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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구황제 허재‘화려한 부활’

    3년만에 대표팀에 복귀한 ‘농구황제’ 허재(34)가 화려하게 부활했다. 허재는 7일밤 타이완 타이베이시립체육관에서 열린 홈팀 타이완A와의 제22회 존스배 국제농구대회 결승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특유의 감각과 노련미를뽐내며 70―67의 승리를 이끌었다.이로써 한국은 5전전승으로 이 대회에 20차례 참가한 끝에 처음으로 정상을 밟았다.또 허재는 최우수선수(MVP)를 거머 쥐어 여전히 아시아 최고의 테크니션임을 입증했다. 지난 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음주파동’을 일으켜 대표팀에서 제외된허재는 그해 연말 음주운전 사고를 내 선수생명이 끝날 위기를 맞았다.하지만 이듬해 프로출범과 함께 ‘대표팀 영구제명’이라는 조건부로 다시 코트를 밟았다.기아시절이던 97∼98시즌 챔프전에서 손가락 골절을 딛고 기적같은 플레이를 펼쳐 팬들을 감동시킨 그는 지난해 나래로 이적한 뒤 플레잉코치를 맡아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성실함을 보여주며 팀을 98∼99시즌 플레이오프 4강으로 이끌었다. 지난 4월 그는 ‘영원한 스승’인 정봉섭 대한농구협회 강화위원장(중앙대체육부장)이 “한국농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슈퍼스타인 만큼 명예롭게 은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며 협회를 간곡히 설득한 덕에 다시 태극마크를달았고 이번 대회에서 멋지게 ‘보은’한 것.국내 훈련때 부터 앞장 서 후배들을 독려한 그는 우승의 고비였던 코스타리카와의 결승리그 첫 경기에서 13득점 10어시스트,타이완A팀과의 경기에서 18득점 6어시스트 등 고비마다 과감한 드라이브 인과 호쾌한 3점포,전광석화 같은 가로채기로 흐름을 휘어 잡아 “역시 허재”라는 탄성을 자아냈다. 잃었던 명예의 절반을 되찾은 그는 오는 28일부터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리는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맞수 중국을 꺾고 시드니올림픽 출전권을따낸 뒤 미련없이 태극마크를 반납할 계획이다. 오병남기자 obnbkt@
  • 沿海州의 카레이스키(중)-고려인의 생활상

    “고려인이 손대면 안되는 것이 없습니다” 지난 17일 스파스크군의 고려인촌에서 만난 한 러시아 주민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고려인을 칭찬했다. 이 지역에서는 토양과 기후가 맞지 않아 지난해까지만 해도 수박과 토마토가 나지 않았다.그러나 지난 겨울 이곳으로 이주해 온 고려인들이 올 여름수박 등의 과일을 수확했다는 것이다.과일과 야채는 중국산이 있었지만 맛이 없었다.이곳에서 양파와 참외를 처음 수확한 것도 고려인이다.감자 밖에 없던 이곳에 다양한 채소와 과일을 선물한 고려인들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었다. 다른 일화도 소개했다.한 고려인이 배추를 수확해 시장에 팔러 나갔다.그러나 러시아인들은 전에 다니던 야채가게만 찾았다.그러자 이 고려인은 손님들에게 “이 배추와 중국배추를 사다가 며칠 놓아두면 어떤 것이 좋은지 알게될 것”이라고 말했다.과연 중국배추는 이틀만에 썩기 시작했다.비료를 많이쓴 탓이다. 이 소문이 퍼지면서 고려인들의 배추는 날개돋친 듯 팔렸다. 농사에 관한한 고려인은 연해주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통한다.강제 이주된 뒤 척박한 중앙아시아의 언 땅에 씨를 뿌려 벼를 수확한 것은 기적으로평가받는다.연해주 정부도 영농기술과 성실함을 높이 사 고려인들을 환영한다. 하지만 고려인의 생활은 아직 넉넉한 편은 못된다.중앙아시아에서 풍족한재산을 모으지 못한 이들은 집값 등 평균 4,000달러나 되는 이주비를 감당하느라 여유가 없다.하루하루 근근이 연명하는 사람도 많다.이들은 90년대 초독립국가연합의 형성으로 민족차별이 심할 때 무작정 건너온 사람들이다.재산을 몰수당한 사람도 적지 않다.일부는 러시아 정부가 내준 군용막사에서지내고 있다. 그럼에도 민족 동질감을 지켜가려는 그들의 노력은 눈물겹다.농활대 학생들은 이날 밤 ‘고려인 위안 행사’를 열었다.이 자리에서 ‘아리랑 민속무용단’의 6∼13세 어린이들이 보여준 무용은 고려인과 러시아인의 심금을 울렸다.무용단은 김 발레리아(39·여)씨가 95년 어렵게 만든 것이다.90년 연해주로 온 김씨는 “민속과 풍습,고려인의 얼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그는“중앙아시아에는 민속무용단이 많았는데 당시 연해주에는 하나도 없었다”면서 “고려인은 물론 러시아인들도 우리 춤을 아주 좋아한다”고 전했다.최근에는 ‘고려인 기업가 연합회’ 등에서 지원을 받고 있다. ‘라즈돌노예’에서는 ‘고려인 중심센터’를 중심으로 실질적인 문화자치주를 만드는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지난해 말에는 고려인들의 소식지인 월간 ‘원동신문’이 어렵사리 만들어졌다.기자가 만난 고려인들은 한결같이 한글을 배울 수 있는 책이나 비디오테이프를 보내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우리말과 글을 잃은 사람들.그러나 ‘한핏줄’이라는 의식은 분명 살아있었다. 연해주 이지운기자 jj@
  • 상반기 스포츠서울 골프투어 결산

    대한매일의 자매지인 스포츠서울이 국내 여자골프의 발전을 위해 올들어 마련한 스포츠서울 투어 상반기 3개 대회에서 거둔 가장 큰 효과는 선수들의경기력 향상이다. 11일 막을 내린 상반기 마지막 대회이자 3차대회인 LG019여자오픈의 경우 30위권까지 이븐파를 기록했고 2라운드 컷오프도 합계 9오버파에서 끊기는 등대체로 타수가 줄고 있는 추세를 보였다. 이는 중상위권까지 언더파를 치는미국이나 일본 투어와 엇비슷한 기록으로 선수의 상대적 기량과 코스의 난이도를 감안해도 고무적인 현상이다.특히 2차대회인 매일우유오픈 첫 라운드에서는 오명순이 7언더파를 기록했고 LG019오픈 2라운드에서는 이정연이 8언더파의 한라운드 국내 최소타 타이기록을 수립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동안 빛을 못보던 신예들의 발굴도 괄목할 만한 성과다.첫대회였던 제주삼다수오픈에서 아마추어 임선욱이 우승한 것을 비롯,2차 대회(매일우유오픈) 김보금,3차 대회(LG019오픈) 김희정이 정상에 오르는 등 아마추어와 무명선수들이 모두 휩쓸었다.이같은 흐름을 심의영(한솔레이디스오픈),박금숙(서산카네이션컵)이 우승한 다른 2개 대회에서도 이어졌다.지난해까지 김미현(3승) 박현순 서아람 정일미 등 내로라하는 선수들이 우승과 상위권을 독차지하던 것과 비교하면 ‘춘추전국시대’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대회가 자주 열리다 보니 예상치 못했던 문제점도 드러났다.일부 선수들 가운데에는 1∼2라운드 도중 결선 통과가 자신없으면 경기를 중도에 포기하는 불성실함을 보이는가 하면 한 타마다 최선을 다해야 하는 프로 정신이 상실된 안일함도 엿보여 하반기부터는 이에 대한 대책이 필요할 것으로보인다. 김경운기자 kkwoon@
  • [제2공화국과 張勉](26)장면의 정치역정·생애(下)

