. 교황은 부활절인 20일 전 세계에 전하는 축복과 강론 ‘우르비 에트 오르비’(로마와 전 세계에)에서 “우리가 ‘평화는 가능한 일’이라는 희망을 새로이 했으면 좋겠다”며 가자지구 전쟁 당사자들에게 “휴전을 선언하고 인질들을 석방하고 평화의 미래를 열망하고 있는 굶주린 사람들을 도우라”고 말했다. 그의 선종 이후 장례절차에 관심이 쏠린다. 케빈 페렐 궁무처장이 ‘어부의 반지’로 불리는 교황의 인장 반지 파기를 결정하면 장례가 시작된다. 과거에는 위조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었지만 현대에는 교황의 임기 종료를 상징하는 절차가 됐다. 이후 애도 기간은 통상 9일이며 장례, 안장 일정은 추기경단이 정한다. 장례식은 통상 4~6일간 성바오로 광장에서 거행된다. 생전 프란치스코는 소박하고 검소한 성품대로 장례가 간소화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바티칸 성바오로 대성전에 안치된 전임 교황들과 달리 로마 시내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지하묘지에 안장되기를 희망했다. 이날 교황청은 교황의 시신이 이르면 23일 오전 성베드로 대성당으로 옮겨져 신도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할 수 있게 된다고 밝혔다.
  • 한국주교회의, 교황 일대기 발표…“세상 끝에서 온 목자, 하느님 품으로”

    한국주교회의, 교황 일대기 발표…“세상 끝에서 온 목자, 하느님 품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이후 한국천주교주교회의가 21일 교황의 일생을 일대기 형식으로 정리해 발표했다. 전문은 아래와 같다. 세상 끝에서 온 목자,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다…1936.12.17. - 2025.4.21.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애로마 시각 2013년 3월 13일 저녁(로마 현지 시각)에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됐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이었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 바로 우리가 추모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는 1936년 12월 1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탈리아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17세 되던 해 성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에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받던 중 하느님의 자비를 깊이 체험했고, 동시에 사제성소를 느꼈다고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목 표어인 ‘자비로이 부르시니(Miserando atque eligendo)’는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신 복음서 기록에 관한 베다 성인의 강론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베르골료는 1958년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에 입회하여 1969년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예수회 아르헨티나 관구 수련장과 관구장, 산미겔 철학·신학 대학 학장 겸 산미겔 교구 파트리아르카 산호세 본당 주임 신부 등을 역임했다. 1992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 보좌주교로 주교품을 받았고, 1998년 교구장 대주교로 임명됐으며, 2001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추기경으로 서임했다. 2005년부터 6년간 아르헨티나 주교회의 의장을 지내며 교황청 라틴아메리카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밖으로 나가는 교회, 세상을 향한 발걸음2013년 3월 13일, 베르골료 추기경은 로마 시스티나 성당에서 열린 콘클라베(교황 선출 비밀 투표)를 통해 제266대 교황으로 선출됐다. “저의 형제 추기경님들께서 [로마의] 주교를 찾으러 지구의 끝까지 가신 것 같습니다”(선출 직후 첫 강복 메시지)라는 소감처럼, 그레고리오 3세 교황(시리아) 이후 1282년 만의 비유럽 출신 교황 탄생은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콘클라베를 위해 소집된 추기경 회의에서 그는 ‘밖으로 나가는 교회’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고 한다. 쿠바 출신 동료 추기경이 전한 그의 발언은 다음과 같다. “[신약성경 요한] 묵시록에서 예수님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신다고 전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 시대에 예수님은 안에 계시면서 밖으로 나가게 해달라고 문을 두드리신다고 생각한다. 자기중심적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 안에 가두고 그분이 밖으로 나가시지 못하게 한다.”(zenit.org, 2013.3.26.) 이는 그가 첫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2013년)에서 말한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받고 더럽혀진 교회”라는 표현과 맥을 같이 한다. 그가 선택한 교황명은 ‘프란치스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평화의 사도이자,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과 평생을 함께했다. 성인의 삶을 닮고자 했던 프란치스코는 즉위 직후부터 행동으로 메시지를 전했다. 즉위 후 9일 뒤 로마의 한 교도소에서 첫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를 봉헌하며 재소자들의 발을 씻겼다. 2013년 7월 람페두사에서 난민들의 죽음을 환기하며 “무관심의 세계화”를 질타하던 목소리, 2014년 한국 방문에서 보여준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연민, 2020년 3월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코로나19 팬데믹에 두려워 떠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던 뒷모습은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다. 교황은 또 현대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한 관심을 제도화하여 ‘세계 가난한 이의 날(11월, 전례력 연중 제33주일)’과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7월 마지막 주일)’을 제정했다. ●복음의 기쁨 전하며 공의회 정신 계승프란치스코 교황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년, 이하 ‘공의회’) 이후 사제품을 받은 첫 교황으로서, 가톨릭의 현대화(아조르나멘토)를 이뤘다고 평가받는 공의회 정신의 계승에 심혈을 기울였다. 교황은 2015년 공의회 폐막 50주년 기념으로 거행된 ‘자비의 특별 희년’ 개막 미사에서 교회와 우리 시대 모든 이의 만남, 복음의 기쁨과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는 선교 열정, 민족과 계층을 초월한 착한 사마리아인의 자비를 실천하자고 권고했다. 2022년에는 9년간 준비한 교황청 기구 개혁을 단행했다. 개혁안을 담은 교황령 「복음을 선포하여라」(2022.3.19. 반포, 6.5. 발효)는 개혁의 지향을 공의회의 쇄신 정신, 착한 사마리아인의 영성, 친교 안에서의 공동 책임, 주교들의 사명에 대한 봉사, 보편성의 표현, 부(富)의 축소 등으로 밝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파격적인 인사를 통해 유럽인 성직자 중심으로 여겨지던 교황청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재위 기간에 걸쳐 미얀마,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동티모르, 라오스 등 다양한 아시아 국가의 주교들을 추기경으로 발탁했으며, 루이스 안토니오 타글레 추기경(복음화부 장관 직무 대행, 필리핀),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성직자성 장관, 대한민국) 등 아시아 성직자, 시모나 브람빌라 수녀(수도회부 장관), 파올로 루피니 박사(홍보부 장관), 막시마노 카바예로 레도 박사(재무원장) 등을 교황청 관료로 등용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회칙 4편, 교황 권고 7편을 비롯해 자신이 반포한 공식 문헌들에서 기쁨, 자비, 생태적 회개, 형제애를 실천을 강조했다. 아울러 전 세계 13억 가톨릭 신자들에게 현대의 위험인 고립과 자아도취를 물리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기쁨을 모두와 나누며(「복음의 기쁨」), 철저히 현실적이면서도 희망에 가득 찬 영으로 다른 이들을 비추자고 요청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2015년 자비의 특별 희년에 조명한 착한 사마리아인 정신은 「모든 형제들」(2020년)에서 구체화됐다. 교황은 「찬미받으소서」(2015년)를 통해 지구에 대한 인류의 관점을 쓰고 버리는 자원 창고가 아닌 ‘공동의 집’으로 전환시켰고, 창조 질서 수호를 위한 국제적 연대의 사명을 일깨웠다. 그는 정교회가 1989년부터 지내 온 9월 1일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을 2015년부터 가톨릭 교회 기념일로 지정해, 모든 그리스도인이 함께 기도하고 행동하는 날로 만들었다. 시노달리타스, 곧 모든 하느님 백성이 함께 걷는 여정에 대한 꿈은 그가 교회에 남긴 귀한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시노달리타스의 어근인 ‘시노드’는 의미상 ‘함께+길’의 합성어이면서 교회 회의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는 성 바오로 6세 교황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무리하며 제정한 세계주교시노드가 지역 교회의 목소리를 충실히 반영하도록 힘을 실었다. 그가 소집한 세계주교시노드 정기총회는 가정(2015년 제14차), 청년(2018년 제15차) 등 현대 교회와 사회의 관심사를 짚으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를 위하여’를 주제로 한 제16차 정기총회는 2021년부터 햇수로 4년간 이어졌다. 교회 자체를 성찰과 쇄신의 대상으로 삼은 이 정기총회 여정은 풀뿌리 교회 조직인 본당에서부터 교구, 주교회의, 대륙을 거쳐 두 차례 로마 총회(제1회기 2023년 10월, 제2회기 2024년 10월)로 수렴되었고, 폐막 후에도 전 세계에서 ‘이행 단계’로 이어지고 있다. ●희망과 평화의 사도한국인에게도 프란치스코 교황은 잊지 못할 존재다. 2014년 8월, 재위 2년차 교황은 첫 아시아 순방지로 한국을 택했다. 제6회 아시아 청년 대회(AYD) 폐막 미사에서 “잠자고 있는 사람은 춤출 수 없다”는 말로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고,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시복 미사를 주례하면서 조선왕조 치하의 순교자들인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를 시복했으며,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나 위로하며 깊은 울림을 남겼다. 국가 단위의 주교단이 교황에게 지역교회 현황을 직접 알리고 논의하는 ‘사도좌 정기 방문’(Visita ad limina)에서도 교황은 한국을 향한 사랑을 전했다. 2015년 방문 중에는 한국 주교들에게 한국 사회의 현안을 묻는 한편, 현지에서 봉헌된 124위 시복 감사 미사에 부쳐 “평신도에 의해 시작됐고 순교자들의 피와 땀으로 건설된 한국 교회가 안락한 신앙을 버리고 아시아 교회의 빛이 되”기를 당부했다. 2024년에는 “분단된 한국, 고통의 상황이 속히 개선되고 종결되도록 기도”할 것을 약속하며, “젊은이들에게 신뢰를 주는 교회, 열린 분위기의 교회”를 만들어 나가자고 독려했다. 교황은 재임 기간 내내 세계 평화를 위한 실천을 멈추지 않았다. 2013년 7월 브라질부터 2024년 12월 프랑스까지 70여 개국을 사목 방문했고, 전쟁 지역인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 교황 특사를 파견했으며,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와 단식의 날’을 여러 번 선포했다. 교황은 2013년 9월 7일 시리아의 평화를 위해, 2018년에는 콩고민주공화국과 수단, 2020년에는 레바논, 2021년에는 아프가니스탄을 위해, 2022년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해, 2023년에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종식을 위해 전 세계 그리스도인의 기도와 연대를 청했다. 평화를 위한 교황의 기도는 병상에서도 계속되었다. 교황은 서면으로 발표한 2025년 2월 23일 주일 삼종기도 연설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3년을 언급하며,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중동, 미얀마, 수단 등 분쟁 지역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청했다. 병세가 완화된 24일에는 가자 지구의 본당신부에게 전화로 위로를 전하기도 했다. 2025년 3월 23일 로마 제멜리 병원에서 퇴원한 뒤에도, 교황은 생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주님의 양 떼인 신자들과 함께했다. 비록 휠체어에 의지한 모습이었지만, 교황은 퇴원하던 날에도, 4월 6일 병자와 의료 종사자를 위한 희년 행사 현장에도, 성주간의 첫날인 4월 13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도, 17일부터 이어진 파스카 성삼일과 20일 주님 부활 대축일에도, 그를 위해 기도하는 신자들에게 직접 찾아가 인사를 건넸다. 즉위 직후 2013년 3월 28일(성주간 목요일) 성유 축성 미사 때 사제들에게 권고한 대로, 교황은 끝까지 주님의 양(羊=신자)들 가운데에 있었던 “양 냄새 나는 목자”였다. 2025년 가톨릭 교회의 정기 희년(25년 주기)을 선포하며 ‘희망’이라는 키워드를 세계인의 가슴에 새기고, 희년의 부활 대축일을 지낸 후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 프란치스코 교황. 교황은 최근에 발행된 자서전 「희망」(Spera)에서 그가 사목 방문 때마다 찾아가 기도했던 로마 성모 대성전(Basilica Papale di Santa Maria Maggiore)에 묻히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 남북 분단부터 산불까지…살뜰하게 한국 챙긴 교황

