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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라나다/알함브라 궁전(아랍서 지중해까지:11)

    ◎스페인 최후의 이슬람궁… 신비 가득/나자리왕조가 13∼14세기 건설… 빼어난 건축술­정교한 세공에 숨막혀 그라나다의 구시가 산타 안나 교회앞에는 세 갈래의 길이 있었다. 『알함브라?』 그러자 수염이 텁수룩한 신부님이 긴 소매 속에서 나온 창백한 손으로 언덕길을 가리켰다.세월과 사람들의 발걸음에 닦이어 빤질빤질 윤이 나는 언덕길에서 흘러내리는 빛의 물살이 다리를 휘청거리게 했다.어디서 어떻게 모습을 드러낼지 모르는 알함브라의 신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길 양쪽으로 늘어선 옛날 집들은 지난날의 비밀을 삼킨 채 그 작은 창문들을 조가비처럼 닫고 있었다.오!벽이 익혀온 시간의 열매들이여. 1층의 연쇄상점들 앞을 지나노라니 캐스터네츠소리가 따다따다 귀를 즐겁게 했고,어둠침침한 어느 상점 안에서는 집시풍의 옷을 입은 여인이 부채로 일으킨 바람을 깊숙이 팬 앞가슴 사이로 밀어넣고 있었다. 휘어진 언덕길 끝에 울창한 삼나무숲 사이로 뚫린 또다른 길이 포개질 듯 기다리고 있었다.서늘한 바람이 계곡속에 숨어 있는 여울물소리를 실어왔다.그 소리가 구르는 듯한 기타 선율로 바뀌면서 알함브라의 슬픈 역사에 젖어들게 했다. ○이사벨여왕에 패퇴 알함브라는 「붉다」는 뜻으로 그라나다 동쪽 언덕에 위치한 무어족의 귀족행정도시의 이름이었다고 한다.13세기에 나자리왕조의 시조인 알 아마르가 자신의 왕궁을 그곳에 지음으로써 그것이 찬란한 알함브라역사의 시초가 되었다.주건물의 대부분은 요세프1세(1353∼1391년)와 그의 아들 모하메드 5세시대에 지어졌고,부분장식들은 레콩키스타(7세기부터 이베리아반도에 유입해온 회교도들이 점거하고 있던 국토를 기독교도들이 되찾기 시작한 운동)의 폭풍에 휘말리면서도 계속되었다.미구에 떠나야 할 것을 예감했기에 왕들은 자신들의 자취로서 아름다움을 그 땅에 영원히 심으려 했다. 이사벨여왕과의 싸움에서 패한 최후의 왕 보아부달은 왕궁을 떠나 시에라네바다의 험준한 고갯길에서 궁전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한편 이 왕궁을 접수한 기독교도들은 그곳을 예배당으로 활용하는 한편 이사벨여왕의 손자인 카를로스5세는 궁전안에 르네상스양식의 또다른 궁전을 건축했다.이를 두고 그라나다 출신의 명상시인 가르시아 로르카는 「알함브라궁전은 자신의 내부에 카를로스5세가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했다. 경사가 가파라질수록 길은 삼나무숲 깊숙이 파고드는 듯 하더니 갑자기 하늘이 파랗게 열리는 곳에 붉은 성벽과 「심판의 문」이 우뚝 솟아 있었다.말발굽모양의 아치에는 코란 5계명을 나타내는 손가락이 조각되어 있었다. 알히베스광장에 쏟아져내리는 햇빛은 눈부시다 못해 얼어붙는 듯 소름이 끼쳤다.짙은 나무그림자에 돌바닥이 검게 패어 있었다.검은 고양이 한마리가 제 몸보다 더 검은 그림자를 끌고 카를로스5세 궁전 담밑을 따라 모퉁이로 사라졌다. 성채·왕궁·정원·여름별장으로 분리해서 파는 입장권 4장을 샀다.그리고 먼저 궁전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첫관문인 메사르홀로 들어섰다.이곳은 기독교도들이 접수한 뒤 예배당으로 활용되면서 기독교식 건축물로 개조되어 본래의 모습이 많이 파괴되었으나 아랍식 문양이 정교하게 세공된 대들보만으로도 그 빼어난 솜씨에 도취되기에 충분했다. 왼쪽의 아치문을 지나 아리야네스(천인화)중정으로 들어갔다.장방형의 긴 못이 중앙에 있는 안달루시안 아랍식 안뜰.속세와 차단된 묵중하고도 투명한 정적이 감돈다.하늘·도금양나무·뜰을 둘러싼 건물의 아치문과 기둥들이 수조의 조용한 물속에 잠겨 행복하고도 덧없는 꿈에 취해 있다.빛과 그늘까지도 그 행복한 꿈에 녹아들어 있다.무엇이 이 꿈꾸는 물의 성채를 침범할 수 있을까.문은 모두 열려 있으나 들어갈 방법을 알지 못하는 세계. ○중앙엔 사자상 분수 왕의 접견실인 대사의 방과 코마레스탑에서 라이온궁전으로 발길을 옮기노라니 등뒤에서 어떤 문이 닫히는 느낌이었다.마치 누군가 되돌아갈 길을 막아버리는 것 같았다. 촛대처럼 가느다란 1백24개의 대리석 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는 장방형 회랑으로 들어섰다.햇빛이 눈을 시리게 하는 뜰의 중앙에 열두마리의 사자에게 둘러싸인 하얀 대리석 분수에서 물줄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이곳은 오직 왕 한사람만 드나들 수 있는 하렘이었다.건물 2층에는왕의 후궁들이 거처했다. 그 옛날 왕족인 아벤세라헤스가문의 한 남자가 하렘의 여자에게 접근한 것이 발각되어 목이 잘린 뒤 그 목이 방의 중앙 분수대 위에 놓여져 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사자의 분수대까지 흘러왔다고 한다. 회랑천장의 정치한 세공으로부터 간신히 눈길을 돌려 자매의 방에 들어섰을 때였다.숨이 턱 막히는 현란한 아름다움 속에 깊숙이 갇혀버리는 것 같았다.벽을 따라 천장까지 미끄러져 올라간 눈길 끝에는 신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실 난 이러한 아름다움과의 대면을 두려워해왔다.릴케의 「비가」 중에는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가까스로 견딜 수 있는 무서움의 시작에 불과하므로/우리가 아름다움을 그토록 찬미함은 파멸하리만큼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파르탈정원을 뒤로 하고 처녀의 탑 앞에 이르른 나는 더이상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회랑에 놓여 있는 의자에 주저앉았다.마음 깊은 곳에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여기 이 자리에서 나이팅게일의 노래를 들으며 생을 마감해도 좋으련만…나에게 있어 알함브라와의 만남은 깊은 상처로 남겨졌다.호텔로 터덜터덜 돌아가 다시 너절한 일상과 마주할 일이 버겁기만 했다. 5월3일,지도조차도 던져버리고 혼자서 호텔을 나섰다.알함브라궁전의 코마레스탑에서 바라본 건너편 산기슭의 하얀 동네를 찾아갈 참이었다.그곳은 아랍인 거주지역으로서 길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어 이방인은 길을 잃기가 십상이라고 한다.일을 저질러보려는 내게 그 미로는 너무나 매혹적인 구실이었다. 택시는 나를 산 니콜라광장에 내려놓고 돌아갔다.조약돌이 다닥다닥 박혀 있는 뜰의 돌벤치에 앉아 관광기념품을 팔고 있는 집시아주머니가 캐스터네츠를 치며 다가왔다.그녀에게서 캐스터네츠 치는 법을 10분쯤 배우고 나서 하나를 샀다. 광장에서 건너다 보이는 알함브라궁전의 전경이 슬프도록 아름다웠다.시에라 네바다산의 눈 덮인 흰 능선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궁전을 감싸고 있었다.서양남자가 광장 한켠에서 이젤을 세워놓고 그 전경을 화폭에 담고 있었다.축대를 걸터듬고 앉아 알함브라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한시간 남짓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친듯이 미로 헤매 니콜라교회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간 곳에 카르멘이라는 정원을 가진 고급저택이 있었다.우체통구멍으로 들여다본 그 집의 파티오엔 핏빛처럼 붉은 칸나꽃이 가득했다. 벽과 벽 사이의 좁은 미로에서 아랍인의 혼이 스며나와 내 손을 잡아끄는 듯했다.이곳의 옛주민들은 레콩키스타로 그라나다가 기독교인들에게 함락되었을 때 최후까지 저항하여 흰 벽과 돌길이 붉은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방향을 알 수 없을만큼 미로 깊숙이 들어온 듯했다.혼자뿐인 길 위에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려왔다.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다보았다.흑단처럼 검은 머리를 반듯하게 빗어넘기고 검은 진바지에 흰 티셔츠 차림의 여성이 저만큼서 걸어오고 있었다.무심히 바라본 그녀가 지난밤 넵튠이라는 극장식 타블라오에서 만난 플라멩코 무희라는 것을 알아본 순간,나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여러 무희들 중에서 오직 그녀만이 나를 사로잡았다.그녀의 춤에서는 격정과 비애가 동시에 교차하고 있었다.폭발하듯 솟구치는가 하면 검으로 자르듯 끊어지며 다시 폭발하고… 어느 순간 나는 저 춤속에 빠져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그것이 그라나다에서 경험한 두번째 마음의 죽음이었다. 그녀가 내 앞에까지 걸어왔다. 『잠깐,당신은 무용수지요』 그녀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어저께 당신의 춤을 봤어요.나는 플라멩코에 대해 아는 것이 없지만 깊이 매혹됐어요.특히 당신의 춤에』 『고맙습니다』 그뿐 우리는 더이상 할 말이 없었다.그녀를 붙잡는 대신 나는 다른 미로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얼마쯤 가노라니 마음이 미어지는 듯 아팠다.몸을 돌이켜 다시 그 장소로 달려가보았으나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사방으로 뚫려 있는 미로 가득히 닫혀 있는 문들뿐이었다.미친듯이 미로를 헤매었으나 나는 어느 문을 두드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눈을 가린 채 손을 맡기고 어디론가 따라가던중 갑자기 손을 놓아버린 것이다.왜 그랬을까.하지만 여행이 끝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녀를 찾고 있다.그녀의 이름은 스텔라다.
  • 6세기 신라/경기북부까지 통치

    ◎강남대 한국학연,포천 반월산성 발굴통해 확인/신라식 석성… 황룡사와 같은 기와 출토/궁예축조설 반전,삼국영토 연구 새자료 삼국의 각축이 한창이던 6세기에 신라는 이미 오늘의 경기 북부지역까지를 장악한 것으로 밝혀졌다.이는 강남대 한국학연구소가 단국대와 한국교원대의 협력을 얻어 발굴한 경기도 포천군 포천읍 구읍리 청성산(해발 285·5m)반월성유적을 통해 확인되었다.조사결과 반월성은 궁예(?∼918년)가 쌓았다는 구전과는 달리 삼국시대의 신라계 산성으로 판명되어 당시 삼국의 영토연구는 물론 성곽연구의 귀중한 자료들을 제시했다. 이 산성은 청성산 정상에 가까운 해발 245∼280m의 능선을 따라 축조된 테뫼식 산성.지난 6월부터 7월말까지 실시한 1차조사에서 둘레 1천80m,동서길이 4백90m,남북 1백50m의 길죽한 반원형 석축산성으로 가려냈다.이 산성은 주변을 공격제압할 수 있는 자연지형을 갖춘데다 청성산 자락을 휘감고 지나는 구읍천,포천천,하성천 등의 3개하천이 해자구실을 했다.그래서 천연의 요새에 자리잡은 산성이라 할 수있다. 이번 조사에서 성과 관련한 시설물로 성문자리 2군데,치성(성벽에 붙어서 바깥쪽으로 돌출된 공격장소)4군데,건물지 6군데,망대터 2군데를 찾아냈다.이밖에 우물 및 수구터 각각 2군데,성벽위를 따라 순찰하는 회곽과 보도시설을 확인했다.특히 성벽 전체를 10m씩 모두 1백8구간으로 나누어 조사하는 과정에서 경주 출토품과 같은 특이한 기와를 발견,반월성이 신라계 산성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 기와의 특징은 미구(기와가 서로 맞물리게 내밀어진 부분)에 무늬가 있다는 점이다.반월성에서 수습된 이들 평기와의 미구에는 수키와와 암키와에 통틀어 여러 형태의 줄무늬가 들어있다.막새기와의 초기형식으로 보이는 이같은 기와류의 출토 예는 경주 황용사와 석굴암 절터,안압지 임해전 터에서 나온 유물에서 찾아진다.조사단은 이들 두 지역의 기와유물을 근거로 반월성을 6세기 신라계 산성으로 결론을 내리기에 이른 것이다. 이 성은 주로 화강암을 잘 다듬은 규격재로 축조했다.급경사지역은 유단식 성벽쌓기 방법을 채택,급경사에서 빚어지는 성벽의붕괴를 방지한 한편 활모양으로 곡선을 이룬 성벽 부분도 아직 남기고 있다. 이 반월성에 대해 동국대 이기동교수(한국고대사)는 『신라의 한수이북 공략은 AD550년 이후에 가능했기 때문에 그 이전은 고구려가 한수 이북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우선 전제하면서 『신라가 포천까지 진출한 것은 아마도 5세기 후반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그 이유는 북한산(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진 AD553년 무렵만해도 고구려가 압박해올 경우 신라는 한수 이남 광주지역(경기도 하남시)으로 퇴각한 사실을 상기시켰다.그리고 이교수는 역사시록에 이 산성이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을 들어 후세 사람들이 문학적 상념을 떠올려 지은 이름이 반월성일 것이라는 의견을 덧붙였다.
  • 이스탄불/보스포루스 해협(아랍서 지중해까지:7)