    “본인은 오늘로써 부통령직을 사퇴한다.3·15부정선거로 인하여 삼천만 동포의 울분은 드디어 절정에 달하고 마침내 민족의 정화인 청소년 남녀들이불법과 불의에 항쟁하다가 총탄에 쓰러져 그 고귀한 피가 이 강산을 물들이게 됨을 볼 때에 하루라도 그 자리에 머무를 수 없는 비통한 심경에 다다른것이다.…이러한 중대위기에 즈음하여 이대통령은 3·15선거의 불법과 무효를 솔직히 시인하고 또 12년간 누적된 비정(秕政)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물러서야 할 것이다.…” 4·19가 일어난 지 나흘만인 1960년 4월23일 장면(張勉)은 기자회견을 갖고 부통령 사임을 발표했다.이틀 뒤에는 순화동 관저를 나와 명륜동 자택으로돌아갔다. 장면은 3·15선거에 부통령으로 출마해 비록 낙선했지만 3대 부통령 임기는 남아 있는 상태였다.따라서 이승만이 물러나고 3·15선거가 무효로 처리되면,대통령 직은 자연히 장면에게로 넘어오게 돼 있었다.그런데 굳이 이를 포기한 까닭은 무엇일까. 장면은 회고록에서 세 가지 이유를 들었는데 그 첫째가 이승만의 하야를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이승만과 자유당에게 ‘정권을 내놓더라도 장면이 바로 계승하지는 않는다’고 보장해 준 것이다.아울러 부통령으로서 도의적인 책임을 함께 진다는 생각과,이승만의 불행을 틈타 권력을 잡는다는 인상을 국민에게 주기 싫어서이기도 했다. 장면이 부통령을 사직하자 곧바로 이기붕(李起鵬)이 부통령 당선과 국회의장 직을 사퇴했다.나흘 뒤에는 이승만도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했다.이승만과 자유당의 퇴진을 무리없이 유도한다는 장면의 의도가 실현된 셈이다. 내각책임제로 개헌이 돼 새 정부가 출범할 즈음 장면은 대통령이냐,총리냐를 놓고 고민하게 된다.공보비서관을 지낸 송원영(宋元英)은 회고록에 “장박사와 그 가족,아주 가까운 몇몇 사람은 차라리 장박사가 실제 행정과는 초연한 대통령 자리에 앉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보이지 않는 운동을 하고 있었다”고 적었다.한 측근이 ▲새 정부가 이승만정권 12년의 비정을 씻을 때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나올 수 있고 ▲부통령을 이미 했으니이제 대통령을 할 차례라고 설득한사실도 소개했다.그랬더니 장면은 “나도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하고 싶지만 그것이 내 뜻대로 되나”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 미국도 ‘장면 대통령’을 지지했다.허터 미 국무장관은 60년 6월11일 매카나기 주한 미대사에게 보낸 전문에서 “장면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못박았다.“그의 성실·청렴함과 국제정세에 대한 폭넓은 안목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장면 자신과 최측근 인사들이 원했고 미국이 은밀히 지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장면은 대통령 아닌 총리 선출 경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송원영의 표현처럼 “신파에 매인 몸이어서 대통령으로 ‘물러날 자유’가 없었던”것이다. 장면을 존경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때 총리가 아닌 대통령이 됐더라면…”하고 지금도 아쉬워하는 것은 사실이다. 총리에 취임한 뒤 장면은 특유의 근면성과 성실함으로 내각을 이끌어갔다. 아직 총리공관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여서 그는 일과후 반도호텔 828호실로옮겨 계속 집무했다.회고록에서 밝혔듯 “새벽 2시 전에 취침하는 날이 별로 없을 정도로 성심껏 무슨 일이든 잘해 보려고”했다. 이성모(李聖模)전 비서관은 “장박사는 점심도시락을 꼭 준비했고 저녁식사도 자택에서 날라왔다”면서 “밤에 반도호텔 집무실에서 보고를 다 받고 나면 보통 10∼11시쯤 됐는데 그때까지도 식사를 못해 식어빠진 저녁상이 그대로 놓여 있곤 했다”고 회상했다. 장면정부는 구파의 분당,소장파의 반발 등 정권 내부의 갈등으로 세차례나개각을 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그리고 이런 것들이 장면 개인,또는 그의 내각이 무능하다거나 지도력이 부족하다는 평을 듣는 주요인이 됐다. 그렇지만 쿠데타가 발생한 61년 5월 장면정부는 이미 기틀을 잡고 있었다.4월24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단일지도체제로 당헌을 개정해 총재 직에 오른장면은 5월4일 3차 개각을 단행한다.당과 정부 양쪽에서 일사불란하게 지도력을 발휘할 구도를 마련한 것이다. 아울러 장면은 7월1일 방미해 케네디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기로 합의하고그 발표시기를 조정하고 있었다.한·일회담 재개도 눈앞에 두었다.미국의 경제원조 규모가 정상회담에서 결정되고 한·일회담에서 배상금문제가 타결되면,지난 3월 시작한 국토건설사업도,작성을 끝낸 경제개발5개년계획도 제 궤도에 오를 터였다.장면정부의 으뜸 목표인 ‘경제제일주의’가 바야흐로 국민의 피부에 와닿을 시점이었다.그런데 쿠데타가 터진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쿠데타군에게 당한 까닭은 무엇일까.김영구(金永求)당시 내무차관의 회고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61년 3월 말,4월 초쯤이었다.반도호텔 장총리 집무실에 총리,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장도영(張都暎)육군참모총장과 나,네 사람이 모였다.쿠데타설이화제에 오르자 매그루더는 ‘내가 한국군의 작전권을 쥐고 있는데 누가 쿠데타를 하느냐.일어나더라도 금세 진압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장총리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듯했다.사실 많은 사람들이 미군이 있는 한 쿠데타는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 쿠데타가 발생하자 장면은 진압에 나서지 못한다.휴전한 지 8년,전쟁의 상흔이 아직 짙게 남은 그 시절,쿠데타 진압이 부대간의 총격전으로까지 비화하면 자칫 북한에게 재남침의 빌미를 줄 수 있다는 판단을 했을것이다.6·25발발 직후 주미대사로서 유엔군 파병을 위해 침식을 잊었던 그로서는,만에 하나라도 그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으리라. 장면의 묘소는 경기도 포천 천보산 기슭의 가톨릭공원묘원에 있다.그 곳에세워져 있는 묘비의 글은 장면의 삶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공(公)은 민주정치를 수립하고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하여 불철주야 심혈을 경주하던 도중,뜻밖인 5·16사태로 경륜을 펴지 못한 채 정치에서 물러나…깨끗한 교육자요,근엄한 종교인이요,불굴의 정치가의 생애였다”- 5·16쿠데타 직후…가택연금등 수난 5·16후 쿠데타세력은 장면(張勉)정부가 무능하고 부패했다고 대대적으로선전한다.이어 소장파가 폭로한 ‘중석불 사건’을 비롯해 비리 의혹이 제기된 온갖 사건들을 파헤친다. 그러나 몇달 뒤 군사정권이 발표한 ‘장정권 비리’는 당시 김영선(金永善)재무장관이 냉장고 한대를 뇌물로 받았다는 것뿐이었다.김장관과 친했던장경순(張慶淳) 5대 민의원은 그나마 “냉장고가 아니라 아이스박스였다”고증언했다.김장관의 오랜 친구인 부산세관장이 출장길에 들러 선물로 아이스박스 한통을 놓고갔다는 것이다. 군사정권이 쿠데타 명분을 세우려고 갖은 애를 써 증거를 찾았는데도 발표거리가 고작 ‘냉장고 한대’였다는 사실은,역설적으로 장면정부가 얼마나깨끗했는지를 확인해준 것이다. 군사정권은 아울러 각종 혐의를 붙여 장면정부의 장·차관과 민주당 간부들을 구속했다.장면은 가택에 연금당했다.가족 증언에 따르면 군인들이 20∼30명 정도 집 안팎에서 상주하며 출입자를 감시했다.심지어 가정부가 장보러드나들 때도 장바구니를 일일이 뒤졌다.장면은 감시자의 눈길이 싫어 대낮에도 창마다 커튼을 드리웠다. 연금은 1961년 11월10일 해제됐다.장면은 기독교 서적 번역에 몰두하는 한편 화초를 가꾸는 일로 하루를 보냈다.감시가 심해서인가,찾아오는 발길도뜸했다.그가 전도(傳道)한 옛 동료가 영세를 받는다는 연락을 해오면 대부(代父)를 서주느라 문밖을 나설뿐 외출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던 62년 7월15일 장면은 ‘이주당(二主黨)사건’의 배후자라는혐의를 쓰고 입건된다.이 사건은,민주당 인사들이 일부 군 출신과 짜고 군사정권을 전복하려 했다는 소위 반혁명음모의 하나로 발표됐다. 장면에게 걸린 혐의는 거사 성공 후 총리로 복귀한다는 조건으로 자금 100만환을 제공했다는 것이었다.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지만 최종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으로 확정되고 결국은 형집행면제 처분을 받는다. 8월28일 법정구속된 장면은 10월15일 보석으로 출감한다.그는 풀려나면서 “제멋대로 잡아넣더니 보석은 무슨…”하면서 개탄했다. 장면이 연루됐다고 해서 떠들썩했던 이 사건을 비중있게 다룬 저작물은 아직도 없다.당시 구속기소된 민주당 인사들도 “그야말로 황당한 조작극이었다”고 입을 모으고,그 중에는 자신이 구속된 사건이 그것이었는지조차 기억 못하는 이가 있을 정도다. ‘이주당 사건’을 마지막으로 장면은 군사정권의 날카로운 칼끝에서 어느정도 벗어난다.66년 1월 말 간질환이 재발해입원한 뒤 그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6월4일 장면은 명륜동 자택에서 영면했다.향년 67세였다.부인김옥윤(金玉允)여사는 지난 90년 9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장면은 슬하에 5남2녀를 두었으며 모두 해외유학을 했다.맏아들(張震 서강대 생물학과 명예교수·72)과 셋째아들(張益 가톨릭 춘천교구장·66)만 국내에 있다.수녀인 맏딸(張義淑·69),건축가인 둘째아들(張建·67),정치학 교수인 넷째아들(張純·64·보스턴 리지스대)은 미국에,은행가인 다섯째아들(張興·60·파리은행)은 프랑스에 거주한다.막내딸(張明子)은 80년대 후반 세상을 떠났다. 서울미대 초대학장을 지낸 장발(張勃·98)과 한국 최초의 항공공학자인 장극(86)은 장면의 동생들이다. 이용원기자
  • [기 고] 국가차원 지식망 구축 서둘러야

