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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린세상] 할머니 할아버지 모습 사라진 가족사진/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열린세상] 할머니 할아버지 모습 사라진 가족사진/함인희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지난달 손주 녀석이 다니는 유치원에서 구청 청소년회관을 빌려 발표회를 한다기에 모처럼 가족 나들이를 했다. 재롱잔치가 시작되기 전, 초대받은 손님들의 무료함을 달래주려, 무대 한쪽에선 원아(園兒)들의 가족사진을 주제로 한 슬라이드 쇼가 진행되고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어가는 사진 속에는 엄마 아빠 형 누나 동생들과 함께 행복하게 웃음 짓는 주인공들 모습이 담겨 있었다. 처음엔 무심히 지나쳤는데 슬라이드가 여러 차례 돌아가는 동안 슬그머니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요즘은 엄마 아빠 혼자 자녀를 키우는 한부모 가족이 10쌍 중 최소 1~2쌍에 이른다는데, 조부모가 손자 손녀를 돌보는 조손(祖孫) 가족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는데, 심지어 결혼이주가족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는데, 사진 속 가족은 하나같이 엄마 아빠에 한두 명의 자녀로 구성된 핵가족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슬라이드 쇼에 등장했던 가족사진 중엔 한부모 가족이나 조손 가족임을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아 부부가 이혼하기 전 행복했던 시절 찍어두었던 사진도 있었을 것이요, 다문화가족임이 부끄러워 가족사진을 숨긴 경우도 있었을 게다. 사진 속에만 남아있는 엄마 아빠의 웃는 모습을 보며 우리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기만 하다. 모름지기 가족이란 엄마 아빠와 아이들이 있어야 ‘정상’이란 고정관념이 강하면 강할수록 이른바 비정상가족에 대한 사회적 낙인 및 편견이 강화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실제로 가족이라 부르기 민망할 만큼 서로에게 소원한 ‘빈 조개껍데기 가족’의 경우에도, 사실을 숨긴 채 밖을 향해 높은 성벽을 쌓고 겉으로 화목하게 사는 것처럼 위장하는 ‘요새가족’을 유지하는 경우가 늘어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부모 가족이나 다문화 가정처럼 정말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가족의 현실이 가족사진 속에서 ‘정상가족’으로 위장되고 있는 건 아니겠는지. 뿐만 아니라 예전 안방이나 마루 한복판에 걸려 있던 가족사진 속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모시고 옆으로 뒤로 엄마 아버지 작은아버지 삼촌 외삼촌 고모 이모들이 죽 줄지어 서고 손자 손녀들이 가득했었는데, 확대가족의 번화한 모습이 담긴 가족사진은 이젠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만큼 희소해졌다. 하기야,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할머니 할아버지가 가족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어 보니 ‘아니요’라고 답한 학생들 숫자가 10년 전에 비해 8배 이상이나 증가했다는 신문기사를 읽은 기억이 난다. 함께 살지 않기에 가족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말 걱정되는 건 이제 고령화에 힘입어 할머니 할아버지는 기본이요,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도 살아 계시고, 때론 고조할머니 고조할아버지께서도 살아 계실 가능성이 점차 현실화되는데, 함께 사는 엄마 아빠만 가족이라 생각한다면 진정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인구학자이자 미래학자인 토레스 길은 향후 인류 최대의 과제는 4세대 이상의 다세대(多世帶) 사회가 등장하면서 세대 간 공존의 지혜를 모색하는 것이 최대의 사회적 과제로 부각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이제 방법은 유치원 때부터 살아있는 생생한 가족교육을 시작할 필요가 있으리란 생각이다. 한부모 가족이든, 조손 가족이든, 다문화 가족이든, 장애인 가족이든 놀림이나 차별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럼없이 함께 어울리고 서로 돌봐주어야 할 우리의 이웃임을 가르쳐주어야 할 것이요, 함께 살지 않더라도 할머니 할아버지,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 모두 엄마 아빠를 낳고 길러주신 진짜 가족임을 경험하도록 해주어야 할 것이다. 차제에 유치원에서부터 가족을 주제로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하여, 할머니 할아버지는 물론이요 이모 삼촌에 사촌 동생에다, 가족처럼 친근하게 지내는 우리 이웃들까지 포함하는 다채로운 가족사진을 모아보는 건 어떻겠는지. 할머니 할아버지 이모 삼촌들이 가족 풍경에서 사라진 자리에 핵가족만 남아 있음은 역설이요, 사진 속에서만 핵가족의 행복을 시연해 보이는 것은 위선일 게다. 가족은 스스로의 모습에 솔직할 때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음을 어린 시절부터 느끼고 생각도록 해 주는 일, 작은 아이디어만으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 생방송 중 거대 파도에 휩쓸리는 女기자 포착

    생방송 중 거대 파도에 휩쓸리는 女기자 포착

    21일 호주방송 ‘9news.com’는 지난 20일(현지시간) 프랑스 브르타튜 생말로에서 BFMTV 날씨 뉴스를 전하던 파니 아고스티니(Fanny Agostini) 기자가 거대 파도에 휩쓸리는 아찔한 상황이 포착됐다고 보도했다. 영상에는 중세의 성벽과 탑으로 유명한 바위섬 몽생미셸 주변에서 생방송 뉴스를 전하려는 아고스티니의 모습이 보인다. 스튜디오에서의 진행 멘트가 이어지고 그녀가 리포팅을 하기 위해 서 있다. 곧이어 그녀 뒤로 갑자기 거대한 파도가 일자 사람들이 소리를 지른다. 사람들의 성화에 고개를 돌려 파도를 확인한 그녀가 손을 저으며 방송을 끊을 것을 요구하지만 거대한 파도는 이미 그녀와 스태프들을 덮치고 지나간다. 잠시 후, 화면에서 사라진 아고스티니가 바닷물에 흠뻑 젖은 채로 카메라 앞에 나타나 방송 뉴스를 이어간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고스티니가 웃음을 머금은 채 리포팅을 이어가자 스튜디오 진행자들도 웃음을 참지 못한다. 프로다운 면모를 보여준 그녀의 영상은 지난 19일 유튜브에 게재된 지 이틀 만에 20만 4600여 건의 조회수를 기록 중이다. 사진·영상= BFMTV youtube 영상팀 seoultv@seoul.co.kr
  • [新국토기행] 충북 제천시

    [新국토기행] 충북 제천시

    “천년의 솔향이 묻어나는 의림지, 옥순봉의 절경을 담은 내륙의 바다 청풍호, 비단으로 수를 놓은 듯한 금수산, 잠시 머물기만 해도 힐링이 되는 제천에서 마음껏 웃고 즐기고 머물다 가시옵소서.” 충북 북부에 있는 제천시는 천혜의 관광자원을 보유해 휴양지로 뜨는 곳이다. 약초의 고장으로 2010년 국제한방바이오엑스포를 개최하는 등 한방산업이 발달해 건강이 가득한 자연치유도시로도 불린다. 바쁜 일상의 속도를 늦추고 자연과 문화를 즐기며 사람과 소통할 수 있는 곳으로 인정받아 수산면과 박달재는 슬로시티로 인증받았다. 김진형 부시장은 “우리 고장은 건강한 기운이 가득해 힐링을 하기에 제격”이라며 “상반기에 동서고속도로가 개통돼 관광은 물론 산업 분야에서도 발전 속도가 더욱 빨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인구는 13만 6000여명, 1980년 시로 승격됐다.[볼거리] ●번지점프·유람선 등 청풍호 즐길거리 풍성 제천이 휴양 관광지로 뜨는 데 일등 공신은 단연 청풍호다. 청풍호는 1985년에 준공한 충주댐으로 인해 조성된 인공호수다. 제천시, 충주시, 단양군에 걸쳐 있다. 제천에서는 청풍호라 부르고, 충주 지역에서는 충주호라 부른다. 청풍호는 ‘내륙의 바다’라고 불릴 만큼 담수량이 많다. 면적 67.5㎢, 평균 수심 97.5m, 저수량 27억 5000t에 달한다. 이 중 제천시의 담수 면적이 호수 전체 면적의 약 60%를 차지한다. 청풍호에 오면 볼거리, 즐길거리가 넘쳐 난다. 아름다운 풍광을 이용해 청풍호 주변에 청풍문화재단지, 청풍랜드, 활공장, 수상 레포츠장 등이 마련돼 외지인들의 방문이 줄을 잇는다. 단양의 장회나루까지 유람선도 운행된다. 유람선을 타면 그림 같은 호반의 풍광이 연인처럼 따라다닌다. 국도 82번 도로를 타고 청풍면 쪽으로 달리는 청풍호반 길은 자연풍광과 레저휴양시설이 조화를 이루며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꼽힌다. 청풍호가 생기면서 수몰민이 발생, 상당수 주민이 삶의 터전을 상실하는 등 고통이 적지 않았지만 지금은 제천의 보물이다. ●한 해 13만명 찾은 모노레일 ‘필수코스’ 청풍호 주변 관광지 가운데 가장 인기가 높다. 모노레일은 시가 2009년부터 2012년까지 4년간 총 42억원을 투자해 만들었다. 모노레일을 이용하면 마을에서 비봉산 정상(해발 531m)까지 23분이면 갈 수 있다. 걸어서 가면 1시간 이상 걸린다. 하산할 때도 모노레일을 이용할 수 있다. 모노레일의 총 길이는 2.94㎞. 6인승 12대가 설치돼 있다. 모노레일의 인기 비결은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 마련된 비봉산 정상에서 청풍호의 장관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비봉산 정상에 서면 청풍호와 함께 월악산과 옥순봉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과 물의 기막힌 조화에 많은 관광객이 최고라는 찬사를 보낸다. 지난해 13만명이 모노레일을 이용했다. 인터넷 예약 70%, 현장판매 30%로 이용권을 판매하는데 인터넷 예약은 서둘러야 원하는 날 이용할 수 있다. 신영철 시 관광시설팀장은 “통영의 다도해 전경보다 비봉산 정상에서 눈에 들어오는 청풍호 풍경이 더욱 아름답다”고 자랑했다. 이용료는 어른 8000원, 어린이 6000원, 장애인 3000원이다. 동절기인 12월부터 2월까지는 운행하지 않는다. ●우륵도 반한 ‘국내 最古’ 저수지 의림지 풍경 ‘제천 10경’ 중 ‘제1경’인 의림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저수지로 삼한시대 축조됐다. 본래 이름은 임지였다. 고려 성종 11년(992) 군현 명칭 개정으로 제천을 ‘의원현’ 또는 ‘의천’이라 하면서 이후 제천의 옛 이름인 ‘의’를 붙여 의림지라 부르게 됐다. 현재까지도 수리시설로 활용되지만 지금은 유원지로서 명성을 더해 가고 있다. 호수 주변에 순조 7년(1807)에 세워진 영호정과 1948년에 건립된 경호루, 수백년을 자란 소나무와 수양버들, 30m의 자연폭포 등이 어우러져 마치 아름다운 정원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 3대 악성 가운데 한 명이며 가야금의 대가인 우륵 선생이 가야금을 타던 바위 우륵대와 그가 마시던 샘인 우륵정도 남아 있다. 시가 의림지 주변에 목조 산책길과 수경분수, 인공폭포, 공연시설까지 꾸몄다. 의림지 야경은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렌즈에 담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의림지 수심은 8~13m, 호반 둘레는 2㎞에 이른다. 겨울철 의림지에서 잡히는 빙어는 담백한 맛의 회로 각광받는 명물이다. ●‘동양 알프스’ 월악산… ‘단풍 절경’ 금수산 ‘동양의 알프스’로 불리는 월악산은 우리나라 5대 악산에 속하는 명산이다. 거칠고 높은 산만큼이나 깊고 아름다운 골짜기에 숲과 계곡이 보석처럼 숨겨져 있다. 송계계곡, 용하구곡 등이 유명하다. 덕주사 마애여래입상을 비롯해 많은 문화유산도 간직하고 있다. 송계에서 보면 영봉, 중봉, 하봉으로 이어지는 암봉의 행진이 장엄하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등산로는 덕주사 코스. 영봉까지로 산행 시간은 3시간 정도다. 제천과 단양에 걸쳐 있는 금수산의 본래 이름은 백암산이었다. 그러나 1548년 단양군수로 있던 퇴계 이황이 마치 비단에 수를 놓은 듯 아름답다고 해 금수산이란 이름을 얻었다. 이름에 걸맞게 산세가 수려하고 기암절벽이 절경을 이뤄 사시사철 어느 한 모습도 놓치고 싶지 않은 산이다. 특히 가을이면 고운 단풍이 아름답다. 높이 30m의 용담폭포, 아득한 전설을 간직한 선녀탕, 무암사, 정방사 등이 있다. ●청풍호반 둘러보는 자드락길 7개 코스 나지막한 산기슭의 비탈진 땅에 난 작은 오솔길을 의미하는 자드락길은 청풍호반과 어우러진 정겨운 산촌을 둘러보는 길이다. 이 길을 걸으면 청풍호의 시원한 바람과 은은한 약초 향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새로운 ‘나’를 만나 볼 수 있다. 자드락길은 7개 코스로 총 58㎞에 달한다. 청풍면 만남의 광장에서 시작되는 1코스 ‘작은 동산길’은 자드락길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작은 동산에 오르면 아기자기한 섬 같은 산들과 호수가 조화를 이룬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2코스인 ‘정방사길’은 금수산에 위치한 정방사로 가는 길이다. 662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정방사는 의상대라는 웅장한 암벽 아래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다. 절벽 아래 지어진 제비집을 떠올리게 하는 정방사에서 바라보는 월악산 영봉과 호수 아래 노을이 장관이다. 3코스는 한여름에도 얼음이 생기는 동굴을 볼 수 있는 ‘얼음골생태길’, 4코스는 상천 산수유마을을 지나 용담폭포에 이르는 ‘녹색마을길’, 5코스는 청풍호와 옥순대교까지 이어지는 ‘옥순봉길’, 6코스는 삼국시대에 쌓은 성벽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지는 ‘괴곡성벽길’, 7코스는 한방의 도시 제천을 실감하는 향기로운 약초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약초길’이다. ●박해받던 천주교의 피땀 서린 배론성지 봉양읍에 있는 배론성지는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로 1801년 신유박해 때 많은 천주교인이 숨어 지낸 곳이다.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이 당시의 박해 상황과 천주교 신도의 구원을 요청하는 백서를 토굴 속에 숨어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1855년부터 1866년까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성요셉신학교가 있었다. 또한 김대건 신부에 이어 한국 천주교의 두 번째 신부가 된 최양업 신부의 무덤도 있다. 현재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 한옥 누각성당인 배론본당, 십자가의 길, 묵주기도의 길, 피정의 집, 조각공원, 문화영성연구소 등이 들어서 있다. ‘배론’은 이곳의 지형이 배 밑바닥 모양과 비슷해 붙여진 이름이다. [먹거리] ●‘약초의 고장’ 대표 한방음식, 약채락 시는 약초의 고장답게 ‘약채락’이란 한방고유음식 브랜드를 만들어 다양한 한방음식을 개발, 미식가들을 유혹하고 있다. 2008년 가장 먼저 개발된 약채락 비빔밥은 누구나 좋아하는 비빔밥에 지역에서 생산되는 뽕잎, 황기잎, 오가피잎, 그리고 황기, 당귀, 오가피 추출액을 넣어 특허를 취득한 약초고추장으로 만들어졌다. 향긋한 약초 향이 입안에 가득해 마치 보약을 먹는 듯하다. 아이들이 먹기 좋게 강하지 않은 약초를 첨가해 만든 약초돈가스와 약채롤가스도 있다. 황기 등을 이용해 푹 우려서 만든 담백한 육수에 신선한 갈비를 넣어 만든 약채갈비전골정식, 신선한 채소를 굽거나 튀기지 않고 쪄서 조리해 채소의 영양분을 그대로 섭취할 수 있는 약채통밥정식, 약초가 들어간 약소스와 고소한 차돌 부위가 어우러진 한방소스차돌구이도 개발됐다. 밀가루 음식 마니아들을 위해 황기를 넣어 만든 면과 약초를 넣어 푹 우려낸 육수로 탄생한 약채칼국수, 직접 뽑은 메밀과 황기 약고추장, 건강육수를 사용하고 약채나물을 고명으로 올린 홍메밀 등 면요리도 있다. 최근에는 청풍호에서 잡은 잉어와 감칠맛 나는 소스가 만난 잉어약채스테이크, 황기를 이용한 육수로 만든 황기어묵정식, 제천의 당귀와 뽕잎이 함유된 약채빵도 만들어졌다. 약채락 음식은 지역 내 17개 음식점에서 만나 볼 수 있다. ●피로 해소 등에 좋은 고본으로… 월악산 고본주 월악산 고지대에서 자라는 불로초인 고본과, 회향, 오미자, 계피, 대추, 감초 등 다양한 한약재를 소주에 담가 1년 이상 숙성시켜 만든 전통 토속주다. 고본의 뿌리를 잘게 썰어 약재처럼 넣기도 하고, 뿌리 그대로 술에 담가 놓기도 한다. 고본의 뿌리는 특이한 향에 매운맛을 내며 따뜻한 약성을 갖고 있다. 고본주가 탄생한 것은 가을에 뿌리를 캐서 말린 고본이 두통·관절통·치통·복통·설사·습진·식욕부진·피로 해소 등에 효과가 있어서다. 이를 안 월악산 인근 한수면 주민들이 고본 뿌리의 독특하고 자극적인 향을 줄이고 약효를 극대화하기 위해 가정에서 약술을 담가 먹었다. 이후 월악산을 찾은 외지인들이 고본주를 마셔 본 이후 전국으로 입소문이 나면서 최근에 제천시의 지원으로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게 됐다. 현재는 제천 지역과 인근의 충주 수안보 지역에서만 판매되고 있다. 고본주의 알코올 도수는 25도. 720㎜ 1병에 2만원이다. 월악주조 박민성(45) 대표는 “고본이 혈액순환에 좋기 때문에 고본주를 마시면 금방 얼굴이 달아오르지만 숙취 해소도 빠르다”고 말했다. 시는 2010 제천 국제한방바이오엑스포 개최를 맞아 2010병의 소주와 대량의 고본을 대형 항아리에 담아 술을 만들어 국내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고본은 월악산 국립공원 일대에서 채취되는 것을 으뜸으로 친다. ●좋구나, 송어 민물비빔회 제천 지역엔 바다가 없지만 충주댐 건설로 청풍호가 생기면서 민물고기 자원이 풍부하다. 그래서 민물고기를 이용한 각종 요리가 발달돼 있다. 청풍면에서는 바다 한치회를 응용한 담백하면서도 새콤달콤한 민물고기 비빔회가 유명하다. 요리방법은 간단하다. 굵게 썬 민물고기와 오이, 당근, 양배추, 미나리, 쑥갓, 깻잎, 풋고추 등에 초고추장 양념을 넣어 골고루 버무리면 된다. 비빔회로 가장 많이 먹는 것은 향어와 송어다. 색이 붉은 송어는 칼슘 함량이 높으며 비타민 A와 B가 풍부해 양질의 단백질 공급원으로 알려졌다. 향어는 육질이 단단하고 씹는 감촉이 좋다. 비린내가 적고 잔가시가 없어 먹기가 좋다. 저지방 식품으로 고혈압, 성인병, 비만 예방, 피부 미용에도 좋다. 의림지 주변에서는 빙어를 식용유에 튀긴 후 고추장 양념을 발라 먹는 도리뱅뱅이가 유명하다. 빙어를 냄비에 동그랗게 돌려 조리한다고 해 도리뱅뱅이로 불린다. 제천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씨줄날줄] 위기의 풍납토성/서동철 논설위원

