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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절하고… 열망하고… 방황하고…

    “난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가의 딸도 아니고, 대단한 얼짱도 아니다. 명문대가 보장된 수재도 아니고, 단번에 스타가 될 재능도 없다. 하지만 난 이렇게 나를 잘 알고 있고, 나를 아는 만큼 노력한다. 지금의 나를 위해, 먼 미래의 나를 위해…” ‘열네 살이 어때서?’(홍익출판사 펴냄)는 ‘인터넷 교보’에 연재되는 동안 청소년 독자들과 학부모, 교사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은 작품이다. 신춘문예로 등단한 저자 노경실은 ‘상계동 아이들’ ‘복실이네 가족사진’ ‘철수는 철수다’ 등의 청소년소설을 통해 이 시대 우리 어린이들과 청소년의 마음을 가장 훌륭하게 표현하는 작가로 활동 중이다. 노경실 작가가 처음 낸 성장소설 ‘열네 살이 어때서?’의 주인공 김연주는 아이돌 가수가 되겠다며 연예인에 열광하는 평범한 열네 살 소녀다. 공부에 지치고, 친구들과의 경쟁에 치이고, 어른들이 강요하는 숱한 의무에 시달리는 등 좌절의 연속이면서도 가슴속 열망에 매달리는 연주의 방황은 오늘을 사는 모든 10대 아이들의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연주의 방황은 모두의 가슴을 안정시키며 미래를 위한 노력으로 끝난다. 브래지어 사이즈도 75A에서 80B로 한 뼘 더 자란다. 노경실의 성장소설이 가진 미덕은 요즘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집요하게 확대하여 추적하면서도 한순간도 아이들에 대한 도타운 애정을 잃지 않는다는 점. 중간중간 삽입된 연주의 메모는 실제 청소년들의 비밀 일기장을 들춰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열네 살 연주의 일상과 고민이 삶에 찌든 어른들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놀랍다. 지나버린 열네 살이 기억이 안 날 만큼 까마득한 사람도, 이제 열네 살의 징검다리를 껑충거리며 건너고 있을 진짜 열네 살도 오늘을 사는 이유와 꿈이라는 것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고 헤매는 것은 똑같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늙는 것이 아니라 성장을 하는지도 모른다. 청소년 성장소설이라 이름 붙었지만 누구에게든 인생에서 생각할 쉼표를 던져주는 책이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중간자’ 독고준의 지적 여정 읽기

    ‘중간자’ 독고준의 지적 여정 읽기

    돌아온 ‘독고준’이다. 눈썰미있는 문학 독자라면 금세 눈치챘을 주인공이다. ‘광장’을 쓴 최인훈이 1960년대에 썼던 연작 소설 ‘회색인’, ‘서유기’에서 이념과 사랑 앞에서 늘 회의하고 고뇌하는 중간자이자 경계인으로서의 인물이다. 두 작품에 걸쳐 독고준은 북한에서 중학교를 다니다가 한국전쟁 때 내려온 국문과 대학생이었다. 최인훈의 자전적 성장소설에 가깝다. 고종석(51)의 ‘독고준’(새움 펴냄)은 최인훈의 작품을 이어서 독고준의 뒷이야기를 들려준다. 장년이 된 독고준과 그의 딸 원을 앞세워 미완으로 끝날 뻔했던 작품을 완결지은 셈이다. 애초 3부작을 예상했던 최인훈은 마지막 작품을 마무리짓지 못한 아쉬움을 드러내곤 했다. 고종석은 1993년 ‘기자들’ 이후 17년 만에 내놓는 장편소설로 ‘최인훈 이어쓰기’를 택했다. ‘독고준’ 속 독고준은 ‘얼음처럼 차가운 회의주의와 수정처럼 투명한 문체’를 높게 평가받으며 소설가로서 일가를 이룬다. 그러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전임 대통령이 자살하기 몇 시간 전 14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몸을 던져 사회적 관심도 받지 못한 채였다. 소설은 독고준의 1주기 즈음 딸 원이 1960년 4·19부터 시작해 2007년 대통령 선거일까지 47년간 아버지가 쓴 일기를 다시 읽으며 자신의 상념을 보태는 방식으로 풀어간다. 독고준의 일기는 한국 사회가 거쳐온 47년의 격변 속 어느 한 쪽이 넘쳐나는 이념 과잉의 우리 모습을 꼬박 담고 있다. 강렬하게 투영된 독고준의 지적 여정이기도 하다. 고종석이 설정한 장년의 독고준은 흥미롭다. 유명한 소설가면서 창비(창작과비평), 문지(문학과지성) 어느 그룹에도 끼지 못하는 여전한 중간자이자 경계인이었다는 점은 익히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활달하고 적극적인 화가인 이유정 대신, 순종적인 신앙인 김순임과 결혼하게 한 것, 독고준의 마지막 생을 자살로 마감지은 것 등은 고종석의 적극적 해석이다. ‘광장’의 이명준을 떠올리면 그 역시 예상할 법하긴 하지만 말이다. 고종석은 “젊은 시절 ‘회색인’과 ‘서유기’를 읽고 난 이후에 ‘독고준’이 살아갈 삶이 궁금했었다.”면서 “장년기 이후의 ‘독고준’에 대해서 상상의 놀이를 해오다 소설로 옮기고 싶은 욕망을 가졌고 결국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게 됐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은 전작을 이어가면서도 독고준과 그의 딸 원의 관념과 생활을 그린 독립적 작품이기도 하다.”고 밝혔다. ‘회색인’ ‘서유기’와 같이 읽어도, 따로 읽어도, 좋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고기 써는 무슬림으로 양면성 파헤치다