    상상 속의 미래사회를 다룬 영화 ‘토탈리콜’를 보면 경험을 파는 회사가등장한다.고객들은 컴퓨터 화면에서 선택한 이상형의 파트너와 자신이 좋아하는 여행지에서 여행을 즐기고 돌아오는 ‘경험상품’을 살 수 있다.이 영화대로라면 스티븐 호킹 박사나 제너럴 일렉트릭의 최고경영자 젝 웰치와 같은 당대 거물들의 지식과 경험을 고스란히 보관했다가 판매하는 사업도 멀지않은 장래에 가능할 듯하다. 지식을 공유,관리함으로써 가치를 창출하는 작업은 이미 시작됐다고 할 수있다.90년대 중반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세계은행 등에서 21세기 국가경쟁력의 원천으로 ‘지식’을 강조하면서 지식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는 것이다. 선진국들은 이미 지식기반경제 심화를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미국은 보유지식자산을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하기 위해 SIP(State Inventory Project)를 추진중이며 교육,정부,공공 부문을 연결해 국가적 지식활용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네덜란드도 95년 ‘지식의 실천(Knowledge in Action)’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지식경제로의 전환을 강조하면서 본격적인 지식경제 구축작업에 착수했다. 기업들의 지식기반 강화 노력도 이미 치열한 경쟁상태다.PW&C,맥킨지 등 세계적인 컨설팅회사들은 ‘지식창고’를 컴퓨터 네트워크에 만들어 컨설턴트들이 세계 어디서나,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지식과 경험을 얻을 수 있게 했다. 또 HP,가오 등의 회사는 고객의 문의 및 지적사항을 모두 데어터베이스화함으로써 고객의 문의에 응대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평균 3초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천재 1∼2명의 두뇌라기보다 현장에서 일하는사람들의 기술과 경험을 체계적으로 통합,관리해 지식으로 발전시키는 데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식기반 강화에 있어서만큼은 우리도 다른나라에 뒤질 것이 없다는 자부심과 의욕을 가져볼 만하다.바로 우리나라가 보유한 가장 귀중한 자원은 높은교육 수준,근면 성실함을 갖춘 풍부한 인적자원이기 때문이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총인구 대비 대학생의 비중이 3.4%에 이를 만큼 높은교육열을 자랑하고 있지만한국 근로자의 생산성은 미국의 절반 수준이라고한다.또 컴퓨터 보급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인터넷 사용자 비중은 아주저조한 편이라는 통계도 있다.아직 우리가 지식을 나누고 관리하는 데 취약하다는 뜻이다. 지식은 나눌수록 빛나는 자원이다.하루빨리 체계적인 지식망을 만들어 개인,기업,국가 각 단위에서 지식을 나누고 관리해야 할 것이다.뿐만 아니라 세계의 지식망에도 파이프라인을 꽂고 선진국의 지식(Foreign Knowledge)을 유치하는 작업도 서둘러야 할 것이다. 朴 泰 榮 前산업자원부 장관
  • [제2공화국과 張勉](25)장면과 가톨릭…정치고비마다 후원자로

    장면(張勉)을 정치가로서 해부하건,인간적으로 이해하건 그 출발점은 같은자리에 있다.곧 가톨릭 신앙이다.장면의 정치는 출발부터 마감까지 신앙의테두리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장면을 정치의 길로 ‘내몬’사람은 노기남(盧基南)대주교다.한국인으로서처음 서울교구장이 되고 주교자리에 오른 그는 해방 당시 한국 가톨릭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노주교는 대한민국 출범을 앞두고 정계에도 가톨릭을 대변하는 인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가 염두에 둔 인물이 장면이었다. 장면은 노주교보다 나이는 겨우 3살 많았지만 소신학교에서 직접 그를 가르쳤다.게다가 인품·덕망이 뛰어나 노주교를 비롯한 제자들에게서 진정한 스승으로서 대우 받았다.그런 한편으로 신자인 장면에게 노주교는 순명(順命)의 대상이었다. 제헌의회 선거를 앞두고 노주교에게 정계진출을 권유받은 장면은 처음에 펄쩍 뛰며 거부한다.교육자로 남겠다고 했다.그러나 거듭되는 강권에 못이겨출마한다.선거전이 시작되자 노주교가 진두지휘를 했고 가톨릭이 운영하는경향신문·경향잡지가 총동원돼 선거운동을 벌였다. 제헌의원이 된 장면은 첫번째 주요 임무인 ‘유엔에서의 한국 승인’을 받아낼 때도 가톨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다.당시 국내에는 친한파인 패트릭번 신부가 교황사절(바티칸이 국교를 맺기 전에 파견한 대사)로 있었다. 장면이 출국인사차 번 신부를 찾아가자 그는 파리주재 교황대사와 유럽·중남미의 가톨릭국가 대표들에게 보내는 소개장 10여장을 건네주었다.이 소개장은 파리에서 큰 효력을 발휘한다.한국을 몰라 냉담하던 이들이 소개장을받고나서는 앞장서서 다른 나라 대표들을 인사시켜줄 정도로 적극 협력했다. 장면은 훗날에도 주위사람들에게 이때 일을 자주 이야기하며 고마워했다. 한편 이승만(李承晩)은 나름대로 장면과 노주교의 관계를 이용했다.이승만은 장면에게 유엔대표단장·주미대사·총리 등 중책을 맡길 때마다 노주교를불러들여 상의하는 형식을 취해,장면으로 하여금 거절하지 못하도록 미리 쐐기를 박았다.이러한 삼각관계는 장면이 52년 4월 총리를 그만둘 때까지 계속된다. 장면이 제헌의원-주미대사-총리-부통령을 단계적으로 밟아 결국 제2공화국정부를 맡은 정치가로 성장한 바탕은 물론 그 자신의 능력과 성실함이다.그러나 가톨릭 세력의 끊임없는 지원이 큰 보탬이 된 것도 사실이다. 장면 자신의 정치형태 또한 신앙인의 자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장면내각에서 총리 공보비서관이었던 송원영(宋元英)은 “종교인으로서 성실의 원칙을정치에 적용하려 했으며 소위 정치적인 권도(權道)나 거짓말을 이용하는 일을 거의 생리적으로 배척했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장면의 정치활동도 가톨릭의 테두리 안에서 끝났다.5·16쿠데타가 일어나자그는 수녀원으로 도피,쿠데타가 기정사실로 굳어진 뒤에야 그곳에서 나왔다. 수녀원에 있던 55시간동안 장면은 누구보다도 고뇌했을 것이다. 세월이 어느정도 흐른 어느날 민주당 신파의 장경순(張慶淳)전의원이 수녀원에서 지낸 시간에 관해 조심스레 물었다.장면은 “정치인과 종교인이라는 갈림길에서 정말 고민했다.결국 종교 쪽으로 결정했다.정치를 택했다면 (쿠데타군과 진압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서울시민의 희생이 컸을 것이다.권력을빼앗겼다거나 무능한 정치인이었다는 낙인은 감내하기로 했다”고 말했다고한다. 이용원기자
  • 칭찬해요-기업은행 종로6가지점 金相燁 섭외반장

