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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컬 말로·피아노 조윤성 내일 올림픽홀서 ‘知音의 재즈향연’

    보컬 말로·피아노 조윤성 내일 올림픽홀서 ‘知音의 재즈향연’

    ‘지음’(知音)이란 말이 있다. 춘추시대 거문고의 명수 백아가 높은 산에 오르고 싶은 마음을 연주하면 그의 벗 종자기는 “하늘을 찌를 듯한 산이 눈앞에 나타나 있구나.”라고 말했다. 백아가 흐르는 강물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타면 종자기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이 눈앞을 지나가는 것 같구나.”라며 감탄했단다. 굳이 말이 필요 없는 경지다. 지난 1월 말 서울 마포구 서교동 복합문화공간 벨로주에서 있었던 보컬리스트 말로(41)와 피아니스트 조윤성(39)의 공연 영상을 유튜브에서 봤을 때 이 고사가 떠올랐다. 말로가 흥에 겨워 현란한 스캣(무의미한 음절로 가사를 대신해 리드미컬하게 흥얼거리는 것)을 쏟아내면 조윤성은 더도 덜도 않고 딱 그만큼의 흥겨움으로 받아 냈다. 누구도 말은 안 했지만 수천, 수만의 대화가 오고 갔다. 무대 위에서 척척 통하는 둘이지만 재즈를 만나기까지 걸어온 길은 전혀 달랐다. 말로는 대학(경희대 물리학과) 2학년까지 재즈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차인표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의 영향으로 어딜 가나 재즈풍 음악이 흘러나오던 무렵 우연히 커피숍에서 나오는 음악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유재하음악경연대회에서 입상할 만큼 재능이 넘쳐나던 그는 본격적으로 재즈를 파기 시작했고 1995년에는 버클리음대로 유학을 떠났다. 반면 조윤성은 재즈를 위해 태어났다. 한국 재즈 1세대의 대표 드러머인 조상국씨가 그의 부친. 덕분에 어린 시절 재즈 대부 이판근을 사사했다. 12살 때 온 가족이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갔는데 재즈를 더 잘하려면 클래식 화성과 기초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아르헨티나 국립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2001년 남캘리포니아대의 ‘텔로니어스 멍크(유명 재즈 피아니스트) 인스티튜트’ 장학재단 지원 프로그램에 아시아인으로는 처음 뽑혔다. 미국의 유명한 실용음악 대학인 엠아이(MI)에서 8년 동안 강의도 했다. 둘의 첫 만남이 이뤄진 건 올 초. 재즈 가수 써니 킴의 결혼식에 조윤성은 축하 연주를 위해, 말로는 하객으로 찾았다. 말로는 “4~5년 전부터 소문이 자자했다. 동료들이 하나같이 ‘조윤성이랑 같이 작업했는데 굉장했다. 같이 해 보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결혼식에서 딱 마주친 것”이라고 말했다. 조윤성은 “나도 말로씨가 궁금했다. 첫인상은 날카롭고 깐깐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말로가 눈웃음을 치며 “첫인상은 요조숙녀 느낌 아니었어.”라고 하자 조윤성은 “실제로도 깐깐하다.”고 받아쳤다.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로 꼽히는 고수인 만큼 처음 호흡을 맞췄던 순간이 궁금했다. 말로는 “연주를 잘하는 분들과 작업할 때 나는 노래, 그분들은 연주만 한다. 각자의 섬에 머물다가 이따금 충돌한다. 그런데 윤성씨는 달랐다. 늘 내 보컬에 묻혀 있다. 신기한 건 튀려고 안 하는데 아주 잘 친다. 첫 연습이 끝나고 집에 오는 내내 흥분이 가시지 않아 소리를 질렀다.”며 웃었다. 이어 “연습이든 리허설이든 항상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는 보물창고다. 늘 모험심을 자극해 나 역시도 현실에 안주할 수가 없다.”고 추어올렸다. 조윤성도 뒤질세라 말을 받았다. “노래에 대한 집중력, 재즈의 스윙감, 에너지가 넘쳐흘러 자극을 줬다. 말로씨는 내가 잘 받쳐준다고 했지만 실은 반대다. 어떤 타이밍과 리듬, 편곡을 꺼내 놓든 척척 받아 낸다. 보컬은 악기보다 즉흥 연주의 폭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분은 목소리의 한계를 초월했다. 다재다능하다.”고 말했다. 클럽 공연 한 번으로는 아쉬웠다. 16일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둘이 뭉치는 까닭이다. 조윤성은 “말로씨를 피아노 혼자 상대하긴 버거워서 육해공군을 다 부른다. 베이스와 드럼, 퍼커션 세션이 함께 나선다.”고 설명했다. 말로는 “육해공군 불러 놓고 윤성씨가 날아다니려고 그러는 것”이라고 첨삭을 했다. 둘은 ‘보스 사이즈 나우’(Both sides now) ‘올 바이 마이셀프’(All by myself) 같은 팝 명곡과 살사·탱고·레게·플라멩코 등의 라틴 음악은 물론 ‘신라의 달밤’ ‘벚꽃지다’ 등 말로의 노래도 선보인다. 4만 4000원. (02)3143-5480.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대법 “명백한 위험 있어야 국보법 위반”

    비전향 장기수 묘역에 추모 글을 쓴 통일단체 대표에게 무죄가 확정됐다. 그 정도 사안으로는 국가의 존립과 안전에 명백한 위험을 초래한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 죄로 의율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 3부(주심 박보영 대법관)는 비전향 장기수 묘역을 조성하면서 표지석에 ‘불굴의 통일애국투사’라고 적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권모(65)씨 등에게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29일 밝혔다. 재판부는 “반국가단체인 북한에 동조한 행위를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려면 국가의 존립·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해악을 끼칠 명백한 위험성이 있어야 한다.”며 이같이 판시했다. 앞서 원심 재판부는 “비전향 장기수를 돕는 일이 피고인들의 잘못된 신념일지라도 인간의 존엄성인 사상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장기간 수형생활을 감내하면서 신념을 지킨 망인들의 생전 뜻을 존중해 표지석에 칭호를 새긴 것은 망인들을 추모하려 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권씨 등은 2005년 비전향 장기수인 고 금재성씨 등 6명의 묘역을 단장하자는 경기 파주시 한 사찰의 제안을 받고 묘역을 조성하면서 ‘불굴의 통일애국투사’라고 적힌 표지석을 세우고 제막식을 거행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1·2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를 고인을 추모하는 행위로 자연스럽게 용인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고인들의 이념이나 주장, 선전 내용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표지석의 내용이 묘역을 찾는 일반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상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안석기자 ccto@seoul.co.kr
  • 우리 조상은 어떤분이셨을까

    국내 유일의 성씨(姓氏) 축제인 ‘제4회 대전뿌리문화축제’가 25~27일 중구 침산동 뿌리공원에서 열린다. 대전시는 전국 104개 문중에서 2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뿌리내림식’과 ‘문중퍼레이드’를 시작으로 7개분야 59개 프로그램이 펼쳐진다고 24일 밝혔다. 17개 문중이 참여하는 문중문화체험관이 가장 볼 만하다. 국내에 처음 목화를 들여온 문익점의 남평 문씨는 직접 재배한 목화 묘목을 나눠 주고 물레체험장을 운영한다. 안동 권씨 문중은 권율장군 행주대첩 체험장을 제공한다. 다른 문중도 매사냥·초고장(짚풀공예) 등을 운영하며 자기네 문중 알리기에 나선다. 축제장은 예년과 달리 마을 형태로 만들어진다. ‘호패로 통하라’, ‘떴다! 포졸’, ‘꼬마훈장’, ‘역사인물 코스프레’ 등 다양한 퍼포먼스 구역이 있다. 문중스탬프 투어, 서당체험, 뿌리사생대회 등 이벤트도 다채롭다. 짚공차기 등 3종 경기를 하면서 문중 간 화합을 다지는 문중명랑운동회와 시조, 가요 등으로 경합을 벌이는 문중장기자랑대회도 마련된다. 밤에는 뿌리공원 앞 유등천에서 우리 전통 뱃놀이인 선유놀이와 전통 불꽃놀이인 낙화놀이가 펼쳐진다. 이강혁 시 관광산업과장은 “아이들이 우리의 뿌리문화를 체험하며 조상을 소중히 생각하고 추억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뿌리공원이 국내 최초의 효(孝) 테마공원으로 문중 조형물 130개와 국내 유일의 족보박물관이 들어서 있는 데다 매년 뿌리축제가 열리는 점을 높이 평가해 공원에 2014년까지 ‘효(孝)문화진흥원’을 건립하기로 최근 결정했다. 대전시는 2016년까지 이 일대를 ‘대한민국 효 테마파크’로 조성한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1만여명 하나 되어 ‘달리는 기쁨’ 나눴다