    남북 분단부터 산불까지…살뜰하게 한국 챙긴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은 유독 한국을 아낀 교황으로 꼽힌다. 남북한 대립 문제부터 최근 빚어진 경북 일대 산불에 이르기까지,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세심하고 자상한 관심을 보였다. 즉위 후 첫 아시아 방문지로 한국을 선택했고, 2027년 ‘세계청년대회’(WYD) 개최지를 서울로 결정하면서 두 번째 방한을 약속하기도 했다. ●유독 한국 아낀 프란치스코 교황프란치스코 교황이 처음 방한한 건 교황 즉위 이듬해인 2014년이다. 1989년 10월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이후 약 25년 만인 2014년 8월 14일 8일 4박 5일 일정으로 한국을 찾은 프란치스코 교황은 평화와 위로, 화해의 메시지로 깊은 울림을 안겼다. 교황은 한국에 머무는 4박 5일간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장애인 등 고통받는 이들을 보듬는 행보로 일관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무엇보다 검소하고 소탈한 모습이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교황이 의전 차량으로 초대형 방탄차가 아닌 기아차의 1600㏄급 소형차 ‘쏘울’을 이용한 것도 깊은 인상을 안겼다. 방한 내내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의 상징인 금목걸이 대신 20년간 착용한 철제 십자가 목걸이를 했다. 낡은 구두를 신고 오래된 가죽 가방을 직접 들었다. 당시 교황청에서 사전 공문을 통해 환영 행사를 간소하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박근혜 정부가 화동에 예포까지 쏘면서 성대한 환영식을 준비해 빈축을 사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성남 서울공항 도착 직후, 마중 나온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족 4명의 손을 잡고 “가슴이 아프다.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있다”며 위로했다. 광복절에 대전에서 열린 성모승천대축일 미사 때는 세월호 유가족에게 받은 노란 리본 배지를 왼쪽 가슴에 달았다. 방한을 마치고 바티칸으로 돌아가는 전세기 안에서도 교황은 선물 받은 배지를 그대로 착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교황은 당시 전세기 안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이분들은 이용당했고 노예가 됐고 그것은 잔혹한 일이었다”며 “그들은 고통을 겪었음에도 인간적인 품위를 지니고 있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충북 음성의 꽃동네를 찾아갔을 때는 의자에 앉으라는 거듭된 권유에도 장애인들과 함께하는 50여분 내내 서 있었다. 당시 78세였던 교황은 체력적인 부담에도 장애인 한명 한명에게 따스한 눈길을 보내며 소통했다. 성직자 인선에서도 교황은 한국을 배려했다. 한국인 추기경은 그간 4명이 배출됐는데 2014년 염수정(82) 추기경, 2022년 유흥식(74) 추기경 2명을 프란치스코 교황이 임명했다. 특히 유 추기경은 2021년 6월에 교황청 성직자부 장관으로 전격 발탁되기도 했다. 교황은 분단된 한반도의 평화도 염원했다.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해 직접 북한을 방문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피력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국내 교회엔 물질주의 멀리하라 충고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의 천주교회에 대해서도 부유한 자들의 이익에 영합하지 말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돌봐야 한다며 매섭게 질책했다. 국내 천주교를 대표하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선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 부자들을 위한 부유한 교회, 또는 잘사는 자들을 위한 중산층의 교회가 되려는 유혹을 경계하라”고 강조했다. 교황은 아울러 “번영의 시기에 오는 위험, 유혹이 있다. 위험이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한낱 ‘사교 모임’이 되는 것”이라며 “‘번영의 신학’에 이르렀다고 말하지는 않겠지만 그저 그런 안일한 교회는 되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교황은 물질주의의 함정도 언급했다. 대전에서 집전한 미사에서 교황은 “올바른 정신적 가치와 문화를 짓누르는 물질주의의 유혹에 맞서, 그리고 이기주의와 분열을 일으키는 무한경쟁의 사조에 맞서 싸우기를 바란다”며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 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 모델들을 거부하라”고 강조했다. 최근까지도 이어진 한국에 관한 관심교황이 한국에 보낸 위로는 최근까지 이어졌다. 2022년 10월 이태원 참사 때는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주일 기도에서 “어젯밤 서울에서 갑작스러운 압사 사고로 인해 비극적으로 숨진 많은 희생자, 특히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하자”고 제안했다. 지난해 12월 전남 무안의 제주항공 참사 때는 “비극적인 비행기 추락 사고로 슬퍼하는 한국의 많은 가족에게 애도를 표한다”며 “생존한 사람, 그리고 세상을 떠난 사람을 위한 기도에 동참한다”고 전했다. 교황은 올봄 경북 일대를 강타한 역대 최악의 산불에 위로의 뜻을 표명하기도 했다. 교황청 국무원장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은 지난달 28일(현지 시각) 한국 가톨릭교회와 행정 당국에 보낸 전보에서 “(교황은) 한국 여러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로 인하여 발생한 생명의 위협과 피해에 대해 깊이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교황이 “희생자들의 영혼을 전능하신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시며,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유가족들에게 진심 어린 애도를 표했다”며 대한민국 공동체 전체에 위로와 치유, 그리고 굳셈의 축복을 주시기를 하느님께 간구하고 계신다“고 덧붙였다.
  • “불탄 나무가 봄비에 싹 틔우듯… 한국도 다시 새롭게 부활하길” [월요인터뷰]

    “불탄 나무가 봄비에 싹 틔우듯… 한국도 다시 새롭게 부활하길” [월요인터뷰]