    지난해 말 국립문화재연구소는 풍납토성의 축조 당시 높이가 13.3m에 이르렀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남은 토성의 높이는 5m 남짓이지만 백제시대에는 5층 높이의 타원형 성벽이 3.5㎞ 길이로 정연하게 쌓여 있었다는 뜻이다. 당나라 ‘통전’(通典)에 기록된 인부 한 사람당 작업량을 대입하면 수축에 연인원 138만명이 투입됐다는 계산이 나온다고 한다. 삼국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쌓은 토성의 규모가 생각보다 엄청나고, 투입된 인원도 상상을 뛰어넘는다. 축성 주체가 대역사(大役事)를 감당할 만큼 확고한 국가체제를 갖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울 송파구 풍납동의 풍납토성은 오늘날 한성백제의 왕성으로 지위를 굳혀가고 있다. 그동안 여러 차례의 발굴 조사 및 연구로 더 이상 부인하기 어려운 증거가 확보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풍납토성을 백제와 연결시키는 학계의 목소리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왕성 외곽의 수비성인 사성(蛇城)이라는 학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던 시절이었다. 서울대 발굴조사에서도 하남 위례성과 같은 시기 축조된 반관반민적(半官半民的) 읍성으로 규정했다. 이런 고정관념을 뒤집고 ‘풍납토성은 곧 백제왕성’이라는 등식을 만든 주역은 고고학자인 이형구 선문대 명예교수다. 대만에 유학하던 시절 춘추전국시대의 제나라나 노나라 같은 고대국가의 도성(都城)이 대부분 강을 끼고 있는 평지에 진흙을 개어 켜켜이 쌓는 판축토성(板築土城)이었음을 확인했던 그는 비슷한 배경을 가진 풍납토성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풍납토성 내부에서 고층 아파트 건설공사가 벌어지던 1997년 신정 연휴기간 현장에 잠입해 기원 전후로 추정되는 백제시대 토기와 기와, 목재 더미가 파괴되는 현장을 확인했다. 풍납토성 내부에서는 어떤 공사도 발굴조사를 선행하는 규정이 생기는 계기였고, 결국 경당연립 재건축을 위한 발굴조사에서 초기 백제 유적과 유물이 대거 쏟아졌다. 이후 풍납토성은 장기적으로 내부 주민 전체를 외부로 이주토록 해 보존하는 것이 정부의 기본방침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최근 문화재청은 뜻밖에 이른바 ‘문화재와 주민의 공존’을 추진하는 내용의 ‘풍납토성 보존·관리 및 활용 기본계획’을 내놓았다. 한 마디로 토성 내부 지역도 층수 제한은 있지만 재건축을 포함해 개발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문화재청은 얼마 전 춘천 중도 유적에 ‘레고랜드’를 허용하면서도 ‘활용과 보존의 상생’을 내세웠다. 풍납토성의 ‘문화재와 주민의 공존’도 같은 논리일 것이다. 하지만 ‘보존과 개발의 조화’는 건설업자의 견강부회는 될 수 있을지언정 문화재청의 논리여서는 안 된다. ‘보존’에 목숨을 걸어도 시원치 않을 정부기관이 먼저 ‘활용’을 이야기하는 순간 ‘상생’이나 ‘공존’이 물 건너 간다는 것을 모르나.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문경새재 제1관문 성벽 ‘건강’ 되찾는다

    문경새재 제1관문 성벽 ‘건강’ 되찾는다

    문경새재의 상징인 제1관문(주흘관·국가사적 제147호) 성벽이 전면 보수된다. 문경시는 올해 상반기에 국비 등 총 2억원을 들여 문경새재 제1관문의 성벽을 전면 보수한다고 14일 밝혔다. 조선 숙종 35년(1708년)에 축조돼 300년 이상 문경새재를 지키고 있는 성벽 동측 부분이 수년 전부터 배부름 현상을 보여 보수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시는 이를 위해 지난해 11월 국립문화재연구소에 계측조사를 의뢰했고 해체 복원 결론이 내려졌다. 문화재연구소 등은 당시 관문의 동쪽 수문 상부 10m 구간에서 석축이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배부름 현상으로 성벽이 경미하게 벌어지고 있으며, 상중하 모든 지점에서 7㎜ 이상 위치가 변형되는 변위현상을 확인했다. 성벽 배부름 현상은 성벽 윗부분에서 스며든 빗물 등의 영향이 가장 큰 원인으로 윗부분을 강회점토로 다져 배수 처리가 자연스럽게 되도록 보수할 예정이다. 시는 이와 함께 성벽 뒤편 누문으로 오르는 등성 계단의 이탈 현상도 바로잡을 계획이다. 시는 또 문경새재 성곽의 올바른 보존과 관리를 위해 종합정비계획도 세우고 제2관문 수구복원 등 연차적으로 성곽 복원과 보수를 병행해 나갈 방침이다. 엄원식 문경시 문화재계장은 “주흘관이 당장 붕괴될 정도는 아니지만 혹시 모를 위험을 막기 위해 보수 공사를 벌이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 조선시대 성벽 중 수원화성을 비롯해 김포 문수산성, 청주 상당산성 등이 문경새재와 비슷한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경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세월도 쉬어가던 섬… 지는 해 배웅하는 너