    ◎동·서양 분기점… 이질문화 한품속에/이스탄불시를 양분… 기독·이슬람교 격전의 역사 간직 보스포루스. 탁한 암록색 물빛의 길이 30㎞,폭 0.6∼3㎞의 좁은 해협,그것은 바다라기보다 강에 가깝다.어원을 보더라도 Bous(ox:황소) Poros(ford:여울),황소여울이다. 제우스와 여사제 이오(IO)는 연인사이다.아내 헤라의 집요한 추적을 비켜나보려고 제우스는 이오를 황소로 변하게 한다.헤라는 그 사실까지도 눈치채고 등에를 이용하여 황소로 변한 이오를 괴롭힌다.황소는 괴로움에 못이겨 근처의 여울 속으로 뛰어드는데…이오가 몸을 던진 물이 바로 보스포루스다. 이 해협은 터키 최대의 도시인 이스탄불을 동양과 서양으로 갈라놓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유럽을 분할하는 분기점이기도 하다. 한 도시가 동양과 서양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동양과 서양이라는 대칭적 이질문화를 하나의 품속에 끌어안고 있는 이스탄불은 어떤 도시일까? 이스탄불에 도착하자마자 떠오르는 궁금증이 그것이었다.「내가 지금 아시아에 있는가,유럽에 있는가?」 지도를 입수함으로써 그 궁금증은 싱겁게 풀리는가 했는데…사실은 그게아니었다. ○부를 나르는 물길 보스포루스 서안 돌출부에 그리스의 메가리아인들이 비잔티움 도시를 세운 것은 BC660년이었다.그들은 집터를 정하기 전에 점술가에게 물어보았다.「눈먼 사람들이 사는 땅의 반대편에」라는 대답을 듣고,그들은 보스포루스 서안 일대를 탐사하던중,경관이 빼어난데도 불구하고 거주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아름다운 터를 발견했다.그때 해협 건너편 땅엔 마케도니아인들이 이미 부락을 이루어 살고 있었으므로,메가리아인들은 이렇게 풍광이 수려한 땅을 몰라본 저들이 바로 「눈먼 사람들」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따라서 자신들이 발견한 곳이 바로 점술가가 점지한 땅이라고 확신하며,그들은 도시를 세웠다. 그것이 바로 해협을 사이에 두고 동양과 서양이 나누어지게 된 시초였다. 그후 비잔티움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에게 점령되었다가 알렉산더대왕이 페르시아를 패퇴시켜(BC334)아나톨리아를 장악함으로써 다시 그리스의 영토로 귀속되었다.대왕의 사후,맹주들에 의해 통치되던 비잔티움은 BC278년 갈라티아인들의 공격에 무릎을 꿇었고,그뒤 마케도니아인들을 쳐부순 로마제국의 출현으로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황제 셉티무스는 비잔틴문화를 재건한다는 기치를 내세우고 도시를 둘러싼 성벽을 확장하고,소피아성당 주변과 도로를 정비했다.뒤이어 왕위를 계승한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고 새 수도의 이름을 콘스탄티노플ㅈ라 했다.황제는 트로이의 영화를 재현한다는 포부를 세우고 성벽을 서쪽으로 2.8㎞나 확장하고,자신이 그리스도교인임에도 이교도들의 사원을 보수하는 한편 소피아 성당을 대대적으로 넓혔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동양과 서양이 격돌한 것은 14세기 중엽이었다.발칸에까지 진출하여 위세를 떨치던 오스만튀르크제국은 메흐메트 2세가 즉위한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고 이곳에 「이슬람교도가 많은 도시」라는 뜻의 이스탄불이란 새 이름을 붙였다. 그후 이스탄불은 오스만제국의 수도가 되어 이슬람문화권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19세기에 들어서 오스만제국이 쇠퇴함에 따라 이스탄불은 또다시 발칸을 둘러싼 열강들의 분쟁지가 되었다.1차 세계대전때 독일편이었던 터키는 패전후 1918년까지 연합군의 통제를 받던중,케말 아타튀르크의 혁명으로 새 공화국이 탄생되기에 이르렀다. 중앙아시아의 회교국가로서 자주권을 선언한 뒤에도 터키는 유럽공동체의 항구적인 회원이 되기 위해 노력해왔다.한국전쟁중에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고,1952년에는 그들의 막강한 군사력 때문에 NATO의 회원국으로 영입되었다.냉전이 종식되자 터키는 걸프전때 연합전선을 펼쳤던 NATO로부터 차갑게 되면당했다. 보스포루스는 과거에도,오늘날에도 이스탄불과 터키에게 막대한 부를 실어다주는 푸른 물길이면서,동시에 그들의 역사앞에 항시 하나의 질문으로 존재해왔다. 「우리는 아시아에 속하는가,유럽에 속하는가?」. 그리고 그것은 보스포루스를 통과하는 여행자인 나에게까지도 역사와 무관한,정신의 뿌리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자 확인으로,이스탄불을 떠날 때까지 마음속에서 맴돌았다.엘레신 호텔. 4월20일 이스탄불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열흘 남짓 뜨거운 사막에서 지내는 동안 증발되었던 마음의 물기가 일시에 되살아났다.여로의 쓸쓸함,애달픔.몸이 으스스 떨리면서도 비릿한 비냄새,축축한 바람이 싫지 않았다. 차가 마르마라 해안에 있는 예쉴쿄이 국제공항을 벗어나 유럽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동안,나는 마음속으로 주머니를 불룩하게 만든 터키의 리라화를 가늠해보고 있었다.1달러에 2만9천리라,1백50달러에 4백35만리라.방금 떠나온 요르단 디나르화에 비해 끗수가 네자리나 더 많아진 것이다. ­이걸로 혹시 보스포루스 해협이 굽어보이는 언덕 어디쯤 오스만 시대에 지은 작은 집 한채 정도 살수 있지 않을까. ○구로동 골목 연상 그러나 차창 밖으로 휙휙 스쳐가는 노변풍경은 나를 황당한 공상에서 깨어나게 했다.겉만 말끔했지 상자곽처럼 보이는 저층의 아파트들,그 사이사이에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석탄더미,고철더미,그리고 산비탈에 빽빽이 들어찬 우중충한 가건물들.그것은 비잔티움이나 오스만이 연상시키는 고풍스런 우아함과는 거리가 아주 먼,어딘지…. 『여기는 서울의 구로동하고 흡사하군요』. 익살이었지만 S씨의 그 말은 활기찬 고도 이스탄불의 속얼굴,오늘의 터키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함축하고 있었다. 회교국들 중에서 최초의 여자 수상이 된 탄슈 칠레르는 취임과 동시에 터키국민들에게 호소했다. 『우리는 더이상 걷지 않을 것입니다.우리는 이제부터 뛰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이끄는 정부는 국내외로부터 밀려오는 거센 도전에 시달리고 있었다.인플레,일자리를 찾아 이스탄불·앙카라·이즈미르등 대도시로 밀려드는 유민들,구소련의 붕괴이후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이웃 회교국들의 무력증강,10년이 넘도록 계속되어온 쿠르드족 분리주의자들과 게릴라전 등등. 아마도 우리는 3박4일의 짧은 일정에 쫓기는 여행자들로서는 이스탄불의 「구로동」을 이런 식으로 스쳐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터키인들이 게체콘두(밤에 지어졌다는 뜻.오스만법에는 밤에 짓기 시작해서 동틀때 완성된 집은 아무도 부술수 없다고도 함)라고 하는 그 집들은 이스탄불 중심가에서 불과 45분거리밖에 안되지만 관광객들이 흔히 지나다니는 길목으로부터 그 얼마나 먼 동네인가. 어느새 창변 풍경이 바뀌고 있었다.안개 자욱한 보스포루스 바다,갈매기떼의 환영을 받으며 항구로 입항하는 크고 작은 선박들,그 너머로 붉은 지붕에 흰 벽의 그리스풍 건물들,백양나무숲,돔과 미나레트들이 어우러진 환상적인 스카이라인이 펼쳐졌다.가슴이 뛰기 시작했다.사해의 짜디짠 물맛이 이제는 꿈이 된 반면,꿈이었던 이스탄불이 현실이 된 것이다. 호텔 엘레신은 신시가 베이올루의 중심지인 탁심 뒷거리에 있었다.이웃에 있는 마르마라나 셰라톤 호텔에 비하면 작고 보잘것없는 시설을 갖춘 곳이었다. 숙박계를 쓰고 604호의 키를 받아든 순간이었다.이스탄불이라는 미지를 해독할 수 있는 최초의 사인.저울의 추처럼 생긴 키를 받아듦으로써 나는 마음을 스쳐간 환영의 무게를 손에 느꼈다.머나먼 장안에서 비단을 싣고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타슈켄트,카라쿰,자그로스산맥을 넘어서 바그다드,그리고 마침내 이스탄불에 당도한 옛대상.동양과 서양,기독교문명권과 이슬람문명권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격돌의 현장.이곳의 이니셜은 저울과 추 일법했다. ○이니셜 “저울과 추” 짐을 방으로 옮겨주려고 로비에 나타난 포터.옛 술탄의 왕자같이 수려한 용모.아마도 그는 전생에서 너무나 놀고 지냈기 때문에 차생에서 남의 무거운 짐을 옮겨주는 일을 하게 되지나 않았는지? 원도어식의 자그마한 승강기가 음악을 싣고 내려왔다.허밍으로 멜로디를 쫓고 있는 사이에 승강기가 멈추었다.문을 열고 복도로 나오자,우리는 복도끝의 전면 거울속에 그림자처럼 담겨 있었다.갑자기 시간이 겹으로 느껴졌다.그리고 내 앞에 나타난 미지의 문.열려라,참깨! 짙은 청색 시트로 덮여있는 가지런한 트윈 침대,하얀 반투명 커튼,머리맡에 놓인 하얀 갓전등…창가로 가서 커튼을 열어본다.오래된 건물의 옥상에서 하얀 비둘기 한마리가 빗속을 가로질러 어디론지 날아간다.맞은편 건물의 지붕밑 방에는 오래전에 사람의 인적이 끊긴듯 책상과 의자 하나가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채 놓여있다.아니다.다시 보니 머리 까만 계집아이가 혼자서 마룻바닥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공깃돌 놀이를 하고있다.창밖엔 비가 내리고 있다. 꿈을 꾸는 것일까.분명히 몸은 여기 있는데,의식은 전생을 살고 있는 것 같다. 『너 화장실에 좀 들어가봐.비눗곽이 참 예쁘다』 등 뒤에서 날아온 K의 목소리에,맞은편 건물의 빈 방에서 계집아이가 얼굴을 돌리고 이쪽을 바라본다.
  • 뛰어난 축성술(백제를 다시본다:18)

    ◎토성 쌓는 판축기법 5세기에 발달/진흙·마사겹겹이 다져… 노동력 절감/통일신라에 전수… 일본에도 전해져/후기 들어 돌·흙 함께 사용… 안팎겹쌓기 등 공법 다양화 백제는 처음 창례성에 도읍하였고,이어서 하남창례성 혹은 한성을 도읍으로 하였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이처럼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했던 때가 서기 5세기 후반기까지 였다.이후 웅진(오늘날 공주)과 사비(오늘날 부여)를 도읍으로 삼았다.어떤 학자들은 오늘날 익산지역에 별도를 경영하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신라가 줄곧 한 곳에서 도읍했던 것과는 달리 백제는 외세의 압력에 의하여 도읍을 옮기곤 했다.국가성립기에는 이웃한 낙낭군과 말갈이라 불리던 세력에 의하여 도읍이 불타는 경우도 있었다.또 한군현을 몰아낸 뒤에는 고구려와 대치한 상황에서 백제는 축성을 통해 방어력을 향상시킬 필요성이 컸다.그런만큼 한성시기의 백제가 잦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력을 키우려 축성을 해 온 것은 곧 백제의 성장과정인 동시에 발전과정이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늘날 한강과 임진강유역에 자리잡은 여러 옛성터들은 백제가 국가로서 성장하던 과정에서 축조된 것들이 대부분이다.그 중에서도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은 가장 규모가 큰 중심적인 것으로서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다.이러한 강안에 위치한 성들은 주변의 산 위에 있는 성들과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커다란 방어망을 형성하였다고 여겨지고 있다. ○잦은 외침에 대비 백제가 고구려의 대대적인 남침에 의하여 한강유역을 내놓고 새로이 마련한 도읍이 웅진이었다.지금의 공산성이 그것으로 후대의 보수와 개축이 있었음에도 백제 도읍지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그러나 공주에서 공산성의 외곽인 시가지까지 나성을 갖춘 새로운 형식의 도성제도가 있었는지는 학자간에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 계획된 천도에 의해 서기 6세기 전반에 마련된 사비도성은 산에 의지한 산성과 거기서 뻗어내려 온 시가지를 감싸고 도는 나성을 마련함으로써 우리나라 성곽 발달에 있어 커다란 발전을 이룩한 것임이 확인된다.이러한 나성을 가진 도성제도는 고구려의 경우 장안성을 쌓은 6세기 중엽의 일이었다.어쩌면 산성과 평지성인 나성을 결합한 도성제도는 백제인에 의해 처음 고안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백제의 경우 산성에 시가지를 둘러싼 나성을 가진 뒤에도 그 외곽에 또다른 산성을 쌓아 이중·삼중의 방어망을 구축한 도성제를 바탕으로 번영하였다.그러나 오히려 이렇게 굳건한 방어망이 백제인들에게 안일한 믿음을 가지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 후세에 남긴 교훈이기도 하다. 백제의 성곽들은 신라나 고구려에 비하여 흙으로 켜쌓기하는 이른바 판축의 기법으로 축조한 것들이 많다.본디 이 판축기법은 중국에서 일찍이 발전된 것이다.일정한 구간을 나누어 기둥을 세우고 구간마다 칸을 마련하여 진흙과 마사토를 교대로 부어가며 길다란 대나무로 일일이 다져쌓는 것이었다. 백제에 있어서는 최근에 조사된 여러 개의 성들에서 이러한 공법으로 축조된 성벽이 많이 확인되었다.특히 처음에는 다지다가 차츰 바닥의 고르기를 일정하게 만든뒤 구간 사이에 돌로 가장자리를 쌓아 기단을 만들어 그 위를 판축하는 특유의기술이 공산성이나 부여의 나성,그리고 지방의 커다란 성들에서 확인되고 있다. ○공산성등서 확인 한편 백제 후기에 이르면 돌로 성벽을 쌓는 안팎겹쌓기(내외겹축)와 바깥면을 돌로 수평잡아 굄쌓기를 하고 안쪽을 돌부스러기와 흙으로 채우는 방법(외축내탁)이 확인되고 있다.축조기법의 다양한 발전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던 것을 알려주고 있는 대목이다.이처럼 발전된 축성술은 백제가 멸망한 다음 통일신라로 이어지고,한편으로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고대성곽의 원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먼저 백제의 판축기법은 거의 그대로 통일신라로 이어졌다.신라는 돌로 겹쌓는 방법이 대부분이었으나 백제의 판축기법을 받아들여 낮은 위치나 험하지 않은 산성에 그대로 적용했다.후대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흙으로 쌓는 성은 돌로 쌓는 성보다 공사비가 약 3분의 1밖에 소요되지 않는다고 한다.적은 노동력으로 훨씬 크고 웅장한 성을 쌓을 수 있는 이 공법이 점차 확산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이러한 추세는 더욱 후대에까지 이어졌다.고려시대 주요한 지역에 축조된읍성들은 거의 전부 판축공법에 의해 축조되었다.또 조선왕조의 도성이었던 한양도성도 처음에는 많은 부분이 흙으로 쌓아졌으며 세종 때에야 돌로 대치되었던 것이다. 한편 백제의 축성기술은 직접적으로 일본에 건너갔다.일본의 가장 오랜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7세기 후반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국도를 함락당한뒤 많은 유민들이 일본에 건너가 대마도와 일기·축자에 방어병력과 봉수대를 배치하고 수성을 쌓았다고 하였다.또 서기 665년8월에 달률(백제의 제2관등) 답발춘초를 보내어 장문국에 성을 쌓게 하고 역시 달솔 억례복류와 사비복부를 보내어 축자국의 대야·연이라는 두 성을 쌓았다고 하였다.오늘날 대마도에 남아있는 가네다(김전)성과 규슈에 있는 오노조(대야성)·미즈키(수성)·기이조 등은 모두 이 시기에 백제인이 주축이 되어 축조한 것으로 일본에서는 특별사적으로 관리되고 있다.이 성들의 축조에 백제의 지배층이 관련되고 있다는 기록은 현재 성곽의 배치관계와 축조기법 뿐만 아니라 거기서 출토되는 그릇조각이나 기와조각이부여에서 보는 것과 동일 하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일본서기에 기록 일본의 고대성곽 가운데 가장 긴 학술적 논쟁을 거친 것으로 고고이시(신총석)란 것이 있다.이는 우리나라의 산성과 동일한 것으로 계곡부분은 돌로 벽을 만들고 성문과 수구문을 두었으며 대부분의 성벽은 돌로 된 기단위에 판축의 토루로 구성되었다.수십년간 이것을 놓고 성역설과 한국식 산성설로 논란을 거듭하다가 발굴조사에 의하여 산성임이 확인되었다.이의 축조연대는 아직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그러나 백제의 축성술이 주축이 되고 신라와 고구려 계통의 영향도 받아 이룩된 우리나라 성곽의 연장임은 우리보다 일본의 학자나 일반인들이 더 잘 알고 있는게 사실이다. ◎백제성곽 유적/한강·금강유역에 많이 남아/풍납동 토성·부여산성등이 대표적 백제시대 성곽은 당연히 도읍지였던 한강유역과 금강유역에 집중적으로 남아 있다. 풍납동 토성은 서울 강동구 천호대교 아래쪽에 남아 있는 평지토성으로 그 둘레가 4㎞에 이른다.현재 동쪽 성벽에는 몇 군데 성문 터가 남아 있으나 한강에 면한 성벽은 거의 유실됐다.이 토성을 백제 초기 도읍인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몽촌토성은 현재 올림픽공원 안에 있다.목책 유구와 토성 외곽에 하천을 파고 한강물을 끌어댄 해자의 흔적이 발견되어 하남위례성의 주성,곧 궁궐이 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타원형의 내성과 그 바깥에 달린 외성으로 나눠져 있으며 총둘레는 2천2백85m로 8천명 내지 1만명이 살 수 있는 규모다. 광주 이성산성은 풍납동 토성,몽촌토성과 함께 도성 권역에 들어있다.총 둘레 1천9백25m로 내부면적은 5만평. 아차산성은 풍납동 토성과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광장동에 있다.풍납동 토성과 함께 도성의 북쪽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공주 공산성과 부여의 부소산성 및 나성은 뛰어난 방어조건을 갖춘 백제 후기의 도성이었다.여기에 부여 북쪽에 있는 환산성이나 금강하류 대안에 축조된 성흥산성 등은 모두 부소산성을 겹겹이 둘러싸 보호하는 외곽 방어시설 역할을 했다. 이밖에 예산의 임존성은 백제가 망한뒤 유장 흑치상지가 백제의 부흥운동을 꾀했던 곳이다.이곳에서 흑치상지는 한때 나·당연합군을 깨뜨려 잃었던 옛땅을 한 때나마 되찾기도 했다.이곳은 또 후삼국시대에 고려 태조와 견훤이 격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 바그다드·암만/“신의 도시” 바빌론(아랍서 지중해까지:5)

