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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 (1) 천주교 前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 (1) 천주교 前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

    경북 의성군 봉양면 도원리 586-1 봉양마을 주민들에게 두봉(78·본명 렌 뒤퐁) 주교는 ‘웃기는 괴짜 할아버지’로 통한다. 언제나 넉넉한 웃음으로 누구에게나 문을 활짝 여는 맘씨 좋은 푸른 눈의 프랑스 선교사. 목사님이나 스님이나 거리낌없이 방 안에 들어가 허물없이 이야기를 꺼내도 껄껄 웃으며 들어주는 외국인.30여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이 문화마을에 두봉 주교는 없어서는 안 될, 그야말로 ‘분위기 메이커’인 것이다.2004년 11월 이 봉양마을에 왔으니 올해로 4년째. 한국인보다 더(?) 한국말을 잘하며 거침없이 ‘나는 한국사람’이라고 말하는 두봉 주교에게 한국은 ‘하느님이 명령한 선교 임지’에 앞서 어쩔 수 없는 ‘인연의 땅’이다.1954년 11월 한국 땅을 밟은 뒤 53년간 단 한번도 한국 땅을 떠나지 않은 채 서슴없이 ‘한국 땅에 묻히겠다.’는 두봉 주교. 그에게 과연 한국은 무엇일까. “하느님의 뜻대로 살다 보니 이곳까지 왔습니다.” 왜 이토록 한국을 고집하느냐는 물음에 ‘능력있을 때까지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 살라.’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지침을 따른 선교사일 뿐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어쩔 수 없는 선교사의 사명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는 원론적인 대답에 ‘한국은 나의 처음이자 끝’이라는 절절한 심중이 읽힘은 왜일까. 프랑스 오를레앙, 그러니까 잔 다르크의 전설로 유명한 그 고장에서도 한참 벗어난 궁벽한 농촌 마을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두봉은 저 멀찍한 한반도의 부름에 이끌려 왔던 것으로 보인다. 다섯 형제, 아니 사촌형제 두 명까지 모두 7형제가 한 집에서 살며 어렵게 어린시절을 보냈던 두봉은 형제 중에 유일하게 ‘성소’의 뜻을 밝혀 신학자, 목회자의 길을 밟았다. 한국이라는 동양 끝 저쪽 나라의 이름조차도 알지 못한 채 신학교에서 신학수업을 쌓았던 그가 털어놓는 한국과의 인연은 거의 필연으로 다가온다. 오를레앙 신학교 2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해 병영생활을 하던 말미에 한국전쟁이 터졌다.“당시 한국전쟁에 참전한 동료들이 거의 다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도 “내가 한국에 가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는 그였다. 당시만 해도 ‘위험지역에 선교사를 보내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에 “한국은 신학생인 나와는 상관없는 그저 먼 나라일 뿐”이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던 참에 6·25전쟁으로 성직자들이 거의 전멸하디시피 한 상황에서 한국 교회가 파리외방전교회에 지원을 요청해 5명의 신부가 배정됐던 것. 휴전 한 달 전인 1953년 6월 발령을 받아 교육을 받고 일본을 거쳐 인천 땅을 밟은 게 1954년 11월. 처음부터 “한국에 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던 그에게 “한국인으로 한국땅에 묻히겠다.”는 변함없는 소신을 준 것은 과연 믿음일까, 삶일까. 전쟁의 끝자락에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폐허만 눈에 띌 뿐” 어느 한 곳 번듯한 게 없었던 한국 땅. 용산 성심여자고등학교 터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거처에서 6개월을 보낸 뒤 대전교구 대흥동본당 보좌신부를 맡은 게 한국 사목의 시작이다. ‘두봉’(杜峰)이란 이름은 당시 대흥동 본당 주임이었던 오기선 신부가 지어준 이름. 두봉 주교의 프랑스 이름자에 맞춰 지었다고 하는데 두봉 주교는 “중국의 두보와 같은 성씨”라며 은근히 이름 자를 치켜세운다.“두견새가 큰 봉우리에서 우니 세상에 이름을 떨치지 않겠느냐.”며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중등학교 시절 ‘가톨릭노동청년회(JOC)’활동을 했던 때문일까,‘눈에 밟히는 가난한 이들’을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고 한다. 대전 선화동 다리 밑에 50명쯤 되는 어려운 집 아이들이 집을 나와 움집을 짓고 살았는데 대전 JOC 청년회원들이 1년 넘게 같이 어울리며 살아 아이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일은 지금도 감동으로 남아 있다. 당시 대전 MBC 라디오를 통해 진행한 ‘5분명상’ 프로그램은 대전 지역 가난한 이들의 마음의 안식처가 되기도 했다. 대구대교구에서 안동교구가 분리돼 초대 교구장을 맡을 무렵 “바늘방석에 앉는 것 같았다.”고 당시의 심정을 털어놓는다. 두달 뒤 주교서품을 받았는데 주교 서품 때 응당 정하는 문장(紋章)과 사목표어를 내세우지 않아 당시 화제가 되었다. 주교라면 12사도 후손의 반열에 오르는 천주교의 큰 명예인데 굳이 문장이며 사목표어를 마다한 까닭은 무엇일까.“문장은 귀족이나 갖는 것이지 서민인 내가 무슨 문장을 가져.” 한사코 문장이며 사목표어를 내세우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외국인 사제는 한국인 뒷바라지만 하면 됐지 뭐 교구장 자리까지 차지하느냐.”며 안동교구장 자리를 고사했지만 교황청의 내리누름에 밀려 할 수 없이 눌러앉았다. 지난 1990년,22년 만에 안동교구장 자리를 내놓을 때까지 “한국인 사제를 교구장으로 임명하라.”며 네 차례에 걸쳐 로마 교황청에 탄원을 낸 인물이다. 전통 문화의 고집이 센 ‘유림의 땅’ 안동에서 22년간이나 큰 탈 없이 천주교 교구장을 지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안동지역 최초의 문화회관을 만든 것을 비롯, 함창에 상지 여중·고를 세운 일, 한국 최초의 전문대학인 가톨릭상지대학을 설립한 일…. “지금 생각해도 그 의롭고 큰 일”들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유교와 불교의 전통이 강한 한국에서도 안동은 전통이 살아있는 유별난 지역이었지요. 그런데 유림들은 양심에 따라 인간관계를 아주 중시하는 성격을 지녔더군요. 천주교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나 나의 가치관이 잘 맞았지요. 내가 부딪칠 이유가 하나도 없었어요.” 그럼에도 1979년 ‘안동농민회사태’, 이른바 ‘오원춘 사건’은 잊지 못할 큰 사건으로 가슴에 남아 있다. 영양군이 알선한 불량감자씨를 심은 농민들이 감자농사를 망쳐 피해보상을 받았는데 보상운동에 앞장선 오원춘이 정부기관에 납치되어 폭행당한 사실을 안동교구와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들고 일어서 전국에 폭로한 것. 서슬퍼런 군사정권이 교구장 두봉 주교의 출국명령을 내렸지만 로마 교황청이 나서 추방명령이 철회됐다. 두봉 주교에게 ‘한국 농민사목의 대부’라는 별명을 붙여준 역사적 사건이다. “이젠 한국인 사제가 교구장을 맡아야 한다.”는 탄원이 받아들여져 교구장에서 은퇴한 게 1990년. 정년을 15년 앞둔 채였다. 고양시 행주외동의 조립식 가건물인 행주공소에서 능곡성당 신부를 도와 성직자와 수도자 신도들의 피정 지도를 14년간 하다가 지난 2004년 안동교구의 주선으로 이곳 봉양마을로 이주해 살고 있다.“고향격인 안동 지역에서 살게 해달라는 주문이 받아들여져 이곳에서 살게 됐는데 너무 잘 살아서 미안하다.”고 말한다.“사는 집에 따라 마음가짐은 물론 삶을 대하는 자세마저 달라진다.”며 한사코 번듯한 집을 마다했던 그다. “한국 천주교 성인 반열에 오른 103위 중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10명은 나의 모범 선배”라는 두봉 주교. 그 10명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라고 강조한다. 사목표어는 만들지 않았지만 마음속 표어는 있지 않으냐는 짓궂은 물음에 마지못해 떠듬떠듬 말한다.“기쁘고 고맙고 떳떳하게….” “기도 많이하고 남과 함께 살다가 주님의 뜻이 뚜렷해지면 주님 뜻대로 하겠다.” 신부로 15년, 주교로 21년 한국에서 40여년을 선교한 끝에 일선에선 물러났지만 지금도 한 달에 절반은 피정에, 강의에 아주 바쁘다. 인터뷰를 마친 뒤 고추며 가지며 텃밭에서 손수 키운 푸성귀들을 주섬주섬 챙긴 주교가 거실 벽에 걸린 문구를 가리킨다. 두봉 주교 은퇴 후에 안동교구 사제들이 뜻을 모아 만든 사목표어란다. ‘우리는 이 터에서 열린 마음으로 소박하게 살고 생명을 소중히 여기며 서로 나누고 섬김으로써 기쁨이 넘치는 하느님 나라를 일군다.’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두봉 주교는 ▲1929년 프랑스 오를레앙 출생 ▲1949년 오를레앙 대신학교 철학과 졸업 ▲1951년 파리외방전교회 대신학교 신학과 졸업 ▲1954년 로마 그레고리안 대신학교 대학원 신학과 졸업 ▲1953년 사제 서품 ▲1954∼1955년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 ▲1955∼1965년 대전교구 대흥동 본당 보좌신부 ▲1967∼1969년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 ▲1969년 초대 안동교구장 임명. 주 교 서품 ▲1982년 프랑스 나폴레옹훈장 ▲1990년 안동교구장 사임, 은퇴 ▲1991∼2003년 행주외동 행주공 소 피정 지도 ▲2004년∼ 봉양문화마을 거주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광대인생50년 사물의 명인 김덕수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광대인생50년 사물의 명인 김덕수