    1만여명 하나 되어 ‘달리는 기쁨’ 나눴다

    일제히 “와” 하는 함성을 지르며 1만여명이 출발선을 나섰다. 20일 오전 9시 서울 마포구 상암동 월드컵공원 평화의 광장에 모인 1만여명은 출발을 알리는 폭죽과 함께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내달았다. 아빠의 손을 꼭 잡은 초등학생부터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엄마, 연인, 노인 등 모두 달리는 기쁨 자체를 즐겼다. 제11회 2012 서울신문 하프마라톤대회가 이날 오전 월드컵공원에서 열렸다. 참가자들은 하프 코스(21.0975㎞), 10㎞, 5㎞ 등 3개 부문에서 실력을 겨뤘다. ●1번 참가자는 초등 4학년 김정한군 대회 시작 30분 전 참가자들은 사회를 맡은 개그맨 배동성씨의 “자, 몸을 풀어주세요. 하나, 둘, 셋, 넷” 하는 유쾌한 목소리에 맞춰 준비운동을 시작했다. 서로 팔을 맞잡고 허리를 숙여 몸을 푸는 부부부터 어린이들까지 열심히 따라했다. 마라톤 동호회 회원들은 곳곳에서 별도로 응원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대회 1번 참가자는 초등학교 4학년 김정한(9)군이었다. 아들에 이어 3번째로 등록된 아버지 종식(47)씨는 “지난해까지는 혼자 참가했지만 올해는 가족과 함께 뛰고 싶어 대회 공지를 보자마자 신청했다.”면서 “4년째 대회에 참가하면서 삶의 활력을 얻게 됐는데 달리는 즐거움을 가족들과 함께 나누고 싶었다.”고 말했다. ●신일고 마라톤클럽 선후배 50여명 참가 고교 선후배 50여명이 함께 참가한 신일고 마라톤클럽은 출발 전부터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완주를 다짐했다. 이 대회에 6번째 참가했다는 김해만(58)·한동표(58)·허일배(58)씨는 “동기들끼리 대회에 참가하니까 서로 의지할 수 있어 든든하다.”면서 “앞으로도 오래오래 서로 인생의 버팀목이 됐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3년 연속 단체로 참가한 신한카드 마라톤 동호회(대표 손호규·39)는 올해도 130명이 완주, 대회 최다 인원 참가상을 수상했다. 동호회 대표 손씨는 “첫 출전 회원도 있었는데 부상 없이 대회를 마쳐 기쁘다.”면서 “1년 동안 열심히 연습해 다음 대회 때에는 순위권 선수를 배출하겠다.”며 내년 대회를 기약했다. 마라톤 애호가로서 17번의 마라톤 풀코스 완주 기록을 보유한 김이수 사법연수원장도 사법연수원 연수생 및 직원들과 함께 하프 코스를 뛰었다. 25도의 다소 더운 날씨였지만 결승선을 들어오는 참가자들은 하나같이 만족한 표정이었다. 하프코스 남자부 4등을 차지한 이한민(24)씨는 “학교 다닐 때 소극적인 성격 때문에 많이 힘들었는데 올해 2월부터 마라톤을 시작한 뒤 일상생활에서 쉽게 포기하는 일이 크게 줄어들었다.”면서 “스스로를 다잡아 줄 수 있게 해준 운동이 정말 좋다.”고 말했다. 글 신진호·명희진기자 sayho@seoul.co.kr 사진 손형준·박지환기자 boltagoo@seoul.co.kr
  • 청도 코미디극장 청춘들의 꿈과 땀

    청도 코미디극장 청춘들의 꿈과 땀

    세상을 웃기고 싶은 청춘들이 시골마을 코미디 전용 극장에 모였다. 20일 밤 10시 55분에 방송되는 KBS 2TV ‘다큐 3일’에서는 당장 주머니를 채울 수는 없어도 마음만은 부자라는 경북 청도 코미디극장의 개그맨 지망생들과 함께한 3일을 소개한다. 시골 마을 청도에 세워진 작은 극장이 전국 250여개의 공연장 중 40주 연속 예매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곳은 바로 개그맨 전유성씨와 청도군이 힘을 합쳐 만든 코미디 전용 극장이다. 이곳엔 개그 콘테스트에서 낙방한 개그맨 지망생 16명이 모여 공연을 하고 있다. 아직은 지망생이지만 직접 무대를 꾸리고 있는 만큼 책임감과 열정은 프로 개그맨 못지않다. 이들은 매일 새벽까지 이어지는 코너 연습 후에는 합숙하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서 집안일까지 스스로 해야 한다. 청도에 오기 전까지는 집안일을 거의 해 보지 않았다는 사람들. 힘들고 불편한 생활을 감수하면서도 코미디를 하고 싶다는 사람들. 이들에게 코미디란 어떤 의미일까. 연습실 한켠에서 코너 연습에 몰두하고 있는 3기 교육생 신미영씨. 작은 체구의 미영씨는 종업원, 골프장 도우미, 콜센터원 등 27세의 나이에 비해서는 꽤 많은 경력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여러 직업을 가졌던 것은 가슴속에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 때문이다. 이제야 현실에 맞춰 살았던 과거를 버리고 과감히 가슴이 시키는 일을 선택한 미영씨는 꿈을 선택하면서 잃는 것도 생겼다. 수입이 없어 친구 결혼식에도 가지 못하고 있는 것. 그는 대신 가슴속을 채워 줄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가고 있다. 신나게 지르박 스텝을 밟고 있는 22명의 3기 교육생들. 올해 2월 입단한 이들은 대부분 코미디를 배워 본 적이 없다. 모두 웃기는 거라면 동네에서 한 가닥씩 했던 사람들로 스스로를 웃기다고 자부하며 이곳까지 오게 됐다. 하지만 동네에서 재미있던 코미디가 무대에서까지 통하지는 않는 법이다. 극장에서 무료로 가르쳐 주는 지르박, 탭댄스, 마술, 1분 스피치 등을 통해 작은 동네에서 큰 무대로 꿈을 넓혀 가고 있다. 공연에서 빠진 2기를 대신해 3기 연습생이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대사 한마디 없는 지하철 승객 역할이지만 연습생인 3기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귀한 기회다. 먼저 무대에 서고 싶다며 지원한 원준씨는 외모가 평범하다는 이유로 탈락했고, 개성 강한 머리 스타일의 대광씨가 낙점됐다. 작은 배역이지만 처음으로 기회를 얻은 대광씨의 역할은 외모와 어울리는 불량배로 설정했다. 설레는 마음에 직접 소품까지 준비한 대광씨는 설렘과 흥분 가득한 얼굴로 첫 무대에 오른다.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산시성 1경-몐산…살아숨쉬는 중국 사적지 山西