    ◎시간도 멈춰선 「2천5백년전 왕국」/거대한고 장엄한 이슈타르게이트… 네자르왕의 위엄 보는듯 고고학자들은 로맨티스트들이다.바빌론 궁전의 유명한 「행진의 거리」복판에 섰을때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그들은 역사의 미궁속으로 끊임없이 잠입을 시도하고 있다.마치 현대의 어린이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속으로 여행을 꿈꾸듯이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90㎞,차로 한시간 남짓 걸리는 이 고속도로를 달리는동안 나도 그 비슷한 공상을 하면서 가슴이 설레었다. 신의 도시,고대 인류가 만든 불가사의 중의 하나,이같은 수식어로 바빌론은 역사의 문외한에게도 널리 알려진 이름이다.그 이름이 주는 매력과 신비감 때문에 나는 갑자기 엉뚱한 「증발의 유혹」에 빠졌는지 모른다.영화 「타임머신」에서 인간은 첨단기계를 이용해서 「과거와 미래로의 여행」을 자유롭게 하고 있다.최근 대전엑스포에서 시승해 본 「미래의 서울로 가는 자동차」는 이보다 한층 단순하고 솔직했다.이것은 고속으로 전개되는 대형 멀티비전 화면을 이용한 것이다.그러나 바빌론에서 시간여행을 하는데는 그런 구차스런 문명의 이기들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여기에는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공간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을뿐 아니라 이 공간에서는 시간도 잠을 자고있다. ○외성은 흔적 없어 먼저 우리앞을 막아선 것은 청색으로 채색된 거대한 이슈타르 게이트였다.이슈타르는 사랑의 여신이란 뜻이다.이 문은 본래 바빌론내성의 출입문인데 외성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 지금 바빌론 궁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출입구 구실을 하고 있었다.우리 눈에 거대하게 보이는 이 문도 복제품으로 원형의 절반 규모밖에 안된다고 한다.이슈타르 게이트의 전면에는 이상한 동물의 모양이 무늬처럼 일정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그 형태는 말과 개의 중간쯤이라고 할까.이것은 상상의 동물로 바빌로니아의 수호신이었다.상상의 동물은 궁안의 여러군데 벽에서도 발견되었다. 입구를 통과하자 오른쪽에 뜻밖에 소규모의 현대식 건물이 보였다.이 건물은 바빌론박물관으로 1899년 이도시가 처음 발굴될때 발견된 여러가지 유물을 보관하고 있었다.박물관을 지나약간 오르막진 언덕으로 올라가자 눈앞에 행진의 거리와 왕궁의 웅장한 성벽들이 나타났다.행진의 거리는 철책으로 가장자리를 둘러쌌는데 그 길이가 수백m는 될것 같았다.성벽들은 행진의 거리 좌우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었다.거리의 바닥에는 단단한 흙벽돌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상태였다.행진의 거리는 「적들은 절대로 통과하지 못하는 곳」이란 뜻이 있고 이곳에서는 매년 신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축제가 열렸었다.그러나 네부카드 네자르가 죽고(BC605∼562) 불과 2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이 승리의 거리에 페르시아의 정복자들이 말발굽소리를 울리며 행진했다는 사실(BC539)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2500년전의 길바닥 위로 뜨거운 햇볕이 작렬하고 있었다.성벽으로 에워싸인 행진의 거리는 정적이 가득했다.문득 이 공간에는 시간이 정지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렇다면 저 성벽들 사이로 걸어들어가서 네부카드 네자르의 병사들과 신하들을 당장 만나볼 수도 있지 않을까?거리 복판에 서서 나는 잠시 이런 공상에 빠져들었다.그러나 이 공상은 금방 깨지고 말았다.성벽을 쌓은 벽돌들마다 네부카드 네자르 대신 사담 후세인의 이름을 새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벽돌엔 후세인 이름 사실 이 거대한 왕궁은 후세인의 지시에 의해 최근 복원된 하나의 무대세트에 불과한 것이다.후세인은 2500년전 이 도시를 수복하고 예루살렘을 정복했던 네부카드 네자르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수백만달러를 들여 바빌론을 복원시켰고 왕궁의 성벽을 쌓은 벽돌에는 네부카드 네자르의 이름대신 자신의 이름을 새겨넣은 것이다.후세인은 자기 이름이 다시 2500년 뒤에 위대한 정복자의 이름으로 회자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9월에 열리는 바빌론축제도 옛 영광을 되살리겠다는 사담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이 축제가 열리는 주무대인 그리스 극장은 바빌론성에서 수백m 떨어진 한적한 들가운데 외롭게 버려져 있었다.일종의 야외극장인 이 무대가 그리스극장이란 이름을 갖게된 것은 BC300년경 바빌론에 수도를 정하고 이곳을 통치했던 그리스의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건축되었기 때문이다.얼핏 봐서 무척 현대적으로 설계된 이 야외무대를 건립하는데 사용된 벽돌이 모두 바벨탑의 잔해에서 거둬들인 것들이란 사실이 흥미로웠다. 궁전의 성벽을 조금 벗어나 옆뜰로 나서면 넓은 공터의 복판에 커다란 사자상이 버티고 있다.높이 2m,폭2·5m의 이 용맹한 사자상은 그러나 지금은 보아주는 사람이 별로 없어 무척 쓸쓸하게 보였다.이 사자상은 사랑의 여신 이슈타르를 상징한 것이란 얘기도 있고 적들을 제압하는 상징물이란 얘기도 있으나 어느쪽인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다만 자세히 관찰해보면 사자밑에는 사람이 누워있고 사자는 앞발로 인간을 찍어누르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이것을 보면 침략자를 제압한다는 왕궁의 수호신 역할을 하지 않았나 짐작되기도 한다. 그 유명한 바벨탑의 유적은 바빌론성에서 거의 1㎞쯤 떨어진 외딴 언덕위에 있다.바벨탑은 존재하지 않고 다만 전설이 있을 뿐이다.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실제로도 그랬다.그러나 바벨탑은 희미하게 존재하고 있었다.이 구약의 불가사의 중의 하나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어쨌든 의심하기 좋아하는 이방인을 잠시나마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우리는 그것을 육안으로 확인하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밋밋하고 먼 언덕길을 올라갔다. 거대한 분화구가 나타났다.미사일이나 큰 폭탄이 떨어져 거대한 웅덩이를 만든 것 같았다.벽돌조각이나 건축물의 다른 잔해조차 흔적이 없었다.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대역사를 벌였다는 느낌은 쉽게 받았다.웅덩이의 넓이나 깊이로 미뤄볼 때 그 규모가 엄청났으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바벨이란 말에는 「하느님의 문」이란 뜻과 「혼돈」이란 뜻이 함께 있다.거대한 웅덩이 잔해를 봤을때 한마디로 혼돈이란 말이 생각났다. 백성들은 하느님에 대한 종교적 열정,하느님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열망으로 이 제단을 쌓아올라갔다.그러나 여호와께서 내려와서 보시고 이것은 백성들이 자기를 두려워하지 않을뿐 아니라 자기네끼리만 뭉치면 무슨 일이든 해치울 수 있다는 교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탑의 건축을 중지시켰다.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에 관해 대강 이런 얘기가 나와있다.여호와께서는 자신에 대한 백성들의 열정을 왜 배신으로 오해했을까?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뜻을 신에게 올바로 전하는 일은 그처럼 힘든 것인가? ○탑문화 크게 발달 이라크 남부에는 구약의 표적물이 유난히 많다.바벨탑을 위시해서 아브라함의 고향이라는 「우르」,쿠르나의 에덴동산 등이 그것이다.「노아의 방주」는 바빌론에 끌려온 유태인들이 수메르인들의 홍수얘기를 전해듣고 훗날 돌아가서 신화로 꾸며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분명한 것은 유프라테스 평원에는 탑이 많다는 사실이다.유프라테스 뿐아니라 나일강 유역도 마찬가지다.평원에는 산악지대와 달리 하늘로 높이 솟은 탑문화가 유독 발달되어 있다.사람들은 수직으로 솟아오른 탑에 의지해 자기의 권력의지와 신에 대한 갈망까지 모두 표출하고 있는 셈이다.바벨탑의 잔해는 인간의 그 끝없는 욕망의 허망감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바빌론성 외곽을 멀리 벗어난 곳에 인류최초의 성문법전을 만든 함무라비 대왕의 석상이 있었다.법전을 새겨놓았다는 높이 2.5m크기의 돌기둥도 있었는데 이것은 모형이었다.원형은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빌론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들도 자연 보잘것이 없었다.귀중한 유산들이 열강의 손으로 넘어가버린 탓이다.박물관 진열대에는 고작해야 문자가 새겨진 돌조각들,작은 토기 몇점만 뒹굴고 있었다. 그곳에서 눈길을 끈것은 1899년 독일인 콜데베이에 의해 처음 발굴이 시작되기 직전의 바빌론성의 전경과 발굴이 진행되는 현장의 사진들이었다.발굴직전의 바빌론 성은 짙은 안개에 싸인 고성의 모습처럼 아름답고 신비로 가득했다.내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나왔다.그런가하면 발굴현장 사진은 시장바닥처럼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아,귀중한 유물을 훔쳐가기 위해 발굴이라는 이름으로 이 신비의 고도는 얼마나 잔인하게 파괴되었던가,나는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무구의 특징(백제를 다시본다:17)