    세월도 쉬어가던 섬… 지는 해 배웅하는 너

    교동도는 은둔의 섬이었다. 인천 강화도를 거미줄처럼 잇던 도로들도 바다 너머 교동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인 데도 그랬다. 요즘엔 달라졌다. 강화도와 교동도 사이에 교동대교가 놓였다. 그 덕에 여행 목적지도 북녘땅 가까운 곳까지 한껏 확장됐다. 다리가 놓이기 전, 외부 세계와 단절되다시피 했던 교동도엔 그 간극만큼이나 남아 있는 보물들이 많다. 낡고 수수한 풍경을 따라 겨울 볕 즐기기 딱 좋다. ●도로가 닿지 못하던 곳… 대교 생기며 뭍에 편입 강화도 서쪽 끝. 걸어서는 갈 수 없었던 곳으로 다리가 놓였다. 길이 3.44㎞에 폭 13.85m, 왕복 2차로의 교동대교다. 이 다리 덕에 바다 너머 교동도가 자연스레 뭍으로 편입됐다. 예전엔 강화도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교동도로 들어와야 했다. 그나마 조수간만의 차가 커 간조 때는 서너 시간씩 배 운항이 정지됐고, 물이 덜 찼을 땐 교동도 월선포 선착장까지 15분이면 닿을 뱃길을 1시간 넘게 돌아가기도 했다. 그렇게 가깝고도 먼 섬이 교동도였다. 교동대교 앞에 서면 강 양쪽으로 철조망이 펼쳐져 있다. 북녘땅이 그리 멀지 않다는 걸 새삼 일깨우는 장면이다. 교동도 서단의 말탄포에서 북한의 황해남도 연안군까지는 직선거리로 2㎞ 정도에 불과하다. 바다 폭이 좁으니 북한 주민이 헤엄쳐 넘어와 귀순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지난여름에도 북한 주민 2명이 그랬다. 이처럼 북한과 가깝다 보니 교동도 전체가 민통선 지역이다. 당연히 출입절차도 마련돼 있는데, 그리 까다롭지는 않다. 이름과 연락처를 적은 출입신청서와 신분증만 제출하면 된다. 다만 출입 시간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기준이다. 검문소 초병은 “오후 6시 30분 이전에 나와야 한다. 그 시간이 지나면 익일(다음날) 오전 6시 30분 이후에나 나올 수 있다”고 했다. 말은 그렇다지만, 설마 늦었다고 섬에서 나오는 걸 막으랴. 한데 초병의 다부진 자세로 미뤄보건대, ‘좋은 게 좋은 거’ 식으로 생각했다간 꼼짝없이 하룻밤을 묵는 낭패를 당하지 싶다. ●‘철새 놀이터’ 고구저수지·교동읍성 등 명소 교동대교를 건너면 길은 곧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쪽은 고구리, 왼쪽은 읍내리 방면이다. 어느 쪽으로 가도 상관없지만, 고구리 쪽으로 방향을 잡고 섬을 한 바퀴 도는 게 일반적이다. 다리 건너 만나는 첫 번째 명소는 고구저수지다. 수도권 낚시인들 사이에서 ‘대물터’로 입소문 난 곳이다. 겨울이면 수많은 겨울철새들이 찾아와 장관을 이룬다. 도시 사람들은 흔히 섬사람들이 물고기나 잡으며 살아갈 것처럼 생각한다. 한데 교동도는 넓다. 논농사를 많이 짓는다. 특히 삼선리 일대 개시미벌을 보면 생각이 싹 바뀐다. 들녘이 어찌나 너른지, 꼭 전북 김제의 만경평야를 보는 듯하다. 지금은 강화군에 딸린 면소재지로 전락했지만 옛 교동도는 독립된 군현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교동현(喬桐縣)이었다가 인조 7년(1629)엔 교동도호부(喬桐都護府)로 승격되기도 했다. 강화군에 완전히 병합된 건 일제강점기인 1914년이다. 교동도 남쪽의 남산포엔 삼도수군통어영도 있었다. 경기, 황해, 충청도의 해군을 지휘하던 곳이다. 한반도가 두 동강 나지 않았다면, 사실 수군의 중심지가 되기에 적합한 위치가 교동도다. ●근대사 풍경, 밀려든 관광객에 얼마나 지켜질지 교동도에 들면 시간이 묻혀 있다는 걸 단박에 느끼게 된다. 가까운 근대사와 옛 고대사가 뒤섞여 있는 느낌이다. 교동대교가 세워진 이후 주말에만 4000여대의 차량이 쏟아져 들어 온다는데, 이런 낡고 투박한 풍경이 얼마나 더 지켜질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오래된 역사를 되짚자면 교동읍성을 먼저 찾는 게 순서다. 도읍인 한양을 지키는 성이 도성이고, 지방 고을 읍에 세워진 게 읍성(邑城)이다. 교동읍성은 조선 인조 7년(1629)에 쌓은 석성이다. 동·남·북 세 개의 문 가운데 현재 남문(유량루)의 홍예문만 남았다. 아치형 돌문 두 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그 자태가 아름다우면서도 견고하다. 한데 폐허 위에 서면 깊은 한숨만 나온다. 주변 성벽은 허물어졌고 돌들은 사라졌다. 출처와 제작연대를 알 수 없는 사금파리 조각들도 홍예문 위쪽에 널려 있다. 하지만 홍예문 주변엔 사람의 접근을 막는 펜스조차 세워져 있지 않다. 그나마 다행인 건 들고나기 쉽지 않은 섬이었을 테니 성벽을 이루던 돌들도 멀리 가지 않았을 거라는 것, 그리고 돌들이 여전히 민가의 담장을 이루며 남아 있다는 거다. 교동읍성 주변에 황색 대룡이 나타났다는 황룡우물, 경기수영 터, 연산군 유배지(추정) 등 볼거리가 많다. 시간 너머의 흔적을 따라 찬찬히 둘러보길 권한다. 교동읍성에서 바다로 향하다 보면 길이 끊겼을 법한 곳에서 난데없이 작은 포구가 나온다. 동진포다. 고려시대부터 뭍과 교동도를 이어주던 나루였다는 곳이다. 안내판에 따르면 나루터는 교동읍성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됐다. 한양과 인천, 해주 등을 오가는 관문 노릇도 담당했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은 먼저 교동도로 와서 바닷길의 일기 등을 살핀 후 출항했다고 한다. 사신들의 임시 숙소인 ‘동진원’이라는 객사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손님을 맞고 배웅하는 광경이 제법 장관이었다는데, 이 장면이 바로 교동팔경의 하나인 동진송객(東津送客)이다. 조선시대엔 각종 조운선과 화물선 등이 오갔고, 한국전쟁 때도 수많은 배들이 들락날락했다던 동진포지만 지금은 배 한 척 없는 썰렁한 나루터로 남았다. 시멘트 포장 아래 조선시대 때 쌓은 것으로 보이는 돌들이 비교적 온전히 남아 있는 게 그나마 위안이다. ●11명 ‘왕족의 유배지’… 한국전쟁 피란민 집결지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였다. 정쟁에서 패한 신하들과 달리 왕족은 가까운 곳에 격리시켰다. 늘 그들의 동정을 살펴야 했기 때문이다. 교동도는 한양과 가까우면서 조류가 급해 유배지로서 최적지였다. 고려 21대왕 희종, 조선시대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등 11명의 왕족이 교동으로 유배됐다. 그 가운데 연산군은 교동도로 유배된 지 두 달 만에 사망했다. 읍내리에 연산군 적거지가 조성돼 있다. 대룡시장은 근대의 시간들이 갇혀 있는 공간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1960~70년대로 날아간 듯한 낡은 풍경과 만날 수 있다. 후줄근한 간판과 낡은 유리문, 옛 포스터 등을 보자니 기억 저편에 숨어 있던 향수가 현재로 소환되는 듯하다.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계란 푼 쌍화차 얻어 마실 수 있는 다방도 여태 남아 있다. 대룡시장 일대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내려온 피란민들의 집결지였다. 전쟁 끝나면 얼른 돌아가려고 고향과 가까운 대룡리 일대에 진을 쳤다. 하지만 닫힌 문은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열리지 않았고, 고향 그리던 이들은 대부분 생을 마감하거나 생계를 위해 자리를 떴다. 골목은 짧다. 채 500m도 못 된다. 하지만 더께로 쌓인 시간은 도무지 방문객의 발걸음을 놓아주질 않는다. ■여행수첩 <지역번호 032> → 가는 길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48번 국도를 따라 곧장 가면 교동대교가 나온다. 교동도 출입시간은 계절에 따라 다르다. 교동도에서 숙박하지 않을 경우 교동대교 앞 군 검문소에서 나오는 시간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교동면사무소 932-5001. 강화버스터미널에서 교동도까지 운행하는 18번 버스가 신설됐다. 선진버스 933-6801. → 맛집 대룡시장 쪽에 먹거리가 풍성하다. 해성식당(932-4111)과 대풍식당(932-4030)이 그중 알려졌다. 오래된 ‘다방’도 두 곳 영업하고 있다. → 잘 곳 대룡시장에 교동파크(932-4164)라는 작은 모텔이 있다. 강화여인숙(932-4067) 등 오래된 숙박업소도 있다. 고구저수지 인근 고구촌펜션민박(933-8668), 난정저수지 주변 수정민박(934-8929) 등 민박집도 운영 중이다. 글 사진 강화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씨줄날줄] 발해의 미소/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발해의 미소/서동철 논설위원

    크라스키노는 러시아 연해주의 마을 이름이다. 최근 북한의 나진·선봉 경제특구와 철도로 이어진 러시아 하산 지역에 속한다. 이국적인 지명이지만, 두만강 바로 건너 마을이라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크라스키노의 남동쪽 평원지대에는 8~9세기 토성(土城)이 남아 있다. 남북 400m, 동서 300m 정도인 토성의 성벽은 2.0~2.5m 높이로, 안팎에는 돌을 쌓고 내부에는 흙을 채웠다. 성의 북쪽과 동쪽, 남쪽에서 각각 성문(城門)이 발견됐는데, 모두 옹성(甕城)의 흔적이 보인다. 발해의 염주(鹽州) 성터다. 발해는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을 규합하고 걸사비우가 이끄는 말갈 세력과 손을 잡아 당나라 손아귀에서 벗어나 698년 지금의 중국 지린성 돈화성 부근 남만주 동모산에 세운 나라다. 고왕(高王) 대조영에 이어 제2대 무왕(武王·재위 719~737)과 제3대 문왕(文王·재위 737~793)은 영토를 넓히면서 내치와 외교에도 힘써 나라의 기틀을 굳건히 했다. 이후 제10대 선왕(宣王·재위 818~830)은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한 것은 물론 연해주까지 차지하면서 전성기를 열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불릴 만큼 강력한 국가로 발돋움한 것이다. 크라스키노는 동쪽의 포시예트만(灣)과 맞닿아 있다. 서쪽으로는 중국의 훈춘이 멀지 않다. 훈춘에는 문왕이 한때 수도로 삼았던 동경용원부가 있었다. 이렇게 보면 발해가 염주성을 세운 이유는 뚜렷하다. 이 도시에 한반도 남쪽의 신라, 동해 건너 일본열도의 왜(倭)와 교류하는 창구 역할을 맡긴 것이다. 염주성은 이른바 신라도(新羅道)와 일본도(日本道)라는 교통로의 출발점이었다. 동북아역사재단과 러시아사회과학원의 발굴조사 결과 염주성은 도로를 정연하게 구획하고 설계한 계획도시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발해 유적에서 도로망으로 구획한 계획도시는 상경도성 말고는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한다. 한성백제박물관에서 ‘러시아 연해주 문물전’이 열리고 있다. ‘러시아의 발해 유물, 한국에 오다’라는 부제처럼 한국 관련 유물 500점이 전시되고 있다. 우리 역사의 흔적이지만, 한국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유물이다. 러시아과학원 극동지부 역사학고고학민족지학연구소와 러시아 국립극동대 박물관, 블라디보스토크의 아르세니예프 박물관에서 빌려 왔다. 특히 관람객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염주성 절터에서 출토된 불상이다. 온화하면서도 절제된 미소는 백제의 서산마애불과 닮았으면서도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서산마애불을 ‘백제의 미소’라고 한다면 염주성 불상은 ‘발해의 미소’라고 불러도 좋지 않을까 싶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농촌진흥청과 함께하는 식품보감] 버릴 것 없는 옥수수

    [농촌진흥청과 함께하는 식품보감] 버릴 것 없는 옥수수

    옥수수는 벼, 밀과 함께 세계 3대 식량 작물이다. 멕시코와 남미가 원산지인 옥수수는 벼, 밀과 달리 세계로 전파된 역사가 500여년밖에 안 된다. 하지만 세계 경제에 미치는 파급력은 훨씬 크다. 옥수수가 없었다면 인류 역사가 많이 바뀌었을 것이라 평가도 나온다. 식용 외에도 전분과 액상과당 등의 형태로 거의 모든 가공식품에 들어간다. 최근엔 산업·의약 소재뿐 아니라 바이오연료로도 활용되고 있다. 옥수수는 어떤 곳에서나 잘 자라고 생산성이 높다. 보존과 조리가 쉬워 원산지인 중남미에서는 옥수수의 신(神)이 존재할 만큼 소중한 작물로 인식된다. 고대 남미에서는 1년 중 50여일간의 노동으로 20여만명이 먹을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수확이 가능했다. 365일과 18개월로 이뤄진 마야의 농사력에도 한 해의 시작과 끝이 옥수수 재배 시기와 일치한다. 인류학자들은 “옥수수로 인해 생긴 잉여 시간은 남미 문화 발달에 매우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다. 여분의 옥수수는 화폐가 없었던 고대 경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물물교환의 수단이었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옥수수가 없었다면 마야나 아스텍의 거대한 피라미드도, 쿠스코의 성벽도, 마추픽추도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옥수수는 식품과 에너지, 산업소재, 제약 원료 등에 이용되고 있다. 식용으로는 대부분 이삭 부위가 식량과 간식으로 이용되며 전분을 전분당으로 변환해 가공식품의 첨가물로 활용된다. 우리가 주로 먹는 ‘배유’(종자 속에 있는 배에 양분을 공급하는 조직) 부위는 콘플레이크와 빵 제조에 쓰인다. 또 액상과당으로 만들어 각종 식품과 아이스크림, 치약 등에 이용된다. 배아(눈) 부위는 식용유와 연성세제, 크레용, 도료 제조에 활용된다. 종자의 껍질은 섬유소가 풍부해 식품첨가제와 친환경 제품 제조, 동물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사료용으로는 옥수수 이삭과 줄기, 잎이 함께 사용되며 ‘사일리지’(겨울철의 가축 먹이)와 곡실 사료로 널리 쓰여지고 있다. 옥수수는 다른 작물 대비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많고 재배의 전 과정을 기계화해 적은 비용으로도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 사료용으로 인기가 높은 이유이기도 하다. 적은 양으로도 가축에게 많은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다. 옥수수로 소고기와 돼지고기, 닭고기 1㎏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옥수수 곡실이 각각 13㎏, 6.5㎏, 2.6㎏이 필요하다. 옥수수수염과 수술 부위의 약리 성분을 추출해 천연물 신약을 개발하는 연구가 활발하다. 옥수수수염은 ‘동의보감’에서 배뇨 장애나 신장 기능 개선에 처방하던 약재로, 최근엔 음료 등 다양한 상품으로 출시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옥수수를 통증 억제 효과가 있고 소변을 잘 보게 해준다고 해서 약재로 사용했다. ‘본초강목’에는 옥수수가 속을 편안하게 하므로 위 기능을 강화하고 소변을 편안히 보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기록했다. 옥수수를 먹고 난 속대를 끓여 먹으면 치통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고 해서 민간요법으로도 활용됐다. 옥수수에 포함된 유효 성분을 활용한 항암제와 잇몸 치료제, 비뇨기질환 치료제 등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 미국 농무성 산하 농업연구청은 제2차 세계대전 중 푸른곰팡이에서 추출하는 페니실린이 부족하자 옥수수를 가루로 만들 때 생기는 옥수수 용액을 이용해 페니실린의 대량 생산 기술을 개발했다. 유가 상승과 환경에 대한 관심 고조로 친환경 연료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옥수수 바이오에탄올의 생산이 증가하고 있다. 바이오에탄올 생산에 이용된 옥수수는 2000년 2000만t에서 2010년 1억 1600만t으로 6배가량 급증했다. 미국 옥수수 생산량의 1%가 양조(위스키·맥주)용으로 사용되지만 36%는 바이오에너지 생산에 쓰여지고 있다. 옥수수의 알곡뿐 아니라 부산물도 산업용 바이오가스와 난방용 연료 등 신재생 에너지원으로 이용된다. 옥수숫대와 볏짚, 유채대 등을 섞은 뒤 발효시켜 천연가스(LNG)의 주성분인 메탄가스를 생산하고 있다. 이 같은 수요 증가로 옥수수 가격도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세계 곡물가격의 상승 원인 중 하나로 옥수수가 지목될 정도다. 옥수수는 친환경 산업소재로도 뜨고 있다. 환경 오염에 대한 높은 관심으로 옥수수로 만든 생분해성 바이오플라스틱 사용이 증가하고 있다. 새집증후군을 방지하는 벽지와 바닥재, 무독성 페인트 등의 친환경 건축자재가 개발됐다. 친환경 소비 계층이 늘면서 단기간에 자연 분해가 가능한 바이오플라스틱을 활용한 생분해성 용기와 기저귀 등의 인기도 올라가고 있다. 미국에서는 매년 1억 5000만t의 옥수숫대가 버려졌다. 하지만 옥수숫대를 가공해 만든 합판이 개발되면서 재활용률이 늘고 있다. 옥수수 합판은 시공이 쉽고 생산비용도 일반 합판의 4분의 1수준이다. 하지만 과도한 옥수수 의존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도 나온다. 미국의 환경운동가 마이클 폴란은 ‘잡식동물의 딜레마’라는 저서에서 “가공식품 1500여개 중 옥수수가 직간접적으로 포함된 것은 1300여개로 우리는 매일 옥수수를 먹고 있으며, 옥수수 가격 상승은 고스란히 우리 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2008년 기준으로 국내 대형마트에서 판매되는 500여개의 상품 중 옥수수 첨가 제품은 372개(74%)를 차지하고 있다. 백성범 농촌진흥청 전작과 농학박사 ■ 문의 golders@seoul.co.kr
  • 돌 틈마다 서린 오랜 전쟁의 기억들… 三國 마주한 요충지, 충북 보은 ‘삼년산성’

    돌 틈마다 서린 오랜 전쟁의 기억들… 三國 마주한 요충지, 충북 보은 ‘삼년산성’