    일본 다이코(大鼓·큰북)의 명인 하야시 에데스는 ‘김덕수의 사물놀이’를 접하고 나서 이렇게 언급했다.‘처음 듣는 소리인데도 그리웠다. 알지도 못하면서 야단법석을 떨게 되었다. 작은 해협 저쪽에 부는 바람은 지금도 먼 옛날 사람들의 기억이나 통곡을 품고 거칠어지고 있는 것일까. 그 소리에 한번 칼날을 대면 선혈이 튀어 오르는 광경이 보일 듯하다. 이만큼 북받쳐 오르는 소리를 만난 것은 처음이다. 사물놀이, 나는 그들을 계속 질투하고 있다.’ 과연 일본 최고의 명인다운 찬사다. 맞다. 사물놀이를 만나는 외국인들은 한결같이 감동의 메시지를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최소한 인간의 혼을 마구 두들겨 깨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박자측정기로는 도저히 측정될 수 없는 음악, 그 ‘신명’을 몸 구석구석까지 카타르시스를 던져주니 말이다. 지금부터 29년 전 1978년 12월. 서울 원서동에 건축가 김수근이 세운 공간 사옥의 지하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남사당의 후예’를 자처하는 김덕수, 김용배, 이광수, 최종실 등 네명의 청년이 등장했다. 이들은 북과 장구, 징, 그리고 꽹과리를 들고 나와 신들린 듯 두들겼다. 듣도 보도 못한 현란한 앙상블에 다들 넋이 나갔다. 그렇게 걸쭉한 난장판이 끝나자 민속학자 심우성씨는 ‘사물(四物)놀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마침내 세상을 울리는 ‘지구촌 사운드’가 탄생되는 순간이었다. ●5일 50주년 기념공연 ‘길-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김덕수(55) 사물놀이패 한울림 대표.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이 국악계에서 하나의 ‘보통명사’로 굳어졌다. 다섯살 때 남사당의 무동으로 예인의 길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1978년 자신의 이름을 딴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창단, 국악의 대중화와 세계화에 인생을 걸었다. 그동안 국내외 공연만 7000여회. 시장판에서는 일반 시민을 상대로, 또 1년이면 6개월은 해외로 나가 외국인들 앞에서 사물놀이로 지구촌의 혼을 흔들어 깨웠다. 그러기를 올해로 꼭 50년.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오는 5∼9일 서울 흥인동 충무아트홀 대극장에서 ‘길-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제목으로 예인 인생 50년 행사를 갖는다. 싱싱한 볼거리도 많다. 우선 국악과 서양음악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연희극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풍물, 버나, 살판, 소고놀이, 탈춤, 무당춤, 민요 등의 전통연희가 선보인다. 이어 비보이 댄스, 재즈, 힙합 등 서양의 춤과 소리가 한바탕 어우러진다. 사물놀이패 외에도 논버벌 퍼포먼스 ‘도깨비 스톰’의 이경섭, 비보이 그룹 드리프터즈 크루, 뮤지컬 배우 김사량, 래퍼 수파사이즈(김씨의 장남) 등 각 분야의 ‘꾼’들이 무대에 올라 ‘난장판’을 벌이는 것. 또한 새 음반 ‘길’이 2001년 ‘청배’ CD 이후 6년만에 등장한다.‘길’에는 ‘덩덕궁’‘비나이다’‘육자배기-흥타령’ 등 모두 10곡이 실렸다. 아울러 기념행사에 맞춰 자서전격인 책 ‘글로벌 광대 김덕수-세상을 두드리다’를 펴낸다. 공연 준비에 비지땀을 흘리던 지난 주 충무아트홀 지하 연습실에서 김 대표를 만났다. “얘들아,(꽹과리 박자를 육성으로 흉내내며)갠지기갠지기갠지기 개갱∼갱, 요 템포로 하란 말야. 그리고 악센트가 없어 악센트가. 번개치고 나서 천둥소리 꽝 치란 말야. 다들 눈을 부릅떠. 전투신이야. 당나라가 평화로운 고구려를 짓밟았어. 자, 다시 갑시다. 갠지기갠지기갠지기 개갱∼갱.” 잠시 땀을 닦고 난 김 대표가 꽹과리를 두들기자 북, 장구, 가야금, 피리, 아쟁소리가 연이어 소리를 낸다. 그러는 사이 드럼, 전자오르간, 전자기타 등 서양 악기들이 국악기의 장단 속으로 들어와 멋있게 화음에 동참한다. 그러자 한쪽 무대에서는 상모돌리기 등 전통놀이가 흥겹게 펼쳐진다. 서양악기와 국악과의 절묘한 만남을 통해 연출된 농악놀이, 비록 연습실이었지만 많은 관객들을 상대로 한 무대 위에서라면 더욱 아름다운 감동을 선사하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콘서트+드라마=콘서트라마 선보인다 잠시 쉬는 시간을 이용해 김 대표와 마주앉았다.“뮤지컬, 오페라만 최고가 아니다. 전통 연희극이 얼마나 훌륭한지 꼭 보여줄 것”이라면서 이번 공연은 콘서트와 드라마를 합친, 즉 ‘콘서트라마’ 형식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서양악기가 우리 국악반주와 잘 어우러져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상 사람들이 편하게, 또 풍요롭게 감상할 수 있도록 새로운 형식의 전통연희극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30년 전 사물놀이가 ‘지구촌 사운드’로 획기적인 파장을 일으켰다면 이번 ‘콘서트라마’는 한차원 업그레이드된 ‘사운드’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지난 50년 예인 인생을 ‘남사당­사물놀이’로 살아왔다면 앞으로는 개량화된 전통연희, 즉 ‘콘서트라마’로 새로운 인생의 그림을 그려나갈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를 위해 10년 전부터 대본을 직접 쓰고 틈나는 대로 제자들과 호흡을 맞춰왔다고 귀띔했다. 어찌보면 고전을 깨부수는 파격 시도 같지만 그는 “전통을 시대에 맞게 변화시키는, 즉 본질적 신명과 색깔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것 또한 우리 것을 지키는 좋은 방법이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이렇게 개량된 사물놀이는 진정한 한류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이젠 우리 것으로,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신명으로 뮤지컬과 오페라를 눌러야 합니다. 외국 오페라가 한국에서 수백억원의 수입을 올리고 가버리는 일이 어디 한두번입니까. 저는 이번 ‘콘서트라마’가 이들과 견줄 새로운 모델이라고 확신합니다. 드럼으로 사물놀이도 하고 피리가락으로 색소폰소리도 내고, 그래야 세계인을 감동시킬 수 있지요. 광대인생 50년은 무척 중요한 전환점이자 아울러 새로운 글로벌 광대인생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어 30년 동안 사물놀이로 세계 곳곳을 다녀 이제는 아프리카만 하더라도 사물놀이에 대해 모르는 나라가 없을 정도로 친숙해 있다고 했다. 이런 토양에 새로운 모델은 충분히 먹혀 들어간다고 거듭 자신했다. ●“세상 모든 음대에 우리 악기 놓겠다” 대전에서 태어난 그는 부친 김문학(벅구놀이의 명인)으로부터 남사당 예인의 기질과 재능을 이어받아 어려서부터 장구를 다루었다. 그러던 1959년 불과 일곱살의 나이로 ‘전국농악경연대회’에 참가하여 대통령상을 받아 일찍부터 ‘장구의 신동’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장구·쇠가락은 양도일·송순갑 선생 등을 사사하고, 이후에는 김소희, 정권진, 지영희 등 민속악계의 명인들로부터 넓은 음악세계를 접한다. 아울러 국악예술고에 진학하면서 체계적인 국악이론과 실기를 배운다. 국악예고 시절에는 2년 선배인 박범훈(현 중앙대총장)과 악기창고에서 자취하다시피 지내며 음악적 우정을 쌓기도 했다. 국악예고 졸업 후에는 전통예술공연단체의 일원으로 전세계 50개국 순회 공연을 가졌다. 이러한 자신감으로 1978년 ‘사물놀이’를 창단, 국악으로 세계를 누비는 새로운 역사를 쓴다.‘해방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50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재 김덕수의 음악적 실험은 1995년에 창단된 ‘한울림예술단’에서 비롯된다. 매년 150여회의 국내외 공연을 통해 클래식 오케스트라, 무용, 재즈, 팝, 월드 뮤직, 연극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르를 넘나들며 전통예술의 다양한 가능성과 함께 ‘한국적인 월드 뮤직’을 다듬고 있다. “우리 전통이 글로벌화한 국제적 에너지로 옷을 갈아입을 때가 됐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적 환경조성이 중요합니다. 세계 각국의 음악대학에 우리 악기 한두개씩은 꼭 놓여 있는 그날을 생각해 보십시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52년 대전 출생. ▲70년 서울국악예술고 졸업. ▲57년 5세 때 남사당 무동으로 데뷔. 장구·쇠가락은 송순갑 등을 사사. ▲78년 김덕수 사물놀이패 창단. ▲82년 미국 댈러스, 세계 타악인대회 참가. ▲84년 캐나다 밴쿠버, 월드 드럼페스티벌 참가. ▲88년 서울올림픽 성화 봉송 축하 공연. ▲95년 사물놀이패 한울림 창단. ▲99∼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연희과 조교수. ▲2001년 전통문화벤처기업 난장컬처스 대표. ▲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전통예술위원. # 대표 음반 ‘난장-뉴호라이즌’(95),‘김덕수 사물놀이 결정판’(96),‘풍물 데뷔 40주년 기념 앨범-미스터 장구’(97), 김덕수 예인인생 50주년 ‘길’(07) 등.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6) 후세에 전해진 중인들의 문학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6) 후세에 전해진 중인들의 문학