    ◎성 방어용 철제가시 마름쇠 이채/제조술 훌륭… 활에 발사장치 덧달아/보병 판갑옷은 철판으로 만든 통형/용·봉황문양 장식한 고리칼은 훌륭한 공예품 철기문화는 동서나 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의 융성을 좌우한다.정복국가에서 무기는 철기문화의 꽃이기도 하다.사실상 정복국가로 성장한 백제의 무기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그래서 실상을 고분 따위에서 출토된 매장유물을 통해 알아볼 수 밖에 없지만,분명히 훌륭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사비성 옛터인 충남 부여읍 부소산성에서 얼핏 불가사리처럼 보이는 철기가 출토되었다.얼마전의 일인데 그 철기는 마름쇠(철질여)라는 일종의 방어용무기였다. 4개의 가시로 이루어진 마름쇠는 어느 방향으로 놓아도 첨예한 가시 하나가 위쪽을 향해 세워지도록 고안되었다.그 중에 가장 큰 가시 하나에 구멍이 뚫려 여러개의 마름쇠를 끈으로 연결할 수도 있다. ○삼국사기에 기록 기막힌 방어용 무기다.마름쇠를 끈으로 연결,성밖에 둘러놓으면 가시덩굴 역할을 하는 동시에 성벽 위에서 던지면 적을 살상하거나쫓아버리는 무기 구실을 한다.「삼국사기」기록에도 나오는 이 무기는 부소산성 출토품이 유일한 실물이다.그 당시 마름쇠를 성밖에 둘러놓으면 요즘 현대식 방어용무기 클레모어지뢰를 매설한 만큼이나 수비를 하는데 마음을 놓았을 것이다. 활과 화살,쇠뇌(노)는 공격용 무기이자 원거리 무기이기도 하다.그 대표적 유물로 전남 나주 신촌리 9호고분 출토품이 있다.이 활은 활채의 정탈목을 지나고 있는 활고자 부분이 휘어진 모양으로 보아 만궁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화살촉은 쇠로 만든 까닭에 유물이 많이 전해지는데,크게 넓적촉과 뾰족촉으로 나누어진다.그 형태도 다양해서 넓적촉의 경우 도끼날 모양의 부인형족,삼각 및 오각형촉,좌우로 날개가 뻗친 양익족이 있다.그리고 송곳 모양의 원추형촉,촉몸이 좌우로 갈라진 우형족은 뾰족촉에 속한다. 백제인들은 활에 발사장치를 덧달아 활이 더 멀리 나가고,관통력이 강한 화살을 쏠 수 있는 쇠뇌를 사용했다.서울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아는 바로 이 같은 발사장치다. 그리고 베는데 사용한 검과 칼,찌르는기능의 쇠창과 끌모양무기(착형무기),적을 걸어서 당기는 갈고리와 쇠낫,내려치는 쇠도끼가 있다.서로가 접근한 가운데 사용되는 이들 무기류는 근거리 무기,외날칼인 도중에는 칼몸이 길고 칼자루 뒤끝인 병두가 둥근고리로 된 고리칼(환두대도)은 훌륭한 공예품이기도 하다.왜냐하면 민고리칼(소환두대도)도 있지만 고리에 용,봉황,잎새문양을 넣은 고리칼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칼자루 뒤끝의 둥근 고리 안에 장식무늬가 있는 환두대도 중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나온 삼엽문환두대도는 특히 유명하다.철지에 금판을 씌운 타원형 병두 고리의 중심 장식이 금동삼엽형으로 되어 있다.손잡이에는 고기비늘무늬를 돋친 은판으로 감았다.또 칼자루 끝 고리에 타출문(정출문)의 돋친 은판을 씌우고 고리 안에는 봉황의 머리를 장식한 고리칼(단봉환두대도)) 역시 이 고분에서 발견되었다. 이밖에 무령왕릉출토품이 있다.타원형 고리 표면에다 용을 새기고 고리안에서 여의주를 입에 문 용머리를 장식한 고리칼(김동장환두대도)이다.고리칼은 아무데서나 출토되는 것이아니다.왕릉이나 규모가 큰 수장급 무덤에서만 나온다.그러고 보면 고리칼은 무기의 기능도 물론 있지만,요새 개념으로 말하면 지휘도라고도 할 수 있다. 고대사회가 전쟁을 할때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무기의 하나가 쇠창(철모)이다.창몸이 모난 송곳 모양인 방추형,쌍날칼 모양의 검신형,자루를 끼우는 착병부에 3가닥의 창몸이 달린 삼지창이 있다.착형무기는 자루를 끼우는 부분은 다른 창들과 같지만 날 부분이 뾰족하지 않고 끌날처럼 넓적하게 생겼다. ○오늘날의 지휘도 기병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무기는 쇠갈고리(철구)다.인마를 베고 찌르는 큰칼과 장창을 휘두르면서 적을 걸어당기는 중요한 무기가 쇠갈고리인 것이다.부여 부소산성에서 나온 쇠갈고리를 보면 몸체의 뾰족한 끝쪽은 휘어져 갈고리를 이루고,다른쪽은 자루를 끼울 수 있게 만들었다.몸체의 한쪽이 두가닥으로 갈라진 또다른 쇠갈고리도 부소산성에서 출토되었다.쇠낫도 걸어당기는 무기로 쓰였다.백제의 쇠낫은 날부분이 안쪽으로 약간 휘고 기단부분이 한쪽으로 말려있다. 오늘날의 쇠도끼는 장작을 패고 도구를 만드는데 쓰이는 일종의 공구다.하지만 삼국시대의 도끼는 육박전을 할때 쓰인 중요한 무기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 고분벽화(안악 3호분·평양역전 2호분·약수리벽화고분)에 그려져 있는,도끼를 어깨에 멘 무사 대열도에서 엿볼 수 있다.또 백제의 병사가 신라의 장군 눌최를 도끼로 쳐죽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도 도끼의 역할이 나타난다.고분에서 드러난 백제의 쇠도끼에는 단조품과 주조품이 있다.단조한 쇠도끼에는 어깨를 갖춘 것과 날끝이 약간 넓고 어깨가 없는 것으로 분류된다. ○투구·방패 발견안돼 우리가 사극영화를 보노라면 갑옷으로 치장한 늠름한 무사를 대하는 경우가 있다.그러나 갑옷은 옷이 아니고,방어용 무기류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갑옷에는 판갑옷(단갑)과 비늘갑옷(찰갑)이 있으나,이들 두가지 모두 조각만 나와 온전한 백제의 갑옷을 만나지 못하고 있다.보병이 주로 입었던 판갑옷은 철판을 오려 못을 박아 두들겨 붙인 형태(철제삼각판정체단갑)다.목가리개(경갑)와 어깨가리개(견갑)를갖추었지만,여닫이(개폐)장치가 없는 통형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동물뼈로도 제조 갑옷이라고 하면 흔히 쇠를 연상하게 마련이다.그런데 백제인들은 쇠가 아닌 동물의 뼈를 갈아서도 갑옷을 만들었다.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공원조성을 위해 발굴한 몽촌토성 출토품 뼈비늘갑옷(골제찰갑)이 그것이다.이렇듯 백제인들이 입었던 갑옷의 윤곽은 밝혀지고 있으나,투구와 방패가 발견되지 않았다.본래 갑옷(갑)과 투구(주)는 일습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두가지를 붙여 갑주라는 말을 쓰고 있다. 「삼국사기」는 갑옷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김갑을 비롯해 금휴개,명광개라는 갑옷 이름이 기록되었다.이들 갑옷은 신라 고분인 김관총에서 나온 금동갑옷과 같은 것이 아니었나 한다. 백제의 무기가 풍기는 분위기는 비록 무기라 할지라도 공포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삼국의 무기가 거의 그렇듯 당시 중국의 무기에 비해 부드러운 느낌을 안겨준다.뛰어난 제철기술을 보유했음에도 공포의 모서리를 순화시킨 까닭은 무엇일까.아마도 부여 능산리 출토 김동용봉봉래산향로에 담긴 종교적 심성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제철술/철기문화 한성시대에 이미 발달/철 불에 달군뒤 두들겨 무기 제작 고대 역사무대에서 무기는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제철기술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제철은 철광석에서 철을 뽑아 정련,사용 목적에 적절한 조직형태를 만들어내는 기술이다.여기에는 담금질,뜨임 등의 열처리 공정과 함께 필요한 모양을 갖추는 성형술이 뒤따른다. 무기의 경우는 특히 강도에 따라 우월성이 판가름나기 때문에 철재의 강성이 요구되었다.사비시대 백제의 철기제조기술은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철제무기류 또한 우수한 것으로 가려졌다.사비시대 백제강역에 속했던 오늘날 충남 부여와 논산지역 고분에서 출토된 무기류는 이를 잘 입증했다.포항제철기술연구소와 고려대생산기술연구소가 실시한 이 지역 출토 손칼(도자)에 대한 화학성분 분석에서 철재가 고탄소강으로 밝혀진 것이다. 고탄소강은 저온(섭씨8백∼1천1백도)에서 뽑은 괴련철을 숯불로 장시간 열을 가한 뒤 계속두드려 탄소가 침투되게 한 철재.이때에 내부에 낀 불순성분이 빠지고 쇠가 매끄러워지면서 강성을 얻을 수 있다.그리고 저탄소강의 강도를 높이기 위해 불에 달구어 두들김작업이 끝날 때마다 물속에 담가 급랭시키는 방법도 썼다.지금도 대장간에서 이런 식으로 칼과 낫 따위를 만드는 것을 더러 보게된다. 백제는 일찍부터 철기문화를 발전시켰다.「일본서기」를 보면 백제의 근초고왕이 일본사신에게 철제 40장을 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현재 일본 이소노카미신궁(석상신궁)이 신물로 여기는 가운데 소장하고 있는 칠지도 역시 백제가 일본에 준 단철의 칼이라 할 수 있다.「태화4년(AD369년)에 백련강철로 만들어 백제 왕세자 기생 성음이 위왕지에 주면서 후세에 전하라」는 명문이 들어있다.이 시기 역시 근초고왕 때 일이다. 그리고 한성시대(?∼?년)백제유적인 서울 성동구 구의동 고분출토 쇠도끼와 철촉을 분석한 결과 실제 고탄소강으로 밝혀졌다.도끼날의 경우 높은 온도에서 여러번 두들겨 공랭한 흔적을 보였다.이렇듯 백제는 한성시대에 이미 철기문화를 꽃피웠다.
  • 바그다드·암만/모술의 유적들(아랍서 지중해까지:3)

    ◎3천년전 앗시라아왕국 성터 곳곳에/날개 달린 황소상엔 위엄 서려… 성마티 수도원은 “회교이방지대” 이탈리아 사람들은 언제나 쾌활하고 붙임성이 좋았다.이십여명의 이탈리아인들이 모술 유적 관광길에 줄곧 우리와 동행했는데 그들은 계속해서 즐겁게 떠들고 노래를 불렀다.그바람에 우리도 잠시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암만에서 바그다드로 오는 길에 우리와 동행했던 두명의 독일인에 비하면 이들은 얼마나 쾌활하고 사교적인가? 고고학자라는 독일인들은 시종 음침한 표정으로 자기네 끼리만 쑥덕거리고 이방인과는 좀처럼 대화를 트려고 하지 않았다.버스 한대에 이탈리아인들과 동승해서 상오 열시쯤 호텔을 빠져나갔다.뜨거운 햇빛이 모스크의 하얗고 둥근 지붕 위에서 이글거리고 있었다.비교적 널찍한 고도의 거리에는 차량도 인적도 보이지 않았다.흙으로 견고하게 지은 낮은 건물 처마 밑을 자세히 보면 남루한 아라비아 의상을 걸친 두세사람이 그늘에 숨어앉아 바깥 거리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시내를 벗어나 동남쪽으로 40㎞쯤 달려갔을때 황량한 들 가운데 흙벽돌로 제법 높이 세운 벽이 나타났다.주위에 철조망을 둘러놓고 엉성한 출입문도 만들어 놓았다.관리인인 노인이 나와서 커다란 자물통을 끄르고 우리를 울타리 안으로 안내했다.이탈리아인들이 대동한 자국인 가이드가 말했다. 『이곳이 두번째 수도였던 님루드요.니네베에 비하면 제법 볼게 많이 있어요』 ○성벽내부 잘 보존 수도라는 말이 아주 야릇하게 들렸다.흙벽돌 몇장을 쌓아놓은 폐허를 놓고 수도라니.그러나 사르곤왕의 북서궁과 남서궁이 존재했을 때 이곳 성벽이 연장 8㎞에 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이라크 국내에는 만개의 유적지가 있는 걸로 알려져 있다.모술은 이라크에서도 대표적인 역사유적도시이며 특히 아시리아제국의 네개의 수도들이 티그리스 강을 끼고 도시 근교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아수르,님루드,니네베,코르사바드등인데 이가운데서도 님루드가 비교적 부조품과 장식들을 충실히 유지하고 있었다.성벽 내부에는 뜻밖에 많은 유적들이 있었다.그것들은 선명하고 완전했으며 이제야 우리는 기원전 천년에 실재했던 왕궁의 위엄을 실감할 수 있었다.왕의 연회장으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터번을 두른 인자한 표정의 석상 둘이 나란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안뜰 한쪽 벽에 부조된 날개 달린 거대한 황소상은 특히 강한 인상을 주었다.거대한 날개는 섬세하고 아름다웠으며 다리의 근육에는 힘이 넘쳤다.짧고 날카로운 쐐기 모양의 설형문자가 촘촘하게 기록된 석판들이 여러개 있었다.이 문자가 바로 뒷날 페니키아 문자를 거쳐 지금 쓰이는 알파벳의 시조가 된 문자이다. 성벽 바깥 들에는 비교적 옷을 깨끗하게 입은 아이들이 즐겁게 뛰어놀고 있었다.주변에 인가가 없으므로 이 아이들은 다른 지역에서 소풍을 왔을 것이다.자세히 살펴보니 저쪽 언덕 아래 부모들이 차를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수메르인의 후손들이 삼천년 고도의 유적에 와서 천진난만하게 뛰어놀고 있는 것이다.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빨간 스웨터를 입은 예쁜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달아난다.간신히 사진 한장을 찍었는데 소녀는 곧 검은 차드르를 둘러쓴 엄마 쪽으로 달려가버렸다.저아이도 멀지않아 차드르로 해맑은 얼굴을 감추고 말겠지.이런 생각을 하자,왠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니네베는 거대한 도시이며 이곳을 한번 돌아보는데 사흘이 걸린다」구약의 「요나서」에는 이런 글귀가 나온다.(요즘 쓰는 구약은 니느웨로 표기하고 있다).「요나서」의 요점은 극도로 타락한 니네베를 징벌하기 위해 여호와가 요나를 파견하는 것으로 되어있다.이 기록에 따르면 니네베는 당시 부와 번영의 상징이었다.그러나 우리가 그곳에 갔을 때 니네베는 5m 높이의 성벽 일부와 세개의 성문으로 겨우 지난날의 흔적을 지탱하고 있었다.세개의 성문도 최근 몇년사이에 이라크 문화부의 노력으로 복원되었다고 한다.이곳에도 님루드에서 봤던 것과 아주 흡사한 날개 달린 황소상이 입구를 장식하고 있었다.이것은 그동안 흙속에 묻혀 있던 것으로 1941년 큰 비가 왔을 때 우연히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부와 번영의 상징 니네베 성 근처의 잔디가 돋아난 야트막한 언덕에 아주 작은 모스크가 하나 있었다.낮은 담장으로 전면만 둘러친 이 작은 건물은 이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으로 눈길을 끌만한 별다른 특징은 없었다.누군가가 저것이 요나의 무덤이라고 말했다.그제서야 사람들의 눈길이 그곳으로 쏠렸다.「선지자 요나의 모스크」로 이름지어진 이 무덤은 니네베가 발굴되던 1847년 비슷한 시기에 발견되었다.그 무덤을 바라보면서 요나의 전설과 방금 둘러본 니네베 성벽의 선명한 황소상이 함께 연상되었다.니네베를 구하려고 요나는 이곳에 왔으니까 그 무덤이 여기 있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그러나 니네베는 실재했고 요나의 실재는 육안으로 증명된 것이 없다.저 무덤마저 요나의 전설을 증거해주지는 않는다.이것은 예수의 부활만큼이나 내게는 난해하고 복잡한 문제였다. 모술시 교외의 성 마티 수도원으로 가는 길에 버스속에서는 작은 해프닝이 벌어졌다.이탈리아인들이 노래를 불러대자,우리 쪽 한사람이 갑자기 경쟁심이 생겼는지 사회자격인 이탈리아인 가이드에게 우리 일행중에 칸초네 가수가 있노라고 허풍을 친 것이다.마치 기다렸다는듯 젊은 이탈리아인들이 박수를 치고 괴성을 질러댔다.그바람에 갑자기 칸초네 가수가 된 나는 달리는 버스에 앉아 난생 처음 노래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사실은 이탈리아인들 앞에서 이탈리아말로 노래를 부른다는게 약간 어깨가 으쓱해지는 일이기도 했다.「아름다운 너의 얼굴」­이 노래는 한때 결혼식장에서도 두어차례 부른 경험이 있었다.그리고 이탈리아인들 가운데 제법 아리따운 처녀와 젊은 부인들도 섞여 있었다.이방인 관객들이 환호성을 올렸고 이것을 계기로 아시리아 고토를 여행하다 우연히 합류하게 된 한국인과 이탈리아인들 사이에 이해와 우정의 폭이 한층 넓어졌다. 1271년 실크로드를 따라 모술을 방문했던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모술은 거대한 왕국이며 여러 인종들이 살고있다.마호메트를 신앙하는 아랍인들,그밖에 그리스도를 따르는 다른 종족들이 있다.이들 그리스도 신자들은 로마교회법을 따르지 않는 다른 종파들인데 네스토리우스파,야곱파,아르메니아파가 그것이다.­이 기록을 보더라도 모술 지방에는 회교 뿐 아니라 비록 소수나마 여러 종파의 기독교인들이 거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라크 국내 종교적 분위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믿는 것과 달리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유태인을 증오하는 사담 후세인도 아시리아의 기독교인에 대해서는 호감을 갖고 있으며 그의 심복으로 걸프전 당시 협상창구역을 맡았던 타리크 아지즈도 아시리아계 기독교인이다. ○차드르 착용 안해 깎아지른듯한 높은 산 중턱에 요새처럼 견고하게 지어진 회색건물이 바라다보였다.이것이 서기 4세기에 세워진 마크로우브산의 성 마티 수도원이다.버스가 가까스로 산중턱 수도원 입구까지 기어올라갔다.사람들이 들어가는 길목의 그늘에 앉아 쉬고 있고 노점을 차리고 애세서리나 담배를 파는 여인들도 있었다.이쪽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차드르를 착용한 여인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었다.남자들의 의상도 제멋대로다.모두가 기독교도들인 탓일 것이다.마티 수도원은 야곱파의 본산이며 인근에 메르기란 기독교 마을도 있었다.그 마을을 잠시 방문했을 때 이층집 베란다에서 바깥거리를 바라보는 여인의 멋진 옷차림과 아름다운 자태,그리고 이방인의 시선을 조금도 꺼리지 않는 개방적인 태도가 무척 인상적이었다.수도원 내부에는 예배실과 수많은 방들,그리고 큰 동굴같은 우물도 있었다.많은 방에는 신자들이 가족과 함께 와서 묵고 있었는데 그들은 병자의 쾌유나 소망성취를 기원하러 찾아온 손님들이었다.그 손님들보다 훨씬 많은 동서양의 관광객들이 수도원 마당으로 몰려들어오고 있었다.이곳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크로우브산 중턱으로 찾아오는 길이 험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수도원 내부에 특별한 볼거리는 없었다.사람들은 이곳이 알라신의 바다에 홀로 떠있는 그리스도의 섬이란 점 때문에 더욱 흥미를 갖는 것이 아닐까? 만약 방문자가 기독교인이라면 특별한 감회를 느끼는건 당연할 것이다.
  • “선진 도성” 사비성(백제를 다시본다:12)