    산시성 1경-몐산…살아숨쉬는 중국 사적지 山西

    우리나라 국적기가 이륙을 앞둔 중국 산시성 타이위안 국제공항. 허름한 철조망 너머로 삼삼오오 주민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비행기를 배경 삼아 아이의 사진을 찍어 주는 엄마, 트럭 위에 걸터 앉아 낄낄대는 남성 등 다양한 사람들이 서 있었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와 그 나라에서 날아온 비행기가 자못 신기했나 봅니다. 그만큼 우리를 포함한 외지와의 교류가 많지 않았다는 방증이겠지요. 하지만 품고 있는 문물은 눈부셨습니다. ‘천공의 도시’ 몐산(綿山)과 명·청대 건물들이 늘어선 핑야오구청 등 수많은 유적들이 옛 사람들의 이야기를 건네 왔습니다. 더욱 놀라운 건 그 유적들이 여전히 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며 살아간다는 점이었습니다. 박제되지 않은 중국의 문물과 마주할 수 있는 곳, ‘5000년 중국 역사를 보려면 산시로 가라’는 헌사가 전해져 오는 것도 그런 까닭이겠지요. ●빼어난 자연과 고도(古都)의 숨결을 찾는 여정  비행기가 요동친다. 착륙을 앞두고 기체가 흔들리는 일상적인 느낌과는 거리가 멀다. 말끔한 고속도로가 아닌, 허름한 시골 마을의 비포장길을 덜덜거리며 날고 있는 듯하다. 부기장이 안내 방송을 통해 친절하게 일러 준다. 봄철 황토 고원 특유의 황사바람 때문이라고. 비행기 수천m 아래로는 산자락을 층층이 깎아 조성한 계단식 밭들이 누런 황토를 뒤집어쓴 채 ‘끝·없·이’ 펼쳐져 있다. 수많은 농부들이 오랜 세월 한땀 한땀 만든 설치미술 작품을 보는 듯 경이롭기까지 하다.  예가 어딘가. 산시성(山西省)이다. 이웃한 산시성(陝西省)과 함께 해마다 봄이면 우리나라에 황사를 날려 보내는 진원지 가운데 한 곳이다. 두 성은 중국어 발음이 같다. 로마자 표기도 똑같다.  비슷한 점은 또 있다. 산시성(陝西省)이 ‘실크로드’의 시발점인 것에 견줘 산시성(山西省)은 국수가 생겨나 전파된, 이른바 ‘누들로드’(Noodle Road)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세계의 국수는 중국에 있고, 중국의 국수는 산시에 있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을 게다. 현지 가이드 최원성씨에 따르면 산시성에 전해지는 면의 종류만 270여종에 달한다.  여기에 빼어난 자연 경관과 역사의 숨결 오롯한 고도(古都)들도 즐비하다. 호사가들이 ‘중국의 지하 문화재는 산시(陝西)에, 지상 문화재는 산시(山西)에 있다.’고 상찬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겠다. 산시성(陝西省)의 지하 문화재란 병마용, 한양릉 등을 염두에 둔 표현일 터. 그렇다면 산시성(山西省)으로의 여행은 불교와 도교의 성지 몐산과 누대를 이어온 핑야오구청(平遙古城) 등 지상의 문화재를 찾아가는 여정이라 봐도 무리가 아닐 듯싶다. ●한식의 기원 품어…신라시대 최치원 흔적도  산시성의 성도 타이위안(太原)에서 남쪽으로 3시간 가까이 내려가면 몐산에 닿는다. 한식(寒食)의 기원이 된 개자추(介子推)의 고사가 어린 산이다. 높이는 약 2567m. 산둥성과 산시성을 가르는 타이항(太行) 산맥의 한 갈래다. 몐산의 겉모습은 유순하다. 하지만 안쪽은 험하기 짝이 없다. 사방이 죄다 절벽이다. 석회암 협곡을 따라 구불구불 산허리를 오르다 보면 천길단애 사이사이에 불교와 도교 사원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다. 이처럼 몐산의 문화유산은 대개 해발 2000m 언저리에 세워져 있다. 그야말로 ‘천공(天空)의 도시’다.  건물과 건물을 잇는 벼랑길은 ‘놀이 기구의 종결자’다. 몐산 초입부터 직벽을 따라 16㎞나 이어져 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겁난다. 절정의 스릴을 맛보려면 오를 땐 버스 오른편, 내려올 땐 반대편에 앉으시라. 단언컨대 오금이 저릴 게다.  몐산을 개발한 이는 염길영이라는 석탄 부호로 알려져 있다. 석탄 광산으로 떼돈을 번 그는 1996년 말부터 몐산 개발에 나섰고, 2005년 5월에 처음 개방했다. 몐산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풍경은 도교사원 다뤄궁(大羅宮)이다. 도교에서 최고의 숫자로 여기는 ‘13’층짜리 건물이다. 내부엔 신라시대 최치원이 다녀간 흔적도 남아 있다.  다뤄궁에서 벼랑길을 몇 굽이 돌면 ‘스자이’(石寨)다. 5호16국 시대, 노예에서 후조의 초대 황제에 등극한 석륵이 지은 군사 요새다. 스자이와 연결된 하늘다리 ‘톈차오’(天橋)의 자태도 웅장하다.  1400년 전 개창했다는 고찰 윈펑스(雲峰寺)는 몐산의 아이콘이다. 몐산 절벽엔 모두 200여개의 동굴이 있는데, 윈펑스는 그 가운데 포복암이라 불리는 높이 60m, 깊이 50m의 동굴 속에 지어졌다. 윈펑스 위 절벽에는 붉은색 천을 단 등과 종들이 매달려 있다. 소원을 비는 사람이 먼저 등을 단 뒤, 소원이 이뤄지면 종으로 바꿔 단다고 한다. 절벽 틈새엔 이쑤시개와 면봉 등이 빼곡히 꽂혀 있다. 허리가 아픈 사람들이 이쑤시개 등을 꽂아 두면 낫는다는 믿음 때문이다.  몐산엔 모두 14존의 등신불(等身佛)이 있다. 불교 성인은 10존, 도교는 4존이다. 윈펑스에 1, 산자락 너머 정궈스(正果寺)에 13존이 각각 모셔져 있다. 윈펑스에서 정궈스까지 트레킹로가 조성돼 있다. 길이는 3㎞ 남짓. 윈펑스 위쪽의 몐산 능선을 따라 간다. 윈펑스에서 절벽에 붙은 폭 1m쯤의 계단을 타고 오를 때 다소 숨이 찰 뿐 이후로는 대체로 평탄하다. 몸이 불편한 사람은 호텔 윈펑수위안(雲峰墅苑)에서 벼랑길을 따라 걷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정궈스로 오르는 방법도 있다.  ‘중국의 절개’ 개자추를 빼고 몐산을 말할 수는 없다. 개자추는 춘추시대 진나라 문공이 19년간 전국을 떠돌아 다니는 동안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먹이며(割肉救主) 곁을 지킨 신하다. 훗날 왕이 된 문공이 몐산에 은거한 개자추를 불러내기 위해 산에 불을 지르지만 개자추는 “신하들이 벼슬을 놓고 다투는 게 부끄럽다.”며 끝내 나오지 않고 3일 뒤 불에 탄 시신으로 발견된다. 한식(寒食)은 불타 숨진 개자추를 기리며 3일 동안 찬 음식을 먹었던 것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몐산 1800여m 능선에 개자추의 무덤이, 바로 아래엔 그를 기리는 사당이 있다. 관광 곤돌라를 타고 오르면 쉽게 만날 수 있다. 하산은 서현곡 쪽으로 내려온다. 몐산에 불이 났을 때 개자추가 어머니를 업고 힘겹게 올랐다는 계곡으로, 그의 효성을 체험하라는 뜻에서 계곡 바위벽에 설치한 철제 계단을 딛고 내려온다. ●‘민간의 자금성’ 왕자다위안  몐산에서 차로 15분 남짓 떨어진 곳에 왕자다위안(王家大院)이란 대저택이 있다. 청나라 때 링스(靈石) 지역에 정착한 왕씨 형제가 두부 장사로 시작해 큰 돈을 벌어 1796년 완성한 집이다. 원래 25㎢에 달하는 주택군이지만, 현재는 ‘불과’ 4.5㎢만 개방하고 있다. 방은 모두 1118칸, 정원은 113개에 달한다. ‘민간의 자금성’이란 표현이 무색하지 않은 대목이다.  왕자다위안엔 ‘형만 한 아우’가 있다. 약 30m 길이의 다리를 경계로 형과 아우의 집이 나뉘는데, 아우의 집이 월등히 크다. 저택은 ‘왕’(王)자 형태를 하고 있다. 골목골목이 미로처럼 얽혀 있다. 명∙청 시대의 부조와 조각, 건축 양식도 엿볼 수 있다. 현재는 정부에서 관광지로 관리하고 있다.  왕자다위안에서 잊지 말고 살펴야 할 게 주변의 ‘동굴집’이다. 동굴집은 산시성의 일반적인 주택 양식이다. 황토 고원인 만큼 주민들이 동네 뒤편의 야트막한 동산을 판 뒤 주택이나 창고 등으로 이용한다.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동굴집에서 살고 있다. 왕자다위안의 32m 담벼락에 서면 그네들 삶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글·사진 타이위안·핑야오·제슈(중국)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빚 독촉 시달리다… 사채업자 살해후 유기