    서당 훈장인 최경흠을 중심으로 모였던 직하시사(稷下詩社)는 자신들의 창작활동보다도 중인 선배들의 생애와 업적을 정리한 공로로 더 높이 평가받고 있다. 한 개인의 시집을 출판하려면 적어도 몇백 편 정도의 작품 분량이 있어야 했고, 책을 편집·출판할 비용이 마련되어야 했다. 상업 출판이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모두 자비 출판이었다. 그런데 가난한 중인들은 개인 시집을 낼 여유가 없었다. 직하시사 동인들은 수백명 선배들의 시를 모아서 시선집을 출판해주고, 그들의 전기도 지어 주었다. 그러한 문화활동 중심에 조희룡이 있었다. ●잡류 6명이 함께 시선집을 출판하다 위항시인 가운데 최초로 문집을 낸 사람은 유희경(劉希慶·1545∼1636)인데, 그는 노예 출신이다.13세에 부친상을 당하자 인부도 구하지 못하고 직접 무덤을 만든 뒤에 흙을 져다가 계단을 만들었는데, 수락산 선영을 왕래하던 양명학자 남언경이 기특하게 여겨 한문을 가르쳤다. 그와 함께 풍월향도(風月香徒)로 불렸던 백대붕(白大鵬)도 전함사의 노예였으니, 임진왜란 전후에는 아직 중인이라는 계층이 확립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즈음에 태어난 중인들은 주로 삼청동에 모여 한시를 지었다. 이 모임의 주역도 노예 출신의 최기남인데, 그는 집이 가난해서 선조의 부마 신익성의 집에 궁노(宮奴)로 들어갔다. 서리(書吏) 일을 보는 틈틈이 경전을 연구했으며, 서당을 열어 위항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와 함께 시를 지었던 친구나 후배들은 의원 정남수, 의원 남응침, 의원 정예남, 금루관(禁漏官) 김효일, 역관 최대립 등인데, 모두 직업상 한문에 능통했다. 이들은 궁에서 숙직하는 날에 모여 시를 짓기도 했고, 날씨가 좋은 날 악공을 불러 풍류를 즐기며 시를 짓기도 했다. 자신들이 놀던 모습까지 그림으로 그렸지만, 현재 확인된 것은 없다. 김효일과 최대립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이들은 1658년쯤에 자신들의 작품을 모아 책으로 낼 생각을 했다. 각자 개인 시집을 내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여섯 사람의 시를 함께 묶었다. 정남수 52편, 최기남 53편, 남응침 43편, 정예남 21편, 김효일 41편, 최대립 51편 등 모두 261편을 편집한 뒤에, 의원 남응침이 어릴 적 친구였던 영의정 이경석을 찾아가 서문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천대받던 중인들의 시선집이 출판된 적이 없으므로, 영의정의 서문을 받아 문단으로부터 인정받으려 했던 것이다. 시선집의 제목인 ‘육가잡영(六家雜詠)’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육가(六家)는 여섯 사람의 시인이라는 뜻이니 별 문제가 없지만, 잡(雜)이라는 글자는 뒤섞였다는 뜻도 있고, 잡스럽다는 뜻도 있으며, 잡놈이라는 뜻도 있다. 대제학을 지낸 남용익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대표작을 모아 ‘기아(箕雅)’라는 시선집을 간행했는데,451명의 양반 사대부 시인들 뒤에 우사(羽士·도사) 3명, 납자(衲子·승려) 19인, 잡류(雜流) 6명, 규수 7명, 불성씨(不姓氏) 3명의 시를 편집했다. 불가의 스님은 조선시대 팔천(八賤) 가운데 하나로 천대받았지만, 남용익의 분류기준에 의하면 중인들은 도가의 도사나 불가의 스님보다도 낮고 천했다. 그가 뽑은 잡류는 풍월향도의 유희경과 백대붕,‘육가잡영’의 최기남, 김효일, 최대립 등이었다. 잡류 뒤에는 여성이 있고, 그 뒤에는 역적이어서 성을 삭제한 허균·박정길·이계가 있을 뿐이다. 그의 기준에 의하면 중인들은 팔천 가운데 하나인 스님보다는 못하지만, 여성이나 역적보다는 조금 나은 잡놈일 뿐이다. 그의 관점에서 본다면 ‘육가잡영’은 ‘여섯 잡놈이 읊은 시’라는 뜻이 된다. 이 책에 서문을 쓴 이경석은 “절구(絶句)와 고시(古詩), 장단율(長短律)이 뒤섞여 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들은 사대부들이 흔히 짓던 5언·7언의 절구나 율시뿐만 아니라,3·5·7언,6언율시,3언절구, 집구(集句), 회문(回文) 등의 다양한 시체(詩體)를 실험적으로 지었다. 그렇다면 ‘육가잡영’은 “여섯 시인이 다양한 형식으로 읊은 시집” 정도의 뜻이 된다. 여섯 시인은 영의정 이경석의 서문을 받아 자랑스럽게 시선집을 출판했지만, 정작 이경석은 이 글을 별 생각없이 써준 듯하다. 그의 문집인 ‘백헌집’ 권30에 그가 지은 서문 26편이 실려 있지만, 이 글은 빠져 버렸다. ●사대부에게 버림받은 주옥 같은 시를 꿰다 ‘육가잡영’이 간행되고 60년 한 갑자쯤 지나자, 역관 시인 홍세태(1653∼1725)가 다시 위항시인들의 대표적인 한시를 뽑아 ‘해동유주’라는 시선집을 편찬했다. 대제학 김창협은 “천기(天機)가 깊은 자만이 진시(眞詩)를 쓸 수 있다.”는 이론을 내세워 중인들을 격려했는데, 신분을 초월해 그와 사귀던 친구 홍세태는 그 이론을 발전시켜 최기남의 아들인 경아전 최승태의 ‘설초시집’에 서문을 썼다.“시는 하나의 소기(小技)이다. 그러나 명예와 이욕에서 벗어나 마음에 얽매인 바가 없지 않고는 잘 지을 수가 없다. 장자(莊子)가 말하길 ‘욕심이 많은 자는 천기(天機)가 얕다.’고 했다. 예로부터 살펴보면 시를 잘하는 사람은 산림(山林) 초택(草澤) 사이에서 많이 나왔다. 부귀하고 세력있는 자라고 해서 반드시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로 미루어보면, 시는 작은 것이 아니다. 그 사람됨까지도 또한 알아볼 수가 있는 것이다.” 시를 통해 그 사람까지도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은 개성을 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한 개성은 빈부 귀천에 달린 것이 아니라 타고난 천기에 달렸다고 하면서, 시에 있어서는 신분의 차별이 없음을 내세웠다. 오히려 태어날 때부터 권력에 욕심을 가질 수 없었던 중인이나 평민 시인들이 양반 사대부들보다 천기를 더 깊이 지녀, 더 좋은 시를 지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창협이 그에게 위항시인들의 시선집을 편집해 보라고 권했다.“우리나라의 시가 채집되어 세상에 간행된 것이 많지만, 여항인의 시만은 빠져 없어지고 전해지지 않으니 안타깝다. 그대가 채집해보라.” 홍세태는 10년 동안 위항시인 48명의 시 235편을 모아 ‘해동유주(海東遺珠)’라는 시선집을 간행했다. 머리말에서 “시에는 귀하고 천하고가 없이 하나같다.”고 하며 편집 동기를 밝혔는데, 유주(遺珠)란 ‘잃어버린 구슬’, 또는 ‘버림받은 구슬’이란 뜻이다. 사대부들이 버린 우리나라의 주옥 같은 작품들을 그가 주워 모았다고 자부한 셈인데, 교서관 활자로 간행했다. ●육십년마다 중인 선배들의 시선집을 간행하다 ‘육가잡영’의 중심인물인 최기남의 서당 제자인 임준원을 비롯해, 최기남의 아들인 최승태·최승윤 및 손자 최세연, 외손자 김부현 등이 주동하여 낙사(洛社)를 구성했다. 이들은 백악·필운대·옥류동 등지에서 모였는데,‘낙사’는 ‘서울(낙양) 시인들의 모임’이란 뜻이다. 이들은 중인들이 개인 시집을 출판하지 못해 이름도 없이 묻혀버리는 현실을 가슴 아파하며,1737년에 임준원과 역관 고시언이 주동하여 161명의 시 685수를 편집해 ‘소대풍요(昭代風謠)’라는 9권 2책 분량의 시선집을 간행했다.‘소대’는 밝은 시대, 태평성대라는 뜻이고,‘기아(箕雅)’의 ‘아(雅)’가 사대부의 시임에 비해 ‘풍요’는 민중들의 노래라는 뜻이다. 목록에는 간단한 약력을 밝혔는데, 한문을 많이 쓰는 역관과 의원이 가장 많고, 내수사 별좌, 금루관, 사자관(寫字官), 주부(主簿), 녹사(錄事), 봉사(奉事) 등의 기술직 관원이 눈에 띈다. 잡과 이외에 생원 1명, 진사 4명이 있지만, 문과 급제자는 없다. 18세기에는 중인 집단이 커져서, 시인의 숫자도 늘어났다.‘소대풍요’가 나온 지 한 갑자가 지나자, 시선집을 다시 편찬할 필요성이 생겼다.‘소대풍요’는 임진왜란 전부터 1737년까지 150년간의 시인들을 대상으로 했지만, 이번에는 60년간의 시인만 대상으로 해도 340명 723수로 늘어났다. 이 책을 편집한 송석원시사의 동인들은 ‘소대풍요’를 잇는다는 뜻에서 책 이름을 ‘풍요속선(風謠續選)’이라 했는데, 잡과 이외의 합격자가 진사 5명, 문과 1명, 무과 8명으로 늘어났다. 그렇지만 이성중같이 향시에 10회나 합격하고도 늙도록 급제하지 못해 임금의 동정을 받은 것이 중인의 한계이기도 하다. 다시 60년이 지난 1857년에는 직하시사의 동인인 유재건과 최경흠이 ‘풍요삼선’을 엮었는데,305명의 시 886수를 7권 3책으로 편집해 300부 간행했다. 이들은 ‘소대풍요’ 초판이 간행된 지 120년이 지나 구할 수 없게 되자,100부를 다시 인쇄했다. 선배 중인들의 문학활동을 후세에 전하겠다는 의지를 그렇게 표현한 것인데, 이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선배 중인들의 전기도 본격적으로 저술했다. 조희룡이 먼저 ‘호산외기’를 저술하자, 이어서 유재건이 ‘이향견문록’을 엮고, 최경흠이 ‘희조질사’를 엮었다. 직하시사 동인들에 의해 조선후기의 중인문화가 19세기 후반에 정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인 전기집에 대해서는 다음 호에서 소개하기로 한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지속발전위원장 윤서성씨

