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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EO칼럼] 기업과 고객의 관계/송영한 KTH 사장

    [CEO칼럼] 기업과 고객의 관계/송영한 KTH 사장

    요즘 기업 광고는 대부분 고객을 최우선시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하지만 기업은 일반적으로 수익을 극대화하는 행동을 하기에 고객우선 경영을 한다는 것은 고객으로부터 더 많은 이익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감춘 것이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고객들은 표현은 하지 않아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고, 마케팅을 전공하는 학생들마저도 그것이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기업이 추구하는 수익이 고객으로부터 나오는 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기업이 고객으로부터 이익을 빼앗아 가는 것은 아니다. 기업의 가치가 고객에게 전달되는 데에는, 고객이 느끼는 가치가 지불 비용보다 크다는 점(소비자 잉여)과 기업의 수익이 생산비용보다 크다는 점(생산자 잉여)이 상호 작용하고 있다. 고객과 기업이 서로 만족하는 거래가 지속될 수 있다는 원리가 숨어 있다. 따라서 기업의 수익 극대화는 곧 고객이 가지는 가치의 극대화를 의미한다. 간혹 당장의 수익을 바라고 고객 가치를 훼손하는 사례가 없지 않지만, 그것이 모든 기업이 이기적이라는 근거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기업의 비전을 얘기할 때 수익이나 주주가치의 극대화만을 내세우지 않는다. 기업이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제임스 콜린스 등 경영학자들은 세계적인 초우량 기업들의 성공적인 경영 이면에는 그 회사의 일관된 정체성으로 핵심 이념이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유지되는 비결이 숨어 있다고 주장한다. 본질적이면서 지속적인 신조로 추구하는 핵심 가치와 기업의 진정한 존재 이유로서의 핵심 목적이 설정되고, 이것들은 경영 환경이나 경쟁 등으로 상황이 불리하게 흐르더라도 변하지 않고 지켜진다고 한다. 이런 기업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고스란히 고객에게 돌아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이클 트레이시가 ‘마켓 리더의 전략’에서 말했듯이 성공하는 기업은 가격, 품질, 서비스, 구색, 편의 등 특정한 가치의 조합을 고객에게 전달하겠다는 암묵적 약속을 한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업은 운영 체계를 조직하고, 그 기업이 시장에서 최고가 되기 위한 경영 전략을 선택한다. 그 전략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진다. 첫째 ‘운영상의 탁월 전략’은 적정한 상품을 최상의 가격 조건으로 고객에게 불편없이 제공하는 것을 의미하고, 두번째 ‘제품 리더십 전략’은 가격보다는 제품의 우수성을 지속적으로 향상시켜 가장 훌륭한 제품을 신속하게 제공하는 것이다. 세번째 ‘고객 밀착 전략’은 시장 전체보다 개별 고객에게 초점을 맞추어 고객이 무엇을 원하든 고객이 최적의 만족을 얻을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하는 전략을 말한다. 기업이 어느 전략을 택하든, 장기적으로 고객에게 최고의 가치를 제공함으로써 고객의 만족을 추구하겠다는 목적에는 변함이 없다. 고객의 만족은 기업의 일방적인 노력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기업과 고객은 연인과도 같다. 기업이 의미있는 가치를 제안하고 고객이 선택함으로써 서로 이끌리는 관계를 맺어간다. 손을 내밀 때는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하고, 시간이 지나도 선택이 흔들리지 않도록 약속을 잘 지키며 애프터서비스도 성실히 해야 연인의 관계를 지켜나갈 수 있다. 누가 일방적으로 빼앗아가는 관계로서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기업의 노력은 연인과 같은 고객에게 최고의 가치를 제공하고 오래 연인으로 남기 원하는 노력과 다르지 않다. 고객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송영한 KTH 사장
  • [儒林 속 한자이야기] (93) 精舍(정사)

    儒林 (451)에는 ‘精舍’(마음 정/집 사)가 나오는데,‘정신이 머물러 있는 곳’ 즉,‘학문을 가르치기 위하여 마련한 學舍(학사)나 書院(서원)’, 또는 ‘정신을 수양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절’을 뜻하기도 한다. ‘精’자의 본래 의미는 ‘고르다.’이다.意符(의부)인 米(미)는 벼이삭의 象形(상형)이다.音符(음부)인 靑은 ‘풀’처럼 푸른색의 鑛石(광석)을 의미한다.用例(용례)에는 精密(정밀:아주 정교하고 치밀하여 빈틈이 없고 자세함),精誠(정성:온갖 힘을 다하려는 참되고 성실한 마음),精銳(정예:썩 날래고 용맹스러움) 등이 있다. ‘舍’자는 ‘口’(입 구)와 관리들의 원거리 출장 때 휴대하던 일종의 信標(신표)를 가리키는 ‘余’(나 여)를 합친 글자로 본래의 뜻은 ‘머물다.’, 혹은 ‘머무는 곳’이다.‘베풀다.’‘두다.’‘버리다.’‘쉬다.’ 같은 뜻으로도 쓰인다.用例로는 ‘校舍(교사:학교의 건물),舍利(사리:부처나 고승의 유골),蝸舍(와사:작고 초라한 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등이 있다. ‘精舍’는 산스크리트어 ‘vihara’의 漢譯(한역)이다.精舍는 석가모니 생존시의 居所(거소)에서 유래하였는데, 그저 雨期(우기)에 비를 피할 정도의 움막과 뜰이 있는 허름한 形態(형태)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중국의 精舍는 後漢(후한)의 包咸(포함)이 동해에 精舍를 세웠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우리나라는 고려말부터 생겨났으며 朱子學(주자학)의 융성과 더불어 곳곳에 세워졌다. 명망있는 선비가 자신의 고향이나 경치가 좋은 장소를 택해 은거하면서 講學所(강학소)를 개설하면, 그를 흠모하는 志學(지학)들이 모여들어 修學(수학)함으로써 많은 精舍가 성립되었다. 그런데 書院(서원)은 祠堂(사당)을 두어 享祀(향사)를 하는 등의 공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반면 精舍는 단지 私的(사적)으로 학문을 수양하는 곳일 뿐이었다. 住居(주거) 등의 목적인 건물을 나타내는 漢字(한자)에는 ‘家’(집 가),‘屋’(집 옥:흔히 가옥 꼭대기의 덮개를 말함),‘堂’(집 당:관아, 사원, 집회소 등의 높고 큰 집, 혹은 터를 높이 돋우어 지은 집),‘館’(객사 관:여행 등의 목적으로 임시 거처하는 집),‘邸’(사처 저:來朝한 제후가 서울에 올라 왔을 때 머무는 숙소),‘軒’(집 헌:난간이 설치된 긴 복도가 있는 집) 등이 있다. 이밖에 ‘亭’(정자 정:벽이 없는 觀望用(관망용)의 建築物(건축물)),‘樓’(다락 루:2층 이상의 건축물로 規模(규모)가 크고 문과 벽이 없이 트이어 사방을 바라볼 수 있게 지은 건물),‘臺’(돈대 대:사방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성토한 위에 세운 건축물),‘閣’(문설주 각:집, 누각, 대궐, 내각, 안방, 객관, 부엌 등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齋’(집 재:집이라는 뜻 외에도 ‘재계하다.’‘마음을 깨끗이 하다.’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書齋(서재)나 學舍(학사)와 같이 경건함이 필요한 집의 명칭으로 쓰인다),‘宮’(집 궁:원래는 사람이 거주하는 가옥의 통칭이었으나 秦(진)·漢(한) 이후 궁궐의 뜻으로만 限定(한정)하여 쓰임),‘殿’(큰집 전:일반적으로 큰 집이나 큰 건물을 가리키는데, 임금의 居處(거처)나 宮闕(궁궐)을 칭하기도 함) 같이 구체적인 형태의 建造物(건조물)을 나타내는 漢字도 있다. 김석제 경기 군포교육청 장학사(철학박사)
  • [조영증의 킥오프] 꿈나무에 희망주는 ‘유럽파’

    내년 독일월드컵에서 또 하나의 신화를 이뤄낼 유럽파 태극 전사들이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다. 축구 지도자를 떠나 축구계 선배로서 눈물날 정도로 대견하고 고마울 뿐이다. 한국인 프리미어리거 1호 박지성(24·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은 지난 7월 잉글랜드 진입 초기 주전 경쟁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이고, 고대하던 골이 터지지 않으면서 “프리미어리그로 간 것은 시기상조였다.”,“포지션을 바꿔야 한다.” 등 일부의 혹평도 들어야 했었다.하지만 19일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프랑스 LOSC릴과의 경기에서 주장 완장까지 차며 단 10분 동안이지만 변함 없는 폭발적인 경기력을 보여줄 정도로 짧은 시간 안에 팀에 적응함은 물론, 자신의 기량을 맘껏 펼치고 있다. 지난 3일에는 어시스트 2개를 기록하고 페널티킥을 유도하는 등 만개한 모습을 선보여 축구팬들과 선배들의 기대를 더욱 높였다.‘말의 심장’이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탄탄한 체력을 바탕으로 경기장 좌우전후를 폭넓게 누비는 박지성의 성실한 플레이는 네덜란드, 스페인보다는 프리미어리그에서 가장 빛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박지성보다 한 발 늦게 프리미어리그에 뛰어든 이영표(28·토트넘 홋스퍼) 역시 눈부신 활약이다.허벅지 부상으로 잠시 결장할 때를 제외하고는 입단 첫 경기부터 주전으로 풀타임 출장할 정도로 마틴 욜 감독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특히 오버래핑과 ‘헛다리짚기’가 빅리그에서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리의 자조적 비판과는 달리 현지 언론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첫 경기부터 주간 MVP를 수상한 이영표에게 내려진 ‘유럽 최고의 윙백’이라는 평가는 우리 선수들의 가능성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빅리그 진출을 꿈꿔왔던 필자를 포함한 과거의 많은 선배들에게 유럽 진출과 빅리그 성공 정착을 이뤄낸 이들의 존재는 기특함과 고마움의 대상이다. 나아가 한창 커가는 꿈나무들에게 이들의 존재와 경기장에서 보여주는 몸짓 하나하나는 ‘희망’ 그 자체다. 축구팬들은 요즘 박지성과 이영표의 경기가 있을 때마다 기꺼이 밤잠을 설쳐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이들을 응원하고 있고, 이들은 세계최고 수준의 선수들과의 대등한 플레이로 보답하고 있다. 이들이 오는 22일 토요일 밤 11시에 프리미어리그에서 맞대결을 펼친다. 누가 이기고 지고를 떠나 대한민국 축구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음을 선언하는 날이다. 기쁜 마음으로 밤잠을 설쳐야겠다.국제축구연맹(FIFA) 기술위원 youngj-cho@hanmail.net
  • [임혜리의 色色남녀] 착한 여자는 안테나가 안 서?