    고기 써는 무슬림으로 양면성 파헤치다

    소설의 공간은 분명히 우리나라 서울 이태원 이슬람 사원 주변 어디쯤이다. 등장하는 이들 역시 한국 국적-태생지는 그리스, 터키, 한국으로 나뉘긴 한다-의 사람들이다. 또한 이들이 주요하게 공감하는 시대적 사건 역시 1950년의 한국전쟁이다. 하지만 왠지 낯설다. 먼저 성장소설이 흔히 품는 문법과 다르다. 담고 있는 주제와 정서 또한 기존의 성장소설이 반복해온 것들과 진한 선을 긋는다. 인간의 삶과 전쟁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다루건만 그렇다고 정색하고서 한국전쟁의 의미와 평가 등을 풀어내는 것도, 애써 에둘러 가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결핍을 드러내면서도 능청스럽게 빈틈없이 채워내는 문체와 문장 또한 눈에 익숙하지 않다. 이것저것 몽땅 낯설다. 하지만 아주 반갑게 낯설다. ●낯선 문체·문법으로 문학적 성취 손홍규(35)가 4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 ‘이슬람 정육점’(문학과지성사 펴냄)은 우리 문단이 목마르게 기다려왔던, 반가운 낯섦이자 새로운 문학적 성취다. 비루한 삶들의 터전인 이태원 어느 골목은 영국 런던의 빈민들이 모여 사는 가난한 뒷골목으로 바꿔도 그만이다. 영혼 깊은 곳에 헤어나기 어려운 상처를 남겨놓은 한국전쟁은 예컨대 코소보 내전이라도 좋고, 2차 세계대전이라도 상관없다. 또한 한국전쟁을 매개로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층위에 있는 그 사람의 고향 나라가 그리스이지만 아니라도 좋고, 터키지만 역시 아니라도 좋다. 인종과 민족, 국가, 종교 등의 경계는 무의미하다. 손홍규는 지구적 보편의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문장과 문제의식을 앞세워 인류집단이, 사회가, 개인이 겪은 상처를 마구 헤집어 눈앞에 보여준다. 세상을 바라보는 소년의 시선은 어떠한 기존의 관념에도 결박되지 않겠다는 듯 등장하는 모든 상처입은 영혼의 안팎을 샅샅이 들여다보고 성실하게 성찰한다. ●한국전쟁에 신음하는 남녀노소 필독서 소설의 제목이자 주된 인물인 터키 출신 한국전쟁 참전 군인인 ‘하산 아저씨’의 직업 설정부터 파격적이며 문제적이다. 삼겹살을 썰고 돼지 목살을 포장하는 독실한 무슬림(이슬람교도)이라니…. 그는 ‘나’를 입양한다. 총상을 비롯해 몸과 마음 곳곳에 크고 작은 흉터가 파인, 상처투성이로 고아원을 전전하던 ‘나’는 오전 11시면 뛰쳐나가 화단에 오줌을 누고, 동상의 팔을 부러뜨리는 행동으로 학교에서 쫓겨나듯 벗어나는 문제적 소년이다. 흉터에 신음하는 이는 하산과 ‘나’뿐 아니다. 그리스 내전 중 사촌 일가를 적으로 오인해 사살했다는 죄책감에 한국전쟁에 도망치듯 자원한 그리스 출신 ‘야모스 아저씨’,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3년의 기억을 몽땅 잃어버린 뒤 늘 군복에 군가를 부르며 사는 ‘대머리 아저씨’, 남편의 폭력에 도망쳐 나온 ‘안나 아주머니’, 그리고 “죽을건데 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소년 염세주의자, 언어의 부정확성에 회의하며 말을 더듬는 ‘유정이’까지, 등장하는 이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깊숙한 상처에 신음한다. 손홍규는 “하산의 직업은 돼지고기를 금기시하는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지만 인간의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종교적으로는 일종의 타락이지만 인간 자체의 타락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전쟁 역시 인류의 타락이지만 인간을 완벽히 타락시키지는 못한다는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상처를 품고 있다면 눈 부릅뜨고 그 상처와 대면해야 한다. 그것이 진짜 성장이다. 작가는 ‘통과의례’라는 말로 개인과 사회의 영혼에 깊이 패어 있는 상처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전쟁의 기억도, 개인의 공포와 불안·상실도 모두 ‘지금, 여기’에서 소중히 다뤄지기를 원한다. 성장소설을 표방한 ‘이슬람 정육점’이 노소를 떠나 필독되어야 할 진정한 이유다. 트럭을 빌려 교외로 소풍 나가는 이들의 모습에서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힘 역시 이미 우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한국전쟁 직후 배경 자전적 소설

    순이 할머니가 말한다. “니, 앞으룬 분이 간나랑 놀지 말어! 그 간나는 빨개이여.” 순이가 연신 묻는다. “할머이, 분이가 나쁘너?” “할머이유, 빨개이가 나쁘너?” 할머니는 답한다. “분이는 어래서 죄가 없어두 그 집 아부지가 빨개이래서 놀문 안 돼.” 그러자 순이 할아버지가 혀를 끌끌 찬다. “아덜이 뭔 죄여! 왜서 못 놀게 해? 뭘 어찌라구 안죽까정 빨개이 타령이너?” 그러니까 전쟁이 막 끝났으니 얼추 1953~54년쯤일 게다. 장소는 휴전선 언저리 강원도 양양 어느 곳일 테고. 순박하고 씩씩한 여섯 살 순이는 할머니, 할아버지, 동생 철이와 함께 살고 있다. 어머니, 아버지는 양양읍내에 옷수선 가게를 열고 살면서 가끔씩 찾아온다. 한국 전쟁의 전화(戰禍)가 채 가시지 않은 이때, 어른들 세상에서 벌어지는 지긋지긋한 공포와 불안은 아이들에게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경자의 장편소설 ‘순이’(사계절 펴냄)다. 한국 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전쟁의 비극적인 참상을 전형화시키기 보다는 강원도 양양 출신 이경자의 어린 시절이 꼬박 투영된 자전적 성장소설이다. 마을 사람들끼리 때로는 쉬쉬하며 반목하고, 때로는 애틋한 예전의 정으로 살고 한다. 순이의 눈에 비친 세상은 신기하고, 두렵고, 재미난 것들로 가득하다. 전쟁 이후 급하게 변하는 세상은 찐 감자에 고추장 대신 버터를 발라먹게 하고, 미국을 ‘천당’이라고 여기게 한다. 강원도의 투박하고 구수한 입말-이해가 안되는 단어도 간혹 나온다.-과 때로는 다투고 탐욕을 부리더라도 순박하기 그지 없는 사람들이 나와 티격태격 거리며 사는 모습은 사람의 마음을 푸근하게 만든다. 살아보지 않은 시절의, 살아보지 않은 지방의 이야기건 만 이처럼 우리 마음 속 고향의 원형은 순박함의 복원, 건강함의 복원으로 매 한 가지다. 왈칵 안아주고 싶은 순이가 소설을 읽는 내내 눈앞에 어른거리며 뛰어다니는듯 하다. 소설 속 순이는 이제 환갑을 훌쩍 넘겼겠다. 이 땅의 모든 순이가 여전히 해맑기를! 9800원.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무협지 말투로 혜성처럼 등단

    무협지 말투로 혜성처럼 등단

    신춘문예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신인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시나브로 단편을 발표하다 책을 모아 낸 것도 아니다. ‘듣도 보도 못한’ 작가 지망생이 대형 출판사로 장편소설을 한 편 투고했고, 곧바로 출간이 결정됐다. 장편소설 ‘변두리 괴수전’(민음사 펴냄)을 쓴 신인 소설가 이지월(36)의 이야기다. ●‘듣보’작가, 대형출판사서 낙점 이지월은 이렇게 ‘갑자기 땅에서 솟은 작가’이기에 오히려 기성 작가를 닮은 고루한 티가 전혀 나지 않는다. 오히려 등단 제도를 거치지 않아 더 발랄한 상상력을 마음껏 보여준다. 그가 신춘문예로 등단했다면 ‘변두리’ 같은 작품을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작품은 무협지의 문체와 학원만화의 구성을 능숙하게 빌려 쓴 성장소설이다. 배경은 서울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도시 ‘은강’. 이곳은 ‘갑갑함과 깊은 회의로 가득 찬 세상의 변두리’로 그 속에서 아이들은 사납고 난폭하게 자라난다. 어릴적 아버지 회사가 부도를 맞아 이곳으로 이사와 자란 ‘나’ 역시, 강호(江湖)와도 같은 이곳에서 ‘은강의 아이’로 커간다. 거기서 ‘나’는 싸움의 고수인 동료 ‘스승’을 만나고, 여선배 ‘소피’를 만나 풋풋한 마음을 키우기도 한다. 그들이 다니는 ‘은강고등학교’는 퇴역한 노장군이 이사장으로 있는 학교. 이사장의 조카가 교장이고, 교장의 조카가 교무주임, 교장 사돈의 팔촌이 학교 지정 교복점을 경영하는 ‘전통과 족보가 확실한 학교’다. ‘나’를 포함한 주인공들은 이렇게 깊이 뿌리내린 학교의 부패와 악습을 참지 못하고 결국 ‘혁명’을 도모한다. 검증도 안 된 아마추어의 작품을 대형 출판사가 선뜻 출판했으니 작품의 대중성만큼은 담보하고 있다고 봐야겠다. 출판사가 장담한 대로 펼친 책장을 놓지 못하게 하는 힘이 범상치 않다. 그 일등공신은 사이사이 웃음이 새어나오게 하는 해학적인 문체다. 집 대문을 나선 7살 아이는 무협지에서 빌려온 근엄한 한문투의 말투로 “이제 세상으로 나설 때가 온 것이었다. 내 나이 일곱 살. (중략) 장부가 길을 걷고자 하는데, 감히 무엇이 그 발목을 잡아챌 수 있겠는가.”라고 이야기한다. 밖에서 얻어맞고 온 그 7살 녀석을 데리고 그를 때린 또래 아이들을 찾아 가서 던진 엄마의 대사는 또 이렇다. “나의 소중한 혈육에게 폭행을 가한 자들이여. (중략) 목을 길게 빼고 얌전히 처벌을 기다려라!” 이런 쾌활하고 발랄한 언변은 상황과 표현의 괴리 속에서 시종일관 흥미를 잃지 않도록 만들어 준다. 그렇다고 ‘변두리’가 능청스러운 표현만 남은 가벼운 소설인 것은 결코 아니다. 이지월은 가벼운 재미를 양념으로 뿌리면서, 현실과의 접점을 잃지 않는 날카로운 시선을 그 안에 숨기고 있다. ●능청 속 사회문제의 씁쓸함 특히 부패한 학교에 대한 학생들의 투쟁은 여러 모로 의미를 곱씹어 볼 만하다. ‘혁명’ 운운한 학생들의 집단행동은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질 좋은 교복을 입고 싶다.”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일면 사소한 욕망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학교는 그 목소리를 묵살하고, 결국 학생들은 폭력이라는 허용되지 않는 극단적 수단을 취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해직 교사, 재단 설립에 반발하는 철거민 등의 집단도 한국 사회가 지나온, 또는 지금 지나가고 있는 현실을 떠올리게 해 서글픈 느낌을 준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책꽂이]