    청와대는 공석 중인 대통령 자문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위원장에 윤서성 현 지속가능발전위원을 내정했다고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이 30일 발표했다. 윤 내정자는 행정고시 13회로, 환경부 차관과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장을 역임한 환경행정 전문가다.
  • 시민방송 RTV 이사장 이효성씨

    시민방송 RTV는 신임 이사장에 이효성(56·전 방송위원회 부위원장) 성균관대 언론정보대학원 원장을 선임했다고 22일 밝혔다.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언론학 박사를 취득한 이 신임 이사장은 한국방송학회 회장, 언론정보학회 회장,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등을 역임했다.
  • “환매보다 보유펀드 비중조정을”

    “추불(펀드에 추가 불입)을 해도 될까요?” “환매할까요?”코스피 지수가 장중 93포인트까지 오르던 20일 재테크 포털 모네타(www.moneta.co.kr)에는 이런 질문들이 적잖게 올랐다. 미국발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쇼크로 코스피 지수가 하루에 100포인트씩 오르락내리락하는 롤러코스터 증시에서 적립식·거치식 펀드 가입자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코스피 지수가 급등락을 거듭하면서 펀드가입자들은 추불을 해야할지, 아니면 환매를 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박살난 성장형 펀드의 수익률 주가지수 2000돌파 직전에 주식 비중이 높은 성장형 펀드에 가입한 사람들의 펀드 수익률은 지난주를 지나면서 대부분 -10%대를 기록했다. 21일 모네타에 따르면 ‘성장형 펀드 수익률 톱 5’의 지난달 한달 수익률은 처참할 지경이다.1위는 ‘동양중소형고배당주식1’로 수익률 -14.88%,2위는 동부 The Classic 진주찾기 주식1 -14.72, 한국밸류10년 투자주식1은 -11.57%, 유리스몰뷰티주식펀드는 -12.80%, 미래에셋 3억만들기 중소형주식은 -15.94%다. 그러나 자산운용사에 따르면 주식시장이 지수가 크게 떨어질 때마다 펀드 수탁고는 크게 증가했다. 미국 베어스턴스은행발 쇼크 때인 지난달 26일,27일에는 각각 2664억원과 3667억원, 지난 16일에도 3072억원이 늘었다.16일 현재 펀드수탁고는 46조 2735억원이다. 전문가들은 “펀드수익률이 나빠져서 물타기용일 수도 있고,‘펀드 열풍’ 때문으로 볼 수도 있다.”고 평가한다. ●추가불입해야 할까 회사원 최성씨는 코스피 지수가 2000을 돌파한 직후 만기가 도래한 정기적금을 찾아 매월 10만원씩 불입하는 적립식 펀드에 가입했다.‘미래에셋디스커버리 2’와 ‘삼성그룹주식투자 Classic-A’였다. 최씨는 지수가 40포인트 이상 하락할 때마다 100만원씩 ‘추불’에 들어갔다.4차례 추불을 한 그는 21일 현재 수익률이 -6%대다.20일 큰 폭의 주가 상승에 힘입어 수익률은 -10%에서 -6%대로 크게 회복했다. 삼성증권 오현석 투자정보파트장은 “적립식 펀드는 3년 이상 적금 붓듯이 기계적으로 돈을 넣어서 가격평균을 낮추자는 것인데 마켓타이밍(최저로 하락했을 때, 최고로 상승했을 때마다 사고 파는 것)을 잡게 되면, 그같은 효과가 반감된다.”면서 “바닥이 확인된 것이 아닌데 추불하면 손해가 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오 팀장은 “요즘은 ‘거치식펀드’로 단타를 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장기로 가져가지 않으면 주식투자처럼 손해를 볼 수가 있다.”고 말했다. ●환매해야 할까 증시 전문가들은 펀드환매가 1900선 안팎에서 투자자들이 환매에 나설 것으로 전망한다. 또한 올해 펀드들의 유입평균 지수대가 1700∼1750포인트인 만큼 지수가 1700선을 오랫동안 밑돌 경우 환매의 유혹을 느낄 것으로 본다. 오 팀장은 “국내 주식시장에서 3차례 투매가 일어났는데 외부 쇼크에 대한 과민반응인 만큼 2∼3개월 안에 반등해 수익률이 개선될 것”이라면서도 “손해를 크게 본 투자자들은 손절매 개념으로 환매가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펀드의 개념이 장기투자인 만큼 환매보다는 보유펀드들의 비중조정이 필요하다고 한다. 신한증권 이계웅 펀드리서치팀장은 “주가상승이 ‘V’자로 가파르게 오르기보다는 ‘U’자 형으로 2∼3개월 조정을 볼 가능성이 높은데 이때를 계기로 펀드 포트폴리오를 재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 [씨줄날줄] 와타나베 부인/우득정 논설위원

    영국의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16일 “세계 금융의 평화는 와타나베 부인들에게 달렸다!”라고 보도했다. 평범한 일본 샐러리맨의 주부가 세계 금융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뜻이다.‘와타나베’는 우리로 치자면 가장 흔한 성씨인 ‘김씨’, 미국엔 ‘제인’ 정도의 의미다. 우리의 복부인이 전국 방방곡곡을 헤집고 다닌 데 이어 미국과 중국의 부동산시장에까지 진출했다면 와타나베 부인은 초저금리(연 0.5%)인 엔화를 무기로 외환시장의 큰손으로 우뚝 섰다. 와타나베 부인의 등장 배경은 단순하다.10년 장기불황을 겪으면서 직장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남편은 일주일 내내 일에 치여 허덕인다. 남편의 월급으로 불안한 미래에 대비하자니 은행금리는 지난해 7월까지 ‘0%’였다. 그래서 인터넷 카페 등으로 고민을 주고받던 일본의 아줌마들은 채권 등 해외 금융상품 투자로 눈길을 돌린다. 첫 투자대상은 뉴질랜드 채권과 정기예금 상품이었다. 뉴질랜드 달러화 값은 단번에 22년만의 최고치로 치솟았다. 그리고 호주, 미국, 영국, 한국…. 국제금융시장에서는 이렇게 거래되는 엔화를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이라고 부른다. 와타나베 부인들의 엔화 투자 규모는 도쿄 외환시장의 30%에 달한다. 최근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여파로 글로벌 금융시장이 요동치자 세계는 엔 캐리 자금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엔화가 강세로 치달으면 일본과 투자대상국의 금리 차이보다는 환차손이 더 커져 엔화가 일본으로 역류할 것으로 내다봤기 때문이다. 최소 2000억달러, 최대 1조달러로 추정되는 엔 캐리 자금이 세계 금융시장에서 이탈하면 서브프라임 모기지 이상의 충격파가 몰아칠 것으로 예상됐던 것이다. 하지만 와타나베 부인은 아직도 배가 고픈 모양이다. 게다가 ‘단카이’로 불리는 베이비부머의 정년퇴직으로 앞으로 3년간 50조엔의 퇴직금과 연금이 와타나베 부인에게 실탄으로 공급된다. 따라서 일본중앙은행(BOJ)이 이번 주에 기준금리를 올리더라도 엔 캐리 자금이 한꺼번에 청산되는 사태는 빚어지지 않을 것 같다. 와타나베 부인은 이미 ‘엔 캐리’에 도취됐다. 우득정 논설위원 djwootk@seoul.co.kr
  • [사설] 유엔도 우려한 단일민족 집착증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CERD)가 한국이 실제와는 다른 ‘단일민족 국가’라는 이미지를 극복해야 한다고 엊그제 지적했다. 아울러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인종차별적 요소들, 예컨대 외국인노동자들이 겪는 차별대우와 학대,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 여성에 대한 인권유린 문제 등을 구체적으로 거론했다. 위원회는 “인종적 우월성이 담긴 ‘순혈’‘혼혈’과 같은 용어가 한국사회에 여전히 널리 퍼져 있다는 데 유의한다.”고까지 밝혔다. 우리사회의 치부가 국제사회에 그대로 노출된 듯해 부끄럽기 짝이 없다.CERD가 적시한 인종차별적 현상은 우라사회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들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순혈주의에 기댄 단일민족이라는 환상이 존재하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유라시아 대륙에 접한 한반도와 만주 일대를 근거지로 반만년 역사를 꾸려온 우리 민족은 고대로부터 활발하게 이웃나라들과 교류해 왔다. 그런데도 이민족과 피를 나누지 않은 ‘순수한 혈통(순혈)’이나 이를 토대로 한 ‘단일민족’이 가능하기나 한 개념이겠는가. 학자들에 따르면 국내 성씨(姓氏) 가운데 46%는 중국·일본 등 주변국가에서 귀화했으며, 그 성씨를 쓰는 인구는 20∼50%에 이른다고 한다. 게다가 지난해 농촌에서 탄생한 새 가정의 40%가 국제결혼일 정도로 우리사회는 급속히 다민족문화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는 단일민족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다양한 피부·문화를 가진 이들을 사회 구성원으로 따뜻이 맞이해야 우리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 최경주 ‘선택과 집중’