    ◎“2중의 방어벽”… 부소산성내에 왕궁 축조/오부관아행가는 산성 발치에 자리잡아/도로망·하수도등 도시체제 잘 갖춰/금동향로 출토지 능산리는 공방촌 추정 백제가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널리 알려진 대로 AD538년의 일이다.그러니까 사비성은 한성(서울)과 웅진(공주)을 거쳐 3번째 도읍으로 자리잡은 도성이다.오늘날 충남 부여군 부여읍 일대로 압축되고 있다. 사비성은 부소산성과 평지성이 연결되어 둘러쳐진 나성의 개념을 갖는다.부소산성을 제외한 나성은 현재의 부여시가지 주위를 에워싼 야산능선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다.그러면 사비성 안쪽에 해당하는 도성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왕궁이 어디쯤에 자리 잡았고,왕의 명을 받들던 관아는 어느지역에 모여있었을까 하는 문제들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구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부소산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않나 한다.테뫼식과 포곡형의 두 가지 축조방식이 복합한 이 산성은 부소산 위쪽 표고 1백6m를 중심으로 쌓아졌다.현재 행정구역상으로 부여읍 쌍북리,구아리,구교리,관북리에 걸쳐 위치한다.면적은 74만6천2백2㎡,성 둘레는 2천2백m에 이른다.부여 중심부에서 보면 북쪽에 있다.그리고 산성의 북쪽 끝이 백마강(금강)에 와닿는다. 이 산성의 형태는 군창지와 사비루 부근이 테뫼식을 이루었고,이들 테뫼식 산성을 연결하는 부분은 모두가 포곡형이다.산성 둘레에는 문자리(문지)가 여러곳에 남아있다.군창지 부근의 남문은 테뫼식 산성을 드나들도록 설계되었다.또 동문과 서문은 포곡형 산성,다시말하면 부소산성 성벽에다 낸 문이라 할 수 있다.이밖에 백마강 대안쪽에는 수구와 더불어 또다른 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연구소가 지난 90년과 91년 동문자리를 발굴한 결과 포곡형 산성의 성벽은 판축을 기본으로 한 흙벽으로 밝혀졌다.그러나 흙벽 만으로 이루어진 성벽은 아니다.흙벽을 보호하기 위해 바깥에 돌을 쌓은 다음 안쪽에도 또 돌을 쌓고 흙벽을 한겹 더 덧붙였다.이를테면 돌­흙벽­돌­흙벽의 단면구조를 가진 견고한 성벽인 것이다.특히 판축과정에 1백20㎝ 간격으로 기둥을 세운뒤 진흙을 쌓아올렸다.그 기둥구멍은 30㎝나 되고 주춧돌까지 받쳐놓았다. 이 성벽 안쪽에는 돌을 깐 도보가 아래로 계속 연결되었다.너비 80㎝의 이 도보는 비가 올 때에 쓰였던 순시용도로로 보고있다.특히 도보 안쪽에서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금제관장식편을 비롯해 금동제용두장식 2점,금동제귀면장식,금동제방울이 그것이다.또 갈고리,양지창,낫,창,도끼와 같은 철제무구와 함께 격조높은 토기,석간,벼루,기와류가 출토되었다. 이들 출토품은 사비시대 왕이나 왕족과 관계되는 유물이다.그렇다면 부소산성 어딘가에는 왕의 상주거소가 있었을 것이다.아직은 왕궁유구나 이렇다 할 건물자리가 발견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사비도성을 호령한 백제의 중심축은 부소산성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왕실 관련유물 출토 그리고 지난 88년과 89년 현 부여문화재연구소 동쪽 부소산 입구 발굴과 결부해도 부소산성은 왕의 거소일 가능성이 있다.이 발굴에서는 부소산성을 향해 일직선상으로 쌓은 축대와 함께 그 축대 밑에서 축대와 병행한 석축의 배수구가 확인되었다.그리고 건물자리 5곳과 암반을 깎아서 만든 우물터를 발견한 바 있다.이들 유적을 부소산성 내에 왕궁이 존재했다는 입장에서 보면 부소산 발치의 축대와 배수구로 여겨진다. 현재의 부여문화재연구소(구국립부여박물관)는 부소산 기슭 남쪽 언덕에 있다.부여 시가지가 가장 가까운 자리다.조선시대 후기 관아이기도 하거니와 부근에 백제시대 석조유물이 산재되어 한때는 가장 유력한 왕궁자리로 추정되기도 했다.그래서 지난 82년 충남대가 이 지역 발굴에 나섰지만,그 성과는 현 부여문화재연구소 정문 앞에서 네모꼴 백제시대 연못자리 하나를 발견하는 것으로 그쳤다. 그이후 87년 네모꼴 연못자리 동쪽에서 도로유적을 확인했다.남북과 동서로 통하는 도로유적으로 도시계획에 의해 조성된 흔적을 역력히 보여주었다.남북도로의 너비는 10.7m,그 좌우 양쪽에는 너비 75㎝의 하수도 시설을 갖추었다.그리고 동서도로는 너비 4m로 밝혀졌다.이 일대가 바로 사비시대에 백제를 다스린 오부의 자리로 추정되는 지역이다.사비도성의 관아가라 할 수 있다. 사비도성에 살았던 사람들의삶은 가히 선진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왜냐하면 지난 92년 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백제시대 천왕사터로 전해진 옛 부여경찰서 자리를 발굴할 때 2중구조의 우물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위에 있는 샘터에서 일단 물을 받아 정수처리를 거친 뒤 밑의 샘으로 보내 물을 마시도록 한 시설로 보인다.윗 샘은 방형의 석축시설이고 아래 샘은 돌(하부)과 널빤지(상부)를 사용해서 만들었다.여기에서는 수막새기와와 토기류(사발과 동이),사람얼굴을 새긴 기와,방추차,곱돌제 거푸집 등이 출토되었다. 그러면서 사비성 사람들은 도성 안에서 불교를 가까이 대했다.나성 안에 있는 명찰 정림사와 천왕사에서 불심을 길렀던 것이다.그뿐이 아니라 군수리 절터나 동남리 절터와 같은 유적지에도 분명히 큰 절이 있었기 때문에 늘 부처를 섬길 수 있었다.또 중국의 양과 일본과의 관계가 밀접한 탓으로 외국문물을 쉽게 접했다.거기에 비옥한 옥토가 백제강역으로 완전히 편입되어 생활은 윤택했을 것이다. ○2중구조 우물 발굴 최근에 와서는 사비성이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는 큰일이 일어났다.지난해 연말의 금동용봉봉래산향로의 발굴이 그것인데,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그것도 역사적 사건이다.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비도성이어서 금동향로가 갖는 제조상의 기술적인 문제나 예술성에 대해서는 접어둔다.다만 금동향로를 발굴한 국립부여박물관 발표대로 출토지를 공방으로 추정한다면,능산리는 공방촌일 수도 있다.바꾸어 말해서 사비시대 백제왕국의 금속산업을 일으킨 지역이 곧 오늘의 부여읍 능산리라는 이야기다.능산리는 사비성의 나성 밖에 있. 이를를론 삼아 종합하면 사비시대 백제는 부소산성안에다 작은 규모의 건건성 밖에 있. 이를를론 삼아 종합하면 사비시대 백제는 부소산성안에다 작은 규모의 건분명히 나성 밖에 있었을 것이다.그리고 도성을 산성과 평지성인 나성을 연결시켜 축조한 점은 고구려 평양성과 더불어 우리 고대의 도성형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고구려의 평양성과 같은 나성/길이 1만3천자… 산성과 평지성으로 구성/사비성의 구조 사비성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지역에 있었던 백제때의 도성이다.백제 도읍자체의 명칭으로 쓰이기도 한다.백제가 협소한 웅진(공주)을 버리고 넓은 평야를 포용한 땅에 보다 큰 도읍을 건설하기 위해 천도한 것은 AD538년(성왕16년)봄이다. 백제는 사비로의 천도를 국가체제 재정비의 시기로 삼았다.북서쪽으로 금강이 굽어 흐르는 가운데 동쪽으로는 산이 둘러쳐져 외적 방어에 더할나위 없는 조건을 갖추었다.도읍을 사비로 옮긴 까닭을 당시 일본과의 관계가 밀접했기 때문에 해상교통에 유리한 점이 고려된 것으로 보는 경향도 있다.어떻든 사비성은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백30년간의 수도가 되었다. 사비도성은 산성으로서 부소산성과 평지성으로서의 나성으로 이루어졌다.부소산성은 부소산을 양쪽 머리가 낮게 감싸 두르고 백마강을 향해 초승달의 형태를 보여 반월성이라고도 불렀다.이밖에 사비성,소부리성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조선시대의 문헌에는 성터의 길이가 1만3천여자나 되며,치소가 그안에 있었다고 기술했다.치소는 왕궁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고학적 발굴결과를 토대로 하면 현재 부여시가지가 있는 나성안쪽은 사비시대에 도시체제를 어느정도 갖춘 것으로 보인다.이같은 가능성은 한성시대(BC18∼AD475년)백제의 도성인 서울 몽촌토성이 당시 구획정리가 된 도로망을 구축했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지난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몽촌토성을 올림픽공원으로 가꾸기 위해 발굴한 결과 조방이 뚜렷한 도성으로 밝혀졌다.그리고 웅진시대(AD475∼538년)의 백제왕궁도 공주 공산성안에 자리했던 여러가지 정황을 남기고 있다.
  • 구주의 나고야성박물관(일본속의 한국문화:13·끝)

    ◎“조선정복” 풍신수길의 야욕 그대로 보는듯/섬뜩한 비문 “바다건너 섬들을 겨누어 보다”/“역사의 아이러니” 거북선·일 판옥선 나란히 임진위란이 아직 끝나지 않고 풍신수길이 살아 있을 때 어리석게도 우리나라 사신이 명나라 사신을 따라 강화조약을 맺자고 현해탄을 건너간 일이 있었다.1596년 8월.임란 발발 4년만의 일이었다. 일행이 대마도와 이키섬을 거쳐 구주 본토에 다다랐을 때 바닷가 언덕 위에 거대한 성벽이 치솟아 있고 한 복판에 5층 누각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이것이 바로 나고야(명호옥:낭고야)성으로서 풍신수길의 소위 「조선정벌」전진기지였다. 나고야성 5층 누각 위에 올라서면 멀리 일기·대마 그리고 조선본토까지 보인다는 곳이다.이곳에 최근 기념박물관이 섰다고 해서 가보았다.이름하여 명호옥성박물관.개관 2개월만에 3만명이 다녀갔다면서 서곡관장이 기뻐하고 있었다. 『반대도 많았습니다만 침략전쟁을 반성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는 지방민의 여론이 결국 이겼습니다』 ○군국주위자가 새겨 먼저 나고야성지 위에 올라서서 북쪽바다를 바라보았다.『한국이 보인다』는 소리를 듣고 바다를 건너다 보니 정말 두 나라는 가까운 나라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그러나 아직도 일제때 일본군의 해외정벌 성지로서 세워놓은 기념탑이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내놓고 있었다.어떤 광신적인 군국주의자가 새겨놓았는지 「태합께서 바다 건너 섬들을 겨누어 보시다」라는 글이 보인다.태합이란 바로 풍신수길을 두고 한 말이다.아무리 지난 일이라 하더라도 섬뜩한 글귀이다. 성지에서 내려오면 새로 완성된 박물관 건물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진열실을 둘러보고 느낀 소감이 『아직도 한일 두 나라가 보는 임진왜란의 역사적 의미에는 큰 시각차가 있다』는 것이었다.4백년이나 지난 옛날 사건이 이토록 오래오래 상흔을 남길 줄이야 아무도 몰랐으리라. 박물관 진열실에서 가장 강한 인상을 남기는 것이 거북선 모형이다.거북선 바로 옆에 똑같은 크기로 일본 수군 판옥선이 전시되어 있는데 두 배는 서로 싸우지 않고 나란히 사이좋게 서있다. 내용을 잘 모르는 제3국인이 이 진열실을 일별하면 어느 쪽이 침략자이고 어느 쪽이 피침략자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것이다.일본인들이 볼 때는 특히 불쾌하지 않게 잘 꾸며 놓았다.3만명이 다녀간 이유를 알것 같았다.만일 우리나라에 이런 박물관을 지었다면 이렇게 형편없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없이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다. 복강(후쿠오카)에는 아직도 진주성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성지와 임란때 납치해온 당인(가라비토 즉 한인)정이 남아 있다.그들 한인들은 도공도 아니요,아무것도 아닌 무고한 농민들이었다.임란때 끌려간 우리 동포들 말고도 후쿠오카 땅에는 불과 50여년전 이곳 탄광에서 혹사당하다 죽어간 너무나 많은 한국청년들의 넋이 있는데 지금도 위령제 한번 지내주지 않은 채 한국관광객이 드나들고 있다. ○임란직전 국력 비슷 임란이 끝난 뒤 서둘러 국교정상화를 했다가 큰 손해를 본 조선정부.배상금과 송환인을 받기는 커녕 매년 30만냥이란 거액의 돈을 대마도에 지불하면서까지 평화를 유지하려 했던 가엾은 조선왕조의 국력과 외교력.그때를 생각하면 임란이 우리나라에 준 타격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간단히 말해서 15세기말 임란이 일어나기까지는 한일 양국의 국력은 비등비등했었다.그러나 난이 끝난 뒤 두나라 국력의 격차는 1대3으로 기울어지고 말았다.일제침략을 받은 뒤에는 그 격차가 1백분의1,2백분의1로 떨어져 오늘에 이르렀다.그런데도 한일관계의 장래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상하다 하겠는데 바로 신정초에 일본의 친지(정명으로 해 두겠다)로부터 이런 내용의 서신을 받았다. 『작년 일본의 호소카와(세천)총리가 한국을 방문하여 새삼스레 식민지지배에 대한 사죄발언을 했습니다.사죄발언 자체는 평가받을만한 일이나 다른 일면이 있다는 사실도 잊지마십시오.즉 금후에 예상되는,보다 대담한 (일본)자위대의 해외파견에 대한 다른 아시아 여러나라의 비판을 미리 막아 두려는 속셈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면서 호소카와내각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구자민당계세력이 왕년의 매파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장차 4,5년 안에는 꼭 일을 저지를 작자들』이라고 경고하였다.호소카와의 얼굴 생김새로 보아 전쟁을 일으킬 인물이 아니라고 속단할수 있다.그러나 한일관계라는 것은 그리 간단하고 달콤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임란이 끝난 뒤 2백년간 통신사라는 평화의 사절단이 현해탄을 건넜다.그러나 그것을 지금의 시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평화의 시대」였다고 회고하는 사람은 없다.1894년 갑오위란이라는 또하나의 침략전쟁을 준비하는 시대로 치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년으로 광복 50주년,일제패망 반세기를 맞는다.광복후 한 시대를 넘기면서 작금 돌아가는 국제관계의 변화를 주시해야 할 것이다.일본이나 중국에서는 민족주의가 강하다.한국에도 나름대로 강했다고 생각되는데 어찌된 일인지 최근에는 국제주의라고 하는 달콤한 슬로건에 현혹되어 이 나라는 동양 3국중 하나가 아닌 것처럼 착각하는 어른과 어린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명호옥 언덕 위에서 본 비문:『태합(풍신수길)이 바다 건너 섬들을 겨누어 보다』란 글귀가 자꾸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을 필자만의 기우라 비웃을수 있는 것일까.
  • 정도 유래/계룡산·무악과 최종경합(서울 6백년 만상:2)