    ●아름다운 하루(안나 가발다 지음, 허지은 옮김, 문학세계사 펴냄) 어린 시절의 추억과 가족을 감수성 짙은 문체로 써내려간 프랑스 소설.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멀어지지만, 그래도 언제나 서로 인생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는 형제자매들의 정에 대해 그렸다. 30대에 접어든 삼남매 시몽, 롤라, 가랑스는 격식을 차린 사촌의 결혼식장에서 갑자기 빠져나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낸 시골 마을로 떠나며 행복을 느낀다. 9000원. ●농담이 사는 집(조명숙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장편 ‘바보이랑’, 소설집 ‘헬로우 할로윈’ 등을 쓴 작가의 첫 성장소설. 고등학생 영은이의 이모는 어느 날 핀란드로 ‘코끼리’를 찾으러 가겠다고 한다. 코끼리는 핀란드인 여행가로 이모는 그를 자신의 친아버지라 믿고 있다. 9000원.
  • 서툰 관계 맺기의 통증

    너무도 서툴다. 근사하면서도 영원한 사랑은 존재할 수 없고, 가족 또한 늘 따뜻한 안식처만은 아니다. 나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던 친구는 역시, 나와 다를 뿐이다. 이렇듯 바로 곁에서 몸 기대고픈 사람들과 관계 맺기는 어렵기만 하다. 그럼에도 그 관계 맺기를 위한 인류의 몸부림은 수 천년 동안 한번도 포기된 적이 없다. 김서령(36)의 첫 장편소설 ‘티타티타’(현대문학 펴냄)는 가족, 사랑, 친구 등 관계 맺기에 서툰 이들이 겪는 잔잔한 통증에 대한 얘기다. 김서령은 특유의 촉촉하게 물기 묻은 섬세한 문장으로 그 통증마저 삶의 한 부분이기에 기꺼이 껴안고 가야한다고 담담하게 얘기한다. 우리가 필연적으로 통과해야하는 인생의 많은 성장통을 다룬 성장소설이자 여성을 주체로, 여성의 시각에서 쓴 여성주의 소설이다. 정답을 알 수 없는 ‘착한 사람(여자) 콤플렉스’에 대한 반성적 성찰이기도 하다. 소설은 기억이 존재하는 시절, 여섯 살 때부터 붙어지내온 ‘소연’과 ‘미유’의 친구 관계를 중심축으로 삼고 이들의 가족, 그리고 남자친구와의 엇갈리듯 스쳐가는 사랑이 등장한다. ‘티타티타’는 ‘젓가락 행진곡’의 애칭이다. 소연과 미유가 여섯 살 함께 쳤던 피아노 연주곡이자 마지막에 또다른 기억으로 확장되는 매개로 등장한다. ‘티타티타’를 통해 우리네 삶 속에서 가족에 치이고, 사랑에 치인 이의 선택이 극단적이지 만은 않음을 알 수 있다. 아무 일 없었던 듯 만원전철을 타고 회사에 가고, 적당히 힘에 부친 일 끙끙거리며 하다가, 오후에 졸린 눈 부비려 커피 한 잔 마신다. 그러다 저녁 어스름 퇴근길 문득 명치 끝에 썰물같은 것이 쏴~하고 밀려가는 느낌이 들면 그때서야 가슴이 아려온다. 그렇지만 미유의 사랑을 잃어버린 남자친구 입을 빌어 단호히 얘기한다. “내가 이렇게 하면 남들이 좋아할 거야.(…) 나는 딴 사람 말고 나만 기쁘게 해줘야지, 그렇게 살아도 돼. 너에게 있어서 나는 조연이잖니. 나한테 미유, 너도 조연이듯이.” 그렇다. 모든 관계 맺기의 출발은 ‘건강한 나’일테니까. 한 장의 인생이 악보처럼 지나갔으니 이제 다른 인생이 또 시작될 것이다. 김서령은 2003년 등단한 뒤 2005년 대산창작기금, 2008년 서울문화재단 창작기금을 받았다. 2007년 첫 소설집 ‘작은 토끼야 들어와 편히 쉬어라’를 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부고] ‘호밀밭의 파수꾼’ 샐린저… ‘미국 민중사’ 하워드 진 상반된 삶을 살다 같은날 하늘로

    한 사람은 문학에서, 다른 한 사람은 역사학에서 일가를 이뤘다. 소설가는 30년 동안 인터뷰 한 번 하지 않는 은둔생활을 계속했고 역사학자는 평생 싸움꾼이란 소리를 마다하지 않고 현실에 참여했다. 정반대 삶을 살았지만 둘 다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고 자기 분야에서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공통점을 갖게 됐다. 60년 가까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가 미 뉴햄프셔주 자택에서 27일(현지시간) 노환으로 별세했다. 91세. 같은 날 캘리포니아에선 ‘미국 민중사’를 통해 권력자에서 원주민과 흑인·여성으로 역사의 시선을 바꿔놓은 역사학자이자 미국을 대표하는 양심적 지식인 하워드 진 보스턴대 명예교수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87세. 비뚤어지고 반항적인 10대 홀든 콘필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성장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은 1951년 출간 이후 샐린저를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유명세에 부담을 느끼고 1965년 미국 잡지 뉴요커에 마지막 작품을 발표한 뒤 뉴햄프셔 시골 마을에서 평생 은둔생활을 했다. 1980년 이후로는 인터뷰 한 번 하지 않았다. 진 교수는 브루클린 부두 노동자로 노동운동에 참여했고 나치가 싫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자신이 투하한 네이팜탄이 무고한 시민들까지 희생시켰다는 것을 안 뒤엔 평생 반전평화운동에 동참했다. 흑인민권운동에 참여했다가 해직 교수 신세가 되기도 했다. 그가 1980년 발표한 ‘미국 민중사’는 지난해 말 200만부를 돌파했을 정도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강국진기자 betulo@seoul.co.kr
  • “댓글 챙겨가며 유쾌하게 쓸게요”

    “댓글 챙겨가며 유쾌하게 쓸게요”