    우리나라는 산성의 나라다. 반도 안팎으로 전쟁이 잦았던 오랜 역사의 흔적이다. 그 가운데 특히 많은 산성이 몰려 있는 곳은 중부 내륙이다.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던 지역이다. 명산 가장 좋은 곳에 사찰이 있듯 산자락 전망 좋은 곳에는 산성이 있다.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도 그렇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국경을 맞댄 요충지에 세워진 산성으로, 세월의 흔적이 더께로 쌓인 성벽을 들여다보면 돌 틈마다 오랜 전쟁의 기억들이 저장되어 있는 듯하다. 여기에 이웃한 선병국 가옥과 속리산 국립공원 등을 묶어 돌아본다면 늦가을 나들이로 제격이지 싶다. 한데 의아하다. 보은 같은 골짜기가 무슨 요충지 노릇을 했다는 걸까. 시계추를 되돌려 보면 의문은 간단히 풀린다. 삼국시대 때 영남에서 한양을 거쳐 북진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문경새재는 조선시대에 열린 ‘고속도로’다. 이웃한 이화령도 일제 강점기 때 열렸다. 그나마 156년 신라왕 아달라가 문경에서 충주를 잇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 계립령(하늘재)을 열었지만 많은 인원과 물자가 오가기엔 턱없이 좁았다. 당시 보은은 지금과 달랐다. 상주에서 청주, 한양 등으로 나가는 길목이자 대처였다. 그러니 걸핏하면 북진하려던 신라나 호시탐탐 아래쪽을 째려보던 고구려 등이 이 자리를 놓칠 리 없었던 것이다. ●신라 축성술 정수… 높이 20m, 3년간 쌓아올려 몇 차례 주인이 뒤바뀌었던 보은을 사실상 지배한 쪽은 신라였다. 신라는 자비왕 13년(470년)부터 3000여명의 인부를 동원해 3년 동안 보은의 요지에 성을 쌓는다. 성의 이름이 ‘삼년’이 된 건 이런 까닭이다. 당시 보은의 지명이 ‘삼년산군’ 또는 ‘삼년군’이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삼년산성은 둘레 약 1.7㎞, 너비 8~10m, 높이 13~20m 규모다. 전체적인 면적은 크지 않은 편. 하지만 곧추선 성벽의 높이는 그야말로 까마득하다. 조선시대까지 축조됐던 성곽들이 대부분 3m 안팎인 것에 견줘 여간 기골이 장대한 게 아니다. 삼년산성은 신라 축성술의 정수다. 당대 최고의 기술이 총동원돼 세워졌다. 구들장처럼 납작한 자연석을 한 칸은 가로, 한 칸은 세로로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가지런하게 쌓아 올린 뒤 내부를 돌로 가득 채웠다. 당시 대부분의 성들이 밖에만 돌을 쌓고 내부는 흙으로 받쳤던 것에 견줘 대단히 견고한 형태다. 어지간한 투석기로는 흠집조차 내지 못할 정도다. 이 덕에 크고 작은 150여 차례의 전투를 치르면서도 단 한 차례도 함락되지 않았다. 뚫을 수 없는 방패라 불러도 좋을 만큼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셈이다. ●옛 봉수대 오르면 속리산 품에 안긴 듯 삼년산성의 들머리는 서문터다. 예서 길은 세 갈래로 나뉜다. 양옆은 산성길이고 가운데는 산성 내 보은사로 드는 길이다. 트레킹을 즐기는 이들은 대부분 서문에서 출발해 남문, 동문, 북문을 거쳐 다시 서문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선호한다. 서문터 바로 앞은 연못이다. 아미지(蛾眉池)라는 고운 이름을 가졌다. 연못 바로 옆 바위에 그 이름이 음각돼 있다. 글쓴이는 신라 명필 김생이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물이 빠져 형체만 어렴풋하지만, 김생이 이름을 새길 당시엔 아리따운 여인의 고운 눈썹을 닮은 연못이었지 싶다. 이름과 달리 연못이 품은 속뜻은 섬뜩하기 이를 데 없다. 서문은 산성의 네 문 가운데 가장 낮다. 적들이 만만하게 볼 만한 높이다. 한데 서문을 나서면 곧바로 연못이다. 이는 서문 양쪽 성곽에 병사들이 매복해 공격할 경우 공성에 나선 적들이 꼼짝없이 연못으로 빠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오른쪽 성벽을 따라 오른다. 제법 가파르지만 힘이 들 정도는 아니다. 복원된 성벽은 반듯하게 잘 생겼다. 한데 너무 희고 반질반질하다. 서문 건너 거무튀튀한 옛 성벽에 견주자니 꼭 ‘기생오라비’를 보는 듯하다. 이 때문에 복원 당시에도 말들이 많았다고 한다. ●아흔아홉칸 ‘선병국 가옥’서 명당의 氣 받자 가쁜 숨 몇 차례 내쉬고 나면 남문터다. 아직 복원되지 않은 옛 성벽이 잡초와 함께 이지러져 있다. 외려 이 모습이 더 자연스럽다. 말끔하게 복원된 성벽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옛 병사들의 밭은 숨결도 그제야 온전히 전해오는 듯하다. 성벽은 야트막한 산릉을 휘감아 돌며 넘어간다. 군데군데 무너진 곳에는 목책을 둘렀다. 동문터는 동쪽 성벽의 중간에 뚫린 문이다. 예전엔 ‘ㄹ’자 형태로 문을 만들어 적의 침입에 대비했다고 한다. 산성에서 가장 전망이 빼어난 곳은 옛 봉수대다. 지금은 전망대로 이용되고 있다. 전망대 위에 올라서면 장쾌하게 자락을 펼친 속리산과 너른 보은의 들녘 그리고 정겨운 시골마을들이 두 눈 가득 들어찬다. 사방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천혜의 전망대다. 신라가 삼년산성을 지키기 위해 고구려, 백제와 치열한 전투를 벌인 까닭을 옛 봉수대 자리에 오르면 확연히 알게 된다. 북문에서 된비알을 하나 넘으면 다시 서문이다. 산성을 한 바퀴 도는 데 두 시간이면 족하다. 산성에서 8㎞쯤 떨어진 곳에 ‘선병국 가옥’이 있다. 삼가천 옆자락에 세워진 보성선씨 종갓집이다. 호남에서 첫손 꼽히는 만석꾼이었던 보성선씨 가문이 당대 최고의 풍수사를 대동하고 전국을 돌다 찾아낸 명당자리에 지었다. 1903년부터 1925년까지 건립기간만 무려 22년을 헤아린다. 칸 수는 예의 ‘아흔아홉칸’이다. 궁궐을 제외하고 민간에 허용되던 최대치까지 지었던 셈이다. 길게 이어진 행랑채와 헛간은 고시원으로 운영됐는데, 거쳐간 고시생만 4000명을 헤아린다고 한다. 예까지 와서 속리산 국립공원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553년 신라 진흥왕이 세운 법주사와 팔상전 등 고풍스러운 볼거리들이 많다. 보은의 상징인 정이품송도 빠뜨리지 말 것. 천연기념물 제103호로 지정된 소나무다. 1464년 세조가 속리산 법주사로 행차할 때 타고 있던 가마가 이 소나무 가지에 걸릴 뻔하자 소나무 스스로 가지를 번쩍 들어 임금을 안전하게 통과시켰다고 전해진다. 이런 이유로 세조가 소나무에게 정이품 벼슬을 하사했다고 한다. 한때 완벽한 삼각형을 자랑하던 나무였으나 지금은 한쪽 면이 병들어 완전치 않다. 글 사진 보은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 여행수첩 (지역번호 043) →가는 길 수도권에서 가자면 청원~상주 간 고속도로 보은 나들목으로 나온다. 보은 방면으로 1㎞ 직진하면 막다른 삼거리다. 여기서 좌회전하면 보은읍 방향이다. 삼년산성은 보은군청에서 1㎞ 떨어진 곳에 있다. 542-3384. 법주사를 먼저 보겠다면 청원~상주 간 고속도로 법주사 나들목으로 나오면 된다. 고속버스는 센트럴, 남부, 동서울에서 각각 출발한다. 10여분 간격으로 고속버스가 다니는 청주까지 간 뒤 직행버스로 보은까지 갈 수도 있다. 보은군 관광안내소 542-3006. →맛집 경희식당(543-3736)은 한정식으로 이름났다. 용궁식당(542-9288)은 오징어볶음과 매운 닭발볶음이 맛있다. 김천식당(543-1413)은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순대전골 맛집이다. 국보식당(543-6369)도 순대를 잘한다. 대추왕순대찜으로 이름났다. 신라식당(544-2869)의 된장뚝배기와 북어찌개 등도 좋다. →잘 곳 숲에서 잠들고 싶다면 말티재자연휴양림(543-6282), 충북알프스자연휴양림(543-1472)이 좋다. 선병국 가옥(543-7177)의 고택 체험도 권할 만하다. 그랜드호텔(542-2500), 힐파크(543-1996) 등은 한국관광공사에서 인증한 ‘굿 스테이’ 숙박업소다.
  • 세월이 멎은 듯… 달도 숨다

    세월이 멎은 듯… 달도 숨다

    단풍 하면 퍼뜩 떠오르는 곳이 내장산 국립공원이다. 우리나라 단풍 유람의 대표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한데 내장산 국립공원이 전북 정읍 쪽의 내장산뿐 아니라 전남 장성 쪽의 백암산과 입암산을 아우른다는 것을 아는 이는 뜻밖에 적다. 백양사가 깃든 백암산은 그나마 유명세를 얻은 편이다. 입암산을 아느냐 물으면 열에 아홉은 고개를 외로 꼬기 일쑤다. 내장산 국립공원의 한 축인 입암산 일대에 장성새재 옛길이 남아 있다. 세인의 시선에서 살짝 비켜 선 곳이니 한적함이야 더 말할 게 없을 터. 남도 사투리는 이를 ‘다붓한(한적한) 새름길(샛길)’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에 삼한시대 축성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입암산성 가는 길을 덧붙이면 멋진 트레킹 코스가 완성된다. 길의 들머리는 남창계곡이다. 산성골, 새재골 등에서 흘러온 여섯 지류가 합류되는 곳이다. 예부터 ‘과실의 왕은 감이요, 감의 왕은 대봉’이라 상찬을 받아온 대봉감의 산지로도 이름났다. 전남대수련원 입구에서 작은 다리를 건너 남경산기도원 왼쪽 흙길 임도로 들어선다. 넓고 완만한 길이다. 계속 직진해서 새재화장실을 지나면 곧 장성새재 갈림길이다. 전 구간을 통틀어 화장실은 이곳뿐이다. 미리 ‘해결’하고 가는 게 낫겠다.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든다. 장성새재를 거쳐 백암산과 백양사 또는 순창새재까지 갈 수 있는 길이다. 흔히 새재 하면 경북의 문경새재를 떠올리지만 장성에도 새재가 있다. 한데 이름의 어원은 다소 다르다. 문경새재는 새도 쉬어 넘는다는 조령(鳥嶺)의 순우리말 표현이다. 장성의 새재는 지름길 혹은 샛길의 의미가 강하다. 김채림 장성군 문화관광해설사는 “이 지역에 살던 선조들이 장을 보거나 과거를 보기 위해 정읍으로 넘어갈 때 지름길로 이용했던 길”이라며 “한양으로 가는 삼남대로인 갈재(노령)를 이용하기 곤란한 사람들도 관아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샛길로 장성새재를 이용하곤 했다”고 설명했다. 장성새재 옛길은 장성 쪽 남창계곡에서 전북 정읍 입암공원지킴터까지 5㎞ 남짓한 구간을 이른다. 한데 이 구간을 종주하면 원점회귀가 어려울 뿐 아니라 산행거리도 짧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따라서 옛길 정상인 장성새재까지 3㎞ 정도 걸은 뒤 되짚어 나와 입암산성까지 다녀오길 권한다. 이 경우 산행거리가 약 14㎞로 확 늘어난다. 하지만 경사가 완만해 오르는 데 별 어려움이 없고 볼거리가 많아 좀 더 발품 팔 이유는 충분하다. 장성새재 정상에서도 입암산성 북문으로 가는 등산로가 있지만 현재는 폐쇄됐다. 김 해설사는 “조금이라도 거리를 줄여 보겠다고 이 코스로 올라붙었다가는 죽을 만큼 고생한다”고 경고했다. 오래전 장성새재 가는 길은 정감 넘치는 오솔길이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군용도로로 쓰기 위해 폭을 넓히면서부터 주변 환경이 훼손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1970년대 들어 차량 통행은 금지됐고 길은 다시 옛 정취를 되찾아가는 중이다. 옛길은 인적이 드물다. 산행 내내 사람 한 명 보기 어렵다. 그 덕에 길을 독차지하고 걷는 호사도 누린다. 길은 완만한 편. 길 옆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위로는 산새들이 삐쭝대며 날아간다. 가을이 짙어지면서 단풍 빛깔도 한결 요염해졌다. 거리가 짧으니 숨이 찰 까닭도 없다. 산책하듯 ‘싸목싸목’ 걷다 보면 어느새 새재 정상이다. 선조들은 새재를 월은치(月隱峙)라고 불렀다. ‘달이 숨은 고개’란 뜻인데, 숲이 어찌나 깊든지 하늘에 뜬 달이 보이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장성새재 갈림길까지 되짚어 내려온 뒤 입암산성 등산로로 접어든다. 갈림길에서 5분가량 올라가 다리를 건너면 숲 체험장이다. 전남대가 1960년대 조성한 삼나무 숲이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삼나무가 수직의 세상을 펼쳐낸다.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나무의자도 여럿 놓여 있다. 삼나무 이파리 사이로 쏟아진 햇살이 빈 의자 위로 사뿐히 걸터앉는다. 삼나무 숲 끝자락은 계곡이다. 단풍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있다. 계곡 위로 놓인 다리를 건너면 잠시 가팔라졌다가 다시 완만해진다. 이렇게 몇 굽이를 돌면 은선동 삼거리다. 왼쪽 길은 갓바위(638m), 오른쪽은 입암산성 남문 방향이다. 어느 쪽으로 가도 입암산성을 돌아 원점회귀할 수 있다. 예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몇번의 된비알을 지나면 입암산성 남문이다. 오랜 시간을 버텨왔을 성벽이 어찌나 견고하든지 입에서 쉼 없이 탄식이 쏟아져 나올 지경이다. 입암산성은 호남 내륙의 자연과 선조들의 지혜가 어우러진 천혜의 요새다. 문화재청 홈페이지는 “전라도를 방어하는 데 중요한 곳으로 노령산맥에 이어져 전라북도 정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성이다. 높이 626m인 입암산의 계곡 능선을 따라 만든 포곡식(계곡을 감싼 형태의 성곽) 산성으로 3.2㎞ 정도 남아 있다”고 적고 있다. 축성 시기는 불분명하다. 다만 ‘고려사’ 등에 1256년 송군비 장군이 몽고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고려시대 이전부터 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향토 사학계에서는 삼한 시대에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후백제 때는 견훤이 요새로 쓰기도 했단다. 과거 네 곳의 포루(砲樓)와 두 곳의 성문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남문만 공개되고 있다. 남문 성벽은 수직에 가깝다. 성 안에는 물이 솟는 곳이 예닐곱 곳에 달한다. 양식만 비축한다면 외적의 침입에도 오랜 시간 성을 지킬 수 있는 모양새다. 남문에서 북문 방향으로 조금만 올라가도 곳곳에 옛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성내마을터가 특히 인상적이다. 1980년대까지도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성내마을터를 지나 북문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입암산이란 이름의 근원이 됐던 갓바위(笠岩)로 가는 길이다. 둥근 접시 모양의 갓바위는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갓이다. 갓바위 위는 최고의 전망대다. 드넓은 들녘 한가운데 입암저수지가 보이고 들판을 가로지르는 호남고속도로와 정읍 시가지, 두승산 등이 한눈에 잡힌다. 입암산성 최고의 망루다운 전망이다. 하산길은 어려울 게 없다. 노송들 사이로 능선길을 따라 20~30분 내려오면 은선동 삼거리다. 글 사진 장성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61) →가는 길:승용차는 호남고속도로 백양사 나들목으로 나와 백양사 방향으로 가다가 남창(입암산) 방향으로 들어가면 된다. 대중교통은 북이면 사거리까지 어떻게 가느냐가 관건이다. 기차는 사거리에 있는 백양사역에서 내리면 된다. 사거리터미널에서 남창 가는 군내버스는 오전 8시 20분, 10시, 오후 1시 50분, 4시 50분 네 차례 있다. 남창에서 나가는 시각은 여기에 30분을 더하면 된다. 사거리에서 남창계곡을 거쳐 백양사까지 가는 버스도 하루 다섯 차례 운행한다. 고속버스는 장성터미널, KTX는 장성역까지 각각 가야 한다. 장성 시내에서 사거리까지는 20~30분에 한 대꼴로 버스가 오간다. →맛집:장성호 인근의 호반가든(392-8692)은 메기찜이 맛있는 집이다. 시래기를 깔고 갓 잡은 메기를 올린 뒤 갖은 양념을 섞어 졸여낸다. 짭짜름하게 양념이 밴 시래기에 메기를 얹어 먹는 맛이 각별하다. 2인분 2만 5000원. 백련동 시골밥상(393-7077)은 유기농 식재료로 차린 열두 가지 반찬이 맛있는 집이다. 1만원. 청자연(394-9909)도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은 담백하고 정갈한 음식들이 일품이다. 두 집 모두 홍길동 테마파크 인근에 있다. →잘 곳:숲 속에서 아침을 맞고 싶다면 축령산자연휴양림(390-7770)이나 방장산자연휴양림(394-5523)이 좋겠다. 축령산은 편백나무 숲이 깊고 방장산은 고창과 서해 일대가 조망된다. 홍길동 테마파크(394-7240)에도 소규모 숙박시설과 오토캠핑장이 마련돼 있다. 남창계곡에도 오토캠핑장이 있다. →주변 볼거리:주변에 단풍 명소가 많다. 그 가운데 백양사가 가장 가깝다. 장성호관광지에 임권택시네마테크가 조성돼 있다. 전망대에선 장성호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다. 테마파크 인근의 금곡영화마을은 영화 ‘태백산맥’ 등의 배경이 됐던 산골마을이다. 필암서원도 지척이다.
  • 해외여행 | 바랄 것이 더 있을까 한여름 날의 다낭·호이안