    칭찬을 아끼지 말자.우리는 칭찬에 인색하다.좋은 일을 보더라도 당연하다는 듯 지나치기 일쑤다.대개는 무관심 탓이다.칭찬은 또다른 선행을 낳는다. 칭찬은 사회의 중요한 활력소다.칭찬이 많은 사회는 건강하고 인정이 넘친다. 독자들의 추천을 토대로 칭찬받을 만한 사람들을 발굴해 소개한다. 기업은행 종로6가지점 섭외반장 김상엽(金相燁·43)과장.동대문시장 골목을 훑다시피 돌아다니며 고객들을 만나는 김씨는 은행원의 ‘표상’이라 할 만하다. “바쁘게 돌아가는 시장에서 뻣뻣하게 앉아 고객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려서는 안되죠” 김과장은 고객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달려간다.출근도 남들보다 1시간일찍 한다.고객들의 삶터인 상가는 그의 사무실과 마찬가지다.그가 방문하는 상점은 하루 70여곳이나 된다.그저 인사만하고 지나치지는 않는다.원단이나 액세서리 가게에 가면 물건을 정리해주고 상자도 날라준다.배달도 마다하지 않는다.고객들의 일이라면 자기 일처럼 발벗고 나선다. 지난해 8월 종로6가지점으로 전근을 온 김과장은 오자마자 300여개의 음식점이 밀집해 있는 동대문상가 앞 ‘먹자골목’으로 찾아갔다.식당에서 손님에게 음식을 날라주고 배달도 거들어 주었다.콩나물 다듬기,마늘까기 등 온갖 궂은 일을 도왔다. 한달만에 고객 100여명을 확보했다.억척스러울 정도로 성실한 태도에 상인들도 감동한 것이다. 김과장은 ‘움직이는 출장소’로 통한다.은행에 갈 시간이 없는 상인들에게서 돈을 받아 은행에 입금시킨 뒤 통장을 돌려준다.이런 서비스를 받는 고객만 80여명에 이른다. 고객 박귀복(朴貴福·44·숯불갈비집 운영)씨는 “상인들 모두 그의 성실함에 감탄하고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벨트·지갑 상점을 운영하는 이춘휘(李椿徽·61·여)씨는 “하루에도 몇번씩,공휴일에도 찾아와 항상 웃는얼굴로 친절히 도와준다”면서 “온 국민이 그처럼 열심히 뛴다면 우리나라는 잘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은행에서 받은 상만 하더라도 50개가 넘는다.지난 10월에는 최다 포상자에게 주는 ‘기은 최고왕’으로 선정되기도 했다.사내 연수원과 한국금융연수원에서는 마케팅 강사로도 뛰고 있다. 그는 “남들과 똑같이 일한다면 결국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면서 “어려울때일수록 포기하지 말고 두배로 뛰어야 한다”고 말했다. 주현진기자 jhj@
  • 崔銀亨씨 “뇌성마비 딛고 당당한 학사모”

    “미생물을 이용해 오염된 토양을 정화하는 분야를 계속 연구해 토양정화전문가가 되고 싶습니다” 선천성 뇌성마비를 불굴의 의지로 극복,오는 26일 99학년도 서울대 학위수여식에서 값진 학사모를 쓰게 된 농업생명과학대 산림자원학과 崔銀亨씨(22·경기 시흥시 정왕동). 崔씨는 뇌성마비로 팔,다리가 불편하고 언어장애도 있지만 자신있는 태도로 졸업 소감을 또박또박 얘기했다. 지난 95년 부천고를 졸업,산림자원학과에 입학한 崔씨는 4년 내내 수원캠퍼스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공부에 몰두했다.특히 언어장애 때문에 말이 느리고 발음이 불분명해 어려움을 겪었지만 성격이 워낙 활달하고 낙천적이어서 대학 4년간 다른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잘 어울릴 수 있었다. 군에서 전역한 뒤 학교 생활을 함께해온 같은 과 선배 朴炳培씨(27)는 崔씨가 “술자리에서 동료들과 공부 및 삶에 관해 대화하는 것을 즐긴다”면서“자신이 장애인임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감있게 사는 모습이 아름답다”며崔씨의 등을 두드렸다. ‘대기오염 피해를 받은 오리나무류에서 채취한 종자의 발아’라는 崔씨의졸업논문을 지도한 李敦求교수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경기도 여천 공단과수원을 오가며 졸업논문을 준비하는 열정에 감탄했다”면서 “앞으로 훌륭한 학자가 될 재목”이라고 학문적 재능과 성실함을 칭찬했다. 全永祐 ywchun@
  • 이런사람이 대접받는 사회-철도청 구로사무소 차장 任班圭씨

    “시민들이 제시간에 고향에 갈 수 있다면 제 임무는 다하는 거지요” 설 연휴를 이틀 앞둔 12일 오전 5시30분.대부분의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깜깜한 새벽.철도청 구로열차사무소 차장 任班圭씨(45·구로구 오류2동)는 어김없이 전동차 앞에 섰다.전철 1호선 전동차의 안전을 점검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전동차 80량의 문이 제대로 열리고 닫히는지를 시험해 본다.방송 시설도 점검한다.시민들의 안전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소홀히할 수 없다. 81년 기능직 10급으로 철도청에 들어왔다.기차표를 파는 역무원에서 화물열차 수송원까지 철도와 관계된 일이라면 안해본 게 없다.하루에도 수십번씩열차를 타고 내려야 하는 수송원 시절에는 열차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치기도 했다.성실함을 인정받아 철도청장상을 받기도 했다. 88년 전동차의 안전을 책임지는 차장으로 승진했다.몸에 밴 ‘부지런함’은어쩔 수 없어 한 차례 지각도 없었다.동료들은 그를 ‘악바리’로 부른다.승객들이 많이 몰리는 시간에는 안전 운행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복잡할 때일수록 안전에 유의하면서 제시간에 승객을 모시는 것이 차장의가장 큰 임무입니다” 시간과 박봉에 쫓기면서도 任씨는 11년째 장애인을 위해 자원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자원봉사대 ‘부름의 전화’에서 장애인들이 외출할 때 발이 되어 준다.손가락조차 움직일 수 없는 장애인들을 병원,동사무소,은행 등에 데려다 준다.지금까지 도움을 준 장애인은 수백명에 이른다. 任씨는 “생각보다 장애인들은 밝게 살아가고 있다”면서 “이제는 장애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바뀔 때”라고 말했다.
  • 정치개혁과 여성 참여/李春鎬 여성유권자연맹 회장(서울광장)

    지난 7·21 보궐선거는 이상한 선거였다.여야 서로가 이겼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승리는 광명 을의 全在姬다.싸운 상대가 누구인가. 그녀는 빗자루 시장이라는 성실함과 참신함으로 정치거물과 무서움없이 당당하게 대결하였을 뿐 아니라 여성들에게 정치판에서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준 ‘희망의 패배’를 거뒀다.그녀는 비굴하지도 않았다.그래서 지고도 많은 박수를 받았다.“여성은 여성을 찍지 않는다” “여성은 정치에 적합하지도 않고 정치를 해서도 안된다”는 정치판의 잘못된 믿음도 한 방에 날려보냈다. 7월을 살맛나게 해준 또한 사람의 여성이 있다.朴세리다.IMF의 긴 터널속에 갇혀 짜증나고 힘들었던 여름밤을 시원하고 통쾌하게 보낼 수 있는 의욕과 희망을 4개의 우승컵에 담아 건네준 깜직한 여성이다.물가에 떨어진 ‘위기의 볼’을 탈출시키기 위하여 새까맣게 타버린 근육질의 종아리 밑에서 양말을 벗는 순간 나타난 새하얀,작고 연약한 소녀의 발을 보았는가.우리는 그녀를 통해 세계적으로 구겨진 자존심을 회복하고 거짓없는 기쁨을나누었다. ○살맛나게 한 ‘7월의 여인’ 서양인과 남성의 전유물인 골프채를 들고 있는,나이어린 세리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하면 된다는 것이다.여성과 남성의 영역이 따로 없고 용기와 투지와 판단력을 갖고 최선을 다할 때 승리는 내 것이 된다는 교훈을 남긴 시원한 7월이었다. 8월의 정가에 개혁바람이 불고 있다.그러나 정권교체 이후에도 바뀐 것이 없다는 비판적 민심이 일고 있는 것을 볼 때 과연 이런 정도 바람으로 국민이 원하고 국민을 기쁘게 하며 국민을 위한 개혁정치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또한 야당인 그대들은 진정 토니 블레어를 아는가.그는 통찰력과 비전,그리고 자신의 삶을 도려내는 노동당의 밑둥치기 개혁을 실천함으로써 영국인의 신뢰 속에서 행동하는 젊은 지성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떤 개혁의 바람이 불어야 하는가.첫째,개혁의 비전과 청사진이 먼저 제시돼야 한다.즉 국민과의 진실된 약속이 아름답게 열매를 맺는 그런 그림을 우리는 원하고 있다.둘째,개혁의 주체세력은 과연 누구이어야 하는가.IMF시대를 극복하고 깨끗한 정치,화합하는 정치,평등한 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정치적 비전과 함께 가슴에 사랑을 지닌 사람이어야 한다.따라서 정계개편은 솎아낼 사람은 솎아내고 건강한 새싹을 심는 인적 개혁을 할 때 성공할 수 있다. 셋째,선거제도의 개혁이다.이 문제는 국회의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운명이 걸린 것이기 때문에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국민회의는 독일식 정당명부제를,한나라당은 중·대선거구제를 주장하고 있어 타협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두 당의 주장을 합친 중·대선거구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제시한다.이렇게 되면 지역감정을 타파하고 사표를 방지하며 소수그룹의 목소리가 반영되는 평등한 정치가 실현되지 않을까. ○현위기는 반쪽정치 유산 이러한 전 과정에 다수이면서도 늘 소수로 취급당해온 여성의 참여는 시대적 사명이라는 것을 이젠 정치권도 알았을 것이다.남성만이 참여한 반쪽 정치의 유산이 오늘날의 경제위기와 정치무관심을 가져왔다. 이젠 여성이 나서야 한다.우리는 7월의 그 무더운 여름밤을 두 여성 때문에 얼마나 통쾌하고 시원하고 행복하게 보냈는가.이렇게 준비된 여성들이 도처에서 국가를 위해 기다리고 있다.세리에게 남성의 전유물인 골프채를 잡게 했듯이 여성에게 국회의 의사봉을 두드리게 할 때 우리의 삶은 편안하고 행복하게 될 것이다.세리의 자신감 넘치는 스윙에서 그리고,全在姬의 미래정치를 여는 희망의 패배에서 밝은 정치의 그날이 가까워오고 있음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다.
  • 아!… ‘아래아 한글’(朴康文 코너)