    “5년 동안 준비한 작품이지만 미리 써 놓은 원고는 없어요. 그냥 그날그날 감정선을 따라 쓰다 보면 슬픈 문장, 유쾌한 문장이 교차될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는 무거운 주제이지만 가볍고 유쾌하게 써 보려고요.” 문단에서 인터넷과 소설의 만남은 이제 새로울 것 없는, 너무 익숙한 풍경이 됐다. 중견 소설가 은희경(51)도 이 흐름에 가세했다. 지난 11일부터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cafe.naver.com/mhdn)에 장편소설 ‘소년을 위로해 줘’의 일일연재를 시작한 은희경은 한껏 들떠 있었다. 두 번째 연재를 막 올려놓은 뒤 서울의 한 찻집에서 만난 은희경은 자신만의 보물을 슬그머니 꺼내 놓은 소년의 수줍음으로, 그리고 아닌 척하면서도 그 보물을 자랑하고,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줄곧 반짝거렸다. 그는 “당연히, 댓글을 열심히 읽고 있는데 그중에 ‘뻔한 것 같지만, 뻔하지 않은 소설을 써 달라.’는 주문이 있었다.”면서 “내가 쓰고자 하는 소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말했다. 은희경은 어느 누구만큼, 혹은 어느 누구보다 더 인터넷 연재의 특성을 속속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소설 중간에 사진도 함께 올리고, 도표도 올리고, 음악도 같이 올리면 인터넷으로 소설 읽기가 훨씬 재미있을 것 같다.”며 “기계적으로 정해진 분량이 아니라 긴 이야기는 길게, 짧은 이야기는 짧게 쓸 수 있는 것 아닌가.”하고 반문했다. 그 자신, 인터넷 연재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고작 이틀 연재한 작가치고는 좀 떠들썩한 반응으로도 여겨진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2005년부터 구상해 놓은 작품을 꼬박 4년간 묵히다가 이번에 ‘저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안하고 두렵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홀가분하다고 고백한다. 은희경은 “17세 소년이 등장하고 그의 가족과 친구들의 이야기가 나오니 가족소설 또는 성장소설로 읽혀질 수도 있을 것”이라면서도 “상투적이거나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 청소년에 대한 가치를 해체하고 전복시키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무책임하지만 따뜻한 엄마가 가능하고, 미숙하지만 꽉 차게 여문 소년이 가능함을 보여주고 싶다.”고 작품의 큰 구도를 밝혔다. 사실 은희경은 이미 ‘준비된 인터넷 소설가’였다. 출간 당시 독자들로부터 ‘은희경의 첫 연애소설’로 주목받았던 장편소설 ‘그것은 꿈이었을까’가 1998년 하이텔에 연재됐다. 인터넷 연재 1세대인 셈이다. 신문 연재 소설 또한 세 번의 경험이 있으니 매일매일 일정 분량을 마감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덜한 편에 속한다. 하지만 그런 은희경인들 걱정이 없겠는가. 그는 “네티즌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올까 두렵기도 해 먼저 인터넷에 연재한 동료들의 반응을 들으니 안심이 됐다.”고 말했다. 무슨 말을 들었기에 그랬을까 물었더니 “걱정 마. 거기 네티즌들은 모두 ‘격려쟁이’들이야.”라고 했단다. 역시 사람을 키우는 것은 비판보다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이다. 누가 아는가. ‘소년을 위로해 줘’ 인터넷 연재가 은희경의 흥을 돋우면 그가 매니저 겸 대주자로 몸담고 있는 문인야구단 ‘구인회(球人會)’의 야구시합에서 어느날 대주자로 나가 춤추며 그라운드를 돌지 말이다. 아니면 최근 입주한 서울 연희문학창작촌에서 사람들 몽땅 모아놓고 흥건하게 소주 한 잔 돌릴지 말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어른사회에 던지는 10대들의 비판

    청소년들은 자신들을 다룬 청소년 소설에서조차 종종 어른의 시각으로 재단돼 왔다. 지난해 촛불집회를 계기로 청소년 집단 역시 정치·사회 담론의 주요 주체임이 확인됐지만, 청소년 소설의 소재는 학교·가족을 위시한 교육·성장 문제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전업작가 김종광(38)의 청소년 소설 ‘착한 대화’(문학과지성사 펴냄)는 이런 청소년들에게 정치적 주체의 자리를 돌려주는 새로운 시도다. 소설은 형식부터 새롭다. 2000년 희곡으로 등단한 이력을 자랑하듯 작가는 수록된 열네 편의 작품 전부를 대화로만 구성했다. 지문도 없이 이어지는 두 고등학생의 대화 속에는 민주주의, 민족과 국가, 빈부격차, 자살 등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들이 등장한다. ●대화체로 구성된 열네편의 작품 제목은 ‘착한 대화’이지만 작품 속 대화들은 결코 기성세대가 바라는 ‘착한 학생’들의 대화가 아니다. 골계·해학·능청이 버무러진 두 ‘고삐리’의 수다는 현실적이고 청소년스럽지만, 또 한편 기성세대에 대한 풍자의 성격이 짙다. 학생회장과 그의 퇴진을 요구하는 또 다른 학생대표의 대화인 ‘타율과 자율 사이’는 고등학교로 배경을 옮겨 놓은 대의민주주의 정당성 논쟁이라 볼 수 있다. ‘다중’의 요구를 대표하지 않는 친학교 성향의 학생회장에게 또 다른 학생대표는 학생들의 서명을 들고 와 ‘용단’을 요구한다. 학생들의 요구 사항은 두발자유, 휴대전화 사용 자율화, 교사의 폭언·구타·얼차려 금지 등 자연스러운 것들. 하지만 그 자연스런 요구 속에는 ‘미국 좋다는 건 다 따라 하면서 미국의 자율학교는 들은 척도 안 하는’, 또 ‘학원·과외·교복 등 자신들은 겪지도 않은 강압적인 교육환경을 청소년들에게 요구하는’ 기성세대의 자가당착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있다. ●강압적 교육환경서 정권비판 엿보여 이러한 어른들을 향한 비판은 자연스럽게 정권에 대한 비판으로 옮아 간다. 교육현실에서 시작된 이 대화에는 ‘강부자·고소영’, 촛불집회, 아고라, 88만원 세대 등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키워드들이 오르내린다. 그렇다고 해서 ‘착한 대화’가 그렇고 그런 ‘삐딱한 시각’만을 청소년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14편의 대화 속 28명의 인물들은 각각 어느 쪽도 쉽게 손을 들어줄 수 없을 만큼 자체적으로 탄탄한 논리를 가지고 있으며, 또 그만큼 둘 사이는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 결국 이들의 논쟁은 어떤 것도 결론이 나지 않고 평행선을 긋고 만다. 이들의 대화가 모두 정치·사회적 문제에만 치중된 것은 아니다. 연애, 섹스, 자기정체성 등 청소년기의 고민도 주로 주제로 다루고 있지만 이 역시 결론이 나지 않기는 마찬가지. 자살을 시도하려는 여인과 옛 남자친구의 대화는 자살을 말리지도, 동반자살을 설득하지도 못하고 끝나며(‘교통사고인가 해방인가’), 하룻밤만 같이 자자는 남학생과 절대 안 된다는 여학생의 줄다리기(‘할 수 있을까 없을까’)도 끝내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다. ●진정으로 ‘착한 것’에 대한 사유 촉발 이러한 결론을 내지 못하는 치열한 논쟁은 쉽사리 합의점을 찾지 못하는 우리 사회에 대한 뼈아픈 현실인식이기도 하지만, 청소년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장을 만들겠다는 글쓴이의 창작 의도와도 맞닿는다. 이미 두 권의 청소년 소설을 낸 김종광은 계몽을 위한 ‘꼰대의 잔소리’가 아니라 “‘진정으로 착한 것’에 대한 청소년들의 다양한 사유를 촉발하는 안내서가 됐으면 한다.”고 작가의 말에서 밝혔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그 때 너의 손을 잡았더라면 세상을 등지진 않았을텐데…