    나는 인생에서 내 뜻과 의지대로 풀리지 않는 문제 중 하나가 파트너 관계라 생각한다. 그것이 연애든 결혼생활이든 큰 차이는 없는 것 같다. 어떤 상대를 만나느냐에 따라 나의 삶이 업그레이드되기도 하고 반대로 곤두박질쳐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내가 만난 그 ‘인간’이 복권일지 폭탄일지는 인생 수업료를 지불해 봐야 알 뿐이다. 남자 입장에서 보면 두 종류의 여자가 있다고 한다. 남자를 살리고 키워주는 여자와 만성으로 죽여주는 여자라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속어로 재수가 좋아지는 여자와 나빠지는 여자라는 표현을 쓰는데 그 원뜻은 ‘올린다’와 ‘내리다’에서 왔다고 한다. 한편 우리 사회는 아직도 연애나 결혼문제로 남녀 간의 궁합을 묻는 수요자가 많은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개인적으로 남녀의 만남과 이별은 인연법에 따라 얽혔다 흩어지는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우리의 만남이 잘못된 인연은 아닐까?라는 관계의 불안함과 이별의 상처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며칠 전 40대 독신남(돌아온 싱글)의 생일파티가 있었다. 아내도 애인도 없는 남자가 불쌍하다고 유부남과 독신녀들이 케이크와 선물을 들고 모였다. 그야말로 광어, 도다리 없는 상차림에 밑반찬들로 풍성한 저녁식사인 셈이었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생일 주인공의 연애와 결혼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남자들이 자기네가 꿈꾸는 이상형의 여자에 대해 릴레이로 얘기하기 시작했다.(1) 일본인 아내와 1년 만에 헤어진 남자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여자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 매사에 자기중심적인 아내와 갈등이 많았기 때문이란다. 섹스는 평범했는데 성격 차이가 심했다는 것이다.(2) 결혼 15년인 유부남은 자기 아내는 부덕이 있고 훌륭하지만 섹스부재로 사느라 힘들다며 섹시하고 용광로 같은 ‘반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3) 모범적 남편인 조각가는 머리가 좋고 감각적인 야성녀에게 필이 꽂힌다고 했다. 그의 아내와는 오랫동안 좋은 동반자로 살고 있는 성공남이다.(4) 연애경력 15년의 독신남은 ‘나는 영원한 너의 팬이야!’라고 외치면서 무조건적으로 격려를 보내는 여자와 사귀고 싶다고 했다. 그는 여자들의 펜(pen)이었던 것일까?(5) 시각디자이너인 남자는 자신은 팔색조 같이 여러 개의 가면을 썼다 벗었다하는 여자와 만나고 싶지 평범하고 착한 여자는 지루해서 안테나가 서지를 않는다고 했다.(6) 애인의 바람기와 습관성 거짓말로 고생을 톡톡히 한 남자는 정직하고 성실한 여자를 만나 낭만적인 사랑을 하고 싶다고 했다.(7) 고가구 수집가인 남자는 직업의 특성 때문인지 자신은 연상의 여자가 좋으며 위풍당당하고 우아한 타입에게 끌린다고 했다. 흰 머리를 창피해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매력을 가꿀 줄 아는 여자가 멋지다는 것이다.(8) 감성적인 성격의 유리공예 작가는 생기 넘치고 화사한 느낌을 주는 여자가 눈에 먼저 들어온다고 했다. 초승달이 보름달보다 더 예쁘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자신은 이상하게 기(氣)가 센 여자에게서 공포를 느낀다고 했다.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어떤 여자에 속할까라는 궁금증이 솟았다.성칼럼니스트 sung6023@kornet.net
  • 소박한 꿈을 쌓아가는 ‘하루’의 의미

    하루를 살다보면 수많은 얼굴들을 스쳐 지나가게 된다. 그 안에 담겨진 다양한 표정까지 알아채기에는 끊임없이 밀려오는 일상이라는 파도가 너무 버겁다. 잔잔한 음악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표정을 클로즈업한 실험적인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졌다. MBC는 23일 오후 10시40분 HD 음악다큐멘터리 ‘하루’를 방송한다. 기존 다큐물과는 세 가지 지점에서 분명한 선을 긋는 프로그램이다. 우선 하루하루를 숨가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온다. 어떻게 보면 하루의 의미가 누구보다 각별한 사람들이기도 하다.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대우받는 세상이 오기에는 아직 이른 듯하지만 언제나 묵묵하게, 작지만 소중한 꿈을 가지고 삶을 이어가고 있는 서민들이다. 흔한 소재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어느 특정인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새벽 봉제공장과 동대문 시장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심야 고속도로를 달리는 트레일러 운전사, 신문배달 아주머니, 우(牛)시장 사람들, 할인점 캐시어, 퀵서비스 청년 등 수많은 사람들이 릴레이를 하며 하루 24시간을 채워 나간다. 두 달 가까이 전국 방방곳곳을 누볐던 카메라가 따뜻한 시선으로 이들의 발걸음을 보듬어 안는다. 휴먼 다큐에 영상 에세이적 문법과 뮤직비디오식 편집 기법이 적용됐다. 일하는 사람들의 역동성을 살리기 위해 스테디캠이 사용됐고, 미니 헬리콥터에 실린 카메라가 테헤란로 고층 빌딩 숲을 누비기도 한다.또 무인조종크레인 지미지프와 이동차 등 기존 다큐멘터리에서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았던 다양한 특수 장비를 동원해 요즘 범람하는 VJ 6㎜ 영상과 차별화를 시도했다. 프로그램 타이틀에서 눈에 띄는 단어는 바로 ‘음악’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음악은 단순히 ‘깔리는’ 도구가 아니다. 인위적인 내레이션은 가능한 자제하고, 말보다 깊은 여운을 던져주는 음악으로 채색했다.국내외 영화음악과 아카펠라, 클래식기타, 대중가요에 이르기까지 15곡 이상의 아름다운 노래가 고품격 영상과 어우러지며 시청자 가슴에 녹아들게 된다. 취재기자 출신으로 ‘하루’를 연출한 이우호 보도제작국 부국장은 “음악 자체가 갖고 있는 힘이 크다.”면서 “음악이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강렬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생각에 대안적인 시도를 하게 됐다.”고 전했다. 촬영을 맡았던 조수현 영상취재부장은 “6㎜로 대표되는 VJ프로그램 영상에 지칠 때가 됐다.”면서 “정통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품격 있고 신선한 그림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고 덧붙였다.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심은하 베일 속 웨딩마치

    심은하 베일 속 웨딩마치

    영화배우 심은하(33)가 18일 오후 서울 쉐라톤워커힐 호텔 애스톤 하우스에서 지상욱(40)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초대장을 받은 150명만이 하객으로 참석한 결혼식은 사회자 없이 하용조 목사의 주례로 약 1시간 동안 비공개로 진행됐다. 이날 식장에는 지상욱씨와 친분이 두터운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를 비롯해 윤세영 SBS 회장, 정세호 PD, 영화사 씨네2000 이춘연 대표, 심은하의 동료 배우 안성기, 정우성, 이미연, 이정재 등이 참석했다. 결혼식 장면은 예식이 끝난 지 30분쯤 뒤에 별도로 마련된 프레스룸에서 동영상으로 공개됐다. 두 사람은 지난해 말 한 모임에서 만나 교제하다 지난 7월 결혼을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상욱씨는 한성실업 지성한 회장의 외아들로 연세대 국제대학원 연구교수로 재직중이다. 연세대 토목공학과 출신으로,2003년 초 미국 체류 중이던 이회창 전 총재를 수행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금속탐지기 이용 농촌패물 싹쓸이

    금속탐지기를 동원한 농촌 빈집털이가 극성을 부리면서 주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17일 전남 장성군 장성읍 덕진리 주민들에 따르면 지난 10일 이 마을 김모 할머니는 밭일을 나간 사이 장롱에 넣어 두었던 팔찌와 목걸이 등 패물을 몽땅 도난당했다. 이날 이 마을에는 말쑥하게 차려입은 40대 남자 2명이 “읍사무소에서 책이 나왔는데 집집마다 비슷한 책이 있는지 찾아봐야 한다.”며 주민들을 한 집으로 모이게 하고 이 사이 빈집에 들어가 물건을 훔쳤다. 주민들은 “도둑들이 무슨 기구(금속탐지기로 추정)를 들고 다니면서 눈깜짝할 사이에 금붙이가 있는 곳을 금방 알아냈던 것 같다.”고 말했다.앞서 이 마을 주모 할머니도 10여일 전 역시 집 장롱속에 간직해둔 목걸이와 반지 등 금붙이를 감쪽같이 잃어버렸다.역시 장성군 남면 시목리 조모(67)씨가 이달 초에 들일을 나갔다가 책상 서랍에 넣어 두었던 통장을 잃어버렸다고 이 마을 공연진 이장이 확인해 줬다. 마을 주민들은 “농협 직원이라는 사람이 통장 적금액이 많은 조합원들에게 냉장고를 경품으로 주는데 통장 비밀번호를 알려 달라는 전화에 속아 통장에 모아 둔 400만원을 몽땅 빼가 버렸다.”고 입을 모았다. 이장 공씨는 “조씨가 평생 날품팔이로 성실하게 모은 돈을 도둑맞은 뒤 실성한 사람처럼 몸져 누워 버렸다.”며 안타까워했다. 이 때문에 도둑맞은 동네나 이 소식을 들은 인근 마을 주민들은 “낮에 들일을 나갈 때면 문 단속을 꼼꼼하게 하고 참깨나 고추 등 돈 나가는 농산물은 도둑이 무서워 마당에 널지도 못하고 창고에 넣어 두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한편 전남지방경찰청의 이번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올들어 지난 8월 말까지 광주와 전남도내에서 발생한 벼·고추·참깨 등 농산물 도난 사건은 34건이었고 지난해 이맘 때는 36건으로 집계됐다.장성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양그룹(1)-창업주 김연수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양그룹(1)-창업주 김연수家