    해외여행 | 바랄 것이 더 있을까 한여름 날의 다낭·호이안

    Fall in Love with Vietnam 여행에서 돌아와 당신이 어떤 도시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당신은 그 도시의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그곳에서 흘러간 당신의 시간을 사랑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높고 아름다운 건물 그 자체보다 건물의 서쪽 벽면에 얼굴처럼 붉게 비추인 오후 다섯 시의 햇살을 더 사랑하는 것. 아니면 어느 저녁, 숙소로 돌아가며 올려다본 하늘의 푸른 별, 휘파람을 불며 걸어가던 꼬마아이, 끝없이 젖고 또 마르던 해변의 모래들, 멀리서 들리는 이국어의 함성들. 그렇게 당신을 스쳐 지나간 그 도시의 어떤 순간들을, 당신은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어떤 풍경이다. 장소와 시간이 연인인 듯 서로 껴안은 채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한 순간. 그 찰나의 찬란함이 적금처럼 모여 쌓인 여행의 잔고들. 그 기억을 우리는 풍경이라 부르고, 쉽게 사랑에 빠져든다. 글·사진 Travie writer 최성규 ●Vietnam Da Nang · HoI An 다낭 & 호이안 바랄 것이 더 있을까 한여름 날의 다낭·호이안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했던가. 너그러워져도 괜찮은 몇몇 휴양지에서도 이 문장을 스스로 완성시켜 보겠다는 듯 종종걸음을 치곤했다. 그렇게 나는 내 여행 세포가 기억하는 감각을 복기하며 다낭에 떨어졌다. 마음을 다잡았던 것과 달리 그곳에서 나는 한결 차분해졌다. 해변의 선베드, 노천카페의 앉은뱅이 의자, 고도의 담벼락. 그곳이 어디든 나는 비스듬히 기대 나른해지곤 했다. 다낭 & 호이안 다낭은 베트남 중부의 항구도시로 참파왕국, 안남왕국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지금은 해안선을 따라 리조트가 개발되면서 베트남의 대표적인 휴양도시로 알려져 있다. 호이안은 다낭에서 남쪽으로 25km 떨어진 옛스러운 도시로 특히 일본과의 교역이 활발하여 지금도 일본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다. 구시가지는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DaNang 오늘의 알람은 태양 다낭에서의 며칠, 단잠에 빠진 나를 흔들어 깨운 것은 요란한 휴대전화의 알람 대신 눈가를 실룩이게 만든 아침 해였다. 그러나 서울과의 두 시간여 시차를 생각하더라도 ‘am 06:00’ 글자 선명한 그 순간에 잠을 깨고 싶진 않았다. 뭉그적거리다 보니 다시 졸음이 밀려왔다. 침대 위로 쓰러지고 잠시 후, 잠결이지만 꽤 잘 자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느지막하게 일어났지만 잠에 쏟은 시간이 그다지 아깝지가 않을 만큼. 그래봐야 호텔 조식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만큼 여전히 아침나절. 다낭의 태양은 아침을 거르게 하지 않았다. 그 시절을 직접 겪지 않았지만 베트남이라 하면 우리가 흔히 월남전이라 부르는 베트남 전쟁의 이미지가 컸다. 다낭은 그랬던 베트남의 이미지를 오히려 낯설게 만들었다. 남북으로 길쭉한 지형에 동쪽으로 바다가 두르고 있는 베트남은 북쪽에 위치한 수도 하노이를 시작으로 무려 3,444km에 달하는 해안선을 따라 그들만의 문화유산과 풍광을 간직한 고도古都를 품고 있다. 그 가운데 아름답고 활기찬 분위기의 휴양 도시로 손꼽히는 곳이 다낭이다. 겹겹이 밀려오는 파도는 속이 알싸해지는 느낌을 줄 만큼 꽤 드세다. 다낭의 미케My Khe 해변은 그 끝이 어디쯤인지, 선 자리에서는 가늠이 되지 않을 만큼 아득하게 펼쳐졌다. 몇 번 피해 봤지만 이내 파도가 두 발을 덮친다. 머리 가르마는 따가운데 발끝은 시원하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동안에는 머나먼 타국에서 온 몇몇 여행자들이 해변을 독차지한다. 베트남 전쟁 기간에는 다낭에 주둔했던 미군들의 휴양지였다고 한다. ‘르 말 뒤 페이Le Mal Du Pays.’ 아주 간단하게는 ‘향수’로 번역되는 프랑스어 구절. 풀이하면 전원 풍경이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이라는데 하루키의 어느 소설에서 보았던 그 구절이 떠올랐다면 너무 감상적인 것일까. 천국이든 극락이든 바라는 것은 매한가지 바다인 줄 알았는데 강이었다. 다낭 해변 안쪽으로 친근한 이름의 ‘한강Song Han’이 흐른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꺼우롱Cau Rong·龍橋’ 주변으로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에 그 언저리에 눈에 띄었던 건축물이 있다. 고운 핑크빛의 다낭 대성당Chinh Toa Da Nang. 문을 밀어 보지만 꿈쩍을 안 한다. 기웃댔더니 자신을 자원봉사자라고 소개한 청년이 맨발로 뛰쳐나와 안내를 해준다. 정작 궁금했던 것은 ‘성당 안을 둘러볼 수 있나 없나’인데 본분에 충실한 이 청년,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지은 성당으로 하늘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자 했던 중세 사람들의 소망을 반영한 고딕양식이라는 등 속사포로 설명을 한다. 순박한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며 들을 수밖에 없었다. 대개 미사를 하는 일요일에 개방을 하고 다른 날은 방문객이 있을 때만 열쇠를 가진 직원이 와서 열어주는데 그 직원이 지금 어디에 갔는지 모르겠다고. 결과적으로 성당 안을 볼 순 없었지만, “괜찮아요, 그대의 친절한 안내가 충분히 인상적이었으니.” 시내를 살짝 벗어나면 차창 밖으로 대번에 고개를 빼게 되는 풍경을 마주한다. 다낭 사람들이 신성시 여기는 응우한썬Ngu Hanh Son이다. 목썬Moc Son, 호아썬Hoa Son, 터썬Tho Son, 낌썬Kim Son, 투이썬Thuy Son 등 5개의 산봉우리가 우뚝우뚝 솟아 군락을 이루고 있는 응우한썬은 한자어로 오행산五行山이다. 각각의 봉우리는 나무木, 불火, 흙土, 쇠金, 물水을 상징한단다. 그 가운데 가장 덩치가 큰 투이썬은 산길을 따라 오르는 것이 아니라 동굴을 따라 관통하는 산이다. 흙벽에 새긴 부조와 동굴 곳곳 불상이 영험한 분위기를 증폭시켰다. 동굴 가장 아래 공포가 느껴지는 곳을 지옥, 동굴 속 깎아지를 듯한 156개의 계단을 타고야 맞이할 수 있는 전망대를 극락이라고 했다. 계단을 기다시피 극락에 올랐다. 응우한썬의 나머지 4개 봉우리와 그 아래로 야트막하게 내리깔린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에 피식 웃었지만 속에서는 부지런히 소원을 읊어댄다. 좋은 구경 실컷 하고 소원도 빌었지만 마른 목은 도무지 해결되질 않는다. 습하고 뜨거운 베트남의 낮 공기엔 ‘카페 쓰어 다Caphe Sua Da’가 정답이다. 철들지 않은 어린 양, 어리석은 중생에겐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커피 한잔을 맛볼 수 있는 노천카페가 곧 천국이고 극락이랄까. 무슨 사람이 그리 가볍나 핀잔을 줄지 모르겠으나 그거야말로 모르는 말씀이다. 이 커피 한잔을 제대로 즐기려면 나름의 내적갈등을 이겨내야 한다. 강하게 볶은 원두를 양철 필터를 통해 한 방울씩 추출한 베트남 커피는 에스프레소 샷보다 몇 배나 더 진하다고. 여기에 설탕과 우유 대신 연유를 넣어 차갑게 즐기는 베트남식 아이스커피가 바로 ‘카페 쓰어 다’. 극단적으로 쓰고, 극단적으로 단맛이 어우러지는 이 커피는 얼음이 녹을 때까지 기다렸다 천천히 음미하며 마셔야 제대로. 조급하지 않게 여유로운 삶을 영위하려는 베트남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HoiAn 고도의 싱그러움이란 소낙비가 내리던 오후, 서글픈 생각이 들었지만 다낭에서 25km 가량 남쪽에 위치한 호이안을 향해 길을 나섰다. 다행히 호이안에 가까워지자 비가 잦아들었다. 오늘의 호이안은 베트남 중부를 유유히 흐르는 투본Thu Bon강과 지류가 하나로 이어지는 호아이Hoai강변의 자그마한 마을이다. 그러나 16~17세기 무렵의 옛 호이안은 인도, 포르투갈, 프랑스, 중국, 일본 등 세계 각국의 상선이 드나들며 크게 번성했던 무역항이었다. 호이안을 소개하는 자료에는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라는 수식어가 빠지지 않는다. 자연스레 마을은 다양한 문화권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색채를 품게 되었다. 베트남 고유의 문화적 토대 위에 일본과 중국 그리고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문화를 두루 흡수하여 조화를 이뤄낸 고도古都 호이안은 이후 무역의 중심이 다낭으로 옮겨가면서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덕분에 베트남 전쟁의 마수를 피해 옛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그 역사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마을 전체가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때문인지 이 작은 마을에는 여느 메트로폴리탄 못지않게 다양한 낯빛의 여행자들이 모여든다. 강물 잔잔한 마을 가운데에 아치형으로 지붕이 있는 목조다리 ‘꺼우 라이 비엔Cau Lai Vien·來遠橋’이 있다. 호이안이 가장 번성했던 17세기, 특히 일본과 중국의 상인들이 이곳에 거주하며 각각의 마을을 형성했는데 당시 일본 상인들이 돈을 모아 두 마을을 연결하는 다리를 놓았다고 한다. 라이 비엔은 멀리서 온 친구란 뜻이다. 호이안은 이 다리를 중심으로 구시가와 신시가로 구분된다. 다리 주변에 중국 복건성 상인들의 회합장소였던 ‘쭈어 푹 끼엔Chua Phuc Kien·福建會館’과 베트남 상인 ‘풍흥Phung Hung’의 고택 등 옛 시간을 머금고 있는 명소가 이웃한다. 호이안의 옛 거리에는 분위기 좋은 카페와 레스토랑, 쨍한 색감이 인상적인 갤러리, 수공예품을 파는 기념품 상점, 감각적인 디자인 숍 등이 촘촘하게 들어차 있다. 시간이 멈춘 고도라지만 호이안은 잿빛을 허락하지 않았다. 소낙비 때문만은 아닐 테다. 파스텔 톤의 건물과 푸른 잎사귀 무성한 가로수가 더욱 선명한 빛을 내비친다. 손잡고 걷거나, 나란히 자전거를 탄 젊은 연인들이 많은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들의 뒤를 따라 자박자박 걷는다. 벽도 쓰다듬어 보고, 빗방울 매달린 나뭇잎도 건드려 보고. 베트남에서 느낀 뜻밖의 싱그러움. 이번 여행에서도 등 돌리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에디터 트래비 글·사진 Travie writer 서진영 취재협조 비엣젯항공 VietJet Air, 02-399-4500, www.vietjetair.com ▶travel info Resort 다낭에서 한껏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것은 안락한 잠자리는 물론이고 굳이 바깥나들이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 싶을 만큼 근사한 비치프론트 리조트에 머물렀던 것이 컸다. 어디 근사한 비치프론트 리조트가 한둘이냐 하겠지만 다낭의 해변은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6대 해변 가운데 하나로 꼽힐 만큼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경쾌한 낮과 평화로운 밤 푸라마 리조트 다낭Furama Resort Danang 오아시스라고 했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건축 스타일에 베트남 전통 양식을 가미한 건물이 삼면을 둘러싸고 있는 리조트 중앙 뜰에 서면 코코스야자가 도열한 끝에 수영장과 백사장, 다시 그 너머로 푸른 바다가 차례로 주단을 펼친다. 수영장 끄트머리에 턱을 괴고 바라보는 박미안Bac My An 해변은 물론이고 그 뒷모습 또한 필름에 담게 할 만큼 인상적이다. 이처럼 태양을 즐길 줄 아는 투숙객들은 수영장과 해변을 오가며 다낭의 낮을 만끽한다. 다이빙과 스노클링 등 다양한 해양 스포츠 서비스를 제공하는 푸라마의 다이빙 센터는 마운틴 반도와 참섬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다이빙 포인트로 안내해 주는 다낭 유일의 다이빙 센터이다.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자 하는 이들은 열대식물 가득한 정원 가운데의 라군 수영장 또는 스파를 이용하며 쌓인 피로와 긴장을 풀어낸다. 최고급 리조트답게 푸라마 스파는 자체 브랜드 제품을 사용하는데 페이셜 아로마 케어나 전통 베트남 마사지 등 기본 타입의 경우 우리 돈으로 3~5만원 수준의 합리적인 가격으로 더욱 만족도를 높인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면 리조트 곳곳에 달아 놓은 등에 불이 들어온다. 한밤의 푸라마는 더욱 나긋나긋한 표정을 짓게 만든다. 시원한 맥주든, 은은한 와인이든 매일 밤 파도 소리 시원한 해변 테라스에 기대어 잔을 들도록 했기에. Truong Sa Street, Khue My Ward, Ngu Hanh Son District, Danang City +84 511 3847 333 www.furamavietnam.com 조용하고도 뜨거운 나절 라구나 랑코Laguna Lang Co 반얀트리 호텔 앤 리조트 그룹이 2013년 11월 베트남 중부 랑코 해안에 ‘앙사나 랑코Angsana Lang Co’와 ‘반얀트리 랑코Banyan Tree Lang Co’라는 걸출한 리조트와 챔피언십 골프 코스, 마린센터 등을 겸비한 복합 리조트 ‘라구나 랑코’를 오픈했다. 다낭 도심에서 한 발짝 떨어져 때묻지 않은 해안가와 울창한 열대 우림 뒤로 높다란 산봉우리가 한데 어우러진 자연 속에 자리하고 있어 어느 때보다 조용하고 뜨거운 나절을 보낼 수 있다. 베트남 후에 왕조의 성벽 창문 양식에서 영감을 받은 리조트 전반의 장식은 매우 감각적이다. 흙빛에 밝은 자색으로 포인트를 준 색감, 옻칠한 기물, 비단 자수를 놓은 직물 등이 차분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홀에서 복도를 지나 객실에 이르기까지 반얀트리 호텔이 자리 잡은 세계 각지의 인상적인 풍광을 담아낸 사진과 그림을 내걸고 있어 리조트 전체가 세련된 갤러리처럼 느껴질 정도로 작품을 감상하는 묘미가 있다. 마냥 널브러져 쉰다고 에너지가 보충되는 것은 아니다. 너른 숲 한 켠에 나무를 심고, 리조트 내 수로를 따라 자전거 페달을 힘껏 굴리거나 바다 위에서 카약 패들을 젓는 동안에 맺힌 땀방울은 한층 개운한 기분을 들게 해준다. 모두 라구나 랑코에서 느낄 수 있는 기쁨이다. Cu Du Village, Loc Vinh Commune, Phu Loc District, Thua Thien Hue Province 02-2250-8051(한국사무소) www.angsana.com(앙사나), www.banyantree.com(반얀트리) Airline 베트남으로 가는 새로운 하늘길 비엣젯항공 여행의 설렘이 최고조로 달하면서도 얼마간 불안이 공존하는 비행시간. 국적기가 아니라면 승무원에게 사소한 도움을 청하는 것도 마냥 쉽지만은 않다. 2007년 설립된 베트남 제2의 항공사 비엣젯항공은 승객들에게 비행의 즐거움을 전하고 안전한 하늘길로 안내하고자 보다 젊고 발랄한 이미지로 단장했다. A320, A321 등 평균 기령 3년 이내의 최신형 기종으로 운항하고 있으며 저렴한 항공 요금에도 불구하고 인천-하노이, 인천-다낭 구간의 경우 따뜻한 기내식을 무료로 제공한다. 또한 한국인 승무원이 탑승하여 직접적인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호치민, 나트랑 등 베트남 내 8개 도시를 연결하는 국내선과 방콕, 싱가포르 등 아시아 주요 도시를 오가는 국제선을 연계하면 선택의 폭은 더욱 넓어진다. 9월10일까지 운행하는 다낭행 전세기는 매일 1회 11:05에 인천VJ8737을 출발해 14:30에 다낭에 착한다. 귀국편VJ8736은 01:50 다낭 출발, 08:00 인천 도착이다. 하노이 정기편VJ8977은 매일 11:05에 인천을 출발하며 14:10에 현지에 도착한다. 귀국편VJ8976은 01:45 하노이 출발, 07:55 인천 도착이다. ACTIVITY 시클로Cyclo는 우리의 인력거를 연상케 하는 바퀴 셋 달린 베트남식 소형 오토바이이다. 대중교통의 하나지만 요즘에는 이색적인 문화 체험으로 인기가 있다. 하노이와 호치민에 비해 한결 호젓한 다낭과 호이안은 시클로 드라이브에 더없이 좋은 환경. 바퀴의 움직임과 강바람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시클로를 타고 골목골목 베트남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다. 30분~1시간이면 충분. 호객행위가 상당하니 가격은 흥정하기 나름. 대략 10만~30만VND. FOOD 다낭 여행자들이 꼭 찾아서 맛보는 음식이 있다. 베트남 쌀국수냐고? 다낭에서는 단연 미꽝Mi Quang이다. 다낭의 명물 면 요리로 면은 쌀로 만들었지만 우동 면에 가까울 만큼 오동통하고, 땅콩가루와 함께 국물 없이 자작자작하게 비벼먹는 양념장이 독특하다. 일종의 비빔쌀국수인 셈. 새우, 돼지고기, 닭고기, 해파리 등 고명의 종류를 선택할 수 있다. 다낭 중심가인 한시장 주변으로 미꽝을 맛볼 수 있는 현지 식당이 많다. 가격은 2만5,000~4만VND. ☞여행매거진 ‘트래비’ 본문기사 보기
  • [新 국토기행] 청주