    최경주(37·나이키골프)가 16일 개막하는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윈덤챔피언십 출전을 포기했다. 매니저 임만성씨는 15일 “최경주가 다음 주 시작하는 페덱스컵 시리즈 첫 번째 대회인 바클레이스챔피언십에 대비하기 위해 윈덤챔피언십에 출전 신청서를 냈다가 철회했다.”고 밝혔다. 시즌 마지막 메이저대회인 PGA챔피언십이 13일 끝나는 바람에 톱랭커들이 이 대회에 대거 불참, 어느 대회보다 우승 확률이 높았지만 다음 주 열리는 대회에 집중하기로 한 것. 디펜딩 챔피언 데이비스 러브 3세(미국)도 신장 결석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행을 택했고,‘장타자’ 부바 왓슨과 숀 미킬,J B 홈즈(이상 미국) 등도 불참을 통보했다. 하지만 나상욱(23·코브라골프)과 위창수(35·테일러메이드)는 예정대로 대회에 출전한다.최병규기자 cbk91065@seoul.co.kr
  • 이중섭·박수근 작품 2800점 ‘짝퉁’ 결론

    이중섭·박수근 화백 미공개 작품 2800여점의 진위 판정을 맡은 서울중앙지검 형사7부는 한국고서연구회 간부 김용수(69)씨가 소장한 이·박 화백의 작품 2827점(이중섭 1067점, 박수근 1760점)에 대해 지난 4월 감정단으로부터 ‘위작’이라는 판정을 받은 데 이어 최근 제3의 전문기관에 재검증을 맡겨둔 상태라고 3일 밝혔다. 검찰은 재검증에서도 ‘위작’ 판정이 내려지면 위작품 유통 경로 등을 쫓는 등 본격수사에 착수한다는 방침이다. 위작 논란은 2005년 3월 이 화백의 아들 이태성씨가 서울옥션에 이 화백의 작품이라며 8점을 경매에 내놓은 데 이어 김씨도 280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고 밝혔는데, 한국미술품감정협회가 이를 모두 위작으로 판정한 데서 비롯됐다. 이에 대해 이씨는 협회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검찰은 표본검사한 56점이 전부 위작이라는 판정을 받은 데 이어 지난 1월 명지대 최명윤 교수와 박 화백의 아들 박성남씨 등 10여명으로 구성된 감정단에게 전수감정을 맡겨,4월20일 역시 위작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감정단은 물감을 성분 분석한 결과 작가들 사후인 1960년대 말쯤 개발된 산화티타늄 계통의 ‘펄’ 물감 안료가 검출됐다는 점을 위작의 유력한 근거로 꼽았다. 또 담뱃갑 속지로 쓰이는 은지에 그림을 자주 그렸던 이 화백이 대부분 ‘럭키스트라이커’라는 담배의 은지를 사용한 반면 김씨 등이 소장한 작품은 다른 성분을 갖고 있는 점, 작품에 새겨진 서명을 초정밀 촬영한 결과 가짜 서명을 만든 흔적이 드러났다는 점 등을 들어 위작 판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같은 감정결과에 대해 김씨는 이날 서울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감정협회에 관여하는 화랑들의 농간이다.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유화의 가치를 깎이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면서 “두 화백은 생활이 어려워 캠퍼스와 오일물감을 살 돈이 없었는데 화랑들이 보유한 작품이 대부분 유화여서 진위논란에 휩싸일까봐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고 반박했다. 홍성규 이경원기자 cool@seoul.co.kr
  • 짝퉁맥주에 창녀 마사지걸… 중국여행 요주의

    ‘짝퉁 맥주에서 창녀 마사지걸까지 중국 여행 요주의!’ 휴가철을 맞아 골프나 관광. 사업 등을 목적으로 중국을 찾는 여행객들이 부쩍 증가하면서 덩달아 현지에서 황당한 일을 겪었다고 호소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특히 한국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아 주의가 요망된다. ◇ 5성급 최고급 호텔에서 창녀를 주선(?) 최근 중국 상해에서 2시간 거리인 한 위성 도시를 사업차 찾은 이모씨. 체크인한뒤 방에 들어가 비치된 물품을 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치 모텔처럼 콘돔이 있는데다 여성용 콘돔, 러브젤, 세척용 액체 등 각종 성인 물품이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이씨는 사업상 해외출장을 여러 차례 다녀봤으나 이런 경우는 처음 본 터라 의아하게 생각했다. 해답은 그 날 밤에 얻을 수 있었다. 여독이 안 풀린데다 온종일 중국내 사업 파트너와 협상을 벌이느라 피곤에 지친 그는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해 룸으로 스포츠 마사지사를 보내달라고 했다. 얼마뒤 늘씬한 팔등신 미녀가 아찔한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들어왔다. 대수롭지 않게 안마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으려니 이 여성은 중국어로 뭔가를 자꾸 얘기했다. 이씨가 못 알아듣자 콘돔을 꺼내 보여주며 안내책자에 있는 요금의 4배 가까이를 달라고 했다. 그제서야 알아들은 이씨가 필요없다는 제스처를 해보이자 이 미녀는 곧장 나가버렸다. 곧이어 낡은 트레이닝복을 입은 50대의 뚱뚱한 진짜 스포츠 마사지사가 들어왔다. ◇ 한국 남자 관광객은 삐끼들의 먹잇감 회사원 성모씨는 최근 3박4일 일정으로 중국 출장을 갔다가 바가지를 쓸 뻔 했다. 그 날 관광일정을 모두 끝내고 저녁을 먹은 뒤 함께 간 선배와 함께 술 한잔 할 요량으로 번화가로 나갔다. 적당한 술집을 찾기위해 돌아다니던 중 이들의 한국어 대화를 들은 한 중국인이 접근해왔다. 그는 서투른 한국말로 “여자? 술?”이라고 했다가 “섹스? 400위엔”이라고 성매매를 제안했다. 이들이 나이트클럽을 찾고 있다고 하자 중국인은 잘 아는데가 있다며 함께 갈 것을 제안했고 택시를 잡았다. 중국인을 따라 30여분 가량 택시를 타고 갔으나 도착한 곳은 변두리의 매우 허름한 건물. 중국내 단란주점격인 ‘KTV’였다. 좁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성씨는 “술이 취하지 않아 얼른 뛰쳐 나왔기 망정이지 바가지를 쓸 뻔 했다”며 “조명이 어두운 데다 인적조차 드문 후미진 곳이어서 신변의 위험까지 느꼈다”고 말했다. ◇ 버젓이 눈 뜨고 있는데도 빙 돌아가는 택시 박모씨는 지난달 중국내 한 유명 백화점에서 야간 쇼핑을 마친 뒤 늦은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택시를 탔다. 기사에게 식당 팜플렛을 보여주자 알았다는 듯 차를 몰았으나 백화점 주위를 한 바퀴 빙 돈 뒤에야 식당으로 향했다. 식사뒤 호텔로 가기 위해 이씨가 다시 택시를 잡자 이번에는 이 택시가 ‘직진→좌회전→좌회전→좌회전→직진’하는 식으로 동네를 한 바퀴 크게 돌아 제자리에 온뒤 목적지로 향했다. 박씨가 영어로 항의했으나 기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연변 조선족 출신 가이드인 김모씨는 “중국은 회사마다 택시 색깔이 다른데 미리 가이드를 통해 현지에서 모범적인 택시 회사차의 색깔을 파악한 뒤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 호텔서 파는 맥주조차 불량 김모씨는 지난 4월 동남아 출장시 중국인이 운영하는 술집에서 가짜 양주를 마신 뒤 고생한 경험이 있어 지난달 중국 출장에서는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다가 귀국 전날 동료들과 호텔 바에서 간단히 맥주를 한잔했다. 동료들은 모두 중국 현지 회사의 맥주를 시켰으나 김씨는 유명 수입맥주를 주문해 마셨다. 두 병째를 마시다가 동료들이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맥주에 거품이 전혀 없고 다른 맥주보다 현저히 색깔이 짙다는 것. 김씨는 꺼림직한 생각에 동료들과 같은 현지 맥주로 바꿔 마셨으나 다음날 아침부터 복통과 설사에 시달렸다. 현지 가이드 김모씨는 “오래된 맥주일 수 있다”며 “최근 중국내에서는 생수에 수돗물을 넣어 파는 등 가짜 생수도 문제가 된 바 있다”고 귀띔했다. 중국 전문 여행사 최모 대표는 “택시를 탔을 경우에는 꼭 영수증을 받아야 짐을 놓고 내린 경우나 바가지 요금 청구 등 문제를 추후에 해결할 수 있다”며 “술집은 믿을만한 현지의 교포나 현지 여행을 경험한 이들에게 정보를 미리 파악해 이용해야 바가지를 쓰지 않는다”고 조언했다. 기사제휴/스포츠서울 백상현기자@import'http://intranet.sharptravel.co.kr/INTRANET_COM/worldcup.css';
  • ‘柳·羅·李→류·라·리’ 허용