    빚 독촉을 하던 조직폭력배 출신의 사채업자를 살해한 후 시신을 유기한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 전남 장성경찰서는 13일 채무 독촉에 시달리다 사채업자를 살해한 성모(31), 윤모(24)씨 등 2명을 살인 등의 혐의로 붙잡았다. 성씨는 지난해 10월 조직폭력배 출신인 사채업자 곽모(31)씨로부터 3500만원을 빌린 뒤 수십 차례에 걸쳐 채무 독촉에 시달리자 유흥업소에서 알게 된 후배 윤씨와 함께 곽씨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 이들은 곽씨를 살해한 후 시신을 광주 남구 윤씨의 집 재래식 화장실에 버린 혐의도 받고 있다. 경찰 조사 결과 채무 독촉에 시달리던 성씨는 윤씨와 공모해 지난 3일 오전 3시 20분쯤 광주 남구의 한 도로에서 곽씨에게 수면제를 넣은 피로회복제를 마시게 한 뒤 잠이 들자 흉기로 찔러 살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조폭 출신 사채업자인 곽씨가 실종됐다는 가족들의 신고에 따라 통화내역, 채무관계 등을 토대로 성씨를 검거했다. 경찰은 성씨 등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 장성 최종필기자 choijp@seoul.co.kr
  • 최저임금위원장 박준성씨 선출

    최저임금위원회는 11일 오전 서울 팔래스호텔에서 제4차 전원회의를 열어 박준성(58) 성신여대 경영학과 교수를 제9대 최저임금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최저임금위원회는 2013년 적용할 최저임금(안)을 법정기한인 6월 28일까지 심의·의결해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제출하고, 고용부 장관은 국민의견 수렴절차를 거쳐 8월 5일까지 2013년 적용 최저임금을 결정·고시한다. 오일만기자 oilman@seoul.co.kr
  • ‘진짜같은 가짜’ SNS 괴담 꼬리 무는데… 처벌규정 없어 무차별 양산

    “서울 은평구 연신내역 인근에 살인마가 돌아다녀요.”, “강동구에 할머니를 앞세운 인신매매단이 출몰해 여고생들을 납치해 가고 있습니다.”, “경기 수원역에서 한 남성이 살해됐습니다.” 최근 들어 인터넷을 통해 이런 괴담들이 잇따라 퍼져 나갔다. 살인마의 인상착의부터 인신매매 현장 목격자의 증언까지 오르는 등 내용도 사실적이다. 심지어 시신을 옮기는 장면을 담은 사진까지 인터넷에 올랐다. 해당 지역 주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집 밖에 나가기가 무섭다. 도와달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시민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 허위 사실로 밝혀졌다. 진짜 같은 가짜였을 뿐이다. 연신내 괴담 소식에 경찰은 강력팀 형사 25명을 현장에 배치해 범인을 잡겠다며 진땀을 뺐지만 헛심만 썼다. 수원역 살인 괴담은 한 노숙인의 자살이 와전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이내 ‘유언비어’라며 진화에 나섰으나 시민들의 불안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속 괴담이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커져버린 SNS의 파급력만큼 괴담의 확산 속도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한두 사람이 말하면 안 믿어도 여럿이 반복해서 말하면 믿게 되는 식이다. 배정근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잘못된 정보가 SNS의 강한 전파력 탓에 왜곡될 수 있으므로 정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은 최근 잇따르는 SNS 괴담이 수원 토막살인사건 등 흉흉한 사회 분위기를 악용한 ‘장난’이라고 보고 있다. 문제는 ‘양치기 소년’ 효과다. 실체 없는 뜬소문에 연이어 헛탕만 치다가 막상 살인사건이 발생했을 때 공권력이 이마저 괴담으로 여겨 안이하게 대응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기회비용 측면에서 출동 소모비용이 엄청나며, 오인 출동으로 인한 경찰의 심리적 허탈감 또한 적지 않다.”면서 “혹시라도 실제 상황에서 괴담 학습효과로 인해 경찰이 느슨하게 대응하게 될까 봐 걱정된다.”고 말했다. 이런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사람을 엄하게 처벌하는 규정이 마땅치 않다 보니 괴담이 꼬리를 물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현행 전기통신기본법 제47조 1항은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전기통신설비에 의해 허위의 통신을 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조항은 현재 위헌 결정이 나 있는 상태다. 2010년 12월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사건의 피고인 박대성씨가 제기한 헌법소원에서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린 까닭이다. 현택수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허위사실을 유포해도 악의성이 없다면 법적 처벌 근거가 미약하다는 점을 악용한 범죄”라면서 “허위정보 유포자 처벌에 대한 법적규정 마련을 고민해야 할 때”라고 지적했다.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도 “허위사실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이를 사전에 규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영준기자 apple@seoul.co.kr
  • 축소판 세상 만드는 모형 제작의 대가

    축소판 세상 만드는 모형 제작의 대가

    세상을 축소해 과거를 기록하고 미래에 남기는 작은 거인 ‘기흥성’. 올해로 어느덧 모형 제작 인생 46년을 맞는 그는 이 분야에서는 대가로 손꼽힌다. 현재는 아버지와 후학들을 위해 자신의 작품 인생을 총망라하는 박물관을 세우는 일에 매진하고 있다. 직접 현장 시찰을 가고 도면을 그려 직원들과 회의를 하는 등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위풍당당하게 현역 생활을 계속해 오는 미니어처 제작의 선구자 기흥성씨를 1일 밤 10시 40분에 방영되는 EBS ‘직업의 세계-일인자’에서 만나본다. 모형 제작 인생 46년. 그는 어릴 때부터 손으로 만드는 것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다. 우리나라에선 모형에 대한 기본 개념조차 서 있지 않았던 1960년대에 모형 제작 일에 뛰어들었다. 건축디자이너는 아니지만 회사 건축부에서 일하던 그는 자신의 스승인 고(故) 김수근 선생의 뜻에 따라 회사 내부에 모형팀을 만들어 전문적으로 모형 제작 일을 시작했고 이후 꾸준히 작업 활동을 이어와 그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로 자리매김하며 미니어처 제작이라는 외길을 걸어오고 있다. 그래서 그의 또 다른 이름은 ‘모형 제작의 일인자’다. 기흥성씨가 제작한 모형을 보면 우리나라의 발전사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여의도 개발 ▲경부고속도로 ▲독립기념관 ▲88올림픽 주 경기장 ▲상암 월드컵 경기장 ▲영종도 신공항 등 1960~70년대 개발 연대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또 허물어지거나 다시 지어진 건물들의 원형 또한 그가 만든 모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건물로 김영삼 정부 시절에 폭파됐던 중앙청의 모형은 건축물로서는 뛰어났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또 2008년 2월 화재로 소실되기 전의 숭례문과 서울역, 서울대학병원 등 많은 건축물이 그의 손에 의해 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기흥성씨는 요즘 박물관을 짓는 문제로 바쁜 날을 보내고 있다. 평생 자식들을 위해 사셨던 아버지와 자신의 길을 따라오는 후배들을 위해 박물관을 지어 자신의 46년 작품 세계를 총망라할 계획이다. 4번의 심장 수술을 버텨내며 걸어온 길. 그는 자신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일을 계속할 계획이라고 말한다. 일흔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당당하게 현역 생활을 이어 나가는 그. 오늘도 그의 손끝에서 또 다른 대한민국의 미래가 만들어진다. 눈앞에 펼쳐지는 모형의 세계! 미니어처 제작의 선구자 기흥성씨를 만나본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열린세상] 은퇴자여 책을 읽으라/장은수 민음사 대표