    나는 89년 세운상가 4층 러브리소프트라는 가게에서 ‘한글’을 샀다. 개발자 이찬진씨한테 어디서 파느냐고 천리안 전자우편으로 물었더니 이곳을 일러 주었다. 그 때 그는 남의 소유인 이 가게의 한켠에 작은 책상 하나를 놓고 5.25인치 디스켓 다섯 장에 든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 ‘한글’을 팔았다. 그는 대학노트를 펴고 기다란 일련번호 다음에 구입자 주소 성명을 모나미 볼펜으로 적은 뒤 1번 디스켓 레이블에 그 번호를 써 주었다. 그와 말을 나눈 것은 이 때를 앞뒤로 하여 두어 번밖에 되지 않는다.그는 수줍음을 타는 편이었는데 겸손하고 성실한 젊은이라는 인상을 주었다.그런 그가 뒷날 화려하게 날개를 펴고 한글과컴퓨터라는 회사의 사장이 되어 한국의 빌 게이츠로 날아오를 줄은 그 때 짐작도 하지 못했다. 그는 내가 외국에 나가 있게 된다는 것을 알고는 출국할 때쯤에 새 버전이 나올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그 해 여름 새 버전으로 바꿔 미국에 가서 잘썼다.그의 성실함에 끌려 ‘프로그램의 이러이러한 점은 저러저러하게 고쳤으면 좋겠다’고 꽤 긴 편지를 서울에 보내기도 했다. 미국서 잠시 함께 지내던 국어학자 서 아무개 교수도 나와 마찬가지로 ‘한글’사랑에 빠진 이였다.세종대왕 이후의 최대 업적이라고 극찬했다. ‘한글’이야말로 한글 워드프로세서라고 할 만한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었다.이것이 나옴으로써 컴퓨터에서 한글이 비로소 제대로 살아 빛을 뿜었다.이찬진씨에게 훈장을 주어야 한다는 서 교수의 말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나는 ‘한글’이 처음 나올 때부터,그 뒤 여러 번의 업그레이드를 거쳐 이제까지,10 년 동안 써 왔다.내 머리 속의 생각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글로 짜여 나왔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글을 읽었다. 이찬진,그가 빛나는 한국의 빌 게이츠가 되리라는 것도 몰랐지만, 그가 자신의 분신이라 할 ‘한글’에 스스로 사형선고를 내리는 날이 오리라는 것은 더더욱 상상할 수 없었다. ‘한글’을 사랑하는 마음은 나 같은 이보다야 그자신이 몇 백 갑절 더할 것이다. 고민도 많았으리라. 그를 생각하면 죄책감,허탈감이 밀려 온다. 우리가 누린 만큼 그에게 제대로 보답했는가.우리 잇속만 챙기고 그의 고민을 외면하지 않았는가.사실 여러 번의 버전업이 있었지만,내가 정품을 구입했던 것은 두 번 아니면 세 번밖에 되지 않는다.컴퓨터를 사면 하드 디스크에 이미 설치된 경우가 있어 굳이 따로 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배신감도 한편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른다.그 길밖에 없었는가.자신이 만들기는 했지만,또 비록 그것이 돈벌이가 안된다지만,이제 국민적 자산이 된 ‘한글’을 버릴 수 있는가.자기 ‘아이’를 버리기로 하고 2,000만 달러를 빌 게이츠에게서 얻다니. 소프트웨어 불법복제가 성행하고 정품이 팔리지 않는 풍토를 그가 원망하지만, 이름없는 청년을 오늘의 그로 자라게 한 밑거름은 초기에 싸지 않은 값을 치르고 정품을 구입한 사람들이 뿌렸다. 초기의 겸손을 잊은 것이 오늘이 사태의 원인일 수도 있다. 이제,자꾸만 그가,영혼을 판 파우스트처럼 보이니 슬프다.무너지는‘한글’의 신화가 가슴 아프다.
  • 청와대 수석 3명 교체/정무수석 李康來/정책수석 金泰東

    ◎경제수석 康奉均/안기부 기조실장 文喜相 金大中 대통령은 18일 청와대 정무수석에 李康來 국가안전기획부 기조실장을 임명하고 文喜相 정무수석을 안기부 기조실장으로 전보하는 등청와대 수석비서관 일부를 교체했다. 金대통령은 또 정책기획수석과 경제수석의 자리를 맞바꿔 정책기획수석에 金泰東 경제수석,경제수석에 康奉均 정책기획수석을 임명했다. 金重權 청와대비서실장은 이날 “金대통령은 안기부 1,2차장과 기조실장이 모두 호남출신이라는 지적에 따라 기회가 있으면 시정하겠다는 뜻을 밝혀왔다”고 지적하고 “이번 인사는 그같은 시정조치의 일환”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金실장은 “청와대 진용의 후속 개편은 없을 것”이라면서 “다만 청와대수석비서관들의 자리이동에 따라 산하 비서관 일부의 이동은 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얼굴/李康來 새 정무수석/일처리 꼼꼼한 ‘DJ 밀사’ 金大中 대통령이 처음부터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마음에 두었을만큼 신임이 두텁다. 야당총재 시절부터 내밀한 정치적 심부름을 많이 시켰다.지난 대선때도 선거전략과 기획수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안기부 기조실장으로 임명된 뒤에도 개혁과 북풍(北風)파문 해결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일처리가 꼼꼼하고 한번 맡긴 일은 끝까지 해내는 성실함이 돋보인다.정치적으로는 철저한 실용주의자. ▲전북 남원(45) ▲명지대 ▲서울대 행정대학원 박사 ▲국민회의 정책연구실장 ▲아태재단 선임연구위원 ▲국민회의 총재특보 ▲안기부기조실장
  • 제임스 먼로(美國의 대통령 문화:18)