    성(姓)을 한글로 쓸 때 ‘유·나·이’로 써야 했던 ‘柳·羅·李’씨도 이제 소리나는 대로 ‘류·라·리’라고 쓸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대법원은 새달 1일부터 한자 성씨 ‘柳(류)·羅(라)·李(리)’를 한글로 옮길 경우 ‘류·라·리’로 표기할 수 있도록 개정한 호적예규를 시행한다고 29일 밝혔다. 대법원 관계자는 “성은 사람의 혈통을 표시하는 고유명사로서, 본래 소리나는 대로 사용해 온 사람에게까지 두음법칙에 따르도록 하는 것은 헌법이 보장한 인격권이나 자기결정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판단해 예규를 개정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모든 한자 성씨에 두음법칙 예외를 인정하는 건 아니고, 예전부터 소리나는 대로 표시해 왔던 사실이 인정되는 경우에만 호적정정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호적 정정을 원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한글 성을 ‘류·라·리’ 등으로 써왔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주민등록등·초본, 학적부, 졸업증명서, 문중 또는 종중의 확인서 등을 신청서와 함께 당사자 본인의 본적지를 관할하는 가정법원에 신청하면 된다. 그동안 두음법칙이 적용됐던 성은 ‘李(리)·林(림)·柳(류)·劉(류)·陸(륙)·梁(량)·羅(라)·呂(려)·廉(렴)·盧(로)·龍(룡)’ 등으로 우리 국민 4900여만명 중 약 23%인 1100만명에 달한다. 이들은1994년 9월부터 호적에 한자·한글 이름을 함께 표시하도록 바뀌고,1996년 10월부터 모든 공문서에 두음법칙을 쓰도록 한 문화예술진흥법에 따라 호적에도 두음법칙이 적용된 성을 쓰도록 했었다.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30일 TV 하이라이트]

    ●김동건의 한국, 한국인(KBS2 밤 12시45분) 국내 대표적인 숲 생태전문가 차윤정 박사가 숲 속 생명의 위대함을 들려준다. 우리의 수려한 나무와 숲에 얽힌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전국 방방곡곡의 숲을 탐사하며 직접 겪었던 일과 아낌없이 모든 것을 주는 숲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차윤정 박사와 이야기를 나눠본다.   ●세계 세계인(YTN 오전 10시40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영국 런던의 런던탑. 그런데 런던탑 주변에 초고층 건물들이 경관을 해치면서 유네스코가 경고하고 나섰다. 역사적 풍경을 굳이 훼손시킬 이유가 없다는 반응도 있지만 런던을 다시 찾는 관광객에겐 최첨단 건물들도 인기있는 관광명소가 될 것이라는 반응도 있다.   ●60분-부모(EBS 오전 10시) 연령에 따라 혹은 아이의 기질에 따라 알레르기가 있거나 특이체질을 가진 아이에게 음식을 잘 먹이는 방법은 각각 다르다. 그래서 부모들은 고민에 빠진다. 아이를 건강하게 잘 먹이고 좋은 식습관을 들이려면 어떤 원칙이 있는지 따져 보고, 아이에게 음식을 먹일 때 흔히 하는 실수는 무엇인지 알아본다.   ●강남엄마 따라잡기(SBS 오후 9시55분) 파출소 앞에서 상원과 민주는 수진과 마주치고, 상원은 수진에게 상황을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수진은 화가 난 채로 떠나 버린다. 잠시 후 놀이터에서 상원은 민주에게 어떻게 진우아빠를 만났는지 물어보고, 민주는 예전에 중국집 배달을 할 때 당시 대학생이던 성수를 만났던 걸 회상하는데….   ●닥터스(MBC 오후 6시50분) 19년째 당뇨와 싸우고 있는 오은성씨. 스무 살 젊은 나이에 당뇨가 찾아왔지만 형편이 어려웠던 은성씨는 몸을 돌볼 여유가 없이 일에 매달려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는 다리 궤양을 비롯해 위역류성 식도염 등 온갖 당뇨 합병증에 시달리고 있다. 빛을 잃어가고 있는 은성씨에게 기적은 찾아올 것인가?   ●TV소설 그대의 풍경(KBS1 오전 7시50분) 보배는 윤주의 집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기뻐하는 윤주를 보며 수련은 마음이 착잡해진다. 떠나는 보배를 위해 수련은 새 옷을 만들어 주지만, 그것을 보는 종구는 왠지 모르게 불안해한다. 왜 거짓말을 했느냐는 동혁의 질책에 윤주는 자신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는데….
  • ‘잠 못드는 밤’ 시작됐다

    ‘잠 못드는 밤’ 시작됐다

    폭염과 열대야 현상으로 무력감이 늘면서 시민들이 일상 생활리듬이 깨지고 건강마저 위협받고 있다. 기상청은 연일 찜통더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27일 서울지방 아침 최저기온이 25.3도를 기록, 열대야 현상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날 아침 최저기온은 강릉 28.7도, 부산 26.5도, 여수 25.8도, 대구 25.5도, 광주 25.4도, 제주 25.3도 등 전국적으로 열대야 현상을 보였다. 열대야는 아침 최저기온이 25도를 웃도는 경우를 말한다. 본격적인 폭염·열대야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의사들은 폭염과 열대야가 이어지면 자칫 건강을 해치기 쉽고 근로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며 규칙적인 생활로 극복하라고 조언했다. ●사무실 하품 소리, 작업현장 생산성 저하 금융기관에 다니는 김재성씨는 하루종일 하품을 달고 지냈다. 과로·과음하지 않았는데도 고객들에게 민망할 정도로 하품이 나온다. 잠을 잔 것 같지 않고 머리도 무겁고 피곤해 집중력도 떨어졌다. 갖가지 운동으로 건강 하나는 자신있다던 김씨도 폭염·열대야 현상에는 맥을 추지 못했다. 서울 여의도 윤중초등학교 앞 가로수 터널 한쪽. 대낮인데도 불법 주차하고 잠을 자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밤새 뒤척이다 기운이 빠진 시민들이 근무 중에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해 시원한 곳을 찾아나온 것이다. 택시 기사, 샐러리맨, 고급 승용차를 갖고 나온 사람도 있다. 택시 기사 이성규씨는 “열대야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해서인지 자꾸만 눈이 감겨 시원한 곳이 나타나기에 무조건 한숨 자려고 차를 세웠다.”고 말했다. 산업현장도 비상이 걸렸다. 아산 탕정 삼성 트라팰리스 건설 현장에서는 아예 휴게실에 숙면 취침 공간을 마련했다. 점심 시간도 30분 늘리고 근로자들에게 차양 달린 모자와 얼음 조끼를 제공하고 있다. 조병철 소장은 “폭염과 열대야로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은 감수할 수 있지만 안전사고로 이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잔뜩 긴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홍승봉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수면클리닉 교수는 “온도가 올라가면 체온조절을 위해 중추신경계 작용이 활발해져 잠이 오지 않는다. 숙면을 취하려면 체온이 깨어 있을 때보다 1∼2도 낮아야 하는데 열대야 현상이 일어나면 자주 깨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도 머리가 무겁고 피곤하다.”고 설명했다. ●냉방병 조심… 규칙적인 생활을 의사들은 열대야를 완전히 극복하기는 어렵지만 가능한 한 낮에 신체 활동을 늘려서 몸을 피곤하게 하라고 권한다. 자기 전에 간단한 목욕으로 땀을 제거하면 숙면을 취할 수 있다. 하지만 밤새 에어컨을 켜두기보다는 잠자리에 들기 전 1∼2시간 동안 가동시켜 기온을 낮춘 뒤 끄고 자는 것이 좋다. 카페인이 든 음료는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술은 오히려 숙면을 방해한다. 각성 성분이 있는 담배 역시 멀리해야 한다. 차가운 물보다 미지근한 물로 샤워하는 것이 긴장감을 푸는 데 도움이 된다. 이정권 삼성서울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잠자기 2시간 전에는 심한 운동과 집중하는 작업을 피하고 운동도 이른 저녁 시간에 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이 교수는 “지나친 수분 섭취는 식욕 부진의 원인이 되고, 낮잠은 점심 식사후 20∼30분이 좋다.”고 말한다. 낮잠이 30분 이상 늘어지면 정작 밤에 불면증으로 이어진다. 에어컨을 겨더라도 틈틈이 외부의 바람을 쐬는 것이 좋다.1시간마다 10분씩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실내 기온이 25℃ 이하로 내려가지 않고 실내외 기온차가 5℃를 넘지 않도록 조절해야 냉방병에 걸리지 않는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민복기 전 대법원장 별세

    민복기 전 대법원장 별세

    제5∼6대 대법원장을 지낸 민복기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 변호사가 13일 오전 4시17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94세. 고인은 1913년 서울에서 출생,38년 경성제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한 뒤 39년 경성지법 판사로 법조계에 입문했다.68년부터 10년간 대법원장을 지낸 뒤 국정자문위원, 헌정제도연구위원장 등을 맡았다가 87년부터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고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고인은 친일 법관으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포함됐고,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에게 사형 확정 판결이 난 75년엔 대법원장이었다. 유족은 장남 경성씨 등 2남 2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영안 1호실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16일 오전, 장지는 대전 국립현충원이다.(02)2072-2020. 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정상명총장 예화랑과 사돈맺어 사위는 유학파출신 전자공학도