    [新 국토기행] 청주

    마한의 영토였던 청주는 삼국시대를 맞아 상당현(上黨縣)이라고 칭해지며 삼국이 각축했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삼국이 청주 땅을 번갈아 지배하면서 청주지역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유물이 모두 출토됐다. 이에 많은 사람은 ‘삼국 문화가 소통하는 지역’이라며 청주가 갖는 문화적 의미가 크다고 말하고 있다. 이후 통일신라시대 들어 서원경(西原京)으로 등급이 오르면서 교통과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됐고 이런 위상은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다. 서원경은 다섯 개의 작은 서울을 의미하는 오소경(五小京)의 하나로, 지방의 중요 도시를 뜻한다. 청주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고려 태조 23년(941)이다. 고려 우왕 3년(1377)에는 청주 흥덕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가 간행됐다. 조선시대 한때 수운이 발달한 충주가 교통의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청주가 쇠퇴기를 맞는 듯했으나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며 청주는 다시 중심 도시의 명성을 되찾았다. 당시 경부선 개통은 수운 교통 중심 체제에서 육상로 교통 중심 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청주는 날로 융성해 1908년 충주에 있던 관찰사가 청주로 이전했다. 관찰사는 지금의 도청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청주의 도시화는 1910년 시작됐다. 이때 청주읍성 성벽을 허물고 그 돌을 이용해 하수도를 설치하고 간선도로를 만드는 사업이 시작됐다. 박영수(76) 전 청주문화원장은 “청주읍성이 지금까지 그대로 보존됐다면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안동 하회마을을 가지 않고 청주읍성을 보러 왔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이 사업으로 인해 바둑판 같은 모양의 시구(市區)가 형성됐고 1920년 충북선이 개통되며 청주는 정치·경제·산업 등 여러 측면에서 활성화됐다. 충북선은 1921년엔 청주~조치원 간, 1923년엔 증평까지, 1928년엔 충주까지 연결됐다. 1946년 미군정하에 청주읍은 청주부로 승격했고, 청주군은 청원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때부터 청주부와 청원군은 독립된 행정구역이 됐다. 그해 청주에는 해방 후 한강 이남 최초의 4년제 대학인 청주상과대학(지금의 청주대)이 개교했다. 당시 전문대학들이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한 사례는 있었지만 처음부터 4년제 대학으로 인가를 받은 것은 해방 후 청주상과대학이 처음이었다. 청주가 ‘교육의 도시’로 불리게 된 계기가 이때 마련됐다고나 할까. 3년 후 청주부는 청주시로 승격했다. 당시 인구는 6만 4463명. 현재의 1개동 규모보다 적었다. 시로 승격했지만 1950년 한국전쟁으로 청주역, 형무소, 교량, 각종 군사시설이 많이 파괴됐고 휴전 후의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빈곤으로 도시 발달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후 행정동 분동, 청원군 일부 지역 편입 등을 거쳐 1989년 2개의 출장소가 설치됐고, 1995년에 출장소가 구청으로 승격됐다. 1차산업이 지배적이던 청주지역 경제는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 개통, 청주산업단지 조성, 미호천 지역 농업개발사업, 청주~충주~제천 국도 포장, 대청댐 완공 등으로 급속하게 발전, 산업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박 전 원장은 “서울에 가려면 지금의 세종시인 충남 연기군 조치원까지 가서 기차를 타야 했는데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청주에서 버스를 타고 갈 수 있었다”며 “시간이 한 시간가량 단축됐었다”고 회상했다. 산업단지 조성은 청주의 인구 급증을 가져왔다. 청주지역 제조업의 핵심인 청주산업단지는 1차로 1970년 11월 조성이 완료됐고 이후 단지를 넓혀 나갔다. 현재 367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총 근로자 수는 2만 7463명에 달한다. 청주는 도청 소재지로서 충북지역을 대표하는 도시지만 타 지역 사람들에겐 작은 지방도시에 불과했다. 아직도 수도권의 적지 않은 사람이 충북의 도청 소재지를 충주로 아는 등 자존심을 구기고 있다. 대한민국의 중심에 위치했으나 힘 있는 정치인을 배출하지 못하고 도세가 약해 중앙 정치권이 외면하면서 국가의 주요 사업에서도 항상 소외돼 왔다. 야구장 시설이 열악해 충청도 연고팀 한화이글스가 있는데도 1년에 프로야구 경기가 10경기 내외로 열리는 등 각종 인프라의 수준이 매우 낮은 실정이다. 2012년까지만 해도 백화점이 없어 많은 시민이 대전으로 원정 쇼핑을 가기도 했다. 지역 전체 인구에서 학생 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 ‘교육의 도시’로 알려졌을 뿐 오랫동안 내세울 게 없는 곳으로 인식돼 왔다. 한 시청 공무원은 “다선 의원이 많이 나와야 하는데 청주는 그렇지 못한 게 지역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난 7월 청주시와 청원군이 ‘청주시’로 통합되면서 이제는 중부권 핵심 도시로 성장할 가장 주목받는 지자체가 됐다. 우선 84만명에 육박하는 인구는 전국 230개 시·군·구 중 인구 규모 7위에 해당된다. 전국 인구의 1.6%를 차지하며 비수도권 중에는 경남 창원시(108만여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행정구역 면적은 총 940.3㎢에 이른다. 전국 인구 50만명 이상 도시 가운데 2위로, 대전시(540㎢)보다 크고 서울시(605㎢)의 1.6배에 달한다. 공무원 1인당 담당 주민은 315명이다. 인구 80만명 이상의 기초자치단체 중에서는 창원시 244명에 이어 두 번째로 적다. 예산은 1조 6000억원을 넘어 ‘광역시’에 버금가는 매머드급이다. 전국 기초자치단체 중 창원시와 성남시, 수원시에 이어 네 번째로 큰 규모다. 행정구역은 2개구 30개동에서 4개구 3개읍 10개면 30개동이 됐다. 오송첨단의료복합단지, 오창과학산업단지 등 완공된 산업단지 6곳과 조성 중인 산업단지 3곳을 거느리며 경제력도 막강해졌다. 이들 산업단지에 입주해 있거나 입주 계약을 체결한 업체는 700곳이 넘는다. 옛 청원군에 위치한 청주국제공항과 KTX 오송역이 관내로 들어오면서 청주는 명실상부한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할 기반도 갖추게 됐다. 내년 1월 KTX 호남선이 개통되면 오송역은 전국 유일의 KTX 경부·호남선의 분기역이 된다. 여기에 세종시와 청주공항을 연결하는 도로망이 구축되고 수도권 전철도 연결된다. 청주시는 최근 2030년까지 추진할 도시계획의 밑그림을 확정했다. 청원구는 세종대왕이 머물렀던 초정약수 주변에 세종문화치유단지를 조성하고 청주공항 주변에 항공정비 물류특화단지를 건설해 ‘문화와 항공의 고장’으로 꾸밀 예정이다. 상당구는 농촌지역에 전원지역특성화마을, 친환경유기농 특화단지, 치유 숲 등을 조성해 ‘자연이 숨 쉬는 생활권’으로 탈바꿈시킨다. 서원구는 충북대, 청주교육대, 서원대 등 교육자원을 활용해 교육특구를 조성하고 금강을 활용한 역사문화체험 수변공간을 만들게 된다. 흥덕구는 오송 첨단복지단지를 중심으로 바이오 및 화장품산업을 육성하게 된다. 청주·청원통합추진공동위원장을 지낸 김광홍(77) 대한노인회 충북연합회장은 “청주가 행정구역 통합을 통해 획기적인 발전의 전기를 마련했다고 본다”면서 “청주는 오송 바이오산업, 오창의 IT산업, 청주공항주변의 항공정비산업 등 미래산업을 모두 함축하고 있는 지역인 만큼 신수도권의 핵심 도시로 성장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는 청주를 전국에 알리는 일도 중요하다”며 “오송역 명칭을 청주오송역으로 바꾸는 등의 논의가 필요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청주 남인우 기자 niw7263@seoul.co.kr
  •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13) 산성(중)

    [노주석의 서울택리지 테마기행] (13) 산성(중)