    [열린세상] 은퇴자여 책을 읽으라/장은수 민음사 대표

    사람들 대부분은 조영무(趙英茂)가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했던 일을 이야기해 주면 누구나 ‘아, 그 사람!’ 하고 떠올린다. 그 이미지는 다소 부정적이다. 이방원의 명을 받고 선죽교에 잠복했다가 정몽주를 철퇴로 내리친 사람인 까닭이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그는 이방원의 편에서 다시 무력행사에 앞장섬으로써 자기 얼굴에 피를 묻혔다. 이 때문에 그 이름에는 인간백정 이미지가 덧씌워져 회자되었다. 그런데 나에게는 조영무에 대한 또 다른 이미지가 있다. 예전에 보았던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그려진 말년의 조영무 초상이다. 제2차 왕자의 난 이후 실권을 장악한 이방원은 사병 혁파에 힘쓴다. 위화도 회군 이래, 피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던 무법천지의 시간을 없애고자 한 것이다. 각자 수십, 수백의 부하를 거느렸던 권세가들은 당연히 반발했고, 조영무 역시 무기를 거두러 온 관리들을 구타해 쫓아버리는 등 강하게 항의했다. 그 결과, 그는 미래 권력인 이방원의 최측근에서 급전직하해 모든 것을 잃고 지방으로 쓸쓸히 유배당한다. 드라마에 따르면, 이때 조영무의 두 번째 인생이 열린다. 유배 직후, 일자무식 행동대장이었던 그는 갑자기 책의 세계로 빠져든다. 허탈에 빠져 술로 분과 한을 달래는 다른 무장들과 달리, 그는 우연히 곁에 놓였던 책을 읽기 시작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지혜로 바꾸어 나간다. 평생 싸움터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피 말리는 긴장의 세월을 보낸 무사 조영무는 유배지에서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어린아이처럼 신통방통한 표정으로 책을 읽으며 선비로 변해 간다. 조영무의 새로운 삶은 곧 조정에 전해지고, 이방원은 다시 그를 불러들여 우정승에 임명하는 등 총애를 거두지 않는다. 이 일화에서 중요한 것은 조영무가 인생의 나락에서 끝내 일어나 영화를 누렸다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생의 모든 전투가 끝나고 인생 끝자락에 들어선 순간, 한쪽으로 치우쳤던 삶을 온전히 만들어 주고 일상 곳곳에 숨어 있던 재미와 풍요를 돌려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독서와 그를 통한 성찰밖에 없다는 것이다. 정치평론가 박성민에 따르면, 1930년대생들은 ‘위대한 세대’이다. 그들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대한민국을 불굴의 리더십으로 이끌어 강한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또 그 뒤를 이은 베이비붐 세대는 어쩌면 ‘더 위대한 세대’이다. 그들은 산업화와 민주화, 정보화라는 엄청난 변화의 물결을 온몸으로 겪어 나가면서도 역사의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삶을 불살랐다. 그러나 역사상의 건국 세대가 흔히 그러했듯이, 이 두 세대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과정에서 모든 것을 생존을 위한 격렬한 전쟁의 연속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이들은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정의를 위한 불법과 탈법에 관대한, 공동체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시대감각을 은연중 갖고 있다. 표절을 저지르고도 관행이라고 항변하는 문대성씨나 당권 장악을 위해 위장전입을 서슴지 않았던 통합진보당의 행태나 상속세를 몰래 포탈하면서 이를 세테크라고 우기는 재벌들의 모습은 어쩌면 같은 의식구조가 배태한 샴쌍둥이일 것이다. 그리고 이 감각에 대한 시대적 거부와 함께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시작된다. 아마 우리 삶의 규칙이 본격적으로 달라지는 순간일 것이다. 조선 초기 많은 공신들이 그러했듯이, 인생을 걸고 많은 것을 이룩했기에 이들의 노년은 더 공허해지기 쉽다. 사회적 삶을 유지하려는 열망 때문에 맹목에 빠지기도 쉽다. 현역 때 그토록 많은 사업의 고비를 넘겨왔던 이들이 은퇴 후에는 사소한 일에도 어이없이 넘어지는 것은 아마 이 탓일 것이다. 조영무의 일화는 내면의 힘을 깨닫고 뇌의 주름을 바로잡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시작해서는 안됨을 가르쳐준다. 독서를 통해 자기를 속 깊게 하고 오감의 능력을 회복한 후에야 비로소 세상을 온전히 볼 수 있고 인생을 재설계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 전에 가장 먼저 챙길 일은 재테크 계획이 아니라 독서 계획이다. 책을 통해 자기를 재정립하는 일이다. 그것이 아마도 ‘더 위대한 세대’가 끝까지 위대한 세대로 남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 향군 부회장 이지두·주창성씨

    대한민국재향군인회(회장 박세환)는 20일 이지두(왼쪽) 전 미국대사관 총영사를 해군부회장에, 주창성(오른쪽) 전 합동참모본부 차장을 공군부회장에 각각 선임했다. 이재관 육군부회장과 이상무 해병대부회장은 유임됐다.
  • 백악관 홈피 ‘동해’서명 경쟁 점화

    미국 백악관 홈페이지에서 ‘동해’와 ‘일본해’가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보도<서울신문 4월 18일자 2면>가 나가자 서울신문 독자를 비롯한 한국 네티즌들이 일본의 파렴치한 행태에 분개하면서 동해 표기 서명 운동에 발벗고 나서는 등 뜨거운 반향이 일고 있다. 네티즌 신재성씨는 “이렇게 생각없는 일본인들이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동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면서 “모두들 서명에 참여함으로써 교과서에 위조된 역사가 포함되는 걸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김성군씨는 “이 글 보시는 분들 빨리 서명해 주세요. 작은 애국입니다.”라고 했다. 구용모씨 등은 서명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며 발을 동동 굴렀고, 본지 기자에게도 서명 방법을 묻는 독자들의 이메일이 폭주했다. 윤재영·손종완·김기찬씨 등은 백악관 홈페이지에 접속해 서명하는 법을 상세히 댓글로 올려 참여를 독려했다. 이 같은 열기에 힘입어 백악관 동해 표기 청원 서명자는 18일 오전 1시(이하 현지시간) 현재 2만 8700명을 넘어섰다. 하루 만에 1100여명이 추가로 서명한 셈이다. 하지만 일본해 표기 청원 서명자도 같은 시간 현재 2600명을 넘었다. 하루 만에 900여명이 더 서명을 한 것으로, 우리에 비해 조용한 편인 일본 측 서명자가 이처럼 빠르게 늘어나는 것은 일본 정부가 ‘아르바이트생’들을 풀어 조직적인 서명에 나서고 있다는 의혹을 짙게 한다. 동해 표기 마감 시한은 오는 21일로 사흘 정도밖에 남지 않은 반면, 지난 13일부터 서명을 시작한 일본해 표기 청원 시한은 25일이나 더 남았기 때문에 최종 서명자 집계에서 역전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워싱턴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74)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74) 영월 하송리 은행나무