    ◎‘먼로 독트린’ 천명… 미 외교정책 기틀 확립/재임전 국무­전쟁장관 자격 영과 전쟁서 승리/성실과 결단력으로 재선… 평화­번영시대 열어 【프레데릭스버그(美 버지니아주)=羅潤道 특파원】 미국의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1817­1825)는 1823년 유럽 열강으로부터의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간섭 배제를 천명한 ‘먼로 독트린’을 통해 신생 미합중국의 독자적 외교정책 기틀을 확립한 것으로 유명하다. 독립전쟁의 영웅으로 독립초기 신생국의 체제정비에 심혈을 쏟았던 버지니아왕조의 막내이자 건국세대(Founding Fathers)의 마지막 대통령을 역임한 그는 두차례 임기 내내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특히 그는 신생국가로써의 국내외적 불안정을 씻고 평화와 번영을 가져온 ‘호감의 시대’(Eraof Good Feelings)를 전개시켜 미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준 대통령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학중퇴 독립전쟁 참전 영국으로부터 독립의 기운이 무르익던 1758년 버지니아주 웨스트모어랜드의 개척농 아들로 태어난 그는 총명했으며 16세 되던 해에윌리엄스버그에 있던 당시 버지니아 식민지의 최고 명문이던 윌리엄&메리 대학에서 수학했다.그러나 2년후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대륙군 소위로 참전,뉴욕전투,저먼타운전투 등에서 용맹을 떨침으로써 특진을 거듭,1778년 전쟁이 끝날때는 계급이 중령까지 올랐다. 특히 먼로는 당시 버지니아 주지사 토머스 제퍼슨(3대 대통령)에 의해 남부 미군의 현황파악을 위한 연락관으로 임명받아 활약했으며 이후 줄곧 제퍼슨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전쟁이 끝난후에는 제퍼슨의 지도로 변호사 시험에 합격,프레데릭스버그에서 개업했다.제퍼슨과 먼로의 우정은 16년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죽을때까지 계속됐다. 이어 먼로는 1782년,24세의 약관에 버지니아 주의회 의원으로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으며 이듬해에는 대륙회의 의원으로 선출돼 3년간 활약한뒤 잠시 정계를 떠나 변호사일에 주력했다.그러나 1790년 연방 상원의원에 진출,제퍼슨,매디슨(4대 대통령)과 함께 민주공화당을 결성,알렉산더 해밀턴의 연방주의당에 맞섰다. 그는 프랑스와 영국주재 대사를 맡는등 외교관으로 활약했으나 이렇다할 결실은 거두지 못했다.1794년 초대 워싱턴 대통령에 의해 프랑스대사로 임명돼 프랑스와의 관계강화에 노력했으나 프랑스혁명 신봉자인 그의 노골적인 친프랑스 언동은 워싱턴의 분노를 사게돼 2년만에 소환되고 말았다.그는 다시 1803년 제퍼슨 대통령에 의해 영국대사로 임명됐으나 역시 본국정부 의도와 다른 무역협상을 벌임에 따라 다시 소환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후에 먼로는 제퍼슨에 의해 루이지애나 식민지 구매협상 대표단장으로 프랑스에 파견됐다.1천500만달러에 당시 미국영토 2배에 달하는 영토를 구매토록하는 협상을 나폴레옹과의 담판에서 성사시킴으로서 협상력을 과시했다.또 매디슨에 의해 국무장관에 임명된 그는 1812년 영국에 선전포고,전쟁에 돌입했다.그러나 워싱턴이 함락되는등 전세가 불리해지자 자신을 전쟁장관에 임명해줄 것을 요청,국무와 전쟁 겸임장관이 된 그는 탁월한 지휘역량을 발휘,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전쟁이 끝난후 매디슨 행정부 말기는 전례없는 평화와 번영을 누리게 됐고 그 주역인 먼로의 인기는 치솟았다.대사로 프랑스·영국을 오가는 사이사이에 두차례 버지니아 주지사를 역임한 경력도 갖춘 그는 자연스레 민주공화당의 대통령후보로 1816년 선거에서 당선,매디슨의 뒤를 잇게 됐다. 59세에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어느 대통령보다도 다양한 공직경험을 갖추고 있었으며 거기서 생성된 그의 정치감각은 탁월한 각료 임명으로 나타났다.국무장관 존 퀸시 애덤스(6대 대통령),전쟁장관 존 칼훈,재무장관 윌리엄크로포드,법무장관 윌리엄 워드 등은 지성적이고 뛰어난 능력과 함께 단합이 잘돼 환상의 진용으로 평가됐다.더우기 먼로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과 굳센 결단력은 모든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했다. 먼로는 남부와 서부 등을 광범위하게 여행하며 국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그의 인기는 더욱 치솟아 1820년 실시된 두번째 선거에서는 232표중 231표를 얻어 만장일치로 당선된 조지 워싱턴에 이어 최다 득표로 재선되는 기록을 세웠다. 먼로는 퇴임후 리스버그의 오크힐에서 거주했으나경제적 어려움으로 고통을 겪었으며 5년후 부인 엘리자베스가 죽자 뉴욕의 딸 집으로 옮겨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 1831년 7월4일,73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퇴임후 곤궁… 사저 매각 먼로의 유적으로는 현재 프레데릭스버그의 박물관,사저이던 샬롯빌의 애쉬론,리스버그의 오크힐 등이 보존돼 있다.변호사 사무실이 있던 건물에 들어선 박물관은 먼로독트린을 초안하던 책상 등 다양한 유품들이 진열되고 있다.또한 애쉬론 사저는 퇴임후 경제난으로 팔았던 것을 1931년 박애주의자 제이 존스가 구입,일반에 공개했다.1974년 존스 가족은 그의 모교인 윌리엄&메리 대학에 이를 기증,이 대학이 박물관과 함께 관리하고 있다. 먼로는 제퍼슨,매디슨과 매우 가깝게 지냈으며 특히 제퍼슨은 자신의 사저인 샬롯빌의 몽티첼로 인근에 ‘지적공동체’(intellectual community)마을의 설립을 위해 이들을 모여살도록 권고,애쉬론을 먼로에게 소개했으며 매디슨의 사저 몽펠리에도 이 부근에 있다. ◎먼로 지명/도시·학교·산·교회 등 238개/워싱턴·링컨과 함께 도시지명 ‘빅3’ 【프레데릭스버그(美 버지니아주)=羅潤道 특파원】 미국의 도시들은 역대 대통령의 이름을 딴 지명들이 많다.신대륙으로의 이주자들이 정착,새 도시를 건설할때마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대통령이나 위인들의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먼로 지명은 워싱턴,링컨과 함께 미대통령 가운데 도시명으로 가장 많이 쓰인 ‘빅3’로 알려져 있다. 워싱턴 지명이 49곳으로 가장 많고,링컨은 45,먼로는 44,제퍼슨은 41 순으로 나타나 있다.이 숫자는 미자동차협회(AAA)가 최근 발행한 ‘로드 아틀라스’에 나타난 지명을 기준으로 한것이기 때문에 산·강·호수 등 자연의 이름과 학교·역 등 공공기관의 이름까지 합하면 실제로 대통령 이름이 사용되고 있는 경우는 훨씬 많다. 먼로박물관이 펴낸 먼로 지명 연구 책자인 ‘먼로,USA’에 따르면 미국내 ‘먼로’가 들어가는 지명은 모두 238개에 달한다.그리고 미국 해방흑인들이 세운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의 수도 ‘먼로비아’와 남극해의 먼로섬 등 미국 밖에도 존재한다. 미국내 50개주중 36개주에 흩어져 있는먼로 지명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도시이름으로 26곳이 있다.인구 40명인 노스 다코타주의 소읍에서부터 인구 5만5천인 루이지애나주의 먼로시까지 다양하다.우리의 군에 해당하는 카운티 이름은 모두 18곳으로 인구 9천명의 미주리주 먼로카운티에서 인구 71만명의 뉴욕주 먼로카운티까지 그 규모가 제각각 이다. 먼로 지명이 가장 많은 주는 오하이오로 35곳이 있고,다음은 인디애나 23,일리노이 19,미주리 17,아이오와·펜실베이니아 13,버지니아 11 순을 기록하고 있다.자연지명으로는 강·호수명 10곳,산 6,숲 2,협곡 2,다리·전망대 1곳 등이 있고 교회 7곳,학교 3곳 등도 있다.
  • 고야마 니혼게이자이지 편집위원 칼럼 요지(해외논단)

    ◎경영윤리 세워야 기업이 산다 총회꾼에 대한 불법 이익제공 등으로 야마이치증권이 문을 닫게 됐으며 나아가 일본 경제계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다.기업들의 윤리 확립은 일본은 물론 한국 등 금융 위기를 겪는 국가들의 경제 회복을 위해 매우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니혼 게이자이신문의 고야마 편집위원은 기업윤리 확보를 위한 기업 개조의 결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다음은 요약-. 비지니스와 윤리는 양립하지 않는다라는 미국인의 생각은 요즘 빠르게 엷어지고 있다.그 계기가 된 것은 91년 시행된 기업 등 조직범죄를 대상으로 하는 ‘미국 양형(양형‘) 가이드라인(U.S.Sentencing Guidelines)이다. 재판관의 판결 기준을 명확히 한 것이지만 동시에 범죄방지 노력도 장려하고 있다.예를 들면 기업이 부정방지를 위해 사내의 윤리관리에 힘을 기울이면 부정사건 발생시 이를 참작해 감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올해 10월 미 텍사스주 샌 안토니오에서 열린 유력기업 경영윤리담당자 전국대회는 기업 윤리의식의 변화를 느끼게 해주었다.이대회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은 ‘integrity(성실함,정직)’였다.비지니스 용어로는 소박한 단어이지만 비지니스의 원점은 결국 여기에 있다는 인식을 미국 기업들이 깊이갖게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21세기에는 필수 조건 즉 기업은 이제부터 21세기에 걸쳐 살아 남고 번창하기 위해서는 환경 보전등과 함께 ‘경영 윤리의 준수’가 불가결의 조건이라는 점을 깊이 명심해야 하는 사회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기업들은 경영윤리 준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첫째 최고 경영자의 강력한 리더십 아래 윤리담당 임원을 임명한다. 둘째 윤리문제를 끊이지 않고 체크하는 수 명의 스태프로 이뤄진 윤리 오피스를 설치한다. 셋째 비윤리적 행동을 취하지 않도록 사원들에게 호소하고 사원 윤리교육을 조직적으로 반복해서 실시한다. 델라웨어대학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미 포천지 매상 상위 1천개 기업 가운데 54%가 윤리담당 이사를 두고 있으며 30%의 기업이 윤리 오피스를 갖고 있다.사원에 대한 윤리교육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 기업은 87년 28%에서 97년 50%로 늘어났다. ○조직 구조 바꿀 결단을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사는 일찍이 61년 ‘이익보다 윤리적으로 바른 행동을 우선한다’는 윤리강령을 작성했다.사업의 급속한 확대와 해외전개에 동반해 기업 가치관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본기업들은 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은가. 우선 최고 경영진은 경영윤리의 준수가 기업존립의 조건으로서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해진다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한 뒤에 윤리적 행동을 취하기 쉽게 기업 조직구조를 바꾸는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 지금 최고 경영자로서 요구되는 것은 ‘개인으로서 뛰어난 윤리관을 갖고이를 공사의 장에서 언행일치로 보여주면서 사원과 충분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라는 지적은 일본 기업에도 그대로 맞는 말이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사내 윤리규정이 있다는 기업은 43%지만 도움이 된다는 것은 불과 17%에 지나지 않았다.경영윤리를 준수하기 위한 시책이 실효성이 있도록 하려면 형식적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바로 알 수있는 명시적인 것이 돼야 한다. 또 기업에 경영윤리를 준수하도록 하는데 효과적인 것은 사회가 ‘사탕과 채찍’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담합,뇌물 주고받기,총회꾼에 이익제공등의 범죄를 범한 기업과의 거래 정지나 불매 등으로 경영윤리에 반하는 행동은 결국 커다란 손실을 가져온다는 것을 몸으로 알도록 해야 한다.기업도 사회의 서브시스템(하부조직)인 이상사회의 윤리와 무관하지 않다.
  • 서울대 모의대선유세 풍자·해학 가득