    정교분리가 민주주의 원칙… 안 따르면 혼란소망이고 희망인 부활처럼 정치도 새로워져야사심 없이 국민만 생각하는 새 대통령 기도해美 종교·정치계 인연, 도움 필요하면 내 역할을사명대로 성직자로 끝맺은 사람으로 기억되길“불에 탔던 나무가 봄비를 통해 다시 싹을 틔우는 것처럼 갈라졌던 대한민국이 하나가 돼 새롭게 부활하길 바랍니다.” 한국 교회 원로인 김장환(91) 목사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6·25전쟁 당시 미군 부대에서 하우스보이로 허드렛일을 하다가 맺은 인연을 통해 미국 유학을 떠나 목사 안수를 받았고 세계적인 목회자로 우뚝 섰다. 1973년 닷새간 연인원 320만명이 모였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서울 여의도 전도대회 때 설교 통역을 맡아 이름을 알렸다. 40년 가까이 담임 목사를 맡아 신도를 12명에서 1만 5000명으로 키운 수원중앙침례교회에서 2004년 은퇴할 때는 세습을 하지 않아 큰 울림을 줬다. 이후 극동방송에서 복음 전파에 매진하며 해외 50개국에 지사를 둘 정도로 방송국을 성장시켰다. 아시아인 최초로 침례교세계연맹 총회장을 지낸 김 목사는 역대 대통령들이 의견을 구하는 조언자였고, 정부 요청이 있을 때면 미국 종교·정치계 인맥을 활용해 지원을 마다하지 않은 민간 외교관이기도 했다. 10대 초반 해방을 맞는 등 우리 현대사를 모두 거쳐 온 노(老)목사에게 지난겨울은 어땠을까. 그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극동방송을 찾아갔다. 인터뷰는 지난 11일 김 목사가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진행됐다. 그는 고난주간과 부활절에 미국의 큰 교회 여러 곳에서 설교 및 예배 일정이 잡혀 있었다. 생전 처음 유대교 회당에서 설교하는 것을 비롯해 뉴욕 3곳, 댈러스 5곳 등 일정이 촘촘했다. -지난겨울부터 봄까지 비상계엄과 탄핵 그리고 대통령 파면을 지켜보며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요. “오래 살아온 개신교 목사로서 보면 결과적으로 참 잘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헌법재판관) 8명 중 소수의견을 낸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게 의아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모든 사람이 법 앞에 똑같다면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법부가 똑같은 잣대를 갖다 대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과하게 대하고, 어떤 사람은 많이 봐주고 이런 것은 좀 지양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도 해 봤죠.”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개신교가 정치에 깊숙하게 개입해 사회 통합보다는 분열을 부추긴다는 비판이 적지 않습니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돼야 합니다. 그게 민주주의의 원칙이죠. 그 원칙을 따르지 않으면 혼란이 옵니다. 물론 자기의 뜻을 갖고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걸 조직화해 정치를 하고 반대파와 대항한다든가 그런 것은 지양해야 합니다. 그런 분들하고 저하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에게 비난도 많이 받죠. 뒤에서 조용히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매일매일 하는 일을 충실히 하는 게 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지켜보며 기도도 많이 하셨을 것 같습니다. “산불 피해를 본 분들을 위해 기도를 많이 했어요. 그리고 탄핵 정국에서는 제 개인 의견이 아니라 앞으로의 대한민국을 위해 무엇이 중요한지를 생각했어요. 지금 제일 중요한 건 갈라졌던 것을 빨리 화합해 정상적인 대한민국, 정상적인 경제, 정상적인 외교를 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이러한 때에 국민이 힘을 합치고 종교가 힘을 합치고 나라를 건전하게 이끌어 갈 수 있는 지도자가 나왔으면 하는 게 기도의 제목이었죠. 또 다른 하나는 저출산이 이대로 가면 100년 후에는 대한민국이 저절로 없어진다고 학자들이 얘기하더라고요. 나라가 부강하려면 사람이 있어야 하잖아요. 사람 없는 나라는 있을 수 없는데 결혼 위기에 놓인 우리 청년들이 좋은 상대를 만나 가정을 갖고 아이를 낳고 그러면 50년 후에는 인구 걱정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그런 거를 위해 우리 개인도 기도하고 교회도 기도하고 우리 (극동방송) 청취자들도 열심히 기도하고 있죠.” -요즘 깊게 묵상하시는 성경 구절이 있으시다면. “많죠. 예레미야 33장 3절에 보면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라는 말씀이 나와요. 마태복음 7장 7절에서는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죠.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애국가 가사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이 계신다고 할 것 같으면 거기다가 호소하고 기도하면 우리가 미신이나 우상에게 하는 것보다 훨씬 이뤄지는 결과가 많을 것입니다.” -부활절을 맞아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죽었던 생명이 살아나는 부활은 소망이고 희망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경상남북도를 휩쓴 산불에 탔던 나무들이 봄비를 통해 다시 새싹이 나고 새로운 산 모양을 보여 줄 거예요. 마찬가지로 우리 경제가 지금 어렵죠. 정치가 어렵죠. 이런 게 부활절을 계기로 해서 새로워졌으면 합니다. 그래서 갈라졌던 게 합쳐지고 미움이 사랑으로 변하고 또 어려운 사람들을 외면했던 거를 우리가 힘을 합쳐 도와줘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교회에서 걷은 부활절 헌금은 대부분 산불 피해자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극동방송도 멘트 한번 냈는데 6억 8000만원이 들어왔어요. 생필품 제공과 임시 거처, 임시 예배소 마련, 차량 지원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루속히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 줘야죠.” -한국 사회가 전례 없는 위기입니다. 늘 그래 왔듯 극복할 수 있을까요. “사회 전반의 위기를 슬기 있게 헤쳐 나가려면 종교의 힘이 많이 필요하다고 봐요. 그다음에 우리 모두 양심이 살아 있어야 해요. 그래서 거짓말은 거짓말대로 타도하고 진리는 진리대로 사수해야 합니다. 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긍지를 가져야죠. 빈부 차이는 빨리 해소돼야 합니다. 중산층이 많아야 나라가 건전한 거죠. 가난한 사람이 부자보다 훨씬 더 많으면 그 나라는 희망이 없습니다.” -역대 대통령과 대부분 친분이 있었는데 윤석열 전 대통령은 어떻게 보셨나요. 최근 심경을 들은 적이 있는지요. “저는 그 양반이 외교를 잘했다고 믿고 있고 또 남자다운 성격이 있다고 봤어요. 검찰 출신이라 그런 데서 오는 부작용이 있었겠죠. 이제 잊고 용서하고 그러고 끝이면 좋겠는데 또 구속된다, 또 뭐 한다고 하면은 그 추종 세력이 있어 어떤 면에선 인기가 올라갈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도 정치하는 사람들이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감옥(구치소)에서 나온 다음날 아침에 제가 전화를 했어요. 받으시더라고. 어제는 하루 종일 멍했다고 그러시더라고. 나 같으면 멍한 게 아니라 병이 들었을 텐데 그래도 음성이 밝더라고. 뭐 목사니까 기도해 드리고 앞으로 나라를 위해 생각도 많이 하고 염려도 많이 할 텐데 건강 유의하시라, 또 조사도 더 받을 텐데 힘내셔라 그 정도 이야기를 했지요.” -두 달 뒤 대선입니다. 새 대통령은 어떤 덕목을 반드시 갖춰야 할까요. “사리사욕이 없어야죠. 당리당략이나 개인을 위한 사람보다는 나 하나 던져 나라에 힘이 되고 도움이 되는 사람이 나왔으면 좋겠죠. 그런데 나와야 할 사람들은 나오질 않고 안 나와도 될 사람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심을 버리고 오직 나라, 오직 백성만 생각하고 더 나은 사람이 나오면 그 사람을 돕고 양보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역대 대통령에게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혹시 새 대통령을 만나게 된다면 어떤 말씀을 하실지요. “고언이라기보다는 주어진 사명이 성직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어 드리고 이대로만 정치하면 성공한다고 말할 것 같아요. 성경책에 그 양반이 가야 할 길이 다 있거든요. 양심을 지키고 사리사욕을 제어하라는 말씀이 다 있기 때문에 국민만 생각하고 간다면 성공적인 대통령이 될 거라고 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때문에 전 세계가 혼란합니다. 과거 직접 만나 본 트럼프는 어땠는지요. “너무 독선적이라고 봐요. 그런 사람에게는 좋은 참모들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좋은 참모가 있더라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허사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자기 생각대로만 하는 거 아닌가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론) 머스크하고는 오래가지 못할 것 같아요. 강성끼리 만났으니까요. 이제 뉴욕과 로스앤젤레스에서 데모를 시작했는데 견디기 힘들 거예요, 트럼프가. 저는 그래도 미국이 잘됐으면 하고 기도합니다. 왜냐면 우리나라가 지대한 도움을 받았으니까요.” -트럼프 2기 행정부와 제대로 된 외교도 시작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도움 요청이 잇따를 것 같습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처음 트럼프를 만나러 갈 때 어느 국회의원이 저더러 트럼프하고 가장 가까운 목사인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 아들(프랭클린)이 트럼프에 대해 세밀하게 얘기 좀 해 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연결해 준 적이 있어요. 오래전 지미 카터 방한 때 1차 회담에 실패하고 2차 회담에 성공했는데 그 과정에서 제가 카터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을 전도해 달라고 하기도 했지요. 요청하는 사람이 있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해야 하겠죠.” -일부에서는 목사님이 보수적이라거나 정치권에 너무 가까운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습니다. 후대에 어떻게 기억되고 싶으신지요.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죠. 하지만 저는 제 중심이 서 있기 때문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내보냅니다. 어려서 정치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성직이 사명으로 주어지면서 미련을 다 버렸어요. 저는 지금까지 성직자로서 누구를 만나도 전도만 했지 어떠한 덕을 본다든가 그런 것은 없었어요. 골프장 캐디를 만나도, 택시 기사를 만나도, 대통령이 만나자고 해도 제 목적은 단 하나 믿음과 신앙, 교회 나가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거 그거 외에는 없어요. 성직자로 끝을 맺은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김장환 목사는 ▲1934년 수원 출생▲미국 밥존스신학대학 학사·석사(1958) ▲미국 단테제일침례교회 목사 안수(1959) ▲수원중앙침례교회 담임목사(1965~2004)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통역(1973) ▲극동방송 사장(1977~2008) ▲명지학원 이사장(1988~1992) ▲침례교세계연맹 총회장(2000~2005)▲수원중앙침례교회 원로목사(2004~현재) ▲극동방송 이사장(2008~현재) ▲백석대 석좌교수(2017~현재)
  • 결혼식서 처음 본 신부, 알고 보니 23살 많은 ‘장모’와 혼례…인도男 충격 사연

    결혼식서 처음 본 신부, 알고 보니 23살 많은 ‘장모’와 혼례…인도男 충격 사연

    인도에서 한 남성이 결혼식 당일 신부의 베일을 들어올린 순간, 예상했던 신부 대신 23살 터울의 ‘예비 장모’와 결혼하게 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가족의 치밀한 속임수로 신부 어머니와 강제 결혼하게 된 이 남성이 항의하자, 오히려 강간 혐의로 고소하겠다는 위협까지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19일(현지시간) 인도 매체 인디아투데이에 따르면, 인도 메루트 브람퓨리에 사는 무함마드 아짐(22)은 자신의 형 나딤과 형수 샤이다가 주선한 결혼식에서 기만당했다고 주장했다. 아짐은 원래 샴리에 사는 21세 여성 만타샤와 결혼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난 3월 31일 열린 결혼식에서 이슬람 성직자인 마울비는 신부를 두고 “타히라”라고 불렀다. 이상함을 느낀 아짐이 베일을 들어올렸을 때, 신부로 위장한 만타샤의 45세 미망인 어머니와 결혼하게 된 사실을 알게 됐다. 아짐은 경찰에 신고하면서 결혼식 과정에서 50만 루피(약 833만원)가 오갔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러한 사기 행위에 항의하자, 형과 형수가 자신을 거짓으로 강간 혐의로 고소하겠다며 협박했다고 진술했다. 아짐은 지난주 경찰에 신고했으나, 이후 브람퓨리 경찰 관계자는 “관련 당사자들 사이에 합의가 이뤄졌다”며 “아짐이 신고를 철회하고 현재 법적 조치를 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이러한 사건은 인도에서 종종 발생하는 결혼 사기의 한 형태로, 특히 지참금이나 금전적 이익을 노린 경우가 많다. 인도에서는 결혼식 당일까지 신부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하는 관습이 일부 지역에 남아있어 이러한 사기가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 탁재훈, 성진 스님 발언에 “불교 안 믿겠다” 경악…무슨 일