    정상명 검찰총장의 장녀 수인(27)씨가 11일 오후 서울 역삼동 GS타워 아모리스홀에서 유학파 출신의 전자공학도인 김용식(30)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수인씨의 시아버지 김태성씨는 정 총장의 서울법대 5년 선배이며, 이강국 헌법재판소장 등과 동기로 절친한 사이다. 시어머니 이숙영씨는 국내 3∼4번째 규모의 예화랑을 운영하고 있다. 수인씨는 서울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고 있으며, 신랑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나와 영국 런던대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현재 LCD모니터 등 디스플레이 전문업체인 코리아데이터시스템스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수인씨는 오빠 친구의 어머니 소개로 김씨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결혼식에는 정 총장과 사법시험 동기인 노무현 대통령이 축하 화환을 보냈고, 검찰 고위 인사와 검찰 출신 국회의원, 김만복 국정원장을 비롯한 정부 고위 관계자 등 하객 100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홍성규기자 cool@seoul.co.kr
  • [부고] 첫 의사출신 판사 전용성씨 별세

    국내 최초의 의사 출신 판사인 전용성(96)씨가 23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전씨는 1938년 국가의사고시에 합격해 이듬해부터 경성제대 부속병원에서 의사로 재직했지만, 해방 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뒤 고시 공부에 전념,1955년 제7회 고등고시 사법과와 행정과에 동시 합격했다. 전씨는 서울지방법원 판사, 서울형사지방법원 재판장 등을 역임한 뒤 1967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전씨는 또 서울의사회 법률고문, 서울대 정치학과 동문회장, 서울라이온스 회장, 국제라이온스 부총재, 서울대총동창회 부회장 등 다양한 사회활동에 참여했다. 유족으로는 병철(개인사업)씨와 부자(전 문래초등학교 교감)·혜자(경원대 교수)·영자·정자(전정자 소아과 원장)씨 등 1남4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27일 오전 7시, 장지는 경남 함양군 서상면 중남리 북동 선영이다.(02)-2072-2091.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궁중음식 연구가 2人 인간문화재로 인정예고

    “궁중음식이 우리 시대 최고의 음식문화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고맙게 생각합니다.”(한복려) “떡과 과자 같은 전통병과가 별도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수 있을 만큼 관심이 높아진 것이 뜻깊습니다.”(정길자) 문화재청은 15일 한복려(60) 궁중음식연구원장과 정길자(59) 궁중음식연구원 교수부장을 각각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 보유자로 인정을 예고했다. 궁중음식의 인간문화재 계보는 조선시대의 마지막 주방상궁인 1대 한희순 상궁에서, 한 상궁으로부터 조리법을 배운 2대 황혜성 전 성균관대 교수로 이어졌다. 이번 3대에선 한씨가 궁중요리, 정씨가 궁중병과로 구분되어 지정예고가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다. 두 사람은 지난해 세상을 떠난 황혜성씨의 제자로 35년 단짝. 씨의 큰딸인 한씨는 “영광스럽다기보다는 궁중음식을 더 공부하여 발전시켜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고 밝혔다. 정씨는 “퓨전음식이 범람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하는 것이 진짜라는 확신을 갖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서울 수도여고 동창. 정씨가 한양대 가정과에 진학하니 당시 이 대학에 교수로 재직하던 황씨가 “복려를 아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대학 졸업하던 해 정씨는 황씨가 설립한 궁중음식연구원에 조교로 들어가 한씨와 다시 만났다. 한씨는 서울시립대 원예과를 졸업한 뒤 어머니의 뒤를 잇고자 고려대 대학원 식품공학과에 진학했고, 명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궁중음식 분야의 과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한씨는 “의궤 등에 담겨 있는 궁중의 식문화를 다시 찾아내는 국가적인 사업이 필요하다.”면서 “그렇게 되살린 궁궐문화를 실제로 오늘날의 사람들이 다시 맛볼 수 있는 단계가 되도록 발전시키는 것이 진정한 중요무형문화재 제도의 의의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서동철 문화전문기자 dcsuh@seoul.co.kr
  • [20&30]남들이 뭐라 하든…난 아날로그야