    ◎“새벽에 법안통과… 성실한 후보” 자찬에/“더이상 보기 싫으면 찍어달라” 호소도 23일 하오 2시 서울대 도서관 앞.200여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모의 대통령 선거 유세장은 현실 정치에 대한 풍자와 해학으로 가득찼다. 기호 1번 신환국당 신구룡,기호 2번 궁민회의당 김대충,기호 3번 민독정당 오민중 후보가 출마했다.「아무러케나」 선관위측은 유세장 옆에 「표 계산은 주최측에 의해 조작될 수 있다」는 개표원칙을 적은 대자보를 내걸었다. 신후보는 「구관이 명관」이라는 구호 아래 『모두가 잠든 새벽에도 법안을 통과시킬수 있는 성실함의 소유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그는 한보사건을 빗대 『대선때 비자금을 대주던 기업 하나가 무너져도 아직 다음 대선때 쓸 자금정도는 충분히 남아있다』고 자랑,청중들의 야유를 받았다. 이어 등단한 김후보는 『부패정치의 원인은 장기집권이고 네번째 도전은 역사의 명령』이라고 말문을 열었다.이어 『이번에 표를 주지 않으면 다음에 또 나오겠다』고 「으름장」을 놓은뒤 『더이상 나를 보기 싫으면 이번 대선에 꼭 찍어 달라』고 호소했다.김후보는 『북한 동포들은 일도 우직하게 잘하고 근로자의 임금도 남한의 5분의 1정도 밖에 안되니 남북 경제협력을 확대해 북한 주민에게 일자리를 주자』고 역설하기도 했다. 마지막 연사로 나온 오후보는 『두자리수 물가인상,떨어질 줄 모르는 집값 등으로 서민 경제가 허덕이고 있다』면서 보수정치 혁파를 주장했다.또 독점재벌 해체,안기부법·국가보안법 철폐,국민소환 및 파면권 보장 등을 공약으로 내걸어 많은 박수를 받았다. 희망자에 한해 투표를 한 결과 오후보가 30표를 얻어 신후보(4표)와 김후보(9표)를 누르고 당선됐다.
  • 검사의 충고(외언내언)

    한 현직검사가 띄운 PC통신이 작은 화제를 불렀다.그는 이 통신에서 『한총련이 백만 대학생조직의 대표조직이지만 그 주동자는 북한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20∼30명에 불과하다』는 실상을 밝혔고 그들에 이끌려 『사회의 소금이자 희망』인 학생이 현혹되지 말 것을 일깨우고 있다. 「검사가 대학 신입생에게 주는 글」인 이런 글을 우리는 일찍이 만나본 일이 없다.대학생의 지도를 직접 맡고 있는 현직교수도,그 많은 지식인도 외면하는 것이 이런 글이다.주사파 이론으로 무장한 호전적인 집단의 공격에 상처입을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검사이므로 겁이 없어서 그런 글을 보낸 것일까.그러나 그들에게 그런 일을 해야 할 의무가 없다.안해도 그만이다.그래서 더욱 어른스러워 보인다. 어려운 대학입시의 관문을 뚫고 대학에 들어온 학생이 『선배의 일방적인 학습을 받고 충동적으로 행동하다 구속돼 전과자로 낙인찍히는 일이 안타까워』 이런 통신을 띄웠다고 그는 말한다.바로 그 대목이 우리는 고맙다. 전과자로 낙인찍히는 것에 끝나지 않는다.학생이 어떤 「조직」에 의해 주입된 이 운동권 바이러스에 한번 이환되면 약물중독처럼 헤어나지 못한다.공부는 시답잖아지고 세상의 모든 일은 부정적으로만 보인다.극렬하게 조장된 투쟁의지로 폭력시위의 전사가 되는 일에 생애의 뜻을 두게 된다.성장기의 인격이 이렇게 바람든 무처럼 황폐화하여 온당하고 건강한 지식이나 체제를 거부하는 체질이 되어가는 것은 커다란 불행이다. 그런 불행과 만나는 것은 검사의 말처럼 대개가 신입생시절이다.백지의 순수함과 왕성한 호기심이 빨아들인 왜곡된 지식에 의해 평생을 그르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누군가 이런 일을 미연에 막아주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그런 역할을 공안을 담당한 검사가 했다는 것은 설득력 있는 일이다.그래도 용기와 성실함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사려깊은 한 사람은 수백명도 못할 일을 해낼수 있다.학부모면 누구나 고마워할 일이다.모든 사회구성원이 높이 평가할만한 일이기도 하다.
  • 오인환 공보 「최장수 장관」 기록 눈앞에

    ◎4년1개월 제임… 「대통령과 함께 임기」 첫 각료될 듯 오인환 공보처장관이 5일 단행된 개각에서 또다시 유임됨으로써 김영삼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하는 장관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당연히 현정부 들어 최장수 장관의 기록도 계속 깨나가고 있다.현정부 퇴임장관들의 모임인 광화문 클럽의 회원이 이미 140명이 넘는 점을 감안한다면 단연 군계일학의 기록이다. 오장관은 93년 2월 문민정부 출범이후 한자리를 지켜온 유일한 각료.4년1개월에 이르는 재임기간은 과거 4년7개월 동안 문화공보부장관을 지낸 홍종철씨에 이어 역대 두번째다. 이에 따라 그가 5년을 채우면 정부수립 이후 대통령과 임기를 함께 한 유일한 장관이 되는 동시에 최장수장관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그가 총리가 6명이나 바뀌는 전면개각과 잦은 보각속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것은 두말할 나위없이 김대통령의 두터운 신임 때문이다.언론인 시절부터 김대통령과 남다른 친분을 유지해 왔고 9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정치특보로 참여,당선에도 한 몫을 해 김대통령의 오장관에 대한 신임은 각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를 가까이서 지켜보아온 공보처 관계자들은 그의 업무추진능력도 장수의 이유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지역민방과 케이블TV 허가 등 이권이 걸린 2차례의 방송관련 정책을 무리없이 수행,별다른 잡음이 일지않은 것만해도 높은 점수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오랜 재임기간에도 불구하고 타성에 젖지 않는 성실함과 몸을 아끼지 않는 추진력을 발휘한 것이 장수의 비결이 됐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오장관은 문민정부 초기부터 특유의 업무추진력과 소신있는 일처리로 신뢰를 쌓아왔고 문민정부의 개혁논리를 전파하는데도 앞장서 행동으로 실천했다.대통령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앞서가며 일을 처리해 가는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주변의 평가이다.그는 국회에서도 소신있는 답변으로 의원들을 설득하는데도 정평이 나있다. 오장관도 평소 『그동안 사심없이 한 눈 팔지 않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왔다』고 말하곤 한다.이날 유임이 확정돼 또다시 기록을 세우자 그는 『남은 1년을 지나온 4년보다 더 열심히 업무에 임하겠다』고 의욕을 보였다.
  • 사시 수석 합격 황승화씨/“공정한 법적용에 노력”