    탁재훈, 성진 스님 발언에 “불교 안 믿겠다” 경악…무슨 일

    가수 겸 방송인 탁재훈이 성진 스님의 불교 세계관 설명을 듣고 두려움을 표했다. 15일 SBS 공식 유튜브 채널에는 이날 오후 방송되는 ‘신발 벗고 돌싱포맨’ 181회 선공개 영상이 올라왔다. 영상에는 성진 스님(불교)과 김진 목사(개신교), 박세웅 교무(원불교), 하성용 신부(천주교) 등 각 종교의 성직자 4명이 초대 손님으로 출연했다. 영상에서 진행자 이상민은 출연진의 죄를 고하는 시간을 갖겠다며 “(출연진이) 각 종교별로 어떤 지옥에 가게 될지 말씀해 달라”고 했다. 진행자 김준호는 “이상민씨를 고발하겠다. 죄명은 ‘입만 산 죄’”라며 이상민의 평소 허세를 폭로했다. 그러자 성진 스님은 “혀가 문제인 사람은 발설지옥(拔舌地獄)이라고 (하는 곳에 간다)”라며 “(그곳에서는 죄인의) 혀를 뽑는다”고 말했다. 이어 “혀를 최대한 늘인 뒤 소에 쟁기를 채운 후 늘어난 혀를 갈도록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김준호는 인상을 쓰더니 “미안하다. (이상민의 죄를) 괜히 고발했다”라고 사과했다. 김준호는 진행자 임원희에 대해선 “토크쇼면 손님한테 질문을 해야 하는데 질문을 안 한다”며 ‘직무유기죄’라고 지적했다. 성진 스님은 “의도적으로 사람을 가려서 고통을 주거나 봐주면 거해지옥(鋸骸地獄)에 간다”고 했다. 불교 세계관에서 거해지옥은 주로 사기꾼들이 가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성진 스님은 “(거해지옥에선 죄를 지은) 사람을 맷돌 사이에 집어넣는다”며 “돌로 사람을 못 움직이게 해놓고 큰 톱으로 머리부터 자른다”고 설명했다. 임원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내가 그 정도로 잘못했냐”라고 해 폭소를 일으켰다. 탁재훈은 불교의 지옥 형벌이 무섭다며 “저, 불교 안 믿을래요”라고 투덜댔다. 그러자 김진 목사는 대화에 끼어들더니 “예수 믿어요, 예수”라고 해 웃음을 안겼다. ‘신발 벗고 돌싱포맨’ 181회는 이날 오후 9시에 SBS에서 시청할 수 있다.
  • 두봉 주교, 한국의 흙으로 돌아가다

    두봉 주교, 한국의 흙으로 돌아가다

    6·25전쟁 직후부터 71년 동안 한국인과 희로애락을 함께한 프랑스 출신 두봉 레나도 주교가 한국의 흙으로 돌아갔다. 지난 10일 96세로 선종한 두봉 주교의 장례미사가 14일 경북 안동시 목성동주교좌성당에서 열렸다. 미사를 이끈 안동교구장 권혁주 주교는 “마음으로도 몸으로도 가난하게 사시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조건 없이 베풀고 나누는 삶을 사셨다”며 “두봉 주교님의 삶은 복음 그 자체였고 그분의 말씀과 행업은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남아 있다”고 회고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애도 메시지를 보냈다. 주한교황대사인 조반니 가스파리 대주교는 “교황께서 두봉 주교님의 선종 소식을 듣고 매우 슬퍼하셨으며 주교님과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 그리고 안동교구 전체에 진심 어린 애도와 위로를 전하셨다”고 말했다. 미사가 끝나고 이별의 시간이 오자 신자들은 관을 어루만지며 오열했다. 장례미사엔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인 이용훈 주교, 염수정 추기경, 서울대교구장인 정순택 대주교 등 한국천주교 주요 인사와 신자, 대선 출마를 앞둔 정치인 등이 참석했다. 두봉 주교는 장례미사에 이어 경북 예천의 농은수련원 내 성직자 묘원에서 영면에 들었다.
  • ‘유퀴즈’ 그 신부님, 두봉주교 10일 선종…96세로 71년간 韓 사목

    ‘유퀴즈’ 그 신부님, 두봉주교 10일 선종…96세로 71년간 韓 사목

    ‘봉양 두씨’의 시조,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프랑스 출신의 두봉 주교가 10일 선종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천주교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 두봉 레나도(프랑스명 르레 뒤퐁) 주교가 10일 오후 7시 47분 선종했다”고 11일 공식 발표했다. 96세. 주교회의는 “두봉 주교는 이달 6일 뇌경색으로 경북 안동병원에서 긴급 시술을 받은 후 치료 중이었으나 끝내 기다리던 신자들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날 오후 7시 47분께 생을 마감했다”며 “두봉 주교가 ‘감사하다’는 말을 남겼으며 마지막 성사(聖事)를 한 뒤 안동교구장인 권혁주 주교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종했다”고 전했다. 두봉 주교는 1929년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가난한 농부의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그의 부모는 “다섯 명이 먹을 것이 있으면 일곱 명이 먹을 것도 있다”며 자신보다 어려운 이를 돕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이처럼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가진 부모덕에 두봉 주교는 감사하는 삶, 돕는 삶을 보고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1954년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에 교황청 직속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파견됐다. 당시 나이 25세. 첫 부임지는 대전 대흥동 성당이었다. 현재 전국 최고의 빵집 중 하나로 떠오른 성심당이 막 문을 연 때였다. 대전에 내려온 젊은 신부는 갓 빵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 성심당 주인과 먹을 것 없는 이웃을 돌보기 시작했다. 훗날 한 언론과 인터뷰한 당시 성심당 대표는 “두봉 신부님이 어려운 사람 주소를 아버지에게 전해주시면 아버지가 밤에 빵 남은 거 가지고 남몰래 전해 줬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두봉 주교는 대흥동천주교회에서만 10년간 보좌로 사목했다. 대전교구 학생회 지도신부, 가톨릭 노동청년회 지도신부, 대전교구청 상서국장 등을 지냈다. 두봉 주교가 경북 안동 땅을 밟은 건 1969년이다. 당시 교황 바오로 6세로부터 주교 서품을 받고 초대 안동교구장으로 취임해 약 21년간 교구를 이끌다 1990년 12월에 퇴임했다. 두봉 주교는 안동에서도 ‘가난한 교회’를 내걸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활동에 힘썼다. 그가 안동교구장으로 재임하던 1973년 경북 영주에 한센병 환자를 위한 다미안 의원이 개원했고 1978년 12월에는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가 창립했다. 두봉 주교는 농민의 권익 보호에도 앞장섰다. 대표적인 사례가 1978년의 이른바 ‘오원춘 사건’이다. 천주교 신자이며 농민회 영양군 청기 분회장이던 오원춘 씨가 “영양군이 감자 경작을 권장했지만, 종자가 불량해 싹이 나지 않는다”며 대책위원회를 만들고 항의하면서 사건이 시작됐다. 당국이 농민들의 요구를 묵살하자 안동교구 사제단이 나섰고, 피해도 보상받았다. 하지만 이후 오원춘 씨가 괴한들에게 납치·폭행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제들이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박정희 정권과 가톨릭이 대립하는 시국 사건으로 번졌고, 외무부가 두봉 주교에게 자진 출국 명령까지 내렸다. 당시 두봉 주교는 바티칸에서 “어려운 사람을 걱정하고, 힘을 주고, 희망을 주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자신의 신념을 설명했고, 요한 바오로 2세는 “만일 일방적으로 한국 정부가 두봉 주교를 추방하면 다른 사람을 안동교구장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며 두봉 주교의 손을 들어줬다. 그가 교황을 만나고 한국으로 돌아온 직후 10·26 사건이 벌어져 박정희 정권은 막을 내렸다. 두봉 주교는 71년간 한국에 머물며 사역했다. 현재를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 어느 누구에 견줘도 더 오래 한국인으로 산 셈이다. 2019년엔 특별귀화자로 선정돼 한국인이 됐다. 근래에는 성당을 겸한 의성의 한 공소에서 생활하며 주민들을 대상으로 미사를 주례하거나 멀리서 찾아오는 신자들에게 고해성사해주며 소일해 왔다. 저서로는 수필집 ‘사람의 일감’(문음사)과 ‘가장 멋진 삶’(바오로딸) 등이 있다. 빈소는 천주교 안동교구 주교좌 목성동 성당(054-858-2460)에 마련됐다. 장례미사는 오는 14일 오전 11시 같은 교회에서 권혁주 교구장 주례로 열린다. 장지는 경북 예천 농은수련원 내 성직자 묘원이다. (054)652-0591~2.
  • 7대 종교인, DMZ 385㎞ 순례…‘화해·평화’ 염원 담은 분단 80주년 행사

    7대 종교인, DMZ 385㎞ 순례…‘화해·평화’ 염원 담은 분단 80주년 행사

    국내 7대 종교인들이 분단 80주년을 맞아 민족 화해와 평화를 염원하며 비무장지대(DMZ) 385㎞ 도보 순례 행사를 연다. ‘2025 DMZ 생명평화순례 준비위원회’(준비위)는 “천주교, 개신교, 불교, 원불교, 천도교, 유교, 민족종교 교인으로 이뤄진 순례단이 DMZ 일대를 걷는 순례를 실시한다”고 19일 밝혔다. 지난해 4대 종교 성직자 순례에 이은 두 번째 행사로, 올해는 7대 종교로 영역을 확장했다. 참가자들은 5월 19일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를 출발해 6월 6일 경기 파주시 임진각까지 걸을 예정이다. 준비위는 “우리 종교인들은 분단의 시간을 살아오면서 우리 안에 내재해 80년 동안 대물림된 증오와 적대감의 근원을 치유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며 “서로에게 가했던 끔찍한 만행과 그로 인한 씻을 수 없는 피해와 희생을 기억하며, 분단의 시간 속에 희생된 모든 이들을 위로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질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행사에 참여하는 7대 종교 성직자와 수도자는 약 25명이다. 385㎞에 달하는 전 구간을 걸어서 이동한다. 준비위는 종교별로 집중 운영 구간을 지정해 신자와 일반인도 참여할 수 있게 할 계획이다.
  • [이은경의 과학산책] “나는 ‘과학’으로 계몽되었다”