    헤르만 헤세(1877~1962)는 “나무들은 단지 아름답고 사랑받을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자연의 무구함을 배우게 하고, 나무를 둘러싼 환경과 그 안에 사는 사람살이의 의미까지도 알게 한다.”고 했다. 평소에 나무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건 곧 ‘진리를 배우는 일’이라고 강조하며 정원 일을 즐겼지만, 그에게 나무는 관상의 대상으로만 머무르지 않았다. 나무를 바라보고 나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그는 삶의 진리를 얻고자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나무와 더불어 살아가는 데에서 참삶의 길을 찾고자 했다. 헤세의 이야기대로 우리 곁에 살아 있는 오래된 나무에는 오래된 삶 속에서 배워야 할 삶의 진리가 담겨 있다. ●마을 수호목에서 문화재로 재조명 “동네 하나 뒤집어 엎는 건 금방이죠. 집들이 부서지고, 여기 살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진 건 고작해야 4년밖에 안 됐지만, 이제 옛날 모습은 남은 게 거의 없어요.” 공공근로 작업으로 나무 주변 정비 작업에 나온 강현미(73) 할머니가 점심 도시락 보자기를 펼치며 이야기를 꺼냈다. 강 할머니의 이야기대로 마을은 몰라보게 바뀌었다. 몇 해 전만 해도 나무 옆으로 난 조붓한 골목길을 따라 낮은 지붕의 작은 집들이 이어져 있었다. 골목 안에서는 간간이 동네 조무래기들의 왁자한 목소리도 새어나왔다. 정겹게 느껴지던 그 마을은 그러나 가뭇없이 사라졌다. 아이들이 뛰놀던 골목으로는 널따란 자동차 도로가 뚫렸고, 반듯한 도로 너머로 휑해진 넓은 터에는 이미 고층 아파트들이 줄지어 올라왔다. “변하지 않은 건 나무밖에 없어요. 이게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라고 하대요. 우린 맨날 봐서 뭐 그리 대단한 줄 모르지요. 그러다가도 나무 한 그루 보겠다고 관광버스까지 타고 우르르 몰려와서 사진 찍고 돌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에야 다시 한번 쳐다보게 돼요.” 강 할머니는 이 마을로 이사온 지 몇 해 되지 않지만, 그나마 마을 사정을 아는 축에 속한다. 이곳 하송리는 군청을 가까이한 영월군의 중심지여서,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들고남이 잦았던 곳인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의 택지 개발까지 이어져 옛사람보다는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하송리 은행나무는 마을이 처음 들어설 때부터 마을의 당산나무로 사람과 더불어 살아온 나무이지만, 이제는 이곳 사람들보다 오히려 외지에서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기념물로 남았다. ●영월엄씨 시조인 당나라 파락사가 심어 나무가 처음 이 자리에 뿌리를 내린 건 신라 때인 1200년 전이다. 당시 당나라의 현종이 새로 지은 악장(樂章)을 주변 나라에 알리는 임무를 띤 ‘파락사’(波使) 신분으로 신라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임무를 마치고 당나라로 돌아가려 했으나, 때마침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고, 난이 평정되기를 기다릴 요량으로 이 지역에 머무르게 됐다. 난은 금세 평정되지 않았고, 영월 지역의 풍광을 좋아하게 된 그는 마침내 새 성씨(姓氏)인 영월엄씨를 일으키고, 이 마을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그가 바로 당나라의 파락사 엄임의(嚴林義)였다. 당시 마을 위쪽의 솔숲이 매우 우거졌다는 이유에서 마을 이름은 소나무 아랫마을, 즉 하송리(下松里)가 됐다. 영월엄씨의 시조인 그는 사람이 모여 사는 아름다운 마을의 상징으로 한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그게 바로 천연기념물 제76호인 하송리 은행나무다. 안녹산의 난이 일어난 게 서기 755년이니 이 나무는 무려 1200년을 넘게 살아온 셈이다. 조선 후기에 활동한 문인 신범(辛汎·1823∼1879)도 이 은행나무를 찾아보고 남긴 시(詩)에서 “中有千年杏”, 즉 ‘마을 한가운데의 천년 된 은행나무’라고 표현했다. 150년 전에도 이미 이 나무가 1000년을 넘은 나무라는 걸 모두가 인정했다는 증거다. 1000년을 넘게 살아온 나무는 키를 29m까지 키웠다. 세월의 풍진에 나무의 원래 줄기는 썩어 문드러져 가운데가 텅빈 듯한 생김새이지만, 거개의 은행나무가 그렇듯이 원줄기 곁에서 돋은 맹아(萌芽)가 더 우람하게 자랐다. 택지 개발로 마을 사람들이 흩어져야 했던 아쉬움 탓이었는지, 영월엄씨 후손들은 나무 앞에 영월엄씨 시조가 심은 나무라는 돌비석을 세웠다. 그 동안 사람들은 나무를 지키기 위해 온갖 정성을 들였을 것이다. 조상의 얼이 깃든 나무이니 당연한 노릇이다. 그리고 나무를 떠나면서 그들은 나무와 더불어 살았던 자신들의 삶을 비석 하나의 기록으로 남겼다. ●사람살이의 안녕을 지켜온 ‘큰나무’ 한 그루의 은행나무와 더불어 살았던 마을 사람들은 나무에 얽힌 여러 전설을 남겼다. 나무 안에 신통력을 가진 늙은 뱀이 살고 있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늙은 뱀은 근처에 다른 삿된 짐승은 다가서지 못하게 하지만, 사람살이만큼은 평화롭게 지켜주었다. 이를테면 아이들이 나무에 기어오르다 떨어져도 결코 다치지 않을 뿐 아니라, 이 나무에 기도를 올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그렇다. 전설을 통해 나무와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며 이룬 평화로운 풍경을 엿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떠나간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아도 나무는 앞으로 다시 또 긴 세월을 이 자리에 지금처럼 융융하게 선 채로 사람과 나무가 더불어 살아갔던 평화로운 마을의 사람살이를 서리서리 풀어낼 것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주변 환경과 그 곁에서 이뤄가는 사람살이의 의미를 짚어준다는 헤세의 말을 다시 짚어보게 하는 이 땅의 큰 나무다. 글 사진 영월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강원 영월군 영월읍 하송리 190-4번지. 중앙고속국도의 제천나들목으로 나가서 영월군 방면으로 간다. 국도 38호선을 이용해 영월군에 들어서면 남면 소재지를 지나면서 청령포 방면을 알리는 안내판을 자주 만나게 된다. 청령포에 가까이 가면 청령포교차로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영월군청 방면으로 좌회전한다. 공설운동장을 지나면서 나오는 군청사거리를 지나 300m쯤 가면 하송사거리가 나온다. 우회전하여 280m 가면 나무가 있다. 나무 옆에 자동차를 세울 공간이 있다.
  • 장나라 “대표 동안요? 저도 주름이 ^.^…노래에 대한 갈증 너무 풀고 싶었죠”

    장나라 “대표 동안요? 저도 주름이 ^.^…노래에 대한 갈증 너무 풀고 싶었죠”