    ◎태조,민심수습 위해 한양천도를 결정/구세력 반발속 무학대사·정도전 주도/고려때부터 고지소문… 개경·평양과 함께 3대도시 서울은 어떻게 서울이 되었을까. 서울은 조선의 수도가 되기전부터 「국조연장의 땅」으로 불렸다.고려때부터 국가와 왕조의 위업을 연장시켜줄 길지라는 풍수지리적인 관점에서 특별한 관심과 함께 「예비국도」의 대접을 받아왔다.고려 숙종은 1099년에 친히 한양에 행차해 지세를 둘러보고 도성개창도감을 두는 등 천도준비를 하기도 했으며 우왕도 1382년부터 중신들과 함께 반년씩 옮겨와 정사를 보았다.1390년 공양왕때는 개성이 지력이 쇠했다는 이유로 한때 임시수도가 된적도 있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만조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을 떠나 새 수도인 한양에 도착한 것은 즉위 2년2개월뒤인 1394년11월29일(음력 10월28일)로 지금으로부터 6백년전 일이다. 한양이 수도가 되기까지는 왕실의 강력한 천도추진에도 불구하고 일반백성과 중신들의 이견과 반대로 우여곡절을 겪는다. 천도에 시간이 걸린 이유는 왕실과 구귀족의이해관계가 엇갈렸기 때문이다.태조등 왕실은 천도를 통해 민심을 수습함과 동시에 개경을 기반으로 한 구귀족들의 경제적·군사적 능력을 무력화시키려 했다.이같은 우려에 천도에 따른 경제적 부담까지 져야하는 중신들은 풍수지리를 앞세워 자신들에게 유리한 곳을 수도로 만들기 위해 왕실과 줄다리기를 벌인다.이 사이 태조는 계룡산일대와 무악일대(현재의 연희동·신촌부근),한양등 3곳을 직접 방문하는등 천도를 염두에 두고 바삐 움직인다.천도 자체에 대한 반대론 뿐아니라 천도장소를 놓고도 풍수지리학적으로 의견이 분분할뿐 이견은 좁혀지지 않는다.이 때문에 1393년말에는 풍수지리와 도참사상에 관한 책을 모아 정리하는 음양산정도감이라는 관청이 만들어져 풍수지리에 관한 기준을 제시하기도 한다. 태조의 맨 처음 천도희망지는 한양이었다.사실 한양은 수도인 개경·서경(평양)과 함께 고려의 3대도시였을 정도로 기반이 잡혀있었다.태조는 즉위 직후인 1392년10월 최고행정기관이던 도평의사사에 빠른 시간안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도록 명한다. 그러나 배극염·조준등 대부분의 중신들은 성벽과 궁궐등의 시설을 지으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며 태조의 「즉각 천도」령을 좌절시킨다.1393년1월엔 중신중 한명인 권중화가 주장한 계룡산천도론이 받아들여져 10달동안 신도시건설이 진행되다 하륜등의 무악천도론에 밀려 중지된다.무악천도론 역시 중신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치자 천도계획자체가 표류하기에 이른다.태조실록은 『여러 재상의 천도반대에 대해 임금께서는 언짢은 기색으로 개성으로 돌아가 소격전에서 의심을 해결하리라고 말씀하셨다』고 당시를 적고있다. 다급해진 태조는 이어 한양으로 행차,고려의 남경구궁(지금의 청와대자리)을 둘러보고 주위의 의견을 물은뒤 『이곳의 형세를 보니 왕도가 될만한 곳이다.더욱이 조운이 통하고 길과 땅도 고르니 인사에 편함이 있다.』고 말하며 무학대사등의 지지를 얻어낸다.정도전과 무학대사등이 대세를 몰아 다른 중신들의 한양천도지지를 얻어내자 태조는 행여 그들의 마음이 바뀔세라 건설공사도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천도를 단행한다. 천도당시 별다른 시설이 건설되지 않아 한성부의 객사를 왕궁으로 이용해야 했다.관아와 관리들은 민가를 점유해 임시거처를 마련하기도 했다.천도 이듬해인 1395년 가을에 들어서야 경복궁과 종묘가 완성되고 수도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당시 천도가 얼마나 어렵게 이루어졌는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이런 어려움을 뚫고 옮긴 수도도 태종이 정도전과 이복동생인 방번·방석형제등을 죽이는 왕자의 난 직후인 1399년 정종원년에 개경으로 환도했다가 1401년 재천도하는 우여곡절의 한 막을 더하게 된다. 한양정도에 관해서는 무학대사와 왕십리,정도전과 무학의 도시배치논쟁,탐랑목성래용설등 이씨의 한양주인설등 얽히고 설킨 이야기들이 적지않다.실상 태조실록등 정사도 무학에게 의지하는 태조의 태도와 그의 영향력을 비교적 잘 그려놓고 있다.그러나 일반에 전해지듯 한양정도가 무학등에 의해 결정됐다기보다는 한양이 당시 수도로서의 최적지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 낙산·인왕·목멱·백악산 경계로 도성형성/한양에서 서울까지 성장과정

    ◎면적 15㎢·인구 5만으로 출발/강남지역 일제말까지 경기도/49년 특별시 승격… “1천만” 거대도시로 한양이 조선의 수도가 된 것은 1394년 11월29일(음력10월28일).정도 당시 서울은 동서남북으로 낙산 인왕산 목멱산(남산) 백악산등 4대산을 경계로한 성벽안 도성과 성저십리라 불린 성밖 10리까지였다. 넓이는 15.2㎦가량으로 지금의 40분의 1가량.한양의 일부면서도 도성과는 구별되던 성저십리는 동으로 왕십리와 청량리,남으론 한남동,서로 용산 마포,북으로는 세검정과 종로구 부암동일대에 이르렀다. 한성부의 영역이었던 한강 북쪽과는 달리 한강진 용산 서강 양화진과 강남의 송파 삼전도 동작진등은 중요 상업거점으로 성장한다.삼남지방의 곡식과 8도의 물산 대부분이 서해와 내륙수로를 이용해 한양으로 수송됐다.이에따라 서울주변의 강촌들은 수송·창고·수탁판매·숙박업등이 집결,경강상이란는 상가를 이룬다.특히 양화·노량·동작·송파·한강진등 5개진은 읍단위 행정관청과 관리들이 파견된 상업및 전략적 거점이었다. 강남의 전역은 조선말기까지 행정구역상 경기도에 속했다.그 때도 지금과 같은 이름이었던 우면산 남태령 관악산등은 과천현에 속했으며 강남이 서울에 일부로 포함된 것은 일제말이 되어서였다. 박석고개와 은평구 진관외동 일대는 경기도 양주목의 신혈면이었고 태릉에는 동북지역으로 가는 역사가 설치돼 있었다.지금의 구리시는 미음읍. 정도당시 인구는 대략 5만명 안팎.조선왕조실록은 태종9년 1409년의 한성부의 호수를 1만1천56호로,세종10년 1428년에는 1만8천5백22호 10만9천3백72명의 백성이 살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600년대 기록은 양반이 전체인구의 10%였고 상민이 15%,75%는 노비라고 전한다. 한강이 서울을 양편으로 나누듯 한양 중심에는 지금은 복개돼 자취를 찾기 어려운 청계천이 흐르고 있었다.이를 경계로 북쪽은 양반들이,남쪽은 중인과 서민들이 모여 살았다.청계천이남 을지로일대는 서민주택촌.경복궁에서 광토현(현재 광화문네거리)까지 이어진 폭35m의 대로 양쪽에는 이조·예조등 각종 관아가 밀집돼 있었고 광토현에서 동대문까지 폭35∼18m도로변에는 1414년까지 공랑(관에서 세운 상설점포)3천간이 들어선 상업중심지였다.일제가 점령하면서 서울의 종로일대는 한국인 거주지,을지로∼남산기슭∼용산∼원효로는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나누었다. 한양은 그때도 역시 교통의 중심지였다.서울과 지방은 6대간선도로인 의주로,경흥 서수나로,평해로,동래로,강화로,제주로(해남∼노량진을 잇는길)로 이어졌고 동북지역과는 금화∼금성∼철령∼안변∼원산로로 연결됐다. 미군정하인 46년8월 경성부에서 서울특별자유시로 선포된 서울은 49년 서울특별시로 승격됐다.면적도 경기도일부를 편입시켜 63년 5백93㎦,73년엔 6백5㎦로 확대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서울신문 전신 대한매일신보 “옛사옥 신문박물관 활용을”

    ◎서울행촌동 2층 건물 “보존” 한목소리 서울 종로구 사직터널에서 인왕산쪽으로 1백여m쯤 오르다 보면 붉은 벽돌로 된 자그마한 2층건물이 눈길을 끈다.한일합방 전까지 일제의 조선침략에 붓을 들고 항거하던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가 있던 건물이다.행정주소는 종로구 행촌동 1의18. 하얀색 화강암 기단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근대식 건물로 지하1층 지상2층 연건평 1백88평규모다. 최근들어 이 건물을 국가가 되찾아 사적지로 지정,우리나라 언론사에 길이 남을 대한매일신보를 기리고 우리 언론의 발자취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신문박물관을 건립하자는 의견들이 강력히 대두되고 있다.즉 지난 1883년 관보로 발행된 한성순보 이래 1세기 이상 지속된 우리 언론의 발자취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곳이 한곳도 없으며,더욱이 일제 강제수탈과정에서 유일하게 일제만행을 검열없이 보도하던 대한매일신보의 역사적 업적을 기릴 수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란 점에서 이같은 주장은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한매일신보는 잘 알려졌듯이 지난 1904년 창간돼 1910년까지 지령 1천6백60여호를 내고 강제폐간될 때까지 유일하게 일제만행을 지적하던 국내 유일의 「국난의 증인」이다.다른 신문들이 일제탄압과 검열로 악랄한 일제수탈을 그대로 보도할 수 없던 시기에도 신보는 영국인 베델(한국명 배설)이 소유자로 내세워져 있었기에 이를 적나라하게 알릴 수 있었던 것이다.고종의 은밀한 후원으로 세워져 양기탁씨가 주필로 있으면서 이준열사의 네덜란드 헤이그 밀사 사건을 세계인에 알리고 국론을 모았던 이 신문은 박은식·신채호선생등이 공들여 만든 걸작품이었던 것이다. 이 건물은 그러한 역사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설신문사 건물이란 점에서도 신문박물관을 반드시 이곳에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다.다행스럽게도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신문박물관 설립취지에 상당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어 추진에는 그리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이곳 주민 김모씨(45)도 『무심코 이곳에와 살고 있으나 이곳이 우리 역사측면에서 무척 중요한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우리가 이전해야 하는 불편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고 말한다. 원우현교수(고려대 신문방송학)도 『신문이 역사를 기록하는 공공기구임에도 우리언론의 과거를 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장소가 한 곳도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면서 『이런 맥락에서 신문박물관 설립취지는 아주바람직하고 또 필요한 일이다』고 말했다. 더욱이 내년은 서울 정도 6백주년이 되는 해이며 시가 덕수궁에서 시작해 구러시아 대사관터·옛 서대문이 있었던 자리인 지금의 서울시 교육청자리·인왕산 서울성벽등을 잇는 역사탐방 코스를 개발하고 있어 그 연장선상에 있는 이곳은 역사교육장소로 아주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었으며 바로 이웃에는 행주대첩의 장본인 권률장군의 생가와 조선조 청백리인 백사 이항복의 집터도 남아 있어 청소년은 물론 시민들의 산 역사교육의 장으로 손색이 없다. 시도 이같은 주장을 수용,문화재전문위원들에게 사적지 지정안을 이미 상정해둔 상태이며 이곳을 사적지로 지정할 경우 지금 살고 있는 주민들을 이주시키기 위한 절충작업을 펴나갈 계획이다.국유재산인 이 건물에는 20여가구 50여명이 주민세만 내며 살고있다.
  • 대마도의 백제산성(일본속의 한국문화:5)