    일반인들에게 ‘삼양설탕’(현 ‘큐원설탕’)으로 익숙한 삼양사는 한국 근대경제사를 주도한 명문 기업이다. 호남 거부의 후예인 김연수(金秊洙) 창업주는 일제하인 1924년 순수 민족자본으로 기업을 설립, 한국기업의 명맥을 이었다. 김 창업주는 형인 인촌(仁村) 김성수씨가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꾸려가도록 뒷받침했고, 여러 차례 재산을 털어 고려대와 고려중앙학원의 기틀을 마련하도록 뒤에서 도왔다. 그러나 김 창업주는 일제하에 기업을 경영함으로써 최근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사인명사전을 편찬하면서 친일인사로 선정하는 등 사후에 ‘친일’ 시비에 휘말리고 있기도 하다. 때문에 근대 한국경제의 산증인인 김 창업주의 삶은 굴곡 많은 우리 근대사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병약했던 어린 시절 김 창업주는 1896년 10월1일 전라도 고부군 부안면 인촌리에서 부친 김경중씨와 모친 장흥 고씨 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다. 형의 호인 인촌은 바로 두 형제가 태어난 동네 이름을 따온 것이다. 김 창업주의 부친은 1만 5000석 지기의 호남 최대 거부였고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부친은 일제하에서 나라가 영영 없어지는 것으로 알고 당시 저명한 사학자들을 몰래 불러 ‘조선사’를 17권이나 엮을 정도로 민족애가 투철했다는 게 삼양그룹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김 창업주는 어린 시절 외롭게 지냈다. 김 창업주의 부모는 그가 태어나기 전 세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일찍 잃었다. 여기에다 한 명뿐인 형인 인촌이 큰아버지인 김기중씨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자 양자로 보내졌기 때문이다. 어릴 적 김 창업주는 몸이 허약했다. 폐가 약했으며 위도 튼튼하지 못해 일찍이 폐와 소화기 계통의 질병으로 자식을 잃은 경험이 있는 부모의 애를 끓게 했다. 이런 이유로 개구쟁이처럼 장난이 심하고 활발했던 인촌과는 달리 김 창업주는 조용한 것을 좋아했고, 과묵하고 내성적인 성품을 지녔다. ●27세에 경영인으로 출발 김 창업주는 15세 되던 1910년 12월8일 자신보다 두 살 위인 박하진씨와 혼인을 맺었다. 결혼 이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쳐 한국인 최초로 교토제대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고국으로 돌아온 이듬해인 1922년 형의 권유로 경성직뉴와 경성방직의 전무와 상무에 취임, 경영인의 삶을 시작했다. 김 창업주는 고무신과 ‘태극성표’ 광목을 대히트시킴으로써 일본자본과 맞서는 최대의 민족회사를 일궜다. 집안 내력을 잘 아는 김재억 삼양사 상임감사는 “30년대 경성방직은 우리나라 금융거래 절반을 담당할 정도의 민족 최대 기업이었다.”고 말했다. 김 창업주는 또한 농촌재건을 위해 소작농을 협동농업 형태로 결합한 근대영농을 시작했다. 이를 발판으로 1924년 삼수사(三水社)를 설립해 호남 일대의 소유농토에 대한 근대화 작업에 나섰다. 장성, 줄포, 고창, 명고, 신태인, 법성, 영광농장을 차례로 개설해 기업형 농장으로 탈바꿈시켰다. 간척사업에도 눈을 돌려 손불농장과 해리농장의 2개 지역에 1070정보의 농토를 만들었다. 이 시기에 상호가 삼양사(三養社)로 바뀌었다. 어느 날 한 작명가가 찾아와 ‘물 수’(水)를 ‘만인의 양식’이라는 뜻인 ‘기를 양’(養)으로 바꿀 것을 권했다고 한다. 김 창업주는 만주벌 개척에도 나섰다.5개 협동농장을 개설한 데 이어 봉천에 남만방적을 설립했다. 남만방적은 한국기업 최초의 해외생산법인이다. 그러나 1945년 해방으로 만주의 사업장들을 고스란히 놓고 철수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제당업으로 재기에 나서 해방공간을 겪으면서 반민특위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김 창업주는 한국 전쟁 이후 해체상태에 놓였던 삼양사 재건에 나섰다. 그는 재기의 발판으로 제당업과 한천제조업을 선택했다. 당시 설탕은 수입에 의존해온 대표적인 외화소비 품목이었기 때문이다. 울산 바닷가를 메워 그곳에 제당공장과 한천공장을 건설했다. 그는 1956년 삼양을 제당으로 키우면서 주식회사 삼양사를 출범시켰다. 자신이 대표이사 회장에 취임했고, 사장에 3남인 상홍(83), 상무에 5남 상하(80)를 앉혔다.3남과 5남이 삼양사를 맡는 전통은 3세에도 그대로 이어져 삼양그룹은 현재 상홍씨의 장남 윤(53)씨와 상하씨의 장남 원(48)씨가 삼양사 회장과 사장을 맡고 있다. 둘째 아들들인 량(51)씨와 정(46)씨도 각각 삼양제넥스 사장과 삼남석유화학 부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당시 삼양사보다 수익률이 높았던 해리염전을 삼양염업사라는 별개의 회사로 독립시키고 맏아들 상준(작고)을 사장에 임명해 경영을 맡겼다.3공화국때 문교부장관과 5공화국에서 국무총리를 역임한 차남 상협(작고)에게도 삼양염전의 지분 25%를 떼어주어 형제간 경영권을 일찌감치 교통정리했다. ●재계의 거목으로 김 창업주는 1962년 설립한 삼양수산을 통해 다양한 어종을 가공, 수출하는 등 한때 냉동선만 21척을 보유할 정도로 수산업에도 주력했다. 이처럼 제당과 수산업으로 재기에 성공한 그는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한국경제협의회(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에 취임, 한국 재계의 얼굴이 되었다. 경영이 본 궤도에 오르자 김 창업주는 전주방직을 인수, 삼양모방(주)을 설립했다. 이어 1969년 전주에 대단위 폴리에스테르 공장을 건설했다. 이로써 70년대 들어 삼양은 국내 초창기 산업의 중심이었던 제당으로 확고한 제조업체로의 변신을 이룩했다. 이 당시 삼양은 매출액에서나 기업선호도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국내 정상급 기업으로 우뚝 섰다. 김 창업주는 사업에 투신한 지 만 53년이 되던 1975년 회장을 상홍에게, 사장에 상하를 임명하는 등 ‘2세경영’을 출범시키고 은퇴했다. 그의 나이 80세일 때였다. 그는 은퇴 후 농촌으로 돌아가 마지막 열정을 쏟다가 1979년 84세의 일기로 생애를 마감했다. ●교육사업도 아낌없는 지원 그는 기업경영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고려대와 고려중앙학원의 운영기금을 출연한 것을 비롯해 양영회와 수당장학회를 설립, 교육사업에도 힘썼다. 문성환 삼양사 부사장은 “창업주는 두 재단을 통해 대학생 2만여명에게 대학등록금을 비롯해 하숙비, 책값, 소정의 용돈까지 장학금으로 대줬다.”고 회고했다. 이런 김 창업주의 혜택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로는 한덕수 경제부총리, 오세철 연세대 교수 등이 꼽힌다. 경성방직의 회계를 맡아 김 창업주를 도왔던 국어학자 이희승 박사는 “수당(秀堂·김 창업주의 호)은 돈 쓰는 데도 일가견을 가진 사람으로 만금을 쓰면서도 기업경영에는 한 푼을 아꼈다.”고 그의 용전(用錢)철학을 전했다. 김 창업주는 경쟁회사에도 관대했던 묵묵한 성격의 경영인으로도 정평이 나 있다.1966년 삼양의 경쟁회사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운영하던 한국비료가 이른바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곤혹을 치렀다. 임원들이 ‘사카린 없는 삼양설탕’이라는 문구로 대대적인 광고전을 벌이자고 수차례 건의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은 사례는 그의 성품을 읽는 일화로 경영인들에게 지금껏 회자되고 있다. ●방대한 혼맥…사회 각 분야와 사통팔달 김 창업주는 부인 박씨와의 사이에 7남6녀 13명의 자녀들을 두었다. 아들로는 장남 상준(작고), 차남 상협(작고),3남 상홍(83),4남 상돈(81),5남 상하(80),6남 상철(70),7남 상응(작고) 등 7남과 장녀 상경(79), 차녀 상민(78),3녀 정애(75),4녀 정유(73),5녀 영숙(72), 막내 희경(66) 등 6녀를 두었다. 김 창업주 가문의 혼맥은 정계·관계·학계·언론계·재계·교육계 등과 거미줄처럼 얽힌 방대한 혼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김 창업주의 성격이 소탈해 자식들에게 정략 결혼을 요구하기보다는 평범하고 무난한 결혼을 시켰다는 게 대체적인 평이다. 김재억 감사는 “창업주의 생활철학이 권세를 배격하는 것이어서 자식들이나 3세들의 결혼에도 사돈 될 집안의 내력과 상대방의 성실성을 먼저 봤다.”고 회고했다. 김 창업주는 특히 자녀들의 대부분은 중매결혼으로 짝지웠지만 사위와 며느리를 맞는 데서는 당시로는 상당히 진보적인 입장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사위를 고를 때는 가문을 따지지 않고 사람됨됨이와 능력을 위주로 보았고, 며느리는 후덕한 집안 출신으로 신식교육을 받은 신여성이기를 원했다. 특히 사돈가의 위치를 보고 정혼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해 그의 직접 사돈 가운데는 정관재계의 거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김 창업주의 며느리들 가운데 위로 세 명은 이화여전 출신 등으로 당시의 김 창업주가 원했던 신여성들의 표본이 많았다. 반면 창업주의 형인 인촌 성수씨도 9남4녀를 두어 대가를 이뤘는데 장남인 상만(작고) 전 동아일보 명예회장의 직계 자손들은 화려한 혼맥을 자랑하고 있다. 고려대 이사장이자 동아일보 전 회장인 장손 병관씨는 장남 재호(41·동아일보 대표이사 전무)씨를 이한동 전 총리의 차녀인 정원(38)씨와 결혼시켰고,2남 재열(37·제일모직 상무)씨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차녀인 서현(32·제일모직 상무보)씨와 결혼했다. 김연수 창업주 자녀들의 혼맥을 살펴보면 장남 상준씨는 당시 집안과 각별하게 지내던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박사의 소개로 이뤄져 1943년 구영숙씨의 맏딸 연성(85)씨를 부인으로 맞았다. 상준씨는 보성전문 상과를 나와 조흥은행에 근무할 때였고 연성씨는 이화여전 음대를 졸업한 직후였다. 상준씨는 3명의 딸을 출가시켜 정·관·재계 인맥을 형성했다. 장녀 정원(62)씨의 부군은 고려대와 국가대표팀에서 축구선수로 활약했던 김선휘(68·삼양염업사부회장)씨다. 축구를 좋아하던 상준씨는 모교인 고려대 축구팀을 지원했는데, 이 일로 선휘씨가 상준씨 집에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혼사가 맺어졌다. 차녀 정희(58)씨는 5공시절 당시 거물 정치인이었던 김진만씨의 맏며느리로 보내 동부그룹 회장인 김준기(64)씨를 사위로 맞았다.3녀 정림(57)씨는 전 문교장관 윤천주씨의 장남 대근(59)씨와 결혼했다. 대근씨는 현재 동부아남반도체 대표이사 부회장과 동부그룹 소재분야 부회장을 맡고 있다. 상준씨의 장남 병휘(60)씨는 한양대 자연과학대 자연과학부 수학전공 교수로 재직하고 있고, 차남 범(52)씨는 독신으로 지내며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차남 상협씨는 해방 직후 고려대 부교수 시절, 의사 김준형씨의 2남3녀 가운데 맏딸 인숙(82)씨와 연애결혼에 성공했다. 인숙씨도 니혼조시 대학을 나온 당시 보기 드문 일본 유학 신여성이었는데 상협씨의 도쿄제대 동창 부인의 소개로 만나 연애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장녀 명신(58)씨를 송진우 전 동아일보사장의 아들인 상현(65) 서울대 법대교수와 혼인시켰다.2녀 영신(56)씨는 정태섭 전 변호사의 아들 성진(58)씨와 결혼했다. 외아들 한(52)씨는 메리츠증권 부회장으로 있다. 3남 상홍(83)씨는 구 치안본부 재직시절 수원갑부 차준담씨의 2남2녀 가운데 맏딸 부영(79)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부영씨는 이화여고와 이화여전을 나온 재원이었다. 상홍씨는 2남2녀 가운데 장남 윤씨를 전 서울신문사 김종규 사장의 딸 유희(46)씨와 혼인시켜 벽산그룹 김인득 회장과 한 다리 건너 사돈이 됐다. 또 차남 량씨는 장지량 전 공군참모총장의 막내딸 영은(46)씨와 백년 가약을 맺었다. 영은씨의 오빠 장대환씨는 매일경제 신문 창업주 정진기씨의 사위로, 현재 매일경제신문 대표이사회장 인쇄인 겸 발행인과 현 매일경제TV 대표이사 회장이다. 장녀인 유주(56)씨를 사업가 윤주탁씨의 2남 영섭(59·고려대 상대교수)씨에게 시집 보내 윤주탁씨와 직접 사돈간인 박태준 전 민자당 최고위원과 연결되고 있다. 영섭씨의 남동생인 영식씨가 박 전 위원의 장녀 진아(48)씨와 결혼했다. 4남 상돈씨는 6·25 직후 김유황 전 광장㈜ 부사장의 딸 용옥(73)씨와 결혼했다. 상돈씨는 맏형인 상준씨의 중매로 장남 병진(52)씨를 축구협회 부회장과 축구대표팀 감독을 지낸 한흥기씨의 딸인 혜승(45)씨와 맺어줬다. 차남 영로(50)씨는 사업을 하던 정형식씨의 딸 은미(46)씨와 혼인했다. 외동딸 희진(45)씨는 전 대한항공 이사 오명석씨의 외아들 광희(49)씨에게 시집갔다. 광희씨는 전 나이스정보통신 전무이사를 역임했다. 5남 상하씨는 삼양사 설탕공장 설립관계로 일본에서 일하고 있던 1953년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귀국, 바로 박상례(75)씨와 혼인을 맺었다. 상례씨는 공무원 출신인 박규원씨의 딸로 김 창업주의 친구가 중매를 섰다. 외동딸인 영난(44)씨를 송하철(45·주식회사 항소 사장)씨와 결혼시켜 송남석 모나미 회장의 막내며느리로 보냈다. 장남 원씨를 배영화 경희어망 회장 딸인 주연(45)씨와 맺어 줬다. 차남 정씨는 안상영 전 부산시장의 딸인 혜원(39)씨와 결혼했다. 6남 상철(70)씨는 사업을 하던 우근호 씨의 딸 정명(63)씨를 부인으로 맞았다. 7남 상응(작고)씨는 공무원 생활을 했던 권오경씨의 5녀중 셋째딸 명자(53)씨와 결혼했다. 장녀 상경(79)씨는 아폴로박사 조경철씨와 결혼 후 이혼해 조서봉(필립), 조서만(조지) 등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차녀 상민(78)씨의 남편은 이두종(작고)씨로 활발하게 삼양사의 경영에 참여했다. 온양 지주의 아들로 자란 두종씨는 1956년 삼양사 과장으로 입사해 이 회사의 대표이사 부사장까지 올랐다.1984년 회사를 떠난 뒤에도 삼양그룹이 운영하는 재단법인 양영회와 수당장학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3녀 정애(75)씨는 교육계에 몸담았던 조종립씨의 아들 석(작고)씨와 결혼했다. 석씨는 서울대 상대 출신으로 결혼 후인 57년 삼양사에 사원으로 입사, 총무부장·경리부장·이사·상무·대표이사 부사장을 거쳐 전 삼양제넥스 상임고문까지 역임했다. 4녀 정유(73)씨의 남편은 전 서울대 부총장인 김영국(작고)씨다. 그는 인천에서 사업을 하던 김덕창씨의 8남매 가운데 3남으로 인천이 낳은 천재로 불리었다. 이들은 김 창업주 친구의 소개로 결혼했다. 영국씨는 서울대 정치학과 총동창회장을 지낸 상하씨의 후배이자 매제인 셈이다. 5녀 영숙(72)씨는 미국인 스테푸친과 결혼, 딸 페기, 아들 프랭크를 두고 미국에서 살고 있다. 막내딸 희경(66)씨도 교육자였던 김종규씨의 아들 성완(68·삼양사 의약사업 고문)씨와 결혼,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성완씨는 미국 유타대학 석좌교수로 인공심장 분야의 권위자다. jrlee@seoul.co.kr ■ 창업주의 친일논란 민족문제연구소는 지난 8월29일 친일인사인명사전 편찬을 앞두고 수록예정자 명단 3090명의 이름을 공개했다. 이 명단에는 삼양사의 창업주 김연수씨도 포함됐다. 김씨는 전쟁협력 분야에서 ▲1939년 만주국 명예 총영사 ▲1940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이사 ▲조선방적 이사장 ▲1940∼1945년 중추원 참의(자문위원)를 지냈다는 이유로 선정됐다. 이에 대해 삼양그룹측은 대응을 일절 자제한 채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다만 그룹의 한 관계자는 “창업주가 일제의 압제에 죽음으로 항거하는 등 깜짝 놀랄 만하게 대항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름대로 일제의 폭거에 맞서 민족자본을 형성했다.”며 “후세에 역사가들이 올바른 평가를 내릴 것”이라고 비교적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보다 반일 감정이 팽배했던 1949년 반민특위 재판에서도 창업주는 무죄를 받았다.”고 해명했다. 또 창업주는 창씨 개명도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김 창업주의 일대기인 ‘한국 근대기업의 선구자’에는 일제시대 그의 행적이 상세히 수록돼 있다.6부로 구성된 전기에는 4부 ‘고난의 시절’ 편에 일제에 협조할 수도, 항거할 수도 없었던 고심의 일단들이 실려 있다. 김씨는 중추원 참의 임명과 관련해 1940년 5월 조간신문에 자신이 칙임참의에 임명됐다는 기사를 보고 내무국장 우에다키에게 항의하러 갔지만 결국 그의 완력에 굴복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설사 내가 지녔던 일제치하의 모든 공직이나 명예직이 스스로 원했던 것이 아니고 위협과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일단 그런 직함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국과 민족앞에 송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며 통렬한 자기반성의 글을 실었다. 김 창업주는 반민특위에 검거돼 7개월간 수감됐지만 이런 반성의 자세가 참작됐는지 재판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는 경성방직을 경영함에 강력히 일본자본과 싸웠고, 항상 한민족을 위한 경제적 기반확립에 노력했고, 경성방직의 상표를 태극기에서 모방한 것으로 보아 피고의 행위는 많이 참작할 곳이 있으며, 그 외의 관직 및 명예직은 일제의 압력에 못이겨 피동적으로 맡은 것이라고 증명되며, 또 피고는 한국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많은 학생에게 원조를 해 그의 혜택을 본 자의 수는 현재 수백명에 달하는 것이니 이 점으로 피고가 남긴 공적은 크다고 할 것이며, 기타 증인의 증언을 통해 볼 때 피고를 단순히 친일 및 반민족행위자라고 규정할 수 없을 것”이라고 판시했다. jrlee@seoul.co.kr ■ 형 김성수와 동생 김연수 ‘한 배에서 태어난 형제가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인촌(仁村) 김성수와 수당(秀堂) 김연수를 아는 주위 사람들의 한결같은 평가다. 인촌과 수당은 호남갑부 김경중씨의 두 아들이었지만 성격은 딴판이었다. 수당은 어릴 때부터 말수가 적고 침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반면 형 인촌은 활달하고 외향적이었다. 여기에 형제는 다섯살이나 터울이 져 어린 시절엔 서로 어울리는 일이 적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평생을 친한 형제로 지냈다. 인촌은 수당이 근대적 교육을 받도록 인도했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생을 일본으로 가게 해 중·고등학교와 교토제대 경제학부를 졸업하도록 도왔다. 수당은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일찍이 ‘기업인’이 될 것을 결심했다. 오사카의 공장지대에서 받았던 강렬한 인상이 결단의 계기였다. 이처럼 수당의 행적은 형 인촌의 행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실제로 수당이 기업가로서 길을 걷는 데는 인촌이 설립하고 인수한 기업의 경영을 맡음으로써 시작됐다. 수당이 경영인으로 첫 발을 내디딘 것도 1922년 형이 운영하던 경성직뉴와 경성방직의 경영인을 맡고부터다. 이후 수당은 경영인으로서 성공하자 인촌을 적극 도왔다. 생전에 인촌은 수당이 없었으면 교육사업을 비롯한 자신의 활동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곧잘 술회했다. 수당은 언제나 인촌에게 돈 걱정은 하지 말고 마음껏 뜻을 펼치라고 말했다. 인촌이 설립한 고려중앙학원이나 고려대, 경성방직과 동아일보 등 모두 동생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 특히 수당은 1940년대까지 고려중앙학원과 고려대에 기부한 재산이 연 평균 250만원에 이르렀는데, 이를 현 시가로 어림잡아 환산하면 1000억원(쌀값 기준)을 훨씬 넘는 액수다. 그러면서도 동생은 형이 하는 일을 뒤에서 묵묵히 돕기만 했다. 그는 “모든 것을 형님이 알아서 하시니까 나는 재정적인 지원만 하면 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형을 만날 때마다 “형님은 교육과 문화사업을 하세요. 저는 뒤에서 돈을 대리다.”라며 든든한 후원자를 자임했다. jrlee@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유영규 특파원 르포] 파키스탄 지진 참사