    ●단 한 번도 뚫린 적 없는 난공불락 요새 18세기 방랑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 “경기도 여주 서쪽은 광주로, 석성산에서 나온 한 가지가 북쪽으로 한강 남쪽에 가서 고을이 형성되었으며 읍(광주부)은 만 길 산꼭대기에 있다. 옛 백제 시조였던 온조왕이 도읍하였던 곳으로, 안쪽은 낮고 얕으나 바깥쪽은 높고 험하다. 청나라 군사들이 처음 왔을 때 병기라고는 날도 대보지 못하였고, 병자호란 때도 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인조가 성에서 내려온 것은 양식이 부족하고 강화가 함락되었기 때문이었다. 강화가 결정되고 나서도 국도(한양)를 외적으로부터 막아줄 중요한 성이라 생각해서, 성 안에다 절 아홉을 세워 스님들을 살게 하고 총섭(總攝)한 사람을 두어 승대장으로 삼았다. 해마다 활쏘기를 시험하여 후한 녹을 주는 까닭에 스님들은 오로지 활과 살로써 업을 삼았다. 조정에서는 나라 안에 스님들이 많아서 그들의 힘을 빌려 성을 지키고자 한 것이었다”라고 적었다. 인조가 스스로 성문을 열고 내려온 것이지 남한산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남한산성은 한성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단 한 번도 뚫린 적이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13세기 전 세계를 휩쓴 무적 몽골군의 두 차례 공격과 병자호란 당시 12만 대군을 이끈 청 태종의 파상공세도 47일간 막아냈다. 해발 400m를 넘나드는 험준한 지형을 따라 본성과 외성을 합쳐 11.7㎞가 넘는 성벽을 쌓았는데 내부는 넓고 평평했다. 우물이 80곳, 연못이 45개에 이를 정도로 물이 풍부해 군량미와 소금만 잘 비축하면 수만 명의 병력이 장기농성할 수 있는 철벽의 금성탕지였다. 우리나라에는 평지성과 산성을 다 합쳐 3000여개의 성이 있다. ‘삼천리금수강산’이니 1리마다 1개의 성곽을 쌓은 셈이다. 가히 ‘성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중 남한산성은 산성 축성기법의 교과서라고 할 만하다. 성곽유산으로는 평지 성인 수원 화성에 이어 두 번째로 지난 6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로써 우리는 모두 11건의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한 문화대국이 됐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남한산성이 병자호란 등 국제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무기발달과 축성술이 상호교류한 탁월한 증거이며 조선의 자주와 독립 수호를 위해 유사시 임시 수도로 계획적으로 축조된 유일한 산성도시이며 자연지형을 활용하여 성곽과 방어시설을 구축함으로써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단계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을 평가했다. 한 해 100만명 이상의 등산객과 관광객이 몰려드는 남한산성이 세계적 명소로 자리 잡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종묘와 사직을 갖춘 행궁은 남한산성이 유일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약 24㎞ 떨어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은 행정구역상 광주시에 63%, 하남시에 24%, 성남시에 13%가 속해 있다. 광주는 고려 태조가 이름 짓기 이전까지 한강 남쪽의 넓고 오래된 땅 한산(漢山)이었다. 하남이라는 지명은 한강의 남쪽, 성남은 남한산성의 남쪽에 면했다고 해서 붙여졌다. 서울과 한강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남한산성의 지리적, 공간적 존재감을 알 만하다. 남한산성은 전란이 일어났을 때 왕의 안전을 담보하는 보장처였다. 왕의 선택지는 대개 강화 섬이 아니면 남한산성이었다. 남한산성에 대한 기록은 주로 광주행궁이라고 남아 있다. 조선시대 전국 각지에는 23곳에 이르는 행궁이 있었다. 별궁 또는 이궁이라고도 했다. 전란에 대비한 광주행궁, 양주행궁(북한산성), 강화행궁, 전주행궁을 비롯해 능행을 목적으로 화성행궁, 이천행궁, 파주행궁, 고양행궁, 풍덕행궁을 지었다. 왕은 질병 치료와 휴양차 온양행궁, 청주행궁, 목천행궁, 고성행궁, 전의행궁 등에 행차했다. 온양행궁 가는 길인 과천행궁과 수원행궁에도 머물렀다. 행궁의 역사는 오래다. 백제본기에 ‘진사왕이 행궁에서 죽었다’라는 최초의 기록이 남았으며 고려사에는 40건의 행궁에 관한 기록이 전해진다. 종묘와 사직을 갖춘 행궁은 남한산성이 유일했다. 국가에 전란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한 임시 수도로서의 위상이다. 조선시대 5군영 중 하나인 수어청의 근거지였으며 광주부가 1917년 경안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290년 동안 광주부 관아가 있던 조선시대 최대의 산악 군사행정 도시였다. 규모도 예사롭지 않았다. 광주행궁은 두 개의 궁으로 나뉘었는데 상궐은 73칸, 하궐은 154칸으로 총 227칸의 당당한 규모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기 전 경복궁은 7715칸, 창덕궁은 4500칸이었다. 화성행궁은 576칸, 북한산성 행궁은 124칸이었다. 대부분의 행궁은 말이 궁이지 왕이 실제 머문 횟수나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남한산성 행궁은 인조가 모두 6차례 행차했고 머문 기간도 농성 47일을 비롯해 50일을 넘었다. 이후 숙종과 영조가 서장대를 둘러보았고, 정조는 서성과 남성을 거쳐 북성까지 돌아보고서 서장대에서 군사훈련까지 했다. 이후 철종과 고종 등 모두 6명의 왕이 찾았다. 남한산성이 몽골과 청은 물론 일제에 항거한 외세 저항의 본거지였던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광주, 이천, 여주 지역 의병 1600명으로 이뤄진 연합의병부대가 주둔하면서 삼남지방 및 강원도 지역 의병 3000명과 합세해 서울로 진격하기로 한 을미의병의 주요 거점이었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항거한 을사의병과 1907년 고종 강제퇴위와 군대 해산령에 반발한 정미의병도 이곳에서 일어났다. 일제는 산성 안 행궁과 사찰을 불태우고 철저하게 파괴했으며 광주읍성도 성 아래로 옮겨버렸다. 1, 2차 대몽항쟁의 승전지에다가 척화론을 주장하다 청에 끌려가 죽은 윤집, 오달제, 홍익한 세 학사를 모신 현절사가 세워진 항청의 기운이 항일로 옮아붙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만해 한용운 기념관이 여기에 깃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남한산성에는 백제의 시조 온조를 모신 숭열전이 있다. 정조실록 등에 따르면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군사를 독려하다 앉아서 잠시 조는 사이 꿈에 온조가 나타났다. “적이 사다리를 타고 북성을 오르는데 뭐하고 있는가”라는 말을 듣고 정신이 들어 군사를 보내 격퇴했으며 이에 감읍해 온조왕의 묘를 지어 제사지내게 했다는 것이다. 덧붙여 이서라는 장군이 배향된 이야기도 재미있다. 환궁한 인조의 꿈에 온조가 나타나 “묘를 세워준 것이 고마우나 혼자서는 지내기 외로우니 이서 장군을 보내 달라”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다음날 아침 이서가 죽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인조는 온조가 이서를 데리고 갔다고 생각해 숭열전에 배향했다는 것이다. ●남한산성은 정말 백제의 왕도였을까 남한산성은 과연 백제의 왕도였을까. 택리지뿐 아니라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 대동야승, 연려실기술,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 대부분의 조선시대 지리서들이 남한산성을 백제의 고성(古城)이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고고학적으론 입증된 바 없다. 18세기 홍경모가 지은 ‘중정남한지’에는 “남한산성은 온조가 쌓은 것이라고 하는데 한산 위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도 없고, 문헌에 근거할 것이 없다”면서 “백제의 도읍은 지금의 검단산 아래인 광주의 고읍이며 온조의 고성은 이성산성”이라는 다른 설을 주장했다. 현재까지 하남시 이성산성과 교산동 유적은 물론 남한산성에서도 백제 관련성을 확인할 수 있는 성과는 발굴되지 않았다. 다만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12년(672년) “한산주(광주)에 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주장성이 남한산성의 원조일 가능성이 크다. 이 시기는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군사 4만명이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시기와 일치한다. 주장성은 당의 침입에 대비해서 신라가 쌓은 한강 이남의 방어거점이라는 것이다. 실제 2007년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보이는 군량미 창고 터가 발굴돼 ‘주장성=남한산성’의 신빙성을 높였다. 남한산성이라는 지명은 선조 대에 자주 등장한다. 조선 초기에는 일장산성이라고 불렸다. 한강과 한양의 북쪽에는 북한산과 북한산성이 있고 남쪽에는 남한산과 남한산성이 있다는 논리에 따른 작명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은 ‘인조의 성’이라고 할 만하다. 조선 역사상 임진왜란을 겪은 선조와 함께 비운의 임금 1, 2위를 다투는 인조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을까. 반정으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즉위했으나 반정공신 이괄의 난 때 공주까지 달아나야 했다. 중립외교를 포기하고 친명배금(親明排) 정책을 내세우다 정묘호란 때는 강화도,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에서 이부자리도 없이 옷을 입고 잠자리에 드는 등 세 번이나 도피행각을 벌였다. 즉위 2년 만인 1624년 남한산성 축성을 명하였고 1626년 성이 완성되자 서부면에 있던 광주부를 옮긴 것도 인조였다. 남한산성은 축성술의 역사를 보여 주는 단순한 세계문화유산이 아니다. 이 땅에는 3000개에 이르는 성이 있었지만, 성의 역할을 제대로 한 성은 평양성과 진주성, 강화성 등 몇 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중 남한산성은 단 한 번도 외세에 빼앗기지 않았던 ‘서울지킴이’ 같은 존재이다. 항몽, 항청, 항일의 구국 혼이 살아 숨 쉰다. 선임기자 joo@seoul.co.kr
  • 세계 7대 불가사의 마추픽추 왜…공중도시 그外 도시는?

    세계 7대 불가사의 마추픽추 왜…공중도시 그外 도시는?

    세계 7대 불가사의 마추픽추, 신세계7대불가사의, 신7대불가사의, 마추픽추  tvN ‘꽃보다청춘’ 윤상 유희열 이적이 함께 한 마지막 여정인 마추픽추로 인해 신세계7대불가사의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7대 불가사의는 페루 마추픽추, 중국 만리장성, 요르단 페트라, 멕시코 치첸이트사, 로마 콜로세움, 인도 타지마할, 브라질 예수상이 그 것. 먼저 페루 마추픽추는 15세기 잉카 왕국에 의해 해발 2280m에 세워진 공중도시. 안데스 산맥 위 우르밤바 계곡에 자리하고 있고 하늘을 찌를 듯한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는 마추픽추는 잉카인들이 당시 스페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지었다는 이야기와 자연 재해를 피해 만든 피난용 도시라는 설이 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는 중국 만리장성이 있다. 200여년에 걸쳐 만든 성벽으로 지도상 길이는 2700km지만 실제론 5000km 이상 된다고 알려져있다. 진시황이 흉노족 침입에 대비해 짓기 시작한 만리장성은 세계에서 가장 긴 구조물에 속한다. 요르단 페트라는 영화 ‘인디아나존스의 마지막성배’에 나와 유명해졌다. 아랍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였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붉은 바위 덩어리로 이뤄진 산악시대에 건설된 도시와, 기원전 7세기에도 뛰어난 상수도 시설 기술을 갖고 있던 나바테아인들은 온수목욕탕까지 지었다고. 극장까지 현대 도시 못지 않다. 협소한 통로와 협곡으로 둘러싸인 바위산을 깎아 조성됐고 대부분 건물들은 암벽을 파서 만들었다. 브라질 예수상의 경우, 가장 현대에 지어졌지만 해발 700m 산 정상에 세워진 38m 높이의 예수상은 브라질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많은 여행객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멕시코 치첸이트사는 마야인들이 남긴 유적지로 마야어로 이트사족의 우물가를 뜻한다. 전사의 신전, 피라미드형 신전, 천문대, 구기장 등이 유명하며 사람을 제물로 바치던 관습이 남았던 마야인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어 눈길을 끈다. 로마 콜로세움은 영화에서도 종종 등장해 익숙한 곳으로 맹수들이 싸움을 벌이고 검투사들이 격투를 하는 등이 벌어지던 곳이다. 지름 188m, 높이 57m로 4층 높이 원형건물이며, 지하엔 동물을 넣는 우리가 있다. 인도 타지마할은 이슬람의 아름다운 건축 양식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무굴 제국 황제 샤자한이 자신의 15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은 왕비 뭄타즈 마할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궁전 형식의 무덤이다. 순백의 대리석이 웅장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지만, 이를 짓다가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자 아들의 반란으로 인해 샤자한은 죽음을 맞이했다. 건축 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1000여 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됐고 2만여명이 참여한 대규모 공사로 알려져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신세계7대불가사의, 마추픽추부터 콜로세움까지…

    신세계7대불가사의, 마추픽추부터 콜로세움까지…

    신세계7대불가사의, 신7대불가사의, 마추픽추  tvN ‘꽃보다청춘’ 윤상 유희열 이적이 함께 한 마지막 여정인 마추픽추로 인해 신세계7대불가사의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7대 불가사의는 페루 마추픽추, 중국 만리장성, 요르단 페트라, 멕시코 치첸이트사, 로마 콜로세움, 인도 타지마할, 브라질 예수상이 그 것. 먼저 페루 마추픽추는 15세기 잉카 왕국에 의해 해발 2280m에 세워진 공중도시. 안데스 산맥 위 우르밤바 계곡에 자리하고 있고 하늘을 찌를 듯한 봉우리로 둘러싸여 있는 마추픽추는 잉카인들이 당시 스페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지었다는 이야기와 자연 재해를 피해 만든 피난용 도시라는 설이 있다. 세계 7대 불가사의는 중국 만리장성이 있다. 200여년에 걸쳐 만든 성벽으로 지도상 길이는 2700km지만 실제론 5000km 이상 된다고 알려져있다. 진시황이 흉노족 침입에 대비해 짓기 시작한 만리장성은 세계에서 가장 긴 구조물에 속한다. 요르단 페트라는 영화 ‘인디아나존스의 마지막성배’에 나와 유명해졌다. 아랍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였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붉은 바위 덩어리로 이뤄진 산악시대에 건설된 도시와, 기원전 7세기에도 뛰어난 상수도 시설 기술을 갖고 있던 나바테아인들은 온수목욕탕까지 지었다고. 극장까지 현대 도시 못지 않다. 협소한 통로와 협곡으로 둘러싸인 바위산을 깎아 조성됐고 대부분 건물들은 암벽을 파서 만들었다. 브라질 예수상의 경우, 가장 현대에 지어졌지만 해발 700m 산 정상에 세워진 38m 높이의 예수상은 브라질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많은 여행객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멕시코 치첸이트사는 마야인들이 남긴 유적지로 마야어로 이트사족의 우물가를 뜻한다. 전사의 신전, 피라미드형 신전, 천문대, 구기장 등이 유명하며 사람을 제물로 바치던 관습이 남았던 마야인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어 눈길을 끈다. 로마 콜로세움은 영화에서도 종종 등장해 익숙한 곳으로 맹수들이 싸움을 벌이고 검투사들이 격투를 하는 등이 벌어지던 곳이다. 지름 188m, 높이 57m로 4층 높이 원형건물이며, 지하엔 동물을 넣는 우리가 있다. 인도 타지마할은 이슬람의 아름다운 건축 양식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무굴 제국 황제 샤자한이 자신의 15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은 왕비 뭄타즈 마할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궁전 형식의 무덤이다. 순백의 대리석이 웅장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지만, 이를 짓다가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자 아들의 반란으로 인해 샤자한은 죽음을 맞이했다. 건축 자재를 운반하기 위해 1000여 마리의 코끼리가 동원됐고 2만여명이 참여한 대규모 공사로 알려져 있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아디오스! 프란치스코] “지도자라면 어떤 태도로 국민들 아픔 대처해야 할지 보여줘”