    ◎1,300년전 축조… 전형적인 “한국식”/하도북쪽 만속에 자리… 돌로 쌓은 천혜요새/백제장군이 라당연합군 침공 막으려 급조 오늘은 대마도의 백제산성을 구경하러가는 날이다.우리들 일행이 묵은 곳은 대마도 태초의 백제수도로 알려지고 있는 기치(계지)국민숙사이다.이 기치에는 2백기가 넘는 고대왕묘(전방후원분)가 남아 있어서 한일양국 학계에 주목을 끌고 있다.이들 고분에 묻힌 사람들은 누구인가. 물론 일본인 학자들은 한국측의 백제인설을 강력히 부인하고 있지만 이 기치를 방위하기 위해 축조된 산성을 백제성이라 부르면서 기치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백제인이 아니라면 말이 안된다.그러나 말이 안되는 것을 말이 되도록 꾸며내는 것이 일본고대사학자들의 주된 임무다.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양심적인 일본학자들은 사석에서나마 자기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시인한다. 백제산성을 가노라면 배를 타야 한다.길이 없는 것이다.배는 전세를 내야 하고 하루 온종일 타고 가는 강행군이다.그러나 바다는 고요하고 좀처럼 파도가 일지 않는 아사마만이다. 「아사마」라고 하니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다.아사마는 본시 아사뫼 즉,단군이 정도하였다고 전하는 아사달에서 유래된 말이다. ○배타고 한참을 가야 아사달의 「달」은 뫼 즉,산을 지칭하는 우리 고유어다.이곳에서 「아사마」를 한자로 천○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그 뜻을 몰라서 이곳 향토사학자들 사이에 아사마논쟁까지 벌였다는 말을 듣고 내심 고소를 금할수 없었다. 대마도는 그 중간 허리에 깊숙이 바닷물이 들어와 넓은 만을 이루고 있는데 이 만은 한국 쪽으로 열려 있고 일본 쪽으로는 육지로 닫혀 있다.따라서 이 만연안에 정착한 태초의 이주자들이 한국 쪽에서 온 것이 확실하고 이 일대에 남긴 고분이라든지 그밖의 여러 유적들이 모두 고대한국인 특히 백제인들의 것임이 확실하다.그 가장 뚜렷한 증거가 백제산성이다. 지도에 보면 백제산성은 대마도의 상도와 하도중 남쪽의 하도 맨 북단에 위치하고 아사만을 내려다 보고 있다.러­일전쟁때 일본 해군이 이 산성에 포대를 설치하여 귀중한 산성의 망루와 봉수대를 파괴하여 버렸다고 하니 그 위치가 고금을 통해 군사적 요새지임을 알 수 있다. 배가 백제산성(여기서는 단지 성산이라고 부르고 있다)어귀에 닿자 높이 40m에 이른다는 깎아 지른 듯한 절벽이 보이고 그 아래 좁은 수문을 통과하여 들어가게 되어 있다.이 절벽을 「톱으로 썰어낸 듯한 바위」라 하여 거할암이라 명명하고 대마도 제일의 명소의 하나로 자랑하고 있다.참고로 말해두지만 대마도의 산세나 지질이 모두 우리나라의 연장이다.그래서 낯설지가 않다. ○산성 높이는 6∼7m 이 수문을 통과할때 탐방단 학생들은 일제히 함성을 올렸다.지금으로부터 1천3백여년전 우리 조상이 이런 아름답고 험한 곳에다 산성을 쌓았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수문을 통과하면 약간 넓은 또 하나의 만이 나오고 오른쪽에 산성이 보이는데 선착장이 없다.만일 안내해 준 영류구혜씨의 호의가 아니었다면 배를 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아슬아슬하게 배를 바위 틈에 대고 모두가 상륙해서 산성으로 올라갔다.수풀속을 헤치면서 2백∼3백m 산을 올라갔을까 높이 6∼7m나 되는 백제산성 제3문의 웅자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놀라운 광경이었다. 일본속의 한국문화유적지를 많이 보아왔지만 이토록 가슴을 친 순간은 없었다.도대체 이렇게 험한 산속에다 무슨 힘으로 바위를 깨뜨리고 돌을 깎아 차곡차곡 성벽을 쌓아 올렸을까.사진에서 보는대로 네모나게 툭 튀어나온 부분은 소위 각대라고 하는 것인데 이 각대만은 수직으로 쌓아야 한다고 되어 있다.만일 이 각대를 여느 성벽처럼 경사지게 쌓는다면 성의 방어기능이 반감되고 만다.또 각대와 각대 사이의 거리는 화살의 사정거리에 맞추어 쌓게 되어 있는데 제1,제2,제3의 성문거리가 정확하게 이 군사원칙에 들어맞고 있다.이것만 보더라도 이 성을 쌓았다는 백제장군의 군사지식이 당대 제일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감탄할 일이 아닐수 없다. 필자는 지금 유명한 정다산의 「민보의」에 나오는 축성법을 읽고 대마도의 백제산성을 논평하고 있는 것인데 1천3백년전의 백제장군이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지금까지의 정설에 따르면 6백60년 백제가나당련합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하게 되자 이곳 백제군(위군)이 가장늦게 백제구원차 출동하게 되는데 6백63년 백촌강 전투에서 전멸당한다.그래서 이곳 백제인들은 나당련합군의 침공을 두려워해서 이듬해인 6백64년에 이 산성을 급조했던 것이다. ○백제멸망 직후 건립 우리나라는 자고로 산성의 나라로 유명했다.전국에 2천개,지금 남한에만도 1천2백개의 산성이 있는데 그중의 많은 산성이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이고 일본에까지 뻗어서 대마도와 일기도,그리고 북구주에 우리식 산성들이 산재해 있다.대마도의 성산 일명 김전산성 이 그 대표적인 백제산성이다.워낙 산세가 험하고 바다를 앞에 두고 쌓은 천연의 요새가 되어 여간해서는 가보기가 어렵다.그래서 대마도라고 하면 이 산성 하나만 보아도 본전을 뽑았다고 할 정도로 가보기 어려운 곳이다. 우리나라 산성의 특수성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상세히 설명하겠으나 그 속에 우리 민주문화의 모든 비밀이 숨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수수께끼를 담고 있다. 일본속의 한국문화 제1번지가바로 이 대마도의 김전산성이란 사실을 다시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 2자치지역 어떤곳

    ◎예리코/예수가 세례받은 역사적 고향/가자/「인티파다」 시작된 지중해연안 팔레스타인의 자치대상 1호인 예리코시는 요르단강 서안의 역사적 고도로 요르단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문이며 가자지구는 지중해 연안으로 가늘고 길게 뻗친 가난한 인구과밀 지역이다.이들 지역은 요르단강 서안,가자지구,골란고원,동예루살렘 등 이스라엘 점령지 4곳의 총인구 1백80만명 대비 44%,총면적 7천4백62㎦ 대비 5%를 차지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낮은 도시인 예리코에는 요르단강 서안 인구의 1.5%인 1만5천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살고 있고 경계선내에는 유태인 정착지가 없다.평균 해면보다 2백50m나 낮은 요르단강 근처 푸른잎이 무성한 오아시스에 자리잡고 있는 이 도시의 현대식 중심부는 9천년전에 세워진 것으로 믿어지고 있는 고도의 폐허에서 2㎞떨어진지점에 건설돼 있다.성서에 따르면 이스라엘인들은 기원전 1200년에 그들 성직자들의 나팔소리로 예리코의 거대한 성벽이 무너진뒤 이 도시를 정복했다. 고도의 폐허에서 2∼3㎞ 떨어진 곳에 예수가40일간의 금식기간중 사탄의 유혹을받은 유혹의산과 예수가 요르단강에서 세례받은 장소가 있다. 한편 가자지구는 ㎦당 2천3백50명꼴의 인구과밀지역으로 팔레스타인 피란민이 대부분인 77만5천명이 비참한 수용소나 임시막사에서 살고 있다.지난 87년12월 이스라엘의 점령에 항의하는 인티파다(봉기)가 시작된 곳이 바로 이 지역의 빈민지구였다. 가자지구 주민 3만∼4만명은 이스라엘로 통근하면서 일용노동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나 지난 3월 점령지 봉쇄 이후 발이 묶여 있다. 이 지역에는 점령지까지 포함하는 예레츠(대)) 이스라엘주의를 부르짖는 약5천명의 완강한 유태인 정착민들도 살고 있다.
  • 효자동 사랑방(외언내언)

    워싱턴 펜실베이니아가에 있는 백악관 앞길은 언제나 카메라를 든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백악관 앞길뿐 아니라 댄스파티와 리셉션이 열리는 동관등은 일반의 참관이 허용되어 있다.런던에선 매일같이 시행되고 있는 전통복장의 근위병 교대가 버킹검궁전의 명물로 손꼽힌다.이 모든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도 일상적인 광경들이다. 이와는 달리 러시아황제의 거성이던 모스크바 크렘린궁전은 높이 9m에서 20m 두께 5m 안팎의 철통같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소련어로 「크레믈리」는 바로 성색란 뜻이다.소련이 개방되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 내부를 알 수 없었고 그래서 베일에 가려진 사람을 우리는 『크렘린 같다』고도 말한다. 무엇이든지 안된다고 강제로 막거나 가리려들면 사람의 심리는 더 궁금해지고 답답해지기 마련이다.청와대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차량통행까지 금해버리자 정부와 국민들 사이는 소원해지고 국민의 입장에선 위축감이 지나쳐 위협감까지 느끼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모든 권위주의를 청산하듯 오랫동안 차단했던청와대 앞길을 개방,사람들은 물 만난듯 숨통이 트인듯 아침부터 관광버스들이 줄을 잇고 있다. 막상 활짝 열어놓고 보면 별로 두드러질 것도 없지만 마치 특별한 곳인양 금을 그어놓는 성역인상에 거부감이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이제 누구라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효자동 사랑방이 문을 열었다.청와대 앞길을 산책하다가 들어가 쉴 수 있는 편안한 장소다. 본래 사랑방이란 아버지나 할아버지 같은 집안의 어른들이 시인 묵객들과 붓장난을 즐기던 집안의 휴식터 같은 곳이다.이곳에 들러 정부의 주요정책을 사진과 함께 볼 수도 있고 대통령들이 받은 선물도 구경할 수 있게 됐다.격세지감이 실감될만큼 새로운 풍조들이 눈앞에 와 있다.무엇보다 청와대는 「권위」가 아니라 우리와 가장 친근한 장소임을 새삼 확인케 된다.사랑방이 너무 어지럽지 않은 자연스러운 휴식공간으로 정착되기를 바란다.
  • 가정에 대한 성역화/이문우(여성칼럼)

    「성역없는 실사」라는 새 정부의 개혁정신이 정치·경제·교육·군대등 사회 각 분야의 비리를 폭로하고 응분의 조치를 취하는 현실을 보면서 그 높고 두텁던 성벽이 이제는 무너지려나 하는 큰 기대를 하게된다. 사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권력과 금력이 결탁된 부패가 만연돼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았으나 그 영역은 기득권자의 성역이어서 아무도 그 부패에 도전을 할 수 없었다.다행히 새 정부가 비리와 부패의 척결이라는 차원에서 부정에 대한 고발은 다 접수하고 조사한다고 하는 정책을 세웠기에 진심으로 환영하면서 밝은 사회의 빛이 계속 전국으로 확대되기를 바라는 마음 그지없다. 필자는 한 여성단체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부당한 처사가 행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통념때문에 치안이 불가능한 성역이 있음을 고발하는 바이다.그곳은 바로 「가정」이라는 성역이다.실제로 가정은 말 그대로 성역이어야 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성역이 45%의 여성들에게는 강자인 남편들로부터 구타를 당하는 폭력의 장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한국여성의 전화가 받은 상담은 모두 6천6백94건 이었다.이중 전화상담은 6천55건,면접은 6백39건 이었다.전체상담중에서 구타상담이 34%였고,면접상담중에서는 60%였다.이외에 매맞고 피난온 「쉼터」이용자수는 1백24명이었다.이렇게 많은 여성들이 육체적 정신적 학대에 시달리면서도 사회나 정부로부터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가정에 대한 성역화때문이다. 이제 새 정부는 그동안 가부장제문화의 비호아래 가정내에서의 아내 구타를 묵인해온 악법과 같은 전통을 깨고 아내구타도 또 하나의 한 인간에 대한 엄연한 폭행으로 인정하고 사회문제화 해야 할 것이다.그리고 더 나아가서 가정폭력제지법을 입법화해 여성의 인간화 나아가서는 평화로운 공동사회건설에 기여해야 할 것이다.
  • 상해 임정 74년(외언내언)

    상해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의 치열한 독립혼은 이러하다.『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의 독립을 지키고 우리의 시체를 발등상 삼아서 자손을 높이고 우리의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해야 한다』 또 있다.『네 소원이 무엇이냐』하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그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것이요 또 『그다음 소원은 무엇이냐』하는 세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모두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에 나오는 대목이다.백범일지는 그가 53세때 중국 상해의 법조계 마랑로 보경리 4호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서 1년여동안 기술한 것이다.그것이 상권이다. 3·1독립운동 이후 국내외에는 모두 6개처에 크고 작은 이른바 임시정부가 생겼다.이는 일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국민들의 독립의지가 정치적으로는 군주제에서 민주공화체제로,즉 통치왕조 구조에서 국민국가로의 지향으로 모여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이런 의지와 욕구에 부응하듯 몇개의 임시정부는 적잖은 우여곡절을 거쳐 상해 임정으로 흡수된다.상해임정은 국민적 통합의 의지를 받들어 개헌의 형식으로 러시아령의 대한민국의회 정부를 흡수한뒤 서울의 한성정부와 통합함으로써 정통유일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이다.19 19년 9월이었다.물론 이에앞서 고국을 떠나 중국각지 특히 상해에 모여든 독립지사들은 19년 4월 13일 정식으로 임정수립을 내외에 선포했던 것이다.74년전 오늘의 일이다.그리고 해방이후 거의 방치돼왔던 그 임정청사가 현지에서 복원됐다는 소식이다. 26년부터 32년까지 김구주석이 기거하며 백범일지를 집필했던 곳이다.감개가 새롭다.
  • 김윤환의원 한일의원연회장 내정의 함축

    ◎동면 넉달의 「허주」 봄기지개 켜는가/대선뒤 3차외유끝 “첫자리” 관심/신경제 일 협조 겨냥한 선택 평가/“회장 내정과 은둔청산은 별거” 시각도 허주가 긴 동면에서 깨어나기 위해 기지개를 켜는가. 김윤환의원(민자)은 항상 자신을 아호인 허주(빈배)로 불러주길 원한다.누구든지 포용할 수 있고 어떤 상황도 헤쳐나갈 수 있는 넉넉함을 은연중 과시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러한 하주가 한일의원연맹회장직을 맡게 됐다.세인의 관심사는 한일의원연맹회장에 누가 됐느냐가 아니다.하주가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 관심거리다. 70년대말 언론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래 하주는 결코 「빈배」가 아니었다.항상 전면에 나서 정치를 리드했다. 하주에게 정치적 시련기가 있었다면 5공중반기와 지금 두번정도이다. 공천이나 공직탈락으로 방황하던 5공때 모습은 개인적 차원이었다.이제는 다르다.하주는 새정부출범 이후 계속 소외되고 있는 민정계,특히 「김영삼대통령 만들기」에 진력했던 구민정계내 신민주계의 상징처럼 되어있다. 새정부가하주를 어떻게 「대접」하느냐에 따라 향후 정국운영,나아가 차기 대권구도까지 영향을 받을 것이 틀림없다. 하주가 「겨울잠」에 들어간 것은 지난해 12월18일 대선이후.불과 4개월여동안 정치행동을 자제한 것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다. 3차례 외유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비치면서 『하주는 이제 갔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그가 한일의원연맹회장으로 돌아왔다.화려한 컴백은 아니지만 일단 재기의 발판은 마련한 셈이다. 하주의 연맹회장직 임명에 대한 청와대측의 설명은 「한일관계의 중요성때문」이라는 것이다.근래 한일관계는 정신대문제등 최악의 상태인 것으로 알려진다.일본통인 전회장 박태준씨를 「홀대」함으로써 일본정치인들의 대한의식도 나빠졌다. 신경제정책수행을 위해 일본의 협조가 필요하며 그것을 이루어낼 역량을 가진 인사로 하주가 꼽혔다고 볼수 있다. 정치적 관점에서는 민정계 불만 해소의 목적도 있다고 비쳐진다.재산공개 파문으로 민정계 상당수가 「다친」상황에서 하주를 외국으로 돌게만 하긴 힘들었을 것이다.이제까지 한일의원연맹회장을 역임했던 인사들은 김종필·정일권·박태준·이재형·권익현·김재순씨 등이다.모두 당대를 풍미했던 거물들이다.민정계 중간보스정도로 인식되던 하주가 원로급 반열에 오를 기회를 맞이 했다고 생각된다. 하주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김대통령의 자신에 대한 「애정」이 식지않았음이 확인된 점이다.청와대측은 지난달 18일 출국,영국을 거쳐 미국에 머물고 있는 하주를 급히 찾은 것으로 전해졌다.김대통령이 직접 하주에게 연맹회장직을 맡아주도록 당부했다는 것이다. 박준규·김재순전국회의장에게 적용된 「토사구팽」이 하주에게는 예외일수 있다는 관측도 낳게 한다. 그러나 연맹회장 내정과 「정치은둔」청산과는 별개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최형우총장·김덕용정무1장관·박관용 청와대비서실장등 민주계 실세트로이카가 쌓고 있는 성벽은 「철옹성」에 가깝다. 하주 스스로도 아직 「주체」가 될수 없음을 아는 눈치다.이들 개혁 실세들,궁극적으로 김대통령의 결심 한번이면 어찌되리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민정·공화계의 지원이란 것은 「동정」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연맹회장에 내정됐음에도 하주는 귀국을 앞당기지 않고 있다.이달 중순쯤 돌아올 예정이다.국내정치에 직접 간여하기 보다는 외곽으로 도는 연맹회장직이 「객체」로서 때를 기다리는 하주에게 걸맞는 자리일수도 있다.
  • 21세기 한국의 문을 여는 “이어령과의 대화”:11