    [이은경의 과학산책] “나는 ‘과학’으로 계몽되었다”

    “우주의 웅장한 구조를 찾는 그의 과학적 탐구는 고대의 가설을 뒤엎었다.” 1999년 타임지는 17세기 대표 인물로 아이작 뉴턴을 선정하고 이렇게 평가했다. 뉴턴 과학의 세계관과 방법론은 근대과학의 특징이다. 그는 별개로 인식되던 천체의 운동과 지구 위 물체 운동을 하나의 법칙으로 통합하고 수학으로 이를 나타냈다. 기독교적 세계관에 맞춘 이전의 설명방식에서 벗어나 이성과 합리적 추론에 따라 정량 데이터를 성공적으로 설명해 낸 것이다. 과학자로서 뉴턴은 당대에 인정받았다.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는 태양 중심 우주와 타원 궤도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과학은 천문학 중심이었다. 갈릴레오는 사고실험으로 물체의 낙하운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지만 수학적이지는 못했다. 뉴턴은 보편 중력의 개념을 도입하고 미적분학이라는 수학 언어를 창안해 활용했다. 그가 1687년에 출판한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린키피아)는 고전역학을 완성한 근대과학의 명저다. 핼리혜성의 발견자, 에드먼드 핼리는 뉴턴역학을 활용해 이전 혜성 관측 기록의 타원궤도와 주기를 계산하고, 다음 혜성을 예측할 수 있었다. 뉴턴은 국회의원, 조폐국장, 왕립학회 회장 등 다양한 사회 활동도 했다. 뉴턴은 여러 분야 활동의 성과를 인정받아 평민 출신이었지만 기사 작위를 받고 ‘뉴턴경’이 됐다. 1727년 3월 31일 런던에서 뉴턴의 성대한 장례식이 있었다. 그는 영광스럽게도 왕족, 성직자, 나라를 구한 군인들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과학자로서는 처음이었다. 이 장례식에 참석한 조문객 중에는 프랑스 작가이자 계몽사상가인 볼테르도 있었다. 볼테르는 일찍부터 문학가, 자유사상가로 이름을 얻었다. 그는 24세에 쓴 ‘오이디푸스’로 촉망받는 작가가 됐다. 프랑스의 전제정치와 가톨릭교회에 비판적이었던 그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영국의 입헌군주정과 성공회 교회에 공감하게 됐다. 볼테르에게는 뉴턴의 장례식이 프랑스와 대비되는 영국의 상징 같은 사건이었다. 그는 이 차이의 밑바탕에 이성과 합리적 사고를 중시하는 뉴턴 과학의 정신이 깔려 있다고 믿었다. 볼테르가 1733년에 출간한 ‘철학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볼테르의 영향을 받은 샤틀레 후작부인은 라틴어로 쓰인 ‘프린키피아’를 불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프랑스 지식인들이 뉴턴과학을 접할 수 있게 도왔다. 이 번역은 20세기까지도 ‘프린키피아’에 대한 훌륭한 번역 중 하나로 손꼽힌다. 17~18세기 유럽에서는 절대왕정의 억압과 종교적 미신을 벗어나 이성을 통해 새로운 사회질서와 발전을 추구하는 계몽운동이 있었다. 볼테르처럼 계몽운동가들에게 뉴턴 과학의 특징인 이성, 합리적 사고, 보편성, 실험과 데이터는 사람들이 어둠에서 벗어나 ‘계몽’ 상태로 나아가게 하는 빛이었다. 그런 뜻에서 “볼테르는 과학으로 계몽되었다”. 이은경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
  • 성소수자 커플 주례하다 결국…세계 최초로 커밍아웃한 ‘이맘’ 피살

    성소수자 커플 주례하다 결국…세계 최초로 커밍아웃한 ‘이맘’ 피살

    이맘(이슬람 성직자)으로는 세계 최초로 커밍아웃한 것으로 알려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무슬림이 무장 괴한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18일(현지시간) 현지 경찰 등에 따르면 이맘인 무신 헨드릭스(57)가 지난 15일 남부 이스턴케이프주 게베하(옛 포트엘리자베스)에서 2명의 남성에게 습격당했다. 경찰은 얼굴을 가린 용의자 2명이 픽업트럭으로 그가 탄 차를 막아선 뒤 여러 차례 총격을 가했다고 설명했다. 헨드릭스는 현장에서 숨졌고, 용의자들은 범행 직후 도주했다. 헨드릭스는 성소수자 커플의 결혼식 주례를 위해 게베하를 방문했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확한 범행 동기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지만, 성소수자 단체 등은 혐오범죄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헨드릭스가 케이프타운에서 동성애자와 다른 소외된 무슬림을 위한 모스크를 운영해 표적이 됐다고 주장한다. 경찰은 용의자들의 신원이 불분명하지만 헨드릭스의 차량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정황이 포착됐다고 밝혔다. 이에 혐오범죄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를 이어갈 예정이다. 1967년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무슬림 가정에서 태어난 헨드릭스는 아랍어 교사와 패션 디자이너로 일했다. 그러다 29세가 되던 해에 가족에게 먼저 커밍아웃했고, 1996년부터는 자신의 성적 지향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이맘으로 활동했다. 동성애자라는 성 정체성을 공개한 이맘은 헨드릭스가 세계 최초라고 한다. 남아공은 아파르헤이트(흑백인종차별정책) 종식 이후 1994년 채택한 헌법에서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차별 금지를 명시한 최초의 국가다.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2006년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기도 했다. 다만 통상 이슬람 공동체는 동성애를 죄악이라고 본다. 헨드릭스는 전통적인 교리 해석을 거부하고 소수자를 포용하는 게 이슬람 정신이라고 주장해왔다. 그가 운영했던 사원 홈페이지에는 “이슬람 공동체에서 소외된 여성과 성소수자 무슬림이 종교를 실천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라는 소개 글이 적혀 있다. 그는 퀴어 퍼레이드 등 각종 성소수자 권리 옹호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2022년에는 헨드릭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다큐멘터리 ‘더 래디컬’이 제작되기도 했다. 당시 헨드릭스는 주변에서 ‘안전을 위해 경호원을 고용하라’는 조언을 자주 듣지만 공격이 두렵지 않다면서 “진정성을 가져야 한다는 욕구가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크다”고 말했다.
  • “소년·소녀 최소 70여명 성학대” 소아성애 신부, 90세로 호주 감옥서 사망

    “소년·소녀 최소 70여명 성학대” 소아성애 신부, 90세로 호주 감옥서 사망

    호주 역사상 가장 악명높은 소아성애 성직자로 꼽히는 전직 신부 제럴드 리즈데일이 수감 중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18일(현지시간) 호주 ABC 등 현지 매체가 전했다. 리즈데일은 호주 빅토리아주 중부와 남서부 등에서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70명 이상의 어린이를 성적으로 학대했다는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고 감옥에 갇혀 있었다. 리즈데일이 처음 수감된 건 1994년이었다. 당시 그는 9명의 소년을 성적 학대한 혐의로 12개월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수십명의 추가 피해자가 나타나면서 2006년까지 4건의 별도 사건에서 54명의 아동을 학대했다는 혐의가 유죄로 인정됐고 형량이 늘어났다. 여기에는 6세 여자 아이에 대한 강간 및 음란 폭행 혐의도 포함됐다. 피해자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987~1988년 당시 13세였던 72번째 피해자가 또 나왔고 리즈데일은 아동 성범죄 혐의로 8번째 형을 선고받고, 이로써 총 형기는 2034년 9월까지로 늘었다. 지난해에는 62건의 새로운 혐의가 또 제기됐다. 생존자 단체는 피해자가 최대 수백명에 이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1934년생인 리즈데일은 빅토리아주 서부 위메라 지역에서 태어났다. 미성년자를 상대로 한 그의 범행은 1961년 빅토리아주 밸러랫 교구에서 가톨릭 사제로 서품된 직후부터 시작된 것으로 파악됐다. 아동 성학대에 대한 제도적 대응을 위한 왕립위원회의 보고서에 따르면 밸러랫 교구는 리즈데일이 1960년대부터 위법 행위를 해왔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는 사제라는 특권적 지위를 이용해 피해자 가족의 신뢰를 얻기도 하면서 범행을 자행했다. 리즈데일은 생애 마지막 몇 년간 건강이 급속히 악화했다고 ABC는 전했다. 2022년 11월 교도소 감방에서 넘어져 몇 시간 동안 바닥에 쓰러져 있던 상태로 발견됐으며 이후 만성 통증, 근육 위측, 사지 약화에 시달렸다.
  • ‘9살 소녀’와 강제 결혼 합법되나…이라크, 가족법 개정안 통과