    [20&30]남들이 뭐라 하든…난 아날로그야

    하루가 다르게 신기술이 쏟아져 나오는 요즘,‘얼리어댑터’가 되는 일이 쉽지마는 않다. 관심과 노력이 없다면 중장년층뿐 아니라 20∼30대에게도 첨단 IT제품을 대하기가 두려울 때가 많은 게 사실이다. 주위 친구들이나 직장 상사에게 ‘기계치’니 ‘넷맹’이니 하는 비아냥도 듣기 편치 않다.MP3보다는 여전히 CD플레이어(또는 워크맨)가 익숙하고, 전자 사전보다는 종이 사전을 찾는 일이 익숙한 아날로그적 삶을 즐기는 20&30들의 속내를 들어봤다. ●“아날로그가 어때서. 이대로 살 거야…” 2500만명이 사용하는 메신저를 사용하지 않는 새내기 직장인 박모(30)씨는 또래 기준으로 보면 시대를 거슬러 사는 셈이다.4년전 친구의 강권(?)으로 MSN메신저 계정을 만들었지만 이후 로그인조차 않았다. 박씨는 “컴퓨터를 로그인할 때마다 마음대로 메신저 창이 뜨는 것도 짜증나고 상대가 말을 걸 때마다 효과음이 나는 것도 정신이 산란해 싫었다.”고 설명했다. 회사에서 업무상 메신저를 사용해야만 하는 요즘 상황이 박씨에게 그다지 달가울 리 없다. MP3 파일이나 영화를 인터넷에서 다운로드 받아보는 일도 박씨에게는 먼 나라의 일이다. 휴대전화도 통화와 문자메시지 기능만 사용한다. 휴대 전화에 원하지 않는 MP3 기능이 있지만 손도 대지 않았다. 인터넷의 용도도 뉴스 검색과 이메일 사용이 전부다. 박씨는 “첨단 제품이 정신없이 쏟아지는데 그때마다 기능을 익히는 것도 귀찮고 소모적이란 생각이 든다.”면서 “지금처럼 사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데, 아득바득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쫓아 가려는 것 자체가 자신을 구속하는 것 아니냐.”면서 아날로그적인 생활방식을 바꿀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직장인 이모(34)씨도 첨단 정보기술(IT) 제품과는 친하지 않다. 집에는 MP3 플레이어와 최신형 전자사전, 듀얼코어 노트북 등이 있지만 정작 이씨의 손때는 거의 타지 않았다. 턴테이블이 망가지고 LP레코드가 출시되지 않아 포기했지만, 여전히 음악은 CD로 듣는다. 주위에선 왜 불편하게 부피가 큰 디스크맨(일본 소니사의 CD플레이어)을 들고 다니냐며 나무라기도 하지만, 이씨는 여전히 디스크맨과 CD홀더를 승용차에 지니고 다닌다. 한때 MP3를 사용한 적도 있지만 몇 곡만 콕 집어서 듣는 것과 앨범 전체를 듣는 것은 맛이 다르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너무 뒤처지지 않을 만큼, 내게 꼭 필요한 만큼만 새로운 기계들과 친해지려고 합니다. 끊임없이 압축하고 새 트렌드를 쫓아 가려는 모습이 한심해 보일 때가 있어요. 남들이 뭐라든, 어떻게 보든 지금처럼 사는 게 편해요.” 잡지사에서 일하는 김모(31)씨는 이메일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넷맹’의 전형이다. 해외에서 오는 원고는 보통 메일로 전송받는데 김씨에겐 비슷한 과정도 매일같이 헤맨다. 첨부 파일을 열고, 그 원고를 다른 사람의 이메일로 포워딩하는 단순한 일도 김씨에겐 어려운 미션이다. 그때마다 동료들에게 되묻고, 직장 동료들은 짜증을 내기 일쑤다. 그러나 김씨는 당당하다.“컴퓨터 못해도 잘 살아 왔어요. 문제될 것 있나요?” ●“윈도, 어떻게 깔죠” 회사원 성모(26)씨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컴맹’이다. 보통 컴퓨터를 살 때 CPU, 메모리 등 ‘사양’을 보고 사는 반면, 성씨가 고르는 기준은 오로지 ‘디자인’이다. 성씨는 “컴퓨터를 잘 모르다 보니 다른 사람처럼 비교하면서 가늠하는 게 불가능해요. 그냥 보고 이쁘면 사고 안 이쁘면 안 사는거죠.”라고 설명한다. 간신히 컴퓨터를 사더라도 고장이라도 나면 속수무책이다. 한 번은 컴퓨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구입처에 연락했다. 직원이 “아무래도 바이러스에 걸린 것 같은데, 중요한 자료가 저장돼 있지 않으면 윈도 다시 깔아야 될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자 성씨는 “윈도는 어떻게 까는 건가요.”라고 되물었다. 결국 컴퓨터를 잘 다루는 친구를 불러 간신히 윈도를 다시 깔 수 있었다. 회사원 이모(29·여)씨도 비슷한 증상이 있다. 직장 상사가 컴퓨터와 관련해 이씨를 불러 묻거나 본인이 작업하다 에러메시지가 뜨면 등줄기에서 식은 땀이 흐르는 것. 컴퓨터를 거의 할 줄 모르는 이씨는 남자 친구가 구워준 영화 CD를 볼 줄 몰라 곤욕을 치른 적이 있다. 컴퓨터에 CD를 넣었지만 제대로 작동이 안됐던 것. 남자 친구는 컴퓨터로 영화도 볼 줄 모르는 여자친구가 한심했던지 “어떻게 그러고 살았냐.”며 비아냥거렸고, 결국엔 한바탕 큰 싸움으로 번졌다. “그때 하도 싸우며 배운 탓에 이제 영화는 볼 줄 알아요. 그래도 아직 컴퓨터로 모르는 것 하려면 진땀이 흐른답니다.” ●정보의 바다에서 ‘맥주병’ 신세 회사원 강모(25·여)씨는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에서 ‘맥주병’ 신세다. 지난해 강씨는 거금을 들여 MP3플레이어를 구입했다. 메탈릭한 보디에 깜찍한 디자인까지 친구들이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봤다. 문제는 강씨가 MP3 파일을 인터넷에서 다운로드받지 못한다는 것. 결국 강씨는 언니가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준 곡만 반복 재생해 들었다. 그런데 강씨가 외국에 나갔을 때 또다시 문제가 생겼다. 지난해 일본에 6개월간 교환학생 자격으로 가게 된 강씨는 언니가 적어준 ‘다운로드 받는 법’을 손에 쥐고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막상 일본에 도착해 다운로드를 받으려고 했지만 기계가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강씨는 일본에서 체류했던 6개월 동안 한국에서 담아간 10곡을 완벽하게 외울 수 있었다. 아날로그 방식의 카세트테이프라면 늘어졌을 정도다. 강씨는 “전혀 이유를 모르겠어요. 언니가 적어준 대로 했는데 다운이 안되는 거예요. 아무튼 그 때 들었던 10곡은 싫증이 난 이후로는 전혀 듣지 않습니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회사원 주모(25·여)씨도 만만치 않다. 외국인 친구가 선물로 준 MP3플레이어를 제대로 사용할 줄 몰랐던 것. 주씨는 MP3 파일을 다운로드할 줄은 알지만 MP3플레이어에 곡을 담을 줄은 모른다. 컴퓨터에 연결해 무작정 클릭을 하다 보니 엉겁결에(?) 몇 곡이 들어가긴 했다. “처음에 프로그램을 깔고 그 ‘Yes’ 창만 계속 누르다 보니 어쩌다 몇 곡 들어가긴 하더라고요. 됐다 싶었는데, 그 이후 6개월 동안 계속 그 곡만 듣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운으로 들어간 셈이죠.” 주씨는 아직도 새 노래를 넣지 못하고 있다. 서울의 한 종합병원에서 레지던트로 일하는 이모(30·여)씨는 웬만한 사람들은 다 한다는 미니홈피를 이용할 줄 모른다. 얼마전 아버지가 “일촌 신청했으니 수락해라.”고 말했지만 이해조차 하지 못했다. 수년전 학교 수업 커뮤니티 때문에 무심코 가입했는데, 가입자에게 미니홈피가 딸려져 나온 것을 몰랐던 것. 아버지는 용케 출생 연도별 회원 검색 기능으로 딸의 미니홈피를 찾아내 일촌 신청을 했다. 이씨는 그때 생각만 하면 지금이 멋쩍은 웃음이 나온다고 털어 놓았다.“환갑이 다 되신 아버지도 미니홈피를 만들어 운영하고 계신데, 저는 그게 뭔지도 몰랐다니 정말 창피했어요.” 문화평론가 김남훈씨는 “최근 음악이나 영화에서도 일부러 돈을 들여 아날로그적 느낌이 나도록 작업할 정도로 ‘디지털 느낌’이 더 이상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면서 “얼마전 회중시계 디자인의 MP3 플레이어가 인기를 끌었듯 외려 투박한 아날로그 개념에 끌리는 젊은 세대가 늘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임일영 이경원기자 argus@seoul.co.kr ■추억의 아날로그 제품들 20∼30대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필수품처럼 가방에 넣고 다니던 워크맨과 영어사전도 이미 골동품이 돼버렸다. 워크맨(Walkman)은 1979년 일본의 소니가 개발한 헤드폰 청취 전용의 소형 스테레오 카세트 플레이어의 제품명이다. 비문법적 제품명에 대해 영어권 국가들의 비아냥이 쏟아지기도 했지만 수억 개가 팔려나가면서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정식 용어’로 등재됐고, 제품군을 통칭하는 일반 명사로 자리잡았다. 80년 중반까지만 해도 워크맨은 학생들 사이에서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아이와나 산요, 파나소닉 등 다른 일본 전자 회사에서도 워크맨 유의 제품이 쏟아져 나왔지만 ‘원조’인 소니의 워크맨이 풍기는 품격을 따라가지는 못했다. 이 틈에 등장한 것이 국산 스테레오 카세트 마이마이(삼성전자)와 아하(LG전자)다. 다소 투박하고 촌스러운 듯했지만 소니의 워크맨에 비해 가격 부담이 덜해 중·고교생들에게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건전지를 아끼기 위해 테이프를 처음으로 되감을 때 볼펜 등을 끼워 수동으로 돌리거나 건전지를 깨물어서 최대한 오래 사용하려 했던 기억들은 국산 스테레오카세트를 사용해본 이들에겐 즐거운 추억이다. MP3에 안방을 내준 채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한 것은 워크맨뿐이 아니다. 공부를 하든 안 하든 누구나 한두 개쯤은 가지고 다녔던 영한사전과 국어사전 등도 이젠 서재 한편으로 밀려났다. 영한·한영·영영사전 기능은 물론 제 2외국어 사전까지 한데 합쳐놓은 데다 MP3와 녹음기 기능까지 중무장한 전자사전에 급격하게 밀려나고 있다. 디지털카메라에 무릎을 꿇은 뒤 일부 마니아들의 성원 속에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필름카메라나 특수 직종 종사자들 사이에서 가느다란 숨을 이어가고 있는 삐삐 등도 비슷한 운명이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아날로그 마니아 3인방 ‘LP찬가’ “LP는 CD나 MP3만큼 간편하지는 않지만 훨씬 인간적인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지직∼’ 긁는 소리가 나더라도 LP를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LP 마니아 정영민(33)씨의 LP찬사는 끝이 없다.LP를 즐겨 듣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수집을 시작한 정씨는 20여년에 걸쳐 갈고 닦은 내공의 소유자답게 3만여장의 LP를 소장하고 있다. 장르는 한국 가요에서 팝송, 클래식을 넘나든다. “컴퓨터로 만들어낸 소리는 차갑고 비인간적이잖아요. 그러나 LP를 듣고 있으면 가슴이 따뜻해집니다.CD나 MP3가 전기 밥솥이라면,LP는 가마솥쯤에 비유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정씨는 자신이 소장한 수만장의 LP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 5년 전 인터넷에 ‘LP114’란 가게도 냈다. 이곳을 통해 LP 마니아들이 처분한 중고품이나 수입 판을 사들여 판매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LP샵 ‘레코드 마니아’를 운영하고 있는 이창훈(36)씨는 “주요 고객층은 20대 초반부터 30대까지 젊은 층”이라면서 “처음에는 나이 드신 분들이 찾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숍을 운영하고 보니 의외로 젊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이씨 역시 정씨처럼 취미로 LP를 즐겨 듣다 LP숍까지 낸 경우다. 국내 LP시장은 척박하다.2001년 이후 국내 생산이 중단돼 마니아들은 LP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크다. 이씨는 “중고시장이 전부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면서 “지금은 LP가 수입시장에 의존해 있지만, 사람들이 디지털로 메말라버린 음반에 염증을 느낀다면,LP는 다시 생산될 겁니다. 그 날을 기다려 봐야죠.” 임수현(26)씨의 LP 사랑도 만만치 않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2000여장의 LP를 소장하고 있는 임씨는 디지털 음반에서 들을 수 없는 생명력을 LP에서는 느낀다고 말한다. “CD는 잡음 하나 없이 깨끗합니다. 듣기 좋아요. 하지만 심금을 울리지는 못합니다.”라고 임씨는 힘주어 말했다. 그는 이어 “LP는 그 가수의 감정까지 전달해줍니다.LP에서는 가수가 눈물을 흘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생명력이 숨쉬고 있기 때문이죠. 디지털 음반이 생명의 소리를 내기까지는 아마 수백년이 필요할 겁니다.”라고 설명했다. 이경원기자 leekw@seoul.co.kr
  • “대한민국의 아들 정체성 찾아”

    해외영주권을 지닌 형제가 처음으로 군에 동반입대했다. 지난달 28일 충남 논산 육군훈련소에 입소한 박희성(20)·종성(19) 형제. 박씨 형제는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중이던 지난 1998년 가족과 함께 브라질로 이민을 떠난 뒤 9년 동안 현지에서 살아왔다. 올해초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들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인내심, 도전정신을 기르기 위해 군입대를 결심하고 지난달 조국행 비행기에 나란히 몸을 실었다. 입대후 1주일간 언어, 역사, 관습, 군대예절 등을 배우는 ‘초기 적응 프로그램’도 무사히 마쳤다. 희성씨는 “군생활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아버지와 친척들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면서 “하지만 형제가 함께 있는 한 어떤 고통과 어려움도 다 이겨낼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이번에 이들과 함께 훈련소에 입소한 해외영주권자는 22명. 이 가운데는 지난해 결혼해 아내와 5개월된 딸을 미국에 남겨두고 온 김신영(29) 훈련병도 있다. 이들 영주권자 훈련병은 다음달 13일 신병교육을 수료한 뒤 자대로 배치돼 20개월간 국방의무를 수행하게 된다.이세영기자 syle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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