    ◎병풍원리/탈경계­탈구축개념의 미래는/「벽속의 고립」 서구문명 한계에/초가식 「열린 자아」가 대안으로/바슐라르 표현대로 서양 문화는/서방이 벽면으로 싸인 지하실형/병풍속서 태어나 병풍속서 죽는 한국인 정서공간은 매우 신축적 □황규호문화부장=선생님께서 올림픽 개폐회식을 기획하셨을 때 그 주제를 「벽을 넘어서」라고 하셨는데 정말 그 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철의 정막이 무너지고 하였지요.오늘은 그 벽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새로운 세기를 전망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어령전문화부장관=서구문화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벽의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도시든 개인의 삶이든 모든 것이 두꺼운 벽을 기본으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지요.가령 도시국가라는 것은 완전히 성벽안에 세운 도시지요.성벽밖에는 한데지요.유럽은 섬이 아닌 대륙인데도 일찍부터 고층화가 이루어진 것은 성벽이라는 제한된 구획속에 도시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것이 커지려면 옆으로 퍼지지 못하고 위로 치솟아 올라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동서양의 성곽 달라 □동양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성벽으로 나라와 도시를 둘러친 것 말입니다.중국의 만리장성이 그렇구요. ■물론이지요.한자로 나라국자를 써보세요.국은 사각형의 구자로 싸여 있지 않습니까.그것이 바로 성곽이지요.그런데 자세히 비교해 보면 중국이나 한국의 경우에는 성밖이라고 해도 얼마든지 마을이 있고 자연의 숲이나 냇가에서 사람들이 퍼져 살지요.즉 성안과 성밖의 구획은 있어도 사람이 사는 곳으로 별 차이가 없습니다.그러나 서양의 도시국가 형태는 성밖과 성안은 인간의 공간과 인외경의 자연 공간으로 대립적 관계로 파악되었지요. □서양의 벽은 아주 뚜껍다는 것이군요.나라의 성만이 아니라 개인집의 벽도…. ■그래요.왜 우리는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지 않아요.얼마나 벽이 허술하면 말이 이렇게 밖으로 다 새어나갑니까.그런데 서양의 속담에는 「벽에는 귀가 있다」고 하지요.벽이 아무리 두꺼워도 사람의 비밀이야기는 샌다는 뜻입니다.실제로 서양집은 적조식으로 돌이나 벽돌로 벽을 쌓아 만든 것이아닙니까.그러나 한국집은 가구식이라고 하여 기둥을 세워놓고 집을 지은 비내력벽으로 되어 있습니다.그래서 벽은 기둥과 기둥의 공간을 바른 것이지 가옥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그렇군요.전통적인 한옥은 벽을 터도 무너지지 않지만 양옥집은 벽을 부수면 집 자체가 무너지고 말지요. ■그래서 첨성대같은 건축물이 가구적 한국의 건축양식으로 볼때 아주 예외적인 것에 속한다고 하지 않아요.첨성대는 기둥을 세우지 않고 돌을 쌓아 말하자면 벽을 쌓아올린 내력벽건축물이기 때문에 서구의 것과 같다고 할수 있어요. □결국 서양사람이 두꺼운 벽을 원했다는 것은 그만큼 고립적이고 개인의 자아중심적인 문화를 지향하고 있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말씀이시군요. ■내 말이라고 하기 보다는 서양사람 자신들이 자기네들의 문화적 특성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지요.바슐라르같은 사람은 서양문화를 지하실적 문화라고 부르고 있는데 지하실은 사면이 벽이 아닙니까.그런데 지하에다 판 것이어서 그 벽은 땅과 직접 연결되어 있어서 절대로 허물수 없는 두께를 갖는 벽이라는 것이지요.서구에서는 문화예술도 정치도 온갖 음모와 형별도 이 지하실속에서 이루어 졌다는 겁니다.나치에 항거한 레지스탕스도 지하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지요.반대로 나치의 온갖 만행­고문같은 것이 바로 또 이 지하실에서 감행되었지요.사르트르의 그 유명한 단편 벽을 보시면 이 벽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또 상징적으로 그러져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한국의 전통적인 건축물에는 지하실이라는 것이 없군요. ■지하실 대신 개구멍이 있었지요.(웃음)담벽을 뚫는 것 그것이 개구멍이고 이 개구멍을 통해서 궁궐과 사가의 내통이 가능했고 이도령은 춘향과의 사랑을 가능케 한 것이지요.서양의 역사가 벽을 쌓는 이 지하실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우리의 역사는 거꾸로 벽을 뚫는 개구멍에서 비사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좋겠지요.농담이 아니라 옛날 시조를 보십시오.「십년을 경영하여 초로삼간지어내니 반은 청풍이요 반은 명월이로다.산천을들일 곳이 없으니 둘러치고 보리라」라는 시조에서 보듯 바람이 맘대로 들락 날락하고 달빛이 새어 들어오니 이집 벽이 어느 정도겠습니까. ○궁궐­사가 내밀통로 □산천은 들일 곳이 없으니 둘러치고 보리라고 한 것을 보면 담벽도 없는 것 같습니다.(웃음) ■그 종장을 특히 주목해서 읽어야 됩니다.둘러치고 보리라라고 하였는데 거기에서 우리가 연상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병풍이 아닙니까.이 병풍이야 말로 동양 특히 한국인의 마음과 의식의 지평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상징물이라고 할수 있지요.병풍이야말로 가장 가볍고 가변적이고 상황에 따라 신축성있게 적응하는 이 지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벽이지요.필요할때 펴면 벽이 되어 공간을 분할하고 또 필요가 없을 때는 접어서 개켜 버리면 형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콘크리트 벽같으면 야단나지요.한번 허물거나 또 쌓으려면 대 공사를 해야 하지요.그런데 서양에는 병풍과 같은 것이 없었나요. ■스크린이라하여 간단히 접어 세우는 나무판때기의 가리개가 있긴 하지요.그러나 병풍과는 개념이 다릅니다.병풍과 같이 신축성 있는 벽이 생긴 것은 천재적인 발명가로 알려진 백민스터 프라에 의해 1930년대에 이르러서야 실현되지요.우리가 왜 아코데온 벽이라고 부르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병풍은 중국이 기원이고 일본에서도 많이 쓰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렇기는 해도 미국의 동양학자 맥쿤의 증언대로 이 지상에서 병풍을 가장 생활화 하고 현재에도 많이 쓰고 있는 민족은 단연 한국이라고 증언하고 있어요.생각해 보세요.우리가 처음 이 세상에 태어난 곳이 어디예요.병풍속이 아닙니까.그러다가 돌날이 되면 또 병풍을 둘러치고 돌상을 받지요.서양식으로 결혼을 해도 폐백을 드릴때만은 화조 병풍이 있어야되지요.환갑연이 돌아오면 또 병풍을 둘러치고 잔치상을 받습니다.그러다가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날 때에도 병풍이 그 시신을 가려주지요.죽고 난뒤에도 병풍과의 인연을 끊지 못합니다.젯상을 받을 때 돌아가신 혼백들을 감싸주는 것이 바로 병풍이 아닙니까.이렇게 한국인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 생의 장면들을 병풍으로 장식하고 죽고난뒤에까지도 병풍에 의존하게 됩니다.이렇게 쉽게 만들고 허무는 그 공간의 경계선처럼 한국인의 자아는 말하자면 「나와 너」「나와 세계」의 그 관계는 매우 신축성이 있습니다 ○군중속의 고독 낳아 □근대적인 자아란 콘크리트 벽처럼 두껍고 튼튼한 것이 아닙니까.그리고 거기에서 프라이버시가 생겨나고요. ■병풍식 자아는 타아와의 경계선이 애매하고 가변적인 것이어서 항상 상황에 따라 흔들리고 있지요.쉽게 나와 너의 공간이 하나가 되기도 하고 또 분리되기도 합니다.서구식 관점에서 보면,그리고 산업사회의 풍토로 보면 근대적 자아가 결여된 것처럼 보입니다.우리가 예사로 남의 프라이버시에 개입하기도 하고 침해하기도 하는 것은 우리의 자아가 병풍식이기 때문이라고 할수 있지요.아주 대조적인 것은 무엇인가 슬픈일이나 괴로운 일이 생기면 우리는 하소연을 하고 넋두리 같은 것을 하게 됩니다.남과 함께 자신의 고통을 나누려고 하지요.그러나 서양영화같은 장면에서 가장 많이 볼수 있는 장면은 우리와는 반대로 「I just want to be left alone」이라는 대사입니다.「날 좀 혼자 있게 해줘」즉 남과 세계를 향해 두꺼운 벽을 쌓고 그 안에 혼자 들어가 앉아야 마음이 가라앉고 생각이 정리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막같은 사회,혼자서 지하실벽을 응시하고 있는 거꾸로 찍힌 활자의 고독,군중속의 고독같은 것이 생겨나는 것이지요.영국의 경우 가옥수는 많은 데도 주택난이 심한 것은 혼자서 집 한채를 차지하고 사는 독신자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극단적인 자아중심적 세계관은 무인도적 존재를 낳게 됩니다.그래서 근대 산업사회에서는 누구나 로빈슨 크루소가 되는 것입니다.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표류기가 우리나라의 소설에는 없지요. ■무인도의 발견·무인도에의 표류­그것이 근대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에 혼자 표류했지만 그 속에서 농업과 산업을 이룩합니다.혼자의 힘으로 문명을 만들어 가는 것이지요.나중에는 프라이데이라는 노예까지도 두게 됩니다.이 소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단순한 표류기가 아니라 로빈슨은 근대시민사회의 정신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로빈슨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인류가 걸어온 문명의 역정을 그 무인도에서 재현하고 발전시킨 것입니다.이 개인의 힘,그 창조력과 자유에 토대를 둔 사회가 바로 근대 시민사회라고 하겠지요. 개척민이 만든 미국의 역사는 바로 로빈슨이 이룩한 그 표류도의 역사를 확대시킨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우리가 표류기 없는 문학속에서 살아왔다는 것은 절대 자아가 없는 문화속에서 살아온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남북 분단으로 우리는 할 수 없이 이산 가족이 되었고 그 슬픔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지만 서양사람들은 스스로 이산가족이 되어 홀로서기를 합니다.가장 미국인다운 미국인의 원형이라는 마운틴 맨이 그렇습니다.깊은 산속에 들어가 혼자서 몇달이고 움막속에서 생활하면서 비바를 잡아 모피를 팔아 생활하는 사람들이지요.그리고 문학을 보아도 마크트웨인의 헉크핀의 모험에서 시작하여 멜빌의 백경,그리고 헤밍웨이의 여러 소설들은 모두가 가정에서 도망쳐 나오는 남자들의 이야기들이지요.그런데 이 두꺼운 자아의 지하실 벽들이 서서히 무너져 내려 앉는 소리와 그 서사극의 종말을 우리는 서구의 새로운 소설철학 그리고 실제의 현실속에서 목격하게 됩니다.이른바 「보더레스」(경계선없는)시대가 오고 있는 것입니다. ○국경없는 시대 도래 □보더레스라는 말은 주로 경제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말이지요.기술 자본 상품등 다국적 기업이나 자유무역 등으로 오늘날의 기업이나 산업은 국경이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가령 미국제 자동차라고 하지만 그 엔진은 멕시코에서 만들고 부품은 일본에서 그리고 차체와 디자인은 이탈리아가 맡는 식으로 말입니다.과연 그것은 미국제라고 할수가 있는지 의심이 갑니다.그러나 그것은 경제에서 끝나지 않습니다.인간의 자아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타자의 경계가 불투명합니다.경계침범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지요.인간관계만이 아니라 사물도 그래요.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사물들의 윤곽이란 것도 결코 그렇게 딱딱하고 분명한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곤충을 잡아먹는 식물이 존재하는 한 동물과 식물의 경계선이라는 것도 확실치가 않습니다.우체통을 보십시오.우체통은 폐쇄된 공간이 아닙니까.그러나 우체통에다 편지를 넣으면 넓고 먼 세계로 그 편지가 운반됩니다.우체통은 폐쇄공간이 아니라 열려져 있는 넓은 공간이기도 한 것입니다.안과 밖이라는 개념도 그래요.호주머니를 흔히 내부공간이라고 믿고 있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세요.외부가 안으로 침범해 들어온 것이 바로 호주머니가 아닙니까.호주머니 속은 「안」이 아니라 「밖」의 것이 들어와 있는 것이지요. 이 탈구축의 이론을 통해서 우리는 서구 근대문명의 허구와 한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그리고 이때 떠오르는 것은 병풍 같은 자아속에 잠재된 미래의 가능성입니다. □이야기가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다음에 다시 계속하기로 하고 이 자리에 병풍을 두르도록 하지요.
  • 후세인의 도발은 고도의 전략행위(해외사설)

    사담 후세인이 저지른 것은 미친짓인가 전략전인가.걸프전쟁 2주년을 앞두고 1991년1월에 일어났던 똑같은 문제에 대한 응수도 그때와 똑같다.즉 미국의 군사적 개입이다. 한달전부터 거듭되어 온 이라크 독재자의 도발은 조지 부시에 대한 적개심이 가장 큰 이유다.바그다드에서 볼 때 부시의 선거 패배는 신의 심판이 었다.사담 후세인은 임기말의 부시가 반격할 힘이 없으리라고 보았기 때문에 쿠웨이트를 빼앗아간 인물을 모욕하는 즐거움을 뿌리치기 어려웠을 것이다.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정치적 계산과 개인적 감정을 구분하지 않는 그는 결코 속죄하는 일이 없으며 오로지 복수에 몰두했다. 사담 후세인은 광신자인 듯하다.그는 자신을 마호메트의 직계로 만든 가승을 공표했고 걸프전쟁 동안에는 꿈에 마호메트가 나타났다고 발표했다.그는 자신을 같은 고향 출신으로 십자군 전쟁때의 영웅이던 살라딘과 동일시했다.그는 기원전 6세기의 바빌로니아 왕이며 위대한 정복자인 나부쇼도노소르의 후계자로 자처했다.이 왕이 후세인의 손을 잡은 모습을 보이는 거대한 그림이 바그다드 성벽들에 있다. 지난 몇주의 사태 진전에 대해 설명하자면 길어진다.우선,대외적인 동기가 있다.사담 후세인은 조지 부시를 벌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빌 클린턴을 시험하려고 했을 것이다.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이라크 언론들은 미국의 새대통령을 줄곧 헐뜯어 왔다.임박한 클린턴의 대통령 취임을 바그다드­워싱턴 관계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본 것이었다. 친미 아랍 세력들이 군대 파견을 내켜하지 않는 상황도 이라크에는 좋은 기회로 보였을 것이다.특히 사우디 아라비아와 이집트의 정부는 서방측의 군사 보복이 무엇보다도 결과적으로 회교 교조주의자들을 고무하게 될것을 겁내고 있다.오늘날 진실로 위협적인 존재는 이란이기 때문이다. 내부적 동기는 다음과 같다.사담 후세인은 외적의 힘입이라는 유령을 흔들어 군을 장악하고 있다.그는 군의 전선을 외적 쪽으로 돌려 놓아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과녁이 될 수 있다. 또한 그는 경제 제재로 점점 고통이 심해지는 국민들에게 그 책임이 자신에 있지 않고 아랍 세계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이라크를 해치는 서방의 악마에게 있다는 것을 보이려 했다.그는 미국이 새로운 전쟁에 빠져들지 않을 것이므로 자신을 뒤엎지 못할 것은 뻔하고 단순한 보복 폭격 정도라면 자신의 권력을 더 튼튼히 해준다는 역설적 결과를 계산했다.이라크 국민의 저주 대상은 그들의 대통령이 아니라 미국이 되니까. 사담 후세인에게 딱 맞는 앵글로색슨의 속담이 있다.『그는 미쳤지만 여우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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