    [유영규 특파원 르포] 파키스탄 지진 참사

    |무자파라바드 유영규특파원|“아저씨 용답동 알아요? 나 거기서 오래 일했는데.” 인구 12만 5000여명 중 1만 50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최대의 지진 피해지역 무자파라바드.13일 오후 5시(현지시각) 국내 민간봉사단체 ‘선한사람들’ 구호팀과 기자를 안내하러 나온 모하메드 아리프(38)는 유창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올 5월까지 3년간 한국의 공장에서 일했다는 그는 “여기 온 한국 사람들은 모두 마음씨 좋은 사장님들 같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의 기억 속에 한국인은 딱 두 종류였다. 좋은 사장님과 나쁜 사장님.“안 좋은 기억도 있었지만 그리움도 많지요. 자원봉사자들을 생각해서라도 한국에 대한 기억 중 좋은 것만 떠올리려고 애쓰고 있어요.” 파키스탄 북쪽 끝에 자리한 카슈미르 지역의 산간 오지에서도 한국에 살았거나 한국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현지 주민 요제프(19)도 기회가 되면 한국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는 “사촌이 한국에 2년간 있었는데 돈을 많이 벌었다.”면서 “구타와 임금체불 등 안 좋은 얘기도 많지만 여기 온 사람들만 같으면 별 걱정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국내 봉사단체들의 헌신적인 활동에 파키스탄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있는 듯했다. 한국인들은 다른 어느 나라 활동가들보다 헌신적이라고 말했다. 무섭고 폭력적이라는 한국인들에 대한 인식이 구호 활동을 통해 짧은 시간이지만 바뀌고 있다. 특히 무자파라바드는 물론 굿네이버스와 한국국제협력단이 각각 활동하는 가리하비불라와 아보타바드는 치안이 극히 열악한 곳이다. 한국 봉사단은 일부러 이런 환경이 나쁜 곳을 찾아갔다. 터키 구호팀의 길잡이를 맡은 현지인 케반(35)은 “아침에 가장 일찍 일어나고 구조현장을 가장 늦게까지 지키는 것은 한국인”이라면서 “이런 열성과 성실함 때문에 한국이 전쟁을 딛고 빨리 일어선 것 같다.”고 말했다. 현지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전염병. 이 때문에 이날 오후 8시 유엔은 각국 구조대에 공식적으로 철수명령을 내렸다. 몇 명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살아남은 주민과 구조대의 생명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 없다는 이유였다. 선한사람들 구조팀 30여명은 오후 9시까지 스페인 구조팀과 함께 무너진 산림청과 학교를 중심으로 최종 수색작업에 나섰다. 14일에는 새벽부터 독일, 캐나다, 러시아, 터키, 영국 등 각국 구조대원들의 철수 준비가 시작됐다. 새벽 5시 예배당에서 라마단(금식월)을 알리는 우르드어(語) 기도소리가 들려온다. 방송시설을 대신해 트럭들이 경적을 울려댔다. 일출과 함께 성스러운 라마단의 예를 올리라는 신호다. 참사 속에서도 희망의 기도는 계속됐다. whoami@seoul.co.kr
  • [儒林 속 한자이야기] (92)符信(부신)