    “아휴, 저도 가까이서 보면 주름이 자글자글해요(웃음).” 국내 대표 동안 연예인 장나라(31). 오죽하면 ‘동안 미녀’라는 제목의 드라마 주인공까지 맡았을까. 최근 서울 마포구 홍대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녀는 여전히 풋풋하고 솔직한 매력을 갖고 있었다. 먼저 4년 만에 새 앨범을 내고 가수로서 국내 활동을 재개한 소감부터 물었다. “오랜만에 무대에 섰더니 정말 긴장이 많이 됐어요. 아무래도 공백 기간에 대한 부담감일 수도 있고요. 중국에서 활동할 때는 관객 수는 굉장히 많지만 거리가 멀어서 덜 긴장됐거든요. 한국에서는 객석과의 거리가 가까워서 더 어색한 것 같기도 하고요.” 신곡 ‘너만 생각나’로 음악 프로그램의 첫 녹화를 했을 때 떨려서 제대로 한자리에 서 있기도 힘들었다는 장나라. 너무 긴장한 탓에 자신의 목소리가 끊어지는 것도 몰랐다고 하니 오랜만의 국내 무대가 상당히 압박감을 준 모양이다. 하지만 음원이 발표된 지난달 26일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에 그녀의 이름과 노래 제목이 떠나지 않을 정도로 팬들은 반가운 기색을 표하고 있다. “사실 저 혼자 반가우면 어떡할까 걱정을 많이 했어요. 제 노래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처럼 다가갔으면 했거든요. ‘너만 생각나’는 단순한 멜로디의 발라드로 가사도 굉장히 직설적이에요. 연인과 헤어진 분들께 위로가 돼도 좋을 것 같고…. 저도 나이를 먹는지 뭔가 와 닿는 것이 있어서 공감하면서 불렀어요.” 2001년 ‘눈물에 얼굴을 묻는다’로 데뷔해 ‘나도 여자랍니다’ ‘4월 이야기’ ‘사랑하기 좋은 날’ 등을 히트시켰던 장나라. 그는 배우로 한국과 중국에서 자리를 잡았지만 가수로서 노래를 하고 싶다는 갈증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국내에서 가수 활동을 하려고 준비했었는데 작품을 하게 되면서 앨범 발매 시기가 맞지 않았어요. 사실 제가 가수로서 비음도 많고 다른 가수들에 비해 소리도 약한 편이지만 매 앨범마다 장점을 꾸준히 살려가는 게 좋아요. 제가 폭발력 있는 느낌이 없고 목소리가 여려도 감성이 많이 담긴 편이거든요.” 이번 디지털 싱글 앨범에는 가수 알렉스와 함께 부른 ‘바로 너였어’도 수록돼 있다. ‘너만 생각나’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봄 느낌이 물씬 풍기는 달달한 곡이다. 장나라는 “두 곡 모두 들으실 때 편안한 느낌을 받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녀를 이야기할 때 중국 활동을 빼놓을 수 없다. 장나라는 중국에서 ‘띠아오만 공주’ ‘순백지련’ ‘철면가녀’ 등 총 6편의 드라마에 출연하며 한류 스타로 입지를 굳혔다. 어느새 한국에서 출연한 작품 수와 똑같아졌다. 한류 스타 대부분의 고민처럼 한국에서의 공백이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한국과 중국 활동의 분배를 잘하고 싶었는데 중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하다 보니 (활동이) 좀 치우친 면도 있었어요. 그런데 한국에 계속 있었다고 안 잊힌다는 보장은 없었을 거예요. 하지만 중국 활동을 하면서 감사한 일도 많고 배운 것도 많아요. 중국에 가기 전에는 세상을 보는 눈이 좀 편협했어요. 작은 어려움이나 불만이 생기면 내가 제일 슬프고 모든 짐을 다 진 것 같은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기도 했었죠. 그렇지만 넓은 곳에서 일하면서 성공하기도 하고 큰일을 겪으면서 조금은 어른이 된 것 같아요.” 장나라는 중국에서 울화통이 치밀고 속상한 적도 많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다 만족스럽다면서 웃었다. 그녀는 “처음 중국에 갔을 때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몰라서 개런티 등의 문제와 관련해 속기도 하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내 매니저를 사칭한 적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최근 중국 드라마에 높은 개런티를 받고 출연하는 한국 배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전하자 그녀의 표정이 순간 진지해졌다. “개런티 부분은 거품도 많지만 어느 정도 현지 중국 배우들과 형평성을 맞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요즘은 한국 뉴스가 실시간으로 중국에 전해지기 때문에 한국 배우들이 광고나 드라마에서 거액의 출연료를 받는 것이 그분들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거든요. 잘못하면 한류가 일방적인 자국 이기주의로 비칠 수도 있어요. 저는 한국, 중국, 일본의 대중문화가 어울림이 없다면 오래 지속되지 않을 거라고 봐요. 하지만 반대로 교류가 잘되면 할리우드가 부럽지 않다고 생각해요.” 장나라는 자신 역시 처음 중국에서 드라마를 촬영할 때 팀내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배우들도 있었고 악의적인 중국 언론의 보도에 시달린 적이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내 말로 연기하고 노래하는 것이 최고”라며 웃는 장나라는 올해와 내년에 국내 활동에 주력할 예정이다. 여기에는 지난해 드라마 ‘동안미녀’의 성공이 발판이 됐다. 이후 시놉시스도 많이 쌓이고 있는 상황이다. “‘동안 미녀’의 첫 회를 보고 눈물을 터뜨렸어요. 혹시 저 때문에 드라마가 안 될까 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거든요. 다행히 작품이 잘돼서 감사했고 혼자 하는 연기가 아닌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연기를 배웠어요. 이후에 ‘동안 미녀’와 비슷한 캐릭터가 많이 들어오긴 해요. 그런데 저는 조금씩만 다르게 한다고 해도 만족해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겠죠. 데뷔 2~3년 차에 진짜 창피한 건 다 해봤기 때문에 이제 두려운 연기도 없고요.” 장나라가 지금까지 연예계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인 연극배우 주호성씨의 공이 컸다. 한때 그녀를 소속사 대표인 아버지에게 기대는 ‘파파걸’로 보는 시선도 있었지만 누가 뭐래도 아버지는 장나라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다. “다른 아버지와 딸처럼 투닥투닥할 때도 있지만 아버지가 없었다면 아마 중국에서 일을 못 했을 거예요. 아버지는 처음에 중국말을 한마디도 못 했지만 독학으로 공부해서 이제는 계약도 혼자서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어요. 참 독하고 똑똑하신 분이죠. 저는 행동력 없고 현실에 안주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인데 미래지향적이고 진취적인 아버지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얼마 전 사진 촬영을 하고 있는데 지나가는 어린 학생들이 “저 누나 처음 보는데, 누구야.” 하는 대화를 듣고는 웃음이 났다는 장나라. 그녀의 30대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사실 20대부터 이지적이고 커리어우먼의 상징인 30대가 되기를 기다렸어요. 그런데 막상 서른이 되니 현실은 너무나 다르더라고요.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8춘기까지 겪었죠. 나 자신을 추스르기도 힘든데 연애도 부담스럽고…. 하지만 전 일이 좋고 즐거워요. 조금 더뎌도 앞으로 계속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청소년들이 음악 꿈 키울 수 있게 돕고 싶어”

    “청소년들이 음악 꿈 키울 수 있게 돕고 싶어”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마(57)가 다문화가정 출신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초청해 직접 연주 지도를 하는 특별한 시간을 가졌다. 12일 효성그룹에 따르면 요요마는 오전 효성의 초청으로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다문화가정 청소년으로 구성된 ‘세종꿈나무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대상으로 음악교실을 열고 직접 연주 지도를 했다. ●‘실크로드 앙상블’ 내한공연도 관람 수업이 끝난 뒤 단원들은 오후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효성과 함께하는 요요마와 실크로드앙상블 내한공연’도 관람했다. 요요마는 세계에서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영향력 있는 첼리스트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중국계 미국인인 그는 여섯 살 때 세계적인 지휘자 번스타인의 찬사 속에 데뷔했고, 이후 하버드대에서 인류학까지 전공한 전형적인 영재 출신 거장이다. 지금까지 70여장의 음반을 내고 그래미상을 15차례나 받았다. 요요마가 이끄는 ‘실크로드앙상블’은 세계 20여개국의 유명 작곡가와 연주자들로 구성된 프로젝트 그룹이다. 서양의 클래식과 각국의 민속음악, 팝까지 다양한 음악 장르를 접목시킨 크로스오버 음악을 선보이고 있다. 한국 음악가 중에서는 타악기 연주자 겸 작곡가인 김동원씨와 비올리스트 김유영씨 등이 정단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날 공연에서도 한국인 작곡가 김대성씨의 ‘돌로 새긴 사랑’ 등을 연주했다. 이번 행사는 ‘요요마와 실크로드앙상블’의 후원사인 효성이 2010년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대상으로 음악교실을 연 이후 2년 만에 개최됐다.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차세대 음악가들이 세계적인 음악가들의 공연을 직접 경험하고 음악적 교감을 통해 꿈을 키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마련됐다. 세종꿈나무하모니 오케스트라는 세종문화회관이 2010년 10월 다문화가정 등 어려운 환경에서도 음악에 대한 꿈을 키우는 초등학교 4학년∼중학교 2학년생 50명으로 창단한 연주단이다. ●“한국 공연 기회 생기면 계속 참여” 세종꿈나무하모니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있는 김은정 감독은 “단원들에게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이라면서 “세계적인 연주자들과 함께할 수 있는 뜻깊은 자리를 마련해 준 효성과 요요마 측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요요마는 “음악을 사랑하는 한국의 어린 친구들을 직접 만나게 돼 무척 기뻤고, 더 많은 기회를 마련해 전 세계 청소년들이 음악에 대한 꿈을 키울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면서 “한국에서 공연할 기회가 생기면 지속적으로 행사에 참여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영등포 ‘빵 터지는’ 음악회 오세요

    영등포구는 오는 15일 오후 7시 30분 영등포아트홀에서 클래식 음악과 개그가 어우러진 폭소 콘서트 ‘얌모얌모 콘서트’를 연다고 8일 밝혔다. 개그맨 전유성씨가 연출하고 전문 성악가 9명이 펼친다. 온 가족이 함께 웃고 떠들며 즐길 수 있도록 꾸몄다. 웃음이 있는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클래식 공연이 펼쳐져 어린 아이부터 성인까지 온 가족이 친근하게 감상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오페라 ‘축배의 노래’, ‘오 나의 태양’을 비롯해 ‘오 해피데이’, ‘산타루치아’, ‘푸니쿨리 푸니쿨라’, 동요 메들리 등 20여 곡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웃음과 재치를 곁들여 딱딱한 클래식 공연도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게 하는 무대다. 티켓은 전석 1만원이다. 구 홈페이지에서 ‘문화마니아’로 가입하면 20%, 청소년은 50% 할인 혜택을 준다. 인터파크·옥션·G마켓 등에서 예매할 수 있다. 6세 이상이면 입장 가능하다. 조길형 구청장은 “아이들이 떠들어도 화내지 않는 음악회로 유명한 이번 공연을 통해 가족끼리 함께 클래식에 입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양반이 된 노비 후손 2세기에 걸친 신분세탁