    『법을 공정하게 적용하는 훌륭한 법조인이 되겠습니다』 20일 발표된 제38회 사법시험에서 수석합격의 영예를 안은 황승화씨(28·서울 관악구 신림7동 673의 61).그는 합격조차 장담하지 못했는데 수석이라니 더욱 믿어지지 않는다며 기뻐했다. 94년 서울대 공법학과를 졸업.지난 92년 한차례 낙방한 후 올해 두번째 도전에서 수석을 차지했다.평균 63.95점. 황씨는 『꾸준히 노력한 것 외에 특별한 비결은 없다』며 『스터디그룹을 만들어 매일 함께 문제도 풀고 주제를 정해 발표와 토론을 한 것이 큰 힘이 됐다』고 소개했다. 스터디그룹 8명 중 시국사건 전력 때문에 3차 면접시험에서 탈락한 오기형씨(30)를 제외하고 7명 모두 합격했다. 부산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중·고교를 마친 그는 아내 최은미씨(27)와 9개월된 딸이 있다.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남긴 고 조영래 변호사를 가장 존경한다는 황씨는 『공정한 법집행을 할 수 있는 검사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사시 최고령 합격 박구진씨/“흔들리지 않는 법조인 될터” 『전셋집을 전전하며 고생한 아내와 아이들에게 합격했다는 소식을 알려줄 수 있게 돼 기쁩니다』 제38회 사법시험에서 최고령으로 합격한 박구진씨(43)는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말없이 지켜봐 준 가족들에게 영광을 돌렸다. 전남 강진 출신으로 2남5녀 중 장남.지난 83년 결혼한 부인 김봉입씨(41)와의 사이에 1남2녀를 두고 있다.고려대 경영학과 재학 중 학생운동을 하다 제적·복학·감방생활 등 순탄치 않은 대학시절을 보냈으며 입학 11년만인 84년 졸업했다. 국회의원 이상수 변호사 사무실에서 지난 93년 7월까지 사무장과 노동문제 상담을 담당하기도 했다. 박씨는 마흔살이던 93년 6월 막내딸이 태어난 것을 계기로 마음을 다잡고 사직서를 제출,신림동 「문창고시원」에 파묻혀 공부해왔다.세살난 딸을 업고 지리산을 종주할 정도로 등산을 좋아한다. 박씨는 『눈앞의 이익에 흔들리지 않는 소신있는 법조인이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사시 최연소 합격 최경희씨/“소신있는 검사되도록 노력” 『고생하신 부모님께 영광을 돌립니다.소신 있는 검사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시 최연소합격의 영광을 차지한 최경희군(21·서울대 공법학과4)은 『생각보다 빨리 합격해 너무 기쁘다』고 겸손해 했다. 최군은 지금까지 일생의 행로를 결정짓는 큰 시험에서 쓰라린 고배를 마셔본 적이 거의 없는 행운아.대학 2학년때 사시 1차시험에서 한번 떨어졌을 뿐이다.등촌초등학교∼백석중∼여의도고교를 거쳐 지금까지 잠시도 성실함을 잃지 않은 학구파로 꼽힌다. 가끔 친구와 어울려 당구를 치거나 전자오락실에서 오락을 즐기는 등 「평범한」 대학생활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최군은 서울 구로소방서 소방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아버지 최순용씨(46)와 어머니 이인순씨(41)의 1남1녀중 맏이. 최군은 『검찰권이 적절하게 행사되지 않고 있다는 국민의 따가운 비판에 감안,소신 있는 법조인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야무진 꿈을 밝혔다. ◎사시 여성최고령 합격 이선희씨/“도와주신 가족에 영광을” 『민권이와 헤어져 공부하는 것이 제일 힘들었어요.도와주신 시부모님과 남편에게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제38회 사법시험에 최고령 여성으로 합격한 이선희씨(36·군포시 산본동 롯데아파트 932동204호)는 지난 89년 김준씨(37·국회입법연구관)와 결혼,아들 민권군(6)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 가정주부다. 『30살이 넘어서 공부를 하려고 하다보니 실용적인 분야를 택하게 됐어요.처음에는 환경대학원에 들어가 환경분야를 다룰 생각이었으나 이과분야는 너무 생소해 법학을 하게 됐습니다』 서울대 국사학과 출신인 이씨가 고시준비를 처음 시작한 것은 2년전부터. 1년동안 모교인 서울대에서 청강을 듣기도 하고,선후배들에게 물어가면서 개념정의를 했다.준비를 한지 1년만에 1차에 합격했다.지난해 2차에 낙방을 한뒤 학교후배들의 소개를 받아 그룹스터디를 하면서 꾸준히 노력해 결국 최고령 여성합격의 영광을 거머쥐었다.
  • 표식문화의 중요성(사설)

    도로표지판(표식판)이 알아보기 쉽게 고쳐진다.크기도 키우고 재질도 고급화하여 선명하고 멀리까지 보일 수 있게 한다고 한다.잘된 일이다. 그동안의 우리 표지판은 불만스러운 부분이 많았던 게 사실이다.불친절하고 무성의하고 인체공학같은 것이 참작된 흔적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어서,표지판만 믿고 길을 찾는 일은 생념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고쳐질 표지판이 그런 불만을 해소할 수 있다면 다행스러울 것이다. 기왕의 표지판이 이렇게 불신을 받아온 원인은 성실함과 충분한 연구의 부족이었다고 생각한다.한번이라도 그 길을 운전해본 사람이면 발견할 수 있는 약점이나 맹점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듯한 표지판이 수두룩했다. 이런 현상은 우리사회가 지닌 전반적인 부실성과 관련이 깊다.전문가나 운전을 하던 시대에는 어느 정도의 생략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그러나 지금은 아마추어가 차를 몰며 고속도로를 누비는 시대다.미처 그런 시대에 대비하지 못한 표지문화의 정책이 오늘 같은 현상을 만든 셈이다. 현대는 표지판문화가 사회생활을 주도한다.그러므로 표지판은 길을 찾는 일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신뢰도를 재는 척도이기도 하다.단순히 문자를 모르는 사람만이 아니라 표지판해독을 못하는 사람도 「문맹」인 것이 오늘의 사회다.게다가 표지판이 소화할 일이 날로 늘어가는 시대다. 따라서 표지판은 시민교육의 중요한 수단이다.시민을 위한 사회교과서의 구실을 해야 하는 것이 표지판문화인 것이다.그런 뜻에서 표지판제작담당자는 교과서를 만드는 성의와 정성으로 임해야 한다.읽어도 설명 안되는 표지판은 곤란하다.선진사회가 갖는 특징이 『표지판만 잘 읽으면 안되는 것이 없는 사회』임을 상기해볼 일이다.지나칠 만큼 자상하고 반복적이다.그런 표지판문화에 접근하는 기회이기를 기대한다.
  • 한·일 민간대화채널 위상 확고히/도쿄 제4차 「한일 포럼」 결산

    ◎미래지향적 협력관계 구축 필요성 공감/무역역조 시정 방법론엔 양측 큰 시각차 제4차 한·일포럼이 지난 4일부터 7일까지 도쿄와 아오모리현에서 열렸다.이번 포럼은 개회식에 이어 ▲한국과 일본의 국내정세 ▲동북아시아의 안전보장과 한·일관계 ▲아시아·태평양에 있어서 한·일 경제관계 ▲한·일 협력의 확대 ▲한·일 문화관계 향상의 방안등 모두 5개 분야로 나누어 논의가 진행됐다. 한·일포럼은 기본적으로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솔직한 의견교환을 위한 것이다.배재시,오와다 히사시 양측 공동의장은 지적인 성실함과 건설적인 솔직함이 논의를 심화시켜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참석자들의 예방을 받은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는 『60년대 첫 한국방문시 식민지 지배가 한국민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음을 느꼈다』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미래지향적 한·일관계 구축의 필요성」을 강조해 동감을 이끌어냈다.이케다 유키히코 일본외상은 개회식 강연에서 한국의 대북한 정책의 일관성 부족 등을 솔직하게 지적하기도 했다.한·일간 공식적인 회합에서 견문하기 쉽지 않은 태도였다.또 토의에서도 참석자들은 상대방을 놀라게 할 만큼 자유로운 개인적 견해들을 밝히기도 했다. 아직 한·일간에는 복선과 오해의 벽,조심스러움 등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지만 포럼이 회를 거듭하면서 착실하게 대화의 광장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평가였다. ▷양국의 국내정세◁ 한국측에서는 지난 총선결과와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의 재판등에 대해 설명했다.일본 참석자들은 재판에 대한 한국민의 여론등에 대해 관심을 표명했다. 일본측 발표자는 일본이 혼돈과 혼미 그리고 불확실의 시대에 처해 있다는 자가진단을 제시했다.체제는 경직돼 있으며 이 모든 것은 리더십 부재에 기인한다고 비판한 이 발표자는 새로운 체제,정치가 요구된다고 말했다. ▷동북아안보와 한·일관계◁ 일본 자위대의 방위력 증강등에 대한 한국측의 우려 섞인 발언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오히려 한·일간 적극적인 안보협력이 바람직하다는 과감한 「개인의견」이 제출돼 일본측을 놀라게 했다. 안보관계 토론에서 눈에 띈 것은 일본과 북한의 접촉에 대해 한국측의 강력한 경고 메시지가 전달됐다는 점.한국측은 과거 동서독 통일 전후의 일화 등을 소개하면서 일본이 신중하게 대북접촉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경제·문화·국제무대에서의 협력관계◁ 한·일간 경제협력이 강화되면 안보협력으로도 연결돼 동북아지역의 안정에 기여할 것이라는 의견이 많이 제시됐다.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중국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는 한·일간 인식의 차이가 느껴졌다.한·일간 무역역조의 시정에 대해 일본측이 정부의 개입이 축소균형을 가져온다면서 시장의 원리에 맡기자고 주장한 반면,한국측은 「시장 실패의 가능성과 무역역조의 공공성」을 들어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을 촉구했다. 마지막으로 일본측은 2000년 월드컵축구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협력위원회 구성을 제의했고 한국측도 동감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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