    儒林 (442)에는 ‘符信’(부절 부/믿을 신)이 나온다. 이것은 ‘나뭇조각이나 두꺼운 종이에 글자를 기록하고 證印(증인)을 찍은 뒤, 두 조각으로 쪼개어 한 조각은 상대자에게 주고 다른 한 조각은 자기가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서로 맞추어서 證據(증거)로 삼던 물건’을 말한다. ‘符’자는 옛날 행정 사무의 證據나 信標(신표)로 삼기 위한 대나무 쪽을 가리킨다. 후에 ‘도장’‘맞다’ 등의 뜻이 派生(파생)하였다.活用(활용) 예로는 符合(부합:符信이 꼭 들어맞듯 사물이나 현상이 서로 꼭 들어맞음),符號(부호:일정한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따로 정하여 쓰는 기호) 등이 있다. ‘信’자는 본디 ‘성실하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考案(고안)되었다.‘人’과 ‘言’(말씀 언)을 組合(조합)하여 사람의 말과 성실성은 不可分(불가분)의 關係(관계)에 있음을 暗示(암시)한다.‘信念(신념:굳게 믿는 마음),信賞必罰(신상필벌:상과 벌을 공정하고 엄중하게 하는 일을 이르는 말),信實(신실:믿음직하고 착실함)’ 등에 쓰인다. 交通手段(교통수단)과 情報(정보) 媒體(매체)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符信이 신분확인을 위한 요긴한 수단이었다. 용도와 종류에 따라 發兵符(발병부)·通符(통부)·宣傳標信(선전표신)·木馬牌(목마패)·大將牌(대장패) 등 다양하였다. 符節(부절)도 일종의 符信으로 볼 수 있는데,符信과의 차이점은 글자와 證印이 없다는 것이다.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高句麗(고구려) 建國始祖(건국시조) 高朱蒙(고주몽)이 短刀(단도)를 符節로 삼아 親子(친자)를 確認(확인)한 崎嶇(기구)한 事緣이 전한다. 주몽은 큰 뜻의 실현을 위해 姙娠(임신)한 예씨 부인과 작별하면서,“아들을 낳거든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의 돌 위 소나무 밑에 간직되어 있는 물건을 찾아 가지고 오라.”는 말을 남겼다. 예씨 부인은 出産(출산)한 아이의 이름을 琉璃(유리)라고 하였다.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뒤 유리는 일곱 모난 주춧돌 아래서 발견한 칼 한 쪽을 들고 주몽을 찾아갔다. 주몽은 지니고 있던 조각난 칼을 꺼내 맞추어 보고 자신의 아들임을 確認(확인)한다. 三國史記에는 新羅(신라) 眞平王(진평왕)때의 사랑 이야기가 전한다. 경주에 사는 설씨(薛氏)는 늙은 홀아비로 오직 딸 하나만 데리고 살았으나, 변방지역의 警備(경비)에 나아가라는 通報(통보)를 받는다. 그때 沙梁部(사량부)에 사는 嘉實(가실)이라는 청년이 兵役(병역)을 대신하겠다고 나선다.感泣(감읍)한 父女(부녀)는 가실과의 婚姻(혼인)을 約條(약조)하고 거울을 반으로 갈라 信標(신표)로 나누어 가진다.6년 만에 다시 설씨 부녀 앞에 나타난 가실의 行色(행색)은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초라하였다.破鏡(파경)을 꺼내 맞추어 보고서야 가실임을 確認할 수 있었다. 漢(한)나라 高祖(고조) 劉邦(유방)은 諸侯(제후)를 分封(분봉)하면서 丹書鐵券(단서철권)을 나누어 주었다. 약칭 鐵券(철권)이라 하는 이 물건은 오늘날의 任命狀(임명장)에 해당한다. 쪼갠 칼이나 거울, 세트로 만들어진 鐵券이 모두 符節에 속한다. 여기서 ‘節’은 마디라는 뜻이니 끼워 맞춘다는 의미를 含蓄(함축)하고 있으며,‘符’란 符合(부합)한다는 뜻이다. 김석제 경기 군포교육청 장학사(철학박사)
  • 유일한 평전/조성기 지음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 자립해서 살아 가거라. 아내는 딸 재라가 그 노후를 잘 돌보아주기 바란다.” 제약회사 유한양행의 창업자인 고 유일한 박사가 1971년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면서 자필로 쓴 유언장의 내용이다.‘유일한 평전’(조성기 지음, 작은 씨앗 펴냄)에서는 존경받는 기업인의 모습을 비롯, 고 유 박사의 철학이 담긴 삶을 되돌아볼 수 있다. 부동산투기와 탈세를 일삼으며 오너 일가의 비자금 조성 등에 열을 올리는 일부 재벌들의 행태와 비교하면 그의 삶은 ‘정직’그 자체다. ●아들에게 한 푼도 안남기고 가정부 정원사에겐 유산남겨 최근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유산 남기지 않기 운동’을 그는 일찌감치 실천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 유일선과 부인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았다. 다만 당시 7살 손녀에게 학자금으로 1만달러를, 딸 재라에게는 유한공고 주변 땅 5000평을 물려줬다. 그는 이외 자신의 주식 모두를 사회에 환원하며 ‘나눔’의 정신을 실천했다. 그 자신은 19년째 같은 만년필을 사용했을 정도로 검약한 생활을 했지만 자신을 돌보던 가정부, 정원사, 운전사에게 원가 500원인 유한양행 주식을 각각 1000주씩 나눠줬다. 또 회사앞 자기 명의의 땅 100평을 가정부에게 40평, 정원사와 운전사에게 각각 30평씩 분양해 주기도 했다. 그를 이어 딸 재라씨는 200억 상당의 전 재산을 유한재단에 기증했고, 여동생 순한씨도 유한양행 주식 1만주를 부산생명의 전화에 기증하며 나누는 삶을 보여줬다. ●버드나무처럼 민족이 쉴 수 있었던 큰 그늘 9살의 어린 나이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미시간대를 졸업했다. 졸업 후 미국에서 식품회사를 운영하던 중 세브란스 의전 에비슨 학장으로부터 자신은 연희전문 교수로, 부인은 세브란스 의전 소아과장으로 와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제약사업을 택했다. 약이 귀해 질병에 시달리던 당시 조국 상황을 외면하기 어려웠고, 일본 지배 아래 일본 기업이 의약품 시장을 독차지하는 것도 깨고 싶었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서재필박사는 이같은 그의 뜻을 알고 “버드나무처럼 민족이 편히 쉴 수 있는 큰 그늘이 되어 달라.”는 부탁과 함께 조각가인 딸을 시켜 버들 목각품을 선물로 줬다. 유한양행의 상표 버드나무는 바로 이렇게 탄생됐다.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큰돈을 벌던 유한양행에 자유당 이승만 정권은 1959년 3억환이라는 거액의 정치자금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는 “불법적으로 모은 정치자금은 불법을 자행하는 데 쓸 뿐”이라며 “내가 기업의 신조로 정직과 성실을 내세우면서 어떻게 불법을 자행하는 무리들과 공범이 될 수 있겠느냐.”며 거절했다. 그는 1942년 미국에서 항일무장 독립군인 맹호군을 창설하는 데 주동적인 역할을 한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재미 독립운동가들과 연계, 광복을 맞을 때까지 그는 맹호군 활동을 도왔다. 민족의 장래를 걱정, 좋은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유한공고를 세우는 등 교육가로서도 열의를 다했다. 최근 이 책은 고건 전 총리가 최근 존경하는 인물로 고 유 박사를 꼽으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1만 7000원. 최광숙기자 bori@seoul.co.kr
  • 가슴 짠한 네쌍의 이별이야기 20일 개봉 ‘새드무비’

    가슴 짠한 네쌍의 이별이야기 20일 개봉 ‘새드무비’

    그림자가 있어 빛은 더 밝을 것이다. 이별을 예감하는 사랑은 그래서 더 뜨거울 것이고.20일 개봉하는 ‘새드무비’(제작 아이필름)는 직설적인 제목처럼 관객을 울려보겠노라 작정하고 덤빈 ‘이별 영화’이다. ●관객 울리려고 작정한 이별영화 우유부단하고 성실한 소방관 진우(정우성)를 바라보는 여자친구 수정(임수정)의 마음은 늘 편치가 않다. 방송국 수화통역사인 그녀는 불길에 몸을 던져야 하는 애인이 안쓰럽지만, 비 소식을 기다리는 일 말고는 해줄 게 없다. 놀이공원 공연단원으로 청각장애가 있는 수정의 여동생 수은(신민아)에게도 사랑이 찾아와 있다. 놀이공원의 화가 상규(이기우)를 좋아하는데, 얼굴의 화상 자국을 보여주기 싫어 인형가면을 벗지 못하고 빙빙 맴돌 뿐이다. 결혼을 앞두고 사소하게 티격태격하는 남녀, 장애를 의식하지 않는 명랑하고 밝은 수은의 사랑이야기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멜로형 드라마의 요건을 갖췄다. 애초에 옴니버스극으로 출발한 영화는 자매의 이야기에다 두 커플의 사연을 보탰다.3년째 ‘백수’로 고시원을 전전하는 하석(차태현)과의 미래가 없는 만남에 질려가는 할인매장 계산원 숙현(손태영), 어느날 갑자기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젊은 엄마(염정아)와 담담히 이별을 준비하는 여덟살짜리 아들(여진구). ●참신한 소재·아이디어는 부족 네 개의 미니 드라마로 연결된 영화는 시작부터 관객에게 이별의 조짐을 찾아내 보라고 권유한다. 화재현장에서 목숨을 잃는 진우, 떠나는 애인을 끝내 되돌려 세우지 못하는 가난한 하석, 수은의 마음을 알면서도 유학을 떠나야 하는 상규, 죽음 앞에서 서로의 진심을 읽는 모자(母子). 이별의 길목에 서서야 비로소 완전연소하는 사랑의 속성을 확인시키기까지 이야기를 섞바꿔 전개하는 것으로 화면이 채워진다. 그러나 나름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목적 달성을 하지 못한 것 같다. 무엇보다 울려야겠다는 지나친 강박이 스크린 밖으로까지 넘쳐 나온다. 눈물샘을 자극받기도 전에 관객이 먼저 부담스러워지는 ‘감정과잉’ 상태다. 스파링 파트너로 두들겨 맞는 하석을 강조한 장면, 불속에 갇힌 진우가 폐쇄회로 카메라에 마지막 인사를 하는 장면 등은 이 영화가 얼마나 은유에 약한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대목들이다. 예측가능한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 영화에는 설상가상 참신한 소재나 아이디어 장치도 눈에 띄지 않는다. 잠시잠깐 현실 밖으로 관객을 불러내 꿈을 꾸게 해주는 ‘영화적’ 캐릭터도 없다. 돈을 벌어야 하는 하석이 이별선언을 대신 해주는 인터넷 이별대행업을 차려 쫓아다니는 설정이 인상에 남을 정도. ●임수정·신민아 등 연기도약 확인 물론 충무로 빅스타들이 줄줄이 나온 영화에는 그들 하나하나의 감정선을 따라가 보는 재미가 적지 않다. 특히 임수정 신민아 이기우 등 어린 배우들의 연기도약을 확인할 수 있어 즐겁다. 그러고 보면 톱스타들의 무더기 출연은, 이렇게 잔잔한 드라마에선 어쩌면 ‘원죄’였을 수도 있겠다.‘그만한 재료로 이 정도의 밥상밖에?’식의 높은 기대치에 흠집들이 더 도드라져 보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S다이어리’의 권종관 감독이 연출했다.12세 이상 관람가. 황수정기자 sjh@seoul.co.kr
  • [깔깔깔]

    ● 남자 생각 대 여자 생각 *남자가 좋아하는 여성상 10대:예쁘고 섹시한 여자. 20대:착하고 능력있는 여자. 30대:돈많고 성실한 여자. 40대:마누라 안 닮은 여자. *여자가 좋아하는 남성상 10대:잘 생기고 잘 빠진 남자. 20대:능력있고 웃기는 남자. 30대:돈 잘 벌고 바람 안 피우는 남자. 40대:힘세고 오래 가는 남자. *남자가 싫어하는 여성상 10대:못난게 예쁜 척하는 여자. 20대:없는게 있는 척하는 여자. 30대:날마다 남편 속옷 검사하는 여자. 40대:무식한 게 힘만 센 여자. *여자가 싫어하는 남성상 10대:왕자인줄 착각하는 남자. 20대:킹카인줄 착각하는 남자. 30대:하늘인줄 착각하는 남자. 40대:남자인줄 착각하는 남자.
  • 미스·석탄공사의 이상형은 - 5분 데이트 (22)

    미스·석탄공사의 이상형은 - 5분 데이트 (22)

      단아하고 선명한 옆얼굴에서 좀처럼 눈을 돌릴 수 없을 만큼 미인이다. 누구를 닮아서 그렇게 미인이냐고 묻자 얼른 눈에 그늘을 지운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꼭 닮았대요』 - 이 미인의 슬픔이 뭔지를 건드릴 생각은 없었는데…. 6·25때 학살당한 아버지를 아직도 눈에 선히 떠올려 얘기해준다. 5살 때의 기억이 그대로 슬픔이 되어 풀리지 않는 멍이 되었다. 즐거운「데이트」는 아예 포기하기로 했다. 얘기는 계속 됐다. 1남 3녀를 혼자서 키우신 어머니의 고생과 셋째딸이 해야 할 효도의 계획까지를 차분한 음성으로 들려준다. 타고 난 소질이 그림 그리기. 숭의여고를 거쳐 건국대학 생활미술과를 졸업. 석탄공사 영업이사실 비서로 근무한 지 3년째. 낮 근무가 끝나면 학교로 직행하는 성실한 20대 전반기를 보냈다는 심순영(24)양. 157cm의 자그마한 몸매의 수선화처럼 가냘픈 아가씨가 좋아하는「타입」의 장래 남편감은 털털하고 시원시원하고 또 소박하고 남자답고…. 한 마디로 어떤 남자인가를 지적해 달랬더니「찐빵」이라는 별명의 가수란다. 매끈하고 빈틈없는 남성은 보는 것만으로 싫어지고. 별로 사교성이 있는 것도 아니라 뒤쫓는 남성들을 사귀려들지 않았지만 연애는 해보고 싶다고 수줍게 말한다. ※ 뽑히기까지 소문난 미인이 심순영양이라 권해보았다.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고 머뭇거리더니 오빠한테 전화를 하고 의논을 한다. 세 번씩이나 다시 찍어야 했던 조그만 불운에 조금의 피로한 기색도 보이지 않는 참을성이 대견스럽다. [ 선데이서울 69년 3/2 제2권 9호 통권 제23호 ]
  • [우리는 맞수 CEO] 허동수 GS칼텍스 회장 vs 신헌철 SK 사장