    [아디오스! 프란치스코] “지도자라면 어떤 태도로 국민들 아픔 대처해야 할지 보여줘”

    낮은 곳에서 상처받고 눈물 흘리고 있는 이들을 기꺼이 보듬어 준 프란치스코 교황이 18일 한국을 떠났다. 교황의 일거수일투족은 방한 기간 내내 우리 사회에 충격에 가까운 파장을 일으켰다. 자기만의 성벽에 갇혀 국민들의 삶과 떨어져 지내는 종교계는 물론 세월호 사건의 진실 규명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 않는 정치권, 그리고 신자유주의 성장의 덫에 빠져 더불어 사는 법을 잊어버린 사회 전반에 구체적인 실천의 과제를 던졌다. 각계에서 교황이 남긴 메시지를 곱씹으며 스스로 성찰하고 혁신하지 않는다면 교황에게 보낸 4박 5일간의 국민적 열광과 환호는 한낱 무의미한 거품으로 사그라질 수도 있다. 각계 전문가들과 함께 교황 방한의 성과 및 부문별로 남겨진 과제를 짚어 본다. ■김영주 KNCC 총무 “사회적 갈등·불의에 맞설 종교인의 역할 제시” →오늘 오전 명동성당에서 교황을 직접 만났다. 어땠나. -많은 말씀을 들었다. 기회가 되면 북쪽도 방문해서 한반도에 평화통일 기운이 더욱 북돋워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부탁드렸다. 확답을 주실 수 없는 부탁이었다. 대신 늘 기도하고 노력하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한국 개신교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교황 방한을 보는 감회가 남달랐을 것 같다. -그동안 우리가 흔히 갖고 있던 천주교 교황의 이미지와는 확연히 달랐다. 말석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웠다. 종교인이 서야 할 자리가 어디여야 하는지 직접 몸으로 보여 줬다. 거기는 사회적 약자,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자리다. 권위를 스스로 내세우지 않고,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 실천하고 행동해야 함을 알려 줬다. 종교인은 세상의 불의와 맞설 준비가 돼 있어야 하고, 갈등이 있는 곳에서 화해도 시켜야 한다. 종교인들이 해야 할 일이 참 많음을 새삼 느꼈다. →한국 사회에 구체적으로 어떤 울림이 있었나. -이렇게 생각한다. 한국 사회는 ‘세월호 전’과 ‘세월호 후’로 나뉜다고. 무한성장, 무한경쟁, 이익 중심 등의 가치가 우리 세상을 지배했고 세월호 참사로 무너졌다. 사람의 가치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교황께서는 그 지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방한 기간 내내 세월호 유족들을 가까이 챙겨 위로했다. →우리 종교인의 구체적 역할은 무엇일까. -교황께서는 한국 땅에 왔다 간 것만으로도 그분의 역할을 다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이 남긴 언어들이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이고, 우리 사회에 남겨진 실천적 과제는 무엇인지 종교인들을 비롯해 사회 전체가 함께 고민하고 풀어 나가야 한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이호중 서강대 로스쿨 교수 “복지부동 정부·지도자 향해 비판 목소리 계기” →교황이 세월호 참사에 대해 한국 사회에 던진 메시지는 무엇이었나. -교황은 세월호 참사에 대해 직접적으로 해법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교황이 세월호와 관련해 한국 사회에 던진 메시지는 그저 위로와 격려의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 사회가 함께 관심을 가지고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교황의 모습과 견줘 정부의 태도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다. -세월호와 같은 사안에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은 기본적인 의무다. 그런 의무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정부의 모습은 교황의 모습과 대비된다. 지도자라면 어떤 태도로 국민들의 아픔에 대처해야 하는지 교황이 모범을 보여 줬다. 교황의 방한은 복지부동하는 정부와 지도자를 향해 국민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계기이기도 했다. →교황의 방한이 세월호 문제 해결로 이어질 수 있을까. -교황은 유족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는 정부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반드시 그래야 한다. 대통령과 여당, 심지어 야당도 가슴을 열고 유족들과 대화를 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다. 늦게나마 정치권이 반성하고 유족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는 특별법 제정과 진상 규명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한국을 찾은 교황으로부터 한국 사회가 배울 점은 무엇인가. -세월호와 같은 사안에서 정부, 지도자부터 시민 개개인까지 사회 전체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정부의 태도가 변화해야 함은 물론 자본도 변해야 한다. 자본의 탐욕을 경계해야 한다는 교황의 메시지처럼 기업과 자본은 무분별한 이윤 추구에 매몰돼 생명과 안전을 경시하지 말아야 한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조원희 국민대 경제학부 교수 “종교·경제적 언어로 사회적 문제 해법 짚어” →프란치스코 교황의 정치·경제 관련 발언은 꽤 낯설었다. -그동안 종교인들의 정치 관련 발언은 물에 물 탄 듯 추상적으로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교황이 때로는 종교의 언어로, 때로는 경제학 용어로 연대, 더불어 사는 삶 등의 가치를 담은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 양극화 반대의 구체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다. →교황이 얘기한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 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모델’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가리킬까. -외환위기 이후 시장 중심 경제 체제, 시장만능주의가 만연했다. 시장만능주의가 뭔가. 각자가 자기가 갖고 있는 것을 팔아서 먹고사는 형태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시장에서 팔 것이 없는 사람은 굶어 죽게 만드는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한국 사회의 경제 시스템이 이렇게 굴러갔다. 교황은 이것을 통렬히 지적한 것이다. →구체적인 의미를 꼽는다면. -교황은 방한 이후 세월호를 주목했다. 세월호는 분열과 양극화, 무한경쟁, 시장만능 등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 사건이다. 그리고 정치권의 외면을 받고 있다. 교황은 사회적 분열, 정치적 분열의 기저에 바로 경제적 문제가 있다는 점을 깊이 인식하고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 줬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한국의 어떤 정치적 지도자들도 하지 못한 일을 외국의 종교지도자가 해낸 셈이다. →교황의 방한이 이러한 비인간적 경제모델의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이번 교황 방한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많이 당황스러웠을 것 같다. 교황이 얘기하는 비인간적 경제모델의 가장 전형적 모습이 과거 박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 얘기했던 ‘줄·푸·세’(세금을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바로 세운다)다. 다행히도 직전 대선에서는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를 얘기했지만 인수위에서부터 슬그머니 폐기하고, 과거 ‘줄·푸·세’로 돌아간 분위기다. 대통령과 정치권이 교황이 얘기한 메시지를 강한 의지로 실천했다면, 그러다가 장벽에 부닥쳤다면 국민들이 환호하며 지지하고 엄호했을 것이다. 반성하고 성찰해야 할 것이다. 박록삼 기자 youngtan@seoul.co.kr
  • 일제가 한양도성 훼손하고 지은 ‘조선신궁’ 터 발견

    일제가 한양도성 훼손하고 지은 ‘조선신궁’ 터 발견

    서울시와 서울역사박물관은 지난해 6월부터 진행한 ‘남산 회현자락 정비사업’ 3단계 조사 결과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조선신궁의 실체를 확인했다고 13일 밝혔다. 지금까지 조선신궁은 문헌으로만 알려졌지만 성벽 바로 옆에 배전(拜殿·신에게 절을 올리는 곳) 터를 발견한 것이다. 일제가 황국신민화 교육을 위해 지은 신사다. 시 관계자는 “신궁 건설 과정에서 성벽의 상당부분이 멸실된 것으로 추정된다”며 “남산 회현자락은 일제 침략으로 인해 인류문화유산이 훼손된 대표적 사례”라고 설명했다. 조사 결과 189.3m의 한양도성 성벽 잔존물이 발견됐다. 이번에 발굴된 한양도성 구간에서는 태조, 세종, 숙종 등 시대별 성곽 축조 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 2단계 사업으로 발굴해 공원화를 끝낸 성벽 76.4m를 합치면 265.7m에 이른다. 시는 발굴된 한양도성에 대해 전문가 자문과 설계를 거쳐 내년 공사를 본격화해 2016년 보존·정비를 마칠 계획이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북한산성 밑에서 고려 성벽 발견

    북한산성 밑에서 고려 성벽 발견

    조선시대 축조된 것으로 알려진 북한산성(사적 제162호)에서 고려시대 성벽의 흔적이 일부 발견됐다고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연구원이 30일 밝혔다. 연구원은 북한산성 대서문~수문과 부왕동 암문 구간의 성벽 절개지를 조사한 결과 조선 숙종 37년(1711년) 축성한 현재의 성벽 아래에서 고려시대 세워진 중흥산성의 기저부가 확인됐다고 전했다. 연구원 관계자는 “이번 발굴로 현재 남아 있는 북한산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를 400~500년 앞당기게 됐다”고 말했다. 오상도 기자 sdoh@seoul.co.kr
  • 서울 양천고성터서 첫 삼국시대 석성 발견

    서울 양천고성터서 첫 삼국시대 석성 발견

    서울에서 처음으로 강서구 양천고성 터에서 삼국시대 석성(石城)이 발견됐다. 강서구는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한얼문화유산연구원이 사적 372호 양천고성 터를 조사한 결과 서울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삼국시대 석성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21일 밝혔다. 이번 조사에서 성곽 몸체인 체성부의 축조 기법과 성곽의 주요 구조물인 치성부(성벽 바깥으로 돌출된 부분), 수·개축부(처음 성을 쌓은 이후 보수하거나 다시 쌓은 부분)를 확인했다고 구는 설명했다. 또 성벽 내부와 바깥에서는 백제 유물로 추정되는 단각고배(짧은 굽다리 접시)와 통일신라시대 유물로 보이는 태선문(굵은금무늬) 기와 조각도 나왔다. 따라서 양천고성이 삼국시대에 석성 형태로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서울에는 한성도읍기 백제시대 도성으로 평가받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그리고 그 건너편 아차산성과 같은 고대 성곽이 남아 있지만, 통일신라시대 이전 흔적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양천고성은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확실한 삼국시대 첫 석성일 가능성이 커졌다. 손영식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은 “그동안 흙으로 쌓은 삼국시대 토성 등은 서울에서 발견된 적이 있으나 돌로 쌓은 석성은 양천고성 터에서 처음으로 발견됐다”면서 “완전한 형태의 치성부와 성벽 형태를 확인한 것도 큰 성과”라고 말했다. 구는 오는 9월부터 3차 조사를 진행하고, 이를 토대로 종합 복원계획을 수립해 시민 역사교육의 장소로 조성할 계획이다. 양천고성지는 가양동 궁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축성된 옛 성터로, 한강지역의 중요한 산성 유적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1992년 사적 372호로 지정됐다. 한준규 기자 hihi@seoul.co.kr
  • [이종원 선임기자 카메라 산책] 세계 문화유산 등재된 남한산성

    [이종원 선임기자 카메라 산책] 세계 문화유산 등재된 남한산성

    ‘성’(城)이란 적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흙이나 돌 등으로 쌓아 올린 장애물을 말한다. 인류는 농경에 따른 정착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담’을 쌓았다. 이것을 성곽의 기원으로 보기도 한다. 특히 외침이 많았던 우리 역사 속에서 ‘성’은 국토를 지키려 했던 ‘호국 의지’의 산물이다. 산지지형인 우리나라는 산에 쌓은 ‘산성’(山城)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이 땅에서 산성의 기원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깊다. 기원전 1000년 전부터 다른 부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산에 성벽을 쌓기 시작한 이후,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와서 절정을 이뤄 한반도에만 모두 1200여개의 산성이 세워지게 됐다고 한다. 지난달 한국의 대표적인 산성인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남한산성은 산악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 만든 성곽이다. 계곡과 능선을 따라 불규칙적으로 성벽을 세우다 보니 산성의 존재를 알기가 어렵다. 적들은 힘들여 험난하고 굽이진 산을 올라야 했다. 방어를 하는 데 탁월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성 안에 수많은 군인과 백성들이 상주할 수 있도록 큰 규모로 지은 것도 남한산성의 특징이다. 자연적인 지형지물 위에 돌을 얹은 형태는 민족 고유의 심미관과 토착기술을 응집하여 만든, 세계에 없는 고유한 성곽의 모양이다. 조상들의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미적 감성을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남한산성 문화관광사업단 신명종 연구원은 “우리 선조들의 산성축성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산성건축의 교과서’라 불릴 만하다”고 말했다. 이러한 남한산성의 문화재적 가치에 세계가 주목했다. 유네스코는 “남한산성이 지형을 이용한 축성술이 돋보이는 초대형 산성”이라 평가하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한 것이다. 또한 체계적 관리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는 점도 이유로 들었다. 남한산성에는 촘촘하게 쌓아 올린 돌의 개수만큼이나 많은 사연이 담겨 있다. ‘남한산성’ 하면 병자호란의 치욕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남한산성은 훨씬 이전부터 이어져 온 긴 역사와 더 많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매 시기, 격전의 현장이었던 남한산성은 한강유역과 수도에 대한 방어 기능을 담당한 천혜의 요새였다. 남한산성은 굴곡 많은 세월을 온몸으로 견뎌온 역사의 산증인이다. 수어장대(守禦將臺·지휘관이 군대를 지휘하던 누각)에 올라와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던 이혜선(37·서울 강남구)씨는 “남한산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축하하는 다양한 행사가 산성 일대에서 열린다는 말을 듣고 가족들과 함께 왔다”며 “아이들에게 남한산성에 대한 역사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고 각종 전시회도 즐거웠다”고 말했다. 남한산성 문화관광사업단 세계유산담당 노현균 팀장은 “남한산성은 굴욕의 역사가 담겨 있지만 끝까지 나라를 지키려던 선조들의 애환과 삶이 그대로 묻어 있는 곳”이라며 “우리가 현재 기억해야 할 남한산성은 위기의 순간에도 역사를 이어온 지혜로움의 산물이며 위대한 문화유산”이라고 강조했다. 오천년 역사와 함께 살아 있는 유산으로 불리고 있는 남한산성이 지금 세계를 매료시키고 있다. 주말이면 한번쯤 호국의 성지인 남한산성에 올라 선열들의 숭고한 뜻을 기려보는 것은 어떨까. 글 사진 jongw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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