    청소년 문학이 다루는 소재는 어쩌면 뻔하다. 왕따, 이성 문제, 성적 정체성, 학교 성적, 결핍된 가정 등 청소년이 늘상 겪을법한, 정체를 드러내기 어려운 불안과 공포가 주종을 이룬다. 화법 역시 비슷하기 일쑤다. 어른의 뻔한 훈계나 권선징악식 결말을 겨우 피했다 싶으면, 개연성 떨어지는 느슨한 서사구조 또는 기성 사회와의 도식적 불화, 생뚱맞은 캐릭터 등이 범벅이 되곤 한다. 그럼에도 오로지 청소년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버젓이 청소년 문학의 이름표를 달고 있다. 이제는 문학의 한 장르로 당당히 인정받고 있건만, 여전히 아쉬움 가득한 청소년 문학의 현주소다. ● 탄탄한 서사·생생한 캐릭터 흥미진진 지난해 ‘완득이’로 청소년 문학의 새 장을 연 김려령이 다시 한 번 청소년 문학의 새로운 전범(典範)을 제시했다. ‘우아한 거짓말’(창비 펴냄)은 탄탄한 서사 구조와 살아있는 캐릭터를 앞세워 작품의 완결성을 높임은 물론 극적 재미까지 안겨준다. 하지만 ‘우아한 거짓말’의 진짜 미덕은 청소년들이 삶 속에서 고민해야할 철학적이고 윤리적인 질문을 무척 자연스럽게 던진다는 점이다. 죄와 죄의식 사이의 미묘한 간극, 용서와 화해의 주체 문제, 종이 한 장 차이인 진실과 거짓의 문제 등 묵직한 주제에 대한 답을 소설을 읽는 내내 찾게 만든다. 게다가 작품 끄트머리에서 심장이 쿨럭거릴 정도로 먹먹해지는 감동은 청소년 문학이 더이상 ‘청소년들만 읽는 문학’이 아님을 여실히 확인시켜준다. 중1 여학생 천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늘 착하고 조용하기만한 천지가 이상하게도 아직 생일이 한참 남았건만 왜 생일 선물로 MP3를 당장 사달라고 엄마를 졸랐으며, 또 학교 안팎에서 어떤 일이 있었길래 집안에서 붉은 털실로 목을 매 자살해야 했는지 의아해지며 점점 높아지는 심박수에 맞춰 작은 혼란이 일기 시작한다. 이후 천지의 담담한 상황 설명, 주변 인물들의 복잡한 죄의식으로 시선을 바꿔가며 씨줄 날줄을 가지런히 풀어간다. 천지는 각각의 메시지를 담은 털실 뭉치 다섯 개를 남겨놓고 떠났다. 털실은 어릴 적 세상을 뜬 아빠의 몫까지 대신해야하는 지친 엄마에게, 엄마처럼 자상한 언니에게,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혀온 친구 화연에게, 또 하나는 동정과 경멸의 시선을 관심으로 포장해온 친구 미라에게 준다. 이렇듯 털실은 천지의 분노와 불안, 두려움, 증오 등을 삭이게 해준 이해와 용서의 상징물이다. 천지는 털실 뭉치 메시지로 모두를 용서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해자와 피해자의 쌍방의 소통이 아닌 일방적인 메시지가 되고 만다. ● 남아있는 자들의 소통·화해·용서 마지막 털실뭉치는 천지 자신에게 남겼지만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는다. 누군가 간절히 자신의 손을 잡아주기 원하던 천지였지만 끝내 소통은 미완성이 되고 만다. 언니 만지는 “지금부터 시작이야. 마지막 털실 뭉치를 찾을 때까지….”라며 천지의 죽음을 통해 남은 이들끼리 소통하고, 이해하고, 용서하는 법을 가져야함을 배운다. 천지와 비슷한 나이 무렵, 세상을 등지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다는 작가 김려령은 “‘잘 지내냐.’는 진심어린 말 한 마디를 듣고 나를 지치고 쓰러지게 하는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하고 바라봐주는 누군가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면서 “(청소년들은)어떠한 일이 있어도 미리 생을 내려놓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무전취식… 술먹고 쌈박질 일삼고…잡범처럼 살던 시인 유용주의 자전소설

    우여곡절 속에 살아온 이라면 “내가 살아온 얘기를 글로 쓰면 대하소설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을 보자. 돌솥 뚜껑처럼 두텁고 넓은 손바닥, 그리 크지 않은 눈에 두툼한 눈두덩, 빗물이 고임직한 넓은 평수의 콧구멍, 튀어나온 광대뼈가 제대로 된 촌놈 얼굴이다. 커다란 덩치에 핏줄 튀어나온 굵은 팔뚝까지 완벽하다. 비교적 귀여운 느낌의 ‘슈렉’을 제외하더라도 ‘백곰’, ‘고릴라’, ‘멧돼지’ 등 별명 역시 딱 어울리는 것들만 모았다. 술 먹고 쌈박질 일삼는 전형적인 ‘잡범(雜犯)’의 모습 아닌가. 게다가 초등학교 졸업하고 열네살부터 겪지 않은 일이 없다. 공사판 막노동은 기본. 중식, 일식, 한식집 주방을 섭렵했으며, 제과점, 구두닦이, 유리공장, 사탕공장, 술집 지배인, 트럭운전, 목수, 우유보급소 등 거치지 않은 일이 없다. 그 뿐인가. 엉덩이 비벼댄 형무소도 군대, 사회 가리지 않았다. 시인 유용주다. 하지만 잡범같은 그에게는, 남다른 재능이 있다. 사람에 대한 뜨거운 애정, 문학에 대한 확신, 세상을 바라보는 순수한 시선이 바로 그 재능이다. 유용주의 삶이야말로 소설 그 자체다. ‘가장 가벼운 짐’(1993), ‘크나큰 침묵’(1996), ‘은근 살짝’(2006) 등 시집으로 평단의 뜨끈뜨끈한 호응을 얻었고, 2000년에는 산문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가 ‘느낌표!’ 도서에 선정되며 일반 독자들에게도 이름을 각인시킨 그였다. 유용주가 자전적 장편소설 ‘어느 잡범에 대한 수사보고’(한겨레출판 펴냄)를 내고 ‘소설가 선언’을 했다. 이미 또다른 자전적 성장소설 ‘마린을 찾아서’를 냈지만, 이번 작품은 소설가로서 본격적인 출발을 알리는 작품에 가깝다. 시(詩) 안에만 담아놓기에는 삶의 굽이마다 빼곡히 새겨진 이야기 보따리가 너무도 터질 듯 부풀어있는 탓이다. ‘어느 잡범’은 고스란히 유용주, 자신의 얘기다. 공무집행방해, 재물손괴, 폭행, 무전취식 등을 저지른 잡범 ‘김호식’이 군대에서 겪은 기구한 3년(군대 2년+군 교도소 1년)의 시간을 중심으로 사회에 나와서도 잡범 신세를 전전하는 삶을 펼쳐냈다. 초가을 바람과 안개만으로 숭늉 냄새를 맡고 들판에 나락이 팼음을 짐작하는 시인의 감성(321쪽)이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오랜 세월 시를 써온 유용주 식 운문(韻文)의 감성이 걸쭉한 입담을 타고 산문(散文)의 형식에 접목되는 과정으로 서서히 들어가고 있음이 틀림없다. 유용주는 “최근 ‘루저 파문’이 있었는데 나야말로 최상급 루저”라면서도 “소설을 통해 승자들이 만든 세상이 고작 이 정도냐고 묻고 싶었고, 그들이야말로 위장전입, 논문 표절, 탈세 등 거짓된 삶 아니었냐고 따지고 싶었다.”고 말했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우익청년 탄생기… 새 성장소설 시도