    ‘9살 소녀’와 강제 결혼 합법되나…이라크, 가족법 개정안 통과

    이라크 의회가 여성의 법적 결혼 허용 나이를 9세로 낮추는 내용이 포함된 개정안을 결국 통과 시켰다고 영국 가디언 등 외신이 2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보수성향의 이슬람 시아파 정당 연합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이라크 의회는 일명 ‘188호법’으로 알려진 가족법 개정안 통과를 준비해 왔다. 이라크의 188호법은 종교와 관계없이 결혼과 이혼, 양육 등의 가족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보장한 법으로, 1959년 도입됐을 당시 중동에서 가장 진보적인 법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의회를 통과한 개정안은 여성의 자녀 양육권과 이혼의 자유, 재산 상속권을 없애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여성의 법적 결혼 허용 나이를 18세에서 9세로 낮추는 내용이 포함돼 아동 인권에 치명적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현재 이라크에는 이웃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와 달리 여성이 결혼할 때 아버지 등 남성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남성 후견인 제도가 없다. 그러나 가족법 개정안이 통과된다면 결혼과 이혼, 양육 등 가족과 관련한 사안을 법치주의가 아닌 이슬람 교리에 의해 결정해야 한다. 새 법률이 시행되면 성직자들의 율법 해석에 따라 10대 초반의 여자아이들이 강제로 결혼하는 사례가 나올 가능성이 다분하다. 심지어 시아파 일부가 신봉하는 자파리 학파의 해석을 따른다면, 고작 9세 여자 아이도 혼인할 수 있다. 문제의 법률 개정을 주장해 온 보수 시아파 의원들은 이라크의 헌법을 이슬람 원칙에 맞추고, 이라크 문화에 대한 서방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개정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지난해 11월 개정안을 제출했던 여당 연합 역시 “가족법 개정안 추진은 이슬람법에 대한 엄격한 해석과 일치하며, 어린 소녀들을 ‘부도덕한 관계’로부터 보호한다”고 밝혔다. “미성년자와 결혼하는 게 무슨 문제야?”이라크의 시아파 정당이 가족법 개정을 시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4년과 2017년에도 개정 시도가 있었으나 여성단체와 인권단체의 반발로 실패했다. 지난해 8월 또 다시 개정안 초안이 공개됐을 때도 지지자들과 반대파가 이라크 곳곳에서 격렬하게 대치했다. 당시 이라크 의회 소속 여성 의원 25명이 개정안을 반대했지만 보수적인 여당 연합이 의회에서 다수당을 차지하고 있어 개정안 의회 통과를 막지 못했다. 지난해 11월 여성 국회의원인 알리아 나시프는 영국 가디언에 “이 법을 지지하는 남성 의원들은 미성년자와 결혼하는 게 무슨 문제냐고 주장한다”면서 “(개정안을 찬성하는) 의원들은 입법자가 아닌 남성으로서만 이 모든 사안을 취급한다”고 지적했다. 이라크 의회가 9세 여자아이도 합법적으로 결혼시킬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켰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 이 법안을 반대하는 운동을 해온 변호사 모하메드 주마는 가디언에 “이란에서 여성 권리와 아동 권리의 종말이 왔다”고 말했다. 이라크 기자인 사자 하심은 성직자들이 여성의 운명을 결정하는 권한을 갖게 된 것은 공포스러운 일이라며 “여성으로서 나의 삶에 온갖 일이 벌어질까봐 두렵다”고 말했다. 이라크 의회가 논란의 개정법 통과시킨 진짜 이유수년 간 논란이 돼 온 이라크 ‘188호법’ 가족법 개정안은 종교와 이념의 전통성을 재확립하려는 시아파 집단의 정치적 행위라는 해석이 나온다. 지난해 11월 영국 왕립국제문제연구소(채텀하우스)의 수석 연구원인 레나드 만수르 박사는 텔레그래프에 “이번 개정안은 이슬람 시아파 집단이 권력을 통합하고 정통성을 되찾으려는 광범위한 정치적 움직임의 일부”라면서 “그들은 종교적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지난 몇 년간 약해졌던 이념적 전통성을 되찾으려 한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남성 정치인들이 이라크 사회 내에서 여성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자신의 권력을 위협받는다고 느끼자 여성 억압을 위해 가족법 개정을 추진했다고 분석한다. 여성 연합의 공동 설립자인 나디아 마흐무드는 지난해 8월 가디언에 “2019년 이라크에서 대규모 청소년 시위가 발생한 이후, (남성) 정치인들은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강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남성) 정치인들은 시민사회와 여성단체 활동가들이 자신의 권력과 지위에 위협이 된다고 느끼자 그들을 억합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2023년 유엔(UN) 산하 아동구호기관인 유니세프에 따르면 이라크 여성의 28%는 18세가 되기 전에 결혼한다.
  • 쪽방촌 의사가 경험한 ‘따뜻한 기적’… “내 학생 3~5%라도 의료봉사 길 가길”[일요인터뷰]

    쪽방촌 의사가 경험한 ‘따뜻한 기적’… “내 학생 3~5%라도 의료봉사 길 가길”[일요인터뷰]

    유명 백화점과 호텔, 집창촌이 공존하는 서울 영등포역 인근, 6번 출구 뒷골목에 200여명이 모여 사는 쪽방촌이 있다. 1970년대 산업화에서 밀려난 도시 빈민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이 골목엔 요셉나눔재단법인 요셉의원도 있다. 건물은 낡고 허름하지만 20여개 진료과를 갖추고 140여명의 의료인이 자원봉사를 하는 ‘종합병원’이다.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환자에게 대가 없이 손을 내미는 곳, 병원 문을 두드리기 어려운 노숙인과 쪽방촌 주민에게 이곳은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쉼터다.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지난달 26일 요셉의원에서 ‘따뜻한 기적’을 만났다. 요셉의원을 찾는 환자는 노숙인, 건강보험 체납으로 혜택을 받을 수 없는 사람, 교도소 출소자와 난민, 미등록 외국인 근로자 등 이런저런 이유로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이다. 하루에 100명 가까이 병원을 찾는다. 멀리 지방에서 올라오는 환자도 많다. 사전 상담에서 진료 대상자로 확인되면 진찰권을 주며 약값과 치료비는 받지 않는다. 고영초(71·신경외과 전문의) 원장은 “요셉의원이 개원했을 땐 3개월 이상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고들 했지만 봉사자와 후원자가 끊이지 않고 계속 느는 걸 보면 기적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성직자를 꿈꿨던 고 원장은 신부와 가장 비슷한 직업을 찾다가 의사의 길에 들어섰고 대학생 때부터 51년째 진료 봉사를 하고 있다. 요셉의원에선 1987년부터 36년간 매주 수요일마다 봉사를 했다. 급기야 건국대병원 교수직 퇴임 직후인 2023년 3월엔 5대 원장으로 부임했다. 140여명의 의료인 봉사자 가운데 고 원장은 유일한 상주 의사다. 신부를 꿈꿨던 의사성직자와 가장 비슷한 직업 찾아건대 교수 퇴임 후 5대 원장 부임봉사 그만둘 생각은 해 본 적 없어병원 지켜온 원동력은 사람의 마음요셉의원은 1987년 서울 주요 빈민촌 중 한 곳이었던 관악구 신림동에 문을 열었다. 영등포역 인근 쪽방촌으로 이사 온 건 1997년이다. 개원 당시엔 협동조합 의료기관이었다. 빈민운동의 대모 김혜경(전 민주노동당 대표)씨가 결성한 ‘난곡희망의료협동조합’이 가난한 사람도 싼 가격에 진료받을 수 있는 병원을 만들고자 조합비 500만원을 모아 설립했고, 고 선우경식(1945~2008년) 원장이 초대 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선우 원장은 조합원이 아니어도 무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자선 병원을 운영하고 싶어 했다. 결국 협동조합이 병원 운영에 손을 떼고 후원에 의지하는 자선 병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초창기에 20명도 안 되던 후원자가 어느덧 6700여명으로 늘었다. 이곳 의사들은 대부분 대학병원 교수나 개원의들이다. 일주일에 한두 번 또는 2주에 한 번씩 요셉의원을 찾아 의료 봉사를 한다. 대구 등 멀리에서 올라와 손을 보태는 의사도 있다. 의정 갈등 사태로 일손이 부족해졌을 때도 그들은 시간을 쪼개 요셉의원을 찾았다. “정말 내일이면 쌀이 똑 떨어질 위기가 왔을 때 하늘에서 보다가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처럼 기적 같은 후원이 들어왔어요. 돌이켜보면 요셉의원을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은 사람의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요셉의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이들은 의사나 간호사 등 의료인만이 아니다. 600여명의 자원봉사자가 매주 목요일 음식 나눔을 하고 있다. 마침 인터뷰한 날이 목요일이라 요셉의원 1층 식당 부엌엔 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무료 급식은 선우 초대원장 때부터 시작했어요. 약보다 더 급한 게 먹을 거다. 가난한 이들이 한 끼도 못 먹어 기운이 없고 아프니까 우선 잘 먹이자 해서 무료 급식을 시작했죠. 노숙인 중 한겨울인데도 여름옷을 입고 다니는 이도 있어요. 그래서 자원봉사자들이 옷과 신발을 나눠 주고, 머리도 깎아 주고, 목욕도 시켜 주는 봉사를 하고 있어요.” 요셉의원에서 가장 분주한 곳은 내과다. 환자 2명 중 1명꼴로 고혈압과 당뇨병 등 만성질환이 있고 술을 많이 마시다 보니 간 질환, 위장 질환 환자가 대다수다. 조현병, 우울증, 불면증, 알코올의존증 등 정신과 질환 환자도 많다고 한다. “우리가 다른 병원에 부탁해 입원시켜도 술을 끊지 못해 쫓겨나는 환자가 많아요. 알코올 치료와 일반 진료를 겸하는 자선 병원이 있으면 좋은데 그런 병원이 별로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죠. 우리나라 사회복지 제도가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는데 요셉의원 같은 병원이 필요하냐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국민기초생활보장 의료 급여 수급자들은 으리으리한 병원에서 치료받길 꺼리고, 병원도 그런 환자 받기를 꺼려요. 이렇게 틈새에 놓인 환자들이 요셉의원을 찾아요. 국가에서 이런 환자들을 다 치료해 주는 병원을 만들어 운영한다면 가장 바람직하겠죠. 하지만 이론과 실제는 다르더군요.” 봉사의 기적의료 사각지대 환자들 무료로 진료요셉의원 봉사·후원자 끊이지 않아600여명 봉사자 목요일 음식 나눔방문 진료 환자, 주검 볼 땐 안타까워한발 더 나가 병원에 올 생각조차 못 하는 더 취약한 환자들을 발굴하고자 고 원장은 부임하자마자 방문 진료를 시작했다. “일주일에 서너 차례 방문 진료를 나가요. 환자를 찾아내 건강 상담을 하고 병원에 데려와 치료합니다. 이미 병이 심각하게 진행된 분들을 많이 보는데 이분들은 건강 검진을 받아 본 적이 없으니까 본인도 자신의 건강 문제에 대해 전혀 몰라요. 방문 진료를 나갔다가 환자로 만난 분을 어느 날 아침 주검으로 발견하는 일도 있어요. 그럴 때 정말 안타깝죠.” 요즘에는 의정 갈등으로 사직한 전공의 10여명과 함께 방문 진료에 나선다. 고 원장은 “행복한 의사가 되려면 지식과 재능을 나눠 누군가에게 도움 되는 일을 해야 한다”며 “내가 가르쳤던 학생들 중에 3~5%만이라도 의료 봉사의 길로 들어선다면 사회가 훨씬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그는 의사보다 성직자를 꿈꿨으나 숙명처럼 의사가 됐고 의료 봉사의 길에 들어섰다. “1960년 4·19 때쯤이었어요. 당시 초등학생이었는데 학교 끝나고 버스를 탔다가 시내에 잘못 내려서 시위대에 휩쓸린 거예요. 오후 5시쯤 계엄 사이렌이 울리자 시위하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는데 나만 홀로 길거리에 남았어요. 지나가던 사람이 울고 있던 나를 발견해 재워 주고 다음날 집에 데려다줬어요. 아이가 혹시 사고를 당했을까 봐 밤새 청량리 병원 영안실까지 뒤졌던 부모님은 천사가 지켜 줬으니 아들을 꼭 신부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셨대요.” 고 원장은 일반 중학교 대신 신학교에 진학했다. 정말 훌륭한 신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신학교 선배들 70% 이상이 대입 예비고사에서 탈락하는 것을 보며 회의가 들었다고 한다. 고 원장은 수학의 미분·적분도 모르는 채로 일반고등학교 3학년 과정에 편입해 새 인생을 시작했다. “재수할 각오였는데 기적처럼 성적이 쑥쑥 오르더니 서울대 의대에 합격했죠. ‘하느님이 나를 신부보다 의사로 만들 계획을 갖고 계셨나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연스레 의료 봉사에 관심을 갖게 됐죠. 마치 짜인 각본처럼, 숙명처럼.” 나눔의 기적20여개 진료과를 갖춘 ‘종합병원’어려운 이웃 몸과 마음 치유 쉼터“행복한 의사, 지식 나눠 도움 돼야사회 공동선 이루려면 나누어야”학생 때는 서울대 의대 가톨릭학생회에서 활동하며 서울 관악구 난곡동에서 의료 봉사를 했다. 의대 졸업 후 1977년부터 서울 금천구 시흥동 ‘전진상의원’에서 의사로서 첫 의료 봉사를 시작했다. 전진상의원은 1975년 고 김수환 추기경 요청으로 문을 열었다. 고 원장은 전진상의원을 “첫사랑 같은 곳”이라고 표현했다. “전진상의원에서 두통 환자를 많이 보다 보니 정신 질환자들이 자꾸 오는 거예요. 이분들을 제가 볼 수 없어 당시 한림대 강남성심병원에서 함께 근무하던 정신과 의사에게 의료 봉사를 부탁했죠. 그랬더니 이분이 ‘그럼 내가 전진상의원에서 의료 봉사를 할 테니, 요셉의원에서 신경외과 환자들을 봐 달라’고 하시더군요. 그때부터 요셉의원과 연을 맺었습니다.” 요셉의원 원장으로 부임하기 전까지 고 원장은 전진상의원, 요셉의원, 외국인 노동자의 병원 ‘라파엘클리닉’을 오가며 의료 봉사를 했다. 그동안 봉사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쪽방촌 주민이나 노숙인은 난폭하고 늘 술에 절어 있다는 편견이 있잖아요. 하지만 술이 원수지 요셉의원에 오는 환자들은 알고 보면 참 양순한 사람들이에요. 한순간의 실수로 나락으로 떨어진 분들이 제법 많아요. 보육원에서 자란 사람도 있고, 장애를 입어 일을 못 해서 노숙인이 된 사람도 있고, 술 때문에 가족에게 버림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누구든 살다가 삐끗하면 이렇게 될 수 있어요. 결국 사회 공동선을 이루려면 내가 가진 것을 남들과 나눠야 합니다. 봉사는 ‘시혜’가 아니에요. 그저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작은 발걸음입니다.”
  • “국민을 마약에서 보호” 사우디, 이란 국적 마약사범 6명 사형 집행