    [우리는 맞수 CEO] 허동수 GS칼텍스 회장 vs 신헌철 SK 사장

    허동수(62) GS칼텍스 회장과 신헌철(60) SK㈜ 사장은 국내 정유업계를 이끌고 있는 ‘산증인’이다. 허 회장은 LG그룹 구씨 집안의 동업자였던 고 허만정 회장의 손자로 GS칼텍스의 CEO를 12년째 맡아 오고 있다. 허 회장은 연세대 화학공학과를 거쳐 미국 위스콘신대에서 화학공학 석·박사학위를 받을 정도로 평생을 에너지업에 종사하며 한길을 걸어오고 있다. 반면 신 사장은 대한석유공사에 입사해 영업전선을 두루 누빈 뒤 SK가스와 SK텔레콤에서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지난해 친정인 SK㈜ 사장에 취임한 정통 ‘정유맨’이다. 현재 정유업계의 시장점유율은 SK㈜가 33%,GS칼텍스가 31%를 차지하고 있는 데다 최근 SK㈜가 인천정유를 인수, 사실상 두 회사가 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해외 자원개발에 매진 허 회장과 신 사장은 앞으로 에너지 산업이 IT나 전자산업을 넘어 국가경쟁을 좌우하게 되는 핵심산업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최근 들어 중국·중남미·아프리카 등 자원 보유국들이 자원개발을 국가 전략산업으로 직접 관리하고 있어 정유업계가 적극적인 해외자원 개발 투자에 나서야 한다는 견해다. 신 사장은 “지난해 기준으로 자주 원유공급률이 3.8%에 불과하다.”며 “이는 일본의 11.5%와 비교할 때 미약한 수준”이라며 해외 유망 광구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SK㈜는 12개국 20개 광구에서 원유 및 천연가스 탐사·생산을 하고 있으며, 연간 국내 원유 소비물량(약 7억배럴)의 40%에 해당하는 3억배럴의 보유매장량을 확보하고 있다. 허 회장도 “우리나라가 에너지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원유에 대한 안정적인 확보가 중요하다.”며 “2010년까지 원유 도입량의 10% 이상을 자체적으로 개발한 유전에서 원유를 확보할 계획”이라며 해외 유전개발 사례를 들었다.GS칼텍스는 캄보디아 블록A광구에 대한 탐사작업을 비롯해 중동, 동남아시아, 러시아 등에서도 탐사작업을 검토하고 있다. 이밖에도 두 CEO는 석유와 석유화학사업은 물론 도시가스,LNG, 전력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하고 신재생에너지 개발에도 적극 나서는 등 세계적인 종합에너지기업으로 발돋움하는 데 경영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기본에 충실하는 경영철학 허 회장과 신 사장의 경영철학과 스타일이 무척 닮았다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평가다. 허 회장은 자신의 경영철학을 ‘정도경영’이라고 못박았다. 그는 “공정하고 투명한 경영활동으로 경제적·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는 것이 회사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길”이라며 “사람이나 조직이나 기본이 잘 돼 있으면 커다란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고 계속 뻗어나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마라톤 경영’의 전도사인 신 사장도 허 회장의 철학에 동감한다. 신 사장은 “마라톤에서 너무 욕심을 내고 달린 사람은 절대 결승점을 통과할 수 없다.”며 “기업도 마라톤처럼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투자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며 ‘성실경영론’을 피력했다. ●적이자 동지 신 사장과 허 회장은 업계에서 차지하는 비중만큼이나 상대방에 대한 배려도 남달랐다. 시장에서는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라이벌 경영인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무한한 신뢰감과 존경을 표시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허 회장은 신 사장에 대해 “지난해부터 SK㈜를 이끌며 소버린 사건 등 어려운 난제 등을 슬기롭게 해결하며 굵직한 현안들을 합리적으로 처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뛰어난 CEO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마라톤을 즐기는 신 사장이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역경을 잘 헤쳐 나가리라 생각된다.”며 덕담을 잊지 않았다. 신 사장도 “전문경영인에 불과한 나와 정유업계에서 30년 이상을 재직한 허 회장을 비교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소탈한 모습으로 늘 밝게 웃으며 주변 사람들을 편안하게 대해 주는 허 회장을 늘 존경하고 있다.”며 치켜세웠다. 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부고]

    ● 송보열 前 제일은행장 행원 출신으로 첫 제일은행장에 올랐던 송보열(宋寶烈) 전 제일은행장이 9일 숙환으로 별세했다.74세. 송 전 행장은 지난 88년 제일은행 출신으로는 첫 은행장을 역임했으며, 이후 제일시티리스 회장 등을 지냈다. 유족으로 서예가인 부인 김정묵 여사와 재훈(삼성서울병원 기획조정실장·성균관의대 교수)·재복(고려대 공대 교수)·재용(서울대 경영대 교수)·재호(경동도시가스 사장)씨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발인은 12일 오전 7시, 장지는 경기도 포천 서능공원묘지.(02)3410-6901. ● 유석근 前 한국일보 편집위원 유석근 전 한국일보 편집위원이 10일 오전 10시 급환으로 별세했다.53세. 고인은 1978년 한국일보 견습35기로 입사, 체육부장과 편집위원 등을 역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강정례 씨와 병석(학생), 새보미(학생) 등 1남1녀. 빈소는 서울 한양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이며 발인은 13일 오전. 장지는 경기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 나자렛동산.(02)2290-9452. ●이재환(한국야쿠르트 책임연구원)씨 모친상 김진홍(국민일보 논설위원)김창성(두리관세사무소 사무장)씨 빙모상 10일 성인천한방병원, 발인 12일 오전 9시 (032)891-4334 ●권오형(전 문경초등학교 교장)씨 상배 기용(농협중앙회 차장)기목(연세대 정보통신처 부처장)기대(대오엔지니어링 대표)기홍(이화공영 부장)기창(서울대병원)씨 모친상 10일 신촌세브란스병원, 발인 12일 오전 6시 (02)392-0299 ●정태용(전 삼우관광 회장)씨 별세 한정자(전 한국여성개발원 선임연구원)씨 상부 석준(미국 거주)주호(〃)민수(건축사)씨 부친상 김윤수(종합건축사사무소 성현 차장)씨 빙부상 9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2일 오전 7시 (02)3410-6905 ●공계진(민주노동당 사무부총장)을진(사업)운진(〃)씨 부친상 박상조(사업)박상웅(농업)황부상(도화종합건설 부장)씨 빙부상 10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2일 오전 8시 (02)3010-2295 ●신항대(재미 사업)항구(명진·화성실업 대표)항락(광주일보 광고국장)씨 모친상 10일 조선대병원, 발인 12일 오전 10시 (062)231-8901 ●신동인(충주시 농업기술센터 기술보급과장)씨 부친상 9일 청원 초정노인병원, 발인 13일 오전 8시 (043)216-0564 ●최용길(금강엘이비종합건설 대표)화길(사업)씨 모친상 10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2일 오전 6시 (02)3010-2268 ●송승호(자영업)용호(증권예탁결제원 예탁업무부 대리)씨 모친상 9일 이대목동병원, 발인 11일 오전 9시30분 (02)2650-2752 ●김춘권(전 한양건축 회장)씨 상배 손영식(재미 사업)황태웅(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전무)김장환(전 쌍용제지 상무)정봉화(세림정보 부사장)한상현(영원산업개발 상무)최영식(순천향대 교수)씨 빙모상 10일 강남성모장례식장, 발인 12일 오전 8시 (02)590-2538 ●박상준(현대시멘트 부장)씨 부친상 김원규(한마음병원 원장)씨 빙부상 10일 서울아산병원, 발인 12일 오전 7시40분 (02)3010-2265 ●안희준(SK 상무)희경(회사원)씨 부친상 10일 삼성서울병원, 발인 12일 오전 8시 (02)3410-6909
  • 서울국제예술제 참가 日연출가 노다 히데키

    서울국제예술제 참가 日연출가 노다 히데키

    막바지에 접어든 서울국제공연예술제의 남은 공연작 가운데 최대 화제작은 일본 연출가 노다 히데키(50)의 ‘빨간 도깨비’다. 노다 히데키는 현재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출가 중 한명이다. 올해 일본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아사히연극대상과 요미우리연극상을 모두 석권하는 등 평단의 신뢰를 받을 뿐만 아니라 공연마다 전석매진을 기록하는 등 관객의 뜨거운 사랑까지 받고 있다. ‘빨간 도깨비’는 1996년 초연 이후 태국(1999), 영국(2002)공연을 거치며 그의 대표작으로 떠오른 작품. 해외 공연마다 그 나라 배우들과 작업해온 전례대로 이번 공연은 한국 배우들과 함께 ‘한국 버전’으로 만들었다. 한국 방문이 처음이라는 그는 “한국 배우들은 굉장히 성실하고 진지한 것 같다.”고 평한 뒤 “영국이나 태국 배우들과 작업할 때는 일본 배우와 다른 점이 너무 두드러져 같은 점을 찾는 게 관건이었는데 한국은 워낙 비슷한 점이 많아 다른 점을 찾는 게 중요했다.”고 말했다. 연극은 해안가에 표류한 한 남자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빨간 도깨비’로 몰리면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우화적으로 묘사한 작품. 타인에 대한 몰이해와 의사소통 부재라는 현대사회의 폐해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그는 “일본 남단 오키나와 인근 섬에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묵었던 여관의 여주인이 외지인이라는 이유로 주민들과 섞이지 못하는 걸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극의 모티브를 설명했다. 극작가, 연출가 외에 배우로도 활동중인 그는 해외에서 이 작품을 공연할 때마다 늘 도깨비역으로 직접 출연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통역을 거쳐 배우들과 대화하는 것보다 연출가가 몸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서로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고, 외국에선 스스로가 ‘빨간 도깨비’가 된 듯한 느낌을 갖기 때문이란다. 이번 공연에선 두 차례의 공개오디션에서 선발된 세 배우가 함께 무대에 선다. 최광일은 마을 건달청년 미즈카네, 오용은 머리가 모자란 오빠 ‘톰비’, 최수현은 ‘빨간 도깨비’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그 여자’역을 맡았다. 그는 “나와 다른 존재를 동화시키려 하기보다는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건강한 방식이 아닐까 생각한다.”는 말로 작품의 의미를 설명했다. 공연은 13일부터 15일까지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02)747-5161.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새영화] ‘리플리스 게임’