    우익청년 탄생기… 새 성장소설 시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장정일은 대단한 독서광이다. ‘장정일의 공부’, ‘독서일기’ 등을 보면 그의 넓고 방대한 독서 편력에 놀라움을 감추기 어렵다. 또한 정력적인 작가이기도 하다. 1987년 내놓은 첫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은 기존 문단의 나른한 모더니즘 혹은 리얼리즘 경향을 찌릿하게 감전시켰다. 그는 첫 시집으로 대뜸 김수영문학상을 안았다. 소재, 주제, 기법, 시적 장르 문법 등 모든 측면에서 기존 경향을 비웃는 실험적인 시를 한참 써대던 장정일은 어느날 문득 소설가로 ‘전업’한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를 통해 대중의 화제와 문단의 외면을 함께 얻은 그는 작품의 외설성 등으로 호되게 곤혹을 겪었다. 그러나 ‘아담이 눈뜰 때’,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등 내놓은 작품마다 영화화되는 등 대중성과 비대중성의 애매한 경계를 자유롭게 오갔다. 희곡작가와 자유기고가, 에세이스트 등 신분을 바꿔가던 장정일은 1999년 11월 경장편소설 ‘중국에서 온 편지’를 마지막으로 남들 앞에서 소설을 쓰지 않았다. ●우리네 모습 담은 배경 설정… 이념적 좌표 문제 등장 그리고 꼬박 10년이 흘렀다. 장정일의 새 장편소설 ‘구월의 이틀’(랜덤하우스 펴냄)은 시인 류시화의 시에서 제목을 따왔다. 이 작품은 장정일의 기존 작품에서 보지 못했던 구체적 현실 상황을 배경으로 설정했고, 이념적인 좌표의 문제를 등장시켰다. 그는 ‘구월의 이틀’ 소설 바깥에서, 그리고 소설 안에서 연신 강조하듯 ‘우익청년 탄생기’로서의 새로운 성장소설을 표방하고 있다. 진보적이고 건강한 청년이 아닌 우익적 이념을 가진 청년이란 설정도, 동성애를 통한 성에 대한 눈뜸도, 최소한의 교훈의 가치(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놀아라!) 등도 모두 성장소설적 코드들이다. 소설은 바로 엊그제 우리네 모습을 담았다. 2003년 참여정부가 출범한다. 광주에서 활동해온 시민운동가의 아들인 ‘금’과 경제적·사회적 기득권을 누리며 부산에서 자랐던 ‘은’은 서울에 있는 같은 대학에 입학하며 만난다. ●개연성 없는 서사·설익은 인물 아쉬워 그들이 서 있는 위치는 거의 절대적인 대립항에 가깝다. 금의 아버지는 청와대 비서실 보좌관이고, 은의 아버지는 밥먹듯 부도를 내지만 부유한 형제들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선다. 외향적인 금은 만인이 올려다보는 정치인을 꿈꾸지만 삶의 본질과 인생의 비의를 어렴풋이 깨닫고 작가를 꿈꾼다. 내성적이고 유약한 은은 고등학교 때부터 시를 써오며 시인의 삶을 꿈꾸지만 자신의 열등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으로 강함을 추구하는 우익 청년정치에 발을 디딘다. 절대 다른 색깔의 금과 은은 자신들의 만남을 ‘이종교배를 통해 우성을 낳는 자연선택’이라고 부르며 아슬아슬한 동성애적 만남을 이어간다. 그렇다고 장정일의 이념적 가치가 투영됐다고 읽는 것은 오독(誤讀)에 가깝다. ‘5%의 논리로 절대 95%의 논리를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있는 우파들’이 ‘다짜고짜 빨갱이라고 인장부터 찍고 보는’ 행태나 또다른 형식의 인간애인 동성애를 애써 감추며 보수연(然)하는 우파들의 위선에 우회적인 야유를 잊지 않는다. 다만 아쉽게도 그가 새롭게 창조한 인물의 전형성은 부족하다. ‘우익 청년 탄생기’라고 스스로 밝혔듯 새로운 인물상의 제시를 기대했건만 살아 꿈틀대는 모습보다는 좌충우돌의 설익은 인물들만 소설 속을 배회한다. 특히 작품 후반부에서 금의 아버지의 난데없는 자살, 은의 아버지의 가정부와 바람 등 개연성없는 서사(敍事)의 연속은 허탈감마저 들게 한다. 불과 몇 년 전의 당대와 그 인물들을 다뤘기에 배반감은 더욱 크다. 우리가 삶 속에서 스무살의 청춘에게 보내곤하는 관대함이 갓 태어난 ‘퓨어 라이트 은’ 혹은 장정일의 작품에도 적용될 수 있을지는 의문 부호를 남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모녀가 흘린 땀과 눈물의 10년 세월 오롯이

    모녀가 흘린 땀과 눈물의 10년 세월 오롯이

    가끔 청소년 문학작품을 읽다가 문득 드는 어리석은 의문점 하나. 청소년 소설들은 보통 200자 원고지 400~500매 남짓이다. 또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쉬운 구어체로 쓰여지곤 한다. 독자로서는 두어 시간 집중하면 훌쩍 읽어내는데, 실제로 작가들도 그만큼 쉽게 쓸까, 하는 것이다. ●연애·이혼 등 구체적 생활상 투영 소설가 김연의 첫 청소년 소설 ‘나의 얼토당토않은 엄마’(실천문학사 펴냄)는 딸과 함께 살았던 10년의 세월을 정리하고 있다. 10년 동안 두 모녀가 쏟아놓은 땀과 눈물, 고함과 다툼, 깔깔거림과 토라짐이 오롯이 담겼음은 물론이다. 길게 잡아 한나절에 휙 읽어버린 이 작품이 쓰여지기까지 10년이 걸린 셈이다. 김연의 등단 작품은 장편소설 ‘함께 가자 우리’다. ‘차주옥’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 제목만 들어도 내용이 얼추 짐작되듯 김연이 대학(연세대 영문과)에 다니던 중 현장으로 들어가 노동운동을 하며 쓴 작품으로서 당시 노동문학의 대표적 작품 가운데 하나였다. 이후 1997년 ‘나도 한때는 자작나무를 탔다’로 제2회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이름을 정식으로 문단에 알린다. 그렇지만 창작은 뜸했다. 김연은 2006년 장편소설(‘그 여름날의 치자와 오디’)을 낸 뒤 또다시 3년이 흘러서야 이 작품을 탈고했고, 지난 8월 딸과 함께 훌쩍 미국 아이오와시티로 떠났다. 맞다. 그는 또한 ‘63년생 작가 그룹’의 하나다. 공지영, 김인숙, 한창훈, 고 김소진, 유하 등 쟁쟁한 틈바구니 안에 있다. 워낙 과작(寡作)인지라 사람들이 가끔 김연을 까먹곤하지만 말이다. ‘나의…엄마’에서는 김연의 모든 것이 거의 날것에 가깝게 투영된다. 성생활을 포함한 엄마의 연애, 이혼 후 친부와 관계 등이 ‘자장면도 배달 안 되는 첩첩산중’ 경기도 가평에서 쑥쑥 자라는 중학생 딸과 단 둘이 살아가는 그의 구체적인 생활상과 함께 드러난다. 또한 불안감, 두려움, 희망, 기대감, 자존심 등 복잡하게 얽힌 작가의 심리 상태까지 모두 집어넣었다. ●“치열하게 지켜온 딸에게 자긍심을” 그러다보니 때로는 낄낄대며 책장 넘기는 청소년 성장소설의 성격이다가도 때로는 설익은 밥을 크게 한술 떠넣은 듯 불편한 느낌을 주는 자전 소설의 성격까지 지니고 있다. 역시 쉽게 읽힌다고 해서 쉽게 썼을리는 없다. 딸의 눈높이에서 보자면 딸에게 인정받고 싶은 ‘철없는 엄마’의 분투기가 될 것이다. 또 김연의 입장에서 보자면 힘들었지만 잘 이겨온 자신의 삶을 짐짓 객관화하여 평가받고픈 욕구의 반영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는 더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훌훌 털어버리고자 하는 해원(解寃)의 한바탕 푸닥거리의 성격도 담고 있다. 김연은 “엄마는 모든 것을 걸고 딸을 지금까지 지켜왔으므로 너도 앞으로 그 자긍심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라는 것이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는 “아이오와와는 2년 전 한국번역원의 후원으로 잠시 머물렀던 인연이 있다. 앞으로 2년 동안 더 머물면서 미군과 결혼한 뒤 미국으로 이주해서 살고 있는 ‘기지촌여성’을 취재해 소설을 쓸 생각이다.”고 밝혔다. 실천문학사 측에서는 책 띠지에 ‘반드시 13세 이상 소녀와 딸이 있는 엄마만 보시오.’라는 경고 문구를 남겼다. 실제로 남성 독자의 경우라면, 엄마와 딸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 라인을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약간 걸릴 수 있다. 감안해서 읽으시라.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어린이 책꽂이]