    양반이 된 노비 후손 2세기에 걸친 신분세탁

    조선시대 양반은 특권유지를 위해 어떤 전략을 썼을까. 하나는 ‘행정실무를 담당한 아전·향리들을 중간신분으로 격하’시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자를 차별’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누를 수 없는 게 특권에 대한 열망이다. 재산을 모은 노비가 양반 신분을 돈으로 사는 것이다. 사학계에서 이를 주로 19세기 멸망사로 연결짓는다. 국가재정의 파탄이 배경에 깔려 있다는 점에서 지도층의 무능을, 엄격한 신분질서가 흔들렸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사회의 혼란상을 나타내는 징표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욕망이 강렬했던 것으로 본다면 어떨까. 역사비평 2012년 봄호에 실린 권내현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의 논문 ‘양반을 향한 긴 여정-조선 후기 어느 하천민 가계의 성장’은 이 점을 잘 요약해서 보여준다. 권 교수가 이 글에서 규명하는 것은 ‘수봉’이라는 한 사노비의 후손들이 17세기 말에서 19세기 중엽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을 거쳐 ‘김해 김씨 양반가’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다. 권 교수는 단성현 도산면, 그러니까 지금 경남 산청군의 일부 지역에 살았던 ‘김흥발’에서 시작한다. 1678년 사노비 문건에 수봉이 등장한다. 이때는 성도 본관도 없다. 1717년 족보에는 수봉의 아들로 김흥발이 등장한다. 1678~1717년 사이에 사노비 신분에서 해방된 수봉이 김씨 성을 획득한 것이다. 곡식을 바쳐 면천하는 납속종량(納粟從良)의 방법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수봉은 왜 수많은 본관과 성씨 가운데 김해 김씨를 골랐을까. ‘지리적으로 가깝거나 인구 수가 많아 익숙한 것’을 골랐으리라는 점이다.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그 지역에서 오랫동안 터 잡은 대표적인 양반 성씨가 밀양 박씨와 남원 양씨였다는 점이다. 그들 성을 끌어다 쓰다가는 곤란할 것 같으니 ‘가장 흔하면서도 신분적 장벽이 높지 않았던 김해 김씨를 자신의 성관으로 선택’한 셈이다. 실제 이 시기 단성현 호적 조사 결과를 보면, 김해 김씨는 늘어나는 추세가 뚜렷한데 밀양 박씨와 남원 양씨는 증가세가 딱히 드러나지 않는다. 수봉뿐 아니라 다른 면천 노비들도 두 성씨를 의도적으로 피하면서 제일 편한 성씨를 골랐다는 의미다. 그러나 아직은 평민이다. 김수봉의 집안은 이후 양반에 도전한다.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김수봉의 증손자 김광오다. 김광오는 1780년 양반들이 독점했던 ‘유학’이란 호적상 직역에 제일 먼저 진출했다. 그 덕분에 수봉의 부인도 이‘소사’(召史·이름 없는 여염집 아낙네)에서 이‘성’(姓), 다시 이‘씨’(氏)로 자꾸만 높아진다. 김광오는 1783년 다시 중간층의 교생으로 강등되지만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후손들이 유학 직역에 안착하는데 성공한다. 양반되는 데 ‘2세기에 가까운 시간’을 들인 셈인데 이는 ‘그들의 뿌리가 노비로 연결되기 때문에 급속한 성장을 이루기에는 그만큼 시간적 물리적 조건을 충분하게 갖추지 못했던 데서 기인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이 평탄했을 리 없다. 대표적인 예가 김성종이다. 그는 1825년 본관을 김해에서 안동으로 바꾸면서 사는 곳도 도산면에서 신등면으로 옮긴다. ‘안동 김씨가 당시 중앙 집권세력이었다는 점’, ‘신등면이 도산면과 달리 대표적인 양반촌’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김성종의 이런 행동은 이제 명실상부한 양반가의 반열에 올라서겠다는 야심찬 도전인 셈이다. 그러나 이들은 1831년 도산면으로 되돌아오고 본관도 김해로 환원한다. 쓰디쓴 실패다. 오늘날 양반이라면 엄격한 신분체계로 이해되지만 실제로는 ‘지역 명망가들의 사교클럽’(미야지마 히로시 성균관대 교수)에 더 가까웠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호적상 양반임을 내세워 실제 양반 행세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보다 더 눈길을 끄는 대목은 후손들의 족보에서 1831년 양자가 처음 등장한다는 점이다. 양자 입양은 양반 가문에서 부계질서 위주의 가계계승을 위해 썼던 방법이다.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면서 양반층의 문화를 따라하고 베끼는 것을 넘어서 ‘양반층의 문화를 부분적으로 내면화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짐작게 해준다. 이는 많은 점을 시사한다. 독일 철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문명화 과정’을 통해 문명이 광범위하게 퍼져나가는 계기로 상층계급에 대한 모방과 내면화 과정을 들었다. 마찬가지로 조선이 망하면서 사라졌다고 여긴 양반에 대한 동경과 욕망은, 여전히 우리 내면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권 교수도 “모방행위는 신분적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로부터 시작됐지만, 누구나 양반이 될 수 있었던 근대사회로 서서히 접어들면서 많은 사람이 그러한 노력을 중단할 수 없게 됐다.”고 결론짓는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조선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마침표 찍지 못한 학업 못내 아쉬워”

    “마침표 찍지 못한 학업 못내 아쉬워”

    80세의 만학도 2명이 대학 입학 60년 만에 학사모를 쓴다. 성균관대는 오는 24일 열릴 졸업식에서 정치외교학과 52학번 김정헌(왼쪽·81)씨와 경제학과 54학번 황기성(오른쪽·80)씨가 졸업장을 받는다고 20일 밝혔다. 김씨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입학해 4학년 1학기까지 마치고 1957년 ROTC격인 학사연대에 입대, 1960년 전역 뒤 당시 태완선 부흥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에 발탁돼 공직에 몸담았다. 김씨는 1973년 복합재료 수출업체인 근영실업을 설립, 2000년 수출입 무역부문 산업은탑 대통령상 등을 수상하는 등 산업역군으로 뛰다 지난해 성균관대에 재입학하기로 결심했다.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준 뒤 마침표를 찍지 못한 학업 문제가 못내 아쉬웠기 때문이다. 지난해 2학기 재입학을 허가받은 김씨는 아들뻘의 교수 밑에서 손자뻘의 학생들과 함께 중국외교사, 한국정치론 등 전공과목 6학점을 수강했다. 김씨는 “강의실에 앉아 반세기 만에 수업을 들으니 굉장히 어색했지만 학생들이 많이 도와줬다.”면서 “교수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물어봤고 수업을 마치면 학생들과 자장면을 먹기도 했다.”고 말했다. 황씨는 한 학기를 남겨둔 시점에서 등록금 6000원(현재 약 600만원)을 내지 못할 만큼 가정형편이 나빠져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1958년 군에 입대, 1968년에 전역한 뒤에도 자녀 넷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부동산중개업에 매달리다 배움의 꿈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자녀 넷을 모두 혼인시키고 삶에 여유를 갖게 된 황씨는 비슷한 처지의 지인이 뒤늦게 학위를 이수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난해 2학기때 재입학, 3학점짜리 교양과목 ‘유학사상’을 수강했다. 황씨는 “1950년대에는 전쟁통에 변변한 교재도 없이 교수가 불러주면 받아 적는 수업밖에 못 들었는데 지금은 이메일로 참고자료를 받아보는 등 대학수업이 많이 발전했다.”면서 “60세만 되었어도 석·박사 과정까지 도전했을 테지만 80세를 넘겨서 졸업장을 받은 것만으로도 뿌듯하고 감사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신진호기자 sayho@seoul.co.kr
  • 서산서 엽총 난사후 음독한 피의자 사망

    자신이 다녔던 충남 서산의 한 공장 직원들에게 엽총을 난사해 3명의 사상자를 낸 뒤 음독자살을 기도한 성모(31)씨가 숨졌다. 19일 충남 서산경찰서에 따르면 성씨는 천안의 한 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전날 오후 4시 20분쯤 약물중독에 의한 급성신부전증으로 사망했다. 성씨는 지난 15일 오전 9시 40분쯤 서산시 수석동 농공단지 내 자동차 시트 제조공장인 D산업 마당에서 엽총 50여발을 난사해 최모(38)씨를 숨지게 하고 함께 있던 임모(30)씨와 문모(56)씨 등 직원 2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범행 후 서해안고속도로 서산IC를 거쳐 서울 방향으로 달아났지만서해대교를 지난 지점에서 경찰에 검거됐다. 그는 붙잡히기 직전 농약을 마셔 병원으로 후송돼 치료를 받아 왔다. 성씨는 3년 전 이 공장에 다니던 시절 직원들이 자신을 괴롭혀서 보복하기 위해 총을 쐈다고 진술했었다. 서산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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