    “국민을 마약에서 보호” 사우디, 이란 국적 마약사범 6명 사형 집행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란 국적 마약사범 6명을 처형했다. 사우디는 중국·이란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사형을 집행하는 나라로, 처형 방식은 주로 참수로 이뤄진다고 알려져 있다. 사우디 국영 SPA통신은 1일(현지시간) 내무부 성명을 인용해 “이란 남성 6명이 사우디로 해시시(농축 대마)를 밀반입하다가 적발됐으며 국가 대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된 후 처형됐다”고 보도했다. 사우디 내무부는 사형 집행 날짜를 밝히지 않았으나, 이번 처형이 이슬람법에 따른 것이며 국민을 ‘마약의 재앙’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다고 AP통신은 전했다. AFP통신은 사우디의 사형 집행이 2023년 170건에서 지난해 최소 338건으로 급증했으며, 지난해 처형된 사형수 가운데 외국인이 129명, 마약사범이 117명이라고 집계했다. 1990년대부터 사우디의 사형 집행을 기록해온 인권단체 국제앰네스티는 이전 최고 사형 집행 건수는 2022년 196건, 1995년 192건이었다고 밝혔다. 중동 최대 마약시장으로 꼽히는 사우디는 특히 시리아 등지의 친이란 무장세력과 연계된 캡타곤 등 마약 밀수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사우디는 국제사회의 비난에 한때 마약사범 사형 집행을 유예하다가 2022년 11월 재개했다. 사우디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는 2022년 언론 인터뷰에서 살인 사건이나 개인이 여러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는 경우 이외에는 사형을 선고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란 외무부는 이날 자국민 처형이 국제법 위반이라며 사우디 대사를 불러 강력히 항의했다고 밝혔다. 각각 이슬람 수니파·시아파 종주국인 사우디와 이란은 종파 갈등과 역내 패권 다툼으로 오래된 앙숙이다. 두 국가는 2016년 사우디가 시아파 성직자를 사형에 처하면서 끊었던 외교 관계를 2023년 3월 중국의 중재로 복원했다.
  • “미성년 아내와 성관계는 강간” 불법인데…“가난해서 조혼” 심각한 인도 상황

    “미성년 아내와 성관계는 강간” 불법인데…“가난해서 조혼” 심각한 인도 상황

    인도에서 미성년자와 불법으로 결혼한 사례에 대한 단속이 대대적으로 이뤄진 가운데, 약 5000명이 체포됐다. 인도는 미성년자와의 결혼이 불법이지만, 매년 150만명에 달하는 소녀들이 결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22일(현지시간) 힌두스탄 타임스 등에 따르면 인도 북동부 아삼주 정부는 지난해 2월부터 아동 결혼 금지법 위반자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시작해 지금까지 약 5000명을 불법 아동 결혼 혐의로 체포했다. 이 중에는 미성년자와의 결혼을 알면서도 결혼식을 주관한 성직자와 혼인 신고를 받아 준 당국자들도 포함됐다. 인도는 법적으로 18세가 돼야 결혼할 수 있다. 하지만 인도에서는 아동 결혼 금지법이 공공연히 무시되고 있다. 유엔(UN)은 2020년 보고서를 통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조혼 사례가 인도에서 나온다며 매년 약 150만명의 소녀들이 결혼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특히 가난한 시골 지역에서는 부모가 재정적 안정을 위해 미성년 자녀에게 조혼을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인도 당국은 아삼주처럼 대대적인 단속을 통해 불법 아동 결혼을 막는 데 노력하고 있다. 인도 대법원은 2017년 미성년자 아내와 성관계하는 것은 강간에 해당한다고 판결하기도 했다. 인도에서 18세 이전에 결혼하는 여성 미성년자의 비율이 2005~2006년 47%에서 2019~2021년 23.3%로 줄었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아삼주는 성명을 통해 “우리는 아동 결혼에 맞서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며 “우리는 사회적 악을 근절하기 위해 계속 과감한 조처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조혼은 인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니세프가 지난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인도를 비롯해 아프가니스탄과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등 남아시아 국가에서 미성년자일 때 결혼한 사람은 2억 9000만명에 달한다.
  • 성희롱에 채찍질까지···이란 ‘히잡법’ 현주소