    알랭 들롱 의 슬픔에 찬 눈빛 연기가 인상적인 ‘태양은 가득히’(1960)와 맷 데이먼이 주연해 리메이크된 ‘리플리’(1999)를 기억하는가. 6일 개봉한 영화 ‘리플리스 게임’(RIPLEY‘s GAME)은 ‘태양은 가득히’의 원작자로 유명한 패트리샤 하미스미스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주인공 리플리는 완전범죄를 위해 주도면밀하게 행동하는 사기꾼으로 앞선 두 영화 속 주인공과 동일 인물. 리플리는 ‘리플리스 게임’을 통해 상실감에 좌절하던 청년기를 지나 원숙한 중년의 모습으로 돌아와 다시 살인 게임을 벌인다. 연출은 ‘비엔나 호텔의 야간배달부’로 명성을 얻은 이탈리아 여성감독 릴리아나 카바니. 음악은 ‘시네마 천국’으로 유명한 엔니오 모리코네가 맡았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영화의 얼개를 촘촘히 하는 일등공신은 주인공 리플리역을 맡은 존 말코비치의 연기. 냉철한 표정 속에 감춰진 미묘한 심리 변화를 소름끼칠 정도로 완벽히 요리했다. 그가 저지르는 범죄를 지켜보며 영화 내내 두근거림을 떨쳐버리기 쉽지 않다. 냉혈한이며 천재적인 사기꾼인 리플리는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유유자적한다. 어느날 그는 파티를 함께한 백혈병에 걸린 가난한 이웃 조너선(더 그레이스콧)에게서 “돈은 많지만 예술은 모르는 미국인”이라는 비난을 듣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이에 리플리는 살인 청부를 부탁한 옛 동료에게 돈이 궁한 조너선을 소개해 곤경에 빠뜨린다. 돈의 유혹에 넘어간 조너선은 성실한 가장과 킬러의 이중생활을 하며 살인에 빠져들고, 결국 상황은 예상치 못한 국면으로 전개된다.15세 이상 관람가. 이영표기자 tomcat@seoul.co.kr
  • [데스크시각] 국세청을 위한 변명/곽태헌 경제부 차장

    전두환 대통령 시절 예비역 준장 출신인 안무혁씨는 국세청장과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지낸 실세였다. 그는 안기부장 시절 “국세청 직원들을 본받으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국세청장 시절에는 사무관급 이상 몇백명을 상대로 말을 해도 밖으로 새 나가는 게 없었는데, 안기부장이 된 직후 핵심 간부들과 얘기를 한 게 여의도 증권가에 바로 흘러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세청 직원들의 입은 무겁다. 입이 무거운 게 새털처럼 가벼운 정치인의 입보다야 좋다. 하지만 무겁다 못해 “지난해 양도소득세를 얼마나 거뒀는지를 말할 수 없다.”는 과장까지 있을 정도로 ‘새가슴’들이 많다.‘새가슴’들을 변호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국세청 조직은 변호해야겠다. 국세청은 지난달부터 밀린 법인 세무조사를 본격적으로 하고 있다. 국세청은 그동안 부동산 투기조사에 매달려 법인조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올 들어 지난 6월말까지 법인 세무조사를 통해 추징한 금액은 1조 1481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조 4333억원)보다 20%나 줄었다. 지난해 법인세 추징실적은 3조 1409억원이다. 그런데 국세청의 정상적인 업무인 법인 세무조사를 놓고 말들이 많다. 올해 5조원 안팎의 세수가 부족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세수부족을 메우려고 조사하는 게 아니냐는 얘기다. 일부 언론의 시각도 그렇고 일부 정치권의 시각도 비슷하다. 법인 세무조사 반대론자들은 “세무조사 때문에 기업활동이 위축돼 경기회복에 찬물을 끼얹게 될 것”이라는 주장도 펴고 있다. 물론 세무조사를 하면 세수에 보탬이 되지만 추징세액은 그리 많지 않다. 개인사업자, 법인사업자, 부가가치세 조사, 양도소득세 조사 등 각종 세무조사를 통해 거둔 세금은 전체 국세의 3∼4%선이다. 법인 세무조사만을 놓고 보면 비율은 더 떨어진다. 세무조사로 직접 늘어나는 세수는 많지 않지만 세무조사는 기업이나 사업자, 고소득자들에게 간접적으로 성실한 세금신고를 유도하는 효과가 있다. 국세청은 1991년에는 현대상선을 비롯한 현대그룹의 주요계열사와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을,1993년에는 포스코와 박태준 당시 회장을 각각 세무조사했다. 그동안 이처럼 순수하지 않은 세무조사도 적지 않았고 그 게 국세청의 업보(業報)이지만, 현재 국세청이 하는 법인 세무조사는 미운털이 박힌 기업(혹은 대주주)들을 손보려는 ‘특별 세무조사’(요즘에는 심층조사라고 한다)가 아니라 정기 조사다. 보통 대기업들은 5년에 한번꼴로 정기 조사를 받는다. 세무조사 받는 것을 좋아할 기업은 없지만, 대기업들은 특별 조사에 비하면 정기 조사에는 그리 걱정을 하지 않는 편이다. 국세청이 본업인 정기 법인 세무조사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세수 부족액은 더 많아진다. 그러면 국채를 더 발행해 부족분을 메우거나 세율을 높여 보충하는 수밖에 없다. 정부가 씀씀이를 줄이는 게 현명한 방법이지만 방만한 나라살림에 익숙한 정부가 이런 선택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국채를 발행하거나 세율을 올리면 결국은 힘 없는 서민들의 부담이 더 늘어난다. 현실이 이런데도 뾰족한 대안도 없이 법인 세무조사를 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를 모르겠다. 부동산투기를 비롯해 돈을 많이 번 개인들로부터 세금을 더 걷는 것은 찬성하면서 돈을 많이 번 대기업들의 탈세를 조사하는 것에는 시비를 거는 무슨 배경이 있는 것일까. 순이익을 많이 낸 기업들은 각종 보너스와 임금인상 등의 돈잔치를 벌여왔다. 돈을 많이 번 기업들이 하는 돈잔치에 시비를 걸 생각은 없지만 낼 세금은 제대로 내야 한다. 게다가 올해부터 법인세율이 2%포인트 낮아지면서 특히 대기업들의 순이익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돼 있다. 법인세율 인하로 올해 덜 걷히는 부분만 8000억원이다. 내년에는 2조 4000억원으로 더 늘어난다. 법인세율을 낮춘 국회의원들 덕분에 실적 좋은 기업들은 돈잔치를 할 여력이 더 생겼다는 뜻이다. 투자활성화 명분으로 법인세율을 낮췄지만, 대기업들이 투자를 더 늘렸다는 통계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결과적으로 서민들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줄여줄 수 있는 법인 세무조사의 발목을 잡을 게 아니라 오히려 국세청을 격려해야 하지 않을까. 곽태헌 경제부 차장 tiger@seoul.co.kr
  • [백승종 정감록 산책] (39)민족적, 유교적 천문예언과 오윤부