    ●먼 곳에서 온 이야기들(숀 탠 글·그림, 이지원 옮김, 사계절 펴냄) ‘도착’ ‘잃어버린 것’ ‘빨간 나무’ 등의 저자가 일상과 환상을 넘나들면서 삶의 진실을 들여다보는 15편의 기이한 이야기를 썼다. 그림책과 성인문학의 경계에서 생각을 확장시켜주는 그림책. 1만 2000원. ●청소년을 위한 뇌과학(니콜라우스 뉘첼 등 지음, 김완균 옮김, 비룡소 펴냄) 최근 과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뇌에 관해 쉽게 풀어쓴 책. 시험을 보면 긴장하고, 사랑의 감정에는 허둥대고, 늦잠으로 고통받는 사춘기에 흔히 갖게 되는 고민들을 과학적으로 풀어준다. 1만 3000원. ●내 잘못이 아니야(크리스티앙 볼츠 지음, 한울림 어린이 펴냄) 국내에서 전시됐던 ‘2009년 그림 속 세계 여행’에도 소개된 작가로 다양한 오브제로 그림을 그려서 아이들이 특히 좋아한다. 당나귀, 개, 돼지, 고양이, 병아리 등이 제가 안 했다고 다 발뺌하는데, 그럼 누가 잘못한 걸까. 8500원. ●포그 매직(줄리아 L 사우어 글, 오승민 그림, 공경희 옮김, 어린이작가정신 펴냄) 캐나다의 작은 산골에 사는 그레타는 안개가 자욱한 날 혼자서 산책을 떠났다. 숲길 입구에서 낯선 집을 발견하는데, 빈터에 갑자기 생긴 것이다. 100년 전으로 떠나는 시간여행이 신비로운 성장소설. 미국 아동문학상인 ‘뉴베리 아너 상’ 수상작. 9000원. ●천둥치던 날(김려령 등 7인 지음, 정문주 그림, 문학과 지성사 펴냄) 어린이책 ‘문지아이들’ 시리즈 100호 기념 단편집. 1999년 피우미니의 ‘할아버지와 마티아’ 등을 시작으로 10년만에 100호까지 내놓게 됐다. 마해송 문학상을 받은 작가 7명이 7개의 시선으로 오늘을 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표현했다. 9000원.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소설가 한창훈 첫 산문집 ‘향연’ 펴내

    소설가 한창훈 첫 산문집 ‘향연’ 펴내

    산문집은 흔히 신변잡기류의 에세이가 되기 십상이다. 몰아치는 격정, 어느 시절에 대한 회고, 주변 일상에 대한 감상 등을 다루곤 하기 때문이다. 늘 비릿한 파도냄새를 묻힌 채 적막한 수평선의 쓸쓸함을 등짝에 얹고 다니는 소설가 한창훈이 쓴 첫 산문집 ‘한창훈의 향연’(중앙북스 펴냄)은 그런 보통의 산문집과 다르다. 영화로 치면 ‘디렉터스컷’이라고나 할 수 있을까. 텍스트로서 한창훈의 소설이 만들어진 전후 상황, 맥락을 알 수 있도록 ‘비교적’ 친절하게 얘기를 써내려갔다. 소설만큼 단단한, 아니 소설보다 더 대단한 입심이 그의 삶에 그대로 드러난다. 흔히들 익살맞다, 해학적이다는 등으로 평가하는 한창훈 소설이 가진 건강한 민중성의 근원, 또한 세상 끝의 나락을 맛보고 온 자에게 풍기는 더 없는 쓸쓸함의 근원까지 함께 들여다볼 수 있다. 그가 한 상 잘 차려놓은 향연(饗宴)은 산문이면서도 여느 소설보다 더욱 훌륭하게 매편의 글마다 기승전결의 서사가 고스란히 살아 있다. 또한 하나 하나 따로 떨어진 듯하지만, 사람과 바다의 삶이라는 일관된 주제 속에서 구체적인 완결성을 획득하고 있다. ‘한창훈의 향연’은 그의 삶 자체가 소설의 소재이고, 주제이며 배경임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1992년 등단한 이후 꼬박 17년의 세월 동안 내놓은 세 권의 장편소설, 다섯 권의 소설집에 대한 해설서로 읽히면 좋겠다. 글줄을 따라가다보면 그의 소설 한 대목, 등장했던 인물 누구, 우리를 낄낄대게 만들었던 웃기는 상황이 하나씩 떠오른다. 1.5t짜리 동력선을 갖고 부부 두 사람이 선장, 항해사, 갑판장 감투를 나눠 갖고 바다로 뱃일 다니는 오씨네의 모습은 단편 ‘나는 여기가 좋다’에서 배 팔고 바다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고기잡으러 나온 부부의 모습으로 연결된다. ‘이등항해사로 올라간 저 집 아들’ 부러워하며 ‘며칠 전부터 여수 나간다고 지랄염병만 떨고 자빠져 있는’ 자기 아들 흉보는 아낙의 모습은 또 다른 단편 ‘아버지와 아들’과 오버랩된다. 육지를 떠돌다가 마음잡고 돌아와 버려진 집 다듬고 사는 한창훈의 모습, 문득 찾아든 낯선 여인으로부터 들은 기구한 사연 등은 장편소설 ‘섬, 나는 세상 끝을 산다’에 충분히 녹아 있다. 뿐이랴. 그에게 한겨레문학상을 안겨준 장편소설 ‘홍합’에서 기구한 팔자에 개성넘치고 걸쭉한 입담을 자랑하던 네 명의 여인네는 한창훈이 홍합공장에서 일하며 가깝게 지낸 실제 성격 그대로의 인물들이다. 섬, 떠돌이, 초등학교, 동창으로부터 문학적 영감을 받아 또다른 장편인 성장소설 ‘열여섯의 섬’을 쓰게 됐음도 확인할 수 있다. 한창훈이 쏟아내놓는 글의 향연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한창훈이 길 위를 떠돌며, 바다 안팎을 넘나들며 만났던 사람들 얘기가 구수하게 이어진다. ‘한창훈식 만인보(萬人譜)’의 첫 걸음이라고나 할까. 시인 유용주, 박남준, 박영근, 이흔복 등 한창훈과 닮은 듯 비슷한 문인들과 엉켜지내며 쌓은 인연은 물론, 소설가 송기원· 이문구 등 문단 선배들과 겪은 파격의 생활들도 담겼다. 충분히 짐작했지만 그의 유년과 청년의 뒷길에 남겨진 흙바람, 파돗방울이 느껴진다. 다시 읽으니 한창훈의 인생 보고서 같기도 하다. 한창훈은 시대의 반동(反動)으로 희망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간결하지만 묵직한 마지막 말로 향연의 종료를 선언한다. ‘기다리면 올 것은 온다.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의 차이뿐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책꽂이]