    성희롱에 채찍질까지···이란 ‘히잡법’ 현주소

    2022년 9월 이란 여성 마흐사 아미니(당시 22세)가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된 후 의문사한 사건 이후 촉발된 시위에서 최소 500명이 사망했지만, 여전히 이란 여성은 히잡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란계 미국인 기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인 마시 알리네자드는 지난 2일(이하 현지시간) 엑스(구 트위터)에 “한 이란 여성이 대중 앞에서 머리카락을 드러낸 혐의로 사법 당국으로부터 채찍형 74대를 선고받았다”고 밝혔다. 알리네자드가 공개한 사진 속 여성은 채찍질을 받은 뒤 허리 부분에 큰 상처가 남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여성은 상처 가득한 몸을 온전히 드러낸 채 ‘여성, 생명, 자유’라고 적힌 팻말이 들고 있다. 사진 속 여성은 알리네자드에게 “수개월 전 길에서 도덕 경찰에게 체포됐다. 히잡법을 위반했다는 게 이유였다“면서 ”오랜 법정 다툼 끝에 나는 채찍형 74대를 선고받았다. 처벌을 감독하는 (이슬람) 성직자는 형벌이 제대로 이뤄지는지 현장에서 지켜봤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이 잔인한 정권에 맞서 싸우는 것을 포기하지 않겠지만, 내 조국에서 죄인처럼 사는 것에 지쳤다”고 토로했다. 사진 속 여성을 히잡법 위반으로 현장에서 체포한 도덕 경찰은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등 샤리아(이슬람 율법)을 따르는 국가에서 사회 통제를 위해 마련한 수단이다. 대체로 여성의 복장이나 행동 등이 샤리아에 어긋나지 않는지를 감시하고 지도하기 위해 고용된 사람들이다. 알리네자드는 “이슬람공화국인 이란에서 여성의 삶이 얼마나 잔인한 지 (이 사진으로) 실감할 수 있다”면서 “히잡법은 야만적인 법이자 테러다.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와 (탈레반이) 다를 게 없다”고 비판했다. 더욱 강력한 히잡법 시행 앞둔 이란2년 전 이란 전역에서 의문사한 아미니의 죽음으로 촉발된 시위가 벌어졌지만, 이란 당국은 오히려 히잡법을 더욱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왔다. CNN의 4일 보도에 따르면, 이란 당국은 지난 4월 일명 ‘누르 계획’을 발표하고 히잡 단속을 다시 강화했다. ‘누르’는 페르시아어로 ‘빛’을 의미하며, 테헤란 등 여러 주요 도시에서는 히잡을 착용하지 않거나 규정에 어긋나게 착용한 여성에 대한 강력한 단속이 시작됐다. 도덕경찰은 공공장소에서 히잡 규정을 어긴 여성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성희롱과 구타 등을 자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여성에게 테이저건을 사용하거나 승용차 유리창을 파손하는 등의 폭력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와 더불어 지난 1일에는 여성의 히잡 착용을 강제하기 위한 ‘히잡과 순결 법안’이 의회를 통과해 대통령 승인만 남겨둔 상황이다. ‘히잡과 순결 법안’은 공공장소에서 부적절한 옷을 입거나 복장 규정을 4회 이상 위반한 사람에게 5~10년의 징역형과 1억 8000만~3억 6000만 리알(한화 약 510만~1035만 원)의 벌금형을 부과할 수 있다.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여성이나 이러한 여성을 태우고 운전한 자동차 소유주에게도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은 이 법안에 대해 반대의사를 밝혀왔지만, 의회 내 보수층 및 보수적인 여론의 반발이 워낙 거센 탓에 법안 서명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페제시키안 대통령은 자신의 엑스에 “내가 서명하고 시행해야 할 히잡법은 매우 모호하다. 우리는 사회의 조화와 공감을 방해하는 어떤 행위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해 상호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CNN은 “이란에서 대통령의 서명은 대체로 의례적인 탓에, 그가 법안 시행을 막을 여지는 거의 없다. 이에 대해 페제시키안 대통령도 인정했다”고 지적했다. 이란 당국은 여성의 히잡 착용을 강제하는 ‘히잡과 순결 법안’에 대한 대통령 승인이 나오면 3년간 시범 시행을 거치고 정식으로 이를 시행할 예정이다.
  • 500명 죽었는데…히잡 때문에 ‘채찍 74대’ 맞은 이란 여성, 상처 공개[포착]

    500명 죽었는데…히잡 때문에 ‘채찍 74대’ 맞은 이란 여성, 상처 공개[포착]

    2022년 9월 이란 여성 마흐사 아미니(당시 22세)가 히잡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체포된 후 의문사한 사건 이후 촉발된 시위에서 최소 500명이 사망했지만, 여전히 이란 여성은 히잡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란계 미국인 기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인 마시 알리네자드는 지난 2일(이하 현지시간) 엑스(구 트위터)에 “한 이란 여성이 대중 앞에서 머리카락을 드러낸 혐의로 사법 당국으로부터 채찍형 74대를 선고받았다”고 밝혔다. 알리네자드가 공개한 사진 속 여성은 채찍질을 받은 뒤 허리 부분에 큰 상처가 남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여성은 상처 가득한 몸을 온전히 드러낸 채 ‘여성, 생명, 자유’라고 적힌 팻말이 들고 있다. 사진 속 여성은 알리네자드에게 “수개월 전 길에서 도덕 경찰에게 체포됐다. 히잡법을 위반했다는 게 이유였다“면서 ”오랜 법정 다툼 끝에 나는 채찍형 74대를 선고받았다. 처벌을 감독하는 (이슬람) 성직자는 형벌이 제대로 이뤄지는지 현장에서 지켜봤다“고 말했다. 이어 “나는 이 잔인한 정권에 맞서 싸우는 것을 포기하지 않겠지만, 내 조국에서 죄인처럼 사는 것에 지쳤다”고 토로했다. 사진 속 여성을 히잡법 위반으로 현장에서 체포한 도덕 경찰은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등 샤리아(이슬람 율법)을 따르는 국가에서 사회 통제를 위해 마련한 수단이다. 대체로 여성의 복장이나 행동 등이 샤리아에 어긋나지 않는지를 감시하고 지도하기 위해 고용된 사람들이다. 알리네자드는 “이슬람공화국인 이란에서 여성의 삶이 얼마나 잔인한 지 (이 사진으로) 실감할 수 있다”면서 “히잡법은 야만적인 법이자 테러다.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와 (탈레반이) 다를 게 없다”고 비판했다. 더욱 강력한 히잡법 시행 앞둔 이란2년 전 이란 전역에서 의문사한 아미니의 죽음으로 촉발된 시위가 벌어졌지만, 이란 당국은 오히려 히잡법을 더욱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왔다. CNN의 4일 보도에 따르면, 이란 당국은 지난 4월 일명 ‘누르 계획’을 발표하고 히잡 단속을 다시 강화했다. ‘누르’는 페르시아어로 ‘빛’을 의미하며, 테헤란 등 여러 주요 도시에서는 히잡을 착용하지 않거나 규정에 어긋나게 착용한 여성에 대한 강력한 단속이 시작됐다. 도덕경찰은 공공장소에서 히잡 규정을 어긴 여성들을 마구잡이로 체포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성희롱과 구타 등을 자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여성에게 테이저건을 사용하거나 승용차 유리창을 파손하는 등의 폭력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이와 더불어 지난 1일에는 여성의 히잡 착용을 강제하기 위한 ‘히잡과 순결 법안’이 의회를 통과해 대통령 승인만 남겨둔 상황이다. ‘히잡과 순결 법안’은 공공장소에서 부적절한 옷을 입거나 복장 규정을 4회 이상 위반한 사람에게 5~10년의 징역형과 1억 8000만~3억 6000만 리알(한화 약 510만~1035만 원)의 벌금형을 부과할 수 있다.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여성이나 이러한 여성을 태우고 운전한 자동차 소유주에게도 벌금이 부과될 수 있다. 마수드 페제시키안 이란 대통령은 이 법안에 대해 반대의사를 밝혀왔지만, 의회 내 보수층 및 보수적인 여론의 반발이 워낙 거센 탓에 법안 서명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페제시키안 대통령은 자신의 엑스에 “내가 서명하고 시행해야 할 히잡법은 매우 모호하다. 우리는 사회의 조화와 공감을 방해하는 어떤 행위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해 상호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고 소신을 밝혔다. CNN은 “이란에서 대통령의 서명은 대체로 의례적인 탓에, 그가 법안 시행을 막을 여지는 거의 없다. 이에 대해 페제시키안 대통령도 인정했다”고 지적했다. 이란 당국은 여성의 히잡 착용을 강제하는 ‘히잡과 순결 법안’에 대한 대통령 승인이 나오면 3년간 시범 시행을 거치고 정식으로 이를 시행할 예정이다.
  • [홍용진의 역사를 보는 눈] ‘동상이몽’ 십자군 원정

    [홍용진의 역사를 보는 눈] ‘동상이몽’ 십자군 원정

    십자군 원정이란 흔히 이교도에 대한 기독교인의 종교적 투쟁으로 알려져 있다. 정확히 말하면 교황 중심의 기독교 세계를 위해 비기독교인이나 이단에 가해진 폭력적 활동을 일컫는다. 이 중에서도 교황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십자군 원정은 예루살렘 수복을 목적으로 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까지 8차례 진행됐다. 그러면 십자군 원정은 왜, 어떻게 발생했을까. 공식적인 수준에서 제1차 십자군이라고 부르는 원정은 1096년 8월에 시작했다. 이때 서유럽은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에서 평화와 안정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교회는 기사귀족의 야성과 폭력행위를 통제하고 금지하는 데 조금씩 성과를 거뒀고, 이들로부터 피해를 받던 비무장인들 즉 농민과 상공업자, 성직자들은 점차 평화로운 일상생활을 누리기 시작했다. 서유럽의 사회·경제적 활력은 회복됐지만 기사귀족은 억압된 폭력적 성향을 분출하고 싶었다. 그 와중에 이베리아 및 이탈리아반도에서 무슬림과의 투쟁에서 승리한 전사들이 왕이나 대제후가 되며 교회로부터 구원을 보장받았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1095년 11월에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소집한 클레르몽 공의회는 서유럽 기사귀족을 흥분시켰다. 폭력의 분출과 신분 상승, 경제적 성공이라는 세속적 욕망이 종교적 구원에 대한 갈망과 뒤얽혔다. 무슬림에 대한 교황의 악의적 ‘가짜뉴스’는 이들의 폭력을 ‘정당한 전쟁’으로 미화했다. 하지만 교황의 속셈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카노사의 굴욕 이후 더 공고하게 확립되고 있던 교황의 권위를 눈앞에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쟁쟁한 서유럽 귀족들이 교황이 내세우는 대의를 받들어 그의 발치 아래 모여 뜻에 따르겠다고 한목소리로 응하는 장면은 서유럽의 보편적·영적 지도자로서 교황의 지위를 증명했다. 그런데 교황이 공의회를 소집한 계기는 무엇보다 동로마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원군 요청이었다. 1054년의 대분열로 정통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된 로마교회를 다시 정통 ‘로마 황제’인 자신에게 돌아오게 만들면서 자신이 준비하는 동방 원정에 서유럽 세력을 이용하려는 심산이었다. 당시 동로마제국은 11세기 후반 서아시아에서 강력하게 팽창하던 셀주크제국에 밀려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하지만 1092년 말리크샤 사망 이후 셀주크제국이 내분으로 혼란해지자 알렉시오스 1세는 반격의 기회를 포착하고 원정을 기획하고 있던 차였다. 13세기에 십자군 원정은 모든 이의 기대를 벗어나 진행됐다. 십자군은 동로마제국과 갈등을 빚었고 급기야 제국을 공격했다. 교황은 십자군 조직과 운영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해 갔다. 그리고 십자군이 성지에서 거둔 성공은 일장춘몽으로 끝나고 말았다. 역사는 누구 하나의 뜻으로만, 또 예상하는 대로 흘러간 적이 없다. 홍용진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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