    [백승종 정감록 산책] (39)민족적, 유교적 천문예언과 오윤부

    구한말 대표적인 애국계몽 운동가요, 항일운동가인 단재 신채호는 우리역사를 깊이 연구했다.‘조선 상고사’처럼 널리 알려진 연구서가 있는가 하면,‘꿈하늘(夢天)’ 같이 소설 형식을 취한 것도 있다.‘꿈하늘’은 일종의 팬터지 문학으로 항일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작가 신채호는 천상에 올라 ‘임’을 좌우에 모신 여러 영웅호걸을 만난다. 이순신과 세종대왕이 있고 철학자 화담 서경덕도 보인다. 도술의 달인 전우치도 함께 자리한다. 예상 밖인 것은 오윤부(伍允孚)라는 생소한 인물이다. 그는 성력(星曆)의 대가라 했다. 우선 성씨부터 낯선 오윤부. 좀 더 알고 보면 그는 ‘고려사’ 열전에 소개될 정도로 완전히 무명은 아니었다. 천문예언 전문가라고 했다. 섣부른 짐작과는 달리 고려시대에는 천문예언이 무척 중시됐다. 이름난 유학자 박상충의 전기에도 “성명(星命)에 밝아 사람들의 길흉을 점치면 많이 맞혔다.”는 대목이 나올 정도다. 중국에서는 13세기 이후 사주명리학이 예언이나 점의 핵심이었다. 고려는 경우가 달랐다. 풍수지리와 더불어 천문예언이 늘 예언의 중심축이었다. 인간 만사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 그리고 산줄기를 타고 흐르는 땅의 기운과 직결된다는 믿음이 고려인들의 정서에 부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천문은 조선후기에 출현한 ‘정감록’에서도 큰 역할을 한다. 정조9년(1785) 정감록 사건이 일어났을 때도 그랬다.“이른바 하늘이 낸 사람이라는 것은, 그 성씨가 김가이고, 이름은 자세히 모릅니다만, 금년에 군사를 일으킨다고 들었습니다. 유가는 정미년에 군사를 일으키고, 정가는 무신년에 군사를 일으켜, 세 집안사람들이 장차 백 년 동안 서로 싸웁니다. 그 증거로, 객성(客星)이 남방에서 이미 서울로 들어왔습니다.”(실록, 정조 9년3월1일 경술) 조선은 장차 3국으로 분할돼 오랜 세월 다투게 된다는 예언이다. 객성이 남쪽에서 출현해 서울 쪽으로 들어왔다는 천문현상이 증거로 제시됐다. 나라의 운명은 별이 결정한다는 민중의 믿음이 읽힌다. ●대대로 별점을 본 오윤부 고려 충렬왕 때 일관(日官)으로 활동한 오윤부야말로 별점의 대명사였다. 그의 본관은 황해도 배천(白川), 한 때 부흥(復興)으로 불리기도 한 곳이다. 일제시대의 성씨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엔 배천 오(伍)씨가 없다. 오윤부는 후손을 남기지 못했다는 이야기만 전해 내려온다. 그 조상은 대물림을 해가며 고려의 수도 개성에 살았다. 배천오씨들은 자자손손 별점을 보며 태사국(太史局)을 지켰다.(오윤부의 전기는 ‘고려사’, 권 122를 참조) 고려는 귀족사회였고, 모든 신분이 세습되었다. 심지어 군졸 노릇만 하는 집안, 아전과 서리를 배출하는 집안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일관 오윤부 일가는 귀족은 아니었으나, 일반 농민이나 상인보다는 훨씬 지위가 높았다. 오윤부는 용모가 초라했고 말수가 적었다. 여간해서는 좀체 웃지도 않았다. 그는 첫눈에 호감을 살 만큼 붙임성 있고 구변 좋은 인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문을 익혔다. 장성해서는 일관에 임용되어 여러 관직을 거친 뒤 판관후서사(判觀候署事)라는 고위직에 올랐다. 말년에는 천문도(天文圖)를 그려 왕에게 바쳤다. 후배 일관들이 그 천문도를 모범으로 삼았다니 그의 실력을 짐작할 만하다. 오윤부의 특기는 뭐니 뭐니 해도 별점이었다. 타고난 재주도 재주였지만 그는 무척 부지런했다. 밤을 새워가며 하늘을 수놓은 수 백 개의 별들을 샅샅이 살폈다. 날씨가 제아무리 춥거나 덥더라도 그는 늘 성실했다. 오윤부의 먼 후배 격인 조선시대 일관들은 5개 팀으로 나뉘어 하루 24시간 내내 하늘을 관측했다. 그들은 관측 대상을 23종으로 나눠 정상적인 현상과 비정상적인 것으로 구별했다. 해, 달, 흰무리, 지진, 혜성, 새별(新星) 그리고 28수로 요약되는 주요 별자리를 모두 점검했다. 일관들은 특히 새별과 흰무리 등의 모양, 정도, 자리, 바뀌는 모습을 낱낱이 기록해 ‘성변측후단자’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서운관지’) 이 보고서에 천체 약도가 첨부돼 날마다 임금님에게 제출됐다. 조선시대 일관들이 남긴 일지는 당시로선 세계에서 가장 정밀한 천문 보고서였다. 그 일부가 아직도 남아 천문 강국의 역사를 입증한다. 고려시대의 일관들은 그와 비슷한 활동을 했고 그것이 ‘고려사’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특히 오윤부는 이상한 천문 현상을 해석하는 데 뛰어났다. 어떤 별이 천준(天樽)을 범하자 “이번에 올 중국사신은 술꾼이다.” 고 예언했다. 천(天)은 중국, 준(樽)은 술통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또 어떤 별이 여림(女林)을 범하자, 중국 사신이 와서 소녀들(童女)을 데려갈 것이라며 걱정했다. 모두 사실로 드러났다. 이런 식의 해석이 현대인의 눈엔 너무 단순해 보일 수 있다. 하늘이 꼭 중국이어야 될 이유가 없다.‘여림’을 두고 공녀(貢女)하라는 것으로 해석할 까닭도 없다. 그러나 그 때는 원나라의 횡포가 가장 큰 문제였다. 오윤부는 그런 현실을 감안해 모든 천문현상을 풀이했다. 그의 별점은 잘 들어맞았고 소문이 원나라 황제의 귀에까지 들렸다. ●원형 민족주의자 오윤부 고려 후기에는 원의 수시력과 같은 중국역법이 수입되기도 했다. 오윤부는 그 방면에도 상당한 전문가였다. 그는 달력을 고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고려의 제일(祭日)을 중국과 비교했다. 고려에서는 봄가을의 가운데 달인 음력 2월과 8월의 마지막 무일(遠戊日)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으나, 중국에선 이미 오래 전부터 첫째 무일(近戊日)을 제삿날로 삼았음이 확인됐다. 오윤부는 조정에 건의해 중국의 예를 따르게 했다. 그러나 그가 항상 중국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긴 것은 아니다. 근본적인 의미로 그는 고려인이었다. 충렬왕은 즉위 직후 선왕인 원종의 신위를 종묘에 모셨다. 새 위패를 선대왕들의 신위와 합설하기 위해 원종의 시책(諡冊 시호를 아뢸 때 쓴 글)을 올릴 차례가 되었다. 충렬왕후는 원나라 공주였는데, 왕비로서 그 행사에 참여하기로 돼 있었다. 마침 오윤부가 이 행사를 주관했다. 그는 난색을 표하며 공주의 참여를 가로막았다. 선대왕들의 신령이 계신 곳에 원나라 공주가 술잔을 올리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사실 원나라는 과거 수십 년간 고려를 침략했기 때문에, 고려인들은 원을 미워했다. 오윤부는 이런 반원의식이 강했다. 원나라 공주는 종묘 제사에서 제외됐다. 많은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통쾌해 했다. 알려진 대로 원종 이후로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간섭이 더욱 노골화됐다. 고려국왕은 대대로 원나라 황실의 사위가 되었다. 왕은 죽어서도 원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시호에 표기해 “충○왕”이 되었다. 고려왕실에 시집온 원나라 공주의 위세는 때로 왕권을 능가하는 경우가 있었고, 오윤부는 이 점을 못마땅해 했다. 그는 천문 현상을 빙자해 공주를 압박했다.“천문을 살펴 보니 괴이한 현상이 자주 나타납니다. 요즘은 심한 가뭄까지 닥쳤습니다. 청컨대 궁궐을 짓거나 고치는 공사를 중지하고 덕을 닦으십시오. 그래야 재변이 멈춥니다.” 원나라 공주는 오윤부의 제지를 받자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원나라 공주에 대한 오윤부의 공격은 계속됐다. 공주는 고려에 시집온 뒤에도 여러 차례 본국을 오갔다. 그 때마다 막대한 비용이 국고에서 지출되었음은 물론이다. 그것도 감당하기 어려운 판인데 공주는 원나라로 여행을 떠날 때마다 자기가 없는 동안 궁궐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라고 지시했다. 언젠가 한 번은 재상들을 불러 모아 놓고 좋은 날을 택해 아예 새 궁궐을 지어 놓으라고 졸랐다. 다들 불평은 있었지만 드러내놓고 반대는 못했다. 이 때도 오윤부가 발 벗고 나섰다.“금년에 토목공사를 일으키면 임금님께 불리하므로, 신하인 저는 절대 택일을 못하겠습니다.” 원나라 공주는 분노에 치를 떨며 오윤부의 벼슬을 빼앗았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려 매로 때리려 했으나 마침 그 장면을 목격한 어느 재상이 애써 말리는 바람에 매 맞는 것만은 간신히 피했다. 그 일로 분이 안 풀린 공주는 오윤부를 왕에게 고자질했다. 왕은 공주의 청을 어기지 못해 오윤부를 매질하게 했다. 그는 매를 맞으며 이렇게 변명하였다.“날을 가리는 것은 흉(凶)을 피하고 길(吉)을 맞으려는 것입니다. 신하를 협박하여 억지로 가리게 한다면 차라리 가리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신은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임금님의 뜻에 아첨할 수가 없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궁궐을 짓는 공사가 겨우 시작됐는데, 화성이 달을 삼키는 변이가 일어났다. 왕은 반승(飯僧 스님들에게 밥을 공양함)을 실시해 이 문제를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다. 반승은 사소한 재앙이 예측될 때마다 되풀이된 고식적인 해결책이었다. 오윤부는 동료인 문창유와 함께 왕에게 간언을 바쳤다. 화성이 달을 삼키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다. 스님들에게 밥을 주고 부처님을 공양한다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런 값싼 보시를 그만 둬야 한다. 진정한 길은 불필요한 토목공사를 중지하는 것이다. 사실 그 말이 맞는 말이었다. 왕은 반대여론을 의식해 궁궐 짓는 일을 그만뒀다. ‘고려사’에 실린 전기 기록을 검토해 보면 오윤부의 간언은 전문분야인 천문에 구애되지 않았다. 시사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한 번은 오윤부가 전법총랑(典法摠郞 법률의 집행을 담당) 박인주에게 전법사의 사무가 자꾸 지연되는 까닭을 물었다. 원나라 공주의 명령과 임금님의 명령이 한없이 쏟아져,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왕과 공주는 각기 소송 사건에 비공식적으로 개입해 일처리를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오윤부는 이런 일이 자기 소관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따졌다. 이런 식으로 일관 오윤부는 가끔씩 왕과 의견충돌을 보였다. 그러나 원나라 공주에 대해 대들거나 비판하는 경우는 더욱 많았다. 그는 공주 보기를 마치 원나라 침략군을 대하듯 했던 것 같다. 오윤부는 일종의 원형(proto) 민족주의자였다. ●백성을 대변한 오윤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전혀 안 그럴 것 같지만 천문에는 변이가 많다. 그럴 때마다 오윤부는 이를 정밀하게 살펴 고려왕실의 미래 운명과 관련지었다. 그는 특히 고려백성의 편에서 국왕 내외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천문현상을 활용했다는 혐의가 있다. 천문에 이상이 있을 경우 과거의 일관들은 기도를 권하거나 굿을 하라는 권고를 주로 했다. 다분히 미신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오윤부는 달랐다. 그가 제시한 해결방법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정치적이었다. 예컨대 이런 식이었다.“백성의 원망이 없다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 두 곳에 파견한 왕지별감(王旨別監 왕의 특사)을 소환하고, 여러 곳에 설치된 공주식읍(公主食邑 원나라 공주에게 준 토지와 백성)을 폐지하면 되겠습니다.” 이런 권고를 듣자 왕은 한동안 망설였지만 마침내는 공주에게 줬던 식읍을 폐지하였다. 거기서 거둔 세금을 나라의 창고에 배속시켜 백관의 봉록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사실 원나라 공주는 왕을 졸라 각처에 농장을 마련해 호사가 극에 이르렀다. 그 뒷바라지를 하느라 수만 명의 백성들은 한숨을 짓고 있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오윤부는 백성들의 의사를 대변해 식읍의 혁파를 주장했다. 하늘뿐만 아니라 자연계의 변동도 오윤부는 마찬가지로 이용했다. 언젠가 한번은 궁궐 연못에 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산소부족이었든지 아니면 약물에 의한 중독이었을 것이다. 허옇게 배를 드러낸 채 물위로 떠오른 고기떼를 두고 오윤부는 충렬왕을 몰아쳤다.“갑술년(충렬왕 즉위년 1274)에 대궐 동편 못에서 이런 괴변이 일어났고 선왕이신 원종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청컨대 임금님께서는 덕을 닦으시고 스스로를 반성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궁궐의 물고기가 죽든 살든 그것이 왕의 목숨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나 일관 오윤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자칫하면 국왕이나 원나라 공주의 진노를 사게 될 거였지만 개의하지 않았다. 예언가 오윤부의 성공비결은 고려사회에 만연했던 반원적인 정서를 잘 이용했다는 점이다. 조정 대신들 가운데도 원나라의 정치노선에 반대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다. 어찌 보면 충렬왕 역시 친원과 반원의 두 노선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했다. 그 틈을 비집고 오윤부는 한결 같이 자주노선을 지켰다. 그런 점에서 그는 묘청과 백수한의 후예였다. 그러나 오윤부는 묘청 등을 뛰어넘었다. 그는 일관으로서 하늘의 뜻을 왕에게 정확히 인식시켜야 될 임무가 있다고 확신했다. 만일에 왕이 자기의 ‘충언’을 듣지 않으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끝까지 졸라댈 정도였다. 오윤부의 해석은 유교의 재이론(災異論)에 가까웠다. 묘청 등이 불교적이고 무속적인 세계에 기울어 있었다면, 오윤부는 다가올 성리학 시대의 천문해석에 근접해 있었다는 말이다. 유교적인 천문예언가 오윤부의 고집불통에 충렬왕은 때로 두통을 일으켰다. ●충렬왕이 졌다! 왕은 오윤부를 골탕 먹일 생각까지도 했다. 원 나라 세조가 요동을 정벌하게 되었을 때다. 왕은 상국의 명령으로 마지못해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까지 나가게 됐다. 우선 유청신을 황제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그 때 오윤부가 별점을 쳤다.“아무 날 유청신이 반드시 돌아옵니다. 임금님께서는 요동까지 가실 필요 없이 말머리를 서울로 돌리게 되십니다.” 그러나 그 날이 됐는데도 유청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왕은 오윤부를 체포했다. 점괘가 틀렸으니 벌을 받으라 했다. 하지만 오윤부는 해가 아직 저물지 않았다며, 좀더 기다리자고 했다. 과연 얼마 안 있어 먼데서 먼지를 휘날리면서 달려오는 말 한 필이 있었다. 유청신이 타고 있었다. 예언이며 점이 설마 그렇게까지 용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천문현상은 그저 자연계의 변화를 알릴 뿐이다. 그것이 인간 세상에 복을 불러들일 리 만무하고 화를 초래할 수도 없다. 오윤부의 사고방식은 이런 현대적 인식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그것은 시대적 한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윤부는 늘 나라와 백성을 위해 천문을 살폈고, 그 때문에 민중은 그를 사랑했다. 신채호가 그를 가장 뛰어난 천문예언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은 그 때문이다. 다시 조선 정조 때 일어난 ‘정감록’ 사건으로 돌아간다. 이 사건의 공범인 평민 지식인 주형채도 오윤부처럼 별점을 보았다. 주형채는 말했다.“작년 섣달 초7일, 초8일, 초9일에 위성(危星), 실성(室星), 벽성(壁星) 앞에 20여 개의 별이 벽을 쌓고 늘어섰습니다. 그 속에 붉은 기운이 있었습니다. 장군성과 태백성이 서로 싸운 지 3일 만에 서로 1도(度) 거리로 떨어졌으며, 태백성이 어깨로 장군성을 떠밀어 여러 번 물러가고 나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정조,9년3월22일 신미) 주형채는 국가의 녹을 먹는 일관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윤부처럼 밤하늘의 별자리를 많이 알고 있었고 밤새워 별을 보았다. 별자리의 이동을 1도 2도로 따질 만큼 전문적인 지식을 갖췄다. 고려시대에는 오윤부 같은 특수 계층만 그런 지식을 독점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평민지식인들도 서적을 통해 공유하게 됐고, 그래서 주형채와 같은 평민도 직접 별을 바라보며 민중의 희망을 찾아 나섰다. 자유로운 지식은 곧 우리들의 희망이다. (푸른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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