    ●별은 시를 찾아온다(김기택·정끝별 외 지음, 민음사 펴냄) ‘2009 세계 천문의 해’를 맞아 나온 기념시집. 나희덕, 문태준, 김경주 등 50명의 시인이 별과 우주를 노래했다. 같은 소재를 두고 50편의 다른 시가 펼쳐내는 다채로운 세계는 새삼 놀라운 상상력의 힘을 실감하게 한다. 여기에 각 시마다 서동욱, 김행숙 시인이 해설을 달았다. 8000원. ●나의 아름다운 죄인들(김숨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작가의 세 번째 장편소설. 부모에게 버림받고 시골 할머니에게 맡겨진 일곱 살 아이 ‘동화’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성장소설이다. 1980년대 충남 금산군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풍경과 죄인 같은 삶을 사는 불운한 사람들을 대비시킨다. 9000원.
  • [책꽂이]

    ●편집자란 무엇인가(김학원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미국 컬럼비아대 동아시아연구소 초청연구원에서 복귀한 김학원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대표가 현재와 미래의 편집자들에게 전하는 매뉴얼. 부제 ‘책 만드는 사람의 거의 모든 것에 대하여’답게 600여종의 책을 펴내며 현장에서 기록한 편집일기, 출판기획 강의 노트, 설문, 인터뷰 등이 망라돼 있다. 1만 7000원. ●경제의 고향을 읽는다-고전편(홍훈·김진방·박만섭·류동민·박종현 지음, 더난출판사 펴냄) 경제학자 5명이 새롭게 해석한 경제학 고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토마스 만의 ‘잉글랜드의 재보와 무역’,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칼 멩거의 ‘국민경제학 원리’,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등을 파헤친다. 3만 5000원. ●100년의 난제 푸앵카레 추측은 어떻게 풀렸을까?(가스가 마사히토 지음, 이수경 옮김, 살림 펴냄) 1904년 프랑스 수학자 앙리 푸앵카레는 난제를 제시했다. 100만 달러의 상금이 걸렸다. 러시아 출신 수학자 그리고리 페럴만은 이를 약 100년 만에 풀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 공로로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 수상자로도 선정됐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고 은둔했다. 왜? 1만 1000원. ●커피인사이드(유대준 지음, 해밀 펴냄) 많은 사람들이 매일 한 잔 이상 즐기는 커피의 알파와 오메가. 커피의 재배와 수확부터, 커피 산업, 맛있는 커피를 만들기 위한 로스팅, 추출법, 향과 맛의 깊이를 찾는 법까지 총천연색으로 설명한다. 커피를 잘 알고 싶다면 곁에 두고 볼 만한 책. 3만 8000원.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생물들(마크 카워다인 지음, 윤길순 옮김, 궁리 펴냄) 텍사스뿔도마뱀은 자기 피의 4분의1을 포식자에게 뿜어 낸다. 섭씨 영하 270도를 견딜 수 있는 개구리도 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놀랍고 기이한 동·식물들을 보여주며 자연의 위대한 상상력에 경이를 보내고 있는 책이다. 3만 5000원. ●언어의 진화(크리스틴 케닐리 지음, 전소영 옮김, 알마 펴냄)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는 ‘언어가 인간 고유의 능력’이라고 주장했지만, 생물학자인 수 새비지 럼버는 ‘침팬지나 보노보 원숭이도 수백개 문장을 만든다.’고 코웃음쳤고, 생물사회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도 ‘인류를 하나의 종으로 생존하게 만든 요인은 아니다.’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누구 말이 맞나. 2만 8000원. ●마초(표장안 지음, 봄날 펴냄)10·26, 5·18, 6월 항쟁 등 격변의 현대사 속에 서 있었던 386세대의 이야기를 다뤘다. 남로당원의 아들로 성격이 거친 ‘표세은’을 주인공으로 삼아 민주화를 외치던 1970~80년대에 사춘기와 대학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젊음과 사랑을 그렸다. 자전적 내용을 포함한 성장소설 형식. 맛깔나는 사투리를 버무린 시원스럽고 거침없는 문체가 돋보인다. 1만원.
  • 70년대말 신문배달 고학생이 본 세상

    누구는 자조적으로 ‘배달의 기수’ 또는 ‘달배’라고 했다. 또 누군가는 짐짓 근엄하게 ‘신문 배달 고학생’이라고도 불렀다. 1970년대 후반 격변의 한국 사회에서 신문을 배달하던 열 여덟살 고학생의 눈에 비친 신문보급소를 둘러싼 세상은 때로는 유쾌하게 희망을 담아내는 공간인가 하면, 때로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일들로 가득차 있다. 시인이자 르포 작가인 박영희가 자신의 첫 번째 장편소설을 냈다. ‘대통령이 죽었다’(실천문학사 펴냄)는 청소년 성장소설을 표방하며 세상살이의 애환, 세상과 개인과의 관계를 맺어가는 모습을 추억의 흑백필름처럼 보여준다. 그래서 청소년들에게는 부모 세대의 삶을 좀더 생생히 엿볼 수 있게 하고, 70년대 후반을 치열하게 타고 넘어 왔던 40~50대에게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아련히 반추하게 만든다. 열 여덟 살 ‘수형이’와 그 또래는 H일보 서울 신설동보급소에서 기숙하며 새벽에는 신문을 배달하고 낮에는 대입검정고시를 준비한다. 가끔 신문 구독료를 챙겨 딴주머니를 차거나 여자 속옷을 몰래 훔치기도 하는 악동 무리들이지만, 폐결핵을 앓는 동료를 위해 주머니를 털어 개고기를 마련하는 끈끈한 의리-연대를 보여준다. 또한 본사의 일방적인 보급소장 교체에 배달을 거부하는 ‘파업’으로 맞서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들의 유일한 희망은 바로 대학에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 바람에 대해 사회는 그들이 소외된 주변부 인생의 처지임을 다시금 뼛속 깊이 확인시켜줄 뿐이다. 그들의 삶에 전혀 관련 없을 법한 긴급조치, YH노조 신민당사 점거, 부마항쟁, 김지하의 ‘오적’ 필화사건, 전태일의 죽음과 독재의 상관관계, ‘학사 세계프로권투챔피언’ 박찬희 등 그 시절을 설명해주는 뉴스 키워드가 쉼없이 엇갈리며 교직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수형이 무리가 세상의 진짜 뉴스를 접하는 곳은 자신들이 매일 옆구리에 끼고 사는 신문이 아닌, ‘정체불명의 삐라’를 통해서다. 수형이는 신문을 믿어야 할지, 아니면 ‘삐라’를 믿어야 할지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나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혼란이라기보다는 진실을 말하지 못하거나 말하지 않는 신문에 대한 조롱이자 야유인 셈이다. 한편 이 소설은 신문 시장을 왜곡시키는 문제점의 한 축을 정확하게 그려낸다. 1년 무료 투입에 자전거·비데 등 경품도 모자라 백화점 상품권·10만원권 수표 등까지 등장한 최근의 불법 판촉 경쟁을 생각하면, 다른 경쟁 신문 몰래 빼와 배달 사고 일으키기 등 30년 전 신문 배달 경쟁은 차라리 애교스럽기까지 하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책꽂이]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강영숙 지음, 문학동네 펴냄) 5년 만에 나온 세 번째 소설집이다. 2004년 여름부터 발표한 단편 9편을 묶었다. 고정된 소설문법에 구속되지 않고 무심한 어조로 삶의 이면에 숨은 불안과 고통을 파헤쳤다. 표제작은 매립지에 들어선 신도시 아파트에 혼자 사는 직장 여성 ‘령’의 일상 속 권태를 그렸다. 1만원. ●순간들(장주식 지음, 문학동네 펴냄) 아버지 세대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성장소설. 무협지를 좋아하는 18살 고등학생 고성만은 문득 학교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넓은 세상을 향해 방황의 걸음을 내딛는다. 유머러스한 문체와 구성으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용기를 그렸다. 8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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